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통해

작성자 :   잭 푸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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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이유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그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잘못된 이유로 성경을 공부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 그리고 저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동일한 목적을 위해 성경을 연구해야 합니다.

내가 성경 전체를 통해 이 연구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들여다보려고 할 때, 내 마음에 떠오른 구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아니하리라"(요 3:16).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주된 목적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이 그들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그들을 죄의 손아귀에서 구원하시고 하나님과의 교제 안으로 인도하기 위해, 그분의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는 그 누구도 죄로 말미암아 망하여 멸망하지 않기를 원하시는 큰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할 때 그 점을 염두에 두도록 합시다.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지라도, "주님, 말씀의 모든 뜻을 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주님의 마음을 알기 원합니다." 라고 기도합시다.

우리는 성경을 공부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것을 이해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공부할 때 작은 세부 사항에 너무 몰두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보는 것을 놓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그분의 마음을 계시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 마치 건물을 짓는 일이 기초를 다지는 일에서 끝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디모데후서 3:16,17에서 읽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하나님이 숨을 불어넣음)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이 합당하게(완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은 아담에게 숨을 불어 넣으신 것처럼, 이 책에도 숨을 불어넣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숨을 불어넣지 않으셨다면, 아담은 단지 흙더미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안에 숨을 불어넣지 않으신 책은 모두 먼지더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1. 우리를 가르치고, 올바른 길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2. 우리를 책망하고 꾸짖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경건의 길에서 지켜지려면 강한 꾸짖음이 필요합니다.

3. 우리가 길을 잃었을 때 우리를 바로잡고,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함입니다.

4. 우리를 의로 훈련시키기 위함입니다. 훈련 매뉴얼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성품을 변화시켜 경건한 남녀가 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을 봅니다.

궁극적인 목표는 "완벽하고 완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아귀까지 가득 찬 물잔처럼, 우리의 성품은 둥글고, 균형을 이루고, 완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계획하신 모든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기름 부음을 받고 하나님을 섬기도록 준비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의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성경을 공부한다면, 이런 이유로 성경을 공부해야 합니다.

오직 성령만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1세기에 사도들을 가르치신 동일한 성령께서, 21세기에도 우리를 가르치고자 하십니다. 1959년 7월 거듭난 때부터 그렇게 성경을 공부했습니다. 저는 성경 학교나 성경 대학에 가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성경을 공부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을 때,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두 제자와 함께 엠마오로 가실 때, "성경을 그들에게 열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그분과 함께 걸을 때, 그분이 오늘날 우리를 위해 하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 제자들은 "주께서 성경을 열어 주실 때에 그들 안에서 마음이 뜨겁다는 것"(눅 24:32)을 발견했습니다. 오늘날 성령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열어 주실 때, 우리 마음에도 그런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으로 계시하시는 진리는 결코 지루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결코 지루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걷고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면, 우리 마음은 우리 안에서 타오를 것입니다 - 왜냐하면 우리는 말씀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옛 언약 아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말씀이 육신(flesh)이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합니다(요 1:14). 이제 우리는 성경을 묵상할 때 예수님의 영광을 봅니다(고후 3:18 참조). 그 영광을 끊임없이 바라보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아서, 항상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는 늙어서도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시 1:3; 92:14). 그것이 우리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잠언 25장 2절은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요, 그것을 드러내는 것은 왕의 영광이다"라고 말합니다. 금과 다이아몬드는 지표면 아래, 수천 피트 깊은 곳에서 발견됩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 그 풍성함은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왕이며, 우리의 영광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숨겨진 보화를 찾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 11:2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 영리할 필요는 없지만, 유아(infant)처럼 깨끗하고 겸손하며 신뢰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못하고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지능이 아니라 마음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믿어야 할 약속과 순종해야 할 명령을 주셨습니다. 말씀에는 우리를 책망하는 말씀도 있고, 위로하는 말씀도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관련된 모든 문제에 있어서 성경을 최종 권위로 삼지 않는다면, 우리는 믿음 자체를 잃을 때까지 이리저리 흔들리게 될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그의 모든 이름보다 높게 하셨다고 말합니다(시 138:2). 그러므로 그것을 거부하거나 무시하거나 가볍게 취급하는 것은 결국 헤아릴 수 없는 손실을 초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경외한다는 것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부로 들어가는 문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서론(introduction)으로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연구를 시작합시다.

방갈로르

2015년 11월

잭 푸닌

장 1
창세기

'창세기'라는 말은 '시작'을 의미합니다. 이 책에서 우리는 창조의 시작, 인간의 시작, 인류의 죄의 시작, 구원의 시작, 종교성과 영성의 두 흐름의 시작, 바빌론의 시작, 예루살렘의 시작, 거짓 종교와 참 종교의 시작에 대해 읽습니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In the beginning God)"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것이 매일 우리 삶에 있어야 하는 방식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의 시작에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우리의 목표와 야망에서, 모든 것에서) 하나님이 첫째가 되셔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업, 재정, 일상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그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남자나 여자를 찾으신다면, 하나님께서 그러한 사람 안에서 그리고 그러한 사람을 통해 하실 일에 제한이 없을 것입니다.

창조

1장에는, 창조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이 장에서 나오는 두 개의 다른 단어인 'created'와 'made'에 주목하십시오. 이 두 단어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땅을 창조하셨지만(1:1), 궁창(firmament)을 만드셨습니다(1:7). 그분은 사람을 창조하셨지만(1:27), 땅의 짐승들을 만드셨습니다(1:25). '만들다'는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의미하고, '창조하다'는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의미합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수백만 년 전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 우리는 모릅니다. 하늘(heavens)과 땅이 하나님에 의해 그분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을 때(히 11:3), 그분은 그것들을 완전하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어떤 것도 불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땅이 공허하고 어둡고 혼돈하게 되었습니까(1:2)? 하나님은 공허하고 어둡고 혼돈한 어떤 것도 창조하지 않으십니다. 1절과 2절 사이에 무슨 일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천사 루시퍼가 타락하여 마귀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죄가 우주에 처음 들어왔을 때였습니다. 성경은 천사를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기록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이 지점에서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창조는 1장에서 언급되고 루시퍼의 타락은 훨씬 나중에 언급됩니다(이사야 14장과 에스겔 28장).

1장의 나머지 부분에서 우리가 읽은 내용은 타락하고 부패하고 어둡고 공허한 지구를 다시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챕터가 끝날 무렵에는 다시 한 번 아름다운 지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것을 보시고 " 심히 좋았다"고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1장에는 우리 모두를 위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사탄은 또한 인류에게 들어와서 2절에 언급된 대로 사람을 공허하고 어둡고 혼돈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image)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그렇게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담은 완벽하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마귀가 들어와 사람을 망쳤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을 다시 만들기 시작하셔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망가진 인류를 재건(remaking)하는 사업을 하고 계십니다. 당신이 얼마나 엉성하고 어둡고 공허한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1장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다시 만드실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분은 당신을 완전하게 만들어서 마침내 그분의 모양(likeness)을 완벽하게 반영하게 하실 수 있으며, 하나님이 친히 당신에 대해 "매우 좋다"고 인증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 첫 장의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이 변화는 어떻게 일어났는가? 그것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이해한다면, 당신의 삶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매일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첫날에 무언가를 말했습니다. 그리고 둘째 날에 무언가를 말씀하셨습니다. 매일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성경의 첫 장에서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 우리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당신이 변화되기를 원한다면, 당신에게 필요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마 4:4).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이 살도록 계획하신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매일 그분의 음성을 듣지 않는다면, 우리는 변화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하나님은 날마다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자들은 그분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매일 성경을 읽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성경을 읽는 것과 다릅니다. 동화책을 읽듯이 성경을 읽거나 화학 책을 공부하듯 성경을 공부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에 말씀하시려는 것을 결코 들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보는 또 다른 것은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움직이셨다는 것입니다(1:2).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에는, 성령께서 당신 위에 역사하시도록 허용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변화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태초부터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봅니다. 오직 성령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혼돈의 지구에 변화와 아름다움을 가져온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결합된 역사였습니다.

오늘날 기독교계에 가장 필요한 것은 균형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것은 강조하지만, 성령에 대한 의존도는 똑같이 강조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도우심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면, 뼈처럼 마르고 죽은 자와 같이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사역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여 감정주의에 빠져서, 그것을 성령의 역사로 착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레일을 이탈한 증기 기관차처럼 맹렬하게 호루라기를 불며 요란한 소리를 내어도,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을 인도하도록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진창 속에 갇혀서 진척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 첫 문단에서 우리가 온전하게 되기 위하여,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을 받을 수 있음을 봅니다.

1:4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라고 읽습니다. 이 분리는 넷째 날에도 반복됩니다(1:18).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며, 이것이 반복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빛을 창조하실 때 어둠이 섞이지 않기를 원하셨고 그래서 분리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모든 분열이 마귀에게서 온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분열을 만든 첫 번째 인격이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을 읽습니다. 빛은 어둠과 교제할 수 없습니다. 빛이 우리 마음에 들어올 때,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서 하기 원하시는 바로 그 다음 일은, 우리를 모든 어둠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6에는 빛의 창조에 대한 신성한 주석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의 빛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는 그림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런 다음 두 장 뒤에 있는 고린도후서 6:14-17에서, 우리는 모든 어두움에서 분리되어야 할 필요성에 대해 듣습니다. 세상은 어두움으로 가득 차 있으며, 우리 마음에는 세상의 것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어둠에서 분리되지 않을 때, 그 결과는 혼란입니다.

하나님께서 해와 달을 하늘 가운데 두셨을 때, 다시 빛과 어두움을 나누셨습니다(1:18). 두 경우 모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을 읽게 됩니다. 당신이 어둠에 속한 모든 것에서 분리되었을 때만 하나님께서 "좋다"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말씀하실 수 없습니다. 빛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어둠에서 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많은 문제를 겪습니다.

사람은 여섯째 날에 창조되었습니다. 들짐승들도 같은 날 아담 바로 전에 만들어졌습니다(24절). 그 짐승들은 사람을 만든 것과 같은 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사람과 짐승을 구별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숨을 불어넣으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동물의 수준 위로 끌어올리는 것은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뿐입니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으로 사는 것을 중단한다면, 머지않아 동물의 수준으로 떨어질 것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의 호흡 없이는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일곱째 날을 안식일로 지키셨습니다. 그 날은 하나님에게는 일곱째 날이었지만, 사람에게는 첫째 날이었습니다. 사람은 여섯째 날이 끝날 무렵에 창조되었으므로 그의 첫 생의 날은 안식의 날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 일하러 나가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 교제해야 한다는 것을 사람에게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루를 보낸 후에야 에덴동산에서 일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이 인간을 위한 신성한 질서입니다: 교제가 먼저이고 봉사가 그 다음입니다. 시작은 하나님 자신이고 -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는 그 순서를 위험할 정도로 잊어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안식일을 그토록 엄격하게 지키라고 가르치신 이유입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백성이 살 수 있는 안식의 쉼이 남아 있습니다(히 4:9).

1:28에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어떻게 그렇게 하기를 기대하셨을까요? 분명히 성관계를 통해서 입니다. 성기능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사용하여 아이를 낳으라고 사람에게 말씀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사람의 성기능도 하나님이 마침내 "심히 좋았더라"(1:31)라고 부르신 것에 포함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혼 생활에서의 성관계가 하나님께서 친히 "매우 좋다"고 말씀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까? 성관계는 결혼 밖에서는 매우 나쁘지만, 결혼 안에서는 매우 좋습니다. 결혼 생활에서도 성관계는 더러운 것이라고 생각하고, 결혼하지 않으면 더 거룩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비-성경적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그에게 복을 주셨습니다(1:28). 하나님은 그에게 생육할 뿐만 아니라, 그 사람 아래 있는 모든 것을 정복하고 모든 것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을 노예가 아니라, 통치자로 창조하셨음을 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모든 것을 그의 발 아래 두는 이기는 자로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에서, 우리는 사람이 통치하기를 바라신 하나님의 뜻을 읽게 됩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 우리는 인간이 이기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소망을 읽습니다(계 21:7). 그것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원래 뜻이었고, 마침내 그분의 계획을 성취하고 이기는 자가 되는 소수를 찾으십니다. 당신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은 모든 것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이 당신의 삶에서 죄와 분노와 정욕과 욕정을 다스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당신이 그것들을 모두 당신의 발 아래 두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결코 노예로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을 정복자와 통치자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복을 주실 때에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우리가 1:28에서 읽은 것처럼).

1장에서, 하나님께서 매일의 일을 살피시고 그것을 좋은 것으로 인정하셨다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둘째 날에는 하나님께서 내쫓으신 사탄이 둘째 하늘에 거하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우리 역시 우리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지, 하나님께서 매일 살펴보시도록 허용해야 합니다.

2장에서는, 사람의 창조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세 가지 선물을 주셨다는 것을 봅니다 - 배우자(이브), 살 집(에덴), 할 일(동산지기). 이것이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이 추구하는 세 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위해 세 가지 모두를 제공하는 데 관심이 있으셨고 오늘날 그분의 자녀들을 위해 세 가지 모두를 제공하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아담은 그것들을 위해 하나님께 구할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아담의 필요를 보시고 그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결혼 상대자, 집, 직업이 필요한 것을 아십니다. 당신이 그분과 동행한다면, 그분은 당신에게 이러한 필요와 다른 필요도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2장 11, 12절에 에덴의 금이 좋았다고 말합니다! 금이 좋은 것은 오직 하나님 앞에서만입니다. 그분에게서 멀어지면 금은 올무이며 저주가 될 수 있습니다.

2장 19, 20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아담에게 짐승들을 데려오셨다는 것을 읽습니다 - 그리고 아담은 그들에게 모든 이름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게 됩니다: "그러나 아담에게는 그를 합당한 돕는 배필이 없었더라." 이 문구는 아담이 파트너가 있는 각 동물을 보았을 때 그들 중 하나를 파트너로 가질 수 있는지 궁금해했음을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사자에게는 암사자가 있었고, 코끼리에게는 짝이 있었고, 고양이에게는 짝이 있었고 그리고 등등 짝이 있었습니다. 아담은 그것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고 하나하나 거절했습니다. 그들 중 누구도 자신의 본성과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담이 그들 모두를 거부했을 때,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좋다, 내가 너를 위해 돕는 자를 만들어 주겠다." 그런 다음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그를 위해 아내를 만드셨습니다.

이것에 대한 영적 적용이 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이고 결혼 상대자를 찾고 있다면, 하나님은 먼저 당신이 거듭났을 때 받은 것과 같은 신성한 본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예쁜 여자(또는 잘생긴 남자)가 당신에게 오는 것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이 그들 중 하나를 당신의 파트너로 선택할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그들을 통해 당신을 테스트 할 것입니다. 당신이 만약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계획하신 사람을 놓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하고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후 6:14)고 말씀하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 그러면 그분은 당신에게 가장 최고의 것을 주실 것입니다.

이것을 주목하십시오: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여섯 번 "좋았더라"고 말씀하신 후(1:4, 10, 12, 18, 21, 25), 갑자기 "좋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2:18).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 다음, 그분은 하와를 만드신 후에 " 심히 좋았더라"(1:31)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행복한 결혼한 부부가 하나님의 창조물에 가져온 차이입니다!

2장 24절에서 우리는 결혼한 모든 사람들이 주의해야 할 것을 읽습니다: 사람이 결혼하면, 부모를 떠나 그의 배우자와 연합해야 한다. 이것은 주로 육체적으로 부모를 떠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필요할 수도 있지만), 감정적으로 부모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이 일단 결혼하면, 그의 배우자는 그의 부모보다 그에게 훨씬 더 중요해야 합니다. 결혼한 부부는 부모와 상의하지 않고 서로 상의하여 가족 관련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나는 모든 결혼한 부부에게 이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면서 인도를 돌아다니고 싶습니다. 결혼한 모든 사람이 이 명령에 순종한다면, 우리 땅에는 더 많은 행복한 결혼 생활이 있을 것입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이 여기 있습니다. 사실 그것은 우리를 위해 성경에 기록된 첫 번째 계명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것을 성경의 첫 번째 계명으로 두셨습니까? 결혼을 제정하신 분께서 이 단계의 중요성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많은 부부들은 그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탄의 말을 들은 두 사람

3장과 4장에서 우리는 마귀의 말에 귀를 기울인 두 사람, 즉 아담과 가인에 대해 읽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어떻게 사탄의 책략에 희생되었는지를 통해 몇 가지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에덴으로 보내셨을 때, 그를 확인하기 위해 그와 함께 천사를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왜일까요? 우리가 감시 당하고 있지 않을 때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의 태도를 시험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아무도 우리 주변에 없을 때,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아담과 이브는 다른 사람 없이 그들만 있었고 어떤 피조물의 감시도 없이 죄를 지을 수 있었습니다.

에덴에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수천 그루의 나무가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그들에게 영생(eternal life)을 가져다 줄 생명나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이 중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지식(Knowledge)"을 추구했습니다. 그들은 생명을 거부하고 지식을 선택했습니다 - 오늘날 사람이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성경 지식과 생명 중에 선택해야 한다면, 무엇을 선택하겠습니까? 나는 여러분 모두가 "생명"이라는 정답을 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시험해 보십시오: 당신은 지식을 얻기 위해 성경을 연구합니까? 아니면,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성경을 연구합니까? 지식을 얻기 위해 성경을 공부한다면, 당신도 지식의 나무에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은 오직 죽음만을 가져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경만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의 살아있는 관계를 통해 선과 악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살아있는 관계 없이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길을 잃을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관계 없이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을 얻었기 때문에 그렇게 죽었습니다. 선과 악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순간순간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려주는 성령을 통해 와야 합니다. 선과 악을 아는 다른 방법은 죽음을 가져올 뿐입니다.

마귀는 하와에게 그녀가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3:5). 예수님은 매우 비슷하게 들리는 메시지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사탄은 하와에게 지식과 권위와 능력에 있어서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말했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겸손과 순결과 사랑에 있어서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두 메시지 중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하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아아, 심지어 대부분의 신자들도 전자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귀의 음성과 예수님의 음성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유혹은 매우 미묘합니다. 마귀는 속이는 자입니다. 그의 모조품은 겉보기에 진짜처럼 보입니다.

마귀가 하와를 유혹했을 때 그는 또한 하나님이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암시를 주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그녀를 사랑하셨다면(사탄은 넌지시 말했다), 하나님은 그녀가 이 아름다운 나무의 열매를 먹도록 허락하셨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탄이 우리 마음에 들어가려고 시도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함으로써 말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이 너희를 체질하기로 작정하고 하나님께 허락을 요구하였다"(눅 22:3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를 체질하도록 허락하신 것처럼, 사탄에게 그렇게 하라고 허락하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내가 너를 위하여 네가 체질을 받을 때에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다"(눅 22:32)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넘어지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넘어져도,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시련과 시험의 때에, 우리가 넘어질 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다면, 승리한 것입니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거나 원하는 것이 주어지지 않는다 해도, 욥처럼 자녀가 죽고 재산을 잃게 되는 깊은 시련을 겪더라도 -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무슨 일이 있어도) 끊임없이 단호하게 말하는 것(assert)을 의미합니다. 탕자를 집으로 돌아오게 한 것은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많은 잘못을 저질렀고 그의 인생을 엉망으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여전히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너무 매력적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아름다운 피조물보다 하나님 자신을 택할지 여부를 시험 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선악과가 매력적일 때이므로 하나님은 선악과를 매력적으로 만드셨습니다. 모든 유혹에서, 우리가 본질적으로 직면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창조주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그의 창조물을 선택할 것인가? 그 유혹은 예쁜 여자나 금이나 다른 창조물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명예나 인정을 구할 때에도, 다른 선택은 하나님의 인정입니다. 어느 것을 원하십니까? 우리는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택할 때 죄를 짓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모든 창조물보다 창조주를 선택할 때 승리합니다. 그만큼 간단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신자들 포함)은 매일 이 시험에 실패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물(아름다운 얼굴이나 금이나 어떤 사람의 인정)을 숭배하든지, 하나님 그분 자체에 비해 이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기든지 합니다. 이기는 자에게는, 예수님의 아름다움과 그분의 인정이, 그분이 창조하신 어떤 것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습니다. 인생의 모든 결정에서 이 한 가지만 선택한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여자가 될 것입니다. 당신은 개인적인 방법으로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알게 될 것입니다 - 어떤 사람이 당신을 가르칠 수 있는 것보다 더 잘 알게 될 것입니다. 모든 유혹에서 그 선택을 하고 이렇게 말하십시오. "주여, 내가 모든 피조물보다 당신을 택합니다." 그것이 비밀입니다.

아담의 죄는 무엇이었습니까? 금지된 나무의 열매만 먹었습니까? 아닙니다. 그 이상이었습니다. 3장 17절에서 하나님은 그에게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들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내의 말을 듣는 것이 죄입니까? 예, 그것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결과를 낳는다면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가정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머리로서의 권위를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의 아내가 악마와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고, 그는 단지 거기 서서 대화를 듣고 있었고, 그녀를 말리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호히 반대하고 "하와, 이리 와. 그의 말을 듣지마"라고 말했어야 했습니다. 오늘날 아담과 같은 남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가정의 머리가 아닙니다. 아담은 자신의 머리 직분을 확고히 주장하지 않았을 때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뱀과 땅은 저주하셨지만, 아담은 저주하지 않으셨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가리기 위해 동물을 죽였습니다. 그것이 지상 최초의 죽음이었습니다. 무고한 동물이 아담의 죄를 위한 제물로 죽임을 당했고, 그 동물의 가죽은 아담과 하와의 벌거벗은 몸을 가리는 옷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습니다(3:21).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들의 의로 우리를 옷 입히시기 위해 그분의 아들이 죽도록 허락하심으로써, 언젠가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행하실 일을 보여 주는 그림이었습니다.

사람이 죄를 짓기 전에는, 생명나무 앞에는 화염검이 없었습니다. 아담은 그곳에 가서 그것을 먹고 영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범죄한 후에 그 나무 앞에 화염검을 두셨습니다. 오늘날, 당신이 그 나무에 참여하기를 원한다면, 그 칼이 당신의 육신(flesh)에 떨어지게 해야 합니다. 그 칼이 갈보리에서 예수님에게 떨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우리의 죄 때문에 벌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칼은 오늘 우리 육신에 떨어져야 합니다. 바울이 말했듯이 말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갈 2:20). 우리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연합할 때, 그 칼이 우리 육신에 떨어지며 우리는 영생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삶의 방법은 없습니다. 이 검은 오늘도 이 나무를 지키고 있습니다.

저주, 슬픔, 가시, 땀, 먼지, 죽음 등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그의 죄에 대한 형벌로 말씀하신 말씀을 주목하십시오(3:16-19). 이 모든 말씀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서 발견됩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스스로 취하셨고, 그래서 우리는 에덴에서 아담에게 가해진 형벌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담과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자마자, 그의 아내와의 교제도 끊어진 것을 봅니다. 이에 대한 증거는 그가 그녀를 비난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에서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기 시작할 때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졌음을 증명합니다. 하나님과 교제할 때, 다른 사람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자신을 판단합니다. 형제를 참소하는 자는 사탄입니다.

4장에서, 우리는 마귀의 말에 귀를 기울인 또 다른 사람인 가인에 대해 읽습니다. 하와는 가인을 낳고 "내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남자아이를 창조했다"(4:1)고 말했습니다. 인간의 탄생은 그 당시에 기적이었습니다; 가인은 살아있는 혼으로 세상에 태어난 첫 번째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하와가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다. 그리고 나도 사람을 만들었다!! 나는 내 자신의 몸으로 사람을 창조했다." 그곳에서 나타난 것은 교만의 정신이었습니다: "내가 만들었고, 창조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조금 도와주셨지만, 나는 해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아들 가인은 그 잘못된 영을 가지고 자랐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그들의 제물을 바치러 하나님께 왔습니다. 4장 4절을 주의 깊게 읽으면, (어떤 사람들이 상상하듯이)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고 따라서 아벨을 받으셨다고 말하지 않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벨(먼저)을 열납하시고 (그 다음에) 그의 제물을 열납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 그 반대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가인을 거절하신 것은 가인의 제물을 거절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분은 먼저 가인을 거절하셨고 따라서 그의 제물도 거절하셨습니다. 성경은 "악인의 제물은 아무리 좋은(good) 제물이라도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잠 21:27)고 말씀합니다. 가인은 악한 자였으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제물을 거절하신 것입니다.

가인이 화가 났을 때, 하나님은 가인에게 그가 위험에 처했다고 경고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에덴에서, 하나님은 아담을 찾으러 오셨고, 이제 그분은 가인을 찾으러 오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타락한 인간을 찾으러 오시는 분입니다. 예수님도 타락한 인간을 찾으러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타락하거나 빗나갈 때마다 우리를 찾으러 오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큰 격려가 됩니다. 하나님이 오셔서 가인에게 경고하셨지만, 가인은 그 경고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의 마음 문에 웅크리고 있던 죄가 안으로 들어와 그를 멸망시키도록 허락했습니다.

질투는 사람이 에덴에서 나온 후, 성경에 언급된 첫 번째 죄입니다 - 하나님의 축복을 더 많이 받은 동생에 대한 질투. 당신보다 어린 사람이 당신보다 더 복을 받고 하나님께 더욱 기름 부음 받은 것을 보거든, 그를 시기하여 가인의 길로 가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이제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하신 말씀을 주목하십시오: "너는 저주를 받았도다"(4:11). 왜 하나님은 가인은 저주하시고 아담은 저주하지 않으셨는가? 아담의 경우, 하나님은 땅만 저주하시고 아담은 저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자신에게만 해를 입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인이 죄를 지었을 때, 그는 다른 사람에게도 해를 입혔습니다. 당신이 흡연이나 음주와 같은 죄를 범하면, 당신의 몸을 망가뜨리지만 자신에게만 해를 끼칩니다. 그러나 험담을 하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므로 그 죄는 더 심각합니다. 그러나 험담이 흡연보다 더 나쁘다고 믿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됩니까?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죄는 자신에게만 상처를 주는 죄보다 하나님 보시기에 훨씬 더 심각합니다. 그래서 가인은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때마다 진지하게 생각하세요.

하나님은 가인에게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4:10)고 말씀하셨습니다. 험담으로 명예를 더럽힌 그 사람의 피가,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께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구하고, 험담한 사람에게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구할 때까지, 그 부르짖음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죄가 심판 날까지 계속해서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입니다.

가인은 형벌을 받을 때, "내 형벌이 너무 커서 감당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지옥에 가는 사람들의 언어입니다. 그들은 "내 죄가 매우 큽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단지 "나의 형벌이 매우 무겁다"고 말할 뿐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죄 때문에 더 괴로워합니까? 아니면 형벌 때문에 더 괴로워합니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통해, 당신이 경건한 사람인지 불경건한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경건하지 않은 사람은 자신이 받게 될 형벌에 대해 걱정하지만, 경건한 사람은 자신의 죄 때문에 마음이 상합니다.

가인이 여호와 앞에서 떠나갔고, 그의 자손도 그와 같이 되었습니다. 그의 아들 중 한 명이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많은 아내와 결혼했습니다. 그들은 즐거움을 위해 악기를 만들었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록 음악과 전체 연예계의 시작을 봅니다. 이것이 아버지가 여호와를 떠날 때, 자녀들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4:16-24).

가인과 아벨에게서, 우리는 두 가지 흐름, 즉 종교적 흐름과 영적 흐름의 시작을 봅니다. 가인은 무신론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종교가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바빌로니아의 거짓 종교 제도의 선구자였습니다. 아벨은 모든 경건한 사람들의 선구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아벨을 의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3:35). 가인은 종교적이었지만, 아벨은 영적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두 사람

우리는 마귀와 동행한 두 사람의 예인 아담과 가인을 보았습니다. 이제 하나님과 동행한 두 사람, 에녹과 노아를 생각해 보십시오.

5장에서, 우리는 '그리고 그가 죽었다'라는 표현을 여덟 번 읽습니다. 하지만 그 장의 중간에, 우리는 전혀 죽지 않은 사람에 대해 읽었습니다!! 그것은 에녹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했고 하나님은 그를 살아있는 채로 천국으로 데려가셨습니다. 그것은 죽음 가운데 부활 생명의 그림입니다. 에녹은 부활의 능력으로 살다가, 죽음을 이기고 하늘로 올려진 사람이었습니다 - 영적인 죽음 가운데 살다가 부활의 능력으로 이기고 마침내 휴거되는 경건한 교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에녹은 아마도 그의 생애의 처음 65년 동안은 경건하지 않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65세에,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소년의 이름을 "므두셀라"라고 지었습니다. "므두셀라"는 "그가 죽으면 물(the waters)이 나올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에녹에게 그의 아들이 태어날 때 계시를 주셨음을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에녹에게 그 아들이 죽으면, 홍수로 세상을 심판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심판의 계시는 노아가 아니라 에녹에게 먼저 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들의 이름을 므두셀라라고 지었습니다.

이제 아기를 낳으면, 그 아이가 얼마나 오래 살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므두셀라가 아플 때마다, 에녹은 심판의 때가 가까운지 궁금했을 것입니다. "그가 죽으면 홍수가 닥칠 것이다"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아기를 상상할 수 있습니까? 당신이 그를 부를 때마다, 당신은 심판을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은 에녹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동행하게 하였고, 영원한 것이 현세적인 것보다 더 중요함을 깨닫게 하였습니다. 그것이 에녹이 300년 동안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게 된 위기였습니다.

성경은 "세상은 사라지리라"(요일 2:17)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믿는다면, 우리도 에녹처럼 영원한 것이 현세적인 것보다 더 중요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엄청난 오래 참으심은 므두셀라가 다른 어떤 인간보다 더 오래 살게 하신 사실에서 볼 수 있습니다 - 969년입니다. 969년 동안, 사람들은 므두셀라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다가올 심판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메시지를 거부했습니다. 이 심판에 대해 설교한 사람은 노아만이 아니었습니다. 에녹은 300년 동안 그것을 설교했고 므두셀라는 또 다른 669년 동안 그의 이름으로 그것을 설교했습니다.

노아도 므두셀라의 생애 마지막 12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심판을 전했습니다. 에녹과 므두셀라는 나중에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계시하신 것처럼 분명하게 홍수의 세부 사항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므두셀라가 죽었을 때 홍수와 관련된 어떤 종류의 심판이 임할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유다는 에녹이 그 시대의 모든 불경건한 백성에 대한 심판을 예언했다고 말합니다(유 14,15). 에녹은 예언자였으며 그는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아담은 에녹이 태어났을 때 622세였고 930세에 죽었습니다(5:5-23). 그러므로 에녹은 아담을 308년 동안 알았을 것입니다. 나는, 에녹이 아담이 친히 한때 하나님과 동행했던 에덴에서 상황이 어떠했는지 자주 아담에게 물었을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그리고 에녹은 하나님 자신과 동행하기를 간절히 바랐을 것입니다. 에녹은 에덴 밖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음을 증명한 최초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온 후에도,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살면서 훌륭한 설교자들을 많이 만났지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거의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내 마음에 직접 하나님과 동행하고 싶은 열망을 불러일으킨 것은 그 소수의 사람들입니다.

므두셀라의 손자는 노아였습니다. 그리고 노아는 므두셀라와 함께 600년을 살았습니다. 그는 므두셀라에게 에녹이 하나님과 어떻게 동행했는지 여러 번 물었을 것입니다. 노아의 마음에는 하나님과 동행하고자 하는 갈망이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6:9에서 노아도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것을 읽습니다.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할 때, 하나님은 그분의 심판의 목적을 노아에게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에서)하나님과 동행한 최초의 두 사람에게 계시하신 것은 죄에 대한 심판의 진리였습니다. 그리고 에녹과 노아는 아무도 그들을 믿지 않을지라도, 그 메시지를 신실하게 전파했습니다. 그 이후로 하나님의 모든 참된 예언자도 같은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하나님은 신자와 불신자를 그들의 죄에 대해 심판하실 것입니다.

에녹과 노아는 성경에 처음으로 언급된 두 명의 설교자이며 둘 다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 이후로 모든 설교자들이 그렇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하셨고 노아는 즉시 방주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방주 값을 누가 지불할 것인지 하나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가 하나님께 물었다면, 하나님은 "당연히 네가 직접 지불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주머니에서 그분의 일의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 일꾼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면, 다른 누군가가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노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고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는 방주를 짓는 데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일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꺼이(gladly) 그렇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그런 사람을 필요로 하십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날이 노아 때와 같이 악할 것이니, 말세에도 하나님께 많은 "노아들"이 필요로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사도 바울과 같이 자기를 부양하며 주님을 섬기는 사람.

사람들은 노아에게 어떻게 동물들이 방주로 들어올 것인지 물었을 것입니다. 노아는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지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동물들을 초자연적으로 안으로 데려오셨습니다. 노아는 그가 해야 할 일, 즉 방주를 짓는 일만 했습니다. 그는 다른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일만 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불가능한 일들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문을 닫으셨다는 것을 읽습니다(7:16). 방주의 문을 닫으신 분은 노아가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젠가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때가 되면 구원의 문을 또한 닫으실 것입니다.

방주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몸인 교회의 그림입니다. 교회에서와 마찬가지로 방주 안에서 생활하는 것이 불편했을 것입니다! 교회에서, 우리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때때로 우리에게 잘못된 방식으로 신경을 건드립니다. 그러나 방주가 편리하지 않더라도, 그 당시 지상에서 유일하게 안전한 장소였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까다로운 사람들이 있어도, 교회 안에 있으면 행복합니다. 당신도 행복하길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가 사람들을 우리와 함께하도록 초대하는 이유입니다.

홍수가 마침내 물이 빠질 즈음에, 노아는 까마귀와 비둘기를 방주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 육신(flesh)과 영(Spirit)을 상징하는 그림입니다. 까마귀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까마귀는 사람과 동물의 시체를 발견하고 그것을 제공하는 모든 잔치에 기뻐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육신의 지시에 따라 사는 사람들은 세상을 매우 즐거운 곳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비둘기는 아주 빨리 돌아왔습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결코 편안함을 느끼지 못하며, 항상 교회에서 하나님의 백성들과 교제하기를 갈망합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온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그 위에 감사제사를 드린 것이었습니다(8:20). 하나님을 첫째로 두고 그분께 우리의 경배와 감사를 드리는 그 예는 우리가 항상 따라야 할 좋은 예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완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술에 취해 장막에 알몸으로 누워 있었습니다. 그의 아들 함은 그를 보고 형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함이 그와 같이 아버지를 욕되게 하였으므로, 저주가 그에게 임하였습니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덮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여기에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아버지를 욕되게 한 아들과 그의 후손을 벌하시는 하나님의 기록이 성경에서 처음 나오는 곳입니다. 우리가 권위를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심각한 문제입니다. 당신의 아버지나 하나님의 사람에게서 약점을 보았을 때, 당신에게 저주가 내리기를 원치 않는다면, 함과 같이 그 벌거벗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폭로하지 마세요. 셈과 야벳처럼 그것을 덮으십시오. "사랑은 허다한(multitude) 죄를 덮습니다"(벧전 4:8; 잠 10:12). 노아는 셈과 야벳에게 교제의 축복으로 축복하며,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그들이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9:27)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도 함께 사는 사람들과 교제하며 서로의 죄를 덮어 주어야 합니다. 그러한 신자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울 수 있습니다.

바벨론

10장에서, 우리는 가인과 아벨로 시작된 두 가지 흐름의 연속을 봅니다 - 종교성과 영성. 이 흐름이 무신론과 영성이라면, 그 차이는 흑백처럼 분명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성과 영성은 크림색과 흰색과 같습니다. 밝은 빛에서만 이 두 가지 색상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악마는 속이는 자이며 위조품을 가능한 한 진품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넓은 길의 문은 좁은 길의 문과 모양이 매우 비슷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넓은 길로 들어가는 줄도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은 영리한 설교자들에게 속고 있습니다.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나는 지금 속고 있는 신자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한 분야만 생각해 보십시오: "너희가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섬기지 못하느니라"(눅 16:13)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믿는 신자가 얼마나 됩니까? 아주 아주 적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있다고 믿는 크리스천과 크리스천 사역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탄이 기독교인들을 속이는 많은 일의 한 예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이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돈을 사랑하고 또한 하나님도 사랑한다고 상상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영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종교적일 뿐입니다.

10장에서, 우리는 바벨론의 시작을 읽습니다. 그 멸망은 요한계시록 18장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바벨론은 성경의 시작 부분에 나타나며, 성경의 끝까지 계속됩니다. 여기에 "여호와를 대적하는"(직역) 강력한 사냥꾼인 니므롯(10:8,9)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왕국의 시작은 바벨(또는 바벨론)이었습니다. 바벨은 원래 '하나님의 문'을 의미했습니다. 니므롯은 무신론자가 아니었습니다. 가인처럼, 그는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그의 직업인 종교인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벨론 시스템(제도)이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바벨론은 종교 제도(계 17장)이자 금융 제도(계 18장)입니다. 돈과 하나님의 일이 합쳐져서, 바벨론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들이 속는 방식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돈도 벌기 때문에 그 일에 끌리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명성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집단은 그와 같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설교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 헌금한 돈으로, 값비싼 집을 짓고 값비싼 차를 사는 데 사용하는 것을 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도들의 생활 방식이 아니라, 영화 배우의 생활 방식과 비슷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판단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우리에게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그들에게 속아서도 안 됩니다. 대신 예수님을 따릅시다. 사람들에게 명성과 부와 권력을 가져다주는 "기독교" 종교 제도는 확실히 바벨론 시스템입니다. 바벨론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가는 문(바벨)을 보여준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그들을 지옥의 문으로 인도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문이다"(요 10: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참된 교회인,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니므롯은 장차 일어날 적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여기에는 그가 사냥꾼이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아마도 그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들짐승에게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니므롯은 그 동물들을 사냥하여 위대한 구원자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세계적인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적그리스도는 말세에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는 놀라운 방법으로 사람들을 구원할 것이며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될 것입니다. 계시록에서, 우리는 거짓 예언자가 적그리스도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될 것이라고 읽습니다. 종교와 정치는 마지막 날에 밀접하게 결합될 것입니다. 우리는 인도와 미국 모두에서 선거철에 그것을 봅니다. 정치 지도자들은 종교 카드를 사용하면 더 많은 표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기독교 종교" 조차도 정치인들이 자신을 홍보하기 위해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요 18:3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참된 믿음을 식별하는 표입니다. 당신은 예수님이나 그분의 사도들을 니므롯처럼 세속적인 왕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종이었습니다. 한번은 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서 도망치셨습니다. 그분은 그들의 왕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11:4에서,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탑을 쌓기로 결의한 것을 읽습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자, 우리 스스로 성읍(city)과 탑을 쌓고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자." 하고 그들은 그들의 탑이 하나님의 문(바벨)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께 도달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거짓 종교의 주요 구성 요소입니다. 거짓 종교는 항상 행위의 종교이며 -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의존의 종교가 아닙니다. 거짓 종교의 지도자들은 항상 영화 배우의 카리스마를 가진 강한 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바울처럼 연약하고(weak) 평범한(unimpressive) 사람이 아니며, 베드로처럼 명성이 없는 사람도 아닙니다. 거짓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자신의 명성과 명예를 구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참 예언자들은 항상 오해를 받고 "이단자"라고 불리며 종교적인 기독교계에 의해 쫓겨납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그랬습니다.

바벨론에는 많은 연합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온 땅이 같은 언어를 사용했다고 합니다(11:1) - 단지 같은 말뿐 아니라, 사람의 지혜와 능력과 영광의 같은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그것은 세상이 사용하는 언어이며, 불행하게도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사용하는 언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연약함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며, 그분 안에는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아름다움이 없었습니다(고후 13:4; 사 53:2). 그분은 사람들의 발을 씻기는 종이었습니다. 그분은 총감독도, 감독도, 교황도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자신을 평범한 사람("사람의 아들")이라고 불렀고 어떤 칭호도 갖지 않았습니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참된 종을 식별하는 표식입니다.

바벨론에서는 "자, 세우자"고 말합니다. 그들은 그러한 문제에 대해 하나님과 상의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천국으로 가는 관문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거짓 종교는 모든 필요를 하나님께 무력하게 의존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기도할 수 있습니다. 모든 종교에 기도가 있지만, 의미 없는 기도일 것입니다. 바알의 예언자들이 갈멜산에서 몇 시간 동안 기도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엘리야가 1분 동안 기도하자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내려왔습니다! 우리 중 일부는 기도하는 시간을 자랑스러워할지 모릅니다. 좋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도 밤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하나님의 인도와 도움에 대한 우리의 무력한 의존을 표현하는 경우에만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 사람들은 인간의 영리함에 의존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거짓 종교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시작됩니다. 그것의 모토는 "태초에 하나님"이 아니라 "태초에 사람"입니다(1:1에서와 같이). 거짓 종교는 사람에게서 나왔고, 사람의 능력을 통해 이루어지며, 사람의 영광을 위해 전파됩니다.

성경은 '나무와 풀과 짚'이나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집을 짓는 것에 대해 말합니다(고전 3:12).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집을 짓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 답은 로마서 11장 36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을 통해, 하나님을 위하여". 이것이 예루살렘(하나님의 참된 교회)이 세워지는 방식입니다. 그 반대는 "사람으로부터, 사람을 통해, 사람을 위해"입니다. 그것이 바벨론이 건설된 방식입니다.

바벨론은 사람의 생각으로 건축되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 단체가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으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보다는, 다국적 기업과 대기업의 원칙을 따릅니다. 그들은 사도들이 세운 교회가 아니라, 비즈니스 기업처럼 조직을 운영합니다. 예수님은 왜 광고회사에 복음을 전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들이 그 열 두 사도보다 더 잘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방법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다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방법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인간은 종교적인 피조물이며, 하나님보다 종교를 갖고 싶어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 불편합니다. 종교와 함께 사는 것이 편안합니다. 당신은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없으며, 세상에서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기독교 종교"를 가지고 있으면서, 여전히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원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신자들도 하나님 자신보다 기독교를 갖고 싶어합니다. 그들은 목에 예수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바벨론은 사람의 힘으로 세워졌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기름부음이나 하나님이 주시는 초자연적인 은사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자연의 선물, 좋은 음악, 전자 기기를 사용하면,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우리의 일이 그렇게 형편없는 것도 당연합니다! 우리는 초기 사도들이 알았던 능력을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경험했다고 주장하는 성령세례는, 그들 자신의 혼의 위조된 세례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 심리적 경험은 그들을 만족시키지만, 오순절 날 사도들이 받은 것과는 전연 다릅니다. 오늘날 예수와 사도들에게 임한 성령의 진정한 기름부음을 경험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few). 나는 예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사도들에게 약속하신 진정한 권능의 부여를 구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왜 제가 오늘날 성령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많은 일들이 가짜라고 말할까요? 예수님께서 그들의 열매로 거짓 예언자를 분별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오늘날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확연히 드러납니다. 성령은 돈을 사랑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그러한 열매는 확실히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들은 권력과 지위와 사람의 명예를 사랑합니다. 이것들은 성령의 열매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능력"은 어떤 다른 근원, 어떤 다른 영으로부터 오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바벨론은 인간의 영광을 위해 세워졌습니다. "우리가 이름을 날리자"는 11:4에서 읽은 내용입니다. 오랜 후, 우리는 다니엘 4:30에서, 느부갓네살이 그가 건축한 바벨론 도시를 바라보았다는 것을 읽습니다. 저는 그것이 길이와 너비가 25km인 정사각형으로, 두께가 87피트(25.52m), 높이가 350피트(106.68m)인 성벽과 함께 지어졌다고 들었습니다. 그것은 세계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아름다운 공중 정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느부갓네살이 이르되, "이는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내 능력의 권능으로 건축한 큰 성 바벨론이 아니냐?" 그것은 사람으로부터, 사람을 통해, 사람을 위해 지어졌습니다. 느부갓네살은 바벨탑이 세워진 지 거의 2000년 후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같은 영이 있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이후 250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는 동일한 영이 오늘날 기독교계에서 활동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이것이 바로 바벨론입니다 - 사람으로부터, 사람을 통해, 사람을 위해. 그리고 그것은 예루살렘과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11:5에서 "여호와께서 사람이 지은 것을 보려고 내려오셨다"는 것을 읽습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짓는 모든 것을 살펴보기 위해 내려오실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분은 우리 교회나 조직의 규모를 살펴보기 위해 오지 않고, 그것이 세워진 동기를 살펴보려고 오십니다. 그것은 누구의 영광을 위해 지어졌습니까? 그분이 바벨탑의 크기를 살펴보시려 했다면, 그것은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때 다른 것을 찾으러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다른 것을 찾으러 내려오십니다.

예루살렘 - 아브라함과 멜기세덱

12장 1절에서, 우리는 진정한 예루살렘 건축의 시작을 봅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낳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없었다면, 예루살렘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에게서 우리가 바벨론에서 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너의 친척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아브라함은 바벨에 있는 이 사람들처럼 어느 날 갑자기 기발한 아이디어(bright idea)를 얻어서, "나는 우르에서 충분히 오래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나로 하여금 가나안으로 가서 거기서 일하게 하소서." 라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No. 그의 움직임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였습니다. 75년을 기다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움직이는 것이 좋습니다. 모세는 목자로 40년을 기다렸다가,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실 때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성취한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우리가 75년이나 80년을 기다려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움직여야 한다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바쁜 21세기 사람들에게 그럴 시간이 있을까요? 아니요.

나는 내가 젊었을 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을 가르쳐 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사람이 너를 움직이게 하지 말아라. 오직 하나님만이 너를 움직이게 하라." 나의 동료를 포함하여 많은 좋은 사람들이 나에게 다양한 일을 하라고 촉구(urge)했습니다. 나는 그들의 충고를 듣지만, 하나님이 나에게도 말씀하실 때까지 움직이지 않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까지 기다립니다, 왜냐하면 내가 사람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인다면, 결국 비참하게 될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동역자들의 의견을 고려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듣는 마지막 음성은 하나님의 음성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라"고 말씀하셨고 그는 갔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가라"고 말씀하셨고 그는 갔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가라"고 말씀하셨고 그는 갔습니다. 이들은 그들의 삶으로 무언가를 성취한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려고 여기저기 뛰어다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원한 가치를 성취하지 못합니다. 통계적으로 보면, 그들이 하는 일은 인상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종교적 바벨론이지, 예루살렘이 아닙니다.

"자, 움직이자. 주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합시다. 벽돌을 만들자, 회반죽을 만들자, 뭔가를 해보자." 당신은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 이름을 날리자." 그리고 당신은 스스로 바빌론을 건설하여 큰 명성을 얻을 수 있습니다 - 느부갓네살이 한 것처럼.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 사역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그것이 요한계시록 17장과 18장에 있는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가라(Go)"를 기다렸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인도 없이 행할 때마다, 그는 곤경에 빠졌음을 주목하십시오. 예를 들어, 우리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갈대아 우르를 떠나 그분이 인도할 곳으로 가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읽습니다. 그러나 11장 31절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을 데리고 우르에서 나온 사람이 데라(아브라함의 아버지)였다는 것을 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무엇을 말씀하셨습니까? "네 친족을 떠나고, 네 아비 집을 떠나라."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75세의 아브라함이 아버지의 손을 잡고 이사하는 것을 봅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이 시작한 방식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방해하는 사람은 먼저 당신의 친척이 될 것입니다 - 부모, 형제, 자매, 아내, 자녀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게 오는 사람은 자기 부모와 형제와 자매와 아내와 자녀를 미워하지 아니하면,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눅 14:2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주님을 따르고 싶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아버지나 당신의 아내는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데라가 아브라함을 데리고, 하란까지 이르러(11:31) 거기 정착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그곳에 정착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이 데라의 생각이었습니다. 하란에는 아마도 양 떼를 위한 좋은 목초지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은 하나님의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아버지와 함께 거기에 정착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실수를 저질렀던 사람이었습니다 - 그가 저지른 첫 번째 실수는 하나님께서 이미 그에게 다른 일을 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의 아버지의 말을 들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그러한 상황을 쉽게 다루실 수 있습니다. 데라를 죽음을 통해 데려가셨습니다(11:32)! 그런 다음 "아브람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대로 나갔습니다." (12:4).

당신이 앞으로 나아가기 전에, 하나님이 그런 과감한 일을 하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면, 그분은 이와 같이 과감한 일을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타협하는 자로 보시면, 그분은 당신을 평생 하란에 머물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놓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움직이는 법을 배우십시오. 하나님을 모르는 친척의 말을 듣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아는 경건한 아버지라면 반드시 그에게서 배우십시오 - 그러나 세상적인 아버지에게는 배우지 마십시오. (나는 여기서 영적 원리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이르렀을 때,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12:5,7).

그리고 하나님은 다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시험하셨고, 아브라함도 시험하셨으며, 당신과 나도 시험하실 것입니다. 이번에는 그 땅에 기근이 들어 시험을 받았습니다(12:10). 당신은 하나님께서 가나안으로 가라고 하셨는데, 가나안에 기근이 들었을 때 어떻게 합니까? 당신의 감각의 증거로 살든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말씀하신 대로 살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그는 눈으로 본 것과 귀로 들은 것으로 판단치 아니하시리라"는 예수님에 대한 아름다운 구절이 있습니다. (사 11:3,4). 그러나 그것은 사람이 사는 방식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가나안에 기근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거나 본다면, 우리의 눈과 귀와 영리한 두뇌가 알려주는 대로, 즉시 결정을 내립니다. 우리는 가나안이 확실히 지금 있을 곳이 아니라고 결정합니다. 우리는 이동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감각에 따라 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상의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한 일입니다: "이에 아브람이 애굽으로 내려가니라"(12:10). 누가 그에게 이집트로 가라고 말했습니까? 하나님이 아닌, 그의 감각입니다!

하나님은 기근의 때에 사람을 지키실 수 없습니까? 확실히 지키실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는 기근의 때에도 메마르지 않을 것이다"(렘 17:5-8).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시하실 때까지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 하신 말씀입니다. 사탄은 예수님께 돌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 광야에는 기근이 있었고 그 주변에는 식료품 가게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빵으로만 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이집트에 빵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곳으로 갔습니다. 그것이 오늘날에도 많은 그리스도인의 일이 이루어지는 방식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 일꾼들은 주님이 가라고 하신 곳에 가지 않습니다. 그들은 좋은 월급을 받을 수 있는 곳, 빵이 풍부한 곳으로 갑니다. 그들은 돈의 기근이 없는 조직에 가입합니다. "이집트"는 살기에 편안한 곳일 수 있습니다 - 기근이 닥쳤을 때. 그런데 문제는 그곳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곳이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가나안"으로 부르셨다면, "이집트"로 가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지 못한다면, 당신도 시험을 받을 때 같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십시오. 그분의 태도는, "네. 빵은 삶에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삶에 더 필요합니다."

사탄이 예수님까지 이렇게 유혹했다면, 여러분도 유혹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 빵이 많은 곳으로 가라고. 전업 기독교 일을 하다가 재정적인 시련을 당하면, 사탄은 다른 단체나 다른 교회에서 돈을 더 받을 수 있다고 하면서 거기로 가라고 할 것입니다. 당신이 사탄의 말을 듣지 않으므로 당신의 삶이 곤두박질 칠 때,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자비를 베푸시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이집트로 내려간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그곳에서 그의 아내가 그의 여동생이라고 거짓말을 해야 했습니다. '이집트'에 가면 많은 문제에 봉착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거짓 보고서를 작성하고, 100% 사실이 아닌 것을 진술하고, 양심을 타협하는 등의 일을 해야 합니다.

사라는 65~70세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집트 왕 파라오가 그녀를 하렘에 넣기를 원했던 것을 보면, 그녀는 여전히 매우 매력적인 여성이었을 것입니다. 슬픈 것은 아브라함이 아내가 하렘으로 끌려가 타락하게 될 것을 보면서도, 자기 생명을 너무나 사랑하여, 바로에게 진실을 말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우리는 우리가 진리를 사랑하는지 아닌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위대한 아브라함이 심각한 실수를 저지른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 그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하나님께 불순종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아내를 잃게 되는 상황에서도, 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은 약하고 이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우리와 똑같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격려가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두 가지 상황에서 아브라함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하란에서 구원하셨고, 하나님은 사라를 바로에게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도, 우리의 마음이 아브라함처럼 진실함을 보신다면, 우리도 건져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격려하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한 아브라함을 꾸짖은 사람은 바로였습니다(12:18). 거짓말을 한 하나님의 예언자를 꾸짖는 이교도 왕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때때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시정해야 하는 타협적인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당신이 '이집트'에 가면 그렇게 됩니다.

이제 나는 더 심각한 것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이집트에서 그 후 4000년 동안 영향을 끼치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집트에 가서 그곳의 부자들이 집에 하녀(여종)를 거느리고 있는 것을 보고, 자기도 하녀를 거느리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갈이라는 여종을 데려왔습니다. 그는 이집트에서 돌아올 때 그녀를 데리고 왔습니다. 이제 사라는 집(tent)에서 모든 일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갈은 그녀를 돕기 위해 그곳에 있었습니다. 나중에, 사라에게 자녀가 없었을 때, 하갈이 그 문제도 돕기 위해 그곳에 있었습니다!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이 나왔고 그의 후손들은 이삭의 후손들과 4000년 동안 갈등을 빚어왔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한 번 듣지 않은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신은 "글쎄요, 저는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좋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단 한 번 듣지 않은 결과입니다. 그 메시지가 진지하게 우리에게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누가 예루살렘을 건축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입니다. 기근이 들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기다리며, "주님,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말해야 합니다. 아마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딘가로 가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아닐 수도 있습니다. 몇 년 후, 하나님은 기근의 때에 야곱에게 애굽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어디론가 가라고 하시면, 가십시오. 돌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렇게 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다른 교회에 가입하라고 말씀하시면, 그렇게 하십시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까지 기다리십시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제 나는 당신에게 아브라함에 대해 좋은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우리 모두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실패로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13:7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종들과 롯의 종들 사이에 분쟁이 있었다는 것을 읽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은 이집트 여행을 통해 막대한 부를 얻었고, 이제 그 부는 문제를 일으킵니다. 부(wealth)는 항상 문제를 일으킵니다. 롯과 그의 아내는 이집트에서 본 것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누구와도 싸우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종들은 싸웠습니다.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 사이에 다툼이 있었다. 그때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이 거기에 살고 있었다." 마지막 문장이 거기에 포함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방인들이 이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기독교계의 상황과도 매우 관련이 있습니다. 그 땅에 거하고 있는 이방인들이 무엇을 보겠습니까? 서로 싸우는 기독교 단체.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모든 자들 가운데, 롯(돈을 사랑하는 세상 사람)을 불러 그에게 "너와 나 사이에 다툼이 없게 하라, 우리는 형제니라" 말할 아브라함과 같은 경건한 사람을 찾을 수 있습니까? 그들은 형제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삼촌이었고, 롯은 그의 조카였습니다. 이 75세의 사람이 35세 조카에게 베푸는 은혜를 보십시오. "우리는 형제입니다!" 경건한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는 75세였지만, 어린 조카를 보며 "우리는 형제입니다. 당신은 나와 동등합니다. 당신에게 우선권을 주겠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십시오." 예루살렘은 그런 사람들에 의해 세워집니다. 기독교계는 그러한 지도자들을 필요로 합니다 - 그리고 그들은 쉽게 발견되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그들의 권위를 주장하고, "나는 75세다. 나는 네 삼촌이다. 내가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이지, 너가 아니다. 너는 단지 나와 함께 왔다." 라고 말하는 많은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롯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롯에게,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 그리고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갈 것이다. 네가 원하는 것을 먼저 가져라." 그리고 탐욕스러운 사람인 롯이, 바벨론의 영으로, 먼저 움켜 잡았습니다. 그는 소돔의 아름다운 들판을 바라보고, 그곳에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와, 거기에 사는 부자들을 보고 "내가 그리로 이사하여 거기서도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말했습니다.

많은 기독교 설교자들이 돈을 사랑하기 때문에, 부유한 나라로 이주하여 부유한 교회에서 설교합니다. 그러나 예외 없이, 그들은 영적으로 상실합니다. 나는 그런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당신을 그곳으로 인도하셨기 때문에 어딘가로 가십니까, 아니면 돈이 당신을 끌어당겨서 가십니까?

아브라함이 이 결정을 내릴 때, 주님은 그와 롯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기 위해, (바벨에서와 같이)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이 자신을 처신하는 경건한 길을 보셨습니다. 롯이 그를 떠난 직후에, 주님은 아브라함에게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14~17절). 하나님은 먼저 그를 그의 아버지로부터(죽음으로) 분리시키셨고, 그런 다음 아브라함을 또 다른 친척(그의 탐욕으로 인해 그에게 방해가 되었을)으로부터 분리시키셨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너는 혼자이고, 이제 내가 원하는 곳으로 너를 데려 갈 수 있고, 내가 원하는 사람이 되도록 할 수 있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똑똑히 보았다." 하나님께서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거래를 감찰하신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그분은 우리의 태도를 주시하십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무언가에 대한 당신의 권리를 포기했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에게, "내가 그것을 유념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여기 서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네가 볼 수 있는 모든 땅은 언젠가는 너의 자녀의 소유가 될 것이다. 나는 그것을 약속한다. 그것은 롯의 후손에게 속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4000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4000년이 지난 오늘 그 땅을 보고, 그곳에 누가 살고 있는지 자문해 보십시오. 롯의 후손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을 지키십니다. 수천 년이 흘러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영원히 주리라(15절)"고 말씀하셨다면, 그대로 될 것입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14장에서 롯이 어떻게 곤경에 빠졌는지 봅니다.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면 항상 문제가 생깁니다. 그는 적들에게 사로잡혔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 합당하다. 그 녀석이 내게서 무언가를 뺏어갔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서 아브라함이 시험을 받은 또 다른 때를 봅니다: 자기를 속인 이 사람이 곤경에 빠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아브라함의 태도는 어떠했겠습니까? 당신을 속인 누군가가 스스로 곤경에 빠졌을 때, 당신이 하나님의 사람인지 아닌지를 매우 빨리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반응은, "내가 가서 롯을 도우게 해주세요. 롯이 나를 속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가 나를 속인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적인 부의 쓰레기들입니다. 그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하늘의 부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롯이 땅의 것을 쫓다가, 지금 곤경에 빠졌기 때문에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내가 가서 그를 돕게 해주세요." 그리고 아브라함은 가서 롯을 구했습니다. 그것이 경건한 사람의 자세입니다. 그런 사람만이 예루살렘을 건축할 수 있습니다.

전투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브라함은 기진맥진했고, 단지 318명의 종과 함께 가서 많은 왕의 많은 군대를 멸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또한 이 전투에서 승리하여 축적한 모든 재산을 모을 위험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만약 당신이 전쟁에서 이긴다면, 적의 금과 은은 모두 당신 것이 되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당신의 종을 보내셨습니다. 그것을 보는 것이 멋지지 않습니까? 그곳 광야에 살고 있던 멜기세덱이라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 하나님과 접촉하고 있었습니다. 14:18에서 그에 대해 읽었습니다.

멜기세덱이 중요한 이유는 시편 110편 4절에, 예수님을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으로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7장에서 그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성경에서 멜기세덱이 나오는 유일한 곳은 14장 18~20절입니다. 세 구절이 전부입니다. 멜기세덱이 나타나, 그의 사역을 다하고 사라집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에게 이르시되,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제사장이니라." 옛 언약의 제사장 직분인 레위의 반차를 따른 제사장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단 세 구절에만 등장하는 이 사람 멜기세덱이 어떻게 그렇게 중요해졌습니까? 그 이유를 아는 것이 우리에게 좋습니다.

우선, 그는 살렘의 왕이었습니다(14:18) - 예루살렘. 우리는 예루살렘이 바벨론의 반대인, 참된 교회의 그림임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교회에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이시고, 우리도 그 반차를 좇아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왕이시며, 우리도 왕이 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왕으로 삼으셨고 우리는 이 땅에서 다스릴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다스리도록 부르심을 받았고 우리의 정욕을 다스리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멜기세덱은 무엇을 했습니까? 그는 먼저 아브라함과 그의 종 318명을 위해 음식을 가져왔습니다. 기독교는 현실적입니다. 사람이 지치면, 그에게 필요한 것은 설교가 아니라 음식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것은 영적이지 못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이 당신이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영적인 일입니다. 엘리야가 기진맥진했을 때,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그에게 음식을 두 번 나누어 주었습니다(왕상 19:6-8).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 어느 날 아침 제자들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고 지쳐 돌아오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해 두셨습니다(요 21:9). 필요한 곳에서, 음식과 물질적인 것으로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 진정한 영성입니다. 그것이 멜기세덱의 제사장 직분의 첫 번째 부분입니다.

계속해서 멜기세덱이 아브람을 축복했다고 말합니다(14:19). 그는 아브람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멜기세덱의 반차에는 참소하는 영이 없습니다. No. 오직 축복입니다. 그리고 그는 아브람을 어떻게 축복했습니까? 그는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아브람에게 천지를 그의 하나님이 소유하셨으므로, 그가 전쟁에서 얻은 적은(little) 금과 은을 가져가지 말 것을 상기시켰습니다. 그는 아브람을 탐욕에 빠지지 않게 구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말했습니다, "네 원수를 네 손에 넘겨주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리하여 그는 아브라함에게 승리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심을 상기시켰고, 따라서 그를 교만에서 구합니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 이 세 가지 문제, 즉 지쳐서 음식이 필요하고 탐욕과 교만의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어떻게 그의 사역은 이 세 가지 필요를 정확히 충족시켰습니까? 멜기세덱의 사역은 과녁 한가운데를 향하는 화살과 같았습니다. 그의 비결은 매일 하나님 말씀을 듣는 습관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기발한 생각(bright ideas)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았습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필요를 정확하게 충족시키는 모든 예언 사역의 비결입니다.

어느 날 멜기세덱이 평소처럼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라. 약 400명분의 많은 양의 음식을 가져가라. 그리고 이 두 문장의 메시지를 가지고 가서, 본 적도 없고 이러저러한 길을 가고 있는 나의 종에게 다 주라." 빌립이 가자(Gaza)로 가는 길에 에디오피아 환관을 만나러 갔던 것처럼, 멜기세덱도 누구를 만날지 알지 못하고, 일어나 갔습니다. 그가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으로 갔을 때, 그는 아브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아브람에게 음식을 주고 그에게 메시지를 전한 다음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어떤 사역입니까? - 사람들을 축복하고, 선물이나 감사를 받기 위해 기다리지 않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멜기세덱의 제사장권은 섬기고 사라지는 제사장권입니다. 그런 제사장들을 통해 예루살렘이 세워집니다. 이들은 오늘날 예루살렘의 진정한 왕들입니다.

하루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그의 장막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들을 셀 수 있나 보라. 너의 후손은 이렇게 많을 것이다"(15:5). 그때 아브라함에게는 자식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하늘에는 수백만 개의 별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었다고 합니다(6절). '믿다'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원어로 'aman'(아만)인데, 여기서 우리는 영어 단어 'Amen'(아멘)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될 줄 나는 믿습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씨가 하늘의 별과 같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단지 "아멘. 그렇게 될 줄 믿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게 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취되었습니다. 오늘날, 아브라함의 자손(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은 수백만 명에 이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무엇인가를 말씀하셨을 때 "아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합니다. "들어야 믿을 수 있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이 있어야 들을 수 있습니다"(롬 10:17).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당신은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멘"이라고 말했습니다.

요즘, 나는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께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 것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을 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메르세데스-벤츠 자동차를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검은 색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추정(presumption)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나서야 생깁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아멘. 그렇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기억하면, 추정과 "거짓 믿음"에서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욕망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서 시작됩니다. 우리 자신의 욕망에서 시작된 것은 바벨론으로 이어질 뿐입니다. 하나님으로 시작하는 것은 예루살렘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번 말씀하시면, 하나님이 말씀을 이루시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우리는 평생 동안 계속해서 그 말씀에 "아멘"해야 합니다.

그러나 16장에서, 우리는 사라가 참을성이 없었다는 것을 읽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여종 하갈을 통해, 아브라함에게 자녀를 갖자고 제의했습니다(16:2). 그때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습니까? 불행히도 그는 사라에게도, "아멘"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로 인해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지금까지 4000년 동안 지속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언가 다른 것을 말씀하셨을 때, 사람의 말에 절대로 "아멘"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육신적인(carnal) 방법을 취하지 않고도, 우리가 가진 어떤 문제도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라의 조언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실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마엘이 태어났습니다(16:15). 여기에서 무언가를 주목하십시오. 이스마엘이 태어났을 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86세였습니다. 다음 구절은 아브라함이 99세 때부터 이어집니다(16:16 & 17:1). 그 13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주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주님은 13년 동안 침묵하신 후, 아브라함이 99세가 되었을 때 다시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마치 주님이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사라의 제안에 '아멘' 하였느냐? 그러면 너는 고통스러운 교훈을 배워야 할 것이다. 네가 다른 누구보다 내 목소리를 귀하게 여기는 법을 배울 때까지, 나는 13년 동안 너에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네, 하나님은 매우 엄격하십니다. 그분은 때때로 매우 어려운 방법으로 우리에게 몇 가지 교훈을 가르칩니다 - 그렇지 않으면 교훈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3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살기에는 긴 시간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때쯤에는 교훈을 얻었고, 훨씬 나중에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다시는 사라와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이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아브람(존귀한 아버지)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열국의 아버지)이라 하리라. 너는 단지 그 이름만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너는 실제로 많은 사람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아브라함은 희망이 없어 보였을 때 다시 한 번 "아멘"이라고 말했고, 1년 안에 아들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마침내 하나님께만 "아멘"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그에게 아들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분의 교훈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이때에 그에게 집안의 모든 남자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옛 언약 하에서 할례는 육체(flesh)를 잘라내는 것이었습니다. 새 언약 아래서, 그것은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함(no confidence in the flesh)"을 상징합니다(빌 3:3).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네 자신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 나를 믿어라."

우리는 18장에서 아브라함의 환대에 대해 조금 읽었습니다. 히브리서 13:2에 "어떤 사람들이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대접하였기 때문에" 나그네를 환대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18장에 언급하고 있습니다. 경건한 사람은 항상 나그네를 대접하고 따뜻하며 선하게 대합니다.

그런 다음 18장과 19장에서, 우리는 롯이 다시 곤경에 빠진 이야기를 읽습니다. 주님은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의 죄를 멸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아브라함은 롯에 대해 염려했습니다. 롯은 아직 교훈을 얻지 못했습니다. 적으로 붙잡힌 후에, 그는 돈을 더 벌기 위해 소돔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롯을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경건한 사람으로서, 그는 롯이 자신의 생명을 구하도록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최초로 기록된 중보기도이며 혼(souls)의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롯은 아브라함의 기도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소금 기둥이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두 사람(남편과 아내)이 한 침상에 있고, 한 사람만 데려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것을 언급하셨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남겨질 것입니다(눅 17:32,34).

롯의 이야기는 슬픈 이야기입니다. 그는 부를 추구하다가, 아내와 사위, 그리고 모든 재산을 잃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하나님께서 처음에 그에게 가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 곳으로 가난하게 가야 했습니다! 그의 딸들이 그와 근친상간을 범하여 두 아들 암몬과 모압을 낳았습니다(19:37,38). 그들에게서 이스라엘과 끊임없이 싸웠던 암몬 족속과 모압 족속이 나왔습니다.

롯이 그의 자녀들을 양육한 방식과는 대조적으로, 우리는 주님께서 아브라함에 대해 아브라함이 "자녀들이 주의 길을 지키도록 명령할 것이다"(18:19)라고 친히 증거하시는 것을 읽습니다. 하나님은 또한 이것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하신 모든 약속을 이루실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을 위해 많은 일을 하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정에서 자녀들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0장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이방 왕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의 동일한 영역에서 두 번째로 실패하는 것을 봅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아내가 다른 남자와 동침하는 것을 기꺼이 허용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얼마나 나약한 사람이었는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선을 행하시고, 사라가 아비멜렉에 의해 건드려지지 않게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 왕을 "그 마음의 진실함(integrity)"으로 칭찬하시는 것을 보는 것은 흥미롭습니다(20:6). 하나님께서는 그가 사라와 간음을 범하지 못하게 막으신 것이 그의 마음의 온전함(integrity)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40세기 전에 이방 왕을 도우셨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오늘날 마음이 온전한 젊은이를 도우실 것입니다!

우리는 20:17-21:2에서 놀라운 것을 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그의 아내 사라가 임신하지 못하던 시기에, 아비멜렉의 집안에 있는 많은 임신하지 못하는 여자들을 위해, 여기에서 기도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못한 것을 다른 사람들도 얻을 수 있도록 기도하려면, 훨씬 더 큰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그렇게 기도하자, 그 모든 여인들이 아이를 낳았을 뿐 아니라, 아이를 낳지 못하던 사라도 임신하여 이삭을 낳았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물을 주는 자는 (하나님에게) 자기도 물을 받을 것이요"(잠 11:25). 욥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그들과 욥에게도 복을 주셨습니다(욥 42:10).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하신 것을 얻기까지 25년을 참을성 있게 기다렸습니다. 이때 아비멜렉 왕이 이삭의 출생 소식을 듣고 아브라함에게 와서 "하나님이 분명히 너와 함께 계시도다"(21:22)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충성할 때, 주님은 이방인들도 그분이 우리와 함께하심을 알게 하실 것입니다.

22장에서, 우리는 성경에서 처음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에 대해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내가 이제야 알았노라"고 증언하신 것을 읽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였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약 125세였고, 하나님은 그를 다시 시험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아브라함이 처음처럼, 여전히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는지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네 아들 이삭을 바쳐라. 나는 너에게 내일 아침에 그것을 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No. 모리아 산에서 해라 - 3일 거리에 있는. 3일 동안 그것에 대해 생각해보아라." 하나님은 결코 우리에게 어떤 일도 급하게 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아브라함은 3일 동안 걸으며, 비용을 계산하고, 이삭을 제단에 놓고, 말했습니다, "주님, 여기 있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보다 당신을 더 사랑합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헌신과 이삭의 헌신도 보여주었습니다. 25세의 청년 이삭은, 125세의 아브라함보다 훨씬 강했습니다. 이삭이 원하지 않았다면, 아브라함은 결코 이삭을 제단에 묶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어떻게 그의 아들에게 그에게 순종하라고 가르쳤는지를 보여줍니다. "이제 너를 하나님께 드리겠다, 여기 누워라,"라고 말할지라도 그의 자녀들이 누우며 "알았어요, 아빠, 계속하세요." 라고 말하는 식으로 자녀들을 양육할 수 있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당신은 그런 아버지는 참으로 경건한 사람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것을 하나님께 대한 "예배(worship)"의 행위라고 불렀습니다(22:5). 이것은 성경에서 "예배"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 이것이 진정한 예배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오늘날에도 그러한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향한 아브라함의 헌신을 보시고,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내가 이제야 알았노라"(22:12)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였다는 것이 성경에 처음으로 기록된 것은, 사람이 "하나님이여,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것보다 당신을 더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며,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했을 때입니다. 아브라함은 가족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했기 때문에, 50년 전에 우르를 떠났습니다. 50년이 지난 후에도, 하나님을 향한 그의 사랑은 조금도 식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을 통해서 예루살렘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본이지 않습니까! 당신이 평생 동안 이 길을 갈 수 있다면, 복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곳을 "여호와 이레"라고 이름지었습니다 - 여호와께서 준비하실 것입니다(22:14). 그것은 우리가 인생에서 어떤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생각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그분의 약속은 "하나님이 너희 모든 필요를 채우시리라"(빌 4:19)이기 때문입니다.

이곳 모리아산에서, 아브라함은 2000년 후 언젠가 당신의 아들을 제물로 바치실 하나님의 마음을 어렴풋이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 56절에서 이것을 언급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나의 때 보리라고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하나님은 여기서 아브라함의 태도를 매우 기뻐하셨고, 1000년 후에 바로 이 자리에 성전을 지으라고 명하셨습니다(대하 3:1).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집은 오늘날에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배하는 자들에 의해 건축됩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삶을 마치기 전에, 우리는 24장에서 그의 아들에 대한 그의 염려를 읽습니다. 그는 종을 보내어, 아들의 신부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성경에는 많은 결혼이 언급되어 있지만, 하나님이 정하신 것으로 분명히 보이는 결혼은 두 가지뿐입니다. 하나는 아담의 결혼이었습니다. 하와는 확실히 하나님의 선택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이삭의 결혼이었습니다. 리브가도 하나님의 선택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나에게 "당신은 중매 결혼을 믿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네, 저는 하나님이 주선한 결혼을 믿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은 부모를 통해(이삭의 경우처럼) 또는 부모와 별도로(아담의 경우처럼) 주선하실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선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경건한 아버지라면, 자녀의 결혼 생활에 관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젊은 청년으로서 경건한 아버지를 가질 만큼 운이 좋다면, 그의 충고를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 경건한 아버지가 당신이 결혼하고 싶은 사람에게 "No"라고 말한다면, 기다리십시오. 하나님께서 거기서 당신을 테스트 중일 수 있습니다. 당신의 아버지의 "No"는 잠시 동안만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경건한 아버지의 충고를 기꺼이 존중하는 것을 보시고, 그분이 택하신 짝을 당신에게 주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의 아내를 찾기 위해 그의 종을 보내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를 선택하기 위해 그의 성령을 땅에 보내신 것을 묘사한 것입니다. 이것이 그 복음이 전파되는, 오늘날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그 장을 읽으면, 몇 가지 아름다운 비유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인이 적용한 테스트 중 하나는 소녀가 그의 낙타에게 기꺼이 물을 줄 것인지 알아보는 것이었습니다. 낙타가 물을 많이 마신다는 것은 알고 계시죠? 아브라함의 종이 알고 싶었던 것은, 그 소녀가 은혜롭고 열심히 일하는 소녀인지였습니다. 그리고 리브가는 그런 소녀였습니다. 그녀는 또한 겸손한 소녀였습니다. 24장 16절에서, 그녀가 우물가에 있었던 아브라함의 종처럼 낯선 사람들을 쳐다보는 데 관심이 없었음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물동이에 물을 채우고 집으로 가려고 할 때, 아브라함의 종이 요구했습니다. 그것이 당신에게 필요한 아내의 유형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께서 지상에서도 찾으시는 그리스도의 신부의 유형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종을 올바른 사람인 리브가에게 주권적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 종은 리브가를 데리고 메소포타미아에서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700km(아마도 한 달이 걸렸을 것임)의 길고 위험한 여행을 떠났습니다 - 이 여행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이 세상에서 우리의 여정을 보여줍니다.

그 긴 여행 동안, 종이 리브가에게 무엇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그것이 이삭에 관한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의 긴 여정에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무엇에 대해 말씀하기를 원하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에 대하여 입니다. 교리나 천국에 관한 것이 아니라, 주 예수님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리브가 자신도 이삭에 대해 듣고 싶어했다고 확신합니다. 나는 (리브가가 이삭을 본 것처럼) 그분을 직접 뵙는 날까지, 이 긴 여정에서 성령님으로부터, 나의 놀라운 구세주에 대해 점점 더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리브가처럼, 나도 주님의 장막에 들어가 그분의 아내가 될 것입니다. 당신은 그러한 갈망을 가지고 있나요? 그것이 바로 24장의 내용입니다.

이삭의 삶

그러나 리브가에게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20년 이상 동안 불임이었습니다(참조, 25:20과 25:26).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친히 택하신 아내를 얻었을 때,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까? 네! 그것은 당신의 영적 교육의 일부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어딘가로 인도하실 때에도, 당신은 그곳에서 문제를 만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당신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No.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구해야 한다는 의미일 뿐입니다. 이삭이 기도하자,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리브가가 임신하였습니다(25:21).

리브가에게 쌍둥이가 태어났습니다. 야곱은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나왔습니다(25:26). 야곱의 움켜쥐는 본성은 태, 바로 그것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출구로 먼저 나오도록 돌진했지만 놓쳤습니다. 에서가 먼저 나오므로, 그는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야곱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의 머리로 택하신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땅의 것을 취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약한 사람을 그분의 종으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들은 그를 '움켜잡는 자'라는 뜻의 '야곱'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와 같은 타락한 죄인들에게 얼마나 큰 격려가 됩니까? 우리 주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이삭은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삭의 집은 편애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삭은 에서의 편이었고 리브가는 야곱의 편이었습니다. 그러한 태도는 집을 나누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에서와 야곱은 부모의 편애 때문에 평생 원수가 되었습니다. 한 부모는 한 아들을 편애했고 다른 부모는 다른 아들을 편애했습니다. 그래서 두 소년은 서로를 질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의심할 바 없이 이삭과 리브가도 갈라놓았습니다. 서로를 위해 하나님이 택하신 부부로 시작하여, 서로 깊은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얼마나 아름다웠습니까! 그러나 자녀들에 대한 그들의 편애는 그들의 결혼 생활을 완전히 망쳐 놓았습니다. 가장 슬픈 부분은 이삭의 경우, 이러한 편애의 이유가 좋은 음식에 대한 사랑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에서가 정기적으로 집으로 가져오는 사슴 고기를 좋아했습니다. 야곱은 사냥을 잘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삭은 그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문제를 일으킨) 이삭의 야곱에 대한 축복도 그의 사슴고기를 사랑하는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삭과 같은 대식가는 분명히 가정에서, 아브라함처럼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없습니다. 경건한 아버지도 때때로 매우 어리석게 행동하는 아들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26장 7절에서 이삭의 또 다른 어리석은 행동에 대해 읽습니다 - 그러나 여기에서 그는 그의 아버지의 거짓된 발자취를 따랐습니다. 이삭이 그랄에 있을 때, 그곳 사람들이 그의 아름다운 아내, 리브가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리브가가 그의 누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그의 어머니 사라에 대해 두 차례에 걸쳐 한 거짓말이었습니다(12장과 20장). 그러나 이삭은 아버지의 실수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부모님이 우리보다 먼저 저지른 것과 같은 실수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실수로부터 배우므로, 실수를 반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삭을 칭찬할 것은, 그는 가족 밖의 사람들을 대할 때 아버지의 좋은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삭이 아버지가 전에 판 우물을 다시 열었던 때에 대해 읽었습니다(26:18). 그것은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하여 막아 놓았던 우물입니다. 그 우물들은 아브라함이 팠기 때문에, 그의 소유였습니다. 그래서 우물들은 이제 이삭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랄의 목자들이 이삭의 종들과 다투어 이르되, "이 물은 우리 것이로다!" 하니 그래서 이삭의 종들이 가서 이삭에게 물었고, 이삭은 "그것을 그들에게 주라"고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롯에게 롯이 원하는 땅을 준 것처럼, 이삭도 이곳에서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릅니다. 그런 다음 이삭이 다른 우물을 팠고(21절) 그랄 사람들이 그 우물을 놓고도 다투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삭은 "그것도 그들에게 주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곳을 떠나 다른 우물을 팠습니다. 그랄 사람들은 이제 부끄러워 이 우물을 놓고 싸우지 않았습니다. 이삭이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기를, "마침내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한 공간을 마련해 주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이다." 하였습니다.

"르호봇,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한 공간을 마련해 주셨다"는 구절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삭은 사람들을 밀어냄으로써 자신을 위한 공간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No. 그는 자신의 권리를 포기했고, 주님은 그를 위해 공간을 만들어 주셨고, 그는 번성하였습니다. 이것이 예루살렘을 건설하는 방법입니다.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이 흐름은 아브라함으로 시작하여, 이삭으로 계속되었고 마침내 수십 년 후에 이삭의 손자 요셉에게로 흘러갔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켜야 할 원칙입니다: "나는 세상의 것을 얻기 위해 싸우거나 움켜쥐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과, 세상적 그리스도인들이 원하는 것을 갖도록 내버려 둡시다. 남은 건 내가 취하겠습니다. 그 남은 것 중에서,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공간을 만들어 주시리니, 나는 그 땅에서 번성할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와 그 부를 움켜쥔 자들은 황폐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예루살렘)의 길은 우리 주 예수께서 하신 것처럼, 우리의 이 땅의 권리를 포기하는 길입니다. 그분의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왕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바벨론의 방식은 움켜잡는 방식입니다.

야곱은 움켜잡는 자로 삶을 시작했고, 그가 이스라엘이 되어 "예루살렘 시내"에 있기 전에 회심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바빌론 시내"에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들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적용되는 창세기의 중요한 원리들 중 일부입니다. 기독교계에서 지위와 명예를 추구하는 신자들의 수를 보십시오. 기독교 지도자(또는 장로)가 되기 위한 첫 번째 자격은 자신이 지도자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철저히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시고 우리를 지도자로 삼으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땅에서 번성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한 공간을 만들려고 한다면, 우리는 결코 열매를 맺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확실합니다.

26장 28절을 보면, 이삭의 원수였던 이 사람이 결국 이삭에게 와서,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하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노라"고 말하고, 이삭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그의 원수와 화목합니다. 우리의 적이 배고프다면 우리는 그를 먹여야 합니다. 그것이 예루살렘 시내의 길입니다.

26:34,35에서, 우리는 이렇게 읽습니다: "에서는 40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과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삭과 리브가에게 근심을 안겨 주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삭이 그의 아들을 위한 파트너를 찾는 데, 아브라함만큼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에서가 마음에 드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그는 편애와 편견으로 에서를 망쳤습니다. 이삭은 에서가 선택한 아내보다 에서가 가져온 음식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것들은 오늘날 우리를 위한, 성경의 경고 중 일부입니다.

생애 말년에, 이삭의 시력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에 대해 심각한 것은 없습니다.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눈이 약해집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삭의 영적 시력도 어둡고 흐릿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늙어감에 따라, 우리의 겉사람은 부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속 사람은 더 강해져야 하고, 우리의 영적인 시력은 날카로워져야 합니다. 그러나 이삭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두 자녀가 리브가의 태에 있을 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형에게 축복을 주기로 결심합니다. 거기에서 그의 어리석음을 볼 수 있습니까? 그는 27:2,3에서 에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곧 죽을 것이다. 가서 너의 활과 화살통을 챙겨서, 나를 위해 사슴 고기를 좀 가져오너라." 한쪽 발이 무덤에 있는 이 노인은 여전히 음식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가 영적 시력을 잃은 것도 당연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 27절에서, "내가 내 몸을 복종하지 아니하면, 남에게 전파할지라도 스스로는 도리어 버림을 받을 것이요"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때때로 음식을 금식하라고 권고하는 이유입니다 -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식탐하는 욕망과 성적 정욕을 통제하여, 배가 아닌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습니다. 음식에 대한 사랑이 이삭을 영적으로 눈멀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설교자들을 영적으로 눈멀게 만든 것도 좋은 음식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삭은 이를 테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에서야, 가서 나에게 이 사슴 고기를 가져오너라. 그것이 맛있으면, 내가 너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주겠다. 나는 하나님께서 수년 전에 너의 동생이 장자의 명분을 받을 것이라고 나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이 수년 전에 말씀하신 것에 관심이 없다. 너는 나에게 좋은 아들이었고, 항상 좋은 사슴 고기를 가져 왔다. 그러니 평생 나에게 좋은 음식을 가져다 준 적이 없는 네 동생에게 축복을 주는 대신에, 너에게 축복을 준다면 하나님께서 이해하실 것이라고 확신한다!!" 여기서 이삭의 어리석음의 깊이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은 이삭의 계획이 실패하도록 보장하셨습니다.

리브가는 야곱의 편이었습니다. 리브가는 동생이 축복을 받아야 한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이삭이 에서에게 축복을 주리라는 말을 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분의 약속을 이루실 수 있도록 도와줄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녀는 야곱에게, "에서가 사슴 고기를 잡으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그동안 내가 너희 아빠가 좋아하는 맛있는 카레를 만들어 줄게. 너는 동물 가죽을 입고 털이 많은 에서인 척하고 카레를 아버지에게 가져다 드려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기 위해 리브가의 모든 교활한 책략이 필요하셨습니까? 리브가는 하갈과 관련하여 아브라함이 저지른 동일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느꼈습니다: "하나님은 도움이 필요하십니다! 약속된 씨는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나는 하갈에게 들어가 아들을 낳아야 합니다." 여기서 리브가는 비슷한 말을 합니다: 에서가 축복을 받을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지금 약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내가, 야곱이 그것을 잡도록 도와야 합니다." 제가 당신에게, 하나님께서 그분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확신시켜 드립니다. 그분은 분명히 우리가 그분의 일을 진척시키기 위해, 속이고 거짓말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가 좋다면, 거기에 도달하는 방법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목표는 영적인 것이어야 하고, 목표에 이르는 길 또한 영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얻기를 원하신다면, 그가 그것을 얻는 방법 역시 영적이어야 합니다. 같은 방식으로: 복음이 모든 피조물에게 전파되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우리가 하는 방식도 영적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수단을 가리지 않고 전도하거나 교회를 세워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 경건한 목표에 도달하는 경건한 방법이어야 합니다. 경건한 방법을 선택한 결과로 다른 사람들이 불경건한 방법으로 할 수 있는 것만큼 우리가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영적인 원칙을 타협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무와 풀과 짚으로 만든 큰 구조물을 짓다가 마지막 날에 불타 버리는 것보다, 금과 은과 보석으로 만든 작고 적은 구조물을 세우는 데 평생을 바치는 것이 더 낫습니다!

당신은 어떤가요? 당신은 경건한 목표를 향해 경건한 방식으로 건물을 짓고 있습니까?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멸시했습니다. 27장 34절에, 그가 축복을 놓쳤다는 말을 듣고, "심히 크고 쓰라린 울음으로 부르짖었다"라고 말합니다. 이제야 그는 여러 해 전에 장자권을 팔기로 한 결정을 후회했습니다. 그는 그때 야곱에게 죽을 얻어먹고 나중에 장자권을 얻음으로써 그의 단순한 마음을 가진 동생 야곱을 능가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침내 에서를 능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을 그들 스스로의 간사함에 빠지게 하는 방법"(고전 3:19)을 아십니다. 그분은 야곱이 장자권을 갖도록 보장하셨습니다. 따라서 모든 영리한 사기꾼은 조심하십시오. 당신은 지금 심는 대로 하나님으로부터 거두게 될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6,17절은 말합니다: " 음행하는(immoral) 자나, 한 끼 식사를 위하여 자기의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경건하지 않은 사람이 되지 말지니, 너희가 알거니와 그 후에 그가 복을 상속받기를 구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당신은 젊을 때, 인생에서 선택을 합니다. 당신은 젊을 때, 특히 도덕적(moral) 문제와 관련하여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그래서 부도덕한 (immoral)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유입니다. 당신은 장자권, 영원한 축복, 영적인 축복을 원하십니까, 아니면 육신의 필요를 충족시켜 줄 일시적인 축복, 당장 먹을 수 있는 죽 한 그릇을 원하십니까? 그것은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이 직면하고 있는 선택입니다 - 영원하고 영적이며 미래에 있는 것과 - 그리고 -일시적이고 물질적(육체적)이며 즉시 사용할 수 있는 것 사이의 선택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 갈림길에 자주 섭니다. 모세는 거기에 왔을 때, 죄의 쾌락과 애굽의 부와 바로의 손자가 되는 영광을 거절했습니다(히 11:24-26).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실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중 많은 이들이 바로 지금 그 갈림길에 있습니다. 당신은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제가 이런 것들을 조금만 즐기게 두세요. 나는 결국에는 회개하고 영적인 축복도 받게 될 것입니다." 나는 당신이 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겠습니다. 에서처럼, 당신도 심은 대로 거두게 될 것 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라"(히 12:15)는 말씀에 따라 지금 올바른 선택을 하세요. 우리 중 누구도,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져서 에서와 같은 결말을 맺지 않기를 바랍니다.

야곱의 삶

28장에서 우리는 야곱이 집을 떠나는 이야기를 읽습니다. 그는 에서의 분노를 피하기 위해, 리브가에 의해 그녀의 오빠 라반의 집으로 보내졌습니다. 야곱은 아직 결혼하지 않았으며, 이때 아마 70세쯤 되었을 것입니다.

28:11에, "해가 졌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지리적인 사실을 언급하는 것이지만, 영적으로 말해서 정말로 야곱의 삶에도 해가 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세상을 위해 살았고, 움켜잡았고 속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로 야곱을 만나셨고, 그의 삶에 큰 목적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 (13,14절).

이것을 "아브라함의 축복"(갈 3:14)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그분은 그에게 "내가 네게 복을 주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니라(12:2,3)"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여기에서 야곱에게 그것을 반복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4절에, 이 축복은 우리가 성령 충만할 때, 우리의 것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령 충만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분명히 우리가 방언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선물 중 하나일 뿐입니다. 불행하게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것을 너무 많이 해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된 목적은 아닙니다. 주된 목적은 육체적인 치유도 아닙니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에서 고침을 받지 못했습니다. 성령 충만의 주된 목적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셔서, 우리가 지상에서 만나는 모든 족속에게 축복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갈 3:14).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를 충만케 하실 때,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축복이 될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축복받지 않고는 아무도 우리를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향수를 많이 뿌린 숙녀들과 같습니다. 당신이 그들로부터 몇 피트 떨어져 있어도, 당신은 그들의 향수 냄새를 맡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사람들은 그들의 향수 냄새를 맡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가 한 가정에 들어간다면, 5분 동안 방문하든 5일 동안 방문하든, 그 가정을 축복할 것입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의 축복"입니다 - 모든 곳에서 목마른 사람들에게 축복으로 흐르는 생수의 강입니다.

그날 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너를 향한 나의 부름이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를 충만케 하시면, 그분은 친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15절). 그분은 야곱에게,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지키며, 너를 돌아오게 하고 내가 네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이 잠에서 깨어 말하였습니다. "이곳은 얼마나 멋진 곳인가! 이곳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집, 벧엘, 하늘의 문이다!"

그러나 이제 그가 하나님의 이 환상적인 약속에 어떻게 반응했는지 보십시오. 그는 효과적으로 말합니다(20절), "주님, 나는 그런 모든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이 여행에서 저를 잘 돌봐주시고, 먹을 것과 입을 옷을 충분히 주시고, 도중에 일어나는 사고와 강도로부터 저를 보호해 주십시오. 나를 안전하게 아버지의 집으로 데려다 주십시오. 그게 내가 원하는 전부입니다. 나는 땅의 모든 족속에게 축복이 되는 데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구한 이 물질적인 축복을 저에게 주시면, 제 수입의 십일조를 당신께 바치고, 당신을 위해 집을 짓겠습니다. 주님, 제 사업을 축복해 주십시오. 제 이익의 10%를 당신께 드리겠다고 약속합니다."

불행하게도 그것은 오늘날에도 하나님을 향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반응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아브라함의 축복을 받아, 어디로 가든지 축복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는 어떠한가요? 그들은 "주님, 월급 많이 받고 편안한 직장을 주옵소서. 내 병을 고치소서. 우리 가족을 위해 좋은 집을 지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내 아이들을 부유하고 잘생긴 파트너와 결혼시켜주세요. 그리고 모든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십시오. 그리고 우리는 당신에게 우리의 모든 수입의 일정 비율을 드릴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입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하늘에 있는 모든 신령한 복"으로 그들을 부르셨을 때, 땅의 복에 안주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가장 좋은 것을 놓쳤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영적이고 영원한 축복을 상속하도록 부르셨을 때, 물질적이고 일시적인 것에 안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영원히 후회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정확히 야곱과 같습니다. 그러한 신자들에게도 실제로 해가 졌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야곱이 본 사다리를 자기자신의 묘사로 언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사닥다리이십니다(요 1:51). 그리고 우리는 그 사다리의 발이, 우리 머리 위로 멀리 매달려 있는 대신에, 바로 내려와 땅에 닿았다는 사실에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시기 위하여, "모든 것에서 우리와 같게 되셨습니다"(히 2:17).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그를 축복하기 위해 그를 부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떻게 그렇게 하십니까? 그분은 야곱이 자신보다 교활한 사람인 라반을 상대하도록 허용하십니다. 아버지와 형을 속였던 야곱이 이제 자기를 속이는 자를 발견합니다.

라반이 어떻게 야곱을 속여 라헬 대신 레아와 결혼하게 했는지 보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그 당시 그들은 결혼식 전에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래서 교활한 라반은, 사람들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이지 않도록 "밤에 결혼식을 올리자"고 말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잔치에서 야곱을 완전히 취하게 하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야곱이 알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런 다음 라반은, 두꺼운 베일을 쓴 한 소녀의 손에 야곱의 손을 넣고, 야곱에게 그녀와 결혼할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라헬이라고 생각한 야곱은 "네"라고 말하고 결혼했습니다! 밤이 깊어 그는 천막에서 옆에 누운 신부의 얼굴을 볼 수 없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그는 그것이 레아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야곱은 그의 적수인 라반을 만났고 마침내 속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아내를 위해 7년 동안 일했습니다!

이제 그는 라반에게, "나는 라헬을 원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라반은 "미안하다. 이 근처에서는, 우리는 먼저 언니를 결혼시켜야 한단다. 네가 라헬을 원한다면, 너는 나를 위해 7년을 더 일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야곱은 "OK"라고 말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야곱의 인간적인 힘을 꺾기 시작하셨습니다.

제가 어린 신자였을 때, 제 마음을 축복해준 아름다운 구절이 있습니다. 29장 20절에,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을 일하되, 그녀를 사랑하므로,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이 한 일이 사무직이 아니었습니다. 양을 돌보며, 들판에서 힘든 일을 했습니다. 낮에는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일하고, 밤에는 추위 속에서 밖에서 자야 했습니다. 그는 심지어 건강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라헬에 대한 야곱의 사랑이 너무나 뜨겁고 강했기 때문에 - 7년이 그에게는 며칠 같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야곱이 한 여자를 위해 그렇게 섬길 수 있었다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주님을 내가 어떻게 섬겨야 하는가?" 주님을 섬긴 지 56년이 지난 오늘, 저는 이 세월이 제게 며칠 같았음을 간증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돈이나 명예나 편안함나 명성을 구하지 않고, 사랑으로 주님을 섬길 때, 주님을 섬기는 기쁨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주님을 위한 수고가 무겁습니까? 그것은 마음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30장. 마침내 야곱은 그 대가로 라반을 속이고, 비뚤어진 방법으로 그의 양을 훔치기 시작합니다. 그는 충분한 부를 축적한 후, 어느 날 몰래 떠날 계획을 세웁니다(31장). 그런 다음 그는 에서가 자기를 만나러 온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는 에서가 자신을 죽이러 올 것이라고 상상하기 때문에,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32장에서 놀라운 것을 봅니다. 야곱은 20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똑같은 나이 많은 움켜잡는 자이고 모사꾼이었지만, 하나님의 천사는 야곱이 가는 길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그런 이기적인 사람에게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이 땅의 회사가 한 사람이 20년 동안 자기들을 속이고 명령을 무시하는 것을 본 후에 그를 고용하겠습니까? 지상의 모든 회사는 그러한 사람을 해고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의 수많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나 저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지금도 그분의 메신저를 통해 오셔서 우리를 만나고 계십니다. 그것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천사'라는 단어는 '전달자'로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길에 전달자를 보내시는 것은, 당신에 대한 그분의 사랑의 표시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포기하실 때, 그것의 한 가지 특징은 당신에게 메시지를 전할 전달자를 더 이상 보내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특히 우리가 어떤 위험이나 악에 직면하게 될 때, 그분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 그분의 전달자를 우리에게 보내십니다.

야곱은 에서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어떻게 하면 피할 수 있을지 궁리했습니다. 그는 그가 좋아하지 않는 세 아내를 맨 앞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라헬과 자신을 맨 뒤에 두었습니다 - 그래서 다른 모든 사람들이 죽더라도, 그와 라헬은 달아나려 했습니다! 야곱은 여전히 예전과 똑같은 나이 많은 항상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이기적인 사람을 뽑아 '이스라엘'로 변화시키신 것을 보면 우리에게 큰 격려가 됩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하나님이 어떻게 야곱을 만나셨고, 그와 씨름하셨고, 그의 고관절을 탈골시키는지 읽었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그분이 원하시는 곳으로 데려가시기 위해 과감한 일을 하십니다. 그분은 그를 깨뜨리며, "이제부터 너는 하나님의 왕자(이스라엘)가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32:28). 언제 하나님께서 그를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실 수 있었습니까? 60~70년 동안 그와 씨름하시다가, 마침내 그의 엉덩이를 탈골시키고, 그를 철저히 부서뜨린 후에야 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나를 이제 가게 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야곱은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돈을 움켜쥐고, 장자의 명분을 움켜쥐고, 재산을 움켜쥐고, 여자를 움켜쥐고, 양을 움켜쥐며 평생을 보내던 이 남자는, 이제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붙잡습니다. 그는 사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돈과 여자와 재산과 세상의 많은 것들을 위해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당신만을 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도 그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면 그분은 야곱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는 더 이상 움켜잡는 자나 속이는 자(야곱)로 불리지 않을 것이다. 네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으니, 하나님의 왕자(이스라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야곱은 언제 이기는 자가 되었습니까? 그의 엉덩이가 부러졌을 때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성경의 처음부터 바로 볼 수 있는 위대한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기 전에 우리를 깨뜨려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왕자가 된 야곱처럼, 그의 지팡이에 기대는 상한 자이지, 위대하고 능력 있는 'Mr. 유니버스'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당신을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기 전에, 먼저 여러분을 깨뜨려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32장 31절에서 이 놀라운 말씀을 읽습니다, "그때에 해가 떴습니다." 다시 한 번 지리적 사실이지만 - 야곱의 삶에서도 영적으로 사실입니다. 20년 전에 해가 그에게 졌습니다. 이제 해가 떴습니다.

34장. 야곱에게는 12명의 아들과 딸 디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디나는 어느 날 부도덕한 남자들로 가득 찬 지역을 혼자 산책하기로 결정했을 때 야곱을 많은 문제에 빠뜨렸습니다. 이 장에는 오늘날에도 그러한 부도덕한 남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모든 어린 소녀들에게 경고가 있습니다. 모든 어린 소녀들은 이 글을 읽고 디나가 자신과 아버지에게 초래한 문제를 보아야 합니다. 그녀는 부도덕한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을 돌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그녀를 붙잡아 강간했습니다. 그녀의 오빠들은 나가서 그의 도시에 있는 모든 남자들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 지역에서 야곱의 이름이 악취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 모든 것은 한 소녀가 부도덕한 지역에서 혼자 방황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들을 귀 있는 여자는 들으십시오.

35장. 주님은 이제 야곱에게 베델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야곱이 이 모든 문제에 휘말린 것도 그의 잘못이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브니엘에서 그를 만나신 후, 곧바로 베델로 돌아갔다면, 이 슬프고 폭력적인 막간극(34장)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삶

이제 요셉의 삶을 살펴봅시다. 그는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열한 번째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야곱이 그의 아버지(이삭)가 그 전에 저지른 것과 같은 실수를 범하는 것을 봅니다. 그 역시 요셉을 편애합니다! 37:3: "이스라엘(야곱)은 요셉이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모든 아들보다 그를 더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다양한 색깔의 튜닉을 만들어주었습니다." 당신의 자녀를 파멸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 중 한 명에게 편파적이 되는 것과 다른 이들에게 주지 않는 특별한 선물을 그들 중 한 명에게 주는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 아버지의 집에서 편애가 행한 일을 이미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집에서 그것을 반복합니다. 그 결과 열 명의 큰아들들은 요셉을 시기하여 거의 죽일 뻔했습니다. 편애는 매우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부모가 다른 자녀들 앞에서 한 자녀를 칭찬하면, 그 결과는 어떠합니까? 다른 아이들은 그 좋아하는 아이의 적이 됩니다 - 때로는, 평생 동안 말입니다. 누구의 잘못입니까? 어리석은 부모의 잘못입니다. 성경에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한 경고가 있습니다.

37:18. 우리는 요셉의 형들이 어떻게 그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는지 읽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형제 중 한 사람이 그 계획을 중단시키고, 그 당시 지나가고 있던 노예 상인들에게 요셉을 팔아넘기는 것으로 바꾸게 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봅니다. 그 당시 노예 상인들을 그곳에 보내신 분은 누구였습니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 노예 상인들이 요셉이 죽임을 당할 때 정확히 그곳에 도착할 수 있도록 여행 시간을 정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노예 상인들은 애굽으로 가고 있었는데, 그곳은 바로 하나님께서 요셉이 가기를 원하시는 곳이었습니다!! 요셉의 삶에서 거듭거듭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보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삶에 대한 계획과 목적 또한 가지고 계시며, 아무도 그것을 좌절시킬 수 없습니다. 당신의 질투심 많은 형제도, 당신의 어리석은 아버지도, 그 누구도 아닙니다. 그것이 우리가 여기서 보는 것입니다.

요셉이 17살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이미 꿈에서 요셉에게 그의 삶의 목적이 있음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젊은이가 하나님께 매우 민감해서, 대부분의 10대 청소년들이 더러운 꿈을 꾸는 나이에 하나님으로부터 꿈을 갖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젊은이 여러분, 나이 많은 형제들이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섬길 기회를 주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진심으로 하나님께 복종한다면, 아무도 당신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망칠 수 없습니다. 내가 젊었을 때, 나의 설교-은사를 시기하는 나이 많은 형제들이,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을 나에게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누구의 허락도 필요 없는 거리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교회 모임에서,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스스로 겸손하고 잠잠하고, 장로들을 결코 비방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깨뜨리신 것처럼 저를 깨뜨리신 세월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장로들 중 어느 누구도 내 인생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할 수 없었습니다.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문을 여셨고 제 인생에 대한 그분의 계획이 이루어졌습니다. 나는 당신을 격려하기 위해 그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불평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망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당신 자신입니다. 그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요셉의 형들의 시기심을 이용하여 요셉을 애굽에 팔게 하심으로써, 요셉의 삶에 대한 그분의 계획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대적하여 계획하는 악을, 우리의 선과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작동하게 하십니다. 할렐루야!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행하려고 하는 악으로부터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셨다면, 그 자체로 엄청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좋은 일을 하십니다! 그분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행하는 바로 그 악으로 우리 삶을 위한 그분의 계획을 성취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사탄에게 형세를 역전시키는 것이 훨씬 낫지 않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시기하지 않고 잘 대해 주었다면, 요셉은 결코 애굽에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셉은 어떻게 애굽에 갔습니까? 1단계: 그의 형제들은 그를 시기했습니다. 2단계: 형들은 그를 노예 상인들에게 팔았습니다. 3단계: 노예 상인들은 그를 이집트로 데려가 그곳에서 팔았습니다. 그리하여 요셉을 이집트로 데려가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었습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해를 입히기 위해 행하는 악한 일 중 일부는 궁극적으로 당신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할 뿐입니다 - 당신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롬 8:28). 당신은 몇 가지 시련을 겪을 수 있습니다. 요셉도 종살이를 하며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했습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말할 것입니다, "요셉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기도 합니다. 내가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면, 많은 사람이 나를 시기할 수 있고,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악을 계획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내 삶에서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는 것을 방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적을 행하시는 우리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38장은 요셉의 이야기에서 약간 벗어난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유다가 그의 며느리 다말과 간음하는 것과, 다말이 쌍둥이를 낳는 것을 읽습니다(38:29,30).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그 쌍둥이 중 하나인 베레스를 통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근친상간과 간음의 후손이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 족보를 의도적으로 선택하셨습니다(마 1:1-3). 왜 그런 죄악된 혈통을 선택하셨습니까? 우리 중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근친상간 가계를 통과하기로 선택했을까요? 주님은 죄인, 심지어 근친상간자까지도 구원하려 부르러 오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하늘에서 그것을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가계에서 가장 악한 범죄자들과 동일시하셨습니다.

39장은 매력적이고 능력 있는 여인에게 강한 유혹을 받았을 때, 하나님께 충실했던 한 젊은이의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음행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 그것에서 도망치는 것입니다(고전 6:18 참조).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요셉이 한 일이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그에게 간음을 강요했습니다(39:7). 그러나 요셉은 거절했습니다. 그는 그녀에게 가까이 가는 것조차 거부했습니다(10절). 그는 단지 "아니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혹의 근원에서 도망쳤습니다. 그 악한 여인이 그에게 가까이 오자마자, 요셉은 다른 곳으로 떠났습니다. 당신을 유혹하는 사람들과 늘 붙어 있으면, 유혹을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유혹을 피하는 그런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어느 날 그녀는 집에서 그와 단 둘이 있을 때, 그를 붙잡았습니다. 이번에는 그는 몸을 빼서, 그녀가 그의 상의를 움켜쥔 채로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녀는 너무 화가 나서 요셉이 자신을 강간하려 한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화가 나서, 요셉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요셉이 겪은 일들을 보십시오 - 형들의 시기와, 악한 여인의 거짓 고발과, 감옥에 갇힘. 그 당시 감옥은 쥐, 벌레, 바퀴벌레가 사방을 기어 다니는 끔찍한 지하 감옥이었습니다. 그런데 21절에 보면, 온갖 기는 것 외에, "여호와께서도 또한 요셉과 함께 계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차이를 만들었습니다. 주님이 당신과 함께 하시면, 당신이 온갖 불편함에 둘러싸여 있어도 문제 없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요셉이 원했던 전부였습니다.

그곳 감옥에서 그는 파라오의 술 관원을 만나, 파라오를 소개받게 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계획이 어떻게 천천히 이루어지기 시작하는지 봅니다. 그것은 단지 보디발과 그의 아내가 그에게 행한 악으로부터 하나님께서 요셉을 보호하신 것만이 아닙니다. 그분은 그들이 요셉에게 행한 악으로 하나님의 완전한 계획을 이루도록 하셨습니다. 요셉이 그 감옥에 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바로의 집사를 만나 바로를 소개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요셉이 처음에 이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면,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내내 주님을 찬양했을 것입니다 - 나중에 바울과 실라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보았기 때문에, 빌립보 감옥에서 주님을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연구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행하는 악으로 인해 곤경에 처할 때마다 주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언젠가, 사람들은 많은 거짓 고발로, 우리도 감옥에 넣을 수 있습니다. 나는 이집트인들이, 이집트에서 가장 정직한 사람인, 이 사람에 대해 퍼진 모든 거짓 이야기를 믿었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참된 종들에 대한 많은 거짓 이야기가 퍼집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잠잠히 있으십시오. 당신의 명성을 지키는 일은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그분은 적절한 때에 당신을 변호하실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공경한다면, 아무도 당신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좌절시킬 수 없습니다.

나는 당신이 요셉이 파라오의 술 맡은 관원장과 어떻게 접촉하게 되었는지 주목하기를 바랍니다. 요셉은 감옥에서 걱정할 만큼 자신만의 문제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느 날 감옥에 새로 온 두 사람이 슬퍼 보이는 것을 보고, 자신의 슬픔을 잊었습니다. 요셉은 간수에 의해 모든 죄수를 관리하도록 임명되었고, 그래서 그는 이 두 죄수에게 그들이 그렇게 낙심해 보이는 이유를 물었습니다(40:7). 그렇게 해서 그는 그들의 꿈을 정확하게 해석했고, 따라서 어느 날 그들 중 한 사람(술 맡은 관원)을 통해 파라오의 꿈을 해석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께 충실하고, 자신의 슬픔을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들을 염려할 수 있는, 그분의 종들을 위해 문을 여는 놀라운 방법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사건에서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슬픔에 사로잡히지 맙시다. 이 세상의 다른 궁핍한 사람들에게 마음을 엽시다.

마침내 요셉은 파라오 앞에 섰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하나님의 완벽한 때였습니다. 성경은 "그들이 족쇄로 요셉의 발을 괴롭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그의 몸에는 쇠사슬이 채워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까지 요셉은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그를 자유케 하셨습니다"(시 105:18,19 - 자유로운 의역). 하나님은 항상 시간을 지키십니다. 그분은 결코 늦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시련에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특정한 기간이 있습니다. 그 시간 동안, 그분은 우리를 시험하실 것입니다. 그 시간이 끝나면, 그분은 우리를 위해 자유를 명령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에, 우리가 신실했다면, 우리 몸에 쇠사슬이 채워질 것이요, 그리고 우리는 믿음 안에서 견고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상황을 사탄에게 뒤집어 놓으시고, 사탄이 우리에게 가하는 바로 그 해악을 사용하여 우리를 강하게 하십니다. 할렐루야!

그 땅에 기근이 들어 그의 형들이 굶주리자 하나님이 20년 전에 그에게 보이신 그대로 와서 요셉에게 절하였던 일을 당신은 알거니와,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을 지키십니다.

43:1,2: 그 땅에 기근이 심했을 때, 야곱은 그의 아들들에게 이집트로 가서 식량을 구하라고 말했습니다. 기근이 들 때마다 어디에서든지, 당신은 기근 전에 지혜로웠던 사람들에게 가서 양식을 구해야 합니다. 7년 대풍년에 요셉은 지혜로웠습니다. 그는 음식을 저장했습니다. 그러므로 형통할 때에 게으르던 자들은 이제 그에게로 와야 합니다. 성경은 "게으른 사람아, 개미에게 가서, 그것을 배워라 - 여름에, 겨울 동안에 먹을 것을 저장하는 법을 배우라"(잠 6:6-8)고 말씀합니다.

이 진리를 영적으로 적용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그로 인해 영적으로 부유해질 기회가 충분히 있다면, 이러한 때에, 당신의 시간을 현명하게 사용하십시오. 그러면, 여러 해 후에 삶의 압박 때문에 말씀을 공부할 시간이 많지 않을 때, 의지할 수 있는 충분한 지혜가 생길 것입니다. 당신이 지금 쌓아 두는 하나님의 말씀의 지혜는 당신을 완전히 만족시킬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도 나눌 수 있는 것이 많을 것입니다.

나는 인도 해군 장교로 복무하던 미혼시절에, 성경을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나는 성경 학교에 가지 않았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발 앞에서 성경을 공부했습니다. 그 습관은 또한 나를 많은 유혹에서 멀리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많은 시간이었습니다 - 왜냐하면 저는 총각으로서 충분한 시간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 여유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당신이 시간이 많은 때에 게으르면, 당신은 기근의 날에 후회할 것입니다. 그 교훈을 배우고 자신에게 적용하십시오.

요셉은 형제들을 경건하게 대했습니다. 45장 5절에서 그는 "당신들보다 먼저 나를 보내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다시 7절에서, 그는 "하나님이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습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8절에서 다시 한 번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습니다." 그는 형제들에게 "나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판 것은 당신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나를 감옥에 보낸 것은 보디발의 아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길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다면 참으로 우리는 복이 있습니다 - 심지어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행하는 악에서도.

이 영광스러운 진리를 보셨습니까? 절대로, "이 사람이 나를 해치고 있다" 또는 "그 사람이 나를 해치고 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당신에게 어떤 일을 하도록 허락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요셉은 한때 자신을 노예로 팔았던 형들을 위해 큰 잔치를 준비했습니다. 그는 또한 한때 그를 위해 구덩이를 예비했던 이 형제들에게 애굽에서 가장 좋은 땅인 고센 땅을 주었습니다(46:34)!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의 태도입니다.

우리는 또한 요셉이 그의 아버지에 대해 가졌던 엄청난 존경심을 봅니다(46:29). 요셉은 세상의 두 번째 통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맞으러 나가 존경을 표했습니다. 경건한 사람은 항상 그의 부모를 공경하고 존경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야곱이 하나님의 예언자로서의 생애를 마감하는 모습을 봅니다. 47장 10절에서 그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통치자인 파라오를 축복한 다음 자신의 아들들을 축복합니다. 요셉은 그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야곱에게 데려오며, "오른손은 므낫세(형)의 머리에, 왼손은 에브라임(동생)의 머리에 얹으세요"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는 손을 교차하고, 형보다 동생을 축복했습니다. 그의 눈도 이제 어두워졌습니다(그의 아버지 이삭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러나 야곱은 그의 아버지와 달리, 영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축복할 사람과 축복하지 않을 사람을 알고 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안락한 삶을 살았던 아버지와 달리, 야곱은 살면서 많은 시련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적인 시력을 날카롭게 하시는 것은 시련을 통해서입니다.

야곱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언한 최초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아들 유다에게, 유다의 사자가 그의 씨를 통하여 와서, 다스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49:9,10).

50:20에서, 우리는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이 말한 것과 유사한 말을 요셉이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여러분은 나에게 악의를 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이 구절은 구약성경의 로마서 8장 28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놀라운 시작의 책인 창세기의 끝을 보게 됩니다. 이제 이 책의 마지막 구절을 봅시다. 창세기는 "태초에 하나님"이라는 말로 시작했지만, "이집트의 관"이라는 말로 끝납니다. 이것은 인간의 죄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이집트의 그 관에서,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을 위한 놀라운 구속을 가져오셨습니다!

할렐루야!!

* 지구의 창조와 재창조에 대한 더 자세한 연구를 보려면, 다음 기사에서 "지구의 창조와 사탄의 기원"을 읽어보십시오: The Creation Of The Earth And The Origin Of Satan | cfcindia, Bangalore

†족장들의 연대표가 여기에 주어져 있습니다.

장 2
출애굽기

이스라엘 국가가 탄생하다

창세기가 '시작의 책'이라면, 출애굽기는 '국가(이스라엘 국가)의 탄생'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창세기에서 이 국가의 시작을 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것을 본격적인 국가로 봅니다. 처음 15장까지는 우리는 그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것과, 애굽에서 구출된 것에 대해 읽습니다. 책의 나머지 부분은 율법을 주신 것, 광야에서의 약간의 시간, 하나님께서 그분의 성막을 짓기 위해 주신 계획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집트로부터의 구속

1장에서, 우리는 파라오가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괴롭혔다는 것을 읽습니다. 그들은 수가 많아지고 있었고, 그는 그들이 마침내 그에게 반항하고 그를 위해 일하지 않을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태어난 모든 사내아이를 즉시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제 그 계략은 마귀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사탄은 항상 유대인들을 죽이기 위해 그들을 뒤쫓았습니다 - 인류 역사상 여러 번 말입니다. 이것은 그러한 경우의 첫 번째에 불과했습니다.

우리는 지난번 연구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사탄의 계획으로부터 보호하실 뿐만 아니라, 더 나은 일을 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분은 사탄에게 상황을 역전시키시고,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사탄의 일을 사용하십니다. 그것은 단순히 사탄을 멸하거나 사탄의 활동을 막는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마귀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실 뿐만 아니라, 사탄이 그분을 파괴시키기 위해 행하는 바로 그 일을 사용하셔서 그분의 능력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이것의 가장 좋은 예는 갈보리입니다 - 그곳에서 사탄은 예수님의 적들을 끌어들여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가 바로 사탄 자신이 패한 곳이 되었습니다!! 사탄의 계획은 항상 그래왔듯이 역효과를 낳았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위해 사탄의 상황을 역전시키셨습니다. 우리가 그분 앞에서 겸손한 마음으로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산다면, 그분은 우리에게도 똑같이 하실 것입니다. 마귀와 그의 대리자들이 우리에게 해를 끼치기 위해 무엇을 하든지 그들에게 되돌아갈 것이며 - 우리 삶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될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주요 메시지 중 하나이며 - 우리는 그것이 성경에서 반복해서 일어남을 봅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로가 남자 아기를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모세의 어머니가 모세를 작은 바구니에 담아 강물에 띄우며 하나님께 기도한 것을 봅니다. 그 사악한 칙령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결코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그렇게 했기 때문에, 파라오의 딸이 모세를 데려갔고, 하나님이 그의 생애의 첫 40년 동안 그를 훈련시키기를 원했던 바로의 궁전에서 자랐습니다. 파라오가 그 악한 법을 통과시키지 않았다면,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며, 그때 동안 모세는 또 다른 노예로 성장했을 것입니다. 당신은, 사탄이 행하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목적이 어떻게 성취되는지 보고 있습니까?

여기에는 우리 모두를 위한 큰 교훈이 있습니다 - 그것은 교회 역사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고자 하실 때마다, 그분은 항상 한 사람에게서 시작하십니다. 그분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기 전에 적합한 사람을 찾으셔야 했습니다. 그 남자의 훈련은 80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학문적 훈련만이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애굽 최고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을 할 자격을 갖추지는 못했습니다. 사도행전 7장(22절)에서, 스데반은 모세가 말과 일에 능하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힘센 사람이었고, 40세에 유창한 연설가였습니다. 그는 위대한 군사 지도자이자, 매우 부유한 사람이었고, 세계에서 가장 발전된 국가가 줄 수 있는 최고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 이집트는 당시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을 섬길 자격이 없었습니다. 스데반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일으키셨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를 그들의 지도자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모든 세상적인 명성과 능력은,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준비하신 일을 위해, 그를 준비시킬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성경 지식과 음악적 재능과 충분한 돈이 있기만 하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틀렸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생애에서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이 세상이 그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40년은 하나님의 봉사를 위해 그를 준비시킬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온전케 하시려고, 그가 궁궐과는 전혀 다른 환경인 광야에서의 또 다른 40년을 보내게 하셔야 했습니다. 그의 인간적 힘은 부서져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에게 양을 돌보게 하시고 장인과 동거하며 장인을 위하여 40년 동안 일하게 하심으로 이를 이루셨습니다. 1년만이라도 장인과 동거한다는 것은 남자로서는 굴욕적일 수 있다! 저는 인도의 많은 기혼 여성들이 평생 시아버지와 함께 산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남자가, 아내의 아버지와 함께 살아야 하고 그를 위해 일해야 하는 경우는 다릅니다. 그것은 남자에게 상당히 굴욕감을 주는 경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이 모세를 부수신 방법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야곱도 깨뜨린 방법임을 기억하십시오. 그 역시 20년 동안 장인과 함께 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장인과 장모를 사용하여 그분의 자녀를 깨뜨리십니다.

모세는 애굽의 모든 대학이 가르치지 못한 것을, 광야에서 양을 치고 장인을 섬기며 배웠습니다. 그 40년의 끝에서, 모세는 너무 부서져서, 한때 매우 유창하고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가 이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저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저는 말을 제대로 못합니다. 당신의 백성을 이끌 다른 사람을 보내 주십시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침내 너는 준비되었다. 내가 이제 너를 바로에게 보내리라"(4:10~17).

야곱과 모세에게서 우리가 배우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당신이 준비되었다고 생각할 때, 당신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당신이 능력 있고, 강하고, 지식이 있고, 말하고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할 수 있고, 하나님을 위해 놀라운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적합하지 않다. 나는 네가 부서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단다." 그 과정이 야곱에게는 20년, 모세에게는 40년, 베드로에게는 3년, 바울에게는 적어도 3년이 걸렸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걸릴까요?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 복종하는 법을 얼마나 빨리 배우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1학년에서 12학년까지 학교를 다니는 데 얼마나 걸립니까? 12년입니다 - 매년 통과하는 경우. 그러나 학교의 12년을 마치는 데 16년이 걸리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일부 의대생은 5년제 의대 과정을 마치는데 10년이 걸립니다! 학교를 마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수업을 얼마나 빨리 배우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12장 40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날이 430년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실 때, 그의 후손이 400년 동안 다른 땅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15:13).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그들이 실제로 430년 동안 거기에 있었다는 것을 읽습니다. 하나님이 실수하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시간표에 있어서 매우 정확하십니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그분의 완전한 뜻은 그들이 애굽에서 400년 동안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30년을 더 머물렀을까요?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다른 예를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을 때, 그들에 대한 그분의 계획은 그들이 광야에서 2년만 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제로 광야에서 몇 년을 보냈습니까? 40년입니다(신 2:14 참조). 하나님은 2년 안에 당신을 깨뜨리실 계획을 세우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40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회심한 지 2년 후에 당신을 사용하기를 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40년 동안 당신을 사용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 당신이 얼마나 빨리 부서지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또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그들이 애굽에서 400년을 지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430년 동안 머물러야 했습니다.

저는 그 이유가 그들의 지도자 모세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모세가 마흔 살에 이집트를 떠날 때, 하나님은 광야에서 장인과 함께 10년 과정을 통해 모세를 깨뜨려, 50세에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 준비를 할 수 있기를 원하셨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10년 동안 그분의 교훈을 배우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충분히 깨어지기 전에, 그의 장인이 그를 좀 더 낮추어야 했습니다. 모세가 10년노정을 마치는데 40년이 걸렸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30년을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지상에서의 그분의 일을 위해 부서진 인간에게 의존하십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메시지와 경고를 줍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삶을 위한 계획을 갖고 계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부서지기 전에는 결코 성취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이 10년 동안 당신 안에서 계획하신 일이 40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그분이 우리의 길에 마주치게 하는 상황에서) 자기를 낮추는 것을 속히 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레미야 애가 3장 27절은, "사람이 젊어서 멍에를 메는 것이(자신을 낮추고 꺾이는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당신이 젊을 때, 하나님께서 당신을 부수도록 허용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삶에 허락하시는 상황에 맞서 싸우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계획이 지연될 뿐입니다. 당신의 모든 성경 지식, 음악적 능력 및 돈으로는 하나님의 봉사를 위해 준비할 수 없습니다. 깨짐은 필수적입니다. 야곱은 깨어졌을 때에만 이스라엘이 될 수 있었습니다. 모세는 깨어졌을 때 지도자와 예언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2장: 여기에서 우리는 모세가 이집트인들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나간 때를 읽습니다. 그는 이집트인이 히브리인을 때리는 것을 보고 (2:11) 이집트인을 때려 죽입니다. 여러분은 모세가 맨손으로 사람을 죽이는 데 얼마나 강했는지 상상이 가십니까? 그가 계속해서 이집트인들을 - 한 명씩 - 이 속도로 죽였다면 수백만 명의 이집트인을 모두 죽이는 데 몇 년이 걸렸을 것 같습니까? 모세는 이집트인들이 모두 죽기 전에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80세에 깨뜨리셨을 때, 모세가 해야 할 일은 그의 지팡이를 홍해 위로 들어 올리는 것뿐이었고, 순식간에 애굽 군대 전체가 홍해 아래에 묻혔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과 상한 자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의 차이입니다.

성경의 처음부터 메시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이 참된 교회인 예루살렘을 세우기 원한다면, 당신은 깨어져야 합니다. 당신은 환경과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당신이 거역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당신 안에서 빠른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저는 열정적인 젊은이들을 많이 봤습니다 - 그들은 머리로 성경을 알고, 나가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나가서 그들의 힘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20년, 30년 후 그들은 좌절하고, 낙담하고, 비판적이며, 그들의 실패에 대해 이 사람과 저 사람을 비난합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인생을 낭비했습니다. 왜일까요? 단 한 가지 이유입니다 - 그들은 결코 하나님이 그들을 깨뜨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경건한 자의 삶은 흥미진진하다"(잠 14:14 - Living)고 말합니다. 나는 이제 76세이고 56년 넘게 하나님의 자녀였습니다 - 그리고 나의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흥미진진했음을 솔직히 간증할 수 있습니다. 나는 많은 시련을 겪었지만, 그 모든 시련 속에서 흥미로운 방식으로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위해 살고 그분을 섬길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은 이 세상에서 누구나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입니다. 나는 전 세계 누구에게도 불만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아무도 나에게 해를 끼치는 데 성공한 적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해치려 했고 몇몇 동역자들은 나를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한 모든 일은 나에게 유익을 줄 뿐이었습니다 - 로마서 8:28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그래서 나는 실제로 그들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들의 악한 행동을 사용하여 저를 더욱 그리스도와 같이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 그것은 그들의 악한 행동에서 나온 좋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젊은 시절에 나를 부수셨고 지금도 여전히 나를 부수고 계십니다. 이것이 결실의 길입니다. 우리가 부서질수록,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도록 우리를 더 많이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17장에서 바위를 친 후에야 물이 흐르기 시작했다는 것을 읽었습니다. 바위를 치지 않으면, 물이 흐르지 않습니다. 향유를 옥합에 담아 가지고 온 여자가 예수님의 발 앞에서 그것을 깨뜨리니, 그제서야 향기로운 냄새가 온 집에 가득했습니다. 유리병이 깨질 때까지 아무도 그 냄새를 맡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들어 축복하셨을 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그것을 부서뜨리셨을 때에,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이 모든 예에서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깨어짐은 축복의 길입니다. 원자가 쪼개질 때 어떤 힘이 방출됩니까! 도시 전체에 전기를 공급할 수 있습니다! 너무 작아서 현미경으로도 볼 수 없는 작은 원자가 깨질 때 방출되는 힘을 상상해 보십시오. 성경 뿐만 아니라 자연에도 있는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부서짐을 통해 방출된다. 그 메시지가 당신의 삶을 사로잡기를 바랍니다.

1963년에 내가 성령세례와 내 사역에서 그분의 능력을 위해 하나님을 찾았을 때, 하나님께서 그 메시지로 나를 붙드셨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나에게 깨어짐의 길이 능력의 길이 됨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평생 잊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아직 젊을 때 그 교훈을 배우도록 격려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여기서 모세를 통해 백성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과 지도자들에게 말했습니다(3:17),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주리라." 거기에는 두 가지 약속이 있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라."

"내가 너희를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주리라."

오직 첫 번째만 성취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그것을 들은 장로들에게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들은 모든 장로 중에서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가 되었을 때 장로들이 믿음으로 응답하지 않았기 때문에(민 13장), 하나님의 약속의 절반만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가 믿음으로 응답할 때까지 성취되지 않습니다. 전기 스위치와 같습니다. 스위치에서, 두 개의 전선이 서로 옆에 연결되어 있지만 서로 닿지는 않습니다. 스위치를 켜는 순간, 그 전선들이 닿고 조명이 켜집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우리의 믿음이 두 전선입니다. 그들은 서로 매우 가까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접촉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들이 닿는 순간, 힘이 방출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들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지만, 당신의 믿음이 "네, 내 삶에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라고 말할 때 비로소 이루어집니다. 가나안 경계에서,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고, 그래서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4장: 여기에서 우리는 모세를 부르시는 하나님에 대해 읽습니다. 모세를 격려하고 그에게 몇 가지 교훈을 가르치기 위해, 하나님은 그에게 세 가지 표적을 주셨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그들은 내가 그들에게 말하는 것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을 때, 여호와께서는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이것에 주목하세요! 주님은 항상 이미 우리 손에 있는 것부터 시작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없는 것을 찾으러 갈 필요가 없습니다. 엘리사가 과부에게 "네 집에 무엇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기름 한 병뿐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엘리사가 말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기름통으로 당신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왕하 4:2,3). 모세의 손에는 목자의 지팡이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하시면, 목자의 지팡이로도 기적이 일어납니다.

첫 번째 표적으로,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를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뱀이 되었고 모세는 그것을 피했습니다(3절). 주님은 "두려워하지 말라. 손을 뻗어 꼬리를 잡아라." 그가 그것을 잡았고 그것은 다시 그의 손에 있는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거기에 어떤 메시지가 있었습니까?

첫째, 사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까이 있습니다 - 그 지팡이가 모세에게 가까웠던 것만큼 말입니다. 당신은 사탄이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 동료들 사이 등에 오해를 일으키기 위해 항상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탄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는 패배한 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우리 발 아래 짓밟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길 때 배워야 할 첫 번째 교훈 중 하나는 사탄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탄은 성채와 요새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그에게서 도망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유혹을 피해야 하지만(딤후 2:22), 사탄은 우리에게서 도망쳐야 합니다(약 4:7). 예수의 능하신 이름으로, 사탄이 우리를 두렵게 하기 위해 사용하는 바로 그것이 우리 손에 바다를 가르고 하나님의 백성을 앞으로 인도하는 권위의 지팡이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우리는 그분의 권위가 필요합니다 - 먼저 성경 지식이 아니라, 신의 권위입니다. 나는 어느 날이든 성경 지식보다 영적인 권위를 갖고 싶습니다. 모세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원수를 다스리는 권세였습니다. 그의 종 파라오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로 삼은 것은 사탄이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두려움 없이, 그의 꼬리를 잡아야 했습니다. 사탄은 결코 우리를 두렵게 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 표적으로, 주님은 모세에게 그의 손을 품에 넣으라고 하셨습니다(6절). 모세가 그렇게 하고 그 손을 꺼내니, 문둥병이 들었습니다.

주님의 종으로서 우리가 이해해야 할 두 번째 사항은, 우리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롬 7:18). 이기심과 부패는 우리 육신(flesh)의 모든 곳에서 발견됩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냥 당신의 손을 살(flesh) 속에 넣고 그리고 보세요! 당신 안에 있는 문둥병에 대한 빛을 비춰주시도록 하나님께 간구하십시오. 만약 당신이 이 중요한 교훈을 배우지 않으면, 마치 사람들이 당신보다 더 나쁜 육신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을 정죄하며 돌아다닐 것입니다. 아무도 우리가 할 수 없는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같은 방식으로 죄를 짓지 않았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 때문이며 우리가 같은 강렬함의 유혹에 직면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동료 인간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당신이 이 땅의 어떤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여호와의 종이 되기에 전혀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세 번째 표적에 대해 주님은 모세에게 나일 강에서 물을 조금 부으라고 하셨고, 그것이 피로 변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9절). 나일강은 애굽의 귀한 신이요, 피는 죽음의 묘사입니다.

그래서 이 표적의 영적 의미는, 세상 사람들이 숭배하고 추종하는 이 땅의 모든 것을, 죽음에 쏟아 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의 종은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고, 세상도 그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합니다. 세상은 더 이상 나에게 (생명에 필수적인) 물이 아니라, 우리가 마시고 싶지 않은 피와 같습니다. 우리는 피를 마시느니 차라리 목마르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보아야 하는 방식입니다.

이것들은 모든 하나님의 종이 되기 위한 세 가지 필수 자격입니다.

이제 모세는 파라오에게 가기로 동의합니다. 그는 신이 주신 권세를 갖추고, 하나님께서 친히 80년 동안 훈련하신 사람으로 나아갑니다. 모세는 그 당시 지상에서 하나님의 목적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에게는 많은 종들이 있습니다. 따라서 한 사람이 실패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하나님에게는 오직 한 사람, 모세만이 있었습니다. 그분의 모든 목적은 그 한 사람에게 달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파라오를 만나기 전에, 매우 중요한 교훈을 하나 더 배워야 했습니다.

우리는 4:24에서 모세가 애굽으로 갈 때, 여호와께서 모세를 죽이려고 하셨다는 것을 읽습니다. 이제 거기에 사탄이 모세를 죽이려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대체 왜, 하나님 자신이 지상에서 자신의 목적을 위해 가장 필수적인 한 사람을 죽이고 싶어 하셨습니까? 모세의 집에 불순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인이 아닌 여자와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아내의 뜻에 굴복하여,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습니다. 모세의 아내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는 "가정의 평화를 위하여", 자신을 낮추어 그녀의 바람에 굴복했을 것입니다 - 특히 그가 그녀의 아버지 집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아내는 그들의 집에서 결정권을 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종들의 가정에서 그러한 잘못된 권위를 결코 허용하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게, 사실상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세야, 네가 먼저 네 가정을 다스리지 못한다면, 네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지 못할 것이다."

성경은, "사람이 자기 가정을 다스릴 수 없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집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합니다(딤전 3:5).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가정에서 머리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자신의 아내를 두려워하는, 하나님의 종이라고 주장하는 남자들을 보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우리의 자녀를 (그들이 우리 집에 살 때에) 경건하게 양육하지 못한다면, 어찌 교회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를 경건하게 양육하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네가 지상에서 나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일지라도, 네가 내 말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나는 너를 죽일 것이다. 나는 내 원칙을 타협할 수 없느니라" 라고 말씀하신 중대한 일이었습니다. 모세의 아내는 남편이 죽어가는 이유를 즉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날카로운 돌을 가져다가 자기 아들의 포피를 베어 내고 화를 내며 모세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나에게 피의 신랑입니다." 모세는 그 후에 한 가지 현명한 일을 했습니다 - 그는 아내를 집으로 보내고 그의 사역을 계속했습니다! 그는, 그녀가 그의 곁에 있는 것으로 인해 더 이상 문제가 생기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얼마나 엄격하신지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은 다른 사람들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타협하도록 허용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분의 택하신 종들 중 하나라면, 그분은 가장 작은 일에서 당신에게 순종을 요구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신경쓰지 않으실, 당신의 삶의 영역을 들여다보실 것입니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10루피나 책 한 권을 빌리고 아직 돌려주지 않았다면, 당신이 하나님의 선택된 종이라면, 그분은 당신이 그것을 돌려줄 때까지 계속해서 당신의 양심을 괴롭힐 것입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대하시지 않고, 그분의 특별한 종들에게만 그렇게 대하십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타협자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그냥 내버려두십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선택된 종이라면, 그분은 당신의 일에 대한 보고서에 단 하나의 거짓 진술도 쓰도록 허락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는 당신이 한 루피 일지라도 불성실하게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신자들은 수백만 루피에 신실하지 않을 수 있으며, 하나님은 그들을 무시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다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택하신 종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당신은 하나님께서 그처럼 질투심 많은 돌보심으로 당신을 지켜주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작은 일에 대해서도 그분의 책망을 기꺼이 받아야 합니다.

마침내 파라오 앞에 섰던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이 깨끗한 양심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을 때, 세상의 가장 권세 있는 자들 앞에 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바로는, 그 콧구멍에 숨이 있는 티끌과 같았습니다. 하나님은 인도에서 모세와 같은 사람들, 즉 그분의 얼굴 앞에서 사는 사람들을 필요로 하십니다. 엘리야는 아합 왕에게, "내가 하나님 앞에서 산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합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우리는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하는 것처럼, 내각 장관들과 국회의원들에게 버터를 바르러(아부하러) 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오늘날 인도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당신이 하나님을 모르면 그것만이 살 길이라는 데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세가 살아남은 방법도 아니고, 엘리야가 살아남은 방법도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살았고 하나님은 그들을 도우셨습니다.

당신도 그들처럼 하나님의 종이 되고 싶습니까? 당신이 오늘날 세상에서 보는 설교자들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종들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오늘날, 사람의 인정을 구하지 않고, 사람의 돈을 원하지 않고, 지상의 권위로부터 지지를 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지지를 받기 원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것이 모세가 파라오 앞에 섰던 방식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세를 전적으로 지원하셨습니다.

오늘의 설교자들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나는 그것들 중 많은 것을 들었습니다. 그것들 중 대부분은 나를 극도로 지루하게 했습니다. 그런 설교자들은 말에 기름 부음도 없고 삶에 권위도 없고,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얄팍한 타협주의자들인데 하나님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바울은 "내가 한 사람의 기쁨을 구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될 수 없느니라"(갈 1:10)고 말했습니다.

절대로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노력하십시오. 사람들이 당신을 오물처럼 취급하게 하십시오. 사도들은 쓰레기 취급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쓰레기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만 살았고, 하나님은 그들을 전적으로 지원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내가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모세는 바로 앞에 섰고, 하나님은 피, 개구리, 이, 파리, 가축의 질병, 종기, 우박, 메뚜기, 흑암 등의 재앙으로 모세의 말을 확증하셨고 마침내 각 집의 장남이 죽게 하셨습니다 - 모두 열 가지 재앙. 그 재앙 중 일부는 이집트 마술사들의 속임수로 복제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술은 어느 시점 이후에 실패했습니다(7:11; 8:7,18).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은 없는) 종교인은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처럼, 모든 시대에 항상 경건한 사람들을 대적해 왔습니다(딤후 3:5,8). 종교적인 거짓 예언자들은 당시에 엘리야와 예레미야를 반대했습니다. 그리고 종교적인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시대에 세례 요한과 예수님과 바울을 반대했습니다. 교회 역사를 통해, 전문적인 설교자들은 항상 하나님이 다른 땅에서 일으키신 예언자들을 대적했습니다. 이것은 항상 같은 스토리였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그분의 예언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타이틀과 학위 증명서를 가지고 있는) 전문 설교자들은 그를 필사적으로 반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공격은 예언자가 그의 메시지를 조금도 바꾸게 만들지 못합니다. 궁극적으로,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그 예언자는 모세처럼 하나님 자신에 의해 입증될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싶다면, 하나님을 모르는 전문 종교 기관을 기쁘게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우리에게 필요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나는 그의 삶과 말이, 그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살고 하나님의 길을 이해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사람을 존경할 것입니다.

12장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구원받은 이야기를 읽습니다. 그들은, 우슬초 묶음으로 흠 없는 어린양의 피를 문 인방과 문설주에 바르고, 죽음의 사자를 피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를 우리 마음에 바르는 믿음의 묘사입니다. 우슬초는 이집트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흔한 식물이었습니다. 믿음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새 달력의 첫 번째 달 14일에 이집트를 떠났고 - 주 예수님은 약 1500년 후 같은 날짜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하나님은 미래를 내다보셨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날을 보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기로 그 날을 선택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그들의 선한 삶이나 선행으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난 30년 동안 각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각 집 안을 확인하러 가지 않으셨습니다. No. 그분은 단지 그들이 흠 없는 어린양의 피를 문에 바를 믿음이 있는지 확인했을 뿐입니다. 그들이 그 우슬초를 피에 적셔서 문에 발랐을 때,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 나의 선행이나 종교 활동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 순결한 어린 양의 피를 믿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죽음의 천사가 내 집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것이 구원의 길입니다. 그 누구도 "내가 착하게 살았기 때문에 구원받았다"라고 자랑할 수 없습니다. No. 선하게 살았던 사람과 악하게 살았던 사람 모두 그날 밤 애굽에서, 어린양의 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의 누군가가, "나는 선한 삶을 살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를 심판하지 않으실 거라고 믿는다"라고 생각하고, 어린 양의 피를 자기 집 문 위에 바르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죽음의 사자가 들어와서, 애굽의 다른 집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장남을 죽였을 것입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진리의 이득은 취하고, 함부로 살면서 "우리가 어떻게 사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구원이 여전히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한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진리가 부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에베소서 2장 9절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구절은 우리가 구원받은 후, 하나님이 우리를 "선한 일을 위하여"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완전한 진리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하는 많은 선한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구원받은 후에 우리의 "믿음"이 선한 행실을 나타내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참된 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다.

야고보는 "(선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약 2:26)고 말했습니다.

문에 피를 바른 후,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두 그날 밤 무교병을 먹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 자신을 먹는 그림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피를 신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그분의 생명도 먹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그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롬 5:10)입니다.

그들은 또한 (즉시 이집트를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여행용 옷을 입고 빵을 먹으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즉시 그분을 만나러 갈 준비가 항상 되어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 집이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나는 여러분이 12:35에서 하나님의 의를 보기를 원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니"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에게 불신자들에게 그런 돈을 요구하라고 하십니까? 확실히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옳은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집트인들은 400년 동안 60만명의 이스라엘 남자들을 자기들을 위해 일하게 하면서도 그들에게 품삯을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들이 애굽을 떠나기 전인, 430년 동안 그들의 품삯을 다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끝내 다른 사람들을 속인 모든 사람을 찾아 처벌할 것입니다 - 430년이 지나도 말입니다! 그 누구도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법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 작은 것들에서, 우리는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사방이 둘러싸여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의 뒤에는 애굽 군대가 그들의 뒤를 쫓고 있었고, 양편으로는 큰 산이 보였고, 그 앞에는 홍해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라볼 수 있는 방향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 위(up). 우리가 이와 같이 곤경에 처했을 때 구원은 오직 한 곳, 즉 하늘에서만 우리에게 올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거기에서 내 도움이 올까요? 아닙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이다"(시 121:1,2).

주님은 모세에게,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네가 잠잠할 때에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싸우시리라"(출 14:13,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홍해를 갈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마른 땅을 밟게 하셨습니다. 그들 아래의 해저 바닥은 젖지도 않았습니다 - 그것은 말랐습니다(출 14:21,22)!

고린도전서 10:2은 그들이 바다를 통과하는 것이 물세례의 그림이라고 말합니다. 또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하늘에서 내려와 이스라엘 백성을 감싸고, 빛을 비추어 적들로부터 보호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성령과 불의 세례의 그림이었습니다.

그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의 구원에서 3중의 경험을 했습니다. 그들은 유월절 양의 피로 구속되었고, 홍해에 잠겼으며, 하늘에서 내려온 구름에 잠겼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초기 세 가지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도행전에 설명된 대로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정확히 그랬습니다. 그들도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고,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받았습니다.

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하늘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하였습니까? 그들이 증언할 수 있는 짜릿한 경험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No. 거인들을 정복하고 하나님이 주신 땅을 차지할 수 있는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단지 체험을 하기 위해 성령세례와 불의 세례를 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가 성령의 능력으로 약속된 땅에 들어가 오랫동안 우리를 지배해 온 정욕, 분노, 더러운 생각, 시기, 원통함, 돈을 사랑함 등의 거인들에게 승리하고 정복하는 것입니다.

가나안은 거인들의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것입니다. 온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430년 전에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우리의 몸도 주님의 것이지, 그것을 지배하는 더러운 정욕의 것이 아닙니다. 많은 신자들이 성령 세례의 주요 목적이 주님을 위해 우리의 몸을 되찾는 것임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 사탄이 이 진리에 눈을 멀게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그들이 성령으로부터 받은 권능으로 그분의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단지 입으로만 증거하는 것이 아닌, 삶으로 그분의 증인이 되라(행 1:8). 우리의 몸은 이제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수 있는 성령의 순결한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고전 6:19,20). 사탄은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구속의 진리나 물세례의 진리에 대해 신자들의 눈을 멀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령 세례의 주요 목적을 이해하지 못하도록 그들 대부분을 눈멀게 했습니다.

그 후 이집트 군대는 그 홍해에 빠져 죽었습니다. 시편 106편 12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사람들이 죽은 것을 보고 나서, 그때에 그들은 여호와를 찬양했다고 말합니다. 보는 것으로 행하는 사람은 자신의 기도에 대한 응답을 받았을 때, 즉 원수가 실제로 익사한 것을 보았을 때에만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행하는 사람은 "주여,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 앞에 상을 베푸셨나이다"(시 23:5)라고 말합니다. 적들은 여전히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원수들을 다루실 것임을 알기 때문에, 주님과 함께 그분의 식탁에 앉아 잔치를 합니다. 한편, 그분은 우리 머리에 기름을 바르셨고 우리의 잔은 찬양으로 넘치게 되었습니다(시편 23:5). 우리의 기도 응답을 본 후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쉽고 옛 언약의 삶입니다. 새 언약의 그리스도인은 응답을 보기 전에, 믿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사탄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있지만, 패배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우리를 해치려는 그의 대리자들(어떤 종교든)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우리 머리털 하나도 만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쩌면 그들이 우리를 죽이도록 허락하실 수도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의 대리자들이 예수님, 야고보, 베드로, 바울을 죽이는 것을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도들은 요한을 제외하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 그러나 그들 각자를 위한 하나님의 시간이 왔을 때만입니다 - 그들 각자가 지상 사역을 마친 후에 말입니다. 우리는 같은 하나님을 섬기므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우리는 15장 이후로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에 대해 읽습니다. 그들이 마라의 쓴 물에 이르렀을 때(23절),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다시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의 시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홍해에서와 같이, 쓴 물에 갈 때에 그것에 대한 해결책도 내가 제공할 것이라는 것을 너희가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아니면 다시 나를 불신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겠느냐?"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그들이 다시 투덜거리기 시작했음을 봅니다. 보는 것으로 행하는 사람은 몇 번이고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믿음으로 행하는 자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께 감사합니다.

출애굽기 15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이 패턴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해 몇 번이고 반복되었습니다. 영원히 오르락내리락하는 "사인파(수학에서)"는 대부분의 신자들의 삶을 완벽하게 묘사합니다 -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 하나님을 찬양하고, 일이 잘못되었을 때 불평하고,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다시 하나님께 감사하고, 다음 문제가 발생했을 때 다시 의심합니다.

이것은 대부분의 신자들이 믿음으로 살지 않고, 보는 것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 이스라엘 백성들과 똑같습니다. 일요일 아침에 그들은 집회에서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때때로 다른 방언으로). 그러나 일요일 오후부터는, 그들의 언어가 달라집니다. 이번에는 그들의 모국어로 말입니다. 그들의 집과 사무실 모두에서 그들의 말은 분노, 투덜거림, 불평입니다!! 그런 다음 다음 일요일에 사인파가 올라가고 그들은 다시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합니다. 그 후, 파도가 다시 내려갑니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그분의 새 언약의 자녀들이 살기를 의도하신 방식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다른 방언의 은사를 주시는 성령께서, 그가 모국어로 말하는 것 또한 통제 하실 수 없으실까요? 그분은 확실히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모든 것 에 감사하라"(빌 4:4; 엡 5:20). 그것이 새 언약 안에서 항상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직면하는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이미 계획하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에게 불평했을 때, 그는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바로 거기에 있다 - 네 앞에"(25절). 주님은 그에게 한 나무를 보여 주셨습니다. 모세가 그 나무를 꺾어서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습니다.

누가 그 나무를 광야에 심었을까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아니면 하나님이었을까요? 의심 할 여지없이 하나님입니다! 사람은 광야에 나무를 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마도 100년 전에 마라 근처에 그 나무를 심으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100년 후에, 그분의 자녀들이 마라에 와서 그것의 물이 쓰다고 알게 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실제로 100년 전에 그들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계획하셨습니다. 당신이 문제에 직면하기 훨씬 전에, 그 동일한 하나님이, 당신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계획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믿음으로 행하는 것은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놀라게 하는 문제가 갑자기 생겨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귀가 우리를 위해 어떤 문제를 준비하고 있는지 이미 미리 알고 계실 뿐만 아니라, 그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도 미리 마련해 두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모든 문제에 담대하게 대처할 수 있습니다. 저는 56년 동안 신자로서 수많은 문제를 겪으면서, 이 진리를 간증할 수 있습니다. 나는 아직까지 하나님께서 해결책을 계획하지 않으신 문제에 직면한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내가 인생에서 마라에 오기 오래 전에, 나무 씨앗을 심었습니다 - 나를 위해 물을 달게 만들기 위해. 또한 항상 "사랑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묵묵히 계획 하시는"(습 3:17 - 의역) 우리의 훌륭하고,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를 믿음으로써 걸어가라고 당신에게 촉구합니다 - 그러면 여러분은 모든 문제를 끊임없이 극복할 것입니다. 다시는 당신의 입에 불평과 원망과 분노가 나타나게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찬송과 감사만 하게 하십시오.

17장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실 물이 없는 또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을 봅니다. 사인파가 내려가고, 그들은 다시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다시 주님은 그들의 바로 눈앞에 있는 그분의 해결책을 그들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분은 모세에게 말했습니다, "네 앞에 있는 저 바위를 보라. 그것을 치라"(6절). 모세가 반석을 치니 물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내가 그 구절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작은 돌과 그곳에서 작은 물방울이 나오고 모두가 마시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마른지 아십니까? 20세에서 60세 사이의 남성만, 60만명입니다. 그러면 나이 많은 사람들, 20세 이하의 남자들 그리고 여자들과 아이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거기에는 적어도 200만 명이 있었을 것입니다. 2백만 명이 마셔야 할 물의 양은 얼마라고 생각하십니까? 약간의 물방울 이었을까요? 아니요! 200만 명 모두가 상당히 빨리 물을 마셔야 한다면, 여러 방향으로 흐르는 많은 강이어야 합니다. 그 200만 명의 사람들이 작은 물방울을 마시기 위해 줄을 서야 했다면, 많은 사람들이 줄의 맨 앞에 도착하기도 전에 갈증으로 죽었을 것입니다! No. 광야에는 반석에서 흘러나온 강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7장 37~39절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매맞은 반석")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성령 충만한 삶에 대해 예수님이 주신 그림입니다.

예수님이 갈보리에서 치심을 당하셨을 때, 그것은 오순절을 위한 길을 예비했습니다. 갈보리는 항상 오순절보다 앞서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때, 생수의 강이 즉시 우리에게서 흐르기 시작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정직하다면, 그것을 인정할 것입니다. 강물이 우리에게서 흘러나와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기 전에, 하나님은 우리를 깨뜨리기 위해 우리 안에서 때리고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나처럼 평범하고, 쓸모 없고, 연약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을 찾으셔서, 지상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도록 만드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치시고, 부수시도록 허락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강물이 흐르기 시작하자마자, 8절에 " 그때 아말렉이 이르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말렉은 구약 전체에 걸쳐 우리 육신(flesh)의 그림입니다. 성령과 육신은 끊임없이 투쟁합니다. 강물이 흐르기 시작하자, 아말렉이 하나님의 백성과 싸우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자마자, 사탄이 와서 그분을 시험했습니다(눅 3:22; 4:1,2). 아말렉은 마침내 모세와 여호수아의 협력으로 패배했습니다. 모세는 산꼭대기에서 손을 들어 기도했고, 여호수아는 골짜기에서 아말렉과 싸웠습니다. 이 조합은 우리도 육신을 이길 수 있게 해줄 것입니다 -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용하셨던 것처럼) 대적에게 직접적으로 사용하셨던 성령의 검(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께 기도할 때 손을 들어 올리는 것(우리의 연약함과 무력함을 인정하는 것).

모세의 손이 피곤할 때에, 아론과 훌이 모세의 손을 들어 올렸습니다(17:12). 우리도 또한 우리가 약하고 피곤할 때 우리를 도와줄 아론과 훌이 필요합니다. 내가 기독교인의 삶에서 발견한 위대한 진리 중 하나는 이것입니다: 나는 혼자서는 해낼 수 없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동료 신자들이 필요합니다. 내가 수년 전 길가에 넘어지지 않고, 소신을 굽히지 않고 오늘 이 자리에 섰다면, 그 이유 중 하나는 끊임없이 나를 격려하고 기도하고 권면해 주는 형제자매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는 수년 동안 내 손을 들어준 많은 아론과 훌이 있으며, 나는 그들을 대단히 소중하게 여기는 법을 배웠습니다. 아론과 훌은 모세만큼 재능이 없었고, 그들은 모세가 하나님을 아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여전히 그들이 필요했습니다. 아론은 적어도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훌은 성경에 다시는 등장하지 않는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인, 모세에게는, 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의 도움도 필요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약하고 알려지지 않은 형제들을 결코 업신여기지 마십시오.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필요합니다. 예수님도 걸려 넘어진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겟세마네에서 그분의 손을 들어달라고(모세처럼) 요청하셨습니다! "심지어 머리(그리스도)도 발(몸의 가장 낮은 지체)에게, 나는 너희가 필요 없다 하지 않습니다"(고전 12:21).

하나님의 율법

19-24장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많은 율법에 대해 읽습니다. 십계명은 20:1-17에 나열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약속이 붙은 계명은 하나뿐입니다(이는 또한 에베소서 6:1,3에도 언급되어 있습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이것은 우리가 집에 있는 모든 자녀에게 가르쳐야 할 한 가지 계명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준 후, 그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이 계명들은 너희를 시험할 뿐이니라"(20절)라고 말했습니다. 백성들은 이미 모세에게 그들이 하나님의 모든 명령에 순종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19:8).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이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후 1500년 동안 그 모든 계명에 불순종했습니다 - 그리하여 사람이 원하더라도, 결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없음을 증명했습니다. 그래서 새 언약이 필요했습니다. 첫 번째 언약(율법)은 결함이 있었습니다(히 8:7-13).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을 주신 직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름다운 비유를 21장에 들려주시어, 그 계명을 지켜야 할 정신(spirit)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21장에서 그분은 6년 간의 강제 노예 생활을 마쳤기 때문에, 주인에 의해 해방된 히브리 노예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7년째 되는 해에 모든 히브리 종을 놓아주어야 한다고 명시했습니다. 그러나 7년째 되는 해에 이 종이 주인에게 와서 말합니다, "주인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자유를 얻어 나가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더 이상 속박된 노예로서가 아닌, 이제는 사랑으로 자유롭게 당신을 섬기기를 원합니다"(5절). 그리고 그는 그 후에도 영원히 그의 주인을 계속 섬깁니다.

이것은 십계명을 준 직후에 온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율법의 문자에 대한 노예적(slavish)이고 외적인 순종이 아니라, 율법의 정신에 대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쁨과 사랑의 순종임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이는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새 언약 아래서 우리의 순종을 원하지 않으신다는 의미입니다. 옛 언약의 정신은 십계명으로 요약됩니다: "너는 하지 말라, 너는 하지 말라, 너는 하지 말라……".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셔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그는……".

15:26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고, 내가 보기에 옳은 일을 행하고, 나의 계명에 귀를 기울이고, 나의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 여호와는 너를 치료하는 자임이니라." 일부 사람들이 이해하듯이, 이것은, 치유의 약속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치유보다 더 나은 것, 즉 건강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건강이 치유보다 낫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치유를 받으려면 먼저 아플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이 그분의 모든 율법을 지킨다면, 병들지도 않을 것이라고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건강할 것입니다! 이것이 그분이 그들에게 위생에 관한 많은 율법을 주신 한 가지 이유였습니다. 당신이 대식가여서 병에 걸리면, 당신 자신을 탓해야 합니다. 술에 중독되어 일찍 죽는 술고래와 좋은 음식에 중독되어 일찍 죽는 대식가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우리의 건강을 지켜 줄 수 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함으로써 시작한다면, 당신은 하나님께 너무 많이 치유를 구하러 갈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을 건강하게 지켜줄 것입니다. 당신은 늙어서 긴장과 과식으로 병든 노인이 아니라, 건강한 노인이 될 것입니다.

23장 9절에, 또 다른 율법이 있습니다: 나그네의 심정을 너희도 알거니와 나그네를 억압하지 말라,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나그네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너무나 친절하고 자비로우셨기 때문에, 우리도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자비로워야 합니다.

31:16,17에서 우리는 안식일에 관한 율법에 대해 읽습니다. 지구가 다시 만들어진 6일이 24시간으로 이루어진 6일인지 아니면 수백만 년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날인지에 대해, 과학계에서는 많은 논쟁이 있습니다. 대답은 여기에 매우 분명합니다. 주님은 엿새 동안 땅을 만드셨고 (made) 일곱째 날을 쉬는 날로 제정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안식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골 2:16,17). 그래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물리적 안식일을 지키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여기에서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셨듯이, 그것은 주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만의 표징(sign)이었기 때문입니다.

32장과 33장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숭배하고, 그들의 우상에게 제사드리는 잔치에서 간음하는 것을 읽습니다. 모세는 시나이 산 정상에 올라 진영을 떠난 지 40일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길을 잃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아론은 그들을 통제할 힘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오직 한 사람 모세에 의해 하나님의 방법으로 유지되었습니다. 그가 그 한가운데 있는 동안, 그들은 그를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법을 지켰습니다. 그가 떠나는 순간, 그들은 죄에 빠졌습니다. 40년 동안 하나님의 방법으로 200만 명을 보존한 사람은 단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교회 역사에서도, 수세기에 걸쳐 있었던 방식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3년 동안, 이리들이 교회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바울이 떠나는 순간, 이리가 들어왔습니다(행 20:29-31). 여기 광야에서도 그랬습니다. 모세가 떠나는 순간, 부패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모세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부패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같은 한 사람을 통해, 아론과 같은 천 명의 타협자를 통해서보다 더 많은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진영으로 돌아온 모세는, 다시 한 번 문제를 바로잡고 백성을 하나님께로 인도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모세가 진영의 모든 죄에 맞서, 주님 편에 그와 함께 설 사람이 누구인지 묻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출 32:26). 그 날 레위 지파만 나와서 모세와 함께 섰습니다. 모세는 그들에게 진영으로 들어가, 우상 숭배의 지도자들을 모두 죽이고, 그 과정에서 그들 자신의 친족도 살려두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진영으로 들어가 그렇게 했습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레위 지파에게 그분의 제사장이 되는 특권을 주신 이유입니다. 그것은 임의적인(arbitrary)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그들이 그분을 위해 서기로 선택했기 때문에, 그들을 선택하셨습니다(신 33:8~11; 말 2:4,5 참조).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도 몇 년 후 같은 정신으로 행동했고, 하나님은 그와도 제사장 직분의 언약을 맺으셨습니다(민 25:7-12).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교회에서의 죄악을 무자비하게 처리할 사람들을, 그분의 대표자로 세우십니다.

여기에서도 모세가 산에서 주님과 긴 대화를 나누면서, 그리스도의 영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중보 기도로 주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만 한다면, 영원히 지옥에 보내질 용의가 있다고 말했습니다(출 32:31,32). 이것이 갈보리 십자가의 정신입니다.

또한 여기에서 우리는 사람의 이름이 생명책에 한 번 있었어도, 지워질 수 있다고 모세에게 친히 말씀하신 하나님에 대해 읽습니다(출 32:33). 이 교리에 대해 기독교인들 사이에는 다양한 의견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3장 5절에서 주 예수께서 친히 반복하신 이 경고를 볼 때 누구든지 가질 수 있는 모든 논쟁은 잠잠해집니다 - 우리 모두 주의 해야 할 경고입니다.

32:34과 33:14~16에서, 우리는 주님의 인격에 대한 모세의 열정을 읽습니다. 이것은 항상 모든 경건한 사람들의 특징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분의 일보다 주님 자신에 대한 열정이 더 큽니다. 모세는 주님께, 만일 하늘에서 온 (겨우) 천사 하나가 그들과 함께 보내지면, 그와 이스라엘 백성이 그곳을 떠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주님 자신이 그들과 동행해야 합니다. 자기를 부지런히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하나님께서 모세의 구하는 것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주님을 향한 모세의 열정은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도록 기도하는 33:18에서 더 잘 보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살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모세를 바위 틈에 숨기셨고(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의 예표), 모세는 그분의 영광을 조금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영광은,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선하심"(33:19)으로 구성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Yes.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그리고 그 영광이 우리의 삶에 임할 때, 그것은 우리를 선한 자와 악한 자 모두에게 선을 행하게 만들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셨던 것처럼(행 10:38).

성막

출애굽기의 많은 부분(25-31장, 35-40장)은 하나님의 성막 건축을 다루고 있습니다. 창세기 연구에서, 우리는 가인과 아벨에게서 거짓 종교와 참 종교의 두 흐름의 기원을 보았고, 그것은 결국 계시록에서 바벨론과 예루살렘으로 끝납니다. 성막은 나중에 하나님의 성전이 나온 씨앗입니다. 그것은 궁극적인 예루살렘, 교회, 하나님의 거처의 그림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을 직역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약성경의 성막은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님 자신의 그림이요, 다음으로 하나님의 거처인 그분의 몸인 교회의 그림입니다. 또한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각자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성막의 모든 부분이 모세에게 주신 양식에 따라 정확하게 만들어지도록 매우 특별하게 생각하셨습니다(출 25:9). 하나님은 모세에게 성막의 각 부분의 크기와 각 부분에 사용되는 재료에 대한 구체적인 지시를 주셨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께서 그분의 말씀에서 명하신 그대로, 교회와 그들의 삶에서도, 모든 일을 해야 할 필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종종 그들의 인간적인 이해로 하나님께 어디까지 순종하고 어디까지 그분의 명령을 수정할 것인지를 결정합니다.

모세는 이집트에서 웅장한 피라미드가 건설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눈에 더 잘 보이도록 하나님의 단순한 성막 양식을 수정하지 않았습니다. 세세한 부분까지, 그는 여호와께서 명하신 대로 정확하게 지었습니다(출 39:1-40:33).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했습니다. 만일 모세가 40세에 이 양식을 받았다면, 그는 애굽의 지혜로 하나님의 양식을 '개선(improve)'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성막은 분명히 더 인상적이었을 것입니다 -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회중을 기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을 수정한 많은 교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길은 우리의 생각과 길보다 훨씬 더 높습니다(사 55:8,9).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항상 하나님의 계명에 인간의 생각(ideas)을 더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의 교회에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만이, 그들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온전한 본과 뜻을 추구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분의 탄생, 삶, 죽음에 관한 구약성경의 예언의 세세한 부분까지 성취하시며 이 땅에서 평생을 사셨습니다. 그분은 자기에 관하여 "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기 위해 항상 주의를 기울였습니다(히 10:7).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 그분에게 항상 나타났습니다.

25장 8절에서 하나님께서 성막 건축을 지시하실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가 그들 중에 거할, 나를 위하여 성소(sanctuary)를 그들이 건축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주된 소명입니다 - 하나님을 위한 거룩한 거처가 되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 - 심지어 좋은 것까지도 -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소명을 놓치면, 전도, 성경 교육, 자선 프로그램 등과 같은 부차적인 일에 몰두하기 쉬울 것입니다. 모두 그 자체로 좋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하나님의 거룩한 거처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본연의 목적에 실패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속에서 집처럼 편안함을 느끼십니까? 당신의 집에서? 당신의 교회에서? 이것이 가장 중요한 질문들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까?" 또는 "당신은 다른 사람들을 얼마나 돕고 있습니까?"가 아닙니다.

모세가 성막의 모형을 본 것은 모세가 하나님과 단둘이 산에서, 40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할 때였습니다(출 25:40). 오늘 우리가 너무 급하게 하나님을 기다리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온전한 뜻과 모형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부르셔서 성막을 짓게 하셨고, 그들이 이 일을 하는 데 필요한 모든 초자연적인 능력을 주셨습니다 - 성령을 통하여(출 31:1-3). 이것은 하나님께서 오늘날 그분의 교회를 세우도록 우리를 부르시면, 그분은 우리가 그 일을 완수하는 데 필요한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도 주실 것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성막의 부분들

성막 건축을 위해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순서를 주목하십시오.

인간의 지혜는 작은 세부 사항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성막의 크기를 개략적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했을 것이지만, 하나님은 맨 먼저 모세에게 언약궤의 세부 사항을 주시는 것으로 시작하셨습니다. 법궤는 성막의 가장 작은 방, 즉 지성소에 두는 작은 가구였습니다(출 25:10). 그러나 그 방은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할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먼저 왔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자신과 함께 시작하셨습니다. 마치 우리가 창세기에서 본 것과 같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하나님의 길은 사람의 길이 아닙니다. 모든 교회에서 우리가 시작해야 할 곳은 하나님과함께입니다. 활동으로가 아니라, 지성소에서 하나님과 함께. 우리는 기독교인의 삶에서 "가장 거룩한"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아담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첫 날을 보내고 나서야, 동산에서 일하러 갔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 하나님과 교제가 먼저이고, 그 다음에 그분의 일입니다 - 전도, 가르침, 사회 사업 등 무엇이든. 하나님이 먼저고, 그 다음이 교리적인 문제입니다. 우리 사이에 분쟁과 분열이 많은 것은 우리가 이 순서를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 죄를 용서해 달라고 아버지께 간구하는 것으로 시작하라고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와 교제하는데 매우 중요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분은 그들에게 먼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고, 그분의 나라가 임하고,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이 궤로 시작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나 자신의 삶과 가정과 교회에서, 하나님을 첫째 자리에 두는 사람을 항상 지지하실 것입니다.


성막은 사람의 그림입니다. 성막은 지성소, 성소, 바깥뜰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것은 사람 존재의 세 부분인 영, 혼, 몸에 정확히 일치합니다(살전 5:23).

성막에서, 하나님은 지성소에 거하셨으며 이는 그분이 우리 영 안에 거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부분. 그분은 우리의 혼(생각과 감정)에 거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을 명확하게 이해하면 많은 속임수에서 우리를 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감정적인 집회가 반드시 영적인 집회가 아닐 수 있음을 깨달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감정에 거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거기에 전혀 계시지 않았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적으로 연구하는 모임도 영적인 모임이 아닐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 생각에 거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귀가 눈과 다른 것처럼 혼은 영과 다릅니다. 사람이 좋은 청력과 나쁜 시력을 가질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은 총명한 지성을 가졌으나 그의 영 안에서 죽은 상태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할 때 매우 감정적일 수 있지만 여전히 그의 마음은 완전히 불결할 수 있습니다. 혼과 영은 완전히 다르며, 하나님은 우리의 혼에 거하지 않습니다. 이 진리를 알면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설교에서 행하고 있는 많은 심리적, 감정적, 논리적 속임수로부터 우리를 구할 수 있습니다.

성막에는 길이가 150피트(45.72m), 너비가 75피트(22.86m)인 바깥뜰이 있었습니다. 교회를 세상의 나머지 부분과 비교할 때 매우 적은 사람들의 교제인 것처럼, 성막은 진영(camp)의 나머지 부분에 비해 매우 작았습니다.

바깥뜰 맨 끝에는 길이가 45피트(13.72m), 너비가 15피트(4.57m)인 장막(tent)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 성소(30피트 x 15피트)와 지성소(15피트 정사각형). 텐트의 높이는 15피트였습니다. 이것은 지성소를 가로와 세로와 높이가 같은 정육면체로 만들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16절에 보면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그리스도의 신부)도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1500마일(2,414km)인 정육면체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는 그들의 깊이(내면의 삶)와 외면의 삶(타인에게 투사하는 전면)이 같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에게 겉으로는 영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에 상응하는 내적인 삶(깊이)이 없는 위선자들을 거부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진영>


성막은 사방이 이스라엘 진영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각 지파마다 특정한 장소가 있었습니다. 레위의 세 아들 므라리, 게르손, 고핫은 성막을 돌보았고, 그들의 장막은 성막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레위 지파가 이스라엘 지파 집계에서 빠지자, 요셉 지파는 므낫세와 에브라임 두 지파로 나뉘었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12지파가 있었습니다.

성막의 바깥뜰은 27:9-19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상징하는 고운 흰 세마포가 그것을 둘러쌌습니다. 이것은 교회 안의 사람들과 외부 사람들을 구별하는 것은, 인간의 더 높은 수준의 의가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는다는 사실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흰 세마포는 또한 교회를 특징짓는 단순성을 상징합니다. 반면에, 음녀 바벨론은, 계시록에서 화려하게 장식된 것으로 묘사됩니다 - 그리스도의 신부에게서 발견되는 단순성과 대조적입니다(계 17:4과 19:8 비교).

성막의 입구는 하나뿐이었습니다 - 30피트(9.14m) 넓이의 커튼이 동쪽에 있고, 누구든지 그 커튼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 되심을 상징했습니다. 한 사람이 태양(동쪽)을 등지고 성막에 들어갔는데, 이는 그가 태양 숭배(당시 이집트와 전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일)를 거부했음을 나타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에도 기도할 때, 특히 "부활절" 아침의 "일출 예배"에서 여전히 동쪽을 바라보는 기독교인들이 있습니다! 마귀는 이집트인들의 태양신을 숭배하기 위해, 교묘하게 그들을 완전히 되돌려 놓았습니다!

바깥뜰에는, 두 가지 물건이 있었습니다 - 희생 제단과 물두멍.

그 장막(tent)은 성소 입구에 휘장이 있었습니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는 또 다른 두꺼운 커튼이 있었습니다("휘장(veil)" - 히 10:20).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둘로 찢어진 휘장(예루살렘 성전에 복제된 것)으로, 이제 모든 사람에게 아버지와 교제하는 길이 열려 있음을 나타냅니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깥뜰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들만이 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성소에는 분향단, 등잔대, 떡상이 있었습니다.

지성소에는, 오직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 그것도, 일 년에 한 번, 속죄일에, 제물의 피를 가지고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속죄소(the mercy seat)로 덮인, 언약궤가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눈에 띄게 나타났습니다.

장막(tent)과 그것의 널빤지

성소의 장막은 26:1-27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값싼 아카시아 나무로 만든 널빤지에 금을 입혀 건축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금)이면서 사람(나무)이심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또한 오늘날 비록 인간이지만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을 상징합니다(벧후 1:4).



각 널빤지에는 사막 모래 위에 안정적으로 놓일 수 있도록 두 개의 은색 받침대에 끼워 맞출 수 있는 두 개의 다리가 달려 있습니다. 은구멍은 이 세상 광야에서 우리가 굳건히 서 있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말해줍니다. 은은 구약 전체에서 구속의 그림입니다(출 38:25,27 및 30:16 참조). 가룟 유다도 은 30개에 우리 주님을 팔았습니다. 두 다리는 이 세상의 사막에서 안정성을 위해 각 신자에게서 발견되어야 하는 믿음과 순종을 상징합니다. 순종하지 않고 믿음만 앞세우는 사람은 한쪽 다리만 달린 널빤지처럼 균형이 잡히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 없이 율법적인 순종을 강조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균형이 맞지 않습니다.

나무 널빤지는 사이에 간격이 없이 나란히 놓였습니다 -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 사이에 있어야 할 친밀한 교제를 상징합니다. 각각의 널빤지에는, 널빤지를 함께 고정시키기 위한 막대를 끼울 네 개의 고리가 있었습니다. 다섯 번째 막대는 모든 널빤지의 중앙을 통해 내부적으로 (끝에서 끝까지) 통과했습니다. 이 5개의 막대는 널빤지를 서로 밀착시켜, 그것들을 안정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믿음과 순종 외에도, 우리가 안정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서로 친밀한 교제가 필요함을 상징합니다.

장막의 덮개들

성막(tabernacle)의 장막(tent)에는 네 개의 덮개가 있었습니다. 가장 안쪽 덮개는 그리스도의 의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복잡한 무늬가 있는 세마포였습니다. 두 번째 덮개는 우리의 죄를 멀리 가져가신 속죄양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염소 가죽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세 번째 덮개는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신 우리의 대리자로서의 예수님을 상징하는 붉게 물든 숫양의 가죽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가장 바깥쪽 덮개는 오소리의 가죽으로 만들어졌습니다 - 오소리 가죽은 더러운 갈색 외관을 가졌고 항상 사막의 모래로 덮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아름다운 덮개는 장막 안에서만 보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외면이 아니라, 내면에 있어야 합니다. 시편 45편 13절은 "왕의 딸은 내면이 모두 영광스럽다"고 말합니다. 즉, 다른 사람들이 겉으로 볼 수 있는 것보다 그리스도인의 내면의 삶에는 더 많은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정반대로 겉은 아름답지만 마음은 더럽습니다. 모든 영광이 밖에 있는 성막은, 하나님의 성막이 아닌 바벨론의 성막입니다.

외부의 오소리 가죽은 "그리스도의 치욕"을 상징합니다. 겉으로 보기에, 교회는 항상 오해와 불명예를 당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멸시와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오직 경건을 원하는 자들만이 그분께 나아왔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세상적인 매력이나 음악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교제의 경건함으로 우리 교회에 이끌려야 합니다.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은 "이 세상의 진영 밖으로" 나가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 "휘장 안"으로 그분에게로 갈 것입니다(히 13:13 및 10:19,20 참조). 그러나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라는 진영 안에 살며 휘장 밖에서 살고 있습니다! 진영 밖으로 나가는 것은 세상에게 버림받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당시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아 귀신의 왕이라 불렸다면, 하물며 그분의 가족인 우리는 얼마나 더 악한 이름으로 불리겠습니까(마 10:25).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과 달리) 세상에서 인기 있는 이유는, 그들이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노력했고 외교적이고 타협적이기 때문입니다.

젊은 기독교인으로서, 나는 종종 어떤 설교자들에게 끌렸습니다. 그들의 설교가 훌륭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그들에게 가까이 가보니, 그들이 교만하고 거만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쉽게 화를 냈습니다. 그들의 자녀들은 불경건했고, 그들은 동역자들 위에 군림했습니다. 내면에는 영광이 없었습니다. 영광은 모두 외부에 있었습니다. 내가 지금 본 것은 바벨론의 설교자의 가장 분명한 표시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참된 장막은 이것과 정반대입니다. 그 안에 있는 영광이 당신이 밖에서 보는 것보다 큽니다.

놋 희생제단

성막 바깥뜰에 있는 첫 번째 물건은 희생제단이었는데, 그것은 땅 위에 놓인 속이 빈 놋 울타리였습니다. 제물은 제단 안의 땅에 드려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제단이 항상 흙으로 된 제단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하나님이 창조하신 것,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닌 - 하나님 자신이 직접 만드신 제단인, 갈보리의 십자가를 상징합니다 - 출 20:24,25).


제단에는 올라가는 계단이 없고, 비탈길만 있어야 했습니다(출 20:26). 이것은 "구원의 단계"가 없다는 사실과,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로 가는 데 중보자나 단계가 없다는 사실을 상징했습니다. 당신은 그분께 직접 갑니다.

제단은 놋으로 덮인 나무로 만들어졌습니다. 놋은 심판을 의미합니다. 제단의 불로 놋이 뜨거워졌을 때, 안의 나무가 까맣게 타는 것을 겉으로는 볼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아무도 볼 수 없는 그리스도의 내적인 고난을 상징했습니다(벧전 4:1).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외적인 고통만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우리 주님이 지상 생애 동안 매일 다른 상황과 유혹에 직면하셨을 때 견뎌내신 내면의 고통에 대해 전혀 모릅니다(히 4:15).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갈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내적인 고통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됩니다. 예를 들어, 그분이 어린 소년이었을 때, 사람들은 그를 사생아로 여겼고, 틀림없이 그를 가리키며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른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분이 살아 있는 동안 겪어야 할 다른 많은 내적 고통들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고통은 십자가에서 아버지와의 교제가 끊어진 것이었습니다. 그 고통은 못과 가시관보다 훨씬 더 컸습니다. 우리 중 대부분은 아버지와의 교제가 끊어지는 것에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아버지와의 "교제 단절"의 고통을 모릅니다.

다음 예를 생각해 보십시오: 빈민가에 사는 사람들은 완벽한 위생 조건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평생 도마뱀이나 바퀴벌레 한 마리도 본 적 없는 집에 살아본 사람들은, 우리 집에서 그런 것들을 보면 움츠러들 것입니다! 예수님께도 그랬습니다. 영원 전부터 그분은 아버지와 완전한 교제 가운데 사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죄가 되어 그 교제를 잃게 될 것이라는 예상을 하셨습니다. 그분은 육체적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100번의 육체적인 십자가형을 기꺼이 겪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께 "내가 이 잔을 마셔야 합니까?"라고 물으셨을 때 - 그 잔은 육체적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끊어지게 되는 아버지와의 교제였습니다. 그것은 그분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피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분은 기도하고 또 기도했고, 아버지는 예수님에게 "다른 길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알겠습니다, 아버지, 타락한 인간을 위해 받아들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겟세마네에서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봅니다.

이 제단에는 모퉁이에, 희생 동물이 죽기 전에 묶여질 네 개의 뿔이 있습니다. 시편 118편 27절은, "절기 희생제물을 줄로 제단 뿔에 매라"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십자가로 가기로 결심하신 예수님의 굳건함을 말합니다. 누가복음 9장 51절에,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아무것도 그분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는 우리도 그 길을 가기로 굳게 결심해야 합니다.

놋 물두멍


물두멍은 물을 담는 큰 통으로, 장막 앞에 놓였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여인들이 사용하던 광을 낸 놋거울로 만들어졌습니다(출 38:8). 이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했습니다. 야고보서 1:23-25은 하나님의 말씀이 거울과 같다고 말합니다. 제사장들이 물두멍에 이르러 자기들의 얼굴이 더럽혀졌는지를 볼 수 있었고, 씻고 깨끗하여져서 성소에서 주님을 섬길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씻어" (우리가 듣고 순종할 때), 우리를 거룩하게 하사 그분을 섬길 수 있도록 하십니다(엡 5:26).

물두멍은 또한 물침례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먼저 물로 깨끗하게 하시고 그 다음 성령의 불로 깨끗하게 하십니다 - 금이 물과 불로 정결케 됨 같이(민 31:21-23). 바깥뜰에서 말씀으로 외적인 죄를 씻음으로,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선한 증거를 얻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거룩한 곳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불이 우리를 내면적으로 정결하게 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영적인 사람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종교인으로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금 떡상

장막 안, 성소에는, 세 가지 가구가 있었습니다. 북쪽에는 떡상이 있고, 남쪽에는 등잔대가 있고, 서쪽 끝에는 분향단이 있었습니다.

금상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12덩어리의 떡이 올려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갈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나타냅니다(마 4:4). 옛 언약에는 이스라엘이 몸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떡이 열두 개 있었습니다. 각 부족은 고유한 특성을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 안에서, 우리는 주님의 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빵 한 덩이만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비록 다른 민족과 배경에서 왔지만 모두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옛 언약에서는 제사장들만이 이 빵을 먹을 수 있었고, 이스라엘 지파를 대신하여 먹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우리 각자가 어떤 인도자나 중재자를 통하지 않고,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직접 접촉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직접 빵을 먹을 수 있습니다.

금 등잔대

등잔대는 우리의 삶과 지역 교회의 증거를 상징합니다. 그것은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와, 세상의 빛인 우리에 대한 그림입니다(마 5:14). 제사장들은 이 등불이 항상 기름으로 타오르도록 해야 했습니다. 이는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의 증거가 항상 밝게 타오르도록 해야 할 우리의 책임을 상징합니다.


옛 언약에서, 등잔대는 일곱 개의 가지가 있는, 단 하나의 촛대였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많은 가지를 가진 하나의 종파로 상징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에서, 우리는 (계시록에서) 각 교회가 분리된 촛대로 나타나고, 주님이 각 촛대의 머리로서 그들 가운데 거니시는 것을 봅니다(계 1:20). 이것은 새 언약 교회가, 이스라엘 지파와 달리,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아래 직접적으로 독립된 단위가 되도록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임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는 여전히 큰 교단(많은 가지를 가진 하나의 큰 등잔대)의 가지가 되는 구약의 패턴을 따르고 있습니다.

등잔대에 있는 일곱 개의 등(지역 교회의 각 구성원을 상징함)은 각자가 스스로 밝게 타올라야 했습니다. 죄를 짓는(그의 빛이 꺼진) 교인은, 문제를 바로잡고 가능한 한 빨리 등불을 다듬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그의 지역 교회에서 물러나야 합니다. 그래서 그 교회에서 주님의 증거가 그 사람 때문에 어떤 면에서도 불명예를 당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본을 정확히 따를 때에만, 그분의 영광이 우리 지역 교회를 채울 수 있습니다.

금 향단

향단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을 나타냅니다(계 5:8).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존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는 (이 향과 같이) 항상 우리 마음에서 하나님께로 올라와야 합니다(출 30:8; 눅 18:1). 모세는 이 향은 여호와만을 위하여 일정한 비율로 준비해야 하며 다른 사람을 위하여는 절대로 만들지 말라는 명령을 구체적으로 받았습니다(출 30:37). 이것은 두 가지를 상징합니다.


첫째, 그것은 우리 자신의 공로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없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 사용하는 마법의 단어(또는 주문)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오직 주 예수의 공로로 나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일 우리 안에 어떤 공로가 있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처럼 기도한다면, 그러한 기도는 예수 이름으로 드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유일한 입장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더 낫게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가 아닌 다른 사람의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공로 없이 하나님께 가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것은 우리가 결코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해 어떤 것도 기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고전 10:31). 우리 자신을 위한 모든 기도는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의인의 기도가 능력 있는 이유입니다 - 그는 모든 일에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기 때문입니다(약 5:16).

휘장-지성소로 들어가는 길

성막(바깥뜰, 성소, 지성소)은 사람의 그림이었습니다 - 몸, 혼, 영(살전 5:23).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혼과 영을 나누는 검과 같습니다(히 4:12).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그것은 먼저 우리의 혼(생각과 감정)에 들어갑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mind)을 가르치고 우리의 감정을 자극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거기서 멈추고,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여 우리의 의지(will)를 굴복하게 하지 않는다면, 그 말씀은 휘장을 통해 우리의 영으로 들어올 수 없으며 - 우리는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할 것입니다. 휘장은 하나님의 뜻(will)에 복종해야 하는 우리 인간의 의지(will)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뜻을 행하지 않고, 그분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오셨습니다(요 6:38). 그분의 지상 생애 내내 아버지에 대한 그분의 태도는,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도 예수님을 따르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 뜻에 감동을 받아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자신의 뜻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영적인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뜻을 부인하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 참된 영성의 비결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우리를 위해 이 새롭고 살아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 그래서 우리는 매일 그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히 10:19,20). 이것은 우리가 단번에 들어가는 문이 아닙니다. 매일매일 걸어야 하는 길입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항상 지성소에 거할 수 있습니다.

금 언약궤

지성소에는 속죄소가 덮개로 된 금궤가 있었습니다. 언약궤와 속죄소는 함께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그림이었습니다. 속죄소는 속죄일에 피가 뿌려지는 곳입니다. 그 위에는 두 개의 금 그룹이 있었습니다. 그룹은 화염검을 가지고 에덴에 있는 생명나무를 지키는 자들이었습니다(창 3:24). 그 칼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처음으로 예수님에게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칼이 우리에게도 떨어졌으니, 이는 우리도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입니다(갈 2:20). 지금 우리가 생명나무(그리스도)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이 검을 받아들이고 우리의 자기-의지(self-will)가 죽임을 당하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법궤 안에는 (십계명이 기록된) 두 돌판과,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지팡이가 있었습니다.

먼저 만나를 살펴봅시다. 만나가 하늘에서 내려왔을지라도, 밤새도록 간직하면 벌레가 생기고 악취가 납니다. 그러나 같은 만나를 하나님 임재 안에 두었더니, 광야에서 40년 동안 냄새가 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의 상징은 이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 생각에만 있다면, 잠시 후에 그것은 악취가 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겸손하게 그것을 붙든다면, 그것은 영원히 신선하게 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 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때, 기름 부음과 신선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메시지를, 다른 사람이 말할 때는, 죽은 뼈처럼 무미건조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당신도 하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고 언젠가 강력하게 설교할 수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다음날 그 기름부음을 잃어버리고, 똑같은 설교를 한다면, 그것은 메마르고 죽은 것일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설교가 지루한 이유는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설교는, 옛 만나와 같이, 벌레를 낳고 악취를 풍깁니다. 히브리서 3:13에 따르면, 우리 중 누구도 마음이 강퍅해지는 데는 24시간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날마다(24시간) 서로 권면(격려)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에 의해 강퍅하게 되지 않게 하라."

이제 아론의 지팡이를 봅시다: 사람들이 모세와 아론의 권위를 의심하던 때가 있었습니다(민 16장). 하나님은 그 때 각 지파에게 죽은 나뭇가지를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막대들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하룻밤 동안 보관되었습니다. 아론의 지팡이만이 밤에 싹이 나서 열매를 맺었습니다(민 17장). 그 후 이 지팡이는 궤 안에 보관되어, 하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 생명을 가져오심으로써 그분의 종들을 증거하신다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이 지팡이도 (만나와 같이) 40년 동안 신선함을 유지하여, 권위도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행사되는 동안에만 유효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사무엘 시대에, 어떤 호기심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궤 안에 무엇이 있는지 보기 위해 이 속죄소를 들어올렸다가, 즉시 주님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삼상 6:19). 이것은 우리와 관련이 없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지 않기로 선택하신 숨겨진 문제를 탐구하려고 시도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줍니다(신 29:29 참조).

대제사장의 의복


대제사장 아론은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그의 외투는 세 가지 항목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의를 상징하는 흰색 세마포로 만든 상의입니다. 그 위에 그는, 옷자락에 방울과 석류 모양이 번갈아 가며 달린 파란 가운을 입어야 했습니다. 파란색은 하늘의 색이며 천국을 말합니다. 석류는 성령의 열매를, 방울은 성령의 은사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삶에서 성령의 열매와 은사를 모두 가지고 계셨습니다. - 그리고 우리도 하나님을 효과적으로 섬기려면, 둘 다 필요합니다. 이 가운 위에, 그는 에봇이라 하는 색색의 앞치마를 입어야 했습니다.

에봇에는 세 가지 물건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진 두 어깨판;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개의 보석이 달린 흉패; 그리고 에봇 주머니에 넣은 "우림과 둠밈". (우리는 "우림과 둠밈"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대제사장이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찾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제 "갈 지"와, 언제 "멈출 지", 언제 "기다릴"지를 알려주는 신호등과 같았습니다.

이 세 가지 항목은 우리를 지탱하는 그리스도의 능력, 우리를 돌보시는 그분의 사랑 , 우리를 인도하는 그분의 지혜를 상징합니다. 이 세 가지는 디모데후서 1장 7절에서 하나님의 영이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덕목으로 함께 제시됩니다.

어깨판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종인 우리도 어린아이를 어깨에 업듯이, 다른 사람을 어깨에 짊어지고 그들의 짐을 들어 주어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흉패는 우리도 하나님의 백성을 마음에 품고, 그들을 사랑하고 염려해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참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을 마음에 품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품을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또 이마에 "여호와께 성결"이라 새긴 금패(관(모자)에 부착)를 두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아론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제물"에서 발견되는 죄를 담당해야 했습니다(28:36-38). 우리의 "거룩한 제물"에도 죄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더러운 죄만 짊어지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거룩한 것 안에 있는 죄도 짊어지셨습니다. 우리의 거룩한 활동에서 죄의 몇 가지 예: 명예나 돈을 얻기 위해 설교하는 것,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 기도하는 것, 이기적인 동기로 선한 일을 하는 것 등입니다.


속죄일(일년에 한 번)에, 대제사장은 이 화려한 옷을 모두 벗고 단순한 흰 드레스만 입고 지성소에 들어갔습니다. 그가 지성소에서 나올 때에는, 다시 화려한 옷을 입고 백성들 앞에 나아가야 했습니다(겔 44:19). 이것은 우리가 주님 앞에 갈 때, 단순함과 겸손함과 깨어진 마음으로 가야 함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백성 앞에 나아갈 때에는, 얼굴에 기름을 바르고, 우리의 희생과 기도와 금식을 그들에게 숨겨야 합니다. 우리의 거룩한 흰 드레스는 오직 하나님 앞에서만 입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금식이 아니라, 잔치하는 것처럼 보여야 합니다!

주님을 전임(풀타임)으로 섬기기 시작했을 때, 저는 돈이 없어도 풍족한 것처럼 행동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아무도 나에게 연민이나 자선의 선물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기독교 사역자들은 (그들의 외모와 기도편지로) 자신이 가난하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에, 거지들이 선물을 받듯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선 행위로 선물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늘과 땅의 주님의 종에게는 품위가 있고, 자신을 자선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그는 자신의 얼굴에 기름을 바르고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보여야 합니다. 그의 주인은 사람들의 자선 선물 없이도, 그의 모든 필요를 충분히 공급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백성들 앞에 나아갈 때 단순한 흰 옷을 벗고 그들 앞에서 항상 화려한 옷을 입읍시다!

그리스도인 생활의 세 가지 수준

성막의 세 부분인 바깥뜰, 성소, 지성소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는 세 가지 수준, 즉 다음과 같은 7가지 영역을 상징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a. 영적 성장의 세 단계:

1. 하나님께 용서받음;

2. 하나님을 섬김; 그리고

3. 하나님과의 교제.

b. 세 가지 유형의 그리스도인:

1. 육신적인 그리스도인;

2. 혼적인 그리스도인; 그리고

3. 영적인 그리스도인.

c. 성령의 세 가지 사역:

1. 성령으로 태어남;

2. 성령으로 세례를 받음; 그리고

3. 날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음.

d. 하나님을 향한 세 가지 태도:

1. 감사;

2. 찬양; 그리고

3. 예배.

감사할 때, 우리는 우리가 받고 축복받은 하나님의 선물을 생각합니다. 찬양할 때, 우리는 우리를 대신하여 행사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전능하신 능력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배에서, 우리의 초점은 하나님 자신에게로 옮겨지고, 스스로 계시는 그분을 경배합니다(we adore Him for Who He is).

e. 빛의 세 가지 수준:

1. 인간의 이성;

2.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 그리고

3. 하나님의 본성.

우리 모두는 위의 세 가지 출처 중 하나 이상에서 받는 이해에 따라 삶을 삽니다. 바깥뜰과 성소의 빛은 태양(바깥 뜰)과 등잔대(성소)라는 창조된 빛이었습니다. 그러나 지성소의 빛은 창조되지 않은 하나님 자신의 임재의 빛이었습니다.

f. 결실의 세 단계:

1. 삼십 배;

2. 육십 배; 그리고

3. 백 배.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나오는 좋은 땅도 나쁜 땅과 마찬가지로 세 종류였습니다(막 4:1-8). 좋은 땅에서 열매를 맺는 정도는 온 마음을 다하는 정도에 달려 있습니다.

g. 그리스도인 성숙도의 세 가지 수준:

1. 어린아이;

2. 청년;

3. 아버지.

아기는 다른 사람에게 의존합니다. 젊은이들은 열심입니다. 아버지는 사랑과 지혜가 충만합니다(요일 2:12-14).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은 인간 의지를 굴복하는 찢어진 휘장을 통해서입니다. 그 휘장은 오늘 찢어질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주님에 의해 이미 찢어졌기 때문입니다(히 10:20). 그러나 우리는 지성소에서 아버지와 교제하려면, 매일 그 길을 걸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매일 그분의 임재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길이지 목표가 아닙니다. 우리의 목표는 자신에 대한 죽음이 아니라 아버지와의 교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의 메시지가 아니라 아버지와의 교제의 메시지를 중요시합니다.

그 복된 교제 가운데 하루 종일 살게 하소서.

장 3
레위기

하나님의 거룩하심

이 책은 정말, 공부하고 마음에 와 닿는 무언가를 얻기에 가장 어려운 책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감받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안에 우리를 위한 무언가를 가지고 계십니다.

레위기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말하는 책입니다. 전체적으로 거룩함을 주요 주제로 삼고 있는 책입니다.

거룩함은 많은 신자들이 두려워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을 담대히 선포해야 합니다 -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현실적이고 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함은 하나님의 본성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은 성령입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환상을 보았을 때,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았고 자신을 부정한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거룩함은 건강과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완벽하게 건강하다는 메시지를 듣는 것을 두려워합니까? 우리는 건강을 두려워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육신의 건강보다 더 중요한 영의 완전한 건강을 왜 두려워해야 합니까? 죄는 질병과 같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레위기에서 봅니다. 주님은 여기에서 거룩함과 건강에 관한 규칙을 주십니다. 둘은 비슷합니다 - 하나는 영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몸을 위한 것입니다. 육신의 거룩함은 우리가 건강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영과 혼의 건강은 우리가 거룩함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함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온전한 건강을 바라는 것보다 온전한 거룩함을 바라는 곳에 이르러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몸의 모든 질병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를 원하는 것처럼, 우리를 더럽히는 모든 죄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를 원해야 합니다.

우리는 질병을 용인하지 않는 것처럼 죄를 용인해서는 안 됩니다. 더러운 생각을 용인하는 것은 결핵이나 문둥병을 용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게 내 약점이야, 또는 그게 내 기질이야"라고 말하며 자신을 정당화함으로써 화를 용인하고, 그것을 삶에 허용하는 것은, 우리 몸에 에이즈나 매독을 허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죄와 질병은 매우 비슷합니다. 예를 들어, 레위기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문둥병과 그와 유사한 피부병에 걸린 사람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이 책에 나오는 죄의 유형이며, 여기에 주어진 율법은 죄를 다루는 방법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책에는 '거룩함'과 '거룩한'이라는 단어가 100번 가까이 등장하며, 그것이 이 책의 주제임을 강조합니다. 거룩함이 100번이나 언급되는 27장의 책은 분명 중요한 책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러나 이 책에는 성경의 다른 많은 책들처럼 이야기가 없습니다. 흥미로운 구절이나 약속도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물, 절기와 같은 것들에 대한 묘사가 많이 있습니다. 나는 이 책의 중요한 부분들 중 일부를 꺼내서 여러분에게 설명하고자 합니다. 나는 또한 이 책에 기술된 일부 제물과 절기들에 대해 설명하고, 그것들이 이 새 언약 시대에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는지 알아보고 싶습니다. 우리는 히브리서를 통해, 하나님께서 모든 제사와 희생을 끝내셨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 희생은 그리스도와 우리를 가리키고 있으므로 그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고 무엇을 상징하는지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 마치 지난 장에서 성막에서 본 것처럼 말입니다.

다섯 가지 제물

레위기 1장부터 7장은 다섯 가지 제물에 대해 설명합니다. 그것들 모두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완전한 삶과 그분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완전한 삶도 생각하기를 원하십니다. 여기에는 피를 흘리지 않는 제물이 설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제물은 분명히 갈보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완전한 삶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분의 삶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치르신 희생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레위기에서 배우는 것은, 그분이 자신의 삶에서도 많은 희생을 치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날마다 아버지께 자신의 삶을 바치셨고, 자신의 뜻(will)과 혼의 생명(soul-life)을 죽음에 쏟아 부으셨습니다.

이 다섯 가지 제물 중 두 가지는 의무(강제)였습니다 - 속죄제(the sin offering), 속건제(the guilt offering).

다른 세 가지 제물은 자발적이었습니다 - 번제(the burnt offering), 소제(the grain offering), 화목제(the peace offering)입니다.

레위기 1장에 언급된 첫 번째 제사는 번제(the burnt offering)입니다 - 이것은 우리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그림입니다.

번제물은 어떤 부분에도 결함이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먼저 조각으로 잘라야 했습니다 - 그런 다음 드려졌습니다. 사람들은 재정 능력에 따라, 소나 양이나 염소나 심지어 비둘기나 집비둘기로도 바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각각의 제물은 흠이나 결함이 없어야 했습니다.

번제는 예수님이 지상 생활을 통해, 아버지께 자신의 몸을 바치셨고 마침내 십자가에 그의 몸을 바친 방식을 보여줍니다. 지상 생활 내내, 그분은 십자가에서 제물로서 그분의 몸을 아버지께 바치기 전에, 모든 유혹 속에서 그분의 몸을 완전히 순결하게 유지하셨습니다. 지난 33년 반 동안 예수님의 지상 생애에 단 한 점의 흠이라도 있었다면,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바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주릴 때에, 돌이 떡덩이가 되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죄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그분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생애는 전적인 의존과 전적인 순종의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서 돌을 빵으로 바꾸는 것과 같은 무해한 일처럼 보이는 것이라도, 아버지의 지시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순종의 기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삶은 그토록 승리했고, 아버지는 그분을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또 다른 예를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복음 4장 38~42절에서, 우리는 한 마을에서 일어난 큰 부흥에 대해 봅니다. 이튿날 아침, 무리는 예수님에게 그곳에 머물며 부흥회를 계속해달라고 압박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No"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왜냐하면, 그분이 그날 아침 사람들을 만나기 전에, 그분은 광야에서 아버지를 만났고 다른 곳으로 가라고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무리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라고 하신 곳으로 가셨습니다. 만일 그분이 군중들에게 굴복하고 부흥회를 했다면, 그분은 죄를 지었을 것입니다! 당신은 아직 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신가요?

우리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부흥회를 주관하는 것이 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사셨던, 죄에 대한 민감성의 수준이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죄를 화내는 것, 더러운 생각을 하는 것, 질투하는 것, 억울해 하는 것 등으로 생각합니다. 이것들도 죄이지만 - 유치원 수준입니다. 예수님은 박사(Ph.D.) 수준에서 죄를 다루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어떤 장소에 가서 집회를 하도록 부르시지 않았는데 그렇게 하면 죄를 짓는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하룻밤 사이에 이 박사 수준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해마다 한 학년에서 다음 학년으로 점진적으로 발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발전함에 따라, 이전에는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많은 것들이, 이제 우리에게 죄가 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죄가 온전히 죄"(롬 7:13)가 될 때, 우리는 영적으로 성장하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생애를 바라볼 때, 우리는 갈보리에서의 그분의 죽음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자신을 성부께 완전히 드리며 "주께서 나를 위하여 (body)을 예비하셨으니... 내가 (이 몸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히 10:5,7)라고 말씀하신 것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단 한 번도 그분의 몸으로 자신의 뜻을 행하지 않으시고, 오직 아버지의 뜻을 행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는 것의 의미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로마서 12장 1절에서 우리에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너희 을 거룩한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리라... 하나님의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이 번제는 하나님께 바쳐져 완전히 타버렸습니다. 성경은 이것이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1:17)라고 말합니다 - 이는 하나님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매우 기뻐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삶의 목표 역시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고후 5:9)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몸을 주님께 드릴 때, "주님, 제 몸을 전적으로 당신께 바칩니다."라고 말하기는 매우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모든 것을 제공했는지는, 그것을 "잘라내기" 전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속일 수 있습니다. 번제와 같이 쪼개어 한 조각씩 드리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 몸의 지체를 하나하나 하나님께 드린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말합니다, "주님, 제 눈이 여기 있습니다. 나는 지난 수년 동안 악마와 나 자신을 위해 그것들을 사용하여, 당신을 화나게 했던 많은 것을 보고 읽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 나의 눈을 제단 위에 올려 놓습니다. 나는 다시는 주님이시라면 보거나 읽지 않을 것을 보거나 읽는 데 이 눈을 사용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더 이상 이 눈으로 죄를 짓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는 혀 옆으로 가서 말합니다, "주님, 여기 제 혀가 있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이 혀를 마귀와 나를 위해 사용해 왔으며, 내 멋대로 말하고, 내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고, 사람에게 화를 내고, 다른 이들을 험담하고, 뒷담화하고, 고발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그 모든 것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여기 내 혀가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완전히 당신의 것입니다."

우리는 손과 발과 육체적 정욕 옆으로 하나씩 가서, 같은 말을 합니다: "주님, 여기 내가 당신에게 죄를 짓고 상처를 입힌, 내 몸의 지체들과 내 육체적 정욕들이 있습니다. 다시는 이것들을 나 자신을 기쁘게 하거나 나의 정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사용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당신 것입니다."

제물을 쪼개어 하나하나 제단 위에 올려놓을 때, 비로소 우리 몸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제물을 각을 뜨고 제단 위에 온전히 올려놓은 다음, "주여, 이제 주의 불을 제물 위에 내려서 그것을 불태워 주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레위기 9장 24절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불이 번제물 위에 내려와 그것을 태웠는지 봅니다. 그 불은 성령세례와, 하나님을 위한 우리의 희생제물을 삼키고 우리 몸을 불태우기 위해 오는 불의 그림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번제물이 제단에 올려질 때까지 불은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몸을 번제로 바치는 대가를 치르기 싫으면서도, 불을 얻고자 할 때 어떻게 합니까? 그들은 가짜 불, 즉 위조 불을 만듭니다. 레위기 10장 1,2절에서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화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하시지 아니한 다른을 그 속에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니라"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짜 불이 없는데, 진짜 불을 가진 사람들의 일부가 되기를 원할 때, 위험은 우리가 그들이 가진 것을 모방하여 "예, 우리도 불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방언도 했습니다!"라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짜 불을 흉내 낸 나답과 아비후에게 너무 화가 나서, 그분의 임재 앞에서 또 다른 불을 내리셨습니다 - 이번에는 번제물을 삼키지 않고, 이 두 위선자를 삼키라고 하셨습니다!

영적인 일에 있어서 참된 것을 모방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설교자들로부터 방언을 말하고, 감정을 북돋우고, 심리적인 "치유"를 경험하도록 지도 받고 있습니다. (이것들이 "예수 이름으로" 고침을 받는 것과 같다고 상상함).

하나님으로부터 진정한 불을 얻은 사람들은 그것에 대한 대가를 치렀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제단 위에 놓았습니다 - 그들의 돈, 그들의 눈, 그들의 혀, 그들의 손, 그들의 모든 것. 그들은 그들의 삶을 살피고, 모든 번제물의 조각이 제단 위에 있는지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불을 보내셨습니다. 당신은 그러한 사람의 삶을 지켜보면서, 당신도 그와 같은 강력한 기름부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것에 대해 같은 가격을 지불할 의향이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여전히 당신이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합니다. 그때 당신은 나답과 아비후가 한 것처럼 이상한 불을 일으키고, 감정을 자극하고, "방언"을 만들어 내는 등의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신자의 95% 이상이 영적 분별력이 없기 때문에, 당신이 진짜 불을 가지고 있다고 그들을 속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은, 당신이 가진 것이 스스로 만든 것이고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조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나답과 아비후를 심판하신 방식으로 오늘날 기독교계를 심판하신다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두 번째 제물은 '소제(the grain offering)'입니다(레 2장). 이 제물에는 피가 없었습니다. 어떤 동물도 죽지 않았습니다.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소금과 기름으로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이 제물과 관련하여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 중 하나는 "누룩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11절). 누룩은 성경 전체에서 죄의 그림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에 소금을 넣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금은 영원한 언약의 그림입니다. 민수기 18장 19절은 "이는 여호와 앞에 영원한 소금 언약이니라"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소금을 받치는 것과 신약성경에서 예수께서 언급하신 소금에 대해 읽을 때마다 그것이 여기 민수기에 언급된 이 영원한 언약을 가리킨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물건을 오래 보존하기 위해 소금을 사용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소금을 영원한 것을 가리키는 데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소제물에 첨가된 소금은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영원히 자신을 여호와께 드리는 것임을 나타냅니다 - 단지 5년 또는 심지어 50년 동안이 아니라! 그것은 결혼과 같은 영원한 언약입니다.

세 번째 제사는 화목제(the peace offering)입니다(레 3장). 제물을 드리는 사람은 그 동물을 끌어다가 그 머리에 손을 얹어야 했습니다(2절). 그리하여, 그는 그 동물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있습니다"(롬 5:1). 우리 양심의 평화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 중 어느 누구도, 그분이 그들을 받아들이시는 것에 대해 확신이 없는 삶을 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가 모두 용서받았다는 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 죄책감이 전혀 없어야 합니다. 이 사람이 짐승에게 손을 얹은 것처럼, 우리도 갈보리에서 주님께 손을 얹고, 갈보리에서 주님이 우리의 모든 죗값을 지불하시고 우리의 빚을 완전히 청산하시고 우리의 빚진 증서를 갈보리에서 찢어 버린 것을 믿습니다(골 2:14). 그러므로 이제,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도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너희 죄와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 항상 거하는 것에 대해 말합니다(히 4장).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 당신이 변화된 후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이것이 우리 삶에 안식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화목제에서 상징되는 것입니다.

네 번째 제사는 속죄제(the sin offering)입니다(4장). 여기에서 오직 '비의도적인 죄'만 언급된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사람이 의도하지 않고 여호와의 명하신 것을 범하였으면…"(2절). 죄를 지은 사람은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일 수 있습니다(3절 참조). 그도 주님께 속죄 제물을 가져와야 합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지도자(족장)일 수도 있습니다(22절). 어떤 기독교 지도자들은 전혀 죄를 짓지 않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실 때, 항상 지도자들과 제사장들부터 시작하십니다. 그들이 먼저 하나님과 결산을 해야 합니다.

만일 당신이 평범한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당신 지파의 지도자가 제단에 제물을 가져오는 것을 보고, 놀라서 "이 사람이 우리의 지도자인데, 그도 죄를 지었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과 같은 평범한 사람들을 그분의 지도자로 선택하신다는 것을 믿도록 격려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를 짓지 않습니까?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세상에 있습니까? 당신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들에게 당신이 완벽하다는 인상을 주지 마십시오. 성경에 나오는 경건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대해 나에게 용기를 주는 한 가지는, 성경이 그들의 실수를 숨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삶에서 그것을 보았습니다. 사도 바울도 실수를 저질렀고 (사도행전 기록을 쓴) 동료 누가에게 그 실수를 조금도 숨기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누가는, 바울이 바나바와 싸운 일,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 일, 유대인의 서원을 이행하기 위해 머리를 깎은 일, 그의 생애 마지막 즈음에 대제사장에게 소리친 일 등을 충실히 기록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우리의 격려를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람들도 실수를 하고 죄에 빠진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현대 전기(biographies - 일대기)는, 결코 모든 진실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 사람들을 마치 그들의 삶에서 어떤 실수도 저지른 적이 없는 것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그러한 전기는 누구에게도 용기를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정직합니다. 지도자도 죄를 지으면 다른 사람들처럼 하나님과 사람과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나는 지도자들에게 공개적으로 죄를 고백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No. 하지만 사람들에게 당신은 결코 실수하지 않는다거나 죄를 짓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당신이 당신의 교회의 어느 누구에게도 사과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당신이 주는 인상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아내에게, 자녀들에게, 나의 교회 사람들에게, 심지어 막내아들보다 어린 젊은이들에게 수없이 사과해야 했습니다 - 이 모든 이유는 하나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도 사과할 필요가 없는 분이 단 한 분 있습니다 -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러니 자신을 낮추고, 당신이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하십시오. 그들은 당신을 더욱 존경할 것입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범죄하면, 장막(tent) 문에 제물을 끌고 가야 했습니다(4절). 그는 그것을 "나는 기름부음을 받은 제사장인데, 이것을 공개적으로 하면, 내 명성이 떨어질 것"이라며 사적으로나 비밀리에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바로 장막 문,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 했습니다. 그는 수소의 머리에 손을 얹고 자신이 죄를 지었음을 인정하고, 그 수소의 피를 조금 가져다가, 손가락에 찍어 여호와께 드려야 했습니다.

여기 4:13,14에서 흥미로운 점을 하나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온 회중이 죄를 범하고, 그것을 회중이 알지 못하고 그 일에 하나라도 범하였으면, 그들도 수소를 끌어올 것이요." 이제 여기에 언급된 다른 제물이 있습니다 - 죄를 지은 족장을 위한 것(4:22)과 죄를 지은 평범한 사람을 위한 것(4:27). 보통 사람 한 명이 죄를 지으면, 암염소 한 마리만 가져와야 했는데(4:28) 값이 그리 비싸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온 회중이 죄를 범하면 수소(더 비싼 것)를 가져와야 했습니다. 제사장이 죄를 지으면, 그도 수소를 가져와야 했습니다. 여기에서 죄를 범한 제사장을 위한 제물이 죄를 범한 회중을 위한 제물과 동일함을 주목하십시오. 지도자가 죄를 짓는 것은 보통 사람이 죄를 짓는 것과는 다릅니다. 달라요. 그것은 온 회중이 죄를 짓는 것과 같습니다. 둘 다 수소를 가져와야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같은 죄를 같은 방식으로 바라보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기름부음 받은 지도자가 어떤 식으로든 죄를 짓고, 평범한 사람이 똑같은 방식으로 죄를 짓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똑같은 죄가 아닙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의 죄는 훨씬 더 심각합니다. 그는 수소 한 마리를 데려와야 하고, 보통 사람은 암염소 한 마리만 데려오면 됩니다. 우리가 더 많이 기름부음을 받고 다른 사람들을 더 많이 가르칠수록(옛 언약의 제사장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 삶에 대해 하나님께 더 책임을 져야 합니다. "더 많이 받은 사람에게는 더 많이 요구할 것입니다"(눅 12:48).

속죄제는 의도치 않은 죄에 대해서만 규정된다는 점에 유의하십시오(레 4:2,13,22,27 참조). 히브리서 10:26에 주어진 경고를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의도적으로 계속 죄를 범하면, 다시 속죄할 제사가 없습니다." 이것은 레위기 4장과 일치합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주님께로 돌이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죄를 짓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거듭남의 한 가지 표시입니다. 우리는 죄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듭나면 다시는 죄를 짓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선하심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쉽게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 죄를 짓는 사람은, 거듭나지 못한 것이 거의 확실합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죄에 빠질 수 있지만, 그는 죄를 미워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심지어 거듭난 후에도, 역시 고의적으로 죄를 지었다고 모두 고백해야 합니다. 그 죄들은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10:26은 가끔 하는 행동이 아니라 계속해서 죄를 짓는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고의로 계속 죄를 범하면 "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더 이상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게 됩니다(히 10:27).

다섯 번째 제사는 속건제(the guilt offering)입니다(5장). 이것은 하나님뿐 아니라, 다른 인간에게도 범한 죄를 가리킵니다. 어떤 죄는 오직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더러운 생각이 든다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그러한 죄는 오직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잘못된 동기가 있다면,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만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죄는 다른 사람들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여기 1절에서는, 어떤 사람이 자기가 본 것이나 아는 것에 대하여, 혹 그의 친구가 연루될까 하여 증거하기를 거절하여, 그 결과 무죄한 사람이 벌을 받는다면, 그 첫 번째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 죄를 범하게 됨을 말합니다. 다른 비슷한 죄들이 다음 구절들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16절에서, 배상이 언급됩니다: "거룩한 것에 대하여 범한 죄를 배상하되, 거기에 오분의 일(20%)을 더하여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 - 죄가 주님을 대적하는 경우. 그 원칙은 사람에게 배상하는 것에도 적용됩니다(민 5:6,7에 언급된 바와 같이). 당신이 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강탈한 경우, 배상할 때, 그에게 받은 것보다 20% 더 돌려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아무에게도 다시는 그것을 행하지 않도록 당신을 가르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속건제에 대해, 여기에서 여러분이 주목하기를 바라는 한 가지를 더 말씀하십니다(레 7:30), "그의 손으로 직접 여호와께 살라 바칠 제물을 가져오고". 당신이 누구이든(큰 자이든 작은 자이든), 당신은 당신의 제물을 개인적으로 가져와야 합니다. 당신은 하인을 통해 그것을 보낼 수 없습니다. 당신이 아무리 훌륭한 사람일지라도, 스스로 와서, 자신을 낮추고,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죄를 지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동등합니다.

거룩함과 건강

이제 우리는 거룩함과 건강에 관한 율법을 다루는 여러 장들에 이르렀습니다. 이 모든 것은 사람의 삶의 가장 작은 세부 사항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관심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삶의 작은 세부 사항에 관심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레위기에서 하나님이 모든 작은 세부 사항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레위기에서 도마뱀이 냄비에 떨어졌을 때 어떻게 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도마뱀이 빠진 질그릇은 깨뜨리고 그 안에 든 음식은 하나도 먹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감염을 일으키고 죽음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레 11:33). 하나님은 또한 그들이 어떤 식으로든 더럽혀졌을 때, 목욕에 대한 지침을 주셨습니다 - 그들은 흐르는 물에 목욕해야 했습니다(레 15:13). 또한 그분은 그들에게 옷을 더럽히면 빨라고 하셨습니다(레 15:5, 7, 11 및 17:15,16 참조). 이것들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을 돌보시는 두 가지 예에 불과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당신이 먹는 음식과 당신의 청결함(당신의 목욕 습관과 정기적인 옷 세탁)에 그토록 관심이 있으실 것이라고 상상해 본 적이 있습니까? 나는 그런 것들을 읽을 때 흥미롭습니다. 레위기가 지루하다고 누가 말했습니까?

이 책은 또한 성적인 순결과 여러 가지 흥미로운 주제에 대한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10장 8-11절에 하나님께서 아론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나 네 자손은 회막에 들어갈 때에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죽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는 방법이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모든 규례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치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지도자들에게 몸을 더럽히는 것은 무엇이든 먹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지도자로서, 그들은 행동에 있어서 모범이 되어야 했습니다.

11장에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 먹을 수 있는 짐승과 먹지 말아야 할 짐승을 알려 주셨습니다. 이 구절에서 내가 배운 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우리의 식습관, 즉 우리가 건강한 식습관을 갖는 것에도 관심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서,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합니다. 먹고 마시는 것에 관한 레위기의 핵심 메시지는 "몸에 좋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 먹거나 마시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는 주님께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먹고 마시는 정크 푸드에 대해, 그분의 자녀들에게 많은 말씀을 하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예를 들어, 11:33에서 볼 수 있듯이 위생에 대한 규칙도 있습니다: "짐승이 죽어 질그릇에 빠지면, 그 그릇에 있는 것이 다 더럽게 되리니, 그 그릇을 깨뜨려야 하리라." 그리고 "만일 부정한 것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사용했던 물이 어떤 음식에 닿으면, 그 모든 음식이 부정한 것이 되느니라"고 하셨습니다(11:34). 그분은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위생 습관과 깨끗한 생활 방식을 가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건강 규칙을 어기고 아플 때, "주님, 저를 고쳐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어리석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위생법을 어기면, 병에 걸렸을 때 책임을 질 사람이 자기 자신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출애굽기 15:26에서 말씀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너희가 내 법을 지키면, 그러면 내가 너희의 치료자가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치유보다 건강을 선물로 주시고자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몸에 대한 그분의 법에 순종해야 합니다.

11장 44절에서, 우리는 읽었습니다, "나는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 자신을 구별하여 바쳐서 거룩하게 하라." 이것이 레위기의 주요 주제입니다 - 그리고 이 구절은 레위기에서 정확히 중간에 나옵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1장 16절에서 이 구절을 인용합니다, "우리를 부르신 이가 거룩하시니, 우리도 거룩할지니라" 거룩과 정결은 레위기의 두 개의 주요 주제입니다.

문둥병자의 깨끗이 함

13장에서는 나병 검사에 대해 다룹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피부에 부스럼이나 옴이나 색점이 있어, 그것이 피부에 문둥병 환부가 되거든, 그를 제사장 아론에게나 그의 아들 제사장 중 한 사람에게로 데리고 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피부의 병점을 진찰할지니, 그 털이 희어지고 환부가 피부보다 우묵하여 보이면, 이는 문둥병의 환부임이니라. 그러나 그의 피부의 색점이 희고 피부보다 우묵하지 아니하고 그 털이 희지 아니하면, 제사장은 그 환자를 칠일 동안 가두어둘 것이며"(13:2-4).

나는 당신이 이것을 문둥병이 아니라, 죄에 적용하기를 바랍니다. 소중한 구절입니다. 당신이 죄라고 생각하는 것이 형제자매에게서 보이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엇을 해야 했습니까? 그들이 틀렸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에 대해 스스로 판단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나병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교훈입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먼저 문제를 주님께 가져가시고(여기서 아론은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런 다음 장로들에게 가져가십시오(아론의 아들들은 여기서 교회의 장로들을 상징합니다). 그들이 그 문제를 다루게 하십시오. 이 단순한 원리를 따른다면, 당신은 당신과 다른 사람들을 파괴하는 많은 것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단지 자신을 낮추고 "나는 제사장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를 하나님이 정하신 제사장에게 데려가겠습니다"라고 말한다면,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자신을 낮추고 똑같이 할 수 있다면, 교회에서 얼마나 많은 거짓 소문과 혼란을 피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여기에서 제사장도 자기가 들은 것에 근거하여 즉시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불행하게도, 많은 장로들은, 문제를 듣자마자 그 문제가 사실인지 확인하지 않고 판단을 내립니다. 성경은 "사실을 알기도 전에 결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라고 말씀합니다(잠 18:13 - Living).

여기서 제사장은 그 사람을 주의 깊게 살피고, 모든 부분을 살펴보고, 그에게 질문을 하고 나서야 사건의 심각성을 판단합니다. 모든 장로들이 여기에서 가르치는 이 단순한 원리를 따랐더라면 모든 교회에 얼마나 큰 평화가 있었겠습니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매우 조심하라. 생각만큼심각 하지 않을 수 있고; 생각보다 심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을 주의 깊이 살펴보고, 인간적 오류를 충분히 고려한 다음, 그를 부정하다고 선언할지 여부를 결정하라." 그 사람이 문둥병자로 진영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이것이 모든 교회에서 징벌이 수행되어야 하는 방식입니다. 주의 깊게 검토한 후에, 마침내 그 형제를 교회에서 내보내야 한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때로는 제사장이 첫 번째 조사에서 확고한 결론을 내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 "나는 그것이 심각한 경우인지 확신할 수 없다. 7일동안 기다렸다가, 그를 다시 보겠다"라고 말합니다(4절). 우리 중 많은 사람은 형제나 자매에게서 잘못되었다고 생각되는 것을 발견했을 때 기다리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고한 사람들이 벌을 받지 않도록 염려하십니다 - 옛 언약과 새 언약 모두에서

우리는 여기서 또 다른 매우 중요한 사실을 보아야 합니다: 제사장의 목표는 언제나 나병 환자를 언젠가는 건강하게 진영으로 데려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은 7일 후에 그 사람을 다시 보게 됩니다. 자신이 본 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7일 후에 다시 데려오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감염이 진행되지 않았다면, 제사장은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는 이제 깨끗합니다. 이제 그는 목욕을 하고 옷을 빨고 다시 캠프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4~6절). 그래도 정결하지 못하면, 진영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진영 밖으로 내보내어 격리시켰습니다. 틀림없이, 제사장은 며칠 후에 다시 한 번 그를 살펴볼 것입니다. 여기 제사장의 태도가 보이십니까? 그의 목표는 그 사람을 가능한 한 캠프 안에 두는 것이었습니다. 제사장은 최후의 수단으로만 그를 내보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님은 잘못을 저지른 형제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네 형제를 얻으라"(마 18:15). 그를 그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시도하십시오. 아무 것도 성공하지 못하면, 그를 내쫓으십시오(마 18:17; 고전 5:13). 그러나 그가 내쫓긴 후에도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그를 교회의 교제 안으로 다시 데려오십시오(고후 2:6-11).

불행하게도, 이것은 내가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보았던 태도와는 너무나 다릅니다. 그들은 신자들을 갈기갈기 찢을 뿐만 아니라, 끌어내리기까지 합니다. 당신이 새 언약의 지도자가 되고 싶다면, 교회 안에서 죄인을 친절과 엄함으로 대하는 방법을 배우십시오(롬 11:22).

여기 13:12,13에 놀라운 진리가 있습니다: "문둥병이 피부에 더 많이 발생하여, 그의머리부터 발까지 온 피부를 덮었으면, 제사장은 그것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피부병이몸에퍼졌다면," - 그런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그 사람은 깨끗한가요, 부정한가요? 대답은 우리를 놀라게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깨끗하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나요? 그의 피부가 모두 하얗다면 깨끗합니다. 그러나 그 생살이 다시 나타나면, 그는 다시 부정하게 됩니다(14절). 이것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를 위한 적용은 바로 이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부패한 쓸모 없는 죄인임을 인정하고, 그에게 선한 것이 하나도 없음을 인정한다면, 그는 주님 보시기에 깨끗합니다. 그러나 그가 "아니요, 저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내 인생에 좋은 점이 좀 있습니다."라고 말하면 - 그러면 그는 부정니다 .

성경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쓸모 없고 썩어빠진 죄인이며 지옥 불 밖에 받을 자격이 없다고 말하면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아실 것입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저는 그렇게 나쁘지 않습니다. 나는 내 삶에 좋은 점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부정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반응이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옳습니다. 내 육신(flesh)에는 선한 것이 없습니다. 나의 최선의 행동(best actions)은 부패한 동기에서 나옵니다. 나는 완전히 썩었습니다." 즉, 그가 자신을 전혀 정당화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히 깨끗한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기쁜 소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한 살인자와 음녀("그들의 온 피부가 나병으로 뒤덮인")는 주님께 용서받았지만, 독선적인 바리새인은 용서받지 못했습니다. 그 바리새인들의 생살 조각(그들의 자기 정당화)은 그들을 부정하게 만들었습니다.

14장에서 우리는 이 문둥병자의 정결에 대해 읽었습니다. 14절에 보면 놀라운 일이 나옵니다. 문둥병자가 깨끗해지면, 제사장은 속건제물(the guilt offering)의 피를 취하여, 나병환자의 오른쪽 귓불에 한 방울, 오른손 엄지에 한 방울, 오른발 엄지에 또 한 방울을 떨어뜨립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 존재의 모든 부분이 완전히 깨끗해짐을 상징합니다. 이제 레위기 8장 23절을 보면, 이것이 모세가 대제사장 아론에게도 행한 바로 그 일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즉, 대제사장에게 주어졌던 동일한 특권이, 이 문둥병자에게도 주어진 것입니다! 복음의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 이처럼 더럽고 부패한 죄인인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시는 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예수님만큼 하나님께 받아들여 진다는 것입니다! 믿을 수 없고 놀랍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입니다!

17절과 18절에는 문둥병자를 정결하게 하는 두 단계가 더 나와 있습니다. 먼저, 제사장은 앞서 피를 바르던 세 곳 곧 오른쪽 귓불, 오른쪽 엄지, 오른쪽 발가락에 기름 한 방울을 바릅니다. 이것은 성령으로 거듭남을 상징합니다. 그런 다음 제사장은 나머지 기름을, 깨끗하게 된 나병 환자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이것은 성령세례, 즉 성령이 우리에게 부어지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복음입니다: 나병에 걸린 죄인은 먼저 그리스도의 피로 머리부터 발까지 깨끗이 씻기고, 성령으로 거듭난 다음, 그 위에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바로 여기 레위기 14:17,18에서 성령의 이 두 가지 중요한 사역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그분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힘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정결함을 받은 "나병환자"인 우리는 피 한 방울과 기름 한 방울을 받는 것으로 그치지 맙시다! 또한 우리 머리에 기름 부음을 받을 수 있도록 마음을 엽시다.

이 모든 것과 더 많은 것이 레위기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지루하다고 여겼던 책이 생각보다 재미있습니다.

여기에, 우리 일상 생활에 많이 적용되는 노인에 대한 공경, 낯선 사람에 대한 배려, 점술과 주술을 거부하는 것과 같은 소소한 것들이 많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21장 16~24절에는, 아론의 자손이라 할지라도, '흠'이 있는 자는 제사장이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그의 삶에 어떤 결점("해결되지 않은 죄")이 있으면, 그는 장로나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그러한 "결함"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대표자로서 그분의 백성 앞에 서는 사람들에 대해 매우 높은 기준을 가지고 계십니다. 옛 언약 아래에서는, 그 지도자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물리적인 왕국으로 인도해야 했기 때문에 그 기준은 모두 물리적인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을 영적인 왕국으로 인도해야 하기 때문에 그러한 기준은 모두 영적인 것입니다.

일곱 절기

23장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정하신 일곱 절기에 대해 읽습니다. 우리는 레위기 초반부에 다섯 가지 제물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에게 종교가 지루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고 싶어하셨습니다. 그것은 즐겁고 신나는 것, 즉 그들이 기쁨으로 실행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그들을 위해 이 절기들(또는 축제들)을 제정하셨습니다. "축제"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 중 하나는 "춤"을 의미하는 단어 "hag"였으며,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이 하기를 기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7이라는 숫자는 의미가 있습니다. 매 일곱째 날과, 매 일곱째 달과, 매 칠년과, 칠년의 일곱번이 지난 해(50년)에도 축제의 시간이었습니다. 이 모든 절기는 매년 4월에서 10월 사이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또한 일년 중 날씨가 맑고 농부들이 밭에서 분주하지 않을 때를 정하셔서, 그들이 이 절기를 위해 모두 예루살렘으로 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모두 현실적이며 그분은 우리의 지상의 모든 필요를 배려하십니다.

다음은 일곱 절기의 목록입니다:

1. 안식일(The Sabbath): 이것은 매주, 6일간의 일이 끝날 때였습니다. 이날은 할 일이 없었습니다. 그 날은 아담이 첫 날을 하나님과 교제하며 보낸 것처럼 보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에게 가져오시는 안식을 상징합니다.

2. 유월절(The Passover-Feast): 유월절은 그들의 첫째 달 14일로, 하나님께서 어린양의 피로 그들의 조상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때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 그리스도의 피로 사탄의 왕국에서 구원받은 우리의 모습.

3. 무교절(The Feast of Unleavened Bread): 유월절 직후에 7일 동안 무교병만 먹는 절기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조상이 애굽에 두고 온 누룩이 든 빵을 생각나게 했습니다 - 우리가 회심했을 때 남겨진 우리의 옛 삶의 모습. 이것은 새 언약 아래서, 우리가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누룩 없는) 정결한 삶을 상징합니다.

4. 오순절(The Feast of Pentecost): 이 절기는 "칠칠절"이라고도 불리며, 무교절이 시작된 지 50일째 되는 날에 지켰습니다. ("Pentekoste"는 "오십 번째"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보리와 밀 추수 끝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절기였습니다. 성령 강림은 1500년이 지난 날에 일어났습니다 - 이것이 바로 이 절기가 상징하는 것입니다(행 2:1). 이 날에 유대인과 이방인이 수년 후 이 날에 하나가 될 것을 상징하는 빵 두 덩이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두 떡 모두 누룩을 넣고 소금을 뿌린 것은, 거듭난 자에게 여전히 죄가 있음을 가리킵니다(누룩).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과 영원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소금).

5. 나팔절(The Feast of Trumpets): 일곱째 달 초에 기념하는 절기였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나팔을 불어, 사람들을 모아 경배하게 하고, 전쟁을 하게 하였으며, 때때로 광야에서 옮겨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쁨을 표현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축제의 시간이었습니다. 이 절기는 마지막 나팔이 울리고 여호와께서 그분의 백성을 위해 다시 오시는 날을 상징합니다.

6. 속죄일(The Day of Atonement): 이 날은 일년 중 가장 중요한 날이었습니다. 이날은 대제사장이 성막 안의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날이었습니다. 그는 이날을 고대했고, 그것에 대비하기 위해 많은 시간 동안 자신을 준비했습니다. 그는 그 해의 이 날에만 하얀 옷을 입었습니다. 속죄소에서, 그는 이스라엘 민족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희생 제물의 피를 제단 위에 바쳤습니다. 이 절기는 갈보리에서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 우리 죄를 위하여 자신을 바치신 대속죄의 날을 고대하는 것입니다.

7. 장막절(The Feast of Tabernacles): 이 절기는 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작은 초막에서 7일 동안 살면서 그들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어떻게 방황했는지를 스스로 상기시키는 "초막절"이라고도 불렸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지금 살고 있는 좋은 집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를 표했습니다. 우리 좋은 집에 있는 작은 문제에 대해 불평하지 않도록 매년마다 일주일 동안 그렇게 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 절기는 예수님이 왕으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 일곱 절기 중 모든 남자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했던 가장 중요한 절기는 무교절과 오순절과 초막절이었습니다(신 16:16).

이 절기들 외에도 다른 많은 안식일이 있었습니다. 일곱째 해가 되면, 그 땅은 안식년이 됩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 자손은 밭에 씨를 뿌리거나 포도원의 가지치기를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레 25:4). 주님은, 만일 그들이 이 법을 어기면 원수들이 그들을 노예로 삼는 것을 허용함으로써 그들을 처벌할 것이라고, 그들에게 경고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땅은 그 기간 동안 안식을 누렸습니다(26:34,35)! 이스라엘 백성들은 490년 동안 하나님의 이 명령에 불순종했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땅이 70년 동안 안식일 명령을 지키도록 하기 위해 정확히 70년 동안 그들을 바벨론으로 포로로 보내셨습니다(대하 36:20,21)!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결과를 겪게 될 것입니다.

27장에는 자발적으로 주님께 예물을 바치거나, 그분께 특별한 서원을 하거나, 무엇을 주님께 바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지침이 주어집니다(2절). 지금까지 레위기에서,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분께 특정한 제물을 바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것들은 의무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또한 그들에게,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의지의 헌물을 드릴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집을 주님께 드리거나(14절), 조상의 재산 중 일부(16절), 그들이 산 밭(22절), 또는 그의 가축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만일, 그들이 이것들 중 어떤 것이든 되찾고자 한다면, 주님은 이것이 어떻게 행해져야 하는지에 대한 지시를 주셨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되찾기 위해 보통 그것의 가치보다 20% 더 지불해야 했습니다(15,19,27,31절).

책의 마지막 세 구절(27:32~34)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탐욕에서 구해내는 흥미로운 내용을 읽습니다. 그들의 소 떼와 양 떼의 십분의 일을 여호와께 드려야 했습니다. 그들은 짐승을 제사장 앞에서, 한 마리씩, 막대기 아래로 지나가게 해야 했습니다. 열 번째 동물마다 여호와께 바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열 번째 동물이 정말 좋고 살찐 동물이라면, 다른 병든 동물과 교환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동물을 하나씩 세었을 때, 10번은 좋든 나쁘든 주님의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일에서 냉정하고 계산적이며 인색하지 않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고 기쁨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주셨던 것보다 더 많이 그들에게 되돌려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장 4
민수기

이스라엘의 광야 방황과 전쟁

이것은 모세가 기록한 네 번째 책으로, 이스라엘의 광야에서의 방황과 전쟁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책을 민수기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두 번 계수되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20세 이상의 이스라엘 백성의 인구를 조사했습니다(민 1:3) - 전쟁에 나갈 수 있었던 모든 사람. 그들은 여행을 시작할 때 한 번, 그리고 40년 동안의 방황이 끝날 무렵에 한 번 가족의 인구 조사를 했습니다(26장).

질서와 조직

2장에는 이스라엘 진영이 배치된 순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며,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에게 가르치신 규율과 질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셨을 때 그들은 애굽에서 전혀 훈련되지 않은 노예 무리였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그분은 그들에게 질서와 청결과 규율을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그들의 삶이나 가정에서 깨끗함이나 질서에 대한 감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들이 시간이나 돈을 쓰는 방식에는 규율이 없습니다.

그러한 모든 문제는 우리의 영적 성장에 영향을 미칩니다. 당신이 어떤 성령의 체험을 하였더라도, 삶의 규율이 없으면 결코 경건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민수기에서 읽은 세부 사항에서 그 질서의 중요성을 봅니다.

우리 삶에 훈련이 부족하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지 않기 때문에 무지합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무지합니다, 그들은 그것을 연구하기 위해 스스로 훈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매일, 특히 젊은 시절에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기 위해 애쓰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알 수 없습니다.

7장에서, 예를 들어, 지도자들의 제물에 대한 세부 사항이 제공되는 곳에는 많은 세부 사항이 주어집니다: 은 접시의 무게가 얼마인지와 은 그릇의 무게가 얼마인지입니다. 반복되는 내용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드리는 작은 것 하나하나에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10명의 다른 사람들이 정확히 같은 것을 드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각 사람이 하나님께 소중하기 때문에, 각 사람이 따로 드린 것을 기록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그분은 각 개인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세상에서는, 자신이 수백만 명 중 한 명일 뿐이라고 느끼며, 길을 잃기 쉽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각 개인을 특별하게 보신다는 사실에 의해 격려를 받으십시오.

민수기 3:40,41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일 개월 이상으로 모든 처음 태어난 남자의 수를 세라고 명하셨다는 것을 읽습니다. 그 이유는 이 모든 맏아들은 이집트에서 죽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자비로 인해 피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여기에서 "나를 위해, 장자를 대신하여 레위인을 구별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 중 모든 처음 난 것을 대신하여 레위인의 가축을 구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모든 맏아들을 계수하니 그들의 수가 22,273명이었습니다(43절). 그가 레위인의 수를 세었더니 겨우 22,000명이었습니다. 나머지 장자 273명에 대해서는, 속전의 값을 지불해야 했습니다(46,47절).

그래서 레위인들은 여호와께 속해야 할 장자를 대신했습니다. 레위인은 여호와께 속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이 땅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나는 너희의 기업이다"(민 18:20). 그들은 전적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에 바쳐져야 했습니다.

4장: 여기서 우리는 성막에서 책임을 맡은 레위 자손에 대해 읽습니다. 레위는 성막에서 봉사할 자신의 아들들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택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섬기기 위해 우리 자녀를 선택하실 수 있으시지만,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녀가 특정한 형태의 봉사를 통해 주님을 섬기기를 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이 그것을 위해 그들을 선택하고, 그들을 개별적으로 부르셔야 합니다. "레위 자손은 이러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씀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레위에게는 고핫, 게르손, 므라리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앞에서 우리는 아론의 아들들인, 나답과 아비후가 어떻게 이상한 불을 드리다가 죽임을 당했는지 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성막과 관련하여 놀라운 특권을 가졌을 것이지만, 그들은 그것을 놓쳤습니다. 고핫, 게르손과 므라리의 자손은 성막을 옮기는 일을 맡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이동에 있어서 가장 성스러운 일이 이 세 가문에게 주어졌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윗 시대에) 웃사가 언약궤가 떨어지는 줄 알고 만졌을 때 하나님은 그를 죽였습니다 - 단지 그가 레위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언약궤를 만질 권리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교회에서 우리에게 책임을 주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그것을 건드리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들이 다른 교회를 비판하는 소리를 들으면, 나는 그들에게 말합니다, "당신은 하나님 백성의 예언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것은 당신의 일이 아닙니다. 그 사역은 그 예언자들과 장로들에게 맡기십시오." 그와 같이, 다른 사람의 자녀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나는 "당신이 그들의 아버지입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자신의 일에 마음을 쓰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자녀를 비판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지도록 허락하지 않으신 것을 만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약궤를 만질 권리가 없는 웃사와 같은 것입니다. 법궤는 특정한 사람들만 다룰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여기서 보는 것입니다.

이 세 가족에게도 각각 특정한 임무가 주어졌습니다(4:4,24,33).

7:2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주님께 제물을 바쳤다는 것을 읽습니다. 모든 지도자들과 그들의 제물이 이 목록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3절에서 우리는 그들이 성막 기구들을 옮기기 위하여, "덮개가 있는 수레 여섯 대와 소 열두 마리"를 가져왔다고 읽습니다. 고핫, 게르손, 므라리 세 가족이 6대의 수레를 나누면, 각 가족이 2대의 수레를 받아야 합니다. 소 12마리를 3가족으로 나누면, 각 가족은 소 4마리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모세가 그것들을 어떻게 나누는지 보십시오. 우리는 모세가 게르손 자손들에게 그들의 봉사를 위하여 수레 두 대와 소 네 마리를 주었다는 것을 읽습니다(7절). 그리고 므라리 자손들에게 수레 네 대와 소 여덟 마리를 주었습니다(8절). 또 고핫 자손에게는 수레나 소를 주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궤를 어깨에 메어야 하였기 때문입니다(9절).

고핫 사람들은 "하나님이 므라리 사람에게는 수레 네 대를 주셨으나, 우리에게는 하나도 주지 아니하셨다"고 말하기 쉬웠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 중 일부에게는 자동차를, 다른 자녀들에게는 자전거만 주기로 선택하신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자전거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의심하고, 불평하고, 그들의 형제가 가진 것을 탐내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며, 결코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하십니다. 민수기 중간에 숨겨진 이 귀한 구절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은 네 대의 차를 가지고 있고 우리 자신은 한 대도 없는 것을 볼 때, 불평에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메시지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구약성경 책들이 오늘날 우리의 문제와 얼마나 관련이 있나요!

각종 법률

민수기 5장 2절에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모든 나병 환자와 유출병 있는 모든 자와 주검으로 인하여 부정한 자를 진영에서 내보내라"고 했습니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출애굽기 15장 26절에서 주님께서 "나 여호와는 너희를 치료하는 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플 때마다 주님께 기도하고 치유를 받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그리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고침을 받지 못하고 진영 밖으로 쫓겨난 문둥병자들에 대해 읽었습니다. 말씀은 오늘날 일부 설교자들이 "나병환자들에게 여호와를 그들의 치료자로 신뢰하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치유 되기를 명령한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아니요! 그들은 진영 밖에 있어야 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고쳐 주실 수 있었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그들을 진영 밖으로 내보내라고 명령했습니다.

우리는 신체적 치유에 대해 이야기할 때 정직하고 현실적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많은 연약한 신자들을 정죄와 속박아래로 끌어들일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교리적인 틀 안에 가두고 이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을 치유하십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병에 걸릴 필요가 없습니다. 병든 사람들은, 믿음이 없기 때문에 병든 채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 비현실적인 입장을 취한 사람들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더라면 나을 수 있었던 많은 성도들을 결국 죽게 만들었습니다. 계시보다 논리에 따라 사는 비현실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어리석음을 행합니다.

레위기 13, 14장에, 나병환자를 정결케 하는 법이 있었습니다. 그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 명령하며 이렇게 말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 당신은 우리의 치유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주여, 이 나병환자를 고쳐주소서. 우리는 그를 진영 밖에 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를 진 밖에 내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자신을 낮추고, 주님만이 아시는 어떤 타당한 이유 때문에 주님께서 치유하지 않으시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문둥병자가 많았으나, 그들 사람도고침을받지못했"(눅 4:27) - 하나님께서 "나는 너희를 고치는 자니라"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현실적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좋아하는 구절 하나, 저기서 좋아하는 구절 하나에 집중하는 사람들은 길을 잃게 됩니다. 우리가 타락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타락하게 하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데 전념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알지 못하는 지도자들에게 미혹되어 고통 당하는 것을 볼 때 마음이 아픕니다.

민수기 5:6-8에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저질렀을 때 배상하는 일에 대하여, "그는 자기의 잘못에 대해 전액 배상하고, 거기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줄 것이다." 이것은 상대방이 그 기간 동안 자신의 돈에 대해 잃었던 이자를 보상해주는 정의입니다.. 배상이 수년 후에 이루어진다면, 분명히 20%보다 더 높은 비율이 추가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총명한 회계사였던) 삭개오가 자기가 남에게서 잘못 받은 것은 네 배로 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재빨리 암산을 했고 1년 된 부채에 대해 20%를 추가해야 한다면 8년 된 부채(복리)에 대해 300% 이상을 추가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이 의롭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삭개오가 그것을 갚는 것을 막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침례를 받은 직후(1961년), 주님께서 저에게 처음으로 말씀하신 것 중 하나는 과거에 세금을 속인 것에 대해 정부에 배상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금액을 계산할 때, 내가 빚진 정확한 금액을 알 수 없었고, 마음속으로 두 가지 금액을 고려하고 있었는데 하나는 다른 것보다 20% 더 많은 금액이었습니다. 나는 마침내 더 낮은 금액을 지불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 문제에서, 우리는 항상 우리에게 유리한 결정을 내리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당시 나는 민수기에서 이 구절을 읽은 적이 없었습니다. 적은 금액을 낼까 생각하던 중, 성경을 읽다가 이 구절을 보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제 질문에 "20%를 더해 그것을 돌려주어라"라는 직접적인 답을 주셨습니다!! 의심이 든다면, 배상으로 더 적게 주는 것보다 더 많이 주는 것이 항상 더 좋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날에 깨끗한 양심을 갖는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나는, 내 은행 계좌에 그 여분의 20%가 있고 주님을 만날 준비가 되지 않은 채로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5장 11-31절: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떻게 신실하지 않은 아내의 죄를 폭로하는지 읽었습니다. 한 남자의 아내가 간음을 범했다면, 제사장이 그녀에게 성막 바닥의 티끌이 섞인 물을 마시게 했을 때, 하나님은 그녀의 배가 붓고 넓적다리를 썩게 하여 그 사실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면, 그 여자가 은밀히 한 일이 드러날 것입니다. 사도행전 5장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은밀히 행한 일을 하나님께서 나타내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새 언약 아래서 죄는 "거룩한 물"이 아닌 성령으로, 하나님에 의해 드러난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성령의 분별을 통해 초자연적으로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드러냈습니다. 기독교 지도자들이 사람들의 진정한 영적 상태를 볼 수 있도록, 영적 분별력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민수기 6:1-21은 나실인 서약을 다룹니다. (이것은 '나사렛'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하십시오. 나사렛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렛에 살았기 때문에 - 나실인이 아니라 -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렸습니다 - 마 2:23).

나실인은 일정 기간 동안 여호와께만 헌신하겠다고 자발적으로 서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머리를 자르거나 포도즙이나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삼손은 평생 나실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서 삼손이 힘을 잃을 수 있었던 두 가지 방법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머리를 자르거나, 포도즙이나 포도주를 마시는 것입니다. 그의 힘은 그의 머리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헌신에 있었습니다 - 그것은 그의 머리를 자르지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둘 중 어느 하나라도 그가 힘을 잃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실인이 아니셨기 때문에, 머리를 깎고 포도주를 마셨습니다.

6장 22~27절에서 우리는 아론이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하라는 명령을 받은 축복을 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옛 언약 아래 있는 자들에게 주실 수 있었던 가장 큰 축복이었습니다 - 단지 건강과 부귀가 아니었습니다. 그 이상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아론에게 "주님께서 당신들에게 많은 돈과 건강으로 축복하시기를 빕니다." 라고 축복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니요. 축복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 모든 악에서 너를 지켜주시기를 원합니다.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취사" - 그분의 영광이 네게 빛을 비추시기를 원합니다.

"여호와께서 네게 은혜를 베푸시기를 원하노라" - 그분이 너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모든 죄를 용서하시기를 원합니다.

"여호와께서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 그분이 너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여호와께서 네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 네가 평안한 마음, 평안한 삶, 평안한 가정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이것보다, 그들이 얻을 수 있는 더 큰 것은 없었습니다.

방황과 원망

9장 15~23절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어떻게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그분의 백성을 인도하셨는지 읽습니다. 구름은 그 뜨거운 사막에서 태양으로부터 그늘을 제공했고, 불은 밤에 그들에게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구름이 떠오르면 행진하고, 구름이 멈추면 진을 쳤습니다. 때로는 구름이 며칠 동안 머물기도 하고 때로는 몇 달 동안 머물기도 했습니다(19,22절). 구름이 하룻밤만 머문다면, 아침에 구름이 떠오를 때 그들은 계속 나아갈 것입니다(21절). 그들은 저녁에 정착하고 아침에 움직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의 실질적인 불편함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에는 어린 자녀, 텐트, 동물과 함께 여행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 저녁 늦게 구름이 멈출 때, 그들은 천막을 쳐야 했습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텐트를 치는 데 몇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이튿날 아침 새벽에, 그들은 구름이 다시 떠오른다는 외침이 진영에 울려 퍼지는 것을 들었습니다. 나는 캠프 전체를 휩쓸었던 짜증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것을 싸서 다시 움직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그들에게 인내를 배우고 순간순간 그분께 순종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의 참된 종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불편한 일을 하라고 말씀하실 때 결코 불평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어딘가로 가라고 말씀하신 다음 돌아오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그는 하늘의 천사들처럼, 순간적으로 순종합니다.

여기 기둥은 성령의 그림입니다. 당신은 성령으로 거듭나고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수 있지만, 일상 생활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롬 8:14).

자녀와 아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아들은 성숙하고 성장합니다. 매일의 삶에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자가 아들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진영에서 들리는 그 어떤 원망과 불평에 대해 매우 엄격하셨습니다. 광야에서 원망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멸망시키는 자에 의해 멸망되었습니다"(고전 10:10). 그리고 다음 구절에서 우리는 이것이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라는 경고로 기록되었다고 말합니다(고전 10:11). 우리는 "모든 일을 원망과 불평 없이"(빌 2:14) 사는 삶을 살면서 투덜거림과 불평이 가득한 세상에서 빛으로 빛납니다.

원망과 불평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40년 동안 방황하는 동안의 특징이었으며, 그런 사람은 아직 가나안 땅(승리의 삶)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입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는 기독교 지도자는 결코 다른 사람을 승리의 삶으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광야 방황"을 끝냈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 중 하나는 우리가 가정과 다른 곳에서 원망과 불평을 그치고, 범사에 감사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살전 5:18; 엡 5:20).

12장에서 우리는 지도자들의 투덜거림과 불평에 대해 읽었습니다: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가 결혼한 여자에 대해 모세를 비난했습니다. 사실, 이것은 그들이 모세의 사역을 시기했기 때문입니다. 아론은 모세보다 3살, 미리암은 12살이 많았는데,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동생을 이스라엘의 예언자이자 지도자로 사용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당신보다 어린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세상에서 가장 겸손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선택하셨습니다(3절). 그 구절은 모세가 자신에 대해 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삽입어구(괄호) 안에 있습니다. 그것은 나중에 추가되었습니다 - 아마도 여호수아에 의해. 그들이 모세에게서 비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가 비유대인과 결혼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여호와께서 들으셨다"(2절)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그분의 기름부음 받은 종들을 비방할 때마다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불러내어 이르시되 나 여호와가 선지자들에게는 환상과 꿈으로 말씀하셨지만, 모세에게는 사람이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직접 대면하여 말씀하셨다고 하셨습니다(6~8절; 출 33:11).

여기서 주님은 우리에게 직접 대면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환상이나 꿈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신자들은, 환상과 꿈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주님께서 마음에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사람보다 더 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상적인 일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은 단순한 환상과 꿈보다 훨씬 뛰어납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종을 비판한 미리암과 아론에게 진노하셨습니다. 구름이 장막에서 떠나갔고 미리암이 갑자기 문둥병이 들었습니다(10절). 그리고 그녀가 비난한 모세는 그녀의 치유를 위해 기도해야 했습니다. 성경은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새 언약의 명령이지, 옛 언약의 명령이 아닙니다. 그러나 모세는 옛 언약 시대에 살았던 새 언약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놀라운 사람이었습니다. 이 새 언약 시대에 옛 언약의 기준에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것처럼, 옛 언약 아래서도 새 언약 원칙에 따라 살았던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은혜(새 언약) 아래 있는 자마다 그들의 삶에서 죄를 이기리라 하신 것은(롬 6:14), 죄를 이기지 못한 자는 옛 언약 아래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 그리고 대부분의 신자들은 그들의 삶에서 죄에 의해 패배합니다.

주님은 미리암이 교훈을 배우도록 7일 동안 진영 밖에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15절).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할 것이며 스스로 그런 일을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역하는 자를 본으로 보이사 다른 사람이 두려워하게 하십니다. 미리엄은 교훈을 얻고 다시 진영으로 돌아왔습니다 - 다시는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에도 불구하고, 진영의 다른 많은 사람들은 교훈을 얻지 못했으며 -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루겠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반역

13장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그들에게 약속하신 땅인 가나안 경계에 있는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렀음을 발견합니다. 그들이 애굽을 떠난 지 이제 2년이 되었고(신 2:14),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들어가서 그 땅을 소유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땅을 정탐하기 위해 12명의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열둘이 다 돌아와서 그 땅이 참으로 아름다운 땅이라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10명은 "그러나 거기에는 거대한 거인들이 있고 우리는 그들을 정복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갈렙과 여호수아 두 사람은 "주님께서 우리가 그 큰 거인들을 이기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60만 이스라엘 백성은 대다수의 말을 들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우선, 다수를 따르는 것은 위험합니다. 다수는 항상 틀리기 때문입니다. "생명에 이르는 길은 좁아서 찾는 사람이 거의 없다"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대다수는 여전히 멸망의 넓은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수를 따른다면, 멸망에 이르는 넓은 길에서 반드시 그들과 함께하게 될 것입니다. 큰 교회가 영적인 교회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교회는 교인이 11명뿐이었습니다.

열 명의 지도자가 한 말을 하고 두 사람이 정반대라고 하면, 당신은 누구 편을 들겠습니까? 하나님은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 편에 계셨습니다. 불신과 사탄은 다른 열 사람 편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리석게도 다수를 따랐습니다 - 그래서 그들은 38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누구 편인지 분별력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한 사람을 더한 숫자는 모든 사람을 상대로 다수가 됩니다 - 그래서 저는 항상 하나님과 함께 서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출애굽기 32장에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숭배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모세 한 사람 편에 계심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열 두 지파 중에, 오직 레위 지파만이 그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갈렙과 함께 하셨을 때, 심지어 레위 지파도 그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교훈이 됩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계는 타협과 세속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여기 저기서, 하나님은 조금도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옹호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일으키십니다. 당신에게 분별력이 있다면, 하나님이 그 소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들과 함께 다수에 대항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약속의 땅에 들어갈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을 어떻게 식별합니까? 그는 믿음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의 언어로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분노, 성적 욕망, 시기, 원망, 돈을 사랑하는 거인들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탄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탄을 우리 발 아래에서 짓밟으실 것입니다" - 이것이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의 언어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지 않은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결국, 우리는 인간일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끝날 때까지 패배할 것입니다. 인간의 심리를 이해해야 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인간 심리"에 관심이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인간적인 논리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길을 잃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진리를 슬기로운 자와 총명한 자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셨습니다. 당신이 성경을 연구하기 위해 인간적인 논리와 영리함을 사용한다면, 나는 당신이 길을 잃게 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의 계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말리엘과 같은 교수나 그의 제자들이 아닌, 어부들을 그분의 제자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분은 나중에 가말리엘의 제자 중 한 명인 바울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울이 계시를 받기 전에, 그의 모든 교만을 없애기 위해 3년 동안 광야로 데려가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능력을 의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노하셔서 "내가 그 앞에서 이 모든 표적을 행한 이 백성은 모두 결단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나를 시험한 이 백성은 다 망하리라"(민 14:2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0번"은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열 번 반역했습니다. 다음은 그들의 열 가지 반역의 목록입니다:

1. 애굽 사람들이 홍해에서 그들을 추격했을 때(출 14:11).

2. 마라의 물이 썼을 때(출 15:24).

3. 신 광야에서 빵이 없었을 때(출 16:2,3).

4. 만나를 밤새 보관했을 때(출 16:20).

5. 안식일에 만나를 구하러 나갔을 때(출 16:27,28).

6. 르비딤에서 마실 물이 없을 때(출 17:3).

7. 금송아지를 숭배할 때(출 32장).

8. 다베라에서 원망할 때(민 11:1).

9. 고기를 달라 할 때(민 11:4,33).

10.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기를 거절했을 때(민 13장).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홉 번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들은 아홉 번째 기회가 그들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하는 것처럼 - 그분의 용서를 이용했습니다. 하나님의 참으심이 다하여, 그들이 열 번째 반역하였을 때 벌을 받았습니다. 그때로 돌아갈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형벌을 들었을 때 회개하고,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너무 늦었습니다(민 14:39-45). 많은 성도들이 언젠가는 승리의 삶에 들어갈 기회도 영원히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16장에서 우리는 고라와 그들의 동료 반역자들의 반역에 대해 읽습니다. 누군가는 고라, 다단, 아비람은 미리암이 모세에 대한 반역으로 진영 밖에 7일 동안 갇혔을 때 교훈을 얻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현명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실수에서 배웁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도 같은 실수를 저지릅니다. 대부분의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은 미리암의 예에서 교훈을 얻었지만, 고라, 다단, 아비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고라, 다단, 아비람을 살아있는 채로 지옥에 보내심으로써 형벌을 내리셨습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채로 천국에 간 두 사람에 대해 읽었습니다. - 에녹과 엘리야. 여기서 우리는 살아서 지옥에 간 유일한 사람들에 대해 읽습니다.

처음에 모세에게 반역한 네 사람이 있었습니다 - 고라, 다단, 아비람, 온(민 16:1). 모세는 그들에게 다음날 아침에 다시 오라고 말했습니다(5절). 하룻밤 사이에 이 네 명 중 한 명인 온(On)이 정신을 차리고 회개하고 물러났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가족도 파멸에서 구했습니다. 모세가 다단과 아비람을 불러 그들에게 비공개적으로 경고하려 했지만 그들은 만나기를 거절하였습니다(12절). 모세를 만나기를 거부하는 그들의 교만과 오만이 그들의 운명과 가족의 운명을 결정지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이 세 사람은 그들의 반역적인 태도에 변함이 없이 모세에게 왔습니다(24절).

여호와께서는 백성들에게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장막에서 물러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그리고 백성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흥미로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 그것은 여기 16장에 기록되지 않고, 26장 11절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고라의 아들들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읽었습니다. 그들은 장성한 아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처음에 모세에 대한 반역에서, 아버지와 함께 장막 밖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반역자들의 장막에서 물러나라고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을 때, 이 고라의 아들들은 순종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빠, 우리는 당신 편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세와 함께 서겠습니다." - 그리고 그들은 모세의 곁으로 달려갔습니다. 때때로 자녀들은 부모보다 더 분별력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지옥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반역자들의 죽음에 대해 모세를 비난했고, 그래서 그날 또 다른 14,700명의 사람들이 지옥에서 반역자들과 합류했습니다(16:41-49). 경건한 사람에게 반역하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매우 심각한 일입니다. 그것은 죽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반항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 그것은 때때로 필요할 수 있습니다!

(죽음을 피한) 고라의 아들들의 후손들은, 다윗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의 노래 지도자였습니다. 그들은 시편 42~49편과 시편 84편 등을 쓴 사람들입니다. 시편 46편 2,3절은 땅이 열리고 산들이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며, 그럴 때 하나님이 그들의 피난처가 되신다고 말합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들은 그들의 시대에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살아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아버지로부터 마지막 순간 탈출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다음 시편 84:10에서 그들은 이렇게 썼습니다, "악인의 장막(그들의 아버지 고라의 장막! 그것이 바로 그 의미입니다)에 거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집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이러한 고라 자손의 시편은 저자의 배경을 이해할 때 우리에게 더욱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아론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신 분이 바로 그분 자신임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단번에 증명하기 원하셨습니다 - 왜냐하면 고라와 일행이 의심하고 탐내던 것은 제사장 직분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12지파의 지도자들에게 지팡이 하나씩을 가져오라고 지시하셨습니다(민 17). 그들은 나무에서 가지를 꺾어 가져가야 했습니다. 아론은 또한 레위 지파를 대표하는, 하나를 가져와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모든 가지를 장막 안에 두라고 하셨고, 아침에 그분이 인정하신 한 가지가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침에 그들은 아론의 지팡이에 싹이 나고, 죽은 꺾인 가지에서 열매가 맺는 것을 보았습니다(8절). 그리하여 주님께서는 그분이 택하신 사람에 대한 논쟁을 끝내셨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택하신 종을 부활의 원리로 식별하시는 방법입니다 - 죽은 가지에서 생명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영적 죽음의 한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종들을 살아 있게 보존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변에 있는 기독교 집단의 영적 죽음에 삼켜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론의 지팡이처럼, 죽음 가운데서도 열매를 맺습니다. 그들의 기름 부음은 항상 신선한 과일처럼 신선합니다. 사역에 있어 한결같은 신선함은 요즘 누구에게서도 찾아보기 힘들지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름 부으시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아론의 지팡이는 광야 여행 내내 신선함을 유지했습니다.

우리는 18장 20절에서, 주님이 아론에게 "네가 약속의 땅에 갈 때, 그곳에서 유산을 얻지 못할 것이다. 나는 너의 몫이며 너의 유산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아름다운 구절을 발견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집이나 땅을 소유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거기에 집착하면, 당신은 결코 주님의 종이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을 섬기고 싶다면, 이 땅의 모든 것에 대한 태도가 "여기에 이런 것들(집, 자동차, 스쿠터 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 그러나 나는 이러한 것들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나의 분깃(몫)이시며 나의 기업(유산)이십니다. 다른 것들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언제든지 가져가실 수 있습니다."

모세가 벌을 받다

20장에서, 우리는 모세가 단 한 번의 불순종 행위로 인해 형벌을 받는 것을 읽습니다. 모세가 실수하여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은 이때뿐이었습니다. 모든 일에 신실하게 하나님께 순종하던 그가 인생의 마지막에 한 가지 실수를 저질렀고 -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게 되면서 그 대가를 치렀습니다. 사람들이 물을 달라고 울부짖은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습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반석을 치지 말고, 그 반석에게 말하라고 하셨습니다(8절). 반석(출애굽기 17장)은 십자가에서 단 한 번만 치심을 받아야 했던 그리스도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 후, 우리는 그 한 번의 치심의 혜택을 얻기 위해서, 그에게 말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모세는 화가 나서 반석을 두 번 쳤습니다. 주님은 즉시 모세에게 그가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20:12).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홉 번의 기회를 주셨고, 열 번째 반역했을 때만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에게는 기회가 한 번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실패했을 때, 그는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거절당했습니다. 왜일까요? 하나님은 일반 신자보다 지도자에게 더 많은 것을 기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많이 받은 사람에게는, 더 많은 것이 요구됩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간청했습니다. 40년 동안 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갈망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땅의 경계에서 그는 입국이 거부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뜻을 굽히지 않으셨습니다. 모세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할 때마다, 하나님은 언제나 마음을 돌이키셨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자신을 위해 기도할 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자신을 낮추고 형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선하셨습니다. 1500년 후, 하나님께서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도록 허락하셨고, 그때 그가 변화산에서 주님과 함께 섰습니다! 모세가 약속의 땅에 섰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역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들어갈 때보다 훨씬 더 좋은 가나안 입성을 허락하심으로 당신의 종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신뢰했다면, 그때에도, 하나님이 그를 위해 좋은 일을 계획하셨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사랑으로 우리를 위하여 조용히 계획"하십니다(습 3:17 - 의역). 그러나 당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공개적으로 벌하셔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종들의 불순종에 대해 엄격하다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불순종했을 때 물이 흐르게 되었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불순종할 때에도, 그의 사역에서 축복이 흘러나올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증명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그 사람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않아요. 그것은 단지 하나님께서 그분의 종들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축복하실 정도로 사람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증명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셔서, 그 날 물이 흐르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육욕적인(carnal) 종의 사역에서 흘러나오는 축복을 볼 때,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종을 인정하신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다루신 것처럼, 나중에 그 종도 다루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아와,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예언하였고, 주의 이름으로 병든 자를 고쳤나이다"라고 말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모든 것이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고침을 받고 축복을 받았으며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여전히 그 설교자들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는 거룩한 삶을 살지 않았으니 나를 떠나라. 너는 죄 가운데 살았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육욕적이고 불순종하는 설교자들도 사용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봅니다.

21장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독사를 그들 가운데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을 벌하신 때를 읽습니다. 백성들이 부르짖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뱀 형상을 놋으로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라고 하셨습니다. 물린 자마다 이 놋뱀을 쳐다보면 고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이것이 그분이 죽기 위해 들어 올려진 십자가의 그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3:14). 우리는 모두 옛 뱀 사탄에게 물렸고 그의 독이 우리 조직에 흐르고 있으며 우리를 영적으로 죽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용서뿐만 아니라 우리 몸에 흐르는 이 독의 악한 영향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면, 우리는 완전히 치유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자유롭게 될 수 있습니다.

발람-경고

22-24장에서, 우리는 발람의 이야기를 읽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문제에 관한 중요한 구절이 있습니다. 발락 왕이 선지자 발람에게 와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청했을 때, 발람은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분명히 발람에게 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발락 왕은 만약 그가 오면 더 많은 영예와 더 많은 돈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발람은 다시 하나님의 뜻을 구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끝을 처음부터 아시는 하나님께서 가지 말라고 이미 말씀하셨는데, 두 번째로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러나 그는 돈과 명예를 얻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성경은 발람이 "불의의 삯을 사랑했다"(벧후 2:15)고 말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찾다가 하나님께서 당신이 어딘가에 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당신의 영 안에서 매우 분명하게 느끼는 상황에 처할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 당신은 그곳의 월급이 매우 매력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다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됩니다!! 앞으로 그런 유혹을 받을 때마다 발람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급여가 더 매력적이거나 명예가 더 크다고 해서 그분의 마음을 바꾸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어떤 길을 가고자 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시면, 하나님은 그를 막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은 그를 놓아줄 것입니다. 이것이 발람이 두 번째로 요청했을 때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가라고 하신 이유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온전한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발람의 자유 의지를 무시하고 그를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은 발람이 정말로 가고 싶어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탕자의 아버지가, 아들이 먼 나라에 가는 것을 허용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셨고 결코 우리의 자유 의지를 무시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발람을 막기 위해, 그분의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발람 자신은 천사를 볼 수 없었지만, 그의 당나귀는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습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이 돈을 사랑하여 눈이 멀면, 심지어 당나귀도 그보다, 영적인 것을 더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그 당나귀는 돈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천사를 똑똑히 볼 수 있었습니다! 발람은 돈을 사랑했기 때문에, 볼 수 없었습니다. 발람은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언했습니다(민 24:2,17). 그러나 그는 돈을 사랑하여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 당나귀가 주인에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방언으로 말하는 것"의 첫 번째 사례입니다 - 당나귀가 결코 배운적이 없는 언어인 외국어를 유창하게 말하는 것! 그것은 초자연적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틀림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방언을 말하는 첫 번째 사례에서 방언을 말한다고 해서 사람을 영적으로 만들지 않는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 그 당나귀는 방언을 한 후에도, 혀를 통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체험한 후에도, 여전히 어리석은 당나귀로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항상 그것을 기억하세요.

그러자 발람은 모압 사람들에게 교묘한 전술을 제안했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멸망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의 하나님 자신이 그들을 대적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등지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을 부도덕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쁜 딸들을 이스라엘 진영으로 보내서 이스라엘 남자들을 유혹하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부도덕에 빠졌을 뿐만 아니라 이 모압 소녀들이 이스라엘 진영으로 가져온 우상 숭배에도 빠졌습니다(민 25:1과 계 2:14 참조). 그리고 당연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엄하게 벌하셨습니다. 전염병으로 24,000명이 죽었습니다(민 25:9). 이것이 오늘날에도 사탄이 신자들을 오염시킨 방식입니다. 발람에게서 사탄의 간계를 배우고 깨어 있읍시다.

전염병이 이스라엘 진영에 퍼지기 시작하여 백성이 파리 같이 죽어갈 때에,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 한 사람의 열심이 아니었더라면, 발람의 책략으로 온 민족이 그곳에서 멸망하였을 것입니다(민 25:9 이후 참조). 비느하스는 창을 가지고 장막으로 들어가, 남자와 그가 장막으로 데려온 미디안 여인을 죽였습니다. 그것은 전염병을 멈췄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위한 그의 열심 때문에, 하나님은 그의 후손이 이스라엘에서 영원히 제사장이 될 것이라고 비느하스와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하고 그로 인해 인기가 없어질지라도 그분을 위해 담대히 서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존중하십니다.

26장에서 우리는 두 번째 인구 조사에 대해 읽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들을 가데스바네아로 다시 데려오셔서 그들에게 약속의 땅에 들어갈 두 번째 기회를 주신 하나님의 끈질김을 봅니다. 그분은 두 번째 기회의 하나님입니다. 이것은 실패한 사람들에게 큰 격려가 됩니다. 사실, 그분은 백만번의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거듭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승리의 삶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얼마든지 주십니다.

27장 15~23절에, 모세가 주님께,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자신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할 사람을 임명해 달라고 간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모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백성의 리더십을 그들에게 넘겨주지 않았습니다 - 오늘날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하는 것처럼.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왕조를 시작하는 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구했고, 하나님은 여호수아("성령이 그 안에 있는 사람" - 18절)를 이스라엘의 차기 지도자로 임명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즉시 그렇게 했습니다.

28장과 29장에는 제물에 관한 더 많은 법이 있습니다. 그리고 30장에는 서원에 관한 법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을 읽습니다 - 아버지는 딸이 어리석게 한 서약을 취소할 수 있고 남편은 아내가 한 어리석은 서약을 취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남편이 서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그 서원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우리가 아버지로서의 권위를 행사하여 자녀가 미련한 길을 가지 않게 하고, 남편으로서 가정의 머리가 되어 아내가 어떤 어리석음으로 가정을 미혹하지 않게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32장에서, 우리는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의 타협에 대해 읽습니다. 그들은 소를 엄청나게 많이 키웠기 때문에, 소 떼를 위한 좋은 목초지를 끊임없이 찾아다녔습니다. 그들은 요단 동편 길르앗의 좋은 땅(가나안 안이 아님)을 보고, 모세에게 거기 거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했습니다. 40년의 방황 후에도, 그들은 교훈을 얻지 못했습니다. 승리의 삶보다 자기 사업과 재물에 더 관심이 있는 그런 자들을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그분은 그들이 그들의 길을 가도록 내버려두십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들이 그곳에 정착하도록 허락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가치보다 세상적인 풍요를 선택한 많은 신자들의 모습입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한 말은, 오늘날 편안함을 사랑하는 많은 신자들을 위한 신랄한 책망입니다: "너희 형제들은 전쟁터에 나가는데, 너희는 여기 앉아 있겠느냐?" (민 32:6)

그들은 마침내 다른 지파들이 가나안을 소유하도록 돕는 데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그들은 요단 동편의 이 풍요로운 땅에 정착하기 위해 다시 돌아오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민수기 35장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실수로 다른 사람을 죽인 사람들이 죽은 사람의 친척들의 진노를 피하기 위해 도망갈 수 있는 여섯 개의 "도피성"을 지정하신 것을 읽습니다. 실수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살인과 같은 범주에 속하지 않습니다 - 그리고 하나님은 살인자들을 용서하지 않으시면서, 그러한 사람들(실수로 다른 사람을 죽인 사람들)이 보호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율법에서, 우리는 그분이 고의적인 죄에 대해서는 용서하지 않으시지만, 의도하지 않은 죄에 대해서는 항상 자비를 베푸시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그것을 레위기 연구에서 보았고 지금 여기(민수기)에서도 보았습니다. 그 다음에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고의적으로 그렇게 자주 죄를 지은 우리를 그토록 자비롭게 용서하신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찬양합니다.

장 5
신명기

율법의 반복과 하나님의 다루심에 대한 검토

'신명기'는 '두 번째 율법'을 의미합니다. 율법의 많은 중요한 측면이 여기에서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책을 두 가지 방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선 모세가 한 세 가지 연설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첫 번째 연설(1~4장).

2. 두 번째 연설(5~26장).

3. 세 번째 연설(27~30장).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주님께 말을 할 수 없다고 말했던 사람이 말한 것입니다!

이 책은 모세의 노래(32장), 모세의 축복(33장), 모세의 죽음(34장)으로 마무리됩니다.

책을 나누는 두 번째 방법은 세 방향을 바라보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1. 뒤를 바라보기 (Looking backward).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돌아보는 두 가지 메시지(1~11장).

2. 위를 바라보기 (Looking upward). 하나님을 바라보는 두 가지 메시지 - 그분의 법을 통해. 하나님의 법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필요를 본다(12-31장).

3. 앞을 바라보기 (Looking forward). 하나님께서 장차 행하실 놀라운 일들을 기대하는 두 가지 메시지(32~33장).

우리 모두는 인생에서 이 세 가지 모습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이 세 가지 모습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뒤를 바라보기

우리는 뒤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 인생에서 여러 번 나는 주님이 나를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돌아보았고 - 그것이 내 믿음을 새롭게 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 처해 도저히 헤어날 수 없을 것 같을 때, 성경의 약속을 상기하고 다른 성도들의 격려에 귀를 기울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제 믿음을 강하게 하는 것은 뒤를 돌아볼 때입니다. 주님은 저에게 "내가 지금까지 한 번이라도 너를 실망시킨 적이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나는 "아니요, 주님. 한 번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런 다음 그분은 "나는 지금도 너를 실망시키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뒤를 바라보는 것은 무엇보다 나를 격려합니다.

또 넘어졌나요? 과거를 돌아보고 주님께서 과거에 어떻게 여러분을 용서하셨는지 보십시오. 그분이 당신을 용서했을 때, 그분은 당신이 다시 넘어질 것을 모르셨습니까? 당신이 다시 넘어진 것이 그분에게 놀라운 일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니 다시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돌아보십시오. 그것은 당신의 믿음을 강화할 것입니다. 주님의 자비에 감사하십시오. 과거의 실패를 돌아보면, 주변의 실패한 성도들에게 긍휼을 베푸는 법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뒤돌아보지 말아야 할 또 다른 길이 있습니다. 바울은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라"고 말했습니다(빌 3:13). 잘못된 방식으로 과거를 돌아보면, 우리는 낙담할 것이고 인생의 많은 시간을 낭비한 자신이 쓸모 없고 실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자신의 삶을 낭비했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격려의 말을 전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일하는 날 12시간 중 11시간을 일하지 않은 노동자들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11시에 어떤 사람이 그들을 불러 자기 포도원에서 일하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가서 한 시간만 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삯을 먼저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2시간 동안 일한 사람들이 보상을 마지막으로 받았습니다! 나는 그것이 당신을 격려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낙심하여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자랑스럽게 뒤를 돌아봐서도 안 됩니다. "뒤에 있는 것을 잊는다"는 것은 우리를 낙담시키는 것과 우리를 자랑스럽게 만드는 것 모두와 관련이 있습니다.

당신을 낙담시키거나 당신을 자랑스럽게 만드는 것이 무엇이든 생각날 수 있다면, 가능한 한 빨리 잊어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과거에 우리에게 행하신 일에 대해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말하는 뒤돌아 보기입니다. 베드로는 그렇게 돌아보지 않고, 그들의 죄로부터 정결해졌음을 잊어버리는 사람은 눈이 멀고 근시안적인 사람이라고 말합니다(벧후 1:9).

위를 바라보기

우리는 또한 위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위를 바라보고 주님의 영광을 더 많이 보는 것을 결코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한 예수님의 영광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에 굶주려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우리를 변화시키려고 하시는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볼 때, 우리 자신의 결핍을 볼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를 겸손하게 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이 끝날 때까지 겸손을 유지하는 비결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시고 강력하게 사용하신 사람이 교만해지기란 매우 쉽습니다. 나는 그런 설교자를 많이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사용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너무 교만하고 사람들과 매우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삶이 끝날 때까지 우리를 부서지고 겸손하게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직 한 가지. 우리 믿음의 창시자이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볼 때, 교만해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보기 시작하면서 자신이 그들보다 더 낫거나, 기름 부음을 받았거나, 그들보다 더 많이 사용된다고 상상하면서 교만해집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예수님을 올려다 본다면, 얼굴을 티끌 속에 묻고 엎드려 회개할 것입니다 - 밧모 섬에서 사도 요한이 한 것처럼. 그리고 그가 계속해서 예수님을 쳐다본다면, 그는 그의 얼굴을 영원히 티끌 속에 둘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항상 티끌 속에 얼굴을 두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것이 안전의 장소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당신의 마지막 날까지 당신을 기뻐하시기를 원한다면, 계속 위를 바라보세요.

우리는 결코 내면을 먼저 들여다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위를 먼저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며, 그분의 영광을 볼 때 우리의 죄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죄를 보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낙담할 것입니다.

앞을 바라보기

우리는 앞을 내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 믿음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놀라운 일들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해야 할 위대한 일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언제 이 세상을 떠나야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시기 전에, 우리는 이 땅에서 그분을 위해 유용한 일을 하기를 기대합니다.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려움과 불안으로 미래를 바라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기대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서 살게 될 때를 기대할 것을, 모세에게 신명기에서 그들에게 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신명기에서 이스라엘의 먼 미래에 관해 예언했습니다.

반복

우리가 신명기에서 볼 수 있는 또 다른 것이 있습니다 - 모세의 초기 책에 이미 기록된 많은 내용의 반복입니다. 우리는 반복에 방해를 받아서는 안됩니다. 진리에 사로잡히려면 반복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에 많은 것을 반복하셨습니다. 유다 왕들의 역사는 두 번 언급됩니다 - 처음에는 열왕기서 두 권에서, 그리고 다시 역대서 두 권에서. 왜 신약성경은 단지 하나가 아닌 네 개의 그리스도의 전기로 시작할까요? 사복음서에는 반복되는 내용이 많습니다 - 어떤 문제는 사복음서에서 네 번 언급됩니다.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에베소서에서 이미 언급된 많은 것들이 골로새서에서 반복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사도들이 말을 되풀이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설교자들은 사람들 앞에서 명성을 잃을까봐 같은 주제로 설교를 반복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필요보다 사람들이 그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나는 한 마을에서 7일 동안 집회를 열고 매일 "당신은 거듭나야 합니다"라는 주제로 설교한 복음 전도자에 대해 들었습니다. 모든 집회에 참석했던 회심하지 않은 한 남자는 7일 내내 같은 주제를 듣는 것에 싫증이 나서 왜 매일 "당신은 거듭나야 합니다"라고 설교하느냐고 그에게 물었습니다. 복음 전도자는 "당신이 거듭나야 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게 답입니다. 그 사람이 거듭날 때까지 그 메시지는 반복되어야 했습니다. 그는 다른 것을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환자는 완치될 때까지 같은 항생제를 복용해야 합니다!

이제 내가 왜 계속해서 "당신은 죄를 이겨야 합니다"라고 말하는지 묻는다면, "당신은 죄를 이겨야 하기 때문입니다"라는 답을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야 했기 때문에 같은 메시지를 거듭해서 반복했습니다. 예레미야는 40년이 넘도록 사실상 같은 메시지를 전했고, 설교하는 것이 거의 지겨워질 때까지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사람들은 어떤 것을 10번 들어야 진리를 충분히 이해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같은 청중에게 같은 주제에 대해 계속해서 설교하는 것을 결코 부끄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기름부음을 받았다면, 소식은 전파할 때마다 여전히 신선할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의 명예를 구한다면, 반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유익을 구한다면, 그들이 이해할 때까지 반복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신명기에서 배우는 교훈 중 하나입니다 - "두 번째 율법"

신명기는 1장 2절에서 다음과 같은 진술로 시작합니다: "호렙에서 세일 산 길을 따라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기까지 11일이 걸립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호렙(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곳)에서 가데스 바네아(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될 곳)까지는 불과 11일의 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11일의 여정은 결국 38년이 걸렸습니다. 당신은 학교의 12학년을 12년 또는 20년 안에 마칠 수 있습니다 - 그것은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11일과 38년 사이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 38년을 낭비했다면(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우리 자신의 즐거움과 안락함을 위해 살고, 돈을 벌기 위해 살면서), 언제나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의 끝에 당신은, "주님,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나는 내 인생의 38년을 낭비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용서하실까요? 그분은 확실히 그러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이 허비한 38년을 돌려주실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도 우리 중 누구에게도 시간을 돌려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작년과 그 기회를 다시 주실 수 있습니까? 아니요. 그분은 내년에 우리에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지나간 세월을 우리에게 돌려주실 수 없습니다. 과거에 우리가 가졌던 기회는 영원히 사라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11일 안에 당신의 삶에서 어떤 일을 하기를 원하신다면, 당신은 그것이 11일 이상 걸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2장 14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난 지 2년 후에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렀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38년이 더 걸렸고, 광야에서 총 40년을 보냈습니다.

리더십을 위한 자격들

1장 13절에서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을 위해 선택한 지도자 유형에 관해 조언하는 것을 봅니다. 나는, 그가 찾던 세 가지 자질, 즉 지혜, 분별력, 경험을 여러분이 보기를 바랍니다.

첫 번째 요구 사항은 지혜였습니다. 지혜는 지식과 다릅니다. 지식은 연구를 통해 옵니다. 그래서 영리한 두뇌를 가진 사람들은 이것에 탁월합니다. 지혜는 많은 시련을 겪어야 옵니다. 그러므로 충실한 사람들은 이것에 탁월합니다. 지혜는 삶의 실제 상황에 지식을 적용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많은 성경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신성한 지혜는 없을 것입니다. 잠언서는 성경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혜를 얻는 것을 강조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지혜를 얻고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수단입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많은 사람들이 지식을 얻습니다. 그러나 지식의 나무는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합니다(고전 8:1). 생명나무는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과 인생의 다양한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지혜를 줍니다. 그래서 지혜는 리더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요건입니다.

두 번째 요구 사항은 분별력이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리더십에 가장 필요한 것 중 하나입니다 - 경건한 것과 인간적인 것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 - 경건한 것과 악마적인 것을 분별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과 인간의 것, 영적인 것과 혼적인 것을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글쎄, 결국 우리는 인간일 뿐이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단지 인간들처럼 행하는 것"(고전 3:3)을 꾸짖었습니다. 우리는 단순한 사람처럼 행동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걸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는 그가 행하신 대로 행합니다"(요일 2:6). 영적인 사람과 육신적인 사람(죄 가운데 사는 사람)을 분별하는 것은 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적인 사람과 혼적인 사람(인간의 능력으로 사는 사람)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들을 때 그 사람이 마음으로 말하는지 머리로 말하는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것은 다른 사람의 머리로만 들어갑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에서 나온 것은 다른 사람의 마음으로 갈 것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마음으로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성경은 머리가 아니라, 마음을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기억이 아닌)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편 119:11)라고 말했습니다.

세 번째 요구 사항은 경험이었습니다. 당신이 젊었을 때, 많은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당신은 분별력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경건한 지도자가 되려면 아직 경험이 필요하며 - 이것은 시간이 걸립니다. 경험은 여러 가지 시험에 부딪히고 그 시험 가운데서 하나님의 능력과 위로를 맛봄으로써 옵니다(고후 1:4). 우리가 시련을 통해 얻은 힘으로 다른 사람을 위한 사역을 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재판관들에게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고 작은 사람이나 큰 사람이나 똑같이 들으라고 경고했습니다(17절). 이것은 리더에게 매우 중요한 요구 사항입니다. 부자에게 아첨하지 마십시오.

내가 젊은 신자였을 때, 나는 내가 가는 모든 교회에서, 한 남자가 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이라면(중요한 정부 관리나 부유한 사업가와 같이), 그는 항상 교회 이사회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왜 이런지 궁금했습니다. 분명히 세상의 모든 거물은 영적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의 가난한 자들을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셨다"(약 2:5)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이 사람들은 분명히 세속적인 영향력 때문에 선택된 것입니다. 그 모든 교회들이 곧 타락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야고보서 2장에서 우리가 경고하는 바로 그 편파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때 나는 만일 주님께서 나의 수고를 통해 교회를 개척하신다면, 영향력 있는 사람이 아니라, 영적인 사람을 장로로 임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세우신 모든 교회에서 우리가 한 일입니다.

모세는 지도자들에게 "너희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17절)고 말했습니다. 리더가 되고 싶다면 어떤 사람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율법의 신선한 반복

2장 2,3절: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산을 충분히 오래 떠돌았다.'" 주님은 그들에게 "빙빙 돌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중 누구에게 그렇게 말씀하셔야만 할까요? 우리가 항상 영적으로 같은 자리에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동은 진보와 다릅니다! 우리는 10년 전에 우리를 패배시킨 것과 같은 죄에 패배해서는 안 됩니다. 10년 전처럼 화를 내거나 정욕을 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10년 전과 같다면, 우리는 빙빙 돌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제 우리에게 앞으로 나아가라고 부르십니다.

4장 2절: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더하거나 빼지 말라."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작은 계명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하여 우리가 직면하는 유혹은 무엇입니까? 중요한 계명을 무시하는 것이 아닌, 작은 계명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 계명은 사소한 것이므로 무시해도 된다고 말하는 신자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구든지 가장 작은 계명이라도 어기면 (지옥에 가지 않을 것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지극히 작은 계명이라도 지켜 사람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사람은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19).

우리는 어린 자녀들의 순종을 어떻게 시험합니까? 큰 일에서가 아닌, 작은 일에서입니다. 당신의 5살짜리 아들이 어느 날 학교에 갈 때, 당신이 그에게 "얘야, 오늘 학교 가는 길에 아무도 죽이지 말고, 누구와도 간음하지 말고, 은행을 털지 마라." 라고 말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는 매일 학교에서 돌아와, "아빠, 저는 당신의 모든 계명을 지켰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주요 계명에서 그의 순종을 시험하는 건가요? 아니요. 어디에서 그의 순종을 시험할 수 있는지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가 친구들과 당신의 집 밖에서 놀고 있을 때, 당신은 "좋아, 아들아, 이제 충분히 놀았어. 지금 들어와서 엄마의 집안일을 도와주어라."라고 말합니다. 그의 대답은 변함없이 이것이 될 것입니다. "잠깐만요, 아빠. 이 게임만 끝낼게요." 그것이 당신이 그의 순종을 시험하는 곳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당신의 순종을 어떻게 시험하신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 중 작은 계명 중에서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무엇을 뺀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작은 계명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더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경에 없는 회원 규칙을 가지고 있는 많은 기독교 단체가 있습니다. 어떤 단체들은 전임 기독교 일꾼들에게 흰 옷이 "더 영적"이기 때문에 항상 흰 옷을 입어야 한다는 규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되기가 그렇게 쉬웠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또 다른 그러한 규칙은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부양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을 부양했으며,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훌륭한 종이었습니다. 우리가 바울보다 낫습니까? 어떤 단체들은 거룩해지려면, 결혼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모든 사도들은(바울과 바나바를 제외하고) 결혼했습니다(고전 9:5). 또는 그들은 우리가 매년 그렇게 많은 날 동안 금식해야 한다거나 매일 그렇게 많은 시간 동안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설교자들이 만든 이와 같은 많은 규칙들이 신자들을 정죄와 속박으로 몰아넣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규칙 중 어느 것도 성경에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바리새인들이 만든 규칙입니다.

나는 금식을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법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덧붙여 가르치는 이와 같은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자신보다 더 영적이 되려고 합니다! 그 결과 그들은 육욕적이고 율법주의적이 됩니다. 사탄이 하와에게 와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셨느냐고 물었을 때,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에 더하거나 빼면서 대답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나무의 열매를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우리가 죽지는 않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나무를 만지는 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고, 오직 먹는 것에 대해서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하와는 하나님보다 더 영적이 되려고 애쓰며 '만지는 것'도 더했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녀는 만지고 먹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더하기 시작할 때 항상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들은 죄에 빠집니다. 하와는 또한 "우리가 죽지는 않을까 하노라" (죽음이 확실한 것이 아니라 오직 가능성일 뿐임을 암시하면서)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의 강도를 낮췄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빼거나 더하면, 그 말씀이 무효화됩니다(창 2:16,17; 3:2,3).

4장 24절과 31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에 관한 두 가지 진술을 읽습니다: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비로우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소멸하는 불이시기도 합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요 1:14).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거룩하십니다. 참으로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처럼 거룩하고 자비로울 것입니다. 영적 지도자가 되려면, 사자와 어린 양과 같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러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타오르는 불과 같으며, 또한 엄청나게 자비롭습니다. 동정심으로 가득한 사람을 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동시에 열렬하고 엄격하기만 한 사람도 영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둘 다 불균형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합니다.

4장 29절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으면 만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렘 29:13에서 같은 말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밤중에 풀밭에서 잃어버린 10냥짜리 동전을 찾는 만큼의 간절함으로 하나님을 찾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지 못합니다. 당신은 그 동전을 얼마나 오래 찾을 것입니까? 당신은 얼마 동안은 그것을 찾을 수 있고, 만일 그것을 찾을 수 없다면 자리를 떠날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어딘가에 만 루피 다발을 잃어버렸다면, 당신은 그것을 얼마나 오랫동안 찾으려고 하겠습니까? 당신은 그렇게 하나님을 찾으십니까? 하나님은 자기를 부지런히 찾는 자들에게만 상 주시는 분이십니다(히 11:6).

당신은 얼마나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까?

당신은 죄에 대한 승리를 얼마나 간절히 구합니까?

당신은 분노와 성욕을 극복하기 위해 얼마나 예민합니까?

당신은 성경을 이해하고 그분의 왕국에서 유용하게 되기를 얼마나 간절히 원하십니까?

한 번이 아니라 날마다 얼마나 간절히 성령 충만을 구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끊임없이 신선하기를 얼마나 간절히 원하십니까?

내가 방금 말한 이 모든 것, 곧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받지 못했다면 그것은 당신이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찾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응답하실 때까지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은 여기에서 모세가 가르친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5장에서, 우리는 십계명이 반복되는 것을 봅니다. 여기, 15절에 안식일을 지키는 또 하나의 이유가 주어집니다: 그들은 자기 힘으로 애굽에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님을 기억하여 안식일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분은 여호와였습니다. 그들은 자유를 얻기 위해 430년 동안 노력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하룻밤 사이에 그들을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안식일의 메시지였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바쁘게 활동하는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성취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교훈을 아주 빨리 잊어버렸습니다. 나중에 그들의 역사에서 우리는, 그들이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안식일에 반복해서 일했다는 것을, 읽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지 말라고 하신 7년째 되는 해에 그들의 땅을 경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모든 노동으로 무엇을 얻었습니까? 하나님은 그들을 바벨론으로 또다시 70년 동안 포로로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안식일에 일을 쉬신 것과 같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 그의 고군분투로부터 쉬게 됩니다. 이것이 안식일의 메시지입니다(히 4:9,10).

5:29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향한 가장 큰 갈망 중 하나를 읽습니다. 성경에서 "O"(오)라는 단어를 찾는 것은 드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사용하시는 것을 봅니다: "오, 그들이 마음에 항상 나를 경외하며 내 모든 계명을 지켜, 그들과 그들의 자손이 영원히 잘되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영원히 잘되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그거 아십니까? 그분은 우리가 항상 최고를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되게 하시려고 그분의 계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성경은 "제조업자의 지침"입니다. 고가의 전자 기기를 구입하면, 사용 방법을 알려주는 지침서가 함께 제공됩니다. 값비싼 도구가 폭발하거나 망가지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지침을 정확히 따르도록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실제로, 제조업자는 일반적으로 모든 지침을 읽을 때까지 장비를 켜거나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합니다. 누가 우리를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입니다! 여기 성경에는 우리가 인간으로서 가장 잘 기능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지침이 있습니다. 이 지침을 따르지 않으면, 당신의 인생이나 결혼 생활을 망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방법대로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누구를 비난할 수 있습니까?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심지어 많은 신자들도 "제조업자의 지시"를 주의 깊게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삶을 망쳤습니다. 육신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무엇보다 먼저 성경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나는 너의 치료자이다"라고 말씀하실 때, 그분의 의미는 "나는 너의 건강이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려면 건강해야 합니다. 그리고 건강해지고 싶다면 무엇을 먹고 무엇을 먹지 않는지에 관한 특정한 법칙을 따라야 합니다. 대식가는 결코 건강하게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내 말에 주의하라, 내 말은 온 몸의 건강이 됨이라"고 말씀하십니다(잠 4:20-22). 마찬가지로, 영적인 사람이 되려면, 영성에 관한 특정한 법칙을 따라야 합니다. 은혜를 받으려면,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만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무언가를 받으려면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에 따라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은 영적 법칙입니다. 당신이 이 법칙들을 따른다면, 우리는 잘 될 것입니다.

6장 4절에 보면 "주님은 우리 하나님이시니, 주님은 한 분이십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세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입니다. 그런 다음 5절에서, 첫째 계명을 다른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2장 37절에서 인용하신 말씀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것이 첫째 계명입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에 가족, 재산, 직업 또는 돈을 위한 자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마음이 하나님께 드려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제조업체의 지침" 매뉴얼에서 지침 1번입니다. 이 명령에 순종하기 전에, 인간 기계를 작동하지 마십시오. 마음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면 어떻게 될까요? 당신은 당신의 아내를 더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이웃을 더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될 것은, 당신의 마음에 미워하는 마음이 더 이상 없기 때문입니다.

시기, 미움, 원한, 기타 다른 사람에 대한 모든 죄는,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마음의 부분이 질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일차적으로 죄와 싸워서 죄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죄를 이깁니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면, 돈과 재물을 사랑하는 것과 악한 정욕이 다 떠나갈 것입니다. 그다지 좋은 사람이 아닌 A씨와 사랑에 빠진 소녀를 생각해봅시다. 그녀의 부모는 그녀가 그를 사랑하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하지만, 성공하지 못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소녀는 훨씬 더 잘생기고 더 부유하고 더 유쾌한 B씨를 만납니다. 갑자기 A씨를 향한 그녀의 모든 사랑이 사라집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것은 "새로운 애정의 추방력"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새로운 사랑이 처음 사랑을 몰아냈습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인의 삶에 적용하십시오. 여기에서 당신은 하나님이 금하신 많은 악한 일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러한 나쁜 습관을 버리려고 노력하고 노력하지만, 당신은 그 정욕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신은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온 마음을 다해 그분을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무슨 일입니까? 이 새로운 사랑은 옛 애정을 몰아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 이상 이 세상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애정의 추방력"입니다. 이것이 죄를 이기는 비결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 이는 '당신의 지적 능력을 다하여'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명석한 마음을 주신 것은, 돈을 벌게 하려는 것도 아니고, 이 세상에서 성공하여 위대한 사람이 되게 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아니요. 사도 바울은 그가 선택한 어떤 분야에서든 성공했을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뛰어난 사람이었기 때문에, 최고의 사업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오늘날 살았다면, 그는 컴퓨터의 천재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모든 재능을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만 사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것이 그가 자신의 삶을 잘 활용한 방법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능력을 무엇을 위해 사용 했습니까?

6장 7절에서, 우리는 모든 유형의 상황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항상 자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부모의 책임임을 읽습니다.

7장 1~6장은 이스라엘보다 크고 강한 일곱 나라를 하나님께서 완전히 물리칠 수 있게 해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죄에 대해 우리에게 주기를 원하시는 승리의 그림입니다 - 왜냐하면 7은 성경에서 완전한 숫자이기 때문입니다(그것은 완성을 말합니다). 적들이 이스라엘보다 강했기 때문에, 적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겨주실 분은 하나님이실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정욕이 우리에게 너무 강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오직 주님만이 우리가 그것들을 이길 수 있게 해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를 축복하실 때

8장은 매우 중요한 장입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마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탄을 이기셨습니다. 그분은 결코 사탄과 토론하거나 논쟁하지 않으셨습니다. 사탄이 무엇을 말하든지, 예수님께서는 단 한 가지 대답만 하셨습니다: "기록되었으되." 세 번의 시험에서, 그분은 구약 성경의 두 장만을 인용하셨습니다.

신명기 8:3이 첫 번째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다른 두 인용문은 신명기 6:16,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라"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신명기 6:13,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겨라."

이것은 예수님께서 신명기를 연구하셨음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 안다면, 인생에서 직면할 수 있는 모든 유혹과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습니다. 나는 내 인생에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 답이 없는 문제를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학생이 되도록 격려하고 싶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이 산과 강을 마주할 때, 그 모든 것을 지나갈 수 있고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다윗은 "내가 내 하나님을 힘입어 벽을 뛰어넘으리로다"(시 18:29)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길을 가로막을 수 있는 장애물은 없습니다. 당신이 그것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 안다면, 성경에 답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에 그것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모든 유혹에 대한 답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사탄에게 속을 수 없었습니다.

8장 11~15절에서 모세는 그들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주님의 계명과 율례를 지키지 아니함으로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당신들이 먹고 배부르며, 좋은 집을 짓고 거기 거하며, 당신들의 소와 양이 번성하여 은과 금이 많아질 때, 당신들의 마음이 교만해져 당신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불뱀과 전갈이 있는 크고 두려운 광야에서 당신들을 인도하신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십시오.

우리가 광야에 있을 때나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고군분투할 때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복을 받고 부자가 될 때보다 더 쉽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짓던 시절, 그는 너무 바빠서 술에 취할 틈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홍수에서 살아남은 지상의 유일한 가족의 우두머리로서 방주에서 의기양양하게 나오자마자, 술에 취했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이 동굴 저 동굴을 도망 다녔을 때, 놀라운 시편을 썼고 하나님과 매우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여유와 돈이 많아서 직접 전투에 나가지 않고 다른 사람을 보내 대신 싸우게 하고 자신은 궁전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었을 때, 밧세바와 죄를 지었습니다. 그가 그날 전쟁에 나갔더라면, 밧세바를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삼하 11:1).

솔로몬은 여유와 편안함과 재물이 넉넉했기 때문에 죄를 지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언제부터 우상숭배를 시작했습니까? 그들은 금송아지 사건 이후 광야에서 40년 동안 우상을 숭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마자, 우상을 숭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풍족할 때 우리는 위험에 처합니다.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그것은 당신이 하나님과 가까이 사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풍족할 때 하나님을 잊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아니요. 더 어렵다는 말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불가능하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풍족한 형제를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그가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당신이 그 사람보다 적게 가진다면 감사하십시오. 그것이 당신의 구원이 될 수 있습니다. 남들만큼 바꿔입을 옷이 많지 않더라도, 부러워하지 마세요. 사실, 당신이 그것을 볼 수만 있다면, 당신이 더 낫습니다. 집이 더 크거나 돈이 더 많은 사람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그러한 사람들은 훨씬 더 큰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당신에게 무엇을 주어야 할지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조금에도 만족하십시오. 나는, 얼마나 많은 설교자들이 풍족함을 얻음으로써 스스로를 파괴하는지 보았습니다. 그들에게서 경고를 받으십시오. 현명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실수에서 배웁니다.

9장부터 11장까지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의 새로운 세대에게,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죽은 그들의 조상들의 역사로부터 몇 가지 경고를 줍니다. 그는 하나님이 소멸하는 불이심을 그들에게 다시 경고합니다(9:3).

11장 21절(KJV)에서, 모세는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갈망이 "너희의 날들과 너희 자녀들의 날들이 많게 되어 땅 위에 있는 하늘의 날들 같이 되리라"고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를 위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 땅 위에서 우리의 날들이 하늘의 날들과 같게 되는 것.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가 가정과 교회에서, 천국의 기쁨과 평강과 사랑과 순결과 선함을 미리 맛보기를 원하십니다. 나는 그것을 조금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제 삶과 사역은 저에게 무거운 짐이 아니었습니다. 전혀요. 땅의 원칙대로 살지 않고 하늘의 원칙대로 사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즐겁고 하루하루가 설렜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할 때 이렇게 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40년 후에도, 여러분은 여전히 땅의 원칙이 아닌 하늘의 원칙에 따라 살기로 결심하기를 바랍니다. 끝까지 견디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 당신의 날이 지상에서, 천국의 날과 같을 수 있도록.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11장 24절은,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다 너희 것이 되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고, 모든 연약함을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는 우리 발을 내려놓고 마귀를 우리 발 아래 두어 그를 이겨야 합니다.

12장에서 26장까지는 여러 가지 율법이 반복되거나 새롭게 주어집니다.

거짓 선지자

13장에는 거짓 선지자에 대한 흥미로운 부분이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계에는 거짓 선지자들이 많기 때문에,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기 위해 거짓 선지자들이 우리의 길을 지나가는 것을 허용하신다고, 듣습니다. 거짓 선지자와 속이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진정한 소망과 갈망을 시험하시는 주요 수단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선지자나 꿈 꾸는 자가 일어나거나, 너희 길을 가로 질러 와서, 너희 중에서 일어나 표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그 표적과 기사가 이루어지리니…"(13:1,2). 하나님께서는 이 속이는 자가 예언한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십니다 - 우리를 시험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계에는 상담실과 상담료(정확히 의사와 같은)를 갖고 있는 그러한 거짓 "선지자"가 많이 있습니다. 당신은 그들의 예언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 그들은 대가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이 거짓 예언자들은 돈을 얻기 위해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를 시도합니다. 첫째, 그들은 당신에게 아첨하며 당신이 가고자 하는 곳에서 정말로 성공할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 아라비아 만 국가든 서양 땅이든 말이죠. 그리하여 그들은 당신에게서 멋진 선물을 받을 수 있도록, 당신을 행복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그들이 "예언"한 것을 정확히 행할 것이며, 따라서 그들의 "예언"을 당신 스스로 성취할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충족적 예언"이라고 불리는 심리적 속임수입니다. 사기꾼들의 오래된 수법입니다. 최종 결과는 무엇입니까? 당신은 돈을 벌기 위해, 당신이 원하는 곳으로 가도록 "선지자"로부터 "하나님의 승인"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얻었기 때문에 행복합니다. 선지자는 멋진 선물을 받았기 때문에 기뻐합니다. 마귀도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당신과 거짓 선지자를 속였기 때문입니다. 불행한 것은 하나님과 하늘의 천사들뿐입니다! 이 "선지자들"이 채택하는 두 번째 방법은 당신이 전혀 모르는 당신이 직면하고 있는 임박한 위험에 대해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마귀가 당신을 쫓고 있다고 말할 것이지만, 그들은 당신이 위험에서 벗어나도록 기도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식으로 그들은 또한 당신의 돈을 얻습니다 - 당신이 어떤 (존재하지 않는) 위험으로부터 구원받은 것에 대해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두 경우 모두 그들의 목표는 당신의 지갑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당신을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지 알려 하사 너를 시험하심이니라"(3절).

그러한 거짓 선지자들은 항상 땅의 것을 강조하고 하늘의 것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영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에 몰두하도록 이끕니다. "우리가 다른 신들을 좇자"는 그들의 메시지입니다 - 다른 신들은 야망, 돈, 편안함, 쾌락 등입니다.

그 구절에서 그러한 선지자는 죽임을 당해야 한다고 말합니다(13:5).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습니까? 그 사람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 즉, 그와 아무 관련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조업체 지침"입니다. 그것들을 따릅시다, 그러면 우리는 결코 속지 않을 것입니다.

각종 법률

14장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먹지 말아야 할 동물과 생물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레위기 11장에서 이전 세대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신 내용을 반복한 것입니다. 이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을 위해 거룩하고 구별된 것의 중요성을 상징적으로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법률은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막 7:19). 바울은 거룩함이 특정 유형의 음식을 피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모든 음식은 우리가 기도하고 그것을 먹을 때 거룩해진다고 명확히 말합니다(딤전 4:1-5).

15장은 안식년에 사람들을 석방하는 것에 대해 말합니다. 그들 중에 가난한 자가 있으면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인색하고 강퍅한 마음을 가지지 말고, 오직 그 형제에게 너그럽게 대할지니라(7,8절). 주님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16장에서, 우리는 모든 남성 구성원이 예루살렘으로 가야 하는 세 절기에 대해 읽었습니다.

17:14~19: 이스라엘이 왕을 갖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이 그들의 왕이 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삼상 8:7 참조).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이 그분의 최고를 원하지 않는다면, 차선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항상 주십니다. 그래서 만일 그들이 왕을 택하면, 그는 이 율법을 날마다 읽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온전히 순종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또 하나의 아주 좋은 구절입니다. 그들은 주의 깊게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그분을 경외하며 그분께 순종해야 합니다.

18:1-7: 여기서 모세는 그들에게 더 많은 율법을 줍니다. 그는 심령술과 주술을 금지합니다(9-14절). 점쟁이를 찾는 대신에, 주님은 미래에 그들이 듣게 될 예언자를 세우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4-19절) - 이는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분명한 언급입니다.

18:20에서, 그들은 그분께서 명령하지 아니한 것을 주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필요한 경고입니다. 특정 유형의 기독교 그룹에서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라고 말하며 "예언"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 그들이 말하는 것에 권위의 분위기를 주기 위해. 그런 다음 그들은 마음에 떠오르는 모든 것을 계속해서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런 예언자를 죽이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심각한 죄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그들에게 말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예언을 하였다"(렘 23:21)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이 모든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 죄악된 행위에 반대하는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습니다. 수많은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오늘날 이 모든 거짓 예언에 의해 잘못된 길로 인도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실제로 말씀하신 것을 인용할 때를 제외하고는 "주님이말씀하시기를"이라고 말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렇지않다면,우리는하나님의말씀에더하고있는것입니다.

18장 21, 22절에서 우리는 거짓 예언자를 식별하는 한 가지 방법에 대해 듣습니다: 그가 예언한 것은 성취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거짓 예언자입니다. 성경의 이 분명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예언자들이 저지르는 "실수"를 용인하고 계속해서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 구절을 완전히 무시하고 왜곡하여, 이 구절이 명백하게 말하는 것을 더 이상 의미가 없도록 만듭니다.

이 구절이 가르치는 것은, 진정한 예언자는 그의 예언의 99%가 아니라 100%의 성공률을 가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속임을 당하지 않도록 말씀으로 충분한 경고를 주셨습니다.

아무리 거룩하고 선하고 복음적인 사람이라도, 그가 예언한 것이 단 한 번이라도 정확하게 성취되지 않았다면 그는 거짓 예언을 한 것이며, 자신을 낮추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또한 거짓예언자입니다. 그 이후에는 그런 사람에게 신경 쓰지 말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께 기꺼이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은 얼마나 될까요?

19장은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들이 피신할 수 있도록 구별된 도피성을 반복합니다.

20장 1~7장: 이스라엘 백성이 전쟁에 나갔을 때, 그들은 어떤 두려움도 없이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신뢰로 나아가라고 여기에서 들었습니다. 두려운 사람이나, 주님의 싸움보다 자기 아내나 집이나 포도원을 더 생각하는 자들은, 다른 군인들이 주님께 헌신하는 것을 식히지 않도록, 집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온 마음을 다해 섬기는 자를 원하십니다 - 그분의 이름과 그분의 왕국이 개인의 이익보다 더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21장에서는, 결혼 문제와 반항하는 자녀를 돌로 치는 등에 관한 여러 가지 다른 법이 주어집니다.

21장 22,23절에서, 우리는 나무에 달린 자마다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라는 말씀을 읽습니다. 이 구절은 바울이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서 인용한 구절로, 그리스도께서 갈보리에 매달리셨을 때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셨으며, 이는 하나님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한 우리에게 임해야 할 저주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22장 5절에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남녀의 의복에 관한 율법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남녀 사이에 만드신 차이를 유지해야 하고, 각 성별에 대해 정하신 다른 기능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가르치기 위한 구약의 율법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어미 새와 새끼가 둘 다 둥지에서 발견된 경우 그 새끼와 함께 어미 새를 데려가는 것을 금지한 율법에서, 동물 창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엄청난 돌보심을 봅니다(22:6,7). 동물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은 우리에게 한 가지 위대한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 그분이 그분의 자녀인 우리를 얼마나 더 돌보시겠습니까?

23장과 24장에서, 우리는 도덕, 청결, 이혼에 관한 율법과 가난한 사람들이 착취당하지 않고 돌봄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다양한 율법을 읽었습니다. 24장 6-21절에 주어진 이 율법을 읽고 가난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강렬한 관심을 보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정말 유익합니다.

25장과 26장에는 다른 여러 가지 법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27장에서는, 특정한 죄를 지은 자들에게 공개적으로 저주가 선언됩니다.

28장은 긴 장으로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처음 14개의 절은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축복하실 것인지에 대한 약속입니다. 다음 54개 절은 그들이 하나님의 법에 불순종할 경우,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벌하실 것인지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 아래서 인간이 보상과 처벌의 위협을 통해 하나님께 순종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린 아이들에게도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초콜릿과 막대기" 방법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 그들이 순종하면 초콜릿을 약속하고 불순종하면 막대기로 처벌하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어린아이처럼 대하셨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 아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어른으로 대하십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인이 된 아들은 두려움이 아닌 사랑과 경외심으로 아버지에게 순종합니다. 그렇게 우리 자신이 아기인지 어른인지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 보상을 바라거나(기대) 벌을 피하기 위해 주님을 섬기거나 그분께 돈을 바치거나 봉사하거나 그분께 기도하거나 금식합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여전히 옛 언약의 정신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31장 7,8절에서, 우리는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을 인도할 책임을 부여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또다시 모세가 자신의 아들이 아닌,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에게 그 책임을 어떻게 맡겼는지 주목합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기독교계에서는 교회나 사역을 시작하는 사람이 자신의 일에 대한 리더십을 자신의 아들이나 딸에게 넘기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열심히 일해서 쌓아온 재정적, 지위적 혜택을, 자신의 가족이 거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에서, 우리는 "아무도 육신을 따라 알지 말라"(고후 5:16)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 심지어 우리 자신의 가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계 어느 곳에서도 모세와 같은 지도자를 찾는 것은 드뭅니다.

32장에서, 우리는 모세의 노래를 읽습니다. 모세는 또한 시편 90편을 썼는데 이것은 또 다른 노래였습니다.

33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지파들을 축복하시는 것을 봅니다. 2절과 3절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율법을 어떻게 보았는지, 즉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의 표현을 보여주는 멋진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오른손에는, 그들을 위한 불 같은 율법이 있더라" (2절 - 직역). 그것이 무엇을 증명했습니까? "참으로 그분은 그분의 백성을 사랑하십니다." (3절). 하나님의 불 같은 계명이 우리를 향한 그분의 지극한 사랑의 증거임을 인식하는 것이 좋습니다. 부드럽고, 쉬운 법은 그가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했을 것입니다.

34장에서, 우리는 모세의 죽음에 대해 읽습니다. 이스라엘은 모세가 죽은 지 30일 만에, 약속의 땅에 들어갔습니다.


장 6
여호수아

여호수아서는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어떻게 소유했는지 알려줍니다. 이 책은 여러 면에서 사도행전과 유사합니다. 두 권의 책 모두 새로운 시작이었고,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엄청나게 나타난 것을 읽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위대한 지도자였으며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했습니다. 우리는 또한 사사기(여호수아서 직후)에서, 여호수아 시대 이후에 얼마나 빨리 타락했는지를 봅니다. 신약에서도, 사도들이 죽자 마자, 교회에서 매우 빠르게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계 2,3장).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좋은 지도자가 없을 때, 매우 빠르게 타락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여호수아서는 하나님을 전쟁의 하나님으로 묘사합니다.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전쟁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랑 많은 아버지가 자식에게 있는 질병과 싸우듯이, 인류에게 해를 끼치는 모든 것을 미워하십니다.

옛 사람과 육신 (The Old Man and the flesh)

가나안 땅은 (일부 신자들이 찬송가에서 부르는 것처럼) 천국의 묘사가 아닙니다, 천국에는 죽임을 당할 거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은 실제로 성령으로 충만한 승리의 삶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곳에서 죄의 거인, 즉 우리 육신의 정욕이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모든 거인들은 한 순간에 죽지 않았습니다. 한 명씩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 두 개의 물을 건너야 했습니다. 하나는 홍해였고 다른 하나는 요단강이었습니다. 이 둘은 모두 죽음을 말합니다. 우리는 고린도전서 10장(2절)에서 홍해에 들어가는 것이 물세례의 그림임을 봅니다. 요단강은 또 다른 종류의 죽음의 그림입니다. 이곳은 1500년 후 세례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준 곳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옛 사람이 하나님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가르칩니다(롬 6:6). 우리는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없습니다. 옛 사람(죄를 짓기 원하는 마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그렇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할 다른 것이 있습니다 - 우리의 육신(욕망의 창고). 갈라디아서 5장 24절은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말합니다.

육신은 옛 사람과 다릅니다. 정욕이 있는 육신은, 우리 마음에 들어와 우리를 더럽히려는 강도 떼와 같습니다. 그 옛사람은 우리 마음속에 살면서, 도둑들이 올 때마다 문을 열어주는 불성실한 종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둘 중 누구를 죽이실까요? 그분은 그 종을 죽입니다. 강도 집단은 여전히 강하고 활동적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회심하기 전과 회심한 후에 똑같은 방식으로 유혹을 받는 이유입니다. 그것은 강도들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회심한 후에도 여전히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 또 다른 무언가가 죽었습니다 - 바로 이 도둑들에게 문을 열어준 종(옛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죽이시고 우리가 거듭났을 때 우리 안에 새 종을 두셨습니다 - 도둑에게 문을 열어 주기를 원하지 않는 종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유혹이 닥칠 때, 새 종은 "아니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신자가 어떻게 죄에 빠질까요? 그들이 새 종을 잘 먹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는 강도들로부터 문을 닫아 둘 만큼 충분히 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강도들이 침입합니다. 그것이 신자가 죄를 짓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신자가 죄를 짓는 것과 불신자가 죄를 짓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 신자는 죄를 짓고 싶어하지 않고, 불신자는 죄를 짓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것은 당신이 정말로 거듭났는가 아닌지를 시험하는 것입니다. 거듭난 증거는 죄를 짓느냐 안 짓느냐가 아니라 죄를 짓고 싶느냐 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여전히 죄를 짓고 싶다면, 당신은 회심하지 않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물세례를 청하러 올 때 나는 그들에게 "한 번이라도 더 죄를 짓고 싶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당신은 죄를 지을 것입니까?"라고 묻지 않습니다, 아무도 죄를 짓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원한다는 것'은 그가 옛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이 말하는 두 가지 죽음입니다. 이 두 가지 모두 이스라엘 역사에서 아름답게 묘사됩니다. 바로의 군대는 순식간에 홍해 밑에 묻혔습니다. 그것은 옛 사람의 죽음을 그린 그림입니다. 누가 그랬을까요? 하나님입니다. 옛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런 다음 이스라엘 백성은 또 다른 죽음을 말하는 요단을 건넜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그들의 정욕에 대해 이러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정욕은 여전히 거기에 있고, 거인들은 여전히 땅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을 하나씩 죽이기로 작정했습니다. 유혹을 받았을 때, 정욕을 하나씩 죽여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합니다(롬 8:13). 이것은 이집트 군대가 하나님에 의해 순식간에 매장되는 것과는 매우 다릅니다.

성경은 신약성경에 적용할 때 매우 정확합니다. 우리가 성령께 우리 자신을 열면, 그분은 이 감춰진 것들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실 것입니다. 성경은 흥미로운 책입니다. 그것은 새 언약의 삶에 대한 구약의 예표에서 매우 완전하고 정확합니다. 구약의 그 경건한 사람들은 그 당시에는 이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사건들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 땅은 수년 동안 수많은 정욕의 거인들이 다스려온 우리 몸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거인들에 대해, "나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생각하겠다"고 말하는 태도를 취했습니다. 예수님은 날마다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옛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옛 사람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의 의지(성경이 우리의 "육신"이라고 부르는 것)를 날마다 죽이는 것입니다.

당신의 삶 속에서 죄에 대해 편안한 태도를 취하면, 다시 옛 사람을 입을 수 있습니다(엡 4:22). "계속해서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은 한번 살아 있었더라도 영적으로 죽게 됩니다. 신자들에게 쓰여진 로마서 8장 13절은 이 점에 대해 매우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여호수아에서 우리 육신의 정욕이 우리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을 예표합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서의 영적 주제는 "죄를 이기는 것"입니다. 이 책은 정욕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라고 격려합니다.

이 싸움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는 여호수아였습니다. 여호수아는 예수를 가리키는 히브리어입니다. 예수는 영어 단어입니다. 히브리어 여호수아는, "주님은 구세주"라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은 말합니다,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는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구주시니라".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할 수 없었던 것은 율법이 우리를 죄에 대한 승리의 삶으로 인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우리를 이 전쟁으로 이끄시는 지도자는 모든 일에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으신 예수님이십니다(히 4:15). 여호수아는 혼자서 장막에 앉아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서 싸우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니요. 그는 앞으로 나가서 자신과 싸우며 "나를 따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구원의 대장이십니다(히 2:10). 그분은 우리보다 앞서 가셨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상의 삶에서, 십자가를 참으시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고, 죄와 사탄을 정복하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리스도인의 경주를 하라는 말씀을 듣습니다(히 12:1,2). 오늘 우리의 싸움에서,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에, 앞서 가신 우리 대장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주님, 제가 지금 시험을 받는 것처럼 당신도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극복했습니다. 저에게도 이겨낼 수 있는 은혜를 주십시오." 우리가 이 대장을 따라갈 때 패배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대장을 따르지 않을 때만 패배합니다.

하나님이 벌하시는 이유

하나님께서 죽이라고 명하신 가나안 사람들은, 소돔과 고모라가 벌을 받은 것처럼, 그리고 노아 시대의 세상이 벌을 받은 것처럼 벌을 받고 있었습니다. 온 땅은 노아 시대에 음행으로 타락했습니다(창 6:11). 가나안 사람들 역시 타락한 성적인 죄와 사탄 숭배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땅이 그들을 토해 냈습니다"(레 18:24,25). 신명기 9장 4절과 18장 10~12절은 하나님이 가나안 족속을 멸하신 이유에 대해 분명한 이유를 제시합니다. 어느 나라에서든 땅을 더럽히고 타락시키는 오염된 영향력이 있다면, 그 사람들을 제거함으로써 그러한 나라를 처벌하는 것입니다 - 그들의 영향력이 확산되어 다른 나라들도 부패하는 것을 방지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마치 친절한 의사가 사람의 발에 생긴 괴사가 온 몸을 망가뜨릴 정도로 심할 때 그 사람의 발을 절단하는 것처럼, 어떤 사람들을 파멸시키십니다. 만약 당신이, 의사가 누군가의 다리를 자르는 것을 보고 의학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의사가 그 사람을 미워한다고 상상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반대였을 것입니다. 의사는 사랑 안에서 그 일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세상을 타락시킬 수 있는 특정 사람들을 잘라내실 때, 세상을 향한 사랑으로 행동하십니다. 홍수 당시 전 세계 인구를 전멸시킨 것은 사랑의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인류는 악마의 지배를 완전히 받게 되지 않고 지켜질 수 있었습니다(창 6:2 -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창조물인 타락한 천사들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 사람을 쳐서 눈이 멀게 한 적이 있습니다(행 13:8-12). 부흥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하나님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사례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호수아에서 읽는 것은, 가나안 사람들을 살해한 것이 아니라 그 땅을 정결케 하는 수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오래 전에,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살았을 때, 거기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은 가나안 족속을 멸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듯이 당시 가나안 족속이 "심판을 받을 때가 되지 않았기"(창 15:16), 때문에 400년 이상을 기다리셨습니다. 우리는 망고가 익었을 때 따먹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심판하시기 전에 인간의 죄가 심판을 받을 만큼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그분은 죄가 무르익었을 때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셨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이 700년 동안 가나안 땅을 차지한 후, 그들이 가나안 사람들과 같은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도 그 땅에서 쫓아내셨습니다. 앗수르 사람들이 와서 이스라엘을 함락했습니다. 125년 후, 남왕국 유다가, 하나님의 선지자들의 메세지를 거절하고 심판을 받을 때가 무르익었을 때, 하나님은 유다도 멸망시키기 위해 바벨론 사람들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편파적이지 않으십니다. 가나안 사람이나 이스라엘 사람이나 유다 사람이나 그분의 기준은 같습니다. 그분의 백성이 계속 그분의 기준을 어기고 그분의 선지자를 무시한다면, 그분은 그들에게도 똑같은 수술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똑같이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죄를 봐주신다면, 그것은 그분이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자녀를 질병과 함께 살도록 내버려 둔다면, 그것은 그분이 자녀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승리의 삶으로 들어가기

1장 1,2절: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 종 모세가 죽었느니라. 이제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라.'" 여호수아를 높여 모세의 뒤를 이을 지도자로 세우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그 위치에 임명하지 않으셨다면, 리더십은 효과적으로 행사될 수 없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여호수아에게 그의 발로 밟는 곳마다 다 그에게 주실 것이며(3절), 그의 평생에 그를 능히 당할 자가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5절). 이는 로마서 6장 14절에 우리에게 주어진, "너희가 은혜 아래 있으므로, 죄가 너희를 이기지 못하리라"는 신약성경의 약속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과거에 많은 거인들이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패배할 것입니다. 단 하나의 죄도 (그것이 아무리 강력하더라도) 우리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실제로 한 영토에 발을 디디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주장해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그의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유업을 주장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의 것으로 붙잡지 않는다면, 그 약속은 우리의 삶에서 결코 성취되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복음 안에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했고, 그 결과 영광스러운 삶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고린도후서 2장 14절에서, " 항상 우리를 승리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말합니다. "항상 승리"는 바울의 승리의 노래였습니다 -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노래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승리의 삶에 결코 들어가지 않습니다. 60만명의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이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거의 같은 비율의 그리스도인(600,000명 중 2명)이 오늘날에도 승리의 삶에 들어갑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약속의 땅에 들어간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땅을 차지하라고 명하시면, 우리가 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만을 생각하며, 결코 우리가 직면한 어려움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것은 불가능하다. 거인들은 너무 크고 강력하다"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분노와 눈의 정욕을 극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낍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정욕은 너무나 강력하고 오랫동안 그들을 지배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 성도들은 평생 패배한 채로 (영적으로 말하자면) 광야에서 죽습니다.

하늘에서 우리를 통해 흐르는 성령의 강은 더러운 생각, 원망, 불평, 돈에 대한 사랑으로 오염된 수로, 즉 우리 마음에서 오염된 수로를 찾아서 흘러가서는 안됩니다. 아니요. 죄가 없는 깨끗하고 순수한 통로를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 강은 하늘의 맑은 물로 우리 주변 사람들을 축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계의 큰 비극은 그 설교자들의 내면이 순수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마음과 사생활에서 죄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돈을 사랑하는 것, 눈의 정욕, 악독, 다른 기독교 지도자/조직과의 경쟁 정신, 시기, 거짓말, 아내에게 화를 내는 것, 그리고 다른 많은 영역에서 불의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설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무엇을 가르칠 수 있습니까? 오직 그들이 실행하고 있는 것, 즉 아내에게 화내는 법, 억울해 하는 법, 질투하는 법, 남들과 경쟁하는 법입니다! 그들이 가르치는 다른 모든 것은 공허한 이론에 불과할 것입니다. 당신이 당신의 삶에서 이기는 자가 되지 않는다면, 당신이 연구를 통해 얻은 모든 성경 지식은 쓸모가 없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라고 확신시키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여호수아 앞에 설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교리를 믿거나 어떤 경험을 함으로써, 죄를 이기지 못합니다. 아니요. 주님의 영을 통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끊임없는 임재만이 우리를 이길 수 있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기독교계에서 그들의 마음이 순수하기 때문에, 그분이 지지하고 보증할 수 있는 그러한 지도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강하고 용기를 내어라. 너는 오랫동안 적들의 지배를 받아온 이 땅을 소유하도록, 이 백성들을 이끌어야 한다" (6절). 우리는 어떤 죄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나가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들의 몸, 즉 수년 동안 죄의 지배를 받아온 몸으로 죄를 극복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단지 그들을 믿음으로 인도하고,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홍해를 건너고, 구름에 덮이는 두 가지 세례를 받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단지 유치원 수업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유치원 수업을 통과하면, 교육을 중단합니까? 아니요. 그러나 그것이 오늘날 기독교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구름 기둥, 즉 성령세례가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기 위해 왔습니다. 그들은 2년 안에 들어갔어야 했는데, 40년 동안이나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지도자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느니라"(롬 10:17). 신자들이 교회 모임에서 이러한 진리를 배우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들이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그들이 어떻게 죄를 이길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강하고 용기를 내어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모든 것을 행하도록 주의하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1:7).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라"(롬 6:14)고 말씀하신다면, 그것을 믿고 고백하십시오.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치우치지 마십시오. 즉, 그 약속의 범위를 축소하지 마십시오. 일부 죄만 포함하도록 축소하지 마십시오. 동시에, 그것이 말하는 것 이상을 의미하게 만들지 마십시오. 우리가 이 땅에서, 그리스도처럼 온전할 수 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이 땅에서 죄 없이 완전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 약속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라고 알고 있는 것(의식하는 죄)에 대한 승리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만 온전히 그리스도와 같이 될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3:2은 그것에 대해 매우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넘어서지 맙시다. 그리고 성경이 약속하는 것보다 적게 믿지도 맙시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은 가나안 온 땅을 점령하는 것 또는 매우 높은 산을 오르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회심할 때, 우리의 죄는 용서받고 우리의 과거는 지워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많은 죄의 노예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 산기슭에 오는 것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이 산을 오르기 시작합니다. 산꼭대기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모습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만, 거기에 도달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산기슭(죄에 패배)에서 영원히 살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요. 성경은 "완전을 향하여 나아가자"(히 6:1)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고린도후서 7장 1절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온전히 거룩함"을 권고 받습니다. 우리는 "완벽"이라는 단어를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생애 말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아직 정상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계속 나아가고 있습니다" (빌 3:12-14). 주님은 지금 우리 중 많은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 산기슭에 충분히 오래 머물렀다. 이제 올라가라. 나아가라." 그러므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맙시다.

"이 하나님의 말씀 책이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라"(8절). 우리는 이미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품어야 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말씀이 우리 입에도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을 입으로 시인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그들이 욕망하는 것을 고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저는 큰 집을 얻게 될 것을 고백합니다. 저는 더 좋은 직장을 얻게 될 것을 고백합니다. 저는 좋은 차를 얻게 될 것을 고백합니다!!" 이 모든 것을 고백하는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을 고백합시다: "주님, 저는 분노를 이길 것을 고백합니다. 눈으로 보는 욕망을 완전히 극복할 것을 고백합니다. 돈을 사랑함을 극복할 것을 고백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입으로 고백해야 할 것들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우리가 이것을 고백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로 하여금 물질에 대한 우리의 정욕을 고백하게 합니다.

당신은 물질에 관심이 있는 사람과 교회를 세울 수 없습니다. 하늘의 일에 관심이 있고 경건한 삶을 사는 사람들과만 교회를 세울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지상의 번영을 제안함으로써, 잘못된 부류의 사람들을 당신의 교회로 끌어들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에게 집이나 차를 주겠다고 약속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당신이 죄를 이길 수 있다고 약속합니다; 하루24시간, 낙심하거나 패배하지 않고 항상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삶 - 항상 승리하고, 항상 기뻐하며, 모든 일과 모든 사람에게 항상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약속하는 새 언약의 삶(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입니다. 그런 다음 그것을 고백하고, "주님, 이것이 제가 평생 살고 싶은 삶입니다"라고 말하십시오.

그것은 젊은 크리스천이었던 제가 성경이 제게 제시하는 것을 보고 원했던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제 주변의 기독교 지도자들을 보니, 그들이 죄에 패배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말했습니다, "주님, 저는 그들을 판단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건 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저들을 제 본보기로 삼고 싶지도 않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만 바라보고 싶습니다. 당신의 약속만 바라보고 싶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나의 유일한 본보기로 삼고 싶습니다." 나는 신자로서 수년 동안 패배했습니다. 그러나 일단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유업을 보았을 때, 나는 계속해서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고백했습니다. 그것은 나에게 끊임없는 기쁨과 끊임없는 승리의 삶을 약속했습니다. 하나님은 마침내 제 마음의 소원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내가 지금 살고 싶은 방식이고, 지상에서의 삶이 끝날 때까지 그렇게 살고 싶은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을 당신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하십시오. 당신이 이 메시지를 전하다 보면, 인기를 구하는 설교자들 사이에서 하나님을 위한 고독한 목소리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낙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끝까지 당신 곁에 서실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있는 죄인들의 필요에 대해 묵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생각하기에 좋은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지 않으면, 죄인들을 도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 번영과 성공을 약속하셨습니다(1:8). 진정한 '번영 복음'은 우리의 삶이 천국적이고 영적인 방식으로 번영하고 성공하는 복음입니다. '번영과 성공'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두 가지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 1장 8절에서 말씀하신 방법으로 이것들을 구하지 않습니다.

라합

2장에서, 우리는 이방 나라의 창녀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봅니다. 예수님은 그분 시대의 창녀들의 영혼을 염려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 마음에도 동일한 염려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라합은 여리고에서 잘 알려진 창녀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오늘날의 많은 창녀들처럼, 자신의 직업에 싫증이 나고 지쳤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자신의 직업에 싫증이 나고 지쳤습니다. 그것을 알아주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들은 매춘부를 경멸했습니다. 우리 도시의 많은 매춘부들은 그곳에 있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곳에 있지 않습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속아서 그런 삶을 살도록 강요당했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남자들에게 착취당하는 것에 지쳤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나는 여러 시대에 걸쳐 매춘부들을 구원할 부담을 가지고 있는 경건한 사람들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들은 이 불행한 여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의 짐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라합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온 세상에서 그분을 갈망하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 국적과 매춘부 또는 종교 지도자 여부에 관계없이. 하나님은 라합의 마음에 있는 그러한 갈망을 보시고, 그녀의 구원을 위한 길을 만들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신약의 첫 페이지에 다윗의 고조모이자 요셉과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리아의 조상으로 나타납니다(마 1:5). 그녀는 히브리서 11장 31절에 믿음의 영웅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야고보는 행함이 따르는 믿음의 모범으로 그녀의 행동을 인용합니다(약 2:25).

라합은 그녀가 다가올 세대의 모범이 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습니까? 아니면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3000년 동안 그녀의 믿음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라고 상상했을까요? 하나님께는 편애가 없습니다. 여러분 중 일부는 라합과 같을 수 있습니다 - 죄 가운데 살면서 당신의 삶을 엉망으로 만든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을 돌봐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세상의 외딴 곳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에 있는 갈망을 보시고, 당신을 그분의 종이 되게 하고 수백만의 축복이 되게 하는 놀라운 방법을 가지고 계십니다.

지도자 여호수아

3장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요단을 건넜는지에 대해 읽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7절),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줄을 그들로 알게 하리라." 여호수아가 모세의 입장이 되는 것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모든 사람의 두려움과 존경을 받았던 강력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모세가 죽었을 때 여호수아는 아마도 70~80세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는 200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야 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존중해줄지 궁금했을 것입니다.

당신도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았던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시작한 사역을 이어가도록 부름을 받았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어떻게 당신이 그것을 할 수 있는지 궁금해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말씀하십니다,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그들 앞에서 너를 높이리라." 하나님은 사람들이 당신을 존경하는 방식으로 사람들 앞에서 당신을 높이실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당신을 감독으로 삼거나 당신에게 칭호를 주고 당신을 높여 주기를 기다리지 마십시오. 어디선가 명예박사학위를 받아 존경을 받으려고 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들에게 당신이 그분의 종이라는 것을 알려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입에 함께 계셔야 합니다. 직함과 인간적인 자격으로 사람을 감동시킨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당신의 삶과 당신이 하는 말에 기름부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감동시킬만한 지상의 자격이 없었습니다. 사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았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것을 구하십시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여호수아의 자격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이것,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예수님의 자격은 무엇이었습니까? 사도행전 10장 38절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니라"고 말합니다. 모세의 자격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셨습니다. 골리앗을 죽일 수 있는 다윗의 자격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당신의 자격은 무엇입니까? 학위증명서인가요? 사탄이 학위 증명서를 두려워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사탄은 학위가 10개가 있는 사람조차 신경 쓰지 않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하는 것을 볼 때에만 두려워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여호수아를 선택하셨습니까? 그의 삶에는 하나님께서 보신 자질이 있었을 것입니다 - 특히 하나님께서 가나안의 거인들을 정복하도록 도우실 것이라는 그의 믿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보시고, "내가 찾는 사람은, 나를 믿고 내 약속을 신뢰할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그를 뽑아서 모세 밑에서 훈련시켰습니다. 하나님은 종종 한 사람을 경건한 나이 많은 사람과 함께 일하게 하심으로써, 그분을 섬기도록 훈련시키십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와 함께 일하며 선지자가 되는 법을 배웠습니다. 디모데는 바울과 함께 일하면서 사도가 되는 법을 배웠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와 함께 일하면서 지도자가 되는 법을 배웠습니다. 하나님께서 경건한 연로한 사람과 함께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면, 그것은 그분을 섬기도록 당신을 준비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실 수 있는 가장 큰 특권 중 하나입니다.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와 가까워지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세로부터 지도자의 자리를 물려받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택하셨습니다.

3장 9절: "이리 와서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수아 자신도 하나님의 말씀을 밤낮으로 묵상했으며, 이제 그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와서 백성에게 말한 것처럼, 여호수아는 모세가 기록한 율법을 읽고 백성에게 "나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여러분에게 전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 우리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듣고 경험한 것을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 - 이론과 기발한 생각이 아닌, 하나님에 대해 맛본 것입니다. 모세, 여호수아, 바울,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널 때 언약궤가 앞서 갔습니다(3:15). 이것은 우리보다 앞서 가시며 모든 죄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입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님을 바라보며"(히 12:1,2) 경주를 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궤를 운반하던 제사장들이 요단강에 다다랐을 때, 강둑은 넘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믿음으로 물에 발을 담그자, 멀리서부터 물이 즉시 그쳤습니다. 그런 다음 이스라엘 사람들이 건너갔습니다. 한편 제사장들은 모두가 강을 건널 때까지 강 한가운데 서 있었습니다. 다시, 그들의 발 밑의 강바닥이 말랐습니다!

4장: 그들이 건너간 후에, 여호수아가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가나안으로 건너왔습니다. 하지만 서둘러 전투에 뛰어들지는 맙시다. 먼저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무엇보다 먼저 무릎을 꿇고 주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교훈입니까? 그런 다음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강바닥에 가서 돌 열두 개를 가져다가(8절), 그것으로 기념을 삼으라고 말했습니다 - 그래서 미래에, 아이들이 아버지에게 그것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아버지들은 그들에게 하나님이 그들의 조상들을 위해 강을 가르면서 행하신 기적에 대해 말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을 우리 자녀들에게도 전하여, 그들도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5장 5~9절: 이스라엘 남자들은 이제 길갈에서 할례를 받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광야에서 태어났고,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할례를 받지 않은 40세의 이스라엘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작은 일이었지만, 언약의 표시였습니다. 그것은 육신에 대한 모든 신뢰를 끊는 것을 상징합니다(빌 3:3). 그들이 전쟁터에 나가기 전에, 육신에 대한 모든 신뢰가 끊어져야 했습니다. 그것이 첫 번째 단계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거인들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애굽에서의 수치가 사라졌습니다(9절).

5장 13,14절: 이제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 앞에 옵니다. 할례가 끝나고 "애굽의 수치가 사라진"(9절) 후에야, 그분이 오신다는 사실에 주목하십시오! 이 대장은 환상 중에 나타나신 주 예수님이셨습니다. 여호수아는 그가 사람인 줄 알고 "당신은 우리 편입니까, 아니면 적 편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대답은 매우 교훈적입니다: "나는 어느 편도 아니다. 나는 군대를 이끌러 왔다. 너는 내 편으로 와야 한다."

때때로 우리는 "주님, 제가 가겠습니다. 오셔서 저를 축복해 주십시오."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 대신에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주님, 주님의 군대 대장으로서 지금 어디로 가십니까? 내가 당신의 군사로서 어디로 가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주님은 대답하실 것입니다, "나는 이러저러한 곳으로 간다. 날 따라와라." 그리스도인의 삶은 너무나 단순합니다. 나는 이리저리 다니며 주님께 나와 함께 가달라고 요청하는 계획을 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요. 하나님은 우리의 종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의 대장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방식을 이렇게 바꾸십시오 - 그러면 당신의 사역에서 놀라운 결과를 보게 될 것입니다. 나는 그것이 내 사역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주님을 더 효율적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땅이 준비되지 않은 곳으로 가서 우리의 시간을 낭비하고 그것을 십 년 후에 깨달은 다음에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닌, 주님이 이미 우리를 위해 땅을 준비한 곳으로 갈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기에 가장 좋은 곳을 아십니다. 그러니 그분의 지시를 기다리십시오 - 항상.

승리,패배 및 속임수

6장 2절: "내가 여리고를 이미 네 손에 넘겨주었노라." 이것은 우리가 사탄과 싸우러 갈 때 알아야 할 것입니다 - 사탄은 이미 갈보리에서 패했고, 주께서 그를 우리 발 아래 짓밟으실 것입니다(롬 16:20). 여호와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내가 7일 후에 여리고를 너희에게 주겠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니요. 그분은 "내가 그 성을 이미 네게 주었노라. 그냥 들어가서 가져가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7일 동안은 성을 13바퀴 돌고 7일째 되는 날에 나팔을 불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이 도시 주변을 행진하고 외치는 소리는, 불행하게도 일부 신자들이 쓰는 기술로 변질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이것들을 명하실 때에만 그것들은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의 소명은 우리가 가는 곳마다 갈보리의 승리를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탄이 패배했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들은 나팔을 불어서 "'사탄아, 너는 십자가에서 패했다'라고 사탄에게 증거하는 말씀으로 사탄을 이겼습니다"(계 12:11). 나는 사탄에게 그의 패배에 대해 매우 자주 상기시켜 주는 것에 큰 기쁨을 느낍니다. 나는 그가 그 말을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나는 한 여인이 우리 집에 기도를 받으러 왔을 때를 기억합니다. 나는 그녀에게, 주님을 그녀의 구세주로 받아들이고 사탄에게 그가 십자가에서 패배했다고 말하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녀는 갑자기 변한 목소리로, "나는 십자가에서 패배한 것이 아니다"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때 나는 나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 그녀 안에 있는 악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악마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거짓말쟁이다. 너는 2000년 전에 십자가에서 패배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녀에게서 나가라." 악마는 즉시 떠났습니다. 그런 다음 그녀는 사탄에게 "사탄아, 너는 십자가에서 패했다"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날 저는 한 가지 사실을 배웠습니다 - 마귀는 자신이 십자가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그것을 자주 말하고, 또한 전 세계의 신자들에게 그것을 정기적으로 말하도록 가르치기로 결심했습니다.

당신은 마귀에게 그가 십자가에서 패배했다고 몇 번이나 말했습니까? 오늘 시작하세요. 그가 십자가에서 패배했다고 자주 그에게 말하십시오. 그는 그렇게 말하는 당신을 미워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악마가 나를 미워할 때 그것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그때 나는 내가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탄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당신의 증거의 말씀을 그에게 선포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를 당신의 발 아래에 둘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여기서 당신에게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당신이 양심을 순결하게 지키지 않고 사탄을 대적한다면, 사탄은 당신을 비웃으며 "나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 그런데 넌 누구니?"라고 말할 것입니다(행 19:15).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께 복종하고, 그 다음에 마귀를 대적하십시오(약 4:7). 주님은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수 1:7).

7장: 여기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처음으로 패한 것을 읽습니다.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이스라엘이 패한 이유를 물었더니, 여호와께서 "진영에 죄가 있다"고 대답하셨습니다. 한 남자가 금지된 물건을 훔쳤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여리고에서 아무 것도 취하지 말라. 이 모든 것을 여호와께 드려야 한다"(6:17)라고 매우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아간을 제외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그 명령에 순종했습니다(7:20). 그가 마침내 붙잡혀 폭로되었을 때, 그는 자신이 죄를 지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어느 집에서 아름다운 바벨론의 외투를 보고 그것을 탐내었습니다('시날'은 바벨론의 또 다른 말입니다.) 그는 "내가 보고, 탐내고, 취하고, 숨겼다"고 말했습니다(21절) - 유혹의 네 단계. 우리도 이런 식으로 죄를 짓고 죄를 숨깁니다. 그런 다음 아간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아간은 여리고에서 전리품을 가져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만약 이 거인들을 죽이고 그들의 도시를 점령한 후에, 내가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면, 앞으로 20년 동안 나는 가난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조금 보관하는 것이 좋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여리고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탐욕스러운지 알아보기 위해 그들을 시험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거의 깨닫지 못했습니다. 여호수아 8장 2절에서, 우리는 여호와께서 백성들에게 그때부터 그들이 가나안 전쟁의 전리품을 스스로 취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읽습니다! 아간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기다리기만 했다면, 그가 원하는 모든 은금과 의복을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시험하셨을 때 실패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놓쳤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이 탐심으로 무언가를 움켜쥐고 있는지 시험하실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그렇다면,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계획하신 최고의 것을 당신의 남은 생애 동안 놓치게 될 것입니다. 대신, 당신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면, 항상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실 것입니다.

8장 26절에는, 아간이 죽임을 당한 후 아이 성이 어떻게 패했는지 읽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기 전에 과거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인생의 아이 성에서 계속 패배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모세가 산꼭대기에서 그의 손을 들었던 것과 같이, 여호수아가 그의 단창을 들어 아이 성을 치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그의 군사들이 싸웠고, 아이를 패하게 하였습니다.

이제, 승리를 거둔 후 우리 모두가 직면하는 가장 큰 위험은, 자만의 위험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긴장을 풀기 시작하는 순간, 속임을 당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여호수아에게 일어난 일입니다(9장). (죽임을 당해야 할 가나안 사람들인) 기브온 사람들이 와서 여호수아를 만났습니다(9:4). 그들(기브온 사람들)은 낡은 옷과 낡은 샌들을 신고 오래되고 곰팡이가 핀 빵을 들고 다니는 등 교묘하게 행동하며 먼 곳에서 온 것처럼 가장했습니다(9:5). 그들은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첨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아첨할 때 우리는 큰 위험에 빠집니다. 그러면 속임수가 곧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는 9장 14절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를 읽습니다. 여호수아는 그들을 믿고, 그들을 죽이지 않겠다고 그들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3일 후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사람들이 죽임을 당해야 할 가나안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16절). 하지만 그때는 이미 그들과 언약을 맺은 후였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약속을 지켜야 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 아첨하는 자들과 그릇된 동기로 교회에 들어오고자 하는 자들에게 미혹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경고입니다. 그러한 경우에 가장 안전한 행동은 우리 자신의 지혜에 의존하지 않고, 주님의 조언을 구하는 것입니다.

큰 승리를 거둔 직후에는 특히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많은 기적적인 치유를 행하신 직후에, 광야로 떠나 기도하시며, 모든 영광을 아버지께 돌리신 이야기를 읽었습니다(눅 5:15,16). 그것은 우리를 위한 예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조언을 구하지 않을 위험에 처한 때는 언제입니까? 우리가 승리했을 때입니다. 우리가 패배했을 때가 아닙니다. 우리는 패배 후보다 승리 후 더 큰 위험에 빠집니다. 일반적으로 패배 후에,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그분을 실망시켰기 때문에 주님께 가까이 나아갑니다. 우리가 한동안 승리를 거두었을 때, 영적 교만의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10장: 다섯 왕이 기브온을 쳤고 기브온 사람들이 여호수아에게 도움을 구했을 때, 여호와께서 여호수아를 격려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넘겨주었다. 그들 중 한 사람도 너를 당하지 못할 것이다"(8절). 그 말은 항상 "나는 이미 주었다"였습니다.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승리는 기정사실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사탄과의 싸움에도 임해야 합니다. 사탄과 그의 악마들은 우리 앞에 설 수 없을 것입니다. 지옥의 문은 결코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그들을 쳐부수니 "아무도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21절). 그리고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불러 이르되, "이 왕들의 목을 발로 밟아라"(24절). 성경은 로마서 16:20에서, "평강의 하나님이 속히 사탄을 (갈보리에서가 아니라)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갈보리에서 사탄을 물리치셨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이제 우리 발 아래 짓밟힐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마지막 날

13장 1절: 여호수아가 나이가 많아 늙었더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아직도 차지할 땅이 많다." 여호수아를 이어받을 다른 지도자가 이스라엘에 없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계에서도, 경건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으며 아직 소유하지 못한 땅이 너무 많습니다.

14장 6~15절에서, 우리는 갈렙이 이제 85세가 되었지만, 그의 믿음이 40년 전처럼 여전히 활기차다는 것을 봅니다. 그는 여호수아에게, 거대한 거인들이 가득한 산간 지방을 달라고 요청하고 그들을 모두 몰아내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헤브론을 갈렙에게 주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갈렙처럼 경건한 노인들이 "주님을 온전히 따르며"(14절) 늙어서도 믿음으로 더욱 굳건해지는 이기는 자들을 보는 것은 얼마나 큰 도전과 격려가 됩니까!

갈렙의 예와 대조적으로, 우리는 가나안의 많은 지역에서 가나안 사람들을 쫓아내지 못한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들의 슬픈 이야기를 읽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지파들이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않았다"(또는 할 수 없었다)는 것을 세 번 읽습니다(15:63; 16:10; 17:12). 이것은 그들의 삶에서 분노, 정욕, 원망과 같은 죄, 즉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죄를 몰아내지 못한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입니다.

나머지 장은 가나안 점령과 그들의 소유지에 정착한 지파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21장 44절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말씀을 읽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사방에서 안식 을 주셨습니다; 그들의 모든 원수들 중에 그들과 맞선 자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4장 8,9절에 언급된 안식입니다. 거기에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한 안식과 승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인도하고자 하시는 안식(그리고 모든 죄에 대한 승리)의 그림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또한 이 안식에 들어가기를 부지런히 하고 그것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히 4:1,11).

21장 45절은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 하신 선한 말씀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이것은 우리가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설 때, 우리의 간증이 될 것입니다. 그 날에 많은 성도들이, 광야에서 멸망한 60만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체험하거나 누리지 못한 것이, 불신앙 때문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이) 믿었던 사람들은 그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의 약속 하나하나를 경험하고 누렸다는 것을, 그 날에 기뻐할 것입니다. 그 날에 많은 믿는 자들의 마음에는 그들의 불신앙으로 인해 얼마나 큰 후회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모든 약속을 요구합시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대로 (Yes)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아멘'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고후 1:20).

22장 10-34절에는, 상대방을 비판하거나 판단하기 전에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는 간단한 방법을 받아들이면, 오해가 제거되고 갈등이 방지되는 방법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나안이 아닌 요단 동편에 살기로 결정한 이스라엘의 2½ 지파는 성막의 놋 제단을 본떠 자기 땅과 가나안의 경계에 세웠습니다. 다른 9½ 지파는 이것을 보고, 즉시 하나님을 거역하는 행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먼저 문제를 명확히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 뒤 곧 그들은 반역 행위가 아니라 단지 9½ 지파의 다음 세대가 강 건너편에 살고 있다는 이유로 2½ 지파의 다음 세대를 배척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문제는 평화롭게 해결되었습니다. 모든 기독교인들이 그들 자신의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기 전에 상대방의 말을 듣는 그 동일한 상식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23장에서, 우리는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내용을 읽습니다. 그는 자신이 곧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굳건히 지키고 그들 주위에 있는 이방 민족들로부터 분리되도록 경고했습니다. 그러면 여호와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고, "이스라엘 사람 한 사람이 능히 천 명의 대적을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6-10절)!! 그러나 그들이 타협한다면, 주님은 그분의 약속을 성취하신 것처럼 그분의 위협도 이행하시고 그들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14-16절).

24장에서, 여호수아는 아브라함 시대부터 이스라엘의 역사를 빠르게 검토하고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돌보심을 상기시킵니다. 그런 다음 그는 그들에게 "주를 경외하고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분을 섬기라"고 권고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의 결정이 무엇이든, 그와 그의 집안은 오직 주님만 섬기겠다고 했습니다(14,15절). 우리는 여호수아가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집안을 위해서도 결정을 내린 것을 봅니다. 그는 그의 집의 가장이었고 그의 자녀들이 주님만을 예배하고 섬기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했던 것처럼, 그 문제에 있어서 자녀들에게 선택권을 주지 않았습니다. 크리스천 지도자들은 무엇보다 먼저 그들의 가정을 이끌어야 하고, 자녀들도 주님을 따르고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전 세계에 여호수아와 같은 많은 사람들을 필요로 하십니다.


장 7
사사기

사사기는 여러 해 동안 여호수아의 리더십 아래에서 경험한 매우 강력한 승리 직후, 이스라엘의 타락한 상태를 묘사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상태가 그들의 지도자의 자질에 달려 있다는 이전과 같은 교훈입니다. 이스라엘은 훌륭한 지도자가 있을 때마다 번영했습니다.

좋은 리더의 중요성

오늘날 기독교계에 있는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타협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곧고 좁은 길로 인도할 만큼 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론처럼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인기를 얻고자 하므로(출 32장), 하나님은 그들의 지도력을 인정하실 수 없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는 결코 인기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여호수아가 살아 있는 동안과, 여호수아가 죽은 뒤에 남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장로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여호와를 섬겼습니다"(2:7). 그러나 여호수아와 그의 동료 장로들이 죽을 무렵에는, 그들을 대신할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그 세대도 다 죽고, 그 후에 여호와와 그가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일을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세대가 일어났습니다"(10절).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수년 동안 많은 기독교 단체를 다녀본 후에, 저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고 엘리야처럼 "나는 주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기독교 지도자를 거의 만나지 못했다고 말해야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 사역에 종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문적인 설교자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공부하고 학위를 받고, 그들을 지원해줄 누군가를 구한 다음, "하나님을 섬기기"위해 나갑니다. 그들의 삶에는, 약간의 희생과 열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열심과 희생과 지식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들의 활동에 대한 통계는 인상적일 수 있지만, 그들의 회심자들의 자질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형편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교회에 거듭난 신자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제자입니까? 영적인 신자와 육신적인 신자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육신적인 신자들의 큰 교회보다, 영적인 신자들의 작은 교회가 더 낫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은 0와트 전구 100개보다 1000와트 전구 몇 개가 더 낫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빛의 강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아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지도자가 하나님을 모르면, 백성도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당신은 성경을 연구하고 교인들에게 가르칠 수 있으며, 그들은 성경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실에서 그들에게 화학을 가르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아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성경 정보를 통해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시련과 시험을 겪어야만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시련 속에서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모임에 앉아있는 것으로써가 아닌, 이것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성경을 알아야 하지만, 성경을 넘어서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리라"(단 11:32). 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겼습니다"(2:11). 그것은 여호수아가 죽었고, 이제 그들을 인도할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2000년 기독교의 역사는, 하나님이 일으켜 세우셔서 교회를 시작하거나 부흥 운동을 일으킨 수많은 사람들의 예들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일단 그들이 죽자, 그들의 교회(또는 운동)는 그들 이전의 교회와 운동처럼 쇠퇴했습니다. 새로운 세대는 그들의 창시자와 동일한 교리와 동일한 성화 이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창시자처럼 거룩하지 않습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창시자가 가졌던 동일한 "성령 세례"를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과 사역에는 동일한 기름부음이 없습니다. 무언가가 빠졌습니다. 창시자는 하나님을 알았지만, 추종자들은 창시자만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일으키시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다른 땅, 다른 세대에서 일으키신 개인들을 통해 교회에서 그의 가장 큰 일을 하셨습니다. 그런 사람을 중심으로 하나님은 숫자보다는 질, 즉 자기 세대에 하나님을 위한 순수한 증거를 하고자 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모으십니다. 나는 인도에 그러한 남녀들이 많이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사사기에서, 하나님은 남자를 찾지 못하셨을 때 한 여자, 즉 드보라를 찾으셨습니다. 그것은 모든 자매들에게 격려가 됩니다. 하나님은 완전히 굴복한 사람을 찾으실 때마다, 그분은 그가 굴복한 정도까지 그를 사용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모든 리더가 같은 자질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굴복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사기에는 하나님께서 일으켜 세우신 몇몇 지도자들이 설명되어 있지만, 모세나 여호수아와 같은 자질을 갖춘 지도자는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기드온은 처음 시작할 때 기름부음을 받은 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이 끝날 무렵 그는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사기가 우리 시대에 매우 적절한 메시지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 수정

이스라엘은 가나안 사람들을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2:1,2), "내가 너희를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어 내가 너희와 언약을 맺은 땅으로 인도하였다.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그 땅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고, 그들의 제단을 헐라'하였다. 그러나 너희는 나에게 순종하지 않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 자신의 생각을 따랐습니다 - 오늘날 많은 기독교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모든 권고를 설교하지 않고, 그들이 사는 회중과 시대와 문화에 맞게 하나님의 말씀을 수정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또한 하나님의 명령을 수정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가 네 원수를 쫓아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죄를 이기지 못할 것이며, 평생 동안 너의 문제와 함께 살 것이다. "이 백성(가나안 사람들)이 네 옆구리에 가시 같을 것이요, 그들의 신들이 네게 올무가 되리라"(2:3). 이스라엘 자손이 이 말을 듣고, 울며 제사를 드렸으나, 그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같은 메시지를 듣고 감동하여 울고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지도자들이 그들을 잘못된 방향으로 인도하기 때문에, 그들은 곧 옛 방식으로 되돌아갑니다. "나는 하나님을 알고 싶고, 지도자가 설교한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기준으로 살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모세와 여호수아처럼 자신이 속한 지역의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온전한 진리로 인도할 수 있는 설교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면, 여기 있는 이스라엘 백성처럼 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아는 하나님의 남자/여자가 되십시오.

타락의 일곱 주기와13명의 사사

사사기 3장부터 16장까지, 하나님께서 세우신 13명의 사사가 나옵니다. 열네 번째 사사는 사무엘상에 나오는 사무엘입니다. 이 대부분의 사사들의 이름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첫 번째 사사는 갈렙의 사위이자 조카인 옷니엘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3:9). 여기에서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시매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니라"(3:10)고 말합니다. 그것은 사사기에 자주 등장했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과 삼손에게 임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도록 준비시켰습니다(6:34; 14:6). 그들이 이스라엘을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기름부음뿐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 기름부음만이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고 이끄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거듭날 수 있으며, 그것은 확실히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주님의 영이 우리에게 임하셔서, 주님을 섬기도록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예배)모임에서 얻은 감정적 경험에 만족하지 마십시오. 방언을 말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방언을 말하면서도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 없이는 결코 만족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성령의 능력 없이 결코, 절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30년 동안 온전한 삶을 사신 예수님, 즉 성령으로 나시고 30년 동안 성령님께 순종하며 사셨던 예수님도 아버지를 섬기러 나가시기 전에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그분이 요단강에서 기도하실 때, 하나님의 영이 그분에게 임했습니다. 그분의 본을 따르십시오. 아무리 많은 지식이나 타고난 재능도 결코 이 기름 부음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기름부음 아래 끊임없이 살아야 합니다. 삼손의 예는 한 때 기름부음을 받았다가 나중에 그 기름부음을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비극적으로 일깨워 줍니다.

옷니엘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40년 동안에는 평화가 있었습니다(3:11). 그러나 그러고 나서 옷니엘이 죽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악을 행하자, 여호와께서 모압 왕에게 18년 동안 그들을 종노릇하게 하셨습니다(3:14).

사사기에서 이러한 일곱 번의 주기가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타락과 형벌,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사사를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평생 이런 순환 속에서 살아갑니다 - 타락하고, 회개하고, 건짐 받고, 다시 타락하고…… . 그들은 끝없는 원을 그리며 계속 돌고 있습니다. 그들은 집회에 가서 감동을 받고 헌신합니다. 부흥회가 끝나면, 곧 그들의 타락이 시작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또 다른 기름부음 받은 설교자가 와서 집회를 열면 사람들은 다시 자극 받습니다.

우리가 이 끝없는 순환 속에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분명히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는 항상 성령님을 모실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성령은 한 지도자에게만 임했고, 모든 사람은 그 지도자에게 의존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는 모두 성령을 받을 수 있으며, 우리를 자극하는 어떤 설교자에게도 의존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불이 항상 타오르게 할 수 있습니다.

18년 동안 모압을 섬긴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15절).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또 다른 구원자 에훗을 세우셨습니다. 그는 두 번째 사사였습니다. 나는 그들이 노예 상태에서 구원해 달라고 외치기 전에 왜 18년을 기다렸는지 궁금했습니다. 왜 그들은 노예가 된 지 한 달 안에 부르짖지 않았습니까? 왜 오늘날 사람은 죄에 대한 승리를 추구하기 전에, 18년(또는 경우에 따라 40년) 동안 죄에 패배한 채 살고 있습니까? 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에훗이 모압을 정복하고 그 땅은 80년 동안 평온했습니다(30절). 그러나 그들은 다시 타락했고, 하나님은 삼갈을 일으켜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600명을 죽였습니다. 그것은 확실히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통해서였습니다. 나중에 삼손이 그랬던 것처럼요.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여호와께서 그들을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파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진멸해야 했던 가나안 족속이, 이제 왕을 세워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신자들은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죄가 그들을 지배합니다.

야빈은 900대의 철병거를 소유하고 20년 동안 이스라엘을 억압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여호와께 부르짖었고 여호와께서는 드보라를 그들을 위한 사사로 세우셨습니다(4:3,4).

여성 지도자

하나님께서는 여성을 그분의 백성의 지도자가 되도록 임명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첫 번째 선택은 항상 남자입니다 - 디모데전서 2:12-14에,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아담이 먼저 창조되었고, 하와는 아담을 돕는 배필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와가 먼저 속아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거기에서 바울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여자가 교회 안에서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라." 여성은 주일 학교 반에서 아이들을 인도하고 가르칠 수 있고, 여성반에서는 여성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녀는 또한 집에서 자녀들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교회에서 장로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온전한 뜻입니다.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이 여자들에게 인도될 때, 참으로 형편없는 상태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사 3:12).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혹은 교회)의 모든 남자들이 게으르고, 부진하고, 비겁한 것을 발견하실 때 어떻게 하셨을까요! 그때 하나님은 "드보라"를 일으키십니다. 그리고 수년 동안 그분은 기독교계에서 그분의 종이 되도록 많은 "드보라"를 일으키셨습니다 - 그리고 저는 그들 모두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영혼을 구원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여성을 선교사와 작가로 강력하게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남자를 찾을 수 없을 때, 어떤 사역에서든 여자를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드보라에게서 배우는 것입니다.

새 언약 시대의 약속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내 영을 너희 아들과 딸들과 나의 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 남녀 모두 - 그들은 (둘 다) 예언하리라"(행 2:17,18). 빌립에게는 결혼하지 않은 4명의 딸이 있었습니다 -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약속을 활용하여 예언했습니다(행 21:9).

여성은 장로나 가르치도록 부름을 받지 않았더라도, 예언("세워주고 격려하고 위로하는" - 고전 14:3)하고 교회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으며, 고린도전서 11:5은 이에 대해 매우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드보라는 여선지자였습니다(4:4). 새 언약 아래에는 여선지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옛 언약 아래는 있었습니다. 드보라는 랍비돗의 아내였습니다. 그는 아내가 사사가 되는 것을 막지 않았습니다. 그는 온유하고 조용한 영으로 그녀 옆에 앉아 그녀의 사역을 격려했습니다! 아마도 그는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것을 도왔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랍비돗 형제를 사용하실 수 없으셨지만, 그의 아내는 사용하실 수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한 부부에 대해 읽습니다 -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브리스길라는 남편 아굴라보다 하나님과 성경을 더 잘 아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에서 그들이 다섯 번 함께 언급된 가운데, 네 번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로 언급되었고,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행 18:18,26; 롬 16:3; 딤후 4:19)! 그곳의 순서는 의미가 있습니다. 남편보다 하나님과 성경을 더 잘 아는 아내가 많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브리스길라는, 남편 아굴라에게 복종할 줄 아는 훌륭한 자매였습니다. 한번은 그녀가 회당에서 아볼로의 말을 듣고 그가 진리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깨닫고, 그를 집으로 청하여 남편과 함께 앉아 하나님의 도를 아볼로에게 설명하여 아볼로의 사역에 근본적 변화를 일으켰습니다(행 18:24-28). 그녀는 회당에서 일어나 그를 바로잡지 않았습니다. 아니요. 그녀는 그를 집에 불렀습니다. 그것은 여성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알면서도, 자신의 삶에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아 남성까지도 축복한 자매의 아름다운 예입니다. 아볼로는 마침내 사도 바울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먼저 바른 길로 인도한 사람은 한 여인 브리스길라였습니다!

드보라가 종려나무 아래 앉아있으면, 이스라엘 자손들은 재판을 받기 위해 그녀에게 나아왔습니다(4:5). 아마도 그녀의 남편 랍비돗은 그녀가 이스라엘을 재판하는 동안, 집에서 음식을 요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이 너무 나약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셔야만 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녀는 전쟁에서 이스라엘을 이끌 이스라엘에서 가장 용감한 사람인 바락을 불렀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여성으로서 전투에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브리스길라에게 아굴라가 필요했던 것처럼, 그녀에게도 남자가 필요했습니다.

드보라는 바락에게, "너는 10,000명을 데리고 가서 시스라와 싸우라. 여호와께서 그를 네 손에 넘겨주시리라"(4:6,7)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아주 분명하고 구체적인 예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 가장 용감한 사람은 뭐라고 대답합니까? 바락이 말했습니다, "자매여, 당신이 나와 함께 간다면 내가 가겠습니다. 나와 함께 해주세요"(4:8). 그는 그녀 없이 가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드보라는 바락과 함께 가기로 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용감한 사람이 얼마나 나약했습니까! 그리고 그는 다른 모든 사람들의 전형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락이 너무 나약했기 때문에, 드보라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스라를 죽이는 영예는 당신에게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여자에게 갈 것입니다." 결국, 시스라를 죽인 사람은 야엘이라는 여자였습니다(4:22).

여기에는 모든 남자를 위한 교훈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인도할 남자를 찾지 못하셨을 때 실망하십니다. 그러나 남자들이 하나님을 실망시킨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이 방해 받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분은 대신 여자를 사용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일을 하기 위해, 수 세기에 걸쳐, 전 세계에서 많은 여성들을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일을 이루기 위해 남자에게만 국한되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이 시스라에서 해방된 후, 드보라와 바락은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것은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라고 불립니다(5장). 5장 16절에서, 우리는 전쟁터에 싸우러 온 여러 지파에 대해 읽습니다. 그리고 나서 5:23에서, 우리는 "메로스를 저주하여라"라고 읽습니다. 왜 메로스가 저주를 받아야 합니까?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죄를 짓지 않았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적이 올 때 그들은 주님을 도우러 오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당신은 죄를 짓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전쟁에 나가서 주님을 위해 싸우지 않는다면, 당신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주님의 전쟁을 하고 있을 때, 가만히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그것은 저지름(commission)의 죄가 아닙니다. 태만(omission)의 죄입니다.

죄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 저지름의 죄와 태만의 죄입니다. 저지름의 죄는 우리가 뭔가 잘못한 죄입니다. 태만의 죄는 우리가 무언가를 했어야 할 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죄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죄는 메로스의 죄였습니다. 메로스는, 주님을 위해 싸울 용사들이 필요했을 때,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군사를 돕지 않고, 스스로 나가서 싸우지 않으면, 죄를 짓는 것입니다.

기드온과 그의 군대

그 후 그들은 40년 동안 평화를 누렸습니다(5:31). 그러나 새로운 세대는 그들의 조상처럼 죄를 지었습니다 - 그리고 이번에는 여호와께서 미디안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7년 동안 종살이하게 두셨습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은 기드온을 구원자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입혔다"라고 말합니다(6:34 - 여백). 성령이 기드온이 입었던 옷과 같이 임했습니다. 그러자 기드온이 힘을 얻어, 나팔을 불고 전쟁터로 나갔습니다. 32,000명이 그와 함께 싸우러 나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백성이 너무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7:2). 그들이 온 마음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 모두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마귀를 두려워하느냐? 그렇다면 집에 가라. 누군가가 너를 '바알세불', '이단자', '거짓 선지자'라고 부를까 두렵느냐? 그렇다면 집에 가라. 주를 섬기는 데 네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그날 22,000명의 남자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10,000명이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7:3). 하나님은 아직 백성이 너무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 역시 전심이 아니었습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자신의 것을 찾고 있었고 제거되어야 했습니다. "그들을 물가로 인도하라, 내가 거기서 그들을 시험하리라"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4절). 물가에 이르자, 그들 중 대부분이 적군을 잊어버리고 물에 머리를 파묻고 물을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와 같습니다.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만 보면, 그들은 주님과 그분의 전쟁은 다 잊고 재물의 탐욕스러운 추구에 머리를 파묻고 있습니다. 그날 기드온의 군사 9,700명이 실격 당했습니다.

300명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물가에 왔을 때, 적군을 살피며 경계를 늦추지 않고, 당장의 갈증을 해소할 수 있을 만큼의 물만 손으로 모았습니다. 이들은 돈과 물질을 사용하면서도, 그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신자들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직장에서 충실하게 일하지만, 나머지 시간은 주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보냅니다. 하나님은 "이들이 내가 원하는 사람들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날 그 군대에는 원래 32,000명의 1%도 안 되는 300명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생명의 길이 좁고 그것을 찾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 비율은 항상 작습니다. 60만 명 중 여호수아와 갈렙 두 명만이 약속의 땅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 소수를 기뻐하십니다.

7:16에서, 우리는 기드온이 그의 군대를 각각 100명씩 세 부대로 나눈 것을 봅니다. 각 사람은 나팔과 불이 들어 있는 항아리를 들고 다녔습니다. 그들은 빛이 보이도록 항아리를 깨뜨린 다음, 나팔을 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과 사역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그림입니다. 우리는 모두 질그릇이지만, "우리 질그릇 안에 하나님의 영광의 보물을 가졌습니다"(고후 4:6,7). 그러나 이 질그릇은 다른 사람들이 빛을 볼 수 있기 전에, 많은 시련, 즉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 깨어져야 합니다(고후 4:7-11). 그렇지 않으면 그 빛은 우리 안에 영원히 감춰질 것입니다. 바울이 이 글을 쓸 때, 기드온의 군대가 내부에 불이 들어있는 항아리를 들고 있었는데, 그 그릇이 깨져야만 불빛이 보였던 것을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이 비취도록, 많은 상황을 통해 우리를 깨뜨리기를 원하십니다. 나팔을 부는 것은 주님의 영광과 말씀을 담대히 선포하는 모습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그런 남녀를 찾고 계십니다.

일찍이, 기드온이 이 전쟁에 나가기 전에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조금 더 용기를 내고 싶다면, 밤에 적진으로 내려가 그들의 말을 들어보아라"(7:10,11). 그리고 기드온이 거기로 내려갔을 때, 그는, 그들이 모두, 그와 그의 무리를 두려워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오늘 당신이 마귀의 진영에 들어가서 귀를 기울이면, 예수님과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을 그들이 두려워한다는 것 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탄과 싸우러 나가도록 격려해 줄 것입니다.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를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진정한 제자라면 그는 우리도 정말로 두려워합니다. 그러니 그가 우리를 겁주려고 할 때마다, 그의 허풍이라고 부르도록 합시다.

그러나 기드온 조차도 주님에 대한 신실함으로 인내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옛 언약 하에서나 오늘날에도 잘 시작한 많은 사람들의 슬픈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드온이 자기들을 다스리기를 원했고, 그가 말했습니다, "아니다, 나는 다스리지 않을 것이다. 내 아들도 다스리지 않을 것이다. 주님께서 다스릴 것이다"(8:22,23). 정말 영적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문장에서 그가 한 말을 들어 보십시오. 그는 "여러분 모두, 나에게 귀고리 하나씩을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8:24).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 백성이 귀고리를 그에게 주었고, 기드온은 금 1700세겔(약 20킬로그램)과 많은 장식품과 값비싼 옷을 모았습니다(8:26). 기드온은 하루 만에 억만장자가 되었습니다 - 많은 설교자들이 양떼에게서 십일조와 헌금을 모아 집으로 가져가서 백만장자가 된 것처럼 말입니다! 기드온은 또한 그 금의 일부를 사용하여 이스라엘이 숭배하는 우상이 된 에봇을 만들었습니다(8:27).

이렇게 하여, 이 위대한 사람은 타락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인생을 끝내는 방식이지 시작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모든 경주의 상은 출발을 잘한 자가 아니라, 잘 마친 자의 것입니다(고전 9:24). 우리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들의 삶을 마감했는지 생각하라"(히 13:7 - 여백)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초기에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은 많은 설교자들이 기드온처럼 타락하여, 돈과 재산을 좇다가 생을 마감했습니다! 기름 부음을 잃은 그들은, 그들의 마지막 날을, 자녀들을 위해 금과 귀걸이를 모으는데 보냅니다! 잘 시작한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겠습니다:

당신에게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기드온과 다른 사람들에게서 교훈을 얻으십시오.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섬길 수는 없습니다. 삶의 마지막에 "내가 누구의 소를 빼앗았거나, 누구의 나귀를 빼앗았습니까? 내가 누구를 억압했습니까?"라고 말할 수 있었던 사무엘과 같은 사람들에게서 우리는 참으로 복된 대조를 봅니다(삼상 12:3). 그처럼, 바울도 인생의 마지막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누구의 은이나 금이나 옷을 탐내지 아니하였고... 우리는 누구의 양식도 거저 먹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아무도 이용하지 않았습니다"(행 20:33; 살후 3:8; 고후 7:2). 설교자에게 얼마나 훌륭한 간증입니까! 사무엘과 바울과 같은 사람들의 예를 따르십시오.

그 후, 사사기에서, 우리는 다른 지도자들에 대해 읽습니다 - 아비멜렉, 돌라, 야일, 입다, 입산, 엘론, 압돈.

입다는 자신이 하나님께 서원하였기 때문에, 약속을 지켜 그의 딸을 하나님께 드렸으므로 그녀가 평생 시집 가지 않았습니다(11:35).

삼손과 그의 실패

그런 다음 13번째 사사인 삼손이 등장합니다. 13장에서, 우리는 자녀가 없는 마노아의 가족에 대해 읽습니다. 어느 날 여호와의 천사가 마노아의 아내에게 나타나 그녀가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를 나실인으로 양육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삼손이 태어났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하기 시작하였습니다(13:25). 그는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 그것이 그의 능력의 비밀이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삼손은 아주 이른 나이에 타락했습니다. 그는 예쁜 여자를 볼 때마다, 자신의 정욕을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섬기려는 그의 소명을 모두 잊고 그 여자를 뒤쫓아 갔을 것입니다 - 그 여자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지 간에, 그 여자가 예쁜 한 그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평생 동안 그의 약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틀림없이 그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늘날의 많은 설교자들처럼 예쁜 여자들에게 큰 약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삼손의 행동은 요셉의 행동과 큰 대조를 이룹니다. 요셉은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 살았고 하나님의 길에 대한 계시는 삼손보다 훨씬 적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반복해서 하나님께 충실했으며 - 따라서 수천 년 동안 젊은이들에게 뛰어난 본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삼손은 수천 년 동안 모든 사람에게, 마찬가지로 두드러진 경고가 되었습니다!

14장 6,7절에서 우리는, "삼손이 딤나에 내려가매, 어린 사자가 그를 향하여 으르렁거렸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크게 임하시니, 삼손이 사자를 잡아 찢었다"라고 읽습니다. 그는 우리가 종이를 찢듯이, 그 사자를 산산조각 냈습니다. 그리고 그는 너무 겸손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 심지어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삼손은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 성령의 능력임을 알았습니다.

14장 10절에서 우리는, 그의 아버지가, 삼손이 좋아하는 블레셋 여자를 만나러 내려가서 삼손을 그녀와 결혼시켰다는 것을 읽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이 결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사람과 결혼해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명시한 하나님의 율법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입니다. 삼손의 인생은 오르락내리락하는 삶이었습니다 - 가끔씩은 위로, 그러나 대부분은 아래로였습니다. 16장 1절에서, 그가 가사에 내려가서 거기서 한 창녀를 보고 좋아하여 그녀와 간음하였다는 것을 읽습니다. 그가 잡혔을 때, 그는 성문을 빼내고 그것과 함께 걸어갔습니다! 후에, 그는 들릴라라는 또 다른 블레셋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졌습니다(16:4). 하나님은 그의 양심에 여러 번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듣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마도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그러하듯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신다 는 사실에 기뻐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날에 주님께 와서, 다양한 사역에서 그들을 어떻게 사용하셨는지 주님께 상기시켜 드릴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 모두를 지옥에 던지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적인 삶에서 죄 가운데 살았기 때문입니다(마 7:22,23). 우리가 양심에 대한 하나님의 부드러운 경고를 계속 거부한다면, 우리도 그 설교자들처럼 스스로를 파멸시킬 수 있습니다.

삼손은 마침내 들릴라의 무릎에 그의 머리를 얹고, 자신의 힘의 비결을 그녀에게 털어놓았습니다. 그녀는 즉시 그의 머리카락을 잘랐고 그것이 그의 사역의 끝이었습니다. 얼마나 비극적인가요! 그토록 강력한 구원자였던 한 남자가, 자신의 욕망과 정욕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 27절에서, "내가 내 몸을 복종시키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설교를 하면서도 나 자신은 실격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리빙 바이블은 이 구절을, "내 몸이 원하는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을 하게 하는 것"이라고 의역합니다. 이것은 우리 몸이 먹고 싶은 것이 아니라 먹어야 할 것을 먹게 해야 하고, 자고 싶은 만큼 자는 것이 아니라 자야 할 만큼 자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눈이 보고 싶은 것만 보지 않고 보아야 할 것만 보도록 눈을 조절해야 합니다. 우리는 혀가 말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말해야 할 말을 하도록 혀를 통제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놀라운 메시지를 전할 수 있지만 마지막 날에 주님에 의해 쫓겨날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의 정욕을 훈련하는 데 많은 것이 달려 있습니다. 그것이 많은 사람들을 축복하는 놀라운 사역을 했던 삼손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얻는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마침내 그는 실격되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위대한 설교자들이 예쁜 여자들의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행사하는 은사나 조직의 방대함에 감동받지 마십시오!! 우리가 레위기에서 본 것처럼 지도자가 죄에 빠지는 것은 일반 신자가 같은 죄에 빠지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일입니다. 더 많이 받은 자에게는, 더 많이 요구하십니다.

당신이 이성과의 관계에 충실하지 못하다면, 장로나 지도자가 되려고 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죄 가운데 살면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 것처럼 사람들을 속이지 마십시오. 당신이 계속 그렇게 살면,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공개적으로 드러내실 것입니다. 당신은 자신의 죄를 숨길 만큼 영리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하나님에 대해 충분히 영리하지 않습니다. 그는 당신이 지금까지 노출된 것보다 더 많이 당신을 폭로할 것입니다.

16장에서, 우리는 삼손이 어떻게 힘을 잃고 눈이 멀게 되었는지 읽습니다. 설교자가 여성을 쫓을 때 이런 일이 발생합니다: 그들은 영적 시력을 잃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명확하게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교리에 있어서 여전히 복음주의적이며 유창하게 설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영적 시력은 사라졌을 것입니다.

삼손은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그는 인생이 끝날 무렵 자신의 죄를 인정할 만큼 분별력이 있었습니다. 그는 회개했고, 마침내 그의 죽음으로 많은 블레셋 사람들을 멸망시켰습니다(삿 16:23~31).

삼손의 이야기는 두 마리의 사자 이야기입니다 - 하나는 외부에 하나는 그의 마음 안에 있습니다. 그는 외부의 사자를 이길 수 있었지만, 내면의 사자는 이길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성욕의 사자가 어떤 외적인 사자보다 훨씬 더 강하고 두려운 것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숲에서 사자가 당신을 향해 달려오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신은 돌아 서서 달릴 것입니다. 당신은 정욕의 사자가 당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볼 때도 그렇게 합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부도덕을 피하라"(고전 6:18)라고 권고합니다. 그것이 그것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 그러한 유혹에 가까이 가지 마십시오. 당신을 유혹하는 여자 근처에 가지 마십시오. 굶주린 사자를 피하듯이 음탕한 여자를 피하십시오.

삼손은 옛 언약 아래서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누구도 삼손의 예를 부도덕에 빠진 핑계로 삼을 수 없습니다. 삼손에게는 신약성경이 없었고, 그는 갈보리 십자가 이전에 살았고,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는 것처럼 본보기가 없었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우리처럼 성령을 내주하시는 도우미로 받을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와 교제하는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그 당시에는 아직 열리지 않았습니다. 삼손도 경건한 교제의 축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 가운데 살 핑계가 없습니다.

그들의 눈에 옳은 것은 무엇이든

17장부터 21장까지는,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 숭배와 부도덕, 전쟁에 관한 이야기로,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그분의 대표자로 선택하신 나라의 타락한 상태를 드러냅니다. 소돔과 고모라만큼이나 가라앉았습니다.

17장 7-13절에서, 최고의 봉급과 최고의 혜택을 받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기꺼이 가고자 하는, 유급 직업 설교자의 성경에서의 첫 번째 사례를 봅니다. 여기에 가장 높은 입찰자에게 제사장으로 섬기기로 동의한 레위인이 있었습니다. 한 사업가가 와서 그에게 좋은 봉급과 매년 새 옷, 무료 숙식을 제안했습니다. 설교자는 즉시 계약에 서명했습니다! 그에게 돈을 준 사업가는 그가 레위인 학교를 졸업한 설교자를 고용했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께서 그에게 축복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일과 얼마나 흡사한지요. 21세기에나 있을 법한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 한심한 상황에 대한 이유는 이 사건에 대한 설명 바로 앞의 구절에 나와 있습니다. "각 사람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17:6).

그리고 그 구절은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요약합니다. 그래서 이 진술은, 매우 적절하게, 책의 마지막 구절에서 반복됩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더라.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21:25).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삶에서 왕이 아니므로 그들은 마음대로 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돈을 쓰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삽니다. 설교자들은 가장 많은 급여를 받을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갑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뜻이나 그들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완전한 계획에 대한 관련 없이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 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우리의 주님과 왕으로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사사기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처럼 될 수 있습니다.


장 8
룻기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

룻기는 모압 여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룻은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모압은 롯이 자신의 딸과 간음을 범함으로써 태어난 아들들 중 하나였습니다. 이 근친상간 관계에서 모압이라는 종족이 나왔습니다. 이 모압 사람들 중에는 룻이라는 어린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매우 나쁜 유산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다윗 왕의 증조모가 되었고,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계에 속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음행과 근친상간 관계에서 태어난 자녀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봅니다.

여러분 중 일부는, 나쁜 가족 유산을 가지고 있거나, 과거에 자신이 매우 사악한 삶을 살았을 수 있습니다. 당신이 태어났을 때 당신의 어머니가 결혼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매춘부였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근친상간 관계에서 태어났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당신을 거부하고 경멸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은 여전히 성도(saint)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룻기에서 우리가 받는 격려입니다. 하나님은 그녀가 어느 특정한 혈통을 가졌다고 해서 그녀를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모압 사람은 주님의 집회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며, 그들의 후손은 10대에 이르기까지 단 한 명도 주님의 집회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신 23:3). 그러나 하나님은 룻에게 그 법을 우회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녀의 마음을 보시고 그녀가 진심으로 그분을 찾는 것을 보셨습니다 - 그래서 하나님은 그녀를 받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진실한 마음을 보실 때 그분의 공식적인 법을 우회할 수 있는 모든 권리를 갖고 계시며 - 실제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룻의 증손자인,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압 여인의 4대째인 솔로몬은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는 것을 거절당하기는커녕, 실제로 그 성전을 지었습니다!

룻이 내린 선택

룻의 결혼 이야기는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에 기근이 들어 엘리멜렉과 그의 아내 나오미가 두 아들과 함께 모압 땅으로 갔습니다. 이 아들들은 자라서 모압 여인들과 결혼하여, 하나님의 법을 어겼습니다. 그리고 나서 엘리멜렉은 죽고, 두 아들도 죽었습니다. 인정있는 여인, 나오미는 두 며느리인 룻과 오르바에게 고국으로 돌아가 새 남편을 찾으라고 말했습니다(1:8).

룻과 오르바는 이 말을 듣고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1:9,14). 그런 다음 오르바는 시어머니에게 입을 맞추며 "어머님, 안녕히 계세요. 저는 집에 돌아가서 다른 남편을 찾아야 합니다. 나는 내 자신의 삶을 돌봐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룻은 나오미에게 매달렸습니다. 그녀는 나오미에게서 참 하나님에 대해 배웠고, 남편을 원하는 것보다 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오르바는, 남편을 원했습니다. 거기에는 갈림길이 있었고, 오르바는 잘못된 길을 택했습니다. 룻은 옳은 길을 택했습니다, 그 선택은 영원히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우리는 오르바라는 이름을 결코 다시 듣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오늘 어디에 있든, 그녀는 의심할 여지 없이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많은 시간 갈림길에 섭니다. 당신은 당신 앞에 두 가지 방법을 보여주는 메시지를 들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중 일부는 지금 그 선택에 직면해 있을 수 있습니다. 갈림길은 결정을 내려야 하기 때문에, 중요한 장소입니다. 룻은 나오미에게, "제발 돌아가라고 하지 마세요. 나는 어머니와 함께 갈 것입니다. 나는 당신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당신의 백성은 내 백성이 되고, 당신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16절). 그녀는 그날 확고한 결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하나님 앞에서, 그녀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나오미는 룻이 결심한 것을 보고 그녀와 함께 이스라엘로 돌아가는 데 동의했습니다(1:18). 그리하여 그들은 엘리멜렉의 고향인 베들레헴에 이르렀습니다. 그러자 나오미가 말했습니다, "내가 풍족하게 나갔으나, 여호와께서 빈손으로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나오미가 자기 앞에 놓인 일을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때때로 우리는 나오미처럼 여호와께서 우리를 빈손으로 돌아오게 하셨다거나, 여호와께서 우리를 대적하신다거나, 전능하신 여호와께서 우리를 괴롭게 하셨다고 불평합니다!(21절). 나오미가 하나님에 대해 그렇게 불평한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러나 시어머니는 어리석었을지라도, 룻 자신은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참 하나님을 발견한 것에 대해 감사했습니다. 그녀는 아주 좋은 며느리였으며 시어머니를 돌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그것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이방인(이교도) 소녀가 불평하지 않고 겸손한 섬김의 영을 가진 것을 보셨습니다. 많은 경우에, 이교에서 그리스도께로 나오는 사람들은, 신자의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들보다 훨씬 더 나은 신자입니다. 이교도 배경에서 온, 이 소녀 룻은 우리 모두에게 도전입니다. 그녀는 시어머니에 대한 세속적인 며느리들의 일반적인 태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녀는 시어머니를 사랑했고 그녀를 아주 잘 돌보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상을 주신 이유입니다.

보아스의 밭

나오미에게는 가까운 친척 곧 보아스라는 큰 부자가 있었습니다(2:1). 이스라엘에는 결혼한 남자가 죽으면, 그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 그의 아내와 결혼하여 죽은 남자의 이름으로 자녀를 양육해야 한다는 법이 있었습니다(신 25:5-9). 그래서 나오미는 생각했습니다, "글쎄, 보아스는 나의 가까운 친척인데 아직 미혼이다. 아마도 그는 룻과 결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룻은 (모압 여인이기 때문에) 그 법을 알지 못하였고, 나오미는 룻의 희망이 커지지 않도록 그녀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룻은 재혼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을 찾으러 이스라엘에 온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참 하나님을 찾으러 왔습니다. 남편을 찾아 모압으로 간 사람은 오르바였습니다. 그러나 룻은 하나님을 먼저 찾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았을 뿐만 아니라 좋은 남편과 미래를 위한 좋은 유산도 찾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존중하는 자를 존중하십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지상 생활에 필요한 다른 모든 것을 그들이 구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더하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 것들은 그들의 무릎에 떨어집니다.

나오미와 룻은 가난했습니다; 그러나 룻은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하여 비천한 일을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근면한 소녀였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어느 날 시어머니에게 가서 부자들의 곡식 밭에서 남은 곡식을 줍겠다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곡식을 거두어들일 때, 밭의 모퉁이는 남겨두고, 남은 곡식을 줍기 위해 밭을 두 번 다시 돌아보지 말라는 하나님의 법이 있었습니다 - 그런 곡식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남겨 두어야 합니다(레 19:9,10). 룻은 그렇게 남은 곡식을 주우러 갔습니다. 가난한 소녀였기에, 그녀는 자신과 시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그녀를 놀랍게도 보아스의 밭으로 인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계획하신 이 두 사람을, 남편과 아내로 연합시키시려고 그분의 주권으로 어떻게 하셨는지 보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보아스는 그곳에서 이삭을 줍는 이 여인을 보고 일꾼들에게 그녀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그녀가 나오미와 함께 돌아온 모압 여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보아스는 매우 친절하고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룻이 남자들에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다른 밭에 가서 이삭 줍는 것은 위험하니,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는 종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그녀를 해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룻은 이 말에 감동을 받아 얼굴을 땅에 대고 멸시받는 모압 여인에게 왜 이렇게 친절하게 대하시는지 물었습니다. 보아스는, 그녀가 시어머니에게 베푼 모든 친절과, 그녀가 옛 모압 우상을 버리고 어떻게 주님을 따르기로 선택했는지 들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 다음 보아스는 일꾼들에게 일부러 곡식 한 움큼을 떨어뜨려 룻이 주울 수 있도록 하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룻을 택하신 이유

하나님께서는 왜 그런 소녀를 보아스의 아내로, 다윗의 조상으로, 우리 주님의 족보에 있는 여자로 선택하셨을까요? 우선, 룻은 자신을 너무 높게 생각하지 않는 매우 겸손한 소녀였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또한 근면하고 공손하며, 주님을 따르기 위해 가정과 친척을 버리고 시어머니를 공경과 친절과 사랑으로 대하는 확고한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오늘날에도 어린 소녀들에게서 찾으시는 자질입니다.

룻이 집에 왔을 때, 시어머니는 그녀에게 어디서 주웠는지 물었고, 그녀는 시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나오미는 룻에게, 자기가 그녀를 위해 안식할 곳을 찾아보아야 하겠다고 말하고, 보아스가 가까운 친척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가까운 친척이 과부의 재산을 되찾고 그녀와 결혼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법에 대해, 룻에게 설명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보아스가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는 그에게 그가 가까운 친척이므로, 그녀를 구하고 그녀와 결혼할 것을 요청했습니다(3:9). 보아스는 룻이 거기 있는 더 잘생기고 젊은 남자들을 택하지 않은 것을 보고 기뻤습니다. 보아스는 훨씬 나이 많은 남자였고, 어린 소녀들은 대개 나이 든 남자에게 매력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녀에게 자신보다 더 가까운 다른 친척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의로운 사람인 보아스는, 그(다른 친척)가 그녀를 속량하고 결혼할 것인지 먼저 그 사람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3:12,13).

친족 구속자

이튿날, 보아스는 즉시 성문으로 가서 이 다른 친척에게 그녀의 가장 가까운 친척인 나오미의 재산을 살 것이냐고 물었습니다(4:3,4). 그는 즉시 "네, 제가 그것을 사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또한 룻과 결혼하여 그녀의 죽은 남편의 이름으로 아들들을 양육해야 할 것임을 그에게 상기시켰습니다. 그가 이 말을 들었을 때, 그는 그의 제안을 철회하고, 그녀의 아들들이 나중에 그의 아들들과 함께 상속권을 주장할 것이고, 그런 복잡함을 원치 않기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재산 사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리하여 보아스는 재산을 사고 룻과 결혼할 첫 번째 서열이 되었습니다. 그는 흔쾌히 그렇게 하기로 동의했습니다.

보아스와 같은 저명한 남자가 모압 소녀와 결혼하는 것은 대담한 조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룻에게서 몇 가지 뛰어난 특성을 보았고 그녀가 이교도 가정으로부터 나온 것을 존경했습니다. 기독교 소년들은 종종 비기독교 가정에서 구원받은 소녀들과 결혼하는 것을 주저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러한 소녀들은 믿는 가정에서 태어난 소녀들보다 더 강한 기독교인이며 더 경건합니다.

보아스는 룻과 결혼하여 오벳이라는 아들을 낳았고, 오벳은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를 낳았습니다(4:17).

이와 같이 하나님은 근친상간, 이도교 배경에서 온 한 여인을 존귀하게 하셨습니다, 그녀가 하나님을 공경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룻에게서 배우는 것은 사무엘상 2장 30절의 진리입니다, "나를 존중하는 자를 내가 존중하리라." 하나님께는 편애가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을 수도 있는 그분의 자녀들을, 그들을 위한 좋은 결혼 상대를 찾기 위해 어떻게 돌보시는지 보여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땅의 일에서도 주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시며 우리의 모든 지상적 필요를,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충족시키기를 원하십니다.

이 이야기는 또한 그리스도와 우리의 영적 연합에 대한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룻은 죄에 빠진 우리의 모습을 완벽하게 보여주는 예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속하고 우리와 결혼하기 전에, 우리의 "가까운 친척"이 되셔야 했습니다. 이것이 그분이 우리와 같은 살과 피를 취하시고 "모든 점에서 우리와 같이 형제가 되신"(히 2:17) 이유입니다. 그리하여 그분은 우리의 친족-구속주가 되셨습니다. 룻과 보아스의 연합을 계획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창세 전에,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의 연합을 계획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할렐루야!

장 9
사무엘상

마지막 사사와 첫 왕

사무엘은 최초의 예언자였습니다 -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의 위대한 예언자 중 첫 번째. 그는 또한 제사장이자 사사였습니다 -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 그는 삼손과 거의 같은 시대에 살았지만, 이스라엘의 다른 지역에 살았습니다.*

사무엘의 탄생

사무엘의 이야기는 어머니 한나가 임신을 하지 못하면서 시작됩니다. 사라, 리브가, 라헬, 한나와 같이 자녀를 갖기 전에 수년 동안 불임이었던 것으로 성경에 언급된 여성이 얼마나 많은지 보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그들은 모두 기도로 하나님을 찾았고, 그들 각자는 하나님의 목적에서 독특한 위치를 가진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들은 불임의 상태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녀들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요청을 들어주셨고, 그들 각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독특한 목적을 이루신 자녀가 있었습니다. 많은 어머니들은 자녀가 아직 뱃속에 있을 때 자녀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나 이 여인들은 남다른 강도로 기도했습니다. 그런 간절한 기도를 통해 한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참으로 멋진 일입니다. 그렇게 해서 사무엘이 태어났습니다.

한나는 아이를 갖기 위해 여러 해 동안 여호와께 기도했습니다. 마침내, 그녀는 이렇게 서원했습니다,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내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1:11). 이제 그녀의 초점이 바뀌었습니다. 처음에, 그녀는 자신의 필요만을 생각했습니다: "나는 아들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녀가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께서도 필요하시므로, 저에게 아들이 있다면 그를 주님께 바치겠습니다." 우리 기도의 초점이 우리의 필요에서 하나님의 필요로 바뀔 때, 그때부터 우리는 기도에 대한 응답을 받기 시작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영적 필요가 컸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너무나 심하게 타락했습니다. 엘리와 같은 그들의 지도자들도 몹시 타락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모세 이후로 예언자가 없었습니다. 한나는 주변 환경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필요함을 인식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나는 계속해서 기도했습니다, "주님, 제 아들을 당신께 바칠 뿐 아니라, 면도칼도 그의 머리에 대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당신에게 바쳐진, 나실인이 될 것입니다. 당신이 그를 사용하여 이 나라를 당신께로 되돌리실 수 있다면, 그는 당신의 것입니다." 그녀의 모든 기도는 그녀의 필요에서 하나님의 필요로 바뀌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우리 자신에게 너무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응답되지 않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그런 어머니에게서 사무엘이 태어난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한나는 사무엘을 낳았을 때, 그녀의 약속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아들을 성전으로 데리고 와서 말했습니다. "나는 이 소년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주님은 내가 그분에게 구한 청원을 나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나도 그를 주님께 바쳤습니다.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립니다"(1:27,28). 그녀는 그를 다시 데려갈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그 어린 소년에게 그곳에서 무릎을 꿇고 주님을 경배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 경건한 어머니가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 다음 그녀는 주님께 놀라운 감사의 노래를 불렀습니다(2:1-10). 마리아의 감사의 노래(눅 1:46-55)는 한나의 노래에서 영감을 받았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 가사가 너무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은 예언 사역을 통해 사사기에서 보았던 혼돈의 상태에서 다윗 통치 하의 영광스러운 상태로 이스라엘의 모습을 변화시킨 청년으로 성장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대제사장 엘리의 아들들은 무익하고, 경건치 아니하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하는 자들이었습니다(2:12). 지도자의 자녀들이 부도덕하고 불경건할 때 그것은 매우 슬픈 일입니다. 최악의 부분은 엘리가 그들이 성막에서 사역에 참여하도록 허락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제물을 훔치고 성전에 있는 여자들과 간음을 범했습니다. 이 모든 일에 대한 엘리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그는 그들을 불러 즉시 주님의 일에서 떠나라고 말했어야 했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들에게 "내 아들들아 내가 듣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라"(24절)고 말했습니다. 그는 줏대가 없고 쓸모 없는 지도자였습니다.

그 경건하지 않은 자들과는 대조적으로, 사무엘은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받으며 자랐습니다(2:26).

그리고 하나님은 엘리에게 사자를 보내셔서 그의 사역이 끝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존중하기보다 그의 아들들을 더 존중하였기 때문입니다(2:27-29). 그 다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아름다운 말씀을 발견하게 됩니다 - 우리가 평생 동안 기억해야 할 것: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히 여기리라"(삼상 2:30). 당신이 하나님을 존중한다면, 당신은 그분이 당신을 존중하실 것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건치 못한 환경 속에서, 사무엘은 순결하게 성장했습니다. 그것은 경건하지 않은 가정이나 환경에 처해 있는 모든 젊은이들을 위한 본보기입니다. 당신은 타협으로 가득 찬 교회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십시오. 만약 당신이 사무엘처럼, 타락하지 않고 주님을 향한 헌신에 굳건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처럼 당신을 그 상황에서 그분의 목소리가 되도록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어느 날 밤, 사무엘이 잠이 들었을 때,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는 그것이 엘리라고 생각하고 알아보러 갔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목소리는 엘리가 사무엘에게 여호와께 말씀해 달라고 요청하라고 말할 때까지, 사무엘을 계속 불렀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오셔서 서서 다른 때와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라고 부르셨습니다. 사무엘이 말하기를,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고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3:10). 여기에 우리 모두가 하루 종일 주님의 음성에 대해 가져야 할 태도가 있습니다: "주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오늘 밤 자정에 내가 와서 너에게 말할 것이다"라고 경고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니요. 사무엘은 항상 깨어 있어야 했습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갑자기 그의 선지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거듭거듭 봅니다. 그런 다음 두세 달 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 다시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깨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음성을 듣기를 간절히 원하는 자들에게만 말씀하십니다. 적어도 지금부터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습관을 기른다면, 당신의 삶과 사역이 완전히 바뀔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밤중에 당신에게 말씀하실 수도 있고, 당신이 그분의 말씀을 읽는 동안이나 버스를 타고 여행하는 동안 당신에게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는 형제나 자매를 통해 당신에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당신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나 혼자 있을 때 당신에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경청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주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하나님의 예언자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들었을 때,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날 사무엘에게, "내가 엘리의 죄를 심판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침에 엘리가 사무엘을 불러 "여호와께서 너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더냐?"라고 물었습니다. 사무엘은 그에게 모든 것을 말했습니다(3:18). 엘리에게는 나쁜 소식이었지만, 사무엘은 그에게 모든 것을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그러해야 합니다. 엘리가 사무엘에게 매우 친절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무엘은 주저하지 않고 그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아들들이 저주를 자초했는데도, 당신은 그들을 꾸짖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언자로서의 사무엘

3장 19절은 말씀을 섬기는 모든 사람들에게 놀라운 구절이자 큰 도전입니다: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우리가 하는 말 중 한 단어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모든 단어가 사람들의 마음에 와 닿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말씀을 전할 때뿐만 아니라 사적인 대화에서도 이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의 비밀은 여호와께서 사무엘과 함께 계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창세기에서 이것이 요셉의 유능함의 비결임을 보았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사역과 대화에서 모두 그러한 말을 갈망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을 여호와의 예언자로 인정하였습니다(20절).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고 환상이 흔하지 아니한 때"에 일어났습니다(3:1). 이스라엘은 모세 시대 이후로, 300년이 넘도록 예언자가 없었습니다. 사사 시대에는 예언자가 없었습니다. 시편 74:9의 (그 시편의 맥락에서 읽을 때) "예언자가 더 이상 없다"는 말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선지자를 보내지 않으실 때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포기하셨다는 것처럼 보입니다.

3세기가 넘도록,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가지고 나온 예언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마침내 한 젊은이를 일으키셨다는 것을 알았고 - 그들은 그의 말을 들었습니다. 젊은이 여러분 모두 이 말을 듣고 용기를 얻어야 합니다: 사무엘이 예언을 시작한 것은 젊었을 때였습니다. 예레미야, 에스겔, 스가랴도 마찬가지였습니다(렘 1:6, 겔 1:1, 슥 2:4). 주님을 섬기기 위해 40세가 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사무엘은 열 살 때 여호와를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20세가 되었을 때, 그는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비밀은 무엇입니까? 그는 듣고 있었습니다. 그의 태도는 항상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였습니다.

4:3: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다가 패한 때를 읽습니다. 장로들은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주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패하게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언약궤를 이곳에 모셔오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 때문에 패배한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언약궤는 상징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없이도 상징을 가질 수 있습니다 - 오늘날 빵을 떼는 것이 상징인 것처럼 말입니다. 당신은 떡을 떼고 잔을 마시면서도 주님과 교제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언약궤를 그들 가운데로 가져왔습니다. 언약궤가 올 때 그들은 큰 소리로 외쳤고, 발 밑의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습니다(5절). 오늘날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외칠 때만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신다고 상상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언약궤가 오기 전, 블레셋 사람들은 전쟁에서 이스라엘 사람 4000명을 죽였습니다(2절). 언약궤가 도착하고 이스라엘이 "할렐루야, 여호와를 찬송하라" 외치자,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 30,000명을 죽였습니다(10절)!!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상징과 의식을 가져오거나 소리를 지르고 하나님을 찬양함으로써 그분을 어떤 상황에 끌어들일 수는 없습니다. 상징과 소리 지르기 모두 있는 교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죄에 의해 패배했습니다. 그리고 매우 자주, 가장 많이 소리지르는 사람이 가장 많이 패배하기도 합니다 - 바로 위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가장 큰 소리로 외치고 비명을 지르는 교회가 아니라, 죄가 없는 교회에서 발견됩니다. 하나님은 쾌락과 돈과 오락의 신을 섬기지 않는 깨끗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그래야만 그들의 외침과 찬양이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는 소리 지르기, 감정적 동요, 신체적 징후가 있든 없든 승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후자의 것들만 존재하고 사람들이 죄에 의해 패배한다면 - 그러면 분명히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계시지 않습니다. 이 간단한 진리를 이해하면, 이 마지막 날에 많은 속임수로부터 우리를 구할 것입니다.

아버지로서, 사무엘의 실패

7:15~17: 사무엘은 해마다 순회하여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로 가서 그 모든 곳에서 이스라엘을 재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행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에 가족을 위한 시간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그의 아들들은 길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여전히 그들을 이스라엘의 사사로 임명했습니다. 그의 아들들은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며 스스로 돈을 벌기 시작하였습니다(8:1-3). 그것이 사무엘이 일생에 저지른 가장 큰 실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사사직에 부르신 적도 없는 아들들을 사사로 세우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그들의 아들들을 그들의 후계자로 삼는 동일한 실수를 범하고 있습니다. 편애와 아들에 대한 사랑은 우리의 귀를 막아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가족과 관련이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무엘과 같은 그런 경건한 사람도 그 시점에서 귀머거리가 되었습니다. 젊은 시절, 사무엘은 엘리에게 자녀 양육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가 자기 집에서, 자기 자녀를 양육하는 방식에서 실패하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자녀들이 주님을 따르지 않는 것을 보았을 때,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사사로 삼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는 예언자요 사사요 분별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아들들에 관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호와께 "주님, 당신 백성의 다음 사사로 누구를 임명해야 합니까?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물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의 아들들을 사사로 세우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너무 자신만만한 나머지, 자신의 편파적인 논리에 따라 자신의 아들들을 임명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많은 사람들의 삶을 파괴했습니다.

이것은 젊었을 때 아주 잘 시작한,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이가 들면서 심지어 자녀가 경건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녀에게 편파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를 위한 경고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판단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확실히 우리 자신을 판단하고 그것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다음은 설교 사역을 하는 사람들을 위한 질문입니다: 당신은 사역에 너무 바빠서 자녀를 하나님의 방법으로 양육할 시간이 없습니까? 오늘날 자녀들이 주님의 길을 따르지 않는 하나님의 종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을 판단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주님의 종들이 살아가며 일하는 압력에 대해 전혀 모를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그들과 그들의 가족이 얼마나 사탄의 공격의 대상인지, 전혀 모릅니다. 나는 그들을 절대 판단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그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고 싶다면, 나는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말할 것입니다. 당신이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면, 적어도 그들을 판단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그들로부터 경고를 받으십시오.

디모데전서 3장 5절은, 자기 자녀를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은(그들이 그의 집에서 그와 함께 살 때), 하나님의 집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다스리지 못하므로, 어떤 교회에서도 장로로 임명되어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 가정을 제대로 다스릴 수 없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그의 자녀들이 장성하여 집을 떠난 후에는, 그들이 주님을 따를 것인지 아닌지를 스스로 선택해야 합니다. 그 이후의 그들의 상태는 그가 주님을 섬기는 데 결격 사유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자녀들이 집에 있을 때, 그들의 좋은 행실은 그가 교회의 장로가 되기 위한 기본적인 요구 조건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기

그러나 그것은 아마도 사무엘이 실패한 유일한 영역이었을 것입니다. 다른 많은 분야에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인생을 마칠 때까지 하나님의 길에서 결코 흔들리지 않은 사람의 탁월한 본이었습니다. 사무엘은 자신의 삶에서 죄에 대한 민감성이 너무 커서, 하나님이 그를 백성의 지도자로 임명하셨는데 그가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다면 죄를 지었을 것이라고 느꼈습니다(삼상 12:23, "나는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께 결단코 범하지 않겠습니다").

얼마나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양떼를 위해 기도하지 않으면 죄를 짓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 많은 사람들이 리더가 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지도자가 되어 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면 죄를 짓는다는 것 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살인, 간음, 악한 생각, 화내는 것이 죄라는 것을 압니다. 여기 당신의 목록에 추가해야 할 또 하나의 죄가 있습니다: 당신이 인도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12 제자를 위해 정기적으로 기도하셨습니다. 사무엘도 그것을 이해했습니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종들은 모두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400년 후에 하나님께서 직접 사무엘에 관해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신 것을 보십시오. 타락한 이스라엘에 대해, 하나님은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서서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한다 해도, 내 뜻을 바꾸지 아니하리라"(렘 15:1)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기도를 들으시지 않습니까? 그분은 분명히 들으십니다. 그러나 "의인의 효과적이고 간절한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큽니다"(약 5:16). 모세부터 예레미야까지 800년 동안 살았던 모든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하나님께서는 기도의 위대한 인물로 단 두 사람만을 선택하셨습니다 - 모세와 사무엘. 가장 위대한 두 선지자는 아마도 모세와 엘리야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의 가장 위대한 두 사람은 모세와 사무엘이었습니다.

모세에게도 사무엘처럼,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신의 후계자로 아들들을 지명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세우라고 하신 사람을 세웠습니다 - 여호수아.

우리는 사무엘과 같은 기도의 용사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심각한 실수를 범할 수 있음을 봅니다. 우리의 살과 피에 대한 편애와 사랑은 모두 우리에게 매우 가깝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의 제자가 되려면, 부모와 아내와 다른 가족에 대한 애착을 끊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4:26). 현명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실수로부터 배울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도 같은 실수를 저지를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우리에게 반복해서 경고하는, 동일한 실수를 저지르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발견합니다.

사울 왕 - 잘 시작한 사람

이제 우리는 사울의 사역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처음에 사울을 왕이 되는 데 관심이 없는 겸손한 청년으로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왕을 원했습니다. 어느 날, 주님은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일 이맘때,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라"(삼상 9:15-17). 사무엘이 사울을 보았을 때, 여호와께서 그에게 "보라, 이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기름병을 가져다가 그의 머리에 붓고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어 그분의 기업의 통치자로 삼으셨다'고 말했습니다(삼상 10:1). 사울은 이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완전히 놀랐습니다. 그는 어쨌든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선택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서 많은 좋은 특성을 보셨음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네게 크게 임하리니, 네가 예언을 하고 변하여 딴 사람이 되리라"(10:6).

이것은 성령으로 충만할 때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을 묘사하는 참으로 놀라운 단어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으로 변합니다 . 이것은 우리 모두가 지속적으로 체험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왕으로 택하신 사람으로도 백성들에게 인정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모든 백성을 불러 모으고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서 한 왕을 택하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주님께서 주권적으로 제비 뽑기를 주관하실 것을 믿고 제비를 뽑았습니다 - 먼저 지파별로, 그 다음 가족별로, 그 다음 개인 이름별로 제비를 뽑았습니다. 결국 제비가 사울에게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사울을 찾았을 때, 그가 없어졌기 때문에 그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왕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몸을 숨겼습니다.

사울이 가진 열 가지 좋은 특성에 유의해 보십시오.

1. 그는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 철저했습니다. 9장 3절에서, 우리는 그의 아버지 기스가 나귀를 잃었다는 것을 봅니다. 기스는 사울에게 가서 그것들을 찾으라고 말했습니다. 사울은 에브라임 온 산지와 살리사 땅을 샅샅이 수색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할 일을 주었고, 그는 그 일을 철저하게 해냈습니다. 그는 몇 분 동안 나귀를 찾으러 갔다가 "저는 찾을 수 없습니다" 하고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당나귀를 찾는 것처럼 작은 일에도 충실한 사람을 선택하십니다!

2. 그는 현명했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나귀를 찾지 못하자 그는 종에게, "돌아가자. 이제 아버지는 나귀보다 우리를 더 걱정하실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9:5).

3. 그는 하나님의 종들을 존중할 줄 알았습니다. 그의 종이 도시로 가서 하나님의 종을 만나자고 제안했을 때, 사울은 "그를 위하여 예물을 드리자"고 말했습니다(9:7).

4. 그는 자신에 대해 겸손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하나님이 그를 선택하셨다고 말했을 때, 그는 "내가 누구입니까?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오며,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작은 가족이 아니니이까?"라고 말했습니다(9:21).

5. 그는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삼촌이 사무엘이 무슨 말을 했는지 물었을 때, 사울은 그의 삼촌에게 사무엘이 그의 당나귀를 찾았다고 말했지만 사무엘이 그를 왕으로 기름 부은 것에 대해서는 삼촌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10:15,16).

6. 그는 뒤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그를 왕으로 뽑았을 때, 그는 짐 속에 몸을 숨겼습니다. 그는 숨기를 원하는 사람이었습니다(10:22).

7. 그는 오래 참았습니다. 사울이 자기 집에 돌아갔을 때에, 어떤 불량배들이 이르되,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할 수 있으리이까"하고, 그들은 그를 경멸했고 어떤 선물도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공개적으로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잠잠했습니다(10:27).

8. 그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어떤 백성이 적의 공격을 받았을 때, 그들은 사울에게 전령을 보냈고, 사울은 즉시 사람들을 모아 가서 그들을 도왔습니다(11:1-7).

9. 그는 용감했습니다. 사울은 가서 암몬 적군과 용감히 싸워 이스라엘 백성을 구했습니다(11:11).

10. 그는 그의 원수들을 용서했습니다. 사울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돌아왔을 때, 어떤 사람들은 이전에 사울을 왕으로써 거부했던 사람들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도 죽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11:12,13).

이 모든 훌륭한 자질을 갖춘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몇 년 안에 그는 하나님과의 접촉을 잃었고,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잃었고, 겸손을 잃었고, 인격을 잃었고, 왕국을 잃었고,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잘 시작한 많은 하나님의 종들의 슬픈 이야기입니다.

사울이 실패한 이유

13장 8절에서, 우리는 사울이 그의 왕국을 잃은 첫 번째 이유를 봅니다. 사무엘은 사울이 전쟁에 나가기 전에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겠다고 사울에게 기다리라고 말했습니다. 사울은 7일을 기다렸지만 사무엘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스스로 제사를 드리기로 결정했습니다(13:9). 그는 자신이 제사장이 아니며,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법을 범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왕으로서의 사역에서 너무나 많은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주위에 그어놓으신 경계를 벗어나 다른 사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느꼈습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같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역을 인식하고, 하나님께서 우리 주위에 그으신 경계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역에서 우리를 축복하셨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지 않으신 다른 사역으로 옮겨갈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전도자로서의 은사가 아닌, 교사로서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때때로 다른 사람들이 내 경계를 벗어나라는 압력을 가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경계 안에 머물러 왔습니다. 나는 사울의 실수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재능 있는 전도자를 소중히 여기며 그들과 함께 일합니다 - 그리고 그들의 사역의 영역에서 그들에게 복종합니다. 그러나 나는 내 사역에 충실합니다.

웃시야는 제사장이 되려고 했던 또 다른 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문둥병으로 치셨습니다(대하 26). 여기서 우리는 사울이 제사장이 되려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왕국을 그에게서 거두어 가신 것을 봅니다. 당신의 사역을 인정하고 당신의 경계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사역을 완수하게 하십시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단순한 법칙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도 사울의 조급함을 봅니다. 그가 제사를 드린 지 몇 분이 지나지 않아 약속한 대로 사무엘이 왔습니다. 사울이 몇 분만 더 기다렸더라면, 이야기가 달라졌을 것입니다! 자만과 조바심 때문에, 그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30년 동안 이스라엘의 왕좌에 앉았습니다. 오늘날 기독교계에는, 아주 오래 전에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잃은 사울과 같은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돈과 인간적 권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조직을 지휘하는 왕좌에 앉아 있습니다. 사울은 매우 겸손하게 출발한 훌륭한 청년에서 퇴보하여 하나님께 쓸모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왕국은 이제 지속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어리석게 행동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지금 그분 자신의 마음에 합한 사람을 찾으십니다"(13:13,14).

여기서 마음에 대한 강조를 보십시오. 사울이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을 때, 성경은 사울이 다른 사람보다 키가 컸기 때문에 백성들 사이에서 그의 머리가 돋보였다고 말합니다(삼상 10:23). 그는 머리, 즉 두뇌로 구별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제 마음으로 구별되는 사람을 찾고 계셨습니다. 다윗이 남들과 다른 것은 머리 때문이 아니라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삼상 13:14).

"머리의 기독교"와 "마음의 기독교"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사울은 첫 번째를 나타내고 다윗은 두 번째를 나타냅니다. 이것이 종교적인 사람과 영적인 사람의 본질적인 차이입니다. 여호와께서 자신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시다가, 다윗을 만나셨습니다. 우리의 머리는 우리의 두뇌, 지능 및 영리함을 나타냅니다. 우리의 마음은 주님에 대한 우리의 헌신과 그분에 대한 경배를 나타냅니다. 아버지는 학자를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요 4:23). 당신이 예배자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 헌신하지 않으면, 아무리 영리해도 사울처럼 끝날 수 있습니다. 다윗은 비록 실수를 했지만 그의 마음이 옳았기 때문에 승리의 길을 마쳤습니다.

14:35에서, 우리는 사울이 처음으로 쌓은 제단에 대해 읽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우리는 그가 실패한 이유를 봅니다: 그는 우선 예배자가 아니었습니다. 사울의 조상, 아브라함은, 예배자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고 여호와께 경배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똑똑하고 영리한 사람일 뿐, 예배자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4장 10절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기 전에 그분을 경배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머리 속에만 존재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과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경배로 이어지지 않는 기독교를 조심하세요.

15장에서, 우리는 사울이 저지른 두 번째 실수를 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모든 아말렉 사람들과 그들의 동물을 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좋은 양 몇 마리는 남겨 두었습니다 - 아마도 자신을 위해 남기고 싶었을 것입니다. 사무엘이 사울의 실패에 대해 따지자, 사울은 백성들이 좋은 양과 소를 남겨두었다고 비난하면서 "그들이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고자 한다"고 경건하게 왜곡하여 정당화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판단에 따라 하나님의 명령을 수정했습니다. 그리고 아담이 아내를 탓했듯이, 사울은 백성을 탓했습니다. 실수를 인정하고 자신의 죄를 책임질 줄 모르는 사람은 지도자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의 지도자가 될 자격이 있는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은 작은 일에 대한 우리의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왕국에서 가장 큰 사람들은 작은 일에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은 작은 계명을 무시하는 자들일 것입니다(마 5:19).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주신 작은 계명에 대한 우리의 태도로 우리를 평가하십니다.

사울은 자신의 죄를 정직하게 자백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주님께 순종했다고 계속 주장했습니다. 그는 사무엘에게,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 나는 여호와의 목소리에 순종했습니다"(13, 20절). 그러나 사무엘이 그에게 계속 대적하자, 마침내 그는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들었나이다"(24절)라고 인정했습니다. 사람들의 의견을 두려워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은 결코 그들의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무엘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죄를 지었음을 개인적으로 당신에게 인정하겠습니다. 하지만 나를 공개적으로 낮추지 마십시오. 장로들 앞에서 저를 존중해 주십시오. 부디 와서 나와 함께 경배하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행하여 주십시오"(30절). 그는 사람들로부터 명예를 구했습니다. 그는 거룩한 사람이라는 것을 가장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사무엘이 그를 지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여전히 자기와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사울에게서 떠나고 악한 영이 그에게 들어갔습니다. 한때 겸손과 지혜와 하나님을 향한 열심으로 가득했던 마음에 이제는 의심과 두려움과 시기와 악한 영이 가득했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알면서도 신실하지 않은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 당신의 나중 끝이 회심하지 않은 상태보다 더 나빠지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성령의 능력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영이 어린 다윗에게 임하여, 그는 성령의 능력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적 골리앗을 죽였습니다. 사울은 여인들이 다윗을 칭찬하는 말을 듣고 시기하여(18:9), 다윗을 한 번 이상 죽이려고 했습니다(18:11; 19:10). 질투가 마음을 지배하도록 허용될 때, 타락은 매우 빠르게 시작됩니다. 사울의 광기가 너무 심해져서 한 번은 자기 아들 요나단을 창으로 죽이려고 한 적도 있습니다. 사울은 요나단이 그 사역을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요나단을 승격시켜 그의 사역을 이어받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기독교계 전역에서 이와 같은 일을 하고 있으며, 그들도 사울의 영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니며 여생을 보냈습니다. 그의 분노는 통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윗이 자기 성읍에 왔다는 사실을 보고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레위 제사장 85명과 그 가족들을 죽인 적이 있습니다(22장). 하지만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상황에서 사울의 목숨을 살려준 적이 한 번 이상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인생에서 상황은 점점 더 나빠졌습니다. 그것은 당신보다 하나님께 더 큰 축복을 받은 사람을 질투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자신보다 더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들을 교회에서 몰아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영적으로 내려가고 내려갑니다, 그들이 스스로를 완전히 멸망시킬 때까지 말입니다.

그 다음에 사울은 주술에 빠져들었고(28:8) 그리고 마침내 자살했습니다(31:4,5). 출발이 아주 좋았던 사람에게 끝은 참으로 슬펐습니다.

다윗 -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사울과는 대조적으로 다윗은 -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습니다.

주님은 사무엘에게 사울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다른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삼상 16장). 사무엘은 이새의 집으로 가서, 하나님이 그의 아들 가운데서 다음 왕이 될 사람을 그에게 보여주실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새에게는 여덟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모든 아들을 불러 제사를 드리라고 말했을 때, 이새는 위에서부터 일곱 아들만 불렀습니다. 그는 막내인, 다윗을 굳이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 분명히 아무도 다윗을 별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가족의 막내였으니까요 - 아마도 15세였을 것입니다. 다윗은 양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총명하고, 잘생긴, 장자 엘리압이 먼저 사무엘을 찾아옵니다(16:6). 그러자 사무엘은 "이는 여호와께서 기름부으신 자가 틀림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외모를 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하나님은 중심(마음)을 보시느니라"는 아름다운 구절을 보게 됩니다(삼상 16:7). 머리가 아닌 마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을 주목하세요.

그리고 나서 이새는 다음 아들을 불렀습니다. 주님은 다시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일곱 아들이 모두 하나씩 사무엘 앞을 지나갔고, 여호와께서는 그들 모두에게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무엘은 놀라고 당황했습니다. 그는 이새에게 "아들이 이 사람들뿐인가요?"라고 물었습니다. 이새는 말했습니다, "아니요, 막내 한 명이 더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인도 아닙니다. 그는 십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귀찮게 그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곱 형들처럼 똑똑하지 않습니다. 그는 수금을 치며 하나님께 노래를 부르며 하루를 보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에게 우리 양을 돌보도록 임명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원한다면 우리가 그를 부를 것입니다."

어린 다윗이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조차 몰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지켜보셨고 주님을 향한 그의 헌신과 사랑을 보셨습니다. 그가 오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그에게 기름을 부었고, 주의 영이 그 어린 십대 소년에게 강하게 임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전역에서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을 찾으셨고, 한 어린 소년을 찾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인도 전역에서 그분이 기름부으시고 사용할 수 있는 어린 소년 소녀들을 찾고 계십니다(새 언약에서는, 성령이 남녀 모두에게 부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새의 맏아들 일곱과 같이 당신보다 뛰어난 자가 많을 수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람이 평가하듯이, 하나님은 평가하지 않으십니다. 양을 돌보는 일일지라도 당신의 일을 충실히 하십시오. 주님께서 당신을 주시하고 계실 수도 있습니다. 신실하세요, 그러면 그분은 언젠가 당신을 부르시고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신 것처럼 당신에게 기름을 부으실 것입니다. 주님은 십 대에 있는 젊은이들을 선택하셔서, 그분을 섬기도록 훈련시키십니다. 오랜 기간 동안 그들을 훈련시킨 다음 그들을 사역으로 이끄십니다.

여호와의 영이 다윗에게 임하자마자, 그 영은 사울에게서 떠나갔습니다(16:13,14).

사적인 승리와 공적인 승리

다윗은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것을 보았을 때,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과 하나님의 백성의 영예에 대한 그의 열렬한 관심에 주목하십시오: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능욕하리요?"(17:26).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한 그들의 조상들처럼 믿지 않는 반면, 다윗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갈렙을 통해 가나안 거인들에게 행하신 일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서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사울이 다윗이 아직 어리다고 비웃었을 때(다윗은 아마 17세 정도였을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전에는 누구에게도, 심지어 그의 부모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사생활의 몇 가지 사건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사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양 떼를 칠 때, 가끔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훔쳐갔습니다. 나는 들짐승을 뒤쫓아 그 입에서 어린 양을 구출하고 그 들짐승을 죽였습니다. 나는 사자와 곰을 모두 죽였습니다"(17:34-36). 다윗은 성령이 삼손에게 임했을 때 그가 한 일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은 후에, 다윗은 하나님께서 삼손을 도우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자기도 도우실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얼마나 많은 목자들이 작고 어린 양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사자를 쫓아가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그의 양 떼 중 가장 어린 양을 돌보는 것을 보시고, 이스라엘을 목양하는 데 다윗이 적합하다고 결정하셨습니다. 연약한 형제가 사탄에게 붙들렸을 때, 영적 전쟁에서 사탄을 뒤쫓아 그 형제를 사탄의 손아귀에서 구출하는 것이 목자의 의무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목자의 모습입니다.

이 이야기는 또한 우리가 공개적으로 골리앗과 맞서기 전에, 먼저 사생활에서 원수를 죽여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사생활에서 사자와 곰을 이기지 못했다면, 공개적으로 골리앗과 맞서도록 하나님이 부르실 것이라고 상상하지 마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사탄의 요새를 무너뜨리는 공개적 사역을 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먼저 자신의 마음에서 사탄의 요새를 파괴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들은 먼저 하나님의 이름과 어린 양들에 대한 관심을 보여야 합니다.

그런 다음 사울은 다윗에게 최소한 자기(사울의) 갑옷을 입으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골리앗에 대한 어느 정도의 보호를 제공할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의 갑옷을 믿어야 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까? 결국 다윗은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나아갔습니다. 그는 골리앗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을 가지고 나에게 왔다. 그러나 나는 주님의 이름으로 너에게 나왔다"(45절). 그리하여 그는 돌 하나로 골리앗을 죽이고, 골리앗의 칼로 그의 머리를 잘랐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사탄을 대적하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탄 자신의 무기(골리앗 자신의 칼)를 사용하여 그를 멸망시키십니다. "죽음을 통해,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를 멸하셨습니다"(히 2:14). 골리앗이 죽자, 다른 블레셋 사람들은 도망쳤습니다(삼상 17:51). 이것은 우리가 일단 우리 삶의 큰 죄("얽매이기 쉬운 죄" - 히 12:1)를 죽이면, 우리 삶의 다른 많은 죄들도 정복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임을 가르쳐줍니다.

18장에서 우리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다윗에게 가졌던 사랑스러운 태도에 대해 봅니다. 요나단은 틀림없이 다윗보다 나이가 많았고 왕위 계승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이스라엘에서 매우 인기가 있고, 따라서 그를 위협하는 다윗을 미워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대신, 우리는 다윗에 대한 그의 마음에서 순수한 사랑과 존경을 봅니다. 이것은 요나단이 자신의 개인적인 발전보다 하나님의 영광과 이스라엘의 유익에 더 관심이 있었던 사람임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그는 아버지 사울을 괴롭혔던 시기심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다윗에게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다윗에게 왕의 옷과 칼과 활을 주면서 말했습니다, "다윗, 여기 있습니다. 이것을 당신에게 줌으로써 나는 당신이 왕위(의복)의 정당한 상속자임을 나타내며, 나는 결코 당신과 (칼과 활로) 싸우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당신에게 복종합니다"(18,4).

요나단은 참으로 훌륭한 청년이었습니다. 14장에서는, 블레셋을 이긴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에 대해 읽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그의 질투로부터의 완전한 자유와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사람을 알아보는 그의 분별력을 볼 수 있습니다.

형이 동생에 대한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인식하고, 동생이 사역에서 자신을 이끌도록 허용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는 바나바에게서 그 아름다운 예를 봅니다. 사도행전 13장 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일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바나바는 사울보다 선배였고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먼저 나오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곧, '바울과 바나바'가 되었습니다(43절). 어떻게요? 바나바는 동생 바울에게 더 큰 기름부음이 임하는 것을 보았을 때 은혜롭게 뒤로 물러났습니다. 요나단과 바나바와 같이 자신의 것을 구하지 않고 질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며 더 강력한 기름 부음을 받은 동생들을 기꺼이 돕는 사람들이 더 많이 있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 땅에서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했을까요?

다윗이 범사에 형통함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18:5,14). 이 어린 17세 소년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는, 그로 하여금 사울의 군대와 궁전에 있는 훨씬 나이 많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지혜롭게 행할 수 있게" 했습니다(18:30).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 우리의 삶과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축복이 찾아오는지 모릅니다.

다윗의 시련

다윗은 이제 사울이 그를 죽이려고 했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도망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획을 세우신 사람을, 그 계획이 완전히 성취되기 전에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22장 1,2절에서, 우리는 기름 부음이 사울에게서 떠나 지금 다윗에게 있음을 인식한 이스라엘의 소수에 대해 봅니다. 이제 그들은 다윗과 함께 모여 동굴에서 동굴로 끊임없이 그와 함께 이동했습니다! 그 사람들처럼 우리도 하나님이 오늘 어디로 움직이시는지를 인식해야 합니다 - 어제 어디로 움직이셨는지가 아니라. 우리는 오늘날 하나님의 기름 부음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 서야 합니다.

다윗은 매일 주님의 인도하심을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블레셋 사람과 싸우러 가기 전에 여호와께 여쭈었고, 여호와께서 가라고 하시면 자기 부하들의 충고도 거스르고 갔습니다(23:1-5). 이것이 그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된 방법입니다: 그는 그의 친구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들었습니다.

다윗이 블레셋의 압제에서 그일라 백성들을 구해낸 후, 사울은 다윗이 그일라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다윗을 잡을 것이라고 확신하며 그곳으로 갔는데, 그 이유는 그일라가 이중 문과 철창으로 둘러싸인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다윗은 이제 그일라 백성이 그에게 매우 고마워서 결코 그를 사울의 손에 넘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이와 같은 단순한 문제에 대해 하나님을 찾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일라 사람들이 그를 배반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일라를 떠나 자신과 그의 사람들을 구했습니다(23:6-13). "하나님은 그를 사울의 손에 넘겨주지 않으셨습니다"(23:14). 이것이 다윗의 젊은 시절의 비결이었습니다 - 사무엘처럼, 그는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24장 4,5절에서 다윗이 사울에게 자비를 베풀었을 때, 사울의 목숨을 살려준 다윗의 고귀한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사실 다윗은 사울의 옷자락을 조금 자른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습니다. 그는 단지 그가 원하기만 하면 사울을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사울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렇게 했습니다. 사울은 이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돌아갔지만, 얼마 후 다시 다윗을 찾아나섰습니다(26:2). 질투, 분노, 증오는 철저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해변의 파도처럼 몇 번이고 되살아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30장에서, 우리는 몇 가지 흥미로운 점을 봅니다. 다윗은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와 그의 사람들이 싸우러 갈 때에, 아말렉 사람들이 와서 그의 백성의 가족들이 머무르는 성을 파괴하고 그 가족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상황이 너무 나빠서 모든 사람들이 울기 시작했고, 그들의 문제에 대해 다윗을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다윗을 돌로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6절). 그리고 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랑스러운 말씀을 읽게 됩니다: "그러나 다윗은 주님 안에서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힘을 얻었습니다)" (6절). 친구들도 우리를 배반할 때, 우리가 따라야 할 본이 얼마나 됩니까? 다윗은 다시 주님을 찾았고, 주님은 그에게 아말렉 사람을 추격하라고 말씀하셨고 그가 모든 것을 회복할 것이라고 확신시켜 주셨습니다(8절).

그러나 다윗은 이 아말렉 사람들을 찾으러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게 그들에게 인도하셨는지 보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죽어가는 낯선 이에게 단순한 친절을 베푼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광야에서 반쯤 죽은 애굽 사람이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를 돌보았고 그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었습니다. 그가 살아났을 때, 그들은 그가 병들었기 때문에 광야에서 아말렉 사람들에게 버림받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30:11~13). 그는 다윗을 아말렉으로 인도한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낯선 사람들에게 친절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보상하시는지 가르쳐줍니다.

그런 다음 다윗이 아말렉 사람들이 훔친 "모든 것을 되찾았다"고 세 번 기록되었습니다(18-20절) - 사탄이 우리에게서 훔친 모든 것을 회복하신 예수님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전투가 끝나고 다윗이 진영으로 돌아왔을 때, 너무 지쳐서 다윗을 따라 전장으로 나가지 못하고, 남아서 다윗의 물건을 보살피던 부하 200명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러자 다윗의 무익한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은 싸우지 않은 이 사람들과 전투의 전리품을 나누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서 다윗의 마음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집에 머물며 짐을 보살피는 자도 나가서 싸운 자와 전리품을 균등하게 나누어 가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 날 이후로 이스라엘에 법이 되었습니다.

31장에, 사울이 자살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를 박해하는 자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아십니다 - 그분의 방법과 그분의 때에. 다윗은 사울에게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다루시도록 했습니다. 1000년 후, 구리 세공인 알렉산더가 사도 바울을 괴롭혔을 때 바울의 태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께서 그에게 갚으시리라"(딤후 4:14). 우리는 언젠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뿌린 대로 거두게 하실 것이며,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에게 박해를 받은 그분의 모든 종들에게 원수를 갚아주실 것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원수 갚는 것이 주께 속하였고, 그분이 언젠가 갚으리라 약속하셨습니다(롬 12:19). 그때까지, 우리의 의무는 다윗이 사울에게 한 것처럼, 원수에게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직면한 모든 어려움과 시련을 통해(약 13년의 기간 동안), 그는 마침내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성공적인 왕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시편 66편 10-12절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습니다: "오 하나님, 당신은 나를 시험하셨습니다. 당신은 은을 단련하듯 나를 단련하셨습니다. 당신은 나를 그물에 갇히게 허락하셨습니다. 당신은 내 등에 무겁고 압제적인 짐을 짊어지도록 허락하셨습니다. 당신은 사람들이 내 머리 위로 타는 것을 허용했습니다. 당신은 저를 불타는 불 속으로 데려가시고, 차갑게 식은 물 속으로 데려가셨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당신은 나를 영적 풍요와 기름 부음의 장소로 인도하셨고, 그곳에서 지금 내 잔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축복으로 넘치고 있습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시 66:10-13 - 자유로운 의역). 이 시편을 누가 썼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다윗의 경험에 있어서 사실이었습니다.

반면에, 사울은, 부유한 집에서 자랐고, 그 안락한 삶에서 곧바로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어떤 시련이나 어려움도 겪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왕으로서 실패한 것입니다.

다윗의 뒤를 이은 솔로몬도, 시련이나 어려움을 겪지 않았습니다. 그는 왕궁의 왕자로서 안락하고 편안하게 자랐습니다. 그는 또한 왕으로서 실패자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예는 시련과 어려움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고 우리의 사역에서 효과적이고 성공적일 수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이것이 바울을 성공적인 사도로 만든 것입니다(고후 1:4-11; 11:23-33을 읽으십시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오늘날 복음을 전하여 부자가 되고 안락하게 사는 많은 설교자들이, 스스로 영적이지 못하고 양 떼에게 경건한 본보기가 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그분의 종으로 부르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당신이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그분을 섬길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랜 시련을 신실하게 견디지 못하면, 성도의 영적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당신은 결국 사울과 솔로몬처럼 될 뿐이며, 마침내 당신 자신을 망하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먼저 오랜 기간의 시련과 어려움을 통해 여러분을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분은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오해하고 질투하도록 허락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그들이 당신을 억압하고 압제하도록 허락하실 것입니다. 당신이 (다윗처럼)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이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은 언젠가 당신을 풍요와 축복의 장소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십시오.

장 10
사무엘하

다윗의 통치

이 책에서, 우리는 다윗의 통치에 대해 읽습니다 - 그가 어떻게 왕이 되었는지, 그가 어떻게 많은 승리를 거두었는지, 그가 어떻게 죄에 빠졌는지, 그리고 그가 인생이 끝날 때까지 가족에게 어떻게 문제가 있었는지.

사울에 대한 다윗의 태도

1장: 여기서 우리는 사울의 죽음에 대해 읽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미워하여 온 이스라엘을 10년 이상 쫓아다니며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제 마침내 그는 죽었습니다. 당신이 다윗의 입장이라면, 그러한 소식에 어떤 반응을 보였겠습니까? 다윗의 반응을 주목하십시오.

우리는 사울이 자살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삼상 31장). 그런데 한 아말렉 사람이 다윗에게 와서 다윗의 호의를 얻으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는 다윗에게 사울의 요청에 따라 자신이 사울을 죽였다고 말하고 사울의 왕관과 팔찌를 다윗에게 주었습니다. 그는 다윗이 기뻐하고 이 행동에 대해 보상해 주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대신, 다윗은 자기 옷을 찢고 울며 사울을 위하여 온종일 금식했습니다(1:1-11). 그러고 나서 다윗은 이 사람에게 어떻게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냐고 물었습니다. 그런 다음 사울을 감히 죽이려 한 아말렉 사람을 죽이도록, 젊은이 중 한 명을 시켰습니다. 그 남자는 자기가 한 거짓말에 상당한 대가를 치렀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다윗의 태도를 보십시오. 이것이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만든 것 중 하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너희를 상하게 하고 해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하신 것을 압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그는 구약 시대에서 새 언약의 태도를 취했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사울이 기름 부음을 잃었을지라도, 다윗은 항상 "나는 그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을 위하여 애도의 글을 쓰고, 진심으로 그들을 찬양하는 아름다운 말을 하였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람이 자기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는 교훈이 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아 네 아름다움이 네 높은 곳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용사들이 어찌 쓰러졌는가!" (1:19,25,27). 우리는 요나단이 다윗의 절친한 친구였기 때문에 그가 칭찬한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울을 많은 승리를 거둔 용감한 사람이라며 칭찬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사울의 좋은 면을 높이 평가하고 그대로 두었습니다. 사울에 대한 판단은 하나님께 맡기고 자신이 직접 판단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써의 다윗을 봅니다. 그러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뽑아 이스라엘의 왕위에 앉히셨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2장 1절: "다윗이 여호와께 물으니..." 앞서 사무엘상 23장 2~4절과 30장 8절에서 보았듯이, 다윗의 끊임없는 습관은 모든 일에 주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무엘하 5장 17~25절에서, 우리는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구했던 블레셋과의 두 번의 전투에 대해 읽습니다. 두 번째 때, 주님은 그에게 전략을 바꾸어 후방에서 공격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때마다 주님은 전략을 바꾸셨습니다. 다윗은 전쟁의 사람이었지만, 항상 주님으로부터 전략을 얻었고 그것이 그가 항상 승리한 이유입니다. 그 땅에 기근이 들었을 때 그는 여호와께 왜 기근이 들었는지 물었습니다(삼하 21:1). 그러나 그가 주님의 뜻을 구하지 않은 몇 가지 사안이 있었습니다. 그 세 가지 예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그가 여섯 아내와 결혼했을 때(삼하 3장);

2. 그가 밧세바를 그의 궁전으로 불렀을 때(삼하 11);

3. 그가 이스라엘의 인구를 조사했을 때(삼하 24).

그리고 이러한 모든 실패에 대해, 그는 매우 큰 대가를 치렀습니다. 그러나 그가 주님의 인도를 기다릴 때마다, 그는 결코 길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를 위한 교훈이자 경고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지만 그 역시 심하게 실패했습니다. 그의 실패에 대한 설명은 또한, 하나님이 실패한 사람들을 사용하실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하기에, 우리를 격려합니다. 성경에 묘사된 하나님의 종들의 실패는 그들의 성공에 대한 설명보다 훨씬 더 우리를 격려합니다 - 왜냐하면 우리 모두도 여러 번 주님을 실망시켰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특히 젊을 때, 실수하고 실패하고 어리석은 일을 합니다 - 우리가 젊을 때는 열심이 충만하나 지혜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젊었을 때 매우 현명하지 못한 방식으로 많은 일을 행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로우십니다. 우리와 같이 실패한 자를 뽑으시고, 여전히 우리를 그분의 마음에 맞는 남자와 여자로 만드십니다.

유다 사람들이 와서 먼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을 삼았습니다. 후에 그는 기름부음을 받아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5:3-5). 그는 30세에 유다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온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까지 7년 반을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시기까지, 20년 이상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의 대기 기간은 거의 아브라함의 대기 기간만큼 길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습니다. 우리는, 믿음과 인내를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물려받은, 그러한 사람들의 모범을 따르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다윗은 결코 자신을 위해 왕좌를 차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그것을 그에게 주시기를 기다렸습니다. 그가 밧세바에 관해서도 움켜쥐지 않는 태도를 취했더라면, 그의 이야기는 얼마나 달라졌을까요.

당신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려면, 움켜쥐지 않는 법을 배워야합니다. 야곱은 움켜쥐는 자요, 움켜쥐는 자인 한, 그는 이스라엘이 될 수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주먹을 쥐고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아기의 손에 당신의 손가락을 넣으면, 즉시 손가락을 잡을 것입니다. 그는 자라면서, 장난감과 다른 많은 것들을 잡는 법을 배웁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움켜잡는 것. 우리는 평생을,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움켜쥐는 데 보냅니다. 우리는 지위, 명예, 돈 및 기타 많은 것들을 위해 움켜쥐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그분은 결코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움켜잡지 않았습니다. 그의 주먹은 닫혀있지 않았습니다. 그의 손바닥은 항상 모든 사람을 향하여 열려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갈보리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손바닥을 펴셨습니다. 그것이 우리 모두가 따라야 할 본보기입니다. 굴복하십시오. 당신의 권리를 포기하십시오. 다른 사람에게 주면,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되돌려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에게 사역과 지위와 당신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주실 것입니다 - 당신이 그분의 때를 기다릴 수만 있다면. 우리가 직접 잡는 것보다,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야곱은 아버지를 속여서, 장자의 명분을 빼앗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는 다윗처럼,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실 때까지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을 그에게 주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움켜잡을 때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함을 표현합니다.

당신이 결혼하고 싶은 젊은 남자나 여자에게 매력을 느낀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리고 당신은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녀/그를 빨리 잡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가 그녀/그를 잡을 거야." 그것은 불신앙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신뢰하면, 조바심을 내거나 움켜쥐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당신은 "주님, 당신이 저를 위해 예비하신 것을, 나는 반드시 얻을 것입니다. 아무도 당신이 나를 위해 예비한 사람과 결혼할 수 없습니다." 동일한 원칙이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계획하신 모든 사역에 적용됩니다. 아무도 그것을 움켜잡을 수 없습니다. 당신이 그분을 기다리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그 사역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고, 사람들에게 결코 불평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당신을 20년 기다리게 하신다면, 기다리십시오. 그 시간이 지나면, 당신은 훨씬 더 나은 리더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본 것처럼, 사울과 솔로몬은 기다리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편안하게 태어나 어떤 시련과 압박도 받지 않고 살았습니다. 저는 인생이 너무 편안하고 쉬워서, 시련이나 압박감이 없는 사람들이 안타깝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역을 주시는 사람은, 사람들로부터 거절을 당한 사람입니다.

다윗의 경우에도 왕이 되고 삶이 편안하고 쉬워지자, 실수를 연이어 저지르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장 2-5절에 보면, 그에게서 여섯 아들이 태어났다고 나와 있습니다 - 여섯 명의 다른 아내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도 왕이 되자 길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많은 일에 대해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께 두 번째, 세 번째, 여섯 번째 결혼을 해야 하는지 묻지 않았습니다! 이삭에게는 아내가 한 명뿐이었고, 모세에게는 아내가 한 명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한, 여호수아도 아내가 한 명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왜 그렇게 많은 아내를 두었습니까? 그는 세상의 다른 모든 왕들처럼 되기로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결과 엄청난 고통을 겪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의 영을 따르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윗이 옛 언약 아래서 살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성령이 없었기 때문에 마음이 강퍅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들이 아내와도 이혼하는 것을 허락했습니다(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9:8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이제 성령을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기준이 다릅니다. 오늘날 우리는 새 언약 아래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간음에 빠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다윗도 넘어졌다"고 변명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옛 언약 아래서 살았습니다. 그 안에는 성령이 거하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영이 그 위에만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을 모실 수 있습니다. 그 옛 언약의 성도들은 그들의 사역을 위해서만 성령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우리의 성품을 변화시키기 위해 성령이 거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다윗이나 삼손과 동일시함으로써 우리의 죄를 변명할 수 없습니다.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

4장 8절에는, 사울의 아들(이스보셋)을 죽이고 그 목을 다윗에게 가져와 다윗이 상을 주기를 바랐던 두 남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들에게 너무 화가 나서 그들을 즉시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다윗은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께 속한 줄로 믿었으므로, 결코 스스로 원수를 갚거나 남에게 원수 갚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할 중요한 원칙입니다. 로마서 12장 19절은 이것에 대해 매우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공의를 집행하거나 원수를 갚는 데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으십니다. 누군가가 당신의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신은 베드로가 한 일을 할 것입니다 - 그를 일으키고, "나를 경배하지 마십시오. 경배는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예배가 하나님께 속한 것처럼, 원수를 갚는 것도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군가에게 복수를 하려는 것은, 사람으로부터 경배를 받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예배를 받을 권리가 없듯이 복수할 권리도 없습니다. 누가 우리에게 어떤 해를 끼쳤든,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방식과 시간에 그를 처리하실 수 있도록 맡겨야 합니다. 우리는 그 사람에게 악한 것을 바라지도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길 때, 우리를 비방하거나 우리의 사역을 파괴하려는 다른 신자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악담하고, 우리에 대한 거짓 이야기를 퍼뜨리고, 우리가 거짓 교리를 가르친다고 비난하는 등의 일 없이는 효과적으로 주님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복수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유혹을 단호히 물리치고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합니다. 성경은 멸할 권세가 있는 심판자는 오직 한 분뿐이라고 말씀합니다(약 4:12).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운명을, 그 한 심판자의 손에 맡겨야 합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기름을 부으셨다면, 아무도 여러분의 직분을 파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바울이 거짓 선생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예수님은 귀신의 왕의 권세를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는 비난까지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대답하시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셨습니다. 진실한 사람들도 그러한 거짓 고발로 인해 길을 잃지 않았습니다. 진실하지 못한 자들만이 길을 잃었습니다.

야고보서 2장 6절에는 그 당시에 부유한 신자들이 가난한 신자들을 압제하고 개인적으로 법정으로 끌고 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오늘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른 신자를 법정으로 끌고 가기 위해서는 부자이자 사악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눈먼 신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에서, 같은 일이 고린도에서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그런 부유한 신자들은 심판하고 복수할 권리가 있는 재판관은 오직 한 분뿐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그들에게 경고했습니다(고전 6:9은 처음 여덟 절의 문맥에서 읽습니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잘못을 저질렀다면, 하나님이 그것을 보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분은 그 사람을 다룰 수 없습니까? 당신이 그것을 믿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를 다루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사람의 길과 하나님의 길

6장: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오고자 하는 열망이 컸습니다. 그 갈망은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율법에 명하신 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재앙이 닥쳤습니다 - 다윗의 신실한 사람 중 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한번은, 블레셋 사람들이 언약궤를 빼앗았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질병으로 심판하셨고 그들은 언약궤를 이스라엘에게 돌려주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소 수레에 궤를 실어 돌려보냈습니다. 다윗은 그 사건에 대해 들었습니다. 그는, 모세의 율법에 언약궤는 레위 자손인, 고핫 자손만 메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방법이 짧은 거리에는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긴 여정이었기 때문에 그는 블레셋 방식이 더 낫고 합리적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소 수레에 언약궤를 싣었습니다. 소들이 험한 길에서 비틀거리고, 언약궤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웃사는 그의 손을 내밀어 궤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들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불경함 때문에 그를 즉시 치셨고 그는 죽었습니다.

웃사는 좋은 동기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법을 어겼습니다. 우리의 동기가 선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다면, 우리는 여전히 고난을 당할 것입니다. 나쁜 동기로 옳은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선한 동기를 가지고 잘못된 일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목적은 결코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언약궤가 떨어지는 것을 막으려는 웃사의 동기가 좋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웃사 또한 모세의 율법에 아무도 언약궤를 만지지 말라고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언약궤를 멘 고핫 자손도 조차도 언약궤 자체에 손을 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궤를 운반하기 전에 성막 휘장으로 궤를 덮어야 했기 때문에 실제로 궤를 만지지 않았습니다(민 4:15). 하나님은 법궤를 만지는 자의 형벌이 죽음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전도를 하기로 결심했을 때, 이 질문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할 것입니까? 하나님의 방법입니까, 아니면 사람의 방법입니까?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다국적 기업의 방식을 본받아야 할까요?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전도를 하려면 돈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당신은 돈을 의지합니까 아니면 성령을 의지합니까? 당신이 해야 할 말은 "우리가 전도 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능력이 필요합니다"입니다. 당신에게 성령의 능력이 있으면, 당신이 돈이 있든 없든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집니다. 세상의 기업과 조직만이 살아남기 위해 돈이 필요합니다. 교회도 "돈이 있어야만 계속할 수 있다"고 말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면, 우리는 교회도 이런 세상 조직 수준으로 내려갔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전도나 하나님의 일과 관련하여 돈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때때로, 그들은 가난한 신자들을 위해 돈을 모았지만, 사도들에게는 결코 지불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갈수록 더 많은 돈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능력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세상의 방법(수레)이 오늘날 하나님의 방법을 대체했습니다. 그래서 영적 사망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중에, 다윗은 법궤를 올바른 방법으로 예루살렘으로 가져왔습니다 - 레위인들의 어깨에 메고. 이번에는 그가 기쁨이 충만하여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습니다(6:14). 그것은 그 당시 그들이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방법 중 하나였습니다. 그들은 악기를 사용하고 손뼉을 치며 소리를 질렀을 뿐만 아니라, 춤도 추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성읍에 들어갈 때에 그의 아내 미갈(사울의 딸)이 다윗의 춤추는 것을 보고 매우 화가 났습니다(16절). 그녀는 마음속으로 그를 경멸했습니다. 그녀는, 그녀가 인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름부음 받은 하나님의 종을 경멸했습니다. 오늘날 당신이 인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당신은 그들을 모방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경멸할 필요도 없습니다. 미갈은 다윗처럼 춤추기를 시작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을 경멸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방식이 유일하게 올바른 방식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많은 기독교 단체들은 그들이 일요일 아침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특별한 방법이 그것을 행하는 유일한 올바른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다음 모든 사람이 자신의 방식대로 할 것을 요구합니다. 어떤 기독교 단체에서는, 주일 아침에 마치 장례식을 하듯이 모두가 조용히 앉아 있습니다. 그것은 나에게 호소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일 아침예배는 장례식과 같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가 비어 있다는 사실과 예수님이 무덤을 이기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축하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기쁨의 시간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을 보면, 우리는 예수님이 여전히 죽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정반대의 극단으로 가는 다른 기독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소음이 특정 데시벨 수준에 도달할 때만 성령이 집회에 임재한다고 느끼기 때문에 - "성령을 그들 가운데로 모셔오기" 위해, 계속해서 목소리를 높이고 감정을 일으킵니다. 그것은 속임수입니다. 성령님은 앰프 볼륨을 높였을 때 집회에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양심이 깨끗한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이 두 그룹 중 어느 쪽도 경멸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둘 중 어느 쪽도 모방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내 방식대로 주님을 찬양할 자유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주님을 찬양하는 방식을 경멸하지 말고, 당신이 그분을 찬양하는 방식이 유일한 올바른 방식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십시오. 하나님은 겉으로 드러난 표현이 아니라, 마음을 보십니다.

6장 20절: "다윗이 자기 집안을 축복하러 돌아갔다." 가족을 축복한다는 것은 - 정말 아름다운 일입니다 - 특히 거리에서 수 킬로미터를 춤을 추다가 기진맥진하여 집에 돌아올 때 더욱 그렇습니다! 모든 남편이 피곤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로 아내에게 요구하기보다는, 가정을 축복하는 남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윗은 잔소리하는 아내인 미갈이 있었지만, 그것이 주님 안에서 그의 기쁨을 식히지는 못했습니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그에게 왕의 품위를 지키지 않고 서민처럼 춤을 춘다고 잔소리하고 고함을 지르며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은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그는 아내의 의견에 개의치 않고 평생 주님 앞에서 춤을 추겠다고 말했습니다(21절). 남편을 경멸한 미갈을 여호와께서 심판하셨고 그녀는 평생 불임이 되었습니다.

7장: 이제 다윗은 여호와를 위해 성전을 짓고자 했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음속으로 "나는 아름다운 집에 거하지만, 하나님의 궤는 장막 안에 있다"(2절)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더 많은 성도들이 이렇게 생각하기를 바랍니다: "주님, 제가 저를 위해 지은 집이 얼마나 편안한지요. 내 집을 짓는데 얼마나 많은 돈과 시간을 들였는지요. 내가 당신의 일을 위해 희생한 것이 얼마나 적은지요! 나는 당신의 일에 대해 얼마나 관심이 없습니까!" 하나님의 일에는 자기자신과 자기의 야망과 시간과 돈을 희생할 일꾼이 필요합니다. 많은 신자들이 공장에서 초과 근무를 하고 회사를 위해 이익을 만듭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우리는 급여도 받지 않고 불평도 없이 그분을 위해 약간의 초과 근무를 할 수 없나요?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집을 염려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우리의 마지막 날까지 - 항상 우리 자신의 집보다 하나님의 집을 더 염려하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그분의 집을 돌보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집을 돌보실 것입니다. 수년 전에 나는 주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제게는 집(가족)이 있고, 당신에게도 집(가족)이 있습니다. 제게, 저는 당신의 집(가족)을 돌보고, 당신은 내 집(가족)을 돌보는 은혜를 주시옵소서." 나는 주님과 그 작은 대화를 나누었고, 내가 그분의 집을 돌보는 것보다 하나님은 내 집을 더 신실하게 돌보셨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이 하나님의 집을 짓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다윗은 전쟁의 사람이었고 오직 평화의 사람만이 하나님의 집을 지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원칙을 주목하십시오: 전쟁의 사람은 하나님의 집을 지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전쟁을 넘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야 합니다. 전쟁은 시작하기 위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안식에 들어가야 합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모든 대적을 물리침으로써 솔로몬을 위한 기반을 닦았습니다. 그는 성전 건축에 필요한 모든 금과 은도 모았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이 그것을 지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할 의향이 있습니까? 우리가 모든 힘든 일을 한 다음, 다른 사람이 그 일을 한 것에 대한 영예를 얻도록 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 자신이 그 영광을 누리고 싶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있도록 모든 일을 뒤에서 할 것이고, 그들이 영광을 얻도록 할 것입니다.

사무엘하 8장 15절: 이 구절은 리빙 바이블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모든 백성에게 공평하였다". 이것은 지도자에게 매우 중요한 요건입니다 - 정의를 집행하는 공정성과, 완전한 공평성을 의미합니다.

9장에서, 우리는 절름발이였던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에 대한 그의 친절을 봅니다. 므비보셋은 자신을 아무 가치도 없는 "죽은 개"와 같다고 여겼습니다(8절). 그러나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정기적으로 자기 식탁에서 먹도록 명령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개인 우리를 들어 올려 그분과 함께 식탁에 앉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그림입니다.

다윗의 큰 넘어짐

11장에서 우리는 다윗의 큰 넘어짐에 관한 이야기를 봅니다. 우리 모두는 그곳에서 그가 어떻게 타락했는지에 대한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왕들이 전투에 나서는 봄에 일어난 일입니다...." 왕들은 추운 겨울에 전쟁터에 나가지 않고, 봄철에 갔습니다. 모든 전투에서 다윗은 항상 지도자가 되어 이스라엘 군대를 이끌고 적과 싸웠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윗이 긴장을 풀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기 시작하는 것은, 싸움을 멈추고 전투에서 휴식을 취할 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있지 않을 때 죄에 빠지게 됩니다. 다윗의 자리는 전쟁터였습니다. 대신 그는 궁전에서 자고 있었습니다. 그가 그날 전쟁터에 있었다면, 그는 결코 이렇게 넘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일이 잘 풀리고 주님의 전쟁을 멈추고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 우리의 후배들을 보내기 시작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왕궁에 왕처럼 앉아, 후배들에게 현장에서 온갖 수고를 시키고 있습니다.

나는 주님의 교회에서 죽을 때까지 항상 후배로 있기를 원합니다. 90세가 되어도 현장에 나가 주님을 위해 일하고 싸우고 싶습니다. 나는 내 인생이 끝날 때까지 전장에 있고 싶습니다. 당신도 거기에 있기를 바랍니다. 전장에는 영적인 위험이 없습니다. 그러한 위험은 궁전에 있습니다. 다윗은 전쟁터에 있는 한 완벽하게 안전했습니다. 그는 궁전에서만 위험에 처했습니다.

우리가 시련과 압박과 질병과 경제적인 어려움에 직면할 때 죄에 빠질까요? 아닙니다. 우리에게 일이 쉬워질 때, 돈이 많을 때, 사업이 번창할 때, 집에 아픈 사람이 없을 때 - 바로 우리가 죄를 짓는 때입니다. 바로 그때가 당신이 더욱 깨어 있어야 할 때입니다.

다윗은 예루살렘에 있는 집에 머물렀습니다(11:1). 그는 여호수아가 싸우는 동안 기도했던 모세와 같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전쟁터에 나가 싸우고 있는 요압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면, 그는 안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고 있었습니다. "저녁에 다윗이 침상에서 일어나"(11:2). 나는 그가 아침 내내 자고 저녁에 일어났는지 모릅니다. 그는 침상에서 일어나 먼저 기도하는 대신, 왕궁 옥상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때 그는 아름다운 여인, 밧세바를 보고 유혹을 받았습니다. 만약 그때, 바로, 유혹의 싹을 잘라내고 첫 번째 단계에서 멈췄다면 그는 결코 마지막 단계에 이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가 보고 유혹을 받았을 때 "이건 위험해. 조심하자"라고 말하며 돌아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가서 요압을 위해 기도하는 데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 다음 그가 물어보아 그녀가 다른 사람의 아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적어도 "오, 나는 그녀를 가질 수 없어"라고 말하면서 자신을 멈출 수 있었습니다! 만일 그가 밧세바를 위해 하나님께서 그녀를 우리아의 순결하고 거룩한 아내로 만들어 주시기를 기도했다면, 그 기도 자체가 그가 죄를 짓지 않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는 자신을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을 잊었습니다. 그는 이제 원하는 사람을 가질 수 있는 강력한 군주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녀와 간음을 범했습니다.

다윗을 비난하지 맙시다. 다른 사람의 아내의 아름다움에 감탄한 적이 있습니까? 당신은 강력한 왕이 아니기 때문에, 그녀를 붙잡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그저 바라만 보고 욕망을 품었을 뿐입니다! 당신과 다윗 사이에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밧세바가 임신했을 때 다윗은 큰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는 이제 자신의 죄를 덮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녀의 남편 우리아를 전장에서 불러내어, 그날 밤 아내와 함께 집에 있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아는 동료 병사들에 대한 책임감이 너무 강해서 집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윗에게 말했습니다. "제 동료들이 전장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집에 가서 아내와 잘 수 있겠습니까?" 그 당시 우리아는 다윗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었습니다. 현장의 많은 후배들은 종종 그들의 미션 리더보다 훨씬 낫습니다. 이제 다윗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당신이 죄를 지으면, 당신은 당신의 첫 죄를 덮기 위해 더 많은 죄를 짓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그는 솔직하게, 우리아에게 가서 용서를 구했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대신에, 그는 자신의 명성을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아를 전쟁터로 돌려보내고, 요압 장군에게, 우리아가 죽임을 당할 수 있도록, 전투가 가장 치열한 곳 바로 앞에 두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다윗이 얼마나 악한 일을 저질렀습니까! 나는 성경이, 완전히 정직하고, 가장 위대한 영웅들의 실패를 은폐하지 않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당신과 내가 우리 육신의 타락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다윗보다 나을 것이 없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같은 육신을 가지고 있고 같은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징계(discipline)

12장: 그곳에 용감한 선지자, 나단이 있었던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 당시 왕을 대면하여 그가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목회자의 99%는 감히 부자 교인이나 고위 공직자에게 가서 그의 죄를 지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단은 달랐습니다. 그는 다윗에게 와서 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한 도시에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부자였고 양 떼가 많았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어린 양 한 마리밖에 없는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손님이 그 부자의 집에 왔을 때, 부자는 그를 위해 양고기 카레를 만들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많은 어린 양에서 하나도 잡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그 가난한 사람의 어린 양을 가져다가, 카레를 만들기 위해 죽였습니다." 다윗은 이 말을 듣고 크게 화를 냈습니다(12:5). 다른 사람의 죄에는, 화를 내기 쉽습니다. 그리고 나서 나단이 말했습니다. " 당신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당신에게는 아주 많은 아내가 있습니다. 우리아에게는 한 사람밖에 없었는데, 당신이 그녀를 데려갔습니다." 다윗은 갑자기 진실을 깨달았습니다.

다윗은 전에, 나단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뭐라고 말했습니까? 그는 너무나 화가 나서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자는 죽어 마땅하도다"(12:5)라고 말했습니다. 율법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양을 훔친 사람을 죽여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다른 사람의 죄에 관해서는 율법보다 더 엄격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에서 더 큰 죄를 보지 못합니다.

다윗은 또한 "그는 네 배나 갚아야 한다"(12:6)고 말했습니다. 한 마리의 어린양을 가져간 부자는, 네 마리의 어린양을 돌려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다윗도 우리아를 죽인 대가로 치러야 할 대가가 되었습니다. 나단이 다윗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칼이 네 집에서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내가 네 집안에서 너를 대적할 악을 일으키리라"(10,11절). 다윗의 네 아들, 즉 밧세바에게서 태어난 아기, 암논, 압살롬, 아도니야가 죽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뿌린 대로 거두고 우리 자신이 말한 대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과 같은 판단으로, 우리도 판단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판단하지 않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일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당신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다시 그분의 마음으로 들어오는 것을 봅니다. 다윗은 나단에게 "내가 여호와께 죄를 지었나이다"(12:13)라고 말했고, 그는 놀라운 시, 시편 51편을 썼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 51:4,11). 그는 사울처럼 자신의 죄를 덮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말했습니다, "나를 존중해 주십시오. 내 죄를 아무에게도 알리지 마십시오"(삼상 15:30). 그러나 다윗은 나단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시편을 지었고 모든 사람에게 그것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다윗에 대해 보는 놀라운 일입니다. 그는 영적인 사람이 아닌데도 영적인 사람인 척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죄를 지었을 때 그것을 인정했습니다.

이 사건에서 또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당신이 주님 앞에서 아무리 훌륭해도, 누군가 당신의 삶에서 잘못된 점을 지적하면, 그것을 인정하십시오. 아무도 당신에게 와서 당신이 틀렸다거나 당신이 어떤 부분에서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교만하고 거만해지지 마십시오. 다윗은 공개적으로 자신을 낮추고 시편 51편을 썼으며, 온 세상에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자비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회개와 자백과 금식과 기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밧세바의 아이를 치셨고 그 아이는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우리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나 그런 다음 그분은 또한 우리를 징계로 다루십니다.

그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수년 동안 외설물과 영화로 마음을 가득 채운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다음 그는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합니다. 하나님은 즉시 그를 용서하십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그를 완전히 씻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의롭다 하시고, 그가 죄를 지은 적이 없는 것처럼 그를 바라보십니다. 그러나 그 남자는 수년 동안, 여전히 그의 기억에서 더럽고, 성적인 이미지로 괴로워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의 마음을 깨끗이 씻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 더러운 이미지를 그의 기억에서 지우지 않으십니까? 왜냐하면 반복되는 더러운 이미지를 통해 남자는, 더 이상 수년 동안 더러운 꿈에 시달리지 않도록, 더러운 사진을 다시 보지 않도록 조심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더러운 이미지가 하나님에 의해 모두 제거된다면, 인간은 용서를 받자마자, 그 이미지가 쉽게 지워질 수 있음을 알기 때문에, 더러운 그림을 다시 보고 싶은 유혹을 더 쉽게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신실하여 그 더러운 생각을 물리치고, 정기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의 마음을 채우면, 그 더러운 생각은 점차 그의 기억의 밑바닥으로 가라앉게 될 것입니다. 그것들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너무 낮게 가라앉아서, 더 이상 꿈에서 그를 괴롭히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순수한 생각이 그의 기억의 맨 위에 떠오를 것이고, 그것이 지금 그가 꿈꾸는 것일 것입니다.

13장에서 우리는, 암논이 그의 이복 누이인 다말에게 "사랑에 빠진" 다음, 강제로 그녀를 성추행하는 것을 읽습니다. 그의 정욕이 만족되자, 그는 그녀를 미워했습니다. "미워하는 미움이 사랑한 사랑보다 더하였다"(15절). 다말에 대한 그의 "큰 사랑"이 어떻게 갑자기 미움으로 바뀌었습니까? 그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제로는 단지 "욕망"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모든 젊은이들이 배워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많은 젊은 남자가 어린 소녀와 "사랑에 빠졌다"고 주장합니다. 그들 둘 다 깨닫지 못하는 것은, 거의 모든 경우에 젊은 남자의 소위 "사랑"이 실제로는 정욕이라는 것입니다. 소녀들은 특히 이것을 인식하고, 젊은 남성들에게 착취당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인간적 사랑은 항상 자신의 이익을 추구합니다.

신적인 사랑은 항상 다른 사람의 선을 추구한다는 사실로 구별됩니다.

다윗은 이 죄에 대해 그의 아들 암논을 책망할 수 없었습니다 - 그 자신도 밧세바에게 같은 일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많은 아버지들이 자녀에 대한 영적 권위를 잃고 있습니다.

압살롬의 반역

압살롬은 암논을 죽임으로써 누이 다말의 원수를 갚았습니다. 다윗은 마침내 밧세바와 우리아에게 뿌린 간음과 살인의 씨앗을 그의 가족 안에서 거두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심판에 있어서 매우 정확하십니다. 조만간, 우리는 뿌린 대로 거두기 시작합니다.

15장에서 우리는,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왕이 되고 싶어 음모를 시작한 이야기를 읽습니다. 그는 매일 아침 성문에 서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문제인지 물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그들에게, 좋은 사례가 있지만, 불행히도 다윗 왕은 그러한 문제를 처리할 사람을 임명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그들에게, 자신이 통치자였더라면, 아주 빨리 모든 사람을 도울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들을 다윗에게서 빼앗아갔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때때로 기독교계에서도 일어나는 일을 봅니다 - 누군가가 지도자가 되고 싶어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을 지도자로부터 훔쳐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장로들에게, "내가 떠난 후에, 너희 중에서 일부가,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할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행 20:29,30). 압살롬은 그렇게 했지만, 결코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압살롬의 길을 따르는 사람은 결코 잘 되지 않습니다.

다윗은 목숨을 걸고 왕좌를 떠나 도망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으로부터 좋은 것을 가져오셨습니다 - 다윗이 광야에 있을 때 시편 55, 61, 63편을 썼기 때문입니다. 압살롬이 다윗을 예루살렘에서 쫓아내지 않았다면, 이 시편은 성경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이제 3000년 동안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시련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사역을 주시는 수단입니다.

시편 55:22을 생각해 보십시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붙드시리라. 그분은 의인의 요동함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다." 다윗은 왕궁에서 편히 앉아 있을 때가 아닌, 목숨을 걸고 도주할 때 주님께 자신의 짐을 맡기는 법을 배웠습니다.

압살롬이 통치하기 시작하자마자 많은 사람들이 편을 바꿨습니다. 다윗에게는 아히도벨이라는 믿음만한 조언자가 있었는데, 다윗은 그의 말을 마치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의지했습니다(16:23). 그러나 압살롬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아히도벨이 편을 바꿨습니다. 아히도벨은 밧세바의 할아버지였으며(삼하 23:34와 11:3 비교), 그는 다윗이 그의 손녀에게 행한 악을 복수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압살롬에게 다윗의 아내들과 간음하여 다윗을 모욕하라고 조언했습니다(16:21,22).

그런 다음 그는 압살롬에게 다윗을 죽이는 방법을 조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미 하나님께 짧은 한 문장의 기도로 아히도벨의 조언을 어리석게 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15:31). 한 문장의 기도가 할 수 있는 일이 놀랍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조언을 거절하고 다른 사람의 조언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하여 다윗은 죽임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한 문장 기도를 멈추지 마십시오! 그러나 아히도벨은 교만한 사람이었으며, 이에 노하여 나가서 자살하였습니다(17:23).

다윗이 압살롬을 피하여 도망할 때에, 시므이라는 사람이 그의 집에서 나와 다윗에게 돌을 던지고 그를 거듭 저주했습니다(16:5). 시므이는 사울의 친족으로, 다윗이 사울을 대신하여 이스라엘의 왕위에 올랐기에, 오랫동안 다윗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습니다. 시므이는 다윗이 왕위에 있는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다윗에게 소리를 지르며 말했습니다, "살인자이자 악당아, 여기서 꺼져라. 주님께서 사울 왕과 그의 가족을 죽인 네게 갚아주실 것이다. 네가 사울 왕의 왕좌를 훔쳤으니, 이제 주님께서 네 아들 압살롬에게 왕좌를 주셨다. 마침내 네가 한 대로 보복을 받을 것이다, 이 살인자"(8절 - Living). 시므이가 진짜 진실을 얼마나 모르고 있었습니까? 그렇기는 하지만 오늘날 주의 종들을 많은 일로 고발하는 자들도 이와 같습니다.

다윗의 군사 중 한 사람이 "나로 가서 시므이의 목을 베게 하소서"(16:9)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아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를 저주하라고 명하셨다면(허용하셨다면), 내가 어찌 여호와와 싸워야 하느냐?"(16:10).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다윗의 이해를 보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그를 대적하여 말할 수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깨닫기만 한다면, 우리의 삶에 어떤 안식이 올 수 있을까요?

요압이 압살롬과 싸우러 갈 때, 다윗은 그에게 "나를 위하여 그 청년을 온유히 대하라"(18:5)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어떤 젊은이를 징계해야 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기를 바라시는 바로 그 말씀입니다. 결국 다윗의 군대가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18장 19~32절에서, 우리는 아히마아스라는 청년이 이 승리의 소식을 다윗에게 가장 먼저 알리고자 하여, 다윗에게서 명예를 얻고자 하는 것을 읽습니다. 그러나 요압은 그 소식을 전하기 위해 구스 사람을 대신 보냈습니다. 그러나 아히마아스는 집요했고, 결국 요압은 그가 가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그는 너무 빨리 달려 구스 사람보다 먼저 다윗에게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압살롬이 살아 있는지 가장 알고 싶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아히마아스는 그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비켜서서 구스 사람이 와서 다윗에게 소식을 전하기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것은 두 부류의 설교자의 그림입니다 - 한 명은 가서 설교하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친히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만이, 그가 나중에 오고 첫 번째 사람만큼 인간적으로 "은사를 받지" 못하더라도 온전한 메시지 즉 온전한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보내신 적이 없는, 아히마아스와 같은 많은 예언자들이 "예언"하고 그리스도인들을 속이고 있습니다. 신자로서, 우리는 모든 "예언"을 판단하고, 우리가 보고 듣는 모든 것을 맹목적으로 삼켜서는 안 됩니다.

다윗은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울며 말했습니다. "내 아들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네 대신 죽었더라면 좋았을 텐데"(18:33). 거기에서 우리는 다윗에게서 그리스도의 영을 봅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에게 반역한 자들을 대신하여 죽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는 자를 미워하지 않은, 새 언약의 영이 그 속에 있는 자였습니다.

압살롬은 죽임을 당하고 다윗은 다시 왕위에 올랐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젊었을 때 그가 사울에게서 왕위를 빼앗을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다윗을 시험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가 늙었을 때, 하나님은 그가 압살롬에게서 왕위를 빼앗을 수 있는지 보려고 그를 다시 시험하셨습니다. 두 경우 모두,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왕좌를 주시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는 결코 그것을 스스로 움켜잡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젊어서도 시험하시고 늙어서도 시험하십니다 - 심지어 우리가 그분을 50년 동안 따랐어도 말입니다. 처음에, 다윗은 10년 넘게 도피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에는, 그는 단 며칠 동안만 목숨을 걸고 도망쳐야 했습니다. 각 시련의 기간은 하나님께서 결정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가 우리의 능력 이상으로 시험 당하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다윗의 마지막 날

21장에서, 우리는 해마다 계속된 이스라엘의 기근에 대해 읽습니다. 처음 2년 동안, 다윗은 이것이 단지 자연재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3년째에도 계속되자, 다윗은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여호와께 간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을 때나,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축복이 계속해서 부족할 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그 이유를 찾는 것이 좋습니다. 항상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이 경우, 하나님은 사울이 오래 전에 기브온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이라고 다윗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여호수아에게 죽이라고 명령하신 가나안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기브온 사람들에게 속아,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들과 그들의 후손을 결코 죽이지 않겠다고 그들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사울은 이 언약을 어겼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말을 어길 때 그것을 매우 심각하게 여기십니다 - 심지어 적에게라도 말입니다! 문제가 해결되자, 하나님은 다시 농작물로 그 땅에 복을 내리셨습니다.

22장: 이것은 시편 18편에서 한 마디 한 마디 반복되는 구원의 노래입니다. 여기 17-20절에, 우리의 구원에 대한 아름다운 그림이 있습니다.

23장 2-4절: 다윗은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죽기 전에, 인간의 영적 지도자에게서 발견되어야 하는 자질에 대해 몇 마디 적었습니다. 지도자는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아야 하며, 그의 혀에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그는 사람들을, 의롭게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그의 삶은 빛나는 빛과 같고 그의 간증은 구름 없는 아침과 같아야 합니다.

23장 8-39절에는, 다윗의 용사들과 그들의 업적에 대한 목록이 있습니다. 다윗은 그 자신이 용감한 사람이었고 그의 주위에 다른 많은 용사들을 모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교회에도 사탄과 맞서 싸우고, 필요하다면 혼자서라도 "주님께서 그를 통하여 큰 승리를 거두실 수 있는"(10,12절) 두려움 없는 지도자를 필요로 하십니다. 주님은 그분을 위해 담대하게 "설" 사람을 필요로 하십니다(12절). 다윗은 이스라엘의 통치자로서 큰 책임이 있었고 이 용감한 사람들에게 책임을 위임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혼자 일하지 않았습니다.

24장에서, 우리는 다윗이 범한 두 번째 심각한 죄에 대해 읽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인구 수를 세어보기로 결심했는데, 이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백성을 거느리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이거나 자신의 군대가 얼마나 강한지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의 장군 요압(그보다 주님을 덜 아는 사람)은 그 일을 하지 말라고 권했습니다(3절). 하지만 다윗은 고집을 부렸고 어쨌든 그렇게 했습니다. 이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벌을 내리사, 이스라엘 중에 병으로 죽은 자가 칠만 명이었습니다(15절).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그의 인구 조사가 소용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루에 인구를 70,000명이나 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회개하고 하나님이 그에게 가라고 지시하신 곳, 곧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드린 모리아 산 위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기로 결심했습니다. 아라우나는 왕을 보자마자, 제물로 바칠 모든 수송아지와 나무를 다윗에게 공짜로 바쳤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제안을 거절하고, "내가값을치르지않고여호와께드리지않겠노라"며 값을 치르겠다고 말했습니다(24:24). 이것은 우리가 일생 동안 가지고 있어야 할 좋은 좌우명입니다.

여기 여러분 모두가 평생 기억해야 할 구절이 있습니다. 비용이 들지 않는 것을 하나님께 절대로 드리지 마십시오.

몇 년 후 하나님께서 성전을 지으라고 명하신 곳이 바로 이 자리였습니다(대하 3:1). 아브라함과 다윗이 " 값을 주고 " 드린 곳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집을 짓기 위해 택하신 곳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참된 집인 교회는, 그런 희생정신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세워집니다. 기독교계는 자신의 것을 구하고, 비용이 전혀 들지 않거나 아주 적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상 생활에서 매일 이러한 태도를 가진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나는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는 것을 결코 하나님께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주님을 섬기는 데 어떤 대가를 치렀나요?

장 11
열왕기상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들

이 책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으로 시작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린 최악의 왕 아합으로 끝납니다. 이스라엘은 강력한 국가로 시작하여 분열된 국가로 끝납니다. 많은 악한 왕들이 두 왕국, 특히 이스라엘을 다스립니다.

우리가 반복해서 살펴보았듯이, 하나님의 백성의 상태는 지도자의 영성 여부에 크게 좌우됩니다. 이스라엘은 경건한 지도자가 있을 때마다 경건한 방식으로 전진했습니다. 그들에게 육적인 지도자가 있었을 때,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육욕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항상 경건한 지도자들입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에 무리를 바라보시며, 그들을 목자 없는 양으로 보셨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 가운데 목자들을 보내시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9:36-38). 하나님은 오늘날 인도의 교회들을 보시고, 경건한 지도자들이 똑같이 필요함을 아십니다. 그때 우리에게 오는 도전은, 하나님이 찾으시는 유형의 남자와 여자가 됨으로써 우리 세대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시키는 것입니다.

모든 세대에서 하나님은 경건한 지도자를 필요로 하십니다. 우리는 이전 세대 지도자들의 지혜에 의존할 수 없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을 영원히 다스릴 수 없었습니다. 그는 죽을 것이고, 다른 누군가가 이어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되느냐는 차기 왕이 어떤 유형의 사람이 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경건한 한 사람을 일으켜 한 세대에 일을 시작하게 하십니다. 그는 늙고 죽습니다. 다음 세대의 지도자들은 창시자의 지식과 교리만 가지고 있고, 그의 경건함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사람들은 확실히 길을 잃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시대에 많은 "다윗"과 "드보라"를 필요로 하십니다.

다윗의 마지막 날

다윗의 마지막 날을 살펴보면, 그의 삶에서 슬픈 일들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죽을 때, 그의 아들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 "내가 다음 왕이 되리라"(1:5)고 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왕으로 세우시기를 기다리던 그의 아버지 다윗과 같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다윗이 평생에 단 한 번도 아도니야를 벌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6절). 그는 그에게 회초리를 사용한 적이 없으며, 그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꾸짖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자라는 아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이 가나요? - 특히 그가 잘생긴 아이라면요? 다윗은 매우 좋지 못한 아버지였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스스로 경고를 받을 수 있습니다. 다윗은 전쟁터에서 너무 바빴기에, 가족을 위한 시간이 없었습니다. 당신도 당신의 일이나 사역에 너무 몰두하여 자녀가 어떻게 성장하고 있는지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주님을 섬기기" 때문에 마귀에게 자녀를 잃는다면, 그것은 슬픈 일입니다. 그것은 주님을 섬기는 방법이 아닙니다.

다윗은 임종의 자리에 누워 있었고, 아도니야는 그의 아버지가 이제 무력하다는 사실을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왕국을 장악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나단 선지자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밧세바에게 가서 다윗에게 솔로몬을 후계자로 삼겠다는 약속을 상기시켜 달라고 말했습니다. 나단 또한 다윗에게 가서 아도니야의 악한 계획을 알렸습니다(22절). 그리하여 나단 선지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그 상황으로 가져왔습니다. 교회는 상황에 따라 예언적으로 말할 수 있는 진정한 선지자가 적어도 한 명 있을 때 큰 축복을 받습니다.

다윗은 제사장들에게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으라고 말했고, 사독은 즉시 그렇게 했습니다(32~34절).

2장: 다윗이 죽을 때 솔로몬에게 몇 가지 일을 맡겼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마지막 말은 매우 실망스럽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분의 가장 위대한 종들의 실패에 대해 우리에게 말할 때 매우 정직합니다.

다윗은 솔로몬에게 경건한 지도자가 되는 법과 하나님을 공경하는 법을 가르쳐야 했습니다. 그는 솔로몬에게 여자를 조심하고 한 명 이상의 아내를 두는 등의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경고했어야 했습니다. 대신에 그는 무엇을 말합니까? 그는 그에게 오랫동안 다윗의 신실하고 충성스러운 장군이었던 요압을 죽이라고 말합니다(2:5,6). 다윗이 요압에게 이렇게 보답한 것은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저는 그 이유가, 다윗이 여기에서 아브넬과 아마사만 언급하고 있을지라도, 그의 아들 압살롬을 죽인 요압을 진정으로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다음 다윗은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했기 때문에, 그를 죽이라고 솔로몬에게 말합니다(2:8,9).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할 때, 다윗은 시므이가 자기를 저주하도록 허락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시므이가 죽임을 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관대하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시므이를 용서하고 그를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솔로몬에게, 자신이 시므이에게 한 약속이 솔로몬에게 구속력이 없으므로 솔로몬이 반드시 그를 죽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요압과 시므이를 죽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솔로몬을 통해 그들을 죽였습니다. 그는 적을 죽이기 위해 갱단을 고용하는 사람들과 같았습니다.

2장 10절의 다음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나서 다윗은 죽었다."

그래서 그 복수의 말은 그가 죽기 전에 한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슬픈 일입니다. 다윗은 인생을 아주 잘 시작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사울을 죽이기를 거부했습니다(그의 친구들의 거듭된 권유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이제 그의 삶의 마지막 순간에, 그는 자신이 용서했다고 주장하는 두 사람을 죽이고 싶어합니다. 이것으로 보아, 다윗이 요압과 시므이를 겉으로만 용서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그들에 대한 원한을 끊임없이 품고, 그의 생각이 시므이와 요압이 그에게 행한 악에 자주 머무르는 것을 내버려 두었을 것입니다. 그의 마음이 강한 한, 그는 용서한 척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늙고 마음이 약해지기 시작하면서ㅡ 그의 마음 속에 있던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는 그들을 진정으로 용서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경고입니까!

그러나 다윗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은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용서하셨던, 옛 언약 아래 살았습니다. 옛 언약 아래서,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이 완악하였기 때문에, 많은 것을 허락하셨습니다(마 19:8). 그들 안에는 성령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 아래에서,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용서받을 수 없다고 분명하고 반복해서 가르치셨습니다(마 6:14,15; 18:35). 예수님은 심지어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다른 모든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한 때 용서하셨던 죄는 우리의 계정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 18:22~35).

당신이 용서했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을, 당신은 정말로 용서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쓴 뿌리가 있는 것의 위험에 대해 말씀합니다(히 12:15). 용서하지 않는 태도는 원통함의 뿌리를 매우 빠르게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에게 해를 끼친 사람들의 목록(리스트 작성할 것)을 살펴보고 그들 모두에 대한 원한의 모든 뿌리를 근본적으로 뽑았는지 확인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자신을 파괴할 것입니다. 당신이 임종할 때가 아니라, 지금 당신의 마음이 강할 때 그 뿌리를 뽑으십시오. 어느 날 당신은 노쇠하여 그 뿌리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약해질 수 있습니다.

솔로몬의 초창기

2장: 솔로몬은 이복형 아도니야(19~27절), 사촌 요압(28~35절), 시므이(36~46절)를 죽임으로써 통치를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통치를 시작하기에 참으로 좋은 방법이죠!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솔로몬에게 제안하여 그를 멸망의 길로 인도한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인 다윗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보세요! 이것이 바로 씻어내지 않은 원통함의 장기적인 결과이며,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더럽혀집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복을 주실 것이라고 여전히 상상했습니다(45절). 사람은 이렇게까지 속을 수 있습니다!

3장: 당신이 잘못된 길에서 시작하면, 점점 더 하나님에게서 멀어집니다! 솔로몬이 한 다음 일은 바로의 딸인 이방 여인과 결혼한 것입니다. 다윗이 솔로몬에게 복수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대신, 지혜로운 결혼에 대해 충고하면서 말년을 보냈다면 솔로몬의 인생은 얼마나 달라졌을까요? 당신은 자녀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나요? 인생에서,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솔로몬이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고 분향하는 것 외에는, '여호와를 사랑하였다'(3:3)"는 기록을 읽습니다. 얼마나 모순인가요! 솔로몬은 그러한 타협으로 인해 결국 스스로 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성전과 사생활에서 이중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에 대한 큰 사랑을 많이 표현합니다; 그러나 사생활에서 불의와 죄 가운데 삽니다. 결국 그들의 작은 타락이 큰 것이 되어, 그들을 멸망시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좋은 분이셨습니다. 그가 변화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어느 날 밤 솔로몬에게 나타나,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주겠다"(5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솔로몬이 이르되, "나에게 이해심 많은 마음을 주십시오.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포용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주십시오. 주의 백성을 판단하기 어려우니,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마음을 내게 주십시오"(9절).

여호와께서 그가 구한 것을 기뻐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장수나 재물이나 원수의 생명 멸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므로, 내가 네게 지혜롭고 분별력 있는 마음을 주어, 너와 같은 자가 없고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또한 너에게 부와 명예를 주었고, 너와 같은 왕은 없을 것이다"(3:10-13).

오늘날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분별력이며, 오직 하나님만이 그것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습니다. 지도자인 사람들은 교회 안에 있는 형제자매들의 참된 상태에 대한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 특히 그들 중 누군가에게 책임을 줄 때. 솔로몬이 하나님께 구하여 얻은 것이라면, 우리는 왜 얻지 못합니까? 하나님께서 새 언약 아래서 우리를 더 사랑하시지 않습니까? 그분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솔로몬보다, 우리가 세우고 있는 교회에 대해 훨씬 더 큰 관심을 갖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분은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분별력이 부족하다면, 아마도 우리가 자급자족하면서 하나님께 분별력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두 여자와 아기

3:16-28: 여기서 우리는 솔로몬의 지혜의 예를 봅니다. 어느 날 두 명의 창녀가 판결을 위해 그의 앞에 섰습니다. 그들은 같은 집에 살고 있었고, 서로 며칠 사이에 아기를 낳았습니다. 어느 날 밤, 그들 중 한 명이 자고 있는 동안 실수로 아이를 깔아 뭉개어 죽였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은 그녀는, 즉시 그녀의 아기를, 살아있는 아기와 바꾸었습니다. 아침에, 다른 여자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았을 때, 살아 있는 아이를 돌려달라고 그녀에게 요구했습니다. 그때 그들 사이에 산 아이가 누구의 것인지에 대해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솔로몬은 어떻게 판단했을까요?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솔로몬은 산 아이를 둘로 나누어 각 여자에게 반씩 주라고 제안했습니다. 그 아기를 낳은 첫 번째 여자가 말했습니다, "안돼요, 제발 아기를 죽이지 마세요. 다른 여자에게 아기를 주세요." 그러나 두 번째 여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죽입시다. 당신도 반을 가질 수 있고, 나도 반을 가질 수 있습니다." 즉시 모두가 진정한 어머니가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솔로몬은 "아이를 첫째 여자에게 주라"고 말했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그 판결을 듣고, 하나님이 왕에게 지혜를 주신 것을 보고 왕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오늘날 솔로몬의 지혜를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두 형제가 한 교회에서 함께 일하다가 서로 사이가 나빠졌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리고 나서 그들 중 한 명이 그것을 둘로 나누고 그의 그룹과 함께 철수합니다. 그는 진정한 어머니입니까? 확실히 아닙니다. 진정한 어머니는 "아니요. 그 교회를 나누지 마십시오. 당신은 교회 전체를 독차지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신자들의 교회를 분열시키지 마십시오. 첫 번째 교회에서 분열을 일으키지 않고, 교회를 그대로 두고 당신이 빠져 나와, 다른 곳으로 가서 완전히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축복하실 것입니다. 당신이 참 어머니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그 교회를 맡기기 원하신다면, 그분은 어느 날 다른 여자까지 죽이고 당신에게 그 아이를 주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사울을 죽이고, 왕국을 다윗에게 넘겼습니다. 그분은 오늘도 그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아기를 둘로 자르지 마십시오. 한 교회를 나누지 마십시오. 다른 곳으로 가서 일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의 손으로부터,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시도록 하십시오. 절대 움켜잡거나 나누지 마십시오.

제가 교회의 리더십에 동의하지 않을 때마다, 지켜온 원칙입니다. 나는 그들 중 일부가 나를 따르도록 하기 위해, 교회를 분열시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다른 곳으로 가서 "주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해 주십시오. 제게 다른 아이를 주십시오. 나는 그 아이를 위해 싸우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태도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의 일에 풍성한 축복을 주셨다고 오늘 간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당신에게 추천하고 싶습니다.

4:29(KJV)에서 우리는 읽습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와 심히 큰 분별력 넓은생각과 해변의 모래와 같은 넓은마음을 주셨다." 솔로몬이 아주 젊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젊은이들은 여기에 언급된 이 네 가지 은사를 그들에게 모두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습니다. 지혜, 분별력, 폭넓은 생각뿐만 아니라 "바닷가의 모래와 같은 넓은 마음"도 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해변의 모래와 같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품을 수 있는 큰 마음을 의미합니다(창 22:17).

물세례나 방언에 대해 우리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다른 교단에 속한 형제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받아 주셨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주님, 그가 나와 함께 일하지 않거나 동의하지 않을지라도, 그를 따뜻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넓은 마음을 주십시오"여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만큼 많은 형제자매를 원합니다!

어떤 문제에 대해, 우리와 다른 신념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그 사람을 받아 들일 수 있습니까? 나는, 한번은 한 자매가 침례를 받으러 나에게 왔을 때, 그녀가 금 장신구를 끼고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때 이미, 나는 신자들이 금을 착용해서는 안 된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디모데전서 2:9과 베드로전서 3:3에 대한 나의 이해입니다. 그리고 이 자매는 금을 차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세례를 주어야 하나요, 말아야 하나요? 그때 주님께서 제게 한 가지 질문을 하셨습니다: "너는 내가 그녀를 받아들였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그래서 나는 말했습니다, "주님, 제가 보기에, 그녀는 참으로 거듭났고, 당신은 그녀를 받아 주셨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내가 받아들인 자를, 네가 어떻게 거절할 수 있느냐?"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 그녀의 금과 함께! 그녀는 나중에 그 문제에 대해 빛을 얻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를 판단하는 것은 내 일이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신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 그들의 신념이 저와 다를지라도 말입니다.

한번은 어떤 문제에 대해 주님께서 제게 물으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너는 이 문제를 이해하는 데 얼마나 걸렸느냐?" 나는 그것이 몇 년이 걸렸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렇다면 문제를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상대방에게 나는 왜 인내심을 가질 수 없었을까요?

우리 모두는 넓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젊을 때, 열심이 많고 편협한 편견에 사로잡혀 모든 문제에 대해 우리와 의견이 일치하는 사람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부끄럽지만 어렸을 때 저도 그랬습니다. 그것은 내가 가진 많은 어리석은 태도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이가 들고 주님을 더 잘 알게 되면서, 마음이 넓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6:7에서, 우리는 성전이 어떻게 지어졌는지에 대한 아름다운 내용을 읽습니다. 성전은 멀리 떨어진 채석장에서 산비탈을 깎아낸 돌을 잘라 모양을 만든 돌로 지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돌들을 건축 현장으로 가져왔을 때, 이미 육면체의 모양이 완벽하게 되어 있어서, 성전 터 자체에서는 깎는 소리가 나지 않았습니다. 교회도 이렇게 세워져야 합니다. 우리는 사생활에서 은밀히 우리 자신을 판단하여, 우리가 함께 모였을 때 갈등이나 다툼의 소리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

솔로몬의 타락

솔로몬은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는 데 7년이 걸렸고(6:38), 자기 집을 건축하는 데 13년이 걸렸습니다(7:1). 그래서 우리는 그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압니다!! 그것은 오늘날 기독교 사역을 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 대한 상당히 좋은 설명입니다. 그들은 "기독교" 일을 잘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요 관심사는 자신의 집과 가족의 안락입니다. 하나님의 일과 하나님의 집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복음 전파는 그들을 부자로 만들었습니다.

솔로몬의 타락은 모든 타락이 그렇듯이 점진적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죽임으로써 통치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아버지 다윗의 의견에 쉽게 동의하지 않고, 시므이와 요압 죽이기를 거부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아도니야를 용서하고 그를 죽이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가 미끄러지기 시작하자, 기울기는 더 가팔라졌습니다. 다음으로, 그는 파라오의 딸과 결혼했습니다 - 분명히 그녀의 재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자신의 집을 짓는 데 13년을 보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러한 지혜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행한 일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인 일꾼들이 삶의 시작부터 바로 세상을 향해 표류하는 것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그들은 사역을 시작할 때부터 자신의 권리를 찾기 시작합니다. 몇 년이 지난 후 그들을 보면, 자신만의 것을 찾는 전문가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왕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의 백성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성전이 완성되자, 그분은 그분의 영광으로 성전을 가득 채우셨습니다(8:10,11). 마치 모세가 성막을 완성한 날과 같았습니다. 성전은 성막과 같은 양식으로 지어졌지만, 훨씬 더 크고 웅장한 규모였습니다.

솔로몬은 아름다운 헌신의 기도를 드렸습니다(8:22-61). 그러자 여호와께서 두 번째로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기도를 들으셨다고 말씀하시고, 그의 왕국이 굳게 설 수 있도록 정직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행하라고 다시 한 번 촉구하셨습니다. 그분은 또한 솔로몬이 여호와를 따르지 않는다면, 이스라엘이 그 땅에서 쫓겨나고 성전이 폐허 더미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9:3~9).

바벨론 사람들이 와서 유다를 점령하고 성전을 파괴했을 때 일어난 일이 바로 그런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네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으면서, 내가 너희를 계속 축복해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라"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길을 잃기 훨씬 전에 우리에게 경고하십니다.

10장에서 우리는, 스바의 여왕이 솔로몬의 놀라운 지혜를 들었기 때문에, 와서 그를 만났다는 것을 읽습니다. 그러나 지혜에 대한 그의 세계적인 명성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은 인간적인 면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대부분의 기독교인처럼, 공개적으로 주님께 아름다운 기도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생활에서, 그는 다른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마찬가지로 경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정욕에 있어서 삼손과 경쟁했습니다 - 그는 700명의 아내와 결혼했고, 그것도 모자라 300명의 첩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 대부분 주변 이교도 국가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3년에 한 번만 그들 각각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 아내들은 마침내 그를 여호와에게서 떠나 우상 숭배에 빠지게 했습니다.

결혼을 계획할 때, 단지 예쁜 얼굴을 찾지 마십시오. 그 소녀가 경건한 삶을 살고자 하는 소망을 가지고 있는지 보십시오. 그것은 장기적으로 훨씬 더 중요합니다. 얼굴만 예쁜 여자가 당신의 인생을 망치고 파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경건한 여자는 평생 동안 당신에게 선을 행할 것입니다. 성경에는 많은 경고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때가 되면 그것들에 주의를 기울일지 모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임(예배)에서 그런 말을 들으면 고개를 끄덕입니다. 하지만 결혼할 때가 되면, 단지 여전히 얼굴이 예쁘다는 이유만으로 세상 여자를 택합니다. 그리고 자매 여러분, 제가 여러분에게도 권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당신의 남편이 될 경건한 사람에게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하십시오. 부모님이 회심하지 않은 사람을 제안하는 경우, 그들의 제안에 굴복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배우자는 당신을 돈, 쾌락, 경건하지 않은 오락 등의 우상 숭배하는 길로 이끌 수 있습니다.

솔로몬이 타락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진노하셔서 그의 왕국을 둘로 나누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11:9-11). 그러나 다윗은 경건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솔로몬의 생전에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11:12). 거기에서 우리는 자녀들이 그들의 아버지의 경건함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축복을 받는지 봅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을 괴롭게 하기 위해 대적들을 일으키셨지만, 그는 여전히 회개하지 않았습니다(11:14). 솔로몬은 여로보암이 자신에게 반역할까 두려워, 여로보암을 죽이려 했습니다(11:26,40). 후에 여로보암은 분열된 왕국(북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솔로몬은 죽었습니다(11:43).

솔로몬은 그의 생애 동안 성경에 세 권의 책을 썼습니다. 그 중 두 권인 잠언과 솔로몬의 노래(아가)는 구약 안에 있는 새 언약 책과 같습니다. 잠언은 구약 성경에서 가장 훌륭한 책입니다. 모든 청소년은 정기적으로 자주 읽어야 합니다. 31개의 장이 있습니다. 하루에 한 장씩 읽으면, 많은 악으로부터 당신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의 노래(아가)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분의 신부로 섬기는 우리의 헌신에 대한 놀라운 그림입니다.

전도서는 솔로몬이 표류한 후에 기록되었습니다. 그 안에서, 그는 세상 지혜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합니다.

성경의 세 권의 놀라운 책을 쓴 이 사람이 마침내 지옥에 갔습니다! 일어서서 멋진 설교를 하는 모든 사람이 천국에 갈 것이라고 상상하지 마십시오.

솔로몬이 지옥에 갔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성령님께서 솔로몬의 전기를 두 권(열왕기상과 역대하)을 쓰셨는데, 그가 실제로 회개했다면, 성령님께서 그 두 권 중 어느 것에도 그의 삶이 끝날 무렵에 그가 회개했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침묵은 매우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솔로몬은 회개하지 않고 죽었다고 말합니다. 므낫세는 솔로몬보다 훨씬 더 큰 악을, 더 오랫동안 행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의 끝에서 그는 회개했고, 성령은 그것을 성경에 언급합니다(대하 33:12,13). 솔로몬이 회개했다면, 성령님께서 그것을 언급하지 않으셨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솔로몬을 천국으로 보내는 것"에 열심인 것입니까? 주님을 섬기는 사람은 어떻게 살든, 반드시 천국에 갈 것이라고 상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날에 주님께 와서,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예언하였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였나이다"라고 말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죄 가운데 살았던 자들아, 나를 떠나라"(마 7:22, 23)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 날에 솔로몬도 여호와 앞에 와서, "주여, 내가 수천만 명을 축복한 세 권의 성경을 기록하였나이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다른 사람들에게 "죄 가운데 살았던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말씀하신 그대로, 그에게도 말씀하실 것입니다. 솔로몬의 생애가 우리 모두에게 경고가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고전 9:27)라고 말했습니다.

분열된 왕국

12장부터 열왕기상 끝까지, 우리는 분열된 왕국에 대해 읽습니다. 솔로몬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궁전을 짓게 하고 다른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를 섬기도록, 열심히 일하게 만든 매우 잔인한 왕이었습니다.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위에 오를 때에, 백성 중 몇 사람이 그에게 나아와, "당신의 아버지가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습니다. 이제 저희의 멍에를 가볍게 해 주십시오"(12:4)라고 말했습니다. 왕은 그들에게 3일 뒤에 다시 오라고 했습니다. 그 3일 동안, 르호보암은 장로들과 의논했습니다. 장로들은 신하들을 친절하게 대하면 그들이 영원히 그를 행복하게 섬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젊은이들과 의논했고, 그들은 그에게 백성들에게 더 엄하게 대하라며, "내 새끼 손가락은 아버지의 허리보다 두꺼울 것이다. 내 아버지가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했다면, 나는 전갈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리라"(12:11)라고 말하라고 했습니다. 그 이후의 다른 많은 어리석은 사람들처럼, 그는 장로들이 아닌 젊은이들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왕국의 85%를 잃었습니다. 열 지파가 그에게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르호보암은 참으로 어리석었습니다! 그는 어리석은 한 마디로 왕국을 분열시켰습니다.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남쪽에 있는)만이 르호보암에게 충성했습니다. 여로보암은 스스로를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는 북쪽의 다른 열 지파의 왕이 되었습니다. 이제 여로보암은, 자기 백성이 연례 절기에 요구되는 대로 일 년에 세 번 예루살렘에 가서 남왕국 백성과 섞이면, 자기 백성에 대한 통제권을 잃을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는 세겜에 예배당을 지어 백성들이 그곳에서 절기를 지낼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는 거기에 우상을 세우고, 모든 사람을 우상 숭배에 빠지게 했습니다.

13장: 여기서 우리는, 여로보암 왕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를 받은 젊은 선지자에 대해 읽습니다. 그는 가서 그것을 신실하게 전달했고, 주님은 그의 예언을 왕에게 초자연적으로 확인해 주셨습니다. 그런 다음 왕은 식사와 보상을 위해 선지자를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전에 선지자에게 그가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젊은 선지자는 주님의 명령에 충실했고, 나라의 절반을 준다 해도 자기는 왕과 함께 집에 가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참으로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계속 그렇게만 했다면 좋았을 텐데요!

그러나 그 지역에 살고 있던 나이든 선지자가 있었는데, 그는 일어난 일을 듣고, 하나님께서 왕에게 이 강력한 메시지를 전할 젊은 사람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에 불안해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질투했습니다. 그는 젊은 선지자를 만나러 가서, "주님께서 젊은 예언자를 집에 초대하여 식사를 하라고 (자기에게) 말씀하셨다"는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 청년은, 바보같이, 주님의 원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주님께서 그에게 알리지 않고 마음을 돌이키셨다고 생각하며, 나이든 예언자의 말을 듣고 가서 그와 함께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의 불순종 때문에, 젊은 예언자는 주님으로부터 벌을 받았습니다. 그는 사자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어떤 교훈을 배워야 합니까? 오늘날, 많은 은퇴한 "예언자"들은 젊은 예언자들을 시기하고 종종 그들을 파멸시키려 합니다. 젊은 예언자들은 그러한 은퇴한 타락한 "예언자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당신에게, "주님께서 나에게, 당신에게 이렇게 말하라고 하셨다...." 라고 말하는 사람을 조심하십시오, 그들을 믿지 마십시오. 만약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말씀을 주시기 원하시면, 당신에게 직접 주실 것입니다 - 옛 언약 시대와 달리, 그분은 당신에게 성령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엘리야와 그의 사역

17장에서 우리는 엘리야에 대해 읽습니다.

여러분이 엘리야에 대해 가장 먼저 주목하기를 바라는 것은, 그가 아합 왕에게 한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계시니, 내가 그 앞에 서 있나이다"(17:1). 이 참 예언자들이 왕을 두려워하지 않은 이유는, 한 가지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 앞에 서 있었습니다. 왕들은 하나님 앞에서 티끌에 불과했습니다. 인도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그러한 예언자가 될 수 있는 젊은이들입니다. 성경 지식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얼굴 앞에서 살기 위해서는, 양심을 100% 깨끗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 99%가 아니라, 100%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완전히 낮추어야 합니다. 당신의 얼굴은 항상 흙바닥에 두어야 합니다. 엘리야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젊은 남자들을 찾지 못하신다면, 나는 그분이 인도에서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살고 하나님의 목소리가 되는 젊은 자매들을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강단에 설 수는 없지만, 당신의 집에 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하나님 앞에 사는 많은 형제자매들을 필요로 하십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작은 일에도 즉시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날 그에게, 그릿 시냇가에 가서 숨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그리고 그는 즉시 갔습니다(17:3). 거기서 까마귀들이 그에게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그는 시냇물을 마셨습니다(6절). 매일 아침 저녁으로 까마귀가 그에게 고기를 가져다 주곤 했습니다. 까마귀가 그에게 채소를 가져왔다면, 그것 자체가 기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까마귀가 (좋아하는) 고기를 가져오는 것은 더 큰 기적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공급하신 방법입니다. 그러나 며칠 후, 엘리야는 주님이 아니라 까마귀를 의지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많은 종들은 그들의 재정적 필요에 대해 주님을 신뢰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몇 년 후, 그들은 더 이상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정기적인 지원을 보내는 인간인 일부 까마귀에게 의존합니다! 그래서 시냇물이 마르자, 여호와께서 까마귀를 멈추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가 시냇물과 까마귀를 의지하는 것을 떨쳐버리고, 다시 한 번 주님만을 의지하도록 가르치기를 원하셨습니다. 까마귀가 오지 않을 때, 약속한 지원이 오지 않을 때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필요에 대해 주님만을 신뢰하는 법을 다시 한 번 배우게 될 것입니다. 나는 그런 경험을 겪었습니다. 까마귀에게서, "천 개의 언덕에 가축을 소유하시고"(시 50:10),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광 안에서 그의 풍성함을 따라"(빌 4:19) 나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에게로, 내 눈을 돌리게 하신 시간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런 다음 주님은 그분의 방법을 바꾸시고, 이제 엘리야에게 사르밧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르밧은 이스라엘 밖에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그곳에 있는 어떤 부유한 사업가가 자신을 돌봐 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사르밧에 이르렀을 때, 그가 발견한 것은 부유한 사업가가 아니라, 이제 막 마지막 식사를 하려는 가난한 과부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엘리야에게, "그녀가 너를 지원해 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일을 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까마귀나 부유한 사업가가 아니라, 그분을 신뢰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당신이, 당신을 도울 수 있을 것이라고 전혀 기대하지 않는 연약한 사람을 사용하실 것이며, 그를 사용하여 아무 육체도 그분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실 것입니다(고전 1:29).

과부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마지막 식사를 하고 죽으려던 참이었어요"(17:12). 엘리야가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나에게 먼저 그것으로 작은 빵 케이크를 만들어 주십시오. 주님께서 땅 위에 비를 내리시는 날까지, 밀가루 그릇이 다 소진되지 않을 것이며 기름 항아리가 비어 있지 않을 것입니다"(17:13, 14). 그리고 밀가루 그릇은 소진되지 않았고 기름 항아리는 비어 있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이 사건을 이용하여 가난한 사람들이 그들에게 돈을 주도록 가르치는 많은 설교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사건에 대한 완전한 오해입니다. 우선, 오늘날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엘리야 같은 예언자가 아닙니다. 둘째, 오늘날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엘리야와 달리,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만으로도 엘리야는,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오늘날의 설교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부류에 속합니다. 더욱이, 엘리야는 기근의 때에 생존하기 위해 과부에게 단지 한 끼의 식사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과부와 그녀의 아들이 먹던 것과 같은 음식을 먹었습니다. 오늘날의 설교자들은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호화로운 생활 방식을 지원하기 위한 돈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엘리야는 그 과부에게서 한 끼만 먹었지만 수개월 동안 기근이 끝날 때까지 그녀와 그녀의 아들을 위해 음식을 제공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예언자에게 준 것보다 백 배나 더 받았습니다. 오늘날 어느 설교자가 그렇게 합니까? 오늘날 수많은 거짓 예언자들이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하나님의 백성들 대부분은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분별할 줄 모르기 때문에, 미혹을 당합니다.

18장에서, 우리는 오바댜라는 사람에 대해 읽습니다. 그는 아합의 궁궐 관리인이었으며, "여호와를 크게 경외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3절). 이것은 단지 그가 종교인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열왕기하 17장 33절에도 다른 사람들에 대해 "그들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들 자신의 신들을 섬겼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어떻게 진정으로 여호와를 경외하면서도 사악한 우상을 숭배하는 왕의 궁전의 관리인으로 살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오바댜는 분명히 그의 종교와 함께 자신을 위한 안락한 삶을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제자도의 대가를 치르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그랬습니다. 그는 유대인 산헤드린을 떠나 멸시받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가 메시야인 줄 알면서도, 사람의 영광을 구하였기에, 은밀히 예수를 따르려 했습니다. 그런 신자는 결코 사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어떤 목적을 수행합니다. 예수님의 몸이 십자가에서 내려져야 했을 때, 빌라도의 궁전에서 요셉의 영향력은 가치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오바댜 또한 여호와의 몇몇 선지자를 도왔습니다.

우리는 그러고 나서 엘리야가 이스라엘에게 던진 도전에 대해 읽었습니다. "모두를 갈멜 산으로 부르십시오,"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했습니다(19절). 아합은 왕이었지만, 엘리야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시키는 대로 이스라엘 백성을 갈멜 산으로 불렀습니다. 그러자 엘리야가 바알의 예언자 450명에게 말했습니다, "각각 소 한 마리씩을 골라, 그 밑에 불을 피우지 않고 제단을 만들어 봅시다. 그런 다음 너희는 너희의 신을 부르고, 그에게 불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시오. 그리고 나는 나의 하나님을 부를 것이오. 불로 응답하는 분이 참 하나님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좋은 생각입니다. 그렇게 합시다"라고 말했습니다(18:23,24).

그러자 바알의 선지자들은 소를 제단 위에 올려놓고, 뛰고 소리 지르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뛰고 소리치고 비명을 지르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바알 숭배자들처럼 육신적이거나 회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여기에서 주목하는 것이 좋습니다! 엘리야는 그들을 조롱하며 말했습니다, "더 크게 외쳐라. 아마도 그는 잠이 들었고 깨워야 할 것이다. 아니면 화장실에 있을지도 모른다!"(18:27). 그들은 여전히 더 크게 외치고, 자해하고, 6시간 넘게 열광했습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도했는지요! 나는 때때로 선한 양심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할렐루야를 외치는 것을 볼 때 이 바알 숭배자들을 생각합니다; 서로 말도 하지 않을 정도로 사이가 안 좋은 형제들이, 같은 모임(예배)에서 서서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할 때; 서로 싸우던 남편과 아내가 주일 모임에 와서 방언을 할 때 등등. 많은 기독교 모임은 시끄럽지만 불은 없습니다. 당신은 6시간 동안 외칠 수도 있고, 심지어 철야 기도 모임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선한(흠이 없는, 완전한) 양심을 찾으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항상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합니다, "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전화를 받으시고 듣고 계시는지 확인하십시오. 당신의 마음에 죄가 있으면,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실 것입니다"(시 66:18).

이제 엘리야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는 제단을 만들기 위해 12개의 돌을 집어 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 분열되었음을 기억하십시오 - 한 나라에 10개 지파, 다른 나라에 2개 지파. 그러나 엘리야는 그 나라들과 교파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돌 12개를 집어 들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든 백성의 하나됨을 믿었습니다. 베냐민 지파와 유다 지파도 포함시킨 것에 대해, 그곳에 있던 사람들 중 일부는 그에게 화를 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의 의견에 개의치 않았습니다.

제단 아래에 비밀의 불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는 물 열 두 주전자를 제단에 부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1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여, 주는 하나님이시며, 나는 주의 종인 줄 알게 하옵소서" (18:36). 불이 떨어지자 모든 백성이 엎드려 여호와께서 참 하나님이심을 시인했습니다. 이제 온 이스라엘이 자기 편이 된 상황에서, 엘리야는 바알의 예언자 450명을 잡아 모두 죽였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불만이 하나님의 참된 종을 식별하는 표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을 그분에게로 돌이키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이제 백성이 회개하였으므로, 엘리야는 아합에게 곧 비가 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3년 반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런 다음 엘리야는 산꼭대기로 올라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땅에 엎드려, 얼굴을 무릎 사이에 두고 기도했습니다(42절). 그는 비가 오는지 알아보기 위해 종을 보냈습니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 종을 일곱 번이나 되돌려 보냈습니다. 드디어, 구름이 생겼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엘리야의 끈질긴 기도를 봅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같은 본성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고, 3년 6개월 동안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에서 비가 쏟아졌습니다"(약 5:17,18). 이전의 가뭄 역시 엘리야의 끈질긴 기도의 결과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의 끈질긴 기도의 결과로 비가 내렸습니다. 끈질긴 기도에 대한 그의 모범은 우리 모두에게 도전이 됩니다. 우리는 너무 빨리 기도를 포기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가 갖기를 원하시는 것을 받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기도를 마치고 일어나,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아합의 병거 앞에서 이스르엘까지 6마일을 달려가, 그 말들을 앞질렀습니다(46절).

이세벨은 그녀의 거짓 예언자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화가 나서 엘리야에게 다음에는 그를 죽이겠다고 전갈을 보냈습니다. 왕도, 850명의 거짓 선지자도, 온 민족도 두려워하지 않던 권세 있는 선지자가, 이제는 한 여인의 위협에 두려워 움츠러들었습니다. 그는 우리와 얼마나 닮았습니까?

성경이 우리에게,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들의 약점과 실패에 대해 정직하게 말하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나는 그것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슈퍼맨을 택하지 않으시고, 평범한 사람들을 택하여 그분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엘리야는 3년 반 동안 기근을 겪었고 이제 기진맥진했습니다. 이 모든 일이 그를 크게 낙심케 하여, 그는 이스라엘을 떠나 산으로 도망하여 로뎀 나무 아래 누웠습니다(19:5). 천사가 하늘에서 왔습니다. 천사는 엘리야에게 권고가 아닌, 음식을 주었습니다. 그는 다시 자고 일어났습니다. 다시 천사가 그에게 음식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는 방식에 있어서 매우 "현실적"이시고 실제적입니다. 많은 경우, 낙심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약간의 음식과 잠입니다. 약간의 격려와, 약간의 음식과 작은 선물이, 많은 설교보다 훨씬 더 사람들을 격려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옛 언약 아래 있었습니다. 그의 낙담은 우리가 위안을 얻을 수 있는 본보기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는 엘리야가 아니라 결코 낙심하지 않으셨던 예수님을 바라보며 경주를 달립니다. 우리는 어떤 때에도 결코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모두 우리가 누구를 따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엘리야는 자신이 홀로 이스라엘에 남아 하나님을 위해 서 있는 것을 상상하고, 하나님께 그의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19:10,4).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에게 이스라엘에 그 외에 다른 사람들이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실, 주님은 이미 그의 뒤를 이를 다음 예언자가 될 사람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그를 대신하게 하였습니다(19:16). 주님은 또한 엘리야에게, 이스라엘에 바알에게 절하기를 거절한 7000명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19:18). 그렇게 하나님은 그 나라에 남은 자를 두셨습니다.

그러나 그 7000명과 엘리야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하나님의 불을 하늘에서 내려오게 하여, 그 민족을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엘리야만이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 이것은 두 부류의 신자에 대한 그림입니다:

1. 한 그룹은 소극적인 증거를 합니다 - 그들은 우상을 숭배하지 않고, 담배를 피우지 않고, 술을 마시지 않는 등입니다.

2. 다른 하나는 엘리야처럼 적극적인 증거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의 불로 타오르고 있습니다. 타협하지 않는 한 명의 선지자는 오늘날 하나님을 위해, 미온적인 7000명의 신자보다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19장 19~21절: 여기서 우리는 엘리야가 엘리사를 부르는 것을 읽습니다. 엘리사가 소를 몰고 들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을 때, 엘리야가 그를 불렀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는 세속 일에 충실하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항상 부르신다는 사실에 주목하십시오. 모세는 장인의 양을 충실히 돌보고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다윗은 양을 돌보며 사자와 곰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아모스는 열심히 일하는 목자였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안드레는 열심히 일하는 어부였습니다. 마태는 테이블에 앉아 회계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하나님이 그분의 섬김을 위해 게으른 사람을 부르신 것을 결코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엘리야가 엘리사가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엘리사의 집에 가서 그를 부른 것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 왜냐하면 우리는 그가 게으른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저녁에 베드로를 부르러 그의 집에 가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그가 낚시를 할 때 부르셨습니다. 이 모든 예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그분을 섬기도록 부르시기 전에, 우리가 세상 일에서 충실하고 열심히 일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당신이 땅의 일에 충성하지 않는데, 어떻게 하늘의 일에 충성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어려서 아직 집에 있다면, 집에서 충실한 아들딸이 되십시오.

두 번째로, 이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자마자,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났다는 사실에 주목하십시오. 우리는 베드로, 요한, 마태와 여기 엘리사에게서 그것을 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부르심에 즉각적이고 전심으로 응답할 자를 부르십니다. 그들은 자신의 감정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기 위해, 경건한 사람들을 통해 그들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인하려고 노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확신이 들면, 재빨리 행동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섬기기 위해서 그런 사람만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을 섬기려면 즉각적인 순종과 전적인 헌신과 수고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속적인 일을 하는 동안 우리를 시험하셔서, 우리가 충성스러운지 알아보십니다. 당신이 방 청소를 부탁 받았는데 당신이 그것을 하는 방법에 대해 부주의하거나 대충한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그분을 섬기도록 부르실지 의심스럽습니다. 방 청소가 그렇게 된다면, 마음도 그렇게 청소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분의 교회를 청소하기 위해, 어떻게 당신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은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21장에는, 아합의 이웃인 나봇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나봇에게는 아합이 사고자 하는 포도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봇은 하나님의 법에 따라, 그것을 팔기를 거절했습니다(레 25:23). 그러나, 이세벨은, 나봇을 거짓으로 고발하여 죽였고, 그리하여 아합은 포도원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두려움 없는 엘리야는 이제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아합과 대면하고, 나봇을 죽인 것에 대해 하나님이 그를 심판하실 것이며 언젠가는 개들이 아합의 피를 핥을 것이며, 그의 가문은 멸망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아합이 두려워하여 자기 옷을 찢고 금식했습니다(27절). 그런 다음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아합을 긍휼히 여기시고 오직 다음 세대에만 그의 가문에 대한 심판을 내리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자비로우신지 보면 놀랍습니다. 하나님은 겸손을 지극히 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에 (그토록 악했던) 아합이 자신을 낮췄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것을 눈여겨보시고 심판을 연기하셨습니다.

22장에서는, 우리는 유다 왕 여호사밧의 어리석음에 대해 읽습니다. 아합은 그에게 아람 왕과의 전쟁에 동참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여호사밧은 즉시 동의했고, 동의한 후에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로 결정했습니다(22:4,5). 아합은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승리를 주실 것을 선뜻 "예언"한 거짓 선지자 400명을 즉시 모았습니다(22:6). 하나님의 불이 내린 직후, 이스라엘에서 거짓 선지자들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보는 것은 놀랍습니다! 모든 시대에 걸쳐 그러했습니다. 거짓 선지자와 설교자들은 모든 세대에 걸쳐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기 위해 도처에 넘쳐났습니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이 400명 중 누구도 진정한 예언자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할 만큼 충분한 분별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합은 선지자 미가야가 한 명 더 있다고 말했습니다 - 그러나 미가야는 항상 아합에 대한 심판을 예언했기 때문에 아합은 그를 미워했습니다. 미가야가 부름을 받았고, 그는 이스라엘 군대의 패배를 예언했습니다. 아합은 그에게 너무 화가 나서 그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여호사밧은 어리석게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합과 연합했습니다. 적군이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아합은 죽임을 당하지 않기 위해 변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발사된 길 잃은 화살이 그를 죽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개들이 그의 피를 핥았습니다(21:19; 22:38).

이 책은 다윗이 통합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것으로 시작하여, 그 나라가 둘로 갈라지고 타락한 상태에 있는 것으로 끝납니다 - 악한 아합이 한 부분을 다스리고 타협하는 여호사밧이 다른 부분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이 책에서 선지자 한 사람이 나라에 미칠 수 있는 엄청난 영향을 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교회에 선지자를 필요로 하십니다. 그들만이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의 하락 추세를 저지할 수 있습니다.

장 12
열왕기하

이 책은 이스라엘과 유다라는 두 나라와 그들을 다스리는 왕들에 대한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을 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거의 모든 왕이 나빴습니다. 유다에서는, 좋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또한 여기에서 두 나라가 어떻게 포로가 되었는지 읽습니다. 기원전 730년경 앗수르인들이 와서 북쪽 이스라엘 왕국을 점령했습니다. 앗수르인 중 일부는 사마리아의 유대인들과 결혼했고, 그렇게 해서 (예수님 당시에는) 다른 유대인들이 전혀 거래하지 않았던 사마리아인이 탄생했습니다. 약 150년 후, 남유다 왕국은 바벨론(앗수르 다음으로 세계 강대국이 된 나라)에 의해 점령당합니다. 비극은 유다가 이스라엘의 실패로부터 어떤 교훈도 얻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현명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실수에서 배웁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결코 배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지혜로워질 수 있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지혜롭게 되는 한 가지 방법은 다른 사람의 실수로부터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실패 사례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 아담과 이브, 가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여호수아, 다윗 등. 우리는 또한 우리 주변에서 보았던 교회와 설교자의 실패로부터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러한 실수들을 반복하지 않아도 됩니다.

엘리야의 뒤를 이은 엘리사

1장: 이스라엘의 새 왕 아하시야는 그의 우상 숭배를 책망한 엘리야에게 몹시 화를 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를 잡으려고 50명의 군사를 보냈습니다. 엘리야는 군대 장관에게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너와 네 오십 군사를 사를지어다"(1:12)라고 말했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즉시 내려와 그들을 다 죽였습니다. 이런 일이 50명으로 구성된 다른 군사들에서도 두 번째로 발생했습니다. 세 번째 장관은 엘리야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했고, 그러자 엘리야는 그와 함께 가서 왕에게 우상숭배 때문에 죽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같은 장소인 이 곳(사마리아)에 오셨을 때 사마리아인들이 그분을 영접하지 않자 야고보와 요한이 언급한 것은 바로 이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은 엘리야가 한 것처럼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을 그들을 꾸짖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어떤 영을 가지고 있는지 깨닫지 못한다. 나는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러 온 것이지, 그들을 멸망시키러 온 것이 아니다"(눅 9:55,56). 거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새 언약의 영과 옛 언약의 선지자들의 영 사이의 차이를 봅니다.

2장: 여기에서 우리는 엘리야가 엘리사를 시험했을 때, 우리는 엘리사의 끈기를 봅니다. 엘리야가 승천하려 할 때, 엘리사는 그와 함께 길갈로 갔습니다.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그가 벧엘로 가므로 길갈에 머물라고 말했습니다. 엘리사가 말했습니다, "아니요,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벧엘에서,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그가 여리고로 가므로, 여기 머물라고 다시 말했습니다. 엘리사는 다시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나는 당신과 함께 갈 것입니다." 여리고에서도, 같은 장면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런 다음 엘리야는 요단으로 갔습니다. 그들이 요단 강에 이르렀을 때, 엘리야는 물을 쳐서 강에 길을 내었고 두 사람은 걸어서 건너갔습니다. 그러자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따르느냐?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당신은 어떻습니까? 당신은 무엇을 원하십니까? 더 많은 수입, 자동차 또는 새 집을 원하십니까?

그러나 엘리사는 "내가 당신 영의 갑절을 원합니다"(2:9)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다른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엘리야에게 임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원했습니다. 그것이 그가 엘리야를 뒤쫓은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역을 맡기시기 전에, 우리 또한 시험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특정한 경험을 - 우리를 길갈로 데려가심 -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에 만족하는지 확인하실 것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만족하지만,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아니요, 주님, 저는 만족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람들을 더 멀리 인도하시고 그들에게 더 깊은 경험 - 벧엘을 주실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에게 몇 가지 비전을 줄 수 있습니다. 일부 사람은 그것에 만족할 것입니다. 다른 이들은 "아니요, 주님. 나는 당신을 더 원합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아마도 그분은 당신을 통해 기적을 행하실 것입니다. 일부는 이제 만족할 것입니다. 다른 이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주여, 당신 위에 머물렀던 그 영이 나에게도 임하여 당신의 형상으로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그 이하로는 만족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에게는 그런 갈망이 있나요?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으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가장 좋은 것보다 훨씬 못한 것 - 25%, 50% 또는 75%에 안주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보아 왔습니다. 자기 세대에 하나님의 가장 좋은 것을 추구했던 엘리사처럼 되세요. 그는 기름 부음을 두 배로 받았습니다, 그가 끈질기게 버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엘리야가 행한 것보다 두 배나 많은 기적을 행했습니다.

당신이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에게 가서 "나는 성령세례를 원합니다"라고 말하면, 그들은 "오, 그것은 간단합니다. 단지 당신의 머리에 내 손을 얹게 해주세요"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는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당신에게 무엇인가를 중얼거려 달라고 요청한 다음 "당신은 그것을 얻었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뭐라고 말했습니까? 그는 엘리사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성령을 갑절이나 받기를 원하느냐?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너는 매우 어려운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하시면, 네가 얻을 것이다"(2:10). 엘리야는 그 문제를 하나님의 손에 맡겼습니다. 여기서 엘리야는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기고 하늘에서 아버지 우편에 있는, 나를 보고 나를 믿으면, 너는 기름부음을 받을 수 있다."

갑절의 기름부음은 받기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아닌, 주님만 바라보면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당신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오늘날에도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 어떤 사람도 아닙니다. 세례요한도 "나는 너희에게 물로만 세례를 베풀 수 있다. 그러나 그분은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무도 당신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줄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세례자이십니다. 그러니 곧장 그분께로 가십시오.

엘리야와 엘리사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불 병거가 와서 엘리야를 태워 올라갔습니다. 엘리사는 이것을 보고, 떨어진 겉옷을 가져다가 갑절의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이에 대한 즉각적인 증거도 있었습니다. 그가 요단 강에 이르렀을 때, 그는 물을 쳐서 바로 건너갔습니다. 기름 부음은 우리 삶에서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는 소리를 지르거나 비명을 지르거나 우리의 경험을 누구에게도 말할 필요 조차도 없습니다. 우리의 삶과 사역은 심지어 우리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도 스스로를 대변할 것입니다.

엘리사의 기적

우리는 엘리사가 행한 다양한 유형의 기적에 대해 더 많이 읽습니다. 한 도시에서는 물이 매우 안 좋았습니다. 엘리사는 그들에게 소금을 가득 담은 새 그릇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가 그것을 물에 부었더니 물이 깨끗해졌습니다(2:20).

3장 11절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다른 사람들이 예언자 엘리사에게 부여한 아름다운 칭호를 봅니다: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자." 매번, 엘리야가 식사를 마치면, 엘리사는 물을 가져와 엘리야가 손을 씻도록 부었습니다. 그는 그 일을 매우 규칙적이고 충실하게 수행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그에게 그 칭호를 주었습니다! 그렇게 엘리사는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역을 맡기시기 전에, 작은 일에서 우리의 신실함을 시험하실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가 차기 지도자가 되기까지, 여러 해 동안 모세를 충실히 섬겼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을 신실하게 섬기고 사도가 되었습니다.

엘리사는 처음 시작할 때, 위대한 설교자나 위대한 선지자로 알려지지 않았었습니다. 그는 하인(종)으로만 알려져 있었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다른 사람을 섬길 기회가 아닌, 사역에서 명성을 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가장 좋은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삶이 끝날 때까지 사람들의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고 그분의 본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몇 년 동안 사람들의 발을 씻겨 주는 것으로 시작해서, 더 고위급 사역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의 삶이 끝날 때까지 사람들의 발을 씻겨주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는 항상 비천한 일을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다른 이들에게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섬기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0:28). 항상 종이 되십시오 - 당신의 지상 생활이 끝날 때까지. 당신이 영원히 주님의 종이 되고 싶다면, 영원히 사람들의 종이 되십시오. 항상 자신을 다른 사람의 하인으로 생각하고, 그 외에 다른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주님을 섬길 때,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당신을 섬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기뻐하지 마십시오. 그들을 당신의 종으로 여기지 마십시오. 그들은 당신의 형제입니다. 기꺼이 그들을 섬기고 그들의 발을 씻겨 주십시오. 오늘날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주(왕)"가 되었고, 그것이 그들의 사역에서 기름 부음이 사라진 이유입니다.

저는 여기서 여러분에게 예언 사역에 대해 다른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엘리사는 예언을 하기 위해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고자 할 때, 수금을 타는 사람을 구했습니다(3:15). 음악가가 연주를 시작하자, 주님의 손이 엘리사에게 임했고 그가 힘있게 예언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경건한 음악의 가치를 봅니다. 나는 내 인생에서 주일 아침 예배와 찬양 시간에, 주님의 손이 내게 임하여 내가 모임(예배)에 올 때 갖고 있지 않았던 말씀을 주셨던 때가 수없이 많이 생각납니다. 그 기름부음 받은 음악에는, 예언의 영을 엘리사에게 가져다 준 능력이 있었습니다.

선지자도 때때로 음악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음악을 이끄는 사람들은 기름 부음을 받아야 합니다. 단순히 좋은 음악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1)기름부음을 받고, 2)선한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다윗은 노래하는 자들과 음악가들을 임명했고, 그들은 기름부음을 받아야 했습니다. 아삽과 같은 몇몇 음악 지도자들은, 12편의 놀라운 시를 지었습니다(시편 50편, 73-83편). 음악 지도자 중 두 명은 선견자(선지자)로 불렸습니다 - 헤만(대상 25:5)과 여두둔(대하 35:15)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름부음 받은 선지자들을 격려하고 지원하기 위해 기름부음 받은 음악가들을 필요로 하십니다. 그래야 교회가 세워집니다. 여러분 중 일부는 선지자로 부름을 받지 않았을 수도 있고 음악가로 부름을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음악가가 되십시오. 저는 수금 연주자가 어떤 세상적인 스타일의 음악을 흉내 내려 했다면, 그날 엘리사가 영감을 받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No. 그 음악에는 천국의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세상적인 음악과 천국의 음악이 있습니다. 음악이 당신의 영을 고양시켜 하나님을 찬양하게 해주기 때문에, 당신은 음악이 천국적일 때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일부 음악은 여러분이 음악가를 존경하게만 만듭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사람들을 인도하고, 예언의 영을 모임에 가져올 수 있다면, 당신은 기름 부음 받은 음악가입니다.

기름병

4장: 여기 1-7절에서, 우리는 빚진 설교자의 과부에 대해 읽습니다. 남편이 죽고 아내에게 빚만 남기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피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설교자들은 특히 빚을 지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쁜 간증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채권자는 빚을 돌려받기 위해 그녀의 두 자녀를 노예로 데려가려고 왔습니다. 엘리사는 그녀에게 집에 무엇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녀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기름 한 병 외에는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녀는 기름병을 "아무것도"라고 불렀지만, 그녀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광야에서 모세에게 비슷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에게는 목자의 지팡이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그 지팡이로, 그는 홍해를 가르고 바위에서 물을 내고 이스라엘을 약속된 땅 경계까지 인도했습니다. (엘리야가 방문한) 사르밧의 과부에게는 밀가루 작은 한 그릇과 기름 작은 한 병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녀 가족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담고 있었고 그녀와 그녀의 아들을 죽음에서 구했습니다. 우리도 역시 소중히 여기지 않는 어떤 능력이 있어서, "그것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주님이 사용하기 원하시는 것일 수 있습니다.

여기 이 기름병은 성령의 묘사입니다. 때로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말합니다, "나는 돈도 없고, 지식도 많지 않습니다. 나는 재능도 없고 똑똑하지도 않습니다. 나에게 돈을 줄 후원자가 없습니다. 주님의 일에 대한 필요는 너무나 큽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래서 당신은 그들에게 "성령을 받았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네." "그럼 또 뭐가 필요하지요?"

이 여인은 자신의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그 기름병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엘리사는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가서 당신의 모든 이웃에게 큰 그릇을 많이 빌려 오세요. 그런 다음 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병에서 이 그릇들에 계속 부으세요. 그릇들이 모두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 기적을 보지 못하게 하세요. 비밀리에 하세요"(3절).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비슷합니다, "가서 문을 닫고 기도하고 금식하며 예물을 드리라. 네가 이런 일을 하는 것을 아무도 보지 못하게 하라"(마 6:1-18).

하나님의 사람은 대중 앞에 서기 전에, 하나님과 은밀히 동행하며 하나님과 마주 대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문을 닫으면 당신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성령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 문을 열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십시오. 이런 식으로 당신은 당신의 빚을 청산할 수 있습니다.

1. 우리는 온 세상에 복음을전해야빚이 있습니다. 바울은 "나는 유대인과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과 교양 있는 사람들과 야만인들에게(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해야 할 빚을 지고 있습니다"(롬 1:14)라고 말했습니다.

2. 우리는 또한 온 교회(모든 신자)에게 사랑을베풀어야 빚이 있습니다. 성경은 "서로 사랑하는 빚 외에는 누구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롬 13:8)고 말합니다.

우리는, 세상과 복음을 나누고 하나님의 모든 자녀를 사랑하는 이 이중의 빚을 어떻게 청산해야 합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로 돈이나 인간의 능력입니까? 아니요. 우리에게는 성령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다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행 1:8). 이것이 바로 바울이 디모데에게 그의 안에서 새롭게 불을 붙이라고 말한 것입니다(딤후 1:6).

문을 닫고 은밀히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사랑을 추구하고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를 진정으로 구하되, 특히 예언의 은사를 구하십시오(고전 14:1). 그런 다음 나가서 빚을 청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이 구절이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그 과부는 찾을 수 있었던 모든 그릇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녀는 그 기름으로 빚을 갚았을 뿐만 아니라, 이웃에게도 축복과 풍요를 주었습니다. - 그녀는 기름이 가득 찬 채로 그 그릇들을 그들에게 돌려보냈음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명이기도 합니다 - 이웃과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축복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아이

우리는 4장 8-37장에서 또 다른 여인 - 유명하고, 부유하며, 재산이 많고, 영향력 있는 여인 - 역시 엘리사의 사역으로 축복을 받았다는 것을 읽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 문맹자, 교육받지 못한 자만을 축복하시려고 선택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편견이 없습니다. 그분은 문맹인 베드로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나 고등 교육을 받은 바울도 선택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성경을 많이 알지 못했지만, 바울은 성경 학자였습니다.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을 재정적으로 부양하는 어떤 부유한 여인들이 있었고, 예수님은 그들이 경건한 여인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많은 헌금을 받으셨습니다(눅 8:3).

여기에 엘리사를 후원하기로 결정한 부유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여자도 경건한 여자였습니다, 이는 그가 이따금씩 찾아오는 남자를 보고 자기 남편에게 "이 사람이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 것을 내가 압니다"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엘리사의 설교를 한번도 듣지 않고, 어떻게 엘리사를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으로 알아보았을까요? 그녀는 그가 식탁에서 행동하는 방식을 관찰했을 뿐입니다. 우리에게 참으로 좋은 본입니다! 경건한 사람을 알아보는 것은 사소한 것입니다 - 그가 사람들과 앉아서 이야기하는 방식, 그의 음식을 먹는 방식, 일상적인 문제들에서 행동하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그의 설교를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엘리사가 머물 수 있도록 그들의 집에 침대, 탁자, 의자, 전등을 갖춘 작은 손님 방을 만들기로 결정했습니다. 엘리사는 그에게 이런 것들이 필요하다고 제안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모든 경건한 여성이 그렇듯이 사려 깊고, 배려심 있는 여성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종들이 기대하지도 않았는데도, 그런 안식처를 제공함으로써 그분의 종들을 돌보십니다.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은 그러한 사람들에게 결코 빚을 지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그의 종 게하시에게, 그녀를 위해 보답으로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게하시는 그녀에게 자녀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그녀를 위해 기도하며 그녀가 1년 안에 아이를 갖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아이를 가졌습니다.

그 아이가 자라더니, 어느 날 병들어 죽었습니다(4:20). 아이를 당장 묻지 않고 "나로 먼저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게 하소서"(4:25)라고 말한 이 어머니의 믿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그녀는 엘리사를 만나러 갔습니다. 엘리사는 멀리서 그녀를 보고, 게하시에게 "잘 지내시나요? 남편은 잘 있나요? 아이는 잘 있나요?"라고 물어보라고 했습니다(26절). 죽은 아이에 대해 그녀가 한 믿음의 대답을 들어보세요: "잘 있습니다. " 엘리사는 가서 그 아이를 위해 기도했고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렸습니다. 그 어머니의 믿음이 그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보면 놀랍습니다. 그녀의 믿음에 따라 그녀는 받았습니다. 그것이 그녀를 믿음의 영웅들의 전시관에서 언급하는 이유입니다: "여자들은 부활로 죽은 자를 되찾았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습니다"(히 11:35,39). 그 어머니가 믿음이 없었다면 그녀는 아이를 묻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믿음이 있는 사람을 찾을 때마다 얼마나 놀라운 기적을 행하십니까!

4장 38~44장: 여기서 우리는 실수로 독이 있는 덩굴을 잘라서 조리 중인 음식에 넣었을 때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그들은 엘리사에게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는 그것에 약간의 곡식 가루를 넣었고 음식은 건강하게 만들어졌습니다. 그 뒤에 또 다른 기적이 뒤따랐습니다 - 성경에서 음식을 증가시킨 첫 번째 사례입니다. 그 떡덩이는 백명에게는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음식을 증가시켰고, 모두가 배불리 먹은 후에도 약간의 음식이 남았습니다!

나아만과 게하시

5장: 여기서 우리는 나아만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하나님은 작은 이스라엘 소녀 종을 사용하여, 나아만을 참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인도하고 그의 문둥병을 고침 받게 하셨습니다. 그녀는 엘리사의 기적을 행하는 능력에 대해 나아만의 아내에게 증거했습니다. 그것이 나아만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신뢰하게 된 첫 번째 단계였습니다. 하나님은 심지어 작은 소녀 종을 사용하여 몇 마디 말로 그녀의 주인을 축복하실 수 있었습니다. 4장에서 우리는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한 여인의 믿음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난하고, 작은 소녀 종의 믿음을 봅니다. 하나님은 이 둘을 모두 사용하셨습니다. 당신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소녀 종일지라도, 하나님은 당신을 사용하여 다른 사람들을 그분께로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당신은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할 능력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소녀 종처럼, 하나님은, 어떤 한 사람을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어느 누군가에게 이끄는 데에 당신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당신은 그 사람을 예언자에게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당신도 또한 상을 받을 것입니다.

나아만은 먼저 왕에게 갔고, 왕은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는 그를 엘리사에게 보냈습니다. 엘리사가 이 막강한 장군을 어떻게 대했는지 보십시오. 이 구절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줍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은 사람이 큰 사람이든 작은 사람이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엘리사는 그 가난한 과부가 경제적 궁핍을 호소하며 그에게 찾아왔을 때, 그녀에게 더 큰 조경을 표했습니다. 그러나 시리아의 위대한 장군(그 앞에 절하는 사람들에게 익숙했던 사람)이 왔을 때, 엘리사는 그를 만나러 가지도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의 장군인, 나아만은 선지자의 막사 밖에 서 있어야 했습니다. 엘리사는 나아만이 누구인지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인도에 그런 선지자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사람의 얼굴은 신경 쓰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만 사는 선지자가 있었다면, 우리 땅에 얼마나 다른 유형의 기독교가 있었을까요? 엘리사는 나아만을 돕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먼저 나아만의 교만을 낮추어야 했습니다.

그는, 자기 종 게하시를 보내어 나아만에게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어라"라고 말하게 하였습니다(10절). 요단강은 더럽고, 진흙투성이의 강이었습니다. 나아만은 크게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나는 그가 반드시 내게로 나아와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 줄로 생각하였노라. 내가 왜 이 더러운 요단강에 가야 하는가?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이 이보다 낫지 아니하냐?"(11,12절). 그는 너무 화가 나서, "짐을 싸서 집에 가자"고 말했습니다.

예언자는 사람들의 교만을 낮추기 위해 때때로 사람들을 짜증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선지자에게 이 사역을 주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람의 자만과 교만을 그에게 드러내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종종 교만한 사람들을 화나게 하셔서, 그들을 낮추고 그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것도 아님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지위나 명예를 중요시하지 않으십니다.

나아만은 엘리사에게 짜증이 났습니다. 그러나 그의 하인들 중 한 명이 슬기롭게 말했습니다, "주인님, 그는 당신에게 그런 간단한 일을 부탁했습니다. 한번 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나아만은 요단 강에 몸을 담그기로 동의했습니다. 위대한 장군이 옷을 벗고 모든 사람들이 그의 문둥병을 보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는 자신을 낮추고 순종해야 했습니다. 그는 언제 멈춰야 했습니까? 그의 살이 어린아이처럼 깨끗하고 맑아졌을 때였습니다. 당신이 어떤 상황이나 사람에 의해 낮아지게 될 때, 주님이 당신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될 때까지, 내려가서 자신을 낮추라."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이 될 때까지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천국은 이런 사람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아만의 살이 어린아이와 같이 깨끗해졌습니다. 여러분의 육신이 어린아이와 같을 때, 여러분도 깨끗해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전까지는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의 눈에 너무 큽니다.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지 않습니다. 어린 아기의 눈을 들여다보세요. 자만심이 없습니다. 그곳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고자 하시는 곳입니다 - 무(無, nothingness)의 자리입니다. 당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는 곳에 이르면, 당신도 깨끗해질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일곱 번이든 일흔 번이든 계속 내려가야 합니다.

나아만은 엘리사에게 돌아와서, 이스라엘 하나님의 기적을 행하시는 능력에 놀라고 감사하였습니다. 그는 엘리사에게 주려고 많은 돈과 옷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여호와께서 살아 계시므로, 내가 아무 것도 받지 아니하리라"(16절)고 말했습니다. 성경은, 우리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서 돈을 받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요삼 7). 어떤 불신자도 하나님의 종을 지원할 권리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백성만이 하나님의 종들을 지원할 권리와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엘리사는 경건한 사람들에게서 선물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방금 부유한 여자가 그가 머물 방을 제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아만에게서 아무것도 받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많은 종들이 그들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놓친 곳입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아니오"라고 말했지만, 엘리사의 종 게하시가 말했습니다, "내 주인은 얼마나 바보인가! 그는 돈을 요구하지 않았다 (또는 어떤 기도 편지를 보내지도 않았다!). 그 돈이 공짜로 주어졌는데도, 그는 여전히 '아니오'라고 말한다. 글쎄, 주인이 안 받는다면, 내가 받을 것이다." 탐욕스러운 게하시는 하나님의 종에게 돈을 바치는 사람이 우상 숭배자라는 사실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돈을 위해 나아만을 뒤쫓았습니다(21절) -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부자들을 뒤쫓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자 게하시가 거짓말을 꾸며 나아만에게 말했습니다. "두 명의 학생이 성서 학교("선지자의 아들들")에서 방금 왔습니다. 그들에게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22절). 나아만은 그 거짓말을 믿고 그가 요구한 것보다 더 많이 주었습니다. 탐욕이 당신의 마음을 지배할 때, 하나님의 일에 대한 거짓 보고를 정당화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보고서에서 "오늘 모임(예배)에 5만 명이 모였습니다. 15,000명의 사람들이 손을 들어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이곳에서 위대한 부흥이 시작되었습니다" 등의 동일한 유형의 거짓말을 봅니다. 당신이 인도에서 미국으로 보내진 모든 보고서를 읽을 수 있다면, 인도가 도처에서 기독교 부흥으로 뒤덮였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여기 인도에 사는 우리는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미국의 많은 선량한 신자들은 이러한 이야기를 믿고, 그러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인도의 사기꾼들에게 희생적으로 돈을 보냅니다! 오늘날 우리 땅에는 게하시가 많습니다.

게하시는 돈을 거두어, 자기 집에 감추고 아무 잘못이 없는 얼굴로, 엘리사 앞에 나아와 섰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하나님의 사람이었기에, 속을 수 없었습니다.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어디에 갔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게하시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게하시는 부정직했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엘리사는 대답했습니다, "게하시야, 나는 다 안다. 하나님께서 네가 행한 모든 것을 환상으로 나에게 보여 주셨다. 나는 나아만이 뒤돌아서는 것을 보았고, 네가 그에게서 물건을 가져오는 것을 보았다. 지금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 이방인에게서 돈을 받고, 옷과 감람원과 포도원과 양과 소를 받을 때냐?" 오늘날의 설교자들을 위한 말씀입니다!

게하시는 엘리사가 엘리야의 종이던 것처럼, 엘리사의 종이었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기름 부음의 두 배를 얻었고, 게하시는 엘리사의 기름 부음의 두 배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엘리야가 가졌던 기름 부음의 네 배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기름 부음을 받으려고 끈질기게 엘리야를 쫓았지만, 게하시는 돈 때문에 나아만을 쫓았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가 받은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게하시는 나아만이 앓았던 문둥병을 얻었습니다!! 게하시뿐만 아니라, 그의 자녀들도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설교자들에게 영적 문둥병이 닥쳤습니다.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 부자와 서구 기독교 단체를 뒤쫓아, 거짓말을 하고 거짓 보고를 했습니다. 이 설교자들의 자녀들 또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십시오.

엘리사의 다른 기적들

우리는 6장에서 엘리사가 행한 또 다른 기적을 봅니다. 어떤 성경 학교 학생들이 건축 작업을 하고 있을 때, 그들이 빌린 도끼가 강에 빠졌습니다. 그들이 와서 엘리사에게 그 일을 알렸습니다. 그는 즉시 강물에 막대기를 던졌고, 그 쇠 도끼는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여기에서 다시 우리는 부활(죽음에서 벗어난 생명)의 원리가 나타나는 것을 봅니다 - 엘리사가 행한 다른 기적들, 즉 죽은 수넴 소년을 살리는 일, 독이 든 죽을 깨끗하게 하는 일, 나아만의 나병을 치료한 일들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참된 예언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또 다른 사건을 지금 살펴보겠습니다. 이스라엘과 싸우고 있던 아람 왕은, 신하들에게 특정 장소에 군대 진영을 세우겠다고 말했습니다(6:8). 그러나 하나님은 왕의 계획을 엘리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 엘리사는 이 사실을 이스라엘 왕에게 경고했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왕은 여러 번 아람으로부터 자신의 군대를 보호했습니다. 아람 왕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해했고, 자기 진영의 누군가가 이스라엘을 위해 스파이 활동을 하고 있다고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진실을 아는 어떤 사람이, 이스라엘에 아람 군대의 동향을 이스라엘 왕에게 경고하는 선지자가 있다는 것을, 왕에게 알렸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에서도 참 예언의 목적입니다. 엘리사는 무엇을 했나요? 그는 이스라엘에게 다음 주에 적군이 어떤 곳으로 올 것이라고 경고하고. 이에 대비하라고 경고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예언 또한 해야 할 일입니다. 매주 교회 모임(예배)에서, 예언의 영은 원수가 어디로 올 것인지 하나님의 백성에게 경고해야 합니다. 그러한 예언적 사역을 하는 교회는 참으로 축복받은 교회입니다. 이스라엘에 엘리사와 같은 선지자가 있다는 것은 축복이 아닐까요? 사람들이 맞설 준비를 해야 할 것을, 말씀을 통해 경고할 수 있는 선지자가 교회에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언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라"(고전 14:1)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6장 24~29절에서 우리는 아람 군대가 그 성을 포위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마리아에 식량이 크게 부족했다는 내용을 읽습니다. 상황이 너무 나빠서 여자들이 자기 아이를 잡아먹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 밖에는 네 명의 나병환자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병환자이므로 성 안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7:3). 그들은 아람 진영에 가서 음식을 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들은 말했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우리를 죽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쨌든 우리는 여기서 굶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갑시다."

그들이 적진에 이르렀을 때에, 그들은 거기에 있던 군인들이 모두 달아난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주께서 그들(적의 군인들)에게 질주하는 말소리를 듣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나병환자들은 그곳에서 많은 음식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는 이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좋은 소식을 혼자만 간직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서 사마리아 성에 좋은 소식(복음)을 전하여, 그 성이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말하자면 나병환자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우리의 생명을 구하는 음식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이 좋은 소식("복음")을 모르기 때문에, 여전히 죽어가는 사람들이 수백만 명 있습니다. 우리는 가서 그들에게 말해야 합니다.

9장에서는, 아합의 아내 이세벨의 죽음에 대해 읽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참 선지자들을 일관되게 반대하는 사람이었으며, 이제 그녀의 이름은 하나님의 종들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20절에서, 주님은 두아디라 교회의 장로에게, "네가 네 아내 이세벨이 내 종들을 미혹하게 하는 것을 네가 용납하는도다(직역)"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장로의 강한 아내가 교회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그녀를 '이세벨'이라고 부릅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에는, 본래의 이세벨이 아합을 통제했던 것처럼, 자기 아내가 교회를 통제하는 이세벨이 되도록 허용하는 그런 약한 장로들이 많이 있습니다. 당신이 엘리야와 같은 하나님의 선지자라면, 이 이세벨들과 맞서서 그들을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교회는 그런 이세벨들에 의해 멸망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세벨 여왕이 건물 꼭대기에서 던져져 그녀의 몸이 산산조각이 났다는 것을 읽습니다. 어떤 여성도 교회에서 권력을 갖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13장 14절에서, 우리는 엘리사가 병들었고 그 병으로 죽었다는 것을 읽습니다. 왜 엘리사는,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요청했던 것처럼, 출애굽기 15장 26절("나 여호와는 너의 치료자니라")을 주장하지 않았습니까? 엘리사와 같은 사람은 죽은 자를 살릴 만큼 충분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낫지 않았다면, 그것은 확실히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종들의 몸에 질병을 허락하신 이유는, 우리가 결코 완전하게 설명할 수 없는 신비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항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목적을 달성한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신 것처럼, 엘리사가 병으로 죽도록 허락하시는 데에도 어떤 목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처럼 불병거를 태워 엘리사를 하늘로 데려가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더 굴욕적인 방법으로 엘리사를 천국으로 데려가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시는 방식에 복종해야 하며, 결코 우리의 처지를 다른 사람의 처지와 비교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놀라운 후속편은, 나중에 모압 사람들이 바로 그 무덤(엘리사와 같은)에 한 사람을 묻었을 때, 그 죽은 사람이 엘리사의 뼈에 닿자마자 그가 죽음에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13:20,21). 그렇게 엘리사는,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살아 있을 때 가지고 있는 것보다, 그의 죽은 뼈에 더 많은 기름 부음을 가졌습니다!! 그의 경우에는 확실히 믿음이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아시리아가 이스라엘과 유다를 공격하다

17장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보다 약 730년 전에 있었던 이스라엘의 포로 생활에 대해 읽습니다. 아시리아 사람들이 와서,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빼앗았습니다. 17장 33절에는 이 앗수르 사람들에 대하여 "그들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들 자신의 신들을 섬겼다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기독교 집단의 많은 곳에서 발견되는 것은 이러한 가짜 "주에 대한 경외심"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에 대해 어느 정도 존경심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돈, 직업, 명예, 세상적인 지위, 교회에서의 지위 등의 그들 자신의 신을 섬깁니다.

18장에서는 유다의 히스기야 왕에 대해 읽습니다. 히스기야의 아버지 아하스는, 매우 사악한 왕이었는데, 그는 히스기야의 형을 이방 우상에게 제물로 바치기 위해 불에 던져 넣었습니다(왕하 16:3). 그러나 히스기야는 아버지와는 달랐고, 좋은 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아버지와 다른 사람이 되고자 하는 자녀들로 인해, 주님을 찬양합니다.

18장 4절에서, 우리는 유다 백성들이 700여년 전에 모세가 광야에서 만든 놋뱀을 여전히 숭배하고 있었다는 것을 읽습니다. 유다에서 이 미신을 마침내 깨뜨리고 파괴시킨 사람은 히스기야였습니다. 그 700년 동안 이스라엘에 살았던 많은 경건한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 여호수아, 사무엘, 다윗(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그러나 이 경건한 사람들 중 누구도 이 놋뱀이 파괴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경건한 사람들 모두는, 하나님께서 친히 그것을 만들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에, 우상과는 다르다고 말하며 용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그것이 우상임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히스기야와 같은 사람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예수(또는 마리아)의 신상과 다른 종교의 신상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요. 둘 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신상들입니다. 한때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만들어졌던 놋뱀 조차도, 하나님께서는 예배의 대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은 놋뱀이나 다른 우상을 숭배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다윗조차도 이 기본적인 진리에 대해서는 빛을 갖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작은 왕에게 그러한 이해력을 주셨습니다. 때로 일반 신자들은 잘 알려진 기독교인들이 깨닫지 못하는 성경의 진리에 대해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결코 잊지 맙시다.

19장에서 우리는, 앗수르 왕이 이스라엘을 점령한 후 남쪽 유다 왕국에도 쳐들어왔다는 내용을 읽습니다. 그러자 히스기야는 여호와께 도와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19:15). 그 밤에 한 천사가 나타나 앗수르 군사 185,000명을 죽였습니다(35절).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베드로에게, 그분이 원한다면, 자신을 돕도록 72,000명의 천사를 부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72,000명의 천사가 130억 명의 사람(72,000 x 185,000)을 멸망시킬 수 있었습니다 - 이는 오늘날 세계 인구의 두 배 이상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세력으로부터 자신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결코 어떤 두려움도 없으셨습니다. 우리도 결코 어떤 두려움 속에 살 필요가 없습니다.

그 후, 히스기야에게는 또 다른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가 중병에 걸렸을 때,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집을 정리하라. 너는 죽을 것이고, 살지 못할 것이다"(20:1). 하나님께서 이제 우리가 죽을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즉시 이 땅을 기꺼이 떠나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이 썩은 세상에 더 이상 머물기를 원하지 말아야 합니다.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가기를 싫어하고 자기의 생명을 연장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요청을 들어주시고 그의 수명을 15년 더 연장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15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그는 므낫세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므낫세가 왕이 되었을 때의 나이가 12세였습니다(21:1). 그는 분명히 히스기야에게 주어진 15년의 추가 기간 동안 태어났습니다. 그는 55년 동안 통치했으며 유다 역사상 가장 악한 왕이었습니다(대하 33:9). 그리고 므낫세는, 히스기야가 죽기를 싫어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 땅에서의 그의 때가 다 됐다고 말씀하셨을 때, 태어났습니다.

24장에서, 우리는 앗수르가 새로운 세계 초강대국이 된 바벨론에 의해 패했다는 것을 읽습니다. 이제 바벨론이 유다를 쳐서 예루살렘을 멸망시켰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이사야는 므낫세 통치 초기에 예언을 했고, 유다를 강력하게 정죄했기 때문에 박해를 받았으며, 속이 빈 통나무 속에 가서 숨었다고 합니다. 그는 발견되었고, 므낫세는 통나무를 둘로 톱질 해, 이사야의 몸도 잘라버렸습니다. 우리는 히브리서 11장 37절에서 "둘로 톱질을 당한" 사람들에 대해 읽습니다.

열왕기하서는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으로 시작하여, 유다 백성이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것으로 끝납니다. 참으로 대조되는 일입니다! 우리도 하늘로 갈 것인지 바벨론으로 갈 것인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 우리가 누구를 기쁘게 하기로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열왕기하에서 배울 수 있는 몇 가지 교훈입니다.

장 13
역대상

우리가 아는 한, 역대상하는 이스라엘 자손이 70년 동안의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후에 기록되었습니다. 아마도 그것을 쓴 사람은 에스라였을 것입니다. 이 두 책은 유다의 역사만을 다룬다는 점에서, 두 열왕기와는 다릅니다.

이스라엘은 솔로몬이 죽은 후 두 왕국으로 나뉘었습니다. 르호보암이 한 쪽을 이끌고, 여로보암이 다른 쪽을 이끌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에는 열 지파가 있었고, 남왕국 유다에는 베냐민과 유다 두 지파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들은 대체로 모두 사악했습니다. 그런데 유다에는, 선한 왕도 있고 악한 왕도 있었습니다. 열왕기는 두 나라를 모두 다룹니다. 그러나 역대기는 사울과 다윗부터 시작하여 유다 왕들만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열왕기에서 발견된 내용이 꽤 많이 반복됩니다 - 그러나 그것은 네 가지 복음서의 경우처럼 특정한 교훈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역대기에 기록된 내용의 대부분은 역사서이며, 우리가 열왕기상하를 공부할 때 이미 다루었습니다.

역대상 첫 아홉 장에는 아담부터 시작되는 다윗의 가계도가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르우벤과 시므온, 제사장 가계와 다른 지파들의 긴 족보를 주신 한 가지 이유는, 하나님께서 개인들에게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분은 지파에 관심이 없고, 개인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된 항목 역시 개별적입니다. 거기에는 "케랄라에서 수천 명의 사람들이 거듭났고, 타밀나두에서 아주 많은 사람들이 거듭났다" 등의 말이 없습니다. No. 각 사람의 이름이 개별적으로 기록되어,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그분은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여러분의 가계도에 대해서도 모두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모든 삶의 역사를 알고 계시며, 당신의 삶을 위한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는 지구상의 수십억 명 가운데서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름을 알고 계시는 개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용기를 줄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와 우리 조상에 관해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 삶의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머리털 개수까지 다 아시는 분입니다!!

나는 4장에서 몇 구절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야베스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읽습니다(4:9). "야베스는 그 형제들보다 훌륭한 자라." 하나님께서 여러 사람들의 역사를 기록하실 때,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훌륭하다는 사실을 강조하신다는 점에 유의하십시오! 사도 바울 또한 그의 동역자들의 명단을 썼을 때(롬 16장),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온전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분의 자녀일지라도, 그분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훌륭한" 사람들을 주목하십니다.

그의 어머니가 그를 몹시 고통스럽게 낳았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야베스라고 지었습니다. 거기에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4:10).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에게 축복을 주시고, 제 지경을 넓히시면, 당신의 손이 저와 함께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해악으로부터 지켜 주십시오, 그리하여 그것이 나에게 고통을 주지 않게 하소서."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야베스가 구한 것을 들어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기도를 우리 자신에게 영적으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선, 다른 사람들보다 더 훌륭해지는 것은 우리가 기꺼이 겪어야 할 고통과 괴로움의 정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고통과 고난을 겪어내고 승리한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하나님 보시기에 더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을 얕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 삶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우리의 영적 경계를 넓혀달라고 끊임없이 요청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느 때라도 우리가 성취한 것에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그분의 손, 즉 그분의 능력이 항상 우리와 함께 하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다치지 않도록, 악과 악한 사람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달라고 그분께 요청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야베스가 구한 것을 들어주셨고, 우리의 간구도 들어주실 것입니다.

다윗의 용사들

12장에서는, 사울이 다윗을 박해할 때 다윗 곁에 있던 사람들에 대해 읽습니다. 다윗이 왕이 된 후에는 다윗과 합류하는 것이 쉬웠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그가 거절당하고 목숨을 걸고 쫓기는 시기에 그와 합류한 사람들에 대해 읽습니다. 하늘에서 전적으로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은 쉽지만, 그분이 거절당하고 멸시받는 이 땅에서 그분을 전적으로 따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유명해지고 인기를 얻은 후에 교회에 합류하는 것은 쉽지만, 교회가 멸시를 받을 때 그곳에 기름 부음이 있음을 알기 때문에 합류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후에 다윗의 군대 대장이 된 사람들은, 다윗이 사울에게 핍박을 받고 이스라엘에게 배척을 당하던 때에 다윗을 따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 시대에도 우리는 비슷한 것을 봅니다. 하나님은 특정 장소에서 그분을 위해 일할 사람을 일으키셨지만, 그와 그의 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인식할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이 소수는 그와 합류하고, '사울'이나 다른 사람이 그에 대해 뭐라고 말하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들의 세대에서 주님을 위한 영원한 일을 성취합니다. 우리는 오늘날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어디에 있는지 분별할 수 있도록 감각을 훈련해야 합니다.

주인이 인기가 없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참된 종은 결코 인기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에 대하여 좋게 말하면 너희에게 화가 있다, 이는 그들이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 그렇게 말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너희를 비방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다, 그들이 모든 참 선지자들을 그렇게 대했기 때문이다" (눅 6:22,26). 이 사실을 이해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참된 선지자는 평생 동안 완전히 인정받거나 가치 있게 여겨지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참된 사도들조차 생전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거부당하고 멸시를 당했음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로부터 배척을 받았습니다. 디모데후서 1장 15절에서 그는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렸느니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생애가 끝날 때까지 하나님께 충실했지만, 그의 동료 신자 대부분은 그를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아버지께 충실하셨고,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 그분을 떠났습니다.

다윗이 굴에 있을 때에 베냐민 자손 중 몇 사람이 다윗을 찾아왔습니다(12:16). 다윗이 그들을 만나서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평화롭게 왔다면, 내 마음도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나를 원수들에게 넘겨주려고 왔다면 - 내 양심은 깨끗하다 - 하나님께서 너희를 벌하시기를 원한다."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오늘날에도 친구인 척하며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양심이 깨끗하다면, 하나님은 그들을 다루실 것입니다.

그러나 아마새의 놀라운 예를 보십시오(12:18): "하나님의 영이 삼십 용사 대장 아마새에게 임하여, 그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당신 것입니다, 오 다윗. 이새의 아들, 우리는 당신과 함께 합니다. 당신에게 평안이 있고, 당신을 돕는 이에게도 평안이 있을 것입니다. 당신의 하나님께서 당신을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다윗은 그들을 받아들여, 자기 군대의 대장으로 삼았습니다." 아마새와 같은 사람들은 성령이 그들 위에 임하셨기 때문에, 다윗의 외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다윗에게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인식했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읽어보면, 기독교 집단의 기존 종교 제도에 반대했던, 참으로 경건한 사람들이 항상 박해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마틴 루터가 로마 카톨릭 체제에 의해 어떻게 박해를 받았는지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존 칼빈(John Calvin)에 대해서도 아마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재세례파(Anabaptists)라고 불리는 또 다른 온 마음을 다해 믿는 무리가 있었는데, 그들은 로마 카톨릭뿐만 아니라 마틴 루터와 존 칼빈의 추종자들에게도 박해를 받았습니다!! 이 재세례파들은 이 세상의 영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경건한 삶을 살기를 추구하는 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입장 때문에 극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숲에서 만났고 많은 지도자들이 살해당했습니다. 교회 역사는 그들에 대해 많이 기록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는 이 사람들이 그 시대에 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섰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에게 임한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찾으십시오 - 초자연적인 은사(사탄도 초자연적인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가 아닌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과 은혜 - 그것들이 바로 하나님이 그 사람과 함께하신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인정하신다면, 우리도 그 사람을 인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마새는 그 정도의 감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또 다른 특성을 주목하십시오(13:1). "다윗은 천부장들과 백부장들과, 심지어 모든 지도들과 의논했습니다." 참된 하나님의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교제하면서 일합니다. 다윗이 백성들로부터 그토록 엄청난 지지를 얻은 이유 중 하나는, 그가 백성들과 의논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태도는 "나는 약한 형제이고 당신의 의견이 필요합니다. 이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였습니다. 그는 자기보다 후배인 사람들과 앉아서 의논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4절에 "이 일이 모든 백성의 눈에 옳았으니, 회중이 다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다윗의 성전 준비

22장에서, 우리는 다윗이 성전 건축을 위한 자재를 준비하는 이야기를 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그가 성전을 건축하지 않고, 그의 아들 솔로몬이 건축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그것을 준비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지 보십시오. 그는 솔로몬이 나중에 일을 쉽게 하도록, 돌을 다듬는 사람을 세우고 필요한 모든 준비를 했습니다. 그는 또 금과 은과 놋을 많이 주었고, 성전의 못을 만들 목재와 많은 양의 철을 마련했습니다. 그는 원래 자신의 비전이었던 성전을 건축할 특권이 자신에게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성전 건축을 돕기 위해 가능한 모든 일을 여전히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한 사역을 주시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그러한 사역을 주신 다른 사람들을 지원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일을 하십시오. 우리는 다윗의 본에서 그 점을 배울 수 있습니다.

다윗은 매우 사려 깊었으며, "내 아들 솔로몬은 어리고 미숙하다, 그리고 그 집은 반드시 웅장한 집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내가 그것을 위한 준비를 하겠다"고 말했습니다(22:5). 이는 우리가 자녀들이 그들의 세대에서 주님을 따를 수 있도록 준비할 때 자녀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훌륭한 유산입니다. 다윗은 솔로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여호와의 집을 위하여 금 십만 달란트, 은 백만 달란트, 무게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청동과 철, 심히 많은 목재와 돌을 준비하고, 기술자와 석수를 준비하였다. 일어나 일하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22:14-16). 그의 아버지가 솔로몬을 위해 많은 일을 하였으므로 솔로몬에게는 그 일이 얼마나 쉬웠을까요. 경건한 사람들은 자기 자녀들에게 그와 같습니다. 다윗은 모든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마음과 뜻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라. 너희는 일어나서 여호와의 성소를 건축하여, 여호와의 언약궤와 하나님의 거룩한 기구들을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할 전으로 들여오라"(22:19).

23장부터 27장까지는 레위인들, 악사들의 반열, 문지기들, 군대장관들 등의 명단이 나옵니다. 다윗은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가졌고, 그들의 이름이 다 나열되어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윗은 솔로몬에게 말했습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주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니 놀라지 마라" (28:20). 솔로몬이 다윗의 그 권고에 힘입어 끝까지 인내했다면, 그의 삶은 매우 달라졌을 것입니다.

29장 3~5절에서, 다윗은 "내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므로", 이전에 드린 것 이상으로 드린 금과 은의 일부를 나열합니다. 그는 이미 주님의 일을 위해 너무나 많은 것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그는 자신이 충분히 드리지 못했다고 느끼고 더 많이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며,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드리는 일에 있어서 냉정하고 계산적입니까? 우리는 너무 많이 드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런 다음 다윗은 주님께 찬양의 기도를 드렸습니다(29:10-19). 온 회중이 주 하나님을 송축하고 경배했습니다(20절). 그런 다음 솔로몬이 왕이 되고 다윗은 죽었습니다.

마지막 요점: 29장 29절은 사무엘과 갓을 "선견자(seers)"로 언급합니다. 왜 이 선지자(prophet)들은 선견자라고 불렸을까요? 왜냐하면 그들은 앞을 내다보고 다른 사람들이 미래에 관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선견자들(seers)입니다 - 영적인 시각(vision)을 가지고 있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으며, (지금은 무해해 보이는) 어떤 특정한 행위가 교회에서 허용된다면 몇 년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있는 남자와 여자입니다. 선견자는 교회가 위험하게 궤도를 벗어날 위험에 처했을 때, 이를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진실의 직선으로부터의 편차(벗어남)는 1도 정도로 매우 작을 수 있으며, 진실과의 거리는 몇 센티미터에 불과할 정도로 매우 작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몇 년만 지나면, 그 거리가 수 킬로미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선견자는 앞에 놓인 위험을 보고 조금의 타협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장 14
역대하

성전이 건축되고 파괴됨

역대하의 처음 아홉 장은 솔로몬의 통치를 다루고 있는데, 그 중 많은 부분은 이미 열왕기상을 연구하면서 살펴보았습니다.

10~36장에서는, 우리는 유다 왕 20명의 통치에 관해 읽습니다: 르호보암, 아비야, 아사, 여호사밧, 여호람, 아하시야, 아달랴(여왕), 요아스, 아마샤,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므낫세, 아몬, 요시야,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

이 장들은 유다의 다섯 번의 배교 기간과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네 번의 기간을 묘사합니다. 마침내 유다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아사왕의 시작은 좋았지만 나중에는 실패했다

14~16장에서 우리는 훌륭한 왕으로 출발한 아사 왕에 대해 읽습니다(14:2~6). 그가 백만 명의 에티오피아 군대에게 공격을 받았을 때, 그는 구약성경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는, 가장 멋진 도움의 기도 중 하나로 주님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여호와여, 강한 자와 힘 없는 자와의 싸움에서 주 외에는 도움을 줄 이가 없나이다. 그러니 우리를 도와주소서, 주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를의지하고주의이름을의지하여무리를치러왔나이다. 오 주님, 당신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오니, 사람이주를이기지못하게하소서"(14:11). 그 믿음의 표현은 주님께서 적을 물리치기에 충분했습니다. 주님께 무기력하게 의지하는 이 기도는 우리가 시련을 당할 때에도 기도할 수 있는 좋은 기도입니다.

그러나 승리한 후에, 한 선지자가 아사에게 와서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너희가 계속해서 주님을 찾는다면, 그분은 너희가 그분을 찾도록 허락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그분을 버리면, 그분도 너희를 버리실 것이다"(15:2). 하나님께서는, 아사가 승리한 후에 더욱 자신감을 갖게 되고 도움을 받기 위해 끊임없이 주님께 의지하는 것을 중단하게 될 위험을 아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가 직면한 위험입니다.

물론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습니다. 그 후 20년 동안 아사의 모든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에티오피아보다 훨씬 약한 군대를 보유한 이스라엘이라는 또 다른 적과 마주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주님을 찾는 대신에, 그는 이방 왕에게 도움을 구하기로 결정했습니다(16:1-6). 그로 인해 그가 당면한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그 결과 아사는 영적으로 큰 손실을 입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사에게 이 사실을 지적하기 위해 선지자 하나니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니가 아사에게 한 말에는, 구약에서 가장 놀라운 약속 중 하나가 담겨 있습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다니시니 마음이 온전히 그분께 속한 자들을 강하게 붙드시리라." (대하 16:9). 여기에서 주님의 눈은 온 마음을 다한 자를 찾지 않으신다는 점에 주목하십시오 - 왜냐하면 그분은 이미 그들이 누구인지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그분의 눈이 이 온 마음을 다한 사람들을 지원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마음을 다한 예수님의 제자라면,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전 세계에서 우리를 지원하실 것임을 확신시켜 주는 놀라운 약속입니다.

제가 수년 동안 해 왔던 기도 중 하나입니다, "주님, 제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 경건한 삶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저를 인도하여, 우리가 서로를 축복할 수 있게 하소서. 그러고 나서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전 세계에 있는 그런 사람들에게 나를 인도해 주십시오." 만일 당신의 마음이 온전히 주님의 것이라면, 그리고 당신의 유일한 소망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분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주님께서는 당신을 세계 각지로부터, 같은 생각을 가진 다른 사람들에게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그들을 통해 여러분을 축복하실 것이며, 여러분을 통해 그들을 축복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수년 동안 겪은 경험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리는 올바르지만, 그들의 마음은 완전히 주님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다른 야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풀 타임 기독교 일꾼들조차도 개인적인 야망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명예와 돈, 편안함을 추구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약속의 성취를 결코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육신적인 야망을 버리고 그분의 목적만을 이루실 수 있도록 온 마음을 주님께 드리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당신을 위해 기적적으로 일하실 것입니다. 당신이 결혼 상대자를 찾기 위해 주님을 기다리고 있다면, 그분은 필요하다면 세상 반대편에서 당신을 위해 누군가를 데려오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눈은 당신을 위해 지구를 가로질러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여러분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도, 그분을 섬길 수 있도록 온 세상의 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이 그분께 구하기도 전에, 당신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실 것입니다. 마음이 온전히 그분의 것인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축복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사 왕은 하나니의 말에 회개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너무 화가 나서 선지자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상황은 점점 더 나빠졌습니다. 그러자 아사는 가난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학대하기 시작했습니다(16:10). 3년 후 아사는 또 다른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 이번에는 자신의 몸에 위기가 닥쳤습니다. 그는 발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질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 아마도 당뇨병성 괴저였을 것입니다. 그는 왕이었기 때문에, 그 나라 최고의 의사들을 불러 그를 돌볼 만큼 충분한 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의사를 부르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 즉 자신을 판단하고 주님을 구하는 일을 결코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최고의 치료에도 불구하고, 그는 죽었습니다(16:12,13).

유다의 다른 왕들

18장: 여기서 우리는 여호사밧이 아합과 함께 전투에 참여하는 이야기를 읽습니다. 그들은 먼저 주님의 말씀을 원했고, 그래서 선지자 미가야가 와서 그들을 위해 예언하게 했습니다. 미가야는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미가야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메시지가 이미 아합의 승리를 예언한 다른 모든 선지자들의 메시지와 같게 해주세요." 그러나 다른 "선지자들"은 모두 거짓 선지자들이었습니다. 나는 모임(예배)에 초대받았을 때, 나 또한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말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 들었습니다. 그러나 미가야는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내가 말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설교할 때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그분은 당신에게 무엇을 말할 것인지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은 미국 설교자들이 쓴 책을 읽고 거기서 읽은 내용을 반복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미국 사람들에게만 말씀하시는 걸까요? 그분은 인도 사람들에게도 말씀하시지 않나요?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 되십시오. 미가야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만을 말했기 때문에, 그들은 그를 박해했습니다. 그들은 그를 때리고 감옥에 가두었습니다(18:23). 역사를 통틀어, 참 선지자들은 항상 박해를 받아왔습니다.

20장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능력을 보여주는 구약성경의 가장 놀라운 이야기 중 하나가 나옵니다. 우리가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많습니다. 여호사밧 왕과 전쟁을 하려고 수많은 적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이전에 아합과 타협한 일에서 교훈을 얻은 여호사밧은, 이제 여호와를 찾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주님을 신뢰하는 가장 훌륭한 기도 중 하나를 기도합니다 - 이는 그의 아버지 아사가 드린 기도와 같은 부류입니다(14:11). 여호사밧이 기도에서 하나님과 자신을 상기시키고 인정한 일곱 가지 사항에 주목하십시오:

1. 하나님의 절대 주권(6절).

2. 하나님께서 과거에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일(7절).

3. 하나님의 약속(8,9절)

4.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기업(11절).

5. 그들의 전적인 연약함(12절)

6. 그들은 전적으로 지혜가 부족함(12절).

7. 그들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함(12절).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내시어 그 기도에 즉시 응답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가서 적들과 맞서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한다" (15~17절).

그래서 여호사밧은 노래하는 자들을 군인들 앞에 두어 전쟁터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 노래하는 자들이 여호와를 찬양하기 시작하자, 여호와께서 유다의 모든 대적을 물리치셨습니다. 유다는 또한 적들에게서 얻은 모든 재물로 부유해졌습니다.

이 이야기는 승리의 방법을 예시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적들(문제)이 있을 때에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약속을 고백하고 미리 주님을 찬양함으로써 말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찬양으로 표현됩니다. "그들이 그분의 말씀을 믿고 - 그분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시 106:12).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6장에서 우리는 웃시야 왕에 대해 읽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 왕이 죽던 해에 여호와의 환상을 받았습니다(사 6:1). 웃시야 왕은 처음부터 순조롭게 시작하여 "여호와를 구할 동안에는 형통"했습니다(26:5). 그러나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 마음이 교만하여 부패한 일을 행하였습니다" (26:16). 같은 이야기가 지난 2000년 동안 기독교계에서 자주 반복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축복하시고 그 사람은 교만해집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축복하시고 강력하게 사용하실 때 겸손을 유지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웃시야는 자신의 성공을 자랑스러워하며, 제사장직도 수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는 300년 전 사울 왕의 경험으로부터 이런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배우지 못했습니다. 용감한 제사장 아사랴는 다른 제사장 80명과 함께 웃시야를 반대하며 말했습니다(26:17,18). "웃시야여, 여호와께 분향하는 것은 당신에게 합당하지 않고, 제사장들에게만 합당합니다." 왕을 책망하는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날 기독교 집단에는 그러한 사람이 몇 명 필요합니다. 웃시야는 제사장들에게 화를 냈습니다. 그러나 그가 화를 내는 중에, 하나님의 심판이 그에게 임하고 그의 이마에 나병이 들었습니다. 그는 성전에서 뛰쳐나와(26:20), 백성에게서 끊어지고, 다시는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지 못하고 나병환자로 죽었습니다(26:21).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시지 않은 사역에 들어가려고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32장에서, 우리는 히스기야가 주님으로부터 경험한 기적적인 치유에 대해 읽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이적도 주셨습니다(32:24) - 태양이 하늘에서 뒤로 물러갔습니다(왕하 20:1-11). 즉, 지구가 반대 방향으로 10도 회전했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시대에는 태양이 멈춰 섰을 뿐입니다. 그러나 히스기야 시대에는 그것이 뒤로 물러갔습니다(사 38:8). 바벨론 사람들은 이 일을 목격하고 히스기야와 어떤 관련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 중 몇 사람이 그를 만나러 이스라엘로 갔습니다(31절). 히스기야는 자신이 너무나 자랑스러워서, 자신의 모든 재산을 바벨론 사람들에게 과시했습니다. 곧, 선지자 이사야가 그에게 와서 그가 바벨론 사람들에게 보여준 모든 것을 언젠가는 그들에게 빼앗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왕하 20:13-17). 그러나 32장 31절에서 말하는 것을 보십시오. 그 통치자들이 히스기야에게 이 놀라운 일에 대해 물으러 왔을 때,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를 시험하시려고 히스기야를 홀로 남겨 두셨습니다", 그가 겸손하여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릴 것인지 아니면 교만하여 자신에게 영광을 돌릴 것인지를 보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는 시험에 실패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행하신 후에 여러 번 우리를 시험하여 우리가 스스로 영광을 가지는지, 아니면 겸손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 보려고 하십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역을 독특한 방법으로 축복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증언하거나 글을 써서, 공로가 당신에게 돌아올 수 있도록 합니다. 히스기야가 그랬습니다. 그는 정말 좋은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런 식으로 그의 인생을 마감해야 했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33장 12,13절에서, 우리는 열왕기하에는 기록되지 않은 므낫세에 관한 내용을 읽습니다. 그의 삶이 끝나갈 무렵, 그는 포로로 잡힌 후에 회개했습니다. 그는 환난 중에, 주님께 간구했습니다. 므낫세는 예루살렘에서 50년 동안 그런 끔찍한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는 백성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우상을 숭배했으며, 심지어 자기 자녀들을 불에 제물로 바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회개하고 기도했습니다 - 그리고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의 말을 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에 감동하셔서 그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데려가셨습니다. 그러자 므낫세는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을 알았습니다(33:13). 그는 우상들을 없애고, 여호와의 제단을 쌓고, 화목제를 드리고, 유다 사람들에게 여호와를 섬기라고 명령했습니다.

솔로몬이 그렇게 회개했다면, 분명 성경에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의 경우에는 그러한 기록이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솔로몬이 지옥에 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므낫세는 회개했습니다. 사람은 인생을 어떻게 시작하느냐보다 인생을 어떻게 끝내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36장 21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70년 동안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게 된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율법은, 매 7년마다 그 땅에 안식년을 주고 그 해에는 아무것도 뿌리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출 23:10,11). 그러나 그들은 탐심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하나님이 경고하신 대로 형벌을 받았습니다(레 26:34,43). 490년 동안 그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그 땅에 안식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70년 동안 포로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정확하며 조만간 우리를 따라잡습니다.

장 15
에스라

돌아온 남은 자들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이 칠십 년의 포로 생활을 마치고 돌아올 당시에 살았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이스라엘의 두 가지 여행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여행은 이집트에서 가나안까지였으며, 이는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구원을 상징합니다 - 그리스도(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구원 받고, 물에서 세례를 받고(홍해를 들어갔다 나옴),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옴), 육신의 정욕(가나안 거인족)을 이김. 두 번째 여행은 포로 생활을 마치고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이동하는 여행이었습니다. 교회를 세우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두 번째는, 죽은 종교 체계(바벨론)에서 나와 그리스도의 몸(예루살렘)을 세우는 것을 상징합니다. 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이동하는 것에 대해 말했습니다. 바벨론은 신약에서 영적인 의미를 가지며, 주님을 따른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그분을 따르지 않는 타락하고 창녀인 기독교계를 가리킵니다(계 17장). 예루살렘(계 21장)은 참된 교회, 곧 그리스도의 신부를 가리킵니다.

스룹바벨 아래에서의 귀환

에스라는 구약의 두 번째 이동에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사람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책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 스룹바벨의 하의 귀환(1,2장), 성전 건축(3~6장), 그 자신(에스라)의 지도력 하의 개혁(7~10장)을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서 고레스 왕을 감동시켜 성전 건축을 명령하셨다는 것을 읽습니다. 고레스는 말했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나에게 주셨고, 예루살렘에 그분을 위한 성전을 건축하라고 나에게 명하셨다"(스 1:2). 이방 왕을 감동시켜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도록 명령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보십시오!

고레스는 이어서 말했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라." (스 1:3). 그는 어떤 이스라엘 사람도 강제로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 우리는 자유롭게 죽은 종교 체제에 머물 수도 있고, 그곳에서 예루살렘으로 이동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고레스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자원하는 예물로 그(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자들)를 지원하게 하라"(1:4)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예루살렘을 건설하기 위해 우리가 가장 먼저 인식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주권자이시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그날 불경건한 통치자들을 움직이실 수 있었고, 심지어 오늘날에도 누구든지 그분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누구든지 움직이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믿지 않으면, 예루살렘을 건축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인식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바벨론을 떠나도록 강요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떠나도록 초대받았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렇게 하도록 강요 받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즐겨 내는 사람만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들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보는 세 번째 사실은, 개인적으로 가지 않더라도 "자원하는 헌금"으로 하나님의 일을 지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1:4). 우리가 개인적으로 예루살렘을 건축할 수 없더라도, 우리는 자발적인 헌금으로 그 건축을 지원할 수 있습니다.

그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하나님의 백성을 그토록 많이 지원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대답은 아마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고레스가 태어나기 거의 200년 전에 선지자 이사야는 그의 이름을 언급하며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고레스를 가리켜 "그는 나의 목자"라고 말할 때, 그는 반드시 내 말대로 행할 것이다. 그는예루살렘을재건하고성전을회복하라고명령할것이다.' 주님께서 그분의 기름 부음 받은 자, 고레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며 그의 오른손에 힘을 주실 것입니다. 그 앞에서 강력한 왕들은 두려움으로 마비 될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고레스야, 내가 너보다 먼저 가서, 청동 문을 부수고 철창을 끊어 버리겠다. 내가 이렇게 해서, 내가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이라는 것을 네가 알게 하리라. 내가 왜 이 일을 위해 너를 불렀느냐? 그것은 내가 택한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다. 네가 나를 알지 못할 때 나는 너의 이름을 불렀다. 동쪽에서부터 서쪽까지의 온 세상이 다른 신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너를 준비했다'" (사 44:28-45:6).

당시 아직 살아 있던 다니엘은 이 성경 구절을 고레스에게 보여 주었을 것입니다 - 그리고 고레스는 200년 전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 이름을 두고 예언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압도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그를 겸손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행했습니다 - 유대 민족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하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2장에서, 우리는 바벨론을 떠난 사람들의 명단을 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바벨론을 떠난 각 사람을 기록하십니다. 그들의 지도자는 스룹바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바벨론에서 인도할 사람이 항상 필요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부패한 기독교계를 떠나 살아계신 하나님의 참된 교회로 들어온 모든 사람의 이름을 기록해 두십니다.

물론 바벨론은 예루살렘보다 살기에 더 편안한 곳입니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에 가는 것은 어렵고, 위험하며 비용이 많이 들었습니다.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왜 움직여야 하는가? 우리는 이곳 바벨론에서 아주 편안하다." 오늘날 불경건한 체제에 있는 많은 신자들도 같은 말을 합니다. 그들은 바벨론에서 더 큰 영예를 누리며 "결혼"하고 "장사(장례식)"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온 마음을 다한 사람들은 그들의 시대에 하나님께서 움직이시는 곳에 있고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있는 곳에 있기를 원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안락이나 명예를 구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체질(선별)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2장 40절을 보면, 레위인 74명만이 예루살렘으로 떠났다고 나옵니다. 숫자가 왜 그렇게 작았나요? 레위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재산도 소유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십일조로 지원을 받아야 했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매우 가난한 것을 보고, 그 가난한 사람들은 십일조를 전혀 바칠 수 없을 것이며, 바친다고 해도 적은 금액이 될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레위 사람들은 바벨론에 머물기로 결정했습니다. 그곳은 그들에게 더 안전했습니다. 오직 74명만이,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보실 것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같은 이야기입니다. 설교자들은 여전히 멋진 선물을 줄 수 있는 부자들이 있는 곳으로 갑니다!

2장 59~63장에서, 우리는 자신이 진정한 이스라엘 사람임을 증명하기 위해 아버지의 집안에 관한 증거를 제시할 수 없었던 어떤 사람들에 대해 읽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자신의 구원에 대해 확신이 없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제사장 지파 출신이라고 주장하는 일부 사람들은 조상 기록에서 그들의 이름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우림과 둠밈으로) 그들이 과연 제사장인지 하나님의 의견을 밝힐 수 있는 제사장이 올 때까지 모든 제사장 직무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지도자들이 예루살렘을 건설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조상에 대해 매우 엄격한 것을 봅니다. 우리 역시 교회의 지도자가 될 사람들에게 순결의 높은 기준을 요구하는 데 특히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교회의 일원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구원 경험을 확신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 교회에 합류하는 데에 대한 기준이 점점 낮아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 인상적인 통계와 숫자에 대한 열풍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올 수 있도록 허용되기 전에, 정말로 개종되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이 바리새인들에게 세례를 베풀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따라야 할 좋은 예입니다.

성전 건축

3장부터 6장까지에서 읽은 내용과 사도행전의 초기 교회 시대에 일어난 일과 흥미로운 유사점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3장에서 성전 건축의 시작에 대해 읽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는 큰 연합의 영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여러 성읍에 있었습니다. 백성이 예루살렘에 한 사람처럼 모였습니다(3:1). 마치 다락방에서 한 사람처럼 성령을 기다린 120인과 같습니다.

"예수아와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스룹바벨과 그의 형제들이 일어나 건축하였느니라" (3:2). 그것은 한 사람의 쇼(a one man show)가 아닌 한 몸 사역(a body-ministry)이었습니다.

그들은 먼저 제단을 쌓고 번제를 드렸습니다(3:2).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십자가의 메시지가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규례대로 '초막절'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했습니다. 그리고 건축자들이 성전의 기초를 놓을 때 찬양의 시간이 있었습니다(3:10). 제사장들이 일어서서 나팔과 심벌즈를 들고, 주님을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참된 교회)에서 찾아야 할 또 다른 것, 즉 찬양과 예배의 영입니다.

그 후에는 "큰 소리로 통곡"하는 시간이 이어졌습니다(3:12). 우리의 죄를 애도하는 것도 교회를 세우는 데 꼭 필요한 부분입니다.

4:1: 그 다음으로 일어난 일은 반대였습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사역은 적 없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 적들은 자기들 역시 성전 건축을 돕고 싶어 하는 척했습니다. 그러나 스룹바벨은, "우리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는 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4:3)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불신자들과 협력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명목상 기독교인일지라도 말입니다. 그들은 "우리도 당신의 하나님을 섬깁니다. 우리도 기독교인이에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니요"라고 말합니다.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같이 단호한 태도를 취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한 사람들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너희가 먼저 회개해야 한다"며 바리새인들에게 세례 주기를 거부한 세례 요한과 같은 사람들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교회에 세례 요한, 스룹바벨, 예수아와 같은 사람들이 더 많이 필요합니다.

그러자 이 사람들이 일어나, 그 땅 사람들과 합세하여 그들을 겁주려고 했습니다(4:4). 종교적인 반대와 두려움, 괴롭힘이 있었습니다. 그들(원수)은 그들(스룹바벨과 예수아)의 계획을 좌절시키기 위해 조언자들을 고용했습니다(4:5) - 이 모든 것은 단지 성전을 건축하기를 원하는 이 소박한 사람들에 대한 반대였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집을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세우려고 하면, 많은 반대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애굽에서 나와서 개인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면, 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의 이 두 번째 이동으로 더 나아간다면, 사탄으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권자이시기 때문에, 당신의 삶은 흥미진진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반대를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왕들과 그들의 법령을 모두 이기십니다. 적들은 왕에게 요청을 보냈고, 왕은 조서를 내렸습니다(4:17-22). 그들은 왕의 명령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서 공사를 중단했습니다. 왕은 거짓 보고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섬기려고 할 때 거짓 보고가 많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종교인, 세속 당국, 경찰 및 기타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등을 돌릴 것입니다. 그리하여 작업이 중단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나요? 그분은 그 왕을 죽이고 다른 왕을 세우셨습니다 - 다리오(4:24)!

4장 24절을 보면,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지 16년이 지나도, 성전 기초를 놓지 못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성전 건축에 소홀한 태도를 갖고 모두 자기 집을 짓느라 바빴기 때문입니다(학 1:1~4 참조). 그러자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최우선에 두고 그분의 성전을 건축하라고 촉구했습니다(5:1,2).

그러나 다시 한번 적들이 선동하여 "누가 이 성전을 지으라고 너희에게 말하였느냐?"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이 놀라운 구절을 읽게 됩니다, "하나님의 눈이 그들(유대 장로들)을 향하시므로, 그들(적)이 그들(유대 장로들)을 능히 막지 못하였느니라" (5절). 적들은 다리오 왕에게 보고를 보냈고, 그래서 다리오는 고레스가 내린 칙령을 발견하여 또 다른 칙령을 내렸습니다. 여기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주목하십시오. 다리오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 일을 오직 하나님의 집에 맡겨라. 나는 이 집을 짓는 데 도움이 되도록, 너희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 한다는 법령을 발표한다. 그 비용은 전액 왕실 금고에서 지불되어야 한다 . 소나 숫양이나 밀이나 소금 등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주어야 한다" (6:7,8).

다리오의 조언자는 누구였습니까? 다니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종들을 돕기 위해 어디서나 그분의 백성을 갖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대자들이 이곳에서 단지 선을 이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이 이전에 가졌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정부는 건축 비용 전체를 지불했습니다!

성전은 마침내 모두가 함께 일하는 한 몸 사역을 통해 완성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일이 그렇듯이, 이 일은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그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건물을 완성하였습니다. 교회 건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다음 그들은 유월절을 기념하고 기뻐했습니다 -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기쁘게 하시고; 왕의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의 전의 일을 격려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스 6:22).

그 후, 7장까지는 60년의 공백이 있습니다. 에스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바로 이 기간입니다.

에스라의 귀환과 개혁

7장부터 우리는 포로들의 귀환과 에스라 아래에서의 개혁에 대해 읽습니다. 첫 번째 그룹 포로들의 지도자는 학개, 스가랴, 스룹바벨, 예수아였습니다. 에스라는 두 번째 그룹과 함께 왔습니다. 하나님의 종 한 사람이 죽으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종을 일으키십니다. 세대를 거쳐, 그분의 백성을 앞으로 이끌 사람들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에스라는 교사였습니다 - 모세의 율법에 능숙한 서기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한 사람 - 7:6. 우리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study) 실천하고(practice) 가르치는(teach) 일에 마음을 쏟았다는 것을 읽습니다(7:10). 우리가 따라야 할 참으로 훌륭한 모범입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말씀을 연구하고, 실천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을 필요로 하십니다 - 그 순서대로!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용하시기를 원한다면 기억하십시오.

에스라가 바벨론에 머물렀더라면 우리는 그의 이름을 결코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늘은 바벨론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이주하는 자를 인정합니다. 이 책에서 우리는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는 내용을 여섯 번이나 읽습니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이동하는 것은 항상 한 단계 더 올라가는 일이며 "하나님의 선한 손이 사람 위에 임한" 결과입니다(7:9). 바벨론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간 사람들이 예수님의 열두 사도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자녀와 후손 모두는 오늘날 우리가 내리는 결정에 영향을 받습니다.

당시, 페르시아 왕은, 에스더의 후손이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을 더 쉽게 만들었습니다.

7장 12절에서 우리는 흥미로운 칭호의 대조적인 내용을 읽습니다: 만왕의 왕 아닥사스다와 하늘 하나님의 율법 학자 에스라!! 우리 모두는 어떤 칭호가 더 큰지 알고 있습니다.

7장 18절은 왕이 진실한(integrity) 사람으로서의 에스라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는 엄청난 확신을 갖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 나머지 은과 금은 너와 너의 형제가 좋게 여기는 일에, 너희 하나님의 뜻을 따라 써라." 모든 하나님의 종은 이방인도 그를 신뢰할 수 있을 만큼 재정적으로 정직한(integrity)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그런 사람을 찾는 것은 얼마나 드문 일입니까?

왕이 유대인들을 위해 행한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에스라는 모든 영광을 왕이 아닌 하나님께 돌리려고 주의합니다. 왕의 마음에 그런 친절한 생각을 넣어주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을 바벨론에서 인도할 수 있는 힘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똑같이 주의합니다(7:27,28).

8장 1절에서, 우리는 바벨론에서 나온 또 다른 사람들의 명단을 읽습니다. 이번에 우리는 레위인의 수가 단지 38명으로 감소했음을 주목합니다(8:18,19).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을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8장 21절에서, 우리는 에스라가 금식을 선포한 것을 읽습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으로의 안전한 여정을 위해 하나님을 겸손히 의지한다는 표현이었습니다. 에스라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왕 앞에서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그의 능력과 진노를 내리시느니라"(8:22)라고 담대하게 고백한 후에 왕에게 그들을 보호할 군사를 구하는 것을 부끄러워했습니다.

8장 24~30장에서, 우리는 에스라가 예루살렘으로 운반되던 은과 금을 다루는 일에서 지혜를 발휘한 것을 봅니다. 그는 제사장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신성한 보증금(공탁금)입니다. 조심하십시오. 여러분이 예루살렘에 이르거든 그 모든 것을 그 곳의 지도자들에게, 정확하게 전달하십시오." 이것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몸을 세울 때 돈을 사용하는 데에 있어 신실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에스라서에서 "우리 하나님의 선한 손이 우리 위에 있도다"라는 표현을 여러 번 발견하는데, 이는 그들이 약하고 무력한 포로로서 모든 일에 대해 하나님의 도움에 얼마나 의존했는지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일은 오늘날에도 이렇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에스라와 그의 포로 무리들을 예루살렘으로 인도할 구름기둥이나 불기둥도 없었고 오직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임재만이 있었습니다.

9장과 10장에서는, 에스라가 이스라엘의 혼합(이방 백성들과의) 결혼 문제를 다루어야 했던 이야기를 읽습니다. 에스라가 이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한 일은 하나님의 백성의 실패를 슬퍼하는 것이었습니다(9:3). 그런 다음 그는 자신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떨고 있는 몇몇 사람들을 모아 함께 기도회를 가졌으며, 그곳에서 그들은 남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대신 그들 자신의 죄를 자백했습니다(9:5-15). 에스라는 기도하고,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울며 엎드렸습니다(10:1). "그는 포로들의 범죄를 슬퍼하여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10:6). 그는 올바른 사람이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학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동료 유대인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울며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에도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주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있어야 하고, 우리의 죄를 슬퍼하는 소리가 있어야 합니다.

에스라와 그의 동료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진심으로 염려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모였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왜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비를 그치지 않으셨는지 궁금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성전 앞 광장에 앉아 있는 동안 내내 비가 많이 내렸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10:9). 아마도 그것은 누가 온 마음을 다한 사람이고 누가 그렇지 않은지 하나님께서 시험하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에스라는 백성들에게 보상하고, 일을 바로잡고, 죄를 자백하도록 가르쳤습니다(10:11). 소수의 사람들이 그를 반대했지만 대다수는 그를 지지했습니다. 다시 한번 타협하는 자들의 목록이 있습니다(10:18-44).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타협하는 자들의 명단을 기록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에스라서는 이렇게 끝납니다.

장 16
느헤미야

예루살렘에서 일을 완성하다

구약성경에는 이스라엘의 두 가지 이동이 아주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1. 애굽에서 가나안으로의 이동은 그리스도의 피와 물 세례와 성령 세례를 통해, 죄에서 벗어나고, 사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세상과 율법주의에서 벗어나, 죄를 이기는 삶과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동행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개인적인 삶을 상징합니다.

2.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의 이동은 거짓 기독교 집단을 떠나 그리스도의 몸의 참된 표현으로 다른 사람들과 교제속으로 들어가는 우리의 단체적인 삶을 상징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바벨론이 기독교 집단에 있는 특정 교단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일단 그 죽은 교단을 떠나면 바벨론도 떠난다고 상상합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바벨론은 상업 시스템입니다. 모든 상업 시스템의 원칙은 자신의 이익을 얻는 것입니다. 사람이 "기독교를 통한 개인적 이득"의 원칙(주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함으로써 그가 얻을 수 있는 것 , 교회나 조직에 가입함으로써 그가 얻을 수 있는 것 등)에 따라 생활하는 한, 그는 바벨론의 원칙에 의해 동기를 부여받습니다. 육신을 따라 살며 자신의 것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은, 비록 세상에서 가장 좋은 교단에 속해 있다 할지라도 여전히 바벨론의 일부입니다. 바벨론의 영은 주로 교단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주로 사람의 내면에서 발견됩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희생의 도시입니다. 그 영(정신)은 바벨론의 사업 영(정신)과 정반대입니다. 그것은 다윗이 "내가 값을 치르지 아니한 것으로는 주님께 드리지 않겠습니다"(삼하 24:24)라고 한 말에서 발견되는 영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즉 "하늘의 예루살렘"을 건설하려면, 자신의 것을 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없는 영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영을 가진 사람은 심지어 죽은 교단에서도 때때로 발견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의 영 역시 주로 내적인 것이지, 외적인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고 한다면, 이 희생의 원리를 이해한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이전 시스템과 같은, 그저 또 다른 하나의 시스템을 구축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분리된 교회들' 중 다수가 행한 일이며, 지금 그들은 주류 교단들과 마찬가지로 죽었습니다(또는 더 많이 죽었습니다).

예루살렘의 부서진 성벽과 불탄 성문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이동시키는 일에 사용하신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스룹바벨, 여호수아, 학개, 스가랴의 약 70년 후에 살았습니다. 성전은 건축되었고 에스라는 약 13년 전에 이미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학개와 스가랴와 스룹바벨에게 주신 사명은 성전을 건축하는 것이었습니다. 에스라의 사명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의 임무는 예루살렘 성벽을 건설하고, 그 도시의 행정을 조직하고, 사람들을 그들이 버린 언약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개혁가였습니다. 영적으로, 그는 비전과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실질적으로, 그는 조직자이자 동기를 부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지금과 같은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의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모든 특성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당시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인 메대-페르시아 제국의 수도인 수산에 살고 있었고, 그 왕 아닥사스다의 개인 참모였습니다.

1장 1~3절: 하나니와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왔을 때, 느헤미야는 돌아간 포로들의 형편과 예루살렘의 형편을 알아볼 만큼 염려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의 주요 특징입니다 - 그는 사람을 염려하고, 그런 다음 하나님께서 그에게 사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섬기고 싶다면,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부터 시작하십시오. 하나님은 남에게 관심없는 사람을 결코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니에게, "거기 일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니는 그에게 성벽이 무너지고 성문이 불탔다고 말했습니다.

이사야서 60장 18절에서, 우리는 예루살렘 성벽은 구원을 상징하고 성문은 찬송을 상징한다는 것을 읽습니다.

성벽은 세상과의 분리와 안전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교회가 세상과 분리되기를 원하십니다. 담이 높아져야, 세속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이 교회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의 일부가 되려면, 제자가 되어야 하며,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지난 20세기 동안, 설교자들은 예수님과 사도들이 세운 기준을 낮추었고, 이제는 성벽이 너무 낮아 누구든지 뛰어 넘어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담을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요 10:1). 들어갈 수 있는 길이 하나 있습니다 - 문을 통해서입니다 -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그 문은 매우 좁습니다. 그러나 설교자들은 기준을 낮추었고, 이제 분리의 벽이 매우 낮아졌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벽이 완전히 무너져, 교회와 세상 사이에 차이가 없게 되었습니다. 사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소위 "신자들"이라고 불리는 많은 사람들보다 훨씬 더 나은 행동을 합니다. 벽이 무너진 교회가 바로 그런 곳입니다.

성문은 교회에서 항상 발견되어야 하는 승리의 찬양의 영을 상징합니다. 성문은 또한 그 도시의 장로들이 앉는 곳, 곧 권위를 행사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승리하는 찬양의 영을 잃어버렸고 영적인 권위를 가진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느헤미야는 무너진 성벽과 불탄 성문을 걱정했습니다. 그는 그 소식을 듣고, 여러 날 동안 울고 애통해하며,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 하나님의 교회의 형편을 볼 때 염려와 부담이 있는 사람입니다.

당신 자신의 슬픔 때문이 아니라, 오늘날 인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그렇게 비참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당신이 마지막으로 애도한 때는 언제였습니까? 오늘날 인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예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을 염려하여 마지막으로 금식하고 기도한 것이 언제였습니까? 그러나 우리 마음속에 염려가 없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남자와 여자가 될 수 없습니다.

느헤미야는 옛 언약 아래에서 살았습니다. 그에게는 우리처럼 성령이 그 안에 거하시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오늘날 우리가 풍부하게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이 완전한 성경도, 교회 교제도, 책도, 테이프도, 연합학회도 없었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너무나 큰 부담이 있었습니다. 그는 '풀타임(전임) 사역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세속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고 주님을 섬겼습니다. 느헤미야는 전적으로 이타적이고 오직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만을 염려한 사람의 훌륭한 예입니다. 우리가 그의 본을 따르라는 도전을 받을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에서도 무언가를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이동하는 일은 다니엘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에서 금식하며 기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이동은 여호수아, 스룹바벨, 학개, 스가랴를 거쳐 계속되었습니다. 그들 모두는 예루살렘 건축을 위한 부담을 갖고 있었습니다. 금식과 기도는 바벨론에서 나오는 이 이동과 관련된 책들에 자주 언급됩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도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우리 중 일부는 간절히 기도에 대한 응답이 필요할 때 금식하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 가족 구성원의 치유를 위해, 또는 직업을 구하거나 결혼 파트너를 찾기 위해. 좋습니다. 그러나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자신을 위해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금식하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도록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우리도 이를 위해 금식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느헤미야의 임무 중 하나는 왕이 마시는 포도주를 맛보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왕들은 적들이 자신들을 독살하려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왕들은 포도주를 받기 전에, 그것을 먼저 맛을 볼 사람이 있었습니다. 분명히, 그러한 사람은 절대적으로 충성스럽고 부패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 이방인 왕이 이 중요한 임무를 위해, 자신의 부하 중 한 사람이 아닌, 유대인을 선택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이를 통해 느헤미야가 청렴한 사람으로서 가졌던 어떤 표시를조금이나마 알 수 있습니다. 왕은 100% 느헤미야를 의지했고, 그 결과 느헤미야는 당시 세계 최고의 군주의 궁정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느헤미야 사역의 시작

느헤미야는 이전에 왕 앞에서 슬퍼한 적이 없었습니다(2:1). 그는 우울한 성격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왕은 항상 그가 행복해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지금 그(느헤미야)가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나 가족에 대해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이 이렇게 혼란에 빠졌기 때문에 슬펐습니다. 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슬픈 모습을 보고 슬퍼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얼마나 좋을까요!

왕이 말했습니다, "네 얼굴이 너무 슬퍼 보인다! 이것은 마음의 슬픔으로만 보인다." 그리고 느헤미야는 두려워했습니다(2:2). 그 당시 왕의 생각을 산란하게 하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나는 느헤미야가 두려웠다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모습을 좋아합니다. 두려움은 우리 삶에서 완전히 제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두려움을 느낄것입니다.그러나결코두려움에따라행동해서는됩니다 . 바울은 그에게 두려움이 있다고 말했습니다(고후 7:5). 그러나 그는 결코 그러한 두려움에 따라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위험한 곳에 살고 있거나, 당신의 생명이 위협받을 수 있는 곳에서 주님을 섬기려고 한다면 - 오늘날 인도에는 그런 곳이 많습니다 - 당신은 자연스럽게 두려움을 느낄 것입니다. 그것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은 인간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 두려움에 근거하여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조심하고 신중하게 행동할 수 있지만, 두려움을 가지고 행동할 수는 없습니다. 두려움은 믿음의 반대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면서 행동하는 것은 불신앙 속에서 행동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신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느헤미야는 두려웠지만, 그래도 왕에게 "내 조상들의 묘실 있는 성읍이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으니, 내 얼굴에 수심이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왕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빠르고 짧은 기도(이러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를 하고, "왕께서 좋게 여기신다면, 나를 유다에 보내어 그 성을 재건하게 하소서"라고 대답했습니다. 왕이 "네가 얼마나 떠나 있을 예정이냐?"라고 말했습니다. 시간이 정해졌고 그는 갔습니다(2:3-6).

그는 예루살렘에 가서 아무데도 가지 않고 사흘 동안 혼자 머물렀습니다 - 아마도 금식하며 기도했을 것입니다(2:11). 그리고나서 그는 밤에 일어나 몇 사람을 데리고 갔습니다. 그는 자신을 방해하는 원수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생각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2:10). 그는 하나님의 일에 대한 부담이 없는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몇 사람만 데리고 가서 성벽과 성문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에스라 시대와 마찬가지로, 반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아야 한다고 염려하는 순간, 즉시 반대가 시작됩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일어나는 그러한 움직임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많은 사람들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해 살고 그분을 섬기려고 노력하지 않는 한 가지 이유입니다. 그들은 마귀의 반대를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당신이 하나님의 뜻안에 있다는 것을 아는 한 가지 방법은 마귀와 자주 대면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당신을 내버려둔다면, 당신은 완전히 하나님의 뜻 밖에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제가 아는 한, 내가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표시 중 하나는 마귀가 나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선동하여 나를 방해할 온갖 상황을 조성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를 통틀어, 이것은 성실하게 주님을 섬기려고 노력한 모든 사람의 경험이었습니다. 산발랏과 도비야는 유대인들을 조롱하고 업신여기며 "너희가 무슨 짓을 하느냐? 너희가 왕을 거역하는도다"(2:19)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형통을 주실 것이다. 우리는 일어나 건축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기억되는 것도 없다. 우리는 너희와 함께 일하지 않는다"(2:20)

느헤미야는 훌륭한 조직가이자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직접 일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와 함께 즐겁게 일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인도에서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지도자의 유형입니다 - 금식하며 기도하는 사람, 하나님의 이름을 염려하는 사람, 주님을 위해 일하도록 사람들을 조직하고 동기를 부여하는 데 능숙한 사람, 그리고 자신의 손으로 직접 일할 줄 아는 사람.

3장에서 우리는 느헤미야가 그 일을 매우 신속하게 조직했음을 봅니다. 그 사실은 여기서 언급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느헤미야는 너무 겸손해서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임무가 할당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대제사장과 같은 지도자들에게도 해야 할 일이 주어졌습니다(3:1). 대제사장은 그 도시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앉아서 작업을 감독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안 돼요. 그는 또한 도시 재건을 돕기 위해 벽돌과 회반죽을 직접 손으로 가져와야 했습니다. 느헤미야가 그러한 지도자들 역시 자신의 손으로 일하게 할 수 있었던 방법을 보는 것은 놀랍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느헤미야의 위대함을 봅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육체 노동을 하기에는 너무 큰 사람은 없다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그들 모두는 형제자매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에서도 우리에게 필요한 영(spirit, 정신)입니다.

이 장에 자주 나오는 표현인 "그 다음은"(3:2, 4, 7, 8)에 주목하십시오. 즉, 성벽은 어디에도 틈이 없이 쌓여졌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모두 다른 유형의 사람들이었지만, 벽에 한 치의 틈도 생기지 않도록 모두 함께 일하고 서로 협력했습니다. 여자들도 손으로 일했습니다(3:12). 살룸은 예루살렘의 고위 관리였습니다. 그의 딸들도 벽돌과 회반죽으로 일하면서 손이 더러워졌습니다.

적으로부터의 반대

4장에서는, 원수 산발랏이 성벽이 올라가는 것을 보고 분노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 성벽은 산발랏에게 개인적으로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괴로움을 느꼈습니까? 그는 사탄의 부추김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같은 것을 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어떤 영역에서 주님을 위한 일을 할 때,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곳의 많은 사람들은 우리를 강력하게 반대합니다! 우리는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우리는 그들 모두에게 선한 일을 하고 있으며 사회에 축복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화를 내는것일까요? 그러한 사람들의 반대와 분노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이 사탄의 부추김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인도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는 기독교인들에게 분노합니까?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그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탄이 어떤 식으로든 그리스도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는 사람을 미워하기 때문에, 화를 냅니다. 우리는 성경 전체에서 이 원칙을 발견합니다. 느헤미야 시대에는, 유대인의 적들은 분노하여 유대인들에게 정부 차원의 압력을 가하려고 했습니다. 오늘날 인도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산발랏은 부자들을 설득하여 유대인들의 사역을 반대하게 하려고 했고, 도비야는 그 사역을 비웃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무엇을 했나요? 그는 그들과 논쟁이나 토론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우리는 멸시를 받습니다. 이 사람들은 우리를 반대합니다. 우리는 성벽만 쌓고 있는데 이 사람들이 우리를 대적하고 있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4절). 그리고 성벽은 계속 건축되었습니다, "백성이 마음을 다해 일하였기" 때문입니다(4:6). 그 후 산발랏과 도비야는 예루살렘을 쳐서 그 도시를 소란하게 하려고 음모를 꾸몄습니다(7,8절). 그러나, 느헤미야는, 기도하며 밤낮으로 파수꾼을 세워 대적들을 막았습니다(9절). 즉, 그들은 망을 보면서 기도도 했습니다. 그들은 깨어서 대적을 경계하고, 기도도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 시대에도 우리가 일해야 하는 방식입니다.

기독교 사역에서 우리가 직면하는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외부에서 우리를 공격하는 원수들뿐만 아니라, 내부에서도 우리를 원망하고 낙담시키는 사람들과 마주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제자들이 더 많아졌을 때, 헬라인 과부들 가운데서 "우리는 히브리 과부들만큼 음식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편애가 좀 있습니다"(행 6:1)라는 불평이 나왔습니다. 진영 내부에서 들려오는 불평도 느헤미야가 역시 처리해야 했던 문제였습니다. 유다 사람들은 "여기 쓰레기가 너무 많아서 다 처리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10절). 그리고 느헤미야는 그 모든 불평과 낙담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들(원수) 근처에 사는 유대인들은 몹시 두려워하며 열 번이나 "그들이 사방에서 너희를 치러오리니, 너희는 조심하라"(12절)며 다른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토로했습니다. 교회에서도, 우리 마음에 두려움과 낙담을 심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크고 두려우신 여호와를 기억하고, 여러분의 형제와 여러분의 아들딸을 위하여 싸우십시오"(14절)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면, 다른 것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사 8:12,13 - Living).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는 일을 지지하신다고 정말로 믿는다면, 누군가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5장 1~13절에서, 우리는 느헤미야가 그들 가운데 있는 가난한 자들과 억압받는 자들과 빚진 자들을 크게 보살피는 것을 봅니다. 그는 채권자들과 이야기하여 그들 모두를 빚에서 면제해 주었습니다. 18절에서, 우리는 느헤미야가 지방 총독으로서, 받을 권리가 있는 돈을 한 푼도 받지 않은 놀라운 본을 봅니다 - 그는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매일 150명의 유대인과 다른 나라들에서 온 많은 사람들을 그의 식탁에서 먹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는 노아와 바울처럼 자비를 들여 하나님을 섬기는 환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성벽을 쌓는 데만 가능한 모든 돈을 사용했습니다. 여기, 엄청난 희생을 하며 살면서, 하나님의 일을 위해 받은 돈을 자신을 위해 전혀 사용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돈에 충성된 하나님의 종을 보시는 곳은 어디든지,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시는 데에는 한계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많은 종들을 버리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형제들을 재정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6장: 여기서 우리는 성벽이 어떤 틈도 없이 완성되었음을 분명히 읽습니다. 이제 산발랏은 또 다른 전략을 시도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오노 평지에서 함께 토론하자"(6:2)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속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들이 자신에게 해를 끼칠 것이라는 것을 그의 영으로 느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종들을 돌보시고 보호하십니다. 느헤미야는 그들에게, 비슷한 상황에서 우리도 대답해야 할, 놀라운 대답을 했습니다: "내가 이제 큰 일을 행하매, 내가 그만 두고 너희에게 내려갈 수 없느니라"(6: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해야 할 일을 주셨을 때, 우리는 그 일을 고수해야 하며, 쓸데없는 토론으로 우리의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태도로 느헤미야는 단 52일 만에 성벽을 완공했습니다(15절). 첫 번째 포로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때부터 90년 동안, 이 성벽은 건축되지 않았었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찾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 한 사람이 발견되었을 때, 그는 두 달도 채 안 되어 그 일을 해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이루어지기를 원하시는 많은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수년이 지났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기다리고 계십니까? 그분은 부담(burden)을 갖고, 반대에도 낙담하지 않으며, 자신의 비용으로 그 일을 해낼 사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느헤미야도 유대인의 적인, 도비야와 결혼 관계에 있던 유다 귀족들로부터 문제를 겪었습니다. 느헤미야는 타협하는 유다 통치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혼자서 나아갔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사명을 완수했습니다.

부흥(Revival)

8장과 9장은 경건한 두 사람,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온 나라에 끼친 영향력을 통해 하나님께서 유대인들 가운데 가져오신 엄청난 부흥을 보여줍니다.

8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에스라를 통해 행하신 일을 읽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고, 모든 남자와 여자 그리고 이해할 수 있는 나이 이상의 아이들을 모았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그들을 위해 6시간 동안 성경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모든 백성이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8:3).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간으로 모임을 시작했습니다(6절). 그리고 나서 에스라는 자신이 읽은 말씀의 모든 의미를 백성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애썼습니다(8절). 분명히 에스라는 그들 모두에게 그 모든 것을 매우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도록 말씀을 직접 연구하는 데 수개월, 수년을 보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때를 위하여 그를 은밀히 예비하셨습니다. 부흥이 일어났고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 때문에 울기 시작했습니다(9절). 그런 다음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좋은 것들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라는 권고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 될 것이라"(8:10). 사람들은 나가서 그 권고에 순종했습니다. 다음 날 에스라는 지도자들을 위한 성경 공부를 했습니다(13절).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매년 일곱째 달에 "초막절"을 지키라고 명령한 것을 보고, 즉시 그 절기에 순종했습니다. 이 절기는 약 900년 만에 처음으로 지키는 것이었는데, 이는 여호수아 때부터 이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14-17절).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조차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명령에 순종하도록 하지 못했습니다. 에스라는 그 후 7일 동안 계속해서 백성들을 위한 성경 공부를 했습니다(18절).

9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느헤미야를 통해 행하신 일을 읽습니다. 이 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식하고,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이방인과 구별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1,2절). 그런 다음 그들은 3시간의 성경 공부 시간과 3시간 동안의 주님을 찬양하고 죄를 고백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다시 한 번 부흥을 맞이한 것입니다(3절). 그러자 레위 사람들이 일어나 큰 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4절). 6절부터 31절까지는, 성경 전체에서 가장 긴 기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 다음 레위인들은 아브라함 시대부터 이스라엘의 역사와 광야 40년 동안의 방황, 사사 시대와 왕 시대 동안의 실패를 되새기며 하나님께서 보내신 모든 심판이 공의롭고 옳았음을 인정했습니다. 그들은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서 문서에 서명했는데, 느헤미야가 먼저 서명했습니다(10:1).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두 사람,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영향력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들의 공동 사역은 두 장로가 이끄는 새 언약 교회의 기능과 거의 똑같았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따라야 할 참으로 훌륭한 모범입니다.

10장에는 이러한 회개의 결과로 그들이 내린 몇 가지 결정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의 생활은 여전히 인기가 없었습니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곳에 와서 살기를 자원했습니다(11:1,2).

12장에서는, 느헤미야가 성문을 지키는 사람과 찬양 시간을 인도할 사람들을 어떻게 조직했는지 읽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금식, 기도, 죄의 고백, 많은 시간의 성경 공부, 긴 모임들, 하나님을 많이 찬양하는 것에 대한 지속적인 강조를 주목하십시오.

13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집을 정결하게 하려는 느헤미야의 열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성전에 들어가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깨끗하게 하셨을 때 하신 것과 비슷한 일을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사람들이, 회심하지 않은 친척들이 성전에 머물도록 허용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제사장 엘리아십은 도비야와 관계가 있었으므로(13:4), 그를 위해 큰 방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느헤미야는 그들을 모두 쫓아냈습니다. 그는 "도비야의 가재도구를 다 내버리고 하나님의 전을 깨끗하게 했습니다"(13:8). 그는 또한 많은 사람들이 안식일에 물건을 팔아 돈을 버는 것을 보았습니다(13:15). 그는 그들을 꾸짖고, 그들에게 경고하였으며, 심지어 무력을 사용하겠다고 위협하였습니다(13:21).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는 또한 유대인 중 일부가 비유대인 여성과 결혼했다는 사실도 발견했습니다. 느헤미야는 "그들을 나무라며, 저주하고, 뺨을 때리고, 머리털과 수염을 뽑고, 다시는 자기 자녀를 이방인과 결혼시키지 않겠다고 맹세하게 하였습니다"(13:25). 이렇게 느헤미야는 어떤 편파성도 없이 제사장직을 깨끗하게 하고, 제사장들에게 직무를 지정했으며, 심지어 제사에 쓸 나무를 준비하는 일까지 세심하게 다루었습니다(13:30,31)!

느헤미야는 친절하고 온유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구하지 않는 용감한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교회에서 하나님의 기준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확고함과 권위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적인 그리스도와 같은 방식으로 강하고 권위 있는 사람을 찾지 못하시면, 하나님의 일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바벨론은 이렇게 세워졌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강력한 지도자를 찾지 못하시면 참된 교회, 즉 예루살렘을 세우실 수 없다는 것을 수년 동안 보아 왔습니다. 나는 또한 많은 지도자들이 강하지 않은 이유가 관대함에 대한 자신의 평판을 염려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그런 행동을 하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겸손하고, 은혜로우며, 온유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고 싶다."

나는 이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신이 당신의 평판에 관심이 있다면, 교회를 세우는 일을 잊어버리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비록 당신의 모든 교리가 옳을지라도, 당신은 바벨론만 건설할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평판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사용하실 수 있었습니다.

장 17
에스더

눈에 띄지 않는 곳에 계신 하나님

에스더서는 성경에서 '하나님(God)'과 '주(Lord)'라는 단어가 전혀 나오지 않는 유일한 책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책의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습니다 - 보이지 않게 뒤에서 그분의 백성을 지원하고 도우며 일하고 계십니다.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안락한 바벨론과 메대-페르시아(바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서 재건이라는 어려운 임무를 수행한 유대인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위한 증거를 세워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지지하셨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에스더서에 언급된 사건은 에스라서 6장과 7장 사이에 일어났습니다 - 첫 번째 유대인 무리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후였습니다. 에스더서에서,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대가를 치르기를 원하지 않고, 바벨론과 메대-페르시아에서 안락한 삶을 살기를 원했던 유대인들의 이야기를 읽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이 그들과 공개적으로 연관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많은 신자들은 일요일 아침에 주님께 헌신의 노래를 부를 때 감정적으로 감동을 받는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이 매우 헌신적인 사람이라고 상상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거짓되기 때문에, 그러한 신자들은 주님의 일이나 이 땅에 그분의 교회를 건축하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이, 그러한 집회에 나가서 자신을 위해 살고 자신의 것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집에서 읽을 수 있는 선교 잡지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천국에 가기를 고대하며 하나님께 건강과 번영을 구합니다. 그들은 문제에 직면하면, 신속하게 하나님께 달려가 도움을 구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해결되면, 그들은 예전의 생활 방식, 즉 그들 자신을 위해 사는 생활로 돌아갑니다. 그런 신자들은 인생을 떠돌며, 하나님께도 쓸모없고 사람에게도 쓸모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공개적으로 자신과 당신을 연관짓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그분을 위해 완전히 팔려야 합니다. 당신은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주님, 저는 안락함, 돈, 명예나 쾌락을 위해 살지 않겠습니다. 나는 오직 당신만을 위해 살겠습니다. 나는 당신이 원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들은 에스라와 느헤미야서에서 읽은 유형의 사람들이며 거기에는 그들의 이름 목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에스더서에 오면, 이름의 목록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람들을 인정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여전히 그들을 돌보셨습니다. 하나님은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위에 해가 떠오르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자와 불신자 모두에게 물질적인 축복과 육신의 건강을 베푸십니다. 그래서 페르시아에 머물고 있는 유대인들도 보호해 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직면한 위험(The Danger the Jews Faced)

당시 세계 통치자였던, 아하수에로 왕은, 어느 날 술에 취해 왕비 와스디에게 와서 다른 모든 사람들 앞에 모습을 보이라고 말했습니다(1:10,11). 그녀는 정숙한 여왕이었고 "나는 나가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왕은 그녀에게 화가 나서 자신에게 불순종했다는 이유로 그녀를 거부하고, 다른 왕비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에스더는 예쁜 유대인 소녀였습니다. 그래서 삼촌 모르드개는 그 자리에 지원하도록 권했습니다!

모르드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으며 좋은 자질을 많이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타협자였습니다. 이 시기에 예루살렘 성벽과 성문이 무너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이 모든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35년 후에 와서 바로 그 나라에 살았던 느헤미야는 걱정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느헤미야와 모르드개 사이의 질적인 차이를 봅니다. 모르드개는 자신의 안전을 염려한 반면,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목적을 염려했습니다.

모르드개와 느헤미야는 두 가지 유형의 신자를 대표합니다 - 바벨론 체제에 머무르는 사람과 그 체제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이주하는 사람. 하나님은 바벨론에 있는 자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아니, 그분은 그들을 부양하시고 위험으로부터 보호하십니다. 그러나 당신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원한다면, 바벨론에서 나와 "주여, 내 삶을 향한 당신의 뜻을 보여 주소서"라고 말해야 합니다.

모르드개는 유대인 소녀가 결코 비유대인 남자와 결혼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성경에서 분명히 가르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죄였습니다. 느헤미야는 몇 년 후 이 문제를 다루어야만 했습니다(느 13:25). 그러나 모르드개는 단지 신랑이 왕이었기 때문에, 이 결혼을 권했습니다!

당신은,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이방인 왕과 결혼하도록 부추긴 것에 대해 자신이 뭔가 잘못하고 있다고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니요. 왜일까요? 사람이 한 영역에서 타협하기 시작하면, 너무 익숙해져서 곧 다른 영역에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타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왕이 와스디에게 시킨 일이 옳지 않았고, 모르드개가 행한 일도 옳지 않았지만, 주님은 주권으로 그들의 잘못을 뒤집으셔서, 유대 민족이 학살당하는 것을 구하기 위해 에스더를 왕좌에 앉히셨습니다.

어느 날 모르드개는 왕을 암살하려는 음모가 꾸며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에스더 왕후에게 말했고 에스더는 왕에게 알렸습니다. 이 문제가 조사되었고 왕에 반대하여 음모를 꾀하는 사람들이 붙잡혀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2:23). 그 후에 왕은 하만이라는 사람을 세워 둘째 통치자로 삼았습니다(3:1). 왕의 모든 신하들이 하만에게 절하였습니다(2절). 그러나 모르드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고, 하만에게 절하기를 거부했습니다. 하만은 모르드개가 왜 절하지 않는지 의아해하다가, 그가 유대인이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만은 유대인들에게 몹시 화가 났습니다. 그는 유대 민족 전체를 멸절시키기로 결심하고, 매우 영리하게도 왕이 특정 날짜에 모든 유대인을 죽이라는 명령을 통과시키도록 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왕의 금고에 10억 루피(162억 3천만원)를 지불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는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만은 기원전 5세기의 히틀러였습니다. 그러나 하만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25세기 후에, 히틀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느 누구도 유대인을 진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4000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에게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만도 왔다가 가고 히틀러도 왔다가 가지만 하나님의 목적은 성취될 것입니다.

하만은 아각 사람이었습니다(3:1) - 그는 아말렉 사람 아각 왕의 후손이었습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아말렉 사람을 모두 죽이지 않았습니다(삼상 15장). 아마도 그 당시에 한 명의 아기가 살아남았을 것이며, 이제 600년이 지난 지금 그의 후손이 일어나 유대인들을 괴롭히는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철저하게 다루지 않는 죄는, 몇 년 후에 다시 우리를 괴롭히게 될 것입니다.

모르드개는 이 계획을 듣고, 에스더에게 메시지를 보내, "당신은 이 때를 위하여 왕권을 얻었습니다"(4:14)라고 말했습니다. 모르드개가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왕궁에 살고 있다고 해서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 때 당신이 침묵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유대인들은 다른 데로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도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찾을 수 없습니다 - 심지어 '기도'라는 단어도 찾을 수 없습니다. 에스더도 유대인들에게 자기를 위해 밤낮 3일 동안 금식만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그들에게 기도하라고 말하지 않고, 오직 금식만 하라고 말했습니다(4:16).

그 당시 왕의 권위는 심지어 에스더 왕후도 왕의 초대를 받지 않으면 왕 앞에 나아갈 수 없을 만큼 강력했습니다. 초대받지 않고 왕 앞에 나아가는 것의 형벌은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에스더의 태도는 "내가 죽으면, 죽으리로다"(4:16)였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왕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녀는 왕의 눈에 띄어 호의를 얻었고, 왕과 하만을 잔치에 초대했습니다.

잔치에서, 하나님께서는 에스더가 하만의 악한 계략을 왕에게 드러낼 기회를 얻지 못하도록 상황을 마련하셨습니다. 이는 하만의 모든 악이 드러나게 하려 하심입니다 - 하만이 그날 밤에 세울 교수대를 아직 세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미루시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족속은 그(아브라함)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당시 그들은 심판하기에 죄가 무르익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400년 후에야 심판을 받을 만큼 죄가 무르익었습니다(창 15:13-16).

하만은 에스더의 잔치에 초대받은 것을 매우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그는 집에 가서 그 일과 자기가 얼마나 부자인지 자랑했습니다(5:11). 그는 자신의 열 아들을 자랑했고(9:10), 왕이 자신을 승진시켰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사람 모르드개가 내게 절하지 아니하는 것을 보는 동안에는 이 모든 일이 만족스럽지 아니하도다"(5:13)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내 세레스와 그의 친구들은 하만에게 모르드개를 매달기 위해 높이가 75피트나 되는 거대한 교수대를 만들 것을 제안했습니다. 75피트 높이는 7층 건물의 높이(22.86m)입니다. 사람을 매달기 위해 75피트 길이의 교수대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10피트 교수대만 있으면 됩니다. 그는 왜 높이를 75피트로 만들었나요? 이는 모르드개가 수치를 당하고 그가 거기 매달린 것을 온 성읍이 보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나 하만과 그의 아내가 밤새도록 악한 일을 계획하고 교수대를 세우는 동안, 모르드개는 자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깨어서 그를 보호하기 위해 일하고 계셨을 때, 그는 깨어 있을 필요가 없었습니다(시 127:2 참조). 하나님은 하만의 행동을 지켜보고 계셨고 이미 그것에 대해 뭔가를 하실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유대인의 승리(The Victory of the Jews)

우리가 에스더서에서 볼 수 있는 놀라운 것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대신하여 주권적인 능력으로 일하신 방식입니다.

그 날 밤에 왕은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6:1). 왕은 왜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깨어 있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대적하여 음모를 꾸미고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우리를 대신하여 일하십니다. 모르드개는 깊이 잠들어 있었고 다음날 아침에 그를 매달기 위해 그날 밤 75피트 길이의 교수대가 만들어 지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왕은 잠을 이룰 수 없었기 때문에, 제국의 역사서를 읽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아마도 그는 역사책을 읽다가 잠이 들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책을 읽었지만 - 그는 여전히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확실히 하셨습니다. 그들은 밤새도록 계속해서 왕에게 책을 읽어 주었습니다. 아침 6시쯤, 그들은 모르드개가 왕의 목숨을 구한 이야기에 이르렀습니다. 왕은 그 이야기를 듣고, "모르드개가 내 목숨을 구해 준 대가로 우리가 무엇을 했느냐?"라고 물었습니다(6:3). 그들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왕은 모르드개를 존귀하게 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바로 그 순간 - 여기서 하나님의 놀라운 타이밍을 볼 수 있습니다 - 하만은 모르드개를 매달기 위해 왕의 허락을 받으러 왕궁으로 왔습니다. 하만이 말을 하기도 전에, 왕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을 존귀하게 하고 싶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자만심이 강한 하만은 즉시 왕이 자신을 존귀케 하려고 생각하고 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를 왕의 말에 태우고, 왕의 신하 중에서 가장 높은 자가 그를 데리고 거리로 나가 '왕은 충실한 사람을 이렇게 존귀하게 하실 것이다'라고 말하게 하십시오." 왕이 말했습니다, "가서 당장 모르드개에게 그 일을 하라"(6:10). 내가 이때 하만의 얼굴을 봤으면 좋았을 텐데요!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어떻게 역전시키시는지를 보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만의 굴욕의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그날 밤 하만이 에스더의 잔치에 갔을 때, 에스더는 하만의 계획을 왕에게 알렸습니다. 하만은 에스더 앞에 엎드려 자비를 구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자기 앞에 무릎을 꿇기를 원했던 그가 이제 유대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주님은 그분의 신실한 교회 중 하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여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계 3:9).

하만은 자신이 모르드개를 위해 교수대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에게 자랑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만 자신을 그 나무에 매달자고 왕에게 제안했습니다. 그 사람이 조용히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민족 앞에서 모르드개에게 모욕을 주려던 그는, 이제 자신이 모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함정을 파는 자는 자기가 거기 빠지리라" (잠 26:27).

"의인은 환난에서 구원을 받고 악인은 그 대신 고난에 빠진다" (잠 11:8).

8장에서, 우리는 모르드개가 어떻게 승진하여 하만의 지위를 얻게 되었는지를 읽습니다.

9장에서는, 유대인들이 그들의 적들을 멸망시킵니다.

모르드개는 당시 지상에서 가장 위대한 왕의 조언자였던, 요셉과 다니엘과 같이 되었습니다.

비록 그들이 페르시아에 남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 유대인들을 선대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때가 이르기까지는 어느 누구도 어떤 식으로든 우리를 해칠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해 기록된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는 "그분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분을 잡을 수 없었다"(요 7:30; 8:20)라고 두 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바울을 위한 하나님의 시간이 끝날 때까지 바울의 목을 베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시기 위해 그들을 대신하여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페르시아에서 타협하고 자신의 것을 추구하던 이 백성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서 일하셨다면, 온전히 주님을 위해 살기 원하는 오늘날의 우리를 위해서는 얼마나 더 많은 일을 하실까요? 이것이 에스더서에서 우리에게 주는 큰 격려입니다. 우리가 잠들어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파멸시키려는 악한 사람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우리를 대신하여 일하십니다.

그 믿음이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나가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마귀가 우리 마음에 두려움을 심어 주고 그 두려움에 따라 행동하게 한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우리가 두려움 속에 행동할 때, 마귀를 찬양하고 마귀는 전능하며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실 수 없다고 선포하는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런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는 신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성경의 모든 내용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대신하여 일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분은 항상 우리를 보살피고 계십니다. 주님의 눈은 우리를 대신하여 일하기 위해 온 땅을 이리저리 뛰어다니십니다. 나를 보살피시는 주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십니다. 그분은 나를 보호하시는 분이십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반대할 계획을 세울지라도, 우리는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길 때, 사탄은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해치려고 시도하게 할 것입니다. 나는, 악한 사람들이 나를 해치고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서 계략을 꾸미고 계획을 세운 일들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일이 그들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그들의 모든 악한 계략을 감찰하시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그들의 계획을 좌절시키셨고, 형세를 뒤집어엎으시고, 그들과 그들이 섬기는 마귀를 바보로 만드셨습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했나요? 그냥 하나님을 신뢰하고, 모르드개처럼 잠을 자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예배하고 섬기는 하나님입니다.

에스더서에서 유대인들은 그곳에서 승리했고 대적은 패배했습니다.

우리 삶에서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장 18
욥기

고난의 문제

욥기는 구약성경 39권 중 아브라함과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이 기록한 유일한 책입니다. 그의 부는 아브라함의 부와 마찬가지로 양과 소로 언급됩니다; 그리고 그는 아브라함처럼 자기 집안의 제사장입니다. 그는 아브라함보다 더 오래 살았습니다. 이 모든 사실은 욥이 노아와 아브라함 사이의 시대에 살았음이 틀림없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욥은 우리가 알고 있는 에녹과 노아 다음으로, 가장 초기의 하나님의 사람 중 한 사람입니다.

이 책은 욥이 살아 있을 때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 욥이 그의 아내 및 친구들과 나눈 사적인 대화가 매우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건이 일어난 지 몇 년이 지나서 이 책이 쓰여졌다면, 그것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기는 영감받은 성경의 첫 번째 책입니다 - 창세기(그리스도보다 약 1500년 전에 모세가 기록한 것) 보다 수백 년 전에 기록됨.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록하기로 결정하셨을 때, 그분이 쓴 첫 번째 책은 창조에 관한 것이 아니라 경건한 사람에 관한 책이었다는 점은 흥미롭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항상 무엇을 찾으시는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분은 에녹의 때, 노아의 때, 욥의 때에 경건한 자를 찾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우리에게 성경 66권을 주시기로 계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책들 중 첫 번째 책에서, 그분은 자신의 마음에서 가장 중요한 것, 즉 경건한 사람에 대해 쓰셨습니다.

욥기는 성경의 다른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몇 가지 문제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중 한 사람이 땅에서 고통을 당할 때 "하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봅니다. 욥 자신도 고난을 당할 때,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만일 그가 알았더라면, 그는 시련 속에서도 큰 위로를 받고 힘을 얻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제 우리에게 드러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욥보다 훨씬 더 나은 위치에 있습니다.

욥은 고난을 겪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후에,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이 사실을 발견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욥이 그토록 불평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욥의 불평에서 위로를 찾을 수 없으며, 우리도 같은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 왜냐하면 우리는 욥보다 훨씬 더 많은 계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더 많은 것을 받은 사람에게는 더 많은 것이 요구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단체적으로 일하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분은 종종 한 사람을 사용하셔서 교회 내의 많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십니다. 사도 바울이 그 예입니다. 만일 바울이 그가 그랬던 만큼 전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하지 않았다면, 교회는 얼마나 많은 손실을 입었을 것입니까? 바울은 혼자서 3년 동안 늑대들이 에베소 교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그가 그 곳을 떠나자마자, 늑대들이 들어왔습니다(행 20:29,30).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욥과 바울과 같은 경건한 남자(그리고 여자)가 필요하십니다.

경건한 사람(A Godly Man)

성경의 첫 영감받은 책의 첫 문장을 주목해 보십시오:

"우스 땅에 욥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은흠이,정직하며,하나님을경외하며악에서떠난자더라"(욥 1:1).

당신은 성경의 첫 문장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까? 그것은 욥이라는 이름과 우스라는 지역으로 식별되는 한 사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그래서 그가 다른 곳에 살고 있는 다른 욥과 혼동되지 않도록). 그리고 하나님은 그 사람에 대한 그분(하나님)의 증거를 주십니다 - 그 사람의 영리함이나 부, 다른 사람들 사이의 평판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오직 욥의 성품에 관한 것입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참으로 가치있게 여기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봅니다 - 정직함, 하나님을 경외함, 모든 악에서 떠남. 나는 그것이 우리에게 도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성경 지식을 가진 사람을 주로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에는 성경이 없었기 때문에 욥에게는 성경 지식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의 주위에도 그가 경건한 삶을 살도록 격려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시대의 설교자들조차 말로 그를 낙담시켰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는 올바른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욥이 너무나 큰 고통(하루아침에 전 재산과 열 자녀를 잃음)을 겪는 이야기를 읽을 때, 이 이야기가 단지 비유에 불과한 것인지 의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욥이 산지, 1400년이 지난 후, 하나님은 에스겔서 14장 14절(20절에서 반복)에서 욥은 역사상 가장 의로운 세 사람 중 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머지 두 사람은 노아와 다니엘이었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당시 바벨론에 살고 있던 젊은 다니엘도 포함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야고보를 통해, 욥의 인내에 관해 기록하셨습니다(약 5:11). 이는 이것이 실제 이야기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1장 4,5절에서 우리는 욥이 그의 자녀들을 염려한 것을 봅니다. 성경의 첫 번째 책은 우리에게 경건한 가족을 갖는 것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경건한 사람은 그의 자녀를 경건한 방법으로 양육합니다.

욥에게는 일곱 아들과 세 딸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성장하여 각자의 집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욥은 그들 중 누구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지 않도록 매우 염려했습니다. 그의 아들들은 자신들의 집에서 며칠 동안 잔치를 벌이면서 생일을 축하하곤 했고, 자매들을 초대하여 함께 먹고 마시곤 했습니다. 이 잔치 기간이 끝나면, 욥은 그들을 불러오곤 했습니다.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났습니다. (이 경건한 사람의 그 중요한 습관도 영감받은 성경의 첫 페이지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런 다음 욥은 그의 자녀 각각을 위해 따로 번제를 드리고, 그들을 다시 주님께 깨끗하게 했습니다. 욥이 그렇게 한 이유는 자녀들이 잔치하는 동안 마음으로 죄를 지었을지도 모른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들이 마음에 죄를 지을까 염려했다는 점에 유의하십시오. 욥은 단순히 우상 숭배나 간음과 같은, 그들이 저질렀을지도 모르는 외적인 죄만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들이 하나님을 욕되게 할 수 있는 마음속에 있는 죄에 대해 염려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 그의 자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사람은 마음 속의 죄에 민감해짐으로써 경건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문을 닫고, 하나님과 단둘이 되어, 자신을 판단하고 다른 사람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그의 마음 속의 죄에 관하여서 하나님을 대합니다.

욥은 가난한 사람들과 소경과 과부를 돌보는 등 선한 일을 많이 했습니다(29:12-16). 하지만 그는 주로 자녀를 경건한 방법으로 양육했습니다. 그는 그의 자녀들을 위해 기도했으며 - 계속해서 그렇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경건한 사람에게는 끊임없이 실천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는 간헐적이지 않고 지속적으로 믿음을 실천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어려울 때만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때에도 하나님과 가깝게 살았습니다.

사탄과 하나님의 토론(Satan's Discussion with God)

1장 6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sons)"에 대해 읽습니다. 이것은 천사들을 가리킵니다. 이 문구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창조물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됩니다. 우리는 아담처럼 하나님이 직접 창조하신 존재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직접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렸습니다. 우리는 부모님을 통해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듭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창조물, 즉 새로운 창조물(the new creation)이므로 우리도 역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립니다.

사탄도 이 천사들 가운데서 나왔습니다. 그 또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창조물이었습니다. 그는 셋째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 직접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곳에서 영원히 쫓겨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본부가 있는 둘째 하늘에서 하나님께 말할 수 있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께 자신이 "땅 위를 배회하며 돌아다녔다"(1:7)고 말했습니다. 사탄은 세계를 여행하는 자입니다. 세계를 여행하는 것이 대단한 일이라고 상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광을 위해 그렇게 하라고 당신을 부르신다면, 그것은 괜찮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지상의 삶 전체에서, 그분은 고향 나사렛에서 반경 100마일(160.9344km)도 채 안 되는 원 안에서만 여행하셨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 왜냐하면 그것이 그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계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결코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일하는 방식과 사탄이 일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사탄은 항상 가만 있지 못하여 - 이리저리 돌아다닙니다. 그의 모든 일에는 서두름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천천히 그리고 인내하며 일하십니다.

사탄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특히 신자들을 지켜봅니다. 그는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습니다(벧전 5:8).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내 종 욥을 생각해 보았느냐?"고 물으셨을 때, 사탄은 "그렇습니다. 나는 그에 대해 다 알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사탄은 모든 사람의 진정한 영적 상태를 알고 있습니다. 그의 마귀들도 도처에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생활을 조사하고 그에게 보고합니다. 그러므로 사탄은 세상 모든 사람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은 사탄에게 욥의 뛰어난 점을 말씀하셨습니다: "그와 같이 흠이없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은 세상에 없느니라"(1:8).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영감받은 성경의 첫 번째 책에서 많이 언급되는 주제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욥을 이 땅의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그렇게 하십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0절에서 우리는 사탄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참소하는 자임을 읽습니다. 그가 신자들을 하나님께 고발할 때, 그는 진실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저기 자기를 당신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사람을 보십시오. 그는 화를 냅니다. 그/그녀는 집에서 배우자에게 소리를 지릅니다. 그는 돈에 대해 불의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말하지만, 사역을 통해 자신을 위한 돈을 버는 데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등등.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하나님이시므로, 사탄이 말하는 것이 사실임을 인정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이름에 불명예를 돌리는 수백만 명의 육신적인 신자들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정직한 사람 한 사람을 찾으시면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하나님은 사탄이 어떤 방법으로도 참소할 수 없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의 죄를 즉시 하나님께 고백하여 매 순간 양심을 깨끗하게 지키는 사람을 사탄은 참소할 수 없습니다(행 24:16). 그러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피 때문에 의롭다 하심(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언하심)을 얻은" 사람입니다(롬 5:9). 그리고 그는 사탄의 모든 참소를 이깁니다(계 12:11). 당신도 그런 사람이 될 것인가요?

예수님은 "세상의 임금이 오되 나에게서 아무 것도 찾지 못하리라"(요 14:30)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께서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그 당시 사탄에게 "그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사람이 땅에 한 명 있었기 때문에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요한일서 2장 6절은,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예수께서 행하신 것과 같이 행할지니라"고 말합니다.

동료 신자들이 우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우리를 가리켜, 수많은 타협하고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지 여부는 매우 중요합니다. "사탄아, 나는 스스로를 내 자녀라고 부르는 많은 사람들이 타협하고 육신적인 사람들임을 안다. 그런데 그 동네 그 거리에 사는 이 남자를 본 적이 있니? 그는 다르다. 그는 정직하고 성실하다. 그 동네 그 거리에 사는 그 여자를 본 적이 있니? 그녀는 다르다. 그녀는 경건하다." 그러면 사탄의 입은 닫혀 있습니다 -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당신을 언급하실 수 있기 때문에, 당신은 사탄의 입을 막을 수 있는 사람 중 하나입니까?

당신이 부유하든 가난하든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가난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성경의 맨 첫 번째 책에 언급된 최초의 경건한 사람은 매우 부유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사실, 그것이 바로 욥 주변 사람들의 시기심을 불러일으킨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부유하고 영적인 사람을 보는 것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만일 그가 가난하고 영적이었다면 그들은 행복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영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가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돈의 양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돈에 대한 우리의 태도입니다. 바울과 베드로는 매우 가난했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욥과 아브라함은 큰 부자였습니다. 그러한 문제는 하나님께서 결정하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피부색이나, 지능 수준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것들도 결정하시며 -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영성은 은행 계좌의 규모가 아니라, 우리의 인격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탄이 욥을 자신의 표적으로 삼은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사탄은 올바른 사람들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당시에 욥을 미워하였고 - 오늘날에도 그런 사람들을 미워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우리가 경건하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의 능력이 닿는 한 모든 일을 합니다. 사탄은 욥의 아내와 육신적인 설교자들을 통해 욥을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이 중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 대한 욥의 헌신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욥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얼마나 큰 도전이 되는가요! 우리도 그와 같을 수 있습니다.

사람의 인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정을 구합시다. 개인적으로는, 전 세계 60억 인류가 모두 나를 '이단자, 거짓 선지자, 속이는 자, 탐식자, 술고래, 대주가, 간음하는 자, 도둑 또는 그들이 생각하는 다른 악한 이름으로 비난하더라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나를 사탄에게 언급하시며 "너는 나를 경외하고 모든 악에서 떠난 고결한 사람인 잭 푸닌을 보았느냐"라고 말씀하실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칭찬은 나에게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더 큰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 자신에게도 그런 소망이 있기를 바랍니다.

심지어 사탄이 우리를 인정하는 것조차도 사람이 우리를 인정하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사탄은 바울이 스게와(Sceva) 자손과 다른 부류에 속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행 19:15).

결국,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 세상 수십억 사람들의 의견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될 것입니다. 그날에는 오직 하나님의 의견만이 중요할 것입니다. 동료 신자들의 칭찬조차도 쓰레기통에 버려야 마땅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뿐입니다. 사람들은 당신을 하늘을 찌를 듯이 칭찬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을 무시하실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사람들은 당신을 갈기갈기 찢어 놓을 수도 있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당신 세대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여기실 수도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일생 동안의 가치를 인식할 수 있는 영적인 분별력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당신이 가고 있는 길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겸손한 모습을 보시고, 은혜를 베푸실 것이며 여러분이 죄와 세상을 이기게 될 것입니다.

사탄은 모든 경건한 사람들을 고발합니다! 그에게는 당신을 고발할 대리자들(심지어 신자들 가운데서도)이 많이 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고발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그가 당신 또한 고발할 것 같지 않나요?

우리는 욥기에서 그의 세 친구까지도 그를 고발(비난)했다는 것을 읽습니다. 네 번째 사람인 엘리후는 좀 더 온건하게 고발했지만, 그 역시 욥을 고발했습니다. 고발은 사탄과 그의 대리인의 성격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경건한 사람은 자신이 그러한 고발에 영향을 받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영적인 분별력이 있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그에 대해 어떻게 말하든, 경건한 사람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둘러싼 세 울타리(Three Hedges Around God's People)

그러자 사탄은 하나님께, "주께서 그와그의집과그의모든 소유물 사방에 울타리를 쳐 주셨나이다"(10절)라고 말했습니다. 사탄의 말에서, 우리는 세 가지 큰 진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경건한 사람 주위에 삼중 울타리를 두셨습니다: 첫번 째는 그를 개인적으로 둘러싸고 있고, 두번 째는 그의 가족 주변을 둘러싸고 있으며, 세번 째는 그의 재정과 재산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사탄은 영적인 영역을 들여다볼 수 있고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울타리를 볼 수 없지만, 울타리가 거기에 있습니다.

사탄은 영이므로 욥이나 그의 가족, 그의 소유물을 공격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경건한 삶을 살면 내 주위에도 세 개의 울타리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나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그리고 그 울타리 중 어느 것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열릴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욥기에서, 사탄이 그 울타리들을 통과하기 위해 하나님께 허락을 구해야 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주 예수님은 여러 해 후에, 베드로에게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탄이 너희를 체로 치려고 허락을 구하였느니라"(눅 22:31).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 한 번에 한 울타리씩 통과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동시에 모든 울타리를 열어 놓지 않으셨습니다. 처음에 하나님은 사탄이 욥의 소유물과 그의 가족만을 공격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나중에, 하나님은 사탄이 욥의 몸을 공격하는 것을 허락하셨지만, 그때에도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의 생명을 건드릴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은 욥을 죽일 수 없었습니다. 사탄은 욥을 죽이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몸에 종기를 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첫 번째 울타리가 열렸을 때, 사탄이 들어가서 욥의 재산을 모두 파괴했습니다. 욥의 재산은 하루 만에 수백만달러에서 0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런 다음 두 번째 울타리가 열렸습니다. 그 울타리 안에는 욥의 아내와 자녀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욥의 열 자녀를 모두 죽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욥의 아내도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죽는 것보다 살아 있는 것이 사탄에게 더 유용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그녀(욥의 아내)를 이용하여 욥에게 잔소리하고 욥을 짜증나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잔소리하는 아내(또는 남편)는 사탄의 손에 있는 매우 유용한 무기입니다 - 따라서 사탄은 그러한 사람들이 오래 사는 것을 보고 기뻐할 것입니다!

영감받은 성경의 맨 첫 페이지에서도 사탄에 대해 배울 수 있는 몇 가지 사항이 있습니다.

우선, 사탄은 한 번에 한 곳에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러나 사탄은 한 곳에 있으면, 다른 곳에는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탄의 일을 하기 위해 이 땅에 돌아다니는 많은 마귀들이 있습니다.

둘째, 사탄은 미래를 볼 수 없습니다. 만일 그가 미래를 볼 수 있었다면, 욥이 결국 훨씬 더 많은 축복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고, 욥을 내버려두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가 그리스도께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어떤 결과가 나올지, 즉 그 자신이 패배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권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분명히 아닙니다! 만일 사탄이, 하만 자신이 그 교수대에 매달릴 것을 알았다면, 하만이 그 교수대를 세우는 일을 돕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전 세계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으며, 그러한 행동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우리처럼) 추측할 수 있지만, 미래를 예견할 수는 없습니다.

셋째, 사탄은 당신의 생각을 읽을 수 없습니다. 그는 외관으로 당신이 무엇을 하는지만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욥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겉모습뿐이었습니다. 그는 욥의 생각을 알 수 없었습니다.

넷째, 사탄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공격하려면 하나님의 허락이 필요합니다.

내가 싸우고 있는 이 원수는 장래 일도, 내 생각도 전혀 모르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속박하는 통제 아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나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게다가, 그는 지금 십자가에서도 패배하였습니다. 그것은 사탄에 대한 나의 모든 두려움을 없애줍니다.

둘째 울타리가 열리자, 욥은 열 자녀를 모두 잃었습니다. 경건한 사람의 자녀가 고통을 당하거나 문제에 직면하는 것을 보면 결코 그를 비판하지 마십시오.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의 자녀들은 사탄의 표적이 되지만, 여러분의 자녀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아마도 여러분은 그와는 달리 타협주의자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당신과 당신의 가족을 내버려둡니다!

이제 욥이 이 모든 일에 어떻게 반응했는지 살펴보십시오. 그는 모든 것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차례로, 그의 종들이 와서 모든 것이 없어졌다고 말했습니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를 밀고,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했습니다(1:20). 그것은 영감받은 성경의 맨 첫 페이지에서 볼 수 있는 또 다른 것입니다: 경건한 사람은 예배자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성경을 아는 것보다, 주님을 섬기는 것보다, 우선적으로 예배하는 사람입니다. 당신이 모든 것을 가졌을 때도 예배자가 되어야 하고, 모든 것을 잃었을 때도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자는 영(spirit)과 진리(truth)로 예배를 드려야한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신다"(요 4:23,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린다는 것은 그분께 모든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욥은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고, 또한 알몸으로 그리로 돌아가리로다. 주신 분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분도 여호와시니라.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시옵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이 모든 일에도 욥은 죄를 짓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1:21,22). 욥은 아마도 여기서 자신이 알몸으로 나왔고, 알몸으로 흙먼지가 되어 돌아갈 대자연을 언급했을 것입니다. 그는 주님께서 그의 삶에 허락하신 모든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주님께 대한 욥의 헌신을 생각할 때, 나는 놀랐습니다. 그에게는 우리가 갖고 있는 예수님이나 사도들의 본이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따라야 할 어떤 본보기도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우리가 가진 성령의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 사람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동료 신자들은 물론이고 자기 아내로부터도 격려나 지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욥에게는 오직 하나님만이 있었습니다 - 그리고 하나님이면 충분했습니다. 욥이 이렇게 영광스러운 삶을 살 수 있었다면, 왜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까?

사탄이 세 번째 울타리를 통해 들어옴(Satan Enters Through the Third Hedge)

2장: 마귀는 욥이 자신이 생각한 대로 반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매우 기분이 나빴습니다. 주님은 사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 종 욥을 생각해 보았느냐? 네가 나를 부추겨서 까닭 없이 그를 망하게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integrity)을 굳게 지키느니라"(3절). 사탄은 대답했습니다, "그는 자기 생명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이나 심지어 자녀에게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는 정말로 자신만을 사랑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위해 가진 모든 것을 바칠 것입니다." 사탄은 인간의 이기심을 알고 있으며,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가죽(껍데기)을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은 사실입니다. 인간은 이기적이며, 압박을 받을 때 자신을 최우선으로 생각합니다.

사탄은 욥도 다르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이제 그의 몸에 손을 대십시오. 그가 여전히 주님께 충실할 것인지 나에게 보여 주십시오"라고 하나님께 도전했습니다. 주님은 "가서 그를 시험하여라. 하지만 그의 생명을 빼앗을 수는 없다." 사탄은 나가서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했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종기가 나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상상해 보십시오. 욥은 더 이상 자기 집에 살 수 없었습니다. 그는 성밖으로 나가서 거름더미 위에 앉아, 재 속에서 몸을 긁적이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아내가 와서 그에게 잔소리를 했습니다, "아직도 순전함(integrity)을 굳게 지키십니까? 이 고약한 당신의 하나님을 저주하고 자살하십시오"(2:9).

성경의 시작 부분에서, 우리는 사탄이 사람들을 자살하도록 유혹하고,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통해 그들을 유혹하는 것을 봅니다. 아담은 하와를 통해 유혹을 받았습니다. 욥은 아내를 통해 유혹을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십자가에 가지 말라고 촉구했습니다. 사탄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통해 우리를 유혹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경건한 남자에게 경건한 아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밤이 어두워질수록 별들이 더욱 밝게 빛나듯이, 아내의 불경건을 사용하여 남자의 경건을 더욱 돋보이게 하실 수 있습니다.

욥의 아내가 자살을 권유하자, 욥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어리석은 여자가 말하는 것 같소. 우리가 여호와께 복은 받아들이고, 고난은 받아들이지 않겠다 하는 것이오?"(2:10). 불경건한 아내를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대신, 그들에게 맞서는 욥과 같은 경건한 남편이 더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에게 재난이 닥쳤을 때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라는 질문을 절대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축복이 당신에게 임했을 때 같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면!! 당신이 예상치 못한 축복을 받았을 때,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왜 나는 축복을 받았고 다른 사람들은 축복을 받지 못했습니까?"라고 질문한 적이 있습니까?

욥의 세 친구인 엘리바스, 빌닷, 소발은 그의 고난을 듣고, 위로하고 싶다며 그를 찾아왔습니다(2:11). 그러나 나중에 그들이 그에게 말한 방식을 보면, 그들은 실제로 그를 전혀 위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를 비난하고 고발할 뿐입니다. 그들 세 사람은 모두 형제들을 참소하는 마귀와 교제하고 있었습니다.

이 세 사람은 욥이 경건한 사람이고 부자였고, 그와 그의 가족에게는 모든 것이 잘되고 있었기 때문에 욥을 질투했습니다.

많은 신자들은 경건한 사람들의 영향력과 사역을 보면, 그들을 질투하며 종종 어떤 재난이 그들에게 닥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귀가 경건한 사람들에게 어떤 재난이 닥치기를 열망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기다리며, 그 일이 일어날 때 은밀히 기뻐하는 신자들도 있습니다.

이 세 사람은 욥을 매우 불쌍히 여기는 체했습니다. 그들은 욥을 보고 울며, 옷을 찢고, 티끌을 그들의 머리에 뿌리었습니다. 그들은 정말 좋은 배우들이었어요. 그러나 그들은 그를 시기하기 때문에, 몰래 기뻐했습니다. 이 세 설교자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만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 중 어느 하나도 사탄에게 언급하실 수 없었습니다.

경건한 사람들은 마귀로부터 공격을 당하고, 때로는 아내로부터, 때로는 육체적으로, 때로는 재정적으로도 공격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성화시키기 위해 많은 시련을 겪게 하십니다. 그러나 아마도 그들의 가장 큰 시련은 그들을 질투하는 친구들과 형제들로부터일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기독교 사역에는 이런 일이 많이 있습니다. 기독교 사역자들은 더 기름부음받은 사역자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서, 그의 사역이 파괴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기름부음이 경건한 사람에게 임하고 다른 사람이 그를 질투할 때, 하나님은 다른 사람의 악한 질투를 드러내시기 위해 그 경건한 사람에게 육체적인 재앙을 허락하실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악이 드러나면, 하나님은 그 병을 고치시고 경건한 사람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네 명의 설교자(Four Preachers)

이 세 사람 모두 욥이 그런 고난을 겪은 이유를 진실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에게서 오직 결점만 찾을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중 예수님 시대에 바리새인들과 같은, 종교적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사람과 종교적인 사람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영적인 사람들은 모든 세대의 종교적인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아왔습니다. 성경은 " 모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사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고 말합니다. 이 규칙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고 싶지 않다면, 경건하게 행동하지 마십시오!

고린도전서 2장 15절은 "신령한(spiritual) 사람은 신령하지 아니한 자들이 분별할 수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사람은 매우 외로운 사람입니다 - 그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성경을 잘 아는 사람에 의해서도, 그의 행동은 오해를 받고 그의 말은 오해를 받습니다. 종교인들은 하나님에 관한 사실들만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자신을 모릅니다. 많은 종교인 가운데 하나님 자신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욥은 그런 희귀한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에 관해 아는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게 될 것입니다.

종교적인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분을 귀신의 왕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오늘날 그들이 어떻게 경건한 사람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예수님 당시에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라는 두 종교 집단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근본주의자들이고, 사두개인들은 자유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둘 가운데, 사두개인들보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더 반대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자유주의자보다 근본주의자가 경건한 사람을 더 비판할 것입니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외로운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닥친 시련을 통해 교훈을 얻게 하십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인내하는 사람을 복있는 사람으로 여깁니다. 여러분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님께서 (욥에게) 행하신 일의 결과나 끝을 보았습니다. 즉, 주님은 가여워하는 마음이 가득하시고 자비로우시다는 것입니다"(약 5:11). 모든 경건한 사람의 증언은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주님은 가여워하는 마음이 가득하시고 자비로우십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신 그 어려운 길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내 삶의 영광스러운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하늘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의 맨 첫 번째 책에서, 우리는 현대의 "건강과 부의 복음"의 시작을 봅니다. 그곳의 세 명의 설교자는 욥이 하나님의 축복을 잃었기 때문에, 그가 건강과 재산을 잃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축복이 항상 번영과 건강을 가져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건강과 부의 복음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처음으로 전파했다는 점에 유의하십시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기억하십시오. 모든 재산과 건강을 잃은 욥은 온전하신 하나님의 뜻 안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건강과 부"의 복음을 전한 세 명의 설교자들은 완전히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에서 이 점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나는 너희 모두에게 화가 난다. 내가 너희를 벌하지 않도록, 욥에게 너희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하여라"(42:8).

욥기는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상황에 욥이 직면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큰 격려가 됩니다.

세 설교자는 우리의 원수나 심지어 불신자들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를 괴롭히고, 오해하고, 비판하는 신자들의 모습입니다. 신자가 우리를 공격하고 고발하는 것은, 불신자가 같은 일을 할 때보다 항상 더 고통스럽습니다. 지난 50년 동안, 나는 불신자들의 비난보다 신자들의 비난을 100배나 더 많이 겪었습니다. 그것은 또한 교회 역사상 모든 하나님의 종들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인과 로마인들보다 바리새인들로부터 더 많은 반대를 받으셨습니다. 빌라도는 그분을 놓아주고 싶었지만, 안나스와 가야바는 그분을 죽이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에 대한 거짓 이야기를 퍼뜨리는 신자들에게서 최대의 반대가 나온다고 해서 놀라지 마십시오. 그들은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의 추종자들입니다.

그들이 실제로 욥에게 무엇을 말했는지 살펴보기 전에, 하나님께서 이 세 설교자에게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마지막에 엘리바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가리켜 옳은 말을 하지 아니하므로,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노라"(42:7). 우리는 이 세 설교자의 말들을 공부하면서, 하나님의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이 말한 것 중 일부는 옳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완전히 틀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들이 틀렸다고 말씀하셨나요? 그들의 말 뒤에 숨은 정신(spirit)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말 뒤에 숨은 정신입니다. 우리가 옳은 말을 할지라도 동기가 잘못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말이 틀렸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심지어 법정에서도 우리의 말을 정당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는, 우리의 태도나 동기가 잘못되면, 우리는 틀린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는 동기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말을 하려고 한다면, 무슨 말을 하든 틀린 말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에 또 한 명의 설교자가,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과 합류했습니다 - 바로 엘리후였습니다.

이 네 사람은 오늘날 기독교 집단의 네 가지 유형의 설교자들을 상징합니다.

첫 번째 설교자 엘리바스는 환상과 천사에 대해 말하는 것에 특별히 관심을 쏟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 자신의 말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자신이 본 천사와 환상에 대해 항상 이야기하는 설교자들이 있습니다.

엘리바스는 욥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말하는 것은 나에게 은밀히 주어진 것입니다. 내 귓가에 속삭이더군요. 그것은 밤에 다른 사람들이 자고 있을 때 환상으로 나타났습니다. 두려움이 나를 사로잡았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에게 임하자 나는 떨었습니다. 나는 공포에 떨었습니다. 한 영혼이 내 얼굴 앞에 다가왔습니다. 등골이 오싹해졌습니다. 그것은 내 앞에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그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형태는 봤습니다. 그러자 '언젠가는 반드시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수 있겠느냐?' 누가 창조주 앞에서 순수할 수 있겠느냐?'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4:12-17).

이 말씀은 절대적으로 옳습니다: 죽을 운명의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할 수 있습니까? 누가 창조주 앞에서 순전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 영은 성령이 아니었습니다 - 성령은 누구의 마음에도 두려움과 공포를 가져오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언제나 기쁨과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환상과 꿈과 영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속지 마십시오. 그들은 엘리바스와 같습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이 모두 거짓말쟁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환상(vision)은 세 가지 근원에서 나옵니다.

우선, 환상과 꿈의 일부는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성령께서 환상과 꿈을 주십니다 - 그러나 그것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할 것입니다(행 2:17). 그러나 진정한 환상을 받은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말하기를 꺼릴 것입니다. 바울은 한 번 셋째 하늘에 올려졌으나, 14년 동안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았습니다 - 심지어 그 당시에도 한 교회에만 그것에 대해 말했습니다 - 그리고 그것도, 사도로서 성경을 쓸 수 있는 권위를 확립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그러한 목적을 위해 우리의 권위를 확립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그것에 관해 말했을 때에도 그는 셋째 하늘에서 들은 것을 그들에게 말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진정한 환상을 가진 사람의 특징 중 일부입니다.

둘째, 환상의 일부는 사탄의 근원에서 나옵니다. 환상에 관해 말함으로써 사람들 앞에서 명예를 얻고, 자신을 사탄에게 개방(open)하고 간절히 환상을 갖고 싶어하는 자들은 사탄에 의해 얼마든지 환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셋째, 대부분의 환상은 사람 자신의 풍부한 상상력에서 나옵니다. 우리 모두는 인간으로서 서로 다르며 -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풍부한 상상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환상을 얻기 위해 해야 할 일은 잠시 눈을 감고 상상을 시작하는 것뿐입니다!! 즉시 그들은 마음속으로 사물을 "보고", "듣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매우 진지할지 모르지만, 그들 역시 그들의 환상에 대해서 속고 있습니다!

우리 말의 권위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와야 하며,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받았다고 생각하는 개인적인 계시나 환상에서 나와서는 안 됩니다.

두 번째 설교자 빌닷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우리에게 가르친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새로 온 사람들보다 그들이 옳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들읍시다"(8:8-10). 그는 기독교 집단에서 발견되는 또 다른 설교자 그룹의 전형입니다. 이 사람들은 "그들의 교회"에서 수백 년 동안 전해 내려온 전통 중 어느 하나도 깨뜨리고 싶지 않습니다 - 그것이 옳든 그르든. 그들은 환상이나 꿈을 원하지 않으며, 어떤 변화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배를 흔들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배의 방향을 바꾸고 싶어하지도 않습니다, 비록 배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더라도요!!

빌닷은 온화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욥을 고발했습니다. 정말로 상처주는 말을 부드럽고 온화한 방식으로 말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말은 부드럽지만 그 속에는 뱀의 독침이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는, 시끄럽고 화를 내는 말보다 더 상처를 주는, 조용한 말을 서로에게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설교자인 소발은 모든 일에 대해 분노하고 비판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욥을 가장 강하게 공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욥을 말이 많은 바보라고 불렀습니다(11:2,12). 그는 자신들이 현대의 엘리야와 세례요한이라고 생각하는 일부 "자칭 선지자들"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보는 모든 것에 대해 비판적이며 지속적으로 모든 하나하나에 공격을 가합니다. 예수님도 바리새인들을 비판하셨습니다. 그러나 기름부음받은 비판이 있고 육신적인 비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독사라고 부르셨습니다. 바울은 사람을 모든 의의 원수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말을 증명하셨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들(예수님, 바울)을 흉내내려고 한다면, 하나님은 그들(흉내내는 자들)을 지지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야고보서 3:1(AMP)은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해 자칭-검열관이 되지 마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검열관은 다른 사람이 말하는 모든 단어를 조사하는 사람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고발하기 위해, 독수리처럼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붙잡으려고 기다렸습니다(막 12:13; 눅 11:54).

나도 그런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 그들은 오로지 나를 고발할 내용을 찾기 위해 내 메시지를 듣거나 내 책을 읽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그러한 독수리가 발견됩니다!! 그러한 자칭 비평가들은 하나님 그분 자신을 위해 전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직 주님을 섬기는 다른 사람들의 말에 현미경의 초점을 맞추고 그들의 결점을 찾는 데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자신의 사역에 기름부음이 없는 설교자들은 종종 다른 기름부음받은 설교자들을 비판하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습니다.

소발은 그런 자칭 검열관이었습니다. 그는 욥을 비난하기 위해 무정하고, 엄격한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의에 급진적으로 헌신한 사람으로 보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말한 것에는 기름부음이 없었습니다.

네 번째 설교자 엘리후는 개인적으로 슬픔이나 고통을 경험한 적이 없는 젊은 열심꾼이었습니다. 그는 젊고 말이 많았지만, 경험이 전혀 없었습니다(32:6,18). 그는 다른 세 사람보다 나았습니다. 진리를 정확하게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세 사람에게 진노하신 것 같이 그에게 진노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엘리후의 영이 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엘리후는 위대하고 놀라운 진리를 가르치지만 직접 고난과 시련의 깊은 물을 겪어본 적이 없는 설교자들의 대표자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문제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조언을 줄 준비가 되어 있는 경건한 체하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의 사역은 고난에서 나왔습니다. 그는 "나는 압박과 시련, 엄청난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그때에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힘을 이제 나도 여러분과 나눌 수 있습니다"(고후 1:4-8). 그것은 전혀 다른 유형의 사역이었습니다. 그것은 경험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역도 그래야 합니다.

욥기에 나오는 이 네 설교자는 우리가 본받을 만한 설교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건강과 부"의 설교자들이었습니다 - 엘리후는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덜했을 뿐입니다. 그들 중 누구도 욥을 위한 사역에서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늘날 대부분의 설교자들처럼, 단지 모든 사람의 시간을 낭비했습니다!

욥과 처음 세 설교자 사이의 세 차례의 토론은 3~31장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엘리바스와 빌닷은 각각 세 번 말하였고 소발도 두 번 말하였습니다. 토론이 끝난 후, 엘리후는 한 번 말했습니다(32~37장). 그런 다음 하나님은 38-42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욥기의 대략적인 개요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토론에서 중요한 구절 중 일부만을 살펴보겠습니다.

1차 토론(First Round of Discussion)

엘리바스는 기본적으로 욥에게 "네가 죄를 지었으므로 고난을 받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욥의 사생활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그를 비난했습니다. "내 경험에 따르면 문제를 심고 악을 기르는 사람은 스스로도 같은 것을 수확하게 된다. 그러므로 너는 네가 지난 삶에 기른 악과 네가 심은 문제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4:8). 그는 완전히 틀렸습니다.

욥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사람들이 음식에 소금이 없다고 불평합니다. 당신의 메시지는 소금 없는 음식과 같으며 익히지 않은 달걀 흰자위와 같습니다"(6:6,7). 그는 의미심장한 말을 사용하여 엘리바스에게 그의 설교가 맛도 없고 가치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빌닷이 말했습니다, "당신의 자녀들이 죄를 지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하나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형벌은 합당하니... 너희가 정결하고 정직하게 행하면, 하나님이 너희 행복한 집을 회복시키시리라"(8:4,6). 빌닷은 욥의 자녀들에 대해 모든 것을 아는 경건하고 거룩한 사람처럼 행동했습니다 (사실 그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의 자녀를 비판합니까? 당신은 다른 사람들이 고통받는 이유를 아는 체하면서, 하나님이 된 척합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빌닷과 같습니다.

욥은 빌닷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이것이 원칙적으로 모두 사실임을 압니다. 당신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할 수 있습니까? 나는 그분의 자비가 필요합니다"(9:2,15). 오늘날에도 실생활에 적용되지 않는 비현실적인 완전함과 성화의 이론을 설교하는 설교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에, 그에게 필요한 것은 성화 이론이 아니라 그와 하나님 사이에 서서 둘을 하나로 묶어 줄 수 있는 살아 있는 중보자임을 알았습니다(9:33). 이것이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한 분이 있습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러자 소발이 말했습니다, "당신이 잡소리를 늘어놓는 동안 나는 침묵해야 하는가? 하나님은 거짓된 자를 아시고 그들의 모든 죄를 기록하신다... 야생 당나귀가 사람 자녀를 낳을 수 없듯이, 머리가 텅 빈 바보는 똑똑해질 수 없다"(11:3,12). 정말 거친 말입니다! 소발은 (당대의 가장 경건한 사람이었던) 욥을 감히 머리가 텅 빈 바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자신이 질투하는 사람에게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강단에서 성경을 인용하여 회중에 앉아 있는, 불만이 있는 누군가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설교자들이 있습니다.

소발에 대한 욥의 반응은 비꼬는 말이었습니다: "내 생각에 당신이 죽으면, 이 세상에 더 이상 지혜가 없겠어요. 아니 근데, 나도 몇 가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나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12:1-3).

그런 다음 욥은 구약성경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가장 놀라운 신앙을 고백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여전히 그분을 신뢰하리로다"(13:15). 그러한 진술은 언제라도 발언한다면 주목할 만할 것입니다. 그러나 욥이 처한 상황, 즉 다음에 그에게 닥칠 다음 재앙이 죽음인지도 모르는 상황을 생각하면 그 진술은 더욱 놀랍게 다가옵니다.

욥은 자신이 "어릴 때 지은 죄"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고 있는지 궁금해합니다(13:26). 이것은 다윗에게도 고민거리였습니다(시 25:7). 경건한 두 사람, 욥과 다윗은 젊은 시절에 청년의 죄에 빠졌고, 그 죄는 수십 년이 지나도 그들을 괴롭힐 만큼 심각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죄에 관해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약속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주님께 자백했다면 - 그 죄가 아무리 심각하더라도 - 그것은 용서받은 것입니다(요일 1:9). 하나님께서는 또한 "내가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히 8:12). 우리는 "어린양의 피"(계 12:11)로 우리를 향한 사탄의 고발을 이겨냅니다. 그러나 욥은 그런 확신이 없었고, 할아버지가 될 만큼 나이가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젊었을 때의 죄를 의식하며 살았습니다. 새 언약 아래서 우리는 얼마나 놀라운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까? 우리가 그것을 결코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2차 토론(Second Round of Discussion)

두 번째 토론에서, 우리는 엘리바스가 욥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봅니다, "너는 허풍쟁이에 불과하다... 악한 사람은 평생 고통을 겪는 사람이다. 이 악한 사람들은 살이 찌고 부자가 될지라도, 그들의 성읍은 황폐하리라"(15:2,27-28). 이제 엘리바스는 더욱 담대해져서 욥을 멸시하는 소발의 본을 따르며, 그를 "허풍으로 찬 자루"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사람을 두고 그런 말을 하다니 얼마나 오만한지요.

욥은 대답했습니다, "너희는 다 고약한 위로자들이다. 너희가 내 처지가 되어 고통받고 있다면 나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가서 너희에게 그렇게 전할 수 있다"(16:2-5). 욥은 또한 이러한 공격의 배후에 사탄이 있음을 인식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나의 대적이 나를 향하여 그 눈을 날카롭게 하였느니라"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16:9 - 여백). 사탄은 우리를 고발하기 위해 우리가 어떤 면에서 실패하는지 항상 유심히 관찰하고 있습니다. 지상에 있는 그의 대리자(특히 신자들)도 우리가 넘어질 때 날카로운 눈초리로 우리를 관찰합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이 나를 무법자의 손에 붙이시며, 악인의 손에 붙이시니"(16:11)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이것을 허락하셨다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허락하셨다는 깨달음은 욥에게 어느 정도 위안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대변자는 높은 곳에 계십니다. 내 눈은 하나님께 눈물을 흘립니다. 오, 사람이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16:19,20).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 아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욥은 또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을 맛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나는 사람들이 침 뱉는 자니"(17:6)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빌닷이 말했습니다, "욥아, 네가 얼마나 더 있다가 말을 멈출 건인가? 우리가 대답하기를 원한다면 상식적으로 말하여라. 우리가 짐승이라고 생각하는가? 우리에게 지능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잡아 뜯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벽에서 바위가 떨어질 것 같은가? 악인의 빛은 꺼진다는 것은 진리이다. 하나님은 악인의 빛을 꺼버리신다. 그들의 장막 안의 빛은 점점 어두워질 것이다. 악인의 확신에 찬 발걸음은 짧아질 것이다. 악인은 그물로 들어간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길에 파 놓으신 구덩이에 빠지게 된다"(18:2-8). 그는 이렇게 말하여, 욥이 악하다는 것을 암시했습니다.

이에 대해 욥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자네들이 지금 나를 열 번이나 모욕하려 하였다. 나를 그렇게 가혹하게 대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리고 설사 내가 죄를 지었다 해도, 그건 나의 문제이지, 자네들이 걱정할 일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처리하실 것이다. 왜 자네들이 그 일로 괴로워하는가? 자네들은 나의 현재의 굴욕을 내 죄의 증거로 삼아 나를 이기려 한다"(19:2-5).

욥은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그의 형제, 친척, 가까운 친구, 가족, 심지어는 그의 아내까지도 그에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그를 여종과 어린아이들의 조롱거리로 삼으셨다고 말합니다(19:13-18). 그러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해서 승리의 말을 합니다, "나는 내 구속자가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안다. 마지막 날에 그분은 땅 위에 서실 것이다. 내 피부가 썩은 뒤에도, 나는 육체 속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직접 그를 보리라"(19:25-27). 여기서 욥은 선지자로서 말하고 있었습니다. 고난을 통해 그는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만일 그가 이 극심한 고통을 겪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이 놀라운 미래의 환상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이 시점이, 욥의 태도에 전환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직까지 자신에 대한 연민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앞으로는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이것은 우리가 미래를 생각하고, 부활하여 우리 주님이시며 구세주이신 분을 대면할 것이라는 소망을 품을 때, 우리에게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런 다음 욥은 설교자 친구들에게 하나님의 종들을 참소하는 모든 사람에게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합니다(19:28,29).

그러자 소발은 욥이 "가난한 사람들을 학대하여 궁핍하게 하고, 집세를 내지 못하므로 그들을 집에서 내쫓고", "탐욕스럽고 탐식하는" 악한 사람이라고 두 번째로 비난했습니다(20:19,20). 그래서 그는 욥의 "번영이 사라지고, 재난이 그에게 닥쳤으며 하나님께서 그에게 배에 가득 찬 환난을 주셨다"고 결론을 내립니다(20:22,23). 소발의 비난은 이제 더욱 거세졌습니다.

이제 대답하는 욥의 지혜를 들어 보십시오. 그는 이제 더 차분해지고 더 정중해졌습니다. 그 결과 그는 상대방도 진정시켜, 화난 소발이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유순한 대답은 노를 쉬게 하느니라" - 잠 15:1).

욥은 이렇게 말합니다, "실상은 악인도 장수하는 경우가 있느니라. 그들은 번영하고 자녀와 손자를 본다. 그들의 집은 평안하고, 그들의 가축은 번성하며, 그들의 날을 즐겁게 지내다가 무덤으로 들어가느니라"(21:7-13). 그것은 절대적으로 맞습니다. 욥은 번영을 설교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에 있는 악한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욥은 계속해서, 그들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섬기지도 순종하지도 않고 기도에 대한 믿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14-16절). 욥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그들의 형통은 그들의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였다"(16절) - 즉, 그들의 형통은 그들이 살았던 방식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이 아니었다. "나는 그런 삶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라고 욥은 말합니다 - 참으로 매우 현명한 대답입니다.

3차 토론(Third Round of Discussion)

이제 세 번째 토론에 이르렀습니다. 이번 라운드에서 말하는 사람은 엘리바스와 빌닷 두 사람뿐입니다.

엘리바스는 이제 초자연적인 분별력을 가진 척합니다 - 오늘날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그러는 것처럼. 엘리바스는 이전에 환상과 영 등에 관해 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제 욥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안다. 너는 친구에게 돈을 빌려주고 그 사람이 담보로 준 옷을 돌려주지 않았다. 너는 친구를 뼈까지 벗겨냈다. 너는 집에 찾아온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주지 않았다. 너는 집에 찾아온 배고픈 사람에게 음식 주기를 거부했다. 어떤 과부들이 네 집에 왔으나, 너는 그들을 돕지 아니하고 돌려보냈다. 너는 몇몇 고아들의 용기를 짓밟았다. 이것이 오늘날 네가 함정과 두려움에 둘러싸여 있고, 하나님의 심판의 물이 너를 덮어서 앞으로 나아갈 길을 볼 수 없는 이유이다. 결국, 욥아, 너는 땅이 강자들의 것이고 특권을 누리는 자들의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너는 그러한, 영향력이 큰 사람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너의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너는 하나님이 너를 보실 수도 없고 심판하실 수도 없다고 생각하는구나"(욥 22:6-13).

이것은 모두 단순한 상상이었습니다. 이 말에는 일말의 진실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판단하고 그들의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입니다!

욥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우선 그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말을 합니다:

"그분은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자세히 알고 계십니다. 그분께서 나를 감찰하신 후에는, 나를 완전히 결백하다고 선언하실 것입니다 - 순금과 같이 순결하다고"(욥 23:10 - Living).

또는 다른 번역판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분께서 나를 시험하신 후에,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욥은, 하나님께서 그(욥)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든 세부 사항을 알고 계시다고, 확신했습니다 - 이는 욥에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훨씬 더 큰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의 모든 세부 사항을 조정하시며, 모든 일이 우리의 최고의 것을 위해 작용하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롬 8:28). 할렐루야!!

욥은 또한 이 시험의 기간이 끝나면, 자신이 정금처럼 나올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성경이 없어도 그가 가졌던 빛을 보는 것은 놀랍습니다.

욥은 계속해서 이렇게 묻습니다, "경건한 자가 어찌하여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까지 그토록 오래 기다려야 하는가?" 그는, 가난한 사람들과 과부들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들을 착취하는 부자와 악한 사람들로부터 직면하는 불의와 굴욕을 나열합니다. 그는 자신들이 범한 죄를 면하는 것처럼 보이는 도둑, 살인자, 간음하는 자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24:1-16). 그러나 그는 마침내 심판이 그들을 따라잡을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24:18-25).

빌닷은 이제 할 말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는 단지 이렇게 묻습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서서 의롭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너무 영광스러워서 달과 별조차도 그분과 비교할 때 거의 빛을 발하지 못하는데 온 땅에서 누가 순결한가?"(25:4, 5).

욥은 또다시 비꼬는 말을 합니다, "오, 네가 나처럼 약한 사람들을 도와주다니! 네가 힘없는 사람들을 구해주다니! 오, 네가 내 어리석음을 깨우쳐주었다! 너는 참으로 현명한 말을 하였다! 이 현명한 것들을 모두 어디서 배웠는가?"(26:1-3). 그런 다음, 그분은 가장 예리한 질문을 합니다: "너희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영은 누구의 영이냐?"(26:4). 그는 계속해서 "땅을 허공에 매달고" 수많은 경이로움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위대함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런 다음 그는 모든 창조물이 "그분의 길의 가장자리"일 뿐이므로 우리가 이 위대하신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고 말합니다(26:5-14). 우리 모두가 그것을 기억하여 우리 자신에 대해 의기양양한 생각을 갖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는 "내 양심이 깨끗하니"(27:6)라고 말하며 결론을 내립니다. 이것이 욥의 마지막 대답입니다.

욥의 독선(Job's Self-Righteousness)

빌닷에게 대답한 후, 욥은 자신의 삶에서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행한 많은 선한 일의 목록을 제시하면서 자신을 정당화합니다(26~31장). 우리가 이 장들을 읽으면서, 욥이 하나님과 그분의 길에 대해 가졌던 엄청난 빛과, 성경도 없고 내주하시는 성령도 없던 시절에 그가 오래 전에 살았던 높은 삶의 기준을 보는 것은 놀랍습니다. 이 장에서 몇 가지 사항을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그 내용은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고 오늘날 훨씬 더 높은 기준에 따라 생활하도록 도전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는 금을 찾기 위해 땅을 깊이 파지만 지혜를 구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은지에 대해 말하면서 시작합니다(28:1,12,13). 그는 계속해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28:28)고 말했습니다. 솔로몬은 1000년 후 잠언 9장 10절에서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의심할 바 없이 그는 욥기를 읽음으로써 그러한 이해를 얻었을 것입니다.

29장에서, 욥은 가난한 사람, 고아, 과부, 눈 먼 사람, 저는 사람, 궁핍한 사람을 도우며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살았던 과거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30장에서, 그는 자신이 행한 모든 선한 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고난을 받고 있으며 하나님에 의해 그토록 낮아졌다고 불평합니다.

31장에서 그는 자신의 삶의 의로움을 말합니다. 그는 여자를 탐하지 않도록 눈을 조심했습니다(31:1). 그는 예수께서 마태복음 5장에서 이 죄에 대해 말씀하시기 2000년 전에 이 죄에 대한 빛을 가졌습니다. 그는 어떤 거짓도 없이 온전하게(integrity) 살았으며(31:5,6), 아내에게 불충실한 적이 없었고(31:9-12), 그는 종들을 친절하게 대했으며(31:13~15), 가난한 자와 과부를 도왔고, 고아들을 자기 자녀처럼 키웠으며(31:16-23), 그는 금을 의지하지도 않았고 우상을 숭배하지도 않았으며(31:24-28), 그는 그의 적이 패배했을 때 기뻐하지 않았으며(31:29,30), 그는 낯선 사람들을 돌보았고(31:31,32), 죄를 지을 때마다 자신의 죄를 자백했고(31:33), 그는 사람들의 멸시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고(31:34), 자기 땅을 올바로 돌보기도 하였습니다(31:38-40). 그는 지금 하나님께 응답해 달라고 부르짖습니다(31:35).

우리는 이 장들에서 욥이 어떤 경건한 사람인지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의 많은 영역에 대해 빛을 받았고 매우 도움이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에 대한 빛이 없었습니다: 영적 교만 - 그의 의에 대한 교만. 하나님은 욥을 사랑하셨고, 욥이 이 땅을 떠나기 전에 겸손이라는 한 가지 덕목 또한 갖추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욥에 대한 무한한 사랑으로 그를 경건하고 겸손하게 만들기 위해, 그가 이 깊은 시련을 겪게 하셨습니다.

경건한 사도 바울이 교만해질 위험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도 고난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사탄의 사자인 육체의 가시를 주셨습니다(고후 12:7). 욥에게도 사탄의 사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왜 그런 일을 당했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욥은 몰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많은 경건한 사람들을 고난과 오해와 반대와 박해로 인도하셔서 - 그들을 겸손하게 하고, 깨뜨려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실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겸손한 자에게만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욥이 불평했다고 비난할 수 없습니다. 그에게는 성경도, 내주하시는 성령도, 그를 격려해 줄 형제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결코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불평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엘리후의 논평(Elihu's Comments)

이제 우리는 마지막 설교자인 엘리후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다른 세 명의 설교자보다 어렸지만 그들 모두보다 더 현명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 다른 면에서 현명하지 못했습니다. "엘리후는 분노가 타올라 소리를 질렀다"고 되어 있습니다(32:5-6).

내 조언은 항상 이렇습니다: "화가 나면, 입을 열지 마세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설교도 절대로 하지 마십시오, 사람이 성내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약 1:20 참조). 당신이 이 간단한 법칙을 따르면, 수백 가지의 죄를 짓는 것에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후에게는 그런 지혜가 없었습니다. 그는 화가 나서 말을 이었습니다. 그는 욥이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독선적으로 화를 냈습니다.

기본적으로 이 설교자들은 모두 이렇게 말했습니다, "욥, 네가 죄를 지었다. 네 자녀들이 죄를 지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다 위선자라는 것을 아신다." 그러나 사실은, 이들 설교자들 중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마음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많은 지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 그리고 아마도 엘리후는 앞선 세 사람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후는 한 번도 고난을 직접 당해 본 적이 없는 열심 있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이 설교하고 조언을 하기 시작할 때, 그들이 말하는 모든 것은 단지 이론에 불과할 것입니다. 만일 바울이 거기 있었다면, 그는 욥에게 욥이 고난을 당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 왜냐하면 바울은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엘리후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시련과 고난의 경험이 없이는, 그의 사역은 얄팍했을 것입니다. 엘리후는 욥뿐 아니라 다른 세 설교자에게도 화를 냈습니다(3절).

엘리후는 우리 모두가 진지하게 고려할 수 있는 몇 가지 좋은 말을 했습니다:

"나는 말이 가득합니다. 내면의 영이 나를 강권합니다"(32:18). 우리 마음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차야 하며, 성령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대로만 말해야 합니다.

"나는 누구에게도 편애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아첨하지 않을 것입니다"(32:21). 하나님은 편파성과 아첨을 미워하십니다. 이 두 가지 죄는 우리 중 누구에게서도 발견되어서는 안 됩니다.

"나를 두려워한다고 해서 누구도 겁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 내 압박이 누구에게도 큰 부담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33:7). 누구도 우리를 두려워하거나 우리의 존재로 인해 겁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 어느 누구도 그의 자유 의지를 빼앗는 우리의 어떤 압력으로 인해 행동을 강요당해서는 안 됩니다.

33장 14~30절에서,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세 가지 다른 방식에 관해 몇 가지 놀라운 진리를 말했습니다:

1. 우선 한두 번 직접 말씀하십니다(14절).

2. 만일 그들이 그분의 말을 듣지 않으면, 그분은 그들이 밤에 자고 있을 때 꿈으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15절).

3. 그래도 듣지 않으면, 그분은 질병을 통해 그들을 징계하심으로써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19-22절).

이 모든 말의 목적은 사람을 교만과 그에 따른 지옥에서 구원하는 것입니다(17,18절).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사람에게 말하고 설명해 줄 사자(messenger)가 있어야,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죄를 자백하여 온전하게 치료받고 지옥에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23-28절).

그러나 엘리후가 이와 같은 말을 할 때 그의 눈이 멀었음이 드러납니다: "욥처럼 오만한 사람이 또 어딨겠습니까?"(34:7 - Living). 혹은 다른 말로 하면, "아담 때부터, 세상에 욥처럼 교만한 사람이 있었던 적이 있었습니까?"입니다. 그러면 욥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은 어떠하였습니까?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한 사람은 세상에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엘리후는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완전히 벗어났기 때문에, 욥에 대한 그의 견해는 하나님의 견해와 정반대였습니다.

엘리후는 예수님 당시의 성경학자들과 같았습니다 - 바리새인, 안나스, 가야바 - 그들은 예수님이 마귀들의 우두머리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같이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았습니다. 그에게 그렇게 가르친 것은 베드로의 영리함이나 성경 지식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여러 시대에 걸쳐, 많은 영리하고 종교적인 사람들은 경건한 사람에 대해 하나님께서 그 (경건한)사람에 대해 생각하시는 것과 정반대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종교인들이 당신이 틀렸다고 생각하더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오직 경건한 사람만이 다른 경건한 사람의 진정한 가치를 평가할 수 있습니다.

엘리후는 계속해서 하나님에 관해 놀랍도록 진실인 몇 가지를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누구도 멸시하지 않으십니다"(36:5). 하나님은 완전하시기 때문에, 누구도 멸시하지 않으십니다. 불완전한 우리는 다른 인간을 멸시합니다. 우리가 완전해질수록, 우리는 더욱 하나님처럼 되어, 아무도 멸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높으십니다. 우리는 전능자의 능력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공의로우시고 자비로우시기 때문에, 우리를 압제하지 않으십니다. 모든 곳의 사람들이 그분을 두려워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진실로 지혜로운 사람은 그분을 경외할 것입니다"(36:26; 37:23, 24).

그런데 엘리후는 또한 하나님에 관해 잘못된 말을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일생 동안 형통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들의 모든 삶은 건강과 부로 즐거울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면, 전쟁에서 망하여 죽을 것입니다"(욥 36:11, 12). 그러므로 우리는 엘리후가 또한 "건강과 부" 번영-복음 설교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오늘날에도 많은 설교자들로부터 듣고 있는 거짓 복음입니다.

욥은 엘리후에게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아무 대답도 안했습니다!

욥에게 하신 하나님의 질문(God's Questions to Job)

그러고 나서 하나님께서 욥에게 대답하셨습니다(38~41장).

(하나님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네 명의 설교자들이 말한 방식과 비교하여, 하나님께서 욥에게 말씀하신 방식이 완전히 다른 것을 주목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욥이 은밀히 죄를 지었다고 한 번도 책망하지 않으셨고, 죄로 인해 벌을 받는다고 말씀하신 적도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욥은 즉시 죄를 깨닫고 회개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말하는 방법과 설교하는 방법에 관해, 우리 모두는 이 일로부터 참으로 큰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의 방법과 다릅니다. 많은 설교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범했다고 생각하는 죄에 대해 말함으로써, 사람들이 죄를 깨닫게 하려고 합니다. 설교자들 자신이 고발자의 영으로 말함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죄책감을 증가시키는 것 외에는 그러한 접근 방식에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크신 자비와 가엾이 여기심으로, 인간에게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말씀하십니다 - 그리고 인간은 자신의 죄를 완전히 깨닫고 이렇게 말합니다, "오 하나님, 나는 부패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나는 회개합니다. 나를 용서해주세요." 하나님은 인자하심으로 사람들을 회개에 이르게 하십니다(롬 2:4).

하나님께서 (이 장들에서) 욥에게 던진 세 가지 기본적인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네가 창조의 이러한 경이로움을 이해할 수 없다면, 영적 현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느냐?"

2. "내가 나의 모든 창조물을 다스린다면, 네 양 떼에 임한 번개와, 네 종들을 죽인 사바인과 갈대아인과, 네 자녀의 집에 닥친 폭풍을 내가 어찌할 수 없을 줄로 아느냐?"

3. "네가, 내가 만든 악어 앞에 설 수 없다면, 어떻게 내 앞에 설 수 있겠느냐?"(41:10).

하나님은 욥에게 그분의 주권과 모든 피조물에 대한 통제권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이 말해야 할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욥은 겸손해졌습니다. 네 명의 설교자들이 몇 시간 동안 직접 공격을 가했지만 아무 성과도 얻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간접적인 접근으로 모든 것이 단 몇 분 만에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통제에 대한 믿음은, 우리가 문제와 고난과 적들을 만날 때, 우리 마음에도 안식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주님은 욥에게, "네가 아직도 전능자와 논쟁하려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욥 40:2). 지금까지의 모든 논쟁에 대해 신속하게 대답했던 욥은 이제 침묵합니다. 그는 이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저는 아무것도 아니며 할 말이 없습니다. 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40:4,5).

영감받은 성경의 첫 번째 책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무가치함을 인정하여, 그분이 우리 삶의 모든 것이 되시기를 원하신다는 점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은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축복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군가를 사용하시려면 먼저 그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드셔야 합니다.

바울이 말했습니다, "바울은 무엇이고, 아볼로는 무엇이냐?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지만,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고전 3:5,6). 즉, 전도하는 사람도 아무것도 아니고,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모든 것이시므로 그분만이 모든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그것이 바울의 삶의 비결이었습니다 - 그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0(zero)이었습니다.

어딘가에서 구원받은 영혼들의 공을 차지하기 위해 애쓰는 설교자들이 있습니다. "다른 목사가 교회에서 양을 훔쳐갔다" 등의 불평을 하는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걸까요? 아직 0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나의교회"라고 말할 때, 어느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교회는 어느 교회입니까? 모든 사람은 반드시 "그들의 교회"에서 떠나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심겨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교회"는 파괴되어야 합니다.

욥이 자신이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더 이상 자신을 정당화하지 않겠다고 결심할 수 있는 지점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까? 그 후, 욥은 남은 생애 동안,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한"(약 1:19)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6장(26~31장)에 걸쳐 한 긴 연설은 성경 전체에서 발견되는 가장 긴 자기 정당화입니다. 내내 독선의 냄새가 납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교만한 냄새를 맡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마침내 이 독선적인 사람은 제로가 되었습니다. 누구 설교의 결과로입니까? 환상과 꿈을 말한 사람을 통해서였습니까? 조상의 전통을 신성하게 간직한 사람을 통해서였습니까? 자칭 "예언자"를 통해서였습니까? 아니면 그가 말한 것이 너무 정확했던 그 사람을 통해서였습니까? 이 네 명의 설교자 중 누구도 그를 도울 수 없었습니다. 욥이 이곳(0)에 올 수 있도록 도와주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분은 다섯 번째 설교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분입니다.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십시오"(엡 5:1).

하나님의 짧은 메시지가 욥에게 얼마나 놀라운 일을 해냈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다른 설교자들의 길고 반복적인 설교를 통해서는 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답은: 하나님은 욥을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네 명의 설교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사람을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들에게 전할 올바른 말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들을 비판하고 비난할 뿐, 축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섬기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들에게 말할 말씀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품고 하나님의 백성을 마음에 품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들을 위한 예언의 메시지를 주실 것입니다.

다른 네 명의 설교자들은 욥의 죄를 정죄하려 했지만, 하나님은 욥을 예배자로 만들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성공하셨습니다. 인도의 기독교 교회로서, 우리가 믿지 않는 세대에게 보여주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이 우주의 최고 통치자이시다. 우리는 반대자들의 위협에 겁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 - 우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우리 머리털 하나 만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항상 비판할 준비가 되어 있는 대신, 측은히 여기는 마음(compassion)을 가지고 행동하는 법을 배우도록 합시다. 정확한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섣부른 판단을 절대로 내리지 맙시다. 사실을 안다고 생각하더라도, 아직 모르는 다른 사실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합시다. 그러므로 항상 자신을 낮추고 "주님,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내 입에 손을 대고 조용히 있겠습니다."라고 말하십시오.

욥은 또한, "주여, 내가 전에는 주님에 대해서 들었더니, 이제는 주를 뵈었나이다"(욥 42:5)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듣는 것과 그분을 개인적으로 아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요한은 밧모섬에서 예수님을 보고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욥도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했습니다.

욥은 또한 하나님을 비난했던 것을 철저히 회개하고 자기가 한 말을 모두 취소했습니다(42:6). 그리고 우리가 그 후 곧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즉시 그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여호와께서 엘리바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한다. 이제 너희 죄(나의 종 욥에게 말한 것)를 위하여 제사를 드리고 나의 종 욥에게 너희를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구하라. 너희가 비난한 사람이 이제 너희의 중재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욥을 어떻게 그분의 종으로 인정하시는지 주목하십시오(42:7,8).

주님은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내가, 그들이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여,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계 3:9)고 말씀하셨습니다. 욥과 그의 친구들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회개하고 그 말들을 철회한 순간, 그는 용서받았고 그 모든 말은 하나님의 기록에서 지워졌습니다. 욥이 한 좋은 말만 기록에 남았습니다!

그 좋은 말은 다음과 같은 진술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죽이시더라도, 나는 그분을 믿겠습니다"(13:15).

"나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고 마지막 날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임을 압니다. 그리고 내 몸이 내 몸 속에서 썩은 후에, 나는 내 눈으로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19:25).

"그분은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든 세부 사항을 알고 계십니다"(23:10 - Living).

이것이 욥이 했던 몇 가지 놀라운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가 했던, 분노한 말은 모두 지워졌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큰 격려가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에는 우리가 하나님께 회개하고 자백한 어떤 죄도 기록되지 않을 만큼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한 선한 믿음의 고백만이 하나님의 기록에서 발견될 것입니다.

그런 다음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은 욥에게 가서 그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욥은 그들을 기꺼이 용서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나는 그 설교자들이 실제로 회개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해 기도하자마자, 주님은 욥의 재산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42:10). 곧 그는 그가 잃은 모든 것의 두 배를 주님께 받았습니다.

그는 심지어 10명의 자녀를 더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아내가 하나님이 그들의 가족에게 얼마나 선하신지를 본 후에, 그녀도 회개하고 경건한 여자가 되었고 남편의 진정한 돕는 자가 되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래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하게 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자신의 삶에서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두 배의 축복을 받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영감받은 성경의 첫 번째 책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몇 가지 영광스러운 진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께서는 그분에게 경배할 경건한 사람들을 온 세상에서 찾고 계십니다.

2. 경건한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은 사탄의 공격의 표적이 됩니다.

3. 사탄은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야만 우리를 공격할 수 있습니다.

4. 경건한 남자에게는 완고한 아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녀를 변화시키실 수 있습니다.

5. 경건한 사람들은 종교적인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을 것입니다.

6. 하나님과 사탄은 경건한 사람들의 행동을 면밀히 감시하고 있습니다.

7. 완전함에 이르는 길은 고통과 오해를 통해서입니다.

8. 건강과 번영은 하나님의 축복의 표시가 아닙니다.

9. 우리가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볼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10. 하나님은 우리의 궁극적인 유익을 위해 모든 것을 계획하십니다.

장 19
시편

시편은 구약의 다른 어떤 책보다 신약에서 더 자주 인용됩니다. 시편 150편 중, 적어도 50편이 신약성경에 인용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시편을 자주 인용하셨습니다.

시편은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각 부분은 축복으로 마무리됩니다.

l 제1권 - 시편 1-41편

l 제2권 - 시편 42-72편

l 제3권 - 시편 73-89편

l 제4권 - 시편 90-106편

l 제5권 - 시편 107-150편

시편 중 70편 이상은 다윗이 썼고, 일부는 아삽이, 일부는 고라 자손이, 두 개는 솔로몬이, 한 개는 모세가, 한 개는 헤만이, 한 개는 에단이 썼습니다. 다른 저자들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시편은 5권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 책은 시편 1-41편입니다. 두 번째 책은 시편 42-72편입니다. 세 번째 책은 시편 73-89편입니다. 네 번째 책은 시편 90-106편, 다섯 번째 책은 시편 107-150편입니다. 이 다섯 권의 책에서는 각각 많은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 다섯 권의 시편을 모세의 처음 다섯 권(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과 비교하는데 - 이 둘 사이에는 어느 정도 유사점이 있습니다.

시편의 많은 부분은 의인의 운명과 악인의 운명을 대조합니다. 많은 시편에서 자주 발견되는 주제는, 적들로부터 구원해 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하는 것입니다. 시편 150편 중 72편은 시편 기자의 적들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우리는 일부 시편을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다른 시편에서는 주제나 중요한 구절만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책 - 의인과 악인

시편 1편은 시편 전체에 대한 소개입니다. 이 시편은 죄악의 길을 떠나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복된 사람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악을 피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악에서 깨끗해진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은 우리가 읽은 말씀을 자주 생각하고 그것이 우리 마음에 스며들도록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 우리가 먹은 음식이 오랜 시간에 걸쳐 소화되어 피와 살과 뼈로 변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실제로 식사하는 데 보내는 시간이 매우 적습니다. 소화 과정은 몇 시간 동안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데 아주 짧은 시간만 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묵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강가에 심은 나무와 같아서 항상 열매를 맺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할 것입니다. 우리 손으로 하는 일과 우리가 하는 말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가 살기를 원하시는 방식입니다.

시편 2편은 그리스도의 통치에 대해 말하는 메시아의 시편입니다. 시편의 열 세편에는 메시아(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이 적어도 18번 나옵니다. 이것은 메시야가 왕으로서 통치하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왕은 세상으로부터 거부당합니다(1-3절 - 베드로는 사도행전 4:25,26에서 이 구절을 인용함). 그러나 "하늘에 앉으신 그분이 웃으실 것입니다"(4절). 그리고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아들이다. 나에게 구하면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땅 끝까지 네 소유가 되게 하리라. 네가 철로된 지팡이로 그들을 깨뜨리리라"(7~9절). 어느 날, 예수님께서 이 땅을 다스리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날이 오기 전에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는" 권고를 받고 있습니다.

시편 3편은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나 예루살렘에서 도망쳐 나올 때 지은 시편입니다. 그는 여기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표현합니다. 그는 "여호와여 주는 나의 영광이시요 내 머리를 드시는 이시니이다"(3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보통 일요일 아침 편안한 건물에서 그 구절을 노래합니다. 다윗이 압살롬으로부터 목숨을 구하기 위해 도망치면서 부른 노래입니다!!! 이 시편들 중 많은 부분은 다윗이 자신의 궁전에 있을 때가 아니라, 압박을 받고 동굴에서 동굴로 도망다닐 때 쓴 것입니다. 다윗이 압박을 받지 않았다면, 이러한 영감받은 시편의 대부분은 결코 쓰여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가장 큰 교훈 중 일부는, 압박을 받는 순간에 있습니다. 압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게 하십니다. 치약 튜브를 짜내면 치약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우리의 원수들을 통하여 우리를 압박하시므로, 그분의 말씀이 우리에게서 나오도록 하십니다. 압박이 클수록 우리의 사역은 더욱 풍성해집니다.

시편 4편은 저녁기도입니다(4:8). 이전 시편은 아침기도였습니다(3:5). 둘 모두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능력에 대한 믿음을 표현합니다. "주님은 자신을 위해 경건한 자를 구별하셨습니다"(3절).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오직 그분의 것이 되도록 구별되었습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분노의 죄에 대해 경고를 받습니다: "(분노하여) 떨지라도 죄를 짓지 말라"(4절 - NASB 여백). 그리고 이어서, "네 침상에서 마음속으로 묵상하고 가만히 있으라"고 말합니다. 옛 언약 아래서, 그들은 분노를 이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진정될 때까지 침대에 누워 있으라는 권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침상에서 "여호와께 의의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5절) - 그리고 그들의 분노가 기쁨으로 바뀌었을 때만 일어나서, "주님, 당신이 내 마음에 기쁨을 주셨습니다"(7절)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아직 분노를 극복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실용적이고 좋은 조언입니다. 새 언약에는 에베소서 4:26에 인용되어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다음 우리는 "모든 분노를 버리라"(엡 4:31)는 권고를 받습니다. 이것이 새 언약 아래 있는 우리의 특권입니다.

시편 5편은 원수들로부터 보호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주님, 아침에 내 목소리를 들으시리이다.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겠나이다"(3절) - 이것은 매일 아침을 시작하는 좋은 방법입니다. "주를 신뢰하는 자들로 하여금 주께서 그들을 보호하심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게 하소서"(11절).

시편 6편은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내 모든 원수가 부끄러워하고 크게 놀라리라"(10절) - 믿음의 고백.

시편 7편은 하나님이 정당성을 입증해 주시기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다윗은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 만일 내 손에 불의한 일이 있고, 나와 화목한 자들에게 내가 악으로 갚았다면, 내 원수가 나를 박해하게 하소서"(3~5절). 남에게 악을 행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일입니다. 죄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 자기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죄와 남에게 해를 끼치는 죄입니다. 마약 중독과 흡연은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죄입니다. 그러나, 험담은, 다른 사람의 평판을 손상시킵니다. 그래서 험담은 더 심각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악한 자들에게 날마다 진노하십니다"(11절). 그러나 그것을 믿는 기독교인은 얼마나 됩니까?

시편 8편에서는 인간의 작음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비교합니다. 이것은 또 다른 메시아 시편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성전에서 예수님을 찬양하고 있고 바리새인들이 떠들석한 찬양으로 화를 냈을 때, 예수님은 이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갓난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을 위한 찬양을 준비하셨다"(마 21:16).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처럼, 바리새인들은, 떠들석한 찬양과 예배가 아닌 장례식과 같은 엄숙함으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린이들의 찬양을 기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떠들석한 찬양과 경배로 가득한 천국을 생각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 2절에서 "힘(strength)"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곳에서, 예수님은 "찬양(praise)"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것에 주목하십시오. 그 목적은 "대적을 침묵하게 하려 함"(2절)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함으로써, 우리는 사탄의 입을 막을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심 어린 찬양은 마귀가 싫어하는 것입니다. 4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나이까? 그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만드셨나이다"라는 말이 히브리서 2장 6-8절에 인용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잠시동안 천사보다 낮은 자리에 계셨던 것에 대한 언급입니다 - 왜냐하면 그분은 죽으셨지만, 천사는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께서는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셨으니, 만물이 그분의 발 아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몸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우리 발 아래 있습니다.

시편 9편은 그(다윗)의 원수들을 벌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입니다. "당신의 이름(예수님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당신을 신뢰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께서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10절). 하나님은 부활의 하나님이십니다: "나를 사망의 문에서 끌어올리시는 주여(13절).

시편 10편은 악인들을 멸하시기를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입니다. "악한 자는 교만한 얼굴로 하나님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아와 억압받는 땅의 사람들을 돌아보시어, 세상의 악한 사람들이 다시는 그들을 압박하거나 두렵게 하지 못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4,18절).

시편 11편은 여호와께서 의인을 보호하시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과 악인을 다 시험(test)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5절). 그리고 그분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려는 자를 미워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실 때, 우리를 더 높은 수준으로 승격시키려고 하십니다 - 마치 학생이 진급하기 위해 시험을 치르는 것과 같습니다.

시편 12편은 혀의 사용에 관한 시편입니다. 충실하고 경건한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말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다음 세 구절에서는 혀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 거짓, 아첨, 불성실, 오만은 혀를 통해 표현됩니다. 경건한 사람의 주된 특징은 그의 말의 자비로움입니다. 그러나 불경건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입술은 우리 자신의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말할 것이다"(4절). 자기 혀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온전한 사람입니다(약 3:2). 경건한 사람은 "여호와의 말씀은 풀무에 일곱 번 단련한 은과 같이 순결한 말씀"임을 인식합니다(6절). 그래서 그는 말하기 전에, 자신이 무슨 말을 할지 생각합니다. 확신이 서지 않으면, 그는 자신이 하려고 계획한 말을, 그의 마음속의 용광로에 던져넣고 스스로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있을까? 좀 더 부드럽게 표현할 수 있을까? 나는 진실을 말하고 있는 걸까? 내가 사랑으로 말하고 있는 걸까?" 등. 그런 다음 그는 무엇을 말할지, 어떻게 말할지 결정합니다. 누군가를 바로잡기 위해 편지를 쓴다면, 필요하다면 그것을 보내기 전에 일곱 번 다시 쓸 것입니다.

시편 13편은 환난 중에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너그럽게 대해 주시므로, 내가 주님을 찬송하리로다"로 끝맺습니다.

시편 14편은 악인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모든 무신론자는 어리석은 자입니다(1절). 2절과 3절은 타락한 인간의 상태를 설명하며 로마서 3장 10~12절에 인용되어 있습니다.

시편 15편은 사람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 살 수 있는 자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존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우리는 사람들을 존중합니다 - 그러나 세상에서와 같이, 그들이 부자이거나 유명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편을 천천히 읽고 그 빛 속에서 당신의 마음을 살펴보십시오. 이렇게 사는 사람은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5절)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머지않아 세상의 많은 것들이 흔들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시편 16편은 다윗이 주님과 성도들이 자신이 원하는 전부라고 말하는 또 다른 메시아 시편입니다. 3절에서, 그는 하나님의 백성을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보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8절,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라. 그분이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나는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는 베드로가 주 예수님을 언급하면서 인용한 구절입니다(행 2:25). 우리는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야 하며, 우리가 말하거나 행하는 모든 일에서 항상 주님을 우리 앞에 모셔야 합니다. 그러면 그분은 우리의 오른편에서 우리도 또한 도와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하나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습니다(11절). 기쁨과 즐거움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만 가장 순수한 형태로 발견됩니다. 세상의 기쁨과 즐거움은 얄팍하고 짧습니다.

시편 17편은 다윗이 자신을 압제하는 자들로부터 보호해 달라고 간구하는 또 다른 시편입니다. 15절은 부활의 아침에 대해 말합니다. 그때 우리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바라보며, 주님을 닮은 것에 만족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두 가지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볼 때 만족할 것이라는 것과 또한 우리가 그분과 같을 때 만족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복된 소망은 이중적입니다 - 그분을 보고 그분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요일 3:2).

시편 18편은 구원의 또 다른 시편입니다. 16-19절은 우리 구원의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그분이 우리 어둠을 밝히시며 우리 길을 완전하게 만들 것입니다"(28,32절). 이 시편은 사무엘하 22장에 완전히 인용되어 있습니다.

시편 19편은 하나님의 일과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는 하나님에 대한 두 가지 증거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늘(1~5절)이고, 다른 하나는 그분의 기록된 말씀(7~11절)입니다. 12절과 13절에서, 다윗은 네 가지 죄에서 자신을 지켜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 그릇된 생각, 은밀한 죄, 고의로 짓는 죄, 큰 죄 - 각각은 이전 것보다 점점 더 심각해집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기에 우리가 스스로 지킬 수 있는 한 가지 죄는 바로 말의 죄입니다. "주님, 내 입의 말과 내 마음의 묵상이 주님 보시기에 받으실 만한 것이 되기를 원합니다"(14절).

시편 20편은 원수를 이기기 위한 기도입니다. 다윗의 확신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병거를,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오늘날, 어떤 사람은 돈을, 어떤 사람은 사람의 도움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리로다"(7절).

시편 21편은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입니다. "주께서 그의 마음의 소원을 그에게 주셨고 그의 입술의 청을 거절하지 아니하셨나이다. 그가 생명을 구하매 아버지께서 그에게 영생을 주셨나이다"(2,4절).

시편 22편은 기도와 찬양이 담긴 또 다른 메시아 시편입니다. 이 시편과 다음 두 시편은 "목자" 시편입니다. 시편 22편은 과거(십자가)에 대해 말하고, 시편 23편은 현재(현재 우리의 목자이신 주님)에 대해 말하고, 시편 24편은 미래(예수께서 영광의 왕으로 통치하실 때)에 대해 말합니다. 1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벌레 같고 물처럼 쏟아지셨습니다(6,14절). 개들이 그분을 둘러싸고 그분의 옷을 나누었습니다(16,18절). 그러나 22절에서, 부활에 이르렀습니다: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전하리라." 예수님은 부활하신 날 처음으로 제자들을 직접 형제라고 부르셨습니다(요 20:17). 이 구절은 히브리서 2장 12절에서도 인용되었습니다. 이어 말합니다, "내가 회중(교회) 가운데서 주를 찬양하리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여, 그를 찬양하라"(22,23절). 예수님은 교회 안에서 아버지를 찬양하도록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만이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권고를 받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찬양만이 진실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22절부터 30절까지에서 십자가의 일과 부활의 결과를 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에 관한 세 구절(22,23,26절)과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에 관한 두 구절(27,29절)이 있고, 이어서 섬김에 관한 한 구절(30절)이 있습니다. 그래서 찬송과 찬송과 찬송이 있고, 그 다음에는 예배와 예배가 있고, 그 다음에는 섬김이 있습니다. 효과적인 봉사를 위한 준비로서 찬송과 예배의 중요성을 이해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시편 23편은 목자의 시편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시면, 우리에게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1절). 그분은 우리를 눕게 만드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회복시키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이끄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자주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점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 안에서 일하시도록 허용할 때에만, 하나님을 위해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악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식탁을 준비하시고 그분이 우리 머리에 기름을 부으십니다. 그러면 우리의 잔이 넘치기 시작하고, 우리가 영원한 집에 이를 때까지 선하심과 자비가 모든 곳에서 우리를 따르게 됩니다.

시편 24편은 예수님께서 왕으로서 땅을 통치하실 때와 "땅이 여호와의 것이 될 것"을 언급하는 예언적 시편입니다. 그 때에 그분의 거룩한 산에서 그분과 함께 거할 사람들을 설명합니다(1,3절).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악의 세력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신 영광의 왕이신 주님을 환영하라고 촉구합니다.

시편 25편은 인도와 보호에 관한 시편입니다. 다윗의 기도는 "주여, 주의 길을 내게 보이소서.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4절).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자(8절), 자신을 낮추는 자(9절), 그분의 계명에 순종하는 자(10절), 그분을 두려워하는 자(12절), 그분을 바라보는 자(15절)에게 인도하심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분의 비밀을 보이십니다(14절).

시편 26편: 여기에서 다윗은 여호와께 자신의 온전함을 선포하고 적들로부터 보호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우리의 양심이 깨끗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를 보호해 달라고 담대히 구할 수 있습니다.

시편 27편은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 없는 신뢰의 시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군대가 자기를 둘러 진 쳐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다윗을 지키시기 때문입니다(1-3절). 다윗이 여호와께 바라는 것은 오직 한 가지 곧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과 항상 하나님의 성전에 거하는 것이었습니다(4절). 이것이 우리도 또한 바라는 유일한 것이어야 합니다.

시편 28편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와 함께 하나님의 신속한 응답에 대한 찬양이 이어집니다. 여호와는 다윗의 힘이요 방패이십니다(7절).

시편 29편은 주님의 음성에 관한 것입니다. 일곱 번이나 언급됩니다. 우리는 창세기 1장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성전(교회)에 있는 모든 것은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9절).

시편 30편은 죽음에서 구원받은 것에 대한 감사의 시입니다. "주께서 나의 슬픔을 바꾸어 나를 위하여 춤으로 바꾸사, 내 혀로 주를 찬양하고 잠잠하지 않게 하셨나이다"(11,12절). 우리는 그분의 모든 구원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결코 중단해서는 안 됩니다.

시편 31편은 도움을 구하는 또 다른 부르짖음과 찬양이 이어집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이 어찌 그리 큰지요. 주께서 그들을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시어 사람들의 음모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은밀히 보호하시는 은신처에 두시어 말다툼을 피하게 하실 것입니다"(19-20절). 그곳은 우리 주변에 있는 적들의 모든 쉴 새 없이 나불거리는 혀로부터, 우리 자신을 숨길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 - 그분의 임재 안입니다.

시편 32편에서는 죄를 용서받고 죄를 덮어주는 복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축복된 일이지만, 우리의 죄가 깨끗하게 씻겨지는 새 언약 아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만큼은 아닙니다. 옛 언약 아래서는 죄를 깨끗하게 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황소와 염소의 피는 죄를 덮을 수만 있지만, 예수님의 피는 우리를 깨끗하게 합니다. 죄가 덮어지는 것은 다음과 같이 묘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죄는 모두 칠판에 쓰여진 다음 종이로 덮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종이를 들어 올리면, 죄가 여전히 보입니다. 하지만, 씻김은 젖은 스펀지로 모든 것을 닦아내는 것과 같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질병이 자백하지 않은 죄로 인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4절). 그가 그것을 고백하자, 그는 치유되었습니다. "주님을 찾을 수 있는 때"가 있으며 우리는 그 시간, 즉 현재의 은혜의 시간에 그분께 기도해야 합니다(6절). 주님은 또한 우리를 가르치고 인도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8절).

시편 33편은 여호와만이 그분의 백성의 도움이심을 선포합니다. "여호와의 눈은 그분을 경외하는 자를 항상 살피사, 그들을 건져내시고 기근의 때에 살려 주시는도다"(18,19절).

시편 34편은 주님을 의인의 돕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다윗이 아비멜렉 왕 앞에서 미친 척하면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음에서 건지셨을 때 이 시를 썼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나는 언제나 주님을 송축하겠습니다. 이 불쌍한 사람이 부르짖자, 주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1,6,8절). 다윗은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들을 둘러 진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7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또한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분의 귀는 항상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그리고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계신다"(15,18절)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윗은 계속해서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의인은 고난이 많다"(19절)고 말합니다. 당신이 의롭다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결코 생각하지 마십시오. 더 많은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너희를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실 것이다"(19절). 그 다음에는 메시아에 관한 또 다른 예언이 있습니다: "그분은 그의 모든 뼈를 지키시며; 그 중에 하나도 꺽이지 아니하리라" (20절) - 이 예언은 십자가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시편 35편은 주님께 자신의 적들과 싸워달라고 구하는 또 다른 기도입니다. 악의 있는 증인들이 다윗을 대적하여 일어났습니다, 다윗이 과거에 그들에게 선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11-21절). 이것은 가룟 유다에게 선한 일을 하신 예수님의 경험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또한 많은 성도들의 체험이기도 했습니다.

시편 36편은 인간의 악함과 하나님의 선하심을 대조합니다. "그분을 신뢰하는 자는 하나님의 집의 풍성한 것을 마음껏 마실 것입니다"(8절). 9절은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나이다." 이는 우리가 결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정죄에 이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우리가 하나님의 빛 안으로 들어올 때에만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상태를 실제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결코 정죄감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시편 37편은 의인의 축복과 악인의 멸망을 다루고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은 옳은 일을 행할 뿐만 아니라, "주 안에서 기뻐하는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그 마음의 소원"을 얻습니다(4절). 그러한 사람의 발걸음은 주님께서 정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말했듯이, "선한 사람이 멈추는 것도 주님께서 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을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인도하시며 때로는 멈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사람이 넘어져도 별 일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잡아 주시기 때문입니다(23,24절). 우리가 주님을 참을성있게 기다리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입니다(34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입니다.

시편 38편: 다윗은 자신이 병들고 원수들에게 공격도 당하니, 속히 도와달라고 주님께 간구합니다.

시편 39편은 인생의 짧음을 말하고 자비를 구하는 기도로 끝납니다. "주님, 나의 종말을 알게 하소서. 내가 얼마나 덧없는 존재인지 알게 하소서"(4절). 다윗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징계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11절).

시편 40편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종들을 위해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말하며 적들로부터의 구원을 요청합니다. 이것은 또 다른 메시아 시편입니다. 히브리서 10장 5~7절에는 6~8절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큰 차이점을 주목하세오. 다윗은 오직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기뻐하나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더 나아가 "하나님이여 내가 당신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옛 언약 아래 있는 사람들이 성취할 수 있는 것과 새 언약 아래 있는 우리가 이룰 수 있는 것의 차이입니다. 그 성도들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기뻐할 수 만 있었습니다. 우리는 실제로 그것을 할 수 있습니다.

시편 41편은 치유와 원수에 대한 승리를 요청합니다. 주님께서는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돈이 필요한 사람)과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복음이 필요한 사람) 둘 다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을 환난에서 건져내시며, 원수들에게서 보호해 주시고, 그가 아플 때 고쳐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시편 후반부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그의 적들로부터 도움을 구합니다 - 그와 함께 식사를 한 친한 친구도 포함됩니다. 이 구절은 요한복음 13장 18절에서 가룟 유다를 언급하는 것으로 인용되었습니다. 11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이 그를 기뻐하신다는 유일한 증거는 그의 원수들이 패배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경우, 이것은 우리 육신의 정욕에 대한 승리를 의미합니다.

두 번째 책 - 억압받는 사람들을 구해주심

이 책의 처음 여덟 편의 시편(시편 42-49편)은 고라가 광야에서 모세에게 반역했을 때, 아버지 고라의 곁을 떠남으로써 죽음을 면한 고라의 아들들이 쓴 시입니다(민 26:9-11). 고라 아들들의 1세대가 썼든 그 후 세대가 썼든, 고라의 아들들이 아버지의 반역에 맞서지 않았다면, 이 시편 중 어느 것도 기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기름부음받은 지도자, 모세와 함께 섰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권위를 지키지 않는다면,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계획을 놓칠 수 있겠습니까?

시편 42편은 "사슴이 물을 갈망함 같이"(1절) 하나님을 갈망하는 영혼에 관한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향한 그러한 갈망을 가질 때, 당신은 하나님께서 매우 신속하게 응답하실 것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깊음이 깊은 곳을 부르느니라"(7절). 그것은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마음 깊은 곳으로 손을 뻗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사람이라면, 주변 사람들이 "네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라고 말할지라도(10절),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찬양하며 낙담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11절).

시편 43편은 인도와 구원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주님, 당신의 빛과 진리를 보내소서. 그것들이 함께 나를 주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게 하소서"(3절). 시편 기자는 진리에 대한 지식만이 아니라, 빛(계시)을 구하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하나님의 빛만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임재로 가는 길을 보여줄 것입니다.

시편 44편은 하나님께서 예전에 그러하셨던 것처럼 지금도 일하시기를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22절 -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나이다; 우리는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니" - 오늘 우리가 걸어야 할 십자가의 길을 예언적으로 언급한 것으로, 바울이 로마서 8장 36,37절에서 인용한 말입니다.

시편 45편은 어린 양의 결혼에 관해 말하고 신부와 신랑을 묘사하는 또 다른 메시아 시편입니다. 신부는 안에서, 즉 내면이 영광스러운 존재로 묘사됩니다(13절). 바로 그곳이 바로 우리가 영광스러워야 할 곳입니다. 그리고 10절에는, 결혼 후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해 하나님께서 모든 신부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네 백성과 아비 집을 잊어버리고" - 남편과 연합하십시오! 이것은 하나님께서 창세기 2:24에서 남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과 균형을 맞추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왕(당신의 신랑)이 당신의 아름다움을 크게 갈망할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의 주님이십니다. 그분께 경배하십시오(11절).

시편 46편은 하나님을, 그분의 백성의 피난처로 묘사합니다. 고라와 그의 동료 반역자들이 경험한 상황과 관련하여 이 내용을 읽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고라의 아들들은 이제, 땅이 열려 그들의 부모를 삼키고 산들이 깊은 곳으로 빠져 들어가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노래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보좌에 앉아 만유를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알고 안식할 것입니다(10절).

시편 47편은 하나님의 주권을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4절은 놀라운 구절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나의 기업을 택하시리라." 참 제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내 아내를 선택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나를 위해 나의 사역을 선택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내가 사는 집의 유형과 그 밖의 모든 것을 선택할 것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을 것입니다.

시편 48편은 교회의 그림인, 시온의 영광을 말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 보는 것처럼, 예수님의 참된 제자는 주님 그분뿐만 아니라 그분의 몸인 교회, 즉 주님의 백성에게도 감사할 것입니다: "주님은 위대하시며 크게 찬양 받으실 분이십니다. 아름답고 온 땅이 기뻐하는 것은 시온산입니다." 교회는 이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입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분이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14절).

시편 49편은 세상의 재물을 신뢰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임을 묘사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부를 신뢰합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자기 형제를 구원할 수 없고, 그를 위해 하나님께 속전을 바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친히 내 영혼을 구속하실 것입니다"(6,7,15절).

시편 50편은 다윗이 하나님의 백성의 예배를 인도하도록 임명한 노래하는 자들 중 한 사람인 아삽이 지은 것입니다. 시편 50편은 하나님을 모든 사람, 즉 의인과 죄인의 심판자로 묘사합니다. 하나님은 갈보리에서 "희생 제물로 그분과 언약을 맺은 자들"을 부르십니다(5절). 하나님은 "내가 굶주려도, 너에게 말하지 않는 것은 세계와 거기 있는 모든 것이 다 내 것임이로다"(12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참된 종도 같은 말을 합니다. 그는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 외에는 세상의 필요를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에 있어서 훌륭한 본이 됩니다. 주님은 15절에서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라"라는 놀라운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19절과 20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제를 비방하는 죄에 대해 경고하십니다. 그분은 험담하는 사람들을 참으시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죄가 심각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잠잠하였더니, 너희는 나를 너희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21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찢겠다고 위협하십니다(22절). 마지막으로, 23절에는 혀를 사용하여 남을 험담하는 대신에 여호와를 찬양하는 데 사용하는 사람들에 대한 놀라운 약속이 나와 있습니다: "찬양을 드리는 자는 나를 영화롭게 하며, 이로써 내가 그에게 나의 구원을 보여줄 수 있는 길을 만든다"(문자 그대로). 우리가 주님을 찬양할 때, 이로써 우리는 그분을 주권자이신 하나님으로 믿는 우리의 믿음을 표현하며, 이러한 믿음의 표현을 통해 그분은 우리에게 그분의 구원을 보여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호사밧 왕이 행한 일에서 그 예를 보았습니다(대하 20장).

시편 51편은 회개하는 죄인이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다윗은 간음과 살인의 죄를 깨닫게 된 후에 이 시편을 썼습니다. 그는 그러한 죄를 지은 직후에 이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는 9개월 후 밧세바가 그의 아이를 낳았을 때 나단 선지자가 찾아와 말을 한 후에야 이 글을 썼습니다. 다윗이 그렇게 심각한 죄를 깨닫게 되는데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 시편은 아름다운 회개의 시편이며, 왜 하나님께서 다윗을 그토록 빨리 회복시키셨는지 보여줍니다.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점은 그는 아담처럼, 자신의 죄에 대해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3,4절). 그는 주님께서 그의 죄를 깨끗하게 하시면 "눈보다 희게 되리라"(7절)는 믿음을 선포합니다. 그는 주님께 그런 죄를 짓지 않는 새 마음을 달라고 간구합니다: "내 안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소서"(10절). 그는 성령을 거두지 마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합니다(11절). 다윗은 기름부음 받는 것의 가치를 알았고, 죄로 인해 어떻게 기름부음을 잃게 될 수 있는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상하고 죄를 깊이 뉘우치는 마음을 하나님은 높이 평가하십니다(17절). 다윗은 하나님께서 "마음 속 진실"을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6절). 그러나 이것은 율법 아래에서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은 이제 성령을 보내 우리 안에 거하게 하심으로 그것을 행하셨습니다(롬 8:3,4; 요 7:37-39).

시편 52편은 악인의 종말과 경건한 사람의 종말을 대조합니다.

시편 53편은 인간의 사악함을 다룬 시편 14편을 거의 한 단어씩 반복한 것입니다.

시편 54편은 도움과 구원과 변호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시편 55편은 다시 원수로부터 보호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이 적은 유다처럼 한때 가까운 친구였습니다(12-14절). 17절에서는 다윗이 얼마나 자주 기도했는지 봅니다: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하나님이 내 소리를 들으시리이다." 유대인의 하루는 해가 질 때 시작되어 다음 날 해가 질 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녁과 아침과 정오"는 하루의 시작과 중간과 끝을 가리킵니다. 다윗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22절은 구약에서 가장 아름다운 약속 중 하나입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리라. 그분은 의로운 사람들이 흔들리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다."

시편 56편은 우리를 해치려는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에서 우리를 건져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또 하나의 시편입니다(3,11절). 11절: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다. 나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이 표현은 시편 118:6에서 거의 정확하게 반복되었으며, 히브리서 13:6에서 인용되었습니다.

시편 57편은 하나님께 원수로부터 도움을 구하는 또 하나의 확신에 찬 기도입니다. 시편 기자는 자신을 둘러싼 재앙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주실 "여호와의 날개 그늘 아래" 거할 것이라고 말합니다(1절).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임을 받으소서"가 5절과 11절에서 반복됩니다.

시편 58편은 악인의 형벌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3절에서는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거짓말을 하기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우리 모두가 저지르는 첫 번째 죄입니다. 아기는 말을 하기 전부터 거짓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단지 안아주고 업어주기만을 원하는데 아픈 척하며 울부짖습니다. 우리가 이 땅을 떠나기 전에 거짓말을 없애려면 이 습관과 진지하게 싸워야 합니다.

시편 59편은 적들에 맞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확신에 찬 기도입니다.

시편 60편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지지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한탄하며, 원수를 이길 수 있도록 도움을 구합니다. "주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깃발을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깃발을 세우게 하셨나이다"(4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깃발로 주셨습니다. 우리는 어디를 가든 그 이름을 드러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시편 61편은 하나님께서 그를 보호하시고 그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실 것이라는 다윗의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의 기도는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입니다(2절). 그 반석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시편 62편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피난처로써 의지하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내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을 기다리라, 이는 나의 소망이 그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5절).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기대가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실망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시편 63편은 당시 다윗이 광야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다윗의 완전한 만족을 표현합니다. 그는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니"(3절)라고 말했습니다.

시편 64편에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적들을 멸망시키실 것이라는 다윗의 확신을 다시 한번 표현합니다.

시편 65편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합니다. 1절(KJV)은 "주여, 시온(교회)에서 찬송이 주를 기다리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 교회는 언제나 찬양이 하나님을 기다리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오실 때, 그분은 찬양이 그분을 기다리고 있음을 발견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그분께 가까이 이끄십니다. 4절은, "택하여 가까이 오게 하는 사람은 복이 있도다"라고 말합니다. 시편은 계속해서 땅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말합니다.

시편 66편: 시편 기자는 여기서, 자신을 축복의 장소로 인도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수많은 시련을 통한 것이었습니다. 10-12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시편 기자를 먼저 질병과 불과 물, 인간의 억압을 겪게 하시고, 영적 번영의 장소로 인도하셨다는 것을 봅니다. 여기에서 "풍요로운 곳"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성경의 다른 한 곳, 즉 시편 23:5에서만 사용되며, "넘친다"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넘치는 축복의 삶을 누리는 길은 시련과 고난을 통해서입니다. 18절은 또 다른 중요한 구절입니다: "내가 내 마음에 죄를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기도는 하나님과 전화통화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속에 자백하지 않은 죄가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기 위해 전화를 받지도 않으실 것입니다.

시편 67편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은 하나님의 길과 그분의 구원이 온 세상에 알려지기를 바라는 시편 기자의 소망이 담긴 전도 시편입니다(2절).

시편 68편은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6절은 독신남과 노처녀를 위한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외로운 자들을 위하여 집을 마련하시느니라." 11절은 전도에 관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명령을 주시니, 그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여자들은 큰 무리이니라." 하나님은 여자들이 복음을 전하기를 기대하십니다!! 18절 "주께서 높이 오르셨고, 포로들을 사로잡으셨나이다; 주님은 사람들에게서 선물을 받으셨습니다"는 에베소서 4장 8절에 인용되어 있으며 예수님의 승천과 그분이 하늘에서 교회에 주신 영적인 은사에 대한 예언적 언급입니다.

시편 69편은 다윗이 자신을 박해하는 자들에 맞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고통의 부르짖음입니다. 여기에 있는 여러 구절은 메시아에 대해 예언하고 있습니다: "내가 도적질하지 아니한 것을 도로 주어야 하리라"(4절)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담당하신 것에 대한 언급입니다. "비방이 내 마음(heart)을 상하게(broken) 하였도다"(20절)는 예수님께서 육체적으로 부서진 심장(broken heart)으로 죽으셨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옆구리가 찔렸을 때 피와 물이 쏟아졌습니다. 의사들은 그분의 심장(heart)이 육체적으로 부서진(broken) 경우에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29절은 부활과 승천에 대한 예언적 언급입니다.

시편 70편은 적에 맞서 도움을 구하는 또 다른 외침입니다.

시편 71편은 시편 기자가 노년에 구원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그는 여전히 주님을 찬양하며 하루하루를 보냅니다(8절). 그리고 그는 이제 늙어 백발이 되었으나, 새로운 세대에게 하나님의 힘을 선포하기를 갈망합니다(17,18절). 그는 20절에서 부활에 대한 믿음을 선포합니다: "주께서 나를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살리시리이다."

시편 72편은 첫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다윗이 그의 아들 솔로몬을 위해 쓴 시입니다. 그 책에서, 그는 왕이 어떠해야 하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 설명합니다. 불행하게도, 솔로몬은 여기에 묘사된 왕의 유형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는 경고입니다. 우리도 또한, 이 시편에 나오는 이 모든 놀라운 것들을 연구하고 그것들 중 아무것도 실천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책 - 성전과 하나님의 보좌

시편 73편부터 83편은 다윗의 노래하는 사람 중 한 사람인 아삽(시편 50편도 지은 사람)이 지은 것입니다.

시편 73편은 수 세기 동안 많은 사람들이 물어왔던 질문을 다루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악인이 형통하며, 의인이 고난을 받는가?" 아삽은 악인이 형통함을 보고, 하나님을 의심할 뻔했다고 솔직하게 말합니다(2,3절). 그래서 그는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가치가 있는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이 걸려 넘어질까 봐, 이런 생각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들어가서 악인들이 매우 미끄러운 땅에 서 있다가 곧 지옥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마침내 그 답을 찾았습니다. 25절은 아마도 성경 전체를 통틀어 진정한 헌신의 의미를 설명하는 가장 훌륭한 구절일 것입니다: "하늘에서 주님 외에 내게 누가 있으리요.주님 외에 제가 원하는 것은 이 땅에 아무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 우리가 지상 생활 내내 이렇게 진실하게 말할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참된 예배자이자 유용한 종이 될 것입니다. 26절: "내 마음은 쇠약할지라도, 하나님은 내 마음의 힘이십니다"는 마음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에게 좋은 구절입니다!

시편 74편은 하나님의 백성의 파멸된 상태에 대한 우려의 부르짖음입니다.

이것은 교회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주님, 당신의 원수들이 당신의 교회의 모든 것을 파괴했고 지금 그 안에서 으르렁거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것을 더럽혔습니다"(3,4,7절). 여기에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계시지 않는다는 두 가지 표징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1. 그분은 그들을 위해 어떤 기적도 행하지 않으신다.

2. 그분은 그들에게 어떤 예언자도 보내지 않으신다(9절).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기적적인 방법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또한 우리를 바로잡기 위해 예언자들을 보내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교회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거나 그 교회에 예언자를 보내지 않으신다면, 그것은 그분이 그 교회를 포기하셨다는 표시일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교회에서는 기적과 선지자를 모두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습니다.

시편 75편의 주제는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에 의해서 높아지기를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6절). 높아짐은 하나님에게서 옵니다(7절). 사람이 당신에게 교회에서 사역을 맡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직 하나님만이 당신을 위해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시편 76편은 인간의 분노한 행동조차도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게 하셔서 그분을 찬양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주권적 능력을 묘사하고 있습니다(10절).

시편 77편은 "옛적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회상한 것입니다. 아삽은 환난 중에, 그 일을 생각하고 위로를 얻었습니다(5절). 13절(KJV)은 "하나님이여 주의 길이 성소에 있사오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길을 찾으려면, 성소안에 있는 지성소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바깥뜰"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그들의 죄에 대한 용서함만 알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없는 신자들과만 교제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길이 성소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깨끗한 마음으로 주를 부르는 자들"(딤후 2:22)과의 교제를 추구하십시오.

시편 78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구원받을 때부터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되돌아보는 역사적인 시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죽이실 때만 하나님을 찾았습니다(34절). 그들은 그분께 입으로 아첨하며 거짓말을 하였습니다(36절).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로우사, 그들을 거듭 용서하셨습니다(38절). 그분은 그들에게 목자 다윗을 주셨고, 다윗은 그들을 목양하고 인도했습니다(70,72절). 이 시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놀라운 일들과 우리에게 주신 지도자들을 돌아보고 기억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도록 일깨워줍니다.

시편 79편은 예루살렘(교회)의 멸망에 대한 염려하는 기도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순결을 염려하는 우리가 하기에 좋은 기도입니다.

시편 80편은 하나님의 백성을 문제에서 구원해 달라고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입니다. 17절은 메시아에 관한 구절입니다: "주의 우편에 있는 사람 곧 주를 위하여 힘 있게 하신 인자에게 주의 손을 얹으소서."

시편 81편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선포합니다. 10절에는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라는 아름다운 약속이 있습니다. 우리가 요청하지 않기 때문에,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주님은 13절과 14절에서 한숨을 쉬시며 말씀하십니다, "오 내 백성이 내 말을 들었더라면! 그러면 내가 그들의 적을 신속히 제압했을텐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믿었더라면,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에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을 것입니다!

시편 82편은 이스라엘의 불공평한 재판관들을 질책하며, 하나님께서 내려오셔서 땅을 심판하시라고 촉구하는 시편입니다.

시편 83편에서는 이스라엘을 멸하려고 하면서 "나라가 되지 못하도록 그들을 없애 버리자"(4절)라고 말하는 원수들을 심판해 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합니다. 수세기에 걸쳐 많은 나라들이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교회도 없애려고 했습니다. 그들 역시 한번도 성공한 적이 없습니다. 교회는 계속 살아남아서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가 온 땅의 주이심을 알 수 있도록 해야합니다(18절).

시편 84편은 그분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하는 갈망을 표현합니다. 제비가 하나님의 제단 위에 둥지를 틀 곳을 찾았듯이(3절), 지성소에 사는 사람들도 복을 받고 항상 하나님을 찬양할 것입니다(4절). 그들이 바카(눈물) 골짜기를 지날 때, 그들은 그 곳을 축복의 샘으로 바꾸며(6절) 점점 더 힘있게 나아갈 것입니다(7절). 10절은, 이 시편이 고라의 아들들이 지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의미가 있습니다: "(모세와 함께 서 있는) 주의 뜰에서 하루가 밖에서 천 날보다 나으니이다. 나는 (우리 아버지 고라와 함께) 악인의 장막에 거하는 것보다, (모세와 함께) 하나님의 집 문지방에 서기를 원합니다." 그들은 악인의 장막에서 구원받은 것을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이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11절). 우리가 정직하게 행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최고의 것을 얻을 것입니다.

시편 85편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방문하시기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주께서 친히 우리를 다시 살리시어, 주의 백성이 주로 인해 즐거워하게 하소서"(6절).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는 원망과 불평이 많습니다. 절실히 필요한 것은 기쁨과 찬송의 부흥입니다. "나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분의 경건한 자들에게 '평강'을 말씀하시리라"(8절). 주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나요? "긍휼과 진리가 서로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느니라"(10절). 하나님의 진리(율법)에 대한 요구와 그분의 긍휼이 갈보리에서 만났습니다. 갈보리에서 의로운 방법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평화가 확립되었습니다.

시편 86편은 도움과 인도를 구하는 또 다른 기도입니다. "주님, 나에게 당신의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당신의 진리 가운데 걸을 것입니다. 내 마음을 하나로 묶어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11절). 다윗의 기도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끌려가는) 그의 마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시편 87편은 시온(교회)의 시민으로서의 특권에 관한 것입니다. "시온에 대하여 이르기를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태어났다' 하리라"(5절). "나의 모든 기쁨의 샘은 너희 안에 있도다"(7절).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교회의 일원이 됨으로써 누리는 큰 기쁨을 말합니다.

시편 88편은 죽음에서 구원해 달라는 간청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모든 시편 중에서 가장 우울한 시편일 것입니다. 시편 기자(아마도 에스라 사람 헤만)는 자신이 어려서부터 고난을 당했으며(15절) 하나님께서 그를 거절하셨다고 불평합니다. 이제 그는 자신이 죽게 될 것을 두려워하는 생각에 우울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는 욥과 매우 흡사하게 들립니다. 고통에 대한 다른 시편들이희망의 말로 끝나는 것과 달리, 이 시편은 절망으로 끝납니다.

시편 89편은 다윗과 맺은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표현하는 시편으로, 하나님께 약속을 이행하시기를 간구합니다. 그 어조는 이전 시편과 정반대입니다. 이 시편은 또 다른 에스라 사람인 에단이 썼습니다. 그러나 그는 시편 88편을 쓴 그의 형제 헤만과는 정반대의 관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7절에 "거룩한 자들(교회)의 모임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크게 경외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27절부터 29절은 예수님을 언급합니다: "내가 내 장자를 땅의 왕들 중에 가장 높은 왕으로 만들 것이다."

네 번째 책 - 이스라엘과 다른 나라들

시편 90편은 하나님의 영원성과 인간의 일시적인 본성을 다루고 있습니다. 모세가 기록한 유일한 시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에게는 "천년이 하루 같다"(4절)는 말씀을 봅니다. 10절에서, 모세는 주변 사람들이 70세에서 80세 사이에 죽어간다고 말합니다. 이는 애굽을 떠난 60만 명 중 대부분이 떠날 당시 20세에서 60세 사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들 중 일부는 모세처럼 120세까지 살았지만, 대부분은 80세가 되기 전에 죽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세대 전체가 광야에서 죽도록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2절에서 모세는 "우리에게 우리 날 수 세는 것을 가르치셔서 우리 날의 적음을 알게 하사, 우리가 지혜를 얻으며 하루를 보낼 수 있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 이는 우리 모두가 기도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도입니다. 17절은 우리 모두가 기도해야 할 또 다른 좋은 기도입니다: "여호와의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임하게 하소서."

시편 91편은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사는 자의 축복과 안전을 선포합니다. 우리에게, 그 은밀한 곳은 바로 예수님의 상처난 옆구리입니다. "전능자의 그늘"에 거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앞에 가시고, 우리가 그분의 그늘 아래서 걷는다는 뜻입니다(1절). 온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하나님의 완전하신 뜻의 중심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두 원수인 사탄(덫을 놓는 자)과 죄(치명적인 질병)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3절). 그분은 명백한 죄(낮의 위험)와 교묘하고 현혹시키는 죄(밤의 위험)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것입니다(5,6절). 우리 주변에 11,000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승리하는 삶을 믿지 않더라도, 그분은 우리를 죄에 빠지지 않게 지켜주실 것입니다(7절). 우리는 많은 환난을 당해야 할지라도, 그 모든 환난 가운데 어떤 악도 우리에게 닥치지 않을 것입니다(10절). 그분은 우리가 그분의 뜻대로 행하는 한, 우리를 돌보도록 천사들을 임명하셨습니다. 사탄(사자와 뱀)은 언제나 우리 발 아래서 짓밟힐 것입니다(13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우리를 높은 곳에 세우시고, 정해진 임무를 마칠 때까지 죽지 않도록 장수를 주실 것입니다(15,16절).

시편 92편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베푸신 선하심을 찬양합니다. "그들은 늙어서도 여전히 열매를 맺으며 진액이 가득하고 매우 푸르를 것이다"(14절). 그 말은 그들이 늙어도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충만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시편 93편은 여호와의 능력과 위엄을 말합니다. "여호와여,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나이다"(5절).

시편 94편은 자기 백성을 징계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징계하시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12절).

시편 95편은 우리에게 주님을 경배하라고 권유하고 마음이 굳어지지 않게하라고 경고합니다. 7절과 8절 -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 히브리서 3:7,8에 인용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계속해서, 우리가 완고해지지 않으려면 날마다 권면과 격려를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히 3:13).

시편 96편은 곧 오실 주님을 예배하라는 또 다른 초대입니다. "주님께서 땅을 심판하러 오십니다. 그분이 의로 세상을 심판하시며 그분의 진리로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13절).

시편 97편은 하나님의 능력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10절에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는, 악을 미워하라"고 했습니다. 악을 미워하지 않으면,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악을 피하는 것과 악을 미워하는 것에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죄를 이기는 길은 죄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미움은 살인과 같습니다. 우리가 죄를 미워하면 죄를 죽일 것입니다.

시편 98편은 우리를 주님께 찬양을 드리도록 초대합니다.

시편 99편은 주님을 찬양하라는 또 다른 부르심입니다.

시편 100편은 주님을 찬양하고 섬기라는 또 다른 권유입니다. 우리는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겨야" 합니다(2절). 나는 주님을 섬기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대부분 이런저런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쁨으로 그분을 섬기지 않는 사람이 그분을 섬기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시편 101편: 여기에서 다윗은 자신이 추구한 흠 없는 삶의 길에 대해 말합니다. "나는 흠 없는 길에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나는 내 집 안에서 온전한 마음으로 행하리라"(2절). 우리 모두는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흠 없이 먼저 행해야 할 곳은 가정입니다. 흠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실패했을 때 사과하고 문제를 바로잡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재정적인 거래에서도 흠잡을 데가 없어야 합니다.

시편 102편은 고통받는 사람이 도움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이며 그의 자녀와 손자들도 주님을 따를 것이라는 믿음을 표현하며 결론을 내립니다(28절).

시편 103편은 다윗이 여호와께 받은 수많은 축복, 즉 그의 모든 죄가 용서되고, 그의 모든 질병이 치료되고, 구덩이(지옥)에서 구원되고, 물질적인 축복("좋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다윗은 옛 언약 아래서 이 모든 것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설교하는 것이 예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고, 치유하시고, 물질적으로 축복하시고, 지옥에서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뿐이라면, 우리는 그리스도보다 1000년 전에 다윗이 설교한 것만을 설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 언약 복음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1.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죄에 대한 승리를 주실 수 있습니다(롬 6:14).

2. 그분은 당신을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벧후 1:3,4).

3. 그분은 당신의 발 아래 마귀를 두게 하실 수 있습니다(롬 16:20).

4. 그분은 당신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울 수 있게 하십니다(엡 4장).

시편 104편은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묘사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종들을 타오르는 불로 삼으십니다"(4절). 주님의 모든 종은 주님을 위해 타오르는 불이 되어야 합니다. 모세는 떨기나무에서 타오르는 불을 보고 멈춰 서서 귀를 기울였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을 때, 사람들도 멈춰 서서 우리의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시편 105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15절에,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예언자들을 해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기름부음받은 예언자들을 보호하시고, 그들을 대적하는 말을 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경고하십니다. 요셉에 관해 이렇게 말합니다: "때가 이르기까지 그는 종으로 팔렸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매 철이 그의 영혼에 들어갔다"(17절 - 여백, 18,19).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감옥에 가두시어 그가 철과 같이 강해지도록 허락하셨습니다 - 그리하여 "철이 그의 영혼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요셉이 풀려날 날은 정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시간을 지키십니다. 39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주신 이유를 알려줍니다. 낮에는 구름이 태양의 열기로부터 그들을 가려 주고, 밤에는 불이 그들에게 빛을 비춰 주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시편 106편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의 역사를 계속해서 담고 있습니다. 11절과 12절에 "물이 그들의 대적을 덮을 때에 그들이 그분의 말씀을 믿고 그분을 찬송하였더라"고 했습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두가지를 봅니다.

첫째, 믿음의 증거는 찬양입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합니다. 입은 마음에 있는 것이 넘쳐흐르는 밸브입니다. 우리 마음에 믿음이 있으면, 찬양이 넘치게 됩니다. 사도들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행 2장).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믿음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둘째, 옛 언약 아래서, 그들은 믿음으로 살지 않고 보는 것으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원수들이 물에 빠져 죽는 것을 본 후에야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원수가 패배하기 전에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고 믿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책 - 찬양과 예배

시편 107편은 주님께서 사람들을 어려운 상황에서 구출하시는 다양한 방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방황하던 사람들은 한 성읍으로 인도되었습니다(4-7절). 흑암에 앉은 자들이 어둠에서 나왔습니다(10,14절). 아픈 사람들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분이 그분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셨습니다"(20절). 폭풍우가 치는 바다에 갇힌 사람들이 구조되었습니다(25-29절). 그래서 2절에 "주께 구속함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하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인가를 행하셨을 때, 특히 그분이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구속하셨을 때 우리는 침묵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를 증거해야 합니다.

시편 108편은 하나님께서 시편 기자를 승리로 이끄실 것이라는 확신을 표현합니다. 그는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찬송하리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라"(1,2절)라고 말합니다. 그는 매일 새벽이 되기 전에 일어나 무엇보다 먼저 주님을 찬양하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 이는 우리 모두가 따라야 할 좋은 습관이었습니다.

시편 109편: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께 그의 적들에게 복수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8절은 사도행전 1장에서 베드로가 가룟 유다를 언급하면서 인용한 것입니다: "그의 직분을 다른 사람이 맡게 하십시오." 유다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으나, 자기 우편에 섰는 사탄의 말을 들었습니다(6절). 그는 하나님을 우편에 두는 대신, 사탄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다를 위해 계획하신 사역은 사도 바울에게 주어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가 불충실하다면, 다른 사람이 우리의 사역을 대신할 수 있습니다.

시편 110편은 예수님을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왕과 제사장으로 언급하는 메시야 시편입니다(4절). 이 내용은 히브리서 7장에 인용되어 있습니다.

시편 111편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하는 또 다른 시편입니다. 초기 시편들은 일반적으로 도움을 구하는 부르짖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시편의 끝으로 갈수록, 우리는 찬양의 시편이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삶도 그러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대개 도움을 구하는 부르짖음으로 시작됩니다. 나이가 들수록, 우리의 삶은 더욱 찬양으로 가득 차야 합니다. 10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니라"는 구절이 잠언에 나오기 전에 여기에 나옵니다. 우리는 이 시편을 누가 썼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다윗에 의해 기록되었다면, 그의 아들 솔로몬이 잠언에서 이 말을 반복하기 전에, 다윗이 먼저 이 말을 했을 것입니다.

시편 112편은 아름다운 시편이며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편 중 하나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의 자녀는 복을 받고 그가 형통할 것입니다. 그는 어둠 속에 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빛을 얻을 것입니다. 그는 의롭고 자비로우며 궁핍한 사람들에게 꾸어 줍니다. 그는 그의 마음이 주님을 굳건히 신뢰하기 때문에, 나쁜 소식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존귀히 여기시고, 악인들은 그를 시기할 것입니다. "그를 향한 하나님의 끊임없는 보살핌은 그것을 보는 모든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줄 것입니다"(6절 - Living). 우리 삶에서도 그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것을 보면 주변 사람들도 깊은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시편 113편에서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높이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너무 위대하십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살펴보실 만큼 겸손하십니다(5,6절).

시편 114편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에 들어가는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 115편은 하나님을 우상과 대조합니다. "주님,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시고, 오직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1절).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느니라"(17절).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여호와를 찬양해야 합니다.

시편 116편: 여기에서 시편 기자는 자신을 죽음에서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주께서 나를 위하여 행하신 모든 놀라운 일을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12절). 그것은 우리가 항상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할 좋은 질문입니다.

시편 117편은 성경에서 가장 짧은 장입니다 - 두 구절의 찬양입니다.

시편 118편은 구원에 대한 감사의 시편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니라"(8절).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탄과 그의 악마들을 이길 수 있다는 말씀을 세 번이나 들었습니다(10,11,12절).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22절).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오늘날 교회의 모퉁잇돌이십니다. 사람들도 우리를 거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높이실 것입니다. "주여, 구원하소서(호산나)"(25절)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며칠 전 예루살렘에 오셨을 때 그들이 종려나무를 흔들며 외치던 외침이었습니다.

시편 119편: 이것은 하나님의 율법의 축복을 묘사합니다. 성경에서 가장 긴 장으로, 176개의 구절이 각각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의 말씀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알파벳순의 시편입니다. 시편의 처음 여덟 절은 히브리어 알파벳의 첫 글자인 '알레프(Aleph)'로 시작됩니다. 다음 8개의 구절은 두 번째 글자인 '베스(Beth)'로 시작됩니다. 이런식으로, 알파벳 22자를 통해서 계속 이어집니다. 9절에서는 청년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그의 행실을 순결하게 지킬 수 있다고 말합니다. 11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간직하면 죄를 피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18절은 기도입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67절은 시편 기자가 많은 환난을 통하여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105절). "주의 말씀이 펼쳐지면 빛이 비치나이다"(130절). 133절은 로마서 6장 14절의 새 언약 약속을 고대하며, "주여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옵소서"라고 말합니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나이다"(165절). 그리고 마지막으로, 176절: "주님, 제가 길을 잃었습니다. 주의 종을 찾으소서."

시편 120편부터 134편까지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의 시편"이라고 불리는 15편의 시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 축제에 참석할 때 이 노래를 불렀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는 음악적으로 상승하는 노래일 수도 있습니다.

시편 120편은 거짓 고발자로부터 보호해 달라는 외침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혀를 통제하는 것에 대한 급진적인 태도를 취하는 데 2절에서 4절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주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나를 구원하소서. 거짓 혀야, 내가 너에게 무엇을 주겠는가? 내가 화살로 너를 쏴서 너를 불사르리라"(2-4절).

시편 121편은 우리를 지키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나의 도움은 어디서 올 것인가? 그것이 남쪽 산 너머의 이집트인들에게서 올 것인가, 아니면 북쪽 산 너머의 앗시리아인들로부터 올 것인가? 아니다.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그분은 결코 잠들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나를 돌볼 것이다. 낮이든 밤이든, 아무것도 나를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4절).

시편 122편은 예루살렘(교회)의 평안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들이 나에게, '교회 모임에 가자'고 말했을 때 나는 기뻤습니다. 내 집은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있는 교회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참된 제자는 하나님의 백성과의 교제를 소중히 여길 것입니다.

시편 123편은 오만한 자들로부터 보호해 달라는 또 다른 기도입니다. "주님, 종의 눈이 그의 주인을 바라보듯이, 내 눈이 주님을 우러러봅니다"(2절). 우리의 소명은 그렇게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지 자기 생각대로 "주님을 위한 일"을 하며 뛰어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 124편은 그분의 백성을 적들에게서 구원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시편 125편은 하나님의 백성의 견고한 안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 산과 같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둘러싸고 계십니다"(1,2절).

시편 126편은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것을 기념합니다. 그들은 바벨론에서 눈물로 씨를 뿌렸고 이제 예루살렘에서 기쁨으로 거두고 있습니다. 교회를 세우려면, 오늘도 눈물로 씨를 뿌려야 합니다.

시편 127편은 집을 짓는 것에 관한 시편입니다. 놀랍게도 이 시편은 아내가 700명, 첩이 300명이나 있었지만 스스로 집을 지은 적이 없는 솔로몬이 쓴 것입니다(왕상 11:3)!! 이는 강력하고 정확한 설교를 하면서도 자신이 설교한 내용을 결코 실천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를 보여줍니다. 시편은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도다. 자녀는 여호와의 기업이니라"(1,3절)라고 말합니다. 계속해서 우리의 자녀는, 원수들이 우리가 자녀를 양육하는 방식을 보면 그들의 입이 다물어질 정도로, 성장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시편을 쓴 사람은 오늘 지옥에 있습니다!

시편 128편은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복된 가정생활에 관한 또 다른 시편입니다!

시편 129편은 또 다른 메시아 시편입니다. 시편 기자는 시온(교회)을 미워하는 자들이 다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시편 130편은 주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을 표현합니다. "주님에게는 용서가 있어 주님을 경외하게 됩니다"(4절).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경외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도록,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시편 131편은 주님에 대한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한 신뢰를 표현합니다. 1절은 우리가 따라야 할 좋은 예입니다 - 우리가 경험하지도 않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 밖의 문제에 관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역 밖에 있는 많은 것들은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시편 132편은 하나님을 위한 집을 짓고자 하는 다윗의 큰 열정을 말합니다(4,5절). 그러나 그에게는 그런 특권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우리도 이와 같은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시편 133편은 연합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1절). 연합은 시온(교회)을 세우기 위한 기본 요건입니다, 왜냐하면 연합이 있는 곳에만 하나님의 기름 부음과 축복이 충만하게 흐르기 때문입니다(2,3절). 120명의 첫 번째 무리의 남자와 여자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들이 "한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행 1:14).

시편 134편: 이 시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의 마지막 시편이며 사람들에게 주님을 찬양하도록 초대합니다.

시편 135편은 주님의 위대하심과 우상의 무력함을 대조시킵니다. "우상을 만드는 자는 그것과 같이 될 것이다"(18절). 우리는 우리가 경배하는 하나님과 같이 됩니다. 우리가 경배하는 하나님이 항상 사람들의 잘못된 행동을 잡으려고 애쓰는 "경찰"이라면,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 경찰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경배한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분처럼 될 것입니다.

시편 136편은 오랜 세월 동안 이스라엘을 향한 주님의 인자하심에 대해 여호와께 감사를 드리는 시편입니다.

시편 137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 생활을 했을 때 겪었던 일을 시편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예루살렘을 다른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기는 법을 배웠습니다. 우리도 이 땅의 어떤 것보다 교회를 더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7-9절에서 바벨론에 대해 표현된 미움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사람들의 전통에 의해 기독교 집단에 세워진 종교 제도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미움이 되어야 합니다 - 시스템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미움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에 대한 미움입니다.

시편 138은 주님에 대한 감사와 믿음의 기도입니다. "주의 모든 이름과 같이 주의 말씀을 크게 하셨나이다"(2절). 하나님의 말씀은 그분의 이름만큼 높임을 받습니다. 그분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그분의 말씀을 욕되게 하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만큼이나 심각한 것입니다! 다윗은 "주님은 내가 염려하는 것을 이루실 것("8절)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편 139편은 하나님이 어디에나 계시며 모든 것을 아신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습니다(7-12절).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을 그토록 안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미리 아심으로 우리가 태어난 날부터 지상 생활의 모든 날을 계획하시고 그것을 책에 기록하셨습니다(16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계획을 한 번에 한 페이지씩 보여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 계획대로 산다면, 이 땅의 삶이 끝날 때에도 후회가 없을 것입니다. 24절(Living)은 우리가 자주 기도해야 할 좋은 기도입니다: "주여, 내 속에 주님을 슬프게 하는 것이 있으면 지적해 주십시오."

시편 140편은 악한 사람들로부터 보호해 달라는 또 다른 기도입니다. 정직한 자만이 하나님 앞에 거할 것입니다(13절).

시편 141편은, 말과 마음이 거룩해지고 보호를 받기 위해, 주님의 도움을 구하는 부르짖음입니다. "주님,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소서. 내 마음이 어떤 악한 일에도 기울지 않게 하소서"(3,4절).

시편 142편은 도움을 구하는 또 다른 부르짖음입니다.

시편 143편은 인도와 구원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당신의 뜻을 행하도록 가르쳐 주십시오. 주의 선한 영으로 나를 평탄한 곳으로 인도하소서"(10절). 평평한 땅은 우리가 꾸준히 발전하는 곳이며 오르락내리락하는 기복이 없는 곳입니다.

시편 144편은 다윗의 자녀들에게 구원과 축복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그는, 그의 아들들은 견고한 나무 같이 자라기를 원하고 그의 딸들은 왕궁의 기둥 같이 강건하기를 원합니다(12절).

시편 145편은 여호와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시편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분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가까이 계시느니라. 그분을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리로다"(18,19절).

시편 146편: 마지막 다섯 편의 시편은 찬양의 시편입니다. 이 시편은 창조의 능력과 선하심으로 인해 주님을 찬양하며,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신뢰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권위자들 조차도 신뢰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3절).

시편 147편 역시 주님께서 창조에서 행하신 일들을 찬양합니다. 그분은 또한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십니다(3절). "그분은 교회를 세우십니다." 그분은 많은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시편 148편: 여기에서 모든 피조물은 주님을 찬양하라는 권고를 받습니다.

시편 149편은 우리에게 항상 주님을 찬양하도록 초대합니다. "그분은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실 것입니다"(4절). 주님께서 당신을 아름답게 하시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는 침대 위에서도 기쁨으로 노래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며, 우리 입은 항상 하나님을 높이 찬양하고 우리 손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 사탄과 그의 마귀들의 권세와 활동을 결박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5-8절).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과 사탄의 권세를 결박하는 것은 언제나 함께 합니다.

시편 150편: 이 시편이 대단원의 마지막입니다. 이 시편에서 "찬양"이라는 단어가 13번 등장하며,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6절)로 결론을 내립니다. 하나님을 찬양할 필요가 없는 사람은 단 한 부류, 즉 숨을 쉴 수 없는 죽은 자뿐입니다. 나머지 모든 사람은 항상 주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 삶에서도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장 20
지혜의 말씀

시편과 잠언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두 가지 측면을 묘사합니다. 시편은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경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잠언은 우리 삶의 나머지 절반, 즉 이 세상에서의 일상 생활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둘은 항상 함께 가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 하늘의 생각에 빠져서 땅에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너무 세속적인 생각에 빠져 하나님께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헌신의 삶,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찬양과 예배, 기도와 믿음의 삶이 이 땅의 다른 사람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성품과 본성을 나타내는 실제적인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잠언서는 주로 그 점을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젊은이들을 위한 그리고 우리의 직장 생활과 가정 상황을 위한 교훈이 있습니다.

잠언은 다음과 같은 주제를 다룹니다: 지혜로운 자녀와 어리석은 자녀, 게으름과 열심히 일함, 혀의 사용, 부와 가난, 거짓말을 하는 것과 참된 것을 말하는 것, 말이 많은 것과 차분하게 말하기, 비방하는 것, 정의와 불의, 교만과 겸손, 선한 여자와 악한 여자, 탐심과 만족, 분노와 자제력, 우울함과 쾌활함, 좋은 친구와 나쁜 친구, 자녀의 교육과 훈육, 주를 경외함,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갖고 있는 의견, 유혹에 대한 경고, 하인을 대하는 방법, 뇌물, 책망, 교정, 우정, 관능적인 쾌락, 술 취함, 아첨, 불의한 재물, 복수 등. 이는 지구상의 우리 일상생활의 많은 영역을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젊은이들이 이 책을 진지하게 공부하는 것이 좋습니다.

지혜의 시작

처음 아홉 장은 주로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지혜교훈을 알게 하며, 명철의 말을 분별하게 하려 함이니라"(1:2). 이 세 단어는 잠언에서 독특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l 지혜(Wisdom)는 신성한 본성을 가리킵니다.

l 교훈(Instruction)은 훈육을 통해 얻어지는 실제적인 지식을 말합니다.

l 명철(Understanding)은 하나님과 그분의 방식에 대한 지식을 말합니다.

저자가 가장 먼저 해야 할 말은 바로 이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니라"(1:7).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가질 수 있는 두려움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 하나는 잘못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옳은 것입니다.

잘못된 유형의 두려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통을 줄 수 있다는 두려움입니다. 올바른 유형의 두려움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고통을있다는 두려움입니다. 거짓 종교는 첫 번째 유형의 두려움에 중점을 둡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그들에게 진노하시고 그들을 해칠 수도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의 신에게 선물과 제물을 바치고 참배하러 가서, 그들의 신을 달래고 그를 행복하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한 정신은 바벨론 기독교에서도 발견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두려움의 유형은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으로 인해 하나님에게 고통을 줄 수 있다는 두려움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행동이나 말, 생각으로 인해 슬퍼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한 두려움은 사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참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영적인 것들에 관해 농담을 합니다. 유머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하나님과 신성한 것들을 농담의 주제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결코 지옥을 농담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 왜냐하면 지옥은 끔찍한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결코 지옥에 대해 농담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 마치 우리가 에이즈로 죽어가는 사람에 대해 농담을 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너무나 부족합니다. 우리가 영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잠언이 말하는 지식은 성경의 학문적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성경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아는 데서 나옵니다. 우리가 그분을 더 많이 알수록, 그분을 더욱 경외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을 경외할수록, 그분을 더 많이 알게 됩니다.

잠언의 모든 구절은 가치가 있습니다. 이 책은 구약성경에서 가장 실용적인 조언을 담은 책입니다. 구약성경 속의 신약성경과 같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각 구절을 살펴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가장 중요한 구절 중 일부만 살펴볼 것입니다.*

그분은 계속해서 젊은이들에게 그들이 만나는 친구들의 유형에 대해 조심하라고 경고합니다. "죄인들이 당신을 유혹하더라도, 그들의 말을 듣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세상적인 방식으로 끌고 가도록 허용하지 마십시오"(10절). 필요하다면 주님을 위해 홀로 서십시오. 젊은이들이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아니요. 나는 당신과 함께 갈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많은 친구들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장기적으로는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모든 젊은이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내가 을 너희에게 부어 주고, 을 너희에게 알리리라"(1:23)고 약속하십니다. 우리가 창세기 1장을 공부할 때,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이 결합하여 땅을 재창조하는 일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것이 우리 안에 지혜를 낳는 것과 동일한 조합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면, 지혜를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말씀이 우리에게 살아 있도록 그분의 영을 우리에게 부어주셔야 합니다. 성령이 깨닫게 하심 없이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은 완전한 어둠 속에서 책을 읽으려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불이 켜지자마자, 그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그분의 말씀에 대한 계시를 주실 때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내 말을 알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계시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지혜를 얻는 방법입니다.

그분은 계속해서, 당신이 지혜의 초대를 거절하면, 어느 날 당신이 곤경에 처해 도움을 청해도 찾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24-33). 당신이 어린 시절에 지혜를 소홀히 했다면, 인생 후반기에 지혜를 찾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2장 4절에 "은과 숨은 보화를 구하듯 지혜를 구하라. 그리하면 주를경외함과하나님을아는지식을 분별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잠언에서 계속해서 반복되는 두 가지 필수 요소는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지혜는 "악의 길과, 비뚤어진 말을 하는 자와, 이방 여자에게서" 우리를 구원할 것입니다(12,16절). 젊은이들은, 그들을 속이려는 악한 사람들과 그들을 유혹하려는 악한 여자들로부터 보호받아야 합니다.

안내

3장 5,6절: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모든 길에서 그분을 인정하면 그분이 너의 길을 곧게 만들어 주실 것이다." 이는 안내에 대한 약속입니다. 우리가 조건을 이행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조건은 무엇입니까?

첫째: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신뢰하고 자신의 이성과 지능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이성이나 지능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의존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추론하는 능력과 지능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와를 아담에게 복종하도록 창조하신 것처럼, 이성도 성령께 복종해야 합니다. 아내는 가정에서 가장 유용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만일 하와가 가정의 머리 직분을 맡는다면, 에덴에서 하와가 머리 직분을 맡아 죄를 지었을 때처럼 혼돈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 우리의 이성(그리고 지성)을 사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매우 유능한 "아내"와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지성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할 수도 없고 이 세상에서 살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이성을 깨우치기 위해 성령을 의지해야 합니다. 믿음은 이성에 반대되지 않고 이성을 초월합니다 - 마치 곱셈이 덧셈에 반대되지 않고 덧셈 너머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둘째: 모든 길에서 하나님을 인정하십시오.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계시하시는 모든 것에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당신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님을 첫 번째 자리에 두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그분의 완전한 뜻으로 당신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지난 56년 동안, 신자로서 나를 한걸음 한걸음 인도해 주셨습니다. 많은 경우, 나는 다음 단계가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의 길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당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같은 기쁨을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너의 재물로 여호와를 공경하라"(3:9). 우리는 우리의 시간, 에너지, 돈, 자원, 재능, 자녀 등 모든 부의 영역에서 기쁨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의 훈계를 거부하지 마십시오"(11절). 교정은 우리의 영적 성장에 필수적입니다.

4장 12절에는 매우 아름다운 약속이 있습니다. 이를 문자 그대로 의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다 보면, 길이 열릴 것입니다." 당신은 심지어 두 걸음 앞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도 알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이 볼 수 있는 첫 번째 단계를 내딛으세요. 그러면 다음 단계를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식입니다. 우리 앞에서 문이 닫혀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다가가면, 문은 자동으로 열립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기 전까지는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당신 앞에 닫힌 문이 보이더라도 주저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지금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보여주시는 발걸음을 내딛으십시오. "내가 너희 앞에 열린 문을 두었나니, 이는 아무도 닫을 수 없느니라"(계 3:8)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4장 15절은 유혹의 장면에 관한 좋은 말씀입니다: "그것을 피하고, 그 옆을 지나가지 마십시오. 그것을 외면하고 지나가세요."

4장 18절은 또 하나의 놀라운 구절입니다: "의인의 길은 새벽빛(해가 뜰 때) 같아서 한낮(정오)까지 점점 더 밝게 빛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모든 자녀가 거듭나는 순간(해가 뜰 때)부터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정오)까지 매일의 삶에서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모든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완전한 뜻입니다. 그 길을 따라가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점점 더 많은 계시를 받게 될 것이고, 우리 자신의 부패한 삶에 대해 점점 더 많은 빛을 얻게 될 것이며, 우리가 직면하는 실제 상황에 대한 점점 더 많은 지혜를 얻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의인의 길을 걷는다면, 해가 하늘에서 다시는 돌아가지 않는 것처럼, 결코 후퇴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사는 그리스도인을 찾는 것이 왜 그렇게 드문가요? 왜냐하면 대부분의 기독교 집단은 표준 이하의 수준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우리 주변에 있는 신자들의 수준으로 내려가도록 놔두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시선은 오직 주님께만 고정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분이 걸으신 것처럼 걷기를 추구해야 합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좋은 본보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당신이 바울과 같은 좋은 본을 발견한다면, 당신은 그 또한 따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 같이 너희도 나를 따르라"(고전 11:1)고 말했습니다.

4장 23절: "부지런히 네 마음(heart)을 살펴라. 거기서 생명의 샘물이 흘러나느니라." 우리 삶에서 나오는 모든 것, 즉 우리의 말, 우리의 사역, 모든 것이 우리 마음에서 흘러나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마음을 항상 순수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생수가 하늘로부터 우리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흘러가는 통로가 깨끗해질 것입니다.

4장 25절: "네 눈은 정면을 바라보고, 네 시선을 똑바로 정면에 고정하여라." 이것은 눈을 통해 오는 유혹에 관한 것이며, 젊은이들에게 매우 좋은 조언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눈이 무엇을 보도록 허락할지 조심하십시오. 당신이 보는 것에 유혹을 받는다면, 눈길을 돌리십시오. 주님을 당신 앞에 모시고, 그분을 똑바로 바라보십시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한, 우리는 보이는 것에 유혹을 받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두 번째 보는 것을 피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눈을 통제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과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유용성을 파괴할 수 있습니다.

5장 15절: "네 우물의 물을 마시라". 이는 남편이 자기 아내에게 만족하고 다른 여자, 즉 다른 사람의 우물을 탐내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결혼 생활 내에서 성적 즐거움을 누리는 것은 전적으로 옳고 좋은 것입니다. 결혼 밖에서는 사악하고 사탄적입니다.

6장 6-10절: "오 게으른 사람아, 개미에게로 가라. 그의 방식을 관찰하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추수 때에 먹을 것을 모읍니다. 왜냐하면 개미는 미래를 미리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개미는 겨울에 식량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 개미의 뇌는 얼마나 작습니까? 하지만 그 작은 뇌에는 미래를 위한 식량을 저장할 만큼 충분한 지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우리는 얼마나 지혜로워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매달 벌어들인 돈을 다 써서는 안 되며, 미래를 위해 저축한 돈이 전혀 없어도 안 됩니다. 나는 사치스럽게 살면서 미래의 모든 비상 상황에 대해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말하는 일부 "초영적인" 신자들을 만나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비상 상황이 닥치면, 결국 개미처럼 지혜로운 다른 신자들에게서 돈을 빌려야 하는 상황이 됩니다! 아니면 그들은 다른 신자들이 와서 도움을 주고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켜 줄 선물을 주기를 기대하면서 거지처럼 기다립니다. 당신은 왜 그들처럼 되고 싶으신가요? 지금 현명하게 자신을 훈련하여 매달 돈을 절약하십시오. 영적인 문제에도 동일한 원칙이 적용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저장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십시오. 결혼하고 자녀를 갖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니, 지금, 시간이 충분한 독신인 때에 말씀을 공부하고 미래를 위해 그 지식을 저장하십시오. 그러면 나중에 영적으로 굶주리지 않을 것입니다.

6장 21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우리 마음에 묶어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우리가 다닐 때에 우리를 인도하고, 우리가 잘 때에 우리를 지켜주고, 우리가 깰 때에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이다"(6:22). 하나님의 말씀은 밤낮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지키실 것입니다. 우리가 밤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불안하다면, 그것은 우리가 어딘가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양심이 나빠졌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좋은 양심은 잠을 잘 때 최고의 베개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하나님의 말씀은 일상생활의 각 단계에서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가 살기를 원하시는 방식입니다.

7장은 도덕성이 전혀 없는 방탕한 여자를 찾아간 아주 어리석은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이는 젊은이들에게 여성과의 모든 우정과 교제에 조심하라는 강력한 경고입니다. 이 분야에서는 한 단계가 다른 단계로 매우 빠르게 이어집니다; 조심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수도 있습니다. 바람기 있는 여자를 조심하십시오. 여성들은 많은 훌륭한 젊은 신자들의 삶을 파멸시켰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계획하신 사역을 빼앗아갔습니다. 젊은 남자들은 이 장을 자주 읽어야 합니다.

8장에서는 지혜(현명한 여인으로 묘사됨)가 사람들에게 그녀의 말을 듣도록 권유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내 말을 듣고, 날마다 내 문을 지켜보는 사람은 복이 있도다"(34절). 우리는 매일 아침, 그리고 하루 종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은 많은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줄 것입니다.

9장 1절: 지혜는 일곱 기둥 위에 집(교회)을 짓습니다. 이 일곱 기둥은 야고보서 3장 17절에 열거되어 있습니다: 순수하고, 화평하고, 온유하고, 분별이 있으며, 자비가 가득하고, 흔들리지 않고, 위선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기둥 위에 세워집니다.

경건을 위한 지침

10장 12절 "사랑은 모든 죄를 덮느니라". 베드로는 그의 서신에서 이것을 인용합니다(벧전 4:8). 당신이 누군가를 정말로 사랑한다면 그의 약점을 드러내지 않고 덮어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신 방식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과거 죄를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을 대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현명해지고 싶다면 당신이 젊었을 때 한 가지 조언을 드리고 싶습니다. 누군가에 대한 나쁜 이야기를 알고 있다면, 그 이야기는 그냥 잊어버리세요.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만약 당신이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존중하실 것입니다. 특히 그것이 그분의 자녀 중 한 사람에 관한 나쁜 이야기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분은 특히 당신을 사랑하실 것입니다. 무언가 잘못한 자녀를 둔 아버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나는 그것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아들이 한 일을 누구에게도 결코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아버지가 나를 무척 사랑할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분의 자녀들을 사랑으로 대하는 것을 보실 때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10장 22절 "부하게 되는 것은 주님의 축복이며, 주님은 거기에 슬픔을 더하지 않으십니다." 일부 번역판에서는 그 마지막 부분을 "수고해도 그것(부)이 늘어나지 않습니다"라고 표현합니다. 주님의 축복은 우리가 지상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우리 삶에 주님의 축복이 임하도록 구합시다.

10장 31절: "의인의 입은 지혜가 흐르느니라." 당신이 의로운지 아닌지는 당신의 말투로 알 수 있습니다. 의인의 입에서는 항상 지혜의 말이 나옵니다.

11장 3절: "정직한 사람의 진실성(integrity)은 자기를 인도할 것이다."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우리 안에서 진실성(integrity)과 정직함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정직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완전한 뜻으로 올바르게 인도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11장 24절: "남에게 나누어 주는데도, 더욱 불어나는 자가 있다." 주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을 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역설 중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축복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색한 사람은 가난해집니다. 구두쇠가 회심하면 관대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0:8).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값없이 주셨습니다. 우리도 역시 다른 사람에게 거저 주어야 합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과부는 렙돈 두 닢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기가 가진 것을 드렸고, 나는 하나님께서 그녀를 존중하셔서 그녀가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남에게 물을 주는 자는 자기도 물을 받으리라"(25절).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물을 주시고 당신이 생기 넘치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다른 사람들에게 물을 주어야 합니다. 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토록 진부하고 무미건조합니까?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물을 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그들에게 물을 주시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물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필요에 대해 생각해보고, 어떻게 그들을 축복할 수 있는지 알아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풍성한 축복을 주시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12장 23절: "지혜로운 사람은 지식을 숨긴다." 이는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지식을 드러내기를 꺼린다는 뜻입니다. 그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 대해 겸손합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무엇이든지 모든 것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말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13장 10절: "오만함에서는 다툼 외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모든 분쟁은 교만의 결과입니다.

14장 12절: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끝은 죽음에 이르는 길이니라" 이 구절은 16장 25절에서 반복됩니다. 따라서, 당신이 처음에 그것(그길)을 놓치면, 하나님께서 두 번째 기회를 주십니다. 당신의 눈에 보이는 것이 반드시 하나님의 길은 아닙니다. 많은 신자들이 자신이 내리는 결정에 대해 하나님의 인도를 진지하게 구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결정과 관련된 모든 요소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몇 년 후 그들은 자신들이 틀렸고 자신들의 삶을 낭비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겸손해져서 우리가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그분의 지혜를 구합시다. 성경을 연구할 때에도, 만일 우리가 성령의 계시를 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멍청하고 어리석으며 성경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완전히 빗나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다"(사 55:8)고 말씀하십니다.

15장 13절: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한다." 우리 얼굴에 빛을 가져다 주는 것은 마음속의 기쁨입니다. "즐거운 마음에는 끊임없는 잔치가 있습니다"(15절). 잠언에는 우리 삶에서 기쁨을 누리는 것이 크게 강조되어 있습니다. "즐거운 마음은 좋은 약이니라"(17:22). 따라서 기쁨은 우리를 건강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단순한 의가 아니라, 성령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의입니다. 구약시대에, 그들은 기쁨이 없는 의를 가졌습니다. 지금 우리는 기쁨과 함께 의를 얻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를 때, 우리의 발걸음에는 활력이 있고, 우리 마음에는 노래가 있으며, 우리 얼굴에는 빛이 있습니다.

16장 18절: "교만에는 멸망이 따르고 거만한 영에는 몰락이 따른다." 사람이 죄에 빠지는 이유는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리석은 일을 할 때, 그 원인이 교만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넘어지지 않게 지켜주실 수 있습니다(유 24절). 그분은 어떻게 그렇게 하시나요? 우리를 바닥으로 낮춤으로써입니다! 우리는 서 있거나 심지어 앉아 있어도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땅에 얼굴을 대고 엎드린 상태에서는, 넘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넘어지고 싶지 않다면, 항상 입을 먼지 속에 두도록 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무리 축복하시고 사용하시더라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미약함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결코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17장 9절: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니라." 누군가 당신에게 잘못을 했나요? 누군가가 당신에게 상처를 주거나 모욕했습니까? 용서하고 무시하십시오. 그것이 경건한 사람이 걷는 사랑의 길입니다.

17장 28절: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롭게 여기느니라." 당신이 어리석은데도, 사람들이 당신을 지혜롭다고 여기기를 원한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입을 다물고 있으십시오!! 그러면 사람들은 이렇게 상상할 것입니다: "그 사람은 깊은 지혜를 지닌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침묵한다"!! 거기서 입을 열었다면, 모두가 즉시 당신이 바보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십시오. 특히 너희가 젊고 어리석은 때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가 말을 억제할 때 얼마나 큰 축복이 있는지요.

18장 12절: "겸손하면 존귀 가 뒤따릅니다." 당신은 하나님께 존귀를 구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자신을 낮추십시오.

18장 16절: "사람의 은사는 그에게 자리를 만들어주며, 그를 존귀한 자 앞으로 인도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은사를 통해, 우리가 교회에서 봉사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십니다. 오늘날 하나님이 주신 은사가 없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자리와 명예를 추구하고 싸우는 것을 보면 애처롭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은사, 특히 예언하는 은사를 추구하라"는 권고를 받습니다(고전 14:1). 예언한다는 것은 도전하고, 죄를 깨닫게 하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세워 주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것입니다(고전 14:3). 하나님은 그분의 은사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에게 은사를 주시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말을 듣기 위해 수백 마일을 여행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 있을새 유대 온 땅에서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들으려고 거기로 나오니, 이는 그가 하늘로부터 온 말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8장 19절: "기분이 상한 형제를 얻는 것은 도시를 얻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관계가 깨지지 않도록, 서로에게 말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18장 21절: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느니라." 오순절 날, 제자들 위에 불의 혀가 나타났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성령의 불로 그들의 혀에 불을 붙이기를 원하셨음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야고보서 3장 6절에는 혀도 지옥의 불로 불타오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 육신이 부패하였기 때문에, 우리의 혀가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만 혀를 통해 사망이 퍼지는 일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19장 17절: "가난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께서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실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속하며 그분은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하는 모든 일을 그분을 위한 일로 여기십니다 - 이것이 바로 그분이 우리의 친절에 대해 갚겠다고 약속하시는 이유입니다.

19장 18절: "희망이 있을 동안에 네 아들을 훈계하고, 그를 죽게 하지 말라." 잠언에는 자녀를 지옥에서 구원하려면 자녀를 훈계해야 한다는 구절이 많이 있습니다.

20장 14절: "물건을 사는 사람이 나쁘다 나쁘다 하다가, 자기 길로 가서는 잘 샀다고 자랑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도에서 상점 주인으로부터 더 낮은 가격으로 물건을 얻기 위해 이 기술을 사용합니다. 나는 신자들이 1루피 더 싸게 물건을 사려고, 가난한 채소 상인들과도 다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모습인가요? 그 가난한 사람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당신에게 주셨습니다. 관대해지세요.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선을 베풉시다.

21장 2절: "사람의 모든 길이 자기 보기에는 옳아도, 여호와는 그 마음을 살피신다." 하나님은 행동보다 동기를 더 보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21장 13절: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에 귀를 막는 자는, 또한 자신이 부르짖어도 응답을 받지 못하리라."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을 대하는 것처럼 우리를 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많은 신자들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는 이유입니다.

21장 19절: "다투기 좋아하고 괴롭히는 여자와 함께 사는 것보다 사막에서 사는 것이 낫다." 여기에서 우리는 잔소리하는 아내에 대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22장 4절: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부와 존귀와 생명이니라" 영적 부, 영적 존귀, 영적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며, 하나님이 사람에게서 찾으시는 두 가지 자질, 즉 겸손과 주님에 대한 경외심을 바탕으로 주어집니다. 이것(겸손, 주님에 대한 경외심)은 교회에서 지도자의 자리를 맡을 사람을 고려할 때 우리가 찾아야 할 주요 자질입니다.

22장 6,15절: "자녀가 마땅히 가야 할 길로 아이를 훈련시키십시오. 그는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아이의 마음에는 어리석음이 얽혀 있습니다. 징계의 채찍이 그것을 그에게서 멀리 쫓아낼 것입니다." 아이의 마음 속에 있는 어리석음을 없애려면, 당신은 아이의 엉덩이를 징계해야 합니다. 아이의 엉덩이와 마음은 분명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사랑으로 현명하게 훈련을 받은 아이는, 자라서 집을 떠나 악한 세상에 직면하게 될 때에도 주님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22장 29절: "자기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그는 왕들 앞에 설 것이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훈련된 연구와 주님을 섬기는 부지런함에 적용하기에 좋은 구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이 그분의 자녀들(이 땅의 진정한 왕들)을 섬길 수 있도록 많은 사역의 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23장 22절: "너를 낳아주신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늙으신 어머니를 경멸하지 말라." 불행하게도 오늘날 많은 자식들은, 연로한 부모를 공경하거나 존경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슬픈 일일 뿐만 아니라, 악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들을 특별히 주목하시고 특별한 방법으로 축복하십니다.

23장 31절: "포도주가 붉고 잔에서 반짝반짝 빛날 때 그것을 보지 말라." 이는 모든 발효가 많이 된 포도주(알코올 함량이 높은 모든 음료)를 피하라는 권고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마신 포도주와 가나에서 만드신 포도주는 집에서 만든, 발효가 많이 되지 않은 포도주였음에 틀림없습니다 - 우리는 예수님께서 모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셨으므로 이 구절에도 순종하셨음에 틀림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24:11,12: "죽음으로 끌려가는 사람들을 건지십시오. 네가 '보라, 우리는 이것을 몰랐다'고 말한다면, 마음을 달아보시는 분께서 그것을 생각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오늘날 이 구절은 전도에 참여하라는 도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의 세상은 복음을 들어야 하며 우리는 복음을 그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24장 17절: "네 원수가 넘어질지라도 기뻐하지 말라." 구약에서도, 원수의 멸망을 기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24장 27절: "네 일을 밖에서 준비하고 너를 위하여 밭에서 준비하라; 그 후에 네 집을 지어라." 이것은 결혼을 고려하는 모든 젊은 남자들에게 좋은 조언입니다. 먼저 취업한 뒤, 결혼하십시오. 가족을 부양할 만큼 충분한 돈을 벌고, 가정을 꾸려갈 아내를 찾으십시오.

24장 30-34절: 여기에서 우리는 자기 밭을 돌보지 않아서 그 밭이 가시덤불로 뒤덮인, 게으른 사람에 대해 읽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일하는 동안 잠을 잤습니다. 여기서 경고하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자면, 가난이 우리를 덮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헨리 롱펠로(영국의 시인) 는 다음과 같은 시를 썼습니다:

"위인들이 도달하고 유지한 높이는

갑작스러운 비행으로 도달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의 동료들이 잠자는 동안

밤새 위쪽으로 애써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부지런함을 보상하십니다. 말씀을 연구하고 부지런히 순종하는 사람은 게으른 신자에 비해 풍성한 삶을 살게 됩니다. 부지런한 사람은 좋은 정원과 복된 사역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게으른 사람은 이 땅에서나 영원에서나 후회할 일이 많습니다.

25장 14절: "그의 은사를 거짓으로 자랑하는 사람은 비 없는 구름과 바람 같으니라." 오늘날, 치유의 은사와 기타 초자연적인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많은 설교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단순한 생각을 가진 신자들을 속일 뿐입니다. 이것은 하늘의 구름을 보고 자신의 밭에 비가 내리기를 바라지만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는 농부에 비유됩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은사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전도의 은사를 주셨다면, 당신은 한 두 사람이 아닌 많은 사람을 주님께 인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가르치는 은사를 주셨다면, 당신의 사역을 통해 한두 사람이 아닌 많은 사람들이 깨우침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치유의 은사를 주셨다면, 당신이 그들을 위해 기도하면 한두 사람이 아닌 많은 사람이 치유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치유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당신에게 은사가 없다는 증거입니다.

26장 4절은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구절은,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라"고 말합니다(5절). 다음 두 가지 진술 중 어느 것이 옳은가요? 정답은 두 가지 유형의 미련한 자를 가리키기 때문에 둘 다 맞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묻는 질문에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이 그분께 질문을 했을 때, 그분은 그들에게 그렇게 명확한 대답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헤롯에게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우리에게 질문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이 어떤 유형의 어리석은 자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분별이 필요합니다.

26장 27절: "구덩이를 파는 자는 그 구덩이에 빠지고; 돌을 굴리는 자는 그 돌이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다." 이는 다른 사람을 해치려는 사람들은, 그들이 계획한 악이 자신을 해치기 위해 돌아올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하만이 이에 대한 한 예입니다.

27장 1절: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야고보는 우리가 단 하루라도 더 살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합니다(약 4:15). 이 사실을 끊임없이 인식하면 우리 모두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27장 2절: "네 자신의 입으로가 아닌, 다른 사람이 너를 칭찬하게 하라." 오늘날 기독교 집단에는, 그리스도의 영과 전혀 다른 자기 홍보가 많이 있습니다.

27장 23절: "네 양떼의 형편을 잘 알고 네 소떼에게 주의를 기울이라." 이는 하나님의 양 떼의 목자들에게 좋은 말씀입니다. 좋은 장로는 그의 교회에 있는 모든 신자의 영적 상태를 알 것입니다.

28장 13절: "자기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이를 자백하고 버리는 자는 자비를 얻으리라." 이는 우리의 죄를 하나님께 자백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가르치는 성경의 가장 분명한 구절 중 하나입니다. 우리도 죄를 끊어야 합니다.

29장 1절: "많은 책망을 받은 후에 목을 굳게 하는 사람은 갑자기 망하여 구제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어느 누구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자비와 선하심을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어느 날 갑자기 그는, 자신이 "빨간 선"을 넘었고 성령께서 그에게 간청을 멈추셨고 그 이후에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29장 18절: "계시(vision)가 없으면, 백성이 망하느니라." 오늘날 기독교 집단에 가장 필요한 것은 계시의 말씀을 가진 남성과 여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 우리를 통해 이 땅에서 그분이 성취하실 수 있는 일에 대한 계시의 말씀을 우리 모두에게 주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 인도(India)를 위한 부담을 당신에게 주시기를 구하십시오.

29장 20절: "말이 성급한(혹은 일이 성급한) 사람을 보았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 이것은 솔로몬의 잠언의 마지막 장이며, 우리는 이제 끝에서부터 일곱 절이 남았습니다. 이 29장 전체에서 솔로몬은 다양한 유형의 어리석은 자들을 묘사해 왔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결론을 내리기 전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누구인지 말하겠습니다 - 그는 말 하는데 빠르고 결정이 성급한 사람입니다. 그가 일등 상을 받았습니다!" 이 책에 언급된 다른 모든 어리석은 자들에게는 성급한 사람보다 더 많은 희망이 있습니다!

30장은 아굴이라는 사람이 썼습니다. 7,8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주께 두 가지를 구했나이다. 내가 죽기 전에 나를 거절하지 마십시오.

(1) 속임수와 거짓말을 저에게서 멀리하십시오.

(2) 저에게 가난도 부귀도 주지 마소서."

구약시대에는 이런 기도를 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구절의 나머지 부분에서 말했듯이) 그들은 가난하면 도둑질을 하고, 너무 부자가 되면 주님을 버릴지도 모른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90%의 신자도 그 기도를 해야 합니다. 너무 많은 돈이 그들을 망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살기에 매우 얕은 수준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내가 가난하든 부자든 상관없습니다. 나는 둘 다 감당할 수 있습니다"(빌 4:12)라고 말했습니다. 부가 바울을 멸망시키지는 못할 것이고, 가난함도 그를 주님에게서 멀어지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장의 나머지 부분에는 묵상할 가치가 있는 좋은 잠언들이 많이 있습니다.

31장은 르무엘이라는 왕이 썼으며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가르친 몇 가지 내용을 나열합니다. 1절부터 9절까지의 좋은 조언 뒤에, 우리는 마지막 부분인 10절부터 31절에 왔습니다. 이 부분은 모든 젊은 남성과 여성에게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경건한 아내의 자질을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모든 젊은 여자는 이와 같기를 추구해야 하고, 모든 젊은 남자는 그런 여자를 찾아서 결혼해야 합니다. 이 경건한 아내에 관해 언급된 여러 가지 사항에 유의하십시오: 그녀는 손으로 일하고 매우 열심히 일하는 사람입니다. 그녀는 일찍 일어나서 식사를 준비합니다. 그녀도 진취적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밭을 사서 직접 손으로 포도밭을 가꾸고 있습니다. 그녀는 직접 손으로 옷을 짓습니다. 그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줍니다. 그녀는 자신이 직접 꿰맨 따뜻한 옷으로, 겨울에 아이들을 보호합니다. 그녀는 남편을 지지하고, 남편은 그녀를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그녀는 옷을 만들고 판매합니다. 그녀는 위엄이 있고 지혜롭게 말합니다. 그녀의 혀에는 친절의 법칙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의 손이 단단하고 혀가 부드럽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많은 젊은 자매들의 상황은 정반대입니다. 그들의 손은 부드럽고(열심히 일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들의 혀는 단단합니다(그들은 교만하고 무례합니다). "매력은 거짓되고 아름다움은 헛되다.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다"(30절). 그녀의 남편과 자녀들은 일어서서 그녀를 세상 최고의 아내이자 어머니라고 칭찬합니다.

젊은 남성들이여,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찾아야 할 아내입니다.

젊은 여성들이여,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되어야 할 여성입니다.

그리고 모든 젊은이 여러분: 잠언을 자주 읽어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경건하고 지혜로운 남자와 여자로 성장하십시오.

* 잠언의 모든 구절을 공부하고 싶다면, https://www.cfcindia.com/verse-by-verse/Proverbs 로 방문하세요 - 이 책에 나는 잠언의 모든 구절을 설명하였습니다.

장 21
전도서

이 책은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지만, 공부하면서 하나님께서 이 책을 성경에 두신 이유가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솔로몬은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되고 공허함을 알았다고 말하면서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하는 모든 일에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1:3).

솔로몬은 인간의 지혜에 관한 한 지금까지 살았던 가장 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은 솔로몬 이전에 그 누구도 갖지 못했고, 솔로몬 이후에도 갖지 못한 지혜를 그가 갖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왕상 3:12,13). 솔로몬은 생애 초기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어느 정도 있었고 그때 잠언을 썼습니다.

잠언은 신(divine)의 지혜입니다. 그러나 전도서는 인간의 지혜입니다, 즉 "해 아래" 사는 사람의 지혜입니다(1:3). 전도서에는 '해 아래'라는 표현이 자주 나오는데, 그 이유는 저자가 해 아래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잠언은 해 위에 살았던 사람의 지혜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살도록 부름 받은 곳은 바로 하늘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전도서를 성경에 두셨을까요?

성경은 신의 지혜가 인간의 지혜보다 얼마나 더 높은지를 보여주기 위해, 인간의 지혜를 묘사합니다. 욥기의 많은 부분은, 인간의 지혜로 하나님에 관해 많이 말했지만 대부분은 모두 잘못된 세 설교자의 연설로 구성됩니다(욥 42:7).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말이 성경에 기록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전도서는 지구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영리함에 의존하면 하나님을 찾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성경에 포함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여, 이것을 영리한 자들과 총명한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1:25). 영리하고 총명한 사람들에게는 없지만 어린아이들에게는 무엇이 있습니까? 겸손입니다. 영리하고 총명한 사람이 겸손해지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총명한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총명을 자랑하는 것은 확실히 불경건한 일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아무리 지혜로워도, 하나님의 뜻을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솔로몬은 역사상 가장 지혜롭고 총명한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할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은 성전의 설계를 솔로몬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다윗에게 주셨습니다. 역대상 28장 11-19절에서,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 등잔대에 금을 얼마나 써야 하고, 갈고리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들어야 했다는 내용은 정말 놀랍습니다! 왜 그 계획이 다윗에게 주어졌습니까? 왜냐하면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머리가 똑똑한 사람이었지만, 다윗은 선한 마음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40세가 아니라, 80세에 성막의 설계를 그에게 주셨습니다. 왜일까요? 40세에 그는 이집트의 지혜로 가득 차 있어, 하나님의 계획을 상당히 수정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 위에 머무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80세가 되었을 때, 인간 지혜의 찌꺼기는 그의 머리에서 제거되었고 기꺼이 하나님의 지혜에 복종하려고 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성막을 단순한 구조로 지었습니다.

성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솔로몬은 이 건물을 지은 청부업자일 뿐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계획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인 다윗이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시는 그분의 계획을, 머리가 좋은 영리한 사람에게 나타내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선한 겸손한 사람에게 나타내십니다. 당신이 똑똑하고 겸손하다면, 그것은 괜찮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구 사항은 지능이 아니라, 겸손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8절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대에서 자기가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어 지혜롭게 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지능에 대해 감사하십시오. 이는 과학이나 수학 연구에 매우 유용합니다. 하지만 성경의 경우는 다릅니다. 여기서 당신이 지혜로워지기 위해서는, 어리석어져야 합니다. 그것은 당신이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와 이렇게 말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주님,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 저는 당나귀만큼 어리석습니다. 저를 가르쳐주세요". 이 세상의 영리한 것이 하나님께 미련한 것입니다(고전 3:19). 이것이 바로 전도서가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영리한 자들의 교활함을 간파하신다. 영리한 사람의 추론은 쓸모가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고전 3:19,20). 세상에서 가장 영리한 사람들의 모든 추론과 주장을 종합해서,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이 쓸모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영적인 것에 있어서는 겸손한 사람이 큰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지능과 영리함을 자랑하는 사람은 엄청난 단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지능이 하나님을 섬기는 데 주요 요구 사항이었다면, 예수님께서는 가말리엘이 예루살렘에서 운영하고 있던 성경학교에 가셨을 것이고, 그곳에서 사도들을 선택하셨을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지 않으셨나요? 왜 갈릴리 호숫가에 가셔서, 성경학교에 가본 적도 없는 어부들을 뽑으셨을까요? 왜냐하면 그분은 영리한 사람을 찾지 않으시고, 배우려는 마음이 있는 겸손한 사람을 찾으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가르침을 잘 받을 수 있는 사람인가요? 당신이 읽고 있는 내용 때문에 기분이 상했다면, 그것은 당신이 교만하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만이 화를 냅니다.

전도서는 사람이 많은 지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전혀 영적이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심리학에서 발견되는 인간의 지혜에는 좋은 점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의 지혜가 아닙니다. 그리고 신성한 지혜와 인간의 지혜가 섞이면, 인간의 지혜만 있는 것보다 더 위험합니다. 누군가가 당신을 독살하고 싶다면, 그는 많은 양의 우유에 약간의 독을 섞을 것입니다. 완전히 나쁜 것들은 감지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심리학에는 좋은 점이 많습니다 - 그렇기 때문에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신의 지혜가 아닙니다. 신의 지혜는 오직 성경에서만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그들의 마음을 복종하지 않는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많은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당신이 그들을 따르면, 당신은 잘못된 길로 갈 것입니다.

전도서와 잠언은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가인의 제사는 종교적인 제사였습니다. 아벨의 제사는 영적인 제사였습니다. 시대를 거치면서, 종교적인 사람들과 영적인 사람들 사이에는 끊임없는 갈등이 있었습니다. 사울은 종교적인 사람, 즉 머리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영적인 사람, 즉 마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적인 분이셨습니다. 우리의 뇌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와가 아담에게 복종하도록 창조된 것처럼, 뇌는 마음과 성령에 복종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가인과 아벨에서 시작된 종교성과 영성의 흐름은, 니므롯과 아브라함으로 이어졌고, 요한계시록의 바벨론과 예루살렘으로 끝납니다. 전도서와 잠언에서도 비슷한 대조를 볼 수 있습니다.

전도서는 설교자의 말을 담고 있습니다(1:1).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좋은 설교를 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그들은 머리만을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설교는 사람들의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다 -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의 마음에서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잠언은 설교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실천한 것만을 설교해야 합니다. 이것이 종교성과 영성의 차이입니다. 이것이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의 차이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은 말은 하여도 행하지 아니하느니라"(마 23: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들이 가르친 것이 잘못된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시대의 근본주의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강단에서 설교한 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예수께서 (먼저) 행하시고 그 다음에 가르치셨느니라"(행 1:1). 그분은 자신이 설교한 것을 실행한 것이 아니라, 이미 실행하신 것을 설교하셨습니다. 그분은 설교하시기 전에 30년 동안 행하셨습니다. 그것이 참된 경건입니다.

지구상의 모든 것의 공허함

전도서의 처음 두 장은 지식, 즐거움, 성취, 수고의 공허함에 대해 말합니다. 이 책을 통해 저자가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에 관해 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의 이름인, 여호와(Yehovah)나 야훼(Yahweh)를 결코 사용하지 않습니다 - 이 책 전체에서 단 한 번도. 잠언에서는 이 단어를 자주 사용합니다. 여기의 저자는 그의 하나님과 어떤 언약관계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단지 하나님에 대한 학문적 지식, 즉 하나님에 관한 사실들에 대한 지식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었을지 모르지만, 마음-관계나 언약-관계의 결과는 아니었습니다.

책 말미에서, 저자는 "그렇다면 모든 것의 결말은 무엇인가?"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에 대해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들을 지키라."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왜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말합니까? 그분이 선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고,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선악간에 숨겨진 모든 것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12:14).

종교적인 사람은 심판이 두려워서 선한 일을 합니다. 그것이 모든 거짓 종교가 운영되는 방식입니다. 그들은 심판을 피하고 다음 생에서 보상을 받기 위해, 선하게 행동하도록 가르칩니다! 거짓 기독교도 같은 것을 전파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주된 동기가 심판을 두려워하는 것이라면, 거기에는 거짓 기독교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15).

진정한 영성은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순종한 것은 아버지께서 자기를 벌하실까 두려워서가 아니라, 아버지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도 순종에 대한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전도서 저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삶에 대한 그의 태도는 숙명론과 무관심이었습니다. 그는 어떤 일에도 놀라지 않도록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대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는 영원에 대해 한 번 언급했지만, 그것에 대해 많이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했고 단지 안전한 편에 있기 위해, 약간의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투자하면서 이 지상 생활을 최대한 활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여기 성령의 도움 없이, 자신의 감각과 지성, 추론을 통해 하나님을 발견하려고 노력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종교를 따르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진리에서 크게 빗나가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도움 없이는,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님만이 하나님의 깊은 것들을 우리에게 계시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모릅니다"(고전 2:11).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날마다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에 관해 연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그들 가운데 오셨을 때, 그들은 그분을 "마귀들의 왕"라고 불렀습니다!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이 예수님을 그런 이름으로 불렀다면,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구약성경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그런 이름으로 부른 사람은 진보적인 사두개인들도 아니었습니다. 근본주의적인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똑똑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겸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머리는 옳았지만, 마음은 옳지 않았습니다. 2000년 전에 그런 일이 일어났고, 오늘날에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계시를 주시는 성령님을 겸손히 의지하며 살지 않으면, 우리는 솔로몬처럼 타락하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라보며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께서,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는 베드로가 이 진리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인간적인 영리함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밤낮으로 성경을 연구하던 바리새인들은 알지 못하는데, 베드로와 같은 학식 없는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는 오직 성령의 계시를 통해서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에게는 그것이 있었고 바리새인들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성령을 의지하십시오.

솔로몬은 재산을 획득하고, 연못을 만들고(2:6), 많은 노예를 두며(2:7), 은과 금을 많이 모으는 등 다양한 형태의 쾌락을 통해 만족을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내 눈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마다하지 아니하였노라"(2:10). 결국 그는, "내가 나의 모든 행위를 살펴보니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었다"(2:11)라고 말합니다. 그런 다음 그는 "자신의 수고의 모든 열매를 자기 뒤를 이을 사람에게 남겨야 할 것인데, 그가 현명한 사람이 될지 바보가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라며 노력의 허무함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해 아래서 모든 것이 헛되었도다"(2:21,22).

2장 26절에서 흥미로운 내용을 읽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지혜와 지식과 기쁨을 주셨느니라." 이것은 참된 진술입니다.

당신의 마음이 깨끗하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이 땅에서 신의 지혜와 그분에 대한 지식과 그분의 임재 안에 있는 충만한 기쁨을 축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인에게는 어떤 임무를 주시나요? 언젠가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는 사람에게 모두 주어질 수 있도록, 돈과 물질을 모으고 수집하고 쌓아두는 일입니다! (26절) 영원에서,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입니다.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지혜와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주님에 대한 기쁨을 추구하고 있거나, 아니면 세상의 것들을 쌓아두고 수집하고 모으고 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영적인 사람과 세상적인 사람 사이의 분명한 대조를 봅니다. 종교적인 사람도 역시 세상적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성경을 알지도 모르겠지만, 하나님을 알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 역시 영원에서 도움이 되지 않을 물질적인 것과 세상적인 지식을 추구하는 데 시간을 보냅니다.

모든 것이 공허하다는 증거

3-6장에서 솔로몬은 이 땅의 모든 것이 헛됨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3:1-8: 솔로몬은 인간의 본성과 세상에 대한 예리한 관찰자였습니다. 수년 동안 관찰한 끝에, 그는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때와 시기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여기에는 참된 진술과 거짓된 진술이 있습니다. 심리학은 진실과 오류의 혼합입니다. 솔로몬은 낳을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 모두 맞습니다. 그러나 이어서 그는 죽일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다고 말합니다! 영적인 사람에게는 살인하거나 미워할 시간이 없으며 - 그가 미워하는 인간도 없습니다. 영적인 사람은 항상 하나님 안에 거하며 모든 사람을 사랑합니다.

아버지에게 화가 나면 베개가 아버지라고 상상하면서, 베개를 때리는 것이 분노를 없애는 방법이라고 가르치는 심리학자들이 있습니다! 솔로몬은 아마, 미워할 때가 있다고 했을 때 그런 말을 믿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책에 등장하는 솔로몬의 세상적인 사고의 예가 여기에 있습니다. 종교 설교자들은 설교할 때 하나님의 말씀에 그들의 세상적인 지혜를 더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상한 마음으로 살지 않는다면, 인간의 지혜는 대부분 옳은 것처럼 들리기 때문에 잘못된 길로 이끌리기 쉽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기독교계에서 "시각화"라는 새로운 가르침이 생겨났습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지금은 5명만 있어도, 눈을 감고 교회에 5,000명이 모인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현재는 작은 집에서만 모임을 하고 있지만, 매우 큰 건물에서 모임을 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만약 당신이 절름발이라면, 걷는 모습을 마음속에 그려 보십시오. 스쿠터만 소유하고 있다면, 멋진 새 차를 소유하고 있는 모습을 그려 보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이런 것들을 얻는 데 필요한 믿음을 갖게 될 것이며 - 그것들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시각화의 대부분은 세상의 사치와 큰 교회 건물 등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나는 누군가가 사람들에게 "십자가를 지고 자기에 대해 죽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신을 시각화하도록 가르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시각화에 대한 가르침은 성경이 아닌, 현대의 "뉴에이지" 철학(신의 진리를 위조한 것)과 심리학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분별력이 없는 많은 신자들은 이것이 그들의 믿음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상상합니다.

믿음은 시각화에 기초하지 않습니다. 로마서 10장 17절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믿음은 오직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기초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마음속에 그려보는 것으로, 이삭을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의 믿음은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시각화하기 시작하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주실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성경이 아닌 심리학의 가르침입니다. 긍정적인 사고는 사업가들에게 좋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성경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시각화나 긍정적인 사고로 기적을 행한 것이 아닙니다. 요즘에는 그러한 위조품에 속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전도서는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 인간의 지혜에 의존하는 것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영원"이라는 단어는 이 책에서 단 한 번 나옵니다 - 3:11: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에 영원을 두셨으니, 그것이 없이는 사람이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능히 알아낼 수 없느니라"(문자적 번역). 모든 인간의 마음에는 하나님 외에는 그 누구로도, 그 어떤 것으로도 결코 채워지거나 만족될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의 공백이 있습니다. 누군가 말했듯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찾을 때까지 불안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돈, 여자, 재산, 명예, 지위에서 결코 만족을 찾지 못하도록 우리 마음에 영원을 두셨습니다. 여기서는 우리가 영원한 것에 우선순위를 두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결코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해 아래의 것들"을 위하여 사는 사람들에게는, "평생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12절). 종교인이나 심리학자들은 사람들에게 악을 행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니요. 그들은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많은 선한 일을 할 수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과의 접촉이 없으며, 여전히 영원한 가치를 위해 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3장 19-21절에서, 우리는 인간의 지혜가 영원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을 봅니다: "사람의 아들들의 운명과 짐승의 운명이 동일하니라. 하나가 죽으면 다른 하나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나을 것이 없다. 그들은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간다. 사람의 숨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숨은 땅 아래로 내려가는지 누가 알겠는가?" 이것이 솔로몬이, 모든 그의 인간적 지혜를 동원하여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그는 사람과 짐승이 다 죽었을 때 그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 책에서, 우리는 지구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 하나님과 종교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는 몇 가지를 제대로 이해했고, 많은 것을 틀렸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전도서가 성경에 포함되도록 허락하셨을까요: 우리는 인간의 지혜와 심리학을 통해서는 하나님을 찾을 수 없고, 오직 그분의 성령을 통해서만 찾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는 영리한 사람들의 가르침을 조심해야 합니다. 누군가의 가르침이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두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런 사람의 말을 듣는 데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4장 4절: "나는, 행해진 모든 노동과 모든 기술이 사람과 이웃 사이의 경쟁의 결과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솔로몬은 전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쟁 정신에 의해 동기를 부여받는다는 사실을 관찰했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것은 기독교계의 대부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 단체는 더 높은 급여를 제공함으로써 다른 기독교 단체의 사역자를 끌어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의 정신입니다. 경건한 사람은 사람이든 교회든 조직이든 결코 다른 사람과 경쟁하지 않습니다.

4:9-12에는 정말 좋은 진술이 몇 가지 있습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4:9). 남편과 아내가 함께 일하는 것은 그들이 따로 일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위해 훨씬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또한 번성하고 자녀를 가지므로, 독신이었을 때보다 더 많은 일을 성취하게 됩니다. 이는 교회의 형제자매들에게도 적용됩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은 두 번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한 사람이 넘어지면, 다른 사람이 그를 일으킬 수 있느니라"(4:10). 죄에 빠지거나 낙담한 사람을 일으켜 세우고자 열망하는 형제자매가 있는 교회는 정말 멋진 곳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주님의 군대는 자기 부상자를 쏘는 유일한 군대"입니다.

"혼자 있어 넘어지되 일으켜 줄 사람이 없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4:10). 교제 없이 혼자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은 위험합니다.

여기에 교제의 세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따뜻해질 수 있다"(4:11). 우리는 교제할 때 서로의 마음에 불을 계속 타오르게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당신 혼자서 하나님을 위해 불타오를 수 없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위해 불타오르는 사람들과의 교제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네 번째 이유는 "누가 혼자 있는 그를 제압할 수 있다면, 두 명은 저항할 수 있다"입니다(4:12).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려고)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그리고 그들이 서로 영으로 하나가 된 곳에서는, 나는 그들 가운데 있다. 그러면 그들이 땅에서 매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다"(마 18:18~20). 사탄의 활동은 서로가 완전히 하나된 두 신자에 의해 속박 받고 제지될 수 있습니다. 신자는 그 일을 혼자서 할 수 없습니다 -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몸의 표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 그리고 최소한 두 사람이 필요합니다.

"세 가닥으로 된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4:12). 튼튼한 결혼 생활을 위해서는 세 가닥이 필요합니다 - 남편, 아내, 주님. 결혼 생활의 중심에 주님이 계시지 않으면, 그 결혼 생활은 번성할 수 없습니다.

교정에 관한 좋은 말씀이 있습니다: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젊은이가, 교정을 받을 줄 모르는 늙고 어리석은 왕보다 나으니라"(4:13). 어리석은 왕이 되는 것은 쉽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적인 지도자의 위치로 높이셨을 때, 우리는 항상 옳고, 더 이상 우리를 교정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상상하기 쉽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 어리석음의 자리에 이르지 않도록 구원해 주시길 바랍니다. 나를 교정해 준 젊은이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나는 그들의 교정을 받고 더 나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내 얼굴에 내가 볼 수 없는 검은 자국이 있다면, 그것을 지울 수 있도록 지적해 주는 사람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20살이든지, 80살이든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는 나를 도왔습니다.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교정받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늙고 어리석은 왕이 되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언제나 교정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5장 1-3절에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있을 때에는 많은 말을 하지 말라고 들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문제를 이야기하려고 성급하게 말이나 생각을 하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당신은 땅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을 적게 하라" (2절). 기도할 때, 우리는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을 더 많이 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전화통화와 같습니다. 전화기에는 듣기 위한 수화기와 말하기 위한 송화구가 있습니다. 당신보다 훨씬 성숙한 사람과 이야기할 때, 당신은 더 많이 말합니까, 아니면 더 많이 듣습니까? 오직 교만한 사람만이, 자기보다 더 경건한 사람의 말을 듣기보다 더 많은 말을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도가운데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어떠해야 합니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기도할 때 하나님께 말씀하실 기회를 결코 드리지 않습니다. 모든 이야기는 그들이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듣는 것이 90%, 말하는 것이 10%여야 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모든 문제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여전히 우리가 그분께 우리의 갈망을 표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요청하십니다. 기도는 무릎 꿇고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항상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8:1).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무전기"를 들고 있는 경찰관을 본 적이 있습니다. 경찰관들은 언제든지 본부에서 오는 모든 메시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기 때문에, 이러한 무전기는 항상 켜져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 하늘에 있는 우리 본부에서 오는 명령에 항상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하나님께 갚을 수 없는 서원을 하지 마십시오.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5:4,5). 우리는 결코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나님께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헌신의 노래를 부르고 주님께 굴복할 때 하나님께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진심이 아니라면, "나의 은과 금을 받으십시오 - 한 푼도 아끼지 않겠습니다"라고 노래하지 마십시오. 만일 당신이 세속적인 노래도 부른다면 "내 목소리를 받으시고 항상 나의 왕만을 노래하게 하소서"라고 노래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삶의 모든 것을 실제로 주님께 내어 드리지 않았다면,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깁니다"라고 노래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어느 날보다 일요일에 하나님께 더 많은 거짓말을 합니다. 왜냐하면 일요일은 집회에서 그러한 노래를 부르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노래에서 아직 여러분의 삶에 해당되지 않는 가사를 발견하면, 간증이 아닌 기도로 부를 수 있습니다. 당신도 그렇게 살고 싶다고 주님께 말씀드리십시오. 그렇다면 당신은 정직합니다. 하지만 노래 한 구절에 묘사된 삶이 당신의 갈망조차 아니라면, 솔직히 말해서 당신은 그 구절에 이르렀을 때 조용히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그들이 하나님께 거짓말을 노래하게 하십시오. 하지만 당신 자신은 솔직해지십시오.

5장 10절: "돈을 사랑하는 자는 돈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이것도 역시 헛되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의 필요에 따라 넉넉하게 만드셨으나, 한 사람의 탐욕을 채우기에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욕심 많은 사람은 아무리 돈을 벌어도 결코 행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백만장자라도 더 많은 것을 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돈을 사랑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6:13) - 둘은 서로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일이 늘어나면(월급이 오르면), 지출도 늘어납니다"(5:11). 훈련되지 않은 사람의 지출은 수입에 비례하므로, 결코 돈을 저축할 수 없습니다.

"일하는 사람은 많이 벌지는 못하지만, 적게 먹든 많이 먹든 잠은 즐겁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배불러서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5:12). 밤에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으면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습니다. 단순한 음식이 더 건강한 삶을 만듭니다.

6:1,2: "내가 해 아래서 본 악이 있는데, 그것은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재물과 부와 명예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영혼은 그가 원하는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런 것들을 먹을 수 있는 힘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여기 돈을 많이 벌었던 남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를 추구하다 건강을 잃었고, 의사에게 많은 것을 먹지 못하도록 금지당합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직장 생활을 하는 삶의 전반부를 건강을 망치며 부를 축적하는 데 보내고, 남은 인생은 건강을 되찾기 위해 그 부를 소비하는 데 보냅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들은 열심히 일하다가 건강을 망치고, 돈을 모으기 위해 자신을 파괴하다가 죽습니다.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좋은 시절과 매일의 가장 좋은 부분을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그것이 가장 지혜롭게 사는 길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법

7-9장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실용적이고 좋은 조언을 많이 담고 있습니다.

"좋은 이름이 좋은 향유보다 낫고, 죽는 날이 태어나는 날보다 낫다"(전 7:1). 그것은 당신이, 하나님과 영원의 가치를 위해 살아온 경우에만 해당됩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인내하는 영이 교만한 영보다 낫다"(7:8). 오래 참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보다 훨씬 나은 사람입니다.

"'왜 옛날이 지금보다 더 좋았을까?'라고 말하지 말라. 너희가 이것을 묻는 것은 지혜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7:10). 예수님의 제자에게, 미래는 항상 과거보다 더 나은 날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과거를 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7장 16,17절에는, 인간의 지혜가 제공하는 어리석은 조언 중 하나가 있습니다: "너무 의인도 되지 말고 너무 악인도 되지 말라. 스스로를 파괴할 뿐이다." 세상 사람들은 의로움에 대해 조금이라도 타협하지 않고는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기서 약간의 뇌물을 주고 저기서 약간의 거짓말을 하는 것을 정당화합니다. 그것이,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물론 참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제안을 거부합니다. 이 구절을 보는 또 다른 방법은 다음과 같이 읽는 것입니다: "매우 의로운 사람이나 매우 영적인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요구 사항을 넘어서는 것이다.

7장 28절에서, 솔로몬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천 명의 남자 중에서 한 명의 현명한 남자를 찾았다. 그러나 나는 천 명의 여자 중에서 현명한 여자를 찾지 못했다." 그렇다면 남자가 여자보다 현명하다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가 영적인 존재가 되는데 동등한 힘과 동등한 영적 능력을 갖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솔로몬은 아내 700명과 첩 300명 등 그의 하렘(harem)에 있었던 1000명의 여자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왕상 11:3). 하렘에 있던 경박한 여자들을 보면, 그가 그들 중 누구에게서도 지혜를 찾지 못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남자보다 지혜로운 경건한 여자가 아주 많습니다.

"사람의 지혜는 그 사람을 빛나게 하여, 그의 심각한 얼굴을 기쁨으로 빛나게 하느니라"(8:1). 우리가 지혜를 더 많이 가질수록, 우리의 얼굴은 주님의 기쁨을 더 많이 발산할 것입니다. 심술궂고 불행한 표정은 지혜가 없는 어리석은 사람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심술궂거나 시큰둥한 분이 아니셨습니다. 그분의 제자들도 그러해서는 안 됩니다.

"악한 일에 대한 형벌은 빨리 집행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악을 행하려는 마음으로 가득 차게 된다"(8:11). 누구든지 어떤 식으로든 죄를 짓자마자 하나님께서 형벌을 내리셨다면, 전 세계 사람들이 죄를 짓는 것을 멈추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죄인이 백 번 악을 행하고도 오래 산다 할지라도, 나는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만 잘 될 것임을 안다"(8:12).

8장 17절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 많으나 우리의 유한한 인간 지혜로는 다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많다고 말합니다.

9장 8절은 우리의 삶과 사역에 적용할 수 있는 아름다운 구절입니다: "네 옷을 항상 희게 하고, 네 머리에 기름이 부족하지 않게 하여라." 이는 우리가 양심을 깨끗하게 하고 마음을 항상 순결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항상 성령의 기름 부으심 아래 살기를 힘써야 합니다.

9장 14-18절은 한 보잘것없는 지혜자에 의해 적들로부터 구원받은 작은 도시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러나 그 지혜자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지혜가 전쟁 무기보다 낫다"(9:18). 우리는 잔인함이 아닌 친절함으로 사람들을 얻어야 합니다. 해와 바람이 누가 더 강한지 겨루는 어린이 우화가 있습니다. 한 남자가 길을 걷고 있었는데, 그들은 그에게서 코트를 벗기는 사람이 더 강한 자가 될 것이라고 결정했습니다. 바람이 먼저 가서 그 사람에게 세게 불었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많이 불수록 남자는 코트를 몸에 꼭 움켜쥐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태양의 차례였습니다. 태양은 단지 날씨를 점점 더 뜨겁게 만들었습니다. 금방, 그 남자는 코트를 벗었습니다. 지혜가 힘보다 낫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인자하심으로 우리를 회개하게 하십니다(롬 2:4).

세상 지혜의 예시

"죽은 파리는 향료 제조자의 향유에서 악취를 풍기게 한다. 그러므로 약간의 어리석음이 많은 지혜와 명예보다 더 무겁다"(10:1). 작은 어리석은 행동 하나가 지혜에 대한 간증 전체를 망칠 수 있습니다, 맛있는 치킨 카레에 도마뱀 한 마리가 빠지면 카레 전체가 망가지는 것처럼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어리석은 말과 행동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달라고 하나님께 겸손히 간구해야 합니다.

10장 4절은 리빙 바이블에서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의역되었습니다: "상사가 너에게 화를 내더라도, 그만두지 말라."

"(다른 사람을 위해) 구덩이를 파는 자는 거기에 빠질 것이다"(10:8).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우리를 대하십니다.

"담을 허무는 자는 뱀에게 물릴 것이다"(10:8).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 주위에 경계를 그으셨고 우리는 그 경계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우리가 그 밖으로 나가면, 옛 뱀인, 사탄이, 우리를 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에덴의 아담과 하와, 그리고 사울 왕과 웃시야 왕에게 일어났던 일입니다(창 3장; 삼상 13:9; 대하 26:16).

"도끼가 무뎌졌는데 날을 갈지 않으면, 더 많은 힘을 써야 한다. 지혜는 성공을 가져다 준다는 장점이 있다"(10:10). 먼저 도끼를 갈면 작업을 더 빨리 끝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양심을 깨끗하게 유지함으로써 영적인 날을 예리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기 때문에, 우리 손에 있는 성령의 검도 날카로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빈약한 지식으로 설교하는 것은 전쟁에서 무딘 칼을 사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적은 패배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종종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와 같은 한 문장으로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사탄의 유혹에 대한 그분의 대답도 예리한 검에서 나왔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등.

여기서도 우리는 세상의 지혜가 혼합된 것을 봅니다. "돈이 모든 것의 답이다" (10:19). 세상 사람이 하는 말이 바로 이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는 온 마음을 다해 돈을 추구합니다. 모든 문제의 답은 하나님이심을 믿는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추구해야 합니다.

10장 20절은 침실에서 험담을 하지 말라는 권면입니다.

"네 빵을 물 위에 던져라. 그러면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11:1). 우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 - 그러면 우리는 뿌린 대로 거둘 것입니다. 우리가 주는 만큼 우리는 받을 것입니다.

"나무가 남쪽으로 쓰러지든 북쪽으로 쓰러지든, 쓰러진 곳에 그대로 있다"(11:3). 사람이 죽으면 그의 영원한 운명은 정해집니다.

"바람이 어디로 불지 살피다가는 씨를 뿌리지 못할 것이며, 구름만 쳐다 보는 사람은 거두어들이지 못할 것이다"(11:4). 우리는 주님을 섬기기 위한 완벽한 조건을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편할 때나 그렇지 않을 때나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주님을 섬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딤후 4:2).

"바람의 길을 모르듯이, 너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지 못한다"(11:5). 우리의 생각은 하나님의 지혜의 바다를 담을 수 없는 작은 컵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지구상의 많은 것들에 대해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영역에서 어떻게 일하시는지 우리는 완전히 알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바람은 원하는 곳으로 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3:8).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령의 모든 사역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11장 9절-12장 7절은 젊은이들에게 "만일 그 마음의 충동과 눈의 욕망을 따르면, 하나님이 이 모든 일에 대하여 그들을 심판하시리라"는 경고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우리 몸으로 하는 모든 일에 대해 하나님께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매일 살아야 합니다. "인생은 잠깐 사이에 지나가 버리기" 때문에 그들은 분노와 영원한 슬픔을 초래할 모든 것을 버리고, 아직 젊을 때 창조주를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 더 어려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노년기는 12:2-7절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12:9-11절은 훌륭한 설교자의 많은 자질을 묘사하는 훌륭한 세 구절입니다. 좋은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 뿐 아니라 그것을 일상 생활에 지혜롭게 적용하는 방법도 아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어떤 주제에 대해 말씀이 말하는 모든 것을 찾기 위해 성경을 철저하게 조사하고, 연구한 결과를 정리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 그는 진리를 정확하고 즐겁고 흥미로운 방식으로 전달하기 위해 주의를 기울일 것입니다. 그의 말은 목자장이 주신 말씀으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중요한 진리를 심어주고 그들이 행동으로 옮기도록 자극합니다.

12장 12절에서는 책을 과도하게 공부하면 지치게 만들 수 있다고 말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를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12:13,14)라는 권고를 받습니다. 종교인은 심판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반면에, 영적인 사람은 사랑과 감사로 하나님께 순종합니다(요 14:15).

그래서 전도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더라도 사람들이 여러 분야에서 옳은 일을 행할 수 있는 방법을 알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옳은 일을 하려는 그들의 동기는 언제나 이기적일 것이며, 그들은 모든 사람을 판단하는 독선적인 바리새인들이 될 것입니다. 그들은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지만, 앞서 말했듯이, (영적 교만의) 도마뱀 한 마리가 그들의 카레 요리 전체를 망칠 수 있습니다

장 22
솔로몬의 노래

신랑과 신부

솔로몬의 노래는 "아가"와 "찬가"라고도 불립니다.

"주(Lord) - YHVH"라는 단어는 이 책에서 단 한 번 나옵니다 ('여호와의 불꽃' - 8:6 - 히브리어).

일부 기독교인들은 이 책을 읽는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결혼 생활의 성적인 부분에 대해 잘못된 이해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성에 대한 그들의 이해가 영화와 세상의 미디어에서 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책을 통해 배우기를 분명히 원하시는 두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1. 결혼 생활에서 성적 관계는 매우 좋고 매우 필수적이라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는 사랑하는 신부와 신랑의 관계처럼 친밀하고 따뜻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성기능을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생식기를 창조하신 후, 그분은 아담과 하와에게 분명히 성적인 결합을 통해 번성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1:28). 그런 다음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모든 것을 보시고(성기능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심히 좋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창 1:31). 하나님께서 성경 첫 페이지에서 남편과 아내 사이의 성을 "매우 좋다"고 선언하셨다면, 우리는 이 주제에 대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매우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솔로몬의 노래(아가)에서 배우는 것은, 서로에 대한 비이기적인 사랑이 결혼 생활에서 성행위를 순결하고 거룩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사랑 없는 남녀의 결합은 육신적인 것입니다.

성기능을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다른 많은 일과 마찬가지로, 사탄은 사람들이 혼외 성관계에 빠지도록 함으로써 그것을 왜곡시켰습니다.

원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성과 마찬가지로, 그것 역시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을 선한 목적으로도, 악한 목적으로도 사용해 왔습니다. 원자가 쪼개질 때, 생성된 에너지는 도시 전체에 전력을 공급하는 데 사용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수천 명의 사람들을 파괴하는 폭탄을 만드는 데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다이너마이트를 생각해보세요. 그것은 집의 기초를 세우기 위해 바위를 폭파하는 데 사용될 수도 있고, 사람을 죽이는 폭탄을 만드는 데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성" 역시 좋은 의미로 사용될 수도 있고 나쁜 의미로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이 담긴 보자기 하나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환상을 한 번 보여 주셨고, 베드로에게 죽여서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유대 의식법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먹기를 거부하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하나님이 깨끗하게 한 것을, 속되다 여기지 말라"(행 10:15)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다"고 부르시는 것을, 부정하다고 부르지 마십시오. 세상이 "성"을 잘못 사용하는 것은, 물론 부정하고 악한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의 약정 안에서는, 거룩하고 순결합니다. 그것은 남편과 아내를 거룩한 유대로 묶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므로 나는 모든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게 솔로몬의 노래를 읽어 주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서로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서로 감사하는 법을 가르쳐 줄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우리 인도 문화에서는,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게 감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그들의 성적 결합은 기계적입니다.

또한 이 책은 결혼 생활에서 의사소통의 중요성, 즉 친절하고 사랑스러운 방식으로 서로에게 말하는 것의 중요성을 가르쳐 줄 것입니다. 이 책 역시 매우 현실적인 책입니다. 모든 결혼 생활에는 우여곡절이 있고, 때로는 사랑의 감정이 없을 수도 있으며, 모든 위기를 통해 진정한 사랑이 어떻게 승리하는가를 보여줍니다. 또한 죽어가던 결혼 생활이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는지 가르쳐 줍니다. 따라서, 이 책은 결혼 생활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주신 놀라운 선물인 "사랑과 성"에 대해 매우 현실적이고 실제적이며 실용적인 책입니다.

솔로몬의 노래는 또한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그림이기도 합니다. 기혼이든 미혼이든 모든 신자는 이런 방식으로 이 책을 공부하고 주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할 수 있습니다.

아가서는 내가 세례를 받은 직후인, 1961년에 처음으로 자세히 공부한 성경의 책이었습니다. 나는 자주 바다에 나가서, 인도 해안선의 사람이 살지 않는 외딴 지역에 자주 출항하는 배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나는 때때로 몇 주 동안 계속 신자들과 연락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 이 책을 공부하면서 내 영혼의 신랑이신 주 예수님에 대한 나의 헌신이 깊어졌습니다. 나는 내가 그분께 매우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나에게 매우 소중한 분이 되셨습니다. 나는 나를 향한 그분의 무한한 사랑 안에서 안식하고, 그분을 온전히 신뢰하고, 그분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온 마음과 영혼을 다해 그분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 이후로 수년 동안 나와 주님과의 관계는 더욱 깊어졌고, 이것이 바로 내가 냉담해지고 떨어져 나가는 것을 막아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책을 매우 소중히 여깁니다.

요한계시록 14장 3절에서 우리는 어린양을 따르는 자들이 다른 사람이 배울 수 없는 새 노래를 부르는 것을 봅니다. 그곳의 144,000명의 작은 무리는 지상 생애 동안 신랑의 발자취를 따라온 그리스도의 신부를 상징합니다. 신부만이 이 노래를 배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노래는 자신이 사랑하는 분에 대한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노래는 이 신부의 노래를 나타냅니다. 당신은 성경을 공부함으로써 그 노래를 배울 수 없고, 오직 예수님을 따름으로써만 배울 수 있습니다. 신부는 지상에 있을 때 이 노래를 배웠습니다. 주님은 지상 생활에서 우리에게 많은 시련을 겪게하시고, 바로 그 시련 속에서 우리는 이 노래를 배우게 됩니다.

사역이 결코 우리 삶의 주요 초점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이 항상 최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50년 동안 풀타임으로 주님을 섬긴 후, 나는 주님에 대한 나의 뜨거운 사랑이 나의 모든 사역의 기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뜨거운 사랑이 줄어들면, 우리의 사역은 하나님 보시기에 전혀 가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말씀하셨을 때 꾸짖으신 것에서 봅니다. "나는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너를 책망할 것이 있다: 너는 처음처럼나를사랑하지않는다"(계 2:2-4 - Living). 이것은 너무나 심각한 실패였기 때문에, 주님은 에베소 교회에 대한 그분의 인정을 완전히 빼앗겠다고 위협하셨습니다(계 2:5).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이고 사랑스럽고 헌신적인 관계는 주님을 위한 모든 참된 봉사가 흘러나오는 원천입니다 - 그것이 전도든, 교회 개척이든, 성경 교육이든, 사회 사업이든 무엇이든 말입니다. 우리는 먼저 "신랑과 신부의 노래"를 배워야 합니다 -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부르고, 우리가 그분께 다시 노래하는 노래입니다.

잠언은 신의 지혜에 대해 말하고 전도서는 인간의 지혜에 대해 말합니다. 그러나 솔로몬의 노래는 신의 사랑에 대해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경 지식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성경 지식이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솔로몬의 노래에서, 우리는 신부의 사랑이 자라나는 것을 봅니다.

첫 번째 장에서 우리는 사랑의 시작을 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열병에 더 가깝습니다. 젊은이들이 "서로 사랑한다"고 말할 때, 그들은 실제로 서로에게 "푹 빠져" 있을 뿐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그 동기에 있어서 사심이 없는 반면, 열병은 이기적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순수한 사랑의 표현은, 영화 스크린이나 로맨틱 소설에서 묘사되는 남자와 여자 사이의 표현이 아닙니다. 그것은 무력한 자녀를 향한 어머니의 사랑에서 나타납니다. 어머니는 그 아이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것입니다. 특히 아이가 아플 때 아기를 향한 어머니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에 빠졌다"고 말하는 젊은 남녀들은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그러는 것처럼, 매년, 서로를 위해 사심 없이 자신을 희생하지 않습니다. 서로에 대한 그들의 열병은 일이 자신의 바람대로 흘러가는 한 지속됩니다. 그러나 참된 어머니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자녀의 반응과 전혀 무관합니다. 아이가 장애가 있거나 아플 수도 있지만, 어머니는 아이를 계속해서 사랑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땅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가장 가까운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사랑을, 갓 태어난 아기를 향한 어머니의 사랑에 비유하신 이유입니다(사 49:15). 남편과 아내가 그렇게 서로 사랑할 수 있다면, 비로소 사랑을 진정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그 정도로 성숙해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립니다.

결혼 초기에,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는 이기심이 많습니다. 남편은 아내에게서 자신을 만족시킬 만한 것을 원하고, 아내는 남편에게서 자신을 만족시킬 만한 것을 원합니다. 남자는 일반적으로 성적 만족과 그를 섬겨줄 누군가를 원하는 반면, 여자는 일반적으로 안전과 편안한 삶을 원합니다. 둘 다 이기적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열병은 서로에 대한 헌신이 있는 사랑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도 마찬가지로 이기적인 방식으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처음에 우리 자신을 위해 무엇인가를 원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 아마도 지옥으로부터의 구원, 치유, 돈, 문제의 해결책, 기름부음받은 사역일 것입니다. 그러한 욕망은 모두 자기 중심적입니다. 하지만 사랑이 성숙해지면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나는 건강이나 부, 심지어 사역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는 당신이 있고, 그것이 내가 원하는 전부입니다. 나는 당신이 나의 단 한 번의 지상 생활을 최대한 활용하시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가 주님에게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생각하지 않고, 주님이 우리에게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성숙한 사랑입니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도 그러했습니다. 그분은 이 땅에 오셨을 때 "내가 사람에게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니요. 그분의 생각은 "내가 사람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였습니다. 그것이 신의 사랑이 항상 생각하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책의 마지막 장인 8장에서 마침내 우리가 도달하게 되는 성숙한 사랑입니다. 검증되지 않은 사랑이 마침내 참된 신의 사랑으로 성숙해집니다.

시편 기자는 "하늘에서는 당신 외에 누가 나에게 있습니까? 이 땅에서 당신 외에는 내가 원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시 73:25). 그것은 주님에 대한 사랑이 성숙해진 사람의 표현입니다. 그는 더 이상 건강이나 부, 또는 이 땅의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주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

사랑의 시작-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

1장 1절: 여기서 우리가 가장 먼저 주목하는 것은 이 노래가 신부의 노래가 아니라 주로 솔로몬의 노래, 즉 신랑의 노래라는 것입니다. 즉, 그것은 주로 우리를 향한 우리 주님의 노래이지, 우리가 그분께 드리는 노래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요일 4:19). 우리가 그분을 먼저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그분이 먼저 우리에게 이 노래를 부르셨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그분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절대로 주님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시작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출발점은 언제나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잘못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결코 낙담하거나 자신을 정죄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의 첫 번째 부분은 주님과의 "사랑에 빠지는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여기에는 그 남자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부를 위한 사람은 전 세계에서 단 한 사람뿐이기 때문입니다 - 바로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신부는 신랑과 단 둘이서 말하기를 "당신의 사랑은 지상의 모든 포도주보다 낫습니다. 당신의 이름이 얼마나 기쁜지요!"(3절). 신랑은 세상이 제공할 수 있는 모든 즐거움(술)보다 낫습니다.

그런 다음 그녀는 "나를 이끌어 들이시면 우리가 당신을 쫓을 것입니다"고 말합니다(4절). 주의 깊게 살펴보십시오. 사랑은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밀어붙이는 것과 끌어당기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밀어붙이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에게로 이끄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2:32). 마치 자석이 철가루를 자기 자신에게 끌어당기는 것처럼, 그분은 우리를 끌어당기려고 하십니다. 주님은 결코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선한 목자이신 그분은, 우리보다 앞서 가셔서 우리가 그분을 따르도록 이끄십니다. 어느 시점에서든, 우리가 더 이상 나아가고 싶지 않다면, 그분은 우리에게 강요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가장 놀라운 점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분의 인도하심과 사탄의 열광적인 선동을 구별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경건한 지도자와 이단(사이비) 지도자를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경건한 사람들은 우리보다 앞서서 가서 그들을 따르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 바울이 했던 것처럼(고전 11:1). 그러나 이단 지도자들은, 독재자와 같아서 사람들에게 설교와 충고를 통해 그들이 지시하는 길을 가라고 강요합니다. 이 책에서 거짓 목자를 따르지 않도록 우리를 보호할 수 있는 놀라운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 남편은 아내에게 "지금 당장 이렇게 해요"라고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앞서 본을 보여서 아내를 이끌어야 합니다. 아내가 개선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해당 부분에서 그녀보다 앞서서 그녀에게 좋은 모범이 되어 주십시오 - 그리고 그녀가 그녀 자신의 속도와 시간에 맞춰 당신을 따라갈 수 있도록 하십시오. 절대로 그녀에게 강요하지 마세요. 그것이 신의 방식입니다. 이 원칙은 교회 안의 모든 관계에도 적용됩니다.

신부는 그녀가 사랑하는 분을, "나의 왕"이라고 부릅니다(1:4).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신랑으로 알기 전에 예수님을 우리의 왕으로 알아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과의 이러한 사랑의 관계에 결코 들어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분을 평생 동안 주님(Lord)과 왕(King)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삶의 일부 영역은 여전히 굴복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예루살렘의 딸들" 또는 "예루살렘 여자들"(1:5)에 대해서도 읽습니다. 이 표현은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뜨뜻미지근한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개인적인 헌신적인 사랑이 아니라 설교, 가르침, 성경 연구 등의 "기독교" 사역에 전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죄 가운데 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을 열렬히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주님은 신부의 마음을 가진 사람, 그분께 헌신하고 그 사랑의 마음으로 섬길 수 있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신부는 이 여자들에게 "나는 검지만 사랑스럽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의 의미는 비록 그녀는 매력적이지 않지만, 신랑이 그녀를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힘있는 자와 고귀한 자와 영리한 자가 아닌, 가난하고 어리석은 자를 주로 선택하셨다고 말합니다(고전 1:26-29). 아마 우리 중 누군가는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능력이 없습니다. 나는 똑똑하지 않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제 능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라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주님은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는 더 아름다운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랑은 이 검은 여인을 선택했습니다. 예수님은 외모나 은사, 능력이 아니라 마음의 자질을 보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뭔가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타고난 능력, 가족 배경, 성취는 실제로 하나님께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그분이 찾는 것은 뜨거운 사랑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그분의 종이 될 사람을 찾으실 때 보시는 것입니다.

신부는 비록 자신이 검지만, 신랑의 눈에는 아름답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많은 기혼 여성들은 남편이 자신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기뻐하지 않는다는 느낌 때문에 고통을 겪습니다. 나는 아내를 기뻐합니다. 남편 여러분도 그렇게 하시길 바랍니다. 당신이 아내로 인해 기뻐하고 있다는 것을 아내가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마찬가지로, 많은 신자들은 주님께서 그들로 인해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스바냐 3장 17절은 말합니다, "네 한가운데 계시는 네 하나님 여호와는 전능하시다. 그분은 기쁨의 소리로 너를 향해 소리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 삼으신 것을 매우 기뻐하십니다. 그거 아시나요? 사람의 눈에는 우리가 못생겼을지라도 하나님의 눈에는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어여쁘고 아름다운 도시 소녀들아 나를 업신여기지 말라"(1:6). 그녀는 세련되지 못한 시골 소녀였고, 예루살렘의 세련된 도시 소녀들은 그녀를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신랑은, 똑똑하고 매력적인 도시 소녀들을 모두 무시하고, 그 시골 소녀를 선택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선택하셨습니다. 그 점에 대해 주님을 찬양합니다! 다른 신자들이 당신을 무시하고 있습니까? 낙심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주님께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16장은 우리가 더럽고, 썩고, 버림받고, 길가에 무력하게 누워 있을 때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데려가셨는지를 묘사하는 아름다운 장입니다.

"그들이 나를 포도원지기로 삼았거니와, 나는 내 포도원을 지키지 못하였다"(1:6). 다른 포도원은 우리의 사역을 가리킵니다. 나의 포도원은 나의 삶이며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이것은 많은 설교자들이 저지르는 흔한 실수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일에 바쁘지만, 자신들의 포도원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많은 활동에 전념하고 있지만, 주님과의 개인적인 동행을 등한히 했습니다. 그들은 항상 통계, 주님께로 인도한 사람들의 수, 방문한 장소의 수 등의 관점에서 생각합니다. 솔로몬의 노래는 바로 시작부터 이러한 위험에 대해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 자신과 네 가르침에 주의를 기울이라. 그리하면 너 자신과 네 말을 듣는 사람들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딤전 4:16).

신부가 구한 두 가지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은 어디서 양 떼를 먹이고, 어디서 쉬게 하시나요?"(1:7). 우리에게도 주님으로부터 필요한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음식과 휴식.

그러고나서 신랑은 그녀에게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라고 칭찬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정말로 기뻐하신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는 그러한 말씀을 주님으로부터 들어야 합니다. 아내들도 남편으로부터 그러한 감탄의 표현을 들어야 합니다. 남편이 성관계를 원하는 것처럼 아내는 결혼 생활에서 그녀에게 안정감을 주는 사랑의 확신을 찾습니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위해서는 이 두 가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아내는 남편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남편은 아내가 원하는 사랑의 확신을 주어야 합니다.

그러한 문제는 영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는 부끄러움 없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강단에서 성에 대해 결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많은 기독교 젊은이들이 이 중요한 주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이해는 그들이 세상에서 얻는 것뿐입니다. 그들은 악마의 설명만 듣습니다. 성경은 성에 대해 공개적이고 분명하게 말하고 이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이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우리는 사랑의 시작을 봅니다 -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 주셨고 우리가 큰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뻐합니다.

사랑의 성장

2장부터 6장까지는, 마침내 8장에서 정점을 이루는 사랑의 성장에 대해 읽습니다. 신부의 사랑에는 굴곡이 있고 때로는 사랑의 감정이 전혀 없을 때도 있습니다.

2장 1절에, 신부는 말하기를 "나는 샤론의 장미일 뿐입니다. 나는 단지 계곡의 백합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표현들은, 신랑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신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많은 노래에서는 예수님을 "샤론의 장미", "계곡의 백합"으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비성경적인 표현입니다. 신부가 신랑에게 "나는 샤론의 평범한 장미일 뿐입니다. 샤론에는 수천 송이의 장미가 있는데 나는 그 중 하나일 뿐입니다. 나는 그저 계곡의 평범한 백합일 뿐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신랑은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당신은 가시나무 속에 핀 백합화라오"(2:2). 예루살렘의 그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자들은 겉보기에는 아름다웠지만, "코에 금고리를 낀 돼지들"(잠 11:22) 같았습니다 - 매력적이지만, 여호와를 향한 뜨거운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랑은 그들을 가시나무에 비유했습니다. 그 가시나무 속에서, 그의 신부는 백합화 같았습니다.

신부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그분은 그분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도록 나를 그분의 연회장으로 데려가셨습니다"(2:4). 탕자의 아버지는 아들을 식탁으로 데려왔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둘러앉으셨습니다. 식탁은 교제를 말합니다. 식탁에서, 우리는 주님을 위한 사역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교제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과 함께 식사합니다(계 3:20 참조). 나중에야 신랑과 신부가 들판으로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식탁에 앉아 주님과 교제하기 전에, 사역을 위해 들판에 나가려고 시도하지 마십시오. 아담의 첫째 날은 안식을 취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날이었습니다(아담은 여섯째 날에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야 하나님은 그를 동산에서 일하도록 보내셨습니다.

신부는 "당신의 사랑으로 나를 먹이십시오. 나는 상사병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주 예수여, 당신은 나에게 모든 것입니다. 당신의 사랑 안에서 기뻐하고 안전함을 누리게 하소서. 세상은 더 이상 나에게 매력적이지 않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이 노래에는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하고 우리를 세상에서 분리시킬 수 있는 아름다운 뜨거운 사랑의 표현이 담겨 있습니다.

"오 예루살렘 여인들이여, 때가 될 때까지 사랑을 깨우지 않겠다고 나에게 약속해 주십시오"(2:7). 모든 젊은 남녀가 그들의 관계에서 명심해야 할 구절입니다. 적절한 때까지 사랑을 불러 일으키지(깨우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때가 올 때까지 이성을 사랑하는 일에 감정을 일깨우지 마십시오. 조심하십시오. 경건한 젊은 남성/여성으로 성장하고 싶다면 그러한 감정을 통제하십시오. 당신은 분명히 감정이 들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감정이 당신을 통제하고 나중에 후회할 방향으로 당신을 이끌도록 놔두지 마십시오.

마귀는 어떤 젊은 남자나 여자가 하나님을 위해 열심을 갖는 것을 볼 때마다 그 사람을 주시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러한 사람이 자라서 지상에 있는 그의 왕국에 위협이 될 수 있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종종 그들을 육적이고 세상적인 사람과 결혼시킴으로써, 그/그녀를 파멸시키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인도는 경건한 젊은 남성들이 경건한 여성과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경건한 가정을 많이 잃었습니다. 그러므로 때가 될 때까지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마십시오.

열병은 기다리지 못하게 합니다. 열병에 걸린 젊은 남자들은 보통 섹스에 환장합니다. 그들의 태도는, "나는 이제 섹스를 해야 해. 결혼할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 입니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은 기다릴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절제입니다. 누군가를 향한 감정이 자극될 때마다 조심하십시오. 적절한 때가 될 때까지 사랑을 깨우지 마십시오 - 적절한 때는 결혼하기로 약혼한 후입니다. 많은 젊은 남성들이 성경을 진지하게 연구하지 못하는 이유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어떤 소녀 또는 다른 소녀를 인생의 동반자로 삼을 것이라는 공상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더러운 것, 성적인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주님의 음성을 듣는 데는 집중할 수 없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오리니, 산을 넘고 작은 언덕을 뛰어넘어 오시는도다"(2:8). 이것은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오시는 열망을 말하며, 또한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재림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신랑은 "나의 사랑, 나와 함께 가자"고 말합니다. 그분은 이제 그분의 신부를 세상으로부터 떠나라고 초대하십니다. "겨울이 지나고… 꽃이 피었도다"(2:11,12). 여름이 다가오는 것은 주님의 재림이 가까워지는 것에 비유됩니다(마 24:32,33). 우리는 이제 여름이 가까워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고나서 신랑은 다정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오 바위틈에 있는 나의 비둘기여, 네 모습을 보여 주어라, 네 목소리를 들려 주어라, 네 목소리는 달콤하고 네 모습은 아름답기 때문이다"(2:14). 여기서 반석은 우리가 숨어 있는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과 애정, 돌봄의 강렬함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믿는다면, 우리에게서 모든 불안과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신랑은 "큰 포도나무가 꽃 피어 있는 동안 작은 여우들이 네 사랑의 포도원을 망치기 전에, 빨리 잡으라"(2:15)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끊임없이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우리 포도원을 망치는 큰 여우(명백한 죄)를 쉽게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포도원에 몰래 들어와 포도를 먹어치우는 새끼 여우도 있는데 - 이것들은 눈에 잘 띄지 않기 때문에, 더 위험합니다.

결혼 생활에서도, 남편이 아내를 때리는 것처럼, 우리가 조심해야 할 큰 위험은 없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결코 그런 일을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결혼 생활을 파괴하는 작은 여우는 보통 사소한 짜증과 언성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 작은 여우들을 잡아서 그들이 당신의 결혼 생활을 망치기 전에 죽이십시오. 당신의 결혼 생활은 포도원과 같습니다. 현명한 농부처럼 포도원을 지키십시오.

주님과의 관계도 포도원과 같습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을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은 간음이나 살인과 같은 큰 죄가 아닙니다. 우리와 주님 사이를 가로막고 주님과의 동행을 망치는 것은 불결한 생각, 돈에 대한 사랑, 용서하지 않는 태도 등과 같은 작은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작은 여우를 잡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합시다.

3장 1절에서, 신부는 신랑이 그녀와 함께하고 있음을 느끼지 못했던 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느 날 밤 그녀는 침대에 누워 주님을 깊이 갈망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 그분을 찾기로 결정했습니다(3:1,2). 여기에서 우리는, 신랑의 임재를 느끼고자 하는 신부를 봅니다. 그리고 그녀의 수색은 헛된 것이었습니다. 3장 3절에 나오는 파수꾼은 욥기에 나오는 설교자들처럼, 올바른 교리를 갖고 있지만 하나님을 모르는 교회의 장로들과 설교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에게는 주님을 사랑하는 이 젊은 신부가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없습니다. 그녀는 파수꾼들에게 가서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분을 보셨나요?"라고 물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녀를 인도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지 않은 장로가, 어떻게 여기 신부처럼 주님을 사모하는 사람을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젊은이들을 그리스도에 대한 뜨거운 사랑의 삶으로 인도할 수 있는 장로 형제들을 찾는 것이 너무나 어렵다는 것은 타락한 기독교 집단의 상태에 대한 슬픈 증거입니다. 성경적 진리와 전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은 많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열렬히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장로 형제가 양 떼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열렬히 사랑하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훌륭한 "파수꾼"의 표시입니다.

마침내 신부는 사랑하는 사람을 직접 찾았습니다(3:4). 이것은 나의 젊은 시절 경험이기도 합니다. 나에게는 그리스도를 향한 헌신적인 사랑의 삶으로 나를 인도해 줄 수 있는 경건한 장로들이 없었습니다. 성령님께서 나를 그 삶으로 직접 인도하셨습니다. 여러분 중 일부는 여러분을 인도해 줄 경건한 장로 형제들이 없는 곳에 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구하십시오. 그러면 성령님은 그러한 삶으로 여러분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내 영혼이 사랑하는 그분을 발견했을 때, 나는 그분을 붙잡고 놓아주지 아니하였다"(3:4).

이제 4장에 이르렀습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말하는 사람은 신부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신랑에게서 신부에 대한 진가를 인정함의 긴 말을 듣습니다. 영적인 성장의 한 가지 특징은 우리 자신이 말하는 것보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신부는 성숙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듣는 동안 신랑이 그녀를 감탄(admiration)한다는 표현을 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분은 그녀의 모든 부분을 감탄하고 나서 "내 사랑, 너는 참 어여쁘다"(4:7)고 말하며 결론을 내립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녀를 초대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아마나 꼭대기에서,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 사자 굴에서 내려다보아라"(4:8). 이것은 하늘나라의 삶으로의 초대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낮고 세상적인 관점에서 사물을 보지 말아라. 나와 함께 하늘나라에 가서 그 관점에서 모든 것을 보아라. 그러면 네가 거기에서 볼 때, 땅의 것들은 작고 희미하며 무가치하게 될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기를 원하십니다. 사실, 거기에는 사자, 즉 악마와 악한 통치권과 권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곳에서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이며 그분과 함께 모든 악한 세력을 이길 것입니다. 신부는 지금 영적 전쟁에 초대받고 있습니다.

신랑은 신부를 "잠겨 있는 동산"이라고 부릅니다(4:12), 이는 신랑만을 위한 전용 동산입니다. 그녀는 다른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전적으로 주님의 소유입니다. 당신과 주님의 관계는 그런 관계입니까? 주님께서 당신에게 "너는 나의 개인 동산이며 오직 나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세상에는 필요 이상으로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 세속적인 권력과 명성을 얻고 자신의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기회 등 우리를 끌어당기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유혹은 신부를 유혹하려는 다른 남자들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 신부는 끌리지 않습니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녀는 독점적으로 신랑에게만 속해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그러한 관계를 맺고 사는 신자는 거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그분을 친밀하게 알지 못하고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성경을 이해하는 비결은 무엇보다 먼저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 주님보다 그분의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우리에게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초기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분과 함께 걸으며 그분이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기를 갈망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도 그들처럼 눈을 뜨고 그들처럼 가슴이 불타오를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주님과 함께 걸어온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발견한 것입니다.

그런 다음 신부는 북풍과 남풍이 자신의 정원에 불어오도록 초대합니다(4:16). 북풍은 고난과 역경, 시련의 찬 바람이고, 남풍은 축복과 격려, 번영과 행복의 바람입니다. 이 바람들 중 어떤 바람이 불든 상관없습니다. 결과는 똑같을 것입니다 - 사방으로 향기가 퍼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편안한 쉬운 삶을 살든, 어려움과 시련으로 가득 찬 삶을 살든,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도록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상황에 관계없이,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과 예배가 우리의 삶에서 나올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가 그의 동산에 와서 그 아름다운 열매를 먹기를 원하노라"(4:16). 우리 삶(우리 동산)에서 생산되는 모든 것은 주님을 위한 것입니다 - 우리가 얼마나 영적인지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당신의 삶에 대해 간증할 때, 당신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려고 하지 마십시오. 대신, 당신에게 얼마나 놀라운 구원자가 있는지 그들에게 보여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의 열매는 사람을 위한 것이 되고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신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동산에 있는 모든 것은 오직 사랑하는 사람만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해 당신을 사용하셨습니까? 당신이 한 일을 기뻐하지 마십시오. 죄인이 회개한 것을 천사들과 함께 기뻐하십시오. 그는 당신의 회심자가 아니라 주님의 회심자입니다. 주님을 위해 희생을 했다면, 아무에게도 알리지 마십시오. 왜 우리의 희생을 광고해야 합니까? 남편을 깊이 사랑하는 아내는, 남편을 위해 자신이 치르는 희생을 세상에 알릴까요? 아내와 남편 사이에는 아주 많은 사랑의 비밀이 있습니다. 우리와 주님 사이에도 사랑의 비밀이 있어야 합니다. 당신은 주님과 단둘이 시간을 보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좋습니다. 그런데 왜 다른 사람이 그것에 대해 알아야 합니까? 남편과 사랑에 빠진 아내는 그들이 함께한 시간을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할 때 문을 닫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분과 함께 보내는 시간에 대해 누구도 알면 안 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그리스도인을 찾는 것은 참으로 드뭅니다. 그들 대부분은 주님을 위한 그들의 희생과 섬김에 대해 모든 사람에게 알리고 싶어합니다 - 그들을 영화롭게 하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부족하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입니다. 솔로몬의 노래는 그러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책입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먼저 이 책을 공부하도록 인도하신 주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과의 이 사랑의 관계는 주님을 위한 우리의 모든 섬김의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1장 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뱀이 교활함으로 하와를 속인 것처럼, 여러분의 마음도 그리스도에 대한 단순하고 순수한 헌신에서 벗어날까 봐 내가 두려워한다." 우리는 언제 잘못된 길로 인도됩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단순한 헌신적인 사랑을 잃을 때입니다. 타락한 자가 되기 위해, 도둑질하거나 간음하거나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를 향한 단순한 뜨거운 사랑을 잃었다면, 마귀는 이미 당신을 잘못된 길로 인도한 것입니다.

신랑은 신부의 동산에 와서 먹으라는 초대를 받아들이고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왔노라"(5:1)라고 말합니다. 그분은 지금 그것을 그분의 동산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분은 과일을 따러 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이 취하신 후, 그분은 다른 사람들도 동산으로 와서 함께 먹으라고 초대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삶이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도록 하십니다.

이제 장면이 바뀌고, 지금 신부는 어느 날 밤에 일어난 일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내가 자고 있으나, 내 마음은 깨었느니라"(5:2). 갑자기 그녀는 사랑하는 분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주님은 때때로 우리를 갑자기 부르실 때가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듣기 위해 항상 깨어있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때때로 갑자기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읽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비록 한밤중에 깊이 잠들었을 때라도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즉시 대답했습니다. 창세기 16장 16절과 17장 1절에서, 우리는 13년 동안의 침묵 끝에, 하나님께서 어느 날 갑자기 아브라함을 부르셨다는 것을 읽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즉시 응답했습니다! 다른 많은 일에 몰두하는 가운데서도 그는 항상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주님께서는 한밤중에 사무엘도 부르셨습니다 - 그리고 사무엘은 일어나서 들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신랑이 한밤중에 와서 "내 사랑, 문을 열어 다오"(5:2)라고 부를 때, 신부는 너무 게으른 나머지 옷을 차려입고 문을 열지 않았음을 봅니다(5:3). 그녀는 (자신이 씻은) 발이 더러워지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그분은 직접 문 걸쇠를 풀려고 했습니다(5:4). 그러자 신부는 마음을 바꾸어 문을 열었지만, 사랑하는 분이 가버린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그녀를 부르셨을 때 그녀가 즉시 응답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셨습니다.

그런 일은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지금 하고 있는 모든 일을 내려놓아라. 그 책을 그만 읽어라. 그 대화를 멈추어라. 나와 단둘이서 이야기하자. 함께 산책하러 가자."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중요한 할 일이 있어요. 15분 안에 끝나요. 그러고나서 제가 갈게요." 그리고 15분 뒤에, 그 중요한(?) 일을 마쳤을 때, 우리는 "주님, 이제 준비가 되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이 가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그분을 찾을 수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많은 신자들의 경험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친구들과 나누는 대화, 우리가 읽고 있는 책, 우리가 하고 있는 일 등보다 그분이 우리에게 더 중요한지 시험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기꺼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지 알아보기 위해 우리를 시험하실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유능한 종이 되고 싶습니까? 주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 습관을 기르십시오. 당신은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랑은 신부에게, "내가 밤에 밖에 있었는데 이슬에 젖었도다"(5:2 - Living)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이 세상의 어두운 밤에 잃어버린 양을 찾으시면서 십자가의 길(자기-부인의 길)을 걸으시고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이제 그분은 자신의 신부에게도 같은 길을 걷도록 초대하십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녀는 마음을 바꾸어 일어나 그 길을 걷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신랑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다음 그녀는 다시 파수꾼(장로들)에게 갔습니다. 그녀는 이전에 그들과의 접촉으로부터 그들이 그녀를 도울 수 없다는 교훈을 배우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의 길을 전혀 모릅니다. 이번에는 그들은 그녀를 때리고 그녀에게 상처를 입혔습니다(5:7). 그 장로들은 세상적이고 율법주의적이어서 말로 그녀에게 상처를 입혔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향한 그녀의 열렬한 헌신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현실적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하며 주님께 그렇게 열광적으로 헌신하는 데만 몰두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을 모르는 설교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당신의 유일한 주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인 것 같다고 비난할 것입니다 - 마치 그게 범죄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자 파수꾼들은 그 여자의 베일(숄)을 벗겼는데, 이는 그 여자가 그렇게 정숙한 옷을 입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녀를 공개적으로 모욕했습니다.

그 경험 후에, 신부는 마음이 미지근한 신자들(예루살렘 여인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이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병에 걸렸다고 말하라"(5:8). 그것은 시간낭비였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미지근한 사람들은 결코 그녀가 주님을 찾도록 도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녀처럼 그분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그녀에게 질문을 했을 때, 그녀는 그분에 대한 존경심을 열광적으로 표현하면서 자신이 그분을 존경하는 이유를 정확히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로 결론짓습니다, "그분은 정말 사랑스럽습니다. 그분은 나의 사랑하는 이시요 나의 친구입니다"(5:16 - KJV).

예수님이 당신의 구세주일 뿐만 아니라, 당신의 친구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당신의 지상 남편/아내는 어떻습니까? 그/그녀는 지구상에서 당신의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합니까? 그래야 합니다. 많은 남편과 아내는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서로에게 가장 좋은 친구는 아닙니다. 그들의 가장 친한 친구는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발견됩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가장 가깝고 소중한 친구이십니다 - 심지어 내 아내보다도 더 가깝습니다. 하지만 지상의 사람들 중에서 내 아내는 나의 가장 가깝고 가장 친한 친구입니다 - 그리고 그녀는 내 평생 동안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그리스도인 생활과 결혼 생활을 극도로 행복하게 만들었습니다.

마침내, 신부는 그분의 동산에서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발견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이의 것이요, 나의 사랑하는 이는 내 것이라"(6:2,3). 이것은 2장 16절에서 "나의 사랑하는 이는 내 것이며 나는 그분의 것이라"고 말한 것과는 다릅니다. 여기에는 진전이 있습니다. 사랑의 초기 단계에서는, "나의 주는 나의 것"을 강조했습니다. 이제 그녀의 강조점은 " 나는 나의 주님의 것입니다"로 바뀌었습니다. 우리가 어리고 미성숙할 때, 우리는 소유욕이 더 강해지고, 주님은 우리에게만 속해 있다는 사실을 더 많이 생각하게 되며, 주님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위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궁금해하게 됩니다. 우리가 성숙해짐에 따라, 우리는 주님께 완전히 항복하는 것과, 주님께서 우리의 단 한번의 지상 생활에서 우리로부터 가능한 모든 것을 얻으시는 것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다음 신랑은 신부에 대한 진가를 인정하는 표현을 합니다(6:4-10). 그분은 모든 여자 가운데 그분의 완전한 신부와 같은 자가 없으며 다른 누구보다 그녀를 선택했다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남편은 아내를 이렇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에는 매력적인 여자가 많지만, 내 아내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내 눈에는 그녀가 1순위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세상의 모든 영리한 사람, 부자, 위대한 사람보다 우리를 더 높이 평가하십니다.

6장 10절에서, 그분은 자신의 신부를 "깃발을 든 군대"에 비유하십니다. 이 신부는 부드러운 계집애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사탄과 지옥의 군대와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강한 전사였습니다. 그녀는 또한 "해처럼 순결한" 양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6장 13절에서 그녀는 '평화의 사람'이라는 뜻의 술람의 여인, 즉 술람미의 여자(Shulamite)이라고 불립니다. 술람(Shulam)은 '평화'를 뜻하는 히브리어 '샬롬'에서 유래됐습니다. 여기에는 군인으로서 주님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어둠의 세력과 싸우면서도, 동시에 온 인류와 화평하게 지내는 신부가 있습니다!

성숙한 사랑

이제 신랑을 향한 신부의 사랑이 성숙한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7장 1~9a절에서 우리는 신랑이 신부를 어떻게 감탄하시는지 읽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께서 실제로 우리를 감탄하며 바라보시고 우리의 진가를 인정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보아야 합니다. 많은 신자들은 단지 주님께서 자신들을 감탄하신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기 정죄를 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신랑이 신부의 입술을 감탄할 때, 신부는 실제로 그것이 그분의 입술에 더 해당된다고 재빨리 대답합니다(7:9b)! 이것은 둘 사이의 높은 수준의 친밀함, 즉 우리가 주님과 가져야 할 친밀함의 유형을 말합니다.

7장 10절에서 신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이의 것이고 그분의 열망은 나를 향한 것입니다." 이것은 6장 3절보다 훨씬 더 높은 사랑의 차원입니다. 여기서 신부는 단지 주님이 자신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또한 그녀를 기뻐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는 것과 주님께서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지만, 아내의 행동 방식이 만족스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실 수 있지만, 당신의 삶에서 많은 것들을 기뻐하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성숙한 사랑은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이제 신부는 신랑과 동역자가 되어 "내 사랑, 가요. 우리가 들판으로 나가요"라고 말합니다(7:11). 신부는 이제 신랑과 함께 추수할 들판이 무르익어 가는 궁핍한 세상을 걱정합니다.

하지만 절대 혼자서 그 들판으로 가지 마세요.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신랑)과 함께 그곳으로 가십시오. 그분과 관계를 맺은 다음, 그분을 섬기십시오. 그분은 당신이 그분을 위해 수고할 수 있는 분야를 가장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내가, 나의 사역에서 주님을 섬기려고 한 방식입니다. 나는 결코 혼자서 어디에도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당신이 길을 인도하시면, 나는 당신과 함께 갈 것입니다. 우리 같이 들판으로 가요.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말해주세요. 그리고 당신이 어딘가에 가시지 않는다면, 나도 거기로 가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교제하고 그분께 복종하면서 주님을 섬긴다면, 우리 삶에는 어떤 자랑도 없을 것이며, 우리의 사역을 다른 사람의 사역과 비교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부는 그분의 포도원을 위해 신랑의 짐을 나누어 집니다. 그녀는 일찍 일어나서 거기 열매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그분과 함께 가고 싶어합니다(7:12). 그녀는 잔치에 앉아 그분의 사랑을 누리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2:4에서처럼). 그녀는 그렇게 했지만, 지금은 더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또한 교회의 젊은 신자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포도원을 관리합니다(1:6과 달리). 그러나 그녀는 또한 교회들에서 주님의 역사가 어떻게 발전하고 있는지 보고 싶어합니다. 그녀는 "꽃이 피었는지", "석류꽃이 피었는지" 보고 싶어합니다(7:12). 그리고 그녀는 사랑하는 이에게 "거기서 내가 당신에게 나의 사랑을 드리겠어요"라고 말합니다. 그녀의 모든 사역 가운데서, 그녀는 주님과 함께 걷고 그분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은 "사랑하는 분을 위해 쓰지 않고 간직해 두었습니다"(7:13).

8장은 언젠가 천국에서 사랑하는 분과 완전한 연합을 이루기를 바라는 신부의 갈망을 표현합니다. "그녀의 사랑하는 이에게 기대어, 땅의 광야에서 올라오는 이 사람은 누구냐?" (8:5) - 교회가 사랑하는 이에게 영원히 의지하기 위해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지는 날을 의미합니다 - 마치 요한이 예수님의 가슴에 기대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나를 도장처럼 당신의 마음에, 도장처럼 당신의 팔에 새기십시오"라고 그녀는 요청합니다(8:6). 그녀는 사랑하는 분과 결코 분리되기를 원하지 않으며 그분의 마음과 팔에 영구적인 자리를 원합니다 - 사람들이 팔에 새기는 문신처럼요.

8:6,7은 사랑과 질투를 함께 말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언제나 질투합니다 - 경건한 질투는 다른 사람이 상대방을 소유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고후 11:2). 오직 그분만을 위하여, "주께서는 우리의 영을 질투하시기까지 사모하십니다"(약 4:5). 그분은 우리가 돈과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오직 그분만을 사랑해야 한다고 매우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당신을 독점적으로 원하는 질투심 많은 남편입니다. 그러한 질투하는 사랑은 가장 밝은 불꽃, 즉 "YHVH(히브리어로 '주(Lord)')의 불꽃"에 비유됩니다. 이곳은 이 책에서 '주'라는 단어가 나오는 유일한 곳입니다(8:6).

많은 홍수도 이 사랑을 끌 수 없고 많은 강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합니다(8:7). 이것이 바로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나타내신 사랑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분에게 미움의 홍수를 쏟아냈을 때, 그분은 아버지께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제 신부는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여동생들에 대한 염려를 표현합니다(8:8). 성숙함의 한 가지 표시는 미성숙한 사람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8장 9절은 소녀가 벽이나 문과 같을 수 있음을 알려주는 흥미로운 구절입니다. 벽은 하나님이 모든 소녀들을 그렇게 되도록 창조하신 것처럼, 겸손하고 조심성 있는 소녀들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문은, 남자들과 자유롭게 지내는 소녀들을 뜻합니다. 열린 문은 언제나 바로 들어오라는 초대입니다 - 그리고 소녀들은 그런 식으로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소녀가 벽과 같다면, 하나님은 그녀를 사용하여 교회("성벽")를 건축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녀가 문과 같다면,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 주위에 "바리케이드"를 만들어 남성과의 접촉을 차단해야 합니다.

8:10은 신부의 영적 성숙을 말합니다. 8장 12절에서, 그녀는 그녀의 포도원 열매의 주요 부분(1000세겔 상당)을 그녀가 사랑하는 분만을 위해 남겨두었다고 말합니다. 그 양의 20%(200세겔 상당)만이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주된 사역은 사람을 향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든 섬김의 방식입니다. 주님이 첫째가 되어야 하고 다른 모든 것은 둘째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먼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다음에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8장 13,14절에서 그녀는 사랑하는 분이 속히 오시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합니다. 이것은 그녀가 2:17에서 말한 것보다 더 높습니다. 그곳에서 그녀는 그분과의 교제를 회복하기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그녀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서 사랑하는 분과의 마지막 연합을 갈망하고 있습니다(계 19:7). 이것이 영광의 궁극적인 높이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성경책이 끝날 때처럼, 신부가 주님에게 속히 오시기를 부르짖는 것으로 끝납니다.

"주 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 나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노래입니까! 나는 여러분 모두가 결혼 생활과 주님과의 관계에서 평생 동안 이 노래의 좋은 점 안에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아멘. 그렇게 되길 바랍니다.

장 23
이사야

심판과 위로에 대한 예언

이사야서는 구약 17권의 예언서(이사야부터 말라기까지) 중 첫 번째 책입니다.

이사야서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이사야는 그의 책을 여러 장으로 나누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더 쉽게 참조할 수 있도록 성경을 장과 절로 나눈 것은 불과 몇 세기 전의 일입니다. 따라서 장 구분에는 영감받은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야서가 6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은 흥미롭습니다 - 마치 성경이 66권의 책으로 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구약이 39권이고 신약이 27권인 것처럼, 이사야서의 첫 번째 부분은 39장이고 두 번째 부분은 27장입니다! 그리고 이사야서의 첫 번째 부분은 구약의 예언을 다루고, 두 번째 부분은 신약의 예언을 다루고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분에서 가장 중요한 장은 6장입니다. 그곳에서 이사야는 먼저 보좌에 앉으신 주님을 보았고, 그 후에야 그분을 섬기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하나님을 죄를 미워하시고 죄를 심판하셔야 하는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보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효과적으로 섬기려면, 우리 역시 이 진리를 분명히 보아야 합니다.

두 번째 부분에서 가장 중요한 장은 53장입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털 깎는 자들 앞으로 끌려가서 털을 깎이고 도살된 어린 양을 봅니다.

보좌와 어린양에 관한 이 두 가지 진리는 요한계시록 5장에서 함께 다루어지며, 그곳에서 우리는 어린양이 보좌 가운데 계신 것을 봅니다.

사람으로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이 땅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그리고 모든 사람의 종으로 사셨습니다. 이사야서도 마찬가지로, 53장(십자가의 장) 전에 두 번째 부분의 장들(40-52장)에서 예수님을 여호와의 종으로 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사람을 섬겨야 합니다.

이 책에는 하나님에 대한 두 가지 칭호가 자주 등장합니다: '만군의 주(Jehovah Tsabaoth - 여호와 차바오트)'는 62회,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는 30회 나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을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주권적으로 다스리시는, 천사 군대의 하나님을 지칭합니다. 두 번째는 그분의 거룩함을 강조합니다. 이 책에서는 이 두 가지 진리를 모두 강조합니다.

이사야서는 구약의 다른 어떤 책보다 그리스도에 관한 더 길고 명확한 예언을 담고 있으며, 그 안에는 "구원"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합니다.

이사야는 유다 나라에 약 50년 동안 예언했습니다. 경외 전설에 따르면 그는 마침내 "둘로 톱질을 당했다"고 합니다(히 11:37). 그는 자신이 예언한 메시아처럼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는 잡히지 않기 위해, 속이 빈 통나무 속에 몸을 숨겼습니다. 그러나 그가 발각되자, 그들은 통나무를 둘로 쪼개어 그를 죽였습니다. 이사야는 강한 말로 하나님의 진리를 전한 용감한 선지자였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에게 말할 때, 그들을 "소돔의 통치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사 1:10). 그것은 강한 말이었습니다 - 그리고 지도자들이 그를 톱질하여 두 동강 낸 것이 놀랍지 않습니다!

선지자는 결코 인기가 없습니다 -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세상에 선지자가 거의 없는 이유입니다. 이사야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거나 감동을 주려고 노력하지 않았습니다(오늘날 대부분의 설교자들이 하는 것처럼). 그는 자신의 말 때문에 사람들이 기분이 상하고, 상처받고, 속상해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을 전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들은 그의 말을 거부하고 심지어 그를 죽이겠다고 위협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겁먹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의 하나님께 충실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백성에게 한 말은 마지막 날에 그들을 심판할 것입니다.

이 책의 첫 번째 구절은 이사야가 주로 남쪽 왕국 유다에 관해 예언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대한 언급도 많이 있습니다. 북쪽 왕국 이스라엘은 심하게 타락하여 곧 앗수르에게 포로로 잡혀갈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는 비슷한 형세로부터 유다를 구하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습니다.

심판에 대한 예언(1-27장)

1장부터 12장은 유다에 대한 심판 예언입니다. 13장부터 27장은 다른 나라들에 대한 심판 예언입니다.

1장에서, 이사야는 유다의 타락한 상태를 묘사합니다. 북쪽 이스라엘 왕국에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강력하게 전한 엘리야와 엘리사와 같은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다에는 그런 사람이 없었습니다. 유다의 가장 뛰어난 왕들(르호보암, 아사, 여호사밧, 요아스, 웃시야)도 통치를 잘 시작했지만, 통치가 끝날 무렵에는 하나님에게서 돌아섰습니다. 유다에는 경건한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 나라는 매우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이사야는 그들이 가진 최초의 주요 선지자였습니다. 그의 예언의 결과로, 유다는 마침내 선한 왕 히스기야를 얻었습니다. 한 명의 선지자가 한 국가(또는 오늘날의 교회)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은 놀랍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를 교회에 보내실 때마다, 항상 그 교회를 위한 좋은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지자들은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고 이단이라 불립니다.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평화와 번영의 메시지를 전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듣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도 같은 선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사야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참 선지자는 항상 거짓 선지자와 충돌해 왔습니다. 그들은 3000년 전에도 그랬고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는 제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되,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느니라"(1:3). 이스라엘은 자기의 주인과 임자를 알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동물들이 더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동물보다 낮은 수준으로 떨어지는 것은 참으로 비극적인 일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버렸을 뿐만 아니라, 또한 멸시 했습니다(1:4). 주님은 그들의 상태를 이렇게 묘사하십니다: "발바닥부터 머리까지 성한 것이 없느니라"(1:6). 그것은 죄 많은 인간의 상태를 완벽하게 보여 주는 그림이기도 합니다.

1:11-15을 의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의 모든 기도 모임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나는 그들에게 관심이 없다. 나는 너희의 특별한 모임과 성경 공부 모임을 싫어한다. 나는 너희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의 삶에 죄가 있기 때문이다."

많은 기도 모임은 기도하는 사람의 양심이 깨끗하지 않기 때문에 시간낭비입니다. 그들의 삶에는 자백하지 않은 죄가 있습니다. 당신의 양심이 깨끗할 때, 기도 모임은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양심이 깨끗하지 않다면, 오히려 기도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그런 기도를 듣지 않으시기 때문에, 기도는 시간 낭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기도하는 것보다 자는 것이 더 낫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을 행하고, 정의를 구하며, 고아를 변호하고, 과부를 위하여 변론하며, 악행을 그치고, 가난한 자를 착취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분은, 만약 그들이 그들의 죄를 자백한다면(이것이 항상 첫 번째 단계입니다), 그들의 마음을 "눈과 같이 희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1:18). 한때 신실했던 도시, 예루살렘이 창녀가 되었습니다(1:21). 야고보는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할 때 이사야와 비슷한 말을 사용했습니다: "너희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임을 알지 못하느냐"(약 4:4). 야고보 역시 이사야와 같은 선지자로서 교회가 들어야 할 말을 전했습니다. 오늘날 인도 교회에는, 신자들에게 진실을 말할 야고보와 이사야와 같은 선지자가 필요합니다 - 분노나 증오가 아니라 사랑과 연민으로.

2장에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세워질 날에 대해 이야기하며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올 것이고, 그분이 열방 가운데서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2:1-4).

그 날에는, "사람의 교만한 눈이 낮아지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입니다"(2:11). 하나님의 가장 큰 충돌은 언제나 교만한 자들과의 충돌이었습니다. 교만은 하나님의 본성과 정반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매일 24시간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십니다 - 그들이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간에 말입니다. 모든 교만한 사람은 겸손해질 것입니다 - 조만간. 교만은 다른 어떤 죄보다 더 많은 사람을 지옥에 보냅니다. 이 땅에서 지혜롭고 유용한 삶을 살고 싶다면,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동료를 향해 항상 겸손하게 행하십시오. 당신이 가진 것 중 하나님께 받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당신의 삶에서 오직 그리스도만이 높임을 받으실 수 있도록, 항상 이 땅에서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되기를 기꺼이 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든 당신을 사용하실 때마다, 당신의 머리를 흙먼지 가운데 두고 그분께 모든 영광을 돌리십시오. 주님은 "교만하고 거만하며 높아진" 모든 사람을 심판하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설명하시는 삼중 강조를 보십시오! 그 날에, 땅의 교만한 자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 위해 바위를 불러 자기들을 숨길 것입니다(계 6:16에서도 읽을 수 있듯이).

사람은 "호흡이 코에 있는" 피조물입니다(2:22). 하나님은 사람에게 매일 호흡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어떤 사람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려는 유혹을 받을 때마다, 이 구절을 기억하십시오. 누군가가 어떤 식으로든 당신에게 해를 끼치려고 계획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한 순간에 그의 숨을 거두실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젊은 시절 나는 수줍음이 많고 내성적인 성격이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할 때마다 긴장을 많이 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굳게 믿지 못했기 때문에, 나의 설교를 통해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싶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이 구절을 통해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내 앞에 있는 사람들을 그저 콧구멍으로 숨을 쉬고 있는 먼지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먼지의 색깔도 달랐습니다 - 어떤 것은 갈색 먼지, 어떤 것은 검은 먼지, 어떤 것은 하얀 먼지, 어떤 것은 황색 먼지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여전히 먼지였습니다! 이 계시를 통해 나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려고 애쓰는 일에서 자유로워졌습니다. 그 후로 나는 사람들을 감동시키려고 노력하는 대신,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도울 수 있었습니다.

3장 10,11절은 의로운 사람들에게 결국에는 형통할 것이라고 확신시키고 악한 사람들에게 결국에는 불행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당장은 그렇게 되지 않을 것 같지만, 최종적으로는 그렇게 될 것입니다.

3장 12절은 이스라엘 백성의 비참한 상태에 대해 말합니다: 그들의 지도자들이 미성숙하고("어린이") 나약하기 때문에("여자") 그들은 그릇된 길로 가고 있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이것은, 오늘날의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에게도 해당됩니다. 미성숙한 지도자는 영원한 것보다 현세적인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나약한 지도자들은 주님을 위한 전사가 아닌 사람들입니다 - 보통 여성들은 전쟁터가 아닌 집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한 지도자들은 진리를 위해 싸우거나 교회에서 죄를 책망하는 데 담대하지 않습니다 - 특히 부자들 사이에서 죄가 발견될 때 더욱 그렇습니다. 만약 당신이 지도자로 부름을 받았다면, 항상 영원한 것을 위해 살기로 결심하고 주님의 전투를 위해 언제나 싸울 준비하세요.

3장 14절에서 주님은 "그분 백성의 장로들(elders)과 방백들(princes)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선지자들은 변함없이 지도자들에 대한 심판의 경고로 시작했습니다 - 왜냐하면 먼저 부패하여 백성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한 사람은 지도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자들에게서 탈취한 물건이 너희 집에 있다. 어찌하여 가난한 사람의 얼굴을 맺돌질하느냐?"(3:15). 오늘날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사람들에게 "주의 일을 위해 돈을 내라"고 자주 요청합니다. 그들은 심지어 사람들에게 십일조를 바치라고 압력을 가합니다 - 그리고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이에 반응하여, 희생적으로 이 설교자들에게 그들이 힘들게 번 돈을 바칩니다. 그런데 이 설교자들은 그것으로 무엇을 합니까? 그들 대부분은 그것을 사용하여 호화로운 방식으로 생활합니다! 이것이 바로 "가난한 자의 얼굴을 맷돌질하는 것"의 의미입니다. 당신이 설교자이고 개인적인 용도로 돈을 선물로 받았다면, 당신에게 돈을 준 사람보다 낮은 기준으로 생활하기 위해 그 돈을 사용하도록 하십시오. 그것이 예수님께서 받으신 돈을 사용하시는 원칙이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예전의 거짓 선지자들처럼) 회중의 가난한 사람들보다 부유한 사람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들은 부자에게는 달콤한 말을 하고 가난한 자에게는 엄한 책망의 말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자들을 택하사 믿음이 부유하게 하시고 그분의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습니다"(약 2:5). 그러므로 참된 선지자는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때 주님은 시온의 여자들, 즉 회심하지 않은 여자들이 아니라, "시온의 딸들"에게 하실 말씀이 있었습니다. 모든 젊은 자매들은 이사야 3장 16-26절을 읽고 경고를 받아야 합니다. 주님은 거기서, "남자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거만하게 점잔을 빼며 걸으며, 발목에 찬 팔찌를 잘랑잘랑이며, 군중 사이를 두리번거리는 음탕한 눈을 가진 여인들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장신구, 목걸이, 팔찌, 반짝이는 얇은 베일, 발찌, 머리띠, 귀걸이 및 기타 반지, 보석, 파티복, 실내복, 망토 및 화려한 빗, 지갑(핸드백), 거울(그들의 핸드백 속에), 사랑스러운 속옷과 아름다운 드레스를 벗겨 버리실 것입니다"(Living Bible).

주님께서는 여자의 복장에 있어서 그처럼 세세한 부분까지 관찰하십니까? 그분은 확실히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딸들이 옷을 입는 방식에 큰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그분은 그리스도인 여성들이 정숙한 옷차림을 하고 결코 남성을 유혹하는 방식으로 옷을 입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성령님께서는 여성들에게 "옷차림을 신중히 하라"고 권면하십니다. 그리스도인 여자들은, 머리를 손질한 방식이나 보석이나 화려한 옷 때문에 주목을 받을 것이 아니라, 친절하고 선한 사람으로 주목받아야 합니다"(딤전 2:9, 10 - Living)

이사야 시대의 여인들이 그처럼 강한 설교를 듣고 얼마나 분노했는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사야를 미워하고 남편에게 그를 죽이라고 부추겼음에 틀림없습니다!

선지자는 일반 설교자와 다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두신 것을 말합니다. 비록 그들의 메시지가 교회의 부자들과 여성들의 마음을 불쾌하게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인기가 없습니다.

4장에서는, 예수님을 "여호와(Lord)의 가지"라고 부릅니다(4:2). 이 장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온 땅에 세워지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1000년 동안 통치하실 날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천년왕국 동안 문자 그대로 일어날 일은, 지금도 교회에서 영적으로 성취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미 교회에서 왕이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그곳에 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구절을 교회에 영적으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심판의 영과 불태우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어내시면, 주님께서 시온 산과 그 회중 위에 밤마다 타오르는 불빛을 창조하실 것이며; 모든 영광 위에 덮개를 두실 것이다"(4:4,5). 교회 안으로, 특히 "시온의 딸들" 안으로 들어온 세상의 영은 불로 깨끗이 씻어져야 합니다. 그러면 광야의 성막 위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이 교회에서도 나타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요구되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심판의 영과 불태우는 영"입니다. 그리하면 그 이름이 하나님의 책에 기록된, 시온에 사는 자마다 거룩하다 일컬음을 받을 것입니다(4:3). 주님은 또한 그분의 영광 위에 덮개를 두실 것입니다(4:5). 구약의 성막에서는, 아름다운 휘장이 안쪽에 있었습니다. 바깥 덮개는 동물 가죽으로 만든, 더러운 갈색의 덮개였습니다. 교회에도 남들이 볼 수 없는 내면의 영광이 있어야 합니다. 외적으로, 참된 교회는 항상 치욕(비난)으로 뒤덮일 것입니다(히 13:13). 이것은 영적인 교만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할 것입니다(6절).

5장 8-23절에서, 이사야가 여섯 부류의 사람들에게 "화(저주)"를 선포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6장 24-26절에서도 예수님께서 "화"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것을 봅니다. 이사야는, 가난한 사람들이 살 곳이 없도록 재산을 광범위하게 사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사람들;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감각적 쾌락(술과 파티)에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 계속해서 죄를 짓고 그들을 벌하시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들; 악을 선하다 하고 선을 악하다 하는 사람들, 자신의 영리함을 자랑스러워하는 사람들; 뇌물을 받아 무고한 사람을 정죄하는 사람들에게 저주를 선언합니다. 그렇게 오만하고 교만한 사람들은 모두 언젠가 하나님에 의해 낮아질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이 이런 것들을 미워하고 저주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필요성이 얼마나 큰지요.

6장은 이사야서 첫 부분의 중심 장입니다. 여기서 이사야는 자신을 겸손하게 하신 주님에 대한 환상을 묘사합니다. 그는 높은 보좌에 앉아 계신 주님과 스랍핌('seraphim'은 'seraph'의 복수형)이라고 불리는 수많은 천사들이 그분께 경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스랍들은 각각 여섯 개의 날개를 가지고 있었고, 네 개의 날개로 몸을 덮고 두 개로 날았습니다. 즉, 그들은 네 날개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경배하고, 두 날개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아버지께서는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또한 사탄의 시험에 대해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worship) 하고 그를 섬기라(serve)"는 말로 대답하셨습니다. 경배가 봉사보다 먼저 이루어져야 함을 주목하십시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더 많이 하나님을 경배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더 많이 경배할수록, 그분을 위한 우리의 봉사는 더욱 효과적이 될 것입니다.

예배(worship)는 우리 자신과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완전히 내어드리고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헌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배는 감사와 찬양 그 이상입니다. 예배에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위대하심을 인식하고, 그분을 만주의 주, 만왕의 왕으로 인정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죄를 지은 적이 없는 이 스랍들은 하나님을 쳐다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분 앞에서 얼굴을 가렸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거룩함의 "가까이 갈 수 없는 빛"에 대해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딤전 6:16).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의를 통해 그분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특권입니다.

이사야는 이 모든 것을 보고 깊이 자신의 죄를 깨달았습니다. 방금 다른 사람들에게 "화 있을진저"라고 선언하던 사람이, 이제 자신에게 "화 있을진저…"라고 선언합니다(6:5)!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선언한 "화" 중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하나님 앞에 홀로 서서 자신 안에 있는 죄를 보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볼 때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여전히,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고 주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그들을 반대하는 말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의 육신에 있는 죄를 보게 될 것입니다.

강단에 서서 죄에 맞서 설교하는 모든 선지자와 설교자는 먼저 자신의 육신에 있는 죄를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곧 타락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많은 설교자들은, 이사야처럼 "내게 화 있을진저"라고 외치거나 바울처럼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내 육신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느니라."라고 외치지 않습니다(롬 7:18,24).

이사야는 특히 그의 말에 대한 죄를 깨달았습니다. 그는 "주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6:5). 그러자 스랍 중 하나가 집게로 제단에서 숯을 가져다가 즉시 이사야의 입술을 깨끗하게 해 주었습니다. 이사야가 고백한 죄는 즉시 용서를 받았습니다. 천사가 만질 수 없었던(집게가 필요했던) 불은 이사야의 입술에 닿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천사가 받을 수 없는 기름 부음을 하나님께 받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이곳에서 보좌와 제단에 대한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내가 누구를 보내야 하느냐? 누가 우리를 위해 갈 것인가?"(6:8)라고 물으십니다. 이사야는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대답합니다. 우리는 보좌와 제단을 끊임없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환상을 보며 흙먼지에 엎드려야 하고, 그 다음에는 제단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하였기 때문에 들려 올려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나가서 주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내시지 않으면, 우리는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내심 없이 우리가 간다면, 우리의 수고는 헛될 것입니다. 인도의 많은 "기독교 사역자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어떤 단체나 사람이 그들을 선교지로 보냈습니다. 아니면 그들은 스스로 갔을 수도 있습니다. 인도와 같은 광활한 나라에서는 기독교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쉬운 일입니다. 그 필요성이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원히 지속되는 열매를 원한다면,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보내셔야 합니다. 다른 경건한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부르심을 확인해 줄 수도 있지만 우리를 부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과 바나바를 개인적으로 부르셔서 그분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그 부르심에 대한 확인은 나중에 다른 선지자들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행 13:1-4).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무엇을 전파할지 우리에게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그분은 이사야에게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라고 말씀하셨습니다(6:9).

하나님은 이사야 시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동일하십니다. 새 언약 아래서는,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에 거하시기 때문에, 지금 우리는 당시 이사야가 들었던 것처럼 육신의 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마음 속에서 그분의 음성을 듣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음성은 그만큼(이사야가 귀로 들었던 것만큼) 분명합니다. 나는 육신의 귀로 주님의 음성을 들은 적이 없으며, 육신의 눈으로 주님이나 천사를 본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지난 56년 동안 내 마음 속에서 그분을 분명히 보고 그분의 말씀을 분명히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눈으로 보지 않고 그분을 믿는 사람들이, 실제로 그분을 보고 믿는 사람들보다 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20:29).

주님께서 이사야에게 주신 사명은 매우 어려운 사명이었습니다. 그분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내 백성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너희는 내 말을 반복해서 들어도, 그것들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내가 기적을 행하는 것을 너희가 보기는 보아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이해력을 둔하게 하고,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나는 그들이 보거나 듣거나 깨달아서, 나에게 돌아와 고침받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6:9,10). 이것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를 설명하실 때 인용하신 구절입니다(마 13:15).

그럼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볼 수 있나요? 하나님에 대한 환상, 자신에 대한 환상, 용서하는 은혜에 대한 환상, 기름부음받은 섬김에 대한 환상, 마지막으로 열매에 대한 환상입니다(6:13). 타락한 유다 나라에서 거룩한 씨가 나올 것입니다. 우리의 섬김을 통해 주님을 위해 남은 자들이 세워질 것입니다.

7장 14절에는,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놀라운 예언이 있습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마 1:23에서 인용됨).

8장 12,1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합세하여 그들을 치러 오는 군대로 말미암아 두려워하는 그의 백성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인도 곳곳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하는 반기독교 세력을 목격하고 있는 우리에게 매우 적절한 말씀입니다. 주님은 "너희는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러나 그분은 너희의 두려움이 되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구절은 베드로전서 3:14,15에 인용되어 있습니다. 리빙 바이블(Living Bible)은 이 구절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다른 것은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40여 년 전, 나는 이 구절을 커다란 나무 명판에 써서 집 현관에 눈에 잘 띄게 붙여 놓았습니다. 이 구절은 나와 다른 많은 사람들이 사람과 환경에 대한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힘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두려워해야 할 한 분을 두려워하도록 격려해 주었습니다 - 바로 하나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제자들에게 "너희 몸은 죽일 수 있으나, 너희 영혼은 건드릴 수 없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오직 영혼과 몸을 모두 지옥에서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만 두려워하라!"라고 당부하셨습니다(마 10:28 - Living).

이사야 8장 18절은 신약성경 히브리서 2장 13절에 인용된 또 다른 구절입니다 - 거기에서 예수님과 우리를 언급합니다. "보라, 나와 주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은 표적과 기적을 위한 것이다." 그것은 가족인 우리에게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들을 그들의 도덕적 성품과 야망에 있어서 세상의 다른 아이들과 다른 방식으로 키워야 합니다. 우리와 우리 자녀들은 항상 영원의 가치를 염두에 두고 산다는 점에서, 우리 주변 세상에 표적과 기적이 되어야 합니다. 불행하게도 신자와 불신자를 나누는 선은 수년에 걸쳐 사탄에 의해 점차 지워졌습니다.

9장 2절은 마태복음 4장 16절에도 인용되어 있습니다: "어두움 속에서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보리라." 이것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사람들을 방문하신 것을 가리킵니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도 적용되는데, 우리가 어디를 가든 어둠 속에 빛을 비추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9장 6,7절은 예수님에 대한 예언적 언급입니다. 그분은 "기묘자(Wonderful), 모사(Counselor), 전능하신 하나님(Mighty God), 평강의 왕(Prince of Peace), 영원하신 아버지(Eternal Father)"라고 불릴 것입니다. 여기서 '영원하신 아버지(Eternal Father)'라는 말은 '영원의 아버지(Father of eternity)'를 의미할 뿐, 아버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9장 6절에 보면, "통치(government)가 그분의 어깨 위에 놓일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내가 사역하는 데 엄청난 도움이 되었습니다. 지난 40년 동안, 우리는 주님께서 인도에서 우리의 사역을 통해 개척하신 교회에서 종종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 이는 성장하는 자녀를 둔 모든 부모가 직면하는 것과 유사한 문제입니다. 우리 교회 중 한 곳에서 나를 당혹스럽게 하는 문제에 대해 들을 때마다, 나는 대개 하나님 앞에 엎드려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이것은 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당신의 일입니다. 이것들은 나의 교회가 아닙니다. 당신의 것입니다. 그들의 통치는 당신의 어깨 위에 있습니다. 책임은 당신의 것입니다. 교회를 폐쇄하고 싶다면, 폐쇄하십시오. 그것은 당신의 일입니다. 나는 단지 당신의 종입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그것을 하겠습니다." 소유자는 원할 경우 그의 상점을 폐쇄할 모든 권리를 갖습니다. 나는 주님께서 폐쇄하기를 원하시는 어떤 일을 열어 두려고 결코 노력하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크리스천 사역자들이 하나님이 그 안에 계시지 않음이 분명해진 지 한참이 지난 후에도, 자신이 시작한 일을 지탱하기 위해 끊임없이 애쓰고 있습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 일의 통치를 자신의 어깨에 짊어졌기 때문입니다. 통치가 주님의 어깨 위에 있을 때, 크리스천 사역에서 스트레스와 부담은 사라집니다. 그것이 나에게 안식을 가져온 것처럼, 당신의 삶에도 안식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주님의 일에 대한 책임은 영원히 그분께 있습니다. 우리는 종일 뿐입니다.

10장은 당시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었던 앗수르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앗수르의 왕은 적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10장 27절에는, "기름 부음으로 말미암아 멍에가 부러지리라"고 되어 있습니다(KJV). 죄와 사탄의 멍에를 깨뜨리고 파괴하는 것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입니다 - 우리의 삶과 가정과 교회에서.

10장에 묘사된 적그리스도의 통치와 대조적으로, 11장에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언급된 (그리스도 위에 임하실) 일곱 가지 성령은 여기서 여호와의 영, 곧 지혜, 총명, 모략, 능력, 지식,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으로 불립니다. 3절에 따르면 성령님은 예수님에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데 예민하게 하셔서, 그분(예수님)이 눈으로 본 것, 귀로 들은 것으로 결코 판단하지 않고, 내면의 성령의 음성에 따라 의로 판단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우리의 모범이 되십니다. 우리 역시 우리의 눈이나 귀가 말하는 대로 어떤 사람이나 상황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대신, 우리는 모든 상황에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해, 성령을 통한 분별력을 주님께 구해야 합니다.

사자와 늑대와 어린 양이 함께 누울 때가 올 것이며(6절) - 그리스도께서 이 땅을 다스리시는 천년왕국에서; 그리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모두 이끌 것입니다(6,7절).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그분의 나라를 세우시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상황이 도처에 만연할 때, 문자 그대로 성취될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지금도 교회 안에서 사실입니다. 이제 늑대 같은 형제는 양 같은 형제를 잡아먹으려고 하지 않고 교제합니다! 표범 같은 자매는 염소 같은 자매를 잡아먹지 않고 함께 누워있습니다! 그리고 이 교회의 지도자는 어린아이, 즉 가장 어린아이 같은 형제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은 어린아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12장은 구원의 기쁨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나는 기쁨으로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크게 외치며 즐겁게 부르라, 너희 가운데 계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위대하심이니라"(2,3,6절).

13장부터 23장은 중동의 여러 나라에 관한 예언입니다. 그 다음에는 심판과 축복의 예언으로 가득한 열 두장이 이어집니다 - 35장까지.

13장은 요한계시록 17장과 18장에 묘사된 바벨론의 멸망에 관한 것입니다.

14장은 계속해서 바벨론의 멸망을 묘사합니다. 이 광대한 종교 및 상업 체제인 바벨론의 통치자는 누구입니까? 한때 하늘에 있었던, "빛나는 이, 아침의 별"(12절)이라 불리는 이입니다. 그는 일반적으로 루시퍼라고 불립니다. 이는 KJV 번역에서 그 이름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가 마음속으로, "내가 하겠노라(I will)"고 다섯 번 말한 것을 봅니다. 그래서 그는 마귀가 되었습니다(13,14절). 이것이 바로 죄가 처음으로 우주에 들어온 방법입니다.

죄는 피조물이 "내가 할 것이다(I will)"라고 말했을 때 왔습니다. 그리고 구원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루어졌습니다 - 단 한 번이 아니라, 그 분의 평생 동안입니다 - 요한복음 6장 38절에서 그분이 직접 말씀하신 것처럼: 내가 하늘에서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당신이 자신의 뜻을 행할 때마다 죄의 길에 있다는 사실을 평생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자신의 뜻을 부인할 때마다, 당신은 참된 거룩함의 길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걸어가라고 명하신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우리 자신의 뜻을 잘라내는 길입니다. 우리 모두는 매일 루시퍼 또는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습니다. 자기 의지가 최종적으로 바벨론을 건설하는 것입니다.

15장부터 23장은 모압, 다메섹, 이름 없는 나라, 애굽, 에티오피아, 에돔, 아라비아, 두로에 대한 예언입니다. 19장 24절과 25절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연합하여, 애굽과 앗수르와 이스라엘이 다 한 교회에서 형제와 자매가 되는 날의 아름다운 그림이 나옵니다.

20장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이사야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갈 때 어떻게 걸을 것인지 보여 주기 위해 속옷 차림으로 외투나 샌들도 신지 않고 맨발로 다니라고 명하신 것을 봅니다.

22장 13절에서 우리는 "내일 죽을 까닭에 먹고 마시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에 대해 봅니다 - 왜냐하면 그들은 영원에 대한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고린도전서 15장 32절에도 인용되어 있습니다.

22장에서 우리는 두 사람에 대해 봅니다:

1. 셉나, 히스기야 왕의 재무 장관,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사람이자 적그리스도의 모형(15-19절).

2. 엘리아김, 경건한 사람, 그리스도의 모형, "확실한 곳에 박힌 못, 견고한 곳에 박힌 말뚝"(20-25절).

23장은 두로의 멸망을 묘사합니다.

24장부터 27장은 주의 날에 관한 예언입니다. 24장은 땅의 멸망(1-20절)과 귀신들의 멸망(21-23절)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25장 8절은 어느 날 부활 때에 사망이 삼켜질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26장 3절은 마지막 날에 우리의 마음을 평안하게 할 수 있는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에게 마음을 두는 자들을 완전한 평강으로 지키실 것이다". 13절은 주님께 완전히 항복하는 좋은 구절입니다: "주님, 전에는 다른 주인들이 우리를 다스렸나이다. 그러나 이제부터, 오직 당신만이 우리를 다스리실 것입니다." 19절은 다시 부활에 대한 예언입니다: "너희의 죽은 자들이 일어나고, 티끌에 누웠던 자들이 살아나리라." 20절은 큰 환난의 짧은 기간을 언급합니다; 그리고 21절에는 주님께서 그분의 성도들을 위해 이 땅에 다시 돌아오시는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그런 다음 27장은 뱀인 사탄의 멸망과, 주님의 포도원이 어떻게 회복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심판과 축복에 대한 예언(28-35장)

28장에는 신약성서에서 인용된 몇 구절이 있습니다. 11절은 고린도전서 14장 21절에 사람들이 방언을 하게 될 때에 대한 예언으로 인용되어 있으며, 오순절 날에 성취되었습니다. 16절은 교회의 모퉁잇돌이신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이 모퉁잇돌을 신뢰하는 사람은 결코 흔들리거나 불안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결코 서두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확고한 기반을 마련할 것입니다." 20절은 인간의 의가 인간을 완전히 덮을 수 없음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21절은 심판이 하나님께는 "흔치 않은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분은 사람을 심판하는 것을 꺼려합니다. 28절과 29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해, 그분의 크신 지혜로 어떻게 우리를 깨뜨리시는지를 말해 줍니다. 그분은 우리의 능력을 넘어서는 시험을 우리에게 결코 허용하지 않으실 것이며 언제 단련을 멈춰야 할지 아신다고 우리를 안심시킵니다.

29장은 타락한 상태에 있는 예루살렘(아리엘 - "하나님의 사자" - 히브리어)을 말합니다. 11절과 12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성한 계시가 필요함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7:6,7절에서 13절을 인용하여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폭로하셨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거민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실 때 그 곳이 기름진 밭처럼 될 것입니다(17절).

30장 9-11절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선지자와 선견자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내용을 봅니다: "우리에게 진리를 예언하지 말라. 우리에게 즐거운 말을 하여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에 관해 우리에게 말하지 말라." 오늘날 우리는 교회에 있는 선지자들의 메시지에 대해 많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동일한 태도를 발견합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이 모두 회개하기를 기다리십니다(15-18절). 그분은 자신에게 돌아오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해 기다리십니다(18절). 그리고 돌이키는 자들은 그들의 스승이신 예수님을 보게 될 것이며(20절), 그들이 올바른 길에서 벗어날 때 그들을 바로잡아 주시는 성령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21절).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적그리스도가 지옥에 던져지는 것을 읽습니다(33절 - 도벳은 지옥의 그림입니다).

31장은 도움을 구하기 위해 사람(애굽)에게 가는 사람들에게 임하는 저주를 언급합니다(렘 17:5-8 참조). 32장은 다가오는 그리스도의 통치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가 3장에서 말한 여인들은 이제 회개하라는 권유를 받습니다(9-12절). 다시 말하지만, 회개하는 자에게 성령이 부어지고(15절), 그 결과 의와 평강을 얻게 됩니다. 33장 14-16절에서, 이사야는 매우 예리한 질문을 던집니다: "누가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소멸하는 불과 함께 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그분께서는 "의롭게 행하고 진실하게 말하는 자들"이라고 직접 대답하십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고 위선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떨고 있다고 말합니다. 34장은 열국에 대한 주님의 복수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35장에서, 우리는 새 언약과 대속받은 자들이 걸어갈 거룩함의 길에 대해 읽습니다(35:8,10).

히스기야가 앗수르인들과 질병으로부터 구출됨

다음 네 장(36장부터 39장)은 히스기야 왕 통치 중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역사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장들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영적인 교훈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배우는 첫 번째 교훈은,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37장)나 병들었을 때(38장) 히스기야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께로 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고, 우리를 치료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히스기야의 실수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의 첫 번째 실수는 하나님께서 그의 지상 생활이 끝났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의 생명을 연장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한 것이었습니다(38:1-5). 떠날 때가 왔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상에서의 삶을 연장해 달라고 요청하지 않은 바울과 베드로를 대조해 보십시오(딤후 4:6; 벧후 1:14). 그러나 히스기야가 이를 구하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15년을 더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분은 그들의 요구를 주셨으나, 그들의 영혼을 쇠약하게 하셨다"(시 106:15 - Living). 히스기야가 아들 므낫세를 낳은 것은 그 연장된 삶의 기간 동안이었고, 그(므낫세)는 유다 역사상 최악의 왕이 되었습니다(대하 33:1-3).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아시며, 우리는 우리의 삶의 길이에 관한 그분의 뜻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히스기야가 저지른 두 번째 실수는 교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치명적인 질병을 고쳐주셨고, 태양이 하늘에서 해시계의 10도 뒤로 물러나는 기적적인 확인의 표징을 주셨습니다(38:8). 즉, 지구가 잠시 자전을 멈추고 자전 방향을 바꿨습니다! 이 기적을 본 바벨론 왕은 사절을 보내 히스기야를 축하하게 했고, 히스기야는 자랑스럽게 자신의 모든 보물을 그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39장). 이로 인해 나중에 그 모든 보물이 바벨론으로 옮겨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서 행하시는 일로 인해 우리가 영광을 누릴 때마다, 우리는 조만간 영적인 상실을 겪게 될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 우리는 이사야의 예언이 현재의 세계 상태에 좌우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소통한 참된 선지자였습니다. 당시 바벨론은 세계 강대국인 앗수르로부터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약한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히스기야의 보물이 앗수르가 아니라, 바벨론으로 옮겨갈 것이라고 정확하게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몇 년 뒤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위로에 대한 예언(40-66장)

40장부터 66장은 이사야서의 "신약" 부분을 구성하며 여기에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새 언약의 삶에 관한 많은 예언이 있습니다.

구원에 대한 예언(40-48장)

이사야의 이 부분은 세례 요한의 사역에 대한 예언으로 시작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광야에 주님을 위한 길을 닦아라. 사막을 평탄하게 하라.'"(사 40:3-5). 이 메시지는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주님은 두 번째로 다시 오십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이 그분의 초림을 위해 사람들을 준비시켰던 것처럼, 교회는 그분의 재림을 위해 사람들을 준비시켜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메시지는 본질적으로 세례 요한의 메시지와 동일해야 합니다:

l 우선, "골짜기들은 돋우어져야 한다"(4절). 새 언약 아래에는 낙담과 절망이 있을 자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결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쓸모 없습니다."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격려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높이시고 우리에게 존엄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쓰레기장, 즉 계곡에서 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왕의 자녀이며 그분은 우리의 머리를 높이 드십니다.

l 둘째, "산들은 낮아져야 한다"(4절). 우리 안의 모든 교만은 낮아져야 합니다.

l 셋째, 거친 곳을 매끈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삶에는 조잡하고 무례하고 거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부드럽게 해야 하며 우리는 은혜롭고 온화해져야 합니다.

l 넷째, 굽은 길은 곧아져야 합니다(눅 3:5절에 이 구절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우리 삶에는 돈 문제에서의 불의와 같이 구부러진 부분이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곧아지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회개에 수반되는 일입니다 - 계곡은 돋우어지고, 산은 낮아지고, 거친 곳은 매끈해지고, 굽은 길은 곧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영광이 우리 육신에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 육신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주님의 오심을 위해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방법입니다.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으니 모든 육체가 여호와의 구원을 보리라"(5절).

40:6,7은 베드로전서 1:24,25절에 인용되어 있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다." 우리는 이미 모든 인간 존재는 숨이 없는 먼지와 같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서는 풀로 묘사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모든 명예는 풀밭에 피어나는 작은 꽃과 같을 뿐입니다. 주님이 입김을 불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어 버립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계속해서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의 원칙대로 살아온 사람들은 어느 날 인간의 모든 영광이 무너져도 남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주변에 보이는 모든 것은 언젠가는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영원한 것을 얻게 됩니다.

40장 10,11절은 주님의 오심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오신다. 그분이 백성에게 주실 상급을 가지고 오신다. 그리고 목자처럼 그분은 자신의 양 떼를 돌보실 것이다. 그분은 어린양들을 품에 안아 옮기실 것이다."

40장 12절부터 17절까지는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통제권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무(無)에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13절은 고린도전서 2장 16절에 인용되어 있습니다: "누가 성령을 가르치겠으며, 그분의 조언자로서 그분에게 알려주겠는가?"

그분 앞에는 땅의 모든 나라가, 아무것도 아닙니다(17절). 세상의 모든 주민들은 아무것도 아니고 무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효과적이고 두려움 없이 섬기려면,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를 보아야 합니다 - 특히 사람들이 국가의 권위를 등에 업고 매우 강력해 보이고 우리가 주님을 섬기려고 할 때 우리를 반대하는 어려운 곳에 갈 때 더욱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구절을 기억하고 우리를 보호하시고 지키시는 하나님의 엄청난 능력을 신뢰해야 합니다.

40장 21,22절: "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듣지 못하였느냐? 지구라는 원 위에 앉으신 분이 바로 그분이다." 이것은 2700년 전에 기록되었으며, 이사야는 여기서 지구가 편평하지 않고 구형임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구상의 어느 누구도 이것을 믿기 수백 년 전이었습니다. 솔로몬은 또한 잠언 8장 27절(NASB)에서 지구의 구형 특성을 언급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하늘에서 재림하실 때 어떤 곳은 낮이고 다른 곳은 밤이라고 언급하심으로써 지구가 구형임을 암시하셨습니다(눅 17:31, 34).

40장 26절: "별들을 다스리시는 분을 보라. 그분은 모든 별들에게 이름을 주셨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놀라운 거룩하심(6장)뿐만 아니라, 그분의 전능하신 능력에 대한 환상도 받았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때 항상 우리 앞에 두어야 할 하나님에 대한 두 가지 환상입니다.

40장 29-31절: 이 구절은, 우리가 경배하고 섬기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가 약할 때 우리에게 힘을 주시리라고 가르칩니다. 우리에게 힘이 부족할 때, 그분은 우리에게 힘을 주실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그분을 섬길 수 있는 건강과 힘을 주실 것입니다. 심지어 젊은 사람들도 지치고 피곤해질 수 있으며, 활력이 넘치는 젊은 사람들도 주님을 섬기려고 노력하다가 지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나이에 상관없이, 새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약속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젊은이들이 쓰러질 때, "주님을 앙망하는 이 노인들은 독수리처럼 날개치며 올라갈 것입니다. 그들은 달릴 것이고 지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걸어도 결코 피곤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젊은이 여러분에게 격려하고 싶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여러분의 모든 필요에 대해 단순한 신뢰로 주님을 기다리는 법을 배우십시오. 이 구절에서 말하는 대로, 당신은 새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또는 다른 번역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를 기다리는 자는 그들의 힘을 교환하리라." 이는 우리가 인간의 힘을 주님께 드리고 주님은 그 대가로 우리에게 그분의 신성한 힘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주님과 교환하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내가 가진 것은 모두 아버지의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가진 것은 모두 내 것입니다"(요 17:10). 주님을 섬기는 데에는, 당신을 끝까지 지켜줄 주님의 힘이 필요합니다. 주님을 섬기는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위로부터 오는 초자연적인 힘, 즉 그분의 부활 능력을 주시는 것을 정말로 신뢰해야 합니다 - 우리의 영뿐만 아니라 우리 몸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노년에도 그분을 위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시 92:14).

40장부터 46장은 주님을 섬기는 나에게, 성경의 귀중한 부분이었습니다. 나는 주님을 섬기는 여러분 모두가 이 장들을 진지하게 묵상하기를 권합니다. 여기에는 여호와의 최초의 참된 종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며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위한 몇 가지 놀라운 약속이 있습니다.

41장 8-18절: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을 때 크게 격려해 주는 몇 가지 약속이 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선택한 것이지, 버린 것이 아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너에 대해 걱정스럽게 보지 말아라. 나는 네 하나님이다. 나는 너를 강하게 하겠다. 내가 너를 도울 것이다. 내가 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네게 노하는 자들은 다 부끄러움을 당하고 불명예를 당할 것이다. 너와 싸우는 자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이 될 것이다. 그들은 멸망할 것이다. 너는 너와 다투는 사람들을 찾을 것이다. 그러나 너는 그들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너와 전쟁을 벌이는 자들은 언젠가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너의 주 너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내가 너의 오른손을 붙잡고 있다. 내가 너에게 이르노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도울 것이다. 너는 벌레다. 하지만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도와 줄 것이다. 너희가 이같이 약할지라도, 내가 너희를 좌우에 날선 새 타작 기계로 만들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 곧 좌우에 날선 검이 너희 입에 있기 때문이다). 너는 이 거대한 산들을 쳐서 부숴버릴 것이다. 너는 언덕들을 겨처럼 만들 것이다. 그러나 너는 너의 주 너의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할 것이다."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여러분,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이 말씀을 당신 자신에게 적용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주장하십시오.

41장 17,18절: 고통받고 궁핍한 자(하나님은 항상 심령(spirit)이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에 관심이 있으십니다)가 물(곧 성령)을 구하되, 그들의 혀가 바짝 말라 '하나님이여, 내가 성령의 능력 없이는 살 수 없나이다' 말할 때에 나 여호와가 그들에게 응답하리라. 나는 그들의 삶에 강을 열 것이며, 그들의 삶 가운데 샘이 나게 할 것이다. 내가 그들의 삶을 물 연못처럼 만들겠다. 그리고 그들의 메마른 삶은 샘물처럼 될 것이다. 이 약속은 수년 동안 나에게 엄청난 축복과 격려가 되었으며 - 나는 그것을 당신에게 전달합니다.

42장은 예수님을 성령으로 기름부음받은 여호와의 종으로 묘사합니다. 성령은 신약의 주요 주제 중 하나이며 이사야 40장부터 66장까지의 주요 주제 중 하나입니다. "보라, 내가 붙들어 주는 나의 종을 보라." 진정한 하나님의 종은 돈이나 조직 또는 인간 기관이 아닌, 하나님에 의해 붙들림을 받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선물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사람이나 돈에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 "떠받치다(붙들어주다)"라는 단어는 우리가 의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주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시는 것은 우리가 무력한 상황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42장 2절: "그분은 거리에서 외치지도 아니하며 그분의 소리를 높이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이것은 마태복음 12:19,20절에서 예수님을 언급하는 것으로 인용되었으며,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은 그분의 소리를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 아니하시리라. 상한 갈대라도 꺾지 아니하시리라." 이는 주님께서, 삶을 엉망으로 만든 사람을 결코 낙담시키지 않으시고 그를 격려하고 고쳐 주신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곧 꺼지는 촛불의 심지를 끄지 않으실 것입니다. 반면에, 그분은 입김을 불어 불을 붙여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실패한 연약한 신자들을 돕는 데 관심이 있으십니다. 그분은 낙담하고 우울한 사람들을 돕고 그들의 영을 북돋는 데 관심이 있으십니다. 주님의 참된 종은 우울하고 낙담한 사람들, 절망감을 느끼고 삶에 지친 사람들의 영혼을 북돋는, 격려하는 비슷한 사역을 항상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그러한 사역을 필요로 하므로, 우리 모두 그러한 사역을 추구하도록 합시다.

42장 5-7절: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의 안에서 너를 불렀느니라. 눈먼 자들의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자들을 감옥에서 끌어내라고 내가 너를 불렀다." 이것은 훌륭한 사역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를 항상 기억하십시오: "여호와께서는 '내가 결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8절). 우리는 사역을 하면서 결코 우리 자신에게 영광을 돌려서는 안 됩니다. 공로나 영광을 우리 자신에게 돌리는 것은 매우, 매우 심각한 범죄입니다. 돈을 훔치는 것보다 더 나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당신의 사역을 축복하시고, 당신을 강력하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결코 자신의 영광을 누구에게도 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영광을 건드리기 시작하면, 많은 주의 종들이 망한 것처럼 당신도 망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승격시키면서, 사람들을 주님 대신 자신에게로 이끌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자신의 공으로 돌리기 시작하면, 당신은 매우 위험한 길에 서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수천 명이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잃어버렸습니다.

42장 19절: "내 종 외에 누가 눈먼 사람이냐? 내 사자처럼 귀가 먼 사람이 누구이냐? 나와 완전히 평화롭게 지내는 사람만큼 눈먼 사람이 누구이며, 여호와의 종만큼 눈먼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이 구절은 특히 (1절에서 볼 수 있듯이) 분명히 예수님을 언급하기 때문에, 수수께끼의 구절처럼 보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는 하나님의 참된 종은 그의 주변에서 보고 듣는 많은 것에 대해 눈이 멀고 귀가 먼 사람이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많은 것을 보지만, 그것들을 유의하지 않습니다(20절). 그는 다른 사람의 죄를 찾으려고 돌아다니지 않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말에서 무언가를 잡기 위해 사람들의 말을 들으러 돌아다니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랬습니다 - 항상 예수님을 고발하기 위해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서 잘못을 잡으려고 기다렸습니다. 불행하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그와 같습니다 - 항상 누군가가 말한 것에 대해 고발하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 매우 자주 그들은 그의 사역을 질투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처럼 되지 마십시오. 당신이 주변에서 듣고 보는 많은 것에 귀가 먼 자가 되고 눈이 먼 자가 되십시오. 누군가가 당신에 대해 거짓 비난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나요? 당신이 귀가 먼 사람이라면 그것을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귀가 먼 사람"이 되십시오! 주님의 종이 매력적인 여자들에 대해 "눈이 먼" 것이 좋지 않습니까? 당신은 눈이 있지만 보지 못합니다. 당신은 "눈이 먼 자"입니다! 당신은 귀가 있지만 듣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것과 귀에 들리는 것으로 판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사셨고,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사 11:3).

이제 이 장들에서 새 언약의 수립을 기대하는 몇 가지 놀라운 약속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겠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인데, 고린도후서 1장 20절은 "하나님의 약속은 다 그리스도 안에서 '예'와 '아멘'이 되느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은 약속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43장 1-5절: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너를 구속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네가 강(어려운 상황)을 지나갈 때, 물이 너에게 범람하지 않을 것이다.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해를 받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이다. 너는 내 눈에 귀한 존재이다. 내가 애굽을 네 대속물로 주었다." 그분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의 대속물로 내 아들의 피를 너희에게 주었다. 그러므로 너는 내 눈에 귀중하다. 무서워하지 말라." "무서워하지 말라"(혹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이것은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43장 10,11절: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나는 여호와이니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43장 18,19,25절: "너희는 과거의 삶을 생각하지 말아라. 예전 일들은 잊어버려라. 나는 새로운 일을 할 것이다. 내가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낼 것이다. 미래를 바라보아라. 네 과거의 실패에 대해 걱정하지 말아라. 나는 네 허물을 지우는 자이니 다시는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44장 3절: "내가 목마른 땅에 물을 부어 주겠다. 내가 내 영을 너와 네 자녀에게 부어 주고,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겠다."

44장 8절: "떨지 말고, 겁내지 말아라. 너희는 나의 증인이다. 나 외에 신이 있겠느냐? 왜 우상을 숭배하는 저 사람들을 걱정하느냐?" 그런 다음 그분은 나머지 구절에서 우상 숭배의 어리석음을 말씀하십니다.

44장 21절: "너는 나의 종이다. 내가 너를 지었다. 너는 나에게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주님께 충실할 때나 외로운 곳에서 그분을 섬길 때 외로움과 잊혀진 느낌을 받기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잊지 않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위안입니다. 때때로 당신의 기도를 주님께서 듣고 있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 "너희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약속을 기억하십시오.

44장 28절부터 45장 6절까지는 고레스 왕에 관한 예언입니다. 고레스가 태어나기 100여 년 전, 그리고 그의 메대-바사(페르시아) 제국이 세계 지배자가 되기 오래 전에, 이사야는 그에 관해 이름을 언급하면서 예언했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돌아가서 성전을 건축하라고 말할 그분의 목자 고레스를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이 에스라서에서 성취되었음을 봅니다.)

45장 9절: "자신을 만드신 분과 다투는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네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께서 당신을 대하시는 방식에 대해 하나님과 논쟁하지 마십시오. 자신을 낮추고 그분께서 당신을 대하시는 방식을 받아들이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을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하신다면, 그것은 당신을 그분의 영광을 위한 유용한 그릇으로 빚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불평하거나 투덜대지 마십시오.

45장 10절은 대부분의 부모가 여자 아이를 갖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우리나라 인도와 특별한 관련이 있습니다. 여자 아기가 고아원 문간에 버려지거나 쓰레기통에 버려지거나 심지어 죽임을 당하는 슬픈 사례가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그러한 모든 부모를 위한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네가 무엇을 낳았느냐?'하고 여자에게 '네가 무엇을 낳았느냐? 여자 아이냐? 나는 남자 아이를 원했다'하는 자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저주가 있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선물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에게는 저주가 있습니다. 비록 정신 장애아(지체아)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를 죽일 권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자녀를 주시기로 작정하시면, 당신을 동정심이 많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실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또한 아기를 낙태하는 자들에게 화(저주)가 있을 것임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45장 17절: "너희가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며 능욕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예수님께서도 굴욕을 당하셨으니, 우리도 그런 굴욕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주님을 따른다면, 우리는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에 또 다른 아름다운 구절이 있습니다: 45장 22절: "땅의 모든 끝이여, 나에게로 돌아와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다. 다른 이는 없다."

46장 4절은 노인들을 위한 아름다운 구절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십니다, "네가 노년이 되어도 나는 그대로일 것이다(나는 늙지 않는다). 네 머리카락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는 너를 업고 갈 것이다. 내가 너를 창조했고, 내가 너를 만들었고, 내가 너를 업고 갈 것이다. 내가 널 구해 줄 것이다." 하나님은 여기서 자신을 우상에 비교하십니다. 우상 숭배자들은 그들의 신들을 업고 다니지만,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업고 다니십니다! 당신은 당신의 신을 업고 다닙니까, 아니면 당신의 신이 당신을 업고 다닙니까? 그것이 문제입니다.

47장 8절은 요한계시록 18장 7절에서 인용되어 바벨론(거짓 기독교)이 여왕으로 앉아 "나는 과부로 앉지 아니하리라"고 말하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모르고 겸손하게 행하지 않는, 편안함을 사랑하는 기독교를 말합니다.

48장 10,11절: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같이 연단하지 않았다. 너를 고난의 용광로에서 너를 시험하였노라. 나 자신을 위하여 내가 행할 것이니 어찌 내 이름을 더럽히리요." 고난은 우리의 신실함을 시험하기 위한 시험 과정입니다. 시험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을 것입니다. 불에서 정제된 금은 마침내 왕을 위한 면류관이 됩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우리를 데려가서 그분의 면류관의 일부로 만드실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이렇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말씀이 두 번째로 나오는 것을 봅니다: "나는 내 영광을 결코 다른 사람에게 주지 아니하리라"(48:11).

48장 17,18절: "나는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가르치는 여호와요, 너희가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여호와라. 만일 네가 내 계명을 듣고 주의를 기울였더라면, 네 행복은 강과 같았을 것이요, 네 의는 바다 물결과 같았을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요구하시는 모든 것은 우리 자신의 이익과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때, 우리는 "광야를 지나가도 목마르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분이 바위에서 물이 흘러나오게 하실 것입니다"(48:21). "그러나 악한 자에게는 평화가 결코 없을 것입니다"(48:22).

메시아에 대한 예언(49-57장)

49-57장은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지만, 우리는 많은 구절을 우리 자신에게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49장은 내가 1964년 5월 6일 아침, 매일 성경을 읽으며 묵상하던 중에 주님께서 나를 전임 기독교 사역자로 부르신 장이었습니다.

49장 2절: "그분은 내 입을 날카로운 칼과 같이 하셨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말할 때, 때로는 날카로운 칼과 같을 수도 있고, 때로는 위로의 말씀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분의 손 그늘에, 나를 숨기셨습니다. 그분은 나를 그분의 화살통에 숨겨 두셨습니다." 그때에 그는 낙담하게 하는 유혹에 대해 말합니다, "주님, 나는 내 인생을 낭비했습니다. 나는 내 힘을 유용하게 쓰지 않았습니다."(4절) 주님의 종은 자주 낙담하게 하는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바울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코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쓸 것이다. 내가 너를 열방의 빛으로 만들 것이다."(6절)라고 말씀하십니다.

49장 14,15절: "시온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도다. 여인이 젖먹이를 잊을 수 있겠느냐?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겠느냐? 이 사람들은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그분의 사랑이 어떤 인간적 사랑보다 더 크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하실 때, 그분이 지상에서 발견하시는 가장 위대한 인간적 사랑의 예는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남편이 아내를 잊을 수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 남편은 종종 아내를 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내도 남편을 잊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새로 태어난 아이를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어머니가 잊더라도, 우리를 잊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약속은 우리 모두를 지상 생활 내내 위로하고 격려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은,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노라"고 말씀하십니다(16절).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 후에도 손바닥에 남을 구멍에 대한 예언적인 언급입니다. 우리의 이름이 그 구멍에 새겨졌습니다!

49장 23절은 오랜 세월 동안 나에게 엄청난 격려가 되었습니다. "나를 바라며 기다리는 자들은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그 놀라운 약속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그분만이 당신을 대신하여 행동하시기를 기다린다면, 나는 당신이 평생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49장 25절: "강한 자의 포로들도 빼앗아 오겠다. 내가 너와 다투는 자와 다투고 네 아들을 구원하리라." 아무도 죄나 사탄의 포로가 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자녀 중 누구라도 사탄의 포로가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여기에서 그들을 그 포로 상태에서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모든 자녀를 위한 그 약속을 주장합시다.

50장 4절은 예수님에 대한 예언입니다.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훈련된 혀를 가지시고, 그 혀로 때에 맞는 말로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혀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우리 몸의 주요 부분이므로, 모든 하나님의 종은 혀의 사용을 절제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입이 날카로운 칼과 같았다는 것을 보았습니다(49:2). 우리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때로는 날카로운 칼처럼 마음을 찔러 잘못된 동기를 드러내기도 하고, 때로는 격려하는 부드러운 말씀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매일 아침 일어나서 아버지의 말씀을 들으셨다는 것을 읽습니다(4절). 그리고 그분은 무언가를 들으셨을 때 즉시 순종하셨습니다. 그분은 다른 사람들이 뺨을 때리고 치며 침을 뱉는 것을 허용하는 경우에도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였습니다(5,6절). 그리고 사람들이 이 모든 일을 했을 때, 예수께서는 "얼굴을 부싯돌처럼 굳게 하셨습니다"(7절). 그들에게 복수하거나 위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용서하고 축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분은 자신을 의롭다고 하신 분이 항상 가까이 계셨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8절). 하나님의 모든 종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누가 나와 싸우겠느냐? 함께 서자." 나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느냐? 나를 법정에 세우고 싶으냐? "주 하나님이 나를 도우실 것이다. 누가 나를 고발하고 정죄할 수 있겠느냐? 그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질 것이다"(9절).

50장 10절: 당신이 주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의 종 예수님의 음성에 순종하더라도, 주님께서는 당신의 믿음을 강화하기 위해, 어둠 속에서 빛 없이 더듬도록 허락하실 때가 여전히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때에 당신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십시오. "어둠 속에서,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서 당신에게 보여 주신 것을, 결코 의심하지 마십시오." 누군가가 당신에게 빛 가운데서 분명히 보이는 100루피 지폐를 주었다면, 어둠 속에서 (명확히 볼 수 없을 때) 그것이 정말 100루피 지폐인지 아닌지 의심하겠습니까? 당신은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미 빛 가운데서 그것을 분명히 보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삶에는 하나님의 빛이 밝고 그분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돌보시는지 보여 주는 때가 있습니다. 나중에, 압박과 시련의 때가 닥쳐도,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11절은 이럴 때 빛을 내기 위해 인간적인 불을 피워서는 안 된다고 경고합니다. 그렇게 하는 자는 "고통 속에 눕게 될 것입니다." 즉, 시련의 때에 사람에게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방어하거나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보내시는 시련을 피하기 위해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를 방어해 주시고, 그분의 방식과 그분의 시간에 우리를 시련에서 풀어 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51장 1절: "여호와를 찾는 자, 의를 추구하는 자여, 너를 쪼아낸 바위와 너를 파낸 채석장을 바라보아라."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찾으셨을 때 우리가 빠져 있던 구덩이, 즉 구원받기 전에 우리가 처해 있던 절망적인 상황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결코 다른 사람을 멸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의를 아는 자들아, 나의 말을 들으라. 사람들의 비방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욕설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너희를 위로하는 자니라. 너는 왜 죽을 사람과 풀과 같이 될 사람의 아들을 두려워하며 하늘을 펴신 여호와를 잊느냐?"(7,12,13절).

51장 16,17절: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내 손 그늘로 너를 덮었노라. 시온(교회)에게 이르라, '너는 내 백성이라. 일어나라.'" 우리 스스로가 용기를 내야만, 다른 사람을 격려할 수 있습니다.

52장 5절: 주님은 "내 이름은 종일토록 모독을 받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은 로마서 2:24에서 이스라엘 때문에 이방인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인용되었습니다. 이것은 많은 곳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해당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인도에서 모독을 당하고 있는데, 이교도들보다는 대부분 기독교인들의 삶의 방식 때문에 더 모독을 당합니다. 인도는 그리스도를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인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본 그리스도를 거부했는데, 그것은 참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대조적으로, "좋은 소식(복음)을 전하고, 평화를 선포하고, 행복의 좋은 소식을 전하며, 시온에게 '너희 하나님이 통치하신다'고 말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얼마나 사랑스러운가"(7절). 좋은 소식은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분이 지금 통치하고 계시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선포해야 할 완전한 복음입니다.

52장 13,14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얼굴은, 그분이 받은 매맞음으로 인해 너무 변형되어 인간의 얼굴처럼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우리 모두가 본, 아름다운 얼굴로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예수님의 그림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분의 얼굴은 매맞고 변형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지상에서 걸었던 사람 중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매달리셨을 때 그분의 얼굴은 너무 흉측해서 가장 추한 얼굴이 되었습니다.

53장은 이사야서의 이 부분의 중심 장이며 십자가의 장입니다. 이 장은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아가 능력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멸시받는 사람으로,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로 올 것이라고 이스라엘에서 누가 믿었을까요? "그분은 그분의 아버지 앞에서 자랐습니다"(2절). 예수님의 삶의 비밀은 사람들의 얼굴 앞에서가 아니라 그분의 아버지의 얼굴 앞에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십자가에 매달려 계셨을 때 사람들에게 매력적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그를 볼때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도다"(2절)라는 것을 봅니다. 복음의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사람들에게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1세기에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21세기에도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이 인정한다고 주장하는 그리스도는 거짓 그리스도이며, 죄와 돈에 대한 사랑을 반대하고 사람들에게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진짜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진짜 그리스도는 오늘날에도 멸시받고 버림받고 거부당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진짜 그리스도를 따른다면, 그분이 당했던 것과 같은 세상의 거부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당신은 기독교집단의 대부분으로부터 멸시를 받을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그 당시 대부분의 종교인들에게 멸시를 받으셨듯이요. 예수님을 멸시하고 거부한 것은 그리스인과 로마인이 아니라 바리새인(당시의 근본주의자들)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십자가의 말씀을 받아들일 마음이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우리는 성경에서 발견되는 축복에 대한 놀라운 약속을 들을 때 흥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말씀은 동일한 상자 안에 축복에 대한 약속과 함께 제공됩니다. 둘 중 하나만 가질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얕은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서 약속을 주장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7절에서 예수님께서 침묵하셨다고 세 번이나 말한 것을 주목하십시오. "그분은 입을 열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분은 잠잠히 있었습니다. 그분은 입을 열지 아니하셨습니다." 신자로서, 우리는 찬양하고 감사드릴 때 입을 크게 벌리고 주님께 소리치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욕을 당하고, 비난을 받고, 중상을 당할 때 입을 다물어야 하는 법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찬양하는 법을 알고 계셨고 침묵하는 법도 알고 계셨습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 반대입니다. 그들은 집회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때는 잠잠합니다; 하지만 누군가 자신을 비난하거나 상처를 입혔을 때 소리치고 자신을 변호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 하지만 그것은 뒤집힌 세상의 특징이며, 그리스도인들은 달라야 합니다.

10절에서, 우리는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상하게 하시기를 기뻐하셨다는 것을 읽습니다 - 그리고 "그러므로 그분은 그분의 씨를 볼 것이고 그분의 날을 연장할 것이다." 그것은 짓밟힘에서 나오는 결과입니다. "그분은 그분의 날을 연장할 것이다"는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실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선한 기쁨이 그분(예수님)의 손에서 번영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도 가야 할 길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범죄자들과 함께 계수되었다"(12절), 우리도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오해를 받고 악한 자들의 범주에 들어갈 것입니다.

54장 4-10절은 과부들에게 위로가 되는 아름다운 구절입니다. "주님은 네 남편이시라.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네 젊음의 수치와 과부의 치욕을 잊을 것이다. 나의 평화의 언약과 사랑의 친절이 네게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

54장 13절은 우리 자녀들에게 한 약속입니다. "네 모든 아들들은 다 주의 제자가 될 것이요 (주님의 가르침을 받음), 네 아들들의 행복이 클 것이다." 주님은 1968년 6월에 아내와 나에게 각각 이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때는 우리가 아이를 낳기 전이었습니다 - 그리고 우리는 네 명의 아들 모두에 대해 그것을 주장했고 그것이 성취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모든 부모에게 놀라운 약속이며, 나는 모든 부모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주님, 나는 모든 자녀가 주님의 제자가 되고 그들의 영적 행복이 커지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하며 이 약속을 주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당신의 자녀가 결코 아프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당신의 자녀가 많은 십 대들이 종종 겪는 어려움을 결코 겪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마침내 주님께 나아올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주장하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54장 15,17절: "누구든지 너와 싸우러 오면 그는 패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네 편이기 때문이다. 네게로 향한 무기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요, 네가 모든 법정의 거짓에 대하여 공의를 얻을 것이니라. 이것이 여호와의 종들의 유업이요, 이것이 내가 네게 준 복이니라"(Living). 이 놀라운 약속은 주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나는 50년 이상 이 약속의 성취를 경험한 것에 대해 주님을 찬양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행하려고 한 모든 악한 일은 오직 나에게 유익할 뿐이며, 나를 그리스도와 더욱 닮게 만들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거짓으로 고발당하셨고 - 베드로와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만약 당신이 온 마음으로 주님을 따른다면, 당신의 메시지에 양심에 가책을 받은 사람들과 당신의 사역을 질투하는 사람들로부터 당신 역시 그런 거짓 비난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들의 고발을 믿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두십시오.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언젠가 그들의 입을 닫으시고 당신의 정당성을 입증하실 것입니다. "그들의 증명은 나로부터 온다"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당신은 자신을 변호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을 변호해 주실 것입니다. 나는 50년 이상 그 실재를 증명해 왔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고발할 때마다, 주님은 항상 입을 다물고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원하는 대로 믿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당신은 인간의 탈을 쓴 악마라고 믿더라도, 그렇게 하게 두십시오 - 그들이 당신의 구세주에 대해 믿었던 것처럼! 입을 다물고 있으면 언젠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결백함을 입증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십시오.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살고 당신의 명예를 그분의 손에 맡기십시오.

55장 1절에서, 우리는 초대를 봅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는 와서... 돈 없이 값 없이 사라." 이것은 복음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라는 초대입니다. 복음은 항상 "값 없이" 제공되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9:18에서 읽을 수 있듯이 말입니다. 많은 전도자들이 공개 복음 집회에서 복음을 전파하기 전에 헌금을 받는 것은 큰 부끄러운 일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기독교 설교자들이 참된 믿음에서 얼마나 멀리 벗어났는지를 보여주는 한 가지 지표일 뿐입니다. 8,9절에서, 주님은 말씀하시길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너희 길은 내 길과 다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다'". 이것은 우리의 인간적 사고방식이 세속적이며, 우리가 그분을 효과적으로 섬기려면 그분의 말씀을 통해 그분으로부터 하나님의 길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11절: "내 입에서 나가는 내 말은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우리의 사고방식이 새롭게 되고 하나님의 길과 일치한 후에야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전할 수 있으며 - 그 말씀은 결코 헛되이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각(ideas)이나 심리학의 가르침을 결코 전파해서는 안 됩니다 -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메시지는 성경에 뿌리를 두어야 하며, 그래서 사람들의 신앙이 인간의 추론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오랜 세월 동안 내가 말하고 글을 쓰는 모든 사역에서, 나는 항상 성경만을 가지고 말하고 글을 썼습니다 -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말보다 더 신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설교에서 말씀의 사람이 되십시오.

56장 2-5절에서 주님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매우 중요한 계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표징이었습니다(출 31:16,17). 그래서 우리는 오늘날 그것을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의 영적인 적용은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 1-11절은 구약의 안식일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들어가기를 원하시는 안식의 삶을 상징한다고 가르칩니다. 7절은 예수께서 마가복음 11:17절에서 인용하신 말씀입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어질 것이니라." 많은 설교자들이 교회를 자신을 위해 돈을 버는 장소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 마치 예수님 당시, 성전에서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장사꾼들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언젠가 그들을 몰아내실 것입니다. 교회는 기도의 집이지 사업의 장소가 아닙니다. 10절과 11절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종들이 눈멀고(영적 분별력 없음) 벙어리가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 도둑이 와도 짖지 않는 감시견과 같습니다. 하나님 백성의 목자들은 돈에 탐욕스러워졌고, 모든 면에서 자기들만의 것을 추구합니다. 오늘날 기독교 집단 세계의 많은 곳에서 벌어지는 비참한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57장 1절: "의인은 멸망하나 아무도 마음에 두지 아니하느니라." 오늘날 세상에서 경건한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거의 아무도 그것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는 듯합니다.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진정으로 경건한 사람들입니다. 15절: 여기서 하나님은 자신이 사는 곳이 두 곳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과 겸손하고 낮은 자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겸손하고 낮다면, 우주의 창조주가 우리 마음속에 사는 특권을 누릴 수 있습니다. 19절: "멀리 있는 자에게나 가까이 있는 자에게나,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에 의해 한 몸이 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예언적 언급으로 에배소서 2장 17절에 인용되었습니다. 20,21절: "악한 자는 (바닥에서) 진흙을 솟구쳐 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 악한 자에게는 평화가 없느니라." 악한 자는 관계에서 평화를 추구하지 않고, 항상 과거에 묻혀 있던 오래된 문제를 꺼내 관계를 방해합니다. 이는 종종 악한 남편과 아내의 경우입니다.

미래에 대한 예언(58-66장)

58장은 주의 깊게 살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아름다운 장인데, 그 이유는 많은 놀라운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금식의 올바른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정한 금식이 종교적 의식이 아니라 배고픈 자와 빵을 나누고, 가난하고 헐벗은 자를 돌보고, 다른 사람을 손가락질하는 것(비난함)을 멈추고,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것(그들을 섬기는 것)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키는 자들은, 어둠 속에서 그들을 위해 빛이 일어나고, 주님께서 그들의 병을 고치시고, 그들을 계속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들은 물이 끊이지 않는 샘과 같아, 어디를 가든 다른 사람을 축복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염려하는 자에게 풍성한 상을 주십니다.

59장: 주님은 많은 기도하는 사람들의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기도하는 자의 마음에 고백하지 않은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1,2절). 죄는 사람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킵니다(2절). 16절에서 주님은 그 당시 그분의 백성 가운데 중보자가 없다는 것을 보고 놀라셨다고 말씀합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보이는 슬픈 상황도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해 줄 중보자를 찾으십니다. 19절(KJV): "원수가 홍수같이 올 때에, 주의 영께서 군기를 들어 올리사 그를 치시리로다." 하나님은 교회가 영적 전쟁에서 사탄을 항상 대적하는 깃발과 같기를 원하십니다. 21절: "내 영과 내 말은 네 입에서나, 네 자손의 입에서나, 네 자손의 자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성령의 기름부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며, 그분의 말씀을 전하는 능력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특권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우리에게만 아니라 우리의 자녀와 손주에게도 이 은사를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얼마나 멋진 약속인가요.

60장 1절: "일어나, 빛을 발하라.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느니라." 이것은 이 새 언약 시대에 우리 삶에서 가질 수 있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예언적 언급입니다: "주께서 친히 우리의 빛이 되시고, 우리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이 되시리라"(19절).

61장 1,2절: 이 구절들은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아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실 것을 예언적으로 언급합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첫 설교를 하실 때 펼치신 성경 구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는 것에서 멈추셨고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전파하지 않으셨다는 점에 유의하십시오. 그날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2절을 누가복음 4:19절과 비교하십시오). 또한 하나님의 은혜와 심판의 비율을 유의하십시오. 단 하루의 심판과는 대조적으로, 은혜의 한 해입니다. 이는 은혜를 지지하는 비율이 365:1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여기서 우리를 심판하기보다는 오히려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고 싶어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십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태도도 동일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보다 365배 더 축복하고 은혜를 베풀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에서 모든 무거움을 없애시고 찬양의 영으로 대체하기 위해 오셨습니다(3절). 10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입히시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만드신다고 말합니다.

62장 3,4절은 우리와 주님이 맺은 신부 관계에 대해 계속 말합니다. 6,7절에서, 예루살렘(교회) 성벽의 파수꾼으로 부름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계속 경고하고 권면하라는 권고를 받고, 중보의 사역을 맡은 자들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땅에서 찬양과 영광의 대상으로 만드실 때까지 중보하는 것을 멈추지 말라는 권고를 받습니다. 그분께서 친히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으므로, 우리는 기도로 담대하게 그분의 약속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1,11절).

63장 8절과 9절은 우리 구주께서 "우리의 모든 환난에서 친히 고난을 받으시고" "그분의 임재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에 대해 말합니다. 그러나 10절에서 계속해서 성령님을 거역하고 근심하게 하여 성령이 돌아서서 그들의 적이 된 사람들에 대해 경고합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경고입니다. 성령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듯이(14절), 우리를 안식의 삶으로 인도하고자 하지만, 우리는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해야 합니다.

63장 15절부터 64장 1절까지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 가운데 다시 일하시고 부흥을 보내주시기를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64장 1절은 우리가 자주 기도하기에 좋은 기도입니다. 이것이 교회에 필요한 것입니다. 4절은 고린도전서 2장 9절에 인용되었지만, 그곳에서는 약간 다르게 인용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분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놀라운 것들을 준비하셨다고 기록되어 있고, 이사야에서는 그분을 기다리는 자들을 위해 이러한 것들을 준비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분을 사랑하는 자들은 항상 그분을 기다릴 것임을 배웁니다. 성경과 성경을 비교할 때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웁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있는 그분의 백성을 위해 준비하신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바로 그분의 백성을 위해 준비하신 새 언약의 놀라운 축복을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 10절은 성령께서 이러한 놀라운 것들을 우리에게 계시하셨다고 계속해서 말합니다. 5절: "당신은, 의를 행하는 것을 기뻐하는 자를, 만나십니다." 하나님은 의를 행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행하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를 좋아하십니다. 그러나 6절에서 "우리의 모든 의로운 행위는 더러운 옷과 같다"고 상기시켜 줍니다. 그래서 우리의 최고의 행위도 하나님의 눈에 보기에는 가장 더러운 누더기와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완전히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을 선하다고 부를 수 있지만, 하나님의 눈에 진정으로 선한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진정으로 선합니다(막 10:18).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려면 그리스도의 의가 그 사람을 덮어야 합니다.

65장 5절: 여기서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에게 독선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에 대한 혐오감을 표현합니다: "내게 가까이 오지 말라, 나는 너보다 거룩하니라." 이런 사람들은 코로 들어가는 연기처럼 하나님에게 혐오스러운 자들입니다. 그분은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모든 사람을 싫어하십니다. 17절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예언입니다. 24절은 우리가 기도할 때 주장할 수 있는 놀라운 약속입니다: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대답할 것이고, 그들이 아직 말하고 있을 때 내가 들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응답을) 듣는 것보다, 우리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기를 더 간절히 원하십니다.

66장 1,2절: 여기서 하나님은 온 하늘이 하나님의 보좌이고 온 땅이 하나님의 발판에 불과한데, 누가 그분을 위해 집(교회)을 지을 수 있다고 상상이나 할 수 있느냐고 우리에게 도전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랑스럽게 자신을 "교회 개척자"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계속해서 특정한 유형의 사람이 그분의 집을 지을 수 있도록 허락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 겸손하고 통회하는 영을 가진 자, 그분의 말씀에 떠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상하고 겸손하며, 그분의 말씀에 있는 모든 명령에 떠는(즉시 순종하는) 사람들만을 호의적으로 보십니다. 5절은 하나님의 말씀에 떠는 사람들은 종종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고 배척당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는 교회 역사 전반에 걸쳐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의 원수들이 결국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런 사람들(하나님의 말씀에 떠는 사람들)을 격려하십니다. 그러니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말씀에 떨면, 하나님께서 항상 당신과 함께하실 것입니다. 13절에서, 하나님은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하듯" 그들을 위로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런 사람들을 더욱 격려하십니다.

마지막으로 22-24절에서, 우리는 주님이 돌아오실 때 세워질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 읽습니다.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인 자들은 영생을 얻을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결코 꺼지지 않는 불로 지옥에서 타오를 것입니다.

정말로 이사야서는 구약성경에서 놀라운 새 언약의 책입니다.

장 24
예레미야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마지막 경고

예레미야는 40년 이상 유다의 남부 왕국에서 전파했습니다. 그는, 포로로 끌려가는 것으로부터 유다를 구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마지막 선지자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유다가 죄에서 돌이키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스바냐, 하박국, 다니엘, 에스겔이 그의 동시대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매우 강하게 말했지만 냉정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유다의 죄를 위해 은밀히 울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 타락한 것에 대해 매우 깊이 느꼈습니다. 그는 매우 순진한(simple) 사람이었고 아주 젊을 때부터 예언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영적으로 매우 예민했지만, 동시에 매우 강했습니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사람에게 좋은 자질입니다 - 마음이 순진(simple)하고, 다른 사람의 감정에 민감하면서도, 진리를 선포할 때는 매우 강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레미야는 예수님과 같았습니다. 예수님도 매우 단순하게(simply) 살았고 다른 사람의 상처에 매우 예민했으며; 그분은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을 위해 울었던 것처럼 예루살렘을 위해 울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그들은 "어떤 사람들은 당신이 다시 돌아온 예레미야라고 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마 16:13,14). 그들이 왜 그렇게 말했을까요? 예수님과 예레미야 사이에는 너무나 많은 유사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레미야에게 엄청난 칭찬입니다 - 사람들이 예수님을 예레미야로 오해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울고 고통받으셨기 때문에, 울고 고통받으셨습니다. 예레미야도 같은 이유로 울고 고통받았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백성을 크게 염려했고 하나님의 대변인이었지만, 그의 백성은 그를 오해했습니다. 이전 세대의 모든 참된 선지자들은 오해받고 박해받고 거부당했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40년 동안 예언한 후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생애가 끝날 때까지 하나님 앞에 굳건하고 진실하게 섰던 사람의 훌륭한 본보기입니다.

그는 많은 예언을 지하 감옥에서 썼습니다 - 그 당시 감옥이었습니다. 그는 많은 왕의 통치 기간 동안 예언했습니다. 그가 등장하기 1년 전인, 므낫세와 아몬의 57년간의 악한 통치 직후, 유다를 통치한 요시야 시대에 부흥이 일어난 듯했습니다(왕하 21:19-26). 하지만 오늘날 많은 "부흥"과 마찬가지로 그 "부흥"은 표면적일 뿐이었습니다.

예레미야서에서 발견되는 두드러진 구절은 '만군의 여호와'입니다. 다른 선지자들도 "하늘 군대의 여호와"에 대해 말했습니다. 이 구절은 예레미야서에서 약 82회 나옵니다.

예레미야의 부름

주님은 예레미야가 젊었을 때 그를 부르셔서(1:5,6), "내가 너를 모태에서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어나기 전에 너를 성별하여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몸이 어머니의 태에서 형성되기 전부터 그를 알고 계셨습니다. 오늘날 태아가 인간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쟁이 많습니다. 이 구절은 그 의심을 영원히 해소할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예레미야가 형성되기 전부터 그를 알고 계셨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가 어머니의 태에서 미세한 입자일 때, 하나님은 그를 알고 그를 선지자로 성별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머니의 태에서 막 잉태된 미세한 입자일 때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셨다는 것을 아는 것은 우리에게 큰 격려가 됩니다. 그분은 예레미야에 대한 계획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삶에 대한 계획도 가지고 계십니다.

상상해보세요, 예레미야가 그 모든 어려움을 겪었을 때, 다음 생각이 그를 얼마나 격려했을지: "나는 지금 많은 어려움에 직면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내가 어머니의 태에 있을 때 나를 알고 계셨고, 그때 내 삶을 계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계획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완전히 굴복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도 시련과 어려움에 직면할 때마다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태어나기 전에 당신을 선택하셨고 당신의 삶에 대한 그분의 계획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절대 낙담하지 마십시오.

그때 예레미야가 말했습니다. "주님, 나는 말할 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대중 앞에서 말하는 데 능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선지자로 택하시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모세도 그랬습니다. 그 또한 "주님, 나는 대중 앞에서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여러분 모두를 격려하고 싶습니다. 당신에게 말할 능력이나 사람들 앞에 설 담대함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용하여 그분의 말씀을 전파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모세에게 "내가 사람의 입을 만들었다. 내가 너로 말하게 할 수 없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 4:10,11). 당신이 하나님께서 당신을 깨뜨리고 성령으로 채우도록 허락한다면, 그분은 당신을 그분의 대변인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당신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나는 젊은 그리스도인 시절에 내성적이고 수줍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에게 성령으로 기름부으셨을 때, 그분은 나를 통해 말씀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에게도 똑같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하나님께 "주님, 나는 너무 어려요."라고 절대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고 성별(신에게 바치다)하신다면, 당신의 나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주님을 섬기기 위해 나이가 들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마음에 부담을 느끼자마자, 성령으로 충만해지도록 하나님을 찾고,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십시오.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나는 어린아이라고 말하지 말라, 내가 너를 보내는 곳마다 너는 가고, 내가 네게 명령한 모든 것을 말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1:7). 그리고 나서 주님은 그분의 선지자들에게 자주 하셨던 말씀을 그에게 하셨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1:8). 이것은 모든 참 선지자들이 가진 큰 이점이었습니다 - 주님이 그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떤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인도에서도 주님을 섬겨야 하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만지시며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9절).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도 똑같이 하셨습니다. 그러고나서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주신 사역을 주목해 보십시오. 여기에는 여섯 가지 활동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 뽑아내고(plucking up), 무너뜨리고(breaking down), 파괴하고(destroying), 넘어뜨리고(overthrowing), 세우고(building), 심는 것(planting)입니다(1:10). 이 중 네 가지는 부정적이었고, 두 가지(세우고 심는 것)는 긍정적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먼저 오래된 구조물을 허물고 나서 하나님의 구조물을 세워야 했습니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빈 땅에 건물을 짓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계는 당시 유다와 매우 유사한 상황에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계는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는 거대한 종교적 구조물이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온 선지자는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을 짓고 심기 전에 먼저 많은 것을 뽑아내고, 허물고, 파괴하고, 무너뜨려야 합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불도저로 하는 이러한 초기 작업을 하기를 꺼립니다. 그들은 "새 천 조각을 낡은 옷에 꿰매려고"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아니다. 낡은 옷을 버려야 한다. 낡은 구조물을 완전히 파괴하고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마 9:16).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신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지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예레미야를 격려하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너를 대적하여 싸우겠지만, 너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1:19).

2장부터 45장까지는 유다에 관한 많은 예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 46장부터 52장까지는, 다른 나라들에 관한 많은 예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들은 간략하게만 살펴보겠습니다 - 마치 퍼즐 조각을 몇 개 맞추는 것과 같습니다. 나머지 퍼즐은 당신이 직접 완성하면 됩니다!

회개로의 부름

2장 13절: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도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책망하신 두 가지 악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그들은 물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둘째, 그들은 구멍이 뚫려 있고 물을 전혀 담을 수 없는 그릇, 즉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3장에서, 예레미야는 간음한 유다와 타락한 이스라엘에 대해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100년 전에 포로로 끌려간 북방 왕국이었습니다. 예레미야와 당시 다른 선지자들이 유다 백성에게 전하고자 했던 가장 큰 부담은 이것이었습니다: "너희 자매 이스라엘이 그들의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을 포로로 보내셨도다. 너희는 그것으로부터 교훈을 얻었느냐?" 유다는 그것으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 우리는 더 낫다. 그런 일이 우리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줄까요? 개신교 기독교는 주로 두 그룹으로 나뉩니다. 하나는 일반적인, 주류의, 교파적 교회들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이스라엘의 북쪽 왕국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분리된 회중"이라고 부르는 작은 비국교도(관행을 따르지 않는 사람) 그룹들이 있습니다. 이 그룹들이 처음에 스스로를 분리했을 때 그들은 좋은 동기를 가지고 그렇게 했습니다 - 타협과 세속으로부터 분리되고 주님을 위한 순수한 증거가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주류 교파의 실패로부터 교훈을 얻었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유다에게 "이스라엘이 너희보다 낫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오늘날 많은 "분리된 회중"과 그들의 지도자들에게 말씀하시는 바로 그 말씀입니다: "그 주류 교파의 지도자들 중 일부는 소위 분리된 회중의 지도자들보다 낫다." 왜 이 새로운 지도자들은 교훈을 얻지 못할까요? 그들은 유다가 한 말과 똑같은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은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그룹도 타락하고 같은 길을 갑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가 남은 자들을 여기로 데려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이 선지자들이 전한 또 다른 부담이었습니다: "남은 자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올 것이다." 남은 자들은 "자기들의 죄악을 인정하는 자"일 것입니다(3:13). 주님은 "내가 너희를 한 도시에서 한 명, 한 가족에서 두 명을 취하여 시온으로 데려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3:14). 여기서 시온은 하나님의 참된 교회의 한 유형입니다. 그 교회의 한 가지 특징은 그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목자"인 지도자들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그분의 길에 대한 명철로 하나님의 백성을 양육한다는 것입니다(3:15). 그런 지도자들을 찾았을 때 여러분은 시온에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교회 지도자들이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시온을 찾지 못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경건한 지도자들은 지성에 중점을 두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측은히 여김과 사랑에 중점을 둡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착취하지 않으며, 사람들의 헌금에는 관심이 없고 주님과 동행하는데 관심이 있습니다.

3장 16,17절: "그들이 다시는 '여호와의 궤'를 말하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보좌에 대하여 말하리라." 다시 말해서, 시온에서, 그들은 상징이 아니라 현실에 대하여 말합니다. 이것은 구약성경에서 여호와의 궤가 언급된 마지막 때입니다. 바벨론 사람들이 궤를 빼앗아갔고, 그 이후로 아무도 그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4장 3,4절: 여호와께서 유다에게 말씀하신다, "너희 묵은 땅을 갈아라. 가시덤불 가운데에 씨를 뿌리지 말아라. 여호와를 위하여 스스로 할례를 행하고, 너희 마음의 포피를 제거하라." 그것은 자신을 낮추고, 깨어지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인간적 자원에 의존하는 것을 멈추라는 부르심입니다.

4장 19절: "내 영혼아, 내 영혼아, 나는 괴로워한다. 내 심장이 두근거린다. 나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전쟁의 경보다." 예레미야는 바벨론 군대가 곧 유다를 포로로 잡아갈 것이라는 것을 느꼈고, 그것은 그를 크게 불안하게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 백성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마음에 큰 부담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선지자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입을 만지셔서 그분의 백성의 대변인이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또한 우리의 마음을 만지셔서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도록 하셔야 합니다. 그럴 때에만 우리는 짐을 지게 됩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소돔이 멸망될 때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과 비슷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소돔에 열 사람이 있다면 그 도시를 용서해 주시겠습니까?"라고 간청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다. 소돔에 의로운 사람이 열 명 있다면 그 도시를 용서해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창 18:32). 그리고 여기서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예루살렘에서 의로운 사람 한 명이라도(열 명이 아니라 한 명이라도) 찾으면, 내가 그 도시를 용서하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한 명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 한 명도 없는 도시의 상황을 상상해 보십시오!

교회에서 한 명의 의로운 사람이 그 교회에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한 명의 의로운 사람이 교제와 가정에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 한 명에 하나님을 더하면 어디서나 다수가 됩니다. 의로운 남자와 여자가 ​​되십시오. 그러면 당신이 어디를 가든 사탄에 대항하여 전세를 뒤집을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강력하게 지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6장 16절: 주님은 " 길가에 서서 옛적 길, 즉 선한 길이 어디인지 물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순절 직후 사도들이 걸었던 길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선한 길"입니다. 그러나 유다 사람들은 그 길을 걷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7장: 예레미야가 등장하기 직전, 요시야 왕 시대에 소위 부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날 많은 "부흥"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변화시키지 못한 깊이가 없는 부흥이었습니다.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성전 입구에 서서 사람들에게 "너희 길을 바꾸고 '이것은 여호와의 성전이다' 하는 속이는 말을 믿지 말라"고 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4절). 다시 말해서, "만약 너희의 길을 바꾸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너희의 종교적 언어에 감명받지 않으실 것이다. 너희가 도둑질하고 살인하고 간음하고 거짓말하고 우상을 숭배한 다음 와서 여호와의 집에 서서,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고 '우리는 구원받았다' 하려느냐?"(9,10절). 예수님은 11절을 인용하여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집이 강도의 소굴이 되었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1:13). 이제 2000년이 지난 지금, 하나님은 교회에 서서 같은 말을 하는 선지자가 필요합니다: "당신은 개인적인 생활에서 죄 가운데 살고, 재정 문제에서는 불의하게 살다가, 하나님의 집에 와서는 '우리는 구원받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원히 안전합니다.'라고 말할 것입니까?" 그것은 위선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의 상태는 예레미야 시대와 같습니다.

우리는 이미 가인과 아벨 시대로부터 시작된 종교성과 영성의 두 흐름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종교인들이 죄에서 구원받지 못하는 소위 '부흥'을 경험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지 못하는 모든 부흥은 깊이가 없고 가치 없는 부흥입니다. 이 사람들은 주님 앞에 나아가면서 동시에 하늘의 여왕을 숭배하기 위해 빵을 굽고 있었습니다(7:18). 오늘날 기독교계에서도, 그들이 "하늘의 여왕"이라고 부르는 자를 숭배하는 수백만 명이 있습니다. 이 "여왕"은 예레미야 시대에 숭배되었던 우상 "하늘의 여왕"을 본떠 만들어졌습니다. 하늘에는 여왕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곳에서 주님이시며 그분은 하늘에 있는 모든 것의 주님이십니다.

예레미야는 이 사람들에게 이렇게 계속 어리석은 짓을 한다면 - 어느 날 갑자기 추수가 끝나고 구원받지 못한 채로 남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8:20). 오늘날에도 사람들에게 선포해야 할 말씀입니다. 주님은 추수할 날을 정해두셨습니다. 그때는 그분의 말씀에 응답하기에는 너무 늦을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이 일을 생각하며 울었던 것을 보십시오. 9장 1절: "오,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의 샘이 되어, 내 백성의 딸의 죽음을 위해 밤낮으로 울게 하소서." 예레미야는 공개적으로 그렇게 강한 말씀을 전했지만, 다른 사람이 없는 데서는 울었습니다. 모든 참된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의 죄를 위해 은밀히 울었습니다.

9장 23-24절: 주님은 여기서 지혜로운 사람과 부자에게 지혜나 부를 자랑하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선지자들은 항상 지성이나 부를 자랑스러워하는 사람들을 반대하여 설교했습니다. 자랑할 만한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주님을 개인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 17:3).

예레미야와 하나님의 대화

10장 24절: 예레미야는 "주여 나를 바로잡으시되, 분노로 하지 마옵소서. 주께서 나를 없어지게 하실까 염려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 모두가 기도해야 할 좋은 기도입니다.

13장 17절: 예레미야는 다시 울었습니다. 그는, "너희가 내 설교를 듣지 아니하면, 내 영혼(soul)이 너희 교만함 때문에 은밀히 울 것이다. 내 눈이 몹시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리라..."라고 말합니다. 예레미야는 "통곡의 선지자"라고 불립니다. 그는 대중 앞에서 강하고 담대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은밀히, 예루살렘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았을 때 예수님께서 우셨던 것처럼 울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에서를 제외하고는 대중 앞에서 우신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은밀히 우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짐을 지고 있을 때만 울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관심이 없다면 울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아이가 죽어가고 있을 때 울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의 아이가 죽어가고 있을 때만 울 것입니다. 울음은 관심과 진정한 사랑에서 생겨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백성을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주님은 그런 선지자에게만 기름을 붓고 지지하십니다.

15장 16-21절: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대변인이 되기 위한 세 가지 조건을 봅니다.

l 첫째: "주님, 나는 당신의 말씀을 발견하였고, 당신의 말씀은 내 마음의 기쁨과 즐거움이 되었습니다"(16절). 하나님의 말씀은 당신의 마음의 기쁨과 즐거움이어야 합니다. 사업가가 돈을 버는 데 기쁨을 느끼는 것처럼, 당신의 기쁨은 하나님의 말씀에 시간을 들이는 데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설교자가 되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는 데 시간을 들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의 기쁨과 즐거움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l 둘째: "나는 웃으며 떠들어대는 자들의 모임에 앉지 않았습니다"(17절). 유다의 다른 사람들이 파티를 열고 즐거워할 때, 예레미야는 홀로 가서 하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이 세상의 농담하는 자들을 멀리하기 위해 스스로를 훈련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결코 하나님의 대변인이 될 수 없습니다. 나는 유머와 건전한 농담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문제에서 어디에서 멈춰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그들은 끊임없이 농담을 합니다. 예레미야는 그런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지 않도록 했습니다.

l 셋째: 예레미야는 18절에서 하나님께 불평했습니다, "주님, 왜 나를 실망시키셨습니까? 당신은 나에게 속이는 시냇물과 같았고, 믿을 수 없는 물과 같았습니다. 나는 시냇물에 물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왔지만 물이 없었습니다. 당신은 나를 실망시키셨습니다." 주님은 "나에게 그런 말을 하지 말아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예레미야가 믿지 않는 말을 한 것을 책망하셨습니다(19절).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믿을 수 없는 시냇물과 같지 않으십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감정에 의존하고 자신의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네가 내게로 돌아와서 쓸모없는 말(방금 네가 한 말과 같은 - 쓸데없고 쓸모없는 말과 불신의 말)을 하는 습관을 버리고 오직 귀중한 말(믿음과 선함의 말)만 한다면, 너는 나의 대변인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중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대변자가 되고 싶습니까? 나는 당신이 어떤 책을 읽고 나온 죽은 설교를 하는 설교자가 되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변자가 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되고 싶다면, 쓸데없는 친구들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당신의 시간을 절약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는 데 쓰십시오. 그것이 당신의 기쁨이 되게 하십시오. 쓸모없는 대화를 없애고 항상 믿음의 말을 하고, 모든 대화에서 선한 말만 하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당신을 그분의 입으로 삼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편애가 없습니다.

그러고 나서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결코 그들에게 돌아가지 말라. 너는 그들에게 영향을 미쳐야 한다. 그들이 결코 너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하라"(15:19 - Living). 세상이 당신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타락한 기독교 집단이 당신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하십시오. 타락한 목사들과 돈을 사랑하는 설교자들이 당신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영향을 미치게 하십시오 -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경건한 쪽으로 영향을 미치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약속은 그분이 우리를 "사람들이 우리를 이기지 못하도록 견고한 놋 성벽"으로 만들 것이라는 것입니다(15:20). 할렐루야!

하나님의 종이 되기 위해서는 큰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예레미야의 경우, 그 대가의 일부는 그가 평생 독신으로 지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이곳에서 아내를 맞이하거나 아들딸을 두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16:2). 바울과 예레미야와 같은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독신으로 살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그 부름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초상집이나 잔치집에 들어가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습니다(16:5,8). 선지자들은 주님을 섬기려면 그들의 식습관을 훈련해야 했습니다. 사람들이 예레미야에 대해 무슨 말을 했는지 상상해 보세요. 그들은 그가 매우 사회적이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노닥거릴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 기다려야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대가를 치르고 싶어하지 않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대변인이 되고 싶어합니다. 그런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많은 해를 끼칩니다.

17장 5-8절은 주님을 신뢰하는 것과 사람을 신뢰하는 것에 대해 알려주는 매우 복된 구절입니다. 주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그분의 백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육신의 팔에 의지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러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는 물가에 심은 나무와 같을 것이요. 그는 항상 열매를 맺을 것이다." 주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그분께 기대는 것을 의미하며, 우리 자신의 능력이나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어떤 인간적 자원도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종종 사람들을 사용하여 우리를 돕지만, 그분은 우리가 오직 그분께만 의지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 믿음의 사람은 항상 그의 삶에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는 결코 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그를 언제 만나든, 그는 항상 신선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내면의 삶은 성령의 강에서 물을 끌어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17:21-24에서, 예레미야는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안식일에 일하는 탐욕스러운 사람들을 꾸짖습니다.

18장: 주님께서는 토기장이의 집에서,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그릇을 만드는 방식을 통해 예레미야에게 몇 가지 교훈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릇이 망가졌을 때, 그는 진흙으로 다른 그릇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유다를 향한 격려의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타락했을 때에도, 그들에게 그렇게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당신에게도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어쩌면 당신의 삶은, 당신이 주님께 응답하지 않았기 때문에 망가졌을 수도 있습니다. 당신에게는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예레미야 18장을 읽어보세요. 당신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주님이 당신을 겸손하게 만드는 데 성공할 수 있다면, 여전히 당신을 그분의 영광을 위한 그릇으로 만드실 수 있습니다. 왜 토기장이의 집에서 그 그릇이 망가졌을까요? 토기장이가 으깨기에 적합하지 않는 딱딱한 진흙 덩어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완고함과 교만을 깨뜨리도록 허용한다면, 그분은 여전히 ​​당신을 그분의 영광을 위한 그릇으로 만드실 수 있습니다.

20장 7-11절: 여기서 예레미야는 "주님, 당신은 내가 이 사람들에게 친절한 말을 하도록 허락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항상 심판, 심판입니다"라고 불평합니다(Living). 많은 사람들이 균형 잡힌 설교를 한다는 평판을 얻고 싶어 합니다. 교사에게는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균형 잡힌 선지자는 없었습니다. 선지자들은 모두 사역에서 불균형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았고 영원히 같은 메시지를 계속 전파했습니다. 예레미야는 40년 동안 같은 심판의 메시지를 전파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도, 하나님은 특정한 짐을 지고 있는 선지자들을 일으키십니다.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짐을 지고 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선지자에게 종종 단 하나의 짐을 주십니다. 그가 주님의 예언자로 남기 원하고, 선의의 다른 기독교인들이 그를 보다 "균형 잡힌" 사역으로 전환하지 못하게 하려면 그는 그것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가 그 압력에 굴복하여 "균형 잡힌" 사람이 되는 날, 그는 더 이상 그의 세대에 하나님의 선지자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다 백성에게 친절한 말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심판의 메시지 한 가지를 예레미야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40년 동안 그 임무를 충실하게 고수했습니다 - 그리고 그는 끝까지 하나님의 대변인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없애버리려고 했고 그를 비난했습니다(20:10). 심지어 그의 가까운 친구들조차도 그의 몰락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위대한 용사와 같으사 예레미야와 함께 하실 것이며, 그를 핍박하는 자들은 걸려 넘어져서 이기지 못하고 영원한 수치를 당할 것이라고 그는 확신했습니다(20:11). 주님은 예레미야의 믿음에 따라 그의 편에 서셨고, 정확히 그렇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그분의 선지자들을 보호하십니다.

그리스도와 새 언약

23장 5,6절: 여기서 우리는 예레미야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하여 예언하는 것을 봅니다. 그분은 여기서 '의로운 가지', '여호와 우리의 의'라고 불립니다. 이 칭호는 주님이 그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함으로써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분임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새 언약의 칭호이며 - 예레미야는 새 언약에 대해 꽤 많이 예언했습니다. 이 장은 또한 모든 설교자들이 읽어야 할 훌륭한 장인데, 여기에는 그들이 주의해야 할 많은 경고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여기서 폭로되고 비난받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데 시간을 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거짓 선지자들이었습니다(23:18). 그들은 하나님 앞에 서서 그분의 말씀을 기다리기에는 너무 게으릅니다. 오늘날 기독교계에는 명예와 돈을 추구하는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꿈꿨다고 주장하는 상상의 꿈에 대해 거짓으로 예언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말을 듣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들은 자신만의 메시지를 만들어내어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부주의하게 그 문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로 말씀하셨는지 확신할 수 없을 때, 일어나서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은 오늘날 그 문구를 사용하고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말합니다. 이것은 위험하고 악합니다. 나는 그런 모든 사람들이 이 장을 읽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법을 배우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나는 하나님의 영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한 바울처럼, 겸손한 사람을 통해 말씀하십니다(고전 7:40) -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라고 거만하게 말하는 사람들을 통해서가 아닙니다. 그런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십시오 - 오늘날 기독교계에는 그런 사람들이 수천 명이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이 불과 망치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23:29). 왜 그렇게 많은 설교자들의 말이 사람들의 굳은 마음을 깨뜨리고 불을 붙이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들의 말은 주님으로부터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5장 3절: 이것은 예레미야의 사역의 중간 부분입니다. 그는 23년 동안 예언했지만, 유다 사람들은 듣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유다가 70년 동안 포로로 잡혀갈 것이라고 충실하게 예언했습니다 -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되었습니다.

26장 20-24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우리야라는 또 다른 선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또한 예레미야와 같은 메시지를 예언했습니다. 왕이 그의 말을 듣고서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21절). 우리야는 이것을 듣고 애굽으로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여호야김 왕은 그를 애굽에서 데려오라고 사람들을 보냈고, 그들은 우리야를 붙잡아 왕 앞으로 데려왔습니다 - 그리고 왕은 그를 죽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예레미야를 보호하셨습니다. "왕의 비서, 아히감이 예레미야와 함께 서서 그를 무리에게 넘겨 죽이지 말라고 왕실을 설득했습니다"(26:24 - Living). 이 두 선지자는 같은 메시지를 충실하게 전파했습니다. 한 명은 죽고 다른 한 명은 벗어났습니다. 이것은 야고보와 베드로에게 일어난 일과 비슷합니다. 야고보는 죽었지만 베드로는 풀려났습니다(행 12장).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께서 왜 그분의 충실한 종 한 명은 죽임을 당하고 다른 한 명은 벗어나도록 허락하시는지 궁금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위해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야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하신 사역은 끝났습니다. 예레미야의 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으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당신이 하나님의 충실한 종이라면 사람들이 당신을 죽이려 할 때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당신에 대한 하나님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면, 그분은 어떤 식으로든 당신의 생명을 보호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기 전에는 당신은 죽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왕의 비서를 통해 은총을 베푸셨고 예레미야의 생명을 구해 주셨습니다. 예레미야의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 그분은 우리에게도 똑같이 하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29-33장에서는 미래의 이스라엘의 회복과 새 언약에 대해 읽습니다. 유다 백성은 70년 동안 포로로 잡혀 있을 것입니다(29:10). 이것은 다니엘이 읽고 고무된 예언입니다(단 9:2,3). 그리고 다니엘은 예레미야가 다음 구절에서 명령한 대로 행했습니다(29:11-14). 주님은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찾으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13절).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의 하나님의 백성의 이동은, 하나님께서 온 마음으로 그분을 찾는 사람(다니엘)을 찾으셨을 때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영적 바벨론에서 영적 예루살렘(참 교회)으로의 하나님의 백성의 이동도, 하나님께서 온 마음으로 그분을 찾는 사람들을 찾으셨을 때 시작될 것입니다.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는 자들은 결코 그분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그분은 오직 부지런히 그분을 찾는 자들에게만 상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히 11:6 - KJV). 그러자 예레미야는 거짓 선지자들 중 몇몇을 거론하여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들의 말을 듣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29:21-32). 그는 거짓 선지자들의 이름을 밝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31장 3절: 여기 우리를 격려하는 주님의 아름다운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였노라. 그러므로 나는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노라." 그분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받을 자격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우리를 향한 그분의 영원하고 변함없는 사랑 때문에 우리를 그분께로 이끄십니다.

32장: 여기서 우리는 예레미야가 시드기야 왕의 명령에 의해 투옥된 것을 읽습니다.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그의 고향에서 땅을 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그를 통해 예언하신 것에 대한 그의 믿음을 보여주는 행동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말해서, 전쟁이 시작되려고 하고 적이 온 땅을 차지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때 땅을 사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70년 후에 하나님의 백성이 돌아와서 그 날에 그의 친척들이 이 땅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돈으로 이 땅을 샀습니다. 그는 심판 기간이 끝난 후에도 지속될 무언가에 자신의 돈을 지불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무런 이득도 얻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위해 우리의 삶과 돈을 내놓는 것과 비슷합니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영리한 사업가는 세상적인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는 무언가에 자신의 돈을 투자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행동에서 영원한 보상을 거둘 것이라고 믿으며, 그렇게 합니다. 예레미야는 "주님, 당신께는 불가능한 것이 없습니다"라는 말로 그 믿음을 표현했습니다(32:17). 그는 이 재산을 사는 것과 관련하여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모든 육체의 하나님 여호와이다. 내게 어려운 것이 있느냐?"(32:27). 우리는 이 말씀을 종종 합창으로 부르지만, 나는 우리가 예레미야처럼 행동할 의향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33장 3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또 다른 놀라운 약속을 봅니다: "나에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리라. 내가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능력 있는 일들을 네게 보이리라." 얼마나 큰 초대입니까! 이 선지자들이 경험한 기적을 경험하려면, 우리는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33장 15,16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오심에 관한 또 다른 예언을 봅니다.

예루살렘의 함락과 그 이후

34-45장에서, 우리는 예루살렘의 함락에 대해 읽습니다. 예루살렘은 바벨론 사람들에게 함락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우리는 레갑 가문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읽습니다(35장).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레갑 사람 가족을 성전으로 불러와서 그들에게 포도주를 마시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레미야가 그렇게 했을 때, 이 레갑 사람들은 포도주를 마시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대대로 조상들이 그들의 가문에게 포도주를 절대 마시지 말라고 했고, 그들은 200년 동안 그 명령을 따랐다고 말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순종입니까! 그러자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조상들의 말을 순종하는 충실한 가문이 있다. 그러나 유다는 나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러자 주님은 레갑 가문에게 그들이 항상 그분 앞에 설 수 있는 특권을 가질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35:19). 오늘날에도 기독교계의 많은 타락자들 가운데서도,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서 있는 한 가정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모가 경건한 방식으로 양육한 그런 가족들을 두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36장에서 예레미야는 처음으로 무언가를 기록하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두루마리를 가져다가 이것을 기록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2절). 때때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기록하는 것은, 우리에게도 좋은 일입니다 - 우리는 종종 그것들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왕은 그 두루마리에 대해 듣고, 가져오라고 명령했습니다. 왕은 그 중 작은 부분을 듣자마자, 화가 나서 그것을 잘라내어 불에 던졌습니다(36:22,23). 예레미야는 어떻게 했습니까? (왕이 파괴한 것이 오늘날 우리가 성경에 가지고 있는 예레미야서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러자 예레미야는 다른 두루마리를 가져다가 바룩에게 전에 기록한 모든 것을 다시 받아적게 했습니다. 이번에는 주님께서 훨씬 더 많이 덧붙이셨습니다"!!(36:32 - Living). 그래서 예레미야서가 52장이 있는 것입니다! 왕이 첫 번째 두루마리를 찢어버리지 않았다면, 우리는 예레미야서에서 36장들만 볼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전세를 역전시키는 방법입니다!!

38장에서, 우리는 예레미야가 바벨론이 와서 유다를 점령할 것이라고 설교했기 때문에, 진창이 가득한 우물에 던져졌다는 것을 읽습니다 - 그리고 왕과 그의 관리들은 그것을 듣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는 진창 속에 빠져 곧 죽을 뻔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주권이 그분의 종의 생명을 보존하는 것을 봅니다. 에벳멜렉이라는 아프리카인(에티오피아인)이 왕에게 가서 예레미야를 구덩이에서 끌어올리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였고, 그를 끌어내어 그의 목숨을 구했습니다(38:6-13). 하나님께서는 가장 예상치 못한 곳에 그분의 대리인들을 두셔서 그분의 충실한 종들을 섬기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에벳멜렉이 예레미야를 도왔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에게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가도, 그는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39:16-18). 하나님은 그분의 종들을 돕기 위해 준 찬물 한 컵도 잊지 않으십니다.

39장 11-14절: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왔을 때, 그는 예레미야에 관해 듣고 그의 사령관에게 그를 돌보라고 명령했고, 어떤 식으로든 그를 해치지 말고 "그가 원하는 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통치자 앞에서도 그분의 종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동일하시며, 오늘날에도 그분의 종들에게 동일하게 행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사령관, 느부사라단은, 예레미야에게 "내가 너를 풀어주겠다. 네가 우리와 함께 바벨론으로 가고 싶다면, 내가 너를 돌보고 잘 대우할 것이다. 그러나 가고 싶지 않다면, 네가 원하는 곳으로 가라"고 말했습니다(40:4). 그 이방인은 유다 사람들보다 하나님의 선지자를 더 높이 평가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그리스인들(헬라인)은 예수님을 보고 싶어했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요 12:20,21). 지난 20세기 동안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보내신 선지자들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에서 편안한 삶을 살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가지 않기로 선택했고, 유다의 멸시받는 사람들과 함께 머물렀습니다. 나중에, 그들(유다 사람들)이 애굽으로 가려고 계획할 때, 그들은 예레미야에게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라고 말했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순종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예레미야가 주님께서 그들이 유다에 머물기를 원하고 애굽으로 가지 않기를 원하신다고 말했을 때, 그들은 태도를 바꾸어서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말했습니다(42,43장). 거기서 우리는, 설교자가 자신이 듣고 싶은 설교만 하기를 바라는 인간의 완고함을 볼 수 있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예레미야를 데리고 애굽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예레미야는 애굽의 신전을 향해 예언했고, 그는 다시 애굽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예언했습니다. 그 후로는 예레미야에 대해 전혀 듣지 못했습니다(43,44장).

바룩은 예레미야의 이러한 예언을 기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바룩에게 경고를 주셨습니다 - 이 경고는 우리 모두가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네가 네 자신을 위해 큰 일을 구하느냐? 그것들을 구하지 말라"(45:5). 우리는 우리의 사역에서 자신을 위해 영광을 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부름은 우리 주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멸시받고 거부당하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같은 사람들은 우리를 인정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백성 대부분은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들을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46-51장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유다를 둘러싼 여러 나라에 대해 예레미야에게 주신 심판의 예언을 읽었습니다 - 예레미야에게 매우 친절했던, 세계 초강대국인 바벨론을 포함합니다. 참된 예언자는 두려움이나 호의 없이 진실을 말합니다.

48장 10절(AMP)에서, 우리는 "게으름과 속임수로 주의 일을 태만히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 주께서 선언하신 심판을 집행(선포)하는 것을 칼(혀)로 막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읽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주의해야 할 경고입니다.

48장 11절은 "젊은 시절부터 평안히 지내며, 한 그릇에서 다른 그릇으로 옮겨지지 아니하고, 그러므로 그(이기적인) 냄새가 변하지 아니한" 사람을 묘사합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그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 시절에 그들을 깨뜨릴 수 없으시므로 그들의 냄새는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굳고 완고하며 쓸모없는 존재로 남습니다.

마지막으로, 52장에서, 우리는 예루살렘의 함락에 대해 읽습니다.

이렇게 하여 40년 동안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에게 인기 없는 메시지를 충실하게 전파한 선지자에 대한 이 놀라운 책이 끝납니다. 그는 사람의 눈에는 실패자였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엄청난 성공자였습니다.

주님께서 오늘날 예레미야와 같은 사람들을 많이 일으키시기를 바랍니다.

장 25
예레미야애가

눈물의 선지자

애가는 예레미야의 애통함을 담은 책입니다. 히브리어 알파벳은 22글자로 되어 있으며, 이 책의 처음 네 장은 각 구절이 히브리어 알파벳의 다른 문자로 시작하는 시처럼 쓰여졌습니다. 시편 119편과 잠언 31:10-31은 이런 스타일의 글쓰기의 다른 예입니다.

이 책은 예루살렘을 위한 장례 노래입니다. 예레미야는 울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거리가 한때 사람들로 북적거렸지만(1:1), 이제는 슬픔에 잠겨 홀로 애통해하는 과부처럼 앉아 있는 것을 슬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백성과 자신을 동일시했으며 - 이것이 이 책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중요한 것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슬픈 상태

1장 9절: 예루살렘 사람들은 오늘날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러하듯이, 그에 따른 형벌을 생각하지 않고 부도덕함으로 자신을 더럽혔습니다. 그들은 죄를 지으며, 언젠가는 자신이 지은 모든 죄에 대해 하나님께 대답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1장 14절: 여기서 예레미야는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심판하신 방식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의 죄를 취하셔서, 그것들을 밧줄로 엮어, 그 밧줄을 노예의 멍에에 매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힘을 약화시켜 원수들에게 넘겨주셨습니다"(Living). 그들을 포로로 잡은 자에게 그들을 묶게 한 밧줄을 만든 것은 바로 그들 자신의 죄였습니다.

2장 7절: "주께서 그분의 제단을 버리셨습니다. 그분은 그분의 백성의 거짓 "예배"를 경멸하셨습니다. 그분은 그들을 원수들에게 주셨습니다." 주님은 오늘날 진영에 죄가 있는 기독교 교회에서 발견되는 거짓 예배를 멸시하십니다. 지도자들 자신도 죄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그분의 백성이 사탄에게 노예가 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2장 9절: "율법은 더 이상 없고, 그 선지자들은 주님으로부터 환상을 찾지 못하느니라". 오늘날 기독교에서도 이와 같은 상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2장 11,12절: 예레미야는 더 이상 울 수 없을 때까지 울었다고 말합니다. "나는 눈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울었습니다. 내 마음은 찢어졌습니다. 어린 아이들과 작은 아기들이 길거리에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엄마, 음식 주세요'라고 울며 엄마의 가슴에 쓰러집니다"(Living). 오늘날 하나님의 종들은, 부패한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착취당하는 가난하고 무고한 사람들과, 지도자들의 나쁜 본보기로 인해 잘못된 길로 인도되고 있는 젊은이들을 위해 울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날 기독교계의 비참한 상황에 맞서야 합니다.

2장 14절: "너희 '선지자들'은 철저히 많은 어리석은 거짓된 말을 했다. 그들은 너희의 죄를 지적함으로써 너희를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거짓말을 하고 모든 것이 잘되고 있다고 말했다"(Living). 오늘날 많은 교회의 상황을 잘 표현한 글입니다.

2장 19절: 그래서 예레미야는 사람들에게 "밤에 일어나서 너희 하나님께 부르짖으라. 너희 마음을 주께 물처럼 쏟아라. 손을 들어 그분에게 기도하라. 너희 자녀를 위하여 간구하라"고 권고합니다 - 오늘날 우리에게도 좋은 권고입니다.

3장 22,23절: "주님의 사랑의 자비는 결코 그치지 아니하시며, 그분의 긍휼은 아침마다 새롭습니다. 그분의 신실하심이 크십니다." "그분의 긍휼은 아침마다 새롭습니다"라는 구절은 매일 아침 하나님께서 우리를 마치 전에 죄를 지은 적이 없는 것처럼 바라보신다는 뜻입니다 - 우리가 과거의 모든 죄를 회개하고 그분께 고백했다면 말입니다. 그분은 더 이상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매일 새로운 긍휼로 우리를 바라보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은 방식으로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하며, 매일 새로운 긍휼로 그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과거 때문에 그들을 나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3장 27-33절에는 모든 젊은이에게 좋은 말씀이 있습니다: 젊을 때 훈련(discipline)의 멍에(굴레)에 복종하라. 하나님께서 당신 위에 두신 권위 아래 자신을 낮추라. 너의 얼굴을 흙바닥에 대면 당신에게 소망이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당신을 치거든, 다른 뺨을 돌려대라. (예레미야가 예수님보다 먼저 이렇게 말했다). 주님께서 당신에게 비록 슬픔을 주실지라도, 또한 불쌍히 여기실 것이다."

주님께로 돌아가라는 부름

3장 40절에는 우리 모두에게 좋은 말씀이 또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길을 시험(test)하고 살피며(examine), 회개하여 주님께로 돌아가자."

예레미야는 주님께서 어떻게 그를 적들로부터 보호하셨는지 설명합니다: "내가 해를 입힌 적이 없는 원수들이 나를 쫓았습니다. 그러나 주님, 나는 당신의 이름을 불렀고, 당신은 나의 말을 들으셨습니다. 당신은 와서 나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 당신은 나의 변호사이십니다. 내 소송을 변호해 주십시오. 나의 재판관이 되어 내가 옳음을 증명해 주십시오"(3:52-59).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격려가 되어, 주님께서 우리의 변호사이자 재판관이 되어 우리를 적들로부터 지켜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줍니다.

4장 2절: 한때 금만큼이나 가치 있었던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제는 질그릇처럼 되었습니다.

5장 21절: "주님, 우리를 회복시켜 주시고, 다시 당신께로 돌아오게 하소서. 옛날과 같이 우리를 새롭게 하소서." 예레미야는 사람들에게 설교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타락한 상태에 대해 마음속으로 깊은 관심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설교할 때 일어나서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를 위대한 사람으로 만든 것은 그들을 위해 뒤에서 울고, 염려하고, ​​부담을 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밤에 일어나 하나님께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나는 여러분 모두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주님을 섬기고 싶다면,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그런 은밀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날 인도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모독당하는 것을 걱정해야 합니다. 당신이 밤에 주님 앞에서 울고 당신의 걱정으로 인해 그분께 부르짖는다면, 당신이 강단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때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서 계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장 26
에스겔

하나님의 영광의 떠남과 돌아옴

에스겔은 예레미야의 영향을 크게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적어도 25년 동안 바벨론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40여 년 동안, 유다 백성들을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형벌에서 구하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분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주님께서는 "지금 너에게 가장 좋은 것은 나의 징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는 벌을 받아야 한다. 바벨론 왕에게 복종하고 기쁨으로 바벨론으로 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징계하고 싶어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결코 징계를 받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영적 교만에 빠지지 않는 한 결코 육체에 가시가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 징계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거나 이미 잘못된 길로 간 것을 보실 때에만 필요합니다. 그럴 때 가장 좋은 것은 그분의 징계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유다에게, "네가 바벨론에 가면, 내가 거기서 너를 축복할 것이다. 70년 동안 내 징계와 훈계를 받아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처럼 즉시 하나님께 순종하여 갔습니다 - 그들은 포로들 중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다에서 자신의 것을 추구하던 어떤 사람들은 나중에 바벨론으로 강제로 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바벨론에서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두 명의 선지자, 에스겔과 다니엘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징계를 받거나 타락한 상태에 있을 때에도 그분의 백성을 크게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때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여전히 선지자들을 보내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선지자가 되라는 하나님의 예상치 못한 부르심

에스겔은 제사장이 되기 위해 훈련을 받던 제사장의 아들이었습니다(1:3). 하지만 그가 30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갑자기 그를 선지자로 부르셨습니다(1:1). 우리는 어떤 사역을 계획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완전히 다른 것으로 부르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에스겔처럼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것은 무엇이든 기꺼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제사장의 삶은 사실 선지자의 삶보다 훨씬 더 안전합니다. 제사장은 보통 죽임을 당하지 않았지만 선지자는 항상 죽임을 당했습니다. 선지자는 또한 매우 힘든 시간을 보냅니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들의 손에 고통을 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손도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에게 무겁게 얹혀 있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이 제사장이었다면, 그런 일을 겪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다른 사역보다 더 많은 고통을 수반하는 사역이 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늙었을 때, 누군가가 네가 가고 싶지 않은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이는 베드로가 믿음 때문에 어떻게 고통을 받을 것인지를 암시합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즉시, 요한을 가리키며, 주님께, "그는 어떻습니까? 그도 나처럼 고통을 받을까요?"라고 물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것은 네 일이 아니다. 너는 그저 나를 따르라"고 대답하셨습니다(요 21:18-23). ​​하나님께서 당신을 고통이 수반되는 사역으로 부르신다면, 다른 사람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그들이 편안한 시간을 보내든지 아닌지에 대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당신의 일이 아닙니다.

에스겔은 즉시 응답했습니다. 다행히도 그는 응답했습니다. 그가 응답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에 대해 전혀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허드슨 테일러가 하나님께서 중국으로 가라는 부르심을 받았을 때 응답하지 않았다면, C.T. 스터드가 하나님께서 아프리카로 가라는 부르심을 받았을 때 응답하지 않았다면, 짐 엘리엇이 하나님께서 남미로 가라는 부르심을 받았을 때 응답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 사람들에 대해 결코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부르시자마자 응답했습니다.

서른 번 째 해는 사람들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인 듯합니다 -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말입니다. 요셉은 30세에 애굽(이집트)의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다윗은 30세에 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0세에 그분의 지상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사도들 대부분은 사역을 시작했을 때 30세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에스겔도 30세에 그의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아마 그 나이쯤 되면 하나님께서 자녀를 위해 준비하신 구체적인 사역으로 인도하기 시작하시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그 특정한 사역을 위해 우리를 준비시키는 데 오랜 세월을 보내셔야 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항복하고 10대와 20대에 당신을 준비시키도록 허락한다면, 당신은 30세(또는 35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계획하신 그 특정한 사역을 위해 준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젊은이들이 참을성이 없고 기다리려 하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이 30세가 되기 전에 나가서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16세라도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어린 시절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인도하고 보호하기 위해 당신을 권위 아래 두어야 합니다. 하지만 많은 젊은이들이 권위에 대한 복종에 짜증을 내고, 그 결과 결코 그들은 깨지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계획하신 사역을 위해 준비되지 못합니다. 심지어 예수님도 사역에 들어가기 전에 30년 동안 요셉과 마리아에게 복종하는 훈련을 필요로 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더 그럴까요? 에스겔은 어린 시절에, 예레미야에게 복종했을 것입니다. 그는 예레미야의 예언을 듣고 청소년 시절에 연구했을 것입니다. 이 젊은이의 충실함을 보신 하나님은, 에스겔을 제사장이 아닌 선지자로 정하셨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하늘을 열어서 그분 자신과 그분의 백성을 위한 메시지를 그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여호야긴 왕이 유배된 지 5년째 되는 달 5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니라"(1:2,3). 하나님은 항상 우리에게 말씀하고 싶어하십니다. 하지만 우리 생각의 한계와 (죄로 인한) 뒤틀림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음성을 가끔만 분명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그분(예수님)에게 끊임없이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조차도 그의 서신 중 하나에서 자신이 쓰고 있는 것이 성령으로부터 온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고전 7:12,25,40).

에스겔은 그의 책에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날짜를 9번 기록했습니다(1:2,3; 24:1; 26:1; 29:1,17; 30:20; 31:1; 32:1,17).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신 날짜를 기록하는 것도 우리에게 좋습니다. 나는 주님께서 내 삶에서 나에게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여러 가지 말씀들을 날짜와 함께 기록해 두었습니다. 나는 가끔씩 그것들을 살펴보며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주님의 손이 그에게 임하였다"(1:3)는 표현은 에스겔서에서 7번 나옵니다. 그것은 에스겔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제, 너는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가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원한다면, 하늘이 항상 우리에게 열려 있는 가운데 평생 이렇게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의 손이 당신에게 임하도록 허락하고, 양심을 깨끗하게 유지하고, 자신을 낮추고 주님을 경외한다면, 그것은 쉬울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주님의 손이 에스겔에게 임했을 때, 에스겔은 "분통이 터지는 심령으로" 갔다는 말을 듣습니다(3:14). 그는 가고 싶지 않았지만, 그는 자신의 삶을 완전히 하나님께 복종했기 때문에 갔습니다.

하나님의 참된 종은 자신의 감정에 따라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실 때, 그가 가고 싶은지 여부가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을 섬기는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에 따라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가고 싶든 그렇지 않든 갑니다. 그들은 주님의 손이 그들 위에 있기 때문에 움직입니다.

에스겔의 환상

에스겔은 자신이 본 환상을 설명합니다. 구름에서 네 생물이 나왔는데, 각각 네 얼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사자, 소, 독수리, 사람의 얼굴이었습니다(1:5,10). 우리는 이것이 에스겔에게 정확히 무엇을 의미했는지 알 수 없지만, 요한계시록에서 비슷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얼굴들은 하나님의 모든 종들에게서 발견되어야 할 성격적 특성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 사자는 권위를 상징하고; 소는 봉사를 상징하고; 독수리는 하늘의 마음을 상징하고; 사람의 얼굴은 동정심을 상징합니다.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모든 종들에게서 발견되어야 할 특성입니다.

그러고 나서 에스겔은 땅 위에서 바퀴 안에 바퀴가 있는 것을 몇 개 보았는데, 이 바퀴들은 이 네 생물의 영과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습니다(1:15-20). 각 바퀴에는 그 안에 십자형으로 회전하는 두 번째 바퀴가 있습니다, 자이로스코프처럼 말입니다. 이 바퀴는 우리가 지상에서 마주치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일하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 때로는 한 방향으로 가고 때로는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에게 우연하고 서로 무관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모든 상황에서 주권적으로 일하고 계십니다. 성령님은 우리 삶의 상황을 통제합니다. 지상의 모든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완전하고 절대적인 주권은, 이 마지막 날에, (바퀴가 북쪽, 남쪽, 동쪽 또는 서쪽으로 가든) 우리가 믿어야 할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입니다. 당신이 어디를 가든지, 우리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를 발견할 것입니다 - 북쪽, 남쪽, 동쪽 또는 서쪽이든 말입니다. 또한 이 생명체들의 순종에 주목하십시오 - "그들은 번개처럼 달렸다"(1:14).

예수님은 그분의 절대적 권위를 바탕으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내게 주어졌으니, 그러므로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마 28:18,19). 오늘날 이 구절은 설교자들에 의해 "사람들은 죄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나라로 가십시오."라고 읽도록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며, 그것이 많은 얄팍한 복음전도의 주된 이유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가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전적인 권위에 근거합니다. 예를 들어, 나와 같은 (가르치는 사역을 하는 사람) 사람이 여러 곳에서 가르치는 사역의 큰 필요성을 느끼고 여기저기 다니며 그리스도인을 가르치기로 결심한다면, 나는 다른 많은 기독교 사역자들처럼 곧 신경쇠약에 걸리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나는 "주님, 당신은 온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당신은 나에게 가서 제자를 만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말씀해 주세요."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나는 그분의 권위 아래서 일합니다. 그것이 주님을 섬기는 방법입니다. 그러면 모든 상황이 당신에게 가장 좋은 방향으로만 작용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모든 곳을 돌아다니며 하고 싶은 일을 한다면, 많은 것들이 당신의 선을 위해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은 당신의 삶에서 성취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보는 것은 성령이 이끄는 삶의 그림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영적인 삶입니다. 바퀴의 테두리가 "눈으로 가득하다"고 말합니다. 이는 "주님의 눈이 온 땅을 두루 돌아다니며, 주님에게 온 마음을 다하는 종들을 지원하신다"는 것을 말합니다(대하 16:9).

1:26-28: 에스겔은 구름 사이로 비치는 무지개와 같은 광채로 둘러싸인, 보좌에 앉은 사람 모습을 보았습니다. 무지개는 하나님의 언약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길 때 항상 기억해야 할 두 가지가 있습니다 - 하나는 모든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와 맺은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의 피를 통해 우리와 영원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내가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고 버리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히 13:5). 그것이 우리가 그분을 섬기기 위해 나아가는 근거가 됩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나아가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것(사람들의 필요)을 볼지라도 말입니다. 우리는 인간 정부나 그들의 규칙과 규정을 두려워하며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을 믿으며, 앞으로 나아갑니다. 요즘에는 이러한 기본 원칙을 기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권위 아래 있는 사람

2장: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완전히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그에게, "일어나라. 너에게 말하고 싶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자 성령이 그에게 임하여 에스겔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주님은 "잘 들어라. 내가 너를 이스라엘 민족에게 보낸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다릴 때, 에스겔처럼 들리는 음성을 듣지는 못하더라도, 에스겔처럼 실제적이고 확실한 부르심에 대한 분별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내신다는 판단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시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내가 사역을 시작했을 때, 나는 내 사역이 무엇이 될지 바로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성취를 발견합니다. 하지만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사역에서 끌어내려고 했던 매우 많은 사람들을 압니다. 주님은 "내가 너를 특정한 사역으로 보낸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법을 배우고 하나님이 당신에게 말씀하시는 것과 그분이 당신을 부르신 목적을 듣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때때로 당신은 하나님의 두 번째로 좋은 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나는 40여 년 더 전에 아내와 나는 재정적으로 매우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돈이 거의 없었을 때, 어떤 기독교 단체에서 나를 그 단체의 지도자로 초대했고, 제안을 수락하면 좋은 연봉과 무료 자동차, 무료 전화, 무료 집 등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던 때가 기억납니다. 그것은 인도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부유한 미국 단체였습니다. 나는 "아니요. 나는 그럴 수 없습니다. 내가 궁핍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책상 뒤에 앉아서 관리자가 되라고 부르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파하라고 부르셨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들의 제안을 수락하지 않아서 매우 감사합니다. 그것은 유혹이었습니다 - 죄를 짓는 유혹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지 않으신 것을 선택하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만약 내가 그들의 제안을 수락했다면, 나는 여전히 기독교 사역에 종사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계획하신 사역에는 종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펴본 성경 속 하나님의 종들의 이러한 예들로부터,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특정한 임무를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젊을 때 그 진실을 깨닫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며 "주님, 나를 위한 당신의 완벽한 계획을 보여주세요."라고 말하십시오. 하루아침에 분명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당신에게 분명해지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것을 고수하십시오 - 그러면 마지막 날에 주님 앞에 설 때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 주님은 설교 사역에 부름받은 사람들이 기억해야 할 매우 중요한 몇 가지를 에스겔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첫 번째 말씀은,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였습니다(2:6). 이 말은 매우 자주 나옵니다: "그들의 위협이 가시처럼 날카롭고, 찔레처럼 뾰족하고, 전갈처럼 쏘아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의 얼굴에 나타난 흉악한 성난 표정에 놀라지 말라"(2:6). 이스라엘은 에스겔이 예언했을 때 그를 노려보며 죽이겠다고 위협했습니다. 모든 선지자는 그런 반대에 직면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선지자들 곁에 서 계셨고, 당신의 소명이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라면 그분은 당신 곁에 서 계실 것입니다. 이 선지자들의 확신은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었습니다.

주님은 에스겔에게, "그들이 듣든 듣지 않든 내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2:7). 그들이 듣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선지자가 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메시지가 전달되면, 선지자의 책임은 끝납니다. 하지만 선지자가 메시지를 전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피가 선지자의 손에 있을 것입니다.

3장에서, 주님은 에스겔에게 그분이 주신 두루마리(하나님 말씀)를 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먼저 우리가 먹고 소화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입에 꿀처럼 달콤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주님은 요한에게 먼저 두루마리를 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계 10:9). 그때서야 ​​에스겔과 요한은 예언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모든 말씀 사역의 기본 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시는 말씀은 무엇보다도 당신에게 전하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설교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도전합니다: "도둑질하지 말라고 전파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롬 2:21). 당신이 누군가에 대해 악한 말을 할 때, 당신은 그의 명예를 훔치는 것입니다. 당신은 그것을 도둑질로 인식합니까? 아니면 돈을 훔치는 것만을 도둑질로 인식합니까? "간음하지 말라고 전파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당신은 눈으로 정욕을 느낍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역에 기름을 부으시려면, 우리 자신이 먼저 두루마리를 먹어야 합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그들 자신이 먼저 두루마리를 먹지 않고 설교합니다. 그것이 그들의 사역이 너무나 생명이 없고 지루한 이유입니다. 효과적인 사역을 원한다면, 먼저 두루마리를 먹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양날의 칼과 같습니다 - 첫 번째 날이 나를 베어야만 그런 다음에야 다른 날로 다른 사람을 벨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먼저 베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설교할 때 매정하고 무자비할 것입니다. 그러니 두루마리를 먹으십시오.

3장 14절: "성령께서 나를 들어 올려 데려가셨고 나는 괴로움과 혼란에 빠졌다. 주님의 손이 강하게 내 위에 임하여 계셨다." 주님께서 어딘가로 가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다른 때처럼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는 혼란스러운 감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순종하고 나아갑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7:5에서 "밖에서는 다툼이 있고 안에서는 두려움이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약간의 두려움이 있었지만; 여전히 가야 할 곳으로 갔습니다. 그는 자신의 감정에 따라 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감정에 따라 간다면, 우리는 결코 주님이 우리에게 가기를 원하시는 곳에 가지 못할 것입니다. 수년 전, 나는 방갈로르의 기차역에서 주말 집회를 위해 작은 마을로 가는 기차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의 아이들은 모두 어렸고 그들 중 일부는 아팠고 내 아내는 그들을 모두 혼자 돌봐야 했습니다. 나는 여행을 취소하고 집에 가서 아내를 도와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나에게 신선한 계시와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은 내게 스스로 선택할 자유를 주셨지만, "네가 무엇을 하든, 두려움에 근거하여 결정을 내리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날 나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 결코 두려움에 근거하여 움직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는 집에 가지 않았습니다. 나는 기차를 타고 사역을 하러 갔습니다. 주님은 나의 아이들을 돌보셨습니다. 나는 오래 전에 주님과 엄숙한 언약을 맺었습니다. 나는 그분께 "주님, 당신께서 나의 가족을 돌보시면, 나는 당신 가족을 돌보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 그리고 주님은 내가 한 것보다 훨씬 더 잘 하셨습니다.

나는 여러분 중 누구에게도 그런 언약을 하거나 내가 기차역에서 그날 밤 한 일을 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집에 머물러 아내를 도와야 할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결정을 내리든, 항상 믿음으로 내리고, 두려움에서 내리지 마십시오. 믿음으로 "나는 그 곳에서 사역을 돌보실 하나님을 믿겠습니다. 지금은 집에서 아픈 아내를 돕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라고 말해야 할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집으로 가십시오 -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마귀가 당신을 두렵게 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정하신 사역을 이루지 못하게 할 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감정에 따라 행동하지 마십시오. 때때로 성령께서 우리를 들어올려 데려가실 때, 우리는 마음속에 혼란을 안고 가야 할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지만 우리는 계속 나아갑니다!

3장 23절: "그래서 나는 일어나서 주님의 영광을 처음 보았을 때와 똑같이 보았습니다. 그리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사역의 또 다른 중요한 원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 얼굴을 항상 땅에 대십시오. 때로는 실제로 - 육체적으로 - 그렇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

하나님 앞에 방 바닥에 누워서 "주님, 여기가 제가 마땅히 있어야 할 곳입니다. 나는 주님 눈에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라고 말하십시오. 다른 사람들 앞에 서서 설교하는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존경하고 높이기 때문에, 큰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다른 누구보다도, 우리는 주님 앞에 자주 홀로 있고, 그분 앞에 엎드려서 우리가 그분의 눈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순식간에 우리의 숨을 거두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순식간에 우리의 기름부음을 거두실 수 있습니다. 나는 나의 삶에서 다른 어떤 것보다 기름부음을 잃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나는 나의 삶에서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잃는 것보다는 나의 모든 돈과 건강을 잃는 것이 낫습니다. 돈이나 우리의 혀, 또는 다른 사소한 문제로 조금만 부주의하면 기름부음을 잃기 쉽습니다. 에스겔의 얼굴이 흙 속에 있을 때, 성령이 그에게 임하여 그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거기 - 하나님 앞의 흙 속에 - 성령이 우리 위에 임하실 곳입니다. 그러면 그분이 우리를 들어 올려 주시고 높여 주실 것입니다. 결코 당신 자신을 높이지 마십시오.

3장 24-27절: "그분이 나에게 말하여 이르되, '가서 네 집에 갇혀 있으라. 거기서 네가 밧줄로 묶여서, 사람들 가운데로 갈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네 혀를 입천장에 붙여서 말할 수 없게 하리라. 내가 네게 메시지를 전할 때마다 네 혀를 풀어서 말하게 하리라.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것이 주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라. 어떤 사람들은 듣고 어떤 사람들은 무시할 것이다. 상관없다.' 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사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지 말라고 하시면, 우리는 가지 않습니다. 그분이 말하지 말라고 하시면, 우리는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언제 말할지, 언제 조용히 할지 말씀하실 것입니다. 당신은 성령의 음성을 듣습니까? 아니면 이성의 음성을 듣습니까? 이성은 말하는 것이 항상 옳다고 말할 수 있지만; 성령의 음성을 듣는 사람은 말할 때와 침묵할 때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때때로 우리는 조용히 하라는 부름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헤롯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습니다(눅 23:9).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사는 법을 배우십시오. 이것이 우리가 에스겔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4장: 주님은 에스겔에게 여러 가지 표적을 통해 가르치셨습니다. 먼저 점토판을 만들고, 390일 동안 한쪽으로 누워 있고, 40일 동안 다른 쪽으로 누워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에스겔은 바벨론에 있는 유다 사람들에게 교훈의 대상이 되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과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을 어떻게 벌하시는지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메시지를 생생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똥으로 음식을 요리하고, 머리와 수염을 깎고, 그 머리카락을 조금만 가지고 다니는 것과 같은 이상한 일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에서 구원받을 사람이 극소수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4:12-15; 5:1-4). 선지자가 된다면, 멋있는 외모를 잊어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머리를 깎으라고 하시면, 머리를 깎아야 합니다. "주님, 그러면 내가 보기에 좋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는 똥으로 간단한 음식을 요리해야 했습니다. 에스겔이 제사장이었다면 훨씬 더 쉬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선지자로서, 그는 식습관을 절제하고 외모에 대해 규율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만 기쁘시게 해야 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종이 되고 싶다면 외모나 음식에 대해 하나님께 불평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무엇이든 받아들이고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순종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삶에서 모든 작은 것을 주권적으로 결정하셨습니다. 내가 23살 때, 나는 정기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때 나는 머리카락도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데에는 뭔가 좋은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이유를 찾았습니다. 사람들은 내 벗어지는 헤어라인을 보고 적어도 30살은 됐을 거라고 생각했고 - 그래서 그들이 내가 23살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보다 내 말을 더 잘 들어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작은 일에도 목적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만약 당신이 젊었을 때부터 하나님께 완전히 헌신하고 그분께 "주님, 나는 나의 음식이나 외모나 그 무엇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나는 당신의 성령으로 충만해지고 당신을 섬기기 위해 기름부음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나는 내 인생이 끝날 때까지 그 기름부음에 충실하고 싶습니다. 나는 다른 설교자들의 본을 따르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 선지자들의 본을 바라보고 싶습니다. 나는 당신을 온 마음으로 따르고 싶습니다"라고 말한다면 - 나는 당신이 매우 흥미로운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당신에게 말씀을 가르치시고 당신의 마음에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말씀을 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분께 완전히 헌신해야 합니다. 당신은 지상에서 명예나 인정, 돈이나 그 무엇에 대한 야망이나 욕망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어야 합니다. 당신의 몸, 당신의 시간, 당신의 돈, 당신의 가족, 모든 것이요. 당신이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통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이유

7장 9절: 여기서 우리는 많은 사람이 듣고 싶어하지 않을 수 있는 주님의 칭호를 봅니다: '때리는 주님', 심판으로 벌하시는 분.

8장에서, 주님은 에스겔에게 성전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우상 숭배를 보여 주셨고, 그것이 바로 그분이 유다를 버리신 이유였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는 은밀한 죄에 대한 통찰력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참 선지자에게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그분의 백성 가운데 있는 은밀한 죄를 폭로하는 말씀을 주실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4절, 25절에는, 교회 모임에서 사람들이 예언적으로 말할 때, 완전히 낯선 사람이 들어와서 자신의 마음의 비밀이 그(낯선 사람 자신)에게 드러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는 얼굴을 땅에 대고 그 모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든 교회 모임이 되어야 하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런 식으로 예언하기를 갈망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우상을 숭배하였고, 여자들은 우상인 담무스를 위해 울부짖었는데, 이는 이교도들과 함께 많은 더럽고 음탕한 의식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8:14).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성전에서 행해졌습니다. 이 우상 숭배의 대부분은 겉으로는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겉으로는 거룩해 보이는 많은 사람들이 속으로는 매우 더럽습니다. 주님은 "여기가 내 성전이 되어야 하는데,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동쪽을 향하고 태양을 숭배했는데,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기 위해 동쪽을 향하는 것과 같습니다(8:16).

9장 3절: 하나님의 집에서의 이 모든 죄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천천히 그곳에서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사람이나 교회에서 떠나기 시작하고 기름 부음, 신선함, 불이 사라졌을 때는, 항상 이유가 있습니다. 20년 전에 기름 부음을 받았던 많은 설교자들이 지금은 그것을 잃었습니다. 우리 삶에 대한 기름 부음은 우리가 나이가 들면서 증가해야 합니다. 하지만 내가 인도에서 만난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그것이 감소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는 대개 그들이 돈을 추구함으로써 스스로를 타락시키거나, 다른 방식으로 타협하거나,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말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중 많은 사람을 그분을 섬기도록 부르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충실하고 당신의 사역에서 영광이 떠나지 않도록 하십시오.

9장 4절: 오늘날 교회에 이런 식으로 적용할 수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교회들을 돌아다니며 교회에서 저지르는 죄로 인해 울고 탄식하는 자들의 이마에 표를 찍어라." 만약 하나님께서 오늘날 (그때처럼) 천사를 보내어 교회에서 예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을 보고 울고 있는 자들의 이마에 표를 찍어주신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표를 받을까요? 당신은 예수님의 이름이 인도에서 기독교인들에 의해 더럽혀지는 것을 얼마나 염려하십니까? 그 신성한 이름은 우리 땅의 대부분 교회(모든 교파의 교회)에서, 더럽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걱정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염려하는 사람들을 표식하십니다. 그리고 여기서 주님은 "나의 표식이 없는 자들을 다 죽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주님의 이름에 관심이 없는 모든 사람들은 결국 영적으로 죽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신 첫 번째 기도입니다. 당신이 그 이름에 대한 관심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용하여 그분의 목적을 이루실 수 있습니다.

천사가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하자, 먼저 칠십 장로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지도자가 되어야 할 장로들은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관심이 적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많은 것을 받은 사람에게는 많은 것이 요구됩니다. 그러므로 심판이 시작될 때는, 항상 교회의 지도자들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지도자들이 실패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11장 1절: 다시 성령께서 에스겔을 들어 올려 주님의 집의 다른 곳으로 데려가셔서 예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하나님의 영광이 마침내 그 도시를 완전히 떠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영광이 얼마나 천천히 떠나는지 보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은 사람과 교회에서 매우 느리게 떠납니다. 하나님은 서둘러 행동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고의로 죄를 계속 지으면, 하나님께서 행동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마침내 예루살렘 동쪽에 있는 올리브산(감람산)으로 갔습니다(11:23). 영광은 이제 떠났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43장 1-4절에서 보듯이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올리브 산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곳입니다. 어느 날, 그분은 영광 가운데 돌아와 같은 산에 오실 것입니다. 그날, 하나님의 영광이 바다를 덮는 물과 같이 땅을 채울 것입니다. 에스겔이 예언하는 동안, "죄를 꾀하고 악한 충고를 하던"(11:2) 블라댜라는 악한 지도자 중 한 명이 갑자기 쓰러져 죽었습니다(11:13) - 아나니아가 사도행전 5장에서 죽은 것과 똑같습니다.

11장 15-17절(Living):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은 형제 유배자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너무나 사악해서 주께서 그들을 추방시키셨다. 이제 주께서 우리에게 그들의 땅을 주셨다!' 그러나 주 하나님이 유배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전하라: '내가 너희를 세상의 여러 나라에 흩어놓았지만, 너희가 거기에 있는 동안 나는 너희에게 성소가 될 것이며, 너희를 흩어진 여러 민족에게서 모아서 이스라엘 땅을 다시 주겠다.'" 바벨론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순종하여 그곳에 간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은 주님께 순종하지 않고, 뒤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은 에스겔에게 그분의 임재와 축복의 약속으로 유배민들을 위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자들은 일시적으로 많은 세상적인 편안함을 누리는 것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만이 진정으로 축복받는다는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은 "성전이 예루살렘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여기 계시고 바벨론으로 간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류 교파(이들을 '바벨론'이라고 부름)에서 스스로를 분리하고 "분리된 회중"에 모여서 자신들이 진정한 "예루살렘"이라고 상상합니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고 다른 집단과 함께 계시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비극은 하나님이 어느 집단과도 함께 계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소위 "분리된 회중"에도 죽은 교파와 마찬가지로 많은 부패가 있기 때문입니다. 두 집단의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돈을 쫓고 있으며, 한 집단이나 다른 집단 모두에 많은 갈등과 교회-정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죽은 종교 시스템에서 나왔다고 해서 당신과 함께 계시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요. 그분은 당신이 겸손하고 깨어졌는지, 양심을 깨끗하게 유지하는지, 돈과 세상적 명예에 대한 사랑에서 자유로운지 등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비난함

13장 3절: 여기서 주님은 그들이 보았다고 주장하는 "환상"으로 사람들을 속이는 거짓 선지자들을 책망하십니다. 그러한 남성 거짓 선지자들과 여성 거짓 선지자들에게는 멸망이 확실합니다(13:17). 그런 다음 주님은 마음에 우상을 품고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책망하십니다(14:1-3). 거짓 예언자들은 그런 사람들에게 쉽게 조언을 해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대가로 돈을 받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자신은 그런 거짓 선지자들을 속여 그렇게 하게 하십니다: "만일 선지자가 속아서 메시지를 전한다면, 그것은 나 주가 그 선지자를 속였기 때문이니라"(14:9). 하나님은 왜 이런 거짓 선지자들이 속는 것을 허락하시는 것일까요? 데살로니가후서 2:10,11에서 그 답을 알려줍니다: 그들은 죄에서 구원받기 위하여 진리를 사랑하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죄를 보여주실 때, 당신이 그것을 정직하게 인정하지 않고 죄로부터 구원받고 싶어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속도록 허락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이 거짓을 믿도록 허락하실 것이고, 그 후로 당신은 평생 망상 속에서 살 것입니다. 이것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누군가(아마 당신보다 어린 사람)에게 사과하라고 하시는데, 당신이 그분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다면, 당신은 속을 위험이 큽니다.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시며 사람들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을 때, 그분은 그들이 속도록 허락하십니다. 이것은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 매우 심각한 경고입니다.

14장 14절: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나라가 하나님께 죄를 지었을 때, "노아, 다니엘, 욥이 거기에 있더라도, 그들은 오직 자신들만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니엘이 살아 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다니엘과 같은 젊은이를 칭찬하실 수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입니다 - 왜냐하면 다니엘은 당시 바벨론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에스겔보다 훨씬 어렸습니다. 에스겔은 자신보다 훨씬 어린 사람을 높이 평가하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 나이 어린 사람의 경건을 인정할 줄 아는 하나님의 종을 찾는 것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16장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모습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장이며, 우리의 구원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 가운데 있고, 씻지 않고 벌거벗었을 때 우리를 찾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씻기시고 그리스도의 의로 입히신 다음 우리와 결혼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그분께 충실하지 않았습니다.

16장 49,50절에서, 하나님은 소돔의 멸망을 초래한 소돔의 진짜 죄를 설명하십니다(창 19장). 우리 대부분은 소돔을 항상 남색(동성애)과 다른 성적 죄와 연관시켜 왔습니다. 하지만 성적 죄는 삶의 방식에서 비롯된 궁극적인 결과였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깊은 악으로 이끌었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소돔의 죄가 실제로 교만, 게으름, 폭식(좋은 음식에 대한 사랑),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소홀히 하는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 도시를 멸망시키신 이유였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성적 죄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소돔의 성적 죄는 그들의 게으르고 편안한 생활 방식의 결과였습니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교만과 성적 죄, 게으름과 성적 죄, 폭식과 성적 죄,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 부족과 성적 죄 사이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이 네 가지 영역만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중 많은 젊은이는 성적 정욕을 극복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은 매우 어려운 영역입니다. 하지만 이 네 가지 쉬운 영역에서 극복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은 어떨까요? 그러면 성적 영역에서 더 쉽게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무엇보다도 모든 상황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으로 시작하세요. 모든 오만함을 피하세요.

2. 그런 다음 무엇을 하든 열심히 일하고 부지런히 일하기 시작하세요.

3. 그런 다음 가끔 금식(음식을 피하기)을 시도하세요.

4. 그리고 네 번째로 주변 사람들의 필요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하고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 살펴보세요.

이 처방전을 1년 동안 시도해 보면 성적 욕망을 극복하는 것이 더 쉬워지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어떤 죄도 극복할 수 없습니다 - 그러나 그분은 겸손한 자에게만 은혜를 주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도움이 되는 사람들만 돕습니다.

18장: 여기에는 "세대의 저주"에 대한 우리의 마음 속의 혼란을 없애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구절이 있습니다. "너희가 이 속담을 사용하여 이르기를 '아버지들이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자녀들의 이가 시리게 되었다'하거니와 그것은 무엇을 뜻하느냐"(18:2). 사람들은 어떤 자녀들이 부모의 죄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비기독교인과 성경을 모르는 기독교인들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거짓 선지자들은 출애굽기 20:5를 잘못 해석하여 사람들을 속박하고 조상의 죄로 인해 자녀를 벌하는 불의한 하나님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에 대해 "너는 이스라엘에서 이 속담을 더 이상 사용하지 못할 것이다. 죄를 지은 영혼은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18:3,4). 주님은 2500년 전에 이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조상들이 우상을 숭배하거나 주술에 관여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고통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유명한 기독교 설교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누군가의 증조부에게 내려진 저주가 그에게 내려올 수 있으며; 그는 저주를 몰아냄으로써 저주를 없앨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 가르침은 완전히 말도 안 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드릴 때, 우리는 우리의 조상(그리고 "아담"의 나무)에서 끊어지고 다른 나무인 "그리스도"에 접붙여집니다. 우리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모든 저주는 우리가 그리스도께 접붙여지는 순간 깨집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더 이상 저주가 없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늘에 있는 모든 영적 복"만 있습니다(갈 3:13,14; 엡 1:3). 당신의 증조부가 우상을 숭배하거나 주술을 행했다 하더라도, 당신이 그리스도께 당신의 삶을 바친 후에는 그것이 당신에게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자신을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바치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진정으로 그리스도께 접붙여지면, 당신에게는 어떠한 저주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저주받을 수 없고 당신은 그분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저주받을 수 있다는 거짓 가르침을 믿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에게 임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불경건한 부모의 자녀들이 여러 면에서, 육체적으로나 물질적으로 고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남자가 술주정뱅이라면 집에 필요한 돈이 충분하지 않아 자녀가 고통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죄 때문에 자녀들에게 저주가 내리지 않을 것입니다. 자녀들은 아버지의 죄 때문에 벌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죄 때문에 벌을 받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에스겔에게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설교자도 당신에게 겁을 주거나 거짓된 가르침을 통해 당신을 속박하지 못하도록 하세요.

22장 30절에서, 주님은 "이 땅을 위하여 내 앞에서 성벽을 쌓고 갈라진 틈에 서있는 사람을 내가 그들 가운데서 찾았으나, 아무도 찾지 못하였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에도 주님은 교회에서 세상과 분리되는 성벽을 쌓고 그 틈새(서로 교제할 수 없는 하나님의 두 자녀 사이에 생긴 간격)에 서서 평화와 교제가 회복되기를 기도할 남녀를 찾고 계십니다.

23장에서, 우리는 두 자매 국가인 이스라엘과 유다의 배도에 대해 읽습니다. 둘 다 "창녀"가 되었습니다. 나이 많은 언니(이스라엘)는 주류 교회를 상징합니다. 어린 동생(유다)은 "분리된 회중"을 상징합니다. 둘 다 영적 매춘부가 되었습니다. 둘 다 타락했습니다. 교회 통치 방식을 바꾸고, 더 이상 사제와 감독이 없다고 해서 영적으로 된 것은 아닙니다. 새 포도주 가죽 부대는 새 포도주와 다릅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는 이스라엘보다 낫다"고 말했던 유다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결국 그들은 언니가 빠진 것과 같은 포로의 구덩이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24장: 여기서 우리는 에스겔이 그의 사역을 위해 치러야 했던 대가의 일부를 봅니다. 그의 아내는 갑자기 죽었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네 아내는 죽을 것이지만 너는 울거나 눈물을 흘리지 말아야 한다. 위로하는 친구들이 가져오는 어떤 음식도 받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24:16,17). 선지자로서, 그는 하나님의 손 아래 있었고 순종해야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할 수 있지만 선지자들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합법적인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종이라면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기준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보는 흥미로운 점 하나는 에스겔과 그의 아내의 친밀하고 사랑스러운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녀를 "네 눈의 즐거움", "네 가장 소중한 보물", "네 사랑스러운 아내", "네 삶의 기쁨",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언급하는 것에서 이것을 알 수 있습니다(24:16 - 다양한 번역). 에스겔은 금욕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선지자임에도 불구하고 아내를 무척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은 아내에 대해 "그녀는 내 눈의 즐거움, 나의 가장 소중한 보물, 내 삶의 기쁨,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입니다."라고 정직하게 말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우리 모두가 항상 아내를 바라봐야 하는 방식입니다.

나라들에 대한 심판

26장 2절: 여기서 우리는 두로 성이 예루살렘의 함락을 기뻐하는 것을 봅니다. 두로는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질투했지만, 이제 예루살렘의 멸망하면 두로에게 더 큰 사업 기회가 주어지고 따라서 두로에게도 더 큰 부를 가져다 줄 것이기 때문에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두로에게 그녀 또한 멸망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의 넘어짐을 기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는 경고입니다.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기뻐하지 말라"(잠 24:17).

28장 11-19절에서, 우리는 "두로의 통치자"에 대해 읽습니다. 사탄은 이 땅의 모든 이방 왕들의 통치자이므로 그는 두로의 인간 통치자 뒤에 있는 실제 통치자였습니다. 이 장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때로는 두로의 인간 통치자에게 말씀하시고, 때로는 그의 안에 거하는 사탄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우리가 귀신 들린 사람을 다룰 때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 때로는 그 사람에게 말하고 때로는 그를 사로잡은 귀신에게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탄이 처음에 최초의 에덴 동산에 있었다는 것을 봅니다(13절). 이것은 창세기 1:2에 언급된 지구의 파괴 전에 존재했던 에덴이었고, 창세기 3장에서 읽은 재창조된 에덴과는 다릅니다. 그는 천사들의 수장으로서 아름다움이 완벽했고, 모든 면에서 흠이 없었으며, 다니엘보다 더 지혜로웠고, 창조될 때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28:3,12,14,15). 하지만 그는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자랑스러워했고 즉시 마귀가 되었습니다(28:17). 우리는 앞서 이사야 14장에서 그의 타락에 대한 설명을 보았습니다. 교만은 여전히 ​​그가 오늘날 남성과 여성을 파괴하는 그의 주요 무기입니다.

29장에서 32장까지는, 이집트(애굽)와 바로에 대한 여러 가지 심판 예언을 봅니다.

33장에서 39장까지는,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에 관한 미래를 위한 희망의 메시지를 봅니다.

33장 1-16절은 파수꾼이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것을 사람들에게 경고할 책임과 사람들이 하나님의 경고에 응답할 책임에 대해 말합니다.

34장은 하나님의 백성의 목자와 목사인 모든 사람이 읽고 묵상하여, 경고를 받고 도전을 받아야 할 장입니다. 하나님은 여기서 이스라엘 목자들의 부주의, 탐욕, 이기적인 태도를 드러내십니다 - 이는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기독교 지도자와 목사들에게도 해당되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마침내 "내가 내 양 떼를 직접 먹이리라"고 말씀하십니다(34:15). 그런 다음 그분은 우리가 우리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의 소나기가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34:26).

새 언약의 삶과 교회

36장 25-37절은 새 언약의 삶에 대한 아름다운 예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그리스도인의 삶을 설명한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먼저 우리를 철저히 깨끗하게 하여 우리 마음에서 모든 우상을 제거하시고,

그런 다음 우리의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꾸신 후,

우리 안에 성령을 두셔서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고 그분의 계명을 순종하게 하여 우리를 모든 더러움에서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36:25-29).

하지만 이 모든 일은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그렇게 해 주시기를 구할 때에만 일어날 수 있습니다(36:37). 우리가 이 삶을 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영광스러운 삶에 들어오면, 우리는 지난 삶을 생각할 때에, "스스로 보기에 우리 자신을 몹시 싫어하게 될 것입니다"(36:31). 이것은 성령 충만한 사람의 주요 특징 중 하나로, 그는 자신의 육신에서 보는 모든 죄 때문에 자신을 혐오하고, "오,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나는 죄인 중의 으뜸이로다"라고 외칩니다(롬 7:24; 딤전 1:15). 성령 충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죄를 보지 않고 자신의 육신 안에서 같은 죄를 보고 그 죄로 인해 자신을 혐오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를 더 잘 알게 됩니다.

37장은 부활의 삶에 대한 비유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마른 뼈가 가득한 골짜기로 데려가서 먼저 그들에게 예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가자 뼈들이 모였고 살이 그것들을 덮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 그 이상의 것이 필요했습니다 - 우리가 창세기 1장에서 본 것처럼, 그들은 성령의 능력도 필요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합동 작용이 죽음에서 생명을 가져왔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이고,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이 이 죽은 몸 위에 내리자, 그들은 일어나 즉시 주님을 위한 강력한 군대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에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의 그림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처음에는 그들의 모든 교리가 정확함에도 불구하고, 딱딱하고 죽은, 마른 뼈들과 똑같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하면서, 그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함께 모이기 시작하고(뼈가 뼈와 모이고), 품위 있는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살이 뼈를 덮을 때 어느 정도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위한 강력한 군대가 되려면 필요한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령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부여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37장의 메시지입니다.

38장과 39장은 마곡의 통치자 곡, 즉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직전 마지막 날에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아마겟돈 전쟁에서 패배할 이스라엘의 북방 적들에 대해 말합니다.

40장부터 48장까지는 새 언약의 삶과 교회에 대한 그림입니다. 이것은 그림으로 표현하면 성전입니다. 우리의 몸은 성령의 성전이고(고전 6:19) 교회는 또한 하나님의 성전입니다(고전 3:16). 43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나 새 성전, 곧 오순절 이후 세워진 새 언약 교회로 돌아오는 것을 봅니다. 주님은 교회를 "나의 보좌의 자리"라고 부르십니다(43:7). 이 새 언약 교회에 대한 법은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 모든 구역은 지극히 거룩할 것이다"(43:12). 옛 언약 성전에서는, 서쪽 끝에 있는 작은 방만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지극히 거룩한 곳"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새 언약 교회에서는, 교회(성전) 전체가 지극히 거룩합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성전으로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이 한 가지 기본적인 법칙을 따라야 합니다 - 교회 안에 있는 모든 구성원이 순전한 거룩함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는 어떤 형태로든 누구에게도 용납되어서는 안 됩니다.

44장 9-19절에서, 주님은 그분의 성전에서 사독의 아들들과 레위인들로 상징되는 두 종류의 사역자들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사독의 아들들은 온 마음을 다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그분을 섬기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레위인들은 "사람들을 섬기는 것"만 허락된 타협자들을 상징합니다. 이 두 종류의 사역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우선하여 섬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모든 섬김은 그분이 사람들을 섬길 때조차도 오직 아버지께만 하셨습니다 -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섬기기 시작할 때, 타협하고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는 유혹이 들어옵니다.

이러한 거룩한 성전(성령으로 충만한 교회 또는 성령으로 충만한 개인)에서 물이 조금씩 흘러나와 하나의 강이 되고 마침내 많은 강들이 됩니다(47장). 이것은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7장 37-39절에서 인용하신 구절로,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에게서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오순절에 시작된 일이며, 그 이후로 경건한 남녀를 통해 흘러왔습니다. 이 삶은 작은 물줄기로 시작되어 하나의 큰 강과 많은 강이 됩니다.

47장 3-6절에서, 주님은 에스겔에게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금 맛보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은 에스겔을 한 걸음 한 걸음 이 강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약 500m를 걸은 후 물이 에스겔의 발목까지 왔습니다. 500m를 더 걸은 후, 물이 무릎까지 차올랐습니다. 500m를 더 걸은 후, 물이 허리까지 차올랐습니다. 그리고 또 500m를 더 걸은 후, 물이 너무 깊어서 에스겔은 발이 땅에서 들려서 강물에 떠내려가야 했습니다. 에스겔이 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과 함께 계속 걸을 수 있습니다; 또는 우리는 어느 지점에서 멈출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더 멀리 가도록 강요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랐을 때(왕하 2장), 엘리야는 엘리사가 더 많은 것을 갈구하는지 아니면 이미 가진 것에 만족하는지 계속해서 시험했습니다. 엘리사는 하나님의 가장 좋은 것을 얻을 때까지 만족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삶에 기름부음의 두 배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에스겔도 비슷한 방식으로 시험을 받는 것을 봅니다. 그는 또한 "헤엄칠 수 있는 물"에 들어갈 때까지 점점 더 강에 들어가고 싶어했습니다. 당신은 삶에서 성령의 역사를 어느 정도 경험할 수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가장 좋은 것보다 덜한 어느 지점에서 멈출 수 있습니다.

이것도 유의하십시오: 물이 에스겔의 발목까지, 무릎까지, 심지어 허리까지 차올랐을 때에도, 그의 발은 여전히 ​​땅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발이 땅에서 떼어질 때, 우리는 우리가 정말로 성령으로 충만해졌다는 것을 압니다. 그 시점에서, 우리는 "세상과 세상적 관심사와 물질적인 것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게 되고" 그리고 "우리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령의 인도를 받기" 시작합니다.

이 책의 마지막 구절(48:35)은 이 새 언약 교회의 이름을 "주께서 거기 계시다" - 여화와삼마라고 언급합니다. 이것이 새 언약 교회의 주요 특징입니다: 주님은 모든 모임(집회)에서 그 가운데 임재하시고 - 사람들은 그분을 만나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과 내가 세우도록 부름받은 교회입니다. 그러나 이 교회를 세우기 위해, 주님은 그분께 전적으로 순종하는 에스겔과 같은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장 27
다니엘

회복은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된다

다니엘서는 박해의 시대와 특별한 관련이 있는 책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박해의 시대에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보여줍니다.

우리는 또한 여기서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의 이동의 시작을 봅니다 - 상징적으로, 타락하고 타협적인 기독교 집단에서 하나님의 새 언약 교회로의 이동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목적에 대해 염려하고 그 목적의 성취를 위해 금식하고 기도한 정직하고 타협하지 않는 한 사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다니엘은 젊은 시절에 충실하게 시작했을 때,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사역을 하게 될지, 결코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저 작은 일이나 큰 일이나 하나님께 충실했을 뿐이었고, 하나님은 그를 통해 위대한 사역을 이루셨습니다. 그는 아마도 이 책이 시작될 때 약 17세였고, 책이 끝날 무렵에는 약 90세였을 것입니다. 그는 70년의 포로 생활을 모두 살았고, 끝까지 충실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의 이 이동을 시작하기 위해 그를 사용하실 수 있었습니다.

타협하지 않는 한 사람

어느 곳에서든지 하나님을 위한 순수한 교회를 세우는 일은 항상, 기도의 부담을 지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그 부담을 지고 "주님, 나는 이곳에 주님을 위한 순수한 교회가 세워지기를 원하며 이를 위해 어떤 대가라도 기꺼이 치르겠습니다."라고 수시로 기도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당신은 기도로 그 짐을 하나님 앞에서 계속해서 지고 가야 합니다. 당신은 오랜 시간 동안 지고 가야 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새 언약 교회의 시작을 보기 전까지 약 10년 동안 그 부담을 지고 가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충실함을 시험하실 것입니다. 마치 어머니가 태중에 아기를 품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이 부담을 마음속에 지고 가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다니엘이 이 부담을 마음속에 지고 간 방식입니다. 그 결과 나중에 학개, 스룹바벨, 여호수아, 스가랴, 에스라, 느헤미야 등 다른사람들도 그의 짐을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짐을 함께 나눌 다른 사람들을 더해 주실 것이며, 당신은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새 언약 교회를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다니엘은 90세의 나이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짓기에는 너무 늙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무대 뒤에 서서 기도하며 일을 시작했습니다.

다니엘은 이방인의 땅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특히 인도에서 우리에게, 기독교 원칙을 타협하지 않고도 기독교가 아닌 땅에서 하나님을 위해 설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모범이 됩니다. 그는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바벨론 이름인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로 더 잘 알려져 있음)라는 세 명의 온 마음을 다한 사람만 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젊은이들은 세계 초강대국의 수도 바벨론 한복판에서 하나님을 증거하는 강력한 증인이었습니다 - 네 명으로 구성된 작은 교회였습니다. 그 네 사람은 바벨론에 있던 다른 수백, 수천 명의 유대인보다 그 나라에 더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타협했지만, 이 네 사람은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수의 그리스도인들로 마을이나 나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위해 섰던 네 사람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와 그 통치자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 메시지를 통해 전해지는 것은 "하나님은 숫자나 인간의 힘으로 일하지 않고, 그분의 영으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직하고 결코 타협하지 않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다니엘서의 핵심 단어 중 하나는 "비전"입니다. 하나님은 비전을 가진 사람을 필요로 하십니다. 이 단어는 이 책에서 약 40번 등장합니다. 또한 다니엘이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 설명하는 두 구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 구절은 "주께서 주셨다"(1:2)입니다 -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것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다니엘은 주님을 느부갓네살에게 예루살렘에 대한 승리를 주신 분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의 하나님에 대한 태도는 지상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믿는 믿음의 태도였습니다. 두 번째 구절은 "다니엘은 자기를 더럽히지 않기로 마음먹었다"(1:8)입니다. 다니엘의 사람에 대한 태도는 "어떤 타협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 태도는 박해의 시대에, 우리도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왕이 나라를 다스린다 해도, 그에게 그 지위를 주신 분은 주님이라는 것을 기억합시다. 누군가가 선거나 전쟁에서 이기고 나라를 다스리도록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느부갓네살은 하나님을 몰랐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그를 다스리셨습니다. 우리 나라의 통치자들도 하나님을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땅에 다니엘과 같은 사람들을 갖고 계신다면, 그곳에서 그분의 목적을 이루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타협의 유혹을 받거나, 타협하도록 권유를 받거나 우리 주변에 있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타협하는 것을 볼 때, 그때 우리는 주님을 위해 흔들리지 않고 서서 조금이라도 굽히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죄로든 양심을 더럽히지 않아야 합니다. 어딘가에 넘어졌다면, 우리는 즉시 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피로 죄를 씻고, 필요한 경우 관련된 사람들에게 사과하고, 상황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타협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도 기쁘게 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느부갓네살이나 그의 권위자들을 기쁘게 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 나라를 다스린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복종할 것이지만, 목숨을 잃어야 할지라도 우리의 신념을 타협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니엘이 자신을 더럽히지 않기로 마음먹은 후, 그의 첫 번째 시험은 음식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아담과 이브에게 온 첫 번째 시험도 음식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예수님에게 온 첫 번째 시험도 음식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만약 맛있는 음식이 하나님의 원칙을 타협하는 것을 포함한다면, 맛있는 음식에 대하여 당신은 어떤 태도를 취하겠습니까? 에서는 음식 때문에 장자권을 잃었습니다. 이삭은 에서가 가져다준 맛있는 음식에 대한 사랑 때문에 영적 시력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의 태도는 "하나님께서 말씀에서 이런 종류의 음식은 먹지 말라고 하셨으니, 나는 먹지 않겠습니다."였습니다. 다니엘은 어렸을 때 성경을 공부했고, 모세의 율법이 특정 고기를 먹는 것을 금하고 잠언은 알코올이 든 술을 마시는 것을 금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하나님께 순종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처음에는 다른 모든 유대인들이 타협하는 동안, 그는 혼자 서 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가 한 청년이 하나님을 위해 일어서는 것을 보고, 그와 함께할 용기를 얻었습니다(1:11). 다니엘이 주님을 위해 일어서지 않았다면, 우리는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에 대해 결코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들 중에 세 가지 유형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첫째, 자신에게 좋은 것을 추구하고 원칙이 없는 타협자들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집단에는 그런 사람들이 수백만 명이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와 같은 두 번째 그룹은 스스로 일어설 용기가 없지만, 다른 사람이 주님을 위해 기꺼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일어날 의향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는 훨씬 적은 수입니다.

그리고 다니엘과 같은 세 번째 그룹은 아무도 일어서지 않더라도, 주님을 위해 일어설 것입니다. 이 그룹은 훨씬 더 작습니다. 이 범주에는, 여기에 한 사람 저기에 다른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구분은 성막의 바깥뜰, 성소, 지성소와 다소 비슷합니다.

나는 인도에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 일어서고, 그들의 지역에서 주님을 위한 순수한 증거를 원하지만, 스스로 일어설 용기가 없습니다. 그들은 다니엘이 그들의 지도자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이 그 마을이나 도시에 오면, 이 그리스도인들이 와서 그와 합류할 것입니다. 하지만 다니엘이 결코 그들의 장소에 오지 않는다면, 이 사람들은 주님을 위한 증거가 되지 못한 채 살다가 죽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에 가장 필요한 것은 다니엘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결심하는 다니엘을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런 다니엘들이 주님을 위해 일어설 때, 그들은 자동적으로 하나냐, 미샤엘, 아사랴를 그들에게로 이끌 것입니다. 나는 이런 일이 인도의 수많은 곳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다니엘을 찾으십니다. 다니엘을 찾을 수 없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것을 구하지 않고, 자신을 위한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으며, 필요하다면 그분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다니엘은 겨우 17살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17살 소년을 택하여 선지자로 삼고 그분을 위해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주실 수 있습니다. 다른 세 사람은 다니엘보다 나이가 많았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다니엘에게 복종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니엘을 하나님이 임명하신 지도자로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

다니엘은 또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왕의 감독관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우리를 열흘 동안 시험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채소와 물만 먹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기름진 음식을 먹는 다른 유대인들보다 육체적으로 더 나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담대하게 믿음을 고백하고, 침대 밑에 빛을 숨기지 않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열흘이 지나자, 다니엘이 말했듯이, 그들은 모두 다른 사람들보다 더 건강하고 강해 보였습니다(1:11-15). 음식과 같은 단순한 문제에서의 이러한 자기 부인은 나중에 불타는 용광로와 사자굴이라는 더 큰 시험을 위해 그들을 준비시켰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의 몸에 초자연적인 건강을 주셨는지 봅니다. 나중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의 마음에 초자연적인 지능을 주셨는지 읽습니다. 그분은 이 네 청년에게 문학과 과학을 배우는데 특별한 총명함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환상과 꿈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또한 그의 영에 초자연적인 이해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몸과 혼과 영에 초자연적으로 능력을 주셨음을 봅니다. 우리는 또한 성령을 통해 우리 몸의 건강, 마음의 지성, 영적 비전과 그분의 길에 대한 이해를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2장에서, 우리는 느부갓네살이 꾼 꿈에 대해 읽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지혜자들을 불러서 "내가 꾼 꿈과 그 의미를 말해 달라."라고 말했습니다. 그 지혜자들은 하나님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설교자들의 모습이고, 속이는 자들입니다. 그런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시대를 올바르게 해석할 수 없습니다. 그 지혜자들은 "신들만이 당신이 꾼 꿈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인간은 그럴 수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꿈을 말해 주면, 우리가 당신을 위해 그것을 해석해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누군가가 우리에게 자신의 꿈을 말하면, 그 꿈을 해석해서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처럼 가장하는 게 쉬운 일이라는 걸 압니다!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그렇게 합니다. 하지만 느부갓네살은 영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만약 너희가 정말로 하나님과 소통하고 있다면, 너희가 나에게 그 꿈 또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참된 종은 사역에서 초자연적인 일들을 경험할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정말로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았다면, 당신은 초자연적인 경험을 할 것입니다. 당신은 아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거기 앉아 있는 어떤 사람들의 필요에 너무나 정확히 부합하는 것이어서, 누군가가 와서 자기들의 문제에 관해 이야기해 주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사역에 필요한 예언의 요소입니다. 우리가 예언의 말씀을 가지려면 예언하기를 구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예언하기를 간절히 원하라"고 명령합니다(고전 14:1).

다니엘은 이 문제에 대해 들었을 때, 침착했습니다. 그는 큰 지혜로 상황을 처리했습니다(고전 2:14). 여기 큰 지혜를 가진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당신은 젊을 때 실수를 해야만 합니까?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젊은이는 많은 실수를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니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다니엘이 그의 평생에 저지른 단 하나의 잘못된 일도 읽지 못했습니다. 그는 요셉과 같은 희귀한 사람이었습니다 - 요셉은 거의 아무런 잘못도 기록되지 않은 젊은이였습니다. 이 젊은이들을 당신의 본으로 삼아, "주님, 나는 다른 젊은이들처럼 어리석은 일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겸손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았던 이 분들의 본을 따르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는 건 어때요?

하지만 그런 젊은이들을 찾는 것이 매우 드물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어리석은 일을 많이 합니다 - 주로 그들이 장로들(지도자, 연장자)에게 복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매우 똑똑하다고 생각하여, 결국 1001가지 어리석은 일을 저지릅니다. 그것은 배우기 어려운 방법입니다. 하지만 더 나은 방법이 있습니다.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살며 하나님께서 당신위에 두신 권위에 복종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하는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고도 어린 시절부터 배울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그 훌륭한 본입니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이 꾼 꿈에 대한 답을 어떻게 얻었을까요? 첫째,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것을 계시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갔습니다. 그는 친구들을 불렀습니다(2:17). 우리에게 너무 어려운 문제에 직면했을 때 기도로 교제하는 것은 엄청난 가치가 있습니다. 다니엘은 기도로 교제하는 원리를 이해했습니다. 그는 옛 언약 시대에 살았던 새 언약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태도는, "이 문제에 대해 나 혼자 기도하지 말자. 세 형제를 불러서 함께 기도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기도했습니다.

2:18에서, 그들이 "하늘의 하나님"에게 기도했다는 것을 보는데, 이는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먼저 "하늘의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함으로써 기도를 시작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시작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 방식도 이와 같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마 6:9), 즉 우리가 하나님께 요청을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기도를 시작할 때 하나님을 높이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9장 4절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경건한 사람의 습관입니다.

기도할 때마다 찬양으로 시작하는 것은 좋은 습관입니다. 기도가 안 될 때마다, 주님을 찬양하기 시작하십시오. 하나님의 위대함을 생각하고 그분을 찬양하십시오 - 그러면 분위기가 즉시 맑아지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셨을 때, 그들은 그분께 모든 영광을 돌리며 말했습니다, "주님의 주권을 찬양합니다. 그분은 세상의 모든 사건의 진로를 결정하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왕들을 제거하고 다른 사람들을 왕좌에 앉히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지혜로운 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학자들에게 지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깊고 신비로운 것들을 계시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당신께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당신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능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2:20,23 - Living).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꿈과 그 의미를 계시하신 후, 그는 가서 왕에게 "이것은 내 총명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계시하신 것입니다"라고 답을 받았음을 알렸습니다(2:30). 다니엘은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겸손한 청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그분의 진리를 계시하십니다.

느부갓네살은 금으로 된 머리, 은으로 된 가슴과 팔, 놋으로 된 배와 허벅지, 철로 된 다리, 철과 진흙이 섞인 발을 가진 신상을 보았습니다(2:31-33). 금으로 된 머리는 약 70년간 지속될 바벨론 제국을 상징했습니다. 그 후 약 200년간 지속될 메대-페르시아 제국(은으로 된 가슴과 팔)이 등장합니다. 놋으로 된 배와 허벅지는 약 200년간 지속될 알렉산더 대왕(과 그의 아버지)의 그리스 제국을 상징했습니다. 철로 된 다리는 약 600년간 지속될 로마 제국(그리스도 시대에 세계를 통치할)을 상징했습니다. 철과 진흙으로 된 발은 독재 국가(철)와 민주주의(진흙)가 다스리는 나라들을 상징하며, 마지막 날에 세계의 나라들을 상징합니다. 발의 열 발가락은 마지막 때 (아마도 유럽에서) 함께 모일 열 왕국을 말하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지상으로 돌아오시기 직전에, 적그리스도가 이끌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느부갓네살에게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까지 지상에서 일어날 일에 대한 환상을 주셨습니다. 그러고나서 그는 돌이 내려와 이 모든 왕국을 산산이 부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통치에 대한 그림이었습니다(2:44). "하늘의 하나님이 영원히 멸망되지 아니할 나라를 세우실 것입이다."

타협하지 않는 남은 자

그래서 느부갓네살이 금으로만 된 동상을 만들었을 때, 그가 말했던 것은 "나는 끝까지 그곳에 있을 것이다. 내 뒤에 은, 놋, 철 왕국은 없을 것이다!!"라는 말이었습니다. 그의 교만은 그를 너무 어리석게 만들어서, 그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모든 오만한 인간을 대표합니다.

3장 1절: 여기서 우리는 느부갓네살이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금신상(3m*30m)을 숭배하도록 강요했다는 것을 봅니다. 다니엘은 이때 분명히 도시에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일과 관련하여 어딘가로 떠나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그들끼리만 있었습니다. 모든 유대인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우상에게 절을 하여 목숨을 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시험하고 강하게 하기 위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이때 그들끼리만 있게 하셨습니다.

때때로 하나님의 사람이 가까이 있지 않다면, 하나님 자신을 의지하는 법을 배울 수 있어, 우리에게 유익합니다. 경건한 사람이 가까이 있는 위험은 우리가 그들에게 기대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항상 좋은 성경 교사의 말을 듣는 것의 위험은 우리 스스로 말씀을 공부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항상 훌륭한 성경 교사가 함께 있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그분의 말씀을 가르쳐 주시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힘을 주시는 성령님께 더욱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주권으로, 이때 다니엘이 거기에 없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시험에 통과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그들이 그의 동상에 절하기를 거부하자 격노하여 "만약 절하지 않으면, 내가 용광로를 일곱 배나 데워서 너희를 던져 넣겠다"라고 말했습니다(3:19). 그들은 여전히 ​​절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다른 유대인들이 그들에게 와서 "조금만 타협하세요. 동상을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이세요"라고 말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완강하게 그렇게 하기를 거부했습니다. 다른 유대인들은 "절을 하고, 하나님께 가서 그 일을 용서해 달라고 하는 것이 어떻겠냐"라고 제안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날에도 그렇게 하면서 자신이 영리하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뭔가 잘못한 다음 하나님께 가서 용서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들은 대학 입학 허가나 비자 또는 직장을 얻기 위해 거짓말을 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고 죄도 용서받기 때문에 자신이 영리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거짓말을 해서 입학 허가나 비자, 직장을 얻는다면, 당신은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도달할 수 없을 것입니다 - 거짓말을 해서 하나님의 뜻에 도달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당신이 어디에 있든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하나님의 최고의 것을 원한다면 타협을 거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당신이 뭔가를 잃는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손실을 당신에게 좋은 것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오늘날 인도에는 그런 담대함과 완전함(integrity)을 가진 제자들이 필요합니다. 다니엘은 그런 사람이었고,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에게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바벨론에 그런 사람 네 명이 있는 것은 왕이 준 것을 먹고, 그(왕)의 우상에게 절하고, 여호와를 믿는다고 주장하는 400명의 타협자보다 나았습니다. 오늘날 인도의 슬픈 상황은 그러한 타협자들인 그리스도인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타협의 시대에 타협 없이 그분을 나타내는 다니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찾고 계십니다.

또한 여기서 우리는 이 세 사람이 죽음을 개의하지 않는 것을 봅니다. 그들은 왕에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불타는 용광로에서 구해내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기로 선택하시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당신의 형상을 숭배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그들이 용광로에 던져졌을 때, 밧줄만 타버렸습니다. 사탄이 우리를 괴롭힐 때, 그는 우리 안에서 무엇을 태울 수 있을까요? 오직 우리를 묶는 것들만 태울 수 있습니다!! 그는 우리 안에서 가치 있는 어떤 것도 태울 수 없습니다. 우리가 불 속에 던져졌을 때, 우리를 묶는 것들이 타버리고 우리는 자유롭게 나옵니다. 불이 당신을 세상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에서 해방시키는 데 성공했다면 좋은 일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밧줄로 세상적인 것들에 묶인 우리 자신의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어려운 시련) 속에 넣으시고 곧 세상적인 것들에 대한 우리의 집착은 사라집니다. 그러한 불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러한 시련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내가 당신에게 3장에서 가장 큰 기적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아마도 "불이 그들을 죽일 수 없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가장 큰 기적을 이렇게 봅니다. 모든 사람이 동상에 절을 했을 때, 이 세 사람은 절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나는 몇 년 전에, 이 90피트(27.432m) 높이의 동상에 수천 명의 사람들이 얼굴을 숙이고 경배하고 있고 세 사람이 서 있는 그림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주님, 나를 저렇게 만들어 주세요.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타협하고 있을 때, 내가 눈에 띄고 다르게 보이도록 도와주세요. 내가 죽어야 할지라도요."라고 말했습니다. 그 그림을 항상 염두에 두십시오.

4장 6,7절: 느부갓네살은 다시 그를 두렵게 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는 다시 지혜자들을 불렀습니다. 32년 전 그가 첫 꿈을 꾸었을 때, 지혜자들은 그를 도울 수 없었습니다. 오직 다니엘만이 그를 도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지혜자들에게 돌아갔습니다. 물론 이번에도 그들은 그를 도울 수 없었습니다. 다니엘은 이 꿈에 대해서도 설명했고,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게 심판하실지 그에게 말했습니다. 다니엘은 "그 나무는 당신을 상징"하며 "당신의 교만함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을 베어버리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그에게 죄를 짓는 것을 멈추고, 옳은 일을 하고, 사악한 과거에서 벗어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이 심판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충고했습니다(4:27). 하지만 느부갓네살은 듣지 않았습니다.

1년 후(4:29) 느부갓네살은 바벨론에 있는 그의 궁전 지붕을 걷고 있었고, 그가 건설한 것에 대해 회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 바벨론은 그에 의해, 그의 능력으로, 그의 영광을 위해 지어졌습니다(4:30). 사람에 의해, 사람을 통해, 사람을 위해 - 그것이 바벨론의 본질입니다. 교회가 인간의 지혜로, 인간의 능력에 의해, 그리고 인간의 영광을 위해 지어지면, 그 교리가 모두 옳더라도 바벨론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사역이 인간의 영리함과 능력으로, 돈의 힘으로, 그리고 인간의 영광을 위해 이루어질 때, 지도자들이 어떤 교리를 믿든, 그들이 세우는 것은 바벨론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사역은 항상 기도로 하나님을 기다리는 가운데 발견되는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성령의 능력(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도움)으로 이루어지며; 100%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루어집니다. 이것을 항상 기억하면 나무, 건초, 짚으로 짓는 일에서 구원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느부갓네살에게 세 번 경고하셨습니다(4:31). 그는 듣지 않았고, 그래서 벌을 받았습니다. 그는 미쳐서 소처럼 풀을 먹기 시작했습니다(4:32). 마침내 그는 회개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의 정신이상을 고쳐 주셨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가장 완전한 진술 중 하나를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분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이며 그분의 왕국은 영원히 지속됩니다. 땅의 모든 주민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지고 그분은 하늘의 군대와 땅의 주민 사이에서 그분의 뜻대로 행합니다. 아무도 그분의 손을 막을 수 없고 그분에게 '당신이 무엇을 했습니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분의 모든 일은 참되고 그분의 길은 공의로우며 그분은 교만하게 걷는 자들을 낮추십니다"(4:34-37).

이것이 내가 느부갓네살이 오늘날 아마도 천국에 있을 것이라고 믿게 하는 이유입니다. 그가 생애의 끝까지 그가 표현한 그 믿음에 따라 살았다면, 그는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성경 세 권을 쓴 솔로몬이 지옥에 있고 느부갓네살이 천국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지 않나요!

다니엘의 계속된 충실함

수년 후, 느부갓네살의 아들 벨사살은 바벨론에서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는 갑자기 누군가의 손이 궁전 벽에 글을 쓰는 것을 보았습니다(5:5). 성경에서 하나님이 실제로 무언가를 쓴 사례는 두 번뿐입니다. 첫 번째는 그분이 돌판에 십계명을 쓰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여기에 있습니다. 지혜자 중 아무도 벽에 쓰여진 것을 해석할 수 없었습니다. 왕의 어머니는 이 소식을 듣고, 느부갓네살 시대에 꿈을 해석한 다니엘을 왕에게 상기시켰습니다. 다니엘이 불려왔고, 왕은 그에게 자색 옷과 금 사슬과 왕국에서 명예로운 자리를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다니엘은 왕에게 선물을 친히 가지시거나 다른 사람에게 주라고 말했습니다(5:17). 이방인에게서 온 선물과 명예에 대한 다니엘의 태도는 엘리사(나아만의 선물을 거부)와 아브라함(소돔 왕이 준 선물을 거부)의 태도와 같았습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은 이 세상의 선물과 명예에 대한 태도로 식별할 수 있습니다. 특히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벨사살과 같은)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당신이 그들을 위해 무언가를 했기 때문에 큰 선물을 주고 싶어할 때, 선물에 대한 당신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요즘의 다른 설교자들과 다르게 "아니요. 괜찮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축복하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선물은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십시오. 많은 주님의 종들은 아무것도 받아서는 안 될 사람에게서 선물을 받아서 스스로 망쳤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서 선물을 받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 그 선물이 자발적으로 주어지고 그 사람들이 당신보다 재정적으로 더 나은 경우입니다. 하지만 당신보다 가난한 사람에게서 개인적인 필요를 위해 돈을 받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일입니다 - 그들이 신자일지라도 말입니다.

다니엘은 벨사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일어난 모든 일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자신을 낮추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가져온 잔을 가져다가 마시면서 하나님께 도전했습니다"(5:22,23). 다니엘은 두려움 없는 선지자였으며 왕에게 위험을 경고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메네, 메네, 데켈, 우바르신"이라는 말을 읽고 해석했습니다(5:25).

우리는 이미 발람의 나귀가 배우지 않은 언어로 말하는 첫 번째 사례를 보았습니다. 여기에 모르는 언어를 해석한 첫 번째 사례가 있습니다. 그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왕국을 세어서 끝나게 하셨습니다. 당신은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함이 드러났습니다. 당신의 왕국은 분열되어 메대와 페르시아에 넘겨졌습니다."였습니다(5:26-28).

이는 오늘날 바벨론의 종교 체계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날을 세셨고 그 날은 끝나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달아보셨고 당신에게서 영원한 무게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당신은 세속적인 것으로 가득 차 있으므로, 당신의 왕국이 나뉘었습니다." 바로 그날 밤 바벨론은 메대-페르시아에 정복당했습니다(5:30).

6장에서 우리는 다리우스 왕이 메대-페르시아 제국을 통치하던 때에 다다릅니다. 그는 또한 다니엘을 그의 행정관 중 한 명으로 임명했습니다(6:2). 다니엘이 이전 왕국의 총리였지만, 다리우스는 여전히 그를 그의 왕국의 총리로 만들었습니다. 다니엘이 다른 왕국에서 연이은 통치자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얼마나 놀라운 증거입니까! 다니엘은 이제 80세가 넘었지만 - 그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타협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존귀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러나 그 왕국에는 다니엘을 질투하고 그를 죽이고자 하는 악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왕에게 가서 주로 다니엘을 겨냥한 법을 통과시키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일어나는 일과 매우 유사합니다. 악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종들을 파괴하고 정부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개종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통과시키려고 합니다. 다니엘 시대의 위협은 "다른 신에게 기도하면, 사자굴에 던져질 것이다"였습니다. 오늘날의 위협은 "누군가를 기독교로 개종시키면, 감옥에 갇힐 것이다"일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왕이 이 법을 통과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무엇을 했을까요? 그는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어떤 왕이나 정부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훗날 사도들이 말했듯이, 다니엘의 태도 역시 "우리는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행 5:29). 그래서 그는 왕의 칙령에서 하지 말라고 한 바로 그 일을 했습니다. 어떤 법도 그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항상 예루살렘을 향해 창문을 열어 놓고 기도하곤 했습니다. 그는 이제 창문을 닫고 기도하는 것을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았기 때문에 창문을 계속 열어 두었습니다. 우리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알리는 것을 결코 부끄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그는 하루에 한 번만 기도한 것이 아니라, 항상 그랬듯이 하루에 세 번 기도했습니다. 질투심 많은 관리들은 단지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그리고 다니엘이 기도하는 것을 보자마자, 왕에게 보고했습니다. 왕은 다니엘을 좋아했고 그를 구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관리들은 왕에게 "메대와 페르시아의 법"은 폐지될 수 없다고 상기시켰습니다. 그래서 왕은 다니엘을 사자굴에 던져야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은 다니엘을 사자로부터 보호해 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우리 삶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질투하고, 어떤 식으로든 우리에게 해를 끼치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 곁에 서 계실 것입니다. 다니엘 시대에는, 불(fire)과 사자들이 하나님의 종들을 만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새 언약 아래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에게 믿음을 위해 순교자로 죽는 영광을 주시기 때문에, 사자가 그들을 잡아먹고 불이 그들을 태워버리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이 20세기 동안 수백만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믿음 때문에 순교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해칠 수 없는 사자가 한 마리 있습니다 - 바로 사탄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만질 수 없는 불이 하나 있습니다 - 바로 지옥의 불입니다. 미움이나 원망 등 지옥의 영에 속한 어떤 것도 결코 우리의 마음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이 세상의 임금이 오면, 그는 내 안에서 아무것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요 14:30).

다니엘의 삶은 메대-페르시아 사람들에게 참 하나님에 대한 증거였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의 증거를 나타내기 위해, 우리에게도 시련이 오게 하십니다. 우리가 박해 속에서 견디고 박해자들을 사랑할 때, 다른 사람들은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를 볼 것입니다. 신앙 때문에 법정에 끌려가더라도, 진실을 말하고 누구도 미워하지 않기로 결심하십시오. 그리고 언젠가 복음을 위해 우리의 목숨을 바쳐야 한다면, 고개를 들고 주님을 찬양하는 마음으로 바칩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이 보좌에 계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미래에 대한 예언

다니엘서의 앞 여섯 장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뒤 여섯 장은 미래에 대한 예언입니다.

7장과 8장에서, 다니엘은 미래의 세계 왕국에 대한 환상을 받습니다. 그는 지금 87세 정도였고, 여전히 젊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환상과 꿈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과 충실하게 동행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7장에서, 우리는 느부갓네살이 꿈에서 본 것과 같은 다섯 왕국, 즉 바벨론, 메대-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그리고 마지막 세계 제국을 다른 관점에서 봅니다. 느부갓네살은 이들을 금, 은, 청동(놋), 철과 같은 귀금속으로 보았습니다. 다니엘은 그것들을 야수로 보았고, 그것은 하나님이 그것들을 보신 방식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땅의 왕국들을 소중한 귀금속으로 봅니다. 한 나라의 왕이나 대통령, 총리가 되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왕국들을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보십니다. 그분은 온 세상이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모두 야수로 여깁니다.

7장과 11장에 나오는 자세한 예언은 앞으로 다가올 몇 세기 동안 여기에서 예언된 대로 정확하게 성취되었습니다. 7장 4절에서, 우리는 느부갓네살의 날개가 잘리는 예언을 읽습니다. 곰처럼 생긴 두 번째 짐승은 메대-페르시아를 가리킵니다(7:5). 세 번째 짐승은 날개가 네 개이고 머리가 네 개 있는 표범처럼 생겼으며 알렉산더 대왕 치하의 그리스를 나타냅니다(7:6). 그가 죽었을 때, 그의 왕국은 네 부분으로 나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다니엘은 열 뿔이 있는 짐승과 그 열 뿔 가운데서 작은 뿔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세상을 다스린) 로마 제국을 가리킵니다. 이 뿔은 마지막 날에 생겨날 적그리스도(작은 뿔)의 통치로 끝날 제국을 가리키며, 이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으로 돌아오시기 직전입니다(7:7,8). 이 장의 마지막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수많은 천사들이 그분을 경배하는 가운데 보좌에 앉아 계시고 땅의 통치가 그분의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것을 봅니다.

8장에서, 우리는 이 왕국들에 대해 다시 조금 더 자세히 알게 됩니다. 첫 번째 환상은 그리스 제국에 대한 것입니다(8:5-8). 염소(알렉산더가 다스리는 그리스 제국)는 매우 강력해져서 "엄청난 속도"로 여러 나라를 정복했습니다(8:8). 그리스는 바벨론과 메대-페르시아와는 달리 세계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알렉산더 대왕이 불과 33세였을 때, 권력의 절정기에 갑자기 죽었습니다(뿔이 갑자기 부러졌습니다). 그가 죽자, 그의 네 장군이 왕국을 그들끼리 나눠 가졌습니다(염소의 네 뿔). 그들의 통치가 끝날 무렵, 술수의 달인인 사나운 왕이 권력을 잡았습니다. 이는 시리아를 통치했던 왕(알렉산더의 장군 중 한 명의 후손)을 가리킵니다. 그의 이름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였습니다. "에피파네스"는 "하나님이 나타나셨다"는 뜻이며, 그는 "자신을 하나님으로 나타내는" 적그리스도의 한 유형입니다(살후 2:4).

9장에서, 우리는 다니엘이 그의 백성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 시작한 것은 다니엘의 기도 때문이었습니다. 다니엘은 이제 87세였고,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금식하고 기도했습니다. 마치 그가 젊었을 때와 같았습니다(9:3). 하나님의 사람이 87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10대 시절처럼 열정적이고, 젊었을 때처럼 말씀을 공부하고, 젊었을 때처럼 금식하고 기도하며, 젊었을 때처럼 여전히 백성의 종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다니엘은 우리 모두에게 얼마나 훌륭한 모범인가요.

다니엘은 다른 유대인들을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님, 내 주변의 유대인들은 모두 타락한 자들입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주님, 우리는 죄를 지었고, 우리는 반역했고, 우리는 당신의 메시지를 듣지 않았습니다. 주님, 당신이 옳고 우리의 얼굴은 부끄러움으로 덮여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9:7). 우리는 다니엘이 타락한 동료 유대인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을 봅니다. 그는 "그들"이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당신의 이름을 모독했습니다. 우리는 인도가 보아야 할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가 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실패했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부흥을 보내주십시오. 주님, 당신이 옳고, 우리의 얼굴은 부끄러움으로 덮여 있습니다. 자비를 베푸시고 우리를 용서해 주십시오. 우리는 당신께 죄를 지었습니다." 그는 "당신의(Thy)"와 "당신의(Thine)"라는 단어를 열 번이나 사용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또 다른 환상을 보여주시고 예루살렘을 향한 그분의 목적을 위해 490년이 정해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9:24,25). 7개의 7년(49년)과 62개의 7년(434년)이 합쳐져 총 483년이 예루살렘을 재건하라는 명령이 내려진 때부터 기름부음받은 자(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지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히 성취되었습니다. 기원전 445년에, 예루살렘을 재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그로부터 483년 후인 기원후 29년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이스라엘 1년은 360일 - 역주)

그러므로 여러분이 다니엘의 예언을 이해했다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정확한 해를 알았을 것입니다. 490년 중에서 7년의 기간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 7년 기간은 마지막 때일 것입니다. 적그리스도가 그 기간 동안 지구를 통치할 것이고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에서나 엄청난 박해와 환난에 직면할 것이며,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것입니다.

10장에서, 우리는 다니엘이 3주 동안 기도하는 것을 읽습니다. 이 기간 동안 하늘에서는 큰 투쟁이 계속되었습니다. 다니엘은 이 기간 동안 부분적으로 금식했습니다. 그는 기름진 고기를 자제하고 소박한 음식을 먹었습니다. 3주가 끝나자, 천사가 다니엘에게 와서 그가 하나님께 "높이 평가받았다"고 말했습니다(10:11). 그(천사)는 또한 다니엘에게 오려고 했지만, 페르시아를 다스리는 악령에게 21일 동안 방해를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다니엘이 기도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그의 요청을 들으셨습니다. 하지만 응답이 오기까지 21일이 걸렸습니다(10:12,13).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의 기도에 즉시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도를 계속한다면, 응답은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러나, 악령이 미가엘을 저항한 이 사건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에 일어났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 당시 사탄과 그의 귀신들은 아직 패배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귀신을 이기는 데 21일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는 데 21일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제 모든 귀신이 우리 주님에 의해 패배했기 때문에, 우리는 다니엘과는 완전히 다른 입장에서 행동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귀신을 저항하면, 그는 즉시 우리에게서 도망칠 것입니다(약 4:7). 그의 활동은 억제될 수 있으며 그는 곧 우리 발 아래 있을 것입니다(롬 16:20).

10장 21절에서, 우리는 "이 세력들에 맞서 나와 함께 굳건히 서 있는 자가 없나니..."라고 읽습니다. 수년 전, 주님은 에스겔에게 중보자를 찾았을 때 한 명도 찾지 못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겔 22:30). 이제 다니엘은 외로운 중보자가 되었고 그는 하나님께서 단 한 사람을 통해 얼마나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는지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11장 2절에서, 우리는 페르시아 제국의 간략한 역사를 읽습니다.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은 11장 3절에서 언급됩니다. 그의 왕국은 그의 후손에게 돌아가지 않고 그의 네 장군에게 나누어질 것입니다(11:4). 여기서 언급된 남방 왕은 이집트이고 북방 왕은 시리아입니다(11:5,6). 이 두 나라의 역사에서 22개의 전쟁이 이 장에서 예언됩니다. 11장 6절은 이집트 왕 프톨레마이오스의 딸 베르니케가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2세 왕과 결혼하는 것을 언급합니다. 11장 10절은 안티오쿠스 3세를 언급합니다. 11장 16절은 시리아가 팔레스타인을 정복하는 것을 언급합니다. 11장 18절에서 우리는 로마의 손에 시리아가 패배하는 것을 읽습니다. 11장 19절은 안티오쿠스가 죽임을 당하는 것을 언급합니다. 11장 21절은 안티오쿠스 4세, 즉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적그리스도의 예표)를 언급합니다. 11장 31절은 이 안티오쿠스가 예루살렘 성전의 제단에서 돼지를 제물로 바치는 것을 언급합니다.

이 장에 기록된 많은 내용에는 이중적인 성취가 있습니다. 기원전 170년경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시대에 처음 성취되었고, 마지막 날 적그리스도 시대에 다시 성취될 것입니다.

11장 32절은 마지막 날에 타협하는 자와 온 마음을 다하는 주님의 제자들이 있을 것이라고 가르치는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타협하는 자들은 "매끄러운 말로, 언약에 대하여 악하게 행동하는 자들을 부패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러나 온 마음을 다한 자들은 "하나님을 알고 강해지고 하나님을 위하여 공적을 세울 것"입니다. 그 날에는, "통찰력이 있는 자들이 많은 사람에게 분별(understanding)을 줄 것입니다. 많은 교사들이 불과 칼에 죽임을 당하고 다른 방법으로도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박해를 받고 정련되고 깨끗해지고 정결해질 것입니다"(11:32-35).

11장 36절은 다시 적그리스도를 언급합니다: "그 왕은 자기 마음대로 행하고, 모든 신보다 자기를 높이고 크다하며 신들의 하나님을 대적하여 흉악한 말을 할 것이며; 분노가 끝날 때까지 번영할 것입니다." 11장 38절은 마지막 날에 모든 곳에서 만연할 권세와 부에 대한 숭배를 언급합니다. 11장 39절은 적그리스도가 귀신에게서 받을 도움을 말합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통치할 것이지만 그의 종말은 매우 빨리 올 것입니다(11:45).

12장에서, 우리는 먼저 적그리스도 시대의 큰 환난에 대해 읽습니다(12:1). 그런 다음 두 번의 부활에 대해 읽습니다 - 하나는 영생을 위한 부활이고 다른 하나는 수치와 부끄러움을 위한 부활입니다(12:2). 이 세상에서 지혜로운 자들은 마지막 날에 정오의 하늘처럼 밝게 빛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많은 사람을 의로움으로 돌이키는 자들은 별처럼 영원토록 빛날 것입니다(12:3). 다니엘서는 봉인된 책이 될 것이며, 마지막 날까지는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12:4,9).

마지막 날에 대한 두 가지 중요한 예언이 여기 12장 4절에 나와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왕래하며, 지식이 증가할 것이다." 마지막 날에는 여행이 상당히 증가할 것입니다. 아담 시대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인간의 여행 속도는 말(horse)의 속도였습니다. 그래서 멀리 여행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20세기는 그 모든 것을 갑자기 바꾸어 놓았습니다. 지금은 세계 여행자들이 수백만 명에 달하고 인간은 달까지 여행했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지식도 증가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생애에서도 성취되는 것을 봅니다. 인간이 5900년(아담 시대부터 1939년까지) 동안 축적한 모든 과학적 지식은, 40년(1939년에서 1979년까지) 동안 20배나 증가했습니다. 그 이후로는 계산을 초월하는 놀라운 속도로 증가해 왔습니다. 인간의 지식 증가 그래프는 역사의 99% 동안 매우 평평한 기울기를 보인 다음, 인간 역사의 마지막 시기에 약 100배 높이로 갑자기 급격하게 상승합니다.

다니엘 자신은 자신이 예언한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12:9), 생명이 다할 때까지 충실히 자신의 길을 가라는 말을 들었고, 그 후 그를 위해 정해진 자리를 보상으로 받게 될 것입니다(12:9,13).

당신은 영원 속에서 별처럼 빛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사람들을 의로움으로 돌이키십시오. 당신의 삶을 다른 사람들을 경건한 삶으로 돌이키는 데 사용하십시오. 그리고 마침내, 당신은 다시 일어나서 주님께서 당신을 위해 예비해 두신 상을 받을 것입니다.

장 28
호세아

영적 간음과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

호세아는 이스라엘 북쪽 왕국에 예언했습니다. 그의 예언의 주제는 영적 간음과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의 예언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에 대한 태도가 불충실한 아내를 계속 사랑하는 남편의 태도였음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은 구약성경에서 "여호와의 신부"라고 불렸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결혼한 관계 같았습니다 - 오늘날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 같습니다. 아내가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를 사랑하거나 다른 남자를 기쁘게 하려고 한다면, 그녀는 불충실하며 당연히 "간음녀"라고 불릴 수 있습니다.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도 똑같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결혼했는데 돈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영적인 간음녀입니다. 왜냐하면 돈은 "다른 남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명예를 사랑한다면, 그것 역시 우리의 주의를 끌려는 "다른 남자(세상)"에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악된 즐거움을 사랑한다면, 그것 역시 세상의 일부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신자들에게, "간음하는 여인들이여, 세상과 벗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됨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합니다(약 4:4).

호세아의 훈련

호세아는 이 매우 중요한 주제를 다룹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에게 이 교훈을 매우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호세아에게서 우리가 보는 것은, 아마도 다른 구약의 선지자들보다 더, 하나님께서 그분의 종에게 그분의 마음을 느끼게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 성경에서도 참된 선지자 사역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느끼시는 감정을 우리도 하나님의 백성에게 느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께서 그들을 바라보시는 방식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사실일 수 있지만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을 향한 감정이 없는 무언가를 설교하는 설교자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섬길 수 있기 전에,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게 하기 위해 우리에게 많은 고통스러운 시련을 겪게 하십니다.

예를 들어, 호세아 시대에 이스라엘은 불충실한 아내와 같았습니다. 그녀가 우상을 숭배했을 때 그녀는 주님께 불충실했습니다. 그것은 간음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간음과 우상 숭배는 구약 성경에서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심지어 신약 성경에서도, 영적 간음은 우상 숭배의 한 형태입니다. 우상 숭배는 참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숭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당신의 사업, 재산, 돈, 외모일 수 있습니다. 심지어 당신의 사역일 수도 있습니다. 당신의 삶에서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최우선 순위를 차지하는 것은 무엇이든 우상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삶에서 무언가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는 순간, 당신은 우상 숭배자, 영적 간음녀가 됩니다. 간음녀와 우상 숭배자에게 하는 모든 말씀은 그 순간에 당신에게 적용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그분의 마음을 느끼게 하신 방법은 부정한 아내와 결혼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호세아가 진리를 배우는 고통스러운 방법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어떤 남자가 자신에게 부정하고 다른 남자와 간음 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 그런 여자와 결혼할 생각이 있겠습니까? 이 선지자들은 선지자가 되기 위해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호세아의 아내가 그에게 부정했을 때, 그는 계속 그녀를 사랑하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한 번은 그녀가 다른 남자에게 자신을 노예로 팔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호세아는 그녀를 다시 사기 위해 돈을 지불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그녀를 계속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그녀를 다시 사온 후에도, 그녀는 계속 간음했습니다. 호세아는 그녀를 참는 것이 매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가 이러한 고난을 겪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이제 너는 내가 내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것이다. 가서 그들에게 전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결과, 호세아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엄하게 말했을 때조차도, 거룩함에 대한 그의 메시지에는 연민의 정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는 무엇을 강조했습니까? 거룩함과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이 두 가지 주제는 모든 선지자들의 부담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거룩함과 그들이 영적 간음에 빠져 타락했을 때에도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그분의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항상 그분의 백성을 돌아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그들을 징계하지만; 징계가 끝난 후에 그들을 그분께 돌아오게 하기를 원합니다. 예레미야는 "징계가 끝나면,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호세아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거룩함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당신 안에서 거룩함을 찾지 못하면, 그분은 당신을 징계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사랑은 너무나 커서 그분은 당신에게 부드럽게 말씀하시고 당신을 그분과의 교제로 다시 데려오시며, "내가 어떻게 너를 포기할 수 있겠느냐? 내가 어떻게 너를 놓아줄 수 있겠느냐? 내가 어떻게 너를 버릴 수 있겠느냐? 내 마음이 내 안에서 울부짖는다. 내가 얼마나 너를 돕고 싶어하는지!"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호 11:8 - Living).

이것이 교회에서도 참된 예언적 사역이 기능해야 하는 방식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참된 예언자는 구약 성경의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거룩함에 대해 가졌던 것과 같은 부담을 가질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예언자는 구약 성경의 예언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의 변함없고, 오래 참으시며, 자비로운 사랑에 감동을 받을 것입니다. 그 사랑은 타락한 하나님의 백성을 그분께로 돌아오게 하고 진정한 거룩함으로 인도하기를 끊임없이 갈망합니다. 교회가 살아있고 하나님을 위해 제대로 기능하려면 모든 교회에 예언적인 사역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호세아의 근본 주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호세아가 고통을 받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가서 창녀와 결혼하라. 그녀의 자식 중 일부는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1:2). 예언자가 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가 얼마나 큰지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예언자가 되고 싶어할까요? 하나님은 오늘날 당신에게 호세아가 한 일을 하라고 요구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원리는 우리가 그분의 마음을 느끼게 하기 위해 그분이 우리에게 깊은 고통을 겪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겪은 고통을 읽어보십시오 - 많은 위험, 많은 매를 맞음, 투옥, 막대기로 맞음, 강도를 당함, 몸을 따뜻하게 할 옷이 부족함, 먹을 음식이 부족함(고후 11:23-28). 이 모든 것의 목적은 바울이 하나님의 마음에 가까이 살게 하여 하나님의 심장 고동을 듣고 하나님이 느끼시는 대로 느끼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시련을 겪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매우 가까이 다가갑니다. 우리는 그분의 심장 고동을 듣고 그분의 백성에게 말할 때 그것을 느낍니다.

그러한 설교자와, 책을 읽고 설교를 들어서 많은 지식을 얻은 사람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섬기고 싶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설교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 그분의 심장 고동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하십시오. 그것은 교실에서 성경을 공부하는 것만으로는 얻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시련을 겪음으로써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집회에 참석하거나 좋은 기독교 서적을 읽는 것만으로는 얻을 수 없습니다 - 그것이 모두 좋은 책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식에 대한 큰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성경 지식을 더 많이 얻게 된다면 주님을 섬길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오늘날 어떤 하나님의 종을 보고 "나도 그가 하는 것처럼 주님을 섬기고 싶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네, 가능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결코 알 수 없는 깊은 고통을 통해 하나님께서 당신을 무너뜨리시도록 당신은 허락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참된 종은 다른 사람들이 전혀 모르는 힘든 시련을 겪었으며, 대부분의 경우 그는 자신이 겪은 일을 심지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도 않습니다.

호세아는 우리에게, 효과적으로 사역하는 유일한 방법은 개인적인 삶에서 깊은 고통을 겪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사람마다 다른 방법으로 이를 행하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모든 자녀에게 적용되는 표준 교과과정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분은 호세아를 힘든 아내를 통해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아내가 없는 예레미야를 깊은 구덩이에 두심으로써,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아내가 없는 바울을 여러 번 감옥에 가두어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절차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원칙은 동일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사역을 원한다면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바울은, "나는 많은 시련을 겪었고 -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힘을 이제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고후 1:4). 그러한 경험이 없다면, 우리는 사람들에게 죽은 지식만 전할 것입니다.

호세아는 고멜과 결혼했지만, 그녀의 자녀 중 일부는 다른 사람을 통해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첫 번째 아들은 호세아의 아들이었습니다. 그 다음 두 자녀는 아마도 그의 자녀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 자녀들의 이름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어떻게 벌하시는지를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길이다; 그녀가 사랑하는 자들을 쫓아가도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그들을 찾을 것이지만 만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나는 지금보다 남편과 함께 있을 때가 더 나았으니, 남편에게 돌아가는 게 낫겠다'라고 말할 것이다"(2:7). 호세아의 아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난 것과 같은 방식으로 그(호세아)에게서 떠났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곤경에 처했을 때, 그녀(이스라엘)는 다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곤경에 처했을 때만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들이 돈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실망시켰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분의 도움을 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도우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네 아내가 최후의 수단으로만 네게 돌아올지라도, 그녀를 다시 받아들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녀는 내가 그녀에게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주고, 그들이 바알을 만드는데 쓴 은과 금을 내가 아낌없이 주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2:8). 이 구절은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당신의 건강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당신이 가진 돈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당신이 가진 지성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금과 은을 사용하여 바알의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것을 이 세상과 그것의 쾌락을 위해 사용합니까?

탕자의 비유를 기억하십시오. 그는 아버지에게서 돈을 받았지만, 그것을 아버지의 사업에 쓰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돈을 모두 자신에게 썼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타락한 백성들의 표식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선물을 받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사용합니까? 그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몸은 내 것이다. 내가 원하는 대로 쓸 수 있다. 이 지성은 내 것이다. 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가능한 한 많이 그것을 사용해야 한다. 이 돈은 내 것이다. 내가 스스로 다 벌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쓸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금과 은을 가져다가 그것으로 바알의 우상을 만든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이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만약 당신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안다면, 당신은 그것을 모두 그분께 돌려드리고 "주님, 당신께서 저에게 이 모든 선물을 주셨고 저는 이 모든 것을 당신의 왕국을 위해 사용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그렇게 불충실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내가 그녀를 되찾을 것이다. 내가 그녀를 사막으로 인도할 것이다. 나는 그녀의 삶을 메마르고 황무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이 메마르고 황무해질 때 그녀는 나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그때 나는 그곳에서 그녀에게 부드럽게 말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2:14).

어떤 남편도 자기에게 완전히 불충실한 아내에게 그토록 부드럽게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는 부드럽게 말하고 그녀에게 선물을 계속 줄 것이다. 나는 그녀의 포도원을 그녀에게 돌려줄 것이다. 나는 아골 골짜기를 소망의 문으로 바꿀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2:14,15). 아골은 여리고에서 주님의 것을 훔친 죄로 아간이 죽임을 당한 곳입니다(여호수아 7장). 그곳은 죄에 대한 심판의 장소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주님은 "나는 심판의 장소를 너에게 소망의 문으로 만들 것이다. 비록 네가 실패했고, 그로 인해 심판과 징계가 너에게 왔지만, 이제 네가 네 죄를 자백했기 때문에, 나는 바로 이곳에서 너에게 소망의 문을 열어 다가올 날들에 너의 삶에서 아름다운 것이 나오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타락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사람들과 그들의 삶의 많은 세월을 허비한 사람들에게 놀라운 메시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 많은 세월을 낭비하고 잘못된 일을 많이 저질렀기 때문에 낙담합니다. 그들은 젊었을 때 이러한 진리를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합니다. 당신은 징계를 받았습니다. 당신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이제 주님은 당신에게 "낙담하지 마라. 내가 아골 골짜기를 너희에게 소망의 문으로 만들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다음 주님은 계속해서 "그 다가오는 날에, 너희는 나를 '나의 남편'이라 부르고 '나의 주인'이라 부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호 2:16). 옛 언약에서는 오늘날 우리가 남편과 아내로서 주님과 맺을 수 있는 관계 형태를 알 수 없었습니다. 이 관계는 성령님께서 우리 삶에 가져오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리브가를 이삭에게 데려온 것처럼, 성령님은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하여 그분과 결혼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은 그분을 주인으로 알았습니다. 이제 그분은 "너는 더 이상 나를 '주인'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너는 나를 '남편'이라고 부를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은 주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습니까? 오늘날 그분은 우선 당신의 주인이 되고 싶어하지 않고, 당신의 남편이 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에게 주님을 위해 섬기는 것은 마치 종이 주인을 섬기는 것과 같아서 지루하고 힘듭니다. 단지 월급을 받기 위해 까다로운 사장 밑에서 일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월급을 받기 위해 남편을 섬기지 않습니다. 사장은 자신의 재산을 직원과 공유하지 않지만, 남편은 공유합니다. 남편은 심지어 아내를 돌봅니다. 하지만 아내는 그 모든 것들 때문에 남편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사랑으로 남편을 섬깁니다. 주님은 "네가 불충실하더라도, 나는 네게 충실하여 너를 내 것으로 삼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2:20). 여기서 하나님을 떠난 사람을 끈질기게 쫓아가시는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보십시오. 바로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 각자를 돌보시는 방식입니다.

호세아의 아내는 노예로 자신을 팔았습니다. 하지만 호세아는 "은화 열다섯 개와 보리 다섯 가마니와 포도주 한 부대"로 그녀를 다시 사들였고(3:2), "당신은 내 집에서 많은 날을 지내고 매춘을 그만둬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그림입니다.

이스라엘이 곧 포로로 잡혀갈 것이기 때문에, 호세아는 아내에게 그 기간 동안 어떤 남자와도 성관계를 하지 않을 것이며, 심지어 그와도 성관계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3:3).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지만, 이스라엘을 일정 기간 동안 그분에게서 멀어지게 하실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일정 기간 동안 성전 제사장 없이 지내게 함으로써 그들을 징계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그분의 백성을 그분께로 돌아오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항상 그분의 바람입니다.

호세아는 고난의 경험을 바탕으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4장 이후). 그는 메시지에서 매우 강한 말을 사용했지만; 그 모든 강한 말의 배경은 그가 겪은 고난에서 나왔습니다. 우리의 고난이 우리를 연약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아니요.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만, 그들에게 단호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영적 간음

우선 호세아는, "이것이 주께서 그분의 백성에게 대하여 하시는 주장이다"라고 말했습니다(4:1). 그리고 모든 선지자들처럼, 그는 지도자들부터 시작했습니다. 수년 전 나는 인도에서 열린 대규모 교단 집회에 특별 연설자로 초대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약 12,000명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내가 연설하기 위해 일어섰을 때, 나는 "주님께서 내게 주신 부담은 내 앞에 앉아 있는 수천 명의 사람들 모두에게 말하라는 것이 아니라, 내 뒤 연단과 청중석에 앉아 있는 모든 목사들에게 말하라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돈 문제에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3일 동안 연설하도록 초대받았지만, 이틀 후에 그들은 "우리는 더 이상 당신이 말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3일째에 조용히 앉았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지도자들부터 시작하십니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지 않는다면, 그 이후로는 그들에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선지자들은 항상 지도자들에게 먼저 말했습니다. 지도자들이 타락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타락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잘못된 길로 간다면, 그것은 부모가 아이들을 올바르게 키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아이들이 학교에서 잘못 행동하더라도, 아이들을 탓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집에서, 그들이 올바르게 행동하도록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어느 어머니가 어린 소년을 데려와서, "잭 형제님, 제 아들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아요"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문제가 그녀에게 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 어머니를 위해 기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하라는 대로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 어머니에게 개인적으로, "당신이 그런 말을 해서 공개적으로 아들에게 망신을 주면 아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오늘날에도 지도자들이 불경건하고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고통을 겪습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먼저 제사장들에게 말했습니다(4:4). 당신이 지도자라면, 회중을 손가락으로 지적하며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 교회의 사람들은 너무 나쁩니다."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당신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불만은 너희 지도자들에게 있다. 너희는 밝은 낮에도 걸려 넘어질 것이요, 거짓 예언자들도 다 그러하리라(4:5).

"내 백성이 멸망하는 것은 나를 알지 못함이니라"(4:6). 하나님의 백성이 멸망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경을 모르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 제사장들아, 잘못은 너희에게 있다. 너희가 나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너희 모두를 더 이상 제사장으로 인정하지 않겠다. 나는 너희 삶에서 기름부음을 제거하겠다. 너희가 너희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너희 자녀를 축복하는 것을 잊을 것이다"(4:6).

"설교자가 많을수록 그들은 내게 죄를 더 많이 짓는다"(4:7).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요!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우상의 수치와 바꾸어 버렸다." 당신은 이 말씀이 오늘날 얼마나 적절한지 보세요!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돈의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잃었습니다. 옛날에 그들은 가난했지만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오늘날은 부유하지만 그 기름부음을 잃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우상과 바꾸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사람들을 희생해서 자기 배를 채우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제사장들에게 사람들이 가져온 속죄제와 속건제의 제물의 일부를 먹을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레 6:25,26; 7:5-7). 그래서 제사장들은 사람들이 죄를 지을 때 행복했습니다. 사람들이 죄를 많이 지을수록, 제사장들이 카레에 넣을 고기가 더 많았기 때문입니다!! "제사장들은 사람들이 죄를 짓고 속죄제를 그들에게 가져올 때 배불리 먹습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은 백성이 죄를 지을 때 기뻐합니다!"(4:8 - NLT).*

호세아는 백성들도 제사장들과 같으므로 둘 다 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4:9). 부모가 돈을 사랑하기 때문에(그리고 부모는 가족의 제사장입니다) 그들의 아들들과 딸들도 영적 간음에 빠지게 됩니다 - 심지어 오늘날에도(4:13).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왜 그들(딸들, 며느리들)을 벌해야 하느냐? 너희 남자들도 똑같은 짓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어리석은 백성들아! 너희는 깨닫기를 거부하므로, 멸망할 것이다"(4:14). "그들의 예배는 겉치레에 불과하다"(4:15).

"제사장들과 이스라엘의 모든 지도자들아, 이 말을 들어라! 왕족의 모든 남자들아, 들어라! 이 심판의 말씀은 너희를 위한 것이다: 너희는 멸망할 것이다! 너희가 우상을 숭배함으로써 백성을 올무에 빠뜨렸기 때문이다…그러나 결코 잊지 말라. 내가 너희가 행한 일에 대해 너희 모두와 청산할 것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너희의 형벌의 날이 오면, 너희는 돌무더기가 될 것이다. 유다의 지도자들은 도둑처럼 악해졌다. 그러므로 나는 내 분노를 폭포처럼 그들에게 쏟을 것이다"(5:1,2,9,10). 다시 한번 하나님께서 심판에 대해 먼저 말씀하신 것은 지도자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스라엘의 실패에 주로 책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인들이 실패하는 것은 그들의 지도자들이 먼저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주님은 이스라엘이 어떤 환난에 직면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때 그들은 주님께로 돌아올 것입니다(5:15). 이스라엘이 호세아의 메시지를 들었을 때, 그들은 주님께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강력한 심판의 말씀을 들을 때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말했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그분은 우리를 찢으셨지만; 이제는 우리를 고쳐 주실 것이다. 그분은 우리를 다치게 했지만; 이제는 우리의 상처를 싸매 주실 것이다. 잠시 후에, 그분은 우리를 회복시켜 그분 앞에서 살 수 있게 하실 것이다. 오, 우리가 주님을 알게 하소서! 그분을 알기 위해 힘쓰자! 그러면 그분은 새벽이 오거나 이른 봄에 비가 오는 것처럼 확실하게 우리에게 응답하실 것이다"(6:1-3). 많은 설교자들은 이런 말을 듣고 흥분했을 것이고 이것이 부흥으로 이어질 진정한 회개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아마도 후원자들에게 "우리는 이곳에서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수천 명이 손을 들어 주님께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며 결단 카드에 서명했습니다." 등의 내용으로 보고서를 재빨리 보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그분은 속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이것이 아침 이슬처럼 곧 사라질 얕은 감정적인 변화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6:4). 아침에는 풀밭에 이슬이 맺혀 있는 것을 보지만; 한 시간 후면 그것은 사라져 버립니다.

6장 5절에서, 하나님은 참된 예언 사역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내가 내 선지자들을 보내어 너희를 산산조각 내었다. 나는 내 말로 너희를 죽이겠다고 위협하며 너희를 죽였다." 사람들을 산산조각 내는 것은 쉬운 사역이 아닙니다. 그러나 호세아 자신도 하나님이 자신의 결혼 생활을 다루시는 과정에서 산산조각 났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호세아가 말한 것은 그런 고난의 학교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호세아가 그의 개인적인 생활에서 그 모든 고난을 겪지 않았다면, 그는 이 말을 가혹하게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고난의 깊은 골짜기로 인도하지 않으셨다면 호세아의 말을 따라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설교단에서 선지자처럼 행동하는 것은 매우 신나는 일입니다. 당신은 그것으로 명예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을 참된 선지자들이 겪은 고난으로 인도하심이 없는데 당신이 선지자를 흉내 내려고 한다면, 당신은 거짓 선지자가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당신을 깊은 경험, 즉 시련과 고난과 고통의 경험으로 인도해서 그분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많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대변자로 삼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은밀히 동행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삶에 보내시는 모든 것에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의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 나는 너희가 자비를 베풀기를 원한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2장 7절에서 인용하신 구절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심판하겠다고 위협하셨습니다(6:11).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치료하고자 하셨지만, 이스라엘의 죄는 너무나 컸습니다.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는 거짓말쟁이, 도둑, 강도들도 가득했습니다(7:1).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거짓말을 하고 도둑질을 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 설교자들이 이런 죄를 짓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금을 위해 서방 국가에 보내는 보고서에서 거짓말을 합니다. 그리고 돈을 받으면 훔쳐서 자신을 위해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인도에 돈을 보냈는데, 기독교 지도자가 그 돈으로 호화롭게 살거나 가족을 위한 부동산을 산다면, 그는 무엇일까요? 도둑입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은 "내 백성이 경건치 않은 이방인들과 어울린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8절). 그들은 이 경건치 않은 사람들의 경건치 않은 방식을 배웁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고, 세상적인 기준, 세상적인 방법, 세상적인 사업 원칙을 기독교 활동에 도입합니다. 설교에서 그들은 심리학자들이 사용하는 방법을 채택합니다. 오늘날 기독교 강단에서 하는 설교의 대부분은 순수 심리학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하기 위한 격려의 말일 뿐입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그들은 모두 반쯤 구운 케이크처럼, 한쪽은 익었지만 다른 쪽은 익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8절).

적이 온 후에 이 모든 것을 회개하기에는 너무 늦었습니다(8:1-4). 이스라엘은 "아무도 기뻐하지 않는 그릇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율법을 멸시했기 때문입니다" (8:8,12).

하나님의 심판

"이스라엘아, 다른 사람들처럼 기뻐하지 말라"(9:1). 성경은 주님 안에서 기뻐하라는 권고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 이스라엘에게 다른 사람들처럼 기뻐하지 말라고 말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 불충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창녀라고 불립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상에게 제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돈, 인간의 명예, 죄의 쾌락, 편안한 삶을 숭배하는 사람이 일요일 아침 교회 집회에 와서 하나님을 찬양할 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아십니까? "기뻐하지 말라. 너는 우상을 숭배하는 창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놀라게 하는 몇 가지 말씀을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전하는 선지자들이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에서 가장 오해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그녀 자신을 위해 열매를 맺는다고 비난하십니다(10:1). 그녀는 하나님과 자신의 이익을 사랑하고자 하는 분열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께는 "빈 말과 쓸모없는 약속"만 합니다(10:4). 구약 성경시대 이스라엘의 행동에 관해 우리가 읽은 많은 내용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하신 말씀입니다. "의를 바라고 심고, 친절함에 따라 거두어들이라; 너희 묵은 땅을 갈아라. 여호와께서 의를 비 내리실 때까지 여호와를 찾아야 할 때라"(호 10:12). 하나님은 우리에게 마음의 단단한 땅을 갈아엎고 의의 좋은 씨앗을 심으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찾을 때, 그분은 우리에게 의의 소나기를 내리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호세아서의 마지막 네 장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국가의 회복, 그리고 심판을 초월한 사랑의 궁극적 승리에 관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 내가 그를 사랑하여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노라"(11:1). 이 구절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구원받은 것을 언급하지만, 마태복음 2장 15절에서는 예수님이 애굽에서 이스라엘로 돌아오신 것에 적용되는 것으로 인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성경이(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말씀이기 때문에) 한가지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 가운데 있는 속임수와 불충실함에 대해 모두 알고 계십니다(11:12). 그러나 그분의 부드러운 마음은 그들을 그리워하며 말합니다, "오, 내가 어떻게 너를 포기할 수 있겠느냐, 내 아들아? 내가 어떻게 너를 놓아줄 수 있겠느냐? 내 마음이 내 안에서 부르짖는다; 내가 얼마나 너를 돕고 싶어 하는지! 아니, 나는 내 맹렬한 분노가 말하는 만큼 너를 처벌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너를 파괴하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다. 나는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니라; 나는 너희 가운데 사는 거룩한 자요, 나는 멸망시키러 온 것이 아니니라"(11:8,9). 이 자비로운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이 사람들은 정직하지 않은 저울로 파는 교활한 상인들이다. 그들은 속이는 것을 좋아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 나서 '나는 부자다. 나는 혼자서 다 달성했다. 아무도 내가 속여서 얻은 것을 알지 못한다'라고 자랑한다"(12:7,8). 오늘날 그리스도인 사업가들 중에는 부정한 방법으로 벌어들인 돈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교묘하게 숨겨 왔습니다. 재정적 성공 덕분에 그들은 미성숙한 신자들의 눈에 인정받게 되었고,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좋은 회중들 가운데 장로(지도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겉보기에 그들은 의로운 사람처럼 보이며 교회에서 존경을 받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내 겉으로 드러난 증거가 흠이 없기 때문에 아무도 내가 속여서 얻은 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사람들을 속인 영리한 상인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이나 그분의 선지자들을 속일 수 없습니다. 언젠가 하나님께서 그들 모두를 폭로하실 것입니다. 참 선지자들도 그런 사람들을 꿰뚫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부유한 사업가들은 참 선지자에게 가까이 가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세대에서, 이러한 부패에 맞서 하나님을 위하여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전에는 이스라엘이 말할 때, 열국이 두려움에 떨었다. 그는 강력한 왕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바알을 숭배했고 그의 파멸에 도장을 찍었다. 그리고 이제 사람들은 점점 더 불순종한다"(13:1,2). 이것은 하나님을 위한 예언적 목소리로 시작하였던 많은 사람들의 역사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은 돈과 이 세상의 것들과 타협하여 그들의 파멸에 도장을 찍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그들이 말할 때 감동을 받지 않습니다.

"오 사망아, 네 가시는 어디 있느냐? 오 스올아, 네 쏘는 것은 어디 있느냐?"(13:14). 이 구절은 부활에 대한 아름다운 구절이며 고린도전서 15장 55절에 인용되어 있습니다.

호세아는 마침내 이스라엘에게 주님께로 돌아오라고 권하고, 그들에게 할말까지 알려줍니다: "이스라엘아,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너희는 너희 죄로 말미암아 넘어졌느니라.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가라. 그분에게 이렇게 말하라, '모든 죄를 제거해 주시고 우리를 은혜롭게 받아 주시어, 우리가 입술의 열매를 바칠 수 있게 해 주옵소서'"(14:1,2). 히브리서 13장 15절에서 읽을 수 있듯이 우리 입술의 열매는 "찬양의 제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마침내 데려가시고자 하는 곳은 영원한 찬양의 자리입니다 - 우리가 그분의 예배자가 되는 곳, 그분과의 관계가 다른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곳입니다.

주님은 마침내 우리에게 "내가 너희를 우상 숭배에서 고칠 것이요... 그리고 내 사랑은 한계가 없으리니, 내 분노는 영원히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약속하십니다(14:4). 돈에 대한 사랑은 우리 모두 안에 깊이 자리 잡은 우상 숭배로, 오직 주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돈에 대한 사랑은 큰 양파와 같습니다. 한 겹을 벗기면 그 아래에 또 다른 겹이 있고 그 아래에는 더 많은 겹이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그 겹을 하나하나 보여주시고 조금씩 우리를 그 겹에서 해방시켜 주실 수 있습니다. 나는 한 번은 어떤 육적인(carnal) 형제에게, "내 생각에 당신의 문제는 돈을 사랑하는 것 같아요."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오 아니요, 잭 형제님. 나는 그것에서 벗어났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나는 그에게 "글쎄요, 당신은 나보다 낫군요. 왜냐하면 나는 아직도 그것과 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보지 못했고, 그래서 나중에 돈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떨어져 나갔습니다. 자신이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먼저 떨어져 나갑니다. 당신은 (예수님처럼) 돈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자비를 베푸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 당신 자신에 대해 빛을 비추어 달라고 요청하세요.

그런 다음 하나님께서는, "나는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처럼 너를 상쾌하게 할 것이다. 너는 돌아와서 내 그늘 아래서 쉴 것이다. 너는 물을 준 정원이 되어 꽃을 피울 것이다"(14:5-7)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을 물 댄 정원처럼 만들어 줄 성령이 부어질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누구든지 지혜로운 사람은, 이런 것들을 깨달아라: 여호와의 길은 참되고 바르며, 의로운 자는 그 길을 따라 걸을 것이다. 그러나 죄인들은 그 길을 시도하지만 실패할 것이다"(14:9).

사람은 두 가지 부류밖에 없습니다: 여호와의 길을 걷는 의로운 사람들과 - 그렇지 않은 죄인들입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이것을 알아볼 것입니다.

*이 구절은 많은 번역본에서 그다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The Living Bible과 The New Living Translation에서 이러한 구약 성경 예언서를 읽는 것이 좋습니다. 이러한 버전들은 번역본이 아니라 의역본이므로 교리를 확립하는 데 사용할 수 없지만 다른 번역본에서 그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없는 많은 구절에 빛을 비춰줍니다.

장 29
JOEL

주님의 날

요엘은 남쪽 왕국인 유다의 선지자였습니다. 그의 예언은 짧고 그의 주제는 주님의 날입니다. 주님은 메뚜기 떼가 농작물을 심각하게 황폐화시켰을 때 그를 유다로 보내셨습니다.

때때로, 자연 재해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아야 합니다 - 그리고 그런 때에 하나님께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셨는지 말해줄 선지자가 필요합니다.

사무엘하 21장 1절에서, 우리는 다윗 시대에 3년 동안 기근이 있었다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비정상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주님께 구했습니다. 주님은 오랫동안 바로잡히지 않은 죄가 있음을 그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 죄가 바로잡히자, 기근은 즉시 그쳤습니다.

때때로 병은 죄로 인해 발생합니다. 38년 동안 불구였던 사람의 경우처럼요(요 5:14). 고린도전서 11장 30절에 따르면 고린도의 어떤 신자들은 죄 가운데 살면서 주님의 만찬에 참여했기 때문에 병에 걸렸고 심지어 죽기도 했다고 말합니다. 야고보서 5장 16절은 "너희 죄를 고백하고 너희가 병고침을 받도록 서로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재난이나 병이 있을 때마다, 주님께서 그것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묻는 것이 좋습니다. 사고가 났더라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것이 좋습니다. 이 모든 것을 자연 현상이나 우연으로 설명하는 대신, 멈추어서 "주님, 이것을 통해 저에게 말씀하시려는 것이 있으신가요?"라고 물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런 기도는 앞으로 닥칠 더 ​​심각한 위험으로부터 당신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나는 두 바퀴 스쿠터를 타다가 넘어진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45년 동안 스쿠터를 타면서 심각하게 다치거나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작은 긁힘은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때마다 멈추어서 주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하는지 물었습니다. "너는 너무 빨리 운전하고 있다. 천천히 운전해라."라는 대답이 돌아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는 이런 경고에 감사했습니다.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면 일어날 수 있었던 더 심각한 사고로부터 나를 구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심판

그래서 메뚜기 재앙이 유다에 닥쳤을 때, 주님은 요엘을 보내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들에게 알리게 하셨습니다. 요엘이 주로 지도자들에게 말한다는 점에 다시 한 번 유의하십시오: "오 장로들아, 이 말을 들으라. 이 땅의 모든 주민아, 귀를 기울이라. 너희 시대에나 너희 조상 시대에 이런 일이 있었느냐?"(1:2). 그들은 평생 그런 일을 경험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무언가를 말씀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이 귀를 기울이고 - 하나님께서 당신의 죄를 징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 당신은 그 죄를 회개하고 그 문제를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나중에 자녀들에게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다(1:3), 그러면 자녀들은 당신이 저지른 실수에서 배우고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길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알려질 수 있습니다 - 그래서 모두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신감에 취하면, "우리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요엘은 술 취한 사람들에게 깨어나 울라고 요청합니다(1:5). 당신의 사역에 열매가 없는 이유를 보십시오. 포도나무가 다 망가지고 새 포도주가 다 없어진 이유를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1:7). 우리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열매를 맺어야 하고 열매가 남아있어야 한다"라고 매우 분명하게 가르치셨습니다(요 15:16).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 우리의 특별한 부르심이 무엇이든, 우리의 성품에서 열매를 맺고, 성령의 열매를 맺고, 우리의 사역에서도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요엘은 "메뚜기가 너희 열매를 망쳐 놓았는데 너희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구나"라고 말합니다(1:4-관련 행과 그 다음을 보시오).

기쁨 자체가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1:12). 기쁨을 잃었을 때, 당신은 타락한 자(backslider)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참된 제자는 항상 기쁨으로 가득합니다. 그는 많은 시련과 슬픔을 겪을 수 있지만; 그는 그 모든 것에서 기쁨을 느낍니다. 불평과 불만은 타락의 표시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언제 불평했습니까? 그들이 광야에 있을 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불평하는 그들을 멸망시키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0,11절은 우리가 지금 그들처럼 불평하지 말라고 경고받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음식이 제대로 조리되지 않았다고 불평한다면, 당신은 여전히 ​​광야에 있는 것입니다. 기억하세요. 기쁨이 말라붙으면, 당신은 타락한 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 가서 금식하고 기도하고 우십시오 - 특히 지도자들과 설교자들이(1:12-14). 사람들을 불러 모으십시오. 교회에 열매가 없기 때문에 금식하고 기도하라고 말하십시오 - 인격의 성장도 없고 사역의 열매도 없습니다.

회개는 성령의 부어주심보다 먼저 일어납니다

시온(교회)에서 나팔을 불고 경고의 소리를 내십시오. 이것은 주님의 날이 오기 전에 해결해야 할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2:1). 주님의 날은 지금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 않고 하나님과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모든 사람에게 어둠과 우울의 날이 될 것입니다. 징계의 날은 다가올 더 큰 심판에 대비하라는 경고일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은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기 때문입니다(2:13). 그분은 친절로 가득 차 계시고 우리를 처벌하기를 전혀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축복을 보내고 싶어하십니다. 그러니 그분을 찾도록 합시다(2:14,15).

여기서 우리는 장로, 어린 아이, 신랑과 신부,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 교회로서 금식하고 기도하도록 권유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주님, 당신의 백성을 살려주십시오. 우리가 이방인들 사이에서 조롱거리가 되지 않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게 하십시오(2:16,17).

기독교인들이 세계 대부분 나라의 이방인들 사이에서 조롱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얼마 전 인도의 한 도시에서 기독교 설교자가 병자를 고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집회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눈먼 사람이 보고, 절름발이가 걷고, 귀머거리가 듣는다..." 등의 말로 집회를 광고했습니다. 어떤 반기독교인들은 의사와 아픈 사람들(눈먼 것보다 훨씬 덜 심각한 문제를 가진)을 집회에 데려와, 설교자에게 그들을 고쳐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물론 그는 그들 중 누구도 고칠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기독교 설교자와 그의 팀을 꾸짖으며 아무도 고칠 능력이 없는데, 거짓 주장으로 사람들을 속이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 사람들의 말에 100% 동의합니다. 우리는 거짓 주장으로 사람들을 속여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오늘날 예수님의 이름이 조롱을 받는 이유입니다.

우리에게 없는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지 맙시다. 당신에게 치유의 은사가 있다면, 그 은사를 행사하십시오 - 그러면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고치셨던 것처럼 사람들이 진정으로 치유될 것입니다. 하지만 은사가 없는데 은사가 있다고 주장하며 돌아다니지 마세요. 예수님은 치유의 은사를 광고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광고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분은 실제로 병자를 치유하셨고 곧 모든 사람이 광고 없이도 그것에 대해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 땅을 위하여 열심을 내시고 자기 백성을 불쌍히 여기실 것이라"(2:18).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하고 죄를 고백할 때, 주님은 그분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 진노하시어 우리에게 응답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어떻게 우리에게 응답하실까요? 그분은 우리에게 그분의 영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내가 내 영을 모든 백성에게 부어주리니, 너희 아들딸이 예언하고 너희 노인들은 꿈을 꾸리라"(2:28). 베드로가 오순절 날에 성취되었다고 인용한 구절이 바로 이 구절입니다. 그들 중 120명이 다락방에서 열흘 동안 금식하고 기도하며, 회개하고 하나님을 찾으며 '주님, 당신의 백성이 예루살렘에서 조롱거리가 되지 않게 해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영이 그들에게 부어졌고, 그들은 나아갔으며, 주님의 이름은 한때 모독을 받았던 곳에서 영광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께 나팔을 불고 금식을 선포하며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도록 격려하고자 합니다 - 그 사람들은 오늘날 이 땅에서 예수님의 이름이 불명예스럽게 여겨지는 것을 걱정하는 사람들입니다. 요엘이 오늘날 우리에게 전하는 예언의 말씀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지금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곧 주님의 날이 올 것입니다.

마침내 주님의 날이 오면, 하늘과 땅에는, 피와 불과 연기 기둥 등 많은 이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날이 오기 전에, 누구든지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2:30-32).

주님의 날이 올 것입니다

3장은 심판의 날과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에 대해 설명합니다. 그 날이 오기 전에,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수많은 무리가 결정(dicision)의 골짜기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3:14). 수백만의 사람들이 결정의 골짜기에서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모르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입니다. 주님의 날이 곧 이 결정의 골짜기에 올 것이며, 그분의 음성이 시온에서부터 울부짖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때 그분의 백성에게 피난처와 견고한 요새가 되실 것입니다(3:16). 오늘날 우리는 이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심판의 날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고 경고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지상에 평화의 왕국을 세우실 것입니다(3:17,18).

"애굽은 황무지가 되고 에돔은 황량한 광야가 될 것이다"(3:19). 우리에게는 세 가지 원수가 있습니다 - 세상, 육신, 마귀입니다. 세 가지가 모두 여기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 이집트(세상), 그 통치자 파라오(마귀), 에돔(육신). 에돔은 에서의 후손을 가리킵니다. 에서와 야곱의 갈등은 육신과 성령의 갈등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날에 이 세 원수에게 치명타를 가하실 것입니다 - 왜냐하면 그들은 수년간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사람이 거주할 것이다......여호와께서 시온에 거하시리라." (3:20, 21). 주님은 교회 안에서 그분의 백성과 함께 영원히 그분의 집을 만드실 것입니다. 그것이 모든 예언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회개하고 우상으로부터 돌이키며 금식과 기도로 하나님을 찾으라고 촉구해야 합니다. 모든 선지자의 부담은 거룩함이었습니다: 우상을 버리고 당신의 삶에서 하나님을 첫째로 두십시오. 진정한 거룩함은 우리 삶에 우상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거룩함은 하나님으로 우리의 온 마음을 채우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름은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거하시는 장소가 될 수 있도록 그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장 30
아모스

특권은 위험과 책임을 가져온다

아모스서는 북왕국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을 담고 있는 예언서 중 첫 번째 책입니다. 이스라엘에는 엘리야와 엘리사라는 두 명의 기적을 행하는 선지자가 그보다 앞서 있었습니다. 하지만 엘리야와 엘리사는 기록된 예언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아모스는 예언을 기록으로 남긴 최초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모스는 엘리사보다 약 40년 후에 예언을 시작했습니다. 만약 게하시(엘리사의 종)가 나아만의 돈을 쫓아가지 않고 스스로를 망치지 않았다면, 그는 엘리사의 기름부음을 두 배로 받아 이스라엘의 다음 선지자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게하시는 아모스 대신 이 예언서를 썼을 것입니다. 하지만 게하시는 그 특권을 놓쳤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아무도 우리의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도록 조심하라고 경고하십니다(계 3:11).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계획하신 사역에 충실하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간직해 두신 면류관이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불충실하다면 그 면류관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당신이 이루어야 할 사역은 다른 사람이 하게 되고 그는 당신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 아모스가 게하시의 면류관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아모스는 선지자가 되고자 하는 열망이 없었습니다. 최초의 많은 사도들이 단순한 어부였던 것처럼 그는 단순한 목동이었습니다. 엘리사는 농부였습니다. 아모스는 소, 양, 무화과를 돌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자격에 대해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말하기를, "나는 전문적인 선지자가 아닙니다. 나는 선지자가 되기 위한 훈련을 전혀 받지 못했습니다. 나는 그저 목동일 뿐입니다. 나는 무화과나무를 돌봅니다. 그러나 주께서 나를 양 떼에서 불러내시며, '가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암 7:14-15).

하나님께서 아모스를 예언적 메시지를 기록한 첫 번째 사람으로 택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아모스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자신의 일에 충실한지 보기 위해 (우리 모두를 지켜보시는 것처럼) 그를 지켜보셨을 것입니다. 아모스는 학자도 제사장도 아니었지만, 자신의 일에 매우 충실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했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친절했으며, 선하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며 "너는 나의 종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충실한지, 항상 겸손의 길을 선택하는지, 그분을 기다리고 그분의 말씀을 경청하고 성경을 공부하는 시간을 갖는지 등을 매일 지켜보십니다. 아마 아모스는 25년 동안 충실했을지, 나는 모르겠습니다. 나는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30년 동안 충실한 삶을 살다가 설교하도록 부름을 받으셨다는 것을 압니다. 당신이 오랜 세월 동안 작은 일에 충실하게 지내다 보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완전히 잊으셨는지 궁금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잊지 않으십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너는 오늘부터 나의 종이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속적인 일에 충실한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그분은 구약 성경에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세속적인 일에 충실했던 사람들을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아모스서에 결코 나오지 않는 두 가지 표현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입니다. 이는 아모스가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의 하나님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에티오피아 사람들보다 나에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느냐? 내가 너희를 이집트에서 인도해 냈다. 그렇다. 하지만 내가 다른 나라들을 위해 많은 일을 하지 않았느냐? 나는 블레셋 사람들을 크레타에서 인도해 냈다. 나는 아람 사람들, 곧 시리아 사람들을 기르에서 인도해 냈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에서 인도해 냈다. 너희와 그들 사이의 차이점이 무엇이냐?"(9:7).

아모스는 모든 민족의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새 언약" 비전을 가진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함께 이방인도 모아서 모두 한 몸으로 만드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아모스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옹졸하고 편협한 사고방식을 뛰어넘었습니다. 그는 전 세계 사람들을 향한 큰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받아주신 사람은 우리뿐이다"라고 느낀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배타적이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자신들만을 지상에서 그분의 백성으로 택하셨다고 생각하는 많은 기독교 단체들이 있습니다!! 사실, 그런 태도는 사이비 종교를 식별하는 특징 중 하나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모스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 그는 큰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참된 종은 모든 단체와 교파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받아들이는 큰 마음을 가질 것입니다. 바벨론은 어떤 한 교파에서만 발견되는 체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의 마음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세상 체제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교회에 앉아서 바벨론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 바벨론이 그들의 영 안에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교파 체제에서 나왔기 때문에 바벨론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돈을 사랑한다면, 세상의 어느 교회에 속해 있든 당신은 바벨론의 일부입니다. 당신이 육체의 정욕에 따라 산다면, 세상의 어느 교회에 속해 있든 당신은 간음한 여자입니다. 당신은 "우리는 마리아를 숭배하지 않고 유아 세례를 행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순수한 교리를 자랑할 수 있습니다. 좋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돈을 숭배하고 정욕을 행한다면, 당신은 실제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머리의 문제(교리적)인 반면, 당신의 문제는 더 심각한 마음의 문제(삶과 관련된)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세계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작은 집단만을 돌보신다고 생각하는 배타주의가 많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어떤 교파보다 큽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느 한 교파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교파에 그분의 백성들을 갖고 계십니다. 많은 교회에는 다른 교리를 가진 거듭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많은 교회의 교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을 거기에 두고 계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주의 교회에 등록된 교인으로 앉아 "구별된" 회중안에서 빵을 떼는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 특히 그 교회에 속한 2세대와 3세대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아모스의 비전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민족과 모든 교파의 사람들을 벌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또한 모든 민족과 모든 교파에서 백성들을 모으십니다.

아모스의 예화는 거의 모두 그의 목동 생활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할 메시지를 주셨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모스의 인간적 성품과 지성을 사용하여 그 메시지를 전달하셨습니다. 아모스는 곡식 단이 가득 찬 소 수레, 사자의 입에서 어린 양의 일부를 구하려는 목동, 밭을 가는 것, 애벌레와 메뚜기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는 또한 별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는데, 밤에 들판에서 목동으로 일하면서 하나님의 광대한 창조물을 예리하게 관찰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모스에게 이스라엘의 부자들과 그들의 아내들이 사치스럽게 살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하는 것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는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모스는 분명 인기 있는 설교자가 아니었습니다!!

아모스는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시대(기원전 790~750년)에 살았습니다. "여로보암은 사십일 년 동안 통치하면서 여호와의 눈 앞에서 악을 행하였다"(왕하 14:23,24). 이 시기는 이스라엘에서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였습니다. 전쟁에 비용이 들지 않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업을 확장하고 매우 매우 부유해졌습니다. 아모스는 부유한 사람들의 궁전 같은 여름 별장과 겨울 저택을 언급합니다(3:15). 부유한 사람들은 산에 집(여름에 사용)과 평원에 집(겨울에 사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상아 침대에 누워 한가롭게 음악을 듣고 술에 취해 부드러운 고기를 실컷 먹으며 매우 부도덕한 생활을 하며 호화롭게 살았습니다(6:4; 4:1; 2:7). 이 외에도 그들은 또한 엄청난 임대료를 부과하고 법정 판사에게 뇌물을 주어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했습니다(5:10,12). 가난한 사람들은 또한 노예로 팔렸습니다(2:6). 부유한 사업가들은 매주 안식일이 끝나기를 간절히 기다렸다가 다시 나가서 사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8:5). 그들이 생각하는 전부는 돈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아내들은 제멋대로 하는 술주정뱅이들이었습니다(4:1). 아무도 나라가 파괴되고 있다는 것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6:6). 그리고 부유하지 않거나 영향력이 없는 사람들은 이 체제에서 피해를 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공산주의가 번식하는 분위기입니다. 공산주의는 엄청나게 부유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곳에서 번성합니다.

놀라운 점은 이 모든 방종과 더불어 그들은 또한 많은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제사와 감사 제물을 드렸고 3일마다 십일조를 가져왔습니다. 그들은 엄숙한 집회, 특별 모임, 찬송가를 부르며 종교 축제를 가졌습니다. 그들은 놀라운 찬양과 예배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 모든 것을 헛된 소음으로 거부하셨습니다(5:21-23).

이 모든 것은 오늘날 기독교 집단에서 우리가 보는 것과 매우 유사합니다. 오늘날 많은 부유한 설교자들은 가난한 신자들에게서 받은 제물로 지어진 웅장한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부자들은 단지 그들의 부 때문에 교회에서 명예로운 지위를 얻습니다. 그런 부유한 설교자들과 부자들은 진실을 듣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모스는 매우 어려운 사역을 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전문적인 설교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아모스를 대적한 아마샤였습니다(7:10-16). 아마샤는 성전의 부유한 임원들에게 많은 봉급을 받는 제사장이었습니다. 그가 설교를 해서 그들을 행복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 훈련받지 않은 목동 선지자, 아모스가 와서 모든 부자들에게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부자들은 격노하여 말했습니다, "이 아모스를 여기서 내쫓아라. 그는 거짓 교리와 이단을 전파하고 있다! 그를 내쫓아라." 아마샤는 부자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아모스에게 이스라엘에서 나가라고 즉시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아마샤는 그 결과로 자신의 가정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7:12,17).

그래서 우리는 아모스와 같은 선지자들이 우리 시대에 매우 적절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봅니다. 1장과 2장에서 아모스는 여러 나라에 대한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3장부터 6장까지는 이스라엘에게 왜 그들이 심판을 받는지 말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7장부터 9장까지는 다른 많은 선지자들처럼, 심판 이후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했습니다.

심판

먼저, 아모스는 다메섹, 가사, 두로, 에돔, 암몬, 모압에 대한 심판을 선포했습니다(1:3,4,6,7,9,11,13; 2:1).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모스가 그 나라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을 듣고 얼마나 기뻤을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아멘. 주님을 찬양하라"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후에 그는 "유다에게 화가 있다. 이스라엘에게 화가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멘"은 잠잠해졌습니다 - 왜냐하면 이제 그는 그들에게 설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세상과 다른 교회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말해주는 설교자를 좋아합니다! 아모스는 그렇게 시작했습니다. 그는 그들 모두에게 "아멘"이라고 말하게 한 다음 그들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는 현명한 설교자였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그들(유다와 이스라엘)도 다르지 않다고 말했습니다(2:4,6).

아모스는 종종 "세 가지 죄와 네 가지 죄로..."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1장과 2장에서 여덟 번). 주님께서 그 표현으로 의미하신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여러 번 너희를 눈감아 주었다. 하지만 더 이상 너희를 눈감아 주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너희를 여러 번 용서했다. 하지만 너희는 나의 선함을 이용하고 있다. 이제 나는 너희를 벌해야겠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용합니까?

아모스의 설교는 주로 다른 사람들을 잔인하게 대하는 여러 나라의 사람들을 정죄했습니다. 다메섹은 가난한 사람들을 이용하고 "곡식처럼 타작했습니다"(1:3). 사람들을 물건(곡식)처럼 취급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물질적 소유물을 훨씬 더 사랑하는 것은 흔한 죄입니다. 두로는 이스라엘과의 형제 관계 언약을 깨고 이스라엘 마을 전체를 에돔에 노예로 팔았습니다(1:9). 에돔은 칼을 들고 이스라엘 사촌들을 쫓아갔습니다(1:11). 이것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흔한 또 다른 죄로,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형제 자매라는 것을 잊고 다른 사람들에게 넘기는 것입니다. 암몬은 길르앗의 임신한 여자들의 배를 갈랐습니다(1:13).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혀로 사람들을 찢어 버립니다. 모압은 죽은 에돔 왕이 살아있을 때 일어난 일로 인해 화가 나서, 그의 뼈를 파내어 재로 태워버렸습니다(2:1). 그리스도인들은 수년 전에 일어난 일로 인해 다른 사람에 대한 분노를 간직하고 있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인간의 많은 행동은 분노에서 비롯됩니다. 화가 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잔인하게 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경고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세 가지 죄와 네 가지 죄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분노를 여러 번 눈 감아주시고 우리를 놓아주셨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가 계속해서 다른 사람을 가혹하게 대하면 그분이 우리에게 가혹하게 대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창세기를 공부할 때, 하나님께서 아담을 저주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그는 오직 자신만을 해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가인을 저주하셨습니다. 가인은 다른 사람을 해쳤기 때문입니다. 어떤 죄는 우리에게만 영향을 미칩니다. 하지만 어떤 죄는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해로운 약물을 복용하면, 기본적으로 그러한 죄로 자신만 해칩니다. 그러한 죄는 다른 사람을 해치는 죄만큼 심각하지 않습니다. 간통을 저지르면, 여성의 몸을 폭행하고 그녀를 해칩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을 험담하거나 악담을 하면, 그들의 명예를 훼손합니다. 이 역시 매우 심각한 일입니다. 다른 사람을 어떤 식으로든 해치는 모든 죄는 하나님의 눈에 매우 심각한 일입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을 해치는) 험담은 (자신만 해치는) 해로운 약물을 복용하는 것보다 더 나쁩니다. 하지만 험담하는 사람이 마약 중독자보다 더 나쁘다고 가르치는 교회를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불행히도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진실을 말해줄 선지자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람들을 얼마나 엄하게 대하셨는지 보십시오! 유다와 이스라엘에 대해, 그분께서 그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보십시오: "너희는 여호와의 율법을 거부하였다, 너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였다"(2:4). 다른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율법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모르고 다른 사람들을 심하게 대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과 유다는 하나님의 율법을 알면서도 똑같은 일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유다에게 불을 보내리라." 이스라엘 백성은 거듭거듭 죄를 지었습니다(2:6).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샌들 한 켤레에 팔았고, 힘없는 사람들을 흙먼지 속에 짓밟았으며,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정의를 베풀지 않았고, 종교적 축제 때 간음을 저질렀으며, 빚진 사람들에게서 훔친 옷을 입고 빈둥거리며 지냈으며, 훔친 돈으로 산 포도주를 하나님의 집에서 바쳤습니다(2:7,8).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속여 그 돈을 하나님의 일에 바치는 것과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먼저 가이샤의 것을 가이샤에게 바치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 속한 것을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순서입니다. 그래서 아모스는 이 모든 사람들에게 경고하고 그들의 태도를 정죄했습니다.

"나는 너희 아들들 중에서 선지자와 나실인을 택하였노라"(2:11). 나실인은 삼손처럼 오로지 하나님께만 속한 사람들로 따로 구별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나실인들에게 포도주를 마시게 하여 죄를 짓게 했다." "너희 교회에는 온전한 젊은 신자들이 몇 명 있었지만, 너희는 이기심, 세속주의, 부도덕한 행동으로 그들을 부패시켰다. 그래서 그 젊은이들이 타락했다." 나는 이런 일이 인도에서 일어났다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저기서 어떤 젊은이를 선지자나 나실인으로 부르시어, 하나님께 구별되게 하셨지만,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연장자 설교자들의 예를 보면서 부패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연장자 설교자들에게 "너희는 이 싹트는 선지자들을 파괴했다. 너희는 이 나실인들을 파괴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젊은이 여러분 모두에게 전하고 싶은 말입니다: 여러분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 있는 나쁜 본보기를 보지 마십시오. 그리스도를 닮은 지도자들의 본보기를 따르고 나머지 사람들은 무시하십시오. 그들의 교리가 옳더라도 말입니다. 어떤 사람의 교리가 옳다고 해서 그가 경건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람을 경건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입니다.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는 이유

아모스는 3장부터 6장에서 이스라엘에게 그들이 심판을 받는 이유를 말했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두 사람이 동의하지 않는 한 함께 걸을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습니다(3:3). 그들이 주님과 완전히 교제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주님이 그들과 함께 걸을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이 회개하지 않고 바로잡지 않은 죄가 남아 있는 한,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걸으시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교제하기 위해 죄에 대한 그분의 견해에 동의해야 합니다. 아모스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사자가 으르렁거리는 것은 그가 먹잇감을 찾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지금 심판하시려고 으르렁거리신다면, 그것은 이스라엘에 죄가 있기 때문이다. 재앙이 어떤 성읍에 임하는 것은, 주께서 그것을 보내심이요 - 심판이니라"(3:4-6).

아모스가 전파한 지 몇 년 후, 앗수르가 와서 이스라엘에 예언된 재앙을 가져왔습니다. 주님은 그것이 그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한 그분의 형벌이라고 미리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형벌하기에 앞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선지자들을 통해 경고하시고,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3:7). 오늘날, 주님은 그분의 선지자들을 통해 교회에 있는 그분의 백성에게 "죄에서 돌이키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징계하리라"라고 반복해서 경고하십니다. 징계는 즉시 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확실히 올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은 아모스가 예언한 지 약 100년 후에 왔지만, 그것은 정말로 왔습니다. 노아가 세상에 심판을 선포했을 때, 그것은 120년 후에서야 이루어졌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뿌린 대로 거둘 것입니다. 그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심판하기 전에 그분의 선지자들을 통해 사람들에게 경고하실 것입니다.

사자가 으르렁거릴 때, 사람들은 두려워해야 합니다. 주권자이신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분의 종들은 예언해야 합니다(3:8).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이것입니다, "사자가 너희 앞에 서서 으르렁거리면, 너희는 떨 것이다. 그러나 내가 여기에서 너희에게 말하고 있는데, 너희는 떨지 않는다. 나는 너희의 생각과 눈의 불순함, 돈 문제에 대한 불의함, 나 외의 것을 숭배하는 것에 대해 너희에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너희는 떨지 않는다. 너희는 창조주인 나보다 내가 만든 사자를 더 두려워한다." 사람들은 "글쎄, 저 사람은 그냥 아모스이고 그저 훈련받지 않은 목동일 뿐이야."라고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그가 훈련받지 않은 목동이었을지는 몰라도 그는 하나님의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너무 많은 죄를 지어서 실제로 "옳은 것"과 "그른 것"을 잊어 버렸습니다(3:10).

4장에서, 아모스는 이스라엘 여인들을 "살찐 소"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많이 먹고 마셔서 살찐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끊임없이 남편들에게 "또 한 잔"을 요구했습니다(4:1). 아모스는 누군가가 "그들의 코(이 소들)에 갈고리를 꿰어 끌고 갈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4:2). 주님은 날카로운 책망을 하셨고, 그분의 선지자 아모스는 주님의 말씀을 듣기 좋게 하기 위해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습니다. 진정한 선지자는 대개 날카롭게 책망을 합니다. 예수님 그분도 그랬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직면한 위험의 심각성을 경고하는 유일한 방법인 경우가 많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원하는 모든 제사를 계속 드릴 수 있지만, 나는 그것들 중 어느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재앙을 거듭하면서 내가 너희에게 만족하지 않다는 것을 경고하려 했다. 나는 한 도시에는 기아를, 다른 도시에는 기근을 가져왔다. 그러나 너희는 나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너희가 절실히 비가 필요한 밭에 가뭄을 보냈고 너희의 농작물은 망했다. 한 밭에는 비가 내렸지만 다른 밭에는 내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물을 마시기 위해 마을에서 마을로 비틀거리며 다녔지만 물이 충분하지 않았다. 그러나 너희는 나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너희 농장과 포도원을 병들게 하였고 너희 가운데 질병과 재앙을 보냈으며 심지어 너희 성읍 중 일부를 파괴하였노라. 그러나 이 모든 경고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여전히 나에게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4:4, 6-11). 이제 남은 해결책은 하나뿐이었습니다. "너희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라"(4:12).

오늘날,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하시는 말씀은 아마도 매우 비슷할 것입니다: "너희는 죄 속에 살고 이 세상을 사랑하면서도, 내 자녀라고 주장하여 내 이름에 불명예를 돌린다. 나는 너희에게, 내가 너희에게 행복하지 않다고 말하기 위해 너희 삶에 보낸 실패와 징계를 통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너희는 깨우치지 않는 듯하다. 그렇다면, 너희의 심판자로서 너희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라."

"벧엘이나 길갈이나 브엘세바에 가서 예배하지 말라"(5:5). 이곳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일하셨던 곳이었습니다. 이 장소들에는 역사가 깃들어 있습니다. 벧엘과 브엘세바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아버지 야곱을 만나셨습니다. 길갈은 요단 강을 건넌 후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을 할례했을 때, 가나안에서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과거에 살지 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년 전에 우리 교회를 세운 사람은 경건한 사람이었다"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200~300년 전에 교회를 세운 이 경건한 사람들 중 일부는, 오늘날 지상으로 돌아온다면 자신이 세운 교회에 합류하지 않을 것입니다 - 그들의 교회가 너무나 심하게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과거를 돌아보지 마십시오. 오늘날 하나님께서 어디에서 일하고 계신지 보십시오.

"오 악한 자들이여, 너희는 가난한 자에게 정의를 쓴 약으로 만든다. 정의와 공정함은 너희에게 무의미한 허구일 뿐이다! 너희는 정직한 판사들을 얼마나 미워하는가! 너희는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멸시하는가! 너희는 가난한 자들을 짓밟고 세금, 벌금, 이자로 그들의 가장 작은 부스러기까지 훔친다;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가 짓고 있는 아름다운 석조 주택에서 결코 살 수 없을 것이다. 너희의 죄는 많고 크다. 나는 그것들을 모두 잘 알고 있다. 너희는 모든 선의 적이다; 너희는 뇌물을 받고, 가난한 자에게 정의를 거부한다. 나는 너희의 쇼와 가식, 즉 너희의 종교적 축제와 엄숙한 집회로 나를 '공경'한다는 너희의 위선을 싫어한다. 나는 너희의 번제와 감사 제물을 받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너희의 화목제를 보지 않을 것이다. 너희의 찬양의 찬송가를 없애라 - 그것들은 내 귀에 소음일 뿐이다. 나는 너희의 음악이 아무리 아름다울지라도 듣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정의의 강력한 홍수, 선을 행하는 급류를 보고 싶다"(5:7-12, 21-24 - TLB). 신자가 가난한 사람에게 집을 임대할 때, 하나님께서 그가 청구하는 임대료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을 착취하는 사람들을 미워하십니다.

"호사스럽게 지내며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너희에게 얼마나 끔찍한 일이 일어날까"(6:1). 6:4-6에서 주님은 매우 비꼬시며 그들에게 그들이 다윗만큼 훌륭한 음악가라고 생각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다윗은 좋은 마음을 가졌지만, 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좋은 음악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집안에서 모든 것이 잘 되어서 기뻤습니다 - 그들은 편안한 집, 좋은 음악, 좋은 음식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요셉의 고난", 즉 국가의 슬픈 상태에 대해 걱정했습니까? 거의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시대에, 주님의 질문은 "너희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슬픈 상태에 대해 걱정하고 있느냐?"입니다. 주님은 "나는 이스라엘의 교만함과 거짓된 영광을 멸시한다. 나는 그들의 아름다운 집을 미워한다"(6: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집을 미워하십니까? 아니요. 그러나 그분께서는 아름다운 집을 자랑스러워하는 사람들과 특히 그리스도의 몸이 순수하고 거룩해야 한다는 것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을 대적하십니다.

심판의 환상과 회복의 약속

7장에서 9장까지, 아모스는 먼저 이스라엘이 심판받는 다섯 가지 환상을 보았고, 그다음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다섯 가지 약속을 받았습니다.

7:1-6에서, 아모스는 메뚜기 떼와 큰 불이 이스라엘을 심판하러 오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는 즉시 이스라엘을 위해 중재하며 말했습니다, "주권자이신 여호와여, 제발 이렇게 하지 마소서. 당신이 이스라엘을 그렇게 심판하신다면 이스라엘에게는 희망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모스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심판하려는 계획을 두 번이나 포기하셨습니다. 이것은 중보에 엄청난 힘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7:6).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도하려면 우리가 하나님께서 서 계신 곳에 우리도 함께 서서 죄의 심각성을 보아야 합니다. 에스겔 시대 이후에, 하나님은 중보자를 찾지 못했습니다(겔 22:30). 하지만 이때 하나님은 한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 아모스는 하나님께 간청했습니다, 모세가 수세기 전에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자 했을 때 간청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 선지자들은 동정심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위대한 중보자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종종 멸망에서 구원받은 것은 이 선지자들 덕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들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아모스에게 (수직∙수평을 헤아릴 때 쓰는) 다림줄에 대한 환상을 보여주시고,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다림줄을 놓아 - 그들이 솔직하고 정직하며 바른지 보려고 하니 - 내가 다시는 그들을 용서하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7:8). 하나님은 항상 다림줄로 우리를 시험하여 우리가 자신의 죄에 대해 정직한지 보십니다.

그런 다음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바벨론의 "기독교" 지도자를 상징)와 아모스(예루살렘, 즉 참된 교회를 세우는 사람을 상징) 사이의 대립을 보게 됩니다. 아마샤는 왕에게 가서 아모스에 대한 거짓말을 하며, "아모스가 당신을 대적하여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참 선지자들에 대해 "그들은 거짓 교리를 전파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말을 들으면, 교회에 혼란이 생길 ​​것입니다." 등의 거짓말을 재빨리 퍼뜨려 사람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진리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아모스 시대에도 그런 일이 있었고, 지난 2000년 동안 기독교 집단에서도 그런 일이 거듭거듭 일어났습니다. 아마샤는 아모스에게 "너는 유다에서 이스라엘로 와서 여기서 전파하고 있다. 유다로 돌아가서 거기서 전파하여 돈을 벌어라("거기서 빵을 먹고 예언하라" - 7:12 - KJV). 여기에는 설교자가 충분하고 여기서 네가 하는 예언은 듣고 싶지 않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아모스는 "들어라, 아마샤, 나는 당신처럼 전문적인 선지자가 아니다. 나는 훈련을 받기 위해 성경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 나는 목동이자 농부다. 내가 양 떼와 무화과나무를 돌보고 있을 때 어느 날 하나님께서 나에게 오셔서 이스라엘로 가서 예언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내가 여기 온 것이다. 나는 생계를 위해 여기 온 것이 아니고 예언자로서 돈을 벌기 위해 온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제, 아마샤, 네가 나를 대적하니, 주께서 너를 심판하실 것이다. 네 아내는 이 성에서 창녀가 될 것이요, 네 아들딸은 죽임을 당할 것이요, 너 자신은 타국에서 죽을 것이다."(7:14-17).

하나님의 참된 예언자들과 싸우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아모스에게 익은 열매의 환상을 보여 주셨는데, 이는 이스라엘이 벌을 받을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상징합니다(8:2). 이스라엘이 벌을 받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들어라, 가난한 사람들의 것을 강탈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짓밟는 너희 상인들아; 안식일이 끝나고 종교적 명절이 끝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무게가 더 나가는 저울과 크기를 줄인 되로 다시 속임수를 쓰는 너희들; 가난한 사람들을 노예로 삼고, 은 한 조각이나 신발 한 켤레의 빚으로 그들을 사들이고, 곰팡이가 핀 밀을 파는 너희들: 이스라엘의 자랑이신 주님께서 맹세하시기를: '나는 너희의 행위를 잊지 않겠다! 그 땅은 파멸을 기다리며 떨고, 모두가 슬퍼할 것이다'"(8:4-7).

8:11,12에서 우리는 마지막 날에 대한 이러한 예언적 말씀을 봅니다: "마지막 날에 기근이 있을 것이다 - 빵의 기근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의 기근이다 - 사람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찾아 여기저기를 헤매고 다닐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그 기근을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을 말합니다 - 그리고 성경은 그 자체로 부족함이 없습니다. 성경 협회는 매년 수백만 권의 성경을 배포하고 성경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책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 여호와의 말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 즉, 선지자의 입을 통해 시대적 필요에 따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예언의 말씀을 말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마지막 날에는 드물 것입니다. 사람들은 진정한 선지자의 말을 듣기 위해 사방을 헤매지만 - 선지자를 찾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으로부터 예언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생기면 주의를 기울이고 주의 깊게 경청하십시오 - 그리고 진지하게 받아들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때, 그분을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구원받을 것입니다: "나는 마치 체로 곡식을 체질하듯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들에 의해 체로 걸러지도록 명령하였다, 하지만참된알맹이하나잃어버리지않을것이다 .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건드리지 않으실 것이다'라고 말하는 죄인들은 모두 칼에 죽게 될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체로 걸러내려는 체를 가지고 있습니다(눅 22:31 참조).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우리의 믿음은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주님은, "그때에 내가, 지금은 폐허가 된 다윗 성을 재건하여 이전의 영광으로 회복시키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9:11). 이 구절은 야고보가 교회를 세우는 것을 언급하면서 인용한 것입니다(행 15:16,17). 교회는 많은 곳에서 폐허가 된 상태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내가 그것을 다시 세울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쟁기질하는 자가 추수하는 자를 따라잡을" 때가 올 것입니다(9:13).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는 과거에 많은 악을 뿌렸고, 우리는 용서받았지만, 어느 정도는 여전히 우리가 뿌린 것을 거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전심으로 제자가 된 후) 당신의 삶에 뿌리는 새로운 것들이, (과거 때문에) 당신이 거두어들인 것들을 지워버릴 때가 곧 올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과거에 너무 많은 음란물을 읽고 보았기 때문에 당신의 마음(mind)을 괴롭혔던 더러운 생각과 꿈은 점차적으로 영적인 것에 대한 생각과 꿈으로 대체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제 당신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당신의 삶은 하나님을 위해 풍성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약속입니까! 할렐루야!

장 31
오바댜

교만과 그 결과

오바댜서는 아주 작은 책으로, 단 한 장만 있습니다. 오바댜가 왜 그렇게 작은 책을 썼을까요? 물론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쓸 내용을 거의 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흥미로운 사실은 오바댜가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멈추셨을 때 글을 쓰는 것을 멈출 만큼 예민했다는 것입니다 - 어떤 설교자들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라고 생각하며 길고 지루한 설교를 합니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다른 이유도 있었을 수 있습니다. 오바댜는 예레미야와 같은 시기에 예언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미 30년 동안 예언해 온 경건한 예레미야 앞에서는 예언을 거의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오바댜의 태도에서 겸손의 영을 봅니다. 이것은 단지 추측일 뿐이지만, 오늘날, 교회 모임이나 신자들이 교제하는 시간에는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덜 성숙한 형제들은 경건한 형제들에게 길게 말할 시간을 주고, 스스로는 거의 말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오바댜와 같은 겸손한 형제들은 오늘날 찾기 힘듭니다.

에돔의 심판

오바댜는 에돔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말했습니다. 에돔은 우리 육신(flesh)의 한 유형입니다. 그래서 이 예언은 육신의 멸망을 상징합니다. 여기서는 에돔의 교만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교만한 것은 높고, 접근하기 어려운 절벽에 살기 때문이다. '누가 여기까지 올 수 있겠는가!'라고 너희는 자랑하고 있다. 스스로를 속이지 마라! 너희가 독수리처럼 높이 날아올라, 별들 사이에 둥지를 틀더라도, 나는 너희를 곤두박질치게 할 것이다.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4절).

육신은 항상 자신을 높이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교만을 완전히 파괴하기로 결심하셨습니다. 밤에 도둑이 와서 물건을 빼앗아간다고 해도, 모든 것을 가져가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모든 구석구석이 수색되고 약탈당하고 모든 보물이 발견되어 빼앗길 것이다"(6절 - TLB). 이것이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은 우리 안에서 "육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작은 구석, 즉 모든 육신의 정욕이 성령의 능력으로 완전히 파괴되고 정복된다는 것입니다.

에돔은 가까운 친척인 이스라엘에게 저지른 폭력 때문에 벌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가던 가장 절박한 때, 그들은 "이스라엘이 도움이 필요한 시기에 이스라엘을 버리고 냉담하게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침략자들이 이스라엘의 재산을 빼앗아 갈 때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이스라엘을 도우려 하지 않았습니다"(10,11절). 그들은 마치 자신들도 이스라엘의 적인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에돔은 이스라엘을 돕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행한 죄와 행하지 않은 죄가 있습니다. 종종 우리는 죄를 생각할 때, 행한 죄만 생각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어떤 죄도 행하지 않았다는 점에 유의하십시오. 그들은 다친 사람을 때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죄는 그를 돕기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은 것입니다(눅 10:29-37). 우리는 궁핍한 사람을 돕지 않는 것이 죄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그것은 행하지 않은 죄입니다. 에돔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 그리고 주님은 그것을 심각하게 여기셨습니다.

에돔의 두 번째 죄는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힌 것을 기뻐했다는 것입니다(12절). 당신이 싫어하는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났을 때, 당신은 행복하다고 느끼십니까? 그것은 죄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불행을 기뻐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에돔은 무력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공격하여 사거리에서 그들을 베어버렸습니다(14절). 그들은 이스라엘의 적들과 협력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회복

마지막으로 주님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거의 모든 선지자들이 회복에 대해 말했습니다. 어느 날 "예루살렘은 도망하는 자들의 피난처가 될 것이다"(17절). 그곳은 거룩한 곳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돌아와서 그들의 유업을 되찾을 것입니다. 그때 이스라엘은 주님을 위해 타오르는 불이 될 것이고, 에돔은 마른 지푸라기가 될 것입니다(18절). "구원자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온 에돔(육신)을 다스릴 것이다. 그리고 주님은 왕이 되실 것이다!"(21절).

오늘날, 하나님은 우리를 그 구원자로 부르시어, 하나님의 타락한 백성에게 "너희의 왕을 보라!"라고 선포하게 하시고 그들이 그분께 돌아오라고 초대하도록 하십니다.

에돔이 멸망하게 된 원인은 무엇이었습니까? "네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느니라"(3절). 우리가 교만할 때, 우리는 영적 속임에 노출됩니다 - 교만은 속이는 자인 사탄의 본성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무언가에 대해 자랑스러워하는 순간 - 외모, 지성, 영성, 성경 지식, 무엇이든 - 마귀는 즉시 당신의 손을 잡고 "지금 당신과 나는 교제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는 지상에서 걸었던 가장 겸손한 사람이었으며, 당신이 자신을 낮추는 순간, 당신은 그분과 교제하게 됩니다.

교만은 간음보다 더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간음은 외적인 죄이기 때문입니다 - 그리고 외적이고 명백한 죄는 숨겨진 죄만큼 심각하지 않습니다. 오바댜는 교만에 안주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속았다고 경고합니다. 그의 짧은 권면을 통해 우리 주변에 육신의 포로가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예수님이 그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다고 선포하는 법을 배우도록 합시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오바댜가 자신의 짧은 글을 헛되이 쓴 것이 아니게 될 것입니다.

장 32
요나

모든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구약성경에는 16권의 예언서가 있습니다(이사야에서 말라기까지). 그 16권의 예언서 중에서, 요나는 이스라엘이나 유다에게 아무것도 예언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니느웨에만 예언했습니다. 요나서는 실제로 예언서가 아니라 역사서입니다.

요나는 요나서를 3인칭으로 직접 썼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요나서는 구약 성경의 위대한 선교서입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의 좁은 마음과 하나님의 넓은 마음을 보여줍니다 - 그리고 지구상에서 가장 사악한 나라(그 당시 수도가 니느웨였던 아시리아)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갈 사자(messenger)가 필요하셨을 때, 그분은 요나를 택하셨습니다. 요나는 외부 세계, 즉 비유대 민족에게 처음으로 하나님의 선지자가 되는 엄청난 영광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불순종으로 그 특권을 거의 놓쳤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인간의 통로에 의존하는 것을 다시 한 번 봅니다. 그리고 사자가 협조할 의향이 없다면, 하나님은 제한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그릇이 준비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 모세의 경우처럼요.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구출될 준비가 되었을 때, 모세는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준비하는 것을 마칠 때까지 구출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여기서도 비슷한 것을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에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먼저 그 메시지를 받을 종을 준비시켜야 했습니다. 요나는 아시리아인에 대한 편견이 있었고 그들에게 가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베드로가 나중에 이방인(고넬료의 집)에게 가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과 같습니다. 편견은 매우 강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특정한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편견을 깨뜨리지 못하신다면, 주님을 위한 우리의 섬김은 제한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사용하실 수 있지만, 그분께서 우리를 사용하실 수 있는 정도는 제한될 것입니다. 그분의 마음은 우리의 마음보다 훨씬 더 크기 때문입니다.

니느웨는 이스라엘에서 동쪽으로 약 600킬로미터 떨어져 있었습니다. 요나가 여행하기에는 먼 거리였습니다. 하지만 그게 요나가 그곳에 가고 싶어하지 않은 주된 이유는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아시리아인을 미워했습니다. 그들이 너무 잔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나는 사악한 아시리아인이 그들의 죄를 회개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요나는, 그들이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살려주실 것이고, 그러면 그들이 와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요나의 첫 번째 사명

이 책에는 두 부분이 있습니다. 처음 두 장은 요나의 첫 번째 사명을 다루고 다음 두 장은 두 번째 사명을 다룹니다.

주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그 성을 향하여 외쳐라. 그들의 악이 내 앞에 이르렀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1:1,2). 하지만 요나는, 동쪽으로 가는 대신, 서쪽으로 갔습니다. 그는 욥바로 가서, 배를 발견하고, 요금을 지불하고, 주님 앞에서 도망하며, 다시스로 내려갔습니다(1:3).

요나는 여행할 돈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놓쳤습니다. 다시스로 가는 표를 살 돈이 없었다면, 그는 얼마나 복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딘가로 가라고 하셨고 우리는 다른 곳으로 가고 싶어할 때, 우리가 선택한 곳으로 여행할 돈이 없다면 좋을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 일꾼들은 어딘가를 여행할 수 있는 돈이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주장이 타당하다면, 요나는 다시스로 떠났을 때 하나님의 뜻에 따랐던 것입니다!! 무언가를 사거나 어딘가로 갈 돈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그 물건을 사는 것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고 다른 곳으로 가기를 원할 수도 있습니다. 돈은 뛰어난 사기꾼입니다. 어디로 갈지 또는 무엇을 살지 결정하는 데 있어서 돈의 가용성을 결정 요인으로 삼지 마십시오.

요나가 하나님의 뜻에서 떠났을 때, 주님께서 바다에 큰 바람과 큰 폭풍을 일으키셨고, 배는 깨지려고 했습니다. 선원들은 두려워서 각자가 자기 신에게 부르짖었지만, 폭풍은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우상에게 기도하는 동안, 그 배에서 참 하나님을 아는 유일한 사람은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요나를 깨워서 그에게도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누구의 잘못으로 그들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는지 알아내기 위해 제비를 뽑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제비를 주권적으로 통제하셔서 그것이 요나에게 떨어지게 하셨습니다. 배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요나보다 훨씬 더 큰 죄인들이었지만, 폭풍은 요나 때문에 왔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불순종은, 믿지 않는 자의 수많은 죄보다 하나님의 눈에 더 심각합니다. "땅의 모든 민족 중에서, 내가 너희만을 택하였노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대로 너희를 더욱 벌하리라"(암 3:2).

요나는 자신의 죄를 인정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해안까지 노를 저어 가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바다가 매우 거세서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요나는 "나를 들어올려 바다에 던지세요 그러면 폭풍이 멈출 것입니다. 이 폭풍이 당신들에게 닥친 것은 나 때문이라는 것을 내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12절). 그러자 선원들은 요나를 바다에 던지면 하나님께서 벌하실까 봐 두려워했습니다. 이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선지자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는 듯합니다. 결국,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요나를 들어올려 바다에 던졌습니다 - 그러자 폭풍이 즉시 가라앉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주님을 두려워했습니다"(16절).

그러는 동안, 주님은 요나를 삼키기 위해 큰 물고기를 준비하셨고,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밤낮을 지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감을 받은 것이고 나는 그 말씀이 기록된 그대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땅 속에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시며 이 이야기가 사실임을 인정하셨습니다(마 12:40). 낙원(Paradise)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전에는 땅의 심장부에 위치했으며 - 예수님은 낙원, 땅의 심장부에 사흘 밤낮 동안 계셨습니다 - 목요일 저녁부터(네, 그분은 목요일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일요일 아침 죽음에서 부활하실 때까지였습니다.

사흘 후에, 요나는 기도했습니다. 2:1에서 "그때"라는 단어에 주목하세요. 이 단어는 요나가 처음 사흘 밤낮 동안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그는 그 사흘 밤낮 동안 무엇을 했을까요? 그는 아마도 큰 물고기의 뱃속에서 기어 나오려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시도했지만 항상 물고기의 끈적끈적한 뱃속으로 다시 미끄러져 들어갔을 것입니다. 사흘 동안 헛된 노력을 한 후에, 그는 마침내 기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우리도 어려운 상황에 빠졌을 때,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보통 하는 첫 번째 일은 어떤 인간적인 노력으로 그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노력이 실패하면, 우리는 기도합니다! 그래서 요나는 사흘 후에 기도했습니다. 여전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는 생명에서 쫓겨나 죽음의 땅에 갇혔습니다. 모든 희망을 잃은 후에, 다시 한 번 주님께 마음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내 간절한 기도가 당신의 거룩한 성전에 이르렀습니다"라고 말합니다(2:6,7). 그의 기도 후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그는 기도를 멈추고 주님을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감사의 소리로 당신께 제사를 드리겠습니다. 구원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구출은 오직 당신께로부터 올 수 있습니다)"(2:9). 다시 말해, 그는 "주님, 저는 온 마음을 다해 당신을 찬양하겠습니다. 당신이 원하시면 저를 구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하자마자, 주님은 물고기에게 요나를 땅으로 토해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2:10에서 다시 "그때" 라는 단어를 주목하세요. 그것은 그가 주님을 찬양하기 시작했을 때, 주님이 물고기에게 그를 토해내라고 명령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여기에는 원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시편 50:23을 공부할 때 이 원리를 보았습니다: "누구든지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자는(요나가 여기서 사용한 것과 같은 문구) 내가 그에게 나의 구원을 보여줄 길을 여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주님은 "그저 불평하는 대신 나를 찬양하기 시작하면, 내가 너를 구원할 길을 만들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여호사밧이 어떻게 그 원리를 따랐는지 보았습니다. 그는 큰 군대에 둘러싸여서도 주님을 찬양하기 시작했고,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를 그의 원수들에게서 구원하셨습니다(대하 20:22).

기도 자체는 반드시 믿음의 표현은 아니지만, 하나님께 진심으로 찬양하는 것은 항상 믿음의 표현입니다(시 106:12 참조). 당신은 믿음 없이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을 때 하나님을 찬양한다면, 당신은 믿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 나는 당신을 찬양합니다. 구원은 오직 당신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압니다"라고 말할 때, 당신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고 그분이 당신을 구원할 길을 만든 것입니다.

요나의 두 번째 사명

그러고 나서 주님의 말씀이 요나에게 두 번째로 임했습니다. 우리가 한 번 실패했을 때, 주님께서 두 번째 기회를 주신다는 것을 찬양합니다. 이것이 요나서에서 우리에게 주는 위대한 메시지 중 하나입니다. 주님을 실망시켰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또 다른 기회를 주기 위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분을 두 번째로 실망시켰습니까? 그분은 당신에게 세 번째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그분은 단지 두 번째 기회의 하나님만은 아니십니다 - 우리 대부분은 이미 오래 전에 두 번째 기회조차 날려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당신이 몇 번이나 실패했든, 또 다른 기회의 하나님이십니다! 당신이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주님은 지금이라도 당신을 회복시켜 주시고 주님을 위한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게 해 주실 수 있습니다.

요나는 이제 교훈을 얻었습니다. 그는 징계를 받았고 이제 기꺼이 니느웨로 갔습니다. 그는 사흘 동안 그 거대한 도시를 걸으며, 거리마다 니느웨가 40일 안에 무너질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놀랍게도, 니느웨 사람들은 즉시 회개했습니다. 이것은 세계 역사상 가장 크고 가장 빠른 부흥이었습니다 - 그리고 그것은 이방 국가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런 부흥은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습니다. 요나의 설교는 단 한 문장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수천 명에게 확신을 가져다 주었고 - 그들은 모두 회개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봅니까? 하나님께서 그분의 종을 성공적으로 다루시고 그 안에서 일하셨을 때, 그의 입에서 나오는 한 문장도 엄청난 힘을 발휘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완고함, 불순종, 반항, 교만을 다루는 데 성공하지 못하셨다면, 당신이 설교하는 긴 설교일지라도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을 깨뜨리는 데 성공하셨다면, 한 문장도 강력할 것입니다.

왕부터 거지까지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회개했습니다. 그들은 베옷을 입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들은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시고, 그들을 벌하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서 나를 격려하는 것 중 하나는 니느웨와 같은 사악한 도시가 회개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몇 년 후에는 도시가 너무 악해져서 파괴해야 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과거의 모습이나 미래의 모습이 아닌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대하십니다. 그분의 이름은 "나는 있었다(I was)"나 "나는 될 것이다(I will be)"가 아니라, "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더 자비로우십니다. 성경에서 사람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섰을 때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신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가룟 유다가 주님께 가서 용서를 구했더라도, 그는 용서받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대신 제사장에게 갔습니다 -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요! 어떤 제사장에게 죄를 고백해도 당신은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가룟 유다는 그것을 시도했지만 용서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당신 또한 그런 방법으로는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에 자비를 베푸셨을 때, 사람들은 요나가 흥분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12만 명이 넘는 도시 전체(4:11)가 울고 회개하는 것을 보는 전도자를 상상해 보세요 - 역사상 가장 위대한 부흥인데도 흥분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요나는 화를 냈습니다. 첫째, 그의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애국적인 이스라엘인으로서, 그는 니느웨 사람들을 미워했고 그들이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망시키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요나와 같습니까?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자비로우셨는지, 그리고 우리가 지옥에 합당할 때에도 우리를 어떻게 축복해 주셨는지 잊었습니까? 하지만 요나는 이제 선지자로서의 자신의 명예와 평판에 대해 걱정했습니다.

요나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주님은 그의 머리 위에 식물이 자라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요나는 그 식물을 보고 매우 기뻤습니다. 하지만 다음 날, 하나님께서 벌레를 만들어 그 식물을 먹게 하셨기 때문에 그 식물은 시들어 버렸습니다. 요나는 다시 매우 화가 났는데, 그 이유는 해가 그를 내리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나에게 나으니라"라고 말했습니다(4:8).

그러자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하룻밤 사이에 자라서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식물에 대해서도 불쌍히 여겼다. 내가,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12만 명이 넘고 짐승도 많은 큰 성읍 니느웨를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겠느냐?"(4:11). 하나님께서는 많은 짐승들 외에도 니느웨에 있는 12만 명 이상의 어린아이 같은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셨습니다. 여기서 니느웨의 짐승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보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선한 사람은 자기 짐승들의 복지를 염려한다"(잠 12:10 - TLB).

이 구절(요나 4:11)에서 - 구약 성경의 다른 어떤 구절보다 - 우리는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하나님의 엄청난 긍휼을 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아무도 멸망하지 않도록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요나는 어떻게 된 일인지 이 문제에서 하나님과 교제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설교자들이 설교하고 부흥을 보지만(요나가 그랬던 것처럼), 요나처럼 하나님의 긍휼하신 마음과 교제하지 않습니다. 그런 설교자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원하시는 대로 사역을 완수하지 못합니다. 당신은 설교하고 사람들을 구원할 수도 있지만, 결국 요나처럼 하나님과 전혀 교제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복음 전도 사역의 올바른 기초는 하나님의 마음과의 교제입니다. 하나님은 빛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토록 큰 자비를 베푸십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고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말합니다(딤전 2:4). 그분은 그것을 갈망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과 더 많이 교제할수록, 우리는 그분의 짐을 더 많이 나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전도자로 부르셨다면, 그분은 당신에게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한 긍휼한 마음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교사로 부르신다면, 그분은 당신에게, 눈멀고 속아 승리의 삶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신자들을 향한 긍휼한 마음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사역을 효과적으로 성취하려면 하나님의 마음과 교제하며 그분의 긍휼을 나누는 것이 필수적인 일입니다.

장 33
미가

부패한 지도자들과 하나님의 권위

미가는 이사야와 같은 시대에 살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둘 다 예언했습니다. 그는 주로 이스라엘과 유다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설교했으며,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특권을 남용하고 교회 내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방식과 똑같습니다. 많은 구약 성경의 선지자들이 탐욕스럽고 이기적이며 교만한 지도자들에게 속고 그릇된 길로 인도되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가난한 사람들을 얼마나 걱정했는지 보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사마리아와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우리가 읽은 첫 세 장에서는 사마리아(이스라엘의 수도)와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다룹니다.

미가는 주님께서 백성들에게 죄를 묻기 위해 내려오실 것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자신의 말을 들어달라고 요청했습니다(1:2).

2장에서 우리는 지도자들이 지은 죄를 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지도자들에게 말씀하실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장로이자 설교자인 우리 모두는 자신을 살피고 판단하는 것이 좋습니다.

"밤에 깨어서 악한 계략을 꾸미는 너희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너희는 새벽에 일어나 서둘러 그 계획을 실행한다. 이는 너희에게 이룰 수 있는 권세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땅을 원하면 빼앗을 방법을 찾고, 누군가의 집을 찾으면 사기로 그것을 얻을 방법을 찾는도다. 너희와 같은 사람들이 주변에 있으면 누구의 가족이나 유산도 안전하지 못하느니라"(2:1,2).

여기에는 권력을 사용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고 그들의 돈을 훔치는 종교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가난한 사람들과 과부들에게 십일조를 바치라고 촉구하고 그런 다음 이 헌금을 사용하여 자신들이 사치스럽게 사는 설교자들에게 이것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이 복음으로 생계를 유지하도록 허락하신 것은 사실입니다(고전 9:14). 하지만 설교자가 자신보다 적게 번 사람에게로부터 생계를 유지하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일입니다. 설교자가 자신보다 가난한 사람에게서 돈을 받아서 그 가난한 사람보다 더 높은 수준에서 사는 데 사용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기독교 목사와 설교자들이 정확히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작은 집에서 사는 사람에게서 돈을 받아서 그 돈으로 자신들을 위한 웅장한 집을 짓습니다. 그들은 소득이 매우 적은 사람들로부터 십일조를 받아, 돈을 준 사람들보다 몇 배나 높은 수준으로 생활합니다. 이것이 그들이 여전히 설교할 은사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서 떠나는 이유입니다.

기독교 일꾼은 결코 자신의 개인적인 필요를 위해,자신보다 적게 번 사람에게서 돈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 가난한 사람들은 주님의 일을 위해 돈을 바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당신에게 돈을 준다면, 당신은 그것을 주님의 일을 위한 헌금함에 넣고 결코 개인적인 필요를 위해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공경한다면, 그분께서 당신을 축복하시고 당신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이런 작은 일에 대해 진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을 지원한 사람들로부터 돈을 받았습니다(눅 8:1-3). 하지만 그분은 그 돈을 호사스럽게 사는 데에 절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가룟 유다의 가방에는 돈이 많이 있었고 예수님은 그것을 원하는 대로 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가난한 사람의 돈으로, 그 가난한 사람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호텔(여관)에 묵는 데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때때로 올리브 산의 나무 아래에서 잠을 잤습니다(요 7:53~8:2). 우리는 그분의 본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의 돈을 사용하는 데 충실하다면, 당신은 당신의 인생이 끝날 때까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간직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설교자로서 하나님의 돈에 충실하지 않다면, 당신은 전 세계의 다른 많은 설교자들처럼 은혜에서 떨어질 것입니다. 주님은 "내가 너희의 악을 악으로 갚을 것이다. 너희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2:3).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말을 하지 마라. 그런 재앙은 결코 우리에게 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2:6). 그러나 미가는 대답했습니다, "주께서 너희의 행동에 인내심을 보이실까? 너희는 너희를 신뢰하는 사람들의 등 뒤에서 셔츠를 훔쳐간다. 너희는 여자들을 집에서 쫓아내고 그들의 자녀들에게서 하나님이 주신 권리를 박탈한다. 너희는 이 땅을 죄로 가득 채우고 완전히 망쳤다. 만약 거짓말로 가득 찬 선지자가 너희에게, '포도주와 술의 즐거움에 대해 설교해 주겠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바로 너희가 좋아할 만한 선지자의 모습이다!"(2:7-11).

역사를 통틀어 하나님의 백성들은 항상 귀를 간지럽히고 행복하게 해주는 말을 하는 거짓 선지자를 선호해 왔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대부분은, 진실을 말하는 하나님의 참 선지자의 말을 듣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전파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종이라면, 한 가지를 기억하십시오: 당신은 결코 인기가 없을 것입니다. 돈을 벌 수 없을 것입니다. 구약 성경의 선지자들처럼 경멸을 당하고 거부당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여전히 ​​이스라엘에게, "내가 너희 중 남은 자들을 모아 너희를 하나로 모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2:12). 대부분의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할 남은 자들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것은 사실입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집단이 타락한 상태에 있지만, 지상에는 진리를 증거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의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면, 어디를 가든 그 남은 자들을 찾아야 합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바벨론 체제를 떠나고 있는 사람들을 찾으십시오. 그들은 어느 특정 교단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마을에서는 한 교회에서 발견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마을에서는, 그 첫 번째 교회의 지부에서 발견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 어디에도 "남은 자들의 교단"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 오직 지역적인 "남은 자들의 교회"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어디를 가든지, "주님, 이곳에서 주님의 사람들이 모이는 곳은 어디입니까?"라고 물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당신을 그들에게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아, 들어라 - 너희는 옳고 그름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너희는 선을 미워하고 악을 사랑하는 자들이구나; 너희는 내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뼈까지 발라낸다. 너희는 그들을 삼키고, 채찍질하고, 뼈를 부러뜨리고, 냄비에 넣을 고기처럼 잘게 썰어 버린다 - 그러고도 너희는 고난의 때에 주님께 도움을 간구한다! 너희가 정말 주께서 들으시기를 바라느냐? 주께서는 눈을 돌리실 것이다! 너희 거짓 예언자들이여! 너희는 그의 백성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자들이여! 너희는 너희에게 음식을 주는 자들에게 "평화"를 외치고, 돈을 주지 않는 자들에게 위협하는 자들이여! 이것이 너희에게 전하는 하나님의 메시지이다: '밤이 너희를 둘러싸고 너희의 모든 환상을 끊을 것이요; 어둠이 너희를 덮을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리라. 해가 지고, 너희의 낮이 끝날 것이다. 마침내 너희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가리고, 너희의 말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었음을 인정할 것이다.'"(3:1-7 - TLB).

역사는 반복됩니다. 2600년 전, 설교자들은 큰 선물을 주는 사람들을 사랑했고, 그들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예언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가난해서 설교자들을 좋은 식사에 초대할 수 없다면, 설교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협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거짓 선지자입니다.

그들은 오늘날 많은 속이는 자들이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환상을 보았다고 주장하며, 거짓 예언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메시지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밤이 너희를 둘러싸고 너희의 모든 환상을 끊을 것이요; 어둠이 너희를 덮을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리라. 해가 지고, 너희의 낮이 끝날 것이다. 마침내 너희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가리고, 너희의 말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었음을 인정할 것이다"(3:6,7).

미가는 성령으로 충만했고 그런 거짓 선지자들을 두려움 없이 꾸짖었습니다: "나는 권능과 주의 영으로 충만하여, 이스라엘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형벌을 두려움 없이 전한다"(3:8).

자랑하는 것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미가는 그(미가 자신)와 당시의 다른 설교자들을 대조하고 있었습니다. 여러 세기 후에, 사도 바울도 그와 다른 사람들을 대조했습니다. 바울은 "나는 너희에게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왜냐? 그것은 자신들이 우리와 똑같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자랑하는 자들의 발 밑에서 토대를 잘라내기 위해서이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보내신 적이 없으시니라; 그들은 너희를 속여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생각하게 한 '거짓된 자들'이로다"라고 말했습니다(고후 11:7-13). 바울은 당시의 거짓 사도들처럼 그리고 오늘날 대부분의 설교자들처럼 돈을 위해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미가는 돈을 위해 설교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말을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아, 내 말을 들어라. 정의를 미워하고 불의를 사랑하며 예루살렘을 살인과 온갖 죄악으로 가득 채우는 자들아 - 뇌물을 받는 지도자들아, 돈을 받기 전에는 설교하지 않고 예언하지 않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아. (그런데도 너희는 주님께 아첨하며 "모든 것이 잘되고 있다 - 주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다. 우리에게 해가 올 수 없다."라고 말한다.) 예루살렘이 밭처럼 갈아지고 돌무더기가 되는 것은 너희 때문이다"(3:9-12).

구약 성경의 선지자들은 그 당시 설교자들의 부패에 대해 많이 말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을 파괴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돈을 받아야만 설교했습니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주님을 의지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종류의 속임수가 행해지고 있습니다.

주의 종은 사람들이 주는 자발적인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과 "하나님을 섬기는" 대가로 봉급을 받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봉급과 선물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봉급은 기대할 수 있지만 선물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참된 종은 돈을 받든 받지 않든, 음식을 받든 받지 않든 계속해서 그분을 섬길 것입니다. 그는 선물에 감사하지만, 선물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그는 돈을 위해 주님을 섬기지 않습니다. 당신이 이 원칙을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법으로든 당신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고, 많은 설교자들이 빠진 함정으로부터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왕국과 왕의 도래

4장의 첫 일곱 구절에서, 미가는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미가는 여기서 처음으로 미래에 대해 예언합니다.

하지만 그 전에 미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갈 것을 예언합니다: "오 시온의 백성아, 너희는 이 성을 떠나 들판에서 살아야 한다; 너희는 바벨론으로 멀리 유배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거기서 너희를 구출하여 너희 원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하리라"(4:10).

미가는 이 일이 실제로 일어나기 100년 전에 예언했습니다 - 당시 작고 알려지지 않은 나라였던 바벨론이 초강대국이 되어 유다를 포로로 잡아갈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5장 1절은 이중 예언입니다 -

1. 먼저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갈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들은 막대기로 이스라엘의 재판관(통치자)의 뺨을 칠 것이다."

2. 둘째, 이스라엘의 참 왕, 곧 예수에 대한 것입니다. 그는 뺨을 맞을 것입니다. 이 통치자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입니다: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의 작은 마을에 불과하지만, 너는 영원한 시대부터 살아 계신 나의 왕의 탄생지가 될 것이다!"(5:2). 시드기야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후, 500년 이상 유다에는 왕이 없었습니다. 다음 왕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미가서의 이 구절은 동방박사들이 헤롯에게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난 이가 어디 계시냐?"(마 2:2)라고 물었을 때 제사장들이 인용한 것입니다.

그런 다음 미가는 남은 자에 대해 말합니다. 선지자들은 항상 심판을 예언한 후, 남은 자에 대한 주제로 돌아갑니다. "야곱의 남은 자들은 많은 민족들 가운데서 여호와로부터 내리는 이슬과 같고, 소나기와 같을 것이요... 그들은 나라들 가운데서, 숲의 짐승들 사이에서 사자와 같을 것이요... 너의 손을 들어 네 대적들을 치고 네 모든 원수들을 끊으리로다"(5:7-9). 이슬과 소나기처럼 다른 사람들을 상쾌하게 하고, 사자처럼 품위 있는 행동을 하며, 사탄과 육체적 정욕(실제 적들)을 이기는 것이 오늘날 남은자 교회가 되어야 할 모습입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의 논쟁

6장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논쟁을 봅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시는 법정의 한 장면과 같습니다, "일어나서 나를 대적하여 변론하라. 산과 언덕이 너희 원망의 증인이 되게 하라. 나도 너희를 대적하여 변론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너희가 나를 떠나느냐?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종살이에서 구원하였고,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보내어 너희를 인도하게 하였노라. 발람이 저주하려 하였을 때, 내가 오히려 너희를 축복하였노라. 그런데 네가 나에게 원망하는 것이 무엇이기에, 나에게서 돌아서느냐?"(6:1-5).

그리고 미가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서 더 많은 제물을 원하신다고 생각합니까? 아니요. 그분은 그들의 십일조나 제물을 원하지 않습니다. 맏아들의 제물(가장 귀중한 지상의 제물)조차도 그들의 죄 중 하나라도 속죄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미가서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절 중 하나를 읽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항상 사람에게 요구하신 것이 무엇인지 말해줍니다 - 우리 모두가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구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은, 정의를 행하고, 인자(kindness)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뿐이니라"(6:8).

만약 당신이 주님께서 당신을 위해 행하신 모든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한다면, 그분이 당신에게 원하시는 것은 당신의 돈이나 섬김이 아닌, 무엇보다도 다음 세 가지입니다:

1. 정의를 행하십시오 . 모든 편파에서 벗어나 모든 상황에서 옳은 일을 행하고, 다른 사람에게 결코 잘못을 저지르지 마십시오.

2. 자비를 사랑하십시오 .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고 그들에게 선을 행하는 것을 기뻐하십시오. 모든 사람을 자비롭게 대하십시오. 실수를 하는 사람에게 엄격하지 마십시오. 당신도 실수를 했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니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모든 시간에, 할 수 있는 모든 선을 행하세요. 그들이 많은 면에서 당신이 가진 모든 빛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고 그들이 당신과 다르게 행동을 하더라도 판단하지 않고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은 마지막 날에 하나님으로부터 자비롭지 않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약 2:13).

3.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십시오 . 이것이 모든 것의 비결입니다. 겸손한 태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당신에게 가져다 주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삶을 살 수 있게 해줄 것입니다. 겸손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그리스도 없이는 당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하나님의 눈에 매우 귀중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당신 자신의 눈에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자신을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종교가 있습니다 - 하나는 종교적 의식에 중점을 두는 것이고(6:6,7),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 중점을 두는 것입니다(6:8). 왜냐하면 앞에서 언급한 세 가지는 결국 이것으로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거짓 종교와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전자를 선호합니다. 참된 제자는 후자를 선택합니다.

외적인 의식은 종종,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고, 이웃들과 사랑과 자비로 동행하는 것을, 대신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이 세 가지 문제에 집중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가르쳤다면, 이스라엘은 결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미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속이는 사업가들을 향해 이렇게 예언합니다: "너희는 속임수로 부자가 되는 일에 끝이 없단 말이냐? 너희 집은 불의하게 얻은 보물과 거짓 저울로 가득하다. 너희는 강탈과 폭력으로 부자가 되었다; 거짓말에 너무 익숙해서 너희 혀가 진실을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너희는 먹어도 결코 배부르지 못할 것이다. 너희가 아무리 돈을 저축하려고 애쓰고 애쓰더라도 결국에는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고, 너희가 저축하는 얼마 안 되는 것도 너희를 정복하는 자들에게 주겠다"(미 6:10-14).

만약 여러분이 부자라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 알고 싶어하십니다. 여러분은 돈을 벌기 위해 다른 사람을 속였습니까? 정부에 내야 할 세금을 속였습니까? 돈을 벌기 위해 불의한 일을 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들이 돈을 버는 방식을 면밀히 지켜보십니다. 부정직하게 번 부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가져올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확기가 끝났을 때 포도와 무화과를 찾는 것만큼, 정직한 사람을 찾기 어렵다. 경건한 사람은 땅에서 멸망했고, 정직한 사람은 없다. 그들은 심지어 자기 형제들을 대적한다. 악에 관해서는, 두 손이 다 잘 행한다: 재판관 은 뇌물을 요구하고 부자는 그에게 뇌물을 주고 누구를 파멸시킬지 말한다. 그래서 둘(재판관&부자) 사이에 정의가 뒤틀리고, 둘은 서로 엮여 있다"(7:1-3).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형벌의 때가 가까웠다고 경고합니다(7:4).

오늘날도 비슷한 상황에 살고 있습니다. 경건한 사람은 어디에서도 찾기 힘듭니다. 사회에는 불의와 뇌물이 많고 가난한 사람들이 착취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기 전에 오랫동안 기다리셨습니다. 오늘날 이 모든 일을 하는 자들은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언젠가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정의를 왜곡하기 위해 받은 모든 뇌물과, 다른 사람들(특히 무력한 가난한 사람들)에게 해를 끼친 모든 잘못에 대해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아무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자기 자신에 대해 설명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미가서 7장 6절의 말씀을 인용하시고 다음과 같이 확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땅 위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말라;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요, 칼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을 그 아버지와, 딸을 그 어머니와, 며느리를 그 시어머니와 대적하게 하려 함이요; 사람의 원수는 그 집안 식구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 10:34-37).

미가 7:6을 읽어보면, 제자도를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 구절을 사용하신 것을 보면 이 선지자들의 말에는 여러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예언이 이중으로 성취됩니다. 그리고 여기 그 중 하나가 있습니다.

미가는 우리가 사탄과의 영적 싸움에서 사용할 수 있는 놀라운 말을 했습니다:

"나는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기를 기다립니다. 그분께서 나에게 귀 기울이실 것입니다. 나의 원수여, 나를 두고 기뻐하지 마라. 내가 쓰러져도 다시 일어날 것이다! 내가 어둠 속에 앉아 있을 때, 주께서 친히 나의 빛이 되실 것입니다. 주께서 나를 벌하시는 동안 나는 참을 것입니다.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주께서 나를 내 원수들에게서 보호하시고 그들이 내게 행한 모든 악을 벌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하시어, 내가 그분의 선하심을 볼 것입니다. 그러면 내 원수가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는 것을 보고, '너희의 그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조롱한 것을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이제 나는 내 눈으로 그가 거리의 진흙처럼 짓밟히는 것을 봅니다"(7:7-10).

이것은 우리가 죄에 빠졌거나 어떤 면에서 주님을 실망시켰을 때, 또는 주님께 징계를 받을 때 마귀에게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사탄이 "너는 타락했다. 이제 너에게 희망은 없다"라고 말하며 당신을 낙담시키지 않도록 하십시오. 이 성경 구절을 암기하고 필요할 때마다 사탄에게 인용하십시오.

미가는 하나님의 놀라운 자비를 찬양하며 예언을 마무리합니다: "당신과 비교할 수 있는 신이 어디 있겠습니까? - 우리의 죄를 깨끗이 지워버리시고, 정결하게 된 주님의 소중한 백성들의 지난 죄를 못 본 척, 못 들은 척해 주시는 분입니다. 당신은 분노를 품지 않으시고 오래 분노하지 않으십니다. 자비가 당신의 특기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이고, 자비가 우리에게 오고 있습니다. 당신은 우리의 잘못을 없애주실 것입니다. 당신은 우리의 죄를 바다 밑바닥에 가라앉히실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실 것입니다"(미 7:18-20 - 의역).

이것은 주님을 실망시켰다고 느끼는 모든 사람을 격려하는 또 다른 성경 구절입니다.

선지자들은 죄에 대한 심판과 형벌을 전파한 후 항상 하나님의 백성에게 격려와 희망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우리 모두에게 본보기가 됩니다. 우리가 강력한 심판이나 책망의 말씀을 전해야 할 때, 어떻게 우리의 메시지를 마무리해야 할까요? 항상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 편이라는 격려의 말로 마무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마귀에 대항하여 당신 편에 서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당신이 아무리 죄를 지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마귀 편에 서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이 회개하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렇지만 그분은 항상 당신 곁에 서 계실 것입니다. 당신이 그분에게로 돌아서는 순간, 그분은 달려가 당신을 도우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당신은 수술실에서 환자의 암을 제거하려는 외과의와 같습니다. 당신은 그 사람의 몸을 절개해서 암을 드러내 놓습니다. 그 다음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암을 제거하고, 봉합하고, 진통제를 주고, 환자가 행복하고 기뻐하는 모습으로 집으로 보내야 합니다!

하지만 많은 설교자들은 그저 환자의 몸을 열고 암을 드러내 놓은 다음, 그 사람을 배가 찢어진 채로 집으로 돌려보냅니다 - 낙담하고 희망이 없는 채로요!

절대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일을 완수하십시오. 사람들이 유죄 판결을 받고 자신의 죄로 인해 울었다 하더라도, 그들이 마음에 희망을 품고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가게 하십시오! 당신의 설교는 항상 구약성경의 선지자들이 희망의 말씀으로 마무리하는 것과 같게 하십시오.

하나님은 항상 마귀에 맞서 당신 편이십니다.

장 34
나훔

하나님의 분노와 복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소(minor)" 선지서들을 읽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 안에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것이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았습니다. 성경의 모든 부분이 동등한 가치를 지닌 것은 아닙니다. 신약 성경은 확실히 구약 성경보다 훨씬 더 중요하지만 - 모든 구약 성경책에는 가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이 선지자들은 강조를 위해 특정한 내용을 반복했습니다. 성경에서 어떤 주제가 반복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주제를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열 가지 다른 주제에 대해 말씀하실 수 있지만, 그 중 두세 가지를 반복하실 수 있습니다 - 그 두세 가지가 특별히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매번 새로운 메시지를 전한다는 그들의 평판을 잃을까 봐 자신의 메시지를 반복하기를 꺼립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설교자들이 결코 선지자가 될 수 없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구약 성경의 선지자들은 자신의 평판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하라고 하신 모든 것을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정확히 알고 계시며, 사람들이 20번 무언가를 들어야 한다면, 선지자는 그것을 20번 반복해서 전할 것입니다.

나훔은 요나보다 100년 뒤에 살았습니다. 그는 앗수르가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였을 때 말했습니다. 그 당시 선지자가 하나님께서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를 멸망시키실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오늘날 누군가가 미국이 파괴되어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전락할 것이라고 선포하는 것만큼 터무니없게 들렸을 것입니다! 아무도 그것을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아무도 나훔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역사를 돌이켜보면, 선지자들이 예언한 것이 정확히 일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앗수르, 애굽, 바벨론, 두로와 같은 거대한 세계 제국에 관한 그들의 모든 말은 정확히 성취되었습니다. 앗수르와 바벨론 제국은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은 두로가 폐허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애굽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애굽은 오늘날에도 존재합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무언가를 말씀하시면, 정확히 그렇게 일어납니다.

구약성경에서 읽은 이 말씀들은, 신약성경에서 주어진 경고도 기록된 대로 정확하게 성취될 것임을 확신시켜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젠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에 대해 그분께 설명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롬 14:12). 그리고 그날에, 모든 사람은 자신이 뿌린 대로 정확히 거둘 것입니다(갈 6:7). 예수님은 "사람들이 부주의하게 하는 모든 말은 심판의 날에 그에 대한 설명을 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2:36). 그러나 내가 아는 신자들의 99%는 성경에 있는 이러한 경고를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모두 자신의 삶과 말에 매우 부주의하기 때문입니다. 심판이 즉시 오지 않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과 말에 부주의합니다. 당신은 몰래 포르노를 보고, 무례한 말을 하고, 거짓말을 하고, 다른 사람을 비방한 다음, "나한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면서 계속해서 죄를 짓고 있을 수 있습니다. 앗수르도 정확히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래. 나훔은 우리에 대해 이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심판은 조금 후에 실제로 왔습니다. 심판에 대한 주님의 경고도 언젠가 그분이 말씀하신 대로 정확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보는 또 다른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앞서 요나를 니느웨로 보내셨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나라가 악해지고 100년 후에 멸망될 것을 알고 계셨는데도 왜 요나를 니느웨로 보내셨는지 물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시대에 니느웨를 그 당시 상황에 따라 다루셨습니다. 요나의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그 도시에 회개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요나를 그곳으로 보내신 이유였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그곳 사람들에게 특별한 목적이 있지 않는 한, 어디에도 그분의 종들을 보내지 않으십니다. 만약 당신이 스스로 어딘가에 가는 거라면, 당신은 스스로 메시지를 준비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주님을 기다렸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어딘가로 인도하셨다면, 니느웨와 같이 어려운 곳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당신을 그곳으로 보내신 데에는 목적이 있었음을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요나는 목적을 가지고 보내졌습니다. 그 세대에 니느웨에는 회개하고 죄에서 돌아선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훔을 니느웨에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의 새로운 세대가 회개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요나와 나훔의 예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이 가기를 원하지 않는 곳에 가서 당신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위해 유용한 일을 이룰 수 있는 곳으로만 ​​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살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 말씀해 주시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 일꾼들처럼 여기저기 설교하며 돌아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기다리는 데 시간을 들였습니다.

니느웨를 멸망시키려는 하나님의 결단

나훔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분노에 대한 메시지였습니다. 1장 2절과 6절에서 우리는 일곱 가지 단어를 봅니다 - 질투, 보복, 분노, 복수심, 분개, 화, 불타오르는 것, 격노. 이 단어들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강렬한 분노와 타오르는 격노를 표현할 뿐만 아니라, 죄를 계속 범하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강렬한 분노와 타오르는 격노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노하기를 더디하시지만, 그분이 노하시면 막을 수 없습니다"(1:3).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고 매우 인내하십니다. 그러나 결국 그분은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분노와 심판은 주로 다른 사람을 착취하는 사람들을 향해 이루어집니다. 그분은 이 땅에서 속임을 당한 모든 사람에게 정의를 가져올 것입니다.

아담의 죄와 가인의 죄는 달랐습니다. 아담은 자신을 다치게 했지만,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저주를 받지 않았습니다. 땅만 저주를 받았습니다(창 3:17). 하지만 가인의 죄는 다른 사람, 즉 아벨을 해쳤습니다. 그래서 그 자신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습니다(창 4:11). 어떤 식으로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행동을 하는 것은 심각한 죄입니다. 당신이 회개하고 당신의 죄를 고백하지 않는다면, 가인에게 그랬던 것처럼 당신에게도 하나님의 저주가 찾아올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누군가를 비방하여 그의 명예를 훼손했을 수도 있고; 당신이 어떤 여자와 친해져서 그녀의 감정을 자극한 다음 그녀를 포기했을 수도 있습니다(그녀의 몸을 만지지 않았지만, 여전히 그녀에게 상처를 입혔습니다). 하나님은 질투하고, 분노하고, 화가 나고, 분개하시며, 그분의 타오르는 분노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모든 사람에게 복수하고 보복할 것입니다. 이 심판은 아직 당신에게 오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여전히 ​​당신이 회개하기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행하는 가장 사소한 일도 주의하시며, 언젠가는 그 모든 일에 대해 우리를 벌하실 것입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진실을 알지 못한 채 다른 사람들을 향해 부주의한 말을 했기 때문에, 즉 검증되지 않은 이야기를 비난하고 퍼뜨렸기 때문에, 삶에서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잃었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은 그런 설교자들에게서 기름부음을 거두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계속해서 부주의한 말을 한다면, 하나님은 언젠가 그들의 구원도 빼앗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앗수르에게 왜 그렇게 화가 나셨을까요? 그들이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거나 해로운 약물을 복용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약물 복용이 끔찍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험담만큼 끔찍하지 않습니다 - 왜냐하면 약물을 복용하면 자신만 다치지만, 험담을 하면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구약성경의 선지자들이 한 일을 하고 싶습니다: 당신에게 하나님께서 심각한 죄로 간주하는 것이 무엇인지 올바르게 이해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앗수르에 대한 하나님의 타오르는 분노는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해쳤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언젠가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살았던 모든 인간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가 말이나 행동으로 누군가를 해쳤다면 말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믿기 어려워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들이 "지옥"이라는 실제 장소를 믿기 어려워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침내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것이고 지옥에 가는 사람들조차도 마침내 천국에 갈 것'이라고 상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탄 자신도 언젠가 회심할 것이라고 믿는 극단에까지 이릅니다! 하지만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당신은 분노로 가득 찬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면, 당신은 사랑으로 가득 찬 하나님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분노와 징계를 요구합니다 - 그 이유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당신이 똑같이 사랑하는 두 자녀가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어느 날 당신은 큰 아들이 동생을 돌로 때려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불쌍한 어린 소년은 자신보다 강한 사람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아버지로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냥 서서 지켜보시겠습니까? 당신은 두 아들을 모두 사랑합니다. 그리고 사랑하기 때문에, 화가 날 것입니다. 당신이 당신의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무시하고 화를 내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은 악에 대한 분노를 가져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정의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더 약한 동생을 다치게 한 큰 형을 벌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앗수르에게 행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분이 언젠가 다른 사람을 어떤 식으로든 다치게 한 모든 사람에게 행하실 일입니다. 우리는 심판의 날에 이것을 분명히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나훔서에 대한 연구가, 우리가 앞으로는 어떤 식으로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말과 행동을 하지 않도록 매우 조심하게 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종이 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의 말에 조심하십시오 - 특히 당신이 싫어하거나 동의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 하는 말에 조심하십시오.

1:7-10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친구와 하나님의 원수에 대한 그분의 태도를 봅니다. 먼저 우리는 회개로 그분의 말씀에 응답하는 사람들에 대한 그분의 태도를 봅니다. 그분은 그들에게 선하십니다. 문제가 올 때 그분은 강력한 피난처가 되십니다. 당신이 겸손하게 선지자들의 이 강력한 경고에 응답한다면 하나님은 당신에게 매우 선하실 것이고, 문제가 올 때 그분은 당신에게 피난처와 같으셔서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처럼 당신을 보호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그분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을 아십니다. 그분은 한 사람도 잊지 않으십니다. 당신은 약하고 가난하고 절망적일 수 있지만, 당신이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 중 한 명이라면 하나님은 당신을 개인적으로 알고 계십니다.

그 다음 몇 구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수들을 대하는 태도를 봅니다. "그분은 홍수처럼 그의 원수들을 쓸어버리신다"(1:8). 홍수가 오면, 순식간에 모든 사람을 쓸어버립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수들에게 심판이 임하는 방식입니다. "그분은 어둠 속까지 그분의 원수들을 추격한다." 선지자는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멸하기 위해 그들을 추격하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왜 너희가 여호와를 대적하여 계략을 꾸미느냐? 그분은 한 번의 타격으로 너희를 멸하실 것이요, 두 번 너희를 치실 필요가 없으리라. 하나님께서 그분의 원수들을 치시면 그들은 술 취한 자같이 비틀거리고 밭의 마른 짚같이 타버릴 것이다. 감히 여호와를 대적하여 악을 꾀하는 이 왕은 누구이냐?"(1:9,10).

하나님께서 앗수르에게 그토록 노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첫째는 하나님에 대한 교만함이었고, 둘째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잔인함이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고 착취했습니다. 이것이 선지자들이 항상 강조했던 두 가지입니다 - 하나님에 대한 태도와 다른 인간에 대한 태도입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이 예언서를 충분히 읽지 않기 때문에 그들 역시 하나님에 대해 교만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냉정합니다. 많은 신자들은 이 구약성경의 예언서들이 지루하다고 말합니다. 바로 그것이 마귀가 당신이 그렇게 말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교만과 완고한 마음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게 됩니다.

나는 당신이 이 예언서들을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어떤 부분은 읽기 힘들다고 생각하더라도요. 이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하나님께서 이런 문제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반복하면,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신다는 그 메시지가 마음에 와 닿고 마침내 당신의 마음에 기록될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그 어떤 죄라도 짓는 것을 두려워하고 떨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와 분노는 다릅니다. 여기서 주목하세요 - 그분은 이스라엘에게 "오 나의 백성아, 내가 너희를 충분히 벌하였노라! 이제 내가 너희의 사슬을 끊고 너희를 종의 멍에에서 풀어 주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1:12,13). 하지만 앗수르 왕에게는 "내가 너를 땅에 묻어 주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1:14).

그분은 앗수르인들에게 "너희는 심판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1:14). 그 다음에 주님은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좋은 소식을 전하고 평화를 선포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악한 자가 다시는 너희를 지나가지 못하리니 그는 완전히 끊어졌느니라"(1:15). 이것은 마귀가 멸망되었다는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그림입니다. 이 구절은 이사야 52:7과 비슷합니다. "산 위에는 좋은 소식을 전하고 평화와 구원을 선포하며 시온에게 '너희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라고 말하는 자의 발이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거기서 강조점은 하나님의 통치에 있었습니다. 여기 나훔서에서는 하나님의 원수의 패배에 대한 것입니다.

앗수르는 사탄과 그의 왕국의 그림이며, 우리가 사람들에게 선포해야 할 좋은 소식은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사탄은 패배했다. 그의 왕국은 멸망되었다."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람들의 죄가 용서되었다고만 선포합니다. 그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복음의 일부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도록 죽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 더 이상 죄의 종이 되지 않도록 죽으셨습니다. 그분은 율법의 저주가 우리에게 결코 미치지 않도록 죽으셨습니다. 그분은 또한 사탄이 패배하도록 죽으셨습니다. 여기 나훔서에서 그 메시지는 "너희 원수가 패배하였고 다시는 너희를 지배하지 못할 것이다"입니다. 당신은 사탄과 죄가 결코 하나님의 백성을 지배할 수 없다는 이 좋은 소식을 전파합니까?

나훔이 예언한 지 몇 년 후, 앗수르 사람들(수도는 니느웨)에게는 더 이상 희망이 없었습니다. 이 세대는 요나 시대의 세대와 달랐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충분히 기다리셨고 문은 이제 닫혔습니다. 앗수르인들은 계속해서 죄를 지었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나라와 사람들 앞에 그으신 붉은 선을 넘었습니다. 성경은 죽음에 이르는 죄가 있으며 그 붉은 선을 넘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고 말합니다(요일 5:16). 사람은 계속해서 죄를 지으며 하나님의 부르심을 계속 거부하고 마음을 완악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그는 붉은 선을 넘으면 더 이상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면 그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잠 29:1 참조). 그때 그는 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지으며 그 이후로는 더 이상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특히 신자가 계속해서 죄를 짓고 하나님의 간청을 계속 거부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앗수르는 이스라엘 땅을 파괴하고 그 백성들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해쳤습니다(2:2). 그러나 주님은 이스라엘의 명예와 권세를 다시 회복하실 것입니다. 나훔은 앗수르가 어떻게 파괴되고 모든 보물을 약탈당할 것인지 설명합니다(2:9). 그 예언은 몇 년 후 바벨론이 와서 앗수르를 파괴하고 그들의 부를 빼앗았을 때 성취되었습니다. 투지와 담대함으로 가득 찬 니느웨는 한때 강력한 사자와 같았습니다(2:11,12). 그들은 새끼를 먹이기 위해 적을 짓밟았습니다. 그들은 포로와 약탈로 도시와 집을 채웠습니다. 그것이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착취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희생시켜 자신을 부유하게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설교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희생시켜 자신을 부유하게 만듭니다. 이 설교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니느웨에 대한 그분의 심판과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람들이 돈을 벌고 싶다면, 기독교 사역이 아니라 사업을 해야 합니다. 그곳은 돈을 버는 곳이 아닙니다. 사실, 가난한 신자들을 희생하여 자신을 부자로 만든 설교자들의 심판은 니느웨의 심판보다 더 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설교자들은 니느웨보다 더 많은 빛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약탈로 너희 집을 가득 채웠다"(2:12). 설교자여,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취한 것으로 당신의 집이 가득 차 있습니까? 그렇다면 주님은 당신에게 "나는 네 원수이며, 너는 다시는 이 가난한 사람들을 약탈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너를 심판할 것이기 때문이다"(2:13)라고 말씀하십니다.

니느웨가 멸망한 이유

하나님께서 스스로 복수할 수 없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복수하십니다. 그분의 심판은 니느웨에 임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 아름다움으로 열방을 유혹하고 거짓 신들을 경배하도록 가르쳤기"(3:4) 때문입니다. 니느웨는 열방을 유혹한 다음 그들을 멸망시켰습니다. 오늘날 서양 땅의 매력처럼, 그녀의 세상적 매력에는 매우 강력한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경고하는 것입니다: "경건하지 않은 세상적인 것에 끌리지 않도록 조심하라. 하나님께서 그것을 멸망시키실 때, 너희도 멸망될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매력적인 것들이 많이 있으며, 마귀는 그것들로 당신을 유혹하려 할 것입니다. 그는 심지어 예수님에게 "만약 네가 절하고 나를 경배한다면, 나는 네게 이 세상의 모든 영광을 줄 것이다"라고 말하며 유혹하려고 했습니다. 이 땅의 매력적인 것들은 어떤 지역에서든 사탄에게 절하는 모든 자들에게 여전히 ​​제공되고 있습니다. 나는 많은 신자들이 이렇게 하다가 그에 따른 대가를 치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이 경고에 유의하십시오.

주께서 니느웨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나일 강가에 위치하고, 물로 둘러싸여 있던 노-아몬(도시)보다 더 나은 존재이냐? 에티오피아는 그녀의 힘이었고, 이집트도 그러했다; 붓과 루빔이 그녀를 도우는 자들 가운데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포로로 끌려갔다"(3:8-10). 노-아몬은 사방이 물로 둘러싸여 있고, 동맹국에 의해 보호받고 있었기 때문에 앗수르가 정복할 수 없는 이집트의 어려운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마침내 앗수르는 노-아몬도 정복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주께서 앗수르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너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원래 다른 사람에게 주었지만 그의 타락으로 인해 빼앗긴 사역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습니다 - 마치 다윗이 사울 왕을 대신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때 교만하게 "나는 그보다 낫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의 사역을 주셨다"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그 다른 사람에게 일어난 일이 당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한 후에, 도리어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될까 두렵다"라고 말했습니다(고전 9:27). 바울은 그 두려움 속에서 겸손하게 살았기 때문에 결코 실격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니느웨에게 그녀가 벌을 받을 것이고 그녀의 군대는 여자들처럼 약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그들의 상처는 치유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곳의 사람들은 그녀에게 내린 하나님의 심판에 동의할 것입니다(3:11-19).

어느 날 모든 사람이 최후의 심판을 위해 하나님 앞에 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사람들을 지옥에서 끌어내어 다시 그들의 육체로 부활시켜 최후의 심판을 위해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실까요? (계 20:11,12). 이유가 있습니다. 온 세상이 이 사람들이 왜 지옥에 보내지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날, 온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에 동의할 것입니다. 지옥에 간 사람이 그곳에 가는 것이 마땅한지에 대해 더 이상 그 어느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누구누구는 좋은 사람이기 때문에 지옥에 갈 리가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은밀한 삶과 생각을 드러내시는 그날에 모든 의심은 사라지고 온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에 동의할 것입니다. 나훔은 니느웨에 대한 심판 예언을 통해 우리에게 그것을 상기시켜줍니다!

장 35
하박국

믿음의 갈등과 승리

나훔이 하나님의 분노와 복수에 대해 말했다면, 하박국은 믿음의 갈등과 믿음의 승리에 대해 말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질문이 있었지만 의심에서 확신으로 나아간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의심으로 시작합니다. "주님, 언제까지 도와달라고 부르짖어야 당신께서 들으시겠습니까? 헛되이 당신께 부르짖어도, 대답이 없습니다. 부르짖어도, 아무도 와서 구원해주지 않습니다"(1:2). 하지만 그는 확신으로 끝맺습니다: "나는 여호와를 기뻐할 것입니다. 주 하나님은 나의 힘이시니, 그분은 나를 산 위로 안전하게 인도하실 것입니다"(3:18,19).

하박국은 하나님께 두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에게 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조차도 의심과 질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질문하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자라면서 부모에게 아무 질문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나쁜 신호입니다. 좋은 아버지는 항상 자녀들에게 질문하도록 격려할 것입니다. 어린 자녀가 질문을 한다고 해서 화를 내는 아버지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당신이 질문을 한다고 해서 화를 내시지 않습니다. 질문이 있을 때는 당신과 같은 수준의 성숙도를 가진 사람에게 가지 마십시오. 그들은 당신을 혼란스럽게 할 뿐입니다 - 그리고 당신의 질문은 그들도 혼란스럽게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그들에게 질문을 하기 전까지는 그들은 의심을 품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당신은 그들의 마음에 의심을 심어주었습니다! 대신 하나님께 가십시오.

첫 번째 질문

하박국이 한 첫 번째 질문은 우리 모두가 가진 질문이었습니다: 왜 악한 사람들이 번영하는가? 이것은 아삽이 가진 질문이었습니다(시 73편). 예레미야는 하박국과 같은 시대에 살았고 그도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네가 사람과 달릴 수 없다면 어떻게 말과 달릴 수 있겠느냐?"(렘 12:5)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즉, "이렇게 간단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면, 어떻게 인생의 큰 문제를 다룰 수 있겠느냐?"라는 뜻입니다. 아삽은 하나님의 얼굴 앞으로 가서 답을 얻었습니다(시 73:17). 예레미야도 하나님의 얼굴 앞으로 가서 답을 얻었습니다. 하박국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얼굴 앞으로 가서 답을 얻었습니다. 질문이 있을 때, 당신은 분명히 경건한 형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박국은 하나님께 갔습니다. 당시 그의 주변에 경건한 형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동시대에 예언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마도 하박국 근처에 살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박국의 부르짖음은 "오 여호와여, 내가 언제까지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까? 당신은 듣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 이 불경건한 자들이 나에게 하는 일을 보십시오. 그리고 당신은 나를 구원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으십니다."(1:2)였습니다. 당신은 그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2000년 동안 많은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감정을 느꼈습니다. "여호와여, 이 불경건한 자들이 번영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당신은 그들이 당신의 백성을 괴롭히도록 허락십니까? 내가 어디를 보든 비참함과 파괴와 폭력이 있고, 나는 다투고 싸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1:3). 하박국은 유다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율법은 마비되어 쓸모가 없고, 법정에는 정의가 베풀어지지 않습니다. 악한 자들이 의로운 자보다 훨씬 많고, 정의는 뇌물과 속임수로 왜곡됩니다"(1:4).

이 글은 2600년 전에 쓰여졌지만, 오늘날에도 매우 관련이 있습니다! 당신이 주님을 위해 증언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말씀이 사실임을 세계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법이 마비되었고 당신의 나라 법정에서 정의를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답

주님은 하박국의 질문에 직접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도 종종 질문에 직접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우리의 지혜보다 훨씬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박국에게 주신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나라들을 보고 놀랄지어다. 내가 너희 시대에 어떤 일을 행할 것인데, 누가 그것을 너희에게 말하더라도 너희는 믿지 못할 것이다. 이는 유다에게는 전혀 일어난 적이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1:5).

이스라엘은 포로가 되었지만, 유다는 그런 일을 경험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모두 이집트에서 노예가 된 것은 8세기 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먼 기억이 되었습니다. 이제 주님은 그들이 믿지 못할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그분이 행하시려는 것은 강력한 구원의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마치 하나님께서 행하실 위대한 기적에 대한 약속인 것처럼 잘못 인용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실제로 말씀하신 것은, 그분이 악한 나라를 일으켜서 그분의 백성을 노예로 삼으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행하실 것이라고 믿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는 바벨론을 일으켜 세상의 새로운 초강대국이 되게 할 것이다. 그들은 우연히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세상을 통제하고 있으며, 그들을 일으키고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도에서 국가 선거가 있을 때마다, 우리는 항상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우리는 투표를 통해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치기에는 신자의 수가 너무 적다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기도함으로써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일으키시고, 또 어떤 사람을 낮추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것입니다, "주님, 우리는 인도와 우리 땅의 신자들과 복음 전파에 무엇이 좋은지 알지 못합니다. 주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주님께서 주권적으로 허락하신 자들이 권세를 잡게 해주시기를 원합니다." 때때로 우리에게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좋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중 얼마나 많은 사람이 바벨론 사람들이 유다를 다스리도록 선택했겠습니까?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는 너희가 믿지 못할 일을 할 것이다. 너희의 방식은 나의 방식과 같지 않다."라고 말씀하셔야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바벨론과 같은 나라를 초강대국으로 만드신다는 것을 믿을 수 없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은 하늘에 앉아 항상 우리를 행복하게 할 선물을 주는 "할아버지"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완전히 잘못된 개념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비그리스도인을 사용하여 그분의 자녀들을 징계하실 것이라고 믿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선거가 치러지는 어떤 나라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싸우고 서로를 비난하고 각 교파가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하나님은 어떤 종류의 정당이 선거에서 이기도록 허락하시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주님, 우리에게 복음을 전파할 자유를 주고 미국에서 자유롭게 돈을 받을 수 있는 정부를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미국의 돈이 그 땅에서 그분의 자녀들의 증거를 방해하고 있음을 보시고, 모든 외국 돈을 막고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정당이 선거에서 이길 수 있도록 허락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서로를 비난하던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일을 멈출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 조금 더 연합될 것입니다. 그리고 외국 돈에 의존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나라 자체에 주님의 일을 할 만큼 충분한 돈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더 강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고 교회는 더 연합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길은 항상 최고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주님은 "내가 바벨론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고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을 일으켜 세우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주님은 당시 최고의 통치자였던 바로에게 "내가 너를 일으킨 것은 너를 통해 내 능력을 나타내려 함이로다"(롬 9: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가 하나님께 반역했을 때, 하나님은 그를 짓밟으시고 그분의 강력한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같은 세대에 모세를 일으켜서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그 안에서 그분의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과 협력한다면, 그분은 모세처럼 당신을 통해 그분의 능력을 나타내기 위해 당신을 사용하실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과 협력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여전히 당신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모든 세대에 경고로 삼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러면 그분은 우리를 나쁜 본보기가 아닌 좋은 본보기로 만드실 것입니다. 당신이 신자일지라도 교만하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대적하시어 다른 신자들에게 경고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잔인하고 폭력적인 민족으로, 잔인함으로 악명 높으며 늑대보다 더 사나웠습니다"(6-9절). 그들은 많은 나라의 방어를 비웃으며 바람처럼 전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힘을 신으로 삼았기 때문에"(11절) 하나님 앞에서 깊은 죄를 지었습니다.

이것이 악인들이 번영하는 이유에 대한 하박국 질문의 답이 되었을까요?

하박국은 주님께 "당신은 제 질문에 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은 악인들이 번영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뿐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질문에 답하셨습니다. 그분은 "나는 완전히 통제하고 있으며, 네가 그것을 완전히 볼 수 없더라도 바벨론을 통해 내 목적을 성취하고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60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는 뒤돌아보면 바벨론이 하나님에 의해 일어났다가 하나님에 의해 멸망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 당신이 행하신 일이 놀랍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유다가 70년 동안 바벨론으로 끌려간 결과를 주목하십시오. 사사 시대(기원전 1300년)부터 바벨론 포로 시대(기원전 600년)까지, 이스라엘은 자주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심지어 다윗 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놋뱀을 숭배했습니다(왕하 18:4). 이스라엘에서는 거의 700년 동안 우상 숭배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은 그들을 70년 동안 바벨론으로 보내셨습니다. 유대인들이 돌아왔을 때, 그들은 다시는 우상을 숭배하지 않았습니다(지난 2500년 동안). 하나님은 포로 생활을 통해 그 문제를 영구히 해결하셨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유대인들은 다른 많은 죄를 지었을지 모르지만, 다시는 우상 숭배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그런 최후의 교훈을 사람에게 가르쳐서 그를 영원히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분은 브니엘에서 단번에 야곱을 깨뜨리셨고 - 야곱은 그 이후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속적인 교훈을 가르치기 위해 강압적인 방법을 사용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우리 삶에 특정한 일들을 허락하시는지 항상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의 모든 상황을 주관하고 계시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분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시는 사람들은 바벨론 사람과 같은 악한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는 사람들을 사용하셨습니다 - 고대 로마에서나 현대 공산주의 국가에서나 말입니다. 우리는 일생 동안, 많은 공산주의 국가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박해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 공산주의 정부가 계속 집권하도록 기도할 그리스도인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하지만 하나님은 그 공산주의자들이 얼마 동안 집권하도록 허락하셨다가 그들을 무너뜨리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집권하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들인 중 일부는 그런 나라에서 나왔습니다 - 박해를 받지 않는 나라에 사는 돈을 사랑하고 편안함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보다 훨씬 더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박해의 불길을 통해, 그리스도인은 정화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공산주의자들이 얼마 동안 집권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우리는 항상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언제나 그리고 모든 나라에서 그분의 자녀들에게 무엇이 좋은지 알고 계십니다 - 그리고 그분은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복되신 주권자"이십니다(딤전 6:15 - J.B. Phillips). 할렐루야!!

두 번째 질문

그러자 하박국은 법정에서 변호사처럼 주님께 질문합니다: "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영원하신 분이시여, 당신의 계획은 우리를 멸망시키는 것입니까? 분명히 아닙니다! 오 하나님, 당신은 이 갈데아인들(바벨론)이 일어나 우리의 끔찍한 죄를 징계하고 바로잡도록 정하셨습니다. 우리는 사악하지만, 그들은 훨씬 더 사악합니다! 어떤 형태로든 죄를 허용할 수 없는 당신은 그들이 우리를 삼키는 동안 가만히 서 계실 건가요? 악인들이 자신들보다 나은 사람들을 파괴하는 동안 당신은 침묵하실 건가요? 우리는 잡혀 죽임을 당할 물고기에 불과합니까? 우리는 적들로부터 방어할 지도자가 없는 기어다니는 것들에 불과합니까? 우리는 그들이 기뻐하는 동안 그들의 갈고리에 걸려 그물에 끌려가야 합니까? 그러면 그들은 그들의 그물을 숭배할 것입니다! 그들은 '이것이 우리를 부유하게 하는 신이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당신은 그들이 영원히 이 일을 저지르도록 내버려 두실 건가요?"(1:12-17).

하박국은 바벨론 사람들이 유다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면, 그들 자신의 능력을 숭배할 것이라고 주님께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대답

하박국은 망루에 올라가서 주님께서 자신의 불평에 어떻게 대답하시는지 지켜보기로 결심했습니다(2:1). 주님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내 대답을 크고 또렷한 글씨로 판에 써서, 모든 사람이 보고 다른 모든 사람에게 전할 수 있게 하여라: 내가 계획한 일은 즉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천천히, 꾸준히, 확실하게 그 환상이 이루어질 때가 다가오고 있다. 느리게 보이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라.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지체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들을 마침내 심판하고, 내 백성을 번영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하룻밤 사이에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2:2,3).

주님은 하박국에게 인내심을 가지라고 권고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악을 심판하기 위해 서두르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즉시 우리를 위해 일하시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위한 기도는 버튼을 누르는 것처럼 우리는 즉각적인 기적을 원합니다 - 마치 우리가 인스턴트 커피를 만드는 것처럼요!! 우리는 즉각적인 구원, 성령 안에서의 즉각적인 세례, 즉각적인 기적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성품은 순식간에 형성될 수 없습니다. 성품이 형성되려면 오랜 시간, 고난, 시련이 필요합니다. "환난은 인내심을 키우고 인내는 성품을 낳습니다"(롬 5:3,4).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박국에게 말씀하신 첫 번째 것은 인내였습니다.

그분이 두 번째로 말씀하신 것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2:4). 인내와 믿음은 함께합니다(히 6:12, 15). 이것들은 시련의 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두 가지 자질입니다.

이 구절("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은 신약 성경에서 세 번 인용되었습니다 - 로마서 1:17; 갈라디아서 3:11과 히브리서 10:38 - 그리고 이것은 종교개혁자들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라고 선포한 종교개혁의 위대한 표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문맥에서, 이 구절은 바벨론 사람들이 유다에 오는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유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 교만한 바벨론 사람들을 보라. 그들은 자신을 신뢰한다. 그들은 비뚤어져 있다. 그러나 의로운 자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믿음은 무엇일까요?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상의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다스리시고, 우리를 엄청나게 사랑하시며, 적절한 때에 우리의 원수들을 다루실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교만한 자들을 보라! 그들은 자신을 신뢰하고, 그들의 삶은 비뚤어져 있다; 그러나 의로운 자들은 그들의 믿음으로 살 것이다"(2:4). 이 구절에 따르면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만 있습니다 - 비뚤어진 교만한 자와 믿음으로 사는 의로운 자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반대는 불신뿐만 아니라, 교만함도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항상 겸손할 것입니다. 진정한 성경적 믿음과 진정한 겸손은 항상 함께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믿음"에 대해 많이 말하는 설교자들이 진정한 성경적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이 겸손으로 옷을 입었는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소위 "믿음"은 성경적 유형이 아닙니다.

또한 이 구절에서 우리는 교만한 사람이 비뚤어져 있음을 봅니다. 비뚤어짐은 항상 교만함과 함께합니다. 교만한 사람을 볼 때마다, 그의 삶에 숨겨진 비뚤어짐이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정직한 사람은 항상 겸손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지만 겸손한 자에게만 은혜를 주십니다(약 4:6).

다음으로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부의 신뢰할 수 없는 본질입니다(2:5). 어떤 종류의 부도 - 돈이나 지성 또는 세상적인 어떤 것이든 - 신뢰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소유자를 교만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또 다른 특징은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결코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탐욕스럽습니다 - 항상 더 많은 것을 원합니다"(2:5). 언젠가 정의가 그런 사람들을 따라잡을 것입니다(2:6).

2:6-19은 자기 중심적인 삶이 어떻게 결국 스스로를 파괴하는지에 대한 설명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을 중심으로 둡니다. 그는 믿음으로 살지 않고, 자신에 대한 전적인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은 "불의한 수단으로 부자가 된 너희에게 재앙이 있을 것이다! 너희는 너희의 부가 안전을 살 수 있다고 믿으며, 네 가족을 위험으로부터 멀리 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2:9)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부에 안전을 두는 사람은 궁극적으로 스스로를 파괴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오만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믿음의 사람은 "온 땅이 (어느 날) 물이 바다를 채우듯이 주님의 영광으로 가득 찰 것"이라고 믿습니다(2:14). 그는 그날을 고대하며 기다릴 인내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박국이 주님을 보았을 때, 그의 마음은 찬양으로 가득 찼습니다: "주께서 그 거룩한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이 잠잠할지어다"(2:20). 그의 믿음의 갈등은 믿음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그는 "주님, 저는 당신의 위엄 앞에서 잠잠합니다. 더 이상 질문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욥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을 때, 그는 또한 "이제 당신을 봅니다. 내 손으로 입을 가렸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욥 42:5; 40:4,5). 욥은 주님을 보고 나서 더 이상 질문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10,000개의 질문에 모두 답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이 답하신다면, 당신은 10,000개의 질문을 더 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답은 (욥의 경우와 하박국의 경우처럼) 주님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분의 거룩한 성전에 계십니다. 당신은 그분을 보았습니까? 그러면 당신의 육신은 그분 앞에서 잠잠해지고 당신은 더 이상 질문이 없을 것입니다!

하박국의 찬양

하박국이 하나님을 보았을 때, 그는 믿음의 삶을 사는 것의 보상을 보았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은 승리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악한 사람들을 벌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하박국은 이제 하나님께서 분노 가운데서도 자비를 베푸시기를 기도합니다(3:2).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버리셨다고 생각했던 그는 이제 찬양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당신이 행하신 일에 대한 놀라움으로 가득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볼 때, 그분의 찬란한 영광이 하늘을 가득 채웁니다. 땅은 그분의 찬양으로 가득합니다. 그분은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그분의 놀라운 권능을 기뻐하십니다. 그분이 보실 때, 민족들이 떱니다. 당신은 당신의 택한 백성을 구원하고, 당신의 기름 부음 받은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나갔습니다. 당신은 악한 자들의 집의 머리를 짓밟으셨습니다 "(3:2-13).

하박국은 이제 바벨론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먼저 보았습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어디서나 항상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마 5:8). 지금까지의 문제는 하박국이 악한 바벨론 사람들이 번영하는 것만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악한 자의 집의 머리"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에 의해 짓밟힌 사탄으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하박국의 모든 질문은 그가 하나님의 영광과 위대함을 보았을 때 답을 얻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보았을 때 속으로 떨며 "나는 우리를 침략하는 백성에게 재앙이 임할 날을 조용히 기다리겠다"라고 말했습니다(2:16). 의심이 들 때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이야기하십시오. 하박국과 우리에게 하신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은 "기다려라!"입니다. 하박국이 기다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의 불평은 노래로 바뀌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어려운 일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박국이 찬양한 놀라운 노래는 구약성경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믿음의 노래 중 하나입니다. 그는 여기서 새 언약의 성도처럼 노래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에 꽃이 피지 아니하고,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고; 올리브 나무에 거둘 것이 없고, 밭이 비어 있고 척박하고; 양 떼가 들판에서 죽고, 소 헛간이 비어 있어도 -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라! 나는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해 즐거워하리라"(3:17,18).

욥처럼, 그의 사업은 황폐하고 그는 모든 것을 잃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기뻐할 것입니다. 그의 기쁨은 땅의 어떤 것도 아닌 주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이 실패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할 것입니다.

찬양의 노래는 믿음의 내적인 승리를 외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분의 말씀을 믿고 - 그분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도다"(시 106:12).

하박국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주권자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다! 그분은 나를 사슴처럼 발이 민첩하게 하시고, 나를 산 위로 안전하게 인도하실 것이다"(3:19). 처음에 의심과 두려움이 많았던 이 선지자는 이제, 주님께서 의심의 모든 산을 안전하게 넘어가게 하시고, 바위틈에서 발을 헛디디지 않는 사슴처럼 그를 흔들림 없게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박국은 마지막에 흥미로운 작은 메모를 추가합니다: "(합창 지휘자를 위해: 이 기도는 현악기로 반주되어야 합니다)"(3:19).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비록 모든 것을 잃어버렸더라도 이 노래를 애도가로 부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노래는 즐거운 음악으로 설정되어야 하며 - 많은 악기도 사용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찬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결코 활기가 없고 단조로운 방식으로 찬송가를 부르지 마십시오. 이 우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주님은 여전히 보좌에 계시고 예수님은 승리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신 목소리와 모든 악기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의 이름을 높입시다. 아멘.

장 36
스바냐

하나님의 엄중함과 선함

스바냐는 나훔 직후, 바벨론이 세계 강국이 되기 전, 예레미야 시대 직전에 예언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스바냐의 예언 시대가 끝나갈 무렵에 거기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스바냐는 또한 앗수르의 멸망과 바베론의 부상(rise)에 대해서도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주요 주제는 하나님의 엄중함과 선함이었습니다. 로마서 11:22은 하나님의 선함과 엄중함을 주의 깊게 살펴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스바냐서 전체에서 그 구절이 강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선 그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엄격함에서 하나님의 엄중함을 선포합니다. 그런 다음 그는 하나님의 백성의 남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선함을 선포합니다.

우리는 이 "소" 선지서들을 연구하면서, 그 중 많은 선지서에서 특정 주제가 반복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 심판의 확실성, 교만과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는 악, 지도자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돈에 대한 사랑과 부도덕,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사용하여 그분의 백성을 징계하시는 것, 하나님께서 즉시 응답하지 않으실 경우 믿음과 인내심의 필요성, 부흥의 외적인 징후에 속지 않는 것, 남은 자에 대한 약속.

모든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남은 자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영적 쇠퇴의 시기에도 하나님께 충실한 사람이 소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것들은 우리의 교훈을 위해 기록되었습니다(고전 10:11). 과거에 이스라엘이 쇠퇴했던 것처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쇠퇴가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라는 두 왕국은 기독교 세계의 두 집단을 보여줍니다. 10개 지파로 구성된 이스라엘은 대규모 집단인 주요 교파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2개 지파로 구성된 유다는 더 작고 비주류적인적인 집단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이 두 집단은 오늘날 쇠퇴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유다는 이스라엘의 실수로부터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비주류적인 집단은 주요 교파가 저지른 실수로부터 배우지 못했고 - 그들 스스로도 같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두 집단에서, 하나님은 오늘날 남은 자들을 선택하셨습니다.

오늘날에는 의식에 치우친 집단들뿐만 아니라 독립적인 집단들 사이에서도 영적인 쇠퇴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 중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향한 마음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한 교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모든 교파에서 발견됩니다 - 하나님을 사랑하고 모든 일에서 그분을 공경하고자 하는 남자와 여자입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성령으로 충만하며 논쟁에 휘말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혀를 사용하는 데 매우 조심하고 돈에 매우 충실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그러한 사람들을 그분의 남은 자로 모으고 계십니다.

선지자들의 주제는 항상 회복이었습니다. 남은 자들은 주 예수님의 오심을 위해 길을 준비했습니다. 주님이 태어나셨을 때, 소수의 남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 성전에는 시므온과 안나, 세례 요한, 목자들, 동방에서 온 몇몇 동방 박사들. 오늘날에도 기독교 집단에는 주님의 오심을 위한 길을 준비하는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스바냐는 먼저 다가올 심판의 날에 대해 말합니다. 그는 다른 어떤 선지자보다 "주님의 날"에 대해 더 많이 말합니다. 느부갓네살이 와서 그들을 포로로 잡아가기 약 4년 전인 요시야 왕 시대에 유다에 부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피상적인 부흥이었습니다. 스바냐와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들은 그것을 간파했고 속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대부분 사람들은 속았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소위 "부흥"에 속고 있으며, 그것의 공허함과 피상성을 간파하지 못합니다.

오늘날 기독교 세계에서 "부흥"이라고 불리는 것의 대부분은 영리하고 돈을 사랑하는 설교자들이 속기 쉬운 대중에게 강요한 감정적 흥분과 심리적 속임수일 뿐입니다. 거기에는 거룩함이나 겸손함, 돈에 대한 사랑으로부터의 자유, 영적 가난 등에 대한 부흥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산상 설교(마 5-7장)의 가르침에 순종하도록 이끌지 않는 모든 부흥은 가짜입니다. 오늘날 "부흥"이라고 불리는 것에 속지 마십시오. 대부분은 전혀 부흥이 아닙니다.

예레미야와 스바냐와 같은 선지자들은 그 당시 그런 피상적인 "부흥"을 즉시 간파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예언을 읽고 그들이 그 당시 "부흥"의 피상성을 어떻게 폭로했는지 보십시오. 그러나 유다 사람들은, 이 선지자들이 "부정적"이라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 선지자들은 부정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단지 진실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4년 후, 느부갓네살이 와서 유다를 포로로 잡았을 때 사람들은 예레미야와 스바냐가 옳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이 "부흥"이라고 부르는 것의 공허함과 텅 빔을 꿰뚫어 볼 수 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은 이러한 피상적인 "부흥"을 폭로한 그분의 종들이 옳았다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보여주실 것입니다. "이단자"로 비판받는 사람들은 종종 주님의 참된 선지자들입니다.

주님의 날의 심판

스바냐는 이 땅, 유다, 그리고 유다 주변 국가인 가자, 모압, 암몬, 에티오피아, 앗수르에 대한 심판을 예언했습니다(1장과 2장).

이 구약성경의 예언에는 이중적인 성취가 있습니다. 처음 언급된 것은 앗수르인들, 바벨론인들, 느부갓네살이 이스라엘과 유다를 침략한 사건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미래에 대한 언급은 적그리스도가 교회를 대적하기 위해 등장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때 남은 자들이 있었고 지금도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그때 말씀하신 주님의 날은 바벨론을 통한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주님의 날은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주님은 "다른 민족들뿐만 아니라, 내가 내 주먹으로 유다와 예루살렘도 쳐서 바알 숭배의 모든 흔적을 없애 버리겠다. 그들이 지붕에 올라가서 해와 달과 별에게 절을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님을 따른다고 하지만 몰렉을 숭배한다"(1:4, 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그들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참 하나님을 가나안 사람들에게 나타내기 위해 가나안으로 갔지만, 가나안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그들의 수준으로 끌어내렸습니다.

만약 당신이 탁자 위에 서서 바닥에 서 있는 사람을 탁자 위로 끌어올리려고 할 때, 그가 당신을 끌어내리려고 한다면, 그가 당신을 끌어내리는 것이 더 쉬울 것입니다. 이것이 유다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주님은 유다에게 가나안 사람들과 어떤 관계도 맺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유다는 가나안 사람들이 여호와를 경배하게 만들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사람들은 유다를 그들의 수준으로 끌어내렸고 - 유다는 바알, 태양, 달, 별을 숭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교회가 그들의 예배를 "인도화"하려고 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들은 매우 종종 우상 숭배적인 비기독교적 관행으로 끝납니다. 나는 "기독교" 사제가 쓴 책을 보았는데, 그 책의 표지에는 예수님이 일곱 개의 머리를 가진 뱀 아래에 앉아 있는 그림이 있었습니다 - 그 뱀은 성령의 일곱 가지 속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것은 "인도화"의 결과입니다. 다른 교회들에서는, 기독교인을 타락하게 만드는 것이 세속적인 가치관일 수 있습니다.

신자가 불신자와 결혼할 때도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불신자는 신자를 자신의 수준으로 끌어내립니다. 결혼할 때 지참금을 요구하는 것은 대부분의 기독교인이 행하는 또 다른 이교 관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참금 제도를 미워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여성을 팔 수 있는 상품으로 취급하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들은 그런 것들에 맞서 싸웠고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은 그 때문에 그들을 미워하였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인도에서 지참금에 반대하는 대담한 입장을 취하는 교회는 거의 없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세상 수준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갖고 있지만, 주변의 다른 세상 사람들처럼 똑같이 살고 있습니다!

"그 날에 나는 지도자들과 이방인의 관습을 따르는 모든 자들과 약탈물로 집을 가득 채우는 자들을 벌할 것이다"(1:8,9). 지도자들은 이방인의 관습을 따르고 돈을 사랑하고 집을 그것으로 가득 채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구약성경의 선지자들은 항상 하나님 백성의 지도자들과 그들의 돈에 대한 사랑에 대해 비난했습니다 - 왜냐하면 그들이 주된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지도자들은 선지자들을 "이단자"라고 부르고 박해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오늘날 교회에 선지자를 보내신다면, 그 선지자도 목사들과 주교들과 그들의 타협과 돈에 대한 사랑에 대해 반대할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들은 그런 선지자를 "이단자"라고 부르고, 그에게 설교단을 막고 박해할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모든 선지자는 박해를 받았습니다. 한 명도 피하지 못했습니다. 스데반은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너희 조상들이 박해하지 않은 선지자를 한 명이라도 말해 보시오!"라고 물었습니다(행 7:52). 그들은 한 명도 말할 수 없었습니다. 왜 모든 선지자들이 박해를 받았을까요? 그들이 지도자들의 죄를 폭로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설교하실 때, 술 취한 사람과 간음한 여자와 살인자, 심지어 당시의 속이는 세리들을 상대로 설교하시는 것을 보았습니까? 아니요. 그분은 그들에게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나는 그 죄인들을 찾아 구원하기 위해 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성경을 들고, 집회장에서 설교하고, 돈을 사랑하고, 위선적인 삶을 사는 종교 지도자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분을 죽였습니다. 당신은 이 실제 예수님과 참된 선지자들을 따르십니까? 아니면 거짓 선지자들과, 세상적인 기독교 지도자들과 친하게 지내며 그들과 함께 잔치를 벌이는 "또 다른 예수님"을 따르십니까? 심판은 먼저 지도자들에게 옵니다.

주님은 "나는 예루살렘의 가장 어두운 구석에서 등불을 들고 수색하여 죄에 만족하고, 주께 무관심하며, 주께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을 찾아 처벌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1:12). 오늘날 교회에도 사치스럽게 사는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설교를 통해 부자가 되었고 주님의 명령에 무관심합니다. 그들은 "감독", "담임 목사", "주교" 등의 직함과 지위를 좋아합니다. 주님은 그들 모두를 폭로하실 것입니다.

교회가 영적으로 쇠퇴할 때마다 항상 사치스럽고, 안락하고, 편안하고, 사람들의 필요에 무관심하고, 기도하지 않는 삶으로 나아갑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열심, 희생, 기도,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진지한 연구로 주님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30년 후, 그들은 "재물의 속임수에 질식하여" 식어버렸습니다. 만약 당신이 육신의 욕망과 싸우고 기독교 집단의 타락에 맞서 싸우는 데 충실하지 않다면, 당신은 당신 주변의 타락한 지도자들과 같이 될 것입니다. 당신은 일요일 아침마다 설교를 하는 전문 설교자가 되어 점점 더 많은 돈을 모으고, 기름 부음도 받지 못한 채 호화롭게 살게 될 것입니다 - 당신이 진심을 다해 시작했을지라도 말입니다. 이 일은 스바냐 시대에 일어났고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주님은 죄를 짓는 자들을 "소경이 길을 찾는 것"(1:17)과 같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지도자들 자신이 눈멀었을 때, 그들의 모든 추종자들은 도랑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다음 스바냐는 "주님께 너희를 구원해 달라고 간청하라. 겸손한 너희는 모두, 더욱 겸손을 구하라"(2:3)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 "더 겸손을 구하라". 스바냐는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들을 축복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 쪽에는 바벨론의 교만함이 있었고 다른 쪽에는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의 겸손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보았듯이, 가인과 아벨의 시대부터 인류에는 바벨론과 예루살렘이라는 두 개의 흐름이 있었습니다. 바벨론은 타락한, 종교적 체계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참된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기적, 표적, 기사가 아니라 겸손으로 특징지어집니다. 그들은 점점 더 겸손해지려고 노력하는 데 결코 지치지 않습니다.

그러면 남은 자들에게 닥친 위험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른 교회들과 자신을 비교하고 우월함을 자랑스러워하는 위험입니다. 마귀는 당신이 바로 그런 식으로 생각하기를 원합니다. 마귀는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는 순간 하나님이 당신의 원수가 되고, 그러면 당신도 당신이 멸시하는 자들과 같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은 자들이 얼마나 빨리 바벨론의 일부가 될 수 있는지 당신은 압니다. 그러므로 겸손을 추구하십시오. 항상 얼굴을 흙바닥에 두세요. 다른 사람들과 결코 자신을 비교하지 마십시오. 오직 예수님과만 자신을 비교하십시오. 이것이 오늘날 하나님 백성의 남은 자들에게 내가 드리는 조언입니다.

스바냐는 블레셋 성읍들이 뿌리째 뽑히고 황폐해질 것이지만, 몇몇 생존자들(다시 말해서, 남은 자들)은 돌봄을 받을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2:4, 7). 이 남은 자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받고 비웃음을 당할 것입니다(2:8).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처럼, 그리고 선지자들이 말한 남은 자들처럼, 당신이 주님을 위해 일어선다면, 많은 타협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당신을 조롱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당신에게 "이 작은 광신적 집단에 합류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환상적인 사역을 할 수 있었을지"라고 말할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내가 더 광범위한 사역을 포기하고 우리 집에서 교회로서 소수의 사람들과만 모이기 시작했을 때(1975년) 나에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 중 하나라도 듣지 않아서 감사합니다. 나는 주님께 "주님, 나는 두 명이나 세 명만 있어도 상관없습니다. 나는, 당신이 계신 곳에 있기 원하고 당신 말씀의 모든 진리를 선포하고 싶습니다. 나는 타락한 기독교와 그들의 지도자들의 의견에 관심이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당신이 그런 입장을 취한다면, 당신은 많은 반대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끝까지 인내한다면 기쁨으로 당신의 길을 마칠 것입니다. 주님께 눈을 고정하십시오. 주님은 "너희를 비판하는 자들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 내가 내 때에 그들을 다룰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나의 비판자들은 침묵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행하신 일에 경탄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조롱을 참을 수 없다면, 당신은 싸움을 포기하고 타협자들과 함께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스바냐는 앗수르의 멸망에 대해 말했습니다(2:13). 나훔이 예언한 후 앗수르는 쇠퇴하기 시작했지만, 완전히 멸망되지는 않았습니다. 이 예언은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주께서 앗수르를 멸망시키시고 그 큰 수도, 니느웨를 사막처럼 메마르게 하실 것이다. 온갖 들짐승이 거기에 정착할 것이다. 여러 종류의 올빼미가 그 궁전의 폐허 가운데 살며, 벌어진 창문에서 울부짖을 것이다"(2:13,14).

그런 다음 스바냐는 유다 지도자들의 죄를 다시 한번 폭로합니다, "그들의 지도자들은얻을 수 있는모든 것을 노리는 으르렁거리는 사자와 같다. 그들의 재판관들은 굶주린 늑대와 같다. 그들의 선지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거짓말쟁이다. 그들의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법을 어긴다"(3:3,4). 모든 참된 선지자는 항상 지도자들, 고관들, 재판관들, 선지자들, 제사장들에게 반대의 목소리를 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우리가 참된 선지자를 알아볼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

오늘날에도, 타락한 목사들과 설교자들은 항상 "그들이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추구합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복되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나는 삼 년 동안,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 곧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되다는 말씀의 진리를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 주었습니다"(행 20:31-35)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 지도자들과 목사들이 그 구절의 진리를 실지로 모본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받으려고만 합니다. 그들은 스바냐가 말한 굶주린 늑대와 같아서, 양을 잡아먹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복되다고 가르친 진짜 예수님를 어떻게 대표할 수 있겠습니까?

이 모든 지도자들은 무엇을 추구합니까? 그들 자신의 이익, 즉 그들의 양떼로부터 돈, 돈, 더 많은 돈입니다. 사람들이 나에게 "잭 형제님, 왜 지도자들의 돈 사랑에 대해 그렇게 많이 반대하십니까?"라고 묻습니다. 나는 "성경이 그것에 대해 많이 말하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들이 그것에 대해 말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것에 대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도 이것에 대해 말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이 복음으로 살도록 허락하셨습니다 - 그러나 그것이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그들이 부유해지도록 허락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그들에게 선물을 주기를 기대하고, 돈을 사랑하며, 부자가 되기를 갈망한다면, 그들은 악해진 것입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지켜보십니다. 언젠가 그분은 모든 부패한 지도자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그분의 백성에게 "인내하라; 내가 가장 맹렬한 분노와 격노를 그들에게 쏟을 때가 곧 오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3:8).

주님의 날의 구원

이 남은 자들의 몇 가지 특징을 주목하십시오.

"내가 백성의 입술을 정결케 하리라"(3:9). 남은 자들의 말은 순수할 것입니다. 이사야는 주님의 영광을 보고 자신의 말의 죄를 깨달았습니다. 나는 우리의 말과 돈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대해 자주 이야기합니다 - 선지자들이 이 두 가지 주제에 대해 많이 말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입과 돈을 조심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대변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한마음으로 그분을 섬길 것이다"(3:9). 남은 자들은 한 몸으로 연합하여 주님의 짐을 지고, 함께 마음을 모아 주님을 섬길 것입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서 교만하고 오만한 자들을 다 제거하리라. 내 거룩한 산에는 교만함이 없으리라. 남은 자들은 낮고 겸손할 것이니라"(3:11,12). 남은 자들은 겸손한 사람들로만 구성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교만한 자들을 다 제거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나에게 묻는 또 다른 질문은 "잭 형제님, 왜 겸손에 대해 그렇게 많이 말씀하십니까?"입니다. 성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말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남은 자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신뢰하리라"(3:12). 남은 자들은 믿음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백성들은 서로에게 해를 끼치지 아니하며, 결코 거짓말을 하거나 서로를 속이지 아니하며, 평화로운 삶을 살 것이다"(3:13). 남은 자들은 결코 거짓말을 하거나 누군가를 속이거나 누군가를 해치지 아니하는 평화적인 백성이 될 것입니다.

"시온의 딸아, 노래하라. 큰 소리로 외쳐라! 기뻐하고 온 마음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여호와께서친히 너희 가운데 거하심이니라!"(3:14, 15). 남은 자들은 주님의 사랑 안에서 완벽한 안전을 찾은 행복한 백성이 될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승리의 용사시라. 그분은 너 때문에 무척이나 기뻐하실 것이다. 그분은 기쁨의 함성으로 너희를 즐거워하실 것이다"(3:17). 하나님은 이 남은 자들을 기뻐하십니다. 그분은 죄 속에 사는 사람들을 통해 기쁨을 찾지 못합니다. 아버지가 암, 나병, 결핵에 걸린 아이를 즐거워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 속에 살면서 치유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을 기뻐하실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거룩한 남은 자들을 기뻐하십니다. 그분은 큰 기쁨으로 그들을 향해 외치시고 노래를 부르십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향해 노래하신다고 말씀하신 유일한 곳입니다. 하나님께 찬양의 노래를 부르라고 권고하는 곳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우리를 향해 노래를 부르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정말 도전적인 일입니다.

"그분은 사랑으로 너희를 위하여 조용히 계획하시느니라"(3:17 - 의역). 주님은 사랑으로 우리를 위해 계획을 세우시고, 다가올 날들에 우리를 위해 즐거운 놀라움을 계획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사랑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약하고 힘없는 자들을 구원할 것이다. 조롱과 수치를 당한 자들에게 영광과 명성을 줄 것이다. 나는 너에게 뛰어난 이름을 줄 것이다. 내가 그들의 눈앞에서 너의 운명을 회복시킬 때 그들은 너를 칭송할 것이다"(3:19, 20).

남은 자들은, 자기 자신을 약하고 무력한 사람으로 여기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그들의 원수들을 다루시고 마지막 날에 그분의 백성에게 영광과 뛰어남을 주십니다.

스바냐서는 이러한 승리의 메시지로 끝을 맺습니다.

장 37
학개

주님의 일을 하라는 격려

학개는 아주 짧게 썼습니다 - 두 장만 썼습니다. 하지만 그는 성전을 지어야 한다는 엄청난 부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지 15년이 넘도록 주님의 성전은 재건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주변 사람들의 반대를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두 명의 선지자, 학개(나이 든 사람)와 스가랴(젊은 사람)를 보내어 유대인들이 성전을 재건하도록 격려했습니다. 학개서에는 네 가지 메시지가 있습니다 - 첫 번째 장에 한 개, 두 번째 장에 세 개가 있습니다.

첫 번째 메시지 - 성전을 완성하라(1:1-15)

첫 번째 메시지는 성전을 재건하라는 부르심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의 자기중심성을 봅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여호와의 집을 재건할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노라"라고 말했습니다(1:2). 페르시아 왕은 단지 예루살렘 성(the city of Jerusalem)을 재건하지 말라고 명령했을 뿐입니다(스 4:21). 그는 결코 성전 건축을 ​​금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그의 말을 이용하여 그들의 이기심과 게으름을 정당화하며 "아직 성전을 지을 상황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다려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꾸짖으시며 "너희는 너희의 호사스러운 집을 지을 때가 되었다고는 생각하지만, 내 집은 여전히 ​​황폐하게 남아​​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1:4). 솔로몬 역시 이기적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궁전을 짓는 데 13년을 보냈지만, 성전을 짓는 데는 최소한으로 7년을 보냈습니다 - 그는 성전을 먼저 지었습니다. 하지만 이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웅장한 집만 지었을 뿐, 주님의 집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늘날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수백만 명이나 되는데, 그들은 먼저 자신의 이익과 가족의 이익을 추구합니다 - 주님의 이익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웃이 자신의 재산을 침범하면 심각하게 걱정하지만, 사탄이 주님의 재산을 침범하면 조금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면 지상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더하여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구하러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을 돌보면, 그분께서 우리의 가족을 돌보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공경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공경하셨고,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을 돌보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을 돌보셨다는 것을 믿지 않는 세상에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당신의 삶이 그런 증거입니까?

우리는 1:5, 6에서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이렇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며 도전을 주십니다, "너희 삶에서 일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생각해 보아라. 영적인 열매가 있었느냐? 너희는 많이 심었지만 수확은 적었다. 너희는 많은 집회에 참석했고, 많은 기독교 서적을 읽었고, 많은 기독교 테이프를 들었다. 그러나 너희의 집은 오늘날 경건한 집이고 평안한 집이냐? 너희는 아내/남편에게 소리를 지르는 것과 같은 간단한 일이라도 극복했느냐? 그렇지 않다면, 너희가 많이 심었을지라도, 수확이 적은 것이다. 너희는 옷을 입지만 여전히 따뜻하지 않다. 너희는 돈을 많이 벌지만 주머니에 구멍이 나서 대부분을 낭비한다. 너희는 하나님께 성령으로 충만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하지만 너희는 새어서 모든 힘이 나가버린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구멍이 있는 그릇에 물을 붓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성령으로 충만해지기를 구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많은 신자들은 구멍이 난 그릇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구멍을 막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성령으로 채우기를 열망하십니다. 하지만 당신의 삶에는 먼저 바로잡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구멍이 난 주머니에 돈을 넣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삶에 새는 부분이 있는 사람들을 성령으로 채우지 않으실 것입니다. 잘못한 사람에게 사과하지 않았거나, 부당하게 챙긴 돈을 돌려주지 않는 등. 이런 것들은 큰 구멍입니다. 당신의 삶에 이렇게 큰 구멍이 났다면, 성령으로 충만해지기를 밤새 기도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밤새도록 그 구멍들을 고치십시오. 그러면 답이 빨리 올 것입니다. 학개의 주요 주제 중 하나는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 행위를 깊이 생각하라."

1:7, 8에서, 학개는 그들에게 건물을 완성하라고 촉구합니다. 기초는 수년 전에 놓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거기서 멈췄습니다. 예수님은 기초만 놓고 건물을 완성하지 않은 사람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눅 14:28-30). 그 비유는 제자가 되는 것에 대한 부분의 중간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의미하신 것은 제자를 만드는 것 없이 복음 전도하는 것은 기초만 놓고 건물을 완성하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기초가 필요한가요? 그렇습니다. 절대적으로 필수적입니다. 그것은 집을 지을 때 해야 할 첫 번째 일입니다. 복음 전도가 필요한가요? 물론입니다. 그것도 해야 할 첫 번째 일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전도만 하고 제자를 만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헛된 노력입니다. 건물이 없는 기초와 마찬가지로 쓸모가 없습니다. 히브리서 6:1-3은 그러한 어리석음에 대해 경고합니다: "회개와 믿음과 물세례와 성령 세례와 부활과 최후의 심판에 관한 가르침의 기초를 다시 놓지 말자." 이 모든 것은 단지 기초일 뿐입니다. 저자는 우리가 그런 다음 온전함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 그것은 집을 짓는 것입니다. 전도를 통해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회심시킨 후에는, 그 회심자들을 예수님을 따르고 온전함을 향해 나아가는 그분의 제자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학개의 메시지는 기초를 놓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온전함을 향한 것입니다 - 건물, 그리스도의 몸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회중(congregation)과 하나님의 집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채석장에서 50,000개의 돌을 잘라내어 건축 현장으로 가져온다면, 그것이 복음 전도입니다. 이 돌들은 거듭난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 건물은 아닙니다. 그저 돌더미일 뿐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복음주의 회중(신자들)이 그렇습니다. 이 돌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표현하려면 이제 서로 나란히 놓여 세워져야 합니다. 가장 어려운 부분은 그들을 함께 모아서 하나님의 집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는 단순한 회중일 뿐입니다. 그곳에서 한 사람(목사)은 파수꾼처럼 아무도 자신의 "돌"을 훔쳐가지 못하도록 지켜야 합니다. 어느 날 그의 "돌" 중 하나가 더 많은 영적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다른 교회에 옮기기로 결정하면, 그 파수꾼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돌"을 훔쳐 간다고 불평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그 돌을 건물로 지었다면 누구도 그것을 훔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운다면,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교인을 훔쳐갈까 봐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돌들이 함께 세워지고 시멘트로 위에도, 아래에도, 왼쪽과 오른쪽에도 돌로 결합되어 있다면, 누가 그것을 훔쳐갈 수 있겠습니까? 나는 1975년부터 방갈로르에서 교회를 이끌었지만, 누군가 우리 교회에서 어떤 사람을 훔쳤다고 불평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서 몸으로 함께 세워지고 있는 사람들은 빼앗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단지 기초를 놓고 돌을 모으지만 말고, 하나님의 집을 지읍시다.

1:9-11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강한 책망에 주목하십시오. 우리 교회들에는 사랑으로 책망의 말씀을 전하는 방법을 아는 설교자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요즘은 설교는 많지만, 책망과 교정은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삶에 패배나 끊임없는 실패를 허락하실 때, 당신은 멈추어서 그분이 당신에게 말씀하려고 하는 것을 들어야 합니다.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보십시오. "왜 내 삶에서 성령의 열매를 놓쳤는가? 왜 내 가정 생활은 엉망인가?" 왜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는가? 왜 내 삶은 메마름이 있을까?"(1:9-11). 주님과 함께 걷는 것보다 세상의 일과 은행 계좌에 더 관심이 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이 예언을 듣고, 즉시 학개의 메시지에 응답하여 "우리는 곧바로 하나님의 집을 짓기 시작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혹은 상징적으로, "우리는 이제부터 단순한 복음 전도에만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제자를 만들 것입니다. 우리는 한 사람의 교회가 아닌, 그리스도의 몸을 세울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교회는 - 해부학 실험실에서 발견되는 신체 부위의 무더기가 아니라 - 기능하는 몸과 같아야 합니다. 신체 부위의 더미는 손, 다리, 눈, 귀가 많이 있지만 생명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기능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정확히 그와 같습니다.

"그 때에 주님의 사자, 학개가 백성에게 주님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1:13). 학개는 먼저 주님의 사자였고, 그 다음 사람들에게 주님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당신은 테이프에서 기름부음받은 메시지를 듣고 그것을 반복할 수 있습니다 - 그리고 그것이 주님의 메시지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학개는 먼저 주님의 사자였습니다. 주님의 사자가 되려면, 당신은 먼저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하신 것처럼 당신 안에서 짓밟는 일을 하시도록 허락해야 합니다. 학개는 하나님께서 젊은 시절에 그를 어떻게 짓밟고 깨뜨리셨는지, 그가 어떤 깊은 시련을 겪어야 했는지 말해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많은 종들은 자신이 겪은 모든 것을 결코 우리에게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모든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께서 그를 다루신 개인적인 역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깨지고, 짓밟히고, 낮아지고, 돈과 명예 등을 잃었습니다. 오직 이렇게 해야만 주님의 사자가 됩니다.

주님의 사자가 주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과 다른 사람이 같은 메시지를 전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첫 번째 경우에는 하나님의 기름 부음이 있지만 두 번째 경우에는 없을 것입니다 - 왜냐하면 기름 부음이 주로 사자에게 임하지, 메시지에 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책과 테이프에 임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에게 임합니다. 나는 책과 테이프에 손을 얹고, 주님께 그것들에게 기름 부어달라고 요청하는 무지한 설교자들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그들이 기도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시는 것은 책과 테이프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성령께서는 학개의 예언을 통해, 이 사람들이 행동하도록 자극하셨습니다. "주께서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와 하나님 백성의 모든 남은 자들의 열정을 일으키셨고, 그들이 와서 여호와의 전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1:14). 그것은 메시지에 기름부음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당신의 설교가 사람들을 행동하도록 자극할 때까지 만족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들이 악수하고 그저 좋은 메시지라고 말하는 것에 만족하지 마십시오. 만약 당신의 메시지가, 사람들이 죄에서 돌이켜 예수님의 제자가 되도록 자극하지 못했다면, 당신은 더 큰 성령의 기름부음을 위해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16년 동안 일어나지 않았던 일들이, 23일 내에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봅니다(1:1, 15). 그것이 한 선지자가 만든 변화입니다. 16년 동안 매주 토요일에 설교했던 유대인 가운데 전문 설교자들은 아무 일도 일으키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한 선지자가 모든 사람을 흔들어 깨웠고,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학개와 같은 사람이 되십시오 - 주님의 사자가 되십시오.

두 번째 메시지 - 성전은 영광스러울 것이다(2:1-9)

주님께서 유대인들 가운데 연장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이 집(성전)의 예전 모습을 기억하느냐? 그에 비해, 지금은 어떻느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 것이다!"(2:3). 이 새로운 성전은 솔로몬이 지은 성전의 영광에 비할 바가 못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용기를 내어 일하라 - 내가 너와 함께 있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2:4). 그리고 주님께서는 " 모든 민족의 소망이 이르리니 - 이 후일의 성전의 영광이 이전보다 더 클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2:7-9 - KJV). "모든 민족의 소망"은 주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였으며, 그분이 이 새로운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500년 후), 이 후일의 성전의 영광은 솔로몬 성전의 어떤 것보다 더 클 것이었습니다.

이 마지막 말씀은 또한 "하나님의 새 언약 성전 - 교회"의 영광이 "옛 언약 성전"의 영광보다 훨씬, 훨씬 더 클 것임을 보여줍니다. 솔로몬의 성전은 일시적인 외적인 영광을 가졌습니다. 새 언약의 교회는 외적인 영광이 없지만 훨씬 더 나은 것, 즉 영원한 내적인 영광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순절에 일어난 일은 구약성경 전체에서 읽은 어떤 것보다 훨씬 뛰어났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재건하기 위해 많은 돈이 필요했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알고 계셨고, 그래서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돈을 직접 공급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날 우리가 그분의 일을 위해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왜 우리는 사람들에게 돈을 요청합니까? 왜 세상의 모든 은과 금의 주인에게 가서 요청하지 않습니까? 결국, 일은 그분의 일이지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그분께서 그분의 일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실 것이라고 신뢰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왜 대부분의 목사와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 사람들에게 구걸합니까?

예수님은 살기 위해 돈이 필요했습니다. 그분 자신의 생활비는 물론 열 두 사도와 그 열 두 사도의 부양 가족들의 생활비도 감당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실을 아셨기 때문에, 몇몇 부유한 가정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 예수님에게 돈을 주도록 하셨습니다(눅 8:2, 3).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선물을 받으셨지만, 누구에게도 돈을 요청하거나 자신의 재정적 필요를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세상의 모든 은과 금의 주인이신 아버지께서 자신의 모든 지상적 필요를 채워 주실 것이라고 신뢰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그들의 필요를 오직 하나님께만 알렸습니다. 새 언약 아래 있는 하나님의 종은 어느 누구에게도 지상적 필요를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마련해 주실 것이라고 신뢰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집을 빌리고, 음식과 옷을 사고, 자녀들을 교육하고,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 돈이 필요합니다. 주님은 "내가 다 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필요에 동정심이 없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과 사도들의 모범을 따라 그들이 한 대로 합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은도 내 것이고, 금도 내 것이다. 네가 나를 신뢰한다면, 네 가족과 일에 필요한 모든 것을, 내가 풍부하게 공급할 것이다. 사람에게 가서 구걸하지 마라."

세 번째 메시지 - 순종하는 자는 축복을 받을 것이다(2:10-19)

이제 세 번째 메시지로 넘어갑니다. 첫 번째 메시지는 성전을 완성하는 것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메시지는 성전의 영광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 메시지는 거룩함과 죄에 대한 것입니다. 어떤 선지자가 하나님의 집을 짓는 것에 관해 말할 때마다, 그가 다음으로 말하는 것은 항상 거룩함이었습니다. 당신이 거룩함을 강조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집을 지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많은 설교자와 목사들이 저지르고 있는 실수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사장들에게 율법에 관해 이렇게 질문하여라: '만약 너희 중에 누가 거룩한 제물을 옷에 싸서 옮기는데 다른 음식에 닿는다면, 그것도 거룩한 것이 되느냐?' 제사장들이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그 다음에 학개는 물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죽은 사람을 만져서 의식적으로(ceremonially) 부정해진 다음 어떤 음식에 닿는다면, 그것이 더럽혀 지느냐?' 제사장들이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2:11-13).

여기서 전하는 메시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거룩함은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 전염될 수 없지만, 죄는 전염될 수 있다.

좀 더 현대적인 예를 들어보면 이것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병원 수술실에서는, 모든 장비가 살균되어 세균이 없습니다. 살균된 칼을 하나 가져다가 더러운 천에 대면, 그 천도 살균되어 세균이 없어질까요? 아닙니다. 반면에, 그 과정을 역으로 진행하여 더러운 천을 가져다가 살균된 칼에 대면, 그 칼은 천에 있는 세균에 즉시 감염됩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죄는 매우 전염성이 강하지만, 거룩함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병원에서 칼을 살균하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오염시키는 데는 얼마나 걸릴까요? 잠깐이면 됩니다. 심지어 그렇게: 누군가가 당신을 죄인으로 만드는 것은 매우 쉽습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당신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죄는 매우 쉽게 전달되지만, 거룩함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런 다음 주님은 계속해서 "그러므로 너희가 바치는 것은 무엇이든지 더럽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2:14). 제물 자체가 의식적(ceremonially)으로 깨끗하더라도, 그들의 손이 죄로 더럽혀졌기 때문에 그들의 제물도 더럽혀졌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주님께서 교회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드리는 기도는 열렬하고 "거룩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큰 소리로 아멘과 할렐루야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삶에 죄가 있다면, 그의 기도는 죄가 됩니다. 아내와 다툰다면, 아내와 먼저 문제를 바로잡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께 순수한 기도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당신의 거룩하지 않은 삶은 당신의 기도에 죄를 전달합니다. 사람들은 당신의 기도에 감명을 받을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거부하십니다. "당신의 거룩한 행위에 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출 28:38).

그런 다음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죄를 바로잡으라고 촉구하시고, "오늘부터 앞으로 내가 너희를 축복하리라"(2:19)라는 약속으로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축복하기를 갈망하십니다. 우리의 죄만이 우리에게서 그 축복을 빼앗아갑니다.

네 번째 메시지 - 스룹바벨이 존중 받을 것이다(2:20-23)

마지막 메시지는 스룹바벨을 위한 개인적인 메시지였습니다. "나는 왕의 보좌들을 뒤엎고 그들의 병거와 병거를 몰던 자들을 전복시킬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이 일어날 때, 나는 내 종을 존중할 것이다. 나는 너를 내 손가락에 끼운 인장 반지처럼 대할 것이다. 내가 너를 특별히 택하였기 때문이다"(2:22, 23). 여기서 반지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상징합니다.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그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웠습니다 - 이는 하나님께서 회개한 죄인들에게 성령으로 기름부으시는 것을 상징합니다.

학개는 진정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스룹바벨을 높이고 자신을 숨겼습니다. 그는 "스룹바벨아, 너는 이 사람들을 이끌고 하나님의 집을 짓게 될 것이다. 반지는 네 손가락에 있을 것이다. 나의 사역은 그저 이 사람들을 격려하고 사라지는 것이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참된 선지자는 결코 사람에게서 영광을 얻지 못했습니다. 다윗과 같은 왕은 영광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스룹바벨과 같은 총독들은 영광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그들의 사역을 완수하고 사라졌습니다. 그들의 영광은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때 그들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서 기독교 집단이나 이 땅의 누구에게도 영광을 구하지 않는 하나님의 종이 되십시오.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고, 그들을 앞으로 밀어주십시오. 그들이 지도자와 장로가 되게 하십시오. 다른 사람들이 직함을 가지고 이사회의 회장과 이사가 되고 영광과 돈을 갖게 하십시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다음 자신을 숨기십시오. 예수님은 이 분야에서 우리에게 놀라운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의 모범을 따르고 하나님의 참된 종이 되십시오.

장 38
스가랴

구약 성경의 '계시록'

스가랴는 남은 자로서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와 성전을 짓던 시절에 학개와 함께 예언을 한 청년이었습니다. 학개와 스가랴는 함께 예언했습니다. 우리는 구약 성경의 다른 어느 곳에서도 두 선지자가 함께 일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엘리야, 엘리사, 요나는 모두 혼자 일했습니다. 예레미야와 하박국이 같은 시대에 살았지만, 그들이 함께 일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따로 예언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학개와 스가랴는 다른 모든 구약 성경 선지자들과 달랐습니다. 옛 언약 시대가 끝나갈 무렵, 하나님은 새 언약을 위해 사람들을 준비시키고 계셨습니다 - 그 언약에서는 아무도 혼자 일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시자마자, 제자들을 둘씩 보내어 - 새 언약을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교제는 새 언약에서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옛 언약 시대의 끝날 무렵, 학개와 같은 연장자와 스가랴와 같은 훨씬 젊은 사람이 함께 일하는 놀라운 예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스가랴는 학개보다 젊었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예언할 일을 훨씬 더 많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나이를 가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스가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환상과 예언의 메시지를 주시기 시작했습니다(2:4). 예레미야도 하나님께서 그를 예언하도록 부르셨을 때 젊은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젊은 모든 사람에게 큰 격려가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어릴 때 당신을 택하셔서, 성령으로 기름을 부으시고, 학개와 같은 연장자이고 경건한 형제와 팀을 이루게 하시고, 마침내 그보다 더 넓은 사역을 주실 수 있습니다. 학개는 은혜롭고 경건한 노인으로, (앞서 보았듯이) 스룹바벨을 앞으로 밀어줬을 뿐만 아니라 젊은 스가랴도 앞으로 밀어주었습니다. 참된 하나님의 사람은 항상 그렇습니다. 그는 젊은 사람들을 앞으로 밀어주고 자신은 뒤로 물러섭니다. 인도에서는 필요가 매우 크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연장자들이 필요합니다 - 그들은 젊은 사람들이 그들의 사역을 이어받도록 훈련시키고, 그 후에는 그곳을 떠나 주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다른 곳으로 옮겨갈 것입니다. 모든 선지자는 이와 같아야 합니다. 선지자로 부름받은 사람이 영원히 한 사역에 안주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학개는 참된 선지자의 훌륭한 모범이었습니다.

스가랴는 낙담한 사람들을 격려하는 축복받은 사역을 했습니다. 이 유대인들은 조상들이 노예였던 바벨론에서 막 돌아왔고, 가난하고 두려움에 떨며 낙담했습니다. 그들은 완전히 낙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200년 전 조상들처럼 교양도 없고 세련되지도 않았으며 부유하지도 않았습니다. 스가랴는 그들을 격려하기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학개의 메시지를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스가랴를 통해 그들에게 더 많은 메시지를 보내셨습니다. 당신이 한 선지자의 메시지를 받으면,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다른 선지자를 보내실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한 선지자의 메시지를 받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그분의 종을 보내지 않으실 것입니다.

주님은 스가랴를 통해 70년 전에 포로로 잡혀간 그들의 조상들에게 매우 화가 났다고 말씀하심으로 시작합니다(1:2). 그분은 그들에게 조상들과 같지 말고 선지자들의 말을 듣고 주님께로 돌아오라고 경고하셨습니다(1:3-5).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그들의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들은 모두 정확하게 성취되었습니다. 그들이 포로로 잡혀간 후에야 그 조상들은 회개하고 "우리는 주님께 합당한 것을 받았습니다. 그분은 말씀하신 대로 행하셨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1:6).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도 주님께 징계를 받을 때에 가서만 회개하고, 그분의 종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는 회개하지 않는 것이 유감입니다.

우리는 스가랴서를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1장에서 6장에서, 스가랴는 여덟 가지 환상을 보았는데, 각각이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다음 7장과 8장에서, 그는 위선, 불순종, 이스라엘의 회복과 같은 다양한 주제에 대한 메시지를 받습니다.

마지막 부분(9장~14장)은 메시아에 대한 것입니다 - 메시아는 거부당했지만 마침내 영광으로 돌아와 온 땅을 통치합니다.

스가랴의 짐(burden)은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의 하나님의 백성의 이동입니다. 예루살렘은 이 모든 선지자들의 짐이었습니다. 학개의 짐은 성전이었습니다. 스가랴의 짐은 성전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하는 예루살렘 도시 자체였습니다.

스가랴의 환상

첫 번째 환상

스가랴가 본 첫 번째 환상은 머틀나무(은매화나무) 사이에 붉은 말을 탄 남자에 대한 것입니다(1:7-17). 머틀나무는 키가 작은 나무로 겸손을 상징합니다. 그 남자 뒤에는 붉은색, 갈색, 흰색 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들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는 땅을 순찰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천사에게 '온 땅이 평화롭습니다.'라고 보고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지켜보는 그림입니다. "천사가 나에게 말했습니다, '이 말을 외쳐 모든 사람이 듣게 하라: 만군의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예루살렘과 시온산에 대한 나의 사랑은 열정적이고 강하다. 나는 예루살렘에 자비를 베풀기 위해 돌아왔다. 내 성전이 재건될 것이고 예루살렘을 재건하기 위한 계획이 세워질 것이다. 주께서 시온을 위로하고 예루살렘을 그분의 것으로 택하실 것이다.''"(1:9-17). '예루살렘'과 '시온산'은 사탄과 그의 세력의 모든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워질 지상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상징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비록 교회는 작고 낮은 곳에 있지만, 우주를 운행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집을 세우려는 교회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외로운 곳에 있으면 힘이 빠지고 무력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눈은 언제나 온 땅을 두루 돌며, 당신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교회에 대한 주님의 사랑은 "열렬하고 강합니다." 이것이 스가랴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집을 짓도록 격려한 방식이었습니다.

두 번째 환상

두 번째 환상은 짐승 뿔 네 개와 네 명의 대장장이에 대한 것이었습니다(1:18-21). 그 뿔은 당시 유다와 이스라엘을 지배했던 세계 강국을 상징합니다 - 애굽, 앗수르, 바벨론, 메대-바사. 우리 시대에는, 북쪽, 남쪽, 동쪽, 서쪽에서 교회를 공격하는 어둠의 세력을 상징합니다. 성경에서 뿔은 힘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이 뿔은 하데스의 문, 영적 죽음의 세력을 상징합니다. 이 뿔은 하나님의 백성을 "흩어버렸습니다"(1:19). 마귀의 일은 항상 신자들을 흩어버리고 나누는 것입니다 - 험담, 비방, 오해, 거짓 보고로 그들을 분리시킵니다. 사탄은 이 사업에 끊임없이 관여합니다.

"이 네 뿔에 맞서 주께서 나에게 네 대장장이를 보여 주셨다(1:20). 이 대장장이들은 뿔을 파괴할 것입니다. 대장장이들은 철을 두드려 모양을 만드는 강한 사람들입니다. 대장장이들은 유다를 흩어버리고 낮추었던 네 뿔들을 두렵게 하기 위해 왔습니다. 그들은 그 적들을 쓰러뜨리고 파멸할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종들을 상징합니다 - 학개, 스가랴, 여호수아, 스룹바벨. 오늘날 하나님은 북쪽, 남쪽, 동쪽, 서쪽에 선지자들을 일으켜 사탄을 두렵게 합니다. 당신은 사탄을 두렵게 하는 하나님의 종들 중 하나여야 합니다(1:21).

대부분의 신자들은 사탄과 마귀들을 두려워합니다! 언젠가, 나는 귀신 들린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나를 너무나 사나운 눈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당황했습니다. 나는 즉시 나의 믿음을 강화하기 위해 스스로 한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이 귀신은 갈보리에서 정복되었는가, 아니면 이 귀신은 도망쳤는가?" 나는 즉시 답을 알았습니다. 사탄과 그의 모든 귀신들은 갈보리에서 정복당했습니다. 그들 중 아무도 도망치지 못했습니다. 나의 마음에는 믿음이 즉시 솟아올랐고, 그들의 정복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탄이나 그의 귀신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탄이 당신의 집이나 교회에서 격렬하게 일하는 것을 보거나, 사람들이 당신을 대적하도록 선동할 때,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해보세요: "사탄은 십자가에서 패배했는가?"

우리는 사탄을 두렵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을 걸으셨을 때 어땠을까요? 그분이 어디를 가시든, 사탄은 두려워했습니다. 귀신들은 서로에게 소리쳤습니다: "예수가 온다. 예수가 여기 온다. 우리는 도망가자." 성경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그러하신 것처럼,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다"(요일 4:17)라고 말합니다. 양심이 깨끗하고 겸손하며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외에는 아무런 욕망이 없다면, 당신이 어디를 가든 귀신들은 예수님에 대해 한 말과 똑같은 말을 할 것입니다. "야, 그가 여기로 온다. 그녀가 여기로 온다. 이 사람은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달라. 이 사람은 겸손하고 양심이 깨끗해. 위험하다. 여기서 나가자."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있는 대장장이들처럼 귀신의 일을 망치로 두들겨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강해져야 합니다 - 요즘 많은 설교자들처럼 나이가 들수록 살찐 것과 부유한 것과 기름부음을 덜 받는 것과는 달라야 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금식하고, 덜 먹고, 더 단순하게 살고, 당신이 필요 없는 것을 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더 큰 기름부음을 구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참된 종이 살아야 할 방식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집단과 그 지도자들이 가는 길로 가지 마십시오. 다른 방향으로 가십시오 - 예수님과 초기 사도들이 간 길로 가십시오. 그들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강해졌습니다.

신명기 33장 25절에는 "네 날들이 어떠함 같이, 네 힘이 그러하리라"(KJV)라는 아름다운 약속이 있습니다. 나는 내 인생의 모든 날에 이 약속을 주장하고 싶습니다. 젊은이 여러분은 젊을 때부터 그 약속을 주장해야 합니다. "주님, 나는 사탄을 두렵게 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십시오.

세 번째 환상

세 번째 환상에서, 스가랴는 예루살렘의 길이와 너비를 재러 가는 사람을 봅니다(2:1-13). 이 환상은 사람이 교회의 힘을 구성원의 수로 판단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은 단 하나의 회원 명단만 가지고 있습니다 - 생명책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여기서 우리에게 교회를 실제로 측정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스가랴에게 말합니다, "예루살렘은 언젠가 사람들로 가득 차서 모든 사람을 수용할 공간이 없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성벽 밖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안전할 것이다." 이것은 소수의 사람들이 모인 작은 집단이었고, 그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누가 이 멸시받는 우리 집단에 들어오려고 하겠는가? 다른 유대인들은 모두 바벨론에서 편안하게 살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을 짓기 위해 애쓰는 작고 멸시받는 집단이다. 우리가 하는 일에 누가 관심이 있겠는가?"

천사가 그들을 격려하기 위해 와서 말했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너희에 대해 듣고 언젠가 와서 너희와 합류할 것이다." 오늘은 당신이 작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일은 매우 작게 시작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원칙을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신실하게 지킬 지도자를 찾을 수 있다면, 비록 그들이 소수일지라도, 언젠가는 동서남북에서 경건과 진리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점차 당신들의 집단에 대해 듣게 될 것이고, 하나님이 여러분들 가운데 계시고 여러분 안에 생명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여러분들에게 와서 함께하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주님은 그들에게 "내가 예루살렘(교회)을 둘러싼 불 성벽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2:5). 교회에는 세상적인, 교단의 장벽이 없습니다. 교리에 관한 동의서에 서명한다고 해서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참된 교회의 일부가 되려면 그 불의 성벽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그 불은 그의 모든 세상적 야망과 자신을 위해 살고자 하는 욕망을 태워버릴 것입니다. 그때서야 ​​그는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불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를 상상해보십시오. 당신은 그 도시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습니까? 오직 불 성벽을 통과해야만 가능합니다. 불태울 수 있는 모든 것은, 당신이 그 성벽을 통과할 때 하나님에 의해 불태워질 것입니다. 불태울 수 없는 것만이 불을 통과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태워 없애시는 불이십니다"(히 12:29). "누가 태워 없애는 불과 함께 거할 수 있겠습니까?"(사 33:14).

설교자들은 수년 동안 그 불에 물을 뿌리고 불을 꺼서 오늘날 누구나 세상적인 생각, 세상적인 야망, 세상에 대한 사랑을 모두 간직한 채 교회에 들어와 참여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교회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분은 어디에 계시든, 그 교회를 둘러싼 불 성벽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 가운데서 영광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당신의 교회에 있기를 원한다면, 그분이 당신의 교회를 둘러싼 불 성벽이 되도록 허락해야 합니다. 둘은 함께 갑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너무 높다고 말하고 불에 물을 뿌린다면, 당신의 교회에는 하나님의 영광 또한 없을 것입니다. 불 성벽이 사라지면, 영광도 사라집니다. 교리는 중요합니다. 하지만 어떤 교리도 불 성벽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불 성벽이 되셔야 합니다.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올바른 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면 올바른 교리가 뒤따를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없다면, 단순히 교리가 옳다는 것만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바벨론을 떠나서 오너라 예루살렘으로 피하여라"(2:6). 얼마나 대단한 말씀입니까! 우리는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백성에게 이것을 선포해야 합니다! 모든 신자는 바벨론에서 나오기 위해 선택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의 목덜미를 잡아서 그를 끌어내지 않으실 것입니다. 책임은 개인에게 있습니다. 당신이 그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말하지면, 나는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존중하지 않는 어떤 종교 체계의 일원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이 불 성벽 안에 모여 하나님의 영광을 그들 가운데 두고 있는,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교회를 세우고자 한다면, 이런 교회를 세우십시오. 다른 어떤 교회도 쓸모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교회를 짓기 위해서는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어딘가에서 본 패턴을 그대로 따라 하고 재현하려고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를 짓기 전에, 당신의 삶에서 불태울 수 있는 모든 것을 먼저 태우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당신 안에 있는 모든 세상적인 야망이 불타도록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사랑하지 않는 것은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은 미워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교회를 짓는 데 사용하시는 남자/여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소리치고 기뻐하라, 내가 너희 가운데 와서 살겠다" (2:10)고 말씀하십니다. 그 결과, 많은 민족이 와서 주님께 합류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2:11).

네 번째 환상

그런 다음 우리는 네 번째 환상(3:1-10)에 도달합니다. 이것은 씻음과 면류관에 대한 환상이었습니다 -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씻음과 면류관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는 두 가지 큰 이동이 있습니다 - 하나는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다른 하나는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의 이동입니다. 그리고 두 이동 모두에, 여호수아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한 여호수아가 있고,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인 여호수아가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닙니다. '여호수아'는 '구원자'를 의미하는 '예수'의 히브리어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모든 죄의 거인으로부터 승리로 이끄시는 분이며,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우리를 위해 중재하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여기서 여호수아를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지도자로 보기를 바랍니다. 이 지도자는 그의 삶에 죄가 있었지만, 의도적이거나 알고 지은 죄는 아니었습니다. 의도적인 죄였다면 매우 심각한 문제였을 것입니다. 바울은 "나는 나 자신에 대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내 양심은 깨끗합니다. 그러나 나를 판단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분은 내가 볼 수 없는 많은 것을 보십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죄를 보여주실 때마다 나는 그것을 고백하고 버립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를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고전 4:4 - 의역).

우리는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죽는 날까지 무의식적으로나 뜻하지 않게 죄를 지을 것입니다. 지도자들도 이런 식으로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세상 어느 곳에도 완벽하게 그리스도와 같은 지도자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조차도 그 정도의 완벽함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대한 한 가지 증거를 생각해 보세요: 그들이 대제사장의 뜰에서 바울을 때렸을 때, 바울은 화가 나서 대제사장에게 "하얀 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실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행 23:3). 하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때렸을 때, 그분은 대제사장을 위협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반응과 바울의 반응의 차이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했으며, 따라서 즉시 문제를 바로잡았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아무도 죄 없이 완벽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돌아오실 때에만 예수님과 같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있는 지도자들조차도 그 안에는 어떤 결함이 있을 것입니다. 교회의 가장 위대한 선지자들에게도 결함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결함 때문에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 나는 간음죄나 돈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심각한 문제이며, 분명 무의식적인 죄가 아닙니다! 나는 심각하진 않지만, 아직 그리스도답지 않은 작은 결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주님 앞에 서 있었고, 사탄은 그를 고발하기 위해 거기에 서 있었습니다. 사탄은 항상 지도자들을 고발하고 해치려 합니다. 사탄은 그들과 그들의 아내와 자녀를 표적으로 삼습니다. 지도자를 판단할 때 가혹하게 판단하지 마십시오. 그는 당신보다 사탄의 더 큰 표적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아내와 자녀는 당신의 아내와 자녀보다 사탄의 더 큰 표적입니다. 사탄은 주님께 여호수아를 고발하기 위해 거기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 여호와는 너의 고발을 거부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3:2). 우리에게는 아버지와 함께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변호인이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고발자에게 너무 몰두하여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변호인을 완전히 잊어버립니다.

지금 하늘에는 두 가지 사역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사탄의 고발입니다. 그는 욥과 여호수아를 고발했습니다. 동시에, 하늘에는 또 다른 사역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살아 계셔서 우리를 위해 중재하십니다"(히 7:25). 두 가지 사역은 고발의 사역과 중재의 사역입니다. 사탄과 교제하는 사람들은 다른 신자들을 고발할 것입니다. 당신이 다른 신자를 험담하거나 악하게 말할 때마다, 당신이 알든 모르든, 당신은 사탄과 손을 잡고 "사탄, 나는 네 말에 동의한다. 그는 그런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약한 형제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당신은 예수님과 손을 잡고 "주님, 나는 당신에게 동의합니다. 우리는 그 형제를 위해 기도하고 그를 그 문제에서 구해내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사탄과 몇 번 손을 잡았고 예수님과 몇 번 손을 잡았습니까? 당신은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달라지기를 바랍니다.

여호수아가 고발당했을 때, 주님은 "나는 너의 고발을 거부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고발을 가지고 나에게 올 때, 나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내 집에 와서 형제를 고발할 때, 나는 그들에게 "그 형제를 즉시 불러서 당신이 나에게 한 말을 전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언제나 고발하는 사람은 "아니요. 제발 그러지 마세요."라고 말합니다. 나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 나는 모든 형제에게 충실합니다. 누군가가 당신에 대해 뭔가를 말해 주었다면, 나는 즉시 당신에게 전화해서 말했을 겁니다. 그러니 당신이 다른 사람에 대해 뭔가를 말해 주면, 나는 그에게 전화해서 그에게도 말해야 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내가 접근한 결과가 어떤지 아십니까? 나의 집은 험담의 장소가 되지 않도록 보호되었습니다. 나는 여러분께 내가 한 일을 꼭 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주님은 사탄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네 고발을 거부한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는 내가 불에서 꺼낸 불탄 막대기이다." 여호수아의 옷이 더러웠기 때문에 천사는 "그 더러운 옷을 벗겨라"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변호인이신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그 더러운 옷을 벗겨라. 그에게 새 옷을 입히라"라고 탄원하시는 모습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제 그리스도의 의로움으로 옷을 입고 서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자녀를 보아야 하는 방식입니다 - 그리스도의 의로움으로 옷을 입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최고의 부분에 왔습니다. 스가랴는 이 모든 것을 보고 너무 기뻐서 영으로 주님과 합류하여 "주님, 이것은 훌륭합니다. 이제 그의 머리에도 멋진 관을 씌워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더러운 형제를 영광스럽게 만드는 일에 동참했습니다.

당신은 "형제를 영광스럽게 만드는" 이 사역에 참여하고 싶으신가요?

이것은 실제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누군가가 와서 나에게 형제를 고발할 때, 나는 "하지만 당신은 그에게도 좋은 자질이 있다는 걸 알잖아요."라고 대답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 중 몇 가지를 말합니다. 갑자기 고발하는 사람의 입이 닫힙니다. 기도할 때조차도 이런 사역이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존 하이드('기도하는 하이드'로 알려짐)는 20세기 초 북인도에서 활동한 위대한 미국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기도하면서 어떤 목사의 약점에 대해 주님께 말씀드리기 시작한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갑자기, 그는 숨이 막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성령께서 그에게 고발의 사역에 관여하지 말고, 그 사람을 위해 중보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그날, 기도할 때조차도 사람들을 고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마귀와 함께 하나님의 백성들을 비판하지 마십시오. 대신 그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주님께서 당신에게 하나님의 성실한 종을 상기시켜 주실 때마다, 그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는 바로 그 순간에 사탄의 공격을 받고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 그의 가족을 보호해 주시고 그의 사역을 축복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이것은 우리가 잘못을 무시하거나 죄를 간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죄와, 교리의 오류는 옛날 선지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무자비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말에는 고발자의 영의 냄새가 조금도 나서는 안 됩니다.

다섯 번째 환상

다섯 번째 환상에서, 주님은 스가랴에게 기름을 담을 그릇이 위에 있는 금 등잔대를 보여 주셨습니다(4:1-14). 등잔대 양쪽에는 올리브나무가 있었고, 그 나무에서 그릇으로 이어지는 파이프가 있었습니다. 구약 성경의 성전에서, 제사장들은 매일 등잔대에 기름을 부어 사용한 기름을 보충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기름이 나무에서 등잔대로 직접 흘러내렸습니다. 이 등잔대는 교회의 그림이고, 기름이 흐르는 것은 교회에 기름을 부으시는 성령의 지속적인 사역을 상징합니다(계 1:20).

두 나무는 주님께서 교회를 항상 신선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유지하기 위해 사용하시는 기름 부음받은 하나님의 종들을 상징합니다(4:14). 그들은 자신이 성령으로 충만하고 항상 성령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당신이 그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에게서 기름이 흘러나와 당신을 축복합니다. 교회에는 그런 하나님의 종이 많이 필요합니다.

학개와 스가랴는 함께 일할 수 있는 그런 두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종들은 자신의 사역이 다른 하나님의 종들의 사역과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한 나무는 한 쪽에서 기름을 붓고 다른 나무는 다른 쪽에서 기름을 붓습니다. 한 사람은 은혜를 강조하고 다른 사람은 진리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함께 할 때,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진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교회의 등잔대는 밝게 타오릅니다(요 1:14).

두 형제가 교회를 세우기 위해 그렇게 함께 일할 수 있는 곳에서 - 둘 다 성령으로 충만하고 경쟁, 질투, 개인적 야망, 또는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모습을 보이고자 하는 욕망 없이 - 단지 등잔대가 타오르기를 바랄 뿐이라면, 그들은 지옥의 문이 결코 이길 수 없는 교회를 세울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여호수아와 스룹바벨, 학개와 스가랴, 또는 주님을 위해 함께 일하는 두 형제나 남편과 아내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새 언약 사역입니다.

주님께서 스룹바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힘이나 권세로 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영으로 되는 것이다. 모든 산이 너희 앞에서 평평해질 것이다"(4:6). 교회가 이런 식으로 성령으로 충만해져서 전진할 때, 지옥의 문들은 그것을 이길 수 없을 것입니다.

2장에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역이 교회를 둘러싼 불 성벽인 것을 보았습니다.

3장에서, 우리는 하나님 아들의 사역이 하나님의 지도자들과 하나님의 백성의 대변자가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4장에서, 우리는 성령 하나님이 교회를 채우고 기름 부으시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 장에서 삼위일체 전체를 볼 수 있습니다.

여섯 번째 환상

그런 다음 여섯 번째 환상으로 넘어갑니다. 여기서 스가랴는 길이 10미터, 너비 5미터의 날아다니는 두루마리를 봅니다(5:1-4). 주님은 "이 두루마리에는 거짓말하고 도둑질하는 모든 자에게 내려지는 율법의 저주가 들어 있다. 나는 모든 도둑과 거짓말하는 자의 집에 저주를 내리고, 내 저주는 그 집을 완전히 파괴할 것이다."(5:3, 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자들에 대한 심판의 그림으로, 모든 집에 들어가 숨겨져 있는 죄를 드러냅니다.

일곱 번째 환상

일곱 번째 환상에서 스가랴는 곡식을 재는 바구니(사업의 상징)에 무거운 납 뚜껑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뚜껑을 들어올리자, 스가랴는 그 안에 "사악함"이라는 여자가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후 두 여인이 와서 바구니를 바벨론으로 가져가, 그곳에 그것을 위한 성전을 세우려 했습니다(5:5-11).

이 환상은 기독교가 금전적 이익의 수단이 된, 거짓 교회를 상징합니다 - 종교와 사업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요한계시록 17장과 18장의 "바벨론" 참조). 바구니 안에 숨은 여자는, 오늘날 기독교 사역이라고 불리는 많은 일의 배후에 숨겨진 동기가 돈을 벌고자 하는 욕망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분별력이 없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재정 문제에서 자신의 불의를 가리는 뚜껑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분의 선지자들에게 그분의 백성 가운데서 발견되는 부패를 보여 주십니다.

우리는 이 바벨론의 영이 교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사람들은 성전 안에서 장사를 하고 종교의 이름으로 돈을 벌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제물로 양과 비둘기가 필요했고 이 판매자들이 자신들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납 뚜껑 아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즉 비둘기와 양을 파는 동기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위해 순이익을 챙기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에도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많은 설교자가 종교의 이름으로 돈을 벌며 "일꾼은 그의 품삯을 받을 자격이 있다"와 "주께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살도록 정하셨다"와 같은 구절을 인용합니다. 하지만 이 납 뚜껑 아래를 들여다보면, 그 아래에 숨어 있는 여자 바벨론이 보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보고 그 종교적 사기꾼들을 성전에서 몰아냈습니다.

여덟 번째 환상

여덟 번째 환상에서 스가랴는 두 놋쇠 산 사이로 네 대의 전차가 오는 것을 봅니다(6:1-8). 성경에서 놋쇠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합니다. 짐승을 제물로 바친 성막의 제단은 놋쇠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네 대의 전차는 놋쇠 산 사이에서 나왔습니다. 그들은 통제되지 않는 말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의 고삐를 통제하셨습니다. 계시록 6장에서처럼 붉은 말, 검은색 말, 흰색 말, 회색 말이 있었습니다. 스가랴는 이것들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물었습니다. 대답은 "이것들은 온 땅의 주님 앞에 서 있는 하늘의 네 영이다. 그들은 그분의 일을 하려고 나간다"였습니다(슥 6:5). 어떤 영들은 북쪽으로, 어떤 영들은 서쪽으로, 어떤 영들은 남쪽으로 갔습니다. 그들은 온 땅을 돌아다니며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한 곳에 홍수를, 다른 곳에 지진을 보내 심판을 내리셨을 수도 있습니다. 이 영들이 돌아왔을 때, 주님은 "북쪽으로 간 자들이 내 영의 분노를 거기에 쏟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6:8). 즉, 그 사람들에게 심판을 내린 후에 하나님의 분노가 완전히 소진되었음을 뜻합니다.

그런 다음 주님은 스가랴에게 어떤 사람들이 바벨론에 있는 유대인들에게서 은과 금을 선물로 가져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스가랴는 그들의 선물을 받고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위해 왕관을 만들었습니다(6:10,11). (우리보다 부유한 사람들) 경건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선물을 줄 때, 우리는 그것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엘리사는 부유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여인에게서 정기적으로 환대의 선물을 받았습니다(왕하 4:8). 그러나 그는 이교도인 나아만에게서는 어떤 선물도 받기를 거부했습니다(왕하 5:15,16). 예수님께서도 부유하고 경건한 어떤 여인에게서 선물을 받으셨습니다(눅 8:2,3). 그러나 사도들은 결코 믿지 않는 사람에게서 돈을 받지 않았습니다(요삼 7).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통해 우리에게 선물을 주실 때, 그것은 항상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을 사용하여 다른 사람들 또한 축복해야 합니다. 여기서 스가랴는 모든 금과 은을 사용하여 여호수아를 위한 왕관을 만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는 또한 여호수아의 머리에 왕관을 씌우고 여호와께서 "여기에 가지(branch)라 불리는 사람이 있다. 그는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할 것이다. 그는 왕으로 통치할 것이다. 그는 또한 그의 보좌에서 제사장으로 섬길 것이다. 그리고 둘 사이에 완전한 조화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그를 격려하셨습니다(6:12,13). 이것은 하나님의 참된 성전인 교회를 세우실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또한 최초의 왕-제사장이 되실 것입니다. 옛 언약 아래에서는, 아무도 왕이자 제사장이 될 수 없었습니다. 사울 왕은 둘 다 되려고 했고 그로 인해 그의 왕국을 잃었습니다(삼상 13:9-13). 웃시야 왕도 왕이자 제사장이 되려고 했고 나병에 걸렸습니다(대하 26:16-23). ​​예수님은 왕이자 제사장이 되실 첫 번째 분이셨습니다. 이제 그분은 우리를 그분과 함께 왕-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계 1:6). 예언은 계속해서 많은 나라로부터 사람들이 와서 교회를 세울 것이라고 말합니다(6:15).

스가랴의 메시지

그러고 나서 주님은 스가랴에게 7장과 8장에서 금식, 위선, 불순종에 대한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렇게 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유배된 칠십 년 동안 금식할 때, 너희가 금식한 것이 정말로 나를 위한 것이었느냐? 지금도 너희의 거룩한 절기에도, 너희는 나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희 자신을 기쁘게 할 생각만 하고 있다"(7:5,6).

주님께서 모든 선지자를 통해 선포하신 메시지는 똑같았습니다: "공정하고 정직하라.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와 친절을 베풀어라. 가난한 자와 과부와 고아와 외국인을 억압하지 말라. 서로 해치지 말라. 그렇게 해야만 너희의 금식(과 빵 떼는 것) 등이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다"(7:9,10). 하나님은 가난한 자와 약한 자와 억압받는 자를 크게 돌보십니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한 설교자 대부분은 부자들이 있는 대도시에서만 설교하며 - 그들에게 "번영의 복음"을 설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오셨습니다(눅 4:18; 마 11:5).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 과부와 고아, 무력한 사람들을 특별히 돌보십니다. 하나님의 모든 참된 종들도 그들을 돌볼 것입니다.

유대인의 조상들은 이 메시지를 듣지 않고 외면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벌하시고 흩으셨습니다(7:11).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분은 시온산(교회)에 대한 사랑이 열정적이고 강하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교회)이 결코 부패해서는 안 된다고 질투하십니다. 주님은 그분 자신을 위해 신부를 "충실하고 거룩하게" - 순수하고 타락하지 않게 지키기를 원하십니다(8:1-3).

그분은 계속해서 교회에는 나이든 남자와 여자, 어린 소년과 소녀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8:4,5).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에는 세대 간 격차가 없을 것입니다. 나는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교회에서 가장 어린 소년 소녀의 수준으로 내려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방문하는 모든 집에서 어린 소년 소녀에게 말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많은 형제들은 집을 방문할 때 나이 든 사람에게만 말합니다. 우리도 아이들과 말하는 법을 배우도록 합시다. 경건한 사람은 항상 아이들과 그들의 수준에 맞춰 말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분이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보는 또 다른 것은 교회에서, 소년 소녀들이 놀이를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8:5). 그들은 항상 기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할 시간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놀 시간도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놀이를 장려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천년 왕국 동안은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제 축구장에서 뛰어다니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나의 영은, 여전히 놀이를 좋아합니다. 사람들이 함께 놀이를 할 때 교제가 쌓입니다. 그것은 사람들 사이에 유대감을 형성합니다. 균형 잡힌 복음을 주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모든 것이 지금은 하나님 백성의 작고 낙담한 남은 자들에게는 불가능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나 만군의 여호와께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느냐? 나는 내 백성을 예루살렘(교회)에 안전하게 살도록 다시 데려올 것이다.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그들의 하나님으로서 그들에게 충실할 것이다"(8:6,8).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용기를 내어 그분의 교회가 완성되고 온전해질 때까지 계속해서 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거나 낙담하지 말고, 오히려 성전(교회)을 재건하는 일을 계속하라!"(8:9-13). 스가랴 시대의 사람들에게 성전을 짓기 위해 열심히 일하도록 고무시킨 것은 이런 격려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 교회를 세우도록 사람들을 고무시킬 격려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와서 교회의 일원이 되려고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교회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8:20-23).

스가랴의 부담

마지막 부분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메시아 거부(9~14장)와 메시아의 지상 통치(12~14장).

스가랴는 먼저 교만함과 오만함으로 인한 여러 나라에 대한 주님의 심판의 부담을 표현합니다(9:1-8). "블레셋 사람들의 교만함"(9:6)과 대조적으로, 예루살렘의 왕은 (지상의 왕들이 했던 것처럼) 말을 타지 않고 나귀를 타고 큰 겸손함으로 올 것입니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오신다...... 겸손하여, 나귀를 타고...... 내가 이스라엘에서 병거를 치우고, 예루살렘에서 군마를 치우고, 전쟁에 쓰이는 모든 무기를 멸하리라. 네 왕은 평화를 가져올 것이다"(9:9,10). 이 겸손한 왕은 전쟁의 영을 평화의 영으로 대체할 것입니다. 교회는 오직 겸손과 평화의 영으로만 세워질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지옥으로부터의 구원에 대한 예언이 나옵니다: "내가 너희와 맺은 피로 봉인된 언약 때문에, 내가 너희 갇힌 자들을 물 없는 지하 감옥의 죽음에서 해방시키리라"(9:11).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예언이 나옵니다: "주께서 그의 백성 위에 나타나실 것이요...... 주권자 여호와께서 나팔을 불며; 회오리바람과 같이 그의 원수들을 치시리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보호하시리니, 그들이 원수들을 정복하리라...... 그 날이 오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치 목자가 양을 구하는 것처럼 그의 백성을 구원(휴거)하실 것이다. 그들은 왕관의 보석처럼 빛날 것이다. 얼마나 놀랍고 아름다울까요!"(9:14-17). 스가랴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때에 주님의 적들의 패배와 하나님의 백성의 승리에 대해 많이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스가랴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다"(10:1)라고 촉구했습니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큰 필요입니다 - 하나님께서 메마른 땅에 비를 내리시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분의 영을 부어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스가랴가 예언한 것처럼, 그분은 분명히 우리에게 그 부으심을 주실 것입니다!

그런 다음 스가랴는 그가 "복술자(점쟁이)"라고 부르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 경고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봤다고 주장하는 거짓 환상에 대해 말합니다(10:2). 그들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거짓말을 합니다. 오늘날 많은 곳에서 신자들이 조언을 구하는 소위 "선지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변함없이 물질적인 것과 재정적 번영에 대한 조언을 구합니다. 이 "선지자"들이 구약성경의 선지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에게 그들의 죄에 대해 말합니까? 아닙니다. 이들은 그들을 행복하게 하는 말로 그들의 귀를 즐겁게 합니다. 모든 종교에 그런 "점쟁이"가 있으며 그들은 모두 돈을 위해 그렇게 합니다. 그리스도인 "점쟁이"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 집단의 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속지 마십시오. 그들의 위협이나 경고에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번영을 약속하는 그들의 말에 속지 마십시오.

그들이 여러분의 돈을 원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이 거짓 선지자이며 사탄의 요원임을 증명합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참된 대표자라면, 그들은 당신이 그들에게 돈을 줄 것을 기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당신이 "점쟁이"와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를 구별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참된 선지자를 찾고 싶다면, 당신에게 당신의 죄에 대해 말하고 당신을 겸손과 자기 부인의 그리스도와 같은 삶으로 인도할 사람을 찾으십시오.

사람들이 이런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듣기 때문에, 마치 "보호해 줄 목자가 없는 길 잃은 양처럼 방황하는 것"입니다(10:2). 그러므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분노가 이 목자들에게 타오르고, 이 지도자들을 벌할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친히 그분의 양 떼를 돌보실 것이다"(10:3).

"유다에서 모퉁잇돌과 장막 말뚝과 전쟁 활과 모든 통치자들이 나올 것이다. 그들은 싸움에서 강한 용사들과 같아, 그들의 적을 발 아래 진흙 속에서 짓밟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므로 그들이 싸우면, 적의 기병도 무너뜨릴 것이다"(10:4-5). 모퉁잇돌, 장막 말뚝, 전쟁 활은 모두 그리스도의 그림입니다. 강력한 용사들은 하나님의 성도들의 그림입니다. 원수들은 사탄과 그의 군대, 그리고 우리 육신의 정욕입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 이 모든 원수들은 무너지고 우리 발 아래 짓밟힐 것입니다(롬 16:20). "내가 유다를 굳건히 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겠다; 내가 그들을 사랑하므로 그들을 다시 세우리라"(10:6). 주님은 (유다와 이스라엘처럼) 서로 분리된 그분의 백성의 무리를 연합시키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모아 하나의 몸으로 세우실 것입니다.

11장에서, 우리는 다시 선한 목자와 악한 목자에 대해 읽습니다. 악한 목자는 돈을 버는 데 관심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그들을 폭로하셔서 돈을 버는 수단이 없어졌을 때 울었습니다(11:3). 그들은 이익을 위해 양 떼를 압제하고 양을 도살했습니다(11:4-7).

그런 다음 우리는 은혜와 연합에 대해 읽습니다. "나는 두 목자의 지팡이를 가지고 하나는 은혜라 하고 다른 하나는 연합이라 하며, 시키는 대로 양 떼를 먹였노라"(11:7). 오늘날 교회에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메시지는 "은혜"와 "연합"에 관한 것입니다. 은혜는 우리를 죄에 대한 승리로 인도할 것입니다(롬 6:14). 죄를 이기는 것은 우리가 완전히 은혜 아래 왔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입니다. 우리가 죄 사함을 받을 때, 우리는 약간의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완전히 은혜 아래 있을 때, 죄는 우리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첫 번째는 물 한 잔과 같고, 두 번째는 강물과 같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에서 선포해야 할 가장 중요한 메시지 중 하나입니다. 이 은혜와 성령이 부어지는 것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때 서로 연합해야 합니다. 그것은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모든 사람과의 연합이 아니라, 은혜를 받고 죄에 대한 승리 안에서 사는 모든 사람과의 연합입니다.

그러다가 유다가 그리스도를 배신할 것에 대한 예언이 나옵니다, "내게 합당한 대가를 주시오...... 그래서 그들은 은화 서른 개를 세어 주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그것을 토기장이들에게 던져라 - 그것은 그들이 나의 값을 매긴 상당한 값이다!' 그래서 나는 서른 개의 동전을 가져다가 주님의 성전에 있는 토기장이들에게 던졌다"(11:12,13).

그러고 나서 하나님께서는 은혜와 기도의 영, 혹은 은혜와 탄식의 영을 그분의 백성에게 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12:10). 로마서 6장에서, 우리는 은혜의 영에 대해 읽습니다. 로마서 8장에서, 우리는 탄식의 영에 대해 읽습니다. 성령은 은혜의 영으로 오셔서 우리가 죄를 이길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분은 또한 탄식의 영으로 오셔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부르짖어 교회를 세우게 하십니다.

그 날에 죄를 씻어주는 샘이 열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샘이 열리려면 목자가 쓰러져야 합니다(13:1,7). 여기의 예언은 그리스도의 첫 번째 오심 때 일어났던 일과 그분의 두 번째 오심 때 일어날 일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돌아오실 때, 하나님께서는 "모든 거짓 선지자들과 그들에게 영감을 주는 더러운 영들을 제거하실 것이다. 그러면 아무도 예언의 은사를 자랑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백성을 속이려고 선지자의 옷을 입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나는 선지자가 아니다'라고 말할 것이다"(13:2-4).

그리고 스가랴는, 대부분의 선지자들처럼, 마지막 날에 주님께 충실하게 서 있을 남은 자들에 대해 예언합니다(13:8,9). 주님은 이 남은 자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들을 불 가운데로 인도하여 금과 은이 불로 연단되고 정화되는 것과 같이 정결하게 하리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대답하리라. 내가 이르기를, '이들은 내 백성이'라' 하면 그들이 이르기를, '여호와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하리라"(13:9).

마지막 장에서, 스가랴는 예수님께서 돌아오셔서 올리브 산에 서시고 그 산이 둘로 갈라질, 다가올 주님의 날에 대해 말합니다(14:3,4). 그때가 되면 열방이 전쟁을 위해 예루살렘 주위에 모일 것입니다(14:2). 오늘날 예루살렘을 놓고 벌어지고 있는 분쟁은 우리 주님이 재림하시기 직전에 그곳에서 벌어질 전투의 첫 단계에 불과합니다. 주님이 돌아오는 날에는, 평소의 빛(해, 달, 별 등)의 근원이 더 이상 빛나지 않게 될 것이며, 주님 자신이 빛이 될 것입니다(14:6,7).

주님의 원수들은 패배할 것입니다. 그들의 살이 썩어 떨어지고 눈이 눈구멍에서 쪼그라드는 것은 어떤 종류의 핵폭발에 노출되었음을 나타내는 듯합니다(14:12). 그 후 주님은 예루살렘에서 온 땅의 왕으로 통치하실 것입니다(14:9,16).

그날에는 교회에 사업가가 없을 것입니다(14:21).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신을 위해 이익을 취하려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깨끗해질 것입니다. 이익의 원칙(기독교를 통해 가능한 한 많은 것을 얻는 것)은 바벨론의 원칙입니다. 그러나 희생의 원칙(가능한 한 많은 것을 주는 것)은 예루살렘의 원칙입니다.

장 39
말라기

능력 없는 모습

말라기는 그리스도의 선구자인, 세례자 요한보다 앞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보내신 마지막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느헤미야 시대가 끝나갈 무렵인 그리스도보다 약 430년 전에 예언했습니다. 말라기가 2장과 3장에서 언급한 죄 중 일부는 느헤미야 13장에 언급된 죄와 비슷합니다. 느헤미야의 경고는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 듯합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을 떠난 후, 유대인들은 다시 옛날의 죄악스러운 습관으로 돌아간 듯합니다. 말라기가 등장했을 당시 상황은 정말 나빴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항상 영적 생존을 위한 경건한 지도자들에게 의존해 왔습니다.

주님의 부담

'말라기'라는 단어는 '나의 사자'를 의미합니다. 다른 선지자들처럼, 말라기 역시 ​​짐을 지고 있었습니다. 각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고유한 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 모두는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거룩함이 부족한 것에 대해 염려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에 두시는 부담은 거의 항상 그분이 당신을 위해 계획하신 사역의 표시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으로부터 부담을 받도록 기다리십시오. 당신이 부담 없이 주님을 섬긴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주님의 사역에 지루함을 느끼고, 결국 돈이나 사람의 명예, 세상적 안락함을 추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주님을 섬긴다고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사역을 위한 하나님께서 주신 부담이 없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는 아이들 가운데서 일하라는 부담을 주시고, 다른 사람에게는 전도하라는 부담을 주실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을 가르치라는 부담을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몸의 각 지체에게 각기 다른 부담을 주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사역을 모방하거나 그의 부담을 가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당신의 부담을 지우도록 강요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당신에게 그의 부담을 지우도록 허용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부담을 주시게 하십시오 - 그것은 그분께서 당신을 위해 계획하신 부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그들의 특정 사역, 보통 복음 전도에 대한 부담을 지라고 촉구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항상 그런 압력을 저항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 주신 부담을 지는 데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특정한 부담을 주셨고 나는 그것이 내가 성취할 유일한 사역이라고 결심했습니다. 선지자들은 누구도 자신들을 하나님께서 주신 부담과 사역에서 곁길로 새게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만약 당신에게 전혀 부담이 없다면, 당신은 하나님께 가서 부담을 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그분은 당신이 그리스도의 몸에서 성취할 확실한 임무를 가지고 계시고 당신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많은 설교자들은 한 사역에서 다른 사역으로 옮겨 다니며 가장 높은 급여를 제공하는 기독교 조직에 합류합니다. 예를 들어, 그들은 라디오 사역에 대한 명백한 "부담"으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아동 전도 단체가 그들에게 더 높은 급여를 제안하면, 그들은 갑자기 아동 전도에 대한 "부담"을 갖게 됩니다! 조금 후에, 어떤 기독교 문학 단체가 그들에게 더 높은 급여를 제안하면, 그들의 "부담"은 갑자기 문학 사역으로 옮겨갑니다!! 그런 설교자들은 주님을 섬기지 않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의 "사업"에 종사하는 종교인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부담을 주실 때, 어떤 조직이 당신에게 더 나은 세상적 혜택을 제공했다고 해서 그 부담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여기서 그분의 백성에 대해 불평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깊이 사랑하였노라. 그런데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떤 점에서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1:2). 말라기의 예언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그분의 백성에게 무언가를 말씀하실 때마다, 그들이 (여기에서 한 것처럼) 일곱 번이나 그분께 질문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했습니다. 그것은 사탄이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 사탄이 하와를 유혹했을 때, 그는 먼저 그녀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심을 심었습니다. 유혹이 암시하는 것은 "하나님은 너를 정말로 사랑하지 않으신다. 만약 사랑했다면, 그분은 너에게 이 아름다운 열매를 먹도록 허락했을 것이다."였습니다. 그것은 하와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녀는 "어쩌면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으실지도 몰라"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쉽게 죄에 빠졌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셨을 때, 그분은 "사탄이 너희를 밀처럼 체질하도록 허락을 요구하였노라. 그러나 나는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22:31, 32). 주님은 베드로가 죄의 깊은 곳(주님을 세 번 부인함)에 빠진 후에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탕자가 가졌던 믿음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엉망으로 만들고 모든 것을 잃은 후에도, 여전히 한 가지를 믿었습니다 -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당신도 자신의 삶을 엉망으로 만들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 사실에 대한 믿음을 결코 잃지 마십시오. 당신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잃었을 때, 이 한 가지 변함없는 사실을 붙잡으십시오 - 하나님께서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에서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1:2-5에서, 하나님은 야곱을 선택하신 주권적인 방식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내가 네 조상 야곱을 사랑함으로써 너희를 사랑함을 보였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었지만, 나는 에서를 버렸노라. 하지만 나는 너희를 택하였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무엇보다도, 그분께서는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 죄를 위해 죽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전 세계의 수백만 명의 사람들 중에서 우리를 택하셔서 생명의 길을 찾을 소수의 사람들 가운데 포함시켰습니다. 왜 우리를 택하셨을까요?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의로웠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회심하지 않은 친구와 친척이 있습니다 - 인간적으로 말해서, 그들은 우리보다 더 나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들이신 것은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시궁창에서 건져내신 죄인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할 하나님의 사랑의 한 가지 증거입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 중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을 택하셔서, 이 우주에 그 어떤 것도 창조하기 전에 당신의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하셨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그것은 그분의 주권적인 선택이었습니다.

로마서 9:11-13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들이 태어나기 전이고, 선이나 악을 행하기 전에, 그녀(리브가)는 하나님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이 메시지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선이나 악한 행위가 아니라, 그분 자신의 계획에 따라 선택하신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녀는 '네 큰 아들의 후손이 네 작은 아들의 후손을 섬길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성경의 말씀에 따르면, '나는 야곱을 사랑했지만 에서는 버렸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를 선택하신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읽습니다. 그것은 선행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주님을 먼저 선택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5:16에서, 예수님은 매우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였노라." 이 말씀을 절대 잊지 마십시오.

이스라엘의 타락한 지도자들

1:6에서, 우리는 "만군의 주께서 제사장들에게 말씀하시되......"라는 말씀을 읽습니다. 하나님께서 지도자들에게 먼저 말씀하시는 것을 다시 한번 주목하십시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틀어, 그들을 죄로 이끈 것은 항상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회 역사의 20세기에서도, 교회를 타협과 세속화로 이끈 것은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때때로,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선지자는 그들에게 그들의 실패를 말했습니다. 그리고 거의 항상 지도자들은 그를 미워하고 박해했으며 그가 일반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를 거짓 선지자라고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의 의견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거짓 선지자들처럼, 누구의 돈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참 선지자들은 그들의 메시지가 지도자들을 화나게 했더라도 진리를 선포했습니다. 이는 교회 역사를 통틀어 늘 같은 이야기였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집단의 많은 교회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확실히 하나님으로부터 예언적 말씀을 전하는 방법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눈먼 자들의 눈먼 지도자들처럼, 그들은 교회를 타협과 세속화의 도랑으로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때때로, 옛날처럼,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들에 그분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선지자를 일으키십니다. 그리고 변함없이 그러한 선지자는 이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거부당합니다 - 그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사람에게 위협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제사장들과 지도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말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공경하고 종은 주인을 공경한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 아버지요, 너희 주인이다. 너희가 나에게 바치는 공경과 존경은 어디에 있느냐? 너희는 내 이름을 멸시하였다. 너희는 나보다 너희 회중의 부자들을 더 사랑한다. 너희는 내 말을 신경도 안 쓴다. 너희는 그저 부자들을 기쁘게 하고 그들의 돈을 챙기고 싶어한다. 너희는 어디에서 나를 공경하는가? 내가 정말 너희 아버지인가? 내가 정말 너희 주인인가? 너희는 어떤 제물을 내게 바쳤느냐? 너희는 더럽혀진 제물을 내게 바쳤다.'"(1:6-8 참조).

이 지도자들은 사람들에게서 공경을 원했지만, 그들 자신은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 대한 권위를 원했지만, 주님께서 그들에게 어떤 권위도 가지도록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한 로마 백부장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권위 아래 있는 사람이고 군인들에 대한 권위가 있습니다. 제가 군인에게 '가라' 하면 가고, 다른 군인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눅 7:8). 권위를 가지려면 권위 아래 있어야 합니다. 자녀가 우리를 존경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아내가 당신에게 복종하기를 원한다면, 당신 자신을 그리스도께 복종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그분의 백성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네가 나를 존경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아내에게 존경을 요구할 수 있느냐? 내가 네 남편이 아니냐? 네가 나를 존경하는 만큼만, 네 아내에게 존경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이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너희가 하나님께 부정한 제물을 바치는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다"(1:8).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그들은 눈먼 동물, 절름발이 동물, 병든 동물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쳤습니다. 구약성경의 율법은 제물로 바치는 모든 동물은 흠이 전혀 없어야 한다고 분명히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이 유대인들은 좋은 동물은 자기가 갖고, 병든 동물은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들은 양 떼에서 가장 나쁜 동물을 골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많은 신자들이 주님께 무엇을 드립니까? 남은 것을 드립니다. 그들은 공직에서 은퇴한 다음 "주님을 섬기기 위해" 기독교 단체에 가입하고 싶어합니다!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의 삶의 가장 좋은 부분을 이미 세상에 바쳤고, 이제 그들은 자신의 인생의 찌꺼기 같은 시기를 주님께 바치면서 은퇴 후에 돈을 더 벌려고 합니다!!

주님은 "그것을 총독에게 바쳐 보아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1:8). 당신은 세상의 총독에게 선물을 줄 때, 집안에 있는 것 중에서 가장 나쁜 것을 골라 주나요? 주지사가 당신의 집에 와서, 당신이 그에게 차 한 잔을 주고 싶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차를 한 잔 끓여서 당신이 거의 다 마셔버리고, 남은 찌꺼기를 그에게 주겠습니까? 아니요. 거지에게조차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많은 신자들이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들은 대부분의 삶을 세상을 위해 살다가 마지막 남은 삶을 주님께 바칩니다. 그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주님께 최고를 드리세요. 젊을 때 그분께 당신의 삶을 드리세요.

많은 신자들은 자신의 시간을 이렇게 사용합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자신의 모든 관심사를 추구하는 데 보낸 후에, 그들은 주님께 약간의 시간을 드립니다. 그런 신자들이 기름부음을 받지 못하고 영적으로 가난한 것은 당연합니다.

당신의 지성은 어떻습니까? 당신은 그것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사용합니까?

모든 영역에서 그분께 최고의 것을 드려 그분을 공경하는 법을 배우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당신의 삶에 임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그 차를 마시기 전에 그분께 먼저 가득 찬 잔을 드리세요. 그분께서 원하시는 것을 취하신 후에, 그분께서 당신에게 찌꺼기를 주시게 하세요. 우리는 매일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 삶과 시간의 가장 좋은 부분은 주님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 삶을 주님께 온전히 드린다는 것은 전임 사역자가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첫째로 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 하나님께서 당신을 전임 그리스도인 사역으로 부르시든 세속적인 직업으로 부르시든 상관없습니다.

말라기 시대의 유대인들은 주님께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은 것을 드렸습니다. 그들은 예배하는 법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그분께 최고의 것을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라기는 유대인 시대가 끝나갈 무렵에 예언했기 때문에 우리 시대를 위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하나님의 백성들의 상황은 교회 시대 말기인 지금 하나님의 백성들의 상황과 매우 비슷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집단에서는 말라기의 메시지를 전하는 선지자가 필요합니다. 주님의 재림을 위해 사람들을 준비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내 이름은 영광을 받을 것이요, 온 세상 모든 곳에서 내 이름을 위한 순수한 증거가 있을 것이다"(1:11). 이것이 오늘날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 세계 모든 곳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큰 제물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인도의 모든 곳에서 순수한 제물을 원하십니다. 구약의 용어로 말하자면, 병든 큰 황소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작은 양이지만 건강하고 티가 없는, 흠 없는 어린 양이어야 합니다. 주님은 그 당시 크기나 무게가 아니라, 질적인 면을 보셨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분은 큰 교회가 아니라 순수한 교회를 찾으십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교회를 세우려 한다면 크기에 상관없이, 순수한 교회여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세요. 세상적인 사고방식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순수함보다는 크기에 감명 받게 합니다. 물론 우리는 수백만 명이 주님께 오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제자가 되어야지, 단지 결심 카드에 서명하거나 복음전도 집회에서 (강단) 앞으로 나온 사람들이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크고 병든 황소보다 작지만 건강한 산비둘기를 더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1:14에서 "저주받은"이라는 단어를 읽습니다. 이 단어는 말라기서에서 일곱 번 나옵니다 -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 단어입니다 - 구약성경의 마지막 단어입니다. [하지만 '만군의 주'라는 표현은 24번 나옵니다. 하늘과 땅의 통치자이신 주님이 바로 우리가 섬기는 분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지도자들에게서 타협과 세속성을 보면 낙담하고 실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다 보면 타락하기 쉽습니다.

나는 어린 시절에 기독교 사역자들, 기독교 교회들, 기독교 기관에서 많고, 많고, 많은 실망을 했습니다. 하지만 나의 인생이 끝날 때까지 주님을 충실히 섬기고자 하는 열망은 결코 바뀌지 않았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위해 여기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나는 나의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리기로 결심했습니다.

말라기서 2:1-3에서, 말라기의 메시지는 다시 제사장들에게 전달됩니다. "나는 회중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연단에 앉아 있는 지도자들에게 말하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명심하라",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을 공경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에게 끔찍한 저주를 내리겠다. 나는 너희가 받는 축복도 저주하겠다. 사실, 나는 이미 그것들을 저주했다. 너희가 내 경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 후손을 책망하고, 너희 얼굴에 너희 절기 제사 제물의 똥을 뿌리고, 너희를 그 똥 더미에 함께 버릴 것이다."

이 선지자들은 장식된 설교단 뒤에 서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기분 좋은 말을 하는 온화하고 친절한 설교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강한 말을 사용했습니다. 설교자가 와서 "내가 너희 얼굴에 똥을 뿌릴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어떤 기분이 들겠습니까? 이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상황이 너무 나빴기에 강하게 말했습니다. 개인적인 대화에서 친절하고 은혜롭고 친절한 것은 괜찮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일어설 때는 사자와 같아야 합니다. 설교단에서는 사자가 되고 밖에서는 어린 양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모든 설교자에게 이렇게 권하고 싶습니다.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그분은 강한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말라기는 "내가 이 경고와 함께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을 너희가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2:4).

하나님의 참된 종들의 자질

2:5,6에서 말라기는 당시의 레위인들을 옛날의 레위인들과 비교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초대 사도들의 모습이 어땠는지, 그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던 모습을 상기시켜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 자신을 그들과 비교해 보아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레위 사람들과 맺은 언약의 목적은 생명과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었다. 이것이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었고, 이것은 그들에게 경외를 요구했다 - 그리고 그들은 나를 크게 경외했다."

5,6절에서, 초기 레위인들의 특징이었던 일곱 가지 특성을 주목하십시오 - 이러한 특징은 하나님의 모든 종에게 해당되어야 합니다.

1.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는 지혜의 기초입니다.

2.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신경을 썼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땅에서 예수님의 이름이 공경받고 존경받기를 간절히 바라야 합니다.

3. 그들은 하나님의 모든 진리를 설교했습니다. 많은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모든 교훈을 설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인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타협자가 됩니다. 나는 언젠가 내가 단독 연설자가 되는 집회에 초대되었습니다. 모임이 시작되기 일주일 전에, 주최측에서 나에게 편지를 보내서 어떤 모임에서도 물 세례에 대한 주제로 연설하지 말라고 요청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지 않도록요. 나는 답장을 보내서 그럴 경우 다른 설교자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하고 무슨 말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지시를 받는다면 어디에서든 연설 초대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주님의 종으로서, 나는 주님께서 내 마음에 두신 대로 말해야 했습니다.

4. 그들은 죄를 미워했습니다. 그들은 거짓말을 하거나 속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죄에 대한 미움이 있었습니다.

5.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걸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매일 동행하는 삶을 소중히 여기며 지켜나갔습니다.

6. 그들은 올바르게 살았습니다. 그들의 삶의 모든 것에서 - 돈을 다루는 방식, 처신하는 방식 등 - 그들은 올곧고 비뚤어진 것이 없었습니다.

7. 그들은 많은 사람을 죄에서 돌이켰습니다.

그 두 구절(2:5,6)에서, 우리는 참된 설교자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를 볼 수 있습니다.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며, 사람들은 교훈을 얻기 위해 그들에게 가야 합니다. 제사장들은 여호와의 사자이기 때문이다"(2:7). 우리는 먼저 주님께 가서 그분의 말씀을 받아야 하고, 그런 다음에야 사람들에게 가서 그분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사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입에 담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레위인들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길을 떠났고, 그분의 언약을 타락시켰으며, 그들의 설교로 사람들을 넘어지게 했습니다(2:8,9).

하나님의 종과 결혼

말라기 2:11에서 말라기는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한 다음 주님께 제물을 바치는 사람들을 꾸짖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경건한 가정을 가져야 합니다. 그는 경건한 아내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수세기 동안 하나님의 많은 종들은, 욥처럼, 경건하지 않은 아내를 두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종들이 가정에서 경건한 남편으로 살아가는 데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당신이 선택하는 아내에 대해 조심해야 합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여자가 당신과 같은 길을 가고 싶어하는지 보여달라고 주님께 구하십시오.

그리고 그녀가 예쁜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와 결혼하지 마십시오!! 유다 사람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여자와 결혼했습니다. 아마도 그 여자들이 아름다웠기 때문일 것입니다(2:11). 만약 당신이 돈을 사랑하거나 인색하고 구두쇠인 여자와 결혼한다면, 당신은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과 결혼한 것입니다. 당신이 주님의 일을 위해 돈을 주고 싶을 때는 아내가 모르게 은밀하게 주어야 합니다. 만약 당신이 다른 사람을 은밀히 돕고 싶다면, 아내에게 그 사실을 숨겨야 합니다. 그러니 당신과 같은 목표를 가진 사람, 당신처럼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세요.

그리고 결혼한 후에는, 아내에게 전적으로 충실하세요 - 아내가 영적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금식하고 울며 기도했지만 아내에게는 불충실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모든 종교 활동을 통해 영적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사생활을 보시는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전혀 듣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기도가 아니라 더 많은 응답받는 기도라고 말했습니다. 바알의 선지자들은 몇 시간 동안 기도했지만, 엘리야는 1분도 채 되지 않게 기도했습니다. 첫 번째 경우에는,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두 번째 경우에는 기도가 응답되었습니다. 기도와 금식을 통해 쉽게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 심지어 그것을 자랑거리로 여길 수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마음의 순수함으로 측정하지 않고 기도하는 시간으로 측정합니다! 그것은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한 젊은 남자를 깊이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젊은 여성을 생각해 보세요. 하지만, 그와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그녀는 끊임없이 시계를 보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확인하고 마침내 한 시간이 다 되었을 때 만족해하며 "좋아요. 이제 가볼게요"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그녀가 그 남자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증명할 것입니다. 그녀가 그를 정말로 사랑한다면, 그녀는 "시간은 잊어요. 나는 그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어요."라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과 시간을 보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 주님을 사랑한다면, 당신은 그분과 이야기할 때 시계를 보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평생 그렇게 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말라기는 사람들에게 "주께서 너희 기도를 듣지 아니하시는 것은, 너희가 아내에게 불충실한 것을 증거하셨음이니라. 너희가 아내에게 한 서원에 충실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2:14)라고 말했습니다. 설교자들은 설교단에 너무 많이 서고 특정 유형의 여성들이 설교자에게 끌릴 수 있기 때문에 큰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그런 여성들은 종교적인 여성이지 영적인 여성이 아닙니다. 그런 여성은 수줍은 얼굴로 설교자에게 다가가서 "형제님, 질문이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설교자와 가까워지는 것뿐입니다.

나는 어딘가에서 설교를 한 후에 그런 식으로 내게 다가온 여성들을 만났고, 주님께서는 "조심하여라. 이것은 옛 뱀이다."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여성이 결혼했다면, 나는 그녀에게 "자매님, 가서 남편에게 그 질문을 하세요."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형제님, 그는 영적인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영적인 사람이 아니라 단지 종교적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그가 영적이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그에게 물어보세요. 성경에 '여자는 집에서 남편에게 물어보세요'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고전 14:34, 35). 그가 당신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면, 그에게 와서 나를 만나라고 하세요. 내가 그에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그런 대답을 받으면 기분이 상하고 - 다시는 저를 귀찮게 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자신을 보호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그 예를 따르십시오.

하지만 어떤 설교자들은 예쁜 여성이 다가와서 고개를 흔들고 눈을 깜빡이며 질문하는 것을 실제로 좋아합니다. 그런 설교자들은 결국 죄에 빠집니다. 넘어지지 않으려면 그런 여자들을 멀리하십시오. 여자와 전혀 이야기하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유혹하는 사람들을 조심하세요. 여자가 어떻게 옷을 입고 있고 머리와 눈을 어떻게 움직이는지 살펴보면 - 유혹적인 유형을 아주 쉽게 알아낼 수 있을 겁니다.

당신은 다른 여자와 대화하는 방식으로도 아내에게 불륜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당신은 여자의 몸을 만지지 않으면서도 마음속으로는 간통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요즘은, 남자와 여자가 ​​사무실에서 가까이서 함께 일합니다. "아내가 갑자기 사무실로 들어왔다면, 그 다른 여자와 웃고 농담하는 것을 그만둬야 할까?"라는 질문을 던져서 스스로를 시험해보십시오. 만일 그렇다면, 당신의 대화에 불순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텔레비전, 비디오 테이프, 음란한 영화, 영화 포스터에 의해 조장되는 많은 불순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조심하지 않는다면, 이 악이 우리 체계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종이 되고자 한다면, 그러한 모든 유혹을 피하고 아내에게 온전히 충실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유혹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아내를 주셨습니다(고전 7:1,2).

여기서 아내는 "네가 젊어서의 아내"라고 불립니다(2:14). 즉, 아내가 늙고 머리가 하얗더라도, 젊고 매력적이었을 때의 모습 그대로 그녀를 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나는 내 아내를 그렇게 봅니다. 내 아내는 머리가 회색이에요. 하지만 나는 오늘 그녀를 결혼식 날 본 그대로 봅니다 - 그리고 그녀는 그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나에게 예쁘고 매력적입니다. 아내에게 충실하십시오. 결혼 서약을 어기지 마십시오. 미끄러져 넘어졌다면, 깊이 회개하고, "주님, 나는 당신께 돌아오고 싶습니다. 나는 앞으로 당신과 나의 아내에게 전적으로 충실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십시오.

주님은 이혼을 미워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2:16). 안타깝게도, 이혼이라는 추악한 문제가 특히 서구 국가들의 복음주의 기독교 교회들 안에서도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슬프게도 많은 교회가 이혼을 지지합니다. 심지어 목사님들 중 많은 분들이 이혼하고 재혼했습니다. 이혼하고 재혼한 사람들을 거부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런 일을 했을 때 회심하지 않았고 빛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들을 예수님의 제자가 되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하지만 교회 자체가 이혼한 사람들의 결혼을 주관할 때, 그것은 그들을 죄로 이끌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불순종하게 만듭니다! 불행히도, 이런 영향은 지금 인도의 많은 교회를 타락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이혼을 미워한다. 나는 결혼의 '한 몸'을 폭력적으로 해체하는 것을 미워한다"고 말씀하십니다(2:16 - MSG). 그러므로 당신이 하나님의 종이라면 당신도 이혼을 미워할 것이고, 하나님께서 이혼을 미워하신다고 어디서나 선포할 것입니다. "만일 남자가 아내와 이해심을 가지고 살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듣지 아니하시리라"(벧전 3:7).

인도에서 대부분의 남편은 아내를 존중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내를 "생명의 은혜를 상속할 동료"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것의 한 가지 증거는 그들이 아내와 영적인 문제를 공유하지 않고 함께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로 다른 형제들과만 기도합니다.

자녀를 양육하는 방식도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왜 당신과 아내를 하나로 만드셨을까요? "하나님께서, 당신과 당신의 아내를 한 몸과 한 영으로 만드시지 않았습니까? 그분께서 이렇게 하신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당신이 참으로 하나님의 백성인 자녀를 낳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2:15 - TEV).

자녀를 낳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경건한 청년 남녀로 양육하는 것은 평생의 과제입니다. 그러므로 아내에게 충실하고, 그녀와 함께 경건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자녀를 경건한 방식으로 양육하기 위해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십시오. 많은 설교자들의 자녀들의 방탕함을 수년간 지켜본 후, 나는 자녀를 경건한 방식으로 양육한 설교자들을 가장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경건한 자녀는 경건하지 않은 시대에 엄청난 증거입니다. 설교자의 자녀가 모두 설교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며 - 아무도 그분(하나님)의 자녀에게 그 부르심을 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그들을 부르셔야 합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입니다. 우리의 성품은 우리의 사역보다 백만 배나 더 중요합니다.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자녀를 자신의 사역에 참여시킵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이에 대한 선례가 없습니다. 자녀가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고 부르심을 받았다면 괜찮지만, 그렇지 않다면 안됩니다.

3:1에서, 주님은 "보라, 내가 내 사자(세례 요한)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을 것이요, 너희가 찾는 주(그리스도)가 갑자기 그분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너희가 기뻐하는 언약의 사자라, 보라, 그분이 임하리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예언은 계속해서 주님께서 타오르는 불처럼 그분의 교회(성전)에 오셔서 모든 사람을 정련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분은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을 정련하기 위해 앉으실 것입니다(3:3). 우리는 빠르게 끝낼 수 있는 일은 서서 하고,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은 일은 앉아서 합니다. 주님은 세상과 죄의 모든 찌꺼기가 우리 삶에서 타버릴 때까지 정련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분의 종들을 정련하여 금처럼 연단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 금이 너무 깨끗해서 그 안에 그분의 얼굴이 반사되는 것을 볼 수 있을 때, 즉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이 보일 때에만 멈출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정련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평생의 일입니다.

요한일서 3장 3절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을 가진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깨끗하신 것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부름은 주님께서 우리를 불 속에 넣고 찌꺼기를 태워 없애실 때 주님과 협력하는 것입니다. 불은 주님께서, 사탄이 우리에게 보내도록 허락하신 어려운 상황, 시련, 질병 및 기타 육체의 가시로 형성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돈을 사랑하는 찌꺼기에서 벗어나도록, 돈과 재산을 잃도록 허락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사람의 명예를 추구하는 찌꺼기에서 구출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우리를 거짓으로 고발하고 우리의 머리 위에 올라타도록 허락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가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오직 그때에야 우리는 그분께 순수한 제사를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주님께서 당신을 시험, 박해, 환난, 시련, 오해, 거짓 고소 등의 불길 속으로 인도하도록 허락한다면, 그리고 당신이 그 각각의 것에 하나님께 복종하고 당신을 박해하는 자들에게 사랑으로 응답한다면, 당신은 너무나 순수해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때 당신의 말에 풍성한 기름부음이 있고 당신의 사역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이 설교하는 것을 그저 반복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당신의 말은 당신의 삶에서 나올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원하시는 사역의 형태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분이 찾고 계신 순수한 제물입니다.

"나 여호와는 변치 아니하노라;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3:6). 이 구절은 신약성경에 묘사된 하나님이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나님보다 더 온유한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잘못된 견해를 바로잡기 위해 구약성경의 마지막에 나옵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분은 구약성경 시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죄를 미워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때도 자비롭고 동정심이 많으셨습니다. 그분은 변하지 않았고 -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과 돈

주님은 "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할 수(또는 속일 수) 있느냐? 그런데 너희는 내 것을 도둑질하고 있다! 그러나 너희는 '우리가 어떻게 당신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하고 말한다. 십일조와 헌물에서 도둑질하였다. 너희는 저주를 받았다, 이는 너희 온 민족이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음(속여 빼았음)이니라!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와서 내 집에 양식이 있게 하라. 그리고 지금 이것으로 나를 시험하여라. 내가 하늘 문을 너희에게 열어 너희에게 복을 쌓아 놓을 곳이 없을 때까지 붓지 아니하겠느냐? 그러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삼키는 자를 꾸짖어, 땅의 열매를 멸하지 못하게 하고, 너희 밭에 있는 포도나무가 포도를 떨어뜨리지 아니하게 하리라"(3:8-11).

오순절(새 언약이 제정된 날) 이후로, 십일조에 대한 언급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을 알고 계셨나요? 십일조는 새 언약에서 전혀 명령되지 않았지만 - 많은 탐욕스러운 목사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십일조를 설교하고 가난하고 무지한 신자들을 착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십일조를 바치라고 가르치지 않으셨고, 드리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께 무엇을 드려야 합니까? 로마서 12:1은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너희에게 권하노니, (십일조가 아니라) 너희 몸을 살아있는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라"라고 말합니다.

옛 언약에서 십일조를 바치는 것이 강조되었던 것처럼, 새 언약에서는 우리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강조됩니다. 십일조는 유월절 양과 안식일처럼 일종의 예표가 되어야 했습니다. 양은 그리스도의 예표였고, 안식일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내적인 안식의 예표였습니다. 이러한 구약의 의식들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마침내 성취된 것의 그림자였습니다(골 2:16, 17에서 매우 명확하게 밝힙니다).

십일조에 관하여, 하나님께서는 "십일조의 목적은 너희가 항상 하나님을 너희 삶에서 첫째로 두도록 가르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신 14:23 - LB). 옛 언약에서,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삶에서 첫째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새 언약에서, 우리는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분이 우리 삶에서 첫째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우리 몸을 바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눈을 하나님께 바쳐서 다시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도록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더 쉬운 일인가요 아니면 수입의 10%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더 쉬운 일인가요? 당신은 매월 수입의 10%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그 달 매일 눈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것보다 훨씬 더 쉽다는 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자들은 우리의 눈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것보다 십일조를 더 많이 가르칩니다. 많은 목사들은 돈을 사랑하고, 그들은 회중이 십일조를 바쳐서 그 십일조로 부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새 언약에서 십일조를 바치는 것에 대한 어떤 정당한 근거가 전혀 없기 때문에, 그들은 말라기서의 이 구절을 사용하여 무지한 신자들이 매달 십일조를 바치도록 겁을 줍니다.

초기 사도들은 가난했습니다. 고린도전서 4:9-12에서 분명히 볼 수 있듯이요: "하나님께서는 사도인 우리를 가장 마지막으로 세우셨으니...... 지금까지 우리는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학대를 받고 집이 없으며, 수고하며, 우리 손으로 일합니다." 하지만 탐욕스러운 목사가 오늘날 어떻게 부자가 되는지에 대하여 수학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열 사람이 그에게 소득의 십분의 일을 준다면, 그는 한 사람의 평균 급여를 받습니다(10 × 10% = 100%). 이는 합리적인 수준입니다. 하지만 유명한 목사들은 수백 명의 하나님의 백성들로부터 십일조를 받습니다. 목사에게 십일조를 100명만 바쳐도 그의 수입은 보통 사람의 10배가 될 것입니다 - 그리고 그는 곧 지지자들의 희생으로 백만장자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부자가 된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번영을 하나님의 축복의 표시로 설교하기 시작할 것입니다(구약성경 - 신 28:5,8,11) - 그리고 그의 양 떼는 속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기독교 세계에 범람하는 속임수이며,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습니다. 돈 바꾸는 자들이 하나님의 성전으로 돌아왔습니다 - 그리고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그들을 몰아낼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기꾼들'을 폭로할 만큼 담대할 설교자가 거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얼마나 많은 돈을 드려야 할까요? 기쁘게 드릴 수 있는 만큼만 드리십시오. 하나님은 억지로 돈을 드리는 사람이나, 그분에게서 무언가를 얻기 위해 돈을 드리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십니다(고후 9:7 참조). 먼저 당신의 몸을 주님께 드리십시오. 그리고 나서 당신이 기꺼이 드리고 싶은 돈을 드리십시오. 그러나 결코 의무감이나 두려움 때문에 드려서는 안 됩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런 이해가 여러분을 거짓 가르침에서 해방시켜 주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날의 남은 자들

3:16에서, 우리는 마지막 날의 하나님의 남은 자들의 몇 가지 특징을 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말을 조심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염려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의 이름을 기념책(the Book of Remembrance)이라는 책에 기록합니다. 이것은 거듭난 모든 사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생명책이 아닙니다. 이 책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 하나님의 이름을 염려하는 사람, 주님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이름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책에는 험담하는 사람의 이름이나 뒷담화하는 사람의 이름이 없습니다. 내 생각에는 이 책에는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의 5%도 안 되는 이름들이 들어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 성도들이 그분의 특별한 보물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언젠가 그분은 그들을 세상에 드러내실 것입니다 - 그리고 그날에야 우리는 누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겼는지, 누가 그분의 종인 척했지만 사실은 자신의 것을 추구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4장은 다가올 심판의 날에 대해 알려줍니다. 심판을 받을 첫 번째 사람은 교만한 자들입니다. "모든 교만한 자와 모든 악한 자는 겨가 될 것이요, 다가올 날은 그들을 불사르리니 뿌리와 가지가 남지 아니하리라"(4:1). 하나님께서 얼마나 교만을 미워하시는지 보십시오.

그리고 나서 주님은 "그러나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의 해가 그 날개에 치유를 가지고 떠오를 것이요; 너희는 악인을 밟으리니, 내가 준비하는 그 날에 그들이 너희 발바닥 밑에 재가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4:2,3).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때, 사탄은 마침내 우리 발 아래 짓밟힐 것입니다(롬 16:20).

말라기는 마침내 주님께서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4:5). 세례 요한은 "이 엘리야의 영으로" 이스라엘에 왔습니다(눅 1:17). 하지만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요한과 그의 메시지를 받아들여야만 요한이 예언된 "엘리야"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1:14). 하지만 이스라엘은 요한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언된 엘리야가 되지 못했습니다. 이제 마지막 날이 가까워오고 있고,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엘리야 사역을 보내실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 시대처럼) 어떤 한 개인을 통해서가 아니라, 마지막 날의 "그리스도의 몸"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교회와 그 사역자들은 지금 엘리야의 영으로 나아가서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선포한 것처럼) "너희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만일 그리스도가 너희의 하나님이면 그분을 섬기라. 만일 재물(돈과 부)이 너희의 하나님이면, 그것을 섬기라. 그러나 너희는 둘 다 섬길 수는 없다."라고 선포해야 합니다.

말라기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엘리야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이키리니", 그래야 여호와께서 저주로 그 땅을 치지 아니하시리라(4:6).

스가랴서에서, 우리는 부모와 자녀 사이의 세대 차이가 깨지고 부모가 자녀와 영광스러운 교제를 나눌 것이라는 예언을 보았습니다. 여기서도 비슷한 예언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이것이 바로 교회가 이 마지막 날에 강조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가족 관계를 세우고, 가정의 가치를 강조하며, 아버지와 자녀를 더욱 가깝게 만들어야 합니다. 사이비 종교(Cults)는 자녀를 부모와 분리하고 가정을 파괴합니다.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는 모든 사람을 저주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마지막 날에 부모와 자녀를 하나로 모으고 싶어합니다.

구약성경의 마지막 단어가 '저주'라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으심으로써, 그 저주가 제거되었습니다(갈 3:13). 그래서, 신약성경의 마지막 구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기를"입니다(계 22:21).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지상의 저주는 완전히 사라질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위해 사람들을 준비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장 40
마태복음

이제 신약성경으로 넘어갑니다. 여기서 우리가 가장 먼저 읽는 것은 그리스도의 족보입니다. 그것이 아담까지 이르지는 않습니다(눅 3:23-38처럼). 여기서는 아브라함까지만 다룹니다. 예수는 다윗의 자손,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불립니다 - 이는 마태가 주로 당시 유대인들을 위해 복음서를 썼으며, 예수가 약속된 메시아임을 확신시키려고 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메시아임을 증명하기 위해 40개가 넘는 구약성경의 인용문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구약성경에서 인용한 내용이 모두 약 53개 있습니다.

하늘의 왕국과 교회

이 복음서에서 다른 어느 곳에서도 나오지 않는 구절을 볼 수 있습니다 - 바로 "하늘의 왕국"(the Kingdom of heaven)입니다. 이 복음서에서 31번 나옵니다. 성령께서 이 책에 영감을 주셨기 때문에, 그분께서 이 구절을 여기서 자주 사용하신 데에는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 하늘의 왕국(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3:2)고 전파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후 4:17에서 정확히 같은 메시지를 전파하셨습니다. 그분이 산상 설교를 시작하셨을 때,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니라”(5:3)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약성경의 시작부터 "하늘"(heaven)에 대한 강조를 봅니다. "하늘"(heaven)은 산상 설교에서만 17번 언급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옛 언약은 이 땅에 있는 왕국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을 받았고 물질적 번영, 신체적 치유 및 기타 이 지상의 혜택을 약속 받았습니다. 나중에 그들은 이 땅의 왕, 이 땅의 부 및 기타 땅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간을 완전히 다른 영역, 즉 하늘로 들어올리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약성경을 읽을 때, 여기서의 좋은 소식은 주로 하늘에 관한 것이지 이 땅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을 이해한다면, 오늘날 기독교 집단에서 발견되는 많은 혼란에서 우리를 구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구원받았다"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신자들 사이에서 매우 흔한 표현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구원받았다"는 것일까요? 우리는 세상적인 방식에서 구원받았을까요, 아니면 단지 우리의 죄를 용서받았을까요? 우리는 세상적인 것들에 대한 관심, 사람과 상황을 바라보는 세상적인 방식, 세상적인 행동 방식에서 구원받았나요?

새 언약은 하늘의 왕국(천국)의 복음입니다.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미국 시민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미국은 살기에 매우 매력적인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아프리카의 어떤 후진국의 시민이 되는 데 관심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 세상에는, 가장 매력적인 곳인 천국의 시민이 되는 데 관심이 있는 사람이 그렇게 적을까요? 그들은 천국 시민권의 진정한 영광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는 복음이 제대로 전파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천국에 관심이 없는 "소위 신자들"이 교회에 많이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들은 죽었을 때 천국에 가고 싶어하지만, 지금은 천국을 원하지 않습니다.

'왕국(kingdom)'이라는 단어는 오늘날 우리가 명확하게 이해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1세기와는 달리, 지금은 왕국을 다스리는 왕이 매우 적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동등한 단어는 '정부'입니다. 우리는 '인도 정부'라고 말하고 '인도 왕국’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 즉 하늘나라의 정부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삶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도에 살 때는, 인도 정부의 통치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늘나라의 정부에 들어오면, 하늘나라의 정부의 통치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당신은 땅에서 하늘로 시민권을 바꾸었습니까?

구원은 땅의 왕국에서 하늘의 왕국으로 구원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많은 신자들의 구원은 그 정도까지 가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죽으면 천국에 가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당장은 하늘의 통치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지금 당장 이 땅의 완전한 시민으로 살고 싶어합니다. 그것이 그들의 그리스도인 삶이 너무 얄팍한 이유입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찾아볼 수 없고 마태복음에서만 사용된 또 다른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라는 단어입니다. 그것은 세 번 나옵니다 - 한 번은 16:18에, 두 번은 18:17에 나옵니다. 이 단어(교회)를 우리가 생각해 온 구절과 나란히 놓고 보면, 교회가 이 땅 위에 있는 천국, 곧 하늘의 왕국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에서는 모든 사람이 하늘의 통치, 즉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는 다릅니다. 모든 사람은 각자 자기 삶을 이끌어 갑니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이끌지 않는 사람들의 한 무리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들은 하늘의 통치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세상에 있는 교회들이 하늘 정부의 절대적 권위 아래 살고 있습니까? 아니요. 이것은 수년간 나의 마음을 슬프게 했습니다. 당신의 마음 또한 슬프기를 바랍니다. 나는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그들이 그렇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우리가 그렇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이고, 우리는 세상에 하늘의 통치 아래 사는 것의 축복을 보여주는 것에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주님, 우리의 실패를 용서해 주십시오.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사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세상에 보여줄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마태는 그의 복음에서 이 하늘 정부의 통치자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그리고 무엇을 가르쳤는지 보여줍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이 행하신 일보다 예수님이 가르친 것에 더 중점을 둡니다.

마태복음에는 다른 어떤 복음서보다 예수님의 비유가 더 많이 있습니다. 13장은 천국의 비유로 가득 차 있습니다. 23장은 종교적 위선자들, 즉 바리새인들에 대해 전적으로 다룹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예수님을 바리새인들과 끊임없이 대립하게 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다른 어떤 복음서보다 바리새인들과의 대립이 더 많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24장과 25장은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때 이 땅에 천국이 세워지는 것에 대해 다룹니다. 5, 6, 7장은 천국의 원리를 다루며, 이 천국의 백성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줍니다.

이 책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장과 2장은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내용입니다. 3장부터 18장까지는 갈릴리에서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내용입니다. 19장부터 28장까지는 유대에서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내용입니다.

예수의 탄생

1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다룹니다. 유대인들은 족보에 남자 이름만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네 명의 여성도 언급되어 있습니다 – 이것은 예수님은, 유대 사회와 이방 사회가 여성에게 부여한 낮은 지위로부터 여성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게다가, 이 네 명의 여성은 죄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으며, 예수님은 가장 죄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첫 번째로 언급된 여성은 다말입니다(1:3). 다말은 유다의 며느리였으며, 유다는 다말을 통해 베레스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베레스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조상이었습니다. 이 근친상간이 일어났을 때 예수님은 하늘에 계셨고(창 38:12-29), 이 죄 많은 가문을 자신의 지상 가족 계보로 삼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우리 중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런 죄 많은 가족 계보를 선택하고 자서전의 제일 첫 페이지에 근친상간 관계를 언급합니까?

여기서 언급된 두 번째 여자는 라합(1:5)으로, 여리고의 "적등가" 지역에서 유명한 매춘부였습니다(수 2:1). 살몬이라는 유대인 남자가 이 이방인과 결혼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매춘부의 결혼을 보셨고 - 그 계보를 통해 오시기로 결심하셨습니다.

세 번째 여자는 룻(1:5)입니다. 룻은 모압 여인이었습니다. 그녀의 조상은 모압으로, 모압은 롯이 딸과 간통하여 태어났습니다(창 19:30-37). 다시 한 번, 예수님은 하늘에서 이 근친상간과 그 근친상간으로부터 내려와서 태어난 룻을 보시고, 그 계보를 선택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네 번째 여자는 밧세바로, 우리아의 아내입니다(1:6). 그녀는 다윗이 간통을 저지른 여자이고 나중에 다윗과 결혼한 여자입니다. 다시 한 번, 죄의 역사를 가진 여성이 등장합니다. 요셉은 다윗의 왕족이었고, 마태는 이 족보를 통해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시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왜 그런 죄 많은 가계를 택하셨을까요? 죄 많은 인류와 그분의 동일성을 보여주고, 의인을 부르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회개시키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도 자신의 가문이나 혈통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도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족보를 자랑합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할 때, 그는 그리스도의 영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요셉이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것이 그녀의 태중에서 일어난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을 알지 못했을 때,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욕되게 하고 싶지 않았고, 그녀의 죄라고 생각되는 것을 덮고 싶어했다고 말합니다(1:19).

여기서 우리 모두가 의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복음의 메시지는 본질적으로 불의한 사람이 어떻게 의롭게 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의로운 사람이라고 불리는 첫 번째 사람은 요셉입니다. 그리고 그의 의로움은 다른 사람의 죄를 덮고 그 사람을 부끄럽게 하지 않으려는 것과 관련하여 언급됩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의로운 사람의 영입니다.

누군가가 죄를 지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당신의 즉각적인 반응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의로운 사람이라면, 당신은 그것을 덮고 싶어할 것입니다. 당신이 불의한 사람이라면, 당신은 그것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것입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성령이 없고 새 언약 아래 있지 않은 요셉이, 거듭났다고 주장하는 수백만 명의 신자들보다 훨씬 더 의롭다는 것을 봅니다. 옛 언약의 기준으로, 요셉은 자신이 죄라고 생각한 것을 덮기로 결정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그는 마리아를 결코 욕되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가 그랬다면, 그가 진실을 발견했을 때, 그녀가 100% 순수하고 결백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얼마나 후회하고 뉘우쳤을지 상상이 되십니까!! 이러한 것들은 우리를 위한 교훈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만일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 퍼뜨린 이야기가 나중에 거짓으로 밝혀진다면, 어떻게 그것을 되돌릴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그들에게 말한 것은 아마 다른 열 명에서 퍼졌을 것이고, 그들은 그것을 더 멀리 퍼뜨렸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신약성경의 첫 장에서 우리에게 경고와 모범을 제시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죄를 덮어주십시오. 요셉의 모범에서 배우십시오. 사랑은 많은 죄를 덮어줍니다.

1:21에서 우리는 신약에서 가장 첫 번째 약속을 읽습니다: "그분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것이다." 이것이 "예수"라는 이름의 의미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우리의 죄에서 구원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용서는 단지 우리의 과거 죄에 대한 죄책감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죄에서 구원받는다는 것은 분노, 눈의 정욕, 탐욕, 원한, 질투 등에서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분이 우리를 죄의 노예가 되는 것에서 구원해 주시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약에서 두 번째 약속은 3:11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분은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다."

이것은 신약성경에서 처음 두 가지 약속이며 - 여기서 복음의 메시지가 요약됩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약속의 성취를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에서 구원받아야 하고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2장에서, 우리는 새로 태어난 예수를 보러 온 박사들에 대해 읽습니다. 우리는 그 박사들이 한 어리석은 일 한 가지를 읽습니다 -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경고가 됩니다. 박사들조차도 때때로 어리석은 일을 합니다! 그들은 동쪽 땅에서 예루살렘까지 수백 마일을 별을 따라갔습니다. 그 별은 우리를 항상 예수께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그림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왕궁이 있는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그들은 어리석어졌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왕이 자연스럽게 궁전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생각했고 - 별을 따르는 것을 멈췄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새로 태어난 왕을 보기 위해 헤롯 왕의 궁전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궁전에 있는 사람들은 새로 태어난 왕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 박사들은 밖으로 나와 다시 별을 따라야 했습니다(2:10).

별은 마침내 그들을 궁전이 아니라 작은 오두막으로 인도했습니다 - 그리고 왕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면, 항상 예수님께로 인도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당신을 예수님이 계신 교회로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높고 권세 있는 자들의 궁전에서 발견되지 않지만,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따르고자 하는 자들의 소박한 거처에서 발견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박사들이, 한 가지 실수로 수백 명의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해를 끼쳤는지 보십시오. 그들이 헤롯에게 왕의 탄생에 대해 말했기 때문에, 그는 베들레헴에 군인들을 보내어 그곳의 두 살 이하의 모든 아기 남자아이를 학살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때, 우리의 어리석은 행동 하나가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큰 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그 후 천사가 꿈에서 박사들에게 말하여 헤롯에게 돌아가지 말고, 다른 길로 집에 돌아가라고 말했습니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그들이 천사의 말에 순종했습니다!! 요셉도 꿈에 이끌려 애굽으로 갔고, 나중에는 또 다른 꿈에 이끌려 이스라엘로 돌아갔습니다. 꿈을 통한 인도는 신약성경의 처음 두 장에서 여러 번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때때로 그렇게 인도하십니다.

3장에서는, 세례 요한의 사역에 대해 다룹니다. 'baptism'라는 단어는 1611년 킹 제임스 성경(KJV)의 번역자들이 영어로 도입한 단어입니다. 역사에 따르면 영국의 제임스 왕이 이 번역을 명령했을 때 번역자들에게 몇 가지 규칙을 주었는데, 그 중 하나는 기존 교회 전통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성공회 교회에서는 신생아에게 물을 뿌려 "유아세례(christen)"를 주었습니다. 번역자들이 여기 3장에서 그리스어 단어 'baptizo'(또는 'bapto')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그 단어는 그리스어로 "담그다(잠그다, 완전히 적시다, 영어로는 immerse)"를 의미했고, 그들은 그렇게 번역했어야 했습니다. 만약 그들이 정직하게 그렇게 번역했다면, 우리는 결코 baptism나 Baptists에 대해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정확하게 번역하면, 기존 교회 유아세례 전통을 흔들게 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 그들은 제임스 왕에게 참수당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솔직히 그 단어를 "유아세례(christen)" 또는 "뿌리다(sprinkle)"로 번역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매우 영리하게) 영어에 새로운 단어인 'baptism'을 도입했습니다. (이것은 'dhobi(도비, 세탁부)'와 'Sahib(사히브, 주인님)'와 같은 인도 단어가 영어에 도입된 방식과 다소 유사했습니다.) 그 당시의 일반 대중이 이 새로운 번역본을 읽고 'baptism'이라는 단어를 읽었을 때, 그들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단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것이 성공회 교회에서 신부들이 신생아에게 행하는 의식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아세례를 주는 것(christening)이 'baptism(세례, 침례)'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올바른 번역은 '요한, 물에 담그는 자'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그 그리스어 단어를 정확하게 번역할 용기가 있는 성경 번역본을 단 하나도 찾지 못했습니다. 만약 그렇게 번역한다면, 유아 세례를 행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성경을 사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가장 좋은 성경 번역본조차도 진리만이 아니라 경제적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침례(온 몸을 물에 담금)를 위해 요한에게 오셨을 때, 요한은 "나는 당신에게 침례를 줄 수 없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침례를 주셔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침례를 받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 요한의 침례는 죄를 회개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고, 예수님은 어느 때에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죄를 지은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거룩하게 태어나셨고 우리와 같은 죄의 본성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침례를 받으려는 사람들과 함께 줄을 서셨을까요? 그분은 다른 유대인 목수와 똑같아 보였고 요한 외에는 아무도 그분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침례를 받으면, 사람들이 오해할 것이다. 그들은 네가 지금 회개하고 있는 어떤 죄를 지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네 증거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등과 같은 많은 생각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생각을 듣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아버지께서 침례를 받는 죄인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 그분은 죄를 지은 적이 없었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아버지께 순종했습니다.

우리는 죄인들과 동일시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다른 사람들을 얕잡아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역은 그토록 제한적이고 얄팍합니다. 예수님은 죄가 한 점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죄인들과 자신을 완전히 동일시하셨습니다. 우리 자신을 낮추고 그분의 모범을 따르도록 합시다.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나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 무리도 다른 무리보다 나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달리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너는 나에게 침례를 주어야 한다. 그것이 내가 모든 의를 이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의란, 그것이 무엇이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세 가지 유혹

4:1-11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유혹에 대해 읽습니다. 성경은 히브리서 4:15에서 예수께서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은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짓지 않으셨다"라고 말합니다. 어떤 "영리한"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분석하고 질문을 던집니다. "예수께서 죄를 지을 수 있었을까? 아니면 죄 짓는 것이 불가능했을까?"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은 죄를 지을 수 없었다"라고 말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분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었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토론에 전혀 관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보통 사람들의 심리조차 분석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압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의 심리를 분석할 수 있을까요? 그분이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셨지만 죄를 짓지 않으셨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그 점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범이 되십니다. 우리는 그분이 하나님이셨고, 그분이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을 때 하나님으로서 그분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은 유혹을 받으실 수 없지만, 예수님은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나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분이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셨지만, 죄를 짓지 않으셨다고 믿습니다. 이것은, 그분이 이기신 것처럼 나 또한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을 줍니다(계 3:21).

예수님은 40일 동안 마귀에게 유혹을 받으셨습니다(눅 4:2). 그분은 그 40일 동안 마귀를 물리치셨습니다. 여기서 읽은 것은 마지막 세 가지 유혹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검인 “기록되었으되”라는 말씀으로 각각의 유혹을 이기셨습니다. 마귀는 예수께서 말씀을 인용하신 것을 보고, 자기도 성경을 인용하여 말했습니다,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하시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니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라”(4:6).

이에 예수님은 “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4:7)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모든 진리는 한 성경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발견됩니다 - 한 구절은 다른 구절로 균형을 이룹니다. 만약 사탄이 성경을 인용하여 예수님을 죄에 빠지게 하려고 했다면, 그는 당신에게도 성경을 인용하여 그릇된 길로 이끌려고 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성경을 잘 모른다면, 그릇된 길로 이끌릴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탄이 그분에게 가한 각각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성경의 말씀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직면하신 유혹에 내재되어 있던 것이 무엇인지 보는 것은 좋습니다. 사탄은 같은 방식으로도 우리를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1. 이기심(4:1-4).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 돌을 빵으로 바꾸라.
  2. 육체적 필요를 영적 필요보다 우선시해라. 예수님은 사람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지 단순히 빵으로만 살아서는 안 된다고 대답하셨습니다.
  3.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여라. 예수님은 그렇게 하기를 거부하셨습니다. 나중에 그분은 이 능력을 사용하여 5000명의 사람에게 줄 빵을 늘렸지만, 결코 자신을 위해서는 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이 유혹의 희생양이 되어,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과 은사를 사용하여 자신을 위해 돈을 벌었습니다.
  4. 무례함(4:5-7). 성전 지붕에서 뛰어내려 하나님의 보호 약속을 주장하여라.
  5.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은 한 걸음을 내딛고 – 그 다음에 하나님의 약속을 주장하여라. 예수님은 우리가 위험한 일을 함으로써 하나님을 유혹해서는 안 된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어떤 어리석은 그리스도인들은 아플 때 약을 먹지 않고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으로 그들을 고쳐 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무례한 것입니다. 그것은 자살입니다! 약은 하나님의 창조물로 만들어졌고 우리는 그것을 사용해야 합니다. 성전 지붕에서 내려오는 계단이 있다면, 그것을 사용해야지 뛰어내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뛰어내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약을 구할 수 없는 정글에 있다면, 우리는 약 없이도 하나님께 우리를 고쳐 달라고 요청할 수 있으며, 그분은 우리를 고쳐 주실 것입니다 - 하지만 그분께서 약을 공급해 주셨을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6. 다른 사람들에게 네가 하나님의 사람임을 보여주기 위해 굉장한 일을 하여라. 사람의 명예를 추구하는 유혹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명예를 얻기 위한 굉장한 일과 기적을 행하는 것을 거부하셨습니다.
  7. 타협(4:8-10). 사탄에게 절함으로써 세상의 왕국과 그것의 영광을 얻어라.
  8. 옳은 것을 잘못된 방법으로 얻어라 - 불의한 지름길로! 불의한 행동은 사탄에게 절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고 몹시 힘든 길을 택하셨고 모든 지름길을 거부하셨습니다.
  9. 이 세상이 제공하는 영광을 추구하여라 - 돈과 명예, 지위와 권세(세상에서나 교회에서).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만 경배해야 하며 사탄이나 돈이나 그가 제공하는 다른 어떤 것도 경배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설교자들은 어떤 것들(하나님께서 그들이 전파하기를 원하시는 것들)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함으로써 더 넓은 사역을 추구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더 넓은 사역을 얻습니다 - 하지만 그것은 사탄에게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에게 온 것처럼, 이 모든 방법으로 우리에게 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탄을 몰아내셨고,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탄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산상수훈

5,6,7장에서 우리는 산상수훈(산 위에서 설교)을 읽습니다. 예수님은 그 설교를 "심령(spirit)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니라"(5:3)고 말씀하심으로 시작하셨습니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건은 심령의 가난입니다. 그것은 "천국"이라고 불리는 이 궁전의 모든 문을 여는 만능 열쇠입니다. 이 만능 열쇠가 있다면, 천국의 모든 부는 우리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예를 들어, 물질적으로 가난하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생각해 보세요. 어느 날 당신의 문에 찾아온 거지를 생각해 보세요 – 그리고 당신은 그에게 몇 루피를 줍니다. 그는 다음 날, 그 다음 날, 그 다음 날 다시 찾아올 것입니다 - 영원히. 왜 그럴까요? 그는 끊임없이 궁핍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항상 자신의 필요를 알고 있으며, 부끄러움 없이 당신의 문으로 계속 찾아와 더 많은 돈을 구걸할 만큼 자신을 낮춥니다 - 당신이 관대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영적으로 가난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가서 "주님, 저는 영적으로 궁핍한 사람입니다. 당신이 제게 필요한 것을 주지 않으시면, 저는 당신의 말씀에서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고 오늘 죄에 패배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 다음날 우리는 다시 주님의 문으로 돌아가 더 많은 것을 구걸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그리고 그 다음날 - 영원히. 왜냐하면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필요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이 천국 전체를 소유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을 소유하고 싶다면, 평생 이런 태도를 유지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을 강력하게 사용하여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교회를 세울 때, 영적으로 가난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계속해서 하나님께 돌아가서 "주님, 저는 가난합니다. 저에게 능력을 주십시오. 저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당신의 영의 충만함을 주십시오. 사람들을 위한 사랑을 주십시오. 순수함을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거룩해지고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사용하는 자들은 바로 이런 "궁핍한 영적 거지"입니다. 영적으로 부유해지고 하나님의 가장 좋은 것을 얻는 자들은 바로 그런 "거지"들입니다. 사람들에게 구걸하는 것은 굴욕적일 수 있지만, 하나님께 구걸하는 것은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영적인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나를 영적으로 상당히 부유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분께서 나에게 더 많은 것을 주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분께서 가지고 계신 모든 것을 원합니다. 당신이 영원히 이런 유형의 "거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이 순수한(pure)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5:8). 순수한(pure) 마음은 깨끗한(clean) 양심과 다릅니다. 깨끗한 양심은 알고 있는 모든 죄에서 자유로운 마음을 의미합니다 - 모든 죄를 고백하고 깨끗하게 씻은 마음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순수한 마음은, 모든 것에서 자유롭고 오직 하나님만을 위한 마음입니다. 사람은 선한 양심을 가질 수 있지만, 하나님 외에 다른 많은 합법적인 것들을 마음속에 품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양심이 깨끗하더라도, 세상적인 야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오직 하나의 야망을 갖고 있습니다 -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그의 마음은 모두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마음이 순수할 때, 당신은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어디서나. 당신은 당신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사람들이 당신을 도울 때, 그리고 사람들이 당신을 저주하고 해칠 때(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했을 때 다윗이 하나님을 보았듯이). 그러나 당신의 마음이 순수하지 않을 때, 당신은 당신을 괴롭히는 사람들, 아마도 당신의 까다로운 아내나 남편 또는 이웃만 볼 것입니다. 불순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많은 문제를 겪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모든 곳과 모든 것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보기 때문에, 축복받을 것입니다!

5:20에서 6:18까지 주님께서 주로 강조하신 것은 내면의 삶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의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었지만, 우리의 의는 그보다 뛰어나야 합니다(5:20). 참된 거룩함은 내면에서 시작됩니다. 주님께서 의에서 찾으시는 것은 양이 아니라 질입니다. 우리의 의의 질은 바리새인들의 것과 근본적으로 달라야 합니다. 그들은 세상적 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외적인 것이었고, 그들에게 사람들로부터의 명예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 중요한 것은 내면의 삶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은 우리 안에서 흘러나와야 합니다. 살인과 간음으로부터의 자유는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5:21-30). 천국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6:1-18에서,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 앞에서만 구제하는 것, 기도하는 것, 금식하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금식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인도에서 만난 대부분의 금식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외없이 그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금식에 대해 단 하나의 명령만 주셨습니다 - "금식할 때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따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단 하나의 명령만 주셨습니다 - 그리고 그는 그것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에게 단 하나의 명령만 주셨습니다 - "부모에게 순종하라" -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따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금식하는 대부분의 사람들 사이에서 같은 불순종을 발견합니다. 이제 우리는, 금식하고 기도하고 베풀지만 이러한 행동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 또 다른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을 일으켜 세웁시다. 이런 일을 할 때 우리 안에는 명예를 얻고자 하는 큰 욕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면 우리가 하늘에서 상을 잃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땅에서도 기름부음을 잃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7장에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지만, 또한 “양의 옷을 입고 오는 거짓 선지자들”을 분별하라고 경고하셨습니다(7:15). 양의 옷은 올바른 복음주의 교리를 가리킵니다. 거짓 선지자는 올바른 교리를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그의 내면은 늑대입니다. 늑대는 양들을 삼키는 데만 관심이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단순한 신자들을 이용하려 합니다. 당신이 그의 교리만 듣는다면, 당신은 그가 양이나 목자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당신을 재정적으로 착취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당신을 통제하려 한다면, 그는 늑대입니다.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신의 이익, 곧 당신의 돈이나 당신의 복종을 얻으려고 할 뿐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거짓 선지자들은 교리가 잘못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를 알아내는 방법은 그들의 교리나 사역의 결과가 아니라, 그들의 성품에 성령의 열매가 없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7:16). 우리는 설교자의 은사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 심지어 초자연적인 은사일지라도요. 당신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보세요, "그는 그리스도의 영을 가지고 있는가? 그는 겸손한 형제인가? 그는 돈에 대한 사랑에서 자유로운가? 그는 사람들에게 돈을 요구하는가? 그는 설교할 때 거룩함을 강조하는가? 그는 여성과의 관계에서 순수한가? 그의 자녀와 가장 가까운 동료들은 경건한가?" 이런 질문을 통해 하나님은 나를 거짓 선지자들에게 속지 않도록 보호해 주셨습니다. 기독교계의 많은 사람들이 설교자들을 교리로만 평가하기 때문에 속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 설교 전체를 통해 성령의 열매에 대해 말씀하신 후, 마지막으로 성령의 은사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마지막 날에 많은 사람이 그분에게 와서 "주님, 우리는 당신의 이름으로 예언하였고, 당신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으며, 당신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였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7:22). 그리고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죄 가운데 살았으니, 내게서 떠나라"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설교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심지어 예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지옥에 갔습니다!

오늘날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참석하고 올바른 교리를 전파하는 조명 아래에서 진행되는 현대의 "치유 집회" 볼 때, 여러분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 경고를 생각하고 그 설교자가 결국 지옥에 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해 보았습니까? 내 생각에는 99.9%의 신자들이 그런 가능성을 전혀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명확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신자들은 여전히 설교자를 그의 인격(성품)이 아닌 은사로 평가합니다. 우리는 결코 다른 사람의 예언적 은사나 그가 귀신을 쫓아내거나 기적을 행하는 것에 감명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으십시오. 나는 이 진리를 수년 동안 전파해 왔지만, 아직까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믿는 신자를 아주, 아주 적게 보았습니다. 이는 우리의 교만함이, 예수님의 경고보다는 우리 자신의 판단을 신뢰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참되시고 사람은 다 거짓말장이니라"(롬 3:4).

이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과 반대되는 상황을 생각해 봅시다. 심판의 날에 어떤 신자가 "주님, 당신의 은혜로 제 죄가 용서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은혜로 저는 이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예언을 한 적도, 병자를 고친 적도, 귀신을 쫓아낸 적도 없습니다."라고 말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주님께서 그에게 "너는 기적도 행하지 않았고 귀신도 쫓아내지 않았으니, 내게서 떠나가라"고 말씀하실까요? 아니요. 불가능합니다.

당신이 열매가 없이 은사를 가지고 있다면, 당신은 결국 지옥에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은사가 없이 열매를 가지고 있다면, 당신은 분명히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것입니다. 우리는 엄청난 속임수가 난무하는 시대에 살고 있으므로, 모든 설교자를 분별해야 합니다.

인정과 격려(Appreciation and Encouragement)

8장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에 대해 읽습니다. 그분은 설교하셨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돌보기도 하셨습니다. 그분은 아무도 만지지 않으려는 나병환자를 만지셨습니다. 그분은 그들을 치유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그들 자신이 소중한 존재임을 느끼게 해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로마 백부장이 매우 겸손하고 믿음이 충만하여, 예수께서 그의 집에 가서 그의 종을 고쳐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주님, 저는 당신을 제 집에 모실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세요. 그러면 이루어질 것입니다."라고 말한 이야기를 읽습니다. 믿음과 겸손은 항상 함께합니다. 예수께서는 즉시 "이스라엘에서 아무에게서도 이렇게 큰 믿음을 발견하지 못하였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8:10).

예수님은 사람들을 인정하고 격려하는 데 능숙하셨습니다. 그분은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칭찬하며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것을 네게 보이셨느니라"(마 16:17)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나다니엘을 칭찬하며 "거짓이 없는 사람이 여기 있다"(요 1:47)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완벽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후하게 인정하셨습니다. 로마 백부장, 베드로, 나다니엘은 모두 불완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 모두에게서 인정할 만한 것을 찾으셨습니다. 그분은 심지어 성경이나 참 하나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회심하지 않은 우상 숭배자이자 군대 대장 안에서도, 그분이 본 선한 점을 주저하지 않고 칭찬하셨습니다. 그 로마 백부장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평생 잊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그는 그 말에 큰 격려를 받았을 것이며,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온 마음을 다한 제자가 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우리는 이로부터 참된 경건함과 천국에 대해 배울 수 있습니다. 아담의 자녀들은 사람들을 인정하는 데 인색하고 비판하는 데는 능숙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교만해질까 봐 공개적으로 사람들을 인정하는 것을 주저합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경건한 사람들조차도 인정할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그리스도로부터 이 습관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누구에게도 아첨해서는 안 됩니다. 아첨은 사탄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인정은 신의 특성입니다. 경건한 사람이 다른 형제에게 인정의 한 마디를 한다면, 그 한 마디는 그 형제가 온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르도록 격려할 수 있습니다.

9:27에서, 우리는 예수님께 나온 두 눈먼 사람에 대해 읽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고치시기 전에, 그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행할 수 있다고 믿느냐?" 그들은 "예, 주님"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의 믿음대로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9:29). 이것은 신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받습니다 - 더 많거나 더 적지 않습니다. 그 눈먼 사람들에게 기적이 필요했습니까? 네. 예수께서 그들에게 기적을 행하고 싶으셨나요? 네. 하지만 그들에게 믿음이 없었다면,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 자신에게 적용해 보세요. 당신은 하나님의 기적이 필요하십니까? 네.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기적을 행하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당신에게 믿음이 없다면, 여전히 기적을 얻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한 눈먼 사람이 "글쎄요, 주님, 저는 당신이 적어도 제 눈 한 쪽은 뜨게 해 주실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저에게는 충분할 겁니다."라고 말했다고 가정해 보세요. 주님은 그에게 정확히 같은 말씀을 하셨을 것입니다, "네 믿음대로 되라." - 그리고 그는 한 쪽 눈만 뜨게 되었을 것입니다! 만일 두 번째 사람이 "주님, 저는 당신이 제 두 눈을 모두 뜨게 하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라고 말했다면 그는 그의 믿음대로 받았을 것이고 - 두 눈 모두 뜨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한쪽 눈의 사람은 "한쪽 눈"이라는 교파를 시작했을 것이고, 예수께서 한쪽 눈을 뜨게 하실 수 있다고 선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두 눈" 교파를 시작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두 눈을 모두 뜨게 하실 수 있다고 선포하면서요. 그래서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고 말하는 반쪽 복음을 선포합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우리에게 죄를 이기는 승리도 주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완전한 복음을 선포합니다. 첫 번째 사람은 두 번째 사람을 이단이라고 부르며 "아니요, 그럴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경우에는 한쪽 눈만 뜨게 하셨거든요."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한쪽 눈만 치유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 사람은 양쪽 눈 모두 치유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는 용서뿐만 아니라 승리에 대해서도 주님을 신뢰했습니다.

당신은 이 두 교파 중 어느 교파에 속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당신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고만 믿는다면, 그게 당신이 그분에게서 얻을 수 있는 전부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분노, 정욕, 교만, 질투 등에 의해 패배한 채로 남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신자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6:14에서 죄가 더 이상 나를 지배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주님께서 내 삶에서 그것을 성취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는 두 눈을 모두 뜨게 됩니다! 그를 이단자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그는 당신보다 더 나은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더 신뢰했기 때문에 당신보다 더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늑대들 사이의 양

10장에서, 예수님이 열 두 사도를 택하여 사역에 대한 권한을 주신 것에 대해 읽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사역에서 그분의 권한을 가질 뿐만 아니라 박해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를 보내는 것이, 이리들 가운데로 양을 보내는 것과 같다. 뱀과 같이 예리하고 비둘기와 같이 때 묻지 않아야 한다"(10:16).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의 이리들 가운데 양으로 보내셨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이리들과 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즉, 우리는 결코 복수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어떤 식으로든 해를 끼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리들로부터 보호해 주실 것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뱀과 같이 예리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리석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의 비그리스도인들을 불필요하게 자극하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방식에서 지혜로워야 합니다. 전심으로 임한다는 것은, 예를 들어, 우리가 우리나라에서 보는 우상숭배를 비난하며 돌아다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메시지는 긍정적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종교나 문화를 비난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높여야 합니다(행 19:37에서 바울의 예를 보십시오. 에베소의 서기관은 바울이 그들이 숭배하는 여신을 거스르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증언했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자신을 포함하여)이 죄인이며 예수께서 모든 사람의 구원자라고 선포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항복할 때에만 죄와 우상을 포기할 수 있으며, 그 전에는 포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또한 돈을 다루는 방식, 특히 하나님의 돈을 다루는 방식에서 뱀처럼 지혜로워야 합니다. 또한 알 필요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 현명함을 보여야 합니다. 우리는 불필요하게 적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우리의 적이 우리 집안 식구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0:36). 우리가 주님을 따를 때, 우리는 집안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선지자는 보통 집안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보다 이 땅의 부모를 더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분께 합당하지 않습니다(10:37). 그러나 사람들에게 거부당하는 것이 우리를 방해하지 않고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기꺼이 목숨까지 잃을 수 있다면, 우리는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10:39).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에게 물 한 잔이라도 준다면, 그분은 우리에게 상을 주실 것입니다(10:42).

옛 언약 아래 살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은 가나안 땅에서 누리는 육신적이고 물질적인 축복, 즉 재산과 치유와 번영에 맞춰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지상적인 것에 마음을 둔 모든 신자는 옛 언약 아래 살고 있습니다. 마태 복음은 그러한 모든 사람들을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당신은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여전히 옛 언약 아래 살고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새 언약 아래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어디에 두었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스도께로의 회심은 우리의 사고방식에 변화를 가져와야 합니다. "회개"라는 단어는 "생각(mind)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우리의 생각에서 무엇을 바꿔야 합니까? 골로새서 3:2는 “위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보이는 것들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고후 4:18).

마태복음은 신약성경의 첫 번째 책이며, 우리를 이 하늘의 새 언약의 삶으로 바로 안내합니다. 그래서 산상수훈(마태복음 5-7장)으로 시작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됨에 따라, 하나님의 계명을 외적으로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도 지키는, 땅에서의 하늘의 삶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에 따라 살고(살인, 간음, 절도와 같은 외적인 죄를 피함)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 기도하고 금식하는 그리스도인은 실제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옛 언약 아래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 왕국의 내적인 삶을 이해할 때에만 새 언약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감옥에 있는 세례 요한

11:2,3에서, 우리는 세례 요한이 감옥에 있었을 때 예수님이 메시아이신지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읽습니다. 세례 요한은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예수님께 내려오는 것을 보았으며,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며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마 3:16,17). 우리는 그런 것을 한 번이라도 보고 들었다면 다시는 의심할 것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옛 언약 시대의 가장 훌륭한 사람(세례 요한)도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이 태어난 모든 인간 중 가장 큰 자라고 부르신 사람(요한)의 마음에 어떻게 의심이 생겼을까요? 요한은 예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일(눈먼 자들의 눈을 뜨게 하고 병자를 고치는 일)에 대해 들었을 때, "그분이 그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다면, 왜 헤롯을 죽이고 나를 이 감옥에서 풀어주지 않으시는 거지?"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옛 언약의 사고방식에서는, 감옥에 갇힌다는 개념이 자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와 같은 새 언약 아래 있는 사람들이 감옥에 갇혔을 때, 그들은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오히려 그분을 찬양했습니다 - 심지어 한밤중에 말입니다. 그것이 성령으로 충만해지고 새 언약에 들어가는 것의 차이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왜 하나님께서 나를 괴롭히는 이 적대적인 사람을 죽이지 않으시고 이 문제에서 나를 구해 주시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 그는 정확히 옛 언약의 사람과 똑같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대다수의 신자들은 옛 언약 아래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간음을 저질렀을 때, "아, 다윗도 간음을 저질렀어요 -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용서하셨어요."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낙담할 때, "글쎄요, 엘리야도 낙담했어요 – 그렇지만 그는 강력한 선지자였지요."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화가 나서 집에서 무언가를 깨뜨렸을 때, "글쎄요,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의 위대한 지도자였는데, 그 또한 화가 나서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돌판을 깨뜨렸지 뭐예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옛 언약의 어떤 사람의 삶에서 그들의 모든 죄에 대한 정당화를 찾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화를 내어 무언가를 깨뜨린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낙담해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계셨던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간음을 저지른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옛 언약의 그리스도인들은 모세와 다윗과 엘리야를 본보기로 삼아 경주를 합니다; 반면 새 언약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본보기로 삼아 경주를 합니다. 하지만 옛 언약의 그리스도인들은 모세가 다른 사람을 위해 이기심 없이 기도하거나 엘리야가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온 마음을 다해 사는 등의 본보기를 따르지 않습니다. 그들이 이런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은 단지 자신의 죄에 대한 변명거리를 찾기 위해서일 뿐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쓰여졌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죄에 대한 변명을 찾기 위해 성경을 읽는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속는 것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당신의 분노나 간음, 우울증에 대한 변명을 찾기 위해 성경을 찾지 마십시오. 신약성경은 우리가 참여해야 할 예수님의 삶을 보여주기 위해 주어졌습니다 - 그리고 예수님은 결코 우울하거나 화가 나거나 불순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지금부터 이런 방식으로 신약성경을 보길 권하고 싶습니다(고후 3:18을 읽어보세요).

세례 요한은 감옥에 갇혔을 때 하나님을 의심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로마 군인들에게 잡혔을 때 무엇을 하셨습니까? 그분은 바로 그 순간에 72,000명의 천사를 불러서 자신을 구해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이 메시지를 다시 보내셨습니다, "가서 요한에게 이르되, 눈먼 자들이 보고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라"(11:4,5). 새 언약의 복음은 죄로부터 구원받는 좋은 소식입니다 - 헤롯, 카이사르, 바리새인을 죽여서 감옥에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 누구도 세례 요한의 의심을 비난할 수 없습니다. 그는 오늘날 우리가 새 언약에서 가질 수 있는 성령이 그 안에 살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은혜 아래 있지 않고 율법 아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성령으로 충만하다고 주장하지만 죄와 의심에 패배한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또한 우리는 여기서 예수께서 사람들에 대한 인정을 공개적으로 표현하신 아름다운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자에게서 태어난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자가 일어나지 아니하였느니라"(11:11)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에 따르면, 그분보다 먼저 태어난 사람 중 가장 위대한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아닙니다!! 마리아를 숭배하는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더욱 숭배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계속해서 "그러나 천국에서 가장 작은 자가 그보다 크니라"(11:11)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새 언약에 들어간 가장 작은 사람조차도 요한이 "주님, 왜 저를 풀어주지 않으시나요?"라고 물었던 것처럼 질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그의 유익을 위해 일하게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 당신의 본은 누구입니까? 우리는 아브라함, 모세, 엘리야, 세례 요한에게서 따를 수 있는 많은 좋은 자질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실패를 따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범은 예수님뿐입니다.

11:12에서 예수님은 "하늘나라는 폭력을 당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자는 그것을 강제로 빼앗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폭력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외적으로, 그리스도인은 항상 평화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내적으로는, 주님을 따르는 데 방해가 되는 모든 것에 폭력을 행사해야 합니다 - 그는 육신의 정욕, 죄, 사탄에 맞서 굳건히 서야 합니다. 오직 그런 사람만이 왕국을 소유하고 새 언약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당신의 마음이 반쪽짜리라면, 당신은 결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고 하늘나라도 소유하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이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막는 모든 애착에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면 - 그 애착이 당신의 부모, 직장, 돈, 여자, 또는 다른 어떤 것에 대한 것이든 - 당신은 3류, 평범한 그리스도인으로 남을 것이고, 실제로 옛 언약의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 왜냐하면 당신의 마음도 그들의 마음처럼 세상적인 것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새 언약으로 들어올리려 하십니다 - 하늘의 마음을 가지도록 말입니다.

계시와 안식

예수께서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당신께서 지혜롭고 총명한 자들에게는 이런 것들을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신 것을 찬양합니다"(11:25). 새 언약의 위대한 진리는 하나님께서 감추셨습니다. 당신은 연구로 그것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세상의 모든 주석서를 읽을 수 있지만, 그것은 똑똑하고 총명한 자들에게는 숨겨져 있기 때문에 발견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계시가 필요하지만, 하나님은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 즉 순수한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만 계시를 주십니다. 그들이 총명한 머리를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는 상관없습니다. 지성은 하나님의 왕국에서 우리에게 아무런 이점도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것은 순수한 마음입니다.

아이들도 가르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무지하고, 기꺼이 자신의 무지함을 인정합니다. 예를 들어, 아이는 아버지에게 "아빠, 왜 도로에 노란 선이 그어져 있어요?"라고 물을 것입니다. 우리 어른들은 그 선이 교통을 목적으로 도로를 나누기 위해 그어진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아이는 그런 간단한 것조차 모릅니다. 아주 소수의 신자들이 성령께 "주님, 당신이 이 책을 쓰셨습니다. 이게 무슨 뜻인가요? 저는 영적인 문제에 어리석습니다. 제게 설명해 주세요."라고 말하며 그런 식으로 나아옵니다. 새 언약에서,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해지고 성령께서 직접 쓰신 성경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특권을 누립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에 교사들을 임명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교사들의 말을 들을 때, 그들에게서 듣는 것에만 머무른다면, 당신은 결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이 가르치는 것이 진리일 수 있지만, 그것은 그들에게서 전해 들은 간접적인 진리입니다. 당신은 그 간접적인 것을 주님 앞에 가지고 가서 "주님, 이것을 저의 직접적인 지식으로 바꿔 주십시오. 제 자신의 경험이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진리가 영원히 당신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늘에서 받은 진리조차도 썩어버릴 것입니다 -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가 24시간 만에 벌레가 생기기 시작한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지성소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 보관된 만나는 항상 신선했습니다.

11:28에서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구약성경 안식일의 성취입니다. 새 언약 안식일은 육체적인 휴식(안식)의 날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내적인 휴식입니다. 그분은 무엇보다도, 지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며 그분에게 오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주십니다. 나는 "잭 형제님, 나는 형제님의 교회에 들어가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왜 우리 교회에 들어오고 싶어하는지 물었고, 그들은 "나는 지금 다니는 교회에 질려서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만약 당신이 지금 다니는 교회에 질렸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에게도 질릴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교회에 들어오지 마십시오. 사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질린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질린 사람들의 무리입니다. 만약 당신이 자신에게 질렸다면, 우리와 합류해도 좋습니다. 우리 함께 멋진 교제를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목사들이 끊임없이 그들 교회에서 교인 수를 늘리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패배한 삶에 질려 있는 사람들만 그분께 오라고 초대하셨습니다. 당신은 우울하고 침울한 삶과 가정 생활의 실패에 질려 있습니까? 사역에서 신선함과 기름부음이 부족한 것에 지쳐 있습니까? 그렇다면 주님은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고 말씀하시며 당신을 초대하십니다.

우리가 불안하거나 화를 내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가 하루 24시간, 주 7일, 일 년 52주를 평안 가운데 거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패배한 상태를 먼저 인정하고 주님께 와서 "주님, 제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제게 이 안식일의 쉼을 주십시오"라고 말할 때에만 그런 삶을 살 수 있습니다.

11:29에서 예수님은 "내 멍에를 메고 내게서 배우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는 배우는 자이며, 그는 가르침을 받는 아이처럼 예수님께 와서 그분에게서 배웁니다. 주님은, 우리가 무엇보다도 그분에게서 무엇을 배우기를 원하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설교하는 법, 병자를 고치는 법, 예언하는 법 등을 배우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가 무엇보다도 그분에게서 온유함과 겸손을 배우기를 원하십니다. 사실, 이 두 가지는 그분이 누구에게나 배우라고 요청하신 유일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미덕을 배우고 싶어하는 그리스도인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분의 안식일의 쉼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기름 부음받고 효과적인 사역을 하는 경건한 사람을 보면, 그와 같은 사역을 하고 싶어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먼저 본받아야 할 것은 그의 경건한 삶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람을 낚는 어부나 그분의 교회에서 교사가 되라고 부르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가 먼저 "안식 속에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 속이 평안하지 않다면, 우리 자신이 많은 문제를 겪게 될 것이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문제를 일으킬 것입니다.

의미심장하게도, 예수님이 이 안식에 대해 말씀하신 직후, 그분은 유대인들의 안식일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무너뜨리셨습니다(12:1-13). 먼저, 제자들이 안식일에 곡식을 따고 있을 때 바리새인들이 그것에 대해 질문하자, 예수님은 즉시 다윗과 레위 제사장들의 예를 인용하여 제자들을 변호하셨습니다(12:1-8). 그런 다음 그분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한 사람을 고치시고, 바리새인들의 비난을 멈추시며, "안식일에 너희 양 한 마리가 구덩이에 빠지면, 너희는 즉시 끌어내지 아니하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더 중요하지 아니하냐?"(12:9-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매우 편협하고 이기적입니다. 그들은 자신을 잘 돌보지만, 다른 사람들의 필요와 고통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12:24, 31, 32에서 우리는 바리새인들이 말하기를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통해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는 것을 읽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대적하는 말을 했느냐? 그것은 용서받는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미리암이 모세를 비판하며 "왜 그 여자와 결혼했느냐?"라고 말했을 때, 그녀는 나병(하나님의 심판)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사탄과 결탁했다고 비판했을 때, 그들은 용서받았습니다!! 이것이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입니다. 아벨의 피는 심판을 외쳤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자비를 외칩니다(히 12:24). 만약 당신이 하나님께서 당신을 해친 사람들을 심판하시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여전히 옛 언약 아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시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12:36, 37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말의 중요성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사람들이 하는 모든 부주의한 말은, 심판 날에 해명을 해야 한다." 50년 이상 전 세계 여러 지역의 신자들을 관찰한 결과, 나는 신자의 95%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믿지 않는다고 확신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한 모든 쓸모없는 말에 대해 언젠가 하나님께 설명해야 할 것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을 욕하고, 험담하고, 뒷담화하고, 추잡한 농담을 합니다. 그들은 농담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줍니다. 유머는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유머는 경건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당신은 유머감각이 있다는 평판을 얻을 수 있지만, 그것은 심판의 날에 설명해야 할 부주의한 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한 모든 말을 기록하고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기억 속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태어난 이후로 우리의 기억 속에 비디오 테이프가 돌아가고 있습니다. 컴퓨터의 메모리처럼, 그것은 우리의 모든 생각, 말, 행동을 기록해 왔습니다. 심판의 날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면, 말을 조심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된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것은 성경적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균형 잡힌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신은 또한 행위에 의한 의롭다 함을 얻게 된다는 것을 믿을 것입니다 - 왜냐하면 그것 역시 성경적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4장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2장은 행위 - 믿음의 행위 - 에 의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에 대해 말합니다. 여기 마태복음 12:37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마지막 날에 우리가 한 말로 의롭다 함을 받거나 정죄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심판의 날, 당신이 한 말이 기억에서 재생될 때, 당신은 의롭다고 인정받을까요, 아니면 정죄받을까요? 그것은 우리 모두가 지금 고려해야 할 질문입니다 - 너무 늦기 전에요.

새 언약에서 우리는 불의 혀를 갖게 될 것입니다. 오순절 날, 불의 혀가 사람들의 머리 위에 내려왔는데, 이는 성령의 끊임없는 통제 하에 있는 혀를 상징합니다. 많은 기독교인이 이것을 알 수 없는 방언을 말하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그것은 그 이상입니다. 그것은 항상 성령의 통제 하에 있는 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인도에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고 나서, 마귀의 인도에 따라 모국어로 말합니다. 나는 성령께서 알려지지 않은 언어로 말하는 은사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제가 아는 언어로 말하는 것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옛 언약에서 그들은 성령이 그들 안에 거하지 않았기 때문에 혀를 통제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더 높은 차원에서 살 수 있습니다.

12:40에서 예수님은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밤낮을 지냈다고 언급합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인자도 땅의 심장부(땅 속)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자, 그분은 즉시 낙원으로 가셨습니다(그 당시 낙원은 땅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회심한 도둑이 잠시 후에 예수님과 합류했습니다. 예수님의 몸만 무덤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실 때, 그분은 낙원을 자신과 함께 세 번째 하늘로 옮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날 오후 3시에 돌아가셨습니다. 그 해 유월절은 목요일이었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금요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다음 날인 금요일은 무교절의 절기의 첫날이었고, 이 날은 "특별한 안식일"이었습니다(요 19:31 참조). 그 다음 날(토요일)은 매주마다 오는 안식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에 두 번의 안식일이 연속으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일요일 아침에야 무덤에 와서 그분에게 기름을 부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요나가 바다 괴물의 뱃속에서 살아있었던 것처럼 땅의 심장부에서 사흘 밤낮으로 살아 계셨습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자신의 몸으로 돌아와 "죽은 자 가운에서 살아나셨습니다.”

왕국의 일곱 가지 비유

13:1-52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일곱 가지 비유를 읽습니다. 그것들은 천국의 비유라고 불립니다. 첫 번째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였습니다. 이 장 전체에서 예수께서 천국의 외적인 표현, 즉 이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보는 방식으로 천국에 대해 말씀하셨다는 점에 유의하십시오. 그래서 천국에는 마음에 선한 땅을 가진 사람과 악한 땅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그분은 천국이 밀과 가라지가 모두 있는 밭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나중에 밭이 교회가 아니라 세상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13:38).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이 비유를 잘못 인용하여, "예수께서 밀과 가라지가 모두 교회에서 자라도록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을 분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심하지 않은 사람과 회심한 사람을 교회에 두어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합니다. 밭은 세상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함께 자라도록 허락하시는 곳은 교회가 아니라 바로 이 세상입니다. 지역 교회에서 우리는, (인간적으로 분별할 수 있는 한에서)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거듭난 사람만이 교인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도 참석하여 메시지를 듣는 것은 환영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거듭나기 전까지는 지역 교회, 즉 그리스도의 몸에 속할 수 없다는 것을 그들에게 분명히 알려야 합니다.

13:31-32는 보통 작은 식물로만 자라는 겨자씨에 대한 비유입니다. 하지만 이 경우, 그것은 자연스럽지 않게 자라서 거대한 나무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지역 교회가 성장하는 것을 의도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비유로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지역 교회가, 서로를 알고, 서로 사랑하고, 지역 주민들에게 그분의 삶을 나타내는 형제 자매들의 작은 무리(작은 겨자 식물과 같은)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재능 있는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계획에 반하여 거대한 교회(큰 나무와 같은)를 세웠습니다 – 그곳은 사람들이 축구 경기나 영화를 보러 가는 것처럼, 설교만 듣기 위해 오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극소수만이 생명으로 가는 길을 찾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7:13,14). 하지만 영리한 설교자들은 거룩함의 기준을 낮추고 회개, 자기 부인, 십자가를 지는 것에 대한 모든 설교를 피함으로써 쉽게 많은 군중을 모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데 전혀 관심이 없고 일요일에 좋은 설교를 듣는 데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무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교회의 규모를 늘리면, 다음에 일어날 일은 예수께서 이 비유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을 것입니다: 공중의 새(예수께서 앞서 비유에서 말씀하셨듯이 악한 자의 대리인을 나타냄 - 13:4,19)가 와서 나무 가지에 앉습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제자만 만들려고 했다면, 당신의 교회는 규모는 작았겠지만, 더 순수했을 것이고 사탄의 영향력과 그러한 영향력이 가져오는 문제에서 자유로웠을 것입니다!

13:33에서 예수님은 천국이 누룩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지역 교회에 부패가 어떻게 퍼질지에 대한 예언입니다. 예수께서는 교회가 겪을 위험에 대해 거듭거듭 경고하셨습니다 - 나쁜 땅, 가라지, 교회 안에 앉아 있는 마귀들(새), 누룩 등이 그것입니다. 만약 기독교 지도자들이 이 비유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그들은 교회를 영적 죽음에서 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 그리고 그들은 제자도를 강조했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제자가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는 두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13:44에서, 예수님은 천국을 밭에 숨겨져 있는 보화를 발견한 사람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그 밭을 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자신에게 소중한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하고 - 하나님의 왕국을 소유하려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 매우 비싼 진주를 산 사람에 대한 두 번째 비유는 같은 진리를 강조했습니다. 두 경우 모두 '그가 가진 모든 것'이라는 표현에 주목하십시오.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지 아니하면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4:33). 그것이 제자가 되고 하나님의 왕국을 소유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13:47-50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왕국이 이 땅에서 외적으로 나타나는데, 두 종류의 물고기로 나타난다고 하셨습니다 – 좋은 것과 나쁜 것. 그러나 마지막 때에, 천사들이 와서 의로운 사람과 악한 사람을 분리합니다(49절).

13:52에서, 성경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좋은 말씀이 있습니다. 서기관은 성경을 주의 깊게 연구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서기관이 제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가 설교할 때, 그는 자신의 보물창고에서 새 진리뿐만 아니라 옛 진리도 신선하게 꺼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서기관으로 남아 있다면, 당신의 사역은 죽게 될 것입니다.

14:25-31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것을 봅니다. 그러나 여기서 큰 기적은 베드로도 물 위를 걸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기는 삶의 그림입니다. 우리가 물 위를 걸을 수 없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를 끌어내리는 중력의 법칙입니다. 중력의 법칙은 예수님도 끌어내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것을 이기고 물 위를 걸었습니다. 중력의 법칙은 폐지되거나 파괴된 것이 아니라 극복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을 신뢰하는 한, 베드로도 중력의 법칙을 극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잠시 후 그랬던 것처럼 중력의 법칙이 그를 이길 것입니다.

죄의 법칙도 중력의 법칙과 같습니다. 유혹은 우리를 끌어내리려 합니다.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은 유혹을 받으셨습니다(히 4:15).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유혹이 아래로 끌어내리는 것을 극복하셨고 - 그래서 그분은 결코 죄를 짓지 않으셨습니다(마 4:1-10). 우리가 같은 능력을 구하기 위해 그분을 바라본다면, 우리도 그분이 이기신 것처럼 이길 수 있습니다 - 하지만 우리가 그분을 계속 바라볼 때만 가능합니다(계 3:21; 히 12:1, 2). 그러나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사는 수준 이하의 삶이나 모세와 예레미야의 옛 언약의 본을 본다면, 우리는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힘입니다. 우리가 "이 은혜 아래 있을 때, 죄가 우리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롬 6:14). 베드로가 주님에게서 시선을 돌린 순간, 그는 가라앉았습니다 - 그리고 우리도 그럴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가라앉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베드로가 한 것처럼 하십시오. 그는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라고 외쳤습니다. 베드로는 바다 바닥에 도달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아닙니다. 그는 가라앉기 시작하자마자 외쳤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유혹의 끌어당김이 너무 강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주님께 구출해 달라고 부르짖으십시오. "주님, 저는 정욕(또는 분노, 또는 무엇이든)에 빠지려고 해요. 제발 저를 구해 주세요."라고 말하십시오. 그분은 바로 그 순간에 당신에게 은혜를 주시고 당신을 서게 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이 넘어지지 않도록 보호하실 수 있습니다"(유 24) -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입니다(히 13:8).

15:13에서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심지 아니하신 모든 식물은 뿌리째 뽑힐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그것이 좋은 식물인지, 큰 식물인지,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는 식물인지가 아닙니다. 문제는 “누가 심었는가 – 당신이냐, 하나님이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한 우리만의 기발한 아이디어로 사람들이 보기에 매우 인상적으로 보이는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날에 주님은, 이 생각이 하나님에게서 나왔는지, 아니면 당신 자신의 두뇌에서 나왔는지 보실 것입니다. 이 말씀을 주의 깊게 들어보세요: 하나님은 이 우주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의 유일한 정당한(합법적인) 창조주입니다. 당신이나 나로부터 시작된 것은 언젠가 반드시 파괴될 운명입니다. 성경의 첫 단어는 “태초에(in the beginning 맨 처음에) 하나님이......”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이 그래야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하고 하나님을 기다리고 삶의 모든 단계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구해야 합니다 - 영원의 기준에 따라 가치 있는 삶을 살고자 한다면 말입니다.

어딘가에 가서 주님을 섬기고 싶은 좋은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누군가가 당신에게 가라고 권했나요? 아니면 당신 자신이 가고 싶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주님을 기다리며 그분의 뜻을 구했나요? 그분이 그 일을 위해 당신의 마음에 부담을 주었나요? 그 부담이 그분의 것이라면, 영원한 열매가 있을 것입니다 - 그렇지 않다면 열매가 없을 것입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본 것처럼, 어떤 장소에 교회를 짓고자 하나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교회가 될 것입니다.

인도와 같은 나라에서는, 물질적 혜택을 원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어디서나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 매우 쉽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거나 자신을 부인하고 죄를 미워하며 이기는 자가 되기 위해 당신에게 오지 않습니다. 아니요. 그들은 세상적인 이익을 위해 옵니다. 나는 평생 인도에서 살았고 - 여기서 소위 "기독교적 일"이라고 불리는 많은 일들의 현실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주님을 기다리며, 그분을 섬기기 전에 당신의 삶에 대한 그분의 부르심을 알고자 했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돈(또는 아마도 당신 자신의 명예)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이것들은 당신이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중요한 질문입니다. 지금은 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지 모르지만, 심판의 날에는 이 말을 들었으면 좋았을 걸 하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자신을 낮추고 "주님, 나는 당신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은 어떤 것도 내 삶에서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의 이성이나 다른 사람의 설득에 의해서 하나님을 위한 일을 서두르지 말아야 합니다. "믿는 자는 서두르지 아니하리라"(사 28:16 - KJV). "너는 자기 일에 성급한 사람을 보았느냐? 어리석은 자에게 그보다 더 소망이 있느니라"(잠 29:20 - NASB 여백). 주님을 기다리고 그분께서 당신의 마음(mind)에 그분의 생각(thoughts)을 넣어 주시도록 허락하십시오. 그분의 생각은 당신의 생각보다 훨씬 더 좋고 더 높고 더 생산적입니다. 이는 하늘이 땅 위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사 55:8,9). 하지만 당신이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거나 주님의 일을 위해 자신의 자원에 의존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그분의 명령에 따라 일하십시오 - 그러면 당신의 모든 식물(하나님이 심으신- 역주)이 영원히 남아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우시는 교회

16:15에서 예수께서 시몬에게 "내가 누구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시몬은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즉시 그를 공개적으로 칭찬하시며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는 네가 스스로의 지성이나 총명으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에게 그것을 계시해 주셨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계시되었다'는 단어에 주목하십시오. 이것은 새 언약의 단어입니다. 옛 언약 아래에서, 사람들은 율법을 연구하고 묵상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밤낮으로 주님의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었습니다(시 1:2). 그러나 새 언약에서, 복 있는 사람은 베드로처럼 계시를 받는 사람입니다. 에베소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바울의 기도는 그들이 "계시의 영"을 받기를 바라는 것이었습니다(엡 1:17). 성령께서 베드로의 마음을 열어 인간의 지성으로는 결코 발견할 수 없는 것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에는 그보다 더 똑똑한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그보다 훨씬 더 성경을 공부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마귀의 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린아이처럼 겸손하게 그분께 나아오는 사람들에게 성경을 계시하십니다(마 11:25).

16:18에서, 예수님은 시몬에게 "너는 베드로(페트로스 - 그리스어)이고, 이 반석(페트라 - 그리스어)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을 "페트로스"("작은 돌(a small stone)")라고 부르셨고, 교회는 시몬이 방금 계시로 고백한 "페트라"("큰 반석(a large rock))") 위에,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위에 세워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몬 베드로(Simon Peter)는 반석-기초(rock-foundation)가 아니었습니다.

방금 (그리스어에서) 보았듯이 예수님은 여기서 완전히 다른 두 단어를 사용하셨는데, 이것은 영어로 번역하면 명확하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16:18,19에서, 예수님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문들이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네게 천국의 열쇠를 주리니; 무엇이든지 네가 땅에서 매는 것은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네가 땅에서 푸는 것은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교회에 관해 하신 첫 번째 말씀이었으며 - 그분은 교회가 영적 죽음의 세력인 “음부의 문들”과 싸우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처음 이 글을 읽었을 때, 교회가 사방에서 사탄에게 공격을 받고, 교회가 주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버텨내고 살아남는 모습을 그려보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음부의 문들이 교회를 공격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교회가 음부의 문을 공격하여 그 문들을 이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당시에는, 도시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 문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그 문을 통과했다면, 당신은 그 도시를 이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영적 전쟁에 참여하여 악의 세력을 이기고, 사탄의 활동을 묶고 그에게 포로로 잡힌 사람들을 풀어주는 공격적인 교회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방어적인 전투가 아니라, 공격적인 전투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사탄의 요새에 맞서 싸우고 곳곳에서 십자가의 승리를 기록합니다. 우리는 구석에 앉아 "주님, 당신이 오실 때까지 견딜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결코 부르고 싶지 않은 유명한 기독교 찬송가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내가 갈테니 요새를 지켜라"라고 주님이 말씀하신다고 나와있습니다. 그것은 요새 안에서 교회가 고군분투하고, 악마가 사방에서 공격하고, 교회가 어떻게든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견디려고 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요새 안에 있는 것은 마귀이고, 우리는 그의 문에서 그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그림은 승리한 대장을 따라 악마를 공격하는 승리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온전히 복종하고 마귀를 대적한다면, 사탄은 우리에게서 도망칠 것입니다(악 4:7). 사탄은 그냥 떠나는 것이 아니라, 도망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이 땅에서 걸으셨던 것처럼 걸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가시는 곳마다 마귀들이 떨었고 사탄은 두려워했습니다. 우리는 같은 방식으로 이 땅에서 걸어야 합니다. "우리 발바닥이 밟는 곳은 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느니라"(수 1:3). 그러므로 우리는 사탄이나 사탄이 우리에게 할 수 있는 일을 두려워하며 살지 않습니다. 아니요. 우리를 두려워해야 할 자는 바로 사탄입니다. 우리가 사탄에 맞서 그런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결코 세울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이미 강한 자를 결박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들어가서 강한 자의 물건을 취할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18:3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결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겸손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면......”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여기서 겸손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데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요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종종 사람들에게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데 세 가지 비결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첫째, 겸손. 둘째, 겸손. 셋째, 겸손. 그게 다입니다. 자신을 낮추고, 당신이 세상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똑똑하더라도,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어리석고 무지하다는 것을 인정하십시오.

우리는 인간으로서, 우리의 교만 때문에, 매우 자신감이 넘칩니다. 어린 아기는 자신감이 없습니다. 6개월 된 아기는 엄마 품에서 떼어놓으면 울 것입니다. 엄마 품 밖에서는 불안함을 느끼는데, 너무 무력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사탄과 맞설 때 담대하기를 바라시는 것처럼, 그분은 우리가 우리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전적으로 그분께 의지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이중적 그림입니다: 사탄과 그의 악한 세력에 맞설 때는 두려움 없는 전사이지만,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어린아이입니다. 항상 그 이중적 태도를 유지하십시오. 영적인 문제에서, 우리는 무지하고 어리석으며 기본적인 것조차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주님을 붙잡습니다 - 그러면 우리는 완벽하게 안전할 것이고 또한 많은 어리석은 말과 행동으로부터 보호받을 것입니다.

18:18-20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교회에 관해 말씀하신 두 번째를 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사탄을 결박하고 그의 손아귀에 붙잡힌 신자들을 풀어주는 교회의 권세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 권세는 연합된 최소한 두 명의 신자에 의해서만 행사될 수 있습니다. 두 신자가 영적으로 하나가 될 때, 주님은 그들 가운데로 들어오십니다(18:20).

그때서야 그들은 사탄의 활동을 묶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탄 자신을 묶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언젠가 미래에 직접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계 20장). 하지만 우리는 사탄의 활동을 묶을 수 있습니다 - 두 사람이 영으로 연합한다면 말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연합하면 사탄을 영원히 집에서 몰아낼 수 있습니다. 두 장로는 연합하면 사탄을 영원히 교회에서 몰아낼 수 있습니다. 사탄은 이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항상 남편과 아내를 분리하고 교회에서 장로들을 분리하려고 합니다.

18:21-35에서, 예수님은 동료 종을 용서하지 않은 자비롭지 못한 종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우리의 죄가 하나님께 한 번 용서받았다 하더라도, 우리가 다른 한 사람만이라도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할" 수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이 왕은 그 종에게 엄청난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 종이 동료 종을 용서하지 않았을 때, 그 자신이 받았던 용서도 취소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네가 네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35절)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용서하신 모든 죄는 당신이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당신의 계좌로 되돌아가고, 당신은 바로 지옥에 가게 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그 종이 고문하는 자들에게 넘겨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 신자들에게서 그분의 보호를 철회하여, 악마가 그들을 괴롭힐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신자들 사이에 어떤 질병이 생기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더 많은 비유

20:1-16에서, 예수님은 하루의 각기 다른 시간에 주인을 위해 일하러 온 일꾼들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유에는, 다섯 무리의 일꾼들이 있었습니다. 처음 네 무리는 – 12시간, 9시간, 6시간, 3시간 일했는데 - 모두 급여를 받고 계약에 따라 일했습니다. 마지막 무리만 - 1시간만 일했는데 - 계약 없이 일했고 급여에 대한 보장도 없었습니다. 하루가 끝나고, 마지막 무리는 첫 번째 무리와 같은 급여를 받았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첫 번째 무리의 시급의 12배를 받았습니다!!

주님께서 이를 통해 가르치신 것은 상을 위해 주님을 섬긴 사람들은, 비록 그들이 수년간 주님을 위해 일했더라도, 가장 나중에 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을 섬긴 사람들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일했더라도 하늘에서 가장 높은 상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일의 양이 아니라 질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동기입니다. 마지막 날에는 우리가 “무엇을” 했는가 보다 "왜" 그렇게 했는가가 훨씬 더 중요할 것입니다. 지금 그것을 깨닫는 것이 좋습니다.

22장에서 우리는 세 가지 중요한 진리를 봅니다: (a)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무료로 받아야만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1-14절). (b) 우리는 하나님께 어떤 돈을 드리기 전에, 먼저 사람에 대한 빚을 청산해야 합니다("가이사"는 오늘날 정부와 모든 인간을 나타냅니다)(21절). (c) 성경 전체의 메시지는 두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여라(37-40절). 많은 사람들이 이 영역에서 우리 주님의 가르침보다 사람의 가르침을 따라 길을 잃기 때문에 이것들은 묵상할 가치가 있는 위대한 진리입니다.

23장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위선과 거짓 종교를 드러내시고, 그들을 엄하게 정죄하십니다. 그들은 금식하고, 기도하고 십일조를 바쳤으며, 그들의 교리는 모두 옳았고, 심지어 선교 프로그램도 있었습니다(23:15). 그들은 직장을 그만두고 개종자를 만들기 위해 먼 나라로 여행을 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개종자가 두 배로 지옥의 자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율법주의자가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 그리고 그가 다른 사람을 자기 식의 율법적인 기독교로 개종시키면, 그는 그 사람을 두 배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듭니다. 그러니 모든 선교 활동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제자를 만들어, 그들이 예수님을 최고로 사랑하도록 가르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하도록 가르칠 때에만, 우리는 그들을 지옥에서 구출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가, 겉모습만 “그리스도인처럼 보이고” 우리가 그들에게 정한 모든 규칙을 따르는 개종자들을 만든다면, 우리는 그들을 속인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지옥을 채울 뿐입니다. 사람들이 외형적으로 변화하고 어떤 형식을 따르도록 하는 것은 쉽습니다. 나는 몇 년 전에, 선교사들이 주민들 중 일부를 자신들의 버전의 "기독교"로 "개종"시킨 마을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삶에는 거룩함이 전혀 없었습니다. 유일한 차이점은 그들이 다른 신들에게가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노래를 부른다는 것입니다. 그들 중 일부는 이름을 "기독교식 이름"으로 바꾸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그 선교사들에 의해 두 배로 지옥의 자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매우 강한 말로 비난하며, "독사"라고 불렀습니다(23:33). 그분은 그렇게 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그들 안에서 책망한 죄를 위해 죽으실 예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수년 동안 "암탉이 날개 아래 새끼를 모으듯이 그들을 모으려” 노력하셨습니다(23:37).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우리의 목숨을 기꺼이 버릴 수 있어야만 다른 사람의 죄를 비난할 권리를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고 죄를 비난한다면, 우리는 단지 "자칭 선지자"이자 위선자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

24장에서, 예수님은 지상으로의 마지막 재림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날의 첫 번째 징조(그분이 반복해서 말씀하신 것)는 마지막 날에 많은 속임수가 있을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4, 11, 24절).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잎(종교)만 있고 열매(영성)가 없어서 저주받은 무화과나무(이스라엘 민족을 상징)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마 11:13-21). 그런데 그 나무가 다시 잎(영성이 없는 종교)을 냈습니다(마 24:32, 33). 이스라엘 민족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지 40년 후에 흩어졌지만, 1967년 우리 생애 처음으로 그들은 땅으로 돌아와서 예루살렘을 다시 차지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재림이 매우 가까웠다는 것을 압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또한 큰 환난이 끝난 후에, 그분의 자녀들을 데려가서 그분과 함께 있게 하시려고 돌아오실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29절). 그분은 또한 그분이 올 때, 모든 사람이 그분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번개처럼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27절). 그분은 또한 그분이 비밀리에 올 것이라고 가르친 사람들을 믿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26절). 그분은 여기서 그분이 구름 속에서 천사들과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오셔서, 온 세상에서 그의 자녀들을 모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들의 휴거는 나중에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 4:16, 17에서 언급한 것과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예수님은 여기서 묘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휴거가 큰 환난이 끝난 후에야 일어날 것이라고 여기서 매우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29절).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사람들의 전통을 믿지 말고 우리 주님의 분명한 가르침을 믿어야 합니다.

25장에서,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그분의 오심을 준비해야 한다는 가르침(24장의 마지막 구절)을 세 가지 비유로 확장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는 방법은 그분의 재림 일정을 이해하고 예언적 도표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준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heart)은 우리의 생각(mind)보다 더 중요합니다. 첫 번째 비유는 마음의 순수함에 대한 것입니다. 열 처녀는 겉모습이 깨끗한 그리스도인을 상징합니다. "그릇에 여분의 기름"을 가진 다섯 명의 현명한 처녀는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마음이 채워진 사람들을 상징합니다(1-13절).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우리가 주님을 위해 하는 모든 일의 동기가 아니라면, 겉모습이 순수하더라도 우리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 어리석은 처녀들과 같이 되어 "처음 사랑"을 잃었습니다(계 2:4). 두 번째 비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를 그분의 왕국을 위해 충실하게 사용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14-30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분을 섬길 수 있는 능력과 기회의 정도를 다르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에게 주신 분량에 따라서만 우리가 열매를 맺기를 바라실 뿐, 그 이상은 바라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다섯 달란트를 벌은 사람이 두 달란트만 벌은 사람과 같은 보상과 칭찬을 받은 것입니다(21,23절). 세 번째 비유(양과 염소에 대한 비유)는 우리가 궁핍한 동료 신자들을 대하는 방식에 따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상해 주실 것임을 보여줍니다(31-36절). 이것은 우리의 믿음이 살아 있고 진실하다는 증거입니다(약 2:14-17).

27:3에서 우리는 "회개"조차도 공허하고 진실하지 않을 수 있음을 봅니다. 유다는 일종의 회개(자신의 죄에 대한 슬픔의 감정)가 있었지만, 주님께 가서 죄를 고백하는 대신 제사장들에게 갔습니다(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그래서 그는 지옥에 갔습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습니다 - 다른 사람은 없습니다.

28장의 처음 몇 구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읽습니다. 그분의 부활이 없었다면 그분의 죽음은 헛되었을 것입니다. 그분이 주장한 대로, 즉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이 흔들리지 않는 두 가지 기초, 즉 우리 죄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분의 부활 위에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를 모든 종교와 다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천사가 돌을 굴리기 전에 그리스도께서 무덤을 떠나셨다는 점에 유의하십시오(2절). 천사가 돌을 굴린 것은 주님이 무덤에서 나오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의 제자들이 들어가서 그분이 부활하신 것을 보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대 명령

28:18-20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대 명령에 대해 읽습니다. 대 명령의 근거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우리 주님께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절대적인 권세로 하늘과 땅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확신하지 못한다면 제자를 삼으러 나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어딘가에 필요가 있거나 누군가가 우리에게 가라고 권유했기 때문에 제자를 삼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시고 우리에게 가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에 제자를 삼으러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나라에 가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우리는 제자를 삼아야 합니다 – 단지 회심자를 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그들이 "그리스도를 마음에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는 주 예수님을 배우고 따르는 자입니다. 우리는 모든 민족 가운데서 사람들을 이런 제자로 만들어야 합니다. 기꺼이 제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만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삼중 이름으로 세례(Baptism)를 받는 것은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필수입니다. 우리는 "세례에 대해 설교하지 않겠다. 그러면 우리의 연합이 깨질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교파 간 연합 단체들과 같아선 안 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설교하라고 말씀하신 모든 것을 설교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그 모든 제자들을 지역 교회로 세워서, 예수님이 명령하신 모든 것을 하나하나 행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지상 명령은 매우 명확합니다. 첫째: 가라. 그 다음 제자를 만들어라. 그 다음 그들에게 세례를 주어라. 그 다음 나머지 시간을 예수님이 명하신 모든 것을 그들이 순종하도록 가르치는 데 써라. 이 지상 명령은 앞뒤로 한가지 선언과 한 가지 약속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먼저, "모든 권세는 주 예수께 주어졌다." 그리고 마지막에, "내가 세상 끝날 때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는 약속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라,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는 주님의 약속을 주장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누구에게 주어졌을까요? 그것은, 가서 제자를 만들고, 그들에게 예수님이 명령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치는 자에게만 주어졌습니다(28:19, 20) - 돈을 벌기 위해 여기저기 다니는 신자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신자들은 그 약속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가는 곳마다 제자를 만들고자 한다면, 당신은 주님께서 항상 당신과 함께 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장 41
마가복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전기를 한 사람에 의한 통합된 전기가 아닌, 네 명의 다른 사람이 네 권의 전기를 쓰도록 허락하신 데에는 여러 가지 좋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마태는 그의 복음을 시작하면서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부르고, 수많은 성경을 인용하여,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약속된 메시아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시작합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의 기적에 대한 설명이 더 많지만, 마태복음만큼 많은 가르침이나 비유가 없습니다. 마태는 지상에서의 천국의 가르침을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배우기와 따르기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를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시몬의 형제 안드레가 그물을 던지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들은 어부들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1:16, 17). 갈릴리 해안에는 수백 명의 어부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 모두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네 사람만 불렀습니다 -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위해 전임 사역에 들어가려면, 하나님으로부터 명확하게 부르심을 받아야 합니다. 당신은 "저는 복음전도자나 교사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역을 위해 당신을 부르시고, 당신을 그 사역에 준비시키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주권적으로 그분의 종들을 부르십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모든 사역은, 인체의 모든 부분과 마찬가지로 중요합니다. 얼굴과 같은 어떤 부분은 보이는 반면, 신장과 간과 같은 다른 부분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도, 어떤 사역은 다른 것보다 더 눈에 보입니다.

마태복음 11:29에서, 예수님은 "나에게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그분은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제자가 해야 할 두 가지 일입니다. 제자는 배우는 자이자 따르는 자입니다. 제자는 평생 예수님으로부터 배우고 그분을 따라야 합니다. 군대에서 그들은 "왼쪽, 오른쪽, 왼쪽, 오른쪽"이라고 말하며 행진합니다. 우리는 "배우고, 따르기. 배우고, 따르기"라고 말해야 합니다 -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배우기만 하고 따르지 않으면, “왼쪽, 왼쪽, 왼쪽, 왼쪽” 명령에 맞춰 왼쪽발로만 걷는 사람과 같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참 제자는 배우고 배운 것을 실천합니다. 배운 것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자신과 같은 사람, 즉 한 발로 행진하는 사람들만 낳을 뿐입니다. 우리는 결코 충분히 배웠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끝까지 예수님으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그 구절의 두 번째 부분은 약속입니다. "너희가 나를 따르면, 내가 너희를......만들겠다." "내가 너희를 만들겠다"는 표현을 생각해 보세요. 이것은 도예가가 그릇을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도예가들은 모든 그릇을 같은 모양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다른 모양으로 만드십니다. 하나님께 당신의 사역을 어떤 다른 형제의 모양으로 만들어 달라고 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각 그릇을 독특한 모양으로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다른 사람의 사역을 얻으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서 만들어내려고 하는 모양을 방해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나의 교회 사람들에게 "절대로 나의 사역을 모방하려고 하지 마세요 - 왜냐하면 하나님은 여러분이 독특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당신답기를 원하십니다."라고 거듭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교회에 나와 같은 사람은 한 명만 원하십니다 - 그리고 그분은 당신과 같은 사람을 한 명만 원하십니다.

주님을 따르면, 그분은 당신을 마땅히 되어야 할 모습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책임입니다. 이 남자들의 경우, 사람을 낚는 어부로 빚어져야 했습니다. 당신의 경우, 그것은 다른 것일 수도 있습니다 - 아마도 교회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도로, 어떤 사람들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들은 전도자로 부름을 받습니다. 전도자는 사람을 낚는 어부입니다. 바울과 같은 사람들은 사도, 선지자, 교사, 목자, 전도자로서 모든 역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한 사람에게 이 모든 특별한 은사를 주시는 경우는 드뭅니다. 우리 대부분은 보통 은사를 하나만 가지고 있습니다. 초기에는 사도들이 많은 은사를 가져야 했는데, 이는 교회에 은사를 가진 사람이 너무 적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교회가 확장되면서, 하나님께서는 은사를 더 널리 분배하셨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은사가 무엇이든, 그 원칙은 여전히 "내가 너를 만들겠다"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그분이 원하시는 존재로 만들도록, 허락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만들 수 없습니다.

자신을 전도자나 교사 또는 사도로 만들려고 하지 마십시오 - 그러면 완전히 실패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부르지 않으신 사역을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자신을 낮추고, 주님을 기다리며, 그분께서 당신을 부르신 목적을 보여주시도록 하십시오. 나는 이 나라에서 스스로 사역을 하려고 노력하는 많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미국에서 돈을 받고 사역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언젠가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뽑아내어 파괴하실 것입니다. 당신은 단 한 번의 인생만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당신이 훌륭한 사역을 가지고 있다는 인상을 사람들에게 심어주려고 노력하면서 인생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에서 이루라고 부르신 사명을 이루십시오.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주의하여 이루라"(골 4:17). 주님을 기다리면 그분께서 당신을 그분이 원하시는 그릇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을 같은 것을 위해 부르지 않습니다. 갈릴리 바다의 모든 어부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사도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사도는 구체적으로 부름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대한 부름과 사역에 대한 부름을 구별해야 합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당신의 사역을 하도록 강요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사람들을 다루실 때, 어떤 귀신들은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소리쳤습니다(1:34). 귀신이 당신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했다는 말을 다른 사람들이 듣는다면, 그것은 당신을 흥분하게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귀신들에게 잠잠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어떤 귀신에게서도 증언을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귀신들은 어떤 경우에도 거짓말쟁이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증언이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귀신을 쫓아내기 전에, 귀신과 대화를 나눕니다. 이것은 항상 어리석은 일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귀신들을 쫓아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1:35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가졌던 습관에 대해 읽습니다, 그것은 우리 각자가 가져야 할 좋은 습관입니다 - 일찍 일어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사 50:4 참조).

전날 밤 늦게까지 사역을 하느라 바빴지만,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아버지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당신은 주로 어떤 영역에서 예수님을 따르고 싶습니까? 병자를 고치는 일? 여기에 기록된 내용부터 시작해 보는 건 어떨까요? 그분은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버지의 말씀을 경청하며 살았습니다. 누군가는 말하기를, 관광객들이 새로운 곳에 갈 때마다 볼거리에 대해 묻는 것처럼, 예수님은 항상 인적이 드물고 한적한 곳이 어디인지, 아버지와 둘만 있을 수 있는 곳이 어디인지 주변을 둘러보셨다고 합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항상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매우 얕습니다. 예수님은 매일 아버지와 이야기하는 시간을 보내고 싶어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힘과 지혜를 얻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께 부흥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곳에 더 머물러 있으라고 권했을 때, 예수님은 그럴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그날 아침에 이미 아버지께서 다른 곳으로 가라는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이성은 부흥이 일어난 곳에 머물러야 한다고 제안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선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 움직인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음성에 의해 움직이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그날 아침에 늦게 일어나 아버지를 기다리지 않았다면, 그분은 자신의 이성을 따라 같은 곳에 머물러 하루를 위한 하나님의 뜻을 놓쳤을 것입니다. 우리는 "단 하루를 위한 하나님의 뜻을 놓친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생기나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일을 완수하기 위해 매일이 중요했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돈을 다루는 것만큼이나, 시간을 신중하게 사용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주님, 저는 제 인생의 단 하루도 낭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항상 당신이 원하시는 곳에 있을 수 있도록 제 상황을 조정해 주세요 - 제 인생의 매일매일이요." 이것은 좋은 기도입니다. 우리가 하늘에서 우리를 인도하는 음성을 듣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가 매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있도록 우리의 상황을 조정하실 수 있습니다. 살기에 편안한 곳이라는 이유로 어떤 곳에 가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당신을 그곳에 두고 싶어하는지 자문해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의 끝에 다다랐을 때, 당신은 당신이 살아온 방식에 대해 어떤 후회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2:3에서, 중풍병에 걸린 한 남자를 예수님의 집으로 옮겨진 것에 대해 읽습니다. 네 사람이 그를 그곳으로 데려갔고, 군중 때문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지붕을 뜯어내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그런 일을 감히 생각했을까요? 그 집은 예수님의 집이었고(1절을 마태복음 4:13과 비교하십시오), 그분은 사람들을 너무 사랑하셔서 누군가가 고침을 받을 수 있다면 집이 망가져도 괜찮다고 생각하실 거라는 걸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셨고(5절) 그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11절). 일반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믿음에 따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습니다. 예수께서는 항상 믿음을 기반으로 일하셨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믿음이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다 주는 것을 봅니다. 이 사람은 전혀 믿음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친구들의 믿음은 그에게 치유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한 아버지의 믿음으로 귀신 들린 아들이 구출(deliverance)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막 9:24). 한 가나안 어머니의 믿음이 그녀의 딸을 구출했습니다(마 15:28). 백부장의 믿음은 그의 하인에게 치유를 가져다 주었습니다(마 8:13).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도 낙담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마비되고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들을, 기도로 예수님께 데려오고, 그분이 우리의 믿음을 통해 그들을 구출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기도로 내려줄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이 사건에서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우리가 서로 의존한다는 것을 배웁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때에 할 수 있고, 누구에게도 보고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혼자 일하는 것이 확실히 더 편리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일하는 사람들은 결국 스스로를 파괴할 것입니다. 교제를 구하십시오 - 그러면 구원(salvation)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당신이 어릴 때, 경건한 형제를 찾고, 그의 권위에 복종하십시오. 당신이 약할 때, 그들의 믿음이 당신을 이끌어 줄 것입니다.

2:18-22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다른 많은 종교적 무리에서는 금식을 했지만, 왜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는 것을 읽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비밀리에 금식하라고 말씀하셨으므로, 엄밀히 말해서, 다른 사람이 금식하는지 아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분(그들의 신랑)이 그들을 떠나 하늘로 돌아가면 금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금식하라는 명령을 내리신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신부는 자발적으로 – 비밀리에 - 금식하고 기도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예수께서는 새 언약에서는 모든 것(금식을 포함해서)이 옛 언약 때와 다르다고 설명하셨습니다. 지금은 규칙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자발적입니다. 그분은 이것을 설명하면서, 새 천 조각을 낡은 면 옷에 꿰매면, 낡은 옷은 빨면 찢어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을 적용하면, 새 언약의 진리를 조금 가져가서 옛 언약의 체계에 붙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옛 언약의 원칙에 따라 교회를 75% 운영한 다음, 거기에 25%의 새 언약 조각을 더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는 새 언약의 원칙에 따라 100% 운영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심각한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새 포도주에는 새 포도주 부대가 필요하다고 말함으로써 같은 진리를 설명했습니다(2:22). 그 당시, 포도주는 동물 가죽에 보관되었습니다. 안에 있는 포도주가 발효되기 시작하고 부피가 늘어나면, 가죽 부대도 팽창했습니다. 하지만 가죽 부대는 일정한 한계를 넘어 늘어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발효되지 않은, 새 포도주를 늘어난 낡은 포도주 부대에 넣으면 발효되면서 낡은 포도주 부대가 터질 것입니다. 오래된 포도주는 율법 아래서의 삶이고, 낡은 포도주 부대는 옛 언약 체계입니다. 새 포도주는 예수님의 삶(life)이고, 새 포도주 부대는 새 언약 교회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가져다가, 제사장과 십일조와 의식과 규칙이 있는 옛 언약 체계에 넣으면, 예수님의 삶이 그 안에서 터져 나올 것입니다. 율법과 규정이 있는 옛 언약 체계를 유지하고 싶다면, 모세의 율법에 따라 살기로 선택해야 합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을 섞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새 언약 교회가 있어야 합니다. 당신은 교회에서 옛 언약 규칙을 완전히 없애야 합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그리스도인은 옛 언약을 따르는 교회 체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새 포도주를 낡은 포도주 부대에 담으려고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여기저기서 터지는 것을 봅니다.

3:1-6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다는 것을 읽습니다. 거기에 손이 마비된 사람이 있었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그를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예수님이 화가 나셨다"는 것을 읽을 수 있는 유일한 곳입니다. 나는 그분께서 성전에서 채찍을 만들어 하나님의 이름으로 돈 버는 자들을 쫓아내셨을 때도 화가 나셨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의 완악함을 보고 슬퍼하셨기 때문에, 여기서 그들을 분노로 바라보셨습니다. 그분은 바리새인들이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무시한 채 그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사악한 본성은 그 사람의 고침을 기뻐하기는커녕, 예수님을 “죽일”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는 데서 드러납니다.

그들은 왜 예수님을 죽이고 싶었을까요? 손이 마비된 그 사람은 수년 동안 그들의 회당에 앉아 있었고 그 바리새인들은 그를 치료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멸시받는 나사렛 마을에서 무식한 목수가 와서 그 사람을 즉시 고쳐 줍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질투하게 되었고, 사람들이 이 설교자가 바리새인들보다 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분을 따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과 그의 사역을 파괴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거짓 선지자나 이단자라고 불렀습니다. 오늘날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용하시는 것을 질투하는 기독교 바리새인들이 있으며, 그들은 당신의 사역이나 심지어 당신의 생명까지도 파괴하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당신을 스캔들화하거나 거짓 선지자라고 부름으로써 당신의 사역을 파괴하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통해 하시는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질투합니다. 다른 사람의 사역을 질투하게 되는 것에 주의하십시오.

여기서 분노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에베소서 4:26은, "화를 내되 죄를 짓지 말라"고 말합니다. 죄가 있는 분노와 죄가 없는 분노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에서 죄가 없는 분노를 관찰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언제 화를 내셨고 언제 화를 내지 않으셨습니까? 여기에서 보듯이, 그분은 사람들이 다른 가난한 사람들에게 냉혹하게 대했을 때 화를 내셨습니다. 그분은 또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전에서 돈을 버는 것을 보았을 때 화를 내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분을 악마라고 부르거나, 그분의 얼굴에 침을 뱉거나, 십자가에 못 박았을 때 그분은 결코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분노는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하는 말이나 행동에 대한 반응일 때 죄가 됩니다 - 바울이 자신을 때리라고 누군가에게 명령한 대제사장에게 소리를 질렀을 때처럼 말입니다(행 23:3). 교회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당하는 것을 볼 때 우리가 느끼는 분노는 의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의 경우, 정반대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해치면 화를 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당하면 화를 내지 않습니다. 인도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돈을 버는 설교자가 너무 많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에게 화가 났을까요? 아니요. 왜 그럴까요? 그들이 그리스도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배우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4:38에서, 예수님이 배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셨다고 나옵니다. 베개는 안락함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배의 딱딱한 나무 바닥이 아닌 베개를 베고 주무셨다는 글을 읽으니 마음이 너무 좋습니다. 예수님은 편안한 침대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데도 그것을 거부하는 금욕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딱딱한 바닥에서 자면 더 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영성이 아닙니다 - 예수님을 따르는 것도 아닙니다.

5장에서, 우리는 귀신 들린 사람이 건짐받는 이야기를 읽습니다. 귀신들은 돼지에게 들어가게 해 달라고 요청했고 예수께서 허락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적어도 2000마리의 귀신이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귀신들이 2000마리의 돼지에게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그 지역 사람들은 이 사람이 완전히 건짐받고 제정신이 된 것을 보고 흥분하여 "주님,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와서 우리 땅에서 사역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대신, 그들은 예수님께 즉시 떠나라고 재촉했습니다(17절). 그것은 그들의 가치관에 대해 무언가를 말해줍니다: 그들은 돼지를 인간보다 더 소중히 여겼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한 영혼이 온 세상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막 8:36). 예수님은 그들의 바람을 존중하여 떠나셨지만, 구원받은 사람에게 그 땅에서 그분의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19절).

6:3에서, 예수님은 네 명의 형제가 있었다는 것을 읽습니다 -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 그분은 또한 자매들이 있었습니다 - 적어도 두 명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적어도 일곱 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요셉에 대한 기록이 없으므로, 그는 이미 죽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랜 세월 목수로 일하며 여덟 식구의 가족을 부양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대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어려운 환경을 헤쳐나가야 하는 부모들에게 본이 될 수 있도록, 그분의 아들(His Son)이 그런 경험을 겪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어려움을 공감하실 수 있습니다(히 4:15).

6:4에서 예수님은 "선지자는 자기 고향과 자기 집안의 친척들 외에는 어디에서나 존경을 받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1세기에 사실이었고 - 21세기에도 사실입니다. 선지자는 자기 친척들에게 멸시를 받고, 일반적으로 고향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그분은 고향 사람보다는 그를 아는 몇몇 경건한 사람들과 다른 마을 사람들에게 더 소중하게 여겨집니다. 너무 잘 알다 보면 무시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고향에서 많은 기적을 행하실 수 없었습니다(6:5). 하나님의 사람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면, 그의 사역은 그를 소중히 여기는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는 만큼 당신에게 축복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고향 사람들의 불신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 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믿지 않을 때 예수님의 손을 묶습니다. 그러면 그분은 우리를 위해 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전통을 비난하다

7장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그들의 전통을 더 중시한다고 비난하셨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대부분의 종교적인 기독교인들에게도 해당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당시 사람들과 겪었던 큰 갈등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옹호했지만 바리새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옹호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 기독교 세계에서도 발견되는 큰 갈등입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조상들이 수년간 믿고 실행해 온 것을 소중히 여기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것을 가르치는지 확인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을 수 없는 종교적 전통을 고수하면 세 단계로 타락하게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게 될 것이다(8절). 그런 다음 하나님의 계명을 제쳐두게 될 것이다(9절).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무효화하게 될 것이다(13절). 이것이 바로 위험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고수하는 모든 종교적 전통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인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맞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사람이 지키라고 하더라도 버리십시오. 오늘날에도 율법주의자와 바리새인을 양성하는 것은 종교적 전통입니다.

세상적 문제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아플 때, 우리는 증조부가 다니셨던 병원에 가지 않습니다 - 오늘날에는 더 좋고 현대적인 병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육에 관해서, 우리는 증조부가 다니셨던 학교에 자녀를 보내지 않습니다 - 오늘날에는 더 나은 학교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적인 문제에 관해서, 소위 "신자"라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조상이 다녔던 교회를 선택합니다! 왜 그들은 주변을 둘러보고 영적인 문제에서도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자신을 "거듭난 신자"라고 부르지만, 여전히 세상적인 생각을 하고 있고 영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든 세상적인 것 중에서는 가장 좋은 것을 원하지만, 영적인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건강과 교육만큼 영적 삶에 관심이 있었다면, 그들은 가장 영적인 교회를 찾아 합류했을 것입니다 - 비록 부모님이 다니던 교회가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그렇게 할 용기가 있을까요? 아마도 백 명 중 한 명일 것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처럼 장로와 조상의 전통을 따릅니다. 그래서 그들은 정체되고, 자신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놓치는 것입니다. 나는 적어도 이 세대의 젊은이들에게 대담하게 행동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모든 인간적 전통을 깨라고 도전을 주고 싶습니다. 그래야만 예수님을 온전히 따를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당신이 어떤 교회에 다녀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단지 당신의 고향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제자들의 공동체에 합류하라고 권할 뿐입니다 - 그 이름이 무엇이든 말입니다.

나는 그렇게 할 것입니다. 나의 충성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으며,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세우시고 나에게 책임을 맡기신 교회 그룹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교파를 믿지 않고 계시록 1~3장에서 읽은 것처럼 개별 지역 교회를 믿습니다. 나는 우리 교회에 있는 사람들에게, 만약 그들이 다른 마을로 이사를 가서 우리와 교제하는 교회보다 더 영적인 교회를 찾았다면, 그 교회에 합류해야지 우리와 연결된 교회에 합류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모든 지역에서 교회의 질은 그 지도자들의 질에 달려 있습니다.

7:10,11에서, 예수님은 부모님이 연로했을 때 돕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 당시(그리고 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부모님에게 "죄송해요. 저는 주님을 섬기고 있어서 어떤 식으로든 도와드릴 수 없어요."라고 말하는 것이 영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태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효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3절). 우리는 연로한 부모님을 도와야 합니다. 당신은 "저는 하나님께 제 돈을 드렸고 당신을 도울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요."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는 부모님을 돕는 것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당신이 집을 떠난 후에는 부모님에게 순종할 필요가 없고, 부모님이 주님을 섬기는 것을 방해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부모님께서 도움이 필요할 때는 재정적으로, 그리고 다른 실질적인 방법으로 도와야 합니다. 당신은 부모님을 돌보아야 합니다.

세 가지 유형의 그리스도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 가지 유형의 누룩에 대해 경고했습니다. 마태복음 16:11에서, 그분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에 대해 경고하셨습니다. 여기서 그분은 헤롯의 누룩에 대해서도 경고했습니다. 이 세 가지 누룩은 무엇일까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 당시 복음주의자들로, 모든 교리가 올바르게 정립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3:3에서 그들에게 그 증명을 주셨습니다.) 사두개인은 예수 당시의 자유주의자들이었으며, 기적, 천사, 부활 등을 믿지 않았습니다. 헤롯당은 헤롯의 추종자들이었고 철저히 세속적이었습니다. 헤롯은 세례자 요한의 강력한 메시지를 듣는 것을 즐겼고, 노출이 심한 옷차림의 살로메의 관능적인 춤을 즐겼습니다(막 6:20,22). 그는 좋은 설교나 찬양의 시간을 즐기고, 똑같이 영화의 관능적인 장면을 전적으로 즐길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같았습니다!!

오늘날에도 이 세 가지 유형의 그리스도인이 존재합니다: 복음주의자, 자유주의자, 세속적 그리스도인. 그러나 예수님을 가장 반대했던 사람들은 헤롯당이나 사두개인이 아니라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당시 복음주의자들은 가장 큰 위선자들이었고;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가장 큰 위선자들은 세속적이고 자유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발견되지 않고 복음주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발견됩니다. 모든 그들의 교리가 올바르다고 자랑하는 많은 근본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율법주의적이고 위선적인지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은 성령의 촉구에 응답하지 않기 때문에, 결코 율법주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주님은 오늘날에도 그런 사람들과 갈등을 겪으십니다 - 2000년 전에 지상에 계셨을 때와 마찬가지로.

8:23-26에서, 우리는 치유에 대한 매우 중요한 가르침을 발견합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한 눈먼 사람을 위해 기도하셨지만 그 사람은 완전히 치유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너는 모든 것이 선명히 보이느랴?"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나무처럼 걷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예수님이 오늘날 어떤 설교자들과 같았다면, 그분은 그에게 "아니다. 너는 긍정적인 고백을 해야 한다. 네가 완전히 치유되었다고 믿고 증상은 무시하여라. 너는 치유되었다고 고백해라. 그래야만 너는 치유될 것이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에게 그렇게 말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도 거짓말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그를 위해 다시 기도하시고 치유의 사역을 완성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런 식으로 그를 치유하셨을까요? 다른 모든 경우에, 그분은 단 한 번의 만짐이나 말씀으로 사람들을 치유하셨습니다. 왜 여기서 두 번째 만짐이 필요했을까요? 주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는 20세기에, '치유자'들이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치유되지 않았더라도 자신이 치유되었다고 고백해야 한다고 가르칠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긍정적인 고백이라는 명목으로 거짓말을 하라고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사람을 나무처럼 보면서도 선명히 볼 수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기독교 세계에서 발견되는, 믿음에 대한 거짓된 가르침에 혼란스러워하지 마십시오. 믿음은 긍정적인 고백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구체적으로 약속하신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치유되지 않는다면, 솔직하게 그렇게 말합시다 - 그리고 치유를 위해 하나님을 찾읍시다.

8:33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누구에게도 사용한 적이 없는 가장 강한 말로 책망하시는 것을 봅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그분은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라고 말씀하셔야 할 일이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베드로보다 더 나은 존재가 아니니까요.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탄에게 속았습니다. 사탄에게 속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안다면, 우리는 속임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사탄의 영향을 받는 사람의 표식은 무엇일까요?

여기 같은 구절에 답이 있습니다. "너희 마음은 하나님의 이익이 아니라, 너희 자신의 이익에 맞춰져 있다."

사탄에게 속는 그리스도인 일꾼은 하나님의 이익이 아닌 자기 자신의 이익에 마음을 두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거듭나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의 마음이 자신의 관심과 자신의 이득에 맞춰져 있다면, 사탄은 당신을 철저히 속일 것입니다. 그의 속임수는 당신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서도 – 오직 자신만을 섬기고 있으면서도 –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 것입니다. 바울 시대에는 자기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디모데는 자기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았습니다(빌 2:19-21). 그러므로 속임수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우리의 마음을 언제나 우리 자신의 관심, 우리 자신의 이득, 우리 자신의 이익에 두지 않고 – 언제나 오직 하나님의 이익에만 두는 것입니다.

권능(power)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왕국

9:1에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보기 전에는 죽음을 맛보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일은 오순절에 일어났고 - 예수님이 그 말씀을 하셨을 때 거기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은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은 오순절에 120명의 마음에 임했습니다(행 1:8). 성령께서 하나님의 왕국을 지상에 가져오셨을 때입니다(롬 14:17). 예수께서는 여기서 오순절을 하나님의 왕국 또는 하나님의 정부가 권능으로 지상에 오는 날로 정의하셨습니다. 교회는 바로 그런 모습이어야 합니다 - 마귀의 왕국 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권능을 드러내는 하나님 왕국의 작은 거점인 것입니다.

9장에서는, 예수님이 변화되신 산에서, 세 제자가 예수님과 함께 있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모세와 엘리야를 보고 흥분하여 "여기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 세 개의 초막을 만들자"라고 말했습니다(5절). 즉시 구름이 그들 모두를 덮었고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들을 모세와 엘리야와 같은 수준으로 두지 마라. 이는 내 아들이다. 그의 말을 들어라." 여기서 우리에게 전달되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부터 아무리 많은 축복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가 우리와 주님 사이에 들어오도록 결코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시각은 항상 명확해야 합니다. 사람이 우리와 주님 사이에 들어오는 순간,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에 구름이 끼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의 시각이 왜 그렇게 흐릿할까요?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람의 말을 듣고 예수님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의 사람들을 존경해야 하지만, “예수님만 바라보며”(8절) 경주를 해야 합니다.

9:20-29에서, 한 아버지의 믿음이 귀신 들린 아들을 어떻게 구해냈는지 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왜 그들이 귀신을 쫓아낼 수 없었는지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너희가 금식하고 기도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믿음이 없었다”(마 17:20, 21)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귀신의 힘의 정도는 다양하며, 우리가 금식과 기도를 통해 믿음이 강해야만 쫓아낼 수 있는 귀신도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나는 기도나 금식의 논리를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나는 그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믿고 그분께 순종할 뿐입니다.

죄의 심각성

예수님은 9:43-48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넘어지게 하거든 잘라 버리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만일 네 발이 너를 넘어지게 하거든 잘라 버리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만일 네 눈이 너를 넘어지게 하거든 그것을 빼 버리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한 눈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예수님은 다른 누구보다 지옥에 대해 더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분만이 지옥의 실체를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지옥이 결코 불이 꺼지지 않고 벌레가 죽지 않는 곳이라고 말했습니다. 누군가가 "벌레가 불 속에서 죽지 않는 건 어떻게 가능할까요?"라고 묻는다면, 나는 "알고 싶지 않아요. 지옥에 가는 사람들은 직접 알아낼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손과 눈으로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 죄 짓는 것을 멈추지 않으면 지옥에 갈 수 있다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분은 죄 많은 사람들이 직면한 위험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습니다. 모든 참된 하나님의 종은 지옥에 대해 설교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옥에 대해 모든 것을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현실이므로 사람들에게 경고해야 합니다.

9:49에서, 예수님은 "모든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그 구절이 모든 사람이 두 가지 불 중 하나를 반드시 겪게 된다는 뜻이라고 이해합니다 - 하늘의 불이든 지옥의 불이든요. 당신은 선택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하늘의 불을 선택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불로 세례를 주시고 또한 꺼지지 않는 불로 쭉정이를 태워버릴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마 3:11, 12).

10:17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부유하고 젊은 통치자에 대해 읽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돈을 심각하게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진단하시고, "먼저 모든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삭개오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의 절반만 주었고 예수님은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눅 19장). 마리아와 마르다는 집이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집을 팔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요 12장). 왜 이런 차이가 있을까요? 돈을 사랑하는 것은 암과 같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암이 너무 퍼져서 온 몸의 장기를 제거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항암 화학 요법으로 암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삭개오의 암은 이 부유한 통치자의 암만큼 퍼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와 마르다의 암은 경미했습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모든 돈을 다 나누어 주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 하지만 그분이 암이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것을 보실 때만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10:25). 하늘의 왕국과 지상의 왕국은 극과 극입니다. 둘 다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하나님만이 사람을 돈에 대한 사랑에서 구원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10:27).

믿음

11:22-24에서, 예수님은 믿음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에 산이 보였을 때, 그것이 반드시 돌아가야 한다는 신호는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에 도전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산을 제거하고 그분의 뜻을 행하기 위해 나아가기를 원하실 수 있습니다(23절).

마가복음에는 놀라운 두 문장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보면, 그 진실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가복음 10:27).

"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가복음 9:23).

모든 신자는 이 두 문장 중 첫 번째를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과 사역에 하나님의 능력을 가져오는 것은 두 번째 문장에 대한 믿음입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에게 믿음이 엄청나게 부족하다는 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히 11:6). 믿음은 우리의 삶과 사역에 모든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믿음에 가장 큰 방해가 되는 것 중 하나인 용서하지 않는 영을 언급하셨습니다(11:25, 26). 이 지구상에 우리가 용서하지 않은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믿음과 심지어 구원(salvation)도 빼앗을 것입니다.

12:17에서, 예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무언가를 바치기 전에 먼저 사람에게 진 빚을 청산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먼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주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쳐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이사의 돈이나 다른 사람의 돈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는 먼저 사람에게 진 빚을 갚아야 합니다.

12:42-44에서, 우리는 헌금함에 두 개의 동전을 넣은 과부에 대해 읽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헌금을 어떻게 바치는지 지켜보시며 금고 옆에 앉아 계셨습니다(12:41).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얼마나 넣는지 지켜보신 것이 아니라, 어떻게 넣는지 지켜보셨습니다. 옛 언약에서, 중요한 질문은 ‘얼마를 드릴 것인가’였습니다. 10퍼센트입니다. 그러나 새 언약에서는, 우리가 ‘어떻게 드리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 과부처럼 기쁘고 희생적으로 드리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찾으시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14:34-36에서,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내 영혼(soul)이 죽을 정도로 심히 슬프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땅에 엎드려 기도하며 "아빠! 아버지! 아버지는 모든 것이 가능하니;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피하고자 하신 잔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육체적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기독교 순교자보다 더 용감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두려워하신 것은 십자가에서 우리 죄에 대한 형벌을 받으실 때 아버지와의 교제가 끊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아버지와 끊어지지 않는 교제를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제 3시간 동안 그 교제가 십자가에서 끊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적인 약함 속에서, 아버지께 다른 방법이 없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마도 3시간 동안 기도하셨고,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흘러내렸습니다. 예수님의 고뇌가 너무나 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천국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죄를 지은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신과 나를 향한 사랑 때문에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로 나아갔습니다.

그런 다음 15:33, 34에서 예수님은 우리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셨다는 것을 읽게 됩니다 -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으시고, 지옥의 영원한 고통을 3시간 동안 집중적으로 겪으신 것입니다. 이때가 그분이 아버지를 하나님이라고 부른 유일한 순간이었습니다 - 왜냐하면 그분은 이제 우주의 심판자 앞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일이 끝났고 - 그분의 마지막 외침은 교제가 회복된 아버지께 다시 자신을 맡기는 것이었습니다(15:37). 그리고 성전의 휘장이 찢어져서 우리가 아버지의 임재 안으로 들어갈 길이 이제 열렸다는 것을 나타냈습니다(15:38). 이런 구세주를 위해, 할렐루야!

16:7에서, 천사가 주님으로부터 "그분의 제자들 그리고 베드로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을 봅니다. 주님은 왜 "그리고 베드로에게"라고 말했을까요? 베드로도 예수님의 제자 중 한 명이 아니었습니까? 이것은 매우 귀중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했기 때문에 사도가 될 자격이 영구히 박탈되었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보낸 메시지에 자신이 포함될 수 있다고는 결코 믿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리고 베드로에게…..."라는 문구를 매우 부드럽게 포함시키셨습니다 - 주님을 만나라는 초대가 그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오늘날에도 그분을 실망시킨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특별히 당신을 그분에게로 오라고 부르십니다. 그 초대는 당신에게도 해당됩니다.

16:14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그들의 불신앙과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다시 꾸짖으시는 것을 봅니다. 복음서 기록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의 불신앙을 책망하시는 것을 일곱 번이나 봅니다. 그분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불신앙 때문에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분이 그들에게서 보고 싶어했던 것은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에게서 보고 싶어했던 것도 바로 믿음입니다.

16:15-18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온 세상으로 가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이미 마태복음 28장에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명령, 즉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명령을 보았습니다. 이 두 명령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여기서(마가복음16장) 강조점은 복음 전도에 있고 주님은 초자연적인 기적으로 복음 전도자의 말을 확증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오늘날에도 복음이 처음으로 전파되는 곳에서 그렇게 하십니다(사도행전에서처럼). 마태복음 28장에서, 강조점은 제자를 만들고 그들에게 그분의 모든 명령을 지키도록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의 큰 비극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합하신 것, 즉 이 두 사명을 분리했다는 것입니다. 제자를 만드는 것이 없는 복음 전도는 한쪽 면만 있는 동전과 같아서, 결국 그것은 가짜 동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 전도자들이 회심자들을 지역 교회로 데려와서 제자가 되게 하기를 의도하셨습니다. 그래서 복음 전도자는 사도, 예언자, 교사, 목자와 함께 일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야 합니다(엡 4:11). 그것이 그들이 1세기에 함께 일했던 방식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날의 기독교 세계에서는 그런 협력을 보기 드뭅니다. 그래서 오늘날 기독교 교회에 얕은 회심자가 많은 이유입니다.

복음 전도자는 채석장에 가서 돌을 깎아 건축 현장으로 가져오는 사람과 같습니다. 나머지 네 가지 사역은 이 돌들을 주님께서 거하실 거룩한 성전으로 짓는 것입니다. 이 사역들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요? 다섯 가지가 모두 필요합니다. 아무도 혼자서 모든 것을 할 수 없습니다. 복음 전도자의 사역은 어렵고 위험한 것이므로 - 하나님께서 부르시지 않는 한 이 사역에 들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 돌들을 건물로 세워가는 벽돌공들이 당신보다 더 쉬운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들을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또한 그들이 채석장에서 당신과 합류한다면, 주님의 성전은 결코 지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완수해야 합니다. 복음 전도에만 모든 강조점을 둔다면, 우리는 성전도 없고 그리스도의 몸의 살아있는 표현도 없이, 사방에 돌무더기만 쌓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지상명령과 관련하여 우리각자에게 주신 구체적인 부르심을 완수하도록 주님께 도움을 구합시다. 아멘.

장 42
누가복음

예수 그리스도 - 성령 충만한 사람

누가의 부담은 가능한 한 예수님이 마리아의 태중에 잉태되신 때부터 부활하신 때까지 모든 일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기록하고, 어느 정도는 부활하신 후에 일어난 일들을 기록하는 것입니다(1:3).

누가는 유대인이 아닌 유일한 신약성경 저자였습니다. 그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썼습니다. 신약성경의 다른 25권은 모두 유대인이 썼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욥기를 제외하고 나머지 38권은 모두 유대인이 썼습니다.) 누가는 그리스인이었고, 이 두 권은 역시 그리스인인 데오빌로에게 썼습니다. 그리스인이 그리스인에게 편지를 써서, 예수님이 사람으로 세상에 오셨고, 어떻게 살았으며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셨는지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성령의 사역

누가는 그가 쓴 두 권의 책에서 성령의 사역에 대해 많이 언급합니다. 사실, 이것은 그의 주요 강조점 중 하나입니다. 이 복음서에서 이러한 예를 살펴보십시오: 세례 요한은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1:15). 마리아에게 성령이 임하실 것이다(1:35). 엘리사벳과 사가랴는 성령으로 충만해졌다(1:41, 67). 시므온은 성령을 받았고, 그는 성령으로부터 계시를 받았으며 성령에 의해 성전으로 인도되었다(2:25-27). 예수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신다(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분명히 성령의 기름부음을 위해) 기도하셨고 성령이 즉시 그분에게 내려왔다(3:21, 22).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충만해져서 성령에 의해 광야로 인도되셨고 성령의 권능으로 돌아오셨다(4:1, 14). 예수께서 성령이 자신에게 임했다고 선포하신다(4:18). 성령은 구하는 자에게 주신다(11:13).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의 능력을 기다리라고 명령하신다(24:49). 사도행전에서, 누가는 성령을 50번 이상 언급합니다. 누가는 의심할 여지 없이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었고 성령의 은사를 통해 가능해진 이 새 언약의 삶에 대해 흥분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그처럼 흥분했을지 궁금합니다.

성령의 세례는 신약성경의 처음 다섯 권의 각 책의 시작 부분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이 새 언약 시대에 성령의 사역이 얼마나 중요한지 가르쳐줍니다. 그러므로 마귀가 위조하려고 하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성령의 세례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날 그러한 위조를 많이 봅니다.

마귀는 어떻게 믿는 사람들이 결코 성령의 세례를 받지 못하도록 합니까?

첫째, 그들 중 일부에게 육체적 또는 감정적 경험을 줌으로써입니다. 그들은 죄를 극복하고 주님을 섬길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그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확신시킵니다. 그러한 신자들은 성령의 세례를 다시는 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그것을 받았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이 도처에 수백만 명 있습니다. 그들은 죄에 패배했고, 돈을 사랑하며 세상을 위해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방언"이라고 부르는 영문 모를 말을 하며 특이한 신체적, 시각적 경험을 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둘째, 사탄은 다른 신자들(성령의 세례에 대해 교리적으로 정반대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이러한 명백한 가짜 현상에 반응하고 성령의 세례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합니다. 이렇게 사탄은 두 신자 집단(대부분의 신자를 구성하는)이 결코 하나님의 진정한 능력과 성령의 세례를 받지 못하도록 하는 데 성공합니다.

조심하고 두 집단을 피하십시오.

요한은 어떻게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충만해졌을까요? 태아일 때 어머니의 태중에서 성령을 기다렸을까요? 누군가가 그에게 태중에서 기도하라고 권했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충만하게 하셨습니다. 성령으로 당신을 충만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가 그분께 복종하면, 그분께서 우리를 충만하게 하실 것입니다. 여기 당신의 믿음을 자극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머니의 태중 안에 있는 무력한 태아를 성령으로 채울 수 있다면, 왜 당신을 채울 수 없겠습니까?

값싼 위조품에 만족하지 마십시오. 나는 어렸을 때 주님께, 위조품에는 절대 만족하지 않을 것이며, 진짜 경험을 얻기 위해 필요하다면 10년을 기꺼이 기다리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면, 그것은 당신의 삶의 방식 전체를 바꿀 것입니다.

요한이 성령으로 충만해졌을 때, 그는 주님 보시기에 크게 되었습니다(행 1:15). 이것이 바로 성령께서 우리에게도 원하시는 것입니다 - 사람의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에 크게 만드는 것입니다.

1:34, 35에서,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왔을 때, 마리아가 자연스럽게 그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나는 처녀입니다. 처녀가 어떻게 아이를 가질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 것을 봅니다. 천사는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실 것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성령은 항상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가져다 줍니다(행 1:8, 10:38 참조).

하나님의 영이 마리아에게 임하셔서 그녀 안에서 예수님을 잉태하게 하신 것처럼, 성령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에게 임하여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를 잉태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과 주님을 위한 우리의 섬김에서 성령의 사역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가장 명확한 지침입니다. 마리아의 태중에서 그 몸이 자라는 데 시간이 걸렸듯이,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에서 나타나는 데도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1:37에서, 우리는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느니라"는 사랑스러운 약속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는 능력이 없는 말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셨다면, 그 말씀에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셨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창세기 1장 전체에서 그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없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그 약속을 주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 강력한 약속이 있습니다: "죄가 너희를 지배하지 못하리라"(로마서 6:14). 당신이 그것을 믿는다면, 당신의 삶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없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시작 부분에서 이것을 말씀하셨습니다(창세기 18:14와 누가복음 1:37 참조). 우리가 그리스도인 생활을 시작할 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믿음은 맹목적인 믿음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맹목적인 믿음으로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성경의 약속을 주장한다면,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것을 우리 삶에서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우리의 믿음은 입증된 믿음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어떤 말씀도 무력하지 않다는 것을 맛보고 경험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대해 결코 의문을 제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모든 비평가와 신학자들이 말하는 것에 신경 쓰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그것을 믿었고 그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오늘날 마귀는 많은 사람들을 그런 단순한 믿음에서 그릇되게 이끌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 능력을 경험하는 대신, 영리함을 사용하여 성경을 분석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채 평생을 낭비하려고 합니다. 당신은 어떻게 살고 싶습니까? 성경을 분석하며 살고 싶습니까, 아니면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싶습니까? 선택은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여, "당신의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게 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1:38). 나는 마리아를 매우 존경합니다(나는 로마 가톨릭 신자가 아니지만요). 그녀는 경건한 젊은 여성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전역을 살펴보아 참으로 경건한 젊은 여성을 찾으셨고; 마리아를 찾으셨는데, 당시 그녀는 아마 18세 정도였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1:46-55를 읽고 그녀가 얼마나 성숙했는지, 그리고 그녀의 노래가 얼마나 성경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면, 18세만 되어도 얼마나 성숙해질 수 있는지 놀랍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택하신 사람에게는 실수를 하지 않으십니다. 마리아는 나사렛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녀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녀에 대한 스캔들 이야기를 퍼뜨릴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이것이 성령의 역사라고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치욕을 기꺼이 참았습니다 - 그녀의 몸에서 예수의 몸을 낳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제 이것을 당신의 삶에 적용하십시오. 당신은 당신의 마을에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싶습니까? 당신은 그것에 대한 명예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의 치욕"을 기꺼이 참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분의 일에서 명예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지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런 사람들은 단지 회중을 세울 뿐, 그리스도의 몸을 세울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은 언제나 비난, 오해, 떠드는 말, 험담을 가져올 것입니다 - 마리아가 나사렛에서 마주했던 것처럼. 하지만 그녀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결국 그리스도의 몸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사람들이 기꺼이 "교파적 중심의 기독교라는 종교적 진영 밖으로 나가서 그분의 치욕을 감당"하려는 곳에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1세기의 남은 자들

여기서 사가랴와 마리아가 천사에게 거의 같은 질문을 한 것을 주목하세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1:18, 34). 그러면 왜 사가랴는 벌을 받아 벙어리가 되었고 마리아는 그렇지 않았을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사가랴는 아이를 낳은 노부부의 본보기를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아브라함과 사라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불신에 대한 변명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처녀가 아이를 잉태하고 낳는 본보기가 앞에 없었습니다. 둘째, 사가랴는 수년간 성경을 연구한 지도자였습니다. 마리아는 어린 소녀였습니다. 더 많이 받은 자에게는 더 많은 것이 요구될 것입니다. 당신이 나이가 많은 지도자라면, 하나님께서는 젊은 사람보다 당신에게 더 많은 것을 기대하실 것입니다. 만약 당신 앞에 하나의 본이 있는데도 그를 따르지 않았다면, 따를 본이 없는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죄를 짓게 될 것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은 따를 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이 요구될 것입니다.

1:74에서, 사가랴가 "이제 주께서 오셔서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구원받고 두려움 없이 그분을 섬기게 하셨습니다."라고 예언하는 것을 읽습니다. 그 원수들은 우리를 노예로 삼은 우리의 죄입니다. 이제 예수께서 오셔서 우리를 모든 원수들로부터 구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를 모든 원수들로부터 구하시고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하셨습니다. 구약의 1500년 동안, 이스라엘은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질병, 광기, 빈곤 등으로 벌하실 것이라는 두려움이었습니다(신명기 28:15-68). 사가랴는 사람들이 두려움이 아닌 사랑으로 하나님을 섬길 새로운 시대가 밝아오고 있다고 예언했습니다. 당신은 그 삶에 들어갔습니까? 당신은 사랑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아기 예수를 보러 온 가난한 목자들, 페르시아에서 온 박사들, 성령으로 충만한 노인(시므온), 그리고 기도하는 늙은 여인(안나) 등 네 무리의 사람들에게만 아들의 탄생을 알려 주셨습니다. 이들은 모두 매우 다른 유형의 사람들이었고, 나이도 달랐고 나라도 달랐지만 - 모두 겸손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오늘날 전 세계에서 그분의 아들의 재림을 위해 준비하고 계신 남은 자들의 모습입니다. 오늘날의 위대한 성경 학자들과 거만한 설교자들은 2000년 전의 안나스, 가야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여전히 모르고 있습니다.

이 네 그룹의 사람들 중 세 그룹이 밤에 활동하는 것이 흥미롭고 의미 있습니다. 목자들은 밤에 양 떼를 돌보고 있었습니다. 박사들은 밤에 별을 보며 여행했습니다. (별은 밤에만 보이기 때문에 낮에는 여행할 수 없었습니다.) 안나는 밤에 금식하고 기도했습니다. 오늘날 남은 자들의 일부인 사람들은 또한 밤의 시간에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잠들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지상에서 편안한 삶만을 찾는 게으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결코 보여주지 않는 것들을 계시하십니다.

만약 당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이해하고 하늘로부터 계시를 받는 하나님의 강력한 남은 자들의 일부가 되고 싶다면,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그분의 말씀을 연구하고, 인간의 전통을 깨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시므온에게 보여주셨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결코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당신은 비기독교인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박사들에게 계시를 주신 것처럼 당신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두 썬다 싱(Sadhu Sundar Singh)에게 환상으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그가 14살 소년이었을 때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나 성경에 대한 지식이 없었지만 하나님을 찾고 그분을 발견한 동방박사 중 한 명과 같았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부지런히 그분을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십니다.

예수의 탄생과 세례

2:7에서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고 읽습니다. 이것은 구약성경에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태어날 때가 되자, 하나님께서는 로마의 가이사에게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이 인구 조사를 위해 고향으로 가야 한다는 명령을 내리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요셉과 마리아는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불편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나귀를 타고 100킬로미터를 여행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그곳의 여관에는 방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예수님의 탄생을 영원 전부터 계획하신)은 그들이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그들을 위해 방을 하나 비워두는 것이 어려웠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주를 다스리는 분이라면 쉽게 그렇게 마련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이 외양간에서 태어나고, 아기로서 구유(소가 먹는 작은 여물통)에 뉘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여행을 지연시키셨기 때문에 그들이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는 호텔의 모든 방이 가득 찼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연은 모두 그분의 계획의 일부입니다 - 예수님은 외양간에서 태어나셔야 했습니다.

외양간에서 태어난 것에 대한 수치심을 생각해보세요. 나는 외양간에서 태어난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모든 인류를 섬기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모든 사람보다 더 낮아지셔야 했습니다 – 이는 아무도 너무 낮아서 예수님이 그를 들어올릴 수 없다고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원칙을 이해해야 합니다 - 이것이 또한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람은 효과적으로 섬기려면 그들 아래로 내려가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유명한 설교자 중 다수는 상당히 다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은 수준에서 살려고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 사람들에게서 돈을 모읍니다. 그들을 만나려면, 먼저 그들의 비서를 거쳐야 합니다. 당신이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면, 비서를 거쳐야만 했을까요? 아니요.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종이었습니다 - 종은 비서가 없습니다. 비서가 있는 것은 왕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모든 사람이 다가가기 쉬운 분이었습니다. 당신은 원할 때마다 직접 그분께 갈 수 있었습니다. 니고데모는 밤에 가서 그분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싶다면 예수님을 본으로 삼으세요 - 오늘날 설교자들의 본을 따르지 마세요. 모든 사람 아래로 내려가 그곳에 머물러야 합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그곳에서 시작하셨고, 생의 마지막에도 그곳에서 – 종으로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더러운 외양간에서 태어나 부끄러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구세주가 가신 길을 평생 따라가도록 우리를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아무리 많이 사용하시더라도, 당신의 인생이 끝날 때까지, 항상 다른 사람들의 발을 씻을 준비가 된 종으로 남아 있으십시오.

나는 마리아가 외양간 안에서 그녀가 처한 어려운 상황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마리아가 오늘날의 버릇없는 십대들 같았다면 어땠을까 상상해보세요. 그녀는 요셉에게 소리치며 “우리가 이틀 일찍 여행을 시작했어야 한다고 내가 말했잖아. 이제 우리는 방도 없이 여기 있어. 나는 프라이버시도 전혀 없고 – 내 주위에 온갖 더러움이 가득한 이 외양간에서 아기를 낳아야 해. 당신은 정말 무책임한 남편이야” 등등을 말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불평과 투덜거림이 가득한 분위기 속에서 태어났다고 상상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불평하지 않는 소녀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마리아를 예수의 어머니로 선택하셨습니다 - 그녀는 어린 시절에 가난과 어려운 환경에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다른 소녀를 선택할 수 없었습니다.

2:34, 35에서, 시므온의 예언을 읽습니다: “이 아이는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을 넘어뜨리고 일으키며,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도록 세움을 받았다. 칼이 네 자신의 영혼을 끝까지 꿰뚫어 많은 사람의 마음의 생각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시므온은 예수께서 하실 사역의 유형을 보여주었습니다. 교회도 비슷한 사역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이것이 우리에게도 중요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예수께서 지상에 계셨을 때 시작하신 사역을 이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모든 사람의 종이었듯이, 우리도 모든 사람의 종이 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종이 된다는 것의 지상에서 가장 위대한 본이 되어야 합니다. 시므온은 예수께서 반대를 받을 표적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에서 지도자라면, 당신도 예수님처럼 반대를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리새인과 같은 종교인들이 당신을 반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당신을 반대할 때, 그들의 마음의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35절). 그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볼 때, 그들 안에 얼마나 많은 질투가 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어떤 사람의 사역을 축복하실 때, 다른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에 얼마나 많은 질투가 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2:47-52에서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셨을 때,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을 성전에 남기고 떠나는 장면을 읽습니다. 12세 때, 예수는 이스라엘의 모든 학자들보다 성경을 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성경에 대한 설명에 놀랐습니다. 예수는 집에 성경이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인쇄된 성경이 없었고, 구약성경을 손으로 쓴 두루마리를 갖는 것은 매우 비쌌습니다. 아무도 집에 두루마리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12살에 성경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예수는, 회당과 학교에서 성경이 낭독될 때 주의 깊게 들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집에 인쇄된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 그리고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여러 버전의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울 수 없습니다. 예수님조차도 아버지를 섬기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성경을 공부해야 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성경을 공부하기에는 너무 게으르다면, 나는 하나님께서는 결코 당신을 사용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성경을 부지런히 공부하고 성령으로 충만해지기를 구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강력하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회심한 직후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습관을 들이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길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부지런히 공부합니다! 그들은 또한 자신의 사업의 발전을 촉진하기 위해 부지런히 일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기 위해 그 부지런함의 5%만이라도 있다면, 그들의 삶은 하나님을 위해 매우 효과적일 것입니다. 학문적인 방식으로 성경을 교과서처럼 공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자 노력하십시오.

2:49에서,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는 또 다른 것을 봅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일(KJV)"에 대한 큰 부담과 열정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설교자로서 명예를 얻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것이지, 아버지의 일을 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야 하며, 그분의 일에 대한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에서 우리의 삶을 낭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일하기 위해 세상에 보내졌습니다. 오두막집에서 살든 궁전에서 살든 상관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하든 자연사로 죽든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아버지의 일을 완수해야 합니다.

3:1, 2에서, 세례 요한의 사역에 대해 읽습니다. 여기에 기록된 내용을 읽어보면 흥미롭습니다: 디베료 가이사는 당시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람이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유대에서 가장 큰 사람이었습니다. 헤롯은 갈릴리에서 가장 큰 사람이었습니다. 빌립은 이두래와 드라고닛에서 가장 큰 사람이었습니다. 루사니아는 아빌레네에서 가장 큰 사람이었습니다. 안나스와 가야바는 종교적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을 모두 우회하여 광야에 세례 요한이라는 알려지지 않은 사람에게 왔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의 모든 위대한 사람들과 기독교 세계의 모든 위대한 신학자들을 우회하여서, 당신이 세례 요한처럼 된다면 당신에게 올 것입니다 - 그리스도가 흥하도록 자신이 쇠하기를 원하고(요한복음 3:30), 광야에 알려지지 않은 목소리가 되기를 기꺼이 원한다면(3:4) 말입니다. 세례 요한은 서둘러 전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때가 올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는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날까지 광야에 있었습니다"(누가복음 1:80). 어느 날 하나님께서 "좋다, 요한. 내가 너에게 충분히 가르쳤다. 이제 가서 전파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나아가 전파했습니다. 그는 단 한 번의 기적도 행하지 않았습니다(요한복음 10:41). 그러나 온 유대가 그의 말을 듣기 위해 광야로 나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마태복음 3:5).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생각을 말하는 사람의 말을 듣기 위해 사방에서 올 것입니다.

3:8-13에서, 우리는 세례 요한의 사역이 열정적이고 매우 실제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오는 모든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그는 분별력이 있었고, 바리새인들처럼 어떤 사람들이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을 분별했을 때, 그는 그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는 숫자가 아니라 질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설교에서 높은 기준을 유지했습니다. 그는 어떤 선교 위원회에도 보고서를 보내야 하는 노예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세리나 군인이든 묻는 모든 사람에게 "현실적인" 실용적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사람들을 착취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설교는 구약 성경 구절을 분석하는 이론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용적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도 항상 실용적이었습니다. 많은 설교자들은 성경 학교에서 가장 좋은 설교는 성경 전체를 한 구절씩 설명하는 강해설교라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님이나 사도, 선지자 또는 교사가 그렇게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항상 주제별로 설교하면서 가끔 구약 성경 구절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나는 당신이, 당신의 가르침에서 예수님과 사도들의 본을 따르고 - 오늘날 성경 학자들의 의견을 따르지 않기를 바랍니다.

3:21, 22에서, 예수님의 세례와 성령이 어떻게 그분에게 임했는지에 대해 읽습니다. 세례 요한이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성령으로 충만했다면,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30년 동안 유혹을 이겼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이 30세 때 성령이 그분에게 임하여, 그분의 사역을 위해 기름을 부으셨다는 것을 읽습니다(행 10:38 참조).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성령으로 태어났으므로 성령을 두 번째로 경험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마리아의 태중에서 성령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분은 30년 동안 그분 안에 성령이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아야 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시므로, 우리는 신학적 용어를 사용하여 성령의 사역을 우리 안에서 온전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사역을 온전히 설명하려는 것은 한 마리의 개가 다른 개에게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려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입니다!! 개가 다른 개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입니다: "나는 인간의 심리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하지만 주인이 나에게 매우 친절하다는 것은 알지. 그는 나를 잘 돌봐줘, 그래서 나는 매우 행복해." 그 개는 주인의 선함을 경험할 수 있지만, 주인의 심리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와 성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활동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분의 사랑, 선함,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하나님(창조주)과 사람 사이의 거리는 두 창조된 존재, 즉 사람과 개 사이의 거리보다 훨씬 큽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의 모든 사역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기도하셨다는 것을 읽습니다(3:21). 무엇을 위해 기도하셨습니까? 분명히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기도가 항상 즉시 응답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이 물에서 올라오자마자 성령이 그분에게 임하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조차도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만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행 1:8)과 생수의 강이 우리를 통해 흘러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고(요 7:38), 하나님께 기도로 구하면, 그분은 우리에게도 성령을 부어주실 것입니다(눅 11:13) - 그러면 우리도 이 땅에서 하나님을 위해 강력한 사역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3:28-33에서, 마리아의 족보를 봅니다. 23절에서,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 요셉은 엘리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이탤릭체로 된 '아들'이라는 단어는 그 단어가 원래 그리스어 원문에는 없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1:7, 16에서 요셉의 아버지의 이름이 엘리가 아니라, 야곱이라는 것을 압니다. 엘리는 분명히 그의 장인, 즉 마리아의 아버지였습니다. 이에 대한 추가 증거는 누가복음의 족보가 다윗의 아들 나단(3:31)에서 시작되고 그의 아들 솔로몬에서 시작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볼 수 있습니다(마태복음 1:7 참조). 누가복음의 족보는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는 누가가 비유대인에게 편지를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4:1-14에서 예수께서 유혹을 받으신 후(마태복음 4:1-10 참조), 성령의 능력으로 오셔서 전파하셨다는 것을 읽습니다. 유혹을 이기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능력으로 전파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 줍니다. 회당에서, 예수께서는 이사야 61장을 읽으시고 그 예언이 이제 성취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분에게 기름을 부어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게 하셨습니다 -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다른 사람들을 갇힌 곳에서 풀어주고, 다른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고, 다른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기름부음의 모든 결과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 사랑, 기쁨, 평화, 오래 참음, 관대, 선함,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하지만 성령의 은사는 모두 다른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설교나 치유의 은사를 주신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을 축복하기 위한 것이지 - 당신이 돈을 벌거나 스스로 명예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방언의 은사조차도 당신이 끊임없이 신선하게 되어 다른 사람을 축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당신이 성령의 은사를 자신을 위해 사용한다면, 당신은 그것으로 바벨론을 건설할 뿐입니다. 항상 그것을 기억하십시오.

기적과 가르침

5:1-11에서, 물고기를 기적적으로 잡은 이야기를 읽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에게 바다로 나가 그물을 던져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은 전날 밤 내내 시도했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 큰 믿음 없이 - 주님께 순종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평생 잡은 물고기 중 가장 많은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언가를 하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주님, 저는 그것을 여러 번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효과가 없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러나 내가 하라고 했으니, 지금 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은 보게 될 결과에 놀랄 것입니다. 다른 곳이 아닌, 주님이 가라고 말씀하시는 곳으로 가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당신이 좋아하는 곳으로 가면, 영원한 열매를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인도를 따라 가면, 영원히 지속되는 열매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당신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언제 가야 하는지 말씀하시게 하십시오.

5:15, 16에서, 많은 무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병을 고치려고 왔다는 것을 읽습니다.

(성경을 공부할 때, 때때로 우리 자신을 그 상황에 놓고 그때 우리가 무엇을 했을지 생각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당신의 사역에서 그러한 결과를 보았다면, 당신은 무슨 위험에 처했을까요? 교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처럼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그분은 무엇을 했습니까? "그분은 자주 광야로 빠져나가 기도하곤 했습니다"(5:16). 다른 사람들이 앉아서 이야기하는 동안, 그분은 아버지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고 기도하기 위해 자리를 빠져나오곤 했습니다. 당신의 삶에서 그 습관을 키우십시오. 하나님과 단둘이 시간을 보내세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단둘이 있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합니다. 당신의 사역이 더 많이 퍼질수록, 하나님과 함께 있는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이것은 그분이 가끔씩이 아니라 자주 하던 일이었습니다.

5:27-29에서, 마태(레위)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주님을 위해 큰 잔치를 마련했다는 것을 읽습니다. 이것을 마태가 그의 복음서에서 이 잔치에 대해 쓴 내용과 비교해 보면, 그가 이 큰 잔치를 마련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에 대해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마태복음 9:9,10). 당신이 좋은 일을 했다면, 다른 사람들이 알리게 하고, 당신 자신이 알리지 마십시오.

6:12,13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것을 봅니다. 그분은 밤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 누구를 택해야 할지 마음속으로 분명히 알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죄 없는 예수님조차도 아버지의 뜻을 알기 위해 기도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가룟 유다를 선택하셨을 때 가룟 유다는 도둑이 아니었다는 점도 여기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6:16에서 가룟 유다가 "배반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선택되었을 때는 배반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배반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선택되었을 때 베드로, 야고보, 요한처럼 온전하고 진실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온전하고 진실한 사람을 택하셨지만, 그 사람은 나중에 도둑이 되어 지옥에 갔습니다.

6:20-49에서, 우리는 산상수훈을 요약한 형태로 볼 수 있습니다. 박해받고, 오해받고, 비판받고, 괴롭힘을 당하고, 굴욕을 당하고, 모욕을 당하고, 신체적 폭행을 당하는 어려운 상황에서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우리 주님의 이 말씀을 기억하고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인자 때문에,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고, 너희를 배척하고, 너희를 모욕하고, 너희의 이름을 악하다고 멸시할 때에 너희는 복이 있다. 그 날에 기뻐하고 기쁨으로 뛰어오르라. 보라, 너희의 상급이 하늘에서 크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을 이와 같이 대하였다"(6:22,23). 사람들이 당신을 미워하고 당신과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으며 당신의 이름마저도 멸시할 때, 당신은 축복받았다고 믿습니까? 이는 당신의 친척, 다른 그리스도인, 비그리스도인, 이웃 또는 누구든지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예수님의 제자이고 하나님의 모든 권고를 선포한다는 이유로 그들이 당신을 거부한다면, 예수님은 당신이 기뻐 뛰어야 한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당신은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그것은 "성령 안에서 춤추는" 때입니다. 그렇다면 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인기와 명예를 추구합니까? 당신의 신랑이신 예수님은 미움받고 모욕을 당하고 배척당하셨습니다. 왜 그분의 신부는 신랑과 함께 서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반면에,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칭찬하고 당신에 대해 좋은 말을 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당신이 거짓 선지자라는 증거일 것입니다 - 왜냐하면 구약성경에서 거짓 선지자들은 항상 존경을 받고 칭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항상 칭찬을 받고 존경을 받고, 참 선지자들은 항상 비난을 받고 배척을 받습니다 –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런 박해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6:27은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선을 행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나는 박해자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나에게 그들을 섬기고 그들에게 선을 행할 기회를 주십시오. 그러면 그들이 나에게 행한 모든 악에 대해 내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보답하여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십시오. 그들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면, 나는 재정적으로도 기꺼이 그들을 돕고 싶습니다. 나는 나의 왕국이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다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가득 찬 왕국에 속해 있습니다. 거기에는 증오의 원자가 하나도 없으므로 우리는 우리를 저주하는 모든 사람을 축복할 수 있습니다(6:28).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당신을 학대할 때, 단지 그들을 용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용서하는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뺨을 때리는 사람과 싸우기를 거부합니다. 그들이 우리의 코트를 벗기면, 우리는 셔츠도 가져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을 끌어내리고 더 높이 올라가려고 하는 이 세상의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삶의 방식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싶다면, 당신은 교회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우리가 우리에게 선을 베푼 사람에게만 선을 행한다면 우리는 그것에 대한 어떤 상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33절). 우리에게 선물을 준 사람에게 선물을 주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0%의 점수를 받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해를 끼친 사람에게 선을 행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100%의 점수를 받습니다.

6:31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자신이 대우받고 싶은 대로, 다른 사람을 대우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등 뒤에서 당신에 대해 악담하기를 원합니까? 아니요.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 등 뒤에서 악담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실수를 했을 때 사람들이 당신을 용서하기를 원합니까? 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이 실수를 했을 때 그들을 용서하십시오. 그렇게 간단합니다.

6:36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한 영역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처럼 완벽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자비의 영역에서 말입니다. 이것을 마태복음 5:48과 비교해 보십시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완전하라". 우리는 하나님처럼 거룩하고, 사랑스럽고, 지혜롭고, 강력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 데 있어서는, 그분처럼 완벽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에게 열 명의 적이 있다면 열 명을 모두 용서한다는 뜻입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같이 자비하라."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마십시오(6:37). 그들을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그분은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인색하지 말고 궁핍한 자에게 후하게 베푸십시오(6:38) -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후하게 베푸실 것입니다. 수입의 90%를 주님께 드린다고 알려진 부유한 사업가는 "나는 돈을 삽으로 퍼서 드립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것을 다시 내게 퍼주십니다 -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더 큰 삽을 가지고 계십니다!"라고 말했습니다.

6:40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우리의 선생님)이 우리를 온전히 훈련시키도록, 허락한다면 언젠가는 그분과 같이 될 것이라고 확신시키셨습니다. 이처럼 놀라운 약속을 주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그러니 그분께서 우리를 어려움과 시련 속에서 훈련시키시도록 허락합시다.

축복받은 여인들

7:13에서, 예수께서 인간의 고통을 볼 때마다 어떻게 연민을 느끼셨는지 다시 한 번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인의 과부가 외아들을 잃은 것을 보셨을 때, 그분은 그녀에게 연민을 느끼셨습니다. 복음서에서 연민이 예수님을 움직여 병자를 고치고, 무리를 먹이고, 심지어 성경을 가르치게 했다는 것을 봅니다. 교회의 모든 사역은 우리 마음을 채우는 예수님의 연민에서 흘러나와야 합니다. 고통받고, 속고, 마귀에게 미혹된 주변 사람들을 많이 생각해보세요.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한 연민으로 당신의 마음을 움직이시도록 허락하세요. 그런 다음, 그 연민으로부터, 나가서 그들을 위해 봉사하고, 전파하고, 가르치고, 기도하세요.

7:36에서,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한 바리새인에 대해 읽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집에 가지 않을 만큼 교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을 축복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셨습니다. 그분은 죄인의 집에만 가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바리새인의 집에도 가셨습니다. 회심한 창녀가 그곳(바리새인의 집)에 와서 자신의 죄가 용서받고 구원받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값비싼 향유병을 가져와 예수님의 발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녀는 창녀로서 번 돈으로 그 향유를 샀을 것입니다. 신명기 23장 18절에는 창녀의 삯은 결코 하나님께 바쳐서는 안 된다는 명확한 명령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 성경을 모르셨을까요? 그분은 분명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분을 초대한 사람처럼 율법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집주인인, 바리새인 시몬은 "이 사람이 선지자라면 누가 자기를 만지고 있는지 알았을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두 사람의 빚을 탕감해준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 한 사람은 500데나리온, 다른 한 사람은 50데나리온의 빚을 졌다. 둘 다 갚을 수 없었고, 그는 두 사람 모두 탕감해주었다. 둘 중 누가 더 그 사람을 사랑하겠느냐? 시몬은 "당연히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시몬이 용서받을 죄가 많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회심한 창녀만큼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많은 용서를 받은 큰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우리가 얼마나 용서받았는지를 깨닫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거짓된 겸손을 가지고 있어서, "나는 죄인 중에 가장 큰 자다"라고 말합니다. 만약 당신이 자신에 대해 그렇게 믿는다면, 당신은 다른 누구보다 주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많은 것을 용서받은 사람은 더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하지만 죄인 중에 가장 큰 자라고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은 종종 더 많은 돈을 추구하고 주님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저 겸손하다는 평판을 얻기 위해 경건한 체하는 언어를 사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바울처럼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하지 않는 한, 결코 당신이 "죄인 중에 가장 큰 자"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많은 것을 용서받았다면, 당신은 많이 사랑할 것입니다. 당신이 주님을 위해 조금만 포기했다면, 그것은 당신이 아주 적게 용서받았다고 믿는다는 증거입니다.

8:1-3에서, 예수님의 팀과 사역을 재정적으로 가장 많이 지원한 사람들이 부유한 여성들이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유한 사람들을 반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교만한 사람들만 반대하셨습니다. 그러나 부유하든 가난하든, 겸손하다면,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을 재정적으로 지원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30세가 될 때까지, 목수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하셨습니다. 그 후로 전임 시역자로서, 그분은 제자들 중 일부의 자발적인 헌금으로 생계를 유지하셨습니다. 그분은 누구에게도 자신의 필요를 알리지 않으셨고,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제자들에게 봉급을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아버지는 사람들을 움직여서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부유한 사람들도 사역을 가질 수 있음을 봅니다 - 하나님의 사역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8:16-18에서 빛이 되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방에 등불을 둘 때는 양동이로 덮거나 침대 밑에 두지 않습니다. 항상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곳에 둡니다. 이것이 우리도 주님을 위해 우리의 빛을 비추어야 하는 방식입니다. 나는 인도의 은행과 관공서에서, 비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책상 근처에 신들의 그림을 걸어놓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나는 기독교 직원이 성경 구절을 걸어놓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부끄러워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승진 가능성이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을까 봐 두려워서 - 자신의 빛을 숨깁니다. 얼마나 비극적인 일입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공개적으로 매달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담대하게 고백하는 것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맙시다. 내가 해군에서 일할 때는, 공개적으로 증거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책상에 성경과 전도지를 놓아두었습니다. 전도지를 원하는 사람은 가져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빛을 비추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교회 건물 안에서보다 밖에서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다른 빛이 없는 곳에서 우리의 빛은 밝게 빛나야 합니다.

8:43, 44에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한 여자에 대해 읽습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주위에 몰려들었지만 그녀만 치유되었습니다. 교회 집회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주위에 몰려듭니다. 하지만 오직 믿음이 있는 사람들만이 - 여기서 한 명, 저기서 한 명 - 주님을 만집니다. 모든 집회에서, 우리는 그 여인처럼, 믿음으로 주님께 다가가 만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축복하기 위한 확장된 마음

9:16에서, 5,000명을 먹인 일에 대해 읽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우리 각자를 사용하여 다른 사람에게 축복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첫 번째 단계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주님께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그 어린 소년은 5개의 빵과 2마리의 물고기를 가지고 있었고 그는 모두 주님께 드렸습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남겨 두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께서 빵과 물고기를 축복하셨습니다. 그것이 두 번째 단계입니다 -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분께 드리는 것에 축복을 내려주셔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그분의 영을 부어주셔야 합니다. 하지만 무리는 여전히 배불리 먹지 못했습니다. 세 번째 단계는 주님께서 우리를 깨뜨리도록 허락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 빵을 떼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사람과 상황을 통해 - 우리도 부서지게 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그분은 무리를 먹이셨습니다. 나는 많은 성령 충만한 신자들이 그들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 왜냐하면 그들은 주님께서 그들을 깨뜨리는 마지막 단계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주님께 바치고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감이 넘치고 깨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사역에 많은 신도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일의 질은 형편없습니다. 이단들조차도 많은 신도가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의 교회에 많은 사람이 더해지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지 마십시오. 그 사람들의 질은 어떻습니까? 제자입니까, 아니면 단지 회심자입니까?

여기에 한 가지 비유가 있습니다: 어느 날 한 암컷 토끼가 한 암사자에게 그해에 새끼를 20마리 낳았다고 자랑하며 암사자에게 몇 마리를 낳았냐고 물었습니다. 암사자는 “한 마리밖에 낳지 못했지만, 그것은 사자였어”라고 대답했습니다. 스무 명의 회심자보다, 한 명의 제자를 얻는 것이 더 낫습니다.

9:23은 누가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 중 하나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자신을 부인하고 매일 자기를 죽이지 않는 한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아가 원하는 모든 것에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는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당신의 뜻이 하나님의 뜻과 교차하는 곳에 나타납니다. 당신의 뜻은 십자가의 수평 팔과 같고 하나님의 뜻은 수직 팔과 같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당신의 뜻에 죽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당신의 선택, 당신의 야망, 당신의 명예, 당신의 선호도, 그리고 사람들에게 반응하고 싶은 방식 등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매일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으로 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9:49, 50에서, 예수님은 우리와 전혀 다른 사역을 하는 사람을 발견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귀신을 쫓아냈지만, 그는 제자들과 합류하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 그를 막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요한에게, 그를 내버려두고 그 사역을 계속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부름에 충실하고 그들이 그들의 부름을 이루도록 하십시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사역의 중요성에 너무 몰두하여 모든 사람이 그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온 몸이 눈이라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것이면 냄새 맡는 것은 어디냐?"(고린도전서 12:17).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에게 다른 사역을 주신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한 사람이 전도를 하고 싶어하고, 다른 사람이 사회 사업을 하고 싶어한다면, 각자 자신의 사역을 이루도록 하세요. 그리스도의 어떤 모습이 두 사람을 통해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여튼 서로를 비판하지 맙시다. 창조물에는 다양성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꽃을 같은 색깔, 같은 모양 또는 같은 크기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무지개에는 매우 다양한 색깔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성경 대학에 가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성경 대학에 가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이 갔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성경 대학에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둘 다 틀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각자의 부르심에 따라 두 가지 방법을 모두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편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사역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한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사역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자신의 사역에 충실하십시오."

9:52에서, 예수님이 사마리아로 오시는 것을 봅니다. 이곳은 1년 전에 큰 부흥이 있었던 도시였습니다. 회심한 죄 많은 한 여자를 통해, 도시 전체가 예수님께 이끌렸습니다(요한복음 4장). 그래서 예수님은 그곳에서 준비를 하도록 그분보다 앞서 사자들을 보내셨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53절). 아마도 사마리아에서 회심한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에 대한 그들의 편견을 버리고 죽은 종교 체계를 떠나 주님을 따르기로 결정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종교 지도자들을 불안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다시는 도시에 들여보내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와 요한은 사마리아인들에게 불을 내리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꾸짖으시며, 그분은 사람들의 생명을 멸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55절). 어떤 교회에서 당신을 쫓아낸다면,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다른 곳으로 가세요. 나는 한 번 이상 그렇게 했습니다.

위의 두 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을 넓히려고 노력하셨습니다. 많은 기독교 단체에서, 나는 지도자가 종종 마음이 넓은 반면, 그의 추종자들은 지도자처럼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이 좁은 것을 보았습니다. 존 웨슬리와 조지 휫필드는 18세기 영국의 두 위대한 설교자였습니다. 존 웨슬리와 그의 추종자들은 구원받은 후에도 다시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믿고 설교했습니다. 조지 휫필드와 그의 추종자들은 사람이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고 설교했습니다. 하지만 웨슬리와 휫필드는 절친한 친구였고, 휫필드가 죽었을 때 그의 장례식을 주관한 사람은 웨슬리였습니다. 웨슬리의 추종자 중 한 명이 그에게 "당신은 천국에서 조지 휫필드를 볼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습니다. 존 웨슬리는 "그럴 것 같지 않습니다. 그는 왕좌에 너무 가까이 있을 것이고, 나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를 볼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웨슬리의 추종자들은 마음이 좁았습니다. 하지만 웨슬리 자신은 겸손하고 마음이 넓은 사람이었으며, 휫필드를 자신보다 더 높이 평가했습니다.

10:5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이 집에 평화가 있기를' 하고 말하라. 평화의 사람이 거기에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에게 머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가정은 이 세상의 쉴 새 없는 바다에서 평화의 섬이 되어야 합니다. 머리인 남자는 특히 평화의 남성이어야 합니다 - 여자가 평화의 여성이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남자는 결코 다투거나, 싸우거나, 언쟁하거나, 화를 내거나, 논란에 휘말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 가정은 그런 식으로 이끌어 줄 남자가 있어야 합니다.

10:19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사탄의 모든 능력을 다스릴 권위를 주셨고, 아무것도 그들을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는 것을 읽습니다. 권위와 능력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트럭은 많은 능력을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작은 경찰관이 손을 들어 멈추라고 하면 멈춥니다 - 경찰관에게 권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탄의 모든 능력에 대해 가지고 있는 권위를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 복종하고 마귀를 대적하라 - 그러면 그가 너희에게서 달아날 것이다"(야고보서 4:7, 8)라고 말합니다. 사탄은 번개의 속도, 초당 30만 킬로미터로 우리에게서 도망칠 것입니다. 예수께서 사탄이 떨어지는 것을 보신 속도가 바로 번개의 속도이기 때문입니다(10:18)! 하지만 우리는 사탄이 우리에게 복종한다는 사실을 기뻐하지 않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기뻐합니다. 우리는, 우리가하나님을 위해 한 일을 기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기뻐합니다 - 그분은 우리의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하셨습니다.

메시지가 담긴 비유들

10:30-37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읽습니다. 레위인과 제사장은 올바른 교리를 가진 존경받는 교단에 속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기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마리아인은 멸시받는 교파에 속해 있었습니다(교리가 많은 면에서 잘못되었습니다). 하지만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운 사람은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교리가 올바르지 않은 사람들이 복음주의자들보다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한다는 것을 자주 가르치셨습니다. 레위인과 제사장은 길에서 불쌍한 사람을 돕는 것보다 예루살렘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석하는 데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집회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그 사람을 도왔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모든 교리가 옳은 우리보다, 사소한 부분에서 교리가 틀린 많은 사람들이 더 큰 상을 받는 것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와 다르게 행동하는 다른 교파의 사람들을 업신여기지 맙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연민으로 섬기는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그분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배고프자 너희가 나를 먹이고, 내가 병들었을 때 너희가 나를 찾아왔고, 내가 목마르자 너희가 내게 마실 것을 주었다. 내 백성(올바른 교리를 가진)이 집회에 참석하고 있을 때, 너희(잘못된 교리를 가진)가 와서 나를 도왔다."

이 비유를 듣는 어떤 사람들은, 이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을 통해 주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바로 그 뒤에 다른 사건을 설명함으로써 여기서 우리에게 균형을 제공합니다. 10:38-42에서, 예수님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말씀하십니다 -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이 우리에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행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마르다가 주님을 열렬히 섬기고, 마리아가 주의 깊게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을 봅니다. 마리아의 행동은 게으르고 일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예수님은 마르다가 그분을 섬기는 것을 꾸짖으시고 마리아가 하는 일이 "필요한 한 가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42절).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삶을 살도록 부름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을 살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종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주인이 하라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고전 4:2 - Living).

11:1-13에서, 예수님이 어떤 장소에서 기도하시고 제자들이 그분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는 것을 읽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누군가가 그렇게 기도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회당에서 기도하는 것을 들었던 것처럼) 예수님이 하나님께 인상적인 강의를 하듯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아버지와 친밀하게 대화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그분이 하신 것처럼 그들에게도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아버지로서 하나님과 이야기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은 혁명적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아무도 하나님을 "아빠"(히브리어 단어 "아바"의 실제 의미)라고 부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부르며 기도하거나 노래하지 말고, "아버지"라고 부르십시오. 그런 다음 예수님은 기도에 대한 질문에 완전히 답하시기 위해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정에 집으로 손님이 왔는데, 손님 앞에 차려줄 음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웃집에 가서 음식을 얻을 때까지 계속 문을 두드렸습니다. 예수께서는 이것이 그들이 성령의 능력을 구해야 하는 방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1:13). 여기서 요점은 무엇보다도, 당신이 만나는 궁핍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부담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만이 당신에게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필요한 것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그분의 성령의 능력을 구해야 합니다. 당신의 부름이 말씀을 전파하는 것이라면, 먼저 하나님께 당신이 전파해야 할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연민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런 다음 그들의 특별한 필요를 충족시킬 구체적인 말씀을 얻기 위해 성령의 기름부음과 계시를 계속 구하십시오. 누군가의 치유를 위해 기도해야 하거나 누군가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야 할 때에도,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께 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사람을 섬기도록 부름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사람들만을 섬기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이 사람은 시골의 배고픈 모든 사람들을 위해 빵을 원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온 한 사람을 위해 빵을 원했습니다. 그 궁핍한 사람은 당신의 아들 또는 딸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이 한 것처럼) 구하고 두드리는 모든 사람이 구하는 것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9,10절). 그러나 두세 번만 두드리고 포기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상의 어떤 아버지보다 더 좋은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우리에게 좋은 것이라면 무엇이든 거부하지 않으실 것입니다(11절).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을 추구하고 - 성령의 은사를 간절히 사모”합시다(고전 14:1).

12:1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누룩인 위선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위선(hypocrisy)’이라는 단어는 영어 단어가 아니라 그리스어 단어인 “hupokrisis”입니다.

번역자들이 (신약성경의 나머지 부분을 번역한 것처럼) 그 단어를 번역하고, 다른 말로 바꾸지 않았다면, 그 번역은 “연기(acting)” 또는 “연극하기(playacting)”가 되었을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위선자(hypocrite)”는 배우(actor)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경고하신 것은 거룩한 사람처럼 연기하는 것이었습니다. 할리우드 배우는 영화에서 세례 요한(거룩한 사람)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 촬영이 끝나면 그는 술 마시고 간음하고, 이혼하는 평범한 삶으로 돌아갑니다. 그것이 그의 진짜 삶입니다. 그런 다음 다음 주에 영화 촬영이 다시 시작되면, 그는 다시 한번 “거룩한 사람”이 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정확히 그렇습니다. 그들이 주일 예배에 오면 그들은 “거룩한” 사람들이 되어, 영적인 것들을 말하고 “다른 언어”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집에 가면 그들은 "모국어"로 돌아가, 아내에게 화를 내고 거짓말을 합니다. 그들은 또한 일주일 내내 돈을 쫓습니다. 그런 다음, 일요일이 되면 그들은 거룩한 사람으로서의 "연기"로 돌아갑니다. 할리우드 배우들은 실제로 더 정직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행동이 진짜라고 가장하지 않고 항상 자신이 정말 거룩한 사람이라고 가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자신이 정말 거룩한 사람이라고 가장합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경고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일요일에도 다른 요일과 똑같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위선을 미워해야 합니다.

12:3-12에서,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박해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 아버지께서는 머리카락까지 다 세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세상의 모든 참새의 상태를 알고 계시며, 우리는 많은 참새보다 그분께 더 귀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우리를 법정에 세우거나 심지어 죽이는 것을 허락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사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질문을 받을 때 무슨 대답을 할지 생각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성령께서 그 순간에, 정확히 무엇을 말해야 할지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12절). 그것은 우리가 설교할 때 주장할 수 있는 약속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법정에 서 있을 때 주장할 수 있는 약속입니다. 설교할 때 이 약속을 주장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효과가 없을 테니까요. 설교를 위해서는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설교는 귀한 손님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것과 같습니다. 인도 주부는 한 끼 식사를 준비하는 데 부엌에서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메시지를 준비하는 데도 힘써야 합니다.

12:13에서, 주님께 와서 "주님, 내 형에게 유산을 나누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말한 사람에 대해 읽습니다. 그의 요청이 진실하고 의로운 요청이었을지라도, 예수님은 그런 분쟁에 개입하기를 거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의 재산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이곳에 오셨습니다 - 땅에서가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들이 너희에게 더하여질 것이다"(12:31).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는 자에게 이 땅에서 필요한 모든 것이 더해진다는 진리의 살아있는 증거가 되도록 이 땅에서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12:35에서,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도록 권고를 받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에게 다른 신자들에 대한 책임을 맡기셨다면, 그들을 때리지 말고 적절한 때에 그들에게 양식을 주는 데 충실하십시오(12:45). 양에게 먹이를 주는 대신 채찍질하는 설교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설교할 때, 사람들에게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양식을 주지 않습니다. 그들은 성경 구절을 잇따라 사용하여 때립니다. 주님은 언젠가 오셔서 그분의 자녀들을 채찍질한 모든 사람을 벌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3:34에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엄청난 연민을 품으셨고 그 도시를 두고 우셨음을 봅니다.

14:13, 14에서, 우리는 아주 소수의 신자들이 따르는 주님의 명령 중 하나를 발견합니다. 그분은 당신이 점심이나 저녁을 제공할 때, 당신에게 보답할 수 없는 사람들을 초대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참된 제자는 교회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돌볼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설교자라면, 주로 부자들에게 가지 마십시오(많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가기 때문입니다), 당신에게 보답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십시오. 그러면 주께서 친히 언젠가 당신에게 보답하실 것입니다. 당신에게 아무런 헌금도 줄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의 잔치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자와 타락자

14:25-34에서, 주님은 제자도의 세 가지 필수 조건을 제시하셨습니다.

  1. 누구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26절).
  2. 매일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27절).
  3.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소유해서는 안 됩니다(33절).

많은 것을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그 중 어떤 것도 소유해서는 안 됩니다. 가지고 있는 것과 소유하는 것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당신은 집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을 하나님께 속한 집으로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허락하신 집입니다. 모든 재산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자들만이 맛을 잃지 않은 소금입니다(34절). 오늘날 우리는 아무 맛이 없는 소금이 많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전도자들은 사람들을 제자로 삼지 않고 죄 용서만을 설교해 왔기 때문입니다.

15장의 세 가지 비유에서, 우리는 -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어린 아들, 잃어버린 큰아들, 잃어버린 동전 - 네 가지 유형의 타락한 자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양은 우연히 또는 부주의로 길을 잃은 신자의 모습입니다. 목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모습입니다. 탕자는 하나님과 교회에 반항하여 떠난 신자의 모습입니다.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그는 첫 번째 경우처럼 그런 사람을 찾으러 다니지 않습니다. 그는 아들이 돼지 수준에 도달하고 스스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큰아들은 율법주의와 독선과 교만함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잃어버린 동전을 찾는 여자는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녀는 등불을 켜고 집을 쓸고(15:8) 그것을 찾을 때까지 주의 깊게 찾았습니다. 그녀가 동전을 잃어버렸을 때, 그녀는 부주의한 교회였고, 그로 인해 일부 사람들을 타락하게 만들었습니다(동전을 잃어버림).

그러자 그녀는 등불을 켜고(그녀는 성령으로 충만해짐) 찾기 시작했고, 그녀는 잃어버린 타락한 사람들을 찾아서 우리 안으로 데려왔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잃어버린 사람들과 타락한 사람들에 대한 부담이 전혀 없습니다. 그들은 오직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런 신자들은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과 완전히 단절되어 있습니다. 내가 수년간 기도해 온 기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우리 교회의 모든 장로들에게도 이렇게 기도하라고 권했습니다). "주님, 이 지역에 경건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우리에게 데려다 주시거나 우리를 그에게 데려다 주십시오. 그리고 이 둘 중 어느 것도 하지 않으신다면, 우리에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려주셔서 바로잡을 수 있게 해주십시오, 우리가 당신과 일치하여 잃어버린 자를 찾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나는 당신에게 그 기도를 하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잃어버린 양을 데려오는 양의 우리의 형태도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 우리 안에 병들고 서로 물어뜯고 찢어발기는 99마리의 양이 있다면, 그 잃어버린 양은 그런 우리 안에 있는 것보다 광야에 있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사역뿐만 아니라, 99마리의 양을 건강하고 평화롭게 유지하는 사역도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잃어버린 양)을 두고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99명의 의로운 사람보다 더 기뻐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7절). 이 얼마나 놀라운 교회(양의 우리)입니까? 회개할 필요가 없는 99명의 의로운 사람이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그들은 매일 스스로를 판단하고 회개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수년 동안 내 자신의 습관이었습니다. 그 결과,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거의 매일 내 삶에서 그리스도와 같지 않은 모습을 발견했고 - 그것을 회개하고 그것에서 스스로를 깨끗이 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그런 사람이라면, 당신은 다른 사람을 비난할 시간이 없을 것입니다 - 왜냐하면 당신은 자신을 깨끗이 하는 데 너무 바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회개가 필요 없는" 사람들의 교회를 세울 수 있고, 그곳에서 잃어버린 양들이 와서 치유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회개를 전파해야 합니다. 점차적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스스로를 판단하는 법을 배우는 교회를 갖게 될 것입니다.

목자가 양을 잃었을 때, 그 손실은 목자의 것이었습니다. 여인이 동전을 잃었을 때, 그 손실은 여인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아들의 경우, 그 손실은 아버지의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비유에서, 예수님은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이 무언가를 잃었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교회에서 우리의 일은 하나님께서 잃은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아들이 알았던 한 가지는 그의 아버지가 그를 사랑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집으로 돌아오기로 결심했습니다. 아버지는 그날 아들이 돌아온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는 매일 창밖을 내다보며 아들이 돌아오는지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 아버지는 아들을 보고 – 그를 맞이하기 위해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큰아들은, 아버지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위해 열심히 일했고 항상 그에게 순종했습니다(28, 29절). 하지만 그는 잃어버린 자에 대한 열정이 없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깊은 염려를 함께 나누지 않았습니다. 그는 한 번도 아버지에게 "제가 가서 동생을 찾아올게요."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두 가지 유형의 그리스도인 사역자와 장로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 이야기 속의 아버지와 같이, 사랑과 연민으로 가득합니다. 다른 하나는 형과 같이 딱딱하고 엄격하며 전문적입니다. 우리 각자는 두 사람 중 누구와 같을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 이야기에서, 처음에, 큰아들은 집 안에 있고 작은 아들은 밖에 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끝나면, 작은 아들은 안에 있고 큰아들은 밖에 있습니다. 지금 첫째인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왕국에서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왕국 밖에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버지의 마음과 교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모든 형제 자매는 주님의 종이 되어야 하며, 잃어버린 사람들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에 동참하는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나는 어렸을 때 전도자가 되어 북인도에서 내 인생을 보내고 싶은 큰 갈망을 가졌습니다. 나는 주님께 그분이 보내시는 곳이면 어디든 갈 준비가 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 그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나에게 북인도로 가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 나는 주님께서 보내지 않으신 곳에는 절대 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전도가 아닌 가르치는 은사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북인도에서의 주님의 사역에 매우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나는 북인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선교 잡지를 읽습니다. 당신이 선교사가 아니더라도, 전 세계의 어려운 곳에서 다른 사람들이 주님을 위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은 열망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돈에 대한 가르침

16장부터 21장까지는 돈에 대한 주제를 다룹니다. 예수님은 돈에 대해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서에서, 그분의 가르침 중 16%가 돈을 언급합니다 – 여섯 구절 중 한 구절 꼴로 돈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주제에 부여한 중요성의 정도입니다. 예수님은 돈을 사랑하는 것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사람들에게 십일조를 바치라고만 권고합니다 -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십일조를 바치라고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예수님은 옛 언약 아래 있던 바리새인들에게만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마태복음 23:23).

예수님이 여기서 말씀하신 첫 번째 비유는 불의한 청지기에 대한 것입니다. 그 이야기의 요점은 그가 자신의 미래를 계획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직장을 잃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직장을 잃었을 때, 그에게 다른 직장을 줄 친구들을 얻기 위해, 약간의 부정을 저질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돈을 통해 영원한 친구를 사귀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청지기에게, 그의 미래는 이 땅에만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우리의 미래는 영원 속에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돈에 대한 능력을 사용하여 미래를 준비했습니다. 우리는 또한 복음을 전파하고 영혼들을 구하는 데 돈을 사용하여 영원한 친구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언젠가 사람들이 천국에서 당신을 만나 "당신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돈을 주었기 때문에, 나는 구원을 받았고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16:9).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매우 강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만일 너희가 세상의 재물에 충실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부를 주겠느냐?"(16:11). 참된 부는 신의 본성, 성령의 기름 부음,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계시입니다. 왜 대부분의 신자들은 말에 있어서 더욱 그리스도와 같아지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성령으로부터 새로운 계시도 받지 못할까요? 그들은 돈에 충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어떤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섬길 수 없습니다(16:13). 선택을 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선교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은 또한 돈을 매우 사랑했습니다(16:14).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를 의롭다고 한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매우 영적으로 보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너희 마음을 아신다. 사람들이 높이 평가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혐오스러운 것이다"(16:15). 나는 이 구절을 항상 내 앞에 두고 평생 기억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사람들이 크게 여기는 모든 것을 나열하고,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모두 몹시 미워하시는 것으로 여기신다는 것을 인식하십시오. 사람들이 높이 평가하는 것은 어떤 것도 결코 영광으로 여기지 마십시오. 당신에게 그런 것들이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것들에 두는 가치만큼만 가치를 두십시오 – 즉, 제로(0)입니다. 그것들을 묵상하거나 그것들을 흡족해 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잘생겼거나 지적이거나 부유하거나 높은 교육을 받았습니까? 이 중 어떤 것에도 문제는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경건한 사람들 중 많은 사람이 잘생기지 않았고, 지적 수준이 높지 않았고, 부유하지 않았으며, 학력도 높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런 것에 어떤 가치를 두셨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소중히 여기는 것은 세상이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겸손과 그분에 대한 경외심입니다. 당신이 하나님께서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소중히 여긴다면, 그분을 위한 당신의 봉사는 훨씬 더 효과적일 것입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어떤 부자와 나사로라는 거지의 실화를 말씀하셨습니다(16:19). 이것은 비유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어떤 비유에서도 (나사로나 아브라함과 같은) 이름을 사용하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많은 돈을 맡기셨지만, 모든 것을 자신을 위해 이기적으로 사용했고, 궁핍한 형제들을 축복하는 데 사용하지 않은 한 남자의 실화입니다. 그는 문 앞에 앉아 있던 가난한 거지 나사로를 돌보지 않았습니다. 나사로는 그의 형제였습니다 - 왜냐하면 그들은 둘 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자녀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부자는 나사로를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에 대한 살아있는 믿음이 없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만일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행함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느냐? 만일 어떤 형제가 옷이 없고 하루의 양식이 부족할 때에 너희가 그에게 ‘평안히 가서 몸을 녹이고 배부르게 하라’ 말하고 그의 몸에 필요한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 그것만으로는 죽은 것이다”(야고보서 2:14-17)라고 말합니다. 구원(salvation)은 믿음에 의한 것입니다 - 그리고 그 부자는 살아 있는 믿음이 없어서 지옥에 갔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그가 묻혔다는 말은 없습니다(16:22). 아마도 그의 시신은 쓰레기 매립지에 버려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사로가 낙원에 있었을 때, 그것이 그에게 무슨 상관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 부자는 장엄하게 장례를 치렀습니다. 대제사장(대주교와 동등)이 거기에 있었을 것입니다(종교 지도자들은 보통 부자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부자에 대해 많은 좋은 말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남자는 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 지옥에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대로 된 장례를 치르거나 성당에서 호화로운 결혼식을 치르기 위해 죽은 교파에 머물러 있습니다!] 부자는 자신이 멸시하던 나사로가 천국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의 모든 돈과 종교로, 부자 자신은 천국에 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가난한 자들을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하게 하셨습니다"(야고보서 2:5).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돈을 주셨다면, 그분은 당신이 그것을 사용하여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기를 기대합니다. 부자가 지옥에 간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는 지옥에 도착했을 때 그것을 발견했습니다 - 그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16:30). 그리고 그는 나사로가 낙원에 있다면, 그것은 나사로가 회개하고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17:3, 4에서,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이 하루에 일곱 번 우리에게 죄를 지었더라도, 그들을 용서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17:10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주님의 모든 명령을 다 지킨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 자신을 "가치 없는 종"으로 생각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심지어 그리스도인들도 신학 학위를 갈구하는 시대에, 여기 좋은 학위가 하나 있습니다: "U.S. - 무가치한 종(Unworthy Servant)"! 이 학위를 자신의 이름 뒤에 붙이길 원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하지만 이처럼 낮은 학위조차도 언제 받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주님의 모든 명령을 다 지켰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우리 중 일부는 우리가 주님의 매우 유용한 종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충분히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여기저기서 우리에게 약간 축복을 주셨다고 해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께 매우 중요하고 유용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우리는 여전히 쓸모없는 종일 뿐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의 우리가 되었습니다(고린도전서 15:10). 항상 자신을 냉정하게 평가하십시오 - 그러면 삶에서 점점 더 큰 일을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계속 받게 될 것입니다.

17:12-19에서, 큰 소리로 주님께 고쳐 달라고 간구한 열 명의 나병 환자에 대해 읽습니다. 그들은 모두 고침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 한 명만이 주님께 돌아와 큰 소리로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감사했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saved)"(19절). 다른 아홉 명은 육체적 치유만 받았습니다. 이 사람은 멸시받는 사마리아인이었지만, 다른 아홉 명의 존경받는 유대인들이 얻지 못한 구원을 얻었습니다. 주님의 축복에 대해 감사할 때 주님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얻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

그 후 예수께서는 자신의 재림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마태복음 24장에서 읽은 내용은 성령에 의해 여기서 반복됩니다. 성령께서는 누구도 속지 않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보라, 그가 여기 또는 저기에 (은밀히) 오셨다'고 말하는 자들을 믿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재림은 하늘의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번쩍이는 번개처럼, 모든 사람에게 보일 것입니다. 예수께서는자신이은밀히오지않을것이라고 거듭해서 분명히 하셨습니다. 재림은 단 한 번뿐입니다. 모든 신자들은 그분의 재림에 앞서 오는 큰 환난 동안 지상에 있을 것입니다 –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적그리스도의 통치기간 동안 가장 증거가 필요한 때에 지상에서 가장 뛰어난 병사들을 데려가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의심할 여지 없이 고난을 겪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에서 떨어질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주님께 충실하여 그분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가 여기 또는 저기에서 은밀히 오실 것이다"(23절)라고 전파할 때, 주님은 우리에게 그들을 믿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믿지 않습니다. 사도들 중 아무도 이 이상한 교리를 가르치거나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순절 이후로 18세기가 넘도록 아무도 그것을 전파하지 않았습니다. 비밀 휴거 교리는 1800년대 중반에 영국에서 처음으로 일어났으며 - 그 메아리는 지금 전 세계에서 들립니다. 나는 이 교리가 수세기 동안 박해를 받지 않았던 나라(영국)에서 안락함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발명되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마침내 오실 때, 소수의 사람들이 공중에서 그분을 만나고 이 땅에 오신 그분을 맞이하기 위해 휴거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뒤에 남겨질 것입니다. 두 사람이 침대에 누워 있습니다(분명히 남편과 아내); 한 사람은 데려가고, 다른 한 사람은 뒤에 남겨질 것입니다(17:34). 두 사람이 같은 장소에서 함께 일할 것입니다; 한 사람은 데려가고, 다른 한 사람은 뒤에 남겨질 것입니다(35절).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항상 준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집 지붕에 있다면 집으로 내려갈 필요가 없습니다. 들판에 있다면, 돌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들판에서 일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사무실에서 일합니다. 주님께서 암시하신 바를 설명하겠습니다: 주님이 오실 때 사무실에 있다면, "주님,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오늘 아침 아내와 다투었는데, 집에 가서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라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끊임없는 준비는 항상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붕 위에 있다면, 그곳에서 휴거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집안의 어떤 물질적인 것에도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방법은 양심을 절대적으로 깨끗하게 유지하고 세상의 모든 것에서 철저히 분리되는 것입니다 - 항상.

18:1-7에서, 예수님은 다시 기도의 끈기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기도에 대해 말씀하신 유일한 두 가지 비유는 끈기를 강조했습니다. 11장에서는,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는 능력이 필요했습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사탄의 압제로부터 개인적으로 구출되는 것입니다. 과부는 신자의 그림입니다. 주님은 항상 신자들을 약하고 무력한 과부나 양으로 묘사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우리 자신의 능력에 의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하거나 죄에 패배할 때, 우리는 사탄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압제에서 해방될 때까지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과부는 원수의 괴롭힘에서 해방될 때까지 재판관에게 계속 요구했습니다. 우리도 똑같이 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비유를 마치시며, 그분이 지상으로 돌아오실 때 그러한 영원한 승리의 삶을 믿는 사람을 거의 찾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8:8). 우리는 지금 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승리가 가능한지 여부에 대한 신학적 논쟁에만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죄 때문에) 애통해하는 사람만이 강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무력함을 더 많이 인식할수록, 우리는 더욱 승리를 위해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밤에 베개 위에서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것을 얻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다음 비유(18:9-14)는 독선적인 사람들의 교만을 폭로하는 것이었습니다 -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입니다. 여기서 바리새인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기도하고 있었습니다(11절). 그 스스로는 그의 신이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을 숭배하고, 기도, 금식, 십일조, 선교 활동 등을 자랑합니다. 가난한 세리는 "죄인인 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마치 세상에서 유일한 죄인인 것처럼, 자신을 "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그는 의롭다 함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첫째가 마지막이 되고 마지막이 첫째가 될 것입니다.

그런 다음 돈과 관련된 두 가지 사건이 더 있습니다. 첫 번째 사건에서, 부유한 젊은 관원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대가를 치르기를 꺼려하고 그분에게서 돌아섰습니다(18:18-27).

두 번째 사건은 부유한 세리였던 삭개오에 관한 것입니다. 그는 평생 많은 사람을 속였습니다(19:1-10). 하지만 삭개오는 주님을 만나고 싶은 열망에 그분을 보려고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예수께서 그 길을 걷고 계실 때, 성령께서는 그분에게 그 길을 멈추고 저 나무를 올려다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주님은 삭개오에게 그의 집을 방문하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는 매우 기뻤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집 앞에 오시자, "삭개오는 멈춰 서서"(8절) 말했습니다(마치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당신은 거룩하십니다. 당신은 제 집에 오실 수 없습니다. 저는 많은 사람을 속여 얻은 불의한 돈으로 집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 저는 이제 제 돈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속인 모든 사람에게서 빼앗은 돈의 네 배를 돌려주겠습니다." 삭개오는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예수님은 그곳에서 의에 대한 설교를 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 빛이 삭개오를 회개하게 했습니다.

구약성경의 율법은 배상할 때 금액에 20%를 더해야 한다고 명시했습니다(민수기 5:7). 하지만 여기서 삭개오는 300%를 더했습니다. 그는 여러 해 전에 사람들을 속였기 때문에 이자를 붙여서 돈을 돌려주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을 들으시자마자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19: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삭개오가 한 일을 기꺼이 할 때, 우리는 그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19:11-20에서, 돈과 관련된 또 다른 비유를 읽습니다. 긴 여행을 떠나던 귀족이 열 명의 종을 불러 각각에게 돈을 주고 그 돈으로 장사를 하라고 했습니다. 한 종은 그것을 매우 충실하게 투자하여, 그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벌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섯 므나를 벌었고, 또 다른 사람은 그 므나를 손수건에 싸서 땅속에 묻었다가, 주인이 돌아왔을 때 돌려주었습니다. 그는 어떤 죄도 짓지 않았습니다. 그는 한 번뿐인 인생을 낭비했을 뿐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의 비유에서는, 주어진 금액이 달랐습니다. 그 비유는 은사에 대한 것입니다. 한 사람은 사도이고 다른 한 사람은 어머니일 수 있습니다. 사도는 어머니보다 여행하고 봉사할 기회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도에게 더 많은 것을 기대하십니다. 하지만 여기의 비유에서, 각 사람에게 주어진 양은 같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 우리의 시간입니다. 우리는 매일 같은 양의 시간, 즉 24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다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시간을 유익하게 사용하여 말씀을 공부하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수다에 시간을 낭비합니다. 둘째, 이것은 우리의 몸을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몸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의 정욕을 통해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유혹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 정욕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다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정욕과 싸워 유혹을 이기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정욕과 죄에 굴복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시간과 몸을 사용하는 한 형제는 열 무나를 얻는 반면, 다른 형제는 단지 다섯 므나만 얻습니다.

19:30에서,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을 읽습니다. 왕들은 말을 탔지만, 예수께서는 나귀를 택하셨습니다. 그분은 세상의 눈에 크고 위대한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경멸 받을 만한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렇게 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한 번은 나귀를 통해 발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나귀만큼 어리석더라도 주님은 우리를 필요로 하시고 그분의 목적을 위해 우리를 사용하고자 한다는 것을 아는 것은 큰 격려가 됩니다. 그 나귀는 그날 많은 영예를 얻었습니다 - 그리고 주님께서 당신을 사용하실 때, 당신도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나귀가 사람들이 자신을 인정한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슬프게도 착각한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공경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리신 순간, 나귀는 예전과 같은 나귀로 돌아갔고 - 아무도 더 이상 나귀를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좋은 교훈입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인정할 때, 그들은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20:25에서, 주님은 다시 돈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리라." 모든 사람에게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돌려주십시오.

21장에서, 주님의 재림에 대해 읽습니다. 박해가 있을 것이고 심지어 우리의 친척들조차 우리를 배신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라도 건드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18절).

최후의 만찬과 십자가 처형

22:24에서,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수년간 들은 후에도, 여전히 그들 중 가장 큰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는 것을 봅니다. 주님은 완벽한 사람들을 제자로 선택하지 않으셨고 - 그들을 바로잡는 데 매우 온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모두 변화될 것임을 알고 계셨고 -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일단 그들이 성령 충만해지자, 그들은 더 이상 지위나 명예를 위해 서로 싸우지 않았습니다.

22:31에서,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사탄이 하나님께 밀처럼 베드로를 체질하겠다고 허락을 구했고 -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허락해 주셨다고, 경고하신 것을 읽습니다. 이것은 욥의 이야기를 생각나게 합니다. 욥의 이야기에서도 사탄은 욥을 괴롭히려면 먼저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탄이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우리를 유혹하도록 결코 허락하지 않으실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0:13). 사탄은 우리를 괴롭히거나 유혹하거나 공격하거나 박해할 때마다 하나님으로부터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엄청난 위안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이 그를 유혹했을 때 그가 넘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한 번이 아니라 세 번이나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가 넘어지지 않도록 결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셨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왜 베드로가 넘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지 않으셨을까요? 베드로는 너무 교만했기 때문에, 죄에 넘어지는 것 외에는 그를 겸손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 반복적으로 - 넘어질 때만 우리 육신에 선한 것이 없고 우리 스스로는 결코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삶을 엉망으로 만들고 바닥까지 떨어졌을 때 – 우리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완전히 무너진 그’제로 포인트(0점)’에 이르렀을 때 – 우리는 믿음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이기는 자로 만드실 것입니다. 실패는 하나님의 계획에 있는 목적을 성취합니다.

베드로의 실패와 그의 실패에 대한 그의 통곡은 모두 오순절을 위한 준비였습니다. 만약 그가 그날 밤 그렇게 깊이 죄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그는 오순절에 그곳의 모든 죄인들을 내려다보며 교만하게 서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깨어진 사람으로서, 그들을 자신과 똑같은 죄인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장 큰 죄인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성령으로 채우시고 그분의 봉사에 사용하시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를 강력하게 사용하셨을 때, 베드로는 더 이상 교만한 생각을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얼마나 큰 실패자였는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실패에는 얼마나 놀라운 목적이 있었습니까.

23:40-42에서,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구원받은 일에서 우리는 두 가지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그는 예수께서 아무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는 예수께서 고발당하셨을 때 어떻게 행동하셨는지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강도는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저주하고 욕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 왔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그는 누군가가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들은 무엇을 하는지 모릅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그의 눈을 뜨게 했습니다. 그것은 또한 로마 백부장의 눈을 뜨게 한 것이었습니다 - 그는 "진실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인정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 안에서 용서하는 마음을 볼 때, 그들 역시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두 번째 것은 다른 강도는 십자가에서 내려오기를 원했지만(자신이 죽을 만한 죄를 짓지 않았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 강도는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힐 만한 죄를 지었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아담은 자신의 죄에 대해 아내를 비난했고 낙원에서 쫓겨났습니다. 이 강도는 자신의 죄를 인정했고 즉시 낙원에 들어갔습니다(23:43). 낙원은 자신이 죄를 지어서 지옥에 갈만하다고 정직하게 인정하는 사람들을 위해 준비되었습니다.

24:13-33에서, 두 제자가 엠마오로 가던 중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과 동행하셨다는 이야기를 읽습니다. 7마일의 여정이었고, 여유롭게 걸어가면 2~3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그들은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성경 공부를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모든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보여주었습니다(24:27). 그리고 그분이 말씀하실 때 그들의 마음은 그들 안에서 불타올랐습니다(24:32).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는 이와 같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설교하기를 갈망해야 합니다 – 말씀을 들을 때 사람들의 눈이 열리고 마음이 그 안에서 불타오르는 그런 설교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신 후, 예수님은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예루살렘에서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24:49). 그들은 그분께 순종했고 그 다음 열흘 동안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24:53). 그 찬양의 분위기 속에서 성령이 다락방에 있는 그들 모두에게 내렸습니다. 성령은 오늘날에도 비슷한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에게 내립니다! 할렐루야!

장 43
요한복음

예수 그리스도 - 영원한 하나님

요한복음 1:1은 창세기 1:1에 언급된 "시작" 이전의 진짜 "시작"으로 돌아갑니다.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예수님은 여기서 "하나님"이라고 불립니다. 요한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셨습니다. 어느 날, "말씀이 육신이 되셨고"(1:14). 그분은 우리의 육신으로 이 땅을 걸으셨을 때 하나님이셨고, 오늘날에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경배하고 그분께 기도합니다. 예수님 자신은 "오직 하나님만이 경배받을 수 있다"(마태복음 4:1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그리고 사람들이 땅에서 그분을 경배했을 때, 그분은 그들의 경배를 받아들이셨습니다.

왜 그분을 "말씀"이라고 부르나요? 그 의미에는 철학적이거나 복잡한 것이 없습니다. 성경은 단순한 책이지만 불행히도 학자들에 의해 의미가 복잡하게 해석되어 왔습니다. 그것을 이해하려면 영리한 마음이 필요하지 않고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이 필요합니다(마태복음 11:25). 이 복음서를 쓴 요한은 교육받은 철학자가 아니라 교육받지 못한 어부였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성경 신학교에 가서 이 어부가 쓴 글에 대한 긴 논문을 쓰고 신학 박사 학위를 받습니다 - 요한 자신은 결코 받을 수 없었을 박사 학위입니다!

말이나 글로 표현된 "말씀"은 들을 수 없는 (또는 보이지 않는) 생각을 들리게 (또는 보이게)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을 말로 표현할 때만,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남아 계셨거나 영으로만 땅에 오셨다면, 우리는 결코 그분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예수님의 형상으로 오셨고 -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고 귀에 들리게 나타내신 분입니다. 그분 외에는 아무도 그 칭호를 가질 수 없습니다.

"그(예수) 안에 생명이 있었고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습니다"(1:4). 빛은 항상 어둠을 몰아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생명이 모든 곳에서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모든 어둠을 몰아낼 것입니다, 우리가 허락만 한다면요. 모든 창문과 문을 닫은 방에서 살면, 밖에 햇빛이 밝더라도 안에는 어둠이 있습니다. 하지만 작은 환풍구라도 열면, 즉시 빛이 들어옵니다. 창문에 작은 틈이 있어도 빛은 들어올 것입니다. 빛은 아주 작은 틈을 통해서도 들어오려 합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 당신의 마음에 들어와서 가득 채우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문 앞에 서서 두드리십니다. 당신이 마음을 여는 만큼, 그분이 그분의 생명으로 당신의 마음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그리고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5:14).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이 빛이었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편 119:105), 하나님의 율법은 그 당시 그들이 가진 유일한 빛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하나님의 빛은 주로 성경이 아닙니다. 육신이 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빛이십니다. 그분은 "내 가르침이 빛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나는 빛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너희의 가르침이 빛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너희는 빛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빛은 우리의 삶이지, 우리가 가르칠 수 있는 놀라운 것들이 아닙니다. 만약 당신의 삶이 빛이 아닌데, 당신이 환상적인 진리를 말한다면, 당신은 위선자입니다 - 그리고 그 누룩이 당신을 파괴할 것입니다. 우리가 가르치는 모든 것은 우리의 삶으로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삶은 우리의 생각, 재정 거래, 가정 생활, 아내와 대화하는 방식, 자녀를 양육하는 방식, 사무실에서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 동료와 교회의 가장 어린 형제를 대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쳐야 합니다. 예수님의 삶은 빛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나라의 가장 큰 결핍입니다.

"그를 영접한 자, 곧 그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children of God)가 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1:11,12). 우리는 그분을 주님으로 영접할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자녀와 아들은 다릅니다. 아들(son)은 성장하여 성숙한 존재입니다. 자녀(child)는 그저 아기일 뿐입니다. 예수님을 당신의 구세주로 영접하면, 당신은 성숙한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기가 됩니다. 성숙한 아들이 되기 위해서는 성장해야 합니다.

은혜와 진리

예수께서 말씀으로 이 땅에 오셨을 때, 제자들은 그분 안에서 “은혜와 진리로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요한복음 1:14). 그리스도께서 드러내신 영광에는 균형이 있었습니다 - 은혜와 진리가 있었습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선포된 진리뿐만 아니라 삶의 실제(reality)를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입니다”(요한복음 17: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복음서에서 “진리”, “참”, “진실로”라는 단어가 70회 이상 나옵니다. 그것은 요한복음의 주요 주제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 진리(계명, 율법, 원칙으로 구성됨)가 사람들에게 매력적이려면 은혜로 덮여야 합니다. 우리 몸에는 뼈(진리의 모습)와 뼈를 덮는 살(은혜의 모습)이 있습니다. 우리가 뼈뿐이라면, 매력적일까요? 어느 날 밤 뼈대만 있는 해골이 다가오는 것을 본다면 당신은 도망칠 것입니다. 사람들이 바리새인에게서 도망친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은 상당한 진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은혜는 없었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너무 율법주의적이어서, 항상 진리와 규칙과 계명을 강조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반감을 사기도 합니다. 예수님도 뼈가 있었지만 - 뼈는 살로 덮여 있었습니다. 진리는 그분 안에서 은혜로 덮여 있었기 때문에, 가장 심한 죄인조차도 그분께 이끌렸습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강조하다 보니, 회심하지 않은 친척들을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해골로 보고 우리가 제시하는 "거짓 그리스도"로부터 도망칩니다.

반면에 은혜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몸에 뼈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서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뼈가 없는 해파리와 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뼈가 없는 것에는 몇 가지 이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모양의 구멍이든 – 비집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그렇습니다. 그들은 어떤 교리에 대한 확신도 없습니다. 그들은 타협하고 어떤 그룹에도 적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복음주의-물고기(복음을 말하지만 물고기가 물살에 따라 어디든 떠내려가듯, 신앙의 원칙 없이 휩쓸리는 사람- 역주)”이기 때문입니다! 카멜레온처럼 그들은 주변 환경에 맞게 그들의 색깔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세상에 적절하게 나타내려면 진리와 은혜가 둘 다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 중 누구도 이 영역에서 완벽하게 균형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몸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진리"에 강하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에 강한 형제들을 주셔서 함께 일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 없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없고, 우리도 그들 없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함께라면 그리스도를 온전히 나타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삶의 끝까지,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 우리의 구원(salvation)은 오직 그리스도의 몸의 다른 지체들과 함께 협력할 때에만 찾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완벽하게 균형을 이루셨습니다. 그분 자체가 그리스도의 온전한 몸이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분의 몸의 일부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우리와 다른 강조점을 가진 사람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현되었습니다"(1:17). 이 구절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세상에 은혜가 없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율법은 모세를 통해 왔습니다. 그것은 옛 언약이었습니다. 옛 언약 아래에는 은혜가 없었습니다. "은혜(grace)"라는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결코 찾을 수 없습니다. 오직 신약성경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킹 제임스 버전 창세기 6:8에서 발견되는 "은혜"라는 단어는 오역입니다. NASB는 그것을 올바르게 "호의(favour)"로 번역했습니다. 은혜(grace)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은혜'에 대한 가장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정의는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호의'로 잘못 알려져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값없이 주시는 호의(the unmerited favour of God)를 받았습니다 – 그러나 그것은 자비(mercy)입니다, 은혜(grace)가 아닙니다. 그들은 옛 언약 아래에서 자비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통해 그들은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시편 103:3). 그러나 은혜로, 우리는 죄에 대한 승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자비는 우리의 과거 삶, 즉 우리 죄에 대한 죄책감을 다룹니다. 은혜는 우리의 미래를 다루며, 우리에게 죄에 대한 승리를 줍니다. 주님께서 "내 은혜가 너에게 족하도다"라고 말씀하실 때, 그것은 은혜가 미래에 우리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모든 복음서에서와 마찬가지로, 요한복음도 예수께서 사람들을 성령으로 세례(담그다, 잠기다)를 줄 것이라는 약속으로 시작합니다(1:33). 물에 담그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 하나는 강이나 수조에 담그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폭포 아래에 서는 것입니다. 물 세례는 수조나 강에서 이루어집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오순절 이후로 하나님의 보좌에서 땅으로 흘러온 하나님의 강의 폭포에 잠기는 것입니다. 폭포는 "겸손"이라고 불리는 곳에 떨어집니다. 우리가 평생 겸손하게 지낸다면, 이 강물은 계속 우리 위에 떨어져 우리를 잠기게 하며 우리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흘러갈 것입니다.

와서, 보고 따르라

세례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님께 “어디에 사십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와서 보아라”(1:3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옛 언약의 하나님의 종은 “와서 들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의 하나님의 종은 “와서 보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옛 언약에서, 초대는 “모세가 하나님의 메시지를 가지고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와서 들으십시오.”였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에서 메시지는 “예수께서 하늘에서 오셨습니다. 와서 그분이 사는 방식을 보십시오.”입니다. 옛 언약에서는, 메시지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새 언약에서는, 메시지에 중점을 두지 않고, 전달자에 중점을 둡니다. 우리가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와서 내가 아내와 어떻게 사는지, 교회 동역자들과 어떻게 지내는지, 교회에서 가장 어린 형제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계좌를 어떻게 관리하는지, 자녀를 어떻게 키우는지 보십시오. 와서 내 삶의 모든 부분을 보십시오. 내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처럼 당신도 나를 따라올 수 있습니다”(고린도전서 11:1)라고 말합니다.

요즘은 미국에서 인도로 오는 설교자가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집에서 아내와 어떻게 사는지, 이혼한 사람인지, 자녀를 어떻게 키웠는지, 거기서 어떤 교회를 세웠는지 모른다면, 저로서는, 그에게 제 교회에서 설교해 달라고 부탁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강력한 설교에 감명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사람은 "와서 내가 어떻게 사는지 보세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뿐입니다. 하지만 "내가 얼마나 잘 설교하는지 (또는 병자를 고치는지) 와서 들어보세요"라고만 말할 수 있다면, 저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옛 언약의 종이며 - 그는 오직 옛 언약의 교회만 세울 것입니다. 바벨론은 "와서 들어보세요"라고만 말할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 세워집니다. 그들은 올바른 교리를 강조하고 그것을 위해 싸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이 사는 방식으로 진리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들의 교리가 정말로 진리라면, 그것은 그들의 삶에서도 진리(실체)를 나타내야 합니다. 그들의 교리가 거룩한 삶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그들의 교리는 틀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life)을 가지고 계셨고, 그 삶(life)은 사람들의 빛이었습니다. 요한의 주제는 그의 복음서와 서신서 전체에 걸쳐, 생명(life)입니다. 수천 년 동안 이 생명(삶)은 숨겨져 있었습니다. 사람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말씀만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육신이 되셨고, 이제 우리는 그 영원한 생명(삶)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복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처럼 나를 따르라"고 말했습니다(고린도전서 11:1). 오늘날 하나님의 모든 종도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설교자들은 "나를 따르지 말고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겸손하게 들리지만,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그는 왜 그렇게 말할까요? 그는 자신의 삶이 나쁜 본보기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설교를 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집에 가서 먼저 자신의 삶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처럼 우리를 따르라고 요청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요. 우리는 아직 그 산 꼭대기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만 일어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산 아래에 앉아 있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복음이 우리의 삶의 방식, 사고방식, 말투, 돈을 다루는 방식, 그리고 일반적으로 행동하는 방식을 바꾸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와 함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완전히 변화하는 이 산을 오르자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나는 인도를 방문하던 서양의 한 형제가 일등석 기차표를 사서 기차에 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누군가가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고, 그 사람은 일어나기를 꺼려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그와 싸우는 대신, 화장실 근처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앉았습니다. 검표원이 왔을 때, 그는 그 형제에게 왜 바닥에 앉아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 형제는 "다른 사람이 내 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검표원은 외국인이 이런 행동을 한다는 사실에 놀랐고 왜 그랬는지 물었습니다. 그 형제는 "저는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사람들과 싸우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검표원은 회심했습니다! 그 사람은 강력한 설교를 듣고 회심한 것일까요? 아니요. 그는 그 형제의 행동에서 강력한 설교를 보았습니다. 그것이 세상의 빛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기차나 버스를 타고 여행할 때 이기적인 인간의 행동이 가장 심하게 나타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경건하지 않은 세상에 그리스도의 아름다움, 겸손, 인내심을 나타내야 합니다.

1:47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나다니엘에 대해 "보라, 이 사람은 간사함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을 봅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얼마나 놀라운 증언입니까. 그분은 나다니엘이 죄가 없거나 완벽하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 나다니엘은 죄가 없거나 완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십니다. 예수께서는 그 사람이 정직하고 맑은 유리처럼 투명하다고만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반투명인 유리와 같습니다 - 그들은 투명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불투명한 유리의 반대편에 많은 것을 숨깁니다. 그들은 앞면에서 매우 거룩해 보입니다. 하지만 반투명한 유리 뒤에서 그들은 다른 삶을 살고 있습니다. 간사함이 없다는 것은 맑은 유리와 같아 우리의 내면이나 사생활에서 숨기고 싶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분노 등에 의해 패배할 수 있지만, 우리는 그것에 대해 솔직합니다. 우리는 가장하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서, 우리는 새 예루살렘(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이 맑은 유리와 같다고 들었습니다. 그 교회에 있고 싶다면 우리의 삶은 그래야 합니다.

첫 번째 표적

2장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참석한 가나의 결혼식에 대해 읽습니다. 2:11에서, "예수께서 갈릴리 가나에서 그 첫 번째 표적(signs)을 행하셨다"는 말씀을 읽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기적을 표적이라고 부릅니다. 즉, 모든 기적도 비유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영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었습니다. 여기서의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우선: 세상적인 것에서 누리는 기쁨의 포도주는 언젠가 바닥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하늘의 포도주를 주실 수 있습니다 - "성령 안에서의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의 삶입니다(로마서 14:17). 당신의 세상적인 포도주가 바닥나면, 그것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고 가서 주님께 말씀하세요 - 마리아가 한 것처럼요. 그게 당신이 해야 할 전부입니다. 포도원에 가서 포도를 따고 그것들을 으깨서 포도주를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요. 그냥 예수님께 가서 "주님, 저는 제 삶에 기쁨이나 평화나 승리가 없습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대로 '항상 주님 안에서 기뻐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세요. 주님은 당신에게 그분의 새로운 포도주, 즉 그분의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빈 항아리에서,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포도주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집안의 하인들을 불러 그분과 함께 일하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오늘날에도 비천한 사람들을 그분의 동역자로 사용하십니다. 종의 영을 가지십시오 - 그러면 주님이 당신을 통해 기적을 행하실 것입니다. 여기 하인들은 항아리에 물을 채웠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포도주로 바꾸셨습니다. 우리는 쉬운 부분만 하면 되고 주님은 어려운 부분을 하십니다. 주님은 당신이 그분의 일에서 동역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인들이 포도주를 내놓았을 때, 사람들은 평생 그렇게 좋은 포도주를 맛본 적이 없어서 놀랐습니다.

나는 사역을 하면서, 종종 맛없는 물(나의 생각들)을 주님께 가져갔고, 주님은 그것을 포도주로 바꾸어 주시고 설교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나에서처럼, 사람들은 내가 어디서 그렇게 좋은 포도주를 구했는지 궁금해했습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처음 표적을 통해, 주님은 우리에게 그분을 섬기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여기에는 게으름이 있을 자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먼저 열심히 일하고 성경을 공부해야 합니다. 600리터의 물로 그 항아리들을 채우는 것은 힘든 일이었습니다(2:6). 하나님은 결코 게으른 사람을 통해 그분의 일을 하지 않으십니다.

2:14-17에서, 예수께서 기도의 집에 장사꾼의 영을 들여오는 자들을 성전에서 쫓아내신 것을 읽습니다. 그분은 먼저 끈으로 채찍을 만드셨습니다. 마음속으로 이 그림을 그려보세요: 예수께서 구석에 앉아 여러 가지 끈을 모아 꼬아서 밧줄을 만들고 계셨습니다. 시간이 좀 걸렸을 것이고 그분의 제자들은 그분이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했을 것입니다.

2장의 이 두 사건에서, 우리는 은혜와 진리를 봅니다. 예수께서는 결혼식에서 일류 포도주를 제공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채찍을 만들어 하나님의 이름으로 돈을 버는 자들을 성전에서 쫓아냈습니다. 우리의 사역에는 포도주와 채찍이 모두 있어야 합니다 - 궁핍한 자에게는 '포도주'이고, 그리스도인 사기꾼에게는 '채찍'입니다.

우리가 설교단에 설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 지상에서 하나님의 대표자로서 거기에 서야 합니다. 내 교회에서 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에게 가장 좋은 일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나를 두려워하는 것이 낫습니다. 이 교회에서 어떤 말도 안 되는 일도 허용하지 않을 테니까요. 여러분이 이곳에 와서 이익을 취하거나, 험담하거나, 사람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거나, 자신의 이름을 알리려고 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곳에 와서 종이 되고 싶지 않다면, 자신을 낮추고 싶지 않다면, 이 건물의 화장실을 기꺼이 청소하고 싶지 않다면, 이 교회에는 여러분을 위한 자리가 없습니다. 여기서는 우리 모두가 평등합니다 - 선배나 후배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 바닥을 청소하고 화장실을 청소합니다. 우리는 모두 형제입니다. 아무도 다른 사람보다 크지 않습니다. 당신이 명예를 추구한다면, 이 교회가 아닌 다른 교회를 찾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양과 비둘기 장사꾼"을 우리 가운데서 몰아낸 방법입니다. 우리가 확고하지 않다면, 우리는 인도에서 하나님의 이름에 불명예를 가져온 수많은 교회와 같은 우유부단한 교회만 만들어낼 것입니다.

2:24, 25에서, “예수께서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맡기지 아니하셨다”는 것을 읽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믿었지만, 그분은 모든 사람을 믿지 않으셨습니다 - 그분은 각 사람의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 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온전히 헌신해야만 그분께서 우리에게 온전히 헌신하실 것입니다.

3장에서,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에 대해 읽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을 걸었던 사람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약속을 잡지 않고도, 밤늦게라도, 그분의 집에 올 수 있었습니다. 자정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예수님은 그에게 이야기할 시간을 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음식을 먹을 시간도 없고(마가복음 3:20) 잠을 잘 시간도 없을 때(누가복음 6:12)가 있었습니다. 주님을 섬긴다면, 불편함을 감수해야 합니다. 음식과 잠에 더 관심이 있다면, 주님을 섬기는 것보다 다른 일을 하는 것이 낫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3:5). 물은 성령의 상징입니다. 불도 또 하나의 상징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우리는, 성령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생명 안에서 성장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봅니다. 우리가 거듭날 때(물로 태어날 때), 우리는 물 한 잔을 마십니다("구원의 잔" - 시편 116:13). 그리고 이 물 한 잔은 “샘물”(요한복음 4:14)이 되어야 하고, 마지막으로, “생수의 강”(요한복음 7:38)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물에서 태어날 때, 성령이 들어와 우리 안에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를 샘물로 인도합니다. 집에 우물이 있다면, 물을 얻기 위해 외부의 어떤 공급원에도 의존하지 않을 것입니다 - 우리의 기쁨과 평화와 승리는 주변의 상황이나 사람들이 우리를 대하는 방식에 의존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주님은 우리를 세 번째 단계로 인도합니다. 이 물이 여러 방향으로 강처럼 흘러내려 많은 사람을 축복합니다. 우리는 세 번째 단계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정죄함 없음

3:17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아들을 통하여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라는 말씀을 읽습니다. 이 구절에서 세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 마음 속에서 듣는 정죄의 음성은 항상 사탄에게서 옵니다. 성령은 우리의 구체적인 죄를 깨닫게 해주시지만, 우리가 쓸모없다거나 우리에게 소망이 없다는 등 말씀하시며 우리를 정죄하시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둘째,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하나님 말씀을 듣고 나서 정죄감을 느끼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항상 격려를 받고 최악의 사람들에게도 소망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셋째, 우리가 비그리스도인에게 증거할 때는, 그들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저는 어렸을 때, 거리와 기차, 버스에서 많은 전도지를 나눠주곤 했습니다. 저는 그들의 피를 제 손에서 씻어내기 위해 그렇게 했습니다. 저는 그들을 구원하려는 의도가 없었고; 예수님처럼 그들 중 누구를 위해 죽을 용의도 분명 없었습니다. 매번 전도지를 줄 때마다, 저는 (조용히) "이제 나는 당신에게 전도지를 주었습니다. 당신의 피는 제 손에 묻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양심의 가책을 덜기 위해 전도지를 주었습니다. 그들이 저를 가리키며 제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고 말하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마지막 날에 그들이 "당신은 예수님에 대해 한 번도 말해주지 않았어."라고 말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이 전도하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그분의 아들을 보내셨지, 사람들을 정죄하기 위해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이제 저는 전도지 1,000장을 주고 아무도 구원하지 않는 것보다 전도지 1장을 주고 한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낫습니다.

3:30에서, 세례 요한의 인생 좌우명을 봅니다: "그분(그리스도)은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 우리도 그것을 우리 인생 좌우명으로 삼는 것이 좋습니다.

4장에서, 예수님이 사마리아를 방문하신 것을 읽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걷다가 사마리아에 이르렀고 모두 배가 고팠습니다. 만약 우리가 전도팀으로서 마을에 가서 배가 고프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까요? 우리 모두 식당에 가서 음식을 먹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성령으로부터 길가에 머물러 있고 식당에 가지 말라는 인도를 느끼시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서 먹고 내게 먹을 것을 가져오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이 그곳에서 기다리시는 동안 한 여인이 왔고, 그녀를 통해 온 도시가 예수님에 대해 듣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사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빌립은 사마리아에서 일어난 부흥을 떠나 사막으로 가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가 순종했을 때, 그는 에티오피아 내시를 만났고, 그는 회심하여 에티오피아에 복음을 전했고, 수천 명이 회심했습니다. 빌립이 그날 성령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에, 에티오피아에는 2000년 동안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빌립이 사막으로 그 많은 시간을 충실하게 걸어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들어올려 옮겨서, 그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무료 여행을 허락하셨습니다(행 8장). 베드로는 기도하는 동안 고넬료의 집으로 가라는 인도를 받았습니다(그는 거기에 갈 계획이 없었습니다)(행 10장).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셨습니다(4:16). 그 여인은 남편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다, 너는 남편이 없다. 너는 다섯 남편이 있었고 지금 같이 사는 사람은 네 남편이 아니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4:18). 이제 그녀는 정말 당황했고 즉시 주제를 바꾸어 예수님께 예배에 대해 묻기 시작했습니다(20절).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로움을 봅니다. 그분은 그녀의 당황함을 알아차리고 직접 주제를 바꾸셨습니다. 그분은 은혜와 진리로 충만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성령께서 이곳에서 당신에게 예수님의 영광을 보여주시도록 허락한다면, 성령은 당신이 예수님을 닮도록 변화시킬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교에게는 구원의 초보적인 진리를 말씀하셨고(요한복음 3장), 5번 이혼한 죄 많은 여자에게는 예배에 대한 가장 심오한 진리를 말씀하셨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4장). 분명히 예수님은 주교보다 그녀에게서 진리에 대한 더 큰 갈증을 보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전 세계에서 "영과 진리(삶의 실제)로 예배하는" 참 예배자를 찾고 계십니다. 옛 언약 아래서, 사람들은 손뼉을 치고 감정을 표현하는 등 몸과 혼으로만 예배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만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참 예배자들이 영으로도 예배할 때가 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 이후, 지성소 앞의 휘장이 찢어졌고, 이제 사람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직접 나아가 자신의 몸을 살아 있는 제물로 드릴 수 있게 되어, “영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시대가 왔습니다(로마서 12:1 - NASB)

하나님의 뜻을 행함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다”(4:34). 예수님의 양식은 돌아다니며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아버지가 그분에게 하기를 바라는 것을 정확히 하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눈을 들어 거두어들일 준비가 된 추수물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35절).

어떤 사람들은 뿌리도록 부름을 받고 어떤 사람들은 거두도록 부름을 받습니다(4:36). 나의 사역은 주로 거두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보내어 다른 사람들이 수고한 곳에서 거두게 하였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4:38). 윌리엄 케리는 200년 전에 인도에 와서 많은 고통을 겪고 많은 것을 뿌렸습니다. 그 이후로 다른 경건한 선교사들이 와서 열심히 일하고 씨를 뿌리고 또 뿌렸지만 열매는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나는 타밀나두의 외딴 마을에 가면, 이 선교사들이 뿌린 것에서 수확물을 거둡니다. 그들은 내가 받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수년간 일했지만 거의 열매를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복음 전도자는 나아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합니다. 그런 다음 그는 회심자들을 교사와 목자에게 넘겨서 그들이 몸으로 자라게 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경쟁이 없습니다. 어떤 목사들은 "당신은 내 양을 훔치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양이며, 당신의 양이나 나의 양이 아닙니다. 그들이 당신의 양이라면, 그들은 모두 지옥에 갈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양들만이 천국에 갑니다.

나는 어느 복음 전도자가 거리에서 술 취한 사람을 만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술 취한 사람이 "당신은 나를 알아보십니까? 나는 당신의 회심자 중 한 명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복음 전도자는 "당신이 이렇게 술에 취해 있다면, 당신은 분명히 나의 회심자이고, 주님의 회심자가 아닙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무도 내 양을 훔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양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두 주님의 양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다른 교회에서 더 나은 목초지를 찾을 수 있다면, 나는 그들이 그곳에 가는 것을 막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도 그래야 합니다. 주님의 양을 마치 당신의 개인 소유물인 것처럼 소유하려 하지 마십시오.

4:46-54에서, 가버나움의 어느 왕의 관리의 아들이 병들었다는 이야기를 읽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러 가나로 왔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가거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집에 가서 하인들에게 아이가 언제 나았는지 물었을 때, 그들은 "어제 오후 1시에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관리가 실제로 집에 도착한 것은 다음 날이었습니다. 그는 왕의 관리였으므로, 의심할 여지 없이 마차를 타고 가나로 왔을 것입니다. 가버나움까지의 거리가 25km에 불과했기 때문에 기껏해야 2~3시간 만에 집에 도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날 바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나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아침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아이가 집에서 심하게 아플 때 누가 그렇게 하겠습니까? 거기서 우리는 그의 아이가 나았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그의 믿음을 봅니다. 그래서 그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네 아들이 잘 있다"라고 말씀하실 때, 그것을 믿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서 확인할 필요가 없는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5장에서, "베데스다에는 많은 병든 자, 눈먼 자, 절름발이, 쇠약한 자들이 누워 있더라"(5:3)라고 읽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많은 교회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 안에는 영적으로 눈먼 자, 병든 자, 절름발이, 쇠약한 신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들을 고쳐주셔야 합니다. 한 사람이 38년 동안 거기에 누워 있었습니다. 38년이라는 기간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것에 대해 방황하도록 벌하신 기간이었습니다: “가데스 바네아(가나안 국경)에서 떠나 우리가 건너기까지 걸린 시간은 38, 주님께서 맹세하신 대로 모든 군사가 죽기까지였습니다(신명기 2:14). 이 절름발이는 죄에 대해 승리하지 못하고 패배한 채 살아가는 신자들을 상징합니다. 그는 천사가 물을 휘저을 때마다 38년 동안 연못에 들어가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매년 실패하고 결국 포기했습니다. 이것은 율법 아래서의 삶의 모습입니다. 당신은 승리를 위해 노력하고 노력하지만 항상 실패하고 결국 포기합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이 오시고 당신은 순식간에 승리에 들어갑니다. 이 기적은 표적이자 비유입니다. 광야에서, 그 38년 동안, 모든 군인이 죽었습니다. 인간의 노력과 에너지는 죽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영(0)점에 도달할 때까지 기다리신 후 오십니다. 5:14에서, 예수께서는 이 사람에게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경고하셨고, 그렇지 않으면 더 심한 병에 걸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의 병은 죄로 인해 생겼습니다. 어떤 병은 죄로 인해 생기며 죄를 고백하고 바로잡고 깨끗해질 때까지 치유될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안식일에 왜 사람들을 고치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안식일에 일하시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5:17). 하나님 아버지는 지금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가지셨던 유일한 안식일은 창세기 2:2에 언급된 안식일로, 인간이 죄에 빠지기 전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일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도 안식일이 없다. 아버지께서 일하시므로 나도 일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전업 사역자이셨습니다 – 그분은 하루 24시간, 주 7일 일하셨습니다. 사탄도 "밤낮으로" 일하며 - 성도들을 고발합니다(요한계시록 12:10). 하나님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가 똑같이 전심을 다해 하나님께 헌신하기를 원하십니다 - 비록 그들이 세속적인 직장에서 일하고 있더라도 말입니다.

5:30에서, 예수님은, "나는 결코 스스로의 주도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그분은 항상 아버지께서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 주시기를 기다렸다는 뜻입니다. 그분은 아버지가 말씀하실 때 행동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매우 배고프셨지만 돌을 빵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 아버지가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항상 하늘에서 음성으로 명령이 내려지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는 어떤 일을 하도록 우리 영 안에서 감동을 주시기도 하고, 어떤 일을 하지 않도록 억제하시기도 하며 말씀하십니다."

5:34, 41에서, 예수님은 “나는 사람들에게서 증거를 받지 아니하노라… . 나는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받지 아니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자신에 대해 주신 증거에 만족하셨습니다. 그분은 다른 사람의 증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5:44에서, 예수님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고자 하는 욕망이 우리가 살아있는 믿음을 갖는 것을 방해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믿음의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다시는 어떤 사람에게서도 명예를 구하지 않겠다고 한 번 결심하십시오. 사람들에게 인상을 주기 위해 신학 학위를 구하지 마십시오. 사탄은 신학 학위를 가진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세속적인 세상에서는 학위가 필요한데, 그래야만 직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일에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주님의 일에서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6:37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는 다 내게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구절의 두 가지 진술은 제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 하나는 제 삶에서, 다른 하나는 제 사역에서였습니다. 이 구절의 후반부는 1959년 7월에 제 구원에 대한 완벽한 확신을 주었습니다. 저는 그 전 약 6년 동안 구원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돌았습니다. 하지만 그날 저는 주님의 이 말씀을 믿었고 마치 닻을 내리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 후로 저는 결코 구원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 구절의 전반부는 제 사역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섬기도록 맡기신 모든 사람들이 결국 저에게 올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기저기서 사람들을 잡으러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많은 종들을 두고 계시고, 그분은 각 종이 섬길 사람을 정해놓으셨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 정해놓으신 사람을 빼앗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도둑질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형제가 다른 지도자의 목양을 받아야 하도록 정하셨다면, 제가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다면, 저는 그것을 지지하고 그가 제 교회가 아닌 그 교회에 가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이것은 저에게 큰 안식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6:38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에 대한 가장 명확한 설명을 (한 문장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나는 내 자신의 뜻을 행하려고 하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즉, "내 자신의 뜻을 부인하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고 왔노라." 이것은 그분이 인간으로서 부인해야 할 자신의 뜻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자신의 뜻을 부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늘에서 그분은 항상 자신의 뜻을 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뜻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우리 육신으로 오신 것은 기본적으로 그분이 아버지의 뜻과 다른 인간의 뜻을 가지셨다는 것을 의미하며 - 따라서 그 뜻은 항상 거부되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겟세마네에서 매우 분명해집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의 인간적 뜻은 잔을 마시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은 예수님이 잔을 마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자신의 뜻을 거부하고 아버지의 뜻을 행했습니다. 그것은 그분이 그 순간 이전에도 평생 행했던 일입니다. 그분은 단지 우리의 죄를 위해 죽기 위해 지상에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뜻을 거부하고(사람으로서) 그의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의 한 부분은 우리의 죄를 위해 죽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부분은 그분의 삶의 33년 반 동안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지상 생활의 매 순간 자신의 인간적 뜻에는 "아니오"라고 했고 그분의 아버지의 뜻에는 "예"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그분이 결코 죄를 짓지 않은 이유였습니다.

모든 유혹은 본질적으로 당신이 자신의 뜻을 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자신의 뜻에 "아니오"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자신을 부인하고 당신의 자신을 위한 삶을 죽입니다(당신은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 그러면 유혹을 이겨내고 승리를 얻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아버지의 뜻을 행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성령의 능력이 필요한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뜻을 죽이기 위해서입니다.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갈라디아서 5:24)은 바로 이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뜻을 죽이는 것"입니다. 당신은 자신의 힘으로는 그것을 할 수 없지만, 성령의 능력으로는 항상 그것을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능력 없이 골리앗을 죽일 수 없었고, 삼손은 하나님의 능력 없이 사자를 죽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당신도 하나님의 능력 없이는 당신의 육신을 죽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성령으로 충만해져야 합니다.

질적 향상과 양적 감소

6장은 큰 무리(2절)로 시작하여 11명(70절)으로 끝납니다. 교회의 질을 향상시키고 규모를 줄이는 방법을 알고 싶다면, 이 장에서 예수님으로부터 배울 수 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설교자와 목사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항상 수를 늘리는 데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질을 향상시키고 양을 줄이는 데 큰 스승이셨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승리를 보장하는 하나님의 임재를 허락하시기 전에, 기드온의 군대를 33,000명에서 300명으로 99%나 줄였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택함받은 소수의 사람들과 함께 자신의 목적을 이루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그렇게 하셨는지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분과 함께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전파하셨습니다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 - 56절). 이 말씀은 이 큰 무리 중 대부분의 사람들을 화나게 했고, 그분의 제자들 대부분은 "이것은 어려운 말씀입니다"라고 말하며 그분을 떠났습니다(60,66절).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 중 누구에게도 남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심지어 남은 12명에게 돌아서서 그들도 가고 싶은지 물었습니다. 예수님의 태도는 "누구든지 십자가의 메시지에 불쾌감을 느끼고 나를 떠나고자 한다면, 그는 갈 수 있다. 나는 그를 막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누구의 취향에 맞게 제자 자격을 낮추지 않을 것이다."였습니다. 모든 설교자가 그런 태도를 가졌다면 지상에 얼마나 강력한 교회가 있었을까요.

오늘날, 설교자들은 사람들에게 재정적으로 축복받고 육체적으로 치유받기 위해 예수님께 오라고 권합니다. 그런 것들을 제공하는 "예수"에게 가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은 "다른 예수"입니다. 번영을 전파하지는 않지만, 많은 신자들은 여전히 그것이 그들에게 내린 하나님의 축복의 표시라고 믿습니다. 이것은 속임수입니다. 모든 종교에 속한 수많은 부정직한 사업가들이 돈을 벌고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축복하셨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표시는 오직 하나뿐입니다 - 당신이 점점 더 그리스도와 닮아가는 것입니다. 진짜 예수님은 우리에게 "와서 죽으라"고 초대하십니다. 그런 메시지에 끌리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소수만이 생명의 길을 찾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마태복음 7:14). 하지만 그 소수만이 교회를 세울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듯이, 그들은 지상에서 많은 고통과 오해와 환난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요한복음 16:33). 그러나 그들은 지상에서 하나님을 위한 일을 할 것이며, 그 일은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7:1에서, 우리는 상식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봅니다. 사람들이 유대에서 예수님을 죽이고 싶어 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거기에 가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생명에 위험이 있는 어떤 곳에 불필요하게 가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몇 구절 뒤에, 예수님은 유대로 갔는데 아버지께서 그곳에 가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신다면, 우리는 어디든 기꺼이 가야 합니다. 그러면 그분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실 것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

7:5에서, 예수님의 친형제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것을 읽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멸시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에, 야고보와 유다는 예수님을 믿었고 심지어 두 개의 서신을 썼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께 절기를 위해 예루살렘에 갈 것인지 물었다는 것을 읽었습니다. 예수님은 형제들처럼 마음 내킬 때에 아무 때나 아무 데나 갈 수 없다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인도하심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아직 그런 인도하심이 없었기 때문에 가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세상이 그분을 미워하는 것은 그분이 세상의 죄에 대해 말씀하셨기 때문이고, 죄에 대해 말씀하지 않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인기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모든 설교자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죄에 대해 설교하지 않는다면 인기 있는 설교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교만, 위선, 돈에 대한 사랑, 부도덕, 불순한 생각, 탐욕, 분노, 질투에 대해 말씀하셨기 때문에 인기가 없었습니다. 세상은 오늘날에도 이런 죄에 대해 설교하는 사람을 미워할 것입니다.

형제들이 떠난 후에, 갑자기 그분은 직접 절기에 가기로 결심하셨습니다. 몇 분 전에 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거짓말을 하셨습니까? 아니요. 예수님은 아버지의 명령을 기다리셨고 형제들이 예루살렘으로 떠난 지 불과 몇 분 후에 명령을 받으셨습니다. 그런 다음 그분은 가셨습니다 - 그리고 형제들이 자신을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할 것이라는 생각에 신경 쓰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그분이 하늘에서 인도하는 순간순간을 살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분은 무전기를 소지한 경찰관처럼 자신의 삶을 살았습니다 - 경찰관들은 무전 전화기로 중앙 통제실과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무전기는 항상 켜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본부의 명령이 있을 때에만 어떤 장소로든 갈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이 형제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가는 것을 원치 않으셨고, 길을 가면서 쓸데없는 잡담과 대화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때때로 주님은 어떤 형제와 함께 가지 말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당신의 시간을 쓸데없는 이야기로 낭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혼자 여행하는 것이 낫습니다.

7:24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판단하지 말고... 그러나 판단하라"고 말씀하신 균형을 봅니다. 우리는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의롭게 판단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권한을 주신 사람들, 예를 들어 부모가 자녀를, 상사가 부하 직원을, 장로가 교인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 경계를 벗어나 다른 사람을 판단한다면 그것은 불의한 판단입니다. 또한 우리는 눈으로 보는 것과 귀로 듣는 것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이사야 11:3). 우리는 판단을 내리기 전에 신중하게 조사해야 합니다(신명기 13:14; 19:18). 예수님은 또한 어떤 사람의 열매(겉으로 드러난 행동)를 보고 그가 거짓 선지자인지 참 선지자인지 판단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7:15,16).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서 모든 판단에 대해 전면적인 금지령을 내리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셨다면, 우리는 거짓 선지자들에게 속아서 교회에서 누구도 징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8:1-12에서, 우리는 바리새인들이 돌로 치려던 간음하다 잡힌 여자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읽습니다. 오늘날에도 주머니에 다른 사람에게 던질 돌이 가득 찬 바리새인들이 많습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설교할 때 사람들에게 돌을 던집니다. 예수님은 누구에게도 돌을 던지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항상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 연민을 가졌습니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살인자, 도둑, 간통한 사람을 비판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이 회당에서 바리새인들과 종교적인 위선자들이 지옥에 이를 것이라며 정죄하는 것을 봅니다. 하지만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에게, 그분은 "나는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8:11)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두 문장에서 우리는 완전한 복음을 볼 수 있습니다 - 칭의와 성화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8:7)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군가에게 돌을 던지려는 유혹을 다시 받을 때마다, 스스로 두 가지를 기억하십시오:

  1. 하나님께서 당신을 끌어내신 구덩이; 그리고
  2. 오늘날 당신의 육신에 여전히 거하는 죄.

그러면 당신은 주머니에 있는 모든 돌을 비울 것입니다. 그 이후로는 누구에게도 돌을 던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속이고 그들의 돈을 가로채는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그런 설교자들을 폭로해야 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이것도 돌을 던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까?" 성경은 "아무도 비방하지 말라"(디도서 3:2)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에게도 악하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의 가르침과 실천이 성경적이지 않으며, 예수님은 결코 그런 일을 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 자신에 대해 악하게 말하지 않고도 그의 교리나 사역의 심각한 오류를 지적할 수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자신을 지키고 주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당신의 입을 거룩하게 지키고 싶다면, 사람들에 대해 악하게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동시에, 모든 사람의 사역에 대해 분별력을 가지십시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8:32에서, 주님은 우리가 듣는 것이 진리인지 알아내는 지침을 주셨습니다: "너희가 진리를 알게 될 것이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당신이 받은 것이 진리라면, 그것은 당신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당신을 속박에 빠뜨리거나, 당신의 삶에 더 많은 속박이나 두려움이나 죄책감이나 정죄를 가져오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거짓말입니다. 그것을 받지 마십시오. 여기의 문맥은 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8:33, 34).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을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교회에 속해 있어야 합니다. 나는 나의 생각, 말, 행동, 태도, 동기 등 모든 면에서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설교를 하는 사람의 말을 듣고 싶습니다. 그것이 내가 어떤 사람이 진리를 전파하고 있는지 아는 방법입니다. 그것이 진리를 시험하는 방법이고, 단지 그의 교리적 진술을 확인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8:44에서, 주님은 바리새인들(그들의 교리는 모두 옳았습니다)에게 그들이 그들의 아버지인 마귀에게 속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귀가 살인자이자 거짓말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거짓말을 한다면, 사탄은 그 거짓말의 아버지이고 당신은 그 거짓말의 어머니가 됩니다.

예수님은 "낮 동안에는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해야 한다; 아무도 일할 수 없는 밤이 온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9:4). 이것은 오늘날 인도에 사는 우리에게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파하고 제자를 만들 기회가 있는 동안 모든 기회를 활용해야 합니다. 밤이 곧 오고, 그때는 우리가 일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 일이 무엇인지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그분은 세상의 빛이었습니다(9:5). 하지만 이제 그분이 세상을 떠나셨으므로 우리의 임무는 세상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마태복음 5:14). 우리는 세상에 빛(즉, 그분의 삶)을 나타내야 합니다.

10:9에서, 예수님은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들어가고 나오며 꼴을 얻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문으로 들어와 구원을 받은 후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는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갔다가 세상에 나가 섬겨야 하고, 그런 다음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돌아왔다가 또 다시 나가서 그분을 섬겨야 합니다. 그것이 균형 잡힌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과 단 둘이 있을 시간을 가져야 하며 항상 “나가는” 데 바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은 항상 한쪽 다리로 걷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균형 잡힌 그리스도인은 두 다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4:10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리고 그분만을 섬깁니다.

10:28, 29에는 영원한 안전을 전파하는 사람들이 잘못 인용한 구절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그들이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그들을 내게 주신 내 아버지는 모든 것보다 크시니; 아무도 그들을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이것은 완벽한 영원한 안전에 대한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 그리고 나는 온 마음을 다해 그것을 믿습니다. 하지만 28절이 "그리고"라는 단어로 시작한다는 점에 유의하십시오.

그래서 그것은, 예수께서 이 영원한 안전을 약속하신 사람들이 누구인지 우리에게 명확하게 말해주는 이전 문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믿는 자라고 주장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 양들은 내 음성을 듣고,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그리고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나는 또한 영원한 안전이 오직 그분의 양들, 즉 그분의 음성을 듣고(즉, 그들이 음성에 순종한다는 의미) 그분을 따르는 자들에게만 약속된다는 것을 온 마음을 다해 믿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그분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에게는 분명히 영원한 안전이 없습니다. 이것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 말씀의 절반만 받아들이거나 문맥에서 벗어난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잘못된 교리를 전파하는 또 다른 예입니다. 아무도 우리를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아버지의 손에서 뛰어내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천국에 가거나 예수를 따르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죽고 하나님께는 살아있음

11장에서, 우리는 베다니의 나사로에 대한 이야기를 읽습니다. 예수께서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말을 듣고, 며칠을 기다리셨고 마침내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 만에 베다니에 도착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의 방법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절대적인 순종으로 움직이셨기 때문에, 그분의 영 안에서 가도 된다는 자유를 얻기 전에는 아무 데도 가지 않으셨습니다. 이 기적도 표적이었습니다. 여기서 영적 교훈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제로 지점에 도달했을 때만 우리에게 힘을 주십니다. 병든 사람은 여전히 어떤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사로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셨고, 그가 작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할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우리 중 일부는 너무 강해서 주님이 우리를 도우러 오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기다려야 합니다. 당신은 그분께 도움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을 도울 것입니다 - 하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당신은 여전히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내가 약할 때, 강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능력을 신뢰하는 것을 끝내야 합니다. 성경을 이해하고 싶으신가요? 당신이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 어리석다는 것을 인정하십시오. 당신은 영적인 힘을 원합니까? 그렇다면 당신이 약하다는 것을 인정하십시오. 단지 인정하는 데 그치지 말고, 그것을 깊이 깨달으십시오.

왜 우리는 그렇게 쉽게 화를 낼까요? 우리는 그것이 우리가 너무 약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가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정말 약하다면, 우리는 전혀 화를 내지 않을 것입니다. 병원에 실려간 병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첫날 그는 화를 내고 간호사와 의사와 음식에 대해 불평합니다. 다음 날, 그는 조금 더 아프고 목소리가 약해져서, 그렇게 자주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르지 않습니다. 일주일 후, 혈관과 코에 튜브를 꽂은 그는 가끔만 화를 냅니다. 마침내 그가 완전히 약해졌을 때, 그는 결코 화를 내지 않습니다. 그는 강했을 때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리고 약해졌을 때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르는 것을 멈췄습니다. 이것이 또한 우리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우리는 주님께서 베다니 사람들에게 쉬운 부분, 즉 돌을 굴리라고 요청하시는 것을 봅니다. 그런 다음 그분은 어려운 부분, 즉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셨습니다. 그 후, 사람들은 다시 쉬운 부분, 즉 나사로의 수의를 벗기고 그를 자유롭게 하라고 요청받았습니다.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협력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멍에를 메고 그분과 함께 일합니다. 우리는 쉬운 부분을 하고 그분은 어려운 부분을 합니다. 이것이 효과적인 사역의 비결입니다.

12:24-26에서, 우리는 열매 맺기의 비결을 봅니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처럼 우리는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합니다. 죽지 않는다면 홀로 남을 것입니다.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영역에서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 세계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우리는 매일 십자가를 지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길을 선포해야 합니다 - 우리의 평판, 명예, 그리고 우리 자신의 선택에 대해 죽는 길입니다. 죄를 이기는 비결도 여기에 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죽은 사람을 발로 차거나 모욕해도, 그는 어떤 식으로도 반응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를 칭찬해도, 그는 반응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도록 부름받은 방식입니다. "자신을 ...... 죽은 자로 여기라..." (로마서 6:11). 이것은 매우 축복받은 곳입니다 - 사람들의 칭찬과 비판이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상에는 죽었고 하나님께만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 지식은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열매를 맺지 못할 것입니다. 사탄조차도 성경을 압니다. 당신이 성령으로도 충만하다면, 그것은 더 좋습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입니다. 비가 내리는 것은 좋지만, 아무리 많은 비가 내려도 작물을 맺지 못할 것입니다. 땅에는 죽은 씨앗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복음서에서 가장 자주 반복되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복음서에서 어떤 식으로든 일곱 번이나 반복됩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12:25). 당신이 지상의 삶, 평판, 야망 등을 구하고자 한다면, 인생의 마지막에 좌절하고 낙담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과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한다면, 지상에서 삶을 마칠 때 영원한 열매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12:42, 43에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모든 권고를 선포하지 않고 그분을 위해 서지 않는 이유를 읽습니다: "많은 관원들이 그분을 믿었으나, 바리새인들 때문에 그분을 시인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회당에서 쫓겨날까 두려워함이라;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인정보다 사람의 인정을 더 사랑함이니라."

13:5에서, 예수께서 생애의 마지막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것을 봅니다. 그것은 우리가 기억하고 따라야 할 좋은 본보기인데, 오늘날 우리는 그런 본보기를 거의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사람들의 발 앞에 앉지 않고 머리 위에 앉기를 원합니다!

13:7은 하나님께서 왜 우리가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도록 허락하셨는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가 위로를 받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내가 왜 이렇게 하는지 지금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나중에는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식별하는 표식은 무엇입니까? 성경을 들고 다니거나 방언을 말하거나 교회 건물에 십자가를 걸거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임을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13:34, 35). 사랑할 수 없다면, 당신은 예수님이 주신 유일하고 새로운 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당신의 언어를 사용하거나 당신과 동의하거나 당신과 같은 사역을 하는 사랑스러운 신자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쉽습니다. 당신의 사랑은, 거듭났지만 다른 공동체에 속하거나, 당신과 의견이 다르거나, 당신과 다른 사역을 하는 신자를 사랑해야 할 때 시험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 우리에게 선물을 주지 않는 사람들, 우리를 칭찬하지 않고 비판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지 없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다른 사람의 반응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신성한 사랑은 반응이 필요하지 않다는 점에서 독특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반응하든 반응하지 않든 계속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내 마음을 그분의 사랑으로 가득 채울 수 있습니다.

더 큰 일

예수님은 14:12에서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신자가 예수께서 하신 일을 할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한다면 말입니다. 그분은 모든 신자가 죽은 자를 일으키거나 물 위를 걸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모든 신자가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그들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든 간에) - 왜냐하면 예수께서 지상에서 평생 동안 행하신 모든 일은 한 구절로 요약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요한복음 6:38). 그분의 어머니가 우물에서 물을 떠오라고 했을 때, 그분은 가서 즉시 물통을 가득 채워 가져왔습니다. 그분은 목수 가게에서 열심히 일하여 생계를 꾸려가고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그분은 20년 이상 집에서 그분을 짜증나게 했던 형제들을 사랑했습니다. 우리도 이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이 어렸을 때, 그분은 마리아를 도와 남동생과 여동생들을 돌보았습니다. 어머니로서 당신은 자녀를 돌봄으로써 예수님이 하셨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설교하라고 부르신다면, 그분은 당신에게 설교할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 하나님께서 당신을 죽은 자를 살리라고 부르신다면, 그분은 당신에게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도 주실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보다 더 큰 일을 하리라"(14:12). 이것은 예수님이 단 3명만 살리셨는데, 각 신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25명을 살릴 것이라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더 많은 일"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고, "더 큰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사역하신 3년 반 동안 할 수 없었던 한 가지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분은 두 제자를 서로 하나가 되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 열두 명은 마지막 만찬에서 리더가 되기 위해 싸웠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어떤 잘못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 안에 성령이 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오신 후에야, 믿는 사람들은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더 큰 일, 즉 교회를 한 몸으로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위대한 과학자였습니다. 그에 비하면 우리는 모두 매우 무지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날 아인슈타인보다 더 빨리 수학적 계산을 할 수 있습니다 -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가 살던 시대보다 더 훌륭한 시설을 갖추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님보다 더 크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지금 우리 안에 거하시기 위해 오셨기에, 우리는 예수님보다 신자들을 하나 되게 할 더 큰 자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바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이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성령이 주어졌습니다.

14:15에서, 예수님은 새 언약에 따른 순종의 올바른 동기를 말씀하십니다. 옛 언약 아래에서 순종의 동기는 형벌에 대한 두려움과 보상에 대한 소망이었습니다(신명기 28장 참조: "너희가 하나님께 순종하면 복을 받을 것이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 이것이 바로 자녀가 우리에게 순종하게 만드는 방법입니다: "네가 아빠에게 순종하면, 초콜릿을 받을 거야. 아빠에게 순종하지 않으면, 회초리를 받지." 하지만 우리는 다 큰 아들에게 초콜릿과 막대기로 순종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사랑으로 우리에게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새 언약에서, 주님은 우리를 어린아이가 아닌 성장한 아들처럼 대합니다. 그래서 그분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14:15).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순종은 단지 죽은 행위가 될 뿐입니다.

성령의 오심

14장부터 16장까지, 예수님은 성령의 오심과 그분의 사역에 대해 자세히 말씀하십니다. 14장 16절에서, 예수님은 성령을 “돕는 자”와 “친구” (MSG)라고 부르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 돕는 자이자 친구. 예수님은 성령이 오시면 우리가 더 이상 고아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4:18). 15장 26, 27절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을 증거할 때 성령이 우리를 도우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설교하기 위해 일어설 때, 성령이 사람들의 마음에 “이것을 들어라. 이것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다”라고 말씀하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우리의 사역에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까? 성령의 역할은 우리가 설교할 때 - 세상 사람들의 죄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16:8). 그리고 16장 13절에서, 예수님은 성령이 우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이는 무엇보다도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진리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둘째로는, 우리 자신에 대한 모든 진실 - 우리의 죄, 자기 의, 이기심, 교만,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닮지 않은 모든 영역들에 대한 것입니다.

그런 다음 요한복음 16장 33절에서, 예수님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환난과 박해, 그리고 고난에 직면할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번영과 안락을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자신이 세상을 이겼으니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기신 “세상”은 무엇이었습니까? 요한일서 2장 16절에서 세상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정의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것을 이기셨습니다 - 그분은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를 짓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4:15). 이제 우리는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 그분처럼 이길 수 있습니다(요한계시록 3:21 참조).

17장에는, 신약 성경에서 가장 긴 기도가 나오는데 - 그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의 짐을 볼 수 있습니다. 2절에서, 우리는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모든 육체와 모든 사람을 다스리는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이는 그들에게 영생을 주게 하려 하심이로소이다”라고 읽습니다. 이는 지도자들이 묵상하기에 좋은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른 믿는 이들에 대한 권세를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을 다스리거나 나를 섬기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영생(하나님 자신의 생명)으로 인도하여 신성한 본성에 참여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3절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아는 것을 통해서만 그 영생에 참여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9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세상을 위하여 기도하지 아니하고,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기도의 주된 짐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한 것이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매우 영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통해 세상을 축복하고 싶으셨기에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사랑하시듯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17장 10절에서, 우리는 아름다운 교환을 봅니다 - 우리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분의 삶에서 왜 그토록 엄청난 권위를 가지셨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내 모든 것이 아버지의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말하자면) "좋다. 그렇다면 내 모든 것이 네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맡기십니다.

17장 23절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절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사랑하시듯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위대한 진리이며, 제가 젊었을 때, 제 삶을 혁신하고 변화시켰습니다. 이것은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불안감, 열등감, 질투심, 경쟁심, 두려움, 우울함, 소심함, 그리고 다른 모든 비참한 콤플렉스에서 저를 건져 주었습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돌보셨던 것처럼 많이 그리고 다정하게 저를 돌보실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많은 구절들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구절만이 그분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분명히 말해줍니다.

18장 11절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배신당하고 잡히시는 것을 어떻게 바라보셨는지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것을 유다의 소행으로 여기고 자신의 칼로 공격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보내신 잔으로 여기셨습니다. 가룟 유다는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가져온 전달자일 뿐이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누군가가 당신에게 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일조차도 결국 “아버지께서 주신 잔”일 뿐이라는 이 진리를 보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주관하실 만큼 강력하시기 때문입니다(로마서 8:28).

18장 36절에서,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웠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적인 것(교회에서의 지위 포함)을 위해 싸우는 모든 신자는 자신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해 있음을 증명합니다. 영적인 사람은 “하늘에 있는” 사탄과 그의 악한 영들과 영적 싸움을 벌이지, 인간과는 싸우지 않습니다(에베소서 6:12). 바울은 디모데에게 돈을 사랑하는 것을 피하라고 권하면서, “예수께서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 하신 선한 고백”을 상기시켰습니다(디모데전서 6:6-14).

19장 10, 11절에서, 빌라도가 예수님을 위협하며 “내가 너를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고 놓아줄 권세도 있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은 차분하고 위엄 있게 “내 아버지께서 네게 주신 것 외에는, 네가 나를 다스릴 권세가 없느니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땅에서 원수와 박해자들에게도 맞설 수 있는 위엄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을 사랑하셨듯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예수님을 돌보셨듯이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설령 거짓 고소를 당하고 법정에 서게 되더라도, 이 땅의 어떤 치안판사나 재판관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하나님의 자녀인 당신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오직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일만이 당신에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언제나 마음속에 완벽한 안식을 누리고 어디에서나 위엄 있게 처신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19장 30절에서,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라고 외치셨습니다. 그 순간 우리 구원의 모든 사역이 완성되었습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형벌을 대신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버림받는 세 시간을 참으셨기 때문에 끝났습니다. 그 후 바로 그분은 낙원에서 3일 동안 계셨습니다. 오늘날 일부 성경 교사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 3일 동안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잘못된 교리를 가르칩니다. 이는 이단입니다. 그들은 하데스(음부)를 지옥과 동일시하는데, 이는 사도행전 2장 31절에서 킹 제임스 성경의 잘못된 번역 때문입니다. 하데스는 낙원과 지옥, 두 구역으로 나뉘었습니다(누가복음 16: 22,23). 예수님은 회심한 강도와 함께 낙원 구역에 가셨습니다.

19장 31절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다음 날이 일반적인 안식일이 아니라 "특별 안식일"이었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 다음 날은 항상 특별 안식일, 즉 "무교절"의 첫날이었습니다(레위기 23장 5-7절). 정규 안식일(토요일)은 그 다음 날이었습니다. 즉, 그 주에 두 안식일이 연속으로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실제로 목요일(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믿는 금요일이 아니라)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오직 그렇게 함으로써 그분은 “땅의 심장”(당시 낙원이 있던 곳)에서 세 밤(목요일, 금요일, 토요일 밤)을 보내실 수 있었습니다. 그분이 마태복음 12:40에서 말씀하신 대로 말입니다.

20장 11절에서, 우리는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 밖에서 기다리는 모습을 봅니다. 그녀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새 창조물의 시작을 목격한 최초의 인간이 되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귀신 들렸던 죄인이었지만,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알리기 위해 선택되었습니다. 남성을 중시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은 여성을 그 영광의 도구로 선택하셨습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육신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볼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20장 29절에서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보고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자들은 복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나는 도마와 다른 모든 사도들보다 내가 더 축복받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들과 달리, 나는 그분을 직접 본 적이 없이도 그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21장 3절에서, 베드로는 “나는 고기 잡으러 간다”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사도로서 실패했다고 생각하여 영원히 어부로 돌아가겠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사도들도 그와 함께했습니다. 하지만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이 사도가 되기를 원하신다면, 당신은 당신이 하는 모든 일에서 실패자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역시 그날 밤 어부로서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저녁 6시부터 다음 날 아침 5시까지, 11시간 동안 고기를 잡으려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들의 배에 물고기를 기적적으로 가득 채워 주셨습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마지막 “표적”입니다.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필요, 즉 죄에 대한 승리든 무엇이든 채워주시기 전에, 우리는 자신을 끝내고 우리 자신에 대한 모든 신뢰를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한복음 15:5)는 확신에 이를 때까지 수없이 반복해서 패배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이 복음서에 나오는 모든 표적을 통해 제자들에게 가르치고자 하신, 가장 중요한 교훈이었습니다. 만약 주님께서 우리가 그 영점(0)에 도달하기 전에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다면, 우리는

  1. 우리의 승리를 자랑스러워하며
  2.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 승리했다고 생각하며) 패배한 다른 사람들을 멸시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분노'라는 30m 구덩이에서 건져주셨다 해도, '영적 교만'이라는 300m 구덩이에 빠진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은 결코 승리가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승리를 자랑스러워하거나 패배한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지 않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 주님은 우리가 수백 번, 수천 번 반복해서 실패하도록 허락하신 후, 승리로 인도하시고 "우리 배에 물고기가 가득 차도록" 하십니다.

21장 15-17절에서, 주님께서 베드로를 그분의 섬김을 위해 다시 위임하시는 것을 봅니다. 베드로는 153마리의 물고기를 잡은 것에 놀랐습니다(11절). 그는 그 모든 물고기로 얼마나 많은 돈을 벌 수 있을지 마음속으로 계산했을 것입니다. 그는 주님께서 매일 이렇게 축복해 주신다면 머지않아 갈릴리에서 가장 부유한 어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 그리고 당연히 수입의 10%를 하나님의 일에 바치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가 이 "번영의 복음"(!!)의 축복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이것들(물고기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 질문은 마치 칼처럼 그의 마음을 꿰뚫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대답했지만 - 예수님이 사용하신 "사랑"이라는 단어(아가페 - 사람이 하나님께 가져야 할 최고의 사랑)보다 더 약한 ‘사랑’(필레오 – 사람이 친구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두 번째 같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다시 그는 주님을 향한 필레오-사랑을 가지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세 번째 질문에서 주님은 베드로의 수준으로 내려오셔서, 그에게 적어도 주님을 향한 필레오-사랑은 있는지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더 이상 며칠 전처럼 교만하고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부서지고 확신이 없었기에, "주님, 제가 필레오-사랑으로라도 당신을 사랑하는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당신만이 제 마음을 아십니다. 당신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당신만이 아십니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사랑에 대해 전혀 확신하지 못했지만, 그는 진심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바로 그 자리에서 그에게 그분의 사역을 맡기시며, 그분의 어린 양들과 양들을 돌보고 먹이라고 명하셨습니다.

새 언약의 사역은 주님을 향한 사랑에 기초합니다. 주님은 오직 온 마음(다른 모든 것보다)으로 그분을 사랑하는 자들만이 그분을 섬기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묻고 계신 질문입니다.

21장 18-23절에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그가 늙으면 믿음 때문에 고난을 받고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을 듣자마자 베드로는 요한을 바라보며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저처럼 고난을 받고 죽을 것입니까, 아니면 편히 지낼 것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은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내가 너를 부르고 나를 따르게 하였으니, 네 일에만 신경 쓰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사역을 하면서 어려움과 고난을 겪을 때, 당신은 당신의 처지를 주님의 다른 종들의 처지와 비교하십니까? 그렇다면 주님께서 당신에게 하신 말씀은 이렇습니다: "네 일에만 힘쓰고 네 처지를 다른 사람의 처지와 비교하지 마라. 너는 나를 따르라."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뿐입니다 - 그러면 우리는 기쁨으로 우리의 길을 마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장 44
사도행전

교회의 탄생과 확산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에서 시작된 이야기의 연장선입니다. 누가는 이 책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그는 자신이 쓴 복음서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첫 번째 기록은 예수께서 행하시고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신 모든 일에 관한 것이니라"(1:1). 따라서 누가복음의 주제는 "예수께서 행하시고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신 모든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사도행전의 주제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통해 계속 행하시고 가르치신 모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2000년을 지나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사도행전의 마지막에는 "아멘"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의 마지막 단어는 "방해받지 아니하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탄과 악한 자들의 모든 반대에도 불구하고 2000년 동안 방해받지 않고 전해져 왔으며,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1절에서 우리가 모든 사역에서 명심해야 할 원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행하시고 그 후에야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실행하신 것만 전파하셨습니다. 먼저 행하시고 그 후에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이 모든 새 언약 섬김의 원리입니다.

옛 언약 아래에서는, 사람이 직접 살아내지 않은 것을 전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 아래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성경을 기록한) 다윗조차도 새 언약 섬김에 자격이 없을 것입니다. 새 언약 아래에서는, 교회의 장로 직분을 맡은 그리스도인이 다윗처럼 간음에 빠지면, 그의 죄는 용서받고 주님과 교회와의 교제로 회복될 수 있지만, 다시는 장로가 될 수 없습니다. 새 언약의 리더십 기준은 매우, 매우 높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원리를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오늘날 우리를 통해 계속해서 행하시고 가르치십니다. 사도행전을 이해하려면, 하나님께서 세우신 새 언약을 이해해야 합니다.

성령 세례

1장 5절에서, 우리는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라는 약속을 받습니다. 세례 요한이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라고 말했을 때, 그들은 즉시 세상 나라를 생각했습니다. 옛 언약 사람들의 생각은 항상 세상적인 것들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복을 주셨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대개 그분이 물질적인 축복, 즉 돈이나 좋은 직업, 집과 같은 축복을 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옛 언약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만약 당신의 생각이 이와 같다면, 그것은 당신이 옛 언약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세상적인 축복이 하나님의 축복의 주된 표징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보다 훨씬 더 많은 축복을 받은 수많은 무신론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 그러면 그러한 생각의 어리석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새 언약의 축복의 표징은 우리가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오순절 이전에 사도들은 세상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곧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곧바로 이 세상의 왕국을 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시는 때가 지금입니까?”(1:6)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아니라,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다. 때와 시기는 너희가 알 바 아니다.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아버지의 권한으로 정하셨다.”(7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한계시록을 연구하며, 다양한 종말 사건의 시기를 찾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오셔서 당신의 왕국을 세우실지 정확히 아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령의 능력입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식별하는 표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그것이 능력(power)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방언이 성령 충만의 증거라는 말씀은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도들도 이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 단 한 구절도 그렇게 가르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방언(배우지 않은 언어)"을 "최초의 증거"로 선포합니다.

우리는 어떤 교리를 결정하기 위해 신약 성경의 역사적인 부분들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행전은 기본적으로 역사적인 책입니다. 교리는 오직 예수님의 가르침과 서신을 통해서만 결정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잘못될 수 있습니다 - 사도행전은 사도들이 잘못한 여러 가지 일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 바울은 디모데에게 할례를 베풀었고(행 16:3), 종교 의식을 이행하기 위해, 희생제물을 위해 돈을 바치고, 아마도 그의 머리도 깎았습니다(행 21:23-26).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는 날카로운 의견차이를 보였고 서로 헤어졌습니다(행 15:39). 또한 모든 신자가 한때 모든 소유물을 팔고 "모든 물건을 서로 공유"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행 2:44, 45). 많은 오순절파 설교자들은 당시 "모두가 방언으로 말했으니"(행 2:4) 오늘날에도 모두 방언으로 말해야 한다고 큰 소리로 선포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같은 장에 기록된, "모두가 재산을 팔고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했으니"(행 2:44) 오늘날에도 모두 모든 소유물을 팔고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해야 한다는 내용을 설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도행전에서 자신들의 견해에 맞는 부분만 골라내어 성경을 다루는 데 부정직함을 드러냅니다. 따라서, 당신이 볼 수 있듯이, 사도행전에서 교리를 얻으면 많은 혼란이 생길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교리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서신에서만 나와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능력을 갖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능력을 갖는다는 것은 곧 열렬한 복음 전파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자신의 사역을 감당할 능력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인체를 생각해 보십시오. 인체의 일부가 되려면 피가 그 부위를 통해 흘러야 합니다. 의수는 피가 흐르지 않기 때문에 몸의 일부가 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하게 된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피가 팔에 흐른다 하더라도, 그 팔은 여전히 마비되어 쓸모없는 지체가 될 수 있습니다. 마비가 치유되고 팔에 능력이 생긴다면, 팔이 혀가 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강력한 팔이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마비된 혀가 능력을 받는다고 해서 팔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강력한 혀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당신을 어머니가 되도록 부르셨고 당신이 성령으로 충만해진다면, 당신은 복음 전파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강력하고 성령으로 충만한 어머니가 될 것입니다.

1장 15절에서, 120명의 남자와 여자가 다락방에 모여 성령을 기다렸다는 것을 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500명이 넘는 신자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그분을 보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고린도전서 15:6). 그러나 500명 중 120명만이 기다렸습니다! 모든 신자가 성령의 능력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 그때에도. 그들은 모두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그분을 만나서 기뻤지만, 성령으로 세례받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 신자들 중 25%도 채 되지 않는 사람들이 성령의 능력을 기다렸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믿는 이들 가운데서 성령의 능력에 대한 그런 무관심을 봅니다.

1장 22절에서, 우리는 사도들이 가룟 유다를 대신할 사람을 찾는 모습을 봅니다. 그들은 자신들과 함께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될 사람을 찾았습니다. 주목할 점은 - 그들이 원했던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니라 부활의 증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단 한 번도 자신이 예수님 십자가의 증인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항상 “그분의 부활을 증거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 없이는 복음이 불완전합니다. 대부분의 전도자들은 부활을 주된 복음으로 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주된 복음으로 전합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부활을 주된 복음으로 전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침울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지만, 그것을 고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처럼, 그들은 침울하고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들은 얼마나 달랐습니까.

교회의 탄생

2장: 120명의 사람들이 성령을 기다렸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미리 말씀해 주지 않으셨기에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알지 못했습니다. 만약 열흘이면 충분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더 쉽게 기다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게 하실 때, 응답을 받기까지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말씀해 주시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유일한 길이며 - 기다림은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는 한 가지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알았다면, 거기에는 믿음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나중에 돌아보면서 "나는 그 일을 위해 3일(혹은 3년)을 기다려야 했다"라고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만약 당신이 기다리고 있던 제자들에게 가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면, 그들은 방언을 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그들에게 능력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당신은 "내가 이 능력을 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라고 질문하실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가 용서받았다고 확신시켜 주셨듯이, 우리에게도 이 능력을 확신시켜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것을 우리의 영과 함께 증거하시는 성령께서 또한 우리에게 능력이 주어졌다는 것을 증거하실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중요한 문제에 대한 확신을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십시오.

그들은 능력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능력을 얻었을 때, 그들은 또한 알지 못하는 언어(방언)로 말하는 은사를 받았습니다. 오늘날 비극은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능력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방언은 모방할 수 있지만, 죄를 이기고 그리스도를 담대하게 증거하는 능력은 모방할 수 없습니다. 다음 예를 생각해 보십시오: 컴퓨터(능력)를 사러 가게에 갔습니다. 가게 주인은 모든 컴퓨터에 무료 CD(방언)를 제공한다고 말합니다. 당신은 CD를 사러 가게에 간 것이 아니라 컴퓨터를 사러 간 것입니다. 하지만 CD가 무료로 제공되므로, 당신은 컴퓨터와 CD를 모두 가져갑니다. 그런데 지금 친구가 당신의 CD를 보고 같은 가게에 가서 컴퓨터 값을 내고 공짜 CD만 집으로 가져옵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방언의 은사는 받았지만 능력은 받지 못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기도하는 집에 바람과 소리가 가득 차고, 불 같은 혀가 모든 사람의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는 것을 읽었습니다. 이것은 외적인 현상일 뿐입니다. 기름부음과 능력을 받는 것이 주요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름부음을 받으셨을 때는 외적인 현상은 달랐습니다. 그분의 경우에는, 바람이나 불이 아니라 비둘기와 음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받으신 능력과 기름부음은 이 사도들이 받았던 것과 동일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처럼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부음"받아야 합니다(사도행전 10:38). 신체적, 정서적 경험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누군가 값비싼 다이아몬드를 선물로 준다고 할 때, 그것이 평범한 갈색 종이에 조잡하게 포장되어 오든, 반짝이는 종이에 화려한 리본으로 장식되어 오든 아무런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담긴 선물입니다. 오직 어린아이들만이 포장, 즉 바람, 불, 소리, 찌릿한 느낌 등의 외적인 것들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어른들은 은사, 즉 기름부음과 성령의 능력에 관심을 갖습니다. 사람들이 은사를 받은 그 포장에 대해 증거하고 영광을 돌릴 때, 당신은 그들이 여전히 어린 그리스도인임을 알게 됩니다.

모든 사람의 머리 위에 임한 불의 혀는 새 언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우리 몸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혀를 사용하실 것임을 나타냅니다 - 성령으로 불붙어 항상 그분의 완전한 통제 아래 있는 혀입니다. 이는 또한 방언의 은사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혀를 사용하여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이 설교자일 때뿐만 아니라, 매일 사람들과 나누는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께서 하루 24시간, 주 7일 동안 당신의 말을 온전히 통제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2장 14절에서, 우리는 성령께서 모든 사도들 안에 거하심으로 인한 놀라운 결과를 보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베드로가 다른 열한 제자의 지지를 받아 일어섰다"(MSG)라고 읽습니다. 예수님께서 평생 동안 이루지 못하셨던 일이 마침내 이루어졌습니다: 열두 제자는 이제 모두 한 몸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설교할 영광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베드로를 지지했고, 베드로가 말할 때 100% 그를 지지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성령이 오신 후에 그들이 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더 큰 일이었습니다 – 성령께서 그들을 한 몸으로 세례(침례)를 주셨습니다.

2장 17절에서, 베드로는 성령의 부어주심이 요엘의 예언의 성취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모든 남자와 여자가 성령부음을 받고 예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옛 언약 아래서는 왕과 제사장에게만 허락된 특권이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 아래에서는, 모든 사람이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얼마나 엄청난 영광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2장 22, 23절에서, 우리는 성령 충만한 베드로가 주 예수님을 사람으로 선포하는 것을 봅니다.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증거하신 사람이니라." 최초의 복음 설교에서, 예수님은 사람으로 선포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이셨고 지금도 그러하십니다. 이는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되신 후에는, 역시 항상 사람이십니다. 그분은 이 땅에 오셨을 때에도 하나님 되심을 멈추지 않으셨고, 하늘로 돌아가셨을 때도 사람 되심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분은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사람이십니다.

디모데전서 2장 4, 5절에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는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시니라”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성경은 어떤 그리스도인들처럼 그분을 “하나님이신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분을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릅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진 베드로는 성령의 영감을 받아 예수님을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는 자신을, 우리의 인성과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동일시하셨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2장 23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계획과 미리 아신 바”에 따른 것이라고 읽습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난 일 중 가장 나쁜 일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이었습니다 - 이 세상에서 그보다 더 큰 죄는 결코 저질러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일어난 일 중 가장 좋은 일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이었습니다 - 그것만이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심으로 최악의 것을 최고의 것으로 바꾸셨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전능하신 능력으로, 하나님은 마귀가 우리에게 행하는 최악의 일들(직접적으로든 그의 부하들을 통해서든)을 우리에게 가장 좋은 일로 바꾸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인 우리를 위해 미리 정하신 계획 또한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2장 38-40절에서, 첫 복음 설교가 전파되어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깨달았을 때, 베드로는 그들에게 “회개하고성령의 은사를 받기 위해 세례를 받고......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권고했습니다.

베드로가 전파한 것은 이 네 가지였습니다 - 회개, (믿음을 의미하는) 물세례, 성령세례, 그리고 이 세상의 영으로부터의 분리입니다. 오늘날 복음 설교에는 이 네 가지가 전혀 포함되지 않습니다 - 바로 이것이 교회에 "반쯤 회심한 신자들"이 많이 앉아있는 이유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전도자들은 회개를 전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회개를 전한다면, “구원받았다”고 손을 드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물세례를 설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강단 위 그들 뒤에 앉아 교회에서 유아 세례를 베푸는 주교들의 기분을 상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성령세례도 설교하지 않습니다. 너무 "오순절주의적"으로 들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세상의 영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도 설교하지 않습니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이 돈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 관심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모든 권고를 전했습니다. 베드로처럼 되십시오.

2장 42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지기 시작한 가정 교제의 시작을 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사도들의 가르침과 교제, 떡을 떼는 일과 기도하는 일을 계속했는데 - 분명히 각기 다른 집에서 소그룹으로 모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모일 건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구원받은 사람들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2장 47절). 교회에 더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몫은 오직, 순수하고 온전한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둘씩 짝지어 일함

3장 1절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함께 일하는 모습을 봅니다. 오순절 이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성격적으로 정반대였고, 이전에는 서로 경쟁 관계에 있었습니다 - 요한복음 21장 21절에서 베드로가 요한에 대해 마지막으로 한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이러한 연합을 간절히 원하셨지만, 결코 보지 못하셨습니다. 당시에는 성령께서 베드로와 요한 안에 거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요한은 항상 그의 형제 야고보와 함께 있었습니다. 베드로 역시 예수님의 가까운 세 명의 제자들 중 하나였지만, 요한과 야고보는 베드로를 밀어내려고 애쓰며, 예수님께 미래에 보좌의 좌우 두 자리를 자신들이 차지하게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셨기에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이제 아무도 자기 자신의 것을 구하거나 자신을 내세우려 하지 않습니다. 이전에는 함께 교제해 본 적이 없었던 베드로와 요한이 이제 함께 기도합니다. 이러한 연합 안에 능력이 있습니다.

3장에서는 앉은뱅이를 고치신 이야기를 읽습니다. 그는 40세가 넘었고(4:22), 태어날 때부터 절름발이였으며, 매일 성전의 미문으로 데려와 구걸하게 했습니다. 그는 적어도 지난 20년 동안 매일 거기에 앉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자주 보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치유가 아니라 매번 그에게 돈을 주셨을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그를 고치지 않으셨을까요? 아버지로부터 그렇게 하라는 인도를 받지 못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고치셨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병자들이 누워 있는 베데스다 못으로 가셔서 절름발이 한 사람만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 문에서 그 사람을 자주 보셨음에도 불구하고 고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그를 고치셨다면, 사도행전 3장과 4장에서 이 사람의 치유를 통해 일어난 부흥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 자신의 이성대로 행동한다면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분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처럼) 먼저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이 우리에게 하라는 대로 행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아버지께서 그 사람을 고치신 시기는 베드로를 통한 오순절 날 이후였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교훈을 줍니다. 우리에게 영적인 은사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대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대로만 사용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목적을 방해하게 됩니다. 하지만 오늘날 누가 이것을 이해하겠습니까?

대부분의 신자들은 성령과 소통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순절파인지 반오순절파인지에 따라 "모든 사람이 초자연적으로 치유될 수 있다" 또는 "아무도 초자연적으로 치유될 수 없다"와 같은 법칙(rules)에 따라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법칙에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사셨습니다. 법칙에 따라 사는 자들은 율법주의자이며 결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성령과 소통하셨지만 - 성령은 그분께 그분의 영 안에서 이 사람을 치유할 자유를 결코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지나칠 때마다 그에게 돈만 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나중에 베드로가 와서 그 사람이 돈을 달라고 하자, 베드로는 "나는 네게 줄 돈이 없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서라"라고 말했습니다. 그 결과 5천 명이 구원받았습니다. 예수님이 3년 반 동안 성령님께 순종하여, 그 사람을 고치지 않으셨기 때문에 5천 명이 거듭났습니다.

"내 명철을 의지하고"(잠언 3:5), 성령의 인도하심 없이 행동한다면 하나님의 일을 어떻게 방해할 수 있는지, 이것은 나에게 큰 경고가 됩니다. 내가 하는 일이 선한 일일지라도(다리 저는 사람을 고치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의 방법이 아닙니다. 영리한 사람, 법칙대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목적에 방해가 될 것입니다. 올바른 원칙과 규칙대로 사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일에 가장 큰 방해가 됩니다. 하나님께 가장 유용한 사람은 성령의 음성을 듣는 사람입니다.

4장 8절에서, 베드로가 두 번째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4장 31절에서, 세 번째로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사도행전 2장과 4장 사이에서, 베드로는 세 번이나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이는 성령의 충만함을 우리가 끊임없이 경험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어제의 충만함은 오늘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아주 오래된 과거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은 오늘날 사막처럼 메말라 있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래전 충만했던 날짜를 말하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생수의 강이 항상 우리를 통해 흐르기를 원하십니다.

4:28에서, 우리는 2:23에서 본 표현, 즉 “당신의 손과 당신의 뜻이 미리 정하신 대로 행하기 위해”라는 표현을 다시 발견합니다. 그들이 종교 지도자들에게 매를 맞았을 때, "주님, 이것도 주의 예정대로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4장 32절에서, 우리는 "믿는 자들의 회중이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다"는 것을 봅니다. 초기 교회의 능력의 비결은 성령의 충만함뿐만 아니라, 그들이 한 마음과 한 뜻이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에게 복종했고 완전히 연합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처럼 모든 것을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소유의 어떤 것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들이 모든 재산을 팔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을 자신들만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고 - 그것을 필요로 하는 다른 몸의 신자들도 사용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많이 가진 사람들이 적게 가진 사람들을 도왔기 때문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

이런 상황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떻게 그것을 악용할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5장에서, 우리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렇게 했다는 것을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인도 교회에 합류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 가운데 친절하고 관대한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즉시 제거하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인도의 모든 가난한 사람들이 우리 교회에 합류하고 싶어 할 것이고, 우리는 놀라운 "교회 성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의가 아닌, 돈에 관심이 있는 "회심자들"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옛날에는, 그들이 '쌀 기독교인'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들은 주로 무료 음식, 무료 교육, 무료 의료, 그리고 어쩌면 미국 무료 여행까지 얻기 위해 선교사들에게 왔습니다. 그러한 태도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오늘날 인도의 많은 기독교 사역자들에게 "주님을 섬기는 것"은 직업이지 소명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합류하여 재정적으로 번영했습니다. 만약 그들의 번영이,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에서 의로운 행실을 보고 그들을 축복하신 것이라면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번영이 교회에 합류하여 얻은 부자들과의 접촉 덕분이라면,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놓친 것입니다 - 기독교는 재정적 이익을 얻는 방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희생하고 베푸는 곳이지 - 이익과 이득을 추구하는 곳이 아닙니다. 오늘날 인도의 많은 "기독교 사역자"들이 세속적인 직업을 가졌을 때 벌었을 수입의 5배에서 10배를 번다는 것은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많은 "기독교 사역자"들은 세속적인 직업에서 단 하루도 일해 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세속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을 사도로 부르신 적이 없습니다. 오늘날 인도에서 기독교 사역은 많은 사람들에게 막대한 수익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비기독교인들은 그들을 보고 “이 사람은 돈을 벌기 위해 기독교인이 되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말이 맞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들의 입을 막아야 할까요? 기독교 사역자들이 세속적인 직업에서 기독교 사역으로 얻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모두가 재산을 팔아 사도들에게 주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던 시절,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어떻게 하면 영적인 사람으로 보이면서도 돈을 간직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땅을 팔았을 때, 그들의 돈을 모두 바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죄는 가진 돈을 모두 바치지 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기쁘게 드리는 사람을 사랑하시며, 누구의 돈도 원하지 않으십니다. 베드로는 아나니아에게 “네 땅이 팔리지 않았을 때, 너는 그것을 네 마음대로 할 수 있었고, 팔린 후에도 그 돈은 네 것이었는데, 왜 거짓말을 하느냐?”(5:4)라고 말했습니다. 아나니아의 죄는 위선, 즉 온 마음을 다하는 척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그가 “우리는 그 땅을 5만 루피에 팔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중 20%만 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머지는 우리의 필요를 위해 남겨두고 싶습니다. 그러니 여기 1만 루피가 있습니다.”라고 말했다면, 베드로는 아나니아를 축복했을 것이고 - 그와 그의 아내는 살아남았을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른 모든 온 마음을 다한 사람들과 함께 줄을 서 있는 것만으로 입을 열지 않고도 거짓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베드로에 의해 드러나게되었고, 그들은 위선 때문에 죽었습니다.

왜 오늘날 하나님은 그렇게 행하지 않으십니까? 그러면 교회에서 살아남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매우 순수하고 강력한 교회 가운데 있었고 - 그것이 그들이 죽은 이유입니다. 만약 그들이 (고린도 교회처럼) 죽어 있고 육적인 교회에 있었다면, 그들은 심지어 그곳의 장로였을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교만하고 위선적인 사람이라면, 완전을 향해 나아가는 교회에 합류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식으로든 당신을 치시고 그들 가운데서 제거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그런 교회는 많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 살아남을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교만하고 위선적인 삶을 살면서 살아남고 싶다면, 죽은 교회를 선택해서 합류하십시오.

5장 29절에서, 사도들이 종교 지도자들에게 담대하게 한 말을 읽습니다, "우리는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5장 41절에서, 우리는 사도들이 박해를 받고 옥에 갇히고 매를 맞았을 때에도, "그들은 예수의 이름을 위해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겨진 것을 기뻐했습니다." 박해자들은 사도들을 채찍질하고 매질했습니다. 사도들은 이 일 이후에 고개를 숙인 채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고개를 들고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채찍질을 당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큰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마치 왕에게 무공 훈장을 받은 것과 같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들은 "기뻐 뛰었습니다."

이 사도들은 우리가 따라야 할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앞으로 인도에서는 많은 박해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날들을 준비하고 다른 사람들도 준비시키도록 합시다. 그리고 그 때가 오면, 우리도 예수의 이름을 위해 수치를 당할 자격이 있다고 여겨졌다는 사실을 기뻐합시다.

6장에서 제자들의 수가 늘어나고 불평이 시작되는 것에 대해 읽습니다. 이는 교회 규모가 커지면 모든 교회가 겪는 문제입니다. 교회가 처음 시작될 때는 규모가 작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제자라고 꽤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커지면 투덜거림, 불평, 그리고 원망이 쉽게 시작됩니다. 새로 온 사람들 중 많은 수가 초대 제자들의 친척이고 - 그들 스스로는 제자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가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무언가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집단에서 누군가가 전염성이 매우 강한 질병에 걸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 사람을 격리하지 않으면,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퍼질 것입니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불평은 세속적인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여기서 불평은 음식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스 과부들은 유대인들이 식량을 배분할 때 자기네 과부들만 편애한다고 불평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인도의 많은 교회에서 그렇듯이 공동체 간의 문제였습니다.

사도들은 지혜로웠습니다. "우리는 음식 배급 일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소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와 말씀 사역에 전념하겠습니다"(6:4). 만약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은사를 받았다면, 좋은 봉급을 주는 기독교 사회복지 단체의 책임자가 되려고 그 소명에서 물러나지 마십시오. 교사/예언자의 직분에 충실하십시오. 다른 사람들이 다른 사역을 수행하게 하십시오. 그래서 사도들은 성령 충만한 사람 일곱을 선택하여 이 일을 맡겼습니다. 스데반과 빌립도 그중에 있었지만, 그들 역시 위대한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스데반은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고, 빌립은 사마리아로 가서 큰 부흥을 일으켰고 에티오피아 재정 장관을 주님께 인도함으로써 에티오피아에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통로가 되었습니다(행 8장). 엘리야를 섬기다가 나중에 선지자가 된 엘리사처럼, 이 두 사람도 과부들을 충실히 섬겼습니다 - 그리고 나중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폭넓은 복음 전파 사역을 주셨습니다.

스데반 -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충만함

스데반이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그들이 그의 지혜와 영으로 말하는 것을 반박할 수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6:10). 우리도 말할 때 이와 같은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은 그들에게 “너희 조상들이 핍박하지 아니한 선지자가 누구냐?”(7:52)라고 물었습니다. 구약성경 시대의 모든 선지자는 인기가 없었고 핍박받았습니다. 선지자는 교사와 다릅니다. 교사는 많은 사람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선지자는 대개 배척당하고 인기가 없습니다. 교사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참된 선지자는 항상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따라서 선지자는 항상 핍박을 받지만, 교사와 복음 전하는 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스데반은 그들이 죄를 깨닫게 하는 방식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때문에 그들은 분노하여 그를 죽였습니다. 그는 기독교 교회 최초의 순교자였습니다(7:54,55).

스데반에 대해 7장 55-60절에 기록된 말씀에서, 우리는 진정으로 성령 충만한 선지자의 몇 가지 특징을 볼 수 있습니다:

  1. 그의 마음은 하늘의 것에 굳건히 고정되어 있습니다.
  2. 그는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3. 그는 사람들의 반대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4. 그의 시각은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께 고정되어 있습니다.
  5. 그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해 담대하게 증거합니다.
  6. 그는 박해를 받고 때로는 죽임을 당하기도 합니다.
  7. 그는 박해자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스데반이 죽임을 당하도록 허락하신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다소 사람 사울의 회심입니다. 나는 바울이 스데반이 죽임을 당할 때 그의 태도를 보지 못했다면 회심했을지 궁금합니다. 로마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것을 듣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신했습니다. 바울은 스데반의 기도를 듣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 시작했고, "이것은 거짓 종교가 아닐 것이다. 어쩌면 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은 그에게 “네 양심의 가책을 거슬러 계속 발길질하는 것이 네게는 괴로운 일이로다”(사도행전 26:14)라고 말씀하셨고 – 그리고 나서 그는 회심했습니다.

당신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반응하는 방식은, 당신을 지켜보는 누군가의 반응을 촉발할 수 있으며, 그로 인해 그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지난 2000년 동안 그리스도인들이 박해에 경건하게 반응하는 모습을 보고 회심한 수많은 사람 중 첫 번째였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반응하려면,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8장에서, 빌립의 설교를 통해 사마리아에서 일어난 큰 부흥에 대해 읽습니다 - 빌립은 가난한 과부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는 것으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았고, 빌립은 그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성령 세례로 인도할 수 없었습니다 -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처럼.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이 와서 그들을 위해 기도했고, 그들은 성령을 받았습니다(8:17).

사도행전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라는 구절이 네 번 나옵니다(2:38; 8:16; 10:48; 19:5). 그러나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마태복음 28:19)라고 명하셨습니다. 이 명백한 차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성경을 부주의하게 읽는 많은 사람들이 이 차이에 당황합니다. 신약성경을 해석할 때 명심해야 할 세 가지 원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두 성경 구절이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때, 둘 다 사실입니다 - 모순은 단지 겉으로 드러날 뿐입니다.
  2. 겉보기에 모순되는 두 성경 구절 중 어느 구절을 따라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을 때는, 항상 주 예수님의 분명한 명령에 순종하십시오.
  3. 신약성경의 역사적 구절을 어떤 교리의 근거로 삼지 마십시오.

이 경우의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비기독교 종교에도 삼위일체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힌두교에는 브라흐마, 비슈누, 시바가 있었고; 이집트인들도 삼위일체를 믿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세례를 베풀 때, 삼위일체를 기독교의 삼위일체임을 밝히기 위해 "아버지와,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이라고 불렸는데, 이는 두 번째 위격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의 마술사 시몬은 베드로가 안수하는 것을 통해 사람들이 성령을 받는 것을 보고, 그는 이 능력을 얻기 위해 베드로에게 돈을 제안했습니다. 이는 기독교 시대에 돈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사려는 첫 번째 사례입니다. 비기독교 종교들은 항상 사람들에게 신의 축복을 받으려면 신에게 돈을 바치라고 권해 왔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기독교 TV 설교자들과 목사들도, 하나님께 돈을 바치면 하나님의 종들을 통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설교하고 있으며, 수백만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그 속임에 빠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오늘날 대부분의 설교자들과는 달리 그런 돈을 받기를 거부했습니다. 베드로는 시몬에게,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돈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네 마음이 하나님께 바르지 않다”라고 말했습니다(8:20,21). 오늘날 많은 부자들이 설교자들에게 사역을 위해 돈을 주며 뇌물을 주려고 합니다. 만약 우리가 어떤 사람의 마음이 바르지 않다고 느낀다면, 우리는 그의 돈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베드로와 같은 설교자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대부분의 사역자들과 설교자들은 돈을 너무 사랑해서 누구에게서나 돈을 받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영수증 장부를 들고 집집을 다니며 회심하지 않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에게서조차 “하나님의 일을 위해” 돈을 모금합니다. 예수님이나 사도들은 그런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요한삼서 7절).

사울의 회심

9장에서,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주님을 만났을 때, 그는 주님께 두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주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5절 - KJV) 이 두 가지 질문은 그가 평생 주님께 끊임없이 물었던 질문이었습니다. 그는 생애 마지막에 “그리스도를 더 알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자신의 열망이라고 말했습니다(빌립보서 3:10,13). 주님은 그에게 처음부터 그의 삶에 대한 모든 계획을 보여주지 않으셨습니다. 단계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성 안으로 들어가라. 내가 네게 무엇을 할지 말해 주리라.”(6절)가 첫 번째 단계였습니다.

다메섹에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성령에 민감했고, 주님께서 사울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가서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에게 어딘가로 가라고 말씀하실 때, 그분께서 당신의 사역을 받아들일 사람들을 이미 반대편에서 준비시켜 놓으셨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 스스로 가면 아무도 준비되지 않은 곳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아나니아는 겸손한 무명의 형제로, 하나님께서 사울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1세기 최고의 사도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는 데 사용하셨던 사람입니다. 그 당시 모든 제자들은 회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또한 성령으로 충만해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9장 25절에서, 바울이 죽임을 당하지 않기 위해 창문을 통해 광주리에 담겨 내려져야 했던 이야기를 읽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32, 33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낮추셨는지 보여주기 위해 이 굴욕적인 사건을 고린도 사람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사도행전 8장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빌립을 들어 올려 다른 곳으로 옮기신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바울을 죽이려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여기서도 쉽게 그렇게 하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방법은 항상 같지는 않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적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굴욕적인 방법을 겪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든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고넬료 -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

10장에서, 복음이 처음으로 이방인들에게 전파되는 모습을 읽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까지 이르러 그분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장에서, 그들은 예루살렘과 유대에 있는 유대인들에게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8장에서, 그들은 사마리아인들에게로 갔습니다. 그리고 이제 복음은 처음으로 이방인들에게까지 전파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문을 여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고넬료는 성경이나 하나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경건한 사람으로 하나님께 끊임없이 기도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아낌없이 도왔습니다(10:2).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 그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고 말했습니다(4절).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비그리스도인들의 기도도 들으시고,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진실하다면, 그들을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길인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봅니다(요한복음 14:6). 베드로처럼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비그리스도인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고넬료처럼 어떤 비그리스도인들은 많은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베드로도 자신이 비유대인들보다 더 정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의 생각을 바꾸고 그의 마음을 넓혀주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비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우리의 생각도 바꾸어야 하실지도 모릅니다. 베드로의 생각이 너무 완고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생각을 바꾸도록 환상을 보여주셔야 했습니다(11절). 이 환상에서, 베드로는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이 담긴 보자기를 보았고, 그것들을 죽여 먹으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은 부정한 것을 먹어 본 적이 없다고 말하며 그렇게 하기를 거부했습니다 -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어떤 짐승들은 부정했고, 유대인들은 그런 짐승을 먹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레위기 11장).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부정하다고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환상은 세 번이나 반복되었습니다.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천사가 고넬료에게 베드로를 부르라고 말했다는 소식을 가지고 베드로의 집에 도착했을 때, 베드로는 이 환상의 의미를 몰라 갈피를 못 잡고 있었습니다. 그제야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여기는 이 비유대인의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고넬료에게 온 천사는 복음의 사실, 즉 그리스도께서 세상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천사는 직접 복음을 전하지 않았을까요? 고넬료에게 베드로를 불러서 고넬료에게 같은 메시지를 전하게 하라고 요청하는 대신 말입니다. 베드로에게는 있었지만 천사에게는 없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천사는 베드로보다 복음을 열 배는 더 잘 설명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천사에게는 없었던 구원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만이 다른 죄인에게 구원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제일 첫 구절에서 우리가 본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행하시고 나서 가르치셨습니다. 경험이 없다면 그것에 대해 말해서는 안 됩니다. 천사조차도 그 신성한 원리를 존중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는 것을 전파하지 말고, 실천했거나 적어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것만 전파하십시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와서 말했습니다. "이제 내가 깨달았노니 각 나라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을 알았도다"(10:35). (모든 나라뿐만 아니라, 모든 교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종교에서 그분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환영하시고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여 구원받게 하십니다. 만약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가기를 거부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베드로가 불순종했다면 고넬료는 길을 잃었을까요? 베드로의 불순종 때문에 고넬료가 고난을 받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 매우 불의한 일입니다. 베드로가 가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야고보나 요한이나 다른 사람을 그에게 보내셨을 것입니다. 아나니아가 다소 사람 사울에게 가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보내셨을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이 가라고 하시는 곳으로 가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당신의 사역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실 것입니다.

10장 38절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역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나사렛 예수 - 하나님께서 그에게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 부으셨습니다. 그분은 두루 다니시며 선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삶 속에서도 성령의 기름 부으심의 증거는 바로 능력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능력으로 선을 행하시고 사람들을 사탄의 압제에서 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그들을 사탄의 압제에서 구할 수 있도록 우리를 성령 충만하게 하십니다. 우리 주변에는 사탄에게 압제받는 사람들 - 낙담하고,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고, 배우자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부모에게 버림받고, 심지어 자살까지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런 사람들 가운데 두셔서 그들이 죄와 사탄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행복해지도록 도울 수 있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사역을 완수하기 위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필요하셨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그래야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기름부음을 받으셨을 때 "하나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다"는 말씀을 읽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와도 함께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강단에 설 때, 또는 누군가에게서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 나갈 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축복하기 위해, 우리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11장 28절에서, 선지자 아가보가 온 세상에 기근이 들 것이라고 예언하는 것을 봅니다. 그는 그 일이 정확히 언제 일어날지 말하지 않았는데, 예수님께서 "때와 시대는 아버지의 손에 있다"(사도행전 1:7)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기근은 그 직후에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선지자

옛 언약의 예언과 새 언약의 예언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옛 언약 아래에서, 사람들은 선지자들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인도를 구했고,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전하라고 하신 말씀을 전하며 그들에게 지시했습니다. 이는 사람들에게 그들을 인도할 성령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선지자에게만 성령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 아래에서는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각 사람이 자기 이웃을 가르쳐 이르되 ‘너는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다 나를 알 것이니라"(히브리서 8:11). 이제 성령께서 모든 사람 안에 거하실 수 있으므로, 어떤 선지자도 하나님의 자녀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지시하는 예언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그가 그렇게 한다면, 그 선지자는 성령의 자리를 차지하고 사람들을 자기 자신에게 연결시키고 그리스도에게 연결시키지 않는 셈이 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질투하기까지 우리를 원하신다고 말합니다(야고보서 4:5). 왜 그럴까요? 성령은 우리가 신랑과 직접 연결되기를, 그리고 어떤 사람도 우리와 그리스도 사이에 끼어들지 않기를 질투하며 갈망합니다. 오늘날 많은 목사들과 자칭 "선지자"들이 사람들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누구와 결혼해야 하는지 등을 말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모두 성령의 역사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직접 말씀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인상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 선지자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사탄의 영향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사람들과 주님 사이에 끼어들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당신이 그리스도와 매우 친밀하게 연결되기를 질투하며 갈망하시므로, 아무도 당신과 그리스도 사이에 끼어들 수 없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내게 어떤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감히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삶에서 성령의 자리를 감히 차지할 수 있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고려하는 행동에 대해 항상 조언을 해 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특정 행동 방식의 장단점을 말해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기도하라고 말할 것이고,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그들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직접 알려 주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어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적그리스도에 대해 성경은 그가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나타낼 것"(데살로니가후서 2:4)이라고 말합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적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거짓 선지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 사람들에게 그들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말해줍니다. 이러한 자칭 "선지자"들이 거짓 선지자라는 또 다른 증거는 거의 모두가 사람들에게 예언을 한 후 돈을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 마치 진찰료를 받는 의사처럼 말입니다! 그런 선지자들에게 가는 사람들은 성령과의 직접적인 연결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주님 안에서 결코 자라지 못합니다. 다음에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을 때면, 다시 그 선지자에게 가야 할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당신에게 직접 보여주고 싶어 하십니다 - 다른 사람을 통해서가 아니라.

참된 선지자 아가보는 여기서 무엇을 했습니까? 그는 기근이 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러므로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헌금을 모아 보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니요. 그는 새 언약에서는 누구도 다른 하나님의 자녀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지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거짓 선지자들과 달리 그는 어디에서 멈춰야 할지 알고 있었습니다. 참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미래에 대해 계시하신 것을 전하고 그리고 멈춥니다. 그러자 안디옥의 신자들은 하나님을 찾았고, 성령께서는 그들에게 직접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주셨습니다. 그들은 돈을 모아 가난한 성도들에게 보냈습니다. 지시적 예언은 구약성경의 특징인데, 당시 사람들에게는 성령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신약성경에서는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우리가 읽는 모든 헌금은 – 이 구절이든, 고린도전서 16장 2절이든, 고린도후서 8장과 9장이든 – 항상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이나 다른 사도들이 누군가에게 자신이나 자신의 사역을 위해 헌금을 모으라고 요청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들은 단지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라고 권고했을 뿐입니다. 바울은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했고, 주님께서 친히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바울의 필요를 위해 돈을 보내도록 하심으로써 채워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 바울이 직접 사람들에게 자신의 필요를 알리거나 성도들에게 자신의 사역에 대한 보고를 보낸 것이 아닙니다.

안디옥에서 모인 헌금은 바나바와 사울을 통해 예루살렘으로 보냈습니다(행 11:29, 30).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거대한 장벽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근을 통해 안디옥의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의 유대인들과 더 가까워지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과 교회에 보내시는 고난과 시련은 우리가 서로 더 가까워지도록 하기 위해 계획하신 것입니다. 한 신자가 아파 병원에 있을 때, 다른 신자들은 그의 가족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병원비를 지불해 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아픈 사람이 병원에서 퇴원할 때, 그는 그리스도의 몸과 더욱 긴밀하게 연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병에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12장에서, 야고보가 헤롯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읽습니다. 그 후 헤롯은 베드로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의 석방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고, 그는 기적적으로 풀려났습니다(12:5-16). 하나님은 베드로를 구하셨듯이 야고보도 쉽게 구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기에서, 한 사람의 이 땅에서의 시간이 끝나면, 하나님은 그를 하늘의 집으로 데려가십니다. 구약성경에서, 선지자 우리아와 예레미야가 그들의 예언으로 여호야김 왕을 불쾌하게 했다는 것을 읽습니다. 그러나 우리아는 왕에게 죽임을 당했고 예레미야는 피했습니다(예레미야 26:11, 20-24). 여기서 야고보는 죽임을 당했지만 베드로는 피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의 기도를 응답하신 것처럼, 당신의 기도에는 왜 응답을 하지 않으시는지 궁금한 적이 있습니까? 베드로가 기도 모임에서 간증했을 때, 야고보의 어머니도 하나님께서 왜 자기 아들을 구하지 않으셨는지 의아해했을 것입니다. 만약 그녀가 경건한 여인이었다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베드로의 가족들과 함께 그의 석방을 기뻐했을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한 형제는 치유되고 같은 병으로 다른 형제는 죽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그러한 상황에서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주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첫 번째 선교 활동

13장에서, 안디옥에서 시작된 최초의 위대한 선교 운동에 대해 읽습니다. 안디옥에서 온 돈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간 바나바와 사울은 베드로가 놀랍게 풀려난 것을 보고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물질적으로 백성들을 축복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갔지만, 기도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확인함으로써 영적인 축복을 얻었습니다. "남에게 물을 주는 자는 자기도 물을 마시게 되리라"(잠언 11:25). 그들이 안디옥으로 돌아와서 그곳 장로들에게 기도에 대해 배운 것을 가르쳤습니다(13:1,2). 그리고 그들은 모두 금식하며 하나님을 경배하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배했습니다. 금식하며 그저 경배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바나바와 사울을, 내가 (이미) 그들을 부른 일을 위해 따로 세우라”(13: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에게 말씀하셨는지는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들의 영으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울과 바나바를 부르신 때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부르실 때는 언제나 개인적으로, 그리고 은밀하게 부르십니다. 나중에 여기에서처럼 공개적으로 확증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저기로 가라’ 또는 ‘이 사람과 결혼하라’”와 같은 말을 할 때, 하나님이 말씀하신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런 말은 쓰레기통에 버려야 합니다, 그 말들이 있어야 할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무언가를 하라고 하시면, 그분은 당신에게 은밀하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다른 장로들을 통해 공개적으로 확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항상 하나님께서 이미 당신에게 미리 말씀하신 일을 행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사울과 바나바는 이미 그 부르심을 들었습니다. 그들이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기도 모임에서 장로들은 하나님께서 "바나바와 사울을 내게로 따로 세우고 내가 그들을 (이미) 부른 일을 하게 하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사울과 바나바는 동료 장로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습니다 - 그리고 나서 그들은 동료 장로들의 파송을 받아 나아갔습니다. 이것이 새 언약 아래서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사역입니다 - 옛 언약 아래서 선지자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다고 생각하는 곳 어디든 스스로 나아갔던 것과는 다릅니다.

주님께서는 1964년 5월 6일, 나를 전임 기독교 사역으로 부르셨습니다. 나는 인도 해군에서 복무하며 휴가 중이었고, 전도팀과 함께 모임을 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성경을 읽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이사야 49장을 통해 나를 매우 분명하게 부르셨습니다. 하지만 내 주변에 앉아 있던 사람 중 아무도 하나님께서 내게 하신 말씀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은밀하고 개인적인 부름이었습니다. 한 시간쯤 후, 하나님의 부르심을 묵상하며 해군에서 전역을 고려하고 있을 때, 우리와 함께 여행 중이던 (내가 인도에서 가장 존경하는) 하나님의 사람 한 분이 내게 다가와 "언제 해군을 떠날 생각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것은 나를 놀라게 한 예언적인 말씀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내게 내적으로 말씀하신 것을 외적으로 확증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부르신다면, 먼저 개인적으로 부르실 것입니다. 그 후에 다른 경건한 사람들을 통해 확증이 올 것입니다. 하지만 먼저 당신 자신이 그 부르심을 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약 성경에서 우리가 부르심을 보는 방식입니다.

13장 36절에서, 우리는 "다윗은 자기 세대를 하나님의 뜻대로 섬기다가 잠들었다"라고 읽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우리 세대를 섬기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하나님의 모든 뜻을 이루도록 하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내가 다윗을 찾았으니, 그는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요 내 뜻을 다 이룰 자니라”(22절)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다윗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 개척과 장로 임명

14장에서, 주님께서 바울을 통해 절름발이를 고치신 이야기를 읽습니다. 루스드라에 모인 군중들의 변덕스러움은 흥미롭습니다. 처음에는 바울과 바나바를 신처럼 섬기려 했지만, 곧 그들을 죽이려 했습니다(13절과 19절). 나사렛 회당에서도, 예수님께서 비슷한 경험을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그곳 사람들이 "그분은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을 하시는지요!"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잠시 후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했습니다(누가복음 4:22, 28, 29).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죽일 수 없었고, 바울도 죽일 수 없었습니다 - 하나님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울에게 돌을 던지고,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그를 성 밖으로 끌어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가장 위대한 종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대우를 받는 것을 허락하십니까? 그분은 그렇습니다 -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악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는 것을 막지 않으셨습니다(그분의 때가 왔을 때). 그리고 하나님은 악한 사람들이 초기 사도들을 죽이는 것도 막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아는 한, 원래의 열두 사도 중 요한만 자연사로 죽었습니다. 유다는 자살했고, 나머지 열 사도는 모두 순교했습니다. 바울은 참수당했습니다. 역사상,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위대한 종들 중 몇몇이 죽임을 당했으며, 하나님은 악한 자들이 그들을 죽이는 것을 막지 않으셨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서, 바울은 자신이 14년 전에 셋째 하늘로 들려 올라갔다가 다시 땅으로 돌아온 경험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일은 루스드라에서 그가 돌에 맞았을 때 일어났을지도 모릅니다. 그의 몸이 루스드라 성 밖에 쓰러져 있을 때, 하나님께서 잠시 그를 셋째 하늘로 데려가셨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극심한 고난을 겪도록 허락하신다면, 반드시 그 고난에 대한 귀한 보상도 함께 주실 것이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14장 21절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루스드라로 돌아갔다는 것을 읽습니다. 그는 돌을 맞았던 도시로 돌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금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는 환난을 통해서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22절)고 말함으로써 그곳 제자들을 굳건하게 했습니다. 바울은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영적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환난의 상처와 흉터를 몸에 지닌 채 그곳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14장 23절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자신들이 개척한 모든 교회에 장로들을 임명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어떤 교회에서도 "목사(pastors)"가 임명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목사(pastor)’라는 단어는 성경에 단 한 번(에베소서 4장 11절) 나오는데 – 이것은 그곳에서 잘못 번역되었습니다. 그리스어 ‘poimen'으로 번역된 이 “pastor”는 신약 성경에 나오는 다른 22곳에서 모두 "목자(shepherd)"로 번역되었습니다 - 에베소서 4장 11절에서도 "목자"로 번역되었어야 했습니다. 목자는 주님께서 교회에 사도, 예언자, 전도자, 교사를 주시는 것처럼 교회에 주시는 은사입니다. 하지만 이 중 어떤 것도 직책이 아닙니다. 그러나 '장로'는 교회에서 지도력을 행사하는 직책입니다. 그리고 모든 교회에는 항상 한 명 이상의 장로가 임명되었습니다.

옛 언약 아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 여호수아, 다윗처럼 한 사람만을 그분의 백성의 지도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시자,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송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새 언약 아래서, 성령께서는 바울을 바나바와 함께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지역 교회가 최소한 두 형제에 의해 인도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그리스도의 몸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전 세계 교회에 대해 한 번 말씀하셨고(마태복음 16:18), 지역 교회에 대해서도 단 한 번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18:17). 그리고 지역 교회의 지도력과 관련하여, 최소 두 사람이 함께할 때, 그분께서 그들 가운데 함께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18:20). 지역 교회에서 사탄의 활동을 결박하려면 최소 두 명의 장로(서로 하나가 되는)가 필요합니다(마태복음 18:18,19). 또한 두 명의 장로는 교회에 균형 잡힌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15장에서, 할례에 대한 논쟁을 읽습니다. 사도들은 매우 현명하게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함께 모였습니다. 당시에는 기록된 신약 성경이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기록된 신약 성경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논쟁은 불필요합니다. 당시 그들은 두 언약 사이의 과도기에 있었습니다.

은혜와 진리의 균형

15장 36절에서, 바울은 바나바에게 새로운 교회들을 다시 방문하여, 그 안에 있는 신자들을 굳건히 세우자고 제안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만한 교훈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데에, 역대 어떤 사람들보다 큰 부담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가 아직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 복음을 전파하고자 항상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그가 다른 교회의 신자들에게 돌아가 그들을 굳건히 세우고 싶어 했다는 것을 읽습니다. 아직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곳이 수천 곳이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한 몸으로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소홀히 합니다.

바나바는 마가 요한도 함께 데려가자고 제안했습니다. 마가 요한은 첫 번째 여행에 동행했지만, 선교 일에 어려움을 겪어 중도에 포기했습니다. 바울은 마가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지 않았지만, 바나바는 기회를 주고 싶어 했습니다. 어쨌든, 마가는 바나바의 사촌이었기 때문입니다(골로새서 4:10)! 이 문제로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 심한 의견 차이가 생겨 서로 갈라졌습니다(15:39). 성령께서 바울과 바나바를 특별한 사명을 위해 함께 부르셨습니다. 바울은 진리를 중시하는 엄격한 사람이었고, 바나바는 은혜를 중시하는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게 나타났을 것입니다(요한복음 1:14). 하지만 그들은 서로 잘 지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갈라짐이 하나님의 뜻이었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단지 일 년이나 이년 동안만 함께 일하라고 사람들을 부르지 않으십니다. 만약 그들이 계속 함께 일했다면 주님의 사역은 얼마나 더 진전되었을까요! 바울은 생애 말년에 “마가가 내게 유익하니라”(디모데후서 4:11)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마가 요한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그는 바울의 태도와 바나바의 태도에 의해 축복을 받았습니다. 바울의 엄격한 태도는 그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더욱 진지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들었을 것입니다. 동시에, 바나바의 온유한 태도는 그가 낙담하고 포기하지 않도록 구해주었습니다. 은혜와 진리가 함께 작용할 때 사람들은 진정으로 축복을 받습니다.

우리는 사도들도 실수를 저질렀음을 봅니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이 저지른 여러 가지 실수를 언급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도행전으로부터 어떤 교리도 정립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그들의 실수에서 교훈을 얻었습니다. 만약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 이러한 불화가, 그들이 60세였을 때 일어났다면, 그들은 갈라지지 않고도 해결책을 찾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그들은 30대였고 - 열정은 넘쳤지만 지혜는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사도들의 실패는 우리에게 격려가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많은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실수를 복음 진척을 위해 사용하셨습니다. 한 팀이 나아가는 대신 두 팀이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두 팀 모두 경험 있는 사람이 한 명씩 있었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바울은 실라를 데려갔습니다. 그리하여 복음은 더욱 널리 퍼졌습니다. 하나님은 마귀가 하는 일을 복음 진척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실수도 이렇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16장 1, 2절에서, 바울이 디모데를 만나는 장면을 읽습니다. 실라를 동역자로 선택한 사람은 바로 바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을 위해 다른 사람, 즉 디모데를 염두에 두셨습니다. 바나바가 바울을 떠났을 때, 하나님은 바울에게 바나바를 대신할 다른 온화한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바나바와 기질이 매우 비슷한 뛰어난 젊은 제자 디모데를 바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울이 저지른 또 다른 실수를 보게 됩니다: 그는 유대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했습니다. 후에 바울은 이것에 빛 비추임을 받고 할례가 불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갈라디아서 5:2,3). 하지만 사도들은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의 과도기에 있었고, 그들이 명확한 빛을 받는 데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16장 9절에서, 우리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리더십을 어떻게 이해했는지에 대한 예를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팀의 리더였으며, 그는 홀로 한 사람이 자신을 "마케도니아로 오라"고 초대하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다음 구절(16장 10절)에서, 우리는 "바울이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 모두는 마케도니아로 가기를 원했다"라는 것을 봅니다. 나머지 팀원들은 바울의 리더십에 큰 확신을 가지고 "바울, 당신이 환상을 보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 모두가 직접 환상을 볼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마케도니아로 부르셨다고 확신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팀에 그렇게 경건한 리더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교제나 리더십 없이 혼자서 일을 하는 그리스도인 사역자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육신적으로 더 쉽기 때문에 그렇게 합니다! 그들은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스스로를 파멸시킬 것입니다. 젊은이라면 당신을 인도할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경건한 지도력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위험한 지경에 처해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

16장 6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갈라디아 지방을 지나갔고, 성령께서 아시아 지방에서 그들이 말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갈라디아에서 어떻게 그들을 멈추게 하셨나요?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 13절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내가 처음에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은 육신의 병 때문인 줄을 너희가 아느니라." 바울은 소아시아로 갈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에 있는 동안 병이 들어, 그곳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곳에 있는 동안 그 지역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회심했고 그곳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병들도록 허락하셨고, 구원받을 사람들이 있는 특정 지역에서 그를 멈추셨습니다. 그러므로 병에 걸린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을 놓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16장 17절에서, 귀신 들린 여자가 바울과 실라를 따라다니며 “이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들이라”고 말하는 것을 읽습니다. 바울은 며칠 동안 그 여자를 무시하다가 귀신에게 그녀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했습니다. 바울은 어떤 귀신의 증거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어떤 귀신의 증거도 받기를 거부하셨습니다.

17장 10, 11절에서, 바울과 실라가 베레아로 갔다는 것을 읽습니다. 베레아 사람들은 고상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불립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받아들이고 매일 성경을 연구하여 들은 내용이 성경적인지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든 설교자의 교리를 성경과 비교했기 때문에 거짓 교리를 전파하는 설교자에게 속을 위험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른 교회들에 편지를 써야 했던 것처럼, 베레아 사람들에게 거짓 교리를 바로잡는 편지를 쓸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18장 9, 10절에서, 주님께서 바울이 고린도에 있을 때 그에게 “반대에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전파하라. 이 성에는 내 백성이 많으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을 읽습니다. 우리는 복음에 대한 반대가 있다고 해서 어딘가에서 도망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박해를 받을 때, 주님께서는 “이 성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성으로 피하라”(마태복음 10:23)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지만 도망치기 전에 주님을 찾는 것이 좋습니다. 주님께서 떠나라고 하시면, 우리는 떠나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때때로 사울에게 말씀하셨듯이 우리에게 머물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외부적인 상황의 증거에만 의존해서 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18장 24-28절에서, 경건한 자매 브리스길라와 그녀의 남편 아굴라가, 아볼로(열심 있는 형제)가 복음을 더 명확하게 이해하도록 도운 이야기를 읽습니다. 브리스길라는 남편보다 복음의 진리를 더 분명하게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 신약 성경에서 두 사람의 이름이 함께 나오는 다섯 곳 중 네 곳에서 그녀의 이름이 남편의 이름보다 앞서기 때문입니다(행 18:26). 그녀는 새 언약에서 자매들이 예언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사도행전 2:17; 고린도전서 11:5). 동시에 그녀는 자매로서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있었고, 혼자서 아볼로에게 진리를 전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아볼로를 집으로 불러 남편과 함께 앉아 복음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 결과 아볼로는 위대한 진리의 전파자가 되었습니다. 이 새 언약 시대에 자매들은 위대한 사역을 할 수 있습니다.

19장 2절에서, 바울은 에베소의 몇몇 제자들에게 “여러분이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라고 질문합니다. 여기서 바울의 질문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1.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동시에 성령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성령을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진정으로 거듭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 우리는 자신이 성령을 받았는지 아닌지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성령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그들에게 "그러면 여러분은 무슨 세례를 받았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는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이름으로"도 세례를 받았음을 보여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이 세례를 받을 때 성령에 대해 들었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요한의 세례로 세례를 받았다고 바울에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성부와,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여 그들이 알 수 없는 언어로 말하고 예언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성령의 다양한 역사에 주목하십시오. 2장에서, 120명이 기도할 때 성령이 그들에게 임했습니다. 8장에서, 사마리아인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안수했을 때 성령을 받았습니다. 9장에서, 바울은 아나니아가 그에게 안수했을 때 성령을 받았습니다. 10장에서, 고넬료는 심지어 물로 세례를 받기 전에, 아무도 그에게 안수하는 것 없이, 메세지를 듣는 동안 성령을 받았습니다. 여기 19장에서, 그들은 안수를 통해 성령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성령은 안수 여부와 관계없이, 그리고 물세례 전이나 후에 받을 수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방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체가 중요합니다.

20장 17-35절에서,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3년 동안 함께 지낸 후 경고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에 대해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바울은 “회개와 믿음”을 전파했습니다(20:21). 그는 오늘날 대부분의 설교자들이 그러하듯 회개의 메시지를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장로들을 떠나려고 할 때, 그는 그들에게 설교한 다양한 주제를 강조하지 않고, 그들 가운데서 살았던 겸손하고 단순한 섬김의 삶을 지적합니다(20:18,19). 그는 담대하게 “내 삶을 보고 내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처럼 나를 따르라”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의 말보다 함께 살았던 사람들에게 더 많은 것을 말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바울은 장로들에게 먼저 자신의 삶을 살피고 그 다음에 양 떼를 지키라고 경고했습니다(20:28). 그는 자신이 떠난 후에 늑대들이 교회에 들어올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20:29). 왜 바울이 거기에 있었을 때 그 늑대들이 들어오지 않았을까요? 바울은 매우 엄격한 문지기였기 때문입니다. 모든 교회에는 적어도 한 명의 엄격한 문지기인 장로가 필요하며, 그는 자신의 막대기를 사용하여 양들을 늑대로부터 보호해야 합니다(시 23:4). 반면에 장로들이 온유하다는 평판을 얻으려고 한다면, 교회는 순수하게 유지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의 탈을 쓴 늑대가 교회를 장악하고 교회가 파괴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또한 지난 3년 동안 자신과 동역자들을 부양했고 아무에게도 짐이 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20:33-35). 그러나 그 장로들은 바울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그래서 에베소 교회는 주님에게서 멀어졌습니다(요한계시록 2:1-5).

바울의 투옥

21장 3-14절에서, 육적인 “예언”과 영적인 “예언”의 대조를 볼 수 있습니다. 두로에서,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예언”을 하며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악의 없는 신자들이었지만, 새 언약의 예언 경계 안에 어떻게 머물러야 할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마음에 떠오르는 것은 무엇이든 말하며,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라는 말로 시작해서 그것이 예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합니다.

얼마 후, 참 선지자 아가보가 와서 예언했습니다(21:11). 하지만 그는 어디서 멈춰야 할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갇힐 것이라고만 말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야 할지 말지는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앞서 11장에서 보았듯이, 새 언약의 예언에서는 때때로 미래에 대한 경고가 있을 수는 있지만, 어떤 신자에게도 무엇을 해야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식의 지시가 내려지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오순절에 성령님이 오신 후, 이제 모든 사람은 아버지의 뜻을 스스로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히브리서 8:11). 성경에는 오순절 이후에 지시적 예언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제 육적인 예언과 영적인 예언의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대로 갔을까요? 분명히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그곳에서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바울아,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를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할 것이다"(사도행전 23: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주님은 바울에게 그가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악의 없는 미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예언하고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한 말을 들었더라면, 그는 예루살렘이나 로마에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뜻을 놓쳤을 것입니다. 그가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를 쓴 것은 로마 감옥에서였습니다. 만약 바울이 두로에서 스스로 선지자라고 자처하며 주님께서 자신들을 통해 말씀하신다고 생각했던 자들의 말을 들었다면, 우리는 그 서신들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지시적인 예언을 전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는다면,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뜻을 놓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말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랐던 바울에 대해 읽은 바로 그 장(21장)에서, 그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성령의 음성에 귀 기울이지 않음으로써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그의 삶에서 가장 큰 실수 중 하나를 저지르는 장면도 함께 볼 수 있다. 21장 18-26절에서, 우리는 그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인 야고보의 압력에 굴복하여, 유대인 성전 의식을 따르고 그의 머리를 깎았다는 것을 읽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사람들도 마음속 성령의 내적 증거를 듣지 않을 때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24장 16절에 나오는 바울의 간증에서 우리는 그의 삶의 위대한 비밀 하나를 발견합니다: "나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습니다." 그는 단 한 순간도 양심에 죄를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죄를 하나님과 사람에게 고백하고 즉시 바로잡았습니다.

26장 19절에서, 우리는 바울의 삶의 또 다른 비밀을 발견합니다: "나는 하늘로부터의 환상에 불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을 만났을 때 그의 인생 전체에 대한 청사진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바울에게 한 번에 한 걸음씩만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순종했습니다 - 한 번에 한 걸음씩. 우리도 그렇게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27장에서, 바울이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로 가던 중 탔던 배가 난파되는 이야기를 읽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죽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배에 탔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배에 탄 모든 사람을 죽음에서 보호하셨습니다. 배든, 자동차든, 비행기든, 집이든, 도시든 - 그 안에 하나님의 사람이 한 명만 있으면 그 곳에 있는 모든 사람이 축복을 받습니다.

28장 30, 31절에서, 바울이 로마에 있는 자신이 빌린 집에서 2년을 머물렀다는 것을 읽습니다. 그는 로마의 교회가 기꺼이 집세를 내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집세를 내달라고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로마에 있는 동안 천막을 만들어 돈을 벌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곳에서 2년 동안 집을 빌릴 수 있었을까요?

바울의 아버지는 매우 부유한 사업가였음에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수준의 유대인들만이 다소와 같은 외국으로 나가 바울이 받은 것과 같은 고등 교육을 아들들에게 제공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되자 가족에게서 상속권을 박탈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가족은 마음을 바꾸어 바울에게 가족 유산의 일부를 주기로 결정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었을 때, 그의 누이의 아들이 그를 만나러 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23:16). 이 청년은 가족의 상속 재산을 바울이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을 바울에게 가져왔음에 틀림없습니다. 이는 아마도 그 직후에 총독 벨릭스가 바울에게서 뇌물을 받기를 바랐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입니다(24:26). 벨릭스 같은 총독은 분명 거액의 뇌물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벨릭스는 바울처럼 가난한 설교자가 그렇게 큰 뇌물을 줄 수 있다고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그는 로마 지휘관에게서 바울이 최근에 거액의 돈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바로 이 돈으로 바울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도시에 2년 동안 집을 빌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종들이 늙고 약할 때에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돌보시는 모습을 보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위해 사랑으로 묵묵히 계획을 세우십니다"(스바냐 3:17 - 의역). 이 말씀은 주님을 섬기는 우리 모두에게 격려가 되어야 합니다. 그분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실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 군인의 감시를 받는 그 집에 갇혀 있었지만, 자신에게 오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를 지키던 모든 군인들이 복음을 들었고, 몇몇은 거듭나기도 했습니다(빌립보서 1:13; 4:22).

하나님께서는 바울 안에 후대에 전해야 할 영적인 내용이 매우 많다는 것을 보셨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를 막으셔서, 그가 하나님에 대해 배운 것을 글로 기록하게 하실 수 있었을까요? 사탄이 그를 로마에 가두도록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감옥에 있는 동안, 가장 훌륭한 서신 몇 개를 썼습니다 - 이 서신들은 그렇지 않았다면 결코 쓰여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 이 서신들은 지금까지 20세기 동안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어 왔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항상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탄이 행하는 악을 그분의 영광을 위해 바꾸십니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단어는 "방해받지 아니함"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는 주 예수님께 속하므로, 복음은 20세기 동안 방해받지 않고 전파되었으며 -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도행전을 통해 바울의 본을 보여주시어 우리가 도전받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바울은 평생 스스로를 부양하고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도 짐이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다른 많은 분야에서도 그를 특별한 본보기로 봅니다. 우리도 그의 본을 따라 우리 시대에 주님을 섬깁시다.

장 45
로마서

하나님의 완전한 복음

로마서의 주제는 이 서신의 첫 구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 이는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사람이 듣기를 원하시는 기쁜 소식입니다.

로마서에서 복음을 소개하는 부분을 살펴보면,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의 여정의 여러 지점에서 멈추며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가지고 계신 궁극적인 목표에 도달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온전한 복음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스스로를 ‘온전한 복음 교회’라고 부르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나는 그들 중 여러 교회에 가봤지만, 그들 누구에게서도 로마서에 설명한 것처럼 온전한 복음을 들어본 적은 없습니다.

로마서는 성경에서 복음을 가장 체계적이고 논리적이며 단계적으로 제시하는 서신입니다. 바울의 다른 서신들(에베소서 제외)에서 그는 다양한 권면과 가르침을 뒤섞어 제시합니다. 하지만 로마서에서는 단계별로 제시합니다.

당신은 이 길을 따라가다 원하는 지점에서 멈춰 더 이상 나아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직 죄 용서함만을 원하며 3장에서 멈춥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향해 나아가고 4장에서 멈춥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평화로운 삶과 환난 속에서의 기쁨을 추구하고 5장에서 멈춥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죄를 이기는 삶으로 나아가지만 6장에서 멈추고 율법주의자로 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7장으로 더 나아가 율법주의에서 벗어납니다. 많은 사람들은 복음이 8장에 묘사된 성령 충만한, 승리의 삶으로 끝난다고 생각하고 거기서 멈춥니다. 그러나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의 온전한 목적을 더 이해하기 위해 나아가 12장부터 15장까지 이르고, 마침내 16장, 사탄이 그들의 발 아래 짓밟히는 것에 이르게 됩니다 - 이것이 복음의 절정입니다. 이 놀라운 편지를 공부하면서 당신은 이 길 어딘가에서 멈췄다는 것을 발견할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어디에 멈춰 있는지 발견한다면, 거기에서 나아가 온전한 복음을 즐길 수 있습니다.

죄인을 위한 좋은 소식

로마서의 좋은 소식은 죄인을 위한 것입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회개시키러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먼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첫 2장 반에서 확립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죄인에는 두 유형이 있습니다 – 한 유형은 경건하지 않고 세상적인 죄인이고(1장에 설명됨), 다른 유형은 자신이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종교적인 죄인입니다(2장에 설명됨). 예수님은 두 아들을 둔 아버지의 비유에서 이 두 가지 유형을 묘사하셨습니다(눅 15:11-32). 그 비유에서 작은 아들은 세속적이고 악하며 반항적이고 경건하지 않고 부도덕했습니다. 그러나 큰아들은, 자신은 잘못한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며 거룩하고 의롭다고 생각했습니다. 큰아들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기 어려웠습니다. 종교적인 가정에서 자란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기가 더 어렵습니다. "의인은 구원을 받기가 어려우니라"(벧전 4:18).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창녀와 도둑들은 쉽게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장로 형제들", 곧 바리새인들,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죄인들은 구원받기 위해 결코 예수님께 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1장 31절에서 경건하지 않은 죄인이 종교적인 죄인보다 구원받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로마서 1장부터 3장에서,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눈에는 이 두 유형의 죄인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음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이제 1장을 살펴보겠습니다.

1장 3절에서, 하나님의 복음이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에서 나신" 그분의 아들에 관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인성은 로마서 서두에서 바로 강조됩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몸을 통해 태어나셨는데, 마리아의 아버지는 엘리였으며(눅 3:23), 그의 조상은 다윗의 아들 나단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눅 3:31). 예수님의 몸은 마리아의 태중에서 무(無)에서 창조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도 있었지만,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는 데 필요한 아담의 인류와의 육체적 연결을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은 마리아의 난소에서 나온 난자로 만들어졌습니다. 성령께서는 초자연적으로 마리아의 난자와 결합할 정자를 창조하여, 예수님이 하늘에서 오셔서 거하실 거룩한 몸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마리아의 몸과 연결된 탯줄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그 탯줄을 잘라야 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이것을 믿지 않는다면, 당신은 예수님이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한 하나님이심을 압니다. 그러나 그분이 또한 완전한 사람이심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복음 메시지의 충만함을 경험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우리 인류와 완전히 하나가 되신 그분의 아들에 관한 것입니다. 오직 그렇게 하심으로 그분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시고 우리가 따라야 할 본보기가 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유일한 차이점은 그분은 우리처럼 죄의 본성("옛 사람")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 그분은 성령으로 태어나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설명하기 시작하면서 바로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한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바울은 죽기 직전에 디모데에게 마지막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하는 말을 생각해 보아라. 그리하면 주께서 모든 것에 너에게 깨달음을 주시리라. 다윗의 후손에서 나시고 나의 복음대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여라"(딤후 2:7, 8). 바울은 항상 복음을 사람으로 이 땅에 사셨던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지어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것에 우리와 같이 되셨고", "모든 일에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으셨으나 죄는 없으셨다"(히 2:17; 4:15)라는 놀라운 진리를 알게 되면, 복음 메시지의 충만함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이해가 생길 것입니다. 로마서의 복음은 죄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죄를 짓지 않으신 예수님을 사람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분은 “거룩함의 영을 따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롬 1:4). 그분은 다윗의 후손이셨지만, 동시에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 곧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지금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음에서 살리심으로써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세상에 증명하셨습니다. 그분은 죽음에서 부활하고 결코 다시 죽지 않았던 최초의 인간이셨습니다. 그분보다 먼저 죽음에서 부활한 다른 모든 사람들은 다시 죽었습니다. 하지만 여기, 새로운 인류를 시작하실 한 분이 계셨고, 우리도 그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 하나님께서 옛 인류로부터 새로운 인류를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그 일은 이미 많은 사람들의 내면에서 시작되었으며 - 언젠가는 외면적으로도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협력한다면, 우리 또한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시대에 행하시는 이 놀라운 일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본질입니다.

1장 5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그에게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가운데 믿음으로 말미암는 순종을 이루도록 사도의 직분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 놀라운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도록 특정한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누구든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사역은 이 복음을 우리 동료 인간들에게 분명하게 선포하고, 그들을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이 새로운 인류의 일원으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이 사역의 영광을 본다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영광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선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일부 사람들(신자의 1%도 안 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모든 삶과 시간을 이 복음 선포에 바치도록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24살이었을 때 나를 부르셔서 전임으로 그분을 섬기도록 하셨습니다 – 그분은 내게 이 세상에서 이보다 더 큰 영광을 주실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비하면 쓰레기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나의 부르심은 내 눈에 점점 더 영광스러워졌습니다.

나는 일부 전임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위해 치른 희생에 대해 자랑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부르심의 영광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 주님을 위해 무언가를 희생했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부르심의 위대함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사도로 부르신 후, 그는 다소에서 사업가가 될 기회를 포기한 것이 자신의 희생이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실제로 승진했습니다!

바울은 “나는 의무가 있습니다… 나는 간절히 원합니다… 나는 부끄럽지 않습니다”(1:14-16)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의무”라고 말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눈을 열어 이 놀라운 복음을 보게 하신 후, 세상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빚을 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는 빚을 갚고자 하는 열정에 이끌렸습니다. 만약 당신이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줄 돈을 받았는데, 그것을 모두 혼자 가졌다면, 당신은 어떤 그리스도인이겠습니까? 당신을 도둑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지 않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주변 사람들에게 진 빚을 갚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대규모 전도 행사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알고 정기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진 빚을 갚읍시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믿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능력입니다(롬 1:16). 당신은 이 복음의 능력을 믿는 정도에 따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3장까지만 복음을 믿으면 그만큼을 경험하게 되고, 4장까지 믿으면 그만큼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끝까지 믿는다면(롬 16장), 복음 안에 있는 모든 능력을 얻게 됩니다.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이르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다”(롬 1:17)고 말했습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는 점점 더 높은 단계의 믿음을 의미합니다. 첫째는, 우리를 죄로 인한 유죄상태에서 구원하여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만드는 믿음입니다(롬 3-5장). 그 다음에 우리를 죄의 권세에서 구원하고, 성화시키고 거룩하게 하는 믿음이 있습니다(롬 6-8장). 그 다음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게 하고(롬 12장),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만들어 함께 교제하게 하는 믿음입니다(롬 14, 15장). 그 다음은 마침내 사탄을 우리 발 아래 짓밟는 믿음입니다(롬 16장). 이 모든 지점에서, 우리는 멈추어 "이 정도면 충분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치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학생들은 4학년 때, 어떤 학생들은 8학년 때, 어떤 학생들은 12학년 때 중퇴합니다. 하지만 박사 학위를 받고도 멈추지 않고, 박사 후 연구원으로 진학하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영적인 것에 대한 그런 열망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을 어느 정도 아는 깊이에 결코 만족하지 않고 그분을 더욱 더 알고 싶어 하는 그런 열망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원하시는 모든 것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 말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내가 죽기 전에,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대한의 당신의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고 싶습니다. 죽기 전에 내 몸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최대한 참여하고 싶습니다." 내가 그것을 왜 그렇게 간절히 원할까요? 천국에서는 이런 것들을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천국에서 그리스도 때문에 매를 맞을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천국에서 그리스도 때문에 법정에 설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천국에서 그리스도 때문에 욕을 듣고 험담을 들을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어디에서 그리스도 고난의 교제에 참여하고 경험할 수 있을까요? 오직 이 땅에서만 가능하지 않습니까?

많은 신자들이 완전한 복음을 경험하기에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소위 "완전한 복음" 교회라고 하는 대부분의 교회들은 진정한 완전한 복음과는 거리가 멉니다. 복음은 단순히 죄 사함과 성령 세례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유치원에서 배우는 것에 불과합니다. 복음의 기초는 죄 사함, 물세례, 그리고 성령세례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시작이지만, 완전한 복음(the full gospel)은 아닙니다.

로마서 1장에서, 바울은 죄인의 범죄행위를 설명합니다. 죄는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됩니다(1:21). 타락의 첫 번째 단계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선하심에 감사하지 않을 때입니다. 생명, 건강, 음식 등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때, 그는 이미 타락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죄는 감사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죄는 비방,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 무례함, 오만, 자랑, 완악함 등 여러 가지 죄악으로 이어집니다(1:29-31). 여기서 세 번이나, "하나님이 그들을 내버려 두셨다"라고 말합니다(1:24, 26, 28). "믿음에서 믿음으로" 위로 성장하는 것처럼, "악에서 악으로" 아래로 악화되는 것도 있습니다. 그리고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를 거부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포기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다양한 성적 왜곡, 창조주가 아닌 피조물을 숭배하는 등의 행위에 내버려 두셨습니다. 모든 죄는 근본적으로, 실제로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사람의 죄

2장에서, 바울은 1장에 언급된 죄인들을 판단하는 종교적인 사람들의 죄에 대해 설명합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당신, 당신은 자신을 판단하고 있습니까? 왜냐하면 당신이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그 일로 당신 자신을 정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2:1).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서 발견하는 죄는 바로 당신 마음 속의 죄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전하려고 하셨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너희가 이 여자가 간음하는 중에 붙잡았구나. 너희 중에 마음속으로 간음하지 않은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느냐? 만일 마음 속으로 간음하지 아니하였거든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 8:1-11). 그들은 모두 주님에게서 물러갔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얼굴 앞에, 곧 그분의 빛 앞에 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일을 행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임하는 줄을 압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심판하고 너도 은밀히 같은 일을 행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2:2, 3). 그 사람은 공개적으로 죄를 짓지만, 당신은 은밀하게 죄를 짓습니다. 사람들은 당신의 죄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당신을 거룩한 사람으로, 다른 사람을 죄인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보다 그 사람을 더 자비롭게 대하실 수 있습니다 - 왜냐하면 당신은 모든 죄 가운데 가장 큰 죄, 즉 위선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 그 다른 죄인은 그런 위선을 지니지 않았습니다.

위선과 영적 교만은 하나님이 정하신 죄의 상위 두 가지에 속합니다 - 살인과 간음보다 더 상위 죄입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되면, 탕자의 이야기에서 큰아들이 두 아들 중 더 큰 죄를 지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도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 왜냐하면 그들 역시 옛 바리새인들처럼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불경건한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위선과 영적인 교만을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 그들은 거룩한 체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매우 기도 많이 하고 관대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지만, 사생활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러한 죄는 살인과 간음보다 더 악합니다. 당신은 그것을 알았습니까? 2장은 스스로를 거룩하다고 여기면서 간음하는 자, 살인하는 자, 마약 중독자, 술꾼들을 멸시하는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기독교 교회는 그런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죽은 교파 교회와 더 멀어질수록 그들은 더 큰 바리새인이 됩니다. 교리가 순수할수록 그들의 바리새주의는 더 커집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삶에는 위선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개인적인 삶에서 죄에 패배하면서도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당신이 다른 교파의 사람들보다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할 책임이 더 큽니다. 그러나 죽은 교파에서 당신보다 더 나은 삶을 사는 사람을 단 한 명이라도 발견한다면, 당신은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이고 "주님, 제 순수한 교리가 저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스스로 착각하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우리가 그들보다 나으냐?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 다 죄 아래 있느니라"(3:9).

당신은 하나님을 찾았다고 생각합니까? 그러나 3장 11절에는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럴 리가 없지. 내가 하나님을 찾았으니까."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 말을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은 참되시고 사람은 다 거짓되도다"(3:4). 나는 하나님께서 여기서 아무도 진정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을 믿습니다. 우리를 먼저 찾으시고 우리에게 그분을 찾고자 하는 마음을 주시는 분은 바로 그분이십니다. 오늘날 우리가 가진 하나님에 대한 모든 지식은 그분의 자비 때문이지, 우리가 그분을 찾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중 누구도 다른 어떤 사람보다 더 낫거나 우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100%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만약 당신이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당신은 복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복음을 진정으로 이해한다면, 그는 결코 영적으로 교만할 수 없습니다. 만약 당신이 다른 사람을 얕보는 것은, 은혜를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많은 거듭난 신자들이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얕보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복음을 이해한 사람은 항상 그의 얼굴을 먼지 속에 묻어둘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은혜에 대해 말하지만, 은혜가 무엇인지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구원을 위해 무언가를 했다고 믿습니다. 완전한 복음을 경험하고 싶다면 먼저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주님, 저는 의롭지 못합니다. 저는 영적인 진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저는 스스로 주님을 찾은 적이 없습니다. 주님의 길에서 벗어나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저는 살아오면서 아무런 선한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 목구멍은 열린 무덤과 같고, 제 입은 저주와 악독으로 가득합니다. 저는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합니다"(3:10-18). 이러한 사실은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탕자같은 - 눅 15:11-24)에게도 마찬가지이며, 종교적인 죄인들(큰아들같은 - 눅 15:25-32)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3:19).

오랫동안, 나는 신자들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실, 즉 자신들이 모두 더럽고 선한 것이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그들에게 확신시키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나는 내 경험을 통해 이러한 이해가 온전한 구원을 경험하는 제일 첫걸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모두는 독선적인 바리새인이 될 것입니다. 나는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육신의 더러움과 부패, 즉 인간 본성을 깨닫지 못해 영적 성장이 저해된 수많은 신자들을 만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로마서의 처음 세 장에서) 복음의 기초를 놓은 방식입니다.

바울은 이 세 장에서 이 진리를 강조해야 했습니다. 나는 내 사역을 통해 나 역시 신자들에게 이 진리를 거듭거듭 강조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진리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우리의 삶에 겸손과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모습을 가져올 것입니다.

바울은 당시 지상에서 가장 거룩한 사람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는 평생 하나님 앞에서 선한 양심으로 살았고(행 23:1), 율법의 기준에 따라 흠이 없었습니다(빌 3:6). 하지만 그는 자신을 “죄인 중의 우두머리”로 여겼습니다(딤전 1:15). 이는 그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얼굴 앞에서 산다면, 우리 삶에서도 바로 그런 감정을 느낄 때가 많을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그런 모습으로 자신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 그렇게 하면 우리는 낙담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하나님은 경건한 사람들에게 그분의 영광과 거룩하심을 엿보게 하셔서, 그들이 이 땅의 모든 죄인들 중에서 가장 더럽고, 가장 이기적이며, 가장 교만한 자라고 느끼게 하십니다. 만약 당신이 단 한 번이라도 그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다면, 나는 당신이 하나님을 알고 있는지 진지하게 의문을 제기하고 싶습니다. 당신은 기독교 교리만 알고 하나님 자신은 알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탕자"에게 이 진리를 이해시키는 것이 "큰아들"에게 이 진리를 이해시키는 것보다 훨씬 쉽습니다 - 마치 낡은 건물을 먼저 철거해야 하는 부지보다 빈 땅에 새 집을 짓는 것이 훨씬 쉬운 것처럼 말입니다. 자랑할 만한 의로움이 없는 사람은 빈 땅과 같습니다. 그러나 경건한 가정에서 태어나 회심하기 전에 선한 삶을 살았던 사람은, 자신의 의로움에 대한 교만함이 너무 커서 주님께서 그의 삶에 가치 있는 것을 세우시기 전에 그것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가장 악한 죄인들이 그분에게 몰려들었던 이유입니다. 반면 바리새인들은 그분을 멀리했습니다. 독선적인 사람들에게는, 불도저와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하여 그들의 교만을 날려버려야 하며 - 이는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이러한 철거 작업을 저항하기 때문에, 그들의 옛 건물은 그대로 남아 평생 영적인 문제들을 겪습니다.

선한 삶을 살아온 여러분 모두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복음 메시지의 충만함을 경험하고 싶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서 철저하게 철거 작업을 하셔서, 여러분의 종교성에 대한 모든 교만을 파괴하시도록 허락하십시오. 나는 여러분에게 나가서 죄를 지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오는 것뿐입니다.

이사야는 아마도 그 시대에 지상에서 가장 거룩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을 때, 자신을 지상에서 가장 더러운 사람 중 하나로 여겼습니다(이사야 6:5). 요한은 1세기 말 무렵 지상에서 가장 거룩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영광 중에 계신 주님을 보았을 때, 그는 죽은 사람처럼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구원의 온전한 영광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로마서의 처음 세 장을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것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만 전해지는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복음 메시지의 핵심적인 토대입니다.

로마서 1장을 읽으면, 거기에 묘사된 사람들만큼 자신이 나쁘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큰아들이 죄 많은 동생과 비교하며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했던 것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삶에 성령의 기름부음과 신선함, 그리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왜 당신은 이렇게 메마른 것입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영이 당신 자신의 의를 무너뜨리도록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모든 선함이 하나님 보시기에 더러운 누더기와 같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이사야 64:6). 하나님께서 당신 안에서 철저하게 무너뜨리는 일을 하시도록 당신이 허락할 때까지 당신은 평생 메마르고 공허한 채로 남을 것입니다. 그래야만 당신은 다시는 다른 교파의 신자나 다른 사람을 멸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이 진리를 40년 동안 들었지만, 아직도 이 곳에 이르지 못한 신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한 사람 안에 있는 인간의 의를 무너뜨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습니다.

죄에 대한 가장 명확한 정의

마지막 결론은 3장 23절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경건하지 않은 죄인과 종교적인 죄인은 모두 동일한 죄인입니다. 어느 쪽이 더 낫거나 더 나쁘지 않습니다.

죄에 대한 가장 명확한 정의는 무엇일까요? 요한일서 3장 4절은 "죄는 율법을 어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행위의 죄를 의미합니다. 야고보서 4장 17절은 “옳은 일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그것이 죄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태만의 죄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죄에 대한 가장 명확한 정의는 로마서 3장 23절에 있습니다: 죄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죄는 단순히 십계명을 어기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산상수훈(마 5-7장)에서 제시하신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죄는 그 이상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무엇일까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서 나타났습니다. 따라서 이 두 구절(요 1:14과 롬 3:23)을 함께 생각해 보면, 죄는 그리스도를 닮지 않은 모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 자신이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중 누구도 그리스도를 완전히 닮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한 정의를 낮추는 사람들은 자신이 죄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합격점은 40%가 아니라 100%입니다. 그리스도를 완전히 닮지 못한 것은 모두 죄입니다. 많은 신자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만큼 나쁜 죄인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마치 시험에서 2%를 받은 학생이 1%를 받은 다른 학생보다 자신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둘 다 떨어졌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99%를 받았다 하더라도, 0점을 받은 학생과 같은 반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율법을 지키다가 작은 실수를 하나라도 저지른 사람은 모든 율법을 어긴 사람과 똑같은 죄가 있습니다"(약 2:10 – Living).

나는 평생 수천 명의 그리스도인을 만나면서, 그들 대다수의 근본적인 문제는 그들 자신을 하나님의 눈에 더럽고 선한 것이 없는 죄인으로 본 적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다른 사람들만큼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그들이 삶에서 온전한 구원을 위한 성령의 충만한 능력을 누리는 것을 방해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받을 형벌을 두려워하여 죄를 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누군가가 죄를 짓는 것을 보실 때, 그가 놓치고 있는 영광을 생각하십니다. 당신이 삶에서 어떤 죄를 용납한다면, 영원토록 놓칠 영광이 있습니다. 당신이 삶에서 죄를 용납하는 정도가 놓칠 영광의 정도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를 의롭게 하십니까? 우리는 스스로 의롭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값없이 의롭게 하십니다(3:24). 우리의 죄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값없이 용서받습니다(3:25). 우리는 값없이 의롭게 됩니다. 성령도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분의 법을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도 값없이 기록하십니다(히 8:10). 그런데도 많은 신자들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값없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의 신실함으로 이러한 은사를 얻은 것처럼 행동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은 복음의 두 번째 부분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첫 번째 부분은 당신이 선한 것이 없고, 더럽고, 쓸모없는 죄인이며, 세상의 다른 어떤 죄인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두 번째 부분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모든 것이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오늘 당신이 받은 것 중 선물이 아닌 것이 무엇입니까? 당신의 지성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당신의 건강은 그분의 선물입니다. 그리고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영적인 은사들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성령 세례를 받았다고 자랑하는 자들(겸손하게 감사하는 대신)은 결코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한 삶을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 하나님은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기 때문입니다(벧전 5:5).

이 두 가지가 바울이 제시하는 기본 원칙입니다. 만약 당신이 이런 복음을 들어본 적이 없다면, 하나님께 당신의 눈을 열어 이 복음의 실체를 깨닫게 해 달라고 간구하십시오. 주님께 "주님, 저는 다른 누구보다 더 나은 사람이 아닙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주님의 값없이 주시는 선물입니다."라고 기도하십시오.

의롭다 하심

우리가 이해해야 할 다음 것은 의롭다 하심입니다. "의롭다 하심"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께서는 4장 전체를 이 주제에 할애하셨습니다. 의롭다 하심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컴퓨터의 워드 프로세서 프로그램에는 '정렬(justify)'라는 명령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타이핑할 때, 각 줄의 길이는 자연적으로 다릅니다. 타이핑된 글의 왼쪽 가장자리는 직선이지만, 오른쪽 가장자리는 항상 들쭉날쭉합니다. 이제 타이핑된 글을 선택하여 표시하고 '정렬' 명령을 클릭하면 오른쪽 가장자리가 즉시 곧게 됩니다. 이것을 '의롭다고 하는 것'이라 부릅니다. 이것이 의롭다 하심에 대한 좋은 예입니다. 우리의 삶은 죄로 인해 들쭉날쭉한 가장자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가 태어난 날부터 삶 속에서 쓴 모든 줄은 들쭉날쭉한 가장자리로 끝났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삶 전체를 선택하여 표시하고 '의롭다 하심'을 선언하십니다. 들쭉날쭉했던 가장자리가 즉시 일직선으로 정렬됩니다. 당신이 열 줄을 썼든 만 줄을 썼든 상관없습니다. 모두 의롭게 됩니다. 열 살이든 오십 살이든 상관없습니다. 당신은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지금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옛날에는 모든 것이 들쭉날쭉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것입니다.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마치 내가 죄를 지은 적이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는 방식입니다. 우리의 죄는 모두 사라지고, 예수님처럼 우리도 하나님께 받아들여집니다.

의롭다 하심은 믿음에 의한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4장에서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예를 사용합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아들을 얻었습니까? 그는 그럴 자격이 있었습니까? 그가 노력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는 오랫동안 아들을 얻기 위해 애썼지만, 아들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하나님의 순수한 선물로 아들을 얻었습니다. 의롭다 하심은 바로 그것과 같습니다 -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므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5:1).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을 분명히 알게 되면, 우리는 놀라운 새 세상, 곧 하나님과 화평한 가운데 살게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서 있는 이 은혜 안에 들어왔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 가운데서 기뻐합니다"(5:2). 한때 우리가 놓쳤던 이 하나님의 영광(3:23)은 점점 더 우리의 일부가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선물이기 때문에, 우리는 교만해질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훌륭한 요리사가 구운 케이크를, 내가 여기에 가져왔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누군가 내게 케이크를 주어서 여기 있는 모든 사람에게 나눠 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케이크를 잘라서 돌렸습니다. 당신은 케이크를 먹고 “잭 형제님, 정말 멋진 케이크네요.”라고 말할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말을 듣고 자랑할 생각조차 없습니다 - 내가 케이크를 직접 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케이크를 구웠고 당신이 감사를 표했다면, 나는 자랑스럽게 느끼고 싶은 유혹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당신에게 "형제님, 당신은 정말 겸손한 형제입니다."라고 말하고 당신이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면, 당신의 겸손은 당신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틀림없습니다. 만약 당신의 겸손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면, 설령 사람들이 당신의 겸손을 칭찬한다 하더라도, 당신은 그것을 자랑스러워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직접 굽지 않은 케이크를 자랑스러워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 당신의 거룩함을 높이 평가하고 당신이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면, 당신의 거룩함은 당신 스스로 만들어낸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만약 그것이 하나님께서 당신 안에서 행하신 것이라면, 당신은 그것을 자랑스러워할 수 없습니다. 만약 당신이 설교를 하고 사람들이 그것을 크게 칭찬한다면 – 만약, 당신이 그 메시지를 만들어냈다면, 당신은 그것을 자랑스러워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그것을 주셨다면, 그것을 전파하는데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죄가 될 것입니다.

가나의 하인들이 예수님께서 만드신 새 포도주를 내놓았을 때 교만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요 2:1-12). 그들은 겸손하게 "우리가 이것을 만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나눠줄 뿐입니다."라고 인정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생산업이 아니라 유통업을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도 해당된다는 사실에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생산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겸손하게 분배하는 사람이 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우리 안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영적인 교만이 있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스스로 미덕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이해해야 할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우리 안에 깊이 자리 잡은 죄; 그리고
  2.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임을 인정하지 않을 때, 우리 안에 높아진 교만입니다.

4장 21절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이루실 것을 완전히 확신하고 믿었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믿음, 곧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이루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믿음에 대한 가르침은, 신자들에게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며 "나는 하나님께 이것을 받을 만큼 충분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라고 묻게 합니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믿음이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자신의 내면을 더 깊이 들여다볼수록, 우리는 더욱 속박에 빠지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낳을 만큼 충분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지 않았습니다. 전혀요. 그는 위를 보며 하나님을 바라보았고 -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이루실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믿음은 항상 위를 바라보는 것, 곧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음에 관한 위대한 장(히 11장) 다음에, 우리는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보라”(히 12:2)는 말씀을 듣습니다. 참된 새 언약의 믿음은 자아에서 벗어나 믿음의 창시자요, 곧 우리 마음에 믿음을 기록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우리 믿음의 대상은 결코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이 강한지 약한지는 우리가 외부에서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튼튼한 콘크리트 다리 위를 걸어서 강을 건너라는 요청을 받는다면, 당신의 믿음은 그 다리를 건널 만큼 강할 것입니다! 하지만 같은 강을 삐걱거리는 약한 대나무 다리로 건너라고 하면 믿음이 전혀 없을 것입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당신의 믿음은 당신 내면의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강을 건너는 다리의 질과 관련이 있습니다. 당신의 믿음은 당신 외부의 대상, 즉 튼튼한 콘크리트 다리인지 약한 대나무 다리인지에 따라 결정됩니다. 또는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만약 당신은 신뢰할 수 없는 은행에 당신의 돈을 맡기라는 요청을 받는다면, 당신은 믿음이 가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부의 지원을 받고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운영되어 온 튼튼한 은행에 돈을 맡기면 믿음이 생길 것입니다. 다시 말해, 당신의 믿음은 당신 외부의 대상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읽을 때에도, 이러한 비유들을 기억하십시오. 절대 아무도 당신이 믿음을 위해 당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하도록 결코 허락하지 마십시오. "내가 이것을 할 수 있을까?"라고 묻지 말고,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이것을 행하실까?"라고 물으십시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신약성경은 그러한 믿음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에 대해 읽습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죄가 용서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 죄를 용서하신 바로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또한 의롭게 하십니다. 그분은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십니다. 아브라함에 대해 “그의 믿음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22절)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가 그것을 얻기 위해 행한 어떤 행위와도 별개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좌에 넣어주십니다(6절). 만일 누군가 제 은행 계좌에 백만 루피를 선물로 넣어줬다고 했을 때, 나는 그것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돈을 제 계좌에 넣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신뢰할 만한 사람이라면, 나는 은행에 가서 확인하지 않더라도 그 사람을 믿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그리스도의 의가 너에게 전가된다”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그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 “나는 당신을 믿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 큰 모욕입니다. 아버지가 당신에게 "네 계좌에 돈을 좀 넣었다."라고 말했는데, 당신이 "아빠, 못 믿겠어요."라고 한다면, 아버지가 정말 믿을 만한 분이었다면, 그것은 아버지에게 큰 모욕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약성경에서 불신이 그토록 심각한 죄인 이유입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많은 것을 놓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58절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불신앙 때문에 한 곳에서 많은 권능을 행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도움이 필요했고 - 예수님도 그들을 돕고 싶어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결국 그들을 도울 수 없었습니다.

의롭다 하심의 축복들

5장을 보면 의롭다 하심의 축복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여러 번 아담을 통해 받은 것과 그리스도를 통해 받은 것 사이에 대조가 그려집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느니라"(12절). 마찬가지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에게 은혜가 넘쳤느니라"(15절). 아담 안에서 우리는 죽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살아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아담에게서 악한 것을 물려받았습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악해지는 법을 배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거짓말하는 법, 다른 사람과 싸우는 법, 이기적인 태도를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그들 안에 있습니다.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조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을 줍니다: 아담에게서 받은 유산이 전적이고 총체적이듯이, 그리스도에게서 받는 유산도 마찬가지로 전적이고 총체적일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아담의 죄악된 행동을 어떻게 나타냈습니까? 아담을 본받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그의 본성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까? 그분을 본받으려고 노력함으로써 따를 수 있습니까? 세상에는 심지어 그리스도인이 아니면서도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노력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아담을 본받으려고 노력하지 않았고,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아담의 본성에 참여했고, 그리스도의 본성에 참여해야 합니다. 아담은 우리에게 자신의 본성을 전적으로 주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우리에게 그분의 본성을 온전히 주실 것입니다 - 우리가 그분께 마음을 여는 정도에 따라 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믿음의 삶, 곧 하나님께 의지하는 삶입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그분의 본성을 주십니다 - 이것이 신약 성경의 메시지입니다.

바로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실수를 합니다. 그들은 거룩함은 노력과 성취를 통해 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분명히 노력이 있고, “욕망을 죽이는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결과이지, 하나님의 본성을 갖는 방법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의 본성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제정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담의 본성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선택 없이 물려받았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본성을 물려받을 수 있습니다 - 하지만 이번에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5장 10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이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더욱 그분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하고,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후에야 우리는 주님의 생명으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죽음으로 구원받았고, 이제 그분의 생명으로 구원받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구원입니다 - 우리는 이미 그것을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분의 생명으로 구원받는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 구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우리는 죄의 형벌(penalty)에서 구원받습니다. 그분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그분의 생명으로 우리는 죄의 권세(power)에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은혜 아래 있을 때

이제 6장으로 넘어갑니다. 이제 하나님의 은혜가 이렇게 풍성한데,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를 계속 지어야 할까요? 복음의 메시지는 예수님께서 가장 악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으며, 구원은 노력으로 얻을 수 없는 값없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아,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든 상관없네!"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그리고 설교자들까지도)이 은혜를 오해하여 그런 식으로 행동합니다. 그래서 그들 중 많은 사람이 간음과 탐욕에 빠지는데 - 이는 구약의 선지자들조차 범하지 않았던 죄입니다. 엘리야가 간음에 빠졌을까요? 세례 요한이나 엘리사(모두 율법 아래 있었음)가 돈을 좇았을까요? 아니요. 그러나 오늘날 은혜 아래 산다고 주장하는 대부분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그들보다 훨씬 낮은 수준의 영적 삶을 살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이 은혜를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율법 아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심각하게 여겼습니다. 은혜 아래서, 우리는 죄를 더욱 심각하게 여겨야 합니다.

우리가 은혜 아래 있을 때, 우리의 태도는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안에 살리요?”(2절)가 됩니다. 우리는 그분의 죽음에 참여하는 세례를 받았습니다(3절). 세례는 장사(장례식)입니다(4절). 물을 뿌리는 것이 아니라 장사 지내는 것입니다. 사람을 장사 지낼 때 모래를 뿌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땅속에 묻습니다. 세례에서 사람이 물속에 잠겼다가 다시 들어올려지는 것처럼, 그는 옛 삶에 대한 죽음과 새 삶에 대한 부활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옛 사람(죄를 지으려는 의지)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장사되고 사라졌습니다. 새 사람은 더 이상 죄를 짓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육신 안에 정욕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에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죄를 짓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우리의 옛 사람은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6절).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다는 것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말하고 우리는 그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경험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그분은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을 담당하셨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그분의 죽음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이 죽으셨음을 믿으며 - 그분의 용서를 경험했습니다. 같은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우리의 옛 사람(죄를 지으려는 의지)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씀하며 -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우리의 죄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께 전가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죄 용서를 받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사실을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그 실제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십자가에서 우리의 옛 사람을 죽이셨습니다.

옛 사람(the old man)은 육신(flesh)과 다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둘을 혼동합니다. 육신 안에 정욕은 집(마음)에 들어오려는 강도단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마음은 우리의 집입니다.

모든 회심하지 않은 사람의 마음 속에는 '옛 사람'이라는 불충실한 종이 살고 있습니다. 이 종은 항상 육신의 정욕이 들어와 우리의 모든 순결과 사랑 등을 빼앗아 가도록 문을 열어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분은 강도단을 죽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불충실한 종(옛 사람)을 죽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례를 받은 후에도, 당신은 세례를 받기 전과 마찬가지로 유혹을 받습니다 - 왜냐하면 강도단은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 육신 안의 정욕은 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옛 사람은 죽었습니다. 진정으로 거듭난 모든 사람 안에서 문을 여는 종이 죽었습니다. 거듭난 당신에게 "이제 죄를 짓고 싶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당신의 대답은 "아니요, 다시는 죄를 짓고 싶지 않습니다."일 것입니다. 옛 사람은 죽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강도들은 여전히 매일 찾아옵니다. 사실, 우리가 거듭난 후에 강도들은 심지어 더 맹렬하게 우리 마음에 들어오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믿는 사람들은 왜 죄에 빠지는 것일까요? 새 사람이 충분히 "먹지" 않고 충분히 "운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을 닫아둘 만큼 강하지 못해서 - 강도들이 문을 밀고 들어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히 읽고 묵상하지 않아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 안에 거하지 않거나,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육신의 정욕을 밖으로 내쫓을 만큼 강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육신의 정욕이 마음속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너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하라 -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라”(11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죄가 더 이상 당신의 삶을 지배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너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라고 말씀하실 때, 당신은 그것을 믿고 받아들입니다. 당신은 “주님, 제가 그리스도께서 제 죄를 위해 죽으셨음을 받아들인 것처럼, 이제 저의 옛 사람이 십자가에서 못 박혔고 저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오늘부터 저는 죄에 대하여는 죽고 그리스도에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 것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매일 이렇게 살기 위해서는 성령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에 대해 계속해서 말씀합니다: “죄가 더 이상 너희를 지배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 너희는 율법 아래에 있지 않고 은혜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14절).

율법과 은혜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두 문장으로 간단히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율법은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얼마나 큰 차이입니까! 세 살배기 아이가 혼자서 알파벳을 완벽하게 쓰려고 애쓰는 것은 율법입니다. 하지만 절대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은혜는 아버지가 아이의 손을 잡고 실수나 오류 없이 완벽하게 알파벳을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가 고집을 부리며 "아냐, 내 손 잡지마요."라고 하면 당연히 계속 실수를 할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사람들은 율법 아래 있었고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실수를 저질렀고 - 가장 훌륭한 사람조차도 항상 죄를 지었습니다. 은혜 아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교만하고 자신감에 차서 하나님께서 우리 손을 잡아주시도록 허락하지 않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당신의 손을 잡아주시도록 당신이 허락한다면 실수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께 순종하고 굴복하십시오. 그러면 죄가 더 이상 당신을 지배하지 못할 것입니다. 죄(무의식적인 죄)는 여전히 당신의 육신 안에 남아 있겠지만, 더 이상 당신을 지배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치 왕이 쫓겨나 노예가 된 것과 같습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세 가지 영적 결혼

7장은 죄를 이기고 거룩한 삶을 살고자 갈망하지만 그 삶의 방식을 오해하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성령께서는 여기서 결혼의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4절). 우리가 회심하지 않았을 때, 우리는 옛 사람과 결혼했습니다. 회심 후, 우리는 그리스도와 결혼하는 대신 율법과 결혼하는 실수를 범합니다. 모든 믿는 사람은 죄에 대한 승리를 추구할 때 이러한 실수를 범합니다. 그는 먼저 자신의 힘으로 죄를 이기려고 하는데 - 이것이 율법과 결혼하는 것입니다.

6장과 7장에서, 우리는 이 세 가지 영적 "결혼"을 봅니다 - 먼저 옛 사람과, 그다음에는 율법과,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와 결혼합니다.

옛 사람은 아내를 때리고 창녀로 만들어 아내의 삶과 행복을 파괴하는 악한 남편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이 폭행당한 아내는 이 악한 남편에게서 벗어나기를 갈망합니다. 어느 날 그녀의 남편, 즉 옛 사람은 죽습니다. 그녀는 거듭났습니다! 이제 그녀는 다시 결혼할 자유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리스도와 결혼하는 대신 그리스도와 닮은 사람, 곧 율법과 결혼하는 실수를 범합니다.

율법은 완벽하기 때문에, 율법을 그리스도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완벽한 의로움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그 옛 사람과는 다릅니다. 그는 아내를 때리거나 학대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괴롭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완벽을 요구합니다. 당신은 아침 6시에 꼭 일어나야 합니다. 8시까지 아침 식사를 준비해 놓아야 합니다. 8시 1분이 아니라 정확히 8시여야 합니다. 그것이 완벽입니다. 집안의 모든 부분이 완벽하게 정돈되고 깨끗해야 합니다. 신발은 항상 제자리에 있어야 하고, 옷은 얼룩 하나 없이 완벽하게 세탁해야 하며, 다림질도 완벽하게 해야 합니다. 율법은 결코 악한 일을 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모든 면에서 완벽을 요구하는 이처럼 선한 남자와 결혼하고 싶은 젊은 자매가 얼마나 될까요? 그 옛 사람과 결혼한 후 율법과 결혼하는 것은 마치 프라이팬에서 뛰어내려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선한 사람이지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그는 결코 악한 것을 요구하지 않지만, 당신은 결코 그의 기준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때 당신은 잘못된 남자와 결혼했음을 깨닫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율법, 즉 하나님의 율법은 결코 죽을 수 없습니다! 여기 건강하고 강하며 영원히 살 남편이 있습니다. "여자는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 그에게 매여 있느니라"(7:2). 그래서 그 여자는 행복해질 수 있는 모든 희망을 포기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그분은 그 여자를 죽게 하시고, 그로 인해 결혼 서약이 깨집니다. 처음에는 남편(옛 사람)이 죽었습니다. 이제는 아내(당신)가 죽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율법에 대하여 죽은 것은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연합하게 하려 함이니라"(7:4). 이제 당신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므로 더 이상 율법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죽음에서 살리셔서 그리스도와 결혼할 수 있게 하십니다. 이것이 세 번째 결혼이며 - 영광스러운 결혼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또한 요구하는 것이 매우 많습니다. 그분은 율법처럼 완벽하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침 식사는 정확히 8시에 식탁에 올려져야 한다 - 8시 1분이 아니라. 모든 것이 아주 깔끔해야 하고, 집은 정돈되어야 한다." 등등. 그분의 기준은 율법의 기준보다 조금도 낮지 않습니다. 사실, 그분의 기준은 실제로 더 높습니다. 율법은 단지 "간음하지 말라"고만 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너는 네 마음으로라도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와 율법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너와 내가 "함께 아침 식사를 만들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모든 것을 그분과 협력하여 하기를 원하십니다.

만약 당신이 오후 1시까지만 아침 식사를 준비할 수 있는 비효율적인 아내라고 가정해 봅시다! 주님은 율법처럼 당신을 정죄하거나 거부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은 "괜찮다. 우리가 함께 노력하면 너는 발전할 거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과 함께 일하시고, 며칠 만에 당신은 오전 11시까지 아침 식사를 준비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은 “훌륭해! 우리가 오후 1시에서 오전 11시로 옮겼어. 우리는 언젠가는 오전 8시까지 만들 거야. 우리는 완전함을 향해 나아갈 거야.”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약 당신이 빨래를 잘 못해서 옷에 얼룩이 남아 있다면, 주님은 “괜찮아. 그 부분도 함께 해결해 보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음에 옷을 빨 때, 주님의 도움으로 얼룩이 덜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빨래한 옷에 얼룩이 하나도 남지 않을 때까지 당신과 함께 일하기로 결심하셨습니다 - 그분은 당신이 완전함에 이를 때까지 당신과 함께 일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분의 신부와 어떻게 일하시는지 보았습니까? 그분은 율법처럼 우리에게 명령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 일하십니다 - 우리는 그분의 동역자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남편이십니다.

그러나 율법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은 규칙과 규정에 따라 살고, 그 결과 끊임없이 자기 정죄와 비참함과 속박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변 사람들까지 비참하게 만들고, 그들에게 규칙을 강요하며 그들을 속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영광스러운 자유”(롬 8:21)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7장 후반부에서, 바울은 거듭난 후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나는 율법이 선하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을 행하지 않고 있습니다"(16절).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19절). 바울은 고의적인 죄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간음하고 싶지 않지만 여전히 간음을 범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면 누군가를 죽이고 싶지 않지만 어떻게든 사람을 죽인다는 말도 아닙니다!! 그는 전혀 그런 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내가 행하는 일을 나도 이해하지 못하겠다"(15절). 이 부분 전체(7:15-25)는 우리 삶에서 완전하게 행하고 싶지만 최선을 다해도 실수하고 넘어지는 영역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완전한 뜻이 아직 우리에게 밝혀지지 않은 부분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화를 잘 내는 성격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날 아침, 당신은 "나는 매일 아내와 아이들에게 화를 냈어. 하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을 거야."라고 결심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진심으로 화를 내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당신을 화나게 하는 일이 일어나, 당신은 또 다시 화를 냅니다. 그리고 곧바로 후회합니다. 그것은 당신이 계획했던 죄가 아니었습니다. 당신은 전혀 넘어지고 싶지 않았지만 - 넘어졌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옛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육체의 정욕에 맞서 문을 닫아둘 만큼 강하지 못한 당신의 새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하고 싶은 선한 일들이 많지만, 그것들을 하지 못하고 - 결국 후회하며 하루를 마감합니다. 우리는 눈으로 정욕을 품고 싶지 않았지만, 한순간 약해져서 실수를 범했습니다. 이 비참한 삶에서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24절)? 방법이 있을까요? 네,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영원히 죄를 짓고 싶어하지만, 우리의 마음과 의지는 오직 하나님께만 순종하도록 되어 있습니다(25절).

성령의 법

8장에서, 우리는 죄로부터의 자유에 대해 과거, 현재, 미래의 세 시제로 나누어 읽습니다. 우리는 먼저 죄의 형벌에서 자유로워집니다 - "정죄함이 없다"(1절). 그런 다음 우리는 죄의 권세에서 자유로워집니다(2-17절). 그리고 마지막으로, 언젠가는 죄의 존재 자체에서 자유로워질 것입니다(18-25절).

2절에서, 우리는 두 가지 법에 대해 읽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은 중력의 법처럼 작용하여 - 항상 우리를 끌어내립니다. 이 법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은 "성령의 법"입니다. 성령의 법은 모세의 율법과 달리 "너는 하라", "너는 하지 말라" 등의 계명 목록이 아닙니다. 그것은 생명, 곧 "그리스도 예수의 생명 그 자체"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내가 책을 손에 들고 있으면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가 책을 놓는 순간, 그것은 떨어집니다. 그 책은 중력의 힘에 어떻게 맞서고 있습니까? 내 몸 안에 있는 생명의 힘에 의해서입니다. 내 힘이 중력의 힘을 이기고 책이 떨어지지 않도록 막아줍니다. 주님께서도 바로 이런 방식으로 우리가 떨어지지 않도록 지켜 주십니다(유다서 24절) – 곧, 성령을 통해 그분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법은 죄와 사망의 법에 의해 우리가 넘어지지 않도록 지켜 줄 수 있습니다 - 우리가 그분께서 우리를 붙잡아 주시도록 허락하는 한 말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이기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붙잡아 주시는데, 우리가 죄에 빠지지 않는다고 무슨 공로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마치 내가 들고 있는 책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그 책이 무슨 공로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선택의 힘이 없는 책과는 달리, 우리는 주님과 협력해야 합니다 -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손에서 뛰어내리기로 선택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반드시 떨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님께 온전히 복종한다면, 주님께서 우리를 떨어지지 않도록 지켜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신자가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신자가 떨어질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8장 28절은 “하나님은 그분을 사랑하는 자, 곧 그분의 목적을 따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복음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놀라운 위치로 인도합니다. 우리는 죄인으로 시작하여 먼저 죄 용서함을 받습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분 보시기에 의롭다고 선언하십니다. 우리는 나아가 죄를 이기고, 율법과 율법주의적인 정신에서 자유로워지고 성령 안에서 생명에 들어갑니다.

7장에는, “나”, “나를”, “나의 것”이라는 단어가 여러 번 등장합니다: 그것은 모두 죄에 맞선 "나"와 "나의 투쟁"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8장에서는, 성령이 17번이나 언급됩니다. 그것은 성령 안에서의 삶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께 순종하는 삶을 살 때, 우리 아버지께서는 우리 삶의 모든 상황에서 역사하시어 모든 것이 우리의 영원한 선을 위해 작용하게 하십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해치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우리의 유익을 위해 작용하게 하십니다(8:28).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복음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을 믿는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남은 생애 동안 사람이나 상황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고를 당하거나 암에 걸리거나 반기독교 광신도들에게 해를 입거나 그 밖의 어떤 것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살지 않을 것입니다 - 왜냐하면 우리 아버지께서는 주권자이시며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일에 항상 감사할 수 있습니다"(엡 5장 20절). 만약 로마서 8장 28절이 "하나님은 대부분의 것을 우리의 선을 위해 일하신다"라고 말한다면, 에베소서 5장 20절은 "대부분의 것에 감사하라"로,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도 "대부분의 것에 감사하라"라고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서 8장 28절이 "하나님은 모든 것을 우리의 선을 위해 일하신다"라고 말씀하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의 90%만 하나님께 드린다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의 90%에 대해서만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탄이나 우리 자신이 우리 삶의 나머지 10%를 지배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은 신약성경에서 가장 놀라운 약속 중 하나이며, 우리가 직면할 수 있는 모든 상황을 절대적으로, 그리고 완벽하게 포괄합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약속을 믿고 오랫동안 그 약속 안에서 유익하게 살아왔습니다. 이 구절은 정수 필터와 같습니다. 더러운 물을 정수 필터에 넣으면 반대편에서는 깨끗한 물이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 우리를 해치려 할 때, 그것은 우리에게 유익하게 작용합니다. 정수 필터가 물을 완벽하게 정화할 수 있다면, 전능하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우리의 유익을 위해 완벽하게 작용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는 평생 로마서 8장 28절의 필터 안에서 살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선을 행하려 하든 해를 끼치려 하든, 결국에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 유익하게 작용할 것입니다 - 항상.

1959년 내가 거듭난 이후부터 지금까지, 아무도 나에게 해를 끼칠 수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해치려 했습니다. 나와 내 가르침에 대해 거짓 소문을 퍼뜨리고, 여기저기서 나를 함정에 빠뜨리려 했습니다. 내가 복음의 진리를 위해 싸웠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나를 미워했고, 심지어 나를 법정까지 데려갔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실제로 저에게 해를 끼칠 수 없었습니다. 나는 로마서 8장 28절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의 필터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님께 이렇게 말씀하십시오, "주님, 저는 이 땅에서 아무런 야망도 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사셨던 것처럼 이 땅에서 주님의 뜻을 행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저는 돈이나 존경, 명예, 안락을 추구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저를 위한 것은 하나도 바라지 않습니다. 저는 오직 매일 당신을 기쁘시게 하기만을 원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 모든 일에 끊임없이 스스로를 판단할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당신의 선을 이룰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은 다음 구절인 로마서 8장 29절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 당신은 예수님과 더욱 닮아갈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이보다 더 큰 선은 없습니다.

하지만 만약 당신에게 개인적인 계획이 있다면, 로마서 8장 28절의 약속은 당신에게 적합하지 않습니다.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서 8장 28절의 유익 안에서 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삶에 대한 자신만의 계획을 가지고 있고, 오직 하나님께서 오셔서 축복해 주시기만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구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31절). 하나님을 그들의 편에 두는 자들을 대적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모든 것을 값없이 주실 것이며(32절),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고발당할 때 그들을 위해 중재하시며(34절), 아무도 그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참으로 복된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자들은 모든 상황에서 정복자 그 이상입니다(37절).

하나님의 주권, 의로움, 그리고 신실하심

9장부터 11장까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교회를 대하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9장은 하나님의 주권을, 10장은 하나님의 의로움을, 11장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다룹니다.

이 세 장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대하시는 모습을 통해 그분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시는지 보여줍니다. 8장 31-39절에 나오는 엄청난 확신과 담대함, 그리고 능력의 표현은 우리를 쉽게 교만하게 만들 수 있으므로, 이 세 장의 주된 목적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12장으로 넘어가기 전에 9~11장을 통해 우리를 겸손하게 해야 합니다.

9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다는 깨닫습니다. 이는 우리가 선해서 택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때문에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또한 우리의 지성이 너무 작아서 하나님의 주권과 우리의 자유 의지를 조화시킬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겸손하게 됩니다.

10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은 의로우시다는 봅니다. 이는 우리가 결코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음을 깨닫기 때문에 우리를 겸손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의를 얻었습니다.

11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은 신실하시다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신실함이 아니라, 우리에게 인자하면서도 엄격하게 대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함으로 인해 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11:22). 하나님은 우리가 절망하고 낙심할 때 인자하게 대하시고 격려하시며, 우리가 죄에 부주의할 때 엄격하게 징계하십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은혜와 진리)로 보호받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8장 31-39절의 결론과는 다릅니다. 거기서 우리는 복음을 통해 받은 모든 혜택에 대해 들었습니다.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받으실 모든 영광에 대해 말합니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부터 나오고, 그분을 통해, 그분에게로 돌아갑니다"(11:36).

이제 이 세 장을 살펴보겠습니다.

9장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주권적으로 선택하셨다는 것을 읽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을, 마치 그분이 어떤 사람은 천국에 가고 어떤 사람은 지옥에 가기로 예정하셨다는 의미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구원받아 천국에서 영원히 그분과 함께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그분은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누가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미리 알고 계셔서 우리를 선택하십니다(벧전 1장 1,2절에 이 사실이 매우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천국에 거주하도록 선택되지 않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이 땅에서 특정한 사역을 감당하도록 선택되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은 구원받고 천국에 가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특정한 사역을 위해 주권적으로 사람들을 선택하십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우리가 원하는 어떤 사역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특정한 사역을 위해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습니다. 왜 인도나 중국을 선택하지 않으셨을까요? 우리는 하나님께 의문을 제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왜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전업주부로 택하셨을까요? 우리는 하나님께 의문을 제기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특정한 사역을 맡기시며, 우리에게 어떤 은사를 주실지는 주권적으로 결정하십니다.

우리는 8장 28절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우리의 모든 상황을 주관하심을 보았습니다. 9장에서는, 그 동일한 주권으로 특정한 사명을 위해 사람들을 택하시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이 땅에서 그분을 위한 특별한 목적을 성취하도록 준비시키십니다. 심지어 바로(9:17)도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바로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바로가 마음을 완악하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바로의 마음이 완악해지는 것을 통해 그분의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싸우면 반드시 지게 될 것입니다.

10장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해 잘못된 방식으로 의를 추구했기 때문에 의를 얻지 못했습니다(9:31). 오늘날에도 그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의를 얻을 수 있을까요? 10장 6절부터 8절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믿음의 말씀이 우리 입에 있다고 말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9절). 우리는 입으로 시인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가르치는 것처럼, 병의 치유, 새 집, 새 차 등 무엇이든 하나님께 구할 수 있고, 입으로 그것을 받았다고 고백하면 그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과 혼동하지 마세요.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 삶의 주님으로 시인하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 이는 우리가, 더 이상 하나님께 우리가 원하는 것을 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만 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17절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의 말씀에 약속하신 것을 고백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 당신은 하나님께서 말씀에서 약속하신 것을 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말씀"이라는 구절은 특히 신약 성경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가 너희를 지배하지 못하리라"(롬 6:14)와 같은 신약성경의 약속을 믿고 고백합니다. 그러면 그 약속들이 우리 삶 속에서 현실이 될 것입니다. 믿는다면 입으로 고백하십시오. 당신은 죄에 완전히 패배할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이 없었음에도 “나는 많은 무리의 아비입니다”라고 고백했듯이, 승리를 고백하십시오. 승리가 올 때까지 “이제 죄가 나를 지배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계속 고백하십시오. 나는 오랫동안 죄에 패배했지만, “이제 죄가 더 이상 나를 지배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계속 고백했습니다 - 그리고 어느 날 그것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11장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하셨다고 해서 교만해지지 말라고 합니다. “자만하지 말고 두려워하라. 하나님께서 본래 가지들을 자르셨다면, 너희라고 아끼시겠느냐?”(20, 21절). 우리는 하나님의 나무의 일부가 되었지만, 결국 잘려 나갈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이 경고를 거듭거듭 받습니다(눅 11:35; 히 3:12 등 참조). 교만은 항상 이러한 잘려 나감의 원인입니다. 겸손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반응은 어떠해야 할까요?

12장: 이처럼 놀라운 복음과 하나님의 크신 자비를 볼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첫째, 우리는 매일 우리 몸을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1절). 하나님은 돈이 아니라 우리 몸을 원하십니다. 구약성경의 번제처럼, 우리는 “주님, 여기 제 눈과 혀와 손과 발과 귀와 육신의 정욕이 있습니다 – 제 모든 것을 다 제단에 드립니다”라고 말하며 우리 몸을 드려야 합니다. 둘째, 우리의 생각이 새로워지도록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생각)을 드려야 합니다(2절). 이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차도록 허락할 때 일어납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더러운 생각으로 심각한 문제를 겪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과거에 우리의 생각을 세속적인 방식으로 사용하는데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의 사고방식을 바꾸어서 우리가 그분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만들고 싶어하십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의 마음은 점차 새롭게 됩니다.

거듭나는 순간,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것처럼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순간부터 하나님은 우리의 사고방식을 바꾸어, 우리가 점차 모든 것을 그분이 보시는 것처럼 보기 시작하도록 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돈을 보시는 것처럼 돈을 보기 시작했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여자를 보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자를 보시는 것처럼 보기 시작했습니까? 세상은 여자를 멸시하거나 여자를 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둘 중 어느 쪽도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원수를 보시는 것처럼 원수를 보기 시작했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원수를 미워하지만,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모든 면에서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순종할 때,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십니다.

변화는 먼저 내면에서 일어납니다. "이 세상을 본받지 말라"(2절)는 세상적인 것이 우리의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많은 사람들은 세상적인 것이 사람의 옷차림에서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적인 것은 먼저 마음에 있습니다. 우리는 아주 검소하게 옷을 입으면서도 돈을 매우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마음을 보십니다. 예수님의 참된 제자는 하나님의 인정을 구합니다. 우리가 몸과 마음을 이처럼 하나님께 드릴 때에만 우리 삶을 향한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2절).

바울은 12장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복음의 목표는 개인적인 구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 그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 즉 예언, 섬김 등을 실천하며 살아갑니다. 성령의 은사 목록은 고린도전서 12장뿐만 아니라 여기(롬 12장)에도 언급되어 있습니다(6-8절). 여기에는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구하지 않는 은사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바로 관대함의 은사, 즉 교회의 가난한 자들과 하나님의 일을 위해 돈을 베푸는 은사입니다(8절).

12장의 나머지 부분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마음이 교만하지 말고 오히려 비천한 사람들과 사귀라"(16절).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모든 사람과 어울려야 하지만,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어울려야 합니다 -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약 2:5). "아무에게도 원수를 갚지 말라,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속하였음이니라"(19절). 경배와 영광이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것처럼, 원수 갚는 것 또한 오직 하나님께만 속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원수를 갚을 권리는 다른 사람에게서 경배나 영광을 받을 권리가 없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없습니다.

13장은 국가 권위에 대한 복종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께 복종하고(12:1, 2); 그다음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서로에게 복종하며(12:3-21); 마지막으로 세속 권위자들에게 복종하라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하나님의 종들"(13:4, 6)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세금을 내고 국가의 법을 준수합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서로를 받아들이는 것

14장과 15장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서로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믿는 자로서 우리는 모든 문제에 대해 모두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언젠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고 우리의 마음이 온전해지면, 우리는 모든 교리에 100% 동의하고 참된 영성이 무엇인지, 혼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모두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실하고 온 마음을 다하더라도 우리의 마음은 여전히 죄의 영향으로 뒤틀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거울로 보는 것처럼 어둡게 봅니다(고전 13:12). 그러므로 다른 사람에게서 다른 것을 발견할 때, 우리는 옳고 다른 사람은 모두 틀렸다고 고집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분열이 일어나는 방식입니다. 성경에는 명확하고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 특히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관한 진리가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자 완전한 인간이시며, 세상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하나님 아버지께 가는 유일한 길이십니다. 이러한 교리에 대해 우리는 조금도 양보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이지 않은 다른 교리들도 있습니다.

물 세례는 구원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지만 지역 교회에 여전히 중요한 교리입니다. 어린이 세례를 믿는 사람이 어린이 세례가 성경적이지 않다고 믿는 사람과 같은 교회에서 함께 사역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 왜냐하면 그들은 끊임없이 충돌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러한 형제들과 함께 사역할 수 없을지라도, 그가 거듭났다면 우리는 여전히 그를 그리스도 안의 형제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 하나님께서 그를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함께 사역할 수 없더라도 함께 교제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함께 사역할 수 없다면 그와 교제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비극입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14장과 15장이 도움이 됩니다.

믿음이 연약한 형제를 보십니까? 그를 받아들이십시오. 어떻게 그를 받아들여야 합니까?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받아주신 것같이”(15:7). 그리스도께서 당신이 완전할 때 당신을 받아주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왜 형제를 받아들이기 전에 그들이 완전해야 한다고 기대합니까? 거듭난 날 우리 모두는 얼마나 연약하고 어리석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고 죄에 짓눌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받아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안에 있는 많은 잘못된 것들을 보셨지만, 그럼에도 우리를 받아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받아주신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교만하고 스스로를 하나님보다 더 영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단이 만들어지는 방식입니다 - 잘못된 교리뿐만 아니라 다른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잘못된 태도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소한 규칙과 법을 그리스도의 몸의 다른 지체들을 받아들이는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냐?”(14:10a). 그것은 외적인 행동입니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14:10b). 그것은 내적인 태도입니다. 우리는 둘 다 피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신 모든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넓어질 때, 우리는 복음 메시지의 절정에 도달하게 됩니다. "우리는 한 마음(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과 한 목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15:6).

마지막 장인 16장에는 바울이 로마에 있는 여러 신자들에게 보낸 인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로마 교회에는, 다섯 개의 가정교회가 있었습니다(5-15절). 그들은 모두 대형 교회처럼 한 회관에 함께 모이지 않았습니다. 로마 교회는 규모가 매우 컸지만, 각기 다른 집에서 소그룹으로 모였습니다. 바울은 로마에 가본 적이 없었지만, 그곳 교회에 다니는 다양한 사람들을 알아가는 데 관심을 가졌고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의 순종'(26절)이라는 표현은 이 서신의 서두와 마찬가지로 이 서신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사람들을 믿음으로 인도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믿는 바에 순종하도록 인도하라는 부르심을 주셨습니다. 순종의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 곧 생명 없는 몸과 같습니다. 옛 언약에서는, 순종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새 언약에서는, 믿음의 순종이 강조됩니다. 우리는 이제 모든 명령이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로부터 왔으며,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기 위해 설계된 것임을 알기에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장 46
고린도전서

지역 교회와 그 기능

이 서신의 두 번째 구절에서, 우리는 그 대상을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게”입니다(1:2).

이 서신은 도시나 마을에 있는 지역 교회의 기능을 다룹니다. ‘하나님의 교회’와 ‘고린도의 도시’라는 두 표현에 주목하십시오. 안타깝게도 그 도시의 영이 교회 안으로 들어왔고, 교회는 그 도시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 신자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대신 세상의 영이 자신들에게 영향을 미치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많이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전하려는 모든 말에도 불구하고, 그는 감사의 말로 서신을 시작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따라야 할 좋은 본보기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서 많은 잘못을 발견하더라도, 우리가 칭찬할 수 있는 부분들이 여전히 있을 것입니다. 어떤 경우든, 우리는 칭찬한 적이 없는 사람을 비난하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비판을 통해 다른 사람을 도우려고 하지만, 비판하기 전에 그 사람에게서 본 좋은 점을 칭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을 도울 수 없습니다.

내가 칠판에 분필로 글을 쓰면 여러분은 내가 쓴 것을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칠판이 없고 분필 한 조각만 있다면, 설령 옳은 글을 쓴다 해도 허공에 쓰는 것과 같을 것이고 - 여러분은 내가 쓴 것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칭찬의 칠판"에서만, 우리는 "비판의 분필"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과거에 누군가를 칭찬한 적이 있다면, 그 사람은 당신이 비판이라는 하얀 분필을 들었을 때, 당신이 무엇을 쓰고 있는지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그 사람을 칭찬한 적이 없다면, 글을 쓸 칠판이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의 모든 비판이 옳다 하더라도 허공에 쓰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는 아무것도 볼 수 없으므로 도움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허공에 글을 쓰고 있기 때문에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합니다. 더 훌륭한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먼저 그 사람을 사랑하고, 그에게서 보이는 좋은 점을 칭찬하세요. 그러면 비판의 한마디라도 그의 마음에 와 닿을 것이고 - 그는 그것에 대해 무언가를 할 것입니다.

바울의 칭찬과 교훈

바울은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그는 “내가 너희에 대하여 항상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노라”(1:4)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와 성경 지식,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간증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는 영적인 은사에 관심이 없었던 많은 신자들과 달리, 그들이 모든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는 사실에 감사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이 교회는 여전히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바울에게서 한 가지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먼저 사람들을 칭찬할 줄 아는 법을 배우십시오. 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흰 종이를 들어 보였습니다. 종이 한쪽 모서리에 작은 검은 점이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종이를 자세히 보고 본 것을 적으라고 했습니다. 모두 "모퉁이에 검은 점이 보여요."라고 적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아무도 흰 종이에 대해 한마디도 쓰지 않았군요. 여러분이 본 것은 검은 점뿐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하얀 부분이 아주 많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그에게서 보는 것은 그 사람에게 있는 작은 검은 점 하나일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좋은 점이 많습니다. 먼저 그것들을 보는 데 집중합시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들을 보시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도록 우리의 눈을 훈련해야 합니다.

그 후, 바울은 계속해서 그들의 잘못에 대해 말했습니다. 칭찬의 칠판을 세운 후, 그는 그 위에 시정할 점을 적을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너희가 각각 말하기를 '나는 바울에게 속하고, 나는 아볼로에게 속하고, 나는 게바에게 속하고,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다' 하느니라"(1:12)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교파"라고 부르는 것으로 나뉘었고, 각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설교자가 있었습니다. 한 무리는 자신들이 다른 모든 무리보다 더 거룩하다고 생각하며 "우리는 그리스도께 속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께 속했습니다"라고 말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영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아마도 교회에서 가장 교만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을 아래로 내려다 보며, 자신들만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오늘날 많은 집단들처럼).

우리는 다른 교회에 속해 있고 "우리 교회"에 속하지 않은 신자들을 소중히 여기고 존중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교회가 비교파거나 초교파라고 해서 교파 교회보다 더 영적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비교파 교회에 속한 사람들 중에는 내가 만난 사람들 중 가장 교만하고 자만심이 강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교파 교회에 속한 사람들 중에는 내가 만난 사람들 중 가장 겸손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묻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뉘었습니까? 바울이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까? 아니면 바울의 이름으로 여러분이 세례를 받았습니까?"(1:13). 바울은 심지어 아무도 바울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자랑하지 못하도록 세례를 주지 않았습니다(1:16). 1:17에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주제, 즉 십자가의 말씀을 시작합니다. 고린도처럼 문제가 많은 세속적인(carnal) 교회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바로 십자가의 말씀입니다.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십자가의 말씀

십자가의 말씀이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걸으신 길, 즉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오해받고 배척당하면서도 자신을 낮추고, 보복하지 않고, 사람에게서 어떤 영광이나 존경도 구하지 않는 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3:3, 4에서도 이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형제들아, 이것을 생각해 보라. 너희 가운데는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고귀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강한 자가 많지 아니하니라." 십자가의 말씀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어리석은 자들을 택하셨느니라"(고전 1:26-28). 예수님이 사도들을 택하실 때, 당시 위대한 성경 학자들을 부끄럽게 하려고 배우지 못한 어부들을 택하셨습니다. 가말리엘은 성경 신학교 교수였고, 아나니아와 가야바는 대주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배우지 못한 어부였던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새 언약을 인도하는 사도로 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학식이 없고 교양이 없지만 열심히 일하고 진실하며 마음이 열린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종교 사회의 영리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지혜로운 사람을 택하지 않으신다는 말은 없다는 것에 주의하세요. “…많지 않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지혜로운 사람 몇 명도 택하십니다. 하지만 택하신 자들 대부분은 어리석고 세상이 하찮게 여기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하찮은 사람들을 사용하시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인도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그리스도를 위해 이 나라에 영향을 미친 사람들 대부분이 위대한 학자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단순하고 학식이 없지만 진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택하시고 성령으로 기름부으시고 강력하게 사용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시는 것일까요? 학문적인 능력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지적인 사람은 자신이 매우 똑똑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용하신다고 생각하고 - 그것을 자랑스러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업에 후하게 헌금하는 부유한 사람들은 자신의 재산이 복음을 전파하는 데 쓰이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교회에 매우 귀중하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모두 속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지성과 돈을 사용하여 복음을 전파하실 수 있지만, 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1세기에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사도들을 통해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인간도 그분 앞에서 자랑할 수 없도록 일하십니다(1:29).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 부를 새 노래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여, 주님만이 홀로 합당하십니다"(계 5:12)입니다. 바울조차도 하늘에서 어떤 영광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여러 해 전, 나는 한 성경 신학교 졸업식에서 연설 초대를 받았습니다. 졸업반에서 1등을 하고 가장 많은 상을 받은 학생이 졸업식 후에 나에게 와서 나와 이야기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죄에 완전히 패배했다고 말했습니다. 오랜 세월 성경 지식을 정확하게 쌓아 온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더러운 생각과 여자에 대한 정욕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에 걸쳐 성경 지식을 정확하게 축적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더러운 생각과 여자에 대한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는 4년간 성경 공부를 했는데, 신학교에 입학했을 때보다 오히려 형편이 더 나빠졌다고 말했습니다. 목사가 되었을 때 그의 모든 성경 지식이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사람들에게 성경에 나오는 히브리어와 헬라어 단어의 어근을 가르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죄를 이기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그가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는 비그리스도인이었지만 주님께 나아온 사람이었고, 그의 삶을 낭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계의 비극입니다. 수많은 학위로 무장한 성경 학자들이 사람들에게 일상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이론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생명나무가 아닌 죽음에 이르는 지식나무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가정 환경이나 지성을 결코 자랑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교만함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통해 그분의 목적을 이루시는 것을 방해할 것입니다. 바울 자신도 다소의 매우 부유한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다소는 유대인 사업가들이 사업을 하러 가는 도시였고 - 바울의 아버지도 분명 매우 부유한 사업가였을 것입니다. 바울은 젊은 시절 예루살렘에서 가장 명문인 신학교에 다녔습니다 - 그곳의 교수는 학식이 풍부한 가말리엘이었습니다. 그런 교수 밑에서 공부하는 것은 큰 영광이었습니다. 바울은 부유한 가문 출신일 뿐만 아니라 뛰어난 지성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직업에서든 큰 성공을 거두었을 것입니다. 만약 그가 오늘날 살아 있다면, 최고 수준의 컴퓨터 엔지니어, 의사, 사업가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을 섬기기 위해 자신의 어떤 능력에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말씀으로 자신의 인간적인 자질에 대한 자신감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가서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뛰어난 것으로 아니하였노라"( 2:1). 그의 설교는 인간의 총명한 말로 하지 않고 성령의 능력으로 했습니다. 이는 사람들의 믿음이 인간의 총명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근거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2:4).

말씀을 전하는 여러분에게 도전을 주고 싶습니다: 설교를 단순하게 하세요. 50년이 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나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왔습니다, "내 말을 듣는 어린아이들이 내가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면 아주 똑똑한 사람들만 이해하는 것일까?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고 어려운 영어 단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인도의 많은 사람들은 어떨까? 그들은 내 말을 이해했을까?" 어린아이들이 내 말을 이해한다면, 다른 모든 사람들도 이해할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예수님처럼 말할 때 어린아이들을 목표로 삼습니다. 똑똑한 사람들만 당신을 이해한다면, 90%의 사람들은 당신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설교를 통해 무엇을 이뤘습니까? 위대한 성경 학자나 유창한 연설가로서 명예를 얻었을 수도 있고 - 어쩌면 돈도 얻었을 것입니다! 당신은 그 모든 것을 원하십니까? - 아니면 사람들에게 축복을 주고 싶습니까? 선택해 보십시오.

내가 젊었을 때, 주님께서 내게 물으셨습니다, "너는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싶니, 아니면 그들을 돕고 싶니?" 나는 "주님, 나는 그들을 돕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주님은 "그럼 그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고 애쓰지 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습니다. 사람들을 돕고 싶다면, 단순하게 말하십시오. 하나님은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 그분의 진리를 계시하시지, 자신의 지성과 학력을 자랑하는 자들에게는 계시하지 않으십니다(마 11:25). 예수님은 단순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아이들도 그분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기본적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있고 훌륭한 학자이며, 그 모든 것을 활용하여 여러분에게 말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발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 내 모든 능력과 지식과 학식을. 그리고 나는 성령의 능력과 기름부음으로 매우 단순한 방식으로 여러분에게 말하기로 결심했습니다 - 성령께서 내 말을 여러분의 생각에만 전해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에 전해주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나는 내 총명함으로 여러분을 감동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확신을 불어넣어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한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말씀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어린아이들이었기에, 바울은 그들에게 우유를 주어야 했습니다(고전 3:1,2). 사람들에게 설교할 때, 우리는 먼저 그들의 영적 수준을 파악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에게 적합한 것을 줄 수 있습니다. 장성하고 경건한 사람들에게 말할 때는 어떤 방식으로 말해야 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에게 말할 때는 또 다른 방식으로 말해야 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오랫동안 신자였지만 아직 성숙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단단한 음식을 줄 수 없었고 오직 우유만 주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을 만났을 때, 그리스도의 더 깊은 것들을 그들에게 전할 수 있었습니다(고전 2:6).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혼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분별하는 것”, “혼적인 삶을 죽음에 쏟아 붇는 것” 등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에게는 회개, 죄 사함, 정죄와 죄책감, 분노, 더러운 생각을 극복하는 것 등과 같은 단순한 것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씹어야 하는 질긴 고기를 감당할 수 없기에 우리는 그들에게 우유를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성숙한 사람들에게 말할 때에도, 세상의 영리한 생각으로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지혜로 말해야 합니다(고전 2:6, 7).

이 하나님의 지혜는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고, 사람의 귀로 들을 수 없으며, 심지어 사람의 마음으로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되어야 합니다(고전 2:9, 10). 그러니 당신의 머리가 뛰어나든 둔하든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지난 몇 세기 동안, 하나님께서는 (지능이 낮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뛰어난 사역을 주시고 그들을 통해 교회를 세우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날 인도에서 위대한 성경 학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마을로 가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요. 그들은 성경 학교에서 가르치고, 대규모 학회에서 전도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고, 미국의 지원을 받는 대규모 기독교 단체의 이사가 됩니다. 인도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사역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누구입니까? 그들 대부분은 평범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며, 성령으로 충만하여, 나가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고 지역 교회에 정착시키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진정한 사역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명예를 사랑하는 쓸모없는 그리스도인들이 전도 학회에서 논문을 발표하고, 국제 위원회에 참석하고 이사가 되게 두라고 말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여러분, 나가서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하고 그분의 교회를 세우십시오. 그것이 내가 평생 하고 싶은 일입니다. 나는 위원회에 앉아 있거나 어떤 학회에서 논문을 발표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하여 그들을 교회로 세우고 싶습니다. 베드로와 바울, 그리고 모든 사도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회심자인가, 제자인가?

3장에서, 우리는 전도와 교회 세우기에 대해 읽습니다. “너희 중에 어떤 이는 말하기를, ‘나는 바울에게 속하고 나는 아볼로에게 속한다’ 하느니라”(3:4). 바울은 “무슨 차이가 있느냐? 우리는 다 종이니라. 나는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느니라”(3:6)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전도의 일을 했습니다 - 바울은 땅을 파고 씨를 심었습니다. 아볼로는 나중에 와서 물을 주었습니다. 아볼로는 땅을 파거나 씨를 심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이미 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아볼로가 다시 땅을 파헤친다면 씨앗을 파괴했을 겁니다! 이제 씨앗에 필요한 것은 물을 주는 것이었고 - 아볼로는 지혜롭게도 그렇게 했습니다. 어떤 전도자들은 다른 사람이 와서 자신이 심은 땅에 물을 주면 화를 냅니다. 그들은 “왜 다른 곳에 심지 않습니까? 왜 내 밭에 들어옵니까?”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밭은 당신의 밭입니까, 아니면 주님의 밭입니까? 당신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밭이며,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심은 것에 다른 종을 보내 물을 주게 하실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볼로가 하는 일을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자신의 밭을 가꾸고 있다면, 언젠가는 "나무와 풀과 짚"처럼 불에 타 버릴 것입니다(3:12-15).

오늘날 많은 전도의 비극은 사람들이 "이 사람은 나의 회심자이다"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하나님의 포도원에는 중복된 일이 많습니다 -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각자가 하나님께서 부르신 대로 행하는 대신, 계속해서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심었다면, 아볼로가 와서 다시 심지 않고 물을 주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연약한 식물이 튼튼한 나무로 자랄 것입니다. 이것이 1세기에 그들이 가졌던 협력의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기독교계에서는 안타깝게도 협력이 아니라 경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일을 되풀이 하지 않고, 협력하여 일하고, 어떤 일도 "우리의 것"이라고 여기지 않도록 배워야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상 명령은 "전도하고"(막 16:15) "제자를 삼아 분부하신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 20)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생각해 보십시오: 100명이 통나무를 나르고 있는데, 그중 99명은 통나무 한쪽 끝을 잡고 있고 다른 쪽 끝은 한 명만 잡고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 당신은 어느 쪽 끝으로 가서 도와주시겠습니까? 오늘날 많은 나라에서 기독교 사역자의 99%는 전도에, 1%는 회심자를 제자로 삼아 지역 교회를 세우는 데 헌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통나무의 1% 쪽 끝에서 돕기로 결심했습니다. 나는 통나무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들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미 그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울과 아볼로는 함께 일했고, 그들의 회심자들은 주님을 위한 것이었으며, 그들의 교회 또한 주님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지만, 자라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과 아볼로에 대해 “우리는 아무도 아닙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3:7)라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조화롭게 함께 일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두 사람은 쉽게 함께 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 중 한 사람이 자신을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때 발생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어느 곳에 지역 교회를 세우게 된다면, 지난 40년 동안 인도와 다른 곳에서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시는 모습을 보면서 얻은 교훈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먼저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고 모든 회심자들을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만드십시오. 그러면 협력이 있고 경쟁이 없는 멋진 교회를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지도자부터 새로 회심한 사람까지 모두가 그저 아무것도 아닌 교회가 세상에서 가장 좋은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0일지 모르지만, 예수님을 그들 앞에 두면 – 예수님은 "1"이시기에 – 9명밖에 없는 교회조차도십억(1,000,000,000)명의 가치가 있는 교회가 됩니다! 그러니 바울과 아볼로처럼 결코 특별한 존재가 되지 않고, 항상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도록 결심하십시오.

그런 다음 바울은 기초를 놓고 그 위에 건물을 짓는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기초와 상부 구조는 둘 다 똑같이 중요합니다. 바울은 처음에는 나무를 키우는 것, 즉 심고 물을 주는 것에 대한 비유를 사용했습니다. 이제 그는 건물의 비유, 즉 기초와 상부 구조에 대한 그림을 사용합니다(10-12절). 교회의 기초는 오직 그리스도뿐입니다 – 우리의 어떤 행위도 더해지지 않는, 그분의 십자가에서 이루신 완전한 속죄 사역이 기초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기초 위에 영원한 구조를 짓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당신은 어떤 교회를 짓고 있습니까? 규모가 큰 교회입니까, 아니면 질적으로 뛰어난 교회입니까? 모든 그리스도인 사역자가 답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양을 추구할 것인가, 질을 추구할 것인가? 우리는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을 수도 있고, 나무와 풀과 짚으로 지을 수도 있습니다(3:12). 마지막 날에는 양이 아니라 질이 중요할 것입니다(3:13,14).

같은 돈으로 금과 은과 보석보다 나무와 풀과 짚을 훨씬 더 많이 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거대한 건물을 짓고 싶다면 나무, 건초, 짚을 택할 것입니다. 하지만 완공되자마자 불이 건물을 시험할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금, 은, 보석처럼 불을 견딜 수 있는 재료로 지을 것입니다 - 이전 건물과 비교했을 때 당신의 건물의 크기가 1%에 불과하더라도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제한된 시간으로 삽니다. 수천 년을 살 수는 없습니다. 거듭난 후 주님을 위해 60년을 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그 60년을 어떻게 보내시겠습니까? 크지만 질은 형편없어 마지막 날에 불타버릴 건물을 짓겠습니까? 아니면 아무리 작더라도 극심한 불의 시험을 견뎌낼 수 있는 건물을 짓겠습니까?

많은 신자들이 규모는 크지만 질은 형편없는 교회를 짓습니다. 하지만 지혜롭게 건축하는 소수의 신자들은 회개와 제자도를 전파하며 질 좋은 작은 교회를 짓습니다. 후자(금과 은과 보석으로 세운 교회)의 통계는 전자(나무와 건초와 짚으로 세운 교회)의 통계만큼 인상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주님께서 모든 것을 불로 시험하실 때, 나무와 건초와 짚으로 만든 거대한 구조물들은 완전히 불타 없어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평생을 제자를 삼는 데 바쳤지만, 그들의 사역이 크지 않다는 이유로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멸시받았던 자들이 세운 작은 구조물들은 불을 뚫고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인생을 살아갈 것입니까? 예수님은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영원히 지속될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있습니까? 이것은 우리 생각 속에 항상 있어야 할 질문입니다. 나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원칙에 따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건축하고 있는가? 나는 예수님을 무엇보다 사랑하는 제자를 만들고 있는가? 아니면 "주 예수님,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라고만 말하며 제자가 되는 데는 관심이 없는 회심자들을 모으고 있는가? 그날 당신의 모든 삶의 사역이 불타버린다면, 주님 앞에 섰을 때 얼마나 후회할지 생각해 보십시오. 구원받고 천국에 갈 수는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이 땅의 삶을 허비한 것을 영원히 후회하며 천국에서 살 것입니다. 나는 그런 후회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짓고 싶습니다. 지금 주님을 위해 질 높은 일을 하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의 참된 종들

4장에서,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것에 대해 더 자세히 읽습니다. "종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행하는 것입니다"(4:2 - LB). 이것이 바로 충실한 종이라는 뜻입니다.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주님께서 시키시는 것을, 그리고 그분이 원하시는 방식대로 행하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기다리며 "주님,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저는 오직 그것만 하고 싶습니다."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하인을 고용했다면, 당신은 ‘하인이 당신을 위해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일을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요. 오히려 당신은 하인이 당신의 말을 듣고 당신이 시키는 것을 하기를 원할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 사역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에서 이야기하신 것을 듣지 않고 그 신성한 원칙들을 따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방식, 즉 대개 세상적인 자신만의 빛나는 아이디어로 하나님의 일을 합니다. 그들은 주님을 섬기기 위해 스스로 프로그램을 만들고, 자신을 향한 주님의 뜻을 알아내기 위해 주님을 기다릴 인내심이 없습니다.

4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참된 종들(십자가의 길을 걷는 사람들)은 세상(세상적인 신자들 포함)의 존경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도들은 교회에서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종들입니다. 그들은 교회 장로들의 장로입니다. 사도들은 교회를 개척하고, 장로들을 임명하고, 그들을 지도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 사도들을 어떻게 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도로 모두의 가장 마지막인 자들로 내놓으신 것 같습니다"(4:9). 세상의 눈에 사도들은 사회적 사다리의 맨 아래에 있습니다. 그들은 “곧 죽임을 당할 죄수와 같이……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고……어리석고……비웃음거리가 되고……발길질을 당하는” 존재입니다(4:9-11 - Living). 바울은 자신과 다른 사도들을 육신적인 고린도 그리스도인들과 비교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다 배부르고 부요하며, 세상으로부터 지혜롭고 강하고 귀한 자로 여겨지거늘,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멸시를 받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사도는 이 세상의 존경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오직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만 세상의 존경을 받습니다. 당신이 세상의 존경을 추구한다면 육신적(세속적)인 그리스도인으로 끝날 것이 분명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의 사도는 복음 전파로 결코 부유해질 수 없습니다. 복음 전파로 부유해진 사람을 어디에서 보든, 그는 그리스도의 사도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복음 전파로 자신과 가족을 위해 집과 땅을 산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도가 아닙니다. 복음 전파로 번 돈으로 비싼 차를 살 수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도가 아닙니다. 그는 단지 육적인 그리스도인일 뿐입니다. 바울은 설교의 은사로 많은 돈을 벌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참된 종은 복음 전파로 돈을 벌지 않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사도들처럼 - 땅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선물을 받을 수는 있지만 - 그렇다고 백만장자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기독교계에서는 정반대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위 사도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과 설교자들(심지어 병든 사람을 고칠지라도)에 대한 나의 존경심은 전혀 없습니다. 나는, 복음을 전하며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십일조를 받아 부자가 되는 복음주의 설교자들보다, 북인도에 가서 검소하게 살며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로마 가톨릭 사제들을 더 존경합니다.

당신은 누구를 따르겠습니까? 바울과 베드로? 아니면 오늘날의 가짜들?

바울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거칠게 다루어지고… 우리 손으로 수고하여 일합니다"(4:11, 12). 바울은 스스로 재정적으로 자립했지만, 욕설과 비방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그에 대해 거짓 소문을 퍼뜨렸지만, 그는 그들에게 축복을 주었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박해를 받았고 "세상의 쓰레기, 모든 것의 찌꺼기"(4:13)가 되었습니다. 즉, 세상은 그를 하수관에 흘러가는 오물보다 나을 것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당시 가장 위대한 사도가 세상으로부터 그런 대우를 받았습니다. 반면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으로부터 존경과 명예를 받았고 - 그 사실을 기뻐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기독교계가 하나님의 종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임무는 하나님의 참된 종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 땅에 보여주는 것입니다 - 타협하지 않고 세속적인 명예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의 신학 학위나 다른 세상적인 자격에도 감명받지 않으십니다. 그러한 자격은 마귀도 겁내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왕좌에 앉아 명예를 얻고 싶어 합니다.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평생 하나님의 겸손한 종이 되십시오. 세상과 바벨론 기독교계에서 배척당할지라도 평범한 형제자매가 되십시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품위 있고 편안한 모습을 질투했을까요? 아닙니다. 바울은 그들보다 더 축복받은 위치에 있었기에 그들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는 아버지처럼 그들에게 말했을 뿐, 그들을 부끄럽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4:14). 진정한 하나님의 종은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교사는 학생이 잘못을 하면 부끄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아버지는 자녀가 어리석은 짓을 하더라도 결코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계에서 아버지와 교사의 비율은 약 1: 10,000입니다(4:15).

바울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훌륭한 것을 많이 전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여러분 가운데에 가면 여러분의 설교를 듣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의 삶에 얼마나 큰 능력이 있는지 보고 싶습니다 - 하나님의 나라는 말로 나타나지 않고 능력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4:19-20).

바울은 처음 네 장에서 십자가의 말씀에 대한 기초를 놓았습니다. 그런 다음 5장부터는, 고린도 교회에 있던 문제들을 다루기 시작합니다. 고린도에 있는 세상의 영이 지역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5장은 사도들이 교회 안에서 죄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가르쳐 주기 때문에 성경에서 귀중한 부분입니다.

세상의 영

바울은 여기서 부도덕의 문제를 다룹니다. 고린도의 이교 신전에는 부도덕이 만연했고, 그 영이 교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계모와 간통을 저질렀지만 회개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교회 장로들은 너무나 “우유부단해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 사람을 교회에서 내쫓을 도덕적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온유하다는 평판을 원했을 것입니다. 장로가 어떤 사람을 교회에서 내쫓으면 온유하다는 평판을 잃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를 비난할 것입니다 - 그리고 대부분의 장로들은 무정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원하지 않습니다. 많은 장로들이 교회의 순수함보다 자신의 평판을 더 소중히 여깁니다. 그들의 목표는 인기이며, 이 점에서 그들은 정치인과 같습니다. 그런 장로나 목사가 있다면 교회는 망할 뿐입니다.

죄 가운데 살던 이 사람은 부자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장로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교인들을 바로잡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많은 헌금으로 교회를 지원합니다. 그들은 영향력이 있어서 당신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언제든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와 장로들은 대개 그런 사람들을 내버려 둡니다. 목사와 장로들은 가난한 사람들만 징계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 사람이 부유하든 가난하든 개의치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 사람을 사탄에게 넘겨주고 장로들에게 그를 교회에서 쫓아내라고, 즉 출교시키라고 말했습니다(5:13).

때로는 사람들을 교회에서 쫓아내야 합니다. 예수님은 “먼저 그러한 사람에게 혼자 가서 말하라”(마 18:15-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그가 당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두세 사람을 데리고 가서 말하십시오. 그래도 듣지 않고 계속 죄를 짓는다면, 온 교회에 그 사람에 대해 알리십시오. 만약 그가 여전히 죄를 짓는다면, 그를 비그리스도인처럼 대하고 교회에서 쫓아내십시오. 교회에도 가정과 마찬가지로 규율이 필요합니다. 아이들이 훈육되지 않는 가정은 혼란스러운 가정이 되고, 사람들이 징계받지 않는 교회는 혼란스러운 교회가 될 것입니다. 아이들이 훈육되지 않는 가정에서는, 아이들이 집안을 장악하고 아버지는 구석에 꼼짝없이 앉아 있어야 합니다. 규율이 없는 교회에서는 장로들이 무력해지고 다른 사람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장로들이 거룩함보다 인기를 더 추구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여러 곳에서 일어났습니다.

"사람을 사탄에게 넘겨 그의 육신(flesh)을 멸망시키려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사탄이 그를 질병으로 공격하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모든 질병은 마귀에게서 비롯되며 - 나는 이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이시며, 어떤 사랑 많은 아버지도 자녀에게 질병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울에게 그러셨듯이, 때때로 자녀들이 병들도록 허락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탄이 바울의 육체에 가시를 박도록 허락하셨고, 바울이 기도했을 때조차도 그를 고쳐주지 않으셨습니다(고후 12:1-7). 하지만 그것은 바울에게 유익했습니다 - 그를 교만에서 구해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도 유혹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사탄이 우리를 유혹하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회개하지 않는 이 형제를 사탄에게 넘겨 병들게 하여 정신을 차리고 회개하게 했습니다. 그는 교회에서 출교당할 것이며, 어떤 신자도 그를 만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영적인 어둠 속에서, 비록 그가 많은 돈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자신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바라건대 회개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사탄이 어떤 신자들을 병들게 하여 회개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사도로서 바울은 사람들을 이렇게 사탄에게 넘겨 회개하게 할 신성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상은 바울을 쓰레기처럼 대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영적 권위를 주셨습니다. 사탄은 바울을 두려워했습니다.

모든 일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바울은 6장에서 다른 신자들을 법정에 세우는 신자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왜 신자는 다른 신자를 법정에 세우려 할까요? 교회 장로들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없고 - 전능하신 하나님도 자신을 도울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 법정에 있는 보잘것없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성령께서는 이것이 완전히 잘못된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 마치 하나님께서 당신 자녀들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는 것처럼 여기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들 사이에는 항상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교회 장로들에게 문제를 가져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와주실 것이라고 믿어야지, 세상 법정에 가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동료 신자가 당신을 속이면, 왜 속아 주지 못합니까?"(6:7). 그러나 그들은 한 가지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또 다른 잘못을 저지르려 했습니다 – 동료 신자들을 법정에 세우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그런 일을 하는 자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믿는 사람을 법정에 세우면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6:9). 그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심각한 죄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불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싸우고, 그리하여 그들을 마귀에게로 몰고 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경우,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명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형제를 법정에 세우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까? 아니지요? 그렇다면 하지 마십시오. 왜 형제를 법정에 세우십니까? 그를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인간 재판관이 그를 처벌하기를 원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를 처벌하시도록 맡기지 않습니까? “앙갚음하려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당신이 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가 심판하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처리하겠다’”(롬 12:19 - MSG).

바울은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세 가지 다른 수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합법적이지만)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6:12). 불법적인(혹은 불의한) 수준은 대부분의 불신자들이 사는 곳입니다. 어떤 신자도 이 수준으로 내려가서는 안 되지만 - 안타깝게도 어떤 신자들은 그렇게 합니다. 그들이 계속해서 그곳에 살면 구원을 잃게 됩니다. 신자에게 최소 수준은 바로 그 다음 단계인 합법적인(혹은 의로운) 수준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높은 수준인 유익한 단계가 있습니다. 100가지 중 70가지는 불법적인 것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의 어떤 것도 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나머지 30가지의 합법적인 것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30가지 중 오직 10가지만이 영적으로 진정으로 유익할 수 있습니다. 온 마음을 다한 그리스도인은 그 10 가지 일만 합니다. 하지만 마음이 반쪽짜리인 그리스도인은 30가지 합법적인 것 중에서 어느 것이든 선택할 것입니다. 전심을 다해 효과적인 하나님의 종이 되고 싶다면, 합법적인 것들 중에서 유익한 것들을 선택해야 합니다.

시간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루 24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시간 중 일부를 음란 영화를 보거나 음란한 책을 읽는 데 쓴다면, 그것은 불법적인 시간 사용 방식입니다. 반면에, 하루를 합법적으로 보낼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중에는 필요한 것들도 있고, 우리는 그것들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신문을 읽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 비록 합법적이기는 하지만 하루를 보내는 가장 유익한 방법은 아닐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유용한 종이 되고 싶다면, 일상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일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건전한 사이트에서) 인터넷 검색을 하거나 심지어 기독교 TV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다가는 성경 공부를 할 시간이 거의 남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짧은 시간 인터넷 검색(세계 뉴스 등)을 하면서 성경 공부에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도 있습니다. 두 시간 동안 건전한 TV 프로그램을 시청하거나 건전한 인터넷 사이트를 방문하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거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는 데 더 유익하게 쓸 수 있었던 시간을 낭비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돈을 쓰는 방법에는 불법적인 방법, 합법적인 방법, 그리고 유익한 방법이 있습니다. 온 마음을 다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시간과 돈을 오직 유익한 방법으로만 사용합니다. 우리는 올바른 선택을 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경건한 삶의 비결은 우리가 내리는 선택에 있습니다. 시간을 합법적으로 쓸 수 있는 모든 방법 중에서, 우리는 시간을 가장 잘 쓰는 방법을 선택해야 합니다. 돈을 쓸 수 있는 모든 합법적인 방법 중에서 우리는 가장 좋은 방법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한 사람은 하나님께 귀중할 것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우리가 몸을 사용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나는 내 몸의 어떤 욕심에도 지배받지 아니하리라"(6:12,13). 음식은 우리 몸에 필수적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종이 되고 싶다면 음식에 지배받아서는 안 됩니다. 음식을 너무 사랑하여 음식에 지배당한다면, 결코 하나님의 유용한 종이 될 수 없습니다. 그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금식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spirit)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몸 또한 "그리스도의 지체"(6:15)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어떤 부도덕한 목적으로도 몸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눈과 혀와 몸의 모든 부분이 주님만을 위해 사용되어야 합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몸에 주신 놀라운 약속이 있습니다 - 나는 오랫동안 이 약속을 내 자신을 위해 선포해 왔습니다: "몸은 주님을 위하고 주님은 몸을 위하십니다"(6:13). "주님, 내 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눈과 혀와 모든 것이 온전히 당신의 것입니다."라고 진심으로 고백한다면, 주님은 전적으로 당신의 몸을 위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이 그분을 섬기기를 원하시는 한, 당신의 몸이 그분을 섬길 수 있도록 건강하게 지켜 주실 것입니다. 심지어 질병으로부터도 지켜 주실 것입니다. 젊은이들조차도 기진맥진할 수 있지만, 주님께 몸을 드리는 자들은 독수리처럼 하늘을 날아오를 것입니다.

우리 몸은 또한 성령의 전입니다(6:19) - 따라서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몸을 더럽혀서는 안 됩니다. 당신이 교회 건물 안에서 흡연, 음주, 간음을 하지 않는다면, 당신의 몸으로도 그런 것들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 하나님의 진정한 성전은 어떤 교회 건물이 아니라 당신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20절).

이 9개의 구절(6:12-20)은 성경에서 우리의 몸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그리고 우리 몸을 위한 하나님의 공급에 관한 가장 놀라운 부분 중 하나를 구성합니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건강한 몸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 주제에 대해 묵상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치유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건강이 치유보다 낫습니다. 예방이 치료보다 낫습니다. 폭식하고 병든 후에 하나님께 치유를 구하는 것보다 적게 먹고 건강해지는 것이 낫습니다. 주님께 당신의 치유자가 되어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당신의 건강이 되어 달라고 구하십시오. 당신의 몸을 온전히 그분께 드리고 "주님, 당신은 제 몸의 건강이십니다. 주님께서 제가 이 땅에서 살면서 주님을 섬기기를 원하시는 한, 저는 기꺼이 섬길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친히 제 몸을 사셨기에, 제 몸으로 당신께 영광을 돌리겠습니다. 제 몸은 오직 당신께만 속합니다."라고 기도하십시오. 우리 몸은 마치 다른 누군가, 곧 주님께서 구입한 집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 집을 비우고, 이제 정당한 주인이 온전히 차지하도록 해야 합니다. 다른 누군가가 구입한 집에서 계속 사는 것은 죄입니다. 당신의 몸을 온전히 주님께 맡기십시오.

부도덕에서 도망쳐라

부도덕의 유혹을 극복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 바로 6장 18절에 언급된 "그것에서 도망쳐라"입니다. 성경은 현실적이며 성적인 유혹이 얼마나 강력한지 잘 알고 있습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에게 유혹을 받았을 때, 그는 도망쳤습니다. 만약 당신이 도망치지 않고 가만히 서서 유혹에 노출된다면, 반드시 넘어질 것입니다 - 언젠가는. 대화, 우정, 또는 관계가 위험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발견한다면,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단 하나뿐입니다 - 당신의 삶과 사역을 망치고 싶지 않다면, 돌아서서 도망치십시오. 거기서 벗어나십시오. 이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당신은 스스로를 파멸시킬 수 있으며 - 도망치지 않은 것을 영원히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이 문제는 그만큼 심각합니다.

이 맥락에서, 바울은 부도덕에서 도망치는 한 가지 방법으로 결혼에 대해 이야기합니다(7:2). 결혼하지 않음으로써 주님을 섬길 시간을 더 많이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부도덕이 만연하기 때문에 (그리고 오늘날은 더욱 그렇습니다)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7:2)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이유로 결혼하는 것은 매우 영적이지 않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기서 결혼이 당신을 부도덕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십니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영적인 사람(성령보다 더 영적인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절제할 수 없다면 불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7:9) 대부분의 남자들이 십 대 후반에 이르면 성욕에 불타는 것은 정상적인 현상이며, 대부분은 그것을 극복할 절제력이 없습니다. 따라서 피할 수 있는 유혹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보다는, 결혼을 해서 불타는 욕정을 피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성경은 매우 실용적입니다. 숲이나 수도원에서 살아야 하는 은둔자적인 삶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 가운데서 살며, 인류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결혼해야 합니다. 에녹에 대해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아들딸을 두었다”(창 5:22)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정상적인 결혼 생활을 하며 아들딸을 낳고, 동시에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결혼한 사람들은 결혼하는 순간 자신의 몸에 대한 권한을 잃는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나는 인도 문화에서 여성이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들에서는 이 점에 대한 가르침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이 점에 대해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는데도 설교자들은 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남편은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해야 하고, 아내는 남편에 대한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7:3,4). 여기서 남편과 아내 사이의 성관계는 의무라고 불립니다. 이는 결코 부끄러워할 일이 아닙니다. 요리하고, 아이들을 돌보고, 가정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일하는 것만큼이나 의무입니다.

일단 결혼한 여성은, 자신의 몸에 대한 권한을 갖지 못합니다. 그 이후로는 그녀의 몸은 남편에게 속합니다. 결혼 전에는 그녀의 것이었지만, 이제 그녀의 몸은 항상 남편의 것입니다. 남편들은 이 말을 듣고 기뻐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남편은 자신의 몸에 대한 권한이 없지만 아내에게는 있습니다. 이는 성관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 남편은 언제든지 그 부분에 대한 의무를 인식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또한 당신의 눈과 혀는 이제 아내의 것이 되었습니다. 예쁜 여자를 볼 때, 당신의 눈이 아내의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른 여성과 이야기할 때, 당신의 혀는 이제 아내의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물론 여성과 이야기할 수는 있지만 - 경솔하거나 추파를 던지는 식으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심지어 설교자들과 목사들 사이에도 숨겨진 부도덕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가 듣는 소문은 빙산의 일각일 뿐입니다. 숨겨진 것은 훨씬 더 많습니다. 하지만 이 부도덕은 어디에서 시작될까요? 그것은 마음과 방황하는 눈에서 시작되며, 위험한 친구 관계에서 도망치지 않을 때 시작됩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바울처럼 어떤 사람들을 독신 생활로 부르실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신의 은사가 있으니”(7:7)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독신으로 지내라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극소수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 독신으로 지냈습니다. 그토록 많은 여행을 하면서 가정을 꾸려 나갈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습니다. 오늘날에는 24시간도 안 되어 지구 반대편까지 여행하고 똑같이 빨리 돌아올 수 있지만, 바울 시대에는 50킬로미터를 여행하는 데도 하루 종일 걸렸습니다. 그러한 사도가 넓은 사역을 감당한다면, 가정을 꾸리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나 바나바 같은 사도들은 독신으로 지냈고, 다른 사도들은 아내와 함께 여행했습니다. 바울이 독신 생활을 장려한 또 다른 이유는 박해 때문이었습니다. 박해 시대에는 기혼 남성이 더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남자가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좋다”라고 말한 것은 1세기에 바로 그런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상황이 있을지 모르지만 - 그런 경우는 드물며, 아마도 1% 미만일 것입니다.

바울이 사람들에게 독신 생활을 권면한 주된 이유는 “주님께 온전히 헌신”(7:35)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당신이 이 세상에 살고 있다 해도,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7:31)고 말했습니다. 우리도 울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울음에 압도되어서는 안 됩니다. 울음을 그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 땅의 소유로 인한 기쁨에 너무 흥분하여, 그런 것들에 마음이 사로잡혀 주님을 섬기는 데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흥분을 빨리 극복하고 주님을 섬기는 일에 집중하십시오. 결혼했더라도 아내와 가정이 당신의 전부가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7:29). 주님을 위해 해야 할 일이 있으며, 주님을 향한 당신의 헌신은 흐트러지지 않아야 합니다. 주님이 당신의 삶에서 첫 번째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중요한 점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여러 번 이렇게 말합니다: "결혼하지 않은 자들에게 말하노니… 내가 말하노니, 주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내가 주께로부터 받은 명령은 없지만, 내 의견을 말하노라"(고전 7:8, 12, 25). 바울은 주님의 명령과 자신의 개인적인 의견을 구분했습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우리가 설교할 때 이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의견을 표현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개인적인 의견이며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라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해야 합니다.

7장 40절도 주목하십시오: "내 생각에는, 내가 하나님의 영을 소유한 줄로 생각하노라." 여기서 바울의 깊은 겸손을 살펴보십시오. 그의 의견은 분명 매우 경건했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오만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라고 말하는 사람보다 "나는 하나님의 영을 소유한 줄로 생각합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56년 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 누군가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라고 말할 때 주님께서 그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단지 자신의 생각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할 때, 나는 하나님의 영을 소유한 줄로 생각합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의 생각을 나타낼 가능성이 더 큽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

8장에서, 바울은 우리의 자유를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할 수 있는 일에 사용하는 것의 위험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당시 시장에서 팔리는 모든 고기는 신전에서 우상에게 바쳐진 후에 팔렸습니다. 그래서 이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채식주의자가 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신자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상이란 무엇인가? 얼굴이 새겨진 나무 조각일 뿐이다. 그 나무 조각 앞에 고기를 놓았다고 해서 무슨 상관이 있는가?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한 분 하나님만 믿기 때문에 이 고기를 감사하며 먹는다."

바울은 여기서 각 신자는 다른 신자의 관점을 존중해야 하며, 상대방을 자신의 관점에 따르도록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는 로마서 14장의 그의 가르침과 유사합니다.) 인도에서는 디왈리(힌두 축제) 때 이웃이 과자를 준다면, 그것이 우상 앞에서 먼저 바쳐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25-28절(MSG)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정육점에서 파는 것은 무엇이든지 먹으십시오; 모든 품목에 대해 ‘우상 숭배 검사’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결국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 ‘모든 것’에는 정육점에 있는 양고기 다리도 분명히 포함됩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 당신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는데, 가고 싶다면 마음껏 즐기세요. 앞에 차려진 것은 무엇이든 먹으십시오. 식사가 나올 때마다 그것이 윤리적으로 순수한 음식인지 주인에게 따져 묻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고 영성에도 해롭습니다. 반대로, 만약 주인이 이것저것이 아무개 신에게 제물로 바쳐졌다고 굳이 말한다면, 당신은 거절해야 합니다. 당신은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에 무관심할지라도, 그는 그렇지 않으며, 당신은 당신이 누구를 경배하는지에 대해 그에게 모호한 메시지를 보내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은 8장에서 이러한 문제들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1절). 지식은 사람을 오만하게 만들어, 그는 다른 사람을 얕보며 “당신은 지식이 없군요. 나무토막을 무서워하네요!”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에게는 사랑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사랑이 있다면, 그는 다른 신자들이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할 것입니다. 우상 숭배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오랜 시간 동안 나무토막을 신으로 여겼고, 그래서 양심이 그들을 괴롭힌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당신은 그런 배경이 없기 때문에 당신의 양심은 당신을 괴롭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너희의 이 자유가 약한 자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러므로, (바울이 말합니다)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다시는 고기를 먹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하지 아니하려 함이라”(8:9, 13).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이런 입장을 취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 시대에 적용해 봅시다. 성경은 포도주를 조금 마시는 것이 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술에 취해서는 안 된다고만 말합니다. 하지만 다른 신자가 당신이 포도주를 조금만 마시는 것을 보았다고 가정해 봅시다. 당신은 절제력이 있어서 포도주를 조금 마시는 것으로 그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경건한 형제인 당신이 포도주를 마시는 것을 보면, 그도 똑같이 합니다. 하지만 그는 당신처럼 절제력이 없어, 점점 더 많이 마시기 시작하여 술꾼이 되고 - 결국 지옥에 갑니다. 누가 그를 지옥으로 인도했습니까? 바로 당신입니다!! 그렇다면 경건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는 포도주를 조금이라도 마시는 즐거움을 자신에게 주지 말아야 합니다. 그는 (자기중심적인 신자처럼) "이것이 옳은가 그른가?"라고 자문하지 않습니다. 아니요. 그는 더 고차원적인 질문을 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지는 않을까?" 그래서 그는 평생 술에 손도 대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이러한 자기 부인이 어떤 영혼이 스스로를 파멸시키고 지옥에 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면, 경건한 사람은 기꺼이 그러한 자기 부인을 실천합니다.

이 원리는 다른 곳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집에 갔는데, 그 집의 남자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들어가지 않는 것이 최선입니다 - 그의 아내에게 유혹을 받을까 봐서가 아니라, 당신의 증거를 지키고 다른 사람들에게 본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당신은 완전히 순수할지라도, 다른 누군가가 당신의 본보기를 따라 죄에 빠질 수 있습니다 - 그리고 당신은 당신의 본보기로 그를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것들은 사소한 문제입니다 - 하지만 사랑의 원칙에 따라 산다면, 당신은 항상 다른 사람들을 염려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은 이방인들이 사는 이기적인 방식입니다. "네 형제를 넘어지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이니라"(8:12).

9장은 자유에 대한 주제입니다. “나는 사도가 아닙니까? 내가 왜 다른 사람들처럼 일해야 하며, 왜 독신으로 지내야 합니까?” 바울을 제외한 모든 사도들은 기혼자였습니다(9:5). 따라서 어떤 교회가 주님을 전임으로 섬기려면 독신이어야 한다고 가르칠 때, 대부분의 사도들은 그 교회에 들어갈 자격이 없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기혼자였기 때문에 그런 교회에 들어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만으로도 그런 가르침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 자신도 교회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면, 그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어떤 교회들은 주님을 섬기려면, 세속적인 직업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바울과 바나바도 세속적인 직업으로 생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자격이 없습니다(9:6). 베드로와 요한은 다른 신자들이 준 선물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스스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따라서 당신은 세속적인 직업으로 생계를 유지하거나, 다른 신자들의 지원을 받는 사도가 될 수 있습니다. 사도로서 당신은 기혼자일 수도 있고 미혼일 수도 있습니다. 결혼 여부와 세속적인 직업 여부는 사도직에 대한 결격 사유가 아닙니다.

그런 다음 바울은 주님의 종들을 지원하는 주제로 넘어갑니다. 하나님은 “곡식을 타작하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9:9)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구약성경의 율법이었습니다. 소가 곡식을 타작할 때, 이기적이고 마음이 완악한 농부들은 소의 입을 막아 곡식을 먹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바울은 “너희는 하나님께서 소에게만 관심 있으시다고 생각하느냐? 이 말씀은 우리를 위해서도 기록된 것이니라”(9:10)라고 말합니다. 이는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자신과 가족을 부양할 수 있도록 우리가 재정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우리가 너희에게 영적인 것들을 뿌렸은즉, 너희에게서 물질적인 것을 거두는 것이 지나치겠느냐?”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영적인 양식을 공급하는 사람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해야 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주님의 종이 가족을 위한 땅과 부동산을 사려고 다른 사람들에게서 돈을 받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니요. 바울은 주님의 종이 가족과 함께 단순하게 생활하기 위한, 자신의 필요를 위해 돈을 받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정하신 이 규정을 많은 설교자들이 자신을 위해 돈을 버는 데 이용해 왔습니다.

"주께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복음으로 먹고 살아야 한다고 명령하셨습니다"(9:14).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자신의 사역으로 유익을 얻는 신자들에게서 선물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갈 6:6). 나는 이 부분에서 기독교 집단의 두 가지 극단을 발견합니다. 한쪽 극단에는 이 가르침을 이용해 자신을 위해 많은 돈을 버는 설교자들이 있습니다 - 그리고 종종 그들보다 훨씬 가난한 신자들로부터 돈을 받기도 합니다. 이는 매우 부끄러운 일입니다. 다른 극단에는 인색하고, 자신들에게 꾸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재정적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이 원리를 가르친 바울은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여러분이 나를 위해 이 일을 하도록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고린도 사람들에게서 돈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나는 내 손으로 먹고 사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누구에게서 돈을 받을지 매우 분별력 있게 판단했습니다. 그는 빌립보 교회에서 돈을 받았습니다(빌 4:14-18). 그러나 고린도, 에베소, 데살로니가의 그리스도인들에게서는 단 한 푼도 받지 않았습니다(고후 11:7-9; 행 20:33, 34; 살후 3:7-9). 바울은 “어떤 믿는 사람에게서도 돈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규칙이나 “모든 믿는 사람에게서 돈을 받아야 한다”는 규칙에 따라 살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바울에게 선물을 줄 때마다 바울은 그것을 받을지 말지에 대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했습니다. 모든 참된 하나님의 종도 이와 같이 할 것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한 데에는 아주 타당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선, 그는 “복음을 값없이 전하고 싶어서 그렇게 합니다”(9:18)라고 말합니다. 복음을 듣는 사람들은 복음을 듣기 위해 돈을 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평생 동안, 내가 주최했던 모든 공개 집회에서 나는 항상 헌금을 받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 군중 속에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었고, 불신자들은 복음을 듣기 위해 단 한 푼이라도 내야 한다고 느껴서는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사도들의 관행이었습니다 - 그들은 어떤 집회에서도 헌금을 받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인도에 있는 모든 교회에서도 초창기부터 이 관행을 지켜왔습니다 - 왜냐하면 우리 신자들이 믿지 않는 친구들을 우리 교회로 데려와 복음을 들려주기 때문입니다. 오직 믿는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사역을 지원할 권리가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권리가 없습니다(요삼 7절 참조). 믿지 않는 사람은 마지막 날에 주님께 "주님, 제가 주님의 사역을 지원하기 위해 돈을 드렸고 주님의 종들이 그것을 받았는데 어떻게 저를 지옥에 보내실 수 있습니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단체와 설교자들이, 거듭났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사람들에게서 돈을 받습니다. 만약 당신이 그런 설교자라면, 주님께서 그날 당신에게 “내 자녀가 아닌 사람에게서 왜 그 돈을 받았느냐?”라고 물으실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서 돈을 받지 않은 또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의 사도직에 의문을 제기했고, 바울은 그의 사역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결코 돈을 받지 않았습니다. 이는 모든 설교자가 취해야 할 입장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 후에, 자신도 결국 자격을 박탈당하지 않도록 자신의 몸을 훈련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고전 9:24-27). 솔로몬은 성경 세 권을 썼지만 결국 지옥에 갔습니다. 이는 모든 설교자에게 경고가 됩니다. 많은 교회를 세우고, 성경을 쓰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그토록 많은 훌륭한 설교를 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자격을 잃을까 봐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육신의 정욕을 다스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그토록 많이 사용하셨다고 해서 반드시 그분의 나라에 데려가실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바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역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주로 보십니다.

경고와 지침

10장에서, 바울은 같은 주제를 계속해서 다루며, 어린 양의 피로 구속을 받았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셔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신 60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의 예를 들어 신자들에게 경고합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멸망했습니다. 바울은 이 말씀이 우리에게 본보기로 쓰였기 때문에 당신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10:6). 또한 우리는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결코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라"(10:13)는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든 시험은 결코 우리 삶에 닥쳐올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모든 유혹을 이겨내고 모든 시련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줍니다. 어떤 시련이나 유혹도 자신에게 너무 힘들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사실상, 하나님이 약속에 신실하지 않으시고 그분은 거짓말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유혹에는 피할 길이 있습니다 –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이겨낼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10장 31절에는, 성경이 침묵하는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는 훌륭한 지침이 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어떤 문제에 있어서든 하나님의 뜻에 의심이 들 때마다,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보십시오, "내가 이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할 수 있을까?" 만약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할 수 없다고 느낀다면, 하지 마십시오. 이 구절은 우리가 평생 살아가야 할 원칙이 되어야 합니다.

11장은 두 가지, 즉 머리를 가리는 것과 떡을 떼는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왜 남자는 교회에서 기도하거나 예언할 때 머리를 가려서는 안 되고, 여자는 머리를 가려야 합니까?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그리스도는 모든 남자의 머리이시요 남자는 여자의 머리입니다"(11:3). 그리스도께서 남자의 머리이시고,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가려져서는 안 되므로, 남자는 머리를 가려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남자는 여자의 머리이며, 교회 안에서 남자는 가려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자는 머리를 가려야 합니다. 더 나아가,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요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11:7). 하나님의 영광은 교회 안에서 가려져서는 안 되므로 남자는 머리를 가려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며 - 남자의 영광은 가려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남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음으로써 증거하는 것이요, 여자가 머리를 가림으로써 증거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머리에 모자를 쓰는 사제는 머리를 가리지 않는 자매만큼이나 잘못입니다.
  2. “여자가 긴 머리를 하면 그것은 그녀에게 영광이 되느니라”(11:15). 모든 여자는 긴 머리가 자신의 아름다움(영광)의 일부라는 것을 압니다. 그렇다면 여자의 영광(그녀의 머리)은 교회 안에서 가려져야 할까요? 남자와 여자의 영광 모두 가려져야 합니다.
  3. “여자는 천사들 때문에 머리 위에 권위의 상징을 가져야 합니다”(11:10). 여성이 머리를 가림으로써, 그녀는 남성의 권위, 즉 남편이나 아버지에게 복종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녀가 고아나 과부일 경우에는 교회의 장로들에게 복종합니다. 그녀는 타락한 천사들처럼 반항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서구의 영향력이 인도 도시 교회들에 들어와 이 가르침을 부패시켰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결론지었습니다, “이 문제로 많은 논쟁이 벌어지려 한다면, 나는 하나님의 모든 교회가 이것을 실행하고 있다고만 말할 것입니다, 나는 이 문제로는 여러분과 논쟁하지 않을 것입니다”(11:16).

그러나 이 구절에서 여성들이 교회 모임에서 기도하고 예언할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교회에서 여성들이 하지 말아야 할 일은 가르치는 것과 장로가 되는 것입니다(딤전 2:12). 하지만 여성들은 예언할 수 있고 (또한 예언해야 하며) – 다시 말해,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고 위로하고 세워주는”(고전 14:3)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눌 수 있습니다.

이제 주님의 만찬(11:23-34)에 대한 주제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주님의 만찬에 참석할 때 우리는 주님의 죽음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몸이 찢기시도록 내어주셨음을 증언하며, 우리도 그분처럼 깨지기를 원한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른 누구도 빵을 떼어 우리 입에 넣어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깨지기를 원하는지는 오직 우리 자신만이 결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빵을 직접 떼어야만, 그 상징이 정확해집니다. 또한 우리는 이 한 빵에 참여하는 우리 모두가 한 몸, 곧 그리스도의 몸임을 증거합니다(10:17). 그러므로 이것은 주님과의 언약과 동료 신자들과의 연합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과 수직적인 교제를 나누지 않고, 동료 신자들과 수평적인 교제를 나누지 않는다면, 우리가 빵을 떼는 것은 거짓이 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누군가에게 원한을 품고 있다면, 빵을 떼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우리가 빵을 떼면, 우리는 병들게 될 것입니다.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병들고, 심지어 영적으로 죽을 수도 있습니다(11:30). 그러므로 우리는 빵을 떼기 전에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스스로를 바르게 판단해야 합니다(11:31).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은사

12장에서, 우리는 성령의 은사에 대해 읽습니다. 여기서 은사는 지역 교회(그리스도 몸의 지역)의 기능과 관련하여 나타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은사에 대해 생각하지만, 그것이 모든 곳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지역적으로 표현하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잘못된 길로 가게 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더 잘 섬기기 위해 성령의 은사를 구해야 합니다(눅 11:5-13).

많은 사람들이 12장의 전반부(은사에 관한 내용)는 강조하지만, 후반부(그리스도의 몸에 관한 내용)는 강조하지 않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후반부를 강조하고, 전반부를 무시합니다. 그들은 마치 11장의 후반부는 강조하면서, 전반부는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하며) 불순종하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성령의 어떤 은사의 행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항상 그것을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지역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한 표현을 세우는 것이라는 맥락에서 보아야 합니다. 12장 13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보편적인 몸, 곧 전 세계적인 교회에 대해 말합니다(그가 "우리"라는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2장 27절에서는, 고린도 교회에서의 그 몸의 지역적인 표현에 대해 말합니다(그가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다"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우리 몸의 다른 지체들과 똑같이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작용합니다. 아무도 귀나 눈처럼 몸의 중요한 지체가 되기를 원해서는 안 됩니다. “온몸에 눈 하나뿐이거나, 온몸에 눈만 있다면 듣는 곳은 어디겠느냐? 온몸에 귀만 있다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겠느냐?”(12:17). 코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은사를 탐내거나 부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누군가를 눈이나 혀로 만드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혀처럼 보이는 지체가 아니라 심장, 간, 신장처럼 보이지 않는 지체가 되기를 원하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모든 보이지 않는 지체들은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합니다. 우리 몸의 어떤 부분들은 발바닥처럼 단단하여 혹독한 환경에도 견딜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부분들은 눈처럼 약하고 매우 예민하며 쉽게 다칩니다. 먼지 한 알이라도 눈에 들어가면 우리는 계속해서 불편함을 느낍니다. 하지만 발이 먼지로 덮여 있어도,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또한 몸의 어떤 지체는 매력적이지만, 어떤 지체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 우리는 그것들을 숨깁니다.

교회에서도 강단에 자주 오르는 설교자처럼 눈에 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를 혀와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의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은 강단에 서지 않습니다. 그들은 설교자를 위해 은밀히 기도하는 "기도자"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입이 말할 수 있도록 피를 펌프질하는 심장과 같습니다. 두 지체는 동등하게 중요합니다. 입은 심장이 피를 펌프질하지 않으면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만일 입을 열어 음식을 먹지 않으면 심장은 죽습니다. 심장은 입에 의존하고 입은 심장에 의존합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어떤 성령의 은사를 받았든, 당신에게는 형제가 필요하고 형제도 당신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 형제는 아무도 보거나 알아차리지 못하는 심장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지체일 수 있고, 당신은 눈이나 손처럼 눈에 보이는 형제일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많지만, 그 은사들 사이에는 경쟁이 없고 오직 협력만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도가 되고, 어떤 사람은 예언자가 될 수 있으며(고전 12:28), 어떤 사람은 방언을 말하고, 어떤 사람은 병 고치는 은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은사는 동등하게 필요합니다. 누구도 다른 사람의 ‘은사’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나는 네가 필요 없어. 나는 모든 것을 혼자서 할 수 있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12:21).

당신의 왼손이 오른손을 질투하는 적이 있습니까? 오른손은 중요한 편지를 모두 쓰고 수표에 서명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왼손이 그것을 질투하여 "아, 중요한 일은 항상 오른손이 하는 거구나. 나는 중요한 일을 한 번도 못 하잖아."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까? 그러다 어느 날 오른손이 다쳐 깁스를 하고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때 왼손이 "아, 이제 그 일들을 할 수 있겠구나."라고 말할까요? 지금 왼손이 수표에 서명한다면, 그것은 당신의 서명처럼 보이지 않을 것이고 은행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왼손은 실제로 무엇을 합니까? 오른손을 빨리 건강하게 회복시켜서 수표에 서명할 수 있도록, 가능한 모든 것을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그렇게 기능해야 합니다. 당신보다 더 큰 은사를 가진 다른 형제를 볼 때, 아무리 열심히 노력하더라도 그의 사역을 따라 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 왜냐하면 그에게 그 은사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단 한 사람(오른손)이 모든 수표에 서명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 질투나 경쟁이 있는 것은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가끔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합니다, "잭 형제님, 왜 몸 안에서 거룩함과 균형만을 늘 강조하십니까?" 나는 이런 질문으로 답합니다. "왜 신장은 혈류를 정화하고 그 안의 화학 물질들을 균형 있게 조절하는 일만 하고 다른 일은 하지 않을까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기능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몸의 모든 기능은 아니지만, 중요한 기능입니다. 신장이 기능을 다하지 못하면 죽게 됩니다. 하지만 신장은 손과 입 없이는 기능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필요합니다. 전도는 마치 손이 감자를 입에 넣는 것과 같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을 그리스도께 데려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할까요? 아닙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 그리스도께 나아오면, 다른 누군가가 이어받아야 합니다. 감자는 이빨로 씹힌 후 뱃속으로 들어가 산을 붓고 분해되어야 합니다. 마침내 여러 과정을 거쳐 인체의 일부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새 신자도 분해되고, 작아지고, 겸손해지고,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맡은 사명에 합당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그는 그리스도의 몸의 효과적인 지체가 됩니다.

하지만 감자가 입이나 뱃속에만 남아 소화되지 않는다면, 당신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을 토해낼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회심자를 교사와 예언자와 목자에게 넘겨야 합니다(엡 4:11). 이 사역들 중 어떤 것이 가장 필요할까요? 은사에는 서열이 있습니다. 사도, 예언자, 교사가 각각 첫째, 둘째, 셋째입니다(고전 12:28). 하지만 모든 은사는 동등하게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다른 사람의 사역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들과 협력하십시오. 이 위대한 진리를 깨닫게 되면, 모든 시기와 경쟁, 불안에서 완전히 해방될 것입니다.

13장은 12장과 14장 사이에 있습니다(둘 다 성령의 은사에 관한 내용입니다). 때때로 신자들은 이 사실을 잊습니다. 성령의 은사를 무시하는 많은 신자들이 13장에 대해 많이 이야기합니다. 11장에서 13장으로, 그리고 13장에서 15장으로 건너뜁니다. 왜 그들은 그 사이의 장들, 즉 12장과 14장을 빼놓을까요? 그들은 성령의 은사를 반대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신자들에게 “더욱 뛰어난 방법”(12:31)으로 성령의 은사를 행사하는 방법을 보여주기 위해 13장을 썼습니다. 사랑 없이 은사를 행사하는 것은 마치 절연체 없이 전선을 사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죽음을 초래할 것입니다. 은사는 강력하며, 사랑으로 행사되지 않으면 사용하는 사람은 물론 다른 사람들도 (영적으로) 죽일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중시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13장을 깊이 묵상하는 것입니다. 가장 초자연적인 은사(기적, 치유, 예언, 방언)와 심지어 희생과 성경 지식조차도, 이 모든 것이 하나님에 대한 열렬한 사랑과 다른 사람에 대한 열렬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여전히 당신을 무가치하게 만들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를 겸손하고, 오래 참고, 사려 깊고, 이타적이고, 용서하는 등의 사람으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13:4-7). 또한 우리가 많은 문제에 대한 완전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하게 해 줄 것입니다(13:12). 성령의 은사를 사용하면서 이러한 모든 자질을 나타내지 않는 사람들은 사실상 어린아이이고 미숙합니다(13:11). 그들은 성령의 은사를 사용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교훈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성령으로 세례받았다고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러한 상태에 있습니다.

14장은 특히 교회에서 방언과 예언의 은사를 어떻게 행사해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14장 5절에서, 바울은 “나는 너희 모두가 나처럼 방언을 말하기를 원한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방언을 말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7:8에서도, 바울은 “나는 너희 모두가 나처럼 독신으로 지내기를 원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모든 신자가 독신으로 지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14:5을 인용하는 많은 신자들은 이 구절을 7:8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두 구절 모두에서, 바울은 단지 개인적인 소망을 표현했을 뿐, 하나님의 명령을 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독신으로 살도록 부르심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방언을 말하지 못한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14:5을 보면 고린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방언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방언을 하도록 심리적으로 압박을 받으면, "방언하는 무리"에 받아들여지기 위해 스스로 "방언"을 하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이 범주에 속합니다. 그 증거는, 그 사람들이 말하는 방언이 참된 방언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결과인 경건한 삶으로 세워지는 것이 그들에게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14:4).

동시에, 고린도전서 14:39에서는 "방언 말하는 것을 금하지 말라"는 명령도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계에는 이 문제에 대해 두 부류의 집단이 있습니다: 한 부류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방언을 말하라고 촉구하는데, 이는 14:5과 12:30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어긋납니다. 다른 부류는 누구에게도 방언을 말하는 것을 금지하며, 이는 14:39에 불순종합니다. 두 부류 모두 성경에 어긋납니다.

14장을 보면 방언의 은사가 오순절에 사도들이 방언을 말한 방식과 다르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오순절에는, 통역의 은사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방언으로 말했고 모든 사람이 통역 없이 언어를 이해했습니다. 이것은 듣는 사람들이 듣는 데서 일어난 기적이거나 사도들이 말하는 데서 일어난 기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14:5에서 "사람이 방언을 말하더라도 통역을 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말합니다. 통역하는 사람이 없으면, 자신이 통역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거나 잠잠해야 합니다(14:13, 27, 28). 오순절에서의 "방언"은 모든 듣는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이해하는 여러 다른 언어였습니다. 그러나 여기 14장에서의 방언은 (생각을 거치지 않고) 마음에서 흘러 넘치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도일 수도 있고, 도전을 주는 말이거나 격려의 말일 수도 있습니다(14:6). 더 나아가 "통역"은 번역과 같지 않습니다. 번역은 말 대 말입니다. 통역은 생각 대 생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 명의 다른 신자가 같은 방언을 통역한다면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지만 각자만의 언어로 표현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 모임에서는, (한 번에 한 명씩) 최대 두세 명만 방언을 말할 수 있으며, 만약 그렇게 한다면 각 방언은 누군가 통역해야 합니다(14:27). 사람들이 동시에 방언을 하거나 통역 없이 방언을 하는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교회입니다. 따라서 나는 그런 교회를 존중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오순절 교회와 은사주의 교회에서 발견되는 많은 관행들은 성경에 완전히 위배되며, 이전 세대에서 전해져 내려온 전통을 따르는 것에 불과합니다. 많은 교회가 방언을 금하는 반면, 어떤 교회는 조상들의 전통을 따릅니다. 우리는 두 집단을 모두 무시하고 오직 성경만을 따라야 합니다.

14장은 교회 모임에서 가장 중요한 은사는 예언의 은사임을 분명히 가르칩니다. 예언은 주로 미래를 미리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전체에서, 모든 선지자의 주된 메시지는 회개와 거룩함이었습니다. 가장 위대한 옛 언약의 선지자인 세례 요한은 미래를 예언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옛 언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미래를 예언하는 것은 옛 언약과 새 언약 모두에서 드물었습니다. (새 언약에서의) 예언은 주로 사람들에게 말하여 그들을 세우고, 격려하고, 그들에게 도전을 주고, 그들을 위로하는 것입니다(14:3에 분명히 가르친 바와 같이). 교회 모임에서는, 두세 명의 예언자가 먼저 말하고 나서, 다른 사람들은 자유롭게 예언할 수 있었습니다(14:29, 31).

15장은 부활에 관한 주제를 다룹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부활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확신시키려 했습니다. 지금까지 살았던 모든 사람의 몸은 언젠가 부활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부활과 그리스도인들의 상급의 날에, 모든 참된 신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겠지만, 모두가 같은 영광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해의 영광, 달의 영광, 별의 영광이 있습니다. 별과 별의 영광이 다릅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15:41,42). 이 땅에서 더 충실했던 신자들은 더 밝은 별과 같을 것이고, 덜 충실했던 신자들은 더 적은 영광을 누릴 것입니다 - 영원토록.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견고하고 흔들리지 아니하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가 되라”(15:58)는 권고를 받습니다.

16장에서, 우리는 바울이 동역자들에게 준 자유를 봅니다. 16:12에서, 바울은 아볼로에게 고린도에 가서 말씀을 가르치라고 권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아볼로는 그의 영 안에서 자유함을 느끼지 못해 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볼로에게 그가 자유롭게 갈 수 있을 때 언제든 가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비록 우리가 사도적 권위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우리가 서로에게 주어야 할 자유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예입니다. 어떤 강요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모두를 위한 한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하는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전 16:14). 우리가 이 말씀에 순종한다면, 결코 잘못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모두가 지역 교회를 세우는 데 기여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장 47
고린도후서

질그릇 속의 보화

어떤 교회의 사역이든 하나님께서 그 교회 지도자의 삶 속에서 행하시는 일에 크게 좌우됩니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서, 우리는 지도자가 타락하면 교회도 타락했고; 지도자가 신실하면 교회도 신실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세계 여러 지역의 교회들을 방문해 보면서 이러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지도자가 타협하면, 교회는 타협하는 교회가 됩니다. 지도자가 경건한 사람이라면 교회는 대개 경건합니다 - 왜냐하면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은 기분이 상하여 그러한 교회를 떠나고, 경건한 남은 자들을 남기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는 도시에 있는 지역 교회를 다루고, 고린도후서는 지역 교회를 이끄는 지도자의 내면 생활을 다룹니다. 고린도전서는 영적 은사, 교회 모임을 인도하는 방법, 떡을 떼는 것, 교회 안에서의 징계 등 여러 가지 문제를 다룹니다. 고린도후서는 교회를 이끄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준비시키시는지를 다룹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다른 어떤 서신보다 자신의 내면적 삶을 더 많이 드러냅니다.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바울이 사도로서 행하고 성취한 일을 읽습니다. 하지만 고린도후서에서는 하나님께서 바울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그에게 허락하신 모든 것을 읽습니다.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고린도후서를 묵상하여 하나님께서 그분의 사역을 위해 사람을 어떻게 준비시키시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바울의 사역이 효과적이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은사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내적 동행 때문이었습니다. 질그릇은 겉보기에는 화려하지 않을지 몰라도, 물이 담겨 있다면 빈 금잔보다 목마른 사람의 필요를 더 잘 채워줄 것입니다. 금잔처럼 화려한 성령의 은사도 있고, 질그릇처럼 매우 평범해 보이는 은사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그릇에 무엇이 담겨 있느냐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를 받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필수적이지만, 우리가 은사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은 우리의 내면의 삶입니다.

고린도전서는 은사를 강조하는 반면, 고린도후서는 그릇을 강조합니다.

고난을 통해 이루어지는 사역

고린도후서 1:1-8절에서, 우리는 바울이 어떻게 사역을 얻었는지 봅니다. 단순히 하나님께서 그에게 성령으로 기름 부으셔서가 아니었습니다. 성령으로 기름 부으심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통해 생수의 강이 흐르는 사역을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고린도후서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오직 성령의 기름 부으심만 이해하고, 그것이 모든 문제의 해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내면을 깨뜨리시는 일을 하시도록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반석이 침을 당했을 때 강물이 흘러나왔습니다(출 17:6; 시 105:41).

고린도후서 1:3, 4에서, 우리는 바울이 어떻게 사역을 얻었는지 간략하게 읽습니다. 그는 여기서 “위로(comfort)”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는 힘을 의미합니다(“요새(fort)”라는 단어에서 유래). 그래서 그 구절은 이렇게 읽힙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능력의 하나님이시여, 그분은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강하게 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의 환난 중에 주신 것과 같은 힘으로, 환난 중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강하게 하실 수 있게 하시는도다." 우리는 온갖 종류의 시련과 환난에 직면한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이기는 자가 되도록 도우려면, 먼저 우리 자신이 많은 시련과 환난을 겪어야 하고, 그 모든 것을 이겨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기도록 주시는 힘과 격려와 승리를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새 언약 사역입니다.

새 언약 사역은 기독교 서적을 공부하고 테이프를 듣고 설교를 준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에요. 우리는 은밀하게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선구자가 되기 위해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분은 모든 유혹을 겪으시고 이기셨기에 우리에게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변 사람들을 위한 작은 선구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내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같이 너희도 나를 따르라”(고전 11:1)라고 말해야 합니다.

만약 바울이 그의 삶에서 많은 시련과 고난을 겪지 않았다면, 비록 그가 성령의 모든 은사를 받았다 하더라도 결코 사역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 공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도 필요하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나는 “이 두 가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또한 많은 시련을 겪어야 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모든 시련을 이겨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새 언약의 종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들여 말씀을 연구해야 합니다. 또한 성령의 은사를 받기 위해 기도로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시련의 훈련을 통해 인도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효과적인 사역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치는 것 같이, 우리의 힘도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하니라”(1:5). 바울은 여기서 우리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도울 만큼 강해질 수 있는지 알려줍니다. 우리는 부모와 친척들에게 거부당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멸시받는 경험을 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재정적인 어려움과 심지어 질병까지 겪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건강은 하나님께서 주신 매우 유용한 선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데 필수적인 조건은 아닙니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라고 불렀던 질병을 가지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질병을 없애실 수 있었지만 결코 없애지 않으셨습니다. 디모데의 “가시”는 바울이 그를 위해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결코 고쳐주지 않으신 잦은 위장병이었습니다(딤전 5:23). 디모데는 평생 병 때문에 약을 먹어야 했습니다. 바울과 디모데는 신약 성경에서 가장 유능한 하나님의 종들 중 두 명이었습니다. 질병은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하나님을 더욱 잘 섬기도록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가시”를 통해 그들을 겸손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겸손한 자에게만 주시는, 하나님의 모든 것을 충족하는 은혜로 힘을 얻었습니다(고후 12:7; 벧전 5:5). 그러므로 건강과 질병 중 어느 것이 우리에게 가장 좋은지 결정하는 일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많은 돈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심어줍니다. 하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바울은 대부분의 시간 동안 돈이 거의 없었습니다. 때로는 그는 자신을 위해 음식이나 따뜻한 옷을 살 돈조차 없을 때가 있었습니다(고후 11:27). 세상 기업들은 직원들에게 이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제공하는데, 하나님은 왜 그분의 가장 위대한 종들에게 먹을 것도, 따뜻한 옷도 없이 살도록 허락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바울에게 어떤 상황에서든 만족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르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또한 바울이 세상 사람들이 먹을 것도 따뜻한 옷도 없을 때 어떤 심정인지 경험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려면, 다른 사람들이 겪는 일을 경험해야 합니다.

나는 결혼 초기에 돈이 거의 없어서, 몇 년 동안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그 시절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축복받은 시간이었습니다. 그 시절 우리는 단순하게, 우리의 형편에 맞게 살고, 결코 돈을 빌리지 않고, 누구에게도 빚지지 않는 법을 배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졌고, 남편과 아내로서 서로 더욱 가까워졌습니다. 그 시절에 배운 단순한 삶의 교훈은 47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안에 깊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아내와 나는 그 초창기 시절에 깊은 감사를 느낍니다. 재정적 어려움은 우리의 영적 교육에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거절, 오해, 거짓 고발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강하게 하시기 위해 사용하셨습니다. 그러한 시련을 겪지 않고서는 결코 효과적인 사역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편안하게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풍성한 사역을 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겪은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는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겪어 살 소망까지 끊어졌느니라”(1:8). 바울은 너무나 많은 환난을 겪어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이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글을 쓴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모든 세부 사항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의 사역이 단지 성경 공부와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만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그의 이야기를 조금 나누었습니다. 바울은 많은 시련을 겪어야 했고; 그가 여기와 11장에 언급한 것은 그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회복과 용서

2장에서, 우리는 바울이 앞서 징계했던 형제의 회복에 대해 읽습니다(고전 5장). 이제 바울은 “그를 지금 당장 받아주어라”(2:6-8)라고 말합니다. 그 형제는 교회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피했을 때 교훈을 얻었고, 세상이 얼마나 어두운지를 보았습니다. 그는 상황을 바로잡고 죄악된 행실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낙담하고 우울해하며 집에 혼자 앉아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를 회복시켜 달라고 교회에 요청했습니다.

모든 징계의 목적은 형제를 하나님과 교회와의 교제로 다시 인도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자녀를 징계하는 것은 자녀를 집에서 쫓아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나은 아들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아들이 다 자랐는데 반항적이라면, 아버지는 그에게 집에서 나가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아들이 (탕자의 비유처럼) 교훈을 얻고 나면, 아버지는 그를 집으로 맞아들일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너희가 그에게 어떤 것을 용서한다면, 나도 용서하노라”(2:10)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를 위한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탄에게 이용당하지 않기 위해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2:11).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고 사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해를 끼쳤는데 당신이 그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사탄은 당신의 삶을 파괴할 수 있습니다. 당신에게 해를 끼친 사람은 나중에 회개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잘못한 적이 없는 당신은 그를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옥에 갈 수 있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천국에 가고 잘못을 당한 사람은 지옥에 간다는 것은 불의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가 회개했는데 당신이 그를 용서하지 않으면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누구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당신을 용서하지 않으신다면,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여기 예수님의 말씀처럼, 당신이 누구라도 용서하지 않고 죽으면, 그 전에 얼마나 오랫동안 신자였는지와 관계없이 지옥에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어떤 해를 끼쳤든 즉시 용서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탄이 우리보다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는 그의 계략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2:11)라고 말합니다. 사탄은 항상 우리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합니다. 왜 사탄은 과거에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행했던 악한 일들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것일까요? 그가 당신에게 동정심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닙니다. 그는 이미 다른 사람을 붙잡아 당신을 해치려 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는 당신까지 붙잡으려 합니다! 그의 계략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모든 사람을 용서하십시오.

한번은 어떤 형제가 내게 와서 누군가가 자기에게 여러 가지 악한 일을 저질렀다고 불평했습니다. 나는 그에게 "그가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아니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데 아직 갈 길이 멀군요.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도 용서하셨으니까요."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56년 동안 신앙생활을 해 온 동안 많은 불신자들과 신자들이 나를 해치려 했습니다. 하지만 로마서 8:28은 이 모든 세월 동안 나에게 여과기와 같았습니다: 그들이 나에게 행하려 했던 악한 일들은 항상 나에게 유익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나를 더욱 그리스도와 닮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입니다(롬 8:29). 언젠가,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를 해치려 했던 모든 자들을 반드시 심판하실 것입니다(딤후 4:14). 하지만 우리의 의무는 그들을 모두 용서하는 것입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을 용서하는 데 도움이 된 것은 분노와 증오를 병으로 보는 것이었습니다. 죄는 가장 치명적인 병보다 더 나쁩니다. 누군가 나를 질투하거나, 미워하거나, 나 또는 내 사역을 해치려 한다면, 그는 병든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를 마치 암과 에이즈와 나병을 (모두 합쳐서) 앓고 있는 사람을 보듯이 바라봅니다. 이 세 가지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을 본다면, 그에게 화를 내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안쓰러움을 느끼실 겁니다. 하나님께서 내 눈을 열어 사람들을 이런 식으로 보게 하신 후로는, 그들을 용서하기가 쉬웠습니다. 심지어 그들이 낫기를 기도할 수도 있었습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가라앉힌다"(잠 15:1).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길입니다.

2:14의 바울의 간증,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우리를 승리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는 말씀은 수년 전 나에게 도전처럼 다가왔습니다. 특히 '항상'이라는 단어가 그랬습니다. 나는 그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지 궁금했습니다. 바울은 끊임없는 승리를 경험했고, 그러한 삶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승리의 행진을 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니요. 그는 하나님께서 항상 자신을 승리로 인도하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승리자였습니다. 그는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때때로 실수를 범하기도 했습니다. 말년에 그는 화가 나서 대제사장에게 소리쳤습니다(행 23:3). 하지만 그는 자신의 죄를 깨닫자마자 겸손하게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의 교제가 즉시 회복되었고, 끊임없이 승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기를 구함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시키는 교회를 세우고 싶다면,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개인적인 삶에서, 가끔이 아니라 매일 승리로 인도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당신을 승리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된 종은 이렇게 증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 곳에서나 항상 나를 이기게 하시고, 나를 통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바울이 가는 곳마다 전해진 것은 그리스도의 향기였지, 바울 자신의 향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바울이 죽음의 향기였습니다(2:16). 모든 사람이 완전한 복음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승리의 메시지를 듣고 기뻐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메시지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메시지가 자신의 죄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생명을 나타내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미워해 죽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돈에 대한 사랑, 명예에 대한 사랑, 가정에서의 패배한 삶이, 계속 승리해야 한다는 메시지에 의해 노출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그 메시지를 전하면 그들은 당신을 미워할 것입니다. 당신이 그들의 죄를 비추기 때문에 그들은 당신을 미워할 것입니다.

당신이 어둠 속에서 강도짓을 하는 사람에게 손전등을 비추면, 그는 당신을 미워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된 종은 하나님 말씀의 손전등을 사람들 마음 어두운 구석구석에 비춥니다. 죄를 사랑하는 자들은 그를 미워하고 거짓 선지자요 이단자라고 부를 것입니다. 그가 그들의 죄를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안전한 길을 더듬으며 헤매는 자들은 이제 길을 볼 수 있게 되었기에 그에게 감사할 것입니다. 따라서 빛에는 두 가지 반응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빛을 미워하고, 어떤 이들은 그 빛에 깊이 감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성령으로 채우시고, 우리를 통해 어디에서나 그분의 능력과 승리를 나타내십니다. 어떤 이들은 우리에게 감사할 것이고, 어떤 이들은 우리를 미워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각 사람의 진정한 모습이 드러날 것입니다.

2:17은 모든 그리스도인 사역자들이 귀 기울여야 할 말씀입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팔러 다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팔러 다닌다"라는 것은 돈을 받고 말씀을 파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는 다른 설교자들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돈을 버는 설교자들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은 인생의 마지막에 “나는 단 하루도, 돈을 벌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적이 없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채소 장사꾼이나 세상의 물건을 파는 사람들은 돈을 위해 물건을 팔러 다니게 하세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팔러 다니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값없이 섬기며, 우리의 봉사에 대한 선물이나 대가를 바라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값없이 주셨듯이,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값없이 베풉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참된 종의 위엄입니다.

새 언약의 종들

바울은 3장에서 새 언약의 종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새 언약의 종과 옛 언약의 종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옛 언약 시대에는, 호세아, 이사야, 에스겔과 같은 몇몇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방법을 배우고 그분의 메시지를 얻기 위해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구약성경의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의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 어떤 시련도 겪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하고 이해하고 그 율법을 백성에게 설명해 주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들은 연구하고 전파했습니다. 만약 당신의 모든 설교가 단지 연구의 결과일 뿐이라면, 당신은 옛 언약의 종입니다. 새 언약의 종은 연구만으로 사역을 얻지 못합니다. 그는 메시지를 경험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말합니다. 그는 "와서 들으라"라고 말하지 않고 "와서 보라"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3:5에서 "우리는 이 사역을 감당하기에 충분한 능력이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우리가 새 언약의 놀라운 사역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것을 스스로 만들어낼 능력이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충분한 능력은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새 언약의 종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자기 안에 있는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습니다. 그는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능력을 주시고, 그는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나눠 줍니다. 마치 가나의 종들이 새 포도주를 나눠 주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 종들은 예수님께 물을 가져다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포도주로 바꾸셨고, 그들은 그것을 나눠 주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제자들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께 가져다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것들을 불어나게 하셨고, 제자들은 그것들을 나눠 주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제한된 자원을 주님께 가져갑니다. 주님께서 그것에 기름을 부어 주시고, 축복해 주시고, 불어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섬겨야 할 방식입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이 아니라, 나누어주는 일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 심지어 설교조차도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말할 때, 우리는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전해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 사역자들이 하나님을 몇 년 동안 섬긴 후 낙담하고 우울하며 침울해집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신경 쇠약에 걸리기도 합니다. 이는 그들이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섬기려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준비시켜 주실 것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려면 육체적 건강까지도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여호와를 기다리는 자는 힘을 얻으리라. 젊은이라도 피곤할 것이나, 너는 독수리 같이 날개 치며 올라갈 것이라"(사 40:31)입니다. 우리의 충분한 능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재정적인 어려움에 처해 있더라도 "우리의 넉넉함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라는 이 약속을 신뢰하십시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하나님은 충분히 공급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새 언약의 종으로 삼으셨습니다. 새 언약 안에서, 우리는 문자(letter)의 종이 아니라 영의 종이 됩니다(3:6). 3:9에는 두 가지 사역, 곧 정죄의 사역과 의의 사역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정죄의 사역은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정죄감을 느끼는 사역입니다. 당신은 사람들이 죄책감과 정죄감을 느꼈기 때문에 당신의 설교가 훌륭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옛 언약의 사역이었습니다. 율법은 사람들을 정죄하고 끊임없이 "너는 부족하다, 너는 전에도 부족했다"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소위 부흥 집회라고 불리는 곳에서는 많은 설교가 그저 "너는 부족하다. 너는 나쁘다. 너는 나쁘다. 너는 나쁘다."라고 말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정죄받은 기분으로 앉아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 설교가 아닙니다. 기독교 설교는 사람들을 의와 영광스러운 삶으로 인도합니다; 사람들에게 죄를 깨닫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설교가 끝날 때쯤에는 그들을 일으켜 세우고, 치유하며, 구원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소망을 품고 돌아갑니다. 만약 당신의 설교가 사람들을 속박한다면, 당신은 옛 언약의 종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만약 당신의 설교가 사람들에게 정죄받은 기분을 느끼게 한다면, 그것은 옛 언약의 설교입니다.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는 대신 눌러버린다면, 그것은 옛 언약의 설교입니다. 새 언약의 설교는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고 소망을 줍니다.

3:13-18에서 바울은, 모세와 그리스도를 통해 새 언약을 옛 언약과 비교합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있을 때, 그의 얼굴에는 영광이 빛났습니다. 그가 산에서 내려올 때, 그는 그의 얼굴에 수건을 썼습니다. 출애굽기에서는 사람들이 그를 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그가 수건을 썼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또 다른 이유를 발견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수건 아래 모세의 얼굴에 있던 영광이 점점 약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얼굴에 수건을 썼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 영광이 점차 사라져가는 것을 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13절).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생활에서 그 영광이 점점 약해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50세 된 설교자들 중 일부는 25세였을 때는 하나님을 위해 불타올랐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돈과 죄, 그리고 다른 많은 문제들에 대한 태도는 그리스도와 같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옛 언약 사역의 주요 특징 중 하나입니다. 영광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새 언약 사역에서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얼굴에 수건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사생활에서 아무것도 숨길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얼굴에 수건을 쓰고 오시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새 언약에서는 이 수건이 벗겨지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주께로 돌이키면 수건이 벗겨질 것이요"(3:16).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예수님의 영광을 볼 때, 성령께서 우리를 점점 더 큰 영광으로 변화시키셔서 우리 안에 있는 그분의 영광이 날마다 증가하게 하십니다(18절). 다시 말해, 우리가 성령께 온전히 순종한다면, 우리 삶에 부어지는 기름부음은 몇 년 전보다 오늘 더 강해지고, 30년 전보다 훨씬 더 강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신실하지 않다면, 나이가 들면서 당신의 삶에서 영광은 줄어들 것입니다. 많고 많은 열심 있는 젊은이들이 결혼하자마자 타락합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날까요? 당신이 하나님의 뜻대로 결혼한다면, 당신의 열정과 영광은 독신일 때보다 훨씬 더 커질 것입니다. 하지만 아내나 가정을 주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되면, 그 영광은 줄어들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주님의 영광을 보는 것을 멈추고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어떤 형제들은 알려지지 않았을 때, 평범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삶에 엄청난 기름부음과 영광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사역이 확장되고 그들이 유명해지면서, 그들은 기름부음을 잃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더욱 걱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니면, 그들이 사역을 시작했을 때 돈이 매우 부족했고 돈을 매우 조심스럽게 사용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돈을 사랑하는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처럼 되었습니다. 그러자 영광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 삶에서 영광을 앗아가는 것은 매우 쉽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영광이 사라질 때, 모세처럼 그것을 가리려고 합니다. 하지만 당신의 삶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에서는 정반대여야 합니다. 영광이 더욱 커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부단히 살펴보고 항상 예수님의 영광을 보십시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보존될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3:18은 신약 성경 전체에서 성령의 사역을 가장 잘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삶에서 주님이 되실 때, 그분은 자유를 가져다주십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17절). 성령은 주로 죄의 힘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실 뿐만 아니라 돈에 대한 사랑, 말씀에 어긋나는 조상과 장로들의 전통, 사람들의 의견 등으로부터도 우리를 해방시켜 주십니다. 이것은 참으로 큰 자유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섬길 자유를 얻게 됩니다. 3:18에서, 성령께서 성경 안에서 예수님의 영광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고 말씀합니다(거울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 약 1:23-25). 어떤 사람들은 단지 설교를 준비하거나 교리를 확인하기 위해 성경을 읽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주로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영광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볼 때, 성령께서는 우리를 그 모양으로 변화시키십니다.

그 모양에는 그리스도께서 사역하신 방식에 있어서 그분을 닮는 것도 포함됩니다. 우리는 그분처럼 사역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섬기기 위해 어떻게 희생하셨는지 우리에게 보여주실 것이며, 우리도 주님을 섬기기 위해 희생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시도록 허락한다면, 우리의 삶과 사역은 근본적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는 새 언약의 종이 될 것이며, 그렇게 되기 위해 세속적인 직업을 그만둘 필요는 없습니다. 교회 안의 모든 형제자매는 새 언약의 종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4:1에서 자신의 사역을 계속해서 설명합니다.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은 것 같이, 이 직분을 받았으므로, 낙심하지 아니하노라." 낙심한다는 것은 낙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조차도 낙담하고 싶은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낙담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고 해서 이상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나도 낙담하고 싶은 유혹을 여러 번 받았습니다. 하지만 나는 바울처럼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사역을 생각하기 때문에 낙담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 낙담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지라도, 주님께 시선을 고정한다면 누구도 결코 낙담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은 4:2에서 “우리는 부끄러움 때문에 숨겨진 것들을 버렸고, 교활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였노라”라고 말합니다. 주님을 섬기고자 한다면 부끄러움 때문에 숨겨야 할 것이 당신의 삶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숨겨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을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서 바로 잡고 깨끗이 씻어야 합니다. 당신의 삶은 투명해야 합니다. 이것이 새 언약의 종이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건 중 하나입니다. 교활이란 무엇일까요? 당신이 "기도 편지"라고 부르는 것을 썼지만, 당신의 주된 목적이 자신이나 당신의 사역을 위해 사람들로부터 돈을 끌어내는 것이라면, 당신은 교활한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돈을 요청하는 편지”라고 부르십시오. 그리스도인 사역자들 사이에는 그런 부정직함이 많습니다. 사람들에게 돈을 요청해야 한다고 생각되면, 요청하십시오. 하지만 편지에 "거룩한"이란 칭호를 붙이지 마십시오! 이것은 교활함의 한 예일 뿐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우리 삶에서 그런 것들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판단하고 우리 삶에서 그런 것들을 깨끗이 씻어버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우리 자신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질그릇에 담긴 그리스도의 영광

그런 다음 바울은 복음이 무엇인지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 세상의 신) 사탄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하여 복음을 보지 못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가 이 땅에서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진정한 보물이라고 말합니다(6절). 하나님께서 창세기 1장에서 빛을 비추라고 명령하셨듯이, 우리 마음에도 빛을 비추셨습니다. 그리고 이 빛은 질그릇 안에 있습니다(4:7). 우리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는 모두 질그릇일 것입니다. 이 그릇의 유일한 매력은 하나님의 영광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은 물질적으로 부유했습니다. 그것은 세상적인 영광이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부를 자랑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약 성경에서, 하나님은 가난하고 인상적이지 않은 바울과 같은 사람을 사용하셨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사도 바울은 키가 4피트 11인치(약 150cm)밖에 되지 않았고, 대머리에 매부리코에 평생 병을 앓았습니다. 그가 일어서서 연설할 때, 그는 그다지 인상 깊은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뒤집어 놓는데" 사용하신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기름 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행 17:6). 바울은 실제로 세상을 "바로 뒤집어엎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이 죄를 지은 이후로 온 세상이 뒤집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약한 질그릇이었지만, 그 안에는 그리스도의 영광이 담겨 있었습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당신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영화배우처럼 단상에 서 있는 소위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에게 감명을 받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보여준 참된 하나님의 종에 대한 모습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금그릇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질그릇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 안에 많은 인간적인 한계와 약점이 있다고 해서 낙담하지 마십시오. 내면에 큰 영광이 있는지 확인하십시오. 즉,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양심으로 행하고 항상 성령의 기름부으심 아래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질그릇 속의 빛(4:6,7)은 기드온의 300명의 군사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들은 각자 질그릇을 들고 있었고, 그 안에는 빛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 300명은 하나님께서 32,000명의 더 큰 무리에서 선택하셨으며, 마지막 날에 이기는 자들의 예표입니다. 이 군사들처럼 사탄과 싸우러 나갈 때, 그들은 칼(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또한 질그릇 안에 빛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드온의 군사들은 빛이 비치도록 질그릇을 깨뜨리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항아리 안에 촛불을 넣으면 그 빛을 거의 볼 수 없지만, 항아리가 깨지면 빛이 비칩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생명이 비춰지기 위해 자신의 질그릇이 어떻게 깨져야 했는지 이야기합니다. 그는 절망하지 않고 고난과 혼란, 박해, 그리고 넘어뜨림을 당해야 했습니다(8-12절). 그리하여 그의 질그릇이 깨졌고, 사람들은 그에게서 빛(예수님의 생명)을 분명히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관심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 십자가의 길만이 생명의 길입니다.

밀알 하나를 땅에 심으면, 그 딱딱한 껍질이 깨집니다. 그때야 비로소 그 안의 생명이 드러납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도 ‘우리의 혼적인 인격과 육신’이라는 딱딱한 껍질이 있는데, 이 껍질이 깨져야 합니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우리에게서 비칠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통해 우리가 바로 볼 수 있는 원리입니다. 한 여인이 예수님께 향유 옥합을 가져왔을 때, 그 안에는 훌륭한 향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옥합이 깨지기 전까지는 집안의 아무도 그 향유 냄새를 맡을 수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외적인 삶이 깨지는 다양한 상황을 겪게 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 이상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에게 매우 똑똑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너의 그 욕망을 깨뜨리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영, 혼, 육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우리 영 안에는 엄청난 영광이 거합니다. 그러나 우리 혼의 삶은 그 영광이 빛나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 삶에 많은 깨짐을 허락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목적을 이루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4:10,11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오해하는 구절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자신의 삶에 물리적인 기적을 행하는 복음에 대해 듣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생명이 당신 안에 나타나기를 원한다면, 그 답은 이 구절들에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우리 몸 안에 지녀야 합니다. 이 "예수님의 죽으심"이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셨던 33년 반 동안처럼(요 6:38) 우리 자신의 뜻과 우리 자신을 위한 삶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반응하셨던 것처럼 삶의 상황에 반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이 그분을 악마라고 불렀을 때, 가룟 유다가 그분의 돈을 훔쳤을 때, 사람들이 그분에게 침을 뱉었을 때, 사생아(마리아의 아들)라고 불렀을 때, 모욕했을 때, 빼앗았을 때, 학대했을 때, 설교하지 말라고 했을 때, 회당에서 쫓아냈을 때, 그분은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그분은 인간적 명예, 위신, 평판, 존엄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뜻에 대해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당신과 나는 갈보리에서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에 아무런 참여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죄를 위해 죽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삶 속에는 그분의 지상 생애 동안 매일 계속된 죽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함께해야 할 죽음입니다.

왜 "예수님의 죽음"이라고 불릴까요? 예수님은 자기 자신과 이 세상의 것들에 대한 죽음의 길을 걸으신 첫 번째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인간적인 모든 것에 대해 죽으셨고, 그리하여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당신과 나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부름받았습니다.

바울은 4:17,18에서 “우리가 겪는 이 모든 환난은 매우 가벼운 것입니다. 이는 장차 이 환난을 통해 우리에게 들어올 영광이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영광은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계속 바라보고 보이는 것을 보지 않는”(4:18) 동안에만 우리 안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어떤 고난도 인간의 관점이 아닌 신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시련을 통해 우리 삶에 영광이 역사하고,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과 더 깊이 교제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격려받는 이유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사역을 얻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것만으로는 사역을 얻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새 언약 안에서 영적인 사역을 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설명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의 말을 들읍시다. 고린도후서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시는 사람의 내면의 삶을 묘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최고의 본보기로 주셨습니다. 또한 바울을 하나님의 종의 본보기로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장로를 임명하시고, 교회 징계를 다루시는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런 일들을 하는 모습은 보았습니다.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려는 야망

바울은 5:9에서 자신의 야망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모든 젊은이들은 야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잘못된 야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야망은 돈을 버는 것, 위대하고 유명해지는 것,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내는 것입니다. 바울 또한 회심했을 때 야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야망은 집에 있든지 떠나 있든지, 천국에 있든지 떠나 있든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5:9). 그는 천국에 가더라도 그의 야망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바로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도 지금 이 땅에서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야망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정직하게 말할 수 있을까요? 그것이 바로 진정한 영적인 사람의 식별 표시입니다. 그는 천국의 가치관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조화를 이룹니다. 그러한 사람은 천국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이 땅에서 가장 유능한 하나님의 종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 사역자들이 겪는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이나 천국에 맞춰져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천국에 간 후에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다면, 나는 당신이 천국에 갈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바울은 5:10, 11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야 합니다. 그것은 각 사람이 몸으로 행한 일에 따라, 그것이 선하든 악하든 보응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두려움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합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는 신자들만 그들의 신실함의 정도에 따라 심판받고 상을 받는 곳입니다. 이는 모든 불신자들이 심판받는 크고 흰 보좌와는 다릅니다(계 20:11,12). 언젠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서 우리가 평생 동안 행한 모든 것, 즉 행동, 말, 생각, 동기, 태도에 대해 평가를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많습니다 - 1년 365일, 다른 사람들을 축복할 수 있는 많은 기회, 돈, 지성, 그리고 다른 은사들. 우리가 인생의 여정의 마지막에 도달할 때, 우리는 이 은사들을 어떻게 사용했는지에 대해 평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 다음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지배한다”(5:14)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언급된 이 두 가지, 즉 주님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우리 삶의 원동력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이 주님을 위해 그토록 효과적인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그런 다음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우리 모두는 그분과 함께 죽었다는 위대한 진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5:14). 바울은 로마서, 고린도서, 갈라디아서에서 이 진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한 사람이 죽었으면,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특별한 계시였습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이에 대해 기록한 것을 우리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셨을 때,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리 모두는 그분과 함께 죽고 부활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분만을 위해 살 수 있습니다(5:15).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는 왜 죽으셨나요?”라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린도전서 15:3의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습니다.”라는 대답을 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답의 일부일 뿐입니다. 두 번째 부분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은 우리로 다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니라"(5:15). 우리가 자신을 위해 살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목적을 좌절시킵니다. 우리가 계속 죄 가운데 산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이용하고,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 사는 신자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온전한 목적을 실제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사탄의 목표는 하나님의 온전한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먼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게 하려고 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사탄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온전한 목적을 보지 못하게 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영원히 구원하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3과 고린도후서 5:15을 함께 살펴보면, 모든 죄의 뿌리는 자기중심성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을 위해 살기 때문에 죄 안에 삽니다. 당신이 자신을 위해 사는 한, 결코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나무의 뿌리가 잘리지 않는 한, 나무는 계속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뿌리(자기중심성)에 도끼를 꽂으면, 나오는 악한 열매(죄)를 계속 잘라낼 필요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표면적으로는 죄를 없앴지만, 그 뿌리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뿌리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한 결코 죄에 대한 승리를 거둘 수 없습니다. 단호하게 결심해야 합니다, "오늘부터 나는 결코 나를 삶의 중심에 두고 결정을 내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결코 나에게 어떤 유익이 될지에 따라 결정을 내리지 않을 것이다."

기독교 사역에서 "이것이 나에게 어떤 유익이 될까? 이것이 내 가족에게 어떤 유익이 될까?"라는 질문으로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세상의 모든 회심하지 않고 불경건한 죄인들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결정을 내립니다. 당신은 그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다만 그는 무신론자고, 당신은 교회에 다닐 뿐입니다. 하지만 내면은 둘 다 똑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그런 것(자기중심성)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코 자신에게 어떤 유익이 될지에 따라 결정을 내리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분의 나라와 그분의 목적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될지에 따라 결정을 내립니다. 그런 사람이 100명만 있어도, 인도를 뒤집어 놓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을 몇 명이라도 찾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살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5:15 같은 구절을 건너뛰고 5:17의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모든 것이 새것이 되었도다 곧 새 피조물이 되었도다"로 넘어갑니다. 하지만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지나갔거나 사라져야 했던 옛 것은 무엇입니까?"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은 사라졌습니까? 당신의 야망과 목표는 새롭게 되었습니까?

우주 최고의 초강대국의 대사

5:20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사이며, 우리는 너희에게 간청한다"라고 읽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사가 된다는 것은 엄청난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의 참된 자녀에게는 위엄이 있습니다. 심지어 매우 가난한 나라의 대사조차도 위엄을 지닙니다; 나라가 크고 강할수록 그 나라의 대사는 더욱 존엄할 것입니다. 인도에 있는 미국의 대사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세계 최고의 초강대국을 대표한다는 것을 알기에 얼마나 위엄 있게 처신하는지 상상해 보세요. 그는 천박하거나 품위 없는 짓은 하지 않을 겁니다. 사람들에게 돈을 요구하지도 않고, 조국의 명예를 더럽히는 짓도 하지 않을 겁니다. 미국 대사가 당신의 집에 찾아와서 자국을 도와달라며 돈을 달라고 부탁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셨나요?

정장을 입은 남자가 당신의 집 문 앞에 (혹은 텔레비전에) 나타나 "나는 미국 대사입니다. 우리나라에 돈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우리의 일을 위해 100루피(1,680원)만 기부해 주시겠습니까?"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당신은 사기꾼입니다. 당신은 미국 대사가 아닙니다. 미국 대사는 절대 그런 식으로 돈을 구걸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제 다른 사람이 당신의 집 문 앞에 (혹은 텔레비전에) 나타나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사입니다. 우리의 사역을 위해 돈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우리 사역을 위해 100루피만 기부해 주시겠습니까?"라고 말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당신은 그 말을 믿고 그에게 돈을 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당신은 미국 대사는 품위 있는 사람인 반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사는 거지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주에는 단 하나의 초강대국,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 나라가 있습니다. 미국 대사는 지상 최대의 초강대국을 대표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는 온 마음을 다해 겸손하게, 나는 우주 최대의 초강대국의 대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러한 대사의 품위를 가지고 처신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 일꾼들이 TV와 교회 집회, 기도 편지를 통해 돈을 구걸하는 품위없고 천박한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을 볼 때, 내 마음은 몹시 상합니다. 시편 50편 12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말하지 아니하리니, 세계와 그 안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참된 하나님의 종도 이와 같이 말합니다: "내가 주리고 궁핍하여도 네게 말하지 아니하고, 온 땅의 주인이신 하늘에 계신 내 주께 아뢰리이다."

대사는 항상 조국과 소통해야 합니다. 단 하루라도 조국과 단절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도록 부름받았습니다. 나는 인도에서 하나님의 종들이 우주 최고의 초강대국의 대사처럼 품위 있게 행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비록 가난하고 자전거만 타고 다닐지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런 그리스도인 사역자들을 얼마나 만나보셨습니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 사역자들은 품위 있는 거지일 뿐입니다. 항상 사람들에게 돈을 구걸하고 부자들을 찾아다닙니다. 이는 참으로 비극입니다.

기차나 버스를 타고 어디를 가든,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사라는 것을 항상 기억하십시오.

6:3-10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자신이 어떻게 처신했는지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역이 비난을 받지 않게 하려고 아무에게도 실족거리를 주지 아니합니다. 오히려 모든 일에 고통과 궁핍과 곤란과 매 맞음과 옥에 갇힘과 수고와 잠 못 이루는 것과 굶주림 가운데서 참음으로 자신을 추천하며, 항상 정결함과 오래 참음과 친절함으로 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치욕을 당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를 칭찬하고, 어떤 사람은 우리를 정죄합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에 대해 좋게 말하고, 어떤 사람은 우리에 대해 나쁘게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일에 예수 그리스도의 대사로 자신을 추천합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를 속이는 자라고 부르고, 어떤 사람은 우리를 하나님의 참된 종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죽는 자 같으나, 우리가 살아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고난을 겪지만 하나님의 때가 올 때까지 죽지 않을 것을 압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징계를 받지만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종종 슬퍼합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상처주기 때문이 아니라, 죄에 빠진 많은 사람들과 육신에 속한 많은 믿는 사람들을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 안에 우리의 기쁨이 있기에 항상 기뻐합니다. 우리는 물질적으로는 가난하지만, 영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부요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는 아무것도 없지만, 다른 의미에서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우리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은행 계좌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가진 것이 많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십니다." 이것이 바울이 살았던 방식이었습니다. 그는 '번영의 복음'을 믿지 않았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에게 마음이 좁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마음은 그들에게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6:11). 이것은 모든 하나님의 종에게 매우 중요한 자질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마음이 좁더라도, 우리의 마음은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활짝 열려 있어야 합니다. 에드워드 마컴의 시에서처럼,

“그는 나를 배제하는 원을 그었네 –

이단자, 반역자’라며 조롱의 대상이었지.

하지만 사랑과 나는 이길 재치를 가지고 있었네:

우리는 그를 끌어안는 원을 그렸지.”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그들의 원에서 배제할 때, 그들까지 포함하는 더 큰 원을 그리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바울의 마음은 넓었습니다. 자신의 교회 구성원이나 모든 면에서 자신과 의견이 일치하는 그리스도인에게만 마음이 열려 있다면,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백성에게 마음이 열려 있지 않다면 하나님을 향한 당신의 봉사는 심각하게 제한될 것입니다.

6:14에서, 우리는 믿지 않는 자와 균형이 맞지 않게 멍에를 같이 메지 말라는 경고를 받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소와 나귀를 함께 멍에 메지 말라는 법이 있었습니다(신 22:10). 우리는 믿지 않는 자와 사업 파트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속이거나 우리가 동의할 수 없는 다른 불의한 일을 하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일에서도, 당신과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과는 함께 일할 수 없습니다. 또한 믿지 않는 사람이나 당신의 가치관, 비전, 야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과 결혼한다면, 그것은 균형이 맞지 않는 멍에가 될 것입니다. 의는 불법과 함께할 수 없고 빛은 어둠과 교제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모든 동맹에서 분리되어야 한다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떨어져 있으라"(6:17). 우리는 세상의 믿지 않는 자들과 섞여 살지만, 그들과 동역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떤 교파의 교회 신자들 중에는 자신들의 지도자와 주교(감독)들이 회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그런 교회에 머물러 있습니까? 지도자가 거듭나지 않았다면, 성경은 그를 "마귀의 자식"(요일 3:10)이라고 부릅니다. 심지어 그가 대주교일지라도 말입니다! 마귀의 자식인 지도자에게 어떻게 복종할 수 있습니까?

성경은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만 있다고 말합니다 -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요일 3:10). 많은 신자들이 이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타협합니다. 어쩌면 당신도 목사님이 돈만 벌려는 사기꾼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런 목사님께 복종한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은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마 15: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구덩이를 피하고 싶다면 눈먼 지도자를 따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믿지 않는 자들과 함께 묶이지 말고…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떨어져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리라”(고후 6:14-18)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명령에 순종한다면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7:1에서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들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이 하자”라고 말합니다. 삶에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고 싶다면, 육과 영의 모든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당신을 더럽히는 외적인 더러움은 함께하는 교제로부터 오고, 내적인 더러움은 동기와 태도로부터 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를 깨끗이 해 달라고 간구할 영역이 아닙니다. 우리는 스스로 깨끗이 해야 합니다 - 끊임없이. 그리고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이것을 행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사람들의 눈앞에서 자신을 정결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앞에서 자신을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또한 친척이나 형제 등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거룩함은 온전해질 것입니다.

7:2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마음 속에는 여러분을 위한 공간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나를 위한 마음의 공간을 만들어주세요. 나는 여러분을 이용한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잘못한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 중 누구도 부패시킨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모든 종이 가져야 할 증거입니다.

7:10, 11에서, 바울은 첫 번째 서신에서 그들에게 주었던 매우 강한 책망을 언급합니다. 바울은 (죄 가운데 살고 있던) 한 사람을 교회에서 쫓아내라고 그들에게 요청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그 서신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바울은 서신을 통해 그들을 슬프게 했습니다(8절). 때때로 하나님의 종들은 우리에게 매우 강하게 말하기 때문에 우리가 슬퍼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슬픔은 잠시뿐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른 슬픔은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낳습니다(10절). 그리고 참된 회개는 항상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과 열심을 가져올 것입니다.

돈과 하나님

8장과 9장에서, 바울은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돈을 모으라고 그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사역을 위해 돈을 모으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하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근거로 바울이 사람들에게 돈을 모으라고 썼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사역을 위해 돈을 모으라고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돈의 단 한 푼도 직접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부유한 신자들에게 가난한 신자들을 돕기 위해 돈을 내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그 돈의 일부를 가져가지 않는 한 정당한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본보기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 단 한 푼도 쓰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필요를 위해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그는 돈이 부족할 때는 천막을 만들어 돈을 벌었습니다. 때로는 굶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기준을 낮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우주 최고의 초강대국의 대사였고, 배가 고프면 하나님 외에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종은 신자들 가운데 가난한 이들이 어디에 있는지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하며, (자신의 책임 하에 있는) 부유한 신자들에게 그들을 돕도록 권면해야 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우리는 예수님이나 어떤 사도 또는 하나님의 종이 자신의 사역을 위해 사람들에게 돈을 내달라고 요청한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께만 개인적인 필요와 사역의 필요를 말했습니다. 그들은 신자들에게 다른 가난한 신자들을 도우라고만 권했습니다.

바울은 이어서 예수님의 예를 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그분은 부요하신 분으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으니, 이는 그분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니라"(8:9).

우리 주님은 하늘에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이 땅에 내려오셔서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에 달려 모든 것을 빼앗기셨는데, 그것은 우리가 부요하게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은 어떤 사람들이 이 구절을 해석하듯이 우리 모두가 부요하게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영적으로 부유해졌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바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라고 권면합니다: "예수님의 본을 보십시오. 그분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셨습니다. 여러분은 그분의 제자이며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야 합니다. 여러분이 부유하다면 가난한 동료 신자들을 도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 장 전체의 맥락입니다. 그러나 돈을 사랑하는 많은 설교자들은 이 구절을 잘못 해석하여 똑같이 탐욕스러운 다른 신자들에게 부를 추구하도록 부추겼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성경 구절을 잘못 인용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하게 되신 것은 내가 부유해지기 위함이었다"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을 위해 돈을 쌓아두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런 식으로 번영 복음 숭배는 더 많은 추종자를 얻게 된 것입니다.

8:20, 21에서, 바울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이 돈을 분배할 때, 아무도 그를 불의하다고 비난하지 못하도록 투명하게 분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뿐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명예로운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큰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과 동역자들이 돈의 일부를 자기들의 몫으로 가져갔다는 비난을 받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도와 다른 형제를 보내어 그 돈을 예루살렘 교회로 운반하게 했습니다(18절). 교회에서 돈을 다룰 때는 적어도 두 명 이상의 좋은 증언을 가진 신자가 함께 처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9:6에서, 바울은 다시 헌금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는 우리가 헌금하는 데 인색하면 그에 비례하여 거둘 것이라고 말합니다. 씨앗을 조금만 뿌리면 수확이 적지만, 씨앗을 많이 뿌리면 수확이 많습니다. 많은 돈을 사랑하는 설교자들(특히 텔레비전 전도자들)은 이 구절을 인용하며 신자들에게 돈을 달라고 촉구해 왔습니다. 그런 설교자들은 순진한 신자들을 속이려는 장사꾼들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찾아온 부자 청년 관원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돈 없이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날 대부분의 설교자들이 그러하듯) "네가 가진 것을 팔아 돈을 내게 주라. 우리 사역에는 많은 필요가 있다. 나는 열두 제자와 그들의 가족들을 부양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돈이 아니라 그 청년을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부자 청년에게 "우리는 당신의 돈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영적으로 성장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러니 당신이 원하는 사람에게 돈을 주고 우리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라고 말하는 주님의 종들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교회에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바로 그 말을 합니다.

9:7에서, 우리는 “하나님은 즐겨 드리는 자를 사랑하신다”라는 말씀을 읽습니다. 옛 언약에서는, 10%(십일조)와 다른 헌금 등 얼마나 많이 드리는지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에서는, 기쁘게 드렸는지 마지못해 드렸는지 어떻게 드리는지가 중요합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헌금의 양이 아니라 헌금의 질입니다. 새 언약에서는, 어떤 교회를 세우느냐에 있어서도, 질만이 강조됩니다.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께 인색하고 구두쇠이기 때문에 영적으로 가난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일에 넉넉하고 풍성하십시오 – 먼저는 당신의 삶으로, 그리고 당신의 시간과 당신의 소유로 드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백 배로 갚아 주시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나는 독신이었을 때, 지출이 많지 않았고, 해군 복무 수입의 대부분을 하나님의 일에 드렸습니다. 나중에 결혼했을 때는 재정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단 한 번도 빚진 적이 없습니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돈을 빌린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아 주시고 내가 이전에 드린 것을 갚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경험을 바탕으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풍성하게 드리는 법을 배우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재정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하지만 지혜롭게 드리라는 경고를 드리고 싶습니다. 돈을 요구하는 설교자들에게는 돈을 주지 마십시오. 그리고 사치스럽게 돈을 쓰는 설교자들에게는 절대 주지 마십시오. 그들은 당신의 돈을 낭비할 것입니다.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께서 가장 필요하다고 보여 주시는 곳에 드리십시오.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부유한 사람들에게 주지 마십시오. 진정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필요한 때에 풍성한 수확을 주심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토록 풍성하신 분이신데, 하나님의 자녀들이 빚을 지거나 끊임없이 재정 문제에 직면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닐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그런 문제에 직면하는 이유는 하나님께 대해 부유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심은 대로 거둡니다.

바울은 위대한 사도였고, 이 고린도 교인들은 어린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10:1에서 “나는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대함으로 너희에게 권하노라”라고 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들 앞에서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바울이 말한 영입니다.

우리의 사고 영역과 그리스도께 대한 헌신

바울은 계속해서 “우리 사고 영역에 있는 요새들”(5절)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우리 육신 안의 욕망들은 더러운 사고방식과 이기적인 사고방식을 만들어냈는데, 그것들은 마치 견고한 요새와 같습니다. 그것들은 낮에는 우리를 이기적으로 살게 하고, 우리 자신의 욕망을 채웁니다. 그리고 밤에 잠잘 때, 그 요새에서 더러운 생각들이 꿈처럼 나옵니다. 우리가 영원히 이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모든 생각을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적인 무기로, 우리는 이 요새들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한 위대한 무기 중 하나는 이 요새들을 무너뜨릴 수 있는 강력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4절). 이렇게 우리는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점점 더 채워갈수록, 우리는 이 요새들이 하나씩 무너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요새 안에 있는 병사들(생각들) 또한 무너집니다. 나도 젊은 시절, 여러분 모두처럼 더러운 생각들과 씨름했습니다. 이것이 내가 젊은 시절에 찾은 해결책이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생각(마음)을 가득 채웠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더러운 물이 가득 찬 그릇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회심하지 않은 시절에 많은 오물과 쓰레기를 그릇에 담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그릇에 깨끗한 물 한 주전자를 부으면, 그 물은 점차 넘쳐흐르며 희석됩니다. 그렇게 그릇 안의 물은 점점 더 맑아집니다. 이 과정에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생각에 부으면 오랜 세월에 걸쳐 천천히 마음을 정화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끔씩 그 그릇에 오물을 조금씩 넣으면 정화 과정이 지연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할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10:13에서, 바울은 “우리의 분량을 넘어서 자랑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내 사역의 영역을 정해 주셨으니, 나는 그 영역을 벗어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셨을 때, 그 영역은 주로 이스라엘의 경계 내에만 국한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밖으로 거의 나가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에게도 하나님께서 할당하신 사역 영역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베드로, 안드레, 마태, 또는 다른 누구와도 경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할당하신 영역에서만 일했습니다. 바울은 그 영역의 경계를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은 자신의 경계를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른 설교자들과 충돌하고 경쟁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시련과 가시

11:2, 3에서, 바울은 “어린 양의 혼인 잔치” 날에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을 정결한 처녀로 주님께 드리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이 그 과정에서 다른 누구와도 사랑에 빠지면 안 된다고 매우 질투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이 리브가를 이삭에게 데려가기 위해 (우르에서 가나안까지 약 1,500km에 달하는) 긴 여정을 함께한 이야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그 여정에서 잘생긴 젊은 남자들이 리브가의 호감을 얻으려고 했다면, 엘리에셀은 리브가에게 이렇게 경고했을 것입니다. "이 남자들에게 끌리지 마라. 나는 너를 정결한 처녀로 이삭에게 드려야 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예수님을 위해 이처럼 보존하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하나님의 종이 자신의 양 떼를 위해 가져야 하는 거룩한 질투입니다. 그는 양 떼에게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너희는 예수님을 위해 예비된 자들이다. 돈이나 불륜이나 세상적인 명예에 끌리지 마라. 이것들이 너희를 유혹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그들의 유혹을 물리치고 자신을 정결하게 지켜야 한다." 그런 다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사탄이 에덴에서 하와에게 그랬던 것처럼 와서 너희 마음을 그리스도를 향한 단순하고 순수한 헌신에서 멀어지게 할까 두렵다."

사람이 언제 타락하거나 길을 잃습니까? 그들이 거짓 교리를 믿기 시작할 때입니까, 아니면 사이비 종교에 가입할 때입니까? 11:3에 따르면, 우리는 그리스도께 대한 헌신을 잃는 순간 잘못된 길로 들어섭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헌신을 잃은 모든 신자는 이미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하나님의 양 떼를 돌보는 목자로서 우리의 임무는 양 떼가 예수 그리스도께 헌신하도록 보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신자들이 예수님을 열렬히 사랑하는 것에서 벗어나도록 유혹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열렬한 사랑을 잃었다면, 전도나 가르침이나 주님을 위한 어떤 봉사도 소용없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에 대해 하신 유일한 꾸지람이었습니다(계 2:4).

바울은 계속해서 자신이 그곳 그리스도인들에게 재정적으로 부담이 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아무에게도 짐이 되지 아니하였노라"(11:5-13). 그는 천막 만드는 일을 하며 자신과 동역자들을 부양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때때로 빌립보 교회로부터 선물을 받았습니다(11:8, 9). 그가 왜 이런 구별되는 행동을 했을까요? 고린도의 많은 신자들이 그의 사도직이나 사역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우리는 우리의 사역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나 교회로부터 결코 돈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위엄을 지닙니다. 어떤 신자에게서든 돈을 받는 것은 교제의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사역을 받아들인 사람에게서 돈을 받는 것은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안됩니다.

11:23-33에서, 바울은 주님을 섬기면서 겪었던 여러 가지 시련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감옥에 갇히고, 채찍과 매로 맞고, 잠 못 들어 밤을 지새고, 굶주림과 목마름, 악천후, 강도의 위험 등입니다. 그는 몸을 가릴 따뜻한 옷도, 먹을 음식도 부족할 때가 많았습니다; 당시 그는 따뜻한 옷과 음식을 살 돈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이 모든 시련 속에서 인도하시어 고통받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작은 선구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시련을 겪을 때마다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번은 내가 다메섹에서 잡힐 뻔했는데, 믿는 사람들이 나를 광주리에 담아 창문으로 내려주어 내가 잡히지 않도록 했습니다"(11:32, 33). 만약 당신이 사도였고, 그와 같은 굴욕적인 일을 겪었다면, 누구에게도 그 이야기를 알리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을,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보내 구원하실 위대한 사람으로 여기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는 평범한 사람이었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그렇게 알기를 원했습니다. "나는 누군가가 나에 대해 마땅히 생각해야 할 것보다 더 높이 평가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후 12:6 - Living)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바울은 오늘날 다른 사람들에게 실제보다 더 높은 인상을 주려고 애쓰는 대부분의 주님의 종들과 얼마나 달랐습니까?

12:1에서, 바울은 주님께서 자신을 셋째 하늘로 올리셨을 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14년 동안 그는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얼마나 대단한 사람입니까! 그는 14년 동안 이 경험에 대해 침묵했고, 심지어 이야기할 때조차도 자세한 내용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바로 다음 교회 모임에서 그러한 환상에 대해 이야기했을 것이고, 그 모든 것을 자세히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바울의 경험이 진실하다고 믿는 이유입니다. 요즘 어떤 신자들이 자랑하는 천국의 환상은 그들의 풍부한 상상력의 산물일 뿐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서 명예를 얻기 위해 하는 말입니다! 내가 왜 그렇게 말할까요? 진정한 환상을 본 사람들은 그 환상이 (바울이 말했듯이) "너무나 놀라워서 사람의 힘으로 설명하거나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며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12:4).

그런 다음 바울은 끈질긴 기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제거해 주지 않으셨던 무거운 시련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육신의 가시"와 "사탄의 사자"라고 불렀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12:7)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선물은 가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그것을 주신 것은 바울이 교만해질 위험에 처해 있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지만, 바울을 대적하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은혜를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겸손을 유지해야지만 은혜를 주실 수 있었습니다(벧전 5:5). 그래서 하나님은 사탄의 사자가 바울을 괴롭히도록 허락하셨고, 그리하여 바울이 끊임없이 하나님께 의지하고 겸손하게 살도록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께서 사탄의 사자라도 좋은 목적을 위해 우리를 계속 괴롭히도록 허락하실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질병은 사탄의 사자입니다. 왜 그렇게 말하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오직)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완벽하게 선하신 하나님에 비하면 우리는 모두 악한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우리 중 누구도 자녀에게 질병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이 많으신 하늘 아버지께서 어떻게 자녀에게 질병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대부분의 질병은 땅이 저주 아래 있기 때문에 생깁니다(창 3:17). 어떤 질병들은 사탄 때문에 생깁니다(욥 2:7).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완전한 뜻은 건강함이지만, 그분은 때때로 목적을 가지고 우리에게 아픔을 허락하실 수 있습니다. 바울이 가시에서 구해 달라고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그를 구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은혜를 주셔서 가시에도 불구하고 이기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그와 같은 은혜로 이기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13:4, 5에서, 우리는 “예수께서는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신다. 우리도 그분 안에서 약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분과 함께 살 것이다.”라고 읽습니다. 진정한 제자는 자신이 약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이 서신을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사의 열두 가지 특징

결론적으로, 이 서신에서 볼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사”의 열두 가지 특징을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사였습니다(고후 5:20).

  1.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1:1). “하나님의 뜻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지 않으셨다면 전임 사역에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2. 그는 전적으로 진실했습니다(1:1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진실함입니다. 당신에게는 많은 약점이 있을지 모르지만, 정직하고 진실하다면 하나님의 참된 종이 될 수 있습니다.
  3. 그는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1:22). 다른 어떤 자격을 갖추었더라도,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지 않았다면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차라리 가서 다른 일을 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4. 그는 자신이 섬기는 사람들을 사랑했습니다(2:4). “내가 특별히 너희를 사랑하는 것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5. 그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했습니다(3:5). “우리의 자격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그는 자신의 인간적인 능력이나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께만 의지했습니다.
  6.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4:1). “우리는 이 사역을 맡은 이상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사역에서, 우리는 종종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 유혹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7.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본이 되었습니다(6:3, 4). “모든 일에 스스로 하나님의 종으로 추천하며.” 그는 삶의 방식과 어려운 상황에서 처신하는 방식에서 모범이 되었습니다.
  8. 그는 누구도 이용하지 않았습니다(7:2). 그는 사람들을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섬기도록 자신의 종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선함이나 환대를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9. 그는 돈을 지혜롭게 다루었습니다(8:20, 21; 11:9). 그는 누구에게도 재정적인 부담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돈 문제에 매우 신중했습니다. 그의 사역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돈을 받지 않았습니다.
  10. 그는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경계 안에 머물렀습니다(10:13). 그는 그 경계를 넘어서려는 욕심이 없었습니다.
  11. 그는 기꺼이 고난을 겪으려 했습니다(11:23-33). 주님을 섬기면서 많은 고난을 겪었지만, 그 모든 고난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12. 마지막으로: 그는 믿는 사람들을 온전함으로 인도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13:9). "우리는 너희가 강건해질 때 기뻐하고, 너희가 온전하게 되기를 기도한다."

바울은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었습니다. 우리도 바울의 모범을 따라 그가 행했던 것처럼 주님을 섬깁시다.

장 48
갈라디아서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는 갈라디아서의 주제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사도들이 전파했던 복음(1:8)과는 반대되는 또 다른 복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다른 복음은 그리스도인들을 율법의 정신에 얽매이게 하는 거짓 복음입니다. 즉, 특정한 규칙을 지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거룩하게 되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사는 대신 율법주의에 빠질 위험이 큽니다. 교회 장로들은 은혜에 대해 너무 많이 설교하면 교인들이 자기 마음대로 살면서 죄를 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교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는 없는 몇 가지 규칙을 교회 회원 자격에 도입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항상 사람들을 속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과 은혜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율법과 은혜의 차이

율법은 사람을 외적으로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십계명은 돼지에게 매인 열 개의 쇠사슬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돼지를 깨끗이 씻긴 다음 더러운 곳을 지나가게 할 때, 돼지가 이쪽이나 저쪽으로 돌아서 진흙탕을 헤집고 싶어 할 때마다 쇠사슬로 계속 통제하면 돼지는 깨끗하게 통과할 수 있습니다. 돼지는 2킬로미터의 쓰레기와 오물을 지나간 후에도 깨끗하다고 자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쇠사슬에 묶여 있었기 때문에 깨끗함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율법의 제한으로 순결을 유지하는 신자는 율법 아래 있습니다. 그러한 신자는 겉모습만 깨끗할 뿐, 내면은 돼지처럼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에, 고양이를 그 2킬로미터 구간으로 보낸다면, 쇠사슬 없이도 깨끗하게 나올 것입니다. 고양이는 모든 더러운 것을 그냥 피합니다. 이것이 율법 아래 있는 사람과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고양이와 돼지를 구별하는 것은 바로 내면의 본성입니다. 은혜는 우리를 신성한 본성에 참여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쇠사슬로 통제하기보다는 우리의 내면의 본성을 변화시키기를 원하십니다.

이 서신의 처음 몇 구절에서, 바울은 이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전한 복음에서 벗어나 율법주의적인 복음으로 옮겨간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바울은 그것을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욕망과 연관시킵니다.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하냐,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 하냐?"(1:10). 율법 아래 사는 사람들은 어김없이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들입니다. 바로 그것이 실제 문제입니다. 바울은 1:4에서 "그리스도께서 이 악한 세상과 그것의 의견, 인정, 규칙과 규정에서 우리를 건져내시려고 우리 죄를 위해 자기 자신을 드리셨느니라"라고 말합니다. 그분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건져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 우리의 옛 사람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시고,
  • 사탄이 십자가에서 패배하게 하시고,
  • 우리가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그분을 위해 살도록 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여기 그분이 죽으신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 우리가 결코 이 세상 체제에 속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을 이해하셨습니까? 율법주의적인 사람들은 대개 이 세상 체제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고 싶어 합니다. 나는 율법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대체로 돈을 사랑하고 세속적이라는 것을 관찰했습니다. 그들은 겉모습으로는 세속적이지 않습니다. 옷차림은 검소할지 몰라도 마음과 생각은 세속적입니다. 하지만 참된 은혜 아래 들어오는 자들은 자유로워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 체제에서 구원하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에는 규칙과 규정이 있습니다. 어떤 종교도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값없이 용서받을 수 있다고 설교하지 않습니다. 모든 종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고 받아들이시기 전에 우리가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기독교"가 그런 것을 설교하기 시작할 때마다, 그것은 거짓 복음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율법주의적인 복음은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합니다. 율법의 의는 외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매우 거룩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외적인 의를 원합니다. 그러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의는 주로 내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내면에 관심을 두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잔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속은 더럽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주의적인 모든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은 깨끗하지만 속은 더럽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우리가 진정으로 율법주의적인 기독교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그 근본 원인을 해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겠다고 단호하게 결심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1:10은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내가 만일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될 수 없느니라.” 이것은 분명한 말씀입니다. 친척, 직장 동료, 동료 형제들, 또는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하는 순간, 당신은 주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따라서 모든 결정과 모든 행동에서 "나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이 일을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하는가?"라고 자문해야 합니다. 신자들은 "이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봐도 되는가?", "장신구를 착용해도 되는가?" 등과 같은 많은 질문을 합니다. 답을 찾으려면 "나는 나 자신/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이 일을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이 일을 하는가?"라고 자문하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서로를 판단할 필요가 없고 오직 자신만을 판단해야 합니다.

여기서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라는 말은 자신을 만족시키는 것도 포함합니다. 자신을 기쁘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율법주의적인 기독교에서 벗어나려면,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유혹을 받을 때마다, 자신을 부인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겠다고 단호하게 결심해야 합니다. 그러면 삶은 주님의 기쁨으로 충만해지고 성령의 능력으로 다른 사람들을 섬길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의 사역

바울은 이어서 자신의 사역을 변호합니다. 바울이 신약 성경이 기록되지 않은 시대에 이 글을 썼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신약 성경의 많은 책들은 바울이 죽은 후에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이 글을 썼을 당시에는, 신약 성경이 다른 곳에는 없었습니다. 신약 성경이 쓰여진 후에도 남아 있는 사본은 몇 권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날 우리가 성경의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성경의 권위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옹호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사도직을 옹호해야 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도들은 그 당시 사람들이 자신들이 가르치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 자신의 사도직을 옹호해야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말이 아니라 성경의 말씀을 전파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이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어떤 성경 구절도 인용하지 않았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그런 가르침의 구절과 율법이 폐지되었다는 구절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성경을 썼고, 따라서 자신의 사도직을 옹호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는 필요하지 않은 방식인 표적과 기사와 기적을 통해 그의 사도직을 확증하셔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바울과 베드로가 그 당시에 보았던 것처럼 많은 기적을 보지 못합니다. 사도행전에서, 하나님께서는 복음이 처음 전파되는 곳마다 기적을 통해 그 메시지를 확증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복음이 처음 전파되는 외딴 지역에서 그러한 기적을 행하고 계십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람에게서 복음을 받은 것이 아니라(1:12)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계시로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는 한때 율법에 매우 열심이었고 그것을 전파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울의 마음에 그분의 아들을 나타내셨을 때, 그는 사람과 상의하지 않고 곧장 아라비아로 갔다가 3년 후에 예루살렘에 갔습니다(1:16, 17). 무엇보다도 그는 당대의 모든 사람보다 더 열심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는 전통을 통해 율법을 발전시키고 장려했습니다(1:14).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는 아라비아로 가서 3년 동안 머물렀습니다.

그는 왜 아라비아로 가서 3년 동안 머물렀을까요? 그는 예루살렘에 있는 가말리엘의 성경 학교에서 3년을 보내면서, 하나님과 율법을 통해 구원받는 방법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를 3년 동안 광야로 데려가 그의 머릿속에 있는 잡생각을 다 빼내고 새 언약 복음에 대한 계시를 주셨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학교에 가서 성령의 계시 없이 지식을 얻는 사람들에게 종종 이런 일을 하십니다.

우리가 아는 한, 가말리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행 5:34-39). 하지만 그는 성령의 계시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경 학교 학생들을 하나님의 진리로 인도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가진 것은 율법에 대한 지적인 지식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제자 바울은 성령의 계시를 받기 전에 3년 동안 하나님과 단둘이 있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종종 '계시'라는 단어를 살펴보았습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이 단어를 본 적이 없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들 안에 성령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옛 언약에서는, '묵상'에만 중점을 두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묵상하더라도 성령의 계시를 받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것을 놓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보았을 때, 예수님은 그에게 "네가 계시를 받았으니 복이 있도다"(마 16: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도 여기서 같은 계시를 받았다고 말합니다(1:16). 성경을 공부할 때 중요한 것은 성령으로부터 계시를 받는 것입니다. 단순히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이해하고 그 안에 기록된 내용을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마귀도 그렇게 이해하고 믿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탄을 변화시키지 않습니다. 그리고 당신도 변화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믿고, 이해하고, 심지어 암송할 수 있지만, 변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 대한 계시가 당신의 삶, 야망, 돈에 대한 태도, 원수에 대한 태도, 그리고 죄에 대한 태도를 변화시킬 때, 당신은 계시를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당신의 모든 성경 지식은 마귀의 지식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매우 부도덕한 사람도 일류 화학 교사가 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매우 부도덕한 사람도 일류 성경 교사가 될 수 있습니다. 당신에게 지성이 있다면, 사람들이 화학을 공부하는 것처럼 성경을 공부할 수 있습니다. 화학 박사 학위를 받을 수도 있고, 성경 박사 학위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당신의 지성을 시험하는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화학 교사와 성경 교사는 개인적인 삶에서 모두 부도덕하게 살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둘 다 돈을 벌기 위해 살면서 세상적인 야망을 품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 중 누구도 신의 계시를 받지 못했습니다. 계시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려면 그것이 필요합니다.

기독교 세계에는, 두 가지 극단으로 치우친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완전히 지적이고 계시를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죽어 있습니다. 계시를 믿지만 다른 극단으로 치닫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에는 없는, 자신들이 받은 특별 계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들은 극단주의자이자 이단자들입니다.

복음은 자유를 가져온다

2장에서, 우리는 바울이 베드로보다 먼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어떻게 옹호했는지 읽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한 일, 즉 우리 모두가 가져야 할 태도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우리는, 내가 방금 말씀드린 불균형에 대한 건강한 교정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먼저 아라비아로 갔고, 14년 후 계시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2:2). 아라비아에서 그는 하나님의 비밀에 대한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 후 하나님은 그에게 또 다른 계시를 주시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가 지금 개인적으로 전파하고 있는 복음을 그곳 교회의 경건한 지도자들에게 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진리를 가르치고 있는지, 아니면 엉뚱한 길로 가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의 경건한 지도자들에게 가서 물었습니다, "형제 여러분, 내가 받은 계시는 이것이고, 내가 전하는 것도 이것입니다. 당신들은 이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 계시에 대한 당신들의 의견은 무엇입니까?

새로운 계시를 받을 때마다, 나는 당신이 나이가 많은 경건한 형제나 형제들을 찾아가 그 계시가 성경적인지 확인해 보시기를 권장합니다. 당신이 알지 못하거나 미처 생각하지 못한 성경의 다른 측면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가서 자신의 계시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인지 확인하는 것은 안전합니다. 그렇게 하면 균형을 잃지 않게 되고, 거짓 가르침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그 당시,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이 누리는 자유를 엿보고 그 자유에 대하여 전파하는 것을 방해하며, 그들을 다시 속박하려고 교회에 들어온 거짓 형제들이 있었습니다(2:4). 바울은 그들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교회의 경건한 지도자들조차도 바울의 설교가 옳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2:6).

당시, 일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을 받으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어떤 교회 지도자들은 "세례를 주기 전에 장신구를 벗어야 한다"거나 "우리와 함께 떡을 떼기 전에 텔레비전을 치워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율법주의는 기독교 세계에서 수 세기 동안 다양한 형태로 존재해 왔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구원을 위한 회개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는 단순한 메시지에 항상 무언가를 더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수 세기 동안 성경에 그들만의 규칙을 덧붙여 왔습니다. 바로 그것이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이처럼 초라한 상태에 처한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받아들이실 때, 그 사람이 장신구를 벗었는지, 아니면 그가 텔레비전을 치웠는지 확인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그가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었는지 보십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기쁘게 순종하는 자를 사랑하시므로 결코 누구에게도 어떤 일을 하라고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은 형제를 교제에 받아들이기 전에 신약성경에 없는 것을 필수 사항으로 추가하고 있습니까? 이론적으로는 회개와 믿음만 필요하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누군가를 교회 교제에 받아들일 때, 교회 지도자들은 다른 것도 필요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소위 "신약" 교회라고 불리는 많은 교회에도 주류 교단만큼이나 장로들의 전통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문맥에서 벗어나 특정 구절을 인용합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가 우리 시대에 매우 관련이 깊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자유를 위해 싸웠습니다. 모든 참된 하나님의 종은 복음의 자유를 위해 싸울 것입니다. 당신이 지금 장로들의 전통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믿는 최고 지도자들이 있는 교회 체제에 속해 있습니까? 그런 장로들은 그러한 전통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속박하고 있습니다.

바울처럼 용기를 내어 그러한 장로들에게 맞서 그들이 틀렸다고 말할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바울은 심지어 베드로에게도 맞섰습니다. "베드로가 안디옥에 오매, 내가 그를 면전에서 책망하였노라"(2:11). 베드로는 바울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역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며 공개적으로 그를 환영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2:9). 그러나 바울은 베드로를 맞섰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 대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들보다 훨씬 어렸던 바울은 그들보다 더 폭넓은 사역을 시작했으며, 그들은 그것을 인정하고 그를 격려할 만큼 은혜로웠습니다. 오늘날 젊은 형제에게 기름부음이 임했음을 알아차릴 만큼 은혜를 입은, 그런 연로한 하나님의 종들을 찾는 것은 매우 드뭅니다. 그때에 바울은 교회의 원로 지도자인 베드로를 찾아가 그의 잘못을 지적합니다. 마치 젊은 목회자가 교단의 최고 지도자에게 "당신은 틀렸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바울과 같은 사람이 왜 이렇게 적을까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외교적이고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타협적인 태도를 온유와 겸손으로 오해합니다. 복음의 진리에 관해서는, 우리는 명성을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진리는 우리의 소유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소유이므로, 우리는 진리를 지켜야 합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이 땅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울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소유물인 진리가 도둑맞을 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침묵합니다. 이는 그들이 자신만을 사랑한다는 증거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나 진리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진리를 사랑했습니다. 만약 누군가 바울의 옷이나 셔츠를 훔쳤다면, 바울은 그에게 그것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도둑질했을 때, 바울은 진리를 위해 싸웠습니다. 그것이 바로 모든 경건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는 자신의 재산보다 하나님의 진리를 더 소중히 여깁니다.

여러분 모두가 자신의 소유만큼 하나님의 진리를 소중히 여겼다면, 여러분은 지금보다 훨씬 더 발전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진리를 위해 기꺼이 나서려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예언자로 삼으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누구를 기쁘게 하고 싶어 하는지 보기 위해 여러 가지 상황에서 당신을 시험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베드로를 기쁘게 하려는지 보기 위해 여기서 바울을 시험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선배 사도였지만, 그의 행동은 잘못되었습니다(2:12). 그는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의 장로인) 야고보에게서 온 사람들이 오자, 그는 야고보가 어떻게 생각할지 두려워하여 물러갔습니다. 그때 바울이 베드로에게 맞섰습니다. 바나바조차도 베드로의 위선에 휩쓸렸습니다(2:13). 바나바 역시 바울보다 선배였습니다. 바나바는 온유하고 너그러운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의 태도는 아마도 "베드로 형제는 선배 형제다. 그러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 이 경건한 사람을 판단하지 않겠다."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태도는 "그가 더 경건한지 아닌지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는 내자신과 그를 비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하는 일은 우리가 전하는 복음 메시지에 어긋납니다.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야고보 형제의 말을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였습니다.

당신도 어떤 장로 형제의 의견이 그렇게 두려운가요? 1세기에 바울처럼 용감하고 두려움 없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신약 성경에 순수한 복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20세기 동안 복음의 진리를 위해 싸우고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았던 두려움 없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에게도 순수한 복음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2:20에서, 우리는 바울의 삶의 비밀과 그가 어떻게 진리를 위해 용감하게 싸웠는지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옛 바울은 죽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그의 안에 사셨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의 길의 한 면, 즉 부정적인 면, 곧 자아에 대한 죽음만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또 다른 영광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자아에 대한 죽음은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면 그분의 생명이 우리를 통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믿음 - 행위가 아닌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에서 우리가 성령을 받는 근거, 곧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바울은 “너희가 율법의 행위로 성령을 받았느냐?”라고 묻습니다(3:2). 어떤 사람들은 금식하고 기도만 충분히 하면 하나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금식하고 기도했기 때문에 죄 사함을 받았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선물이었습니다. 죄 사함과 성령의 선물은 모두 정확히 같은 근거, 곧 행위 없이 은혜로 주어집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에게 “만약 너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하였다면, 이제 육신의 노력으로 그것을 온전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라고 질문합니다. 당신의 삶에 구원을 가져다주신 분은 바로 성령이시며, 당신을 거룩하게 만드실 분도 성령이십니다. 당신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율법이나 규칙이나 규정이 아닙니다. 이 진리를 이해했다면 갈라디아서의 핵심 메시지를 이해한 것입니다.

당신은 율법의 행위로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온전함은 육체의 행위로 이루어지지 않고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집니다. 성령께 굴복하고, 그분께서 당신에게 죄를 깨닫게 할 때마다 그분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문제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당신을 거룩하게 하실 것입니다. 금식과 기도만으로는 아무도 거룩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규칙적으로 금식하고 기도하는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죄에 패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다투고 마음속에 정욕을 품습니다. 이는 거룩함이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음을 증명합니다.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런 다음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행하신 기적들이 그들의 행위의 결과가 아니었음을 상기시킵니다(3:5). 그것들은 그들의 믿음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을 위해 놀라운 초자연적인 일들을 행하십니다. 그들이 그것을 받을 자격이 있거나 그들이 행한 어떤 선한 행위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3:6); 그 후 모든 민족에게 복이 되었습니다(3:8).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3:14).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분은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으셨습니다(3:13). 이는 우리에게서 율법의 저주를 제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율법에는 저주가 있습니다: 율법의 기준대로 살지 않으면 저주를 받습니다. 신명기 28장은 이러한 저주들 중 몇 가지를 나열합니다. 정신 이상, 눈멈, 그리고 여러 질병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이러한 저주들을 없애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조상들이 지은 어떤 죄 때문에 고통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모든 저주가 십자가에서 풀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였을 때 모든 저주가 풀렸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세대를 이어오는 저주를 두려워하며 살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인 아브라함의 축복을 받았습니다(3:14).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믿음을 통해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은: "땅의 모든 민족과 모든 가족들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3:8)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우리 삶에 오시는 목적은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축복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의 한 가지 특징은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축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가정을 방문할 때, 그 가정을 축복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정을 방문할 때, 그 가정에 혼란을 가져옵니다. 많은 이단들은 그리스도인 가정에 분열과 다른 많은 문제들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은 축복을 가져옵니다. 가정의 한 사람이 회심하면 그 가정에 어느 정도 혼란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하나님의 축복이 그 가정에 임할 것이고; 그 가정의 더 많은 구성원들이 회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참여하도록 부름받은 아브라함의 축복입니다.

칭의(의롭다 하심)와 성화

3장 나머지 부분에서는, 율법과 은혜의 차이에 대해 살펴봅니다. 위의 약속은 율법이 있기 400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주어졌습니다. 3:24은,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어린아이-훈련자(또는 유모)와 같다”라고 말합니다. 율법의 한 가지 기능은 사람이 아무리 거룩하더라도 결코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합격 점수는 100%입니다. 우리 중 가장 뛰어난 사람은 0%를 받습니다!! 150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했지만 거듭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마치 밤새도록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0%) 제자들과 같았습니다(요 21장). 결국, 그들은 주님을 바라보았고, 주님께서는 순식간에 그들의 배에 물고기(100%)를 채워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나아갈 때, 그분은 우리에게 즉시 그분의 100%를 더해 주시며, 그리하여 우리는 의롭게 됩니다. 칭의는 시험에서 은혜 점수를 받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는 우리 모두 0%를 받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100점의 은혜 점수를 주십니다.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100%를 받습니다. 거부하는 사람은 0%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따라서 100점의 은혜 점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비록 더 못한 학생일지라도 다른 모든 사람보다 앞서 나갑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복음입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귀속됩니다. 우리는 겸손히 우리가 0%만 받을 자격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에 대한 모든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돌아갑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저 의롭다 함을 얻는 것에 그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또한 우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귀속된 그리스도의 의는 매일매일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부여되어, 우리 본성의 일부가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완전함을 향해 나아갑니다.

갈라디아서의 핵심 메시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당신이 누구이든 상관없습니다. "너희는 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니라"(3:26).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는 아무도 다른 사람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자유인이나 종이나 남자나 여자나 구별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받아들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께 나아온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른 공동체에 속한 사람을 멸시한다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의롭다 하심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당신은 다시 율법 아래 놓이게 됩니다. 율법은 사람들을 여러 집단으로 나눕니다. 은혜로 인한 의롭다 하심은 우리를 하나로 묶어줍니다.

당신이 율법에서 자유롭다는 한 가지 증거는 언어, 공동체, 교육, 배경에 관계없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진심으로 바라보며 "그는 내 형제이고, 그녀는 내 자매입니다. 나는 그들의 배경이 어떠하든 그들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차이가 그리스도 안에서 사라졌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나에게 동일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4장에서는, 어린 자녀와 성인 아들의 차이를 지적합니다. 율법 아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어린 자녀처럼 대하셨습니다. 어린 자녀와 종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어린 자녀는 모든 것을 소유하더라도 실제로는 어떤 것에도 소유권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4:1). 그러나 어린 자녀가 성인이 되면, 모든 것에 대한 소유권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율법과 은혜의 차이입니다. 율법 아래서, 하나님은 사람들을 어린 자녀처럼 대하셨습니다. 은혜 아래서, 우리는 성인 아들처럼 대우받습니다.

율법 아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든 사소한 일에도 율법을 주셨습니다. 예를 들어, 도마뱀이 항아리에 빠지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둥지에 어미 새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발견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각종 피부병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등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어린 자녀들을 대하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양치질을 하고, 책을 챙기고, 학교에 가고, 숙제를 하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붐비는 길을 건너기 전에 좌우를 살피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는 아이에게 모든 사소한 일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하지만 어른에게 아침에 양치질을 하라고, 학교에 가라고 일깨워 줄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은 성인 아들에게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좋은 원칙을 가르칠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과 은혜의 또 다른 차이입니다. 새 언약 아래에서는, 세부적인 규칙이 아닌 원칙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 원칙들을 받아들이고 이를 바탕으로 세부적인 규칙을 만들면 바리새인이 됩니다. 기독교의 모든 교파에서 그런 그리스도인들을 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주의적인 경향은 모든 집단에 존재합니다. 지도자들은 양 떼에게 신성한 원칙들을 가르치기보다는 규칙을 만드는 것을 더 선호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을 율법 아래로 다시 데려옵니다. 하나님께서 어른으로 대우하시기를 원하시는 사람들을 그들은 어린아이처럼 대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을 어른으로 대우하시기를 원하신다면, 우리도 그들을 어른으로 대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4:13에서, 바울은 자신이 병들었기 때문에 갈라디아에서 처음으로 복음을 전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처음에는 갈라디아에 머물 계획이 아니라, 단지 지나가기만을 계획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병들어 갈라디아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그 지역에 있는 동안 그는 그곳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교회들이 세워졌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마귀가 바울에게 준 병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데에만 도움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병들지 않았다면 갈라디아에 머물지 않았을 것이고, 그곳에 교회가 세워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16:6에서, 우리는 바울과 그의 일행이 갈라디아를 거쳐 "소아시아로 가는 것을 성령께서 금하셨다"는 것을 읽습니다. 우리가 갈라디아서 4:13을 읽을 때에야 성령께서 갈라디아에서 그를 막으신 방법이 병을 통해서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옛말에 "실망은 그분의 약속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당신이 온 마음을 다한 하나님의 자녀라면 모든 실망은 당신을 위한 하나님의 약속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병, 기차 지연, 버스 놓침, 그리고 다른 지연들을 통해 놀라운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4:19에서, 바울은 자신을 아이를 낳기 위해 산고를 겪는 어머니에 비유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마음속의 부담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자궁 속 태아 사진을 본 적이 있다면, 그 태아가 사람보다는 올챙이처럼 생겨서, 큰 머리와 꼬리처럼 생긴 작은 몸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9개월 후, 그 태아는 완벽한 형태의 아기로 자궁에서 나옵니다. 바울은 여기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인 너희도 그 태아와 같다. 너희는 전혀 그리스도와 닮지 않았다. 하나님의 씨가 너희 안에 있지만, 모든 것이 불균형하다. 그래서 나는 너희에 대한 짐을 지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이 너희 안에 형성되는 것이다. 이는 너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완전한 균형을 이루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모든 참된 하나님의 종이 양 떼를 위해 마음속에 품고 있는 부담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

바울은 5:1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기 위해 오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누구도 우리를 율법의 노예로 삼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어떤 단체나 교회가 만든 전통과 율법의 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죄의 핑계로 삼아서도 안 됩니다(5:13). 많은 신자들이 은혜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오해하여 율법 아래 있을 때보다 더 나쁜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육신의 종으로 살아갑니다. 율법에서 자유로워지는 유일한 올바른 길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율법보다 더 낮은 수준으로 떨어져 죄 가운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하면, 육신의 수준으로 내려가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그러한 신자들만이 율법에서 자유롭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5:16, 18). 따라서 신자는 세 가지 수준에서 살 수 있습니다:

  1.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가장 높은 수준 - 새 언약의 수준); 또는
  2. 율법의 인도를 받는 삶(옛 언약의 수준); 또는
  3. 육신에 이끌려 사는 삶(가장 낮은 수준).

이 세 가지 삶의 수준을 건물의 세 층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당신이 (성령의 인도를 받는) 3층에서 살지 않고, (율법의 인도를 받는) 2층을 무너뜨린다면, 당신은 (육신에 이끌리는) 1층으로 내려갈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하셨기 때문에 나는 율법의 인도를 받지 않는다"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육신의 수준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수많은 신자들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그들은 갈라디아서에서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을 읽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지 않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육신을 따라 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 지도자들이 율법 아래 살았던 사람들보다 훨씬 더 나쁜 일을 행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은혜 아래 있다고 하는 신자들이 어떻게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 수 있습니까? 그들은 율법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령의 인도를 받는 자는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느니라"(갈 5:18).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에게는 율법이 필수적입니다.

갈라디아서의 메시지는 "율법을 버리라"가 아닙니다. "성령 안에서 삶을 살게 된 후에야 율법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성령께서는 육신 안에서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십니다(5:19-21): 음행, 우상 숭배(돈과 사람을 숭배하는 것), 원수 맺음, 다툼, 시기, 분노의 폭발, 논쟁, 분열, 파벌 등등. 이러한 것들은 불신자들에게만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소위 "믿는 자"들조차 이러한 죄에 빠져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성령 안에서의 삶에 들어가기 전에 율법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5:21).

반대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들은 삶에서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5:22, 23). 우리가 성령에 이끌려 산다면, 성령으로 행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일을 살펴보기

6:1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말하는 이 삶의 기준에서 벗어난 형제를 보거든 그를 비난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영적인 사람이라면 가서 그를 도우십시오. 당신도 그처럼 넘어질 수 있습니다." 넘어진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자신도 같은 방식으로 넘어질 수 있음을 아는 사람뿐입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나는 이 사람처럼 넘어질 수 없다"는 태도를 보인다면, 그는 그 넘어진 형제를 도울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타락한 신자들을 회복시킬 수 있는 '온유의 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려면 다른 사람들의 짐을 져야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균형이 필요합니다. "서로의 짐을 지라"라고 말씀하시고, "각 사람은 자기의 짐을 져야 한다"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6:2, 5).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우리의 짐을 다른 사람에게 지우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6:3에서, 바울은 거만한 신자들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다른 신자들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면, 그는 사실상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쓸모없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형제가 넘어지는 것을 보더라도, 당신이 그보다 어떤 면에서든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그와 같은 육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당신을 넘어지지 않게 지켜주었습니다. 이 사실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바울은 이어서 말합니다, "네 자신의 일을 살피고 하나님께서 너를 통해 무엇을 이루셨는지 보라." 고린도전서 11:28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 곧 우리의 삶을 살피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일을 살피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그들 자신은 다른 사람들이 주님을 위해 한 일의 1%도 이루지 못했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비판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들의 큰 입을 닫고 먼저 자신의 일을 살피는 것이 좋습니다.

6:7, 8에서, 우리는 누구나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을 상기하게 됩니다. 육체를 위해 심는 자는 영원히 죽고, 성령을 위해 심는 자는 영생을 거둘 것입니다.

6:14에서, 바울은 다시 십자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십자가에 대해 세 번이나 언급했습니다. 2:20에서,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합니다. 5:24에서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6:14에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세상이 그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가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합니다. 자아, 육체, 세상, 이 세 가지가 모두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바울은 세상에 대해 죽었고, 죽은 사람처럼 세상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세상 위에서, 성령 안의 높은 차원의 삶을 살았습니다. 성령 안에서 사는 것과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 사이에는 밀접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율법으로부터의 자유(갈라디아서의 주제)는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고,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을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

장 49
에베소서

그리스도 안에서 - 이 땅에서의 천국의 삶

에베소서는 아마도 바울이 쓴 가장 영적인 편지일 것입니다. 이는 당시 에베소 교회가 매우 영적인 상태에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매우 좋은 교회였습니다. 바울이 바로잡아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에게는 “오,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이여! 누가 너희를 꾀었느냐?”와 같은 매우 강한 어조로 말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에베소 교인들 사이에서는 바로잡아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훌륭한 교회였기에 바울은 다른 교회들과는 나눌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을 그들에게 전할 수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나는 너희에게 젖을 줄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에베소 교인들에게는 더 깊은 진리를 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오직 우리의 영적 성장의 정도에 따라 받을 수 있습니다. 아기는 고기를 먹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씹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아기처럼 산다면, 오랫동안 젖만 먹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대부분의 신자들의 상태입니다.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더 깊은 것들에 대해 깊이 파고들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죄가 용서받는 것에 만족합니다. 그 후에는 다른 사람들을 죄 사함으로 인도하는 것만이 그들의 유일한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라면, 신약 성경의 많은 부분은 불필요하다고 여겨져 버려질 수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 왜 그렇게 많은 가르침이 담겨 있을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죄 용서받는 것에 그치는 것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거듭남에서 멈추고 그 이후로 계속 젖만 먹고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숙해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성숙해지면 성숙해질수록 다른 사람들에게 더 효과적으로 증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사람들을 천국으로 데려가는 프로그램에 관여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이 땅에서(모든 곳의 그리스도인 가정과 지역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위한 강력한 증거를 하는 프로그램에 관여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그분이 명령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8:20).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우주적 교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우주적 교회의 원리를 이해하면, 모든 지역 교회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에베소서는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사는 것에 대해 다룹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오직 천국의 마음을 가져야만 이 땅에서 제 기능을 다할 수 있습니다. 천국의 마음을 가질수록 이 땅에서 당신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을 더욱 잘 이룰 수 있습니다. 당신이 세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질수록, 죽어서 천국에 간다고 말하더라도, 당신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데 쓸모없는 존재일 뿐입니다. 당신의 집은 오직 천국의 마음을 가진 집일 때만 하나님을 위해 제 기능을 다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뜻은 "너희의 땅에서의 날들이 하늘의 날들같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신 11:21 – KJV). 이것은 옛 언약 아래에서는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에베소서는 새 언약 아래서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는지 알려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에베소서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또는 '그분 안에서'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리스도의 외적인 사역은 누구나 복음서에서 읽을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분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셨고, 나병 환자들을 만지셨고, 병자들을 고치셨고,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모든 종교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외적인 사역을 존경하며,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면에서 그분을 모방하려고 노력하기도 합니다. 인간의 눈에는 그것이 존경스러울 만한 일이며, 그래서 그런 행위로 좋은 평판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에베소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내적인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고, 예수님의 외적인 삶을 따른다면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들의 존경을 받기 위해 예수님을 흉내 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영성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분의 내적인 가치와 동기를 깨닫는 데서 옵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먼저 우리 안에 들어와야 하며, 그런 다음 우리 안에서부터 밖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성막을 공부할 때, 하나님께서는 천으로 만든 외벽에서 시작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분은 지성소의 법궤가 있는 중앙에서 시작하셨습니다. 그것이 항상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우리는 개인으로서, 그리고 교회로서 하나님의 거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거처를 정하실 때, 그분은 항상 내면, 즉 우리의 영에서부터 시작하십니다. 이 짧은 서신에서 '안'이라는 단어는 89회, '은혜'는 13회, '영적인'은 13회 등장합니다. 에베소서는 물질적인 번영이 아니라 영적인 번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율법이 아니라 은혜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내적 삶에서 시작하여 외적인 행실로 이어집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에베소서를 공부한다면,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에베소서는 "하늘에 있는 영적인 복"(1:3)이라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에베소서는 매우 깔끔하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처음 세 장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로서 우리의 위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 다음 세 장은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위치에서 마귀와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이는 마치, 기초와 상부 구조가 있는 건물과 같습니다. 기초는 처음 세 장에, 상부 구조는 마지막 세 장에 있습니다.

만약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기초 없이 상부 구조를 지으려고 한다면, 예수님의 삶을 존경하며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고 말하는 비그리스도인들과 같아질 것입니다. 많은 종교인들이 산상수훈을 따르고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선하게 대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들은 기초 없이 상부 구조를 지으려고 했습니다. 분별력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사람을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으로 존경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눈이 멀었습니다. 기초가 없는 집은 홍수가 올 때 휩쓸려 갈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존경하는 것의 위험은 당신도 그들처럼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 나병 환자, 과부 등을 돌보는 사회복지 활동에 평생을 바치면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계가 직면한 진정한 위험입니다.

에베소서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또 다른 사실은 처음 세 장에는 권면이나 계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장들에서 우리는 어떤 일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듣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만 듣게 됩니다. 반면에, 4장부터 6장까지는 권면으로 가득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균형입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리고 우리 안에서 행하신 일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그런 후에야 우리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먼저 일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를 통해 일하실 수 없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흉내 내는 것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우리는 검소한 생활 방식을 유지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등의 노력을 기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외적이고 공허할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는 '그리스도 안에서'를 강조합니다.

많은 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존경하고 산상수훈(마 5-7장)을 읽고 그 말씀을 따르려고 노력합니다. 그들도 많은 선한 일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먼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모든 행위 속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역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그리스도를 모방하려 했을 뿐입니다. 그것은 마치 그림으로 그린 불과 같습니다. 화가는 멀리서 보면 실제 불과 매우 흡사한 불을 그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불은 아무런 빛이나 온기를 주지 못합니다. 분별력이 없다면, 그리스도를 모방하려는 사람들에게 속기 쉽습니다.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많은 존경을 받을 수 있게 해줍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에게 영생을 줄 수는 없습니다. 영생을 얻으려면 예수님을 자신의 주님이자 구주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참된 섬김은 항상 사람 내면에서 우러나옵니다.

예수님은 “잔의 안을 먼저 깨끗이 하라 그러면 겉도 저절로 깨끗해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분이 산상수훈에서 주로 강조하신 것입니다. 단순히 간음을 피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여자를 속으로도 탐해서는 안 됩니다. 단순히 혀를 다스리는 것만이 아닙니다. 입은 마음에 가득 찬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더럽다면, 혀를 다스리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방심하는 순간에 당신의 마음속의 모든 더러운 것이 쏟아져 나올 것입니다. “온갖 부지런함으로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샘이 거기에서 나오기 때문이니라”(잠 4:23).

하늘의 영적 축복

1:3은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을 주시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이 모든 축복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임을 주목하십시오. 옛 언약 아래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된 것은 이 땅의 축복이었습니다. 신명기 28장에서 그 내용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은혜와 모세가 가져온 율법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만약 구약에 이와 같은 구절이 있었다면, 이렇게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찬송하리로다 전능하신 하나님(우리 아버지가 아니라)께서 모세 안에서 이 땅에 속한 모든 물질적인 복으로 우리에게 복을 주셨도다." 따라서 육체적인 치유와 물질적인 복을 주로 구하는 신자들은 실제로 옛 언약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자들"은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이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들은 모세를 따르는 자이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오늘날 신자들에게 물질적인 복을 주시지 않는다는 뜻일까요? 그분은 주십니다.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하십니다. 그들이 그분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먼저 구할 때, 그들의 모든 세상적인 필요가 채워집니다. 옛 언약 아래서, 사람들은 오직 이 세상적인 것들만 추구했고, 그것들을 풍족하게 얻었습니다. 많은 자녀, 많은 재산, 많은 돈, 원수에 대한 승리, 지상에서의 명예와 지위 등입니다. 그러나 새 언약 아래서, 우리는 영적인 축복, 즉 영적인 자녀, 영적인 부, 영적인 명예, 그리고 영적인 승리(사탄과 육신에 대한 승리이지, 블레셋 사람이나 인간에 대한 승리가 아닙니다)를 추구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 필요한 건강과 돈과 같은 세상적인 필요들이 우리에게 더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망치지 않을 만큼의 돈을 주실 것입니다. 옛 언약 아래서,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을 억만장자로 만드셨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지 못하게 하고, 결국 우리를 파멸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옛 언약 아래 사람들에게 약속하신 것들을 추구합니다. 성경을 통해 번영을 전파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전파하는 내용을 매우 선택적으로 전파합니다. 예를 들어, 신명기 28:11에 나오는 옛 언약의 축복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많은 재물뿐만 아니라 많은 자녀도 축복해 주실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이 설교자들은 두 번째 부분(많은 자녀)은 전하지 않습니다. 이는 그들의 정직함이 부족함을 증명합니다. 저는 번영 설교자들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많은 자녀로 축복하실 것이라고 설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들이 최고의 사기꾼임을 증명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돈을 모아 얻은) 막대한 부를 정당화하기 위해 무관한 구약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물질적 번영을 설교합니다. 그런 설교자들에게 속지 마십시오.

신명기 1:3의 "영적인 축복"이라는 단어는 "성령의 축복"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성령의 모든 복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것들을 주장하기만 하면 됩니다. 길가에 앉아 구걸하는 거지 소녀를 상상해 보십시오. 부유한 왕자가 찾아와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심하고 수백만 루피를 은행 계좌에 넣어줍니다. 그 계좌에서 소녀는 원할 때마다 자유롭게 돈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녀는 정말 행운아입니다! 한때는 동전 몇 개가 든 작은 깡통 하나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최고급 옷을 입고 호화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왕자가 서명한 백지 수표가 너무 많아서 은행에서 얼마든지 돈을 인출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영적으로 말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제 우리는 천국 은행에 가서 성령의 모든 복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우리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분과 이 신부의 관계를 유지한다면, 그리고 "주님, 저는 당신의 신부로서 이 땅에서 사는 모든 날 동안 당신께 진실하고 싶습니다."라고 고백한다면, 하늘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모든 축복이 우리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가 그 어떤 것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납득시키려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어떤 것도 받을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거지 소녀가 자신이 거저 얻은 모든 부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로 인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의 모든 것을 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금식이나 기도로 그것들을 얻을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그런 식으로 그것들을 얻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그것들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 그것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저는 예전에 세상적인 필요를 위해 기도할 때 주님께서 제게 이 교훈을 가르쳐 주신 것을 기억합니다. 저는 "주님, 저는 오랫동안 주님을 섬겨 왔습니다. 그러니 제발 저를 위해 이것을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안 된다, 네가 네 자신의 이름으로 나온다면 나는 그것을 하지 않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날 저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습니다. 그날 저는 방금 회심한 새 신자와 1959년에 회심한 저, 두 사람 모두 정확히 같은 근거, 즉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방금 회심한 새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서명하신 수표를 가지고 천국 은행에 가야 합니다. 저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서명하신 수표를 가지고만 천국 은행에 갈 수 있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하나님께 신실했다고 말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면, 저는 제 서명이 있는 수표를 가지고 천국 은행에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 은행은 그것을 거부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많은 기도가 응답 받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름으로 나아갑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그토록 많은 것을 희생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70년 동안 신실하게 살아왔다 해도, 주님 앞에 나아갈 때는 새로운 회심자와 동일한 조건으로만 나아갈 수 있습니다 — 바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깨닫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 이후로는 제 이름으로 서명된 수표를 하나님께 들고 간 적이 없습니다! 그런 유혹을 받을 때마다,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수표는 절대 현금화되지 않을 거야.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직 그분의 공로로만 나아가자.”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성령의 모든 복이 우리의 것입니다.

1:4은, “하나님은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이 창조되기 훨씬 전, 곧 창세기 1:1보다 훨씬 전에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요한복음 1:1이 창세기 1:1보다 먼저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요한복음 1:1은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셨다”고 말합니다. 이는 영원 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연대순으로 다음에 오는 구절은 창세기 1:1이 아니라, 에베소서 1:4이며, 이 역시 영원 전을 언급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하늘과 땅이 창조되기 전부터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었다는 것을 아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것도 창조하시기 전, 이미 우리의 이름은 그분의 생각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책 안에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낙담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특별한 존재입니다. 당신은 자신이 쓸모없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만일 당신이 거듭난 사람이라면, 당신의 이름은 창세기 1:1 이전부터 하나님의 생각 속에 있었습니다. 이 사실에 대해 주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천국에 가도록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설교가 우리가 죽은 후 천국에 가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죽었을 때 천국에 가도록 선택하셨다는 구절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것은 우리가 천국에 가기 전에 이 땅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중 상당수는 죽으면 천국에 간다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으로 선택하셨다는 찬송가는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관점을 바꿔야 합니다. 1장부터 3장까지는 기초입니다. 기초에는 "우리는 죽어서 천국에 가도록 선택되었다"라고 말하는 돌은 없습니다. 기초에 있는 돌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것은 우리가 그분 앞에 거룩하고 흠 없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건물의 기초가 약하면 건물은 무너집니다. 당신의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초가 약하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당신의 삶도 무너집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에베소서 1장부터 3장까지의 견고한 기초를 갖지 못하기 때문에 나중에 무너지는 것입니다. 건물 4층에 균열이 생겼다면, 아마도 기초가 충분히 튼튼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100층짜리 건물이라도 균열이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깊고 견고한 기초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 거듭난 지 15년 후에 다시 타락한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할 때 좋은 기초를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하나님께 주로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축복이 아니라 영적인 축복을 구하고 있는지 반드시 확인하십시오. 땅의 축복이 아니라 하늘의 축복을 구하고 있는지 반드시 확인하십시오.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 반드시 확인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을 택하신 것은 천국에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1:4, 5을 더 읽어 보십시오. “하나님이 사랑 안에서 우리를 예정하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정하셨다”는 또 다른 단어인데, 이 단어는 크게 오해받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하신 것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그것은 천국에 가기 위해서였을까요, 지옥에 가기 위해서였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누구도 천국이나 지옥에 가도록 예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서는 “그분은 그분의 뜻의 선하신 의도에 따라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아들들이 되게 하려고 미리 정하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분은 우리를 어린 그리스도인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아들로 예정하셨습니다. 당신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일에 관심을 갖는 책임감 있는 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일에 책임감을 느끼는 아들처럼 처신하십시오. 아버지가 25살 아들을 자기 가게에 두는 것과 4살 아들을 그 가게에 두는 것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4살 아들은 친구들이 놀러 오라고 부르면 바로 도망칩니다. 하지만 25살 아들은 가게에 충실히 남아서 필요하다면 자정까지 일합니다. 아들과 아이의 차이는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는 하나님의 일에 대해 엄청난 책임감을 가진 아들들이 몇 명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에 대해 걱정하고 자주 생각합니다. 그들은 돈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감 때문에 일합니다. 교회에는 결코 자라지 않는 어린아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오직 재미와 오락, 음악에만 관심이 있을 뿐, 하나님의 일에 대한 책임감은 거의 또는 전혀 없습니다. 그들은 교회 집회에 와서 앉아 듣기만 할 뿐, 교회를 위해 그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아들이 아니라 어린아이들입니다.

성령과 계시

1:7에서, “그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그분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읽습니다. 이것이 은혜의 첫 번째 부분, 곧 죄 사함입니다. 로마서 6:14은 은혜의 또 다른 부분입니다. 1:13에서, 우리는 약속하신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는 것을 상기하게 됩니다. 1:14에서, 성령이란 선물은 우리의 최종 상속에 대한 담보, 보증, 그리고 계약금으로 언급됩니다. 만약 누군가가 50만 루피 상당의 부동산을 산다면, 그는 3개월 안에 잔금을 지불하고 5만 루피를 선불로 지불하겠다는 계약서에 서명할 것입니다. 그 10%는 그가 정해진 기간 내에 전액을 지불하고 부동산을 살 것이라는 보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언젠가 우리를 온전히 그리스도와 같이 되게 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 보증은 바로 성령이란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아직 우리에게 새 몸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아직 우리 몸에서 모든 육체의 정욕을 제거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언젠가 이루어질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분은 우리에게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습니다. 그분은 언젠가 나의 생각을 그리스도의 생각과 똑같이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에 대해 먼저 감사하노니 너희의 믿음과 사랑을 들었음이요 너희에 대해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노라"(1:16). 바울은 항상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 감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희 안에서 놀라운 일을 행하사 너희가 믿음을 갖게 하시고 모든 성도를 사랑하게 하셨지만, 나는 너희를 위하여 더 기도하노니,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기를 기도한다"(1:17)라고 했습니다. '계시'라는 단어에 주목하십시오. 이것은 새 언약의 단어입니다. 옛 언약에서는, 율법을 묵상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습니다(시 1:2). 그러나 새 언약에서는, 말씀에 대한 성령의 계시를 받는 것에 중점을 둡니다. 옛 언약 아래에서는, 성경을 아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 아래에서는, 하나님 자신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내가 기도하노니 너희 마음(생각이 아니라)의 눈이 밝아지기를 원하노라”(1:18)라고 말합니다. 새 언약의 강조점은 항상 마음에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지식이 머리로 들어오는 것을 강조했지만, 이제는 빛이 마음으로 들어오는 것을 강조합니다. 구약 성경시대에도 마음의 사람들이 몇몇 있었습니다. 잠언은 마음에 대해 많이 이야기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옛 언약 시대의 제사장들과 성경 학자들은 마음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에 대한 지적인 연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만약 당신이 평생을 머리로만 성경을 연구하고 많은 성경 지식을 얻는 데만 시간을 보낸다면, 당신은 결국 또 다른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당신의 머리에서 마음으로 내려와 계시가 되어야 합니다. 머리에서 가슴까지 12인치(30cm)가 바로 모든 차이를 만듭니다!

바울은 “그들의 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1.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심의 소망과;
  2. 성도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과;
  3. 그들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능력의 위대함”을 보게 되기를 기도했습니다(1:18,19).

바울은 이 진리들을 이해하기 위해 서신을 25번이나 읽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백 번을 읽어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성령으로부터 이 위대한 진리들에 대한 계시를 받기를 기도했습니다. 당신은 성경에 나오는 모든 히브리어와 그리스어(헬라어) 단어의 어근을 연구하더라도 영적으로 완전히 눈이 멀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있는 영적인 복”을 단 하나도 경험하지 못하거나,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대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성령으로부터 성경에 대한 계시를 받으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그리스어를 몰라도, 그리스도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될 것입니다. 성경(하나님의 약속)에 있는 수표를 하늘 은행에 가져가 현금으로 교환하고 영적으로 부유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시 없는 성경 공부를 하지 마십시오. 성경 공부의 목적은 성령으로부터 계시를 받는 것이어야 합니다. 마음보다 머리를 강조하는 사람은 당신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나는 생각(minds)을 사용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나는 공부하거나 설교할 때 생각을 광범위하게 사용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에게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나의 생각을 성령의 종으로 삼았습니다. 성경을 공부할 때, 우리는 먼저 눈(몸)을 사용하여 읽습니다. 그러면 말씀이 우리의 생각(혼)으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말씀은 우리의 혼을 넘어 영으로 스며들어야 하며, 그곳에서 성령은 우리에게 계시를 주실 것입니다.

이에 대한 예는 세 부분으로 나뉜 옛 언약의 성막에서 볼 수 있습니다. 바깥뜰은 우리의 몸을 상징하며, 우리는 그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습니다. 다음 영역인 성소는 우리의 혼을 상징하는데, 우리는 혼을 통해 말씀을 이해하고(생각) 말씀에 의해 감동을 받습니다(감정). 그 다음 지성소는 우리의 영을 상징하며, 하나님은 그곳에서 우리에게 계시를 주시고 순종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계시를 받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진정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오직 그때에야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모든 성경 공부는 읽고 이해하는 것을 넘어 계시와 순종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휘장이 찢어져 우리가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히 10:20).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읽고 이해했지만, 아무런 계시도 받지 못했기에 예수님을 귀신의 왕 바알세불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성경에 대한 계시를 받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이심을 알았습니다.

성령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소망을 우리가 알기 원하십니다. 일단 이것을 깨닫는다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불순함에 대한 당신의 태도가 바뀔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하게 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마음대로 읽고 보는 것을 우리는 읽거나 볼 수 없습니다. 수술실에서 환자를 수술하려는 외과의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의 손은 절대적으로 깨끗하고 살균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손에 있는 세균으로 환자를 죽일 수 있습니다. 가위가 땅에 떨어지면 그는 그것을 만지거나 사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눈에는 그 가위가 아주 깨끗해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바닥에 세균이 있기 때문에 가위는 더러워졌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100% 순결함을 향한, 그에 못지않은 열정을 가지고 세상 속에서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들은 많은 세상적인 즐거움에 빠져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거룩한 목적을 위해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는 그 목적을 이루어야 합니다. 기독교 지도자들이 그러한 순결함 가운데 살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더럽고, 살균되지 않은 마음"으로 양 떼를 더럽히고 그들이 가는 곳마다 영적인 죽음을 초래합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는 소망을 보았습니까?

성도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기업(상속, 유산)의 영광스러운 풍성함을 보셨습니까? 이것은 하늘에서 우리가 받을 기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가지신 기업(우리가 변화되고 성화될 때,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심 – 역주)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기업을 가지고 계십니다.

부활의 능력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나타내실 수 있는 그분의 위대한 능력을 보셨습니까? 하나님이 이 우주에 나타내신 가장 위대한 능력은 창조가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에 있었습니다(1:20). 우리를 둘러싼 우주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첫 번째 창조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서, 두 번째 창조 곧 새 창조가 시작되었습니다. 새 창조는 이전 창조보다 더 강력합니다. 요한복음 20장에 나오는 내용은 창세기 1장에 나오는 내용보다 더 강력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우주에 나타난 가장 위대한 능력의 표현이었습니다. 정신적 힘은 물리적 힘보다 더 강력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 능력을 경험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계시를 받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먼저 내적인 삶에서 그 능력을 경험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나중에 언젠가는 우리 몸에서도 그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항상 내면에서 시작됩니다. 언젠가 우리는 우리 몸 안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영 안에서 그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기를 원하십니다. 부활의 능력은 우리를 영적 죽음에서 일으켜 세울 능력입니다. 죄의 법은 우리를 영적 죽음으로 끌어내립니다. 부활의 능력은 우리를 그 죽음으로부터 일으켜 세웁니다.

우리를 죄의 법에서 들어 올리는 부활의 능력은, 마치 (책을 끌어내리려는) 중력의 법칙에 맞서 책을 들어 올리는 것과 같습니다. 부활의 능력은 우리를 하늘로 들어 올립니다. 2:1-6절에서 우리는 우리의 죄로 죽었을 때, 이 능력이 우리를 일으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혔다는 것을 읽습니다(2:6). 일부 사람들은 이것이 상상력이 풍부한 비유적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고 믿지 않으면, 당신은 결코 이로부터 얻는 유익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분량대로 받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참되시며,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우리의 감정은 모두 믿을 수 없습니다. 심지어 우리의 시각도 우리를 속일 수 있습니다.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는 두 어린 소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열두 살쯤 된 큰아이가 말했습니다. "야, 해가 움직였어. 아침에는 동쪽에 있었는데, 지금은 서쪽에 있어." 여섯 살밖에 안 된 작은아이가 말했습니다. "아니. 아빠가 우리한테 한 말 기억나? 움직이는 건 태양이 아니라 지구가 자전하는 거야." 큰아이가 말했습니다. "나는 내가 보고 느끼는 것을 믿어. 나는 동쪽에 해가 있는 걸 봤는데, 지금은 서쪽에 있어. 그리고 발 밑에서 지구가 회전하는 것을 느끼지 못했어. 지구는 움직이지 않았어." 작은아이가 말했습니다. "나는 아빠를 믿어."

누가 옳았을까요? 아버지를 믿는 아이, 아니면 보고 느낀 것을 믿는 아이?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보고 느낀 것에 따라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의 감각은 우리를 속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믿습니다; 비록 내가 보거나 느낄 수 없더라도 그분의 말씀은 항상 옳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일으켜져서 하늘의 자리에 앉혀졌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내 감정이 내게 뭐라고 말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 감정은 내 시각처럼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믿으면, 내 삶의 모든 것이 잘 풀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믿지 않으면, 결국 많은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놀라운 부활의 능력이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에게만 주어진다고 배웁니다. 당신이 이것을 믿지 않으면, 이 능력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요 20: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그들 중 한 사람입니다.

나는 사도들보다 더 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직접 보지 않고도 믿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당신의 아버지가 당신을 사랑하는 억만장자이고 어느 날 당신의 은행 계좌에 백만 루피를 넣어두었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그 말을 믿겠습니까, 아니면 은행에 가서 확인해 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하늘에 두셨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것을 믿습니다. 나는 더 이상 이 땅에 속하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나는 이 땅에 속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내가 하늘에 속해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비록 내 몸은 이 땅에 있지만, 이제 내 생각(mind)은 위에 있는 것들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지금 이 세상의 것들을 위해 싸우지 않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이 내 교회에 남아 있도록 하기 위해서도 싸우지 않습니다. 만약 누군가 어느 목사가 내 교회에서 어떤 형제를 유혹해서 데려갔다고 말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나는 그 일 때문에 누구와도 싸우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다른 교회에 가고 싶어 한다면, 그가 행복해지는 곳으로 가게 두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 종들은 싸우지 아니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이 땅과 교회에서 지위와 명예와 돈을 위해 싸우는 것을 봅니다. 그런 신자들은 세상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하늘에 앉아있지" 않습니다. 사실 그들은 생각 속에 기독교 교리를 붙잡고 있는 불신자들입니다. 그들은 성령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하늘의 자리에 올려주시도록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에베소서 1장부터 3장까지는 그리스도인 삶의 기초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늘에 올려주시지만, 우리는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결코 스스로를 죽음에서 살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조차도 자신을 죽음에서 살리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은 항상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음에서 살리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죽음에서 살릴 권세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0:18). 하지만 그분은 결코 그 권세를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아버지께서 자신을 죽음에서 살리시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세례에서, 다른 사람이 당신을 물속으로 밀어 넣을 때, 바로 그 사람이 당신을 들어 올립니다. 당신이 자신을 들어 올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를 들어 올리시는 것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이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에 순복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들어 올려 하늘에 앉히십니다. 하늘의 관점에서 보면, 땅의 모든 것이 작아 보일 것입니다. 비행기를 타고 여행할 때, 지상의 거대한 건물들은 장난감 건물처럼 보이고, 큰 차들은 장난감 자동차처럼 보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게 되면, 지상의 것들이 당신의 눈에는 작아지고, 그것들을 위해 싸우는 것을 멈추게 될 것입니다. 마치 장난감 자동차를 위해 싸우지 않듯이 말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우리의 구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습니다(2:8). 그러나 행위의 결과가 아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이 미리 준비하신 선한 일들 가운데서 걸어가도록 계획하셨습니다(2:10). 그런 다음 2:11-22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으로 만드시는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분리의 벽이 허물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적대감을 없애셨습니다(2:14, 15). 유대인과 이방인은 세상에서 가장 반대되는 종족입니다. 인도의 어떤 카스트 제도보다 더 나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이 둘을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그분은 적대감을 없애셨습니다. 만약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다른 공동체에 대해 가졌던 모든 적대감은 무너집니다. 만약 그러한 적대감이 다른 사람에 대해 여전히 존재한다면, 당신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 모두를 한 몸으로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은 하늘에 속한 삶을 사는 신자와만 한 몸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의 교회는 단지 사람들의 집단, 즉 회중일 뿐입니다. 그들이 한 몸이 되려면, 당신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있는 삶을 살도록 해야 합니다(2:16).

바울은 3장에서 큰 비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옛 언약 아래에서는 드러나지 않았던 비밀, 곧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3:4). 이 비밀에 이르는 길은 새 언약 아래에서만 성령을 통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에베소서의 처음 세 장에는 두 가지 기도가 있습니다. 1:17-23은 성령을 통한 계시를 구하는 기도이고, 3:14-21은 성령의 능력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성령의 계시이고, 다른 하나는 4장에서 6장에 설명될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 주는 성령의 능력입니다.

두 번째 기도는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사,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소서"(3:16, 17)입니다. 이 구절의 마지막 부분은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집처 거하시도록"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집에서 사는 것과 그곳에서 "집처럼" 느끼는 것의 차이를 압니다. 어떤 집에서는 불편함을 느끼지만, 다른 집에서는 완벽하게 집에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해줍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당신의 마음속에 거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예수님이 그곳에서 집처럼 느끼시는가?"입니다. 아니면 당신의 마음과 집에 있는 어떤 것들 때문에 예수님이 불편을 느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완벽히 편안함을 느끼시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충만하게 하셔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완벽하게 집처럼 느끼실 수 있도록 하십니다.

“너희가 모든 성도와 함께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달아 알게 되기를 바라노라”(3:18). 우리는 혼자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모든 성도와 함께해야만 그리스도의 사랑을 온전히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3:19)라고 결론짓습니다. 그리고 3:20, 21은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께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고자 하시는 일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이 땅에서의 천국의 삶

이제 4장부터 6장까지 살펴보겠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1장부터 3장에 머무른 채 살아갑니다. 그들은 하늘에 앉아 있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들은 “너무 하늘의 일에만 마음을 두고 살아서 이 땅에서는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사시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이 땅에 살았던 사람 중 가장 하늘에 속한 마음을 가진 분이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분의 삶은 모든 인류에게 가장 유용한 삶이었습니다. 우리의 생각(mind)은 하늘에 있어야 하지만, 우리의 발은 땅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천국의 삶은 이 땅에서 실제적인 방식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이 어린아이로서, 십 대로서, 직장인으로서, 그리고 전임 설교자로서 이 땅에서 어떻게 천국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집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활동을 통해 삶을 살아갑니다. 이 세 가지 영역 모두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천국의 영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러한 삶의 방식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참된 기독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은둔자가 아니셨습니다. 그분은 주변 사람들과 다르게 옷을 입거나 먹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 똑같이 사시고 일하셨습니다. 그분은 다른 사람들과 너무나 같았기에 로마 군인들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분을 알아볼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이는 그분이 모든 면에서 제자들과 똑같으셨음을 보여줍니다. 겉으로는 제자들과 똑같으셨지만, 속으로는 하늘의 생각을 품으셨습니다. 하늘의 태도가 그분의 행동 방식과 활동을 지배했습니다. 우리도 가정과 교회에서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4장에서 6장까지의 내용입니다.

4장은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4:1). 처음 세 장에는 권면이 없습니다. 이 세 장(1-3장)의 모든 내용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에 관한 것입니다. 그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모든 영적인 복으로 축복하셨으며, 우리를 죽음에서 일으켜 세우시고 하늘에 있는 그리스도 안에 두셨으며, 우리를 그분의 기업으로 삼으시고, 그분의 능력을 주시고, 사탄을 패배시키셨으며, 십자가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한 몸으로 연합시키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우리는 그 일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1장부터 3장까지는 이러한 진리들에 대한 계시를 받는 것에 중점을 둡니다. 이제 우리는 이 계시를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의 목적은 하나님의 다방면적인 지혜가 교회를 통해 하늘에 있는 천사들(선한 천사와 악한 천사 모두)에게 알려지도록 하는 것입니다(3:10). 사탄과 그의 악령들은 아담의 타락 이후로 아무도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살 수 없다고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삶을 통해 사탄의 거짓말을 반박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오셨고,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셨지만,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사셨습니다.

사탄은 두 가지를 말합니다:

  1. "예수는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은 할 수 없다. 모든 믿는 사람은 세상적인 생각을 가질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나는 내 교회 안에 이 땅에서 하늘의 생각을 가지고 살 사람들이 있음을 너희에게 보여주겠다."
  2.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하나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말라얄람족과 타밀족은 하나가 될 수 없다. 앵글로-인도인과 말라얄람족은 하나가 될 수 없다. 서양인과 동양인은 하나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나는 내 교회 안에서 이 모든 무리와 다른 많은 무리들이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하나가 될 수 있는지 보여 주겠다."

이 두 가지는 우리가 믿는 자로서 사탄에게 보여줘야 할 두 가지 도전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욥에 대해 자랑하셨듯이(욥 1:8) 우리에 대해서도 자랑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계에서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패배한 삶을 살고 있으며, 대부분의 교회들은 분열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이 땅 곳곳에 사탄에게 자랑할 수 있는 남은 자들을 남겨 두셨고, 그들의 삶은 하늘의 천사들조차 놀라게 합니다.

4:1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나는 그리스도인 삶의 세 가지 비결이 겸손, 겸손, 그리고 겸손이라고 자주 말하곤 합니다. 모든 것은 바로 거기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시며 마태복음 11:29에서 "나는 겸손하고 온유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배우라고 하신 것은 오직 겸손과 온유뿐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담의 자녀인 우리는 모두 교만하고 매정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당신이 이 땅에서 하늘의 삶을 보여주고자 한다면, 그것은 먼저 복음 전도나 설교, 성경 교육, 또는 사회 봉사를 통해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겸손하고 온유한 태도를 통해 드러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의 모형을 주셨을 때, 법궤부터 시작하셨습니다. 어떤 건축을 계획할 때든 사람은 건물의 외형부터 시작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가장 안쪽 성소부터 시작하셨습니다. 사람은 잔의 겉을 깨끗이 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먼저 안을 깨끗이 하려고 하십니다. 그분은 안에서 시작하여 바깥으로 나아가십니다. 당신의 생각과 접근 방식이 인간적이라면,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겉모습에 더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당신이 더욱 신성하다면, 오직 하나님만 보실 수 있는 내면에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교회 구성원의 수보다 구성원의 질에 더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규모는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질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겸손, 온유, 그리고 오래 참음을 찾으십니다. 4:2(LB)은 "너희가 사랑으로 서로의 허물을 용납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교회에서도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실수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는 서로의 실수를 참아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기 때문에, 서로의 실수를 용납해야 합니다. "네가 잘못하면 내가 덮어줄 것이다. 네가 어떤 일을 빠뜨리면 내가 대신할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이 작동해야 하는 방식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연합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4:3). 연합은 바울 서신의 여러 부분에서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교회를 위해 가지신 부담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몸은 죽으면 해체되기 시작합니다. 우리 몸은 흙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 몸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흙 조각들은 서로 붙어 있는 것입니다. 생명이 사라지는 순간, 해체가 시작되고; 얼마 후 온 몸이 흙으로 변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는 믿는 이들의 교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서 믿는 이들이 분열되면, 죽음이 이미 들어왔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분열되면, 비록 그들이 서로 이혼하지 않았더라도 죽음이 이미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혼한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아 오해, 긴장, 다툼 등으로 부부 관계가 해체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대개 주님을 위해 순수한 사역을 세우려는 열렬한 형제 몇 명이 함께 모이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하지만 곧 분열이 일어나고 죽음이 찾아옵니다. 우리는 결혼 생활과 교회 안에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싸워야 합니다.

인체의 놀라운 점은 그것을 구성하는 작은 흙 조각들이 너무도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어서, 그들이 어떻게 이어져 있는지 눈으로는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몸이 다치면, 즉시 피부 표면을 닫으려는 과정이 시작됩니다. 몸은 피부의 어떤 부분도 벌어져 열려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즉시 피부의 갈라진 부분을 다시 붙이기 시작합니다. 뼈가 부러졌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은 즉시 뼈를 붙이려고 노력합니다. 이 세상의 어떤 사람도 두 뼈를 붙일 수 없습니다. 의사는 뼈의 부러진 부분을 서로 나란히 놓을 수만 있습니다. 두 부분을 연결하는 것은 바로 몸 자신입니다. 인간의 몸은 항상 하나됨을 향해 움직입니다. 그리스도의 몸도 그렇게 기능해야 합니다. 교회가 그렇게 기능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대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많은 거룩한 개인들을 세우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몸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바울이 4장에서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한 몸이니, 영의 연합을 보존하라”고 권면합니다. 언제 우리는 지역적인 몸 안에 연합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평안의 줄로 매여” 있을 때입니다(4:3). “성령의 생각은 평안입니다”(롬 8:6). 형제자매를 생각할 때, 평안과 안식이 있다면, 당신과 그 사람 사이에 연합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을 생각할 때 조금이라도 불안함을 느낀다면, 당신은 그 사람과 연합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그에게 “주님을 찬양합니다”라고 열정적으로 인사할 수 있지만, 그것은 위선입니다. 평안이 시험입니다. 그러므로 평안의 매는 줄로 영의 연합을 보존해야 합니다.

4:5에서, “한 세례”라고 말할 때, 이는 성경적 세례를 한 번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아 세례”라고 부르는 어린아이 세례는 세례가 아닙니다. 따라서 당신이 어릴 때 유아 세례를 받았다면, 그것은 진정한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 다음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 필요한 은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초자연적인 은사 없이는 교회를 세우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은사를 주셨습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으니”(4:7).

그런 다음 예수님의 승천에 대해 읽습니다: “승천하실 때에 많은 포로를 사로잡으셨느니라”(4:8). 이 구절의 의미는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그분이 말씀하신 대로 사흘 낮과 사흘 밤 동안 땅의 중심부로 가셨습니다(마 12:40). 따라서 우리는 낙원이 그 당시 땅의 중심부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회개한 강도에게 그날 낙원에 자신과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께서는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있었던) 그분의 몸으로 다시 돌아오셔서 무덤에서 나오셨습니다. 그 후 40일 동안 땅에 계시다가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 후 승천하셨습니다. 그분이 승천하실 때, 낙원에 있던 모든 사람들(땅의 중심부에 갇혀 있던 사람들)을 데리고 셋째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낙원이 셋째 하늘에 있다는 것을 압니다. 왜냐하면 고린도후서 12:2, 4에서 바울이 그곳으로 이끌려 갔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이끌려 올라갔다고 했고, 내려가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오늘날 죽으면 모세, 다윗, 예수님처럼 땅의 중심부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그리스도께서 계신 셋째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땅의 아랫부분으로 내려가셨습니다(4:9). 지옥도 그곳에 있었지만, 부자와 나사로의 실제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지옥과 낙원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있었습니다. 지옥은 여전히 지구 중심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승천하신 후, 교회에 은사를 주셨습니다. 이 은사들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에 사도들, 예언자들, 복음 전하는 자들, 목자들, 교사들을 주셨습니다(4:11). 이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모든 믿는 자들을 준비시켜야 했습니다. 이 점에 유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스스로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믿는 자들을 준비시켜서,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도록 해야 했습니다. 모든 믿는 자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 각자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러한 일은 매우 드뭅니다.

은사를 받은 사람들 중 첫 번째는 사도들입니다. 이들은 처음 열두 사도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그들을 교회에 주셨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에서는, 바울과 바나바도 사도로 불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2에서, 원래 열두 사도 중 한 명(요한)만 살아 있었을 때,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에 “너희가 사도라 주장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그들의 거짓을 드러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당시 다른 진정한 사도들도 있었음을 증명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도라 주장하는 사람을 시험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사도들은 있습니다. 사도는 반드시 성경을 기록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안드레를 비롯한 원래 열두 사도 중 많은 사람들은 성경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가와 누가처럼 사도가 아닌 사람들도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사도들은 하나님께서 특정한 사명을 가지고 보내신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라는 단어는 ‘보냄을 받은 자’를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특정 시기에 특정 장소로 보내신 사람입니다. 사도들은 여러 지역에 지역 교회를 세우고 그 지역에 장로들을 임명합니다. 그러면 이 사도들은 그 장로들의 장로가 되어 그들을 인도하고, 교회 문제를 해결하며, 그들이 성숙하도록 인도합니다. 사도는 어떤 교회 안에 본거지를 두고 있을지라도, 그 지역 교회의 교인들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습니다. 사도의 책임은 교회 장로들에 대한 것입니다.

다음은 예언자들입니다. 이들은 교회의 문제를 진단할 분별력을 부여받은 사람들입니다. 마치 환자의 병을 진단하고, 적절한 약을 처방하고, 필요한 수술을 하고, 암을 제거하고 치료할 수 있는 훌륭한 의사와 같습니다. 예언자들은 모든 교회에서 죄라는 암을 항상 드러내기 때문에 인기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신체 검사 결과를 보고 기뻐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많은 신자들은 예언자가 자신의 죄악된 내면 상태를 말해 줄 때 기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지역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사역입니다. 어떤 교회든 영적인 생명을 유지하려면, 모든 모임에서 죄를 드러내는 예언자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자신의 숨겨진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서 모임에 함께하신다는 것을 인정하며 그분께로 돌아올 것입니다(고전 14:24, 25). 나는 지금 사람들에게 어디로 가야 할지, 누구와 결혼해야 할지 말하거나 천벌로 위협하는 오늘날 기독교계의 수많은 거짓 예언자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짜 예언입니다. 지시적 예언은 새 언약에서는 결코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옛 언약의 선지자들의 사역이었으며, 당시에는 선지자들만 성령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다음은 전도자들입니다. 이들은 복음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부담을 지고, 개인적인 전도나 전도 집회를 통해 그들을 주님께 인도할 수 있는 능력을 받은 신자들입니다. 전도자는 몸에 있는 손과 같아서 빵 한 조각을 집어서(불신자를 상징) 입에 넣습니다. 예언자는 그 조각을 씹어 작게 만드는 이빨과 같고, 또한 위처럼 산을 붓고 크기를 줄인 다음 마침내 몸의 일부가 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빵 조각을 집어 올리는 온유한 사역은 산을 붓는 사역보다 더 칭찬 받습니다. 하지만 빵 조각이 몸의 일부가 되려면 둘 다 필요합니다. 따라서 전도자와 예언자는 함께 일해야 합니다.

다음은 목자들이 있습니다. 그리스어 단어 poimen(명사)과 poimaino(동사)는 신약성경에서 29회 사용되었으며, 다른 모든 곳에서는 항상 "목자", "양을 치는"으로 번역됩니다. 여기서만 "목사"로 번역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기독교계에서 이 사역에 대한 많은 오해가 생겼습니다. 목자는 양들을 돌보고, 배고프거나 다쳤을 때 보살피는 사람들입니다. 목자의 임무는 양들을 양육하고, 어린 양들을 부드럽게 돌보고, 그들이 성숙할 때까지 성장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모든 교회에는 한 명의 목사가 아니라 목자들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단 12명의 사람만 목양하셨습니다. 따라서 교회에 120명의 사람이 있다면, 그들을 돌볼 10명의 목자가 필요합니다. 나는 '목사'라는 직함을 가진 전임 사역자 10명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자신보다 어린 사람들을 돌볼 목자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세속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교회의 젊은이들을 격려하고자 하는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25세 청년은 교회의 모든 십 대들을 격려하고 그들의 목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많은 사람들은 교회 장로들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더 많은 목자가 필요합니다. 대형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아버지의 마음을 가진 목자들이 있는 작은 교회들입니다. 대형 교회는 사실 사람들이 즐거움을 찾고 교육을 받기 위해 오는 "설교 센터"일 뿐, 은혜 안에서 성장하기 위해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교회의 지도자들은 단지 훌륭한 행정가이자 설교자/교사일 뿐, 목자는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교사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단순하고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기독교계에는 훌륭한 교사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모든 교회에 교사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한 명의 교사만으로도 20~30개 교회를 돌며 가르칠 수 있습니다. 요즘은 CD, DVD, 인터넷 덕분에 한 명의 교사가 수백 개의 교회에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교회에 전도자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전도자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한 후 다른 곳으로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교회에 필요한 것은 예언자와 목자입니다.

이 모든 사역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혼들(souls)을 그리스도께 인도한 후, 그들이 좋아하는 교회로 가거나, 죽은 교회로 돌아가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에베소서 4장에서 말하는 전도자는 그런 유형의 전도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날에는 자신의 이름을 사역에 붙여서 활동하는 전도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집회를 열고 (바라건대) 사람들을 구원합니다. 그런데 그 후에 그들은 사람들에게 죽은 교회로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그 죽은 교회에는 그들을 진리로 인도할 목자나 교사가 없습니다.

4장에서, 우리는 사도들, 예언자들, 목자들, 교사들과 함께 일하는 전도자들에 대해 읽습니다. 전도자는 회심자들을 선한 목자들에게 넘겨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협력의 형태입니다. 교회 초기 시대의 모습이 바로 그랬습니다. 빌립은 전도자였지만 사도나 목자는 아니었습니다(행 8장). 그래서 사마리아의 다른 사람들이 빌립으로부터 책임을 이어받아 회심자들을 하나님의 진리로 더욱 인도했습니다. 빌립은 그들이 제멋대로 돌아다니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전도 사역은 한 사람의 이름만 세우는데 집중하며, 그 사람은 사람들의 헌금으로 많은 돈을 벌고 있습니다. 그것은 직업이 되었고, 4:11에서 말하는 부르심(calling)은 아닙니다. 그것은 여기서 말하는 전도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여기서 전도자는 자신의 사역이나 이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성장

더 나아가, 바울은 여기서 몸 안에서의 연합의 필요성에 대해 말합니다. 그는 믿는 자로서 우리 모두가 “믿음의 하나 됨에 이를 때까지...... 영의 하나 된 것을 지켜야 한다”(4:3,13)라고 말합니다. 믿는 자로서 우리 사이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많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교회를 그분에게로 데려가시기 전에 교회가 환난을 겪을 것이라는 나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께서 환난 전에 오실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다른 의견의 차이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믿음의 모든 면에서 연합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연합에 이를 때까지, 우리는 영 안에서 연합해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의 모든 문제에서 하나가 될 때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영으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점진적으로 “성숙한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해야 합니다(4:13). 우리의 목표는 우리 자신이 성장하고 다른 사람들도 이러한 충만함에 이르도록 돕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의 속임수와 교활한 계략으로 말미암아 온갖 교리의 풍조에 이리저리 밀려다니는” 어린아이로 남아서는 안 됩니다(4:14). 하나님은 우리가 분별력을 키우도록 속임과 거짓 가르침에 노출되도록 허락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분별력은 발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수많은 속이는 자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기독교계에 돌아다니도록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영이 바르지 못한 자와 영이 바른 자를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판단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분별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영적인 감각들이 훈련될 것입니다.

4:15에서, 우리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여 자라도록 하라”고 권고 받습니다. 여기서 진리와 사랑의 균형을 주목하십시오. 우리는 진리를 말해야 할까요? 네, 항상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진리를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해야 합니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할 수 없다면, 당신은 사람들에게 진리를 말할 만큼 충분한 사랑이 생길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사랑은 진리라는 펜(연필)을 쓸 수 있는 판입니다. 진리를 쓸 판도 없이 쓰려고 한다면 허공에 쓰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도 당신이 무엇을 쓰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설교단에서든 개인적인 대화에서든, 항상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함으로써 우리는 “모든 면에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랄 수 있습니다.”

4:16에서, 바울은 “온 몸이 각 마디의 공급을 받아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마디는 교제를 의미합니다. 당신의 한쪽 팔에 얼마나 많은 마디가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어깨에 하나, 팔꿈치에 하나, 손목에 하나, 그리고 각 손가락에 세 개씩, 최소 열일곱 개의 마디가 있습니다. 이 마디들이 당신의 팔을 자유롭게 움직이게 합니다. 만약 당신의 윗팔이 튼튼하고 아랫팔도 튼튼한데, 팔꿈치가 뻣뻣하다면 그 팔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팔을 유용하게 만드는 것은 힘뿐만이 아닙니다. 관절도 제대로 기능해야 합니다. 이제 이것을 그리스도의 몸에 적용해 보십시오. 여기 좋은 형제, 강한 위팔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좋은 형제, 강한 아랫팔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 교제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비극입니다. 인체에서, 이것을 관절염이라고 불리며, 매우 고통스럽습니다. 많은 지역 교회들이 관절염을 앓고 있습니다. 관절이 제대로 기능하면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관절염이 있으면 몸이 삐걱거리고 모든 움직임이 건강에 해로운 소음을 냅니다. 어떤 신자들 사이에서 말하는 "교제"는 바로 그런 것입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납니다. 하지만 관절이 제대로 기능하면 아무 소리도 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교제 또한 이와 같아야 합니다. 만약 당신이 그렇지 않다면, 관절염 약을 먹어야 합니다. 당신의 "자신을 위한 삶"을 죽이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치유될 것이고,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는 영광스러울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하나님의 뜻입니다.

4:1725에는 강력한 권면이 나옵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행하지 말라. 그들의 총명은 어두워지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너희는 다르게 행해야 한다.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렇게 배우지 않았다.” 성경을 배우는 것과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의 차이를 아십니까?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단순히 성경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배워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배우면 이방인처럼 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전의 생활 방식을 벗어 버리고, 우리의 생각(minds)의 영 안에서 새롭게 될 것입니다(23절). 모든 거짓을 버릴 것입니다(25절).

4:26에서는, 해가 지기 전에 모든 분노를 버리라고 권면합니다. 옛날 사람들은 해가 진 직후에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에 모든 잘못된 태도를 버리라고 권면합니다. 남편과 아내 여러분, 다툼과 갈등의 원인을 해결하지 않고 잠자리에 드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이 구절에서 경고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귀에게 둘 사이를 갈라놓을 기회를 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몇 가지 실질적인 조언이 있습니다. 과거에 도둑질했던 사람들은 이제 반대로 해야 합니다. 정직하게 돈을 벌어서 다른 사람들과 나눠야 합니다(4:28). 우리는 말을 조심하고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말이 우리 입에서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4:29, 30). 모든 악독(억울한 마음)과 분노와 노여움은 버려야 합니다(4:31). 이 구절들은 우리 삶에 악독, 분노, 험담, 비방, 중상, 증오가 전혀 없어야 함을 분명히 가르칩니다.

자동차 공장 벽에 "우리의 목표는 결함 제로입니다"라고 쓰인 간판을 본 기억이 납니다. 그 회사는 직원들이 결함 없는 자동차를 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 원했습니다. 나는 "내 목표 역시 결함 제로가 되어야 한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곳에 도달하려면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목표여야 합니다. 자동차 제조업체들이 결함 제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면, 그리스도인들도 왜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지 못할까요?

"서로 친절하게 대하고, 부드럽게 대하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물로 하나님께 드리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안에서 행하라"(4:32; 5:1, 2). 우리의 부르심은 하나님을 본받고 사랑 안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 높은 부르심은 없습니다.

“음행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 부르지 말라. 추잡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하는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너희가 분명히 알다시피, 음행하는 자나 불순한 자나 탐욕스러운 자 곧 우상 숭배자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5:3-6). 이것은 우리의 대화에 대한 얼마나 높은 기준입니까! 부정적인 것(어리석은 희롱과 불순함)을 피하는 한 가지 방법은 긍정적인 것(모든 것에 감사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화가 우리의 영원한 운명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하도록 속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이 땅에서의 삶은 짧기 때문에, 시간을 최대한 잘 활용해야 합니다. 이는 날들이 악하기 때문이며, 우리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5:16,17).

그런 다음 우리는 “술 취하지 말고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5:18)라는 놀라운 구절에 도달하게 됩니다. 두 가지 계명을 주목하십시오. 첫 번째는 "술 취하지 말라"입니다. 두 번째는 "성령으로 충만하라"입니다. 여기 첫 번째 계명을 절대 어기지 않을 그리스도인들이 왜 두 번째 계명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까요? 이는 사탄이 우리의 생각을 성경의 진리로부터 어떻게 눈 멀게 하는지 보여주는 한 가지 예일 뿐입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첫 번째 계명은 명령("술 취하지 말라")으로 여기지만, 두 번째 계명은 제안("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둘 다 명령이며, 둘 다 똑같이 중요합니다. 일 년에 단 한 번이라도 술에 취하는 것이 심각한 문제라면, 일 년에 단 하루라도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당신은 그것을 그렇게 본 적이 있습니까?

5:18 하반절의 동사는 진행형 동사입니다. 즉, "충만함을 받고 있다", "계속 충만함을 받다"를 의미하며, "한 번 충만함을 받다"가 아닙니다. 아침에 성령으로 충만했다면, 저녁에도, 그리고 매일 계속해서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항상 성령으로 충만하게 채워주시도록 간구하십시오. 사도행전에서는 그러한 사람들을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성령 충만함의 주요 특징 중 하나는 말하는 방식의 변화입니다. 우리의 혀는 "불의 혀"(행 2:3)가 될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순결의 불로, 모국어로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언어는 하늘의 언어가 될 것입니다. 이 구절들에서 우리의 말에 대한 강조점을 주목하십시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말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고 선율을 만들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항상 감사하라”(5:19, 20).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할 때, 감사의 영이 험담, 비방, 억울한 마음, 분노의 영을 대신할 것입니다.

5:18 이후의 모든 구절들은 성령 충만한 사람들의 특징입니다(5:19부터 6:24까지). 그것은 감사로 시작하여 교회와 가정 관계에서 서로에게 복종하는 것으로 이어지고(5:21부터 6:9까지); 마지막으로 사탄의 세력과 싸워 이기는 것으로 이어집니다(6:11). 그러므로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걸어가고 싸우는 비결은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제대로 찬양할 수 없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고서는 경건한 남편과 아내가 될 수 없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고서는 자녀를 제대로 양육할 수 없습니다. 또한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고서는 사탄의 세력을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든 것은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가정의 관계들

여기서는 가정과 관련하여 세 가지 관계, 즉 남편과 아내(5:22-33), 자녀와 부모(6:1-4), 그리고 주인과 종(6:5-9)에 대해 말씀합니다. 이 마지막 부분은 우리 집에서 일하는 하인뿐 아니라 회사나 정부에서 상사를 두고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해당됩니다. 즉, 이 말씀은 우리가 집이나 직장에서 주인(여주인)이나 하인으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집과 직장, 이 두 곳에서 보내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그리스도의 영을 나타낼 것입니다. 오직 그 영으로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울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에 대해 말합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행하는 행동의 근본적인 원칙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5:21)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듯이, 남편도 아내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아버지도 자녀에게 복종해야 하고, 주인도 종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경계를 정해 놓으셨고, 우리 모두는 그 경계를 존중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모든 사람을 공경”(벧전 2:17)하는 방법입니다. 남편, 아내, 아버지, 자녀, 주인과 종 모두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정해 놓으신 경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당신의 집에서 일하는 종이 있다면, 그는 당신이 침해할 수 없는 특정한 권리의 경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에게는 정기적으로 월급을 지급해야 하고, 그의 존엄성을 존중해야 하며, 징계를 받을 때 굴욕을 당해서는 안 됩니다. 이처럼 주인은 종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아이가 나쁜 행동으로 벌을 받을 때에도 아이의 존엄성은 존중받아야 합니다. 아버지는 자녀를 둘러싼 경계에 복종해야 합니다. 아버지로서 나는 방문객이든 형제든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절대 아이를 벌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이들에게 이중적인 벌이 되기 때문입니다. 먼저 매질을 당하고, 그 다음에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굴욕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굴욕은 매질보다 더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아이에게도 그를 둘러싼 존엄성의 원이 있으며, 아버지는 그 경계를 존중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아내에게도 경계가 있습니다. 아내는 부엌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하고 싶어 할 수 있습니다. 부엌은 아내의 영역입니다. 남편은 아내가 부엌을 운영하는 방식에 간섭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어떤 경건한 남편이 질서 정연하게 행동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정반대였습니다. 그녀는 부엌에 접시와 수저를 아무렇게나, 모두 뒤섞어 두곤 했습니다. 남편은 부엌에서 설거지를 할 때마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접시와 수저를 정돈하고 싶은 유혹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내가 정돈된 부엌을 보면 절대 그렇게 정리할 수 없기에 낙담할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내가 부엌에서 편안하게 느낄 수 있도록 아내가 정리했던 것처럼 모든 것을 의도적으로 어설프게 정리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부엌은 어설펐지만, 그들 사이에는 영광스러운 교제가 있었습니다! 그 경건한 형제는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아내에게 복종하는 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지혜로웠고, 아내와의 교제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접시와 수저를 아무렇게나 두든, 정돈된 상태로 두든 개의치 않았습니다. 어떤 부부들은 너무 어리석어서 서로의 교제보다 깔끔한 집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의 교제 또한 깔끔하고 정돈된 집보다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깔끔하고 정돈된 생활을 하고 물건을 제자리에 정리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어려서 집에서 뛰어놀 때는 모든 것을 항상 깔끔하고 정돈되게 유지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이 자유롭게 지낼 수 있는 유일한 곳은 바로 집입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내 집이 깔끔하다고 생각하든 그렇지 않든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나는 아내와 아이들이 내 집에서 행복하게 지내기를 바라며, 그들과 교제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나에게는 더 중요합니다. 깔끔하고 정돈된 집보다 항상 교제를 더 중요하게 여기십시오.

에베소서 5장에서는 아내가 남편의 권위를 자기의 머리로 인정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남편을 우리 몸의 뇌처럼 머리로 삼으셨습니다. 머리(뇌)는 몸의 모든 지체를 돌봅니다(5:28). 마찬가지로 남편도 아내를 돌보아야 합니다. 머리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명령만 내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머리는 몸에 명령을 내립니다. 손과 발, 혀에게 여러 가지 일을 하라고 명령합니다. 하지만 머리는 또한 지체들을 돌봅니다. 몸의 어느 곳에든 아주 작은 상처라도 생기면, 머리는 즉시 그것을 감지하고 조치를 취합니다. 마찬가지로 남편도 머리로서 아내의 상처에 민감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모습입니다. 나는 단순히 육체적 상처만이 아니라 감정적인 상처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내가 슬프거나 낙담하거나 어떤 일로 상처받았을 때, 남편은 아내를 공감하고 치유해야 합니다. 그러한 돌봄에 관심이 없는 남편은 머리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명령만 내리는 머리는 독재자입니다! 민감한 남편과 순종하는 아내는 세상에 그리스도와 교회가 무엇인지를 아름답게 보여줍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가 세워야 할 가정의 모습입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해 이를 추구해야 합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도록 양육되어야 합니다(6:1-4). 우리가 자녀에게 가르쳐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종들은 주인에게 순종하되, 겉치레가 아니라 진심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인들은 종들을 편견 없이 자비롭게 대해야 합니다(6:5-9).

영적 전쟁

6:10-18에서, 우리는 사탄과의 영적 전쟁에 대해 읽습니다. 영적 전쟁에 대한 내용이 가정에 대한 내용 바로 다음에 나온다는 점에 유의하십시오. 마귀는 항상 가정을 먼저 공격합니다. 우리는 마귀에 맞서 굳건히 서야 하며 결코 혈과 육을 상대로 싸워서는 안 됩니다(6:12). 사탄과 효과적으로 싸우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사람과의 모든 싸움을 멈추는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사탄에게 패배하는 이유는 그들이 사람과 너무 많이 싸우기 때문입니다. 나는 오래전 어떤 일로든 사람과는 절대 싸우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다가 나는 사탄과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단 한 가지 결심, 다시는 사람과 싸우지 않겠다는 결심만 한다면, 당신은 사탄을 끊임없이 이길 수 있고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당신의 삶에서 유익한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갑옷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수많은 영적 장비들을 상징합니다.

첫째, 진리의 허리띠입니다. 진리는 성실함, 진실함, 위선 없음, 거짓말 없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죄에서 자유롭지 않다면, 사탄과의 싸움은 잊어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마귀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만약 당신의 내면에 거짓이 있다면, 사탄은 당신의 속사람과 교제할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사탄을 이길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삶이 항상 투명하고 간사함이 없도록 하십시오.

흉배는 의입니다. 의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 것(하나님께서 친히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과
  2.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나누어 주어지는 것으로,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함에 따라 성령을 통해 조금씩 참여하게 되는 의입니다. 이는 항상 깨끗한 양심을 유지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모든 것에 순종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다음은 복음을 전할 준비가 된 신발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사탄을 이길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 게으르고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사탄에게 쉽게 굴복하게 됩니다. 그러나 활동적이고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보호를 받습니다. 젊은 시절, 젊은이들이 직면하는 수많은 유혹으로부터 나를 보호해 준 것은 대부분의 여가 시간을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믿는 사람들과 교제하고, 그분을 위해 증거하는 데 보냈던 것이었습니다. 나는 세속적인 직장에서 일했습니다. 하지만 매주 두 번씩, (내가 살고 있던 도시인) 코친의 거리에서 몇 시간씩 복음을 전했습니다. 해군 기지에서 2년 동안 일하면서 그 도시의 주요 도로를 거의 다 다녔을 겁니다. 전도하고, 전도지를 나눠주고, 집에서 네다섯 명씩 소그룹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로 정신없이 바빴고, 그 덕분에 수많은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할 일 없이, 시간이 많으면 많은 유혹이 찾아올 것입니다. 게으른 생각은 실제로 마귀의 작업장입니다. 우리의 발은 항상 하나님과의 평화라는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한번 시도해 보시고 사탄과의 싸움에서 도움이 되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네 번째 갑옷은 믿음의 방패입니다. 사탄의 가장 강력한 무기 중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에덴에서 하와에게 발사한 미사일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이 정말로 하와를 사랑하신다면, 그녀에게 그런 아름다운 열매를 주지 않을 수 없었을 거라고 암시하며 하와의 생각에 의심의 씨앗을 심었습니다. 하와는 그 미사일에 넘어졌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열렬히 사랑하시고 모든 상황에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실패했을 때조차도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탄의 모든 불타는 미사일이 꺼질 것입니다.

다섯 번째 항목은 성령의 검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사탄을 이기셨습니다. 그분은 하와처럼 사탄과 토론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사탄에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항상 이기셨습니다. 유혹을 받을 때, 우리는 "하나님은 내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신다"(고전 10:13), "죄가 나를 지배하지 못하리라"(롬 6:14), "예수님은 나를 넘어지지 않게 보호하신다"(유 1:24)와 같은 성경 말씀을 인용해야 합니다. 사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면 그는 예수님에게서 도망쳤듯이 당신에게서도 도망칠 것입니다(약 4:7).

마지막으로, 우리는 우리의 전신갑주에 기름을 잘 발라야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며"(6:18). 성령 안에서 기도한다는 것은 알 수 없는 언어로 기도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영으로 기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고전 14:15).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은 육신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성령에 의해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우리의 혀를 성령의 다스림 아래 두는 것을 허용한다면, 우리는 성령 안에서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나를 위해 특별히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싸움에서 최전선에서 싸우는 하나님의 종들을 위해 특별히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면, 우리는 지옥의 문에 맞서 승리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울 수 있습니다.

장 50
빌립보서

그리스도의 태도를 가지라

빌립보서의 주제는 2장 5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던 이 태도를 너희 안에도 가지라.” 바울이 이 서신에서 쓴 모든 내용은 기본적으로 이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서신에는 기쁨에 대한 강조점이 많습니다. “너희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기쁨으로 항상 기도하고”(1:4) 그리고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뻐하라”(4:4).

빌립보서는 바울이 감옥에 있을 때 기록되었습니다(1:13). 바울이 감옥에 있는 동안 기쁨에 대해 그토록 많은 글을 썼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모든 상황이 편안할 때 기쁨에 대해 설교하는 것과 어려운 상황에서 기쁨에 대해 쓰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바울의 이 말은 그리스도인이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할 수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생각과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날 밤에 기쁨에 대해 가장 많이 말씀하셨습니다(요 15, 16장).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아무도 너희 기쁨을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는 내 기쁨을 너희에게 주고자 하노라." 예수님은 몇 시간 후면 마치 범죄자처럼 거짓 고소를 당하고 공개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과 기쁨을 나누고 그들을 격려하셨습니다!!

바울이 가졌던 그리스도의 생각과 태도는 바로 이것입니다. 그는 감옥에서도 기쁨으로 가득했습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당시(행 28:16, 30, 31) 단지 죄수로서 가택 연금 상태였는지, 아니면 실제 로마 감옥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당시 로마 감옥은 쥐, 모기, 기어 다니는 벌레들로 가득 찬 어두운 지하 감옥이었고, 죄수들은 바닥에서 자야 했으며 음식은 거의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어느 곳에 있었든 상황은 분명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바울은 기쁨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슬픔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 않았습니다. 누구의 동정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쁨으로 가득했습니다.

바울은 안락하게 살면서도 아주 사소한 불편함에도 불평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얼마나 훌륭한 본보기입니까! 우리는 믿는 사람들이 작은 어려움에 직면하거나 작은 시련을 겪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의 동정을 얻으려 애쓰는 모습을 얼마나 자주 봅니까. 바울은 여기서 자신의 고난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그는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기쁨으로 항상 간구하노라"(1:3, 4)라고 말합니다. 그는 아마도 모기에 물린 채 밤새도록 고생한 후에 이 글을 썼을 것입니다; 몸을 덮을 만한 따뜻한 옷도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그의 기쁨은 자신의 환경 때문이 아니라 빌립보 성도들에게서 본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수년 전, 바울은 주님의 환상을 통해 빌립보로 갔습니다(행 16:9-12). 그는 그 환상을 따라 그곳으로 가서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했습니다. 그리고 빌립보에서도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곳에서 회심한 간수는 지금은 아마도 빌립보 교회의 장로였을 것이며, 그는 그때 사람들에게 "나는 이 사람이 감옥에서 기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바울의 기쁨은 주님을 위해 유익하게 보낸 삶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당신이 인생의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당신에게 기쁨을 가져다 줄 것은 하나님께서 건강과 힘을 주신 그 시절에 주님을 섬기고, 그분의 나라를 위해 사람들을 모으고, 그분의 교회를 세우는 데 삶을 바쳤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이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인생의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바울처럼 하나님께서 당신의 삶에 행하신 일에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백성을 우리 마음에 소중히 간직함

바울은 위대한 기도의 용사였습니다(1:4). 그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그들에게 설교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종은 단순히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백성을 위해 기도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이 너희 안에서 시작하신 것을 그리스도의 날에 이루실 줄을 확신한다. 내가 너희에 대해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은 마땅하니,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라"(6, 7절). 만약 당신이 설교자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예언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면, 항상 두 가지를 마음속에 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백성을 마음속에 품어야 합니다. 만약 당신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만 있고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하나님은 당신에게 그들을 위한 말씀을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당신이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하지만 당신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지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당신에게 그들을 위한 말씀을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은 아론이 가슴에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을 새긴 흉패를 차고 다녔던 것처럼, 믿는 사람들을 마음에 품었습니다. 바울은 한 인간으로서 세상의 모든 믿는 사람들을 마음에 품고 다닐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책임을 맡기신 사람들만 품고 다녔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께서 돌보라고 책임을 맡기신 사람들을 마음속에 간직할 때, 우리가 하는 말 한마디가 그들에게 축복이 될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애정으로 빌립보 그리스도인들을 사모하며 그들의 사랑이 더욱 커지기를 기도했습니다(1:9). 하지만 그는 또한 그들의 사랑이 분별력 안에서 더욱 커지기를 기도했습니다(1:9, 10). 분별력 없는 사랑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영적인 분별력과 함께 풍성해질 때, 우리는 좋은(good) 것보다 탁월한(excellent) 것을 좋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잠언에서 말했듯이, " 좋은 것(the good)은 가장 좋은 것(the best)의 원수입니다." 우리는 좋은 길을 택하고 훨씬 더 나은 길, 즉 탁월한 길을 놓칠 수 있습니다.

악한 것, 좋은 것, 그리고 가장 좋은 것이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6:12에서 불법적인 것, 합법적인 것, 그리고 유익한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단지 합법적인 것을 선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유익한 것을 선택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영적인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단순히 좋은 방법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섬기는 가장 좋은 방법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좋은 메시지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가장 좋은 메시지를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단순히 좋은 방법으로 돕는 것이 아니라, 가장 좋은 방법으로 돕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의사가 "이 아픈 사람에게 단순히 좋은 치료가 아니라, 가능한 가장 좋은 치료를 해주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환자가 자기 자식이라면 그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사람들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항상 그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할 것입니다.

나는 어떤 집에서 식사 초대를 받아, 식탁에 차려진 음식을 볼 때, 종종 그 주부가 그 음식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지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나는 내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할 때,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최고의 것을 주기 위해 같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시련은 축복으로 변한다

그런 다음 바울은 자신의 투옥에 대해 언급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갇힌 것 때문에 낙심하지 마십시오. 나의 갇힘은 복음의 진보가 되었습니다"(1:12). 바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롬 8:28)라고 믿었습니다. 바울의 투옥은 어떻게 그에게 선이 되었습니까?

바울의 투옥이 우리에게 유익을 준 한 가지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바울은 항상 끊임없이 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늙어서도 그는 항상 여행을 했습니다. 그는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복음을 가지고 가능한 한 많은 곳에 가고 싶어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매우 가까이 동행했고 수많은 시련을 겪으면서 영적으로 매우 부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주님께 배운 모든 것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람의 영적인 부가 그와 함께 무덤으로 내려가지 않고 보존되어 다음 세대의 축복을 위해 전해지도록 결정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바울이 앉아서 그 모든 것을 쓸 수 있을 만큼 속도를 늦추실 수 있었을까요? 그분은 바울이 감옥에 갇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혀 여행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시간을 유익하게 보내기로 결심하고 교회와 동역자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렇게 그는 빌립보서, 에베소서, 골로새서를 썼습니다.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그의 삶과 글은 2000년 동안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투옥은 선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1980년대 중반, 나는 아주 가벼운 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주님께서 수술 없이도 나를 쉽게 낫게 하실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수술을 통해 나를 낫게 하셨습니다. 병원에 있을 때 나는 "주님, 왜 나를 병원에 두셨습니까? 주님께서 나를 낫게 하실 수도 있었고, 나는 지금쯤 어딘가에서 주님을 섬기며 바쁘게 지낼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셨습니다. "수술 없이도 너를 낫게 할 수 있었지만; 내가 너를 병원에 두는 것은 네가 잠시 누워서 내 말을 듣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네가 너무 뛰어다니기 때문에 내가 너와 이야기할 기회가 거의 없다."

내가 병원에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한, 그곳에 누워 있는 것이 기뻤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의 한 가지 장점은 오직 위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거기에 누워 있는 동안 주님은 날마다 내게 말씀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마다, 나는 그분이 하신 말씀을 적었습니다.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대로 거의 한 글자 한 글자 그대로 쓴 글은 그 글이 유일했습니다. 나는 그 글을 "경건한 사람의 50가지 특징"이라는 제목의 작은 소책자로 출판했습니다. 그것은 내 책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하나님을 섬기는 원칙들"에 있는 "하나님은 사람을 필요로 하신다"라는 장의 제목 아래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소책자를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사용하셨습니다. 나는 이 소책자가 내 모든 글 중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나를 병원 침대에 눕히지 않으셨다면 나는 이 소책자를 결코 쓰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가 질병이나 투옥으로 하는 일을 막으셔서, 우리가 그분을 위해 하지 않았을 일을 하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멈추게 하실 때에도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그 안에 목적이 있으시며, “선한 사람의 멈춤도 그들의 걸음만큼이나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시 37:23).

바울의 투옥이 선을 이룬 두 번째 방법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것이 온 근위대와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널리 알려졌으니”(1:13)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여기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여러분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특히 가이사의 궁전에서 일하는 이들이 여러분에게 안부를 전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Living). 가이사의 궁궐 사람들은 어떻게 회심했을까요? 바울이 갇혀 있는 감옥 간수들에게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는 죄수들이 도망치는 것을 막기 위해 간수에게 쇠사슬로 묶여 있었습니다. 로마 군인이 8시간 동안 그에게 쇠사슬로 묶여 있는 동안, 바울은 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간수는 도망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들어야 했습니다. 간수는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을지도 모릅니다. 8시간 교대가 끝나자 다른 간수가 그를 대신하여 8시간 동안 일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간수들이 회심했고, 곧 가이사의 궁궐에서 작은 교회 모임이 시작되었습니다!!

바울의 투옥은, 성경이 기록되고 (결코 모임에 오지 않을) 사람들이 회심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투옥으로 인해 많은 신자들이 더욱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1:14). 소심했던 신자들은 복음을 전하는 데 대한 두려움을 버리고 담대해졌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바울을 시기하고 경쟁심과 다툼의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은사를 과시하기 위해 복음을 전하고 싶어 했지만; 바울이 그곳에 있을 때는 그럴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바울이 감옥에 갇힌 후 그들은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기름 부으심은 없었지만, 설교하고자 하는 욕망은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소식을 들었을 때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요? 그는 그들의 동기가 잘못되었을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전파되고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그들에 대한 판단은 하나님께 맡겼습니다(1:15).

오늘날 우리는 많은 설교자들이 돈을 벌기 위해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용하여 어떤 영혼을 구원하고 심지어 어떤 병든 사람들을 치유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결국 그들을 돈을 벌기 위해 그리스도를 전파했다는 이유로 지옥에 보내실 것입니다(마 7:22, 23이 이를 분명히 밝힙니다). 인터넷에서 내 설교를 듣고 내 책을 읽는 설교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오직 설교의 요점만 찾고 그들 자신을 위한 명예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영혼들은 그들의 설교로 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젠가 그들의 잘못된 동기를 판단하실 것입니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이 복음 전도지를 배포할 수도 있고, 그 전도지를 통해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도지를 배포한 사람은 지옥에 갑니다. 우리는 그들을 판단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그들을 판단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잘못된 동기로 복음을 전하는 어떤 사람도 용서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바울은 1:21에서 “내 삶의 이유는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가 죽는다면 즉시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이고, 계속 산다면 그리스도의 포도원에서 몇 년 더 열매 맺는 수고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 가지 선택 모두 바울에게 똑같이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결국 그는 믿는 사람들을 경건한 삶으로 인도하기 위해 조금 더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직 굳건히 서야 할 믿는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성경을 완성하기 위해 더 많은 편지를 쓸 수 있도록 그가 몇 년 더 살도록 허락하셨습니다. 나중에 바울은 디모데후서를 쓸 때, 세상을 떠날 때가 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1:27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행하라. 그리하면 내가 옥에 갇혔든지 너희를 만나러 가든지, 너희가 한 영으로 굳게 서서 한 마음으로 함께 노력하는 것을 내가 항상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짐, 곧 연합이었습니다. 그가 여기서 사용하는 다양한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한 마음, 한 영, 그리고 함께 노력하는 것입니다.

1:28에서, 바울은 원수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박해를 받을 때 “안식”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구원의 증거이자 원수들에게는 멸망의 표징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내가 너를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가 있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네게 주지 아니하시면 네가 나를 해할 권세가 없느니라”(요 19:10, 11)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당신이나 내 삶에서, 세속적인 권위 앞에 우리가 그와 같이 서야 할 때가 온다면, “예수님께서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 하셨던 것과 같은 고백”을 합시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주시는 것 외에는 네가 나를 해할 권세가 없느니라.” 그러한 고백은 우리의 원수들에게 멸망의 표징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 가지 특권을 주셨습니다(1:29).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그분을 위해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함께 갑니다.

이기심과 교만으로부터의 자유

바울은 2장에서도 연합이라는 동일한 주제를 계속 다룹니다(1:27 참조). 2:2에서, 그는 연합의 네 가지 표현을 사용합니다: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사랑을 품고, 영적으로 하나가 되어, 한 목적을 향해 나아가라.” 그런 다음 그는 이러한 연합을 이루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연합 안에서 어떻게 세워지고 성장할 수 있는지 말합니다: 이기심이나 교만으로부터 어떤 일도 하지 마십시오(2:3). 죽을 때까지 어느 정도 우리 안에 남아 있는 두 가지 죄는 이기심과 교만입니다. 우리는 시간이 흐르면서 부정한 생각이나 물질에 대한 집착, 성내는 것, 비방과 험담, 억울해 함,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등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기심과 교만은 우리 안에 매우 깊이 뿌리박혀 있습니다. 마치 거대한 양파 두 개와 같습니다. 한 겹을 벗기면 그 아래에 또 다른 겹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껍질을 벗겨낼 때, 그 아래에 또 다른 껍질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기심은 아담의 후손의 주요 특징이며, 우리가 행동하는 방식, 돈과 시간을 쓰는 방식 등에서 드러납니다. 우리의 이기심을 깨닫게 되면, 조금씩 씻어낼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우리는 점점 더 사랑스러워지고 그리스도를 닮아갈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자신의 이기심을 점점 더 깨닫게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당신이 주님과 함께 빛 안에서 걷고 있지 않다는 가장 분명한 징후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리스도의 몸의 연합을 방해하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아담의 후손의 두 번째 특징은 교만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외모나 지성에 대한 교만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교만을 극복한 후에, 우리는 영적인 교만에 빠질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양파와 같습니다. 우리는 종종 주님을 위해 무언가를 한 후에야 영적인 교만에 대해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증거를 한 후에,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지 않았을 때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자신을 정결하게 한다면, 영적인 교만이라는 양파 껍질을 한 겹 더 벗긴 셈이 됩니다.

이기심과 영적인 교만이라는 양파 껍질을 충실히 벗기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점점 더 하나가 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바울은 계속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던 이 마음(태도)을 너희 안에 품으라”(2:5)라고 말합니다. 당신은 평생 이 한 구절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변화를 위해 성경의 다른 구절은 필요 없습니다. 모든 상황에서 “나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라고 자문해 보십시오. “나는 거기서 그리스도의 태도를 가지고 있었는가?”라는 질문으로 당신의 과거 행동을 판단해 보세요. 아담의 후손들이 자신의 편의를 중시하는 태도에는 많은 이기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가장 좋은 침대, 가장 좋은 음식, 가장 큰 케이크 조각을 선택하고 싶어 합니다. 아이들은 그런 식으로 미성숙합니다. 우리는 나이가 들면서 그런 미성숙한 행동을 피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간증을 망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내면은 여전히 그런 상태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태도는 어떠셨을까요? 하늘에 계시는 동안 예수님은 그분이 가진 모든 것을 갖지 못한 이 땅의 사람들의 비참한 처지를 생각하셨습니다; 그분의 태도는 "나는 그들도 여기 내가 하늘에서 가진 것을 갖기를 원한다"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태도였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을 향한 우리의 태도는 "나는 죄 사함을 받았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다. 나는 죄를 이겼지만 저 신자들은 그렇지 않다. 나는 이것들을 그들에게 주어야 한다"가 되어야 합니다. 이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추운 밤, 담요를 덮을 때, 교회 안의 다른 신자들도 담요를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음식을 먹을 때, 교회 안의 다른 동료 신자들을 생각하고 그들 모두가 먹을 것이 있는지 자문해 보십시오. 그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우리는 그분이 취하신 세 가지 겸손의 단계를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그분은 아버지와 동등하셨지만, 그 특권들을 포기하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둘째, 사람으로서 그분은 모든 사람의 이 되셨습니다. 셋째, 그분은 더 낮아지셔서 범죄자처럼 죽으셨습니다(2:6-8).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세 가지 비결입니다: 겸손, 겸손, 겸손.

예수님은 사람들을 섬길 때에만 그들을 도울 수 있고, 왕처럼 다스릴 때는 그들을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분을 왕으로 만들려고 했을 때, 그분은 왕이 되기를 거부하셨습니다. 우리는, 왕으로서 한 사람이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분의 삶을 통해 오직 종이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기를 거부하셨습니다. 그분은 평생 다른 사람들을 섬기셨고, 어떤 지위나 직함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을 '사람의 아들', 즉 "평범한 사람"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분은 이 땅에 계실 때에도 전능하신 하나님이셨지만; 여전히 자신을 평범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종의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섬기는 것과 종이 되는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신문에서 어떤 장관이 도로를 쓸며 '청결 캠페인'을 시작하는 사진을 본 적이 있을 겁니다. 그는 5초 동안 도로를 쓸고 신문기자들이 사진을 찍기를 기다립니다. 그는 종일까요? 아닙니다. 그는 단지 평판을 얻기 위해 5초 동안 종처럼 행동할 뿐입니다. 섬기는 것과 종이 되는 것은 천지 차이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명예를 얻기 위해 섬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종이 된다는 것은 항상 자신을 종으로 여기는 마음의 태도를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내게 이 진리를 가르쳐 주신 방법입니다. 나는 11년 동안 군 복무를 했는데, 그 시절에는 시간 엄수가 매우 중요했습니다. 만약 열병식이 아침 6시 30분에 있다면, 우리는 6시 31분이 아니라 6시 25분에 와야 했습니다. 누군가가 6시 31분에 왔다면, 그는 평생 다시는 늦지 않게 될 정도의 교육을 받게 될 것입니다. 내가 교회의 장로가 되었을 때, 교회 신도의 절반 이상이 주일 아침 예배에 제시간에 오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일은 나를 상당히 불편하게 했고, 사람들을 제시간에 오게 하려고 할 수 있는 모든 권유를 시도해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내가 교회에서 종이 아니라 주인처럼 행동하고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예를 들어, 궁궐의 하인은 항상 제 시간에 아침 식탁에 와야 합니다. 하지만 왕과 왕비는 원할 때 언제든 올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게 그분의 교회에서 종이 되고, 다른 사람들을 나보다 더 중요하게 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 나는 안식을 얻었습니다. 그때 나는 단순히 섬기는 것이 아니라 종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말씀이 나를 자유롭게 해 주었고; 다른 사람들이 시간을 잘 지키지 않는 것에 더 이상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왕과 왕비"들이 원할 때마다 오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점차 그들 중 일부는 종이 되어 제 시간에 오기 시작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종이 되기 위해 자신을 낮추셨고,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높이셨습니다. 당신이 자신을 더 낮추면 낮출수록,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영적으로 더 높이실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을 사람보다 높이지 않으시고 죄와 세상, 그리고 마귀보다 높이실 것입니다.

2:14에서, 우리는 모든 일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행하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이는 불가능한 기준처럼 보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명령을 무시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능합니다. 앞의 두 구절(2:12, 13)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 안에서 일하시고, 그 후에 우리가 그것을 실천해야 한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그리스도의 겸손과 이타적인 사랑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 안에서 일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렇게 하십니다. 하지만 그 후에는 우리가 매일의 상황에서 그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끊임없이 우리 안에서 일하시며,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것을 이해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날마다 그리스도를 닮아갈 것입니다(고후 4:16). 그리하여 우리는 어느 때에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 바울은 그리스도의 이타적인 태도를 삶 속에서 나타낸 두 동역자, 디모데(2:19-21)와 에바브로디도(2:25)의 예를 인용합니다. 바울은 당시 그와 함께 있던 모든 동역자들 중에서, 빌립보로 파송할 사람으로 디모데만 선택할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기 이익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성령으로 세례받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방언을 하고 설교도 잘했습니다. 심지어 영혼을 향한 열정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자신의 이익, 즉 약간의 명예, 약간의 돈, 그리고 약간의 편안함을 추구했습니다. 영적인 사람이었던 바울은 이 선한 형제들이 모두 같은 질을 가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분별할 수 있었습니다. 디모데만 전적으로 이타적인 사람으로 두드러졌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 사역자들 사이에서도 같은 모습을 발견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 집단 안에는, 선한(good) 형제자매들과 뛰어난(excellent) 형제자매들이 있습니다. 뛰어난 형제자매들은 자신의 것을 구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만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 사역자들은 내게는 자기 이익을 구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들은 디모데와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스도의 일을 추구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은 계시를 주시고, 그런 자들을 통해 영원한 일을 행하십니다.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가 그랬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하나님을 섬기다가 병들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지만, 그의 삶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발산했습니다.

바울은 3:1에서 “같은 내용을 다시 쓰는 것이 내게는 아무 짐이 아니요, 너희에게 보호장치가 되느니라”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글에서 반복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명예가 아니라 사람들의 유익을 추구했습니다.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사람들의 명예를 추구하기 때문에 설교를 반복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설교 목록을 작성하고, 설교한 내용을 어디에 기록해 두어서, 어디에서도 반복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전문적인 설교자이지 선지자가 아닙니다. 옛 언약의 선지자들은 그들 자신을 위한 명예나 돈을 얻는 것보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하는 데 더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설교를 여러 번 반복했습니다. 바울은 사람들이 자신의 권면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자신의 권면을 반복했습니다.

그리스도 외에는 모두 쓰레기입니다

3:2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개들을 조심하고, 악한 일꾼들을 조심하고, 외적인 할례만을 믿는, 거짓 할례자들을 조심하라. 우리는 참 할례를 받은 자니라." 할례, 곧 육신을 잘라내는 것은 "육신을 신뢰하지 아니하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자랑하는 것"을 상징합니다(3:3). 바울은 계속해서 육신적으로 자랑할 것이 많았다고 말합니다. 그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었습니다. 즉, 그는 어린 시절부터 처음 아홉 가지 계명을 충실히 지키고 올바른 삶을 살았다는 뜻입니다. (옛 언약 시대에는 열 번째 계명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 롬 7:7-9).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의 모든 "인간적인 선함"이 실제로는 쓰레기(찌꺼기)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이 세상의 쓸모없는 것들을 언급할 때 종종 "쓰레기"와 " 찌꺼기"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하지만 그 단어는 내가 처음 사용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바로 여기(3:8)에서 이 단어를 처음 사용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의를 포함한 세상의 모든 것이, 실제로 그리스도에 비하면 쓰레기와 찌꺼기라고 말했습니다. 당신은 그것을 직접 보셨습니까? 세상의 모든 돈이 그리스도에 비하면 쓰레기라는 것을 보셨습니까? 사람의 모든 명예가 그리스도에 비하면 쓰레기라는 것을 보셨습니까? 세상의 모든 안락함이 그리스도에 비하면 쓰레기라는 것을 보셨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곳에 거하며,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예비하신 사역을 완수하는 것, 이것들만이 영원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입니다.

다른 그리스도인 사역자들이 존중을 받는데 당신이 존중받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우리의 부르심은 그리스도의 치욕을 나누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명예는 어떤 경우에도 쓸모없는 것입니다. 다른 그리스도인 사역자가 당신보다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편안한 삶을 사는 것을 질투하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돈을 쓰레기로 여기지 않은 것입니다. 그는 당신보다 쓰레기가 조금 더 많을 뿐입니다! 그것 때문에 슬퍼하십니까? 바울이 이 모든 것의 무가치함을 깨달았기에 그는 그토록 자유로운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세상적인 쾌락, 부, 명예에 얽매이지 않고,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주님을 섬길 수 있는 자유를 누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의 모든 것이 쓰레기임을 깨닫기 전까지는 우리는 주님을 충실히 섬길 수 없습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려면 우리에게는 분명히 돈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종으로서 우리는 손으로 일하거나 (우리가 결코 요구하거나 추구하지 않는) 선물로 돈을 받을 수 있으며, 이 땅에서의 삶을 위해, 즉 음식, 옷, 집, 그리고 자녀 교육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돈 문제에 있어 우리의 처지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거나, 돈에 대한 태도에서 "계산적"이거나, 주님을 섬기는 데 돈을 중요한 요소로 여긴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길을 완전히 놓친 것입니다. 돈은 우리의 종이어야지 결코 우리의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천국의 거리는 금으로 포장되어 있습니다. 천국에서 우리 발밑에는 금이 있습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참된 주님의 종들에게도 돈이 있어야 할 곳이 바로 그곳입니다. 이 땅에서는 사람들이 머리 위에 금을 얹습니다. 당신이 지금 발밑에 금을 둘 수 있다면, 천국을 위한 준비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머릿속(마음)에 항상 금이 있다면, 아직 천국에 갈 준비가 되지 않은 것입니다. 돈을 제자리에 두는 법을 빨리 배우는 것이 좋으며; 명예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적인 명예나 불명예는 당신에게 똑같이 쓰레기여야 합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자신의 삶 속 가장 큰 갈망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유명한 설교자가 되거나 널리 알려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그 모든 것이 쓰레기였습니다. 그의 간절한 갈망은 그리스도를 더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과 그분의 고난의 교제에 더 많이 참여하는 것이었습니다(3:10). 그는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에 이르지 못했다고, 즉 아직 그리스도의 완전함에 이르지 못했다고 말합니다(3:12). 하지만 다른 의미에서, 그는 자신이 완전했다고 말합니다(15절). 그리고 자신처럼 완전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러한 사람들을 본보기로 삼으라고 권면합니다. 당신은 이 역설, "완전하지만, 아직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셨습니까? 이것이 바로 참된 영성의 역설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완전함'이라는 단어를 두려워합니다. 신약성경을 주의하여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완전함이 있지만, 이 땅에 있는 동안 얻을 수 있는 완전함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가질 수 있는 완전함은 완전한 양심입니다. 즉,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모든 문제를 바로잡는 것(행 24:16), 알고 있는 모든 죄를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해진 상태(요일 1:7, 9), 모든 배상을 하고, 모든 빚을 갚고, 모든 사과를 한 상태 등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양심은 완전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완전함입니다. 우리가 가질 수 없는 완전함은 그리스도와 완전히 같아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처럼 완전히 완벽해지지는 않았음을 인정했지만, 그 목표를 향해 계속 전진했습니다. 그 완전함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목표는 산의 정상과 같습니다. 우리가 거듭날 때, 우리는 그 산기슭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완전히 같아지는 것이 산의 정상입니다. 우리는 매일 그 정상을 향해 조금씩 더 높이 올라가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완전을 향해 나아갑니다. 평생 산기슭에 앉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계속 나아가야 합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항상 완전한 양심으로 사는 사람들을 우리의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17절). 다른 사람들을 본보기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입니다(18절). 그들의 신은 그들의 배입니다(19절). 우리의 배(식욕)가 우리의 신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어느 날 아내가 요리한 음식이 맛이 없어서 아내에게 화를 낸다면, 당신의 미뢰가 당신의 신입니다! 그런 경우, 당신이 음식을 먹기 전 기도할 때, 당신은 단지 주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처럼 상상할 뿐입니다. 실제로는 당신의 미뢰 앞에 절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미뢰를 신으로 삼지 마십시오. 당신의 배를 신으로 삼지 마십시오. 오직 그리스도만을 당신의 하나님으로 삼으십시오. 좋은 음식을 먹을 때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어느 날 음식이 맛이 없더라도 다시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어느 날 출근 전에 아침 식사가 제시간에 준비되지 않았다고 해서 아내에게 화를 내지 마십시오. 대신 이렇게 말하십시오. "아마 주님께서 오늘 아침 금식을 하기를 원하시는 것 같군. 그래서 아침 식사가 준비되지 않도록 허락하셨을 거야. 어쩌면 주님께서 내가 음식을 매우 좋아하는 것을 보시고 음식에서 자유로워지기를 원하시는 것일 수도 있어." 그러므로 감사하며 아침 식사 없이 출근하십시오! 당신의 배를 신으로 삼지 마십시오. 우리는 천국의 시민이기 때문입니다(20절).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힘

4:4에서,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항상 주님 안에서 기뻐하라"라고 권면하십니다. 가끔이나 심지어 대부분의 시간도 아니고, 항상입니다. 이 구절은 오래전부터 나에게 도전이 되었습니다. 나는 이 구절이 내 삶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내 삶에도 적용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당신은 가끔만 건강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대부분의 시간, 아니면 항상 건강하기를 원하십니까? 우리 모두는 항상 건강하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가끔, 대부분, 아니면 항상 기뻐하고 싶으신가요? 당신은 "그게 가능할까요?"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셨다면 그런 명령을 주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 삶에서 아직 그렇지 않다면, 솔직하게 주님께 그렇게 말씀드려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고, 그리스도 밖에 있는 세상의 모든 것은 쓰레기라는 것을 가르쳐 달라고 간구하십시오. 그러면 항상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불평과 원망, 투덜거림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세상의 모든 것을 쓰레기로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항상 기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바울은 이 말씀을 썼을 당시 로마의 형편없는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가 그런 상황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다면, 우리는 왜 그럴 수 없겠습니까?

그런 다음 바울은 또 한 가지 도전적인 말씀을 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4:6). 그것은 또 다른 정복해야 할 산봉우리입니다. 불안은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쉽게 찾아옵니다. 월말까지 생활비를 충당할 돈이 없을 때 이런 일이 생깁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늦게 돌아오면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당신이 젊지만, 나이가 들어가도 결혼할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면 불안해질 수 있습니다. 많은 것들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의 산 정상에 오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 전진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자라나고, 무엇에 대해서든 염려가 생길 때마다 기도로 주님께 가져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옛 찬송가에 이렇게 노래합니다. "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평안을 잃고, 얼마나 불필요한 고통을 겪고 있는가. 이 모든 것은 우리가 모든 것을 기도로 하나님께 아뢰지 않기 때문이다." 기도와 함께 감사를 더해야 합니다. 감사는 "주님, 내 기도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당신의 기도가 하늘에 닿았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면 기도에서 불안 없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만약 여전히 불안이 남아 있다면, 기도를 감사로 마무리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언제나 탁월한 것에 마음을 두라는 권고를 받습니다(4:8). 이어서 바울은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지혜로 바울에게 주시기로 택하신 것이 무엇이든, 많든 적든 그것에 만족하는 비결을 배웠다고 말합니다(4:11, 12). 이것은 참으로 비결입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비결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승리의 선언을 합니다: "내게 힘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4:13).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힘을 주시므로 우리는 항상 기뻐하고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이러한 삶에 도달할 수 없지만,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능력을 통해서는 가능합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을 재정적으로 지원해 준 유일한 교회였으며, 바울은 그곳에서 자유롭게 선물을 받았습니다(4:14-18). 그래서 바울은 그처럼 관대한 교회에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영광 가운데 그분의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리라"(4:19)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경건한 삶을 사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이 약속은 주로 세상적인 것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광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부요함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죄와 사탄을 이기고, 성령으로 충만하고 기름부음받아 끊임없는 기쁨과 평안의 삶을 사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실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물질적인 필요도 채워 주실 것입니다. 여기서는 사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의 필요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약속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일에 관대했던 사람들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그러한 믿는 자들에게 아무것도 아끼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은 그들에게 가장 좋은 것, 곧 그분이 소유하신 모든 것을 주실 것입니다.

장 51
골로새서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 영광의 소망

골로새는 바울이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에베소에서 3년 동안 지냈을 때, 그의 동역자 중 한 명인 에바브라가 골로새로 건너가 그곳에 교회를 개척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1:7). 그래서 바울은 에바브라를 통해 그 교회에 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고, 그 특별한 교회의 발전에 대해 매우 실질적인 관심을 가졌습니다. 바울이 골로새에 보낸 편지는 에베소에 보낸 편지와 쌍둥이 같은 편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 - 하나님과 사람

에베소서의 주제는, '그리스도 안에서'였습니다. 골로새서의 주제는,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입니다. 1:27에서,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이라고 말씀합니다. 에베소서에서, 하늘에 있는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위치에 대해 읽습니다. 골로새서에서, 우리는 그 진리의 다른 면을 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그분은 이 땅에 계셨을 때 나타내셨던 것과 동일한 하늘의 삶을 우리를 통해 나타내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다른 방식으로 말하자면, 골로새서의 주요 강조점은 하나님의 충만함이 그리스도 안에 육체의 형태로 거하셨다는 것입니다(골 2:9). 하나님의 충만함이 인간의 몸 안에 거하시는 모습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으며, 이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인간 몸 안에 거하시면서 그와 동일한 신성한 생명을 나타내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 서신의 주제입니다.

이 편지에서, 우리는 바울이 인간의 몸에 대한 두 가지 극단적인 잘못된 교리를 바로잡는 것을 봅니다. 이 두 가지 극단은 많은 거짓 종교에서도 발견됩니다.

한 가지 가르침은 인간의 몸은 본질적으로 악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영적인 사람이 되려면 몸을 억압하고 거칠게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가르침은 오늘날 요가, 금욕주의, 그리고 육체의 수련을 통해 거룩해지려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발견됩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2장 후반부에서 이 문제를 다룹니다.

또 다른 가르침은 인간의 몸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영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육체적 정욕은 얼마든지 탐닉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종교라는 미명 아래 부도덕과 음행으로 이어졌습니다. 이교에서 신전 매춘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수세기 동안 많은 종교는 인간의 몸에 대해 이러한 두 가지 극단적인 태도를 보여 왔습니다. 이 두 가지 가르침 모두 인간의 몸을 경멸합니다.

이러한 가르침 때문에 골로새의 일부 사람들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이 땅에 사람으로 거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오셨다고 믿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의 일상생활에서 그 진리를 실제로 적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항상 하나님이셨습니다. 이 땅에 계셨을 때에도 여전히 하나님이셨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 되셨습니다. 이 두 가지 진리는 모두 똑같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이 두 가지 중 하나와 그 실제적 적용을 간과한다면, 그만큼 우리의 그리스도인 삶은 손해를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의 죄는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인류 전체의 죄에 대한 형벌을 대신 감당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고, "모든 것에서 그의 형제들과 같이 되셨다"(히 2:17)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분을 따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직 하나님이신 분을 따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한계를 가지고 이 땅에 사시면서 하나님으로서의 특권을 포기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따를 수 있습니다(빌 2:5).

죄는 몸(body)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닙니다. 몸이 있다고 해서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몸을 가지셨습니다. 그분의 몸은 어머니로부터 왔으며, "다윗의 씨(seed of David)" (딤후 2:8, KJV – 거기서 헬라어 원어의 문자적 의미는 "다윗의 정자(sperm)"입니다)를 통해 나셨습니다. 하지만 그분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몸을 가지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몸에는 죄가 전혀 없었습니다. 의식적인 죄도, 무의식적인 죄도 없었습니다. 그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완전히 순결하셨습니다.

반면에, 몸이 없는 사탄은 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죄가 인간의 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유혹의 순간에 직접 선택을 합니다. 죄를 우리 몸을 통해 드러내도록 할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생명과 순결을 우리 몸을 통해 드러내도록 할 것인지 말입니다.

골로새서는 하나님의 충만함이 그리스도 안에서 몸의 형태로 거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지금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을 다룹니다. 1장은 창조와 구속에서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을 강조합니다. 우선, 바울은 자신이 편지를 쓴 모든 교회를 위해 항상 하듯이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가 이 말을 들은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1:9). 바울은 여기서 자신이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1:7, 8). 그의 동역자 에바브라가 바로 이 교회를 세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바울에게 골로새의 신자들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흥미로운 성경 공부는 사도 바울의 기도를 연구하는 것입니다. 로마서부터 디모데후서까지 바울의 기도는 많습니다. 그의 모든 기도에서 그는 오직 신자들을 위해 영적인 것들만을 기도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부유해지거나, 좋은 집에서 살거나, 직장에서 승진하는 것을 기도한 적이 없습니다. 그는 결코 그러한 물질적인 것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항상 영원하고 영적인 것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바울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짧은 기간 동안만 존재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깊이 사로잡혔습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은 영원으로 가는 기차 여행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기차 여행은 짧은 기간 동안만 지속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최종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우리가 지혜롭다면, 편안한 기차 여행보다 최종 목적지에서 살 좋은 집을 갖는 데 더 집중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믿는 이들이 영원에 들어갔을 때 후회하지 않을 방식으로 이 세상에서 살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는 그들이 "모든 영적인 지혜와 깨달음에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하게"(1:9)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다시 말해, "나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기를 기도합니다"(J.B. 필립스 의역). 하나님의 관점에서 당신의 육체적 몸을 바라보고, 그것을 경멸하거나 탐닉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인간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니 자신의 몸을 경멸하지 마십시오. 삶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십시오. 이것은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하기에 좋은 기도입니다: "주님, 내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당신의 관점에서 볼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당신은 당신의 삶에 닥친 상황들, 즉 질병, 육체의 가시, 당신을 나쁘게 대하는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십니까?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십시오. 그런 일이 당신에게 일어났을 때 하나님께서 놀라셨습니까? 아니요. 놀라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놀라지 않으셨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하나님의 관점으로 나아갈 때, 세상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았다면 당신을 괴롭혔을 많은 것들에 대해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법을 배운 교회를 세울 수 있다면, 그것은 영적인 교회입니다. 교회가 단순히 전도와 사회복지 활동에 많이 참여한다고 해서 영적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그럴 때에만 우리는 "주님께 합당한 방식으로 행하며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1:10). 이어서 바울은 "그분의 영광스러운 권능에 따라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심을 입는 것"(11절)에 대해 말하는데, 이는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의미합니다.

1:15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하나님이셨다는 사실을 신약성경에서 가장 명확하게 묘사하는 구절 중 하나입니다(혹시 의심하는 분이 있다면).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그분이 인간의 형상을 취하신 하나님이심을 의미합니다. 즉, 창조된 모든 것을 시작하신 분(혹은 창조하신 분), 만물이 창조되기 전부터 계셨고 만물을 창조하신 분(1:15-17절에 명확히 나와 있음)이십니다. 1:22에서 그리스도의 "육신의 몸"이 강조되는데, 그 이유는 당시 어떤 사람들이 그분이 육신의 몸을 가지지 않았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채우다

바울은 1:24에서 "나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일로서 그분의 몸인 교회를 대신하여 나의 몫을 다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서 부족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분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여기에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육체적 고난에 대해 읽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방식으로 영혼(soul)의 고난도 겪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은 인간의 죄값을 치르셨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유혹을 극복하는 것도 마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와 다름없이 모든 면에서 유혹을 받으셨고 이기셨습니다(히 4:15). 모든 유혹에서, 우리는 유혹에 굴복하여 쾌락의 길을 선택하거나, 유혹에 저항하여 (쾌락의 반대인) 고난의 길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끊임없이 고난의 길을 택하시고 "육신(flesh)으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벧전 4:1). 그리하여 그분은 우리의 선구자가 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 다른 사람들을 위한 작은 선구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죄의 유혹을 받을 때, 성령께서는 우리가 예수님께서 겪으셨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육체 안에서 고난을 겪도록 이끄십니다. 바울이 1:24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그는 삶에서 예수님께서 완수하신 모든 고난(시험, 유혹)을 아직 완수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진리를 위해 서셨기 때문에 외적으로 여러 가지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만약 잔을 고난의 상징으로 삼는다면, 예수님의 경우, 그분께서 생애 동안 겪으시기로 택하신 모든 고난이 그 잔을 가득 채웠습니다. 마침내,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으며, 우리 역시 그분과 같은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도 우리 안에서 그 잔을 채우는 동일한 일을 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거듭날 때, 우리의 잔은 그리스도를 위해 아무것도 겪지 않았기 때문에 비어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 잔은 그리스도를 위해 우리가 겪는 고난으로 채워지기 시작합니다. 이 땅에서 고난을 겪으신 동일한 그리스도께서 지금 우리 안에 거하시며, 그분은 이제 우리 몸을 통해 그분께서 겪으신 고난을 우리도 겪도록 이끄시기를 원하십니다.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않습니다. 주님의 모든 고난은 지금 우리 몸 안에서 완성되어야 합니다. 이는 참으로 큰 특권입니다. 바울은 그의 잔이 아직 채워지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겪을 때,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고난 속에서 그분과 교제하는 것임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내가 말하는 고난은 우리가 어리석거나 죄악된 일을 해서 받는 고난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결코 죄악되거나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이 세상과 완전히 반대되는 삶의 방식을 택하셨기 때문에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그분의 전 사역은 당대의 성경 학자들과 신학자들과 끊임없는 갈등 속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미워했고 결국 죽였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라면, 이 세상의 모든 종교 체계와, 그리고 소위 기독교 신학과 종교라고 불리는 많은 것들과 갈등을 겪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하나님을 알지 못하지만 매우 종교적인 사람들과 갈등을 겪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알세불'이라고 부른 자들은 누구였습니까? 그들은 그리스인이나 로마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성경(당시 구약 성경)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가장 많이 핍박하고 죽인 자들은 누구였을까요? 그들은 성경을 가진 종교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채우려 한다면, 성경을 가진 종교인들도 우리를 괴롭힐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그분의 아버지를 알지 못해서 예수님을 미워하고 핍박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똑같이 할 것입니다.

바울은 "나는 이 고난 중에 기뻐합니다. 내가 내 몫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 각자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해 각자의 몫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육신으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이제 그분은 영적인 몸인 교회로 고난을 받으셔야 합니다. 이 고난에서 당신은 당신의 몫을 가지고 있고, 나는 나의 몫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의 몫을 이행할 수 없고, 당신도 나의 몫을 이행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어떤 고난을 겪을 때, 내가 당신을 대신해서 충실할 수 없습니다. 친척이나 이웃 때문에 고난을 받거나,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박해를 받거나 집에서 쫓겨날 때에도 당신은 스스로 충실해야 합니다. 이러한 고난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일부입니다. 그때 기뻐하며 "주님, 당신의 몸인 교회를 위해 당신의 고난을 조금이나마 채우는 특권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십시오. 그렇게 할 때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사역을 하게 되고, 그렇게 해서 교회를 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의 일부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고난을 통해서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얻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더라도 우리 자신은 그로부터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그것은 교회를 위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의 고난을 통해 유익을 얻을 것입니다. 당신은 그럴 의향이 있습니까? 우리가 "네, 주님. 기꺼이 하겠습니다. 나는 주님의 마음과 영, 그리고 태도와 하나 되어 교제하기 원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내 고난 받는 것을 통해 유익을 얻기를 원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탕수수가 분쇄기에 어떻게 으깨지는지 보셨나요? 사탕수수 막대기를 분쇄기에 넣고 갈아서 즙을 냅니다. 몇 번 하고 나면, 마치 막대기에서 즙이 다 나온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다시 넣으면, 즙이 더 나옵니다. 누구의 유익을 위해 으깨는 것일까요? 다른 사람이 마시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는 삶의 환경과 시련 속에서 짓눌리고 압도되지만, 자신을 낮추고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짓눌림에서 그리스도의 빛남과 아름다움과 향기가 뿜어져 나옵니다. 이것이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바울은 1:28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전파하며, 모든 지혜로 모든 사람을 훈계하고 가르쳐,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게 드리려 함이니라"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모든 지혜를 담은 예언과 가르침입니다. 바울의 궁극적인 목표는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게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100명의 교회를 섬긴다면, 그는 그 100명 모두, 즉 모든 형제자매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게 되도록 가능한 모든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그는 모든 지혜로 그들을 권면하고, 훈계하고, 가르칠 것입니다. 언젠가는 그들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부담을 가진 목사나 목자는 거의 없습니다. 그들은 그저 설교만 할 뿐입니다. 그것이 다 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모든 각 사람을 영적으로 성숙하게 인도해야 한다는 부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회 장로라는 책임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내가 뱅갈로르 교회에서 25년 동안 장로로 있을 때, 나는 교회 모든 성인의 영적 상태를 알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바로잡고, 책망하고, 지혜를 주고, 격려의 말과 강한 말을 하여 언젠가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게 드리고자 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서 내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위해,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 나는 개인적인 삶에서 많은 짓밟힘을 겪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나를 다루셔서 내 안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겨 나와 다른 사람들이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 사역입니다.

바울은 1:29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목적을 위하여 내가 수고하고 열심히 일하고 힘쓰나니." 그는 어떻게 힘씁니까? "성령의 강력한 능력으로 – 먼저 하나님이 내 안에서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그 능력으로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먼저 성령으로 우리 안에서 일하셔야만, 그런 후에야 우리를 통해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실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섬기는 여러분, 이 두 구절을 당신의 목표로 삼으십시오. 곧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게 드리는 것(1:28)과 그 목표를 이루는 데 필요한 성령의 충만함을 얻는 것(1:29)입니다.

경건의 비밀

바울은 2:2에서 “너희의 마음이 사랑 안에서 하나로 결합되어 깨달음의 완전한 확신에서 오는 모든 부요함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 즉 그리스도 자신에 대한 참된 지식을 얻게 되기를 기도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비밀’이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 몇 번 등장하며, 하나님께서 그분의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해 주실 때만 알 수 있는 진리를 가리킵니다. 고린도전서 2:8-10은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그것들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다.”라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큰(great)’ 비밀이라고 불리는 것은 단 두 가지뿐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육신으로 오셨다는 비밀입니다(딤전 3: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셨느니라.” 이것이 경건의 비밀, 혹은 경건한 삶을 사는 비밀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 비밀은 그리스도의 몸이자 신부인 교회에 관한 것입니다. 에베소서 5:32은 “둘이 한 육체가 될 것이다. 이는 비밀이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라고 말씀합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와 한 육체가 되는 것이 두 번째 큰 비밀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셨고, 우리처럼 유혹을 받으셨으며, 모든 유혹을 이기셨다는 것을 이해하고, 우리가 어떻게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 죄를 이기고, 같은 길을 걷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세울 수 있는지 이해하려면 하나님의 계시가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것은 이 땅에서 누구든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사역입니다. 그보다 더 위대한 일은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평생 이 교회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종은 그리스도와 함께 그분의 교회를 세우는 사람들입니다. 경건한 삶을 사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바울은 사회 사업에 평생을 바치지 않았습니다. 세상적인 일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이 교육과 치료만으로 사람들의 삶을 더 편안하게 만든다면, 지옥으로 가는 그들의 길을 평탄하게 만들 뿐일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들이 험난한 길을 따라 지옥으로 가고 있었지만, 당신이 그 길을 조금 더 평탄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바울은 모든 사역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경건한 삶으로 인도하며, 그들을 한 몸으로 세우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사역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회 사업을 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모든 사람들을 존경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축복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 당시 세상에는 수많은 사회적 필요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그런 일에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사람들은 노벨 평화상과 같은 세상적인 영예를 얻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바울은 결코 노벨 평화상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교회를 세우는 사람들에게 노벨상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바울은 2:11,12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는 손으로 행하지 않은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신의 몸을 벗어버리는 할례이다”라고 말합니다. 할례가 육체의 일부를 잘라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의 육체(자기 의지)가 십자가에서 잘려 나갔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 입장을 취해야 합니다. 물세례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부활했음을 증거합니다(2:12).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의 모든 후손이 할례를 받도록 명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모든 자녀는 영적으로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육신을 신뢰해서는 안 됩니다(빌 3:3). 세례는 그러한 내적 할례의 상징입니다.

사탄에 대한 예수님의 승리

2:14,15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두 가지 일을 읽습니다. 첫째, 그분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빚을 탕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계명들이 나열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어겼습니다. 우리가 저지르는 모든 죄는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께 지고 있는 빚이며, 우리 모두는 삶 속에 엄청난 빚을 쌓아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빚을 완전히 갚으시고 빚 증명서를 찢어 버리셨습니다. 이제 우리 이름으로 빚진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신 두 번째 일은 모든 악령의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의 갑옷을 벗기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들을 이기셨을 때, 그분은 그들의 무기를 제거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를 다음과 같이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수많은 악마들이 우리처럼 무력한 인간에게 기관총을 겨누고 있었고, 우리는 그들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항상 우리에게 총을 쏘았고, 우리는 항상 숨을 곳을 찾아 도망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기관총을 모두 빼앗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제 그들은 우리에게서 도망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사탄이나 그의 악마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깨끗한 양심으로 살고 겸손하게 거한다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는 사탄의 모든 세력에 대해 항상 승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은 강하고 견고한 망대(tower)입니다. 의인은 그 이름으로 달려가 안전할 수 있습니다(잠 18:10).

사탄과 그의 모든 악마는 십자가에서 단번에 영원히 패배했습니다. 당신이 귀신들린 사람을 만나거든, 그 사람 안에 있는 귀신은 십자가에서 패배했음을 기억하십시오. 그 귀신의 기관총은 십자가에서 빼앗겼고, 그에게는 어떤 무기도 없습니다. 지금 당신은 그 귀신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약하더라도 상관없습니다. 기관총을 든 가장 약한 병사라도 총이 없는 더 강한 적을 향해 쏠 수 있습니다. 그 거대한 골리앗 같은 악마도 당신 앞에 쓰러질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그림자와 실체

바울은 2:16-23에서 하나님의 계시 없이 사람들이 생각해 낸 “거룩해지는” 다양한 방법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거룩한 날들을 지키고, 순례를 가고,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이런 일로 누구든지 너희를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안식일은 그림자일 뿐이요, 실체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실체가 있는데 왜 그림자가 필요합니까?

만약 바울이 오늘날 살아 있었다면, “모든 의식적인 옛 언약의 율법과 절기들은 사진과 같을 뿐이다. 이제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실체를 가지고 있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나는 여행 중이고 아내와 떨어져 있을 때만 아내의 사진을 봅니다. 하지만 아내가 바로 옆에 있다면, 아내의 사진을 보는 것은 미친 짓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 친히 당신 안에 거하실 때, 왜 그 모든 사진들이 필요합니까? 당신의 남편이신 그리스도께서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 그렇다면 왜 그분의 사진이 필요합니까? 안식일과 그 모든 옛 언약의 절기는 단지 사진과 그림자에 불과했습니다. 이제 당신에게는 그리스도라는 실체가 있습니다.

바울은 이어서 “누구도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당신을 위해 예비해 두신 상이 있습니까? 아무도 당신을 속여서 스스로 비하하는 것(거짓된 겸손)을 즐기게 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믿는 이들 가운데는 거짓된 겸손이 많습니다. 거짓된 겸손은 사실 겸손의 옷을 입고 매우 겸손한 척하는 영적인 교만입니다. 그것을 버리십시오.

바울은 “천사”를 숭배하는 것에 대해 말합니다. “천사”라는 단어는 “사자(messenger)”로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계에는 하나님의 사자를 숭배하는 것이 많습니다. 많은 비기독교인들은 소위 ‘신적인 인간(godmen)’을 숭배합니다. 많은 기독교인들 역시 ‘신적인 인간들’을 숭배합니다 - 그들이 너무나도 존경하는 기독교 지도자들로서, 그 존경이 거의 숭배에 가까운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경건한 사람을 존경하고,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조언을 주의 깊게 듣는 것은 모두 매우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가 당신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자리를 차지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숭배가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거짓 겸손의 일부입니다. 당신은 그렇게 거룩해질 수는 없습니다. 그 사자를 붙잡는 대신, 머리이신 분을 붙잡아야 합니다(2:19). 가장 훌륭한 사자는 당신이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돕는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르치는 거룩함의 또 다른 방법은 훈련입니다: "이것을 붙잡지 말고, 이것을 만지지 말고, 이것을 맛보지 말라"(20,21절) – 식습관을 바꿈으로써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또는 몸을 엄하게 다루는 것, 즉 "침상에서 자지 말고 바닥에서 자라. 40일 동안 금식하라"(23절)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 날 금식하지만 여전히 화를 내고 마음에 원통함을 품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금식은 그들을 거룩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다른 사람들을 험담하고 비방합니다. 몸을 엄하게 다루는 것은 누구도 거룩하게 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거룩한 모양"을 가질 뿐, 죄에서 구하지 못합니다.

죄는 어떻게 다뤄질 수 있습니까? 바울은 3:3에서 “너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느니라”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방법입니다. 자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로 여기십시오. 당신은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났습니다(3:1). 이것이 진정한 거룩함에 이르는 길입니다. 성일을 지키거나, 사자(전달자)를 숭배하거나, 몸을 심하게 다루거나, 절제나 금식하는 것으로는 거룩하게 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결코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당신이 평생 이러한 것들을 실천한다 해도, 그것들은 당신을 거룩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거룩하게 되는 길은 이 세상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고, 그 후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죽음이 아닙니다. 자아에 대한 죽음만 생각한다면, 자기 부정 등의 요가 형태의 거룩함에 속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에게 전하고, 당신의 몸 안에서 예수님의 생명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십니다. 성령은 당신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그분의 몸으로 사셨던 방식대로 살 수 있도록 돕고 싶어하십니다. 그 증거 중 하나는 당신의 생각이 위에 있는 것들에 두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3:2). 당신은 먹는 음식이나 다른 세상적인 훈련에 사로잡히지 않을 것입니다. 위에 있는 것들에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서 참된 거룩함이 시작됩니다.

3:2의 "너희 생각"과 2:23의 "너희 몸"의 대조에 주목하십시오. 우리가 거룩해지는 것은 육신의 욕망과 정욕을 억누름으로써가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마음)이 위에 있는 것들에 두어질 때, 우리 몸은 성령께 순종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니 너희 생각은 위에 있는 것들에 두라.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은즉 너희 몸의 지체도 죽은 것으로 여기라"(3:1-3). 이것이 바울이 로마서에서 설명하는 거룩함의 길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하나님께 이것을 이해하게 해 달라고 간구하십시오. 이것이 진정한 거룩함의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이 진리를 깨닫는 순간은, 마치 거듭남의 순간처럼 당신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경험이 될 수 있습니다.

평화롭고 감사하는 삶

우리가 가진 많은 편견들은 이 새로운 생명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는 다른 인종의 사람들 사이에 차별이 없습니다(3:11). 이제 우리는 인종이나 문화에 관계없이 모든 믿는 자들을 동일하게 바라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납하고 용서합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우리 마음과 서로의 관계에서 심판이 됩니다(3:15). 우리의 양심은 무언가 잘못되었을 때 우리에게 알려주는 심판과 같습니다. 축구 경기에서 선수가 파울을 하면 심판은 휘슬을 붑니다. 심판이 휘슬을 불면 경기는 중단됩니다. 파울이 바로잡힐 때까지는 아무것도 인정되지 않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잃고 불안하고 괴로울 때, 그것은 양심이 휘슬을 불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당신이 무언가를 잘못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아내에게 심하게 말했거나, 돈으로 불의한 일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휘슬이 울리면, 모든 것을 멈춰야 합니다. 즉시 파울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집에서든 교회 모임에서든 마음이 동요될 때는 절대 말하지 마십시오. 입을 다물면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을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죄를 고백하거나; 잘못 받은 것을 돌려주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의 평화가 당신의 마음에 회복될 것입니다. 이 심판의 말을 듣는다면 결코 잘못된 길로 가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축구 경기에서는, 선수들이 심판과 언쟁을 벌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심판의 말은 최종 결정입니다. 심판과 언쟁하지 마십시오. 아니면 심판이 당신을 경기장 밖으로 내보낼 수도 있습니다! 즉시 문제를 바로잡으십시오.

바울은 3:15에서 “서로에게 감사하라”고 말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역 교회에서 서로에게 감사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바울은 이어서 가정생활에 대해 말합니다: “네 아내에게 괴롭게 대하지 마라”(3:19).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아내에게 괴롭게 하는 날이 일 년에 몇 일 허락됩니까? 단 한 번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살인하지 말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단 한 번도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서 "네 아내에게 괴롭게 대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실 때, 이는 우리가 아내에게 한 번이라도 괴롭게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살인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 하나님께서 " 네 아내에게 괴롭게 대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진지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3:21에는, 아버지들에게 권고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자녀를 화나게 하지 말라.” 계속해서 잔소리하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자녀가 낙담할 것입니다. 4:1에는 주인들에게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종들을 공정하게 대하라.” 그들에게 잘 대해 주십시오. 비록 그들이 당신의 종이고 당신이 그들에게 돈을 줄 의무가 없더라도, 그들에게 돈을 주십시오.

그런 다음 몇 가지 실질적인 권고가 있습니다: 기도에 전념하십시오(4:2). 항상 은혜로 말하여, 모든 사람에게 지혜롭게 대답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4:6). 설교단에서는 사자처럼, 하나님의 대변자로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과 개인적으로 대화할 때는 어린 양처럼 하십시오. 항상 은혜와 친절과 자비로 말하십시오.

4:12에서, 우리는 골로새 교인들이 완전해지기를 항상 기도했던 에바브라 형제에 대해 읽습니다. 이것이 사도들의 짐이었습니다. 모든 형제자매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사람들이 단지 회심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그들이 제자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이 완전해지기를 바랐습니다. 사도들은 복음 전파만 하느라 너무 바빠서 사람들을 완전하게 이끄는 데 시간을 내지 못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렇게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4:16에서, 바울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낸 편지를 언급합니다. 요한계시록 3:14-17에서 이 교회의 비참한 상태를 읽을 수 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바울이 쓴 경고에 귀 기울였다면 그런 상태에 이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이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낸 편지는 성경에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 편지가 그 교회를 재앙에서 구원할 수 있는 예언적 권고로 가득 차 있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당신에게 특별히 당신을 위한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를 보내실 수 있습니다. 당신이 그 말씀에 귀 기울인다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만약 그 말씀을 거부한다면, 당신은 멸망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당시 자신의 동역자였던 데마를 언급합니다(4:14). 그러나 후에, 데마는 세상의 것들에 끌려 그릇된 길로 갔습니다(딤후 4:10).

4:17에서, 우리는 바울이 아킵보에게 한 놀라운 권면을 읽습니다: "당신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역에 주의를 기울여 그 사역을 완수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에게 주신 사역에 대해 신경 쓰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특정한 사역을 주셨습니다. 그것에 집중하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완수하십시오. 아킵보 자리에 당신의 이름을 넣고, 그 말씀을 당신의 마음에 새기십시오. 내가 젊은 시절, 이 구절을 읽었을 때, 아킵보 자리에 내 이름을 넣자 주님께서 내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내가 네게 준 사역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것을 완수하여라. 곁길로 빠져 다른 일을 하지 마라."

여러분 모두에게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교회를 세우는 일로 부르셨다면, 사회복지 활동의 곁길로 빠지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을 예언 사역으로 부르셨다면, 어떤 기독교 단체의 책임자로 책상에 앉아 있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사역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것을 완수하십시오.”

장 52
데살로니가전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는 교회

성경에 나오는 바울 서신들은 로마서로 시작하여 디도서로 끝나지만, 우리가 아는 한 그 순서대로 쓰여진 것은 아닙니다. 일부 서신에는 기록 시기를 암시하는 단서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아마도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지 약 6년 후에 회심했을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는 아마도 바울의 첫 번째 서신일 것입니다. 회심 후 15년, 그리고 첫 번째 선교 여행을 시작한 지 5년 후에 쓰여졌습니다(행 13장). 바울이 서신을 쓴 순서는 아마도 데살로니가전서와 데살로니가후서, 갈라디아서,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 로마서,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빌립보서(이 마지막 네 서신은 감옥에서 씀), 디모데전서, 디도서, 디모데후서였을 것입니다.

바울이 쓴 첫 번째 서신이 바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다루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습니다. 이 서신의 주제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박해받는 교회였고; 바울은 그곳에 오기 전에 빌립보에서 직접 박해를 받았기에 그곳 사람들을 섬길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참된 종들은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작은 선구자로 만드십니다. 자신이 박해를 받아본 적이 없다면 박해받는 교회를 격려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많은 박해를 겪을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을 데살로니가로 보내시기 전에, 빌립보에서 매를 맞고 옥에 갇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행 16:22-24). 그래서 바울은 박해를 갓 겪은 직후에 그곳에 왔습니다. 나중에 데살로니가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았을 때, 그들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운 바울 자신도 박해를 받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섬기게 될 사람들에게 닥칠 고난을 미리 우리도 겪게 하심으로써, 그들을 향한 사역에 우리를 준비시키십니다. 오직 그런 설교자만이 이론에 치우치지 않고 강력하게 사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당신을 통과하게 하시는 모든 것은 당신의 미래 사역을 위한 준비입니다.

참된 회개와 믿음

바울은 먼저 믿음, 사랑, 소망에 대해 “믿음의 행위,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에 대해 말하고(1:3), 1장의 마지막 구절에서는 참된 회개에 대해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참된 회개에 대한 가장 명확한 정의 중 하나를 볼 수 있습니다: “우상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1:9)입니다. 회개는 우리의 모든 우상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마주하는 것입니다. 죄 가운데 살면, 우상을 마주하고 하나님께 등을 돌리게 됩니다. 당신의 우상은 돈, 직업, 야망, 죄된 쾌락, 여자친구, 혹은 자신일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우상일 수도 있습니다. 우상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회개는 이 모든 우상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180도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우상은 이제 모두 등 뒤에 있게 됩니다. 만약 당신이 그러한 우상에게 등을 돌리지 않았다면, 당신은 진정한 회개를 한 것이 아닙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삶 속에 여전히 우상을 품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마주하려 합니다. 그들의 야망과 관심사는 모두 세상에 있지만, 그들은 스스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쾌락과 돈이라는 우상만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그런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행복합니다! 하지만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 온전히 사는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사람들은 하나님과 세상을 위해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마치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가는 두 배에 발을 얹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중간에 강물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직면하는 많은 문제들은 그들이 삶 속에 회개의 올바른 기초를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상은 당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는 모든 것입니다. 당신이 너무 존경해서 당신의 삶에서 하나님을 대신하는 기독교 지도자일 수도 있고; 당신이 사랑하는 특정 성경적 교리일 수도 있습니다.

일단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이킨 후에는, 우리의 남은 생애를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그분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돌아오시기를 기다려야 합니다(1:9,10). 여기서 우리는 진정한 회개와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완벽한 설명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회심한 그리스도인은 그 자체만으로도 좋은 기초를 다진 것입니다. 그는 돈, 안락함, 음식, 잠, 사람들의 의견,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을 올바른 자리에 두고 온전히 하나님께로 향했습니다. 그 이후 그의 삶의 주된 목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의 주된 목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다시 오실 것을 기대하며 기다리면서 하나님을 섬깁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면 “다가올 진노에서 우리를 건져내실 것입니다”(1:10).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경험이 1:9,10과 일치하는지 점검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바울의 본보기

2장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오기 직전 빌립보에서 박해를 받고 학대를 받았던 사실을 그들에게 상기시킵니다. 데살로니가인들은 바울이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는지 기억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을 위해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의 본보기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에 대해 우리 모두가 귀 기울여야 할 말을 계속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말한 것이 아니요, 우리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고 말하였노라"(2:4). 설교하고 가르치는 모든 사람은 듣는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기쁘게 하기 위해 설교한다는 것을 증언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설교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끊임없이 살피시어 그들이 오직 그분만을 기쁘시게 하려고 하는지 보십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쓸 때도 이 점을 강조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결코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자주 강조했습니다. 사람의 명예를 구하는 것은 기독교계에서 충분히 인식되지 않는 죄입니다. 다른 죄들은 쉽게 인식되지만, 이 죄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의 명예를 구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죄입니다. 그런 사람은 결코 그리스도의 종이 될 수 없습니다(갈 1:10).

바울은 2:5에서 자신의 설교에서 누구에게도 아첨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는 회중의 부유한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결코 어떤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 심지어 사적인 대화에서도. 많은 설교자들이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 아첨하여 그들에게서 이익을 취하려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참된 종은 결코 누구에게도 아첨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돈을 벌기 위해 설교한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2:5). 많은 설교자들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좋은 헌금을 주게 만들 수 있는 말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전하기를 원하시는 진리를 전한다면, 대부분의 교회에서 배척당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크고 부유한 교회로 다시 초대받기를 원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좋아하는 말을 합니다.

바울은 설교할 때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구하지 않았습니다(2:6). 사도로서 권위를 행사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권위를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주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가르쳐 주는 구절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은 이 성경 구절을 묵상해야 합니다: 아첨도 않고, 돈을 탐하지도 않고,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구하지도 않고, 권위를 내세우지도 않았습니다.

이러한 삼가하는 면들 외에도, 바울은 자신이 어떻게 그들 가운데서 사역하고 섬겼는지에 대한 긍정적인 면도 언급합니다. 첫째, 그는 마치 온유한 어머니가 그녀의 아기를 돌보는 것처럼 섬겼습니다(2:7). 둘째, 그는 “우리는 여러분에게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2:8)라고 말합니다.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사랑이 없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자격이 없습니다. 마음속에 사람들을 향한 진정한 사랑이 없다면, 그들에게 설교하는 것은 잊어버리고 다른 일을 하십시오. 셋째, 바울은 “우리가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만 주기 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주기를 원하였노라”(2:8)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얼마나 도전적인 본보기입니까! 그들은 단순히 그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을 섬기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쏟아붓고 싶어 했습니다. 넷째, 바울은 그들이 재정적으로 부담이 되지 않도록 밤낮으로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말합니다(2:9). 하나님의 종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나라(인도)의 많은 전임 기독교인 사역자들은 사실상 열심히 일하지 않습니다. 저녁에 이리저리 집회에 가지만, 하루의 나머지 시간은 대부분 낭비합니다. 그들은 진정한 전임 사역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저녁 시간 사역자일 뿐입니다. 인도에서 진정한 전임 사역자는 평일 내내 낮에는 세속적인 일을 하고, 저녁과 일요일에는 나가서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낮에는 텐트를 만들었고, 시간이 날 때는 늦은 밤까지 텐트를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그는 생계를 유지했고 누구에게도 짐이 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의 신자들을 향해 얼마나 헌신적이고 정직하며 흠 없이 처신했는지 계속해서 말합니다(2:10). 바울은 어디를 가든지 "복음은 단지 내 메시지만이 아니라, 내 삶의 방식에서도 드러납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인도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 사역자들이 얼마나 필요한지 모릅니다!

2:11에서, 바울은 아버지처럼 신자들을 책망하고 격려하며 권면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참된 종은 어머니이자 아버지입니다. 어머니처럼, 신자들을 온유하게 대하고, 아버지처럼 필요한 경우 조언하고 훈육합니다. 이 두 가지 자질은 모든 하나님의 종과 교회의 모든 장로에게서 발견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효과적으로 섬기기를 원한다면 2:4-11 말씀을 많이 읽고 깊이 묵상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2:18에서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나를 막았도다"라고 말합니다. 사탄이 십자가에서 패배했고, 그의 갑옷이 벗겨졌고,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할 힘이 없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압할 권세를 주셨습니다(눅 10:19). 바울은 온 마음을 다하는 하나님의 종이었지만, 사탄이 어느 시점에 그를 방해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데살로니가로 가고자 했지만, 사탄이 그를 방해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탄의 사자가 바울을 끊임없이 괴롭히도록 허락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께 온 마음을 다한 종이었기에 사탄이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사탄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자신의 하급(힘이 약한) 악마들을 보냈지만, 바울에게는 직접 나섰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도 사탄은 자신이 보기에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가장 온 마음으로 섬기는 사람을 직접 공격하려 할 것입니다.

악마들 사이에는 여러 단계의 권세가 있습니다. 성경은 악한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에 대해 말씀합니다(엡 6:12). 더 강한 악마들은 더욱 온 마음을 다하는 그리스도인 일꾼들을 노리고, 하급 악마들은 반쪽짜리 마음으로 하는 사람들을 노립니다. 사탄은 교만하고 돈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 사역자들을 완전히 무시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자신의 왕국을 어떤 식으로도 해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그들이 스스로를 망치고 다른 사람들까지 함께 망치게 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탄이 당신을 핍박하고 괴롭히고 곤경에 빠뜨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사실 큰 영광입니다. 이는 사탄이 당신을 자신의 왕국에 대한 위협으로 여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탄은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가는 것을 막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셨습니다. 마치 바울의 육체의 가시를 사용하여 바울을 겸손하게 하셨듯이 말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갈 수 없게 되자 디모데를 그곳으로 보냈습니다(3:2). 그 덕분에 디모데는 사역에 필요한 경험을 쌓고 성숙해질 수 있었습니다. 때로는 선임 사역자가 다른 곳으로 갈 수 없을 때, 후임 사역자가 대신 가서 경험을 쌓을 수 있기 때문에 좋은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러셨듯이 이번에도 사탄에게 역전을 가하셨습니다. 우리의 사역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면, 사탄이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우리 사역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방해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 큰 기쁨을 느꼈습니다. 2:19부터 3:9에는 기쁨에 대한 여러 표현이 나옵니다. 그는 “데살로니가에 있는 너희 그리스도인들에게 나의 가장 큰 기쁨이 있느니라”(3:9)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섬기는 사람들로부터 기쁨을 찾지 못하는 하나님의 종은 심각하게 잘못된 것입니다.

인간 관계 속의 사랑

3:12,13에서, 우리는 어떻게 참된 거룩함의 마음을 가질 수 있는지 읽습니다. 바울은 “주께서 너희로 서로 사랑하는 것을 더욱 풍성하게 하시고 넘치게 하사, 너희 마음을 거룩함 가운데 흠 없게 견고하게 하시리라”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거룩함은 서로에 대한 사랑이 자라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할 때에만 거룩함 가운데 흠 없게 견고해질 수 있습니다. 거룩함이 단지 더러운 생각으로부터의 자유와 옷차림의 단정함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수정 사항입니다. 이러한 좋은 자질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행동에 있어서 완전히 이기적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내면의 순수함에는 관심이 있지만, 다른 사람들의 필요와 문제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자라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거룩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함 가운데 흠 없게 견고하게 하시는 방법은 우리 마음을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점점 더 채우시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없는 거룩함은 가짜 거룩함입니다. 참된 거룩함은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 동료 신자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 그리고 모든 사람을 향한 뜨거운 사랑입니다. 이 길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거룩함 가운데 흠 없이 굳건히 서게 될 것입니다(3:13).

4:1-8에서, 바울은 성적인 영역에서의 순결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4:4은 두 가지 의미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그릇"(그리스어로 스케우오스)이라는 단어는 우리 몸이나 우리 아내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각 사람은 자기 몸을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소유할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몸을 거룩하고 정결하게 유지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4:3).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는 영역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 영역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히 아는 영역입니다.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죄악되고 세상적이며 그리스도와 같지 않은 모든 것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모든 악으로부터 우리 몸을 지키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4:4는 "각 사람은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 아내를 얻는 법을 알아야 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즉, 아내를 얻는 방법은 거룩하고 순결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아내를 얻는 데에는 여러 가지 부정한 방법이 있습니다. 지참금을 받는 것도 그러한 부정한 방법 중 하나입니다. 당신은 아내를 찾을 때 거룩한 방법으로 아내를 찾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적인 자격을 찾고 있습니까? "음욕으로" 아내를 찾는 것은 이방인들처럼 아내를 찾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하나님을 섬기고 싶다면, 당신과 같은 경건한 갈망을 가진 아내를 찾아야 합니다.

4:6에서, 바울은 "이 일에 있어서는 누구든지 자기 형제를 속이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는 "남의 아내와 지나치게 친하게 지내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일을 하는 자들의 복수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성과의 관계에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데살로니가인들이 살았던 사회와 매우 유사한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에서는 성적 부도덕을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교회의 젊은이들, 심지어 그리스도인 사역자들 사이에서도 부도덕한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세상과 다르다는 점과 이 점에 대해 분명한 간증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당신은 이 부분에서 자신의 몸을 어떻게 정결하게 보존해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을 실망시키게 될 것입니다. 삼손과 다윗은 하나님을 알았지만 실패한 사람들의 비극적인 예입니다. 우리 시대에도 그들과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4:11에서, 바울은 믿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조용한 삶을 살고, 자신의 일에만 집중하고, 자신의 손으로 일하는 것을 목표로 삼으십시오." 고린도후서 5:9에서, 우리는 바울이 자신의 목표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에 언급된 그의 말은 저 말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언제나 평화로운 삶을 사는 것이어야 합니다. 누구와도 다투지 않고, 자기 일에만 신경 쓰고, 남의 일에 참견하지 않고,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우리가 귀 기울여야 할 중요한 권고를 담고 있는 훌륭한 구절입니다.

구름 속 그리스도의 재림

바울은 4:13-18에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 말합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자는 자들에 관하여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고;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도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살아 있는 우리는 우리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보다 앞서 들려 올라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무덤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이것이 첫째 부활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들과 함께 들려 올라가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천 년 동안 다시 살아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둘째 부활로 살아날 것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 주님은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강림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들이 구름 속에서 주님을 만나기 위해 들려 올라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분의 재림에 대해 말씀하실 때, 바로 이 문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여기 있다’, ‘그가 저기 있다’, ‘그가 은밀히 오셨다’ 하는 자들을 믿지 말라”(마 24:26)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믿는 것처럼, 그분이 은밀히 오시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분이 오실 때는 마치 동에서 서까지 번쩍이는 번개와 같을 것입니다. 모든 눈이 그분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언제 일어날까요? 예수님은 이 질문에도 “환난 후에 즉시”(마 24:29)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환난 전에 성도들을 휴거시키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성경 어디에도 그렇게 가르치는 구절은 없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교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환난 후에 오실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4:16,17에 언급된 사건들은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4:30,31에서 언급하신 사건들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예수님께서 천사들과 나팔 소리와 함께 구름 속에 나타나시고, 성도들이 그분을 맞이하러 들려 올라가는 것.

5:2에서, 우리는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오리라”라고 읽습니다. 도둑은 자신의 옴을 알리지 않고 예고 없이 옵니다. 따라서 모든 불신자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놀랄 것입니다. 그러나 빛의 아들들인 우리는 주님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5:4). 우리는 어둠 속에 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잠들어 있지 말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5:6). 우리가 깨어 있는지 잠들어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사람이 잠들어 있을 때, 방 안의 실제적인 것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꿈속에서) 비실재적인 것들은 실재가 되어 나타납니다. 마찬가지로, 신자는 영적으로 잠들어 있을 때, 영원한 실재적인 것들이 그에게 비실재적으로 보이고, 이 세상의 비실재적인 것들이 그에게 실재로 보입니다. 이 세상 전체는 천국과 영원에 비하면 비실재적인 꿈과 같습니다. 진정으로 영원한 것들은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잠자는 신자들에게 주님은 분명히 밤에 도둑같이 오실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그날을 고대하며 그분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린다고 말합니다. 우리 주변 사람들은 모든 것이 평화롭고 안전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5:3). 하지만 멸망은 그들에게 갑자기 닥쳐올 것입니다.

이 멸망은 “아이 밴 여자에게 임하는 진통과 같이”(5:3) 갑자기 임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지막 날에 대해 말씀하실 때 같은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마 24:8). 모든 여성은 아이를 낳기 전에 여러 시간 동안 지속될 수 있는 고통스러운 진통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떤 산모들은 너무 고통스러워서 죽을 것 같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아이는 그 후에야 비로소 태어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앞서 겪게 될 고통스러운 환난의 시기를 묘사합니다. 어떤 아이도 그러한 진통 없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재림은 이 고통스러운 환난 전에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시기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우리가 이곳에 있으며 그분을 위한 증인이 되고, 복음을 위해 우리의 생명을 바치는 것이 큰 영광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 권고

5:12에서, 우리는 “우리 가운데서 부지런히 수고하는 자들, 특히 우리를 가르치는 자들에게 감사하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장로로서 우리를 인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시는 분들은 높이 존경받아야 하며, 우리는 그분들께 감사를 표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지고 있는 이 감사의 빚은 어떤 금전적 빚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두 가지 극단적인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도자를 신처럼 숭배하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지도자를 존중하지 않고 감사를 표하지 않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다면, 여러분만 손해를 볼 것입니다.

5:14-18에서, 바울은 아홉 가지의 짧고 강력한 권면을 합니다: 무질서하게 사는 자들을 훈계하고,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도와주고,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며, 결코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항상 다른 사람들을 위해 선을 구하고, 항상 기뻐하고, 항상 기도하고(즉, 항상 기도하는 영을 지니라는 의미입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 모든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다음 5:19-21에서, 바울은 예언의 은사에 대해 몇 가지 조언을 합니다 - 먼저 예언하는 자들에게, 그리고 듣는 자들에게. 성령께서 때때로 말씀을 나누라고 촉구하시면, 일어나 말씀하십시오. 그 불을 끄지 마십시오. 그리고 듣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예언의 말씀"(교회 모임에서 하나님 말씀을 나누는 것)을 업신여기지 말고, 둘째로, 듣는 모든 것을 예언으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경고를 받습니다. 거짓 "예언"이 넘쳐나는 우리 시대에 이 두 번째 경고는 매우 필요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분별력을 사용하여 무엇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 분별해야 합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교훈이 되는 것만 꼭 붙잡고 나머지는 버려야 합니다. 예를 들어, 바나나 껍질을 벗겨 먹으십시오. 예언하는 사람이 영적으로 성숙할수록 바나나 껍질은 더욱 얇아질 것입니다!!

5:22과 23은, 모든 형태의 악을 멀리하라고 권고를 받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한다면, 평강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영과 혼과 몸을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우리를 보존하실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5:23에서, 우리는 성경 전체의 다른 어떤 곳보다도 사람이 영과 혼과 몸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더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장막이며, 구약의 장막은 지성소, 성소, 바깥뜰, 이렇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는 사람의 영과 혼과 몸에 해당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지성소에 거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 존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우리의 영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의 혼은 우리의 생각, 감정, 의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이나 감정 안에 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영은 우리의 양심과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능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장 53
데살로니가후서

마지막 날의 위험

바울이 데살로니가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 역시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편지는 첫째 편지가 쓰여진 지 1년 후에 쓰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첫째 편지는 주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으로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쓰였습니다. 둘째 편지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 쓰였습니다. 첫째 편지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라고 권했습니다. 그러자 몇몇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이 곧 오신다면 우리가 왜 시간을 낭비하며 일합니까? 직장을 그만두고 모든 사람에게 주님의 재림을 전하는 데 시간을 쓰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게으르게 앉아 일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야 했습니다.

우리는 신문에서 가끔씩 어떤 미친 사이비 종교 집단이 주님이 특정 날짜에 재림하실 것이라고 가르치고 산꼭대기에 올라가 그분을 기다렸다는 기사를 읽습니다. 그 종교 집단의 지도자는 추종자들에게 재산을 모두 팔게 하여 돈을 받아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추종자들은 며칠을 기다려 보고는 속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그분의 재림의 정확한 날짜와 시간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그것이 가까워졌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다시 점령했습니다(눅 21:24).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다는 것을 압니다. 예루살렘 주변에는 많은 분쟁이 있습니다(눅 21:20).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우리는 날짜와 시간을 알지 못합니다. 때와 시기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행 1:7). 그러므로 누구도 자신의 직업을 버리고 산 위에서 주님의 재림을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지 2000년이 흘렀습니다. 만약 데살로니가의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의 책망을 받지 않았다면, 그들은 죽을 때까지 직업을 잃고 굶주렸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1:4에서, 바울은 그 그리스도인들이 환난 가운데서도 신실함을 유지한 것을 기뻐합니다. 박해 속에서도 그들의 신실함과 인내는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다는 분명한 증거였습니다(1:5). 동시에 그것은 불신자들에게 내려지는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의 분명한 증거였습니다. 언젠가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를 괴롭히는 모든 사람을 벌하시는 것이 정의로울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면 그들이 환난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박해가 계속될 것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1:7).

바울이 이 글을 썼을 때, 그는 2000년의 교회사가 도처에서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로 가득 차리리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했으며,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비로소 구출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받고 있습니다. 나는 지난 100년 동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에 죽임을 당한 사람이 앞선 1900년 동안 죽임을 당한 사람보다 더 많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그리스도인 박해는 대부분 공론화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리스도께 순종하지 않는 자들”(1:8)에게 심판을 내리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에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성도들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1:10).

그러므로 우리가 신실하다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박해를 받을 것을 예상해야 합니다. 우리는 비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친척들과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는 자로서 우리에게 정해진 운명입니다. 우리는 물에서 건져 올린 물고기처럼 이 땅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의 집이 아니며, 우리는 이 세상 체제와 끊임없이 갈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나그네요 외국인이며 사탄의 세상 체계에 위협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은 우리를 미워하고 핍박합니다. 세상과 친해지면 세상이 더 이상 여러분을 괴롭히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적그리스도의 등장

2장에서, 바울은 주님의 재림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계속해서 바로잡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주님의 재림에 대한 메시지와 환상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해 동요하거나 흔들리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들을 믿지 마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오늘날, 이 경고는 매우 시의적절합니다. 그들을 믿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지침이 되며,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쓰고 "바울"이라고 서명하여 바울이 쓴 편지라고 믿게 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처럼 신약 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누구든지 주님의 날이 왔다고 말하여 여러분의 생각을 어지럽히지 못하게 하라"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누구든지 예수께서 은밀히 오셔서 자신의 성도들을 데려가셨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라"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이어서 그리스도의 재림은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재림의 날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에서 크게 떨어져 나가는 일이 있기 전에는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는 일"은 우리 시대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둘째로, 바울은 적그리스도(불법의 사람)가 나타나기 전에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2:3). 적그리스도가 먼저 와야 하고 환난의 시기가 끝나야 합니다. 신약 성경 곳곳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큰 환난 후에야 재림하실 것이라는 진리를 분명히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오시면 모든 사람이 그분이 오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마 24:27-31 참조).

2장은 “주의 날”, 즉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날과 주님의 재림을 분리합니다. 영리한 사람들은 자신의 교리에 맞게 성경을 왜곡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속아서는 안 됩니다. 선입견을 가지고 성경을 대하거나, 우리가 믿는 대로 성경을 맞추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속도록 허락하실 것입니다(2:10,11에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자신의 의견을 갖지 않고 성경을 대해야 합니다. 우리의 의견이 성경에 의해 형성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야 우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의 교사들에게서 물려받은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든 성경을 이 의견에 맞추어 버립니다. 나도 신앙생활 초기에 성경을 주의 깊게 연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하지만 열린 생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면서, 성경에 맞게 나의 선입견을 많이 바꿔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때 내가 깨달은 진리 중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적그리스도가 일어나고 그리스도인들이 큰 환난을 겪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은 믿는 자로서 우리가 큰 환난을 기다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니에요.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임신한 아내에게 "산고를 기대하고 있나요?"라고 묻는다면, 그녀는 "아니요, 나는 아기가 태어나기를 기대하고 있어요!"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녀는 산고가 먼저 올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산고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아기가 태어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나도 주님의 재림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가 시작되기 전에 환난의 시기가 있을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환난 기간 동안,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처럼 성전에 앉아 있을 것입니다"(2:4).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숭배하게 할 것입니다. 요한은 적그리스도의 영이 이미 세상에 있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미 교회에 앉아 마치 하나님인 것처럼 사람들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처럼 행하는 적그리스도의 이러한 특징은 "불법의 비밀"이라고 불리며, 이미 역사하고 있습니다(7절). 기독교 지도자들이 여러분의 삶을 지배하려 할 때, 그들은 하나님처럼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영이며,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에게서 발견됩니다.

경건의 비밀이 있듯이, 불법의 비밀도 있습니다. 경건의 비밀은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딤전 3:16). 우리는 이 땅에서 경건한 삶을 살 수 있음을 우리의 삶으로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서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법(죄)의 비밀은 사탄이 육신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실제로 육신이 되지는 않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에 영향을 미쳐 이 육신으로는 경건한 삶을 살 수 없다고 믿게 만듭니다. 그래서 그들은 죄를 가볍게 여기고, 죄가 영원히 그들을 지배할 것이라고 그들의 삶으로 선포합니다(롬 6:14과 모순됨). 이렇게 그들은 사탄에게 동의합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그분은 입김으로 적그리스도를 죽이실 것입니다(2:8). 그러나 적그리스도가 나타나기 전에, 그의 영은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그의 길을 예비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의 오심을 위해 길을 예비했던 것처럼, 적그리스도를 위한 길을 예비하는 큰 움직임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 영은 온갖 종류의 악, 사탄적 능력, 혼적 능력, 그리고 거짓 표적과 기사로 나타날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는 많은 거짓 치유와 기적이 있을 것입니다(2:9). 우리는 이미 오늘날,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리로 높여지고 가난한 사람들의 돈을 빼앗는 수많은 "치유 운동"에서 이를 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적그리스도를 위한 길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를 고치시고 오늘날에도 기적을 행하십니다. 나는 그것들을 직접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거짓도 많습니다. 우리는 이 둘을 분별해야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에게 “미혹하는 영향력”(11절)을 보내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그들이 “진리를 사랑하지 아니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였기”(10절)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약성경에서 가장 무서운 구절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기심이나 교만, 또는 다른 죄를 보여주실 때 우리가 자신에 대한 진실을 마주하려 하지 않고, 그러한 죄에서 구원받기를 갈망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가 속도록 허락하실 것입니다. 얼마나 끔찍한 비극이겠습니까! 사탄은 이미 우리를 속이고 있으며, 우리의 마음은 믿을 수 없고 우리의 욕망도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 우리가 속도록 허락하신다면, 우리는 소망 없이 파멸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시라는 것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시기를 원한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죄를 보여주실 때 자신에 대한 진실을 사랑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의 탐욕, 이기심, 돈에 대한 사랑, 교만함을 보여주실 때, 그것을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주님, 나는 온 마음을 다해 이것으로부터 구원받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하십시오. 자신을 정당화하고 죄를 은폐한다면,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에게 미혹하는 영향력을 보내셔서 거짓을 믿게 하실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당신은 당신이 보는 가짜 기적들을 믿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이러한 가짜 기적들에 속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삶 속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그 죄에서 구원받기를 간절히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 대하여 감사하노니 너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고 택하심을 입었느니라"(2:14). 복음의 전적인 목적은 우리가 주 예수님의 영광, 곧 그분 안에 있는 충만한 은혜와 진리를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 은혜와 진리를 통해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요 1:14).

마지막 권고

3:6-11에서, 바울은 그곳 그리스도인들(그리고 우리)에게 “게으른 생활을 하는 형제들을 멀리하라”고 경고합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자신이 그들 가운데 어떻게 살았는지 상기시켜 줍니다. 그는 열심히 일했고, 그들에게서 생계를 위해 돈을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음식값까지 지불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얼마나 훌륭한 본보기였는지 모릅니다. 전임 그리스도인 사역자들 중에서 자신이 대접받는 음식의 값을 지불할 생각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달랐습니다. 바울이 성도들의 집에 초대받아 한 끼 식사를 했을 때 돈을 지불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바울이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렀기에, 몇몇 신자들이 정기적으로 그에게 음식을 공급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들을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님의 종으로서 그들을 섬겼고, 따라서 정기적으로 그들에게서 음식을 받을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음식값을 지불했습니다. 그는 밤낮으로 텐트를 만들어 일하며 돈을 벌고 음식값을 지불했습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참으로 훌륭한 본보기입니다: 주님의 참된 종은 다른 사람들에게 "나의 본을 따르라"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그들 중 어떤 이들이 규율 없는 삶을 살며 생계를 위해 일하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본보기를 그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아마도 주님의 재림에 대한 잘못된 생각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 중 일부는 "주님이 곧 오신다면 우리 모두 직장을 그만두고 복음을 전하러 다니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오늘날 대부분의 전임 그리스도인 사역자들처럼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결국 다른 사람들의 일에 참견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이렇게 규칙을 정했습니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면 먹지도 말라.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런 사람들에게 조용한 방식으로 일하고 자기 양식을 먹으라고 명령하고 권면하노라"(3:10,12).

만약 당신이 전임으로 주님을 섬긴다면, 세속적인 직업을 가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당신은 바울처럼 천막을 만드는 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교회 성도들의 선물로 재정적인 지원을 받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스스로에게 이렇게 질문해 보십시오: 만약 우리 교회 교인들이 생계를 위해 아침 8시에 집을 나서서 저녁 7시에 돌아올 정도로 열심히 일해야 하고, 그들이 나를 지원해주는 사람들인데, 그렇다면 나는 그들만큼 열심히 일하고 있는 걸까? 만약 당신이 그들만큼 열심히 일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당신을 부양해 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주님의 종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기독교계의 비극은 세속적인 일을 하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전임 그리스도인 사역자들보다 훨씬 더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이 편지에 있는 우리의 지시를 따르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특별히 주의하여 사귀지 말라. 그리하여 그가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라. 그러나 원수처럼 여기지 말고 형제같이 권하라"(3:14,15).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지 않고 단지 생계를 위해 기독교 사역에 들어간 게으른 전임 사역자들과 어울리지 말아야 합니다. 인도에는 그런 사람들이 수천 명이나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원수로 대하지 않지만, 그들과 어울리지 말고 권고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이 편지에 기록된 모든 것을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기 위해 우리가 반드시 주의해야 할 중요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장 54
디모데전서

교회와 그 목자들

바울이 디모데와 디도에게 보낸 편지는 생애 말년에 쓴 마지막 편지입니다. 디모데후서가 마지막 편지입니다. 세 편지 모두 교회에서 섬기는 주님의 종과 관련이 있습니다.

디모데전서의 주제는 교회와 그 목자들입니다. 즉, 교회의 목자와 지도자들이 가져야 할 태도, 삶의 방식, 그리고 교회 일을 처리하는 방식에 대한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바울의 마지막 세 편지 모두 동일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지상 생활이 끝나가고 있음을 느꼈고, 다음 세대 교회 지도자들이 주님의 종으로서 자신이 가졌던 것과 같은 원칙과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깊이 우려했습니다. 이전 편지들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세 편지에서는 다음 세대 지도자들이 같은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더 많이 이야기하며, 마지막 때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한 예언적 경고를 통해 그들을 준비시킵니다.

바울은 여기서 디모데에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종이 명심해야 할 가장 중요한 몇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바울은 “너희 교회에서 이상한 교리를 전하는 것을 허락하지 말라”(1:3)고 말합니다. 교회의 지도자라면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가르침을 점검할 책임이 있습니다.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초대 교회 시대에는 신자들이 일어나서 마음에 있는 것을 나눌 수 있는 자유가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아무도 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신자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이상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성경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회에서 이상한 교리가 전파되고 있습니다. 지도자는 항상 경계해야 하며, 교회에서 누군가가 이상한 교리를 전하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또한 두 서신에서 디모데에게 “족보와 추측에 관한 논쟁과 다툼에 휘말리지 말라”고 반복해서 말했습니다. 추측이란 성경에 언급되지 않은 문제, 예를 들어 가인의 아내가 누구였는지와 같은 문제를 가리킵니다. 그런 문제에 대한 답을 알 필요는 없습니다. 알더라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이와 비슷한 질문을 많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추측에 휘말리지 마십시오.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신의 모든 가르침의 목적을 상기시킵니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순수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진실한 믿음으로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1:5). 순수한 마음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누구도, 어떤 것도 자리 잡을 수 없는 마음입니다. 만약 교회의 신자들이 단지 예배에만 참석할 뿐 하나님과 서로에 대한 사랑이 자라지 않는다면, 당신의 사역은 실패한 것입니다. 그러한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또한 선한 양심과 진실한 믿음에서 나와야 합니다. 바울은 생애 말년에 선한 양심의 중요성을 자주 강조했습니다. 바울은 대제사장(행 23:1)과 벨릭스(행 24:16) 앞에서 심문을 받을 때 자신의 “선한 양심”을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것의 중요성을 이야기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 사역자들이 선한 양심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어떻게 삶을 파멸하게 되었는지 보았습니다(1:19). 바울이 여기서 언급하는 진실한 믿음은 삶의 일상적인 시련 속에서 주님을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이지, 단순히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믿는 믿음이 아닙니다.

이 구절(1:5)은 지역 교회를 세우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면 명심해야 할 좋은 구절입니다. 만약 당신이 당신의 사람들을 순수한 마음과 깨끗한 양심, 진실한 믿음으로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도록 이끌었다면, 당신은 성공적인 장로 형제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1:6에서 “어떤 사람들이 이 근본적인 진리에서 벗어났고”, 그로 인해 무익한 토론과 논쟁에 빠지게 되었다고 경고합니다. "그들은 율법의 선생이 되고 싶어 하지만,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자신 있게 주장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기독교계의 많은 설교자들을 접했는데, 그들 대부분이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그저 어떤 책에서 읽거나, 어떤 신학교에서 공부했거나,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것을 설교할 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일상생활의 일부가 되도록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스스로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리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그러한 삶으로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에게서 듣는 말씀은 간접적인 것입니다. 당신은 그것을 하나님 앞에 가져가서 "주님, 이것을 직접적인 경험으로 바꿔주세요. 내 삶에서 실제로 경험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당신이 들은 진리를 하나님과 함께 생생한 경험으로 체험하게 될 때, 당신은 그것을 당신의 메시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간접적인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내게서 들은 모든 메시지를 이런 방식으로 전환하여 직접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잭 형제님, 당신의 메시지를 전해도 될까요?"라고 물었습니다. 나는 "물론입니다.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먼저 그 삶을 사세요."라고 대답합니다. 먼저 그 삶을 살지 않고 설교하려고 한다면, 당신은 스스로를 파멸시킬 것입니다. 당신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교사가 될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을 법대로 쓰면 선한 줄을 우리가 아노라. 그러나 율법은 의로운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니라"(1:8,9). 의로운 사람에게는 율법이 필요 없습니다. 생각으로도 간음하지 않는데 왜 "간음하지 말라"는 법이 필요하겠습니까? 사람들에게 분노조차 하지 않는데 왜 "살인하지 말라"는 법이 필요하겠습니까? 의로운 사람은 십계명이 필요 없습니다. 그는 훨씬 더 높은 수준의 성령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기준은 율법보다 높습니다. "율법은 불법한 자들과, 반역하는 자들과, 경건하지 아니한 죄인들과, 그런 많은 것들과, 그 외에도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복음에 어긋나는 것들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요"(1:9-11). 우리는 갈라디아서에서 성령 안에서 행할 때 율법으로부터 어떻게 자유로워지는지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사역을 위해 사람을 준비시키는 방법

바울이 생애 말년에 매우 강조했던 또 다른 내용이 있습니다: "나의 본보기를 보라",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보라"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디모데에게 반복해서 말하는 내용입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께 감사하노니 그가 나를 충성되이 여겨 직분을 맡기셨음이로다”(1:12). 하나님께서는 주권적으로 사람들을 사역으로 부르시지만, 사역을 맡기기 전에 먼저 사람을 시험하십니다. 바울은 10년 동안(회심한 사도행전 9장부터 사역으로 파송된 사도행전 13장까지)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 10년 동안 바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나님은 바울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일상생활에서 충실한지 살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10년 동안 그를 시험하시고 그의 충실함을 보시고 “이제 내가 너를 보내어 나를 섬기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부르신다면, 먼저 당신을 시험하실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새 언약 교회를 세우는 사역을 열어 주시기 전에 16년 동안(그 중 9년은 전임 기독교 사역으로) 나를 시험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기독교 사역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기름부음받은 사역을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이 작은 일에 충실한지 시험하실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작은 일에 충실하고, 그분의 말씀을 연구하는 데 충실하며, 돈에 충실하고, 시간에 충실하고, 순결함에 충실하고, 올바르고, 정직하고,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 아래 자신을 낮추면, 아마도 10년 후에 그분께서 당신에게 효과적인 사역을 맡겨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사역을 맡겨 주실 때, 당신은 30년 동안 자신의 생각대로 사역하는 것보다 1년 안에 더 많은 것을 해낼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사역을 맡겨 주셨으니"(1:12)라고 말합니다. 바울을 임명한 것은 어떤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내가 비록 신성을 모독하고 박해하는 자였으나"(1:13). 하나님은 한때 악했던 회심한 죄인들에게 사역을 맡겨 주십니다. 이것은 과거에 매우 악한 삶을 살았던 모든 사람들에게 격려가 됩니다. 2세기로부터 전해진 한 저서에서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회개시키러 오셨음을 보여주시기 위해, 당시 가장 악한 죄인들을 택하여 사도로 삼으셨다고 말합니다. 바울도 그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으니, 내가 죄인들 중에 가장 큰 죄인이니라"(1:15). 그러므로 하나님은 반드시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에서 자라나고 항상 깨끗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을 택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은 그런 사람들을 많이 사용하십니다. 하지만 죄의 늪에서 살았던 사람들도 택하십니다. 그분은 간음하는 자, 도둑, 술 취하는 자, 마약 중독자들을 불러 사도로 삼으십니다. 이는 회심하기 전의 죄가 누구든지 사도가 되는 것을 결코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함입니다. 가장 큰 죄인이었던 바울이 가장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중 누구를 통해서든, 죄를 회개하고 그분을 신뢰한다면 많은 일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죄에 대해 점점 더 깊이 깨달아 가는 과정을 주목하기를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수록 자신의 삶에서 죄를 점점 덜 의식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모든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수록 자신의 삶에서 죄를 더 많이 의식하게 된다는 것을 인정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매우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보고 "주님,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욥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베드로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요한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바울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디모데전서를 쓰기 약 10년 전, 고린도전서 15:9에서 바울은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5년 후 에베소서 3:8에서 그는 "나는 모든 믿는 자 중에 가장 작은 자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5년 후 디모데전서를 쓸 때 그는 "나는 이 세상 모든 죄인들 중 가장 큰 죄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영적 성장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우리의 보잘것없음, 무의미함, 그리고 죄악됨을 점점 더 자각함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성장하고 있다면, 당신은 올바른 방향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께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것입니다.

1:18,19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선한 양심을 지키라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버리고 파선하였느니라." 선한 양심을 지키지 못하고 삶을 파선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믿음을 잃었습니다. 때때로 신자들이 믿음을 잃는 이야기를 읽습니다. 나는 어떤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자유주의 신학교에 다녔다가 그곳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듣고 믿음을 완전히 잃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믿음을 잃었을까요? 첫째, 그는 그곳에 가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둘째, 만약 그가 선한 양심을 지켰더라면 믿음을 잃지 않았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신념을 굳게 지키지 않을 때 믿음을 잃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믿음을 잃고 지옥에 가야 마땅합니다. 지옥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담대히 서지 않는 비겁한 자들을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계 21:8).

바울이 예로 든 사람들 중에는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절대 이름을 언급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다른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에 대해 경고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를 사탄에게 넘겨주어 그들이 신성모독을 하지 않도록 배우게 했습니다.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할까요?

바울은 2:1에서 “나는 네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며 그들에게 감사하기를 원하노라”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미 모든 일에 항상 감사하라는 권고를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더 나아가 모든 사람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우리가 “주님, 나는 모든 사람, 곧 나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에게나 나에게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나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모든 사람을 나의 선을 위해 일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로마서 8:28을 믿지 않으면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우리가 특별히 정부 권위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이 서신을 썼을 당시 로마의 통치자는 네로였는데, 그는 로마 황제 중 가장 악한 황제 중 한 명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나중에 바울의 목을 베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우리가 그러한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직한 권위자들뿐만 아니라 그들 중 가장 불경건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어둠의 세력을 제지하시고 그들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막아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인도에서는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까? 우리는 우리의 통치자들이 신자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불신자일지라도 괜찮습니다. 바울 시대에는 어느 나라에도 권력을 가진 신자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 곧 전권을 가진 아버지께서 우리나라 정부를 다스려 달라고 기도하고 간구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선거 때마다 하나님께서 선한 정부를 세우시기를 기도해 왔습니다. 또한 정부가 내리는 결정도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기를 기도해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에 대한 놀라운 응답을 보았습니다. 하늘에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한 나라의 정부를 주관하실 수 있다는 믿음이 없다면 당연히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이 없다면 기도해도 소용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경건한 삶을 살며 선한 양심을 지닌 몇 사람만이라도 기도한다면, 그들이 한 나라의 정부에 영향을 미쳐 그 나라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때때로, 하나님의 뜻은 그분의 교회가 박해를 겪어야 한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즉 성도들을 정결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거의 200년 동안 박해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지막 날에 "모든 사람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다"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주님,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어떻게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또한 마지막 날에 기근과 지진과 전쟁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기근이나 지진이나 전쟁이 없도록 기도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우리는 악의 세력이 억제되기를 기도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6,7에서 우리는 세상 속에서 억제하는 영향력에 대해 읽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를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입니다. 언젠가 성령께서 모든 억제하시는 것을 멈추실 것이고, 그때 적그리스도가 권능을 가지고 일어날 것입니다. 하지만 그날이 올 때까지 우리는 우리나라의 권위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기도를 통해 그들에게 영향을 미쳐야 합니다. 우리는 정치에 참여하는 것보다 기도를 통해 정부에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박해받지 않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경건과 존엄 안에서 조용한 생활을 할 수 있기를”(2:2) 기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인도에서 박해를 받을 필요가 있다고 보신다면, 우리는 그것도 받아들일 것입니다.

바울은 2:4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신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은 누구도 지옥에 가도록 예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실 뿐만 아니라, 그분에 대한 진리를 온전히 알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사람이 구원을 받으면, 하나님의 뜻의 다음 단계는 그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온전히 아는 데 도달하는 것입니다.

2:5에서, 우리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지 35년이 지났는데도 성령께서는 여전히 그분을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부르십니다. 그분을 신인(God-man, 神人)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표현입니다. 그분은 100% 하나님이시며 항상 그러하셨습니다. 그러나 한 번 인간의 형상을 취하신 후에는 영원히 100% 사람이시기도 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인성(人性)을 가지고 천국으로 가져가서 그곳에서 우리를 대표하십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그분을 대표하도록 우리에게 자신의 신성(神性)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대표하며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계십니다. 우리도 이 땅에서 그분을 충실히 대표하며 우리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여성의 사역

2:9부터, 성령께서는 여성들이 교회에서 어떻게 옷을 입고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여성들은 단정하고 정숙한 옷을 입어야 합니다. 즉, 여성의 옷차림은 남성의 정욕을 불러일으키는 스타일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옷차림은 남성의 정욕을 자극하도록 고안되었습니다. 자매 여러분, 옷을 살 때 단정함을 지킬 수 있도록 조심하십시오. 재단사가 옷을 지어주고 있다면, 몸을 어떻게 가리고 싶은지 정확히 말하십시오. 정숙하게 옷을 입는다는 것은 초라하게 옷을 입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모든 형제자매가 깔끔하고 단정하게, 심지어 멋지게 옷을 입는 것은 좋은 증거입니다. 여성이 가능한 한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은 잘못이 아니지만, 남성의 정욕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옷을 입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는 계속해서 여성들이 화려한 머리 스타일이나 금, 진주, 비싼 옷으로 치장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교회의 설교자들은 '금으로 치장하지 말라'는 부분은 강조하지만 '비싼 옷으로 치장하지 말라'는 부분은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매에게 800루피짜리 귀걸이를 벗으라고 하면서, 10,000루피짜리 사리(인도여성의 전통 의상)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자매를 위선자로 부추깁니다. 이 구절의 주요 강조점은 화려한 옷과 장신구로 부를 과시하는 것을 피하라는 것입니다. 대신 그리스도인 여성은 경건한 여성에게 어울리는 선한 일로 자신을 장식해야 합니다.

이어서 성령께서는 교회 안에서 여성의 사역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디모데전서의 주제는 교회와 그 목자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3:15에서 “내가 이것을 쓰는 것은 네가 교회 안에서 어떻게 행해야 할지 알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합니다. 교회 모임에서 “여자는 조용히 기르침을 받아야 합니다”(2:11). 여자는 가르치려 해서는 안 되며, 목사나 장로처럼 남자 위에 권위 있는 직분을 가져서도 안 됩니다. 여자는 가정이나 주일학교에서 어린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전도자나 선교사가 되어 회심하지 않은 남녀에게 복음을 전할 수도 있습니다. 교회 모임에서 기도하고 찬송하고 간략하게 예언할 수도 있습니다(고전 11:5 참조). 하지만 남자를 가르치는 것과 관련해서는 “조용히 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교회에서 간증을 하고 자신에게 축복이 된 말씀을 나눌 수는 있지만,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또한 남자들에게 권위를 행사해서는 안 됩니다.

로마서 16장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동역자였던 다섯 명의 여성에 대해 읽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음식을 요리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주님을 섬겼습니다. 전도를 통해, 그리고 교회 안의 여성들과 아이들을 섬기면서 말입니다. 이처럼 여성들은 초기 교회에서 큰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인도와 같은 나라에서는, 남자가 여성에게 말하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인도 인구의 50%(여성)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요? 바로 교회 안의 자매들입니다. 교회 안의 여성들은 다른 자매들을 상담하고 인도 여성들에게 다가가 복음을 전하는 훌륭한 사역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성들이 그러한 사역을 하는 것을 막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교회 안의 권위에 관해서는, 먼저 아담이 창조되었고 그 후에 하와가 창조되었습니다(2:13). 그리고 두 번째로, 속은 것은 아담이 아니라 하와였습니다(2:14).

여성들은 자녀를 낳음으로써 위대한 사역을 감당합니다. 이 편지를 받은 디모데는 어머니의 경건한 양육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그는 결코 사도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가정에서 아버지보다 자녀와 더 친밀한 관계를 맺습니다. 그래서 자녀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예수님의 제자로 양육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자가 만일 자기 절제를 가지고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2:15). 주님은 창세기 3장에서 하와에게 많은 고통을 겪으면서 자녀를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아담과 하와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는 이 사실을 기억하며 여성들에게 해산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자녀를 낳을 때 그들을 돌보실 것입니다. 오직 믿음과 사랑과 정결함에 거하세요.

장로의 자격

3장에서, 성령께서는 교회에서 장로와 다른 종들의 자격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3:1-7에는 장로의 자격에 대해 언급되어 있습니다. 장로는 세상에서 좋은 증거를 가져야 하며, 한 명 이상의 아내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당시에는 두세 명의 아내와 결혼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만약 그 남자와 그의 세 아내가 모두 개종했다면, 그는 어떻게 해야 했습니까? 그 남자는 첫 번째 아내와만 살고, 다른 집에서 다른 아내들을 재정적으로 부양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좋은 형제일지라도 교회의 장로가 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이혼하고 재혼한 남자는 (두 명의 아내가 있기 때문에) 교회의 장로가 될 수 없습니다. 교회의 장로들은 결혼한 남성인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혼자들을 상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장로는 절제하며, 지혜롭고, 존경받을 만하며, 손님을 잘 대접하고, 가르치는 능력이 있으며, 술을 좋아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는 이기적이고 편안한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는 논쟁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온유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돈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신약성경에서 돈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에 대해 얼마나 강조하는지 주목하십시오. 그것은 구약성경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단지 부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받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사도들은 돈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자유로워야 할 필요성에 대해 설교했습니다.

장로는 자신의 자녀를 잘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집에서 자녀를 잘 다스리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집을 돌볼 수 있겠습니까? 집에서 서너 명의 자녀를 돌볼 수 없다면 어떻게 교회에서 300명의 자녀를 돌볼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자녀를 양육하고 집안을 잘 다스리고 질서 있게 유지하는 것은 교회에서 책임을 맡을 자격 중 하나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의 종이 되려면 가정생활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어떤 목사들의 자녀들은 교회에서 가장 행실이 나쁜 아이들입니다. 이는 매우 나쁜 증거입니다. 그런 사람은 교회 지도자 직분에서 물러나야 합니다. 새로 개종한 사람들은 교만에 빠질 수 있으므로 장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3:6).

"집사(deacon)"(3:8)라는 단어는 사실 그리스어 "디아코노스(diakonos)"인데, 안타깝게도 영어 성경에 그대로 음역되어 들어왔습니다. 이 단어는 단지 "종"을 의미하며, 그렇게 번역되어야 했습니다. 장로는 교회의 영적 지도자입니다. 하지만 모든 교회에는, 재정 관리와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는 등의 실질적인 문제들을 돌보아야 할 비영적인 책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는 "종"이 필요합니다. 품위 있는 "집사"라는 단어는 어떤 종들에게 잘못된 중요성을 부여할 수 있으므로, 이 "종"이라는 단어가 훨씬 더 선호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종들은 또한 이중적인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3:8-10). 즉, 이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하고 저 사람에게는 저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또한 진실하고 정직해야 합니다. 믿음의 비밀을 간직하고 선한 양심으로 사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또한 그러한 종들은 (장로들처럼)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하며, 자기 자녀를 잘 다스려야 합니다(3:12). 교회 사역의 실질적인 측면을 담당하는 사람들조차도 가정생활에서 좋은 증거를 보여야 합니다.

3:11에서, 바울은 교회 안의 여성 종들("여집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여성들은 영적 지도력과 남성들을 가르치는 것 외에 교회에서 다양한 봉사의 직분을 맡을 수 있습니다. 여성들과 아이들을 가르치고 여러 가지 실질적인 방법으로 도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악의적인 험담을 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악의적인 험담"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는 "디아볼로스(diabolos)"인데, 이 단어는 신약성경의 다른 34곳에서 "마귀(devil)"로 번역됩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여자들이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작은 악마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남자들도 작은 악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바울은 아마도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험담할 가능성과 기회가 더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남자들은 보통 하루 종일 밖에 나가 있는 반면, 여자들은 집에 있고, 나이가 들면 집에서 할 일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여자들을 찾아가 함께 앉아 다른 사람들을 비방할 수 있습니다. 여자 종들은 절제하고 충성되어야 합니다. 오직 그러한 여자들만이 교회에서 사역을 맡아야 합니다.

경건의 큰 비밀

3:15,16에서, 바울은 매우 중요한 주제로 나아갑니다. 바로 경건의 큰 비밀입니다. 신약성경에는 두 가지 비밀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여기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육신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에베소서 5:32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다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비밀은 하나님의 계시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진리를 가리킵니다. 창조되지 않은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람이 되실 수 있을까요?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것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분이 어떻게 우리 인간처럼 모든 일에 시험을 받으실 수 있을까요? 이는 그분이 육신으로 오셨다는 사실(히브리서 4:15)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모릅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 경건한 삶으로 인도하는 비밀이 되었습니다. 리빙 바이블(Living Bible)은 이 구절을 이렇게 의역합니다: "경건한 삶을 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답은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셔서 영적으로 흠 없고 순결함을 증명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육신으로 오셔서 이 땅에 사셨고,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지만 경건한 삶을 사신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경건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사람이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 수 있다는 살아있는 증거입니다. 즉, 하나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며, 안목의 정욕을 이기고, 화를 다스리고, 시기하거나 원망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으로 오셨고 성령으로 의롭다 하심을 인정받으셨습니다(3:16). 이는 성령께서 그분의 삶의 모든 영역을 살피시고 100% 순결하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천사들이 그분을 보았습니다. 천사들은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사람으로 이 땅에 거하시며 모든 영역에서 시험을 받으시고 승리하시는 이 위대한 신비를 지켜보았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세상 모든 민족에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이 땅에 계실 때에도 사람들은 그분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영광으로 올리워 가셨습니다. 이것이 경건의 비밀이며, 우리도 마땅히 따라야 할 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육신 안에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삶을 살피시어 우리가 순결한지 보십니다. 천사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엡 3:10). 우리의 삶은 복음이 무엇인지 열방에 선포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믿고, 우리가 신실하다면 언젠가 우리도 영광으로 들어 올려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함의 방법과는 대조적으로, 성령께서는 마지막 날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설교자들을 통해 역사하는) 속이는 영들에게 미혹되어 믿음에서 떠나, 거룩함에 이르는 다른 방식을 전파하는 설교를 듣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4:1). 이러한 새로운 교리는 "귀신의 교리"라고 불릴 것입니다. 귀신의 교리에 대해 읽을 때, 우리는 끔찍한 가르침이라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단지 결혼을 금하는 것처럼 속이는 것들일 뿐입니다. 마지막 날에, 어떤 사람들은 독신 생활이 경건에 이르는 길이라고 가르칠 것입니다. 그것은 귀신의 교리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경건한 삶에 이르는 길은 특정 음식, 즉 고기를 피하거나 금식하고 자기 훈련을 하는 것이라고 가르칠 것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귀신의 교리입니다. 겉으로는 좋게 보이지만, 사실은 모두 속임수입니다!

경건한 삶으로 가는 길은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의 성품에 참여하고 그분의 본을 따름으로써 그분의 생명(life)이 우리 육신에 나타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의 삶(life)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당신을 그와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교회가 기둥과 버팀목이 되어 지지해야 할 진리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금식해야 한다, 기도해야 한다, 성경을 읽어야 한다"와 같은 수많은 규칙과 규정을 가진 교회가 생겨날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매우 좋지만,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통해 우리 안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삶(life)을 강조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율법주의적인 바리새인들만 만들어낼 것입니다. 누군가 독신 생활을 하거나 금식하고 싶어 한다면, 그것은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경건의 비결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속는 이유는 그들의 삶에 위선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4:2). 그들은 그들 안에 거짓의 영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의 양심은 악합니다. 만약 당신의 삶에 위선이 있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당신에게 나쁜 양심이 있다면, 당신은 악마의 교리에 속기 쉬운 완벽한 후보입니다.

그런 다음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네가 믿는 자들에게 경건의 비결이 그러한 모든 자기 절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life)이 그들의 육신에 나타나는 데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면,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훌륭한 종이 될 것이다”(4:6). 당신은 예수님의 훌륭한 종이 되고 싶습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이것들을 알려준다면, 당신은 그리스도 예수의 훌륭한 종이 되어 믿음의 말씀으로 끊임없이 양육받을 것입니다. 바울은 “모든 세상적인 이야기에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 이는 늙은 여자들의 것이니라.”라고 말합니다. 늙은 여자들은 할 일이 없어서 앉아서 세상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습니다. 바울은 “이런 허튼소리에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오직 경건에 이르도록 자신을 훈련하라”(4:7)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훈련 자체를 반대하지 않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훈련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금식과 기도도 절실히 필요합니다. 하지만 육체적 훈련과 신체적 연습만으로는 누구도 경건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반면에 경건은 이 세상과 다음 세상에서도 유익합니다. 다시 말해, 경건한 삶을 살면 신체적 건강도 좋아집니다. 질투, 원망, 분노에서 자유로울 때 우리는 신체적으로 더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원망과 불안에서 자유로울 때, 우리는 위산 과다, 천식, 관절염, 편두통으로부터 구원받을 것입니다. 이러한 질병들이 항상 영적인 원인에서 비롯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요. 대부분 자연적인 원인에서 비롯됩니다. 하지만 때로는, 이러한 질병들이 개인적인 삶의 죄 때문에 올 수도 있습니다.

당신의 삶으로 본이 되십시오

디모데는 에베소 교회의 젊은이였는데, 그 교회에는 나이 든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에게 그의 젊음 때문에 누구도 그를 얕보지 못하게 하라고 말했습니다(4:12). 젊은 설교자는 교회의 나이 든 사람들, 특히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 때문에 위축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들이 디모데를 위축시키는 것을 허용하지 말고, 경건한 말과 행동, 그들을 향한 사랑, 모든 시련 속에서의 믿음, 삶과 모든 영역에서의 순결함으로 본이 되라고 촉구합니다. 이는 바울이 4:1-4에서 말한 것과 정반대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단지 가르치기만 하지만, 참 교사들은 본을 보이며 가르칩니다. 거짓 교사들은 이론을 가르치지만, 참 교사들은 그들의 삶으로 가르칩니다. 4:13은 성경을 공개적으로 낭독할 것을 강조하는데, 그 이유는 당시 신자들에게 성경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가진 사람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많은 부분을 읽어야 했습니다. 오늘날 신자들은 집에서도 많은 성경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 바울은 디모데에게 선한 삶과 성경 지식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고 일깨워 줍니다. "선한 본이 되고 성경에 유의하라"(4:12,13). 이것은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의 은사를 등한히 여기지 말며”(4:14). 바울은 디모데에게 다른 장로들과 함께 그에게 안수하여 영적 은사를 나누어 주었음을 상기시킵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도 성령의 은사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예언하기를 간절히 사모해야”(고전 14:1) 합니다. 즉, 우리의 말이 사람들의 마음에 화살처럼 꽂히도록 말하는 것입니다. 마치 구약성경의 예언자들의 말처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헛되이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사 55:11). 그렇게 사역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기름부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필요하셨고, 우리 모두에게도 항상 필요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단번에 얻어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요. 우리는 항상 기름 부음을 받기를 구해야 합니다.

젊은이 여러분: 주님을 섬기기 위해 40세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는 19살에 거듭났고, 21살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아는 것이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내가 아는 작은 지식으로, 나보다 아는 것이 적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의 "A, B, C..."를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자라면서 더 많은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이 유치원생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기 시작하기 전에 나이가 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회심하는 순간, 당신보다 아는 것이 적은 사람들, 특히 아직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기 시작하십시오.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준비를 하고, 말씀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도록 성령의 능력을 구하십시오.

4:15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런 일에 힘쓰라"고 권고합니다. 사업가는 돈을 벌고 사업을 굳건히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진지하다면, 성경을 연구하고, 성령의 은사를 구하고, 모든 더러운 것에서 삶을 깨끗하게 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이 구절의 한 번역은 "그것들에 몰두하라"입니다. 당신이 이러한 것들에 몰두하면 당신의 발전이 모든 사람에게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무언가에 "몰두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부정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한 가족이 집에서 인기 TV 프로그램을 시청하며 완전히 몰입하고 있었습니다. 가족이 그렇게 몰두해 있는 것을 알고 있던 도둑들이 조용히 집에 들어와 훔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훔쳐갔습니다! 그리고 그 가족은 TV 프로그램이 끝날 때까지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긍정적인 의미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에 깊이 몰입하여 이 세상의 유혹에 크게 끌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쫓는 많은 것들을 쫓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몰두한" 삶을 산다면, 끊임없이 발전할 것입니다. 매년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주님의 더욱 효과적인 종이 될 것입니다.

4:16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두 가지 영역, 곧 그의 삶과 그의 가르침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라고 권면합니다. 이 두 가지는 우리가 끊임없이 살펴야 할 두 가지입니다. 우리의 삶과 가르침은 모두 순수해야 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이 두 가지 영역에서 끈기 있게 노력하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먼저 자신을 구원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다른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다음을 의미합니다: 만약 당신 자신이 죄악된 습관에서 구원받지 못했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그 습관에서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당신이 삶의 수준을 넘어서는 설교를 한다면, 당신은 위선자가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에 증거해 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사업가들이 사업 운영 방식에 대해 진지하듯이,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진지해야 합니다. 그들(사업가들)은 이윤을 내는 데 온 마음을 다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끈기 있게 노력해야 하며, 하나님을 위해 살고 그분을 섬기는 데 온전히 우리 자신을 바쳐야 합니다.

몇 가지 실용적인 지침들

5:1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가 젊은 사람이기 때문에 항상 어른들에게는 공손하게 말하고, 나이 많은 여성들은 어머니처럼, 젊은 여성들은 자신의 자매처럼 모든 순결함으로 대하라고 권면합니다. 오늘날 많은 젊은 형제들은 나이 많은 형제들에게 말하는 태도가 거만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한 가지 증거입니다(레 19:32 참조). 그리고 이것이 많은 설교자들이 젊은 자매들과 죄에 빠지는 이유입니다.

5:3-16에서, 바울은 교회가 힘없는 과부들을 어떻게 돌보아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당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 때문에 죽임을 당했고, 그래서 많은 과부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60세가 넘은 과부들만 교회의 부양을 받아야 하고, 젊은 과부들은 재혼하도록 격려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이 든 과부들은 부양할 자녀나 손주가 없는 경우에만 교회의 부양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여기 매우 중요한 구절이 있는데, 믿는 자가 자기 가족을 부양하지 않으면 믿지 않는 자보다 더 나쁘다고 말합니다(5:8). 그리고 바울은 몇 가지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오직 경건한 방식으로 자녀를 양육하고, 환대를 베풀고, "성도들의 발을 씻은" 과부들만이 부양을 받아야 합니다(5:10).

이 구절(5:10)은 1세기의 신자들에게는 (오늘날 일부 신자들이 하고 있는) 서로의 발을 씻는 관습이 없었다는 것을 분명히 증명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신자들이 그것을 실천하고 있었다면, 과부를 교회에서 부양 대상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조건으로 그것을 정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행한 대로 하라”(요 13:14)고 말씀하셨을 때, 그 뜻은 그분께서 방금 제자들에게 행하신 것처럼 그들도 서로를 위해 더러운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그리고 항상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어떤 의식을 지시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5:17-22에서, 바울은 교회 장로들에 관한 몇 가지 중요한 지침을 제시합니다. 장로들은 “배나 더 존중받아야” 합니다. 이는 교회 안의 다른 신자들보다 두 배나 더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된 장로는 곡식을 밟아 빻는 소처럼, 그리고 수고하는 품꾼처럼 열심히 일할 것입니다(5:18).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에 수고하는” 이처럼 헌신적인 장로들은 두 배의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마치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과 같이, 이것이 그들에게 마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장로인 형제를 존경하지 않는 것은 일꾼의 품삯을 속이는 것과 같습니다. 장로들은 높이 평가받고 존경받아야 합니다.

동시에 바울은 죄를 지은 장로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디모데에게 조언합니다. 먼저 바울은 디모데에게 “두세 증인이 없으면 장로들에 대한 고소를 받지 말라”고 말합니다. 만일 그들이 죄를 지은 것이 증명되면, 그들은 반드시 “공개적으로 책망받아, 다른 이들이 두려워하게 해야 합니다”. 장로들은 두 배의 존경을 받지만, 죄를 지으면 교회 앞에서 공개적으로 책망받아야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장로들을 너무 성급하게 (안수하여) 세우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장로로 세우기 전에 먼저 검증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디모데는 자신이 임명한 장로들의 죄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있습니다(5:22).

5:23에서, 우리는 디모데에게도 “육체의 가시”가 있음을 봅니다. 그는 잦은 위통을 겪었습니다. 분명 바울이 그를 위해 여러 번 기도했지만, 그는 낫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에게 약으로 포도주를 조금 먹으라고 권했습니다. 이 영감받은 성경 구절은 아무리 경건한 사람이라도 모든 질병이 다 낫는 것은 아니며, 아플 때는 의사의 도움을 받고 약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6:4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에 관여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이는 모든 장로가 명심해야 할 경고입니다. 어떤 신자들은 교리적 논쟁에 끊임없이 관심을 갖습니다. 그러한 논쟁을 피하십시오.

그런 다음 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께서 그의 이 땅에서의 필요를 채워주신 것에 항상 만족하라고 권합니다. 그는 필요 이상으로 부를 추구하는 것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합니다(6:6-10). 그리스도인 사역자들이 탐욕스러워지기는 매우 쉽습니다. 돈은 좋은 하인이지만 끔찍한 주인입니다. 돈을 갈망하는 자들은 스스로를 파멸시키고 많은 문제를 겪게 될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사역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이 돈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신을 망쳐버렸습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영원한 생명을 붙잡으라"(6:12)라는 권고를 받습니다. 영생은 하나님 자신의 생명이며, 디모데처럼 온 마음을 다한 형제조차도 그 생명을 더욱 소유하도록 권면받았습니다. 이것은 점점 더 많은 돈을 붙잡으려는 것과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고백을 기억하라"(6:13)는 권고를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하신 고백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였습니다. 그리스도인 사역자는 결코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부유해져서는 안 됩니다.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은 "불확실한 재물"에 의지하지 말고, 믿는 이들 가운데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재물을 나누도록 권면받습니다(6:17).

결론적으로, 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거룩한 것을 지키라”고 권고하며, 모든 세상의 잡담과 논쟁을 피하라고 권면합니다(6:20). 주님께서 우리도 마지막까지 충실하게 살도록 도우시기를 기도합니다.

장 55
디모데후서

하나님의 참된 종과 그의 사역

이 편지는 바울이 쓴 마지막 편지입니다. 그는 자신이 곧 이 세상을 떠나 주님과 함께할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를 쓸 때 그는 “우리 살아 있는 자들은 끌어올려지리라”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그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자신도 살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12년 후, 그의 마지막 편지인 이 편지를 쓸 때 그는 “내가 떠날 시간이 가까왔도다”(딤후 4:6)라고 말합니다.

디모데후서의 주제는 “하나님의 참된 종과 그의 사역”입니다. 이는 바울이 디모데와 디도에게 보낸 마지막 세 편지의 기본 주제이기도 합니다. 바울이 세상을 떠나기 전, 그의 부담은 하나님의 백성의 선한 목자가 될 다음 세대의 지도자들을 준비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자신의 삶을 보여주었습니다. 바울은 항상 자신의 삶을 본보기로 삼았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전한 말씀을 기억하라”라고 하지 않고 “내가 너희와 함께 어떻게 살았는지 기억하라”라고 했습니다(행 20:19, 33-35). 그는 디모데에게 여기서도 같은 말을 합니다. “내 조상들처럼 깨끗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음에 하나님께 감사한다”(1:3). 바울은 완전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가 아는 한, 자신의 양심이 가르쳐 준 바에 따라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았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따뜻한 말을 건넵니다. 왜냐하면 디모데는 바울의 마음에 가장 큰 기쁨을 가져다준 동역자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많은 교회의 많은 신자들이 급진적인 제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실망했습니다. 또한 많은 동역자들이 하나님을 위해 온전히, 철저히 살지 않았기 때문에 실망했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참된 종은 누구나 같은 실망을 겪을 것입니다. 바울조차 자신이 세운 교회들로 인해 실망을 겪었다면, 우리가 더 나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까요? 나는 교회를 개척했지만, 그 교회들에서 본 많은 것들에 실망했습니다. 나는 동료들이 있는데, 그 동료들 중 몇몇에게서 본 것들에 실망했습니다. 여기저기서 디모데처럼 어떤 일에서도 자기 이익을 구하지 않는 사람을 우리는 발견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종에게 큰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바울은 다음 세대로 사역을 이어갈 수 있는 자신과 같은 몇 명의 사람들을 발견했기 때문에 큰 기쁨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의 종에게 가장 큰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은, 생을 마감할 때 주님을 향한 같은 영과 헌신으로 그의 사역을 이어갈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디모데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썼습니다. "내가 기도할 때마다 너를 생각하며 너를 보고 싶어하고, 네가 흘리던 눈물을 기억한다." 그것이 바울이 디모데를 마지막으로 본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그를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디모데의 할머니 로이스는 그 가족에서 처음으로 믿음을 갖게 된 사람이었습니다(1:5). 그의 할머니는 그의 어머니 유니게에게 믿음을 전수했고, 유니게는 디모데에게도 그 믿음을 전수했습니다. 할머니는 딸에게 성경 지식이 아닌 믿음을 전수했습니다. 그리고 그 어머니는 디모데에게 그 믿음을 전수했습니다. 즉, 디모데는 자라면서 어머니가 여러 시련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당신의 자녀들도 당신이 시련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까? 바로 그것이 당신이 자녀들에게 믿음을 전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어려운 시련을 허락하시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자녀는 한 가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 엄마는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기도하고 하나님을 신뢰해요. 내가 아플 때 아빠는 내 머리에 손을 얹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 주셨어요." 그 어린아이가 자라서 어느 날 집을 떠나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아빠와 엄마가 했던 것처럼 할 것입니다. 자녀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자녀들에게 믿음을 전해야 하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필수적입니다. 그렇게 하면 아이들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믿음도 전해야 합니다. 유니게는 이 어린 아들이 자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도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스무 살쯤 되었을 때 그를 자신의 동역자로 선택했습니다. 그 어머니는 가정에서 교회를 위해 얼마나 큰 일을 했습니까! 여러분도 자녀들이 어린 시절부터 주님을 신뢰하도록 양육함으로써 그와 같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의 아버지는 그리스인이었습니다(행 16:3). 유니게는 경건한 유대인 어머니의 딸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니게는 율법을 어기고 이방인과 결혼했기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을 것입니다. 후에 그녀는 회개했을 것입니다. 그녀의 남편은 아마도 부유한 사업가였을 것이며, 하나님께 시간을 바칠 생각도 없고 아들을 경건하게 키우는 데에도 관심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니게는 디모데를 홀로 키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유니게는 그를 경건하게 키워서 1세기 최고의 사도 중 한 명이 되게 했습니다. 오늘날 회심하지 않은 남편을 둔 어머니들에게 유니게는 얼마나 훌륭한 본보기입니까! 누가 알겠습니까? 당신의 네 살배기 아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언젠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친애하는 어머니, 당신이 아이를 어떻게 양육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아이의 작은 마음에 전달하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달려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험담하고 집에서 불평하고 투덜거리는 것을 그 아이가 듣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것은 그 아이를 망하게 할 것입니다.

나는 집에서 매우 조심했습니다. 나의 아이들이 내가 다른 신자들을 험담하는 것을 듣지 않도록, 그들이 그 질병에 감염되지 않도록 말입니다. 내가 내 아이들이 결핵이나 나병에 걸리지 않기를 바랐듯이, 나는 내 아이들이 다른 신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에 감염되는 것도 원치 않았습니다. 만약 자녀들이 우리가 집에서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볼 때 자녀들에게 믿음을 전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선물을 주는 셈이 될 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믿는 가정에서 자란 2세대 그리스도인들보다 1세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에 대한 믿음과 헌신이 더 강하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디모데는 예외였습니다. 그는 주님께 헌신한 3세대 신자였습니다. 그러므로 2세대와 3세대 신자들도 부모 세대보다 주님께 더 헌신할 수 있습니다.

계속 불을 타오르게 하라

하지만 디모데에게는 믿음 이상의 것이 있었습니다. 그는 또한 영적인 은사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바울은 그에게 이 점을 상기시켜 줍니다. "내가 네게 안수할 때 네가 받은 영적인 은사를 다시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성령은 소심한 영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에게 그 은사를 일깨워 다시 불붙이도록, 그리고 그 불이 계속 타오르도록 권고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지만(마 3:11), 우리는 여전히 그 불이 항상 타오르도록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을 배웁니다. 하나님은 불을 붙이십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연료를 공급해야 합니다 - 항상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굴복하는 삶이 바로 그 연료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번 기름 부으셨다고 해서 이제 안심하고 "한 번 기름 부음 받은 자는 영원히 기름 부음 받은 자다"라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라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큰 오류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진정으로 기름 부음받았지만 1년 후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불은 사라졌습니다. 세상적인 관심사와 교만이 들어와 그 불을 꺼버렸습니다. 그들은 이제 돈과 안락한 삶을 좇으며 하나님의 불을 잃어버렸습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에 있어 매우 슬프고 큰 손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게 임한 그 불을 계속 새롭게 하고, 계속 타오르게 하라. 이제 네게 달려 있다. 계속 타오르게 하지 않으면 꺼질 것이다. 선한 양심을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고,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돈을 사랑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의 다툼을 피하고, 이 불을 끌 수 있는 모든 것을 피함으로써 계속 타오르게 하라.”

바울은 이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소심한 영이 아니요”(1:7)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본래 불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와 디모데는 소심했습니다. 하나님은 불같은 사람과 소심한 사람을 사역에 함께 두시는 것은 서로 균형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떤 교회에서든 리더십에 이상적인 조합입니다.

만약 지도자들이 모두 디모데와 같다면, 교회는 우유부단한 타협자들로 가득 찰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지도자들이 모두 바울과 같다면, 교회에 남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낙담하여 떠났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두 유형의 사람이 리더십에 함께할 때, 은혜와 진리의 균형이 이루어집니다! 만약 당신의 기질과 은사가 당신과 정반대인 동료가 있다면, 그 동료는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완벽한 선택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과 기질이 정반대인 아내를 주신다면, 그 배우자도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완벽한 선택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대한 동일한 헌신과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동일한 열정을 가지고 있지만, 기질은 정반대일 수 있습니다.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께 대한 동일한 헌신을 가졌지만, 그들의 기질은 서로 정반대였습니다.

내 삶에서 하나님께서 나와는 기질과 은사가 정반대이지만 그리스도께 헌신된 동료들을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마치 왼손과 오른손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균형을 맞추기 위해 어떤 유형의 동료가 필요한지 아셨고, 정확히 그런 동료를 주셨습니다. 나는 그들을 매우 소중히 여기고 귀하게 여깁니다. 그들이 없었다면 나는 결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동역자로 선택하신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타고난 소심함이 당신의 삶을 지배하지 않도록 하라"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타고난 엄격함이 당신의 삶을 지배하지 않도록 하라"라고 말해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으니"(1:7)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은 우리에게 능력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시고, 스스로를 절제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당신이 성령을 어떤 방식으로 경험했든, 성령께서 당신을 훈련시키도록 허락하지 않는다면, 즉 당신의 시간과 돈을 절제 있게 사용하도록, 그리고 당신의 말을 절제하도록 훈련시키는 일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결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은 성령께서 자신의 삶을 훈련하도록 허락한 남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수면 습관, 식습관, 기도, 성경 공부에서 절제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세상적인 욕망보다 하나님을 첫째로 두도록 절제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성령 세례를 받은 것에 만족하며, 그 이후로는 삶의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당신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면 당신도 훈련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지키십시오

바울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갇혔다고 해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1:8). 많은 신자들이 사도 바울이 교회를 세우고 기적을 행할 때 그와 함께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이제 죄수가 되자, 사람들은 그와 관계를 맺는 것을 꺼리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수치스럽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인기 있는 설교자와 교제합니다. 하지만 그가 인기를 잃거나 배척당하는 순간, 그들은 바로 떠납니다. 그러나 바울과 끝까지 함께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그분께서 그분의 교회를 세우는 데 사용하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인기 없는 모습을 통해 시험을 받고 신실함을 보였습니다. 하나님은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인기 없는 그분의 종과 우리가 함께할지 시험하실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당신이 자신의 것을 추구하는지, 아니면 당신이 그분께 진실한지 알아보실 것입니다.

그리고 1:12에서, 바울은 “내가 믿는 분을 내가 알고 있으며, 또 내가 그분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분께서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하노라”(1:12)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주님께서 자신을 끝까지 지켜 주실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온 마음을 다한 바울은 그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반쪽짜리(전심이 아닌) 그리스도인이 그 구절을 인용한다면, 그는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절대로 기준을 낮추지 말라”는 것이 바울이 디모데에게 한 다음 권고입니다(1:13). 오늘날 모든 기독교 설교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권고가 얼마나 절실히 필요한지 모릅니다: "더 많은 사람을 교회에 데려오기 위해 성경에 나오는 기준을 낮추지 마십시오. 더 적은 수의 사람들이더라도 더 높은 기준을 가지고 있다면, 낮은 기준을 가진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있는 것보다 주님의 눈에는 더 나은 교회입니다.

 300명의 타협하는 사람이 있는 교회보다 3명의 제자가 있는 교회가 더 낫습니다. 온 마음을 다하는 3명의 제자가 300명의 타협하는 신자보다 온 마을에 그리스도를 전하는 데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참된 하나님의 종이 다음 세대를 위해 져야 할 짐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우리는 어떤 운동의 2세대가 창립자들과 같은 비전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기준을 낮추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거대한 교파 교회들을 창립자들의 시대와 비교해 보십시오. 만약 그 교파들의 창립자들이 오늘날 이 땅에 온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세운 교파에 가입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교파는 창립자들이 내세우고 선포했던 기준을 낮췄기 때문입니다. 교리의 외적인 형태는 여전히 존재할지 모르지만, 그 능력과 기름부음은 사라졌습니다. 생명은 사라졌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통해 이 기준을 지켜야 합니다. 이 기준은 신성한 보물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당신의 회사가 방갈로르에서 델리까지 기차로 가져갈 현금 500만 루피를 준다면, 당신은 그것을 매우 조심스럽게 지키고,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300만 루피가 아니라 500만 루피가 당신과 함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기준을 지켜야 하는 방식입니다. 성령의 지혜와 능력 없이는 결코 이것을 할 수 없습니다(1:14).

바울은 디모데에게 소아시아의 많은 신자들이 “그에게서 떠났다”(1:15)고 말합니다. 바울은 말년에 예수님께서도 겪으셨던 일을 경험했습니다. 바로 신자들이 그를 떠나 그와의 교제를 끊는 것이었습니다. 그 신자들은 바울이 감옥에 갇혔기 때문에 그와 어울리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인들과 마찰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습니다. 그를 떠난 부겔로와 허모게네는 한때 바울의 동역자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네시보로는 남아서 바울의 쇠사슬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1:16). 에베소에서 바울을 섬겼던 그는 이제 로마에서도 감옥에 있는 바울을 만나 함께 교제했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종들과 함께하는 충성스러운 형제들을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바울은 “오네시보로가 로마에 있을 때, 나를 간절히 찾아 만났음이라. 주께서 그에게 마지막 날에 주의 긍휼을 얻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18)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제자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준다면, 당신은 상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종의 특징

바울은 2장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종의 특징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첫째, 진정한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 말씀을 충실하게 가르치는 교사여야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내게서 들은 것을 충성된 사람들에게 맡겨라. 그러면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것이다”(2:2)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을 4대까지 전해야 한다는 바울의 부담을 볼 수 있습니다. (2대째 제자인) 디모데는 3대째에서 충성된 사람들(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충성된 사람들)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4대째에서도 충성된 사람들을 찾아낼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똑똑하거나 부유한 사람을 찾으신 적이 없고, 오직 충성된 사람만을 찾으셨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종은 세상 일에 얽매이지 않고 그것과 분리된 군인이어야 합니다(2:3,4). 그는 세상에 살지만 항상 자신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음을 인식합니다. 훌륭한 군인은 적과 싸우고 조국을 위한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집중합니다. 다른 일들은 그의 생각속에서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참된 하나님의 종 또한 사탄의 영역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를 자리 잡는 데 마음을 둘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그는 세상적인 것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만일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구하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1,2).

주님을 섬기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위의 것을 주로 생각하고 마귀와 싸워 주님을 위해 승리하기로 결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든 세상적인 필요를 채워주실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독신일 때 훌륭한 군인이 됩니다. 하지만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면 세상적인 것들에 생각을 빼앗겨 주님을 향한 사랑이 식어버립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 안에서 결혼했다면 그리스도를 향한 헌신이 더욱 커질 것입니다. 나는 결혼 전부터 전임 기독교 사역자였습니다. 아내와 나는 네 아들을 키웠고, 모두 자라서 지금은 결혼했습니다. 나는 그들을 돌보고 부양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도 내 가족이 주님보다 더 소중해진 적은 없었습니다. 내 삶에서 하나님을 첫째 자리에 두었기에, 아내와 아이들은 어떤 면에서도 손해를 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영적으로나 물질적으로 고통받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그분을 신실하게 섬기는데, 그분이 당신의 가족을 실망시키실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훌륭한 군인이 되어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가족에게 필요한 모든 지상의 것들을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그분을 위해 산다면 그분은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으실 것입니다. 다른 수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지난 2000년 동안 고백해 온 것에 나도 내 증언을 더할 뿐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공경하면, 그분도 당신을 공경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변 세상이 당신을 그들만의 틀에 억지로 끼워 넣지 못하게 하라."(롬 12:2 - J.B. 필립스).

바울이 여기서 사용하는 세 번째 그림은 운동선수의 모습입니다(2:5). 참된 하나님의 종은 규칙에 따라 달리는 운동선수와 같아야 합니다. 즉, 속이지 않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 규칙을 어기지 않습니다. 올림픽 50km 경보를 생각해 보세요. 선수들은 경기 내내 한 걸음도 뛰지 않고 걸어야 합니다. 하지만 50킬로미터는 긴 거리이고, 사람들이 보지 않는 도중에 어딘가에서 조금이라도 뛰고 싶은 유혹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곳곳에 숨겨진 비디오 카메라가 선수들을 감시하고 있습니다. 만약 선수가 속여서 1등으로 들어오면 실격 처리되고 메달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삶에는 어떤 속임수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사역의 결과를 거짓으로 보고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사역에서는 결코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거짓말을 해야 하는 일은 오직 마귀의 일에서만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정직해야 합니다. 재정 관리에서 어떤 속임수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진실을 말하다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받는 것이 거짓말을 해서 하나님께 언젠가 고난을 받는 것보다 낫습니다.

넷째, 우리는 부지런한 농부와 같아야 합니다(2:6). 농부는 씨앗을 뿌리고 다음 날 아침에 와서 곡식이 익었는지 확인하지 않습니다. 기다립니다. 수확이 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결국 수확하게 됩니다. 그러는 동안 농부는 씨앗에 물을 주고 거름을 줍니다. 농부는 부지런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풍성한 수확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사람들을 섬기는 일에 부지런한 농부와 같아야 합니다. 부지런히 일하면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자신이 섬겼던 사람들이 성숙해지고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을 보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내가 지난 몇 년 동안 누렸던 엄청난 기쁨입니다. 젊은이들이 하나님의 충실한 종으로 자라나는 것을 보는 기쁨 말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비유들을 진지하게 묵상하고 그 빛 안에서 우리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어서 바울은 “다윗의 씨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너에게 범사에 총명을 주시리라”(2:7,8)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예수님께서 육신(다윗의 씨)으로 오셔서 죄와 죽음과 사탄을 정복하셨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줍니다. 이는 그분이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사실로 증명됩니다. 이렇게 하여 그분은 우리도 이러한 원수들을 정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디모데가 주님께로부터 깨달음을 받아야 했던 것이며, 우리 또한 깨달아야 할 부분입니다.

다섯째, 주님의 종은 부지런한 일꾼이어야 합니다(2:15).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연구하고 진리를 정확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는 사람으로 드릴 수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당신을 사용하여 그분의 말씀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성경을 강력하게 설명하는 것을 볼 때마다, 그것은 단지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연구했기 때문임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게으른 자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아이들이 시험 기간에 와서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면, 나는 그들에게 "시험 공부 열심히 했어요?"라고 묻습니다. 만약 아이들이 공부하지 않았다면, 내 기도는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파종기에 씨를 정성껏 뿌리지 않고 부지런히 물을 주지 않는 농부는 풍성한 수확을 위해 기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용하시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공부해야 합니다.

2:11-13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분과 함께 살 것이요; 우리가 참으면 또한 그분과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그분을 부인하면 그분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요; 우리는 신실하지 못할지라도 그분은 언제나 신실하십니다. 그분은 자기를 부인할 수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이 땅에서의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나타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매일 자신을 죽여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왕 노릇 하고 싶다면, 지금 이 땅에서 그분과 함께 참아야 합니다. 반면에, 우리가 삶의 방식으로 그분을 부인한다면, 마지막 날에 그분께서 우리를 부인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2:14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런 일들을 사람들에게 일깨워 주고, 말로 다투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령하십시오.”라고 경고합니다. 성경에서 논쟁과 다툼을 피하라고 가장 많이 경고하는 두 책은 디모데전서와 디모데후서입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기독교 설교자들이 이 명령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설교자들이 어떤 교리에 대해 나와 논쟁하러 올 때, 내가 가장 먼저 살피려 하는 것은 그가 경건한 삶을 살고 싶어서 진심으로 진리를 알고 싶어 하는지, 아니면 내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논쟁하려는 것인지입니다. 그가 진정으로 경건한 삶을 살고 싶어 한다고 느껴지면, 나는 기꺼이 그에게 몇 시간이고 성경을 설명해 줍니다. 하지만 그가 단지 나와 논쟁하는 데만 관심이 있다고 느껴지면, 나는 즉시 토론을 중단하고 더 즐거운 주제로 전환합니다. 그래야 논쟁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2:16에서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헛된 세상 잡담을 피하라. 그것이 경건치 아니함에 이르게 함이니라." 모든 세상 잡담과 험담은 반드시 경건치 아니함으로 이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당신의 말은 마치 괴저와 같을 수 있습니다(2:17). 당뇨병 환자의 발에 작은 상처가 생기면, 때로는 아물지 않고 괴저가 시작되어 결국 발을 잘라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영적인 괴저는 끔찍한 것입니다. 논쟁과 세상 잡담은 당신의 삶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도 파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전염병처럼 피하십시오. 후메내오와 빌레도는 그런 세상 잡담과 논쟁에 빠져 결국 진리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간 두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마지막 부활이 이미 일어났다고 가르치며 많은 사람들의 믿음을 어지럽히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어서 하나님의 견고한 기초(터)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터는 두 면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님만 보실 수 있는 윗면과 우리가 볼 수 있는 아랫면입니다. 이것은 기독교계에서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사이에 흔히 있는 논쟁, 즉 구원받은 사람이 구원을 잃을 수 있는지에 대한 논쟁을 해결해 줍니다. 진리는 무엇일까요? 누군가 말했듯이, "진리는 한쪽 극단이나 다른 쪽 극단에서 발견될 수 없습니다. 하물며 중간에서 발견될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진리는 양 극단이 함께 어우러진 곳에서 발견됩니다."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며 우리를 선택하십니다. 동시에 우리는 그분을 부지런히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분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나를 붙잡고 계십니다. 하지만 나도 그분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분은 결코 나를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지만 나도 그분을 결코 버려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자유 의지를 빼앗지 않으십니다. 만약 그렇게 하신다면, 우리는 로봇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초(터) 위에서 보면, 하나님은 누가 그분의 자녀인지 아십니다. 우리가 생명책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누가 하나님의 자녀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기초의 아래쪽에서 바라보는데, 거기서 무엇을 볼 수 있을까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죄에서 떠나라"(2:19)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죄에서 떠나면 영원히 안전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기초(터) 안에서, 곧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에서 두 가지 진리를 봅니다. 주님은 자신에게 속한 자들을 아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죄에서 떠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붙잡아 주시니, 우리는 그분을 꼭 붙잡아야 합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종의 여섯 번째 특징은 거룩한 그릇, 곧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그릇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2:20,21). 신약성경에는 두 가지 정결에 대해 언급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정결입니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일 1:7,9).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의 죄책감에서 깨끗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만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정결은 우리 스스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사람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 2:21). 이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과거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시고, 우리는 삶에서 보는 잘못된 것들에서 스스로를 깨끗이 씻습니다.

어쩌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농담을 하는 습관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절대 하지 않으실 일입니다. 하나님께 그것을 깨끗이 씻어 달라고 기도하지 마십시오. "주님, 나는 내 자신을 깨끗이 하려 합니다. 주님의 도움으로 이 나쁜 습관을 버리려 합니다."라고 말하십시오. 아니면, 다른 사람의 일에 참견하는 호기심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도록 자신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이렇게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 거룩하고 주님께 쓰임 받는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수년 동안 내 인생의 열정은, 내가 이 세상에서의 삶 동안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행하실 수 있는 모든 선한 일을 위해 내가 하나님께 유용한 그릇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기껏해야 80년이나 90년을 살지도 모릅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해가 하나님께 가치 있게 쓰여야 합니다. 그런 삶을 살고 싶다면 매일 자신을 깨끗이 하십시오. 주님께 쓸모없는 것들을 보여 달라고 간구하고, 그것들을 깨끗이 치우십시오. 당신의 삶이 끊임없이 깨끗해지는 삶이 되게 하십시오. 이 일에 진지하게 임한다면, 당신은 주인께 유용한 그릇이 될 것입니다. 교회에는 쓸모없는 그릇들이 많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집안의 여러 그릇들에 비유합니다. "부유한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이 있고,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습니다. 값진 그릇은 손님을 위해 쓰고, 값싼 그릇은 부엌에서나 쓰레기를 담는 데 사용합니다. 만일 당신이 죄에서 떠나 있다면, 당신은 이 집에서 가장 좋은 순금 그릇과 같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그분의 가장 귀한 목적에 쓰시게 될 것입니다"(2:20,21 – Living).

하지만 유용성만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알고 기뻐합니다. 집에서는, 금 그릇보다 나무 상자를 더 많이 사용합니다. 하지만 어떤 그릇이 더 귀할까요? 당신은 쓰임받는 것에 대해 마음을 두고 있습니까? 아니면 당신의 영적 가치에 더 마음을 두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사역에서 당신의 영적 가치를 당신의 유용성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을, 심지어 마귀까지도 사용하여 그분의 일을 하십니다. 마귀는 한때 사자로서 바울의 육신에 가시를 보냈고, 하나님은 그것을 사용하여 바울을 겸손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발람을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을 사용하여 성경도 쓰게 하셨지만; 그는 그 후 지옥에 갔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결코 영광으로 여기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기적을 행한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날에 버림받을 것입니다(마 7:22,23). 그러므로 하나님께 쓰임받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본질적인 가치는 무엇입니까? 당신은 금그릇입니까?

집에 불이 나면 사람들은 질그릇이 아니라 금그릇과 은그릇을 꺼내려고 달려듭니다. 세상이 불타오를 때에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 날에 내가 나의 보석을 모을 때,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때에 너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의 차이를 보리라”(말 3:17,18 – Living). 지금 당신이 값싼 질그릇에 불과하다면, 당신의 삶에서 그리스도와 같지 않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에서 자신을 깨끗이 씻어 금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을 깨끗이 하기로 결심했다면, 가장 먼저 피해야 할 것 중 하나는 청년 시절의 정욕입니다(2:22). 당시 45세쯤 된 디모데와 같은 사람도 청년 시절의 정욕에서 도망쳐야 했습니다. 바울은 이 온 마음을 다한 형제 디모데에게 이 영역에서 죄를 짓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유혹에서 도망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 영역에서 유혹을 받기에 너무 늙었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45세라고 해서 유혹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러한 죄가 당신을 끌어내려 당신의 사역을 망가뜨리게 하지 마십시오.

“순수한 마음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를 좇으라”(2:22). 다시 말해, 우리는 주로 순수함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교제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의 가장 좋은 친구는 온 마음을 다해 순결함을 갈망하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많은 신자들은 낮은 기준을 가지고 있고 경건함에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하는 자들과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순결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사람들이 마음에 가득 찬 것을 말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2:34). 우리는 사람이 즐겨 말하는 것으로 그의 마음이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그가 항상 돈과 물질적인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그의 마음이 돈 생각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이 주로 주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면, 그의 마음이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예수님처럼 되기를 갈망하는 사람들과 교제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할 때, 우리는 그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것이 주님을 위해 효과적으로 섬기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의 종의 일곱 번째 특징은 온유한 조언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2:24-26). 그는 사람들에게 말할 때 온유해야 하며, 논쟁적이거나 다투는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됩니다. 다투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없습니다. 또한 모든 어리석은 논쟁을 거부해야 합니다(2:23). 우리가 온유하고 예의 바르게 말한다면, 사람들이 죄에서 벗어나 사탄의 손아귀에서 건짐받도록 도울 가능성이 더 높아집니다(2:24-26).

마지막 권면

바울은 3장에서 마지막 날에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기가 얼마나 어려울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할 것”(3:2)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세상 사람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항상 자기를 사랑해 왔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은 스스로를 믿는 자라고 자칭하는 사람들, 곧 “경건의 모양은 지키려”(3:5) 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교리를 가리킵니다. 마지막 날에, 올바른 교리를 가진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돈을 사랑하고 자랑하고 교만할 것입니다(3:2-5). 교리는 우리 몸의 지체와 같습니다. 사람의 몸은 모든 지체를 가지고 있어도 죽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모든 교리를 바르게 가지고 있어도 능력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 능력이 없습니다. 모든 교리가 옳다는 사실을 자랑하면서도 자신을 위해 살고 돈을 사랑한다면, 당신은 죽은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만 있는 자들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교만과 배은망덕과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함과 악한 험담과 비방과 사나움과 배신과 자만심과 쾌락과 안일을 사랑하기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함이니라.” 이러한 특성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올바른 교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착각합니다(3:2-5).

오늘날 세상에는 올바른 종교적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자신과 세상과 돈을 위해 사는 삶에서 결코 건짐받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런 사람들을 피하라고 말합니다. 왜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피해야 합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그들에게 감염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그러한 설교자들은 그들을 존경하고 마음을 사로잡는 나약한 여성들의 집으로 들어갑니다. 그들은 여성들만 있는 집을 방문하다가 종종 그들과 함께 죄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런 여성들은 많은 집회에 참석하고 많은 설교자들의 말을 계속 듣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진리를 깨닫지 못합니다(3:6,7). 설교자라면 이런 습관을 조심하십시오. 여성스러운(나약한) 설교자가 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사람이 되십시오. 하지만 모든 여성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는 훌륭하고 경건한 자매들이 많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어서 모세를 대적했던 파라오의 마술사들인 얀네와 얌브레의 예를 인용합니다(3:8). 오늘날에도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하나님의 참된 종들을 대적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고 그들의 어리석음이 모든 사람에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한 설교자들과 대조적으로,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보았느니라. 너는 나의 행실과 나의 삶의 목적과 나의 믿음과 나의 오래 참음과 나의 사랑과 나의 끈기와 내가 받은 모든 박해를 보았느니라"(3:10,11). 바울은 여기서 자랑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다른 신자들에게 도전을 주기 위해 우리의 간증을 나눠야 합니다. 바울은 다른 설교자들, 즉 비뚤어졌지만 스스로를 하나님의 종이라고 주장하는 자들과 대조하기 위해 디모데에게 자신의 삶의 방식을 상기시켜야 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모두 핍박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3:12). 그러나 악한 자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해져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 자신도 속게 될 것입니다. 디모데는 그런 자들을 피하고 어린 시절에 배운 것을 따르라는 경고를 받습니다(3:13,14).

그런 다음 바울은 디모데에게 우리를 완전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친히 불어넣어 주신” 성경 연구에 전념하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영감을 불어넣으신 바로 그 성령께서 지금도 그 말씀을 사용하여 우리를 가르치고, 책망하고, 바로잡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모든 선한 일을 행할 준비를 갖추게 하십니다(3:16,17).

바울은 디모데에게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말씀을 전파하라. 기분이 좋을 때나 그렇지 않을 때, 편할 때나 편하지 않을 때에도 항상 말씀을 전할 준비를 하라”(4:1,2).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설교할 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들을 위로할 뿐만 아니라, 큰 인내심을 가지고 책망하고 꾸짖고 권면하고 가르쳐야 합니다(4:2). 이는 사람들이 “건전한 교리”, 즉 경건한 삶으로 이끄는 위생적인 교리를 들으려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신 사람들은 자기 귀를 즐겁게 해 주는 설교자들을 원할 것입니다. 설교자들은 (심리학에서 배운 기법들을 사용한 “근거 없는 통념들”로)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결국은 그들에게서 돈을 뜯어 내기를 원할 것입니다(4:3).

오늘날 기독교 서점에 가서 팔리는 책들을 훑어본다 해도, 진정으로 경건한 삶으로 인도하는 책은 단 한 권도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곳에서 팔리는 책들은 대부분 쓸모없는 쓰레기입니다. 사람들의 경험(실제 경험이든 상상이든)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것들은 당신을 즐겁게 해줄 뿐 경건함으로 인도하지는 않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한 삶에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고난을 견디고 전도자의 일을 하며 제자를 삼으라고 권면합니다(이것이 진정한 "전도"입니다 - 마 28:19). 그리고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그런 다음 바울은 자신의 지상 생활이 끝났음을 안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그는 온 마음을 다해 마귀와 육신의 정욕에 맞서 싸웠고, 믿음을 변질되지 않고 타협 없이 지켰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정하신 길을 완수한 것에 감사했습니다. 그는 지상 사역을 마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곳을 찾아다녔습니다. 때로는 걸어서, 때로는 난파선을 헤쳐 나가기도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의의 면류관을 예비해 두셨는데, 이는 바울뿐만 아니라 그분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4:8). 그러나 바울은 동역자들에게서도 실망을 겪었습니다. 데마는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처럼 세상의 영광, 아마도 돈을 추구하며 바울을 버렸습니다(4:10).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는 바울에게 많은 해를 끼쳤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어떤 복수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갚아주시도록 맡겼습니다(4:14). 바울이 법정에 끌려갔을 때 모두가 그를 버렸지만, 주님은 그의 편에 서서 그를 구원하셨습니다(4:17). 바울은 주님께서 자신을 순교에서 구원해 주시기를 바라지 않고, 오직 “모든 악한 행위”에서 구원해 주시기를 바랐습니다(4:18).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은 그에게 하늘 나라에 영광스럽게 들어가게 하실 것입니다. 삶을 마감하는 참으로 놀라운 방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선한 싸움을 싸우며 달려갈 길을 마친 경건한 종의 본보기를 보여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그의 발자취를 따라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장 56
디도서

장로들 - 그리고 그들이 가르쳐야 할 것 바울이 디도에게 보낸 편지의 주제는 다시 한번 교회와 그 장로들입니다. 이 세 편지, 즉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그리고 디도서는 교회와 교회의 그 지도력을 다룹니다. 바울이 가장 먼저 추구한 것은 교회 안에 질서를 확립하는 것이었습니다. 1장에서, 바울은 교회를 이끌고 반역하는 사람들을 침묵시킬 수 있는 경건한 장로들을 임명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2장에서는 건전한 교리에 대해, 그리고 3장에서는 선한 일을 행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다름에도 불구하고 함께 일하는 것 디도와 같은 바울의 가까운 동역자들 중에는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바울 자신도 매우 강한 유대인이었고,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끊임없는 여행 동반자는 누가라는 그리스인 의사였는데, 그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했습니다. 그가 가장 가까이서 함께 일했던 또 다른 사람은 디모데였습니다. 그는 반 그리스인이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그리스인이었습니다. 디도 역시 그리스인이었습니다. 서로 다른 공동체 출신의 네 사람, 바울, 디도, 디모데, 누가가 함께 일한 것은 서로 다른 국적의 사람들이 하나로 일할 수 있는 새 언약 복음의 살아있는 증거였습니다. 만약 당신이 자신의 문화와 국적을 가진 사람들과만 일할 수 있다면, 당신의 기독교 신앙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말라얄람 사람인데 말라얄람 사람들과만 일할 수 있다면, 당신은 복음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복음은 바울이 서로 다른 언어와 국적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일하게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라면 어떤 국적이나 기질을 가진 사람들과도 기꺼이 함께 일해야 합니다 - 중국인이든 아프리카인이든 러시아인이든 남미인이든 북미인이든, 내향적이든 외향적이든. 기질과 국적은 모두 다를 수 있지만, 그들은 친밀한 동역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과 같은 국적과 기질을 가진 사람들과만 편안하게 지내게 하는 종파적이고 공동체적이며 편협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모든 사람과 함께 일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특정 국적과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몇 가지 독특한 특징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리스도께 나아오면 그러한 특징들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디도가 크레타에 있을 때, 크레타의 한 종교 설교자가 "크레타 사람들은 거짓말쟁이요 짐승과 같이 악하며 게으르고 탐식합니다"(1:12)라고 말했다고 디도에게 말했습니다. 그 말이 사실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크레타 사람이 그리스도께 나아와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그는 거짓말쟁이나 악한 사람이 되지 않을 것이며, 짐승처럼 행동하지도 않을 것이며, 게으르지도 않고 탐식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국적이나 공동체에 따라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공동체 때문에 어떤 그리스도인에 대해 편견을 갖는다면, 우리는 영적으로 가난한 상태로 남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국적과 공동체의 사람들, 즉 중국인, 아프리카인, 다양한 인종의 인도인, 유럽인, 미국인 등과의 교제를 통해 나를 영적으로 엄청나게 부유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나는 경건함이 특정 민족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모든 공동체와 민족의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항상 마음을 열어 두었습니다. 나는 부유한 나라 사람들이 매우 거만하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나라의 참된 신자들은 겸손합니다. 그러므로 크레타 사람들은 거짓말쟁이일지 몰라도, 크레타의 그리스도인들은 거짓말쟁이가 아닙니다. 일부 공동체 사람들은 가족에 대한 가치가 매우 낮습니다. 하지만 그 공동체의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과 같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공동체의 기준으로 그리스도인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다른 국적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동역자들을 갖는 것에 대해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당신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하기를 꺼린다면, 당신은 당신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온전한 목적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동료가 누구여야 하는지 보여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당신이 다른 국적이나 인도의 다른 지역 출신의 사람과 함께 일하기를 원하실 수도 있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하나님의 계획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아무런 차별 없이 함께 일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있는 잘못된 태도들을 많이 깨뜨려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과만 일하기를 선호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동역자를 선택하고 주님께서 우리를 그들에게 인도하셨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를 인도한 것은 우리 자신의 육욕적인 선호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선택한 이유는 그들이 우리와 같은 지적 수준, 같은 공동체, 같은 기질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유형의 결합은 결혼에 적합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위해 일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동역자로 선택하신 모든 사람에게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경건 바울은 서신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의 믿음과 경건에 따르는 진리를 아는 지식을 위해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이 자리에서 말하고 있습니다."(1:1). 바울이 생애의 마지막을 향해 나아갈 때, 그의 서신들이 삶의 경건함을 매우 강조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바울의 마지막 세 서신,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서신들에서 그는 방언에 대해 얼마나 많이 언급했습니까?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육체적 치유에 대해서는요? 없습니다. 아니면 재정적 번영에 대해서는요? 없습니다. 요한이 생애 말년에 쓴 첫 번째 서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요한은 방언, 육체적 치유, 혹은 재정적 번영에 대해 얼마나 많이 언급했습니까?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도들은 생애 말년에 이르러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강조하는 다른 부차적인 문제들이 아닌,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들을 강조했습니다. 요한은 서신에서 무엇을 언급했습니까? 순종입니다. 바울은 마지막 세 서신에서 무엇을 언급했습니까? "경건"입니다(11회) – "경건의 비밀"(딤전 3:16), "경건의 능력"(딤후 3:5), "경건에 따른 진리"(딛 1:1). 반면 바울은 그의 초기 서신들에서는 "경건"이라는 단어를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성숙한 사도로서 생애 말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전에도 여러 가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주님의 재림, 방언, 병 고침, 기적 등등 말입니다. 하지만 생애 말년에 이르러서는 경건을 다른 모든 것보다 우선하고 기초로 삼아야 할 절실한 필요성을 느낍니다." 우리는 사역에서도 경건을 강조할 때 성숙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경건이 없다면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울 수 없습니다. 설령 우리가 모든 성령의 은사와 재정적 풍요를 누리고 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은사를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모든 은사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주된 강조점은 삶의 경건에 있어야 합니다. 내가 귀 기울이는 사람은 바울과 요한이 생애 말년에 보았던 경건의 중요성을 깨달은 성숙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설교자들이 여러 가지를 설교하는 것을 들을 때, 그들을 사도들과 비교해 보십시오. 그러면 누가 진정으로 성숙한 사람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장로의 자격 바울은 디도에게, 그를 크레타에 남겨둔 것은 “잘못된 일을 바로잡고 각 성에 장로들을 임명하기 위함”이었다고 말합니다(1:5). 바울은 또한 생애 말년에 모든 교회에는 지도자로서 장로가 있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 염려했습니다. 성령께서는 항상 모든 교회에 한 명 이상의 장로를 세우려 하셨지, 결코 한 명의 목사를 세우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은 디도에게 모든 교회에 목사를 세우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교회 지도력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각 교회를 인도하는 장로가 최소 두 명 있어야 합니다. 한 사람의 지도력은 교회의 균형을 깨뜨립니다. 옛 언약 아래에서는, 항상 한 사람, 즉 대제사장, 왕, 선지자가 지도력을 행사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자마자,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보내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몸의 사역(Body ministry)'의 시작이었고, 이는 오순절 이후 새 언약의 특징 중 하나가 될 것이었습니다. 교회의 장로는 그 교회에서 가장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어야 하며, 반드시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이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젊고 미성숙한 사람들이 성경학교에서 학위를 받고 교회의 목사가 됩니다. 교회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보다 훨씬 더 성숙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 하나의 조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하나님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은 장로입니다. 성숙함은 설교 능력이나 은사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15살 소년도 전도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숙함은 오랜 세월에 걸친 신실함을 통해 옵니다. 장로의 자격은 1:6-9에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디모데전서에서도 이러한 자질들을 볼 수 있습니다. 장로는 이웃에게 좋은 증거를 가져야 합니다. 그는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합니다. 그의 자녀들(집에 있는 자녀들)은 주님을 사랑하고 방탕하거나 불순종하지 않아야 합니다. 자기 자녀를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신약성경에서는 교회 지도자의 자격으로 남자가 자녀를 양육하는 방식에 큰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믿는 이의 자녀는 그가 가정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어떤 믿는 이의 자녀는 늘 잘못을 저지르는 반면, 다른 믿는 이의 자녀는 항상 바른 행실을 보입니다. 이는 자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어떻게 양육했느냐에 관한 문제입니다. 어떤 부모는 자녀를 너무 무분별하게 양육하여 교회 예배나 사람들의 집에 방문할 때 자녀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둡니다. 그런 형제들은 하나님의 교회에서 어떤 책임도 질 자격이 전혀 없습니다. 교회의 장로는 자녀들을 잘 훈련시켜야 하며, 자녀들은 어릴 때에도 모임에서 조용히 앉아 있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자녀들이 예배 중에 끊임없이 뛰어다니는 장로는 사임하고 자녀를 잘 다스릴 수 있는 다른 사람에게 장로직을 넘겨야 합니다. 자녀를 훈육할 줄 모르는 사람은 교회를 이끌 수 없습니다. 설교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지도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교회에서 책임을 맡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가정에서 좋은 지도자가 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급하게 화를 내거나 분노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1:7). 다투기 좋아하고 성급한 사람은 장로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테러리스트가 되어야지 교회 장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장로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돈을 탐해서는 안 됩니다”(1:7). 사람들에게서 돈을 받는 데 관심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손님을 잘 대접해야 합니다”(1:8). 영적인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집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선하고 분별력 있고 경건하며 절제해야 합니다”(1:8). “신실한 말씀을 가르침에 따라 굳게 지켜야 합니다. 그리하여 건전한(위생적인) 교리로 권면하고 거스르는 자들을 지적할 수 있어야 합니다”(1:9). 순수한 교리를 설명하는 데 사용된 단어는 그리스어 “hugiaino”이며, 여기서 영어 단어 “위생적인(hygienic)”이 유래되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디모데와 디도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주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위생은 좋은 병원이 바닥을 자주 청소하고 장비를 살균하여 모든 것을 세균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병원에 가야 한다면, 우리 모두는 위생적인 병원을 선택할 것입니다. 우리가 소속되기로 선택한 교회도 그와 같아야 합니다. 거룩함을 강조하는 교회 말입니다. 불행하게도, 많은 교회들은 인도의 어떤 국립 병원들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치료를 받으러 그 병원에 갔다가, 들어갈 때는 없던 병을 얻고 나옵니다! 새 신자는 그런 교회에 가서 험담하고 비난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 교회에는 위생 기준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는 경건을 중시하는 교회입니다. “반항적인 사람들, 헛된 말을 하는 사람들, 속이는 자들이 많이 있는데, 그들의 입을 막아야 합니다”(1:10,11). 우리는 결코 강단에 서서 교회 모임(집회)에서 사람들을 지루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할 말이 없으면 강단에서 말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의 시간을 그렇게 낭비하는 것은 범죄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침묵시키는 것은 장로의 책임입니다. 그리고 침묵시켜야 할 속이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선생들은 너희 돈만 노린다"(1:11 - LB). 그들은 사람들을 경건한 삶으로 인도하는 데 관심이 없습니다. 만약 설교자가 여러분의 교회에 와서 주로 돈을 모으는 데 관심이 있다면, 가장 좋은 방법은 가능한 한 빨리 그를 내쫓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와 여러분의 교회에 유익할 것입니다. 신약성경을 공부하면서, 돈을 사랑하는 것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에 대해 얼마나 많이 언급하는지 눈여겨보셨습니까? 이것은 새 언약 아래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하나님의 참된 종이라면, 돈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자주 말하고 사람들에게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경고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돈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설교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의 목사와 설교자 자신들이 돈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문제에 대해 말할 수 없고, 오늘날 교회를 파괴하고 있는 이 엄청난 죄를 폭로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디도에게 크레타 사람들을 책망하여 믿음 안에서 온전해지도록 하라고 권했습니다(1:13). 거짓말쟁이, 악한 사람, 게으른 탐식가로 가득 찬 크레타 사회에서 크레타 교회가 빛이 되기가 얼마나 어려웠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 사회에서, 죄의 형태는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특히 빠져 있는 모든 죄의 영역에서, 교회는 빛으로서 그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 사회에서, 남편은 집안에서 더러운 일을 전혀 하지 않는 왕과 같다면, 그리스도인 남편은 달라야 합니다. 인도 사회에서는 남편이 보통 아기 기저귀를 갈지 않고, 화장실에 가서 어린아이의 엉덩이를 닦아주는 일도 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일은 아내의 몫입니다. 왜 그럴까요? 부부가 함께 아이를 낳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왜 남편도 그런 더러운 일을 할 수 없습니까? 이러한 인도 문화에서 그리스도인 남편은 다른 모습으로 돋보여야 합니다. 그들이 아내와 함께 자녀를 낳는 데 협력했듯이, 자녀를 양육하는 모든 면에서도 아내와 협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변의 어둠과 달라야 합니다. 바울은 1:15에서 “너희가 순수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순수하다. 그러나 너희가 더럽게 되면 아무것도 순수한 것이 없고 모든 것이 너희에게 더럽게 되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이 더러워서 어디서나 더러움을 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이 마귀에 의해 타락한 이유입니다. 이제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의 생각을 정결하게 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더러움이 없는 곳에서 더러움을 보지 않고,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볼 때마다 항상 나쁜 동기를 부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잠언 27:19은 “물 속에 얼굴이 비치듯, 사람의 마음은 사람을 비춘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다른 사람에게서 당신은 자신의 마음 속에 숨어 있는 악을 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잘못된 동기로 대부분의 일을 한다면, 누군가가 선한 일을 하는 것을 볼 때 그 사람에게 잘못된 동기를 부여하게 됩니다. 당신이 돈 벌기 위해서만 설교한다면, 모든 설교자가 돈 벌기 위해서만 설교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는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서 자신의 마음이 비춰지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당신처럼 부정하지 않더라도, 당신은 그가 부정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마음이 순수하다면,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판단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좋은 동기를 부여할 것입니다. 주니퍼는 13세기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형제회에 속해 있었는데, 이 형제회는 모든 면에서 지극히 단순하게 살기로 결심한 단체였습니다. 어느 날 주니퍼는 형제 중 한 명이 비교적 비싼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아마도 그 비싼 옷 안에는 내가 소박한 옷을 입고 있는 것보다 더 겸손한 마음이 있을지도 몰라."라고 생각했습니다. 주니퍼는 순수했기에 모든 것이 그에게 순수했습니다. 그는 누구도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생각이 타락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동기에서 타락을 볼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타락한 동기가 다른 사람들에게 반영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을 때, 그는 스랍들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님은 거룩하시다. 온 세상이 그분의 영광으로 가득하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사 6:3). 하지만 우리가 땅을 바라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찬 것이 아니라 부패로 가득 찬 것을 봅니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천사들은 땅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다고 봅니다. 그 천사들은 생각이 순수하기 때문에 사람과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창조물의 아름다움과 곳곳에 있는 경건한 신자들 등 많은 것들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또한 그들은 땅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게 될 미래의 날을 예언적으로 봅니다. 위생적인 교리 바울은 2:1에서 다시 한번 위생적인 교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는 지금 용서, 칭의, 성령 세례, 물 세례, 주님의 재림, 교회와 장로직에 대한 교리를 언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제 그리스도인의 일상생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는 디도에게 "사람들에게 위생적인 교리를 가르치라"고 권고한 후, 다양한 집단의 사람들을 언급합니다. 나이든 남자들은 품위 있고, 분별력 있고, 믿음에 건전하며, 사랑과 인내로 충만하도록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나이든 사람들은 무지하고, 미성숙하고, 어리석은 젊은이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할 줄 모르는 나이든 사람은 참으로 품위가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에게는 문제가 있습니다. 나이든 여자들은 행동에 경건해야 합니다. 그들은 악의적인 험담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선을 행하도록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나이든 자매들은 젊은 자매들의 스승이 되어야 합니다(2:4). 무엇을 가르쳐야 합니까? 젊은 자매들에게 남편을 사랑하는 법, 자녀를 사랑하는 법, 분별력 있고 순결한 사람이 되는 법, 그리고 집안일을 하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2:5). 어머니들은 단지 생활 수준을 높이기 위해 일하러 나가는 등 가정과 자녀를 소홀히 하지 않도록 배워야 합니다. 그들은 가정을 우선시해야 합니다.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하도록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이 모독당하지 않습니다. 나이든 자매들이 젊은 자매들에게 가르쳐야 할 중요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르치는 데 성경 대학 학위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진정한 위생적인 가르침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주변에는 많은 나이든 자매들이 험담과 비방에 능숙한 모습을 보입니다. 이는 안타까운 일이며, 하나님께 불명예를 돌리는 일입니다. 위생 교리는 실천적인 기독교이며 삶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사랑하고, 분별력 있게 행동하고, 가정생활을 우선시하고, 자녀를 경건하게 양육하고,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고, 가정에서 일하는 사람이 되는 것 등을 가르칩니다. 오늘날 많은 어머니들이 직장에 나가 자녀를 방치했고, 그 결과 자녀들은 잘못된 길로 가게 됩니다. 나는 내가 실천했던 것만을 설교합니다. 1968년에 의사와 결혼했습니다. 주님의 종으로서, 학생들 사이에서 그리고 마을에서 주로 사역했는데, 우리는 결혼 생활을 시작할 당시에는 극도로 가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첫 아이를 주시자, 아내는 병원에서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네 아들을 주셨고, 아내는 경건한 방식으로 아이들을 키우며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첫 아이를 낳은 후, 아내는 의사로서 단 한 루피도 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의학 지식으로 수백 명의 여성과 아이들을 돕고 상담해 왔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돈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47년의 결혼 생활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 결과를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아들들은 모두 거듭나 주님을 위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경건한 여성들과 결혼하여 그들 스스로도 경건한 자녀들을 키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돈을 더 벌어 호사스러운 삶을 사는 대신 경건한 자녀들을 키우기로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순하게 살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 자녀들이 그분을 위해 살도록 양육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당신의 자녀는 당신의 생활 수준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당신이 수백만 루피를 버는 것이 경건한 자녀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모든 어머니와 아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자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집에서 일하는 자가 되라." 자녀들이 자라서 집을 떠났다면, 당신은 일하러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나이든 자매라면, 당신 자신의 본보기를 통해 젊은 자매들에게 집에서 일하는 자가 되는 법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물론 예외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남편이 병들거나 아파서 아내가 생계를 위해 일해야 하는 경우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외일 뿐이고 규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젊은이들은 분별력을 갖도록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위생적인 교리입니다. 바울은 디도에게 선한 행실과 정결함과 순결한 교리와 품위 있고 건전한 말씨로 좋은 본이 되라고 권면합니다. 그래야 마귀가 그에게서 주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 만한 어떤 것도 지적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탄이 당신의 집을 가리키며 하나님께 "하나님, 저 그리스도인 가정을 보세요. 돈만 더 버는 데만 관심이 있는 저 어머니를 보세요. 그리고 그 자녀들이 얼마나 반항적인지 보세요. 부모도 교회도 존경하지 않아요."라고 말할 수 있어서는 안 됩니다. 원수가 당신에 관해서 주님의 이름에 수치를 돌릴 만한 말을 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당신의 자녀는 당신의 삶의 가치관을 반영합니다. 당신은 영적인 사람인 척하며 세상 사람들을 속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자녀는 속일 수 없습니다. 자녀들은 당신의 가치관과 당신이 무엇을 위해 사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종들(오늘날 사무실과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포함)은 모든 일에 주인에게 복종하도록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그들은 상사와 논쟁해서는 안 됩니다. 공장이나 사무실에서 상사와 논쟁해서는 안 된다고 사람들에게 말하는 설교자가 얼마나 됩니까? 그리스도인이 공장이나 사무실에서 상사와 논쟁하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에 수치를 돌리는 일입니다. 잘못된 일을 하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 자신의 신념을 지키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신념을 지켜야 합니다. 내가 해군에 있을 때, 상관들에게 맞서 "죄송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양심에 어긋나기 때문에 그럴 수 없습니다."라고 말해야 했던 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논쟁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 종들에게(그리고 사무실에서 일하는 직원들에게) 중요한 또 다른 권면이 있습니다. "작고 사소한 것을 조금씩 몰래 훔치지 말라"(2:10). 슬쩍 훔치는 것과 도둑질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도둑질은 값비싼 물건을 부당하게 자기 것으로 가져가는 것을 말합니다. 슬쩍 훔치는 것은 사소한 물건을 가져가는 것을 말하며, 예를 들어 사적인 편지를 쓰기 위해 사무용 종이 한 장을 가져가는 것과 같은 행위입니다." 우리가 경건한지 아닌지는 이처럼 작은 일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작은 일에 충성하면 큰 일에도 충성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당신이 과거에 어딘가에서 물건을 슬쩍 훔쳤다면, 훔친 물건의 대략적인 가격을 계산하여 돌려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삭개오가 그렇게 했습니다. 나는 내 평생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실천해 온 것을 설교하고 있으며, 오늘 내 양심은 완전히 깨끗합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모든 면에서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리를 빛내야”(2:10) 합니다. 여성들이 보석으로 자신을 치장하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전하는 교리를 그리스도와 같은 삶으로 장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에게 경건치 아니함과 세상적 정욕을 버리고 이 세상에서 분별력 있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며, 복된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이시며 구주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도록 가르치십니다”(2:11-13).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 곧 구원을 가져오신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현재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일, 곧 우리가 모든 경건치 아니한 것을 버리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시는 일; 그리고 미래에 우리가 바라는 것, 곧 주님의 재림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는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2:14). 이는 그분께서 자신을 위해 자기 백성을 정결하게 하여 자신의 소유가 되게 하시고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입니다. 당신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면, 선한 일을 열심히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위생적인 교리입니다. 위생 교리는 칭의, 물세례, 성령세례를 넘어섭니다. 이는 일상생활 속에서의 실천적인 기독교입니다. 사람을 경건한 삶으로 인도하지 않는 교리는 위생적인 교리가 아니라 빈민가의 교리입니다. 수술 장비를 살균하지 않고 바닥을 청소하지 않는 더러운 병원과 같습니다. 이는 신자들을 경건한 삶으로 인도하지 않는 더러운 교회입니다. 위생적인 교리는 오늘날 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도에게 “이런 것들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사람들을 책망하라”(2:15)라고 권고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 가정, 교회, 그리고 설교단에 가장 필요한 것은 “경건한 권위”입니다. 말할 때 사람들이 “당신의 말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라(2:15 - LB). 마지막 권고 바울은 이어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주제를 다룹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복종하고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3:1). 이어서 내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어서 식당과 거실에 걸어두라고 권했던 구절이 나옵니다. “아무도 비방하지 마십시오”(3:2). 우리 모두는 사무실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아서 감사합니다”라는 안내문을 본 적이 있지 않습니까? “험담하지 않아서 감사합니다”라는 안내문을 붙여 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리스도인 가정에서는 험담이 너무나 많습니다. 험담은 흡연보다 훨씬 더 나쁩니다. 나는 집에서 험담하는 사람보다 담배 피우는 사람이 있는 게 낫습니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당신의 집에서 담배 피우지 말라고 부탁할 수 있다면, 왜 험담하지 말라고 부탁할 수 없습니까? "누구에게도 악담을 하지 말고, 다투지 말고, 모든 사람을 배려하는 온화한 태도를 보여주십시오. 우리도 한때는 어리석었습니다"(3:2,3). 우리 모두 한때는 그렇게 어리석었습니다. 어리석었을 뿐만 아니라 불순종하고, 속고, 노예가 되어 악의와 시기심에 사로잡혀 서로 미워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친절과 은혜가 우리를 그 모든 것에서 구원했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행한 어떤 선한 행위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분의 자비와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항상 강조했던 첫 번째 내용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의로움이나 선행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값없는 선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우리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인 삶의 비밀, 즉 성령 충만을 언급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항상 강조했던 두 번째 내용입니다. 그런 다음 바울은 디도에게 이 모든 것을 “확신과 신념을 가지고 자신 있게” 설교하라고 권고합니다(3:8). 한 배우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배우와 설교자의 차이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설교자는 현실적인 것을 마치 비현실적인 것처럼 말하는 반면, 배우는 비현실적인 것을 마치 현실적인 것처럼 말합니다”!! 내가 들어본 대부분의 설교자들이 그렇습니다. 그들의 사역에는 불이나 열정, 간절함이 없습니다. 그들은 영원한 것들, 영생, 그리고 사람들이 영원히 불타는 지옥에 대해서 마치 졸리고 나른한 어조로 말합니다. 누가 그런 설교자들을 믿겠습니까? 절대 그런 설교자가 되지 마십시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확신하지 못한다면 절대 설교하지 마십시오. 가서 사업을 하거나 다른 직업에 종사하십시오. 하지만 입을 열어 교회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면, 항상 확신과 권위를 가지고 해야 합니다. 나는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오류가 없는 말씀이라고 진심으로 믿습니다. 그래서 나는 확신을 가지고 성경을 전합니다. 50년도 더 전에 설교를 시작했을 때도 확신을 가지고 성경을 전했고, 오늘날에도 더욱 확신을 가지고 성경을 전합니다. 성경의 진실성에 대해 더욱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 삶을 통해 하나님의 책에 담긴 약속들이 모두 진실임을 증명해 왔습니다. 성경은 동화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계의 가장 큰 비극은 신의 권위를 가지고 설교하는 설교자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생애 말년에 사람들에게 권고한 또 다른 한 가지는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와 논란의 여지가 있는 신학적 견해에 대한 논쟁을 피하라. 그것들은 다툼을 일으키고 해로울 뿐이기 때문이다”(3:9 - Living)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누가 논쟁을 벌이고 다툼과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다면, 먼저 경고하고 두 번까지 경고해야 한다. 그 후에는 그와 더 이상 관계를 맺지 마라. 그런 사람은 타락한 사람이고, 죄를 짓고, 스스로를 정죄한 자이기 때문이다”(3:10,11). 한번은 낯선 사람이 우리 집에 찾아와서, 그리스도인은 아플 때 약을 먹으면 안 되고, 오직 주님께서 그들을 고쳐 주실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고 설득하려고 했습니다. 나는 그에게 동의하지 않으며 이 문제로 논쟁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예수님에 대해, 그분의 말씀, 그리고 그분의 일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에게 그런 주제로만 이야기하고 싶다면 이야기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2분도 채 되지 않아 그는 다시 "약 없이 치유받는 것"이라는 주제로 돌아갔습니다. 나는 다시 한번 경고하며, 그 주제로 논쟁하려면 집에서 나가 달라고 요청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2분 동안 주님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는 다시 예전 주제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나는 일어나 그를 문까지 안내하며 "안녕히 가세요. 하나님의 축복이 있기를."이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위의 성경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경건한 삶을 사는 데 중요하지 않은 문제에 대해서는 나는 누구와도 논쟁하고 싶지 않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선한 일을 하라고 권면하며 결론을 맺습니다(3:14).

장 57
빌레몬서

회심한 노예에 대한 연민

이 편지는 바울이 쓴 25절짜리 짧은 한 장짜리 편지입니다. 그는 부유한 형제 빌레몬에게 이 편지를 썼습니다. 압비아(1:2)는 아마도 그의 아내였을 것입니다. 골로새서 4:17에서 살펴본 아킵보는 아마도 그의 아들이었을 것입니다. 빌레몬은 아마도 골로새에 살았을 것입니다. 그는 아마도 그 교회의 장로였을 것이고, 교회는 그의 집에서 모임을 가졌을 것입니다. 이 짧은 편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아름다운 것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선 바울은 "나는 당신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며, 당신을 위해 늘 기도합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종이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누구에게나 큰 격려가 됩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여러분이 기도하는 사람들의 목록을 살펴보면, 여러분이 그들 모두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그다지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사랑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을 사랑했고 그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빌레몬은 위대한 사도 바울이 자신을 위해 기도할 시간을 가졌다는 사실에 큰 격려를 받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대의 사랑과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대가 성도들에게 복이 된다는 것을 알고 큰 기쁨과 위로를 얻었노라"(1:5-7). 바울은 그에게 아첨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결코 아첨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감사의 말로 그를 격려했는데, 이는 우리 모두가 바울에게서 배워야 할 경건한 습관입니다.

오네시모를 위한 간청

빌레몬은 경건한 사람이었고, 그의 집에 찾아온 많은 가난한 신자들을 매우 후대했습니다. 바울은 "나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대에게 명령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대가 해야 할 옳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대에게 간청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1:8). 바울은 이제 복음 때문에 감옥에 갇힌 노인이 되었고, 빌레몬에게 간청하는 유일한 것은 바울이 감옥에 있는 동안 주님께로 인도했던 오네시모에게 친절을 베풀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1:10). 바울은 빌레몬이 바울에게 목숨을 빚진 것을 상기시킵니다(1:19). 빌레몬은 바울의 사역을 통해 구원받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레몬에게 무언가를 하라고 명령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명령하지 않고 오히려 간청했습니다. 이 위대한 하나님의 종의 정중함을 보십시오. 우리 모두가 따라야 할 훌륭한 본보기입니다. 우리의 사역을 통해 회심한 사람들은 우리를 매우 존경하여 우리를 위해 무엇이든 기꺼이 합니다. 나는 나를 위해 목숨까지 기꺼이 내어놓으려는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무언가를 하라고 명령하면 그들은 할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결코 그들에게 무언가를 하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간청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참된 종이 행하는 방식입니다. 그는 결코 자신의 권위를 이용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바울처럼 은혜로운 사람이 되는 법을 배우도록 합시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무엇을 원했습니까?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서 도망쳐 로마로 간 그의 노예였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그는 바울을 만나 회심했습니다.

당시에는 노예가 주인에게서 도망치면, 주인이 그를 발견하는 즉시 죽일 수 있도록 율법이 허용되었습니다. 당시 노예에게는 아무런 권리가 없었습니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부탁했을 때, 그는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른 누군가를 위해 부탁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경건한 사람이었고, 자신을 위해 결코 부탁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가 그에게 돌아올 때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로써 돌아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한때 오네시모는 단지 노예였지만, 이제는 형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그가 도망친 것을 사용해 그가 형제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1:15). 바울은 빌레몬에게 자신을 위해 오네시모를 형제로 받아들여 달라고 간청합니다. 오네시모라는 이름은 "유익한"이라는 뜻이며, 바울은 이제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정말 유익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사실상 빌레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당신의 집으로 오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나를 맞이하겠습니까? 오네시모도 똑같은 방식으로 맞아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아버지께 우리에 대해 말씀하시는 방식을 떠올리게 합니다. "아버지, 이 아이는 집에서 도망쳐 나와 죄 가운데 살며 경건하지 못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를 찾아서 데려왔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받아주신 것처럼, 그를 받아주십시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받아들여지는 방식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받아들이신 것처럼,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고 받아들이십니다(요 17:23).

그러자 바울은 “오네시모가 당신을 속여 당신의 집에서 무엇을 훔쳤다면, 그 값을 내게 청구하십시오. 내가 갚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도 “그가 지은 죄를 내게 청구하십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모든 경건한 사람의 태도입니다: “그 값을 내게 청구하십시오. 그가 당신에게 진 빚을 내가 갚겠습니다.” 바울이 주님께 인도했던 사람을 돕는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태도입니까! 여기 자신을 위해 돈을 구하는 대신 신자에게 돈을 주는 설교자가 있습니다!! 이런 설교자를 본 적이 있습니까?

바울이 교회에서 돈을 받는 부자가 아니었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하지만 천막 만드는 사업으로 얼마 못 되는 수입으로 오네시모에게 "내가 가진 것으로 너를 돕겠다. 네 빚을 갚도록 도와주겠다."라고 말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본보기입니까!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돈을 거두는 대신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자 하는 설교자가 더 많았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다른 기독교를 보았을까요?

하나님의 부르심에 집중하기

바울은 분별이 있었습니다. 그는 빌레몬에게 오네시모와 재산을 나누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안 했어요. 오네시모는 여전히 노예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당시 노예 제도에 대한 십자군 운동을 벌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령의 분별력을 통해 아직 그런 시기가 오지 않았음을 알았습니다. 만약 바울이 노예 제도에 대한 십자군 운동을 시작했다면, 성경을 쓰고 교회를 세우는 데 집중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노예 제도에 대한 십자군 운동을 벌이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것이 자신의 소명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미국의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수 세기 후에 그렇게 했습니다. 선(good)은 종종 최고의 것(best)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의 생각을 이해하고자 했고, 하나님께서 그를 이 세상에서만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사회봉사보다 더 나은 일을 하도록 부르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제자를 삼고 교회를 세우도록 자신을 부르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영원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은 어떤 사회적 대의나 해방 신학에 몰두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이 세상의 삶에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선한(good) 일에만 몰두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당신이 참여하기를 원하시는 최고의(best) 것을 놓칠 수 있습니다. 최고의 일은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고 그분의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 후로, 교회가 빌레몬의 집에서 모일 때마다, 그와 오네시모는 형제가 되었습니다. 오네시모 형제와 빌레몬 형제였습니다. 그러나 일단 교회 모임이 끝나면, 다시 오네시모는 종이었고 빌레몬은 주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얼마나 놀랍게 보여 주는지요!

주님은 모든 사회적 차별을 없애거나 모든 그리스도인의 부를 평등하게 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부자들이 그들의 부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려고 오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공산주의이며, 기독교는 공산주의가 아닙니다. 오네시모와 빌레몬은 세상에서의 지위나 특권, 부에 있어서 동등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 모든 면에서, 지상 생활 내내 서로 달랐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동등했고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로서 하나였습니다. 빌레몬서에는 성령께서 공산주의를 가르치지 않으시며, 성령께서 그리스도인들이 공산주의자가 되기를 원치 않으신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 주는 영감받은 성경의 유일한 부분입니다.

장 58
히브리서

예수 - 더 나은 언약의 중보자

킹제임스 성경을 사용하신다면, 맨 위에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바울의 서신'이라고 되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올바르지 않습니다. 이 서신에는 누가 썼는지, 누구에게 썼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바울은 서신을 쓸 때마다 항상 자신의 이름을 서두에 적고 누구에게 썼는지 언급했습니다. 이것이 그의 스타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서신은 분명 바울이 쓴 것이 아닙니다. 또한 누구에게 썼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이 서신에 '히브리서'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는 아론의 제사장직, 멜기세덱, 여호수아의 가나안 입성, 성막, 제사, 구약의 믿음의 영웅들 등 최소 30번 이상의 구약 관련 언급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 서신이 구약에 익숙한 그리스도인, 즉 히브리(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쓰였다고 추측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누가 썼는지, 누구에게 썼는지 알아내는 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 쓸모없는 연구는 신학 박사 학위를 따려는 사람들에게 맡겨둡시다!! 우리는 성령께서 이 글을 쓰셨고 우리를 위해 쓰셨다는 것을 압니다. 따라서 우리는 진정한 저자를 알고, 그분이 누구를 위해 이 글을 쓰셨는지를 압니다 - 바로 우리입니다!!

예수님 - 사람으로서

이 편지는 매우 심오합니다.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이 편지를 주의 깊게 읽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히브리서보다는 로마서와 빌립보서를 더 선호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마귀의 짓일 수 있습니다. 마귀는 신자들이 이 편지에 담긴 놀라운 진리에 사로잡히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이 진리는 성경의 다른 어떤 책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책은 신약 성경의 다른 어떤 책보다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그 인성이 우리에게 주는 실질적인 의미를 더 깊이 보여줍니다. 성경의 모든 진리는 실질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그분을 경배하고 그분께 기도합니다. 하지만 그분은 또한 사람이십니다. 이 진리가 오늘 당신의 삶에 어떤 실질적인 의미를 지닙니까? 만약 당신이 그리스도의 인성으로부터 오늘날 당신 자신을 위한 실질적인 의미를 찾지 못했다면, 그것은 당신에게 죽은 교리가 된 것입니다. 죽은 교리는 죽은 근육과 같습니다. 오랫동안 근육을 사용하지 않으면 근육은 어떻게 될까요? 약해지고 결국 위축됩니다. 그래서 여러 달 동안 병원 침대에 누워 있던 사람들은 그 침대에서 나올 때 거의 다시 걷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진리를 일상생활에서 실제적으로 적용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실질적인 모든 측면에서 그 진리를 잃어버렸습니다. 심지어 오늘날 누군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할 때, 많은 신자들은 그를 이단으로 여길 정도입니다. 16세기에 마틴 루터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교리를 선포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를 이단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수 세기 동안 그 교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잃어버린 진리가 회복될 때마다 똑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그의 세대는 그를 이단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하지만 다음 세대는 그가 예언자였음을 인정할 것입니다.

100여 년 전 그리스도인들이 성령 세례를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이단이라고 불렸습니다. 하지만 이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진리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인성과 그것이 우리에게 미치는 의미에 대한 설교를 듣는 일은 매우 드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람으로 사셨기에 우리도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 “그분이 이 땅에서 걸어가신 것처럼 걸어가야 합니다”(요일 2:6). 만약 그분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그분을 따를 수 없었을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것이 이 서신의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주제는 3:1; 8:1, 그리고 12:2, 3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온전함을 향하여 나아가라”(6:1) 또한 이 서신의 주제로 볼 수 있습니다.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10:19)도 또 다른 주제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서신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이 서신에는 '더 나은(better)'이라는 단어가 13번 등장합니다. 더 나은 희생, 더 나은 부활, 더 나은 언약, 더 나은 중보자 등입니다. '완전한', '하늘의', '영원한'과 같은 단어도 이 서신에서 자주 사용됩니다.

기본적으로 이 서신이 드러내는 것은 사람으로서의 예수님을 당신의 본보기로 삼는다면, 그분 안에서 승리하는 삶의 비밀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성령의 능력과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예수님을 인간으로 보아야 합니다.

1장은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찾을 수 있는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가장 분명한 표현 중 하나로 시작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성령의 영감을 받아 (신약성경의 다른 어떤 기자보다)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 광범위하게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예수님의 신성을 믿지 않는지 궁금해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1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강조하도록 영감을 받았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실제적으로는 그분의 인성을 무시해 버립니다. 이것이 히브리서가 그들에게 그다지 인기가 없는 한 가지 이유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진리를 이해하는 데 균형을 잡으려면 바로 이 서신을 연구해야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예수님이 사신 것처럼 살기"라는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첫 장에서도,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을 강조하며 시작했습니다. 그분은 이 땅에 계셨을 때에도 하나님이셨고,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의 예배를 기꺼이 받아들이셨습니다. 천사조차도 예배를 받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장에서, 저자는 구약 성경의 여러 구절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증명합니다. 그리고 2장에서, 그는 구약 성경의 여러 구절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이심을 증명합니다. 이것이 처음 두 장의 주제입니다.

1장에서, 우리는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환상, 꿈, 예언의 말씀, 기록된 성경 등 여러 방식으로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마침내 당신의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아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불립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메시지이십니다. 예수님의 삶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기록된 말씀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그분은 살아 있는 말씀, 곧 한 인격체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은 당신을 통해, 단지 당신의 말이 아니라 당신의 삶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말씀하고 싶어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시대에 하나님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리고 당신과 나는 지금 세상에 전해지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육신이 된 말씀"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말씀(메시지)은 먼저 예수님 안에서 육신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 말씀(메시지)은 우리의 육신 안에서 보여져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상이 아들 예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1:2). 이것은 1:10에서도 다시 언급됩니다. 창세기 1:1에서 세상의 창조주로 언급된 분은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하나님의 본성의 정확한 형상이십니다(1:3). 다시 말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싶다면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9). 예수님은 또한 자기의 능력의 말씀으로 온 우주를 붙드시는 분이십니다(1:3).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정결하게 하신 후, 사람으로서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천사에게 사람인 예수님께 경배하라고 명하셨습니다(1:6).

여기서 '경배(worship)'라는 단어는 예수님께서 피조물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우리에게 증명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피조물도 경배를 받을 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천사에게 경배하려고 엎드렸을 때, 천사는 즉시 "그러지 마라. 하나님께 경배하라"라고 말했습니다(계 19:10). 이 우주에서 경배를 받을 자격이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자신뿐입니다. 하나님 외에, 경배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끔찍한 죄를 짓는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그분이 사람들에게서 적어도 일곱 번이나 경배를 받으시고, 그것을 받아들이셨다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는 의심할 여지 없이, 그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하나님의 특권을 스스로 비우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인격(존재) 안에서는 여전히 하나님이셨음을 증명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하나님이 아니게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친히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부르시며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영하며 영원무궁하리이다”(히 1:8)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봅니다. 이는 시편 45:6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이 모든 소개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증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기초를 다진 후에야 우리는 그분의 인성을 연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다음 저자는 예수님의 인성과 그 진리가 우리에게 주는 모든 실질적인 의미를 보여줍니다.

다음 구절은 예수님께서 사람으로서 이 땅에서 어떻게 사셨는지 보여줍니다: “주께서 의를 사랑하시고 불법을 미워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당신의 하나님께서 기쁨의 기름으로 당신을 동료들보다 더 높이셨습니다”(1:9).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셨을 때, 우리 인간의 모든 한계를 안고 사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기름부음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기름부음을 받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하늘에 계셨을 때 기름부음을 받으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이 땅에 사셨을 때, 우리의 본보기가 되시기 위해 기름부음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곧 그분의 동료들보다 예수님께 더 큰 기쁨(즐거움)의 기름을 부어주신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 주된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셨습니다. 그분은 순결을 사랑하고 죄를 미워하셨습니다.

의를 행하는 것과 의를 사랑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자녀는 순종하는 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아버지께 순종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의를 행하신 것이 아니라 의를 사랑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단순히 죄를 피하신 것이 아니라 죄를 미워하셨습니다.

에이즈는 오늘날 사람들이 성적인 죄를 통해 얻는 치명적인 질병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에이즈에 걸릴까 봐 간음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성적인 죄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에이즈에 걸릴까 봐 두려워합니다.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도둑질을 하지 않는 것은 도둑질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들킬까 봐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당신은 다른 죄를 미워하지 않고도 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쁨의 기름으로 기름부음을 받으려면 의를 사랑하고 죄를 미워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기쁨의 기름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신 이유가 바로 이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는 편애가 없습니다. 좋은 아버지는 결코 다른 자녀들보다 맏아들을 더 사랑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편애가 없을 것입니다. 그가 맏아들에게 한 일은 모든 자녀에게도 똑같이 행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도 그러하십니다. 예수님은 많은 형제들 중 맏아들이라고 불리십니다. 거듭난 우리는 그분의 동생들입니다. 예수님은 맏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은 편애하지 않으시기에, 맏아들 예수님께 하신 모든 것을 우리에게도 행하실 것입니다. 만약 내가 예수님이 이루신 것과 같은 조건들을 충족시킨다면, 하나님은 예수님을 위해 행하신 모든 일을 나에게도 행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 앎으로써 발견하는 위대한 진리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기쁨의 기름으로 기름 부음을 받으셨다고 기록되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격려나 도전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의를 사랑하시고 불법을 미워하셨기에 기름 부음을 받으셨다는 것을 읽을 때, 우리도 의를 사랑하고 죄를 미워한다면 같은 방식으로 기름 부음을 받을 수 있다는 소망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성령을 통해 내 마음에 역사하사 의를 행할 뿐만 아니라 의를 사랑하게 하시고; 죄를 피할 뿐만 아니라 죄를 미워하게 하소서."

우리가 삶 속에서 의를 더 사랑하고 죄를 더 미워할수록, 우리는 성령의 기쁨으로 더욱 충만해질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의와 기쁨인 하나님 나라가 임하여 우리 마음을 채울 것입니다(롬 14:17). 그러면 우리는 "항상 주 안에서 기뻐하라"(빌 4:4)는 계명에 순종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분이 매우 중요한 분이시기에, 우리는 말씀에서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더욱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2:1).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어떤 계명들은 사소하므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중요한 질문은 계명 자체가 얼마나 중요한지가 아니라, 그 계명을 주신 분이 얼마나 중요한 분인가 하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할 위험이 아니라, 오히려 소홀히 하여 말씀에서 떠내려갈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배에서 일해 왔기에 표류가 무엇인지 잘 압니다. 배가 항구에 정박했을 때, 닻을 내리지 않으면 표류합니다. 아무리 느린 해류라도 배를 멀리 밀어낼 수 있습니다. 이 느린 표류는 눈에 띄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이 되면 배는 전날 밤에 멈춘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내려가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당신의 의로움에 대한 기준이 낮아지고, 어떤 죄를 가볍게 생각하게 되고, 주님에 대한 사랑이 1년 전과 비교해 식었다면, 당신은 자신도 모르게 떠내려갔다는 것을 확신해도 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당신이 떠내려갔다가 강력한 메시지를 듣고 그분께 돌아오고, 다시 떠내려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삶에서 온전히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방향으로 꾸준히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떠내려가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2:1). 2:3에서, 저자는 우리가 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떻게 피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이 구절은 믿지 않는 자를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니라 믿는 자를 위해 기록된 것입니다.

심지어 많은 성경 신학교들조차 성경 자체를 가르치는 것을 소홀히 합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성경에 대해 주장하는 수많은 이론들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놀라운 구원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소홀히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패배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들은 죄의 형벌(지옥행)로부터의 구원은 받아들였지만, 죄의 권세로부터의 구원은 등한시했습니다.

그런 다음 저자는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 계속해서 말합니다. 그는 2:6에서, 시편 8:4을 인용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주께서 그를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고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복종하게 하셨나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주변을 돌아보면, 만물은 사람의 발 아래 있지 않습니다. 사람은 왕이 되어야 할 때 노예입니다. 마귀가 인간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구절이 성취된, 사람 예수님을 봅니다. 만물이 그의 발 아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분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셨고, 오늘날 만물이 그의 발 아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맏형이시므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이곳으로 인도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맏아들을 위해 하신 일을 우리 모두에게도 행하실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예수님의 남동생/여동생이라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위해 하신 모든 일을 당신에게도 행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편애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8편의 이 구절은 주로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고난 때문에 천사들보다 조금 못하게 되셨습니다. 천사들은 죽지 않지만, 예수님은 죽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천사들보다 낮게 만들었습니다. 아담은 창조되었을 때 죽을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천사들보다 낮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금지된 열매를 먹었을 때, 그는 천사들보다 낮아졌고, 죽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은 죽음을 정복하시고 천사들 위에 계시며, 모든 것이 그분의 발 아래 있습니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을 때, 비록 지금은 천사들 아래에 있고 곧 죽을지라도, 언젠가 부활 때에는 그들보다 높아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은혜가 필요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셨습니다"(2:9).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위해 아버지의 은혜가 필요하셨습니다. 우리가 승리하며 살고, 이기는 자가 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은혜가 필요했을까요? 분명 필요하셨습니다. 사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있었다"라고 기록된 첫 번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눅 2:40). 그리고 성경에서 그 표현이 다음으로 나오는 곳은 사도행전 4장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은혜가 임했다는 내용입니다. 은혜가 누군가에게 임할 때, 그는 "은혜 아래" 있습니다. 우리가 "은혜 아래" 있을 때 우리는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롬 6:14).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왔습니다(요 1:17). 예수님은 은혜 아래 살면서 죄를 짓지 않은 첫 번째 분이셨습니다. 따라서 은혜(grace)는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베푸시는 호의(favoar)"를 의미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자격이 없는 호의를 받으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모든 호의를 받을 자격이 있었습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도움이자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으로서 은혜가 필요하셨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이 사람으로서 은혜가 필요하셨음을 여기서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비록 예수님 안에는 죄가 없었지만, 모든 면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연약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영광에 이르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의 지도자이자 대장이신 예수님을 고난을 통하여 완전하게 하셨습니다(2:10). 우리도 마찬가지로 고난을 통해 완전해집니다.

"완전한(perfect)"라는 단어는 무슨 뜻일까요? 이 단어는 히브리서에 여러 번 등장하기 때문에,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 안에서의 완전함(perfection)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perfect"는 단순히 "완전히 채워진"이라는 뜻입니다 — 마치 비어 있던 컵이 이제 가득 채워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완성된 것입니다. 그것은 처음에 컵에 더러운 물이 있었는데 이제 깨끗한 물로 바뀐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는 어느 때에도 더러운 물(죄)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을 때 하나님의 특권을 비우셨습니다(빌 2:5). 예수님은 하늘에 계셨을 때 누구에게도 순종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이 어떻게 인간으로서 겪어야 하는, 불완전한 육신의 아버지와 어머니께 순종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경험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생계를 위해 땀 흘리고 열심히 일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었겠습니까? 오직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심으로써만 알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구원의 대장이시자 지도자가 되시기 위해, 우리와 똑같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육신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자신을 복종시켰고, 부엌에서 어머니를 도우시고,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오시며, 부모님이 시키는 모든 일에 순종하셨습니다. 목수로 일하시며 땀을 흘리시고 지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인간이 겪는 고난을 조금씩 겪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으로서 그분의 경험의 그릇은 가득 차게 되었고, 그분은 사람으로서 “완전”해지셨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은 고난의 삶입니다. 그분은 고난을 받아들이시고 우리와 같은 길을 걸으셨습니다. 이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과 거룩하게 된 자들은 모두 한 아버지에게서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우리는 거룩하게 되었으며, 그분의 아버지는 이제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고, 그분은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나는 예수님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고 예수님의 형제입니다. 때때로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예수님의 동생이라고 말하기를 매우 주저합니다. 로마서 8:29에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로 예정하셨다고 매우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 다음 2:12에서, 십자가의 시편 - 시편 22편에서 인용한 구절을 볼 수 있습니다(시편 22:1 참조):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리이다." 이는 예수님의 어린 형제자매들을 가리킵니다. 그런 다음 이사야 8장의 또 다른 구절이 인용됩니다: "보라, 나와 및 하나님이 내게 주신 자녀들이니라." 그런 다음 예수님은 "자녀들이 피와 살을 가졌으니 그분도 또한 피와 살을 가지셨습니다"(2:14)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죽으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고, 죽음을 통해 사탄에게서 죽음의 권세를 빼앗으실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탄이 죽음의 권세를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담이 죄를 지은 이후로, 그리고 구약 시대 내내 사탄은 죽음의 열쇠를 쥐고 있었습니다. 아담이 그것을 사탄에게 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을 때, 그분은 사탄에게서 그 열쇠를 빼앗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내가 사망의 열쇠를 가졌노라”(계 1:18)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순종하는, 하나님의 자녀라면 예수님이 그 문을 열어주시기 전까지는 죽을 수 없습니다. 이 계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이 죽음의 문을 열어주시고 “내 아들아, 들어오너라”라고 말씀하시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나를 죽일 수 없습니다. 사고도, 암도, 종교적 근본주의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진리를 아는 것은 우리에게 엄청난 확신을 줍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정복하셨고, 그 이후로 죽음의 열쇠는 오직 그분의 손에만 있습니다.

사탄은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음의 권세를 가졌습니다. 인간은 에덴에서 자신을 마귀에게 내주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평생 죽음의 두려움 속에서 살아온 우리를 건져주고자 하십니다(2:15). 모든 인간은 죽음의 두려움 속에서 삽니다. 하지만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더 이상 두려움 속에서 살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은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내어 드렸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야망도 없다면, 단 한 순간도 죽음의 두려움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은 평안히 잠들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천사들과 같이 되지 않으셨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듣게 됩니다(2:16). 천사들 또한 죄에 빠졌습니다 – 사람보다 먼저. 그러나 예수님은 천사들을 구원하기 위해 천사가 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사람이 되셨습니다. 나는 그 이유가 사탄은 스스로 죄를 지었지만, 아담은 사탄의 부추김으로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면에서 우리, 곧 그분의 형제들과 같이 되셨습니다(2:17). 그리스도의 인성은 죄를 제외하고는 우리와 똑같았습니다. 그분은 죄 있는 육신을 가지지 않으셨고, 결코 죄를 지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외에는 그분의 인성은 당신과 나의 인성과 똑같았습니다. 바로 그렇게 하여 그분은 우리를 위해 자비로운 대제사장이 되실 수 있었습니다. 오직 그렇게 하심으로써만 그분은 하나님의 율법의 의로운 요구를 충족시키시고 우리 죄를 속죄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으로서 모든 일에 유혹을 받으시고 육신으로 그 유혹들을 겪으셨기에, 이제 우리가 유혹을 받을 때 우리를 도우러 달려오실 수 있습니다(2:18). 만약 그분이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지 않으셨다면, 유혹의 힘을 실질적으로 이해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생각해 보십시오: 하늘에서 온 천사가 수영하는 법을 가르쳐 주러 와서 강으로 데려가 강을 건너며 "나를 따라 해라"라고 한다면, 당신은 그에게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나는 당신을 따라 할 수 없습니다. 그저 당신을 존경할 뿐입니다. 내가 당신을 따라 하기를 원하신다면, 먼저 당신의 날개를 떼시고, 중력에 끌려 내려가는 나와 같은 몸을 취하신 후, 나에게 따라 하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말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만약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으로서의 그분의 모든 능력을 사용하시고, 완전한 순결함으로 사시며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셨다면, 우리는 그분께 "우리는 당신을 따를 수 없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유혹을 받으실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는 항상 유혹을 받고 죄의 법에 이끌립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본이 되시려면,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이 유혹의 끌림을 느끼셔야 했고, 우리가 가진 것 외에는 다른 어떤 자원도 가지고 있지 않으셔야 했습니다. 오직 그렇게 하셔야만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실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분은 우리와 똑같이 오셔서 유혹의 끌림을 느끼셨고, 성령의 능력을 구하셨으며, 그 끌림을 이길 은혜를 구하셨고, 완전한 순결 가운데 사셨습니다. 그분은 지금 우리에게도 그분이 이기셨던 것처럼 유혹을 이겨내라고 요구하십니다(계 3:21).

이 진리에 눈이 열렸을 때가 기억납니다. 나는 울면서 "주님, 당신이 나의 낮은 수준에까지 내려오셨다는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나는 당신이 나보다 조금 더 높은 수준에 오셨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당신이 나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나의 본보기가 되시기 위해 나와 같이 되시고 나처럼 유혹을 받으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평생 주님을 따르고 싶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계시는 내 삶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하지만 내가 이 진리를 더 많이 선포할수록 그리스도인들은 내가 가르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을 더 많이 발견했습니다. 마귀는 이 교리가 사람들을 승리로 인도할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이 교리를 싫어합니다. 마귀는 이것이 경건의 비결임을 알고 있으며, 당신이 경건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이 진리는 나의 삶, 나의 가정, 나의 사역, 내가 섬기는 사람들의 삶, 그리고 내가 섬기는 사람들의 가정을 변화시켰습니다. 성경은 나에게 새로운 책이 되었습니다. 성령께서 나를 충만하게 하시고, 예수님께서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이 되시고, 우리처럼 시험을 받으시고, 우리처럼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을 보여주셨을 때, 나는 이전에는 본 적이 없었던 놀라운 것들을 성경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나 훌륭한 본보기가 되시는지요! 옛 언약 아래서는 그들에게 본보기가 전혀 없었습니다. 오직 계명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에게는 본보기가 있습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3:1에서, 저자는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에게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고 권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의 진정한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 나는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이렇게 선포하고 싶습니다. “거룩한 형제들이여, 여러분은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 하늘의 부르심에 따라 살고 싶습니까? 거룩한 형제/거룩한 자매가 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과 같이 되시고(2:17), 그분을 임명하신 하나님께 충실하셨던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모세는 집의 일부였지만 예수님은 집을 지으신 분이시기에 예수님은 모세보다 더 크십니다.

불신의 악

3:7에서, “오늘 그분의 음성을 듣거든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라고 경고합니다. 그리고 3:12에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지 않도록 조심하라”라고 경고합니다. 저자는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거룩한 형제들에게 예수님이 자신들과 똑같이 오셨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악하고 믿음이 없는 마음을 가지게 될까 두려워하라고 경고합니다.

당신이 패배한 삶에 지쳐 있을 때에야,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당신의 본보기가 되기 위해 당신처럼 오셨다는 계시를 주실 것입니다. 한때 나는 완전히 패배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패배한 삶에 정말 진절머리가 났습니다. 나는 밤낮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답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설교자이지만, 나는 내면의 삶에서 죄에 패배합니다. 생각과 말과 가정생활에서 패배합니다. 나는 거듭났고 물세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나는 패배합니다. 내가 알아야 할 것을 보여주세요." 그때 주님께서 내게 경건의 비결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셔서 나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결한 삶을 사셨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 말씀을 진심으로 믿었고, 그것이 나의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여기서는 믿지 않는 마음을 품으면 하나님에게서 떨어질 수 있다는 경고를 받습니다(3:12).

그러나 떨어져 나가는 대신 다음 구절은 우리에게 또 다른 선택권을 제공합니다.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 매일 서로 권면하고 서로 격려하십시오"(3:13). 우리는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그러니 오늘 무언가를 합시다. 오늘 누군가를 격려합시다. 오늘 누군가를 권면합시다. 이 장의 맥락에서, 이는 누군가에게 우리와 같이 되신 예수님을 생각하도록 권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부르심은 매일 예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동과 말은 항상 "예수님을 보십시오. 그분은 정말 놀라운 구세주이십니다! 그분은 나의 죄를 용서하셨을 뿐만 아니라 나의 삶을 변화시키셨습니다. 나의 가정생활을 변화시키셨고, 주님의 기쁨으로 나를 채워주셔서 항상 기뻐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은 내게서 죽음의 두려움을 없애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합시다.” 라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매일 다른 사람들에게 도전과 격려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당신의 얼굴을 볼 때, 그들은 거기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어떤 모습이라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3:13은 우리가 단 24시간 만에 타락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 서로에게 권면하고 격려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서로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가인은 “나는 내 형제를 지키는 자가 아닙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우리는 형제를 지키는 자, 자매를 지키는 자입니다. 누군가 실수하는 것을 보면 격려해 주십시오. 넘어지는 것을 보면 일으켜 세워 주십시오. 당신에게 격려해 주거나 권면해 줄 사람이 없다면, 성령과 성경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경에서 그의 말씀을 통해 여러 날 동안 나에게 직접 권면하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도 나를 권면하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내 주변에 권면해 줄 형제가 없을 때에도, 이 사도들은 성경을 통해 내게 찾아와 격려해 주었습니다. 베드로, 바울, 요한이 우리 방에 함께 있어서 매일 우리를 격려해 준다는 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왜 그들이 여러분을 격려하게 하지 않습니까? 왜 그들을 성경 안에 가두어 두십니까?

성경에 대해 말하는 다른 모든 책보다 성경 자체를 더 읽어야 합니다. 나는 베드로, 바울, 요한의 글에 대해 위대한 성경 학자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알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그들의 말을 직접 듣고 싶습니다. 그래서 나는 성경에 관한 책이 아니라 성경 자체를 읽습니다.

3:14은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었으면..."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만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시작할 때의 확신을 끝까지 굳게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된다고 말씀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끝까지 견뎌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라톤 경주를 잘 시작하지만 경주를 끝내지 못합니다. 도중에 탈락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경주에서든 잘 시작했다고 해서 상이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시작은 잘했지만 경주를 끝내지 못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예를 보십시오. 신약 성경에서 세 번에 걸쳐, 우리는 애굽을 떠났지만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경고를 받아야 한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히브리서 3장과 고린도전서 10장, 그리고 유다서 1장에도 그 내용이 나옵니다. 그들은 탬버린을 두드리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놀랍게 시작했습니다(출 15장). 그러나 2년 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진노하시기 시작하셨고; 그 후 38년 동안 계속해서 그들에게 진노하셨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믿지 않는 악한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애굽에 있을 때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40년 동안 하늘에서 양식을 주시고, 반석에서 물을 주시고,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기적을 행하신다고 해서 그분이 당신을 기뻐하신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그분이 선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줄 뿐입니다. 그분은 당신이 죄라는 거인들이 당신의 삶을 지배하도록 허락한 것에 대해 여전히 분노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언제 당신에게 기뻐하실까요? 당신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죄악의 거인들을 발 아래 두었을 때입니다. 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상에서 인간이 경험한 가장 위대한 기적들 중 일부를 경험했다고 솔직하게 증언할 수 있었습니다. 200만 명이 40년 동안 매일 하늘에서 빵을 얻고, 마른 반석에서 물이 흘러내리고, 뱀에 물린 자리가 기적적으로 즉각 치유되는 기적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38년 동안 그들에게 진노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놀라운 기적을 행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진노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삶 속에서 죄를 용납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분노, 질투, 원망, 음탕한 시선, 그리고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발 아래 두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당신이 경험하는 기적은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합니다.

3:19에서, 우리는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하였더라"라고 읽습니다. 그리고 4:1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분의 안식(His rest)에 들어갈 약속을 주셨는데도, 우리가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은혜 아래 거하면 "죄가 우리를 지배할 수 없다"(롬 6:14)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의 모든 거인을 그들의 발 아래 굴복시키겠다고 하신 약속만큼이나 분명한 약속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는 안식의 삶입니다. 안식의 반대는 혼란, 패배, 기복이 심한 경험 등입니다. 여러분은 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까 두려워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그들이 들었던 것과 똑같은 복음(좋은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4:2).

그들이 들은 좋은 소식은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께서 그들이 아직 애굽에 있을 때 주신 약속에는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라" 그리고 "내가 너희를 가나안으로 인도하리라"(출 3:17). 그들은 그 좋은 소식을 들었지만, 첫 번째 부분만 경험했습니다. 우리도 구원의 두 부분, 즉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것과 예수님은 우리가 죄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듣지만, 첫 번째 부분만 경험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승리의 삶에 들어가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려워해야 한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두려움을 가진 신자를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패배한 삶에 대해 무관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거인들을 물리치고 가나안을 차지한다는 놀라운 약속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기적을 보고, 하늘의 음성을 듣고, 뱀에게 물린 데서 치유를 경험하는 등의 일에 계속 몰두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결코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당신도 치유와 기적, 하늘의 음성에 사로잡혀 (그리고 흥분하여) 복음의 핵심 메시지인 죄를 이기는 것을 놓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왜 그 땅에 들어갈 수 없었을까요? 그들은 말씀을 듣고 믿었던 여호수아, 갈렙과 함께 믿음으로 함께 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이 안식의 삶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이 끊임없는 안식의 삶(life of rest)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저자는 안식일(Sabbath)을 또 다른 옛 언약의 안식의 예로 사용합니다(4:4). 아담과 하와가 창조되었을 때, 그들의 첫날은 쉬는 날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섯째 날이 끝날 무렵에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항상 그분 안에서 안식하는 자리에서 모든 일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일곱째 날에 쉬셨습니다.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그들이 그분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가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말씀하시길, "오늘, 너희가 그분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라"(4:7). 복음 메시지에서 시간은 항상 '오늘'입니다. 내일이나 어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지금까지 경험했던 것보다 훨씬 더 높은 삶으로 당신을 부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마십시오. "주님, 나는 이 안식의 삶(life of rest)에 들어가고 싶습니다."라고 말하십시오.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승리의 삶의 한 예일 뿐입니다. 오늘 당신에게는 안식일의 쉼이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끊임없는 안식일, 곧 그분 안에서의 영원한 쉼(안식)의 삶을 약속하십니다. 우리 자신의 노력이 이 쉼에 들어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이 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쉼에 데려가시도록 허락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일을 쉬셨듯이, 우리도 우리 자신의 일을 쉬어야 합니다(4:10). 하나님은 엿새 동안 일하시고 일곱째 날에 일을 멈추셨습니다. 저자는 이것을 통해 우리도 이 쉼(안식)에 들어가려면 더 이상 스스로 애쓰는 것을 멈춰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언젠가 자신의 노력으로 죄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당신은 패배할 것입니다. 제자들이 물고기를 잡으려 했던 예를 생각해 보십시오(요 21장). 그들은 밤새도록 호수를 누비며 애썼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애쓰는 것을 멈추고 주님의 말씀을 신뢰했을 때, 그들의 배는 물고기로 가득 찼습니다. 거기서 얻는 교훈과 똑같습니다. 주님께 나아가 "주님, 평생의 애씀은 나에게 승리를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은혜로 내게 승리를 주셔야 합니다."라고 기도할 때, 당신은 이 삶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고군분투하는 시기는 율법 아래 사는 모습, 즉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은혜 아래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무언가를 하십니다. 자신의 고군분투를 멈추면 이 안식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비결입니다.

4:11에서, 우리는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이 쉼에 들어가기를 힘쓰고 광야에서 불순종한 사람들처럼 넘어지지 않도록 하자”라고 읽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주님, 나를 이 쉼(안식)의 삶으로 인도해 주십시오. 이것은 내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원합니다”라고 말합시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쉼을 주리라.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혼이 쉼을 얻으리라”(마 11:28,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우리는 죄 사함의 안식에 들어가고, 그 후에야 죄를 이기는 승리의 안식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꿰뚫는 하나님의 말씀

4:12에서, 우리는 읽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어떤 양날의 칼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판단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칼처럼 우리 마음을 꿰뚫어 우리의 생각과 의도를 드러냅니다. (히브리서에서 강조하는) 새 언약에서는, "마음의 생각과 의도"가 가장 중요합니다. 반면 옛 언약 아래에서는 이스라엘 백성 안에 성령이 거하지 않았기 때문에 악한 생각과 뜻은 심각하게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율법은 사람이 악한 생각과 의도를 품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거나 처벌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이 외적으로 모든 것을 행하는 한, 율법은 그를 칭찬할 것입니다. 그러나 새 언약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율법 아래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은 의사가 환자를 겉으로만 진찰하는 것처럼 단지 외적으로만 그를 시험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마치 초음파 검사나 엑스레이처럼 마음 속을 꿰뚫어 봅니다. 하나님은 이제 우리의 생각, 태도, 동기, 그리고 의도에 더 관심을 두십니다. 때로는 겉으로는 모든 것이 좋아 보일지라도, 내면에는 큰 악이 숨겨져 있을 수 있습니다. 마치 겉으로는 건강해 보이는 많은 사람들이 내부에 암과 같은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며 당신 삶 속의 외적인 죄만 깨달았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모두 듣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이 질문으로 자신을 시험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드러내었는가?" 여기서 강조점은 머리(head)가 아니라 마음(heart)에 있다는 점에 유의하십시오. 기름 부음을 받은 모든 하나님 말씀의 설교에서, 말씀은 당신의 생각을 통과하여 마음속으로 들어와 당신의 가장 깊은 생각과 의도를 드러냅니다.

고린도전서 14:25에서, 우리는 기름부음받은 설교의 결과에 대해 읽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의 생각이 드러나고, 그들은 머리를 숙이며 하나님께서 그 모임에 함께 계심을 인정합니다. 당신이 경건한 사람과 대화할 때, 그가 기름부음받은 예언의 말씀을 당신에게 전할 때도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기름부음받은 말씀은 항상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날카로운 양날 가진 검과 같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섬기고 싶다면, 당신의 마음과 입에 있는 칼날이 날카롭게 서 있도록 하십시오. 칼날을 무디게 하거나, 세련된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부드럽게 하거나, 외교적인 수법으로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쉽게 만들지 마십시오. 그런 것은 사람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깊숙이 파고들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무딘 칼로 고기를 썰어 본 적이 있습니까? 계속 썰어도 고기는 여전히 잘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날카로움을 타협하는 설교자는 설교를 마칠 때 아무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양날의 검입니다. 설교자는 먼저 말씀이 자신의 마음을 절개하여 자신의 생각과 의도를 드러내도록 허락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그는 그것을 사용해 다른 사람들의 마음도 절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자신의 마음을 꿰뚫지 않았다면, 그것을 설교하지 마십시오. 대부분의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오직 다른 사람만 판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동기까지도 꿰뚫고 판단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 안에서 성령의 음성에 끊임없이 우리 마음을 열면, 궁극적으로 우리는 완전히 깨끗한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의 생각과 동기가 끊임없이 우리에게 드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정결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믿는 자는 매일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매일 만나를 받았듯이, 우리도 매일 하나님께로부터 기름부음받은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혼적인가, 영적인가?

하나님의 말씀이 행하는 또 다른 일은 혼과 영을 구분하는 것입니다(4:12). 이것은 우리가 방금 살펴본 것보다 조금 더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악한 동기(명예를 얻거나 돈을 벌기 위해)로 설교한다면, 우리는 즉시 그것을 알 것입니다. 하지만 혼과 영을 구분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혼(생각과 감정)에 의지하는지, 아니면 성령에 의지하는지를 드러낼 것입니다. 옛 언약 시대의 사람들은 혼과 영을 구분할 수 없었습니다.

옛 언약의 성막은 바깥뜰, 성소, 지성소, 이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몸, 혼, 영을 상징합니다(살전 5:23). 혼은 성소로, 영은 지성소로 상징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지성소에 있었습니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는 두꺼운 휘장이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들어가는 것을 제외하고) 아무도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는 옛 언약 아래서는 사람이 “영으로” 하나님을 섬기거나 살 수 없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엇이 혼적인지, 무엇이 영적인지 구별할 수 없었습니다. 아직도 이 둘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옛 언약의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당신에게 무엇이 혼적인지, 무엇이 영적인지 보여 줄 것입니다. 오늘날 소위 “그리스도인”의 많은 행위는 혼적인 것입니다. 혼적인 행위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대한 인간적인 생각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악하거나 육적인 것이 아닌 선한 생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인간적이고 혼적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육적인 그리스도인은 거듭났지만 여전히 "제한된" 죄악적인 쾌락을 누리고 돈 등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이 모든 것을 포기했지만 여전히 지성과 감정에 따라 사는 혼적인 그리스도인도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영적인 그리스도인도 있습니다.

혼적인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증거하고 섬기기를 열망하는 선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이 모든 일을 하는 방식은 매우 인간적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다"(사 55:8,9)라고 말씀하십니다.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하는 인간적인 방법과 하나님을 섬기는 인간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다윗은 한때 하나님의 법궤를 소달구지에 실어 옮겼습니다 - 한때 블레셋 사람들이 했던 것처럼(삼하 6:3; 삼상 6:11). 그것은 좋은 생각이었습니다 - 고핫 자손이 그 긴 여정 동안 법궤를 어깨에 메고 가는 짐을 덜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길에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사역을 인간적인 방식으로 행할 때마다 혼란이 생길 것입니다. 겉보기에 인상적인 결과가 있을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없을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성막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거대한 피라미드를 짓는 법을 배웠던 애굽의 학문 기관에서 공부한 방식대로 그것을 짓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집을 짓는 방법에 대한 인간적인 이해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40년 동안 광야로 인도하신 이유 중 하나는 그의 인간적인 지혜를 제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아라비아로 3년 동안 인도하신 이유도 바로 그것입니다. 그가 가말리엘의 성경 학교에서 3년간 공부하면서 얻은 인간적인 생각들을 제거하기 위해서였습니다(갈 1:17,18). 바울은 하나님의 길을 이해하기 전에 자신의 혼적인 이해를 죽음에 이르기까지 쏟아내야 했습니다.

혼은 또한 인간의 능력, 곧 인간적인 자원에 의존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많은 전자 기기와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의 사역을 더 잘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은 속임수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성령의 능력으로 성취될 수 있습니다. 초기 사도들은 돈도, 도구도, 영향력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인간적인 자원은 거의 전무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온갖 도구와 돈, 영향력으로 이루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성취했습니다. 사도들은 영적인 능력을 가졌지, 혼적인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진정으로 영적인 사람이 되려면 혼과 영을 분리해야 합니다. 나는 감정이 고조되고 소리가 크다는 이유만으로 성령께서 역사하고 계신다고 주장하는 여러 집회에 참석해 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속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지 인간 혼(soul)의 작용일 뿐,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성령 세례"라고 부르는 것은 단지 "혼적 능력의 세례"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 안에서 진정으로 세례를 베푸십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스도를 위한 증인이 되는 영적인 능력을 가져옵니다(행 1:5,8). 하지만 혼적 능력은 단지 감정을 자극할 뿐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문제에 대한 분별력이 없기 때문에 속고 있습니다.

그들은 일부 비기독교 기도 모임에서도 "방언"을 말하며 감정을 고조시키고 "내적인 안식에 이르렀다"고 주장합니다! 많은 종교가 이런 인간의 혼적 능력을 자극하는 일에 빠져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혼과 영을 분별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철저히 속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많은 "치유"는 진정한 성령의 은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혼적인 능력으로 행해집니다. 집회에는 노래가 넘쳐나 "분위기"가 조성됩니다. "주님, 나는 믿습니다"와 같은 노래를 여러 번 부르며 사람들의 감정은 고조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믿음을 공개하라(표현하라)"고 요구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설교자는 단지 사람들을 최면에 걸리게 할 뿐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치유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노래나 감정 없이 조용히 병자들을 치유했습니다.

당신이 이 가짜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당신은 심지어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며 모방하려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당신은 가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비슷한 방식으로 당신의 혼적인 능력을 나타내며 그들과 당신 자신을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 안에 깊이 스며들어 무엇이 혼적인지, 무엇이 영적인지 보여 주도록 허용하십시오. 당신이 예수님을 바라보면, 당신은 그분 안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당신이 치유 집회에 참석하거나 기독교 TV에서 그런 장면을 시청한다면, 이것이 예수님께서 하신 방식인지 자문해 보세요. 당신은 곧바로 진리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면 반드시 속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혼과 영을 분별하게 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말씀과 예수님과 사도들의 본을 주셔서 참된 영성이 무엇인지 보여 주셨습니다.

“그분께 숨겨져 있는 피조물은 하나도 없으며, 우리가 상관해야 하는 그분께는 모든 것이 드러나고 벌거벗은 채로 있습니다"(4:13). 이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문구입니다: “우리가 상관해야 하는 그분". 이는 인간으로서 우리가 상관해야 할 분은 우주에 오직 한 분뿐이며,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하고 대답해야 할 유일한 분은 하나님 자신뿐이라는 뜻입니다. 당신이 삶을 살면서 그 사실을 의식하며 살아간다면, 당신은 점점 더 경건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늘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 쓴다면, 당신은 결국 그들의 노예가 될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종이 되고 싶다면, "당신이 상관해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뿐"임을 항상 명심하십시오. 만 명이 당신을 경건한 사람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당신이 경건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만 명이 당신을 경건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당신이 경건하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주는 증명은 아무 가치도 없습니다. 그러니 모두 쓰레기통에 버리십시오. 다른 사람들은 당신의 사생활, 생각, 돈 거래 등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당신 삶의 단 1%만 알고 있으며, 그들의 의견은 그 1%의 아는 것에만 근거합니다. 따라서 그들의 의견은 좋든 나쁘든 가치가 없습니다. 좋은 의견이든 나쁜 의견이든 모두 쓰레기통에 버려야 합니다. 쓰레기통에 버리십시오. 그것이 바로 내가 수년간 해온 일입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을 섬길 자유를 얻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길 자유를 얻고 싶다면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님, 내가 상관해야 할 분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매일 주님 앞에 서고 싶습니다. 주님의 눈앞에 숨겨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 삶의 모든 것이 주님 앞에 드러나고 벌거벗겨져 있습니다. 나는 내가 영적인 사람이라고 사람들을 속일 수 있지만, 주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그렇게 살면 삶에 더 나은 변화가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신은 새 언약의 삶에 들어가기 시작할 것입니다.

4:14-16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늘을 통과하셨다는 것을 읽습니다. 성경은 세 개의 하늘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 하늘은 우주 공간인데, 즉 우리가 볼 수 있는 해와 달과 별 등이 있습니다(시 8:3). 셋째 하늘은 지금 낙원이 있는 곳이며, 바울이 한때 그곳으로 이끌려갔던 곳입니다(고후 12:2-4). 이 두 하늘 사이에는 둘째 하늘(또는 하늘들)이 있는데, 사탄이 그의 본부를 두고 있는 곳입니다. 사탄이 하늘에서 쫓겨났을 때(사 14:12), 그는 지옥이 아니라 둘째 하늘로 쫓겨났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었고(욥 1장과 2장에서 볼 수 있듯이), 땅 위를 돌아다닐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셋째 하늘에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죽으면 셋째 하늘에 갑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셨을 때, 두 하늘을 지나 아버지께서 거하시는 셋째 하늘로 들어가셨습니다(히 4:14).

4:15에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하시고 공감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되지 않으셨더라도 분명히 우리의 고난을 공감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지금 우리에게 공감하시는 것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겪는 고난을 실제로 겪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어려움을 겪는 누군가를 공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자신이 같은 어려움을 겪었다면 그 사람을 훨씬 더 잘 공감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 어머니가 외아들을 잃었다면, 자신도 외아들을 잃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 다른 누구보다도 그녀를 훨씬 더 깊이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겪는 모든 것을 직접 경험하시고, 우리와 함께 고통을 나누며 진정한 교제를 나누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신랑이시기에, 그분의 신부인 우리가 겪는 모든 일을 함께 겪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분은 우리에게 본이 되시고, "나를 따르라"라고 의미 있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만약 내 아내가 매우 어려운 길을 걸어가고 있다면, 나는 바깥에 앉아서 그녀에게 단지 신실하라고 권고하고만 싶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아내와 함께 그 길을 걸으며 신실할 수 있도록 돕고 싶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신랑이시며,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혹시 어려움, 낙담, 시련, 압박, 유혹을 겪고 계신가요? 예수님은 당신이 겪는 압박을 겪으셨고 당신의 곤경을 잘 이해하십니다. 그분은 당신이 겪는 것과 똑같은 상황을 겪지 않으셨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상황에 놓인 모든 유혹을 겪으셨습니다. 또한 그분은 성령을 통해 당신이 그분처럼 승리자가 되도록 도우실 것입니다(계 3:21). 나는 결코 아내가 혼자서 무거운 짐을 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아내가 그 짐을 들 수 있도록 도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그렇게 하십니다.

인생에서 가장 큰 문제

우리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재정적 어려움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재정적 어려움"이라고 부르는 것은 탐욕의 결과일 뿐입니다. 그들은 자신보다 잘사는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시기심을 느낍니다. 하지만 만약 자신보다 못사는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했다면, 그들은 완벽하게 만족하고 감사했을 것이고, 그들의 "재정적 어려움"은 사라졌을 것입니다! 한때 치약을 살 돈조차 없었던 한 선교사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당시 치약 없이도 양치질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특정한 생활 수준에 익숙해져 있고, 그 수준으로 살 수 없을 때 우리는 가난하다고 생각합니다. 경건을 추구하는 사람은 치약은 물론 칫솔조차 살 여유가 없다는 사실에 결코 걱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쨌든 인도 사람들은 대부분 손가락과 약간의 소금이나 석탄 가루만으로 양치질을 합니다.

경건을 추구하는 사람이 가장 걱정하는 문제는 죄의 유혹을 이기는 것입니다.

4:15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다”라고 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를 공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느끼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모든 유혹의 끌어당김을 느끼셨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여기에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다고 기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탄이 그분을 시험했을 때, 그분은 유혹의 끌어당김을 느끼셨지만 “아니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그분이 그 끌어당김을 느끼지 않으셨다면, 그것은 유혹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유혹은 줄다리기와 같습니다. 두 팀이 밧줄을 잡고 서로 잡아당깁니다. 당신이 거룩한 삶을 붙잡으려고 할 때, 반대 방향에서 잡아당기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유혹입니다. 반대편에서 아무도 밧줄을 잡아당기지 않는다면, 줄다리기는 없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아무런 끌어당김을 느끼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그분이 우리처럼 유혹을 받지 않으셨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 4:1-10에서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했다고 말하고, 히브리서 4:15에서 예수님이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다고 말하는 성경의 말씀은 거짓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유혹"이라는 단어는 항상 죄를 짓게 하는 유혹을 가리킵니다. 피곤할 때 잠을 자고 싶어 하는 것과 같은 정상적인 욕망은 유혹이 아닙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유혹을 받으셨다고 말할 때 그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처럼 죄를 짓게 하는 유혹을 받으셨지만, 죄를 짓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그 면에서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십니까? 분명 그렇습니다. 히브리서 2:17에서 우리는 그분이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이 되셨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수영을 가르치려는 날개 달린 천사와 같은 분이 아니었습니다.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수영을 가르치기 위해 그분의 "날개" 없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셨을 때, 중력의 법칙을 극복하셨습니다. 만약 천사가 물 위를 스치듯 지나갔다면, 그것은 기적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중력을 극복하셨기에 이것은 기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물 위를 걸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을 때, 사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신뢰하면 그분과 똑같이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맏아들 예수님을 편애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신뢰한다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위해 하신 일을 우리에게도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모든 면에서 유혹을 받으셨지만 죄를 짓지 않으셨습니다. 이 점에서 그분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십니다. 우리는 유혹을 받을 때마다 주님께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주님, 나사렛에서 이 땅에 사시던 어느 때, 당신도 지금 내가 받는 유혹과 같은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내가 그때 당신이 하신 것과 똑같이 반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당신은 낙심하거나 죄악된 분노로 반응하려는 유혹을 받고 있습니까? 예수님도 그런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죄를 짓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본보기를 보고 "주님, 나는 주님을 따르고 싶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그렇게 사셨습니다. 우리도 그분처럼 살고 싶다면 성령의 능력을 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4:16에서 “그러므로 우리도 (또한)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우리처럼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를 짓지 않으셨다는 앞 구절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가셨던 것처럼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서, 우리도 또한 죄를 이길 수 있게 해주는 동일한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4:16은 자비(긍휼)와 은혜에 대해 말합니다. 자비와 은혜는 다릅니다. 자비는 우리의 과거를 다루는 반면, 은혜는 미래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해 자비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미래에 죄를 이길 수 있도록 돕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옛 언약 아래에서는 오직 자비만 있었습니다. 새 언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가 왔습니다(요 1:17). 예수님은 죄를 지으신 적이 없으셨기에 자비가 필요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자비와 은혜가 모두 필요합니다.

4:16에서 말하는 “필요한 때”는 무엇일까요? 바로 시험을 받을 때입니다. 마치 산을 오르다가 미끄러져 절벽에 손가락으로 겨우 매달려 있는 상황을 떠올려 보세요. 더는 버틸 수 없어 떨어져 뼈가 부러집니다. 그제야 도움을 요청하면, 앰뷸런스가 와서 병원에 데려가 치료해줍니다. 이것이 ‘자비’입니다. 하지만 떨어지기 전에 도움을 요청해서 누군가가 끌어올려 바위 위에 세워준다면, 그것이 ‘은혜’입니다. 진짜 필요한 때는 떨어지기 ‘전’입니다. 떨어진 후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차선입니다. 최선은 떨어지기 전에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은혜의 영’이시며, ‘돕는 분’으로 불립니다. 성령은 우리가 미끄러질 때(시험을 받을 때), 즉 떨어지기 전에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계속해서 넘어지고 계속해서 자비를 구합니다. 넘어지고 나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합니다. 다시 올라가려고 하지만, 다시 넘어지고 또다시 자비의 구급차를 구합니다. 자비롭게도, 구급차는 매번 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그런 삶을 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다음에 당신이 시험을 받을 때, 성을 내거나 성적으로 더러운 생각을 하도록 유혹을 받고, 스스로 넘어지고 있음을 알게 될 때, "주님, 지금 저에게 은혜를 주소서."라고 부르짖으십시오. 그러면 당신이 넘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라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당신을 붙들어 줄 것입니다. 로마서 6:14은 “너희는 은혜 아래 있으므로 죄가 너희를 지배하지 못하리니”라고 말씀합니다.

5:1에서, 저자는 예수님을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론을 부르신 것처럼(5:4), 이스라엘 백성 중 누구도 대제사장이 되기로 결정할 수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조차도 스스로 대제사장이 되지 않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4,000년을 기다리셨고, 아버지께서 정하신 때가 되자 이 땅에 가라는 명령을 받고 오셨습니다(갈 4:4).

이 땅에는 그 4,000년 동안의 필요가 없었습니까?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자리에 있었다면, 아담이 죄를 지은 바로 다음 날 예수님을 보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의 방법과 다릅니다. 우리는 필요를 보면 즉시 행동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4,000년을 기다리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후에도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30년을 기다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필요만 보고 움직이신 것이 아닙니다. 필요를 보시고 그것에 대해 마음을 쓰셨지만, 아버지께서 “가라” 하실 때에만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후 단 3년 반 만에, 아버지께서 맡기신 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분은 여러 필요를 채우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생의 마지막에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었노라"(요 17: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생의 마지막에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행동한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신앙생활 초기에 배운 것 중 하나는 이것입니다: "필요한 것을 주의 깊게 살피되, 오직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는 곳과 가라고 하시는 때에 가라" 우리는 눈을 들어 추수할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뜻입니다(요 4:35,34 참조). 예수님조차도 보내심을 받을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5:7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계실 때" 어떻게 기도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은 "죽음에서 구원받기 위해 큰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던 그분의 생애 마지막 날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분이 "육신으로 계시던 날들에" 그렇게 기도하셨다고 정확하게 말씀합니다. "날들"은 그분의 지상 생활 33년 반 전체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구원받기 위해 기도하셨던 죽음(그리고 이 구절에서 말하듯이 그분이 구원받으신 죽음)은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 영적인 죽음(한 번의 죄라도 지음으로 인해 발생하는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죄를 짓지 않기를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 일에 매우 간절하셨기에, 도움을 구하는 기도는 큰 통곡과 눈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결코 죄를 짓지 않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죄를 이기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은 죄에서 구원받기 위해 큰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기 때문에 죄를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의를 사랑하시고 죄를 미워하기를 너무도 간절히 하셨기에 뜨겁게 기도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그분이 다른 믿는 자들보다 더 간절히 기도하셨기 때문에, 그들보다 더 큰 능력으로 기름 부으셨습니다(히 1:9). 대부분의 신자들은 죄를 가볍게 여기고, 자신들이 인간이기 때문에 결코 죄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이유가 아닙니다. 그들은 죄에서 구원받기 위해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로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종종 외딴곳을 찾아가 기도하셨는데,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눈물을 흘리시며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눅 5:16). 도시에 살면 외딴곳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나는 어디에 있든 입으로 소리를 내지 않고 마음속으로 큰 소리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의 순결을 위해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어떤 죄에 빠지면 눈물을 흘리고 싶어집니다. 예수님은 결코 죄에 빠지지 않으셨지만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 사실이 나를 정말 겸손하게 만듭니다. 순결에 대한 열정이 예수님을 삼키고 불태우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이루셨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은 우리 안에 순결함을 향한 열정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의 본을 따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육체적 죽음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영적인 죽음을 두려워하셨기에, 어떤 때라도 그분 안에서 죄의 냄새조차 맡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잔을 마시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은 무엇을 위해 기도하셨습니까? 그분이 두려워하신 잔은 십자가 위에서 세 시간 동안 아버지와의 교제가 끊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실 때였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미워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죄가 아버지와의 교제를 끊어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는 예수님에게 다른 사람들을 지옥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는 것으로부터 구원하려면, 그 교제의 단절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한 엄청난 사랑으로, 예수님은 그 무거운 대가를 치르기로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평생 동안 죄를 통해 아버지와의 교제가 끊어지는 것을 거부하셨습니다. 죄의 냄새가 조금이라도 나면 하나님과의 교제는 즉시 끊어집니다. 우리가 그 교제를 소중히 여긴다면, 우리 안에 원통함이나 영적인 교만, 부정함, 시기, 돈에 대한 사랑, 증오 등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에 어긋나는 어떤 냄새도 나지 않도록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로 기도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완전하신 뜻 안에서 살고자 하는 열정이 없기 때문에 죄를 가볍게 여기는 것입니다. 거룩함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열정이 아닙니다. 그들의 열정은 대개 주님이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어떤 형태의 섬김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세상적인 개념일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과 교제하기를 원했지만, 마르다는 그분을 섬기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택한 것이 필요한 유일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마르다를 꾸짖으셨습니다(눅 10:42). 우리의 섬김을 효과적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거룩함입니다.

5:8에서, 우리는 “그분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라고 읽습니다. 예수님은 순종을 배우셔야 했습니다. ‘배우다’는 교육과 관련된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으로 계실 때 순종에 대한 교육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서, 그분은 누구에게도 순종하신 적이 없습니다. 평생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일이라도, 처음 해 볼 때 무언가를 배우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을 때 순종하는 법을 배우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아버지께 순종하셨을 뿐만 아니라 요셉과 마리아에게도 순종하셔야 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죄가 있고, 불완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든 부모가 그렇듯 그들도 실수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순종하셨습니다. 그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순종하셨고, 순종하는 동안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즉, 평생 자신의 뜻을 부인하고 아버지께 순종하는 고통을 겪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분은 고난의 대가를 치르면서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순종의 어떤 부분은 즐거울 수 있습니다. 아이에게 아이스크림을 먹으라고 하면 아이는 순종하는 것을 즐깁니다. 거기에는 고통이 없습니다. 하지만 아이가 친구들과 놀 때 놀지 말고 들어와서 숙제를 하라고 하면 순종은 고통스러워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에는 순종이 쉽고 즐거운 영역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알면서 순종합니다. 하지만 우리 순종의 진정한 시험은 우리가 하기 싫어하는 일, 우리의 의지를 부인하는 일,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일을 해야 할 때입니다. 바로 그곳에서 우리의 순종이 시험받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부인하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안 돼”라고 하신 모든 것에 대해서도 “안 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고, 이 교육을 마치신 후 “그분은 완전하게 되셨습니다”(5:9). 여기서 “완전한(pefect)”은 “완료하다(complete)”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졸업하시고 학위를 받으셨습니다. 이 학위는 우리도 받아야 할 학위와 같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수많은 유혹을 극복해야 합니다. 시험에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면 다시 시험을 치러야 합니다! 모든 시험을 통과하면 학위를 받습니다. 그때 우리는 승리자가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학위입니다. 다른 모든 학위는 상대적으로 볼 때 쓸모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실 때, 그분은 우리 구원의 대장으로서 행하셨던 일을 우리에게도 하라고 요구하십니다. 그분은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유혹을 우리에게 겪으라고 결코 요구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히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 우리의 교육을 마칠 수 있도록 돕는 은혜를 받도록 합시다. 고난을 겪어야 한다면, 고난을 겪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순종을 배우고 교육을 끝마칠(완료 할) 것을 결심합니다.

5:9에서, "완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이제 이 순종의 대학에서 교수가 되셨습니다. 그분은 가장 낮은 단계부터 가장 높은 단계까지 같은 대학을 거치셨고, 모든 일에 순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종인 우리는 이제 이 같은 순종의 대학에서 초급 강사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고난을 통해 순종을 더 많이 배울수록, 다른 사람들을 순종으로 인도하는 주님의 참된 종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만이 진정한 기독교 사역입니다. 하지만 시험에서 계속 낙제한다면, 어떻게 이 대학의 강사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분은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5:9). 이 “영원한 구원”은 죄의 형벌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죄의 권세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셨습니다(5:10). 멜기세덱은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 순종한 사람이었습니다(창 14:18). 하나님께서 그에게 알지 못하는 사람(아브라함)에게 음식을 가져다 주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즉시 순종했습니다. 5:11을 더 읽어 보겠습니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이 예수에 관하여는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이에 관심이 없는 것 같으니 설명하기가 매우 어렵도다.” 그들은 이기는 삶이나 경건함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경건함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 경건함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마치 선생님이 어떤 중요한 과목을 가르치려 하는데, 학생들은 동시에 진행 중인 '월드컵' 경기의 점수에 더 관심을 두는 것과 같습니다. 선생님은 수학이나 과학을 가르치려 할지 모르지만, 아무도 듣지 않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게임에 쏠려 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들은 승진이나 집 짓기, 결혼에 더 집중합니다. 이런 일들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하지만 경건함이 당신의 주된 열정이 아니라면, 이러한 진리를 이해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연구 과학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그 분야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자 하는 엄청난 열정을 가지고 있기에 밤늦게까지 연구에 몰두합니다. 당신이 경건함을 갈망하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그런 열정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비밀을 이해할 것입니다. 하지만 순결함에 대한 열정이 없는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성숙으로 성장하다

그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은 아직 젖을 필요로 하는 어린아이였지 단단한 음식은 필요 없었습니다. 젖을 먹는 자마다 의의 말씀에 익숙하지 않습니다(히 5:12,13). 오늘날에도 교회에는 25년 동안 신자였지만 여전히 단단한 음식을 먹지 못하는 "아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단지 젖, 즉 회개의 메시지, 예수님을 믿는 믿음, 죄 사함, 물세례, 성령세례로 만족합니다. 그것이 그들이 원하는 전부입니다. 의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지금쯤이면 순종의 대학에서 교사가 되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유치원생이었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A, B, C만 아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아기들로 가득합니다. 매주 일요일 아침마다 젖병을 물고 있는 아기들을 교회에서 200명이나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의 더 깊은 진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완전함에 대해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단단한 음식은 연습을 통해 선악을 분별하는 감각을 단련한 성숙한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5:14). 이는 그들이 직면한 다양한 상황에서 감각을 훈련하여 혼적인 것(인간적인 것)과 영적인 것(신적인 것)을 분별하고, 그들은 영적인 것을 택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그들은 단순히 말을 할 때 죄악된 것을 피하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또한 인간적인 반응을 피하고 그리스도와 같은 방식으로 반응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결국 우리는 인간일 뿐이다"라는 변명으로 자신의 육적인 행동을 정당화할 때, 그는 어린아이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너희가 단지 사람들처럼 행하느니라"(고전 3:3)라고 책망했습니다. 아담의 다른 자녀들처럼 행동하는 것이 잘못일까요? 물론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당신은 사람처럼 말합니까, 아니면 예수님처럼 말합니까? 강단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누구나 "주님, 나도 당신이 전하신 것처럼 전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젊은 시절,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분의 말씀을 전파하라고 부르셨을 때, 나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주님, 당신께서 전파하신 것처럼 나도 전파하고 싶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사람도 나의 본보기로 삼고 싶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전파하셨는지 보기 위해 사복음서를 공부했습니다. 그분은 나의 본보기가 되셨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혼적인 설교와 영적인 설교, 그리고 혼적인 삶의 방식과 영적인 삶의 방식을 분별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그것을 분별하기 위해 영적인 감각을 계발해야 합니다.

6:1-3에서, 저자는 성숙을 향해 나아가는 것에 대해 계속해서 이야기합니다. 5장에서, 그는 우유를 마시고 고기를 먹는 비유를 사용했습니다. 이제 그는 두 가지 비유를 더 사용합니다. 첫째는 초등 교육과 고등 교육의 비유이고; 둘째는 건물의 기초와 그 상부 구조의 비유입니다. 이 모든 비유는 어린아이와 성숙한 그리스도인을 대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둘의 차이는 유혹의 때에 드러납니다. 성숙한 성도는 유혹에 대해 그리스도와 같은 반응을 보이는 반면, 어린아이는 인간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신적인 방식이 아니라 인간적인 방식으로 행동합니다. 우리 자신을 살펴봅시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앉아 있을 때, 당신이 다른 사람을 당황하게 하는 농담을 한다면, 예수님은 그런 농담을 하실까 하고 즉시 자문해 보십니까? 그런 질문을 한 번도 하지 않는다면, 당신의 인간적인 행동에 결코 빛 비추임을 얻지 못할 것이며, 항상 어린아이 같은 그리스도인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매일 다른 시간에 자신을 돌아보며, 예수님께서 비슷한 상황에서 하셨던 것처럼 자신이 행동하는지 (또한 반응하는지)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자신을 그렇게 살피지 않으면 결코 성장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영원히 기초만 놓고 그 위에 아무것도 세우지 못한 채 살게 될 것입니다. 영원히 유치원에 다니며 우유만 마시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영적 교육에서 진보를 이루는데 진지하게 임한다면 매우 빠르게 성장할 것입니다.

다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성숙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산(예를 들어 1만 미터)을 오르는 것처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미 정상에 오르셨습니다. 우리가 거듭날 때, 우리는 이 산기슭에서 시작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아무리 오래 걸리더라도 예수님을 따르고 정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비록 100미터밖에 오르지 못했더라도 어린 형제자매들에게 "내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처럼 너희도 나를 따르라"(고전 11:1)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초는 무엇입니까? 우유는 무엇입니까? 유치원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게 됩니까? 무엇보다도 회개입니다(6:1). 회개는 죄뿐만 아니라 죽은 행실에서도 돌이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옛 언약 아래서는 선한 행실과 악한 행실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에서는 선한 행실, 악한 행실, 그리고 죽은 행실이 있습니다. 죽은 행실이란 악한 동기로 행한 선한 행실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누군가 명예나 돈을 위해 설교한다면 그것은 죽은 행실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돈을 바치는 것처럼 선한 일을 하더라도 행복하지 않게 한다면 그것은 죽은 행실이 됩니다. 이러한 예는 많습니다. 믿음과 기쁨 없이 행하는 모든 것은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한다 하더라도 죽은 행실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죽은 행실에서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의 이기적인 동기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 기초의 다른 부분들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 물세례, 성령세례, (“안수하여”) 영적 은사를 받는 것, 그리스도의 재림 때 죽은 자의 부활을 기다리는 것, 그리고 최후의 심판을 준비하는 것입니다(고후 5:10). 이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우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것들에만 전념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아직 유치원에 있습니다. 그들의 집은 아직 기초 단계에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성숙과 완전함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점점 더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히브리서 저자의 핵심은 그리스도인들이 젖을 먹는 수준을 넘어 단단한 음식 수준으로, 기초를 넘어 상부 구조로, 유치원을 넘어 더 높은 학년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아무도 영원히 아기로 남아 있고 싶어 하지 않을 것입니다. 유치원에서 교육을 중단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기초만 있는 건물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은 그저 그런 것에 만족하는 듯합니다. 심지어 많은 설교자와 목회자들도 어린아이입니다. 그 결과 그들의 교회 또한 어린아이들로 가득 차게 됩니다.

6:1은, “완전함을 향하여 나아가자”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기초 교리에만 사로잡힌다면, 우리의 설교를 통해 태어나는 것은 어린아이들뿐일 것입니다. 새 언약의 핵심 메시지는 단지 사람들의 죄를 용서받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말씀은 “우리가 더 많은 아기를 낳자”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성숙을 향해 나아가라는 권고를 받습니다. 모든 아기는 성숙해져야 합니다.

교회가 아기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교회 안에는 수많은 다툼과 법정 소송이 벌어지고, 심지어 지도자들조차 간음에 빠지고 돈을 좇고 서로 다투는 등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납니다. 아기들은 항상 싸우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성숙해지면, 우리는 싸우지 않고 교회에서 어떤 지위나 명예도 탐하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에서 싸우거나 지위나 명예를 탐한다면, 당신은 여전히 아기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기독교계의 많은 지도자들은 여전히 아기입니다. 아기들과 함께 교회를 짓는 것은 기초만 있고 지붕이나 벽이 없는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떨어져 나갈 수 있을까요?

이어서 저자는 6장에서 완전함을 향해 나아가지 않는 것의 위험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세상적 기초는 그 위에 아무것도 세우지 않더라도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문제에서, 그 기초 위에 상부 구조를 세우지 않으면(즉, 완전함을 향해 나아가지 않으면) 그 기초 자체가 언젠가는 침식될 것입니다. 그 신자는 구원을 잃고, 성령께서 그를 떠나시며, 믿음과 회개, 그리고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여러 곳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6:4,5에서, 우리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에 대한 다섯 가지 설명을 읽습니다. 첫째, 그는 ‘빛을 받았습니다.’ 그의 어두운 마음에 빛이 들어왔습니다. 둘째, 그는 “하늘의 선물”,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선물을 맛보았습니다. 셋째, 그는 “성령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단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는 성령을 받았습니다. 넷째, 그는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맛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했습니다. 다섯째, 그는 “다가올 시대의 능력을 맛보았습니다.” 이는 그가 삶 속에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어느 정도 맛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기적을 맛보았습니다. 그는 불가능한 상황에서 기도에 대한 초자연적인 응답을 맛보았습니다. 질병으로부터 치유받는 것은 “다가올 시대의 능력을 맛보는 것”의 한 부분입니다. 미래에 나는 질병 없이 완벽하게 건강한 부활의 몸을 가질 것입니다. 나는 지금 그 몸을 가질 수 없습니다. 하지만 육체적 치유를 통해 그것을 맛볼 수 있습니다. 치유는 언젠가 우리가 미래에 충만하게 얻게 될 것의 작은 예입니다. 우리는 지금 모든 질병으로부터 치유받는 것을 우리의 권리나 특권으로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과 주권 안에서, 그분은 때때로 우리가 이 능력을 맛보고 아플 때 치유받도록 허락하십니다. 아플 때마다 나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언젠가 나의 온몸을 예수님의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킬 부활의 능력을 지금 내 몸 안에서 조금 맛보게 해 주세요. 지금은 그 능력을 온전히 누릴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 능력을 맛보게 해 주세요." 언제, 누구에게 그것을 맛보게 할지는 하나님께서 정하십니다. 그것은 그분의 주권적인 결정입니다. 나는 그것을 여러 번 맛보았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경험한 사람이라도 부주의하고 반항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남용하면 여전히 떨어져 나갈 수 있습니다(6:4). 이것은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는 신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이것은 떨어져 나가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신자가 그렇게 떨어져 나갈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면 나는 그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셨다면 그것은 분명히 가능합니다. 만약 당신의 이해가 그 말씀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당신의 신학이 틀렸고 하나님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 대해 미리 정해진 생각을 가지고 다가갑니다. 그래서 성경이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진정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싶다면, 완전히 열린 생각으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당신의 모든 선입견을 버리고 "주님, 나의 눈을 열어주세요. 내가 항상 믿어왔던 것이 틀렸을지도 몰라요."라고 기도하십시오. 성경은 지적인 학자들이 아니라 단순한 사람들, 어부들을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진리를 똑똑하고 총명한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처럼 겸손한 자들에게는 나타내십니다(마 11:25).

그런 신자들이 왜 떨어져 나가는 것일까요?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기"(6:6) 때문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죄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분명히 본) 신자가 자신의 삶에서 죄를 가볍게 여기고 고의로 계속 죄를 지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할 때마다, 그는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그가 고의로 죄를 지을 때, 그는 군중이 예수님에 대해 말했던 것처럼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결코 십자가에 못 박히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나는 어린아이들에게 복음을 설명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에서 네가 유일하게 잘못을 저지른 남자 혹은 여자 아이이고 다른 모든 사람들이 선하다 하더라도,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와 너를 위해 죽으셨을 거야."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당신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죄인이고 다른 모든 사람들이 거룩하다 하더라도, 예수님은 여전히 오셔서 당신을 위해 죽으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죄를 위해 죽으셨겠습니까? 오직 당신의 죄를 위해서입니다! 당신은 예수님께서 온 세상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회심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깨닫는 날, 당신은 회심할 것입니다. 당신의 죄가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죄를 지을 때마다, 당신은 그분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나는 죄에 넘어지고 쓰러지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고의로 죄를 짓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둘의 차이는 마치 누군가의 발을 실수로 밟는 것과 고의로 밟는 것의 차이와 같습니다! 때로는 실수로 화를 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죄를 지으려고 계획하고 계략을 꾸밀 때도 있습니다. 그러한 죄는 실수로 지은 죄보다 훨씬 더 심각합니다. 실수로 예수님의 손에 못을 박았다고 해서 고의로 못을 박는 것만큼 심각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우연히 성적으로 음란한 생각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 잡지에 더럽고 음란한 사진이 실릴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사진이 거기에 있었고, 당신은 그것을 보고 갑자기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포르노 잡지를 사서 보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고의로 계속해서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도 고의로 계속해서 죄를 지어 구원을 잃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계속해서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그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입니다(마 6:15에 따르면). 그러면 그는 구원을 받았던 적이 있었더라도, 결국 잃고 지옥으로 갈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아니요, 나는 그를 용서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 앞에서 거의 벌거벗은 채 공개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끔찍한 수치였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고의로 죄를 지을 때, 당신은 다시 한번 "그리스도를 공공연히 욕되게 하는 것"(6:6)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고의적인 죄를 보아야 하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는 한, 그를 회개로 이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가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죄의 심각성이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과 동일하다는 것을 깨달으면, 그는 여전히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습니다.

6:7은 믿는 자가 계속해서 죄를 짓는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에만 관심을 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삶에서 열매를 맺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계속 비를 마시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한 채소를 내는 대신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냅니다(6:8).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부와 건강을 축복해 주신다는 것을 가르치는 모임(집회)에는 참석하지만, 죄에서 어떻게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 알려주는 모임(집회)에는 참석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하늘에서 내린 이 모든 비를 마신 후에 그는 무엇을 맺을까요? 사랑, 기쁨,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가 아니라, 원통함, 용서하지 않는 마음, 성적 죄악 등을 맺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용하고 결코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매우 위험한 길입니다.

새 언약의 축복은 옛 언약의 축복보다 더 큽니다. 하지만 새 언약에서 떨어져 나가면 그 떨어짐은 더 클 것입니다. 3미터 높이에서 떨어지면 다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죽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300미터 높이에서 떨어지면 죽을 것입니다. 다윗과 같은 옛 언약 사람들이 간음에 빠졌을 때, 그것은 3미터 높이에서 떨어지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것은 나쁜 일이었지만, 그다지 심각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큰 역사를 행하신 상태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새 언약 안에서 우리를 하늘로 들어 올리셨기에, 우리가 넘어지면 영적인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당나귀는 결코 높이 올라갈 수 없지만, 그렇다고 깊은 곳까지 떨어지지도 않습니다. 예를 들어, 당나귀는 결코 사탄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창조물 중 가장 높은 존재(천사)만이 타락하여 사탄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더 큰 일을 하실수록, 우리가 넘어질 때 받는 영적인 상처는 더 커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불순종에 대해 하나님께 아홉 번 용서받았습니다. 그러나 열 번째 불순종했을 때,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민 14:22,23). 그러나 그들의 지도자 모세에게는 단 한 번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가 단 한 번이라도 하나님께 불순종했을 때, 그는 즉시 벌을 받아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민 20:12). 왜 이런 차이가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누군가에게 더 많이 주실 때, 그분은 그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새 언약 시대에, 교회 지도자가 간음에 빠지면, 옛 언약 아래 다윗처럼, 다시 지도자로 돌아오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가 회개하면,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고 다시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있지만; 그 후에는 그 교회에서 영적 지도자를 맡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높이 올라갈수록, 그가 넘어질 때의 충격은 더욱 심각해집니다.

옛 언약 아래서, 사람들은 모세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따릅니다. 모세와 예수님의 영적인 높이는 엄청나게 다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일 때 넘어지는 것은 더욱 심각한 일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경고를 했지만, 그들이 그렇게 넘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고 덧붙입니다(6:9).

하지만 이러한 강력한 말씀과 함께 그는 격려의 말도 덧붙입니다.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시며, 너희의 행위와 너희가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보여준 사랑 곧 믿는 자들을 섬긴 것을 잊지 아니하시느니라"(6:10). 예수님은 누구든지 그분의 이름으로 냉수 한 그릇을 주는 자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여러분이 끝까지 동일한 부지런함과 소망에 대한 온전한 확신을 가지고 계속하기를 바랍니다”(6:11). 그는 게으르지 말고 끝까지 동일한 부지런함으로 전진하라고 격려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게으름을 피울 시간이 없습니다. 설령 90세라 할지라도, 주님을 섬기고 전진하십시오. 인생의 단 하루도 낭비하지 마십시오.

나는 A.B. 심슨의 이 시에서 끊임없이 도전을 받았습니다:

내 인생엔 사소한 일에 쓸 시간이 없도다
이 길은 복되신 주께서 걸으신 길이 아니네;
오직 힘겨운 수고로 — 매 시간, 모든 힘을 다해
언제나, 온전히 하나님을 위하여.

시간은 쏜살같이 흐르고 — 영원이 가까이 다가오네,
머지않아 나의 흙이 땅 아래 묻힐지도 모르는데.
내 삶을 어찌 허비하며, 멈출 수 있겠는가?
언제나, 온전히 하나님을 위하여.

예수님의 삶의 매일과 그분의 육신의 모든 에너지는 100% 그분의 아버지께 바쳐졌습니다. 우리도 마지막 날까지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게으르면 결코 이 새 언약의 삶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 전적으로 헌신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영원한 가치를 지닌 것들에 집중해야 합니다. 소풍을 가거나 약간의 오락을 즐기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휴식 시간조차도 적절한 비율로, 알맞게 유지해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 공부에 시간을 들이지 않습니다. 바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원한다면 시간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게으르지 말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가 되라”(6:12)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

새 언약 안에서 믿음과 오래 참음은 항상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75세에 아들을 약속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그 아들을 얻기까지 25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습니다”(6:15)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을 주고 너를 번성하게 하리라”(6: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옛 언약 아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복을 주시면 그 사람은 자식을 얻었습니다. 이는 옛 언약의 약속의 일부였습니다: “내가 너를 복을 주고 너를 번성하게 하리라.” 새 언약에서도, 영적으로 동일한 것이 적용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실 때, 그분은 우리에게 영적인 자녀를 주십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를 축복하겠지만 너는 자녀를 갖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면, 아브라함은 몹시 실망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오늘 하나님께서 나에게 축복을 주시겠지만 영적인 자녀를 주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면, 나 역시 몹시 실망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실망시키지 않으셨고, 앞으로도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비전을 이룰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실 때, 우리와 같은 비전, 같은 열정, 같은 열망, 같은 갈망을 가진 형제들을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도 그러한 제자가 열한 명 있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께서 당신을 축복하신다고 말하면서도 당신과 같은 사람을 한 명도 낳지 못한다면, 무언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가진 똑같은 열정과 비전을 가진 영적인 자녀들을 갖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육신의 자녀를 보고 "아빠 닮았네요."라고 말합니다 - 같은 피부색과 얼굴 생김새 등이 똑같아요. 그리고 영적으로, 우리 자녀는 우리와 같은 열정, 같은 갈망, 같은 소망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지역 교회에 대한 우리의 소망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면 우리를 번성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처럼, 우리도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기다렸고 약속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변치 않는 두 가지를 주셨습니다, 곧 그분의 말씀과 그분의 맹세입니다(6:16-18). 이 두 가지를 통해,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소망을 붙잡을 수 있습니다. 그 소망은 우리 영혼의 닻이 됩니다. 그 소망이란 무엇일까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소망의 절반에 불과합니다. 요한일서 3:2은 그분은 다시 오실 것이며, 그분이 오실 때 우리는 그분과 같아질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두 가지가 우리 소망의 두 부분입니다. 다음 구절(요일 3:3)은 계속해서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리스도께서 깨끗하신 것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이중의 소망은 “우리 영혼의 확실하고 견고한 닻”(6:19)이라고 불립니다.

배가 닻을 내리면 움직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2장 앞부분에서 표류의 위험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표류를 멈추는 방법은 이 닻, 곧 언젠가 예수님처럼 될 것이라는 소망의 닻을 내리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그 외에 다른 삶의 목표를 가지고 있다면, 예를 들어 많은 돈을 벌거나 위대한 설교자가 되는 것과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다면, 당신은 분명히 표류할 것입니다. 집에서 많은 아이들을 돌보는 어머니이든,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전도자이든 상관없습니다. 두 사람의 닻은 같습니다. 바로 예수님처럼 되고자 하는 소망입니다. 하나님께는 어느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우리 앞서 달려가신 분(Forerunner)으로서 휘장 안으로 들어가셨다는 것을 읽습니다(6:20). 이것은 예수님의 칭호이지만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목자, 길, 진리, 생명, 그리고 그들의 구원자, 주님, 왕, 치유자로 들어봤습니다. 하지만 그분을 앞서 달려가신 분으로 들어본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이 구절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히브리서는 신약 성경에서 복음서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책 중 하나입니다. 오직 히브리서에서만,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 앞서 달려가신 분으로 읽게 됩니다. 그분은 모든 일에 있어 우리와 같이 되셨고, 모든 점에서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으셨으나 죄는 없으셨으니, 그 이유는 그분이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눈물로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2:17; 4:15; 5:7). 오직 히브리서에서만 새 언약의 약속들(8:10-12), 예수님께서 그분의 육신을 통해 우리를 위해 열어 주신 새롭고 살아 있는 길(10:20), 그리고 우리가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 완전함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방법(6:1; 12:1,2) 등에 대해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책은 매우, 매우 중요한 책이며; 그렇기 때문에 사탄은 대부분의 신자들이 이 책을 진지하게 공부하지 못하도록 막습니다. 사탄은 그들이 승리자가 되거나 완전을 향해 나아가거나 닻을 내리고 표류를 멈추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7:1에서는, 살렘(혹은 예루살렘)의 왕 멜기세덱에 대해 읽습니다. 멜기세덱의 제사장직이 레위의 제사장직보다 더 위대함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저자는 흥미로운 방식으로 이를 증명합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을 만났을 때, 그는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의 10%를 멜기세덱에게 주었습니다(7:4). 그리고 레위는 그 당시 아브라함의 몸 안에 있었던 후손이므로, 레위 역시 그 십일조를 멜기세덱에게 바친 셈이 됩니다. 그러므로 멜기세덱은 레위보다 더 큽니다! 예수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으로 임명되셨기에, 그분의 제사장직은 레위의 제사장직보다 더 큽니다.

레위 제사장들은 사람들에게 십일조를 바치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바치지 않는 자들을 저주하실 것이라고 사람들을 위협했습니다(말 3:10). 그러나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 십일조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이 자발적으로 바친 선물을 받았을 뿐입니다. 새 언약에서, 모든 선물은 자발적인 것이며; 십일조를 바치라는 명령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바쳤던 것처럼 자발적으로 선물을 바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부양하기 위해 누구에게도 십일조를 바치라고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바치는 것만 받으셨습니다(눅 8:2,3).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계는 레위 제사장들의 관행을 따릅니다. 목사가 자신과 자신의 사역을 부양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십일조를 바치라고 말할 때, 그는 예수님의 본보기가 아니라 레위 제사장들의 본보기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 제사장들은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기 위해 긴 옷을 입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 제사장들과 주교들도 같은 옷을 입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사도들은 당시 일반 사람들과 똑같은 옷을 입었습니다. 레위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집(성전)이라고 불리는 특별한 건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도 하나님의 집 또는 "성소"라고 불립니다. 이 모든 것은 옛 언약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옛 언약 아래 살고 있으며, 그것이 바로 그들이 죄에 패배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멜기세덱은 이 모든 것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을 만나러 갔습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많은 종들을 축복하기 위해 음식을 가져갔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에게서 돈을 받으러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왕이었기에 돈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선물에 의존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의 시종 318명에게 먹일 막대한 양의 음식을 가져온 데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하기 위해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 중 일부를 멜기세덱에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멜기세덱은 그 선물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복으로 아브라함을 축복했습니다. 바울도 멜기세덱과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자신이 그들의 선물을 받은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그들을 축복하시기 위함이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빌 4:16-19). 그러나 레위 제사장직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선물에 의존했기에 사람들에게 십일조를 바치도록 강요했습니다. 레위 제사장직과 멜기세덱의 제사장직을 비교해 보면 그리스도인 사역에 필요한 올바른 재정 원칙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멜기세덱은 왕의 위엄을 지녔습니다. 예수님과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든 참된 하나님의 종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과 바울은 자신들의 필요에 대해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했습니다. 그들이 다른 사람에게서 선물을 받은 것은, 선물을 준 사람들이 복을 받게 하기 위해서였지, 사람들이 가진 것을 탐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멜기세덱의 제사장직(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이신)의 위엄을 드러내고자 하는 목사들은 레위 지파 제사장들의 방식으로 내려가서는 안 됩니다.

레위 지파 제사장들은 왕의 위엄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십일조를 요구했습니다. 백성들이 레위인들에게 십일조를 내지 않자(느헤미야 시대), 그들은 제사장 일을 그만두고 농사를 지었습니다(느 13:10). 그들은 매달 봉급을 받을 때에만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설교자와 목사들이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방식도 이와 같습니다. 멜기세덱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는 아브라함과 같은 부자 앞에서도 왕의 위엄을 지켰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디에서 그런 하나님의 종들을 찾을 수 있습니까?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부자들에게 아첨하여 돈을 얻으려 합니다.

멜기세덱은 다른 면에서도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의의 왕(그의 이름이 그것을 의미)이자 평화의 왕이었습니다(살렘은 "평화"라는 뜻입니다)(7:2). 의와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났습니다(시 85:10). 더 나아가, 멜기세덱은 창세기에 등장합니다. 창세기는 시작의 책이며 모든 하나님의 사람의 족보, 즉 에녹,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등 명확하게 표시되어 있습니다. 아담부터 아래로 이 모든 사람들의 혈통이 명확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멜기세덱의 아버지나 어머니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 같은 방식으로, 창세기에 나오는 이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의 죽음도 언급됩니다. 그러나 멜기세덱의 죽음은 언급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멜기세덱은 영원부터 하늘에서 살았던 예수님의 예표입니다: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날의 시작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습니다"(7:3).

예수님은 또 다른 면에서도 다릅니다. 옛 언약의 제사장들은 매일 죄를 위한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단 한 번 제사로 드리셨습니다(7:26-28). 제사장들이 제사를 드렸을 때, 그것은 백성의 죄뿐 아니라 자신의 죄까지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직 백성의 죄를 위해서만 자신의 몸을 드리셨습니다. 그분 자신에게는 죄가 없었습니다. 7:26은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수함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우리의 이 대제사장은 땅의 다른 대제사장들과 다릅니다. 그분은 거룩하고 순결하시고 더럽혀지지 않았고 죄인들과 완전히 구별되셨습니다." 그분에게는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다른 어떤 형태의 죄의 흔적도 없었습니다. 그분은 땅에서 완전한 삶을 사셨습니다.

이 두 제사장직의 또 다른 근본적인 차이점에 주목하십시오. 옛 언약 아래서는, 사람이 제사장이 되는 것은 육적인 계명에 의해서였습니다: 즉, 레위의 후손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불멸의 생명의 능력으로 더 나은 언약의 보증인이 되셨습니다(7:16,22). 레위의 제사장직은 세상적인 자격에 의존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이 성경 학교 학위가 있다고 해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레위의 제사장직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멜기세덱의 제사장직에서,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죄로 인해 파괴될 수 없는 생명입니다(7:16). 우리 안에 있는 불멸의 예수님의 생명만이 우리를 새 언약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자격을 갖추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하늘의 생명을 더 많이 가질수록, 우리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새 언약의 제사장으로서 더 효과적으로 사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

7:25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삶을 사신다고 읽습니다. 이것이 멜기세덱 제사장직의 또 다른 특징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그들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축복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친히 우리를 위해 중보하십니다. 레위인 제사장들은 그저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기도를 드리고, 직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그분의 제사장들은 기도에 전념합니다. 시간을 내어 히브리서 7장을 공부하고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제사장직의 차이점을 살펴보십시오.

영광스러운 새 언약

8장은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점이라는 주제로 계속됩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 우리의 대제사장이십니다. 모세가 지은 성막은 실제로 하늘에 있는 실체의 그림자였습니다(8:5).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을 지을 때, 내가 산에서 너에게 보여 준 양식대로 모든 것을 정확히 만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교회를 짓고 모든 사역을 할 때에도, 하나님께서 새 언약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대로 모든 것이 정확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새 언약의 신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레위 제사장의 규례로 돌아가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비극적입니다! 이것이 영광이 떠난 한 가지 이유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양식대로 모든 것을 정확하게 행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바꾸거나 수정하거나 자신의 인간적인 생각을 넣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의 영광이 그 성막 위에 임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신약성경에서 가르쳐 주신 대로 새 언약 교회를 세운다면, 우리도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본보기는 예수님 자신입니다. 옛 언약에는, 성막의 모든 세부 사항이 기록된 두루마리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본보기는 한 분 안에서 발견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본보기를 따라 우리의 삶과 사역을 정확하게 본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의 종이 되려면, 예수님을 더욱 더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당신의 삶과 사역에서 더욱 그분을 본받으십시오. 주님을 섬기는 방법을 알고 싶다면,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이 아버지를 어떻게 섬기셨는지 보십시오. 설교하는 방법을 알고 싶다면, 예수님이 어떻게 설교하셨는지 보십시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알고 싶다면, 예수님이 어떻게 사셨는지 연구하십시오. 집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알고 싶다면, 예수님이 30년 동안 어머니에게 복종하며 집에서 어떻게 사셨는지 보십시오. 일하는 방법을 알고 싶다면, 예수님이 목수 일터에서 어떻게 일하셨는지 보십시오. 이것이 모든 영역에서 우리의 본보기입니다. 그 본보기를 정확히 따라 행하십시오.

새 언약은 8:7-13절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로마서조차도 히브리서만큼 새 언약을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첫 언약에 흠이 없었다면, 두 번째 언약은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히 8:7).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율법에 흠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흠이 있다"라는 단어를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자동차 제조업체가 첫 번째 모델에서 결함을 발견하고 다음 모델에서 바로잡는 것과는 다릅니다. 아니에요. 하나님께서는 첫 언약으로는 인간을 향한 그분의 뜻을 이루실 수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1500년 동안 인간에게 첫 언약을 주셨습니다. 이는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는 결코 하나님의 본성을 드러낼 수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매우 노력했지만 항상 실패했습니다. 모세는 화를 냈고, 다윗은 간음을 저질렀으며, 엘리야는 죽고 싶어 했고, 세례 요한은 감옥에 갇혔을 때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믿음을 잃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율법의 한 가지 목적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거듭난 후 처음 경험하는 것들이 이와 비슷합니다. 우리는 죄를 이기는 승리에 관한 메시지를 듣고, 노력하고, 노력하고, 계속 노력합니다. 하지만 실패하고, 실패하고, 계속 실패합니다. 마침내 어떤 이들은 자신의 힘으로는 승리할 수 없다는 교훈을 깨닫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새 언약으로 인도하십니다. 주님을 섬기고자 할 때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바로 우리의 영적 무능함에 대한 교훈입니다.

심지어 50년 넘게 설교를 한 오늘날에도, 나는 설교하기 위해 일어설 때면, 나는 내가 약하고 무력하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그분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설교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내가 과거의 경험에 의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완전히 어리석은 사람일 것입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은 우리가 말할 때마다, 심지어 같은 메시지를 백 번 전한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새 언약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과거의 죄를 결코 기억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8:12). 옛 언약 아래에서는, 과거의 죄를 끊임없이 기억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에서는 과거의 죄를 전혀 기억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새 언약에 들어갈 때,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하시는 일은 당신의 과거 삶의 기록을 지워버리는 것입니다. 당신은 매우 악한 삶을 살았을지 모르지만,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받고 의롭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평생 죄를 지은 적이 없는 사람처럼 보십니다! 모든 사람은 죄를 지었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회개하는 모든 사람을 완전히 용서하십니다. 예를 들어: 시험에서 합격 점수가 40%이고, 어떤 사람은 25%를 받았고 당신은 0점을 받았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당신보다 나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낙제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은혜 안에서 두 사람 모두에게 100%를 주십니다. 그리하여 두 사람 모두 그분의 눈에 동등해집니다. 이것이 칭의의 경이로움입니다. 당신이 새 언약에 들어간 후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그토록 많이 용서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 외에는 과거를 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새 언약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개인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 것이다"(8:11)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은, 작은 자부터 큰 자까지 모두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보통 "큰 자로부터 작은 자까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세상과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은 작은 자부터 시작하십니다. 가장 작은 신자도 주님을 개인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당신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예언자에게 갈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당신의 아버지이자 친구로 개인적으로 알 수 있으며, 언제든지 어떤 필요가 있을 때라도 그분께 갈 수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 다른 사람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성경을 가르쳐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당신의 아버지로 알기 위해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이웃에게 '너는 여호와를 알라'고 가르치지 않을 것이다"(8:11). 이것이 새 언약 안에서 우리의 특권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이제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그분의 법을 기록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내가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리라”(8:10). 옛 언약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법을 외부, 곧 돌판에 기록하셨습니다. 이제 그분은 그분의 법을 우리 안에 기록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제 우리가 그분께 순종하도록 도우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분은 옛 언약은 “너는 ~~ 해야 한다”와 “너는 ~~하지 말아야 한다”로 가득 차 있다고 말씀하십니다(출 20:1-17). 그러나 새 언약에서, 하나님은 “내가 하리라, 내가 하리라, 내가 하리라, 내가 하리라, 내가 하리라”라고 5번이나 말씀하십니다(8:10-12). 옛 언약은 마치 주인이 종에게 “내 모든 소유물을 완벽하게 관리하고, 집을 완벽하게 정돈하고, 옷을 완벽하게 깨끗하게 세탁하고, 음식을 완벽하게 요리해야 한다”라고 명령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종은 주인의 이러한 명령에 압도됩니다. 하지만 새 언약은 남편이 아내에게 "우리가 모든 것을 함께 하자. 내가 당신이 아이들을 돌보고, 빨래하고, 집을 정돈하고, 심지어 요리까지 할 수 있도록 도와줄게. 나는 모든 일에 당신을 도와줄게."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내에게는 얼마나 일이 쉬워지겠습니까! 새 언약은 아버지가 어린 자녀에게 "내가 네 손을 잡고 알파벳을 완벽하게 쓰는 법을 가르쳐 줄게"라고 말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새 언약 안에서 하나님은 나를 붙잡아 주시고 내가 그분의 계명을 지키도록 도우십니다.

주님께서 우리 생각(minds)에 그분의 법을 기록하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그분의 법을 지키고자 하는 갈망을 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분이 우리 마음(hearts)에 기록하신다는 것은 또한 우리에게 그 법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빌립보서에서, 우리는 같은 내용을 다른 말로 읽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사 그분의 기쁘신 뜻을 행하기를 원하게 하시고(=갈망) 행하게 하시느니라(=능력)"(빌 2:13).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때 그분과 협력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계명을 기록하신 시내산의 반석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반석은 하나님께 순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글을 쓰실 때, (말하자면) 바위가 “좋아요, 하나님, 제게 쓰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쓰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법을 우리 안에 쓰시도록 허락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에게 “저는 주님께 복종합니다. 주님께서 제 안에서 하시기로 정하신 것은 무엇이든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마리아는 복종했고,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태중에 예수님의 몸을 창조하셨습니다. 마리아 스스로는 그것을 만들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리아가 복종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태중에 그 몸을 만들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복종했고, 성령께서 그 몸을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본보기입니다. 우리는 복종하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성품을 만들어 내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만들어 낼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성품을 만들어 내려는 것은 마치 동정녀 마리아가 스스로 아기를 낳겠다고 결심한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입니다! 마리아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 몸을 만들어 내셔야 했습니다. 신약 성경이 바로 이 이야기로 시작된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마리아는 복종했고, 성령께서 그 몸을 만들어 내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하나님의 손가락이라고 부르셨습니다(마 12:28과 눅 11:20 비교). 성령은 시내산에서 두 돌판에 글을 쓰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기록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갈망과 능력을 주시는 분입니다. 나사렛에서, 마리아가 성령께 기꺼이 순종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그녀를 지나쳐 다른 사람을 예수님의 어머니로 삼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면 마리아는 그 영광과 특권을 놓쳤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당신이 성령께 복종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당신을 지나쳐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계획하신) 특별한 사역을 성취할 특권을 다른 사람에게 주실 것입니다. 당신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을 성취할 특권을 놓치지 마십시오.

8:13에서, 우리는 "옛 언약은 낡아졌다"라고 읽습니다. 9장의 주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더 나은 제사를 통해, 새 언약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유익입니다. 옛 언약의 성막에는,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두꺼운 휘장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통해 백성들에게 그들의 삶 속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에 들어갈 수 없음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셨을 때, 휘장이 찢어지고 인간은 이제 하나님 임재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우리의 완벽한 제물

9:9에서, 우리는 옛 언약이 예배자의 양심을 완전하게 할 수 없었다는 것을 읽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도달할 수 없는 "완전함"이 있지만;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완전함도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우리 존재 전체가 전적으로 완전해지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새 언약 안에서 산다면, 우리는 "우리의 양심 안에서 완전해질" 수 있습니다. 이 완전함으로, 우리는 최종적인 완전함을 향해 나아갑니다. 우리는 완전한 양심으로 시작하여 그리스도와 완전히 닮은 모습으로 끝을 맺습니다. 따라서 완전함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단지 우리의 양심 안에서 완전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것들을 구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혼란스러울 것입니다.

9:14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흠 없는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흠 없이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셨을까요? 그분은 이 땅에 사시는 33년 반 동안 우리와 똑같이 여러 가지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죄를 짓지 않으셨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셨을까요? 이 구절이 그 답을 알려줍니다: "영원하신 성령을 통해". 예수님이 흠 없이 남아 계실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의 고유한 능력이 아니라, 성령이 지금 우리에게 주시는 것과 같은 성령의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서 이 땅에 사셨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처럼 그 능력을 구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마치 우리 집에 있는 전기가 수많은 전자 기기에 전원을 공급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우리가 그 전원을 모든 기기에 연결하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통해, 우리도 양심 안에서 흠 없이 자신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죄뿐만 아니라 죽은 행실에서도 깨끗하게 합니다(9:14). 죽은 행실이란 사람들 앞에서 거룩하고 선하게 보일 수 있는 행실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들은 사랑도, 기쁨도, 믿음도, 열심도 없이 행하는 일이며, 개인적인 이득을 위해 행하는 일이며, 단지 양심의 가책을 덜기 위한 행위, 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 전에 회개하고 이러한 죽은 행실에서 자신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9:27은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하신 일이요, 그 후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두 가지 진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사람은 죽으면 심판 외에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죽은 후에는 회개할 두 번째 기회가 없습니다. 또 다른 아름다운 진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이 죽을 때까지 기다리신 후에야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죽기 전에 언제든 나아지기를 바라십니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죽기 훨씬 전에 그들을 심판합니다. 그들에게 아무런 희망도 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범을 따르고,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그들을 판단하지 않도록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 자신도 많은 죄에서 구원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10:1에서, 우리는 율법이 결코 누구도 완전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읽습니다. 여기서 다시 "완전함"이라는 단어에 주목하십시오. 옛 언약의 문제점은 무엇이었을까요?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그것은 누구도 완전하게 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옛 언약 아래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그들은 "완전함"이라는 단어를 두려워합니다. 새 언약의 주요 특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람들을 양심 안에서 완전하게 하여, 삶에서 완전함을 향해 나아가도록 돕고, 마침내 그들이 예수님처럼 될 때까지 그렇게 합니다.

새 언약에 대해 진지하다면, 더 이상 "완전함"이라는 단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완전해지기를 갈망할 것입니다. 완전해지기를 갈망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옛 언약의 그리스도인입니다.

10:5에서, 우리는 "하나님은 우리의 제물을 원하지 않으신다"라고 읽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헌금을 원하신다고 계속 말하는 설교자들 때문에 고통을 겪은 사람들에게 나는 이 구절을 인용합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바로 우리의 몸입니다. 옛 언약에서는, "레위 사람들에게 십일조를 바치라"는 것이 강조되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너희 몸을 하나님께 드리라"(롬 12:1)는 것이 강조됩니다.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십일조를 바치도록 요구하는 교회는 옛 언약 교회입니다. 새 언약 교회는 우리의 몸, 즉 눈, 손, 혀 등을 하나님께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물질적인 제물이 아니라 우리의 몸입니다.

우리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새 언약에서, 옛 언약의 십일조에 해당하는 것 입니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옛 언약에서 유월절에 희생된 어린 양에 해당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일을 위해 돈을 바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까? 물론 드릴 수는 있지만, 하나님은 당신이 기쁘게 드리는 것만을 원하십니다(고후 9:7). 어떤 경우든,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당신의 몸을 원하십니다. 그분께 몸을 드리는 자들은 대개 다른 모든 것도 그분께 드립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그분은 아버지께 십일조와 물질적인 헌금을 드리러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10:5). 그분은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리러 오셨습니다. 그분은 새 언약의 중보자이시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은 바로 우리의 몸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돈과 봉사를 바칩니다. 당신은 수백 장의 전도지를 배포했거나, 어려운 지역에서 수년간 선교사로 봉사했거나, 여러 시간 동안 기도했거나, 여러 날 동안 금식했다고 자랑할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좋은 제물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여전히 눈으로 성적 욕망을 품고 성을 낸다면, 그러한 제물은 하나님께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원하시는 것인 당신의 몸을 드리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네 제사와 제물을 내게 주는 것은 잊어버려라. 무엇보다도 먼저 네 눈과 혀를 내게 주어라. 나는 네 몸을 원한다." 물질적인 제물로 당신의 몸을 대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드린 물질적인 제물을 중히 여기는 사람들은 옛 언약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새 언약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당신의 몸입니다. 히브리서는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책 중 하나입니다. 새 언약 안에서 살고 싶다면 히브리서를 공부하십시오.

예수님은 하늘에 계셨을 때 몸(body)을 가지신 적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아버지께서 그에게 몸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몸으로 무엇을 하실 예정이었습니까? 아프리카처럼 험난한 곳으로 선교사로 가서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실 예정이었습니까? 아니면 매일 4시간씩 기도하고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실 예정이었습니까? 그런 것은 전혀 아닙니다. 예수님은 “오 하나님이여 내가 (땅에) 온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함이요 제사를 드리려 함이 아니니이다”(10: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사용하신 목적이며, 그리고 우리 역시 우리 몸을 이와 같이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그것은 이후로 우리의 눈과 손, 혀와 열정, 갈망 등 몸의 모든 부분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행하겠다는 뜻입니다. 이후 우리의 삶에서 유일한 열정은 매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곧 너희의 성화라(거룩하게 되는 것)”(살전 4:3) 이것이 우리 모두를 위한 하나님의 뜻의 첫 번째 부분입니다. 우리 사역에 있어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하려고 여기저기 허둥대며 뛰어다녀서 안 됩니다. 우리는 사역 안에서 다시 한번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늘의 천사들은 하나님을 위해 어떤 식으로든 바쁘게 일하려고 뛰어다니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아버지를 위해 이것저것 하려고 뛰어다니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을 구하셨고, 그대로 행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18세부터 30세까지 목수로 일하라고 하셨을 때,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 모든 세월 동안 이 땅에서 충실히 일하신 후, 아버지는 3년 반 동안 나가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파하고 병든 자들을 고치실 때와 마찬가지로, 12년 동안 의자와 탁자를 만들 때에도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선교사가 되거나 전임 사역을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그것이 무엇이든, 오직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목수 일이었을 때, 그분은 그 일을 했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전임 사역이었을 때, 그분은 그 일을 했습니다. 우리 또한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헌신해야지, 이 직업이나 저 직업을 하는 데 헌신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선교사가 아닌 목수로 부르실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기꺼이 하시겠습니까?

만약 내가 인도 군대에 입대한다면, 내가 원하는 곳에 배치해 달라고 요청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가라고 하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그들은 나를 전장에 배치할 수도 있고, 아니면 뒤에서 보급 부서에 배치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선택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군대에 입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보소서, 오 하나님이여, 내가 당신의 뜻을 행하러 왔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그분은 첫 번째 언약을 폐하시고 두 번째 언약을 세우셨습니다(10:8,9).

첫 번째 언약에는 많은 종교적 활동이 있었습니다. 특히 성막과 성전 안에서 활동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상 생활의 90% 동안 종교적인 일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30년 동안 집에서 어머니를 도우시고 목수로서 가족을 부양하셨습니다. 그 후 3년 반 동안은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을 마치시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셨습니다(요 17:4 참조). 우리는 이 구절에서 집에서 어머니를 돕는 것이 병든 사람을 고치는 것만큼이나 하나님 보시기에 중요하다는 것을 배웁니다. 새 언약에서, 하나님께서 특정한 때에 당신이 행하기를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하나님의 뜻이며, 그것이 바로 그 특정한 때에 당신이 행할 수 있는 가장 거룩한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분명한 부르심 없이 전임 사역과 선교 사업에 나갔습니다. 그들은 결국 좌절하고 낙담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 누군가의 압력으로 인해 "외국에서 하나님을 섬기러" 나간 탓에 삶을 엉망으로 만든 늙은 선교사들을 우연히 만났습니다.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본을 따르십시오. 그분은 우리 모두를 위해 본보기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런 다음 언약의 약속들이 10:16,17에 반복됩니다. “내가 내 법들을 그들의 마음속에 두고 그들의 생각 속에 그것들을 기록할 것이다. 나는 그들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내용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두 번째로 반복되는 것입니다.

새롭고 살아있는 길

10:19-25은 히브리서의 핵심 구절입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 안으로 들어가 영원히 살 수 있도록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살아있는 길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으며, 새 언약 안에서 우리의 특권이기도 합니다. "형제들아, 이제 우리는 (첫째는)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두 번째는) 휘장 곧 그분의 육체를 통하여 우리를 위하여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살아있는 길로써, 지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성전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휘장은 그분의 육체(flesh), 즉 그분의 자기 뜻을 상징합니다. 이 육체는 그분께서 이 땅에 사시는 동안 매일 찢어졌으며(십자가에 못 박히심), 이는 항상 아버지의 뜻만 행하기 위함이었습니다(요 6:38). 이 길은 새롭고 살아있는 길이라고 불립니다. "새롭다"는 "항상 신선하다"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 5:9에서, 우리는 그들이 하늘에서 예수님의 갈보리 죽음에 대한 새 노래를 불렀다는 것을 읽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새” 노래가 될 수 있을까요? 그 노래는 그것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신선합니다. 마치 그들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처음 듣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살아있고 신선하게 느끼게 하시는 방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따르는 길 또한 우리에게 매일 새롭게 다가오고 흥미진진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늘 신선한 길이며, 자아와 우리 자신의 의지에 대한 죽음의 길입니다. 매일 하나님의 뜻만을 행하기 위해 우리 몸을 바치는 것입니다. 이 장의 앞부분에서 보았듯이, “보소서, 오 하나님, 내가 주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우리는 지금 휘장을 찢을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휘장을 찢으시고 길을 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살기 위해 그 길을 따라 걸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걸어갈 이 새로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길을 걷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이 길을 열기 위해 33년 반 동안 매일 자아에 대해 죽는 대가를 치르셔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지금 우리에게 걸어가라고 초대하시는 거룩함의 고속도로입니다(사 35:8). 하지만 우리는 그 길 자체, 곧 십자가의 길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의 시선은 항상 목표에 고정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의 교제라는 기쁨이 자신 앞에 놓여 있기 때문에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만약 당신이 새로 만든 훌륭한 길로 첸나이에서 방갈로르까지 여행한다면, 그 길을 감탄하며 시간을 허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결코 방갈로르에 도착하지 못할 것입니다. 길은 단지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십자가의 길은 아버지의 임재에 들어가 매일 그곳에 거하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육신을 죽이는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우울하고 비참하며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비판적입니다. 이는 그들의 육신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삶에서 아무런 진전을 이루지 못합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은 여전히 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목적지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그리스도를 닮지 못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그리스도를 닮고 하나님과 더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는 길을 바라보지 않고 예수님을 바라보며 경주해야 합니다(히 12:1). 경주자는 자신이 달리고 있는 길을 결코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들은 항상 결승선을 향해 앞만 바라봅니다. 길을 내려다보며 달리는 사람은 경주에서 꼴찌가 될 것입니다. 십자가의 메시지에만 사로잡혀 있다면 당신은 거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그 자신의 인격에 사로잡혀 있다면 당신은 거룩합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걸어갈 십자가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며 앞서 달려가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진실한 마음과 믿음의 완전한 확신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악한 양심에서 깨끗해지고, 우리의 몸은 맑은 물로 씻겨졌습니다(10:22). 이 마지막 구절은 우리가 몸으로 지은 모든 죄가 바로잡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상처를 준 모든 사람에게 사과했고, 남에게 속여 빼앗은 돈도 돌려주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혀와 손은 그러한 더러움에서 깨끗해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소망의 고백을 굳게 잡고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동료 신자들을 생각하고 “어떻게 그들이 사랑하도록 격려할 수 있을까 고민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가능한 한 자주 다른 사람들과 교제”하며 주님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립니다(10:23-25). 이 구절, 10:19-25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묵상하십시오. 히브리서에서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그런 다음 저자는 고의로 죄를 짓는 것의 위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더 이상 우리 죄를 위한 제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했다면 죄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근본적으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약해지는 순간에 넘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죄를 미워하고 죄를 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새롭고 살아있는 길은 길이지 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계속 전진해야 하는 길입니다. 나중에 12:1에서, 저자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경주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앞으로 나아가려는 노력을 멈추면 타락하게 됩니다. 하늘에 있는 비행기는 움직이는 한 계속 떠 있습니다. 엔진을 끄고 멈추면 즉시 추락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계속 전진하지 않으면, 우리는 타락하게 될 것입니다.

이어서 저자는 구약 시대의 사람들이 죄를 지었을 때 자비 없이 벌을 받았다고 우리에게 경고합니다(10:28).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들보다 훨씬 더 높은 부르심으로 부르셨기에, 지금 죄를 가볍게 여긴다면 우리의 형벌은 더 클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우리 발 아래 짓밟고, 예수님의 피를 하찮은 것으로 여기고, 성령의 음성을 멸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떨어지는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10:31).

이어서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기꺼이 고난을 겪어야 한다고 말합니다(10:32-34). 사람들이 우리의 재산을 빼앗아 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세상적인 것들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인도에 박해가 닥치면, 우리는 세상적인 많은 것들을 잃고 명예도 잃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정직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쉽게 일자리를 얻지 못할 수도 있고, 승진도 못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대적하고 교회 건물을 허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지성소에서 산다면, 이러한 것들을 기쁘게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10:34). 우리는 하늘에 훨씬 더 좋은 소유가 있다는 것을 알기에, 이러한 것들이 우리를 괴롭히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하지 않고 뒤로 물러선다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기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10:38). 두 가지 길밖에 없습니다. 믿음으로 살거나 뒤로 물러서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면 발전할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의 반대는 뒤로 물러서는 것입니다(10:38). 그러므로 우리는 그 구절에서 모든 타락은 주로 믿음의 실패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의 영웅들

그런 다음 11장에서, 그는 믿음의 주제를 확장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구약 시대의 성도들도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11:4). 믿음이란,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가 확실히 진리라고 아는 것들을 믿는 것입니다. 아직 보지 못한 것들을 받게 될 것이라는 확고한 확신입니다. 아벨은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자신이 가진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창 4:4). 반면에 가인은 하나님께 값싼 제물을 드렸습니다(창 4:3). 에녹도 300년 동안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히 11:5). 다른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살 때,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행하며 그분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에녹을 300년 동안 시험하신 후 그를 하늘로 데려가셨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없다면, 우리가 다른 어떤 좋은 자질을 가지고 있더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11:6).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하고 많은 희생을 치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분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분을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보고 믿는 자보다 더 복되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20:29).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그분에 대해 두 가지를 믿어야 합니다: 첫째, 그분은 하늘에 실제로 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분은 자신을 부지런히 찾는 모든 사람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히 11:6).

당신은 정말로 당신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시다고 믿습니까? 당신을 위해서요? 당신은 어려움이나 문제에 직면했을 때, 누구에게 가장 먼저 의지하십니까? 당신이 믿음으로 산다면, 의지하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장 먼저 의지해야 할 분은 하나님이셔야 합니다. 만약 우리 나라의 통치자가 나의 아버지라면, 문제가 생길 때마다 나는 아버지께 전화를 걸어 "아빠, 문제가 좀 있는데 도와주실 수 있나요?"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아버지는 "물론이지. 무슨 문제니?"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나는 아버지에게 나의 문제를 말씀드릴 것이고, 아버지는 "아들아, 걱정하지 마. 내가 해결해 줄게."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전화를 끊고 편히 쉴 것입니다. 당신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통치자들보다 더 힘이 있다고 믿으십니까? 질병처럼, 강력한 통치자들조차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먼저 그분께 말씀드리지 않으십니까? 문제가 크든 작든, 어떤 문제든 항상 먼저 하나님께 나아가는 습관을 기르도록 합시다.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십니다"(11:6).

노아도 믿음으로 살았습니다(11:7). 그는 자신의 삶의 방식으로 "세상을 정죄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노아가 자신의 재산을 팔고 저축한 돈을 모두 방주를 만드는 데 쓰고 하나님의 심판이 세상에 임할 것이라고 전파하는 것을 보았을 때, 그것은 세상의 생활 방식에 대한 정죄였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은 돈을 오로지 자기 자신을 즐겁게 하는 데만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노아는 항상 자신을 부인했습니다. 그는 휴가도 가지 않았고, 멋진 옷이나 사치스러운 생활에 돈을 낭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방주를 짓는 데 쓸 수 있는 모든 것을 썼습니다. 이렇게 그는 세상을 정죄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는 데 가장 큰 열정을 쏟는다면, 그 역시 세상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여기저기 여행하고 기독교 서적 등을 사는 데 돈을 쓴다는 건 미친 짓이에요.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쓸 수 있는 돈을 말이죠!"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남는 것은 오직 교회뿐입니다. 노아와 같은 믿음을 가진다면, 당신의 시간, 에너지, 돈을 쓰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당신은 믿음을 드러낼 것입니다. 사람들은 당신이 무엇을 위해 시간과 돈, 에너지를 쓰는지를 보고 있습니까?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을 때 갈대아 우르를 떠났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떠나라고 말씀하실 때까지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말씀하시기 전까지는 어떤 곳에서도 떠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그는 집을 떠나 즉시 순종했습니다(11:8).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셨을 때, 그는 즉시 순종했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아브라함에게 어디로 가는지 물었다면, 그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누가 나를 인도하시는지는 압니다.”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는 낯선 땅에서 나그네처럼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늘을 위해 살았기 때문입니다(11:9). 아브라함과 사라도 믿음으로 자녀를 가질 수 있는 능력을 얻었습니다. 그는 노쇠했고 아내는 불임이었을 때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남편과 아내 모두의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사라처럼 믿음이 강한 아내를 얻는다면 당신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은 약속한 것을 받지 못한 채 믿음 안에서 죽었습니다(11:13). 그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고자 하신 모든 것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아주 조금 받았을 뿐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땅의 모든 족속이 그를 통해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것을 보았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그 약속의 성취를 보지 못한 채 가나안에서 죽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그 약속은 성취되었습니다.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은 죽기 전에 우리의 수고의 최종 결과를 결코 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인도로 간 선교사 윌리엄 캐리는, 자신이 인도어로 번역한 성경이 인도와 그의 삶에 도전 받을 전 세계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축복이 될지를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에콰도르의 선교사인 짐 엘리엇은, 아우카족 가운데 그리스도를 믿게 될 많은 사람들과 그의 삶을 통해 축복을 받게 될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을 보지 못한 채 아주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신이 믿음으로 살고 신실하다면, 당신의 삶은 당신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축복을 전하며 계속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삶은 그가 이 땅의 것들을 위해 살았던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나라를 위해 살았음을 보여주었습니다(11:16).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을 때 믿음으로 이삭을 바쳤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이삭에 대한 사랑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지 시험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그분의 약속을 성취할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이삭이 죽었다면 그 약속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를 죽음에서 살리시어 그분의 말씀을 성취하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11:19). 인류 역사상 그런 일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을 때, 아브라함은 이삭이 죽음에서 부활할 것이라고 믿을 만큼 놀라운 믿음을 가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그분의 종들에게 시키십니다. 엘리야가 하늘에서 제단에 불을 내려달라고 했을 때, 그는 먼저 백성들에게 물통 열두 개를 그 위에 부으라고 했습니다 - 물이 불을 꺼뜨릴 만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는 불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지 싸구려 마술사의 속임수가 아님을 증명하고자 했습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이삭의 믿음에 대해 읽습니다. 그는 야곱과 에서에게 미래의 일에 대해 축복했습니다. 후에 야곱 또한 믿음으로 그의 자녀들을 축복했습니다(11:21). 우리도 믿음으로 자녀를 축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길을 가르치고 인도했기에, 그들의 미래에 대해 축복할 수 있습니다. 부모로서 우리는 이삭과 야곱이 그들의 자녀들에게 준 것처럼, 자녀들에게 얼마나 큰 축복을 줄 수 있습니까!

또한 여기서 우리는 야곱이 "지팡이에 의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읽습니다. 브니엘에서, 하나님은 그의 허벅지뼈를 탈골시키고 그의 육체의 힘을 꺾으셨고,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바꾸셨습니다. 야곱이 그 후로 의지했던 그 지팡이는 그가 이제 하나님께만 의지하여 도움을 구하는 깨어진 사람이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의 수많은 위대한 업적이 나열된 한 장에서, 우리는 지팡이에 의지했던 한 사람의 주요 업적에 대해 읽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가장 위대한 기적 중 하나는 바로 사람의 혼적인 힘을 꺾어 그로 하여금 무력하게 오직 하나님께만 의지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요셉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머물지 않고 가나안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11:22). 11:23에서 우리는 부모의 믿음에 대한 또 다른 예를 볼 수 있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그들의 아이를 아름다운 아이로 여겨 모든 남자 아기를 죽이라는 파라오의 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를 숨겼습니다. 우리도 부모로서 우리 자녀를 하나님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아름다운 아이로 보아야 합니다. 그 부모들은 모세가 어릴 적에 그에게 그러한 믿음을 심어주었기 때문에, 그가 성장한 후에는 믿음으로 세 가지 중요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는 세상의 명예를 거부했습니다(파라오의 딸의 아들로 알려지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는 죄의 쾌락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재물도 거부했습니다(11:24-26). 당신이 믿음으로 산다면, 또한 이 세 가지를 거부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명예, 이 세상의 죄악된 쾌락, 그리고 이 세상의 재물 말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러한 것들 대신 언젠가 오실 메시아(그리스도)의 치욕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그 치욕 또한 우리도 선택하게 될 것입니다. 이어서 저자는 믿음의 사람들이 이룬 다른 놀라운 일들, 곧 홍해를 가르고 여리고 성벽을 무너뜨린 일들을 언급합니다(11:29,30). 여기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점에 유의하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은 믿음으로 홍해를 건넜습니다. 그러나 애굽 사람들이 그들을 따라 했을 때 그들은 익사했습니다(11:29)! 기생 라합은 가나안 여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호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보호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녀의 믿음을 존중하셨습니다. 때때로, 우리도 믿음의 길을 걸으며 위험을 감수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어서 저자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그리고 선지자 사무엘을 언급합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정복하고, 사자의 입을 막고, 불의 세력을 멸하고, 칼날을 피하고, 군대를 도망치게 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여자들은 믿음으로 죽은 자녀를 다시 살아나게 하여 되돌려 받기도 했습니다(11:31-35).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믿음의 한 면, 즉 놀라운 기적을 행하는 믿음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또 다른 면이 있습니다. 똑같은 믿음을 가졌지만 그런 일을 경험하지 못한 남녀들이 있었습니다. 믿음을 부인하기를 거부한 이들 중 일부는 고문과 죽음을 당했고,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야 비로소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믿음의 다른 남녀들은 조롱과 채찍질, 쇠사슬과 투옥을 경험했습니다. 믿음의 어떤 이들은 돌에 맞고, 어떤 이들은 톱으로 두 동강이 났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이사야는 톱으로 두 동강이 났다고 합니다.) 믿음의 어떤 이들은 죽임을 당했고, 어떤 이들은 양가죽과 염소가죽을 입고 궁핍하고 괴로움을 당하고 학대를 받으며 떠돌았습니다. 그들은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을 헤매며 살았습니다. 이 모든 사람들은 앞서 언급한 기적적인 건짐을 경험한 이들처럼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을 위해 세우신 계획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어떤 이들은 믿음으로 큰일을 이루고 기적을 경험하게 하시는 반면, 어떤 이들은 믿음 때문에 감옥에 갇히고 고문을 당하게 하십니다. 육적인 신자들은 후자보다 전자를 더 귀하게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모두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존귀한 사람들로 보십니다. 그들은 모두 이 세상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너무나 선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이 항상 바다를 가르고 사자들의 입을 막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때로는 사자들이 우리를 죽이고 잡아먹거나 목을 베려고 올 때에도 하나님께 진실하게 서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님이심을 선포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그것 또한 믿음입니다. 이 두 가지 믿음의 표현이 11장에서 함께 언급됩니다. 우리는 이 중 어떤 길을 우리를 위해 계획하셨는지 하나님께 맡깁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불 속에 들어갔지만 불에 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인들 중 많은 이들이 박해자들에 의해 불에 타 죽었습니다. 다니엘은 사자 굴에 들어갔지만 아무 상처도 없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사자들에게 던져졌고 사자들은 그들을 먹었습니다. 누가 더 큰 믿음을 가졌을까요? 둘 다 동등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한 사람은 죽음을 피하는 믿음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죽기까지 신실한 믿음이었습니다. 사자가 우리를 잡아먹을지 살려줄지, 우리가 목이 잘릴지 피할지는 하나님께서 결정하십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 결정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야고보는 목이 잘렸지만 베드로는 살아남았습니다(행 12장). 두 사람 모두 동등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그들 각자에 대해 달랐습니다.

11장은 옛 언약 아래서, 이 두 믿음의 사람들(승리한 자들과 인내한 자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다고 결론짓습니다. 그러나 이어서 하나님께서 지금 새 언약 안에서 우리를 위해 더 나은 것을 예비하셨다고 말합니다. 11장에 나열된 사람들이 경험한 어떤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난 것입니다. 이 '더 나은'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서에 여러 번 나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 우리의 본

오늘날 우리의 믿음은 아벨, 모세, 에녹, 혹은 11장에 나열된 어떤 사람들을 우러러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다른 모든 사람을 떠나 예수님을 바라보는”(12:2)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 믿음의 창시자요 또 완성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바라보며 이 경주를 달립니다. 우리는 가만히 서 있지 않습니다. 믿음의 경주는 가만히 서 있을 수 없는 경주입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달려야 합니다. 넘어지면 일어나 계속 달려야 합니다. 경주에서 넘어졌다가도 다시 일어나 계속 달려 선두를 차지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동행하는 삶에서 때때로 넘어지더라도 낙담하지 마십시오. 거기에 주저앉지 마십시오. 일어나 죄를 고백하고 계속 달려가십시오.

십자가를 참으시고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많은 원수들이 당신을 대적할 때, 그토록 많은 원수들이 대적했던 그분을 생각하십시오(12:3). 여러분은 아직 그분처럼 죄와 맞서 싸우며 피 흘리기까지 저항하지 않았습니다(12:4).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죄와 맞서 싸우셨음을 봅니다. 다시 말해, 죄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는 "나는 죄를 짓느니 차라리 나의 피를 흘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당신도 같은 태도, 즉 죄를 짓느니 차라리 죽겠다면, 당신도 이기는 자가 될 것입니다. 거짓말을 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 "거짓말을 하느니 차라리 죽겠다"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이기는 자가 될 것입니다. 돈을 더 벌기 위해 조금이라도 속이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 "조금이라도 속이느니 차라리 죽겠다"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이기는 자가 될 것입니다. 예쁜 여자를 탐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 "욕망하기보다는 차라리 죽겠다"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이기는 자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이기는 삶을 사는 비결입니다.

이어서 저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 징계하시는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본보기로 바라보고; 우리를 징계하시는 아버지를 바라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 아버지로서 우리를 징계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징계도 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징계를 받는 동안 행복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지만, 나중에 그것이 우리 안에 거룩함을 낳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12:4-11).

12:14에서, 우리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추구하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것 없이는 우리는 주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떤 이유로든 누구와도 다투거나 언쟁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평화의 사람으로 알려지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12:16에서는, 세상적인 작은 이익 때문에 영적 장자권을 잃은 에서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세상적인 이익을 위해 자신의 신념을 타협하여 영원한 유산을 잃지 마십시오. 에서는 나중에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울며 장자권을 달라고 간청했지만, 자신이 내어준 것을 돌려받지 못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한 어리석은 선택과 허비한 삶을 되돌아보며 눈물로 기도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인생을 다시 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지혜롭게 처신하십시오.

12:18-23에서, 저자는 우리가 율법이 주어진 시내산이 아닌 시온산(교회)에 이르렀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처럼 두려움과 떨림 속에 살 필요가 없습니다.

12:24에서, 예수님의 피는 아벨의 피와 대조됩니다. 아벨의 피는 심판을 간구했고, 예수님의 피는 자비를 간구합니다. 가인이 아벨에게 해를 끼친 것처럼 누군가가 당신에게 해를 끼칠 때, 당신은 그 사람에 대한 심판을 구하거나 자비를 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옛 언약 아래 있는지 새 언약 아래 있는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옛 언약을 따르다가 누군가 당신에게 해를 끼치면, 아벨처럼 심판을 부르짖으며 “주님, 저 사람을 벌하소서”라고 말할 것입니다. 다윗과 다른 시편 기자들이 기도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면 자비를 구하며 “주님, 저 사람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는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12:25-29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왕국, 곧 교회에 대해 읽습니다. 교회는 영원히 남을 유일한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흔들리고 파괴될 것입니다. 돈, 금, 부동산, 재산, 혹은 이 땅의 어떤 것에 의지했던 사람들은 삶이 흔들리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재산을 가질 수 있지만, 그것을 신뢰하지 마십시오. 오직 하나님께만 의지하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감사함으로 그분을 섬길 것입니다. 저자는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을 일깨워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가졌던 두려움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지셨던 것처럼 경건함과 경외심으로 그분을 섬겨야 합니다(히 5:7).

13장에서, 저자는 몇 가지 마지막 권면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형제를 사랑하십시오. 집에 오는 사람을 환대하십시오. 고통받는 사람들과 학대받고 옥에 갇힌 그리스도인들을 기억하십시오. 그들과 함께 고난을 겪고 격려하십시오. 결혼 생활을 완벽하게 순결하게 지키십시오. 혼인 관계 밖에서는 결코 성관계를 갖지 마십시오. 그런 사람은 모두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입니다”(13:1-4).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것이 무엇이든 그것에 만족하고 완전히 흡족해 하십시오(13:5). 돈을 좇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시고 버리지 아니하시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약속은 마치 은행 계좌에 많은 잔고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당신과 함께하실 것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가진 것을 보고 그것들을 탐하지 마십시오. 더 좋은 집, 더 많은 옷, 좋은 차, 그리고 많은 전자 기기들이 당신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당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십시오. 주님께서 “내가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고 버리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러면 어떤 상황에서든 담대히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누가 내게 어찌하리요"(13:6)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사람이나 어떤 상황도 두려워하지 않고 살 수 있을 것입니다.

13:7에서, 우리는 우리를 이끌어 주신 연로한 경건한 사람들의 삶을 살펴 그들의 삶에서 나오는 좋은 결과를 보고 그들의 본을 따르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 그들을 인도하시고 축복하신 그분께서 당신도 인도하시고 축복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신 일을 당신일 위해서도 행하실 수 있습니다. 저자는 우리에게, 그것을 전파하는 사람들에게조차 경건함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이상한 교리에 사로잡히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올바른 교리는 "은혜로 마음을 굳건하게 하여" 죄를 짓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13:9). 오늘날 이상한 교리들이 많이 전파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이러한 교리들이 그것을 전파하는 사람들을 더욱 그리스도와 닮게 만들었는지 항상 알아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런 교리를 따르지 마세요.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모든 세대에서 항상 진영 밖으로 나가, (세상과 종교적이지만 영적이지 않은 그리스도인 모두에게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치욕을 짊어지는 것을 수반합니다(13:10-13).

항상 하나님께 찬양의 제사를 드리는 법을 배우도록 합시다(13:15).

13:17에서, 우리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순종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위에 영적 권위를 부여하신 분들을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고, 복종해야 합니다. 저자는 모든 신자들에게 그들을 영적으로 인도하는 어떤 형태의 영적 권위를 가진 지도자들이 있다고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 지도자들은 언젠가 당신에 대해 하나님께 보고해야 합니다. 당신의 장로들이 당신과 그들에게 맡겨진 모든 사람에 대해 하나님께 보고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 장로 형제들도 이 구절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양 떼에 대한 책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이 서신의 마지막 축복은 다음과 같습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곧 영원한 언약의 피로 양들의 위대한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을 모든 선한 일에 온전히 준비시켜 그분의 뜻을 행하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분이 보시기에 기뻐하시는 것을 우리 안에서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영광이 그분께 영원무궁토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13: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