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한 복음의 메세지

작성자 :   잭 푸넨 카테고리 :   기본 진실 시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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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통하여 저는 "거듭남" 또는 "구원" 에 대해 설명하고자 합니다.

거듭남 흑은 구원은 회개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나 회개(죄로부터 돌이킴)하기 위해서는 먼저 죄란 무엇인가를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이는 오늘날 기독교는 회개에 대한 그릇된 이해가 판을치며 죄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수 세기를 거치며, 기독교의 전체적인 수준은 형편없이 낮아졌습니다. 오늘날 설교자들이 강대상에서 선포하는 "복음" 은 진실과 거리가 너무나도 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에수님 "만" 믿으면 된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회개 없는 믿음은 그 어느 누구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거듭남" 입니다. 거듭남 없이 잘 사는 것은 이 세상 다른 종교들도 가르치고 있는 사실입니다. 물론 우리는 잘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의 상부 구조일뿐 본질이 될 수는 없습니다. 본질은 "다시 태어나는" 것이고 우리 모두는 여기서 출발해야 합니다.

에수님께서는 요3:3에서 니고데모에게 "거듭남"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공회지도자이자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롭게 살았던 인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수님께서는 그에게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 3:3 )" 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무리 훌콩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또한 에수님께서 십자가에 들려야 하며, 저(에수님)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3:14,16).

그 후 에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기 행우I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 하며 (요3:19) 오직 "진리를 좋는 자는 빛으로" 와서 구원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요 3:21). 거듭나기 위해서는 빛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 정직하게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이 저지른 모든 죄를 다 기억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기억나는 모든 죄를 하나님께 털어놓아야 합니다.

죄의 실체는 매우 큼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나의 삶 속에 있는 그 죄들의 조그만 부분밖에 보지 못합니다. 그것은 마치 어느 광대한 나라에 살면서 아주 소소한 지역만 둘러본 것과도 같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알고 있는 죄로부터 돌이키기 시작할 때, 여러분의 삶 속에 숨어 있던 "죄의 나라" 를 발견하기 시작할 것이고, 빛으로 걸어가기 시작할 때, 죄는 더욱 분명해지고 따라서 여러분이 더욱 정결해 질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정직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또 다른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당신으| 집에 여러 개으| 지저분한 방이 있다고 칩시다. 에수님을 집으로 모시고 싶지만 에수님께서는 지저분한 방에서는 사실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에수님께서 당신을 도와 방을 함께 청소해 주기 시작하셨고, 서서히 모든 방들이 깨끗해졌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신앙 속에서 거족해지는 비결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가는 곳마다 동일한 메시지를 전파했습니다: 회개하고 에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행 20:20). 회개와 믿음이야 말로 거듭나기 위한 두 가지 조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와 믿음을 같이 가도록 정해 놓으셨습니다. 허나 많은 설교자들이 둘 사이를 갈라 놓았고, 오늘날 복음 설교들은 "회개" 의 메시지가 사라지고 "믿음" 만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 만 가지고는 "거듭" 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한 여자가 아무리 혼자 노력해도 아이를 가질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물론 남자도 혼자서는 아이를 가질 수 없습니다. 생명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남자와 여자가 함께여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회개" 오ᅡ "믿음" 이 병행 될 때만이 영적 거듭남이 가능합니다. 이러한 영적 거듭남은 생물학적인 출생만큼이나 실제적이며 그것은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닙니다.

생물학적인 출생에 있어서 준비 기간이 요구되듯이 새로운 탄생을 위해서는 수개월의 준비 기간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둘다 출생 자체는 단번에 이루어집니다. 기독교인들 중에서는 자신이 다시 태어난 날짜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 또한 내가 다시 태어난 날짜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으| 생물학적인 생일을 모르는 것과도 같은데 사실 그것이 그리 심각한 문제가 될 것은 없습니다.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흑시 에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갈 수 있다는 사실이 편협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제 육신의 아버지를 한 번도 직접 본 적이 없는 사람은(사진으로도) 저의 아버지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한 번도 하나님을 보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에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셨습니다. 따라서 오직 에수님만이 하나님께 갈 수 있는 길을 보여줄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14:6) 라고 에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에수님이라는 사실에 우리는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 놓입니다. 에수님이 하신 말씀을 받아들이던지 아니면 에수님을 거짓말쟁이요 속이는 자라고 단정지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느 누가 그분을 거짓말쟁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에수님께서 단지 훌콩한 사람 또는 선지자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훌콩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거짓말쟁이거나 속이는 자라면 훌콩한 사람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론은 에수님은 사람의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진리란 언제나 편협합니다. 수학에서 2+2는 언제나 4입니다. 너그럽게 3 또는 5를 정답으로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3.9999 조차도 용납될 수 없습니다. 아주 미세한 오차마저 용납해 버린다면 수학이라는 학문 전체가 무너질 수 밖에 없는 까닭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회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융통성 있게" 태양도 지구 주위를 돈다는 학설을 받아들이게 될 경우, 천문학 전체도 붕괴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한, 화학에서 H2O는 물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H2O를 관대하게 소금이라고 받아들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진리가 언제 어디서나 절대적이며 매우 편협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도 이와 같습니다. 융통성 또는 관대함은 수학, 천문학, 화학,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도 심각한 오류를 생성해 낼 소지가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인간이 죄인이며 에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죽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기독교인" 으로서 에수님께 나아간다면 여러분의 죄는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분은 기독교인을 위해 죽으신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에수님께서는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으며, 에수께 나아가 용서 받을 수 있는 자는 "주여, 내가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사람들뿐입니다. 여러분이 어느 종교를 갖고 있든 간에 에수님 앞에서는 용서 받을 수 없습니다. 그분은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오직 죄인으로서 에수님께 나아갈 때만이 여러분의 죄를 즉시 용서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납득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양심이라는 선물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매우 에민한 양심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죄를 빨리 감지하게 해줍니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양심은 점점 무뎌지고 둔해집니다. 3살짜리 아이가 거짓말을 하면 그의 얼굴에 곧바로 나타나는데 이는 그의 양심이. 가책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5년이 툴러 어느새 아이는 무표정으로도 거짓말을 할 수 있게 되는데 이는 그가 양심으I 소리를 반복적으로 죽임으로써 양심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또, 갓난아기의 발바닥은 미세한 깃털의 움직임도 감지할 만큼 부드럽습니다. 그러나 어른의 발바닥은 날카로운 핀으로 찌르기 전에는 느끼지 못할 만큼 딱딱합니다. 이처럼 양심도 세월이 지나며 점점 굳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양심을 두셔서 우리가 윤리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임을 지각하게 만드셨습니다. 양심은 우리가 선과 악을 분별하게 해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에수님은 양심을 "몸의 눈" (눅 11:34) 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눈" 을 잘 돌보지 않는다면 조만간 우리는 영적인 장님이 될 것입니다. 양심의 가책을 묵살하는 것은 눈에 들어가는 먼지를 무시하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일입니다. 어느 날 당신의 눈은 완전히 멀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종교를 가지고 태어나는 아기는 없습니다. 모두 같은 선상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몇 년이 지나도 그들은 똑같이 이기적이거나 소란스러울 뿐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갈수록 부모들에 의해 온갖 종교를 주입 받으며 결국에는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부모로부터 종교를 물려 받게 될 학률은 90%가 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종교가 다른 인간들" 로 구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죄인입니다. 그리고 에수님께서는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충분히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죄인임으로 고백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고 여기는 자들을 위해 오신 것입니다. 우리의 양심이 우리가 죄인임을 말해줍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땅히 에수님께 나아가 "주여, 내가 죄인입니다, 나는 살면서 수많은 죄를 저질렀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게 어려울 것은 없습니다.

간흑 사람들은 "아버지가 아들을 용서하듯, 선하신 하나님도 우리의 죄를 간과하고 용서하실 수는 없냐" 고 질문합니다. 만약에 아들이 도자기를 깨뜨려서(또는 분실해서) 뉘우치고 아버지께 용서를 구한다면 그의 아버지는 틀림없이 용서해 줄 것입니다. 허나 이러한 사건들은 도덕적인 문제에 속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우리의 모든 죄가 이와 같은 것이라면 분명 하나님은 우리를 즉시 용서해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죄는 이와 다른 문제입니다. 죄는 범죄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느 법정에서 판사인 아버지가 자기 앞에 친아들이 범죄를 저질러 심문 받고 있는데 그에게 "아들아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용서한다" 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일말의 정의라도 있는 판사라면 그렇게는 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정의는 그분의 완전한 공의의 일부분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심각한 범죄를 저지르면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나는 너를 매우 사랑하지만 네가 죄를 범하였으므로 나는 너를 심판할 수 밖에 없다" 고 말씀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즉, 법정에서 아들이 아무리 후회를 할지언정 그의 아버지는 판사로서 아들에게 심판을 선고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아들이 은행을 털었다고 가정합시다. 아버지는 법이 정한 바에 의해 벌금을 부과하는데 - 벌금이 백만억이라고 합시다. 그러나 아들은 벌금을 물 돈이 없으므로 감옥에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아버지가 재판석에서 관복을 벗고 내려오십니다. 그러고는 개인 수표장을 꺼내 전 재산인 백만억의 수표를 끊어 아들에게 건내줍니다. 이 때 그 아들이 아버지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따질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또 동시에 아무도 아버지를 공정치 못한 판사로 비난할 수 없습니다. 그가 아들에게 법이 규정한 모든 처벌을 이미 선고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과 정학히 일치합니다. 재판장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죄인 된 우리의 죽음을 선고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몸소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내려오셔서 스스로 그 심판을 담당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세 위격을 가진다고 말합니다. 성부라는 하나의 위격만을 가지셨다면 하나님은 천국의 보좌를 비운 채로 이 땅에 에수라는 사람의 모양으로 오셨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랬다면 그 사이에 누가 이 넓은 우주를 통치할 것입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 위격을 가지심으로 성자이신 에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늘의 재판관이신 하나님 앞에서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고 죽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종종 기독교인들은 "오직 에수" 의 이름으로 세례를 행하며 삼위일체에서 성자만을 인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릇된 생각입니다. 요한일서 2:22에는 누구든지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친히 에수라는 인간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셔서 자기를 부인하고 아버지으|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심판 받으셨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때문입니다. (요일 4:2,3)

에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자 동시에 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셨을 때 그는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죄의 대가는 하나님과의 영원한 단절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분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부터 단절되셨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단절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고통 가운데 가장 가흑한 형벌입니다.

온 우주 가운데 유일하게 하나님께 버림받은 장소가 있는데 그곳은 지옥입니다. 지옥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옥에는 온갖 종류의 마귀가 견고한 진을 치고 있으며 그곳은 비참하고 불행한 곳입니다. 에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이러한 지옥을 경험하셨습니다. 6 시간 동안 십자가 위에서 고통 당하셨고 마지막 3 시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셨습니다 . 태양은 어두워졌고 땅은 진동하였습니다 .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다" 라고 고전11:3 은 기록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버림 받으신 것은 마치 하나님의 머리가 비틀어 꺾인 것과 같은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우리는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만약 에수님이 단지 우리와 같은 피조물에 불과하다면, 아담 이후 수많은 인간들의 죄에 대한 심판을 대속할 자격이 없었을 것입니다! 한 명의 인간이 수많은 죄인을 대신해 처형당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에 수님은 가능했는데 그분이야말로 영원한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분의 영원하심으로 인해 3 시간만에 영원한 심판을 담당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에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닌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 에수님을 심판하셨다면 그것은 공의에 위배됩니다. 한 사람을 위해 다른 사람을 대신 심판할 수는 없습니다. 설령 그 다른 사람이 원한다고 해도 말입니다. 당신으I 친구가 당신을 대신해서 십자가형을 치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불공정한 일입니다. 따라서 에수님이 단지 피조물이고 우리의 죄를 위해 심판 받으셨다면 그보다 큰 불공정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어떤 피조물도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심판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럴 자격이 있으신데 그분은 온 우주의 재판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할 권리가 있으시며 하나님은 우리가 받아야할 심판을 대신 감당할 권리도 가지시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 땅에 에수 그리스도라는 인간의 모양으로 오셔서 하나님은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두 개의 위대한 진리에서 시작됩니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셨고, 둘째, 죽은지 3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지 않았더라면, 그분이 하나님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사실이야말로 에수님이 했던 말씀이 모두 진실이라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어떤 종교 지도자도 세상의 죄를 대신해 죽을 것이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도 없습니다. 이런 두 가지 사실이 에수 그리스도의 유일무이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종교가 선행과 평화로운 삶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특별한 본질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에서 이 두 가지 사실이 배제되면 기독교는 타 종교들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위 두 가지 사실이 기독교가 유일무이함을 나타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위해 살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때 그동안 하나님의 것을 홈친 도득의 회개하는 심정으로 그 분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심을 감사하는 마음과 그분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시고 오늘날도 살아계심을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분이 오늘날 살아계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분께 기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죽은 사람에게 기도할 수는 없는 까닭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에수님께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기에 우리는 그분과 교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에수는 하늘 보좌로 올라가셨습니다. 그 후 삼위일체의 제3위격인 성령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성령님은 에수님처럼 실존하는 인격체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그분의 충만하심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성령님께 우리 몸을 위탁할 때 우리는 거족해질 수 있습니다. 당신 안에 성령이 충만해질 때 당신은 죄로부터 승리하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오순절날 성령이 오셔서 인간 안에 내주하시기 전에는 누구도 그렇게 살 수 없었습니다. 그 전에는 사람들은 오직 자신의 육신적인 삶만 성장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그들의 영혼은 여전히 죄를 이길 힘이 없었고 변화도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즉, 당신이 성령 충만해질 때 하나님이 당신 안에 내주하시어 거족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복음의 놀라운 메시지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정결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보내시어 당신의 몸을 거족한 하나님의 성전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담배를 피는 어느 크리스천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나는 그가 교회 안에서도 담배를 피우겠냐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는 교회가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에 절대 그럴 수 없노라고 대답했습니다. 나는 교회 건물이 아니라 그의 몸이야말로 하나님의 집이라고 얘기해 주었습니다. 여러분은 교회 건물 안에서 간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또 교회 안에서 성인 음란물도 구경하지 않을 것입니다. 에수님께서 내주하실 때 여러분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몸의 지체들과 무엇을 하는가 주의하셔야 합니다. 뽑연, 음주, 마약, 불순한 생각과 같은 습관들은 여러분의 몸과 마음을 서서히 파괴시킬 것입니다.

기독교 삶이란 경주와도 같습니다. 죄로부터 돌이키고 거듭날 때 비로소 우리는 출발점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죽는 날까지 마라톤은 계속됩니다. 우리는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립니다. 매일매일 우리는 결승점에 조금씩 가까워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 달리기를 멈춰서는 안 됩니다.

또 다른 비유를 들겠습니다. 거듭남은 집을 짓기 위한 기초를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 층계로 이루어진 기초 위에 조금씩 건축물을 쌓기 시작하면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 수 있는 이상적인 삶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해로운 것들은 서서히 제거하고 해가 갈수록 하나님과 닮은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거듭나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우선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십시오. 괜히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며 자신이 그들보다 낳은 사람이라는 사실에 안주하지 말기 바랍니다. 죄는 치명적인 독과도 같습니다. 한 방울을 마시든 100방울을 마시든 죽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모든 죄인들 중에 괴수라는 사실을 인정하십시오. 그것이 당신으I 신앙 생활에 있어 좋은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그런 후 당신이 알고 있는 모든 죄로부터 돌이키기로 결정하시면 됩니다.

다음은, 에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십시오. 이 말은 그리스도에 대한 전적인 헌신을 의미합니다. 단지 마음 속에서 그를 믿는 것과는 다릅니다. 전적인 헌신 없이도 사람을 믿을 수는 있습니다. 결혼식에서 신부에게 "당신은 이 남자에게 전적으로 헌신하기로 다짐합니까?" 라고 질문했다고 합시다. 만약 신부가 "나는 그가 훌콩한 사람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 모든 삶과 미래를 이 사람에게 헌신할 지는 모르겠습니다" 라고 대답한다면 그 남자와 결혼할 수 있겠습니까? 신랑에 대한 전적인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혼한 신부의 삶은 송두리째 변합니다. 신랑이 어느 곳에 살게 될지는 모르나 신부는 자신의 삶을 신랑에게 의탁합니다. 신랑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 란 단어를 경건하게 표현하자면 "그리스도의 신부" 와도 같습니다! 결혼한 후에야 저의 부인은 저의 성을 사용할 자격이 주어집니다. 동일하게 그리스도와 결혼한 자만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하고 "그리스도인" 라고 불릴 자격이 되는 것입니다. 저와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제 성을 사용하고 자신에 대해 "Poonen 부인" 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은 거짓말하는 행위입니다. 동일하게 그리스도와 결혼하지 않은 채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호칭하는 것은 거짓말하는 행위입니다.

결혼은 며칠간 짧게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평생의 과업입니다.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헌신했다고 해서 당신이 완벽해졌다는 말은 아닙니다. 신부는 결혼하면서 앞으로 일생동안 절대로 실수하지 않겠다는 약속은 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많은 실수를 겪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으로부터 용서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남편과 함께 살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와 우리가 연합하는 모습입니다.

거듭남을 위한 세 번째 단계는 물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는 것은 마치 혼인 증명서를 취득하는 것과 같습니다. 혼인 증명서만으로 결혼할 수는 없습니다. 동일하게, 세례를 받는다고 해서 무조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선 결혼을 하고 난 후에야 혼인 증명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또한, 내 자신을 그리스도께 드렸을 때 세례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세례는 나의 옛 사람을 버리고 에수 그리스도를 삶의 주인으로 모셨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금술 좋은 부부들은 많은 대화를 나눕니다. 이처럼 당신도 매일매일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에수님과 함께 대화하며 동행해야 합니다.

좋은 아내는 남편을 불행하게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도리어 모든 일을 함께 동역해 나가고자 할 것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불쾌하게 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에수님이라면 보시지 않았을 영상물은 보지도 않을뿐더러 어떤일이 되었든 에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지 못할 일들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거듭났다고 학신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로마서 8:16에는 우리가 거듭날 때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놀라운 삶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평생 사귈 수 있는 가장 좋은 친구와 함께 거하기 때문입니다. 외로움은 사라질 것입니다. 에수님이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의 고민들을 그분과 나누고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걱정과 근심으로부터 해방되는 기쁨이 넘치는 인생입니다. 에수님께서 우리의 앞날을 책임져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거듭나고 싶으신 분들은 저와 함께 진실한 마음으로 아래와 같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내 구주 에수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 저는 지옥에 가는 것이 마땅한 죄인입니다. 저를 사랑해주시고 저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담당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당신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지금도 살아계심을 믿습니다. 죄악 된 나으I 삶으로부터 이 순간 돌이키기 원합니다.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죄를 혐오하는 마음을 주세요. 나에게 상처를 주었던 모든 사람들을 용서합니다. 주 에수님 제 안에 오셔서 오늘부로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주세요. 지금 저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세요."

요1:12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라고 기록하며 요6:37에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당신을 받아 주셨다는 사실을 학신해도 좋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이렇게 감사의 기도를 올려드리세요. "주님 감사합니다,나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의 성령으로 나를 채우시고 주님을 위해 살 수 있는 힘을 주세요. 오늘부터 오직 주님만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성령 충만함을 간구해야 합니다. 또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교제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여러분의 신앙이 성장할 수 있고 매일 주님을 따를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 좋은 교회로 인도해 주시라고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풍성하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