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그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잘못된 이유로 성경을 공부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 그리고 저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동일한 목적을 위해 성경을 연구해야 합니다.
내가 성경 전체를 통해 이 연구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들여다보려고 할 때, 내 마음에 떠오른 구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아니하리라"(요 3:16).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주된 목적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이 그들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그들을 죄의 손아귀에서 구원하시고 하나님과의 교제 안으로 인도하기 위해, 그분의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는 그 누구도 죄로 말미암아 망하여 멸망하지 않기를 원하시는 큰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할 때 그 점을 염두에 두도록 합시다.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지라도, "주님, 말씀의 모든 뜻을 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주님의 마음을 알기 원합니다." 라고 기도합시다.
우리는 성경을 공부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것을 이해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공부할 때 작은 세부 사항에 너무 몰두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보는 것을 놓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그분의 마음을 계시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 마치 건물을 짓는 일이 기초를 다지는 일에서 끝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디모데후서 3:16,17에서 읽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하나님이 숨을 불어넣음)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이 합당하게(완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은 아담에게 숨을 불어 넣으신 것처럼, 이 책에도 숨을 불어넣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숨을 불어넣지 않으셨다면, 아담은 단지 흙더미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안에 숨을 불어넣지 않으신 책은 모두 먼지더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1. 우리를 가르치고, 올바른 길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2. 우리를 책망하고 꾸짖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경건의 길에서 지켜지려면 강한 꾸짖음이 필요합니다.
3. 우리가 길을 잃었을 때 우리를 바로잡고,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함입니다.
4. 우리를 의로 훈련시키기 위함입니다. 훈련 매뉴얼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성품을 변화시켜 경건한 남녀가 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을 봅니다.
궁극적인 목표는 "완벽하고 완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아귀까지 가득 찬 물잔처럼, 우리의 성품은 둥글고, 균형을 이루고, 완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계획하신 모든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기름 부음을 받고 하나님을 섬기도록 준비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의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성경을 공부한다면, 이런 이유로 성경을 공부해야 합니다.
오직 성령만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1세기에 사도들을 가르치신 동일한 성령께서, 21세기에도 우리를 가르치고자 하십니다. 1959년 7월 거듭난 때부터 그렇게 성경을 공부했습니다. 저는 성경 학교나 성경 대학에 가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성경을 공부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을 때,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두 제자와 함께 엠마오로 가실 때, "성경을 그들에게 열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그분과 함께 걸을 때, 그분이 오늘날 우리를 위해 하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 제자들은 "주께서 성경을 열어 주실 때에 그들 안에서 마음이 뜨겁다는 것"(눅 24:32)을 발견했습니다. 오늘날 성령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열어 주실 때, 우리 마음에도 그런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으로 계시하시는 진리는 결코 지루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결코 지루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걷고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면, 우리 마음은 우리 안에서 타오를 것입니다 - 왜냐하면 우리는 말씀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옛 언약 아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말씀이 육신(flesh)이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합니다(요 1:14). 이제 우리는 성경을 묵상할 때 예수님의 영광을 봅니다(고후 3:18 참조). 그 영광을 끊임없이 바라보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아서, 항상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는 늙어서도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시 1:3; 92:14). 그것이 우리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잠언 25장 2절은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요, 그것을 드러내는 것은 왕의 영광이다"라고 말합니다. 금과 다이아몬드는 지표면 아래, 수천 피트 깊은 곳에서 발견됩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 그 풍성함은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왕이며, 우리의 영광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숨겨진 보화를 찾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 11:2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 영리할 필요는 없지만, 유아(infant)처럼 깨끗하고 겸손하며 신뢰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못하고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지능이 아니라 마음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믿어야 할 약속과 순종해야 할 명령을 주셨습니다. 말씀에는 우리를 책망하는 말씀도 있고, 위로하는 말씀도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관련된 모든 문제에 있어서 성경을 최종 권위로 삼지 않는다면, 우리는 믿음 자체를 잃을 때까지 이리저리 흔들리게 될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그의 모든 이름보다 높게 하셨다고 말합니다(시 138:2). 그러므로 그것을 거부하거나 무시하거나 가볍게 취급하는 것은 결국 헤아릴 수 없는 손실을 초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경외한다는 것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부로 들어가는 문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서론(introduction)으로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연구를 시작합시다.
방갈로르
2015년 11월
잭 푸닌
'창세기'라는 말은 '시작'을 의미합니다. 이 책에서 우리는 창조의 시작, 인간의 시작, 인류의 죄의 시작, 구원의 시작, 종교성과 영성의 두 흐름의 시작, 바빌론의 시작, 예루살렘의 시작, 거짓 종교와 참 종교의 시작에 대해 읽습니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In the beginning God)"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것이 매일 우리 삶에 있어야 하는 방식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의 시작에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우리의 목표와 야망에서, 모든 것에서) 하나님이 첫째가 되셔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업, 재정, 일상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그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남자나 여자를 찾으신다면, 하나님께서 그러한 사람 안에서 그리고 그러한 사람을 통해 하실 일에 제한이 없을 것입니다.
창조
1장에는, 창조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이 장에서 나오는 두 개의 다른 단어인 'created'와 'made'에 주목하십시오. 이 두 단어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땅을 창조하셨지만(1:1), 궁창(firmament)을 만드셨습니다(1:7). 그분은 사람을 창조하셨지만(1:27), 땅의 짐승들을 만드셨습니다(1:25). '만들다'는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의미하고, '창조하다'는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의미합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수백만 년 전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 우리는 모릅니다. 하늘(heavens)과 땅이 하나님에 의해 그분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을 때(히 11:3), 그분은 그것들을 완전하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어떤 것도 불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땅이 공허하고 어둡고 혼돈하게 되었습니까(1:2)? 하나님은 공허하고 어둡고 혼돈한 어떤 것도 창조하지 않으십니다. 1절과 2절 사이에 무슨 일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천사 루시퍼가 타락하여 마귀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죄가 우주에 처음 들어왔을 때였습니다. 성경은 천사를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기록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이 지점에서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창조는 1장에서 언급되고 루시퍼의 타락은 훨씬 나중에 언급됩니다(이사야 14장과 에스겔 28장).
1장의 나머지 부분에서 우리가 읽은 내용은 타락하고 부패하고 어둡고 공허한 지구를 다시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챕터가 끝날 무렵에는 다시 한 번 아름다운 지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것을 보시고 " 심히 좋았다"고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1장에는 우리 모두를 위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사탄은 또한 인류에게 들어와서 2절에 언급된 대로 사람을 공허하고 어둡고 혼돈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image)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그렇게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담은 완벽하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마귀가 들어와 사람을 망쳤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을 다시 만들기 시작하셔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망가진 인류를 재건(remaking)하는 사업을 하고 계십니다. 당신이 얼마나 엉성하고 어둡고 공허한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1장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다시 만드실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분은 당신을 완전하게 만들어서 마침내 그분의 모양(likeness)을 완벽하게 반영하게 하실 수 있으며, 하나님이 친히 당신에 대해 "매우 좋다"고 인증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 첫 장의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이 변화는 어떻게 일어났는가? 그것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이해한다면, 당신의 삶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매일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첫날에 무언가를 말했습니다. 그리고 둘째 날에 무언가를 말씀하셨습니다. 매일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성경의 첫 장에서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 우리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당신이 변화되기를 원한다면, 당신에게 필요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마 4:4).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이 살도록 계획하신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매일 그분의 음성을 듣지 않는다면, 우리는 변화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하나님은 날마다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자들은 그분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매일 성경을 읽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성경을 읽는 것과 다릅니다. 동화책을 읽듯이 성경을 읽거나 화학 책을 공부하듯 성경을 공부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에 말씀하시려는 것을 결코 들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보는 또 다른 것은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움직이셨다는 것입니다(1:2).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에는, 성령께서 당신 위에 역사하시도록 허용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변화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태초부터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봅니다. 오직 성령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혼돈의 지구에 변화와 아름다움을 가져온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결합된 역사였습니다.
오늘날 기독교계에 가장 필요한 것은 균형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것은 강조하지만, 성령에 대한 의존도는 똑같이 강조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도우심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면, 뼈처럼 마르고 죽은 자와 같이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사역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여 감정주의에 빠져서, 그것을 성령의 역사로 착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레일을 이탈한 증기 기관차처럼 맹렬하게 호루라기를 불며 요란한 소리를 내어도,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을 인도하도록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진창 속에 갇혀서 진척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 첫 문단에서 우리가 온전하게 되기 위하여,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을 받을 수 있음을 봅니다.
1:4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라고 읽습니다. 이 분리는 넷째 날에도 반복됩니다(1:18).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며, 이것이 반복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빛을 창조하실 때 어둠이 섞이지 않기를 원하셨고 그래서 분리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모든 분열이 마귀에게서 온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분열을 만든 첫 번째 인격이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을 읽습니다. 빛은 어둠과 교제할 수 없습니다. 빛이 우리 마음에 들어올 때,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서 하기 원하시는 바로 그 다음 일은, 우리를 모든 어둠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6에는 빛의 창조에 대한 신성한 주석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의 빛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는 그림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런 다음 두 장 뒤에 있는 고린도후서 6:14-17에서, 우리는 모든 어두움에서 분리되어야 할 필요성에 대해 듣습니다. 세상은 어두움으로 가득 차 있으며, 우리 마음에는 세상의 것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어둠에서 분리되지 않을 때, 그 결과는 혼란입니다.
하나님께서 해와 달을 하늘 가운데 두셨을 때, 다시 빛과 어두움을 나누셨습니다(1:18). 두 경우 모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을 읽게 됩니다. 당신이 어둠에 속한 모든 것에서 분리되었을 때만 하나님께서 "좋다"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말씀하실 수 없습니다. 빛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어둠에서 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많은 문제를 겪습니다.
사람은 여섯째 날에 창조되었습니다. 들짐승들도 같은 날 아담 바로 전에 만들어졌습니다(24절). 그 짐승들은 사람을 만든 것과 같은 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사람과 짐승을 구별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숨을 불어넣으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동물의 수준 위로 끌어올리는 것은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뿐입니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으로 사는 것을 중단한다면, 머지않아 동물의 수준으로 떨어질 것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의 호흡 없이는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일곱째 날을 안식일로 지키셨습니다. 그 날은 하나님에게는 일곱째 날이었지만, 사람에게는 첫째 날이었습니다. 사람은 여섯째 날이 끝날 무렵에 창조되었으므로 그의 첫 생의 날은 안식의 날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 일하러 나가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 교제해야 한다는 것을 사람에게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루를 보낸 후에야 에덴동산에서 일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이 인간을 위한 신성한 질서입니다: 교제가 먼저이고 봉사가 그 다음입니다. 시작은 하나님 자신이고 -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는 그 순서를 위험할 정도로 잊어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안식일을 그토록 엄격하게 지키라고 가르치신 이유입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백성이 살 수 있는 안식의 쉼이 남아 있습니다(히 4:9).
1:28에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어떻게 그렇게 하기를 기대하셨을까요? 분명히 성관계를 통해서 입니다. 성기능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사용하여 아이를 낳으라고 사람에게 말씀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사람의 성기능도 하나님이 마침내 "심히 좋았더라"(1:31)라고 부르신 것에 포함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혼 생활에서의 성관계가 하나님께서 친히 "매우 좋다"고 말씀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까? 성관계는 결혼 밖에서는 매우 나쁘지만, 결혼 안에서는 매우 좋습니다. 결혼 생활에서도 성관계는 더러운 것이라고 생각하고, 결혼하지 않으면 더 거룩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비-성경적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그에게 복을 주셨습니다(1:28). 하나님은 그에게 생육할 뿐만 아니라, 그 사람 아래 있는 모든 것을 정복하고 모든 것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을 노예가 아니라, 통치자로 창조하셨음을 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모든 것을 그의 발 아래 두는 이기는 자로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에서, 우리는 사람이 통치하기를 바라신 하나님의 뜻을 읽게 됩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 우리는 인간이 이기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소망을 읽습니다(계 21:7). 그것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원래 뜻이었고, 마침내 그분의 계획을 성취하고 이기는 자가 되는 소수를 찾으십니다. 당신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은 모든 것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이 당신의 삶에서 죄와 분노와 정욕과 욕정을 다스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당신이 그것들을 모두 당신의 발 아래 두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결코 노예로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을 정복자와 통치자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복을 주실 때에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우리가 1:28에서 읽은 것처럼).
1장에서, 하나님께서 매일의 일을 살피시고 그것을 좋은 것으로 인정하셨다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둘째 날에는 하나님께서 내쫓으신 사탄이 둘째 하늘에 거하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우리 역시 우리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지, 하나님께서 매일 살펴보시도록 허용해야 합니다.
2장에서는, 사람의 창조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세 가지 선물을 주셨다는 것을 봅니다 - 배우자(이브), 살 집(에덴), 할 일(동산지기). 이것이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이 추구하는 세 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위해 세 가지 모두를 제공하는 데 관심이 있으셨고 오늘날 그분의 자녀들을 위해 세 가지 모두를 제공하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아담은 그것들을 위해 하나님께 구할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아담의 필요를 보시고 그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결혼 상대자, 집, 직업이 필요한 것을 아십니다. 당신이 그분과 동행한다면, 그분은 당신에게 이러한 필요와 다른 필요도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2장 11, 12절에 에덴의 금이 좋았다고 말합니다! 금이 좋은 것은 오직 하나님 앞에서만입니다. 그분에게서 멀어지면 금은 올무이며 저주가 될 수 있습니다.
2장 19, 20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아담에게 짐승들을 데려오셨다는 것을 읽습니다 - 그리고 아담은 그들에게 모든 이름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게 됩니다: "그러나 아담에게는 그를 합당한 돕는 배필이 없었더라." 이 문구는 아담이 파트너가 있는 각 동물을 보았을 때 그들 중 하나를 파트너로 가질 수 있는지 궁금해했음을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사자에게는 암사자가 있었고, 코끼리에게는 짝이 있었고, 고양이에게는 짝이 있었고 그리고 등등 짝이 있었습니다. 아담은 그것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고 하나하나 거절했습니다. 그들 중 누구도 자신의 본성과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담이 그들 모두를 거부했을 때,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좋다, 내가 너를 위해 돕는 자를 만들어 주겠다." 그런 다음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그를 위해 아내를 만드셨습니다.
이것에 대한 영적 적용이 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이고 결혼 상대자를 찾고 있다면, 하나님은 먼저 당신이 거듭났을 때 받은 것과 같은 신성한 본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예쁜 여자(또는 잘생긴 남자)가 당신에게 오는 것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이 그들 중 하나를 당신의 파트너로 선택할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그들을 통해 당신을 테스트 할 것입니다. 당신이 만약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계획하신 사람을 놓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하고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후 6:14)고 말씀하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 그러면 그분은 당신에게 가장 최고의 것을 주실 것입니다.
이것을 주목하십시오: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여섯 번 "좋았더라"고 말씀하신 후(1:4, 10, 12, 18, 21, 25), 갑자기 "좋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2:18).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 다음, 그분은 하와를 만드신 후에 " 심히 좋았더라"(1:31)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행복한 결혼한 부부가 하나님의 창조물에 가져온 차이입니다!
2장 24절에서 우리는 결혼한 모든 사람들이 주의해야 할 것을 읽습니다: 사람이 결혼하면, 부모를 떠나 그의 배우자와 연합해야 한다. 이것은 주로 육체적으로 부모를 떠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필요할 수도 있지만), 감정적으로 부모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이 일단 결혼하면, 그의 배우자는 그의 부모보다 그에게 훨씬 더 중요해야 합니다. 결혼한 부부는 부모와 상의하지 않고 서로 상의하여 가족 관련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나는 모든 결혼한 부부에게 이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면서 인도를 돌아다니고 싶습니다. 결혼한 모든 사람이 이 명령에 순종한다면, 우리 땅에는 더 많은 행복한 결혼 생활이 있을 것입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이 여기 있습니다. 사실 그것은 우리를 위해 성경에 기록된 첫 번째 계명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것을 성경의 첫 번째 계명으로 두셨습니까? 결혼을 제정하신 분께서 이 단계의 중요성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많은 부부들은 그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탄의 말을 들은 두 사람
3장과 4장에서 우리는 마귀의 말에 귀를 기울인 두 사람, 즉 아담과 가인에 대해 읽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어떻게 사탄의 책략에 희생되었는지를 통해 몇 가지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에덴으로 보내셨을 때, 그를 확인하기 위해 그와 함께 천사를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왜일까요? 우리가 감시 당하고 있지 않을 때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의 태도를 시험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아무도 우리 주변에 없을 때,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아담과 이브는 다른 사람 없이 그들만 있었고 어떤 피조물의 감시도 없이 죄를 지을 수 있었습니다.
에덴에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수천 그루의 나무가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그들에게 영생(eternal life)을 가져다 줄 생명나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이 중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지식(Knowledge)"을 추구했습니다. 그들은 생명을 거부하고 지식을 선택했습니다 - 오늘날 사람이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성경 지식과 생명 중에 선택해야 한다면, 무엇을 선택하겠습니까? 나는 여러분 모두가 "생명"이라는 정답을 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시험해 보십시오: 당신은 지식을 얻기 위해 성경을 연구합니까? 아니면,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성경을 연구합니까? 지식을 얻기 위해 성경을 공부한다면, 당신도 지식의 나무에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은 오직 죽음만을 가져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경만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의 살아있는 관계를 통해 선과 악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살아있는 관계 없이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길을 잃을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관계 없이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을 얻었기 때문에 그렇게 죽었습니다. 선과 악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순간순간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려주는 성령을 통해 와야 합니다. 선과 악을 아는 다른 방법은 죽음을 가져올 뿐입니다.
마귀는 하와에게 그녀가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3:5). 예수님은 매우 비슷하게 들리는 메시지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사탄은 하와에게 지식과 권위와 능력에 있어서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말했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겸손과 순결과 사랑에 있어서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두 메시지 중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하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아아, 심지어 대부분의 신자들도 전자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귀의 음성과 예수님의 음성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유혹은 매우 미묘합니다. 마귀는 속이는 자입니다. 그의 모조품은 겉보기에 진짜처럼 보입니다.
마귀가 하와를 유혹했을 때 그는 또한 하나님이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암시를 주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그녀를 사랑하셨다면(사탄은 넌지시 말했다), 하나님은 그녀가 이 아름다운 나무의 열매를 먹도록 허락하셨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탄이 우리 마음에 들어가려고 시도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함으로써 말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이 너희를 체질하기로 작정하고 하나님께 허락을 요구하였다"(눅 22:3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를 체질하도록 허락하신 것처럼, 사탄에게 그렇게 하라고 허락하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내가 너를 위하여 네가 체질을 받을 때에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다"(눅 22:32)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넘어지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넘어져도,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시련과 시험의 때에, 우리가 넘어질 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다면, 승리한 것입니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거나 원하는 것이 주어지지 않는다 해도, 욥처럼 자녀가 죽고 재산을 잃게 되는 깊은 시련을 겪더라도 -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무슨 일이 있어도) 끊임없이 단호하게 말하는 것(assert)을 의미합니다. 탕자를 집으로 돌아오게 한 것은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많은 잘못을 저질렀고 그의 인생을 엉망으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여전히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너무 매력적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아름다운 피조물보다 하나님 자신을 택할지 여부를 시험 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선악과가 매력적일 때이므로 하나님은 선악과를 매력적으로 만드셨습니다. 모든 유혹에서, 우리가 본질적으로 직면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창조주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그의 창조물을 선택할 것인가? 그 유혹은 예쁜 여자나 금이나 다른 창조물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명예나 인정을 구할 때에도, 다른 선택은 하나님의 인정입니다. 어느 것을 원하십니까? 우리는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택할 때 죄를 짓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모든 창조물보다 창조주를 선택할 때 승리합니다. 그만큼 간단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신자들 포함)은 매일 이 시험에 실패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물(아름다운 얼굴이나 금이나 어떤 사람의 인정)을 숭배하든지, 하나님 그분 자체에 비해 이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기든지 합니다. 이기는 자에게는, 예수님의 아름다움과 그분의 인정이, 그분이 창조하신 어떤 것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습니다. 인생의 모든 결정에서 이 한 가지만 선택한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여자가 될 것입니다. 당신은 개인적인 방법으로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알게 될 것입니다 - 어떤 사람이 당신을 가르칠 수 있는 것보다 더 잘 알게 될 것입니다. 모든 유혹에서 그 선택을 하고 이렇게 말하십시오. "주여, 내가 모든 피조물보다 당신을 택합니다." 그것이 비밀입니다.
아담의 죄는 무엇이었습니까? 금지된 나무의 열매만 먹었습니까? 아닙니다. 그 이상이었습니다. 3장 17절에서 하나님은 그에게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들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내의 말을 듣는 것이 죄입니까? 예, 그것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결과를 낳는다면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가정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머리로서의 권위를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의 아내가 악마와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고, 그는 단지 거기 서서 대화를 듣고 있었고, 그녀를 말리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호히 반대하고 "하와, 이리 와. 그의 말을 듣지마"라고 말했어야 했습니다. 오늘날 아담과 같은 남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가정의 머리가 아닙니다. 아담은 자신의 머리 직분을 확고히 주장하지 않았을 때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뱀과 땅은 저주하셨지만, 아담은 저주하지 않으셨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가리기 위해 동물을 죽였습니다. 그것이 지상 최초의 죽음이었습니다. 무고한 동물이 아담의 죄를 위한 제물로 죽임을 당했고, 그 동물의 가죽은 아담과 하와의 벌거벗은 몸을 가리는 옷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습니다(3:21).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들의 의로 우리를 옷 입히시기 위해 그분의 아들이 죽도록 허락하심으로써, 언젠가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행하실 일을 보여 주는 그림이었습니다.
사람이 죄를 짓기 전에는, 생명나무 앞에는 화염검이 없었습니다. 아담은 그곳에 가서 그것을 먹고 영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범죄한 후에 그 나무 앞에 화염검을 두셨습니다. 오늘날, 당신이 그 나무에 참여하기를 원한다면, 그 칼이 당신의 육신(flesh)에 떨어지게 해야 합니다. 그 칼이 갈보리에서 예수님에게 떨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우리의 죄 때문에 벌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칼은 오늘 우리 육신에 떨어져야 합니다. 바울이 말했듯이 말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갈 2:20). 우리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연합할 때, 그 칼이 우리 육신에 떨어지며 우리는 영생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삶의 방법은 없습니다. 이 검은 오늘도 이 나무를 지키고 있습니다.
저주, 슬픔, 가시, 땀, 먼지, 죽음 등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그의 죄에 대한 형벌로 말씀하신 말씀을 주목하십시오(3:16-19). 이 모든 말씀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서 발견됩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스스로 취하셨고, 그래서 우리는 에덴에서 아담에게 가해진 형벌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담과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자마자, 그의 아내와의 교제도 끊어진 것을 봅니다. 이에 대한 증거는 그가 그녀를 비난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에서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기 시작할 때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졌음을 증명합니다. 하나님과 교제할 때, 다른 사람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자신을 판단합니다. 형제를 참소하는 자는 사탄입니다.
4장에서, 우리는 마귀의 말에 귀를 기울인 또 다른 사람인 가인에 대해 읽습니다. 하와는 가인을 낳고 "내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남자아이를 창조했다"(4:1)고 말했습니다. 인간의 탄생은 그 당시에 기적이었습니다; 가인은 살아있는 혼으로 세상에 태어난 첫 번째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하와가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다. 그리고 나도 사람을 만들었다!! 나는 내 자신의 몸으로 사람을 창조했다." 그곳에서 나타난 것은 교만의 정신이었습니다: "내가 만들었고, 창조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조금 도와주셨지만, 나는 해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아들 가인은 그 잘못된 영을 가지고 자랐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그들의 제물을 바치러 하나님께 왔습니다. 4장 4절을 주의 깊게 읽으면, (어떤 사람들이 상상하듯이)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고 따라서 아벨을 받으셨다고 말하지 않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벨(먼저)을 열납하시고 (그 다음에) 그의 제물을 열납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 그 반대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가인을 거절하신 것은 가인의 제물을 거절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분은 먼저 가인을 거절하셨고 따라서 그의 제물도 거절하셨습니다. 성경은 "악인의 제물은 아무리 좋은(good) 제물이라도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잠 21:27)고 말씀합니다. 가인은 악한 자였으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제물을 거절하신 것입니다.
가인이 화가 났을 때, 하나님은 가인에게 그가 위험에 처했다고 경고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에덴에서, 하나님은 아담을 찾으러 오셨고, 이제 그분은 가인을 찾으러 오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타락한 인간을 찾으러 오시는 분입니다. 예수님도 타락한 인간을 찾으러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타락하거나 빗나갈 때마다 우리를 찾으러 오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큰 격려가 됩니다. 하나님이 오셔서 가인에게 경고하셨지만, 가인은 그 경고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의 마음 문에 웅크리고 있던 죄가 안으로 들어와 그를 멸망시키도록 허락했습니다.
질투는 사람이 에덴에서 나온 후, 성경에 언급된 첫 번째 죄입니다 - 하나님의 축복을 더 많이 받은 동생에 대한 질투. 당신보다 어린 사람이 당신보다 더 복을 받고 하나님께 더욱 기름 부음 받은 것을 보거든, 그를 시기하여 가인의 길로 가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이제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하신 말씀을 주목하십시오: "너는 저주를 받았도다"(4:11). 왜 하나님은 가인은 저주하시고 아담은 저주하지 않으셨는가? 아담의 경우, 하나님은 땅만 저주하시고 아담은 저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자신에게만 해를 입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인이 죄를 지었을 때, 그는 다른 사람에게도 해를 입혔습니다. 당신이 흡연이나 음주와 같은 죄를 범하면, 당신의 몸을 망가뜨리지만 자신에게만 해를 끼칩니다. 그러나 험담을 하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므로 그 죄는 더 심각합니다. 그러나 험담이 흡연보다 더 나쁘다고 믿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됩니까?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죄는 자신에게만 상처를 주는 죄보다 하나님 보시기에 훨씬 더 심각합니다. 그래서 가인은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때마다 진지하게 생각하세요.
하나님은 가인에게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4:10)고 말씀하셨습니다. 험담으로 명예를 더럽힌 그 사람의 피가,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께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구하고, 험담한 사람에게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구할 때까지, 그 부르짖음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죄가 심판 날까지 계속해서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입니다.
가인은 형벌을 받을 때, "내 형벌이 너무 커서 감당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지옥에 가는 사람들의 언어입니다. 그들은 "내 죄가 매우 큽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단지 "나의 형벌이 매우 무겁다"고 말할 뿐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죄 때문에 더 괴로워합니까? 아니면 형벌 때문에 더 괴로워합니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통해, 당신이 경건한 사람인지 불경건한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경건하지 않은 사람은 자신이 받게 될 형벌에 대해 걱정하지만, 경건한 사람은 자신의 죄 때문에 마음이 상합니다.
가인이 여호와 앞에서 떠나갔고, 그의 자손도 그와 같이 되었습니다. 그의 아들 중 한 명이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많은 아내와 결혼했습니다. 그들은 즐거움을 위해 악기를 만들었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록 음악과 전체 연예계의 시작을 봅니다. 이것이 아버지가 여호와를 떠날 때, 자녀들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4:16-24).
가인과 아벨에게서, 우리는 두 가지 흐름, 즉 종교적 흐름과 영적 흐름의 시작을 봅니다. 가인은 무신론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종교가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바빌로니아의 거짓 종교 제도의 선구자였습니다. 아벨은 모든 경건한 사람들의 선구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아벨을 의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3:35). 가인은 종교적이었지만, 아벨은 영적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두 사람
우리는 마귀와 동행한 두 사람의 예인 아담과 가인을 보았습니다. 이제 하나님과 동행한 두 사람, 에녹과 노아를 생각해 보십시오.
5장에서, 우리는 '그리고 그가 죽었다'라는 표현을 여덟 번 읽습니다. 하지만 그 장의 중간에, 우리는 전혀 죽지 않은 사람에 대해 읽었습니다!! 그것은 에녹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했고 하나님은 그를 살아있는 채로 천국으로 데려가셨습니다. 그것은 죽음 가운데 부활 생명의 그림입니다. 에녹은 부활의 능력으로 살다가, 죽음을 이기고 하늘로 올려진 사람이었습니다 - 영적인 죽음 가운데 살다가 부활의 능력으로 이기고 마침내 휴거되는 경건한 교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에녹은 아마도 그의 생애의 처음 65년 동안은 경건하지 않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65세에,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소년의 이름을 "므두셀라"라고 지었습니다. "므두셀라"는 "그가 죽으면 물(the waters)이 나올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에녹에게 그의 아들이 태어날 때 계시를 주셨음을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에녹에게 그 아들이 죽으면, 홍수로 세상을 심판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심판의 계시는 노아가 아니라 에녹에게 먼저 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들의 이름을 므두셀라라고 지었습니다.
이제 아기를 낳으면, 그 아이가 얼마나 오래 살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므두셀라가 아플 때마다, 에녹은 심판의 때가 가까운지 궁금했을 것입니다. "그가 죽으면 홍수가 닥칠 것이다"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아기를 상상할 수 있습니까? 당신이 그를 부를 때마다, 당신은 심판을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은 에녹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동행하게 하였고, 영원한 것이 현세적인 것보다 더 중요함을 깨닫게 하였습니다. 그것이 에녹이 300년 동안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게 된 위기였습니다.
성경은 "세상은 사라지리라"(요일 2:17)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믿는다면, 우리도 에녹처럼 영원한 것이 현세적인 것보다 더 중요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엄청난 오래 참으심은 므두셀라가 다른 어떤 인간보다 더 오래 살게 하신 사실에서 볼 수 있습니다 - 969년입니다. 969년 동안, 사람들은 므두셀라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다가올 심판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메시지를 거부했습니다. 이 심판에 대해 설교한 사람은 노아만이 아니었습니다. 에녹은 300년 동안 그것을 설교했고 므두셀라는 또 다른 669년 동안 그의 이름으로 그것을 설교했습니다.
노아도 므두셀라의 생애 마지막 12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심판을 전했습니다. 에녹과 므두셀라는 나중에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계시하신 것처럼 분명하게 홍수의 세부 사항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므두셀라가 죽었을 때 홍수와 관련된 어떤 종류의 심판이 임할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유다는 에녹이 그 시대의 모든 불경건한 백성에 대한 심판을 예언했다고 말합니다(유 14,15). 에녹은 예언자였으며 그는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아담은 에녹이 태어났을 때 622세였고 930세에 죽었습니다(5:5-23). 그러므로 에녹은 아담을 308년 동안 알았을 것입니다. 나는, 에녹이 아담이 친히 한때 하나님과 동행했던 에덴에서 상황이 어떠했는지 자주 아담에게 물었을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그리고 에녹은 하나님 자신과 동행하기를 간절히 바랐을 것입니다. 에녹은 에덴 밖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음을 증명한 최초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온 후에도,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살면서 훌륭한 설교자들을 많이 만났지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거의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내 마음에 직접 하나님과 동행하고 싶은 열망을 불러일으킨 것은 그 소수의 사람들입니다.
므두셀라의 손자는 노아였습니다. 그리고 노아는 므두셀라와 함께 600년을 살았습니다. 그는 므두셀라에게 에녹이 하나님과 어떻게 동행했는지 여러 번 물었을 것입니다. 노아의 마음에는 하나님과 동행하고자 하는 갈망이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6:9에서 노아도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것을 읽습니다.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할 때, 하나님은 그분의 심판의 목적을 노아에게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에서)하나님과 동행한 최초의 두 사람에게 계시하신 것은 죄에 대한 심판의 진리였습니다. 그리고 에녹과 노아는 아무도 그들을 믿지 않을지라도, 그 메시지를 신실하게 전파했습니다. 그 이후로 하나님의 모든 참된 예언자도 같은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하나님은 신자와 불신자를 그들의 죄에 대해 심판하실 것입니다.
에녹과 노아는 성경에 처음으로 언급된 두 명의 설교자이며 둘 다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 이후로 모든 설교자들이 그렇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하셨고 노아는 즉시 방주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방주 값을 누가 지불할 것인지 하나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가 하나님께 물었다면, 하나님은 "당연히 네가 직접 지불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주머니에서 그분의 일의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 일꾼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면, 다른 누군가가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노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고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는 방주를 짓는 데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일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꺼이(gladly) 그렇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그런 사람을 필요로 하십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날이 노아 때와 같이 악할 것이니, 말세에도 하나님께 많은 "노아들"이 필요로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사도 바울과 같이 자기를 부양하며 주님을 섬기는 사람.
사람들은 노아에게 어떻게 동물들이 방주로 들어올 것인지 물었을 것입니다. 노아는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지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동물들을 초자연적으로 안으로 데려오셨습니다. 노아는 그가 해야 할 일, 즉 방주를 짓는 일만 했습니다. 그는 다른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일만 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불가능한 일들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문을 닫으셨다는 것을 읽습니다(7:16). 방주의 문을 닫으신 분은 노아가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젠가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때가 되면 구원의 문을 또한 닫으실 것입니다.
방주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몸인 교회의 그림입니다. 교회에서와 마찬가지로 방주 안에서 생활하는 것이 불편했을 것입니다! 교회에서, 우리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때때로 우리에게 잘못된 방식으로 신경을 건드립니다. 그러나 방주가 편리하지 않더라도, 그 당시 지상에서 유일하게 안전한 장소였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까다로운 사람들이 있어도, 교회 안에 있으면 행복합니다. 당신도 행복하길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가 사람들을 우리와 함께하도록 초대하는 이유입니다.
홍수가 마침내 물이 빠질 즈음에, 노아는 까마귀와 비둘기를 방주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 육신(flesh)과 영(Spirit)을 상징하는 그림입니다. 까마귀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까마귀는 사람과 동물의 시체를 발견하고 그것을 제공하는 모든 잔치에 기뻐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육신의 지시에 따라 사는 사람들은 세상을 매우 즐거운 곳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비둘기는 아주 빨리 돌아왔습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결코 편안함을 느끼지 못하며, 항상 교회에서 하나님의 백성들과 교제하기를 갈망합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온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그 위에 감사제사를 드린 것이었습니다(8:20). 하나님을 첫째로 두고 그분께 우리의 경배와 감사를 드리는 그 예는 우리가 항상 따라야 할 좋은 예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완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술에 취해 장막에 알몸으로 누워 있었습니다. 그의 아들 함은 그를 보고 형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함이 그와 같이 아버지를 욕되게 하였으므로, 저주가 그에게 임하였습니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덮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여기에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아버지를 욕되게 한 아들과 그의 후손을 벌하시는 하나님의 기록이 성경에서 처음 나오는 곳입니다. 우리가 권위를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심각한 문제입니다. 당신의 아버지나 하나님의 사람에게서 약점을 보았을 때, 당신에게 저주가 내리기를 원치 않는다면, 함과 같이 그 벌거벗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폭로하지 마세요. 셈과 야벳처럼 그것을 덮으십시오. "사랑은 허다한(multitude) 죄를 덮습니다"(벧전 4:8; 잠 10:12). 노아는 셈과 야벳에게 교제의 축복으로 축복하며,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그들이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9:27)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도 함께 사는 사람들과 교제하며 서로의 죄를 덮어 주어야 합니다. 그러한 신자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울 수 있습니다.
바벨론
10장에서, 우리는 가인과 아벨로 시작된 두 가지 흐름의 연속을 봅니다 - 종교성과 영성. 이 흐름이 무신론과 영성이라면, 그 차이는 흑백처럼 분명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성과 영성은 크림색과 흰색과 같습니다. 밝은 빛에서만 이 두 가지 색상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악마는 속이는 자이며 위조품을 가능한 한 진품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넓은 길의 문은 좁은 길의 문과 모양이 매우 비슷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넓은 길로 들어가는 줄도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은 영리한 설교자들에게 속고 있습니다.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나는 지금 속고 있는 신자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한 분야만 생각해 보십시오: "너희가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섬기지 못하느니라"(눅 16:13)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믿는 신자가 얼마나 됩니까? 아주 아주 적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있다고 믿는 크리스천과 크리스천 사역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탄이 기독교인들을 속이는 많은 일의 한 예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이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돈을 사랑하고 또한 하나님도 사랑한다고 상상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영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종교적일 뿐입니다.
10장에서, 우리는 바벨론의 시작을 읽습니다. 그 멸망은 요한계시록 18장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바벨론은 성경의 시작 부분에 나타나며, 성경의 끝까지 계속됩니다. 여기에 "여호와를 대적하는"(직역) 강력한 사냥꾼인 니므롯(10:8,9)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왕국의 시작은 바벨(또는 바벨론)이었습니다. 바벨은 원래 '하나님의 문'을 의미했습니다. 니므롯은 무신론자가 아니었습니다. 가인처럼, 그는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그의 직업인 종교인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벨론 시스템(제도)이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바벨론은 종교 제도(계 17장)이자 금융 제도(계 18장)입니다. 돈과 하나님의 일이 합쳐져서, 바벨론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들이 속는 방식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돈도 벌기 때문에 그 일에 끌리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명성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집단은 그와 같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설교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 헌금한 돈으로, 값비싼 집을 짓고 값비싼 차를 사는 데 사용하는 것을 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도들의 생활 방식이 아니라, 영화 배우의 생활 방식과 비슷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판단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우리에게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그들에게 속아서도 안 됩니다. 대신 예수님을 따릅시다. 사람들에게 명성과 부와 권력을 가져다주는 "기독교" 종교 제도는 확실히 바벨론 시스템입니다. 바벨론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가는 문(바벨)을 보여준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그들을 지옥의 문으로 인도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문이다"(요 10: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참된 교회인,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니므롯은 장차 일어날 적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여기에는 그가 사냥꾼이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아마도 그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들짐승에게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니므롯은 그 동물들을 사냥하여 위대한 구원자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세계적인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적그리스도는 말세에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는 놀라운 방법으로 사람들을 구원할 것이며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될 것입니다. 계시록에서, 우리는 거짓 예언자가 적그리스도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될 것이라고 읽습니다. 종교와 정치는 마지막 날에 밀접하게 결합될 것입니다. 우리는 인도와 미국 모두에서 선거철에 그것을 봅니다. 정치 지도자들은 종교 카드를 사용하면 더 많은 표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기독교 종교" 조차도 정치인들이 자신을 홍보하기 위해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요 18:3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참된 믿음을 식별하는 표입니다. 당신은 예수님이나 그분의 사도들을 니므롯처럼 세속적인 왕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종이었습니다. 한번은 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서 도망치셨습니다. 그분은 그들의 왕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11:4에서,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탑을 쌓기로 결의한 것을 읽습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자, 우리 스스로 성읍(city)과 탑을 쌓고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자." 하고 그들은 그들의 탑이 하나님의 문(바벨)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께 도달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거짓 종교의 주요 구성 요소입니다. 거짓 종교는 항상 행위의 종교이며 -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의존의 종교가 아닙니다. 거짓 종교의 지도자들은 항상 영화 배우의 카리스마를 가진 강한 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바울처럼 연약하고(weak) 평범한(unimpressive) 사람이 아니며, 베드로처럼 명성이 없는 사람도 아닙니다. 거짓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자신의 명성과 명예를 구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참 예언자들은 항상 오해를 받고 "이단자"라고 불리며 종교적인 기독교계에 의해 쫓겨납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그랬습니다.
바벨론에는 많은 연합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온 땅이 같은 언어를 사용했다고 합니다(11:1) - 단지 같은 말뿐 아니라, 사람의 지혜와 능력과 영광의 같은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그것은 세상이 사용하는 언어이며, 불행하게도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사용하는 언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연약함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며, 그분 안에는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아름다움이 없었습니다(고후 13:4; 사 53:2). 그분은 사람들의 발을 씻기는 종이었습니다. 그분은 총감독도, 감독도, 교황도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자신을 평범한 사람("사람의 아들")이라고 불렀고 어떤 칭호도 갖지 않았습니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참된 종을 식별하는 표식입니다.
바벨론에서는 "자, 세우자"고 말합니다. 그들은 그러한 문제에 대해 하나님과 상의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천국으로 가는 관문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거짓 종교는 모든 필요를 하나님께 무력하게 의존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기도할 수 있습니다. 모든 종교에 기도가 있지만, 의미 없는 기도일 것입니다. 바알의 예언자들이 갈멜산에서 몇 시간 동안 기도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엘리야가 1분 동안 기도하자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내려왔습니다! 우리 중 일부는 기도하는 시간을 자랑스러워할지 모릅니다. 좋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도 밤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하나님의 인도와 도움에 대한 우리의 무력한 의존을 표현하는 경우에만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 사람들은 인간의 영리함에 의존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거짓 종교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시작됩니다. 그것의 모토는 "태초에 하나님"이 아니라 "태초에 사람"입니다(1:1에서와 같이). 거짓 종교는 사람에게서 나왔고, 사람의 능력을 통해 이루어지며, 사람의 영광을 위해 전파됩니다.
성경은 '나무와 풀과 짚'이나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집을 짓는 것에 대해 말합니다(고전 3:12).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집을 짓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 답은 로마서 11장 36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을 통해, 하나님을 위하여". 이것이 예루살렘(하나님의 참된 교회)이 세워지는 방식입니다. 그 반대는 "사람으로부터, 사람을 통해, 사람을 위해"입니다. 그것이 바벨론이 건설된 방식입니다.
바벨론은 사람의 생각으로 건축되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 단체가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으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보다는, 다국적 기업과 대기업의 원칙을 따릅니다. 그들은 사도들이 세운 교회가 아니라, 비즈니스 기업처럼 조직을 운영합니다. 예수님은 왜 광고회사에 복음을 전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들이 그 열 두 사도보다 더 잘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방법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다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방법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인간은 종교적인 피조물이며, 하나님보다 종교를 갖고 싶어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 불편합니다. 종교와 함께 사는 것이 편안합니다. 당신은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없으며, 세상에서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기독교 종교"를 가지고 있으면서, 여전히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원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신자들도 하나님 자신보다 기독교를 갖고 싶어합니다. 그들은 목에 예수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바벨론은 사람의 힘으로 세워졌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기름부음이나 하나님이 주시는 초자연적인 은사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자연의 선물, 좋은 음악, 전자 기기를 사용하면,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우리의 일이 그렇게 형편없는 것도 당연합니다! 우리는 초기 사도들이 알았던 능력을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경험했다고 주장하는 성령세례는, 그들 자신의 혼의 위조된 세례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 심리적 경험은 그들을 만족시키지만, 오순절 날 사도들이 받은 것과는 전연 다릅니다. 오늘날 예수와 사도들에게 임한 성령의 진정한 기름부음을 경험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few). 나는 예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사도들에게 약속하신 진정한 권능의 부여를 구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왜 제가 오늘날 성령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많은 일들이 가짜라고 말할까요? 예수님께서 그들의 열매로 거짓 예언자를 분별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오늘날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확연히 드러납니다. 성령은 돈을 사랑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그러한 열매는 확실히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들은 권력과 지위와 사람의 명예를 사랑합니다. 이것들은 성령의 열매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능력"은 어떤 다른 근원, 어떤 다른 영으로부터 오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바벨론은 인간의 영광을 위해 세워졌습니다. "우리가 이름을 날리자"는 11:4에서 읽은 내용입니다. 오랜 후, 우리는 다니엘 4:30에서, 느부갓네살이 그가 건축한 바벨론 도시를 바라보았다는 것을 읽습니다. 저는 그것이 길이와 너비가 25km인 정사각형으로, 두께가 87피트(25.52m), 높이가 350피트(106.68m)인 성벽과 함께 지어졌다고 들었습니다. 그것은 세계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아름다운 공중 정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느부갓네살이 이르되, "이는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내 능력의 권능으로 건축한 큰 성 바벨론이 아니냐?" 그것은 사람으로부터, 사람을 통해, 사람을 위해 지어졌습니다. 느부갓네살은 바벨탑이 세워진 지 거의 2000년 후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같은 영이 있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이후 250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는 동일한 영이 오늘날 기독교계에서 활동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이것이 바로 바벨론입니다 - 사람으로부터, 사람을 통해, 사람을 위해. 그리고 그것은 예루살렘과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11:5에서 "여호와께서 사람이 지은 것을 보려고 내려오셨다"는 것을 읽습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짓는 모든 것을 살펴보기 위해 내려오실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분은 우리 교회나 조직의 규모를 살펴보기 위해 오지 않고, 그것이 세워진 동기를 살펴보려고 오십니다. 그것은 누구의 영광을 위해 지어졌습니까? 그분이 바벨탑의 크기를 살펴보시려 했다면, 그것은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때 다른 것을 찾으러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다른 것을 찾으러 내려오십니다.
예루살렘 - 아브라함과 멜기세덱
12장 1절에서, 우리는 진정한 예루살렘 건축의 시작을 봅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낳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없었다면, 예루살렘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에게서 우리가 바벨론에서 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너의 친척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아브라함은 바벨에 있는 이 사람들처럼 어느 날 갑자기 기발한 아이디어(bright idea)를 얻어서, "나는 우르에서 충분히 오래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나로 하여금 가나안으로 가서 거기서 일하게 하소서." 라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No. 그의 움직임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였습니다. 75년을 기다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움직이는 것이 좋습니다. 모세는 목자로 40년을 기다렸다가,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실 때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성취한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우리가 75년이나 80년을 기다려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움직여야 한다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바쁜 21세기 사람들에게 그럴 시간이 있을까요? 아니요.
나는 내가 젊었을 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을 가르쳐 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사람이 너를 움직이게 하지 말아라. 오직 하나님만이 너를 움직이게 하라." 나의 동료를 포함하여 많은 좋은 사람들이 나에게 다양한 일을 하라고 촉구(urge)했습니다. 나는 그들의 충고를 듣지만, 하나님이 나에게도 말씀하실 때까지 움직이지 않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까지 기다립니다, 왜냐하면 내가 사람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인다면, 결국 비참하게 될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동역자들의 의견을 고려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듣는 마지막 음성은 하나님의 음성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라"고 말씀하셨고 그는 갔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가라"고 말씀하셨고 그는 갔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가라"고 말씀하셨고 그는 갔습니다. 이들은 그들의 삶으로 무언가를 성취한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려고 여기저기 뛰어다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원한 가치를 성취하지 못합니다. 통계적으로 보면, 그들이 하는 일은 인상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종교적 바벨론이지, 예루살렘이 아닙니다.
"자, 움직이자. 주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합시다. 벽돌을 만들자, 회반죽을 만들자, 뭔가를 해보자." 당신은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 이름을 날리자." 그리고 당신은 스스로 바빌론을 건설하여 큰 명성을 얻을 수 있습니다 - 느부갓네살이 한 것처럼.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 사역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그것이 요한계시록 17장과 18장에 있는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가라(Go)"를 기다렸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인도 없이 행할 때마다, 그는 곤경에 빠졌음을 주목하십시오. 예를 들어, 우리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갈대아 우르를 떠나 그분이 인도할 곳으로 가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읽습니다. 그러나 11장 31절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을 데리고 우르에서 나온 사람이 데라(아브라함의 아버지)였다는 것을 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무엇을 말씀하셨습니까? "네 친족을 떠나고, 네 아비 집을 떠나라."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75세의 아브라함이 아버지의 손을 잡고 이사하는 것을 봅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이 시작한 방식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방해하는 사람은 먼저 당신의 친척이 될 것입니다 - 부모, 형제, 자매, 아내, 자녀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게 오는 사람은 자기 부모와 형제와 자매와 아내와 자녀를 미워하지 아니하면,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눅 14:2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주님을 따르고 싶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아버지나 당신의 아내는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데라가 아브라함을 데리고, 하란까지 이르러(11:31) 거기 정착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그곳에 정착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이 데라의 생각이었습니다. 하란에는 아마도 양 떼를 위한 좋은 목초지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은 하나님의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아버지와 함께 거기에 정착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실수를 저질렀던 사람이었습니다 - 그가 저지른 첫 번째 실수는 하나님께서 이미 그에게 다른 일을 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의 아버지의 말을 들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그러한 상황을 쉽게 다루실 수 있습니다. 데라를 죽음을 통해 데려가셨습니다(11:32)! 그런 다음 "아브람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대로 나갔습니다." (12:4).
당신이 앞으로 나아가기 전에, 하나님이 그런 과감한 일을 하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면, 그분은 이와 같이 과감한 일을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타협하는 자로 보시면, 그분은 당신을 평생 하란에 머물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놓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움직이는 법을 배우십시오. 하나님을 모르는 친척의 말을 듣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아는 경건한 아버지라면 반드시 그에게서 배우십시오 - 그러나 세상적인 아버지에게는 배우지 마십시오. (나는 여기서 영적 원리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이르렀을 때,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12:5,7).
그리고 하나님은 다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시험하셨고, 아브라함도 시험하셨으며, 당신과 나도 시험하실 것입니다. 이번에는 그 땅에 기근이 들어 시험을 받았습니다(12:10). 당신은 하나님께서 가나안으로 가라고 하셨는데, 가나안에 기근이 들었을 때 어떻게 합니까? 당신의 감각의 증거로 살든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말씀하신 대로 살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그는 눈으로 본 것과 귀로 들은 것으로 판단치 아니하시리라"는 예수님에 대한 아름다운 구절이 있습니다. (사 11:3,4). 그러나 그것은 사람이 사는 방식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가나안에 기근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거나 본다면, 우리의 눈과 귀와 영리한 두뇌가 알려주는 대로, 즉시 결정을 내립니다. 우리는 가나안이 확실히 지금 있을 곳이 아니라고 결정합니다. 우리는 이동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감각에 따라 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상의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한 일입니다: "이에 아브람이 애굽으로 내려가니라"(12:10). 누가 그에게 이집트로 가라고 말했습니까? 하나님이 아닌, 그의 감각입니다!
하나님은 기근의 때에 사람을 지키실 수 없습니까? 확실히 지키실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는 기근의 때에도 메마르지 않을 것이다"(렘 17:5-8).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시하실 때까지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 하신 말씀입니다. 사탄은 예수님께 돌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 광야에는 기근이 있었고 그 주변에는 식료품 가게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빵으로만 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이집트에 빵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곳으로 갔습니다. 그것이 오늘날에도 많은 그리스도인의 일이 이루어지는 방식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 일꾼들은 주님이 가라고 하신 곳에 가지 않습니다. 그들은 좋은 월급을 받을 수 있는 곳, 빵이 풍부한 곳으로 갑니다. 그들은 돈의 기근이 없는 조직에 가입합니다. "이집트"는 살기에 편안한 곳일 수 있습니다 - 기근이 닥쳤을 때. 그런데 문제는 그곳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곳이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가나안"으로 부르셨다면, "이집트"로 가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지 못한다면, 당신도 시험을 받을 때 같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십시오. 그분의 태도는, "네. 빵은 삶에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삶에 더 필요합니다."
사탄이 예수님까지 이렇게 유혹했다면, 여러분도 유혹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 빵이 많은 곳으로 가라고. 전업 기독교 일을 하다가 재정적인 시련을 당하면, 사탄은 다른 단체나 다른 교회에서 돈을 더 받을 수 있다고 하면서 거기로 가라고 할 것입니다. 당신이 사탄의 말을 듣지 않으므로 당신의 삶이 곤두박질 칠 때,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자비를 베푸시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이집트로 내려간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그곳에서 그의 아내가 그의 여동생이라고 거짓말을 해야 했습니다. '이집트'에 가면 많은 문제에 봉착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거짓 보고서를 작성하고, 100% 사실이 아닌 것을 진술하고, 양심을 타협하는 등의 일을 해야 합니다.
사라는 65~70세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집트 왕 파라오가 그녀를 하렘에 넣기를 원했던 것을 보면, 그녀는 여전히 매우 매력적인 여성이었을 것입니다. 슬픈 것은 아브라함이 아내가 하렘으로 끌려가 타락하게 될 것을 보면서도, 자기 생명을 너무나 사랑하여, 바로에게 진실을 말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우리는 우리가 진리를 사랑하는지 아닌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위대한 아브라함이 심각한 실수를 저지른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 그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하나님께 불순종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아내를 잃게 되는 상황에서도, 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은 약하고 이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우리와 똑같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격려가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두 가지 상황에서 아브라함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하란에서 구원하셨고, 하나님은 사라를 바로에게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도, 우리의 마음이 아브라함처럼 진실함을 보신다면, 우리도 건져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격려하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한 아브라함을 꾸짖은 사람은 바로였습니다(12:18). 거짓말을 한 하나님의 예언자를 꾸짖는 이교도 왕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때때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시정해야 하는 타협적인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당신이 '이집트'에 가면 그렇게 됩니다.
이제 나는 더 심각한 것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이집트에서 그 후 4000년 동안 영향을 끼치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집트에 가서 그곳의 부자들이 집에 하녀(여종)를 거느리고 있는 것을 보고, 자기도 하녀를 거느리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갈이라는 여종을 데려왔습니다. 그는 이집트에서 돌아올 때 그녀를 데리고 왔습니다. 이제 사라는 집(tent)에서 모든 일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갈은 그녀를 돕기 위해 그곳에 있었습니다. 나중에, 사라에게 자녀가 없었을 때, 하갈이 그 문제도 돕기 위해 그곳에 있었습니다!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이 나왔고 그의 후손들은 이삭의 후손들과 4000년 동안 갈등을 빚어왔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한 번 듣지 않은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신은 "글쎄요, 저는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좋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단 한 번 듣지 않은 결과입니다. 그 메시지가 진지하게 우리에게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누가 예루살렘을 건축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입니다. 기근이 들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기다리며, "주님,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말해야 합니다. 아마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딘가로 가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아닐 수도 있습니다. 몇 년 후, 하나님은 기근의 때에 야곱에게 애굽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어디론가 가라고 하시면, 가십시오. 돌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렇게 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다른 교회에 가입하라고 말씀하시면, 그렇게 하십시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까지 기다리십시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제 나는 당신에게 아브라함에 대해 좋은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우리 모두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실패로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13:7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종들과 롯의 종들 사이에 분쟁이 있었다는 것을 읽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은 이집트 여행을 통해 막대한 부를 얻었고, 이제 그 부는 문제를 일으킵니다. 부(wealth)는 항상 문제를 일으킵니다. 롯과 그의 아내는 이집트에서 본 것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누구와도 싸우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종들은 싸웠습니다.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 사이에 다툼이 있었다. 그때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이 거기에 살고 있었다." 마지막 문장이 거기에 포함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방인들이 이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기독교계의 상황과도 매우 관련이 있습니다. 그 땅에 거하고 있는 이방인들이 무엇을 보겠습니까? 서로 싸우는 기독교 단체.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모든 자들 가운데, 롯(돈을 사랑하는 세상 사람)을 불러 그에게 "너와 나 사이에 다툼이 없게 하라, 우리는 형제니라" 말할 아브라함과 같은 경건한 사람을 찾을 수 있습니까? 그들은 형제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삼촌이었고, 롯은 그의 조카였습니다. 이 75세의 사람이 35세 조카에게 베푸는 은혜를 보십시오. "우리는 형제입니다!" 경건한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는 75세였지만, 어린 조카를 보며 "우리는 형제입니다. 당신은 나와 동등합니다. 당신에게 우선권을 주겠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십시오." 예루살렘은 그런 사람들에 의해 세워집니다. 기독교계는 그러한 지도자들을 필요로 합니다 - 그리고 그들은 쉽게 발견되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그들의 권위를 주장하고, "나는 75세다. 나는 네 삼촌이다. 내가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이지, 너가 아니다. 너는 단지 나와 함께 왔다." 라고 말하는 많은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롯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롯에게,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 그리고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갈 것이다. 네가 원하는 것을 먼저 가져라." 그리고 탐욕스러운 사람인 롯이, 바벨론의 영으로, 먼저 움켜 잡았습니다. 그는 소돔의 아름다운 들판을 바라보고, 그곳에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와, 거기에 사는 부자들을 보고 "내가 그리로 이사하여 거기서도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말했습니다.
많은 기독교 설교자들이 돈을 사랑하기 때문에, 부유한 나라로 이주하여 부유한 교회에서 설교합니다. 그러나 예외 없이, 그들은 영적으로 상실합니다. 나는 그런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당신을 그곳으로 인도하셨기 때문에 어딘가로 가십니까, 아니면 돈이 당신을 끌어당겨서 가십니까?
아브라함이 이 결정을 내릴 때, 주님은 그와 롯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기 위해, (바벨에서와 같이)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이 자신을 처신하는 경건한 길을 보셨습니다. 롯이 그를 떠난 직후에, 주님은 아브라함에게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14~17절). 하나님은 먼저 그를 그의 아버지로부터(죽음으로) 분리시키셨고, 그런 다음 아브라함을 또 다른 친척(그의 탐욕으로 인해 그에게 방해가 되었을)으로부터 분리시키셨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너는 혼자이고, 이제 내가 원하는 곳으로 너를 데려 갈 수 있고, 내가 원하는 사람이 되도록 할 수 있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똑똑히 보았다." 하나님께서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거래를 감찰하신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그분은 우리의 태도를 주시하십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무언가에 대한 당신의 권리를 포기했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에게, "내가 그것을 유념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여기 서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네가 볼 수 있는 모든 땅은 언젠가는 너의 자녀의 소유가 될 것이다. 나는 그것을 약속한다. 그것은 롯의 후손에게 속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4000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4000년이 지난 오늘 그 땅을 보고, 그곳에 누가 살고 있는지 자문해 보십시오. 롯의 후손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을 지키십니다. 수천 년이 흘러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영원히 주리라(15절)"고 말씀하셨다면, 그대로 될 것입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14장에서 롯이 어떻게 곤경에 빠졌는지 봅니다.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면 항상 문제가 생깁니다. 그는 적들에게 사로잡혔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 합당하다. 그 녀석이 내게서 무언가를 뺏어갔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서 아브라함이 시험을 받은 또 다른 때를 봅니다: 자기를 속인 이 사람이 곤경에 빠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아브라함의 태도는 어떠했겠습니까? 당신을 속인 누군가가 스스로 곤경에 빠졌을 때, 당신이 하나님의 사람인지 아닌지를 매우 빨리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반응은, "내가 가서 롯을 도우게 해주세요. 롯이 나를 속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가 나를 속인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적인 부의 쓰레기들입니다. 그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하늘의 부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롯이 땅의 것을 쫓다가, 지금 곤경에 빠졌기 때문에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내가 가서 그를 돕게 해주세요." 그리고 아브라함은 가서 롯을 구했습니다. 그것이 경건한 사람의 자세입니다. 그런 사람만이 예루살렘을 건축할 수 있습니다.
전투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브라함은 기진맥진했고, 단지 318명의 종과 함께 가서 많은 왕의 많은 군대를 멸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또한 이 전투에서 승리하여 축적한 모든 재산을 모을 위험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만약 당신이 전쟁에서 이긴다면, 적의 금과 은은 모두 당신 것이 되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당신의 종을 보내셨습니다. 그것을 보는 것이 멋지지 않습니까? 그곳 광야에 살고 있던 멜기세덱이라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 하나님과 접촉하고 있었습니다. 14:18에서 그에 대해 읽었습니다.
멜기세덱이 중요한 이유는 시편 110편 4절에, 예수님을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으로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7장에서 그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성경에서 멜기세덱이 나오는 유일한 곳은 14장 18~20절입니다. 세 구절이 전부입니다. 멜기세덱이 나타나, 그의 사역을 다하고 사라집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에게 이르시되,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제사장이니라." 옛 언약의 제사장 직분인 레위의 반차를 따른 제사장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단 세 구절에만 등장하는 이 사람 멜기세덱이 어떻게 그렇게 중요해졌습니까? 그 이유를 아는 것이 우리에게 좋습니다.
우선, 그는 살렘의 왕이었습니다(14:18) - 예루살렘. 우리는 예루살렘이 바벨론의 반대인, 참된 교회의 그림임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교회에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이시고, 우리도 그 반차를 좇아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왕이시며, 우리도 왕이 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왕으로 삼으셨고 우리는 이 땅에서 다스릴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다스리도록 부르심을 받았고 우리의 정욕을 다스리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멜기세덱은 무엇을 했습니까? 그는 먼저 아브라함과 그의 종 318명을 위해 음식을 가져왔습니다. 기독교는 현실적입니다. 사람이 지치면, 그에게 필요한 것은 설교가 아니라 음식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것은 영적이지 못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이 당신이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영적인 일입니다. 엘리야가 기진맥진했을 때,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그에게 음식을 두 번 나누어 주었습니다(왕상 19:6-8).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 어느 날 아침 제자들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고 지쳐 돌아오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해 두셨습니다(요 21:9). 필요한 곳에서, 음식과 물질적인 것으로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 진정한 영성입니다. 그것이 멜기세덱의 제사장 직분의 첫 번째 부분입니다.
계속해서 멜기세덱이 아브람을 축복했다고 말합니다(14:19). 그는 아브람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멜기세덱의 반차에는 참소하는 영이 없습니다. No. 오직 축복입니다. 그리고 그는 아브람을 어떻게 축복했습니까? 그는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아브람에게 천지를 그의 하나님이 소유하셨으므로, 그가 전쟁에서 얻은 적은(little) 금과 은을 가져가지 말 것을 상기시켰습니다. 그는 아브람을 탐욕에 빠지지 않게 구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말했습니다, "네 원수를 네 손에 넘겨주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리하여 그는 아브라함에게 승리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심을 상기시켰고, 따라서 그를 교만에서 구합니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 이 세 가지 문제, 즉 지쳐서 음식이 필요하고 탐욕과 교만의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어떻게 그의 사역은 이 세 가지 필요를 정확히 충족시켰습니까? 멜기세덱의 사역은 과녁 한가운데를 향하는 화살과 같았습니다. 그의 비결은 매일 하나님 말씀을 듣는 습관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기발한 생각(bright ideas)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았습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필요를 정확하게 충족시키는 모든 예언 사역의 비결입니다.
어느 날 멜기세덱이 평소처럼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라. 약 400명분의 많은 양의 음식을 가져가라. 그리고 이 두 문장의 메시지를 가지고 가서, 본 적도 없고 이러저러한 길을 가고 있는 나의 종에게 다 주라." 빌립이 가자(Gaza)로 가는 길에 에디오피아 환관을 만나러 갔던 것처럼, 멜기세덱도 누구를 만날지 알지 못하고, 일어나 갔습니다. 그가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으로 갔을 때, 그는 아브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아브람에게 음식을 주고 그에게 메시지를 전한 다음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어떤 사역입니까? - 사람들을 축복하고, 선물이나 감사를 받기 위해 기다리지 않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멜기세덱의 제사장권은 섬기고 사라지는 제사장권입니다. 그런 제사장들을 통해 예루살렘이 세워집니다. 이들은 오늘날 예루살렘의 진정한 왕들입니다.
하루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그의 장막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들을 셀 수 있나 보라. 너의 후손은 이렇게 많을 것이다"(15:5). 그때 아브라함에게는 자식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하늘에는 수백만 개의 별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었다고 합니다(6절). '믿다'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원어로 'aman'(아만)인데, 여기서 우리는 영어 단어 'Amen'(아멘)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될 줄 나는 믿습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씨가 하늘의 별과 같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단지 "아멘. 그렇게 될 줄 믿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게 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취되었습니다. 오늘날, 아브라함의 자손(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은 수백만 명에 이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무엇인가를 말씀하셨을 때 "아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합니다. "들어야 믿을 수 있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이 있어야 들을 수 있습니다"(롬 10:17).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당신은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멘"이라고 말했습니다.
요즘, 나는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께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 것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을 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메르세데스-벤츠 자동차를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검은 색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추정(presumption)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나서야 생깁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아멘. 그렇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기억하면, 추정과 "거짓 믿음"에서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욕망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서 시작됩니다. 우리 자신의 욕망에서 시작된 것은 바벨론으로 이어질 뿐입니다. 하나님으로 시작하는 것은 예루살렘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번 말씀하시면, 하나님이 말씀을 이루시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우리는 평생 동안 계속해서 그 말씀에 "아멘"해야 합니다.
그러나 16장에서, 우리는 사라가 참을성이 없었다는 것을 읽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여종 하갈을 통해, 아브라함에게 자녀를 갖자고 제의했습니다(16:2). 그때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습니까? 불행히도 그는 사라에게도, "아멘"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로 인해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지금까지 4000년 동안 지속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언가 다른 것을 말씀하셨을 때, 사람의 말에 절대로 "아멘"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육신적인(carnal) 방법을 취하지 않고도, 우리가 가진 어떤 문제도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라의 조언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실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마엘이 태어났습니다(16:15). 여기에서 무언가를 주목하십시오. 이스마엘이 태어났을 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86세였습니다. 다음 구절은 아브라함이 99세 때부터 이어집니다(16:16 & 17:1). 그 13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주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주님은 13년 동안 침묵하신 후, 아브라함이 99세가 되었을 때 다시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마치 주님이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사라의 제안에 '아멘' 하였느냐? 그러면 너는 고통스러운 교훈을 배워야 할 것이다. 네가 다른 누구보다 내 목소리를 귀하게 여기는 법을 배울 때까지, 나는 13년 동안 너에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네, 하나님은 매우 엄격하십니다. 그분은 때때로 매우 어려운 방법으로 우리에게 몇 가지 교훈을 가르칩니다 - 그렇지 않으면 교훈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3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살기에는 긴 시간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때쯤에는 교훈을 얻었고, 훨씬 나중에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다시는 사라와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이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아브람(존귀한 아버지)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열국의 아버지)이라 하리라. 너는 단지 그 이름만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너는 실제로 많은 사람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아브라함은 희망이 없어 보였을 때 다시 한 번 "아멘"이라고 말했고, 1년 안에 아들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마침내 하나님께만 "아멘"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그에게 아들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분의 교훈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이때에 그에게 집안의 모든 남자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옛 언약 하에서 할례는 육체(flesh)를 잘라내는 것이었습니다. 새 언약 아래서, 그것은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함(no confidence in the flesh)"을 상징합니다(빌 3:3).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네 자신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 나를 믿어라."
우리는 18장에서 아브라함의 환대에 대해 조금 읽었습니다. 히브리서 13:2에 "어떤 사람들이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대접하였기 때문에" 나그네를 환대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18장에 언급하고 있습니다. 경건한 사람은 항상 나그네를 대접하고 따뜻하며 선하게 대합니다.
그런 다음 18장과 19장에서, 우리는 롯이 다시 곤경에 빠진 이야기를 읽습니다. 주님은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의 죄를 멸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아브라함은 롯에 대해 염려했습니다. 롯은 아직 교훈을 얻지 못했습니다. 적으로 붙잡힌 후에, 그는 돈을 더 벌기 위해 소돔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롯을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경건한 사람으로서, 그는 롯이 자신의 생명을 구하도록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최초로 기록된 중보기도이며 혼(souls)의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롯은 아브라함의 기도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소금 기둥이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두 사람(남편과 아내)이 한 침상에 있고, 한 사람만 데려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것을 언급하셨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남겨질 것입니다(눅 17:32,34).
롯의 이야기는 슬픈 이야기입니다. 그는 부를 추구하다가, 아내와 사위, 그리고 모든 재산을 잃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하나님께서 처음에 그에게 가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 곳으로 가난하게 가야 했습니다! 그의 딸들이 그와 근친상간을 범하여 두 아들 암몬과 모압을 낳았습니다(19:37,38). 그들에게서 이스라엘과 끊임없이 싸웠던 암몬 족속과 모압 족속이 나왔습니다.
롯이 그의 자녀들을 양육한 방식과는 대조적으로, 우리는 주님께서 아브라함에 대해 아브라함이 "자녀들이 주의 길을 지키도록 명령할 것이다"(18:19)라고 친히 증거하시는 것을 읽습니다. 하나님은 또한 이것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하신 모든 약속을 이루실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을 위해 많은 일을 하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정에서 자녀들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0장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이방 왕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의 동일한 영역에서 두 번째로 실패하는 것을 봅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아내가 다른 남자와 동침하는 것을 기꺼이 허용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얼마나 나약한 사람이었는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선을 행하시고, 사라가 아비멜렉에 의해 건드려지지 않게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 왕을 "그 마음의 진실함(integrity)"으로 칭찬하시는 것을 보는 것은 흥미롭습니다(20:6). 하나님께서는 그가 사라와 간음을 범하지 못하게 막으신 것이 그의 마음의 온전함(integrity)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40세기 전에 이방 왕을 도우셨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오늘날 마음이 온전한 젊은이를 도우실 것입니다!
우리는 20:17-21:2에서 놀라운 것을 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그의 아내 사라가 임신하지 못하던 시기에, 아비멜렉의 집안에 있는 많은 임신하지 못하는 여자들을 위해, 여기에서 기도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못한 것을 다른 사람들도 얻을 수 있도록 기도하려면, 훨씬 더 큰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그렇게 기도하자, 그 모든 여인들이 아이를 낳았을 뿐 아니라, 아이를 낳지 못하던 사라도 임신하여 이삭을 낳았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물을 주는 자는 (하나님에게) 자기도 물을 받을 것이요"(잠 11:25). 욥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그들과 욥에게도 복을 주셨습니다(욥 42:10).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하신 것을 얻기까지 25년을 참을성 있게 기다렸습니다. 이때 아비멜렉 왕이 이삭의 출생 소식을 듣고 아브라함에게 와서 "하나님이 분명히 너와 함께 계시도다"(21:22)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충성할 때, 주님은 이방인들도 그분이 우리와 함께하심을 알게 하실 것입니다.
22장에서, 우리는 성경에서 처음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에 대해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내가 이제야 알았노라"고 증언하신 것을 읽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였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약 125세였고, 하나님은 그를 다시 시험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아브라함이 처음처럼, 여전히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는지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네 아들 이삭을 바쳐라. 나는 너에게 내일 아침에 그것을 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No. 모리아 산에서 해라 - 3일 거리에 있는. 3일 동안 그것에 대해 생각해보아라." 하나님은 결코 우리에게 어떤 일도 급하게 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아브라함은 3일 동안 걸으며, 비용을 계산하고, 이삭을 제단에 놓고, 말했습니다, "주님, 여기 있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보다 당신을 더 사랑합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헌신과 이삭의 헌신도 보여주었습니다. 25세의 청년 이삭은, 125세의 아브라함보다 훨씬 강했습니다. 이삭이 원하지 않았다면, 아브라함은 결코 이삭을 제단에 묶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어떻게 그의 아들에게 그에게 순종하라고 가르쳤는지를 보여줍니다. "이제 너를 하나님께 드리겠다, 여기 누워라,"라고 말할지라도 그의 자녀들이 누우며 "알았어요, 아빠, 계속하세요." 라고 말하는 식으로 자녀들을 양육할 수 있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당신은 그런 아버지는 참으로 경건한 사람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것을 하나님께 대한 "예배(worship)"의 행위라고 불렀습니다(22:5). 이것은 성경에서 "예배"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 이것이 진정한 예배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오늘날에도 그러한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향한 아브라함의 헌신을 보시고,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내가 이제야 알았노라"(22:12)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였다는 것이 성경에 처음으로 기록된 것은, 사람이 "하나님이여,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것보다 당신을 더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며,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했을 때입니다. 아브라함은 가족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했기 때문에, 50년 전에 우르를 떠났습니다. 50년이 지난 후에도, 하나님을 향한 그의 사랑은 조금도 식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을 통해서 예루살렘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본이지 않습니까! 당신이 평생 동안 이 길을 갈 수 있다면, 복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곳을 "여호와 이레"라고 이름지었습니다 - 여호와께서 준비하실 것입니다(22:14). 그것은 우리가 인생에서 어떤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생각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그분의 약속은 "하나님이 너희 모든 필요를 채우시리라"(빌 4:19)이기 때문입니다.
이곳 모리아산에서, 아브라함은 2000년 후 언젠가 당신의 아들을 제물로 바치실 하나님의 마음을 어렴풋이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 56절에서 이것을 언급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나의 때 보리라고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하나님은 여기서 아브라함의 태도를 매우 기뻐하셨고, 1000년 후에 바로 이 자리에 성전을 지으라고 명하셨습니다(대하 3:1).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집은 오늘날에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배하는 자들에 의해 건축됩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삶을 마치기 전에, 우리는 24장에서 그의 아들에 대한 그의 염려를 읽습니다. 그는 종을 보내어, 아들의 신부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성경에는 많은 결혼이 언급되어 있지만, 하나님이 정하신 것으로 분명히 보이는 결혼은 두 가지뿐입니다. 하나는 아담의 결혼이었습니다. 하와는 확실히 하나님의 선택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이삭의 결혼이었습니다. 리브가도 하나님의 선택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나에게 "당신은 중매 결혼을 믿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네, 저는 하나님이 주선한 결혼을 믿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은 부모를 통해(이삭의 경우처럼) 또는 부모와 별도로(아담의 경우처럼) 주선하실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선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경건한 아버지라면, 자녀의 결혼 생활에 관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젊은 청년으로서 경건한 아버지를 가질 만큼 운이 좋다면, 그의 충고를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 경건한 아버지가 당신이 결혼하고 싶은 사람에게 "No"라고 말한다면, 기다리십시오. 하나님께서 거기서 당신을 테스트 중일 수 있습니다. 당신의 아버지의 "No"는 잠시 동안만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경건한 아버지의 충고를 기꺼이 존중하는 것을 보시고, 그분이 택하신 짝을 당신에게 주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의 아내를 찾기 위해 그의 종을 보내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를 선택하기 위해 그의 성령을 땅에 보내신 것을 묘사한 것입니다. 이것이 그 복음이 전파되는, 오늘날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그 장을 읽으면, 몇 가지 아름다운 비유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인이 적용한 테스트 중 하나는 소녀가 그의 낙타에게 기꺼이 물을 줄 것인지 알아보는 것이었습니다. 낙타가 물을 많이 마신다는 것은 알고 계시죠? 아브라함의 종이 알고 싶었던 것은, 그 소녀가 은혜롭고 열심히 일하는 소녀인지였습니다. 그리고 리브가는 그런 소녀였습니다. 그녀는 또한 겸손한 소녀였습니다. 24장 16절에서, 그녀가 우물가에 있었던 아브라함의 종처럼 낯선 사람들을 쳐다보는 데 관심이 없었음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물동이에 물을 채우고 집으로 가려고 할 때, 아브라함의 종이 요구했습니다. 그것이 당신에게 필요한 아내의 유형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께서 지상에서도 찾으시는 그리스도의 신부의 유형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종을 올바른 사람인 리브가에게 주권적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 종은 리브가를 데리고 메소포타미아에서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700km(아마도 한 달이 걸렸을 것임)의 길고 위험한 여행을 떠났습니다 - 이 여행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이 세상에서 우리의 여정을 보여줍니다.
그 긴 여행 동안, 종이 리브가에게 무엇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그것이 이삭에 관한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의 긴 여정에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무엇에 대해 말씀하기를 원하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에 대하여 입니다. 교리나 천국에 관한 것이 아니라, 주 예수님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리브가 자신도 이삭에 대해 듣고 싶어했다고 확신합니다. 나는 (리브가가 이삭을 본 것처럼) 그분을 직접 뵙는 날까지, 이 긴 여정에서 성령님으로부터, 나의 놀라운 구세주에 대해 점점 더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리브가처럼, 나도 주님의 장막에 들어가 그분의 아내가 될 것입니다. 당신은 그러한 갈망을 가지고 있나요? 그것이 바로 24장의 내용입니다.
이삭의 삶
그러나 리브가에게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20년 이상 동안 불임이었습니다(참조, 25:20과 25:26).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친히 택하신 아내를 얻었을 때,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까? 네! 그것은 당신의 영적 교육의 일부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어딘가로 인도하실 때에도, 당신은 그곳에서 문제를 만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당신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No.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구해야 한다는 의미일 뿐입니다. 이삭이 기도하자,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리브가가 임신하였습니다(25:21).
리브가에게 쌍둥이가 태어났습니다. 야곱은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나왔습니다(25:26). 야곱의 움켜쥐는 본성은 태, 바로 그것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출구로 먼저 나오도록 돌진했지만 놓쳤습니다. 에서가 먼저 나오므로, 그는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야곱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의 머리로 택하신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땅의 것을 취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약한 사람을 그분의 종으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들은 그를 '움켜잡는 자'라는 뜻의 '야곱'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와 같은 타락한 죄인들에게 얼마나 큰 격려가 됩니까? 우리 주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이삭은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삭의 집은 편애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삭은 에서의 편이었고 리브가는 야곱의 편이었습니다. 그러한 태도는 집을 나누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에서와 야곱은 부모의 편애 때문에 평생 원수가 되었습니다. 한 부모는 한 아들을 편애했고 다른 부모는 다른 아들을 편애했습니다. 그래서 두 소년은 서로를 질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의심할 바 없이 이삭과 리브가도 갈라놓았습니다. 서로를 위해 하나님이 택하신 부부로 시작하여, 서로 깊은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얼마나 아름다웠습니까! 그러나 자녀들에 대한 그들의 편애는 그들의 결혼 생활을 완전히 망쳐 놓았습니다. 가장 슬픈 부분은 이삭의 경우, 이러한 편애의 이유가 좋은 음식에 대한 사랑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에서가 정기적으로 집으로 가져오는 사슴 고기를 좋아했습니다. 야곱은 사냥을 잘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삭은 그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문제를 일으킨) 이삭의 야곱에 대한 축복도 그의 사슴고기를 사랑하는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삭과 같은 대식가는 분명히 가정에서, 아브라함처럼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없습니다. 경건한 아버지도 때때로 매우 어리석게 행동하는 아들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26장 7절에서 이삭의 또 다른 어리석은 행동에 대해 읽습니다 - 그러나 여기에서 그는 그의 아버지의 거짓된 발자취를 따랐습니다. 이삭이 그랄에 있을 때, 그곳 사람들이 그의 아름다운 아내, 리브가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리브가가 그의 누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그의 어머니 사라에 대해 두 차례에 걸쳐 한 거짓말이었습니다(12장과 20장). 그러나 이삭은 아버지의 실수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부모님이 우리보다 먼저 저지른 것과 같은 실수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실수로부터 배우므로, 실수를 반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삭을 칭찬할 것은, 그는 가족 밖의 사람들을 대할 때 아버지의 좋은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삭이 아버지가 전에 판 우물을 다시 열었던 때에 대해 읽었습니다(26:18). 그것은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하여 막아 놓았던 우물입니다. 그 우물들은 아브라함이 팠기 때문에, 그의 소유였습니다. 그래서 우물들은 이제 이삭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랄의 목자들이 이삭의 종들과 다투어 이르되, "이 물은 우리 것이로다!" 하니 그래서 이삭의 종들이 가서 이삭에게 물었고, 이삭은 "그것을 그들에게 주라"고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롯에게 롯이 원하는 땅을 준 것처럼, 이삭도 이곳에서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릅니다. 그런 다음 이삭이 다른 우물을 팠고(21절) 그랄 사람들이 그 우물을 놓고도 다투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삭은 "그것도 그들에게 주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곳을 떠나 다른 우물을 팠습니다. 그랄 사람들은 이제 부끄러워 이 우물을 놓고 싸우지 않았습니다. 이삭이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기를, "마침내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한 공간을 마련해 주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이다." 하였습니다.
"르호봇,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한 공간을 마련해 주셨다"는 구절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삭은 사람들을 밀어냄으로써 자신을 위한 공간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No. 그는 자신의 권리를 포기했고, 주님은 그를 위해 공간을 만들어 주셨고, 그는 번성하였습니다. 이것이 예루살렘을 건설하는 방법입니다.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이 흐름은 아브라함으로 시작하여, 이삭으로 계속되었고 마침내 수십 년 후에 이삭의 손자 요셉에게로 흘러갔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켜야 할 원칙입니다: "나는 세상의 것을 얻기 위해 싸우거나 움켜쥐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과, 세상적 그리스도인들이 원하는 것을 갖도록 내버려 둡시다. 남은 건 내가 취하겠습니다. 그 남은 것 중에서,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공간을 만들어 주시리니, 나는 그 땅에서 번성할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와 그 부를 움켜쥔 자들은 황폐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예루살렘)의 길은 우리 주 예수께서 하신 것처럼, 우리의 이 땅의 권리를 포기하는 길입니다. 그분의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왕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바벨론의 방식은 움켜잡는 방식입니다.
야곱은 움켜잡는 자로 삶을 시작했고, 그가 이스라엘이 되어 "예루살렘 시내"에 있기 전에 회심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바빌론 시내"에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들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적용되는 창세기의 중요한 원리들 중 일부입니다. 기독교계에서 지위와 명예를 추구하는 신자들의 수를 보십시오. 기독교 지도자(또는 장로)가 되기 위한 첫 번째 자격은 자신이 지도자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철저히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시고 우리를 지도자로 삼으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땅에서 번성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한 공간을 만들려고 한다면, 우리는 결코 열매를 맺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확실합니다.
26장 28절을 보면, 이삭의 원수였던 이 사람이 결국 이삭에게 와서,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하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노라"고 말하고, 이삭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그의 원수와 화목합니다. 우리의 적이 배고프다면 우리는 그를 먹여야 합니다. 그것이 예루살렘 시내의 길입니다.
26:34,35에서, 우리는 이렇게 읽습니다: "에서는 40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과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삭과 리브가에게 근심을 안겨 주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삭이 그의 아들을 위한 파트너를 찾는 데, 아브라함만큼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에서가 마음에 드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그는 편애와 편견으로 에서를 망쳤습니다. 이삭은 에서가 선택한 아내보다 에서가 가져온 음식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것들은 오늘날 우리를 위한, 성경의 경고 중 일부입니다.
생애 말년에, 이삭의 시력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에 대해 심각한 것은 없습니다.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눈이 약해집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삭의 영적 시력도 어둡고 흐릿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늙어감에 따라, 우리의 겉사람은 부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속 사람은 더 강해져야 하고, 우리의 영적인 시력은 날카로워져야 합니다. 그러나 이삭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두 자녀가 리브가의 태에 있을 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형에게 축복을 주기로 결심합니다. 거기에서 그의 어리석음을 볼 수 있습니까? 그는 27:2,3에서 에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곧 죽을 것이다. 가서 너의 활과 화살통을 챙겨서, 나를 위해 사슴 고기를 좀 가져오너라." 한쪽 발이 무덤에 있는 이 노인은 여전히 음식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가 영적 시력을 잃은 것도 당연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 27절에서, "내가 내 몸을 복종하지 아니하면, 남에게 전파할지라도 스스로는 도리어 버림을 받을 것이요"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때때로 음식을 금식하라고 권고하는 이유입니다 -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식탐하는 욕망과 성적 정욕을 통제하여, 배가 아닌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습니다. 음식에 대한 사랑이 이삭을 영적으로 눈멀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설교자들을 영적으로 눈멀게 만든 것도 좋은 음식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삭은 이를 테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에서야, 가서 나에게 이 사슴 고기를 가져오너라. 그것이 맛있으면, 내가 너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주겠다. 나는 하나님께서 수년 전에 너의 동생이 장자의 명분을 받을 것이라고 나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이 수년 전에 말씀하신 것에 관심이 없다. 너는 나에게 좋은 아들이었고, 항상 좋은 사슴 고기를 가져 왔다. 그러니 평생 나에게 좋은 음식을 가져다 준 적이 없는 네 동생에게 축복을 주는 대신에, 너에게 축복을 준다면 하나님께서 이해하실 것이라고 확신한다!!" 여기서 이삭의 어리석음의 깊이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은 이삭의 계획이 실패하도록 보장하셨습니다.
리브가는 야곱의 편이었습니다. 리브가는 동생이 축복을 받아야 한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이삭이 에서에게 축복을 주리라는 말을 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분의 약속을 이루실 수 있도록 도와줄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녀는 야곱에게, "에서가 사슴 고기를 잡으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그동안 내가 너희 아빠가 좋아하는 맛있는 카레를 만들어 줄게. 너는 동물 가죽을 입고 털이 많은 에서인 척하고 카레를 아버지에게 가져다 드려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기 위해 리브가의 모든 교활한 책략이 필요하셨습니까? 리브가는 하갈과 관련하여 아브라함이 저지른 동일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느꼈습니다: "하나님은 도움이 필요하십니다! 약속된 씨는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나는 하갈에게 들어가 아들을 낳아야 합니다." 여기서 리브가는 비슷한 말을 합니다: 에서가 축복을 받을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지금 약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내가, 야곱이 그것을 잡도록 도와야 합니다." 제가 당신에게, 하나님께서 그분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확신시켜 드립니다. 그분은 분명히 우리가 그분의 일을 진척시키기 위해, 속이고 거짓말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가 좋다면, 거기에 도달하는 방법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목표는 영적인 것이어야 하고, 목표에 이르는 길 또한 영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얻기를 원하신다면, 그가 그것을 얻는 방법 역시 영적이어야 합니다. 같은 방식으로: 복음이 모든 피조물에게 전파되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우리가 하는 방식도 영적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수단을 가리지 않고 전도하거나 교회를 세워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 경건한 목표에 도달하는 경건한 방법이어야 합니다. 경건한 방법을 선택한 결과로 다른 사람들이 불경건한 방법으로 할 수 있는 것만큼 우리가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영적인 원칙을 타협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무와 풀과 짚으로 만든 큰 구조물을 짓다가 마지막 날에 불타 버리는 것보다, 금과 은과 보석으로 만든 작고 적은 구조물을 세우는 데 평생을 바치는 것이 더 낫습니다!
당신은 어떤가요? 당신은 경건한 목표를 향해 경건한 방식으로 건물을 짓고 있습니까?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멸시했습니다. 27장 34절에, 그가 축복을 놓쳤다는 말을 듣고, "심히 크고 쓰라린 울음으로 부르짖었다"라고 말합니다. 이제야 그는 여러 해 전에 장자권을 팔기로 한 결정을 후회했습니다. 그는 그때 야곱에게 죽을 얻어먹고 나중에 장자권을 얻음으로써 그의 단순한 마음을 가진 동생 야곱을 능가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침내 에서를 능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을 그들 스스로의 간사함에 빠지게 하는 방법"(고전 3:19)을 아십니다. 그분은 야곱이 장자권을 갖도록 보장하셨습니다. 따라서 모든 영리한 사기꾼은 조심하십시오. 당신은 지금 심는 대로 하나님으로부터 거두게 될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6,17절은 말합니다: " 음행하는(immoral) 자나, 한 끼 식사를 위하여 자기의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경건하지 않은 사람이 되지 말지니, 너희가 알거니와 그 후에 그가 복을 상속받기를 구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당신은 젊을 때, 인생에서 선택을 합니다. 당신은 젊을 때, 특히 도덕적(moral) 문제와 관련하여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그래서 부도덕한 (immoral)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유입니다. 당신은 장자권, 영원한 축복, 영적인 축복을 원하십니까, 아니면 육신의 필요를 충족시켜 줄 일시적인 축복, 당장 먹을 수 있는 죽 한 그릇을 원하십니까? 그것은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이 직면하고 있는 선택입니다 - 영원하고 영적이며 미래에 있는 것과 - 그리고 -일시적이고 물질적(육체적)이며 즉시 사용할 수 있는 것 사이의 선택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 갈림길에 자주 섭니다. 모세는 거기에 왔을 때, 죄의 쾌락과 애굽의 부와 바로의 손자가 되는 영광을 거절했습니다(히 11:24-26).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실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중 많은 이들이 바로 지금 그 갈림길에 있습니다. 당신은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제가 이런 것들을 조금만 즐기게 두세요. 나는 결국에는 회개하고 영적인 축복도 받게 될 것입니다." 나는 당신이 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겠습니다. 에서처럼, 당신도 심은 대로 거두게 될 것 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라"(히 12:15)는 말씀에 따라 지금 올바른 선택을 하세요. 우리 중 누구도,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져서 에서와 같은 결말을 맺지 않기를 바랍니다.
야곱의 삶
28장에서 우리는 야곱이 집을 떠나는 이야기를 읽습니다. 그는 에서의 분노를 피하기 위해, 리브가에 의해 그녀의 오빠 라반의 집으로 보내졌습니다. 야곱은 아직 결혼하지 않았으며, 이때 아마 70세쯤 되었을 것입니다.
28:11에, "해가 졌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지리적인 사실을 언급하는 것이지만, 영적으로 말해서 정말로 야곱의 삶에도 해가 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세상을 위해 살았고, 움켜잡았고 속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로 야곱을 만나셨고, 그의 삶에 큰 목적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 (13,14절).
이것을 "아브라함의 축복"(갈 3:14)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그분은 그에게 "내가 네게 복을 주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니라(12:2,3)"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여기에서 야곱에게 그것을 반복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4절에, 이 축복은 우리가 성령 충만할 때, 우리의 것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령 충만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분명히 우리가 방언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선물 중 하나일 뿐입니다. 불행하게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것을 너무 많이 해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된 목적은 아닙니다. 주된 목적은 육체적인 치유도 아닙니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에서 고침을 받지 못했습니다. 성령 충만의 주된 목적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셔서, 우리가 지상에서 만나는 모든 족속에게 축복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갈 3:14).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를 충만케 하실 때,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축복이 될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축복받지 않고는 아무도 우리를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향수를 많이 뿌린 숙녀들과 같습니다. 당신이 그들로부터 몇 피트 떨어져 있어도, 당신은 그들의 향수 냄새를 맡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사람들은 그들의 향수 냄새를 맡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가 한 가정에 들어간다면, 5분 동안 방문하든 5일 동안 방문하든, 그 가정을 축복할 것입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의 축복"입니다 - 모든 곳에서 목마른 사람들에게 축복으로 흐르는 생수의 강입니다.
그날 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너를 향한 나의 부름이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를 충만케 하시면, 그분은 친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15절). 그분은 야곱에게,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지키며, 너를 돌아오게 하고 내가 네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이 잠에서 깨어 말하였습니다. "이곳은 얼마나 멋진 곳인가! 이곳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집, 벧엘, 하늘의 문이다!"
그러나 이제 그가 하나님의 이 환상적인 약속에 어떻게 반응했는지 보십시오. 그는 효과적으로 말합니다(20절), "주님, 나는 그런 모든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이 여행에서 저를 잘 돌봐주시고, 먹을 것과 입을 옷을 충분히 주시고, 도중에 일어나는 사고와 강도로부터 저를 보호해 주십시오. 나를 안전하게 아버지의 집으로 데려다 주십시오. 그게 내가 원하는 전부입니다. 나는 땅의 모든 족속에게 축복이 되는 데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구한 이 물질적인 축복을 저에게 주시면, 제 수입의 십일조를 당신께 바치고, 당신을 위해 집을 짓겠습니다. 주님, 제 사업을 축복해 주십시오. 제 이익의 10%를 당신께 드리겠다고 약속합니다."
불행하게도 그것은 오늘날에도 하나님을 향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반응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아브라함의 축복을 받아, 어디로 가든지 축복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는 어떠한가요? 그들은 "주님, 월급 많이 받고 편안한 직장을 주옵소서. 내 병을 고치소서. 우리 가족을 위해 좋은 집을 지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내 아이들을 부유하고 잘생긴 파트너와 결혼시켜주세요. 그리고 모든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십시오. 그리고 우리는 당신에게 우리의 모든 수입의 일정 비율을 드릴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입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하늘에 있는 모든 신령한 복"으로 그들을 부르셨을 때, 땅의 복에 안주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가장 좋은 것을 놓쳤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영적이고 영원한 축복을 상속하도록 부르셨을 때, 물질적이고 일시적인 것에 안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영원히 후회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정확히 야곱과 같습니다. 그러한 신자들에게도 실제로 해가 졌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야곱이 본 사다리를 자기자신의 묘사로 언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사닥다리이십니다(요 1:51). 그리고 우리는 그 사다리의 발이, 우리 머리 위로 멀리 매달려 있는 대신에, 바로 내려와 땅에 닿았다는 사실에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시기 위하여, "모든 것에서 우리와 같게 되셨습니다"(히 2:17).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그를 축복하기 위해 그를 부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떻게 그렇게 하십니까? 그분은 야곱이 자신보다 교활한 사람인 라반을 상대하도록 허용하십니다. 아버지와 형을 속였던 야곱이 이제 자기를 속이는 자를 발견합니다.
라반이 어떻게 야곱을 속여 라헬 대신 레아와 결혼하게 했는지 보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그 당시 그들은 결혼식 전에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래서 교활한 라반은, 사람들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이지 않도록 "밤에 결혼식을 올리자"고 말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잔치에서 야곱을 완전히 취하게 하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야곱이 알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런 다음 라반은, 두꺼운 베일을 쓴 한 소녀의 손에 야곱의 손을 넣고, 야곱에게 그녀와 결혼할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라헬이라고 생각한 야곱은 "네"라고 말하고 결혼했습니다! 밤이 깊어 그는 천막에서 옆에 누운 신부의 얼굴을 볼 수 없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그는 그것이 레아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야곱은 그의 적수인 라반을 만났고 마침내 속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아내를 위해 7년 동안 일했습니다!
이제 그는 라반에게, "나는 라헬을 원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라반은 "미안하다. 이 근처에서는, 우리는 먼저 언니를 결혼시켜야 한단다. 네가 라헬을 원한다면, 너는 나를 위해 7년을 더 일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야곱은 "OK"라고 말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야곱의 인간적인 힘을 꺾기 시작하셨습니다.
제가 어린 신자였을 때, 제 마음을 축복해준 아름다운 구절이 있습니다. 29장 20절에,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을 일하되, 그녀를 사랑하므로,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이 한 일이 사무직이 아니었습니다. 양을 돌보며, 들판에서 힘든 일을 했습니다. 낮에는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일하고, 밤에는 추위 속에서 밖에서 자야 했습니다. 그는 심지어 건강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라헬에 대한 야곱의 사랑이 너무나 뜨겁고 강했기 때문에 - 7년이 그에게는 며칠 같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야곱이 한 여자를 위해 그렇게 섬길 수 있었다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주님을 내가 어떻게 섬겨야 하는가?" 주님을 섬긴 지 56년이 지난 오늘, 저는 이 세월이 제게 며칠 같았음을 간증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돈이나 명예나 편안함나 명성을 구하지 않고, 사랑으로 주님을 섬길 때, 주님을 섬기는 기쁨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주님을 위한 수고가 무겁습니까? 그것은 마음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30장. 마침내 야곱은 그 대가로 라반을 속이고, 비뚤어진 방법으로 그의 양을 훔치기 시작합니다. 그는 충분한 부를 축적한 후, 어느 날 몰래 떠날 계획을 세웁니다(31장). 그런 다음 그는 에서가 자기를 만나러 온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는 에서가 자신을 죽이러 올 것이라고 상상하기 때문에,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32장에서 놀라운 것을 봅니다. 야곱은 20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똑같은 나이 많은 움켜잡는 자이고 모사꾼이었지만, 하나님의 천사는 야곱이 가는 길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그런 이기적인 사람에게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이 땅의 회사가 한 사람이 20년 동안 자기들을 속이고 명령을 무시하는 것을 본 후에 그를 고용하겠습니까? 지상의 모든 회사는 그러한 사람을 해고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의 수많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나 저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지금도 그분의 메신저를 통해 오셔서 우리를 만나고 계십니다. 그것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천사'라는 단어는 '전달자'로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길에 전달자를 보내시는 것은, 당신에 대한 그분의 사랑의 표시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포기하실 때, 그것의 한 가지 특징은 당신에게 메시지를 전할 전달자를 더 이상 보내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특히 우리가 어떤 위험이나 악에 직면하게 될 때, 그분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 그분의 전달자를 우리에게 보내십니다.
야곱은 에서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어떻게 하면 피할 수 있을지 궁리했습니다. 그는 그가 좋아하지 않는 세 아내를 맨 앞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라헬과 자신을 맨 뒤에 두었습니다 - 그래서 다른 모든 사람들이 죽더라도, 그와 라헬은 달아나려 했습니다! 야곱은 여전히 예전과 똑같은 나이 많은 항상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이기적인 사람을 뽑아 '이스라엘'로 변화시키신 것을 보면 우리에게 큰 격려가 됩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하나님이 어떻게 야곱을 만나셨고, 그와 씨름하셨고, 그의 고관절을 탈골시키는지 읽었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그분이 원하시는 곳으로 데려가시기 위해 과감한 일을 하십니다. 그분은 그를 깨뜨리며, "이제부터 너는 하나님의 왕자(이스라엘)가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32:28). 언제 하나님께서 그를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실 수 있었습니까? 60~70년 동안 그와 씨름하시다가, 마침내 그의 엉덩이를 탈골시키고, 그를 철저히 부서뜨린 후에야 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나를 이제 가게 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야곱은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돈을 움켜쥐고, 장자의 명분을 움켜쥐고, 재산을 움켜쥐고, 여자를 움켜쥐고, 양을 움켜쥐며 평생을 보내던 이 남자는, 이제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붙잡습니다. 그는 사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돈과 여자와 재산과 세상의 많은 것들을 위해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당신만을 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도 그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면 그분은 야곱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는 더 이상 움켜잡는 자나 속이는 자(야곱)로 불리지 않을 것이다. 네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으니, 하나님의 왕자(이스라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야곱은 언제 이기는 자가 되었습니까? 그의 엉덩이가 부러졌을 때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성경의 처음부터 바로 볼 수 있는 위대한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기 전에 우리를 깨뜨려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왕자가 된 야곱처럼, 그의 지팡이에 기대는 상한 자이지, 위대하고 능력 있는 'Mr. 유니버스'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당신을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기 전에, 먼저 여러분을 깨뜨려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32장 31절에서 이 놀라운 말씀을 읽습니다, "그때에 해가 떴습니다." 다시 한 번 지리적 사실이지만 - 야곱의 삶에서도 영적으로 사실입니다. 20년 전에 해가 그에게 졌습니다. 이제 해가 떴습니다.
34장. 야곱에게는 12명의 아들과 딸 디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디나는 어느 날 부도덕한 남자들로 가득 찬 지역을 혼자 산책하기로 결정했을 때 야곱을 많은 문제에 빠뜨렸습니다. 이 장에는 오늘날에도 그러한 부도덕한 남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모든 어린 소녀들에게 경고가 있습니다. 모든 어린 소녀들은 이 글을 읽고 디나가 자신과 아버지에게 초래한 문제를 보아야 합니다. 그녀는 부도덕한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을 돌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그녀를 붙잡아 강간했습니다. 그녀의 오빠들은 나가서 그의 도시에 있는 모든 남자들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 지역에서 야곱의 이름이 악취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 모든 것은 한 소녀가 부도덕한 지역에서 혼자 방황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들을 귀 있는 여자는 들으십시오.
35장. 주님은 이제 야곱에게 베델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야곱이 이 모든 문제에 휘말린 것도 그의 잘못이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브니엘에서 그를 만나신 후, 곧바로 베델로 돌아갔다면, 이 슬프고 폭력적인 막간극(34장)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삶
이제 요셉의 삶을 살펴봅시다. 그는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열한 번째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야곱이 그의 아버지(이삭)가 그 전에 저지른 것과 같은 실수를 범하는 것을 봅니다. 그 역시 요셉을 편애합니다! 37:3: "이스라엘(야곱)은 요셉이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모든 아들보다 그를 더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다양한 색깔의 튜닉을 만들어주었습니다." 당신의 자녀를 파멸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 중 한 명에게 편파적이 되는 것과 다른 이들에게 주지 않는 특별한 선물을 그들 중 한 명에게 주는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 아버지의 집에서 편애가 행한 일을 이미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집에서 그것을 반복합니다. 그 결과 열 명의 큰아들들은 요셉을 시기하여 거의 죽일 뻔했습니다. 편애는 매우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부모가 다른 자녀들 앞에서 한 자녀를 칭찬하면, 그 결과는 어떠합니까? 다른 아이들은 그 좋아하는 아이의 적이 됩니다 - 때로는, 평생 동안 말입니다. 누구의 잘못입니까? 어리석은 부모의 잘못입니다. 성경에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한 경고가 있습니다.
37:18. 우리는 요셉의 형들이 어떻게 그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는지 읽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형제 중 한 사람이 그 계획을 중단시키고, 그 당시 지나가고 있던 노예 상인들에게 요셉을 팔아넘기는 것으로 바꾸게 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봅니다. 그 당시 노예 상인들을 그곳에 보내신 분은 누구였습니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 노예 상인들이 요셉이 죽임을 당할 때 정확히 그곳에 도착할 수 있도록 여행 시간을 정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노예 상인들은 애굽으로 가고 있었는데, 그곳은 바로 하나님께서 요셉이 가기를 원하시는 곳이었습니다!! 요셉의 삶에서 거듭거듭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보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삶에 대한 계획과 목적 또한 가지고 계시며, 아무도 그것을 좌절시킬 수 없습니다. 당신의 질투심 많은 형제도, 당신의 어리석은 아버지도, 그 누구도 아닙니다. 그것이 우리가 여기서 보는 것입니다.
요셉이 17살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이미 꿈에서 요셉에게 그의 삶의 목적이 있음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젊은이가 하나님께 매우 민감해서, 대부분의 10대 청소년들이 더러운 꿈을 꾸는 나이에 하나님으로부터 꿈을 갖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젊은이 여러분, 나이 많은 형제들이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섬길 기회를 주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진심으로 하나님께 복종한다면, 아무도 당신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망칠 수 없습니다. 내가 젊었을 때, 나의 설교-은사를 시기하는 나이 많은 형제들이,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을 나에게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누구의 허락도 필요 없는 거리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교회 모임에서,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스스로 겸손하고 잠잠하고, 장로들을 결코 비방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깨뜨리신 것처럼 저를 깨뜨리신 세월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장로들 중 어느 누구도 내 인생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할 수 없었습니다.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문을 여셨고 제 인생에 대한 그분의 계획이 이루어졌습니다. 나는 당신을 격려하기 위해 그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불평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망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당신 자신입니다. 그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요셉의 형들의 시기심을 이용하여 요셉을 애굽에 팔게 하심으로써, 요셉의 삶에 대한 그분의 계획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대적하여 계획하는 악을, 우리의 선과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작동하게 하십니다. 할렐루야!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행하려고 하는 악으로부터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셨다면, 그 자체로 엄청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좋은 일을 하십니다! 그분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행하는 바로 그 악으로 우리 삶을 위한 그분의 계획을 성취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사탄에게 형세를 역전시키는 것이 훨씬 낫지 않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시기하지 않고 잘 대해 주었다면, 요셉은 결코 애굽에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셉은 어떻게 애굽에 갔습니까? 1단계: 그의 형제들은 그를 시기했습니다. 2단계: 형들은 그를 노예 상인들에게 팔았습니다. 3단계: 노예 상인들은 그를 이집트로 데려가 그곳에서 팔았습니다. 그리하여 요셉을 이집트로 데려가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었습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해를 입히기 위해 행하는 악한 일 중 일부는 궁극적으로 당신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할 뿐입니다 - 당신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롬 8:28). 당신은 몇 가지 시련을 겪을 수 있습니다. 요셉도 종살이를 하며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했습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말할 것입니다, "요셉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기도 합니다. 내가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면, 많은 사람이 나를 시기할 수 있고,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악을 계획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내 삶에서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는 것을 방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적을 행하시는 우리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38장은 요셉의 이야기에서 약간 벗어난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유다가 그의 며느리 다말과 간음하는 것과, 다말이 쌍둥이를 낳는 것을 읽습니다(38:29,30).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그 쌍둥이 중 하나인 베레스를 통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근친상간과 간음의 후손이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 족보를 의도적으로 선택하셨습니다(마 1:1-3). 왜 그런 죄악된 혈통을 선택하셨습니까? 우리 중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근친상간 가계를 통과하기로 선택했을까요? 주님은 죄인, 심지어 근친상간자까지도 구원하려 부르러 오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하늘에서 그것을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가계에서 가장 악한 범죄자들과 동일시하셨습니다.
39장은 매력적이고 능력 있는 여인에게 강한 유혹을 받았을 때, 하나님께 충실했던 한 젊은이의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음행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 그것에서 도망치는 것입니다(고전 6:18 참조).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요셉이 한 일이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그에게 간음을 강요했습니다(39:7). 그러나 요셉은 거절했습니다. 그는 그녀에게 가까이 가는 것조차 거부했습니다(10절). 그는 단지 "아니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혹의 근원에서 도망쳤습니다. 그 악한 여인이 그에게 가까이 오자마자, 요셉은 다른 곳으로 떠났습니다. 당신을 유혹하는 사람들과 늘 붙어 있으면, 유혹을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유혹을 피하는 그런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어느 날 그녀는 집에서 그와 단 둘이 있을 때, 그를 붙잡았습니다. 이번에는 그는 몸을 빼서, 그녀가 그의 상의를 움켜쥔 채로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녀는 너무 화가 나서 요셉이 자신을 강간하려 한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화가 나서, 요셉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요셉이 겪은 일들을 보십시오 - 형들의 시기와, 악한 여인의 거짓 고발과, 감옥에 갇힘. 그 당시 감옥은 쥐, 벌레, 바퀴벌레가 사방을 기어 다니는 끔찍한 지하 감옥이었습니다. 그런데 21절에 보면, 온갖 기는 것 외에, "여호와께서도 또한 요셉과 함께 계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차이를 만들었습니다. 주님이 당신과 함께 하시면, 당신이 온갖 불편함에 둘러싸여 있어도 문제 없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요셉이 원했던 전부였습니다.
그곳 감옥에서 그는 파라오의 술 관원을 만나, 파라오를 소개받게 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계획이 어떻게 천천히 이루어지기 시작하는지 봅니다. 그것은 단지 보디발과 그의 아내가 그에게 행한 악으로부터 하나님께서 요셉을 보호하신 것만이 아닙니다. 그분은 그들이 요셉에게 행한 악으로 하나님의 완전한 계획을 이루도록 하셨습니다. 요셉이 그 감옥에 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바로의 집사를 만나 바로를 소개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요셉이 처음에 이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면,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내내 주님을 찬양했을 것입니다 - 나중에 바울과 실라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보았기 때문에, 빌립보 감옥에서 주님을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연구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행하는 악으로 인해 곤경에 처할 때마다 주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언젠가, 사람들은 많은 거짓 고발로, 우리도 감옥에 넣을 수 있습니다. 나는 이집트인들이, 이집트에서 가장 정직한 사람인, 이 사람에 대해 퍼진 모든 거짓 이야기를 믿었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참된 종들에 대한 많은 거짓 이야기가 퍼집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잠잠히 있으십시오. 당신의 명성을 지키는 일은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그분은 적절한 때에 당신을 변호하실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공경한다면, 아무도 당신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좌절시킬 수 없습니다.
나는 당신이 요셉이 파라오의 술 맡은 관원장과 어떻게 접촉하게 되었는지 주목하기를 바랍니다. 요셉은 감옥에서 걱정할 만큼 자신만의 문제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느 날 감옥에 새로 온 두 사람이 슬퍼 보이는 것을 보고, 자신의 슬픔을 잊었습니다. 요셉은 간수에 의해 모든 죄수를 관리하도록 임명되었고, 그래서 그는 이 두 죄수에게 그들이 그렇게 낙심해 보이는 이유를 물었습니다(40:7). 그렇게 해서 그는 그들의 꿈을 정확하게 해석했고, 따라서 어느 날 그들 중 한 사람(술 맡은 관원)을 통해 파라오의 꿈을 해석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께 충실하고, 자신의 슬픔을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들을 염려할 수 있는, 그분의 종들을 위해 문을 여는 놀라운 방법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사건에서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슬픔에 사로잡히지 맙시다. 이 세상의 다른 궁핍한 사람들에게 마음을 엽시다.
마침내 요셉은 파라오 앞에 섰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하나님의 완벽한 때였습니다. 성경은 "그들이 족쇄로 요셉의 발을 괴롭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그의 몸에는 쇠사슬이 채워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까지 요셉은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그를 자유케 하셨습니다"(시 105:18,19 - 자유로운 의역). 하나님은 항상 시간을 지키십니다. 그분은 결코 늦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시련에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특정한 기간이 있습니다. 그 시간 동안, 그분은 우리를 시험하실 것입니다. 그 시간이 끝나면, 그분은 우리를 위해 자유를 명령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에, 우리가 신실했다면, 우리 몸에 쇠사슬이 채워질 것이요, 그리고 우리는 믿음 안에서 견고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상황을 사탄에게 뒤집어 놓으시고, 사탄이 우리에게 가하는 바로 그 해악을 사용하여 우리를 강하게 하십니다. 할렐루야!
그 땅에 기근이 들어 그의 형들이 굶주리자 하나님이 20년 전에 그에게 보이신 그대로 와서 요셉에게 절하였던 일을 당신은 알거니와,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을 지키십니다.
43:1,2: 그 땅에 기근이 심했을 때, 야곱은 그의 아들들에게 이집트로 가서 식량을 구하라고 말했습니다. 기근이 들 때마다 어디에서든지, 당신은 기근 전에 지혜로웠던 사람들에게 가서 양식을 구해야 합니다. 7년 대풍년에 요셉은 지혜로웠습니다. 그는 음식을 저장했습니다. 그러므로 형통할 때에 게으르던 자들은 이제 그에게로 와야 합니다. 성경은 "게으른 사람아, 개미에게 가서, 그것을 배워라 - 여름에, 겨울 동안에 먹을 것을 저장하는 법을 배우라"(잠 6:6-8)고 말씀합니다.
이 진리를 영적으로 적용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그로 인해 영적으로 부유해질 기회가 충분히 있다면, 이러한 때에, 당신의 시간을 현명하게 사용하십시오. 그러면, 여러 해 후에 삶의 압박 때문에 말씀을 공부할 시간이 많지 않을 때, 의지할 수 있는 충분한 지혜가 생길 것입니다. 당신이 지금 쌓아 두는 하나님의 말씀의 지혜는 당신을 완전히 만족시킬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도 나눌 수 있는 것이 많을 것입니다.
나는 인도 해군 장교로 복무하던 미혼시절에, 성경을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나는 성경 학교에 가지 않았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발 앞에서 성경을 공부했습니다. 그 습관은 또한 나를 많은 유혹에서 멀리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많은 시간이었습니다 - 왜냐하면 저는 총각으로서 충분한 시간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 여유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당신이 시간이 많은 때에 게으르면, 당신은 기근의 날에 후회할 것입니다. 그 교훈을 배우고 자신에게 적용하십시오.
요셉은 형제들을 경건하게 대했습니다. 45장 5절에서 그는 "당신들보다 먼저 나를 보내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다시 7절에서, 그는 "하나님이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습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8절에서 다시 한 번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습니다." 그는 형제들에게 "나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판 것은 당신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나를 감옥에 보낸 것은 보디발의 아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길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다면 참으로 우리는 복이 있습니다 - 심지어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행하는 악에서도.
이 영광스러운 진리를 보셨습니까? 절대로, "이 사람이 나를 해치고 있다" 또는 "그 사람이 나를 해치고 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당신에게 어떤 일을 하도록 허락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요셉은 한때 자신을 노예로 팔았던 형들을 위해 큰 잔치를 준비했습니다. 그는 또한 한때 그를 위해 구덩이를 예비했던 이 형제들에게 애굽에서 가장 좋은 땅인 고센 땅을 주었습니다(46:34)!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의 태도입니다.
우리는 또한 요셉이 그의 아버지에 대해 가졌던 엄청난 존경심을 봅니다(46:29). 요셉은 세상의 두 번째 통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맞으러 나가 존경을 표했습니다. 경건한 사람은 항상 그의 부모를 공경하고 존경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야곱이 하나님의 예언자로서의 생애를 마감하는 모습을 봅니다. 47장 10절에서 그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통치자인 파라오를 축복한 다음 자신의 아들들을 축복합니다. 요셉은 그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야곱에게 데려오며, "오른손은 므낫세(형)의 머리에, 왼손은 에브라임(동생)의 머리에 얹으세요"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는 손을 교차하고, 형보다 동생을 축복했습니다. 그의 눈도 이제 어두워졌습니다(그의 아버지 이삭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러나 야곱은 그의 아버지와 달리, 영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축복할 사람과 축복하지 않을 사람을 알고 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안락한 삶을 살았던 아버지와 달리, 야곱은 살면서 많은 시련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적인 시력을 날카롭게 하시는 것은 시련을 통해서입니다.
야곱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언한 최초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아들 유다에게, 유다의 사자가 그의 씨를 통하여 와서, 다스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49:9,10).
50:20에서, 우리는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이 말한 것과 유사한 말을 요셉이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여러분은 나에게 악의를 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이 구절은 구약성경의 로마서 8장 28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놀라운 시작의 책인 창세기의 끝을 보게 됩니다. 이제 이 책의 마지막 구절을 봅시다. 창세기는 "태초에 하나님"이라는 말로 시작했지만, "이집트의 관"이라는 말로 끝납니다. 이것은 인간의 죄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이집트의 그 관에서,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을 위한 놀라운 구속을 가져오셨습니다!
할렐루야!!
* 지구의 창조와 재창조에 대한 더 자세한 연구를 보려면, 다음 기사에서 "지구의 창조와 사탄의 기원"을 읽어보십시오: The Creation Of The Earth And The Origin Of Satan | cfcindia, Bangalore
†족장들의 연대표가 여기에 주어져 있습니다.
이스라엘 국가가 탄생하다
창세기가 '시작의 책'이라면, 출애굽기는 '국가(이스라엘 국가)의 탄생'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창세기에서 이 국가의 시작을 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것을 본격적인 국가로 봅니다. 처음 15장까지는 우리는 그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것과, 애굽에서 구출된 것에 대해 읽습니다. 책의 나머지 부분은 율법을 주신 것, 광야에서의 약간의 시간, 하나님께서 그분의 성막을 짓기 위해 주신 계획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집트로부터의 구속
1장에서, 우리는 파라오가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괴롭혔다는 것을 읽습니다. 그들은 수가 많아지고 있었고, 그는 그들이 마침내 그에게 반항하고 그를 위해 일하지 않을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태어난 모든 사내아이를 즉시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제 그 계략은 마귀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사탄은 항상 유대인들을 죽이기 위해 그들을 뒤쫓았습니다 - 인류 역사상 여러 번 말입니다. 이것은 그러한 경우의 첫 번째에 불과했습니다.
우리는 지난번 연구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사탄의 계획으로부터 보호하실 뿐만 아니라, 더 나은 일을 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분은 사탄에게 상황을 역전시키시고,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사탄의 일을 사용하십니다. 그것은 단순히 사탄을 멸하거나 사탄의 활동을 막는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마귀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실 뿐만 아니라, 사탄이 그분을 파괴시키기 위해 행하는 바로 그 일을 사용하셔서 그분의 능력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이것의 가장 좋은 예는 갈보리입니다 - 그곳에서 사탄은 예수님의 적들을 끌어들여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가 바로 사탄 자신이 패한 곳이 되었습니다!! 사탄의 계획은 항상 그래왔듯이 역효과를 낳았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위해 사탄의 상황을 역전시키셨습니다. 우리가 그분 앞에서 겸손한 마음으로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산다면, 그분은 우리에게도 똑같이 하실 것입니다. 마귀와 그의 대리자들이 우리에게 해를 끼치기 위해 무엇을 하든지 그들에게 되돌아갈 것이며 - 우리 삶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될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주요 메시지 중 하나이며 - 우리는 그것이 성경에서 반복해서 일어남을 봅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로가 남자 아기를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모세의 어머니가 모세를 작은 바구니에 담아 강물에 띄우며 하나님께 기도한 것을 봅니다. 그 사악한 칙령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결코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그렇게 했기 때문에, 파라오의 딸이 모세를 데려갔고, 하나님이 그의 생애의 첫 40년 동안 그를 훈련시키기를 원했던 바로의 궁전에서 자랐습니다. 파라오가 그 악한 법을 통과시키지 않았다면,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며, 그때 동안 모세는 또 다른 노예로 성장했을 것입니다. 당신은, 사탄이 행하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목적이 어떻게 성취되는지 보고 있습니까?
여기에는 우리 모두를 위한 큰 교훈이 있습니다 - 그것은 교회 역사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고자 하실 때마다, 그분은 항상 한 사람에게서 시작하십니다. 그분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기 전에 적합한 사람을 찾으셔야 했습니다. 그 남자의 훈련은 80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학문적 훈련만이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애굽 최고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을 할 자격을 갖추지는 못했습니다. 사도행전 7장(22절)에서, 스데반은 모세가 말과 일에 능하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힘센 사람이었고, 40세에 유창한 연설가였습니다. 그는 위대한 군사 지도자이자, 매우 부유한 사람이었고, 세계에서 가장 발전된 국가가 줄 수 있는 최고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 이집트는 당시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을 섬길 자격이 없었습니다. 스데반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일으키셨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를 그들의 지도자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모든 세상적인 명성과 능력은,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준비하신 일을 위해, 그를 준비시킬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성경 지식과 음악적 재능과 충분한 돈이 있기만 하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틀렸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생애에서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이 세상이 그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40년은 하나님의 봉사를 위해 그를 준비시킬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온전케 하시려고, 그가 궁궐과는 전혀 다른 환경인 광야에서의 또 다른 40년을 보내게 하셔야 했습니다. 그의 인간적 힘은 부서져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에게 양을 돌보게 하시고 장인과 동거하며 장인을 위하여 40년 동안 일하게 하심으로 이를 이루셨습니다. 1년만이라도 장인과 동거한다는 것은 남자로서는 굴욕적일 수 있다! 저는 인도의 많은 기혼 여성들이 평생 시아버지와 함께 산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남자가, 아내의 아버지와 함께 살아야 하고 그를 위해 일해야 하는 경우는 다릅니다. 그것은 남자에게 상당히 굴욕감을 주는 경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이 모세를 부수신 방법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야곱도 깨뜨린 방법임을 기억하십시오. 그 역시 20년 동안 장인과 함께 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장인과 장모를 사용하여 그분의 자녀를 깨뜨리십니다.
모세는 애굽의 모든 대학이 가르치지 못한 것을, 광야에서 양을 치고 장인을 섬기며 배웠습니다. 그 40년의 끝에서, 모세는 너무 부서져서, 한때 매우 유창하고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가 이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저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저는 말을 제대로 못합니다. 당신의 백성을 이끌 다른 사람을 보내 주십시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침내 너는 준비되었다. 내가 이제 너를 바로에게 보내리라"(4:10~17).
야곱과 모세에게서 우리가 배우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당신이 준비되었다고 생각할 때, 당신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당신이 능력 있고, 강하고, 지식이 있고, 말하고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할 수 있고, 하나님을 위해 놀라운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적합하지 않다. 나는 네가 부서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단다." 그 과정이 야곱에게는 20년, 모세에게는 40년, 베드로에게는 3년, 바울에게는 적어도 3년이 걸렸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걸릴까요?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 복종하는 법을 얼마나 빨리 배우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1학년에서 12학년까지 학교를 다니는 데 얼마나 걸립니까? 12년입니다 - 매년 통과하는 경우. 그러나 학교의 12년을 마치는 데 16년이 걸리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일부 의대생은 5년제 의대 과정을 마치는데 10년이 걸립니다! 학교를 마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수업을 얼마나 빨리 배우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12장 40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날이 430년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실 때, 그의 후손이 400년 동안 다른 땅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15:13).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그들이 실제로 430년 동안 거기에 있었다는 것을 읽습니다. 하나님이 실수하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시간표에 있어서 매우 정확하십니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그분의 완전한 뜻은 그들이 애굽에서 400년 동안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30년을 더 머물렀을까요?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다른 예를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을 때, 그들에 대한 그분의 계획은 그들이 광야에서 2년만 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제로 광야에서 몇 년을 보냈습니까? 40년입니다(신 2:14 참조). 하나님은 2년 안에 당신을 깨뜨리실 계획을 세우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40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회심한 지 2년 후에 당신을 사용하기를 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40년 동안 당신을 사용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 당신이 얼마나 빨리 부서지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또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그들이 애굽에서 400년을 지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430년 동안 머물러야 했습니다.
저는 그 이유가 그들의 지도자 모세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모세가 마흔 살에 이집트를 떠날 때, 하나님은 광야에서 장인과 함께 10년 과정을 통해 모세를 깨뜨려, 50세에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 준비를 할 수 있기를 원하셨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10년 동안 그분의 교훈을 배우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충분히 깨어지기 전에, 그의 장인이 그를 좀 더 낮추어야 했습니다. 모세가 10년노정을 마치는데 40년이 걸렸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30년을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지상에서의 그분의 일을 위해 부서진 인간에게 의존하십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메시지와 경고를 줍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삶을 위한 계획을 갖고 계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부서지기 전에는 결코 성취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이 10년 동안 당신 안에서 계획하신 일이 40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그분이 우리의 길에 마주치게 하는 상황에서) 자기를 낮추는 것을 속히 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레미야 애가 3장 27절은, "사람이 젊어서 멍에를 메는 것이(자신을 낮추고 꺾이는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당신이 젊을 때, 하나님께서 당신을 부수도록 허용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삶에 허락하시는 상황에 맞서 싸우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계획이 지연될 뿐입니다. 당신의 모든 성경 지식, 음악적 능력 및 돈으로는 하나님의 봉사를 위해 준비할 수 없습니다. 깨짐은 필수적입니다. 야곱은 깨어졌을 때에만 이스라엘이 될 수 있었습니다. 모세는 깨어졌을 때 지도자와 예언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2장: 여기에서 우리는 모세가 이집트인들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나간 때를 읽습니다. 그는 이집트인이 히브리인을 때리는 것을 보고 (2:11) 이집트인을 때려 죽입니다. 여러분은 모세가 맨손으로 사람을 죽이는 데 얼마나 강했는지 상상이 가십니까? 그가 계속해서 이집트인들을 - 한 명씩 - 이 속도로 죽였다면 수백만 명의 이집트인을 모두 죽이는 데 몇 년이 걸렸을 것 같습니까? 모세는 이집트인들이 모두 죽기 전에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80세에 깨뜨리셨을 때, 모세가 해야 할 일은 그의 지팡이를 홍해 위로 들어 올리는 것뿐이었고, 순식간에 애굽 군대 전체가 홍해 아래에 묻혔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과 상한 자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의 차이입니다.
성경의 처음부터 메시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이 참된 교회인 예루살렘을 세우기 원한다면, 당신은 깨어져야 합니다. 당신은 환경과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당신이 거역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당신 안에서 빠른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저는 열정적인 젊은이들을 많이 봤습니다 - 그들은 머리로 성경을 알고, 나가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나가서 그들의 힘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20년, 30년 후 그들은 좌절하고, 낙담하고, 비판적이며, 그들의 실패에 대해 이 사람과 저 사람을 비난합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인생을 낭비했습니다. 왜일까요? 단 한 가지 이유입니다 - 그들은 결코 하나님이 그들을 깨뜨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경건한 자의 삶은 흥미진진하다"(잠 14:14 - Living)고 말합니다. 나는 이제 76세이고 56년 넘게 하나님의 자녀였습니다 - 그리고 나의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흥미진진했음을 솔직히 간증할 수 있습니다. 나는 많은 시련을 겪었지만, 그 모든 시련 속에서 흥미로운 방식으로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위해 살고 그분을 섬길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은 이 세상에서 누구나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입니다. 나는 전 세계 누구에게도 불만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아무도 나에게 해를 끼치는 데 성공한 적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해치려 했고 몇몇 동역자들은 나를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한 모든 일은 나에게 유익을 줄 뿐이었습니다 - 로마서 8:28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그래서 나는 실제로 그들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들의 악한 행동을 사용하여 저를 더욱 그리스도와 같이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 그것은 그들의 악한 행동에서 나온 좋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젊은 시절에 나를 부수셨고 지금도 여전히 나를 부수고 계십니다. 이것이 결실의 길입니다. 우리가 부서질수록,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도록 우리를 더 많이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17장에서 바위를 친 후에야 물이 흐르기 시작했다는 것을 읽었습니다. 바위를 치지 않으면, 물이 흐르지 않습니다. 향유를 옥합에 담아 가지고 온 여자가 예수님의 발 앞에서 그것을 깨뜨리니, 그제서야 향기로운 냄새가 온 집에 가득했습니다. 유리병이 깨질 때까지 아무도 그 냄새를 맡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들어 축복하셨을 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그것을 부서뜨리셨을 때에,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이 모든 예에서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깨어짐은 축복의 길입니다. 원자가 쪼개질 때 어떤 힘이 방출됩니까! 도시 전체에 전기를 공급할 수 있습니다! 너무 작아서 현미경으로도 볼 수 없는 작은 원자가 깨질 때 방출되는 힘을 상상해 보십시오. 성경 뿐만 아니라 자연에도 있는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부서짐을 통해 방출된다. 그 메시지가 당신의 삶을 사로잡기를 바랍니다.
1963년에 내가 성령세례와 내 사역에서 그분의 능력을 위해 하나님을 찾았을 때, 하나님께서 그 메시지로 나를 붙드셨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나에게 깨어짐의 길이 능력의 길이 됨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평생 잊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아직 젊을 때 그 교훈을 배우도록 격려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여기서 모세를 통해 백성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과 지도자들에게 말했습니다(3:17),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주리라." 거기에는 두 가지 약속이 있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라."
"내가 너희를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주리라."
오직 첫 번째만 성취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그것을 들은 장로들에게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들은 모든 장로 중에서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가 되었을 때 장로들이 믿음으로 응답하지 않았기 때문에(민 13장), 하나님의 약속의 절반만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가 믿음으로 응답할 때까지 성취되지 않습니다. 전기 스위치와 같습니다. 스위치에서, 두 개의 전선이 서로 옆에 연결되어 있지만 서로 닿지는 않습니다. 스위치를 켜는 순간, 그 전선들이 닿고 조명이 켜집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우리의 믿음이 두 전선입니다. 그들은 서로 매우 가까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접촉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들이 닿는 순간, 힘이 방출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들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지만, 당신의 믿음이 "네, 내 삶에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라고 말할 때 비로소 이루어집니다. 가나안 경계에서,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고, 그래서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4장: 여기에서 우리는 모세를 부르시는 하나님에 대해 읽습니다. 모세를 격려하고 그에게 몇 가지 교훈을 가르치기 위해, 하나님은 그에게 세 가지 표적을 주셨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그들은 내가 그들에게 말하는 것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을 때, 여호와께서는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이것에 주목하세요! 주님은 항상 이미 우리 손에 있는 것부터 시작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없는 것을 찾으러 갈 필요가 없습니다. 엘리사가 과부에게 "네 집에 무엇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기름 한 병뿐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엘리사가 말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기름통으로 당신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왕하 4:2,3). 모세의 손에는 목자의 지팡이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하시면, 목자의 지팡이로도 기적이 일어납니다.
첫 번째 표적으로,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를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뱀이 되었고 모세는 그것을 피했습니다(3절). 주님은 "두려워하지 말라. 손을 뻗어 꼬리를 잡아라." 그가 그것을 잡았고 그것은 다시 그의 손에 있는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거기에 어떤 메시지가 있었습니까?
첫째, 사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까이 있습니다 - 그 지팡이가 모세에게 가까웠던 것만큼 말입니다. 당신은 사탄이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 동료들 사이 등에 오해를 일으키기 위해 항상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탄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는 패배한 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우리 발 아래 짓밟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길 때 배워야 할 첫 번째 교훈 중 하나는 사탄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탄은 성채와 요새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그에게서 도망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유혹을 피해야 하지만(딤후 2:22), 사탄은 우리에게서 도망쳐야 합니다(약 4:7). 예수의 능하신 이름으로, 사탄이 우리를 두렵게 하기 위해 사용하는 바로 그것이 우리 손에 바다를 가르고 하나님의 백성을 앞으로 인도하는 권위의 지팡이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우리는 그분의 권위가 필요합니다 - 먼저 성경 지식이 아니라, 신의 권위입니다. 나는 어느 날이든 성경 지식보다 영적인 권위를 갖고 싶습니다. 모세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원수를 다스리는 권세였습니다. 그의 종 파라오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로 삼은 것은 사탄이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두려움 없이, 그의 꼬리를 잡아야 했습니다. 사탄은 결코 우리를 두렵게 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 표적으로, 주님은 모세에게 그의 손을 품에 넣으라고 하셨습니다(6절). 모세가 그렇게 하고 그 손을 꺼내니, 문둥병이 들었습니다.
주님의 종으로서 우리가 이해해야 할 두 번째 사항은, 우리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롬 7:18). 이기심과 부패는 우리 육신(flesh)의 모든 곳에서 발견됩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냥 당신의 손을 살(flesh) 속에 넣고 그리고 보세요! 당신 안에 있는 문둥병에 대한 빛을 비춰주시도록 하나님께 간구하십시오. 만약 당신이 이 중요한 교훈을 배우지 않으면, 마치 사람들이 당신보다 더 나쁜 육신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을 정죄하며 돌아다닐 것입니다. 아무도 우리가 할 수 없는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같은 방식으로 죄를 짓지 않았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 때문이며 우리가 같은 강렬함의 유혹에 직면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동료 인간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당신이 이 땅의 어떤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여호와의 종이 되기에 전혀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세 번째 표적에 대해 주님은 모세에게 나일 강에서 물을 조금 부으라고 하셨고, 그것이 피로 변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9절). 나일강은 애굽의 귀한 신이요, 피는 죽음의 묘사입니다.
그래서 이 표적의 영적 의미는, 세상 사람들이 숭배하고 추종하는 이 땅의 모든 것을, 죽음에 쏟아 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의 종은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고, 세상도 그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합니다. 세상은 더 이상 나에게 (생명에 필수적인) 물이 아니라, 우리가 마시고 싶지 않은 피와 같습니다. 우리는 피를 마시느니 차라리 목마르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보아야 하는 방식입니다.
이것들은 모든 하나님의 종이 되기 위한 세 가지 필수 자격입니다.
이제 모세는 파라오에게 가기로 동의합니다. 그는 신이 주신 권세를 갖추고, 하나님께서 친히 80년 동안 훈련하신 사람으로 나아갑니다. 모세는 그 당시 지상에서 하나님의 목적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에게는 많은 종들이 있습니다. 따라서 한 사람이 실패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하나님에게는 오직 한 사람, 모세만이 있었습니다. 그분의 모든 목적은 그 한 사람에게 달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파라오를 만나기 전에, 매우 중요한 교훈을 하나 더 배워야 했습니다.
우리는 4:24에서 모세가 애굽으로 갈 때, 여호와께서 모세를 죽이려고 하셨다는 것을 읽습니다. 이제 거기에 사탄이 모세를 죽이려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대체 왜, 하나님 자신이 지상에서 자신의 목적을 위해 가장 필수적인 한 사람을 죽이고 싶어 하셨습니까? 모세의 집에 불순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인이 아닌 여자와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아내의 뜻에 굴복하여,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습니다. 모세의 아내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는 "가정의 평화를 위하여", 자신을 낮추어 그녀의 바람에 굴복했을 것입니다 - 특히 그가 그녀의 아버지 집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아내는 그들의 집에서 결정권을 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종들의 가정에서 그러한 잘못된 권위를 결코 허용하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게, 사실상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세야, 네가 먼저 네 가정을 다스리지 못한다면, 네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지 못할 것이다."
성경은, "사람이 자기 가정을 다스릴 수 없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집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합니다(딤전 3:5).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가정에서 머리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자신의 아내를 두려워하는, 하나님의 종이라고 주장하는 남자들을 보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우리의 자녀를 (그들이 우리 집에 살 때에) 경건하게 양육하지 못한다면, 어찌 교회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를 경건하게 양육하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네가 지상에서 나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일지라도, 네가 내 말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나는 너를 죽일 것이다. 나는 내 원칙을 타협할 수 없느니라" 라고 말씀하신 중대한 일이었습니다. 모세의 아내는 남편이 죽어가는 이유를 즉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날카로운 돌을 가져다가 자기 아들의 포피를 베어 내고 화를 내며 모세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나에게 피의 신랑입니다." 모세는 그 후에 한 가지 현명한 일을 했습니다 - 그는 아내를 집으로 보내고 그의 사역을 계속했습니다! 그는, 그녀가 그의 곁에 있는 것으로 인해 더 이상 문제가 생기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얼마나 엄격하신지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은 다른 사람들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타협하도록 허용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분의 택하신 종들 중 하나라면, 그분은 가장 작은 일에서 당신에게 순종을 요구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신경쓰지 않으실, 당신의 삶의 영역을 들여다보실 것입니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10루피나 책 한 권을 빌리고 아직 돌려주지 않았다면, 당신이 하나님의 선택된 종이라면, 그분은 당신이 그것을 돌려줄 때까지 계속해서 당신의 양심을 괴롭힐 것입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대하시지 않고, 그분의 특별한 종들에게만 그렇게 대하십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타협자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그냥 내버려두십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선택된 종이라면, 그분은 당신의 일에 대한 보고서에 단 하나의 거짓 진술도 쓰도록 허락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는 당신이 한 루피 일지라도 불성실하게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신자들은 수백만 루피에 신실하지 않을 수 있으며, 하나님은 그들을 무시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다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택하신 종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당신은 하나님께서 그처럼 질투심 많은 돌보심으로 당신을 지켜주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작은 일에 대해서도 그분의 책망을 기꺼이 받아야 합니다.
마침내 파라오 앞에 섰던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이 깨끗한 양심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을 때, 세상의 가장 권세 있는 자들 앞에 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바로는, 그 콧구멍에 숨이 있는 티끌과 같았습니다. 하나님은 인도에서 모세와 같은 사람들, 즉 그분의 얼굴 앞에서 사는 사람들을 필요로 하십니다. 엘리야는 아합 왕에게, "내가 하나님 앞에서 산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합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우리는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하는 것처럼, 내각 장관들과 국회의원들에게 버터를 바르러(아부하러) 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오늘날 인도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당신이 하나님을 모르면 그것만이 살 길이라는 데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세가 살아남은 방법도 아니고, 엘리야가 살아남은 방법도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살았고 하나님은 그들을 도우셨습니다.
당신도 그들처럼 하나님의 종이 되고 싶습니까? 당신이 오늘날 세상에서 보는 설교자들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종들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오늘날, 사람의 인정을 구하지 않고, 사람의 돈을 원하지 않고, 지상의 권위로부터 지지를 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지지를 받기 원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것이 모세가 파라오 앞에 섰던 방식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세를 전적으로 지원하셨습니다.
오늘의 설교자들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나는 그것들 중 많은 것을 들었습니다. 그것들 중 대부분은 나를 극도로 지루하게 했습니다. 그런 설교자들은 말에 기름 부음도 없고 삶에 권위도 없고,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얄팍한 타협주의자들인데 하나님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바울은 "내가 한 사람의 기쁨을 구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될 수 없느니라"(갈 1:10)고 말했습니다.
절대로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노력하십시오. 사람들이 당신을 오물처럼 취급하게 하십시오. 사도들은 쓰레기 취급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쓰레기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만 살았고, 하나님은 그들을 전적으로 지원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내가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모세는 바로 앞에 섰고, 하나님은 피, 개구리, 이, 파리, 가축의 질병, 종기, 우박, 메뚜기, 흑암 등의 재앙으로 모세의 말을 확증하셨고 마침내 각 집의 장남이 죽게 하셨습니다 - 모두 열 가지 재앙. 그 재앙 중 일부는 이집트 마술사들의 속임수로 복제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술은 어느 시점 이후에 실패했습니다(7:11; 8:7,18).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은 없는) 종교인은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처럼, 모든 시대에 항상 경건한 사람들을 대적해 왔습니다(딤후 3:5,8). 종교적인 거짓 예언자들은 당시에 엘리야와 예레미야를 반대했습니다. 그리고 종교적인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시대에 세례 요한과 예수님과 바울을 반대했습니다. 교회 역사를 통해, 전문적인 설교자들은 항상 하나님이 다른 땅에서 일으키신 예언자들을 대적했습니다. 이것은 항상 같은 스토리였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그분의 예언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타이틀과 학위 증명서를 가지고 있는) 전문 설교자들은 그를 필사적으로 반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공격은 예언자가 그의 메시지를 조금도 바꾸게 만들지 못합니다. 궁극적으로,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그 예언자는 모세처럼 하나님 자신에 의해 입증될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싶다면, 하나님을 모르는 전문 종교 기관을 기쁘게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우리에게 필요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나는 그의 삶과 말이, 그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살고 하나님의 길을 이해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사람을 존경할 것입니다.
12장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구원받은 이야기를 읽습니다. 그들은, 우슬초 묶음으로 흠 없는 어린양의 피를 문 인방과 문설주에 바르고, 죽음의 사자를 피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를 우리 마음에 바르는 믿음의 묘사입니다. 우슬초는 이집트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흔한 식물이었습니다. 믿음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새 달력의 첫 번째 달 14일에 이집트를 떠났고 - 주 예수님은 약 1500년 후 같은 날짜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하나님은 미래를 내다보셨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날을 보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기로 그 날을 선택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그들의 선한 삶이나 선행으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난 30년 동안 각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각 집 안을 확인하러 가지 않으셨습니다. No. 그분은 단지 그들이 흠 없는 어린양의 피를 문에 바를 믿음이 있는지 확인했을 뿐입니다. 그들이 그 우슬초를 피에 적셔서 문에 발랐을 때,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 나의 선행이나 종교 활동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 순결한 어린 양의 피를 믿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죽음의 천사가 내 집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것이 구원의 길입니다. 그 누구도 "내가 착하게 살았기 때문에 구원받았다"라고 자랑할 수 없습니다. No. 선하게 살았던 사람과 악하게 살았던 사람 모두 그날 밤 애굽에서, 어린양의 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의 누군가가, "나는 선한 삶을 살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를 심판하지 않으실 거라고 믿는다"라고 생각하고, 어린 양의 피를 자기 집 문 위에 바르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죽음의 사자가 들어와서, 애굽의 다른 집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장남을 죽였을 것입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진리의 이득은 취하고, 함부로 살면서 "우리가 어떻게 사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구원이 여전히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한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진리가 부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에베소서 2장 9절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구절은 우리가 구원받은 후, 하나님이 우리를 "선한 일을 위하여"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완전한 진리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하는 많은 선한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구원받은 후에 우리의 "믿음"이 선한 행실을 나타내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참된 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다.
야고보는 "(선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약 2:26)고 말했습니다.
문에 피를 바른 후,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두 그날 밤 무교병을 먹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 자신을 먹는 그림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피를 신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그분의 생명도 먹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그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롬 5:10)입니다.
그들은 또한 (즉시 이집트를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여행용 옷을 입고 빵을 먹으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즉시 그분을 만나러 갈 준비가 항상 되어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 집이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나는 여러분이 12:35에서 하나님의 의를 보기를 원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니"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에게 불신자들에게 그런 돈을 요구하라고 하십니까? 확실히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옳은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집트인들은 400년 동안 60만명의 이스라엘 남자들을 자기들을 위해 일하게 하면서도 그들에게 품삯을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들이 애굽을 떠나기 전인, 430년 동안 그들의 품삯을 다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끝내 다른 사람들을 속인 모든 사람을 찾아 처벌할 것입니다 - 430년이 지나도 말입니다! 그 누구도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법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 작은 것들에서, 우리는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사방이 둘러싸여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의 뒤에는 애굽 군대가 그들의 뒤를 쫓고 있었고, 양편으로는 큰 산이 보였고, 그 앞에는 홍해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라볼 수 있는 방향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 위(up). 우리가 이와 같이 곤경에 처했을 때 구원은 오직 한 곳, 즉 하늘에서만 우리에게 올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거기에서 내 도움이 올까요? 아닙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이다"(시 121:1,2).
주님은 모세에게,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네가 잠잠할 때에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싸우시리라"(출 14:13,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홍해를 갈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마른 땅을 밟게 하셨습니다. 그들 아래의 해저 바닥은 젖지도 않았습니다 - 그것은 말랐습니다(출 14:21,22)!
고린도전서 10:2은 그들이 바다를 통과하는 것이 물세례의 그림이라고 말합니다. 또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하늘에서 내려와 이스라엘 백성을 감싸고, 빛을 비추어 적들로부터 보호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성령과 불의 세례의 그림이었습니다.
그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의 구원에서 3중의 경험을 했습니다. 그들은 유월절 양의 피로 구속되었고, 홍해에 잠겼으며, 하늘에서 내려온 구름에 잠겼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초기 세 가지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도행전에 설명된 대로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정확히 그랬습니다. 그들도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고,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받았습니다.
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하늘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하였습니까? 그들이 증언할 수 있는 짜릿한 경험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No. 거인들을 정복하고 하나님이 주신 땅을 차지할 수 있는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단지 체험을 하기 위해 성령세례와 불의 세례를 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가 성령의 능력으로 약속된 땅에 들어가 오랫동안 우리를 지배해 온 정욕, 분노, 더러운 생각, 시기, 원통함, 돈을 사랑함 등의 거인들에게 승리하고 정복하는 것입니다.
가나안은 거인들의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것입니다. 온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430년 전에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우리의 몸도 주님의 것이지, 그것을 지배하는 더러운 정욕의 것이 아닙니다. 많은 신자들이 성령 세례의 주요 목적이 주님을 위해 우리의 몸을 되찾는 것임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 사탄이 이 진리에 눈을 멀게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그들이 성령으로부터 받은 권능으로 그분의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단지 입으로만 증거하는 것이 아닌, 삶으로 그분의 증인이 되라(행 1:8). 우리의 몸은 이제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수 있는 성령의 순결한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고전 6:19,20). 사탄은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구속의 진리나 물세례의 진리에 대해 신자들의 눈을 멀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령 세례의 주요 목적을 이해하지 못하도록 그들 대부분을 눈멀게 했습니다.
그 후 이집트 군대는 그 홍해에 빠져 죽었습니다. 시편 106편 12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사람들이 죽은 것을 보고 나서, 그때에 그들은 여호와를 찬양했다고 말합니다. 보는 것으로 행하는 사람은 자신의 기도에 대한 응답을 받았을 때, 즉 원수가 실제로 익사한 것을 보았을 때에만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행하는 사람은 "주여,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 앞에 상을 베푸셨나이다"(시 23:5)라고 말합니다. 적들은 여전히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원수들을 다루실 것임을 알기 때문에, 주님과 함께 그분의 식탁에 앉아 잔치를 합니다. 한편, 그분은 우리 머리에 기름을 바르셨고 우리의 잔은 찬양으로 넘치게 되었습니다(시편 23:5). 우리의 기도 응답을 본 후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쉽고 옛 언약의 삶입니다. 새 언약의 그리스도인은 응답을 보기 전에, 믿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사탄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있지만, 패배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우리를 해치려는 그의 대리자들(어떤 종교든)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우리 머리털 하나도 만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쩌면 그들이 우리를 죽이도록 허락하실 수도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의 대리자들이 예수님, 야고보, 베드로, 바울을 죽이는 것을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도들은 요한을 제외하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 그러나 그들 각자를 위한 하나님의 시간이 왔을 때만입니다 - 그들 각자가 지상 사역을 마친 후에 말입니다. 우리는 같은 하나님을 섬기므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우리는 15장 이후로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에 대해 읽습니다. 그들이 마라의 쓴 물에 이르렀을 때(23절),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다시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의 시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홍해에서와 같이, 쓴 물에 갈 때에 그것에 대한 해결책도 내가 제공할 것이라는 것을 너희가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아니면 다시 나를 불신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겠느냐?"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그들이 다시 투덜거리기 시작했음을 봅니다. 보는 것으로 행하는 사람은 몇 번이고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믿음으로 행하는 자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께 감사합니다.
출애굽기 15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이 패턴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해 몇 번이고 반복되었습니다. 영원히 오르락내리락하는 "사인파(수학에서)"는 대부분의 신자들의 삶을 완벽하게 묘사합니다 -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 하나님을 찬양하고, 일이 잘못되었을 때 불평하고,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다시 하나님께 감사하고, 다음 문제가 발생했을 때 다시 의심합니다.
이것은 대부분의 신자들이 믿음으로 살지 않고, 보는 것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 이스라엘 백성들과 똑같습니다. 일요일 아침에 그들은 집회에서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때때로 다른 방언으로). 그러나 일요일 오후부터는, 그들의 언어가 달라집니다. 이번에는 그들의 모국어로 말입니다. 그들의 집과 사무실 모두에서 그들의 말은 분노, 투덜거림, 불평입니다!! 그런 다음 다음 일요일에 사인파가 올라가고 그들은 다시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합니다. 그 후, 파도가 다시 내려갑니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그분의 새 언약의 자녀들이 살기를 의도하신 방식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다른 방언의 은사를 주시는 성령께서, 그가 모국어로 말하는 것 또한 통제 하실 수 없으실까요? 그분은 확실히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모든 것 에 감사하라"(빌 4:4; 엡 5:20). 그것이 새 언약 안에서 항상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직면하는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이미 계획하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에게 불평했을 때, 그는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바로 거기에 있다 - 네 앞에"(25절). 주님은 그에게 한 나무를 보여 주셨습니다. 모세가 그 나무를 꺾어서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습니다.
누가 그 나무를 광야에 심었을까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아니면 하나님이었을까요? 의심 할 여지없이 하나님입니다! 사람은 광야에 나무를 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마도 100년 전에 마라 근처에 그 나무를 심으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100년 후에, 그분의 자녀들이 마라에 와서 그것의 물이 쓰다고 알게 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실제로 100년 전에 그들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계획하셨습니다. 당신이 문제에 직면하기 훨씬 전에, 그 동일한 하나님이, 당신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계획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믿음으로 행하는 것은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놀라게 하는 문제가 갑자기 생겨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귀가 우리를 위해 어떤 문제를 준비하고 있는지 이미 미리 알고 계실 뿐만 아니라, 그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도 미리 마련해 두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모든 문제에 담대하게 대처할 수 있습니다. 저는 56년 동안 신자로서 수많은 문제를 겪으면서, 이 진리를 간증할 수 있습니다. 나는 아직까지 하나님께서 해결책을 계획하지 않으신 문제에 직면한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내가 인생에서 마라에 오기 오래 전에, 나무 씨앗을 심었습니다 - 나를 위해 물을 달게 만들기 위해. 또한 항상 "사랑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묵묵히 계획 하시는"(습 3:17 - 의역) 우리의 훌륭하고,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를 믿음으로써 걸어가라고 당신에게 촉구합니다 - 그러면 여러분은 모든 문제를 끊임없이 극복할 것입니다. 다시는 당신의 입에 불평과 원망과 분노가 나타나게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찬송과 감사만 하게 하십시오.
17장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실 물이 없는 또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을 봅니다. 사인파가 내려가고, 그들은 다시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다시 주님은 그들의 바로 눈앞에 있는 그분의 해결책을 그들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분은 모세에게 말했습니다, "네 앞에 있는 저 바위를 보라. 그것을 치라"(6절). 모세가 반석을 치니 물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내가 그 구절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작은 돌과 그곳에서 작은 물방울이 나오고 모두가 마시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마른지 아십니까? 20세에서 60세 사이의 남성만, 60만명입니다. 그러면 나이 많은 사람들, 20세 이하의 남자들 그리고 여자들과 아이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거기에는 적어도 200만 명이 있었을 것입니다. 2백만 명이 마셔야 할 물의 양은 얼마라고 생각하십니까? 약간의 물방울 이었을까요? 아니요! 200만 명 모두가 상당히 빨리 물을 마셔야 한다면, 여러 방향으로 흐르는 많은 강이어야 합니다. 그 200만 명의 사람들이 작은 물방울을 마시기 위해 줄을 서야 했다면, 많은 사람들이 줄의 맨 앞에 도착하기도 전에 갈증으로 죽었을 것입니다! No. 광야에는 반석에서 흘러나온 강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7장 37~39절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매맞은 반석")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성령 충만한 삶에 대해 예수님이 주신 그림입니다.
예수님이 갈보리에서 치심을 당하셨을 때, 그것은 오순절을 위한 길을 예비했습니다. 갈보리는 항상 오순절보다 앞서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때, 생수의 강이 즉시 우리에게서 흐르기 시작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정직하다면, 그것을 인정할 것입니다. 강물이 우리에게서 흘러나와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기 전에, 하나님은 우리를 깨뜨리기 위해 우리 안에서 때리고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나처럼 평범하고, 쓸모 없고, 연약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을 찾으셔서, 지상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도록 만드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치시고, 부수시도록 허락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강물이 흐르기 시작하자마자, 8절에 " 그때 아말렉이 이르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말렉은 구약 전체에 걸쳐 우리 육신(flesh)의 그림입니다. 성령과 육신은 끊임없이 투쟁합니다. 강물이 흐르기 시작하자, 아말렉이 하나님의 백성과 싸우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자마자, 사탄이 와서 그분을 시험했습니다(눅 3:22; 4:1,2). 아말렉은 마침내 모세와 여호수아의 협력으로 패배했습니다. 모세는 산꼭대기에서 손을 들어 기도했고, 여호수아는 골짜기에서 아말렉과 싸웠습니다. 이 조합은 우리도 육신을 이길 수 있게 해줄 것입니다 -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용하셨던 것처럼) 대적에게 직접적으로 사용하셨던 성령의 검(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께 기도할 때 손을 들어 올리는 것(우리의 연약함과 무력함을 인정하는 것).
모세의 손이 피곤할 때에, 아론과 훌이 모세의 손을 들어 올렸습니다(17:12). 우리도 또한 우리가 약하고 피곤할 때 우리를 도와줄 아론과 훌이 필요합니다. 내가 기독교인의 삶에서 발견한 위대한 진리 중 하나는 이것입니다: 나는 혼자서는 해낼 수 없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동료 신자들이 필요합니다. 내가 수년 전 길가에 넘어지지 않고, 소신을 굽히지 않고 오늘 이 자리에 섰다면, 그 이유 중 하나는 끊임없이 나를 격려하고 기도하고 권면해 주는 형제자매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는 수년 동안 내 손을 들어준 많은 아론과 훌이 있으며, 나는 그들을 대단히 소중하게 여기는 법을 배웠습니다. 아론과 훌은 모세만큼 재능이 없었고, 그들은 모세가 하나님을 아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여전히 그들이 필요했습니다. 아론은 적어도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훌은 성경에 다시는 등장하지 않는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인, 모세에게는, 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의 도움도 필요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약하고 알려지지 않은 형제들을 결코 업신여기지 마십시오.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필요합니다. 예수님도 걸려 넘어진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겟세마네에서 그분의 손을 들어달라고(모세처럼) 요청하셨습니다! "심지어 머리(그리스도)도 발(몸의 가장 낮은 지체)에게, 나는 너희가 필요 없다 하지 않습니다"(고전 12:21).
하나님의 율법
19-24장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많은 율법에 대해 읽습니다. 십계명은 20:1-17에 나열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약속이 붙은 계명은 하나뿐입니다(이는 또한 에베소서 6:1,3에도 언급되어 있습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이것은 우리가 집에 있는 모든 자녀에게 가르쳐야 할 한 가지 계명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준 후, 그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이 계명들은 너희를 시험할 뿐이니라"(20절)라고 말했습니다. 백성들은 이미 모세에게 그들이 하나님의 모든 명령에 순종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19:8).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이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후 1500년 동안 그 모든 계명에 불순종했습니다 - 그리하여 사람이 원하더라도, 결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없음을 증명했습니다. 그래서 새 언약이 필요했습니다. 첫 번째 언약(율법)은 결함이 있었습니다(히 8:7-13).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을 주신 직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름다운 비유를 21장에 들려주시어, 그 계명을 지켜야 할 정신(spirit)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21장에서 그분은 6년 간의 강제 노예 생활을 마쳤기 때문에, 주인에 의해 해방된 히브리 노예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7년째 되는 해에 모든 히브리 종을 놓아주어야 한다고 명시했습니다. 그러나 7년째 되는 해에 이 종이 주인에게 와서 말합니다, "주인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자유를 얻어 나가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더 이상 속박된 노예로서가 아닌, 이제는 사랑으로 자유롭게 당신을 섬기기를 원합니다"(5절). 그리고 그는 그 후에도 영원히 그의 주인을 계속 섬깁니다.
이것은 십계명을 준 직후에 온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율법의 문자에 대한 노예적(slavish)이고 외적인 순종이 아니라, 율법의 정신에 대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쁨과 사랑의 순종임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이는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새 언약 아래서 우리의 순종을 원하지 않으신다는 의미입니다. 옛 언약의 정신은 십계명으로 요약됩니다: "너는 하지 말라, 너는 하지 말라, 너는 하지 말라……".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셔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그는……".
15:26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고, 내가 보기에 옳은 일을 행하고, 나의 계명에 귀를 기울이고, 나의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 여호와는 너를 치료하는 자임이니라." 일부 사람들이 이해하듯이, 이것은, 치유의 약속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치유보다 더 나은 것, 즉 건강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건강이 치유보다 낫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치유를 받으려면 먼저 아플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이 그분의 모든 율법을 지킨다면, 병들지도 않을 것이라고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건강할 것입니다! 이것이 그분이 그들에게 위생에 관한 많은 율법을 주신 한 가지 이유였습니다. 당신이 대식가여서 병에 걸리면, 당신 자신을 탓해야 합니다. 술에 중독되어 일찍 죽는 술고래와 좋은 음식에 중독되어 일찍 죽는 대식가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우리의 건강을 지켜 줄 수 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함으로써 시작한다면, 당신은 하나님께 너무 많이 치유를 구하러 갈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을 건강하게 지켜줄 것입니다. 당신은 늙어서 긴장과 과식으로 병든 노인이 아니라, 건강한 노인이 될 것입니다.
23장 9절에, 또 다른 율법이 있습니다: 나그네의 심정을 너희도 알거니와 나그네를 억압하지 말라,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나그네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너무나 친절하고 자비로우셨기 때문에, 우리도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자비로워야 합니다.
31:16,17에서 우리는 안식일에 관한 율법에 대해 읽습니다. 지구가 다시 만들어진 6일이 24시간으로 이루어진 6일인지 아니면 수백만 년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날인지에 대해, 과학계에서는 많은 논쟁이 있습니다. 대답은 여기에 매우 분명합니다. 주님은 엿새 동안 땅을 만드셨고 (made) 일곱째 날을 쉬는 날로 제정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안식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골 2:16,17). 그래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물리적 안식일을 지키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여기에서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셨듯이, 그것은 주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만의 표징(sign)이었기 때문입니다.
32장과 33장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숭배하고, 그들의 우상에게 제사드리는 잔치에서 간음하는 것을 읽습니다. 모세는 시나이 산 정상에 올라 진영을 떠난 지 40일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길을 잃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아론은 그들을 통제할 힘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오직 한 사람 모세에 의해 하나님의 방법으로 유지되었습니다. 그가 그 한가운데 있는 동안, 그들은 그를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법을 지켰습니다. 그가 떠나는 순간, 그들은 죄에 빠졌습니다. 40년 동안 하나님의 방법으로 200만 명을 보존한 사람은 단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교회 역사에서도, 수세기에 걸쳐 있었던 방식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3년 동안, 이리들이 교회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바울이 떠나는 순간, 이리가 들어왔습니다(행 20:29-31). 여기 광야에서도 그랬습니다. 모세가 떠나는 순간, 부패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모세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부패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같은 한 사람을 통해, 아론과 같은 천 명의 타협자를 통해서보다 더 많은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진영으로 돌아온 모세는, 다시 한 번 문제를 바로잡고 백성을 하나님께로 인도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모세가 진영의 모든 죄에 맞서, 주님 편에 그와 함께 설 사람이 누구인지 묻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출 32:26). 그 날 레위 지파만 나와서 모세와 함께 섰습니다. 모세는 그들에게 진영으로 들어가, 우상 숭배의 지도자들을 모두 죽이고, 그 과정에서 그들 자신의 친족도 살려두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진영으로 들어가 그렇게 했습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레위 지파에게 그분의 제사장이 되는 특권을 주신 이유입니다. 그것은 임의적인(arbitrary)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그들이 그분을 위해 서기로 선택했기 때문에, 그들을 선택하셨습니다(신 33:8~11; 말 2:4,5 참조).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도 몇 년 후 같은 정신으로 행동했고, 하나님은 그와도 제사장 직분의 언약을 맺으셨습니다(민 25:7-12).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교회에서의 죄악을 무자비하게 처리할 사람들을, 그분의 대표자로 세우십니다.
여기에서도 모세가 산에서 주님과 긴 대화를 나누면서, 그리스도의 영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중보 기도로 주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만 한다면, 영원히 지옥에 보내질 용의가 있다고 말했습니다(출 32:31,32). 이것이 갈보리 십자가의 정신입니다.
또한 여기에서 우리는 사람의 이름이 생명책에 한 번 있었어도, 지워질 수 있다고 모세에게 친히 말씀하신 하나님에 대해 읽습니다(출 32:33). 이 교리에 대해 기독교인들 사이에는 다양한 의견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3장 5절에서 주 예수께서 친히 반복하신 이 경고를 볼 때 누구든지 가질 수 있는 모든 논쟁은 잠잠해집니다 - 우리 모두 주의 해야 할 경고입니다.
32:34과 33:14~16에서, 우리는 주님의 인격에 대한 모세의 열정을 읽습니다. 이것은 항상 모든 경건한 사람들의 특징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분의 일보다 주님 자신에 대한 열정이 더 큽니다. 모세는 주님께, 만일 하늘에서 온 (겨우) 천사 하나가 그들과 함께 보내지면, 그와 이스라엘 백성이 그곳을 떠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주님 자신이 그들과 동행해야 합니다. 자기를 부지런히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하나님께서 모세의 구하는 것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주님을 향한 모세의 열정은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도록 기도하는 33:18에서 더 잘 보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살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모세를 바위 틈에 숨기셨고(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의 예표), 모세는 그분의 영광을 조금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영광은,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선하심"(33:19)으로 구성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Yes.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그리고 그 영광이 우리의 삶에 임할 때, 그것은 우리를 선한 자와 악한 자 모두에게 선을 행하게 만들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셨던 것처럼(행 10:38).
성막
출애굽기의 많은 부분(25-31장, 35-40장)은 하나님의 성막 건축을 다루고 있습니다. 창세기 연구에서, 우리는 가인과 아벨에게서 거짓 종교와 참 종교의 두 흐름의 기원을 보았고, 그것은 결국 계시록에서 바벨론과 예루살렘으로 끝납니다. 성막은 나중에 하나님의 성전이 나온 씨앗입니다. 그것은 궁극적인 예루살렘, 교회, 하나님의 거처의 그림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을 직역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약성경의 성막은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님 자신의 그림이요, 다음으로 하나님의 거처인 그분의 몸인 교회의 그림입니다. 또한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각자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성막의 모든 부분이 모세에게 주신 양식에 따라 정확하게 만들어지도록 매우 특별하게 생각하셨습니다(출 25:9). 하나님은 모세에게 성막의 각 부분의 크기와 각 부분에 사용되는 재료에 대한 구체적인 지시를 주셨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께서 그분의 말씀에서 명하신 그대로, 교회와 그들의 삶에서도, 모든 일을 해야 할 필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종종 그들의 인간적인 이해로 하나님께 어디까지 순종하고 어디까지 그분의 명령을 수정할 것인지를 결정합니다.
모세는 이집트에서 웅장한 피라미드가 건설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눈에 더 잘 보이도록 하나님의 단순한 성막 양식을 수정하지 않았습니다. 세세한 부분까지, 그는 여호와께서 명하신 대로 정확하게 지었습니다(출 39:1-40:33).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했습니다. 만일 모세가 40세에 이 양식을 받았다면, 그는 애굽의 지혜로 하나님의 양식을 '개선(improve)'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성막은 분명히 더 인상적이었을 것입니다 -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회중을 기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을 수정한 많은 교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길은 우리의 생각과 길보다 훨씬 더 높습니다(사 55:8,9).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항상 하나님의 계명에 인간의 생각(ideas)을 더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의 교회에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만이, 그들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온전한 본과 뜻을 추구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분의 탄생, 삶, 죽음에 관한 구약성경의 예언의 세세한 부분까지 성취하시며 이 땅에서 평생을 사셨습니다. 그분은 자기에 관하여 "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기 위해 항상 주의를 기울였습니다(히 10:7).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 그분에게 항상 나타났습니다.
25장 8절에서 하나님께서 성막 건축을 지시하실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가 그들 중에 거할, 나를 위하여 성소(sanctuary)를 그들이 건축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주된 소명입니다 - 하나님을 위한 거룩한 거처가 되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 - 심지어 좋은 것까지도 -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소명을 놓치면, 전도, 성경 교육, 자선 프로그램 등과 같은 부차적인 일에 몰두하기 쉬울 것입니다. 모두 그 자체로 좋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하나님의 거룩한 거처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본연의 목적에 실패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속에서 집처럼 편안함을 느끼십니까? 당신의 집에서? 당신의 교회에서? 이것이 가장 중요한 질문들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까?" 또는 "당신은 다른 사람들을 얼마나 돕고 있습니까?"가 아닙니다.
모세가 성막의 모형을 본 것은 모세가 하나님과 단둘이 산에서, 40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할 때였습니다(출 25:40). 오늘 우리가 너무 급하게 하나님을 기다리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온전한 뜻과 모형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부르셔서 성막을 짓게 하셨고, 그들이 이 일을 하는 데 필요한 모든 초자연적인 능력을 주셨습니다 - 성령을 통하여(출 31:1-3). 이것은 하나님께서 오늘날 그분의 교회를 세우도록 우리를 부르시면, 그분은 우리가 그 일을 완수하는 데 필요한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도 주실 것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성막의 부분들
성막 건축을 위해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순서를 주목하십시오.
인간의 지혜는 작은 세부 사항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성막의 크기를 개략적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했을 것이지만, 하나님은 맨 먼저 모세에게 언약궤의 세부 사항을 주시는 것으로 시작하셨습니다. 법궤는 성막의 가장 작은 방, 즉 지성소에 두는 작은 가구였습니다(출 25:10). 그러나 그 방은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할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먼저 왔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자신과 함께 시작하셨습니다. 마치 우리가 창세기에서 본 것과 같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하나님의 길은 사람의 길이 아닙니다. 모든 교회에서 우리가 시작해야 할 곳은 하나님과함께입니다. 활동으로가 아니라, 지성소에서 하나님과 함께. 우리는 기독교인의 삶에서 "가장 거룩한"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아담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첫 날을 보내고 나서야, 동산에서 일하러 갔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 하나님과 교제가 먼저이고, 그 다음에 그분의 일입니다 - 전도, 가르침, 사회 사업 등 무엇이든. 하나님이 먼저고, 그 다음이 교리적인 문제입니다. 우리 사이에 분쟁과 분열이 많은 것은 우리가 이 순서를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 죄를 용서해 달라고 아버지께 간구하는 것으로 시작하라고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와 교제하는데 매우 중요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분은 그들에게 먼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고, 그분의 나라가 임하고,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이 궤로 시작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나 자신의 삶과 가정과 교회에서, 하나님을 첫째 자리에 두는 사람을 항상 지지하실 것입니다.
성막은 사람의 그림입니다. 성막은 지성소, 성소, 바깥뜰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것은 사람 존재의 세 부분인 영, 혼, 몸에 정확히 일치합니다(살전 5:23).
성막에서, 하나님은 지성소에 거하셨으며 이는 그분이 우리 영 안에 거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부분. 그분은 우리의 혼(생각과 감정)에 거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을 명확하게 이해하면 많은 속임수에서 우리를 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감정적인 집회가 반드시 영적인 집회가 아닐 수 있음을 깨달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감정에 거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거기에 전혀 계시지 않았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적으로 연구하는 모임도 영적인 모임이 아닐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 생각에 거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귀가 눈과 다른 것처럼 혼은 영과 다릅니다. 사람이 좋은 청력과 나쁜 시력을 가질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은 총명한 지성을 가졌으나 그의 영 안에서 죽은 상태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할 때 매우 감정적일 수 있지만 여전히 그의 마음은 완전히 불결할 수 있습니다. 혼과 영은 완전히 다르며, 하나님은 우리의 혼에 거하지 않습니다. 이 진리를 알면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설교에서 행하고 있는 많은 심리적, 감정적, 논리적 속임수로부터 우리를 구할 수 있습니다.
성막에는 길이가 150피트(45.72m), 너비가 75피트(22.86m)인 바깥뜰이 있었습니다. 교회를 세상의 나머지 부분과 비교할 때 매우 적은 사람들의 교제인 것처럼, 성막은 진영(camp)의 나머지 부분에 비해 매우 작았습니다.
바깥뜰 맨 끝에는 길이가 45피트(13.72m), 너비가 15피트(4.57m)인 장막(tent)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 성소(30피트 x 15피트)와 지성소(15피트 정사각형). 텐트의 높이는 15피트였습니다. 이것은 지성소를 가로와 세로와 높이가 같은 정육면체로 만들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16절에 보면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그리스도의 신부)도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1500마일(2,414km)인 정육면체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는 그들의 깊이(내면의 삶)와 외면의 삶(타인에게 투사하는 전면)이 같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에게 겉으로는 영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에 상응하는 내적인 삶(깊이)이 없는 위선자들을 거부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진영>
성막은 사방이 이스라엘 진영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각 지파마다 특정한 장소가 있었습니다. 레위의 세 아들 므라리, 게르손, 고핫은 성막을 돌보았고, 그들의 장막은 성막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레위 지파가 이스라엘 지파 집계에서 빠지자, 요셉 지파는 므낫세와 에브라임 두 지파로 나뉘었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12지파가 있었습니다.
성막의 바깥뜰은 27:9-19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상징하는 고운 흰 세마포가 그것을 둘러쌌습니다. 이것은 교회 안의 사람들과 외부 사람들을 구별하는 것은, 인간의 더 높은 수준의 의가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는다는 사실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흰 세마포는 또한 교회를 특징짓는 단순성을 상징합니다. 반면에, 음녀 바벨론은, 계시록에서 화려하게 장식된 것으로 묘사됩니다 - 그리스도의 신부에게서 발견되는 단순성과 대조적입니다(계 17:4과 19:8 비교).
성막의 입구는 하나뿐이었습니다 - 30피트(9.14m) 넓이의 커튼이 동쪽에 있고, 누구든지 그 커튼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 되심을 상징했습니다. 한 사람이 태양(동쪽)을 등지고 성막에 들어갔는데, 이는 그가 태양 숭배(당시 이집트와 전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일)를 거부했음을 나타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에도 기도할 때, 특히 "부활절" 아침의 "일출 예배"에서 여전히 동쪽을 바라보는 기독교인들이 있습니다! 마귀는 이집트인들의 태양신을 숭배하기 위해, 교묘하게 그들을 완전히 되돌려 놓았습니다!
바깥뜰에는, 두 가지 물건이 있었습니다 - 희생 제단과 물두멍.
그 장막(tent)은 성소 입구에 휘장이 있었습니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는 또 다른 두꺼운 커튼이 있었습니다("휘장(veil)" - 히 10:20).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둘로 찢어진 휘장(예루살렘 성전에 복제된 것)으로, 이제 모든 사람에게 아버지와 교제하는 길이 열려 있음을 나타냅니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깥뜰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들만이 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성소에는 분향단, 등잔대, 떡상이 있었습니다.
지성소에는, 오직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 그것도, 일 년에 한 번, 속죄일에, 제물의 피를 가지고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속죄소(the mercy seat)로 덮인, 언약궤가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눈에 띄게 나타났습니다.
장막(tent)과 그것의 널빤지
성소의 장막은 26:1-27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값싼 아카시아 나무로 만든 널빤지에 금을 입혀 건축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금)이면서 사람(나무)이심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또한 오늘날 비록 인간이지만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을 상징합니다(벧후 1:4).
각 널빤지에는 사막 모래 위에 안정적으로 놓일 수 있도록 두 개의 은색 받침대에 끼워 맞출 수 있는 두 개의 다리가 달려 있습니다. 은구멍은 이 세상 광야에서 우리가 굳건히 서 있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말해줍니다. 은은 구약 전체에서 구속의 그림입니다(출 38:25,27 및 30:16 참조). 가룟 유다도 은 30개에 우리 주님을 팔았습니다. 두 다리는 이 세상의 사막에서 안정성을 위해 각 신자에게서 발견되어야 하는 믿음과 순종을 상징합니다. 순종하지 않고 믿음만 앞세우는 사람은 한쪽 다리만 달린 널빤지처럼 균형이 잡히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 없이 율법적인 순종을 강조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균형이 맞지 않습니다.
나무 널빤지는 사이에 간격이 없이 나란히 놓였습니다 -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 사이에 있어야 할 친밀한 교제를 상징합니다. 각각의 널빤지에는, 널빤지를 함께 고정시키기 위한 막대를 끼울 네 개의 고리가 있었습니다. 다섯 번째 막대는 모든 널빤지의 중앙을 통해 내부적으로 (끝에서 끝까지) 통과했습니다. 이 5개의 막대는 널빤지를 서로 밀착시켜, 그것들을 안정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믿음과 순종 외에도, 우리가 안정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서로 친밀한 교제가 필요함을 상징합니다.
장막의 덮개들
성막(tabernacle)의 장막(tent)에는 네 개의 덮개가 있었습니다. 가장 안쪽 덮개는 그리스도의 의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복잡한 무늬가 있는 세마포였습니다. 두 번째 덮개는 우리의 죄를 멀리 가져가신 속죄양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염소 가죽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세 번째 덮개는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신 우리의 대리자로서의 예수님을 상징하는 붉게 물든 숫양의 가죽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가장 바깥쪽 덮개는 오소리의 가죽으로 만들어졌습니다 - 오소리 가죽은 더러운 갈색 외관을 가졌고 항상 사막의 모래로 덮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아름다운 덮개는 장막 안에서만 보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외면이 아니라, 내면에 있어야 합니다. 시편 45편 13절은 "왕의 딸은 내면이 모두 영광스럽다"고 말합니다. 즉, 다른 사람들이 겉으로 볼 수 있는 것보다 그리스도인의 내면의 삶에는 더 많은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정반대로 겉은 아름답지만 마음은 더럽습니다. 모든 영광이 밖에 있는 성막은, 하나님의 성막이 아닌 바벨론의 성막입니다.
외부의 오소리 가죽은 "그리스도의 치욕"을 상징합니다. 겉으로 보기에, 교회는 항상 오해와 불명예를 당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멸시와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오직 경건을 원하는 자들만이 그분께 나아왔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세상적인 매력이나 음악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교제의 경건함으로 우리 교회에 이끌려야 합니다.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은 "이 세상의 진영 밖으로" 나가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 "휘장 안"으로 그분에게로 갈 것입니다(히 13:13 및 10:19,20 참조). 그러나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라는 진영 안에 살며 휘장 밖에서 살고 있습니다! 진영 밖으로 나가는 것은 세상에게 버림받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당시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아 귀신의 왕이라 불렸다면, 하물며 그분의 가족인 우리는 얼마나 더 악한 이름으로 불리겠습니까(마 10:25).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과 달리) 세상에서 인기 있는 이유는, 그들이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노력했고 외교적이고 타협적이기 때문입니다.
젊은 기독교인으로서, 나는 종종 어떤 설교자들에게 끌렸습니다. 그들의 설교가 훌륭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그들에게 가까이 가보니, 그들이 교만하고 거만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쉽게 화를 냈습니다. 그들의 자녀들은 불경건했고, 그들은 동역자들 위에 군림했습니다. 내면에는 영광이 없었습니다. 영광은 모두 외부에 있었습니다. 내가 지금 본 것은 바벨론의 설교자의 가장 분명한 표시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참된 장막은 이것과 정반대입니다. 그 안에 있는 영광이 당신이 밖에서 보는 것보다 큽니다.
놋 희생제단
성막 바깥뜰에 있는 첫 번째 물건은 희생제단이었는데, 그것은 땅 위에 놓인 속이 빈 놋 울타리였습니다. 제물은 제단 안의 땅에 드려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제단이 항상 흙으로 된 제단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하나님이 창조하신 것,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닌 - 하나님 자신이 직접 만드신 제단인, 갈보리의 십자가를 상징합니다 - 출 20:24,25).
제단에는 올라가는 계단이 없고, 비탈길만 있어야 했습니다(출 20:26). 이것은 "구원의 단계"가 없다는 사실과,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로 가는 데 중보자나 단계가 없다는 사실을 상징했습니다. 당신은 그분께 직접 갑니다.
제단은 놋으로 덮인 나무로 만들어졌습니다. 놋은 심판을 의미합니다. 제단의 불로 놋이 뜨거워졌을 때, 안의 나무가 까맣게 타는 것을 겉으로는 볼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아무도 볼 수 없는 그리스도의 내적인 고난을 상징했습니다(벧전 4:1).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외적인 고통만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우리 주님이 지상 생애 동안 매일 다른 상황과 유혹에 직면하셨을 때 견뎌내신 내면의 고통에 대해 전혀 모릅니다(히 4:15).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갈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내적인 고통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됩니다. 예를 들어, 그분이 어린 소년이었을 때, 사람들은 그를 사생아로 여겼고, 틀림없이 그를 가리키며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른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분이 살아 있는 동안 겪어야 할 다른 많은 내적 고통들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고통은 십자가에서 아버지와의 교제가 끊어진 것이었습니다. 그 고통은 못과 가시관보다 훨씬 더 컸습니다. 우리 중 대부분은 아버지와의 교제가 끊어지는 것에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아버지와의 "교제 단절"의 고통을 모릅니다.
다음 예를 생각해 보십시오: 빈민가에 사는 사람들은 완벽한 위생 조건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평생 도마뱀이나 바퀴벌레 한 마리도 본 적 없는 집에 살아본 사람들은, 우리 집에서 그런 것들을 보면 움츠러들 것입니다! 예수님께도 그랬습니다. 영원 전부터 그분은 아버지와 완전한 교제 가운데 사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죄가 되어 그 교제를 잃게 될 것이라는 예상을 하셨습니다. 그분은 육체적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100번의 육체적인 십자가형을 기꺼이 겪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께 "내가 이 잔을 마셔야 합니까?"라고 물으셨을 때 - 그 잔은 육체적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끊어지게 되는 아버지와의 교제였습니다. 그것은 그분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피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분은 기도하고 또 기도했고, 아버지는 예수님에게 "다른 길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알겠습니다, 아버지, 타락한 인간을 위해 받아들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겟세마네에서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봅니다.
이 제단에는 모퉁이에, 희생 동물이 죽기 전에 묶여질 네 개의 뿔이 있습니다. 시편 118편 27절은, "절기 희생제물을 줄로 제단 뿔에 매라"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십자가로 가기로 결심하신 예수님의 굳건함을 말합니다. 누가복음 9장 51절에,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아무것도 그분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는 우리도 그 길을 가기로 굳게 결심해야 합니다.
놋 물두멍물두멍은 물을 담는 큰 통으로, 장막 앞에 놓였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여인들이 사용하던 광을 낸 놋거울로 만들어졌습니다(출 38:8). 이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했습니다. 야고보서 1:23-25은 하나님의 말씀이 거울과 같다고 말합니다. 제사장들이 물두멍에 이르러 자기들의 얼굴이 더럽혀졌는지를 볼 수 있었고, 씻고 깨끗하여져서 성소에서 주님을 섬길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씻어" (우리가 듣고 순종할 때), 우리를 거룩하게 하사 그분을 섬길 수 있도록 하십니다(엡 5:26).
물두멍은 또한 물침례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먼저 물로 깨끗하게 하시고 그 다음 성령의 불로 깨끗하게 하십니다 - 금이 물과 불로 정결케 됨 같이(민 31:21-23). 바깥뜰에서 말씀으로 외적인 죄를 씻음으로,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선한 증거를 얻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거룩한 곳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불이 우리를 내면적으로 정결하게 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영적인 사람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종교인으로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금 떡상
장막 안, 성소에는, 세 가지 가구가 있었습니다. 북쪽에는 떡상이 있고, 남쪽에는 등잔대가 있고, 서쪽 끝에는 분향단이 있었습니다.
금상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12덩어리의 떡이 올려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갈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나타냅니다(마 4:4). 옛 언약에는 이스라엘이 한 몸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떡이 열두 개 있었습니다. 각 부족은 고유한 특성을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 안에서, 우리는 주님의 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빵 한 덩이만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비록 다른 민족과 배경에서 왔지만 모두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옛 언약에서는 제사장들만이 이 빵을 먹을 수 있었고, 이스라엘 지파를 대신하여 먹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우리 각자가 어떤 인도자나 중재자를 통하지 않고,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직접 접촉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직접 빵을 먹을 수 있습니다.
금 등잔대
등잔대는 우리의 삶과 지역 교회의 증거를 상징합니다. 그것은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와, 세상의 빛인 우리에 대한 그림입니다(마 5:14). 제사장들은 이 등불이 항상 기름으로 타오르도록 해야 했습니다. 이는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의 증거가 항상 밝게 타오르도록 해야 할 우리의 책임을 상징합니다.
옛 언약에서, 등잔대는 일곱 개의 가지가 있는, 단 하나의 촛대였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많은 가지를 가진 하나의 종파로 상징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에서, 우리는 (계시록에서) 각 교회가 분리된 촛대로 나타나고, 주님이 각 촛대의 머리로서 그들 가운데 거니시는 것을 봅니다(계 1:20). 이것은 새 언약 교회가, 이스라엘 지파와 달리,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아래 직접적으로 독립된 단위가 되도록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임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는 여전히 큰 교단(많은 가지를 가진 하나의 큰 등잔대)의 가지가 되는 구약의 패턴을 따르고 있습니다.
등잔대에 있는 일곱 개의 등(지역 교회의 각 구성원을 상징함)은 각자가 스스로 밝게 타올라야 했습니다. 죄를 짓는(그의 빛이 꺼진) 교인은, 문제를 바로잡고 가능한 한 빨리 등불을 다듬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그의 지역 교회에서 물러나야 합니다. 그래서 그 교회에서 주님의 증거가 그 사람 때문에 어떤 면에서도 불명예를 당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본을 정확히 따를 때에만, 그분의 영광이 우리 지역 교회를 채울 수 있습니다.
금 향단
향단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을 나타냅니다(계 5:8).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존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는 (이 향과 같이) 항상 우리 마음에서 하나님께로 올라와야 합니다(출 30:8; 눅 18:1). 모세는 이 향은 여호와만을 위하여 일정한 비율로 준비해야 하며 다른 사람을 위하여는 절대로 만들지 말라는 명령을 구체적으로 받았습니다(출 30:37). 이것은 두 가지를 상징합니다.
첫째, 그것은 우리 자신의 공로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없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 사용하는 마법의 단어(또는 주문)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오직 주 예수의 공로로 나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일 우리 안에 어떤 공로가 있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처럼 기도한다면, 그러한 기도는 예수 이름으로 드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유일한 입장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더 낫게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가 아닌 다른 사람의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공로 없이 하나님께 가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것은 우리가 결코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해 어떤 것도 기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고전 10:31). 우리 자신을 위한 모든 기도는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의인의 기도가 능력 있는 이유입니다 - 그는 모든 일에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기 때문입니다(약 5:16).
휘장-지성소로 들어가는 길
성막(바깥뜰, 성소, 지성소)은 사람의 그림이었습니다 - 몸, 혼, 영(살전 5:23).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혼과 영을 나누는 검과 같습니다(히 4:12).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그것은 먼저 우리의 혼(생각과 감정)에 들어갑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mind)을 가르치고 우리의 감정을 자극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거기서 멈추고,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여 우리의 의지(will)를 굴복하게 하지 않는다면, 그 말씀은 휘장을 통해 우리의 영으로 들어올 수 없으며 - 우리는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할 것입니다. 휘장은 하나님의 뜻(will)에 복종해야 하는 우리 인간의 의지(will)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뜻을 행하지 않고, 그분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오셨습니다(요 6:38). 그분의 지상 생애 내내 아버지에 대한 그분의 태도는,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도 예수님을 따르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 뜻에 감동을 받아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자신의 뜻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영적인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뜻을 부인하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 참된 영성의 비결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우리를 위해 이 새롭고 살아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 그래서 우리는 매일 그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히 10:19,20). 이것은 우리가 단번에 들어가는 문이 아닙니다. 매일매일 걸어야 하는 길입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항상 지성소에 거할 수 있습니다.
금 언약궤
지성소에는 속죄소가 덮개로 된 금궤가 있었습니다. 언약궤와 속죄소는 함께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그림이었습니다. 속죄소는 속죄일에 피가 뿌려지는 곳입니다. 그 위에는 두 개의 금 그룹이 있었습니다. 그룹은 화염검을 가지고 에덴에 있는 생명나무를 지키는 자들이었습니다(창 3:24). 그 칼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처음으로 예수님에게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칼이 우리에게도 떨어졌으니, 이는 우리도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입니다(갈 2:20). 지금 우리가 생명나무(그리스도)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이 검을 받아들이고 우리의 자기-의지(self-will)가 죽임을 당하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법궤 안에는 (십계명이 기록된) 두 돌판과,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지팡이가 있었습니다.
먼저 만나를 살펴봅시다. 만나가 하늘에서 내려왔을지라도, 밤새도록 간직하면 벌레가 생기고 악취가 납니다. 그러나 같은 만나를 하나님 임재 안에 두었더니, 광야에서 40년 동안 냄새가 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의 상징은 이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 생각에만 있다면, 잠시 후에 그것은 악취가 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겸손하게 그것을 붙든다면, 그것은 영원히 신선하게 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 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때, 기름 부음과 신선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메시지를, 다른 사람이 말할 때는, 죽은 뼈처럼 무미건조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당신도 하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고 언젠가 강력하게 설교할 수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다음날 그 기름부음을 잃어버리고, 똑같은 설교를 한다면, 그것은 메마르고 죽은 것일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설교가 지루한 이유는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설교는, 옛 만나와 같이, 벌레를 낳고 악취를 풍깁니다. 히브리서 3:13에 따르면, 우리 중 누구도 마음이 강퍅해지는 데는 24시간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날마다(24시간) 서로 권면(격려)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에 의해 강퍅하게 되지 않게 하라."
이제 아론의 지팡이를 봅시다: 사람들이 모세와 아론의 권위를 의심하던 때가 있었습니다(민 16장). 하나님은 그 때 각 지파에게 죽은 나뭇가지를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막대들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하룻밤 동안 보관되었습니다. 아론의 지팡이만이 밤에 싹이 나서 열매를 맺었습니다(민 17장). 그 후 이 지팡이는 궤 안에 보관되어, 하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 생명을 가져오심으로써 그분의 종들을 증거하신다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이 지팡이도 (만나와 같이) 40년 동안 신선함을 유지하여, 권위도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행사되는 동안에만 유효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사무엘 시대에, 어떤 호기심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궤 안에 무엇이 있는지 보기 위해 이 속죄소를 들어올렸다가, 즉시 주님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삼상 6:19). 이것은 우리와 관련이 없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지 않기로 선택하신 숨겨진 문제를 탐구하려고 시도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줍니다(신 29:29 참조).
대제사장의 의복
대제사장 아론은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그의 외투는 세 가지 항목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의를 상징하는 흰색 세마포로 만든 상의입니다. 그 위에 그는, 옷자락에 방울과 석류 모양이 번갈아 가며 달린 파란 가운을 입어야 했습니다. 파란색은 하늘의 색이며 천국을 말합니다. 석류는 성령의 열매를, 방울은 성령의 은사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삶에서 성령의 열매와 은사를 모두 가지고 계셨습니다. - 그리고 우리도 하나님을 효과적으로 섬기려면, 둘 다 필요합니다. 이 가운 위에, 그는 에봇이라 하는 색색의 앞치마를 입어야 했습니다.
에봇에는 세 가지 물건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진 두 어깨판;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개의 보석이 달린 흉패; 그리고 에봇 주머니에 넣은 "우림과 둠밈". (우리는 "우림과 둠밈"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대제사장이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찾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제 "갈 지"와, 언제 "멈출 지", 언제 "기다릴"지를 알려주는 신호등과 같았습니다.
이 세 가지 항목은 우리를 지탱하는 그리스도의 능력, 우리를 돌보시는 그분의 사랑 , 우리를 인도하는 그분의 지혜를 상징합니다. 이 세 가지는 디모데후서 1장 7절에서 하나님의 영이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덕목으로 함께 제시됩니다.
어깨판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종인 우리도 어린아이를 어깨에 업듯이, 다른 사람을 어깨에 짊어지고 그들의 짐을 들어 주어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흉패는 우리도 하나님의 백성을 마음에 품고, 그들을 사랑하고 염려해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참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을 마음에 품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품을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또 이마에 "여호와께 성결"이라 새긴 금패(관(모자)에 부착)를 두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아론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제물"에서 발견되는 죄를 담당해야 했습니다(28:36-38). 우리의 "거룩한 제물"에도 죄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더러운 죄만 짊어지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거룩한 것 안에 있는 죄도 짊어지셨습니다. 우리의 거룩한 활동에서 죄의 몇 가지 예: 명예나 돈을 얻기 위해 설교하는 것,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 기도하는 것, 이기적인 동기로 선한 일을 하는 것 등입니다.
속죄일(일년에 한 번)에, 대제사장은 이 화려한 옷을 모두 벗고 단순한 흰 드레스만 입고 지성소에 들어갔습니다. 그가 지성소에서 나올 때에는, 다시 화려한 옷을 입고 백성들 앞에 나아가야 했습니다(겔 44:19). 이것은 우리가 주님 앞에 갈 때, 단순함과 겸손함과 깨어진 마음으로 가야 함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백성 앞에 나아갈 때에는, 얼굴에 기름을 바르고, 우리의 희생과 기도와 금식을 그들에게 숨겨야 합니다. 우리의 거룩한 흰 드레스는 오직 하나님 앞에서만 입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금식이 아니라, 잔치하는 것처럼 보여야 합니다!
주님을 전임(풀타임)으로 섬기기 시작했을 때, 저는 돈이 없어도 풍족한 것처럼 행동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아무도 나에게 연민이나 자선의 선물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기독교 사역자들은 (그들의 외모와 기도편지로) 자신이 가난하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에, 거지들이 선물을 받듯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선 행위로 선물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늘과 땅의 주님의 종에게는 품위가 있고, 자신을 자선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그는 자신의 얼굴에 기름을 바르고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보여야 합니다. 그의 주인은 사람들의 자선 선물 없이도, 그의 모든 필요를 충분히 공급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백성들 앞에 나아갈 때 단순한 흰 옷을 벗고 그들 앞에서 항상 화려한 옷을 입읍시다!
그리스도인 생활의 세 가지 수준
성막의 세 부분인 바깥뜰, 성소, 지성소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는 세 가지 수준, 즉 다음과 같은 7가지 영역을 상징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a. 영적 성장의 세 단계:
1. 하나님께 용서받음;
2. 하나님을 섬김; 그리고
3. 하나님과의 교제.
b. 세 가지 유형의 그리스도인:
1. 육신적인 그리스도인;
2. 혼적인 그리스도인; 그리고
3. 영적인 그리스도인.
c. 성령의 세 가지 사역:
1. 성령으로 태어남;
2. 성령으로 세례를 받음; 그리고
3. 날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음.
d. 하나님을 향한 세 가지 태도:
1. 감사;
2. 찬양; 그리고
3. 예배.
감사할 때, 우리는 우리가 받고 축복받은 하나님의 선물을 생각합니다. 찬양할 때, 우리는 우리를 대신하여 행사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전능하신 능력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배에서, 우리의 초점은 하나님 자신에게로 옮겨지고, 스스로 계시는 그분을 경배합니다(we adore Him for Who He is).
e. 빛의 세 가지 수준:
1. 인간의 이성;
2.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 그리고
3. 하나님의 본성.
우리 모두는 위의 세 가지 출처 중 하나 이상에서 받는 이해에 따라 삶을 삽니다. 바깥뜰과 성소의 빛은 태양(바깥 뜰)과 등잔대(성소)라는 창조된 빛이었습니다. 그러나 지성소의 빛은 창조되지 않은 하나님 자신의 임재의 빛이었습니다.
f. 결실의 세 단계:
1. 삼십 배;
2. 육십 배; 그리고
3. 백 배.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나오는 좋은 땅도 나쁜 땅과 마찬가지로 세 종류였습니다(막 4:1-8). 좋은 땅에서 열매를 맺는 정도는 온 마음을 다하는 정도에 달려 있습니다.
g. 그리스도인 성숙도의 세 가지 수준:
1. 어린아이;
2. 청년;
3. 아버지.
아기는 다른 사람에게 의존합니다. 젊은이들은 열심입니다. 아버지는 사랑과 지혜가 충만합니다(요일 2:12-14).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은 인간 의지를 굴복하는 찢어진 휘장을 통해서입니다. 그 휘장은 오늘 찢어질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주님에 의해 이미 찢어졌기 때문입니다(히 10:20). 그러나 우리는 지성소에서 아버지와 교제하려면, 매일 그 길을 걸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매일 그분의 임재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길이지 목표가 아닙니다. 우리의 목표는 자신에 대한 죽음이 아니라 아버지와의 교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의 메시지가 아니라 아버지와의 교제의 메시지를 중요시합니다.
그 복된 교제 가운데 하루 종일 살게 하소서.
하나님의 거룩하심
이 책은 정말, 공부하고 마음에 와 닿는 무언가를 얻기에 가장 어려운 책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감받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안에 우리를 위한 무언가를 가지고 계십니다.
레위기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말하는 책입니다. 전체적으로 거룩함을 주요 주제로 삼고 있는 책입니다.
거룩함은 많은 신자들이 두려워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을 담대히 선포해야 합니다 -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현실적이고 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함은 하나님의 본성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은 성령입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환상을 보았을 때,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았고 자신을 부정한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거룩함은 건강과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완벽하게 건강하다는 메시지를 듣는 것을 두려워합니까? 우리는 건강을 두려워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육신의 건강보다 더 중요한 영의 완전한 건강을 왜 두려워해야 합니까? 죄는 질병과 같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레위기에서 봅니다. 주님은 여기에서 거룩함과 건강에 관한 규칙을 주십니다. 둘은 비슷합니다 - 하나는 영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몸을 위한 것입니다. 육신의 거룩함은 우리가 건강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영과 혼의 건강은 우리가 거룩함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함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온전한 건강을 바라는 것보다 온전한 거룩함을 바라는 곳에 이르러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몸의 모든 질병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를 원하는 것처럼, 우리를 더럽히는 모든 죄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를 원해야 합니다.
우리는 질병을 용인하지 않는 것처럼 죄를 용인해서는 안 됩니다. 더러운 생각을 용인하는 것은 결핵이나 문둥병을 용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게 내 약점이야, 또는 그게 내 기질이야"라고 말하며 자신을 정당화함으로써 화를 용인하고, 그것을 삶에 허용하는 것은, 우리 몸에 에이즈나 매독을 허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죄와 질병은 매우 비슷합니다. 예를 들어, 레위기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문둥병과 그와 유사한 피부병에 걸린 사람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이 책에 나오는 죄의 유형이며, 여기에 주어진 율법은 죄를 다루는 방법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책에는 '거룩함'과 '거룩한'이라는 단어가 100번 가까이 등장하며, 그것이 이 책의 주제임을 강조합니다. 거룩함이 100번이나 언급되는 27장의 책은 분명 중요한 책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러나 이 책에는 성경의 다른 많은 책들처럼 이야기가 없습니다. 흥미로운 구절이나 약속도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물, 절기와 같은 것들에 대한 묘사가 많이 있습니다. 나는 이 책의 중요한 부분들 중 일부를 꺼내서 여러분에게 설명하고자 합니다. 나는 또한 이 책에 기술된 일부 제물과 절기들에 대해 설명하고, 그것들이 이 새 언약 시대에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는지 알아보고 싶습니다. 우리는 히브리서를 통해, 하나님께서 모든 제사와 희생을 끝내셨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 희생은 그리스도와 우리를 가리키고 있으므로 그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고 무엇을 상징하는지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 마치 지난 장에서 성막에서 본 것처럼 말입니다.
다섯 가지 제물
레위기 1장부터 7장은 다섯 가지 제물에 대해 설명합니다. 그것들 모두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완전한 삶과 그분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완전한 삶도 생각하기를 원하십니다. 여기에는 피를 흘리지 않는 제물이 설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제물은 분명히 갈보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완전한 삶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분의 삶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치르신 희생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레위기에서 배우는 것은, 그분이 자신의 삶에서도 많은 희생을 치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날마다 아버지께 자신의 삶을 바치셨고, 자신의 뜻(will)과 혼의 생명(soul-life)을 죽음에 쏟아 부으셨습니다.
이 다섯 가지 제물 중 두 가지는 의무(강제)였습니다 - 속죄제(the sin offering), 속건제(the guilt offering).
다른 세 가지 제물은 자발적이었습니다 - 번제(the burnt offering), 소제(the grain offering), 화목제(the peace offering)입니다.
레위기 1장에 언급된 첫 번째 제사는 번제(the burnt offering)입니다 - 이것은 우리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그림입니다.
번제물은 어떤 부분에도 결함이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먼저 조각으로 잘라야 했습니다 - 그런 다음 드려졌습니다. 사람들은 재정 능력에 따라, 소나 양이나 염소나 심지어 비둘기나 집비둘기로도 바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각각의 제물은 흠이나 결함이 없어야 했습니다.
번제는 예수님이 지상 생활을 통해, 아버지께 자신의 몸을 바치셨고 마침내 십자가에 그의 몸을 바친 방식을 보여줍니다. 지상 생활 내내, 그분은 십자가에서 제물로서 그분의 몸을 아버지께 바치기 전에, 모든 유혹 속에서 그분의 몸을 완전히 순결하게 유지하셨습니다. 지난 33년 반 동안 예수님의 지상 생애에 단 한 점의 흠이라도 있었다면,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바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주릴 때에, 돌이 떡덩이가 되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죄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그분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생애는 전적인 의존과 전적인 순종의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서 돌을 빵으로 바꾸는 것과 같은 무해한 일처럼 보이는 것이라도, 아버지의 지시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순종의 기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삶은 그토록 승리했고, 아버지는 그분을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또 다른 예를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복음 4장 38~42절에서, 우리는 한 마을에서 일어난 큰 부흥에 대해 봅니다. 이튿날 아침, 무리는 예수님에게 그곳에 머물며 부흥회를 계속해달라고 압박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No"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왜냐하면, 그분이 그날 아침 사람들을 만나기 전에, 그분은 광야에서 아버지를 만났고 다른 곳으로 가라고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무리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라고 하신 곳으로 가셨습니다. 만일 그분이 군중들에게 굴복하고 부흥회를 했다면, 그분은 죄를 지었을 것입니다! 당신은 아직 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신가요?
우리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부흥회를 주관하는 것이 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사셨던, 죄에 대한 민감성의 수준이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죄를 화내는 것, 더러운 생각을 하는 것, 질투하는 것, 억울해 하는 것 등으로 생각합니다. 이것들도 죄이지만 - 유치원 수준입니다. 예수님은 박사(Ph.D.) 수준에서 죄를 다루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어떤 장소에 가서 집회를 하도록 부르시지 않았는데 그렇게 하면 죄를 짓는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하룻밤 사이에 이 박사 수준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해마다 한 학년에서 다음 학년으로 점진적으로 발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발전함에 따라, 이전에는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많은 것들이, 이제 우리에게 죄가 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죄가 온전히 죄"(롬 7:13)가 될 때, 우리는 영적으로 성장하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생애를 바라볼 때, 우리는 갈보리에서의 그분의 죽음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자신을 성부께 완전히 드리며 "주께서 나를 위하여 몸(body)을 예비하셨으니... 내가 (이 몸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히 10:5,7)라고 말씀하신 것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단 한 번도 그분의 몸으로 자신의 뜻을 행하지 않으시고, 오직 아버지의 뜻을 행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는 것의 의미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로마서 12장 1절에서 우리에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리라... 하나님의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이 번제는 하나님께 바쳐져 완전히 타버렸습니다. 성경은 이것이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1:17)라고 말합니다 - 이는 하나님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매우 기뻐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삶의 목표 역시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고후 5:9)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몸을 주님께 드릴 때, "주님, 제 몸을 전적으로 당신께 바칩니다."라고 말하기는 매우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모든 것을 제공했는지는, 그것을 "잘라내기" 전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속일 수 있습니다. 번제와 같이 쪼개어 한 조각씩 드리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 몸의 지체를 하나하나 하나님께 드린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말합니다, "주님, 제 눈이 여기 있습니다. 나는 지난 수년 동안 악마와 나 자신을 위해 그것들을 사용하여, 당신을 화나게 했던 많은 것을 보고 읽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 나의 눈을 제단 위에 올려 놓습니다. 나는 다시는 주님이시라면 보거나 읽지 않을 것을 보거나 읽는 데 이 눈을 사용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더 이상 이 눈으로 죄를 짓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는 혀 옆으로 가서 말합니다, "주님, 여기 제 혀가 있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이 혀를 마귀와 나를 위해 사용해 왔으며, 내 멋대로 말하고, 내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고, 사람에게 화를 내고, 다른 이들을 험담하고, 뒷담화하고, 고발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그 모든 것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여기 내 혀가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완전히 당신의 것입니다."
우리는 손과 발과 육체적 정욕 옆으로 하나씩 가서, 같은 말을 합니다: "주님, 여기 내가 당신에게 죄를 짓고 상처를 입힌, 내 몸의 지체들과 내 육체적 정욕들이 있습니다. 다시는 이것들을 나 자신을 기쁘게 하거나 나의 정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사용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당신 것입니다."
제물을 쪼개어 하나하나 제단 위에 올려놓을 때, 비로소 우리 몸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제물을 각을 뜨고 제단 위에 온전히 올려놓은 다음, "주여, 이제 주의 불을 제물 위에 내려서 그것을 불태워 주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레위기 9장 24절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불이 번제물 위에 내려와 그것을 태웠는지 봅니다. 그 불은 성령세례와, 하나님을 위한 우리의 희생제물을 삼키고 우리 몸을 불태우기 위해 오는 불의 그림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번제물이 제단에 올려질 때까지 불은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몸을 번제로 바치는 대가를 치르기 싫으면서도, 불을 얻고자 할 때 어떻게 합니까? 그들은 가짜 불, 즉 위조 불을 만듭니다. 레위기 10장 1,2절에서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화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하시지 아니한 다른불을 그 속에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니라"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짜 불이 없는데, 진짜 불을 가진 사람들의 일부가 되기를 원할 때, 위험은 우리가 그들이 가진 것을 모방하여 "예, 우리도 불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방언도 했습니다!"라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짜 불을 흉내 낸 나답과 아비후에게 너무 화가 나서, 그분의 임재 앞에서 또 다른 불을 내리셨습니다 - 이번에는 번제물을 삼키지 않고, 이 두 위선자를 삼키라고 하셨습니다!
영적인 일에 있어서 참된 것을 모방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설교자들로부터 방언을 말하고, 감정을 북돋우고, 심리적인 "치유"를 경험하도록 지도 받고 있습니다. (이것들이 "예수 이름으로" 고침을 받는 것과 같다고 상상함).
하나님으로부터 진정한 불을 얻은 사람들은 그것에 대한 대가를 치렀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제단 위에 놓았습니다 - 그들의 돈, 그들의 눈, 그들의 혀, 그들의 손, 그들의 모든 것. 그들은 그들의 삶을 살피고, 모든 번제물의 조각이 제단 위에 있는지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불을 보내셨습니다. 당신은 그러한 사람의 삶을 지켜보면서, 당신도 그와 같은 강력한 기름부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것에 대해 같은 가격을 지불할 의향이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여전히 당신이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합니다. 그때 당신은 나답과 아비후가 한 것처럼 이상한 불을 일으키고, 감정을 자극하고, "방언"을 만들어 내는 등의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신자의 95% 이상이 영적 분별력이 없기 때문에, 당신이 진짜 불을 가지고 있다고 그들을 속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은, 당신이 가진 것이 스스로 만든 것이고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조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나답과 아비후를 심판하신 방식으로 오늘날 기독교계를 심판하신다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두 번째 제물은 '소제(the grain offering)'입니다(레 2장). 이 제물에는 피가 없었습니다. 어떤 동물도 죽지 않았습니다.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소금과 기름으로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이 제물과 관련하여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 중 하나는 "누룩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11절). 누룩은 성경 전체에서 죄의 그림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에 소금을 넣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금은 영원한 언약의 그림입니다. 민수기 18장 19절은 "이는 여호와 앞에 영원한 소금 언약이니라"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소금을 받치는 것과 신약성경에서 예수께서 언급하신 소금에 대해 읽을 때마다 그것이 여기 민수기에 언급된 이 영원한 언약을 가리킨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물건을 오래 보존하기 위해 소금을 사용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소금을 영원한 것을 가리키는 데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소제물에 첨가된 소금은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영원히 자신을 여호와께 드리는 것임을 나타냅니다 - 단지 5년 또는 심지어 50년 동안이 아니라! 그것은 결혼과 같은 영원한 언약입니다.
세 번째 제사는 화목제(the peace offering)입니다(레 3장). 제물을 드리는 사람은 그 동물을 끌어다가 그 머리에 손을 얹어야 했습니다(2절). 그리하여, 그는 그 동물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있습니다"(롬 5:1). 우리 양심의 평화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 중 어느 누구도, 그분이 그들을 받아들이시는 것에 대해 확신이 없는 삶을 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가 모두 용서받았다는 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 죄책감이 전혀 없어야 합니다. 이 사람이 짐승에게 손을 얹은 것처럼, 우리도 갈보리에서 주님께 손을 얹고, 갈보리에서 주님이 우리의 모든 죗값을 지불하시고 우리의 빚을 완전히 청산하시고 우리의 빚진 증서를 갈보리에서 찢어 버린 것을 믿습니다(골 2:14). 그러므로 이제,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도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너희 죄와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 항상 거하는 것에 대해 말합니다(히 4장).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 당신이 변화된 후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이것이 우리 삶에 안식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화목제에서 상징되는 것입니다.
네 번째 제사는 속죄제(the sin offering)입니다(4장). 여기에서 오직 '비의도적인 죄'만 언급된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사람이 의도하지 않고 여호와의 명하신 것을 범하였으면…"(2절). 죄를 지은 사람은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일 수 있습니다(3절 참조). 그도 주님께 속죄 제물을 가져와야 합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지도자(족장)일 수도 있습니다(22절). 어떤 기독교 지도자들은 전혀 죄를 짓지 않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실 때, 항상 지도자들과 제사장들부터 시작하십니다. 그들이 먼저 하나님과 결산을 해야 합니다.
만일 당신이 평범한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당신 지파의 지도자가 제단에 제물을 가져오는 것을 보고, 놀라서 "이 사람이 우리의 지도자인데, 그도 죄를 지었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과 같은 평범한 사람들을 그분의 지도자로 선택하신다는 것을 믿도록 격려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를 짓지 않습니까?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세상에 있습니까? 당신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들에게 당신이 완벽하다는 인상을 주지 마십시오. 성경에 나오는 경건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대해 나에게 용기를 주는 한 가지는, 성경이 그들의 실수를 숨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삶에서 그것을 보았습니다. 사도 바울도 실수를 저질렀고 (사도행전 기록을 쓴) 동료 누가에게 그 실수를 조금도 숨기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누가는, 바울이 바나바와 싸운 일,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 일, 유대인의 서원을 이행하기 위해 머리를 깎은 일, 그의 생애 마지막 즈음에 대제사장에게 소리친 일 등을 충실히 기록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우리의 격려를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람들도 실수를 하고 죄에 빠진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현대 전기(biographies - 일대기)는, 결코 모든 진실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 사람들을 마치 그들의 삶에서 어떤 실수도 저지른 적이 없는 것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그러한 전기는 누구에게도 용기를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정직합니다. 지도자도 죄를 지으면 다른 사람들처럼 하나님과 사람과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나는 지도자들에게 공개적으로 죄를 고백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No. 하지만 사람들에게 당신은 결코 실수하지 않는다거나 죄를 짓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당신이 당신의 교회의 어느 누구에게도 사과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당신이 주는 인상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아내에게, 자녀들에게, 나의 교회 사람들에게, 심지어 막내아들보다 어린 젊은이들에게 수없이 사과해야 했습니다 - 이 모든 이유는 하나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도 사과할 필요가 없는 분이 단 한 분 있습니다 -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러니 자신을 낮추고, 당신이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하십시오. 그들은 당신을 더욱 존경할 것입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범죄하면, 장막(tent) 문에 제물을 끌고 가야 했습니다(4절). 그는 그것을 "나는 기름부음을 받은 제사장인데, 이것을 공개적으로 하면, 내 명성이 떨어질 것"이라며 사적으로나 비밀리에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바로 장막 문,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 했습니다. 그는 수소의 머리에 손을 얹고 자신이 죄를 지었음을 인정하고, 그 수소의 피를 조금 가져다가, 손가락에 찍어 여호와께 드려야 했습니다.
여기 4:13,14에서 흥미로운 점을 하나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온 회중이 죄를 범하고, 그것을 회중이 알지 못하고 그 일에 하나라도 범하였으면, 그들도 수소를 끌어올 것이요." 이제 여기에 언급된 다른 제물이 있습니다 - 죄를 지은 족장을 위한 것(4:22)과 죄를 지은 평범한 사람을 위한 것(4:27). 보통 사람 한 명이 죄를 지으면, 암염소 한 마리만 가져와야 했는데(4:28) 값이 그리 비싸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온 회중이 죄를 범하면 수소(더 비싼 것)를 가져와야 했습니다. 제사장이 죄를 지으면, 그도 수소를 가져와야 했습니다. 여기에서 죄를 범한 제사장을 위한 제물이 죄를 범한 회중을 위한 제물과 동일함을 주목하십시오. 지도자가 죄를 짓는 것은 보통 사람이 죄를 짓는 것과는 다릅니다. 달라요. 그것은 온 회중이 죄를 짓는 것과 같습니다. 둘 다 수소를 가져와야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같은 죄를 같은 방식으로 바라보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기름부음 받은 지도자가 어떤 식으로든 죄를 짓고, 평범한 사람이 똑같은 방식으로 죄를 짓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똑같은 죄가 아닙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의 죄는 훨씬 더 심각합니다. 그는 수소 한 마리를 데려와야 하고, 보통 사람은 암염소 한 마리만 데려오면 됩니다. 우리가 더 많이 기름부음을 받고 다른 사람들을 더 많이 가르칠수록(옛 언약의 제사장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 삶에 대해 하나님께 더 책임을 져야 합니다. "더 많이 받은 사람에게는 더 많이 요구할 것입니다"(눅 12:48).
속죄제는 의도치 않은 죄에 대해서만 규정된다는 점에 유의하십시오(레 4:2,13,22,27 참조). 히브리서 10:26에 주어진 경고를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의도적으로 계속 죄를 범하면, 다시 속죄할 제사가 없습니다." 이것은 레위기 4장과 일치합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주님께로 돌이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죄를 짓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거듭남의 한 가지 표시입니다. 우리는 죄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듭나면 다시는 죄를 짓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선하심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쉽게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 죄를 짓는 사람은, 거듭나지 못한 것이 거의 확실합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죄에 빠질 수 있지만, 그는 죄를 미워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심지어 거듭난 후에도, 역시 고의적으로 죄를 지었다고 모두 고백해야 합니다. 그 죄들은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10:26은 가끔 하는 행동이 아니라 계속해서 죄를 짓는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고의로 계속 죄를 범하면 "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더 이상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게 됩니다(히 10:27).
다섯 번째 제사는 속건제(the guilt offering)입니다(5장). 이것은 하나님뿐 아니라, 다른 인간에게도 범한 죄를 가리킵니다. 어떤 죄는 오직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더러운 생각이 든다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그러한 죄는 오직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잘못된 동기가 있다면,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만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죄는 다른 사람들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여기 1절에서는, 어떤 사람이 자기가 본 것이나 아는 것에 대하여, 혹 그의 친구가 연루될까 하여 증거하기를 거절하여, 그 결과 무죄한 사람이 벌을 받는다면, 그 첫 번째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 죄를 범하게 됨을 말합니다. 다른 비슷한 죄들이 다음 구절들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16절에서, 배상이 언급됩니다: "거룩한 것에 대하여 범한 죄를 배상하되, 거기에 오분의 일(20%)을 더하여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 - 죄가 주님을 대적하는 경우. 그 원칙은 사람에게 배상하는 것에도 적용됩니다(민 5:6,7에 언급된 바와 같이). 당신이 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강탈한 경우, 배상할 때, 그에게 받은 것보다 20% 더 돌려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아무에게도 다시는 그것을 행하지 않도록 당신을 가르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속건제에 대해, 여기에서 여러분이 주목하기를 바라는 한 가지를 더 말씀하십니다(레 7:30), "그의 손으로 직접 여호와께 살라 바칠 제물을 가져오고". 당신이 누구이든(큰 자이든 작은 자이든), 당신은 당신의 제물을 개인적으로 가져와야 합니다. 당신은 하인을 통해 그것을 보낼 수 없습니다. 당신이 아무리 훌륭한 사람일지라도, 스스로 와서, 자신을 낮추고,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죄를 지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동등합니다.
거룩함과 건강
이제 우리는 거룩함과 건강에 관한 율법을 다루는 여러 장들에 이르렀습니다. 이 모든 것은 사람의 삶의 가장 작은 세부 사항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관심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삶의 작은 세부 사항에 관심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레위기에서 하나님이 모든 작은 세부 사항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레위기에서 도마뱀이 냄비에 떨어졌을 때 어떻게 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도마뱀이 빠진 질그릇은 깨뜨리고 그 안에 든 음식은 하나도 먹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감염을 일으키고 죽음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레 11:33). 하나님은 또한 그들이 어떤 식으로든 더럽혀졌을 때, 목욕에 대한 지침을 주셨습니다 - 그들은 흐르는 물에 목욕해야 했습니다(레 15:13). 또한 그분은 그들에게 옷을 더럽히면 빨라고 하셨습니다(레 15:5, 7, 11 및 17:15,16 참조). 이것들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을 돌보시는 두 가지 예에 불과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당신이 먹는 음식과 당신의 청결함(당신의 목욕 습관과 정기적인 옷 세탁)에 그토록 관심이 있으실 것이라고 상상해 본 적이 있습니까? 나는 그런 것들을 읽을 때 흥미롭습니다. 레위기가 지루하다고 누가 말했습니까?
이 책은 또한 성적인 순결과 여러 가지 흥미로운 주제에 대한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10장 8-11절에 하나님께서 아론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나 네 자손은 회막에 들어갈 때에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죽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는 방법이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모든 규례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치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지도자들에게 몸을 더럽히는 것은 무엇이든 먹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지도자로서, 그들은 행동에 있어서 모범이 되어야 했습니다.
11장에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 먹을 수 있는 짐승과 먹지 말아야 할 짐승을 알려 주셨습니다. 이 구절에서 내가 배운 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우리의 식습관, 즉 우리가 건강한 식습관을 갖는 것에도 관심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서,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합니다. 먹고 마시는 것에 관한 레위기의 핵심 메시지는 "몸에 좋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 먹거나 마시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는 주님께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먹고 마시는 정크 푸드에 대해, 그분의 자녀들에게 많은 말씀을 하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예를 들어, 11:33에서 볼 수 있듯이 위생에 대한 규칙도 있습니다: "짐승이 죽어 질그릇에 빠지면, 그 그릇에 있는 것이 다 더럽게 되리니, 그 그릇을 깨뜨려야 하리라." 그리고 "만일 부정한 것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사용했던 물이 어떤 음식에 닿으면, 그 모든 음식이 부정한 것이 되느니라"고 하셨습니다(11:34). 그분은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위생 습관과 깨끗한 생활 방식을 가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건강 규칙을 어기고 아플 때, "주님, 저를 고쳐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어리석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위생법을 어기면, 병에 걸렸을 때 책임을 질 사람이 자기 자신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출애굽기 15:26에서 말씀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너희가 내 법을 지키면, 그러면 내가 너희의 치료자가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치유보다 건강을 선물로 주시고자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몸에 대한 그분의 법에 순종해야 합니다.
11장 44절에서, 우리는 읽었습니다, "나는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 자신을 구별하여 바쳐서 거룩하게 하라." 이것이 레위기의 주요 주제입니다 - 그리고 이 구절은 레위기에서 정확히 중간에 나옵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1장 16절에서 이 구절을 인용합니다, "우리를 부르신 이가 거룩하시니, 우리도 거룩할지니라" 거룩과 정결은 레위기의 두 개의 주요 주제입니다.
문둥병자의 깨끗이 함
13장에서는 나병 검사에 대해 다룹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피부에 부스럼이나 옴이나 색점이 있어, 그것이 피부에 문둥병 환부가 되거든, 그를 제사장 아론에게나 그의 아들 제사장 중 한 사람에게로 데리고 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피부의 병점을 진찰할지니, 그 털이 희어지고 환부가 피부보다 우묵하여 보이면, 이는 문둥병의 환부임이니라. 그러나 그의 피부의 색점이 희고 피부보다 우묵하지 아니하고 그 털이 희지 아니하면, 제사장은 그 환자를 칠일 동안 가두어둘 것이며"(13:2-4).
나는 당신이 이것을 문둥병이 아니라, 죄에 적용하기를 바랍니다. 소중한 구절입니다. 당신이 죄라고 생각하는 것이 형제자매에게서 보이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엇을 해야 했습니까? 그들이 틀렸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에 대해 스스로 판단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나병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교훈입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먼저 문제를 주님께 가져가시고(여기서 아론은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런 다음 장로들에게 가져가십시오(아론의 아들들은 여기서 교회의 장로들을 상징합니다). 그들이 그 문제를 다루게 하십시오. 이 단순한 원리를 따른다면, 당신은 당신과 다른 사람들을 파괴하는 많은 것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단지 자신을 낮추고 "나는 제사장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를 하나님이 정하신 제사장에게 데려가겠습니다"라고 말한다면,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자신을 낮추고 똑같이 할 수 있다면, 교회에서 얼마나 많은 거짓 소문과 혼란을 피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여기에서 제사장도 자기가 들은 것에 근거하여 즉시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불행하게도, 많은 장로들은, 문제를 듣자마자 그 문제가 사실인지 확인하지 않고 판단을 내립니다. 성경은 "사실을 알기도 전에 결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라고 말씀합니다(잠 18:13 - Living).
여기서 제사장은 그 사람을 주의 깊게 살피고, 모든 부분을 살펴보고, 그에게 질문을 하고 나서야 사건의 심각성을 판단합니다. 모든 장로들이 여기에서 가르치는 이 단순한 원리를 따랐더라면 모든 교회에 얼마나 큰 평화가 있었겠습니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매우 조심하라. 생각만큼심각 하지 않을 수 있고; 생각보다 심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을 주의 깊이 살펴보고, 인간적 오류를 충분히 고려한 다음, 그를 부정하다고 선언할지 여부를 결정하라." 그 사람이 문둥병자로 진영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이것이 모든 교회에서 징벌이 수행되어야 하는 방식입니다. 주의 깊게 검토한 후에, 마침내 그 형제를 교회에서 내보내야 한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때로는 제사장이 첫 번째 조사에서 확고한 결론을 내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 "나는 그것이 심각한 경우인지 확신할 수 없다. 7일동안 기다렸다가, 그를 다시 보겠다"라고 말합니다(4절). 우리 중 많은 사람은 형제나 자매에게서 잘못되었다고 생각되는 것을 발견했을 때 기다리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고한 사람들이 벌을 받지 않도록 염려하십니다 - 옛 언약과 새 언약 모두에서
우리는 여기서 또 다른 매우 중요한 사실을 보아야 합니다: 제사장의 목표는 언제나 나병 환자를 언젠가는 건강하게 진영으로 데려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은 7일 후에 그 사람을 다시 보게 됩니다. 자신이 본 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7일 후에 다시 데려오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감염이 진행되지 않았다면, 제사장은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는 이제 깨끗합니다. 이제 그는 목욕을 하고 옷을 빨고 다시 캠프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4~6절). 그래도 정결하지 못하면, 진영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진영 밖으로 내보내어 격리시켰습니다. 틀림없이, 제사장은 며칠 후에 다시 한 번 그를 살펴볼 것입니다. 여기 제사장의 태도가 보이십니까? 그의 목표는 그 사람을 가능한 한 캠프 안에 두는 것이었습니다. 제사장은 최후의 수단으로만 그를 내보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님은 잘못을 저지른 형제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네 형제를 얻으라"(마 18:15). 그를 그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시도하십시오. 아무 것도 성공하지 못하면, 그를 내쫓으십시오(마 18:17; 고전 5:13). 그러나 그가 내쫓긴 후에도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그를 교회의 교제 안으로 다시 데려오십시오(고후 2:6-11).
불행하게도, 이것은 내가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보았던 태도와는 너무나 다릅니다. 그들은 신자들을 갈기갈기 찢을 뿐만 아니라, 끌어내리기까지 합니다. 당신이 새 언약의 지도자가 되고 싶다면, 교회 안에서 죄인을 친절과 엄함으로 대하는 방법을 배우십시오(롬 11:22).
여기 13:12,13에 놀라운 진리가 있습니다: "문둥병이 피부에 더 많이 발생하여, 그의머리부터 발까지 온 피부를 덮었으면, 제사장은 그것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피부병이온몸에퍼졌다면," - 그런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그 사람은 깨끗한가요, 부정한가요? 대답은 우리를 놀라게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깨끗하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나요? 그의 피부가 모두 하얗다면 깨끗합니다. 그러나 그 생살이 다시 나타나면, 그는 다시 부정하게 됩니다(14절). 이것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를 위한 적용은 바로 이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부패한 쓸모 없는 죄인임을 인정하고, 그에게 선한 것이 하나도 없음을 인정한다면, 그는 주님 보시기에 깨끗합니다. 그러나 그가 "아니요, 저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내 인생에 좋은 점이 좀 있습니다."라고 말하면 - 그러면 그는 부정합니다 .
성경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쓸모 없고 썩어빠진 죄인이며 지옥 불 밖에 받을 자격이 없다고 말하면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아실 것입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저는 그렇게 나쁘지 않습니다. 나는 내 삶에 좋은 점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부정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반응이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옳습니다. 내 육신(flesh)에는 선한 것이 없습니다. 나의 최선의 행동(best actions)은 부패한 동기에서 나옵니다. 나는 완전히 썩었습니다." 즉, 그가 자신을 전혀 정당화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히 깨끗한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기쁜 소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한 살인자와 음녀("그들의 온 피부가 나병으로 뒤덮인")는 주님께 용서받았지만, 독선적인 바리새인은 용서받지 못했습니다. 그 바리새인들의 생살 조각(그들의 자기 정당화)은 그들을 부정하게 만들었습니다.
14장에서 우리는 이 문둥병자의 정결에 대해 읽었습니다. 14절에 보면 놀라운 일이 나옵니다. 문둥병자가 깨끗해지면, 제사장은 속건제물(the guilt offering)의 피를 취하여, 나병환자의 오른쪽 귓불에 한 방울, 오른손 엄지에 한 방울, 오른발 엄지에 또 한 방울을 떨어뜨립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 존재의 모든 부분이 완전히 깨끗해짐을 상징합니다. 이제 레위기 8장 23절을 보면, 이것이 모세가 대제사장 아론에게도 행한 바로 그 일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즉, 대제사장에게 주어졌던 동일한 특권이, 이 문둥병자에게도 주어진 것입니다! 복음의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 이처럼 더럽고 부패한 죄인인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시는 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예수님만큼 하나님께 받아들여 진다는 것입니다! 믿을 수 없고 놀랍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입니다!
17절과 18절에는 문둥병자를 정결하게 하는 두 단계가 더 나와 있습니다. 먼저, 제사장은 앞서 피를 바르던 세 곳 곧 오른쪽 귓불, 오른쪽 엄지, 오른쪽 발가락에 기름 한 방울을 바릅니다. 이것은 성령으로 거듭남을 상징합니다. 그런 다음 제사장은 나머지 기름을, 깨끗하게 된 나병 환자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이것은 성령세례, 즉 성령이 우리에게 부어지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복음입니다: 나병에 걸린 죄인은 먼저 그리스도의 피로 머리부터 발까지 깨끗이 씻기고, 성령으로 거듭난 다음, 그 위에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바로 여기 레위기 14:17,18에서 성령의 이 두 가지 중요한 사역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그분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힘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정결함을 받은 "나병환자"인 우리는 피 한 방울과 기름 한 방울을 받는 것으로 그치지 맙시다! 또한 우리 머리에 기름 부음을 받을 수 있도록 마음을 엽시다.
이 모든 것과 더 많은 것이 레위기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지루하다고 여겼던 책이 생각보다 재미있습니다.
여기에, 우리 일상 생활에 많이 적용되는 노인에 대한 공경, 낯선 사람에 대한 배려, 점술과 주술을 거부하는 것과 같은 소소한 것들이 많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21장 16~24절에는, 아론의 자손이라 할지라도, '흠'이 있는 자는 제사장이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그의 삶에 어떤 결점("해결되지 않은 죄")이 있으면, 그는 장로나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그러한 "결함"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대표자로서 그분의 백성 앞에 서는 사람들에 대해 매우 높은 기준을 가지고 계십니다. 옛 언약 아래에서는, 그 지도자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물리적인 왕국으로 인도해야 했기 때문에 그 기준은 모두 물리적인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을 영적인 왕국으로 인도해야 하기 때문에 그러한 기준은 모두 영적인 것입니다.
일곱 절기
23장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정하신 일곱 절기에 대해 읽습니다. 우리는 레위기 초반부에 다섯 가지 제물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에게 종교가 지루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고 싶어하셨습니다. 그것은 즐겁고 신나는 것, 즉 그들이 기쁨으로 실행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그들을 위해 이 절기들(또는 축제들)을 제정하셨습니다. "축제"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 중 하나는 "춤"을 의미하는 단어 "hag"였으며,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이 하기를 기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7이라는 숫자는 의미가 있습니다. 매 일곱째 날과, 매 일곱째 달과, 매 칠년과, 칠년의 일곱번이 지난 해(50년)에도 축제의 시간이었습니다. 이 모든 절기는 매년 4월에서 10월 사이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또한 일년 중 날씨가 맑고 농부들이 밭에서 분주하지 않을 때를 정하셔서, 그들이 이 절기를 위해 모두 예루살렘으로 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모두 현실적이며 그분은 우리의 지상의 모든 필요를 배려하십니다.
다음은 일곱 절기의 목록입니다:
1. 안식일(The Sabbath): 이것은 매주, 6일간의 일이 끝날 때였습니다. 이날은 할 일이 없었습니다. 그 날은 아담이 첫 날을 하나님과 교제하며 보낸 것처럼 보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에게 가져오시는 안식을 상징합니다.
2. 유월절(The Passover-Feast): 유월절은 그들의 첫째 달 14일로, 하나님께서 어린양의 피로 그들의 조상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때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 그리스도의 피로 사탄의 왕국에서 구원받은 우리의 모습.
3. 무교절(The Feast of Unleavened Bread): 유월절 직후에 7일 동안 무교병만 먹는 절기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조상이 애굽에 두고 온 누룩이 든 빵을 생각나게 했습니다 - 우리가 회심했을 때 남겨진 우리의 옛 삶의 모습. 이것은 새 언약 아래서, 우리가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누룩 없는) 정결한 삶을 상징합니다.
4. 오순절(The Feast of Pentecost): 이 절기는 "칠칠절"이라고도 불리며, 무교절이 시작된 지 50일째 되는 날에 지켰습니다. ("Pentekoste"는 "오십 번째"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보리와 밀 추수 끝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절기였습니다. 성령 강림은 1500년이 지난 날에 일어났습니다 - 이것이 바로 이 절기가 상징하는 것입니다(행 2:1). 이 날에 유대인과 이방인이 수년 후 이 날에 하나가 될 것을 상징하는 빵 두 덩이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두 떡 모두 누룩을 넣고 소금을 뿌린 것은, 거듭난 자에게 여전히 죄가 있음을 가리킵니다(누룩).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과 영원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소금).
5. 나팔절(The Feast of Trumpets): 일곱째 달 초에 기념하는 절기였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나팔을 불어, 사람들을 모아 경배하게 하고, 전쟁을 하게 하였으며, 때때로 광야에서 옮겨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쁨을 표현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축제의 시간이었습니다. 이 절기는 마지막 나팔이 울리고 여호와께서 그분의 백성을 위해 다시 오시는 날을 상징합니다.
6. 속죄일(The Day of Atonement): 이 날은 일년 중 가장 중요한 날이었습니다. 이날은 대제사장이 성막 안의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날이었습니다. 그는 이날을 고대했고, 그것에 대비하기 위해 많은 시간 동안 자신을 준비했습니다. 그는 그 해의 이 날에만 하얀 옷을 입었습니다. 속죄소에서, 그는 이스라엘 민족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희생 제물의 피를 제단 위에 바쳤습니다. 이 절기는 갈보리에서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 우리 죄를 위하여 자신을 바치신 대속죄의 날을 고대하는 것입니다.
7. 장막절(The Feast of Tabernacles): 이 절기는 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작은 초막에서 7일 동안 살면서 그들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어떻게 방황했는지를 스스로 상기시키는 "초막절"이라고도 불렸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지금 살고 있는 좋은 집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를 표했습니다. 우리 좋은 집에 있는 작은 문제에 대해 불평하지 않도록 매년마다 일주일 동안 그렇게 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 절기는 예수님이 왕으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 일곱 절기 중 모든 남자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했던 가장 중요한 절기는 무교절과 오순절과 초막절이었습니다(신 16:16).
이 절기들 외에도 다른 많은 안식일이 있었습니다. 일곱째 해가 되면, 그 땅은 안식년이 됩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 자손은 밭에 씨를 뿌리거나 포도원의 가지치기를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레 25:4). 주님은, 만일 그들이 이 법을 어기면 원수들이 그들을 노예로 삼는 것을 허용함으로써 그들을 처벌할 것이라고, 그들에게 경고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땅은 그 기간 동안 안식을 누렸습니다(26:34,35)! 이스라엘 백성들은 490년 동안 하나님의 이 명령에 불순종했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땅이 70년 동안 안식일 명령을 지키도록 하기 위해 정확히 70년 동안 그들을 바벨론으로 포로로 보내셨습니다(대하 36:20,21)!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결과를 겪게 될 것입니다.
27장에는 자발적으로 주님께 예물을 바치거나, 그분께 특별한 서원을 하거나, 무엇을 주님께 바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지침이 주어집니다(2절). 지금까지 레위기에서,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분께 특정한 제물을 바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것들은 의무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또한 그들에게,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의지의 헌물을 드릴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집을 주님께 드리거나(14절), 조상의 재산 중 일부(16절), 그들이 산 밭(22절), 또는 그의 가축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만일, 그들이 이것들 중 어떤 것이든 되찾고자 한다면, 주님은 이것이 어떻게 행해져야 하는지에 대한 지시를 주셨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되찾기 위해 보통 그것의 가치보다 20% 더 지불해야 했습니다(15,19,27,31절).
책의 마지막 세 구절(27:32~34)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탐욕에서 구해내는 흥미로운 내용을 읽습니다. 그들의 소 떼와 양 떼의 십분의 일을 여호와께 드려야 했습니다. 그들은 짐승을 제사장 앞에서, 한 마리씩, 막대기 아래로 지나가게 해야 했습니다. 열 번째 동물마다 여호와께 바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열 번째 동물이 정말 좋고 살찐 동물이라면, 다른 병든 동물과 교환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동물을 하나씩 세었을 때, 10번은 좋든 나쁘든 주님의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일에서 냉정하고 계산적이며 인색하지 않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고 기쁨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주셨던 것보다 더 많이 그들에게 되돌려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방황과 전쟁
이것은 모세가 기록한 네 번째 책으로, 이스라엘의 광야에서의 방황과 전쟁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책을 민수기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두 번 계수되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20세 이상의 이스라엘 백성의 인구를 조사했습니다(민 1:3) - 전쟁에 나갈 수 있었던 모든 사람. 그들은 여행을 시작할 때 한 번, 그리고 40년 동안의 방황이 끝날 무렵에 한 번 가족의 인구 조사를 했습니다(26장).
질서와 조직
2장에는 이스라엘 진영이 배치된 순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며,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에게 가르치신 규율과 질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셨을 때 그들은 애굽에서 전혀 훈련되지 않은 노예 무리였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그분은 그들에게 질서와 청결과 규율을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그들의 삶이나 가정에서 깨끗함이나 질서에 대한 감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들이 시간이나 돈을 쓰는 방식에는 규율이 없습니다.
그러한 모든 문제는 우리의 영적 성장에 영향을 미칩니다. 당신이 어떤 성령의 체험을 하였더라도, 삶의 규율이 없으면 결코 경건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민수기에서 읽은 세부 사항에서 그 질서의 중요성을 봅니다.
우리 삶에 훈련이 부족하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지 않기 때문에 무지합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무지합니다, 그들은 그것을 연구하기 위해 스스로 훈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매일, 특히 젊은 시절에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기 위해 애쓰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알 수 없습니다.
7장에서, 예를 들어, 지도자들의 제물에 대한 세부 사항이 제공되는 곳에는 많은 세부 사항이 주어집니다: 은 접시의 무게가 얼마인지와 은 그릇의 무게가 얼마인지입니다. 반복되는 내용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드리는 작은 것 하나하나에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10명의 다른 사람들이 정확히 같은 것을 드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각 사람이 하나님께 소중하기 때문에, 각 사람이 따로 드린 것을 기록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그분은 각 개인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세상에서는, 자신이 수백만 명 중 한 명일 뿐이라고 느끼며, 길을 잃기 쉽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각 개인을 특별하게 보신다는 사실에 의해 격려를 받으십시오.
민수기 3:40,41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일 개월 이상으로 모든 처음 태어난 남자의 수를 세라고 명하셨다는 것을 읽습니다. 그 이유는 이 모든 맏아들은 이집트에서 죽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자비로 인해 피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여기에서 "나를 위해, 장자를 대신하여 레위인을 구별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 중 모든 처음 난 것을 대신하여 레위인의 가축을 구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모든 맏아들을 계수하니 그들의 수가 22,273명이었습니다(43절). 그가 레위인의 수를 세었더니 겨우 22,000명이었습니다. 나머지 장자 273명에 대해서는, 속전의 값을 지불해야 했습니다(46,47절).
그래서 레위인들은 여호와께 속해야 할 장자를 대신했습니다. 레위인은 여호와께 속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이 땅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나는 너희의 기업이다"(민 18:20). 그들은 전적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에 바쳐져야 했습니다.
4장: 여기서 우리는 성막에서 책임을 맡은 레위 자손에 대해 읽습니다. 레위는 성막에서 봉사할 자신의 아들들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택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섬기기 위해 우리 자녀를 선택하실 수 있으시지만,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녀가 특정한 형태의 봉사를 통해 주님을 섬기기를 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이 그것을 위해 그들을 선택하고, 그들을 개별적으로 부르셔야 합니다. "레위 자손은 이러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씀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레위에게는 고핫, 게르손, 므라리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앞에서 우리는 아론의 아들들인, 나답과 아비후가 어떻게 이상한 불을 드리다가 죽임을 당했는지 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성막과 관련하여 놀라운 특권을 가졌을 것이지만, 그들은 그것을 놓쳤습니다. 고핫, 게르손과 므라리의 자손은 성막을 옮기는 일을 맡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이동에 있어서 가장 성스러운 일이 이 세 가문에게 주어졌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윗 시대에) 웃사가 언약궤가 떨어지는 줄 알고 만졌을 때 하나님은 그를 죽였습니다 - 단지 그가 레위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언약궤를 만질 권리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교회에서 우리에게 책임을 주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그것을 건드리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들이 다른 교회를 비판하는 소리를 들으면, 나는 그들에게 말합니다, "당신은 하나님 백성의 예언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것은 당신의 일이 아닙니다. 그 사역은 그 예언자들과 장로들에게 맡기십시오." 그와 같이, 다른 사람의 자녀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나는 "당신이 그들의 아버지입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자신의 일에 마음을 쓰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자녀를 비판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지도록 허락하지 않으신 것을 만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약궤를 만질 권리가 없는 웃사와 같은 것입니다. 법궤는 특정한 사람들만 다룰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여기서 보는 것입니다.
이 세 가족에게도 각각 특정한 임무가 주어졌습니다(4:4,24,33).
7:2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주님께 제물을 바쳤다는 것을 읽습니다. 모든 지도자들과 그들의 제물이 이 목록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3절에서 우리는 그들이 성막 기구들을 옮기기 위하여, "덮개가 있는 수레 여섯 대와 소 열두 마리"를 가져왔다고 읽습니다. 고핫, 게르손, 므라리 세 가족이 6대의 수레를 나누면, 각 가족이 2대의 수레를 받아야 합니다. 소 12마리를 3가족으로 나누면, 각 가족은 소 4마리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모세가 그것들을 어떻게 나누는지 보십시오. 우리는 모세가 게르손 자손들에게 그들의 봉사를 위하여 수레 두 대와 소 네 마리를 주었다는 것을 읽습니다(7절). 그리고 므라리 자손들에게 수레 네 대와 소 여덟 마리를 주었습니다(8절). 또 고핫 자손에게는 수레나 소를 주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궤를 어깨에 메어야 하였기 때문입니다(9절).
고핫 사람들은 "하나님이 므라리 사람에게는 수레 네 대를 주셨으나, 우리에게는 하나도 주지 아니하셨다"고 말하기 쉬웠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 중 일부에게는 자동차를, 다른 자녀들에게는 자전거만 주기로 선택하신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자전거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의심하고, 불평하고, 그들의 형제가 가진 것을 탐내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며, 결코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하십니다. 민수기 중간에 숨겨진 이 귀한 구절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은 네 대의 차를 가지고 있고 우리 자신은 한 대도 없는 것을 볼 때, 불평에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메시지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구약성경 책들이 오늘날 우리의 문제와 얼마나 관련이 있나요!
각종 법률
민수기 5장 2절에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모든 나병 환자와 유출병 있는 모든 자와 주검으로 인하여 부정한 자를 진영에서 내보내라"고 했습니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출애굽기 15장 26절에서 주님께서 "나 여호와는 너희를 치료하는 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플 때마다 주님께 기도하고 치유를 받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그리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고침을 받지 못하고 진영 밖으로 쫓겨난 문둥병자들에 대해 읽었습니다. 말씀은 오늘날 일부 설교자들이 "나병환자들에게 여호와를 그들의 치료자로 신뢰하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치유 되기를 명령한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아니요! 그들은 진영 밖에 있어야 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고쳐 주실 수 있었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그들을 진영 밖으로 내보내라고 명령했습니다.
우리는 신체적 치유에 대해 이야기할 때 정직하고 현실적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많은 연약한 신자들을 정죄와 속박아래로 끌어들일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교리적인 틀 안에 가두고 이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을 치유하십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병에 걸릴 필요가 없습니다. 병든 사람들은, 믿음이 없기 때문에 병든 채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 비현실적인 입장을 취한 사람들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더라면 나을 수 있었던 많은 성도들을 결국 죽게 만들었습니다. 계시보다 논리에 따라 사는 비현실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어리석음을 행합니다.
레위기 13, 14장에, 나병환자를 정결케 하는 법이 있었습니다. 그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 명령하며 이렇게 말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 당신은 우리의 치유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주여, 이 나병환자를 고쳐주소서. 우리는 그를 진영 밖에 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를 진 밖에 내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자신을 낮추고, 주님만이 아시는 어떤 타당한 이유 때문에 주님께서 치유하지 않으시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문둥병자가 많았으나, 그들 중한사람도고침을받지못했다"(눅 4:27) - 하나님께서 "나는 너희를 고치는 자니라"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현실적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좋아하는 구절 하나, 저기서 좋아하는 구절 하나에 집중하는 사람들은 길을 잃게 됩니다. 우리가 타락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타락하게 하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데 전념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알지 못하는 지도자들에게 미혹되어 고통 당하는 것을 볼 때 마음이 아픕니다.
민수기 5:6-8에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저질렀을 때 배상하는 일에 대하여, "그는 자기의 잘못에 대해 전액 배상하고, 거기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줄 것이다." 이것은 상대방이 그 기간 동안 자신의 돈에 대해 잃었던 이자를 보상해주는 정의입니다.. 배상이 수년 후에 이루어진다면, 분명히 20%보다 더 높은 비율이 추가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총명한 회계사였던) 삭개오가 자기가 남에게서 잘못 받은 것은 네 배로 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재빨리 암산을 했고 1년 된 부채에 대해 20%를 추가해야 한다면 8년 된 부채(복리)에 대해 300% 이상을 추가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이 의롭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삭개오가 그것을 갚는 것을 막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침례를 받은 직후(1961년), 주님께서 저에게 처음으로 말씀하신 것 중 하나는 과거에 세금을 속인 것에 대해 정부에 배상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금액을 계산할 때, 내가 빚진 정확한 금액을 알 수 없었고, 마음속으로 두 가지 금액을 고려하고 있었는데 하나는 다른 것보다 20% 더 많은 금액이었습니다. 나는 마침내 더 낮은 금액을 지불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 문제에서, 우리는 항상 우리에게 유리한 결정을 내리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당시 나는 민수기에서 이 구절을 읽은 적이 없었습니다. 적은 금액을 낼까 생각하던 중, 성경을 읽다가 이 구절을 보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제 질문에 "20%를 더해 그것을 돌려주어라"라는 직접적인 답을 주셨습니다!! 의심이 든다면, 배상으로 더 적게 주는 것보다 더 많이 주는 것이 항상 더 좋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날에 깨끗한 양심을 갖는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나는, 내 은행 계좌에 그 여분의 20%가 있고 주님을 만날 준비가 되지 않은 채로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5장 11-31절: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떻게 신실하지 않은 아내의 죄를 폭로하는지 읽었습니다. 한 남자의 아내가 간음을 범했다면, 제사장이 그녀에게 성막 바닥의 티끌이 섞인 물을 마시게 했을 때, 하나님은 그녀의 배가 붓고 넓적다리를 썩게 하여 그 사실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면, 그 여자가 은밀히 한 일이 드러날 것입니다. 사도행전 5장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은밀히 행한 일을 하나님께서 나타내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새 언약 아래서 죄는 "거룩한 물"이 아닌 성령으로, 하나님에 의해 드러난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성령의 분별을 통해 초자연적으로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드러냈습니다. 기독교 지도자들이 사람들의 진정한 영적 상태를 볼 수 있도록, 영적 분별력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민수기 6:1-21은 나실인 서약을 다룹니다. (이것은 '나사렛'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하십시오. 나사렛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렛에 살았기 때문에 - 나실인이 아니라 -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렸습니다 - 마 2:23).
나실인은 일정 기간 동안 여호와께만 헌신하겠다고 자발적으로 서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머리를 자르거나 포도즙이나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삼손은 평생 나실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서 삼손이 힘을 잃을 수 있었던 두 가지 방법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머리를 자르거나, 포도즙이나 포도주를 마시는 것입니다. 그의 힘은 그의 머리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헌신에 있었습니다 - 그것은 그의 머리를 자르지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둘 중 어느 하나라도 그가 힘을 잃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실인이 아니셨기 때문에, 머리를 깎고 포도주를 마셨습니다.
6장 22~27절에서 우리는 아론이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하라는 명령을 받은 축복을 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옛 언약 아래 있는 자들에게 주실 수 있었던 가장 큰 축복이었습니다 - 단지 건강과 부귀가 아니었습니다. 그 이상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아론에게 "주님께서 당신들에게 많은 돈과 건강으로 축복하시기를 빕니다." 라고 축복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니요. 축복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 모든 악에서 너를 지켜주시기를 원합니다.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취사" - 그분의 영광이 네게 빛을 비추시기를 원합니다.
"여호와께서 네게 은혜를 베푸시기를 원하노라" - 그분이 너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모든 죄를 용서하시기를 원합니다.
"여호와께서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 그분이 너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여호와께서 네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 네가 평안한 마음, 평안한 삶, 평안한 가정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이것보다, 그들이 얻을 수 있는 더 큰 것은 없었습니다.
방황과 원망
9장 15~23절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어떻게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그분의 백성을 인도하셨는지 읽습니다. 구름은 그 뜨거운 사막에서 태양으로부터 그늘을 제공했고, 불은 밤에 그들에게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구름이 떠오르면 행진하고, 구름이 멈추면 진을 쳤습니다. 때로는 구름이 며칠 동안 머물기도 하고 때로는 몇 달 동안 머물기도 했습니다(19,22절). 구름이 하룻밤만 머문다면, 아침에 구름이 떠오를 때 그들은 계속 나아갈 것입니다(21절). 그들은 저녁에 정착하고 아침에 움직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의 실질적인 불편함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에는 어린 자녀, 텐트, 동물과 함께 여행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 저녁 늦게 구름이 멈출 때, 그들은 천막을 쳐야 했습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텐트를 치는 데 몇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이튿날 아침 새벽에, 그들은 구름이 다시 떠오른다는 외침이 진영에 울려 퍼지는 것을 들었습니다. 나는 캠프 전체를 휩쓸었던 짜증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것을 싸서 다시 움직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그들에게 인내를 배우고 순간순간 그분께 순종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의 참된 종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불편한 일을 하라고 말씀하실 때 결코 불평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어딘가로 가라고 말씀하신 다음 돌아오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그는 하늘의 천사들처럼, 순간적으로 순종합니다.
여기 기둥은 성령의 그림입니다. 당신은 성령으로 거듭나고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수 있지만, 일상 생활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롬 8:14).
자녀와 아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아들은 성숙하고 성장합니다. 매일의 삶에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자가 아들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진영에서 들리는 그 어떤 원망과 불평에 대해 매우 엄격하셨습니다. 광야에서 원망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멸망시키는 자에 의해 멸망되었습니다"(고전 10:10). 그리고 다음 구절에서 우리는 이것이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라는 경고로 기록되었다고 말합니다(고전 10:11). 우리는 "모든 일을 원망과 불평 없이"(빌 2:14) 사는 삶을 살면서 투덜거림과 불평이 가득한 세상에서 빛으로 빛납니다.
원망과 불평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40년 동안 방황하는 동안의 특징이었으며, 그런 사람은 아직 가나안 땅(승리의 삶)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입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는 기독교 지도자는 결코 다른 사람을 승리의 삶으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광야 방황"을 끝냈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 중 하나는 우리가 가정과 다른 곳에서 원망과 불평을 그치고, 범사에 감사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살전 5:18; 엡 5:20).
12장에서 우리는 지도자들의 투덜거림과 불평에 대해 읽었습니다: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가 결혼한 여자에 대해 모세를 비난했습니다. 사실, 이것은 그들이 모세의 사역을 시기했기 때문입니다. 아론은 모세보다 3살, 미리암은 12살이 많았는데,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동생을 이스라엘의 예언자이자 지도자로 사용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당신보다 어린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세상에서 가장 겸손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선택하셨습니다(3절). 그 구절은 모세가 자신에 대해 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삽입어구(괄호) 안에 있습니다. 그것은 나중에 추가되었습니다 - 아마도 여호수아에 의해. 그들이 모세에게서 비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가 비유대인과 결혼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여호와께서 들으셨다"(2절)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그분의 기름부음 받은 종들을 비방할 때마다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불러내어 이르시되 나 여호와가 선지자들에게는 환상과 꿈으로 말씀하셨지만, 모세에게는 사람이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직접 대면하여 말씀하셨다고 하셨습니다(6~8절; 출 33:11).
여기서 주님은 우리에게 직접 대면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환상이나 꿈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신자들은, 환상과 꿈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주님께서 마음에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사람보다 더 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상적인 일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은 단순한 환상과 꿈보다 훨씬 뛰어납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종을 비판한 미리암과 아론에게 진노하셨습니다. 구름이 장막에서 떠나갔고 미리암이 갑자기 문둥병이 들었습니다(10절). 그리고 그녀가 비난한 모세는 그녀의 치유를 위해 기도해야 했습니다. 성경은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새 언약의 명령이지, 옛 언약의 명령이 아닙니다. 그러나 모세는 옛 언약 시대에 살았던 새 언약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놀라운 사람이었습니다. 이 새 언약 시대에 옛 언약의 기준에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것처럼, 옛 언약 아래서도 새 언약 원칙에 따라 살았던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은혜(새 언약) 아래 있는 자마다 그들의 삶에서 죄를 이기리라 하신 것은(롬 6:14), 죄를 이기지 못한 자는 옛 언약 아래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 그리고 대부분의 신자들은 그들의 삶에서 죄에 의해 패배합니다.
주님은 미리암이 교훈을 배우도록 7일 동안 진영 밖에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15절).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할 것이며 스스로 그런 일을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역하는 자를 본으로 보이사 다른 사람이 두려워하게 하십니다. 미리엄은 교훈을 얻고 다시 진영으로 돌아왔습니다 - 다시는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에도 불구하고, 진영의 다른 많은 사람들은 교훈을 얻지 못했으며 -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루겠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반역
13장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그들에게 약속하신 땅인 가나안 경계에 있는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렀음을 발견합니다. 그들이 애굽을 떠난 지 이제 2년이 되었고(신 2:14),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들어가서 그 땅을 소유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땅을 정탐하기 위해 12명의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열둘이 다 돌아와서 그 땅이 참으로 아름다운 땅이라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10명은 "그러나 거기에는 거대한 거인들이 있고 우리는 그들을 정복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갈렙과 여호수아 두 사람은 "주님께서 우리가 그 큰 거인들을 이기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60만 이스라엘 백성은 대다수의 말을 들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우선, 다수를 따르는 것은 위험합니다. 다수는 항상 틀리기 때문입니다. "생명에 이르는 길은 좁아서 찾는 사람이 거의 없다"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대다수는 여전히 멸망의 넓은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수를 따른다면, 멸망에 이르는 넓은 길에서 반드시 그들과 함께하게 될 것입니다. 큰 교회가 영적인 교회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교회는 교인이 11명뿐이었습니다.
열 명의 지도자가 한 말을 하고 두 사람이 정반대라고 하면, 당신은 누구 편을 들겠습니까? 하나님은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 편에 계셨습니다. 불신과 사탄은 다른 열 사람 편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리석게도 다수를 따랐습니다 - 그래서 그들은 38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누구 편인지 분별력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한 사람을 더한 숫자는 모든 사람을 상대로 다수가 됩니다 - 그래서 저는 항상 하나님과 함께 서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출애굽기 32장에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숭배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모세 한 사람 편에 계심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열 두 지파 중에, 오직 레위 지파만이 그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갈렙과 함께 하셨을 때, 심지어 레위 지파도 그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교훈이 됩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계는 타협과 세속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여기 저기서, 하나님은 조금도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옹호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일으키십니다. 당신에게 분별력이 있다면, 하나님이 그 소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들과 함께 다수에 대항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약속의 땅에 들어갈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을 어떻게 식별합니까? 그는 믿음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의 언어로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분노, 성적 욕망, 시기, 원망, 돈을 사랑하는 거인들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탄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탄을 우리 발 아래에서 짓밟으실 것입니다" - 이것이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의 언어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지 않은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결국, 우리는 인간일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끝날 때까지 패배할 것입니다. 인간의 심리를 이해해야 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인간 심리"에 관심이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인간적인 논리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길을 잃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진리를 슬기로운 자와 총명한 자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셨습니다. 당신이 성경을 연구하기 위해 인간적인 논리와 영리함을 사용한다면, 나는 당신이 길을 잃게 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의 계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말리엘과 같은 교수나 그의 제자들이 아닌, 어부들을 그분의 제자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분은 나중에 가말리엘의 제자 중 한 명인 바울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울이 계시를 받기 전에, 그의 모든 교만을 없애기 위해 3년 동안 광야로 데려가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능력을 의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노하셔서 "내가 그 앞에서 이 모든 표적을 행한 이 백성은 모두 결단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나를열번 시험한 이 백성은 다 망하리라"(민 14:2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0번"은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열 번 반역했습니다. 다음은 그들의 열 가지 반역의 목록입니다:
1. 애굽 사람들이 홍해에서 그들을 추격했을 때(출 14:11).
2. 마라의 물이 썼을 때(출 15:24).
3. 신 광야에서 빵이 없었을 때(출 16:2,3).
4. 만나를 밤새 보관했을 때(출 16:20).
5. 안식일에 만나를 구하러 나갔을 때(출 16:27,28).
6. 르비딤에서 마실 물이 없을 때(출 17:3).
7. 금송아지를 숭배할 때(출 32장).
8. 다베라에서 원망할 때(민 11:1).
9. 고기를 달라 할 때(민 11:4,33).
10.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기를 거절했을 때(민 13장).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홉 번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들은 아홉 번째 기회가 그들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하는 것처럼 - 그분의 용서를 이용했습니다. 하나님의 참으심이 다하여, 그들이 열 번째 반역하였을 때 벌을 받았습니다. 그때로 돌아갈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형벌을 들었을 때 회개하고,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너무 늦었습니다(민 14:39-45). 많은 성도들이 언젠가는 승리의 삶에 들어갈 기회도 영원히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16장에서 우리는 고라와 그들의 동료 반역자들의 반역에 대해 읽습니다. 누군가는 고라, 다단, 아비람은 미리암이 모세에 대한 반역으로 진영 밖에 7일 동안 갇혔을 때 교훈을 얻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현명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실수에서 배웁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도 같은 실수를 저지릅니다. 대부분의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은 미리암의 예에서 교훈을 얻었지만, 고라, 다단, 아비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고라, 다단, 아비람을 살아있는 채로 지옥에 보내심으로써 형벌을 내리셨습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채로 천국에 간 두 사람에 대해 읽었습니다. - 에녹과 엘리야. 여기서 우리는 살아서 지옥에 간 유일한 사람들에 대해 읽습니다.
처음에 모세에게 반역한 네 사람이 있었습니다 - 고라, 다단, 아비람, 온(민 16:1). 모세는 그들에게 다음날 아침에 다시 오라고 말했습니다(5절). 하룻밤 사이에 이 네 명 중 한 명인 온(On)이 정신을 차리고 회개하고 물러났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가족도 파멸에서 구했습니다. 모세가 다단과 아비람을 불러 그들에게 비공개적으로 경고하려 했지만 그들은 만나기를 거절하였습니다(12절). 모세를 만나기를 거부하는 그들의 교만과 오만이 그들의 운명과 가족의 운명을 결정지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이 세 사람은 그들의 반역적인 태도에 변함이 없이 모세에게 왔습니다(24절).
여호와께서는 백성들에게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장막에서 물러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그리고 백성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흥미로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 그것은 여기 16장에 기록되지 않고, 26장 11절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고라의 아들들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읽었습니다. 그들은 장성한 아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처음에 모세에 대한 반역에서, 아버지와 함께 장막 밖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반역자들의 장막에서 물러나라고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을 때, 이 고라의 아들들은 순종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빠, 우리는 당신 편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세와 함께 서겠습니다." - 그리고 그들은 모세의 곁으로 달려갔습니다. 때때로 자녀들은 부모보다 더 분별력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지옥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반역자들의 죽음에 대해 모세를 비난했고, 그래서 그날 또 다른 14,700명의 사람들이 지옥에서 반역자들과 합류했습니다(16:41-49). 경건한 사람에게 반역하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매우 심각한 일입니다. 그것은 죽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반항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 그것은 때때로 필요할 수 있습니다!
(죽음을 피한) 고라의 아들들의 후손들은, 다윗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의 노래 지도자였습니다. 그들은 시편 42~49편과 시편 84편 등을 쓴 사람들입니다. 시편 46편 2,3절은 땅이 열리고 산들이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며, 그럴 때 하나님이 그들의 피난처가 되신다고 말합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들은 그들의 시대에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살아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아버지로부터 마지막 순간 탈출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다음 시편 84:10에서 그들은 이렇게 썼습니다, "악인의 장막(그들의 아버지 고라의 장막! 그것이 바로 그 의미입니다)에 거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집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이러한 고라 자손의 시편은 저자의 배경을 이해할 때 우리에게 더욱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아론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신 분이 바로 그분 자신임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단번에 증명하기 원하셨습니다 - 왜냐하면 고라와 일행이 의심하고 탐내던 것은 제사장 직분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12지파의 지도자들에게 지팡이 하나씩을 가져오라고 지시하셨습니다(민 17). 그들은 나무에서 가지를 꺾어 가져가야 했습니다. 아론은 또한 레위 지파를 대표하는, 하나를 가져와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모든 가지를 장막 안에 두라고 하셨고, 아침에 그분이 인정하신 한 가지가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침에 그들은 아론의 지팡이에 싹이 나고, 죽은 꺾인 가지에서 열매가 맺는 것을 보았습니다(8절). 그리하여 주님께서는 그분이 택하신 사람에 대한 논쟁을 끝내셨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택하신 종을 부활의 원리로 식별하시는 방법입니다 - 죽은 가지에서 생명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영적 죽음의 한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종들을 살아 있게 보존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변에 있는 기독교 집단의 영적 죽음에 삼켜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론의 지팡이처럼, 죽음 가운데서도 열매를 맺습니다. 그들의 기름 부음은 항상 신선한 과일처럼 신선합니다. 사역에 있어 한결같은 신선함은 요즘 누구에게서도 찾아보기 힘들지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름 부으시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아론의 지팡이는 광야 여행 내내 신선함을 유지했습니다.
우리는 18장 20절에서, 주님이 아론에게 "네가 약속의 땅에 갈 때, 그곳에서 유산을 얻지 못할 것이다. 나는 너의 몫이며 너의 유산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아름다운 구절을 발견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집이나 땅을 소유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거기에 집착하면, 당신은 결코 주님의 종이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을 섬기고 싶다면, 이 땅의 모든 것에 대한 태도가 "여기에 이런 것들(집, 자동차, 스쿠터 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 그러나 나는 이러한 것들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나의 분깃(몫)이시며 나의 기업(유산)이십니다. 다른 것들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언제든지 가져가실 수 있습니다."
모세가 벌을 받다
20장에서, 우리는 모세가 단 한 번의 불순종 행위로 인해 형벌을 받는 것을 읽습니다. 모세가 실수하여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은 이때뿐이었습니다. 모든 일에 신실하게 하나님께 순종하던 그가 인생의 마지막에 한 가지 실수를 저질렀고 -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게 되면서 그 대가를 치렀습니다. 사람들이 물을 달라고 울부짖은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습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반석을 치지 말고, 그 반석에게 말하라고 하셨습니다(8절). 반석(출애굽기 17장)은 십자가에서 단 한 번만 치심을 받아야 했던 그리스도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 후, 우리는 그 한 번의 치심의 혜택을 얻기 위해서, 그에게 말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모세는 화가 나서 반석을 두 번 쳤습니다. 주님은 즉시 모세에게 그가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20:12).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홉 번의 기회를 주셨고, 열 번째 반역했을 때만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에게는 기회가 한 번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실패했을 때, 그는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거절당했습니다. 왜일까요? 하나님은 일반 신자보다 지도자에게 더 많은 것을 기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많이 받은 사람에게는, 더 많은 것이 요구됩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간청했습니다. 40년 동안 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갈망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땅의 경계에서 그는 입국이 거부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뜻을 굽히지 않으셨습니다. 모세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할 때마다, 하나님은 언제나 마음을 돌이키셨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자신을 위해 기도할 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자신을 낮추고 형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선하셨습니다. 1500년 후, 하나님께서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도록 허락하셨고, 그때 그가 변화산에서 주님과 함께 섰습니다! 모세가 약속의 땅에 섰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역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들어갈 때보다 훨씬 더 좋은 가나안 입성을 허락하심으로 당신의 종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신뢰했다면, 그때에도, 하나님이 그를 위해 좋은 일을 계획하셨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사랑으로 우리를 위하여 조용히 계획"하십니다(습 3:17 - 의역). 그러나 당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공개적으로 벌하셔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종들의 불순종에 대해 엄격하다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불순종했을 때 물이 흐르게 되었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불순종할 때에도, 그의 사역에서 축복이 흘러나올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증명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그 사람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않아요. 그것은 단지 하나님께서 그분의 종들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축복하실 정도로 사람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증명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셔서, 그 날 물이 흐르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육욕적인(carnal) 종의 사역에서 흘러나오는 축복을 볼 때,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종을 인정하신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다루신 것처럼, 나중에 그 종도 다루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아와,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예언하였고, 주의 이름으로 병든 자를 고쳤나이다"라고 말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모든 것이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고침을 받고 축복을 받았으며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여전히 그 설교자들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는 거룩한 삶을 살지 않았으니 나를 떠나라. 너는 죄 가운데 살았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육욕적이고 불순종하는 설교자들도 사용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봅니다.
21장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독사를 그들 가운데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을 벌하신 때를 읽습니다. 백성들이 부르짖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뱀 형상을 놋으로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라고 하셨습니다. 물린 자마다 이 놋뱀을 쳐다보면 고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이것이 그분이 죽기 위해 들어 올려진 십자가의 그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3:14). 우리는 모두 옛 뱀 사탄에게 물렸고 그의 독이 우리 조직에 흐르고 있으며 우리를 영적으로 죽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용서뿐만 아니라 우리 몸에 흐르는 이 독의 악한 영향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면, 우리는 완전히 치유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자유롭게 될 수 있습니다.
발람-경고
22-24장에서, 우리는 발람의 이야기를 읽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문제에 관한 중요한 구절이 있습니다. 발락 왕이 선지자 발람에게 와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청했을 때, 발람은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분명히 발람에게 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발락 왕은 만약 그가 오면 더 많은 영예와 더 많은 돈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발람은 다시 하나님의 뜻을 구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끝을 처음부터 아시는 하나님께서 가지 말라고 이미 말씀하셨는데, 두 번째로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러나 그는 돈과 명예를 얻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성경은 발람이 "불의의 삯을 사랑했다"(벧후 2:15)고 말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찾다가 하나님께서 당신이 어딘가에 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당신의 영 안에서 매우 분명하게 느끼는 상황에 처할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 당신은 그곳의 월급이 매우 매력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다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됩니다!! 앞으로 그런 유혹을 받을 때마다 발람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급여가 더 매력적이거나 명예가 더 크다고 해서 그분의 마음을 바꾸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어떤 길을 가고자 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시면, 하나님은 그를 막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은 그를 놓아줄 것입니다. 이것이 발람이 두 번째로 요청했을 때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가라고 하신 이유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온전한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발람의 자유 의지를 무시하고 그를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은 발람이 정말로 가고 싶어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탕자의 아버지가, 아들이 먼 나라에 가는 것을 허용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셨고 결코 우리의 자유 의지를 무시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발람을 막기 위해, 그분의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발람 자신은 천사를 볼 수 없었지만, 그의 당나귀는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습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이 돈을 사랑하여 눈이 멀면, 심지어 당나귀도 그보다, 영적인 것을 더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그 당나귀는 돈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천사를 똑똑히 볼 수 있었습니다! 발람은 돈을 사랑했기 때문에, 볼 수 없었습니다. 발람은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언했습니다(민 24:2,17). 그러나 그는 돈을 사랑하여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 당나귀가 주인에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방언으로 말하는 것"의 첫 번째 사례입니다 - 당나귀가 결코 배운적이 없는 언어인 외국어를 유창하게 말하는 것! 그것은 초자연적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틀림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방언을 말하는 첫 번째 사례에서 방언을 말한다고 해서 사람을 영적으로 만들지 않는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 그 당나귀는 방언을 한 후에도, 혀를 통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체험한 후에도, 여전히 어리석은 당나귀로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항상 그것을 기억하세요.
그러자 발람은 모압 사람들에게 교묘한 전술을 제안했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멸망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의 하나님 자신이 그들을 대적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등지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을 부도덕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쁜 딸들을 이스라엘 진영으로 보내서 이스라엘 남자들을 유혹하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부도덕에 빠졌을 뿐만 아니라 이 모압 소녀들이 이스라엘 진영으로 가져온 우상 숭배에도 빠졌습니다(민 25:1과 계 2:14 참조). 그리고 당연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엄하게 벌하셨습니다. 전염병으로 24,000명이 죽었습니다(민 25:9). 이것이 오늘날에도 사탄이 신자들을 오염시킨 방식입니다. 발람에게서 사탄의 간계를 배우고 깨어 있읍시다.
전염병이 이스라엘 진영에 퍼지기 시작하여 백성이 파리 같이 죽어갈 때에,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 한 사람의 열심이 아니었더라면, 발람의 책략으로 온 민족이 그곳에서 멸망하였을 것입니다(민 25:9 이후 참조). 비느하스는 창을 가지고 장막으로 들어가, 남자와 그가 장막으로 데려온 미디안 여인을 죽였습니다. 그것은 전염병을 멈췄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위한 그의 열심 때문에, 하나님은 그의 후손이 이스라엘에서 영원히 제사장이 될 것이라고 비느하스와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하고 그로 인해 인기가 없어질지라도 그분을 위해 담대히 서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존중하십니다.
26장에서 우리는 두 번째 인구 조사에 대해 읽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들을 가데스바네아로 다시 데려오셔서 그들에게 약속의 땅에 들어갈 두 번째 기회를 주신 하나님의 끈질김을 봅니다. 그분은 두 번째 기회의 하나님입니다. 이것은 실패한 사람들에게 큰 격려가 됩니다. 사실, 그분은 백만번의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거듭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승리의 삶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얼마든지 주십니다.
27장 15~23절에, 모세가 주님께,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자신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할 사람을 임명해 달라고 간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모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백성의 리더십을 그들에게 넘겨주지 않았습니다 - 오늘날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하는 것처럼.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왕조를 시작하는 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구했고, 하나님은 여호수아("성령이 그 안에 있는 사람" - 18절)를 이스라엘의 차기 지도자로 임명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즉시 그렇게 했습니다.
28장과 29장에는 제물에 관한 더 많은 법이 있습니다. 그리고 30장에는 서원에 관한 법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을 읽습니다 - 아버지는 딸이 어리석게 한 서약을 취소할 수 있고 남편은 아내가 한 어리석은 서약을 취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남편이 서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그 서원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우리가 아버지로서의 권위를 행사하여 자녀가 미련한 길을 가지 않게 하고, 남편으로서 가정의 머리가 되어 아내가 어떤 어리석음으로 가정을 미혹하지 않게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32장에서, 우리는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의 타협에 대해 읽습니다. 그들은 소를 엄청나게 많이 키웠기 때문에, 소 떼를 위한 좋은 목초지를 끊임없이 찾아다녔습니다. 그들은 요단 동편 길르앗의 좋은 땅(가나안 안이 아님)을 보고, 모세에게 거기 거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했습니다. 40년의 방황 후에도, 그들은 교훈을 얻지 못했습니다. 승리의 삶보다 자기 사업과 재물에 더 관심이 있는 그런 자들을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그분은 그들이 그들의 길을 가도록 내버려두십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들이 그곳에 정착하도록 허락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가치보다 세상적인 풍요를 선택한 많은 신자들의 모습입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한 말은, 오늘날 편안함을 사랑하는 많은 신자들을 위한 신랄한 책망입니다: "너희 형제들은 전쟁터에 나가는데, 너희는 여기 앉아 있겠느냐?" (민 32:6)
그들은 마침내 다른 지파들이 가나안을 소유하도록 돕는 데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그들은 요단 동편의 이 풍요로운 땅에 정착하기 위해 다시 돌아오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민수기 35장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실수로 다른 사람을 죽인 사람들이 죽은 사람의 친척들의 진노를 피하기 위해 도망갈 수 있는 여섯 개의 "도피성"을 지정하신 것을 읽습니다. 실수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살인과 같은 범주에 속하지 않습니다 - 그리고 하나님은 살인자들을 용서하지 않으시면서, 그러한 사람들(실수로 다른 사람을 죽인 사람들)이 보호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율법에서, 우리는 그분이 고의적인 죄에 대해서는 용서하지 않으시지만, 의도하지 않은 죄에 대해서는 항상 자비를 베푸시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그것을 레위기 연구에서 보았고 지금 여기(민수기)에서도 보았습니다. 그 다음에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고의적으로 그렇게 자주 죄를 지은 우리를 그토록 자비롭게 용서하신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찬양합니다.
율법의 반복과 하나님의 다루심에 대한 검토
'신명기'는 '두 번째 율법'을 의미합니다. 율법의 많은 중요한 측면이 여기에서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책을 두 가지 방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선 모세가 한 세 가지 연설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첫 번째 연설(1~4장).
2. 두 번째 연설(5~26장).
3. 세 번째 연설(27~30장).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주님께 말을 할 수 없다고 말했던 사람이 말한 것입니다!
이 책은 모세의 노래(32장), 모세의 축복(33장), 모세의 죽음(34장)으로 마무리됩니다.
책을 나누는 두 번째 방법은 세 방향을 바라보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1. 뒤를 바라보기 (Looking backward).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돌아보는 두 가지 메시지(1~11장).
2. 위를 바라보기 (Looking upward). 하나님을 바라보는 두 가지 메시지 - 그분의 법을 통해. 하나님의 법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필요를 본다(12-31장).
3. 앞을 바라보기 (Looking forward). 하나님께서 장차 행하실 놀라운 일들을 기대하는 두 가지 메시지(32~33장).
우리 모두는 인생에서 이 세 가지 모습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이 세 가지 모습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뒤를 바라보기
우리는 뒤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 인생에서 여러 번 나는 주님이 나를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돌아보았고 - 그것이 내 믿음을 새롭게 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 처해 도저히 헤어날 수 없을 것 같을 때, 성경의 약속을 상기하고 다른 성도들의 격려에 귀를 기울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제 믿음을 강하게 하는 것은 뒤를 돌아볼 때입니다. 주님은 저에게 "내가 지금까지 한 번이라도 너를 실망시킨 적이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나는 "아니요, 주님. 한 번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런 다음 그분은 "나는 지금도 너를 실망시키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뒤를 바라보는 것은 무엇보다 나를 격려합니다.
또 넘어졌나요? 과거를 돌아보고 주님께서 과거에 어떻게 여러분을 용서하셨는지 보십시오. 그분이 당신을 용서했을 때, 그분은 당신이 다시 넘어질 것을 모르셨습니까? 당신이 다시 넘어진 것이 그분에게 놀라운 일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니 다시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돌아보십시오. 그것은 당신의 믿음을 강화할 것입니다. 주님의 자비에 감사하십시오. 과거의 실패를 돌아보면, 주변의 실패한 성도들에게 긍휼을 베푸는 법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뒤돌아보지 말아야 할 또 다른 길이 있습니다. 바울은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라"고 말했습니다(빌 3:13). 잘못된 방식으로 과거를 돌아보면, 우리는 낙담할 것이고 인생의 많은 시간을 낭비한 자신이 쓸모 없고 실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자신의 삶을 낭비했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격려의 말을 전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일하는 날 12시간 중 11시간을 일하지 않은 노동자들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11시에 어떤 사람이 그들을 불러 자기 포도원에서 일하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가서 한 시간만 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삯을 먼저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2시간 동안 일한 사람들이 보상을 마지막으로 받았습니다! 나는 그것이 당신을 격려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낙심하여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자랑스럽게 뒤를 돌아봐서도 안 됩니다. "뒤에 있는 것을 잊는다"는 것은 우리를 낙담시키는 것과 우리를 자랑스럽게 만드는 것 모두와 관련이 있습니다.
당신을 낙담시키거나 당신을 자랑스럽게 만드는 것이 무엇이든 생각날 수 있다면, 가능한 한 빨리 잊어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과거에 우리에게 행하신 일에 대해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말하는 뒤돌아 보기입니다. 베드로는 그렇게 돌아보지 않고, 그들의 죄로부터 정결해졌음을 잊어버리는 사람은 눈이 멀고 근시안적인 사람이라고 말합니다(벧후 1:9).
위를 바라보기
우리는 또한 위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위를 바라보고 주님의 영광을 더 많이 보는 것을 결코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한 예수님의 영광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에 굶주려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우리를 변화시키려고 하시는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볼 때, 우리 자신의 결핍을 볼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를 겸손하게 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이 끝날 때까지 겸손을 유지하는 비결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시고 강력하게 사용하신 사람이 교만해지기란 매우 쉽습니다. 나는 그런 설교자를 많이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사용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너무 교만하고 사람들과 매우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삶이 끝날 때까지 우리를 부서지고 겸손하게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직 한 가지. 우리 믿음의 창시자이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볼 때, 교만해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보기 시작하면서 자신이 그들보다 더 낫거나, 기름 부음을 받았거나, 그들보다 더 많이 사용된다고 상상하면서 교만해집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예수님을 올려다 본다면, 얼굴을 티끌 속에 묻고 엎드려 회개할 것입니다 - 밧모 섬에서 사도 요한이 한 것처럼. 그리고 그가 계속해서 예수님을 쳐다본다면, 그는 그의 얼굴을 영원히 티끌 속에 둘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항상 티끌 속에 얼굴을 두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것이 안전의 장소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당신의 마지막 날까지 당신을 기뻐하시기를 원한다면, 계속 위를 바라보세요.
우리는 결코 내면을 먼저 들여다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위를 먼저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며, 그분의 영광을 볼 때 우리의 죄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죄를 보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낙담할 것입니다.
앞을 바라보기
우리는 앞을 내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 믿음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놀라운 일들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해야 할 위대한 일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언제 이 세상을 떠나야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시기 전에, 우리는 이 땅에서 그분을 위해 유용한 일을 하기를 기대합니다.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려움과 불안으로 미래를 바라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기대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서 살게 될 때를 기대할 것을, 모세에게 신명기에서 그들에게 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신명기에서 이스라엘의 먼 미래에 관해 예언했습니다.
반복
우리가 신명기에서 볼 수 있는 또 다른 것이 있습니다 - 모세의 초기 책에 이미 기록된 많은 내용의 반복입니다. 우리는 반복에 방해를 받아서는 안됩니다. 진리에 사로잡히려면 반복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에 많은 것을 반복하셨습니다. 유다 왕들의 역사는 두 번 언급됩니다 - 처음에는 열왕기서 두 권에서, 그리고 다시 역대서 두 권에서. 왜 신약성경은 단지 하나가 아닌 네 개의 그리스도의 전기로 시작할까요? 사복음서에는 반복되는 내용이 많습니다 - 어떤 문제는 사복음서에서 네 번 언급됩니다.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에베소서에서 이미 언급된 많은 것들이 골로새서에서 반복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사도들이 말을 되풀이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설교자들은 사람들 앞에서 명성을 잃을까봐 같은 주제로 설교를 반복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필요보다 사람들이 그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나는 한 마을에서 7일 동안 집회를 열고 매일 "당신은 거듭나야 합니다"라는 주제로 설교한 복음 전도자에 대해 들었습니다. 모든 집회에 참석했던 회심하지 않은 한 남자는 7일 내내 같은 주제를 듣는 것에 싫증이 나서 왜 매일 "당신은 거듭나야 합니다"라고 설교하느냐고 그에게 물었습니다. 복음 전도자는 "당신이 거듭나야 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게 답입니다. 그 사람이 거듭날 때까지 그 메시지는 반복되어야 했습니다. 그는 다른 것을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환자는 완치될 때까지 같은 항생제를 복용해야 합니다!
이제 내가 왜 계속해서 "당신은 죄를 이겨야 합니다"라고 말하는지 묻는다면, "당신은 죄를 이겨야 하기 때문입니다"라는 답을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야 했기 때문에 같은 메시지를 거듭해서 반복했습니다. 예레미야는 40년이 넘도록 사실상 같은 메시지를 전했고, 설교하는 것이 거의 지겨워질 때까지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사람들은 어떤 것을 10번 들어야 진리를 충분히 이해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같은 청중에게 같은 주제에 대해 계속해서 설교하는 것을 결코 부끄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기름부음을 받았다면, 소식은 전파할 때마다 여전히 신선할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의 명예를 구한다면, 반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유익을 구한다면, 그들이 이해할 때까지 반복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신명기에서 배우는 교훈 중 하나입니다 - "두 번째 율법"
신명기는 1장 2절에서 다음과 같은 진술로 시작합니다: "호렙에서 세일 산 길을 따라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기까지 11일이 걸립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호렙(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곳)에서 가데스 바네아(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될 곳)까지는 불과 11일의 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11일의 여정은 결국 38년이 걸렸습니다. 당신은 학교의 12학년을 12년 또는 20년 안에 마칠 수 있습니다 - 그것은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11일과 38년 사이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 38년을 낭비했다면(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우리 자신의 즐거움과 안락함을 위해 살고, 돈을 벌기 위해 살면서), 언제나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의 끝에 당신은, "주님,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나는 내 인생의 38년을 낭비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용서하실까요? 그분은 확실히 그러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이 허비한 38년을 돌려주실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도 우리 중 누구에게도 시간을 돌려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작년과 그 기회를 다시 주실 수 있습니까? 아니요. 그분은 내년에 우리에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지나간 세월을 우리에게 돌려주실 수 없습니다. 과거에 우리가 가졌던 기회는 영원히 사라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11일 안에 당신의 삶에서 어떤 일을 하기를 원하신다면, 당신은 그것이 11일 이상 걸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2장 14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난 지 2년 후에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렀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38년이 더 걸렸고, 광야에서 총 40년을 보냈습니다.
리더십을 위한 자격들
1장 13절에서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을 위해 선택한 지도자 유형에 관해 조언하는 것을 봅니다. 나는, 그가 찾던 세 가지 자질, 즉 지혜, 분별력, 경험을 여러분이 보기를 바랍니다.
첫 번째 요구 사항은 지혜였습니다. 지혜는 지식과 다릅니다. 지식은 연구를 통해 옵니다. 그래서 영리한 두뇌를 가진 사람들은 이것에 탁월합니다. 지혜는 많은 시련을 겪어야 옵니다. 그러므로 충실한 사람들은 이것에 탁월합니다. 지혜는 삶의 실제 상황에 지식을 적용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많은 성경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신성한 지혜는 없을 것입니다. 잠언서는 성경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혜를 얻는 것을 강조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지혜를 얻고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수단입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많은 사람들이 지식을 얻습니다. 그러나 지식의 나무는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합니다(고전 8:1). 생명나무는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과 인생의 다양한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지혜를 줍니다. 그래서 지혜는 리더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요건입니다.
두 번째 요구 사항은 분별력이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리더십에 가장 필요한 것 중 하나입니다 - 경건한 것과 인간적인 것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 - 경건한 것과 악마적인 것을 분별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과 인간의 것, 영적인 것과 혼적인 것을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글쎄, 결국 우리는 인간일 뿐이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단지 인간들처럼 행하는 것"(고전 3:3)을 꾸짖었습니다. 우리는 단순한 사람처럼 행동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걸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는 그가 행하신 대로 행합니다"(요일 2:6). 영적인 사람과 육신적인 사람(죄 가운데 사는 사람)을 분별하는 것은 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적인 사람과 혼적인 사람(인간의 능력으로 사는 사람)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들을 때 그 사람이 마음으로 말하는지 머리로 말하는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것은 다른 사람의 머리로만 들어갑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에서 나온 것은 다른 사람의 마음으로 갈 것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마음으로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성경은 머리가 아니라, 마음을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기억이 아닌)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편 119:11)라고 말했습니다.
세 번째 요구 사항은 경험이었습니다. 당신이 젊었을 때, 많은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당신은 분별력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경건한 지도자가 되려면 아직 경험이 필요하며 - 이것은 시간이 걸립니다. 경험은 여러 가지 시험에 부딪히고 그 시험 가운데서 하나님의 능력과 위로를 맛봄으로써 옵니다(고후 1:4). 우리가 시련을 통해 얻은 힘으로 다른 사람을 위한 사역을 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재판관들에게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고 작은 사람이나 큰 사람이나 똑같이 들으라고 경고했습니다(17절). 이것은 리더에게 매우 중요한 요구 사항입니다. 부자에게 아첨하지 마십시오.
내가 젊은 신자였을 때, 나는 내가 가는 모든 교회에서, 한 남자가 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이라면(중요한 정부 관리나 부유한 사업가와 같이), 그는 항상 교회 이사회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왜 이런지 궁금했습니다. 분명히 세상의 모든 거물은 영적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의 가난한 자들을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셨다"(약 2:5)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이 사람들은 분명히 세속적인 영향력 때문에 선택된 것입니다. 그 모든 교회들이 곧 타락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야고보서 2장에서 우리가 경고하는 바로 그 편파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때 나는 만일 주님께서 나의 수고를 통해 교회를 개척하신다면, 영향력 있는 사람이 아니라, 영적인 사람을 장로로 임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세우신 모든 교회에서 우리가 한 일입니다.
모세는 지도자들에게 "너희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17절)고 말했습니다. 리더가 되고 싶다면 어떤 사람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율법의 신선한 반복
2장 2,3절: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산을 충분히 오래 떠돌았다.'" 주님은 그들에게 "빙빙 돌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중 누구에게 그렇게 말씀하셔야만 할까요? 우리가 항상 영적으로 같은 자리에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동은 진보와 다릅니다! 우리는 10년 전에 우리를 패배시킨 것과 같은 죄에 패배해서는 안 됩니다. 10년 전처럼 화를 내거나 정욕을 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10년 전과 같다면, 우리는 빙빙 돌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제 우리에게 앞으로 나아가라고 부르십니다.
4장 2절: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더하거나 빼지 말라."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작은 계명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하여 우리가 직면하는 유혹은 무엇입니까? 중요한 계명을 무시하는 것이 아닌, 작은 계명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 계명은 사소한 것이므로 무시해도 된다고 말하는 신자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구든지 가장 작은 계명이라도 어기면 (지옥에 가지 않을 것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지극히 작은 계명이라도 지켜 사람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사람은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19).
우리는 어린 자녀들의 순종을 어떻게 시험합니까? 큰 일에서가 아닌, 작은 일에서입니다. 당신의 5살짜리 아들이 어느 날 학교에 갈 때, 당신이 그에게 "얘야, 오늘 학교 가는 길에 아무도 죽이지 말고, 누구와도 간음하지 말고, 은행을 털지 마라." 라고 말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는 매일 학교에서 돌아와, "아빠, 저는 당신의 모든 계명을 지켰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주요 계명에서 그의 순종을 시험하는 건가요? 아니요. 어디에서 그의 순종을 시험할 수 있는지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가 친구들과 당신의 집 밖에서 놀고 있을 때, 당신은 "좋아, 아들아, 이제 충분히 놀았어. 지금 들어와서 엄마의 집안일을 도와주어라."라고 말합니다. 그의 대답은 변함없이 이것이 될 것입니다. "잠깐만요, 아빠. 이 게임만 끝낼게요." 그것이 당신이 그의 순종을 시험하는 곳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당신의 순종을 어떻게 시험하신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 중 작은 계명 중에서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무엇을 뺀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작은 계명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더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경에 없는 회원 규칙을 가지고 있는 많은 기독교 단체가 있습니다. 어떤 단체들은 전임 기독교 일꾼들에게 흰 옷이 "더 영적"이기 때문에 항상 흰 옷을 입어야 한다는 규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되기가 그렇게 쉬웠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또 다른 그러한 규칙은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부양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을 부양했으며,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훌륭한 종이었습니다. 우리가 바울보다 낫습니까? 어떤 단체들은 거룩해지려면, 결혼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모든 사도들은(바울과 바나바를 제외하고) 결혼했습니다(고전 9:5). 또는 그들은 우리가 매년 그렇게 많은 날 동안 금식해야 한다거나 매일 그렇게 많은 시간 동안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설교자들이 만든 이와 같은 많은 규칙들이 신자들을 정죄와 속박으로 몰아넣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규칙 중 어느 것도 성경에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바리새인들이 만든 규칙입니다.
나는 금식을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법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덧붙여 가르치는 이와 같은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자신보다 더 영적이 되려고 합니다! 그 결과 그들은 육욕적이고 율법주의적이 됩니다. 사탄이 하와에게 와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셨느냐고 물었을 때,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에 더하거나 빼면서 대답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나무의 열매를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우리가 죽지는 않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나무를 만지는 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고, 오직 먹는 것에 대해서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하와는 하나님보다 더 영적이 되려고 애쓰며 '만지는 것'도 더했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녀는 만지고 먹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더하기 시작할 때 항상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들은 죄에 빠집니다. 하와는 또한 "우리가 죽지는 않을까 하노라" (죽음이 확실한 것이 아니라 오직 가능성일 뿐임을 암시하면서)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의 강도를 낮췄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빼거나 더하면, 그 말씀이 무효화됩니다(창 2:16,17; 3:2,3).
4장 24절과 31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에 관한 두 가지 진술을 읽습니다: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비로우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소멸하는 불이시기도 합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요 1:14).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거룩하십니다. 참으로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처럼 거룩하고 자비로울 것입니다. 영적 지도자가 되려면, 사자와 어린 양과 같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러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타오르는 불과 같으며, 또한 엄청나게 자비롭습니다. 동정심으로 가득한 사람을 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동시에 열렬하고 엄격하기만 한 사람도 영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둘 다 불균형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합니다.
4장 29절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으면 만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렘 29:13에서 같은 말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밤중에 풀밭에서 잃어버린 10냥짜리 동전을 찾는 만큼의 간절함으로 하나님을 찾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지 못합니다. 당신은 그 동전을 얼마나 오래 찾을 것입니까? 당신은 얼마 동안은 그것을 찾을 수 있고, 만일 그것을 찾을 수 없다면 자리를 떠날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어딘가에 만 루피 다발을 잃어버렸다면, 당신은 그것을 얼마나 오랫동안 찾으려고 하겠습니까? 당신은 그렇게 하나님을 찾으십니까? 하나님은 자기를 부지런히 찾는 자들에게만 상 주시는 분이십니다(히 11:6).
당신은 얼마나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까?
당신은 죄에 대한 승리를 얼마나 간절히 구합니까?
당신은 분노와 성욕을 극복하기 위해 얼마나 예민합니까?
당신은 성경을 이해하고 그분의 왕국에서 유용하게 되기를 얼마나 간절히 원하십니까?
한 번이 아니라 날마다 얼마나 간절히 성령 충만을 구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끊임없이 신선하기를 얼마나 간절히 원하십니까?
내가 방금 말한 이 모든 것, 곧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받지 못했다면 그것은 당신이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찾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응답하실 때까지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은 여기에서 모세가 가르친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5장에서, 우리는 십계명이 반복되는 것을 봅니다. 여기, 15절에 안식일을 지키는 또 하나의 이유가 주어집니다: 그들은 자기 힘으로 애굽에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님을 기억하여 안식일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분은 여호와였습니다. 그들은 자유를 얻기 위해 430년 동안 노력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하룻밤 사이에 그들을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안식일의 메시지였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바쁘게 활동하는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성취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교훈을 아주 빨리 잊어버렸습니다. 나중에 그들의 역사에서 우리는, 그들이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안식일에 반복해서 일했다는 것을, 읽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지 말라고 하신 7년째 되는 해에 그들의 땅을 경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모든 노동으로 무엇을 얻었습니까? 하나님은 그들을 바벨론으로 또다시 70년 동안 포로로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안식일에 일을 쉬신 것과 같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 그의 고군분투로부터 쉬게 됩니다. 이것이 안식일의 메시지입니다(히 4:9,10).
5:29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향한 가장 큰 갈망 중 하나를 읽습니다. 성경에서 "O"(오)라는 단어를 찾는 것은 드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사용하시는 것을 봅니다: "오, 그들이 마음에 항상 나를 경외하며 내 모든 계명을 지켜, 그들과 그들의 자손이 영원히 잘되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영원히 잘되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그거 아십니까? 그분은 우리가 항상 최고를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되게 하시려고 그분의 계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성경은 "제조업자의 지침"입니다. 고가의 전자 기기를 구입하면, 사용 방법을 알려주는 지침서가 함께 제공됩니다. 값비싼 도구가 폭발하거나 망가지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지침을 정확히 따르도록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실제로, 제조업자는 일반적으로 모든 지침을 읽을 때까지 장비를 켜거나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합니다. 누가 우리를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입니다! 여기 성경에는 우리가 인간으로서 가장 잘 기능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지침이 있습니다. 이 지침을 따르지 않으면, 당신의 인생이나 결혼 생활을 망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방법대로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누구를 비난할 수 있습니까?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심지어 많은 신자들도 "제조업자의 지시"를 주의 깊게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삶을 망쳤습니다. 육신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무엇보다 먼저 성경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나는 너의 치료자이다"라고 말씀하실 때, 그분의 의미는 "나는 너의 건강이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려면 건강해야 합니다. 그리고 건강해지고 싶다면 무엇을 먹고 무엇을 먹지 않는지에 관한 특정한 법칙을 따라야 합니다. 대식가는 결코 건강하게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내 말에 주의하라, 내 말은 온 몸의 건강이 됨이라"고 말씀하십니다(잠 4:20-22). 마찬가지로, 영적인 사람이 되려면, 영성에 관한 특정한 법칙을 따라야 합니다. 은혜를 받으려면,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만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무언가를 받으려면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에 따라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은 영적 법칙입니다. 당신이 이 법칙들을 따른다면, 우리는 잘 될 것입니다.
6장 4절에 보면 "주님은 우리 하나님이시니, 주님은 한 분이십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세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입니다. 그런 다음 5절에서, 첫째 계명을 다른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2장 37절에서 인용하신 말씀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것이 첫째 계명입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에 가족, 재산, 직업 또는 돈을 위한 자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마음이 하나님께 드려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제조업체의 지침" 매뉴얼에서 지침 1번입니다. 이 명령에 순종하기 전에, 인간 기계를 작동하지 마십시오. 마음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면 어떻게 될까요? 당신은 당신의 아내를 더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이웃을 더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될 것은, 당신의 마음에 미워하는 마음이 더 이상 없기 때문입니다.
시기, 미움, 원한, 기타 다른 사람에 대한 모든 죄는,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마음의 부분이 질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일차적으로 죄와 싸워서 죄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죄를 이깁니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면, 돈과 재물을 사랑하는 것과 악한 정욕이 다 떠나갈 것입니다. 그다지 좋은 사람이 아닌 A씨와 사랑에 빠진 소녀를 생각해봅시다. 그녀의 부모는 그녀가 그를 사랑하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하지만, 성공하지 못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소녀는 훨씬 더 잘생기고 더 부유하고 더 유쾌한 B씨를 만납니다. 갑자기 A씨를 향한 그녀의 모든 사랑이 사라집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것은 "새로운 애정의 추방력"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새로운 사랑이 처음 사랑을 몰아냈습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인의 삶에 적용하십시오. 여기에서 당신은 하나님이 금하신 많은 악한 일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러한 나쁜 습관을 버리려고 노력하고 노력하지만, 당신은 그 정욕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신은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온 마음을 다해 그분을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무슨 일입니까? 이 새로운 사랑은 옛 애정을 몰아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 이상 이 세상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애정의 추방력"입니다. 이것이 죄를 이기는 비결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 이는 '당신의 지적 능력을 다하여'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명석한 마음을 주신 것은, 돈을 벌게 하려는 것도 아니고, 이 세상에서 성공하여 위대한 사람이 되게 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아니요. 사도 바울은 그가 선택한 어떤 분야에서든 성공했을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뛰어난 사람이었기 때문에, 최고의 사업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오늘날 살았다면, 그는 컴퓨터의 천재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모든 재능을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만 사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것이 그가 자신의 삶을 잘 활용한 방법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능력을 무엇을 위해 사용 했습니까?
6장 7절에서, 우리는 모든 유형의 상황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항상 자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부모의 책임임을 읽습니다.
7장 1~6장은 이스라엘보다 크고 강한 일곱 나라를 하나님께서 완전히 물리칠 수 있게 해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죄에 대해 우리에게 주기를 원하시는 승리의 그림입니다 - 왜냐하면 7은 성경에서 완전한 숫자이기 때문입니다(그것은 완성을 말합니다). 적들이 이스라엘보다 강했기 때문에, 적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겨주실 분은 하나님이실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정욕이 우리에게 너무 강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오직 주님만이 우리가 그것들을 이길 수 있게 해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를 축복하실 때
8장은 매우 중요한 장입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마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탄을 이기셨습니다. 그분은 결코 사탄과 토론하거나 논쟁하지 않으셨습니다. 사탄이 무엇을 말하든지, 예수님께서는 단 한 가지 대답만 하셨습니다: "기록되었으되." 세 번의 시험에서, 그분은 구약 성경의 두 장만을 인용하셨습니다.
신명기 8:3이 첫 번째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다른 두 인용문은 신명기 6:16,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라"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신명기 6:13,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겨라."
이것은 예수님께서 신명기를 연구하셨음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 안다면, 인생에서 직면할 수 있는 모든 유혹과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습니다. 나는 내 인생에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 답이 없는 문제를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학생이 되도록 격려하고 싶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이 산과 강을 마주할 때, 그 모든 것을 지나갈 수 있고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다윗은 "내가 내 하나님을 힘입어 벽을 뛰어넘으리로다"(시 18:29)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길을 가로막을 수 있는 장애물은 없습니다. 당신이 그것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 안다면, 성경에 답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에 그것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모든 유혹에 대한 답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사탄에게 속을 수 없었습니다.
8장 11~15절에서 모세는 그들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주님의 계명과 율례를 지키지 아니함으로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당신들이 먹고 배부르며, 좋은 집을 짓고 거기 거하며, 당신들의 소와 양이 번성하여 은과 금이 많아질 때, 당신들의 마음이 교만해져 당신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불뱀과 전갈이 있는 크고 두려운 광야에서 당신들을 인도하신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십시오.
우리가 광야에 있을 때나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고군분투할 때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복을 받고 부자가 될 때보다 더 쉽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짓던 시절, 그는 너무 바빠서 술에 취할 틈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홍수에서 살아남은 지상의 유일한 가족의 우두머리로서 방주에서 의기양양하게 나오자마자, 술에 취했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이 동굴 저 동굴을 도망 다녔을 때, 놀라운 시편을 썼고 하나님과 매우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여유와 돈이 많아서 직접 전투에 나가지 않고 다른 사람을 보내 대신 싸우게 하고 자신은 궁전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었을 때, 밧세바와 죄를 지었습니다. 그가 그날 전쟁에 나갔더라면, 밧세바를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삼하 11:1).
솔로몬은 여유와 편안함과 재물이 넉넉했기 때문에 죄를 지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언제부터 우상숭배를 시작했습니까? 그들은 금송아지 사건 이후 광야에서 40년 동안 우상을 숭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마자, 우상을 숭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풍족할 때 우리는 위험에 처합니다.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그것은 당신이 하나님과 가까이 사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풍족할 때 하나님을 잊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아니요. 더 어렵다는 말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불가능하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풍족한 형제를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그가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당신이 그 사람보다 적게 가진다면 감사하십시오. 그것이 당신의 구원이 될 수 있습니다. 남들만큼 바꿔입을 옷이 많지 않더라도, 부러워하지 마세요. 사실, 당신이 그것을 볼 수만 있다면, 당신이 더 낫습니다. 집이 더 크거나 돈이 더 많은 사람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그러한 사람들은 훨씬 더 큰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당신에게 무엇을 주어야 할지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조금에도 만족하십시오. 나는, 얼마나 많은 설교자들이 풍족함을 얻음으로써 스스로를 파괴하는지 보았습니다. 그들에게서 경고를 받으십시오. 현명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실수에서 배웁니다.
9장부터 11장까지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의 새로운 세대에게,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죽은 그들의 조상들의 역사로부터 몇 가지 경고를 줍니다. 그는 하나님이 소멸하는 불이심을 그들에게 다시 경고합니다(9:3).
11장 21절(KJV)에서, 모세는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갈망이 "너희의 날들과 너희 자녀들의 날들이 많게 되어 땅 위에 있는 하늘의 날들 같이 되리라"고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를 위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 땅 위에서 우리의 날들이 하늘의 날들과 같게 되는 것.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가 가정과 교회에서, 천국의 기쁨과 평강과 사랑과 순결과 선함을 미리 맛보기를 원하십니다. 나는 그것을 조금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제 삶과 사역은 저에게 무거운 짐이 아니었습니다. 전혀요. 땅의 원칙대로 살지 않고 하늘의 원칙대로 사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즐겁고 하루하루가 설렜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할 때 이렇게 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40년 후에도, 여러분은 여전히 땅의 원칙이 아닌 하늘의 원칙에 따라 살기로 결심하기를 바랍니다. 끝까지 견디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 당신의 날이 지상에서, 천국의 날과 같을 수 있도록.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11장 24절은,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다 너희 것이 되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고, 모든 연약함을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는 우리 발을 내려놓고 마귀를 우리 발 아래 두어 그를 이겨야 합니다.
12장에서 26장까지는 여러 가지 율법이 반복되거나 새롭게 주어집니다.
거짓 선지자
13장에는 거짓 선지자에 대한 흥미로운 부분이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계에는 거짓 선지자들이 많기 때문에,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기 위해 거짓 선지자들이 우리의 길을 지나가는 것을 허용하신다고, 듣습니다. 거짓 선지자와 속이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진정한 소망과 갈망을 시험하시는 주요 수단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선지자나 꿈 꾸는 자가 일어나거나, 너희 길을 가로 질러 와서, 너희 중에서 일어나 표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그 표적과 기사가 이루어지리니…"(13:1,2). 하나님께서는 이 속이는 자가 예언한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십니다 - 우리를 시험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계에는 상담실과 상담료(정확히 의사와 같은)를 갖고 있는 그러한 거짓 "선지자"가 많이 있습니다. 당신은 그들의 예언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 그들은 대가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이 거짓 예언자들은 돈을 얻기 위해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를 시도합니다. 첫째, 그들은 당신에게 아첨하며 당신이 가고자 하는 곳에서 정말로 성공할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 아라비아 만 국가든 서양 땅이든 말이죠. 그리하여 그들은 당신에게서 멋진 선물을 받을 수 있도록, 당신을 행복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그들이 "예언"한 것을 정확히 행할 것이며, 따라서 그들의 "예언"을 당신 스스로 성취할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충족적 예언"이라고 불리는 심리적 속임수입니다. 사기꾼들의 오래된 수법입니다. 최종 결과는 무엇입니까? 당신은 돈을 벌기 위해, 당신이 원하는 곳으로 가도록 "선지자"로부터 "하나님의 승인"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얻었기 때문에 행복합니다. 선지자는 멋진 선물을 받았기 때문에 기뻐합니다. 마귀도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당신과 거짓 선지자를 속였기 때문입니다. 불행한 것은 하나님과 하늘의 천사들뿐입니다! 이 "선지자들"이 채택하는 두 번째 방법은 당신이 전혀 모르는 당신이 직면하고 있는 임박한 위험에 대해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마귀가 당신을 쫓고 있다고 말할 것이지만, 그들은 당신이 위험에서 벗어나도록 기도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식으로 그들은 또한 당신의 돈을 얻습니다 - 당신이 어떤 (존재하지 않는) 위험으로부터 구원받은 것에 대해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두 경우 모두 그들의 목표는 당신의 지갑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당신을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지 알려 하사 너를 시험하심이니라"(3절).
그러한 거짓 선지자들은 항상 땅의 것을 강조하고 하늘의 것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영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에 몰두하도록 이끕니다. "우리가 다른 신들을 좇자"는 그들의 메시지입니다 - 다른 신들은 야망, 돈, 편안함, 쾌락 등입니다.
그 구절에서 그러한 선지자는 죽임을 당해야 한다고 말합니다(13:5).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습니까? 그 사람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 즉, 그와 아무 관련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조업체 지침"입니다. 그것들을 따릅시다, 그러면 우리는 결코 속지 않을 것입니다.
각종 법률
14장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먹지 말아야 할 동물과 생물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레위기 11장에서 이전 세대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신 내용을 반복한 것입니다. 이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을 위해 거룩하고 구별된 것의 중요성을 상징적으로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법률은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막 7:19). 바울은 거룩함이 특정 유형의 음식을 피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모든 음식은 우리가 기도하고 그것을 먹을 때 거룩해진다고 명확히 말합니다(딤전 4:1-5).
15장은 안식년에 사람들을 석방하는 것에 대해 말합니다. 그들 중에 가난한 자가 있으면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인색하고 강퍅한 마음을 가지지 말고, 오직 그 형제에게 너그럽게 대할지니라(7,8절). 주님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16장에서, 우리는 모든 남성 구성원이 예루살렘으로 가야 하는 세 절기에 대해 읽었습니다.
17:14~19: 이스라엘이 왕을 갖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이 그들의 왕이 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삼상 8:7 참조).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이 그분의 최고를 원하지 않는다면, 차선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항상 주십니다. 그래서 만일 그들이 왕을 택하면, 그는 이 율법을 날마다 읽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온전히 순종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또 하나의 아주 좋은 구절입니다. 그들은 주의 깊게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그분을 경외하며 그분께 순종해야 합니다.
18:1-7: 여기서 모세는 그들에게 더 많은 율법을 줍니다. 그는 심령술과 주술을 금지합니다(9-14절). 점쟁이를 찾는 대신에, 주님은 미래에 그들이 듣게 될 예언자를 세우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4-19절) - 이는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분명한 언급입니다.
18:20에서, 그들은 그분께서 명령하지 아니한 것을 주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필요한 경고입니다. 특정 유형의 기독교 그룹에서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라고 말하며 "예언"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 그들이 말하는 것에 권위의 분위기를 주기 위해. 그런 다음 그들은 마음에 떠오르는 모든 것을 계속해서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런 예언자를 죽이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심각한 죄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그들에게 말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예언을 하였다"(렘 23:21)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이 모든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 죄악된 행위에 반대하는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습니다. 수많은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오늘날 이 모든 거짓 예언에 의해 잘못된 길로 인도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실제로 말씀하신 것을 인용할 때를 제외하고는 "주님이말씀하시기를"이라고 말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렇지않다면,우리는하나님의말씀에더하고있는것입니다.
18장 21, 22절에서 우리는 거짓 예언자를 식별하는 한 가지 방법에 대해 듣습니다: 그가 예언한 것은 성취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거짓 예언자입니다. 성경의 이 분명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예언자들이 저지르는 "실수"를 용인하고 계속해서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 구절을 완전히 무시하고 왜곡하여, 이 구절이 명백하게 말하는 것을 더 이상 의미가 없도록 만듭니다.
이 구절이 가르치는 것은, 진정한 예언자는 그의 예언의 99%가 아니라 100%의 성공률을 가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속임을 당하지 않도록 말씀으로 충분한 경고를 주셨습니다.
아무리 거룩하고 선하고 복음적인 사람이라도, 그가 예언한 것이 단 한 번이라도 정확하게 성취되지 않았다면 그는 거짓 예언을 한 것이며, 자신을 낮추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또한 거짓예언자입니다. 그 이후에는 그런 사람에게 신경 쓰지 말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께 기꺼이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은 얼마나 될까요?
19장은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들이 피신할 수 있도록 구별된 도피성을 반복합니다.
20장 1~7장: 이스라엘 백성이 전쟁에 나갔을 때, 그들은 어떤 두려움도 없이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신뢰로 나아가라고 여기에서 들었습니다. 두려운 사람이나, 주님의 싸움보다 자기 아내나 집이나 포도원을 더 생각하는 자들은, 다른 군인들이 주님께 헌신하는 것을 식히지 않도록, 집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온 마음을 다해 섬기는 자를 원하십니다 - 그분의 이름과 그분의 왕국이 개인의 이익보다 더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21장에서는, 결혼 문제와 반항하는 자녀를 돌로 치는 등에 관한 여러 가지 다른 법이 주어집니다.
21장 22,23절에서, 우리는 나무에 달린 자마다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라는 말씀을 읽습니다. 이 구절은 바울이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서 인용한 구절로, 그리스도께서 갈보리에 매달리셨을 때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셨으며, 이는 하나님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한 우리에게 임해야 할 저주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22장 5절에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남녀의 의복에 관한 율법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남녀 사이에 만드신 차이를 유지해야 하고, 각 성별에 대해 정하신 다른 기능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가르치기 위한 구약의 율법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어미 새와 새끼가 둘 다 둥지에서 발견된 경우 그 새끼와 함께 어미 새를 데려가는 것을 금지한 율법에서, 동물 창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엄청난 돌보심을 봅니다(22:6,7). 동물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은 우리에게 한 가지 위대한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 그분이 그분의 자녀인 우리를 얼마나 더 돌보시겠습니까?
23장과 24장에서, 우리는 도덕, 청결, 이혼에 관한 율법과 가난한 사람들이 착취당하지 않고 돌봄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다양한 율법을 읽었습니다. 24장 6-21절에 주어진 이 율법을 읽고 가난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강렬한 관심을 보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정말 유익합니다.
25장과 26장에는 다른 여러 가지 법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27장에서는, 특정한 죄를 지은 자들에게 공개적으로 저주가 선언됩니다.
28장은 긴 장으로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처음 14개의 절은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축복하실 것인지에 대한 약속입니다. 다음 54개 절은 그들이 하나님의 법에 불순종할 경우,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벌하실 것인지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 아래서 인간이 보상과 처벌의 위협을 통해 하나님께 순종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린 아이들에게도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초콜릿과 막대기" 방법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 그들이 순종하면 초콜릿을 약속하고 불순종하면 막대기로 처벌하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어린아이처럼 대하셨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 아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어른으로 대하십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인이 된 아들은 두려움이 아닌 사랑과 경외심으로 아버지에게 순종합니다. 그렇게 우리 자신이 아기인지 어른인지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 보상을 바라거나(기대) 벌을 피하기 위해 주님을 섬기거나 그분께 돈을 바치거나 봉사하거나 그분께 기도하거나 금식합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여전히 옛 언약의 정신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31장 7,8절에서, 우리는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을 인도할 책임을 부여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또다시 모세가 자신의 아들이 아닌,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에게 그 책임을 어떻게 맡겼는지 주목합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기독교계에서는 교회나 사역을 시작하는 사람이 자신의 일에 대한 리더십을 자신의 아들이나 딸에게 넘기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열심히 일해서 쌓아온 재정적, 지위적 혜택을, 자신의 가족이 거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에서, 우리는 "아무도 육신을 따라 알지 말라"(고후 5:16)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 심지어 우리 자신의 가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계 어느 곳에서도 모세와 같은 지도자를 찾는 것은 드뭅니다.
32장에서, 우리는 모세의 노래를 읽습니다. 모세는 또한 시편 90편을 썼는데 이것은 또 다른 노래였습니다.
33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지파들을 축복하시는 것을 봅니다. 2절과 3절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율법을 어떻게 보았는지, 즉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의 표현을 보여주는 멋진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오른손에는, 그들을 위한 불 같은 율법이 있더라" (2절 - 직역). 그것이 무엇을 증명했습니까? "참으로 그분은 그분의 백성을 사랑하십니다." (3절). 하나님의 불 같은 계명이 우리를 향한 그분의 지극한 사랑의 증거임을 인식하는 것이 좋습니다. 부드럽고, 쉬운 법은 그가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했을 것입니다.
34장에서, 우리는 모세의 죽음에 대해 읽습니다. 이스라엘은 모세가 죽은 지 30일 만에, 약속의 땅에 들어갔습니다.
여호수아서는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어떻게 소유했는지 알려줍니다. 이 책은 여러 면에서 사도행전과 유사합니다. 두 권의 책 모두 새로운 시작이었고,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엄청나게 나타난 것을 읽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위대한 지도자였으며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했습니다. 우리는 또한 사사기(여호수아서 직후)에서, 여호수아 시대 이후에 얼마나 빨리 타락했는지를 봅니다. 신약에서도, 사도들이 죽자 마자, 교회에서 매우 빠르게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계 2,3장).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좋은 지도자가 없을 때, 매우 빠르게 타락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여호수아서는 하나님을 전쟁의 하나님으로 묘사합니다.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전쟁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랑 많은 아버지가 자식에게 있는 질병과 싸우듯이, 인류에게 해를 끼치는 모든 것을 미워하십니다.
옛 사람과 육신 (The Old Man and the flesh)
가나안 땅은 (일부 신자들이 찬송가에서 부르는 것처럼) 천국의 묘사가 아닙니다, 천국에는 죽임을 당할 거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은 실제로 성령으로 충만한 승리의 삶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곳에서 죄의 거인, 즉 우리 육신의 정욕이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모든 거인들은 한 순간에 죽지 않았습니다. 한 명씩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 두 개의 물을 건너야 했습니다. 하나는 홍해였고 다른 하나는 요단강이었습니다. 이 둘은 모두 죽음을 말합니다. 우리는 고린도전서 10장(2절)에서 홍해에 들어가는 것이 물세례의 그림임을 봅니다. 요단강은 또 다른 종류의 죽음의 그림입니다. 이곳은 1500년 후 세례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준 곳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옛 사람이 하나님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가르칩니다(롬 6:6). 우리는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없습니다. 옛 사람(죄를 짓기 원하는 마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그렇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할 다른 것이 있습니다 - 우리의 육신(욕망의 창고). 갈라디아서 5장 24절은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말합니다.
육신은 옛 사람과 다릅니다. 정욕이 있는 육신은, 우리 마음에 들어와 우리를 더럽히려는 강도 떼와 같습니다. 그 옛사람은 우리 마음속에 살면서, 도둑들이 올 때마다 문을 열어주는 불성실한 종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둘 중 누구를 죽이실까요? 그분은 그 종을 죽입니다. 강도 집단은 여전히 강하고 활동적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회심하기 전과 회심한 후에 똑같은 방식으로 유혹을 받는 이유입니다. 그것은 강도들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회심한 후에도 여전히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 또 다른 무언가가 죽었습니다 - 바로 이 도둑들에게 문을 열어준 종(옛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죽이시고 우리가 거듭났을 때 우리 안에 새 종을 두셨습니다 - 도둑에게 문을 열어 주기를 원하지 않는 종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유혹이 닥칠 때, 새 종은 "아니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신자가 어떻게 죄에 빠질까요? 그들이 새 종을 잘 먹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는 강도들로부터 문을 닫아 둘 만큼 충분히 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강도들이 침입합니다. 그것이 신자가 죄를 짓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신자가 죄를 짓는 것과 불신자가 죄를 짓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 신자는 죄를 짓고 싶어하지 않고, 불신자는 죄를 짓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것은 당신이 정말로 거듭났는가 아닌지를 시험하는 것입니다. 거듭난 증거는 죄를 짓느냐 안 짓느냐가 아니라 죄를 짓고 싶느냐 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여전히 죄를 짓고 싶다면, 당신은 회심하지 않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물세례를 청하러 올 때 나는 그들에게 "한 번이라도 더 죄를 짓고 싶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당신은 죄를 지을 것입니까?"라고 묻지 않습니다, 아무도 죄를 짓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원한다는 것'은 그가 옛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이 말하는 두 가지 죽음입니다. 이 두 가지 모두 이스라엘 역사에서 아름답게 묘사됩니다. 바로의 군대는 순식간에 홍해 밑에 묻혔습니다. 그것은 옛 사람의 죽음을 그린 그림입니다. 누가 그랬을까요? 하나님입니다. 옛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런 다음 이스라엘 백성은 또 다른 죽음을 말하는 요단을 건넜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그들의 정욕에 대해 이러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정욕은 여전히 거기에 있고, 거인들은 여전히 땅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을 하나씩 죽이기로 작정했습니다. 유혹을 받았을 때, 정욕을 하나씩 죽여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합니다(롬 8:13). 이것은 이집트 군대가 하나님에 의해 순식간에 매장되는 것과는 매우 다릅니다.
성경은 신약성경에 적용할 때 매우 정확합니다. 우리가 성령께 우리 자신을 열면, 그분은 이 감춰진 것들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실 것입니다. 성경은 흥미로운 책입니다. 그것은 새 언약의 삶에 대한 구약의 예표에서 매우 완전하고 정확합니다. 구약의 그 경건한 사람들은 그 당시에는 이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사건들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 땅은 수년 동안 수많은 정욕의 거인들이 다스려온 우리 몸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거인들에 대해, "나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생각하겠다"고 말하는 태도를 취했습니다. 예수님은 날마다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옛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옛 사람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의 의지(성경이 우리의 "육신"이라고 부르는 것)를 날마다 죽이는 것입니다.
당신의 삶 속에서 죄에 대해 편안한 태도를 취하면, 다시 옛 사람을 입을 수 있습니다(엡 4:22). "계속해서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은 한번 살아 있었더라도 영적으로 죽게 됩니다. 신자들에게 쓰여진 로마서 8장 13절은 이 점에 대해 매우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여호수아에서 우리 육신의 정욕이 우리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을 예표합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서의 영적 주제는 "죄를 이기는 것"입니다. 이 책은 정욕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라고 격려합니다.
이 싸움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는 여호수아였습니다. 여호수아는 예수를 가리키는 히브리어입니다. 예수는 영어 단어입니다. 히브리어 여호수아는, "주님은 구세주"라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은 말합니다,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는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구주시니라".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할 수 없었던 것은 율법이 우리를 죄에 대한 승리의 삶으로 인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우리를 이 전쟁으로 이끄시는 지도자는 모든 일에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으신 예수님이십니다(히 4:15). 여호수아는 혼자서 장막에 앉아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서 싸우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니요. 그는 앞으로 나가서 자신과 싸우며 "나를 따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구원의 대장이십니다(히 2:10). 그분은 우리보다 앞서 가셨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상의 삶에서, 십자가를 참으시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고, 죄와 사탄을 정복하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리스도인의 경주를 하라는 말씀을 듣습니다(히 12:1,2). 오늘 우리의 싸움에서,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에, 앞서 가신 우리 대장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주님, 제가 지금 시험을 받는 것처럼 당신도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극복했습니다. 저에게도 이겨낼 수 있는 은혜를 주십시오." 우리가 이 대장을 따라갈 때 패배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대장을 따르지 않을 때만 패배합니다.
하나님이 벌하시는 이유
하나님께서 죽이라고 명하신 가나안 사람들은, 소돔과 고모라가 벌을 받은 것처럼, 그리고 노아 시대의 세상이 벌을 받은 것처럼 벌을 받고 있었습니다. 온 땅은 노아 시대에 음행으로 타락했습니다(창 6:11). 가나안 사람들 역시 타락한 성적인 죄와 사탄 숭배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땅이 그들을 토해 냈습니다"(레 18:24,25). 신명기 9장 4절과 18장 10~12절은 하나님이 가나안 족속을 멸하신 이유에 대해 분명한 이유를 제시합니다. 어느 나라에서든 땅을 더럽히고 타락시키는 오염된 영향력이 있다면, 그 사람들을 제거함으로써 그러한 나라를 처벌하는 것입니다 - 그들의 영향력이 확산되어 다른 나라들도 부패하는 것을 방지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마치 친절한 의사가 사람의 발에 생긴 괴사가 온 몸을 망가뜨릴 정도로 심할 때 그 사람의 발을 절단하는 것처럼, 어떤 사람들을 파멸시키십니다. 만약 당신이, 의사가 누군가의 다리를 자르는 것을 보고 의학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의사가 그 사람을 미워한다고 상상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반대였을 것입니다. 의사는 사랑 안에서 그 일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세상을 타락시킬 수 있는 특정 사람들을 잘라내실 때, 세상을 향한 사랑으로 행동하십니다. 홍수 당시 전 세계 인구를 전멸시킨 것은 사랑의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인류는 악마의 지배를 완전히 받게 되지 않고 지켜질 수 있었습니다(창 6:2 -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창조물인 타락한 천사들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 사람을 쳐서 눈이 멀게 한 적이 있습니다(행 13:8-12). 부흥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하나님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사례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호수아에서 읽는 것은, 가나안 사람들을 살해한 것이 아니라 그 땅을 정결케 하는 수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오래 전에,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살았을 때, 거기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은 가나안 족속을 멸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듯이 당시 가나안 족속이 "심판을 받을 때가 되지 않았기"(창 15:16), 때문에 400년 이상을 기다리셨습니다. 우리는 망고가 익었을 때 따먹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심판하시기 전에 인간의 죄가 심판을 받을 만큼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그분은 죄가 무르익었을 때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셨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이 700년 동안 가나안 땅을 차지한 후, 그들이 가나안 사람들과 같은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도 그 땅에서 쫓아내셨습니다. 앗수르 사람들이 와서 이스라엘을 함락했습니다. 125년 후, 남왕국 유다가, 하나님의 선지자들의 메세지를 거절하고 심판을 받을 때가 무르익었을 때, 하나님은 유다도 멸망시키기 위해 바벨론 사람들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편파적이지 않으십니다. 가나안 사람이나 이스라엘 사람이나 유다 사람이나 그분의 기준은 같습니다. 그분의 백성이 계속 그분의 기준을 어기고 그분의 선지자를 무시한다면, 그분은 그들에게도 똑같은 수술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똑같이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죄를 봐주신다면, 그것은 그분이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자녀를 질병과 함께 살도록 내버려 둔다면, 그것은 그분이 자녀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승리의 삶으로 들어가기
1장 1,2절: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 종 모세가 죽었느니라. 이제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라.'" 여호수아를 높여 모세의 뒤를 이을 지도자로 세우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그 위치에 임명하지 않으셨다면, 리더십은 효과적으로 행사될 수 없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여호수아에게 그의 발로 밟는 곳마다 다 그에게 주실 것이며(3절), 그의 평생에 그를 능히 당할 자가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5절). 이는 로마서 6장 14절에 우리에게 주어진, "너희가 은혜 아래 있으므로, 죄가 너희를 이기지 못하리라"는 신약성경의 약속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과거에 많은 거인들이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패배할 것입니다. 단 하나의 죄도 (그것이 아무리 강력하더라도) 우리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실제로 한 영토에 발을 디디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주장해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그의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유업을 주장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의 것으로 붙잡지 않는다면, 그 약속은 우리의 삶에서 결코 성취되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복음 안에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했고, 그 결과 영광스러운 삶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고린도후서 2장 14절에서, " 항상 우리를 승리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말합니다. "항상 승리"는 바울의 승리의 노래였습니다 -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노래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승리의 삶에 결코 들어가지 않습니다. 60만명의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이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거의 같은 비율의 그리스도인(600,000명 중 2명)이 오늘날에도 승리의 삶에 들어갑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약속의 땅에 들어간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땅을 차지하라고 명하시면, 우리가 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만을 생각하며, 결코 우리가 직면한 어려움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것은 불가능하다. 거인들은 너무 크고 강력하다"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분노와 눈의 정욕을 극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낍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정욕은 너무나 강력하고 오랫동안 그들을 지배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 성도들은 평생 패배한 채로 (영적으로 말하자면) 광야에서 죽습니다.
하늘에서 우리를 통해 흐르는 성령의 강은 더러운 생각, 원망, 불평, 돈에 대한 사랑으로 오염된 수로, 즉 우리 마음에서 오염된 수로를 찾아서 흘러가서는 안됩니다. 아니요. 죄가 없는 깨끗하고 순수한 통로를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 강은 하늘의 맑은 물로 우리 주변 사람들을 축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계의 큰 비극은 그 설교자들의 내면이 순수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마음과 사생활에서 죄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돈을 사랑하는 것, 눈의 정욕, 악독, 다른 기독교 지도자/조직과의 경쟁 정신, 시기, 거짓말, 아내에게 화를 내는 것, 그리고 다른 많은 영역에서 불의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설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무엇을 가르칠 수 있습니까? 오직 그들이 실행하고 있는 것, 즉 아내에게 화내는 법, 억울해 하는 법, 질투하는 법, 남들과 경쟁하는 법입니다! 그들이 가르치는 다른 모든 것은 공허한 이론에 불과할 것입니다. 당신이 당신의 삶에서 이기는 자가 되지 않는다면, 당신이 연구를 통해 얻은 모든 성경 지식은 쓸모가 없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라고 확신시키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여호수아 앞에 설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교리를 믿거나 어떤 경험을 함으로써, 죄를 이기지 못합니다. 아니요. 주님의 영을 통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끊임없는 임재만이 우리를 이길 수 있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기독교계에서 그들의 마음이 순수하기 때문에, 그분이 지지하고 보증할 수 있는 그러한 지도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강하고 용기를 내어라. 너는 오랫동안 적들의 지배를 받아온 이 땅을 소유하도록, 이 백성들을 이끌어야 한다" (6절). 우리는 어떤 죄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나가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들의 몸, 즉 수년 동안 죄의 지배를 받아온 몸으로 죄를 극복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단지 그들을 믿음으로 인도하고,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홍해를 건너고, 구름에 덮이는 두 가지 세례를 받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단지 유치원 수업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유치원 수업을 통과하면, 교육을 중단합니까? 아니요. 그러나 그것이 오늘날 기독교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구름 기둥, 즉 성령세례가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기 위해 왔습니다. 그들은 2년 안에 들어갔어야 했는데, 40년 동안이나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지도자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느니라"(롬 10:17). 신자들이 교회 모임에서 이러한 진리를 배우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들이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그들이 어떻게 죄를 이길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강하고 용기를 내어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모든 것을 행하도록 주의하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1:7).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라"(롬 6:14)고 말씀하신다면, 그것을 믿고 고백하십시오.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치우치지 마십시오. 즉, 그 약속의 범위를 축소하지 마십시오. 일부 죄만 포함하도록 축소하지 마십시오. 동시에, 그것이 말하는 것 이상을 의미하게 만들지 마십시오. 우리가 이 땅에서, 그리스도처럼 온전할 수 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이 땅에서 죄 없이 완전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 약속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라고 알고 있는 것(의식하는 죄)에 대한 승리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만 온전히 그리스도와 같이 될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3:2은 그것에 대해 매우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넘어서지 맙시다. 그리고 성경이 약속하는 것보다 적게 믿지도 맙시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은 가나안 온 땅을 점령하는 것 또는 매우 높은 산을 오르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회심할 때, 우리의 죄는 용서받고 우리의 과거는 지워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많은 죄의 노예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 산기슭에 오는 것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이 산을 오르기 시작합니다. 산꼭대기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모습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만, 거기에 도달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산기슭(죄에 패배)에서 영원히 살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요. 성경은 "완전을 향하여 나아가자"(히 6:1)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고린도후서 7장 1절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온전히 거룩함"을 권고 받습니다. 우리는 "완벽"이라는 단어를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생애 말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아직 정상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계속 나아가고 있습니다" (빌 3:12-14). 주님은 지금 우리 중 많은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 산기슭에 충분히 오래 머물렀다. 이제 올라가라. 나아가라." 그러므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맙시다.
"이 하나님의 말씀 책이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라"(8절). 우리는 이미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품어야 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말씀이 우리 입에도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을 입으로 시인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그들이 욕망하는 것을 고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저는 큰 집을 얻게 될 것을 고백합니다. 저는 더 좋은 직장을 얻게 될 것을 고백합니다. 저는 좋은 차를 얻게 될 것을 고백합니다!!" 이 모든 것을 고백하는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을 고백합시다: "주님, 저는 분노를 이길 것을 고백합니다. 눈으로 보는 욕망을 완전히 극복할 것을 고백합니다. 돈을 사랑함을 극복할 것을 고백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입으로 고백해야 할 것들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우리가 이것을 고백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로 하여금 물질에 대한 우리의 정욕을 고백하게 합니다.
당신은 물질에 관심이 있는 사람과 교회를 세울 수 없습니다. 하늘의 일에 관심이 있고 경건한 삶을 사는 사람들과만 교회를 세울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지상의 번영을 제안함으로써, 잘못된 부류의 사람들을 당신의 교회로 끌어들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에게 집이나 차를 주겠다고 약속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당신이 죄를 이길 수 있다고 약속합니다; 하루24시간, 낙심하거나 패배하지 않고 항상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삶 - 항상 승리하고, 항상 기뻐하며, 모든 일과 모든 사람에게 항상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약속하는 새 언약의 삶(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입니다. 그런 다음 그것을 고백하고, "주님, 이것이 제가 평생 살고 싶은 삶입니다"라고 말하십시오.
그것은 젊은 크리스천이었던 제가 성경이 제게 제시하는 것을 보고 원했던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제 주변의 기독교 지도자들을 보니, 그들이 죄에 패배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말했습니다, "주님, 저는 그들을 판단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건 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저들을 제 본보기로 삼고 싶지도 않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만 바라보고 싶습니다. 당신의 약속만 바라보고 싶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나의 유일한 본보기로 삼고 싶습니다." 나는 신자로서 수년 동안 패배했습니다. 그러나 일단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유업을 보았을 때, 나는 계속해서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고백했습니다. 그것은 나에게 끊임없는 기쁨과 끊임없는 승리의 삶을 약속했습니다. 하나님은 마침내 제 마음의 소원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내가 지금 살고 싶은 방식이고, 지상에서의 삶이 끝날 때까지 그렇게 살고 싶은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을 당신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하십시오. 당신이 이 메시지를 전하다 보면, 인기를 구하는 설교자들 사이에서 하나님을 위한 고독한 목소리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낙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끝까지 당신 곁에 서실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있는 죄인들의 필요에 대해 묵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생각하기에 좋은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지 않으면, 죄인들을 도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 번영과 성공을 약속하셨습니다(1:8). 진정한 '번영 복음'은 우리의 삶이 천국적이고 영적인 방식으로 번영하고 성공하는 복음입니다. '번영과 성공'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두 가지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 1장 8절에서 말씀하신 방법으로 이것들을 구하지 않습니다.
라합
2장에서, 우리는 이방 나라의 창녀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봅니다. 예수님은 그분 시대의 창녀들의 영혼을 염려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 마음에도 동일한 염려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라합은 여리고에서 잘 알려진 창녀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오늘날의 많은 창녀들처럼, 자신의 직업에 싫증이 나고 지쳤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자신의 직업에 싫증이 나고 지쳤습니다. 그것을 알아주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들은 매춘부를 경멸했습니다. 우리 도시의 많은 매춘부들은 그곳에 있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곳에 있지 않습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속아서 그런 삶을 살도록 강요당했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남자들에게 착취당하는 것에 지쳤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나는 여러 시대에 걸쳐 매춘부들을 구원할 부담을 가지고 있는 경건한 사람들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들은 이 불행한 여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의 짐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라합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온 세상에서 그분을 갈망하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 국적과 매춘부 또는 종교 지도자 여부에 관계없이. 하나님은 라합의 마음에 있는 그러한 갈망을 보시고, 그녀의 구원을 위한 길을 만들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신약의 첫 페이지에 다윗의 고조모이자 요셉과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리아의 조상으로 나타납니다(마 1:5). 그녀는 히브리서 11장 31절에 믿음의 영웅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야고보는 행함이 따르는 믿음의 모범으로 그녀의 행동을 인용합니다(약 2:25).
라합은 그녀가 다가올 세대의 모범이 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습니까? 아니면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3000년 동안 그녀의 믿음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라고 상상했을까요? 하나님께는 편애가 없습니다. 여러분 중 일부는 라합과 같을 수 있습니다 - 죄 가운데 살면서 당신의 삶을 엉망으로 만든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을 돌봐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세상의 외딴 곳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에 있는 갈망을 보시고, 당신을 그분의 종이 되게 하고 수백만의 축복이 되게 하는 놀라운 방법을 가지고 계십니다.
지도자 여호수아
3장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요단을 건넜는지에 대해 읽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7절),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줄을 그들로 알게 하리라." 여호수아가 모세의 입장이 되는 것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모든 사람의 두려움과 존경을 받았던 강력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모세가 죽었을 때 여호수아는 아마도 70~80세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는 200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야 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존중해줄지 궁금했을 것입니다.
당신도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았던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시작한 사역을 이어가도록 부름을 받았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어떻게 당신이 그것을 할 수 있는지 궁금해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말씀하십니다,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그들 앞에서 너를 높이리라." 하나님은 사람들이 당신을 존경하는 방식으로 사람들 앞에서 당신을 높이실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당신을 감독으로 삼거나 당신에게 칭호를 주고 당신을 높여 주기를 기다리지 마십시오. 어디선가 명예박사학위를 받아 존경을 받으려고 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들에게 당신이 그분의 종이라는 것을 알려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입에 함께 계셔야 합니다. 직함과 인간적인 자격으로 사람을 감동시킨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당신의 삶과 당신이 하는 말에 기름부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감동시킬만한 지상의 자격이 없었습니다. 사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았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것을 구하십시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여호수아의 자격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이것,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예수님의 자격은 무엇이었습니까? 사도행전 10장 38절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니라"고 말합니다. 모세의 자격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셨습니다. 골리앗을 죽일 수 있는 다윗의 자격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당신의 자격은 무엇입니까? 학위증명서인가요? 사탄이 학위 증명서를 두려워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사탄은 학위가 10개가 있는 사람조차 신경 쓰지 않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하는 것을 볼 때에만 두려워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여호수아를 선택하셨습니까? 그의 삶에는 하나님께서 보신 자질이 있었을 것입니다 - 특히 하나님께서 가나안의 거인들을 정복하도록 도우실 것이라는 그의 믿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보시고, "내가 찾는 사람은, 나를 믿고 내 약속을 신뢰할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그를 뽑아서 모세 밑에서 훈련시켰습니다. 하나님은 종종 한 사람을 경건한 나이 많은 사람과 함께 일하게 하심으로써, 그분을 섬기도록 훈련시키십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와 함께 일하며 선지자가 되는 법을 배웠습니다. 디모데는 바울과 함께 일하면서 사도가 되는 법을 배웠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와 함께 일하면서 지도자가 되는 법을 배웠습니다. 하나님께서 경건한 연로한 사람과 함께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면, 그것은 그분을 섬기도록 당신을 준비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실 수 있는 가장 큰 특권 중 하나입니다.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와 가까워지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세로부터 지도자의 자리를 물려받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택하셨습니다.
3장 9절: "이리 와서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수아 자신도 하나님의 말씀을 밤낮으로 묵상했으며, 이제 그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와서 백성에게 말한 것처럼, 여호수아는 모세가 기록한 율법을 읽고 백성에게 "나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여러분에게 전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 우리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듣고 경험한 것을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 - 이론과 기발한 생각이 아닌, 하나님에 대해 맛본 것입니다. 모세, 여호수아, 바울,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널 때 언약궤가 앞서 갔습니다(3:15). 이것은 우리보다 앞서 가시며 모든 죄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입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님을 바라보며"(히 12:1,2) 경주를 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궤를 운반하던 제사장들이 요단강에 다다랐을 때, 강둑은 넘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믿음으로 물에 발을 담그자, 멀리서부터 물이 즉시 그쳤습니다. 그런 다음 이스라엘 사람들이 건너갔습니다. 한편 제사장들은 모두가 강을 건널 때까지 강 한가운데 서 있었습니다. 다시, 그들의 발 밑의 강바닥이 말랐습니다!
4장: 그들이 건너간 후에, 여호수아가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가나안으로 건너왔습니다. 하지만 서둘러 전투에 뛰어들지는 맙시다. 먼저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무엇보다 먼저 무릎을 꿇고 주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교훈입니까? 그런 다음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강바닥에 가서 돌 열두 개를 가져다가(8절), 그것으로 기념을 삼으라고 말했습니다 - 그래서 미래에, 아이들이 아버지에게 그것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아버지들은 그들에게 하나님이 그들의 조상들을 위해 강을 가르면서 행하신 기적에 대해 말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을 우리 자녀들에게도 전하여, 그들도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5장 5~9절: 이스라엘 남자들은 이제 길갈에서 할례를 받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광야에서 태어났고,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할례를 받지 않은 40세의 이스라엘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작은 일이었지만, 언약의 표시였습니다. 그것은 육신에 대한 모든 신뢰를 끊는 것을 상징합니다(빌 3:3). 그들이 전쟁터에 나가기 전에, 육신에 대한 모든 신뢰가 끊어져야 했습니다. 그것이 첫 번째 단계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거인들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애굽에서의 수치가 사라졌습니다(9절).
5장 13,14절: 이제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 앞에 옵니다. 할례가 끝나고 "애굽의 수치가 사라진"(9절) 후에야, 그분이 오신다는 사실에 주목하십시오! 이 대장은 환상 중에 나타나신 주 예수님이셨습니다. 여호수아는 그가 사람인 줄 알고 "당신은 우리 편입니까, 아니면 적 편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대답은 매우 교훈적입니다: "나는 어느 편도 아니다. 나는 군대를 이끌러 왔다. 너는 내 편으로 와야 한다."
때때로 우리는 "주님, 제가 가겠습니다. 오셔서 저를 축복해 주십시오."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 대신에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주님, 주님의 군대 대장으로서 지금 어디로 가십니까? 내가 당신의 군사로서 어디로 가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주님은 대답하실 것입니다, "나는 이러저러한 곳으로 간다. 날 따라와라." 그리스도인의 삶은 너무나 단순합니다. 나는 이리저리 다니며 주님께 나와 함께 가달라고 요청하는 계획을 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요. 하나님은 우리의 종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의 대장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방식을 이렇게 바꾸십시오 - 그러면 당신의 사역에서 놀라운 결과를 보게 될 것입니다. 나는 그것이 내 사역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주님을 더 효율적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땅이 준비되지 않은 곳으로 가서 우리의 시간을 낭비하고 그것을 십 년 후에 깨달은 다음에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닌, 주님이 이미 우리를 위해 땅을 준비한 곳으로 갈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기에 가장 좋은 곳을 아십니다. 그러니 그분의 지시를 기다리십시오 - 항상.
승리,패배 및 속임수
6장 2절: "내가 여리고를 이미 네 손에 넘겨주었노라." 이것은 우리가 사탄과 싸우러 갈 때 알아야 할 것입니다 - 사탄은 이미 갈보리에서 패했고, 주께서 그를 우리 발 아래 짓밟으실 것입니다(롬 16:20). 여호와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내가 7일 후에 여리고를 너희에게 주겠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니요. 그분은 "내가 그 성을 이미 네게 주었노라. 그냥 들어가서 가져가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7일 동안은 성을 13바퀴 돌고 7일째 되는 날에 나팔을 불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이 도시 주변을 행진하고 외치는 소리는, 불행하게도 일부 신자들이 쓰는 기술로 변질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이것들을 명하실 때에만 그것들은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의 소명은 우리가 가는 곳마다 갈보리의 승리를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탄이 패배했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들은 나팔을 불어서 "'사탄아, 너는 십자가에서 패했다'라고 사탄에게 증거하는 말씀으로 사탄을 이겼습니다"(계 12:11). 나는 사탄에게 그의 패배에 대해 매우 자주 상기시켜 주는 것에 큰 기쁨을 느낍니다. 나는 그가 그 말을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나는 한 여인이 우리 집에 기도를 받으러 왔을 때를 기억합니다. 나는 그녀에게, 주님을 그녀의 구세주로 받아들이고 사탄에게 그가 십자가에서 패배했다고 말하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녀는 갑자기 변한 목소리로, "나는 십자가에서 패배한 것이 아니다"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때 나는 나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 그녀 안에 있는 악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악마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거짓말쟁이다. 너는 2000년 전에 십자가에서 패배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녀에게서 나가라." 악마는 즉시 떠났습니다. 그런 다음 그녀는 사탄에게 "사탄아, 너는 십자가에서 패했다"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날 저는 한 가지 사실을 배웠습니다 - 마귀는 자신이 십자가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그것을 자주 말하고, 또한 전 세계의 신자들에게 그것을 정기적으로 말하도록 가르치기로 결심했습니다.
당신은 마귀에게 그가 십자가에서 패배했다고 몇 번이나 말했습니까? 오늘 시작하세요. 그가 십자가에서 패배했다고 자주 그에게 말하십시오. 그는 그렇게 말하는 당신을 미워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악마가 나를 미워할 때 그것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그때 나는 내가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탄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당신의 증거의 말씀을 그에게 선포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를 당신의 발 아래에 둘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여기서 당신에게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당신이 양심을 순결하게 지키지 않고 사탄을 대적한다면, 사탄은 당신을 비웃으며 "나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 그런데 넌 누구니?"라고 말할 것입니다(행 19:15).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께 복종하고, 그 다음에 마귀를 대적하십시오(약 4:7). 주님은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수 1:7).
7장: 여기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처음으로 패한 것을 읽습니다.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이스라엘이 패한 이유를 물었더니, 여호와께서 "진영에 죄가 있다"고 대답하셨습니다. 한 남자가 금지된 물건을 훔쳤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여리고에서 아무 것도 취하지 말라. 이 모든 것을 여호와께 드려야 한다"(6:17)라고 매우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아간을 제외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그 명령에 순종했습니다(7:20). 그가 마침내 붙잡혀 폭로되었을 때, 그는 자신이 죄를 지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어느 집에서 아름다운 바벨론의 외투를 보고 그것을 탐내었습니다('시날'은 바벨론의 또 다른 말입니다.) 그는 "내가 보고, 탐내고, 취하고, 숨겼다"고 말했습니다(21절) - 유혹의 네 단계. 우리도 이런 식으로 죄를 짓고 죄를 숨깁니다. 그런 다음 아간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아간은 여리고에서 전리품을 가져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만약 이 거인들을 죽이고 그들의 도시를 점령한 후에, 내가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면, 앞으로 20년 동안 나는 가난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조금 보관하는 것이 좋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여리고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탐욕스러운지 알아보기 위해 그들을 시험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거의 깨닫지 못했습니다. 여호수아 8장 2절에서, 우리는 여호와께서 백성들에게 그때부터 그들이 가나안 전쟁의 전리품을 스스로 취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읽습니다! 아간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기다리기만 했다면, 그가 원하는 모든 은금과 의복을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시험하셨을 때 실패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놓쳤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이 탐심으로 무언가를 움켜쥐고 있는지 시험하실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그렇다면,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계획하신 최고의 것을 당신의 남은 생애 동안 놓치게 될 것입니다. 대신, 당신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면, 항상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실 것입니다.
8장 26절에는, 아간이 죽임을 당한 후 아이 성이 어떻게 패했는지 읽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기 전에 과거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인생의 아이 성에서 계속 패배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모세가 산꼭대기에서 그의 손을 들었던 것과 같이, 여호수아가 그의 단창을 들어 아이 성을 치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그의 군사들이 싸웠고, 아이를 패하게 하였습니다.
이제, 승리를 거둔 후 우리 모두가 직면하는 가장 큰 위험은, 자만의 위험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긴장을 풀기 시작하는 순간, 속임을 당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여호수아에게 일어난 일입니다(9장). (죽임을 당해야 할 가나안 사람들인) 기브온 사람들이 와서 여호수아를 만났습니다(9:4). 그들(기브온 사람들)은 낡은 옷과 낡은 샌들을 신고 오래되고 곰팡이가 핀 빵을 들고 다니는 등 교묘하게 행동하며 먼 곳에서 온 것처럼 가장했습니다(9:5). 그들은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첨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아첨할 때 우리는 큰 위험에 빠집니다. 그러면 속임수가 곧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는 9장 14절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를 읽습니다. 여호수아는 그들을 믿고, 그들을 죽이지 않겠다고 그들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3일 후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사람들이 죽임을 당해야 할 가나안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16절). 하지만 그때는 이미 그들과 언약을 맺은 후였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약속을 지켜야 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 아첨하는 자들과 그릇된 동기로 교회에 들어오고자 하는 자들에게 미혹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경고입니다. 그러한 경우에 가장 안전한 행동은 우리 자신의 지혜에 의존하지 않고, 주님의 조언을 구하는 것입니다.
큰 승리를 거둔 직후에는 특히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많은 기적적인 치유를 행하신 직후에, 광야로 떠나 기도하시며, 모든 영광을 아버지께 돌리신 이야기를 읽었습니다(눅 5:15,16). 그것은 우리를 위한 예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조언을 구하지 않을 위험에 처한 때는 언제입니까? 우리가 승리했을 때입니다. 우리가 패배했을 때가 아닙니다. 우리는 패배 후보다 승리 후 더 큰 위험에 빠집니다. 일반적으로 패배 후에,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그분을 실망시켰기 때문에 주님께 가까이 나아갑니다. 우리가 한동안 승리를 거두었을 때, 영적 교만의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10장: 다섯 왕이 기브온을 쳤고 기브온 사람들이 여호수아에게 도움을 구했을 때, 여호와께서 여호수아를 격려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넘겨주었다. 그들 중 한 사람도 너를 당하지 못할 것이다"(8절). 그 말은 항상 "나는 이미 주었다"였습니다.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승리는 기정사실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사탄과의 싸움에도 임해야 합니다. 사탄과 그의 악마들은 우리 앞에 설 수 없을 것입니다. 지옥의 문은 결코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그들을 쳐부수니 "아무도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21절). 그리고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불러 이르되, "이 왕들의 목을 발로 밟아라"(24절). 성경은 로마서 16:20에서, "평강의 하나님이 속히 사탄을 (갈보리에서가 아니라)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갈보리에서 사탄을 물리치셨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이제 우리 발 아래 짓밟힐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마지막 날
13장 1절: 여호수아가 나이가 많아 늙었더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아직도 차지할 땅이 많다." 여호수아를 이어받을 다른 지도자가 이스라엘에 없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계에서도, 경건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으며 아직 소유하지 못한 땅이 너무 많습니다.
14장 6~15절에서, 우리는 갈렙이 이제 85세가 되었지만, 그의 믿음이 40년 전처럼 여전히 활기차다는 것을 봅니다. 그는 여호수아에게, 거대한 거인들이 가득한 산간 지방을 달라고 요청하고 그들을 모두 몰아내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헤브론을 갈렙에게 주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갈렙처럼 경건한 노인들이 "주님을 온전히 따르며"(14절) 늙어서도 믿음으로 더욱 굳건해지는 이기는 자들을 보는 것은 얼마나 큰 도전과 격려가 됩니까!
갈렙의 예와 대조적으로, 우리는 가나안의 많은 지역에서 가나안 사람들을 쫓아내지 못한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들의 슬픈 이야기를 읽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지파들이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않았다"(또는 할 수 없었다)는 것을 세 번 읽습니다(15:63; 16:10; 17:12). 이것은 그들의 삶에서 분노, 정욕, 원망과 같은 죄, 즉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죄를 몰아내지 못한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입니다.
나머지 장은 가나안 점령과 그들의 소유지에 정착한 지파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21장 44절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말씀을 읽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사방에서 안식 을 주셨습니다; 그들의 모든 원수들 중에 그들과 맞선 자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4장 8,9절에 언급된 안식입니다. 거기에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한 안식과 승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인도하고자 하시는 안식(그리고 모든 죄에 대한 승리)의 그림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또한 이 안식에 들어가기를 부지런히 하고 그것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히 4:1,11).
21장 45절은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 하신 선한 말씀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이것은 우리가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설 때, 우리의 간증이 될 것입니다. 그 날에 많은 성도들이, 광야에서 멸망한 60만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체험하거나 누리지 못한 것이, 불신앙 때문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이) 믿었던 사람들은 그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의 약속 하나하나를 경험하고 누렸다는 것을, 그 날에 기뻐할 것입니다. 그 날에 많은 믿는 자들의 마음에는 그들의 불신앙으로 인해 얼마나 큰 후회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모든 약속을 요구합시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대로 (Yes)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아멘'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고후 1:20).
22장 10-34절에는, 상대방을 비판하거나 판단하기 전에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는 간단한 방법을 받아들이면, 오해가 제거되고 갈등이 방지되는 방법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나안이 아닌 요단 동편에 살기로 결정한 이스라엘의 2½ 지파는 성막의 놋 제단을 본떠 자기 땅과 가나안의 경계에 세웠습니다. 다른 9½ 지파는 이것을 보고, 즉시 하나님을 거역하는 행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먼저 문제를 명확히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 뒤 곧 그들은 반역 행위가 아니라 단지 9½ 지파의 다음 세대가 강 건너편에 살고 있다는 이유로 2½ 지파의 다음 세대를 배척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문제는 평화롭게 해결되었습니다. 모든 기독교인들이 그들 자신의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기 전에 상대방의 말을 듣는 그 동일한 상식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23장에서, 우리는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내용을 읽습니다. 그는 자신이 곧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굳건히 지키고 그들 주위에 있는 이방 민족들로부터 분리되도록 경고했습니다. 그러면 여호와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고, "이스라엘 사람 한 사람이 능히 천 명의 대적을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6-10절)!! 그러나 그들이 타협한다면, 주님은 그분의 약속을 성취하신 것처럼 그분의 위협도 이행하시고 그들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14-16절).
24장에서, 여호수아는 아브라함 시대부터 이스라엘의 역사를 빠르게 검토하고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돌보심을 상기시킵니다. 그런 다음 그는 그들에게 "주를 경외하고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분을 섬기라"고 권고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의 결정이 무엇이든, 그와 그의 집안은 오직 주님만 섬기겠다고 했습니다(14,15절). 우리는 여호수아가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집안을 위해서도 결정을 내린 것을 봅니다. 그는 그의 집의 가장이었고 그의 자녀들이 주님만을 예배하고 섬기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했던 것처럼, 그 문제에 있어서 자녀들에게 선택권을 주지 않았습니다. 크리스천 지도자들은 무엇보다 먼저 그들의 가정을 이끌어야 하고, 자녀들도 주님을 따르고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전 세계에 여호수아와 같은 많은 사람들을 필요로 하십니다.
사사기는 여러 해 동안 여호수아의 리더십 아래에서 경험한 매우 강력한 승리 직후, 이스라엘의 타락한 상태를 묘사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상태가 그들의 지도자의 자질에 달려 있다는 이전과 같은 교훈입니다. 이스라엘은 훌륭한 지도자가 있을 때마다 번영했습니다.
좋은 리더의 중요성
오늘날 기독교계에 있는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타협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곧고 좁은 길로 인도할 만큼 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론처럼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인기를 얻고자 하므로(출 32장), 하나님은 그들의 지도력을 인정하실 수 없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는 결코 인기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여호수아가 살아 있는 동안과, 여호수아가 죽은 뒤에 남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장로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여호와를 섬겼습니다"(2:7). 그러나 여호수아와 그의 동료 장로들이 죽을 무렵에는, 그들을 대신할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그 세대도 다 죽고, 그 후에 여호와와 그가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일을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세대가 일어났습니다"(10절).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수년 동안 많은 기독교 단체를 다녀본 후에, 저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고 엘리야처럼 "나는 주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기독교 지도자를 거의 만나지 못했다고 말해야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 사역에 종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문적인 설교자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공부하고 학위를 받고, 그들을 지원해줄 누군가를 구한 다음, "하나님을 섬기기"위해 나갑니다. 그들의 삶에는, 약간의 희생과 열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열심과 희생과 지식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들의 활동에 대한 통계는 인상적일 수 있지만, 그들의 회심자들의 자질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형편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교회에 거듭난 신자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제자입니까? 영적인 신자와 육신적인 신자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육신적인 신자들의 큰 교회보다, 영적인 신자들의 작은 교회가 더 낫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은 0와트 전구 100개보다 1000와트 전구 몇 개가 더 낫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빛의 강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아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지도자가 하나님을 모르면, 백성도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당신은 성경을 연구하고 교인들에게 가르칠 수 있으며, 그들은 성경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실에서 그들에게 화학을 가르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아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성경 정보를 통해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시련과 시험을 겪어야만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시련 속에서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모임에 앉아있는 것으로써가 아닌, 이것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성경을 알아야 하지만, 성경을 넘어서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리라"(단 11:32). 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겼습니다"(2:11). 그것은 여호수아가 죽었고, 이제 그들을 인도할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2000년 기독교의 역사는, 하나님이 일으켜 세우셔서 교회를 시작하거나 부흥 운동을 일으킨 수많은 사람들의 예들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일단 그들이 죽자, 그들의 교회(또는 운동)는 그들 이전의 교회와 운동처럼 쇠퇴했습니다. 새로운 세대는 그들의 창시자와 동일한 교리와 동일한 성화 이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창시자처럼 거룩하지 않습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창시자가 가졌던 동일한 "성령 세례"를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과 사역에는 동일한 기름부음이 없습니다. 무언가가 빠졌습니다. 창시자는 하나님을 알았지만, 추종자들은 창시자만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일으키시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다른 땅, 다른 세대에서 일으키신 개인들을 통해 교회에서 그의 가장 큰 일을 하셨습니다. 그런 사람을 중심으로 하나님은 숫자보다는 질, 즉 자기 세대에 하나님을 위한 순수한 증거를 하고자 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모으십니다. 나는 인도에 그러한 남녀들이 많이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사사기에서, 하나님은 남자를 찾지 못하셨을 때 한 여자, 즉 드보라를 찾으셨습니다. 그것은 모든 자매들에게 격려가 됩니다. 하나님은 완전히 굴복한 사람을 찾으실 때마다, 그분은 그가 굴복한 정도까지 그를 사용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모든 리더가 같은 자질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굴복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사기에는 하나님께서 일으켜 세우신 몇몇 지도자들이 설명되어 있지만, 모세나 여호수아와 같은 자질을 갖춘 지도자는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기드온은 처음 시작할 때 기름부음을 받은 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이 끝날 무렵 그는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사기가 우리 시대에 매우 적절한 메시지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 수정
이스라엘은 가나안 사람들을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2:1,2), "내가 너희를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어 내가 너희와 언약을 맺은 땅으로 인도하였다.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그 땅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고, 그들의 제단을 헐라'하였다. 그러나 너희는 나에게 순종하지 않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 자신의 생각을 따랐습니다 - 오늘날 많은 기독교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모든 권고를 설교하지 않고, 그들이 사는 회중과 시대와 문화에 맞게 하나님의 말씀을 수정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또한 하나님의 명령을 수정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가 네 원수를 쫓아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죄를 이기지 못할 것이며, 평생 동안 너의 문제와 함께 살 것이다. "이 백성(가나안 사람들)이 네 옆구리에 가시 같을 것이요, 그들의 신들이 네게 올무가 되리라"(2:3). 이스라엘 자손이 이 말을 듣고, 울며 제사를 드렸으나, 그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같은 메시지를 듣고 감동하여 울고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지도자들이 그들을 잘못된 방향으로 인도하기 때문에, 그들은 곧 옛 방식으로 되돌아갑니다. "나는 하나님을 알고 싶고, 지도자가 설교한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기준으로 살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모세와 여호수아처럼 자신이 속한 지역의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온전한 진리로 인도할 수 있는 설교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면, 여기 있는 이스라엘 백성처럼 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아는 하나님의 남자/여자가 되십시오.
타락의 일곱 주기와13명의 사사
사사기 3장부터 16장까지, 하나님께서 세우신 13명의 사사가 나옵니다. 열네 번째 사사는 사무엘상에 나오는 사무엘입니다. 이 대부분의 사사들의 이름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첫 번째 사사는 갈렙의 사위이자 조카인 옷니엘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3:9). 여기에서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시매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니라"(3:10)고 말합니다. 그것은 사사기에 자주 등장했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과 삼손에게 임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도록 준비시켰습니다(6:34; 14:6). 그들이 이스라엘을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기름부음뿐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 기름부음만이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고 이끄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거듭날 수 있으며, 그것은 확실히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주님의 영이 우리에게 임하셔서, 주님을 섬기도록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예배)모임에서 얻은 감정적 경험에 만족하지 마십시오. 방언을 말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방언을 말하면서도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 없이는 결코 만족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성령의 능력 없이 결코, 절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30년 동안 온전한 삶을 사신 예수님, 즉 성령으로 나시고 30년 동안 성령님께 순종하며 사셨던 예수님도 아버지를 섬기러 나가시기 전에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그분이 요단강에서 기도하실 때, 하나님의 영이 그분에게 임했습니다. 그분의 본을 따르십시오. 아무리 많은 지식이나 타고난 재능도 결코 이 기름 부음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기름부음 아래 끊임없이 살아야 합니다. 삼손의 예는 한 때 기름부음을 받았다가 나중에 그 기름부음을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비극적으로 일깨워 줍니다.
옷니엘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40년 동안에는 평화가 있었습니다(3:11). 그러나 그러고 나서 옷니엘이 죽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악을 행하자, 여호와께서 모압 왕에게 18년 동안 그들을 종노릇하게 하셨습니다(3:14).
사사기에서 이러한 일곱 번의 주기가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타락과 형벌,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사사를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평생 이런 순환 속에서 살아갑니다 - 타락하고, 회개하고, 건짐 받고, 다시 타락하고…… . 그들은 끝없는 원을 그리며 계속 돌고 있습니다. 그들은 집회에 가서 감동을 받고 헌신합니다. 부흥회가 끝나면, 곧 그들의 타락이 시작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또 다른 기름부음 받은 설교자가 와서 집회를 열면 사람들은 다시 자극 받습니다.
우리가 이 끝없는 순환 속에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분명히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는 항상 성령님을 모실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성령은 한 지도자에게만 임했고, 모든 사람은 그 지도자에게 의존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는 모두 성령을 받을 수 있으며, 우리를 자극하는 어떤 설교자에게도 의존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불이 항상 타오르게 할 수 있습니다.
18년 동안 모압을 섬긴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15절).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또 다른 구원자 에훗을 세우셨습니다. 그는 두 번째 사사였습니다. 나는 그들이 노예 상태에서 구원해 달라고 외치기 전에 왜 18년을 기다렸는지 궁금했습니다. 왜 그들은 노예가 된 지 한 달 안에 부르짖지 않았습니까? 왜 오늘날 사람은 죄에 대한 승리를 추구하기 전에, 18년(또는 경우에 따라 40년) 동안 죄에 패배한 채 살고 있습니까? 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에훗이 모압을 정복하고 그 땅은 80년 동안 평온했습니다(30절). 그러나 그들은 다시 타락했고, 하나님은 삼갈을 일으켜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600명을 죽였습니다. 그것은 확실히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통해서였습니다. 나중에 삼손이 그랬던 것처럼요.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여호와께서 그들을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파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진멸해야 했던 가나안 족속이, 이제 왕을 세워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신자들은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죄가 그들을 지배합니다.
야빈은 900대의 철병거를 소유하고 20년 동안 이스라엘을 억압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여호와께 부르짖었고 여호와께서는 드보라를 그들을 위한 사사로 세우셨습니다(4:3,4).
여성 지도자
하나님께서는 여성을 그분의 백성의 지도자가 되도록 임명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첫 번째 선택은 항상 남자입니다 - 디모데전서 2:12-14에,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아담이 먼저 창조되었고, 하와는 아담을 돕는 배필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와가 먼저 속아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거기에서 바울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여자가 교회 안에서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라." 여성은 주일 학교 반에서 아이들을 인도하고 가르칠 수 있고, 여성반에서는 여성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녀는 또한 집에서 자녀들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교회에서 장로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온전한 뜻입니다.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이 여자들에게 인도될 때, 참으로 형편없는 상태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사 3:12).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혹은 교회)의 모든 남자들이 게으르고, 부진하고, 비겁한 것을 발견하실 때 어떻게 하셨을까요! 그때 하나님은 "드보라"를 일으키십니다. 그리고 수년 동안 그분은 기독교계에서 그분의 종이 되도록 많은 "드보라"를 일으키셨습니다 - 그리고 저는 그들 모두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영혼을 구원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여성을 선교사와 작가로 강력하게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남자를 찾을 수 없을 때, 어떤 사역에서든 여자를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드보라에게서 배우는 것입니다.
새 언약 시대의 약속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내 영을 너희 아들과 딸들과 나의 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 남녀 모두 - 그들은 (둘 다) 예언하리라"(행 2:17,18). 빌립에게는 결혼하지 않은 4명의 딸이 있었습니다 -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약속을 활용하여 예언했습니다(행 21:9).
여성은 장로나 가르치도록 부름을 받지 않았더라도, 예언("세워주고 격려하고 위로하는" - 고전 14:3)하고 교회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으며, 고린도전서 11:5은 이에 대해 매우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드보라는 여선지자였습니다(4:4). 새 언약 아래에는 여선지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옛 언약 아래는 있었습니다. 드보라는 랍비돗의 아내였습니다. 그는 아내가 사사가 되는 것을 막지 않았습니다. 그는 온유하고 조용한 영으로 그녀 옆에 앉아 그녀의 사역을 격려했습니다! 아마도 그는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것을 도왔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랍비돗 형제를 사용하실 수 없으셨지만, 그의 아내는 사용하실 수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한 부부에 대해 읽습니다 -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브리스길라는 남편 아굴라보다 하나님과 성경을 더 잘 아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에서 그들이 다섯 번 함께 언급된 가운데, 네 번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로 언급되었고,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행 18:18,26; 롬 16:3; 딤후 4:19)! 그곳의 순서는 의미가 있습니다. 남편보다 하나님과 성경을 더 잘 아는 아내가 많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브리스길라는, 남편 아굴라에게 복종할 줄 아는 훌륭한 자매였습니다. 한번은 그녀가 회당에서 아볼로의 말을 듣고 그가 진리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깨닫고, 그를 집으로 청하여 남편과 함께 앉아 하나님의 도를 아볼로에게 설명하여 아볼로의 사역에 근본적 변화를 일으켰습니다(행 18:24-28). 그녀는 회당에서 일어나 그를 바로잡지 않았습니다. 아니요. 그녀는 그를 집에 불렀습니다. 그것은 여성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알면서도, 자신의 삶에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아 남성까지도 축복한 자매의 아름다운 예입니다. 아볼로는 마침내 사도 바울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먼저 바른 길로 인도한 사람은 한 여인 브리스길라였습니다!
드보라가 종려나무 아래 앉아있으면, 이스라엘 자손들은 재판을 받기 위해 그녀에게 나아왔습니다(4:5). 아마도 그녀의 남편 랍비돗은 그녀가 이스라엘을 재판하는 동안, 집에서 음식을 요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이 너무 나약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셔야만 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녀는 전쟁에서 이스라엘을 이끌 이스라엘에서 가장 용감한 사람인 바락을 불렀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여성으로서 전투에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브리스길라에게 아굴라가 필요했던 것처럼, 그녀에게도 남자가 필요했습니다.
드보라는 바락에게, "너는 10,000명을 데리고 가서 시스라와 싸우라. 여호와께서 그를 네 손에 넘겨주시리라"(4:6,7)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아주 분명하고 구체적인 예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 가장 용감한 사람은 뭐라고 대답합니까? 바락이 말했습니다, "자매여, 당신이 나와 함께 간다면 내가 가겠습니다. 나와 함께 해주세요"(4:8). 그는 그녀 없이 가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드보라는 바락과 함께 가기로 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용감한 사람이 얼마나 나약했습니까! 그리고 그는 다른 모든 사람들의 전형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락이 너무 나약했기 때문에, 드보라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스라를 죽이는 영예는 당신에게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여자에게 갈 것입니다." 결국, 시스라를 죽인 사람은 야엘이라는 여자였습니다(4:22).
여기에는 모든 남자를 위한 교훈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인도할 남자를 찾지 못하셨을 때 실망하십니다. 그러나 남자들이 하나님을 실망시킨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이 방해 받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분은 대신 여자를 사용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일을 하기 위해, 수 세기에 걸쳐, 전 세계에서 많은 여성들을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일을 이루기 위해 남자에게만 국한되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이 시스라에서 해방된 후, 드보라와 바락은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것은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라고 불립니다(5장). 5장 16절에서, 우리는 전쟁터에 싸우러 온 여러 지파에 대해 읽습니다. 그리고 나서 5:23에서, 우리는 "메로스를 저주하여라"라고 읽습니다. 왜 메로스가 저주를 받아야 합니까?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죄를 짓지 않았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적이 올 때 그들은 주님을 도우러 오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당신은 죄를 짓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전쟁에 나가서 주님을 위해 싸우지 않는다면, 당신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주님의 전쟁을 하고 있을 때, 가만히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그것은 저지름(commission)의 죄가 아닙니다. 태만(omission)의 죄입니다.
죄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 저지름의 죄와 태만의 죄입니다. 저지름의 죄는 우리가 뭔가 잘못한 죄입니다. 태만의 죄는 우리가 무언가를 했어야 할 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죄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죄는 메로스의 죄였습니다. 메로스는, 주님을 위해 싸울 용사들이 필요했을 때,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군사를 돕지 않고, 스스로 나가서 싸우지 않으면, 죄를 짓는 것입니다.
기드온과 그의 군대
그 후 그들은 40년 동안 평화를 누렸습니다(5:31). 그러나 새로운 세대는 그들의 조상처럼 죄를 지었습니다 - 그리고 이번에는 여호와께서 미디안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7년 동안 종살이하게 두셨습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은 기드온을 구원자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입혔다"라고 말합니다(6:34 - 여백). 성령이 기드온이 입었던 옷과 같이 임했습니다. 그러자 기드온이 힘을 얻어, 나팔을 불고 전쟁터로 나갔습니다. 32,000명이 그와 함께 싸우러 나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백성이 너무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7:2). 그들이 온 마음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 모두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마귀를 두려워하느냐? 그렇다면 집에 가라. 누군가가 너를 '바알세불', '이단자', '거짓 선지자'라고 부를까 두렵느냐? 그렇다면 집에 가라. 주를 섬기는 데 네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그날 22,000명의 남자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10,000명이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7:3). 하나님은 아직 백성이 너무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 역시 전심이 아니었습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자신의 것을 찾고 있었고 제거되어야 했습니다. "그들을 물가로 인도하라, 내가 거기서 그들을 시험하리라"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4절). 물가에 이르자, 그들 중 대부분이 적군을 잊어버리고 물에 머리를 파묻고 물을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와 같습니다.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만 보면, 그들은 주님과 그분의 전쟁은 다 잊고 재물의 탐욕스러운 추구에 머리를 파묻고 있습니다. 그날 기드온의 군사 9,700명이 실격 당했습니다.
300명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물가에 왔을 때, 적군을 살피며 경계를 늦추지 않고, 당장의 갈증을 해소할 수 있을 만큼의 물만 손으로 모았습니다. 이들은 돈과 물질을 사용하면서도, 그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신자들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직장에서 충실하게 일하지만, 나머지 시간은 주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보냅니다. 하나님은 "이들이 내가 원하는 사람들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날 그 군대에는 원래 32,000명의 1%도 안 되는 300명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생명의 길이 좁고 그것을 찾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 비율은 항상 작습니다. 60만 명 중 여호수아와 갈렙 두 명만이 약속의 땅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 소수를 기뻐하십니다.
7:16에서, 우리는 기드온이 그의 군대를 각각 100명씩 세 부대로 나눈 것을 봅니다. 각 사람은 나팔과 불이 들어 있는 항아리를 들고 다녔습니다. 그들은 빛이 보이도록 항아리를 깨뜨린 다음, 나팔을 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과 사역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그림입니다. 우리는 모두 질그릇이지만, "우리 질그릇 안에 하나님의 영광의 보물을 가졌습니다"(고후 4:6,7). 그러나 이 질그릇은 다른 사람들이 빛을 볼 수 있기 전에, 많은 시련, 즉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 깨어져야 합니다(고후 4:7-11). 그렇지 않으면 그 빛은 우리 안에 영원히 감춰질 것입니다. 바울이 이 글을 쓸 때, 기드온의 군대가 내부에 불이 들어있는 항아리를 들고 있었는데, 그 그릇이 깨져야만 불빛이 보였던 것을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이 비취도록, 많은 상황을 통해 우리를 깨뜨리기를 원하십니다. 나팔을 부는 것은 주님의 영광과 말씀을 담대히 선포하는 모습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그런 남녀를 찾고 계십니다.
일찍이, 기드온이 이 전쟁에 나가기 전에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조금 더 용기를 내고 싶다면, 밤에 적진으로 내려가 그들의 말을 들어보아라"(7:10,11). 그리고 기드온이 거기로 내려갔을 때, 그는, 그들이 모두, 그와 그의 무리를 두려워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오늘 당신이 마귀의 진영에 들어가서 귀를 기울이면, 예수님과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을 그들이 두려워한다는 것 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탄과 싸우러 나가도록 격려해 줄 것입니다.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를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진정한 제자라면 그는 우리도 정말로 두려워합니다. 그러니 그가 우리를 겁주려고 할 때마다, 그의 허풍이라고 부르도록 합시다.
그러나 기드온 조차도 주님에 대한 신실함으로 인내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옛 언약 하에서나 오늘날에도 잘 시작한 많은 사람들의 슬픈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드온이 자기들을 다스리기를 원했고, 그가 말했습니다, "아니다, 나는 다스리지 않을 것이다. 내 아들도 다스리지 않을 것이다. 주님께서 다스릴 것이다"(8:22,23). 정말 영적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문장에서 그가 한 말을 들어 보십시오. 그는 "여러분 모두, 나에게 귀고리 하나씩을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8:24).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 백성이 귀고리를 그에게 주었고, 기드온은 금 1700세겔(약 20킬로그램)과 많은 장식품과 값비싼 옷을 모았습니다(8:26). 기드온은 하루 만에 억만장자가 되었습니다 - 많은 설교자들이 양떼에게서 십일조와 헌금을 모아 집으로 가져가서 백만장자가 된 것처럼 말입니다! 기드온은 또한 그 금의 일부를 사용하여 이스라엘이 숭배하는 우상이 된 에봇을 만들었습니다(8:27).
이렇게 하여, 이 위대한 사람은 타락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인생을 끝내는 방식이지 시작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모든 경주의 상은 출발을 잘한 자가 아니라, 잘 마친 자의 것입니다(고전 9:24). 우리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들의 삶을 마감했는지 생각하라"(히 13:7 - 여백)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초기에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은 많은 설교자들이 기드온처럼 타락하여, 돈과 재산을 좇다가 생을 마감했습니다! 기름 부음을 잃은 그들은, 그들의 마지막 날을, 자녀들을 위해 금과 귀걸이를 모으는데 보냅니다! 잘 시작한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겠습니다:
당신에게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기드온과 다른 사람들에게서 교훈을 얻으십시오.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섬길 수는 없습니다. 삶의 마지막에 "내가 누구의 소를 빼앗았거나, 누구의 나귀를 빼앗았습니까? 내가 누구를 억압했습니까?"라고 말할 수 있었던 사무엘과 같은 사람들에게서 우리는 참으로 복된 대조를 봅니다(삼상 12:3). 그처럼, 바울도 인생의 마지막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누구의 은이나 금이나 옷을 탐내지 아니하였고... 우리는 누구의 양식도 거저 먹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아무도 이용하지 않았습니다"(행 20:33; 살후 3:8; 고후 7:2). 설교자에게 얼마나 훌륭한 간증입니까! 사무엘과 바울과 같은 사람들의 예를 따르십시오.
그 후, 사사기에서, 우리는 다른 지도자들에 대해 읽습니다 - 아비멜렉, 돌라, 야일, 입다, 입산, 엘론, 압돈.
입다는 자신이 하나님께 서원하였기 때문에, 약속을 지켜 그의 딸을 하나님께 드렸으므로 그녀가 평생 시집 가지 않았습니다(11:35).
삼손과 그의 실패
그런 다음 13번째 사사인 삼손이 등장합니다. 13장에서, 우리는 자녀가 없는 마노아의 가족에 대해 읽습니다. 어느 날 여호와의 천사가 마노아의 아내에게 나타나 그녀가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를 나실인으로 양육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삼손이 태어났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하기 시작하였습니다(13:25). 그는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 그것이 그의 능력의 비밀이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삼손은 아주 이른 나이에 타락했습니다. 그는 예쁜 여자를 볼 때마다, 자신의 정욕을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섬기려는 그의 소명을 모두 잊고 그 여자를 뒤쫓아 갔을 것입니다 - 그 여자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지 간에, 그 여자가 예쁜 한 그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평생 동안 그의 약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틀림없이 그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늘날의 많은 설교자들처럼 예쁜 여자들에게 큰 약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삼손의 행동은 요셉의 행동과 큰 대조를 이룹니다. 요셉은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 살았고 하나님의 길에 대한 계시는 삼손보다 훨씬 적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반복해서 하나님께 충실했으며 - 따라서 수천 년 동안 젊은이들에게 뛰어난 본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삼손은 수천 년 동안 모든 사람에게, 마찬가지로 두드러진 경고가 되었습니다!
14장 6,7절에서 우리는, "삼손이 딤나에 내려가매, 어린 사자가 그를 향하여 으르렁거렸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크게 임하시니, 삼손이 사자를 잡아 찢었다"라고 읽습니다. 그는 우리가 종이를 찢듯이, 그 사자를 산산조각 냈습니다. 그리고 그는 너무 겸손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 심지어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삼손은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 성령의 능력임을 알았습니다.
14장 10절에서 우리는, 그의 아버지가, 삼손이 좋아하는 블레셋 여자를 만나러 내려가서 삼손을 그녀와 결혼시켰다는 것을 읽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이 결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사람과 결혼해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명시한 하나님의 율법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입니다. 삼손의 인생은 오르락내리락하는 삶이었습니다 - 가끔씩은 위로, 그러나 대부분은 아래로였습니다. 16장 1절에서, 그가 가사에 내려가서 거기서 한 창녀를 보고 좋아하여 그녀와 간음하였다는 것을 읽습니다. 그가 잡혔을 때, 그는 성문을 빼내고 그것과 함께 걸어갔습니다! 후에, 그는 들릴라라는 또 다른 블레셋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졌습니다(16:4). 하나님은 그의 양심에 여러 번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듣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마도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그러하듯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신다 는 사실에 기뻐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날에 주님께 와서, 다양한 사역에서 그들을 어떻게 사용하셨는지 주님께 상기시켜 드릴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 모두를 지옥에 던지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적인 삶에서 죄 가운데 살았기 때문입니다(마 7:22,23). 우리가 양심에 대한 하나님의 부드러운 경고를 계속 거부한다면, 우리도 그 설교자들처럼 스스로를 파멸시킬 수 있습니다.
삼손은 마침내 들릴라의 무릎에 그의 머리를 얹고, 자신의 힘의 비결을 그녀에게 털어놓았습니다. 그녀는 즉시 그의 머리카락을 잘랐고 그것이 그의 사역의 끝이었습니다. 얼마나 비극적인가요! 그토록 강력한 구원자였던 한 남자가, 자신의 욕망과 정욕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 27절에서, "내가 내 몸을 복종시키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설교를 하면서도 나 자신은 실격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리빙 바이블은 이 구절을, "내 몸이 원하는것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할일을 하게 하는 것"이라고 의역합니다. 이것은 우리 몸이 먹고 싶은 것이 아니라 먹어야 할 것을 먹게 해야 하고, 자고 싶은 만큼 자는 것이 아니라 자야 할 만큼 자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눈이 보고 싶은 것만 보지 않고 보아야 할 것만 보도록 눈을 조절해야 합니다. 우리는 혀가 말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말해야 할 말을 하도록 혀를 통제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놀라운 메시지를 전할 수 있지만 마지막 날에 주님에 의해 쫓겨날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의 정욕을 훈련하는 데 많은 것이 달려 있습니다. 그것이 많은 사람들을 축복하는 놀라운 사역을 했던 삼손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얻는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마침내 그는 실격되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위대한 설교자들이 예쁜 여자들의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행사하는 은사나 조직의 방대함에 감동받지 마십시오!! 우리가 레위기에서 본 것처럼 지도자가 죄에 빠지는 것은 일반 신자가 같은 죄에 빠지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일입니다. 더 많이 받은 자에게는, 더 많이 요구하십니다.
당신이 이성과의 관계에 충실하지 못하다면, 장로나 지도자가 되려고 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죄 가운데 살면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 것처럼 사람들을 속이지 마십시오. 당신이 계속 그렇게 살면,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공개적으로 드러내실 것입니다. 당신은 자신의 죄를 숨길 만큼 영리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하나님에 대해 충분히 영리하지 않습니다. 그는 당신이 지금까지 노출된 것보다 더 많이 당신을 폭로할 것입니다.
16장에서, 우리는 삼손이 어떻게 힘을 잃고 눈이 멀게 되었는지 읽습니다. 설교자가 여성을 쫓을 때 이런 일이 발생합니다: 그들은 영적 시력을 잃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명확하게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교리에 있어서 여전히 복음주의적이며 유창하게 설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영적 시력은 사라졌을 것입니다.
삼손은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그는 인생이 끝날 무렵 자신의 죄를 인정할 만큼 분별력이 있었습니다. 그는 회개했고, 마침내 그의 죽음으로 많은 블레셋 사람들을 멸망시켰습니다(삿 16:23~31).
삼손의 이야기는 두 마리의 사자 이야기입니다 - 하나는 외부에 하나는 그의 마음 안에 있습니다. 그는 외부의 사자를 이길 수 있었지만, 내면의 사자는 이길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성욕의 사자가 어떤 외적인 사자보다 훨씬 더 강하고 두려운 것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숲에서 사자가 당신을 향해 달려오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신은 돌아 서서 달릴 것입니다. 당신은 정욕의 사자가 당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볼 때도 그렇게 합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부도덕을 피하라"(고전 6:18)라고 권고합니다. 그것이 그것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 그러한 유혹에 가까이 가지 마십시오. 당신을 유혹하는 여자 근처에 가지 마십시오. 굶주린 사자를 피하듯이 음탕한 여자를 피하십시오.
삼손은 옛 언약 아래서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누구도 삼손의 예를 부도덕에 빠진 핑계로 삼을 수 없습니다. 삼손에게는 신약성경이 없었고, 그는 갈보리 십자가 이전에 살았고,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는 것처럼 본보기가 없었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우리처럼 성령을 내주하시는 도우미로 받을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와 교제하는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그 당시에는 아직 열리지 않았습니다. 삼손도 경건한 교제의 축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 가운데 살 핑계가 없습니다.
그들의 눈에 옳은 것은 무엇이든
17장부터 21장까지는,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 숭배와 부도덕, 전쟁에 관한 이야기로,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그분의 대표자로 선택하신 나라의 타락한 상태를 드러냅니다. 소돔과 고모라만큼이나 가라앉았습니다.
17장 7-13절에서, 최고의 봉급과 최고의 혜택을 받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기꺼이 가고자 하는, 유급 직업 설교자의 성경에서의 첫 번째 사례를 봅니다. 여기에 가장 높은 입찰자에게 제사장으로 섬기기로 동의한 레위인이 있었습니다. 한 사업가가 와서 그에게 좋은 봉급과 매년 새 옷, 무료 숙식을 제안했습니다. 설교자는 즉시 계약에 서명했습니다! 그에게 돈을 준 사업가는 그가 레위인 학교를 졸업한 설교자를 고용했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께서 그에게 축복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일과 얼마나 흡사한지요. 21세기에나 있을 법한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 한심한 상황에 대한 이유는 이 사건에 대한 설명 바로 앞의 구절에 나와 있습니다. "각 사람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17:6).
그리고 그 구절은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요약합니다. 그래서 이 진술은, 매우 적절하게, 책의 마지막 구절에서 반복됩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더라.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21:25).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삶에서 왕이 아니므로 그들은 마음대로 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돈을 쓰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삽니다. 설교자들은 가장 많은 급여를 받을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갑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뜻이나 그들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완전한 계획에 대한 관련 없이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 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우리의 주님과 왕으로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사사기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처럼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
룻기는 모압 여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룻은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모압은 롯이 자신의 딸과 간음을 범함으로써 태어난 아들들 중 하나였습니다. 이 근친상간 관계에서 모압이라는 종족이 나왔습니다. 이 모압 사람들 중에는 룻이라는 어린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매우 나쁜 유산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다윗 왕의 증조모가 되었고,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계에 속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음행과 근친상간 관계에서 태어난 자녀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봅니다.
여러분 중 일부는, 나쁜 가족 유산을 가지고 있거나, 과거에 자신이 매우 사악한 삶을 살았을 수 있습니다. 당신이 태어났을 때 당신의 어머니가 결혼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매춘부였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근친상간 관계에서 태어났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당신을 거부하고 경멸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은 여전히 성도(saint)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룻기에서 우리가 받는 격려입니다. 하나님은 그녀가 어느 특정한 혈통을 가졌다고 해서 그녀를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모압 사람은 주님의 집회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며, 그들의 후손은 10대에 이르기까지 단 한 명도 주님의 집회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신 23:3). 그러나 하나님은 룻에게 그 법을 우회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녀의 마음을 보시고 그녀가 진심으로 그분을 찾는 것을 보셨습니다 - 그래서 하나님은 그녀를 받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진실한 마음을 보실 때 그분의 공식적인 법을 우회할 수 있는 모든 권리를 갖고 계시며 - 실제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룻의 증손자인,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압 여인의 4대째인 솔로몬은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는 것을 거절당하기는커녕, 실제로 그 성전을 지었습니다!
룻이 내린 선택
룻의 결혼 이야기는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에 기근이 들어 엘리멜렉과 그의 아내 나오미가 두 아들과 함께 모압 땅으로 갔습니다. 이 아들들은 자라서 모압 여인들과 결혼하여, 하나님의 법을 어겼습니다. 그리고 나서 엘리멜렉은 죽고, 두 아들도 죽었습니다. 인정있는 여인, 나오미는 두 며느리인 룻과 오르바에게 고국으로 돌아가 새 남편을 찾으라고 말했습니다(1:8).
룻과 오르바는 이 말을 듣고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1:9,14). 그런 다음 오르바는 시어머니에게 입을 맞추며 "어머님, 안녕히 계세요. 저는 집에 돌아가서 다른 남편을 찾아야 합니다. 나는 내 자신의 삶을 돌봐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룻은 나오미에게 매달렸습니다. 그녀는 나오미에게서 참 하나님에 대해 배웠고, 남편을 원하는 것보다 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오르바는, 남편을 원했습니다. 거기에는 갈림길이 있었고, 오르바는 잘못된 길을 택했습니다. 룻은 옳은 길을 택했습니다, 그 선택은 영원히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우리는 오르바라는 이름을 결코 다시 듣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오늘 어디에 있든, 그녀는 의심할 여지 없이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많은 시간 갈림길에 섭니다. 당신은 당신 앞에 두 가지 방법을 보여주는 메시지를 들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중 일부는 지금 그 선택에 직면해 있을 수 있습니다. 갈림길은 결정을 내려야 하기 때문에, 중요한 장소입니다. 룻은 나오미에게, "제발 돌아가라고 하지 마세요. 나는 어머니와 함께 갈 것입니다. 나는 당신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당신의 백성은 내 백성이 되고, 당신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16절). 그녀는 그날 확고한 결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하나님 앞에서, 그녀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나오미는 룻이 결심한 것을 보고 그녀와 함께 이스라엘로 돌아가는 데 동의했습니다(1:18). 그리하여 그들은 엘리멜렉의 고향인 베들레헴에 이르렀습니다. 그러자 나오미가 말했습니다, "내가 풍족하게 나갔으나, 여호와께서 빈손으로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나오미가 자기 앞에 놓인 일을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때때로 우리는 나오미처럼 여호와께서 우리를 빈손으로 돌아오게 하셨다거나, 여호와께서 우리를 대적하신다거나, 전능하신 여호와께서 우리를 괴롭게 하셨다고 불평합니다!(21절). 나오미가 하나님에 대해 그렇게 불평한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러나 시어머니는 어리석었을지라도, 룻 자신은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참 하나님을 발견한 것에 대해 감사했습니다. 그녀는 아주 좋은 며느리였으며 시어머니를 돌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그것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이방인(이교도) 소녀가 불평하지 않고 겸손한 섬김의 영을 가진 것을 보셨습니다. 많은 경우에, 이교에서 그리스도께로 나오는 사람들은, 신자의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들보다 훨씬 더 나은 신자입니다. 이교도 배경에서 온, 이 소녀 룻은 우리 모두에게 도전입니다. 그녀는 시어머니에 대한 세속적인 며느리들의 일반적인 태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녀는 시어머니를 사랑했고 그녀를 아주 잘 돌보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상을 주신 이유입니다.
보아스의 밭
나오미에게는 가까운 친척 곧 보아스라는 큰 부자가 있었습니다(2:1). 이스라엘에는 결혼한 남자가 죽으면, 그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 그의 아내와 결혼하여 죽은 남자의 이름으로 자녀를 양육해야 한다는 법이 있었습니다(신 25:5-9). 그래서 나오미는 생각했습니다, "글쎄, 보아스는 나의 가까운 친척인데 아직 미혼이다. 아마도 그는 룻과 결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룻은 (모압 여인이기 때문에) 그 법을 알지 못하였고, 나오미는 룻의 희망이 커지지 않도록 그녀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룻은 재혼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을 찾으러 이스라엘에 온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참 하나님을 찾으러 왔습니다. 남편을 찾아 모압으로 간 사람은 오르바였습니다. 그러나 룻은 하나님을 먼저 찾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았을 뿐만 아니라 좋은 남편과 미래를 위한 좋은 유산도 찾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존중하는 자를 존중하십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지상 생활에 필요한 다른 모든 것을 그들이 구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더하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 것들은 그들의 무릎에 떨어집니다.
나오미와 룻은 가난했습니다; 그러나 룻은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하여 비천한 일을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근면한 소녀였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어느 날 시어머니에게 가서 부자들의 곡식 밭에서 남은 곡식을 줍겠다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곡식을 거두어들일 때, 밭의 모퉁이는 남겨두고, 남은 곡식을 줍기 위해 밭을 두 번 다시 돌아보지 말라는 하나님의 법이 있었습니다 - 그런 곡식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남겨 두어야 합니다(레 19:9,10). 룻은 그렇게 남은 곡식을 주우러 갔습니다. 가난한 소녀였기에, 그녀는 자신과 시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그녀를 놀랍게도 보아스의 밭으로 인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계획하신 이 두 사람을, 남편과 아내로 연합시키시려고 그분의 주권으로 어떻게 하셨는지 보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보아스는 그곳에서 이삭을 줍는 이 여인을 보고 일꾼들에게 그녀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그녀가 나오미와 함께 돌아온 모압 여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보아스는 매우 친절하고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룻이 남자들에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다른 밭에 가서 이삭 줍는 것은 위험하니,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는 종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그녀를 해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룻은 이 말에 감동을 받아 얼굴을 땅에 대고 멸시받는 모압 여인에게 왜 이렇게 친절하게 대하시는지 물었습니다. 보아스는, 그녀가 시어머니에게 베푼 모든 친절과, 그녀가 옛 모압 우상을 버리고 어떻게 주님을 따르기로 선택했는지 들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 다음 보아스는 일꾼들에게 일부러 곡식 한 움큼을 떨어뜨려 룻이 주울 수 있도록 하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룻을 택하신 이유
하나님께서는 왜 그런 소녀를 보아스의 아내로, 다윗의 조상으로, 우리 주님의 족보에 있는 여자로 선택하셨을까요? 우선, 룻은 자신을 너무 높게 생각하지 않는 매우 겸손한 소녀였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또한 근면하고 공손하며, 주님을 따르기 위해 가정과 친척을 버리고 시어머니를 공경과 친절과 사랑으로 대하는 확고한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오늘날에도 어린 소녀들에게서 찾으시는 자질입니다.
룻이 집에 왔을 때, 시어머니는 그녀에게 어디서 주웠는지 물었고, 그녀는 시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나오미는 룻에게, 자기가 그녀를 위해 안식할 곳을 찾아보아야 하겠다고 말하고, 보아스가 가까운 친척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가까운 친척이 과부의 재산을 되찾고 그녀와 결혼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법에 대해, 룻에게 설명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보아스가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는 그에게 그가 가까운 친척이므로, 그녀를 구하고 그녀와 결혼할 것을 요청했습니다(3:9). 보아스는 룻이 거기 있는 더 잘생기고 젊은 남자들을 택하지 않은 것을 보고 기뻤습니다. 보아스는 훨씬 나이 많은 남자였고, 어린 소녀들은 대개 나이 든 남자에게 매력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녀에게 자신보다 더 가까운 다른 친척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의로운 사람인 보아스는, 그(다른 친척)가 그녀를 속량하고 결혼할 것인지 먼저 그 사람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3:12,13).
친족 구속자
이튿날, 보아스는 즉시 성문으로 가서 이 다른 친척에게 그녀의 가장 가까운 친척인 나오미의 재산을 살 것이냐고 물었습니다(4:3,4). 그는 즉시 "네, 제가 그것을 사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또한 룻과 결혼하여 그녀의 죽은 남편의 이름으로 아들들을 양육해야 할 것임을 그에게 상기시켰습니다. 그가 이 말을 들었을 때, 그는 그의 제안을 철회하고, 그녀의 아들들이 나중에 그의 아들들과 함께 상속권을 주장할 것이고, 그런 복잡함을 원치 않기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재산 사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리하여 보아스는 재산을 사고 룻과 결혼할 첫 번째 서열이 되었습니다. 그는 흔쾌히 그렇게 하기로 동의했습니다.
보아스와 같은 저명한 남자가 모압 소녀와 결혼하는 것은 대담한 조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룻에게서 몇 가지 뛰어난 특성을 보았고 그녀가 이교도 가정으로부터 나온 것을 존경했습니다. 기독교 소년들은 종종 비기독교 가정에서 구원받은 소녀들과 결혼하는 것을 주저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러한 소녀들은 믿는 가정에서 태어난 소녀들보다 더 강한 기독교인이며 더 경건합니다.
보아스는 룻과 결혼하여 오벳이라는 아들을 낳았고, 오벳은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를 낳았습니다(4:17).
이와 같이 하나님은 근친상간, 이도교 배경에서 온 한 여인을 존귀하게 하셨습니다, 그녀가 하나님을 공경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룻에게서 배우는 것은 사무엘상 2장 30절의 진리입니다, "나를 존중하는 자를 내가 존중하리라." 하나님께는 편애가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을 수도 있는 그분의 자녀들을, 그들을 위한 좋은 결혼 상대를 찾기 위해 어떻게 돌보시는지 보여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땅의 일에서도 주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시며 우리의 모든 지상적 필요를,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충족시키기를 원하십니다.
이 이야기는 또한 그리스도와 우리의 영적 연합에 대한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룻은 죄에 빠진 우리의 모습을 완벽하게 보여주는 예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속하고 우리와 결혼하기 전에, 우리의 "가까운 친척"이 되셔야 했습니다. 이것이 그분이 우리와 같은 살과 피를 취하시고 "모든 점에서 우리와 같이 형제가 되신"(히 2:17) 이유입니다. 그리하여 그분은 우리의 친족-구속주가 되셨습니다. 룻과 보아스의 연합을 계획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창세 전에,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의 연합을 계획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할렐루야!
마지막 사사와 첫 왕
사무엘은 최초의 예언자였습니다 -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의 위대한 예언자 중 첫 번째. 그는 또한 제사장이자 사사였습니다 -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 그는 삼손과 거의 같은 시대에 살았지만, 이스라엘의 다른 지역에 살았습니다.*
사무엘의 탄생
사무엘의 이야기는 어머니 한나가 임신을 하지 못하면서 시작됩니다. 사라, 리브가, 라헬, 한나와 같이 자녀를 갖기 전에 수년 동안 불임이었던 것으로 성경에 언급된 여성이 얼마나 많은지 보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그들은 모두 기도로 하나님을 찾았고, 그들 각자는 하나님의 목적에서 독특한 위치를 가진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들은 불임의 상태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녀들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요청을 들어주셨고, 그들 각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독특한 목적을 이루신 자녀가 있었습니다. 많은 어머니들은 자녀가 아직 뱃속에 있을 때 자녀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나 이 여인들은 남다른 강도로 기도했습니다. 그런 간절한 기도를 통해 한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참으로 멋진 일입니다. 그렇게 해서 사무엘이 태어났습니다.
한나는 아이를 갖기 위해 여러 해 동안 여호와께 기도했습니다. 마침내, 그녀는 이렇게 서원했습니다,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내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1:11). 이제 그녀의 초점이 바뀌었습니다. 처음에, 그녀는 자신의 필요만을 생각했습니다: "나는 아들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녀가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께서도 필요하시므로, 저에게 아들이 있다면 그를 주님께 바치겠습니다." 우리 기도의 초점이 우리의 필요에서 하나님의 필요로 바뀔 때, 그때부터 우리는 기도에 대한 응답을 받기 시작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영적 필요가 컸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너무나 심하게 타락했습니다. 엘리와 같은 그들의 지도자들도 몹시 타락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모세 이후로 예언자가 없었습니다. 한나는 주변 환경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필요함을 인식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나는 계속해서 기도했습니다, "주님, 제 아들을 당신께 바칠 뿐 아니라, 면도칼도 그의 머리에 대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당신에게 바쳐진, 나실인이 될 것입니다. 당신이 그를 사용하여 이 나라를 당신께로 되돌리실 수 있다면, 그는 당신의 것입니다." 그녀의 모든 기도는 그녀의 필요에서 하나님의 필요로 바뀌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우리 자신에게 너무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응답되지 않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그런 어머니에게서 사무엘이 태어난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한나는 사무엘을 낳았을 때, 그녀의 약속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아들을 성전으로 데리고 와서 말했습니다. "나는 이 소년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주님은 내가 그분에게 구한 청원을 나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나도 그를 주님께 바쳤습니다.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립니다"(1:27,28). 그녀는 그를 다시 데려갈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그 어린 소년에게 그곳에서 무릎을 꿇고 주님을 경배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 경건한 어머니가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 다음 그녀는 주님께 놀라운 감사의 노래를 불렀습니다(2:1-10). 마리아의 감사의 노래(눅 1:46-55)는 한나의 노래에서 영감을 받았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 가사가 너무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은 예언 사역을 통해 사사기에서 보았던 혼돈의 상태에서 다윗 통치 하의 영광스러운 상태로 이스라엘의 모습을 변화시킨 청년으로 성장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대제사장 엘리의 아들들은 무익하고, 경건치 아니하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하는 자들이었습니다(2:12). 지도자의 자녀들이 부도덕하고 불경건할 때 그것은 매우 슬픈 일입니다. 최악의 부분은 엘리가 그들이 성막에서 사역에 참여하도록 허락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제물을 훔치고 성전에 있는 여자들과 간음을 범했습니다. 이 모든 일에 대한 엘리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그는 그들을 불러 즉시 주님의 일에서 떠나라고 말했어야 했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들에게 "내 아들들아 내가 듣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라"(24절)고 말했습니다. 그는 줏대가 없고 쓸모 없는 지도자였습니다.
그 경건하지 않은 자들과는 대조적으로, 사무엘은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받으며 자랐습니다(2:26).
그리고 하나님은 엘리에게 사자를 보내셔서 그의 사역이 끝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존중하기보다 그의 아들들을 더 존중하였기 때문입니다(2:27-29). 그 다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아름다운 말씀을 발견하게 됩니다 - 우리가 평생 동안 기억해야 할 것: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히 여기리라"(삼상 2:30). 당신이 하나님을 존중한다면, 당신은 그분이 당신을 존중하실 것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건치 못한 환경 속에서, 사무엘은 순결하게 성장했습니다. 그것은 경건하지 않은 가정이나 환경에 처해 있는 모든 젊은이들을 위한 본보기입니다. 당신은 타협으로 가득 찬 교회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십시오. 만약 당신이 사무엘처럼, 타락하지 않고 주님을 향한 헌신에 굳건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처럼 당신을 그 상황에서 그분의 목소리가 되도록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어느 날 밤, 사무엘이 잠이 들었을 때,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는 그것이 엘리라고 생각하고 알아보러 갔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목소리는 엘리가 사무엘에게 여호와께 말씀해 달라고 요청하라고 말할 때까지, 사무엘을 계속 불렀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오셔서 서서 다른 때와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라고 부르셨습니다. 사무엘이 말하기를,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고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3:10). 여기에 우리 모두가 하루 종일 주님의 음성에 대해 가져야 할 태도가 있습니다: "주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오늘 밤 자정에 내가 와서 너에게 말할 것이다"라고 경고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니요. 사무엘은 항상 깨어 있어야 했습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갑자기 그의 선지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거듭거듭 봅니다. 그런 다음 두세 달 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 다시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깨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음성을 듣기를 간절히 원하는 자들에게만 말씀하십니다. 적어도 지금부터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습관을 기른다면, 당신의 삶과 사역이 완전히 바뀔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밤중에 당신에게 말씀하실 수도 있고, 당신이 그분의 말씀을 읽는 동안이나 버스를 타고 여행하는 동안 당신에게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는 형제나 자매를 통해 당신에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당신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나 혼자 있을 때 당신에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경청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주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하나님의 예언자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들었을 때,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날 사무엘에게, "내가 엘리의 죄를 심판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침에 엘리가 사무엘을 불러 "여호와께서 너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더냐?"라고 물었습니다. 사무엘은 그에게 모든 것을 말했습니다(3:18). 엘리에게는 나쁜 소식이었지만, 사무엘은 그에게 모든 것을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그러해야 합니다. 엘리가 사무엘에게 매우 친절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무엘은 주저하지 않고 그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아들들이 저주를 자초했는데도, 당신은 그들을 꾸짖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언자로서의 사무엘
3장 19절은 말씀을 섬기는 모든 사람들에게 놀라운 구절이자 큰 도전입니다: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우리가 하는 말 중 한 단어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모든 단어가 사람들의 마음에 와 닿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말씀을 전할 때뿐만 아니라 사적인 대화에서도 이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의 비밀은 여호와께서 사무엘과 함께 계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창세기에서 이것이 요셉의 유능함의 비결임을 보았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사역과 대화에서 모두 그러한 말을 갈망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을 여호와의 예언자로 인정하였습니다(20절).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고 환상이 흔하지 아니한 때"에 일어났습니다(3:1). 이스라엘은 모세 시대 이후로, 300년이 넘도록 예언자가 없었습니다. 사사 시대에는 예언자가 없었습니다. 시편 74:9의 (그 시편의 맥락에서 읽을 때) "예언자가 더 이상 없다"는 말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선지자를 보내지 않으실 때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포기하셨다는 것처럼 보입니다.
3세기가 넘도록,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가지고 나온 예언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마침내 한 젊은이를 일으키셨다는 것을 알았고 - 그들은 그의 말을 들었습니다. 젊은이 여러분 모두 이 말을 듣고 용기를 얻어야 합니다: 사무엘이 예언을 시작한 것은 젊었을 때였습니다. 예레미야, 에스겔, 스가랴도 마찬가지였습니다(렘 1:6, 겔 1:1, 슥 2:4). 주님을 섬기기 위해 40세가 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사무엘은 열 살 때 여호와를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20세가 되었을 때, 그는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비밀은 무엇입니까? 그는 듣고 있었습니다. 그의 태도는 항상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였습니다.
4:3: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다가 패한 때를 읽습니다. 장로들은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주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패하게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언약궤를 이곳에 모셔오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 때문에 패배한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언약궤는 상징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없이도 상징을 가질 수 있습니다 - 오늘날 빵을 떼는 것이 상징인 것처럼 말입니다. 당신은 떡을 떼고 잔을 마시면서도 주님과 교제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언약궤를 그들 가운데로 가져왔습니다. 언약궤가 올 때 그들은 큰 소리로 외쳤고, 발 밑의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습니다(5절). 오늘날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외칠 때만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신다고 상상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언약궤가 오기 전, 블레셋 사람들은 전쟁에서 이스라엘 사람 4000명을 죽였습니다(2절). 언약궤가 도착하고 이스라엘이 "할렐루야, 여호와를 찬송하라" 외치자,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 30,000명을 죽였습니다(10절)!!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상징과 의식을 가져오거나 소리를 지르고 하나님을 찬양함으로써 그분을 어떤 상황에 끌어들일 수는 없습니다. 상징과 소리 지르기 모두 있는 교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죄에 의해 패배했습니다. 그리고 매우 자주, 가장 많이 소리지르는 사람이 가장 많이 패배하기도 합니다 - 바로 위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가장 큰 소리로 외치고 비명을 지르는 교회가 아니라, 죄가 없는 교회에서 발견됩니다. 하나님은 쾌락과 돈과 오락의 신을 섬기지 않는 깨끗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그래야만 그들의 외침과 찬양이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는 소리 지르기, 감정적 동요, 신체적 징후가 있든 없든 승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후자의 것들만 존재하고 사람들이 죄에 의해 패배한다면 - 그러면 분명히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계시지 않습니다. 이 간단한 진리를 이해하면, 이 마지막 날에 많은 속임수로부터 우리를 구할 것입니다.
아버지로서, 사무엘의 실패
7:15~17: 사무엘은 해마다 순회하여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로 가서 그 모든 곳에서 이스라엘을 재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행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에 가족을 위한 시간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그의 아들들은 길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여전히 그들을 이스라엘의 사사로 임명했습니다. 그의 아들들은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며 스스로 돈을 벌기 시작하였습니다(8:1-3). 그것이 사무엘이 일생에 저지른 가장 큰 실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사사직에 부르신 적도 없는 아들들을 사사로 세우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그들의 아들들을 그들의 후계자로 삼는 동일한 실수를 범하고 있습니다. 편애와 아들에 대한 사랑은 우리의 귀를 막아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가족과 관련이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무엘과 같은 그런 경건한 사람도 그 시점에서 귀머거리가 되었습니다. 젊은 시절, 사무엘은 엘리에게 자녀 양육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가 자기 집에서, 자기 자녀를 양육하는 방식에서 실패하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자녀들이 주님을 따르지 않는 것을 보았을 때,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사사로 삼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는 예언자요 사사요 분별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아들들에 관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호와께 "주님, 당신 백성의 다음 사사로 누구를 임명해야 합니까?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물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의 아들들을 사사로 세우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너무 자신만만한 나머지, 자신의 편파적인 논리에 따라 자신의 아들들을 임명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많은 사람들의 삶을 파괴했습니다.
이것은 젊었을 때 아주 잘 시작한,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이가 들면서 심지어 자녀가 경건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녀에게 편파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를 위한 경고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판단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확실히 우리 자신을 판단하고 그것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다음은 설교 사역을 하는 사람들을 위한 질문입니다: 당신은 사역에 너무 바빠서 자녀를 하나님의 방법으로 양육할 시간이 없습니까? 오늘날 자녀들이 주님의 길을 따르지 않는 하나님의 종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을 판단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주님의 종들이 살아가며 일하는 압력에 대해 전혀 모를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그들과 그들의 가족이 얼마나 사탄의 공격의 대상인지, 전혀 모릅니다. 나는 그들을 절대 판단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그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고 싶다면, 나는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말할 것입니다. 당신이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면, 적어도 그들을 판단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그들로부터 경고를 받으십시오.
디모데전서 3장 5절은, 자기 자녀를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은(그들이 그의 집에서 그와 함께 살 때), 하나님의 집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다스리지 못하므로, 어떤 교회에서도 장로로 임명되어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 가정을 제대로 다스릴 수 없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그의 자녀들이 장성하여 집을 떠난 후에는, 그들이 주님을 따를 것인지 아닌지를 스스로 선택해야 합니다. 그 이후의 그들의 상태는 그가 주님을 섬기는 데 결격 사유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자녀들이 집에 있을 때, 그들의 좋은 행실은 그가 교회의 장로가 되기 위한 기본적인 요구 조건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기
그러나 그것은 아마도 사무엘이 실패한 유일한 영역이었을 것입니다. 다른 많은 분야에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인생을 마칠 때까지 하나님의 길에서 결코 흔들리지 않은 사람의 탁월한 본이었습니다. 사무엘은 자신의 삶에서 죄에 대한 민감성이 너무 커서, 하나님이 그를 백성의 지도자로 임명하셨는데 그가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다면 죄를 지었을 것이라고 느꼈습니다(삼상 12:23, "나는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께 결단코 범하지 않겠습니다").
얼마나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양떼를 위해 기도하지 않으면 죄를 짓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 많은 사람들이 리더가 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지도자가 되어 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면 죄를 짓는다는 것 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살인, 간음, 악한 생각, 화내는 것이 죄라는 것을 압니다. 여기 당신의 목록에 추가해야 할 또 하나의 죄가 있습니다: 당신이 인도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12 제자를 위해 정기적으로 기도하셨습니다. 사무엘도 그것을 이해했습니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종들은 모두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400년 후에 하나님께서 직접 사무엘에 관해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신 것을 보십시오. 타락한 이스라엘에 대해, 하나님은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서서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한다 해도, 내 뜻을 바꾸지 아니하리라"(렘 15:1)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기도를 들으시지 않습니까? 그분은 분명히 들으십니다. 그러나 "의인의 효과적이고 간절한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큽니다"(약 5:16). 모세부터 예레미야까지 800년 동안 살았던 모든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하나님께서는 기도의 위대한 인물로 단 두 사람만을 선택하셨습니다 - 모세와 사무엘. 가장 위대한 두 선지자는 아마도 모세와 엘리야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의 가장 위대한 두 사람은 모세와 사무엘이었습니다.
모세에게도 사무엘처럼,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신의 후계자로 아들들을 지명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세우라고 하신 사람을 세웠습니다 - 여호수아.
우리는 사무엘과 같은 기도의 용사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심각한 실수를 범할 수 있음을 봅니다. 우리의 살과 피에 대한 편애와 사랑은 모두 우리에게 매우 가깝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의 제자가 되려면, 부모와 아내와 다른 가족에 대한 애착을 끊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4:26). 현명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실수로부터 배울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도 같은 실수를 저지를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우리에게 반복해서 경고하는, 동일한 실수를 저지르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발견합니다.
사울 왕 - 잘 시작한 사람
이제 우리는 사울의 사역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처음에 사울을 왕이 되는 데 관심이 없는 겸손한 청년으로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왕을 원했습니다. 어느 날, 주님은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일 이맘때,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라"(삼상 9:15-17). 사무엘이 사울을 보았을 때, 여호와께서 그에게 "보라, 이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기름병을 가져다가 그의 머리에 붓고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어 그분의 기업의 통치자로 삼으셨다'고 말했습니다(삼상 10:1). 사울은 이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완전히 놀랐습니다. 그는 어쨌든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선택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서 많은 좋은 특성을 보셨음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네게 크게 임하리니, 네가 예언을 하고 변하여 딴 사람이 되리라"(10:6).
이것은 성령으로 충만할 때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을 묘사하는 참으로 놀라운 단어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으로 변합니다 . 이것은 우리 모두가 지속적으로 체험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왕으로 택하신 사람으로도 백성들에게 인정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모든 백성을 불러 모으고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서 한 왕을 택하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주님께서 주권적으로 제비 뽑기를 주관하실 것을 믿고 제비를 뽑았습니다 - 먼저 지파별로, 그 다음 가족별로, 그 다음 개인 이름별로 제비를 뽑았습니다. 결국 제비가 사울에게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사울을 찾았을 때, 그가 없어졌기 때문에 그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왕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몸을 숨겼습니다.
사울이 가진 열 가지 좋은 특성에 유의해 보십시오.
1. 그는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 철저했습니다. 9장 3절에서, 우리는 그의 아버지 기스가 나귀를 잃었다는 것을 봅니다. 기스는 사울에게 가서 그것들을 찾으라고 말했습니다. 사울은 에브라임 온 산지와 살리사 땅을 샅샅이 수색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할 일을 주었고, 그는 그 일을 철저하게 해냈습니다. 그는 몇 분 동안 나귀를 찾으러 갔다가 "저는 찾을 수 없습니다" 하고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당나귀를 찾는 것처럼 작은 일에도 충실한 사람을 선택하십니다!
2. 그는 현명했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나귀를 찾지 못하자 그는 종에게, "돌아가자. 이제 아버지는 나귀보다 우리를 더 걱정하실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9:5).
3. 그는 하나님의 종들을 존중할 줄 알았습니다. 그의 종이 도시로 가서 하나님의 종을 만나자고 제안했을 때, 사울은 "그를 위하여 예물을 드리자"고 말했습니다(9:7).
4. 그는 자신에 대해 겸손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하나님이 그를 선택하셨다고 말했을 때, 그는 "내가 누구입니까?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오며,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작은 가족이 아니니이까?"라고 말했습니다(9:21).
5. 그는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삼촌이 사무엘이 무슨 말을 했는지 물었을 때, 사울은 그의 삼촌에게 사무엘이 그의 당나귀를 찾았다고 말했지만 사무엘이 그를 왕으로 기름 부은 것에 대해서는 삼촌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10:15,16).
6. 그는 뒤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그를 왕으로 뽑았을 때, 그는 짐 속에 몸을 숨겼습니다. 그는 숨기를 원하는 사람이었습니다(10:22).
7. 그는 오래 참았습니다. 사울이 자기 집에 돌아갔을 때에, 어떤 불량배들이 이르되,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할 수 있으리이까"하고, 그들은 그를 경멸했고 어떤 선물도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공개적으로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잠잠했습니다(10:27).
8. 그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어떤 백성이 적의 공격을 받았을 때, 그들은 사울에게 전령을 보냈고, 사울은 즉시 사람들을 모아 가서 그들을 도왔습니다(11:1-7).
9. 그는 용감했습니다. 사울은 가서 암몬 적군과 용감히 싸워 이스라엘 백성을 구했습니다(11:11).
10. 그는 그의 원수들을 용서했습니다. 사울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돌아왔을 때, 어떤 사람들은 이전에 사울을 왕으로써 거부했던 사람들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도 죽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11:12,13).
이 모든 훌륭한 자질을 갖춘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몇 년 안에 그는 하나님과의 접촉을 잃었고,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잃었고, 겸손을 잃었고, 인격을 잃었고, 왕국을 잃었고,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잘 시작한 많은 하나님의 종들의 슬픈 이야기입니다.
사울이 실패한 이유
13장 8절에서, 우리는 사울이 그의 왕국을 잃은 첫 번째 이유를 봅니다. 사무엘은 사울이 전쟁에 나가기 전에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겠다고 사울에게 기다리라고 말했습니다. 사울은 7일을 기다렸지만 사무엘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스스로 제사를 드리기로 결정했습니다(13:9). 그는 자신이 제사장이 아니며,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법을 범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왕으로서의 사역에서 너무나 많은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주위에 그어놓으신 경계를 벗어나 다른 사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느꼈습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같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역을 인식하고, 하나님께서 우리 주위에 그으신 경계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역에서 우리를 축복하셨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지 않으신 다른 사역으로 옮겨갈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전도자로서의 은사가 아닌, 교사로서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때때로 다른 사람들이 내 경계를 벗어나라는 압력을 가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경계 안에 머물러 왔습니다. 나는 사울의 실수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재능 있는 전도자를 소중히 여기며 그들과 함께 일합니다 - 그리고 그들의 사역의 영역에서 그들에게 복종합니다. 그러나 나는 내 사역에 충실합니다.
웃시야는 제사장이 되려고 했던 또 다른 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문둥병으로 치셨습니다(대하 26). 여기서 우리는 사울이 제사장이 되려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왕국을 그에게서 거두어 가신 것을 봅니다. 당신의 사역을 인정하고 당신의 경계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사역을 완수하게 하십시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단순한 법칙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도 사울의 조급함을 봅니다. 그가 제사를 드린 지 몇 분이 지나지 않아 약속한 대로 사무엘이 왔습니다. 사울이 몇 분만 더 기다렸더라면, 이야기가 달라졌을 것입니다! 자만과 조바심 때문에, 그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30년 동안 이스라엘의 왕좌에 앉았습니다. 오늘날 기독교계에는, 아주 오래 전에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잃은 사울과 같은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돈과 인간적 권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조직을 지휘하는 왕좌에 앉아 있습니다. 사울은 매우 겸손하게 출발한 훌륭한 청년에서 퇴보하여 하나님께 쓸모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왕국은 이제 지속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어리석게 행동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지금 그분 자신의 마음에 합한 사람을 찾으십니다"(13:13,14).
여기서 마음에 대한 강조를 보십시오. 사울이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을 때, 성경은 사울이 다른 사람보다 키가 컸기 때문에 백성들 사이에서 그의 머리가 돋보였다고 말합니다(삼상 10:23). 그는 머리, 즉 두뇌로 구별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제 마음으로 구별되는 사람을 찾고 계셨습니다. 다윗이 남들과 다른 것은 머리 때문이 아니라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삼상 13:14).
"머리의 기독교"와 "마음의 기독교"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사울은 첫 번째를 나타내고 다윗은 두 번째를 나타냅니다. 이것이 종교적인 사람과 영적인 사람의 본질적인 차이입니다. 여호와께서 자신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시다가, 다윗을 만나셨습니다. 우리의 머리는 우리의 두뇌, 지능 및 영리함을 나타냅니다. 우리의 마음은 주님에 대한 우리의 헌신과 그분에 대한 경배를 나타냅니다. 아버지는 학자를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요 4:23). 당신이 예배자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 헌신하지 않으면, 아무리 영리해도 사울처럼 끝날 수 있습니다. 다윗은 비록 실수를 했지만 그의 마음이 옳았기 때문에 승리의 길을 마쳤습니다.
14:35에서, 우리는 사울이 처음으로 쌓은 제단에 대해 읽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우리는 그가 실패한 이유를 봅니다: 그는 우선 예배자가 아니었습니다. 사울의 조상, 아브라함은, 예배자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고 여호와께 경배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똑똑하고 영리한 사람일 뿐, 예배자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4장 10절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기 전에 그분을 경배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머리 속에만 존재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과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경배로 이어지지 않는 기독교를 조심하세요.
15장에서, 우리는 사울이 저지른 두 번째 실수를 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모든 아말렉 사람들과 그들의 동물을 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좋은 양 몇 마리는 남겨 두었습니다 - 아마도 자신을 위해 남기고 싶었을 것입니다. 사무엘이 사울의 실패에 대해 따지자, 사울은 백성들이 좋은 양과 소를 남겨두었다고 비난하면서 "그들이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고자 한다"고 경건하게 왜곡하여 정당화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판단에 따라 하나님의 명령을 수정했습니다. 그리고 아담이 아내를 탓했듯이, 사울은 백성을 탓했습니다. 실수를 인정하고 자신의 죄를 책임질 줄 모르는 사람은 지도자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의 지도자가 될 자격이 있는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은 작은 일에 대한 우리의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왕국에서 가장 큰 사람들은 작은 일에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은 작은 계명을 무시하는 자들일 것입니다(마 5:19).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주신 작은 계명에 대한 우리의 태도로 우리를 평가하십니다.
사울은 자신의 죄를 정직하게 자백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주님께 순종했다고 계속 주장했습니다. 그는 사무엘에게,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 나는 여호와의 목소리에 순종했습니다"(13, 20절). 그러나 사무엘이 그에게 계속 대적하자, 마침내 그는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들었나이다"(24절)라고 인정했습니다. 사람들의 의견을 두려워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은 결코 그들의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무엘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죄를 지었음을 개인적으로 당신에게 인정하겠습니다. 하지만 나를 공개적으로 낮추지 마십시오. 장로들 앞에서 저를 존중해 주십시오. 부디 와서 나와 함께 경배하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행하여 주십시오"(30절). 그는 사람들로부터 명예를 구했습니다. 그는 거룩한 사람이라는 것을 가장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사무엘이 그를 지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여전히 자기와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사울에게서 떠나고 악한 영이 그에게 들어갔습니다. 한때 겸손과 지혜와 하나님을 향한 열심으로 가득했던 마음에 이제는 의심과 두려움과 시기와 악한 영이 가득했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알면서도 신실하지 않은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 당신의 나중 끝이 회심하지 않은 상태보다 더 나빠지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성령의 능력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영이 어린 다윗에게 임하여, 그는 성령의 능력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적 골리앗을 죽였습니다. 사울은 여인들이 다윗을 칭찬하는 말을 듣고 시기하여(18:9), 다윗을 한 번 이상 죽이려고 했습니다(18:11; 19:10). 질투가 마음을 지배하도록 허용될 때, 타락은 매우 빠르게 시작됩니다. 사울의 광기가 너무 심해져서 한 번은 자기 아들 요나단을 창으로 죽이려고 한 적도 있습니다. 사울은 요나단이 그 사역을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요나단을 승격시켜 그의 사역을 이어받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기독교계 전역에서 이와 같은 일을 하고 있으며, 그들도 사울의 영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니며 여생을 보냈습니다. 그의 분노는 통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윗이 자기 성읍에 왔다는 사실을 보고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레위 제사장 85명과 그 가족들을 죽인 적이 있습니다(22장). 하지만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상황에서 사울의 목숨을 살려준 적이 한 번 이상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인생에서 상황은 점점 더 나빠졌습니다. 그것은 당신보다 하나님께 더 큰 축복을 받은 사람을 질투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자신보다 더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들을 교회에서 몰아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영적으로 내려가고 내려갑니다, 그들이 스스로를 완전히 멸망시킬 때까지 말입니다.
그 다음에 사울은 주술에 빠져들었고(28:8) 그리고 마침내 자살했습니다(31:4,5). 출발이 아주 좋았던 사람에게 끝은 참으로 슬펐습니다.
다윗 -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사울과는 대조적으로 다윗은 -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습니다.
주님은 사무엘에게 사울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다른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삼상 16장). 사무엘은 이새의 집으로 가서, 하나님이 그의 아들 가운데서 다음 왕이 될 사람을 그에게 보여주실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새에게는 여덟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모든 아들을 불러 제사를 드리라고 말했을 때, 이새는 위에서부터 일곱 아들만 불렀습니다. 그는 막내인, 다윗을 굳이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 분명히 아무도 다윗을 별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가족의 막내였으니까요 - 아마도 15세였을 것입니다. 다윗은 양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총명하고, 잘생긴, 장자 엘리압이 먼저 사무엘을 찾아옵니다(16:6). 그러자 사무엘은 "이는 여호와께서 기름부으신 자가 틀림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외모를 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하나님은 중심(마음)을 보시느니라"는 아름다운 구절을 보게 됩니다(삼상 16:7). 머리가 아닌 마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을 주목하세요.
그리고 나서 이새는 다음 아들을 불렀습니다. 주님은 다시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일곱 아들이 모두 하나씩 사무엘 앞을 지나갔고, 여호와께서는 그들 모두에게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무엘은 놀라고 당황했습니다. 그는 이새에게 "아들이 이 사람들뿐인가요?"라고 물었습니다. 이새는 말했습니다, "아니요, 막내 한 명이 더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인도 아닙니다. 그는 십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귀찮게 그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곱 형들처럼 똑똑하지 않습니다. 그는 수금을 치며 하나님께 노래를 부르며 하루를 보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에게 우리 양을 돌보도록 임명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원한다면 우리가 그를 부를 것입니다."
어린 다윗이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조차 몰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지켜보셨고 주님을 향한 그의 헌신과 사랑을 보셨습니다. 그가 오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그에게 기름을 부었고, 주의 영이 그 어린 십대 소년에게 강하게 임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전역에서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을 찾으셨고, 한 어린 소년을 찾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인도 전역에서 그분이 기름부으시고 사용할 수 있는 어린 소년 소녀들을 찾고 계십니다(새 언약에서는, 성령이 남녀 모두에게 부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새의 맏아들 일곱과 같이 당신보다 뛰어난 자가 많을 수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람이 평가하듯이, 하나님은 평가하지 않으십니다. 양을 돌보는 일일지라도 당신의 일을 충실히 하십시오. 주님께서 당신을 주시하고 계실 수도 있습니다. 신실하세요, 그러면 그분은 언젠가 당신을 부르시고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신 것처럼 당신에게 기름을 부으실 것입니다. 주님은 십 대에 있는 젊은이들을 선택하셔서, 그분을 섬기도록 훈련시키십니다. 오랜 기간 동안 그들을 훈련시킨 다음 그들을 사역으로 이끄십니다.
여호와의 영이 다윗에게 임하자마자, 그 영은 사울에게서 떠나갔습니다(16:13,14).
사적인 승리와 공적인 승리
다윗은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것을 보았을 때,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과 하나님의 백성의 영예에 대한 그의 열렬한 관심에 주목하십시오: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능욕하리요?"(17:26).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한 그들의 조상들처럼 믿지 않는 반면, 다윗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갈렙을 통해 가나안 거인들에게 행하신 일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서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사울이 다윗이 아직 어리다고 비웃었을 때(다윗은 아마 17세 정도였을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전에는 누구에게도, 심지어 그의 부모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사생활의 몇 가지 사건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사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양 떼를 칠 때, 가끔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훔쳐갔습니다. 나는 들짐승을 뒤쫓아 그 입에서 어린 양을 구출하고 그 들짐승을 죽였습니다. 나는 사자와 곰을 모두 죽였습니다"(17:34-36). 다윗은 성령이 삼손에게 임했을 때 그가 한 일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은 후에, 다윗은 하나님께서 삼손을 도우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자기도 도우실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얼마나 많은 목자들이 작고 어린 양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사자를 쫓아가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그의 양 떼 중 가장 어린 양을 돌보는 것을 보시고, 이스라엘을 목양하는 데 다윗이 적합하다고 결정하셨습니다. 연약한 형제가 사탄에게 붙들렸을 때, 영적 전쟁에서 사탄을 뒤쫓아 그 형제를 사탄의 손아귀에서 구출하는 것이 목자의 의무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목자의 모습입니다.
이 이야기는 또한 우리가 공개적으로 골리앗과 맞서기 전에, 먼저 사생활에서 원수를 죽여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사생활에서 사자와 곰을 이기지 못했다면, 공개적으로 골리앗과 맞서도록 하나님이 부르실 것이라고 상상하지 마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사탄의 요새를 무너뜨리는 공개적 사역을 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먼저 자신의 마음에서 사탄의 요새를 파괴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들은 먼저 하나님의 이름과 어린 양들에 대한 관심을 보여야 합니다.
그런 다음 사울은 다윗에게 최소한 자기(사울의) 갑옷을 입으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골리앗에 대한 어느 정도의 보호를 제공할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의 갑옷을 믿어야 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까? 결국 다윗은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나아갔습니다. 그는 골리앗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을 가지고 나에게 왔다. 그러나 나는 주님의 이름으로 너에게 나왔다"(45절). 그리하여 그는 돌 하나로 골리앗을 죽이고, 골리앗의 칼로 그의 머리를 잘랐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사탄을 대적하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탄 자신의 무기(골리앗 자신의 칼)를 사용하여 그를 멸망시키십니다. "죽음을 통해,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를 멸하셨습니다"(히 2:14). 골리앗이 죽자, 다른 블레셋 사람들은 도망쳤습니다(삼상 17:51). 이것은 우리가 일단 우리 삶의 큰 죄("얽매이기 쉬운 죄" - 히 12:1)를 죽이면, 우리 삶의 다른 많은 죄들도 정복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임을 가르쳐줍니다.
18장에서 우리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다윗에게 가졌던 사랑스러운 태도에 대해 봅니다. 요나단은 틀림없이 다윗보다 나이가 많았고 왕위 계승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이스라엘에서 매우 인기가 있고, 따라서 그를 위협하는 다윗을 미워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대신, 우리는 다윗에 대한 그의 마음에서 순수한 사랑과 존경을 봅니다. 이것은 요나단이 자신의 개인적인 발전보다 하나님의 영광과 이스라엘의 유익에 더 관심이 있었던 사람임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그는 아버지 사울을 괴롭혔던 시기심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다윗에게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다윗에게 왕의 옷과 칼과 활을 주면서 말했습니다, "다윗, 여기 있습니다. 이것을 당신에게 줌으로써 나는 당신이 왕위(의복)의 정당한 상속자임을 나타내며, 나는 결코 당신과 (칼과 활로) 싸우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당신에게 복종합니다"(18,4).
요나단은 참으로 훌륭한 청년이었습니다. 14장에서는, 블레셋을 이긴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에 대해 읽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그의 질투로부터의 완전한 자유와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사람을 알아보는 그의 분별력을 볼 수 있습니다.
형이 동생에 대한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인식하고, 동생이 사역에서 자신을 이끌도록 허용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는 바나바에게서 그 아름다운 예를 봅니다. 사도행전 13장 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일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바나바는 사울보다 선배였고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먼저 나오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곧, '바울과 바나바'가 되었습니다(43절). 어떻게요? 바나바는 동생 바울에게 더 큰 기름부음이 임하는 것을 보았을 때 은혜롭게 뒤로 물러났습니다. 요나단과 바나바와 같이 자신의 것을 구하지 않고 질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며 더 강력한 기름 부음을 받은 동생들을 기꺼이 돕는 사람들이 더 많이 있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 땅에서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했을까요?
다윗이 범사에 형통함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18:5,14). 이 어린 17세 소년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는, 그로 하여금 사울의 군대와 궁전에 있는 훨씬 나이 많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지혜롭게 행할 수 있게" 했습니다(18:30).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 우리의 삶과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축복이 찾아오는지 모릅니다.
다윗의 시련
다윗은 이제 사울이 그를 죽이려고 했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도망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획을 세우신 사람을, 그 계획이 완전히 성취되기 전에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22장 1,2절에서, 우리는 기름 부음이 사울에게서 떠나 지금 다윗에게 있음을 인식한 이스라엘의 소수에 대해 봅니다. 이제 그들은 다윗과 함께 모여 동굴에서 동굴로 끊임없이 그와 함께 이동했습니다! 그 사람들처럼 우리도 하나님이 오늘 어디로 움직이시는지를 인식해야 합니다 - 어제 어디로 움직이셨는지가 아니라. 우리는 오늘날 하나님의 기름 부음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 서야 합니다.
다윗은 매일 주님의 인도하심을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블레셋 사람과 싸우러 가기 전에 여호와께 여쭈었고, 여호와께서 가라고 하시면 자기 부하들의 충고도 거스르고 갔습니다(23:1-5). 이것이 그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된 방법입니다: 그는 그의 친구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들었습니다.
다윗이 블레셋의 압제에서 그일라 백성들을 구해낸 후, 사울은 다윗이 그일라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다윗을 잡을 것이라고 확신하며 그곳으로 갔는데, 그 이유는 그일라가 이중 문과 철창으로 둘러싸인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다윗은 이제 그일라 백성이 그에게 매우 고마워서 결코 그를 사울의 손에 넘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이와 같은 단순한 문제에 대해 하나님을 찾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일라 사람들이 그를 배반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일라를 떠나 자신과 그의 사람들을 구했습니다(23:6-13). "하나님은 그를 사울의 손에 넘겨주지 않으셨습니다"(23:14). 이것이 다윗의 젊은 시절의 비결이었습니다 - 사무엘처럼, 그는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24장 4,5절에서 다윗이 사울에게 자비를 베풀었을 때, 사울의 목숨을 살려준 다윗의 고귀한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사실 다윗은 사울의 옷자락을 조금 자른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습니다. 그는 단지 그가 원하기만 하면 사울을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사울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렇게 했습니다. 사울은 이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돌아갔지만, 얼마 후 다시 다윗을 찾아나섰습니다(26:2). 질투, 분노, 증오는 철저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해변의 파도처럼 몇 번이고 되살아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30장에서, 우리는 몇 가지 흥미로운 점을 봅니다. 다윗은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와 그의 사람들이 싸우러 갈 때에, 아말렉 사람들이 와서 그의 백성의 가족들이 머무르는 성을 파괴하고 그 가족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상황이 너무 나빠서 모든 사람들이 울기 시작했고, 그들의 문제에 대해 다윗을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다윗을 돌로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6절). 그리고 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랑스러운 말씀을 읽게 됩니다: "그러나 다윗은 주님 안에서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힘을 얻었습니다)" (6절). 친구들도 우리를 배반할 때, 우리가 따라야 할 본이 얼마나 됩니까? 다윗은 다시 주님을 찾았고, 주님은 그에게 아말렉 사람을 추격하라고 말씀하셨고 그가 모든 것을 회복할 것이라고 확신시켜 주셨습니다(8절).
그러나 다윗은 이 아말렉 사람들을 찾으러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게 그들에게 인도하셨는지 보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죽어가는 낯선 이에게 단순한 친절을 베푼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광야에서 반쯤 죽은 애굽 사람이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를 돌보았고 그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었습니다. 그가 살아났을 때, 그들은 그가 병들었기 때문에 광야에서 아말렉 사람들에게 버림받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30:11~13). 그는 다윗을 아말렉으로 인도한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낯선 사람들에게 친절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보상하시는지 가르쳐줍니다.
그런 다음 다윗이 아말렉 사람들이 훔친 "모든 것을 되찾았다"고 세 번 기록되었습니다(18-20절) - 사탄이 우리에게서 훔친 모든 것을 회복하신 예수님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전투가 끝나고 다윗이 진영으로 돌아왔을 때, 너무 지쳐서 다윗을 따라 전장으로 나가지 못하고, 남아서 다윗의 물건을 보살피던 부하 200명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러자 다윗의 무익한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은 싸우지 않은 이 사람들과 전투의 전리품을 나누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서 다윗의 마음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집에 머물며 짐을 보살피는 자도 나가서 싸운 자와 전리품을 균등하게 나누어 가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 날 이후로 이스라엘에 법이 되었습니다.
31장에, 사울이 자살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를 박해하는 자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아십니다 - 그분의 방법과 그분의 때에. 다윗은 사울에게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다루시도록 했습니다. 1000년 후, 구리 세공인 알렉산더가 사도 바울을 괴롭혔을 때 바울의 태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께서 그에게 갚으시리라"(딤후 4:14). 우리는 언젠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뿌린 대로 거두게 하실 것이며,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에게 박해를 받은 그분의 모든 종들에게 원수를 갚아주실 것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원수 갚는 것이 주께 속하였고, 그분이 언젠가 갚으리라 약속하셨습니다(롬 12:19). 그때까지, 우리의 의무는 다윗이 사울에게 한 것처럼, 원수에게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직면한 모든 어려움과 시련을 통해(약 13년의 기간 동안), 그는 마침내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성공적인 왕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시편 66편 10-12절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습니다: "오 하나님, 당신은 나를 시험하셨습니다. 당신은 은을 단련하듯 나를 단련하셨습니다. 당신은 나를 그물에 갇히게 허락하셨습니다. 당신은 내 등에 무겁고 압제적인 짐을 짊어지도록 허락하셨습니다. 당신은 사람들이 내 머리 위로 타는 것을 허용했습니다. 당신은 저를 불타는 불 속으로 데려가시고, 차갑게 식은 물 속으로 데려가셨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당신은 나를 영적 풍요와 기름 부음의 장소로 인도하셨고, 그곳에서 지금 내 잔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축복으로 넘치고 있습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시 66:10-13 - 자유로운 의역). 이 시편을 누가 썼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다윗의 경험에 있어서 사실이었습니다.
반면에, 사울은, 부유한 집에서 자랐고, 그 안락한 삶에서 곧바로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어떤 시련이나 어려움도 겪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왕으로서 실패한 것입니다.
다윗의 뒤를 이은 솔로몬도, 시련이나 어려움을 겪지 않았습니다. 그는 왕궁의 왕자로서 안락하고 편안하게 자랐습니다. 그는 또한 왕으로서 실패자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예는 시련과 어려움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고 우리의 사역에서 효과적이고 성공적일 수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이것이 바울을 성공적인 사도로 만든 것입니다(고후 1:4-11; 11:23-33을 읽으십시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오늘날 복음을 전하여 부자가 되고 안락하게 사는 많은 설교자들이, 스스로 영적이지 못하고 양 떼에게 경건한 본보기가 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그분의 종으로 부르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당신이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그분을 섬길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랜 시련을 신실하게 견디지 못하면, 성도의 영적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당신은 결국 사울과 솔로몬처럼 될 뿐이며, 마침내 당신 자신을 망하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먼저 오랜 기간의 시련과 어려움을 통해 여러분을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분은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오해하고 질투하도록 허락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그들이 당신을 억압하고 압제하도록 허락하실 것입니다. 당신이 (다윗처럼)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이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은 언젠가 당신을 풍요와 축복의 장소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십시오.
다윗의 통치
이 책에서, 우리는 다윗의 통치에 대해 읽습니다 - 그가 어떻게 왕이 되었는지, 그가 어떻게 많은 승리를 거두었는지, 그가 어떻게 죄에 빠졌는지, 그리고 그가 인생이 끝날 때까지 가족에게 어떻게 문제가 있었는지.
사울에 대한 다윗의 태도
1장: 여기서 우리는 사울의 죽음에 대해 읽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미워하여 온 이스라엘을 10년 이상 쫓아다니며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제 마침내 그는 죽었습니다. 당신이 다윗의 입장이라면, 그러한 소식에 어떤 반응을 보였겠습니까? 다윗의 반응을 주목하십시오.
우리는 사울이 자살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삼상 31장). 그런데 한 아말렉 사람이 다윗에게 와서 다윗의 호의를 얻으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는 다윗에게 사울의 요청에 따라 자신이 사울을 죽였다고 말하고 사울의 왕관과 팔찌를 다윗에게 주었습니다. 그는 다윗이 기뻐하고 이 행동에 대해 보상해 주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대신, 다윗은 자기 옷을 찢고 울며 사울을 위하여 온종일 금식했습니다(1:1-11). 그러고 나서 다윗은 이 사람에게 어떻게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냐고 물었습니다. 그런 다음 사울을 감히 죽이려 한 아말렉 사람을 죽이도록, 젊은이 중 한 명을 시켰습니다. 그 남자는 자기가 한 거짓말에 상당한 대가를 치렀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다윗의 태도를 보십시오. 이것이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만든 것 중 하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너희를 상하게 하고 해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하신 것을 압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그는 구약 시대에서 새 언약의 태도를 취했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사울이 기름 부음을 잃었을지라도, 다윗은 항상 "나는 그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을 위하여 애도의 글을 쓰고, 진심으로 그들을 찬양하는 아름다운 말을 하였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람이 자기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는 교훈이 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아 네 아름다움이 네 높은 곳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용사들이 어찌 쓰러졌는가!" (1:19,25,27). 우리는 요나단이 다윗의 절친한 친구였기 때문에 그가 칭찬한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울을 많은 승리를 거둔 용감한 사람이라며 칭찬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사울의 좋은 면을 높이 평가하고 그대로 두었습니다. 사울에 대한 판단은 하나님께 맡기고 자신이 직접 판단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써의 다윗을 봅니다. 그러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뽑아 이스라엘의 왕위에 앉히셨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2장 1절: "다윗이 여호와께 물으니..." 앞서 사무엘상 23장 2~4절과 30장 8절에서 보았듯이, 다윗의 끊임없는 습관은 모든 일에 주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무엘하 5장 17~25절에서, 우리는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구했던 블레셋과의 두 번의 전투에 대해 읽습니다. 두 번째 때, 주님은 그에게 전략을 바꾸어 후방에서 공격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때마다 주님은 전략을 바꾸셨습니다. 다윗은 전쟁의 사람이었지만, 항상 주님으로부터 전략을 얻었고 그것이 그가 항상 승리한 이유입니다. 그 땅에 기근이 들었을 때 그는 여호와께 왜 기근이 들었는지 물었습니다(삼하 21:1). 그러나 그가 주님의 뜻을 구하지 않은 몇 가지 사안이 있었습니다. 그 세 가지 예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그가 여섯 아내와 결혼했을 때(삼하 3장);
2. 그가 밧세바를 그의 궁전으로 불렀을 때(삼하 11);
3. 그가 이스라엘의 인구를 조사했을 때(삼하 24).
그리고 이러한 모든 실패에 대해, 그는 매우 큰 대가를 치렀습니다. 그러나 그가 주님의 인도를 기다릴 때마다, 그는 결코 길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를 위한 교훈이자 경고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지만 그 역시 심하게 실패했습니다. 그의 실패에 대한 설명은 또한, 하나님이 실패한 사람들을 사용하실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하기에, 우리를 격려합니다. 성경에 묘사된 하나님의 종들의 실패는 그들의 성공에 대한 설명보다 훨씬 더 우리를 격려합니다 - 왜냐하면 우리 모두도 여러 번 주님을 실망시켰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특히 젊을 때, 실수하고 실패하고 어리석은 일을 합니다 - 우리가 젊을 때는 열심이 충만하나 지혜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젊었을 때 매우 현명하지 못한 방식으로 많은 일을 행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로우십니다. 우리와 같이 실패한 자를 뽑으시고, 여전히 우리를 그분의 마음에 맞는 남자와 여자로 만드십니다.
유다 사람들이 와서 먼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을 삼았습니다. 후에 그는 기름부음을 받아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5:3-5). 그는 30세에 유다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온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까지 7년 반을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시기까지, 20년 이상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의 대기 기간은 거의 아브라함의 대기 기간만큼 길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습니다. 우리는, 믿음과 인내를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물려받은, 그러한 사람들의 모범을 따르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다윗은 결코 자신을 위해 왕좌를 차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그것을 그에게 주시기를 기다렸습니다. 그가 밧세바에 관해서도 움켜쥐지 않는 태도를 취했더라면, 그의 이야기는 얼마나 달라졌을까요.
당신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려면, 움켜쥐지 않는 법을 배워야합니다. 야곱은 움켜쥐는 자요, 움켜쥐는 자인 한, 그는 이스라엘이 될 수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주먹을 쥐고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아기의 손에 당신의 손가락을 넣으면, 즉시 손가락을 잡을 것입니다. 그는 자라면서, 장난감과 다른 많은 것들을 잡는 법을 배웁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움켜잡는 것. 우리는 평생을,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움켜쥐는 데 보냅니다. 우리는 지위, 명예, 돈 및 기타 많은 것들을 위해 움켜쥐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그분은 결코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움켜잡지 않았습니다. 그의 주먹은 닫혀있지 않았습니다. 그의 손바닥은 항상 모든 사람을 향하여 열려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갈보리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손바닥을 펴셨습니다. 그것이 우리 모두가 따라야 할 본보기입니다. 굴복하십시오. 당신의 권리를 포기하십시오. 다른 사람에게 주면,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되돌려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에게 사역과 지위와 당신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주실 것입니다 - 당신이 그분의 때를 기다릴 수만 있다면. 우리가 직접 잡는 것보다,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야곱은 아버지를 속여서, 장자의 명분을 빼앗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는 다윗처럼,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실 때까지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을 그에게 주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움켜잡을 때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함을 표현합니다.
당신이 결혼하고 싶은 젊은 남자나 여자에게 매력을 느낀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리고 당신은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녀/그를 빨리 잡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가 그녀/그를 잡을 거야." 그것은 불신앙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신뢰하면, 조바심을 내거나 움켜쥐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당신은 "주님, 당신이 저를 위해 예비하신 것을, 나는 반드시 얻을 것입니다. 아무도 당신이 나를 위해 예비한 사람과 결혼할 수 없습니다." 동일한 원칙이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계획하신 모든 사역에 적용됩니다. 아무도 그것을 움켜잡을 수 없습니다. 당신이 그분을 기다리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그 사역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고, 사람들에게 결코 불평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당신을 20년 기다리게 하신다면, 기다리십시오. 그 시간이 지나면, 당신은 훨씬 더 나은 리더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본 것처럼, 사울과 솔로몬은 기다리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편안하게 태어나 어떤 시련과 압박도 받지 않고 살았습니다. 저는 인생이 너무 편안하고 쉬워서, 시련이나 압박감이 없는 사람들이 안타깝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역을 주시는 사람은, 사람들로부터 거절을 당한 사람입니다.
다윗의 경우에도 왕이 되고 삶이 편안하고 쉬워지자, 실수를 연이어 저지르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장 2-5절에 보면, 그에게서 여섯 아들이 태어났다고 나와 있습니다 - 여섯 명의 다른 아내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도 왕이 되자 길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많은 일에 대해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께 두 번째, 세 번째, 여섯 번째 결혼을 해야 하는지 묻지 않았습니다! 이삭에게는 아내가 한 명뿐이었고, 모세에게는 아내가 한 명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한, 여호수아도 아내가 한 명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왜 그렇게 많은 아내를 두었습니까? 그는 세상의 다른 모든 왕들처럼 되기로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결과 엄청난 고통을 겪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의 영을 따르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윗이 옛 언약 아래서 살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성령이 없었기 때문에 마음이 강퍅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들이 아내와도 이혼하는 것을 허락했습니다(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9:8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이제 성령을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기준이 다릅니다. 오늘날 우리는 새 언약 아래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간음에 빠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다윗도 넘어졌다"고 변명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옛 언약 아래서 살았습니다. 그 안에는 성령이 거하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영이 그 위에만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을 모실 수 있습니다. 그 옛 언약의 성도들은 그들의 사역을 위해서만 성령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우리의 성품을 변화시키기 위해 성령이 거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다윗이나 삼손과 동일시함으로써 우리의 죄를 변명할 수 없습니다.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
4장 8절에는, 사울의 아들(이스보셋)을 죽이고 그 목을 다윗에게 가져와 다윗이 상을 주기를 바랐던 두 남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들에게 너무 화가 나서 그들을 즉시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다윗은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께 속한 줄로 믿었으므로, 결코 스스로 원수를 갚거나 남에게 원수 갚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할 중요한 원칙입니다. 로마서 12장 19절은 이것에 대해 매우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공의를 집행하거나 원수를 갚는 데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으십니다. 누군가가 당신의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신은 베드로가 한 일을 할 것입니다 - 그를 일으키고, "나를 경배하지 마십시오. 경배는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예배가 하나님께 속한 것처럼, 원수를 갚는 것도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군가에게 복수를 하려는 것은, 사람으로부터 경배를 받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예배를 받을 권리가 없듯이 복수할 권리도 없습니다. 누가 우리에게 어떤 해를 끼쳤든,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방식과 시간에 그를 처리하실 수 있도록 맡겨야 합니다. 우리는 그 사람에게 악한 것을 바라지도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길 때, 우리를 비방하거나 우리의 사역을 파괴하려는 다른 신자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악담하고, 우리에 대한 거짓 이야기를 퍼뜨리고, 우리가 거짓 교리를 가르친다고 비난하는 등의 일 없이는 효과적으로 주님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복수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유혹을 단호히 물리치고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합니다. 성경은 멸할 권세가 있는 심판자는 오직 한 분뿐이라고 말씀합니다(약 4:12).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운명을, 그 한 심판자의 손에 맡겨야 합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기름을 부으셨다면, 아무도 여러분의 직분을 파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바울이 거짓 선생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예수님은 귀신의 왕의 권세를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는 비난까지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대답하시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셨습니다. 진실한 사람들도 그러한 거짓 고발로 인해 길을 잃지 않았습니다. 진실하지 못한 자들만이 길을 잃었습니다.
야고보서 2장 6절에는 그 당시에 부유한 신자들이 가난한 신자들을 압제하고 개인적으로 법정으로 끌고 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오늘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른 신자를 법정으로 끌고 가기 위해서는 부자이자 사악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눈먼 신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에서, 같은 일이 고린도에서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그런 부유한 신자들은 심판하고 복수할 권리가 있는 재판관은 오직 한 분뿐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그들에게 경고했습니다(고전 6:9은 처음 여덟 절의 문맥에서 읽습니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잘못을 저질렀다면, 하나님이 그것을 보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분은 그 사람을 다룰 수 없습니까? 당신이 그것을 믿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를 다루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사람의 길과 하나님의 길
6장: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오고자 하는 열망이 컸습니다. 그 갈망은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율법에 명하신 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재앙이 닥쳤습니다 - 다윗의 신실한 사람 중 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한번은, 블레셋 사람들이 언약궤를 빼앗았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질병으로 심판하셨고 그들은 언약궤를 이스라엘에게 돌려주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소 수레에 궤를 실어 돌려보냈습니다. 다윗은 그 사건에 대해 들었습니다. 그는, 모세의 율법에 언약궤는 레위 자손인, 고핫 자손만 메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방법이 짧은 거리에는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긴 여정이었기 때문에 그는 블레셋 방식이 더 낫고 합리적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소 수레에 언약궤를 싣었습니다. 소들이 험한 길에서 비틀거리고, 언약궤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웃사는 그의 손을 내밀어 궤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들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불경함 때문에 그를 즉시 치셨고 그는 죽었습니다.
웃사는 좋은 동기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법을 어겼습니다. 우리의 동기가 선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다면, 우리는 여전히 고난을 당할 것입니다. 나쁜 동기로 옳은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선한 동기를 가지고 잘못된 일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목적은 결코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언약궤가 떨어지는 것을 막으려는 웃사의 동기가 좋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웃사 또한 모세의 율법에 아무도 언약궤를 만지지 말라고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언약궤를 멘 고핫 자손도 조차도 언약궤 자체에 손을 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궤를 운반하기 전에 성막 휘장으로 궤를 덮어야 했기 때문에 실제로 궤를 만지지 않았습니다(민 4:15). 하나님은 법궤를 만지는 자의 형벌이 죽음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전도를 하기로 결심했을 때, 이 질문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할 것입니까? 하나님의 방법입니까, 아니면 사람의 방법입니까?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다국적 기업의 방식을 본받아야 할까요?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전도를 하려면 돈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당신은 돈을 의지합니까 아니면 성령을 의지합니까? 당신이 해야 할 말은 "우리가 전도 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능력이 필요합니다"입니다. 당신에게 성령의 능력이 있으면, 당신이 돈이 있든 없든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집니다. 세상의 기업과 조직만이 살아남기 위해 돈이 필요합니다. 교회도 "돈이 있어야만 계속할 수 있다"고 말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면, 우리는 교회도 이런 세상 조직 수준으로 내려갔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전도나 하나님의 일과 관련하여 돈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때때로, 그들은 가난한 신자들을 위해 돈을 모았지만, 사도들에게는 결코 지불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갈수록 더 많은 돈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능력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세상의 방법(수레)이 오늘날 하나님의 방법을 대체했습니다. 그래서 영적 사망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중에, 다윗은 법궤를 올바른 방법으로 예루살렘으로 가져왔습니다 - 레위인들의 어깨에 메고. 이번에는 그가 기쁨이 충만하여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습니다(6:14). 그것은 그 당시 그들이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방법 중 하나였습니다. 그들은 악기를 사용하고 손뼉을 치며 소리를 질렀을 뿐만 아니라, 춤도 추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성읍에 들어갈 때에 그의 아내 미갈(사울의 딸)이 다윗의 춤추는 것을 보고 매우 화가 났습니다(16절). 그녀는 마음속으로 그를 경멸했습니다. 그녀는, 그녀가 인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름부음 받은 하나님의 종을 경멸했습니다. 오늘날 당신이 인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당신은 그들을 모방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경멸할 필요도 없습니다. 미갈은 다윗처럼 춤추기를 시작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을 경멸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방식이 유일하게 올바른 방식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많은 기독교 단체들은 그들이 일요일 아침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특별한 방법이 그것을 행하는 유일한 올바른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다음 모든 사람이 자신의 방식대로 할 것을 요구합니다. 어떤 기독교 단체에서는, 주일 아침에 마치 장례식을 하듯이 모두가 조용히 앉아 있습니다. 그것은 나에게 호소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일 아침예배는 장례식과 같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가 비어 있다는 사실과 예수님이 무덤을 이기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축하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기쁨의 시간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을 보면, 우리는 예수님이 여전히 죽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정반대의 극단으로 가는 다른 기독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소음이 특정 데시벨 수준에 도달할 때만 성령이 집회에 임재한다고 느끼기 때문에 - "성령을 그들 가운데로 모셔오기" 위해, 계속해서 목소리를 높이고 감정을 일으킵니다. 그것은 속임수입니다. 성령님은 앰프 볼륨을 높였을 때 집회에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양심이 깨끗한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이 두 그룹 중 어느 쪽도 경멸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둘 중 어느 쪽도 모방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내 방식대로 주님을 찬양할 자유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주님을 찬양하는 방식을 경멸하지 말고, 당신이 그분을 찬양하는 방식이 유일한 올바른 방식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십시오. 하나님은 겉으로 드러난 표현이 아니라, 마음을 보십니다.
6장 20절: "다윗이 자기 집안을 축복하러 돌아갔다." 가족을 축복한다는 것은 - 정말 아름다운 일입니다 - 특히 거리에서 수 킬로미터를 춤을 추다가 기진맥진하여 집에 돌아올 때 더욱 그렇습니다! 모든 남편이 피곤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로 아내에게 요구하기보다는, 가정을 축복하는 남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윗은 잔소리하는 아내인 미갈이 있었지만, 그것이 주님 안에서 그의 기쁨을 식히지는 못했습니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그에게 왕의 품위를 지키지 않고 서민처럼 춤을 춘다고 잔소리하고 고함을 지르며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은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그는 아내의 의견에 개의치 않고 평생 주님 앞에서 춤을 추겠다고 말했습니다(21절). 남편을 경멸한 미갈을 여호와께서 심판하셨고 그녀는 평생 불임이 되었습니다.
7장: 이제 다윗은 여호와를 위해 성전을 짓고자 했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음속으로 "나는 아름다운 집에 거하지만, 하나님의 궤는 장막 안에 있다"(2절)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더 많은 성도들이 이렇게 생각하기를 바랍니다: "주님, 제가 저를 위해 지은 집이 얼마나 편안한지요. 내 집을 짓는데 얼마나 많은 돈과 시간을 들였는지요. 내가 당신의 일을 위해 희생한 것이 얼마나 적은지요! 나는 당신의 일에 대해 얼마나 관심이 없습니까!" 하나님의 일에는 자기자신과 자기의 야망과 시간과 돈을 희생할 일꾼이 필요합니다. 많은 신자들이 공장에서 초과 근무를 하고 회사를 위해 이익을 만듭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우리는 급여도 받지 않고 불평도 없이 그분을 위해 약간의 초과 근무를 할 수 없나요?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집을 염려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우리의 마지막 날까지 - 항상 우리 자신의 집보다 하나님의 집을 더 염려하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그분의 집을 돌보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집을 돌보실 것입니다. 수년 전에 나는 주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제게는 집(가족)이 있고, 당신에게도 집(가족)이 있습니다. 제게, 저는 당신의 집(가족)을 돌보고, 당신은 내 집(가족)을 돌보는 은혜를 주시옵소서." 나는 주님과 그 작은 대화를 나누었고, 내가 그분의 집을 돌보는 것보다 하나님은 내 집을 더 신실하게 돌보셨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이 하나님의 집을 짓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다윗은 전쟁의 사람이었고 오직 평화의 사람만이 하나님의 집을 지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원칙을 주목하십시오: 전쟁의 사람은 하나님의 집을 지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전쟁을 넘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야 합니다. 전쟁은 시작하기 위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안식에 들어가야 합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모든 대적을 물리침으로써 솔로몬을 위한 기반을 닦았습니다. 그는 성전 건축에 필요한 모든 금과 은도 모았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이 그것을 지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할 의향이 있습니까? 우리가 모든 힘든 일을 한 다음, 다른 사람이 그 일을 한 것에 대한 영예를 얻도록 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 자신이 그 영광을 누리고 싶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있도록 모든 일을 뒤에서 할 것이고, 그들이 영광을 얻도록 할 것입니다.
사무엘하 8장 15절: 이 구절은 리빙 바이블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모든 백성에게 공평하였다". 이것은 지도자에게 매우 중요한 요건입니다 - 정의를 집행하는 공정성과, 완전한 공평성을 의미합니다.
9장에서, 우리는 절름발이였던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에 대한 그의 친절을 봅니다. 므비보셋은 자신을 아무 가치도 없는 "죽은 개"와 같다고 여겼습니다(8절). 그러나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정기적으로 자기 식탁에서 먹도록 명령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개인 우리를 들어 올려 그분과 함께 식탁에 앉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그림입니다.
다윗의 큰 넘어짐
11장에서 우리는 다윗의 큰 넘어짐에 관한 이야기를 봅니다. 우리 모두는 그곳에서 그가 어떻게 타락했는지에 대한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왕들이 전투에 나서는 봄에 일어난 일입니다...." 왕들은 추운 겨울에 전쟁터에 나가지 않고, 봄철에 갔습니다. 모든 전투에서 다윗은 항상 지도자가 되어 이스라엘 군대를 이끌고 적과 싸웠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윗이 긴장을 풀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기 시작하는 것은, 싸움을 멈추고 전투에서 휴식을 취할 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있지 않을 때 죄에 빠지게 됩니다. 다윗의 자리는 전쟁터였습니다. 대신 그는 궁전에서 자고 있었습니다. 그가 그날 전쟁터에 있었다면, 그는 결코 이렇게 넘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일이 잘 풀리고 주님의 전쟁을 멈추고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 우리의 후배들을 보내기 시작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왕궁에 왕처럼 앉아, 후배들에게 현장에서 온갖 수고를 시키고 있습니다.
나는 주님의 교회에서 죽을 때까지 항상 후배로 있기를 원합니다. 90세가 되어도 현장에 나가 주님을 위해 일하고 싸우고 싶습니다. 나는 내 인생이 끝날 때까지 전장에 있고 싶습니다. 당신도 거기에 있기를 바랍니다. 전장에는 영적인 위험이 없습니다. 그러한 위험은 궁전에 있습니다. 다윗은 전쟁터에 있는 한 완벽하게 안전했습니다. 그는 궁전에서만 위험에 처했습니다.
우리가 시련과 압박과 질병과 경제적인 어려움에 직면할 때 죄에 빠질까요? 아닙니다. 우리에게 일이 쉬워질 때, 돈이 많을 때, 사업이 번창할 때, 집에 아픈 사람이 없을 때 - 바로 우리가 죄를 짓는 때입니다. 바로 그때가 당신이 더욱 깨어 있어야 할 때입니다.
다윗은 예루살렘에 있는 집에 머물렀습니다(11:1). 그는 여호수아가 싸우는 동안 기도했던 모세와 같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전쟁터에 나가 싸우고 있는 요압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면, 그는 안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고 있었습니다. "저녁에 다윗이 침상에서 일어나"(11:2). 나는 그가 아침 내내 자고 저녁에 일어났는지 모릅니다. 그는 침상에서 일어나 먼저 기도하는 대신, 왕궁 옥상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때 그는 아름다운 여인, 밧세바를 보고 유혹을 받았습니다. 만약 그때, 바로, 유혹의 싹을 잘라내고 첫 번째 단계에서 멈췄다면 그는 결코 마지막 단계에 이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가 보고 유혹을 받았을 때 "이건 위험해. 조심하자"라고 말하며 돌아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가서 요압을 위해 기도하는 데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 다음 그가 물어보아 그녀가 다른 사람의 아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적어도 "오, 나는 그녀를 가질 수 없어"라고 말하면서 자신을 멈출 수 있었습니다! 만일 그가 밧세바를 위해 하나님께서 그녀를 우리아의 순결하고 거룩한 아내로 만들어 주시기를 기도했다면, 그 기도 자체가 그가 죄를 짓지 않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는 자신을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을 잊었습니다. 그는 이제 원하는 사람을 가질 수 있는 강력한 군주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녀와 간음을 범했습니다.
다윗을 비난하지 맙시다. 다른 사람의 아내의 아름다움에 감탄한 적이 있습니까? 당신은 강력한 왕이 아니기 때문에, 그녀를 붙잡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그저 바라만 보고 욕망을 품었을 뿐입니다! 당신과 다윗 사이에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밧세바가 임신했을 때 다윗은 큰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는 이제 자신의 죄를 덮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녀의 남편 우리아를 전장에서 불러내어, 그날 밤 아내와 함께 집에 있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아는 동료 병사들에 대한 책임감이 너무 강해서 집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윗에게 말했습니다. "제 동료들이 전장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집에 가서 아내와 잘 수 있겠습니까?" 그 당시 우리아는 다윗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었습니다. 현장의 많은 후배들은 종종 그들의 미션 리더보다 훨씬 낫습니다. 이제 다윗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당신이 죄를 지으면, 당신은 당신의 첫 죄를 덮기 위해 더 많은 죄를 짓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그는 솔직하게, 우리아에게 가서 용서를 구했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대신에, 그는 자신의 명성을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아를 전쟁터로 돌려보내고, 요압 장군에게, 우리아가 죽임을 당할 수 있도록, 전투가 가장 치열한 곳 바로 앞에 두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다윗이 얼마나 악한 일을 저질렀습니까! 나는 성경이, 완전히 정직하고, 가장 위대한 영웅들의 실패를 은폐하지 않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당신과 내가 우리 육신의 타락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다윗보다 나을 것이 없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같은 육신을 가지고 있고 같은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징계(discipline)
12장: 그곳에 용감한 선지자, 나단이 있었던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 당시 왕을 대면하여 그가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목회자의 99%는 감히 부자 교인이나 고위 공직자에게 가서 그의 죄를 지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단은 달랐습니다. 그는 다윗에게 와서 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한 도시에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부자였고 양 떼가 많았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어린 양 한 마리밖에 없는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손님이 그 부자의 집에 왔을 때, 부자는 그를 위해 양고기 카레를 만들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많은 어린 양에서 하나도 잡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그 가난한 사람의 어린 양을 가져다가, 카레를 만들기 위해 죽였습니다." 다윗은 이 말을 듣고 크게 화를 냈습니다(12:5). 다른 사람의 죄에는, 화를 내기 쉽습니다. 그리고 나서 나단이 말했습니다. " 당신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당신에게는 아주 많은 아내가 있습니다. 우리아에게는 한 사람밖에 없었는데, 당신이 그녀를 데려갔습니다." 다윗은 갑자기 진실을 깨달았습니다.
다윗은 전에, 나단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뭐라고 말했습니까? 그는 너무나 화가 나서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자는 죽어 마땅하도다"(12:5)라고 말했습니다. 율법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양을 훔친 사람을 죽여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다른 사람의 죄에 관해서는 율법보다 더 엄격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에서 더 큰 죄를 보지 못합니다.
다윗은 또한 "그는 네 배나 갚아야 한다"(12:6)고 말했습니다. 한 마리의 어린양을 가져간 부자는, 네 마리의 어린양을 돌려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다윗도 우리아를 죽인 대가로 치러야 할 대가가 되었습니다. 나단이 다윗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칼이 네 집에서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내가 네 집안에서 너를 대적할 악을 일으키리라"(10,11절). 다윗의 네 아들, 즉 밧세바에게서 태어난 아기, 암논, 압살롬, 아도니야가 죽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뿌린 대로 거두고 우리 자신이 말한 대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과 같은 판단으로, 우리도 판단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판단하지 않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일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당신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다시 그분의 마음으로 들어오는 것을 봅니다. 다윗은 나단에게 "내가 여호와께 죄를 지었나이다"(12:13)라고 말했고, 그는 놀라운 시, 시편 51편을 썼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 51:4,11). 그는 사울처럼 자신의 죄를 덮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말했습니다, "나를 존중해 주십시오. 내 죄를 아무에게도 알리지 마십시오"(삼상 15:30). 그러나 다윗은 나단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시편을 지었고 모든 사람에게 그것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다윗에 대해 보는 놀라운 일입니다. 그는 영적인 사람이 아닌데도 영적인 사람인 척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죄를 지었을 때 그것을 인정했습니다.
이 사건에서 또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당신이 주님 앞에서 아무리 훌륭해도, 누군가 당신의 삶에서 잘못된 점을 지적하면, 그것을 인정하십시오. 아무도 당신에게 와서 당신이 틀렸다거나 당신이 어떤 부분에서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교만하고 거만해지지 마십시오. 다윗은 공개적으로 자신을 낮추고 시편 51편을 썼으며, 온 세상에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자비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회개와 자백과 금식과 기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밧세바의 아이를 치셨고 그 아이는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우리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나 그런 다음 그분은 또한 우리를 징계로 다루십니다.
그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수년 동안 외설물과 영화로 마음을 가득 채운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다음 그는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합니다. 하나님은 즉시 그를 용서하십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그를 완전히 씻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의롭다 하시고, 그가 죄를 지은 적이 없는 것처럼 그를 바라보십니다. 그러나 그 남자는 수년 동안, 여전히 그의 기억에서 더럽고, 성적인 이미지로 괴로워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의 마음을 깨끗이 씻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 더러운 이미지를 그의 기억에서 지우지 않으십니까? 왜냐하면 반복되는 더러운 이미지를 통해 남자는, 더 이상 수년 동안 더러운 꿈에 시달리지 않도록, 더러운 사진을 다시 보지 않도록 조심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더러운 이미지가 하나님에 의해 모두 제거된다면, 인간은 용서를 받자마자, 그 이미지가 쉽게 지워질 수 있음을 알기 때문에, 더러운 그림을 다시 보고 싶은 유혹을 더 쉽게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신실하여 그 더러운 생각을 물리치고, 정기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의 마음을 채우면, 그 더러운 생각은 점차 그의 기억의 밑바닥으로 가라앉게 될 것입니다. 그것들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너무 낮게 가라앉아서, 더 이상 꿈에서 그를 괴롭히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순수한 생각이 그의 기억의 맨 위에 떠오를 것이고, 그것이 지금 그가 꿈꾸는 것일 것입니다.
13장에서 우리는, 암논이 그의 이복 누이인 다말에게 "사랑에 빠진" 다음, 강제로 그녀를 성추행하는 것을 읽습니다. 그의 정욕이 만족되자, 그는 그녀를 미워했습니다. "미워하는 미움이 사랑한 사랑보다 더하였다"(15절). 다말에 대한 그의 "큰 사랑"이 어떻게 갑자기 미움으로 바뀌었습니까? 그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제로는 단지 "욕망"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모든 젊은이들이 배워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많은 젊은 남자가 어린 소녀와 "사랑에 빠졌다"고 주장합니다. 그들 둘 다 깨닫지 못하는 것은, 거의 모든 경우에 젊은 남자의 소위 "사랑"이 실제로는 정욕이라는 것입니다. 소녀들은 특히 이것을 인식하고, 젊은 남성들에게 착취당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인간적 사랑은 항상 자신의 이익을 추구합니다.
신적인 사랑은 항상 다른 사람의 선을 추구한다는 사실로 구별됩니다.
다윗은 이 죄에 대해 그의 아들 암논을 책망할 수 없었습니다 - 그 자신도 밧세바에게 같은 일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많은 아버지들이 자녀에 대한 영적 권위를 잃고 있습니다.
압살롬의 반역
압살롬은 암논을 죽임으로써 누이 다말의 원수를 갚았습니다. 다윗은 마침내 밧세바와 우리아에게 뿌린 간음과 살인의 씨앗을 그의 가족 안에서 거두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심판에 있어서 매우 정확하십니다. 조만간, 우리는 뿌린 대로 거두기 시작합니다.
15장에서 우리는,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왕이 되고 싶어 음모를 시작한 이야기를 읽습니다. 그는 매일 아침 성문에 서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문제인지 물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그들에게, 좋은 사례가 있지만, 불행히도 다윗 왕은 그러한 문제를 처리할 사람을 임명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그들에게, 자신이 통치자였더라면, 아주 빨리 모든 사람을 도울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들을 다윗에게서 빼앗아갔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때때로 기독교계에서도 일어나는 일을 봅니다 - 누군가가 지도자가 되고 싶어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을 지도자로부터 훔쳐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장로들에게, "내가 떠난 후에, 너희 중에서 일부가,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할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행 20:29,30). 압살롬은 그렇게 했지만, 결코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압살롬의 길을 따르는 사람은 결코 잘 되지 않습니다.
다윗은 목숨을 걸고 왕좌를 떠나 도망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으로부터 좋은 것을 가져오셨습니다 - 다윗이 광야에 있을 때 시편 55, 61, 63편을 썼기 때문입니다. 압살롬이 다윗을 예루살렘에서 쫓아내지 않았다면, 이 시편은 성경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이제 3000년 동안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시련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사역을 주시는 수단입니다.
시편 55:22을 생각해 보십시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붙드시리라. 그분은 의인의 요동함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다." 다윗은 왕궁에서 편히 앉아 있을 때가 아닌, 목숨을 걸고 도주할 때 주님께 자신의 짐을 맡기는 법을 배웠습니다.
압살롬이 통치하기 시작하자마자 많은 사람들이 편을 바꿨습니다. 다윗에게는 아히도벨이라는 믿음만한 조언자가 있었는데, 다윗은 그의 말을 마치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의지했습니다(16:23). 그러나 압살롬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아히도벨이 편을 바꿨습니다. 아히도벨은 밧세바의 할아버지였으며(삼하 23:34와 11:3 비교), 그는 다윗이 그의 손녀에게 행한 악을 복수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압살롬에게 다윗의 아내들과 간음하여 다윗을 모욕하라고 조언했습니다(16:21,22).
그런 다음 그는 압살롬에게 다윗을 죽이는 방법을 조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미 하나님께 짧은 한 문장의 기도로 아히도벨의 조언을 어리석게 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15:31). 한 문장의 기도가 할 수 있는 일이 놀랍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조언을 거절하고 다른 사람의 조언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하여 다윗은 죽임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한 문장 기도를 멈추지 마십시오! 그러나 아히도벨은 교만한 사람이었으며, 이에 노하여 나가서 자살하였습니다(17:23).
다윗이 압살롬을 피하여 도망할 때에, 시므이라는 사람이 그의 집에서 나와 다윗에게 돌을 던지고 그를 거듭 저주했습니다(16:5). 시므이는 사울의 친족으로, 다윗이 사울을 대신하여 이스라엘의 왕위에 올랐기에, 오랫동안 다윗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습니다. 시므이는 다윗이 왕위에 있는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다윗에게 소리를 지르며 말했습니다, "살인자이자 악당아, 여기서 꺼져라. 주님께서 사울 왕과 그의 가족을 죽인 네게 갚아주실 것이다. 네가 사울 왕의 왕좌를 훔쳤으니, 이제 주님께서 네 아들 압살롬에게 왕좌를 주셨다. 마침내 네가 한 대로 보복을 받을 것이다, 이 살인자"(8절 - Living). 시므이가 진짜 진실을 얼마나 모르고 있었습니까? 그렇기는 하지만 오늘날 주의 종들을 많은 일로 고발하는 자들도 이와 같습니다.
다윗의 군사 중 한 사람이 "나로 가서 시므이의 목을 베게 하소서"(16:9)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아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를 저주하라고 명하셨다면(허용하셨다면), 내가 어찌 여호와와 싸워야 하느냐?"(16:10).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다윗의 이해를 보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그를 대적하여 말할 수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깨닫기만 한다면, 우리의 삶에 어떤 안식이 올 수 있을까요?
요압이 압살롬과 싸우러 갈 때, 다윗은 그에게 "나를 위하여 그 청년을 온유히 대하라"(18:5)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어떤 젊은이를 징계해야 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기를 바라시는 바로 그 말씀입니다. 결국 다윗의 군대가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18장 19~32절에서, 우리는 아히마아스라는 청년이 이 승리의 소식을 다윗에게 가장 먼저 알리고자 하여, 다윗에게서 명예를 얻고자 하는 것을 읽습니다. 그러나 요압은 그 소식을 전하기 위해 구스 사람을 대신 보냈습니다. 그러나 아히마아스는 집요했고, 결국 요압은 그가 가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그는 너무 빨리 달려 구스 사람보다 먼저 다윗에게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압살롬이 살아 있는지 가장 알고 싶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아히마아스는 그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비켜서서 구스 사람이 와서 다윗에게 소식을 전하기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것은 두 부류의 설교자의 그림입니다 - 한 명은 가서 설교하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친히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만이, 그가 나중에 오고 첫 번째 사람만큼 인간적으로 "은사를 받지" 못하더라도 온전한 메시지 즉 온전한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보내신 적이 없는, 아히마아스와 같은 많은 예언자들이 "예언"하고 그리스도인들을 속이고 있습니다. 신자로서, 우리는 모든 "예언"을 판단하고, 우리가 보고 듣는 모든 것을 맹목적으로 삼켜서는 안 됩니다.
다윗은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울며 말했습니다. "내 아들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네 대신 죽었더라면 좋았을 텐데"(18:33). 거기에서 우리는 다윗에게서 그리스도의 영을 봅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에게 반역한 자들을 대신하여 죽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는 자를 미워하지 않은, 새 언약의 영이 그 속에 있는 자였습니다.
압살롬은 죽임을 당하고 다윗은 다시 왕위에 올랐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젊었을 때 그가 사울에게서 왕위를 빼앗을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다윗을 시험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가 늙었을 때, 하나님은 그가 압살롬에게서 왕위를 빼앗을 수 있는지 보려고 그를 다시 시험하셨습니다. 두 경우 모두,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왕좌를 주시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는 결코 그것을 스스로 움켜잡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젊어서도 시험하시고 늙어서도 시험하십니다 - 심지어 우리가 그분을 50년 동안 따랐어도 말입니다. 처음에, 다윗은 10년 넘게 도피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에는, 그는 단 며칠 동안만 목숨을 걸고 도망쳐야 했습니다. 각 시련의 기간은 하나님께서 결정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가 우리의 능력 이상으로 시험 당하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다윗의 마지막 날
21장에서, 우리는 해마다 계속된 이스라엘의 기근에 대해 읽습니다. 처음 2년 동안, 다윗은 이것이 단지 자연재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3년째에도 계속되자, 다윗은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여호와께 간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을 때나,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축복이 계속해서 부족할 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그 이유를 찾는 것이 좋습니다. 항상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이 경우, 하나님은 사울이 오래 전에 기브온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이라고 다윗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여호수아에게 죽이라고 명령하신 가나안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기브온 사람들에게 속아,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들과 그들의 후손을 결코 죽이지 않겠다고 그들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사울은 이 언약을 어겼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말을 어길 때 그것을 매우 심각하게 여기십니다 - 심지어 적에게라도 말입니다! 문제가 해결되자, 하나님은 다시 농작물로 그 땅에 복을 내리셨습니다.
22장: 이것은 시편 18편에서 한 마디 한 마디 반복되는 구원의 노래입니다. 여기 17-20절에, 우리의 구원에 대한 아름다운 그림이 있습니다.
23장 2-4절: 다윗은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죽기 전에, 인간의 영적 지도자에게서 발견되어야 하는 자질에 대해 몇 마디 적었습니다. 지도자는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아야 하며, 그의 혀에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그는 사람들을, 의롭게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그의 삶은 빛나는 빛과 같고 그의 간증은 구름 없는 아침과 같아야 합니다.
23장 8-39절에는, 다윗의 용사들과 그들의 업적에 대한 목록이 있습니다. 다윗은 그 자신이 용감한 사람이었고 그의 주위에 다른 많은 용사들을 모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교회에도 사탄과 맞서 싸우고, 필요하다면 혼자서라도 "주님께서 그를 통하여 큰 승리를 거두실 수 있는"(10,12절) 두려움 없는 지도자를 필요로 하십니다. 주님은 그분을 위해 담대하게 "설" 사람을 필요로 하십니다(12절). 다윗은 이스라엘의 통치자로서 큰 책임이 있었고 이 용감한 사람들에게 책임을 위임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혼자 일하지 않았습니다.
24장에서, 우리는 다윗이 범한 두 번째 심각한 죄에 대해 읽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인구 수를 세어보기로 결심했는데, 이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백성을 거느리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이거나 자신의 군대가 얼마나 강한지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의 장군 요압(그보다 주님을 덜 아는 사람)은 그 일을 하지 말라고 권했습니다(3절). 하지만 다윗은 고집을 부렸고 어쨌든 그렇게 했습니다. 이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벌을 내리사, 이스라엘 중에 병으로 죽은 자가 칠만 명이었습니다(15절).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그의 인구 조사가 소용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루에 인구를 70,000명이나 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회개하고 하나님이 그에게 가라고 지시하신 곳, 곧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드린 모리아 산 위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기로 결심했습니다. 아라우나는 왕을 보자마자, 제물로 바칠 모든 수송아지와 나무를 다윗에게 공짜로 바쳤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제안을 거절하고, "내가값을치르지않고는여호와께드리지않겠노라"며 값을 치르겠다고 말했습니다(24:24). 이것은 우리가 일생 동안 가지고 있어야 할 좋은 좌우명입니다.
여기 여러분 모두가 평생 기억해야 할 구절이 있습니다. 비용이 들지 않는 것을 하나님께 절대로 드리지 마십시오.
몇 년 후 하나님께서 성전을 지으라고 명하신 곳이 바로 이 자리였습니다(대하 3:1). 아브라함과 다윗이 " 값을 주고 " 드린 곳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집을 짓기 위해 택하신 곳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참된 집인 교회는, 그런 희생정신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세워집니다. 기독교계는 자신의 것을 구하고, 비용이 전혀 들지 않거나 아주 적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상 생활에서 매일 이러한 태도를 가진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나는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는 것을 결코 하나님께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주님을 섬기는 데 어떤 대가를 치렀나요?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들
이 책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으로 시작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린 최악의 왕 아합으로 끝납니다. 이스라엘은 강력한 국가로 시작하여 분열된 국가로 끝납니다. 많은 악한 왕들이 두 왕국, 특히 이스라엘을 다스립니다.
우리가 반복해서 살펴보았듯이, 하나님의 백성의 상태는 지도자의 영성 여부에 크게 좌우됩니다. 이스라엘은 경건한 지도자가 있을 때마다 경건한 방식으로 전진했습니다. 그들에게 육적인 지도자가 있었을 때,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육욕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항상 경건한 지도자들입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에 무리를 바라보시며, 그들을 목자 없는 양으로 보셨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 가운데 목자들을 보내시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9:36-38). 하나님은 오늘날 인도의 교회들을 보시고, 경건한 지도자들이 똑같이 필요함을 아십니다. 그때 우리에게 오는 도전은, 하나님이 찾으시는 유형의 남자와 여자가 됨으로써 우리 세대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시키는 것입니다.
모든 세대에서 하나님은 경건한 지도자를 필요로 하십니다. 우리는 이전 세대 지도자들의 지혜에 의존할 수 없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을 영원히 다스릴 수 없었습니다. 그는 죽을 것이고, 다른 누군가가 이어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되느냐는 차기 왕이 어떤 유형의 사람이 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경건한 한 사람을 일으켜 한 세대에 일을 시작하게 하십니다. 그는 늙고 죽습니다. 다음 세대의 지도자들은 창시자의 지식과 교리만 가지고 있고, 그의 경건함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사람들은 확실히 길을 잃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시대에 많은 "다윗"과 "드보라"를 필요로 하십니다.
다윗의 마지막 날
다윗의 마지막 날을 살펴보면, 그의 삶에서 슬픈 일들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죽을 때, 그의 아들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 "내가 다음 왕이 되리라"(1:5)고 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왕으로 세우시기를 기다리던 그의 아버지 다윗과 같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다윗이 평생에 단 한 번도 아도니야를 벌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6절). 그는 그에게 회초리를 사용한 적이 없으며, 그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꾸짖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자라는 아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이 가나요? - 특히 그가 잘생긴 아이라면요? 다윗은 매우 좋지 못한 아버지였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스스로 경고를 받을 수 있습니다. 다윗은 전쟁터에서 너무 바빴기에, 가족을 위한 시간이 없었습니다. 당신도 당신의 일이나 사역에 너무 몰두하여 자녀가 어떻게 성장하고 있는지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주님을 섬기기" 때문에 마귀에게 자녀를 잃는다면, 그것은 슬픈 일입니다. 그것은 주님을 섬기는 방법이 아닙니다.
다윗은 임종의 자리에 누워 있었고, 아도니야는 그의 아버지가 이제 무력하다는 사실을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왕국을 장악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나단 선지자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밧세바에게 가서 다윗에게 솔로몬을 후계자로 삼겠다는 약속을 상기시켜 달라고 말했습니다. 나단 또한 다윗에게 가서 아도니야의 악한 계획을 알렸습니다(22절). 그리하여 나단 선지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그 상황으로 가져왔습니다. 교회는 상황에 따라 예언적으로 말할 수 있는 진정한 선지자가 적어도 한 명 있을 때 큰 축복을 받습니다.
다윗은 제사장들에게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으라고 말했고, 사독은 즉시 그렇게 했습니다(32~34절).
2장: 다윗이 죽을 때 솔로몬에게 몇 가지 일을 맡겼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마지막 말은 매우 실망스럽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분의 가장 위대한 종들의 실패에 대해 우리에게 말할 때 매우 정직합니다.
다윗은 솔로몬에게 경건한 지도자가 되는 법과 하나님을 공경하는 법을 가르쳐야 했습니다. 그는 솔로몬에게 여자를 조심하고 한 명 이상의 아내를 두는 등의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경고했어야 했습니다. 대신에 그는 무엇을 말합니까? 그는 그에게 오랫동안 다윗의 신실하고 충성스러운 장군이었던 요압을 죽이라고 말합니다(2:5,6). 다윗이 요압에게 이렇게 보답한 것은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저는 그 이유가, 다윗이 여기에서 아브넬과 아마사만 언급하고 있을지라도, 그의 아들 압살롬을 죽인 요압을 진정으로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다음 다윗은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했기 때문에, 그를 죽이라고 솔로몬에게 말합니다(2:8,9).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할 때, 다윗은 시므이가 자기를 저주하도록 허락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시므이가 죽임을 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관대하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시므이를 용서하고 그를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솔로몬에게, 자신이 시므이에게 한 약속이 솔로몬에게 구속력이 없으므로 솔로몬이 반드시 그를 죽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요압과 시므이를 죽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솔로몬을 통해 그들을 죽였습니다. 그는 적을 죽이기 위해 갱단을 고용하는 사람들과 같았습니다.
2장 10절의 다음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나서 다윗은 죽었다."
그래서 그 복수의 말은 그가 죽기 전에 한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슬픈 일입니다. 다윗은 인생을 아주 잘 시작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사울을 죽이기를 거부했습니다(그의 친구들의 거듭된 권유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이제 그의 삶의 마지막 순간에, 그는 자신이 용서했다고 주장하는 두 사람을 죽이고 싶어합니다. 이것으로 보아, 다윗이 요압과 시므이를 겉으로만 용서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그들에 대한 원한을 끊임없이 품고, 그의 생각이 시므이와 요압이 그에게 행한 악에 자주 머무르는 것을 내버려 두었을 것입니다. 그의 마음이 강한 한, 그는 용서한 척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늙고 마음이 약해지기 시작하면서ㅡ 그의 마음 속에 있던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는 그들을 진정으로 용서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경고입니까!
그러나 다윗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은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용서하셨던, 옛 언약 아래 살았습니다. 옛 언약 아래서,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이 완악하였기 때문에, 많은 것을 허락하셨습니다(마 19:8). 그들 안에는 성령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 아래에서,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용서받을 수 없다고 분명하고 반복해서 가르치셨습니다(마 6:14,15; 18:35). 예수님은 심지어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다른 모든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한 때 용서하셨던 죄는 우리의 계정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 18:22~35).
당신이 용서했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을, 당신은 정말로 용서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쓴 뿌리가 있는 것의 위험에 대해 말씀합니다(히 12:15). 용서하지 않는 태도는 원통함의 뿌리를 매우 빠르게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에게 해를 끼친 사람들의 목록(리스트 작성할 것)을 살펴보고 그들 모두에 대한 원한의 모든 뿌리를 근본적으로 뽑았는지 확인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자신을 파괴할 것입니다. 당신이 임종할 때가 아니라, 지금 당신의 마음이 강할 때 그 뿌리를 뽑으십시오. 어느 날 당신은 노쇠하여 그 뿌리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약해질 수 있습니다.
솔로몬의 초창기
2장: 솔로몬은 이복형 아도니야(19~27절), 사촌 요압(28~35절), 시므이(36~46절)를 죽임으로써 통치를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통치를 시작하기에 참으로 좋은 방법이죠!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솔로몬에게 제안하여 그를 멸망의 길로 인도한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인 다윗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보세요! 이것이 바로 씻어내지 않은 원통함의 장기적인 결과이며,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더럽혀집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복을 주실 것이라고 여전히 상상했습니다(45절). 사람은 이렇게까지 속을 수 있습니다!
3장: 당신이 잘못된 길에서 시작하면, 점점 더 하나님에게서 멀어집니다! 솔로몬이 한 다음 일은 바로의 딸인 이방 여인과 결혼한 것입니다. 다윗이 솔로몬에게 복수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대신, 지혜로운 결혼에 대해 충고하면서 말년을 보냈다면 솔로몬의 인생은 얼마나 달라졌을까요? 당신은 자녀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나요? 인생에서,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솔로몬이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고 분향하는 것 외에는, '여호와를 사랑하였다'(3:3)"는 기록을 읽습니다. 얼마나 모순인가요! 솔로몬은 그러한 타협으로 인해 결국 스스로 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성전과 사생활에서 이중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에 대한 큰 사랑을 많이 표현합니다; 그러나 사생활에서 불의와 죄 가운데 삽니다. 결국 그들의 작은 타락이 큰 것이 되어, 그들을 멸망시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좋은 분이셨습니다. 그가 변화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어느 날 밤 솔로몬에게 나타나,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주겠다"(5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솔로몬이 이르되, "나에게 이해심 많은 마음을 주십시오.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포용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주십시오. 주의 백성을 판단하기 어려우니,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마음을 내게 주십시오"(9절).
여호와께서 그가 구한 것을 기뻐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장수나 재물이나 원수의 생명 멸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므로, 내가 네게 지혜롭고 분별력 있는 마음을 주어, 너와 같은 자가 없고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또한 너에게 부와 명예를 주었고, 너와 같은 왕은 없을 것이다"(3:10-13).
오늘날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분별력이며, 오직 하나님만이 그것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습니다. 지도자인 사람들은 교회 안에 있는 형제자매들의 참된 상태에 대한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 특히 그들 중 누군가에게 책임을 줄 때. 솔로몬이 하나님께 구하여 얻은 것이라면, 우리는 왜 얻지 못합니까? 하나님께서 새 언약 아래서 우리를 더 사랑하시지 않습니까? 그분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솔로몬보다, 우리가 세우고 있는 교회에 대해 훨씬 더 큰 관심을 갖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분은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분별력이 부족하다면, 아마도 우리가 자급자족하면서 하나님께 분별력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두 여자와 아기
3:16-28: 여기서 우리는 솔로몬의 지혜의 예를 봅니다. 어느 날 두 명의 창녀가 판결을 위해 그의 앞에 섰습니다. 그들은 같은 집에 살고 있었고, 서로 며칠 사이에 아기를 낳았습니다. 어느 날 밤, 그들 중 한 명이 자고 있는 동안 실수로 아이를 깔아 뭉개어 죽였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은 그녀는, 즉시 그녀의 아기를, 살아있는 아기와 바꾸었습니다. 아침에, 다른 여자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았을 때, 살아 있는 아이를 돌려달라고 그녀에게 요구했습니다. 그때 그들 사이에 산 아이가 누구의 것인지에 대해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솔로몬은 어떻게 판단했을까요?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솔로몬은 산 아이를 둘로 나누어 각 여자에게 반씩 주라고 제안했습니다. 그 아기를 낳은 첫 번째 여자가 말했습니다, "안돼요, 제발 아기를 죽이지 마세요. 다른 여자에게 아기를 주세요." 그러나 두 번째 여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죽입시다. 당신도 반을 가질 수 있고, 나도 반을 가질 수 있습니다." 즉시 모두가 진정한 어머니가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솔로몬은 "아이를 첫째 여자에게 주라"고 말했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그 판결을 듣고, 하나님이 왕에게 지혜를 주신 것을 보고 왕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오늘날 솔로몬의 지혜를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두 형제가 한 교회에서 함께 일하다가 서로 사이가 나빠졌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리고 나서 그들 중 한 명이 그것을 둘로 나누고 그의 그룹과 함께 철수합니다. 그는 진정한 어머니입니까? 확실히 아닙니다. 진정한 어머니는 "아니요. 그 교회를 나누지 마십시오. 당신은 교회 전체를 독차지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신자들의 교회를 분열시키지 마십시오. 첫 번째 교회에서 분열을 일으키지 않고, 교회를 그대로 두고 당신이 빠져 나와, 다른 곳으로 가서 완전히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축복하실 것입니다. 당신이 참 어머니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그 교회를 맡기기 원하신다면, 그분은 어느 날 다른 여자까지 죽이고 당신에게 그 아이를 주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사울을 죽이고, 왕국을 다윗에게 넘겼습니다. 그분은 오늘도 그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아기를 둘로 자르지 마십시오. 한 교회를 나누지 마십시오. 다른 곳으로 가서 일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의 손으로부터,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시도록 하십시오. 절대 움켜잡거나 나누지 마십시오.
제가 교회의 리더십에 동의하지 않을 때마다, 지켜온 원칙입니다. 나는 그들 중 일부가 나를 따르도록 하기 위해, 교회를 분열시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다른 곳으로 가서 "주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해 주십시오. 제게 다른 아이를 주십시오. 나는 그 아이를 위해 싸우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태도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의 일에 풍성한 축복을 주셨다고 오늘 간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당신에게 추천하고 싶습니다.
4:29(KJV)에서 우리는 읽습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와 심히 큰 분별력 과 폭넓은생각과 해변의 모래와 같은 넓은마음을 주셨다." 솔로몬이 아주 젊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젊은이들은 여기에 언급된 이 네 가지 은사를 그들에게 모두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습니다. 지혜, 분별력, 폭넓은 생각뿐만 아니라 "바닷가의 모래와 같은 넓은 마음"도 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해변의 모래와 같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품을 수 있는 큰 마음을 의미합니다(창 22:17).
물세례나 방언에 대해 우리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다른 교단에 속한 형제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받아 주셨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주님, 그가 나와 함께 일하지 않거나 동의하지 않을지라도, 그를 따뜻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넓은 마음을 주십시오"여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만큼 많은 형제자매를 원합니다!
어떤 문제에 대해, 우리와 다른 신념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그 사람을 받아 들일 수 있습니까? 나는, 한번은 한 자매가 침례를 받으러 나에게 왔을 때, 그녀가 금 장신구를 끼고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때 이미, 나는 신자들이 금을 착용해서는 안 된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디모데전서 2:9과 베드로전서 3:3에 대한 나의 이해입니다. 그리고 이 자매는 금을 차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세례를 주어야 하나요, 말아야 하나요? 그때 주님께서 제게 한 가지 질문을 하셨습니다: "너는 내가 그녀를 받아들였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그래서 나는 말했습니다, "주님, 제가 보기에, 그녀는 참으로 거듭났고, 당신은 그녀를 받아 주셨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내가 받아들인 자를, 네가 어떻게 거절할 수 있느냐?"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 그녀의 금과 함께! 그녀는 나중에 그 문제에 대해 빛을 얻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를 판단하는 것은 내 일이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신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 그들의 신념이 저와 다를지라도 말입니다.
한번은 어떤 문제에 대해 주님께서 제게 물으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너는 이 문제를 이해하는 데 얼마나 걸렸느냐?" 나는 그것이 몇 년이 걸렸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렇다면 문제를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상대방에게 나는 왜 인내심을 가질 수 없었을까요?
우리 모두는 넓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젊을 때, 열심이 많고 편협한 편견에 사로잡혀 모든 문제에 대해 우리와 의견이 일치하는 사람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부끄럽지만 어렸을 때 저도 그랬습니다. 그것은 내가 가진 많은 어리석은 태도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이가 들고 주님을 더 잘 알게 되면서, 마음이 넓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6:7에서, 우리는 성전이 어떻게 지어졌는지에 대한 아름다운 내용을 읽습니다. 성전은 멀리 떨어진 채석장에서 산비탈을 깎아낸 돌을 잘라 모양을 만든 돌로 지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돌들을 건축 현장으로 가져왔을 때, 이미 육면체의 모양이 완벽하게 되어 있어서, 성전 터 자체에서는 깎는 소리가 나지 않았습니다. 교회도 이렇게 세워져야 합니다. 우리는 사생활에서 은밀히 우리 자신을 판단하여, 우리가 함께 모였을 때 갈등이나 다툼의 소리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
솔로몬의 타락
솔로몬은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는 데 7년이 걸렸고(6:38), 자기 집을 건축하는 데 13년이 걸렸습니다(7:1). 그래서 우리는 그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압니다!! 그것은 오늘날 기독교 사역을 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 대한 상당히 좋은 설명입니다. 그들은 "기독교" 일을 잘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요 관심사는 자신의 집과 가족의 안락입니다. 하나님의 일과 하나님의 집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복음 전파는 그들을 부자로 만들었습니다.
솔로몬의 타락은 모든 타락이 그렇듯이 점진적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죽임으로써 통치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아버지 다윗의 의견에 쉽게 동의하지 않고, 시므이와 요압 죽이기를 거부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아도니야를 용서하고 그를 죽이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가 미끄러지기 시작하자, 기울기는 더 가팔라졌습니다. 다음으로, 그는 파라오의 딸과 결혼했습니다 - 분명히 그녀의 재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자신의 집을 짓는 데 13년을 보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러한 지혜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행한 일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인 일꾼들이 삶의 시작부터 바로 세상을 향해 표류하는 것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그들은 사역을 시작할 때부터 자신의 권리를 찾기 시작합니다. 몇 년이 지난 후 그들을 보면, 자신만의 것을 찾는 전문가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왕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의 백성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성전이 완성되자, 그분은 그분의 영광으로 성전을 가득 채우셨습니다(8:10,11). 마치 모세가 성막을 완성한 날과 같았습니다. 성전은 성막과 같은 양식으로 지어졌지만, 훨씬 더 크고 웅장한 규모였습니다.
솔로몬은 아름다운 헌신의 기도를 드렸습니다(8:22-61). 그러자 여호와께서 두 번째로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기도를 들으셨다고 말씀하시고, 그의 왕국이 굳게 설 수 있도록 정직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행하라고 다시 한 번 촉구하셨습니다. 그분은 또한 솔로몬이 여호와를 따르지 않는다면, 이스라엘이 그 땅에서 쫓겨나고 성전이 폐허 더미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9:3~9).
바벨론 사람들이 와서 유다를 점령하고 성전을 파괴했을 때 일어난 일이 바로 그런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네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으면서, 내가 너희를 계속 축복해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라"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길을 잃기 훨씬 전에 우리에게 경고하십니다.
10장에서 우리는, 스바의 여왕이 솔로몬의 놀라운 지혜를 들었기 때문에, 와서 그를 만났다는 것을 읽습니다. 그러나 지혜에 대한 그의 세계적인 명성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은 인간적인 면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대부분의 기독교인처럼, 공개적으로 주님께 아름다운 기도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생활에서, 그는 다른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마찬가지로 경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정욕에 있어서 삼손과 경쟁했습니다 - 그는 700명의 아내와 결혼했고, 그것도 모자라 300명의 첩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 대부분 주변 이교도 국가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3년에 한 번만 그들 각각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 아내들은 마침내 그를 여호와에게서 떠나 우상 숭배에 빠지게 했습니다.
결혼을 계획할 때, 단지 예쁜 얼굴을 찾지 마십시오. 그 소녀가 경건한 삶을 살고자 하는 소망을 가지고 있는지 보십시오. 그것은 장기적으로 훨씬 더 중요합니다. 얼굴만 예쁜 여자가 당신의 인생을 망치고 파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경건한 여자는 평생 동안 당신에게 선을 행할 것입니다. 성경에는 많은 경고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때가 되면 그것들에 주의를 기울일지 모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임(예배)에서 그런 말을 들으면 고개를 끄덕입니다. 하지만 결혼할 때가 되면, 단지 여전히 얼굴이 예쁘다는 이유만으로 세상 여자를 택합니다. 그리고 자매 여러분, 제가 여러분에게도 권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당신의 남편이 될 경건한 사람에게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하십시오. 부모님이 회심하지 않은 사람을 제안하는 경우, 그들의 제안에 굴복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배우자는 당신을 돈, 쾌락, 경건하지 않은 오락 등의 우상 숭배하는 길로 이끌 수 있습니다.
솔로몬이 타락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진노하셔서 그의 왕국을 둘로 나누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11:9-11). 그러나 다윗은 경건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솔로몬의 생전에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11:12). 거기에서 우리는 자녀들이 그들의 아버지의 경건함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축복을 받는지 봅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을 괴롭게 하기 위해 대적들을 일으키셨지만, 그는 여전히 회개하지 않았습니다(11:14). 솔로몬은 여로보암이 자신에게 반역할까 두려워, 여로보암을 죽이려 했습니다(11:26,40). 후에 여로보암은 분열된 왕국(북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솔로몬은 죽었습니다(11:43).
솔로몬은 그의 생애 동안 성경에 세 권의 책을 썼습니다. 그 중 두 권인 잠언과 솔로몬의 노래(아가)는 구약 안에 있는 새 언약 책과 같습니다. 잠언은 구약 성경에서 가장 훌륭한 책입니다. 모든 청소년은 정기적으로 자주 읽어야 합니다. 31개의 장이 있습니다. 하루에 한 장씩 읽으면, 많은 악으로부터 당신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의 노래(아가)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분의 신부로 섬기는 우리의 헌신에 대한 놀라운 그림입니다.
전도서는 솔로몬이 표류한 후에 기록되었습니다. 그 안에서, 그는 세상 지혜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합니다.
성경의 세 권의 놀라운 책을 쓴 이 사람이 마침내 지옥에 갔습니다! 일어서서 멋진 설교를 하는 모든 사람이 천국에 갈 것이라고 상상하지 마십시오.
솔로몬이 지옥에 갔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성령님께서 솔로몬의 전기를 두 권(열왕기상과 역대하)을 쓰셨는데, 그가 실제로 회개했다면, 성령님께서 그 두 권 중 어느 것에도 그의 삶이 끝날 무렵에 그가 회개했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침묵은 매우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솔로몬은 회개하지 않고 죽었다고 말합니다. 므낫세는 솔로몬보다 훨씬 더 큰 악을, 더 오랫동안 행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의 끝에서 그는 회개했고, 성령은 그것을 성경에 언급합니다(대하 33:12,13). 솔로몬이 회개했다면, 성령님께서 그것을 언급하지 않으셨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솔로몬을 천국으로 보내는 것"에 열심인 것입니까? 주님을 섬기는 사람은 어떻게 살든, 반드시 천국에 갈 것이라고 상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날에 주님께 와서,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예언하였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였나이다"라고 말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죄 가운데 살았던 자들아, 나를 떠나라"(마 7:22, 23)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 날에 솔로몬도 여호와 앞에 와서, "주여, 내가 수천만 명을 축복한 세 권의 성경을 기록하였나이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다른 사람들에게 "죄 가운데 살았던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말씀하신 그대로, 그에게도 말씀하실 것입니다. 솔로몬의 생애가 우리 모두에게 경고가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고전 9:27)라고 말했습니다.
분열된 왕국
12장부터 열왕기상 끝까지, 우리는 분열된 왕국에 대해 읽습니다. 솔로몬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궁전을 짓게 하고 다른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를 섬기도록, 열심히 일하게 만든 매우 잔인한 왕이었습니다.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위에 오를 때에, 백성 중 몇 사람이 그에게 나아와, "당신의 아버지가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습니다. 이제 저희의 멍에를 가볍게 해 주십시오"(12:4)라고 말했습니다. 왕은 그들에게 3일 뒤에 다시 오라고 했습니다. 그 3일 동안, 르호보암은 장로들과 의논했습니다. 장로들은 신하들을 친절하게 대하면 그들이 영원히 그를 행복하게 섬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젊은이들과 의논했고, 그들은 그에게 백성들에게 더 엄하게 대하라며, "내 새끼 손가락은 아버지의 허리보다 두꺼울 것이다. 내 아버지가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했다면, 나는 전갈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리라"(12:11)라고 말하라고 했습니다. 그 이후의 다른 많은 어리석은 사람들처럼, 그는 장로들이 아닌 젊은이들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왕국의 85%를 잃었습니다. 열 지파가 그에게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르호보암은 참으로 어리석었습니다! 그는 어리석은 한 마디로 왕국을 분열시켰습니다.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남쪽에 있는)만이 르호보암에게 충성했습니다. 여로보암은 스스로를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는 북쪽의 다른 열 지파의 왕이 되었습니다. 이제 여로보암은, 자기 백성이 연례 절기에 요구되는 대로 일 년에 세 번 예루살렘에 가서 남왕국 백성과 섞이면, 자기 백성에 대한 통제권을 잃을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는 세겜에 예배당을 지어 백성들이 그곳에서 절기를 지낼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는 거기에 우상을 세우고, 모든 사람을 우상 숭배에 빠지게 했습니다.
13장: 여기서 우리는, 여로보암 왕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를 받은 젊은 선지자에 대해 읽습니다. 그는 가서 그것을 신실하게 전달했고, 주님은 그의 예언을 왕에게 초자연적으로 확인해 주셨습니다. 그런 다음 왕은 식사와 보상을 위해 선지자를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전에 선지자에게 그가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젊은 선지자는 주님의 명령에 충실했고, 나라의 절반을 준다 해도 자기는 왕과 함께 집에 가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참으로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계속 그렇게만 했다면 좋았을 텐데요!
그러나 그 지역에 살고 있던 나이든 선지자가 있었는데, 그는 일어난 일을 듣고, 하나님께서 왕에게 이 강력한 메시지를 전할 젊은 사람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에 불안해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질투했습니다. 그는 젊은 선지자를 만나러 가서, "주님께서 젊은 예언자를 집에 초대하여 식사를 하라고 (자기에게) 말씀하셨다"는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 청년은, 바보같이, 주님의 원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주님께서 그에게 알리지 않고 마음을 돌이키셨다고 생각하며, 나이든 예언자의 말을 듣고 가서 그와 함께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의 불순종 때문에, 젊은 예언자는 주님으로부터 벌을 받았습니다. 그는 사자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어떤 교훈을 배워야 합니까? 오늘날, 많은 은퇴한 "예언자"들은 젊은 예언자들을 시기하고 종종 그들을 파멸시키려 합니다. 젊은 예언자들은 그러한 은퇴한 타락한 "예언자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당신에게, "주님께서 나에게, 당신에게 이렇게 말하라고 하셨다...." 라고 말하는 사람을 조심하십시오, 그들을 믿지 마십시오. 만약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말씀을 주시기 원하시면, 당신에게 직접 주실 것입니다 - 옛 언약 시대와 달리, 그분은 당신에게 성령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엘리야와 그의 사역
17장에서 우리는 엘리야에 대해 읽습니다.
여러분이 엘리야에 대해 가장 먼저 주목하기를 바라는 것은, 그가 아합 왕에게 한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계시니, 내가 그 앞에 서 있나이다"(17:1). 이 참 예언자들이 왕을 두려워하지 않은 이유는, 한 가지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 앞에 서 있었습니다. 왕들은 하나님 앞에서 티끌에 불과했습니다. 인도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그러한 예언자가 될 수 있는 젊은이들입니다. 성경 지식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얼굴 앞에서 살기 위해서는, 양심을 100% 깨끗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 99%가 아니라, 100%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완전히 낮추어야 합니다. 당신의 얼굴은 항상 흙바닥에 두어야 합니다. 엘리야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젊은 남자들을 찾지 못하신다면, 나는 그분이 인도에서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살고 하나님의 목소리가 되는 젊은 자매들을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강단에 설 수는 없지만, 당신의 집에 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하나님 앞에 사는 많은 형제자매들을 필요로 하십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작은 일에도 즉시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날 그에게, 그릿 시냇가에 가서 숨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그리고 그는 즉시 갔습니다(17:3). 거기서 까마귀들이 그에게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그는 시냇물을 마셨습니다(6절). 매일 아침 저녁으로 까마귀가 그에게 고기를 가져다 주곤 했습니다. 까마귀가 그에게 채소를 가져왔다면, 그것 자체가 기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까마귀가 (좋아하는) 고기를 가져오는 것은 더 큰 기적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공급하신 방법입니다. 그러나 며칠 후, 엘리야는 주님이 아니라 까마귀를 의지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많은 종들은 그들의 재정적 필요에 대해 주님을 신뢰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몇 년 후, 그들은 더 이상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정기적인 지원을 보내는 인간인 일부 까마귀에게 의존합니다! 그래서 시냇물이 마르자, 여호와께서 까마귀를 멈추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가 시냇물과 까마귀를 의지하는 것을 떨쳐버리고, 다시 한 번 주님만을 의지하도록 가르치기를 원하셨습니다. 까마귀가 오지 않을 때, 약속한 지원이 오지 않을 때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필요에 대해 주님만을 신뢰하는 법을 다시 한 번 배우게 될 것입니다. 나는 그런 경험을 겪었습니다. 까마귀에게서, "천 개의 언덕에 가축을 소유하시고"(시 50:10),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광 안에서 그의 풍성함을 따라"(빌 4:19) 나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에게로, 내 눈을 돌리게 하신 시간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런 다음 주님은 그분의 방법을 바꾸시고, 이제 엘리야에게 사르밧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르밧은 이스라엘 밖에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그곳에 있는 어떤 부유한 사업가가 자신을 돌봐 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사르밧에 이르렀을 때, 그가 발견한 것은 부유한 사업가가 아니라, 이제 막 마지막 식사를 하려는 가난한 과부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엘리야에게, "그녀가 너를 지원해 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일을 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까마귀나 부유한 사업가가 아니라, 그분을 신뢰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당신이, 당신을 도울 수 있을 것이라고 전혀 기대하지 않는 연약한 사람을 사용하실 것이며, 그를 사용하여 아무 육체도 그분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실 것입니다(고전 1:29).
과부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마지막 식사를 하고 죽으려던 참이었어요"(17:12). 엘리야가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나에게 먼저 그것으로 작은 빵 케이크를 만들어 주십시오. 주님께서 땅 위에 비를 내리시는 날까지, 밀가루 그릇이 다 소진되지 않을 것이며 기름 항아리가 비어 있지 않을 것입니다"(17:13, 14). 그리고 밀가루 그릇은 소진되지 않았고 기름 항아리는 비어 있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이 사건을 이용하여 가난한 사람들이 그들에게 돈을 주도록 가르치는 많은 설교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사건에 대한 완전한 오해입니다. 우선, 오늘날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엘리야 같은 예언자가 아닙니다. 둘째, 오늘날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엘리야와 달리,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만으로도 엘리야는,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오늘날의 설교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부류에 속합니다. 더욱이, 엘리야는 기근의 때에 생존하기 위해 과부에게 단지 한 끼의 식사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과부와 그녀의 아들이 먹던 것과 같은 음식을 먹었습니다. 오늘날의 설교자들은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호화로운 생활 방식을 지원하기 위한 돈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엘리야는 그 과부에게서 한 끼만 먹었지만 수개월 동안 기근이 끝날 때까지 그녀와 그녀의 아들을 위해 음식을 제공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예언자에게 준 것보다 백 배나 더 받았습니다. 오늘날 어느 설교자가 그렇게 합니까? 오늘날 수많은 거짓 예언자들이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하나님의 백성들 대부분은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분별할 줄 모르기 때문에, 미혹을 당합니다.
18장에서, 우리는 오바댜라는 사람에 대해 읽습니다. 그는 아합의 궁궐 관리인이었으며, "여호와를 크게 경외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3절). 이것은 단지 그가 종교인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열왕기하 17장 33절에도 다른 사람들에 대해 "그들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들 자신의 신들을 섬겼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어떻게 진정으로 여호와를 경외하면서도 사악한 우상을 숭배하는 왕의 궁전의 관리인으로 살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오바댜는 분명히 그의 종교와 함께 자신을 위한 안락한 삶을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제자도의 대가를 치르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그랬습니다. 그는 유대인 산헤드린을 떠나 멸시받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가 메시야인 줄 알면서도, 사람의 영광을 구하였기에, 은밀히 예수를 따르려 했습니다. 그런 신자는 결코 사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어떤 목적을 수행합니다. 예수님의 몸이 십자가에서 내려져야 했을 때, 빌라도의 궁전에서 요셉의 영향력은 가치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오바댜 또한 여호와의 몇몇 선지자를 도왔습니다.
우리는 그러고 나서 엘리야가 이스라엘에게 던진 도전에 대해 읽었습니다. "모두를 갈멜 산으로 부르십시오,"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했습니다(19절). 아합은 왕이었지만, 엘리야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시키는 대로 이스라엘 백성을 갈멜 산으로 불렀습니다. 그러자 엘리야가 바알의 예언자 450명에게 말했습니다, "각각 소 한 마리씩을 골라, 그 밑에 불을 피우지 않고 제단을 만들어 봅시다. 그런 다음 너희는 너희의 신을 부르고, 그에게 불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시오. 그리고 나는 나의 하나님을 부를 것이오. 불로 응답하는 분이 참 하나님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좋은 생각입니다. 그렇게 합시다"라고 말했습니다(18:23,24).
그러자 바알의 선지자들은 소를 제단 위에 올려놓고, 뛰고 소리 지르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뛰고 소리치고 비명을 지르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바알 숭배자들처럼 육신적이거나 회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여기에서 주목하는 것이 좋습니다! 엘리야는 그들을 조롱하며 말했습니다, "더 크게 외쳐라. 아마도 그는 잠이 들었고 깨워야 할 것이다. 아니면 화장실에 있을지도 모른다!"(18:27). 그들은 여전히 더 크게 외치고, 자해하고, 6시간 넘게 열광했습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도했는지요! 나는 때때로 선한 양심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할렐루야를 외치는 것을 볼 때 이 바알 숭배자들을 생각합니다; 서로 말도 하지 않을 정도로 사이가 안 좋은 형제들이, 같은 모임(예배)에서 서서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할 때; 서로 싸우던 남편과 아내가 주일 모임에 와서 방언을 할 때 등등. 많은 기독교 모임은 시끄럽지만 불은 없습니다. 당신은 6시간 동안 외칠 수도 있고, 심지어 철야 기도 모임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선한(흠이 없는, 완전한) 양심을 찾으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항상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합니다, "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전화를 받으시고 듣고 계시는지 확인하십시오. 당신의 마음에 죄가 있으면,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실 것입니다"(시 66:18).
이제 엘리야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는 제단을 만들기 위해 12개의 돌을 집어 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 분열되었음을 기억하십시오 - 한 나라에 10개 지파, 다른 나라에 2개 지파. 그러나 엘리야는 그 나라들과 교파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돌 12개를 집어 들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든 백성의 하나됨을 믿었습니다. 베냐민 지파와 유다 지파도 포함시킨 것에 대해, 그곳에 있던 사람들 중 일부는 그에게 화를 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의 의견에 개의치 않았습니다.
제단 아래에 비밀의 불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는 물 열 두 주전자를 제단에 부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1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여, 주는 하나님이시며, 나는 주의 종인 줄 알게 하옵소서" (18:36). 불이 떨어지자 모든 백성이 엎드려 여호와께서 참 하나님이심을 시인했습니다. 이제 온 이스라엘이 자기 편이 된 상황에서, 엘리야는 바알의 예언자 450명을 잡아 모두 죽였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불만이 하나님의 참된 종을 식별하는 표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을 그분에게로 돌이키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이제 백성이 회개하였으므로, 엘리야는 아합에게 곧 비가 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3년 반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런 다음 엘리야는 산꼭대기로 올라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땅에 엎드려, 얼굴을 무릎 사이에 두고 기도했습니다(42절). 그는 비가 오는지 알아보기 위해 종을 보냈습니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 종을 일곱 번이나 되돌려 보냈습니다. 드디어, 구름이 생겼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엘리야의 끈질긴 기도를 봅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같은 본성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고, 3년 6개월 동안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에서 비가 쏟아졌습니다"(약 5:17,18). 이전의 가뭄 역시 엘리야의 끈질긴 기도의 결과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의 끈질긴 기도의 결과로 비가 내렸습니다. 끈질긴 기도에 대한 그의 모범은 우리 모두에게 도전이 됩니다. 우리는 너무 빨리 기도를 포기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가 갖기를 원하시는 것을 받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기도를 마치고 일어나,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아합의 병거 앞에서 이스르엘까지 6마일을 달려가, 그 말들을 앞질렀습니다(46절).
이세벨은 그녀의 거짓 예언자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화가 나서 엘리야에게 다음에는 그를 죽이겠다고 전갈을 보냈습니다. 왕도, 850명의 거짓 선지자도, 온 민족도 두려워하지 않던 권세 있는 선지자가, 이제는 한 여인의 위협에 두려워 움츠러들었습니다. 그는 우리와 얼마나 닮았습니까?
성경이 우리에게,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들의 약점과 실패에 대해 정직하게 말하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나는 그것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슈퍼맨을 택하지 않으시고, 평범한 사람들을 택하여 그분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엘리야는 3년 반 동안 기근을 겪었고 이제 기진맥진했습니다. 이 모든 일이 그를 크게 낙심케 하여, 그는 이스라엘을 떠나 산으로 도망하여 로뎀 나무 아래 누웠습니다(19:5). 천사가 하늘에서 왔습니다. 천사는 엘리야에게 권고가 아닌, 음식을 주었습니다. 그는 다시 자고 일어났습니다. 다시 천사가 그에게 음식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는 방식에 있어서 매우 "현실적"이시고 실제적입니다. 많은 경우, 낙심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약간의 음식과 잠입니다. 약간의 격려와, 약간의 음식과 작은 선물이, 많은 설교보다 훨씬 더 사람들을 격려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옛 언약 아래 있었습니다. 그의 낙담은 우리가 위안을 얻을 수 있는 본보기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는 엘리야가 아니라 결코 낙심하지 않으셨던 예수님을 바라보며 경주를 달립니다. 우리는 어떤 때에도 결코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모두 우리가 누구를 따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엘리야는 자신이 홀로 이스라엘에 남아 하나님을 위해 서 있는 것을 상상하고, 하나님께 그의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19:10,4).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에게 이스라엘에 그 외에 다른 사람들이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실, 주님은 이미 그의 뒤를 이를 다음 예언자가 될 사람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그를 대신하게 하였습니다(19:16). 주님은 또한 엘리야에게, 이스라엘에 바알에게 절하기를 거절한 7000명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19:18). 그렇게 하나님은 그 나라에 남은 자를 두셨습니다.
그러나 그 7000명과 엘리야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하나님의 불을 하늘에서 내려오게 하여, 그 민족을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엘리야만이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 이것은 두 부류의 신자에 대한 그림입니다:
1. 한 그룹은 소극적인 증거를 합니다 - 그들은 우상을 숭배하지 않고, 담배를 피우지 않고, 술을 마시지 않는 등입니다.
2. 다른 하나는 엘리야처럼 적극적인 증거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의 불로 타오르고 있습니다. 타협하지 않는 한 명의 선지자는 오늘날 하나님을 위해, 미온적인 7000명의 신자보다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19장 19~21절: 여기서 우리는 엘리야가 엘리사를 부르는 것을 읽습니다. 엘리사가 소를 몰고 들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을 때, 엘리야가 그를 불렀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는 세속 일에 충실하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항상 부르신다는 사실에 주목하십시오. 모세는 장인의 양을 충실히 돌보고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다윗은 양을 돌보며 사자와 곰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아모스는 열심히 일하는 목자였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안드레는 열심히 일하는 어부였습니다. 마태는 테이블에 앉아 회계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하나님이 그분의 섬김을 위해 게으른 사람을 부르신 것을 결코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엘리야가 엘리사가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엘리사의 집에 가서 그를 부른 것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 왜냐하면 우리는 그가 게으른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저녁에 베드로를 부르러 그의 집에 가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그가 낚시를 할 때 부르셨습니다. 이 모든 예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그분을 섬기도록 부르시기 전에, 우리가 세상 일에서 충실하고 열심히 일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당신이 땅의 일에 충성하지 않는데, 어떻게 하늘의 일에 충성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어려서 아직 집에 있다면, 집에서 충실한 아들딸이 되십시오.
두 번째로, 이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자마자,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났다는 사실에 주목하십시오. 우리는 베드로, 요한, 마태와 여기 엘리사에게서 그것을 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부르심에 즉각적이고 전심으로 응답할 자를 부르십니다. 그들은 자신의 감정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기 위해, 경건한 사람들을 통해 그들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인하려고 노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확신이 들면, 재빨리 행동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섬기기 위해서 그런 사람만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을 섬기려면 즉각적인 순종과 전적인 헌신과 수고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속적인 일을 하는 동안 우리를 시험하셔서, 우리가 충성스러운지 알아보십니다. 당신이 방 청소를 부탁 받았는데 당신이 그것을 하는 방법에 대해 부주의하거나 대충한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그분을 섬기도록 부르실지 의심스럽습니다. 방 청소가 그렇게 된다면, 마음도 그렇게 청소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분의 교회를 청소하기 위해, 어떻게 당신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은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21장에는, 아합의 이웃인 나봇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나봇에게는 아합이 사고자 하는 포도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봇은 하나님의 법에 따라, 그것을 팔기를 거절했습니다(레 25:23). 그러나, 이세벨은, 나봇을 거짓으로 고발하여 죽였고, 그리하여 아합은 포도원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두려움 없는 엘리야는 이제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아합과 대면하고, 나봇을 죽인 것에 대해 하나님이 그를 심판하실 것이며 언젠가는 개들이 아합의 피를 핥을 것이며, 그의 가문은 멸망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아합이 두려워하여 자기 옷을 찢고 금식했습니다(27절). 그런 다음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아합을 긍휼히 여기시고 오직 다음 세대에만 그의 가문에 대한 심판을 내리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자비로우신지 보면 놀랍습니다. 하나님은 겸손을 지극히 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에 (그토록 악했던) 아합이 자신을 낮췄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것을 눈여겨보시고 심판을 연기하셨습니다.
22장에서는, 우리는 유다 왕 여호사밧의 어리석음에 대해 읽습니다. 아합은 그에게 아람 왕과의 전쟁에 동참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여호사밧은 즉시 동의했고, 동의한 후에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로 결정했습니다(22:4,5). 아합은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승리를 주실 것을 선뜻 "예언"한 거짓 선지자 400명을 즉시 모았습니다(22:6). 하나님의 불이 내린 직후, 이스라엘에서 거짓 선지자들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보는 것은 놀랍습니다! 모든 시대에 걸쳐 그러했습니다. 거짓 선지자와 설교자들은 모든 세대에 걸쳐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기 위해 도처에 넘쳐났습니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이 400명 중 누구도 진정한 예언자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할 만큼 충분한 분별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합은 선지자 미가야가 한 명 더 있다고 말했습니다 - 그러나 미가야는 항상 아합에 대한 심판을 예언했기 때문에 아합은 그를 미워했습니다. 미가야가 부름을 받았고, 그는 이스라엘 군대의 패배를 예언했습니다. 아합은 그에게 너무 화가 나서 그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여호사밧은 어리석게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합과 연합했습니다. 적군이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아합은 죽임을 당하지 않기 위해 변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발사된 길 잃은 화살이 그를 죽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개들이 그의 피를 핥았습니다(21:19; 22:38).
이 책은 다윗이 통합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것으로 시작하여, 그 나라가 둘로 갈라지고 타락한 상태에 있는 것으로 끝납니다 - 악한 아합이 한 부분을 다스리고 타협하는 여호사밧이 다른 부분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이 책에서 선지자 한 사람이 나라에 미칠 수 있는 엄청난 영향을 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교회에 선지자를 필요로 하십니다. 그들만이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의 하락 추세를 저지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이스라엘과 유다라는 두 나라와 그들을 다스리는 왕들에 대한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을 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거의 모든 왕이 나빴습니다. 유다에서는, 좋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또한 여기에서 두 나라가 어떻게 포로가 되었는지 읽습니다. 기원전 730년경 앗수르인들이 와서 북쪽 이스라엘 왕국을 점령했습니다. 앗수르인 중 일부는 사마리아의 유대인들과 결혼했고, 그렇게 해서 (예수님 당시에는) 다른 유대인들이 전혀 거래하지 않았던 사마리아인이 탄생했습니다. 약 150년 후, 남유다 왕국은 바벨론(앗수르 다음으로 세계 강대국이 된 나라)에 의해 점령당합니다. 비극은 유다가 이스라엘의 실패로부터 어떤 교훈도 얻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현명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실수에서 배웁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결코 배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지혜로워질 수 있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지혜롭게 되는 한 가지 방법은 다른 사람의 실수로부터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실패 사례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 아담과 이브, 가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여호수아, 다윗 등. 우리는 또한 우리 주변에서 보았던 교회와 설교자의 실패로부터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러한 실수들을 반복하지 않아도 됩니다.
엘리야의 뒤를 이은 엘리사
1장: 이스라엘의 새 왕 아하시야는 그의 우상 숭배를 책망한 엘리야에게 몹시 화를 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를 잡으려고 50명의 군사를 보냈습니다. 엘리야는 군대 장관에게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너와 네 오십 군사를 사를지어다"(1:12)라고 말했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즉시 내려와 그들을 다 죽였습니다. 이런 일이 50명으로 구성된 다른 군사들에서도 두 번째로 발생했습니다. 세 번째 장관은 엘리야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했고, 그러자 엘리야는 그와 함께 가서 왕에게 우상숭배 때문에 죽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같은 장소인 이 곳(사마리아)에 오셨을 때 사마리아인들이 그분을 영접하지 않자 야고보와 요한이 언급한 것은 바로 이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은 엘리야가 한 것처럼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을 그들을 꾸짖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어떤 영을 가지고 있는지 깨닫지 못한다. 나는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러 온 것이지, 그들을 멸망시키러 온 것이 아니다"(눅 9:55,56). 거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새 언약의 영과 옛 언약의 선지자들의 영 사이의 차이를 봅니다.
2장: 여기에서 우리는 엘리야가 엘리사를 시험했을 때, 우리는 엘리사의 끈기를 봅니다. 엘리야가 승천하려 할 때, 엘리사는 그와 함께 길갈로 갔습니다.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그가 벧엘로 가므로 길갈에 머물라고 말했습니다. 엘리사가 말했습니다, "아니요,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벧엘에서,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그가 여리고로 가므로, 여기 머물라고 다시 말했습니다. 엘리사는 다시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나는 당신과 함께 갈 것입니다." 여리고에서도, 같은 장면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런 다음 엘리야는 요단으로 갔습니다. 그들이 요단 강에 이르렀을 때, 엘리야는 물을 쳐서 강에 길을 내었고 두 사람은 걸어서 건너갔습니다. 그러자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따르느냐?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당신은 어떻습니까? 당신은 무엇을 원하십니까? 더 많은 수입, 자동차 또는 새 집을 원하십니까?
그러나 엘리사는 "내가 당신 영의 갑절을 원합니다"(2:9)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다른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엘리야에게 임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원했습니다. 그것이 그가 엘리야를 뒤쫓은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역을 맡기시기 전에, 우리 또한 시험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특정한 경험을 - 우리를 길갈로 데려가심 -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에 만족하는지 확인하실 것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만족하지만,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아니요, 주님, 저는 만족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람들을 더 멀리 인도하시고 그들에게 더 깊은 경험 - 벧엘을 주실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에게 몇 가지 비전을 줄 수 있습니다. 일부 사람은 그것에 만족할 것입니다. 다른 이들은 "아니요, 주님. 나는 당신을 더 원합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아마도 그분은 당신을 통해 기적을 행하실 것입니다. 일부는 이제 만족할 것입니다. 다른 이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주여, 당신 위에 머물렀던 그 영이 나에게도 임하여 당신의 형상으로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그 이하로는 만족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에게는 그런 갈망이 있나요?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으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가장 좋은 것보다 훨씬 못한 것 - 25%, 50% 또는 75%에 안주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보아 왔습니다. 자기 세대에 하나님의 가장 좋은 것을 추구했던 엘리사처럼 되세요. 그는 기름 부음을 두 배로 받았습니다, 그가 끈질기게 버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엘리야가 행한 것보다 두 배나 많은 기적을 행했습니다.
당신이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에게 가서 "나는 성령세례를 원합니다"라고 말하면, 그들은 "오, 그것은 간단합니다. 단지 당신의 머리에 내 손을 얹게 해주세요"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는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당신에게 무엇인가를 중얼거려 달라고 요청한 다음 "당신은 그것을 얻었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뭐라고 말했습니까? 그는 엘리사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성령을 갑절이나 받기를 원하느냐?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너는 매우 어려운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하시면, 네가 얻을 것이다"(2:10). 엘리야는 그 문제를 하나님의 손에 맡겼습니다. 여기서 엘리야는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기고 하늘에서 아버지 우편에 있는, 나를 보고 나를 믿으면, 너는 기름부음을 받을 수 있다."
갑절의 기름부음은 받기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아닌, 주님만 바라보면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당신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오늘날에도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 어떤 사람도 아닙니다. 세례요한도 "나는 너희에게 물로만 세례를 베풀 수 있다. 그러나 그분은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무도 당신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줄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세례자이십니다. 그러니 곧장 그분께로 가십시오.
엘리야와 엘리사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불 병거가 와서 엘리야를 태워 올라갔습니다. 엘리사는 이것을 보고, 떨어진 겉옷을 가져다가 갑절의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이에 대한 즉각적인 증거도 있었습니다. 그가 요단 강에 이르렀을 때, 그는 물을 쳐서 바로 건너갔습니다. 기름 부음은 우리 삶에서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는 소리를 지르거나 비명을 지르거나 우리의 경험을 누구에게도 말할 필요 조차도 없습니다. 우리의 삶과 사역은 심지어 우리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도 스스로를 대변할 것입니다.
엘리사의 기적
우리는 엘리사가 행한 다양한 유형의 기적에 대해 더 많이 읽습니다. 한 도시에서는 물이 매우 안 좋았습니다. 엘리사는 그들에게 소금을 가득 담은 새 그릇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가 그것을 물에 부었더니 물이 깨끗해졌습니다(2:20).
3장 11절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다른 사람들이 예언자 엘리사에게 부여한 아름다운 칭호를 봅니다: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자." 매번, 엘리야가 식사를 마치면, 엘리사는 물을 가져와 엘리야가 손을 씻도록 부었습니다. 그는 그 일을 매우 규칙적이고 충실하게 수행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그에게 그 칭호를 주었습니다! 그렇게 엘리사는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역을 맡기시기 전에, 작은 일에서 우리의 신실함을 시험하실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가 차기 지도자가 되기까지, 여러 해 동안 모세를 충실히 섬겼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을 신실하게 섬기고 사도가 되었습니다.
엘리사는 처음 시작할 때, 위대한 설교자나 위대한 선지자로 알려지지 않았었습니다. 그는 하인(종)으로만 알려져 있었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다른 사람을 섬길 기회가 아닌, 사역에서 명성을 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가장 좋은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삶이 끝날 때까지 사람들의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고 그분의 본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몇 년 동안 사람들의 발을 씻겨 주는 것으로 시작해서, 더 고위급 사역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의 삶이 끝날 때까지 사람들의 발을 씻겨주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는 항상 비천한 일을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다른 이들에게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섬기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0:28). 항상 종이 되십시오 - 당신의 지상 생활이 끝날 때까지. 당신이 영원히 주님의 종이 되고 싶다면, 영원히 사람들의 종이 되십시오. 항상 자신을 다른 사람의 하인으로 생각하고, 그 외에 다른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주님을 섬길 때,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당신을 섬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기뻐하지 마십시오. 그들을 당신의 종으로 여기지 마십시오. 그들은 당신의 형제입니다. 기꺼이 그들을 섬기고 그들의 발을 씻겨 주십시오. 오늘날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주(왕)"가 되었고, 그것이 그들의 사역에서 기름 부음이 사라진 이유입니다.
저는 여기서 여러분에게 예언 사역에 대해 다른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엘리사는 예언을 하기 위해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고자 할 때, 수금을 타는 사람을 구했습니다(3:15). 음악가가 연주를 시작하자, 주님의 손이 엘리사에게 임했고 그가 힘있게 예언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경건한 음악의 가치를 봅니다. 나는 내 인생에서 주일 아침 예배와 찬양 시간에, 주님의 손이 내게 임하여 내가 모임(예배)에 올 때 갖고 있지 않았던 말씀을 주셨던 때가 수없이 많이 생각납니다. 그 기름부음 받은 음악에는, 예언의 영을 엘리사에게 가져다 준 능력이 있었습니다.
선지자도 때때로 음악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음악을 이끄는 사람들은 기름 부음을 받아야 합니다. 단순히 좋은 음악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1)기름부음을 받고, 2)선한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다윗은 노래하는 자들과 음악가들을 임명했고, 그들은 기름부음을 받아야 했습니다. 아삽과 같은 몇몇 음악 지도자들은, 12편의 놀라운 시를 지었습니다(시편 50편, 73-83편). 음악 지도자 중 두 명은 선견자(선지자)로 불렸습니다 - 헤만(대상 25:5)과 여두둔(대하 35:15)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름부음 받은 선지자들을 격려하고 지원하기 위해 기름부음 받은 음악가들을 필요로 하십니다. 그래야 교회가 세워집니다. 여러분 중 일부는 선지자로 부름을 받지 않았을 수도 있고 음악가로 부름을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음악가가 되십시오. 저는 수금 연주자가 어떤 세상적인 스타일의 음악을 흉내 내려 했다면, 그날 엘리사가 영감을 받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No. 그 음악에는 천국의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세상적인 음악과 천국의 음악이 있습니다. 음악이 당신의 영을 고양시켜 하나님을 찬양하게 해주기 때문에, 당신은 음악이 천국적일 때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일부 음악은 여러분이 음악가를 존경하게만 만듭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사람들을 인도하고, 예언의 영을 모임에 가져올 수 있다면, 당신은 기름 부음 받은 음악가입니다.
기름병
4장: 여기 1-7절에서, 우리는 빚진 설교자의 과부에 대해 읽습니다. 남편이 죽고 아내에게 빚만 남기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피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설교자들은 특히 빚을 지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쁜 간증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채권자는 빚을 돌려받기 위해 그녀의 두 자녀를 노예로 데려가려고 왔습니다. 엘리사는 그녀에게 집에 무엇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녀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기름 한 병 외에는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녀는 기름병을 "아무것도"라고 불렀지만, 그녀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광야에서 모세에게 비슷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에게는 목자의 지팡이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그 지팡이로, 그는 홍해를 가르고 바위에서 물을 내고 이스라엘을 약속된 땅 경계까지 인도했습니다. (엘리야가 방문한) 사르밧의 과부에게는 밀가루 작은 한 그릇과 기름 작은 한 병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녀 가족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담고 있었고 그녀와 그녀의 아들을 죽음에서 구했습니다. 우리도 역시 소중히 여기지 않는 어떤 능력이 있어서, "그것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주님이 사용하기 원하시는 것일 수 있습니다.
여기 이 기름병은 성령의 묘사입니다. 때로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말합니다, "나는 돈도 없고, 지식도 많지 않습니다. 나는 재능도 없고 똑똑하지도 않습니다. 나에게 돈을 줄 후원자가 없습니다. 주님의 일에 대한 필요는 너무나 큽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래서 당신은 그들에게 "성령을 받았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네." "그럼 또 뭐가 필요하지요?"
이 여인은 자신의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그 기름병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엘리사는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가서 당신의 모든 이웃에게 큰 그릇을 많이 빌려 오세요. 그런 다음 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병에서 이 그릇들에 계속 부으세요. 그릇들이 모두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 기적을 보지 못하게 하세요. 비밀리에 하세요"(3절).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비슷합니다, "가서 문을 닫고 기도하고 금식하며 예물을 드리라. 네가 이런 일을 하는 것을 아무도 보지 못하게 하라"(마 6:1-18).
하나님의 사람은 대중 앞에 서기 전에, 하나님과 은밀히 동행하며 하나님과 마주 대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문을 닫으면 당신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성령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 문을 열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십시오. 이런 식으로 당신은 당신의 빚을 청산할 수 있습니다.
1. 우리는 온 세상에 복음을전해야할빚이 있습니다. 바울은 "나는 유대인과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과 교양 있는 사람들과 야만인들에게(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해야 할 빚을 지고 있습니다"(롬 1:14)라고 말했습니다.
2. 우리는 또한 온 교회(모든 신자)에게 사랑을베풀어야 할 빚이 있습니다. 성경은 "서로 사랑하는 빚 외에는 누구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롬 13:8)고 말합니다.
우리는, 세상과 복음을 나누고 하나님의 모든 자녀를 사랑하는 이 이중의 빚을 어떻게 청산해야 합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로 돈이나 인간의 능력입니까? 아니요. 우리에게는 성령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다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행 1:8). 이것이 바로 바울이 디모데에게 그의 안에서 새롭게 불을 붙이라고 말한 것입니다(딤후 1:6).
문을 닫고 은밀히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사랑을 추구하고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를 진정으로 구하되, 특히 예언의 은사를 구하십시오(고전 14:1). 그런 다음 나가서 빚을 청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이 구절이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그 과부는 찾을 수 있었던 모든 그릇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녀는 그 기름으로 빚을 갚았을 뿐만 아니라, 이웃에게도 축복과 풍요를 주었습니다. - 그녀는 기름이 가득 찬 채로 그 그릇들을 그들에게 돌려보냈음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명이기도 합니다 - 이웃과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축복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아이
우리는 4장 8-37장에서 또 다른 여인 - 유명하고, 부유하며, 재산이 많고, 영향력 있는 여인 - 역시 엘리사의 사역으로 축복을 받았다는 것을 읽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 문맹자, 교육받지 못한 자만을 축복하시려고 선택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편견이 없습니다. 그분은 문맹인 베드로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나 고등 교육을 받은 바울도 선택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성경을 많이 알지 못했지만, 바울은 성경 학자였습니다.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을 재정적으로 부양하는 어떤 부유한 여인들이 있었고, 예수님은 그들이 경건한 여인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많은 헌금을 받으셨습니다(눅 8:3).
여기에 엘리사를 후원하기로 결정한 부유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여자도 경건한 여자였습니다, 이는 그가 이따금씩 찾아오는 남자를 보고 자기 남편에게 "이 사람이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 것을 내가 압니다"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엘리사의 설교를 한번도 듣지 않고, 어떻게 엘리사를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으로 알아보았을까요? 그녀는 그가 식탁에서 행동하는 방식을 관찰했을 뿐입니다. 우리에게 참으로 좋은 본입니다! 경건한 사람을 알아보는 것은 사소한 것입니다 - 그가 사람들과 앉아서 이야기하는 방식, 그의 음식을 먹는 방식, 일상적인 문제들에서 행동하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그의 설교를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엘리사가 머물 수 있도록 그들의 집에 침대, 탁자, 의자, 전등을 갖춘 작은 손님 방을 만들기로 결정했습니다. 엘리사는 그에게 이런 것들이 필요하다고 제안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모든 경건한 여성이 그렇듯이 사려 깊고, 배려심 있는 여성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종들이 기대하지도 않았는데도, 그런 안식처를 제공함으로써 그분의 종들을 돌보십니다.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은 그러한 사람들에게 결코 빚을 지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그의 종 게하시에게, 그녀를 위해 보답으로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게하시는 그녀에게 자녀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그녀를 위해 기도하며 그녀가 1년 안에 아이를 갖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아이를 가졌습니다.
그 아이가 자라더니, 어느 날 병들어 죽었습니다(4:20). 아이를 당장 묻지 않고 "나로 먼저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게 하소서"(4:25)라고 말한 이 어머니의 믿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그녀는 엘리사를 만나러 갔습니다. 엘리사는 멀리서 그녀를 보고, 게하시에게 "잘 지내시나요? 남편은 잘 있나요? 아이는 잘 있나요?"라고 물어보라고 했습니다(26절). 죽은 아이에 대해 그녀가 한 믿음의 대답을 들어보세요: "잘 있습니다. " 엘리사는 가서 그 아이를 위해 기도했고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렸습니다. 그 어머니의 믿음이 그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보면 놀랍습니다. 그녀의 믿음에 따라 그녀는 받았습니다. 그것이 그녀를 믿음의 영웅들의 전시관에서 언급하는 이유입니다: "여자들은 부활로 죽은 자를 되찾았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습니다"(히 11:35,39). 그 어머니가 믿음이 없었다면 그녀는 아이를 묻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믿음이 있는 사람을 찾을 때마다 얼마나 놀라운 기적을 행하십니까!
4장 38~44장: 여기서 우리는 실수로 독이 있는 덩굴을 잘라서 조리 중인 음식에 넣었을 때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그들은 엘리사에게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는 그것에 약간의 곡식 가루를 넣었고 음식은 건강하게 만들어졌습니다. 그 뒤에 또 다른 기적이 뒤따랐습니다 - 성경에서 음식을 증가시킨 첫 번째 사례입니다. 그 떡덩이는 백명에게는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음식을 증가시켰고, 모두가 배불리 먹은 후에도 약간의 음식이 남았습니다!
나아만과 게하시
5장: 여기서 우리는 나아만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하나님은 작은 이스라엘 소녀 종을 사용하여, 나아만을 참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인도하고 그의 문둥병을 고침 받게 하셨습니다. 그녀는 엘리사의 기적을 행하는 능력에 대해 나아만의 아내에게 증거했습니다. 그것이 나아만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신뢰하게 된 첫 번째 단계였습니다. 하나님은 심지어 작은 소녀 종을 사용하여 몇 마디 말로 그녀의 주인을 축복하실 수 있었습니다. 4장에서 우리는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한 여인의 믿음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난하고, 작은 소녀 종의 믿음을 봅니다. 하나님은 이 둘을 모두 사용하셨습니다. 당신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소녀 종일지라도, 하나님은 당신을 사용하여 다른 사람들을 그분께로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당신은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할 능력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소녀 종처럼, 하나님은, 어떤 한 사람을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어느 누군가에게 이끄는 데에 당신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당신은 그 사람을 예언자에게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당신도 또한 상을 받을 것입니다.
나아만은 먼저 왕에게 갔고, 왕은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는 그를 엘리사에게 보냈습니다. 엘리사가 이 막강한 장군을 어떻게 대했는지 보십시오. 이 구절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줍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은 사람이 큰 사람이든 작은 사람이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엘리사는 그 가난한 과부가 경제적 궁핍을 호소하며 그에게 찾아왔을 때, 그녀에게 더 큰 조경을 표했습니다. 그러나 시리아의 위대한 장군(그 앞에 절하는 사람들에게 익숙했던 사람)이 왔을 때, 엘리사는 그를 만나러 가지도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의 장군인, 나아만은 선지자의 막사 밖에 서 있어야 했습니다. 엘리사는 나아만이 누구인지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인도에 그런 선지자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사람의 얼굴은 신경 쓰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만 사는 선지자가 있었다면, 우리 땅에 얼마나 다른 유형의 기독교가 있었을까요? 엘리사는 나아만을 돕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먼저 나아만의 교만을 낮추어야 했습니다.
그는, 자기 종 게하시를 보내어 나아만에게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어라"라고 말하게 하였습니다(10절). 요단강은 더럽고, 진흙투성이의 강이었습니다. 나아만은 크게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나는 그가 반드시 내게로 나아와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 줄로 생각하였노라. 내가 왜 이 더러운 요단강에 가야 하는가?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이 이보다 낫지 아니하냐?"(11,12절). 그는 너무 화가 나서, "짐을 싸서 집에 가자"고 말했습니다.
예언자는 사람들의 교만을 낮추기 위해 때때로 사람들을 짜증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선지자에게 이 사역을 주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람의 자만과 교만을 그에게 드러내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종종 교만한 사람들을 화나게 하셔서, 그들을 낮추고 그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것도 아님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지위나 명예를 중요시하지 않으십니다.
나아만은 엘리사에게 짜증이 났습니다. 그러나 그의 하인들 중 한 명이 슬기롭게 말했습니다, "주인님, 그는 당신에게 그런 간단한 일을 부탁했습니다. 한번 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나아만은 요단 강에 몸을 담그기로 동의했습니다. 위대한 장군이 옷을 벗고 모든 사람들이 그의 문둥병을 보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는 자신을 낮추고 순종해야 했습니다. 그는 언제 멈춰야 했습니까? 그의 살이 어린아이처럼 깨끗하고 맑아졌을 때였습니다. 당신이 어떤 상황이나 사람에 의해 낮아지게 될 때, 주님이 당신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될 때까지, 내려가서 자신을 낮추라."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이 될 때까지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천국은 이런 사람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아만의 살이 어린아이와 같이 깨끗해졌습니다. 여러분의 육신이 어린아이와 같을 때, 여러분도 깨끗해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전까지는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의 눈에 너무 큽니다.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지 않습니다. 어린 아기의 눈을 들여다보세요. 자만심이 없습니다. 그곳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고자 하시는 곳입니다 - 무(無, nothingness)의 자리입니다. 당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는 곳에 이르면, 당신도 깨끗해질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일곱 번이든 일흔 번이든 계속 내려가야 합니다.
나아만은 엘리사에게 돌아와서, 이스라엘 하나님의 기적을 행하시는 능력에 놀라고 감사하였습니다. 그는 엘리사에게 주려고 많은 돈과 옷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여호와께서 살아 계시므로, 내가 아무 것도 받지 아니하리라"(16절)고 말했습니다. 성경은, 우리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서 돈을 받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요삼 7). 어떤 불신자도 하나님의 종을 지원할 권리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백성만이 하나님의 종들을 지원할 권리와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엘리사는 경건한 사람들에게서 선물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방금 부유한 여자가 그가 머물 방을 제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아만에게서 아무것도 받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많은 종들이 그들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놓친 곳입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아니오"라고 말했지만, 엘리사의 종 게하시가 말했습니다, "내 주인은 얼마나 바보인가! 그는 돈을 요구하지 않았다 (또는 어떤 기도 편지를 보내지도 않았다!). 그 돈이 공짜로 주어졌는데도, 그는 여전히 '아니오'라고 말한다. 글쎄, 주인이 안 받는다면, 내가 받을 것이다." 탐욕스러운 게하시는 하나님의 종에게 돈을 바치는 사람이 우상 숭배자라는 사실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돈을 위해 나아만을 뒤쫓았습니다(21절) -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부자들을 뒤쫓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자 게하시가 거짓말을 꾸며 나아만에게 말했습니다. "두 명의 학생이 성서 학교("선지자의 아들들")에서 방금 왔습니다. 그들에게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22절). 나아만은 그 거짓말을 믿고 그가 요구한 것보다 더 많이 주었습니다. 탐욕이 당신의 마음을 지배할 때, 하나님의 일에 대한 거짓 보고를 정당화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보고서에서 "오늘 모임(예배)에 5만 명이 모였습니다. 15,000명의 사람들이 손을 들어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이곳에서 위대한 부흥이 시작되었습니다" 등의 동일한 유형의 거짓말을 봅니다. 당신이 인도에서 미국으로 보내진 모든 보고서를 읽을 수 있다면, 인도가 도처에서 기독교 부흥으로 뒤덮였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여기 인도에 사는 우리는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미국의 많은 선량한 신자들은 이러한 이야기를 믿고, 그러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인도의 사기꾼들에게 희생적으로 돈을 보냅니다! 오늘날 우리 땅에는 게하시가 많습니다.
게하시는 돈을 거두어, 자기 집에 감추고 아무 잘못이 없는 얼굴로, 엘리사 앞에 나아와 섰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하나님의 사람이었기에, 속을 수 없었습니다.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어디에 갔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게하시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게하시는 부정직했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엘리사는 대답했습니다, "게하시야, 나는 다 안다. 하나님께서 네가 행한 모든 것을 환상으로 나에게 보여 주셨다. 나는 나아만이 뒤돌아서는 것을 보았고, 네가 그에게서 물건을 가져오는 것을 보았다. 지금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 이방인에게서 돈을 받고, 옷과 감람원과 포도원과 양과 소를 받을 때냐?" 오늘날의 설교자들을 위한 말씀입니다!
게하시는 엘리사가 엘리야의 종이던 것처럼, 엘리사의 종이었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기름 부음의 두 배를 얻었고, 게하시는 엘리사의 기름 부음의 두 배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엘리야가 가졌던 기름 부음의 네 배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기름 부음을 받으려고 끈질기게 엘리야를 쫓았지만, 게하시는 돈 때문에 나아만을 쫓았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가 받은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게하시는 나아만이 앓았던 문둥병을 얻었습니다!! 게하시뿐만 아니라, 그의 자녀들도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설교자들에게 영적 문둥병이 닥쳤습니다.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 부자와 서구 기독교 단체를 뒤쫓아, 거짓말을 하고 거짓 보고를 했습니다. 이 설교자들의 자녀들 또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십시오.
엘리사의 다른 기적들
우리는 6장에서 엘리사가 행한 또 다른 기적을 봅니다. 어떤 성경 학교 학생들이 건축 작업을 하고 있을 때, 그들이 빌린 도끼가 강에 빠졌습니다. 그들이 와서 엘리사에게 그 일을 알렸습니다. 그는 즉시 강물에 막대기를 던졌고, 그 쇠 도끼는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여기에서 다시 우리는 부활(죽음에서 벗어난 생명)의 원리가 나타나는 것을 봅니다 - 엘리사가 행한 다른 기적들, 즉 죽은 수넴 소년을 살리는 일, 독이 든 죽을 깨끗하게 하는 일, 나아만의 나병을 치료한 일들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참된 예언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또 다른 사건을 지금 살펴보겠습니다. 이스라엘과 싸우고 있던 아람 왕은, 신하들에게 특정 장소에 군대 진영을 세우겠다고 말했습니다(6:8). 그러나 하나님은 왕의 계획을 엘리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 엘리사는 이 사실을 이스라엘 왕에게 경고했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왕은 여러 번 아람으로부터 자신의 군대를 보호했습니다. 아람 왕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해했고, 자기 진영의 누군가가 이스라엘을 위해 스파이 활동을 하고 있다고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진실을 아는 어떤 사람이, 이스라엘에 아람 군대의 동향을 이스라엘 왕에게 경고하는 선지자가 있다는 것을, 왕에게 알렸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에서도 참 예언의 목적입니다. 엘리사는 무엇을 했나요? 그는 이스라엘에게 다음 주에 적군이 어떤 곳으로 올 것이라고 경고하고. 이에 대비하라고 경고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예언 또한 해야 할 일입니다. 매주 교회 모임(예배)에서, 예언의 영은 원수가 어디로 올 것인지 하나님의 백성에게 경고해야 합니다. 그러한 예언적 사역을 하는 교회는 참으로 축복받은 교회입니다. 이스라엘에 엘리사와 같은 선지자가 있다는 것은 축복이 아닐까요? 사람들이 맞설 준비를 해야 할 것을, 말씀을 통해 경고할 수 있는 선지자가 교회에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언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라"(고전 14:1)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6장 24~29절에서 우리는 아람 군대가 그 성을 포위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마리아에 식량이 크게 부족했다는 내용을 읽습니다. 상황이 너무 나빠서 여자들이 자기 아이를 잡아먹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 밖에는 네 명의 나병환자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병환자이므로 성 안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7:3). 그들은 아람 진영에 가서 음식을 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들은 말했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우리를 죽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쨌든 우리는 여기서 굶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갑시다."
그들이 적진에 이르렀을 때에, 그들은 거기에 있던 군인들이 모두 달아난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주께서 그들(적의 군인들)에게 질주하는 말소리를 듣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나병환자들은 그곳에서 많은 음식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는 이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좋은 소식을 혼자만 간직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서 사마리아 성에 좋은 소식(복음)을 전하여, 그 성이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말하자면 나병환자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우리의 생명을 구하는 음식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이 좋은 소식("복음")을 모르기 때문에, 여전히 죽어가는 사람들이 수백만 명 있습니다. 우리는 가서 그들에게 말해야 합니다.
9장에서는, 아합의 아내 이세벨의 죽음에 대해 읽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참 선지자들을 일관되게 반대하는 사람이었으며, 이제 그녀의 이름은 하나님의 종들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20절에서, 주님은 두아디라 교회의 장로에게, "네가 네 아내 이세벨이 내 종들을 미혹하게 하는 것을 네가 용납하는도다(직역)"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장로의 강한 아내가 교회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그녀를 '이세벨'이라고 부릅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에는, 본래의 이세벨이 아합을 통제했던 것처럼, 자기 아내가 교회를 통제하는 이세벨이 되도록 허용하는 그런 약한 장로들이 많이 있습니다. 당신이 엘리야와 같은 하나님의 선지자라면, 이 이세벨들과 맞서서 그들을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교회는 그런 이세벨들에 의해 멸망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세벨 여왕이 건물 꼭대기에서 던져져 그녀의 몸이 산산조각이 났다는 것을 읽습니다. 어떤 여성도 교회에서 권력을 갖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13장 14절에서, 우리는 엘리사가 병들었고 그 병으로 죽었다는 것을 읽습니다. 왜 엘리사는,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요청했던 것처럼, 출애굽기 15장 26절("나 여호와는 너의 치료자니라")을 주장하지 않았습니까? 엘리사와 같은 사람은 죽은 자를 살릴 만큼 충분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낫지 않았다면, 그것은 확실히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종들의 몸에 질병을 허락하신 이유는, 우리가 결코 완전하게 설명할 수 없는 신비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항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목적을 달성한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신 것처럼, 엘리사가 병으로 죽도록 허락하시는 데에도 어떤 목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처럼 불병거를 태워 엘리사를 하늘로 데려가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더 굴욕적인 방법으로 엘리사를 천국으로 데려가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시는 방식에 복종해야 하며, 결코 우리의 처지를 다른 사람의 처지와 비교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놀라운 후속편은, 나중에 모압 사람들이 바로 그 무덤(엘리사와 같은)에 한 사람을 묻었을 때, 그 죽은 사람이 엘리사의 뼈에 닿자마자 그가 죽음에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13:20,21). 그렇게 엘리사는,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살아 있을 때 가지고 있는 것보다, 그의 죽은 뼈에 더 많은 기름 부음을 가졌습니다!! 그의 경우에는 확실히 믿음이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아시리아가 이스라엘과 유다를 공격하다
17장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보다 약 730년 전에 있었던 이스라엘의 포로 생활에 대해 읽습니다. 아시리아 사람들이 와서,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빼앗았습니다. 17장 33절에는 이 앗수르 사람들에 대하여 "그들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들 자신의 신들을 섬겼다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기독교 집단의 많은 곳에서 발견되는 것은 이러한 가짜 "주에 대한 경외심"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에 대해 어느 정도 존경심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돈, 직업, 명예, 세상적인 지위, 교회에서의 지위 등의 그들 자신의 신을 섬깁니다.
18장에서는 유다의 히스기야 왕에 대해 읽습니다. 히스기야의 아버지 아하스는, 매우 사악한 왕이었는데, 그는 히스기야의 형을 이방 우상에게 제물로 바치기 위해 불에 던져 넣었습니다(왕하 16:3). 그러나 히스기야는 아버지와는 달랐고, 좋은 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아버지와 다른 사람이 되고자 하는 자녀들로 인해, 주님을 찬양합니다.
18장 4절에서, 우리는 유다 백성들이 700여년 전에 모세가 광야에서 만든 놋뱀을 여전히 숭배하고 있었다는 것을 읽습니다. 유다에서 이 미신을 마침내 깨뜨리고 파괴시킨 사람은 히스기야였습니다. 그 700년 동안 이스라엘에 살았던 많은 경건한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 여호수아, 사무엘, 다윗(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그러나 이 경건한 사람들 중 누구도 이 놋뱀이 파괴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경건한 사람들 모두는, 하나님께서 친히 그것을 만들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에, 우상과는 다르다고 말하며 용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그것이 우상임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히스기야와 같은 사람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예수(또는 마리아)의 신상과 다른 종교의 신상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요. 둘 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신상들입니다. 한때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만들어졌던 놋뱀 조차도, 하나님께서는 예배의 대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은 놋뱀이나 다른 우상을 숭배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다윗조차도 이 기본적인 진리에 대해서는 빛을 갖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작은 왕에게 그러한 이해력을 주셨습니다. 때로 일반 신자들은 잘 알려진 기독교인들이 깨닫지 못하는 성경의 진리에 대해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결코 잊지 맙시다.
19장에서 우리는, 앗수르 왕이 이스라엘을 점령한 후 남쪽 유다 왕국에도 쳐들어왔다는 내용을 읽습니다. 그러자 히스기야는 여호와께 도와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19:15). 그 밤에 한 천사가 나타나 앗수르 군사 185,000명을 죽였습니다(35절).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베드로에게, 그분이 원한다면, 자신을 돕도록 72,000명의 천사를 부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72,000명의 천사가 130억 명의 사람(72,000 x 185,000)을 멸망시킬 수 있었습니다 - 이는 오늘날 세계 인구의 두 배 이상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세력으로부터 자신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결코 어떤 두려움도 없으셨습니다. 우리도 결코 어떤 두려움 속에 살 필요가 없습니다.
그 후, 히스기야에게는 또 다른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가 중병에 걸렸을 때,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집을 정리하라. 너는 죽을 것이고, 살지 못할 것이다"(20:1). 하나님께서 이제 우리가 죽을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즉시 이 땅을 기꺼이 떠나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이 썩은 세상에 더 이상 머물기를 원하지 말아야 합니다.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가기를 싫어하고 자기의 생명을 연장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요청을 들어주시고 그의 수명을 15년 더 연장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15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그는 므낫세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므낫세가 왕이 되었을 때의 나이가 12세였습니다(21:1). 그는 분명히 히스기야에게 주어진 15년의 추가 기간 동안 태어났습니다. 그는 55년 동안 통치했으며 유다 역사상 가장 악한 왕이었습니다(대하 33:9). 그리고 므낫세는, 히스기야가 죽기를 싫어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 땅에서의 그의 때가 다 됐다고 말씀하셨을 때, 태어났습니다.
24장에서, 우리는 앗수르가 새로운 세계 초강대국이 된 바벨론에 의해 패했다는 것을 읽습니다. 이제 바벨론이 유다를 쳐서 예루살렘을 멸망시켰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이사야는 므낫세 통치 초기에 예언을 했고, 유다를 강력하게 정죄했기 때문에 박해를 받았으며, 속이 빈 통나무 속에 가서 숨었다고 합니다. 그는 발견되었고, 므낫세는 통나무를 둘로 톱질 해, 이사야의 몸도 잘라버렸습니다. 우리는 히브리서 11장 37절에서 "둘로 톱질을 당한" 사람들에 대해 읽습니다.
열왕기하서는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으로 시작하여, 유다 백성이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것으로 끝납니다. 참으로 대조되는 일입니다! 우리도 하늘로 갈 것인지 바벨론으로 갈 것인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 우리가 누구를 기쁘게 하기로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열왕기하에서 배울 수 있는 몇 가지 교훈입니다.
우리가 아는 한, 역대상하는 이스라엘 자손이 70년 동안의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후에 기록되었습니다. 아마도 그것을 쓴 사람은 에스라였을 것입니다. 이 두 책은 유다의 역사만을 다룬다는 점에서, 두 열왕기와는 다릅니다.
이스라엘은 솔로몬이 죽은 후 두 왕국으로 나뉘었습니다. 르호보암이 한 쪽을 이끌고, 여로보암이 다른 쪽을 이끌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에는 열 지파가 있었고, 남왕국 유다에는 베냐민과 유다 두 지파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들은 대체로 모두 사악했습니다. 그런데 유다에는, 선한 왕도 있고 악한 왕도 있었습니다. 열왕기는 두 나라를 모두 다룹니다. 그러나 역대기는 사울과 다윗부터 시작하여 유다 왕들만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열왕기에서 발견된 내용이 꽤 많이 반복됩니다 - 그러나 그것은 네 가지 복음서의 경우처럼 특정한 교훈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역대기에 기록된 내용의 대부분은 역사서이며, 우리가 열왕기상하를 공부할 때 이미 다루었습니다.
역대상 첫 아홉 장에는 아담부터 시작되는 다윗의 가계도가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르우벤과 시므온, 제사장 가계와 다른 지파들의 긴 족보를 주신 한 가지 이유는, 하나님께서 개인들에게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분은 지파에 관심이 없고, 개인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된 항목 역시 개별적입니다. 거기에는 "케랄라에서 수천 명의 사람들이 거듭났고, 타밀나두에서 아주 많은 사람들이 거듭났다" 등의 말이 없습니다. No. 각 사람의 이름이 개별적으로 기록되어,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그분은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여러분의 가계도에 대해서도 모두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모든 삶의 역사를 알고 계시며, 당신의 삶을 위한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는 지구상의 수십억 명 가운데서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름을 알고 계시는 개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용기를 줄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와 우리 조상에 관해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 삶의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머리털 개수까지 다 아시는 분입니다!!
나는 4장에서 몇 구절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야베스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읽습니다(4:9). "야베스는 그 형제들보다 훌륭한 자라." 하나님께서 여러 사람들의 역사를 기록하실 때,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훌륭하다는 사실을 강조하신다는 점에 유의하십시오! 사도 바울 또한 그의 동역자들의 명단을 썼을 때(롬 16장),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온전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분의 자녀일지라도, 그분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훌륭한" 사람들을 주목하십니다.
그의 어머니가 그를 몹시 고통스럽게 낳았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야베스라고 지었습니다. 거기에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4:10).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에게 축복을 주시고, 제 지경을 넓히시면, 당신의 손이 저와 함께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해악으로부터 지켜 주십시오, 그리하여 그것이 나에게 고통을 주지 않게 하소서."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야베스가 구한 것을 들어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기도를 우리 자신에게 영적으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선, 다른 사람들보다 더 훌륭해지는 것은 우리가 기꺼이 겪어야 할 고통과 괴로움의 정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고통과 고난을 겪어내고 승리한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하나님 보시기에 더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을 얕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 삶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우리의 영적 경계를 넓혀달라고 끊임없이 요청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느 때라도 우리가 성취한 것에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그분의 손, 즉 그분의 능력이 항상 우리와 함께 하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다치지 않도록, 악과 악한 사람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달라고 그분께 요청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야베스가 구한 것을 들어주셨고, 우리의 간구도 들어주실 것입니다.
다윗의 용사들
12장에서는, 사울이 다윗을 박해할 때 다윗 곁에 있던 사람들에 대해 읽습니다. 다윗이 왕이 된 후에는 다윗과 합류하는 것이 쉬웠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그가 거절당하고 목숨을 걸고 쫓기는 시기에 그와 합류한 사람들에 대해 읽습니다. 하늘에서 전적으로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은 쉽지만, 그분이 거절당하고 멸시받는 이 땅에서 그분을 전적으로 따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유명해지고 인기를 얻은 후에 교회에 합류하는 것은 쉽지만, 교회가 멸시를 받을 때 그곳에 기름 부음이 있음을 알기 때문에 합류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후에 다윗의 군대 대장이 된 사람들은, 다윗이 사울에게 핍박을 받고 이스라엘에게 배척을 당하던 때에 다윗을 따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 시대에도 우리는 비슷한 것을 봅니다. 하나님은 특정 장소에서 그분을 위해 일할 사람을 일으키셨지만, 그와 그의 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인식할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이 소수는 그와 합류하고, '사울'이나 다른 사람이 그에 대해 뭐라고 말하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들의 세대에서 주님을 위한 영원한 일을 성취합니다. 우리는 오늘날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어디에 있는지 분별할 수 있도록 감각을 훈련해야 합니다.
주인이 인기가 없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참된 종은 결코 인기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에 대하여 좋게 말하면 너희에게 화가 있다, 이는 그들이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 그렇게 말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너희를 비방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다, 그들이 모든 참 선지자들을 그렇게 대했기 때문이다" (눅 6:22,26). 이 사실을 이해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참된 선지자는 평생 동안 완전히 인정받거나 가치 있게 여겨지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참된 사도들조차 생전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거부당하고 멸시를 당했음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로부터 배척을 받았습니다. 디모데후서 1장 15절에서 그는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렸느니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생애가 끝날 때까지 하나님께 충실했지만, 그의 동료 신자 대부분은 그를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아버지께 충실하셨고,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 그분을 떠났습니다.
다윗이 굴에 있을 때에 베냐민 자손 중 몇 사람이 다윗을 찾아왔습니다(12:16). 다윗이 그들을 만나서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평화롭게 왔다면, 내 마음도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나를 원수들에게 넘겨주려고 왔다면 - 내 양심은 깨끗하다 - 하나님께서 너희를 벌하시기를 원한다."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오늘날에도 친구인 척하며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양심이 깨끗하다면, 하나님은 그들을 다루실 것입니다.
그러나 아마새의 놀라운 예를 보십시오(12:18): "하나님의 영이 삼십 용사 대장 아마새에게 임하여, 그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당신 것입니다, 오 다윗. 이새의 아들, 우리는 당신과 함께 합니다. 당신에게 평안이 있고, 당신을 돕는 이에게도 평안이 있을 것입니다. 당신의 하나님께서 당신을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다윗은 그들을 받아들여, 자기 군대의 대장으로 삼았습니다." 아마새와 같은 사람들은 성령이 그들 위에 임하셨기 때문에, 다윗의 외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다윗에게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인식했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읽어보면, 기독교 집단의 기존 종교 제도에 반대했던, 참으로 경건한 사람들이 항상 박해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마틴 루터가 로마 카톨릭 체제에 의해 어떻게 박해를 받았는지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존 칼빈(John Calvin)에 대해서도 아마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재세례파(Anabaptists)라고 불리는 또 다른 온 마음을 다해 믿는 무리가 있었는데, 그들은 로마 카톨릭뿐만 아니라 마틴 루터와 존 칼빈의 추종자들에게도 박해를 받았습니다!! 이 재세례파들은 이 세상의 영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경건한 삶을 살기를 추구하는 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입장 때문에 극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숲에서 만났고 많은 지도자들이 살해당했습니다. 교회 역사는 그들에 대해 많이 기록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는 이 사람들이 그 시대에 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섰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에게 임한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찾으십시오 - 초자연적인 은사(사탄도 초자연적인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가 아닌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과 은혜 - 그것들이 바로 하나님이 그 사람과 함께하신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인정하신다면, 우리도 그 사람을 인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마새는 그 정도의 감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또 다른 특성을 주목하십시오(13:1). "다윗은 천부장들과 백부장들과, 심지어 모든 지도들과 의논했습니다." 참된 하나님의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교제하면서 일합니다. 다윗이 백성들로부터 그토록 엄청난 지지를 얻은 이유 중 하나는, 그가 백성들과 의논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태도는 "나는 약한 형제이고 당신의 의견이 필요합니다. 이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였습니다. 그는 자기보다 후배인 사람들과 앉아서 의논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4절에 "이 일이 모든 백성의 눈에 옳았으니, 회중이 다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다윗의 성전 준비
22장에서, 우리는 다윗이 성전 건축을 위한 자재를 준비하는 이야기를 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그가 성전을 건축하지 않고, 그의 아들 솔로몬이 건축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그것을 준비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지 보십시오. 그는 솔로몬이 나중에 일을 쉽게 하도록, 돌을 다듬는 사람을 세우고 필요한 모든 준비를 했습니다. 그는 또 금과 은과 놋을 많이 주었고, 성전의 못을 만들 목재와 많은 양의 철을 마련했습니다. 그는 원래 자신의 비전이었던 성전을 건축할 특권이 자신에게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성전 건축을 돕기 위해 가능한 모든 일을 여전히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한 사역을 주시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그러한 사역을 주신 다른 사람들을 지원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일을 하십시오. 우리는 다윗의 본에서 그 점을 배울 수 있습니다.
다윗은 매우 사려 깊었으며, "내 아들 솔로몬은 어리고 미숙하다, 그리고 그 집은 반드시 웅장한 집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내가 그것을 위한 준비를 하겠다"고 말했습니다(22:5). 이는 우리가 자녀들이 그들의 세대에서 주님을 따를 수 있도록 준비할 때 자녀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훌륭한 유산입니다. 다윗은 솔로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여호와의 집을 위하여 금 십만 달란트, 은 백만 달란트, 무게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청동과 철, 심히 많은 목재와 돌을 준비하고, 기술자와 석수를 준비하였다. 일어나 일하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22:14-16). 그의 아버지가 솔로몬을 위해 많은 일을 하였으므로 솔로몬에게는 그 일이 얼마나 쉬웠을까요. 경건한 사람들은 자기 자녀들에게 그와 같습니다. 다윗은 모든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마음과 뜻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라. 너희는 일어나서 여호와의 성소를 건축하여, 여호와의 언약궤와 하나님의 거룩한 기구들을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할 전으로 들여오라"(22:19).
23장부터 27장까지는 레위인들, 악사들의 반열, 문지기들, 군대장관들 등의 명단이 나옵니다. 다윗은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가졌고, 그들의 이름이 다 나열되어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윗은 솔로몬에게 말했습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주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니 놀라지 마라" (28:20). 솔로몬이 다윗의 그 권고에 힘입어 끝까지 인내했다면, 그의 삶은 매우 달라졌을 것입니다.
29장 3~5절에서, 다윗은 "내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므로", 이전에 드린 것 이상으로 드린 금과 은의 일부를 나열합니다. 그는 이미 주님의 일을 위해 너무나 많은 것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그는 자신이 충분히 드리지 못했다고 느끼고 더 많이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며,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드리는 일에 있어서 냉정하고 계산적입니까? 우리는 너무 많이 드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런 다음 다윗은 주님께 찬양의 기도를 드렸습니다(29:10-19). 온 회중이 주 하나님을 송축하고 경배했습니다(20절). 그런 다음 솔로몬이 왕이 되고 다윗은 죽었습니다.
마지막 요점: 29장 29절은 사무엘과 갓을 "선견자(seers)"로 언급합니다. 왜 이 선지자(prophet)들은 선견자라고 불렸을까요? 왜냐하면 그들은 앞을 내다보고 다른 사람들이 미래에 관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선견자들(seers)입니다 - 영적인 시각(vision)을 가지고 있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으며, (지금은 무해해 보이는) 어떤 특정한 행위가 교회에서 허용된다면 몇 년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있는 남자와 여자입니다. 선견자는 교회가 위험하게 궤도를 벗어날 위험에 처했을 때, 이를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진실의 직선으로부터의 편차(벗어남)는 1도 정도로 매우 작을 수 있으며, 진실과의 거리는 몇 센티미터에 불과할 정도로 매우 작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몇 년만 지나면, 그 거리가 수 킬로미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선견자는 앞에 놓인 위험을 보고 조금의 타협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성전이 건축되고 파괴됨
역대하의 처음 아홉 장은 솔로몬의 통치를 다루고 있는데, 그 중 많은 부분은 이미 열왕기상을 연구하면서 살펴보았습니다.
10~36장에서는, 우리는 유다 왕 20명의 통치에 관해 읽습니다: 르호보암, 아비야, 아사, 여호사밧, 여호람, 아하시야, 아달랴(여왕), 요아스, 아마샤,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므낫세, 아몬, 요시야,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
이 장들은 유다의 다섯 번의 배교 기간과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네 번의 기간을 묘사합니다. 마침내 유다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아사왕의 시작은 좋았지만 나중에는 실패했다
14~16장에서 우리는 훌륭한 왕으로 출발한 아사 왕에 대해 읽습니다(14:2~6). 그가 백만 명의 에티오피아 군대에게 공격을 받았을 때, 그는 구약성경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는, 가장 멋진 도움의 기도 중 하나로 주님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여호와여, 강한 자와 힘 없는 자와의 싸움에서 주 외에는 도움을 줄 이가 없나이다. 그러니 우리를 도와주소서, 주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를의지하고주의이름을의지하여이무리를치러왔나이다. 오 주님, 당신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오니, 사람이주를이기지못하게하소서"(14:11). 그 믿음의 표현은 주님께서 적을 물리치기에 충분했습니다. 주님께 무기력하게 의지하는 이 기도는 우리가 시련을 당할 때에도 기도할 수 있는 좋은 기도입니다.
그러나 승리한 후에, 한 선지자가 아사에게 와서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너희가 계속해서 주님을 찾는다면, 그분은 너희가 그분을 찾도록 허락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그분을 버리면, 그분도 너희를 버리실 것이다"(15:2). 하나님께서는, 아사가 승리한 후에 더욱 자신감을 갖게 되고 도움을 받기 위해 끊임없이 주님께 의지하는 것을 중단하게 될 위험을 아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가 직면한 위험입니다.
물론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습니다. 그 후 20년 동안 아사의 모든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에티오피아보다 훨씬 약한 군대를 보유한 이스라엘이라는 또 다른 적과 마주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주님을 찾는 대신에, 그는 이방 왕에게 도움을 구하기로 결정했습니다(16:1-6). 그로 인해 그가 당면한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그 결과 아사는 영적으로 큰 손실을 입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사에게 이 사실을 지적하기 위해 선지자 하나니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니가 아사에게 한 말에는, 구약에서 가장 놀라운 약속 중 하나가 담겨 있습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다니시니 마음이 온전히 그분께 속한 자들을 강하게 붙드시리라." (대하 16:9). 여기에서 주님의 눈은 온 마음을 다한 자를 찾지 않으신다는 점에 주목하십시오 - 왜냐하면 그분은 이미 그들이 누구인지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그분의 눈이 이 온 마음을 다한 사람들을 지원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마음을 다한 예수님의 제자라면,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전 세계에서 우리를 지원하실 것임을 확신시켜 주는 놀라운 약속입니다.
제가 수년 동안 해 왔던 기도 중 하나입니다, "주님, 제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 경건한 삶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저를 인도하여, 우리가 서로를 축복할 수 있게 하소서. 그러고 나서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전 세계에 있는 그런 사람들에게 나를 인도해 주십시오." 만일 당신의 마음이 온전히 주님의 것이라면, 그리고 당신의 유일한 소망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분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주님께서는 당신을 세계 각지로부터, 같은 생각을 가진 다른 사람들에게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그들을 통해 여러분을 축복하실 것이며, 여러분을 통해 그들을 축복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수년 동안 겪은 경험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리는 올바르지만, 그들의 마음은 완전히 주님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다른 야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풀 타임 기독교 일꾼들조차도 개인적인 야망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명예와 돈, 편안함을 추구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약속의 성취를 결코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육신적인 야망을 버리고 그분의 목적만을 이루실 수 있도록 온 마음을 주님께 드리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당신을 위해 기적적으로 일하실 것입니다. 당신이 결혼 상대자를 찾기 위해 주님을 기다리고 있다면, 그분은 필요하다면 세상 반대편에서 당신을 위해 누군가를 데려오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눈은 당신을 위해 지구를 가로질러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여러분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도, 그분을 섬길 수 있도록 온 세상의 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이 그분께 구하기도 전에, 당신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실 것입니다. 마음이 온전히 그분의 것인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축복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사 왕은 하나니의 말에 회개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너무 화가 나서 선지자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상황은 점점 더 나빠졌습니다. 그러자 아사는 가난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학대하기 시작했습니다(16:10). 3년 후 아사는 또 다른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 이번에는 자신의 몸에 위기가 닥쳤습니다. 그는 발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질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 아마도 당뇨병성 괴저였을 것입니다. 그는 왕이었기 때문에, 그 나라 최고의 의사들을 불러 그를 돌볼 만큼 충분한 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의사를 부르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 즉 자신을 판단하고 주님을 구하는 일을 결코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최고의 치료에도 불구하고, 그는 죽었습니다(16:12,13).
유다의 다른 왕들
18장: 여기서 우리는 여호사밧이 아합과 함께 전투에 참여하는 이야기를 읽습니다. 그들은 먼저 주님의 말씀을 원했고, 그래서 선지자 미가야가 와서 그들을 위해 예언하게 했습니다. 미가야는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미가야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메시지가 이미 아합의 승리를 예언한 다른 모든 선지자들의 메시지와 같게 해주세요." 그러나 다른 "선지자들"은 모두 거짓 선지자들이었습니다. 나는 모임(예배)에 초대받았을 때, 나 또한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말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 들었습니다. 그러나 미가야는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내가 말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설교할 때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그분은 당신에게 무엇을 말할 것인지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은 미국 설교자들이 쓴 책을 읽고 거기서 읽은 내용을 반복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미국 사람들에게만 말씀하시는 걸까요? 그분은 인도 사람들에게도 말씀하시지 않나요?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 되십시오. 미가야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만을 말했기 때문에, 그들은 그를 박해했습니다. 그들은 그를 때리고 감옥에 가두었습니다(18:23). 역사를 통틀어, 참 선지자들은 항상 박해를 받아왔습니다.
20장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능력을 보여주는 구약성경의 가장 놀라운 이야기 중 하나가 나옵니다. 우리가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많습니다. 여호사밧 왕과 전쟁을 하려고 수많은 적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이전에 아합과 타협한 일에서 교훈을 얻은 여호사밧은, 이제 여호와를 찾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주님을 신뢰하는 가장 훌륭한 기도 중 하나를 기도합니다 - 이는 그의 아버지 아사가 드린 기도와 같은 부류입니다(14:11). 여호사밧이 기도에서 하나님과 자신을 상기시키고 인정한 일곱 가지 사항에 주목하십시오:
1. 하나님의 절대 주권(6절).
2. 하나님께서 과거에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일(7절).
3. 하나님의 약속(8,9절)
4.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기업(11절).
5. 그들의 전적인 연약함(12절)
6. 그들은 전적으로 지혜가 부족함(12절).
7. 그들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함(12절).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내시어 그 기도에 즉시 응답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가서 적들과 맞서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한다" (15~17절).
그래서 여호사밧은 노래하는 자들을 군인들 앞에 두어 전쟁터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 노래하는 자들이 여호와를 찬양하기 시작하자, 여호와께서 유다의 모든 대적을 물리치셨습니다. 유다는 또한 적들에게서 얻은 모든 재물로 부유해졌습니다.
이 이야기는 승리의 방법을 예시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적들(문제)이 있을 때에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약속을 고백하고 미리 주님을 찬양함으로써 말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찬양으로 표현됩니다. "그들이 그분의 말씀을 믿고 - 그분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시 106:12).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6장에서 우리는 웃시야 왕에 대해 읽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 왕이 죽던 해에 여호와의 환상을 받았습니다(사 6:1). 웃시야 왕은 처음부터 순조롭게 시작하여 "여호와를 구할 동안에는 형통"했습니다(26:5). 그러나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 마음이 교만하여 부패한 일을 행하였습니다" (26:16). 같은 이야기가 지난 2000년 동안 기독교계에서 자주 반복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축복하시고 그 사람은 교만해집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축복하시고 강력하게 사용하실 때 겸손을 유지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웃시야는 자신의 성공을 자랑스러워하며, 제사장직도 수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는 300년 전 사울 왕의 경험으로부터 이런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배우지 못했습니다. 용감한 제사장 아사랴는 다른 제사장 80명과 함께 웃시야를 반대하며 말했습니다(26:17,18). "웃시야여, 여호와께 분향하는 것은 당신에게 합당하지 않고, 제사장들에게만 합당합니다." 왕을 책망하는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날 기독교 집단에는 그러한 사람이 몇 명 필요합니다. 웃시야는 제사장들에게 화를 냈습니다. 그러나 그가 화를 내는 중에, 하나님의 심판이 그에게 임하고 그의 이마에 나병이 들었습니다. 그는 성전에서 뛰쳐나와(26:20), 백성에게서 끊어지고, 다시는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지 못하고 나병환자로 죽었습니다(26:21).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시지 않은 사역에 들어가려고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32장에서, 우리는 히스기야가 주님으로부터 경험한 기적적인 치유에 대해 읽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이적도 주셨습니다(32:24) - 태양이 하늘에서 뒤로 물러갔습니다(왕하 20:1-11). 즉, 지구가 반대 방향으로 10도 회전했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시대에는 태양이 멈춰 섰을 뿐입니다. 그러나 히스기야 시대에는 그것이 뒤로 물러갔습니다(사 38:8). 바벨론 사람들은 이 일을 목격하고 히스기야와 어떤 관련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 중 몇 사람이 그를 만나러 이스라엘로 갔습니다(31절). 히스기야는 자신이 너무나 자랑스러워서, 자신의 모든 재산을 바벨론 사람들에게 과시했습니다. 곧, 선지자 이사야가 그에게 와서 그가 바벨론 사람들에게 보여준 모든 것을 언젠가는 그들에게 빼앗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왕하 20:13-17). 그러나 32장 31절에서 말하는 것을 보십시오. 그 통치자들이 히스기야에게 이 놀라운 일에 대해 물으러 왔을 때,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를 시험하시려고 히스기야를 홀로 남겨 두셨습니다", 그가 겸손하여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릴 것인지 아니면 교만하여 자신에게 영광을 돌릴 것인지를 보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는 시험에 실패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행하신 후에 여러 번 우리를 시험하여 우리가 스스로 영광을 가지는지, 아니면 겸손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 보려고 하십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역을 독특한 방법으로 축복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증언하거나 글을 써서, 공로가 당신에게 돌아올 수 있도록 합니다. 히스기야가 그랬습니다. 그는 정말 좋은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런 식으로 그의 인생을 마감해야 했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33장 12,13절에서, 우리는 열왕기하에는 기록되지 않은 므낫세에 관한 내용을 읽습니다. 그의 삶이 끝나갈 무렵, 그는 포로로 잡힌 후에 회개했습니다. 그는 환난 중에, 주님께 간구했습니다. 므낫세는 예루살렘에서 50년 동안 그런 끔찍한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는 백성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우상을 숭배했으며, 심지어 자기 자녀들을 불에 제물로 바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회개하고 기도했습니다 - 그리고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의 말을 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에 감동하셔서 그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데려가셨습니다. 그러자 므낫세는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을 알았습니다(33:13). 그는 우상들을 없애고, 여호와의 제단을 쌓고, 화목제를 드리고, 유다 사람들에게 여호와를 섬기라고 명령했습니다.
솔로몬이 그렇게 회개했다면, 분명 성경에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의 경우에는 그러한 기록이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솔로몬이 지옥에 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므낫세는 회개했습니다. 사람은 인생을 어떻게 시작하느냐보다 인생을 어떻게 끝내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36장 21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70년 동안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게 된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율법은, 매 7년마다 그 땅에 안식년을 주고 그 해에는 아무것도 뿌리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출 23:10,11). 그러나 그들은 탐심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하나님이 경고하신 대로 형벌을 받았습니다(레 26:34,43). 490년 동안 그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그 땅에 안식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70년 동안 포로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정확하며 조만간 우리를 따라잡습니다.
돌아온 남은 자들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이 칠십 년의 포로 생활을 마치고 돌아올 당시에 살았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이스라엘의 두 가지 여행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여행은 이집트에서 가나안까지였으며, 이는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구원을 상징합니다 - 그리스도(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구원 받고, 물에서 세례를 받고(홍해를 들어갔다 나옴),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옴), 육신의 정욕(가나안 거인족)을 이김. 두 번째 여행은 포로 생활을 마치고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이동하는 여행이었습니다. 교회를 세우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두 번째는, 죽은 종교 체계(바벨론)에서 나와 그리스도의 몸(예루살렘)을 세우는 것을 상징합니다. 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이동하는 것에 대해 말했습니다. 바벨론은 신약에서 영적인 의미를 가지며, 주님을 따른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그분을 따르지 않는 타락하고 창녀인 기독교계를 가리킵니다(계 17장). 예루살렘(계 21장)은 참된 교회, 곧 그리스도의 신부를 가리킵니다.
스룹바벨 아래에서의 귀환
에스라는 구약의 두 번째 이동에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사람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책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 스룹바벨의 하의 귀환(1,2장), 성전 건축(3~6장), 그 자신(에스라)의 지도력 하의 개혁(7~10장)을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서 고레스 왕을 감동시켜 성전 건축을 명령하셨다는 것을 읽습니다. 고레스는 말했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나에게 주셨고, 예루살렘에 그분을 위한 성전을 건축하라고 나에게 명하셨다"(스 1:2). 이방 왕을 감동시켜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도록 명령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보십시오!
고레스는 이어서 말했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라." (스 1:3). 그는 어떤 이스라엘 사람도 강제로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 우리는 자유롭게 죽은 종교 체제에 머물 수도 있고, 그곳에서 예루살렘으로 이동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고레스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자원하는 예물로 그(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자들)를 지원하게 하라"(1:4)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예루살렘을 건설하기 위해 우리가 가장 먼저 인식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주권자이시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그날 불경건한 통치자들을 움직이실 수 있었고, 심지어 오늘날에도 누구든지 그분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누구든지 움직이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믿지 않으면, 예루살렘을 건축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인식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바벨론을 떠나도록 강요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떠나도록 초대받았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렇게 하도록 강요 받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즐겨 내는 사람만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들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보는 세 번째 사실은, 개인적으로 가지 않더라도 "자원하는 헌금"으로 하나님의 일을 지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1:4). 우리가 개인적으로 예루살렘을 건축할 수 없더라도, 우리는 자발적인 헌금으로 그 건축을 지원할 수 있습니다.
그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하나님의 백성을 그토록 많이 지원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대답은 아마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고레스가 태어나기 거의 200년 전에 선지자 이사야는 그의 이름을 언급하며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고레스를 가리켜 "그는 나의 목자"라고 말할 때, 그는 반드시 내 말대로 행할 것이다. 그는예루살렘을재건하고성전을회복하라고명령할것이다.' 주님께서 그분의 기름 부음 받은 자, 고레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며 그의 오른손에 힘을 주실 것입니다. 그 앞에서 강력한 왕들은 두려움으로 마비 될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고레스야, 내가 너보다 먼저 가서, 청동 문을 부수고 철창을 끊어 버리겠다. 내가 이렇게 해서, 내가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이라는 것을 네가 알게 하리라. 내가 왜 이 일을 위해 너를 불렀느냐? 그것은 내가 택한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다. 네가 나를 알지 못할 때 나는 너의 이름을 불렀다. 동쪽에서부터 서쪽까지의 온 세상이 다른 신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너를 준비했다'" (사 44:28-45:6).
당시 아직 살아 있던 다니엘은 이 성경 구절을 고레스에게 보여 주었을 것입니다 - 그리고 고레스는 200년 전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 이름을 두고 예언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압도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그를 겸손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행했습니다 - 유대 민족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하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2장에서, 우리는 바벨론을 떠난 사람들의 명단을 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바벨론을 떠난 각 사람을 기록하십니다. 그들의 지도자는 스룹바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바벨론에서 인도할 사람이 항상 필요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부패한 기독교계를 떠나 살아계신 하나님의 참된 교회로 들어온 모든 사람의 이름을 기록해 두십니다.
물론 바벨론은 예루살렘보다 살기에 더 편안한 곳입니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에 가는 것은 어렵고, 위험하며 비용이 많이 들었습니다.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왜 움직여야 하는가? 우리는 이곳 바벨론에서 아주 편안하다." 오늘날 불경건한 체제에 있는 많은 신자들도 같은 말을 합니다. 그들은 바벨론에서 더 큰 영예를 누리며 "결혼"하고 "장사(장례식)"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온 마음을 다한 사람들은 그들의 시대에 하나님께서 움직이시는 곳에 있고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있는 곳에 있기를 원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안락이나 명예를 구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체질(선별)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2장 40절을 보면, 레위인 74명만이 예루살렘으로 떠났다고 나옵니다. 숫자가 왜 그렇게 작았나요? 레위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재산도 소유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십일조로 지원을 받아야 했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매우 가난한 것을 보고, 그 가난한 사람들은 십일조를 전혀 바칠 수 없을 것이며, 바친다고 해도 적은 금액이 될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레위 사람들은 바벨론에 머물기로 결정했습니다. 그곳은 그들에게 더 안전했습니다. 오직 74명만이,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보실 것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같은 이야기입니다. 설교자들은 여전히 멋진 선물을 줄 수 있는 부자들이 있는 곳으로 갑니다!
2장 59~63장에서, 우리는 자신이 진정한 이스라엘 사람임을 증명하기 위해 아버지의 집안에 관한 증거를 제시할 수 없었던 어떤 사람들에 대해 읽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자신의 구원에 대해 확신이 없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제사장 지파 출신이라고 주장하는 일부 사람들은 조상 기록에서 그들의 이름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우림과 둠밈으로) 그들이 과연 제사장인지 하나님의 의견을 밝힐 수 있는 제사장이 올 때까지 모든 제사장 직무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지도자들이 예루살렘을 건설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조상에 대해 매우 엄격한 것을 봅니다. 우리 역시 교회의 지도자가 될 사람들에게 순결의 높은 기준을 요구하는 데 특히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교회의 일원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구원 경험을 확신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 교회에 합류하는 데에 대한 기준이 점점 낮아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 인상적인 통계와 숫자에 대한 열풍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올 수 있도록 허용되기 전에, 정말로 개종되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이 바리새인들에게 세례를 베풀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따라야 할 좋은 예입니다.
성전 건축
3장부터 6장까지에서 읽은 내용과 사도행전의 초기 교회 시대에 일어난 일과 흥미로운 유사점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3장에서 성전 건축의 시작에 대해 읽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는 큰 연합의 영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여러 성읍에 있었습니다. 백성이 예루살렘에 한 사람처럼 모였습니다(3:1). 마치 다락방에서 한 사람처럼 성령을 기다린 120인과 같습니다.
"예수아와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스룹바벨과 그의 형제들이 일어나 건축하였느니라" (3:2). 그것은 한 사람의 쇼(a one man show)가 아닌 한 몸 사역(a body-ministry)이었습니다.
그들은 먼저 제단을 쌓고 번제를 드렸습니다(3:2).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십자가의 메시지가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규례대로 '초막절'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했습니다. 그리고 건축자들이 성전의 기초를 놓을 때 찬양의 시간이 있었습니다(3:10). 제사장들이 일어서서 나팔과 심벌즈를 들고, 주님을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참된 교회)에서 찾아야 할 또 다른 것, 즉 찬양과 예배의 영입니다.
그 후에는 "큰 소리로 통곡"하는 시간이 이어졌습니다(3:12). 우리의 죄를 애도하는 것도 교회를 세우는 데 꼭 필요한 부분입니다.
4:1: 그 다음으로 일어난 일은 반대였습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사역은 적 없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 적들은 자기들 역시 성전 건축을 돕고 싶어 하는 척했습니다. 그러나 스룹바벨은, "우리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는 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4:3)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불신자들과 협력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명목상 기독교인일지라도 말입니다. 그들은 "우리도 당신의 하나님을 섬깁니다. 우리도 기독교인이에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니요"라고 말합니다.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같이 단호한 태도를 취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한 사람들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너희가 먼저 회개해야 한다"며 바리새인들에게 세례 주기를 거부한 세례 요한과 같은 사람들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교회에 세례 요한, 스룹바벨, 예수아와 같은 사람들이 더 많이 필요합니다.
그러자 이 사람들이 일어나, 그 땅 사람들과 합세하여 그들을 겁주려고 했습니다(4:4). 종교적인 반대와 두려움, 괴롭힘이 있었습니다. 그들(원수)은 그들(스룹바벨과 예수아)의 계획을 좌절시키기 위해 조언자들을 고용했습니다(4:5) - 이 모든 것은 단지 성전을 건축하기를 원하는 이 소박한 사람들에 대한 반대였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집을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세우려고 하면, 많은 반대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애굽에서 나와서 개인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면, 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의 이 두 번째 이동으로 더 나아간다면, 사탄으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권자이시기 때문에, 당신의 삶은 흥미진진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반대를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왕들과 그들의 법령을 모두 이기십니다. 적들은 왕에게 요청을 보냈고, 왕은 조서를 내렸습니다(4:17-22). 그들은 왕의 명령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서 공사를 중단했습니다. 왕은 거짓 보고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섬기려고 할 때 거짓 보고가 많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종교인, 세속 당국, 경찰 및 기타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등을 돌릴 것입니다. 그리하여 작업이 중단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나요? 그분은 그 왕을 죽이고 다른 왕을 세우셨습니다 - 다리오(4:24)!
4장 24절을 보면,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지 16년이 지나도, 성전 기초를 놓지 못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성전 건축에 소홀한 태도를 갖고 모두 자기 집을 짓느라 바빴기 때문입니다(학 1:1~4 참조). 그러자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최우선에 두고 그분의 성전을 건축하라고 촉구했습니다(5:1,2).
그러나 다시 한번 적들이 선동하여 "누가 이 성전을 지으라고 너희에게 말하였느냐?"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이 놀라운 구절을 읽게 됩니다, "하나님의 눈이 그들(유대 장로들)을 향하시므로, 그들(적)이 그들(유대 장로들)을 능히 막지 못하였느니라" (5절). 적들은 다리오 왕에게 보고를 보냈고, 그래서 다리오는 고레스가 내린 칙령을 발견하여 또 다른 칙령을 내렸습니다. 여기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주목하십시오. 다리오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 일을 오직 하나님의 집에 맡겨라. 나는 이 집을 짓는 데 도움이 되도록, 너희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 한다는 법령을 발표한다. 그 비용은 전액 왕실 금고에서 지불되어야 한다 . 소나 숫양이나 밀이나 소금 등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주어야 한다" (6:7,8).
다리오의 조언자는 누구였습니까? 다니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종들을 돕기 위해 어디서나 그분의 백성을 갖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대자들이 이곳에서 단지 선을 이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이 이전에 가졌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정부는 건축 비용 전체를 지불했습니다!
성전은 마침내 모두가 함께 일하는 한 몸 사역을 통해 완성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일이 그렇듯이, 이 일은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그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건물을 완성하였습니다. 교회 건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다음 그들은 유월절을 기념하고 기뻐했습니다 -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기쁘게 하시고; 왕의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의 전의 일을 격려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스 6:22).
그 후, 7장까지는 60년의 공백이 있습니다. 에스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바로 이 기간입니다.
에스라의 귀환과 개혁
7장부터 우리는 포로들의 귀환과 에스라 아래에서의 개혁에 대해 읽습니다. 첫 번째 그룹 포로들의 지도자는 학개, 스가랴, 스룹바벨, 예수아였습니다. 에스라는 두 번째 그룹과 함께 왔습니다. 하나님의 종 한 사람이 죽으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종을 일으키십니다. 세대를 거쳐, 그분의 백성을 앞으로 이끌 사람들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에스라는 교사였습니다 - 모세의 율법에 능숙한 서기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한 사람 - 7:6. 우리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study) 실천하고(practice) 가르치는(teach) 일에 마음을 쏟았다는 것을 읽습니다(7:10). 우리가 따라야 할 참으로 훌륭한 모범입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말씀을 연구하고, 실천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을 필요로 하십니다 - 그 순서대로!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용하시기를 원한다면 기억하십시오.
에스라가 바벨론에 머물렀더라면 우리는 그의 이름을 결코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늘은 바벨론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이주하는 자를 인정합니다. 이 책에서 우리는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는 내용을 여섯 번이나 읽습니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이동하는 것은 항상 한 단계 더 올라가는 일이며 "하나님의 선한 손이 사람 위에 임한" 결과입니다(7:9). 바벨론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간 사람들이 예수님의 열두 사도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자녀와 후손 모두는 오늘날 우리가 내리는 결정에 영향을 받습니다.
당시, 페르시아 왕은, 에스더의 후손이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을 더 쉽게 만들었습니다.
7장 12절에서 우리는 흥미로운 칭호의 대조적인 내용을 읽습니다: 만왕의 왕 아닥사스다와 하늘 하나님의 율법 학자 에스라!! 우리 모두는 어떤 칭호가 더 큰지 알고 있습니다.
7장 18절은 왕이 진실한(integrity) 사람으로서의 에스라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는 엄청난 확신을 갖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 나머지 은과 금은 너와 너의 형제가 좋게 여기는 일에, 너희 하나님의 뜻을 따라 써라." 모든 하나님의 종은 이방인도 그를 신뢰할 수 있을 만큼 재정적으로 정직한(integrity)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그런 사람을 찾는 것은 얼마나 드문 일입니까?
왕이 유대인들을 위해 행한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에스라는 모든 영광을 왕이 아닌 하나님께 돌리려고 주의합니다. 왕의 마음에 그런 친절한 생각을 넣어주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을 바벨론에서 인도할 수 있는 힘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똑같이 주의합니다(7:27,28).
8장 1절에서, 우리는 바벨론에서 나온 또 다른 사람들의 명단을 읽습니다. 이번에 우리는 레위인의 수가 단지 38명으로 감소했음을 주목합니다(8:18,19).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을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8장 21절에서, 우리는 에스라가 금식을 선포한 것을 읽습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으로의 안전한 여정을 위해 하나님을 겸손히 의지한다는 표현이었습니다. 에스라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왕 앞에서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그의 능력과 진노를 내리시느니라"(8:22)라고 담대하게 고백한 후에 왕에게 그들을 보호할 군사를 구하는 것을 부끄러워했습니다.
8장 24~30장에서, 우리는 에스라가 예루살렘으로 운반되던 은과 금을 다루는 일에서 지혜를 발휘한 것을 봅니다. 그는 제사장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신성한 보증금(공탁금)입니다. 조심하십시오. 여러분이 예루살렘에 이르거든 그 모든 것을 그 곳의 지도자들에게, 정확하게 전달하십시오." 이것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몸을 세울 때 돈을 사용하는 데에 있어 신실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에스라서에서 "우리 하나님의 선한 손이 우리 위에 있도다"라는 표현을 여러 번 발견하는데, 이는 그들이 약하고 무력한 포로로서 모든 일에 대해 하나님의 도움에 얼마나 의존했는지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일은 오늘날에도 이렇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에스라와 그의 포로 무리들을 예루살렘으로 인도할 구름기둥이나 불기둥도 없었고 오직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임재만이 있었습니다.
9장과 10장에서는, 에스라가 이스라엘의 혼합(이방 백성들과의) 결혼 문제를 다루어야 했던 이야기를 읽습니다. 에스라가 이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한 일은 하나님의 백성의 실패를 슬퍼하는 것이었습니다(9:3). 그런 다음 그는 자신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떨고 있는 몇몇 사람들을 모아 함께 기도회를 가졌으며, 그곳에서 그들은 남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대신 그들 자신의 죄를 자백했습니다(9:5-15). 에스라는 기도하고,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울며 엎드렸습니다(10:1). "그는 포로들의 범죄를 슬퍼하여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10:6). 그는 올바른 사람이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학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동료 유대인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울며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에도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주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있어야 하고, 우리의 죄를 슬퍼하는 소리가 있어야 합니다.
에스라와 그의 동료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진심으로 염려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모였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왜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비를 그치지 않으셨는지 궁금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성전 앞 광장에 앉아 있는 동안 내내 비가 많이 내렸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10:9). 아마도 그것은 누가 온 마음을 다한 사람이고 누가 그렇지 않은지 하나님께서 시험하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에스라는 백성들에게 보상하고, 일을 바로잡고, 죄를 자백하도록 가르쳤습니다(10:11). 소수의 사람들이 그를 반대했지만 대다수는 그를 지지했습니다. 다시 한번 타협하는 자들의 목록이 있습니다(10:18-44).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타협하는 자들의 명단을 기록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에스라서는 이렇게 끝납니다.
예루살렘에서 일을 완성하다
구약성경에는 이스라엘의 두 가지 이동이 아주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1. 애굽에서 가나안으로의 이동은 그리스도의 피와 물 세례와 성령 세례를 통해, 죄에서 벗어나고, 사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세상과 율법주의에서 벗어나, 죄를 이기는 삶과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동행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개인적인 삶을 상징합니다.
2.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의 이동은 거짓 기독교 집단을 떠나 그리스도의 몸의 참된 표현으로 다른 사람들과 교제속으로 들어가는 우리의 단체적인 삶을 상징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바벨론이 기독교 집단에 있는 특정 교단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일단 그 죽은 교단을 떠나면 바벨론도 떠난다고 상상합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바벨론은 상업 시스템입니다. 모든 상업 시스템의 원칙은 자신의 이익을 얻는 것입니다. 사람이 "기독교를 통한 개인적 이득"의 원칙(주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함으로써 그가 얻을 수 있는 것 , 교회나 조직에 가입함으로써 그가 얻을 수 있는 것 등)에 따라 생활하는 한, 그는 바벨론의 원칙에 의해 동기를 부여받습니다. 육신을 따라 살며 자신의 것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은, 비록 세상에서 가장 좋은 교단에 속해 있다 할지라도 여전히 바벨론의 일부입니다. 바벨론의 영은 주로 교단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주로 사람의 내면에서 발견됩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희생의 도시입니다. 그 영(정신)은 바벨론의 사업 영(정신)과 정반대입니다. 그것은 다윗이 "내가 값을 치르지 아니한 것으로는 주님께 드리지 않겠습니다"(삼하 24:24)라고 한 말에서 발견되는 영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즉 "하늘의 예루살렘"을 건설하려면, 자신의 것을 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없는 영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영을 가진 사람은 심지어 죽은 교단에서도 때때로 발견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의 영 역시 주로 내적인 것이지, 외적인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고 한다면, 이 희생의 원리를 이해한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이전 시스템과 같은, 그저 또 다른 하나의 시스템을 구축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분리된 교회들' 중 다수가 행한 일이며, 지금 그들은 주류 교단들과 마찬가지로 죽었습니다(또는 더 많이 죽었습니다).
예루살렘의 부서진 성벽과 불탄 성문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이동시키는 일에 사용하신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스룹바벨, 여호수아, 학개, 스가랴의 약 70년 후에 살았습니다. 성전은 건축되었고 에스라는 약 13년 전에 이미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학개와 스가랴와 스룹바벨에게 주신 사명은 성전을 건축하는 것이었습니다. 에스라의 사명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의 임무는 예루살렘 성벽을 건설하고, 그 도시의 행정을 조직하고, 사람들을 그들이 버린 언약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개혁가였습니다. 영적으로, 그는 비전과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실질적으로, 그는 조직자이자 동기를 부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지금과 같은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의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모든 특성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당시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인 메대-페르시아 제국의 수도인 수산에 살고 있었고, 그 왕 아닥사스다의 개인 참모였습니다.
1장 1~3절: 하나니와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왔을 때, 느헤미야는 돌아간 포로들의 형편과 예루살렘의 형편을 알아볼 만큼 염려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의 주요 특징입니다 - 그는 사람을 염려하고, 그런 다음 하나님께서 그에게 사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섬기고 싶다면,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부터 시작하십시오. 하나님은 남에게 관심없는 사람을 결코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니에게, "거기 일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니는 그에게 성벽이 무너지고 성문이 불탔다고 말했습니다.
이사야서 60장 18절에서, 우리는 예루살렘 성벽은 구원을 상징하고 성문은 찬송을 상징한다는 것을 읽습니다.
성벽은 세상과의 분리와 안전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교회가 세상과 분리되기를 원하십니다. 담이 높아져야, 세속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이 교회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의 일부가 되려면, 제자가 되어야 하며,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지난 20세기 동안, 설교자들은 예수님과 사도들이 세운 기준을 낮추었고, 이제는 성벽이 너무 낮아 누구든지 뛰어 넘어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담을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요 10:1). 들어갈 수 있는 길이 하나 있습니다 - 문을 통해서입니다 -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그 문은 매우 좁습니다. 그러나 설교자들은 기준을 낮추었고, 이제 분리의 벽이 매우 낮아졌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벽이 완전히 무너져, 교회와 세상 사이에 차이가 없게 되었습니다. 사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소위 "신자들"이라고 불리는 많은 사람들보다 훨씬 더 나은 행동을 합니다. 벽이 무너진 교회가 바로 그런 곳입니다.
성문은 교회에서 항상 발견되어야 하는 승리의 찬양의 영을 상징합니다. 성문은 또한 그 도시의 장로들이 앉는 곳, 곧 권위를 행사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승리하는 찬양의 영을 잃어버렸고 영적인 권위를 가진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느헤미야는 무너진 성벽과 불탄 성문을 걱정했습니다. 그는 그 소식을 듣고, 여러 날 동안 울고 애통해하며,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 하나님의 교회의 형편을 볼 때 염려와 부담이 있는 사람입니다.
당신 자신의 슬픔 때문이 아니라, 오늘날 인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그렇게 비참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당신이 마지막으로 애도한 때는 언제였습니까? 오늘날 인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예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을 염려하여 마지막으로 금식하고 기도한 것이 언제였습니까? 그러나 우리 마음속에 염려가 없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남자와 여자가 될 수 없습니다.
느헤미야는 옛 언약 아래에서 살았습니다. 그에게는 우리처럼 성령이 그 안에 거하시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오늘날 우리가 풍부하게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이 완전한 성경도, 교회 교제도, 책도, 테이프도, 연합학회도 없었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너무나 큰 부담이 있었습니다. 그는 '풀타임(전임) 사역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세속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고 주님을 섬겼습니다. 느헤미야는 전적으로 이타적이고 오직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만을 염려한 사람의 훌륭한 예입니다. 우리가 그의 본을 따르라는 도전을 받을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에서도 무언가를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이동하는 일은 다니엘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에서 금식하며 기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이동은 여호수아, 스룹바벨, 학개, 스가랴를 거쳐 계속되었습니다. 그들 모두는 예루살렘 건축을 위한 부담을 갖고 있었습니다. 금식과 기도는 바벨론에서 나오는 이 이동과 관련된 책들에 자주 언급됩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도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우리 중 일부는 간절히 기도에 대한 응답이 필요할 때 금식하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 가족 구성원의 치유를 위해, 또는 직업을 구하거나 결혼 파트너를 찾기 위해. 좋습니다. 그러나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자신을 위해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금식하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도록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우리도 이를 위해 금식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느헤미야의 임무 중 하나는 왕이 마시는 포도주를 맛보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왕들은 적들이 자신들을 독살하려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왕들은 포도주를 받기 전에, 그것을 먼저 맛을 볼 사람이 있었습니다. 분명히, 그러한 사람은 절대적으로 충성스럽고 부패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 이방인 왕이 이 중요한 임무를 위해, 자신의 부하 중 한 사람이 아닌, 유대인을 선택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이를 통해 느헤미야가 청렴한 사람으로서 가졌던 어떤 표시를조금이나마 알 수 있습니다. 왕은 100% 느헤미야를 의지했고, 그 결과 느헤미야는 당시 세계 최고의 군주의 궁정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느헤미야 사역의 시작
느헤미야는 이전에 왕 앞에서 슬퍼한 적이 없었습니다(2:1). 그는 우울한 성격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왕은 항상 그가 행복해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지금 그(느헤미야)가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나 가족에 대해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이 이렇게 혼란에 빠졌기 때문에 슬펐습니다. 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슬픈 모습을 보고 슬퍼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얼마나 좋을까요!
왕이 말했습니다, "네 얼굴이 너무 슬퍼 보인다! 이것은 마음의 슬픔으로만 보인다." 그리고 느헤미야는 두려워했습니다(2:2). 그 당시 왕의 생각을 산란하게 하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나는 느헤미야가 두려웠다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모습을 좋아합니다. 두려움은 우리 삶에서 완전히 제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두려움을 느낄것입니다.그러나결코두려움에따라행동해서는안됩니다 . 바울은 그에게 두려움이 있다고 말했습니다(고후 7:5). 그러나 그는 결코 그러한 두려움에 따라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위험한 곳에 살고 있거나, 당신의 생명이 위협받을 수 있는 곳에서 주님을 섬기려고 한다면 - 오늘날 인도에는 그런 곳이 많습니다 - 당신은 자연스럽게 두려움을 느낄 것입니다. 그것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은 인간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 두려움에 근거하여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조심하고 신중하게 행동할 수 있지만, 두려움을 가지고 행동할 수는 없습니다. 두려움은 믿음의 반대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면서 행동하는 것은 불신앙 속에서 행동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신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느헤미야는 두려웠지만, 그래도 왕에게 "내 조상들의 묘실 있는 성읍이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으니, 내 얼굴에 수심이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왕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빠르고 짧은 기도(이러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를 하고, "왕께서 좋게 여기신다면, 나를 유다에 보내어 그 성을 재건하게 하소서"라고 대답했습니다. 왕이 "네가 얼마나 떠나 있을 예정이냐?"라고 말했습니다. 시간이 정해졌고 그는 갔습니다(2:3-6).
그는 예루살렘에 가서 아무데도 가지 않고 사흘 동안 혼자 머물렀습니다 - 아마도 금식하며 기도했을 것입니다(2:11). 그리고나서 그는 밤에 일어나 몇 사람을 데리고 갔습니다. 그는 자신을 방해하는 원수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생각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2:10). 그는 하나님의 일에 대한 부담이 없는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몇 사람만 데리고 가서 성벽과 성문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에스라 시대와 마찬가지로, 반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아야 한다고 염려하는 순간, 즉시 반대가 시작됩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일어나는 그러한 움직임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많은 사람들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해 살고 그분을 섬기려고 노력하지 않는 한 가지 이유입니다. 그들은 마귀의 반대를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당신이 하나님의 뜻안에 있다는 것을 아는 한 가지 방법은 마귀와 자주 대면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당신을 내버려둔다면, 당신은 완전히 하나님의 뜻 밖에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제가 아는 한, 내가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표시 중 하나는 마귀가 나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선동하여 나를 방해할 온갖 상황을 조성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를 통틀어, 이것은 성실하게 주님을 섬기려고 노력한 모든 사람의 경험이었습니다. 산발랏과 도비야는 유대인들을 조롱하고 업신여기며 "너희가 무슨 짓을 하느냐? 너희가 왕을 거역하는도다"(2:19)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형통을 주실 것이다. 우리는 일어나 건축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기억되는 것도 없다. 우리는 너희와 함께 일하지 않는다"(2:20)
느헤미야는 훌륭한 조직가이자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직접 일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와 함께 즐겁게 일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인도에서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지도자의 유형입니다 - 금식하며 기도하는 사람, 하나님의 이름을 염려하는 사람, 주님을 위해 일하도록 사람들을 조직하고 동기를 부여하는 데 능숙한 사람, 그리고 자신의 손으로 직접 일할 줄 아는 사람.
3장에서 우리는 느헤미야가 그 일을 매우 신속하게 조직했음을 봅니다. 그 사실은 여기서 언급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느헤미야는 너무 겸손해서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임무가 할당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대제사장과 같은 지도자들에게도 해야 할 일이 주어졌습니다(3:1). 대제사장은 그 도시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앉아서 작업을 감독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안 돼요. 그는 또한 도시 재건을 돕기 위해 벽돌과 회반죽을 직접 손으로 가져와야 했습니다. 느헤미야가 그러한 지도자들 역시 자신의 손으로 일하게 할 수 있었던 방법을 보는 것은 놀랍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느헤미야의 위대함을 봅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육체 노동을 하기에는 너무 큰 사람은 없다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그들 모두는 형제자매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에서도 우리에게 필요한 영(spirit, 정신)입니다.
이 장에 자주 나오는 표현인 "그 다음은"(3:2, 4, 7, 8)에 주목하십시오. 즉, 성벽은 어디에도 틈이 없이 쌓여졌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모두 다른 유형의 사람들이었지만, 벽에 한 치의 틈도 생기지 않도록 모두 함께 일하고 서로 협력했습니다. 여자들도 손으로 일했습니다(3:12). 살룸은 예루살렘의 고위 관리였습니다. 그의 딸들도 벽돌과 회반죽으로 일하면서 손이 더러워졌습니다.
적으로부터의 반대
4장에서는, 원수 산발랏이 성벽이 올라가는 것을 보고 분노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 성벽은 산발랏에게 개인적으로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괴로움을 느꼈습니까? 그는 사탄의 부추김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같은 것을 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어떤 영역에서 주님을 위한 일을 할 때,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곳의 많은 사람들은 우리를 강력하게 반대합니다! 우리는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우리는 그들 모두에게 선한 일을 하고 있으며 사회에 축복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화를 내는것일까요? 그러한 사람들의 반대와 분노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이 사탄의 부추김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인도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는 기독교인들에게 분노합니까?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그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탄이 어떤 식으로든 그리스도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는 사람을 미워하기 때문에, 화를 냅니다. 우리는 성경 전체에서 이 원칙을 발견합니다. 느헤미야 시대에는, 유대인의 적들은 분노하여 유대인들에게 정부 차원의 압력을 가하려고 했습니다. 오늘날 인도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산발랏은 부자들을 설득하여 유대인들의 사역을 반대하게 하려고 했고, 도비야는 그 사역을 비웃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무엇을 했나요? 그는 그들과 논쟁이나 토론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우리는 멸시를 받습니다. 이 사람들은 우리를 반대합니다. 우리는 성벽만 쌓고 있는데 이 사람들이 우리를 대적하고 있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4절). 그리고 성벽은 계속 건축되었습니다, "백성이 마음을 다해 일하였기" 때문입니다(4:6). 그 후 산발랏과 도비야는 예루살렘을 쳐서 그 도시를 소란하게 하려고 음모를 꾸몄습니다(7,8절). 그러나, 느헤미야는, 기도하며 밤낮으로 파수꾼을 세워 대적들을 막았습니다(9절). 즉, 그들은 망을 보면서 기도도 했습니다. 그들은 깨어서 대적을 경계하고, 기도도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 시대에도 우리가 일해야 하는 방식입니다.
기독교 사역에서 우리가 직면하는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외부에서 우리를 공격하는 원수들뿐만 아니라, 내부에서도 우리를 원망하고 낙담시키는 사람들과 마주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제자들이 더 많아졌을 때, 헬라인 과부들 가운데서 "우리는 히브리 과부들만큼 음식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편애가 좀 있습니다"(행 6:1)라는 불평이 나왔습니다. 진영 내부에서 들려오는 불평도 느헤미야가 역시 처리해야 했던 문제였습니다. 유다 사람들은 "여기 쓰레기가 너무 많아서 다 처리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10절). 그리고 느헤미야는 그 모든 불평과 낙담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들(원수) 근처에 사는 유대인들은 몹시 두려워하며 열 번이나 "그들이 사방에서 너희를 치러오리니, 너희는 조심하라"(12절)며 다른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토로했습니다. 교회에서도, 우리 마음에 두려움과 낙담을 심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크고 두려우신 여호와를 기억하고, 여러분의 형제와 여러분의 아들딸을 위하여 싸우십시오"(14절)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면, 다른 것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사 8:12,13 - Living).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는 일을 지지하신다고 정말로 믿는다면, 누군가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5장 1~13절에서, 우리는 느헤미야가 그들 가운데 있는 가난한 자들과 억압받는 자들과 빚진 자들을 크게 보살피는 것을 봅니다. 그는 채권자들과 이야기하여 그들 모두를 빚에서 면제해 주었습니다. 18절에서, 우리는 느헤미야가 지방 총독으로서, 받을 권리가 있는 돈을 한 푼도 받지 않은 놀라운 본을 봅니다 - 그는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매일 150명의 유대인과 다른 나라들에서 온 많은 사람들을 그의 식탁에서 먹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는 노아와 바울처럼 자비를 들여 하나님을 섬기는 환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성벽을 쌓는 데만 가능한 모든 돈을 사용했습니다. 여기, 엄청난 희생을 하며 살면서, 하나님의 일을 위해 받은 돈을 자신을 위해 전혀 사용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돈에 충성된 하나님의 종을 보시는 곳은 어디든지,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시는 데에는 한계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많은 종들을 버리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형제들을 재정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6장: 여기서 우리는 성벽이 어떤 틈도 없이 완성되었음을 분명히 읽습니다. 이제 산발랏은 또 다른 전략을 시도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오노 평지에서 함께 토론하자"(6:2)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속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들이 자신에게 해를 끼칠 것이라는 것을 그의 영으로 느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종들을 돌보시고 보호하십니다. 느헤미야는 그들에게, 비슷한 상황에서 우리도 대답해야 할, 놀라운 대답을 했습니다: "내가 이제 큰 일을 행하매, 내가 그만 두고 너희에게 내려갈 수 없느니라"(6: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해야 할 일을 주셨을 때, 우리는 그 일을 고수해야 하며, 쓸데없는 토론으로 우리의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태도로 느헤미야는 단 52일 만에 성벽을 완공했습니다(15절). 첫 번째 포로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때부터 90년 동안, 이 성벽은 건축되지 않았었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찾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 한 사람이 발견되었을 때, 그는 두 달도 채 안 되어 그 일을 해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이루어지기를 원하시는 많은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수년이 지났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기다리고 계십니까? 그분은 부담(burden)을 갖고, 반대에도 낙담하지 않으며, 자신의 비용으로 그 일을 해낼 사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느헤미야도 유대인의 적인, 도비야와 결혼 관계에 있던 유다 귀족들로부터 문제를 겪었습니다. 느헤미야는 타협하는 유다 통치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혼자서 나아갔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사명을 완수했습니다.
부흥(Revival)
8장과 9장은 경건한 두 사람,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온 나라에 끼친 영향력을 통해 하나님께서 유대인들 가운데 가져오신 엄청난 부흥을 보여줍니다.
8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에스라를 통해 행하신 일을 읽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고, 모든 남자와 여자 그리고 이해할 수 있는 나이 이상의 아이들을 모았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그들을 위해 6시간 동안 성경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모든 백성이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8:3).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간으로 모임을 시작했습니다(6절). 그리고 나서 에스라는 자신이 읽은 말씀의 모든 의미를 백성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애썼습니다(8절). 분명히 에스라는 그들 모두에게 그 모든 것을 매우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도록 말씀을 직접 연구하는 데 수개월, 수년을 보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때를 위하여 그를 은밀히 예비하셨습니다. 부흥이 일어났고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 때문에 울기 시작했습니다(9절). 그런 다음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좋은 것들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라는 권고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 될 것이라"(8:10). 사람들은 나가서 그 권고에 순종했습니다. 다음 날 에스라는 지도자들을 위한 성경 공부를 했습니다(13절).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매년 일곱째 달에 "초막절"을 지키라고 명령한 것을 보고, 즉시 그 절기에 순종했습니다. 이 절기는 약 900년 만에 처음으로 지키는 것이었는데, 이는 여호수아 때부터 이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14-17절).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조차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명령에 순종하도록 하지 못했습니다. 에스라는 그 후 7일 동안 계속해서 백성들을 위한 성경 공부를 했습니다(18절).
9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느헤미야를 통해 행하신 일을 읽습니다. 이 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식하고,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이방인과 구별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1,2절). 그런 다음 그들은 3시간의 성경 공부 시간과 3시간 동안의 주님을 찬양하고 죄를 고백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다시 한 번 부흥을 맞이한 것입니다(3절). 그러자 레위 사람들이 일어나 큰 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4절). 6절부터 31절까지는, 성경 전체에서 가장 긴 기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 다음 레위인들은 아브라함 시대부터 이스라엘의 역사와 광야 40년 동안의 방황, 사사 시대와 왕 시대 동안의 실패를 되새기며 하나님께서 보내신 모든 심판이 공의롭고 옳았음을 인정했습니다. 그들은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서 문서에 서명했는데, 느헤미야가 먼저 서명했습니다(10:1).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두 사람,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영향력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들의 공동 사역은 두 장로가 이끄는 새 언약 교회의 기능과 거의 똑같았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따라야 할 참으로 훌륭한 모범입니다.
10장에는 이러한 회개의 결과로 그들이 내린 몇 가지 결정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의 생활은 여전히 인기가 없었습니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곳에 와서 살기를 자원했습니다(11:1,2).
12장에서는, 느헤미야가 성문을 지키는 사람과 찬양 시간을 인도할 사람들을 어떻게 조직했는지 읽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금식, 기도, 죄의 고백, 많은 시간의 성경 공부, 긴 모임들, 하나님을 많이 찬양하는 것에 대한 지속적인 강조를 주목하십시오.
13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집을 정결하게 하려는 느헤미야의 열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성전에 들어가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깨끗하게 하셨을 때 하신 것과 비슷한 일을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사람들이, 회심하지 않은 친척들이 성전에 머물도록 허용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제사장 엘리아십은 도비야와 관계가 있었으므로(13:4), 그를 위해 큰 방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느헤미야는 그들을 모두 쫓아냈습니다. 그는 "도비야의 가재도구를 다 내버리고 하나님의 전을 깨끗하게 했습니다"(13:8). 그는 또한 많은 사람들이 안식일에 물건을 팔아 돈을 버는 것을 보았습니다(13:15). 그는 그들을 꾸짖고, 그들에게 경고하였으며, 심지어 무력을 사용하겠다고 위협하였습니다(13:21).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는 또한 유대인 중 일부가 비유대인 여성과 결혼했다는 사실도 발견했습니다. 느헤미야는 "그들을 나무라며, 저주하고, 뺨을 때리고, 머리털과 수염을 뽑고, 다시는 자기 자녀를 이방인과 결혼시키지 않겠다고 맹세하게 하였습니다"(13:25). 이렇게 느헤미야는 어떤 편파성도 없이 제사장직을 깨끗하게 하고, 제사장들에게 직무를 지정했으며, 심지어 제사에 쓸 나무를 준비하는 일까지 세심하게 다루었습니다(13:30,31)!
느헤미야는 친절하고 온유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구하지 않는 용감한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교회에서 하나님의 기준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확고함과 권위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적인 그리스도와 같은 방식으로 강하고 권위 있는 사람을 찾지 못하시면, 하나님의 일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바벨론은 이렇게 세워졌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강력한 지도자를 찾지 못하시면 참된 교회, 즉 예루살렘을 세우실 수 없다는 것을 수년 동안 보아 왔습니다. 나는 또한 많은 지도자들이 강하지 않은 이유가 관대함에 대한 자신의 평판을 염려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그런 행동을 하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겸손하고, 은혜로우며, 온유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고 싶다."
나는 이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신이 당신의 평판에 관심이 있다면, 교회를 세우는 일을 잊어버리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비록 당신의 모든 교리가 옳을지라도, 당신은 바벨론만 건설할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평판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사용하실 수 있었습니다.
눈에 띄지 않는 곳에 계신 하나님
에스더서는 성경에서 '하나님(God)'과 '주(Lord)'라는 단어가 전혀 나오지 않는 유일한 책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책의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습니다 - 보이지 않게 뒤에서 그분의 백성을 지원하고 도우며 일하고 계십니다.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안락한 바벨론과 메대-페르시아(바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서 재건이라는 어려운 임무를 수행한 유대인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위한 증거를 세워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지지하셨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에스더서에 언급된 사건은 에스라서 6장과 7장 사이에 일어났습니다 - 첫 번째 유대인 무리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후였습니다. 에스더서에서,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대가를 치르기를 원하지 않고, 바벨론과 메대-페르시아에서 안락한 삶을 살기를 원했던 유대인들의 이야기를 읽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이 그들과 공개적으로 연관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많은 신자들은 일요일 아침에 주님께 헌신의 노래를 부를 때 감정적으로 감동을 받는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이 매우 헌신적인 사람이라고 상상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거짓되기 때문에, 그러한 신자들은 주님의 일이나 이 땅에 그분의 교회를 건축하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이, 그러한 집회에 나가서 자신을 위해 살고 자신의 것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집에서 읽을 수 있는 선교 잡지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천국에 가기를 고대하며 하나님께 건강과 번영을 구합니다. 그들은 문제에 직면하면, 신속하게 하나님께 달려가 도움을 구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해결되면, 그들은 예전의 생활 방식, 즉 그들 자신을 위해 사는 생활로 돌아갑니다. 그런 신자들은 인생을 떠돌며, 하나님께도 쓸모없고 사람에게도 쓸모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공개적으로 자신과 당신을 연관짓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그분을 위해 완전히 팔려야 합니다. 당신은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주님, 저는 안락함, 돈, 명예나 쾌락을 위해 살지 않겠습니다. 나는 오직 당신만을 위해 살겠습니다. 나는 당신이 원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들은 에스라와 느헤미야서에서 읽은 유형의 사람들이며 거기에는 그들의 이름 목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에스더서에 오면, 이름의 목록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람들을 인정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여전히 그들을 돌보셨습니다. 하나님은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위에 해가 떠오르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자와 불신자 모두에게 물질적인 축복과 육신의 건강을 베푸십니다. 그래서 페르시아에 머물고 있는 유대인들도 보호해 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직면한 위험(The Danger the Jews Faced)
당시 세계 통치자였던, 아하수에로 왕은, 어느 날 술에 취해 왕비 와스디에게 와서 다른 모든 사람들 앞에 모습을 보이라고 말했습니다(1:10,11). 그녀는 정숙한 여왕이었고 "나는 나가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왕은 그녀에게 화가 나서 자신에게 불순종했다는 이유로 그녀를 거부하고, 다른 왕비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에스더는 예쁜 유대인 소녀였습니다. 그래서 삼촌 모르드개는 그 자리에 지원하도록 권했습니다!
모르드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으며 좋은 자질을 많이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타협자였습니다. 이 시기에 예루살렘 성벽과 성문이 무너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이 모든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35년 후에 와서 바로 그 나라에 살았던 느헤미야는 걱정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느헤미야와 모르드개 사이의 질적인 차이를 봅니다. 모르드개는 자신의 안전을 염려한 반면,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목적을 염려했습니다.
모르드개와 느헤미야는 두 가지 유형의 신자를 대표합니다 - 바벨론 체제에 머무르는 사람과 그 체제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이주하는 사람. 하나님은 바벨론에 있는 자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아니, 그분은 그들을 부양하시고 위험으로부터 보호하십니다. 그러나 당신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원한다면, 바벨론에서 나와 "주여, 내 삶을 향한 당신의 뜻을 보여 주소서"라고 말해야 합니다.
모르드개는 유대인 소녀가 결코 비유대인 남자와 결혼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성경에서 분명히 가르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죄였습니다. 느헤미야는 몇 년 후 이 문제를 다루어야만 했습니다(느 13:25). 그러나 모르드개는 단지 신랑이 왕이었기 때문에, 이 결혼을 권했습니다!
당신은,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이방인 왕과 결혼하도록 부추긴 것에 대해 자신이 뭔가 잘못하고 있다고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니요. 왜일까요? 사람이 한 영역에서 타협하기 시작하면, 너무 익숙해져서 곧 다른 영역에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타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왕이 와스디에게 시킨 일이 옳지 않았고, 모르드개가 행한 일도 옳지 않았지만, 주님은 주권으로 그들의 잘못을 뒤집으셔서, 유대 민족이 학살당하는 것을 구하기 위해 에스더를 왕좌에 앉히셨습니다.
어느 날 모르드개는 왕을 암살하려는 음모가 꾸며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에스더 왕후에게 말했고 에스더는 왕에게 알렸습니다. 이 문제가 조사되었고 왕에 반대하여 음모를 꾀하는 사람들이 붙잡혀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2:23). 그 후에 왕은 하만이라는 사람을 세워 둘째 통치자로 삼았습니다(3:1). 왕의 모든 신하들이 하만에게 절하였습니다(2절). 그러나 모르드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고, 하만에게 절하기를 거부했습니다. 하만은 모르드개가 왜 절하지 않는지 의아해하다가, 그가 유대인이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만은 유대인들에게 몹시 화가 났습니다. 그는 유대 민족 전체를 멸절시키기로 결심하고, 매우 영리하게도 왕이 특정 날짜에 모든 유대인을 죽이라는 명령을 통과시키도록 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왕의 금고에 10억 루피(162억 3천만원)를 지불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는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만은 기원전 5세기의 히틀러였습니다. 그러나 하만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25세기 후에, 히틀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느 누구도 유대인을 진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4000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에게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만도 왔다가 가고 히틀러도 왔다가 가지만 하나님의 목적은 성취될 것입니다.
하만은 아각 사람이었습니다(3:1) - 그는 아말렉 사람 아각 왕의 후손이었습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아말렉 사람을 모두 죽이지 않았습니다(삼상 15장). 아마도 그 당시에 한 명의 아기가 살아남았을 것이며, 이제 600년이 지난 지금 그의 후손이 일어나 유대인들을 괴롭히는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철저하게 다루지 않는 죄는, 몇 년 후에 다시 우리를 괴롭히게 될 것입니다.
모르드개는 이 계획을 듣고, 에스더에게 메시지를 보내, "당신은 이 때를 위하여 왕권을 얻었습니다"(4:14)라고 말했습니다. 모르드개가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왕궁에 살고 있다고 해서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 때 당신이 침묵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유대인들은 다른 데로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도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찾을 수 없습니다 - 심지어 '기도'라는 단어도 찾을 수 없습니다. 에스더도 유대인들에게 자기를 위해 밤낮 3일 동안 금식만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그들에게 기도하라고 말하지 않고, 오직 금식만 하라고 말했습니다(4:16).
그 당시 왕의 권위는 심지어 에스더 왕후도 왕의 초대를 받지 않으면 왕 앞에 나아갈 수 없을 만큼 강력했습니다. 초대받지 않고 왕 앞에 나아가는 것의 형벌은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에스더의 태도는 "내가 죽으면, 죽으리로다"(4:16)였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왕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녀는 왕의 눈에 띄어 호의를 얻었고, 왕과 하만을 잔치에 초대했습니다.
잔치에서, 하나님께서는 에스더가 하만의 악한 계략을 왕에게 드러낼 기회를 얻지 못하도록 상황을 마련하셨습니다. 이는 하만의 모든 악이 드러나게 하려 하심입니다 - 하만이 그날 밤에 세울 교수대를 아직 세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미루시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족속은 그(아브라함)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당시 그들은 심판하기에 죄가 무르익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400년 후에야 심판을 받을 만큼 죄가 무르익었습니다(창 15:13-16).
하만은 에스더의 잔치에 초대받은 것을 매우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그는 집에 가서 그 일과 자기가 얼마나 부자인지 자랑했습니다(5:11). 그는 자신의 열 아들을 자랑했고(9:10), 왕이 자신을 승진시켰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사람 모르드개가 내게 절하지 아니하는 것을 보는 동안에는 이 모든 일이 만족스럽지 아니하도다"(5:13)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내 세레스와 그의 친구들은 하만에게 모르드개를 매달기 위해 높이가 75피트나 되는 거대한 교수대를 만들 것을 제안했습니다. 75피트 높이는 7층 건물의 높이(22.86m)입니다. 사람을 매달기 위해 75피트 길이의 교수대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10피트 교수대만 있으면 됩니다. 그는 왜 높이를 75피트로 만들었나요? 이는 모르드개가 수치를 당하고 그가 거기 매달린 것을 온 성읍이 보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나 하만과 그의 아내가 밤새도록 악한 일을 계획하고 교수대를 세우는 동안, 모르드개는 자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깨어서 그를 보호하기 위해 일하고 계셨을 때, 그는 깨어 있을 필요가 없었습니다(시 127:2 참조). 하나님은 하만의 행동을 지켜보고 계셨고 이미 그것에 대해 뭔가를 하실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유대인의 승리(The Victory of the Jews)
우리가 에스더서에서 볼 수 있는 놀라운 것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대신하여 주권적인 능력으로 일하신 방식입니다.
그 날 밤에 왕은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6:1). 왕은 왜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깨어 있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대적하여 음모를 꾸미고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우리를 대신하여 일하십니다. 모르드개는 깊이 잠들어 있었고 다음날 아침에 그를 매달기 위해 그날 밤 75피트 길이의 교수대가 만들어 지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왕은 잠을 이룰 수 없었기 때문에, 제국의 역사서를 읽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아마도 그는 역사책을 읽다가 잠이 들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책을 읽었지만 - 그는 여전히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확실히 하셨습니다. 그들은 밤새도록 계속해서 왕에게 책을 읽어 주었습니다. 아침 6시쯤, 그들은 모르드개가 왕의 목숨을 구한 이야기에 이르렀습니다. 왕은 그 이야기를 듣고, "모르드개가 내 목숨을 구해 준 대가로 우리가 무엇을 했느냐?"라고 물었습니다(6:3). 그들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왕은 모르드개를 존귀하게 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바로 그 순간 - 여기서 하나님의 놀라운 타이밍을 볼 수 있습니다 - 하만은 모르드개를 매달기 위해 왕의 허락을 받으러 왕궁으로 왔습니다. 하만이 말을 하기도 전에, 왕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을 존귀하게 하고 싶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자만심이 강한 하만은 즉시 왕이 자신을 존귀케 하려고 생각하고 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를 왕의 말에 태우고, 왕의 신하 중에서 가장 높은 자가 그를 데리고 거리로 나가 '왕은 충실한 사람을 이렇게 존귀하게 하실 것이다'라고 말하게 하십시오." 왕이 말했습니다, "가서 당장 모르드개에게 그 일을 하라"(6:10). 내가 이때 하만의 얼굴을 봤으면 좋았을 텐데요!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어떻게 역전시키시는지를 보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만의 굴욕의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그날 밤 하만이 에스더의 잔치에 갔을 때, 에스더는 하만의 계획을 왕에게 알렸습니다. 하만은 에스더 앞에 엎드려 자비를 구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자기 앞에 무릎을 꿇기를 원했던 그가 이제 유대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주님은 그분의 신실한 교회 중 하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여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계 3:9).
하만은 자신이 모르드개를 위해 교수대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에게 자랑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만 자신을 그 나무에 매달자고 왕에게 제안했습니다. 그 사람이 조용히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민족 앞에서 모르드개에게 모욕을 주려던 그는, 이제 자신이 모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함정을 파는 자는 자기가 거기 빠지리라" (잠 26:27).
"의인은 환난에서 구원을 받고 악인은 그 대신 고난에 빠진다" (잠 11:8).
8장에서, 우리는 모르드개가 어떻게 승진하여 하만의 지위를 얻게 되었는지를 읽습니다.
9장에서는, 유대인들이 그들의 적들을 멸망시킵니다.
모르드개는 당시 지상에서 가장 위대한 왕의 조언자였던, 요셉과 다니엘과 같이 되었습니다.
비록 그들이 페르시아에 남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 유대인들을 선대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때가 이르기까지는 어느 누구도 어떤 식으로든 우리를 해칠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해 기록된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는 "그분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분을 잡을 수 없었다"(요 7:30; 8:20)라고 두 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바울을 위한 하나님의 시간이 끝날 때까지 바울의 목을 베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시기 위해 그들을 대신하여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페르시아에서 타협하고 자신의 것을 추구하던 이 백성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서 일하셨다면, 온전히 주님을 위해 살기 원하는 오늘날의 우리를 위해서는 얼마나 더 많은 일을 하실까요? 이것이 에스더서에서 우리에게 주는 큰 격려입니다. 우리가 잠들어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파멸시키려는 악한 사람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우리를 대신하여 일하십니다.
그 믿음이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나가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마귀가 우리 마음에 두려움을 심어 주고 그 두려움에 따라 행동하게 한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우리가 두려움 속에 행동할 때, 마귀를 찬양하고 마귀는 전능하며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실 수 없다고 선포하는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런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는 신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성경의 모든 내용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대신하여 일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분은 항상 우리를 보살피고 계십니다. 주님의 눈은 우리를 대신하여 일하기 위해 온 땅을 이리저리 뛰어다니십니다. 나를 보살피시는 주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십니다. 그분은 나를 보호하시는 분이십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반대할 계획을 세울지라도, 우리는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길 때, 사탄은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해치려고 시도하게 할 것입니다. 나는, 악한 사람들이 나를 해치고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서 계략을 꾸미고 계획을 세운 일들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일이 그들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그들의 모든 악한 계략을 감찰하시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그들의 계획을 좌절시키셨고, 형세를 뒤집어엎으시고, 그들과 그들이 섬기는 마귀를 바보로 만드셨습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했나요? 그냥 하나님을 신뢰하고, 모르드개처럼 잠을 자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예배하고 섬기는 하나님입니다.
에스더서에서 유대인들은 그곳에서 승리했고 대적은 패배했습니다.
우리 삶에서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고난의 문제
욥기는 구약성경 39권 중 아브라함과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이 기록한 유일한 책입니다. 그의 부는 아브라함의 부와 마찬가지로 양과 소로 언급됩니다; 그리고 그는 아브라함처럼 자기 집안의 제사장입니다. 그는 아브라함보다 더 오래 살았습니다. 이 모든 사실은 욥이 노아와 아브라함 사이의 시대에 살았음이 틀림없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욥은 우리가 알고 있는 에녹과 노아 다음으로, 가장 초기의 하나님의 사람 중 한 사람입니다.
이 책은 욥이 살아 있을 때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 욥이 그의 아내 및 친구들과 나눈 사적인 대화가 매우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건이 일어난 지 몇 년이 지나서 이 책이 쓰여졌다면, 그것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기는 영감받은 성경의 첫 번째 책입니다 - 창세기(그리스도보다 약 1500년 전에 모세가 기록한 것) 보다 수백 년 전에 기록됨.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록하기로 결정하셨을 때, 그분이 쓴 첫 번째 책은 창조에 관한 것이 아니라 경건한 사람에 관한 책이었다는 점은 흥미롭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항상 무엇을 찾으시는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분은 에녹의 때, 노아의 때, 욥의 때에 경건한 자를 찾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우리에게 성경 66권을 주시기로 계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책들 중 첫 번째 책에서, 그분은 자신의 마음에서 가장 중요한 것, 즉 경건한 사람에 대해 쓰셨습니다.
욥기는 성경의 다른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몇 가지 문제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중 한 사람이 땅에서 고통을 당할 때 "하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봅니다. 욥 자신도 고난을 당할 때,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만일 그가 알았더라면, 그는 시련 속에서도 큰 위로를 받고 힘을 얻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제 우리에게 드러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욥보다 훨씬 더 나은 위치에 있습니다.
욥은 고난을 겪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후에,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이 사실을 발견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욥이 그토록 불평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욥의 불평에서 위로를 찾을 수 없으며, 우리도 같은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 왜냐하면 우리는 욥보다 훨씬 더 많은 계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더 많은 것을 받은 사람에게는 더 많은 것이 요구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단체적으로 일하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분은 종종 한 사람을 사용하셔서 교회 내의 많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십니다. 사도 바울이 그 예입니다. 만일 바울이 그가 그랬던 만큼 전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하지 않았다면, 교회는 얼마나 많은 손실을 입었을 것입니까? 바울은 혼자서 3년 동안 늑대들이 에베소 교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그가 그 곳을 떠나자마자, 늑대들이 들어왔습니다(행 20:29,30).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욥과 바울과 같은 경건한 남자(그리고 여자)가 필요하십니다.
경건한 사람(A Godly Man)
성경의 첫 영감받은 책의 첫 문장을 주목해 보십시오:
"우스 땅에 욥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사람은흠이없고,정직하며,하나님을경외하며악에서떠난자더라"(욥 1:1).
당신은 성경의 첫 문장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까? 그것은 욥이라는 이름과 우스라는 지역으로 식별되는 한 사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그래서 그가 다른 곳에 살고 있는 다른 욥과 혼동되지 않도록). 그리고 하나님은 그 사람에 대한 그분(하나님)의 증거를 주십니다 - 그 사람의 영리함이나 부, 다른 사람들 사이의 평판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오직 욥의 성품에 관한 것입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참으로 가치있게 여기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봅니다 - 정직함, 하나님을 경외함, 모든 악에서 떠남. 나는 그것이 우리에게 도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성경 지식을 가진 사람을 주로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에는 성경이 없었기 때문에 욥에게는 성경 지식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의 주위에도 그가 경건한 삶을 살도록 격려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시대의 설교자들조차 말로 그를 낙담시켰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는 올바른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욥이 너무나 큰 고통(하루아침에 전 재산과 열 자녀를 잃음)을 겪는 이야기를 읽을 때, 이 이야기가 단지 비유에 불과한 것인지 의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욥이 산지, 1400년이 지난 후, 하나님은 에스겔서 14장 14절(20절에서 반복)에서 욥은 역사상 가장 의로운 세 사람 중 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머지 두 사람은 노아와 다니엘이었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당시 바벨론에 살고 있던 젊은 다니엘도 포함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야고보를 통해, 욥의 인내에 관해 기록하셨습니다(약 5:11). 이는 이것이 실제 이야기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1장 4,5절에서 우리는 욥이 그의 자녀들을 염려한 것을 봅니다. 성경의 첫 번째 책은 우리에게 경건한 가족을 갖는 것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경건한 사람은 그의 자녀를 경건한 방법으로 양육합니다.
욥에게는 일곱 아들과 세 딸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성장하여 각자의 집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욥은 그들 중 누구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지 않도록 매우 염려했습니다. 그의 아들들은 자신들의 집에서 며칠 동안 잔치를 벌이면서 생일을 축하하곤 했고, 자매들을 초대하여 함께 먹고 마시곤 했습니다. 이 잔치 기간이 끝나면, 욥은 그들을 불러오곤 했습니다.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났습니다. (이 경건한 사람의 그 중요한 습관도 영감받은 성경의 첫 페이지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런 다음 욥은 그의 자녀 각각을 위해 따로 번제를 드리고, 그들을 다시 주님께 깨끗하게 했습니다. 욥이 그렇게 한 이유는 자녀들이 잔치하는 동안 마음으로 죄를 지었을지도 모른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들이 마음에 죄를 지을까 염려했다는 점에 유의하십시오. 욥은 단순히 우상 숭배나 간음과 같은, 그들이 저질렀을지도 모르는 외적인 죄만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들이 하나님을 욕되게 할 수 있는 마음속에 있는 죄에 대해 염려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 그의 자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사람은 마음 속의 죄에 민감해짐으로써 경건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문을 닫고, 하나님과 단둘이 되어, 자신을 판단하고 다른 사람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그의 마음 속의 죄에 관하여서 하나님을 대합니다.
욥은 가난한 사람들과 소경과 과부를 돌보는 등 선한 일을 많이 했습니다(29:12-16). 하지만 그는 주로 자녀를 경건한 방법으로 양육했습니다. 그는 그의 자녀들을 위해 기도했으며 - 계속해서 그렇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경건한 사람에게는 끊임없이 실천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는 간헐적이지 않고 지속적으로 믿음을 실천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어려울 때만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때에도 하나님과 가깝게 살았습니다.
사탄과 하나님의 토론(Satan's Discussion with God)
1장 6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sons)"에 대해 읽습니다. 이것은 천사들을 가리킵니다. 이 문구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창조물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됩니다. 우리는 아담처럼 하나님이 직접 창조하신 존재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직접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렸습니다. 우리는 부모님을 통해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듭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창조물, 즉 새로운 창조물(the new creation)이므로 우리도 역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립니다.
사탄도 이 천사들 가운데서 나왔습니다. 그 또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창조물이었습니다. 그는 셋째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 직접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곳에서 영원히 쫓겨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본부가 있는 둘째 하늘에서 하나님께 말할 수 있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께 자신이 "땅 위를 배회하며 돌아다녔다"(1:7)고 말했습니다. 사탄은 세계를 여행하는 자입니다. 세계를 여행하는 것이 대단한 일이라고 상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광을 위해 그렇게 하라고 당신을 부르신다면, 그것은 괜찮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지상의 삶 전체에서, 그분은 고향 나사렛에서 반경 100마일(160.9344km)도 채 안 되는 원 안에서만 여행하셨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 왜냐하면 그것이 그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계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결코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일하는 방식과 사탄이 일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사탄은 항상 가만 있지 못하여 - 이리저리 돌아다닙니다. 그의 모든 일에는 서두름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천천히 그리고 인내하며 일하십니다.
사탄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특히 신자들을 지켜봅니다. 그는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습니다(벧전 5:8).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내 종 욥을 생각해 보았느냐?"고 물으셨을 때, 사탄은 "그렇습니다. 나는 그에 대해 다 알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사탄은 모든 사람의 진정한 영적 상태를 알고 있습니다. 그의 마귀들도 도처에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생활을 조사하고 그에게 보고합니다. 그러므로 사탄은 세상 모든 사람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은 사탄에게 욥의 뛰어난 점을 말씀하셨습니다: "그와 같이 흠이없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은 세상에 없느니라"(1:8).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영감받은 성경의 첫 번째 책에서 많이 언급되는 주제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욥을 이 땅의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그렇게 하십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0절에서 우리는 사탄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참소하는 자임을 읽습니다. 그가 신자들을 하나님께 고발할 때, 그는 진실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저기 자기를 당신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사람을 보십시오. 그는 화를 냅니다. 그/그녀는 집에서 배우자에게 소리를 지릅니다. 그는 돈에 대해 불의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말하지만, 사역을 통해 자신을 위한 돈을 버는 데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등등.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하나님이시므로, 사탄이 말하는 것이 사실임을 인정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이름에 불명예를 돌리는 수백만 명의 육신적인 신자들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정직한 사람 한 사람을 찾으시면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하나님은 사탄이 어떤 방법으로도 참소할 수 없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의 죄를 즉시 하나님께 고백하여 매 순간 양심을 깨끗하게 지키는 사람을 사탄은 참소할 수 없습니다(행 24:16). 그러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피 때문에 의롭다 하심(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언하심)을 얻은" 사람입니다(롬 5:9). 그리고 그는 사탄의 모든 참소를 이깁니다(계 12:11). 당신도 그런 사람이 될 것인가요?
예수님은 "세상의 임금이 오되 나에게서 아무 것도 찾지 못하리라"(요 14:30)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께서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그 당시 사탄에게 "그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사람이 땅에 한 명 있었기 때문에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요한일서 2장 6절은,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예수께서 행하신 것과 같이 행할지니라"고 말합니다.
동료 신자들이 우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우리를 가리켜, 수많은 타협하고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지 여부는 매우 중요합니다. "사탄아, 나는 스스로를 내 자녀라고 부르는 많은 사람들이 타협하고 육신적인 사람들임을 안다. 그런데 그 동네 그 거리에 사는 이 남자를 본 적이 있니? 그는 다르다. 그는 정직하고 성실하다. 그 동네 그 거리에 사는 그 여자를 본 적이 있니? 그녀는 다르다. 그녀는 경건하다." 그러면 사탄의 입은 닫혀 있습니다 -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당신을 언급하실 수 있기 때문에, 당신은 사탄의 입을 막을 수 있는 사람 중 하나입니까?
당신이 부유하든 가난하든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가난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성경의 맨 첫 번째 책에 언급된 최초의 경건한 사람은 매우 부유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사실, 그것이 바로 욥 주변 사람들의 시기심을 불러일으킨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부유하고 영적인 사람을 보는 것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만일 그가 가난하고 영적이었다면 그들은 행복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영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가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돈의 양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돈에 대한 우리의 태도입니다. 바울과 베드로는 매우 가난했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욥과 아브라함은 큰 부자였습니다. 그러한 문제는 하나님께서 결정하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피부색이나, 지능 수준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것들도 결정하시며 -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영성은 은행 계좌의 규모가 아니라, 우리의 인격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탄이 욥을 자신의 표적으로 삼은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사탄은 올바른 사람들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당시에 욥을 미워하였고 - 오늘날에도 그런 사람들을 미워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우리가 경건하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의 능력이 닿는 한 모든 일을 합니다. 사탄은 욥의 아내와 육신적인 설교자들을 통해 욥을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이 중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 대한 욥의 헌신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욥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얼마나 큰 도전이 되는가요! 우리도 그와 같을 수 있습니다.
사람의 인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정을 구합시다. 개인적으로는, 전 세계 60억 인류가 모두 나를 '이단자, 거짓 선지자, 속이는 자, 탐식자, 술고래, 대주가, 간음하는 자, 도둑 또는 그들이 생각하는 다른 악한 이름으로 비난하더라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나를 사탄에게 언급하시며 "너는 나를 경외하고 모든 악에서 떠난 고결한 사람인 잭 푸닌을 보았느냐"라고 말씀하실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칭찬은 나에게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더 큰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 자신에게도 그런 소망이 있기를 바랍니다.
심지어 사탄이 우리를 인정하는 것조차도 사람이 우리를 인정하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사탄은 바울이 스게와(Sceva) 자손과 다른 부류에 속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행 19:15).
결국,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 세상 수십억 사람들의 의견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될 것입니다. 그날에는 오직 하나님의 의견만이 중요할 것입니다. 동료 신자들의 칭찬조차도 쓰레기통에 버려야 마땅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뿐입니다. 사람들은 당신을 하늘을 찌를 듯이 칭찬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을 무시하실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사람들은 당신을 갈기갈기 찢어 놓을 수도 있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당신 세대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여기실 수도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일생 동안의 가치를 인식할 수 있는 영적인 분별력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당신이 가고 있는 길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겸손한 모습을 보시고, 은혜를 베푸실 것이며 여러분이 죄와 세상을 이기게 될 것입니다.
사탄은 모든 경건한 사람들을 고발합니다! 그에게는 당신을 고발할 대리자들(심지어 신자들 가운데서도)이 많이 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고발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그가 당신 또한 고발할 것 같지 않나요?
우리는 욥기에서 그의 세 친구까지도 그를 고발(비난)했다는 것을 읽습니다. 네 번째 사람인 엘리후는 좀 더 온건하게 고발했지만, 그 역시 욥을 고발했습니다. 고발은 사탄과 그의 대리인의 성격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경건한 사람은 자신이 그러한 고발에 영향을 받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영적인 분별력이 있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그에 대해 어떻게 말하든, 경건한 사람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둘러싼 세 울타리(Three Hedges Around God's People)
그러자 사탄은 하나님께, "주께서 그와그의집과그의모든 소유물 사방에 울타리를 쳐 주셨나이다"(10절)라고 말했습니다. 사탄의 말에서, 우리는 세 가지 큰 진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경건한 사람 주위에 삼중 울타리를 두셨습니다: 첫번 째는 그를 개인적으로 둘러싸고 있고, 두번 째는 그의 가족 주변을 둘러싸고 있으며, 세번 째는 그의 재정과 재산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사탄은 영적인 영역을 들여다볼 수 있고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울타리를 볼 수 없지만, 울타리가 거기에 있습니다.
사탄은 영이므로 욥이나 그의 가족, 그의 소유물을 공격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경건한 삶을 살면 내 주위에도 세 개의 울타리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나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그리고 그 울타리 중 어느 것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열릴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욥기에서, 사탄이 그 울타리들을 통과하기 위해 하나님께 허락을 구해야 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주 예수님은 여러 해 후에, 베드로에게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탄이 너희를 체로 치려고 허락을 구하였느니라"(눅 22:31).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 한 번에 한 울타리씩 통과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동시에 모든 울타리를 열어 놓지 않으셨습니다. 처음에 하나님은 사탄이 욥의 소유물과 그의 가족만을 공격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나중에, 하나님은 사탄이 욥의 몸을 공격하는 것을 허락하셨지만, 그때에도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의 생명을 건드릴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은 욥을 죽일 수 없었습니다. 사탄은 욥을 죽이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몸에 종기를 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첫 번째 울타리가 열렸을 때, 사탄이 들어가서 욥의 재산을 모두 파괴했습니다. 욥의 재산은 하루 만에 수백만달러에서 0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런 다음 두 번째 울타리가 열렸습니다. 그 울타리 안에는 욥의 아내와 자녀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욥의 열 자녀를 모두 죽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욥의 아내도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죽는 것보다 살아 있는 것이 사탄에게 더 유용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그녀(욥의 아내)를 이용하여 욥에게 잔소리하고 욥을 짜증나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잔소리하는 아내(또는 남편)는 사탄의 손에 있는 매우 유용한 무기입니다 - 따라서 사탄은 그러한 사람들이 오래 사는 것을 보고 기뻐할 것입니다!
영감받은 성경의 맨 첫 페이지에서도 사탄에 대해 배울 수 있는 몇 가지 사항이 있습니다.
우선, 사탄은 한 번에 한 곳에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러나 사탄은 한 곳에 있으면, 다른 곳에는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탄의 일을 하기 위해 이 땅에 돌아다니는 많은 마귀들이 있습니다.
둘째, 사탄은 미래를 볼 수 없습니다. 만일 그가 미래를 볼 수 있었다면, 욥이 결국 훨씬 더 많은 축복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고, 욥을 내버려두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가 그리스도께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어떤 결과가 나올지, 즉 그 자신이 패배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권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분명히 아닙니다! 만일 사탄이, 하만 자신이 그 교수대에 매달릴 것을 알았다면, 하만이 그 교수대를 세우는 일을 돕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전 세계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으며, 그러한 행동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우리처럼) 추측할 수 있지만, 미래를 예견할 수는 없습니다.
셋째, 사탄은 당신의 생각을 읽을 수 없습니다. 그는 외관으로 당신이 무엇을 하는지만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욥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겉모습뿐이었습니다. 그는 욥의 생각을 알 수 없었습니다.
넷째, 사탄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공격하려면 하나님의 허락이 필요합니다.
내가 싸우고 있는 이 원수는 장래 일도, 내 생각도 전혀 모르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속박하는 통제 아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나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게다가, 그는 지금 십자가에서도 패배하였습니다. 그것은 사탄에 대한 나의 모든 두려움을 없애줍니다.
둘째 울타리가 열리자, 욥은 열 자녀를 모두 잃었습니다. 경건한 사람의 자녀가 고통을 당하거나 문제에 직면하는 것을 보면 결코 그를 비판하지 마십시오.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의 자녀들은 사탄의 표적이 되지만, 여러분의 자녀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아마도 여러분은 그와는 달리 타협주의자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당신과 당신의 가족을 내버려둡니다!
이제 욥이 이 모든 일에 어떻게 반응했는지 살펴보십시오. 그는 모든 것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차례로, 그의 종들이 와서 모든 것이 없어졌다고 말했습니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를 밀고,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했습니다(1:20). 그것은 영감받은 성경의 맨 첫 페이지에서 볼 수 있는 또 다른 것입니다: 경건한 사람은 예배자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성경을 아는 것보다, 주님을 섬기는 것보다, 우선적으로 예배하는 사람입니다. 당신이 모든 것을 가졌을 때도 예배자가 되어야 하고, 모든 것을 잃었을 때도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자는 영(spirit)과 진리(truth)로 예배를 드려야한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신다"(요 4:23,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린다는 것은 그분께 모든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욥은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고, 또한 알몸으로 그리로 돌아가리로다. 주신 분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분도 여호와시니라.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시옵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이 모든 일에도 욥은 죄를 짓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1:21,22). 욥은 아마도 여기서 자신이 알몸으로 나왔고, 알몸으로 흙먼지가 되어 돌아갈 대자연을 언급했을 것입니다. 그는 주님께서 그의 삶에 허락하신 모든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주님께 대한 욥의 헌신을 생각할 때, 나는 놀랐습니다. 그에게는 우리가 갖고 있는 예수님이나 사도들의 본이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따라야 할 어떤 본보기도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우리가 가진 성령의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 사람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동료 신자들은 물론이고 자기 아내로부터도 격려나 지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욥에게는 오직 하나님만이 있었습니다 - 그리고 하나님이면 충분했습니다. 욥이 이렇게 영광스러운 삶을 살 수 있었다면, 왜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까?
사탄이 세 번째 울타리를 통해 들어옴(Satan Enters Through the Third Hedge)
2장: 마귀는 욥이 자신이 생각한 대로 반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매우 기분이 나빴습니다. 주님은 사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 종 욥을 생각해 보았느냐? 네가 나를 부추겨서 까닭 없이 그를 망하게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integrity)을 굳게 지키느니라"(3절). 사탄은 대답했습니다, "그는 자기 생명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이나 심지어 자녀에게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는 정말로 자신만을 사랑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위해 가진 모든 것을 바칠 것입니다." 사탄은 인간의 이기심을 알고 있으며,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가죽(껍데기)을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은 사실입니다. 인간은 이기적이며, 압박을 받을 때 자신을 최우선으로 생각합니다.
사탄은 욥도 다르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이제 그의 몸에 손을 대십시오. 그가 여전히 주님께 충실할 것인지 나에게 보여 주십시오"라고 하나님께 도전했습니다. 주님은 "가서 그를 시험하여라. 하지만 그의 생명을 빼앗을 수는 없다." 사탄은 나가서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했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종기가 나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상상해 보십시오. 욥은 더 이상 자기 집에 살 수 없었습니다. 그는 성밖으로 나가서 거름더미 위에 앉아, 재 속에서 몸을 긁적이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아내가 와서 그에게 잔소리를 했습니다, "아직도 순전함(integrity)을 굳게 지키십니까? 이 고약한 당신의 하나님을 저주하고 자살하십시오"(2:9).
성경의 시작 부분에서, 우리는 사탄이 사람들을 자살하도록 유혹하고,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통해 그들을 유혹하는 것을 봅니다. 아담은 하와를 통해 유혹을 받았습니다. 욥은 아내를 통해 유혹을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십자가에 가지 말라고 촉구했습니다. 사탄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통해 우리를 유혹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경건한 남자에게 경건한 아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밤이 어두워질수록 별들이 더욱 밝게 빛나듯이, 아내의 불경건을 사용하여 남자의 경건을 더욱 돋보이게 하실 수 있습니다.
욥의 아내가 자살을 권유하자, 욥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어리석은 여자가 말하는 것 같소. 우리가 여호와께 복은 받아들이고, 고난은 받아들이지 않겠다 하는 것이오?"(2:10). 불경건한 아내를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대신, 그들에게 맞서는 욥과 같은 경건한 남편이 더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에게 재난이 닥쳤을 때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라는 질문을 절대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축복이 당신에게 임했을 때 같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면!! 당신이 예상치 못한 축복을 받았을 때,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왜 나는 축복을 받았고 다른 사람들은 축복을 받지 못했습니까?"라고 질문한 적이 있습니까?
욥의 세 친구인 엘리바스, 빌닷, 소발은 그의 고난을 듣고, 위로하고 싶다며 그를 찾아왔습니다(2:11). 그러나 나중에 그들이 그에게 말한 방식을 보면, 그들은 실제로 그를 전혀 위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를 비난하고 고발할 뿐입니다. 그들 세 사람은 모두 형제들을 참소하는 마귀와 교제하고 있었습니다.
이 세 사람은 욥이 경건한 사람이고 부자였고, 그와 그의 가족에게는 모든 것이 잘되고 있었기 때문에 욥을 질투했습니다.
많은 신자들은 경건한 사람들의 영향력과 사역을 보면, 그들을 질투하며 종종 어떤 재난이 그들에게 닥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귀가 경건한 사람들에게 어떤 재난이 닥치기를 열망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기다리며, 그 일이 일어날 때 은밀히 기뻐하는 신자들도 있습니다.
이 세 사람은 욥을 매우 불쌍히 여기는 체했습니다. 그들은 욥을 보고 울며, 옷을 찢고, 티끌을 그들의 머리에 뿌리었습니다. 그들은 정말 좋은 배우들이었어요. 그러나 그들은 그를 시기하기 때문에, 몰래 기뻐했습니다. 이 세 설교자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만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 중 어느 하나도 사탄에게 언급하실 수 없었습니다.
경건한 사람들은 마귀로부터 공격을 당하고, 때로는 아내로부터, 때로는 육체적으로, 때로는 재정적으로도 공격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성화시키기 위해 많은 시련을 겪게 하십니다. 그러나 아마도 그들의 가장 큰 시련은 그들을 질투하는 친구들과 형제들로부터일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기독교 사역에는 이런 일이 많이 있습니다. 기독교 사역자들은 더 기름부음받은 사역자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서, 그의 사역이 파괴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기름부음이 경건한 사람에게 임하고 다른 사람이 그를 질투할 때, 하나님은 다른 사람의 악한 질투를 드러내시기 위해 그 경건한 사람에게 육체적인 재앙을 허락하실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악이 드러나면, 하나님은 그 병을 고치시고 경건한 사람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네 명의 설교자(Four Preachers)
이 세 사람 모두 욥이 그런 고난을 겪은 이유를 진실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에게서 오직 결점만 찾을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중 예수님 시대에 바리새인들과 같은, 종교적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사람과 종교적인 사람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영적인 사람들은 모든 세대의 종교적인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아왔습니다. 성경은 " 모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사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고 말합니다. 이 규칙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고 싶지 않다면, 경건하게 행동하지 마십시오!
고린도전서 2장 15절은 "신령한(spiritual) 사람은 신령하지 아니한 자들이 분별할 수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사람은 매우 외로운 사람입니다 - 그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성경을 잘 아는 사람에 의해서도, 그의 행동은 오해를 받고 그의 말은 오해를 받습니다. 종교인들은 하나님에 관한 사실들만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자신을 모릅니다. 많은 종교인 가운데 하나님 자신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욥은 그런 희귀한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에 관해 아는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게 될 것입니다.
종교적인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분을 귀신의 왕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오늘날 그들이 어떻게 경건한 사람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예수님 당시에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라는 두 종교 집단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근본주의자들이고, 사두개인들은 자유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둘 가운데, 사두개인들보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더 반대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자유주의자보다 근본주의자가 경건한 사람을 더 비판할 것입니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외로운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닥친 시련을 통해 교훈을 얻게 하십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인내하는 사람을 복있는 사람으로 여깁니다. 여러분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님께서 (욥에게) 행하신 일의 결과나 끝을 보았습니다. 즉, 주님은 가여워하는 마음이 가득하시고 자비로우시다는 것입니다"(약 5:11). 모든 경건한 사람의 증언은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주님은 가여워하는 마음이 가득하시고 자비로우십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신 그 어려운 길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내 삶의 영광스러운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하늘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의 맨 첫 번째 책에서, 우리는 현대의 "건강과 부의 복음"의 시작을 봅니다. 그곳의 세 명의 설교자는 욥이 하나님의 축복을 잃었기 때문에, 그가 건강과 재산을 잃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축복이 항상 번영과 건강을 가져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건강과 부의 복음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처음으로 전파했다는 점에 유의하십시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기억하십시오. 모든 재산과 건강을 잃은 욥은 온전하신 하나님의 뜻 안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건강과 부"의 복음을 전한 세 명의 설교자들은 완전히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에서 이 점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나는 너희 모두에게 화가 난다. 내가 너희를 벌하지 않도록, 욥에게 너희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하여라"(42:8).
욥기는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상황에 욥이 직면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큰 격려가 됩니다.
세 설교자는 우리의 원수나 심지어 불신자들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를 괴롭히고, 오해하고, 비판하는 신자들의 모습입니다. 신자가 우리를 공격하고 고발하는 것은, 불신자가 같은 일을 할 때보다 항상 더 고통스럽습니다. 지난 50년 동안, 나는 불신자들의 비난보다 신자들의 비난을 100배나 더 많이 겪었습니다. 그것은 또한 교회 역사상 모든 하나님의 종들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인과 로마인들보다 바리새인들로부터 더 많은 반대를 받으셨습니다. 빌라도는 그분을 놓아주고 싶었지만, 안나스와 가야바는 그분을 죽이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에 대한 거짓 이야기를 퍼뜨리는 신자들에게서 최대의 반대가 나온다고 해서 놀라지 마십시오. 그들은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의 추종자들입니다.
그들이 실제로 욥에게 무엇을 말했는지 살펴보기 전에, 하나님께서 이 세 설교자에게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마지막에 엘리바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가리켜 옳은 말을 하지 아니하므로,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노라"(42:7). 우리는 이 세 설교자의 말들을 공부하면서, 하나님의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이 말한 것 중 일부는 옳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완전히 틀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들이 틀렸다고 말씀하셨나요? 그들의 말 뒤에 숨은 정신(spirit)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말 뒤에 숨은 정신입니다. 우리가 옳은 말을 할지라도 동기가 잘못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말이 틀렸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심지어 법정에서도 우리의 말을 정당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는, 우리의 태도나 동기가 잘못되면, 우리는 틀린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는 동기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말을 하려고 한다면, 무슨 말을 하든 틀린 말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에 또 한 명의 설교자가,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과 합류했습니다 - 바로 엘리후였습니다.
이 네 사람은 오늘날 기독교 집단의 네 가지 유형의 설교자들을 상징합니다.
첫 번째 설교자 엘리바스는 환상과 천사에 대해 말하는 것에 특별히 관심을 쏟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 자신의 말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자신이 본 천사와 환상에 대해 항상 이야기하는 설교자들이 있습니다.
엘리바스는 욥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말하는 것은 나에게 은밀히 주어진 것입니다. 내 귓가에 속삭이더군요. 그것은 밤에 다른 사람들이 자고 있을 때 환상으로 나타났습니다. 두려움이 나를 사로잡았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에게 임하자 나는 떨었습니다. 나는 공포에 떨었습니다. 한 영혼이 내 얼굴 앞에 다가왔습니다. 등골이 오싹해졌습니다. 그것은 내 앞에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그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형태는 봤습니다. 그러자 '언젠가는 반드시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수 있겠느냐?' 누가 창조주 앞에서 순수할 수 있겠느냐?'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4:12-17).
이 말씀은 절대적으로 옳습니다: 죽을 운명의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할 수 있습니까? 누가 창조주 앞에서 순전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 영은 성령이 아니었습니다 - 성령은 누구의 마음에도 두려움과 공포를 가져오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언제나 기쁨과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환상과 꿈과 영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속지 마십시오. 그들은 엘리바스와 같습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이 모두 거짓말쟁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환상(vision)은 세 가지 근원에서 나옵니다.
우선, 환상과 꿈의 일부는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성령께서 환상과 꿈을 주십니다 - 그러나 그것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할 것입니다(행 2:17). 그러나 진정한 환상을 받은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말하기를 꺼릴 것입니다. 바울은 한 번 셋째 하늘에 올려졌으나, 14년 동안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았습니다 - 심지어 그 당시에도 한 교회에만 그것에 대해 말했습니다 - 그리고 그것도, 사도로서 성경을 쓸 수 있는 권위를 확립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그러한 목적을 위해 우리의 권위를 확립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그것에 관해 말했을 때에도 그는 셋째 하늘에서 들은 것을 그들에게 말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진정한 환상을 가진 사람의 특징 중 일부입니다.
둘째, 환상의 일부는 사탄의 근원에서 나옵니다. 환상에 관해 말함으로써 사람들 앞에서 명예를 얻고, 자신을 사탄에게 개방(open)하고 간절히 환상을 갖고 싶어하는 자들은 사탄에 의해 얼마든지 환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셋째, 대부분의 환상은 사람 자신의 풍부한 상상력에서 나옵니다. 우리 모두는 인간으로서 서로 다르며 -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풍부한 상상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환상을 얻기 위해 해야 할 일은 잠시 눈을 감고 상상을 시작하는 것뿐입니다!! 즉시 그들은 마음속으로 사물을 "보고", "듣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매우 진지할지 모르지만, 그들 역시 그들의 환상에 대해서 속고 있습니다!
우리 말의 권위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와야 하며,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받았다고 생각하는 개인적인 계시나 환상에서 나와서는 안 됩니다.
두 번째 설교자 빌닷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우리에게 가르친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새로 온 사람들보다 그들이 옳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들읍시다"(8:8-10). 그는 기독교 집단에서 발견되는 또 다른 설교자 그룹의 전형입니다. 이 사람들은 "그들의 교회"에서 수백 년 동안 전해 내려온 전통 중 어느 하나도 깨뜨리고 싶지 않습니다 - 그것이 옳든 그르든. 그들은 환상이나 꿈을 원하지 않으며, 어떤 변화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배를 흔들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배의 방향을 바꾸고 싶어하지도 않습니다, 비록 배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더라도요!!
빌닷은 온화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욥을 고발했습니다. 정말로 상처주는 말을 부드럽고 온화한 방식으로 말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말은 부드럽지만 그 속에는 뱀의 독침이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는, 시끄럽고 화를 내는 말보다 더 상처를 주는, 조용한 말을 서로에게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설교자인 소발은 모든 일에 대해 분노하고 비판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욥을 가장 강하게 공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욥을 말이 많은 바보라고 불렀습니다(11:2,12). 그는 자신들이 현대의 엘리야와 세례요한이라고 생각하는 일부 "자칭 선지자들"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보는 모든 것에 대해 비판적이며 지속적으로 모든 하나하나에 공격을 가합니다. 예수님도 바리새인들을 비판하셨습니다. 그러나 기름부음받은 비판이 있고 육신적인 비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독사라고 부르셨습니다. 바울은 사람을 모든 의의 원수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말을 증명하셨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들(예수님, 바울)을 흉내내려고 한다면, 하나님은 그들(흉내내는 자들)을 지지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야고보서 3:1(AMP)은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해 자칭-검열관이 되지 마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검열관은 다른 사람이 말하는 모든 단어를 조사하는 사람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고발하기 위해, 독수리처럼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붙잡으려고 기다렸습니다(막 12:13; 눅 11:54).
나도 그런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 그들은 오로지 나를 고발할 내용을 찾기 위해 내 메시지를 듣거나 내 책을 읽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그러한 독수리가 발견됩니다!! 그러한 자칭 비평가들은 하나님 그분 자신을 위해 전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직 주님을 섬기는 다른 사람들의 말에 현미경의 초점을 맞추고 그들의 결점을 찾는 데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자신의 사역에 기름부음이 없는 설교자들은 종종 다른 기름부음받은 설교자들을 비판하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습니다.
소발은 그런 자칭 검열관이었습니다. 그는 욥을 비난하기 위해 무정하고, 엄격한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의에 급진적으로 헌신한 사람으로 보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말한 것에는 기름부음이 없었습니다.
네 번째 설교자 엘리후는 개인적으로 슬픔이나 고통을 경험한 적이 없는 젊은 열심꾼이었습니다. 그는 젊고 말이 많았지만, 경험이 전혀 없었습니다(32:6,18). 그는 다른 세 사람보다 나았습니다. 진리를 정확하게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세 사람에게 진노하신 것 같이 그에게 진노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엘리후의 영이 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엘리후는 위대하고 놀라운 진리를 가르치지만 직접 고난과 시련의 깊은 물을 겪어본 적이 없는 설교자들의 대표자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문제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조언을 줄 준비가 되어 있는 경건한 체하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의 사역은 고난에서 나왔습니다. 그는 "나는 압박과 시련, 엄청난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그때에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힘을 이제 나도 여러분과 나눌 수 있습니다"(고후 1:4-8). 그것은 전혀 다른 유형의 사역이었습니다. 그것은 경험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역도 그래야 합니다.
욥기에 나오는 이 네 설교자는 우리가 본받을 만한 설교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건강과 부"의 설교자들이었습니다 - 엘리후는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덜했을 뿐입니다. 그들 중 누구도 욥을 위한 사역에서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늘날 대부분의 설교자들처럼, 단지 모든 사람의 시간을 낭비했습니다!
욥과 처음 세 설교자 사이의 세 차례의 토론은 3~31장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엘리바스와 빌닷은 각각 세 번 말하였고 소발도 두 번 말하였습니다. 토론이 끝난 후, 엘리후는 한 번 말했습니다(32~37장). 그런 다음 하나님은 38-42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욥기의 대략적인 개요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토론에서 중요한 구절 중 일부만을 살펴보겠습니다.
1차 토론(First Round of Discussion)
엘리바스는 기본적으로 욥에게 "네가 죄를 지었으므로 고난을 받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욥의 사생활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그를 비난했습니다. "내 경험에 따르면 문제를 심고 악을 기르는 사람은 스스로도 같은 것을 수확하게 된다. 그러므로 너는 네가 지난 삶에 기른 악과 네가 심은 문제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4:8). 그는 완전히 틀렸습니다.
욥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사람들이 음식에 소금이 없다고 불평합니다. 당신의 메시지는 소금 없는 음식과 같으며 익히지 않은 달걀 흰자위와 같습니다"(6:6,7). 그는 의미심장한 말을 사용하여 엘리바스에게 그의 설교가 맛도 없고 가치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빌닷이 말했습니다, "당신의 자녀들이 죄를 지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하나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형벌은 합당하니... 너희가 정결하고 정직하게 행하면, 하나님이 너희 행복한 집을 회복시키시리라"(8:4,6). 빌닷은 욥의 자녀들에 대해 모든 것을 아는 경건하고 거룩한 사람처럼 행동했습니다 (사실 그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의 자녀를 비판합니까? 당신은 다른 사람들이 고통받는 이유를 아는 체하면서, 하나님이 된 척합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빌닷과 같습니다.
욥은 빌닷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이것이 원칙적으로 모두 사실임을 압니다. 당신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할 수 있습니까? 나는 그분의 자비가 필요합니다"(9:2,15). 오늘날에도 실생활에 적용되지 않는 비현실적인 완전함과 성화의 이론을 설교하는 설교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에, 그에게 필요한 것은 성화 이론이 아니라 그와 하나님 사이에 서서 둘을 하나로 묶어 줄 수 있는 살아 있는 중보자임을 알았습니다(9:33). 이것이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한 분이 있습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러자 소발이 말했습니다, "당신이 잡소리를 늘어놓는 동안 나는 침묵해야 하는가? 하나님은 거짓된 자를 아시고 그들의 모든 죄를 기록하신다... 야생 당나귀가 사람 자녀를 낳을 수 없듯이, 머리가 텅 빈 바보는 똑똑해질 수 없다"(11:3,12). 정말 거친 말입니다! 소발은 (당대의 가장 경건한 사람이었던) 욥을 감히 머리가 텅 빈 바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자신이 질투하는 사람에게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강단에서 성경을 인용하여 회중에 앉아 있는, 불만이 있는 누군가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설교자들이 있습니다.
소발에 대한 욥의 반응은 비꼬는 말이었습니다: "내 생각에 당신이 죽으면, 이 세상에 더 이상 지혜가 없겠어요. 아니 근데, 나도 몇 가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나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12:1-3).
그런 다음 욥은 구약성경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가장 놀라운 신앙을 고백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여전히 그분을 신뢰하리로다"(13:15). 그러한 진술은 언제라도 발언한다면 주목할 만할 것입니다. 그러나 욥이 처한 상황, 즉 다음에 그에게 닥칠 다음 재앙이 죽음인지도 모르는 상황을 생각하면 그 진술은 더욱 놀랍게 다가옵니다.
욥은 자신이 "어릴 때 지은 죄"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고 있는지 궁금해합니다(13:26). 이것은 다윗에게도 고민거리였습니다(시 25:7). 경건한 두 사람, 욥과 다윗은 젊은 시절에 청년의 죄에 빠졌고, 그 죄는 수십 년이 지나도 그들을 괴롭힐 만큼 심각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죄에 관해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약속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주님께 자백했다면 - 그 죄가 아무리 심각하더라도 - 그것은 용서받은 것입니다(요일 1:9). 하나님께서는 또한 "내가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히 8:12). 우리는 "어린양의 피"(계 12:11)로 우리를 향한 사탄의 고발을 이겨냅니다. 그러나 욥은 그런 확신이 없었고, 할아버지가 될 만큼 나이가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젊었을 때의 죄를 의식하며 살았습니다. 새 언약 아래서 우리는 얼마나 놀라운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까? 우리가 그것을 결코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2차 토론(Second Round of Discussion)
두 번째 토론에서, 우리는 엘리바스가 욥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봅니다, "너는 허풍쟁이에 불과하다... 악한 사람은 평생 고통을 겪는 사람이다. 이 악한 사람들은 살이 찌고 부자가 될지라도, 그들의 성읍은 황폐하리라"(15:2,27-28). 이제 엘리바스는 더욱 담대해져서 욥을 멸시하는 소발의 본을 따르며, 그를 "허풍으로 찬 자루"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사람을 두고 그런 말을 하다니 얼마나 오만한지요.
욥은 대답했습니다, "너희는 다 고약한 위로자들이다. 너희가 내 처지가 되어 고통받고 있다면 나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가서 너희에게 그렇게 전할 수 있다"(16:2-5). 욥은 또한 이러한 공격의 배후에 사탄이 있음을 인식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나의 대적이 나를 향하여 그 눈을 날카롭게 하였느니라"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16:9 - 여백). 사탄은 우리를 고발하기 위해 우리가 어떤 면에서 실패하는지 항상 유심히 관찰하고 있습니다. 지상에 있는 그의 대리자(특히 신자들)도 우리가 넘어질 때 날카로운 눈초리로 우리를 관찰합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이 나를 무법자의 손에 붙이시며, 악인의 손에 붙이시니"(16:11)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이것을 허락하셨다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허락하셨다는 깨달음은 욥에게 어느 정도 위안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대변자는 높은 곳에 계십니다. 내 눈은 하나님께 눈물을 흘립니다. 오, 사람이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16:19,20).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 아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욥은 또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을 맛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나는 사람들이 침 뱉는 자니"(17:6)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빌닷이 말했습니다, "욥아, 네가 얼마나 더 있다가 말을 멈출 건인가? 우리가 대답하기를 원한다면 상식적으로 말하여라. 우리가 짐승이라고 생각하는가? 우리에게 지능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잡아 뜯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벽에서 바위가 떨어질 것 같은가? 악인의 빛은 꺼진다는 것은 진리이다. 하나님은 악인의 빛을 꺼버리신다. 그들의 장막 안의 빛은 점점 어두워질 것이다. 악인의 확신에 찬 발걸음은 짧아질 것이다. 악인은 그물로 들어간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길에 파 놓으신 구덩이에 빠지게 된다"(18:2-8). 그는 이렇게 말하여, 욥이 악하다는 것을 암시했습니다.
이에 대해 욥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자네들이 지금 나를 열 번이나 모욕하려 하였다. 나를 그렇게 가혹하게 대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리고 설사 내가 죄를 지었다 해도, 그건 나의 문제이지, 자네들이 걱정할 일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처리하실 것이다. 왜 자네들이 그 일로 괴로워하는가? 자네들은 나의 현재의 굴욕을 내 죄의 증거로 삼아 나를 이기려 한다"(19:2-5).
욥은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그의 형제, 친척, 가까운 친구, 가족, 심지어는 그의 아내까지도 그에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그를 여종과 어린아이들의 조롱거리로 삼으셨다고 말합니다(19:13-18). 그러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해서 승리의 말을 합니다, "나는 내 구속자가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안다. 마지막 날에 그분은 땅 위에 서실 것이다. 내 피부가 썩은 뒤에도, 나는 육체 속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직접 그를 보리라"(19:25-27). 여기서 욥은 선지자로서 말하고 있었습니다. 고난을 통해 그는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만일 그가 이 극심한 고통을 겪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이 놀라운 미래의 환상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이 시점이, 욥의 태도에 전환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직까지 자신에 대한 연민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앞으로는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이것은 우리가 미래를 생각하고, 부활하여 우리 주님이시며 구세주이신 분을 대면할 것이라는 소망을 품을 때, 우리에게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런 다음 욥은 설교자 친구들에게 하나님의 종들을 참소하는 모든 사람에게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합니다(19:28,29).
그러자 소발은 욥이 "가난한 사람들을 학대하여 궁핍하게 하고, 집세를 내지 못하므로 그들을 집에서 내쫓고", "탐욕스럽고 탐식하는" 악한 사람이라고 두 번째로 비난했습니다(20:19,20). 그래서 그는 욥의 "번영이 사라지고, 재난이 그에게 닥쳤으며 하나님께서 그에게 배에 가득 찬 환난을 주셨다"고 결론을 내립니다(20:22,23). 소발의 비난은 이제 더욱 거세졌습니다.
이제 대답하는 욥의 지혜를 들어 보십시오. 그는 이제 더 차분해지고 더 정중해졌습니다. 그 결과 그는 상대방도 진정시켜, 화난 소발이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유순한 대답은 노를 쉬게 하느니라" - 잠 15:1).
욥은 이렇게 말합니다, "실상은 악인도 장수하는 경우가 있느니라. 그들은 번영하고 자녀와 손자를 본다. 그들의 집은 평안하고, 그들의 가축은 번성하며, 그들의 날을 즐겁게 지내다가 무덤으로 들어가느니라"(21:7-13). 그것은 절대적으로 맞습니다. 욥은 번영을 설교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에 있는 악한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욥은 계속해서, 그들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섬기지도 순종하지도 않고 기도에 대한 믿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14-16절). 욥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그들의 형통은 그들의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였다"(16절) - 즉, 그들의 형통은 그들이 살았던 방식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이 아니었다. "나는 그런 삶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라고 욥은 말합니다 - 참으로 매우 현명한 대답입니다.
3차 토론(Third Round of Discussion)
이제 세 번째 토론에 이르렀습니다. 이번 라운드에서 말하는 사람은 엘리바스와 빌닷 두 사람뿐입니다.
엘리바스는 이제 초자연적인 분별력을 가진 척합니다 - 오늘날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그러는 것처럼. 엘리바스는 이전에 환상과 영 등에 관해 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제 욥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안다. 너는 친구에게 돈을 빌려주고 그 사람이 담보로 준 옷을 돌려주지 않았다. 너는 친구를 뼈까지 벗겨냈다. 너는 집에 찾아온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주지 않았다. 너는 집에 찾아온 배고픈 사람에게 음식 주기를 거부했다. 어떤 과부들이 네 집에 왔으나, 너는 그들을 돕지 아니하고 돌려보냈다. 너는 몇몇 고아들의 용기를 짓밟았다. 이것이 오늘날 네가 함정과 두려움에 둘러싸여 있고, 하나님의 심판의 물이 너를 덮어서 앞으로 나아갈 길을 볼 수 없는 이유이다. 결국, 욥아, 너는 땅이 강자들의 것이고 특권을 누리는 자들의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너는 그러한, 영향력이 큰 사람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너의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너는 하나님이 너를 보실 수도 없고 심판하실 수도 없다고 생각하는구나"(욥 22:6-13).
이것은 모두 단순한 상상이었습니다. 이 말에는 일말의 진실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판단하고 그들의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입니다!
욥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우선 그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말을 합니다:
"그분은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자세히 알고 계십니다. 그분께서 나를 감찰하신 후에는, 나를 완전히 결백하다고 선언하실 것입니다 - 순금과 같이 순결하다고"(욥 23:10 - Living).
또는 다른 번역판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분께서 나를 시험하신 후에,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욥은, 하나님께서 그(욥)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든 세부 사항을 알고 계시다고, 확신했습니다 - 이는 욥에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훨씬 더 큰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의 모든 세부 사항을 조정하시며, 모든 일이 우리의 최고의 것을 위해 작용하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롬 8:28). 할렐루야!!
욥은 또한 이 시험의 기간이 끝나면, 자신이 정금처럼 나올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성경이 없어도 그가 가졌던 빛을 보는 것은 놀랍습니다.
욥은 계속해서 이렇게 묻습니다, "경건한 자가 어찌하여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까지 그토록 오래 기다려야 하는가?" 그는, 가난한 사람들과 과부들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들을 착취하는 부자와 악한 사람들로부터 직면하는 불의와 굴욕을 나열합니다. 그는 자신들이 범한 죄를 면하는 것처럼 보이는 도둑, 살인자, 간음하는 자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24:1-16). 그러나 그는 마침내 심판이 그들을 따라잡을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24:18-25).
빌닷은 이제 할 말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는 단지 이렇게 묻습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서서 의롭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너무 영광스러워서 달과 별조차도 그분과 비교할 때 거의 빛을 발하지 못하는데 온 땅에서 누가 순결한가?"(25:4, 5).
욥은 또다시 비꼬는 말을 합니다, "오, 네가 나처럼 약한 사람들을 도와주다니! 네가 힘없는 사람들을 구해주다니! 오, 네가 내 어리석음을 깨우쳐주었다! 너는 참으로 현명한 말을 하였다! 이 현명한 것들을 모두 어디서 배웠는가?"(26:1-3). 그런 다음, 그분은 가장 예리한 질문을 합니다: "너희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영은 누구의 영이냐?"(26:4). 그는 계속해서 "땅을 허공에 매달고" 수많은 경이로움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위대함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런 다음 그는 모든 창조물이 "그분의 길의 가장자리"일 뿐이므로 우리가 이 위대하신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고 말합니다(26:5-14). 우리 모두가 그것을 기억하여 우리 자신에 대해 의기양양한 생각을 갖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는 "내 양심이 깨끗하니"(27:6)라고 말하며 결론을 내립니다. 이것이 욥의 마지막 대답입니다.
욥의 독선(Job's Self-Righteousness)
빌닷에게 대답한 후, 욥은 자신의 삶에서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행한 많은 선한 일의 목록을 제시하면서 자신을 정당화합니다(26~31장). 우리가 이 장들을 읽으면서, 욥이 하나님과 그분의 길에 대해 가졌던 엄청난 빛과, 성경도 없고 내주하시는 성령도 없던 시절에 그가 오래 전에 살았던 높은 삶의 기준을 보는 것은 놀랍습니다. 이 장에서 몇 가지 사항을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그 내용은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고 오늘날 훨씬 더 높은 기준에 따라 생활하도록 도전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는 금을 찾기 위해 땅을 깊이 파지만 지혜를 구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은지에 대해 말하면서 시작합니다(28:1,12,13). 그는 계속해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28:28)고 말했습니다. 솔로몬은 1000년 후 잠언 9장 10절에서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의심할 바 없이 그는 욥기를 읽음으로써 그러한 이해를 얻었을 것입니다.
29장에서, 욥은 가난한 사람, 고아, 과부, 눈 먼 사람, 저는 사람, 궁핍한 사람을 도우며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살았던 과거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30장에서, 그는 자신이 행한 모든 선한 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고난을 받고 있으며 하나님에 의해 그토록 낮아졌다고 불평합니다.
31장에서 그는 자신의 삶의 의로움을 말합니다. 그는 여자를 탐하지 않도록 눈을 조심했습니다(31:1). 그는 예수께서 마태복음 5장에서 이 죄에 대해 말씀하시기 2000년 전에 이 죄에 대한 빛을 가졌습니다. 그는 어떤 거짓도 없이 온전하게(integrity) 살았으며(31:5,6), 아내에게 불충실한 적이 없었고(31:9-12), 그는 종들을 친절하게 대했으며(31:13~15), 가난한 자와 과부를 도왔고, 고아들을 자기 자녀처럼 키웠으며(31:16-23), 그는 금을 의지하지도 않았고 우상을 숭배하지도 않았으며(31:24-28), 그는 그의 적이 패배했을 때 기뻐하지 않았으며(31:29,30), 그는 낯선 사람들을 돌보았고(31:31,32), 죄를 지을 때마다 자신의 죄를 자백했고(31:33), 그는 사람들의 멸시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고(31:34), 자기 땅을 올바로 돌보기도 하였습니다(31:38-40). 그는 지금 하나님께 응답해 달라고 부르짖습니다(31:35).
우리는 이 장들에서 욥이 어떤 경건한 사람인지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의 많은 영역에 대해 빛을 받았고 매우 도움이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에 대한 빛이 없었습니다: 영적 교만 - 그의 의에 대한 교만. 하나님은 욥을 사랑하셨고, 욥이 이 땅을 떠나기 전에 겸손이라는 한 가지 덕목 또한 갖추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욥에 대한 무한한 사랑으로 그를 경건하고 겸손하게 만들기 위해, 그가 이 깊은 시련을 겪게 하셨습니다.
경건한 사도 바울이 교만해질 위험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도 고난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사탄의 사자인 육체의 가시를 주셨습니다(고후 12:7). 욥에게도 사탄의 사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왜 그런 일을 당했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욥은 몰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많은 경건한 사람들을 고난과 오해와 반대와 박해로 인도하셔서 - 그들을 겸손하게 하고, 깨뜨려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실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겸손한 자에게만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욥이 불평했다고 비난할 수 없습니다. 그에게는 성경도, 내주하시는 성령도, 그를 격려해 줄 형제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결코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불평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엘리후의 논평(Elihu's Comments)
이제 우리는 마지막 설교자인 엘리후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다른 세 명의 설교자보다 어렸지만 그들 모두보다 더 현명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 다른 면에서 현명하지 못했습니다. "엘리후는 분노가 타올라 소리를 질렀다"고 되어 있습니다(32:5-6).
내 조언은 항상 이렇습니다: "화가 나면, 입을 열지 마세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설교도 절대로 하지 마십시오, 사람이 성내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약 1:20 참조). 당신이 이 간단한 법칙을 따르면, 수백 가지의 죄를 짓는 것에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후에게는 그런 지혜가 없었습니다. 그는 화가 나서 말을 이었습니다. 그는 욥이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독선적으로 화를 냈습니다.
기본적으로 이 설교자들은 모두 이렇게 말했습니다, "욥, 네가 죄를 지었다. 네 자녀들이 죄를 지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다 위선자라는 것을 아신다." 그러나 사실은, 이들 설교자들 중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마음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많은 지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 그리고 아마도 엘리후는 앞선 세 사람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후는 한 번도 고난을 직접 당해 본 적이 없는 열심 있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이 설교하고 조언을 하기 시작할 때, 그들이 말하는 모든 것은 단지 이론에 불과할 것입니다. 만일 바울이 거기 있었다면, 그는 욥에게 욥이 고난을 당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 왜냐하면 바울은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엘리후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시련과 고난의 경험이 없이는, 그의 사역은 얄팍했을 것입니다. 엘리후는 욥뿐 아니라 다른 세 설교자에게도 화를 냈습니다(3절).
엘리후는 우리 모두가 진지하게 고려할 수 있는 몇 가지 좋은 말을 했습니다:
"나는 말이 가득합니다. 내면의 영이 나를 강권합니다"(32:18). 우리 마음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차야 하며, 성령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대로만 말해야 합니다.
"나는 누구에게도 편애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아첨하지 않을 것입니다"(32:21). 하나님은 편파성과 아첨을 미워하십니다. 이 두 가지 죄는 우리 중 누구에게서도 발견되어서는 안 됩니다.
"나를 두려워한다고 해서 누구도 겁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 내 압박이 누구에게도 큰 부담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33:7). 누구도 우리를 두려워하거나 우리의 존재로 인해 겁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 어느 누구도 그의 자유 의지를 빼앗는 우리의 어떤 압력으로 인해 행동을 강요당해서는 안 됩니다.
33장 14~30절에서,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세 가지 다른 방식에 관해 몇 가지 놀라운 진리를 말했습니다:
1. 우선 한두 번 직접 말씀하십니다(14절).
2. 만일 그들이 그분의 말을 듣지 않으면, 그분은 그들이 밤에 자고 있을 때 꿈으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15절).
3. 그래도 듣지 않으면, 그분은 질병을 통해 그들을 징계하심으로써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19-22절).
이 모든 말의 목적은 사람을 교만과 그에 따른 지옥에서 구원하는 것입니다(17,18절).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사람에게 말하고 설명해 줄 사자(messenger)가 있어야,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죄를 자백하여 온전하게 치료받고 지옥에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23-28절).
그러나 엘리후가 이와 같은 말을 할 때 그의 눈이 멀었음이 드러납니다: "욥처럼 오만한 사람이 또 어딨겠습니까?"(34:7 - Living). 혹은 다른 말로 하면, "아담 때부터, 세상에 욥처럼 교만한 사람이 있었던 적이 있었습니까?"입니다. 그러면 욥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은 어떠하였습니까?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한 사람은 세상에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엘리후는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완전히 벗어났기 때문에, 욥에 대한 그의 견해는 하나님의 견해와 정반대였습니다.
엘리후는 예수님 당시의 성경학자들과 같았습니다 - 바리새인, 안나스, 가야바 - 그들은 예수님이 마귀들의 우두머리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같이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았습니다. 그에게 그렇게 가르친 것은 베드로의 영리함이나 성경 지식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여러 시대에 걸쳐, 많은 영리하고 종교적인 사람들은 경건한 사람에 대해 하나님께서 그 (경건한)사람에 대해 생각하시는 것과 정반대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종교인들이 당신이 틀렸다고 생각하더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오직 경건한 사람만이 다른 경건한 사람의 진정한 가치를 평가할 수 있습니다.
엘리후는 계속해서 하나님에 관해 놀랍도록 진실인 몇 가지를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누구도 멸시하지 않으십니다"(36:5). 하나님은 완전하시기 때문에, 누구도 멸시하지 않으십니다. 불완전한 우리는 다른 인간을 멸시합니다. 우리가 완전해질수록, 우리는 더욱 하나님처럼 되어, 아무도 멸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높으십니다. 우리는 전능자의 능력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공의로우시고 자비로우시기 때문에, 우리를 압제하지 않으십니다. 모든 곳의 사람들이 그분을 두려워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진실로 지혜로운 사람은 그분을 경외할 것입니다"(36:26; 37:23, 24).
그런데 엘리후는 또한 하나님에 관해 잘못된 말을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일생 동안 형통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들의 모든 삶은 건강과 부로 즐거울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면, 전쟁에서 망하여 죽을 것입니다"(욥 36:11, 12). 그러므로 우리는 엘리후가 또한 "건강과 부" 번영-복음 설교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오늘날에도 많은 설교자들로부터 듣고 있는 거짓 복음입니다.
욥은 엘리후에게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아무 대답도 안했습니다!
욥에게 하신 하나님의 질문(God's Questions to Job)
그러고 나서 하나님께서 욥에게 대답하셨습니다(38~41장).
(하나님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네 명의 설교자들이 말한 방식과 비교하여, 하나님께서 욥에게 말씀하신 방식이 완전히 다른 것을 주목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욥이 은밀히 죄를 지었다고 한 번도 책망하지 않으셨고, 죄로 인해 벌을 받는다고 말씀하신 적도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욥은 즉시 죄를 깨닫고 회개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말하는 방법과 설교하는 방법에 관해, 우리 모두는 이 일로부터 참으로 큰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의 방법과 다릅니다. 많은 설교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범했다고 생각하는 죄에 대해 말함으로써, 사람들이 죄를 깨닫게 하려고 합니다. 설교자들 자신이 고발자의 영으로 말함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죄책감을 증가시키는 것 외에는 그러한 접근 방식에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크신 자비와 가엾이 여기심으로, 인간에게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말씀하십니다 - 그리고 인간은 자신의 죄를 완전히 깨닫고 이렇게 말합니다, "오 하나님, 나는 부패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나는 회개합니다. 나를 용서해주세요." 하나님은 인자하심으로 사람들을 회개에 이르게 하십니다(롬 2:4).
하나님께서 (이 장들에서) 욥에게 던진 세 가지 기본적인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네가 창조의 이러한 경이로움을 이해할 수 없다면, 영적 현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느냐?"
2. "내가 나의 모든 창조물을 다스린다면, 네 양 떼에 임한 번개와, 네 종들을 죽인 사바인과 갈대아인과, 네 자녀의 집에 닥친 폭풍을 내가 어찌할 수 없을 줄로 아느냐?"
3. "네가, 내가 만든 악어 앞에 설 수 없다면, 어떻게 내 앞에 설 수 있겠느냐?"(41:10).
하나님은 욥에게 그분의 주권과 모든 피조물에 대한 통제권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이 말해야 할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욥은 겸손해졌습니다. 네 명의 설교자들이 몇 시간 동안 직접 공격을 가했지만 아무 성과도 얻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간접적인 접근으로 모든 것이 단 몇 분 만에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통제에 대한 믿음은, 우리가 문제와 고난과 적들을 만날 때, 우리 마음에도 안식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주님은 욥에게, "네가 아직도 전능자와 논쟁하려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욥 40:2). 지금까지의 모든 논쟁에 대해 신속하게 대답했던 욥은 이제 침묵합니다. 그는 이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저는 아무것도 아니며 할 말이 없습니다. 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40:4,5).
영감받은 성경의 첫 번째 책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무가치함을 인정하여, 그분이 우리 삶의 모든 것이 되시기를 원하신다는 점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은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축복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군가를 사용하시려면 먼저 그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드셔야 합니다.
바울이 말했습니다, "바울은 무엇이고, 아볼로는 무엇이냐?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지만,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고전 3:5,6). 즉, 전도하는 사람도 아무것도 아니고,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모든 것이시므로 그분만이 모든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그것이 바울의 삶의 비결이었습니다 - 그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0(zero)이었습니다.
어딘가에서 구원받은 영혼들의 공을 차지하기 위해 애쓰는 설교자들이 있습니다. "다른 목사가 내 교회에서 내 양을 훔쳐갔다" 등의 불평을 하는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걸까요? 아직 0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나의교회"라고 말할 때, 어느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교회는 어느 교회입니까? 모든 사람은 반드시 "그들의 교회"에서 떠나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심겨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교회"는 파괴되어야 합니다.
욥이 자신이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더 이상 자신을 정당화하지 않겠다고 결심할 수 있는 지점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까? 그 후, 욥은 남은 생애 동안,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한"(약 1:19)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6장(26~31장)에 걸쳐 한 긴 연설은 성경 전체에서 발견되는 가장 긴 자기 정당화입니다. 내내 독선의 냄새가 납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교만한 냄새를 맡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마침내 이 독선적인 사람은 제로가 되었습니다. 누구 설교의 결과로입니까? 환상과 꿈을 말한 사람을 통해서였습니까? 조상의 전통을 신성하게 간직한 사람을 통해서였습니까? 자칭 "예언자"를 통해서였습니까? 아니면 그가 말한 것이 너무 정확했던 그 사람을 통해서였습니까? 이 네 명의 설교자 중 누구도 그를 도울 수 없었습니다. 욥이 이곳(0)에 올 수 있도록 도와주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분은 다섯 번째 설교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분입니다.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십시오"(엡 5:1).
하나님의 짧은 메시지가 욥에게 얼마나 놀라운 일을 해냈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다른 설교자들의 길고 반복적인 설교를 통해서는 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답은: 하나님은 욥을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네 명의 설교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사람을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들에게 전할 올바른 말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들을 비판하고 비난할 뿐, 축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섬기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들에게 말할 말씀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품고 하나님의 백성을 마음에 품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들을 위한 예언의 메시지를 주실 것입니다.
다른 네 명의 설교자들은 욥의 죄를 정죄하려 했지만, 하나님은 욥을 예배자로 만들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성공하셨습니다. 인도의 기독교 교회로서, 우리가 믿지 않는 세대에게 보여주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이 우주의 최고 통치자이시다. 우리는 반대자들의 위협에 겁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 - 우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우리 머리털 하나 만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항상 비판할 준비가 되어 있는 대신, 측은히 여기는 마음(compassion)을 가지고 행동하는 법을 배우도록 합시다. 정확한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섣부른 판단을 절대로 내리지 맙시다. 사실을 안다고 생각하더라도, 아직 모르는 다른 사실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합시다. 그러므로 항상 자신을 낮추고 "주님,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내 입에 손을 대고 조용히 있겠습니다."라고 말하십시오.
욥은 또한, "주여, 내가 전에는 주님에 대해서 들었더니, 이제는 주를 뵈었나이다"(욥 42:5)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듣는 것과 그분을 개인적으로 아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요한은 밧모섬에서 예수님을 보고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욥도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했습니다.
욥은 또한 하나님을 비난했던 것을 철저히 회개하고 자기가 한 말을 모두 취소했습니다(42:6). 그리고 우리가 그 후 곧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즉시 그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여호와께서 엘리바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한다. 이제 너희 죄(나의 종 욥에게 말한 것)를 위하여 제사를 드리고 나의 종 욥에게 너희를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구하라. 너희가 비난한 사람이 이제 너희의 중재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욥을 어떻게 그분의 종으로 인정하시는지 주목하십시오(42:7,8).
주님은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내가, 그들이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여,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계 3:9)고 말씀하셨습니다. 욥과 그의 친구들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회개하고 그 말들을 철회한 순간, 그는 용서받았고 그 모든 말은 하나님의 기록에서 지워졌습니다. 욥이 한 좋은 말만 기록에 남았습니다!
그 좋은 말은 다음과 같은 진술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죽이시더라도, 나는 그분을 믿겠습니다"(13:15).
"나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고 마지막 날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임을 압니다. 그리고 내 몸이 내 몸 속에서 썩은 후에, 나는 내 눈으로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19:25).
"그분은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든 세부 사항을 알고 계십니다"(23:10 - Living).
이것이 욥이 했던 몇 가지 놀라운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가 했던, 분노한 말은 모두 지워졌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큰 격려가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에는 우리가 하나님께 회개하고 자백한 어떤 죄도 기록되지 않을 만큼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한 선한 믿음의 고백만이 하나님의 기록에서 발견될 것입니다.
그런 다음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은 욥에게 가서 그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욥은 그들을 기꺼이 용서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나는 그 설교자들이 실제로 회개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해 기도하자마자, 주님은 욥의 재산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42:10). 곧 그는 그가 잃은 모든 것의 두 배를 주님께 받았습니다.
그는 심지어 10명의 자녀를 더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아내가 하나님이 그들의 가족에게 얼마나 선하신지를 본 후에, 그녀도 회개하고 경건한 여자가 되었고 남편의 진정한 돕는 자가 되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래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하게 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자신의 삶에서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두 배의 축복을 받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영감받은 성경의 첫 번째 책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몇 가지 영광스러운 진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께서는 그분에게 경배할 경건한 사람들을 온 세상에서 찾고 계십니다.
2. 경건한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은 사탄의 공격의 표적이 됩니다.
3. 사탄은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야만 우리를 공격할 수 있습니다.
4. 경건한 남자에게는 완고한 아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녀를 변화시키실 수 있습니다.
5. 경건한 사람들은 종교적인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을 것입니다.
6. 하나님과 사탄은 경건한 사람들의 행동을 면밀히 감시하고 있습니다.
7. 완전함에 이르는 길은 고통과 오해를 통해서입니다.
8. 건강과 번영은 하나님의 축복의 표시가 아닙니다.
9. 우리가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볼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10. 하나님은 우리의 궁극적인 유익을 위해 모든 것을 계획하십니다.
시편은 구약의 다른 어떤 책보다 신약에서 더 자주 인용됩니다. 시편 150편 중, 적어도 50편이 신약성경에 인용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시편을 자주 인용하셨습니다.
시편은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각 부분은 축복으로 마무리됩니다.
l 제1권 - 시편 1-41편
l 제2권 - 시편 42-72편
l 제3권 - 시편 73-89편
l 제4권 - 시편 90-106편
l 제5권 - 시편 107-150편
시편 중 70편 이상은 다윗이 썼고, 일부는 아삽이, 일부는 고라 자손이, 두 개는 솔로몬이, 한 개는 모세가, 한 개는 헤만이, 한 개는 에단이 썼습니다. 다른 저자들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시편은 5권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 책은 시편 1-41편입니다. 두 번째 책은 시편 42-72편입니다. 세 번째 책은 시편 73-89편입니다. 네 번째 책은 시편 90-106편, 다섯 번째 책은 시편 107-150편입니다. 이 다섯 권의 책에서는 각각 많은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 다섯 권의 시편을 모세의 처음 다섯 권(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과 비교하는데 - 이 둘 사이에는 어느 정도 유사점이 있습니다.
시편의 많은 부분은 의인의 운명과 악인의 운명을 대조합니다. 많은 시편에서 자주 발견되는 주제는, 적들로부터 구원해 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하는 것입니다. 시편 150편 중 72편은 시편 기자의 적들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우리는 일부 시편을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다른 시편에서는 주제나 중요한 구절만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책 - 의인과 악인
시편 1편은 시편 전체에 대한 소개입니다. 이 시편은 죄악의 길을 떠나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복된 사람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악을 피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악에서 깨끗해진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은 우리가 읽은 말씀을 자주 생각하고 그것이 우리 마음에 스며들도록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 우리가 먹은 음식이 오랜 시간에 걸쳐 소화되어 피와 살과 뼈로 변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실제로 식사하는 데 보내는 시간이 매우 적습니다. 소화 과정은 몇 시간 동안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데 아주 짧은 시간만 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묵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강가에 심은 나무와 같아서 항상 열매를 맺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할 것입니다. 우리 손으로 하는 일과 우리가 하는 말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가 살기를 원하시는 방식입니다.
시편 2편은 그리스도의 통치에 대해 말하는 메시아의 시편입니다. 시편의 열 세편에는 메시아(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이 적어도 18번 나옵니다. 이것은 메시야가 왕으로서 통치하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왕은 세상으로부터 거부당합니다(1-3절 - 베드로는 사도행전 4:25,26에서 이 구절을 인용함). 그러나 "하늘에 앉으신 그분이 웃으실 것입니다"(4절). 그리고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아들이다. 나에게 구하면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땅 끝까지 네 소유가 되게 하리라. 네가 철로된 지팡이로 그들을 깨뜨리리라"(7~9절). 어느 날, 예수님께서 이 땅을 다스리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날이 오기 전에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는" 권고를 받고 있습니다.
시편 3편은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나 예루살렘에서 도망쳐 나올 때 지은 시편입니다. 그는 여기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표현합니다. 그는 "여호와여 주는 나의 영광이시요 내 머리를 드시는 이시니이다"(3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보통 일요일 아침 편안한 건물에서 그 구절을 노래합니다. 다윗이 압살롬으로부터 목숨을 구하기 위해 도망치면서 부른 노래입니다!!! 이 시편들 중 많은 부분은 다윗이 자신의 궁전에 있을 때가 아니라, 압박을 받고 동굴에서 동굴로 도망다닐 때 쓴 것입니다. 다윗이 압박을 받지 않았다면, 이러한 영감받은 시편의 대부분은 결코 쓰여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가장 큰 교훈 중 일부는, 압박을 받는 순간에 있습니다. 압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게 하십니다. 치약 튜브를 짜내면 치약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우리의 원수들을 통하여 우리를 압박하시므로, 그분의 말씀이 우리에게서 나오도록 하십니다. 압박이 클수록 우리의 사역은 더욱 풍성해집니다.
시편 4편은 저녁기도입니다(4:8). 이전 시편은 아침기도였습니다(3:5). 둘 모두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능력에 대한 믿음을 표현합니다. "주님은 자신을 위해 경건한 자를 구별하셨습니다"(3절).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오직 그분의 것이 되도록 구별되었습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분노의 죄에 대해 경고를 받습니다: "(분노하여) 떨지라도 죄를 짓지 말라"(4절 - NASB 여백). 그리고 이어서, "네 침상에서 마음속으로 묵상하고 가만히 있으라"고 말합니다. 옛 언약 아래서, 그들은 분노를 이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진정될 때까지 침대에 누워 있으라는 권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침상에서 "여호와께 의의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5절) - 그리고 그들의 분노가 기쁨으로 바뀌었을 때만 일어나서, "주님, 당신이 내 마음에 기쁨을 주셨습니다"(7절)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아직 분노를 극복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실용적이고 좋은 조언입니다. 새 언약에는 에베소서 4:26에 인용되어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다음 우리는 "모든 분노를 버리라"(엡 4:31)는 권고를 받습니다. 이것이 새 언약 아래 있는 우리의 특권입니다.
시편 5편은 원수들로부터 보호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주님, 아침에 내 목소리를 들으시리이다.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겠나이다"(3절) - 이것은 매일 아침을 시작하는 좋은 방법입니다. "주를 신뢰하는 자들로 하여금 주께서 그들을 보호하심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게 하소서"(11절).
시편 6편은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내 모든 원수가 부끄러워하고 크게 놀라리라"(10절) - 믿음의 고백.
시편 7편은 하나님이 정당성을 입증해 주시기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다윗은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 만일 내 손에 불의한 일이 있고, 나와 화목한 자들에게 내가 악으로 갚았다면, 내 원수가 나를 박해하게 하소서"(3~5절). 남에게 악을 행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일입니다. 죄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 자기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죄와 남에게 해를 끼치는 죄입니다. 마약 중독과 흡연은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죄입니다. 그러나, 험담은, 다른 사람의 평판을 손상시킵니다. 그래서 험담은 더 심각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악한 자들에게 날마다 진노하십니다"(11절). 그러나 그것을 믿는 기독교인은 얼마나 됩니까?
시편 8편에서는 인간의 작음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비교합니다. 이것은 또 다른 메시아 시편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성전에서 예수님을 찬양하고 있고 바리새인들이 떠들석한 찬양으로 화를 냈을 때, 예수님은 이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갓난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을 위한 찬양을 준비하셨다"(마 21:16).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처럼, 바리새인들은, 떠들석한 찬양과 예배가 아닌 장례식과 같은 엄숙함으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린이들의 찬양을 기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떠들석한 찬양과 경배로 가득한 천국을 생각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 2절에서 "힘(strength)"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곳에서, 예수님은 "찬양(praise)"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것에 주목하십시오. 그 목적은 "대적을 침묵하게 하려 함"(2절)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함으로써, 우리는 사탄의 입을 막을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심 어린 찬양은 마귀가 싫어하는 것입니다. 4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나이까? 그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만드셨나이다"라는 말이 히브리서 2장 6-8절에 인용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잠시동안 천사보다 낮은 자리에 계셨던 것에 대한 언급입니다 - 왜냐하면 그분은 죽으셨지만, 천사는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께서는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셨으니, 만물이 그분의 발 아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몸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우리 발 아래 있습니다.
시편 9편은 그(다윗)의 원수들을 벌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입니다. "당신의 이름(예수님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당신을 신뢰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께서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10절). 하나님은 부활의 하나님이십니다: "나를 사망의 문에서 끌어올리시는 주여(13절).
시편 10편은 악인들을 멸하시기를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입니다. "악한 자는 교만한 얼굴로 하나님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아와 억압받는 땅의 사람들을 돌아보시어, 세상의 악한 사람들이 다시는 그들을 압박하거나 두렵게 하지 못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4,18절).
시편 11편은 여호와께서 의인을 보호하시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과 악인을 다 시험(test)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5절). 그리고 그분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려는 자를 미워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실 때, 우리를 더 높은 수준으로 승격시키려고 하십니다 - 마치 학생이 진급하기 위해 시험을 치르는 것과 같습니다.
시편 12편은 혀의 사용에 관한 시편입니다. 충실하고 경건한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말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다음 세 구절에서는 혀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 거짓, 아첨, 불성실, 오만은 혀를 통해 표현됩니다. 경건한 사람의 주된 특징은 그의 말의 자비로움입니다. 그러나 불경건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입술은 우리 자신의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말할 것이다"(4절). 자기 혀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온전한 사람입니다(약 3:2). 경건한 사람은 "여호와의 말씀은 풀무에 일곱 번 단련한 은과 같이 순결한 말씀"임을 인식합니다(6절). 그래서 그는 말하기 전에, 자신이 무슨 말을 할지 생각합니다. 확신이 서지 않으면, 그는 자신이 하려고 계획한 말을, 그의 마음속의 용광로에 던져넣고 스스로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있을까? 좀 더 부드럽게 표현할 수 있을까? 나는 진실을 말하고 있는 걸까? 내가 사랑으로 말하고 있는 걸까?" 등. 그런 다음 그는 무엇을 말할지, 어떻게 말할지 결정합니다. 누군가를 바로잡기 위해 편지를 쓴다면, 필요하다면 그것을 보내기 전에 일곱 번 다시 쓸 것입니다.
시편 13편은 환난 중에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너그럽게 대해 주시므로, 내가 주님을 찬송하리로다"로 끝맺습니다.
시편 14편은 악인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모든 무신론자는 어리석은 자입니다(1절). 2절과 3절은 타락한 인간의 상태를 설명하며 로마서 3장 10~12절에 인용되어 있습니다.
시편 15편은 사람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 살 수 있는 자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존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우리는 사람들을 존중합니다 - 그러나 세상에서와 같이, 그들이 부자이거나 유명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편을 천천히 읽고 그 빛 속에서 당신의 마음을 살펴보십시오. 이렇게 사는 사람은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5절)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머지않아 세상의 많은 것들이 흔들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시편 16편은 다윗이 주님과 성도들이 자신이 원하는 전부라고 말하는 또 다른 메시아 시편입니다. 3절에서, 그는 하나님의 백성을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보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8절,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라. 그분이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나는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는 베드로가 주 예수님을 언급하면서 인용한 구절입니다(행 2:25). 우리는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야 하며, 우리가 말하거나 행하는 모든 일에서 항상 주님을 우리 앞에 모셔야 합니다. 그러면 그분은 우리의 오른편에서 우리도 또한 도와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하나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습니다(11절). 기쁨과 즐거움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만 가장 순수한 형태로 발견됩니다. 세상의 기쁨과 즐거움은 얄팍하고 짧습니다.
시편 17편은 다윗이 자신을 압제하는 자들로부터 보호해 달라고 간구하는 또 다른 시편입니다. 15절은 부활의 아침에 대해 말합니다. 그때 우리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바라보며, 주님을 닮은 것에 만족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두 가지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볼 때 만족할 것이라는 것과 또한 우리가 그분과 같을 때 만족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복된 소망은 이중적입니다 - 그분을 보고 그분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요일 3:2).
시편 18편은 구원의 또 다른 시편입니다. 16-19절은 우리 구원의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그분이 우리 어둠을 밝히시며 우리 길을 완전하게 만들 것입니다"(28,32절). 이 시편은 사무엘하 22장에 완전히 인용되어 있습니다.
시편 19편은 하나님의 일과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는 하나님에 대한 두 가지 증거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늘(1~5절)이고, 다른 하나는 그분의 기록된 말씀(7~11절)입니다. 12절과 13절에서, 다윗은 네 가지 죄에서 자신을 지켜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 그릇된 생각, 은밀한 죄, 고의로 짓는 죄, 큰 죄 - 각각은 이전 것보다 점점 더 심각해집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기에 우리가 스스로 지킬 수 있는 한 가지 죄는 바로 말의 죄입니다. "주님, 내 입의 말과 내 마음의 묵상이 주님 보시기에 받으실 만한 것이 되기를 원합니다"(14절).
시편 20편은 원수를 이기기 위한 기도입니다. 다윗의 확신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병거를,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오늘날, 어떤 사람은 돈을, 어떤 사람은 사람의 도움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리로다"(7절).
시편 21편은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입니다. "주께서 그의 마음의 소원을 그에게 주셨고 그의 입술의 청을 거절하지 아니하셨나이다. 그가 생명을 구하매 아버지께서 그에게 영생을 주셨나이다"(2,4절).
시편 22편은 기도와 찬양이 담긴 또 다른 메시아 시편입니다. 이 시편과 다음 두 시편은 "목자" 시편입니다. 시편 22편은 과거(십자가)에 대해 말하고, 시편 23편은 현재(현재 우리의 목자이신 주님)에 대해 말하고, 시편 24편은 미래(예수께서 영광의 왕으로 통치하실 때)에 대해 말합니다. 1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벌레 같고 물처럼 쏟아지셨습니다(6,14절). 개들이 그분을 둘러싸고 그분의 옷을 나누었습니다(16,18절). 그러나 22절에서, 부활에 이르렀습니다: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전하리라." 예수님은 부활하신 날 처음으로 제자들을 직접 형제라고 부르셨습니다(요 20:17). 이 구절은 히브리서 2장 12절에서도 인용되었습니다. 이어 말합니다, "내가 회중(교회) 가운데서 주를 찬양하리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여, 그를 찬양하라"(22,23절). 예수님은 교회 안에서 아버지를 찬양하도록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만이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권고를 받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찬양만이 진실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22절부터 30절까지에서 십자가의 일과 부활의 결과를 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에 관한 세 구절(22,23,26절)과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에 관한 두 구절(27,29절)이 있고, 이어서 섬김에 관한 한 구절(30절)이 있습니다. 그래서 찬송과 찬송과 찬송이 있고, 그 다음에는 예배와 예배가 있고, 그 다음에는 섬김이 있습니다. 효과적인 봉사를 위한 준비로서 찬송과 예배의 중요성을 이해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시편 23편은 목자의 시편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시면, 우리에게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1절). 그분은 우리를 눕게 만드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회복시키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이끄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자주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점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 안에서 일하시도록 허용할 때에만, 하나님을 위해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악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식탁을 준비하시고 그분이 우리 머리에 기름을 부으십니다. 그러면 우리의 잔이 넘치기 시작하고, 우리가 영원한 집에 이를 때까지 선하심과 자비가 모든 곳에서 우리를 따르게 됩니다.
시편 24편은 예수님께서 왕으로서 땅을 통치하실 때와 "땅이 여호와의 것이 될 것"을 언급하는 예언적 시편입니다. 그 때에 그분의 거룩한 산에서 그분과 함께 거할 사람들을 설명합니다(1,3절).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악의 세력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신 영광의 왕이신 주님을 환영하라고 촉구합니다.
시편 25편은 인도와 보호에 관한 시편입니다. 다윗의 기도는 "주여, 주의 길을 내게 보이소서.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4절).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자(8절), 자신을 낮추는 자(9절), 그분의 계명에 순종하는 자(10절), 그분을 두려워하는 자(12절), 그분을 바라보는 자(15절)에게 인도하심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분의 비밀을 보이십니다(14절).
시편 26편: 여기에서 다윗은 여호와께 자신의 온전함을 선포하고 적들로부터 보호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우리의 양심이 깨끗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를 보호해 달라고 담대히 구할 수 있습니다.
시편 27편은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 없는 신뢰의 시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군대가 자기를 둘러 진 쳐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다윗을 지키시기 때문입니다(1-3절). 다윗이 여호와께 바라는 것은 오직 한 가지 곧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과 항상 하나님의 성전에 거하는 것이었습니다(4절). 이것이 우리도 또한 바라는 유일한 것이어야 합니다.
시편 28편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와 함께 하나님의 신속한 응답에 대한 찬양이 이어집니다. 여호와는 다윗의 힘이요 방패이십니다(7절).
시편 29편은 주님의 음성에 관한 것입니다. 일곱 번이나 언급됩니다. 우리는 창세기 1장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성전(교회)에 있는 모든 것은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9절).
시편 30편은 죽음에서 구원받은 것에 대한 감사의 시입니다. "주께서 나의 슬픔을 바꾸어 나를 위하여 춤으로 바꾸사, 내 혀로 주를 찬양하고 잠잠하지 않게 하셨나이다"(11,12절). 우리는 그분의 모든 구원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결코 중단해서는 안 됩니다.
시편 31편은 도움을 구하는 또 다른 부르짖음과 찬양이 이어집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이 어찌 그리 큰지요. 주께서 그들을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시어 사람들의 음모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은밀히 보호하시는 은신처에 두시어 말다툼을 피하게 하실 것입니다"(19-20절). 그곳은 우리 주변에 있는 적들의 모든 쉴 새 없이 나불거리는 혀로부터, 우리 자신을 숨길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 - 그분의 임재 안입니다.
시편 32편에서는 죄를 용서받고 죄를 덮어주는 복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축복된 일이지만, 우리의 죄가 깨끗하게 씻겨지는 새 언약 아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만큼은 아닙니다. 옛 언약 아래서는 죄를 깨끗하게 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황소와 염소의 피는 죄를 덮을 수만 있지만, 예수님의 피는 우리를 깨끗하게 합니다. 죄가 덮어지는 것은 다음과 같이 묘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죄는 모두 칠판에 쓰여진 다음 종이로 덮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종이를 들어 올리면, 죄가 여전히 보입니다. 하지만, 씻김은 젖은 스펀지로 모든 것을 닦아내는 것과 같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질병이 자백하지 않은 죄로 인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4절). 그가 그것을 고백하자, 그는 치유되었습니다. "주님을 찾을 수 있는 때"가 있으며 우리는 그 시간, 즉 현재의 은혜의 시간에 그분께 기도해야 합니다(6절). 주님은 또한 우리를 가르치고 인도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8절).
시편 33편은 여호와만이 그분의 백성의 도움이심을 선포합니다. "여호와의 눈은 그분을 경외하는 자를 항상 살피사, 그들을 건져내시고 기근의 때에 살려 주시는도다"(18,19절).
시편 34편은 주님을 의인의 돕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다윗이 아비멜렉 왕 앞에서 미친 척하면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음에서 건지셨을 때 이 시를 썼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나는 언제나 주님을 송축하겠습니다. 이 불쌍한 사람이 부르짖자, 주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1,6,8절). 다윗은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들을 둘러 진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7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또한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분의 귀는 항상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그리고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계신다"(15,18절)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윗은 계속해서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의인은 고난이 많다"(19절)고 말합니다. 당신이 의롭다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결코 생각하지 마십시오. 더 많은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너희를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실 것이다"(19절). 그 다음에는 메시아에 관한 또 다른 예언이 있습니다: "그분은 그의 모든 뼈를 지키시며; 그 중에 하나도 꺽이지 아니하리라" (20절) - 이 예언은 십자가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시편 35편은 주님께 자신의 적들과 싸워달라고 구하는 또 다른 기도입니다. 악의 있는 증인들이 다윗을 대적하여 일어났습니다, 다윗이 과거에 그들에게 선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11-21절). 이것은 가룟 유다에게 선한 일을 하신 예수님의 경험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또한 많은 성도들의 체험이기도 했습니다.
시편 36편은 인간의 악함과 하나님의 선하심을 대조합니다. "그분을 신뢰하는 자는 하나님의 집의 풍성한 것을 마음껏 마실 것입니다"(8절). 9절은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나이다." 이는 우리가 결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정죄에 이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우리가 하나님의 빛 안으로 들어올 때에만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상태를 실제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결코 정죄감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시편 37편은 의인의 축복과 악인의 멸망을 다루고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은 옳은 일을 행할 뿐만 아니라, "주 안에서 기뻐하는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그 마음의 소원"을 얻습니다(4절). 그러한 사람의 발걸음은 주님께서 정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말했듯이, "선한 사람이 멈추는 것도 주님께서 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을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인도하시며 때로는 멈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사람이 넘어져도 별 일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잡아 주시기 때문입니다(23,24절). 우리가 주님을 참을성있게 기다리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입니다(34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입니다.
시편 38편: 다윗은 자신이 병들고 원수들에게 공격도 당하니, 속히 도와달라고 주님께 간구합니다.
시편 39편은 인생의 짧음을 말하고 자비를 구하는 기도로 끝납니다. "주님, 나의 종말을 알게 하소서. 내가 얼마나 덧없는 존재인지 알게 하소서"(4절). 다윗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징계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11절).
시편 40편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종들을 위해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말하며 적들로부터의 구원을 요청합니다. 이것은 또 다른 메시아 시편입니다. 히브리서 10장 5~7절에는 6~8절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큰 차이점을 주목하세오. 다윗은 오직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기뻐하나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더 나아가 "하나님이여 내가 당신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옛 언약 아래 있는 사람들이 성취할 수 있는 것과 새 언약 아래 있는 우리가 이룰 수 있는 것의 차이입니다. 그 성도들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기뻐할 수 만 있었습니다. 우리는 실제로 그것을 할 수 있습니다.
시편 41편은 치유와 원수에 대한 승리를 요청합니다. 주님께서는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돈이 필요한 사람)과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복음이 필요한 사람) 둘 다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을 환난에서 건져내시며, 원수들에게서 보호해 주시고, 그가 아플 때 고쳐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시편 후반부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그의 적들로부터 도움을 구합니다 - 그와 함께 식사를 한 친한 친구도 포함됩니다. 이 구절은 요한복음 13장 18절에서 가룟 유다를 언급하는 것으로 인용되었습니다. 11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이 그를 기뻐하신다는 유일한 증거는 그의 원수들이 패배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경우, 이것은 우리 육신의 정욕에 대한 승리를 의미합니다.
두 번째 책 - 억압받는 사람들을 구해주심
이 책의 처음 여덟 편의 시편(시편 42-49편)은 고라가 광야에서 모세에게 반역했을 때, 아버지 고라의 곁을 떠남으로써 죽음을 면한 고라의 아들들이 쓴 시입니다(민 26:9-11). 고라 아들들의 1세대가 썼든 그 후 세대가 썼든, 고라의 아들들이 아버지의 반역에 맞서지 않았다면, 이 시편 중 어느 것도 기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기름부음받은 지도자, 모세와 함께 섰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권위를 지키지 않는다면,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계획을 놓칠 수 있겠습니까?
시편 42편은 "사슴이 물을 갈망함 같이"(1절) 하나님을 갈망하는 영혼에 관한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향한 그러한 갈망을 가질 때, 당신은 하나님께서 매우 신속하게 응답하실 것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깊음이 깊은 곳을 부르느니라"(7절). 그것은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마음 깊은 곳으로 손을 뻗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사람이라면, 주변 사람들이 "네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라고 말할지라도(10절),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찬양하며 낙담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11절).
시편 43편은 인도와 구원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주님, 당신의 빛과 진리를 보내소서. 그것들이 함께 나를 주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게 하소서"(3절). 시편 기자는 진리에 대한 지식만이 아니라, 빛(계시)을 구하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하나님의 빛만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임재로 가는 길을 보여줄 것입니다.
시편 44편은 하나님께서 예전에 그러하셨던 것처럼 지금도 일하시기를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22절 -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나이다; 우리는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니" - 오늘 우리가 걸어야 할 십자가의 길을 예언적으로 언급한 것으로, 바울이 로마서 8장 36,37절에서 인용한 말입니다.
시편 45편은 어린 양의 결혼에 관해 말하고 신부와 신랑을 묘사하는 또 다른 메시아 시편입니다. 신부는 안에서, 즉 내면이 영광스러운 존재로 묘사됩니다(13절). 바로 그곳이 바로 우리가 영광스러워야 할 곳입니다. 그리고 10절에는, 결혼 후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해 하나님께서 모든 신부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네 백성과 아비 집을 잊어버리고" - 남편과 연합하십시오! 이것은 하나님께서 창세기 2:24에서 남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과 균형을 맞추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왕(당신의 신랑)이 당신의 아름다움을 크게 갈망할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의 주님이십니다. 그분께 경배하십시오(11절).
시편 46편은 하나님을, 그분의 백성의 피난처로 묘사합니다. 고라와 그의 동료 반역자들이 경험한 상황과 관련하여 이 내용을 읽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고라의 아들들은 이제, 땅이 열려 그들의 부모를 삼키고 산들이 깊은 곳으로 빠져 들어가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노래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보좌에 앉아 만유를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알고 안식할 것입니다(10절).
시편 47편은 하나님의 주권을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4절은 놀라운 구절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나의 기업을 택하시리라." 참 제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내 아내를 선택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나를 위해 나의 사역을 선택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내가 사는 집의 유형과 그 밖의 모든 것을 선택할 것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을 것입니다.
시편 48편은 교회의 그림인, 시온의 영광을 말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 보는 것처럼, 예수님의 참된 제자는 주님 그분뿐만 아니라 그분의 몸인 교회, 즉 주님의 백성에게도 감사할 것입니다: "주님은 위대하시며 크게 찬양 받으실 분이십니다. 아름답고 온 땅이 기뻐하는 것은 시온산입니다." 교회는 이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입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분이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14절).
시편 49편은 세상의 재물을 신뢰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임을 묘사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부를 신뢰합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자기 형제를 구원할 수 없고, 그를 위해 하나님께 속전을 바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친히 내 영혼을 구속하실 것입니다"(6,7,15절).
시편 50편은 다윗이 하나님의 백성의 예배를 인도하도록 임명한 노래하는 자들 중 한 사람인 아삽이 지은 것입니다. 시편 50편은 하나님을 모든 사람, 즉 의인과 죄인의 심판자로 묘사합니다. 하나님은 갈보리에서 "희생 제물로 그분과 언약을 맺은 자들"을 부르십니다(5절). 하나님은 "내가 굶주려도, 너에게 말하지 않는 것은 세계와 거기 있는 모든 것이 다 내 것임이로다"(12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참된 종도 같은 말을 합니다. 그는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 외에는 세상의 필요를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에 있어서 훌륭한 본이 됩니다. 주님은 15절에서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라"라는 놀라운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19절과 20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제를 비방하는 죄에 대해 경고하십니다. 그분은 험담하는 사람들을 참으시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죄가 심각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잠잠하였더니, 너희는 나를 너희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21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찢겠다고 위협하십니다(22절). 마지막으로, 23절에는 혀를 사용하여 남을 험담하는 대신에 여호와를 찬양하는 데 사용하는 사람들에 대한 놀라운 약속이 나와 있습니다: "찬양을 드리는 자는 나를 영화롭게 하며, 이로써 내가 그에게 나의 구원을 보여줄 수 있는 길을 만든다"(문자 그대로). 우리가 주님을 찬양할 때, 이로써 우리는 그분을 주권자이신 하나님으로 믿는 우리의 믿음을 표현하며, 이러한 믿음의 표현을 통해 그분은 우리에게 그분의 구원을 보여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호사밧 왕이 행한 일에서 그 예를 보았습니다(대하 20장).
시편 51편은 회개하는 죄인이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다윗은 간음과 살인의 죄를 깨닫게 된 후에 이 시편을 썼습니다. 그는 그러한 죄를 지은 직후에 이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는 9개월 후 밧세바가 그의 아이를 낳았을 때 나단 선지자가 찾아와 말을 한 후에야 이 글을 썼습니다. 다윗이 그렇게 심각한 죄를 깨닫게 되는데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 시편은 아름다운 회개의 시편이며, 왜 하나님께서 다윗을 그토록 빨리 회복시키셨는지 보여줍니다.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점은 그는 아담처럼, 자신의 죄에 대해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3,4절). 그는 주님께서 그의 죄를 깨끗하게 하시면 "눈보다 희게 되리라"(7절)는 믿음을 선포합니다. 그는 주님께 그런 죄를 짓지 않는 새 마음을 달라고 간구합니다: "내 안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소서"(10절). 그는 성령을 거두지 마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합니다(11절). 다윗은 기름부음 받는 것의 가치를 알았고, 죄로 인해 어떻게 기름부음을 잃게 될 수 있는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상하고 죄를 깊이 뉘우치는 마음을 하나님은 높이 평가하십니다(17절). 다윗은 하나님께서 "마음 속 진실"을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6절). 그러나 이것은 율법 아래에서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은 이제 성령을 보내 우리 안에 거하게 하심으로 그것을 행하셨습니다(롬 8:3,4; 요 7:37-39).
시편 52편은 악인의 종말과 경건한 사람의 종말을 대조합니다.
시편 53편은 인간의 사악함을 다룬 시편 14편을 거의 한 단어씩 반복한 것입니다.
시편 54편은 도움과 구원과 변호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시편 55편은 다시 원수로부터 보호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이 적은 유다처럼 한때 가까운 친구였습니다(12-14절). 17절에서는 다윗이 얼마나 자주 기도했는지 봅니다: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하나님이 내 소리를 들으시리이다." 유대인의 하루는 해가 질 때 시작되어 다음 날 해가 질 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녁과 아침과 정오"는 하루의 시작과 중간과 끝을 가리킵니다. 다윗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22절은 구약에서 가장 아름다운 약속 중 하나입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리라. 그분은 의로운 사람들이 흔들리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다."
시편 56편은 우리를 해치려는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에서 우리를 건져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또 하나의 시편입니다(3,11절). 11절: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다. 나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이 표현은 시편 118:6에서 거의 정확하게 반복되었으며, 히브리서 13:6에서 인용되었습니다.
시편 57편은 하나님께 원수로부터 도움을 구하는 또 하나의 확신에 찬 기도입니다. 시편 기자는 자신을 둘러싼 재앙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주실 "여호와의 날개 그늘 아래" 거할 것이라고 말합니다(1절).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임을 받으소서"가 5절과 11절에서 반복됩니다.
시편 58편은 악인의 형벌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3절에서는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거짓말을 하기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우리 모두가 저지르는 첫 번째 죄입니다. 아기는 말을 하기 전부터 거짓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단지 안아주고 업어주기만을 원하는데 아픈 척하며 울부짖습니다. 우리가 이 땅을 떠나기 전에 거짓말을 없애려면 이 습관과 진지하게 싸워야 합니다.
시편 59편은 적들에 맞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확신에 찬 기도입니다.
시편 60편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지지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한탄하며, 원수를 이길 수 있도록 도움을 구합니다. "주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깃발을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깃발을 세우게 하셨나이다"(4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깃발로 주셨습니다. 우리는 어디를 가든 그 이름을 드러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시편 61편은 하나님께서 그를 보호하시고 그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실 것이라는 다윗의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의 기도는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입니다(2절). 그 반석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시편 62편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피난처로써 의지하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내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을 기다리라, 이는 나의 소망이 그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5절).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기대가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실망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시편 63편은 당시 다윗이 광야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다윗의 완전한 만족을 표현합니다. 그는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니"(3절)라고 말했습니다.
시편 64편에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적들을 멸망시키실 것이라는 다윗의 확신을 다시 한번 표현합니다.
시편 65편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합니다. 1절(KJV)은 "주여, 시온(교회)에서 찬송이 주를 기다리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 교회는 언제나 찬양이 하나님을 기다리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오실 때, 그분은 찬양이 그분을 기다리고 있음을 발견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그분께 가까이 이끄십니다. 4절은, "택하여 가까이 오게 하는 사람은 복이 있도다"라고 말합니다. 시편은 계속해서 땅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말합니다.
시편 66편: 시편 기자는 여기서, 자신을 축복의 장소로 인도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수많은 시련을 통한 것이었습니다. 10-12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시편 기자를 먼저 질병과 불과 물, 인간의 억압을 겪게 하시고, 영적 번영의 장소로 인도하셨다는 것을 봅니다. 여기에서 "풍요로운 곳"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성경의 다른 한 곳, 즉 시편 23:5에서만 사용되며, "넘친다"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넘치는 축복의 삶을 누리는 길은 시련과 고난을 통해서입니다. 18절은 또 다른 중요한 구절입니다: "내가 내 마음에 죄를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기도는 하나님과 전화통화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속에 자백하지 않은 죄가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기 위해 전화를 받지도 않으실 것입니다.
시편 67편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은 하나님의 길과 그분의 구원이 온 세상에 알려지기를 바라는 시편 기자의 소망이 담긴 전도 시편입니다(2절).
시편 68편은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6절은 독신남과 노처녀를 위한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외로운 자들을 위하여 집을 마련하시느니라." 11절은 전도에 관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명령을 주시니, 그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여자들은 큰 무리이니라." 하나님은 여자들이 복음을 전하기를 기대하십니다!! 18절 "주께서 높이 오르셨고, 포로들을 사로잡으셨나이다; 주님은 사람들에게서 선물을 받으셨습니다"는 에베소서 4장 8절에 인용되어 있으며 예수님의 승천과 그분이 하늘에서 교회에 주신 영적인 은사에 대한 예언적 언급입니다.
시편 69편은 다윗이 자신을 박해하는 자들에 맞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고통의 부르짖음입니다. 여기에 있는 여러 구절은 메시아에 대해 예언하고 있습니다: "내가 도적질하지 아니한 것을 도로 주어야 하리라"(4절)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담당하신 것에 대한 언급입니다. "비방이 내 마음(heart)을 상하게(broken) 하였도다"(20절)는 예수님께서 육체적으로 부서진 심장(broken heart)으로 죽으셨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옆구리가 찔렸을 때 피와 물이 쏟아졌습니다. 의사들은 그분의 심장(heart)이 육체적으로 부서진(broken) 경우에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29절은 부활과 승천에 대한 예언적 언급입니다.
시편 70편은 적에 맞서 도움을 구하는 또 다른 외침입니다.
시편 71편은 시편 기자가 노년에 구원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그는 여전히 주님을 찬양하며 하루하루를 보냅니다(8절). 그리고 그는 이제 늙어 백발이 되었으나, 새로운 세대에게 하나님의 힘을 선포하기를 갈망합니다(17,18절). 그는 20절에서 부활에 대한 믿음을 선포합니다: "주께서 나를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살리시리이다."
시편 72편은 첫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다윗이 그의 아들 솔로몬을 위해 쓴 시입니다. 그 책에서, 그는 왕이 어떠해야 하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 설명합니다. 불행하게도, 솔로몬은 여기에 묘사된 왕의 유형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는 경고입니다. 우리도 또한, 이 시편에 나오는 이 모든 놀라운 것들을 연구하고 그것들 중 아무것도 실천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책 - 성전과 하나님의 보좌
시편 73편부터 83편은 다윗의 노래하는 사람 중 한 사람인 아삽(시편 50편도 지은 사람)이 지은 것입니다.
시편 73편은 수 세기 동안 많은 사람들이 물어왔던 질문을 다루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악인이 형통하며, 의인이 고난을 받는가?" 아삽은 악인이 형통함을 보고, 하나님을 의심할 뻔했다고 솔직하게 말합니다(2,3절). 그래서 그는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가치가 있는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이 걸려 넘어질까 봐, 이런 생각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들어가서 악인들이 매우 미끄러운 땅에 서 있다가 곧 지옥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마침내 그 답을 찾았습니다. 25절은 아마도 성경 전체를 통틀어 진정한 헌신의 의미를 설명하는 가장 훌륭한 구절일 것입니다: "하늘에서 주님 외에 내게 누가 있으리요.주님 외에 제가 원하는 것은 이 땅에 아무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 우리가 지상 생활 내내 이렇게 진실하게 말할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참된 예배자이자 유용한 종이 될 것입니다. 26절: "내 마음은 쇠약할지라도, 하나님은 내 마음의 힘이십니다"는 마음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에게 좋은 구절입니다!
시편 74편은 하나님의 백성의 파멸된 상태에 대한 우려의 부르짖음입니다.
이것은 교회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주님, 당신의 원수들이 당신의 교회의 모든 것을 파괴했고 지금 그 안에서 으르렁거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것을 더럽혔습니다"(3,4,7절). 여기에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계시지 않는다는 두 가지 표징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1. 그분은 그들을 위해 어떤 기적도 행하지 않으신다.
2. 그분은 그들에게 어떤 예언자도 보내지 않으신다(9절).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기적적인 방법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또한 우리를 바로잡기 위해 예언자들을 보내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교회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거나 그 교회에 예언자를 보내지 않으신다면, 그것은 그분이 그 교회를 포기하셨다는 표시일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교회에서는 기적과 선지자를 모두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습니다.
시편 75편의 주제는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에 의해서 높아지기를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6절). 높아짐은 하나님에게서 옵니다(7절). 사람이 당신에게 교회에서 사역을 맡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직 하나님만이 당신을 위해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시편 76편은 인간의 분노한 행동조차도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게 하셔서 그분을 찬양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주권적 능력을 묘사하고 있습니다(10절).
시편 77편은 "옛적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회상한 것입니다. 아삽은 환난 중에, 그 일을 생각하고 위로를 얻었습니다(5절). 13절(KJV)은 "하나님이여 주의 길이 성소에 있사오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길을 찾으려면, 성소안에 있는 지성소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바깥뜰"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그들의 죄에 대한 용서함만 알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없는 신자들과만 교제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길이 성소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깨끗한 마음으로 주를 부르는 자들"(딤후 2:22)과의 교제를 추구하십시오.
시편 78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구원받을 때부터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되돌아보는 역사적인 시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죽이실 때만 하나님을 찾았습니다(34절). 그들은 그분께 입으로 아첨하며 거짓말을 하였습니다(36절).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로우사, 그들을 거듭 용서하셨습니다(38절). 그분은 그들에게 목자 다윗을 주셨고, 다윗은 그들을 목양하고 인도했습니다(70,72절). 이 시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놀라운 일들과 우리에게 주신 지도자들을 돌아보고 기억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도록 일깨워줍니다.
시편 79편은 예루살렘(교회)의 멸망에 대한 염려하는 기도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순결을 염려하는 우리가 하기에 좋은 기도입니다.
시편 80편은 하나님의 백성을 문제에서 구원해 달라고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입니다. 17절은 메시아에 관한 구절입니다: "주의 우편에 있는 사람 곧 주를 위하여 힘 있게 하신 인자에게 주의 손을 얹으소서."
시편 81편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선포합니다. 10절에는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라는 아름다운 약속이 있습니다. 우리가 요청하지 않기 때문에,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주님은 13절과 14절에서 한숨을 쉬시며 말씀하십니다, "오 내 백성이 내 말을 들었더라면! 그러면 내가 그들의 적을 신속히 제압했을텐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믿었더라면,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에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을 것입니다!
시편 82편은 이스라엘의 불공평한 재판관들을 질책하며, 하나님께서 내려오셔서 땅을 심판하시라고 촉구하는 시편입니다.
시편 83편에서는 이스라엘을 멸하려고 하면서 "나라가 되지 못하도록 그들을 없애 버리자"(4절)라고 말하는 원수들을 심판해 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합니다. 수세기에 걸쳐 많은 나라들이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교회도 없애려고 했습니다. 그들 역시 한번도 성공한 적이 없습니다. 교회는 계속 살아남아서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가 온 땅의 주이심을 알 수 있도록 해야합니다(18절).
시편 84편은 그분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하는 갈망을 표현합니다. 제비가 하나님의 제단 위에 둥지를 틀 곳을 찾았듯이(3절), 지성소에 사는 사람들도 복을 받고 항상 하나님을 찬양할 것입니다(4절). 그들이 바카(눈물) 골짜기를 지날 때, 그들은 그 곳을 축복의 샘으로 바꾸며(6절) 점점 더 힘있게 나아갈 것입니다(7절). 10절은, 이 시편이 고라의 아들들이 지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의미가 있습니다: "(모세와 함께 서 있는) 주의 뜰에서 하루가 밖에서 천 날보다 나으니이다. 나는 (우리 아버지 고라와 함께) 악인의 장막에 거하는 것보다, (모세와 함께) 하나님의 집 문지방에 서기를 원합니다." 그들은 악인의 장막에서 구원받은 것을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이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11절). 우리가 정직하게 행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최고의 것을 얻을 것입니다.
시편 85편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방문하시기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주께서 친히 우리를 다시 살리시어, 주의 백성이 주로 인해 즐거워하게 하소서"(6절).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는 원망과 불평이 많습니다. 절실히 필요한 것은 기쁨과 찬송의 부흥입니다. "나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분의 경건한 자들에게 '평강'을 말씀하시리라"(8절). 주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나요? "긍휼과 진리가 서로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느니라"(10절). 하나님의 진리(율법)에 대한 요구와 그분의 긍휼이 갈보리에서 만났습니다. 갈보리에서 의로운 방법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평화가 확립되었습니다.
시편 86편은 도움과 인도를 구하는 또 다른 기도입니다. "주님, 나에게 당신의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당신의 진리 가운데 걸을 것입니다. 내 마음을 하나로 묶어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11절). 다윗의 기도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끌려가는) 그의 마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시편 87편은 시온(교회)의 시민으로서의 특권에 관한 것입니다. "시온에 대하여 이르기를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태어났다' 하리라"(5절). "나의 모든 기쁨의 샘은 너희 안에 있도다"(7절).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교회의 일원이 됨으로써 누리는 큰 기쁨을 말합니다.
시편 88편은 죽음에서 구원해 달라는 간청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모든 시편 중에서 가장 우울한 시편일 것입니다. 시편 기자(아마도 에스라 사람 헤만)는 자신이 어려서부터 고난을 당했으며(15절) 하나님께서 그를 거절하셨다고 불평합니다. 이제 그는 자신이 죽게 될 것을 두려워하는 생각에 우울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는 욥과 매우 흡사하게 들립니다. 고통에 대한 다른 시편들이희망의 말로 끝나는 것과 달리, 이 시편은 절망으로 끝납니다.
시편 89편은 다윗과 맺은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표현하는 시편으로, 하나님께 약속을 이행하시기를 간구합니다. 그 어조는 이전 시편과 정반대입니다. 이 시편은 또 다른 에스라 사람인 에단이 썼습니다. 그러나 그는 시편 88편을 쓴 그의 형제 헤만과는 정반대의 관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7절에 "거룩한 자들(교회)의 모임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크게 경외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27절부터 29절은 예수님을 언급합니다: "내가 내 장자를 땅의 왕들 중에 가장 높은 왕으로 만들 것이다."
네 번째 책 - 이스라엘과 다른 나라들
시편 90편은 하나님의 영원성과 인간의 일시적인 본성을 다루고 있습니다. 모세가 기록한 유일한 시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에게는 "천년이 하루 같다"(4절)는 말씀을 봅니다. 10절에서, 모세는 주변 사람들이 70세에서 80세 사이에 죽어간다고 말합니다. 이는 애굽을 떠난 60만 명 중 대부분이 떠날 당시 20세에서 60세 사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들 중 일부는 모세처럼 120세까지 살았지만, 대부분은 80세가 되기 전에 죽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세대 전체가 광야에서 죽도록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2절에서 모세는 "우리에게 우리 날 수 세는 것을 가르치셔서 우리 날의 적음을 알게 하사, 우리가 지혜를 얻으며 하루를 보낼 수 있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 이는 우리 모두가 기도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도입니다. 17절은 우리 모두가 기도해야 할 또 다른 좋은 기도입니다: "여호와의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임하게 하소서."
시편 91편은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사는 자의 축복과 안전을 선포합니다. 우리에게, 그 은밀한 곳은 바로 예수님의 상처난 옆구리입니다. "전능자의 그늘"에 거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앞에 가시고, 우리가 그분의 그늘 아래서 걷는다는 뜻입니다(1절). 온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하나님의 완전하신 뜻의 중심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두 원수인 사탄(덫을 놓는 자)과 죄(치명적인 질병)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3절). 그분은 명백한 죄(낮의 위험)와 교묘하고 현혹시키는 죄(밤의 위험)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것입니다(5,6절). 우리 주변에 11,000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승리하는 삶을 믿지 않더라도, 그분은 우리를 죄에 빠지지 않게 지켜주실 것입니다(7절). 우리는 많은 환난을 당해야 할지라도, 그 모든 환난 가운데 어떤 악도 우리에게 닥치지 않을 것입니다(10절). 그분은 우리가 그분의 뜻대로 행하는 한, 우리를 돌보도록 천사들을 임명하셨습니다. 사탄(사자와 뱀)은 언제나 우리 발 아래서 짓밟힐 것입니다(13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우리를 높은 곳에 세우시고, 정해진 임무를 마칠 때까지 죽지 않도록 장수를 주실 것입니다(15,16절).
시편 92편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베푸신 선하심을 찬양합니다. "그들은 늙어서도 여전히 열매를 맺으며 진액이 가득하고 매우 푸르를 것이다"(14절). 그 말은 그들이 늙어도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충만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시편 93편은 여호와의 능력과 위엄을 말합니다. "여호와여,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나이다"(5절).
시편 94편은 자기 백성을 징계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징계하시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12절).
시편 95편은 우리에게 주님을 경배하라고 권유하고 마음이 굳어지지 않게하라고 경고합니다. 7절과 8절 -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 히브리서 3:7,8에 인용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계속해서, 우리가 완고해지지 않으려면 날마다 권면과 격려를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히 3:13).
시편 96편은 곧 오실 주님을 예배하라는 또 다른 초대입니다. "주님께서 땅을 심판하러 오십니다. 그분이 의로 세상을 심판하시며 그분의 진리로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13절).
시편 97편은 하나님의 능력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10절에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는, 악을 미워하라"고 했습니다. 악을 미워하지 않으면,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악을 피하는 것과 악을 미워하는 것에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죄를 이기는 길은 죄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미움은 살인과 같습니다. 우리가 죄를 미워하면 죄를 죽일 것입니다.
시편 98편은 우리를 주님께 찬양을 드리도록 초대합니다.
시편 99편은 주님을 찬양하라는 또 다른 부르심입니다.
시편 100편은 주님을 찬양하고 섬기라는 또 다른 권유입니다. 우리는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겨야" 합니다(2절). 나는 주님을 섬기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대부분 이런저런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쁨으로 그분을 섬기지 않는 사람이 그분을 섬기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시편 101편: 여기에서 다윗은 자신이 추구한 흠 없는 삶의 길에 대해 말합니다. "나는 흠 없는 길에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나는 내 집 안에서 온전한 마음으로 행하리라"(2절). 우리 모두는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흠 없이 먼저 행해야 할 곳은 가정입니다. 흠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실패했을 때 사과하고 문제를 바로잡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재정적인 거래에서도 흠잡을 데가 없어야 합니다.
시편 102편은 고통받는 사람이 도움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이며 그의 자녀와 손자들도 주님을 따를 것이라는 믿음을 표현하며 결론을 내립니다(28절).
시편 103편은 다윗이 여호와께 받은 수많은 축복, 즉 그의 모든 죄가 용서되고, 그의 모든 질병이 치료되고, 구덩이(지옥)에서 구원되고, 물질적인 축복("좋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다윗은 옛 언약 아래서 이 모든 것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설교하는 것이 예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고, 치유하시고, 물질적으로 축복하시고, 지옥에서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뿐이라면, 우리는 그리스도보다 1000년 전에 다윗이 설교한 것만을 설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 언약 복음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1.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죄에 대한 승리를 주실 수 있습니다(롬 6:14).
2. 그분은 당신을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벧후 1:3,4).
3. 그분은 당신의 발 아래 마귀를 두게 하실 수 있습니다(롬 16:20).
4. 그분은 당신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울 수 있게 하십니다(엡 4장).
시편 104편은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묘사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종들을 타오르는 불로 삼으십니다"(4절). 주님의 모든 종은 주님을 위해 타오르는 불이 되어야 합니다. 모세는 떨기나무에서 타오르는 불을 보고 멈춰 서서 귀를 기울였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을 때, 사람들도 멈춰 서서 우리의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시편 105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15절에,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예언자들을 해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기름부음받은 예언자들을 보호하시고, 그들을 대적하는 말을 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경고하십니다. 요셉에 관해 이렇게 말합니다: "때가 이르기까지 그는 종으로 팔렸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매 철이 그의 영혼에 들어갔다"(17절 - 여백, 18,19).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감옥에 가두시어 그가 철과 같이 강해지도록 허락하셨습니다 - 그리하여 "철이 그의 영혼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요셉이 풀려날 날은 정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시간을 지키십니다. 39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주신 이유를 알려줍니다. 낮에는 구름이 태양의 열기로부터 그들을 가려 주고, 밤에는 불이 그들에게 빛을 비춰 주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시편 106편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의 역사를 계속해서 담고 있습니다. 11절과 12절에 "물이 그들의 대적을 덮을 때에 그들이 그분의 말씀을 믿고 그분을 찬송하였더라"고 했습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두가지를 봅니다.
첫째, 믿음의 증거는 찬양입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합니다. 입은 마음에 있는 것이 넘쳐흐르는 밸브입니다. 우리 마음에 믿음이 있으면, 찬양이 넘치게 됩니다. 사도들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행 2장).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믿음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둘째, 옛 언약 아래서, 그들은 믿음으로 살지 않고 보는 것으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원수들이 물에 빠져 죽는 것을 본 후에야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원수가 패배하기 전에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고 믿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책 - 찬양과 예배
시편 107편은 주님께서 사람들을 어려운 상황에서 구출하시는 다양한 방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방황하던 사람들은 한 성읍으로 인도되었습니다(4-7절). 흑암에 앉은 자들이 어둠에서 나왔습니다(10,14절). 아픈 사람들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분이 그분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셨습니다"(20절). 폭풍우가 치는 바다에 갇힌 사람들이 구조되었습니다(25-29절). 그래서 2절에 "주께 구속함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하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인가를 행하셨을 때, 특히 그분이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구속하셨을 때 우리는 침묵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를 증거해야 합니다.
시편 108편은 하나님께서 시편 기자를 승리로 이끄실 것이라는 확신을 표현합니다. 그는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찬송하리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라"(1,2절)라고 말합니다. 그는 매일 새벽이 되기 전에 일어나 무엇보다 먼저 주님을 찬양하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 이는 우리 모두가 따라야 할 좋은 습관이었습니다.
시편 109편: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께 그의 적들에게 복수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8절은 사도행전 1장에서 베드로가 가룟 유다를 언급하면서 인용한 것입니다: "그의 직분을 다른 사람이 맡게 하십시오." 유다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으나, 자기 우편에 섰는 사탄의 말을 들었습니다(6절). 그는 하나님을 우편에 두는 대신, 사탄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다를 위해 계획하신 사역은 사도 바울에게 주어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가 불충실하다면, 다른 사람이 우리의 사역을 대신할 수 있습니다.
시편 110편은 예수님을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왕과 제사장으로 언급하는 메시야 시편입니다(4절). 이 내용은 히브리서 7장에 인용되어 있습니다.
시편 111편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하는 또 다른 시편입니다. 초기 시편들은 일반적으로 도움을 구하는 부르짖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시편의 끝으로 갈수록, 우리는 찬양의 시편이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삶도 그러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대개 도움을 구하는 부르짖음으로 시작됩니다. 나이가 들수록, 우리의 삶은 더욱 찬양으로 가득 차야 합니다. 10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니라"는 구절이 잠언에 나오기 전에 여기에 나옵니다. 우리는 이 시편을 누가 썼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다윗에 의해 기록되었다면, 그의 아들 솔로몬이 잠언에서 이 말을 반복하기 전에, 다윗이 먼저 이 말을 했을 것입니다.
시편 112편은 아름다운 시편이며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편 중 하나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의 자녀는 복을 받고 그가 형통할 것입니다. 그는 어둠 속에 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빛을 얻을 것입니다. 그는 의롭고 자비로우며 궁핍한 사람들에게 꾸어 줍니다. 그는 그의 마음이 주님을 굳건히 신뢰하기 때문에, 나쁜 소식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존귀히 여기시고, 악인들은 그를 시기할 것입니다. "그를 향한 하나님의 끊임없는 보살핌은 그것을 보는 모든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줄 것입니다"(6절 - Living). 우리 삶에서도 그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것을 보면 주변 사람들도 깊은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시편 113편에서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높이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너무 위대하십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살펴보실 만큼 겸손하십니다(5,6절).
시편 114편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에 들어가는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 115편은 하나님을 우상과 대조합니다. "주님,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시고, 오직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1절).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느니라"(17절).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여호와를 찬양해야 합니다.
시편 116편: 여기에서 시편 기자는 자신을 죽음에서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주께서 나를 위하여 행하신 모든 놀라운 일을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12절). 그것은 우리가 항상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할 좋은 질문입니다.
시편 117편은 성경에서 가장 짧은 장입니다 - 두 구절의 찬양입니다.
시편 118편은 구원에 대한 감사의 시편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니라"(8절).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탄과 그의 악마들을 이길 수 있다는 말씀을 세 번이나 들었습니다(10,11,12절).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22절).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오늘날 교회의 모퉁잇돌이십니다. 사람들도 우리를 거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높이실 것입니다. "주여, 구원하소서(호산나)"(25절)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며칠 전 예루살렘에 오셨을 때 그들이 종려나무를 흔들며 외치던 외침이었습니다.
시편 119편: 이것은 하나님의 율법의 축복을 묘사합니다. 성경에서 가장 긴 장으로, 176개의 구절이 각각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의 말씀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알파벳순의 시편입니다. 시편의 처음 여덟 절은 히브리어 알파벳의 첫 글자인 '알레프(Aleph)'로 시작됩니다. 다음 8개의 구절은 두 번째 글자인 '베스(Beth)'로 시작됩니다. 이런식으로, 알파벳 22자를 통해서 계속 이어집니다. 9절에서는 청년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그의 행실을 순결하게 지킬 수 있다고 말합니다. 11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간직하면 죄를 피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18절은 기도입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67절은 시편 기자가 많은 환난을 통하여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105절). "주의 말씀이 펼쳐지면 빛이 비치나이다"(130절). 133절은 로마서 6장 14절의 새 언약 약속을 고대하며, "주여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옵소서"라고 말합니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나이다"(165절). 그리고 마지막으로, 176절: "주님, 제가 길을 잃었습니다. 주의 종을 찾으소서."
시편 120편부터 134편까지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의 시편"이라고 불리는 15편의 시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 축제에 참석할 때 이 노래를 불렀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는 음악적으로 상승하는 노래일 수도 있습니다.
시편 120편은 거짓 고발자로부터 보호해 달라는 외침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혀를 통제하는 것에 대한 급진적인 태도를 취하는 데 2절에서 4절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주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나를 구원하소서. 거짓 혀야, 내가 너에게 무엇을 주겠는가? 내가 화살로 너를 쏴서 너를 불사르리라"(2-4절).
시편 121편은 우리를 지키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나의 도움은 어디서 올 것인가? 그것이 남쪽 산 너머의 이집트인들에게서 올 것인가, 아니면 북쪽 산 너머의 앗시리아인들로부터 올 것인가? 아니다.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그분은 결코 잠들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나를 돌볼 것이다. 낮이든 밤이든, 아무것도 나를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4절).
시편 122편은 예루살렘(교회)의 평안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들이 나에게, '교회 모임에 가자'고 말했을 때 나는 기뻤습니다. 내 집은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있는 교회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참된 제자는 하나님의 백성과의 교제를 소중히 여길 것입니다.
시편 123편은 오만한 자들로부터 보호해 달라는 또 다른 기도입니다. "주님, 종의 눈이 그의 주인을 바라보듯이, 내 눈이 주님을 우러러봅니다"(2절). 우리의 소명은 그렇게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지 자기 생각대로 "주님을 위한 일"을 하며 뛰어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 124편은 그분의 백성을 적들에게서 구원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시편 125편은 하나님의 백성의 견고한 안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 산과 같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둘러싸고 계십니다"(1,2절).
시편 126편은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것을 기념합니다. 그들은 바벨론에서 눈물로 씨를 뿌렸고 이제 예루살렘에서 기쁨으로 거두고 있습니다. 교회를 세우려면, 오늘도 눈물로 씨를 뿌려야 합니다.
시편 127편은 집을 짓는 것에 관한 시편입니다. 놀랍게도 이 시편은 아내가 700명, 첩이 300명이나 있었지만 스스로 집을 지은 적이 없는 솔로몬이 쓴 것입니다(왕상 11:3)!! 이는 강력하고 정확한 설교를 하면서도 자신이 설교한 내용을 결코 실천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를 보여줍니다. 시편은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도다. 자녀는 여호와의 기업이니라"(1,3절)라고 말합니다. 계속해서 우리의 자녀는, 원수들이 우리가 자녀를 양육하는 방식을 보면 그들의 입이 다물어질 정도로, 성장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시편을 쓴 사람은 오늘 지옥에 있습니다!
시편 128편은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복된 가정생활에 관한 또 다른 시편입니다!
시편 129편은 또 다른 메시아 시편입니다. 시편 기자는 시온(교회)을 미워하는 자들이 다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시편 130편은 주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을 표현합니다. "주님에게는 용서가 있어 주님을 경외하게 됩니다"(4절).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경외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도록,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시편 131편은 주님에 대한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한 신뢰를 표현합니다. 1절은 우리가 따라야 할 좋은 예입니다 - 우리가 경험하지도 않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 밖의 문제에 관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역 밖에 있는 많은 것들은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시편 132편은 하나님을 위한 집을 짓고자 하는 다윗의 큰 열정을 말합니다(4,5절). 그러나 그에게는 그런 특권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우리도 이와 같은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시편 133편은 연합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1절). 연합은 시온(교회)을 세우기 위한 기본 요건입니다, 왜냐하면 연합이 있는 곳에만 하나님의 기름 부음과 축복이 충만하게 흐르기 때문입니다(2,3절). 120명의 첫 번째 무리의 남자와 여자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들이 "한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행 1:14).
시편 134편: 이 시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의 마지막 시편이며 사람들에게 주님을 찬양하도록 초대합니다.
시편 135편은 주님의 위대하심과 우상의 무력함을 대조시킵니다. "우상을 만드는 자는 그것과 같이 될 것이다"(18절). 우리는 우리가 경배하는 하나님과 같이 됩니다. 우리가 경배하는 하나님이 항상 사람들의 잘못된 행동을 잡으려고 애쓰는 "경찰"이라면,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 경찰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경배한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분처럼 될 것입니다.
시편 136편은 오랜 세월 동안 이스라엘을 향한 주님의 인자하심에 대해 여호와께 감사를 드리는 시편입니다.
시편 137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 생활을 했을 때 겪었던 일을 시편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예루살렘을 다른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기는 법을 배웠습니다. 우리도 이 땅의 어떤 것보다 교회를 더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7-9절에서 바벨론에 대해 표현된 미움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사람들의 전통에 의해 기독교 집단에 세워진 종교 제도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미움이 되어야 합니다 - 시스템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미움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에 대한 미움입니다.
시편 138은 주님에 대한 감사와 믿음의 기도입니다. "주의 모든 이름과 같이 주의 말씀을 크게 하셨나이다"(2절). 하나님의 말씀은 그분의 이름만큼 높임을 받습니다. 그분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그분의 말씀을 욕되게 하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만큼이나 심각한 것입니다! 다윗은 "주님은 내가 염려하는 것을 이루실 것("8절)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편 139편은 하나님이 어디에나 계시며 모든 것을 아신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습니다(7-12절).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을 그토록 안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미리 아심으로 우리가 태어난 날부터 지상 생활의 모든 날을 계획하시고 그것을 책에 기록하셨습니다(16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계획을 한 번에 한 페이지씩 보여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 계획대로 산다면, 이 땅의 삶이 끝날 때에도 후회가 없을 것입니다. 24절(Living)은 우리가 자주 기도해야 할 좋은 기도입니다: "주여, 내 속에 주님을 슬프게 하는 것이 있으면 지적해 주십시오."
시편 140편은 악한 사람들로부터 보호해 달라는 또 다른 기도입니다. 정직한 자만이 하나님 앞에 거할 것입니다(13절).
시편 141편은, 말과 마음이 거룩해지고 보호를 받기 위해, 주님의 도움을 구하는 부르짖음입니다. "주님,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소서. 내 마음이 어떤 악한 일에도 기울지 않게 하소서"(3,4절).
시편 142편은 도움을 구하는 또 다른 부르짖음입니다.
시편 143편은 인도와 구원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당신의 뜻을 행하도록 가르쳐 주십시오. 주의 선한 영으로 나를 평탄한 곳으로 인도하소서"(10절). 평평한 땅은 우리가 꾸준히 발전하는 곳이며 오르락내리락하는 기복이 없는 곳입니다.
시편 144편은 다윗의 자녀들에게 구원과 축복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그는, 그의 아들들은 견고한 나무 같이 자라기를 원하고 그의 딸들은 왕궁의 기둥 같이 강건하기를 원합니다(12절).
시편 145편은 여호와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시편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분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가까이 계시느니라. 그분을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리로다"(18,19절).
시편 146편: 마지막 다섯 편의 시편은 찬양의 시편입니다. 이 시편은 창조의 능력과 선하심으로 인해 주님을 찬양하며,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신뢰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권위자들 조차도 신뢰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3절).
시편 147편 역시 주님께서 창조에서 행하신 일들을 찬양합니다. 그분은 또한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십니다(3절). "그분은 교회를 세우십니다." 그분은 많은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시편 148편: 여기에서 모든 피조물은 주님을 찬양하라는 권고를 받습니다.
시편 149편은 우리에게 항상 주님을 찬양하도록 초대합니다. "그분은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실 것입니다"(4절). 주님께서 당신을 아름답게 하시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는 침대 위에서도 기쁨으로 노래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며, 우리 입은 항상 하나님을 높이 찬양하고 우리 손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 사탄과 그의 마귀들의 권세와 활동을 결박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5-8절).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과 사탄의 권세를 결박하는 것은 언제나 함께 합니다.
시편 150편: 이 시편이 대단원의 마지막입니다. 이 시편에서 "찬양"이라는 단어가 13번 등장하며,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6절)로 결론을 내립니다. 하나님을 찬양할 필요가 없는 사람은 단 한 부류, 즉 숨을 쉴 수 없는 죽은 자뿐입니다. 나머지 모든 사람은 항상 주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 삶에서도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시편과 잠언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두 가지 측면을 묘사합니다. 시편은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경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잠언은 우리 삶의 나머지 절반, 즉 이 세상에서의 일상 생활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둘은 항상 함께 가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 하늘의 생각에 빠져서 땅에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너무 세속적인 생각에 빠져 하나님께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헌신의 삶,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찬양과 예배, 기도와 믿음의 삶이 이 땅의 다른 사람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성품과 본성을 나타내는 실제적인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잠언서는 주로 그 점을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젊은이들을 위한 그리고 우리의 직장 생활과 가정 상황을 위한 교훈이 있습니다.
잠언은 다음과 같은 주제를 다룹니다: 지혜로운 자녀와 어리석은 자녀, 게으름과 열심히 일함, 혀의 사용, 부와 가난, 거짓말을 하는 것과 참된 것을 말하는 것, 말이 많은 것과 차분하게 말하기, 비방하는 것, 정의와 불의, 교만과 겸손, 선한 여자와 악한 여자, 탐심과 만족, 분노와 자제력, 우울함과 쾌활함, 좋은 친구와 나쁜 친구, 자녀의 교육과 훈육, 주를 경외함,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갖고 있는 의견, 유혹에 대한 경고, 하인을 대하는 방법, 뇌물, 책망, 교정, 우정, 관능적인 쾌락, 술 취함, 아첨, 불의한 재물, 복수 등. 이는 지구상의 우리 일상생활의 많은 영역을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젊은이들이 이 책을 진지하게 공부하는 것이 좋습니다.
지혜의 시작
처음 아홉 장은 주로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지혜와 교훈을 알게 하며, 명철의 말을 분별하게 하려 함이니라"(1:2). 이 세 단어는 잠언에서 독특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l 지혜(Wisdom)는 신성한 본성을 가리킵니다.
l 교훈(Instruction)은 훈육을 통해 얻어지는 실제적인 지식을 말합니다.
l 명철(Understanding)은 하나님과 그분의 방식에 대한 지식을 말합니다.
저자가 가장 먼저 해야 할 말은 바로 이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니라"(1:7).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가질 수 있는 두려움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 하나는 잘못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옳은 것입니다.
잘못된 유형의 두려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통을 줄 수 있다는 두려움입니다. 올바른 유형의 두려움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고통을줄수있다는 두려움입니다. 거짓 종교는 첫 번째 유형의 두려움에 중점을 둡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그들에게 진노하시고 그들을 해칠 수도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의 신에게 선물과 제물을 바치고 참배하러 가서, 그들의 신을 달래고 그를 행복하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한 정신은 바벨론 기독교에서도 발견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두려움의 유형은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으로 인해 하나님에게 고통을 줄 수 있다는 두려움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행동이나 말, 생각으로 인해 슬퍼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한 두려움은 사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참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영적인 것들에 관해 농담을 합니다. 유머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하나님과 신성한 것들을 농담의 주제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결코 지옥을 농담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 왜냐하면 지옥은 끔찍한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결코 지옥에 대해 농담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 마치 우리가 에이즈로 죽어가는 사람에 대해 농담을 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너무나 부족합니다. 우리가 영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잠언이 말하는 지식은 성경의 학문적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성경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아는 데서 나옵니다. 우리가 그분을 더 많이 알수록, 그분을 더욱 경외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을 경외할수록, 그분을 더 많이 알게 됩니다.
잠언의 모든 구절은 가치가 있습니다. 이 책은 구약성경에서 가장 실용적인 조언을 담은 책입니다. 구약성경 속의 신약성경과 같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각 구절을 살펴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가장 중요한 구절 중 일부만 살펴볼 것입니다.*
그분은 계속해서 젊은이들에게 그들이 만나는 친구들의 유형에 대해 조심하라고 경고합니다. "죄인들이 당신을 유혹하더라도, 그들의 말을 듣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세상적인 방식으로 끌고 가도록 허용하지 마십시오"(10절). 필요하다면 주님을 위해 홀로 서십시오. 젊은이들이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아니요. 나는 당신과 함께 갈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많은 친구들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장기적으로는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모든 젊은이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내가 내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고, 내말을 너희에게 알리리라"(1:23)고 약속하십니다. 우리가 창세기 1장을 공부할 때,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이 결합하여 땅을 재창조하는 일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것이 우리 안에 지혜를 낳는 것과 동일한 조합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면, 지혜를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말씀이 우리에게 살아 있도록 그분의 영을 우리에게 부어주셔야 합니다. 성령이 깨닫게 하심 없이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은 완전한 어둠 속에서 책을 읽으려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불이 켜지자마자, 그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그분의 말씀에 대한 계시를 주실 때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내 말을 알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계시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지혜를 얻는 방법입니다.
그분은 계속해서, 당신이 지혜의 초대를 거절하면, 어느 날 당신이 곤경에 처해 도움을 청해도 찾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24-33). 당신이 어린 시절에 지혜를 소홀히 했다면, 인생 후반기에 지혜를 찾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2장 4절에 "은과 숨은 보화를 구하듯 지혜를 구하라. 그리하면 주를경외함과하나님을아는지식을 분별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잠언에서 계속해서 반복되는 두 가지 필수 요소는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지혜는 "악의 길과, 비뚤어진 말을 하는 자와, 이방 여자에게서" 우리를 구원할 것입니다(12,16절). 젊은이들은, 그들을 속이려는 악한 사람들과 그들을 유혹하려는 악한 여자들로부터 보호받아야 합니다.
안내
3장 5,6절: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모든 길에서 그분을 인정하면 그분이 너의 길을 곧게 만들어 주실 것이다." 이는 안내에 대한 약속입니다. 우리가 조건을 이행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조건은 무엇입니까?
첫째: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신뢰하고 자신의 이성과 지능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이성이나 지능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의존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추론하는 능력과 지능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와를 아담에게 복종하도록 창조하신 것처럼, 이성도 성령께 복종해야 합니다. 아내는 가정에서 가장 유용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만일 하와가 가정의 머리 직분을 맡는다면, 에덴에서 하와가 머리 직분을 맡아 죄를 지었을 때처럼 혼돈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 우리의 이성(그리고 지성)을 사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매우 유능한 "아내"와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지성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할 수도 없고 이 세상에서 살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이성을 깨우치기 위해 성령을 의지해야 합니다. 믿음은 이성에 반대되지 않고 이성을 초월합니다 - 마치 곱셈이 덧셈에 반대되지 않고 덧셈 너머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둘째: 모든 길에서 하나님을 인정하십시오.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계시하시는 모든 것에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당신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님을 첫 번째 자리에 두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그분의 완전한 뜻으로 당신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지난 56년 동안, 신자로서 나를 한걸음 한걸음 인도해 주셨습니다. 많은 경우, 나는 다음 단계가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의 길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당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같은 기쁨을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너의 재물로 여호와를 공경하라"(3:9). 우리는 우리의 시간, 에너지, 돈, 자원, 재능, 자녀 등 모든 부의 영역에서 기쁨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의 훈계를 거부하지 마십시오"(11절). 교정은 우리의 영적 성장에 필수적입니다.
4장 12절에는 매우 아름다운 약속이 있습니다. 이를 문자 그대로 의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다 보면, 길이 열릴 것입니다." 당신은 심지어 두 걸음 앞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도 알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이 볼 수 있는 첫 번째 단계를 내딛으세요. 그러면 다음 단계를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식입니다. 우리 앞에서 문이 닫혀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다가가면, 문은 자동으로 열립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기 전까지는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당신 앞에 닫힌 문이 보이더라도 주저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지금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보여주시는 발걸음을 내딛으십시오. "내가 너희 앞에 열린 문을 두었나니, 이는 아무도 닫을 수 없느니라"(계 3:8)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4장 15절은 유혹의 장면에 관한 좋은 말씀입니다: "그것을 피하고, 그 옆을 지나가지 마십시오. 그것을 외면하고 지나가세요."
4장 18절은 또 하나의 놀라운 구절입니다: "의인의 길은 새벽빛(해가 뜰 때) 같아서 한낮(정오)까지 점점 더 밝게 빛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모든 자녀가 거듭나는 순간(해가 뜰 때)부터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정오)까지 매일의 삶에서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모든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완전한 뜻입니다. 그 길을 따라가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점점 더 많은 계시를 받게 될 것이고, 우리 자신의 부패한 삶에 대해 점점 더 많은 빛을 얻게 될 것이며, 우리가 직면하는 실제 상황에 대한 점점 더 많은 지혜를 얻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의인의 길을 걷는다면, 해가 하늘에서 다시는 돌아가지 않는 것처럼, 결코 후퇴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사는 그리스도인을 찾는 것이 왜 그렇게 드문가요? 왜냐하면 대부분의 기독교 집단은 표준 이하의 수준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우리 주변에 있는 신자들의 수준으로 내려가도록 놔두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시선은 오직 주님께만 고정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분이 걸으신 것처럼 걷기를 추구해야 합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좋은 본보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당신이 바울과 같은 좋은 본을 발견한다면, 당신은 그 또한 따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 같이 너희도 나를 따르라"(고전 11:1)고 말했습니다.
4장 23절: "부지런히 네 마음(heart)을 살펴라. 거기서 생명의 샘물이 흘러나느니라." 우리 삶에서 나오는 모든 것, 즉 우리의 말, 우리의 사역, 모든 것이 우리 마음에서 흘러나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마음을 항상 순수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생수가 하늘로부터 우리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흘러가는 통로가 깨끗해질 것입니다.
4장 25절: "네 눈은 정면을 바라보고, 네 시선을 똑바로 정면에 고정하여라." 이것은 눈을 통해 오는 유혹에 관한 것이며, 젊은이들에게 매우 좋은 조언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눈이 무엇을 보도록 허락할지 조심하십시오. 당신이 보는 것에 유혹을 받는다면, 눈길을 돌리십시오. 주님을 당신 앞에 모시고, 그분을 똑바로 바라보십시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한, 우리는 보이는 것에 유혹을 받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두 번째 보는 것을 피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눈을 통제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과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유용성을 파괴할 수 있습니다.
5장 15절: "네 우물의 물을 마시라". 이는 남편이 자기 아내에게 만족하고 다른 여자, 즉 다른 사람의 우물을 탐내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결혼 생활 내에서 성적 즐거움을 누리는 것은 전적으로 옳고 좋은 것입니다. 결혼 밖에서는 사악하고 사탄적입니다.
6장 6-10절: "오 게으른 사람아, 개미에게로 가라. 그의 방식을 관찰하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추수 때에 먹을 것을 모읍니다. 왜냐하면 개미는 미래를 미리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개미는 겨울에 식량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 개미의 뇌는 얼마나 작습니까? 하지만 그 작은 뇌에는 미래를 위한 식량을 저장할 만큼 충분한 지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우리는 얼마나 지혜로워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매달 벌어들인 돈을 다 써서는 안 되며, 미래를 위해 저축한 돈이 전혀 없어도 안 됩니다. 나는 사치스럽게 살면서 미래의 모든 비상 상황에 대해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말하는 일부 "초영적인" 신자들을 만나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비상 상황이 닥치면, 결국 개미처럼 지혜로운 다른 신자들에게서 돈을 빌려야 하는 상황이 됩니다! 아니면 그들은 다른 신자들이 와서 도움을 주고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켜 줄 선물을 주기를 기대하면서 거지처럼 기다립니다. 당신은 왜 그들처럼 되고 싶으신가요? 지금 현명하게 자신을 훈련하여 매달 돈을 절약하십시오. 영적인 문제에도 동일한 원칙이 적용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저장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십시오. 결혼하고 자녀를 갖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니, 지금, 시간이 충분한 독신인 때에 말씀을 공부하고 미래를 위해 그 지식을 저장하십시오. 그러면 나중에 영적으로 굶주리지 않을 것입니다.
6장 21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우리 마음에 묶어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우리가 다닐 때에 우리를 인도하고, 우리가 잘 때에 우리를 지켜주고, 우리가 깰 때에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이다"(6:22). 하나님의 말씀은 밤낮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지키실 것입니다. 우리가 밤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불안하다면, 그것은 우리가 어딘가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양심이 나빠졌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좋은 양심은 잠을 잘 때 최고의 베개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하나님의 말씀은 일상생활의 각 단계에서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가 살기를 원하시는 방식입니다.
7장은 도덕성이 전혀 없는 방탕한 여자를 찾아간 아주 어리석은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이는 젊은이들에게 여성과의 모든 우정과 교제에 조심하라는 강력한 경고입니다. 이 분야에서는 한 단계가 다른 단계로 매우 빠르게 이어집니다; 조심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수도 있습니다. 바람기 있는 여자를 조심하십시오. 여성들은 많은 훌륭한 젊은 신자들의 삶을 파멸시켰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계획하신 사역을 빼앗아갔습니다. 젊은 남자들은 이 장을 자주 읽어야 합니다.
8장에서는 지혜(현명한 여인으로 묘사됨)가 사람들에게 그녀의 말을 듣도록 권유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내 말을 듣고, 날마다 내 문을 지켜보는 사람은 복이 있도다"(34절). 우리는 매일 아침, 그리고 하루 종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은 많은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줄 것입니다.
9장 1절: 지혜는 일곱 기둥 위에 집(교회)을 짓습니다. 이 일곱 기둥은 야고보서 3장 17절에 열거되어 있습니다: 순수하고, 화평하고, 온유하고, 분별이 있으며, 자비가 가득하고, 흔들리지 않고, 위선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기둥 위에 세워집니다.
경건을 위한 지침
10장 12절 "사랑은 모든 죄를 덮느니라". 베드로는 그의 서신에서 이것을 인용합니다(벧전 4:8). 당신이 누군가를 정말로 사랑한다면 그의 약점을 드러내지 않고 덮어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신 방식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과거 죄를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을 대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현명해지고 싶다면 당신이 젊었을 때 한 가지 조언을 드리고 싶습니다. 누군가에 대한 나쁜 이야기를 알고 있다면, 그 이야기는 그냥 잊어버리세요.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만약 당신이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존중하실 것입니다. 특히 그것이 그분의 자녀 중 한 사람에 관한 나쁜 이야기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분은 특히 당신을 사랑하실 것입니다. 무언가 잘못한 자녀를 둔 아버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나는 그것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아들이 한 일을 누구에게도 결코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아버지가 나를 무척 사랑할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분의 자녀들을 사랑으로 대하는 것을 보실 때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10장 22절 "부하게 되는 것은 주님의 축복이며, 주님은 거기에 슬픔을 더하지 않으십니다." 일부 번역판에서는 그 마지막 부분을 "수고해도 그것(부)이 늘어나지 않습니다"라고 표현합니다. 주님의 축복은 우리가 지상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우리 삶에 주님의 축복이 임하도록 구합시다.
10장 31절: "의인의 입은 지혜가 흐르느니라." 당신이 의로운지 아닌지는 당신의 말투로 알 수 있습니다. 의인의 입에서는 항상 지혜의 말이 나옵니다.
11장 3절: "정직한 사람의 진실성(integrity)은 자기를 인도할 것이다."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우리 안에서 진실성(integrity)과 정직함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정직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완전한 뜻으로 올바르게 인도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11장 24절: "남에게 나누어 주는데도, 더욱 불어나는 자가 있다." 주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을 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역설 중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축복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색한 사람은 가난해집니다. 구두쇠가 회심하면 관대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0:8).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값없이 주셨습니다. 우리도 역시 다른 사람에게 거저 주어야 합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과부는 렙돈 두 닢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기가 가진 것을 드렸고, 나는 하나님께서 그녀를 존중하셔서 그녀가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남에게 물을 주는 자는 자기도 물을 받으리라"(25절).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물을 주시고 당신이 생기 넘치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다른 사람들에게 물을 주어야 합니다. 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토록 진부하고 무미건조합니까?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물을 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그들에게 물을 주시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물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필요에 대해 생각해보고, 어떻게 그들을 축복할 수 있는지 알아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풍성한 축복을 주시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12장 23절: "지혜로운 사람은 지식을 숨긴다." 이는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지식을 드러내기를 꺼린다는 뜻입니다. 그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 대해 겸손합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무엇이든지 모든 것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말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13장 10절: "오만함에서는 다툼 외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모든 분쟁은 교만의 결과입니다.
14장 12절: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끝은 죽음에 이르는 길이니라" 이 구절은 16장 25절에서 반복됩니다. 따라서, 당신이 처음에 그것(그길)을 놓치면, 하나님께서 두 번째 기회를 주십니다. 당신의 눈에 보이는 것이 반드시 하나님의 길은 아닙니다. 많은 신자들이 자신이 내리는 결정에 대해 하나님의 인도를 진지하게 구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결정과 관련된 모든 요소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몇 년 후 그들은 자신들이 틀렸고 자신들의 삶을 낭비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겸손해져서 우리가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그분의 지혜를 구합시다. 성경을 연구할 때에도, 만일 우리가 성령의 계시를 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멍청하고 어리석으며 성경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완전히 빗나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다"(사 55:8)고 말씀하십니다.
15장 13절: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한다." 우리 얼굴에 빛을 가져다 주는 것은 마음속의 기쁨입니다. "즐거운 마음에는 끊임없는 잔치가 있습니다"(15절). 잠언에는 우리 삶에서 기쁨을 누리는 것이 크게 강조되어 있습니다. "즐거운 마음은 좋은 약이니라"(17:22). 따라서 기쁨은 우리를 건강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단순한 의가 아니라, 성령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의입니다. 구약시대에, 그들은 기쁨이 없는 의를 가졌습니다. 지금 우리는 기쁨과 함께 의를 얻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를 때, 우리의 발걸음에는 활력이 있고, 우리 마음에는 노래가 있으며, 우리 얼굴에는 빛이 있습니다.
16장 18절: "교만에는 멸망이 따르고 거만한 영에는 몰락이 따른다." 사람이 죄에 빠지는 이유는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리석은 일을 할 때, 그 원인이 교만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넘어지지 않게 지켜주실 수 있습니다(유 24절). 그분은 어떻게 그렇게 하시나요? 우리를 바닥으로 낮춤으로써입니다! 우리는 서 있거나 심지어 앉아 있어도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땅에 얼굴을 대고 엎드린 상태에서는, 넘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넘어지고 싶지 않다면, 항상 입을 먼지 속에 두도록 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무리 축복하시고 사용하시더라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미약함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결코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17장 9절: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니라." 누군가 당신에게 잘못을 했나요? 누군가가 당신에게 상처를 주거나 모욕했습니까? 용서하고 무시하십시오. 그것이 경건한 사람이 걷는 사랑의 길입니다.
17장 28절: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롭게 여기느니라." 당신이 어리석은데도, 사람들이 당신을 지혜롭다고 여기기를 원한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입을 다물고 있으십시오!! 그러면 사람들은 이렇게 상상할 것입니다: "그 사람은 깊은 지혜를 지닌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침묵한다"!! 거기서 입을 열었다면, 모두가 즉시 당신이 바보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십시오. 특히 너희가 젊고 어리석은 때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가 말을 억제할 때 얼마나 큰 축복이 있는지요.
18장 12절: "겸손하면 존귀 가 뒤따릅니다." 당신은 하나님께 존귀를 구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자신을 낮추십시오.
18장 16절: "사람의 은사는 그에게 자리를 만들어주며, 그를 존귀한 자 앞으로 인도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은사를 통해, 우리가 교회에서 봉사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십니다. 오늘날 하나님이 주신 은사가 없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자리와 명예를 추구하고 싸우는 것을 보면 애처롭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은사, 특히 예언하는 은사를 추구하라"는 권고를 받습니다(고전 14:1). 예언한다는 것은 도전하고, 죄를 깨닫게 하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세워 주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것입니다(고전 14:3). 하나님은 그분의 은사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에게 은사를 주시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말을 듣기 위해 수백 마일을 여행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 있을새 유대 온 땅에서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들으려고 거기로 나오니, 이는 그가 하늘로부터 온 말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8장 19절: "기분이 상한 형제를 얻는 것은 도시를 얻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관계가 깨지지 않도록, 서로에게 말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18장 21절: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느니라." 오순절 날, 제자들 위에 불의 혀가 나타났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성령의 불로 그들의 혀에 불을 붙이기를 원하셨음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야고보서 3장 6절에는 혀도 지옥의 불로 불타오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 육신이 부패하였기 때문에, 우리의 혀가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만 혀를 통해 사망이 퍼지는 일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19장 17절: "가난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께서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실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속하며 그분은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하는 모든 일을 그분을 위한 일로 여기십니다 - 이것이 바로 그분이 우리의 친절에 대해 갚겠다고 약속하시는 이유입니다.
19장 18절: "희망이 있을 동안에 네 아들을 훈계하고, 그를 죽게 하지 말라." 잠언에는 자녀를 지옥에서 구원하려면 자녀를 훈계해야 한다는 구절이 많이 있습니다.
20장 14절: "물건을 사는 사람이 나쁘다 나쁘다 하다가, 자기 길로 가서는 잘 샀다고 자랑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도에서 상점 주인으로부터 더 낮은 가격으로 물건을 얻기 위해 이 기술을 사용합니다. 나는 신자들이 1루피 더 싸게 물건을 사려고, 가난한 채소 상인들과도 다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모습인가요? 그 가난한 사람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당신에게 주셨습니다. 관대해지세요.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선을 베풉시다.
21장 2절: "사람의 모든 길이 자기 보기에는 옳아도, 여호와는 그 마음을 살피신다." 하나님은 행동보다 동기를 더 보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21장 13절: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에 귀를 막는 자는, 또한 자신이 부르짖어도 응답을 받지 못하리라."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을 대하는 것처럼 우리를 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많은 신자들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는 이유입니다.
21장 19절: "다투기 좋아하고 괴롭히는 여자와 함께 사는 것보다 사막에서 사는 것이 낫다." 여기에서 우리는 잔소리하는 아내에 대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22장 4절: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부와 존귀와 생명이니라" 영적 부, 영적 존귀, 영적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며, 하나님이 사람에게서 찾으시는 두 가지 자질, 즉 겸손과 주님에 대한 경외심을 바탕으로 주어집니다. 이것(겸손, 주님에 대한 경외심)은 교회에서 지도자의 자리를 맡을 사람을 고려할 때 우리가 찾아야 할 주요 자질입니다.
22장 6,15절: "자녀가 마땅히 가야 할 길로 아이를 훈련시키십시오. 그는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아이의 마음에는 어리석음이 얽혀 있습니다. 징계의 채찍이 그것을 그에게서 멀리 쫓아낼 것입니다." 아이의 마음 속에 있는 어리석음을 없애려면, 당신은 아이의 엉덩이를 징계해야 합니다. 아이의 엉덩이와 마음은 분명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사랑으로 현명하게 훈련을 받은 아이는, 자라서 집을 떠나 악한 세상에 직면하게 될 때에도 주님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22장 29절: "자기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그는 왕들 앞에 설 것이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훈련된 연구와 주님을 섬기는 부지런함에 적용하기에 좋은 구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이 그분의 자녀들(이 땅의 진정한 왕들)을 섬길 수 있도록 많은 사역의 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23장 22절: "너를 낳아주신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늙으신 어머니를 경멸하지 말라." 불행하게도 오늘날 많은 자식들은, 연로한 부모를 공경하거나 존경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슬픈 일일 뿐만 아니라, 악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들을 특별히 주목하시고 특별한 방법으로 축복하십니다.
23장 31절: "포도주가 붉고 잔에서 반짝반짝 빛날 때 그것을 보지 말라." 이는 모든 발효가 많이 된 포도주(알코올 함량이 높은 모든 음료)를 피하라는 권고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마신 포도주와 가나에서 만드신 포도주는 집에서 만든, 발효가 많이 되지 않은 포도주였음에 틀림없습니다 - 우리는 예수님께서 모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셨으므로 이 구절에도 순종하셨음에 틀림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24:11,12: "죽음으로 끌려가는 사람들을 건지십시오. 네가 '보라, 우리는 이것을 몰랐다'고 말한다면, 마음을 달아보시는 분께서 그것을 생각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오늘날 이 구절은 전도에 참여하라는 도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의 세상은 복음을 들어야 하며 우리는 복음을 그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24장 17절: "네 원수가 넘어질지라도 기뻐하지 말라." 구약에서도, 원수의 멸망을 기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24장 27절: "네 일을 밖에서 준비하고 너를 위하여 밭에서 준비하라; 그 후에 네 집을 지어라." 이것은 결혼을 고려하는 모든 젊은 남자들에게 좋은 조언입니다. 먼저 취업한 뒤, 결혼하십시오. 가족을 부양할 만큼 충분한 돈을 벌고, 가정을 꾸려갈 아내를 찾으십시오.
24장 30-34절: 여기에서 우리는 자기 밭을 돌보지 않아서 그 밭이 가시덤불로 뒤덮인, 게으른 사람에 대해 읽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일하는 동안 잠을 잤습니다. 여기서 경고하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자면, 가난이 우리를 덮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헨리 롱펠로(영국의 시인) 는 다음과 같은 시를 썼습니다:
"위인들이 도달하고 유지한 높이는
갑작스러운 비행으로 도달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의 동료들이 잠자는 동안
밤새 위쪽으로 애써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부지런함을 보상하십니다. 말씀을 연구하고 부지런히 순종하는 사람은 게으른 신자에 비해 풍성한 삶을 살게 됩니다. 부지런한 사람은 좋은 정원과 복된 사역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게으른 사람은 이 땅에서나 영원에서나 후회할 일이 많습니다.
25장 14절: "그의 은사를 거짓으로 자랑하는 사람은 비 없는 구름과 바람 같으니라." 오늘날, 치유의 은사와 기타 초자연적인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많은 설교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단순한 생각을 가진 신자들을 속일 뿐입니다. 이것은 하늘의 구름을 보고 자신의 밭에 비가 내리기를 바라지만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는 농부에 비유됩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은사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전도의 은사를 주셨다면, 당신은 한 두 사람이 아닌 많은 사람을 주님께 인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가르치는 은사를 주셨다면, 당신의 사역을 통해 한두 사람이 아닌 많은 사람들이 깨우침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치유의 은사를 주셨다면, 당신이 그들을 위해 기도하면 한두 사람이 아닌 많은 사람이 치유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치유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당신에게 은사가 없다는 증거입니다.
26장 4절은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구절은,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라"고 말합니다(5절). 다음 두 가지 진술 중 어느 것이 옳은가요? 정답은 두 가지 유형의 미련한 자를 가리키기 때문에 둘 다 맞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묻는 질문에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이 그분께 질문을 했을 때, 그분은 그들에게 그렇게 명확한 대답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헤롯에게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우리에게 질문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이 어떤 유형의 어리석은 자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분별이 필요합니다.
26장 27절: "구덩이를 파는 자는 그 구덩이에 빠지고; 돌을 굴리는 자는 그 돌이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다." 이는 다른 사람을 해치려는 사람들은, 그들이 계획한 악이 자신을 해치기 위해 돌아올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하만이 이에 대한 한 예입니다.
27장 1절: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야고보는 우리가 단 하루라도 더 살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합니다(약 4:15). 이 사실을 끊임없이 인식하면 우리 모두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27장 2절: "네 자신의 입으로가 아닌, 다른 사람이 너를 칭찬하게 하라." 오늘날 기독교 집단에는, 그리스도의 영과 전혀 다른 자기 홍보가 많이 있습니다.
27장 23절: "네 양떼의 형편을 잘 알고 네 소떼에게 주의를 기울이라." 이는 하나님의 양 떼의 목자들에게 좋은 말씀입니다. 좋은 장로는 그의 교회에 있는 모든 신자의 영적 상태를 알 것입니다.
28장 13절: "자기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이를 자백하고 버리는 자는 자비를 얻으리라." 이는 우리의 죄를 하나님께 자백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가르치는 성경의 가장 분명한 구절 중 하나입니다. 우리도 죄를 끊어야 합니다.
29장 1절: "많은 책망을 받은 후에 목을 굳게 하는 사람은 갑자기 망하여 구제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어느 누구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자비와 선하심을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어느 날 갑자기 그는, 자신이 "빨간 선"을 넘었고 성령께서 그에게 간청을 멈추셨고 그 이후에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29장 18절: "계시(vision)가 없으면, 백성이 망하느니라." 오늘날 기독교 집단에 가장 필요한 것은 계시의 말씀을 가진 남성과 여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 우리를 통해 이 땅에서 그분이 성취하실 수 있는 일에 대한 계시의 말씀을 우리 모두에게 주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 인도(India)를 위한 부담을 당신에게 주시기를 구하십시오.
29장 20절: "말이 성급한(혹은 일이 성급한) 사람을 보았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 이것은 솔로몬의 잠언의 마지막 장이며, 우리는 이제 끝에서부터 일곱 절이 남았습니다. 이 29장 전체에서 솔로몬은 다양한 유형의 어리석은 자들을 묘사해 왔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결론을 내리기 전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누구인지 말하겠습니다 - 그는 말 하는데 빠르고 결정이 성급한 사람입니다. 그가 일등 상을 받았습니다!" 이 책에 언급된 다른 모든 어리석은 자들에게는 성급한 사람보다 더 많은 희망이 있습니다!
30장은 아굴이라는 사람이 썼습니다. 7,8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주께 두 가지를 구했나이다. 내가 죽기 전에 나를 거절하지 마십시오.
(1) 속임수와 거짓말을 저에게서 멀리하십시오.
(2) 저에게 가난도 부귀도 주지 마소서."
구약시대에는 이런 기도를 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구절의 나머지 부분에서 말했듯이) 그들은 가난하면 도둑질을 하고, 너무 부자가 되면 주님을 버릴지도 모른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90%의 신자도 그 기도를 해야 합니다. 너무 많은 돈이 그들을 망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살기에 매우 얕은 수준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내가 가난하든 부자든 상관없습니다. 나는 둘 다 감당할 수 있습니다"(빌 4:12)라고 말했습니다. 부가 바울을 멸망시키지는 못할 것이고, 가난함도 그를 주님에게서 멀어지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장의 나머지 부분에는 묵상할 가치가 있는 좋은 잠언들이 많이 있습니다.
31장은 르무엘이라는 왕이 썼으며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가르친 몇 가지 내용을 나열합니다. 1절부터 9절까지의 좋은 조언 뒤에, 우리는 마지막 부분인 10절부터 31절에 왔습니다. 이 부분은 모든 젊은 남성과 여성에게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경건한 아내의 자질을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모든 젊은 여자는 이와 같기를 추구해야 하고, 모든 젊은 남자는 그런 여자를 찾아서 결혼해야 합니다. 이 경건한 아내에 관해 언급된 여러 가지 사항에 유의하십시오: 그녀는 손으로 일하고 매우 열심히 일하는 사람입니다. 그녀는 일찍 일어나서 식사를 준비합니다. 그녀도 진취적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밭을 사서 직접 손으로 포도밭을 가꾸고 있습니다. 그녀는 직접 손으로 옷을 짓습니다. 그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줍니다. 그녀는 자신이 직접 꿰맨 따뜻한 옷으로, 겨울에 아이들을 보호합니다. 그녀는 남편을 지지하고, 남편은 그녀를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그녀는 옷을 만들고 판매합니다. 그녀는 위엄이 있고 지혜롭게 말합니다. 그녀의 혀에는 친절의 법칙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의 손이 단단하고 혀가 부드럽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많은 젊은 자매들의 상황은 정반대입니다. 그들의 손은 부드럽고(열심히 일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들의 혀는 단단합니다(그들은 교만하고 무례합니다). "매력은 거짓되고 아름다움은 헛되다.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다"(30절). 그녀의 남편과 자녀들은 일어서서 그녀를 세상 최고의 아내이자 어머니라고 칭찬합니다.
젊은 남성들이여,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찾아야 할 아내입니다.
젊은 여성들이여,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되어야 할 여성입니다.
그리고 모든 젊은이 여러분: 잠언을 자주 읽어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경건하고 지혜로운 남자와 여자로 성장하십시오.
* 잠언의 모든 구절을 공부하고 싶다면, https://www.cfcindia.com/verse-by-verse/Proverbs 로 방문하세요 - 이 책에 나는 잠언의 모든 구절을 설명하였습니다.
이 책은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지만, 공부하면서 하나님께서 이 책을 성경에 두신 이유가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솔로몬은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되고 공허함을 알았다고 말하면서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하는 모든 일에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1:3).
솔로몬은 인간의 지혜에 관한 한 지금까지 살았던 가장 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은 솔로몬 이전에 그 누구도 갖지 못했고, 솔로몬 이후에도 갖지 못한 지혜를 그가 갖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왕상 3:12,13). 솔로몬은 생애 초기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어느 정도 있었고 그때 잠언을 썼습니다.
잠언은 신(divine)의 지혜입니다. 그러나 전도서는 인간의 지혜입니다, 즉 "해 아래" 사는 사람의 지혜입니다(1:3). 전도서에는 '해 아래'라는 표현이 자주 나오는데, 그 이유는 저자가 해 아래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잠언은 해 위에 살았던 사람의 지혜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살도록 부름 받은 곳은 바로 하늘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전도서를 성경에 두셨을까요?
성경은 신의 지혜가 인간의 지혜보다 얼마나 더 높은지를 보여주기 위해, 인간의 지혜를 묘사합니다. 욥기의 많은 부분은, 인간의 지혜로 하나님에 관해 많이 말했지만 대부분은 모두 잘못된 세 설교자의 연설로 구성됩니다(욥 42:7).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말이 성경에 기록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전도서는 지구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영리함에 의존하면 하나님을 찾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성경에 포함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여, 이것을 영리한 자들과 총명한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1:25). 영리하고 총명한 사람들에게는 없지만 어린아이들에게는 무엇이 있습니까? 겸손입니다. 영리하고 총명한 사람이 겸손해지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총명한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총명을 자랑하는 것은 확실히 불경건한 일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아무리 지혜로워도, 하나님의 뜻을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솔로몬은 역사상 가장 지혜롭고 총명한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할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은 성전의 설계를 솔로몬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다윗에게 주셨습니다. 역대상 28장 11-19절에서,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 등잔대에 금을 얼마나 써야 하고, 갈고리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들어야 했다는 내용은 정말 놀랍습니다! 왜 그 계획이 다윗에게 주어졌습니까? 왜냐하면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머리가 똑똑한 사람이었지만, 다윗은 선한 마음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40세가 아니라, 80세에 성막의 설계를 그에게 주셨습니다. 왜일까요? 40세에 그는 이집트의 지혜로 가득 차 있어, 하나님의 계획을 상당히 수정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 위에 머무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80세가 되었을 때, 인간 지혜의 찌꺼기는 그의 머리에서 제거되었고 기꺼이 하나님의 지혜에 복종하려고 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성막을 단순한 구조로 지었습니다.
성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솔로몬은 이 건물을 지은 청부업자일 뿐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계획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인 다윗이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시는 그분의 계획을, 머리가 좋은 영리한 사람에게 나타내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선한 겸손한 사람에게 나타내십니다. 당신이 똑똑하고 겸손하다면, 그것은 괜찮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구 사항은 지능이 아니라, 겸손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8절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대에서 자기가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어 지혜롭게 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지능에 대해 감사하십시오. 이는 과학이나 수학 연구에 매우 유용합니다. 하지만 성경의 경우는 다릅니다. 여기서 당신이 지혜로워지기 위해서는, 어리석어져야 합니다. 그것은 당신이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와 이렇게 말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주님,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 저는 당나귀만큼 어리석습니다. 저를 가르쳐주세요". 이 세상의 영리한 것이 하나님께 미련한 것입니다(고전 3:19). 이것이 바로 전도서가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영리한 자들의 교활함을 간파하신다. 영리한 사람의 추론은 쓸모가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고전 3:19,20). 세상에서 가장 영리한 사람들의 모든 추론과 주장을 종합해서,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이 쓸모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영적인 것에 있어서는 겸손한 사람이 큰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지능과 영리함을 자랑하는 사람은 엄청난 단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지능이 하나님을 섬기는 데 주요 요구 사항이었다면, 예수님께서는 가말리엘이 예루살렘에서 운영하고 있던 성경학교에 가셨을 것이고, 그곳에서 사도들을 선택하셨을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지 않으셨나요? 왜 갈릴리 호숫가에 가셔서, 성경학교에 가본 적도 없는 어부들을 뽑으셨을까요? 왜냐하면 그분은 영리한 사람을 찾지 않으시고, 배우려는 마음이 있는 겸손한 사람을 찾으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가르침을 잘 받을 수 있는 사람인가요? 당신이 읽고 있는 내용 때문에 기분이 상했다면, 그것은 당신이 교만하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만이 화를 냅니다.
전도서는 사람이 많은 지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전혀 영적이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심리학에서 발견되는 인간의 지혜에는 좋은 점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의 지혜가 아닙니다. 그리고 신성한 지혜와 인간의 지혜가 섞이면, 인간의 지혜만 있는 것보다 더 위험합니다. 누군가가 당신을 독살하고 싶다면, 그는 많은 양의 우유에 약간의 독을 섞을 것입니다. 완전히 나쁜 것들은 감지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심리학에는 좋은 점이 많습니다 - 그렇기 때문에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신의 지혜가 아닙니다. 신의 지혜는 오직 성경에서만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그들의 마음을 복종하지 않는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많은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당신이 그들을 따르면, 당신은 잘못된 길로 갈 것입니다.
전도서와 잠언은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가인의 제사는 종교적인 제사였습니다. 아벨의 제사는 영적인 제사였습니다. 시대를 거치면서, 종교적인 사람들과 영적인 사람들 사이에는 끊임없는 갈등이 있었습니다. 사울은 종교적인 사람, 즉 머리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영적인 사람, 즉 마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적인 분이셨습니다. 우리의 뇌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와가 아담에게 복종하도록 창조된 것처럼, 뇌는 마음과 성령에 복종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가인과 아벨에서 시작된 종교성과 영성의 흐름은, 니므롯과 아브라함으로 이어졌고, 요한계시록의 바벨론과 예루살렘으로 끝납니다. 전도서와 잠언에서도 비슷한 대조를 볼 수 있습니다.
전도서는 설교자의 말을 담고 있습니다(1:1).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좋은 설교를 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그들은 머리만을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설교는 사람들의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다 -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의 마음에서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잠언은 설교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실천한 것만을 설교해야 합니다. 이것이 종교성과 영성의 차이입니다. 이것이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의 차이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은 말은 하여도 행하지 아니하느니라"(마 23: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들이 가르친 것이 잘못된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시대의 근본주의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강단에서 설교한 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예수께서 (먼저) 행하시고 그 다음에 가르치셨느니라"(행 1:1). 그분은 자신이 설교한 것을 실행한 것이 아니라, 이미 실행하신 것을 설교하셨습니다. 그분은 설교하시기 전에 30년 동안 행하셨습니다. 그것이 참된 경건입니다.
지구상의 모든 것의 공허함
전도서의 처음 두 장은 지식, 즐거움, 성취, 수고의 공허함에 대해 말합니다. 이 책을 통해 저자가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에 관해 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의 이름인, 여호와(Yehovah)나 야훼(Yahweh)를 결코 사용하지 않습니다 - 이 책 전체에서 단 한 번도. 잠언에서는 이 단어를 자주 사용합니다. 여기의 저자는 그의 하나님과 어떤 언약관계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단지 하나님에 대한 학문적 지식, 즉 하나님에 관한 사실들에 대한 지식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었을지 모르지만, 마음-관계나 언약-관계의 결과는 아니었습니다.
책 말미에서, 저자는 "그렇다면 모든 것의 결말은 무엇인가?"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에 대해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들을 지키라."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왜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말합니까? 그분이 선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고,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선악간에 숨겨진 모든 것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12:14).
종교적인 사람은 심판이 두려워서 선한 일을 합니다. 그것이 모든 거짓 종교가 운영되는 방식입니다. 그들은 심판을 피하고 다음 생에서 보상을 받기 위해, 선하게 행동하도록 가르칩니다! 거짓 기독교도 같은 것을 전파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주된 동기가 심판을 두려워하는 것이라면, 거기에는 거짓 기독교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15).
진정한 영성은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순종한 것은 아버지께서 자기를 벌하실까 두려워서가 아니라, 아버지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도 순종에 대한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전도서 저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삶에 대한 그의 태도는 숙명론과 무관심이었습니다. 그는 어떤 일에도 놀라지 않도록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대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는 영원에 대해 한 번 언급했지만, 그것에 대해 많이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했고 단지 안전한 편에 있기 위해, 약간의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투자하면서 이 지상 생활을 최대한 활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여기 성령의 도움 없이, 자신의 감각과 지성, 추론을 통해 하나님을 발견하려고 노력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종교를 따르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진리에서 크게 빗나가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도움 없이는,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님만이 하나님의 깊은 것들을 우리에게 계시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모릅니다"(고전 2:11).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날마다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에 관해 연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그들 가운데 오셨을 때, 그들은 그분을 "마귀들의 왕"라고 불렀습니다!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이 예수님을 그런 이름으로 불렀다면,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구약성경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그런 이름으로 부른 사람은 진보적인 사두개인들도 아니었습니다. 근본주의적인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똑똑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겸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머리는 옳았지만, 마음은 옳지 않았습니다. 2000년 전에 그런 일이 일어났고, 오늘날에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계시를 주시는 성령님을 겸손히 의지하며 살지 않으면, 우리는 솔로몬처럼 타락하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라보며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께서,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는 베드로가 이 진리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인간적인 영리함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밤낮으로 성경을 연구하던 바리새인들은 알지 못하는데, 베드로와 같은 학식 없는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는 오직 성령의 계시를 통해서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에게는 그것이 있었고 바리새인들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성령을 의지하십시오.
솔로몬은 재산을 획득하고, 연못을 만들고(2:6), 많은 노예를 두며(2:7), 은과 금을 많이 모으는 등 다양한 형태의 쾌락을 통해 만족을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내 눈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마다하지 아니하였노라"(2:10). 결국 그는, "내가 나의 모든 행위를 살펴보니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었다"(2:11)라고 말합니다. 그런 다음 그는 "자신의 수고의 모든 열매를 자기 뒤를 이을 사람에게 남겨야 할 것인데, 그가 현명한 사람이 될지 바보가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라며 노력의 허무함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해 아래서 모든 것이 헛되었도다"(2:21,22).
2장 26절에서 흥미로운 내용을 읽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지혜와 지식과 기쁨을 주셨느니라." 이것은 참된 진술입니다.
당신의 마음이 깨끗하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이 땅에서 신의 지혜와 그분에 대한 지식과 그분의 임재 안에 있는 충만한 기쁨을 축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인에게는 어떤 임무를 주시나요? 언젠가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는 사람에게 모두 주어질 수 있도록, 돈과 물질을 모으고 수집하고 쌓아두는 일입니다! (26절) 영원에서,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입니다.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지혜와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주님에 대한 기쁨을 추구하고 있거나, 아니면 세상의 것들을 쌓아두고 수집하고 모으고 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영적인 사람과 세상적인 사람 사이의 분명한 대조를 봅니다. 종교적인 사람도 역시 세상적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성경을 알지도 모르겠지만, 하나님을 알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 역시 영원에서 도움이 되지 않을 물질적인 것과 세상적인 지식을 추구하는 데 시간을 보냅니다.
모든 것이 공허하다는 증거
3-6장에서 솔로몬은 이 땅의 모든 것이 헛됨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3:1-8: 솔로몬은 인간의 본성과 세상에 대한 예리한 관찰자였습니다. 수년 동안 관찰한 끝에, 그는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때와 시기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여기에는 참된 진술과 거짓된 진술이 있습니다. 심리학은 진실과 오류의 혼합입니다. 솔로몬은 낳을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 모두 맞습니다. 그러나 이어서 그는 죽일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다고 말합니다! 영적인 사람에게는 살인하거나 미워할 시간이 없으며 - 그가 미워하는 인간도 없습니다. 영적인 사람은 항상 하나님 안에 거하며 모든 사람을 사랑합니다.
아버지에게 화가 나면 베개가 아버지라고 상상하면서, 베개를 때리는 것이 분노를 없애는 방법이라고 가르치는 심리학자들이 있습니다! 솔로몬은 아마, 미워할 때가 있다고 했을 때 그런 말을 믿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책에 등장하는 솔로몬의 세상적인 사고의 예가 여기에 있습니다. 종교 설교자들은 설교할 때 하나님의 말씀에 그들의 세상적인 지혜를 더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상한 마음으로 살지 않는다면, 인간의 지혜는 대부분 옳은 것처럼 들리기 때문에 잘못된 길로 이끌리기 쉽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기독교계에서 "시각화"라는 새로운 가르침이 생겨났습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지금은 5명만 있어도, 눈을 감고 교회에 5,000명이 모인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현재는 작은 집에서만 모임을 하고 있지만, 매우 큰 건물에서 모임을 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만약 당신이 절름발이라면, 걷는 모습을 마음속에 그려 보십시오. 스쿠터만 소유하고 있다면, 멋진 새 차를 소유하고 있는 모습을 그려 보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이런 것들을 얻는 데 필요한 믿음을 갖게 될 것이며 - 그것들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시각화의 대부분은 세상의 사치와 큰 교회 건물 등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나는 누군가가 사람들에게 "십자가를 지고 자기에 대해 죽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신을 시각화하도록 가르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시각화에 대한 가르침은 성경이 아닌, 현대의 "뉴에이지" 철학(신의 진리를 위조한 것)과 심리학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분별력이 없는 많은 신자들은 이것이 그들의 믿음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상상합니다.
믿음은 시각화에 기초하지 않습니다. 로마서 10장 17절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믿음은 오직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기초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마음속에 그려보는 것으로, 이삭을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의 믿음은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시각화하기 시작하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주실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성경이 아닌 심리학의 가르침입니다. 긍정적인 사고는 사업가들에게 좋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성경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시각화나 긍정적인 사고로 기적을 행한 것이 아닙니다. 요즘에는 그러한 위조품에 속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전도서는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 인간의 지혜에 의존하는 것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영원"이라는 단어는 이 책에서 단 한 번 나옵니다 - 3:11: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에 영원을 두셨으니, 그것이 없이는 사람이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능히 알아낼 수 없느니라"(문자적 번역). 모든 인간의 마음에는 하나님 외에는 그 누구로도, 그 어떤 것으로도 결코 채워지거나 만족될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의 공백이 있습니다. 누군가 말했듯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찾을 때까지 불안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돈, 여자, 재산, 명예, 지위에서 결코 만족을 찾지 못하도록 우리 마음에 영원을 두셨습니다. 여기서는 우리가 영원한 것에 우선순위를 두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결코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해 아래의 것들"을 위하여 사는 사람들에게는, "평생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12절). 종교인이나 심리학자들은 사람들에게 악을 행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니요. 그들은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많은 선한 일을 할 수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과의 접촉이 없으며, 여전히 영원한 가치를 위해 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3장 19-21절에서, 우리는 인간의 지혜가 영원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을 봅니다: "사람의 아들들의 운명과 짐승의 운명이 동일하니라. 하나가 죽으면 다른 하나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나을 것이 없다. 그들은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간다. 사람의 숨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숨은 땅 아래로 내려가는지 누가 알겠는가?" 이것이 솔로몬이, 모든 그의 인간적 지혜를 동원하여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그는 사람과 짐승이 다 죽었을 때 그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 책에서, 우리는 지구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 하나님과 종교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는 몇 가지를 제대로 이해했고, 많은 것을 틀렸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전도서가 성경에 포함되도록 허락하셨을까요: 우리는 인간의 지혜와 심리학을 통해서는 하나님을 찾을 수 없고, 오직 그분의 성령을 통해서만 찾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는 영리한 사람들의 가르침을 조심해야 합니다. 누군가의 가르침이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두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런 사람의 말을 듣는 데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4장 4절: "나는, 행해진 모든 노동과 모든 기술이 사람과 이웃 사이의 경쟁의 결과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솔로몬은 전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쟁 정신에 의해 동기를 부여받는다는 사실을 관찰했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것은 기독교계의 대부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 단체는 더 높은 급여를 제공함으로써 다른 기독교 단체의 사역자를 끌어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의 정신입니다. 경건한 사람은 사람이든 교회든 조직이든 결코 다른 사람과 경쟁하지 않습니다.
4:9-12에는 정말 좋은 진술이 몇 가지 있습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4:9). 남편과 아내가 함께 일하는 것은 그들이 따로 일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위해 훨씬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또한 번성하고 자녀를 가지므로, 독신이었을 때보다 더 많은 일을 성취하게 됩니다. 이는 교회의 형제자매들에게도 적용됩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은 두 번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한 사람이 넘어지면, 다른 사람이 그를 일으킬 수 있느니라"(4:10). 죄에 빠지거나 낙담한 사람을 일으켜 세우고자 열망하는 형제자매가 있는 교회는 정말 멋진 곳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주님의 군대는 자기 부상자를 쏘는 유일한 군대"입니다.
"혼자 있어 넘어지되 일으켜 줄 사람이 없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4:10). 교제 없이 혼자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은 위험합니다.
여기에 교제의 세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따뜻해질 수 있다"(4:11). 우리는 교제할 때 서로의 마음에 불을 계속 타오르게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당신 혼자서 하나님을 위해 불타오를 수 없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위해 불타오르는 사람들과의 교제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네 번째 이유는 "누가 혼자 있는 그를 제압할 수 있다면, 두 명은 저항할 수 있다"입니다(4:12).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려고)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그리고 그들이 서로 영으로 하나가 된 곳에서는, 나는 그들 가운데 있다. 그러면 그들이 땅에서 매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다"(마 18:18~20). 사탄의 활동은 서로가 완전히 하나된 두 신자에 의해 속박 받고 제지될 수 있습니다. 신자는 그 일을 혼자서 할 수 없습니다 -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몸의 표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 그리고 최소한 두 사람이 필요합니다.
"세 가닥으로 된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4:12). 튼튼한 결혼 생활을 위해서는 세 가닥이 필요합니다 - 남편, 아내, 주님. 결혼 생활의 중심에 주님이 계시지 않으면, 그 결혼 생활은 번성할 수 없습니다.
교정에 관한 좋은 말씀이 있습니다: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젊은이가, 교정을 받을 줄 모르는 늙고 어리석은 왕보다 나으니라"(4:13). 어리석은 왕이 되는 것은 쉽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적인 지도자의 위치로 높이셨을 때, 우리는 항상 옳고, 더 이상 우리를 교정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상상하기 쉽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 어리석음의 자리에 이르지 않도록 구원해 주시길 바랍니다. 나를 교정해 준 젊은이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나는 그들의 교정을 받고 더 나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내 얼굴에 내가 볼 수 없는 검은 자국이 있다면, 그것을 지울 수 있도록 지적해 주는 사람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20살이든지, 80살이든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는 나를 도왔습니다.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교정받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늙고 어리석은 왕이 되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언제나 교정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5장 1-3절에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있을 때에는 많은 말을 하지 말라고 들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문제를 이야기하려고 성급하게 말이나 생각을 하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당신은 땅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을 적게 하라" (2절). 기도할 때, 우리는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을 더 많이 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전화통화와 같습니다. 전화기에는 듣기 위한 수화기와 말하기 위한 송화구가 있습니다. 당신보다 훨씬 성숙한 사람과 이야기할 때, 당신은 더 많이 말합니까, 아니면 더 많이 듣습니까? 오직 교만한 사람만이, 자기보다 더 경건한 사람의 말을 듣기보다 더 많은 말을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도가운데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어떠해야 합니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기도할 때 하나님께 말씀하실 기회를 결코 드리지 않습니다. 모든 이야기는 그들이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듣는 것이 90%, 말하는 것이 10%여야 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모든 문제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여전히 우리가 그분께 우리의 갈망을 표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요청하십니다. 기도는 무릎 꿇고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항상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8:1).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무전기"를 들고 있는 경찰관을 본 적이 있습니다. 경찰관들은 언제든지 본부에서 오는 모든 메시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기 때문에, 이러한 무전기는 항상 켜져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 하늘에 있는 우리 본부에서 오는 명령에 항상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하나님께 갚을 수 없는 서원을 하지 마십시오.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5:4,5). 우리는 결코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나님께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헌신의 노래를 부르고 주님께 굴복할 때 하나님께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진심이 아니라면, "나의 은과 금을 받으십시오 - 한 푼도 아끼지 않겠습니다"라고 노래하지 마십시오. 만일 당신이 세속적인 노래도 부른다면 "내 목소리를 받으시고 항상 나의 왕만을 노래하게 하소서"라고 노래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삶의 모든 것을 실제로 주님께 내어 드리지 않았다면,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깁니다"라고 노래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어느 날보다 일요일에 하나님께 더 많은 거짓말을 합니다. 왜냐하면 일요일은 집회에서 그러한 노래를 부르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노래에서 아직 여러분의 삶에 해당되지 않는 가사를 발견하면, 간증이 아닌 기도로 부를 수 있습니다. 당신도 그렇게 살고 싶다고 주님께 말씀드리십시오. 그렇다면 당신은 정직합니다. 하지만 노래 한 구절에 묘사된 삶이 당신의 갈망조차 아니라면, 솔직히 말해서 당신은 그 구절에 이르렀을 때 조용히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그들이 하나님께 거짓말을 노래하게 하십시오. 하지만 당신 자신은 솔직해지십시오.
5장 10절: "돈을 사랑하는 자는 돈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이것도 역시 헛되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의 필요에 따라 넉넉하게 만드셨으나, 한 사람의 탐욕을 채우기에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욕심 많은 사람은 아무리 돈을 벌어도 결코 행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백만장자라도 더 많은 것을 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돈을 사랑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6:13) - 둘은 서로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일이 늘어나면(월급이 오르면), 지출도 늘어납니다"(5:11). 훈련되지 않은 사람의 지출은 수입에 비례하므로, 결코 돈을 저축할 수 없습니다.
"일하는 사람은 많이 벌지는 못하지만, 적게 먹든 많이 먹든 잠은 즐겁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배불러서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5:12). 밤에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으면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습니다. 단순한 음식이 더 건강한 삶을 만듭니다.
6:1,2: "내가 해 아래서 본 악이 있는데, 그것은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재물과 부와 명예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영혼은 그가 원하는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런 것들을 먹을 수 있는 힘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여기 돈을 많이 벌었던 남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를 추구하다 건강을 잃었고, 의사에게 많은 것을 먹지 못하도록 금지당합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직장 생활을 하는 삶의 전반부를 건강을 망치며 부를 축적하는 데 보내고, 남은 인생은 건강을 되찾기 위해 그 부를 소비하는 데 보냅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들은 열심히 일하다가 건강을 망치고, 돈을 모으기 위해 자신을 파괴하다가 죽습니다.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좋은 시절과 매일의 가장 좋은 부분을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그것이 가장 지혜롭게 사는 길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법
7-9장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실용적이고 좋은 조언을 많이 담고 있습니다.
"좋은 이름이 좋은 향유보다 낫고, 죽는 날이 태어나는 날보다 낫다"(전 7:1). 그것은 당신이, 하나님과 영원의 가치를 위해 살아온 경우에만 해당됩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인내하는 영이 교만한 영보다 낫다"(7:8). 오래 참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보다 훨씬 나은 사람입니다.
"'왜 옛날이 지금보다 더 좋았을까?'라고 말하지 말라. 너희가 이것을 묻는 것은 지혜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7:10). 예수님의 제자에게, 미래는 항상 과거보다 더 나은 날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과거를 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7장 16,17절에는, 인간의 지혜가 제공하는 어리석은 조언 중 하나가 있습니다: "너무 의인도 되지 말고 너무 악인도 되지 말라. 스스로를 파괴할 뿐이다." 세상 사람들은 의로움에 대해 조금이라도 타협하지 않고는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기서 약간의 뇌물을 주고 저기서 약간의 거짓말을 하는 것을 정당화합니다. 그것이,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물론 참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제안을 거부합니다. 이 구절을 보는 또 다른 방법은 다음과 같이 읽는 것입니다: "매우 의로운 사람이나 매우 영적인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요구 사항을 넘어서는 것이다.
7장 28절에서, 솔로몬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천 명의 남자 중에서 한 명의 현명한 남자를 찾았다. 그러나 나는 천 명의 여자 중에서 현명한 여자를 찾지 못했다." 그렇다면 남자가 여자보다 현명하다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가 영적인 존재가 되는데 동등한 힘과 동등한 영적 능력을 갖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솔로몬은 아내 700명과 첩 300명 등 그의 하렘(harem)에 있었던 1000명의 여자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왕상 11:3). 하렘에 있던 경박한 여자들을 보면, 그가 그들 중 누구에게서도 지혜를 찾지 못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남자보다 지혜로운 경건한 여자가 아주 많습니다.
"사람의 지혜는 그 사람을 빛나게 하여, 그의 심각한 얼굴을 기쁨으로 빛나게 하느니라"(8:1). 우리가 지혜를 더 많이 가질수록, 우리의 얼굴은 주님의 기쁨을 더 많이 발산할 것입니다. 심술궂고 불행한 표정은 지혜가 없는 어리석은 사람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심술궂거나 시큰둥한 분이 아니셨습니다. 그분의 제자들도 그러해서는 안 됩니다.
"악한 일에 대한 형벌은 빨리 집행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악을 행하려는 마음으로 가득 차게 된다"(8:11). 누구든지 어떤 식으로든 죄를 짓자마자 하나님께서 형벌을 내리셨다면, 전 세계 사람들이 죄를 짓는 것을 멈추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죄인이 백 번 악을 행하고도 오래 산다 할지라도, 나는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만 잘 될 것임을 안다"(8:12).
8장 17절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 많으나 우리의 유한한 인간 지혜로는 다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많다고 말합니다.
9장 8절은 우리의 삶과 사역에 적용할 수 있는 아름다운 구절입니다: "네 옷을 항상 희게 하고, 네 머리에 기름이 부족하지 않게 하여라." 이는 우리가 양심을 깨끗하게 하고 마음을 항상 순결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항상 성령의 기름 부으심 아래 살기를 힘써야 합니다.
9장 14-18절은 한 보잘것없는 지혜자에 의해 적들로부터 구원받은 작은 도시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러나 그 지혜자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지혜가 전쟁 무기보다 낫다"(9:18). 우리는 잔인함이 아닌 친절함으로 사람들을 얻어야 합니다. 해와 바람이 누가 더 강한지 겨루는 어린이 우화가 있습니다. 한 남자가 길을 걷고 있었는데, 그들은 그에게서 코트를 벗기는 사람이 더 강한 자가 될 것이라고 결정했습니다. 바람이 먼저 가서 그 사람에게 세게 불었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많이 불수록 남자는 코트를 몸에 꼭 움켜쥐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태양의 차례였습니다. 태양은 단지 날씨를 점점 더 뜨겁게 만들었습니다. 금방, 그 남자는 코트를 벗었습니다. 지혜가 힘보다 낫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인자하심으로 우리를 회개하게 하십니다(롬 2:4).
세상 지혜의 예시
"죽은 파리는 향료 제조자의 향유에서 악취를 풍기게 한다. 그러므로 약간의 어리석음이 많은 지혜와 명예보다 더 무겁다"(10:1). 작은 어리석은 행동 하나가 지혜에 대한 간증 전체를 망칠 수 있습니다, 맛있는 치킨 카레에 도마뱀 한 마리가 빠지면 카레 전체가 망가지는 것처럼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어리석은 말과 행동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달라고 하나님께 겸손히 간구해야 합니다.
10장 4절은 리빙 바이블에서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의역되었습니다: "상사가 너에게 화를 내더라도, 그만두지 말라."
"(다른 사람을 위해) 구덩이를 파는 자는 거기에 빠질 것이다"(10:8).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우리를 대하십니다.
"담을 허무는 자는 뱀에게 물릴 것이다"(10:8).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 주위에 경계를 그으셨고 우리는 그 경계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우리가 그 밖으로 나가면, 옛 뱀인, 사탄이, 우리를 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에덴의 아담과 하와, 그리고 사울 왕과 웃시야 왕에게 일어났던 일입니다(창 3장; 삼상 13:9; 대하 26:16).
"도끼가 무뎌졌는데 날을 갈지 않으면, 더 많은 힘을 써야 한다. 지혜는 성공을 가져다 준다는 장점이 있다"(10:10). 먼저 도끼를 갈면 작업을 더 빨리 끝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양심을 깨끗하게 유지함으로써 영적인 날을 예리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기 때문에, 우리 손에 있는 성령의 검도 날카로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빈약한 지식으로 설교하는 것은 전쟁에서 무딘 칼을 사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적은 패배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종종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와 같은 한 문장으로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사탄의 유혹에 대한 그분의 대답도 예리한 검에서 나왔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등.
여기서도 우리는 세상의 지혜가 혼합된 것을 봅니다. "돈이 모든 것의 답이다" (10:19). 세상 사람이 하는 말이 바로 이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는 온 마음을 다해 돈을 추구합니다. 모든 문제의 답은 하나님이심을 믿는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추구해야 합니다.
10장 20절은 침실에서 험담을 하지 말라는 권면입니다.
"네 빵을 물 위에 던져라. 그러면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11:1). 우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 - 그러면 우리는 뿌린 대로 거둘 것입니다. 우리가 주는 만큼 우리는 받을 것입니다.
"나무가 남쪽으로 쓰러지든 북쪽으로 쓰러지든, 쓰러진 곳에 그대로 있다"(11:3). 사람이 죽으면 그의 영원한 운명은 정해집니다.
"바람이 어디로 불지 살피다가는 씨를 뿌리지 못할 것이며, 구름만 쳐다 보는 사람은 거두어들이지 못할 것이다"(11:4). 우리는 주님을 섬기기 위한 완벽한 조건을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편할 때나 그렇지 않을 때나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주님을 섬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딤후 4:2).
"바람의 길을 모르듯이, 너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지 못한다"(11:5). 우리의 생각은 하나님의 지혜의 바다를 담을 수 없는 작은 컵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지구상의 많은 것들에 대해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영역에서 어떻게 일하시는지 우리는 완전히 알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바람은 원하는 곳으로 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3:8).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령의 모든 사역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11장 9절-12장 7절은 젊은이들에게 "만일 그 마음의 충동과 눈의 욕망을 따르면, 하나님이 이 모든 일에 대하여 그들을 심판하시리라"는 경고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우리 몸으로 하는 모든 일에 대해 하나님께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매일 살아야 합니다. "인생은 잠깐 사이에 지나가 버리기" 때문에 그들은 분노와 영원한 슬픔을 초래할 모든 것을 버리고, 아직 젊을 때 창조주를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 더 어려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노년기는 12:2-7절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12:9-11절은 훌륭한 설교자의 많은 자질을 묘사하는 훌륭한 세 구절입니다. 좋은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 뿐 아니라 그것을 일상 생활에 지혜롭게 적용하는 방법도 아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어떤 주제에 대해 말씀이 말하는 모든 것을 찾기 위해 성경을 철저하게 조사하고, 연구한 결과를 정리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 그는 진리를 정확하고 즐겁고 흥미로운 방식으로 전달하기 위해 주의를 기울일 것입니다. 그의 말은 목자장이 주신 말씀으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중요한 진리를 심어주고 그들이 행동으로 옮기도록 자극합니다.
12장 12절에서는 책을 과도하게 공부하면 지치게 만들 수 있다고 말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를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12:13,14)라는 권고를 받습니다. 종교인은 심판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반면에, 영적인 사람은 사랑과 감사로 하나님께 순종합니다(요 14:15).
그래서 전도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더라도 사람들이 여러 분야에서 옳은 일을 행할 수 있는 방법을 알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옳은 일을 하려는 그들의 동기는 언제나 이기적일 것이며, 그들은 모든 사람을 판단하는 독선적인 바리새인들이 될 것입니다. 그들은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지만, 앞서 말했듯이, (영적 교만의) 도마뱀 한 마리가 그들의 카레 요리 전체를 망칠 수 있습니다
신랑과 신부
솔로몬의 노래는 "아가"와 "찬가"라고도 불립니다.
"주(Lord) - YHVH"라는 단어는 이 책에서 단 한 번 나옵니다 ('여호와의 불꽃' - 8:6 - 히브리어).
일부 기독교인들은 이 책을 읽는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결혼 생활의 성적인 부분에 대해 잘못된 이해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성에 대한 그들의 이해가 영화와 세상의 미디어에서 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책을 통해 배우기를 분명히 원하시는 두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1. 결혼 생활에서 성적 관계는 매우 좋고 매우 필수적이라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는 사랑하는 신부와 신랑의 관계처럼 친밀하고 따뜻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성기능을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생식기를 창조하신 후, 그분은 아담과 하와에게 분명히 성적인 결합을 통해 번성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1:28). 그런 다음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모든 것을 보시고(성기능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심히 좋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창 1:31). 하나님께서 성경 첫 페이지에서 남편과 아내 사이의 성을 "매우 좋다"고 선언하셨다면, 우리는 이 주제에 대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매우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솔로몬의 노래(아가)에서 배우는 것은, 서로에 대한 비이기적인 사랑이 결혼 생활에서 성행위를 순결하고 거룩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사랑 없는 남녀의 결합은 육신적인 것입니다.
성기능을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다른 많은 일과 마찬가지로, 사탄은 사람들이 혼외 성관계에 빠지도록 함으로써 그것을 왜곡시켰습니다.
원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성과 마찬가지로, 그것 역시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을 선한 목적으로도, 악한 목적으로도 사용해 왔습니다. 원자가 쪼개질 때, 생성된 에너지는 도시 전체에 전력을 공급하는 데 사용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수천 명의 사람들을 파괴하는 폭탄을 만드는 데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다이너마이트를 생각해보세요. 그것은 집의 기초를 세우기 위해 바위를 폭파하는 데 사용될 수도 있고, 사람을 죽이는 폭탄을 만드는 데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성" 역시 좋은 의미로 사용될 수도 있고 나쁜 의미로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이 담긴 보자기 하나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환상을 한 번 보여 주셨고, 베드로에게 죽여서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유대 의식법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먹기를 거부하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하나님이 깨끗하게 한 것을, 속되다 여기지 말라"(행 10:15)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다"고 부르시는 것을, 부정하다고 부르지 마십시오. 세상이 "성"을 잘못 사용하는 것은, 물론 부정하고 악한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의 약정 안에서는, 거룩하고 순결합니다. 그것은 남편과 아내를 거룩한 유대로 묶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므로 나는 모든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게 솔로몬의 노래를 읽어 주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서로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서로 감사하는 법을 가르쳐 줄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우리 인도 문화에서는,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게 감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그들의 성적 결합은 기계적입니다.
또한 이 책은 결혼 생활에서 의사소통의 중요성, 즉 친절하고 사랑스러운 방식으로 서로에게 말하는 것의 중요성을 가르쳐 줄 것입니다. 이 책 역시 매우 현실적인 책입니다. 모든 결혼 생활에는 우여곡절이 있고, 때로는 사랑의 감정이 없을 수도 있으며, 모든 위기를 통해 진정한 사랑이 어떻게 승리하는가를 보여줍니다. 또한 죽어가던 결혼 생활이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는지 가르쳐 줍니다. 따라서, 이 책은 결혼 생활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주신 놀라운 선물인 "사랑과 성"에 대해 매우 현실적이고 실제적이며 실용적인 책입니다.
솔로몬의 노래는 또한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그림이기도 합니다. 기혼이든 미혼이든 모든 신자는 이런 방식으로 이 책을 공부하고 주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할 수 있습니다.
아가서는 내가 세례를 받은 직후인, 1961년에 처음으로 자세히 공부한 성경의 책이었습니다. 나는 자주 바다에 나가서, 인도 해안선의 사람이 살지 않는 외딴 지역에 자주 출항하는 배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나는 때때로 몇 주 동안 계속 신자들과 연락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 이 책을 공부하면서 내 영혼의 신랑이신 주 예수님에 대한 나의 헌신이 깊어졌습니다. 나는 내가 그분께 매우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나에게 매우 소중한 분이 되셨습니다. 나는 나를 향한 그분의 무한한 사랑 안에서 안식하고, 그분을 온전히 신뢰하고, 그분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온 마음과 영혼을 다해 그분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 이후로 수년 동안 나와 주님과의 관계는 더욱 깊어졌고, 이것이 바로 내가 냉담해지고 떨어져 나가는 것을 막아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책을 매우 소중히 여깁니다.
요한계시록 14장 3절에서 우리는 어린양을 따르는 자들이 다른 사람이 배울 수 없는 새 노래를 부르는 것을 봅니다. 그곳의 144,000명의 작은 무리는 지상 생애 동안 신랑의 발자취를 따라온 그리스도의 신부를 상징합니다. 신부만이 이 노래를 배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노래는 자신이 사랑하는 분에 대한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노래는 이 신부의 노래를 나타냅니다. 당신은 성경을 공부함으로써 그 노래를 배울 수 없고, 오직 예수님을 따름으로써만 배울 수 있습니다. 신부는 지상에 있을 때 이 노래를 배웠습니다. 주님은 지상 생활에서 우리에게 많은 시련을 겪게하시고, 바로 그 시련 속에서 우리는 이 노래를 배우게 됩니다.
사역이 결코 우리 삶의 주요 초점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이 항상 최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50년 동안 풀타임으로 주님을 섬긴 후, 나는 주님에 대한 나의 뜨거운 사랑이 나의 모든 사역의 기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뜨거운 사랑이 줄어들면, 우리의 사역은 하나님 보시기에 전혀 가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말씀하셨을 때 꾸짖으신 것에서 봅니다. "나는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너를 책망할 것이 있다: 너는 처음처럼나를사랑하지않는다"(계 2:2-4 - Living). 이것은 너무나 심각한 실패였기 때문에, 주님은 에베소 교회에 대한 그분의 인정을 완전히 빼앗겠다고 위협하셨습니다(계 2:5).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이고 사랑스럽고 헌신적인 관계는 주님을 위한 모든 참된 봉사가 흘러나오는 원천입니다 - 그것이 전도든, 교회 개척이든, 성경 교육이든, 사회 사업이든 무엇이든 말입니다. 우리는 먼저 "신랑과 신부의 노래"를 배워야 합니다 -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부르고, 우리가 그분께 다시 노래하는 노래입니다.
잠언은 신의 지혜에 대해 말하고 전도서는 인간의 지혜에 대해 말합니다. 그러나 솔로몬의 노래는 신의 사랑에 대해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경 지식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성경 지식이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솔로몬의 노래에서, 우리는 신부의 사랑이 자라나는 것을 봅니다.
첫 번째 장에서 우리는 사랑의 시작을 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열병에 더 가깝습니다. 젊은이들이 "서로 사랑한다"고 말할 때, 그들은 실제로 서로에게 "푹 빠져" 있을 뿐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그 동기에 있어서 사심이 없는 반면, 열병은 이기적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순수한 사랑의 표현은, 영화 스크린이나 로맨틱 소설에서 묘사되는 남자와 여자 사이의 표현이 아닙니다. 그것은 무력한 자녀를 향한 어머니의 사랑에서 나타납니다. 어머니는 그 아이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것입니다. 특히 아이가 아플 때 아기를 향한 어머니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에 빠졌다"고 말하는 젊은 남녀들은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그러는 것처럼, 매년, 서로를 위해 사심 없이 자신을 희생하지 않습니다. 서로에 대한 그들의 열병은 일이 자신의 바람대로 흘러가는 한 지속됩니다. 그러나 참된 어머니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자녀의 반응과 전혀 무관합니다. 아이가 장애가 있거나 아플 수도 있지만, 어머니는 아이를 계속해서 사랑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땅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가장 가까운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사랑을, 갓 태어난 아기를 향한 어머니의 사랑에 비유하신 이유입니다(사 49:15). 남편과 아내가 그렇게 서로 사랑할 수 있다면, 비로소 사랑을 진정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그 정도로 성숙해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립니다.
결혼 초기에,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는 이기심이 많습니다. 남편은 아내에게서 자신을 만족시킬 만한 것을 원하고, 아내는 남편에게서 자신을 만족시킬 만한 것을 원합니다. 남자는 일반적으로 성적 만족과 그를 섬겨줄 누군가를 원하는 반면, 여자는 일반적으로 안전과 편안한 삶을 원합니다. 둘 다 이기적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열병은 서로에 대한 헌신이 있는 사랑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도 마찬가지로 이기적인 방식으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처음에 우리 자신을 위해 무엇인가를 원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 아마도 지옥으로부터의 구원, 치유, 돈, 문제의 해결책, 기름부음받은 사역일 것입니다. 그러한 욕망은 모두 자기 중심적입니다. 하지만 사랑이 성숙해지면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나는 건강이나 부, 심지어 사역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는 당신이 있고, 그것이 내가 원하는 전부입니다. 나는 당신이 나의 단 한 번의 지상 생활을 최대한 활용하시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가 주님에게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생각하지 않고, 주님이 우리에게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성숙한 사랑입니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도 그러했습니다. 그분은 이 땅에 오셨을 때 "내가 사람에게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니요. 그분의 생각은 "내가 사람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였습니다. 그것이 신의 사랑이 항상 생각하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책의 마지막 장인 8장에서 마침내 우리가 도달하게 되는 성숙한 사랑입니다. 검증되지 않은 사랑이 마침내 참된 신의 사랑으로 성숙해집니다.
시편 기자는 "하늘에서는 당신 외에 누가 나에게 있습니까? 이 땅에서 당신 외에는 내가 원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시 73:25). 그것은 주님에 대한 사랑이 성숙해진 사람의 표현입니다. 그는 더 이상 건강이나 부, 또는 이 땅의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주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
사랑의 시작-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
1장 1절: 여기서 우리가 가장 먼저 주목하는 것은 이 노래가 신부의 노래가 아니라 주로 솔로몬의 노래, 즉 신랑의 노래라는 것입니다. 즉, 그것은 주로 우리를 향한 우리 주님의 노래이지, 우리가 그분께 드리는 노래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요일 4:19). 우리가 그분을 먼저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그분이 먼저 우리에게 이 노래를 부르셨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그분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절대로 주님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시작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출발점은 언제나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잘못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결코 낙담하거나 자신을 정죄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의 첫 번째 부분은 주님과의 "사랑에 빠지는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여기에는 그 남자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부를 위한 사람은 전 세계에서 단 한 사람뿐이기 때문입니다 - 바로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신부는 신랑과 단 둘이서 말하기를 "당신의 사랑은 지상의 모든 포도주보다 낫습니다. 당신의 이름이 얼마나 기쁜지요!"(3절). 신랑은 세상이 제공할 수 있는 모든 즐거움(술)보다 낫습니다.
그런 다음 그녀는 "나를 이끌어 들이시면 우리가 당신을 쫓을 것입니다"고 말합니다(4절). 주의 깊게 살펴보십시오. 사랑은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밀어붙이는 것과 끌어당기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밀어붙이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에게로 이끄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2:32). 마치 자석이 철가루를 자기 자신에게 끌어당기는 것처럼, 그분은 우리를 끌어당기려고 하십니다. 주님은 결코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선한 목자이신 그분은, 우리보다 앞서 가셔서 우리가 그분을 따르도록 이끄십니다. 어느 시점에서든, 우리가 더 이상 나아가고 싶지 않다면, 그분은 우리에게 강요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가장 놀라운 점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분의 인도하심과 사탄의 열광적인 선동을 구별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경건한 지도자와 이단(사이비) 지도자를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경건한 사람들은 우리보다 앞서서 가서 그들을 따르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 바울이 했던 것처럼(고전 11:1). 그러나 이단 지도자들은, 독재자와 같아서 사람들에게 설교와 충고를 통해 그들이 지시하는 길을 가라고 강요합니다. 이 책에서 거짓 목자를 따르지 않도록 우리를 보호할 수 있는 놀라운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 남편은 아내에게 "지금 당장 이렇게 해요"라고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앞서 본을 보여서 아내를 이끌어야 합니다. 아내가 개선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해당 부분에서 그녀보다 앞서서 그녀에게 좋은 모범이 되어 주십시오 - 그리고 그녀가 그녀 자신의 속도와 시간에 맞춰 당신을 따라갈 수 있도록 하십시오. 절대로 그녀에게 강요하지 마세요. 그것이 신의 방식입니다. 이 원칙은 교회 안의 모든 관계에도 적용됩니다.
신부는 그녀가 사랑하는 분을, "나의 왕"이라고 부릅니다(1:4).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신랑으로 알기 전에 예수님을 우리의 왕으로 알아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과의 이러한 사랑의 관계에 결코 들어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분을 평생 동안 주님(Lord)과 왕(King)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삶의 일부 영역은 여전히 굴복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예루살렘의 딸들" 또는 "예루살렘 여자들"(1:5)에 대해서도 읽습니다. 이 표현은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뜨뜻미지근한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개인적인 헌신적인 사랑이 아니라 설교, 가르침, 성경 연구 등의 "기독교" 사역에 전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죄 가운데 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을 열렬히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주님은 신부의 마음을 가진 사람, 그분께 헌신하고 그 사랑의 마음으로 섬길 수 있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신부는 이 여자들에게 "나는 검지만 사랑스럽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의 의미는 비록 그녀는 매력적이지 않지만, 신랑이 그녀를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힘있는 자와 고귀한 자와 영리한 자가 아닌, 가난하고 어리석은 자를 주로 선택하셨다고 말합니다(고전 1:26-29). 아마 우리 중 누군가는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능력이 없습니다. 나는 똑똑하지 않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제 능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라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주님은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는 더 아름다운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랑은 이 검은 여인을 선택했습니다. 예수님은 외모나 은사, 능력이 아니라 마음의 자질을 보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뭔가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타고난 능력, 가족 배경, 성취는 실제로 하나님께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그분이 찾는 것은 뜨거운 사랑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그분의 종이 될 사람을 찾으실 때 보시는 것입니다.
신부는 비록 자신이 검지만, 신랑의 눈에는 아름답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많은 기혼 여성들은 남편이 자신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기뻐하지 않는다는 느낌 때문에 고통을 겪습니다. 나는 아내를 기뻐합니다. 남편 여러분도 그렇게 하시길 바랍니다. 당신이 아내로 인해 기뻐하고 있다는 것을 아내가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마찬가지로, 많은 신자들은 주님께서 그들로 인해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스바냐 3장 17절은 말합니다, "네 한가운데 계시는 네 하나님 여호와는 전능하시다. 그분은 기쁨의 소리로 너를 향해 소리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 삼으신 것을 매우 기뻐하십니다. 그거 아시나요? 사람의 눈에는 우리가 못생겼을지라도 하나님의 눈에는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어여쁘고 아름다운 도시 소녀들아 나를 업신여기지 말라"(1:6). 그녀는 세련되지 못한 시골 소녀였고, 예루살렘의 세련된 도시 소녀들은 그녀를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신랑은, 똑똑하고 매력적인 도시 소녀들을 모두 무시하고, 그 시골 소녀를 선택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선택하셨습니다. 그 점에 대해 주님을 찬양합니다! 다른 신자들이 당신을 무시하고 있습니까? 낙심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주님께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16장은 우리가 더럽고, 썩고, 버림받고, 길가에 무력하게 누워 있을 때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데려가셨는지를 묘사하는 아름다운 장입니다.
"그들이 나를 포도원지기로 삼았거니와, 나는 내 포도원을 지키지 못하였다"(1:6). 다른 포도원은 우리의 사역을 가리킵니다. 나의 포도원은 나의 삶이며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이것은 많은 설교자들이 저지르는 흔한 실수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일에 바쁘지만, 자신들의 포도원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많은 활동에 전념하고 있지만, 주님과의 개인적인 동행을 등한히 했습니다. 그들은 항상 통계, 주님께로 인도한 사람들의 수, 방문한 장소의 수 등의 관점에서 생각합니다. 솔로몬의 노래는 바로 시작부터 이러한 위험에 대해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 자신과 네 가르침에 주의를 기울이라. 그리하면 너 자신과 네 말을 듣는 사람들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딤전 4:16).
신부가 구한 두 가지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은 어디서 양 떼를 먹이고, 어디서 쉬게 하시나요?"(1:7). 우리에게도 주님으로부터 필요한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음식과 휴식.
그러고나서 신랑은 그녀에게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라고 칭찬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정말로 기뻐하신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는 그러한 말씀을 주님으로부터 들어야 합니다. 아내들도 남편으로부터 그러한 감탄의 표현을 들어야 합니다. 남편이 성관계를 원하는 것처럼 아내는 결혼 생활에서 그녀에게 안정감을 주는 사랑의 확신을 찾습니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위해서는 이 두 가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아내는 남편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남편은 아내가 원하는 사랑의 확신을 주어야 합니다.
그러한 문제는 영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는 부끄러움 없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강단에서 성에 대해 결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많은 기독교 젊은이들이 이 중요한 주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이해는 그들이 세상에서 얻는 것뿐입니다. 그들은 악마의 설명만 듣습니다. 성경은 성에 대해 공개적이고 분명하게 말하고 이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이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우리는 사랑의 시작을 봅니다 -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 주셨고 우리가 큰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뻐합니다.
사랑의 성장
2장부터 6장까지는, 마침내 8장에서 정점을 이루는 사랑의 성장에 대해 읽습니다. 신부의 사랑에는 굴곡이 있고 때로는 사랑의 감정이 전혀 없을 때도 있습니다.
2장 1절에, 신부는 말하기를 "나는 샤론의 장미일 뿐입니다. 나는 단지 계곡의 백합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표현들은, 신랑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신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많은 노래에서는 예수님을 "샤론의 장미", "계곡의 백합"으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비성경적인 표현입니다. 신부가 신랑에게 "나는 샤론의 평범한 장미일 뿐입니다. 샤론에는 수천 송이의 장미가 있는데 나는 그 중 하나일 뿐입니다. 나는 그저 계곡의 평범한 백합일 뿐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신랑은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당신은 가시나무 속에 핀 백합화라오"(2:2). 예루살렘의 그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자들은 겉보기에는 아름다웠지만, "코에 금고리를 낀 돼지들"(잠 11:22) 같았습니다 - 매력적이지만, 여호와를 향한 뜨거운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랑은 그들을 가시나무에 비유했습니다. 그 가시나무 속에서, 그의 신부는 백합화 같았습니다.
신부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그분은 그분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도록 나를 그분의 연회장으로 데려가셨습니다"(2:4). 탕자의 아버지는 아들을 식탁으로 데려왔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둘러앉으셨습니다. 식탁은 교제를 말합니다. 식탁에서, 우리는 주님을 위한 사역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교제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과 함께 식사합니다(계 3:20 참조). 나중에야 신랑과 신부가 들판으로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식탁에 앉아 주님과 교제하기 전에, 사역을 위해 들판에 나가려고 시도하지 마십시오. 아담의 첫째 날은 안식을 취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날이었습니다(아담은 여섯째 날에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야 하나님은 그를 동산에서 일하도록 보내셨습니다.
신부는 "당신의 사랑으로 나를 먹이십시오. 나는 상사병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주 예수여, 당신은 나에게 모든 것입니다. 당신의 사랑 안에서 기뻐하고 안전함을 누리게 하소서. 세상은 더 이상 나에게 매력적이지 않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이 노래에는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하고 우리를 세상에서 분리시킬 수 있는 아름다운 뜨거운 사랑의 표현이 담겨 있습니다.
"오 예루살렘 여인들이여, 때가 될 때까지 사랑을 깨우지 않겠다고 나에게 약속해 주십시오"(2:7). 모든 젊은 남녀가 그들의 관계에서 명심해야 할 구절입니다. 적절한 때까지 사랑을 불러 일으키지(깨우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때가 올 때까지 이성을 사랑하는 일에 감정을 일깨우지 마십시오. 조심하십시오. 경건한 젊은 남성/여성으로 성장하고 싶다면 그러한 감정을 통제하십시오. 당신은 분명히 감정이 들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감정이 당신을 통제하고 나중에 후회할 방향으로 당신을 이끌도록 놔두지 마십시오.
마귀는 어떤 젊은 남자나 여자가 하나님을 위해 열심을 갖는 것을 볼 때마다 그 사람을 주시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러한 사람이 자라서 지상에 있는 그의 왕국에 위협이 될 수 있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종종 그들을 육적이고 세상적인 사람과 결혼시킴으로써, 그/그녀를 파멸시키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인도는 경건한 젊은 남성들이 경건한 여성과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경건한 가정을 많이 잃었습니다. 그러므로 때가 될 때까지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마십시오.
열병은 기다리지 못하게 합니다. 열병에 걸린 젊은 남자들은 보통 섹스에 환장합니다. 그들의 태도는, "나는 이제 섹스를 해야 해. 결혼할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 입니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은 기다릴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절제입니다. 누군가를 향한 감정이 자극될 때마다 조심하십시오. 적절한 때가 될 때까지 사랑을 깨우지 마십시오 - 적절한 때는 결혼하기로 약혼한 후입니다. 많은 젊은 남성들이 성경을 진지하게 연구하지 못하는 이유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어떤 소녀 또는 다른 소녀를 인생의 동반자로 삼을 것이라는 공상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더러운 것, 성적인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주님의 음성을 듣는 데는 집중할 수 없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오리니, 산을 넘고 작은 언덕을 뛰어넘어 오시는도다"(2:8). 이것은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오시는 열망을 말하며, 또한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재림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신랑은 "나의 사랑, 나와 함께 가자"고 말합니다. 그분은 이제 그분의 신부를 세상으로부터 떠나라고 초대하십니다. "겨울이 지나고… 꽃이 피었도다"(2:11,12). 여름이 다가오는 것은 주님의 재림이 가까워지는 것에 비유됩니다(마 24:32,33). 우리는 이제 여름이 가까워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고나서 신랑은 다정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오 바위틈에 있는 나의 비둘기여, 네 모습을 보여 주어라, 네 목소리를 들려 주어라, 네 목소리는 달콤하고 네 모습은 아름답기 때문이다"(2:14). 여기서 반석은 우리가 숨어 있는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과 애정, 돌봄의 강렬함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믿는다면, 우리에게서 모든 불안과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신랑은 "큰 포도나무가 꽃 피어 있는 동안 작은 여우들이 네 사랑의 포도원을 망치기 전에, 빨리 잡으라"(2:15)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끊임없이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우리 포도원을 망치는 큰 여우(명백한 죄)를 쉽게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포도원에 몰래 들어와 포도를 먹어치우는 새끼 여우도 있는데 - 이것들은 눈에 잘 띄지 않기 때문에, 더 위험합니다.
결혼 생활에서도, 남편이 아내를 때리는 것처럼, 우리가 조심해야 할 큰 위험은 없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결코 그런 일을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결혼 생활을 파괴하는 작은 여우는 보통 사소한 짜증과 언성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 작은 여우들을 잡아서 그들이 당신의 결혼 생활을 망치기 전에 죽이십시오. 당신의 결혼 생활은 포도원과 같습니다. 현명한 농부처럼 포도원을 지키십시오.
주님과의 관계도 포도원과 같습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을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은 간음이나 살인과 같은 큰 죄가 아닙니다. 우리와 주님 사이를 가로막고 주님과의 동행을 망치는 것은 불결한 생각, 돈에 대한 사랑, 용서하지 않는 태도 등과 같은 작은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작은 여우를 잡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합시다.
3장 1절에서, 신부는 신랑이 그녀와 함께하고 있음을 느끼지 못했던 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느 날 밤 그녀는 침대에 누워 주님을 깊이 갈망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 그분을 찾기로 결정했습니다(3:1,2). 여기에서 우리는, 신랑의 임재를 느끼고자 하는 신부를 봅니다. 그리고 그녀의 수색은 헛된 것이었습니다. 3장 3절에 나오는 파수꾼은 욥기에 나오는 설교자들처럼, 올바른 교리를 갖고 있지만 하나님을 모르는 교회의 장로들과 설교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에게는 주님을 사랑하는 이 젊은 신부가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없습니다. 그녀는 파수꾼들에게 가서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분을 보셨나요?"라고 물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녀를 인도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지 않은 장로가, 어떻게 여기 신부처럼 주님을 사모하는 사람을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젊은이들을 그리스도에 대한 뜨거운 사랑의 삶으로 인도할 수 있는 장로 형제들을 찾는 것이 너무나 어렵다는 것은 타락한 기독교 집단의 상태에 대한 슬픈 증거입니다. 성경적 진리와 전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은 많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열렬히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장로 형제가 양 떼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열렬히 사랑하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훌륭한 "파수꾼"의 표시입니다.
마침내 신부는 사랑하는 사람을 직접 찾았습니다(3:4). 이것은 나의 젊은 시절 경험이기도 합니다. 나에게는 그리스도를 향한 헌신적인 사랑의 삶으로 나를 인도해 줄 수 있는 경건한 장로들이 없었습니다. 성령님께서 나를 그 삶으로 직접 인도하셨습니다. 여러분 중 일부는 여러분을 인도해 줄 경건한 장로 형제들이 없는 곳에 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구하십시오. 그러면 성령님은 그러한 삶으로 여러분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내 영혼이 사랑하는 그분을 발견했을 때, 나는 그분을 붙잡고 놓아주지 아니하였다"(3:4).
이제 4장에 이르렀습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말하는 사람은 신부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신랑에게서 신부에 대한 진가를 인정함의 긴 말을 듣습니다. 영적인 성장의 한 가지 특징은 우리 자신이 말하는 것보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신부는 성숙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듣는 동안 신랑이 그녀를 감탄(admiration)한다는 표현을 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분은 그녀의 모든 부분을 감탄하고 나서 "내 사랑, 너는 참 어여쁘다"(4:7)고 말하며 결론을 내립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녀를 초대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아마나 꼭대기에서,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 사자 굴에서 내려다보아라"(4:8). 이것은 하늘나라의 삶으로의 초대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낮고 세상적인 관점에서 사물을 보지 말아라. 나와 함께 하늘나라에 가서 그 관점에서 모든 것을 보아라. 그러면 네가 거기에서 볼 때, 땅의 것들은 작고 희미하며 무가치하게 될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기를 원하십니다. 사실, 거기에는 사자, 즉 악마와 악한 통치권과 권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곳에서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이며 그분과 함께 모든 악한 세력을 이길 것입니다. 신부는 지금 영적 전쟁에 초대받고 있습니다.
신랑은 신부를 "잠겨 있는 동산"이라고 부릅니다(4:12), 이는 신랑만을 위한 전용 동산입니다. 그녀는 다른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전적으로 주님의 소유입니다. 당신과 주님의 관계는 그런 관계입니까? 주님께서 당신에게 "너는 나의 개인 동산이며 오직 나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세상에는 필요 이상으로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 세속적인 권력과 명성을 얻고 자신의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기회 등 우리를 끌어당기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유혹은 신부를 유혹하려는 다른 남자들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 신부는 끌리지 않습니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녀는 독점적으로 신랑에게만 속해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그러한 관계를 맺고 사는 신자는 거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그분을 친밀하게 알지 못하고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성경을 이해하는 비결은 무엇보다 먼저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 주님보다 그분의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우리에게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초기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분과 함께 걸으며 그분이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기를 갈망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도 그들처럼 눈을 뜨고 그들처럼 가슴이 불타오를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주님과 함께 걸어온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발견한 것입니다.
그런 다음 신부는 북풍과 남풍이 자신의 정원에 불어오도록 초대합니다(4:16). 북풍은 고난과 역경, 시련의 찬 바람이고, 남풍은 축복과 격려, 번영과 행복의 바람입니다. 이 바람들 중 어떤 바람이 불든 상관없습니다. 결과는 똑같을 것입니다 - 사방으로 향기가 퍼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편안한 쉬운 삶을 살든, 어려움과 시련으로 가득 찬 삶을 살든,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도록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상황에 관계없이,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과 예배가 우리의 삶에서 나올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가 그의 동산에 와서 그 아름다운 열매를 먹기를 원하노라"(4:16). 우리 삶(우리 동산)에서 생산되는 모든 것은 주님을 위한 것입니다 - 우리가 얼마나 영적인지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당신의 삶에 대해 간증할 때, 당신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려고 하지 마십시오. 대신, 당신에게 얼마나 놀라운 구원자가 있는지 그들에게 보여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의 열매는 사람을 위한 것이 되고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신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동산에 있는 모든 것은 오직 사랑하는 사람만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해 당신을 사용하셨습니까? 당신이 한 일을 기뻐하지 마십시오. 죄인이 회개한 것을 천사들과 함께 기뻐하십시오. 그는 당신의 회심자가 아니라 주님의 회심자입니다. 주님을 위해 희생을 했다면, 아무에게도 알리지 마십시오. 왜 우리의 희생을 광고해야 합니까? 남편을 깊이 사랑하는 아내는, 남편을 위해 자신이 치르는 희생을 세상에 알릴까요? 아내와 남편 사이에는 아주 많은 사랑의 비밀이 있습니다. 우리와 주님 사이에도 사랑의 비밀이 있어야 합니다. 당신은 주님과 단둘이 시간을 보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좋습니다. 그런데 왜 다른 사람이 그것에 대해 알아야 합니까? 남편과 사랑에 빠진 아내는 그들이 함께한 시간을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할 때 문을 닫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분과 함께 보내는 시간에 대해 누구도 알면 안 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그리스도인을 찾는 것은 참으로 드뭅니다. 그들 대부분은 주님을 위한 그들의 희생과 섬김에 대해 모든 사람에게 알리고 싶어합니다 - 그들을 영화롭게 하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부족하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입니다. 솔로몬의 노래는 그러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책입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먼저 이 책을 공부하도록 인도하신 주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과의 이 사랑의 관계는 주님을 위한 우리의 모든 섬김의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1장 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뱀이 교활함으로 하와를 속인 것처럼, 여러분의 마음도 그리스도에 대한 단순하고 순수한 헌신에서 벗어날까 봐 내가 두려워한다." 우리는 언제 잘못된 길로 인도됩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단순한 헌신적인 사랑을 잃을 때입니다. 타락한 자가 되기 위해, 도둑질하거나 간음하거나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를 향한 단순한 뜨거운 사랑을 잃었다면, 마귀는 이미 당신을 잘못된 길로 인도한 것입니다.
신랑은 신부의 동산에 와서 먹으라는 초대를 받아들이고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왔노라"(5:1)라고 말합니다. 그분은 지금 그것을 그분의 동산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분은 과일을 따러 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이 취하신 후, 그분은 다른 사람들도 동산으로 와서 함께 먹으라고 초대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삶이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도록 하십니다.
이제 장면이 바뀌고, 지금 신부는 어느 날 밤에 일어난 일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내가 자고 있으나, 내 마음은 깨었느니라"(5:2). 갑자기 그녀는 사랑하는 분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주님은 때때로 우리를 갑자기 부르실 때가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듣기 위해 항상 깨어있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때때로 갑자기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읽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비록 한밤중에 깊이 잠들었을 때라도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즉시 대답했습니다. 창세기 16장 16절과 17장 1절에서, 우리는 13년 동안의 침묵 끝에, 하나님께서 어느 날 갑자기 아브라함을 부르셨다는 것을 읽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즉시 응답했습니다! 다른 많은 일에 몰두하는 가운데서도 그는 항상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주님께서는 한밤중에 사무엘도 부르셨습니다 - 그리고 사무엘은 일어나서 들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신랑이 한밤중에 와서 "내 사랑, 문을 열어 다오"(5:2)라고 부를 때, 신부는 너무 게으른 나머지 옷을 차려입고 문을 열지 않았음을 봅니다(5:3). 그녀는 (자신이 씻은) 발이 더러워지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그분은 직접 문 걸쇠를 풀려고 했습니다(5:4). 그러자 신부는 마음을 바꾸어 문을 열었지만, 사랑하는 분이 가버린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그녀를 부르셨을 때 그녀가 즉시 응답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셨습니다.
그런 일은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지금 하고 있는 모든 일을 내려놓아라. 그 책을 그만 읽어라. 그 대화를 멈추어라. 나와 단둘이서 이야기하자. 함께 산책하러 가자."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중요한 할 일이 있어요. 15분 안에 끝나요. 그러고나서 제가 갈게요." 그리고 15분 뒤에, 그 중요한(?) 일을 마쳤을 때, 우리는 "주님, 이제 준비가 되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이 가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그분을 찾을 수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많은 신자들의 경험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친구들과 나누는 대화, 우리가 읽고 있는 책, 우리가 하고 있는 일 등보다 그분이 우리에게 더 중요한지 시험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기꺼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지 알아보기 위해 우리를 시험하실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유능한 종이 되고 싶습니까? 주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 습관을 기르십시오. 당신은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랑은 신부에게, "내가 밤에 밖에 있었는데 이슬에 젖었도다"(5:2 - Living)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이 세상의 어두운 밤에 잃어버린 양을 찾으시면서 십자가의 길(자기-부인의 길)을 걸으시고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이제 그분은 자신의 신부에게도 같은 길을 걷도록 초대하십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녀는 마음을 바꾸어 일어나 그 길을 걷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신랑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다음 그녀는 다시 파수꾼(장로들)에게 갔습니다. 그녀는 이전에 그들과의 접촉으로부터 그들이 그녀를 도울 수 없다는 교훈을 배우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의 길을 전혀 모릅니다. 이번에는 그들은 그녀를 때리고 그녀에게 상처를 입혔습니다(5:7). 그 장로들은 세상적이고 율법주의적이어서 말로 그녀에게 상처를 입혔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향한 그녀의 열렬한 헌신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현실적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하며 주님께 그렇게 열광적으로 헌신하는 데만 몰두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을 모르는 설교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당신의 유일한 주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인 것 같다고 비난할 것입니다 - 마치 그게 범죄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자 파수꾼들은 그 여자의 베일(숄)을 벗겼는데, 이는 그 여자가 그렇게 정숙한 옷을 입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녀를 공개적으로 모욕했습니다.
그 경험 후에, 신부는 마음이 미지근한 신자들(예루살렘 여인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이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병에 걸렸다고 말하라"(5:8). 그것은 시간낭비였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미지근한 사람들은 결코 그녀가 주님을 찾도록 도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녀처럼 그분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그녀에게 질문을 했을 때, 그녀는 그분에 대한 존경심을 열광적으로 표현하면서 자신이 그분을 존경하는 이유를 정확히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로 결론짓습니다, "그분은 정말 사랑스럽습니다. 그분은 나의 사랑하는 이시요 나의 친구입니다"(5:16 - KJV).
예수님이 당신의 구세주일 뿐만 아니라, 당신의 친구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당신의 지상 남편/아내는 어떻습니까? 그/그녀는 지구상에서 당신의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합니까? 그래야 합니다. 많은 남편과 아내는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서로에게 가장 좋은 친구는 아닙니다. 그들의 가장 친한 친구는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발견됩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가장 가깝고 소중한 친구이십니다 - 심지어 내 아내보다도 더 가깝습니다. 하지만 지상의 사람들 중에서 내 아내는 나의 가장 가깝고 가장 친한 친구입니다 - 그리고 그녀는 내 평생 동안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그리스도인 생활과 결혼 생활을 극도로 행복하게 만들었습니다.
마침내, 신부는 그분의 동산에서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발견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이의 것이요, 나의 사랑하는 이는 내 것이라"(6:2,3). 이것은 2장 16절에서 "나의 사랑하는 이는 내 것이며 나는 그분의 것이라"고 말한 것과는 다릅니다. 여기에는 진전이 있습니다. 사랑의 초기 단계에서는, "나의 주는 나의 것"을 강조했습니다. 이제 그녀의 강조점은 " 나는 나의 주님의 것입니다"로 바뀌었습니다. 우리가 어리고 미성숙할 때, 우리는 소유욕이 더 강해지고, 주님은 우리에게만 속해 있다는 사실을 더 많이 생각하게 되며, 주님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위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궁금해하게 됩니다. 우리가 성숙해짐에 따라, 우리는 주님께 완전히 항복하는 것과, 주님께서 우리의 단 한번의 지상 생활에서 우리로부터 가능한 모든 것을 얻으시는 것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다음 신랑은 신부에 대한 진가를 인정하는 표현을 합니다(6:4-10). 그분은 모든 여자 가운데 그분의 완전한 신부와 같은 자가 없으며 다른 누구보다 그녀를 선택했다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남편은 아내를 이렇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에는 매력적인 여자가 많지만, 내 아내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내 눈에는 그녀가 1순위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세상의 모든 영리한 사람, 부자, 위대한 사람보다 우리를 더 높이 평가하십니다.
6장 10절에서, 그분은 자신의 신부를 "깃발을 든 군대"에 비유하십니다. 이 신부는 부드러운 계집애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사탄과 지옥의 군대와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강한 전사였습니다. 그녀는 또한 "해처럼 순결한" 양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6장 13절에서 그녀는 '평화의 사람'이라는 뜻의 술람의 여인, 즉 술람미의 여자(Shulamite)이라고 불립니다. 술람(Shulam)은 '평화'를 뜻하는 히브리어 '샬롬'에서 유래됐습니다. 여기에는 군인으로서 주님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어둠의 세력과 싸우면서도, 동시에 온 인류와 화평하게 지내는 신부가 있습니다!
성숙한 사랑
이제 신랑을 향한 신부의 사랑이 성숙한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7장 1~9a절에서 우리는 신랑이 신부를 어떻게 감탄하시는지 읽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께서 실제로 우리를 감탄하며 바라보시고 우리의 진가를 인정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보아야 합니다. 많은 신자들은 단지 주님께서 자신들을 감탄하신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기 정죄를 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신랑이 신부의 입술을 감탄할 때, 신부는 실제로 그것이 그분의 입술에 더 해당된다고 재빨리 대답합니다(7:9b)! 이것은 둘 사이의 높은 수준의 친밀함, 즉 우리가 주님과 가져야 할 친밀함의 유형을 말합니다.
7장 10절에서 신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이의 것이고 그분의 열망은 나를 향한 것입니다." 이것은 6장 3절보다 훨씬 더 높은 사랑의 차원입니다. 여기서 신부는 단지 주님이 자신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또한 그녀를 기뻐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는 것과 주님께서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지만, 아내의 행동 방식이 만족스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실 수 있지만, 당신의 삶에서 많은 것들을 기뻐하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성숙한 사랑은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이제 신부는 신랑과 동역자가 되어 "내 사랑, 가요. 우리가 들판으로 나가요"라고 말합니다(7:11). 신부는 이제 신랑과 함께 추수할 들판이 무르익어 가는 궁핍한 세상을 걱정합니다.
하지만 절대 혼자서 그 들판으로 가지 마세요.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신랑)과 함께 그곳으로 가십시오. 그분과 관계를 맺은 다음, 그분을 섬기십시오. 그분은 당신이 그분을 위해 수고할 수 있는 분야를 가장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내가, 나의 사역에서 주님을 섬기려고 한 방식입니다. 나는 결코 혼자서 어디에도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당신이 길을 인도하시면, 나는 당신과 함께 갈 것입니다. 우리 같이 들판으로 가요.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말해주세요. 그리고 당신이 어딘가에 가시지 않는다면, 나도 거기로 가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교제하고 그분께 복종하면서 주님을 섬긴다면, 우리 삶에는 어떤 자랑도 없을 것이며, 우리의 사역을 다른 사람의 사역과 비교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부는 그분의 포도원을 위해 신랑의 짐을 나누어 집니다. 그녀는 일찍 일어나서 거기 열매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그분과 함께 가고 싶어합니다(7:12). 그녀는 잔치에 앉아 그분의 사랑을 누리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2:4에서처럼). 그녀는 그렇게 했지만, 지금은 더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또한 교회의 젊은 신자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포도원을 관리합니다(1:6과 달리). 그러나 그녀는 또한 교회들에서 주님의 역사가 어떻게 발전하고 있는지 보고 싶어합니다. 그녀는 "꽃이 피었는지", "석류꽃이 피었는지" 보고 싶어합니다(7:12). 그리고 그녀는 사랑하는 이에게 "거기서 내가 당신에게 나의 사랑을 드리겠어요"라고 말합니다. 그녀의 모든 사역 가운데서, 그녀는 주님과 함께 걷고 그분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은 "사랑하는 분을 위해 쓰지 않고 간직해 두었습니다"(7:13).
8장은 언젠가 천국에서 사랑하는 분과 완전한 연합을 이루기를 바라는 신부의 갈망을 표현합니다. "그녀의 사랑하는 이에게 기대어, 땅의 광야에서 올라오는 이 사람은 누구냐?" (8:5) - 교회가 사랑하는 이에게 영원히 의지하기 위해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지는 날을 의미합니다 - 마치 요한이 예수님의 가슴에 기대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나를 도장처럼 당신의 마음에, 도장처럼 당신의 팔에 새기십시오"라고 그녀는 요청합니다(8:6). 그녀는 사랑하는 분과 결코 분리되기를 원하지 않으며 그분의 마음과 팔에 영구적인 자리를 원합니다 - 사람들이 팔에 새기는 문신처럼요.
8:6,7은 사랑과 질투를 함께 말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언제나 질투합니다 - 경건한 질투는 다른 사람이 상대방을 소유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고후 11:2). 오직 그분만을 위하여, "주께서는 우리의 영을 질투하시기까지 사모하십니다"(약 4:5). 그분은 우리가 돈과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오직 그분만을 사랑해야 한다고 매우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당신을 독점적으로 원하는 질투심 많은 남편입니다. 그러한 질투하는 사랑은 가장 밝은 불꽃, 즉 "YHVH(히브리어로 '주(Lord)')의 불꽃"에 비유됩니다. 이곳은 이 책에서 '주'라는 단어가 나오는 유일한 곳입니다(8:6).
많은 홍수도 이 사랑을 끌 수 없고 많은 강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합니다(8:7). 이것이 바로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나타내신 사랑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분에게 미움의 홍수를 쏟아냈을 때, 그분은 아버지께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제 신부는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여동생들에 대한 염려를 표현합니다(8:8). 성숙함의 한 가지 표시는 미성숙한 사람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8장 9절은 소녀가 벽이나 문과 같을 수 있음을 알려주는 흥미로운 구절입니다. 벽은 하나님이 모든 소녀들을 그렇게 되도록 창조하신 것처럼, 겸손하고 조심성 있는 소녀들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문은, 남자들과 자유롭게 지내는 소녀들을 뜻합니다. 열린 문은 언제나 바로 들어오라는 초대입니다 - 그리고 소녀들은 그런 식으로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소녀가 벽과 같다면, 하나님은 그녀를 사용하여 교회("성벽")를 건축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녀가 문과 같다면,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 주위에 "바리케이드"를 만들어 남성과의 접촉을 차단해야 합니다.
8:10은 신부의 영적 성숙을 말합니다. 8장 12절에서, 그녀는 그녀의 포도원 열매의 주요 부분(1000세겔 상당)을 그녀가 사랑하는 분만을 위해 남겨두었다고 말합니다. 그 양의 20%(200세겔 상당)만이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주된 사역은 사람을 향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든 섬김의 방식입니다. 주님이 첫째가 되어야 하고 다른 모든 것은 둘째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먼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다음에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8장 13,14절에서 그녀는 사랑하는 분이 속히 오시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합니다. 이것은 그녀가 2:17에서 말한 것보다 더 높습니다. 그곳에서 그녀는 그분과의 교제를 회복하기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그녀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서 사랑하는 분과의 마지막 연합을 갈망하고 있습니다(계 19:7). 이것이 영광의 궁극적인 높이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성경책이 끝날 때처럼, 신부가 주님에게 속히 오시기를 부르짖는 것으로 끝납니다.
"주 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 나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노래입니까! 나는 여러분 모두가 결혼 생활과 주님과의 관계에서 평생 동안 이 노래의 좋은 점 안에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아멘. 그렇게 되길 바랍니다.
심판과 위로에 대한 예언
이사야서는 구약 17권의 예언서(이사야부터 말라기까지) 중 첫 번째 책입니다.
이사야서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이사야는 그의 책을 여러 장으로 나누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더 쉽게 참조할 수 있도록 성경을 장과 절로 나눈 것은 불과 몇 세기 전의 일입니다. 따라서 장 구분에는 영감받은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야서가 6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은 흥미롭습니다 - 마치 성경이 66권의 책으로 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구약이 39권이고 신약이 27권인 것처럼, 이사야서의 첫 번째 부분은 39장이고 두 번째 부분은 27장입니다! 그리고 이사야서의 첫 번째 부분은 구약의 예언을 다루고, 두 번째 부분은 신약의 예언을 다루고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분에서 가장 중요한 장은 6장입니다. 그곳에서 이사야는 먼저 보좌에 앉으신 주님을 보았고, 그 후에야 그분을 섬기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하나님을 죄를 미워하시고 죄를 심판하셔야 하는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보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효과적으로 섬기려면, 우리 역시 이 진리를 분명히 보아야 합니다.
두 번째 부분에서 가장 중요한 장은 53장입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털 깎는 자들 앞으로 끌려가서 털을 깎이고 도살된 어린 양을 봅니다.
보좌와 어린양에 관한 이 두 가지 진리는 요한계시록 5장에서 함께 다루어지며, 그곳에서 우리는 어린양이 보좌 가운데 계신 것을 봅니다.
사람으로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이 땅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그리고 모든 사람의 종으로 사셨습니다. 이사야서도 마찬가지로, 53장(십자가의 장) 전에 두 번째 부분의 장들(40-52장)에서 예수님을 여호와의 종으로 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사람을 섬겨야 합니다.
이 책에는 하나님에 대한 두 가지 칭호가 자주 등장합니다: '만군의 주(Jehovah Tsabaoth - 여호와 차바오트)'는 62회,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는 30회 나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을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주권적으로 다스리시는, 천사 군대의 하나님을 지칭합니다. 두 번째는 그분의 거룩함을 강조합니다. 이 책에서는 이 두 가지 진리를 모두 강조합니다.
이사야서는 구약의 다른 어떤 책보다 그리스도에 관한 더 길고 명확한 예언을 담고 있으며, 그 안에는 "구원"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합니다.
이사야는 유다 나라에 약 50년 동안 예언했습니다. 경외 전설에 따르면 그는 마침내 "둘로 톱질을 당했다"고 합니다(히 11:37). 그는 자신이 예언한 메시아처럼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는 잡히지 않기 위해, 속이 빈 통나무 속에 몸을 숨겼습니다. 그러나 그가 발각되자, 그들은 통나무를 둘로 쪼개어 그를 죽였습니다. 이사야는 강한 말로 하나님의 진리를 전한 용감한 선지자였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에게 말할 때, 그들을 "소돔의 통치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사 1:10). 그것은 강한 말이었습니다 - 그리고 지도자들이 그를 톱질하여 두 동강 낸 것이 놀랍지 않습니다!
선지자는 결코 인기가 없습니다 -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세상에 선지자가 거의 없는 이유입니다. 이사야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거나 감동을 주려고 노력하지 않았습니다(오늘날 대부분의 설교자들이 하는 것처럼). 그는 자신의 말 때문에 사람들이 기분이 상하고, 상처받고, 속상해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을 전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들은 그의 말을 거부하고 심지어 그를 죽이겠다고 위협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겁먹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의 하나님께 충실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백성에게 한 말은 마지막 날에 그들을 심판할 것입니다.
이 책의 첫 번째 구절은 이사야가 주로 남쪽 왕국 유다에 관해 예언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대한 언급도 많이 있습니다. 북쪽 왕국 이스라엘은 심하게 타락하여 곧 앗수르에게 포로로 잡혀갈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는 비슷한 형세로부터 유다를 구하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습니다.
심판에 대한 예언(1-27장)
1장부터 12장은 유다에 대한 심판 예언입니다. 13장부터 27장은 다른 나라들에 대한 심판 예언입니다.
1장에서, 이사야는 유다의 타락한 상태를 묘사합니다. 북쪽 이스라엘 왕국에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강력하게 전한 엘리야와 엘리사와 같은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다에는 그런 사람이 없었습니다. 유다의 가장 뛰어난 왕들(르호보암, 아사, 여호사밧, 요아스, 웃시야)도 통치를 잘 시작했지만, 통치가 끝날 무렵에는 하나님에게서 돌아섰습니다. 유다에는 경건한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 나라는 매우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이사야는 그들이 가진 최초의 주요 선지자였습니다. 그의 예언의 결과로, 유다는 마침내 선한 왕 히스기야를 얻었습니다. 한 명의 선지자가 한 국가(또는 오늘날의 교회)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은 놀랍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를 교회에 보내실 때마다, 항상 그 교회를 위한 좋은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지자들은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고 이단이라 불립니다.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평화와 번영의 메시지를 전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듣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도 같은 선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사야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참 선지자는 항상 거짓 선지자와 충돌해 왔습니다. 그들은 3000년 전에도 그랬고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는 제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되,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느니라"(1:3). 이스라엘은 자기의 주인과 임자를 알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동물들이 더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동물보다 낮은 수준으로 떨어지는 것은 참으로 비극적인 일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버렸을 뿐만 아니라, 또한 멸시 했습니다(1:4). 주님은 그들의 상태를 이렇게 묘사하십니다: "발바닥부터 머리까지 성한 것이 없느니라"(1:6). 그것은 죄 많은 인간의 상태를 완벽하게 보여 주는 그림이기도 합니다.
1:11-15을 의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의 모든 기도 모임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나는 그들에게 관심이 없다. 나는 너희의 특별한 모임과 성경 공부 모임을 싫어한다. 나는 너희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의 삶에 죄가 있기 때문이다."
많은 기도 모임은 기도하는 사람의 양심이 깨끗하지 않기 때문에 시간낭비입니다. 그들의 삶에는 자백하지 않은 죄가 있습니다. 당신의 양심이 깨끗할 때, 기도 모임은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양심이 깨끗하지 않다면, 오히려 기도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그런 기도를 듣지 않으시기 때문에, 기도는 시간 낭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기도하는 것보다 자는 것이 더 낫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을 행하고, 정의를 구하며, 고아를 변호하고, 과부를 위하여 변론하며, 악행을 그치고, 가난한 자를 착취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분은, 만약 그들이 그들의 죄를 자백한다면(이것이 항상 첫 번째 단계입니다), 그들의 마음을 "눈과 같이 희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1:18). 한때 신실했던 도시, 예루살렘이 창녀가 되었습니다(1:21). 야고보는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할 때 이사야와 비슷한 말을 사용했습니다: "너희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임을 알지 못하느냐"(약 4:4). 야고보 역시 이사야와 같은 선지자로서 교회가 들어야 할 말을 전했습니다. 오늘날 인도 교회에는, 신자들에게 진실을 말할 야고보와 이사야와 같은 선지자가 필요합니다 - 분노나 증오가 아니라 사랑과 연민으로.
2장에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세워질 날에 대해 이야기하며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올 것이고, 그분이 열방 가운데서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2:1-4).
그 날에는, "사람의 교만한 눈이 낮아지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입니다"(2:11). 하나님의 가장 큰 충돌은 언제나 교만한 자들과의 충돌이었습니다. 교만은 하나님의 본성과 정반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매일 24시간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십니다 - 그들이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간에 말입니다. 모든 교만한 사람은 겸손해질 것입니다 - 조만간. 교만은 다른 어떤 죄보다 더 많은 사람을 지옥에 보냅니다. 이 땅에서 지혜롭고 유용한 삶을 살고 싶다면,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동료를 향해 항상 겸손하게 행하십시오. 당신이 가진 것 중 하나님께 받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당신의 삶에서 오직 그리스도만이 높임을 받으실 수 있도록, 항상 이 땅에서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되기를 기꺼이 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든 당신을 사용하실 때마다, 당신의 머리를 흙먼지 가운데 두고 그분께 모든 영광을 돌리십시오. 주님은 "교만하고 거만하며 높아진" 모든 사람을 심판하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설명하시는 삼중 강조를 보십시오! 그 날에, 땅의 교만한 자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 위해 바위를 불러 자기들을 숨길 것입니다(계 6:16에서도 읽을 수 있듯이).
사람은 "호흡이 코에 있는" 피조물입니다(2:22). 하나님은 사람에게 매일 호흡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어떤 사람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려는 유혹을 받을 때마다, 이 구절을 기억하십시오. 누군가가 어떤 식으로든 당신에게 해를 끼치려고 계획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한 순간에 그의 숨을 거두실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젊은 시절 나는 수줍음이 많고 내성적인 성격이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할 때마다 긴장을 많이 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굳게 믿지 못했기 때문에, 나의 설교를 통해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싶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이 구절을 통해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내 앞에 있는 사람들을 그저 콧구멍으로 숨을 쉬고 있는 먼지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먼지의 색깔도 달랐습니다 - 어떤 것은 갈색 먼지, 어떤 것은 검은 먼지, 어떤 것은 하얀 먼지, 어떤 것은 황색 먼지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여전히 먼지였습니다! 이 계시를 통해 나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려고 애쓰는 일에서 자유로워졌습니다. 그 후로 나는 사람들을 감동시키려고 노력하는 대신,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도울 수 있었습니다.
3장 10,11절은 의로운 사람들에게 결국에는 형통할 것이라고 확신시키고 악한 사람들에게 결국에는 불행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당장은 그렇게 되지 않을 것 같지만, 최종적으로는 그렇게 될 것입니다.
3장 12절은 이스라엘 백성의 비참한 상태에 대해 말합니다: 그들의 지도자들이 미성숙하고("어린이") 나약하기 때문에("여자") 그들은 그릇된 길로 가고 있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이것은, 오늘날의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에게도 해당됩니다. 미성숙한 지도자는 영원한 것보다 현세적인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나약한 지도자들은 주님을 위한 전사가 아닌 사람들입니다 - 보통 여성들은 전쟁터가 아닌 집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한 지도자들은 진리를 위해 싸우거나 교회에서 죄를 책망하는 데 담대하지 않습니다 - 특히 부자들 사이에서 죄가 발견될 때 더욱 그렇습니다. 만약 당신이 지도자로 부름을 받았다면, 항상 영원한 것을 위해 살기로 결심하고 주님의 전투를 위해 언제나 싸울 준비하세요.
3장 14절에서 주님은 "그분 백성의 장로들(elders)과 방백들(princes)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선지자들은 변함없이 지도자들에 대한 심판의 경고로 시작했습니다 - 왜냐하면 먼저 부패하여 백성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한 사람은 지도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자들에게서 탈취한 물건이 너희 집에 있다. 어찌하여 가난한 사람의 얼굴을 맺돌질하느냐?"(3:15). 오늘날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사람들에게 "주의 일을 위해 돈을 내라"고 자주 요청합니다. 그들은 심지어 사람들에게 십일조를 바치라고 압력을 가합니다 - 그리고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이에 반응하여, 희생적으로 이 설교자들에게 그들이 힘들게 번 돈을 바칩니다. 그런데 이 설교자들은 그것으로 무엇을 합니까? 그들 대부분은 그것을 사용하여 호화로운 방식으로 생활합니다! 이것이 바로 "가난한 자의 얼굴을 맷돌질하는 것"의 의미입니다. 당신이 설교자이고 개인적인 용도로 돈을 선물로 받았다면, 당신에게 돈을 준 사람보다 낮은 기준으로 생활하기 위해 그 돈을 사용하도록 하십시오. 그것이 예수님께서 받으신 돈을 사용하시는 원칙이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예전의 거짓 선지자들처럼) 회중의 가난한 사람들보다 부유한 사람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들은 부자에게는 달콤한 말을 하고 가난한 자에게는 엄한 책망의 말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자들을 택하사 믿음이 부유하게 하시고 그분의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습니다"(약 2:5). 그러므로 참된 선지자는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때 주님은 시온의 여자들, 즉 회심하지 않은 여자들이 아니라, "시온의 딸들"에게 하실 말씀이 있었습니다. 모든 젊은 자매들은 이사야 3장 16-26절을 읽고 경고를 받아야 합니다. 주님은 거기서, "남자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거만하게 점잔을 빼며 걸으며, 발목에 찬 팔찌를 잘랑잘랑이며, 군중 사이를 두리번거리는 음탕한 눈을 가진 여인들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장신구, 목걸이, 팔찌, 반짝이는 얇은 베일, 발찌, 머리띠, 귀걸이 및 기타 반지, 보석, 파티복, 실내복, 망토 및 화려한 빗, 지갑(핸드백), 거울(그들의 핸드백 속에), 사랑스러운 속옷과 아름다운 드레스를 벗겨 버리실 것입니다"(Living Bible).
주님께서는 여자의 복장에 있어서 그처럼 세세한 부분까지 관찰하십니까? 그분은 확실히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딸들이 옷을 입는 방식에 큰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그분은 그리스도인 여성들이 정숙한 옷차림을 하고 결코 남성을 유혹하는 방식으로 옷을 입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성령님께서는 여성들에게 "옷차림을 신중히 하라"고 권면하십니다. 그리스도인 여자들은, 머리를 손질한 방식이나 보석이나 화려한 옷 때문에 주목을 받을 것이 아니라, 친절하고 선한 사람으로 주목받아야 합니다"(딤전 2:9, 10 - Living)
이사야 시대의 여인들이 그처럼 강한 설교를 듣고 얼마나 분노했는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사야를 미워하고 남편에게 그를 죽이라고 부추겼음에 틀림없습니다!
선지자는 일반 설교자와 다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두신 것을 말합니다. 비록 그들의 메시지가 교회의 부자들과 여성들의 마음을 불쾌하게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인기가 없습니다.
4장에서는, 예수님을 "여호와(Lord)의 가지"라고 부릅니다(4:2). 이 장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온 땅에 세워지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1000년 동안 통치하실 날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천년왕국 동안 문자 그대로 일어날 일은, 지금도 교회에서 영적으로 성취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미 교회에서 왕이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그곳에 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구절을 교회에 영적으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심판의 영과 불태우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어내시면, 주님께서 시온 산과 그 회중 위에 밤마다 타오르는 불빛을 창조하실 것이며; 모든 영광 위에 덮개를 두실 것이다"(4:4,5). 교회 안으로, 특히 "시온의 딸들" 안으로 들어온 세상의 영은 불로 깨끗이 씻어져야 합니다. 그러면 광야의 성막 위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이 교회에서도 나타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요구되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심판의 영과 불태우는 영"입니다. 그리하면 그 이름이 하나님의 책에 기록된, 시온에 사는 자마다 거룩하다 일컬음을 받을 것입니다(4:3). 주님은 또한 그분의 영광 위에 덮개를 두실 것입니다(4:5). 구약의 성막에서는, 아름다운 휘장이 안쪽에 있었습니다. 바깥 덮개는 동물 가죽으로 만든, 더러운 갈색의 덮개였습니다. 교회에도 남들이 볼 수 없는 내면의 영광이 있어야 합니다. 외적으로, 참된 교회는 항상 치욕(비난)으로 뒤덮일 것입니다(히 13:13). 이것은 영적인 교만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할 것입니다(6절).
5장 8-23절에서, 이사야가 여섯 부류의 사람들에게 "화(저주)"를 선포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6장 24-26절에서도 예수님께서 "화"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것을 봅니다. 이사야는, 가난한 사람들이 살 곳이 없도록 재산을 광범위하게 사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사람들;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감각적 쾌락(술과 파티)에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 계속해서 죄를 짓고 그들을 벌하시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들; 악을 선하다 하고 선을 악하다 하는 사람들, 자신의 영리함을 자랑스러워하는 사람들; 뇌물을 받아 무고한 사람을 정죄하는 사람들에게 저주를 선언합니다. 그렇게 오만하고 교만한 사람들은 모두 언젠가 하나님에 의해 낮아질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이 이런 것들을 미워하고 저주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필요성이 얼마나 큰지요.
6장은 이사야서 첫 부분의 중심 장입니다. 여기서 이사야는 자신을 겸손하게 하신 주님에 대한 환상을 묘사합니다. 그는 높은 보좌에 앉아 계신 주님과 스랍핌('seraphim'은 'seraph'의 복수형)이라고 불리는 수많은 천사들이 그분께 경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스랍들은 각각 여섯 개의 날개를 가지고 있었고, 네 개의 날개로 몸을 덮고 두 개로 날았습니다. 즉, 그들은 네 날개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경배하고, 두 날개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아버지께서는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또한 사탄의 시험에 대해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worship) 하고 그를 섬기라(serve)"는 말로 대답하셨습니다. 경배가 봉사보다 먼저 이루어져야 함을 주목하십시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더 많이 하나님을 경배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더 많이 경배할수록, 그분을 위한 우리의 봉사는 더욱 효과적이 될 것입니다.
예배(worship)는 우리 자신과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완전히 내어드리고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헌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배는 감사와 찬양 그 이상입니다. 예배에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위대하심을 인식하고, 그분을 만주의 주, 만왕의 왕으로 인정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죄를 지은 적이 없는 이 스랍들은 하나님을 쳐다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분 앞에서 얼굴을 가렸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거룩함의 "가까이 갈 수 없는 빛"에 대해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딤전 6:16).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의를 통해 그분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특권입니다.
이사야는 이 모든 것을 보고 깊이 자신의 죄를 깨달았습니다. 방금 다른 사람들에게 "화 있을진저"라고 선언하던 사람이, 이제 자신에게 "화 있을진저…"라고 선언합니다(6:5)!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선언한 "화" 중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하나님 앞에 홀로 서서 자신 안에 있는 죄를 보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볼 때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여전히,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고 주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그들을 반대하는 말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의 육신에 있는 죄를 보게 될 것입니다.
강단에 서서 죄에 맞서 설교하는 모든 선지자와 설교자는 먼저 자신의 육신에 있는 죄를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곧 타락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많은 설교자들은, 이사야처럼 "내게 화 있을진저"라고 외치거나 바울처럼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내 육신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느니라."라고 외치지 않습니다(롬 7:18,24).
이사야는 특히 그의 말에 대한 죄를 깨달았습니다. 그는 "주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6:5). 그러자 스랍 중 하나가 집게로 제단에서 숯을 가져다가 즉시 이사야의 입술을 깨끗하게 해 주었습니다. 이사야가 고백한 죄는 즉시 용서를 받았습니다. 천사가 만질 수 없었던(집게가 필요했던) 불은 이사야의 입술에 닿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천사가 받을 수 없는 기름 부음을 하나님께 받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이곳에서 보좌와 제단에 대한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내가 누구를 보내야 하느냐? 누가 우리를 위해 갈 것인가?"(6:8)라고 물으십니다. 이사야는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대답합니다. 우리는 보좌와 제단을 끊임없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환상을 보며 흙먼지에 엎드려야 하고, 그 다음에는 제단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하였기 때문에 들려 올려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나가서 주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내시지 않으면, 우리는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내심 없이 우리가 간다면, 우리의 수고는 헛될 것입니다. 인도의 많은 "기독교 사역자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어떤 단체나 사람이 그들을 선교지로 보냈습니다. 아니면 그들은 스스로 갔을 수도 있습니다. 인도와 같은 광활한 나라에서는 기독교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쉬운 일입니다. 그 필요성이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원히 지속되는 열매를 원한다면,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보내셔야 합니다. 다른 경건한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부르심을 확인해 줄 수도 있지만 우리를 부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과 바나바를 개인적으로 부르셔서 그분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그 부르심에 대한 확인은 나중에 다른 선지자들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행 13:1-4).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무엇을 전파할지 우리에게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그분은 이사야에게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라고 말씀하셨습니다(6:9).
하나님은 이사야 시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동일하십니다. 새 언약 아래서는,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에 거하시기 때문에, 지금 우리는 당시 이사야가 들었던 것처럼 육신의 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마음 속에서 그분의 음성을 듣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음성은 그만큼(이사야가 귀로 들었던 것만큼) 분명합니다. 나는 육신의 귀로 주님의 음성을 들은 적이 없으며, 육신의 눈으로 주님이나 천사를 본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지난 56년 동안 내 마음 속에서 그분을 분명히 보고 그분의 말씀을 분명히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눈으로 보지 않고 그분을 믿는 사람들이, 실제로 그분을 보고 믿는 사람들보다 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20:29).
주님께서 이사야에게 주신 사명은 매우 어려운 사명이었습니다. 그분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내 백성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너희는 내 말을 반복해서 들어도, 그것들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내가 기적을 행하는 것을 너희가 보기는 보아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이해력을 둔하게 하고,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나는 그들이 보거나 듣거나 깨달아서, 나에게 돌아와 고침받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6:9,10). 이것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를 설명하실 때 인용하신 구절입니다(마 13:15).
그럼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볼 수 있나요? 하나님에 대한 환상, 자신에 대한 환상, 용서하는 은혜에 대한 환상, 기름부음받은 섬김에 대한 환상, 마지막으로 열매에 대한 환상입니다(6:13). 타락한 유다 나라에서 거룩한 씨가 나올 것입니다. 우리의 섬김을 통해 주님을 위해 남은 자들이 세워질 것입니다.
7장 14절에는,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놀라운 예언이 있습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마 1:23에서 인용됨).
8장 12,1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합세하여 그들을 치러 오는 군대로 말미암아 두려워하는 그의 백성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인도 곳곳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하는 반기독교 세력을 목격하고 있는 우리에게 매우 적절한 말씀입니다. 주님은 "너희는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러나 그분은 너희의 두려움이 되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구절은 베드로전서 3:14,15에 인용되어 있습니다. 리빙 바이블(Living Bible)은 이 구절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다른 것은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40여 년 전, 나는 이 구절을 커다란 나무 명판에 써서 집 현관에 눈에 잘 띄게 붙여 놓았습니다. 이 구절은 나와 다른 많은 사람들이 사람과 환경에 대한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힘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두려워해야 할 한 분을 두려워하도록 격려해 주었습니다 - 바로 하나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제자들에게 "너희 몸은 죽일 수 있으나, 너희 영혼은 건드릴 수 없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오직 영혼과 몸을 모두 지옥에서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만 두려워하라!"라고 당부하셨습니다(마 10:28 - Living).
이사야 8장 18절은 신약성경 히브리서 2장 13절에 인용된 또 다른 구절입니다 - 거기에서 예수님과 우리를 언급합니다. "보라, 나와 주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은 표적과 기적을 위한 것이다." 그것은 가족인 우리에게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들을 그들의 도덕적 성품과 야망에 있어서 세상의 다른 아이들과 다른 방식으로 키워야 합니다. 우리와 우리 자녀들은 항상 영원의 가치를 염두에 두고 산다는 점에서, 우리 주변 세상에 표적과 기적이 되어야 합니다. 불행하게도 신자와 불신자를 나누는 선은 수년에 걸쳐 사탄에 의해 점차 지워졌습니다.
9장 2절은 마태복음 4장 16절에도 인용되어 있습니다: "어두움 속에서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보리라." 이것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사람들을 방문하신 것을 가리킵니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도 적용되는데, 우리가 어디를 가든 어둠 속에 빛을 비추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9장 6,7절은 예수님에 대한 예언적 언급입니다. 그분은 "기묘자(Wonderful), 모사(Counselor), 전능하신 하나님(Mighty God), 평강의 왕(Prince of Peace), 영원하신 아버지(Eternal Father)"라고 불릴 것입니다. 여기서 '영원하신 아버지(Eternal Father)'라는 말은 '영원의 아버지(Father of eternity)'를 의미할 뿐, 아버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9장 6절에 보면, "통치(government)가 그분의 어깨 위에 놓일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내가 사역하는 데 엄청난 도움이 되었습니다. 지난 40년 동안, 우리는 주님께서 인도에서 우리의 사역을 통해 개척하신 교회에서 종종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 이는 성장하는 자녀를 둔 모든 부모가 직면하는 것과 유사한 문제입니다. 우리 교회 중 한 곳에서 나를 당혹스럽게 하는 문제에 대해 들을 때마다, 나는 대개 하나님 앞에 엎드려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이것은 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당신의 일입니다. 이것들은 나의 교회가 아닙니다. 당신의 것입니다. 그들의 통치는 당신의 어깨 위에 있습니다. 책임은 당신의 것입니다. 교회를 폐쇄하고 싶다면, 폐쇄하십시오. 그것은 당신의 일입니다. 나는 단지 당신의 종입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그것을 하겠습니다." 소유자는 원할 경우 그의 상점을 폐쇄할 모든 권리를 갖습니다. 나는 주님께서 폐쇄하기를 원하시는 어떤 일을 열어 두려고 결코 노력하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크리스천 사역자들이 하나님이 그 안에 계시지 않음이 분명해진 지 한참이 지난 후에도, 자신이 시작한 일을 지탱하기 위해 끊임없이 애쓰고 있습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 일의 통치를 자신의 어깨에 짊어졌기 때문입니다. 통치가 주님의 어깨 위에 있을 때, 크리스천 사역에서 스트레스와 부담은 사라집니다. 그것이 나에게 안식을 가져온 것처럼, 당신의 삶에도 안식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주님의 일에 대한 책임은 영원히 그분께 있습니다. 우리는 종일 뿐입니다.
10장은 당시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었던 앗수르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앗수르의 왕은 적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10장 27절에는, "기름 부음으로 말미암아 멍에가 부러지리라"고 되어 있습니다(KJV). 죄와 사탄의 멍에를 깨뜨리고 파괴하는 것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입니다 - 우리의 삶과 가정과 교회에서.
10장에 묘사된 적그리스도의 통치와 대조적으로, 11장에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언급된 (그리스도 위에 임하실) 일곱 가지 성령은 여기서 여호와의 영, 곧 지혜, 총명, 모략, 능력, 지식,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으로 불립니다. 3절에 따르면 성령님은 예수님에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데 예민하게 하셔서, 그분(예수님)이 눈으로 본 것, 귀로 들은 것으로 결코 판단하지 않고, 내면의 성령의 음성에 따라 의로 판단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우리의 모범이 되십니다. 우리 역시 우리의 눈이나 귀가 말하는 대로 어떤 사람이나 상황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대신, 우리는 모든 상황에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해, 성령을 통한 분별력을 주님께 구해야 합니다.
사자와 늑대와 어린 양이 함께 누울 때가 올 것이며(6절) - 그리스도께서 이 땅을 다스리시는 천년왕국에서; 그리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모두 이끌 것입니다(6,7절).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그분의 나라를 세우시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상황이 도처에 만연할 때, 문자 그대로 성취될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지금도 교회 안에서 사실입니다. 이제 늑대 같은 형제는 양 같은 형제를 잡아먹으려고 하지 않고 교제합니다! 표범 같은 자매는 염소 같은 자매를 잡아먹지 않고 함께 누워있습니다! 그리고 이 교회의 지도자는 어린아이, 즉 가장 어린아이 같은 형제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은 어린아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12장은 구원의 기쁨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나는 기쁨으로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크게 외치며 즐겁게 부르라, 너희 가운데 계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위대하심이니라"(2,3,6절).
13장부터 23장은 중동의 여러 나라에 관한 예언입니다. 그 다음에는 심판과 축복의 예언으로 가득한 열 두장이 이어집니다 - 35장까지.
13장은 요한계시록 17장과 18장에 묘사된 바벨론의 멸망에 관한 것입니다.
14장은 계속해서 바벨론의 멸망을 묘사합니다. 이 광대한 종교 및 상업 체제인 바벨론의 통치자는 누구입니까? 한때 하늘에 있었던, "빛나는 이, 아침의 별"(12절)이라 불리는 이입니다. 그는 일반적으로 루시퍼라고 불립니다. 이는 KJV 번역에서 그 이름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가 마음속으로, "내가 하겠노라(I will)"고 다섯 번 말한 것을 봅니다. 그래서 그는 마귀가 되었습니다(13,14절). 이것이 바로 죄가 처음으로 우주에 들어온 방법입니다.
죄는 피조물이 "내가 할 것이다(I will)"라고 말했을 때 왔습니다. 그리고 구원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루어졌습니다 - 단 한 번이 아니라, 그 분의 평생 동안입니다 - 요한복음 6장 38절에서 그분이 직접 말씀하신 것처럼: 내가 하늘에서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당신이 자신의 뜻을 행할 때마다 죄의 길에 있다는 사실을 평생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자신의 뜻을 부인할 때마다, 당신은 참된 거룩함의 길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걸어가라고 명하신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우리 자신의 뜻을 잘라내는 길입니다. 우리 모두는 매일 루시퍼 또는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습니다. 자기 의지가 최종적으로 바벨론을 건설하는 것입니다.
15장부터 23장은 모압, 다메섹, 이름 없는 나라, 애굽, 에티오피아, 에돔, 아라비아, 두로에 대한 예언입니다. 19장 24절과 25절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연합하여, 애굽과 앗수르와 이스라엘이 다 한 교회에서 형제와 자매가 되는 날의 아름다운 그림이 나옵니다.
20장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이사야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갈 때 어떻게 걸을 것인지 보여 주기 위해 속옷 차림으로 외투나 샌들도 신지 않고 맨발로 다니라고 명하신 것을 봅니다.
22장 13절에서 우리는 "내일 죽을 까닭에 먹고 마시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에 대해 봅니다 - 왜냐하면 그들은 영원에 대한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고린도전서 15장 32절에도 인용되어 있습니다.
22장에서 우리는 두 사람에 대해 봅니다:
1. 셉나, 히스기야 왕의 재무 장관,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사람이자 적그리스도의 모형(15-19절).
2. 엘리아김, 경건한 사람, 그리스도의 모형, "확실한 곳에 박힌 못, 견고한 곳에 박힌 말뚝"(20-25절).
23장은 두로의 멸망을 묘사합니다.
24장부터 27장은 주의 날에 관한 예언입니다. 24장은 땅의 멸망(1-20절)과 귀신들의 멸망(21-23절)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25장 8절은 어느 날 부활 때에 사망이 삼켜질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26장 3절은 마지막 날에 우리의 마음을 평안하게 할 수 있는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에게 마음을 두는 자들을 완전한 평강으로 지키실 것이다". 13절은 주님께 완전히 항복하는 좋은 구절입니다: "주님, 전에는 다른 주인들이 우리를 다스렸나이다. 그러나 이제부터, 오직 당신만이 우리를 다스리실 것입니다." 19절은 다시 부활에 대한 예언입니다: "너희의 죽은 자들이 일어나고, 티끌에 누웠던 자들이 살아나리라." 20절은 큰 환난의 짧은 기간을 언급합니다; 그리고 21절에는 주님께서 그분의 성도들을 위해 이 땅에 다시 돌아오시는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그런 다음 27장은 뱀인 사탄의 멸망과, 주님의 포도원이 어떻게 회복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심판과 축복에 대한 예언(28-35장)
28장에는 신약성서에서 인용된 몇 구절이 있습니다. 11절은 고린도전서 14장 21절에 사람들이 방언을 하게 될 때에 대한 예언으로 인용되어 있으며, 오순절 날에 성취되었습니다. 16절은 교회의 모퉁잇돌이신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이 모퉁잇돌을 신뢰하는 사람은 결코 흔들리거나 불안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결코 서두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확고한 기반을 마련할 것입니다." 20절은 인간의 의가 인간을 완전히 덮을 수 없음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21절은 심판이 하나님께는 "흔치 않은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분은 사람을 심판하는 것을 꺼려합니다. 28절과 29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해, 그분의 크신 지혜로 어떻게 우리를 깨뜨리시는지를 말해 줍니다. 그분은 우리의 능력을 넘어서는 시험을 우리에게 결코 허용하지 않으실 것이며 언제 단련을 멈춰야 할지 아신다고 우리를 안심시킵니다.
29장은 타락한 상태에 있는 예루살렘(아리엘 - "하나님의 사자" - 히브리어)을 말합니다. 11절과 12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성한 계시가 필요함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7:6,7절에서 13절을 인용하여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폭로하셨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거민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실 때 그 곳이 기름진 밭처럼 될 것입니다(17절).
30장 9-11절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선지자와 선견자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내용을 봅니다: "우리에게 진리를 예언하지 말라. 우리에게 즐거운 말을 하여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에 관해 우리에게 말하지 말라." 오늘날 우리는 교회에 있는 선지자들의 메시지에 대해 많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동일한 태도를 발견합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이 모두 회개하기를 기다리십니다(15-18절). 그분은 자신에게 돌아오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해 기다리십니다(18절). 그리고 돌이키는 자들은 그들의 스승이신 예수님을 보게 될 것이며(20절), 그들이 올바른 길에서 벗어날 때 그들을 바로잡아 주시는 성령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21절).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적그리스도가 지옥에 던져지는 것을 읽습니다(33절 - 도벳은 지옥의 그림입니다).
31장은 도움을 구하기 위해 사람(애굽)에게 가는 사람들에게 임하는 저주를 언급합니다(렘 17:5-8 참조). 32장은 다가오는 그리스도의 통치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가 3장에서 말한 여인들은 이제 회개하라는 권유를 받습니다(9-12절). 다시 말하지만, 회개하는 자에게 성령이 부어지고(15절), 그 결과 의와 평강을 얻게 됩니다. 33장 14-16절에서, 이사야는 매우 예리한 질문을 던집니다: "누가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소멸하는 불과 함께 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그분께서는 "의롭게 행하고 진실하게 말하는 자들"이라고 직접 대답하십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고 위선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떨고 있다고 말합니다. 34장은 열국에 대한 주님의 복수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35장에서, 우리는 새 언약과 대속받은 자들이 걸어갈 거룩함의 길에 대해 읽습니다(35:8,10).
히스기야가 앗수르인들과 질병으로부터 구출됨
다음 네 장(36장부터 39장)은 히스기야 왕 통치 중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역사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장들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영적인 교훈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배우는 첫 번째 교훈은,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37장)나 병들었을 때(38장) 히스기야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께로 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고, 우리를 치료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히스기야의 실수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의 첫 번째 실수는 하나님께서 그의 지상 생활이 끝났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의 생명을 연장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한 것이었습니다(38:1-5). 떠날 때가 왔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상에서의 삶을 연장해 달라고 요청하지 않은 바울과 베드로를 대조해 보십시오(딤후 4:6; 벧후 1:14). 그러나 히스기야가 이를 구하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15년을 더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분은 그들의 요구를 주셨으나, 그들의 영혼을 쇠약하게 하셨다"(시 106:15 - Living). 히스기야가 아들 므낫세를 낳은 것은 그 연장된 삶의 기간 동안이었고, 그(므낫세)는 유다 역사상 최악의 왕이 되었습니다(대하 33:1-3).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아시며, 우리는 우리의 삶의 길이에 관한 그분의 뜻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히스기야가 저지른 두 번째 실수는 교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치명적인 질병을 고쳐주셨고, 태양이 하늘에서 해시계의 10도 뒤로 물러나는 기적적인 확인의 표징을 주셨습니다(38:8). 즉, 지구가 잠시 자전을 멈추고 자전 방향을 바꿨습니다! 이 기적을 본 바벨론 왕은 사절을 보내 히스기야를 축하하게 했고, 히스기야는 자랑스럽게 자신의 모든 보물을 그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39장). 이로 인해 나중에 그 모든 보물이 바벨론으로 옮겨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서 행하시는 일로 인해 우리가 영광을 누릴 때마다, 우리는 조만간 영적인 상실을 겪게 될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 우리는 이사야의 예언이 현재의 세계 상태에 좌우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소통한 참된 선지자였습니다. 당시 바벨론은 세계 강대국인 앗수르로부터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약한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히스기야의 보물이 앗수르가 아니라, 바벨론으로 옮겨갈 것이라고 정확하게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몇 년 뒤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위로에 대한 예언(40-66장)
40장부터 66장은 이사야서의 "신약" 부분을 구성하며 여기에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새 언약의 삶에 관한 많은 예언이 있습니다.
구원에 대한 예언(40-48장)
이사야의 이 부분은 세례 요한의 사역에 대한 예언으로 시작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광야에 주님을 위한 길을 닦아라. 사막을 평탄하게 하라.'"(사 40:3-5). 이 메시지는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주님은 두 번째로 다시 오십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이 그분의 초림을 위해 사람들을 준비시켰던 것처럼, 교회는 그분의 재림을 위해 사람들을 준비시켜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메시지는 본질적으로 세례 요한의 메시지와 동일해야 합니다:
l 우선, "골짜기들은 돋우어져야 한다"(4절). 새 언약 아래에는 낙담과 절망이 있을 자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결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쓸모 없습니다."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격려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높이시고 우리에게 존엄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쓰레기장, 즉 계곡에서 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왕의 자녀이며 그분은 우리의 머리를 높이 드십니다.
l 둘째, "산들은 낮아져야 한다"(4절). 우리 안의 모든 교만은 낮아져야 합니다.
l 셋째, 거친 곳을 매끈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삶에는 조잡하고 무례하고 거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부드럽게 해야 하며 우리는 은혜롭고 온화해져야 합니다.
l 넷째, 굽은 길은 곧아져야 합니다(눅 3:5절에 이 구절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우리 삶에는 돈 문제에서의 불의와 같이 구부러진 부분이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곧아지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회개에 수반되는 일입니다 - 계곡은 돋우어지고, 산은 낮아지고, 거친 곳은 매끈해지고, 굽은 길은 곧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영광이 우리 육신에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 육신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주님의 오심을 위해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방법입니다.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으니 모든 육체가 여호와의 구원을 보리라"(5절).
40:6,7은 베드로전서 1:24,25절에 인용되어 있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다." 우리는 이미 모든 인간 존재는 숨이 없는 먼지와 같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서는 풀로 묘사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모든 명예는 풀밭에 피어나는 작은 꽃과 같을 뿐입니다. 주님이 입김을 불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어 버립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계속해서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의 원칙대로 살아온 사람들은 어느 날 인간의 모든 영광이 무너져도 남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주변에 보이는 모든 것은 언젠가는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영원한 것을 얻게 됩니다.
40장 10,11절은 주님의 오심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오신다. 그분이 백성에게 주실 상급을 가지고 오신다. 그리고 목자처럼 그분은 자신의 양 떼를 돌보실 것이다. 그분은 어린양들을 품에 안아 옮기실 것이다."
40장 12절부터 17절까지는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통제권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무(無)에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13절은 고린도전서 2장 16절에 인용되어 있습니다: "누가 성령을 가르치겠으며, 그분의 조언자로서 그분에게 알려주겠는가?"
그분 앞에는 땅의 모든 나라가, 아무것도 아닙니다(17절). 세상의 모든 주민들은 아무것도 아니고 무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효과적이고 두려움 없이 섬기려면,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를 보아야 합니다 - 특히 사람들이 국가의 권위를 등에 업고 매우 강력해 보이고 우리가 주님을 섬기려고 할 때 우리를 반대하는 어려운 곳에 갈 때 더욱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구절을 기억하고 우리를 보호하시고 지키시는 하나님의 엄청난 능력을 신뢰해야 합니다.
40장 21,22절: "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듣지 못하였느냐? 지구라는 원 위에 앉으신 분이 바로 그분이다." 이것은 2700년 전에 기록되었으며, 이사야는 여기서 지구가 편평하지 않고 구형임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구상의 어느 누구도 이것을 믿기 수백 년 전이었습니다. 솔로몬은 또한 잠언 8장 27절(NASB)에서 지구의 구형 특성을 언급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하늘에서 재림하실 때 어떤 곳은 낮이고 다른 곳은 밤이라고 언급하심으로써 지구가 구형임을 암시하셨습니다(눅 17:31, 34).
40장 26절: "별들을 다스리시는 분을 보라. 그분은 모든 별들에게 이름을 주셨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놀라운 거룩하심(6장)뿐만 아니라, 그분의 전능하신 능력에 대한 환상도 받았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때 항상 우리 앞에 두어야 할 하나님에 대한 두 가지 환상입니다.
40장 29-31절: 이 구절은, 우리가 경배하고 섬기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가 약할 때 우리에게 힘을 주시리라고 가르칩니다. 우리에게 힘이 부족할 때, 그분은 우리에게 힘을 주실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그분을 섬길 수 있는 건강과 힘을 주실 것입니다. 심지어 젊은 사람들도 지치고 피곤해질 수 있으며, 활력이 넘치는 젊은 사람들도 주님을 섬기려고 노력하다가 지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나이에 상관없이, 새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약속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젊은이들이 쓰러질 때, "주님을 앙망하는 이 노인들은 독수리처럼 날개치며 올라갈 것입니다. 그들은 달릴 것이고 지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걸어도 결코 피곤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젊은이 여러분에게 격려하고 싶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여러분의 모든 필요에 대해 단순한 신뢰로 주님을 기다리는 법을 배우십시오. 이 구절에서 말하는 대로, 당신은 새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또는 다른 번역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를 기다리는 자는 그들의 힘을 교환하리라." 이는 우리가 인간의 힘을 주님께 드리고 주님은 그 대가로 우리에게 그분의 신성한 힘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주님과 교환하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내가 가진 것은 모두 아버지의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가진 것은 모두 내 것입니다"(요 17:10). 주님을 섬기는 데에는, 당신을 끝까지 지켜줄 주님의 힘이 필요합니다. 주님을 섬기는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위로부터 오는 초자연적인 힘, 즉 그분의 부활 능력을 주시는 것을 정말로 신뢰해야 합니다 - 우리의 영뿐만 아니라 우리 몸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노년에도 그분을 위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시 92:14).
40장부터 46장은 주님을 섬기는 나에게, 성경의 귀중한 부분이었습니다. 나는 주님을 섬기는 여러분 모두가 이 장들을 진지하게 묵상하기를 권합니다. 여기에는 여호와의 최초의 참된 종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며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위한 몇 가지 놀라운 약속이 있습니다.
41장 8-18절: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을 때 크게 격려해 주는 몇 가지 약속이 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선택한 것이지, 버린 것이 아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너에 대해 걱정스럽게 보지 말아라. 나는 네 하나님이다. 나는 너를 강하게 하겠다. 내가 너를 도울 것이다. 내가 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네게 노하는 자들은 다 부끄러움을 당하고 불명예를 당할 것이다. 너와 싸우는 자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이 될 것이다. 그들은 멸망할 것이다. 너는 너와 다투는 사람들을 찾을 것이다. 그러나 너는 그들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너와 전쟁을 벌이는 자들은 언젠가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너의 주 너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내가 너의 오른손을 붙잡고 있다. 내가 너에게 이르노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도울 것이다. 너는 벌레다. 하지만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도와 줄 것이다. 너희가 이같이 약할지라도, 내가 너희를 좌우에 날선 새 타작 기계로 만들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 곧 좌우에 날선 검이 너희 입에 있기 때문이다). 너는 이 거대한 산들을 쳐서 부숴버릴 것이다. 너는 언덕들을 겨처럼 만들 것이다. 그러나 너는 너의 주 너의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할 것이다."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여러분,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이 말씀을 당신 자신에게 적용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주장하십시오.
41장 17,18절: 고통받고 궁핍한 자(하나님은 항상 심령(spirit)이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에 관심이 있으십니다)가 물(곧 성령)을 구하되, 그들의 혀가 바짝 말라 '하나님이여, 내가 성령의 능력 없이는 살 수 없나이다' 말할 때에 나 여호와가 그들에게 응답하리라. 나는 그들의 삶에 강을 열 것이며, 그들의 삶 가운데 샘이 나게 할 것이다. 내가 그들의 삶을 물 연못처럼 만들겠다. 그리고 그들의 메마른 삶은 샘물처럼 될 것이다. 이 약속은 수년 동안 나에게 엄청난 축복과 격려가 되었으며 - 나는 그것을 당신에게 전달합니다.
42장은 예수님을 성령으로 기름부음받은 여호와의 종으로 묘사합니다. 성령은 신약의 주요 주제 중 하나이며 이사야 40장부터 66장까지의 주요 주제 중 하나입니다. "보라, 내가 붙들어 주는 나의 종을 보라." 진정한 하나님의 종은 돈이나 조직 또는 인간 기관이 아닌, 하나님에 의해 붙들림을 받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선물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사람이나 돈에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 "떠받치다(붙들어주다)"라는 단어는 우리가 의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주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시는 것은 우리가 무력한 상황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42장 2절: "그분은 거리에서 외치지도 아니하며 그분의 소리를 높이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이것은 마태복음 12:19,20절에서 예수님을 언급하는 것으로 인용되었으며,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은 그분의 소리를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 아니하시리라. 상한 갈대라도 꺾지 아니하시리라." 이는 주님께서, 삶을 엉망으로 만든 사람을 결코 낙담시키지 않으시고 그를 격려하고 고쳐 주신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곧 꺼지는 촛불의 심지를 끄지 않으실 것입니다. 반면에, 그분은 입김을 불어 불을 붙여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실패한 연약한 신자들을 돕는 데 관심이 있으십니다. 그분은 낙담하고 우울한 사람들을 돕고 그들의 영을 북돋는 데 관심이 있으십니다. 주님의 참된 종은 우울하고 낙담한 사람들, 절망감을 느끼고 삶에 지친 사람들의 영혼을 북돋는, 격려하는 비슷한 사역을 항상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그러한 사역을 필요로 하므로, 우리 모두 그러한 사역을 추구하도록 합시다.
42장 5-7절: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의 안에서 너를 불렀느니라. 눈먼 자들의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자들을 감옥에서 끌어내라고 내가 너를 불렀다." 이것은 훌륭한 사역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를 항상 기억하십시오: "여호와께서는 '내가 결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8절). 우리는 사역을 하면서 결코 우리 자신에게 영광을 돌려서는 안 됩니다. 공로나 영광을 우리 자신에게 돌리는 것은 매우, 매우 심각한 범죄입니다. 돈을 훔치는 것보다 더 나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당신의 사역을 축복하시고, 당신을 강력하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결코 자신의 영광을 누구에게도 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영광을 건드리기 시작하면, 많은 주의 종들이 망한 것처럼 당신도 망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승격시키면서, 사람들을 주님 대신 자신에게로 이끌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자신의 공으로 돌리기 시작하면, 당신은 매우 위험한 길에 서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수천 명이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잃어버렸습니다.
42장 19절: "내 종 외에 누가 눈먼 사람이냐? 내 사자처럼 귀가 먼 사람이 누구이냐? 나와 완전히 평화롭게 지내는 사람만큼 눈먼 사람이 누구이며, 여호와의 종만큼 눈먼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이 구절은 특히 (1절에서 볼 수 있듯이) 분명히 예수님을 언급하기 때문에, 수수께끼의 구절처럼 보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는 하나님의 참된 종은 그의 주변에서 보고 듣는 많은 것에 대해 눈이 멀고 귀가 먼 사람이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많은 것을 보지만, 그것들을 유의하지 않습니다(20절). 그는 다른 사람의 죄를 찾으려고 돌아다니지 않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말에서 무언가를 잡기 위해 사람들의 말을 들으러 돌아다니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랬습니다 - 항상 예수님을 고발하기 위해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서 잘못을 잡으려고 기다렸습니다. 불행하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그와 같습니다 - 항상 누군가가 말한 것에 대해 고발하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 매우 자주 그들은 그의 사역을 질투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처럼 되지 마십시오. 당신이 주변에서 듣고 보는 많은 것에 귀가 먼 자가 되고 눈이 먼 자가 되십시오. 누군가가 당신에 대해 거짓 비난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나요? 당신이 귀가 먼 사람이라면 그것을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귀가 먼 사람"이 되십시오! 주님의 종이 매력적인 여자들에 대해 "눈이 먼" 것이 좋지 않습니까? 당신은 눈이 있지만 보지 못합니다. 당신은 "눈이 먼 자"입니다! 당신은 귀가 있지만 듣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것과 귀에 들리는 것으로 판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사셨고,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사 11:3).
이제 이 장들에서 새 언약의 수립을 기대하는 몇 가지 놀라운 약속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겠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인데, 고린도후서 1장 20절은 "하나님의 약속은 다 그리스도 안에서 '예'와 '아멘'이 되느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은 약속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43장 1-5절: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너를 구속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네가 강(어려운 상황)을 지나갈 때, 물이 너에게 범람하지 않을 것이다.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해를 받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이다. 너는 내 눈에 귀한 존재이다. 내가 애굽을 네 대속물로 주었다." 그분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의 대속물로 내 아들의 피를 너희에게 주었다. 그러므로 너는 내 눈에 귀중하다. 무서워하지 말라." "무서워하지 말라"(혹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이것은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43장 10,11절: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나는 여호와이니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43장 18,19,25절: "너희는 과거의 삶을 생각하지 말아라. 예전 일들은 잊어버려라. 나는 새로운 일을 할 것이다. 내가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낼 것이다. 미래를 바라보아라. 네 과거의 실패에 대해 걱정하지 말아라. 나는 네 허물을 지우는 자이니 다시는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44장 3절: "내가 목마른 땅에 물을 부어 주겠다. 내가 내 영을 너와 네 자녀에게 부어 주고,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겠다."
44장 8절: "떨지 말고, 겁내지 말아라. 너희는 나의 증인이다. 나 외에 신이 있겠느냐? 왜 우상을 숭배하는 저 사람들을 걱정하느냐?" 그런 다음 그분은 나머지 구절에서 우상 숭배의 어리석음을 말씀하십니다.
44장 21절: "너는 나의 종이다. 내가 너를 지었다. 너는 나에게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주님께 충실할 때나 외로운 곳에서 그분을 섬길 때 외로움과 잊혀진 느낌을 받기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잊지 않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위안입니다. 때때로 당신의 기도를 주님께서 듣고 있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 "너희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약속을 기억하십시오.
44장 28절부터 45장 6절까지는 고레스 왕에 관한 예언입니다. 고레스가 태어나기 100여 년 전, 그리고 그의 메대-바사(페르시아) 제국이 세계 지배자가 되기 오래 전에, 이사야는 그에 관해 이름을 언급하면서 예언했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돌아가서 성전을 건축하라고 말할 그분의 목자 고레스를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이 에스라서에서 성취되었음을 봅니다.)
45장 9절: "자신을 만드신 분과 다투는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네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께서 당신을 대하시는 방식에 대해 하나님과 논쟁하지 마십시오. 자신을 낮추고 그분께서 당신을 대하시는 방식을 받아들이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을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하신다면, 그것은 당신을 그분의 영광을 위한 유용한 그릇으로 빚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불평하거나 투덜대지 마십시오.
45장 10절은 대부분의 부모가 여자 아이를 갖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우리나라 인도와 특별한 관련이 있습니다. 여자 아기가 고아원 문간에 버려지거나 쓰레기통에 버려지거나 심지어 죽임을 당하는 슬픈 사례가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그러한 모든 부모를 위한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네가 무엇을 낳았느냐?'하고 여자에게 '네가 무엇을 낳았느냐? 여자 아이냐? 나는 남자 아이를 원했다'하는 자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저주가 있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선물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에게는 저주가 있습니다. 비록 정신 장애아(지체아)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를 죽일 권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자녀를 주시기로 작정하시면, 당신을 동정심이 많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실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또한 아기를 낙태하는 자들에게 화(저주)가 있을 것임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45장 17절: "너희가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며 능욕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예수님께서도 굴욕을 당하셨으니, 우리도 그런 굴욕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주님을 따른다면, 우리는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에 또 다른 아름다운 구절이 있습니다: 45장 22절: "땅의 모든 끝이여, 나에게로 돌아와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다. 다른 이는 없다."
46장 4절은 노인들을 위한 아름다운 구절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십니다, "네가 노년이 되어도 나는 그대로일 것이다(나는 늙지 않는다). 네 머리카락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는 너를 업고 갈 것이다. 내가 너를 창조했고, 내가 너를 만들었고, 내가 너를 업고 갈 것이다. 내가 널 구해 줄 것이다." 하나님은 여기서 자신을 우상에 비교하십니다. 우상 숭배자들은 그들의 신들을 업고 다니지만,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업고 다니십니다! 당신은 당신의 신을 업고 다닙니까, 아니면 당신의 신이 당신을 업고 다닙니까? 그것이 문제입니다.
47장 8절은 요한계시록 18장 7절에서 인용되어 바벨론(거짓 기독교)이 여왕으로 앉아 "나는 과부로 앉지 아니하리라"고 말하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모르고 겸손하게 행하지 않는, 편안함을 사랑하는 기독교를 말합니다.
48장 10,11절: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같이 연단하지 않았다. 너를 고난의 용광로에서 너를 시험하였노라. 나 자신을 위하여 내가 행할 것이니 어찌 내 이름을 더럽히리요." 고난은 우리의 신실함을 시험하기 위한 시험 과정입니다. 시험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을 것입니다. 불에서 정제된 금은 마침내 왕을 위한 면류관이 됩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우리를 데려가서 그분의 면류관의 일부로 만드실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이렇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말씀이 두 번째로 나오는 것을 봅니다: "나는 내 영광을 결코 다른 사람에게 주지 아니하리라"(48:11).
48장 17,18절: "나는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가르치는 여호와요, 너희가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여호와라. 만일 네가 내 계명을 듣고 주의를 기울였더라면, 네 행복은 강과 같았을 것이요, 네 의는 바다 물결과 같았을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요구하시는 모든 것은 우리 자신의 이익과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때, 우리는 "광야를 지나가도 목마르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분이 바위에서 물이 흘러나오게 하실 것입니다"(48:21). "그러나 악한 자에게는 평화가 결코 없을 것입니다"(48:22).
메시아에 대한 예언(49-57장)
49-57장은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지만, 우리는 많은 구절을 우리 자신에게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49장은 내가 1964년 5월 6일 아침, 매일 성경을 읽으며 묵상하던 중에 주님께서 나를 전임 기독교 사역자로 부르신 장이었습니다.
49장 2절: "그분은 내 입을 날카로운 칼과 같이 하셨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말할 때, 때로는 날카로운 칼과 같을 수도 있고, 때로는 위로의 말씀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분의 손 그늘에, 나를 숨기셨습니다. 그분은 나를 그분의 화살통에 숨겨 두셨습니다." 그때에 그는 낙담하게 하는 유혹에 대해 말합니다, "주님, 나는 내 인생을 낭비했습니다. 나는 내 힘을 유용하게 쓰지 않았습니다."(4절) 주님의 종은 자주 낙담하게 하는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바울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코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쓸 것이다. 내가 너를 열방의 빛으로 만들 것이다."(6절)라고 말씀하십니다.
49장 14,15절: "시온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도다. 여인이 젖먹이를 잊을 수 있겠느냐?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겠느냐? 이 사람들은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그분의 사랑이 어떤 인간적 사랑보다 더 크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하실 때, 그분이 지상에서 발견하시는 가장 위대한 인간적 사랑의 예는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남편이 아내를 잊을 수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 남편은 종종 아내를 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내도 남편을 잊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새로 태어난 아이를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어머니가 잊더라도, 우리를 잊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약속은 우리 모두를 지상 생활 내내 위로하고 격려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은,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노라"고 말씀하십니다(16절).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 후에도 손바닥에 남을 구멍에 대한 예언적인 언급입니다. 우리의 이름이 그 구멍에 새겨졌습니다!
49장 23절은 오랜 세월 동안 나에게 엄청난 격려가 되었습니다. "나를 바라며 기다리는 자들은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그 놀라운 약속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그분만이 당신을 대신하여 행동하시기를 기다린다면, 나는 당신이 평생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49장 25절: "강한 자의 포로들도 빼앗아 오겠다. 내가 너와 다투는 자와 다투고 네 아들을 구원하리라." 아무도 죄나 사탄의 포로가 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자녀 중 누구라도 사탄의 포로가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여기에서 그들을 그 포로 상태에서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모든 자녀를 위한 그 약속을 주장합시다.
50장 4절은 예수님에 대한 예언입니다.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훈련된 혀를 가지시고, 그 혀로 때에 맞는 말로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혀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우리 몸의 주요 부분이므로, 모든 하나님의 종은 혀의 사용을 절제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입이 날카로운 칼과 같았다는 것을 보았습니다(49:2). 우리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때로는 날카로운 칼처럼 마음을 찔러 잘못된 동기를 드러내기도 하고, 때로는 격려하는 부드러운 말씀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매일 아침 일어나서 아버지의 말씀을 들으셨다는 것을 읽습니다(4절). 그리고 그분은 무언가를 들으셨을 때 즉시 순종하셨습니다. 그분은 다른 사람들이 뺨을 때리고 치며 침을 뱉는 것을 허용하는 경우에도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였습니다(5,6절). 그리고 사람들이 이 모든 일을 했을 때, 예수께서는 "얼굴을 부싯돌처럼 굳게 하셨습니다"(7절). 그들에게 복수하거나 위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용서하고 축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분은 자신을 의롭다고 하신 분이 항상 가까이 계셨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8절). 하나님의 모든 종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누가 나와 싸우겠느냐? 함께 서자." 나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느냐? 나를 법정에 세우고 싶으냐? "주 하나님이 나를 도우실 것이다. 누가 나를 고발하고 정죄할 수 있겠느냐? 그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질 것이다"(9절).
50장 10절: 당신이 주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의 종 예수님의 음성에 순종하더라도, 주님께서는 당신의 믿음을 강화하기 위해, 어둠 속에서 빛 없이 더듬도록 허락하실 때가 여전히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때에 당신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십시오. "어둠 속에서,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서 당신에게 보여 주신 것을, 결코 의심하지 마십시오." 누군가가 당신에게 빛 가운데서 분명히 보이는 100루피 지폐를 주었다면, 어둠 속에서 (명확히 볼 수 없을 때) 그것이 정말 100루피 지폐인지 아닌지 의심하겠습니까? 당신은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미 빛 가운데서 그것을 분명히 보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삶에는 하나님의 빛이 밝고 그분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돌보시는지 보여 주는 때가 있습니다. 나중에, 압박과 시련의 때가 닥쳐도,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11절은 이럴 때 빛을 내기 위해 인간적인 불을 피워서는 안 된다고 경고합니다. 그렇게 하는 자는 "고통 속에 눕게 될 것입니다." 즉, 시련의 때에 사람에게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방어하거나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보내시는 시련을 피하기 위해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를 방어해 주시고, 그분의 방식과 그분의 시간에 우리를 시련에서 풀어 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51장 1절: "여호와를 찾는 자, 의를 추구하는 자여, 너를 쪼아낸 바위와 너를 파낸 채석장을 바라보아라."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찾으셨을 때 우리가 빠져 있던 구덩이, 즉 구원받기 전에 우리가 처해 있던 절망적인 상황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결코 다른 사람을 멸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의를 아는 자들아, 나의 말을 들으라. 사람들의 비방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욕설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너희를 위로하는 자니라. 너는 왜 죽을 사람과 풀과 같이 될 사람의 아들을 두려워하며 하늘을 펴신 여호와를 잊느냐?"(7,12,13절).
51장 16,17절: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내 손 그늘로 너를 덮었노라. 시온(교회)에게 이르라, '너는 내 백성이라. 일어나라.'" 우리 스스로가 용기를 내야만, 다른 사람을 격려할 수 있습니다.
52장 5절: 주님은 "내 이름은 종일토록 모독을 받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은 로마서 2:24에서 이스라엘 때문에 이방인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인용되었습니다. 이것은 많은 곳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해당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인도에서 모독을 당하고 있는데, 이교도들보다는 대부분 기독교인들의 삶의 방식 때문에 더 모독을 당합니다. 인도는 그리스도를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인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본 그리스도를 거부했는데, 그것은 참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대조적으로, "좋은 소식(복음)을 전하고, 평화를 선포하고, 행복의 좋은 소식을 전하며, 시온에게 '너희 하나님이 통치하신다'고 말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얼마나 사랑스러운가"(7절). 좋은 소식은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분이 지금 통치하고 계시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선포해야 할 완전한 복음입니다.
52장 13,14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얼굴은, 그분이 받은 매맞음으로 인해 너무 변형되어 인간의 얼굴처럼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우리 모두가 본, 아름다운 얼굴로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예수님의 그림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분의 얼굴은 매맞고 변형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지상에서 걸었던 사람 중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매달리셨을 때 그분의 얼굴은 너무 흉측해서 가장 추한 얼굴이 되었습니다.
53장은 이사야서의 이 부분의 중심 장이며 십자가의 장입니다. 이 장은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아가 능력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멸시받는 사람으로,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로 올 것이라고 이스라엘에서 누가 믿었을까요? "그분은 그분의 아버지 앞에서 자랐습니다"(2절). 예수님의 삶의 비밀은 사람들의 얼굴 앞에서가 아니라 그분의 아버지의 얼굴 앞에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십자가에 매달려 계셨을 때 사람들에게 매력적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그를 볼때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도다"(2절)라는 것을 봅니다. 복음의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사람들에게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1세기에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21세기에도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이 인정한다고 주장하는 그리스도는 거짓 그리스도이며, 죄와 돈에 대한 사랑을 반대하고 사람들에게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진짜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진짜 그리스도는 오늘날에도 멸시받고 버림받고 거부당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진짜 그리스도를 따른다면, 그분이 당했던 것과 같은 세상의 거부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당신은 기독교집단의 대부분으로부터 멸시를 받을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그 당시 대부분의 종교인들에게 멸시를 받으셨듯이요. 예수님을 멸시하고 거부한 것은 그리스인과 로마인이 아니라 바리새인(당시의 근본주의자들)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십자가의 말씀을 받아들일 마음이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우리는 성경에서 발견되는 축복에 대한 놀라운 약속을 들을 때 흥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말씀은 동일한 상자 안에 축복에 대한 약속과 함께 제공됩니다. 둘 중 하나만 가질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얕은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서 약속을 주장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7절에서 예수님께서 침묵하셨다고 세 번이나 말한 것을 주목하십시오. "그분은 입을 열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분은 잠잠히 있었습니다. 그분은 입을 열지 아니하셨습니다." 신자로서, 우리는 찬양하고 감사드릴 때 입을 크게 벌리고 주님께 소리치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욕을 당하고, 비난을 받고, 중상을 당할 때 입을 다물어야 하는 법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찬양하는 법을 알고 계셨고 침묵하는 법도 알고 계셨습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 반대입니다. 그들은 집회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때는 잠잠합니다; 하지만 누군가 자신을 비난하거나 상처를 입혔을 때 소리치고 자신을 변호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 하지만 그것은 뒤집힌 세상의 특징이며, 그리스도인들은 달라야 합니다.
10절에서, 우리는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상하게 하시기를 기뻐하셨다는 것을 읽습니다 - 그리고 "그러므로 그분은 그분의 씨를 볼 것이고 그분의 날을 연장할 것이다." 그것은 짓밟힘에서 나오는 결과입니다. "그분은 그분의 날을 연장할 것이다"는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실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선한 기쁨이 그분(예수님)의 손에서 번영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도 가야 할 길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범죄자들과 함께 계수되었다"(12절), 우리도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오해를 받고 악한 자들의 범주에 들어갈 것입니다.
54장 4-10절은 과부들에게 위로가 되는 아름다운 구절입니다. "주님은 네 남편이시라.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네 젊음의 수치와 과부의 치욕을 잊을 것이다. 나의 평화의 언약과 사랑의 친절이 네게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
54장 13절은 우리 자녀들에게 한 약속입니다. "네 모든 아들들은 다 주의 제자가 될 것이요 (주님의 가르침을 받음), 네 아들들의 행복이 클 것이다." 주님은 1968년 6월에 아내와 나에게 각각 이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때는 우리가 아이를 낳기 전이었습니다 - 그리고 우리는 네 명의 아들 모두에 대해 그것을 주장했고 그것이 성취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모든 부모에게 놀라운 약속이며, 나는 모든 부모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주님, 나는 모든 자녀가 주님의 제자가 되고 그들의 영적 행복이 커지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하며 이 약속을 주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당신의 자녀가 결코 아프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당신의 자녀가 많은 십 대들이 종종 겪는 어려움을 결코 겪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마침내 주님께 나아올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주장하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54장 15,17절: "누구든지 너와 싸우러 오면 그는 패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네 편이기 때문이다. 네게로 향한 무기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요, 네가 모든 법정의 거짓에 대하여 공의를 얻을 것이니라. 이것이 여호와의 종들의 유업이요, 이것이 내가 네게 준 복이니라"(Living). 이 놀라운 약속은 주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나는 50년 이상 이 약속의 성취를 경험한 것에 대해 주님을 찬양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행하려고 한 모든 악한 일은 오직 나에게 유익할 뿐이며, 나를 그리스도와 더욱 닮게 만들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거짓으로 고발당하셨고 - 베드로와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만약 당신이 온 마음으로 주님을 따른다면, 당신의 메시지에 양심에 가책을 받은 사람들과 당신의 사역을 질투하는 사람들로부터 당신 역시 그런 거짓 비난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들의 고발을 믿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두십시오.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언젠가 그들의 입을 닫으시고 당신의 정당성을 입증하실 것입니다. "그들의 증명은 나로부터 온다"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당신은 자신을 변호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을 변호해 주실 것입니다. 나는 50년 이상 그 실재를 증명해 왔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고발할 때마다, 주님은 항상 입을 다물고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원하는 대로 믿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당신은 인간의 탈을 쓴 악마라고 믿더라도, 그렇게 하게 두십시오 - 그들이 당신의 구세주에 대해 믿었던 것처럼! 입을 다물고 있으면 언젠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결백함을 입증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십시오.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살고 당신의 명예를 그분의 손에 맡기십시오.
55장 1절에서, 우리는 초대를 봅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는 와서... 돈 없이 값 없이 사라." 이것은 복음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라는 초대입니다. 복음은 항상 "값 없이" 제공되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9:18에서 읽을 수 있듯이 말입니다. 많은 전도자들이 공개 복음 집회에서 복음을 전파하기 전에 헌금을 받는 것은 큰 부끄러운 일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기독교 설교자들이 참된 믿음에서 얼마나 멀리 벗어났는지를 보여주는 한 가지 지표일 뿐입니다. 8,9절에서, 주님은 말씀하시길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너희 길은 내 길과 다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다'". 이것은 우리의 인간적 사고방식이 세속적이며, 우리가 그분을 효과적으로 섬기려면 그분의 말씀을 통해 그분으로부터 하나님의 길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11절: "내 입에서 나가는 내 말은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우리의 사고방식이 새롭게 되고 하나님의 길과 일치한 후에야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전할 수 있으며 - 그 말씀은 결코 헛되이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각(ideas)이나 심리학의 가르침을 결코 전파해서는 안 됩니다 -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메시지는 성경에 뿌리를 두어야 하며, 그래서 사람들의 신앙이 인간의 추론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오랜 세월 동안 내가 말하고 글을 쓰는 모든 사역에서, 나는 항상 성경만을 가지고 말하고 글을 썼습니다 -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말보다 더 신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설교에서 말씀의 사람이 되십시오.
56장 2-5절에서 주님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매우 중요한 계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표징이었습니다(출 31:16,17). 그래서 우리는 오늘날 그것을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의 영적인 적용은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 1-11절은 구약의 안식일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들어가기를 원하시는 안식의 삶을 상징한다고 가르칩니다. 7절은 예수께서 마가복음 11:17절에서 인용하신 말씀입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어질 것이니라." 많은 설교자들이 교회를 자신을 위해 돈을 버는 장소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 마치 예수님 당시, 성전에서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장사꾼들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언젠가 그들을 몰아내실 것입니다. 교회는 기도의 집이지 사업의 장소가 아닙니다. 10절과 11절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종들이 눈멀고(영적 분별력 없음) 벙어리가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 도둑이 와도 짖지 않는 감시견과 같습니다. 하나님 백성의 목자들은 돈에 탐욕스러워졌고, 모든 면에서 자기들만의 것을 추구합니다. 오늘날 기독교 집단 세계의 많은 곳에서 벌어지는 비참한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57장 1절: "의인은 멸망하나 아무도 마음에 두지 아니하느니라." 오늘날 세상에서 경건한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거의 아무도 그것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는 듯합니다.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진정으로 경건한 사람들입니다. 15절: 여기서 하나님은 자신이 사는 곳이 두 곳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과 겸손하고 낮은 자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겸손하고 낮다면, 우주의 창조주가 우리 마음속에 사는 특권을 누릴 수 있습니다. 19절: "멀리 있는 자에게나 가까이 있는 자에게나,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에 의해 한 몸이 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예언적 언급으로 에배소서 2장 17절에 인용되었습니다. 20,21절: "악한 자는 (바닥에서) 진흙을 솟구쳐 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 악한 자에게는 평화가 없느니라." 악한 자는 관계에서 평화를 추구하지 않고, 항상 과거에 묻혀 있던 오래된 문제를 꺼내 관계를 방해합니다. 이는 종종 악한 남편과 아내의 경우입니다.
미래에 대한 예언(58-66장)
58장은 주의 깊게 살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아름다운 장인데, 그 이유는 많은 놀라운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금식의 올바른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정한 금식이 종교적 의식이 아니라 배고픈 자와 빵을 나누고, 가난하고 헐벗은 자를 돌보고, 다른 사람을 손가락질하는 것(비난함)을 멈추고,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것(그들을 섬기는 것)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키는 자들은, 어둠 속에서 그들을 위해 빛이 일어나고, 주님께서 그들의 병을 고치시고, 그들을 계속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들은 물이 끊이지 않는 샘과 같아, 어디를 가든 다른 사람을 축복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염려하는 자에게 풍성한 상을 주십니다.
59장: 주님은 많은 기도하는 사람들의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기도하는 자의 마음에 고백하지 않은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1,2절). 죄는 사람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킵니다(2절). 16절에서 주님은 그 당시 그분의 백성 가운데 중보자가 없다는 것을 보고 놀라셨다고 말씀합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보이는 슬픈 상황도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해 줄 중보자를 찾으십니다. 19절(KJV): "원수가 홍수같이 올 때에, 주의 영께서 군기를 들어 올리사 그를 치시리로다." 하나님은 교회가 영적 전쟁에서 사탄을 항상 대적하는 깃발과 같기를 원하십니다. 21절: "내 영과 내 말은 네 입에서나, 네 자손의 입에서나, 네 자손의 자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성령의 기름부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며, 그분의 말씀을 전하는 능력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특권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우리에게만 아니라 우리의 자녀와 손주에게도 이 은사를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얼마나 멋진 약속인가요.
60장 1절: "일어나, 빛을 발하라.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느니라." 이것은 이 새 언약 시대에 우리 삶에서 가질 수 있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예언적 언급입니다: "주께서 친히 우리의 빛이 되시고, 우리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이 되시리라"(19절).
61장 1,2절: 이 구절들은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아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실 것을 예언적으로 언급합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첫 설교를 하실 때 펼치신 성경 구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는 것에서 멈추셨고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전파하지 않으셨다는 점에 유의하십시오. 그날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2절을 누가복음 4:19절과 비교하십시오). 또한 하나님의 은혜와 심판의 비율을 유의하십시오. 단 하루의 심판과는 대조적으로, 은혜의 한 해입니다. 이는 은혜를 지지하는 비율이 365:1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여기서 우리를 심판하기보다는 오히려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고 싶어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십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태도도 동일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보다 365배 더 축복하고 은혜를 베풀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에서 모든 무거움을 없애시고 찬양의 영으로 대체하기 위해 오셨습니다(3절). 10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입히시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만드신다고 말합니다.
62장 3,4절은 우리와 주님이 맺은 신부 관계에 대해 계속 말합니다. 6,7절에서, 예루살렘(교회) 성벽의 파수꾼으로 부름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계속 경고하고 권면하라는 권고를 받고, 중보의 사역을 맡은 자들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땅에서 찬양과 영광의 대상으로 만드실 때까지 중보하는 것을 멈추지 말라는 권고를 받습니다. 그분께서 친히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으므로, 우리는 기도로 담대하게 그분의 약속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1,11절).
63장 8절과 9절은 우리 구주께서 "우리의 모든 환난에서 친히 고난을 받으시고" "그분의 임재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에 대해 말합니다. 그러나 10절에서 계속해서 성령님을 거역하고 근심하게 하여 성령이 돌아서서 그들의 적이 된 사람들에 대해 경고합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경고입니다. 성령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듯이(14절), 우리를 안식의 삶으로 인도하고자 하지만, 우리는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해야 합니다.
63장 15절부터 64장 1절까지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 가운데 다시 일하시고 부흥을 보내주시기를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64장 1절은 우리가 자주 기도하기에 좋은 기도입니다. 이것이 교회에 필요한 것입니다. 4절은 고린도전서 2장 9절에 인용되었지만, 그곳에서는 약간 다르게 인용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분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놀라운 것들을 준비하셨다고 기록되어 있고, 이사야에서는 그분을 기다리는 자들을 위해 이러한 것들을 준비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분을 사랑하는 자들은 항상 그분을 기다릴 것임을 배웁니다. 성경과 성경을 비교할 때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웁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있는 그분의 백성을 위해 준비하신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바로 그분의 백성을 위해 준비하신 새 언약의 놀라운 축복을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 10절은 성령께서 이러한 놀라운 것들을 우리에게 계시하셨다고 계속해서 말합니다. 5절: "당신은, 의를 행하는 것을 기뻐하는 자를, 만나십니다." 하나님은 의를 행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행하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를 좋아하십니다. 그러나 6절에서 "우리의 모든 의로운 행위는 더러운 옷과 같다"고 상기시켜 줍니다. 그래서 우리의 최고의 행위도 하나님의 눈에 보기에는 가장 더러운 누더기와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완전히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을 선하다고 부를 수 있지만, 하나님의 눈에 진정으로 선한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진정으로 선합니다(막 10:18).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려면 그리스도의 의가 그 사람을 덮어야 합니다.
65장 5절: 여기서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에게 독선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에 대한 혐오감을 표현합니다: "내게 가까이 오지 말라, 나는 너보다 거룩하니라." 이런 사람들은 코로 들어가는 연기처럼 하나님에게 혐오스러운 자들입니다. 그분은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모든 사람을 싫어하십니다. 17절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예언입니다. 24절은 우리가 기도할 때 주장할 수 있는 놀라운 약속입니다: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대답할 것이고, 그들이 아직 말하고 있을 때 내가 들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응답을) 듣는 것보다, 우리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기를 더 간절히 원하십니다.
66장 1,2절: 여기서 하나님은 온 하늘이 하나님의 보좌이고 온 땅이 하나님의 발판에 불과한데, 누가 그분을 위해 집(교회)을 지을 수 있다고 상상이나 할 수 있느냐고 우리에게 도전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랑스럽게 자신을 "교회 개척자"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계속해서 특정한 유형의 사람이 그분의 집을 지을 수 있도록 허락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 겸손하고 통회하는 영을 가진 자, 그분의 말씀에 떠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상하고 겸손하며, 그분의 말씀에 있는 모든 명령에 떠는(즉시 순종하는) 사람들만을 호의적으로 보십니다. 5절은 하나님의 말씀에 떠는 사람들은 종종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고 배척당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는 교회 역사 전반에 걸쳐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의 원수들이 결국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런 사람들(하나님의 말씀에 떠는 사람들)을 격려하십니다. 그러니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말씀에 떨면, 하나님께서 항상 당신과 함께하실 것입니다. 13절에서, 하나님은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하듯" 그들을 위로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런 사람들을 더욱 격려하십니다.
마지막으로 22-24절에서, 우리는 주님이 돌아오실 때 세워질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 읽습니다.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인 자들은 영생을 얻을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결코 꺼지지 않는 불로 지옥에서 타오를 것입니다.
정말로 이사야서는 구약성경에서 놀라운 새 언약의 책입니다.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마지막 경고
예레미야는 40년 이상 유다의 남부 왕국에서 전파했습니다. 그는, 포로로 끌려가는 것으로부터 유다를 구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마지막 선지자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유다가 죄에서 돌이키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스바냐, 하박국, 다니엘, 에스겔이 그의 동시대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매우 강하게 말했지만 냉정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유다의 죄를 위해 은밀히 울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 타락한 것에 대해 매우 깊이 느꼈습니다. 그는 매우 순진한(simple) 사람이었고 아주 젊을 때부터 예언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영적으로 매우 예민했지만, 동시에 매우 강했습니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사람에게 좋은 자질입니다 - 마음이 순진(simple)하고, 다른 사람의 감정에 민감하면서도, 진리를 선포할 때는 매우 강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레미야는 예수님과 같았습니다. 예수님도 매우 단순하게(simply) 살았고 다른 사람의 상처에 매우 예민했으며; 그분은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을 위해 울었던 것처럼 예루살렘을 위해 울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그들은 "어떤 사람들은 당신이 다시 돌아온 예레미야라고 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마 16:13,14). 그들이 왜 그렇게 말했을까요? 예수님과 예레미야 사이에는 너무나 많은 유사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레미야에게 엄청난 칭찬입니다 - 사람들이 예수님을 예레미야로 오해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울고 고통받으셨기 때문에, 울고 고통받으셨습니다. 예레미야도 같은 이유로 울고 고통받았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백성을 크게 염려했고 하나님의 대변인이었지만, 그의 백성은 그를 오해했습니다. 이전 세대의 모든 참된 선지자들은 오해받고 박해받고 거부당했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40년 동안 예언한 후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생애가 끝날 때까지 하나님 앞에 굳건하고 진실하게 섰던 사람의 훌륭한 본보기입니다.
그는 많은 예언을 지하 감옥에서 썼습니다 - 그 당시 감옥이었습니다. 그는 많은 왕의 통치 기간 동안 예언했습니다. 그가 등장하기 1년 전인, 므낫세와 아몬의 57년간의 악한 통치 직후, 유다를 통치한 요시야 시대에 부흥이 일어난 듯했습니다(왕하 21:19-26). 하지만 오늘날 많은 "부흥"과 마찬가지로 그 "부흥"은 표면적일 뿐이었습니다.
예레미야서에서 발견되는 두드러진 구절은 '만군의 여호와'입니다. 다른 선지자들도 "하늘 군대의 여호와"에 대해 말했습니다. 이 구절은 예레미야서에서 약 82회 나옵니다.
예레미야의 부름
주님은 예레미야가 젊었을 때 그를 부르셔서(1:5,6), "내가 너를 모태에서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어나기 전에 너를 성별하여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몸이 어머니의 태에서 형성되기 전부터 그를 알고 계셨습니다. 오늘날 태아가 인간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쟁이 많습니다. 이 구절은 그 의심을 영원히 해소할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예레미야가 형성되기 전부터 그를 알고 계셨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가 어머니의 태에서 미세한 입자일 때, 하나님은 그를 알고 그를 선지자로 성별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머니의 태에서 막 잉태된 미세한 입자일 때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셨다는 것을 아는 것은 우리에게 큰 격려가 됩니다. 그분은 예레미야에 대한 계획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삶에 대한 계획도 가지고 계십니다.
상상해보세요, 예레미야가 그 모든 어려움을 겪었을 때, 다음 생각이 그를 얼마나 격려했을지: "나는 지금 많은 어려움에 직면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내가 어머니의 태에 있을 때 나를 알고 계셨고, 그때 내 삶을 계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계획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완전히 굴복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도 시련과 어려움에 직면할 때마다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태어나기 전에 당신을 선택하셨고 당신의 삶에 대한 그분의 계획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절대 낙담하지 마십시오.
그때 예레미야가 말했습니다. "주님, 나는 말할 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대중 앞에서 말하는 데 능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선지자로 택하시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모세도 그랬습니다. 그 또한 "주님, 나는 대중 앞에서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여러분 모두를 격려하고 싶습니다. 당신에게 말할 능력이나 사람들 앞에 설 담대함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용하여 그분의 말씀을 전파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모세에게 "내가 사람의 입을 만들었다. 내가 너로 말하게 할 수 없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 4:10,11). 당신이 하나님께서 당신을 깨뜨리고 성령으로 채우도록 허락한다면, 그분은 당신을 그분의 대변인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당신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나는 젊은 그리스도인 시절에 내성적이고 수줍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에게 성령으로 기름부으셨을 때, 그분은 나를 통해 말씀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에게도 똑같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하나님께 "주님, 나는 너무 어려요."라고 절대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고 성별(신에게 바치다)하신다면, 당신의 나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주님을 섬기기 위해 나이가 들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마음에 부담을 느끼자마자, 성령으로 충만해지도록 하나님을 찾고,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십시오.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나는 어린아이라고 말하지 말라, 내가 너를 보내는 곳마다 너는 가고, 내가 네게 명령한 모든 것을 말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1:7). 그리고 나서 주님은 그분의 선지자들에게 자주 하셨던 말씀을 그에게 하셨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1:8). 이것은 모든 참 선지자들이 가진 큰 이점이었습니다 - 주님이 그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떤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인도에서도 주님을 섬겨야 하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만지시며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9절).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도 똑같이 하셨습니다. 그러고나서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주신 사역을 주목해 보십시오. 여기에는 여섯 가지 활동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 뽑아내고(plucking up), 무너뜨리고(breaking down), 파괴하고(destroying), 넘어뜨리고(overthrowing), 세우고(building), 심는 것(planting)입니다(1:10). 이 중 네 가지는 부정적이었고, 두 가지(세우고 심는 것)는 긍정적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먼저 오래된 구조물을 허물고 나서 하나님의 구조물을 세워야 했습니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빈 땅에 건물을 짓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계는 당시 유다와 매우 유사한 상황에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계는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는 거대한 종교적 구조물이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온 선지자는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을 짓고 심기 전에 먼저 많은 것을 뽑아내고, 허물고, 파괴하고, 무너뜨려야 합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불도저로 하는 이러한 초기 작업을 하기를 꺼립니다. 그들은 "새 천 조각을 낡은 옷에 꿰매려고"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아니다. 낡은 옷을 버려야 한다. 낡은 구조물을 완전히 파괴하고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마 9:16).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신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지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예레미야를 격려하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너를 대적하여 싸우겠지만, 너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1:19).
2장부터 45장까지는 유다에 관한 많은 예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 46장부터 52장까지는, 다른 나라들에 관한 많은 예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들은 간략하게만 살펴보겠습니다 - 마치 퍼즐 조각을 몇 개 맞추는 것과 같습니다. 나머지 퍼즐은 당신이 직접 완성하면 됩니다!
회개로의 부름
2장 13절: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도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책망하신 두 가지 악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그들은 물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둘째, 그들은 구멍이 뚫려 있고 물을 전혀 담을 수 없는 그릇, 즉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3장에서, 예레미야는 간음한 유다와 타락한 이스라엘에 대해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100년 전에 포로로 끌려간 북방 왕국이었습니다. 예레미야와 당시 다른 선지자들이 유다 백성에게 전하고자 했던 가장 큰 부담은 이것이었습니다: "너희 자매 이스라엘이 그들의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을 포로로 보내셨도다. 너희는 그것으로부터 교훈을 얻었느냐?" 유다는 그것으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 우리는 더 낫다. 그런 일이 우리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줄까요? 개신교 기독교는 주로 두 그룹으로 나뉩니다. 하나는 일반적인, 주류의, 교파적 교회들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이스라엘의 북쪽 왕국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분리된 회중"이라고 부르는 작은 비국교도(관행을 따르지 않는 사람) 그룹들이 있습니다. 이 그룹들이 처음에 스스로를 분리했을 때 그들은 좋은 동기를 가지고 그렇게 했습니다 - 타협과 세속으로부터 분리되고 주님을 위한 순수한 증거가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주류 교파의 실패로부터 교훈을 얻었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유다에게 "이스라엘이 너희보다 낫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오늘날 많은 "분리된 회중"과 그들의 지도자들에게 말씀하시는 바로 그 말씀입니다: "그 주류 교파의 지도자들 중 일부는 소위 분리된 회중의 지도자들보다 낫다." 왜 이 새로운 지도자들은 교훈을 얻지 못할까요? 그들은 유다가 한 말과 똑같은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은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그룹도 타락하고 같은 길을 갑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가 남은 자들을 여기로 데려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이 선지자들이 전한 또 다른 부담이었습니다: "남은 자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올 것이다." 남은 자들은 "자기들의 죄악을 인정하는 자"일 것입니다(3:13). 주님은 "내가 너희를 한 도시에서 한 명, 한 가족에서 두 명을 취하여 시온으로 데려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3:14). 여기서 시온은 하나님의 참된 교회의 한 유형입니다. 그 교회의 한 가지 특징은 그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목자"인 지도자들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그분의 길에 대한 명철로 하나님의 백성을 양육한다는 것입니다(3:15). 그런 지도자들을 찾았을 때 여러분은 시온에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교회 지도자들이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시온을 찾지 못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경건한 지도자들은 지성에 중점을 두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측은히 여김과 사랑에 중점을 둡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착취하지 않으며, 사람들의 헌금에는 관심이 없고 주님과 동행하는데 관심이 있습니다.
3장 16,17절: "그들이 다시는 '여호와의 궤'를 말하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보좌에 대하여 말하리라." 다시 말해서, 시온에서, 그들은 상징이 아니라 현실에 대하여 말합니다. 이것은 구약성경에서 여호와의 궤가 언급된 마지막 때입니다. 바벨론 사람들이 궤를 빼앗아갔고, 그 이후로 아무도 그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4장 3,4절: 여호와께서 유다에게 말씀하신다, "너희 묵은 땅을 갈아라. 가시덤불 가운데에 씨를 뿌리지 말아라. 여호와를 위하여 스스로 할례를 행하고, 너희 마음의 포피를 제거하라." 그것은 자신을 낮추고, 깨어지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인간적 자원에 의존하는 것을 멈추라는 부르심입니다.
4장 19절: "내 영혼아, 내 영혼아, 나는 괴로워한다. 내 심장이 두근거린다. 나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전쟁의 경보다." 예레미야는 바벨론 군대가 곧 유다를 포로로 잡아갈 것이라는 것을 느꼈고, 그것은 그를 크게 불안하게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 백성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마음에 큰 부담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선지자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입을 만지셔서 그분의 백성의 대변인이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또한 우리의 마음을 만지셔서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도록 하셔야 합니다. 그럴 때에만 우리는 짐을 지게 됩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소돔이 멸망될 때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과 비슷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소돔에 열 사람이 있다면 그 도시를 용서해 주시겠습니까?"라고 간청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다. 소돔에 의로운 사람이 열 명 있다면 그 도시를 용서해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창 18:32). 그리고 여기서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예루살렘에서 의로운 사람 한 명이라도(열 명이 아니라 한 명이라도) 찾으면, 내가 그 도시를 용서하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한 명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 한 명도 없는 도시의 상황을 상상해 보십시오!
교회에서 한 명의 의로운 사람이 그 교회에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한 명의 의로운 사람이 교제와 가정에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 한 명에 하나님을 더하면 어디서나 다수가 됩니다. 의로운 남자와 여자가 되십시오. 그러면 당신이 어디를 가든 사탄에 대항하여 전세를 뒤집을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강력하게 지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6장 16절: 주님은 " 길가에 서서 옛적 길, 즉 선한 길이 어디인지 물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순절 직후 사도들이 걸었던 길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선한 길"입니다. 그러나 유다 사람들은 그 길을 걷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7장: 예레미야가 등장하기 직전, 요시야 왕 시대에 소위 부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날 많은 "부흥"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변화시키지 못한 깊이가 없는 부흥이었습니다.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성전 입구에 서서 사람들에게 "너희 길을 바꾸고 '이것은 여호와의 성전이다' 하는 속이는 말을 믿지 말라"고 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4절). 다시 말해서, "만약 너희의 길을 바꾸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너희의 종교적 언어에 감명받지 않으실 것이다. 너희가 도둑질하고 살인하고 간음하고 거짓말하고 우상을 숭배한 다음 와서 여호와의 집에 서서,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고 '우리는 구원받았다' 하려느냐?"(9,10절). 예수님은 11절을 인용하여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집이 강도의 소굴이 되었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1:13). 이제 2000년이 지난 지금, 하나님은 교회에 서서 같은 말을 하는 선지자가 필요합니다: "당신은 개인적인 생활에서 죄 가운데 살고, 재정 문제에서는 불의하게 살다가, 하나님의 집에 와서는 '우리는 구원받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원히 안전합니다.'라고 말할 것입니까?" 그것은 위선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의 상태는 예레미야 시대와 같습니다.
우리는 이미 가인과 아벨 시대로부터 시작된 종교성과 영성의 두 흐름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종교인들이 죄에서 구원받지 못하는 소위 '부흥'을 경험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지 못하는 모든 부흥은 깊이가 없고 가치 없는 부흥입니다. 이 사람들은 주님 앞에 나아가면서 동시에 하늘의 여왕을 숭배하기 위해 빵을 굽고 있었습니다(7:18). 오늘날 기독교계에서도, 그들이 "하늘의 여왕"이라고 부르는 자를 숭배하는 수백만 명이 있습니다. 이 "여왕"은 예레미야 시대에 숭배되었던 우상 "하늘의 여왕"을 본떠 만들어졌습니다. 하늘에는 여왕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곳에서 주님이시며 그분은 하늘에 있는 모든 것의 주님이십니다.
예레미야는 이 사람들에게 이렇게 계속 어리석은 짓을 한다면 - 어느 날 갑자기 추수가 끝나고 구원받지 못한 채로 남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8:20). 오늘날에도 사람들에게 선포해야 할 말씀입니다. 주님은 추수할 날을 정해두셨습니다. 그때는 그분의 말씀에 응답하기에는 너무 늦을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이 일을 생각하며 울었던 것을 보십시오. 9장 1절: "오,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의 샘이 되어, 내 백성의 딸의 죽음을 위해 밤낮으로 울게 하소서." 예레미야는 공개적으로 그렇게 강한 말씀을 전했지만, 다른 사람이 없는 데서는 울었습니다. 모든 참된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의 죄를 위해 은밀히 울었습니다.
9장 23-24절: 주님은 여기서 지혜로운 사람과 부자에게 지혜나 부를 자랑하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선지자들은 항상 지성이나 부를 자랑스러워하는 사람들을 반대하여 설교했습니다. 자랑할 만한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주님을 개인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 17:3).
예레미야와 하나님의 대화
10장 24절: 예레미야는 "주여 나를 바로잡으시되, 분노로 하지 마옵소서. 주께서 나를 없어지게 하실까 염려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 모두가 기도해야 할 좋은 기도입니다.
13장 17절: 예레미야는 다시 울었습니다. 그는, "너희가 내 설교를 듣지 아니하면, 내 영혼(soul)이 너희 교만함 때문에 은밀히 울 것이다. 내 눈이 몹시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리라..."라고 말합니다. 예레미야는 "통곡의 선지자"라고 불립니다. 그는 대중 앞에서 강하고 담대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은밀히, 예루살렘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았을 때 예수님께서 우셨던 것처럼 울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에서를 제외하고는 대중 앞에서 우신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은밀히 우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짐을 지고 있을 때만 울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관심이 없다면 울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아이가 죽어가고 있을 때 울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의 아이가 죽어가고 있을 때만 울 것입니다. 울음은 관심과 진정한 사랑에서 생겨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백성을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주님은 그런 선지자에게만 기름을 붓고 지지하십니다.
15장 16-21절: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대변인이 되기 위한 세 가지 조건을 봅니다.
l 첫째: "주님, 나는 당신의 말씀을 발견하였고, 당신의 말씀은 내 마음의 기쁨과 즐거움이 되었습니다"(16절). 하나님의 말씀은 당신의 마음의 기쁨과 즐거움이어야 합니다. 사업가가 돈을 버는 데 기쁨을 느끼는 것처럼, 당신의 기쁨은 하나님의 말씀에 시간을 들이는 데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설교자가 되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는 데 시간을 들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의 기쁨과 즐거움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l 둘째: "나는 웃으며 떠들어대는 자들의 모임에 앉지 않았습니다"(17절). 유다의 다른 사람들이 파티를 열고 즐거워할 때, 예레미야는 홀로 가서 하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이 세상의 농담하는 자들을 멀리하기 위해 스스로를 훈련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결코 하나님의 대변인이 될 수 없습니다. 나는 유머와 건전한 농담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문제에서 어디에서 멈춰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그들은 끊임없이 농담을 합니다. 예레미야는 그런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지 않도록 했습니다.
l 셋째: 예레미야는 18절에서 하나님께 불평했습니다, "주님, 왜 나를 실망시키셨습니까? 당신은 나에게 속이는 시냇물과 같았고, 믿을 수 없는 물과 같았습니다. 나는 시냇물에 물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왔지만 물이 없었습니다. 당신은 나를 실망시키셨습니다." 주님은 "나에게 그런 말을 하지 말아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예레미야가 믿지 않는 말을 한 것을 책망하셨습니다(19절).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믿을 수 없는 시냇물과 같지 않으십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감정에 의존하고 자신의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네가 내게로 돌아와서 쓸모없는 말(방금 네가 한 말과 같은 - 쓸데없고 쓸모없는 말과 불신의 말)을 하는 습관을 버리고 오직 귀중한 말(믿음과 선함의 말)만 한다면, 너는 나의 대변인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중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대변자가 되고 싶습니까? 나는 당신이 어떤 책을 읽고 나온 죽은 설교를 하는 설교자가 되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변자가 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되고 싶다면, 쓸데없는 친구들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당신의 시간을 절약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는 데 쓰십시오. 그것이 당신의 기쁨이 되게 하십시오. 쓸모없는 대화를 없애고 항상 믿음의 말을 하고, 모든 대화에서 선한 말만 하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당신을 그분의 입으로 삼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편애가 없습니다.
그러고 나서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결코 그들에게 돌아가지 말라. 너는 그들에게 영향을 미쳐야 한다. 그들이 결코 너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하라"(15:19 - Living). 세상이 당신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타락한 기독교 집단이 당신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하십시오. 타락한 목사들과 돈을 사랑하는 설교자들이 당신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영향을 미치게 하십시오 -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경건한 쪽으로 영향을 미치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약속은 그분이 우리를 "사람들이 우리를 이기지 못하도록 견고한 놋 성벽"으로 만들 것이라는 것입니다(15:20). 할렐루야!
하나님의 종이 되기 위해서는 큰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예레미야의 경우, 그 대가의 일부는 그가 평생 독신으로 지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이곳에서 아내를 맞이하거나 아들딸을 두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16:2). 바울과 예레미야와 같은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독신으로 살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그 부름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초상집이나 잔치집에 들어가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습니다(16:5,8). 선지자들은 주님을 섬기려면 그들의 식습관을 훈련해야 했습니다. 사람들이 예레미야에 대해 무슨 말을 했는지 상상해 보세요. 그들은 그가 매우 사회적이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노닥거릴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 기다려야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대가를 치르고 싶어하지 않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대변인이 되고 싶어합니다. 그런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많은 해를 끼칩니다.
17장 5-8절은 주님을 신뢰하는 것과 사람을 신뢰하는 것에 대해 알려주는 매우 복된 구절입니다. 주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그분의 백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육신의 팔에 의지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러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는 물가에 심은 나무와 같을 것이요. 그는 항상 열매를 맺을 것이다." 주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그분께 기대는 것을 의미하며, 우리 자신의 능력이나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어떤 인간적 자원도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종종 사람들을 사용하여 우리를 돕지만, 그분은 우리가 오직 그분께만 의지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 믿음의 사람은 항상 그의 삶에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는 결코 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그를 언제 만나든, 그는 항상 신선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내면의 삶은 성령의 강에서 물을 끌어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17:21-24에서, 예레미야는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안식일에 일하는 탐욕스러운 사람들을 꾸짖습니다.
18장: 주님께서는 토기장이의 집에서,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그릇을 만드는 방식을 통해 예레미야에게 몇 가지 교훈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릇이 망가졌을 때, 그는 진흙으로 다른 그릇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유다를 향한 격려의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타락했을 때에도, 그들에게 그렇게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당신에게도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어쩌면 당신의 삶은, 당신이 주님께 응답하지 않았기 때문에 망가졌을 수도 있습니다. 당신에게는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예레미야 18장을 읽어보세요. 당신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주님이 당신을 겸손하게 만드는 데 성공할 수 있다면, 여전히 당신을 그분의 영광을 위한 그릇으로 만드실 수 있습니다. 왜 토기장이의 집에서 그 그릇이 망가졌을까요? 토기장이가 으깨기에 적합하지 않는 딱딱한 진흙 덩어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완고함과 교만을 깨뜨리도록 허용한다면, 그분은 여전히 당신을 그분의 영광을 위한 그릇으로 만드실 수 있습니다.
20장 7-11절: 여기서 예레미야는 "주님, 당신은 내가 이 사람들에게 친절한 말을 하도록 허락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항상 심판, 심판입니다"라고 불평합니다(Living). 많은 사람들이 균형 잡힌 설교를 한다는 평판을 얻고 싶어 합니다. 교사에게는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균형 잡힌 선지자는 없었습니다. 선지자들은 모두 사역에서 불균형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았고 영원히 같은 메시지를 계속 전파했습니다. 예레미야는 40년 동안 같은 심판의 메시지를 전파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도, 하나님은 특정한 짐을 지고 있는 선지자들을 일으키십니다.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짐을 지고 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선지자에게 종종 단 하나의 짐을 주십니다. 그가 주님의 예언자로 남기 원하고, 선의의 다른 기독교인들이 그를 보다 "균형 잡힌" 사역으로 전환하지 못하게 하려면 그는 그것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가 그 압력에 굴복하여 "균형 잡힌" 사람이 되는 날, 그는 더 이상 그의 세대에 하나님의 선지자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다 백성에게 친절한 말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심판의 메시지 한 가지를 예레미야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40년 동안 그 임무를 충실하게 고수했습니다 - 그리고 그는 끝까지 하나님의 대변인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없애버리려고 했고 그를 비난했습니다(20:10). 심지어 그의 가까운 친구들조차도 그의 몰락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위대한 용사와 같으사 예레미야와 함께 하실 것이며, 그를 핍박하는 자들은 걸려 넘어져서 이기지 못하고 영원한 수치를 당할 것이라고 그는 확신했습니다(20:11). 주님은 예레미야의 믿음에 따라 그의 편에 서셨고, 정확히 그렇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그분의 선지자들을 보호하십니다.
그리스도와 새 언약
23장 5,6절: 여기서 우리는 예레미야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하여 예언하는 것을 봅니다. 그분은 여기서 '의로운 가지', '여호와 우리의 의'라고 불립니다. 이 칭호는 주님이 그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함으로써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분임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새 언약의 칭호이며 - 예레미야는 새 언약에 대해 꽤 많이 예언했습니다. 이 장은 또한 모든 설교자들이 읽어야 할 훌륭한 장인데, 여기에는 그들이 주의해야 할 많은 경고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여기서 폭로되고 비난받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데 시간을 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거짓 선지자들이었습니다(23:18). 그들은 하나님 앞에 서서 그분의 말씀을 기다리기에는 너무 게으릅니다. 오늘날 기독교계에는 명예와 돈을 추구하는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꿈꿨다고 주장하는 상상의 꿈에 대해 거짓으로 예언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말을 듣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들은 자신만의 메시지를 만들어내어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부주의하게 그 문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로 말씀하셨는지 확신할 수 없을 때, 일어나서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은 오늘날 그 문구를 사용하고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말합니다. 이것은 위험하고 악합니다. 나는 그런 모든 사람들이 이 장을 읽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법을 배우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나는 하나님의 영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한 바울처럼, 겸손한 사람을 통해 말씀하십니다(고전 7:40) -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라고 거만하게 말하는 사람들을 통해서가 아닙니다. 그런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십시오 - 오늘날 기독교계에는 그런 사람들이 수천 명이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이 불과 망치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23:29). 왜 그렇게 많은 설교자들의 말이 사람들의 굳은 마음을 깨뜨리고 불을 붙이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들의 말은 주님으로부터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5장 3절: 이것은 예레미야의 사역의 중간 부분입니다. 그는 23년 동안 예언했지만, 유다 사람들은 듣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유다가 70년 동안 포로로 잡혀갈 것이라고 충실하게 예언했습니다 -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되었습니다.
26장 20-24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우리야라는 또 다른 선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또한 예레미야와 같은 메시지를 예언했습니다. 왕이 그의 말을 듣고서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21절). 우리야는 이것을 듣고 애굽으로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여호야김 왕은 그를 애굽에서 데려오라고 사람들을 보냈고, 그들은 우리야를 붙잡아 왕 앞으로 데려왔습니다 - 그리고 왕은 그를 죽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예레미야를 보호하셨습니다. "왕의 비서, 아히감이 예레미야와 함께 서서 그를 무리에게 넘겨 죽이지 말라고 왕실을 설득했습니다"(26:24 - Living). 이 두 선지자는 같은 메시지를 충실하게 전파했습니다. 한 명은 죽고 다른 한 명은 벗어났습니다. 이것은 야고보와 베드로에게 일어난 일과 비슷합니다. 야고보는 죽었지만 베드로는 풀려났습니다(행 12장).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께서 왜 그분의 충실한 종 한 명은 죽임을 당하고 다른 한 명은 벗어나도록 허락하시는지 궁금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위해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야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하신 사역은 끝났습니다. 예레미야의 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으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당신이 하나님의 충실한 종이라면 사람들이 당신을 죽이려 할 때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당신에 대한 하나님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면, 그분은 어떤 식으로든 당신의 생명을 보호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기 전에는 당신은 죽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왕의 비서를 통해 은총을 베푸셨고 예레미야의 생명을 구해 주셨습니다. 예레미야의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 그분은 우리에게도 똑같이 하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29-33장에서는 미래의 이스라엘의 회복과 새 언약에 대해 읽습니다. 유다 백성은 70년 동안 포로로 잡혀 있을 것입니다(29:10). 이것은 다니엘이 읽고 고무된 예언입니다(단 9:2,3). 그리고 다니엘은 예레미야가 다음 구절에서 명령한 대로 행했습니다(29:11-14). 주님은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찾으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13절).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의 하나님의 백성의 이동은, 하나님께서 온 마음으로 그분을 찾는 사람(다니엘)을 찾으셨을 때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영적 바벨론에서 영적 예루살렘(참 교회)으로의 하나님의 백성의 이동도, 하나님께서 온 마음으로 그분을 찾는 사람들을 찾으셨을 때 시작될 것입니다.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는 자들은 결코 그분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그분은 오직 부지런히 그분을 찾는 자들에게만 상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히 11:6 - KJV). 그러자 예레미야는 거짓 선지자들 중 몇몇을 거론하여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들의 말을 듣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29:21-32). 그는 거짓 선지자들의 이름을 밝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31장 3절: 여기 우리를 격려하는 주님의 아름다운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였노라. 그러므로 나는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노라." 그분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받을 자격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우리를 향한 그분의 영원하고 변함없는 사랑 때문에 우리를 그분께로 이끄십니다.
32장: 여기서 우리는 예레미야가 시드기야 왕의 명령에 의해 투옥된 것을 읽습니다.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그의 고향에서 땅을 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그를 통해 예언하신 것에 대한 그의 믿음을 보여주는 행동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말해서, 전쟁이 시작되려고 하고 적이 온 땅을 차지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때 땅을 사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70년 후에 하나님의 백성이 돌아와서 그 날에 그의 친척들이 이 땅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돈으로 이 땅을 샀습니다. 그는 심판 기간이 끝난 후에도 지속될 무언가에 자신의 돈을 지불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무런 이득도 얻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위해 우리의 삶과 돈을 내놓는 것과 비슷합니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영리한 사업가는 세상적인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는 무언가에 자신의 돈을 투자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행동에서 영원한 보상을 거둘 것이라고 믿으며, 그렇게 합니다. 예레미야는 "주님, 당신께는 불가능한 것이 없습니다"라는 말로 그 믿음을 표현했습니다(32:17). 그는 이 재산을 사는 것과 관련하여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모든 육체의 하나님 여호와이다. 내게 어려운 것이 있느냐?"(32:27). 우리는 이 말씀을 종종 합창으로 부르지만, 나는 우리가 예레미야처럼 행동할 의향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33장 3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또 다른 놀라운 약속을 봅니다: "나에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리라. 내가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능력 있는 일들을 네게 보이리라." 얼마나 큰 초대입니까! 이 선지자들이 경험한 기적을 경험하려면, 우리는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33장 15,16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오심에 관한 또 다른 예언을 봅니다.
예루살렘의 함락과 그 이후
34-45장에서, 우리는 예루살렘의 함락에 대해 읽습니다. 예루살렘은 바벨론 사람들에게 함락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우리는 레갑 가문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읽습니다(35장).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레갑 사람 가족을 성전으로 불러와서 그들에게 포도주를 마시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레미야가 그렇게 했을 때, 이 레갑 사람들은 포도주를 마시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대대로 조상들이 그들의 가문에게 포도주를 절대 마시지 말라고 했고, 그들은 200년 동안 그 명령을 따랐다고 말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순종입니까! 그러자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조상들의 말을 순종하는 충실한 가문이 있다. 그러나 유다는 나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러자 주님은 레갑 가문에게 그들이 항상 그분 앞에 설 수 있는 특권을 가질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35:19). 오늘날에도 기독교계의 많은 타락자들 가운데서도,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서 있는 한 가정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모가 경건한 방식으로 양육한 그런 가족들을 두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36장에서 예레미야는 처음으로 무언가를 기록하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두루마리를 가져다가 이것을 기록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2절). 때때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기록하는 것은, 우리에게도 좋은 일입니다 - 우리는 종종 그것들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왕은 그 두루마리에 대해 듣고, 가져오라고 명령했습니다. 왕은 그 중 작은 부분을 듣자마자, 화가 나서 그것을 잘라내어 불에 던졌습니다(36:22,23). 예레미야는 어떻게 했습니까? (왕이 파괴한 것이 오늘날 우리가 성경에 가지고 있는 예레미야서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러자 예레미야는 다른 두루마리를 가져다가 바룩에게 전에 기록한 모든 것을 다시 받아적게 했습니다. 이번에는 주님께서 훨씬 더 많이 덧붙이셨습니다"!!(36:32 - Living). 그래서 예레미야서가 52장이 있는 것입니다! 왕이 첫 번째 두루마리를 찢어버리지 않았다면, 우리는 예레미야서에서 36장들만 볼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전세를 역전시키는 방법입니다!!
38장에서, 우리는 예레미야가 바벨론이 와서 유다를 점령할 것이라고 설교했기 때문에, 진창이 가득한 우물에 던져졌다는 것을 읽습니다 - 그리고 왕과 그의 관리들은 그것을 듣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는 진창 속에 빠져 곧 죽을 뻔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주권이 그분의 종의 생명을 보존하는 것을 봅니다. 에벳멜렉이라는 아프리카인(에티오피아인)이 왕에게 가서 예레미야를 구덩이에서 끌어올리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였고, 그를 끌어내어 그의 목숨을 구했습니다(38:6-13). 하나님께서는 가장 예상치 못한 곳에 그분의 대리인들을 두셔서 그분의 충실한 종들을 섬기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에벳멜렉이 예레미야를 도왔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에게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가도, 그는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39:16-18). 하나님은 그분의 종들을 돕기 위해 준 찬물 한 컵도 잊지 않으십니다.
39장 11-14절: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왔을 때, 그는 예레미야에 관해 듣고 그의 사령관에게 그를 돌보라고 명령했고, 어떤 식으로든 그를 해치지 말고 "그가 원하는 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통치자 앞에서도 그분의 종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동일하시며, 오늘날에도 그분의 종들에게 동일하게 행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사령관, 느부사라단은, 예레미야에게 "내가 너를 풀어주겠다. 네가 우리와 함께 바벨론으로 가고 싶다면, 내가 너를 돌보고 잘 대우할 것이다. 그러나 가고 싶지 않다면, 네가 원하는 곳으로 가라"고 말했습니다(40:4). 그 이방인은 유다 사람들보다 하나님의 선지자를 더 높이 평가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그리스인들(헬라인)은 예수님을 보고 싶어했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요 12:20,21). 지난 20세기 동안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보내신 선지자들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에서 편안한 삶을 살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가지 않기로 선택했고, 유다의 멸시받는 사람들과 함께 머물렀습니다. 나중에, 그들(유다 사람들)이 애굽으로 가려고 계획할 때, 그들은 예레미야에게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라고 말했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순종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예레미야가 주님께서 그들이 유다에 머물기를 원하고 애굽으로 가지 않기를 원하신다고 말했을 때, 그들은 태도를 바꾸어서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말했습니다(42,43장). 거기서 우리는, 설교자가 자신이 듣고 싶은 설교만 하기를 바라는 인간의 완고함을 볼 수 있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예레미야를 데리고 애굽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예레미야는 애굽의 신전을 향해 예언했고, 그는 다시 애굽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예언했습니다. 그 후로는 예레미야에 대해 전혀 듣지 못했습니다(43,44장).
바룩은 예레미야의 이러한 예언을 기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바룩에게 경고를 주셨습니다 - 이 경고는 우리 모두가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네가 네 자신을 위해 큰 일을 구하느냐? 그것들을 구하지 말라"(45:5). 우리는 우리의 사역에서 자신을 위해 영광을 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부름은 우리 주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멸시받고 거부당하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같은 사람들은 우리를 인정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백성 대부분은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들을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46-51장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유다를 둘러싼 여러 나라에 대해 예레미야에게 주신 심판의 예언을 읽었습니다 - 예레미야에게 매우 친절했던, 세계 초강대국인 바벨론을 포함합니다. 참된 예언자는 두려움이나 호의 없이 진실을 말합니다.
48장 10절(AMP)에서, 우리는 "게으름과 속임수로 주의 일을 태만히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 주께서 선언하신 심판을 집행(선포)하는 것을 칼(혀)로 막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읽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주의해야 할 경고입니다.
48장 11절은 "젊은 시절부터 평안히 지내며, 한 그릇에서 다른 그릇으로 옮겨지지 아니하고, 그러므로 그(이기적인) 냄새가 변하지 아니한" 사람을 묘사합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그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 시절에 그들을 깨뜨릴 수 없으시므로 그들의 냄새는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굳고 완고하며 쓸모없는 존재로 남습니다.
마지막으로, 52장에서, 우리는 예루살렘의 함락에 대해 읽습니다.
이렇게 하여 40년 동안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에게 인기 없는 메시지를 충실하게 전파한 선지자에 대한 이 놀라운 책이 끝납니다. 그는 사람의 눈에는 실패자였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엄청난 성공자였습니다.
주님께서 오늘날 예레미야와 같은 사람들을 많이 일으키시기를 바랍니다.
눈물의 선지자
애가는 예레미야의 애통함을 담은 책입니다. 히브리어 알파벳은 22글자로 되어 있으며, 이 책의 처음 네 장은 각 구절이 히브리어 알파벳의 다른 문자로 시작하는 시처럼 쓰여졌습니다. 시편 119편과 잠언 31:10-31은 이런 스타일의 글쓰기의 다른 예입니다.
이 책은 예루살렘을 위한 장례 노래입니다. 예레미야는 울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거리가 한때 사람들로 북적거렸지만(1:1), 이제는 슬픔에 잠겨 홀로 애통해하는 과부처럼 앉아 있는 것을 슬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백성과 자신을 동일시했으며 - 이것이 이 책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중요한 것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슬픈 상태
1장 9절: 예루살렘 사람들은 오늘날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러하듯이, 그에 따른 형벌을 생각하지 않고 부도덕함으로 자신을 더럽혔습니다. 그들은 죄를 지으며, 언젠가는 자신이 지은 모든 죄에 대해 하나님께 대답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1장 14절: 여기서 예레미야는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심판하신 방식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의 죄를 취하셔서, 그것들을 밧줄로 엮어, 그 밧줄을 노예의 멍에에 매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힘을 약화시켜 원수들에게 넘겨주셨습니다"(Living). 그들을 포로로 잡은 자에게 그들을 묶게 한 밧줄을 만든 것은 바로 그들 자신의 죄였습니다.
2장 7절: "주께서 그분의 제단을 버리셨습니다. 그분은 그분의 백성의 거짓 "예배"를 경멸하셨습니다. 그분은 그들을 원수들에게 주셨습니다." 주님은 오늘날 진영에 죄가 있는 기독교 교회에서 발견되는 거짓 예배를 멸시하십니다. 지도자들 자신도 죄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그분의 백성이 사탄에게 노예가 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2장 9절: "율법은 더 이상 없고, 그 선지자들은 주님으로부터 환상을 찾지 못하느니라". 오늘날 기독교에서도 이와 같은 상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2장 11,12절: 예레미야는 더 이상 울 수 없을 때까지 울었다고 말합니다. "나는 눈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울었습니다. 내 마음은 찢어졌습니다. 어린 아이들과 작은 아기들이 길거리에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엄마, 음식 주세요'라고 울며 엄마의 가슴에 쓰러집니다"(Living). 오늘날 하나님의 종들은, 부패한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착취당하는 가난하고 무고한 사람들과, 지도자들의 나쁜 본보기로 인해 잘못된 길로 인도되고 있는 젊은이들을 위해 울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날 기독교계의 비참한 상황에 맞서야 합니다.
2장 14절: "너희 '선지자들'은 철저히 많은 어리석은 거짓된 말을 했다. 그들은 너희의 죄를 지적함으로써 너희를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거짓말을 하고 모든 것이 잘되고 있다고 말했다"(Living). 오늘날 많은 교회의 상황을 잘 표현한 글입니다.
2장 19절: 그래서 예레미야는 사람들에게 "밤에 일어나서 너희 하나님께 부르짖으라. 너희 마음을 주께 물처럼 쏟아라. 손을 들어 그분에게 기도하라. 너희 자녀를 위하여 간구하라"고 권고합니다 - 오늘날 우리에게도 좋은 권고입니다.
3장 22,23절: "주님의 사랑의 자비는 결코 그치지 아니하시며, 그분의 긍휼은 아침마다 새롭습니다. 그분의 신실하심이 크십니다." "그분의 긍휼은 아침마다 새롭습니다"라는 구절은 매일 아침 하나님께서 우리를 마치 전에 죄를 지은 적이 없는 것처럼 바라보신다는 뜻입니다 - 우리가 과거의 모든 죄를 회개하고 그분께 고백했다면 말입니다. 그분은 더 이상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매일 새로운 긍휼로 우리를 바라보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은 방식으로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하며, 매일 새로운 긍휼로 그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과거 때문에 그들을 나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3장 27-33절에는 모든 젊은이에게 좋은 말씀이 있습니다: 젊을 때 훈련(discipline)의 멍에(굴레)에 복종하라. 하나님께서 당신 위에 두신 권위 아래 자신을 낮추라. 너의 얼굴을 흙바닥에 대면 당신에게 소망이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당신을 치거든, 다른 뺨을 돌려대라. (예레미야가 예수님보다 먼저 이렇게 말했다). 주님께서 당신에게 비록 슬픔을 주실지라도, 또한 불쌍히 여기실 것이다."
주님께로 돌아가라는 부름
3장 40절에는 우리 모두에게 좋은 말씀이 또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길을 시험(test)하고 살피며(examine), 회개하여 주님께로 돌아가자."
예레미야는 주님께서 어떻게 그를 적들로부터 보호하셨는지 설명합니다: "내가 해를 입힌 적이 없는 원수들이 나를 쫓았습니다. 그러나 주님, 나는 당신의 이름을 불렀고, 당신은 나의 말을 들으셨습니다. 당신은 와서 나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 당신은 나의 변호사이십니다. 내 소송을 변호해 주십시오. 나의 재판관이 되어 내가 옳음을 증명해 주십시오"(3:52-59).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격려가 되어, 주님께서 우리의 변호사이자 재판관이 되어 우리를 적들로부터 지켜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줍니다.
4장 2절: 한때 금만큼이나 가치 있었던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제는 질그릇처럼 되었습니다.
5장 21절: "주님, 우리를 회복시켜 주시고, 다시 당신께로 돌아오게 하소서. 옛날과 같이 우리를 새롭게 하소서." 예레미야는 사람들에게 설교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타락한 상태에 대해 마음속으로 깊은 관심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설교할 때 일어나서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를 위대한 사람으로 만든 것은 그들을 위해 뒤에서 울고, 염려하고, 부담을 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밤에 일어나 하나님께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나는 여러분 모두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주님을 섬기고 싶다면,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그런 은밀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날 인도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모독당하는 것을 걱정해야 합니다. 당신이 밤에 주님 앞에서 울고 당신의 걱정으로 인해 그분께 부르짖는다면, 당신이 강단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때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서 계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