작성자 :   잭 푸넨 카테고리 :   교회 하나님을 알기 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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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은 우리가 이 땅의 여정을 마치기 전에, 반드시 졸업해야 하는 영적 교육의 과정 중 하나입니다. 우리 앞서 달려가신 자이신 예수님도 이 과정을 졸업하셨습니다. 편견 없는 마음으로 성경을 살펴봅시다:

이사야 53:3에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와 버림을 받았으니 그는 고통을 겪었고 병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다 "(Holman Christian Standard Bible)라고 말합니다.

이 땅의 저주 때문에 인간에게 질병이 찾아옵니다. 그 결과 우리도 땀을 흘리고 가시 등에 의해 상처를 받습니다(창 3:17~19 참조). 예수님도 죄로 저주받은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분의 몸도 땀을 흘리시고 가시에 상처를 입으셨으며 때때로 병에 걸리기도 하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병을 잘 아셨다"(사 53:3 - Amplified Bible - 직역)라고 말합니다. (* 아래 참고 참조)

우리가 육체적으로 경험하는 모든 것을 경험하기 위해, 예수님도 병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러한 고통은 그분의 이 땅의 교육의 일부였습니다(히 5:8). 우리가 심하게 시험을 받을 때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이 모든 면에서 시험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는 것처럼(히 4:15), 우리가 아플 때 이 사실을 아는 것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적 교육의 일환으로 "질병을 잘 아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플 때, 주님은 우리가 "주님이 이긴 것처럼 이기기를" 원하십니다 - 자기 연민을 갖지 말고, 동정을 구하지 말고, 누구에게도 요구하지 말고, 원망하거나 우울해하지 말고, 항상 밝고 명랑하며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하기를 원하십니다(계 3:21). 우리가 이 땅에서 평생 그렇게 살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예수님도 때때로 아프셨다는 사실은 병이 항상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결정적으로 증명해 줍니다 -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유혹뿐만 아니라 우리의 질병도 공감해 주시는 놀라운 앞서 달려가신 자이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바울과 그의 동료들인 디모데, 에바브로디도, 드로비모는 이 땅에서의 영적 교육 과정에서 이 "질병" 과정을 졸업했습니다(고후 12:7-9, 딤전 5:23, 빌 2:27, 딤후 4:20 참조).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개척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병을 통해 바울을 갈라디아 지역에서 한동안 멈추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처음에 갈라디아를 거쳐 소아시아로 이동할 계획이었지만, 갈라디아를 떠나지 못하도록 "성령의 제지"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행 16:6). 이 성령의 제지는 초자연적인 환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울이 갈라디아에서 병에 걸려서 계속 여행할 수 없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울이 갈라디아에 머물며 전도한 이유는 자신이 병들었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에서 이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갈 4:14,15)!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때때로) 병을 허락하시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세상의 아픈 사람들을 더 잘 공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전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그분의 자비로 우리를 치유하십니다(빌 2:25-27).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돌보셨듯이 우리도 돌보실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플 때 치유를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주장하는 것처럼 질병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sprit), 혼(soul), 육(body)의 전인격의 구속을 위해 죽으셨나요? 네,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을 직시하고 환상과 착각의 세계에 살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효과는 오직 거듭난 사람의 영 안에서만 지금 바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의 영 안에서, 우리는 죽음에서 부활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엡 2:1-6, 고후 5:17).

그러나 우리의 혼(마음, 감정, 의지)과 육은 아직 새로워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아직 이 두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의 완전한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께서 우리의 가치 체계를 세상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꾸시도록 허용한다면, 우리의 마음은 천천히 그리고 점진적으로 새롭게 될 수 있습니다(롬 12:2).

그러나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만 변화될 것입니다(빌 3:21에 매우 분명하게 설명함).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 몸은 질병과 죽음이 없는 완전한 부활의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자비하심으로 우리 몸에서 가끔씩 "앞으로 올 시대의 능력"(히 6:5)을 조금씩 맛볼 수 있도록 허락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치유 능력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신자들이 초자연적으로 질병에서 치유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지체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치유와 기적의 은사를 선물로 주신 이유입니다.

그러나 몸의 치유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달려 있으며, 누가 치유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우리가 하나님께 지시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회개와 고백 그리고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믿음을 통해,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한 완전한 용서를 주장할 수 있는 것처럼,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원할 때마다 치유를 권리로서 주장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치유를 권리로 주장할 수 없다는 것과 우리가 구원받을 때 우리 몸에 대한 저주의 영향이 제거되지 않는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는, 사람들이 아무리 기도하고 치유와 생명을 주장하더라도 모든 신자들이 결국 죽는다는 사실에서 볼 수 있습니다! 질병과 죽음은 땀, 육체적 피곤함, 졸음과 마찬가지로 땅에 대한 저주의 결과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우리 몸에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의 영은 이미 저주에서 구속되었지만(갈 3:13,14), 흙으로 된 우리의 몸은 여전히 땅의 흙에 대한 저주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이사야 53:5의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써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는 말씀은 무엇인가요? 이 구절에 대해 우리 자신의 해석을 내리지 말고, 신약성경에서 성령께서 이 구절에 대해 직접 주신 해석을 살펴봅시다:

베드로 전서 2:24에서 우리는 읽습니다: "그가 친히 십자가에 달려 그의 몸으로 우리 죄를 지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의 상처로 너희가 고침을 받았느니라".

이 구절에서 언급된 "치유"는 "죄로부터의 치유"이며, 그 결과로 우리가 얻는 "건강"은 "의"임이 분명합니다. 이는 이 구절이 나오는 단락의 문맥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죄를 짓지 않으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53:4의 "그는 실로 우리의 고통을 짊어지고 우리의 슬픔을 짊어지셨다"라는 말씀은 마태복음 8:16, 17에 다음과 같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든 모든 사람을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그가 친히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시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셨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이 구절을 보면 이 예언이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될 때 바로 거기에서 성취되었음을 다시 한번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나중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성취된 것이 아닙니다. 이 예언은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셨을 때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질병을 다 짊어지셨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플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울의 모범을 따릅시다. 그는 자신의 "육체의 가시"를 치유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마침내 가시는 제거되지 않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극복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고후 12:7-9). 에바브로디도의 경우, 바울은 계속 기도했고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그를 온전히 고쳐 주셨습니다(빌 2:27). 그러나 드로비모의 경우 바울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치유되지 않았습니다(딤후 4:20). 디모데의 경우에도 바울은 그를 위해 여러 번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디모데는 계속해서 위장병으로 고통받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마침내 그에게 포도주를 약으로 먹으라고 말했습니다(딤전 5:23).

따라서 우리는 항상 모든 질병의 치유를 위해 기도해야 하며, 치유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그분께서 우리에게 두 가지 중 더 좋다고 결정하시는 것에 은혜를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의 균형 잡힌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사랑한다면, 치유에 대한 신학이 무엇이든 간에, 모든 기독교 단체에는 아픈 신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편견 때문에 이 사실에 눈을 감고 있습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참고: 이사야 53:3에서 "슬픔"(대부분의 영어 번역에서)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choliy"는 실제로는 "병" 또는 "질병"을 의미합니다. 신명기 7:15, 신명기 28:61, 이사야 1:5에서도 같은 단어가 "병"으로 정확하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번역가들은 예수님이 병에 걸리셨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사야 53:3에서 이 단어를 정확하게 번역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신, 그들은 자신들의 신학을 사용하여 이 히브리어 단어를 "슬픔"으로 번역했습니다!!! 오직 홀만 성경(Holman Bible)과 증폭 성경(Amplified Bible)(위에 인용된)만이 이 히브리어 단어를 "병"으로 정확하게 번역했습니다. 히브리어 "choliy"의 의미가 "병"이라는 가장 분명한 증거는 다음 구절(사 53:4)에서 같은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기 히브리어에서는 다시 "슬픔"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이 신약성경 마태복음 8:17에서 인용될 때는 "astheneia"(그리스어로 병/질병을 의미)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참조: http://bible.cc/matthew/8-17.ht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