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하나님 앞에 서서 성령의 불을 가지고 설교하는 예언자들은 어디에 있는가, 누가 주님을 위해 순결하게 교회를 지킬 수 있는가?
하나님의 종들은 어디에 있는가:
그런 자들은 모든 나라에서 보기 드물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날 그러한 사람을 필요로 한다.
그런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싶다면, 이 시대의 마지막 날에 이 책을 읽어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한 가지를 가르쳐 준다 - 그것은 하나님은 그분이 많이 맡기신 자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종들에게 엄격하시다, 이는 그들에게 많은 것을 맡기셨기 때문이다.
모세가 불타는 떨기 나무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이집트로 가는 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고 하셨다는 것을 읽었다(출4:24). 하나님이 방금 그를 그분을 섬기는 것에 부르셨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모세는 그 임무를 완수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지구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고, 하나님은 그를 훈련시키는 데 80년을 보내셨다!! 왜 하나님은 모세를 죽이려고 했을까 ?
유대인이 아닌 모세의 아내 십보라는 그들의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는 것을 믿지 않았었다. 그리고 모세는 아내의 의견에 복종하여 하나님께 불순종하였다. 모세는 이제 하나님의 백성의 지도자가 될 것이었다. 그런데도 여기서 그는 자신의 집에서 아내를 기쁘게 하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었다. 모세가 죽어가고 있을 때, 십보라는 남편 병의 이유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녀는 즉시 아들에게 할례를 했다. 그제서야 하나님은 모세의 목숨을 살려주셨다.
거기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종들에게서 어떠한 타협이나 불복종이나 아내를 기쁘게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려면 완전히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에게 편애는 없다. 하나님은 그분의 가장 뛰어난 종이라도 하나님을 거역하면, 심판할 것이다.
인내의 중요성
모세가 120살이었을 때, 하나님은 그를 다시 벌주셨다. 그리고 이번에는 처벌이 풀리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에게 물이 흐르도록 바위에게 명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모세는 이성을 잃고 먼저 하나님의 백성을 치고, 그 다음에 바위도 쳤다(민 20:7-13 ). 그것은 우리에게 작은 실수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는 그것이 심각했다.
모세는 백성들에게 "너희 반역자들아, 이제 들어라"하고 화를 내며 말했다(민 20:10) . 거기에 함축된 것은 모든 백성이 반역자인데 반해 모세 자신은 반역자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세 역시 바로 다음 순간 하나님을 거역했기 때문에 반역자였다. 하나님은 그런 말을 듣고 기뻐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들이 모세의 마음을 상하게 했기에, 모세가 입술로 경솔하게 말했던 것이다"(시 106:33).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하는 바로 그 행위에서 반역을 보는가? 우리는 종종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하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말을 한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약 1:19,20).
우리 집이나 교회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를 볼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주님을 기다리지 않고 빨리 말하고 행동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실패하고 우리의 가정과 교회에 혼란을 가져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이럴 때 우리의 분노가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마음이 편안하지 않고, 다른 사람으로 인해 동요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조용히 있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는 적어도 하나님의 일에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은 심각한 일이다. 그런 책임을 가볍게 여길 수는 없다. 하나님의 종들은 엄청난 권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아주 작은 일, 특히 그들의 말에서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을 극도로 조심해야 한다.
한번은 모세의 누이인 미리암이 모세를 비난했을 때, 그는 침묵을 지키며 대답하지 않았다. 성령이 모세의 반응을 인정한 것은 모세가 "땅 위에 있던 어떤 사람보다도 겸손했다"(민 12:3 )고 기록한 데서 확인할 수 있다. 또 한 번은 고라가 모세에게 반역하여 다른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그의 권위를 의심하자, 모세는 다시 화를 내지 않고 엎드려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민 16:4 ). 백성이 모세에게 반역할 때, 그는 왜 므리바에서 조용히 하지 않았는가? 왜 그는 인생의 마지막을 향해 갈 때 경솔하게 말을 해야 했을까?
인내는 하나님의 종(딤전 2:24 )과 사도(고후 12:12)의 주요한 특징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참을 수 있고 계속해서 엎드릴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인생이 끝날 때까지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에게 우리의 사건을 계속 맡길 것인지", 아니면 몇 년 동안 인내한 뒤에,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방어하기 시작할 것인지 여부이다(벧전 2:23).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느 때나 우리의 능력 이상으로 누군가에게 시련을 받거나 시험 받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다(고전 10:13). 그러나 그분은 우리를 우리 힘의 한계까지 시험 받도록 허락할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가 자아, 권리, 평판에 대해 기꺼이 죽는다면, 우리에게 인내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실 것이다.
오늘, 내일, 다음 주, 다음 달, 내년, 그리고 우리의 삶이 끝날 때까지, 우리가 모욕을 당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우리 모두가 엎드리는 사람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 바란다.
모세가 므리바에서 엎드렸다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는 인생의 마지막에 단 한 순간 부주의해서 많은 것을 놓쳤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다른 종들도 오랫동안 충실하게 살다가 부주의해져서 말년에 와서 미끄러지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들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망쳤다.
앞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에게 내리셨던 것과 같은 형벌, 즉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형벌을 내리셨다는 것을 읽었다. 그러나 그들은 열 번이나 하나님께 반역하였다(민 14:22).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벌을 주기 전에 열 번의 기회를 주셨다. 그러나 그분은 모세에게 단 한번의 기회를 주셨다. 왜일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보다 모세에게서 더 많은 것을 기대하셨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의 외적인 행위만을 보았으나, 모세는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였다(시 103:6). 우리가 하나님을 대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하나님은 우리 교회의 다른 사람들보다 열 배나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기대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종들은 화가 났을 때에도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말에서 가치 없는 말을 없애는 법을 배워야만, 하나님의 대변자가 될 수 있다(렘 15:19).
완전한 순종의 중요성
사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끌도록 선택한 또 다른 사람이었다. 사울은 왕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이스라엘의 왕좌에 앉힌 것은 하나님이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를 왕으로 삼으러 왔을 때에, 사울은 몸을 숨기며 말하기를 "내가 누구이기에 왕이 되겠는가?우리 집안은 이스라엘의 모든 집안 중에서 가장 적다"(삼상 10: 21,22). 그는 정말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울은 자신의 눈에 커졌고 하나님은 그에게서 기름부으심을 빼앗아야 했다.
사무엘상15장에서, 우리는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을 수정하고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아말렉의 모든 것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읽었다. 그는 자신의 이치를 따랐고, 백성을 기쁘게 하는 일을 했다. 자신이 자기 눈에 커지면 이런 일이 일어난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종이 마주하는 가장 큰 두 개의 덫을 보게 된다. 바로 그 자신의 이성의 의견과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다. 사울은 이 두 가지 요인에 의해 스스로 영향을 받는 것을 허용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을 잃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지혜에 따라 하나님의 어떤 명령도 수정할 권리가 없다. 그리고 우리가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될 수 없다"(갈 1:10).
만약 사울이 자신의 눈에 작게 남아 있었다면, 그는 죽을 때까지 그 기름부으심을 간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왕좌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이런 방식으로 다른 많은 하나님의 종들 또한 기름부으심을 잃었다. 하나님의 대변자로서 사람들 앞에 반복적으로 서 있는 것은,우리가 주의하지 않으면,우리 스스로 머리가 되는 길이다.
그러나 사울은 왕이 되는 것에만 매달리지 않았다. 기름부음을 받은 어린 형제(다윗)가 일어나고, 다른 사람들이 그를 신임하는 것을 보자, 사울은 다윗을 제압할 음모를 꾸몄다. 다윗은 사울에게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였다. 그리고 사울은 사람들이 다윗을 존경했기 때문에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왜 하나님은 자신의 왕좌에 집착하는 사울과 같은 이들의 행동을 모르는 체하시는가? 심지어 그들을 거부하신 후에도 말이다. 오랫동안 하나님은 그들을 살려 주실 수도 있다. 사울의 경우 하나님은 그를 13년 동안 살려 주셨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였을 때 그의 나이는 17살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30살 때 비로소 왕이 되었다. 다윗이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후 13년 동안, 하나님은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계속 통치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타락한 자가 된 후에도, 우리가 성령의 기름부음을 잃은 지 오래도록, 우리가 사역에 머물도록 허락하실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분별력 부족으로 인해 우리가 기름부음을 잃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의 나이나 성경 지식이나 경험을 존중하기 때문에 우리를 하나님의 종으로 계속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백성들의 이러한 수용이 우리가 하나님의 종으로 남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거절했다면 인간이 우리를 받아들여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어떤 사람이 그의 삶에서 기름부음이 사라진 후에도 주님을 섬기거나 교회를 이끄는 일을 계속하는 것은, 끔찍한 비극이다.
성급한 행동을 피하는 것
불행히도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하나님의 계명을 수정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역시 벌해야 했다. 하나님에게 편애는 없다. 하나님은 그분을 섬기는 모든 사람에게 엄격하시다.
사무엘하 6장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따르지 않는다면, 아무리 선한 의도일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놓치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구하지 못하는 것을 본다. 다윗은 법궤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그것은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율법에서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레위인들에게 법궤를 어깨에 메라고 명하셨었다. 그러나 다윗은 그 명령을 수정하여 궤를 수레에 싣고 소가 수레를 끌게 하였다. 거기 서 다윗은 몇 년 전에 그 방법을 채택한 블레셋 사람들을 모방 하고 있었다(삼하 6: 8-12).
오늘날에도 같은 일을 하는 기독교 지도자들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보다는 세속적인 사업의 경영 기법에 따라 교회를 운영한다.
소들이 법궤를 나르고 있을 때, 소들이 비틀거렸다. 웃사는 그것을 보고 손을 내밀어 법궤가 떨어지지 않도록 잡았다. 그리고 하나님은 즉시 "그의 불경함 때문에" 웃사를 죽였다(7절).
하나님의 목자들이 실수를 하면 양들도 고통을 받는다는 것은 슬프지만 사실이다. 다윗은 실수를 저질렀고 웃사는 그 일로 고통을 받았다. 다윗은 거기에서 하나님이 그분의 종들에게 매우 엄격하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웃사는 가장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주님의 분노는 웃사를 향하여 불타올랐다"(7절). 웃사는 어린 시절부터 레위인만이 법궤를 만질 수 있다는 가르침을 받아왔다. 그러나 그는 그 순간 하나님의 계명을 가볍게 여기며 그 일로 고통을 받았다.
웃사의 실수는 오늘도 되풀이될 수 있다. 우리가 교회에서 일이 잘못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법궤를 안정시키기 위해" 손을 뻗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의도는 좋았을지언정 우리는 '경계' 바깥으로 나갔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때리실 수도 있다. 우리는 어쩌면 우리의 이성이 옳다고 말한 것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뜻을 알기 위해 주님을 기다리지 않았다. 우리는 서둘러 행동했다.
예수님은 "내가내 교회를 세우겠다"(마 16:18 )고 말씀하셨다. 교회를 세우는 것은 주님의 일이요, 우리가 할 일이 아니다. 그분은 그 일을 우리 중 누구에게도 위임한 적이 없다. 그래서 우리가 "나는 이런 저런 곳에 교회를 세우고 있다"고 말할 때, 그것은 오만한 자만심이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 자신의 사적인 일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언젠가 웃사가 저지른 실수를 반드시 저지르게 될 것이다.
만약 우리가 교회가 흔들리는 것을 본다면, 하나님께 가서 그분에게 "주님, 교회를 세우는 것은 제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 주님의 교회를 지켜주소서"라고 말씀드리자.
그리고 우리가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느낄 때, 그것이 누구의 일이고 누가 그것을 책임지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성령인가, 우리인가?
때때로, 우리는 무언가가 즉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의 말씀을 듣지 않고 행동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육체에 따라 행동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행동은 좋은 의도로 행해졌다고 해도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더 큰 혼란을 야기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주여,당신이 이곳을 책임지고 있습니다.통치권은 당신의 어깨에 있습니다.그리고 나는 당신의 말을 듣고 싶습니다.당신이내가 하길 원하는 것을 말씀하소서 ."
잠언에 묘사된 어리석은 자는 여러 종류가 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가장어리석은 자는 이렇게 묘사된다,
"말(또는 그의 문제)에 성급한 사람이 보입니까?오히려 미련한 자에게 그보다 더희망이 있다"(잠 29:20).
성급한 사람 - 어떤 말을 하거나 어떤 일을 하기 위해 성급한 사람은 어떤 상황에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절대적으로 자신감을 느낀다. 그는 전혀 하나님과 상의할 필요가 없다. 그는 스스로 행동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자다.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 있었는데,
"그는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않을 것이다"(사 11:3).
예수님은 눈이 멀지 않았기에 많은 것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분은 귀머거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많은 것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분은 아버지를 너무 경외하셨기 때문에, 단지 보고 들은 것에 근거하여 판단하거나 의견을 내지 않으셨다. 그분은 자신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다,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요 5:19).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인을 데리고 예수께 오자, 예수께서는 한동안 그들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아버지의 말씀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분은 들으시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단지 "죄 없는 자가먼저 돌로 치라"는 한 문장이었다. 그것은한 시간 이상 설교를 한 것보다 더한 성취가 있었다 !
누군가 우리에게 복잡한 문제를 가지고 올 때, 우리가 우리의 영리함과 우리의 지난 경험을 바탕으로 그에게 조언을 해준다면, 문제는 더 복잡해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아버지로부터 온 지혜의 한마디가 놀라운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니 다음에 우리가 "소들이 비틀거리고 넘어지려는 법궤"를 보게 되면, 우리의 이름을 어리석은 자들 목록의 맨 위에 올려놓으려 하지 맙시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으로 판단하여 불손한 행동을 재빠르게 하는 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대신 주님 앞에서 얼굴을 흙먼지에 대고 "주님, 나는 지혜가 없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길 원하십니까?"라고 말합시다.
특히 교회의 다른 사람들이 우리보다 어리고 미성숙하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지혜가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너무 어렵다. 그러나 우리가 겸허하게 우리의 필요를 인정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풍부한 지혜를 주실 것이다.
약속 지키기
우리는 사무엘하 21장 1절에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종들에게 엄격함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를 본다 . 다윗이 왕위에 있던 시절, 이스라엘에는 삼 년 동안 기근이 들었다. 이처럼 우리 회중에게 예언의 말씀이 기근에 시달릴 때, 다윗처럼 행동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하다. 다윗은 주님께 답을 구했다. 주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오래 전에 기브온 자손에게 한 약속을 어겼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300년 전 여호수아 시대에 기브온 자손에게 그들의 자손에게 결코 해를 입히지 않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러나 사울은 왕이 되었을 때, 그 약속을 어기고 그들 중 몇 명을 죽였다. 그 죄에 대한 처벌은 불과 30년 후에 이스라엘을 따라잡았다. 하나님은 그분의 기록을 매우 소중하게 보관하신다. 우리가 그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면, 우리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잊혀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결산하는 데 30년이 걸릴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정산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 일이 해결될 때까지 이스라엘에서 기근을 없애지 않으셨다.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은 예배모임뿐만 아니라 모임 밖에서 하는 말에도 매우 신중해야 한다.
우리는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하겠다고 약속하고 나서 그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약속하고 나서, 그렇게 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그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수 없다면, 우리는 정직하게 그들에게 "내가 기억나는 대로 너를 위해 기도하겠다"라고 말해야 한다. 아니면 그 자리에서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킬 수 없는 약속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
남에게 가볍게 약속을 하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엄숙하게 말할 수 있겠는가? 약속한 일을 할 수 없다면 그 사람에게 가서 왜 약속을 지키지 못했는지를 설명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약속을 어기는 것은 심각한 일이다.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해명을 해야 한다"(마 12:36)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한 약속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우리는 불신자나 종들에게도(기브온 사람들처럼) 약속을 어길 권리가 없다.
우리는 오랫동안 아무런 처벌도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디선가 행했던 여전히 미해결로 남아 있는 불의를 잊으셨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잊지 않는다. 하나님의 심판은 오는 것이 느릴지도 모르지만, 마침내 올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경건함과 경외심을 가지고 받으실 만하게 하나님을 섬길지니,우리 하나님은 소멸시키는 불이시다"(히 12:28,29) .
요한계시록2장과3장은 교회의 장로형제(사자)들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이 담겨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읽기에 좋은 장이다. 여호와께서 일곱 교회 가운데 다섯 교회에서 타락한 장로들을 공개적 으로 꾸짖으셨다. 그분은 사도 요한을 통해 그들에게 "개인적이고 비밀스러운" 편지를 보낸 것이 아니라, 그 교회의 모든 신자들에게 읽어주어야 할 편지를 보냈다.
에베소 - 주님에 대한 헌신 없음
에베소의 장로는 어떤 큰 죄악에 빠진 것이 아니라, 일찍이 가졌던 주님을 향한 그 열렬한 헌신을 잃어버린 것에 대해 질책을 받았다(계2:1-5). 아마도 그는 이제 매주 일요일마다 설교하는 일에 정신이 팔려, 개인 생활에서 주님께 헌신하는 것을 모두 잊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심각한 잘못이었다.
사탄은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에 대한 단순한 헌신"에서 이차적인 것(고후11:3)으로 돌리려 한다. 주님을 위한 우리의 일이 주님 자신보다 우리에게 더 중요해 질 때, 우리는 이미 타락하기 시작했다. 주님을 위한 우리의 모든 수고는 주님과의 개인적 관계에서 흘러나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수고들은 영적 가치가 없다 . 단지 죽은 행위와 사회봉사에 불과할 것이다.
주님 자신보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이 있을 때마다, 우리는 더 이상 새 언약의 종이 될 수 없다. 새 언약은 주님을 위한 봉사를 강조 하는 옛 언약과는 달리 주님과의 관계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 우리가 이 차이를 이해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결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울 수 없다.
버가모 - 세속적 가르침이 허용됨
버가모의 장로는, 사람들이 교회를 세속화하고 죄에 대한 나태한 태도로 이끄는 교리를 가르치도록 허용한 것에 대해 책망을 받았다(계 2:14 ,15). 그 자신은 좋은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발람의 교리를 다른 사람들이 가르치는 것을 허락했다. 그래서 그는 유죄였다.
주님은 교회에서 죄를 가볍게 여기도록 이끄는 어떤 설교도 허용되지 않도록 장로들에게 책임을 물으신다. "경건에 이르게 하는 교리"(경건하고, 그리스도를 닮은 삶으로 인도하는 교리)가 있으며, 그것만이 "위생적인 가르침"(딤전 6: 3 - 여백 )이다. 다른 모든 가르침은 어느 정도는 비위생적이다.
이 장로는 왜 그의 교회에서 그러한 느슨한 가르침을 허락했을까? 아마도 그는 겸손하고 온유한 형제로서의 명성을 원했기 때문에, 형제자매들을 무엇에 대해서도 결코 바로 잡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교회의 유익보다 자신의 명예를 더 추구한 것이다.
"겸손"과 "온유"는 예수께서 직접 말씀해주신 대로 우리가 예수의 본을 보고 배워야 할 덕목이다(마 11:29).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 의미를 잘못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의 겸손과 온유함이 환전상들을 성전 밖으로 몰아내거나,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십자가를 피해야 한다는 거짓 교리를 말할 때, 예수님이"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와 같은 강한 말로 베드로에게 질책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마 16:22,23).
사탄은 베드로처럼 착한 형제라도 교회를 타락시키는 데 사용할 수 있다. 그 형제는 모임에서 십자가의 말씀 을 희석시키는 식으로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설교는 항상 사탄의 목소리로 인식해야 한다. 따라서 사탄은 교회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에서 멀어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 장로로서 우리가 가진 가장 큰 책무 중 하나는 우리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과 타협을 위한 방향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바리새주의와 율법주의의 방향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것은 십자가의 길 , 즉 하나님의 뜻의 방향이 되어야만 한다.
발람과 같은 설교자들은 보통 큰 혼적인 힘을 가지고 있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불건전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강력한 인간적 개성을 지닌 설교자들은 변함없이 다른 사람들을 압도하고, 그들이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연결되는 것을 방해한다. 그들은 또한 사람들을 진정한 영성에서 벗어나 피상적이고 세속적인 종교성으로 인도하는 방식으로 영향을 미친다.
설교자가 자신의 혼적인 힘을 죽이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면, 그는 신자들을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아닌 자신과 연결시킬 것이다. 신자들은 설교자를 존경하고 따르겠지만, 그들의 삶에서 죄와 세상을 결코 이기지 못할 것이다.
영적 능력과 혼적 능력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으며, 우리는 그 둘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은 성경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고 말에 재능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심지어 형제 자매들에게 매우 친절하고, 많은 실용적인 방법으로 그들을 도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사람을 그리스도가 아닌 자기 자신에게 연결시켜 준다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 방해가 될 것이다.
발람과 같은 설교자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선물을 받는 것을 기뻐한다(민 22:15-17). 선물은 우리의 눈을 멀게 할 수 있고(잠 17:8) 인간에게 의무를 지게 하여 우리가 그들의 노예가 되게 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말하고 우리의 후원자들을 바로잡는 것을 방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종은 항상 자유로워야 한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사람의 종이 되지 말라"(고전 1:23).
발람의 가르침은 버가모 교회에서 번성하였다. 그곳의 장로가 사람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다.
발람의 가르침에는 두 가지 부분이 있다. 베드로가 이 두 가지를 베드로후서 2장 14절 , 15절 에서 탐욕과 간통으로 언급하였다.
예수님은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미워하고,돈에 매달리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멸한다고 말씀하셨다(눅 16:13 을 주의 깊게 읽어라).
그런 것을 분명하게 가르치지 않으면, 발람의 가르침은 우리 교회에서 번창할 것이고, 형제 자매는 돈의 연인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가 가르친 것을 가르치려면, 우선 우리 스스로 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야 한다. 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분노와 눈으로 보는 정욕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 쉬운가요? 끊임없는 전투를 통해서만 우리는 이 악을 극복할 수 있다.
돈에 대한 사랑을 "모든 악의 뿌리"(딤전 6:10)로 본 적이 있는가? 분노와 눈으로 보는 정욕은 악으로 인식되지만, 돈에 대한 사랑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돈의 노예가 되어, 그들이 하나님을 미워하고 경멸하는 것을 거의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인도에서 이른바 '전임 사역자'의 대다수는 발람처럼 돈에 대한 애착의 노예가 되어 있다. 그들은 부유한 신자들의 집을 방문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자들로부터 선물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부자와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죄를 질책해야 할 때 그들의 입은 다물어진다. 그들은 멋진 예물을 받을 것을 아는 교회에서 설교하기 위해 여행을 한다. 어떻게 그런 설교자들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을까? 그건 불가능하다. 그들은 맘몬을 섬기고 있다. 예수님은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셨다.
새로운 언약 아래 하나님의 종이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필수적인 자격이 있다:
1. 그는 사생활에서죄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롬6:22).
2.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해서는 안 된다(갈 1:10).
3. 그는 돈을 미워하고 경멸해야 한다(눅 16:13).
우리는 이 세 분야에서 끊임없이 우리의 삶을 점검하여 새 언약의 종이 될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살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효과적으로 일하려면, 돈과 물질적인 것이 우리의 삶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
예수께서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복이 더 많다"(행전 20:35)고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선물을 받는 것도 싫어해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수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이끌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발람의 가르침에서 그들을 구원할 수 없을 것이다.
발람의 가르침의 두 번째 측면은 부도덕이다. 이 가르침은 형제자매가 아무런 구속 없이 자유롭게 어울리도록 장려한다. 우리는 요한계시록 2장 14절 에서 모압의 젊은 여자들이 이스라엘의 젊은 남자들과 자유롭게 어울리도록 격려한 사람이 발람이라는 것을 읽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 자손의 부도덕이 심해져서, 하나님은 하루 만에 2만 4천 명을 죽이셨다(민25:1-9).
비느하스가 창을 들어 그것을 멈추게 할 때에야 비로소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는 멎었다. 하나님께서 비느하스의 행동을 보시고 기뻐하셔서 영원한 제사장직(민 25:11-13)의 언약을 내리셨다. 하나님은 교회에서 형제자매가 자유롭게 어울리는 것을 반대하는 급진적인 사람들을 항상 존중하신다 .
여기서 다시, 장로로서, 우리는 우리의 개인적인 행동에 의해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자매들과의 행동에 진지해야 하며 그들과 모든 경솔하고 불필요한 대화를 피해야 한다. 우리는 항상 우리에게 말하고 싶어하는 자매들을 특히 조심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자매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를 이끌기에 적합하지 않다. 우리는 절대 폐쇄된 방에서 혼자 여자들과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아내와 함께 혹은 다른 장로와 함께 자매를 상담 하는 것이 항상 최선이다.
제자들이 사마리아 우물에서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말을 거는 것을 보았을 때, 예수님은 혼자서 여자와 말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다"(요 4:27 )라고 쓰여 있다. 그분은 악한 것처럼 보이는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도록 조심했다. 여기에 우리 모두가 따라야 할 모범이 있다.
두아디라 - 교회를 경영하는 여성
주님은 두아디라의 장로가 '이세벨'(그의'아내 ' - 계 2:20 여백)이라는 여자가 교회의 일에 그토록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허락하여 많은 형제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한 것을 꾸짖으셨다. 오늘날에도 그런 하나님의 종들이 있는데, 그들은 아내와 다른 자매들이 교회 일에 간섭하는 것을 제지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새언약 교회를 이끄는 데 있어서 어떤 역할도 할 수 있도록 여자들을 부르지 않았다. 그것은 디모데전서 2장 12 절에서분명하게 가르친다. 그러나 교회를 운영하는 데 영향력을 갖고 싶어하는 강한 자매들이 도처에 있다. 그런 여자들은 모두 이세벨이다. 자매는 "집에서 일하는 사람"(딛 2:5)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그들이 교회 문제에 대해 발언권을 가지기 시작하면, 교회에 혼란이 생길 것이다. 장로의 아내는 집에서 남편에게 매우 강력하게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장로의 모임에서 그가 말하는 모든 것은 그녀가 집에서 그의 머리에 대고 한 말의 메아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장로들은 하나님의 종이 되기에는 너무 약하고 완전히 부적당하다. 그러한 장로들은 반드시 여성으로 분류되어야 하며, 따라서 교회에서 어떠한 지도자의 직책을 맡기에는 부적당하다.
사데 - 자신의 명성에 기대어 사는 것
여호와께서 사데의 장로를 위선자라고 꾸짖으셨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그가 살아있다는 이름을 가졌는데, 실제로 그는 영적으로 죽어 있었다. 그러나 사데의 회중에는, 온 정성을 다하여 열심인 사람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옷을 깨끗하게 지키고 있었다. 장로보다 회중의 다른 형제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참으로 슬픈 사태다.
사데의 장로는 그의 설교와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증언함으로써 자신의 이름을 얻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목회에서 놀라운 기적을 경험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들에 대해 말하기 시작할 때 진짜 위험이 있다.
예수님의 예를 보면, 그분은 그런 일에 대해 말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분은 자신이 다른 곳에서 행한 기적에 대해 어디에서도 증언하지 않았다. 그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아버지께서 그분을 통해 하신 일에 대해서는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그분의 모든 의와 그분의 일은 아버지 앞에서 은밀히 이루어졌다.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보낸 30년 동안 아버지와 함께 놀라운 경험을 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그것들 중 어느 하나에 대해서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분은 그것들을 모두 비밀로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분은 남들 앞에서 자신의 이름을 알리려 하지 않았다. 이 문제에서도 예수님을 본보기로 삼읍시다.
우리가 증언을 할 때, 부정직과 과장이 슬그머니 들어오는 것은 매우 쉽다. 예를 들어, 우리는 기도를 통해 치유된 사람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지만, 우리가 기도한 다른 수백 명의 치유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결코 말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 우리는 모든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주의 종이 되려면 철저히 정직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결코 우리의 실제의 모습보다 더 좋은 인상을 갖게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우리를 낮게 평가하는 것이 훨씬 낫다.
그리고 실제로 가지고 있지 않은 영적 선물을 자랑하는 사람들은 필요한 비를 가져오지 않는 속이는 구름과 같다(잠 25:14).
당신은 정말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드러낸 만큼 훌륭한 믿음의 사람인가? 불안했던 시절을 생각해 보라. 그때 당신은 그렇게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었나? (누구보다도 당신을 잘 아는)부인은 당신을 위대한 믿음의 사람으로 여기는가? 사람들 앞에서 명성을 가진 대부분의 장로들은 자기 아내 앞에서 명성을 별로 갖고 있지 않다. 아내들은 장로들을 있는 그대로 알고 있다!!
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있는 그대로 보게 하는 것을 두려워하는가? 우리가 그들보다 우월하게 보이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닌가?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실패를 고백할 때, 우리가 충분히 기도하지 않거나 충분히 금식하지 않는다는 사실 등과 같은 "성스러운 죄"만을 고백하는가?
그런 고백은 위선적이고 자신의 평판을 높이기 위한 것일 뿐이다! 그런 위선적인 장로들은 모두 회개해야 한다.
우리는 또한 항상 우리 자신과 똑같은 자녀를 낳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성경은 아담에 대해 "그는 자기의 모습을 닮은아들의 아버지가 되었다 "(창 5:3)고 말한다. 우리 혈류에는 강력한 현미경이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약점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 약점을 자녀에게 전달한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다. 우리 삶에는 다른 사람들이 절대 보지 못할 실패 영역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일정 기간이 지나면,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자녀들에게도 같은 약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모든 교회가 마침내 지도자와 같아진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장과3장에 나오는 일곱 통의 편지들은 먼저 교회의 사자들에게 보내진 것이고, 그 다음엔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적혀 있는 것이다.
우리가 남몰래 부정직하다면, 궁극적으로 부정직한 형제자매를 양산할 것이다. 우리가 남몰래 정욕적이거나 인색하다면, 우리 교회의 다른 사람들도 결국 그렇게 될 것이다. 유일한 예외는 우리의 세속성을 꿰뚫어 볼 분별력을 가지고 있고 우리의 본보기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뿐이다.
사데에 그런 충실한 젊은 신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장로의 세속성을 꿰뚫어보고 그의 본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장로처럼 되지 않았다.
우리가 빠질 수 있는 가장 큰 속임수 중 하나는, 우리 자신의 이름을 알리려는 바벨론의 영에 의해 이끌려, 우리가 진정한 교회를 세우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바벨론의 기원( 계 17,18장에 기술된 거짓 교회)은 바벨탑에서 발견된다.
바벨에서 사람들은 서로에게 " 우리에게 이름을 가져다 줄 무언가를 짓자"고 말했다(창11:4). 그것이 바벨론의 본질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일을 형통하게 하셨는가? 주님을 위한 일을 통해 우리 자신의 이름을 얻었는가?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불충실한 것과는 달리 우리는 충실했다는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마음속에 떠오를 수 있다. 영적 죽음으로 내려가는 가장 쉬운 방법 중 하나는 그런 자축을 통해서다.
그렇게 느부갓네살은 타락하여, 짐승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다니엘서 4장을 읽고 묵상해 보라. 우리 모두에게 매우 필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 곳에서 느부갓네살은 "이것은 나 자신이 지은 바벨론이 아닌가?"라고 속으로 생각했다(단4:30). 그가 아무에게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거기서 알아차려라. 그는 마음속으로만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즉시 그를 심판하시고 그를 미치게 하셨다.
이것이 바로 수세기 동안 수많은 설교자와 장로들이 은혜에서 타락한 방식이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 그리고 같은 운명이 닥치지 않도록 조심하라.
자신과, 주님을 위한 수고에 대해 그렇게 높은 생각을 가진 종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낮추시겠는가?
그는 자신의 마음과 그의 교회에서 세속성을 발견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삶 속에서 나온 생각들과 돈을 사랑하는 삶에서 패배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교회 안에 있는 형제들 사이에 마찰이 있을 것이다.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의 가정 형편이 나빠지기 시작할 것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교회에는 예언의 영이 없을 것이다. 예배모임은 따분하고 지루할 것이다. 최고에 있는 고독한 장로를 제외하고는 교회 안에서 어떤 리더십도 발전하지 못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보고, 장로는 자신이나 교회 어느 쪽에도 영적인 내용이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할 것이다. 아마도 그의 회중은 수적으로 성장했지만 영적으로는 성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영적으로 죽었다는 모든 증거가 있다.
대부분의 장로들은 그런 것을 보면 남들에게 감추어 버리고, 교회에서 모든 것이 다 괜찮은 척 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타락하여 정확히 사데의 장로처럼 될 것이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발견하기 위해 수 년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별력을 주실 수 있으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과 교회에서 이런 것들을 매우 빨리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고 사람의 명예에는 관심을 두지 않을 때만 분별력을 주실 것이다.
교회가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교회의 수적 성장에 감명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의 육신적인 상태를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바울)을 낮추실 것이라고 말했다(고후 12:20,21읽기). 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세속성 때문에 수치를 느껴야 하는가?
바울은 그들의 영적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녀들의 영적 상태에 대해 아버지들에게 책임을 물으신다.
우리 회중에서 세속성을 볼 때, 하나님은 지도자로서 우리 자신의 실패를 보여 주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형제자매를 탓할 것이 아니라 낮추어야 할 사람은 바로 우리이다. 우리가 자녀들에게서 세속성을 볼 때,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로서 우리의 실패를 보여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자녀들을 탓하지 말고 우리 자신을 낮춰야 한다.
만약 우리가 고용인이라면, 우리는 형제자매의 실패를 볼 때 그들을 비판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자신을 낮추고 "주님, 제가 실패하였습니다. 저를 용서해주세요"하고 말할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께로 인도한 이방인들이 " 하나님께 순수한 제물로 바칠 수 있을 정도로 거룩해 져야 한다"(롬 15:16)는 큰 부담을 가지고 있었다.
옛 언약에 아래서, 제사장은 백성이 가져온 모든 제물을 검사하여 그 제물이 흠이 없는지 확인해야 했다(신 17:1). 그것은 제사장의 책임이었다. 그는 어떤 식으로든 불구인 것을 하나님에게 바칠 수 없었다. (말라기1,2 장을 읽으면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심각한 죄였는지 알 수 있다.)
이제 새 언약 아래서, 주님이 교회 안에서 그분을 섬기도록 부르신 모든 사람(지도자)은 동일한 임무를 맡게 된다. 그들이 하나님께 바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사람이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사람으로 드리기 위해"(골 1:28) 애쓴 이유이다.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는, 모든 것이 명백해질 것이다. 모든 사람이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그 날 우리의 모든 노력이 천박하고 육신적인 것으로 드러난다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사데의 장로는 사람들의 존경에 만족하는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우리는 자녀들을 통해 우리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싶어 하는가 ? 어쩌면 아이들과 잘 지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점에 대해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차려서 우리 스스로 영광을 얻기를 원하는가?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훌륭한 아버지였는지 다른 사람들이 알기를 바라는가? 우리 자신의 영광을 위해 자녀를 양육하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양육하고 있는가?
확실히, 우리 모두는 우리의 아이들을 전적으로 헌신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키우고 싶어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시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셨다면 우리는 왜 사람의 인정을 원하는가?
남들이 우리 자식들이 세속적이라고 생각한다고 해도 무슨 상관인가? 우리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에게만 대답해야 한다.
우리 자신과 교회에 대해 냉정하게 평가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우리 육신에는 수고의 결과를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큰 욕망이 있다. 우리가 그 정욕을 죽이지 않으면, 사탄은 언제나 우리를 이용하게 될 것이다. 어떤 장로라도 자신의 이름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사탄은 그를 이용하고 속일 것이며, 심지어 장로가 제자도, 거룩함, 그리스도의 몸에 대해 설교하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장로는 바벨론의 또 다른 지교회만을 세울 것이다!
우리 자신의 이름을 구한다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새 언약 교회를 세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사람들 사이에서 이름이나 명성을 얻으려는 욕망이 없는 사람이다.
여러 해 동안 고생한 끝에 당신의 교회에 온 마음을 다한 제자가 세 명뿐이라면, 당신은 좁은 문을 바늘구멍보다 더 넓게 만들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그것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언젠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잘했다,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어느 마을에 그리스도의 순수한 증인인 3명의 제자를 두는 것이, 주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3000명의 타협자보다 훨씬 낫다.
하지만 사람 숫자가 적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더 나은 통계로 깊은 인상을 주기 위해 우리의 기준을 낮추고 싶은 강한 유혹을 받을 수 있다. 그 정욕과 싸우지 않으면 결국 사데의 장로처럼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말에서 잘못된 위안을 찾을 지도 모르는 지도자들에게 경고의 말을 덧붙이고 싶다.
교회가 성장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도움이 필요한 다른 사람들에게 당신의 교회를 추천할 수 없기 때문일 수 있다.
교회에 사람을 더하는 분은 주님이다(행 2:47). 그리고 초대 교회시기에는, 교회에 많은 사람을 더하게 하셨다(행 6:7 ).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좋다:
"주님,우리는 수많은 타협하는 사람들로 우리 교회의 숫자를 늘려달라고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하지만 경건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이 마을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주여,이 세 가지 중 하나를 행해 주십시오 :
1)우리가 그들을 도울 수 있도록 그들을 우리에게 인도해 주십시오 .
2)우리를 그들에게 인도해 주십시오 .
3)우리를 그들에게 추천할 수 없는 이유를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주님은 당신 교회가 너무 율법주의적이고 냉정하고 바리새주의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추천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실지도 모른다!! 그분은 또한 당신의 교회가 그런 까닭은 장로로서 당신 자신이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당신이 할 일은 슬퍼하고 회개하는 것뿐이다.
만일 우리가 사역에서 사람들의 명예와 인정을 구하지 않으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주님과 신부 관계를 쌓는 것이다. 아가서에서, 신부는 자신의 삶과 일을, 신랑만을 위한 열매를 맺는 정원으로 묘사한다(아 4:16b). 우리의 목표가 우리 하늘의 신랑만을 만족시키는 것일 때, 우리의 마음은 항상 안식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한계를 가진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셨다는 사실에 만족할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다른 사람과 같은 사역 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독교계에 만연한 경쟁의 정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다. 또한 사역의 결과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픈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다.
주님은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우리의 고유한 공헌에 필요한 은사를 주셨고, 우리에게 완수해야 할 구체적인 임무를 주셨다. 우리는 그분의 은혜와 능력으로 그 임무를 최선을 다해 완수해야 하며, 우리가 그분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다른 사람에게 알려서는 안 된다. 마치 신부가 신랑을 위해 몰래 하는 일을 다른 사람이 알기를 원하지 않는 것처럼!
그러니 사데의 장로처럼 되지 않도록, 주님과 신랑-신부 관계를 맺읍시다.
라오디게아 - 자신의 비참함을 모르는 사람
라오디게아의 장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주님으로부터 강하게 질책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부유하고 재물이 많아져서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고 느꼈다. 부는 돈과만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지식, 은사, 재능도 풍부할 수 있다. 따라서 자급자족감을 느낄 수 있다.
지적이고 유창하며 재능이 있는 사람은 두려운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그들은 이러한 인간의 능력을 자랑스러워하고 주님보다 그것들에 더 의지할 수 있는 위험에 끊임없이 처하기 때문이다.
라오디게아 장로는 자신의 성경지식과 재능, 업적, 장로로서의 지위에 만족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는 여전히 그가 영적으로 "비참하고,가련하고 , 가난하고,눈이 멀고, 벌거벗은" 존재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계 3:17). 하나님께서 보시듯이 우리의 진정한 영적 상태에 무지할 때 참으로 슬프다.
라오디게아 장로는 자신이 비참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사도 바울과 같은 경건한 사람은 울부짖으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 7:24 )라고 말한다.
바울은 어떻게 자신의 비참함을 알았고 라오디게아의 장로는 어떻게 자신을 몰랐을까? 바울은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살았지만 , 라오디게아 장로는 그렇지 않았다. 하나님의 빛 안에서, 바울은 자신의 육체가 부패했음을 끊임없이 깨달았다(롬 7:18 ). 그리하여 바울은 끊임없이 영적으로 가난한 상태를 유지하여, 경건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의 장로는 그의 육신의 비참함을 보지 못하고 육욕적이고 미지근한 사람이 되었다 .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살지 않으면, 자신의 영적 필요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만족과 자급자족이 삶에 들어오기 매우 쉽다. 그리고 그 증거는 그가 말하고 설교하는 방식에서 볼 수 있다. 궁핍한 사람이 말하는 방식은 자급자족이 강한 사람이 말하는 방식과는 사뭇 다르다.
말을 잘하고, 웅변을 잘하며, 교리를 잘 아는 재능 있는 설교자가 있다. 하지만 그들이 말할 때 그들의 영을 들어보면, 거기에서 오만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전문가로서 말하는 것이지,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로서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강하고 오만한 영을 가진 사람이 지을 수 없고, 겸손하고 온화한 영을 가진 사람만이 지을 수 있다.
오만한 설교자가 설교에서 사람들을 채찍질하는 것은 쉽다!! 그러면 그는 주인이 다른 사람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나누어 주도록 임명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종처럼 된다. 하지만 그는 그들에게 음식을 주는 대신 채찍질했다(눅 12:45)! 불행히도, 오늘날 기독교계 강단에서 일어나는 많은 채찍질들이 있다. 채찍질은 그 누구도 경건한 삶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정죄의 감정과 그를 채찍질하는 설교자에 대한 복종으로만 이끈다.
가난하고 무기력한 거지가 다른 이에게 어떻게 말을 하는지 생각해 보라. 늘 온유하며 정중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세상에서 보잘것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모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라고 하는 것은, 우리 역시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벧전 3:15). 반면에 독재자는 어떻게 말하는가? 항상 오만하게 말할 것이다
우리의 말은 영적 가난으로부터 나오는 것인가, 오만으로부터 나오는 것인가?
베드로전서 2장 17절 은 우리에게 "모든 사람을 존중하라"라고 명령한다. 그 명령에서 배제된 인간이 지구상에 단 한 사람이라도 있을까? 아니요.
언변이 없고 말씀을 많이 알지 못하지만 겸손하고 온유한 영을 지닌 형제는 재능 있고 유창하여 오만한 형제보다 더욱 그리스도의 몸을 지을 것이다.
그 유능한 형제는 이 땅 위에서 영적인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은 심지어 그를 교회의 큰 자산으로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는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운 사람은 더 겸손한 형제였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주로 성경 지식과 영적 은사가 아니라 우리의 삶에 의해서 세워진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영적으로 가난한 자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수 있다(마 5:3 ). 그리고 계속 영적으로 가난하게(자신의 영적 필요를 자각하면서) 남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며, 그것은 예수님을 항상 바라보는 것 이다.
우리가 주님의 빛 속에서 우리 자신을 볼 때, 비록 우리가 우리 주변의 다른 사람들보다 낫더라도, 우리가 얼마나 주님과 다른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주님의 빛 안에서, 우리는 타인의 약점을 보지 못하고 오직 우리 자신의 약점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자연스레 "오호라 나는 비참한사람이로다"(롬 7:24 )라고 말할 것이다 . 우리는 누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그 상태로 살아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라오디게아 장로처럼 미지근함, 육욕에 빠짐, 오만한 자부심의 깊은 구덩이에 쉽게 타락할 것이다.
옛 언약에 아래서, 대제사장은 일년에 한번만 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일년에 한번, 그 영광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자신의 비참함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에 의해 새로운 살아있는 길이 열렸으니(히10:20), 우리는 지성소에서,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고,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언제나 우리의 육신의 비참함을 볼 수 있다.
옛 언약 예언자들은 가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었다. 이사야는 이를 보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사 6:5)라고 부르짖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 계시를 계속 받을 수 있는 특권을 갖게 되었다. 우리는 남들에게 재앙을 선포하는 대신 끊임없이 "나에게 화로다"라고 외칠 것이다!! 성령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결핍을 보고 언제나 성령 안에서 가난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오직 심령이 가난한 사람만이 하나님 보시기에 정말로 영적으로 부유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개인적인 대화나 모임에서 우리에게 말할 때, 우리는 그의 영적인 부를 함께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심령이 가난하지 않은 유창한 설교자는 우리에게 부요에 대한 그림만 보여줄 수 있다. 그는 우리를 실제로 부요하게 만들 수 없다.
우리는 가장 유능한 사람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우리 회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역의 자리를 주어야 한다. 심령이 가난하지 않은 유능한 형제는 교회를 파괴할 수 있다.
교회는 간음한 사람과 도둑에 의해 파괴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너무나 명백한 죄인들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오디게아의 장로처럼 자신의 결핍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면서, 그런데도 거룩함에 대해 설교하는 웅변적인 설교자들과 재능 있는 교사들에 의해 교회는 파괴될 수 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과 영적으로 교만한 사람을 분별할 수 없다면 그 이유는 우리의 영이 가난하지 않기 때문일 수 있다. 장로로서 우리 자신의 결핍을 먼저 보지 못한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의 필요를 보고 도울 수 있겠는가?
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우리의 회중을 순결하게 유지하려면,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빛을 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주님의 말씀을 직접 들음
이 다섯 장로들이 귀머거리여서 주께서 그들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없었다는 것을 언급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여호와께서 사도 요한을 통해 그들을 꾸짖어야 했다. 왜 그것이 새 언약 시대에 필요했는가? 사람들이 예언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했던 것은 옛 언약 아래서였다. 이 형제들이 겸손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했다면 요한이 그들에게 편지를 쓰지 않아도 하나님이 그들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장로들이 요한에게서 이런 편지를 받고 나서 회개한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우리는 그들이 그랬기를 바랄 뿐이다. 두아디라의 장로가 아내에게 자신의 일에 신경 쓰고 교회 일에 참견하지 말라고 했는지 궁금하다. 아니면 그녀가 남편한테 요한의 편지에 신경 쓰지 말라고 말했을까?
이 다섯 장로들이 요한을 통해 여호와의 책망을 받아들였더라면, 틀림없이 그들에게 좋은 일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교회의 적어도 한 장로는 요한이 쓴 글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요한은 요한삼서에서 장로로서의 지위를 사랑하고, 요한의 교정을 받아들이지 않은 디오드레베에 대해 기록한다(요삼 9절).
우리가 주님을 섬기려면, 항상 주님이 우리를 보는 것처럼 우리를 보아야 하며, 형제들이 우리를 보는 것처럼 보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끊임없이 하나님의 얼굴 앞에 살면서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 모든 영적 위험에서 우리를 보호해 줄 수 있다 - 그분이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실 때나 다른 형제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말이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결코 우리의 과거의 실패를 정죄하기 위해 우리를 책망하지 않으시며,항상 더 나은 미래를 주시기 위해 책망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세례 요한은 옛 언약 아래서 가장 위대한 예언자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새 언약 안에서 가장 작은 자가 요한보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마 11:11).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이 되라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부르심이다.
새 언약 아래의 사역은 옛 언약 아래의 사역보다 훨씬 더 높은 부르심이다. 모세, 엘리야, 세례 요한과 같은 하나님의 옛 언약 종들의 삶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이 많다. 그러나 그들이 계명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반면 , 오늘날의 우리는 본을 따라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예수님은 이제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보여주는 우리의 본보기가 되었다. 예수님은 어떻게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셨을까? 그분의 기적적인 사역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분이 모든 점에서 그분의 형제들과 같이 되셨기 때문에"(히 2:17),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셨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요 17:2 )를 주셨다고 말씀하셨다. 왜 그런 권세가 주어졌을까? 같은 구절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라고 말씀하신다. "영생"은 결코 끝나지 않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삶"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생명이나 신성한 성품을 묘사한다.
모세, 여호수아, 삼손, 다윗 등과 같은 하나님의 옛 언약 종들은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그들의 인간 적들을 이길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새 언약 아래서, 하나님의 종들은 다른 사람들이 신성한 성품(영원한생명)에참여하도록 이끌고,그들이 육체의 욕망을 이겨낼 수 있도록이끄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교회에서 우리의 권위는 형제자매들이 지상의 모든 상황에서 신성한 본성을 발현한 예수님처럼 되도록 이끄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 말고는 다른 권한이 없다.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신성한 본성에 참여하도록 이끌기 위해 우리의 권한을 행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실패자로 간주해야 한다.
불행히도 오늘날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옛 언약의 하나님의 종처럼 백성을 다스린다. 그러나 예수님과 사도들은 모든 사람의 종이었다.
우리는 옛 언약과 새 언약 중 어느 언약 아래 살고 있는가?
예수님은 우리의 앞서 달려가신 자(forerunner-선구자, 히 6:20 )라고 불린다. 그분은 우리가 가야만 하는 그 똑같은 길을 우리보다 앞서서 가셨다. 우리는 또한 "십자가를 견디어 내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달려가라"는 권고를 받았다(히 12:1-2). 그분은 "우리처럼 모든 점에서 유혹을 받으셨으나,죄는 짓지 않으셨다"( 히 4:15).그러므로 우리는 " 죄를 짓지 않은 그분의 자취를 따르자"(벧전 2:21-22).
예수님은 우리가 만나는 모든 유혹에 직면하셨고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따를 수 있는 본이 되실 수 있다. 그분이 "나를 따르라"고 말할 때, 그분의 말이 그렇게 강력한 이유다. 이제 하나님의 양 떼를 이끄는 목자들로서, 우리도 같은 길을 따라 양떼를 이끌어야 한다. 우리는 바울이 말한 대로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나의 본을 따르라"( 고전 11:1; 빌 3:17 ).
많은 설교자들은 "나를 따라오지 마세요. 그냥 그리스도를 따르십시오."라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가 감동을 받을 수 있을 만큼 겸손한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사도들 중 아무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것은 비성경적인 말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들을 따라오라고 권했다.
예수님은 목자의 우두머리이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양 떼의 작은 목자들이다. 그렇더라도 예수님은 앞서 달려가신 자(forerunner)이시며, 우리는 교회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작은 앞서 달려가는 자(mini-forerunner)라고 불린다. 우리는 그분이 갔던 것과 같은 길을 가야 한다. 우리 자신을 이긴 사람이 된 후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가 이긴 것과 같이 이기라"(계3:21)고 권면할 수 있다.
새 언약 사역의 비밀
바울은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효과적인 사역의 비밀을 밝힌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고통에서 우리를 능히 강건하게 하십니다,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강건함과 같은 힘으로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능히 강건하게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고후 1:4).
바울은 영적인 교육을 받기 위해 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래야만 그 자신이 시련을 겪을 때 받았던 힘을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었다. 그런 교육 없이는 누구도 새 언약의 종이 될 수 없다.
옛 언약 아래 기름부음 받은 삼손과 새 언약 아래 기름부음 받은 바울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삼손은 외부 사자를 이길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성령의 능력으로 삼손은 이기지 못했던, 자기 육체 안에 거하는 사자들을 이길 수 있었다.
옛 언약 아래서,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나서 다른 사람에게 들은 것을 말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새 언약에서는 충분하지 않다. 이제 하나님의 종들은 시련과 고통을 겪으며 그 모든 시련을 이겨내도록 도와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해야 하며, 그 후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 본을 따르도록 권해야 한다. 이처럼 새 언약 사역은 옛 언약 사역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의 사역이고, 비용 또한 훨씬 많이 든다.
우리는 성경학교에 다닌다고 해서 새 언약의 종이 될 수 없다. 성경 안에 나오는 진정한 사도나 예언자는 성경학교에서 나온 적이 없다 . 우리는 교실에 갇혀서 화학을 공부하는 것처럼 성경을 공부할 수 없다. 성령님은 삶의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성경의 의미를 가르쳐 주신다. 사도들은 그렇게 배웠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종들이 오늘날에도 그것을 배우는 방법이다. 이렇게 해야만 타인을 영생에 참여하게 할 수 있다. 우리가 새 언약의 종이 되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옛 언약에서는 사람들이 완전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새 언약에서는 우리는 할 수 있다(히 6:1; 7:19 참조).
그러나 우리 자신이 완전을 향해 달려가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을 완전으로 이끌 수 없다. 오직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고"(고후 7:1), "예수님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것"(요일 3:3 )이 있어야만, 우리는 다른 사람들도 그러한 삶으로 이끌 수 있다. 다른 방법은 없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작은 앞서 달려가는 자(선구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교회의 다른 모든 신자들이 겪어야 하는 것보다 우리에게 더 다양하고 힘든 상황을 겪게 하신다. 그래야 그들에게 진정한 목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돈이나 인간의 명예 같은 우리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고용인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교회의 다른 사람들이 직면하는 모든 상황에 직면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상황에 직면하여 우리의 선구자가 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유혹을 겪음으로써 우리의 선구자가 되셨다(히 4:15). 예수님은 우리처럼 술 취한 아버지나 잔소리하는 아내나 순종하지 않는 자식들을 두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오늘날 우리가 기다려야 하는 것처럼 정부 기관 밖에서 긴 줄을 서서 면허증을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의 선구자였다. 왜냐하면 그분은 당시의 다른 상황에서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모든 시험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형제자매가 마주하는 모든 시험을 겪게 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을 섬기고 그들을 영생에 참여하도록 이끌려면 그 모든 유혹을 이겨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새 언약의 종이 되는 것이다.
베드로가 장로들에게 "양떼에게 본보기가 되라"(벧전 5:3)고 편지를 쓴다. 그리고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 , 사랑,믿음, 순결에 있어서 믿는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딤전 4:12)고 편지를 쓴다.
1) 우선, 우리는 말의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말은 항상 온화하고 품위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험담하는 일이 전혀 없어야 한다. 만약 누군가가 은밀하게 우리와 무언가를 공유한다면, 우리는 그 문제를 부인들에게도 비밀로 할 수 있어야 한다.
2) 우리는 사랑의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거나 무엇을 하든, 그들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3)우리는 믿음의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모든 힘든 상황에서, 사람들은 우리가 결코 당황하지 않고 항상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다는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있음을 보아야 한다.
4) 우리는 순수의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 우리 자신이 이 분야에서 일류의 모범이 아니라면, 우리 교회에서 젊은 형제자매들 간의 관계에서 순결을 기대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노예
바울은 스스로를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불렀다(롬 1:1). 모든 초기 사도들이 그러했다. 예수님은 오늘날 종이 아닌 노예를 찾고 계신다. 종과 노예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종은 보수를 받고 일한다. 노예는 봉급을 받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새 언약 아래에서 종은 두지 않고, 노예만 두신다.
예수님은 그분의 사도들이라고 부르던 사람들에게 봉급을 한 푼도 제공하지 않으셨다. 만약 우리가 기독교의 전임 사역에 부름받는다면, 우리는 결코 월급을 위해 일하지 않도록 확실히 하자.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결국 사람의 종으로 전락할 것이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선물을 줄 것을 기대하면서 우리 교회를 섬기지 말자. 만약 우리가 그들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그렇게 하기(선물을 주기)로 선택한다면, 그것은 괜찮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에게도 어떤 것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우리보다 생활수준이 낮은 사람들로부터는 절대 어떤 돈도 받지 않겠다는 원칙도 세워야 한다.
그러나 전임 사역으로 주님을 섬기는 가장 높은 방법은 바울이 사도로서 여호와를 섬겼던 방법인데, 그것은 어느 정도 세속적인 일을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필요를 위해 누구의 선물에도 의존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고전 9:14-18;고후 11:7-15, 행 20:33 -34).
임금을 위해 일한다면 우리는 새 언약의 종이 될 수 없다. 우리는 노예가 되어야만 한다. 만약 우리가 편안함과 편리함을 가질 권리가 있다고 느낀다면, 우리는 노예가 아니라 유급 종이다. 노예는 어떤 것에 대한 권리도 없다 - 심지어 명예나 평판에 대한 권리도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살 집을 주신다면, 우리는 감사할 따름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 집이 없더라도 우리는 그분을 섬길 것이다. 우리가 진정한 노예일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몸을 세울 수 있는 특권을 주신다는 사실이 (살 집 보다) 우리에게 더 충분하다.
로마서 6장 22절 은 하나님의 진정한 노예의 과거∙현재∙미래를 말한다.
1) 과거 - 의식적인 죄로부터 해방되었다.
2) 현재 - 점진적인 성화의 열매.
3) 미래 - 영생(신성한 성품의 충만함).
우선, 의식적인 죄악에서 벗어나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은밀한 실패를 슬퍼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죄에 대한 승리의 삶을 살지 못한다. 우리는 삶에서 나온 생각의 불순함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 삶의 그 부분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경외하는지 아닌지를 시험하시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두 번째, 우리가 하나님의 진정한 노예라면, 성화의 증진이 우리의 삶에서 나오는 주요 한 열매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데려와 믿음으로 그들을 세우는 것은 부차적 인 열매가 될 것이다. 우리가 정말로 주님을 섬기고 있다면, 우리의 수고는 분명히 우리의 개인 생활에 경건함을 증가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성화는 우리의 육체에 깃든 악에 대해 점점 더 빛을 얻는 과정이며, 예수님의 죽음을 우리 몸에 짊어짐으로써 점점 더 많은 영역에서예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과정이다. 만약 우리가 성화 되고 있다면, 예를 들어, 우리가 가족 구성원들에게 말할 때 우리의 거친 목소리, 우리가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부족, 우리의 목회에서 명예를 추구하는 태도, 지나친 말과 어리석은 농담, 그리고 우리의 설교의 죽음 등에 대해 빛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노예는 모든 충만함 속에서 하나님의 본성(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기를 고대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진정한 노예가 추구하는 목표다.
하나님의 노예로서 우리는 이 땅에서 많은 시련과 오해와 거짓 고발을 겪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끝까지 사랑으로 인내한다면, 예수님을 만나게 될 때 그 모든 것이 가치가 있을 것이다.
바울은 우리에게 새 언약의 종으로서 다음과 같이 상기시켜 준다, 우리는
"이 사역이 비난을 받지 않게 하려고 어떤 일에서도 실족거리를 주지 아니하며,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우리 자신을 추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고통과 어려움과 괴로움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순결함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진실한 사랑과 영광과 불명예,나쁜 평판과 좋은 평판을 겪으며 일합니다,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사람들에게)무명한 자 같으나(하나님에게)유명한 자요,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소유하고,우리를 향해 마음이 좁은 사람들에게 마음을 활짝 여는 자입니다"( 고후 6:3-11).
우리의 몸을 복종하게 함
고린도전서 9장 27절 에서, 바울은 그의 삶의 비밀을 하나 더 우리에게 말한다. 그는 "몸을 거칠게 다루며,몸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할 일을 하도록 훈련시켰다"(TLB)고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설교한 후에 자신이 실격될 것을 두려워했다.
바울이 주님을 위해 온갖 일을 다 해놓고도 실격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을 보면 놀랍다.
건강한 두려움이 있고 건강하지 못한 두려움이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해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건강하지 못한 두려움이다.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해칠지도 모른다(우리가 무언가를 말하거나 함으로써)는 두려움은 건강한 두려움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마침내 실격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우리를 항상 경계하게 하고 "정신을 차리게" 만드는 건강한 두려움이다. 그것은 우리의 몸을 복종시키고, 몸을 우리의 노예로 만들 수 있게 해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두려움과 떨림으로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빌2:12)고 말한다. 모든 설교자는 위선자가될위험이 항상 존재하기때문에, 이러한 권고는 특히 설교자들에게 필요하다. 그는 아직 실천하지 못한 일을 설교할 위험에 처해 있다. 그는 완전히 사실이 아닌 자신에 대한 인상을 남들에게 줄 위험에 처해 있고, 자신의 삶을 완성하는 것보다 자신의 설교를 준비하고 완성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위험에 처해 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9장 26절 에서 자신이 하고 있던 일에 대해 아주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목적 없이 싸우거나 달리지 않았다. 그는 확실한 목표를 향해 달렸다. 그는 확실한 목표를 향해 총을 쏘았다.
우리 생도들이 사관학교에서 소총 쏘는 법을 배우던 시절이 생각난다. 우리는 손에 소총을 들고 서로 몇 피트 떨어진 땅바닥에 누워 있어야 했다. 우리들 각자는 몇 야드 앞쪽에 과녁 판이 있었는데, 그 중심에 "황소의 눈"이라고 불리는 점이 있는 동심원이 여러 개 표시되어 있었다.
우리가 처음 사격을 시작했을 때, 우리는 조준이 매우 부정확했다. 우리 중 몇몇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옆 사람의 과녁을 맞히기도 했다!! 얼마 후,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과녁을 맞추는 법을 배웠다.
많은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목표물을 쏜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일에 간섭한다. 그러나 그들 자신의 구원을 위해 노력한다면, 차츰 자기들의 목표물을 맞추는 법을 배워 마침내 중심을 맞추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들의 조준은 완벽해졌을 것이다. 바울의 조준은 완벽했다. 그는 남을 판단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판단하고 자신의 몸을 복종하게 했다. 그래서 그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그의 달려갈 길을 끝마쳤다(딤후 4:7).
우리의 눈과 혀는 우리가 가장 단련해야 할 우리 몸의 두 구성원이다.
우리는 불신자들을 초대하여 그리스도에게 마음을 바치도록 권유한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몸을 드리라고 하신다(롬 12:1 ), 특별히 우리의 눈과 혀를 드리라고 요구하신다. 우리가 이것을 줄곧 하나님께 드리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노예나 대변자가 되거나,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인정 받기를 기대할 수 없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눈을 통제하지 않는다면 - 집에서, 버스에서, 길에서 우리의 일하는 곳에서 - 우리는 천사처럼 설교해도,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 버림받게 될 것이다. 수세기 동안 하나님의 많은 종들이 눈을 조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넘어졌다. 그들은 눈을 돌려 예쁜 소녀들을 바라보게 되었고, 곧 한 가지 일이 다른 일로 이어졌고, 그들은 죄에 빠졌다. 우리가 여자에 대해 욕망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성경은 우리가 영적 빈곤에 빠지지 않도록 여자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바라보지 말라고 경고한다(잠 6:25-26).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조심해야 하는가.
우리는 같은 방법으로 혀도 조심해야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다른 때에 사탄에게 그의 혀를 사용하도록 허용한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의 혀를 사용하여 말씀을 전하지 않으실 것이다.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이르시되,
"(너의 대화에서) 네가 만일 헛된 것을 버리고 귀한 것을 말한다면,너는 나의 입이 될 것이다"(렘 15:19).
우리는 결코 선의의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말을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이 부분에 너무 약하기 때문에,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혀를 훈련하려면 무자비해야 한다.
나는 하나님께서 지난 날 그분을 섬기기 위해 부르시고, 인도에서 그분의 예언자들로 세우시려고 계획하셨던 젊은이가 우리 땅에 많이 있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그들은 눈과 혀를 훈련하는 데 주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언자가 되지 못했다. 그들은 그들의 몸을 복종시키지 않았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라고 불린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몸의 지체와 뇌의 관계처럼 머리이신 그리스도와의 친밀하고 내면적인 관계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자신의 몸의 모든 부분을 오직 아버지(그분의 머리)만을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신실하게 지켰다. 로마서 15장 3절 에는 그분은 결코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다고 쓰여 있다. 그분은 결코 눈이나 혀를 사용하는 방식에서 자신의 즐거움을 추구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바라보지 않았다. 또한 하고 싶은 말도 하지 않았다. 그분은 항상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일을 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그분은 자신의 몸을 아무런 흠도 없이 아버지에게 선물하고, 세상에서 아버지의 완벽한 대변자가 되었다(히 9:14). 이제 우리도 그분의 영적인 몸의 지체로서 그렇게 살아야 한다.
온 마음을 다해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아무런 흠도 없이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고자 하는 불타는 열망을 갖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우고자 한다면, 이렇게 하나님께 몸을 바치고자 하는 열망하는 자들과 진정으로 육체를 노예로 삼으려는 자들이 모두 모여야 한다.
중심과녁을 맞추지 못할 때마다, 우리는 실패를 슬퍼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눈이 완전히 순수하지 않을 때 슬퍼해야 한다. 우리의 혀가 절대적인 선으로 말하지 않았을 때 우리는 슬퍼해야 한다.
로마서 7장 23절 에서 바울은 그의 몸 안에 한 다른 법(그리스도의 법에 반대되는)을 보고(현재형), 그것이 바울을 죄의 법의 포로가 되게 하였다고 정직하게 인정했다. 만약 바울이 과거 시제로 이것을 한번 본 적이 있는 것으로 언급했다면, 그것은 별개의 문제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보았고 매일 그것을 계속 보았다. 즉, 그는 자신의 육신에 선이 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계속 깨달았다. 그리고 그는 육과 영의 모든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계속 깨끗하게 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몸을 복종시키고 그의 삶이 끝날 때까지 하나님께 충실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우리 시대의 많은 설교자들과는 달리 실격되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그의 달려갈 길을 마쳤다.
경건함 - 진실과 거짓
옛 언약 아래서, 사람들은 "주님의법"(시 1:2)에 대해 묵상하도록 권고를 받았다. 그러나 새 언약 아래서, 우리는 "주님의 영광"(고후 3:18)에 대해 묵상하도록 권고를 받는다.
하나님의 말씀의 글자만 보면 우리는 바리새인이 될 것이고, 바리새인 교회를 세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에서 보듯이, 예수님의 삶의 영광을 본다면 우리는 점점 하나님의 모양으로 변화될 것이다.
경건한 삶을 사는 비결(딤전 3:16에 성령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은 육신의 모든 한계를 안고 이 땅에 사셨고,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 보다 더 많은 자원, 즉 성령의 능력을 더 가지지 못하셨지만, 그분의 영 안에서 완전히 순결하게 사셨던 예수님의 본을 보는데 있다. 그분이 그렇게 살 수 있었다면 우리도 그렇게 살 수 있다.
"그분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분이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6).
우리는 죄를 짓는 것에 대해 더 이상 육체를 탓할 수는 없다. 이 땅에 육신을 입고 걸으며, 죄를 짓지 않은 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분은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으로 이기셨다 -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우리 자신이 예수님을 따라 이기는 삶을 사는 척도에 따라 우리 동료 신자들을 예수님이 걸으신 대로 걷도록 이끌 수 있는 척도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성령님은 경건함의 비밀(딤전 3:16)에 대해 말씀하신 직후, 마지막 때에 신자들을 이런 경건의 길에서 벗어나 거짓으로 거룩해지는 길로 인도하려는 속이는 영들이 올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들을 따르리라 하셨으니"(딤전 4:1).
모든 속이는 영들의주요한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로 오셨음을 인정하지 않는다"(요이 7절)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육체를 입고 모든 죄를 이기셨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속이는 영들의 말을 들음으로써, 신자들은 마침내 '악마의 교리"(딤전 4:2)를 믿게 될 것이다. 거기서 두 가지 악마 교리의 예가 언급된다: 결혼을 금지하는 것과 특정 음식을 먹는 것을 금지 하는 것이다.
독신주의와 금식은 이방인 종교에서 항상 거룩해지기 위한 방법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이러한 악마적 교리는 말세에 심지어 기독교에까지 침투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 시대에 실현되는 것을 본다.
오늘날 우리가 미혼으로 남거나 규칙적으로 금식을 하면 더 거룩해질 수 있다고 가르치는 기독교 단체들이 있다. 이런 교리는 악마들의 교리인가? 그렇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의 시선을 경건함의 비밀에서 금욕주의로 돌리기 때문이다. 성령의 힘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대신, 우리는 수도자적 자기 훈련을 통해 경건함을 추구하기 시작한다.
미혼으로 남거나 금식을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이것들이 경건함의 비밀로 장려된다면, 그 오류는 심각하다. 사실 사람들을 "경건함의 비밀로서 육체에 나타난 그리스도"에서 멀어지게 하는 모든 교리는 악마의 교리인 것이다. 진정한 거룩함은 요가나 명상이나 자기 훈련이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얻을 수 있다.
골로새서2:20-23에서, 바울은 금욕적인 수행은 외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신적 성품이 우리의 육체에 나타나도록 우리를 이끌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오직 성령만이 신적 성품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교회에서, 우리는 사람들을 종교적 금욕주의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오직 기독교화된 버전의 요가만 선포하게 될 것이다.
악마는 영원히 신자들을 물질주의의 한 극단 또는 금욕주의의 반대 극단으로 이끌려고 한다.
물질주의는 육욕적인 신자에게도 분명히 세속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렇게 위험하지 않다. 그러나 금욕주의는 경건함으로 이끄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더욱 위험하다. 이 둘은 서로 마주 서 있는 절벽이다. 그러나 둘 다 지옥으로 이끈다. 돈을 사랑하는 무종교인과 종교적이고 자기 훈련을 잘하는 바리새인들은 둘 다 지옥으로 향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종으로서 우리는 그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세상의 눈에 크고 위대하게 보이는 것
교회를 세울 때, 우리는 다음 사항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의 눈에큰것은 모두 하나님이 보시기에 혐오스러운 것이다"(눅 16:15) .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인간적인 위대함을 교회에 끌어들이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할 때, 우리의 영리함이나 지식이나 세련된 언어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려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교회에서 우리의 혼적인 힘을 과시하는 것이 될 것이다.
교회에서의 우리의 가치관은 세속적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와 정반대다. 세속적인 사람들은 돈에 많은 가치를 두는 반면, 우리는 돈에 가치를 두지 않는다. 세속적인 사람들은 세상에서 위대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공경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 반면에, 우리는 겸손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소중히 여긴다. 세상은 지적인 것에 큰 가치를 두는 반면, 우리는 사람의 영리함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세상과 교회는 조금만 다른 것이 아니다. 그들은 반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교회에서 우리의 총명함이나 위대함을 과시하는 것은 하나님께 혐오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구약성경에서 제단에 돼지를 바치는 것과 맞먹는다. 우리는 인간의 가증한 것들을 하나님을 섬기는 데 사용하는 것에 대한 건강한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 한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기
이사야 11장 6절 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돌아오실 때 천년 동안 모든 것이 평안할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야생동물은 없을 것이고, 지구상의 삶은 그야말로 멋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교회에서 그 삶을 미리 맛보고 있다 -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교회에 이미 왔기 때문이다. "이리"는 이미 "어린양"과 함께 누워있고, "표범"과 "염소"는 평화롭게 지내며, 교회의 교제 속에서 "소"는 "사자떼" 안에서 안전하다. 세상에는 이렇게 다양한 개성을 가진 사람들은 서로 잘 어울리지 못한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그들은 자기자신을 위한 삶에 죽고, 서로 영광스럽게 평화를 누리며 살아간다.
그리고 이 왕국에서, 이사야는 "어린 아이가 지도자가 될 것"(사 11:6)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를 이끌기에 정말 적합한 사람은 어린 아이와 가장 닮은 사람인 것을 봅니다 .
교회에서 진정한 지도자는 어린 아이처럼 속임수를 모르고 겸손한 사람이다. 그런 형제와 교제하는 것은 쉽다. 사람들은 그러한 형제, 즉 자신의 성격이나 재능으로 남을 감동시키려 하지 않으며, 더 성숙한 다른 형제들을 흉내 내려고 하지 않는 형제에 대해 신뢰를 갖게 된다.
많은 기독교 단체에서, 리더십은 똑똑하고 재능 있고 유머러스하며, 훌륭한 음악가나 기획자인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그러나 새 언약 교회에서, 하나님은 어린 아이들과 같은 사람들을 임명하시는데, 그들은 그분의 왕국에서 가장 큰 자들이기 때문이다.
교회에 있는 "이리"들이 "어린양들"을 찢고 있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그 교회에 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지도자가 어린아이 같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서 일이 잘못될 때 지도자들은 스스로를 판단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8:4에서 제자들에게 어린 아이들처럼 겸손하라고 하셨는데, 하나님 나라에서는 어린 아이가 가장 크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처럼 항상 겸손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 모든 기독교 지도자들이 따라야 할 예가 있다.
예수님이 수많은 병든 사람들을 고치셨지만, 사람들에게 그것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그분은 자신에 대한 어떠한 홍보도 원하지 않았다. 그것은 " 거리에서 그분의 목소리를 들리게 하지 않을 것이다"(그분은 자신을 광고하지 않을 것이다, 마12:15-20)라고 한 성경을 이행하기 위해서였다.
이 성경 구절은 "보라 나의 아이를...."라는 말로 시작한다(마 12:18 - 여백). 하나님께서 거기에서 말씀하시기를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나의 아이를잘보아라. 그는 병든 자를 치료하고 나서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처럼 사라진다 ."
교회에서, 이런 영을 가진 사람이 진정한 지도자다.
어린 아이는 자신이 보잘것없는 존재이며,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우리가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것과 영적인 문제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우리를 항상 어린아이로 있게 해줄 것이다. 하나님께서 교회에서 그분의 대리자로서 인정하실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런 사람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겸손함을 배울 수 있는 두 가지 예만을 우리에게 주셨다: 예수님 자신과 어린 아이들이다 . 복음서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어떻게 사셨는지 볼 수 있고, 그분의 본보기로 겸손함을 배울 수 있다. 우리 주위에서 우리는 작은 아기들을 볼 수 있고, 그들에게서 겸손함을 배울 수 있다.
어린 아기가 요람에 누워 있을 때 어떤 생각을 할까? 자신이 얼마나 똑똑한지, 혹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얼마나 인정해 주는지를 생각하는가? 아니다. 아기는 전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 아기는 자기 의식이 전혀 없다. 아기는 가식이나 인위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운 그 자신일 뿐이다. 그것이 우리의 본보기가 된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나 우리 사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이 쓰이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린 아이들 같지 않다. 우리는 회심하여 어린아이처럼 될 때까지 이러한 높은 생각과 싸워야만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할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을 갖추게 될 것이다.
그 때에 우리는 그분의 일을 하기 위해서 우리를 이 땅에 두신 어떤 작은 구석에서도 만족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인간의 눈에 크게 보이려는 어떤 야망도 갖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우리에게 맡기신 임무를 기쁨으로 완수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어떤 사람의 사역도 질투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이 놀라운 복음을 전할 뿐만 아니라 경험할 수 있게 하시고, 우리의 모든 부패한 "어른의 방식"을 버리고 다시 한 번 어린 아이처럼 될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새 언약의 진정한 종이 될 것이다.
"무릇 사람을 신뢰하고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그는 사막의 키가 작은 관목과 같을 것이다.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신뢰하고 주님을 그의 희망과 확신으로 삼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다.그는 강변에 심어진 나무가 달콤한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을 것이다"( 렘 17:5-8 - TLB).
새 언약의 종은 모든 일에 있어서 은혜와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살고 섬겨야 한다. 그래서 기도는 그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 기도는 우리가 무력하지만 하나님께 확신을 가지고 의존한다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자신감 넘치는 사람은 종교적 의식을 제외하고는 기도하지 않을 것이다. 기도하지 않는 기독교 지도자들은 자급자족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의존하지 않는다. 그리고 언제나 그들은 열매가 안 열리는 나무나 다름없을 것이며, 그들의 회중은 사막과 같을 것이다. 위의 구절에서 말하는 강은 성령이다. 주님만 의지하여 도움을 구하는 사람은 계속적으로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진정으로 구할 것이다.
예언자 스가랴는 교회의 상징인 순금 등잔대에 대한 환상을 받은 적이 있다(슥 4:2; 계 1:20참조).
등잔이 계속 타오르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지속적인 기름 공급이다(슥 4:3). 그리고 이를 위해 등잔대 양쪽에 올리브 나무 두 그루가 심어져 있었는데, 이 나무를 통해 교회가 세워지는 성령의 열매와 은사를 상징한다.
그러자 천사는 스가랴에게 하나님의 일은 사람의 힘이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이루어질 것이며, 가로막는 모든 산이 평평해질 것이라고 말했다(슥 4:6,7).
모든 산은 평평해질 것이다
하나님의 일에서, 우리는 여러 유형의 방해물과 장애물에 직면할 것이다. 우리는 진정으로 그분의 뜻대로만 하기를 구하고 있을 때,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러한 산들을 맞닥뜨리도록 허락하시는지 궁금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가 믿음을 행사하여 그 모든 산들을 평지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라고 재촉하신 경우를 읽은 적이 있다. 그들은 가고 싶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가라고 재촉했다(마 14:22 ). 그들이 예수님께 복종했을 때, 그들은 거센 폭풍우를 만났다. 그들이 예수님을 불순종하고, 호수를 건너지 않았다면, 그들은 그 폭풍에 전혀 맞닥뜨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폭풍을 잠잠케 하시는 주님의 능력도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폭풍우를 마주할 때만이 비로소 하나님의 능력도 알 수 있다.
불순종하고 타협하는 그리스도인은 인생을 쉽게 살아간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능력도 경험하지 못한다. 예수님의 제자는 "많은 고난"을 겪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또한 "모든 고난에서 그를 건지시는"(시 34:19) 주님을 경험한다.
하나님은 사람이 해결할 수 없는 거대한 문제들 속에서 그분의 백성이 그분을 신뢰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신다.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그러한 상황에서이다. 하나님의 백성 중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인간이 만들었거나 마귀가 만든 폭풍우나 산에 직면했을 때 그들을 도울 수 없는 자신의 상상 속의 신을 믿고 있다. 그것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만든 신, 즉 어떤 이방 우상보다 나을 것이 없는 무력한 상상 속의 우상이다.
우리 하나님께 너무 큰 문제가 있을까? 없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사람이나 사탄이 우리의 길을 가로막는 산을 일으킬 때 두려워하는가?
이스라엘 자손은 가나안 땅의 거인들의 크기를 듣고, "이 거인들은 우리 하나님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크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신은 누구였을까? 이집트로부터 그들을 인도한 신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상상 속에 만들어낸 무력한 허상이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38년 동안 광야를 떠도는 것(신 2:14 )을 선고한 것은 당연하다.
그들은 믿지 않았다. 그들의 불신은 하나님을 모욕하고, 하나님의 양손을 묶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오늘날에도 그들의 불신으로 하나님의 손을 묶는 기독교 지도자들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하나님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것을 믿고 선포할 사람을 찾고 계신다.
하나님은 항상 사탄에 대항하여 우리 편이다. 그리고 우리의 불신 외에는 그분이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세상의 모든 55억 사람들과 수백만의 사탄 마귀들이 우리를 반대하더라도, 그들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방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낙담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가 죽더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우리의 죽음을 통해 그분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실 것을 믿고 죽을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산을 만나게 하실 때, 그것이 우리와 씨름하는 악마의 모습이든, 우리를 반대하고 고발하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든, 그분의 목적은 우리가 강해지고 부유해지도록 하기 위함이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
스가랴 4:6 -7이 단순히 거실에 걸어두는 벽에 걸린 글귀 이상의 것이 되는 것은, 우리가 산과 마귀와 인간의 반대를 마주할 때뿐이다. 그것은 우리의 혈류 속에 쓰여진다!
그러나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하여 "주님,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나는 정말 이 곳에서 주님 편에 서고 싶습니다. 모든 동료신자들이 미온적이 되더라도, 그리고 아내가 반대하더라도, 주님 편에 설 수 있는 은혜를 주옵소서. 난 전적으로 당신의 것입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당신의 것 입니다. 나는 당신의 일을 위해 내 일생의 모든 수입을 기꺼이 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있는 산을 계속해서 평평하게 만드시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이 땅에 거인이 아무리 많아도 상관없다. 우리 하나님은 그들 모두 감당하실 수 있다. 그는 "우리 적에게 적이 될 것"이며, "우리들과 싸우는 자들과 싸우실 것이다"(출 23:22, 사 49:25 ).
하나님은 "너를 치려고 제조된 모든 연장이 쓸모가 없을 것"과 "그분이 친히 우리를 변호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사 54:17 ). 그래서 우리는 억울한 누명을 썼을 때 결코 스스로를 변호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침묵을 지키며,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우리의 일을 맡길 수 있다"(벧전 2:23). 이것이 새 언약의 종들이 품위 있게 행동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으실 것을 알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한다. 하나님께서 우리 앞서 달려가신 분이신 예수님을 위해 행하신 일을, 우리에게도 역시 행하실 것이다.
인도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수고한 우리 자신의 간증은, 우리가 지난 몇 년 동안 사람과 악마의 반대, 거짓된 비난, 악의적인 험담, "거짓 형제"에 의한 배신(고후 11:26) 등의 많은 산을 만났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 자신을 변호해 본 적이 없다. 우리는 늘 하나님 앞에 엎드려 "주님, 이것은 주님의 일이지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당신의 종일 뿐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나 악마도 당신이 우리 땅에서 성취하고자 하는 것을 방해할 수 없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 산을 우리 길에서 사라지라고 명령한다."
2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로막고 서 있는 모든 산을 제거하셨다고 간증할 수 있다. 그분은 우리의 적들에게 적이셨고 하나님은 그분 스스로 우리를 변호하고 증명해 주셨다. 그분의 이름에 모든 영광을 돌린다. 우리는 그분이 미래에도 그렇게 하실 것을 안다.
주님께 신자들을 맡기기
하나님의 종으로서, 우리는 또한 신자들이 우리가 아닌 성령님께 의지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그들이 어린 아기일 때, 많은 문제에서 우리의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단 그들이 주님을 알게 된지 몇 달이 지났다면, 우리는 그들을 주님께 맡겨서 도움을 받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은 아이들이 태어난 지 1년 만에 스스로 설 수 있도록 정하셨다. 우리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거듭난 지 1년 안에, 신자들은 죄를 이기고 주님과 함께 걷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들이 두 살이 될 때쯤이면, 두 발로 안정적으로 서 있을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도 이집트를 떠난 지 2년 만에 가데스바네아로 데려와 약속된 땅으로 들어가라고 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여호와를 거역했다. 그들의 실패는 신약성경에서 우리에게 경고로 반복해서 제시된다(고전10장,히2장 참조).
우리는 신자들이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찾는데 우리에게 의존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들을 주님께 맡겨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그들은 자랄 것이다. 새 언약 아래서, 하나님의 약속은 "그들이 모든 자기 형제에게 '주를 알라'고 가르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지극히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모두 나를 알 것이기 때문이다"(히 8:11).
예수님은 그분의 양들이 그분의 목소리를 들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들은 항상 우리를 통해 그것을 들을 필요가 없다. 대부분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실망시킨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신자들을 구약성경 형태의 삶으로 이끌었다. 신자들은 결정을 내려야 할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들의 지도자가 말해주기를 의존한다.
하나님의 새 언약 종은 신자들이 그들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직접 연결되도록 이끈다. 그것이 우리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에 대한 관심
스가랴 4장 9절 에서, 성전의 기초를 닦은 스룹바벨(주 예수님의 한 전형)도 그것을 마칠 것이라고 읽었다. 주님은 그분의 일을 미완성으로 남겨두지 않으실 것이다.
주님이 어느 마을에서 두 제자를 두시어,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순수한 증거를 세우도록 하셨다면, 그분은 이미 거기에 그분의 일을 위한 기초를 닦아 놓으신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기초에 균열이 생기지 않도록, 즉 두 사람 사이에 틈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들이 서로 세우고 교제를 유지하는데 충실하다면, 주님은 그분의 일을 완성하실 것이다. 그분은 그곳에 그분의 교회를 세울 것이다.
당신의 마음이 당신의 마을에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지기를 몹시 원한다면, 하나님의 마음이 그것을 훨씬 더 원하고 있다는 것이 확실하다. 교회를 세우는 것에 대한 당신의 관심은 하나님에 비하면 바다에 물 한 방울이다. 씨앗 한 톨과 같은 그 짐을 당신의 마음속에 넣어주신 분이 바로 그분이다. 그런 짐이 자기의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자만이다. 당신은 하나님 자신이 심은 씨앗에 물을 줄 수 있을 뿐이다. 그분은 그것을 자라게 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교회를 세우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나님의 일로 여기지 않으면, 당신이 궁지에 몰리게 될 때, 하나님이 도와주실지 말지 의문이 들 것이다. 당신은 그 때에 제자들처럼 여호와께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막4:38)라고 물을 것이다.
교만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데, 교만은 우리를 믿지 못하게 한다. 교만과 불신앙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하박국 2장 4절 에서, 우리는 신자의 반대는 불신자가 아니라 교만의 사람이라는 것을 읽었다. 그리고 요한복음 5장 44절 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믿음을 갖지 못하게 한 것은 교만 (사람의 명예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불신앙이 교만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 교만한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의지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믿음이 없다.
정확히 같은 방법으로 겸손과 믿음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한다.
우리 자신을 신뢰하지 않음
옛 언약 아래서, 이스라엘 사람의 주요한 표시는 할례였다.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백성에게서 끊어져야 했다. 그가 하나님의 언약을 어겼기 때문이다(창17:14).
새 언약에서, 할례의 영적 의미는 "우리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것"(빌3:3)이라고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고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으로 계속 기름부으시는 사람은 바로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다. 예수님에 관한 예언에 "내가 붙드는 나의 종을 보라….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으니"(사42:1; 마12:18 참조)라는 구절이 있다.
성령의 기름부음은 하나님의 새 언약의 종이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하나님은 그분 자신이 붙드는 사람 즉, 속수무책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에게 기름을 부으신다는 것을 본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약해지기 전에는 행사할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믿음은 우리 자신의 영리함, 능력과 돈일 수도 있고, 우리가 알고 의지할 수 있는 다른 사람들의 자원이 될 수도 있는 육체의 팔에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부유한 형제와 가난한 형제가 둘 다 갑작스런 경제적 필요에 직면한다면 누가 더 하나님을 믿겠는가? 분명 가난한 형제이다. 그 부유한 형제는 충분한 돈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는 기도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가난한 형제는 믿음이 있다면,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그는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의지할 인적 자원이 없을 때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법을 배운다.
심지어 "믿음으로 산다"고 주장하는 많은 이른바 "전임 사역자"들도 그들이 의지할 수 있는 상당히 신뢰할 만한 인적자원을 갖추고 있다. 그들에게는 매달 돈을 보내 줄 수 있을 만한 형제들이 있다 - 하나님이 그들을 실망시킬 경우를 대비해서 말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온다"(롬10:17).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때 우리 마음 속에 믿음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또한 성령을 통해서도 말씀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 우리의 영적 안테나는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하루 종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조절되어야 한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하나님의 종에게 가장 중요한 요건 중 하나이다. 예수님은 매일 성령의 이끄심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며 살았다( 사50:4 참조). 그것은 그분이 자신에 대한 신뢰가 없음을 증명했고 오직 아버지만이, 영원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너무 바빠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시간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영원한 가치가 없는 일을 하는 데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법을 가르쳐 주길 원하신다. 성경에 네 번,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적혀 있다. 이 말은 전임 사역자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자에게 적용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거듭 하나님께 의지하여 지도를 받을 수 밖에 없도록 우리의 상황을 마련하신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최선을 찾고 있다면, 그분은 우리가 오랫동안 의지해 온 인간의 버팀목들을 점차 거두어 가시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 즉 그 필요들이 재정적이든 육체적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오직 하나님을 믿는 곳으로 우리를 데려갈 것이다.
역대하 16장 12절에서, 우리는 유다의 아사 왕이 아프다는 것을 읽었다. 왕이 아플 때, 그는 그를 치료할 최고의 의사들을 구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아사는 죽었다. 왜? "그의 병이 매우 위독할 때에도 그가 주님을 찾지 않고 의사들을 의지했기"(12절) 때문이다.
지금 만약 이스라엘의 가난한 사람이 아팠다면, 그는 여호와께 구해야 했을 것이며 여호와께서 그를 고쳐 주실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찾는 것은 약하고 인적 자원이 제한되어 있을 때이다.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너무나 중요한 요소여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히11:6)라는 말을 듣는다. 그것은 우리가 순결하고 선하게 살고, 결코 뒷담화나 험담이나 속임수나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일을 위해 모든 돈을 바쳐도 믿음(하나님을 속수무책으로 의지하고 우리 자신에 대해 신뢰하지 않는 것)으로 살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그분을 기쁘게 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새 언약의 종으로서, 우리는 교회 안의 다른 사람들에게 단지 성경 지식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전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경험을 통해 모든 상황에서 주님을 신뢰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소울파워, 전자파워, 머니파워
또 하나 우리가 하나님의 종으로서 이해해야 할 것은 우리의 혼적인 힘과 성령의 힘의 차이다.
베드로가 주께 말하였다,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즉시 대답하셨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다." 즉, 베드로는 자신의 혼적인 힘, 즉 인간의 총명함이나 영리함으로 그 영적 진리를 발견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혼soul(생각mind)은 우리에게 신의 계시를 줄 수 없다. 우리가 총명하다면, 성경에서 영리한 생각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교회에서 다른 사람들과 그런 생각을 공유하고 분별력 없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영리한 인간의 생각과 신의 계시는 땅과 하늘만큼 서로 다르고 멀리 떨어져 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데 자기 자신의 총명함을 사용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보다 바울의 지혜에 기대지 않도록 두렵고 떨림으로 설교했다(고전2:1-5).
인간적으로 말하면, 바울은 유대인들 사이에서(바울이 그들의 성경을 알았기 때문에), 베드로는 이방인들 사이에서 일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적합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정확히 반대되는 사역(갈2:8)를 주셨다. 그래서 그들이 성령에 의지하고 자기 능력에는 의존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영리한 생각들은 보통 다른 사람들에게 설교하여 존경을 얻는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반면에 계시는 우리를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한다. 우리의 영리함으로, 우리는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신의 계시로 우리는 그들을 도울 수 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를 받았을 때, 자신의 환상을 다음 설교의 요점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엎드려서 하나님을 예배했다. 밧모섬에서도 요한에게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둘 다 주님 앞에 엎드려서야 비로소 주님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라고 하셨다. 하나님을 섬기려면 먼저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또한, 혼적인 힘은 최면을 거는 힘을 통해 사람을 쓰러뜨리고, 병적으로 흥분하여 웃게 하고 설교자들에게 돈을 바치는 사역에서도 나타난다. 이런 모임에서 정신 질환자(정신적 태도가 잘못돼 생기는 병)들도 "치유"된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의 혼적인 힘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며, 그래서 많은 신자들까지도 속는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우리는 대담하게 이 위조품들을 폭로해야 한다.
혼적인 힘은 또한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그들의 추종자들을 지배하고 지도자들의 인격으로 그들을 압도하는 방식에서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그러한 지도자들을 경외하며 그들을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으로 존경한다. 그리고 이 지도자들은 추종자들로부터 그러한 존경을 좋아한다.
음악에도 엄청난 혼적인 힘이 있다. 음악은 우리의 감정을 동요시킬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성령의 힘이라고 속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좋은 음악으로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들일 수 있다. 하지만 누구를 끌어들일까?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 도움을 구하는 가난한 영의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의 지성과 음악적 취향을 자랑스러워하는 교양 있는 사람들과 세련된 사람들이다.
어느 일요일, 음악적으로 재능있는 커플이 방갈로에 있는 우리 모임에 왔을 때가 기억난다. 그들은 음악이 수준 이하라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다시는 오지 않았다. 우리는 경건한 교회가 아닌 음악적인 교회를 찾는 사람들로부터 지켜주셔서 감사했다!!
교회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훌륭한 오케스트라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다. 베드로가 오순절에 군중을 끌어모은 것은 키보드와 드럼 세트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으로 하였다. 이 기름부으심이 사라질 때, 성도들이 훌륭한 음악, 유머러스한 설교, 웅장한 건물 등으로 그것을 대체하려고 한다.
전자 기기 또한 올가미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의 기름을 부은 종들이 성경을 가르치는 테이프는 확실히 우리의 영적 성장에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자 할 때, 성령보다 그런 테이프에 더 의존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사도 바울의 테이프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것들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울 수는 없을 것이다!
돈은 세상에서 엄청난 힘을 가진 또 다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쉽게 돈에 기댈 수 있다. 오늘날 거의 모든 기독교 단체들은 돈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으며, 서구 국가의 단순하고 진실한 (그러나 잘 속는) 신자들로부터 "엄청난 달러"를 긁어 모으기 위해 소식지와 잡지를 보낸다.
반면에 사도들은 신도들에게 자신들을 위해, 혹은 그들의 일을 위해 돈을 요구한 적이 없었다. 이들은 신도들에게 오직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고"(갈2:10) 어려움에 처한 자들을 도우라고 촉구했다(고후8,9장).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도들이 단 한 번도 말하지 않은 것이 오늘날에는 기독교 사역에서 항상 언급되고 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시50:12).
이 신의 종으로서 우리는 어떨까? 우리가 식량이나 돈이 필요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말씀 드려야 하나, 사람에게 말을 하여야 하나? 만약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면, 우리는 결코 지상의 필요한 것에 부족함을 겪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돈이 부족하지 않다. 그분에게 부족한 것은 부서지고 겸손하며 성실하고 믿음직한 종들뿐이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권능을 부여하고 교회를 세우는 데 사용할 수 있는 부서지고 겸손한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그분은 다른 사람에게 그분의 영광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분은 그분의 능력 이외의 어떤 힘으로도 교회를 세우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옛날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 혼적인 힘이나 전기의 힘(컴퓨터)이나 재정적인 힘으로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 진다!
예수님의 삶과 사역
우리는 성령이 충만한 삶을 생각할 때마다,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살펴야 한다. 그분은 성령이 충만한 사람의 가장 분명한 본보기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성령의 열매와 은사 중 어느 것을 가지고 있었는가? 정답은 "둘 다" 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둘 다 추구하자.
성령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 거울에 비친 예수님의 영광을 보여주신 다음, 우리를 그분의 형상으로 변화시켜 주신다(고후3:18).
성령은 먼저 예수님의 삶을 우리에게 보여 줄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예수님의 뺨을 때리고 그분의 턱수염의 털을 뽑고 거짓으로 고발할 때에도 결코 짜증내지 않으셨던 예수님의 완전한 인내를 보여 주실 것이다.
성령님은 예수님이 그분의 집과 목공소에서 마주한 여러 가지 상황에 어떻게 반응하셨는지 우리에게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성령께 복종한다면, 성령님은 그러한 본성에 나아가도록 우리에게도 역사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그분의 기뻐하는 것을 원하게도 하시고 행하게도 하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빌2:12,13). 그러면 우리의 삶에서 서서히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은 한 가지이다. 그것을 생산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우리는 신의 성품을 만들어 낼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려면, 우리는 그것을 생산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부서진 상태가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을 성령으로부터 겸허히 받아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신적 성품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오늘날 우리가 전심을 다하고 자신을 훈련했기 때문에 인내심을 갖게 되었다고 느낀다면, 그때 우리는 사탄에게 속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사탄이 우리를 파괴하려고 우리를 자만하게 하는 방법이다. 만약 우리가 가진 인내심이 우리 자신의 산물이라면, 그것은 가치 없는 인간의 미덕이며, 인간의 똥만큼 가치가 없다.
반면에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인내심을 받았고, 우리가 직접 그것을 생산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우리 삶에서 그분이 행하신 일에 대해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성령께서 우리에게 예수님의 영광을 보여주시고,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화시키도록 허용합시다.
성령님은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겼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줄 것이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셨고 초자연적인 은사를 갖추셨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성령의 기름부음 없이 아버지를 섬기려고 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먼저 기름부음을 받지 않고서는 감히 아버지를 섬길 수 없었다.
성경에서 예수님에 대해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라고 쓰여 있다. 결과는 어땠는가?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건져내셨으니 ),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10:38).
사탄이 어떤 식으로든 억압하고 괴롭히고 속박했기 때문에 우리 주변의 세상은 고통받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그들에게 선한 일을 행하고, 사탄의 속박에서 그들을 구해 낼 것이다.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지 않고서는 그 일을 할 수 없다.
예수님 자신이 성령의 기름부음 없이 그런 사역을 완수할 수 없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의 사역의 맥락에서 성령의 세례와 은사를 볼 때, 우리는 결코 잘못될 수 없다. 예수님은 거룩한 삶을 살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사역도 하셨다. 그분은 설교하고, 병든 자를 치료하고, 악마를 내쫓고, 제자를 만들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기름부음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분을 효과적으로 섬길 수 없다.
말씀을 주의 깊게 연구하여 정확하게 설교하는 사람은 많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들의 사역은 메마르고 죽어 있다.
새 언약의 종으로서 우리의 설교는 항상 성령의 능력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예수님은 기름부음을 받으셨기 때문에 설교하실 때 어느 때라도 따분하거나 지루하거나 식상하지 않으셨다. 우리도 그분처럼 기름부음을 받을 때, 우리 역시 결코 따분하거나 지루하거나 식상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우리 사역은 모든 사람에게 새 힘을 주는 축복이 될 것이다.
예수님이 엠마오로 걸어가던 제자들에게 말씀을 전하자, 그들은 마음이 "그들 안에서 타올랐다"(눅24:32)고 증언했다. 그것이 진정으로 기름부음 받은 사역이다 -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불타게 만든다. 그리고 우리의 사역이 항상 그래야 한다.
우리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지 않는 때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께서 하셨던 것처럼, 우리가 만나는 곤고한 자들에게 항상 전할 말씀이 있을 것이다(사50:4참조).
사도행전 1장 1절에서, 누가복음은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한 모든 일"을 기술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예수님이 계속하여 행하시고 가르치신 일에 대한 기록이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그분의 육체를 가지고 행하신 일의 기록이 있다. 사도행전에서는 예수님이 그분의 영적인 몸으로 행하신 일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사실 사도들을 통한 예수님의 행적이다.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셨을 때 하신 일 외에, 오늘날 이 땅에서 다른 사역을 하고 계시지 않다. 그분은 여전히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건져내고 계신다" - 그분의 영적인 몸인, 교회의 지체들을 통해서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몸 안에 있는 주님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엄청난 책임이다. 결코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30년 동안 이렇게 완벽한 삶을 사신 예수님이 아버지를 섬기기 전에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아야 했다면, 우리도 이와 비슷한 기름부음 없이 어떻게 감히 그런 사역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아직 성령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지 못했다면, 그것은 우리가 성령을 충분히 구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그것을 구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그것을 충분히 소중히 여기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그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면 그것은 우리가 자급자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자만심을 회개하고 하나님이 우리 마음의 모든 자신감에 할례를 베푸시도록 허락하자.
성령의 기름부으심
형제자매 여러분,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위하여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자. 우리는 성령의 기름부음이 없으면 결코 하나님을 섬기거나 교회를 세울 수 없다. 이것은 우리의 가장 크고 가장 절실한 필요다. 오순절날 예수님이 사도들에게 베푸신 불의 세례보다 못한 것에 결코 만족하지 말자. 그리고 하나님의 불이 우리 사역을 떠날 때마다 슬퍼하자.
성령의 기름부으심은 항상 다른 사람의 필요와 관련하여 주어진다. 예수께서 누가복음 4장 18절 에서 말씀하셨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기 위함이다".
여기에서 성령의 기름부으심은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 먼 자, 눌린 자 등 다른 사람의 결핍을 채워주는 것으로만 설명된다는 것을 주목하라. 그것은 우리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 교회 안에 있는 가난한 자와 눌린 자와 사탄의 포로가 된 자들에 대한 부담과 관심을 가질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름 부어주실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떻게 성령의 능력을 구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비유(눅11:5-13)를 말한 적이 있다. 어느 날 밤 한 남자가 손님을 맞았는데 집에 줄 음식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이웃집에 가서 이웃이 침대에서 일어나 손님을 위해 필요한 음식을 줄 때까지 계속 노크했다. 그리고 예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시기를 이것이 우리 천국의 아버지께 성령의 능력을 구하는 방법이라고 하셨다(13절).
우리 집(교회)에 찾아오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없다면, 우리는 그들을 축복하고, 그들을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지 않을 것이다.
사탄에게 억압받는 형제를 보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우린 그냥 그와 함께 기도하고 그를 보내야 할까? 그러면 우리는 사탄의 억압으로부터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주려고 온 주님을 대표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우리는 형제에게 필요한 것을 위해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주님께 우리에게 그를 도울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말하고, 그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요청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받을 때까지 계속 구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이 위의 비유를 적용한 것이다.
우리 중 아무도 예수님이 받은 것과 같이 성령의 모든 은사를 가질 수 없다 - 성령은 그분의 뜻에 따라 몸의 모든 지체에게 그 은사를 나누어 주시기 때문이다. 예수님 그 자신은 처음에 그리스도의 몸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분은 성령의 모든 은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은 은사를 받는 많은 지체들로 구성되어 있다. 성령께서 당신에게 가르침이나 치유의 은사를 주지 않으셨을지도 모른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그분은 당신에게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는 은사를 주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그 은사를 성실하게 행사하고, 또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은사를 행사하도록 허용하라.
혼자서 모든 것이 되려고 하지 마라.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한 사람만이 모든 것이 될 수 있었다 - 그리고 그분은 예수님이셨다. 오늘날 우리는 오직 그분의 몸의 한 부분일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이 갖지 못한 어떤 은사를 어린 형제들에게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기뻐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몸의 일 중 그 부분을 우리보다 더 잘 할 수 있다. 주님을 찬양하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보게 되면, 우리는 다시는 누군가를 질투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우리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사역을 기뻐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한 영역에서 사람들을 돕는 은혜를 주시고, 하나님은 다른 이들에게 다른 영역에서 사람들을 돕는 은혜를 주신다. 그래서 우리 마음속에는 모든 형제자매에 대해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교회에서 가장 약한 형제자매들에게도 필수적인 사역이 있다. 사실 약할수록 성령에게 의존할 가능성이 더 높다.
우리는 우리 지역 교회에 있는 모든 형제 자매들의 사역을 이끌어 낼 수 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유능한 종이 된다. 모든 것을 스스로 하는 기독교 지도자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실패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처한 상황이다.
올바른 균형
우리는 우리의 삶이 기독교계의 다른 집단에서 보아온 극단적인 모습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기독교계의 역사에서, 거룩함을 주요시하고 성령의 은사를 경멸하는 많은 집단들이 있었다 - 심지어 그들을 악마라고 부를 정도로 말이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이 하셨던 것과 같은 하나님의 가장 높은 목적을 달성하는 데 실패했다.
그 반대의 극단에는, 개인의 거룩함을 무시할 정도로 영적 은사만을 주요시한 집단들이 있다. 그런 집단은 종교적 영에 속아 항상 잘못된 길로 들어갔다.
이와 마찬가지로, 말씀에 대한 지적인 연구를 주요시하는 집단들도 있다. 그리고 그 반대의 극단에는 감정의 충만을 주요시하는 집단들이 있다. 그러나 두 집단 모두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 무지한 것 같다. 지식주의와 감정주의는 둘 다 혼적이다. 둘 다 진정한 영성을 이루지 못한다. 성령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으로 인도한다.
이 모든 집단 중에서 우리는 누구를 따라가야 할까? 그들 중 아무도 없다.
우리는 단지 공부만 하고 그것에 대해 흥분하는 대신, 성령의 열매와 은사를 모두 가지고 계시며, 말씀에 순종하신 우리 주님의 완벽한 예를 따라야 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잘못되지 않을 것이다.
마음을 다해 "사랑을 추구하며 영적인 은사들을 간절히 구하자"(고전14:1), 그러면 우리는 만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우리의 길에서 마주치는, 사탄의 억압받는 모든 영혼을 건져낼 것이다.
복이 되기
성령의 은사는 고린도전서12장에서 눈, 귀, 손, 발 등 몸의 기관들과 비교된다. 우리는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손과 우리를 세상의 다른 지역으로 데려갈 수 있는 발이 필요하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의 이런 은사들을 주셨으니, 우리 주변의 어려운 세상이 이를 통해 복을 받을 수 있도록 하셨다. 그분은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는 사탄의 손아귀와 좌절과 두려움으로부터 사람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이 기름으로 우리의 머리에 부으실 때에, 우리의 잔은 다른 사람에게 복으로 넘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다른 사람의 그릇들에 계속 기름을 붓는다면, 우리는 과부처럼 (엘리사가 살던 시대 - 왕하4:1-7) 하나님의 기름 부음에는 우리의 길에서 마주치는 모든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충분한 능력과 복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가난한 과부의 집에는 그날 기름을 가득 채우지 않은 그릇이 한 개도 없었다. 그녀의 이웃은 모두 그녀를 통해 축복받았다. 그리고 우리 이웃도 같은 방법으로 축복받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삶에 계속 쏟아 부어야 한다. 그것은 신성한 법칙이다. 우리가 이기적으로 우리만을 위해 하나님의 축복을 붙잡고 있으면, 처음에 우리의 축복이 만나처럼 하늘에서 나왔다고 해도, 만나가 악취가 난 것처럼 악취가 나기 시작할 것이다.
잠언 11장 25절 은 "오직 남에게 물을 주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물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저주가 되셔서 우리가 아브라함의 축복인 성령의 약속(갈3:13)을 받을 수 있도록 하셨다. 아브라함의 축복은 창세기 12장 3절 에서 "땅의 모든 족속에게 복이 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새 언약의 종이 된다는 것은 이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만나는 모든가족에게 복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출생권이다.
그러니 "작은 시작의 날"을 멸시하지 말자(슥4:10). 어쩌면 성령님이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두신 단 한 사람에게 격려의 편지를 쓰는 것부터 시작하라고 권하실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는 길에서 가난한 형제 한 사람, 곧 굶주린 방문객 한 사람을 보내셔서 그분을 섬기려는 우리의 열심을 시험하실 수도 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그 형제를 도울 수 있는 힘을 하나님께 구할 것인가?
그런 일에 우리가 불성실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계획하신 모든 것을 놓치게 될 것이다. 끊임없는 성령의 기름부으심 아래에 살기 위해서는, 사소한 일에도 충실해야 한다. 모든 강력한 사역은 작은 행동을 통해 시작된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생수의 강은 성소에서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작은 물줄기로 시작되었으나, 나중에는 큰 강이 되었다(겔47:1,9 참조 ).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가 작은 일에도 충실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비록 무수한 스승이 있다고 해도, 그의 시대에는 아버지가 많지 않았다고 말했다(고후4:15). 이것은 오늘날에도 사실이다.
하나님의 모든 종은 교회에서 형제자매를 향하여 아버지의 정신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아버지가 되는 것은 쉽지만, 아버지 답게 되는 것은 어렵다. 사람은 아무 어려움 없이 열 명의 아이를 낳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을 성숙한 어른으로 성장시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을 거듭나게 하는 것은 비교적 쉽다. 그러나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모습으로 아버지께 드리는 것은 훨씬 더 어렵다.
우리의 야망은 큰 교회가 아니라 순수한 교회를 갖는 것이어야 한다. 성숙하고 완전하게 성장하지 않는다면 우리 교회에 많은 사람이 있어도 소용이 없다.
우리에게 많은 자녀가 있다고 해도 모두 정신지체자라면 자랑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의 다 큰 아들딸들이 아직도 배변 훈련이 안되고 옷을 더럽히고 있고, 걷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젖병으로 우유를 마시고 있다면, 그건 자랑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많은 교회들은 그렇게 자란 아기들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20년 넘게 신자였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더러운 생각을 가지고 있고, 여전히 승리의 길을 걸을 수 없으며, 여전히 우유를 마시고 있다(그들은 죄의 용서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지체의 이유는 그들의 지도자가 아버지가 아니라 선생님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교사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영적인 아버지로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다"(고전4:14)라고 말했다. 교사들은 실패한 학생들을 모욕하고 공개적으로 수치심을 주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다르다. 그들은 비틀거리는 아이들이 저지르는 모든 죄를 덮어주고, 계속해서 더 높은 삶을 살도록 격려한다.
남의 짐을 우리 마음에 짊어지려면 자기부인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아버지보다 회중에서 교사가 되는 것이 훨씬 쉽다. 교사들은 결코 가족을 세울 수 없다. 그들은 오직 교실만 세울 수 있다. 그리고 많은 교회는 가족이 아니라 학교다. 오직 아버지만이 가정과 가족을 세울 수 있다.
우리 교회가 가족 같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아버지가 아니라 교사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교회에 있는 형제 자매들을 가르칠 필요가 있는 학생으로 보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잘못된 영을 갖게 된다. 우리가 아버지라면 그들을 품어주고, 사랑하고 보살펴주고 이해하는 방식으로 지원해야 하는 사람으로 바라볼 것이다. 우리가 진짜 아버지 인지 교사인지 스스로 판단하고 살피는 것은 우리에게 유익하다.
교회 안에 있는 형제 자매들이 모두 육신적이라고 비난해도 소용없다. 우리 자신을 먼저 판단하자.
진정한 영적 아버지는 어떤 일에서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자녀들의 행복과 유익을 항상 추구할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 14 , 15절 에서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내가 구하는 것은 너희의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어린 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부모가 어린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하므로 재물을 사용하고 또 내 자신까지도 내어 주리니". 그게 진정한 아버지의 말이다.
바울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다. 그는 자신이 살면서 얻은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얻는 것에 비해 쓰레기로 여겼다. 그는 또한 그리스도께로 인도한 사람들에게 아버지가 되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교사는 보수를 받고 일한다. 교사는 학생들의 이익을 주로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다. 우리가 기대하는 이득이 돈이 아니라, 명예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하나님의 종으로 존경을 받으며 인정받고 싶은가?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로부터 명예라는 봉급을 받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버지가 아니라 교사다.
아버지들은 자식들을 위해 하는 모든 것에 대한 보답으로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바울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이나 복종조차 기대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의 영적 성장만을 추구했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형제자매의 유익을 추구하고 있는가?
오늘날 우리가 기독교계에서 발견하는 '목사 제도'는 사도 시절에는 들어보지 못한 것이었다. 기독교계에 수많은 교사들이 생기게 된 것은 바로 이 비성경적 제도 때문이다. 교사들은 그들이 한 수업에 대해 매달 월급을 받아야 하고, 학생들이 결혼이든 취업이든 간에 인생의 모든 중요한 결정에서 그들에게 의존하게 만든다.
그런 교회의 형제 자매는 결코 자라지 않는다. 그들은 영원히 영적인 아기로 남는다. 왜냐하면 이 인간적 제도가 새 언약에 따른 그들의 타고난 권리인 그들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의 직접적인 연결을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어떻게 돌볼까? 가난한 집에서는, 아이들에게 먹을 음식이 충분하지 않으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먹지도 않을 것이다. 부모는 기꺼이 자신을 부인할 것이며, 아이들이 그것에 대해 낙담하지 않도록, 자기 자식들에게 자신이 먹지 않았다는 것을 알리지도 않을 것이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자기부인을 숨긴다. 우리는 형제 자매의 이익을 위해 스스로를 부인하고, 그것에 대해 그들에게 알리지도 않는 그런 정신이 있는가.
아버지의 또 다른 특징은 자녀들이 자신을 뛰어넘어 교육과 다른 모든 면에서 발전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고등학교 이상을 공부한 적이 없는 아버지들이 많은데, 자녀들에게 대학 교육을 시키기 위해 많은 희생을 치른다. 그들은 이런 목적을 위해 삶의 편안함을 스스로 부인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고, 자녀가 졸업하면 기뻐한다. 아들이 아버지의 지위나 교육 수준을 넘어 출세하는 것을 보고 질투하는 아버지는 없다.
하나님의 참된 종도 그러할 것이다. 젊은 형제들이 전심을 다하고 성경에서 계시를 받고 주님으로부터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도록 쓰임 받을 때 그는 기뻐할 것이다. 그는 진심으로 그들이 영적으로 그를 뛰어넘고, 주님의 손에서 자신의 이제까지의 삶보다 더 유용하게 쓰이기를 간절히 바랄 것이다.
형제들을 보호하는 훌륭한 리더십 덕분에, 어린 형제들이 교회 안에서 그들의 삶에서 어떠한 어리석음도 드러나지 않고 성장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우리가 누리지 못했던 축복을 그들이 누릴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해야 한다. 우리가 아버지라면 질투의 그늘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기뻐할 것이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어린 형제들의 사역이나 영향력이나 영적 진보를 시기한다면, 우리는 확실히 교사이지, 아버지가 아니다. 학교에서, 만약 학생이 그의 선생님이 풀 수 없는 문제를 풀 수 있다면, 교사는 매우 화가 나고 질투할 것이고, 그래서 그는 어떤 식으로든 그 학생을 모욕하려고 할 것이다. 누군가 우리에게 잘못을 지적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어떤 기분이 드는가?
교사들은 바벨론을 건설할 수 있을 뿐이다. 오직 아버지만이 진정한 교회, 즉 새 예루살렘을 세울 수 있다. 우리는 새 언약의 모든 진리를 이해하고 선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교사의 정신으로 이와 같이 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바벨론을 건설할 것이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투자한 모든 수고를 매우 의식한다. 그는 제자들이 잘하면 받게 될 명예를 생각한다. 그는 제자들이 잘 할 때도 늘 자신이 무엇을 얻을지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아버지는 전혀 다르다. 그는 자식들의 행복만을 바라고 있다. 그는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교사는 그의 학생들을 비판할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의 아이들을 격려할 것이다. 형제자매들을 계속 비판한다면 비록 우리가 말하는 모든 것이 사실일지라도 우리는 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할 것이다. 아버지는 아이들을 격려함으로써 훨씬 더 많은 것을 이룰 것이다.
아버지만이, 감사할 줄 모르고 악한 아이들에게 계속 친절할 수 있다. 교사는 감사할 줄 모르는 학생들을 매우 빨리 포기할 것이다.
우리가 회중 가운데 까다로운 형제들과 문제가 있을 때, 비록 그들이 스스로를 파괴하더라도 그들이 회중을 떠나기를 바란다면, 우리의 정신이 교사의 정신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아버지는 자식들 중 누구에게도 결코 그런 것을 바랄 수 없다.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께서 은혜를 모르고 악한 백성에게 자비롭고 자애로우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자비를 베풀라고 말씀하셨다(눅6:35,36).
우리가 의를 추구할 때,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자비를 베풀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우리는 바리새인과 교사로 매우 쉽게 타락할 수 있다.
아버지와 형
탕자의 비유에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타락하고,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함을 이용하기도 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배울 수 있다. 거기서 우리는 신의 성품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운다 -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참여해야 할 성품이다.
우리는 그 비유 속에서 저 고집스런 소년의 형과 그의 아버지의 태도 사이에 현저한 대조를 보게 된다. 그것은 교사와 아버지의 대조이기도 하다.
형은 똑바른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동생에 대한 사랑이나 관심이 없었다. 그는 단지 동생에 대한 결점을 찾았을 뿐이다. 그러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은 쉽게 화를 내고 형제자매를 비난하고 꾸짖는다.
하지만 그 이야기 속의 아버지를 보아라. 그는 정말 다른 영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여주는 그림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했을 때, 우리 또한 그렇게 될 것이다. 형은 동생이 저지른 악행을 모두 기억하고, 그것을 모두 폭로하는 것을 즐거워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생각조차 하기 싫어한다.
불신자에서 신앙인으로 개종하는 것이 한 가지다. 그러나 우리가 새 언약의 종이 되려면, '형'에서 '아버지'로,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에서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으로, 즉 두 번째 개종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당신의 권위에 반기를 들고, 당신이 그에게 여러 해 동안 선한 일만을 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에게 악한 말을 많이 한 형제가 있는가? 지금 그에 대한 당신의 태도는 어떠한가? 교사의 태도인가, 아버지의 태도인가?
우리는 교회에서 반항적인 형제들만큼 선한 형제들과 온전한 형제들을 통해서는 시험을 받지 않는다.
한두 명의 반항적인 형제는 백 명 이상의 영적인 형제들보다 우리의 진정한 영적 상태를 우리에게 더 잘 보여줄 수 있다. 왜냐하면 그 까다로운 형제들은 우리 육체의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정욕을 빛으로 이끌어내는 방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헌신된 신자들뿐만 아니라 " 모든 사람에게 감사하라"는 권고를 받는다(딤전2:1). 우리가 마주친 모든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성화를 위해 도움을 준다.
자, 당신은 영적인 아버지라는 속임수 아래에서 수년 동안 살아왔다. 그러다가 당신의 교회에서 까다로운 형제가 생긴다. 그리고 그를 대하는 태도를 통해, 당신은 정말로 아버지가 아닌 교사라는 것을 순식간에 알게 된다!
그 까다로운 형제는 교회에 있는 모든 헌신된 형제들이 매우 여러 해 동안 보여줄 수 없었던 방식으로 당신의 진짜 상태를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영원히 자신을 속이는 것으로부터 당신을 구해주었던 그런 형제에게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잘못된 방법으로 우리의 신경을 건드리는 형제들로 인해 견디기 힘들 때,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같은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과 문제를 일으켰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좋다. 그들 역시 우리를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 중 누구도 완벽하지 않다. 우리는 모두 육체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육체를 가진 사람은 누구나 비슷한 육체를 가진 다른 사람을 참아야 한다. 우리보다 더 성숙해진 다른 사람들은 우리의 행동에서 예수님과 같지 않은 영역을 볼 수 있는데, 우리는 스스로 이 부분을 정직하게 볼 수 없다.
까다로운 아내를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여전히 그녀를 참아주고 사랑하며 그녀에 대한 불평이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심지어 당신의 '그리스도 같은' 행동에 대해 은밀히 스스로 축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신은 아내도 아마 당신에 대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녀는 함께 살고 견디기 어려운 남편이 있다고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에 대한 낮은 생각 속에 사는 것이 좋다.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결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좋다.
탕자의 행동은 아버지의 인자함을 놀랄 만한 방법으로 이끌어냈다. 만약 그가 항상 집에서 착한 아이였다면, 그는 아버지의 엄청난 인자함을 결코 보지 못했을 것이다.
비슷한 문제가 우리 회중(또는 우리 집에서도)에서 어떤 형제(또는 가족 구성원)에게 발생할 때마다, 우리는 그 사람이 형제든 아내든 아들이든 딸이든 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그 잘못한 사람을 향해 아버지의 마음을 드러내고 싶어 하시는 때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대신 교사의 마음을 드러낼 때 하나님은 얼마나 실망스러우시겠는가.
누가 당신의 물건을 가져가고, 떠나가서, 그의 행위로 당신의 이름과 회중의 명예를 망쳐 놓았는가? 어느 날 그가 회개하여 돌아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신은 그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그를 보호관찰하며 몇 달 동안 하인의 숙소에 가둬 두고, 그의 회개가 진실한지 알아낼 것인가?
아니면 탕자의 아버지처럼 기뻐하며 그에게 달려가서 그를 끌어안고 따뜻한 환영의 뜻을 전할 것인가? 모든 것은 당신이 아버지인지 교사인지에 달려있다. 아마 교사도 돌아온 탕자를 받아들일 수 있지만 따뜻한 마음으로 맞아주지는 못할 것이다!
회개하는 모든 영혼을 하늘에서는 기뻐한다. 만약 우리가 그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없다면, 우리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탕자의 형은 교사의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내가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보세요. 나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요. 나는 진심으로 열심이었어요. 나는 아버지를 위해 충실하게 일해 왔어요. 그런데 이 당신의 아들(탕자)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보세요."
교사는 항상 자신의 선함과 성실함을 교회의 육적인 성도들의 실패와 비교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보다 그의 형제들의 결점에 더 몰두한다. 그것이 예수님 시대에 바리새인들의 주된 특징이었다. 교사의 정신을 가진 자는 모두 바리새인이다.
탕자의 형이 말한 것에는 어느 정도 진실이 있었다 - 그의 동생은 정말로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 그에게 그 돈이 "창녀에게 쓰였다"고 말했을까? 그것은 가정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교사의 특징이다. 그는 누군가와 맞설 때마다, 항상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그에 대한 최악의 상황을 믿는다. 그는 또한 범죄자를 수치스럽게 하기 위해 범죄자의 죄를 폭로하는 것을 즐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비난할 때, 우리의 사실이 100% 옳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형제들을 고발하는 자와 교제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영(정신)은 여전히 100% 틀릴 수 있다(계12:10).
사탄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그분에게 고발할 때, 여러분은 그의 사실이 모두 100% 옳다고 확신할 수 있다. 사탄은 감히 하나님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탄의 영(정신)은 여전히 비난의 영(정신)이다.
우리가 조심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그럴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사실을 세심하게 검증하여 사실로 밝혀졌다고 위안을 삼지 말자. 우리의 영혼은 여전히 지옥의 냄새가 날 수 있다.
한편, 우리가 아버지라면 형제가 저지른 수많은 죄를 덮어주고, 형제가 이제 회개한 것을 기뻐할 것이다. 우리는 "살찐 송아지를 잡고 기뻐할 것"이다. 이것은 도달하기에 매우 어려운 높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곳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이미 그곳에 도달했다고 상상하면서 우리 자신을 속이지 말자.
다른 사람들에게 참된 아버지가 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자.
다윗과 압살롬
다윗의 생애에, 그의 아들 압살롬이 그에게 음모를 꾸미고 많은 이스라엘 자손의 마음을 얻어 다윗을 왕좌에서 몰아낸 일이 있었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여전히 그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싶어하는 일류 군인 친구들이 몇 명 있었다. 다윗은 그들이 압살롬과 싸울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윗은 요압 장군에게 "나를 위하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삼하18:5)고 말했다.
우리는 교회에서 까다로운 형제들을 상대해야 할 때마다 굵은 글씨로 이 말을 마음 앞에 써야 한다. "그 사람을 너그러이 대우하라-주를 위하여 "
그 후에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은 눈물을 흘리며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하고 말하였다(삼하18:33).
다윗은 교사가 아니었다! 그는 반항적인 아들에게 아버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불린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의 마음에도 같은 소망이 있다: "너희들 대신 내가 죽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래서 예수님은 갈보리에서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으로 교제를 시작할 때 비로소 우리는 아버지가 된다.
예수님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기꺼이 죽으셨기 때문에 인간의 죄를 책망할 권리가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죄에서 건져내기 위해 기꺼이 죽기 전까지는 다른 사람의 죄를 책망할 권리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만이 진정한 아버지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교사일 뿐이다.
목자와 고용인
에스겔 34장 3-6절 에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목자를 꾸짖으신다.
주님은 목자들이 양들의 기름을 먹고 양털로 옷을 입었다고 꾸짖으셨다. 그들은 병든 양을 강하게 하지도 않고, 병든 양을 고치지도 않았으며, 상처 입은 양들을 싸매주지도 않았다. 그들은 흩어진 양을 되찾으러 나가지도 않았고, 야생동물로부터 양들을 보호하지도 않았다. 대신에 그들은 양들을 힘과 엄격함으로 다스렸었다. 그들은 고용인이었고 진정한 목자들이 아니었다.
고용인들은 교사와 같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것을 추구하고 보수를 위해 일한다.
대조적으로, 우리는 11절에서 16절까지 진정한 목자는 어떻게 행동하는지 본다. 양들을 보살피고, 먹이를 주고, 그들을 쉬게 하고, 잃어버린 양을 찾아내고, 타락한 양을 다시 데려오고, 아픈 양을 튼튼하게 한다. 좋은 목자는 심지어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다.
영적인 아버지는 그의 양 떼에게 그런 목자이다.
이것이 새 언약의 종으로서의 우리의 부르심이다.
우리는 우리의 사역을 단지 모임에서 설교하는 것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아마도 어딘가에 방문과 격려의 말이 필요한 낙담한 형제가 있을 것이다. 그가 사탄에게 억압을 받고 있기 때문에 다른 누군가의 건져냄이 필요로 할 수도 있다.
우리는 그러한 모든 사람들을 사자인 사탄에게 잡혀간 어린 양으로 보아야 한다(벧전5:8). 다윗처럼 사자를 치러 나가서 공격하여 그 입에서 양을 구해내야 한다(삼상17:34,35). 그것이 진정한 목자의 행동방식이다. 그는 다루기 어려운 까다로운 형제를 만나면, 사탄과 싸우며 형제를 비판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사자의 입에서 어린 양을 구해낸다.
우리 모두는 아픈 자녀들을 밤새도록 침대 곁에서 보살피고 있는 부모들을 본적이 있지 않는가?
교사들은 그런 자기 부인적인 보살핌을 할 시간이 없다. 그들은 아픈 학생들에게 병이 나은 후에 학교로 돌아오라고만 말할 것이다.'
우리가 실제로 아버지인지 교사인지 알게 되는 것은 우리 가운데 영적으로 아픈 형제가 있을 때다.
까다로운 아내가 있다면, 곧 당신이 목자 남편인지 아니면 고용인 남편인지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영적인 아내가 있다면, 당신은 결코 당신의 진짜 상태를 발견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나님은 에스겔 시대에 목자들에게, 이스라엘이 그들의 목자들의 실패 때문에 바벨론으로 갔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많은 백성이 오늘날 바벨론에 살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다: 그들의 목자들이 그들을 저버리고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디모데전서 3장 1 절은 교회에서 장로가 되기를 열망하는 사람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영적인 아버지로서 교회의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자 도움이 되는 것은 분명 선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 중 누구도 하나님의 장로와 종으로 알려지는 직분과 명예를 탐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
하나님, 우리가 이 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도록 도와주소서.
새 언약에서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다수의 그리스도와 같은 개인을 배출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인 " 하나의 새사람"을 만드는 것이다(엡2:15,16).
옛 언약 아래서, 하나님은 한 명의 모세, 한 명의 엘리야, 한 명의 세례 요한을 일으켜 세우셨다. 그들은 모두 자기 세대에서 하나님의 증인으로 섰던 외톨이들이었다. 그러나 교회는 그들 모두에게 숨겨진 비밀이었다. 이스라엘은 오직 개인들로 이루어진 회중이 될 수 있을 뿐, 한 몸이 될 수 없었다. 한 몸에서는 모든 구성원이 서로 연관되어 있으며, 각 구성원은 머리와 개인적, 내적 관계를 맺고 있다.
새 언약의 중재자 예수님이 오셨고, 그분은 제자들을 두 사람씩 내보냈다. 그들은 더 이상 그분(예수님)에 대한 외로운 증인이 되지 않았다.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 중 적어도 두 명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연합하는 곳이면 어디든 그분의 임재가 강력하게 나타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18:18-20) - 왜냐하면 두 명이 예수 이름으로 연합하는 곳은 그리스도의 몸을 대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새로운 언약의 종으로서, 우리는 결코 개별적으로 형제자매가 경건해지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지역의 회중 자체가 그리스도의 몸을 대표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가장 높은 목적을 달성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
새 언약 교회의 주된 특징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은 새 언약 교회가 특정한 형식의 교회운영과 특정한 형태의 모임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것들 중 어느 것도 아니다. 교회에서 중요한 것은 신적 생명(Divine life)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아기가 엄마의 자궁에서 형성되고 있을 때, 초기 몇 주 동안은 인간의 모양(형태)조차 갖지 못한다. 그것은 오직 생명만 있을 뿐이다. 모양(형태)은 나중에 생긴다. 어디든 새 교회가 세워지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적절한 형태가 나타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생명이 있어야 한다.
새 언약 교회의 주된 특징은 그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다. 교회가 한데 모이고, 모두가 성령의 기름부음 아래 예언을 할 때,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그들의 죄를 깨닫고 그 모임에 하나님이 임재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전14:24,25). 그것, 그것만으로도 그러한 교회가 올바른 모양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만약 하나님의 임재가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에 미치지 못했음을 고백해야 하며, 우리는 회개해야 한다.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서 만든 회막을 생각해 보라. 그 모양은 출애굽기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블레셋 사람들도 비슷한 회막을 쉽게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결코 모조할 수 없었던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회막을 밝히는 불타는 광채처럼 나타난, 지성소에 하나님의 임재였다. 그것은 회막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당신은 어디선가 강력한 교회를 보고, 그 비결이 모임에서 따르는 형태나, 교리를 설교하는 것이라고 상상할 수도 있다!! 그래서 당신은 그런 형태를 모방하고, 같은 교리를 설교하고, 새 언약 교회를 갖게 되었다고 상상한다. 하지만 당신은 자신을 속이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이 너희 가운데 강력하게 계시지 않는 한, 거기에 새 언약 교회는 결코 없다.
하나님께서 교회인 우리 가운데 강력하게 임재하실 때, 그분의 빛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계속 보여 줄 것이다. 그 빛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위험에 대해 경고해 줄 것이다. 그것은 어둠을 몰아낼 뿐만 아니라, 어둠의 왕자도 쫓아낼 것이다. 지옥의 힘은 결코 그런 교회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
교회에서 우리의 교리만 올바르게 갖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다.
예언의 영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임재하실 때에, 우리는 하나님이 모임 중에 우리에게 강력하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게 될 것이다. 그것이 예언의 의미이다.
옛 언약 시대에는, 예언은 미래를 예언하고 사람들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인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새 언약에서, 예언은 권면(사람들을 도전하고, 책망하고, 바르게 함)과 위로(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함)와 교화(교회를 세우는 것)를 위한 것이다(고전14:3).
예언은, 교회를 세우는 성령의 주요 은사다. 예언의 말씀은 "어두운 곳을 비추는 등불"(벧후1:19)이다. 이 빛이 교회에서 끊임없이 타오르지 않으면, 어둠의 왕자의 계략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교회 자체가 어둠 속으로 가라앉을 것이다. 출발이 좋았던 많은 기독교 단체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퇴보한 주된 이유는 예언의 은사가 점차 사라졌기 때문이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임재가 이스라엘에서 떠날 때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신 흔적은 그들 가운데 "더 이상 예언자가 없다"(시74:1,9)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엘리 시대처럼 예언자가 없을 때마다 항상 타락했다( 삼상3:1 참조). 그러나 이스라엘은 사무엘 시대 와 같이, 예언자가 있었을 때, 저명한 위치에 올랐다 .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것은 사무엘을 통해서였다.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에서 영광스러운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사무엘이 예언했을 때, "주님은 그의 말이 땅에 떨어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삼상 3:19 - KJV).
우리 역시 우리가 하는 말 한마디가 마치 표적에 화살처럼 사람들의 마음으로 곧장 들어가도록, 교회에서 그토록 강력한 예언의 사역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예언의 은사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난다"(고전14:25)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모든 사람들이 죄악의 속임수를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매일 (교회에서)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속임수로 말미암아 강퍅해지지 않도록 하라"(히3:13)는 명령을 받았다. 죄에는 명백한 죄도 있고 교묘하고 숨겨진 죄도 있다. 그러나 예언의 영은 죄악의 속임수와 사탄의 계략을 모두 드러내어 우리를 보호해 준다.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이것에 대한 예를 볼 수 있다. 아람 왕이 이스라엘과 싸울 때, 그와 그의 장군들이 어느 시점에 이스라엘을 공격할 계획을 비밀리에 세울 때마다, 엘리사가 예언(왕하6:8-12)을 통해 그의 계획을 이스라엘 왕에게 알려주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왕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군대를 어디에 배치해야 할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의 나라를 계속해서 구했다.
주님은 교회 모임에서 예언을 통해, 앞으로 사탄이 우리를 공격할 지역을 미리 경고해 주신다. 그래서 우리는 그 지역을 경계할 수 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에 관한 예언에 주의를 기울여 선한 싸움(사탄에 대항하여)을 하라고 권면했다(딤전1:18).
우리는 방갈로의 교회에서 몇 번이고 알게 되었는데, 우리의 모임에서 예언의 영이, 많은 형제자매들에게 앞으로 적의 공격에 직면하게 될 지점들을 미리 경고해 주었다. 하나님은 예언의 말씀을 통해 교회 안의 우리 모두에게 지혜를 주셨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의 사생활, 가정생활, 교회생활을 위한 지혜다.
잠언 24장 3 , 4절은 "집은 지혜로 말미암아 건축되고, 또 방들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채우게 되느니라"고 말한다.
교회에는 기름 부음 받은 교사들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인 지식을 위한 자리가 있다. 그러나 지식은, 지혜 에 의해 지어진 후에 집에 갖추어지는 가구와 같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 성경 지식만 있다면, 우리는 우리 주위에 값비싼 가구들이 많이 있지만, 벽도 없고 지붕도 없고 바닥도 없는, 집이 없는 빈 땅바닥에서 사는 가족과 같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약성경에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지혜를 추구할 것을 권하고 있다.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한 사람이 있다면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는 하나님에게 구하라"(약1:5).
교회가 세워지는 것은 지혜를 통해서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는 예언의 은사를 통해 교회에 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의 모든 모임에서 "간절히 예언하기를 구해야 한다"(고전14:1,5). 성경공부와 복음전도를 위한 모임도 좋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한 순수한 증거로서 교회를 세우려면, 예언의 은사가 우선 되어야만 한다.
진리의 기둥과 터
디모데전서 3장 15절 에서,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부른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하신다(딤전2:4). 하나님이 모든 사람이 알기를 바라는 이 진리는 무엇인가? 요한복음 8장 32절 에서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고 하셨다. 진리는 사람을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요8:34).
모든 종류의 속박은 우리가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발생한다. 광신자(Cultists)들은 신도들을 진리에 대해 무지하게 함으로써 속박에 묶이게 한다. 진리를 알면 알수록 자유로워진다. 주님의 영은 자유를 가져온다(고후3:17).
요한복음 16장 13절 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분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라고 하셨다.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 하는데, 성령은 우리를 모든 진리로 인도하려 하기 때문이다.
진리는 가나안 땅처럼 광활한 땅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나안을 조금씩 소유하도록 인도하신 것처럼, 성령님도 우리가 모든 진리를 소유하도록 인도하시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진리를 알면 알수록, 죄로부터, 사람들의 의견으로부터, 그리고 비성경적인 종교 전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불린다는 것은, 교회가 사람들이 진리를 듣고 점점 더 자유로워지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 교회에서 사람들이 자유로워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역에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는, 진리의 말씀(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의 영(성령)이 필요하다. 예수께서 아버지께 기도하셨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진리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정기적으로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면 교회를 세울 수 없다. 하나님과 새 언약의 참된 종이 되려면 우리는 말씀의 사람이 되고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교회 자체가 진리의 기둥이자 터가 되려면, 교회 안에 그들 자신이 기둥이 된 기름부은받은 형제자매가 있어야 한다. 요한계시록 3장 12절 에서, 주님은 우리가 이기면 주님의 교회에서 우리를 기둥으로 삼으실 것이라고 말한다.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우리를 교회의 기둥이 되게 할 수 없다. 우리는 스스로 기둥이 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어떤 종도 우리를 기둥으로 임명할 수 없다.
그러나 주님은 모든 이기는 자, 즉 형제와 자매를 그분의 교회에서 기둥으로 삼으신다. 자매라도 이기는 자라면, 기둥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건물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기둥을 세운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를 주님의 교회에서 기둥으로 세우실 때에, 그것은 다른 사람의 짐을 짊어지는 것이 될 것이다. 이기적이고 그런 부담을 짊어지려 하지 않는 사람은 기둥이 될 자격이 없다.
장로는 아니지만 교회의 기둥인 형제들이 많이 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이기는 자라면, 비록 리더십의 어떤 직책을 맡지 않더라도 우리는 기둥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을 그분의 교회에서 기둥으로 임명하고 증명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다.
영적 권위
하나님의 종은 영적 권위를 가지고 말하는 자여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달리 영적인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다는 것을 읽었다(마7:29). 영적 권위가 없으면 교회를 세울 수 없다. 서기관들은 교리를 알고 있었지만, 사역에는 영적 권위가 없었다.
우리는 나이, 교육, 성경 지식 또는 혼적 능력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의 권위를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 중 어느 것도 영적 권위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증명을 받아야 한다.
우리에게 영적 권위가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 우리의 견해를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기 때문에 우리를 신뢰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단지 리더십의 위치에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의 권위를 강요한다면, 우리는 영적인 권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다른 사람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엘리후의 "나에 대한 두려움이 그대를 무섭게 하지 아니하겠고, 나의 압박이 그대를 무겁게 누르지 아니하리라"(욥33:7)는 말과 같아야 한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분야에서든 당신에게서 어떤 압박감을 느끼는가? 아니면 당신은 그들의 양심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완벽한 자유를 주는가?
사람들이 우리가 신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때, 그들은 스스로 우리에게 조언을 구하러 올 것이다. 그들이 우리와 상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들이 우리에게 어떠한 신뢰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의 아이들이 어릴 때, 아버지로서 자녀에게 우리의 뜻을 강요하고, 모든 결정을 내릴 때 우리와 상의하도록 강요하는 것이 쉽다. 하지만 그들이 자라서 자신의 가정을 꾸릴 때, 우리는 그들이 정말로 우리를 신뢰하는지 아닌지 알게 된다. 만약 그들이 우리를 신뢰한다면, 그들은 자발적으로 우리와 상의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신뢰하는지 아닌지를, 우리는 교회에서도 그렇게 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우리에게 상담하는가?
만약 그들이 조언을 구하러 젊은 형제에게 가는 것이 더 자유롭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그들이 젊은 형제에게 대해 더 많은 신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한 형제를 질투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사람들이 도움을 청하러 갈 수 있는 영적인 사람을 두셨다는 것을 기뻐해야 한다.
마태복음 18장 18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교회가 사악한 사탄의 세력을 결박하고, 결박된 사람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이 권위는 결코 한 사람에 의해서만 행사될 수 없고, 최소한 두 사람에 의해서 행사될 수 있으며, 이 두 사람이 영적으로 완전히 일치해야만, 주님께서 그들 가운데 강력하게 임재하셔서 그들에게 그분의 권세를 주실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마18:19,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는 신약성서에서 가장 오해받는 구절 중 하나이다. 그 구절은 두세 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 모이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아니요. 이 구절은 예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 성령에 의해 모이고 영적으로 하나된 두세 사람이 행사하는 교회의 권위를 가리키는 것이다(15-18 절 참조). 그런 몸은 사탄의 활동을 결박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사탄의 손아귀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 엄청난 권위를 갖게 될 것이다. 이는 모든 교회의 장로들이 끊임없이 행사해야 할 권위이다.
일부 무지한 신자들이 하는 것처럼 우리가 사탄이나 그의 악마들 자체를 결박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재림할 때에만 그렇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계20:1,2; 마8:29도 참조). 그러나 우리는 사탄과 그의 악마들의 활동을 결박(제한)할 수 있다(살후2:7).
사탄은 완벽하게 연합하는 두세 명의 지도자가 가지고 있는 이 권위에 대해 알고 있다. 그래서 사탄은 모든 교회의 지도자들이 단결하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지도자급에서 단결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몸은 결코 세워질 수 없다.
한 교회에서 두세 명의 신도가 하나가 되지 않는 것은 심각하지 않다. 슬픈 일이지만, 지도자들이 하나가 되지 않는 것만큼 심각하지는 않다. 모든 교회는 완전히 하나 된 두세 명의 지도자의 핵심이 있어야 한다. 주님은 하나된 200명, 300명을 찾는 것이 아니라, 지도자 가운데 정말 하나인 두세 명만을 찾고 계신다. 그곳에는 주님의 권위가 강력하게 나타날 것이다.
경고 - 자신만의 것을 추구하는 사람
하나님께서 우리가 우리만의 왕국을 세우거나, 원맨쇼를 하는 것을 보신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실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계에는 그런 원맨쇼가 많이 있다. 그들은 "기독교적인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돈을 벌거나 명예를 얻는 등 개인적인 이익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바벨론을 건설하고 있다.
하나님을 속일 수 없다. 그런 설교자들이 많은 추종자를 모을지라도, 그분은 결코 그런 설교자들을 인증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옛 언약의 회중(congregation)을 세울지는 모르지만, 새 언약의 교회를 세울 수는 없을 것이다.
사도행전 5장 36절 에서, 400명을 모아 그를 따르게 한 드다의 이야기가 나온다. 400명의 교인이 있는 교회는 꽤 인상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수포로 돌아갔다". 우리는 또한 많은 사람들을 그를 따르게 한 유다에 대해서도 읽었다. "그도 망했다"(행 5:37).
기독교계의 역사에는 항상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우리는 우리 도시에 400명을 모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것을 추구한다면, 우리는 드다보다 나을 것이 없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영적 권위는 너무나도 귀중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무에게나 주지 않으실 것이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팀의 일원이 됨으로써 상당한 명성을 얻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매우 높이 존경했다. 그리고 유다도 그 영광의 몫을 차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유다의 자기 중심적인 본성을 바꾸지는 못했다. 여전히 그는 죽었다.
마찬가지로 데마도 사도 바울의 동료였다. 바울의 팀에 있는 것은 분명 큰 영광이었을 것이다. 많은 신자들이 바울을 매우 존경했고, 데마 역시 바울과 함께 함으로써 그 영광의 몫을 얻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는 바울과 같은 자기 부인, 희생정신이 없었다. 데마는 디모데처럼 경건하고 사심이 없는 형제들과 가깝게 어울렸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정신을 흡수하지 않았다.
그것은 예수님 시대와 바울 시대에 일어났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다. 그들 자신의 삶이나 사역을 통해서가 아니라, 단지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증명해 주시는 어떤 다른 경건한 형제와 함께 한다는 이유만으로 명성을 얻은 형제들이 있다.
우리가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끝도 가룟 유다와 데마의 끝과 같을 수 있다. 우리는 단지 어떤 경건한 형제와 함께 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권위를 가질 수 없다. 우리 자신의 이익, 우리 자신의 이름, 우리 자신의 안락함, 우리 자신의 편리함, 그리고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을 추구하지 않고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지지해 주실 것이다. 그래야만 그리스도의 몸을 세울 수 있는 영적 권위를 갖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고 하는가, 아니면 우리 자신의 나라를 세우려고 하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신다. 바울은 디모데와 같은 동료가 한 명도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의 일을 구하지 않았다. 오직 디모데만 진정 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빌2:19-21).
모든 것을 희생하는 것
우리 모두는 바울과 같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권위를 갖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것을 가지려면 우리는 그처럼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고, 그 모든 것을 가치 없는 쓰레기로 간주해야 한다(빌3:7-9).
예수님은 아버지께 "내 모든 것은 다 아버지의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또한 "아버지의 모든 것은 내 것입니다"라고 덧붙일 수 있었다(요17:10).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아낌없이 드릴 때,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 또한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어질 것이다. 우리가 그분께 드리는 만큼 그분도 우리에게 주신다.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영적 권위에 있어서 매우 가난에 시달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2장 23, 25절에서,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음에도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을 맡기지 않으셨음을 본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 무엇이 있는지, 우리의 동기가 무엇인지를 보시기 때문에, 우리는 주께서 자신을 맡기지 않으신 사람들 중에 있을 수도 있다.
우리의 전문직과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 중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 우리는 교회를 세울 시간을 더 갖기 위해 우리의 세상의 직업에서 출세를 포기할 의향이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맡기시겠는가?
우리는 주님의 백성을 위해 기꺼이 집을 개방할 의향이 있는가? 아니면 우리의 편의와 사생활이 우리에게 더 중요한가? 어떤 분야에서든 우리 자신의 것을 추구한다면, 금식하고 기도해도 하나님으로부터 영적 권위를 얻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은 속지 않는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싶다면, 우리의 삶의 전부가 하나님 나라에 2등을 차지해야 한다. 하나님에게 편애는 없다. 우리 모두는 그분에게 똑같다. 그분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행하신 일은 우리에게도 행하실 것이다. 예수님과 바울은 그들의 사역에서 하나님께 강력한 증거를 받았다. 그들은 대가를 치렀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꺼이 같은 대가를 치른다면, 하나님도 우리를 위해 똑같이 하실 것이다.
우리가 교회를 세우려면 우리의 돈과 저축도 하나님께 속해야 한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방주를 세우라고 하셨을 때, 노아는 그런 거대한 배를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을 누가 부담할 것인지에 대해 하나님에게 묻지 않았다. 만약 그가 그 질문을 했더라면, 하나님은 그에게 "노아야, 네가 직접 그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누가 그 비용을 지불하겠느냐?" 그러나 노아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노아는 아마 방주를 짓기 위해 자신의 재산 일부를 팔아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에 자금을 대기 위해 기꺼이 개인 재산을 팔려고 하는 하나님의 종을 우리가 몇 명이나 찾을 수 있을까?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바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서도 모든 것을 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하나님의 종들의 태도는 그것이 주님의 일이라면, 그 돈은 자기 주머니에서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헌금함을 통해 들어오는 돈을 아낌없이 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자기 돈을 아낌없이 바치지 않는다. 평생 돈의 손아귀에서 자유롭지 못한 하나님의 종은 영적 권위를 결코 가질 수 없다.
우리가 주님께 "주님, 주님의 일은 나의 일입니다. 그리고 내 저축한 돈은 당신의 것입니다. 내 돈과 당신의 돈을 구별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가? 우리가 주님께 그렇게 말하지 않았고 진심이 아니라면, 우리는 여전히 돈의 10%를 하나님의 것으로 여기고, 90%를 자신의 것으로 여겼던 옛 언약 아래 있는 것이다. 일단 그들은 10%를 드리고 나면 그들의 의무는 끝났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수입의 10%만을 아버지께 드리러 온 것이 아니다. 그분은 새 언약을 세우고 새 언약의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오셨다. 그래서 그분은 아버지에게 100%를 드렸다. 이제 그분은 우리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다. 영적 권위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드리는 사람이다.
우리는 돈, 명예, 편리함, 신체적 에너지, 평판, 직업 등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리스도의 몸을 기꺼이 세워야 한다. 주님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고자 하는 것에는 제한이 없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일에서도 우리 자신의 편리함이나 안락함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그리스도의 몸을 만드는 것과 관련이 있어야 한다. 우리의 세상의 직업도 생계를 꾸리는 수단일 뿐, 우리의 경제적 지원을 위해 교회의 다른 사람들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구두쇠 같은 태도를 회개하자.
앞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부자가 되어 우리 삶에서 영적 권위를 갖고 이 땅에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오늘날 사람을 필요로 한다:
• 주님 앞에 서서, 날마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들
• 하나님 자신 이외의 그 누구에게도 또는 그 어떤 것에도 마음속으로 욕망이 없는 사람들
• 하나님을 크게 두려워하여 모든 형태의 죄를 미워하고, 모든 방식으로 의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
• 분노와 성적으로 죄악된 생각을 이겨내고, 생각이나 태도에서도 죄를 짓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는 사람들
• 매일의 삶의 방식이 십자가를 지고 완전함을 향해 나아가며, 두려움과 떨림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가는 사람들
•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사랑에 너무나도 뿌리를 내리고 기반을 두고 있어서, 아무리 큰 도발을 당해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태도로 그들을 이끌 수 없다.
• 인간의 칭찬이나 영적 성장, 신이 인정한 사역, 그 밖의 어떤 것도, 자신이 모든 성도 중 지극히 작은 자라는 인식을 잃게 할 수 없을 정도로, 겸손에 바탕을 두고 있는 사람들
•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과 목적을 깨닫고, 그 말씀을 듣고 떨어서, 아무리 작은 계명이라도 불순종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는 사람들
• 하나님의 모든 권고를 선포하고, 종교적 음행과 비성경적 인간 전통을 폭로할 사람들
• 경건함의 비밀, 곧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와서 육신을 통해 새롭고 살아있는 길을 열어 주신 것에 대하여 성령의 계시를 받은 사람들
• 부지런하고 근면하지만 유머 감각도 있고, 아이들과 함께 휴식을 취하고 놀 줄도 알고,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좋은 선물을 즐기는 사람들
• 금욕주의자는 아니지만, 동시에 절제된 삶을 살고, 고난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
• 값비싼 의류나 관광에 관심이 없고 이익이 없는 활동에 시간을 낭비하거나 불필요한 구매에 돈을 낭비하지 않는 사람들
• 고급 음식에 대한 욕구를 통제하고 음악이나 스포츠, 그 밖의 합법적인 활동에 노예가 되지 않은 사람들
• 고통, 학대, 시련, 거짓 고발, 신체적 질병, 경제적 어려움 및 친척 및 종교 지도자의 반대 등의 불길 속에서도 하나님의 징계를 성공적으로 잘 받은 사람들
• 최악의 죄인과 최악의 신자들을 동정할 수 있고, 그들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자비가 가득한 사람들, 그들은 스스로를 모든 죄인 가운데 괴수로 여기기 때문이다.
• 하늘 아버지의 사랑의 안전함에 깊이 뿌리내린 사람들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고, 사탄이나 악한 사람, 어려운 상황 등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 사람들은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가 최선임을 믿고, 그러므로 모든 사람과 모든 일과 모든 상황에서 항상 감사하는 사람들이다.
• 하나님 안에서만 기쁨을 찾고 그러므로 모든 불쾌한 기분을 이겨내고, 주님의 기쁨으로 충만한 사람들이다.
•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서, 자기 자신이나 타고난 능력에 대해서는 신뢰하지 않지만,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을 한결같은 도우시는 분으로서 완전히 신뢰하는 사람들
• 자기 이성의 이끌림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사는 사람들
• 그리스도께서 직접 진정으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신 사람들(단지 감정적인 위조에 흥분하거나 신학적 주장에 설득된 것이 아님)
• 끊임없이 성령의 기름부으심 아래 살며, 성령님이 주신 초자연적인 은사를 부여받은 사람들
• (회중이나 교단이 아닌)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대한 계시를 갖고 있으며, 모든 에너지와 물질적인 재산과 영적 은사를 드려서 그 교회를 세우는 사람들
• 성령의 도움으로 혀에 굴레를 씌우는 법을 배웠고, 이제 그들의 혀가 신성한 말씀으로 불타오르는 사람들
• 모든 것을 버리고, 돈이나 물질적인 것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에게서 어떤 선물도 바라지 않는 사람들
• 지상의 모든 필요를 하나님께 의지할 수 있고, 대화나 편지와 보고서를 통해 자신의 물질적 필요를 암시하거나 노고에 대해 자랑하지 않는 사람들
• 고집이 세지 않고 온순하며, 비판에 개방적이고, 나이 많고 현명한 형제들의 교정을 열망하는 사람들
• 남을 지배하거나 조언하려는 욕구가 없고(요청할 때 조언을 해줄 준비가 되어 있지만), '장로' 형제, 또는 지도자로 간주되고자 하는 열망이 없고, 오직 모든 사람의 평범한 형제와 종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
• 함께 어울리기 쉽고, 기꺼이 다른 사람에 의해 불편함을 겪거나 이용당하려는 사람들
• 백만장자와 거지, 백인과 흑인, 지성인과 바보, 교양인과 야만인을 구별하지 않고, 그들을 모두 똑같이 대하는 사람들
• 아내, 자녀, 친척, 친구 또는 다른 신자들에 의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이나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에서 조금이라도 식게 하는데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들
• 사탄이 제공하는 어떤 보상(명예든 돈이든 그 어떤 것이든)에도 결코 뇌물로 타협할 수 없는 사람들
• 그리스도를 위한 증인으로서 두려움이 없고, 종교지도자와 세속지도자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 땅 위에 있는 어떤 인간도 기쁘게 하지 않으려는 사람, 필요하다면 하나님을 홀로 기쁘게 하기 위해 모든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려는 사람들
•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나라를 단순한 인간의 필요와 그들 자신의 안락함보다 항상 우선시하는 사람들
• 다른 사람이나 자신의 이성(reason)에 의해 하나님을 위해 '죽은 일'을 하도록 압력을 받지 않고, 오직 자신의 삶을 위해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열망하고 만족하는 사람들
• 그리스도의 일에 있어서 혼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구별할 수 있는 성령의 분별력을 가진 사람들
• 사물을 세상의 관점이 아닌 하늘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사람들
• 하나님을 위한 수고의 대가로 그들에게 주어진 지상의 모든 명예와 직함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들
• 쉬지 않고 기도할 줄 아는 사람, 필요할 때 금식하고 기도할 줄 아는 사람들
• 아낌없이, 기꺼이, 은밀히 그리고 지혜롭게 주는 법을 배운 사람들
• 모든 사람에게 기꺼이 모든 것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는 사람들
• 다른 사람들이 구원받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아, 진리를 알게 하고 하나님의 모든 계명에 순종하는 것을 보기를 갈망하는 사람들
• 모든 곳에서, 하나님을 위한 순수한 증거가 세워지는 것을 보기를 갈망하는 사람들
• 그리스도가 교회에서 영광 받으시는 것을 보고자 하는 열정이 불타는 사람들
• 어떤 일에도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 사람들
• 영적 권위와 영적 존엄성을 지닌 사람들
• 필요하면 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해 홀로 설 수 있는 사람들
• 사도들과 옛 예언자들처럼 전혀 타협하지 않는 사람들
오늘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이 고통받는 것은, 그런 사람의 수가 적기 때문이다.
죄 많고 음란한 세대와 타협하는 기독교계 한가운데서, 하나님을 위해 그런 사람이 되겠다고 온 마음을 다해 결심하라.
하나님은 편견이 없으시므로, 당신도 그런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면 당신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은 삶의 의식하는 부분에서만 헌신과 순종을 요구하기 때문에, 비록 당신의 삶에서 의식할 수 있는 부분이 제한되어 있더라도, 당신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그 부분은 당신이 빛 가운데서 걸으며 완전함을 향해 나아갈수록 계속 늘어날 것이다).
그렇다면 왜 당신이 그런 사람이 될 수 없는지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육신에 선한 것이 없는 만큼, 위에 열거된 덕목을 가지려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구해야 한다.
그러므로 날마다 하나님께 부르짖어라.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 시대의 막바지에 이런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이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서 사람을 찾았는데....... 누가 내 앞에 설 것인가'"(겔22:30).
하나님은 지상에서 그분의 일을 인간을 통해 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분의 일을 하기 위해 사람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이 준비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이 지체되거나 방해를 받는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을 부르실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우르에 있을 때, 그의 집과 친척을 떠나 미지의 땅으로 들어가라고 부르셨다. 만약 아브라함이 순종하기를 꺼렸다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강요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하나님이 다른 사람을 부르셨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결코 아브라함에 대해 듣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아 그분을 섬기는 것은 엄청난 특권이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막중한 책임감을 동반한다.
야곱의 자손들을 위한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에서 그들은 정확히 4세기를 이집트에서 보내도록 되어 있었다. 그분은 오래 전에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들이 400년 동안 낯선 땅에서 노예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창 15:13). 그러나 하나님께서 마침내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구원하실 때까지, 그들은 이집트에서 430년을 보냈다(출 12:40).
왜 그들은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보다 30년을 더 보내야 했을까?
모세가 아직 그들을 이끌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건져내려면 하나님은 사람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영적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먼저 하나님에 의해 준비되어야 했다.
하나님의 종들은 부서져야 한다
모세가 마흔 살 때, 그는 스스로 강했고, 이스라엘 자손의 지도자가 될 자격이 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는 그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사도행전 7장 22절에서 40세에 "모세는 이집트인의 모든 지혜를 교육받았고 말과 행동에 힘이 있었다"(TLB)고 말한다. 어느 날 모세가 그의 이스라엘 동포들을 방문했을 때, 동포들 중 한 명이 이집트인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을 변호하여 이집트 사람을 죽였다. 그는 이스라엘 자손이 이렇게 자기를 하나님이 임명한 지도자로 인정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모세는 여전히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인간적 힘과 지혜에 대한 확신을 깨뜨리기 위해 모세를 광야로 데리고 나가셨다.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에서, 그 훈련은 아마도 10년 밖에 걸리지 않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모세가 부서지는 데는 그 대신 40년이 걸렸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의 지도자가 준비될 때까지 30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하나님의 지도자들이 제때 깨지지 않을 때 하나님의 계획이 지체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깨져야 하는 정해진 기간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 기간을 단축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훈련에 굴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늘릴 수 있다. 우리가 완고하고 굴복하지 않으면 우리 자신도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 또한 어려움을 겪는다.
우리는, 모세처럼 성경의 교리를 잘 배우고,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고,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고, 우리 눈에 "말과 행동에 능한 사람"(행 7:22)으로 자신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심지어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패배하고 억압받는 형제들에 대해서도 걱정할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길 준비가 잘 되어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유창한 말솜씨("말의 능력")를 발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두세 시간이라도 정치 지도자들의 말을 기꺼이 들어주려고 하기 때문에, 남들이 한 시간 동안 우리 설교를 들어준다는 사실만으로는 아무 것도 증명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타고난 자원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재능이 많을수록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우리의 인간적 능력에 의존하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깨져야 하는 이유다.
이스라엘 자손은 모세를 신뢰하지 않았다. 하나님도 그를 그들의 지도자로 임명할 확신이 없었다. 하나님도 사람도 그를 신뢰하지 않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인도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스스로를 하나님이 그분의 대표자로 쓰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효과적인 일을 하려면 우리 사역에 하나님의 증명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가 부서질 때까지 우리의 사역을 인증하지 않을 것이다.
모세가 부서지자, 한 때 말솜씨가 강했던 바로 그 사람이 마침내 "주여, 나는 말을 잘 하지 못합니다"(출 4:10 )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어떻게 모세를 깨뜨렸을까? 그분은 그를 광야로 보냈다. 거기서 모세는 결혼하여 아내의 부모와 함께 그들의 집에서 살아야 했다. 그가 장인집에 무기력하게 의존하여 살아야 했을 때 그가 얼마나 빨리 부서질 수 있었는지는 놀랍다!! 오래 전, 하나님께서는 야곱도 그렇게 부서뜨리셨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가정 형편(아내와 자녀, 장인, 장모와 함께)과 직장 형편(장인의 양을 돌보는 일)에서 그를 깨뜨리고 겸손하게 하셨다. 그리고 그 교육은 40년이 걸렸다. 하나님은 기꺼이 기다리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도 하나님의 사람이 준비되기를 기다려야 했다.
하나님은 오늘도 기다리고 있다. 인도에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함께 세워져야 할 궁핍한 영혼들이 있는 곳이 많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이 찾아낼 수 있는 사람들, 즉 하나님께서 깨뜨리고 준비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 그분의 종으로 사용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가정과 직장 상황을 하나님의 대학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가 시댁(또는 처가)과 다른 가족들과 마주하는 긴장된 상황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종'이 되게 준비시켜 주시는 교육 과정의 일부분이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교리 이상의 것을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서뜨리는 중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찾으시는 즉 도예가의 손에 있는 진흙처럼 하나님께 복종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수련생들은 반항하고 스스로 죽기를 거부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제쳐 놓으신다.
모세가 그 40년 동안 배운 것은 교리가 아니었다. 영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교리는 아주 짧은 시간 안에 배울 수 있다. 하지만 깨지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항상 우리 자신에 대해 하찮게 생각하는 것에 뿌리를 내리고 기반을 두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는 더 성숙한 신자 가운데 있을 때 스스로를 중요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만의 본 교회에 가면, 우리는 우리가 꽤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할 수 있다. 그게 바로 위험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철저히 깨트리셔서 우리가 가는 곳마다 우리 자신을 모든 성도들 중에서 가장 작은 자로 인식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젊은이를 부르신다
예수님은 아주 젊은 사람들을 그분의 사도로 부르셨다. 많은 사람들은 사도가 되려면 적어도 60세나 65세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서른 살짜리를 첫 사도들로 택하셨다. 예수 자신이 죽었을 때 겨우 33.5세였다. 그리고 열한 사도들은 모두 예수님보다 젊었다. 유대 사람 가운데서 랍비들은 언제나 자기보다 어린 사람을 제자로 삼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은 오순절 날에 겨우 30살이었을지도 모른다.
예수께서 이 젊은이들을 부르시니, 그들의 경험은 보지 않고, 그들의 전심을 보셨다. 오순절 날 이 젊은이들은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았고, 주님의 사도가 될 수 있도록 초자연적으로 준비되었다. 그들의 경험과 성숙함은 나중에 이루어졌다. 디모데 역시 아주 젊은 나이에 사도가 되었다(딤전 4:12).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그분을 섬기도록 젊은이들을 부르신다. 그러나 그들은 겸손을 유지해야 한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젊은이들이 직면하는 가장 큰 위험은 영적인 교만이다.
나는 인도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 받은 젊은이가 소명으로부터 타락한 많은 비극적인 사건들을 보아왔다.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이 그들을 어떤 식으로든 사용하기 시작하자마자, 그들은 부풀어 올랐는데, 그들은 하나님께 속한 영광을 스스로 취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제쳐 놓아야만 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세속적인 안락함을 구하다가 결국 좋은 월급을 주는 서구 기독교 단체의 유급 직원으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발람처럼 잘못된 길로 빠졌다. 그리고 또 다른 경우에는, 예쁜 들릴라에게 이끌려 삼손처럼 기름부음을 잃었다. 그러므로 이 훌륭한 젊은이들은 인간의 명예와 돈을 얻거나 예쁜 여자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부르심과 그들의 기름부음을 희생시켰다.
[오늘날 인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움 없이 말하는 하나님의 예언자들은 어디에 있으며, 돈이나 예쁜 여자나 사람들의 인정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런 자들은 찾기 힘들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도중에 실패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은 부서지고 뉘우치는 심령이다. 우리가 깨지고 겸손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사용하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위대한 계시를 받았다고 생각하거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엄청난 사역 때문에, 우리가 무언가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뒤로 미끄러지기 시작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를 제쳐 놓으실 것이다.
우리는 어떤 교회에서 여전히 연장자로서의 지위를 유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에서 우리가 우리의 삶을 낭비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하나님은 제로(0)인 자들을 부르신다
고린도전서 3장 5절에서, 바울은 "그럼 아볼로는 무엇이고 바울은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바울이 죽은 자를 일으키고 많은 교회를 세우고 성경까지 쓴 주님의 강력한 사도였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바울은 무엇인가? 종이다 ." 그것이 그의 인생 끝까지 자신에 대한 의견이었다. 바울이 결코 곁길로 빠지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들의 종이 아닌 다른 존재로 생각하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뒤로 미끄러지기 시작한다.
바울은 더 나아가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고 말한다. 둘 중 누가 더 위대한가? 식물을 심는 사람 - 미지의 지역에 개척자로 가서, 전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곳에서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사람? 아니면 나중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과 격려의 가르침으로 식물에 물을 주고, 신자들을 몸으로 세우는 사람? 답은 "둘 다 아니다"이다. 둘 다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바울(7절)은 말한다. 둘 다 0(영)이다. 오직 식물을 자라게 하신 하나님만이 모든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죽을 때까지 0 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그의 인생 끝까지 사용할 수 있었다. 바울에게는 하나님이 전부였다.
주님은 발람에게 말을 하기 위해 당나귀가 한 번 필요하셨다. 그분은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다른 시간에 타고 갈 당나귀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분은 심지어 오늘날에도 그분의 목적을 위해 당나귀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우린 누구인가? 주님이 말을 하게 하거나, 타고 다닐 당나귀들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될 수 있도록 형제들이 기꺼이 아무것도 되려고 하지 않는 곳에서는, 그들 사이에 누가 가장 영적인지 또는 가장 위대한지 등에 대한 어떠한 경쟁도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자신을 그룹의 리더로 내세우려고 할 때마다 하나님은 그를 선반 위에 치워두실 것이다. 모든 교회에는 지도자가 있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도자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다른 형제에게 그들의 지도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 은총을 주신다면, 우리는 재빨리 스스로를 겸손하게 여기고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의 사역을 질투하게 되거나, 그의 지위를 탐하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지역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을 방해하는 사탄의 대리인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주권으로 어떤 교회를 이끌기에 가장 좋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아신다. 그리고 그분은 영리한 자와 지적인 자를 찾지 않는다. 그분은 약하고 깨어진 사람과 자신이 0이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을 선택한다. 우리는 그것을 깨달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