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전한 복음

작성자 :   잭 푸넨 카테고리 :   시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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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기독교인들은 오늘날 완전한 복음을 선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떻게 우리가 "완전한 복음"을 정말로 들었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요8 :32 ). 예수님은 계속해서 진리가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켜 준다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진정으로 진리를 들었다는 증거는 우리가 삶에서 죄의 힘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이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완전한 목적"(행20 :27 )을 선포하였다. 단순히 종교적인 것만이 아니라 진정으로 영적인 사람이 되려면, 오늘날에도 모든 신자들이 필사적으로 들어야 할 말이다.

주님 안에서 당신의 영이 강해지기 위해 고기를 원한다면, 열린 마음과 생각으로 이 책을 읽고, 그것을 통해 주님이 당신에게 말씀하시기를 요청하라……

장 1
완전한 복음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행20:27 ).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3년간 밤낮을 설교하며 지냈다(행20 :31 ). 그는 무엇을 설교했는가?

그는 회심하지 않은 이교도에게, 하나님을 향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설교하였다(행20 :21 ). 그러나 그는 신도가 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완전한 목적"(행20: 27) 을 설교하였다.

오늘날,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오직 "믿음"만을 설교하여 - 그것은 너무 위조된 복음이다 - 이는 복음주의 모임(예배)에서 많은 영적인 "유산"을 초래하였고, 그들의 죄에서 결코 돌아서지 않았지만 "복"을 받기 위해서만 예수께 오기를 원하는 많은 반만 회심한 "신자들"을 낳았다.

그러나 어떤 설교자들은 더 성경적이며, 바울이 그랬듯이 회개가 믿음보다 선행되어야 한다고 설교한다.

그러나 바울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완전한 복음을 설교하였다(행20:24).

많은 이들은 예수를 성령 안에서 구원자와 세례자로 알고 있을 때 '완전한 복음'을 경험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히브리서 6장 1, 2절 은 이것이 기독교인의 삶의 시작이라고 우리에게 말한다: "그리스도에 관한 기초적인 가르침 - 회개와 믿음의 기초(즉 죄의 용서 - 예수를 구원자로 아는 것), 세례와 안수(즉, 물과 성령으로 세례하는 것 - 예수를 영적인 은사를 주시는 성령의 세례자로 아는 것), 그리고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예수의 재림)이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갓 태어난 아기들이 먼저 마셔야 할 젖이다( 히5:13 ). 그러나 대부분의 신자들은 평생 동안 아기로 남아 있기 때문에, 그들은 절대 완전한 복음의 단단한 음식을 경험하지 못한다.

히브리파 기독교인들과, 고린도교회 기독교인들이 그랬다.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전2:2 )고 했다.

왜 그는 그리스도가 그들의 죄 때문에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는 사실( 고전15:1-4) 을 넘어서는 어떤 것도 말하지 못했을까?

그는 고린도전서 3장 2절 에서 그 이유를 설명한다: 그들은 단단한 음식을 소화하지 못하는 아기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배운 기초적 진리에도 충분히 반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더 멀리 인도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갈등과 질투, 영적 분열 등에 패배한 채 육신적으로 남아 있었다.

사람들이 아기일 때, 우리는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 이상의 어떤 것도 가르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러한 신자들은 여전히 육신적으로 남아있게 된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아기들'에게 "우리는 성숙한 자들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말한다 (다른 교회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단단한 음식을 먹을 줄 아는 자들).....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고전2 : 6 ,7)고 말한다.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완전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교회 중 하나였다.

완전한 복음은 무엇인가?

우리는 구약성경을 보고 거기서 그것에 관한 몇 가지 교훈을 배울 수 있다.

성막은 하나님이 주신 그의 거처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 상징 속에서, 우리는 완전한 복음이 무엇이며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있는 즐거움에 들어갈 수 있는지 그리고 우리 삶에 대한 그의 완전한 목적을 알 수 있다.

성막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바깥뜰, 성소, 지성소이다, 이것은 완전한 복음의 세 부분을 상징한다.

복음의 제1부 - 예수 우리의 구원자

바깥뜰에는 희생제물의 제단, 물두멍(씻는 용도)이 있었다. 제단은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라는 메시지를 나타낸다. 물두멍은 우리 삶의 외적인 정화( 히10:22 )와 우리가 물세례(행 22:16 )에서 증거하는 중생의 씻음(딛 3:5 )을 나타낸다.

이것은 기독교 생활의 첫 단계로, 어떤 사람이 자신의 죄에 대한 벌을 받으신 예수님을 구원자로서 회개하고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물에서 세례를 받는다.

복음의 제2부 - 예수 우리의 세례자

바깥뜰은 모든 이스라엘 자손에게 개방되어 있었지만(이방인에게는 개방되지 않음), 성소는 오직 제사장들, 곧 주님을 섬기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만 개방되어 있었다.

구약성경에서는, 예언자, 제사장, 왕이든지 주님을 섬기는 가장 중요한 요건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었다. 어떤 인간의 자격도 이 기름 부으심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없다. 심지어 예수님도 먼저 성령에게 기름부음을 받지 않고는 그의 공생애에 나서지 않았다. 여호와께서 자녀들을 '바깥 뜰'에서 이 영역으로 인도하시기를 원하신다 - 성령의 기름부음과 그를 섬기기 위한 영적 은사를 행사하기 위해서.

성소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가구가 들어 있었다.

1. 등잔대 -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있는 힘을 주는 기름부음을 상징한다(행 1:8 )

2. 진설병을 두는 상 - 우리 에게 말씀을 계시하는 기름부음을 상징한다 (고후3:18).

3. 향단 - 기도에 있어서 우리에게 힘을 주는 기름부음을 상징한다(롬 8:26 , 27 ).

여기까지 도달하는 것은 기독교인의 삶의 제2단계에 도달하는 것으로 죄 용서와 물 세례뿐 아니라 성령의 세례도 받는 것이다.

복음의 제3부 - 예수 우리의 앞서가신 자

지성소는, 성막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거하는 곳이었다. 새 예루살렘처럼(교회를 상징), 이것 역시 정확한 정육면체였다: "그곳의 길이, 너비, 높이가 같다"( 계21:16 ).

어떤 사람도 심지어 제사장도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심지어 대제사장도 일년에 한 번만 들어가 백성의 죄를 속죄할 수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바로 앞에 가는 길이 여전히 어떤 사람에게도 열려 있지 않다는 사실을 부각시켰다( 히9:8 ).

우리는 이에 따라 구약성서의 가장 훌륭한 성도들도 그들의 영적 경험에 비추어 성소까지만 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세례 요한은 예수가 태어나기 전까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위대한 사람이었다. 예수께서 마태복음 11장 11절에서 말씀하신 대로 그는 심지어 마리아보다도 위대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극히 작은 자라도 세례 요한보다 더 클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니, 왜 그럴까?

구약성경의 성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축복을 받을 수 있었다. 그들은 죄의 용서를 받고(다윗이 용서받은 것처럼 - 시 103:3),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었다(아브라함처럼 - 창15:6 ; 롬4: 2 ,3). 그들은 또한 외적인 삶의 의로움에 도달할 수 있었다(사가랴와 엘리사벳처럼 - 눅 1:6), 그리고 섬김을 위해 기름부음 받을 수 있었다(기드온과 엘리사가 그랬듯이 - 삿6 :34 ; 왕하 2:9-15 ).

다시 말해, 그들은 바깥 뜰, 심지어 성소까지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지성소를 가리는 휘장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그들은 신의 본성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새언약 아래에서는, 휘장을 통해 지성소로 바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우리는 히브리서 10장 19 , 20 절에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지)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이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고 한다.

예루살렘의 성전(성막의 양식에 따라 지은 성전)에도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휘장이 있었다. 이것은 예수님이 갈보리에서 죽었을 때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마27 :50 , 51 ). 이것은 예수님이 육신으로 완성하신 일을 의미한다.

경건한 삶을 사는 비결( 디모데전서 3장 16절 에서 말한다)은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와서 그의 영혼을 순수하고 더럽히지 않으신 것을 아는 데 있다. 그리하여 우리가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열렸다.

인간의 자기 의지는 그에게서 하나님의 임재를 차단하는 두꺼운 '휘장'이다. 예수님은 지상의 삶 동안 항상 자신의 뜻을 부인하셨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영혼을 순수하게 유지했다. 우리 역시 같은 길을 걸을 수 있는데, 만약 우리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 말이다( 갈5:24 ).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항상 지성소에서 살 수 있다.

사도가 히브리인들에게 우유와 단단한 음식(히5 :13 )을 대조하며 글을 쓸 때, 그는 그들에게 진리('단단한 음식')는 "설명하기 어렵다"(11절)라고 말한다. 그 진리는(히5 :7-10 에서 분명히 나타나듯이) 육체에 계실 때에 심한 통곡과 눈물,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1세기에 많은 신자들이 이 진리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듯이,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신자들이 진리를 받아들이기 또한 어렵다. 그리고 그 이유는 똑같다. 왜냐하면 그들은 "듣는 것이 둔하기"(히5:11)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표준 이하의 패배한 상태에 만족하기 때문에 청력이 둔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경건한 삶을 갈망하고 목말라 하는 자들에게 계시를 주신다. 주님의 비밀이 주님을 경외하는 자들의 귀에 속삭인다( 시편25:14 ). 그래서 그들은 온전함의 비밀을 발견한다.

지성소에서 우리는 하나님 율법의 의로운 요구를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게 할 수 있다(롬 8:3 , 4 ).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할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고 율법의 의로운 요구는 한 마디로 요약될 수 있다 : LOVE - 즉, 마음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경건함" 또는 사랑의 하나님의 성품의 참여는 옛 언약 아래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는데, 그 때는 성령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머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가능하다. 이것은 매우 값진 진주인데,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다른 모든 진주를 포기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랑이고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한다"(요일 4:16 ). 사랑하며 살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앞에서 살 수 없다. 성경에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다"(아8:6)라고 적혀 있다. 그것은 죽음이 아무도 살려주지 않고 모든 인간에게 닥치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도 모든 인간에게 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 언약에서는, 죽음이 예수님에 의해 정복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사시는 동안, 예수님께 퍼부은 모든 증오와 독과 울분(영적 죽음)은 예수님이 나타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이길 수 없었다. 하나님의 사랑의 빛이 어둠 속에서 빛났고 어둠은 그것을 이겨내지 못했다.

성령의 힘으로 우리의 자기 의지가 십자가에 못박힐 때 비로소 지성소에서 살고,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다.

대부분의 신자들(거룩함을 설교하는 많은 사람들조차)은 그들의 사랑이 그들 자신의 집단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제한된다. 그들은 자기 집단의 누구에게도 결코 악담을 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다른 집단신자들에 대해 말하고 악담을 듣는 것은 상당히 자유롭게 느낀다. 독자여, 자신을 살펴보고, 그것이 자신의 삶에서 사실이 아닌지 보라. 그런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인간적 사랑이다. 신자들이 이런 배타적인 'ghetto(유대인 거주지역) 사고방식'에 만족하면, 그들은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한다.

예수님은 우리를 아버지처럼 선하고 사랑스럽게 만드시려고 오셨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그의 해가 떠오르게 하신다,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태도와 상관없이 말이다.

예수님은 우리처럼 모든 점에서 유혹을 받으셨다(히4 :15 ). 즉, 그는 자신의 뜻을 행하고 수많은 방법으로 자신을 기쁘게 하고 싶은 유혹을 받았다. 하나님은 그가 지상에 있었던 33년 반 동안, 인간에게 가능한 모든 유혹의 범위를 그의 아들이 겪도록 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것들 하나하나 모두를 이겨내셨다.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의지에 굴복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그는 생각, 말, 행동, 태도, 동기에서 단 한 번도 죄를 지은 적이 없다. 자기 의지에 굴복할 때 비로소 죄가 된다.

이것이 예수님이 지상의 삶 동안 겪었던 "교육"이었다. 그는 순종이 고통을 의미할 때, 순종을 배웠다(히 5:8 ). 그리고 여기서 언급된 고통은 자신의 의지를 부정하는 데서 오는 고통이다.

고통의 반대는 즐거움이다. 유혹에 빠질 때마다 우리 모두가 갖는 선택지는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를 기쁘게 하는 일을 하면서 즐거움을 누리는 것과 우리의 자기 의지를 죽음으로 몰아넣음으로써 고통을 받는 것이다. 예수님은 한결같이 고통 받는 것을 택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다"(롬 15: 3).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무렵, 그는 인간에게 가능한 온갖 유혹을 다 겪으시고, 그 모든 유혹 속에서 큰 승리를 거두시고 나오셨다.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날 밤, 그는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었다"(요 17:4 )고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십자가에 자신을 바치는 제물이 완성되자, 휘장은 찢어졌다. 마침내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열렸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 은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예수님의 죽으심"은 무슨 뜻인가? 예수님이 세상의 죄 때문에 죽은,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죽음에는 우리가 관여할 수 없다. 거기서 그는 혼자 죽었다. 거기서 그는 휘장을 찢어 우리를 위해 새롭고 살 길을 열어 주었다. 휘장은 이미 찢어졌으니 이제 두 번 다시 찢어야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 앞으로 들어가는 길은 영원히 열려 있다. 그러나 우리는 찢어진 휘장의 길, 즉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 한다. 우리는 그의 영원한 "죽음"을 함께 해야 한다 - 우리의 자기 의지를 죽이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 앞에서 이런 자기 부인의 길을 걸어가신 우리의 앞서가는 자다. 그가 우리를 위해 세우신 이 새롭고 살아 있는 길을 통해, 우리는 일생 동안 지성소에서 살 수 있다. 이것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단 한번의 경험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매일 매일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야 하는 길이다.

조심하지 않으면 하루는 지성소에서 살다가 다음날 다시 성소나 바깥 뜰로 돌아갈 수 있다. 육신대로 살면, 하나님의 성막 밖까지 갈 수도 있다( 롬8:13 참조). 사람이 타락하고 마음이 굳어지는 데는 24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 우리가 한때 용서했던 누군가에게 억울해 지는 데는 24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매 24시간 내에) 서로 타락하지 않기 위해 서로 날마다 권고해야 한다. 만일 우리에게 날마다 우리를 권고할 형제나 자매가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 우리에게 매일 권고하시도록 해야 한다(히3 :13 ).

그때의 완전한 복음은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롬 8:3 , 4 )이다. 즉, 옛 언약 하에서는 불가능했던 것, 즉 우리의 내면적 삶에서 죄에 대한 승리를 거두는 것,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것이 이제 가능해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사랑의 본성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셨다.

어떤 사람이 지성소에 들어갈 때, 그는 기독교인 삶의 3단계, 즉 가장 높은 단계에 들어간다.

지성소에는, 오직 하나님만이 거주하신다. 이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함께 살고 있으며 사람들로부터 해방되어, 인간들의 명예와 심지어 기독교 지도자들의 명예를 추구하는 것에서 자유로워졌다. 그들은 또한 불쾌함, 불평과 투덜거림, 그리고 원통함과 질투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들은 이제 보답으로 사랑을 받든 안 받든 상관없이, 예수님이 그들을 사랑하셨던 것처럼, 자유롭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이제 그들이 하는 모든 일에서, 예를 들어 그들이 모임(예배)에서 기도하고 말할 때, 사람들보다 하나님을 더 의식하면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러므로 그들의 내적(숨겨진) 삶은 그들의 외적 삶처럼 순수하다.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인간의 눈에는 크고 위대한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혐오스러운 것이라고 본다. 그들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할 가능성에 비교하여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긴다.

죄를 이기고 승리하는 삶에 들어간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넘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에 점점 더 참여하게 된다. 그들은 항상 모든 것에 감사하고, 그들이 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살아간다.

지성소에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빛 안에서, 혼에 불과한 것(인성)과 진정으로 영적인 것(신성)에 대해 점점 더 분별력을 얻는다.

예수님을 흉내 내는 것과 그의 본성에 참여하는 것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우리가 그를 흉내 낼 때, 인생은 끊임없는 투쟁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의 본성에 참여할 때, 우리는 안식을 취하게 된다.

우리 모두는 아담의 자녀로서, 증오하고, 거짓말을 하고, 화를 내고, 여자를 탐내고, 인간의 명예를 추구하고, 돈을 사랑하고, 이기적이고 교만해지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이었는지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본성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할 때, 우리가 사랑하고, 진실을 말하고, 인내하고, 순수하고, 관대하고, 사심 없고, 겸손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주 쉬워질 수 있다.

고양이는 몸을 핥고 몸을 항상 청결하게 유지하는 것이 쉽다. 그것은 고양이에게 부담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고양이의 본성이다. 하지만 돼지가 그렇게 하는 것은 - 고양이를 흉내 내는 것은 - 지속적인 부담이 될 것이다. 그것은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과 그것을 모방하려는 노력의 차이를 보여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신다 - "예수의 생명"(고후4 :10) .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함에 참여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러면 우리에게 악한 자에게 선하게 대하는 것도, 우리에게 죄를 짓는 자를 용서하는 것도 부담이 안될 것이다. 고양이가 죽을 때까지 자기 자신을 깨끗하게 핥는 것처럼, 우리는 이 하나님의 선함을 우리의 삶 끝날까지 이어갈 수 있다.

사람들이 함께 모여 기능하는 몸(단순한 신도와는 반대로)으로 형성되는 것도 지성소 안에서이다. 지성소에는 개인주의가 없다. 여기선 아무도 혼자 살지 않는다. 여기에 사는 모든 사람은 영원한 제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런 모든 형제자매를 한 지역에서 영적 권위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몸으로 기능하게 하실 수 있다. 이것은 예수님이 '동의'하신다고 말씀하시고 아버지께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받을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사탄의 힘을 마음대로 묶을 수 있는 자들에 대한 것이다(마 18:18-20 ).

기독교인들의 모든 회중에서, 대다수가 바깥 뜰에 거주한다 - 이들은 복음의 메시지의 3분의 1에 응답했다. 일부는 성소에 들어간다 - 성령의 기름부음 받은 것이다. 이들은 복음의 메시지의 3분의 2에 응답했다. 그러나 그 회중의 영적 권위와 효과(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지성소에 들어간 사람들(완전한 복음에 응답한 사람들)의 숫자로 측정된다.

사탄은 휘장을 뚫고 지성소로 들어간 사람들만 두려워한다. 그가 신자들을 완전한 복음에 눈을 멀게 한 것은 이 때문이다.

지성소에 영구히 거주하는 사람들의 모임 안에 중심 핵이 있어야만, 비로소 회중은 영적 죽음의 힘으로부터 순수하게 지켜지고 생명의 길 안에서 보존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신랑과 한 몸이 된다.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 5:31 , 32 ).

그때 너의 인생에서 가장 높은 하나님보다 못한 것으로 만족하지 마라. 너희를 방해하는 모든 죄악과 예수님이 너희를 위해 선언하시고 열어놓으신 그 곳에 너희를 단호히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인간의 모든 전통과 의견에 폭력을 가하라.

장 2
진리의 균형

"네가 하나님의 길을 떠나서 (오른쪽으로 또는 왼쪽으로) 길을 잘못 들어서면, 너의 뒤에서 '아니야, 이것이 바른 길이다, 이리로 가거라'하는 소리가 너의 귀에 들릴 것이다" ( 사30:20 , 21 - TLB).

여기서 언급된 음성은 우리가 하나님의 보좌로 이어지는 직선적이고 좁은 길(오른쪽이나 왼쪽으로)에서 조금이라도 빗나가면, 우리에게 경고하는 성령의 목소리다.

오늘날 우리가 교회의 신자들을 볼 때도, 우리는 그들 대부분이 진리의 직선에서 오른쪽이나 왼쪽에, 틀에 박혀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어떤 집단은 성령의 은사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한 방향은 균형이 맞지 않는다. 다른 집단은 성령의 열매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은사를 완전히 소홀히 하여 다른 방식으로 균형이 맞지 않는다. 이 두 그룹 모두 중앙으로 돌아가기 위해 좌/우로 이동하라고 말하는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 같다. 각 집단은 성경에서 그들이 좋아하는 구절이 있는데, 그들은 계속 반복하고 있다. 그들은 성경의 다른 부분이 균형을 이루게 하는 것을 결코 보지 못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구절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 다른 구절을 보는 것을 매우 자주 거부하는 것은 그 다른 구절이 반대 방향으로 빗나간 집단들에 의해 잘못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진리에 대한 이해는 다른 집단이 간 극단에 대한 반응에서 나온 것이지,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세심하게 연구한 데서 나온 것이 아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예언자들의 사역은 항상 이스라엘이 어디로 잘못 가고 있는지를 지적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성령이 교정하는 말을 그대로 말했다. 그들은 균형 잡힌 사역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항상 잃어버린 것을 강조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루어진 이스라엘의 일들을 말하면서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구약성서 예언자들은 모두 사역이 균형이 잡혀 있지 않았다.

예레미야를 예로 들어보자. 어느 단계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당신은 내가 이 사람들에게 친절한 말을 하도록 결코 한번도 허락한 적이 없다. 항상 그것은 재앙, 공포, 멸망이다"( 렘20:8 - TLB). 그의 메시지는 확실히 은혜와 진실로 가득 찬 균형 잡힌 메시지는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심판과 심판 그리고 더 많은 심판이었다! 이 메시지는 어느 순간 예레미야 자신에게는 너무나 부담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 설교를 멈출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 메시지를 바꿀 생각을 할 때마다,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이 불처럼 가슴 속에 타올라 더 이상 그것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렘20:9 - TLB). 그리하여 그는 46년 동안 유다 민족에게 심판의 말씀을 계속하였다.

예레미야가 자신의 이성의 목소리나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는 다른 설교자들의 충고에 귀를 기울였다면, 자신의 메시지를 수정했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더 균형 잡혔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의 예언자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초기의 예언자 호세아의 사역을 생각해 보자. 그의 메시지는 예레미야의 메시지와는 전혀 달랐다. 하나님께서 호세아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전하신 말씀은 "비록 네가 내 말을 거역하고 곁길로 갔지만, 나는 너를 얼마나 사랑하느냐"이었다. 그러나 호세아가 살았던 180년 뒤에 살던 예레미야는 호세아의 사역을 흉내 내려고 하지 않았다. 이 예언자들은 서로 모방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짐을 그들 각자가 알고 있었다.

새 언약의 예언자 역시 항상 교회에 부족한 것을 말하고, 그것이 불균형한 곳을 지적할 것이다. 그는 그가 섬기는 사람들의 현재 필요성에 대해 하나님으로부터 분별력을 갖게 될 것이다.

오늘날 모든 교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예언적 사역이다, 이를 통해 성령께서 말씀하신다, "아니다. 그쪽은 아니다. 이쪽이다."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자신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 위해 책과 잡지를 읽고 테이프를 듣는 것으로 준비한다. 그러나 그들은 명예와 선물을 추구하기 때문에, 듣는 자들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는 건 모두 제외하려고 조심한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그들이 듣도록 정확히 말해준다. 그래서 예언자는 교회의 불균형이 시정될 때까지 한 가지 주제에 대해 반복적으로 설교할 수 있다. 그러나 직업적인 설교자들은 같은 신도들에게 같은 메시지를 두 번이라도 설교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여행 설교자들은 특정 교회에서 어떤 메시지를 전했는지(마음속이나 일기에) 메모를 해야 한다, 그들이 두 번째로 그 교회를 방문할 때 같은 메시지를 다시 설교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 설교자로서의 명예를 잃지 않도록!!

우리 시대에 예언자들이 얼마나 절실히 필요한가!

가르치는 사역은 예언적 사역과는 다르다. 교사는 성경의 교리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은 그가 사역하고 있는 사람들의 현재의 필요와 관련이 있을 필요는 없다. 칭의, 성령 세례, 성화, 그리스도의 재림 등에 관한 가르치는 사역은 어느 교회에서나 언제나 이익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곳의 사람들은 이 모든 훌륭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와 낙담으로 패배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런 교회에 필요한 것은 예언적인 사역이다!

우리가 균형을 이루어야 할 한 분야를 생각해보자: 복음의 메시지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있어서.

에베소서에서, 바울이 전한 좋은 소식을 똑똑히 볼 수 있다.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교회의 장로들에게(감독자들) 3년을 그 가운데서 보낸 뒤에,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다"(행 20:27 )고 말했다.

바울은 복음의 메시지를 주님 자신의 입에서 직접 받았으며, 우리 모두가 받은 것처럼 다른 사람의 입에서 간접적으로 받은 것이 아니다( 갈1:11 , 12 ). 주께 받은 복음 이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갈1 :8, 9 ) 말했다. 다른 어떤 복음을 전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복음을 희석하거나, 그 일부를 생략하는 것은 심각한 일이다.

에베소서는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첫 번째 세 장은 복음의 첫 번째 부분을, 다음 세 장은 두 번째 부분을 이룬다. 첫 번째 부분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다룬다. 두 번째 부분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해야 할 일을 다룬다.

에베소서 4장 1절 은, "그러므로, 나는 너희가 걸어가기를 간청한다......"로 시작한다. '그러므로'라는 말은 4장에서 6장으로 이어지는 모든 말씀은, 성령이 처음 세 장에서 세운 토대를 기초로 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바울은 훌륭한 건축가였고 성령의 영감 아래 에베소서를 신중하게 썼다.

에베소서 4~6장은 1~3장의 기초 위에 세워진 상부구조라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 기독교의 많은 집단에서 볼 수 있는 불균형은, 어떤 집단은 처음 세 장의 기초를 세웠지만, 그 위에 상부구조가 없다는 것이다. 다른 집단은 (마지막 세 장의) 상부구조를 세우고 있지만, 기초가 없다. 두 집단 모두 똑같이 어리석다.

에베소서 처음 세 장에 대해 주목할 점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그 모든 장에 단 하나의 명령이나 권고가 없다는 것이다! 반면에, 첫 세 장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에 대한 설명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에베소서 다음 세 장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게 할 것인가에 대한 권고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주목하라!

우리가 기초적 진리와 상부 구조적 진리를 구별하려면, 그 차이점을 주의 깊게 주목해야 한다. 우리는 문과 창문을 기초에 설치하지 않는다! 안 한다! 그것들은 상부 구조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상부구조 자체는 기초 위에 세워져야만 한다. 즉, 우리가 설교하는 모든 계명은 하나님이 맨 처음에 우리를 위해 그리고 우리 안에 하신 일에 확고히 바탕을 두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리고 우리 안에 하신 일을 우리가 먼저 확신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능력이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 다음에 우리는 옛 언약 성도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려다가 끊임없이 실패했던 것과 같은 속박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기독교인들 역시 끊임없는 실패와 낙담의 삶을 살고 있으며, 그들에게 승리의 삶은 불가능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에베소서 1~3장의 기초를 항상 우리 밑에 두지 않으면, 끊임없는 승리의 삶이 불가능한 것은 사실이다. 기초는 우리가 어디엔가 한 번 놓은 다음, 나아가서 건물 자체를 다른 어디엔가 짓는 것이 아니다.

모든 건물은 그 기초 위에 지어질 뿐만 아니라, 항상 같은 기초 위에 계속 세워져 있다. 나중에 건물에 새 층을 추가하면, 그 층들도 처음에 건물을 위해 놓았던 기초 위에 놓도록 지어진다.

신자들이 한 곳에 기초를 놓은 다음 다른 곳에 상부구조를 세우기 시작할 때, 성령의 음성이 그들에게 말할 것이다(들어야 할 귀가 있고 편견이 없다면), "아니, 거기가 아니다. 기초가 마련된 이곳에 지어라."

한편, 기초를 닦은 자에게, 그리고 그 다음엔 오직 기초만 감탄하며 바라보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들에게(매 주일 모임에서!!) 성령의 음성은 (듣는 귀가 있고 편견이 없으면 또)

"이제 어떻게 할거니? 기초만으로 만족하니? 집을 짓고 싶지 않니?" 라고 말할 것이다.

여러 해 동안 강단으로부터 권고한 뒤에(에베소서 4~6장의 계명을 바탕으로) 권고 외에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던 우리들에게, 지금 우리가 들어야 할 것은 에베소서 1~3 에서 발견되는 진리를 조금 더 들어 균형 있게 하는 것이다.

에베소서 1~3장을 급히 지나쳐 가는 사람들은 나중에 생활 속에서 불안, 우울, 공포, 하나님을 받아들임에 대한 불확실성, 질투, 경쟁심, 그리고 그 밖의 여러 가지 악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우리 스스로에게 세 가지 질문을 하고 그에 따라 점검을 해보자.

1. 우리는 언젠가 특정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 우리가 그 특정한 아침에 기도를 하거나 성경을 읽을 시간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문제에 대해 우리를 돕지 않으실 것이라고 느낀 적이 있는가?

2. 우리가 사고를 당했을 때, 혹은 금전적인 손실에 직면했을 때, 우리가 그날 아침 하나님과 단둘이 시간을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느낀 적이 있는가?

3. 우리가 어느 날 아침 성경 읽기와 기도의 긴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그날 하나님이 다른 날보다 우리를 조금 더 받아주셨다는 것을 느낀 적이 있는가?

만약 위의 내용 중 어느 것이라도 당신의 경우에 사실이라면, 당신은 아직 에베소서 1~3장까지 기초가 제대로 세워지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당신은 아직 하나님이 당신을 받아들이는 기초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우리가 한 일에 근거한 것이 아닌)을 바탕으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받아주신 사실에 확고하고 안전하게 세워지지 않으면, 이기는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우리가 기초만 갖추고, 신약성경에 나오는 계명과 권고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이기는 자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로 불가능하다.

우리는 어느 쪽도 실수해서는 안 된다.

에베소서 1~3장에서의 기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복(성령의 모든 축복)을 우리에게 주시되"(엡 1:3 ).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라는 말로 시작한다(창 1:1 ).

그것이 진정한 복음의 시작이기도 하다 -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 그러나 인본주의적인 복음은, "태초에 사람이…..."로 시작할 것이다,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 아니라, 우리가 해야 할 일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사실 이것은 진정한 복음을 모든 거짓 복음과 구별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다. 모든 사이비 종교는 인간이 성취한 것을 영광스럽게 여길 수 있는, 인간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는 인문학적 복음을 선포한다.

그러한 많은 거짓 복음서는 매우 훌륭하게 들리고 사람들을 거룩하게 인도하는 것처럼 보이며, 따라서 많은 성실한 신자들이 속는다. 그러나 그런 복음과 이를 선포하는 사람들은 모두 바울이 갈라디아서 1장에서 선포한 저주를 받게 된다.

진정한 복음은 항상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기억하라,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 해야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에베소서는 "우리를 축복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로 시작한다. 그것이 올바른 시작이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은 성령의 축복을 내리셨는가?

그들 한 명도 빠짐없이. 단 한 건의 축복도 빠뜨리지 않았다.

당신은 거듭나는 순간 성령의 모든 축복을 물려받은 사람이다. 그 모든 축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면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신은 처음부터 그것들 모두의 상속자라는 것을 잊지 마라.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엡1:4).

우주가 창조되기 훨씬 전에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이름으로 알고 계셨다. 하나님이 수 백 만년 전에 당신을 알고 계셨다는 걸 알고 있는가? 이러한 확신은 그 자체로 우리의 삶에 엄청난 안정감을 가져다 줄 수 있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기를…..."(엡 1:18 ).

하나님께서 당신과 나를 잡으셨을 때 그가 보물을 얻으셨다는 이 확신에 우리는 뿌리박아야 한다. 그것이 위 구절의 뜻이다. 스바냐 3장 17절 은 하나님께서 기쁨의 함성을 외치며 우리를 기뻐하신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신도들은 하나님이 늘 눈살을 찌푸리고,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아, 더 잘할 수 있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태도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기쁨의 함성을 외치며 그들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결코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엡 1:18-20 ).

하나님의 능력이 가장 크게 나타난 것은 창조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에 있었다.

이 부활의 능력(무에서 우주를 창조한 능력보다 더 큰 능력)은 지금 믿는 우리 모두에게 이용 가능하다.

모든 것은 믿음에 달려있다 - 그리고 믿음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데서 온다. 따라서 위의 것과 같은 구절들을 성급하게 훑어보지 말고 묵상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18절부터 20절까지 위에서 읽은 것은 완전한 거짓말이거나 아니면 절대적으로 사실이다. 그것이 거짓이라면, 신약성경이 용서와 칭의 등에 대해 가르치는 다른 모든 것 역시 거짓임에 틀림없다. 반면에 우리가 그 다른 가르침들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우리가 믿었을 때, 그때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이 초자연적인 힘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믿지 않기 때문이다!

이 힘은 모든 " 믿는 사람 " 이 이용할 수 있다 .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하면서 기도를 시작하라고 가르치셨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주의 총감독이 아니라, 아버지 -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우리 삶의 모든 면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고, 완전하게 지혜롭고 전능하신 아버지에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여기는 이 부분을 하찮게 생각하면서 서둘러 지나치기 쉽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는 방법은 모든 기도의 기초가 된다 -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는 사랑하는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그들의 아버지로서 하나님을 굳게 믿도록 이끌려고 했다. 에베소서 1~3장은 또한 우리를 그 같은 믿음으로 이끌려고 한다. 그런 믿음만이 우리의 삶에 완벽한 안정감을 가져다 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배와 같을 것이다 - 바람과 환경의 파도와 악마의 세력의 공격에 의해 출렁일 것이다.

많은 신도들은 매우 불안하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데리고 가실지, 지상의 여정을 반쯤 건너가신 후에 "너에게 질렸다"고 말하며 그들을 쫓아낼지 끊임없이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즉 어쩌면 기독교의 일을 위해 약간의 여분의 돈을 주거나, 금식하고 기도하는 등의 어떤 일을 하려고 한다 -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다음 예화는 아마도 이 상태를 더 명확하게 설명할 것이다.

당신은 세 명의 아이가 있는데(10살에서 6살 사이의), 고아원에서 8살짜리 소년을 입양했다고 가정해보자. 당신의 세 자녀는 당신의 집에서 완벽하게 자유를 느끼며, 밤에는 푹 잘 것이고, 당신의 사랑 안에서 항상 완벽하게 안심할 것이다. 하지만 당신 집에 새로 들어온 이 소년은 항상 불안감을 느낄 것이다. 그는 항상 자신이 다른 아이들과 같은 방식으로 받아들여지는지 궁금해 할 것이다. 그는 밤에 잠을 푹 자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안심시켜도 그 아이는 자신이 당신의 다른 세 자녀와 동등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에 대해 여전히 의심을 품을 것이다. 어느 날 실수로 우유를 엎질렀을 때, 그는 그것 때문에 집 밖으로 쫓겨날까 봐 걱정할 수도 있다. 그 아이는 당신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그의 행동에 달려 있다고 느낄 것이다. 그래서 그 아이는 당신의 인정을 받기 위해 평생을 바칠 것이다.

이것은 대부분의 신자들이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보여주는 그림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받아들여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 그들이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확신하지 못하는 것 같다!

에베소서 1장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모든 것을 그의 발 아래에 두셨으며,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서 우리에게 주셨으므로, 모든 것 또한 우리의 발 아래에 있다고 우리에게 말한다!(엡1 :21 , 22 ).

그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는 이유다 - 사람에게든 사탄에게든.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예수님에게 정복되지 않은 악마는 우주 어디에도 없다.

악마에 사로잡힌 사람들과 마주쳤을 때, 나는 "이 악마는 갈보리에서 예수님이 정복한 것인가, 아닌가?" 라는 간단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짐으로써 의심과 두려움에 대한 유혹을 이겨냈다.

그것에 대한 대답은 "그래, 그는 정복당했다"이다, 매번 예외 없이. 그러면 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 악마에 대한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

이것은 우리의 능력이나 은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가 갈보리에서 하신 일과, 그리고 그리스도가 지금 우리의 머리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수장권 아래 있을 때, 사탄은 우리를 건드릴 수 없다.

에베소서 2장과 3장은 1장에서 언급된 내용을 더욱 증폭시킨다. 우리는 거기서 몇 구절을 간단히 볼 수 있다. 그러나 여러분은 여유롭게 그 장들 자체를 묵상할 수 있다.

에베소서 2장 1-8절 에서는, 우리가 우리의 죄로 인해 죽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살리시고 구원해 주셨다는 말을 듣는다.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래서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고 구원해 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은 그것을 믿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죽음에서 살리시는데 돕기 위해 당신 자신도 조금 일을 했다고 느끼는가?? 우습게 들릴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구원하는데 하나님을 조금이나마 도왔다고 느끼는 신자들이 많이 있다!! 그런 신자들은 자신이 죄 안에서 죽었다고 느끼지 않고, 아마 죄로 병들었을 뿐이라고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병자는 어쩌면 뭔가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당신은 아픈가 아니면 죽었는가?

에베소서 2장을 주의 깊게 읽으면 답이 나온다. 당신은 죽었다, 완전히 생기가 없고 죽었다! 그때 하나님이 당신을 살리셨다.

우리의 구원은:

 " 우리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

 " 우리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다 "

 " 아무도 자랑해서 는 안 된다 "( 8 ).

우리의 구원이 우리 자신의 행위에서 난 것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자랑할 만한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모두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에, 우리는 그에게 모든 영광을 드린다. 그래서 우리 중 누구도 서로 자랑할 수 없다. 교만한 사람은 모두 에베소서 2장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했다.

성경에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그 자신을 살렸다는 구절이 단 한 구절도 없다는 것을 아는가? 어디에나 그를 살리신 분은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우리까지 살려주신 건 하나님이었다.

비록 우리가 여러 해 동안 흠잡을 데 없는 삶을 이 땅에서 살더라도, 그 끝에서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 우리는 여전히 "주님, 나는 영원한 지옥에 갈 죄인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나를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의 값 없는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나는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달은 사람만이 구원의 교리를 제대로 이해한 것이다.

에베소서 1장 17절 , 18절 에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으로부터 계시를 받게 해달라고 기도했었다.

이 에베소서의 전반부 끝, 3장 16절에서, 바울은 그들이 성령으로부터 능력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한다.

이것이 우리의 가장 큰 두 가지 필요인 계시와 능력이다.

성령만이 우리에게 둘 다 줄 수 있다.

기독교인의 삶 전체가 성령에 의존하고 있다. 먼저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일을 밝히신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모든 것을 순종하면서, 우리의 소명에 걸 맞는 모습으로 걸을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이제 에베소서 3장에서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살펴보자. 18,19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곳에는 4차원이 존재하며, 그 자체가 인간의 지식을 넘어선다) - 오직 모든 성도들과 함께.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 스스로는 결코 파악할 수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다른 구성원들이 필요하다. 게다가, 우리는 우리만의 작은 그룹에 있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의 모든 구성원들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항상 모든 신자들에게, 심지어 우리에게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그리고 우리가 조금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도 열려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들 모두와 함께 일하지 못할 수도 있고, 이 지구상에서 그들 모두를 만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자녀 모두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은 많은 형제자매를 위한 여지를 가져야 한다 - 하나님께서 야만인과 교양인 자녀를 두셨듯이.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작가의 글뿐만 아니라 모든 경건한 사람들의 글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미리 경고하는데, 내 평생 이렇게 열린 마음을 가진 신자들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진정으로 영적으로 부유한 몇 안 되는 사람들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가난에 찌든 채, 교파적 태도를 취하며, 만약 그들이 하나님이 받아주신 모든 사람을 받아들일 만큼 겸손했다면, 그들의 것이 될 수 있었던 부를 놓치고 바리새인으로 살다가 죽는다.

그러면 우리는 에베소서 처음 세 장에 대해 신중히 묵상하고, 성령님께 우리가 방금 생각하던 이 영광스러운 진리에 대한 계시를 내려 달라고 부탁하자.

계시를 받고 나면, 순수함과 겸손과 사랑으로 가득 찬 이기는 삶을 살게 하는 그분의 능력을 주시도록 성령을 찾을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 말에서 모든 불건전한 말들을 없애고, 우리의 마음에서 모든 분노와 모든 억울함을 없앨 수 있을 것이다(엡4 : 29 ,31).

그러면 아내들은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남편에게 복종할 수 있게 되고, 남편들은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한 것처럼 아내를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다(엡5 :22 , 25 ).

그러면 우리는 언제나 사탄을 이길 수 있을 것이다(엡6 :11-13 ).

그리고 나서 우리는 "하나님을 본 받는 자가 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될 것이다(엡5 :1 ).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해 훨씬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있기를(엡 3:20 , 21 ).

장 3
기독교인의 삶을 강하게 움켜잡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 손에 다섯 손가락을 주셨다. 이것들로 우리는 물건을 단단히 붙잡을 수 있다. 두 손가락으로 유리잔을 잡을 수는 있지만, 다섯 손가락으로 잔을 잡는 만큼 꽉 움켜잡지는 못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섯 가지 선물을 주셨는데, 이것을 통하여 우리가 기독교인의 삶을 강하게 움켜잡을 수 있게 해주셨다. 타락하는 일이 일어나는 곳은, 신도들이 이 다섯 가지 영역 중 하나 이상에 대하여 움켜잡는 것이 느슨해졌기 때문이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더 이상 타락하지 않고, 진보할 것을 결정하자 - 하나님을 알고, 그분과 교제하고 동료 신자들과 교제하며, 이번 해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그분께 더 많이 봉사할 수 있도록 말이다.

(1) 그리스도의 피

우리의 과거의 죄에 대한 용서는 우리의 첫 번째, 그리고 우리의 끊임없는 필요다. 우리의 죄에 대한 책임은 우리의 죄에 대한 완전한 형벌의 대가를 지불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이 제거할 수 없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9:22 )고 했다.

그리스도가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피를 흘렸을 때, 그것은 누구든지 저지른 모든 죄의 사면을 샀다. 하지만 그 사면을 우리가 받아야만 우리의 것이 된다.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한 용서를 받는다, 우리가 우리의 죄에서 진정으로 돌아서서(회개),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리스도가 베푸는 용서를 받는다면 말이다.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롬5 :9 ). 이것은 단지 용서받는 것 이상의 것이다. 마치 우리가 평생 죄를 짓지 않았던 것처럼, 의롭다고 선포되고 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히8:12 )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마치 우리가 죄를 지은 적이 없는 것처럼 우리를 바라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의롭게 됨의 뜻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이다. 많은 신자들은 지난 삶에 관한 끊임없는 비난 속에 살고 있다, 사탄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그들을 의롭게 하셨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숨겼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 벧전1:18 ). 그것은 죄의 노예시장에서 우리를 사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가 갈보리에서 흘린 피는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요구를 이루기 위해 지불한 몸값으로, 우리가 더 이상 노예가 아니라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하였다. 우리는 자유로워지기 위해 태어난다. 우리는 더 이상 사탄이나 인간에게 노예가 될 필요가 없다, 비난이나 죄책감, 두려움이나 죄에 대해서도 말이다.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우리도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다(엡2 :13 ). 하나님은 어떤 사람도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서 산다. 그분의 앞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은 피를 통해서이다 - 우리 삶이 끝날 때까지. 우리가 아무리 성자가 되더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은 항상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일 것이다. 많은 신자들은 일단 의식적인 죄에 대한 승리를 얻고 나면, 이것을 잊어버리고 바리새인으로 끝나는 경향이 있다.

갈보리의 십자가에 흘린 피를 통해,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었다( 골1:20 ). 하나님은 이제 우리에게 적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 마음속에 확고히 자리잡아야 할 사실이다.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끊임없이 불만스러워하시고 늘 눈살을 찌푸리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것은 사탄의 거짓말인데, 신자들을 비난하고 그들의 영적 성장을 방해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친구가 되었다. 우리가 이것을 믿지 않는 한, 영적인 진보를 결코 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피는 또한 우리가 빛 속에서 걸을 때 모든 죄로부터 우리를 끊임없이 깨끗하게 한다( 요일1:7 ) 빛 속에서 걷는 것은 모든 의식적인 죄에 대한 승리 속에서 걷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의식적인 죄악에 대한 승리 속에서 살아도, 우리 모두에게 아직 무의식적인 죄악은 얼마든지 있다. 그래서 요한은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다"(8절)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죄를 짓는 것은, 육신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회심하기 전과 후 모두 여러 해 동안 의식적인 이기주의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고 계셨다. 그러나 그는 어느 때라도 이기적으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단 한 번이라도 무의식적으로 죄를 지은 적이 없었다. 그에게는 죄가 전혀 없었다(요일3:5).

우리의 무의식적인 죄(처음에는 우리 전체 죄의 약 90%를 차지한다)는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끊임없이 깨끗해져, 우리가 아버지와 끊임없이, 그리고 끊기지 않는 교제를 가질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우리도 사탄과 그의 고발을 이긴다( 계12:11 ). 사탄은 우리를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과, 우리 자신에게 끊임없이 고발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용서받고, 의롭다 하심을 받고, 구원받고, 하나님께 가까이 와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해졌다고 고백("우리가 증거하는 말")함으로써 그의 고발을 이길 수 있다. 사탄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할 힘이 없다.

우리 모두는 무의식적으로 매일 죄를 짓고, 많은 신도들도 의식적으로 죄를 짓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 우리를 깨끗하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하다.

(2) 성령

우리가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승리한 크리스천의 삶을 살거나 하나님을 효과적으로 섬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죄의 용서와 성령은 모든 죄인들이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서자마자 하나님께서 주시는 두 가지 선물이다.

주님께 돌이켜 죄의 용서를 받은 사람은 성령을 받기 위해서 단 하루도 기다릴 필요가 없다.

기독교 초창기 시절에는 그랬다. 그 시절에는, 사람들이 회개하고 믿자마자, 물세례를 받고 나서 성령을 즉시 받았다. 그것은 그들이 처음 경험하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신자들이 물세례를 받기 전에 몇 년을 기다리고, 성령을 받기 전에 몇 년을 더 기다리는 것을 발견한다.

모든 신자들이 알아야 할 것은 성령을 받기 위해,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해 필요한 것은 - 즉 죄의 회개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외에 어떤 추가적인 자격요건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많고 많은 신자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지 못하는 것은 이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진리를 안다면, 그들은 더 이상 사탄에게 속지 않을 것이다.

성령을 받을 만큼 가치 있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은 죄의 용서를 받을 만큼 가치 있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일이다.

성령의 충만함은 먼저 우리 삶에 성령의 열매의 충만함을 가져다 줄 것이다 -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의 충만함( 갈5:23 ).

둘째로,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강력한 증인이 되고 그리스도의 지상의 몸의 효과적인 구성원이 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은 그리스도의 몸의 효과적인 구성원이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건이다. 이것이 없으면, 우리의 삶이 아무리 거룩하더라도, 우리의 유용성은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는데 제한적일 것이다.

예수님은 30년 동안 순수하고 거룩한 삶을 살았지만, 여전히 성령님께 기름부음을 받아야만, 사역을 완수하는 데 필요한 초자연적 은사를 얻으실 수 있었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같은 방식으로 우리에게 무장을 해서, 우리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 사역을 수행할 수 있기를 원하신다.

이러한 초자연적인 은사를 경멸하거나 믿지 않는 사람들은 당연히 그것들을 갖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주님에 대한 봉사도 제한될 것이다.

우리는 매일 성령 충만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이것은 일생의 단 한번의 경험으로 우리의 필요를 영원히 해결해 주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의 말씀

성경의 첫 단락부터 바로, 우리는 성령이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운행하는 것을 본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품으심(창 1:3 )은 혼돈 속에서 아름다움과 질서를 가져왔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도 아름다움과 질서를 가져다 줄 수 있는 방법이다.

기록된 말씀의 지침이 없이 경험적으로 아는 성령의 능력은, 증기 기관차처럼 증기는 가득하지만 달릴 수 있는 어떤 레일이 없는 사람이 되게 했을 것이다. 반대로, 성령의 기름 부으심과 능력이 없이 기록된 말씀에 대한 지식은, 깔끔하게 놓여진 레일 위에 서 있지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증기가 부족한 기관차 같은 사람을 만들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수단이다. 말씀에 순종함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생각하는 방식과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 골1:9 - 의역)으로 생각하기 위해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지 않고서는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많은 이들이 인생의 여러 가지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생에서 직면할 수 있는 모든 문제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에는 답이 있다 - 우리가 그것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 알고 있다면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저 신자들은 실로 가난한 자들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내면의 영적 상태를 드러내기도 하다( 히4:12 ). 그것은 마치 우리 마음 속의 모든 것을 드러내는 정밀검사와 같다. 하나님의 말씀을 규칙적으로 묵상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참된 상태에 대해 영원히 무지하고 자기를 속이게 될 것이다.

영적 전투에 관한 한, 하나님의 말씀은 사탄에 대항하는 우리의 무기다. 예수님은 사탄에게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사탄을 이기셨다(마 4:1-10 ). 이것이 적군을 몰아내는 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 안에 거하면, 그는 사탄의 모든 계략을 이겨낼 수 있도록 강해진다(요일2:14).

우리자신에게 빛 비추임을 받고, 이기는 자가 되고, 영적 발전을 이루려면 우리는 매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을 들어야 한다.

(4) 십자가의 길

예수님은, 우리의 앞서가신 자(우리보다 앞서 같은 레이스를 달리신 분)로서, 우리가 아버지 앞으로 들어가 항상 그곳에 거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다. 이 길을 "새로운 살 길"(히10 :20 )이라고 한다.

바울은 그것을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다"( 고후4:10 )고 말한다. 그는 개인적인 증언으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더 이상 그가 사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자신이 갈보리 위에서 죽었기 때문에, 지금 그 안에 살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였다. 이것이 그의 놀라운 삶의 비밀이자 하나님께 쓰임 받음이 되었다.

예수님은 항상 십자가의 길, 즉 자아의 죽음의 길을 걸으셨다. 그는 결코 단 한 번도 자신을 기쁘게 한 적이 없다(롬 15:3 ).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 모든 죄의 본질이다.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 거룩함의 본질이다.

예수님은 언젠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스스로 죽기로 결심하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따라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눅9:23 ). 그것은 분명하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해지고 성령을 받았으며 말씀을 깊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날마다 스스로 죽지 않으면, 주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 그것은 확실하다.

예수님은 낡은 옷에 새 옷 조각을 붙여서 입으려는 사람들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그는 새것이 옷을 찢을 것이라고 말했다. 필요한 것은 낡은 옷을 버리고 새 옷을 사는 것이다. 또 다른 비유에서, 그는 우리가 열매가 좋기를 바란다면, 나무 자체를 좋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나쁜 열매를 단지 잘라내는 것은 소용이 없다.

이 모든 비유들은 기본적으로 한 가지 교훈을 가지고 있다: 옛 사람은 개선될 수 없다. 그는 하나님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혔다(롬 6:6 ). 이제 우리는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동의하고,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야 한다.

십자가의 길은 영적 진보의 길이다. 만약 당신이 분노, 짜증, 조급함, 정욕적 사고, 부정직, 질투, 악의, 억울함, 돈에 대한 사랑 등의 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면, 답은 여기에 있다: 당신은 십자가의 길을 피해 왔다.

죽은 사람은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맞서 싸우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평판에 신경 쓰지 않는다. 그는 복수를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누구를 미워할 수도,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다.

자아가 죽는다는 것은 이런 뜻이다.

십자가의 길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적 성장을 위해 마련하신 다른 모든 준비들과 마찬가지로(위에서 고려했던 것), 우리가 영적 발전을 위해서는 매일 필요한 것이다.

(5) 그리스도의 몸

새 언약에 따르면, 하나님은 비록 우리가 죄에 대한 승리를 거두며 살고 있더라도, 우리가 혼자 사는 외로운 기독교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의 영광을 함께 드러나는 제자들의 몸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몸과 회중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회중은 세속적인 클럽이나 다름없다. 그 클럽은 사람들이 서로를 아끼고 돕는 좋은 클럽일 수도 있다. 하지만 몸은 그 이상이다. 그리스도의 몸에서는, 각 구성원이 먼저 내적으로 머리와 연결되고, 그 다음에는 내적으로 그리고 불가분하게 다른 구성원과 연결된다. 이들 구성원은 그들의 하나됨이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된 것과 같이 하나로 성장해야 한다(요 17:21-23 ).

사탄은 그런 몸이 자신을 패배시키고, 그를 도망치게 하고, 자신의 왕국을 멸망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 땅 어디에도 그러한 몸을 건설하는 것을 반대한다. 예수님은 지옥의 문들이 교회를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셨다(마 16:18 ). 지옥의 문들은 외로운 개인인 기독교인을 이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교회를 상대로 이길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들 사이의 영적 하나됨에 대한 사탄의 공격이 순수성에 대한 공격보다 훨씬 강한 이유이다.

예수님의 어떤 두 제자가 마음과 영이 일체가 되어 굳게 결속되어 있는 곳에서는,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허락을 받을 것이다. 그런 두 제자에게서 그리스도의 몸의 표현이 발견되기 때문이다(마 18:18-20 ).

다른 신자들과의 교제를 통해, 우리 힘만으로 살았을 때보다 우리 육신의 이기심과 완전한 부패를 훨씬 더 빠르고 더 깊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거친 모서리는 육신을 가진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를 통해서만 매끄러워질 수 있다.

많은 신자들은 단지 교회와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이론만 늘어놓는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을 추구하는 사람들 속에 있어야 한다. 기독교에는 교회에 대한 이론이 충분히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이론이나 교리를 하나 더 추가할 필요가 없다. 우리 지역 교회의 상호 교제 안에서 몸의 실체를 증명하고, 따라서 세상과 사탄에게 이 땅에 그리스도의 몸이 실재함을 보여주자.

하나님의 선물 모두 받기

우리는 한 손가락으로 많은 것을 할 수 있고, 두 손가락으로 더 많이 할 수 있고, 세 손가락으로 여전히 더 많이 할 수 있고, 네 손가락으로 훨씬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혜로 우리를 다섯 손가락으로 창조하셨다, 이것은 목적이 있다. 우리가 손에 손가락들을 생각할 때, 우리는 손가락 두 개만으로 절대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기독교 생활에서 최소한의 것에 만족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선물을 이용해서 기독교인의 삶을 강하게 움켜잡자.

장 4
십자가에서의 3가지 교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시는 모든 일은 믿음을 통한 은혜에 의한 것이다(엡 2: 8). 은혜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나님의 손이다. 그 손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가져다 준다(엡 1:3 ). 믿음은 우리가 손을 위로 뻗어 하나님의 손에서 그 축복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이기는 자가 되게 하고 영적으로 부유하게 할 때, 그들이 패배하고 가난한 상태로 남아있는 데는 적어도 네 가지 이유가 있다.

1. 그들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에게 베푸신 축복에 대해 무지하다.

2. 비록 그들이 그 축복에 대해 알고 있을지라도, 그들은 하나님에게 그것들을 요청하지 않는다.

3. 비록 그들이 그것들을 요구할지라도, 믿지 않는 마음으로 요청한다.

4. 믿음으로 요청하지만, 이기적인 동기로 요청한다( 요8:32 ; 롬10:14 ; 약4:2 ; 요16:24 ; 마13:58 ; 약1:7 ; 4:3).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라는 말로 시작한다(창 1:1 ). 이것이 진정으로 신적인 일하심의 주된 특징이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에게서 기원을 두고 있다. 반면에 인간의 일은 - 비록 "기독교적인 일"이라고 불린다고 해도 - 인간의 마음 속에 그 기원이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하늘 아버지께서 심지 않으신 모든 식물은 뿌리째 뽑힐 것이다"(마 15:13 ). 식물(아이디어, 일, 사역 등) 그 자체가 좋은 식물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 하나님이 심지 않았다면, 언젠가는 뽑혀서 불에 태워질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에는 하나님에게서 유래하지 않은 많은 좋은 것들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흔드는 날에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 자신에 의해 파괴될 것이다. 흔들리지 않는 것, 즉 하나님에게서 유래된 것만이 그 날(히12 :26-28 )에 남아 있을 것이다.

인간의 육신에는 하나님을 위해 일을 하고 싶다는 강한 충동이 있다. 모든 거짓 종교는 이 욕구를 충족시킴으로 번성한다. 신전을 짓든 모스크를 짓든,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주든, 의를 행하든, 설교를 하든, 선행을 행하든,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했다고 느낄 때 인간은 크고 중요하다고 느끼게 된다.

그러나 진정한 기독교에서는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신"(엡 1:4 )분이다. 우리는 그를 사랑한다.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를 먼저 사랑했기 때문이다(요일 4:19 ). 에베소서에서는 바울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1장~3장)을 가장 먼저 기술한다. 그제야 그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기술한다(4장~6장).

복음주의 집단에서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구절이 매우 흔하게 쓰인다. 비록 신약성경이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골1:27 ; 엡3 :17 )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에 대해 훨씬 더 많이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고, 우리를 그리스도에 안에 두는 것은 하나님이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인간 중심의 신학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보다 우리가 하는 일에 훨씬 더 중점을 두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기독교인의 삶이 강해지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에 뿌리를 내리고 터가 굳어져야 한다.

"그리스도에 안에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기 위해, 책 안에 놓인 종이 한 장을 생각해보라. 책을 봄베이에 우편으로 보내면, 그 종이도 봄베이에게 간다.

마찬가지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었으므로, 그리스도가 갈보리의 언덕 위에서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우리도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에 못박혔다. 그를 장사 지냈을 때, 우리도 그 안에서 장사 되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을 때, 우리는 주님 안에서 부활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때에, 우리는 주님 안에서 승천했다. 그리고 그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주님 안에 있다.

우리가 이 하나님 말씀의 진실을 믿어야만 그것을 경험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경험할 수 없다. "당신의 믿음에 따라 당신에게 이루어진다"는 하나님의 법칙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통장에 수백만 루피를 넣어 주시고 그 위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서명한 백지 수표를 주시는 것과 같은 것이다(고후1:20).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금액을 쓰고 은행에 가서 우리의 유산을 주장하는 것뿐이다 - 예수님의 이름으로.

복음의 좋은 소식은 주로 하나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하신 일 때문에, 우리는 지금 당장 마음속에서 천국을 미리 맛 볼 수 있다.

천국은 완벽한 평화와 완벽한 기쁨의 장소다. 아무도 천국에서는 우울하거나 절망하거나 시큰둥하거나 원통해하지 않는다. 하늘에는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복음의 메시지는 우리가 지금 그 천국의 삶 그 자체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천국은 왜 이렇게 멋진 곳일까? 기본적으로 천국에서는 아무도 자신의 뜻대로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신 이유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리다". 그것이 우리의 진심 어린 기도일 때, 천국의 분위기는 우리 마음 구석구석까지 스며들 것이다.

그들은 남편이나 아내로서, 아버지나 어머니로서, 또는 교회의 형제나 자매로서,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행하기를 원할 것이다. 그런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짐이 아니라 기쁨과 즐거움이 될 것이다. 그들은 결코 절망하거나 우울하거나 두려운 마음이 들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결코 하나님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직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을 때(요 6:38 ), 그는 천국의 분위기를 이 땅에 가져오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땅에서의 그의 삶을 통해, 그는 그의 삶을 지배하는 천국의 분위기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예수님이 어디를 가셨든지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었다. 이것이 예수님이 지금 우리에게도 주고 싶어하는 삶이다.

그러나 이 삶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의 삶은 건물과 같다. 기초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것이고, 상부구조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하는 것이다. 기초가 튼튼하지 않으면 어떤 건물도 튼튼할 수 없다.

여기에 많은 기독교인들의 삶에 실패의 이유가 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위해 하신 일에 먼저 붙잡히지 않고,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 일을 하려고 나섰다. 최종 결과는 항상 우울함과 좌절감이다.

성경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셨다고 가르친다. 그는 우리와 자리를 바꾸었다. 이번 교환이 이뤄진 분야는 세 가지다. 우리가 이 교환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이 세 영역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될 수 있다.

(1)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해 죄악이 된 예수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5:21 ).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죄악이 되셨다. 그래서 주님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셨다. 이것이 칭의이며, 하나님의 거룩한 기준에 부합할 만큼 결코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할 만큼 겸손한 사람들에게 주는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이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은혜에 의한 것 뿐이며, 성경에 이르기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 11 :6 ).

그들의 선한 행위(육신을 죽음으로 몰아넣기 등)를 바탕으로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이 되려고 하는 사람은 이스라엘이 실패한 것과 마찬가지로 실패할 것이다( 롬9:31 , 32 ,10:3을 주의 깊게 읽어라). 믿음으로 의롭게 되려는 자만이 하나님의 의로움을 얻을 것이다(롬 9:30 ).

죄에 대한 승리를 갈망하는 많은 신자들은, 로마서 3장 23 절("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에서 로마서 6장 14 절("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로 멀리 뛰어넘어가, 로마서 3장 24절에서 5장 21절까지에 묘사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과정을 건너뛴다. 그 결과 그들은 바리새인이 된다. 그 바리새인의 두 가지 분명한 증거는 그들 자신의 '거룩함'에 대한 자부심이며, 그들이 타인을 경멸하는 것은 그들처럼 '거룩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에 대한 벌을 짊어졌을 뿐만 아니라, 그는 실제로 죄가 되었다. 우리는 불행히도 인간의 똥을 먹는 돼지처럼 죄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우리 주님에게 얼마나 끔찍한 경험이었는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희미하게나마, 예수님이 죄에 대해 가졌던 혐오감을 이해하기 위해, 두 가지 예를 생각해 보자.

인간의 똥이 가득 찬 정화조에 뛰어들어 영구히 동화되는 것이 무슨 뜻인지 먼저 생각해 보라. 아니면 자발적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신을 상처투성이로 덮는 끔찍한, 치료할 수 없는 병을 받는 것이 무슨 뜻인지 생각해 보라.

그런 예화들조차도 설명이 부족하고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깊이에 대한 희미한 그림만을 우리에게 줄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자발적으로 그가 싫어했던 것이 되시려고 선택하셨던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직접 볼 때 비로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이 어떤 대가를 치르셨는지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우리는 죄의 끔찍함을 볼 수 있어야 하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 우리의 죄임을 알 때, 그것을 미워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기본적으로, 사탄이 끊임없이 우리를 고발하려고 하는 근거는 두 가지가 있는데, (1) 우리 과거의 죄와 (2) 우리의 현재 상태이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자신감을 앗아간다. 그러나 하나님은 복음 안에서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해 주셨다.

우리 과거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하셨다"(롬5 :9 ).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 과거 기록으로부터 우리를 너무나 철저하게 깨끗하게 해주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지난 죄를 기억하지도 않겠다고 약속하신다( 히8:12 ). 하나님께서 우리의 지난 죄를 하나도 기억하지 않으신다면, 우리가 평생 죄를 짓지 않은 것처럼 우리를 바라보신다고 진실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악마는 당신이 이 진실을 믿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사탄의 거짓말을 믿는다면, 영원히 비난 속에 살게 될 것이며, 하나님 앞에 오는 대담함도 결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예수의 피로 정결해지는 것과 관련하여, "어린 양의 피와 당신의 증거의 말을 통하여" 사탄에게 저항한다면, 당신은 이기는 자가 될 수 있다(계12: 11) .

우리의 현재 상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두신다. 우리 육신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다. 우리가 백 년 동안 육신이 죽음에 처해 있어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 앞에 서기에 부적합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이 휘장 안에 그가 거하시는 성막의 지성소로 들어가는 것을 금지하신 것은 이 때문이다. 휘장은 인간이 하나님 의 얼굴 앞에 오는 것을 막는 육신을 상징했다(히10:20) .

하나님의 의는 이 땅에서 가장 거룩한 사람의 의보다 높으며, 하늘이 땅 위에 있는 것과 같다( 사55:8 , 9 ). 죄 없는 천사들도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고, 하나님 앞에서 얼굴을 가려야 한다( 사6:2 , 3 ). 오직 그리스도만이 아버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두시고, 우리가 이제 두려움 없이, 하나님 앞에 올 수 있게 하신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두시고, 그리스도 자신처럼 의로운 존재로 받아들이셔서, 우리를 의롭게 하신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었으므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완전히 받아들여짐으로 지금 기뻐할 수 있다. 율법의 행위에 기초하여 하나님 앞에서 받아들여짐을 가르치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그런 설교자에게 하나님의 저주가 임할 것이다(갈1:8) . 우리를 완전하게 의롭게 하신 후에야, 하나님은 우리를 성화로 인도하시는데, 그것은 죄를 이기는 승리의 삶이고 그의 성품에 참여하는 삶이다.

(2) 우리를 부요하게 하기 위해 가난해진 예수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8:9 ).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가난해졌고, 우리는 그 안에서 부요하게 될 수 있다.

이 구절에서 말하는 가난과 부는 영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러나 이 구절이 나타나는 문맥은 성령이 물질적 가난과 물질적 풍요 또한 말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부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많은 돈과 재산을 갖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킬 만큼 충분한 것과 다른 사람들을 돕고 축복할 수 있는 여분의 것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부자 란 요한계시록 3장 17절 에서 "부족한 것이 없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것이 하나님이 부유하신 방식이다. 하나님은 은이나 금, 은행 계좌, 심지어 지갑도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가난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언젠가 그는 심지어 약 1만 명에게 식사를 제공할 수 있었다 - 남자 5000명, 많은 여자들과 아이들(마 14:21 ). 부자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는 세금을 낼 충분한 돈이 있었다(마17:27) . 그는 어느 때라도 누구에게서도 돈을 빌릴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돈도 충분했다(요13 :29 ).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마 26:11 )고 말한 적이 있다. 거기서 그는 가난한 사람들과 자신을 대조했다. 또 다른 경우, 예수님이 부유한 젊은 관리에게 그의 모든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분명히 그 돈을 받을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자신을 포함시키지 않으셨다!! 그렇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부자였음이 분명하다. 그는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았다.

초기 사도들도 가난하지 않았다. 그들이 신자들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라"( 갈2:10 )고 했을 때, 그들은 신자들에게 그들을 기억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 그 사도들은 은과 금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행3:6). 하지만 그들은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사도들은 이전의 그들의 주인처럼 부자였다. 하나님은 또한 그렇게 우리가 부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가난해진 것을 본다. 가난한 사람은 신약성경에서 "남루한 옷"( 약2 :2)을 입은 사람으로 묘사된다. 우리가 인도에서 본 가장 가난한 거지는 보통 몸에 두른 적어도 찢어진 누더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 그런 것조차 가지지 않으셨다. 그는 알몸으로 옷을 벗기고 십자가에 못박혔다. 그는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우리를 위해 정말 가난해졌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가난하게 되셔서, 우리가 부요 하게하셨고, 다시 말해서, 우리 삶에서 "부족한 것이 없게"하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필요한 모든 것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빌4:19 ). 현명한 부모는 자녀에게 그들이 원하거나 요구하는 모든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모든 것을 준다. 하나님이 그렇듯이 말이다.

옛 언약은 율법을 지키는 자에게 이 땅의 부를 약속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새 언약 아래서, 우리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우리가 이 땅에서 생명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마6 :33 ; 벧후1:4). 성경은 재물이 속이고 불확실하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친다(마 13:22 ; 딤전6:17). 그래서 부를 갈망하거나 점점 더 많은 돈을 갖고 싶어 하는 것은 위험하다(딤전 6:10 ).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훨씬 더 영광스러운 것이다: 그는 항상 우리에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필요한 것"을 주실 것이다(빌4:19).

당신은 당신이 버는 월급으로 먹고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재정적인 경계를 긋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이 땅에서 필요한 것을 충분히 주지 않으실 리가 없다. 그러면 당신의 부족함은 하나님의 축복이 당신 삶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여러분은 게으르거나, 돈을 낭비하거나, 이기적인 방식으로 살아가거나,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에게 부자라면, 하나님도 또한 당신에게 부자가 될 것이다.

복음의 좋은 소식을 알려 주겠다: 그의 자녀들이 이 땅의 삶에서 끊임없는 재정적 부족을 안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아무리 생활비가 많이 들더라도, 그들의 삶에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사람은 언제나 땅 위의 필요가 충족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거짓말쟁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분명히 약속하셨기 때문이다(마 6 :33 ).

예수님은 가난해졌다 - 그래서 우리가 부자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결코 우리의 삶에서 부족함을 가지고 살 필요가 없다. 우리는 미래에 대해 두려울 필요가 없다 - 우리 자신이나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와 우리 가족 구성원에게 필요한 모든 세상의 필요를 구매하셨다.

불행히도, 돈을 사랑하는 설교자들(특히 지난 30여 년 동안)은 이 진실을 과장하고 오해하여 "번영-복음"을 전하는 구실로 변질시켰다. 즉 예수님이 우리를 부자로 만들려고 오셨다는 가르침이다. 그것은 거짓이고 진실의 잘못된 표현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 언약에서 부를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훨씬 더 좋은 것, 즉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을 약속하셨다.

그러니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져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미 당신을 위해 가난하게 되셨다. 더 이상 삶에서 끊임없는 재정적 부족을 안고 살아갈 필요는 없다. 필요한 것은 언제든지 모두 가질 수 있다. 복음 안에서 당신의 출생권(장자권)을 주장하라.

(3) 우리를 축복으로 만들기 위해 저주가 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 아브라함의 복이 우리에게 임하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갈 3:13 , 14 ).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저주가 되어, 우리가 아브라함의 축복, 즉 성령의 약속을 받을 수 있도록 하셨다.

법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한 저주는 신명기 28장 15-68절에 혼란, 불치병, 전염병 , 끊임없는 실패, 실명, 광기, 안식도 없고 마음의 평화도 없고, 타인에게 착취당하고, 적(사탄)에게 사로잡히는 아이들, 비참한 가난 등으로 묘사 된다.

복음의 좋은 소식은 예수님이 이미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셨기 때문에, 이 율법의 저주가 더 이상 우리를 건드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 자체가 좋은 소식일 것이다. 하지만 더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축복하신 복을 대신 받을 수 있다.

그 구절에서 우리가 약속 받은 축복은, 주로 물질적 번영과 많은 자녀에 대한 약속으로 구성된 율법의 축복( 신28:1-14 에 설명되어 있음)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하라. 그렇다, 우린 더 나은 걸 약속 받았다 - 아브라함의 축복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신 복은 창세기 12 장 2, 3 절에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내가 네게 복을 줄 것이다....오, 너는 복이 될지라...네 안에 있는 세상의 모든 가정은 복을 얻을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어,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사 주신 축복이다. 그는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우리가 이 땅에서 마주치는 모든 사람에게 복을 주기를 원하신다, 우리 평생 동안.

이 축복(이 구절은 우리에게 말해준다)은 성령을 받음으로써 우리에게 온다. 예수님은 성령을 우리 안에서 솟아나는 샘물로 우리를 축복하고(요 4:14 ), 우리를 통해 흘러나오는 강들로 다른 사람들에게 복을 주는 분(요 7:37-39 )으로 묘사하셨다.

가치 있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면서 성령을 받으려고 하면, 결코 성령을 받지 못할 것이다. 마술사 시몬이 성령의 능력을 받기 위해 베드로에게 돈을 바치는 것(행 8:18-23 )과 다를 바 없다. 베드로가 시몬에게 회개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당신도 회개해야 한다 - 당신의 선한 행위로 성령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께로 나와서 자신의 무가치함을 고백하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으라, 단지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 저주가 되었다는 이유 때문이지, 당신이 가치 있기 때문이 아니다.

과거에 당신 자신의 삶은 어떠했는가? 당신이 노력한 모든 것이 실패했다는 것을 발견했는가?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한 말들이 혼란과 혼돈만 가져온다는 것을 알아냈는가? 당신이 향하는 모든 곳에서 좌절과 우울증, 침울함과 상실감을 발견했는가?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복음의 희소식이 여기 있다. 그 모든 것들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울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를 받아, 당신이 결코 저주를 받지 못하게 하셨다. 당신은 그런 저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남에게 복이 될 수 있다.

오늘날 죄악과 실패 속에 사는 최악의 죄인이라도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다음과 같다:

"너희가 과거에는 저주가 되었었으나, 너희가 나중에는 이 되게 하리니"(슥8: 13 ).

아마도 당신은 과거에 만난 모든 사람들을 비난과 험담과 뒷담화로 오염시킴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저주가 되었을 것이다. 어딜 가나 영적인 전염병을 퍼트린 적이 있는가? 지금부터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당신은 이제 다른 사람들에게 영적 치유와 축복을 전파할 수 있다. 하나님은 당신을 통해 살아 있는 강물들이 흐르게 하시므로, 당신이 가는 곳마다, 성령님이 당신을 통해 일하셔서 다른 사람들이 치유되고 복을 받게 하신다( 겔47:8 , 9 ).

이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만나는 모든 가족들에게 축복의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리스도 안에서 출생권(장자권)을 주장해야 한다. 사탄은 오랫동안 당신한테서 이것을 빼앗았다. 예수님께서 이미 당신을 위해 저주가 되셨기 때문에, 앞으로 어떤 저주가 당신을 건드릴 수 없다고 믿어야 한다. 당신은 당신의 가족, 이웃, 교회에 축복이 될 것이다. 할렐루야!

우리는 사무엘하 6장에서 다윗 왕에 대해 읽었는데, 그가 하나님을 섬기며 바쁜 하루를 보낸 후, 그는 "가족을 축복하기 위해"(20절) 집으로 돌아왔다. 얼마나 아름다운 말씀인가! 그는 언약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올 때 언약궤 앞에서 하루 종일 춤을 추었는데(14절), 의심할 여지 없이 피곤했다. 그는 또한 사람들을 축복을 하느라 바빴다(18,19절). 그러나 그는 집에 있는 아내를 잊지 않았다. 그는 집에 가서 그녀도 축복했다 - 비록 그녀가 사악하고 잔소리가 심한 아내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20-22절).

모든 가장들이 본받아야 할 얼마나 훌륭한 본보기인가! 하루 종일 직장 상사의 가락에 맞춰 춤을 춰야 했더라도, 기분 나쁜 상태로 집에 들어와 나쁜 영을 집으로 가져오는 대신, 저녁에는 여전히 당신의 가족을 축복하기 위해 집에 돌아갈 수 있다.

예수님은 또한 십자가에서 사탄을 물리치시고, 그의 갑옷을 완전히 벗기셨기 때문에, 사탄 역시 우리 삶의 어느 부분에 대해서도 권리가 없다. 사탄은 이제 무기를 모두 잃어버린 무력한 도둑과 같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그에게 대항하는 모든 천상의 무기로 무장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탄에게 저항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나님의 약속은 사탄이 우리에게서 도망치는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흑마술, 마법, 또는 우리에게 나쁜 짓을 저지르려고 하는 어떤 악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며 살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남아 있는 한, 그 어떤 악도 더 이상 우리를 건드릴 수 없다. 여러 해 전에 이스라엘을 위해 "저주를 축복으로" 바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도 모든 저주를 축복으로 바꿀 수 있다(신 23:5 ).

당신의 부모님들이 살았던 방식 때문에, 혹은 그들이 우상을 숭배하거나 주술에 손을 대었기 때문에, 만약 당신의 가족들에게 저주가 있었다면, 당신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저주를 깨뜨리고, 당신의 삶에서 그것을 영원히 쫓아낼 수 있다. 그것은 오늘 이후로 당신을 지배할 수 없다. 예수님은 당신을 위해 저주가 되셨다. 그가 지금 당신에게 주는 축복을 받아라.

사람들이 우리를 저주할 때, 예수님은 대신에 그들을 축복하라고 하셨다( 눅6:28 ). 이것이 우리의 부르심이요, 우리에게 악한 자들에게도 복이 되는 것이다(벧전3:9 참조). 이것이 우리가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는 이유다 - 그래서 예수께서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행10 :38 )처럼, 우리 또한 어디에서나 선한 일을 하며 사람들을 축복할 수 있다. 앞으로 당신과 접촉하는 사람은 과거처럼 당신의 말에 오염되거나 상처받지 않을 것이다. 대신에, 그들은 복을 받고 풍족하게 복을 받을 것이다.

천국의 모든 복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것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그것을 마음속으로 믿어야 한다. 그럼 입으로 고백해야 한다. 성경은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그리고 건짐)에 이르느니라"(롬 10:10 )고 말한다.

이 모든 진실을 마음속으로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것을 입으로 사탄에게 말하고, 항상 이기는 자가 되어라. 그런 식으로 "당신이 증거하는 말에 의해", 당신은 사탄을 도망치게 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복이 될 것이다( 계12:11 ). 그렇다, 심지어 당신조차도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복이 될 수 있다 - 당신이 어떤 사람이든지, 당신이 한 일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 하신 일 때문이다.

바울은 로마에 가려고 했을 때, 그곳의 기독교인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롬15 :29 )고 말했다. 그는 로마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복이 넘치게 될 것이라고 절대적으로 확신했다.

예수님의 모든 제자는 그런 고백을 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축복이 되게 하실 것을 믿는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출생권을 지금까지 여러 해 동안 주장해 왔다, 내가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축복이 충만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것은 내가 어떤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저주가 되어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간다 - 예수님의 공로로 - 우리 자신의 공로가 아니다:

우리를 위해 죄가 되신 그의 이름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의가 되었다.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신 그의 이름으로, 우리는 영원히 부자다.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신 그의 이름으로, 우리는 영원히 다른 이들에게 축복이 될 수 있다.

장 5
처음부터 있었던 것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요일:1-3 ).

신약성경에 나오는 사도들의 편지들은, 모두 성령으로부터 영감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편지를 썼을 당시의 사도의 성숙도를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요한이 90세가 넘었을 때, 그리고 60년에 걸쳐 교회와 기독교의 발전을 주의 깊게 관찰한 후에, 그가 생을 마칠 무렵에 이 글을 썼기 때문에, 요한일서는 최대의 성숙함을 나타낸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요한은 무엇에 대해 말하는가?

여러 교회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의 부담은 무엇인가?

그의 편지 전체에서, 그는 방언의 은사, 치유, 영적인 은사, 심지어 전도에 대해 단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좋고 필요한 것이지만, 어느 것도 일차적인 것은 아니다.

요한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들, 즉 시작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했던 것들, 즉 생명교제에 대해 말한다.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가지신 것은 사랑의 신성한 생명이었다. 그리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에는 복되고 완벽한 사랑의 교제가 있었다. 이것이 요한의 주제와 부담이다. 이것은 그가 점점 더 많이 참여하고 싶어 하는 것이고, 모든 신자들이 점점 더 많이 참여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다 - 우리가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되어 아버지와 예수가 하나이신 것처럼 하나가 되는 것이다(요 17:3 , 21 ).

태초에는, 설교도, 노래책도, 신약 성경 형태의 교회도, 교리조차도 없었다. 이 모든 것들은 그 뒤에 나왔고, 잠시 동안 목적을 위해 도입되었다. 그러나 태초에는 생명과 교제만이 있었다.

이와 같이, 미래에는, 영원에서는, 다시 한번 설교나 노래책이나 치유는 없을 것이며, 오직 생명교제만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의 시작과 끝에 오직 생명과 교제만이 존재했고, 존재할 것이라는 것을 안다. 다른 모든 것들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중간 시기를 위한 것이다.

예를 들어, 방언을 말하는 것은, 의식을 교화시키는 경험이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한 천국에서 그 은사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거기서 하나님과의 의사소통에 아무런 제약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설교는 이 땅에서 매우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영원에는 그것이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심지어 죄에 대한 승리도 우리가 육신에 있고 유혹에 빠질 수 있는 기간 동안만 가능하다. 일단 천국에 도착하면, 더 이상 유혹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태초에는, 하나님이 가졌던 것은 "죄에 대한 승리"가 아니라, 완벽한 사랑의 신성한 생명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교회에서 필요한 가장 본질적인 두 가지가 생명과 교제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만 한다. 만약 우리가 이것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교회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는 하나님께 실패했다.

생명(Life)

우리의 가운데에서 주로 발견되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생명, 즉 항상 다른 사람을 섬기고 축복하고, 그들의 선을 추구하는 사랑의 생명이다. 하나님의 모든 행동은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이것은 신성한 생명의 주요한 특징들 중 하나이다.

하늘에서, 우리가 어떤 사람이 어떤 말을 하는 것을 듣거나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그들의 동기에 대해 아무런 의문도 마음속에 품지 않을 것이다. 그 동기는 오직 우리를 축복하기 위한 것일 것이다. 지금 이 땅에서 우리의 교제가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회심하지 않은 자 중에는,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다"(롬3 :13 ), 그리고 그들은 다른 사람을 쏘고 다치게 하는 말을 한다. 그러나 그런 독은 절대로 교회 안의 사람들 입에서 발견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에서, 모든 사람의 말은 오직 복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성령이 우리 마음에 천국의 분위기를 불어넣어 주시려고 오셨다. 옛 언약 아래서, 그들은 남은 인류의 삶에 비해 매우 의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율법만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우리를 인도하는 신성한 법 그 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고, 우리의 행동을 다스리는 신성한 생명 그 자체를 가지고 있다.

천국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기 때문에 천국이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 천국이다. 하나님이 없는 곳은 지옥이다. 여기 지구상에는 여전히 하나님의 임재가 도처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심지어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어떤 선함을 발견하는 이유다. 하지만 지옥에서는, 그 똑같은 사람들이 아주 달라질 것이다. 거기에서 그들의 이기심과 교만은 억제되지 않을 것이며, 진짜 그들의 모습 그대로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선함의(그들의 이기심과 교만을) 억제하는 영향력이 없게 되면 말이다.

하늘에는 축복된 교제도 있다. 그곳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군림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의 종이다. 남을 다스리고자 하는 루시퍼와 같은 사람들은 천국에서 결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의 태도는 "하늘에서 섬기는 것보다 지옥에서 다스리는 것이 낫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탄 정신의 본질이다, 즉 타인을 지배하려는 욕망이다.

그러므로 폭군처럼 아내를 다스리는 남편들, 남편에게 복종하지 않는 아내들이 자기 집에 지옥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자기 교회에서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형제들도 자기 교회에 지옥을 불러들이고, 바벨론을 건설한다.

천국은 완전히 다른 정신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곳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스럽게 그들을 인도하고 섬긴다. 그것이 우리가 참여해야 할 본성이다.

우리가 지금 충실하다면 우리는 천국에서 면류관을 약속 받았다. 그게 무슨 의미인가? 그때 우리가 사람들을 다스리게 될 것이라는 의미인가. 아니다, 전혀 아니다. 이곳 지구상에서 형제들을 섬기고 싶은 갈망이 있었지만, 여러 가지 한계 때문에 완벽하게 해내지 못했는데, 하늘에서 그 모든 한계가 사라진 것을 발견하여,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완벽하게 섬길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의 갈망이 성취될 것이다.

하늘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예수 자신이 될 것이며 그는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위대한 종이 될 것이다. 그의 정신은 영원히 섬김의 정신이 될 것이다.

이 교회는 하나님께서 땅 위에 세우셔서, 작은 천국의 표본이 되게 하시고, 다른 사람들이 맛보도록 하셨다. 비스킷 회사가 작은 비스킷 샘플을 보내서 맛을 보고 더 먹고 싶은지 알아보라고 부탁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우리를 땅으로 보내셔서,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나타내게 하셔서, 그들이 주님께 끌리게 하셨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에게서 어떤 맛을 느끼는가?

예수님이 이 땅을 밟으셨을 때, 사람들은 하늘의 삶의 작은 샘플을 보고 맛보았다. 그들은 그의 동정심, 타인에 대한 배려, 순수함과 사심 없는 사랑과 겸손함을 보았다. 천국은 그렇다. 하나님은 그와 같다 - 죄인과 인생에서 실패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이 가득하다.

동시에 예수님은 종교적 위선자들에게 아버지를 무자비한 분으로 나타내시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돈을 번 자들을 지옥으로 보내시는 분으로 나타내셨다. 천국에는 거룩한 척하면서, 남에게 자비심도 없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천국이 우리 교회로 내려오면, 우리 교회는 이런 삶을 보여줘야 한다. 예수(삼위일체의 제2위격)가 땅에 내려왔을 때, 그는 하나님의 생명을 나타낼 몸이 필요했다.

이제 성령(삼위일체의 제3위격)이 내려오셨으니, 그 역시 천국의 삶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몸이 필요하다. 예수님이 몸이 없이 땅 위에 계셨다면, 그의 이 땅의 삶에서 어떤 한계가 있었을지 생각해 보라. 그때는 아무도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이 몸을 가지고 계셔서 하나님께 감사 드린다.

이것이 우리가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매우 소중한 이유다 - 왜냐하면 몸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이 성령에 의해서 다른 사람에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런 생명을 보아야 한다. 그들은 단지 일련의 교리나 심지어 설교에 대한 많은 열정을 보아서는 안 된다. 아니, 그것보다 더 많은 걸 봐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교회로서 하나님을 실망시켰다.

비록 우리의 행동이 완벽하지 않을지라도, 우리의 동기는 완벽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완벽하게 섬기고 축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동기는 항상 하나님을 찬양하고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는 것이어야 한다.

교회에는 회심하지 않고 세속적일 때 가졌던 바람둥이 정신을 버리지 못한 자매들이 있다. 그들은 여전히 특정한 방식으로 눈썹을 치켜 올리고, 특정한 방식으로 머리를 흔든다 - 옛날 영화에서 여배우들을 보면서 얻은 습관이다. 그런 자매는 교회의 증인에게 방해가 된다. 이러한 습관은 당신이 회심하는 순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그것들을 미워해야만 사라질 것이고, 그것들로부터 당신의 구원을 이루어 낼 것이다.

우리를 순수하게 만드는 것은 이 생명이다. 만약 우리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오직 종교적일 것이다. 우리가 단지 종교적인지, 진정으로 영적인지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살펴보는 것이 좋다.

여기 우리 모두가 자신을 살펴볼 수 있는 한 분야가 있다:

결혼을 한 우리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기도를 정직하게 할 것인가: "주님, 육체적으로, 지적으로, 다른 방법으로도 나를 매력적으로 만들지 마십시오 - 내 결혼 상대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이 완전한 내면의 순수함을 갈망하는 모든 크리스천 남녀의 진심 어린 외침일 것이다.

결혼한 기독교 남녀가 여전히 이성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려고 할 때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 인가. 그런 형제자매가 우리 가운데 와서 앉으면, 모임에 올 때마다 불편함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교회로서의 우리의 소명이다 - 모든 모임에서 반신반의하고 타협적인 신자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들이 겉으로 죄를 짓지 않는 한, 우리는 아무도 내쫓지 않는다. 그러나 교회의 불은 그가 회개하거나 기분이 상해서 교회를 떠날 때까지 모든 종교적인 사기꾼들을 불편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 종교적인 사기꾼들은 교회의 많은 사람들을 속일 수 있다. 그러나 지도자들은 속아서는 안 된다.

교회의 예언적 사역은 삶에서 천국의 분위기를 갈망하지 않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 것이다. 모든 모임에서 우리 교회에 그런 사역이 있기를 기도하자.

세상에는 간음의 영이 있다. 특히 지난 50년동안, 고대 이집트를 범람시킨 개구리들처럼 (계16:13과 출8:3-6 비교 ) 부정한 영들이 전 세계에 넘쳐났다. 침실에 개구리, 신문에 개구리, 거리에 개구리, 사방에 개구리가 있다.

우리가 교회에 올 때 그곳에 개구리가 없기를 바란다. 하지만 사탄도 또한 그것들을 교회로 보낼 것이다. 그러나 이 부정한 영들을 쫓아내서, 교회의 영이 순결 가운데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다. 젊은이들과 심지어 나이든 기혼자들까지도 개구리의 이런 영을 지니고 있다. 이들 중 다수는 종교 활동에 매우 열성적이다. 그러나 그들은 불순하다.

우리는 모두 조심해야 한다. 너희 형제들이 여자나 자매에게 말할 때에, 거기에서 부정한 영(개구리)을 느끼면, 조심하여라. 전염병을 피하고 싶듯이 그녀를 피해라, 마침내 네 자신을 파멸시키지 않도록 하라.

또는 반대로, 만약 당신 자매들이 어떤 남자나 심지어 자신을 형제라고 부르는 사람 눈에서 불순함을 본다면(눈 속에 개구리가 있는 사람), 만약 당신이 순결하게 남길 원한다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를 피하라.

고대 이집트에서는, 고센 땅(이스라엘 자손이 살던 곳)에는 개구리가 없었다. 우리 교회는 불순함이 없고 천국의 분위기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

자신이 속한 교회에 천국의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척도가 당신이 교회에 쓰임 받는 척도를 결정한다. 그리고 천국의 영이 아닌 다른 영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는 행위는, 그 행위에서 당신은 사탄의 대리인으로서, 당신의 지역 교회에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이다.

교제(Fellowship)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은 교제로 이어질 것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영원히 서로 영광스러운 친교를 맺었다. 그들 사이에는 어느 때라도 경쟁이나 질투가 있었던 적이 없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분은 모두 인간에 대한 그들의 사역이 무엇인지를 영원부터 알고 있었다.

삼위일체 세분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결정한 것은, 아담이 넘어진 후가 아니다. 아니, 그들은 처음부터 끝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들의 마음 속에 영원부터 있었다. "어린양은 창세로부터 죽임 당했다"(계13 :8 ).

성령이 이 땅으로 오는 것도 영원부터 알려져 있었다. 아들과 성령이 아버지에게 복종할 것이라는 사실 또한 영원부터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사역은 그들 사이에 어떤 어려움도 일으키지 않았다.

영원히 아버지께 복종하게 되는 것이 결코 아들을 방해하지 않았다(고전15: 28).

많은 아내들은 심지어 365일 동안이라도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한다. 많은 형제들은 나이가 많고 현명한 형제들에게 복종하는 것이 큰 어려움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은 낮은 지위를 취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것은 교제의 결과 중 하나이다.

교제가 있는 곳에는, 경쟁도 질투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교제가 없는 곳에서는, 형제가 지도자가 되고 싶어 끊임없이 근질거릴 것이다. 어떤 이는 기꺼이 복종하지만, 지도자가 되는 날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루시퍼의 영이다.

성령의 사역을 생각해보자. 그의 사역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든 사역 중에서 가장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일에 대한 인정이나 공로조차 바라지 않고, 조용하고 보이지 않는 방법으로 격려하고 돕는다. 그는 사람들이 아버지와 예수님만을 찬양하고, 그림에서 완전히 제외되는 것에 꽤 만족한다. 얼마나 아름다운 사역인가.

그렇다면 그런 영으로 충만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우리가 그분처럼 되어서, 조용하고, 보이지 않고, 공로를 인정받지 못하고, 공로를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것에 만족하는 성령과 같은 사역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정말 이 성령으로 가득 차 있는가?

그러나 오늘날 "성령으로 충만하다"고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의 강단에서 은사를 행사함으로 자신을 위한 명성을 얻으려 하고, 자신을 홍보하고, 자신을 위해 돈을 추구한다. 이 모든 것은 성령의 일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성령을 위조한 어떤 다른 영의 소행이며, 그런 위조와 속임수를 폭로하는 것은 교회 안에서 우리의 의무다.

예수님과 성령의 삶이 하나님의 삶보다 조금이라도 부족하기 때문에 그들은 아버지께 복종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들의 삶은 모든 면에서 정확히 똑같다. 그들이 서로 복종하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각 구성원이 서로에게 복종하는 것이 기쁨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의 일부분이다.

하나님께서 자매에게 네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하시는 것은 자매의 생명이 남편의 생명보다 열등하기 때문일까. 아니다. 그건 그녀의 사역이 다르기 때문이다. 모든 자매들이 예수님과 성령의 이 영광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그러나 아아, 이 영광을 본 자매들이 거의 없다.

만일 자매가 교회의 머리로서 남자에게 복종하라는 소명을 알지 못했다면, 그녀가 그 교회에서 이세벨이 될 위험은 얼마든지 있다(계2 :20 ). 그리고 그때 여호와께서 두아디라에서 장로를 꾸짖으신 것과 같이, 그러한 교회의 장로들을 꾸짖으실 것이다 - 이세벨이 교회에서 번성하게 허락하는 것은, 언제나 장로들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다. 이세벨이 루시퍼의 영을 교회로 불러들인다, 그러면 장로들은 그 영이 나타나기 시작하자마자, 바로 그 영을 쫓아내기 위해 강해져야 한다. 그 여자 자신이 쫓겨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녀의 영은 하나님께서 임명한 교회의 지도력에 복종해야 한다. 우리는 독재자인 지도자가 필요한 게 아니라, 확고한 아버지가 필요하다.

만일 천국의 영이 교회에서 발견되려면, 우리는 지옥의 영이 나타날 때마다 단호히 저항해야 한다.

하나님의 진실한 생명이 발견되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형제자매들 사이에서도 항상 이런 교제의 질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교제의 질이 발견되지 않는 곳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진실한 생명이 거기에 없다고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다. 그 모든 형제자매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종교일 뿐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에서 발견되는 교제는 주님이 모든 교회에서 재현하고 싶어 하시는 것이다 .

예수님은 그 아버지와의 교제를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여겼다. 그는 겟세마네에서 이렇게 엄청난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인류를 구할 다른 방법이 없느냐고 외친 것은, 십자가 위에서 3시간 동안 그 교제가 깨질 것을 알았을 때였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얼마나 큰 비용을 치렀는지 완전히 깨닫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 중 아무도 예수님처럼 아버지와의 교제를 중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기도의 시간이 길어진 후에, 예수님이 우리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가장 소중한 소유(아버지와의 교제)마저 기꺼이 잃으셨음을 알게 된다. 거기서 우리는 우리를 향한 그의 사랑의 위대함을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육체적으로 기꺼이 고통 받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본다. 그러나 그 육체적 고통은 그가 아버지와의 교제가 우리의 죄 때문에 깨졌을 때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세 시간 동안 겪은 고통의 100만분의 1도 되지 않았다. 언젠가 우리가 그를 마주 볼 때, 우리는 그것이 우리를 향한 그의 사랑의 가장 위대한 표현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아버지와의 교제를 매우 중시했기 때문에 그를 죽음(영적인 죽음)에서 구해주시기를 아버지께 "큰 울음과 눈물로 애원했다". 예수님이 구원받기를 원했던 유일한 것은 아버지와의 교제의 단절이었다. 그는 다른 모든 것을 기꺼이 잃어버렸다. 다른 모든 것은 그에게 완전히 쓰레기였다.

아버지와의 교제에 비하면 모든 것을 쓰레기(그리고 인간의 배설물처럼)로 생각할 때, 비로소 사도 요한의 첫 편지에서 기록한 아버지와의 교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와의 그런 교제가 결과적으로 교회 안에서 서로 진정한 교제를 갖게 한다.

요한계시록 4장 10절 에서 천국의 또 다른 모습이 보인다. 거기서 우리는 장로들이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라고 읽었다. 천국에서는 예수님 말고는 아무도 왕관을 쓰지 못할 것이다. 나머지 우리 모두는 그곳에서 평범한 형제자매가 될 것이다. 천국에는 특별한 형제나 자매가 없다. 교회에서 특별한 형제자매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지옥의 분위기를 교회 안으로 가져온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어떤 것도 결코 자랑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그 앞에 던져 버릴 것이다. 하늘에서는, 아무도 그가 가진 모든 것에 대해(그가 받은 왕관에 대해서도) "이것은 나의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천국의 분위기가 우리 교회에 퍼지기 시작할 때, 우리 역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이것은 내 것이다"라고 다시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으로 간주될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전파될 수 있도록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구두쇠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는 모든 이기적인 사람은 사탄의 지배를 받는다.

이 땅에 있는 수백만 명의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에 교제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큰 슬픔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억울함을 가지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자기를 의롭게 여기는 바리새인들인데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만 선택하셨고 다른 사람들은 선택하지 않으셨다고 상상한다.

하나님은 이 두 그룹의 자녀들 때문에 괴로워하시는데, 그들은 모두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좌절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교회에서나 가장 소중한 형제자매는 천국의 분위기를 교회로 불러올 수 있고, 그 교회에서 형제 자매 간의 교제를 쌓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것이 반드시 지도자일 필요는 없다. 우리 모두는 이렇게 소중한 형제자매가 될 기회를 가지고 있다.

교회에 형제나 자매가 있다면, 그가 모임에 들어오거나 집에 들어올 때마다, 마치 방안에 불어오는 천국의 순풍과 같다고 생각해 보라. 그런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형제자매인가! 그가 가는 길에 들러서 단 5분만 당신을 찾아와도 기분이 상쾌해진다. 마치 5분 동안 천국이 집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다! 그는 당신에게 설교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성경에서 한 마디의 계시조차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순수했다. 그는 침울하거나 우울하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불평하지 않았다. 그런 형제는 모임에서 결코 먼저 말하지 않을 수도 있다(많은 사람들이 먼저 하고 싶은 욕망이 있듯이). 그는 아마도 모든 모임에서 15번째에 말을 할 것이고, 그것도 단 3분 동안만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 시간은 모임에서 3분간의 천국이 될 것이다!

세상에는 불평하는 자와 중얼거리는 자들이 가득한데, 그런 형제를 만나는 것은 너무 상쾌하다. 그것은 마치 덥고 끈적끈적한 날에 목욕을 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닮기 위해 갈망해야 할 형제자매의 모습이다. 예수님도 그랬고 우리도 그렇게 되기를 원하신다.

그렇게 하는 대신, 많은 형제 자매들이 돌아다니면서 가는 곳마다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그들은 돌아다니며 험담으로 형제 자매들을 서로 갈라놓는다. 이들은 루시퍼의 종과 대리인들이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함께 살았던 것과 똑같이 서로 함께 살도록 부르심 받았다. 그들은 영원 전부터 서로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교제하고 있었다. 우리 역시 서로 설교하라고 부름을 받지 않고, 교제하라는 부름을 받았다.

그것은 천국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이끄는 새로운 살 길이다. 나는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목적지(아버지와의 교제)에 결코 도착하지 못하는 방식에 너무 사로잡히는 것이 두렵다.

방갈로 가는 회의에 참석하러 왔다가, 방갈로 가는 길에 너무 감탄해서, 방갈로에 전혀 도착지 못한다고 생각해 보라. 그리고 만약 여러분 중 많은 사람이 방갈로 가는 중간쯤 되는 길에 앉아 그 길을 여행하는 대신, 그 길의 미덕을 서로 나누기 시작했다고 생각해 보라. 당신은 방갈로에 절대 도착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적절하게 설명한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육체를 통한 새로운 살 길, 즉 육신을 죽이고 예수님이 죽음을 감내하신 것 등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오직 우리를 휘장 안(히10 :20 )으로 인도하여 아버지와 만나고 교제하게 하게 하므로 그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예수님은 일상생활에서 십자가 그 자체에 사로잡힌 적이 없다. 그는 십자가를 즐기지 않았다. 우리 는 그가 십자가를 참으셨다고 들었다(히12:2) . 예수님의 기쁨은 "그 앞에 놓여있는" 것 - 즉 아버지와의 교제였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기쁨이다.

하나님만이 존재했던 태초에, 죽음에 처해질 육신이 없었고, 그래서 요한은 그의 편지에서 그것을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 그것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그의 주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요한은 처음부터 있었던 일, 즉 생명과 교제를 강조한다. 우리 교회에서도 항상 이것들을 강조하자.

장 6
그리스도와의 혼인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8: 32 ).

우리 삶의 모든 속박은 어떤 면에서 우리가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온다. 이것은 우리가 진리를 전혀 듣지 못했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그것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진리를 들었을 수도 있지만 잘못 이해했을 수도 있다. 모든 비난의 감정 또한 진리를 모르는 결과이다.

특히 많은 젊은이들이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을 주저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끝까지 견딜(순종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임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나서, 어쩌면 화를 내거나, 욕정에 사로잡혀, 어떤 식으로든 미끄러져 넘어지면, 다른 사람들에게 조롱을 당하고, 주님을 공개적으로 고백한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악마는 그들을 영원히 회심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완벽한 신자는 없다. 이 땅에서 예수님이 걸어가신 것처럼 항상 걷고 있다고 주장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요일2 :6). 그것은 확실히 우리의 목표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목표를 향해 계속 나아가면서 때때로 비틀거린다.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의 수석 장로인 야고보는 자신이 때때로 너무 비틀거렸다는 것을 인정했다("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 약 3:2 ).

하지만 우리가 미끄러지거나 비틀거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일어나서 계속 달려라.

화학 시험에서 한 번 떨어졌다고 해서, 아무도 학교를 그만두지 않는다. 그렇다. 그는 특별 수업에 참석해서 다음 시험에서 합격을 할 것이다.

우리가 실패했을 때, 솔직하게 하나님께 우리의 실패를 고백하고 슬퍼하자. 하나님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정직한 사람이 천국에 살게 하신다.

나의 삶에서, 요한복음 6장 37절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에 하신 예수님의 약속은 지금까지 36년동안 닻과 같았다. 그 이전 여러 해 동안, 나는 예수님이 나를 받아주셨을까, 안 받아주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십 대 시절에 주님께 백 번은 내 마음에 와 달라고 부탁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나는 항상 그가 실제로 내 마음에 들어왔는지 아닌지 궁금했다. 어느 날, 주님의 이 약속에 대한 단순한 믿음으로, 특별한 감정도 전혀 없이, 주님께 말했다, "주님, 나는 주님께서 나를 받아주셨다고 믿습니다." 그날 이후 나의 확신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약속은 우리가 처음 주님께 올 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땅에 사는 한 적용된다. 나는 내가 거듭났을 때 그랬던 것처럼, 나는 오늘 이 구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아마도 오늘 아침에 성경책을 읽을 시간이 없었을지 모른다.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실패했을 수도 있다. 다시 예수님께 올 필요가 있지 않은가? 그가 당신을 거절할 것 같은가? 결코 아니다. 주님께 오라. 주님은 당신을 받아들이실 뿐만 아니라, 당신이 지금까지 경험한 것보다 더 높은 영광의 경지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우리의 믿음의 척도에 따라" 받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믿음은 우리 모두를 같은 수준으로 만든다. 만약 여호와께서 우리가 우리의 지식이나 재산이나 선함의 척도에 따라 받는다고 하셨다면, 지적이고 부유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유리했을 것이다. 인간적인 면에서 선천적으로 좋은 사람이면 선천적으로 까다로운 기질을 가진 사람보다 유리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믿음을 그 방법으로 만드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모두를 같은 수준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믿음을 갖는 것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겠다. 강을 가로지르는 두 개의 다리를 생각해보자 - 하나는 약한 막대기로 만든 곧 무너질 듯한 나무 다리이고, 다른 하나는 강바닥에 놓여진 많은 기둥에 의해 지탱되는 튼튼한 콘크리트 다리이다. 콘크리트 다리 위를 자신 있게 걸을 수 있지만 흔들리는 나무다리를 밟기가 두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당신의 믿는 능력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것은 단지 당신이 걷고 있는 다리의 종류와 관련이 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믿음은 단단한 콘크리트 다리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지, 우리 자신의 믿는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다. 비록 우리가 약하다고 해도, 우리는 다리를 건너갈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리에 대한 믿음이 있고, 우리의 믿는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겪는 문제는 우리의 믿음이 종종 우리 자신의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 그리고 우리의 믿음은 흔들리는 나무 다리처럼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믿음은 우리 자신에 대한 강한 정신적 자신감을 북돋우고 나서 흔들리는 다리로 강을 건너려 하는 것과 맞먹을 것이다. 다리를 반쯤 건너면, 다리가 무너져서 우리는 물에 빠질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자신의 믿음에 대한 믿음을 가질 때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튼튼한 콘크리트 다리에 대한 믿음을 갖는 데 있어서 무엇이 어려운가. 강물의 물이 얼마나 격동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어떤 두려움 없이, 그 튼튼한 다리위로 강을 건널 수 있다.

아니면 다른 예를 생각해 보라. 철로 밑을 지나는 길을 걸을 때, 다리가 무너지고 기차가 넘어져 압사할까 봐 걱정해 본 적이 있는가? 그런 철교 밑을 지나가려면 반드시 큰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아니다, 매일 수백 명의 사람들이 그 밑을 걷는다. 그들의 믿음은 그 믿음 자체가 아니라, 그 다리의 강함 속에 있다.

믿음은 그것처럼 간단한 문제다.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 당신은 자신의 믿음을 보지 않는다 - 당신은 예수님을 본다.

악마가 이런저런 방법으로 해를 줄까 봐 두려워서 하나님을 모욕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므로 그들은 두려움이 그들을 마비시키므로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성취하지 못한다. 그들은 강물에 빠질까 두려워 저 콘크리트 다리 옆에 영원히 서 있는 남자와 비교될 수 있다. 그보다 더 큰 믿음이 없이도, 수천 명이 겁도 없이 다리를 건넌다. 그러나 그는 다리를 보지 않고, 자신의 믿음을 보고 있기 때문에, 그는 마비되었다. 그래서 그는 절대 반대편에 도달하지 못한다.

왜 믿음이 그렇게 중요하고 그리고 그렇게 간단한지 이제 알겠는가? 여호와께서 지금 당신에게 "네가 나를 믿겠느냐? 네가 믿으면, 내가 너를 모든 속박에서 해방시켜 줄 수 있다"라고 물으신다.

기독교인의 삶은 본질적으로 매우, 매우 단순하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을 오해해왔다. 우리는 처음에 예수님께 자유롭게 갈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구원받고 나면, 어쩐지 주님이 우리가 지금 주님께로 가기 전에 완전해지기를 기대하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우리를 안심시킨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그 것을 기억해라 - 어디를 가든지. 어디서든 직면할 수 있는 어려움이나 문제가 무엇이든지, 주님께 말씀 드려라. "주님, 절대로 나를 내쫓지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갑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당신을 위하여 행하실 기적을 보아라.

끝까지 견디지 못할까 봐, 오랫동안 주님께 진실한 헌신을 하기를 망설이던 사람들에게 나는 말한다: 주님께 주님의 제자가 되고 싶다고 말하라. 실패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패하면, 일어나서 계속 달려라. 시험에서 낙제하면, 그것을 두 번째 다시 해라. 만약 또 실패한다면, 세 번째 혹은 스무 번째, 혹은 만 번째까지도 그렇게 하라. 하지만 악마가 당신이 학교를 그만두게 하지 마라. 합격하기로 결심해라. 나는 당신이 합격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루 동안 490번 다른 사람을 용서하라고 가르치셨다( 마18:21 , 22 ; 눅17:4 참조). 하루에도 여러 번 주님은 우리를 용서해주시지 않겠는가? 예수님이 우리에게 매일 490번 남을 용서해 주라고 하시면서, 당신은 우리를 그 정도로 용서해 주시지 않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를 전적으로 믿도록 하자.

두 가지 유형의 속박

나사로가 죽음에서 부활한 이야기를 살펴보고 그리고 대부분의 신자들이 묶여있는 두 종류의 속박을 보자.

가장 먼저, 나사로는 죽음의 속박에 갇혀 있었다. 그는 죽은 지 오래되어서 몸에서 지독한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이것은 너무 심해서 그들은 무덤을 열고 싶지도 않았다(39절).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그 속박에서 해방시켜 주셨다.

둘째로,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온 후, 그는 무덤의 옷에 묶여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그 속박에서도 해방시켜 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나사로의 구원에서 세 단계를 본다:

첫 번째 단계: 죽어서 악취가 난다.

두 번째 단계: 살아났지만 무덤의 옷으로 묶여 있었다.

세 번째 단계: 완전한 자유

우리 모두는 오늘 이 세 단계 중 한 단계에 있다.

더 읽으면서, 주저하지 말고 그 돌을 굴려라.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참된 상태를 인정하라. 사람들에게 당신의 죄를 고백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라.

그들이 그 날 베다니에서 악취를 드러냈기 때문에, 우리는 다음 장에서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했다"(요 12: 3)를 읽었다.

그것은 주님이 우리 삶에서도 할 수 있는 놀라운 그림이다. 일이 너무 나빠서 덮어버리고 싶을 때, 주님은 일을 바꿀 수 있다. 그곳 베다니에서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당신의 삶에도 오래 걸리지 않아도 된다.

그 다음에 나사로는 다른 사람들을 초대해서 주님께서 자기를 위해 하신 일을 보게 할 수 있었다. 그 집에 있는 누구도 그 공을 차지하지 못했다. 주님께서 다 하셨다.

우리는 요한복음 11장 3절 에서 예수님이 나사로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동시에 그는 이틀을 더 머물렀다고 읽었다.

예수님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는가?

그는 나사로가 고군분투하는 것을 멈추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나사로가 새끼손가락조차 들지 못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완전한 죽음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방식이며 우리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 전반에 걸쳐, 하나님께서 사람을 대하시는 모든 것에서 이 원리를 발견한다.

세상은 "신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다른 많은 속담이 사실이 아닌 것처럼,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진실은 "하나님은 스스로 도울 수 없는 자를 도우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나사로가 완전히 무력하여 죽었을 때였다. 우리가 우리의 상황이 완전히 절망적이라고 느끼는 곳에 다다르면, 바로 그때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시려고 발을 들여놓으시는 것이다.

성경에 선포된 삶의 기준대로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끼는 곳에 왔는가?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구원에 매우 가까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직접 듣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가 실제로 가르치는 것을 오해한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의 주된 메시지가 가정에 TV를 두지 않는 것, 장신구를 착용하지 않는 것, 집 밖에서 일하지 않는 자매 등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은 완전히 잘못 알고 있다. 그런 것들은 내 생각으로는 매우 중요하지 않아서, 거룩한 삶을 위한 하나님의 기준 목록의 맨 아래에서 찾아볼 수조차 없다. 하나님의 기준은 예수님의 삶이다 - 그리고 그것은 내면의 문제이고 방금 언급된 어떤 것들과도 관련이 없다.

그런데 왜 당신의 삶은 완벽을 향해 나아가지 않는 건가? 답은: 당신이 여전히 고군분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당신이 고군분투하는 것을 멈추고 죽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세 번의 결혼 이야기

로마서 6, 7장에서 성령님은 나사로를 놓아 주신 것과 같은 방법으로 오늘 우리를 놓아주시는 것을 보여 주신다. 다음은 우리를 위한 세 가지 단계이다.

첫 번째 단계: 죽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두 번째 단계: 다시 태어났지만 율법의 무덤의 옷에 묶여 있다.

세 번째 단계: 완전한 자유

우리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 우리는 모두 결혼한 채 태어났다 - 성경이 말하는 "옛 사람"과 결혼했다!!

'

"옛 사람"은 "육신"과는 다르다.

육신은 많은 욕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들은 우리 집을 털러 오는 강도패거리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들은 우리 집 안(우리 마음)에 살지 않는다. 그것들은 밖에서 온다.

우리는 육신이 아니라 옛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옛 사람"은 끔찍한 남편이다. 그는 매일 우리를 학대하고 때린다. 그리고 또 강도패거리(육신 안의 욕망)가 집에 올 때마다, 옛 사람이 문을 열고 그들을 불러들여 우리를 때리고 추행한다. 여기 아내를 직접 때릴 뿐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들어와 추행할 수 있게 하는 남편이 있다.

어떤 여자가 그런 남자와 결혼하고 싶어하겠는가? 어떤 아내라도 그런 남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면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어떻게 그를 없앨 수 있을까? 그녀는 아마 그리스도와 결혼하고 싶어할 것이다. 그러나 율법은 그녀의 첫 번째 남편이 살아 있는 한, 그녀는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 없다고 말한다. "옛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 또한 그리스도와 결혼하고 싶다면, 그녀는"음녀가 될 것"이다(롬 7:3 ). 이것이 창녀(음녀) 바벨론이 세워진 방법이다 - 그들의 옛 남편인 "옛 사람"과 함께 사는 "신자들"을 통해 세워진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이집트의 이스라엘 자손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자신을 구원하는 데 무력하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만 외칠 수 있다. 이스라엘 자손은 이집트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그들을 해방시켜 주셨다. 하나님은 우리 역시 해방시켜 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옛 사람과의 결혼에서 구원해 주실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며, 그것은 그를 죽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일이다.

로마서 6장 6절 에서, 우리는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라고 읽었다.

이것이 우리가 세례에서 증거하는 것이다(롬6: 4).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우리의 죄만 자기 자신에게 뒤집어씌우신 것이 아니다. 그 십자가에 우리 "옛 사람"도 죽였다. 이제 그리스도와 결혼할 자유가 생겼다.

이것은 복음의 좋은 소식이다 - 하나님이 당신의 옛 사람을 죽이고 이제 당신을 그리스도와 결혼하도록 초대하셨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우리의 모든 문제가 이제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신자(사실 99% 이상)는 옛 사람과의 결혼에서 해방된 후, 그리스도와 결혼하는 상상을 하면서, "율법"과 결혼한다!!

로마서 7장의 첫 부분은 이렇게 다루고 있다.

율법은 선하고 도덕적으로 청렴한 남편이라는 점에서 옛 사람과 다르다. 이것이 우리가 그를 그리스도로 착각하는 이유다.

그러나 율법은 매우 까다로운 남편이다. 그는 모든 분야에서 완벽을 기대한다.

그는 아내가 집을 완전히 아주 깔끔하게 유지할 것을 요구한다. 책과 옷과 신발은 모두 제자리에 있어야 한다. 집안 어디에서나 티끌 한 점이라도 발견되어서는 안 된다. 음식은 제시간에 준비되어야 한다 - 아침 8.00시에 아침식사를 하고, 1분도 늦으면 안 된다. 점심은 오후 1.00시에 준비되어야 하고, 1시 01분에 준비되어서는 안 된다. 그 음식은 소금과 향신료의 완벽한 비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등.

동시에, 그는 당신의 일을 돕기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부엌이나 다른 곳에서 당신을 돕지 않을 것이다. 그가 집 안으로 들어올 때,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 완벽하게.

이 남편(율법)은 결코 당신을 때리거나 해치지 않는다. 당신은 그의 요구 중 어떤 것도 흠잡을 데가 없다. 그것들은 모두 옳기 때문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율법이다.

하지만 그런 남자와 결혼하고 싶은 여자는 얼마나 될까?

그런 남자와 결혼한 여자의 운명을 생각해 보라. 그녀는 그와 이혼할 수 없다. 여자는 두 남편을 둘 수 없기 때문에, 동시에 그리스도와 결혼할 수 없다.

그리고 "율법"'과 결혼한 나쁜 소식 중 가장 안 좋은 점은 "옛 사람"과는 달리, 이 남편은 완벽하게 건강하다는 것이다. 그는 만년 후에도 결코 죽지 않을 것 같다.

하나님은 "율법"을 죽일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절대적으로 완벽하기 때문이다. "옛 사람"은 사악했기 때문에 정당하게 살해될 수 있었다. 그러나 "율법"은 아니다, 그는 결코 잘못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없을까?

그렇다, 하나님을 찬양하라, 있다. 하나님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은 무슨 일을 하시는가?

그는 아내를 죽인다!!

율법은 죽을 수 없기 때문에, 로마서 7장 4절에, "당신(아내)은 율법에 대해 죽임을 당하였으니"고 말한다.

그것이 우리를 이 두 번째 결혼에서 해방시켜 주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놓였고, 그와 함께 죽었다.

만약 당신이 2000년 전에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존재할 수 있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면, 히브리서 7장 9 , 10 절을 보라. 거기에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레위가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다고 말씀하시는데, 레위는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칠 때 "아브라함 안"에 있었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성령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레위가 야곱의 아들이었으므로, 레위의 약간은 "야곱 안"에 있었고, 야곱이 이삭의 아들이었으므로, 레위의 약간도 "이삭 안"에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삭이 아브라함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레위의 작은 부분 역시 분명히 "아브라함 안"에 있었다!

같은 방법으로, 당신과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 속에 존재했다. 우리는 처음에 하나님의 마음 속에 있었고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그리스도 안에 두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자비를 베푸셨다. 그래서 예수가 몇 년 전에 십자가에서 죽었을 때, 우리는 예수와 함께 죽었다.

모든 결혼은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일 뿐이다. 그래서 일단 우리가 죽으면, 결혼은 무효가 되고 끝난다. 그러므로 완벽을 요구하면서도, 그것을 이루기 위해 어떤 식으로도 결코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던 이 남편으로부터 해방되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결혼에서 벗어나게 해주신 방법이 얼마나 멋진가!

로마서 7장 4절(KJV)은 우리가 이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리스도와 결혼"하기 위해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다고 말한다.

여호와께서 이제 우리를 부활시켜 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결혼하게 되었다 -, 마침내! 이 복음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메시지인가!!

아직도 옛 사람이나 율법과 결혼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생각해 보라.

이제 예수님의 기준은 어떠한가? 그 기준은 율법의 기준보다 더 낮은가? 그는 우리 집(우리 마음)이 불결하고 더러운 것을 허락하시는가? 아니, 사실 그의 기준이 훨씬 더 높다.

율법이 살인하지 말라고 하면, 예수님은 우리가 화도 내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율법이 간음하지 말라고 하면, 예수님은 우리 마음속에 욕망조차 품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이전 예화를 이용하면: 율법처럼, 예수님도 아침식사가 아침 8시에 정확히 제 시간에 준비되길 원하신다. 그러나 율법이 1분의 지연을 용납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은 1초의 지연도 용납하지 않으신다!!

이것은 우리가 프라이팬에서 불 속으로 뛰어들어, 이제 율법보다 훨씬 더 위대한 완벽주의자와 결혼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아니다. 예수님과 율법 사이에는 다른 세상이 있다. 예수님의 기준이 율법의 기준보다 높을지는 모르지만, 그는 우리의 모든 일을 도우려고 오신다. 그는 "모든 것을 함께 하자. 우리 함께 집을 청소하자. 옷과 신발을 함께 제자리에 놓자. 우리 함께 옷을 빨래하자".

그러나 만일 우리가 아침식사를 아침 8시까지 준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후 4시까지도 준비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실패한다면 어떨까? 그러면 주님은 어떻게 하실까? 그는 여전히 우리를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말할 것이다. '좋아.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내일은 오후 3시 45분까지 너와 내가 아침식사를 준비하도록 하자. 그러면 다음 날에도 더 나아질 수 있을 거야. 언젠가 우리는 아침 8시에 가까워질 거야. 완벽을 추구한다는 것은 이런 뜻이다.'

오늘 주께서는 우리 각자를 초대하시며,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당신은 옛 사람과 결혼하였거나 율법과 결혼하였기 때문에). 나의 멍에를 메어라(나와 결혼하여 모든 것을 함께 하자)"라고 말씀하신다(마 11:28-30 ).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좋은 소식의 가장 좋은 부분은 우리가 주님과 함께 일을 할 때, 주님은 99%의 일을 하시고 우리에게는 1%만 해달라고 요청하신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나온 몇 가지 예를 생각해 보라.

가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이 행하셨던 첫 번째 기적에서, 포도주가 다 떨어졌을 때, 예수님은 모든 결혼식 하객들에게 금식과 기도로 남은 시간을 보내자고 제안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많은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렇게 제안했을 것이다. 많은 신자들은 예수님이 사람들의 삶에서 기쁨을 영원히 앗아간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가 가나에서 한 일을 보라(요2).

우리 는 요한복음 2장 6절 에서 여섯 개의 물 항아리가 다해서 약 150갤런(거의 700L)의 물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을 읽었다. 현재 700리터는 약 3000잔과 같다. 그래서 그 혼인잔치에 300명 정도의 하객이 있었다고 해도, 이것은 예수가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10잔의 포도주를 추가로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확실히 모든 혼인잔치 하객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는 어제와 오늘 그리고 영원히 똑같다.

그러나 예수님이 어떻게 기적을 행하셨는지 주목하라. 그는 무(無)로부터 포도주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사람과 동업하여 행한 일이 아니라, 그 혼자 행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하인들에게 물 항아리에 물을 채워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포도주로 바꾸었다. 그는 하인들에게 쉬운 부분(1% 부분)을 시키고, 어려운 부분(99% 부분)을 스스로 하셨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이 5000명을 먹이려고 할 때, 그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빵을 만들 수 있었다(요6). 하지만 그렇게 하면 그는 혼자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어린 소년에게 가지고 있는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그에게 주라고 말했다. 그리고 주님은 군중을 먹이셨다. 소년은 1%를 했고 예수님은 99%를 했다.

그 소년은 집에 가서 어머니께 예수님과 그가 만 명을 먹였다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순서를 바꿔서 "그와 예수님"이 만 명을 먹였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신도들은 그런 식이다. 주님이 그들을 어디에 쓰실 때마다, 그들은그들이 주님을 위해 한 일들 - 즉 그들이 설교하고 간증한 결과로 그들이 주께 얻은 영혼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광고한다).

예수님이 맹인을 고쳐 주셨을 때(요9), 다시 맹인에게 쉬운 부분을 요청하셨다 - 실로암 못에 가서 얼굴을 씻으라. 예수님은 맹인의 눈을 뜨게 하는 어려운 부분을 하셨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셨을 때,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쉬운 부분을 다시 하라고 말했다 - 돌을 옮겨 놓으라. 그 후 예수님은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시는 어려운 일을 하셨다(요11).

주님은 밤새도록 고생하고 물고기를 잡지 못한 제자들에게 오셨을 때에, 주님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그들의 배에 물고기를 가득 채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식으로 하지 않았다. 그는 제자들에게 뭔가(쉬운 부분) 하라고 말했다 - 그물을 바다에 던져라. 그리고 나서 그는 그들의 그물을 물고기로 채웠다(요21).

행복한 결혼생활의 큰 비결은 "함께 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우리의 결혼에 있어서 확실한 사실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결혼하면, 그는 항상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모든 것을 함께 할 수 있다. 남편이 매일 집을 떠나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결혼 상대자들과 모든 것을 함께 할 수 없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라면 그런 문제는 없다. 우리는 항상 그와 함께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누가 그런 멋진 남편과 결혼하고 싶어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참된 기독교이고, 이것이 참된 복음이다.

그럼 옛 사람을 버릴 용의가 있는가? 당신 또한 율법에 따라 사는 것에 기꺼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예수님과 단둘이 결혼할 의향이 있는가?

독신으로 지낼 수는 없다.

만약 당신이 불신자라면 당신은 옛 사람과 결혼하고 언젠가는 영원히 악마와 결혼하게 될 것이다.

아니면 "신자"가 되더라도, 영적인 창녀로 살면서 - 옛 사람과 간음하고, 당신의 욕망에 굴복하고, 세상을 사랑하며 사는 것이다( 약4:4 참조).

아니면 율법과 결혼한 신자일 수도 있다. 이것에 대한 한 가지 증거는 옳고 그름에 대한 당신의 사소한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일 수 있다. 당신의 삶은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등"과 같은 다양한 규칙과 규정으로 구성될 수 있다( 골2:21 ). 그리고 당신은 다른 사람들을 비판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당신이 만든 이러한 규칙들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은 스스로 속박당하고 있고 다른 사람들도 그 속박에 끌어들인다.

옛 사람을 버리고 당신의 율법주의 종교를 없애라.

예수님과 결혼하여 모든 것을 함께 하라.

오늘 진리가 당신을 자유롭게 하라.

"율법이 그렇게 큰 영광으로 시작되었다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때에, 우리는 더 큰 영광을 기대하지 않겠는가?"(고후3:7,8).

장 7
하나님이 교회 안에서 바리새인을 노출시키는 방법

"예수께서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사람의 필요에 대한 그들의 무관심에 심히 탄식하사"( 막3:5 - TLB).

이 사건은 한 번은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을 때 손이 마른 사람을 보았다, 그리고 그때 회당 지도자들이 그 사람을 치료하면 예수님을 비판하려고 기다리는 것을 보셨을 때 일어났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그의 얼굴에 침을 뱉거나, 그를 '정신이상자', '사마리아인', '사탄' 등과 같은 이름으로 불러도 결코 화를 내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이 인간의 필요에 무관심하고 냉정할 때, 그리고 그들이 다른 사람들의 '마름병'을 치유 받는 것을 방해할 때 화를 내셨다.

우리는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엡 4:26 )라는 명령을 받았다. 죄를 짓지 않고 화를 낸다는 것은 예수님이 지상에 있을 때 화가 났던 것들에 대해 화를 낸다는 것이다. 다른 모든 분노는 죄악이다. 남들이 우리나 우리 가족을 대하는 태도에 결코 화를 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에서 바리새인들이 다른 사람들을 악한 방식으로 대하는 태도에 분노해야 한다.

"당신은 스스로를 도울 수 없는 사람들을 변호해야 한다. 그렇다, 가난하고, 무기력한 자들을 위하여 큰소리로 말하되, 그들이 정의를 얻는 것을 보라"(잠 31:8 , 9 ).

사람들이 다른 가난하고 무력한 사람들에 대해 냉정 할 때 화를 내는 것은 그리스도와 같은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당신이나 당신의 가족에게 무정하게 대할 때 화를 내는 것은 악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은 분노와 사탄의 분노를 분명하게 구별해야 한다.

바리새인들의 종교는 주로 회당에서 열리는 많은 모임에 가서, 기도하고 노래하고 목청껏 설교하며, 아마도 큰 박수를 치고 손을 흔드는 등 -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 위한 것들이다(마 6:5 , 6 ). 오늘날에도 그런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영성은 결코 우리의 노래나 대중 앞에서 기도하는 데시벨 수준에 의해서 측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헌신의 깊이와 우리 주변 사람들의 필요에 대한 우리의 관심의 강도로 측정된다.

신의 본성은 사랑이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더 많이 가질수록, 우리는 더 많은 참된 경건함을 갖게 된다. 우리 주위에는 어떤 식으로든 마른(약한) 사람이 많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관찰하시고 그들을 통해 우리를 시험하신다.

하나님은 경건한 사람들의 고난을 사용하여, 그들을 판단하는 사람들의 사악함을 드러내신다.

한번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맹인으로 태어난 사람을 보고, 예수님께 그 사람의 앞 못 보는 것이 자기 죄의 결과인지 부모의 죄의 결과인지 물었다. 예수께서는 둘 다 아니라고 대답하셨다(요9:2, 3 ). 제자들은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에서 병이란 그 사람이나 부모의 죄의 결과라는 영향을 받았었다. 예수님은 항상 다른 사람에게 그런 판단을 하는 사람에게 화를 내신다.

회당의 바리새인들은 마른 손을 가진 그 사람에 대해 비슷하게 느꼈을 것이다. 그들은 "거룩한" 사람들이고, 금식하고 기도하고 십일조를 했기 때문에, 그들 자신이 마른 손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 다른 남자는 아마 십일조를 정기적으로 내지 않았기 때문에 아팠을 것이다! 아니면 아마도 죄를 지은 것은 그의 부모였을지도 모른다고 느꼈을 것이다.

자녀들은 아버지의 죄로 벌을 받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부모의 죄 때문에 자녀들을 벌하신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매우 흔한 오해다. 많은 신도들 역시 이교도적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신념에 대한 성경의 뒷받침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20 :5 ; 신5:9 )라고 한다.

그렇다,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주의 깊게 읽으면, 주께서 자기를 미워하는 자들의 자녀만을 벌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 실수하고 실패하는 신실한 신자들의 자녀는 벌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의 율법주의자들에 의해 잘못 인용되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을 때리고 정죄하기 위해 그것을 망치로 사용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그런 말씀을 하신 지 1000년이 지났을 때, 예언자 에스겔을 통해 그 잘못된 해석을 바로잡아야 했다.

그분은 에스겔 18장 2절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왜 사람들은 이 속담을 사용하느냐: '자녀들은 아버지의 죄로 벌을 받는다?'".

하나님은 나아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그릇된 인상을 바로잡아 주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의인의 공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겔18:20 ).

그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율법주의자들은 이스라엘에서 계속 번창하고 사람들의 생각에 영향을 미쳤고, 500년 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그렇게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그 맹인이 부모의 죄 때문에 고통 받고 있냐고 물었다!!

바리새주의(율법주의)는 쉽게 죽지 않는다!! 우리는 남을 심판하고 그들의 불행을 가장 나쁘게 해석하려는 성향을 타고났다.

친구를 시험한 욥의 고난

욥의 이야기를 보자. 왜 하나님의 "분노"가 욥의 세 명의 설교자 친구,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에게 불타올랐을까(욥42 :7 ).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 말한 것이 옳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욥의 책을 다 읽으면, 그들이 욥에게 한 설교에서 하나님에 대해 말한 모든 것에 사실 틀린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이 정확했다.

한편, 욥이 그들에게 억울함과 자기 연민으로 대답한 것을 읽으면, 욥이 여러 가지 일로 하나님을 원망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는 가끔 믿음의 말을 했다. 그가 하나님에 대해 한 말은 대부분 완전히 틀리고 악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끝에서, 하나님은 욥이 하나님에 대해 옳은 말을 했고, 세 명의 설교자가 잘못된 말을 했다고 말한다.

이 설교자들이 어디가 잘못됐을까?

그들은 욥의 재산과 자녀, 건강의 손실은 욥의 삶에 어떤 은밀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함으로써 욥을 판단했기 때문에 잘못한 것이었다. 그들의 소위 말하는 "분별력"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다. 그들은 겉모습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부당하게 판단하였으므로; 하나님의 분노가 그들에게 불타서, 그들이 용서받으려면, 가서 욥(그들이 잘못한 사람)에게 그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구하셨다.

저 세 명의 설교자들이 했던 일을 해 본 적이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의 분노가 당신에게도 타오를 것이 확실하다. 가장 안전한 방법은 절대로 남을 판단하지 않는 것이다. 그 비밀스러운 것들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그가 판단할 수 있도록 놔두어라.

그리고 왜 하나님은 욥의 많은 악담을 무시하고 간과했을까?

우선 하나님은 욥의 마음이 곧은 것을 보셨고, 욥의 모진 말들 중 많은 것이 욥의 병과 슬픔으로 인한 압박의 결과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욥의 마음 속 진심이 아니었다. 그러나 욥의 말은 틀렸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침내 욥의 말을 의로운 근거에 입각하여 용서하고 무시할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욥은 자기의 어리석음을 깨닫자마자 즉시 "그의 말을 거두어들였다"(욥 42: 6)고 했다. 그리고 그것들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바로 지워져서, 지금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은 오직 그가 내뱉은 좋은 말뿐이었다.

이와 같이 한 사람의 과거 기록을 지워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와 칭의의 능력이다. 복음의 좋은 소식은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을 상대로 한 잘못된 말을 철회하고 되돌릴 수 있으며, 그 말들이 우리 삶의 기록에서 지워질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지금 그것을 지금 해야만 한다 - 우리가 죽기 전에. 우리가 더 똑바로 살수록, 더 빨리 그것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욥의 말을 기록한 바에 따르면, 지금 읽을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말뿐이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그를 의지할 것이다…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1:21; 2:10; 13:15; 19:25; 23:10; 40:4; 42:6).

이것들은 모두 선한 말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기록에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당신은 욥이 다른 말을 많이 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것들은 성경에 나오는 욥의 책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천국에 있는 욥의 삶에 대한 나의 기록에서 그것을 나에게 보여줘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당신은 거기에 쓰여져 있는, 욥이 말한 악한 말은 하나도 찾을 수 없다. 그것들은 모두 지워졌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와 씻어짐의 결과이다.

하나님은 얼마나 선하시며,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방법은 얼마나 경이로운가.

하나님을 대항하는 말을 한 적이 있는가? 그것들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지금 당장 용서를 구하라. 그분은 즉시 당신을 의롭게 할 것이다.

당신은 심지어 우발적이거나 압력을 받아서 사람들에게 나쁜 말을 한 적이 있는가? 즉시 관계된 사람들에게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라.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으면 의롭게 될 수 없다. 그들이 당신을 용서하든 말든 상관없다. 그들이 당신을 용서하지 않으면, 그들의 자비심의 부족은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무자비한 심판을 그들의 머리 위에 가져오게 될 것이다(약2: 13 ). 하지만 당신은 그들의 용서를 구함으로써 당신의 기록을 없앴을 것이다.

당신이 어떤 바리새인과 화해하려고 했는데, 그가 당신과 화해하고 싶지 않다면, 당신의 책임은 끝이다. 그가 당신을 용서하게 하려고 언제까지나 그의 문 앞에서 굽실거릴 필요는 없다. 아니, 그를 그냥 내버려두고, 하나님께서 그를 처리하도록 하라. 당신은 그를 잊어도 된다.

우리 모두는 욥이 겪은 고통을 통해 욥이 성화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이 그의 모든 고통의 주된 목적이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부산물도 있었다: 하나님은 의로운 욥의 고난을 이용하여 그를 찾아온 종교인의 악행을 드러내셨다.

그들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의로운 사람들을 비난하듯이, 진실을 알지 못한 채 욥을 고발했다. 사람들이 하는 대부분의 비난은 소문에 근거하고 있으며, 직접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하는 경우는 드물다.

예수님은 결코 소문(그가 들은 것)에 근거하여 그 누구도 판단하지 않으셨다 . 그러나 그는 훨씬 더 철저하셨다: 그는 어느 누구도 직접적 지식(그가 눈으로 본 것)을 근거로 판단하지 않았다( 사11:3 ). 이 문제에서, 예수님만큼 철저한 신자는 전 세계에 아주 아주 적다.

바리새인들은 그들을 판단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주의 깊게 관찰한다.

마가복음 3장 2절 에는, 그날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셨을 때, 그의 원수들이 "그를 가까이서 지켜보았다"고 적혀 있다. 바리새인들은 항상 그런 식이다 - 그들은 다른 신도들의 삶을 아주 아주 가까이서 관찰한다. 사람들 안에서 이런 저런 결점을 찾기 위해서 말이다.

이들은 자매들이 무엇을 입고 있는지 지켜보며, 그들의 성도가 살아가야 할 것으로 기대되는 "단순한 기준"에 부합하는지 지켜본다. 몸에 장식품이 있는지, 얼굴에 립스틱을 발랐는지 지켜본다. 그들은 다른 신도들이 그들의 집에 TV가 있는지, 아니면 다른 어떤 세상의 흔적이 있는지 보기 위해 지켜본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아이들에게서 결점을 찾아내기 위해 지켜본다. 그들은 아무 말을 하지 않을지라도, 마음속에 있는 의견을 가지고 판단한다. 그들은 신자들이 하는 말을 주의 깊게 듣는데, 어떤 잘못된 말에서 신자들을 잡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당신이 다른 신자에게 화가 나거나 질투심을 느낄수록, 당신은 그의 삶을 더 가까이서 지켜보게 될 것이고, 그에게서 어떤 잘못을 찾을 것이다. 그의 인생, 혹은 아내의 사리에, 또는 그의 집이나 가족에 어떤 사소한 잘못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당신 마음의 사악함을 드러내시는 데 사용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경건한 사람들의 약점과 실패를 이용하여 그들을 심판하는 사람들의 사악함을 폭로한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 사람들 중에는 맹인 속에 숨어있는 사냥꾼처럼 희생자들을 잡으려 잠복하는 사악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사람을 잡기 위해 함정을 설치했다. 그들의 집은 사악한 음모로 가득 차 있다……내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하는가(벌하지 아니하며 보복하지 아니 하겠느냐)?"(렘5:26,29 - TLB).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게 많은 질문을 퍼부어, 예수님을 체포할 수 있는 말을 하도록 함정에 빠뜨렸다"(눅11:54 - TLB). 또 다른 경우, "그들은 다른 종교 지도자들을 보내 그와 대화하고 그를 함정에 빠뜨리도록 시도했다"(막12 :13 ).

이러한 "남을 유심히 지켜보는" 바리새인들의 후손은 오늘날 기독에서 많이 발견된다. 우리가 "늑대들 가운데 양처럼", 그들의 가운데에서 움직일 때, "뱀처럼 지혜로워지자"(마 10:16 ).

1등급 바리새인이 되는 가장 빠른 방법 중 하나는 "다른 신자들을 가까이서 지켜보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바리새인이 되는 것을 피하고 싶다면, 다른 사람들을 가까이서 관찰하는 것을 완전히 끝내라. 왜냐하면 그것은 결코 좋은 동기, 그들을 돕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항상 그들을 판단할 목적으로 행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모임에서 다른 사람들이 언급하거나 또는 『HIDDEN TREASURES』에서 읽은 바리새주의 몇 가지 특징을 단지 우리의 삶에서 제거한다고 해서 바리새주의를 제거할 수는 없다. 아니. 목록은 끝이 없다. 성령이 근본적으로 우리를 다루도록 허용하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우리 삶에서 바리새주의 한 증상을 제거할 수 있으나, 여전히 그 질병 자체를 우리 안에 가지고 있게 된다.

당신은 다른 형제의 사역에서 전혀 들어보지 못한, 당신의 삶에서 성령이 바리새주의 어떤 면모를 당신에게 보여주는 체험을 (한 번이라도) 해본 적이 있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나는 당신이 새로운 살 길을 걷고 있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당신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의해 살고 있다 - 다른 사람에 의해 선과 악이 당신에게 드러나고 있다. 어떤 형제는 자기 자신에 빛 비추임을 받고(죄를 깨달음), 그것을 모임에서 나누면, 당신은 빛을 받는다. 의심의 여지 없이, 당신은 정직하여, 들었던 한 가지를 없애버린다. 그러나 당신은 선과 악에 대한 간접적인 지식으로 살고 있다 - 그리고 그것은 항상 죽음을 가져온다. 당신은 생명의 나무(성령)에 의해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부상자는 행인들에게 시험이었다.

자비는 바리새주의에 대한 매우 중요한 해독제다.

남에게 자비롭다는 것은 우리에게 해를 끼치거나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을 용서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어려움에 처한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선량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자비"가 의미하는 바를 설명했다( 눅10:25-42 - 37절의 "자비"라는 말의 사용 참조).

그곳에서 우리는 어떻게 영생을 얻는지에 대해 예수님께 질문한 율법교사의 이야기를 읽는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함으로써 된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율법교사는(오늘날의 많은 성경-학자처럼) "어떤 종류의 사람들에 대한 그의 사랑의 부족을 정당화하고 싶어서"(29절 - TLB), '이웃'라는 단어가 누구를 지칭하는지 예수님께 물었다. 그의 자기 합리화는 그를 바로 바리새인으로 나타내었고, 예수님은 그의 물음에 예화를 들어 답했다.

비유에서, 우리는 길가에서 매맞은 사람을 못 본척하는 제사장(하나님 집의 장로)의 일면을 먼저 읽는다. 그는 그곳에서 사람의 필요를 보았고 그것에 무관심했다. 아마도 그는 그 남자가 자신의 삶에서 어떤 비밀스런 죄에 대해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고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아니면 밤늦게 아무 일행도 없이 그 길을 걸어온 그 남자에게 잘못이 있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는 욥에게 설교한 세 명의 설교자와 꼭 같았다. 사람들이 고통을 겪는 것을 볼 때, 그들을 돕는 대신에, 그들이 저질렀을 모든 종류의 잘못으로 고통 받는다고 우리는 생각하는데 얼마나 빠른가. 우리는 사람의 필요에 얼마나 무관심한가! 주님은 우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배고플 때, 너는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목이 마를 때, 너는 마실 것을 주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벌거벗었을 때, 너는 나를 입힌 적이 없었다. 내가 아플 때, 너는 나를 방문하지 않았다. 너는 단지 나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나에게 설교를 했을 뿐, 도움이 필요할 때 결코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그 제사장은 고통 받는 인간을 돕는 것보다, 예루살렘에서 열리는 모임에 제시간에 도착하는 데 더 관심이 있었다. 모든 모임에 제시간에 온 많은 사람들이 마침내 지옥에 간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 뒤에, 레위인(하나님의 집에 있는 형제)도 지나갔고, 그 역시 하나님의 시험을 받았다. 그리고 그도 시험에 떨어졌다. 그는 또한 모임에 제시간에 도착하기를 원했고, 사람의 필요에 무관심했다.

이 두 종교인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하는 것을 듣기 위해 모임에 참석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미 모임에 가는 길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는 것과,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는 것을 거의 깨닫지 못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노래와 기도, 종교가 모두 쓸모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지 못했다, 그들은 도중에 마주친 가난한 사람의 고통에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경건한 사람들의 고통을 사용하시는데, 그들이 고통 받는 것을 보고 사람들의 마음을 시험하기 위해서다.

우리 중 누구도 이 두 종교인에게 돌을 던질 수 없다. 왜냐하면 어느 때인가 우리 모두는 그들처럼 행동해 왔기 때문이다. 예화에 나오는 레위인과 제사장에게서 우리의 모습을 본다면, 회개하고, 앞으로 근본적으로 달라지기를 구하자.

제사장과 레위인과 같이, 하나님을 대표하기 위해서, 우리도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세우신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를 제대로 대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회개해야 한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 매맞은 사람을 도우시려고 사용한 사람은 멸시받는 사마리아인이었다(다른 교파에 속하는 형제,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순수한 교리를 가지고 있지 않은 형제).

그 사마리아인은 지도자나 설교자가 아니었다. 그는 그저 다른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풀며, 어려운 사람들을 도울 기회를 찾는 조용한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아무도 그가 한일을 알지 못했다. 그는 그 매맞은 사람을 판단하지 않았다. 그는 그 재앙이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자비로운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을 부인하고 어려움에 처한 형제를 돕기 위해 시간과 돈을 썼다.

육신을 통한 새롭고 살아 있는 길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있다: 육신에 나타난 그리스도는 육신에 나타난사랑이다. 그것은 육신에 나타난 자비다. 그것은 육신에 나타난 선함이다.

탕자의 실패가 형을 시험했다.

탕자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형제의 필요에 완전히 무관심한 형의 또 다른 예를 본다( 눅15:11-32 ). 그가 하는 일이라곤 타락한 동생을 판단하는 것뿐이다.

만약 당신이 교회의 지도자인데, 당신의 교제권 안에 있는 형제가 타락하거나 떨어져 나갔다면, 당신은 왜 그가 넘어지는 것을 알지 못할 만큼 무감각했는지 스스로에게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그가 실제로 떨어져 나갈 때까지 말이다. 당신은 왜 교회 안의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난 후에야 그의 타락을 발견했는가? 어떻게 진작 그에게 경고하지 않았는가? 무감각하고 냉혹한 마음을 먼저 회개해야 할 사람은 바로 당신이다. 그리고 당신의 불감증인 이유는 당신이 자신의 이익과 가족의 이익, 당신 교회의 다른 사람들과 다른 어르신들이 당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좋은 의견들에 대부분의 시간을 몰두하고 있기 때문일 수 있다. 그 결과 양떼의 필요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그 형제가 떨어져 나가서 돼지 수준에 이르렀을 때, 그때 당신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럴 줄 알았다. 나는 그가 교회를 떠날 때, 그것이 그에게 좋지 않게 될 것이고, 결국 돼지들과 함께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라"고 말했다. 당신은 그 타락한 동생이 끔찍한 상태에 있다는 사실과, 당신 자신이 옳다는 것이 증명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고소해하고 있다!!

우리의 육신에는 우리가 깨닫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바리새주의가 있다. 우리는 대부분,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것보다 옳게 증명되는 것에 훨씬 더 관심이 있다. 예수님은 옳다는 것을 증명 받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적이 결코 없다. 그는 길을 잃은 사람들을 찾고 구하러 왔다. 우리가 얼마나 그와 다른지 알겠는가?

돼지들 가운데서 형제를 보는 것을 기뻐할 때, 악마 같은 네 영혼(하나님 아버지의 마음과는 크게 다른)이 보이는가? 아버지는 아들이 돼지들 사이에 있을 때 기뻐하지 않았다. 그는 울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타락한 자들에게 느끼는 감정이다. 그리고 교회에 있는 모든 진정한 아버지는 그렇게 슬퍼할 것이다. 그러나 바울 시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교회에는 수많은 교사가 있지만, 아버지 수는 많지 않다( 고전4:15 ).

하나님이 형제의 타락을 이용해 당신 마음의 악한 상태를 드러내시는 것을 당신은 거의 깨닫지 못한다. 당신의 형제가 타락할 때 하나님께서 시험하시는 사람은 바로 당신이다.

주님은 "보라, 내가 그런 목자들을 대적한다"고 말씀하신다( 겔34:10 ).

아내/남편의 영적, 육체적, 감정적 필요에 무감각한 남편/아내도 마찬가지다.

부자를 시험한 나사로의 상태

그 부자(가난한 거지 나사로가 그의 문 앞에 앉아있었다)는 왜 지옥에 갔을까? 왜냐하면 그는 사람의 필요에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그가 지옥에서 맞닥뜨린 불은 하나님의 진노의 불이었다. 하나님의 진노의 불은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에게 타올랐고, 예수께서 회당에 가셨을 때 그 곳에서 바리새인들에게 타올랐던 것과 같은 불이었다(눅16: 19-31 ).

그 부자는 나사로가 그토록 궁핍하고 무력한 생활을 한데는 틀림없이 그의 삶에 어떤 은밀한 죄악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불쌍한 나사로를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오직 하나님께서 자신을 충직하게 여기셨기 때문에 그 자신이 물질적인 부와 건강의 축복을 받았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는 나사로의 상태가 자신에게 시험이라는 것을 거의 깨닫지 못했다. 그는 어느 날 지옥에서 깨어날 때까지 계속 자신을 착각했다. 하나님의 사랑 없이 의식으로만 구성된 거짓 종교를 가지고, 성전과 회당에서 자신을 속인 주교들과 함께 지옥에 빠진 자신을 보았을 때, 그는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까? 그가 평생 경멸했던 사람, 나사로가 실제로 낙원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의 충격은 더욱 컸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한 것은 그 부자만이 아니었다. 오늘날 정확히 그렇게 생각하는 부유한 신자들이 많이 있다. 자기 돈, 건강, 많은 봉급 등은 모두 자기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베푸는 표시라고 생각하고, 고통 받고 있는 주변 사람들의 필요에 무관심하다. 그들은 하나님이 고통 받고 있는 그들 주위의 다른 경건한 신자들을 통해 그들을 시험하고 있다는 것을 거의 깨닫지 못한다.

종교적인 바리새인들이 영원에 이르게 되면 알게 될 놀라움은 아주, 아주 많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더 많이 이해할수록, 우리가 바리새인이 되는 위험은 더 커진다. 오늘날 이 나라에서 누군가 설교하고 있는 가장 순수하고 가장 성경적인 교리를 듣는 특권을 가진 사람들은, 다른 모든 교파의 바리새인보다 최고 바리새인이 될 가장 큰 위험에 처해 있다.

하나님은 경건한 사람들의 고통을 이용하여 그들의 고통에 무관심한 사람들의 악함을 드러내신다.

음행 중에 잡힌 여인, 그녀의 고발자들을 시험하기 위해 사용하신다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돌로 치려고 예수께 데려왔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여인의 죄를 이용해 그 바리새인들의 악한 마음을 폭로하셨다(요8 :1-12 ).

하나님은 넘어진 죄인들의 죄악까지도 그들을 고발하는 자들의 악함을 폭로하기 위해 사용하신다.

예수님이 우리의 마음에 끊임없이 말씀하시는 것, "판단하지 마라.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것을 듣지 않으면, 우리는 마침내 바리새인들의 무리들과 함께 끝나게 될 것이며, 예수님 앞에서 영원히 쫓겨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결코 죄인을 대적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는 오직 바리새인들만 대적하셨다.

장 8
믿음, 부서짐, 승리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엡6:12 ).

영적으로 살아 있는 모든 신자들은 악한 영적 세력과의 투쟁 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은 이 투쟁을 감지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적들이 무시하는 전장에 누워 있는 죽은 병사들과 같기 때문이다. 혈과 육에 몸부림치는 자들도 사탄에게 무시당하는데, 사탄은 그들을 인간들과 다투고 싸우도록 내버려두기 때문이다. 오직 주님을 위하여 온 마음을 다하고 불타는 자들만이, 사탄에게 위협이 되고, 주님의 전투에서 싸울 수 있다.

에베소서 6장 18 , 19절 은 모든 신자들을 위해 항상 깨어, 인내심을 갖고 기도할 것을 촉구한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전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들은 적들의 분노의 주요 표적이기 때문이다.

구약성서의 예

역대하 20장에서,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사탄에 대항하여 이 전쟁을 치를 수 있는지 그림을 본다. 거기에서 우리는 여호사밧 왕을 대항하는 큰 무리에 대해 읽었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그렇게 많은 적들과 맞닥뜨렸을 때 옳은 일을 하였다. 그는 금식과 기도로 온 유다 사람이 하나님을 찾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약함과 어리석음을 인정하면서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는 말하였다. "우리 하나님이여, 그들을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12절).

이것이 모든 효과적인 기도의 비결이다. 우리의 약함과 어리석음을 인정하고, 우리를 위해 전쟁에서 싸우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다.

약한 자를 선택하시는 하나님

예수님은 "선택 받은 백성(교회)"을 인간의 도움이나 자원이 없이, 강적에 맞서 싸워야 하는 가난하고 무력한 늙은 과부로 묘사하셨다(눅18:1-7). 그렇게 우리의 약점을 인식할 때 비로소 주님께 의지할 수 있다. 그래야 믿음을 발휘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인간적 자원에 기대는 자는 불모지가 된다고 저주하신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그 사람은 광야의 불모지처럼 될 것이다"( 렘17: 5).

많은 사람들이 죄에 의해 끊임없이 패배하고, 사탄에게 압도당한다, 오직 그들 스스로 강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든 사람과 모든 것에 대해 강한 의견을 가지고 있고, 찌르는 말을 하며, 남을 판단하는 데 민첩하다. 하나님은 그런 신자들을 혼자 내버려두고, 그들은 결코 이기는 자가 되지 못한다.

논쟁하고 분쟁하는 사람들은 확실히 약하고 힘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강하고 따라서 사탄의 쉬운 표적이 된다. 사탄은 항상 논쟁하는 사람들과의 싸움에서 이기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그는 에덴에서 이브와의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러므로 절대로 남편이나 아내나 다른 사람과 말다툼을 하지 말아라. 왜냐하면 당신은 결코 이길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기는 것은 언제나 악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복수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강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약한 과부는 재판장에게 간청할 필요가 있지만( 눅18: 2), 강한 사람은 그렇지 않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은행 계좌에 돈이 많기 때문에, 혹은 그들의 고용주가 매달 1일에 성실하게 급여를 줄 것을 믿기 때문에 강하다. 그들의 믿음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다. 그래서 그들은 불모지이다.

우리가 가진 자원이 바닥날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려고 힘써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을 때까지 즉, 그가 모든 힘을 다 잃을 때까지 기다리셨다가 도우러 오셨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가 같은 제로 지점에 도달하기를 몹시 기다리신다.

여호사밧은 자기가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한다고 고백하였는데, 이것은 좋은 고백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지혜가 부족함을 인정하는 모든 사람에게 지혜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지혜를 구해야 한다( 약1:5 , 6 ). 그리고 그것이 여호사밧이 한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무력함과 지혜의 부족만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한다는 표현으로 기도를 마무리했다. 그는 "오직 우리의 시선은 주님만 바라보나이다"라고 말했다. 즉, 그는 하나님께 "우리는 당신이 우리를 대신하여 일하기를 기대합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해내셨다 !!

신자의 3가지 범주

세상에는 '신자'의 세 가지 범주가 있다:

1.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들. 그러한 신자들은 기도를 거의 하지 않거나 전혀 하지 않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보통 절대 금식하거나 기도하지 않는다. 비록 그들이 그렇게 많은 말로 말하지는 않지만, 그들은 기도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이 모든 상황을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런 신자들은 결코 하나님을 위해 영원한 일을 할 수 없다.

2. 자신에 대한 신뢰가 없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없는 사람들. 그들은 힘도 지혜도 없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일하실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그런 신자들도 대개는 기도하지 않는다. 그들이 기도를 한다고 해도, 그들의 기도는 예외 없이 믿음이 없다. 그러한 신자도 하나님을 위해 영원한 일을 할 수는 없다.

3. 자신에게는 신뢰가 없지만,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들. 그들은 자신의 힘과 지혜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을 힘있게 도와주실 것과, 그들 안에서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일 하실 것을 믿는다. 그런 신자만이 진정으로 영적이며, 오직 그런 신자만이 하나님을 위해 영원한 일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위의 범주 2에 있는 사람들이 범주 1에 있는 사람들보다 하나님께 쓸모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좋다. 범주 2에 속한 사람들은 더 깨어진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불신앙은 그리스도와 같은 진정한 겸손함과 동시에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우리가 부서진 것처럼 보여도, 믿음이 없다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단지 우리의 무능함을 인정한다고 해서 우리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을 믿어야만 한다.

우리가 부패했고, 아무짝에도 쓸모 없고, 무능하고 어리석다고 고백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불신이다!! 우리가 그것을 계속 고백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쓸모 없는 상태로 남을 것이다. 그런 잘못된 겸손은 종종 분별없는 신자들에 의해 진실로 오인되곤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로부터 겸손함을 배우라고 하셨다(마 11:29 ). 그리고 예수님이 소용없고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고백하는 것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결코 없다.

진정한 겸손은 하나님 앞에 완전한 무(無)를 대신하여, 하나님께서 만능이 되시도록 하는 것이다. 이곳이 예수님이 사람으로서 택하신 자리이다. 이것이 또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그 비천한 곳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또 우리를 통해 위대한 일을 하시며, 사탄을 우리 발 밑에서 짓밟으실 것을 믿는다.

전쟁은 주님께 속한 것이다.

여호사밧이 기도를 마치자마자, 하나님은 즉시 그에게 회답을 보내셨다, "두려워하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15,17절).

오늘 하나님은 누구에게 비슷한 말을 하는가?

우리가 위에서 살펴보았던 범주 3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된다. 믿음으로 기도하고 믿음의 말을 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항상 너희를 위해 구원하시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여호와를 믿는 자는 결코 실망하거나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롬 9:33 ). 그러나 무력함만을 고백하는 자는 적에게 늘 수치를 당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단단한 땅을 갈아엎는 것(회개하고 깨지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추수 때에 농작물을 거두려면, 우리는 또한 거기에 씨앗(믿음의 말)을 뿌려야 한다. 씨를 뿌리지 않고 계속 단단한 땅만 파내는 사람은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사탄은 우리가 단단한 땅을 파헤치는 것을 아예 막거나, 아니면 우리 삶이 끝날 때까지 영원히 땅을 파게 하고 싶은 것이다!!! 어느 쪽이든, 그는 목적을 달성한다.

하나님께서 사탄을 우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실 것을 고백하자(롬16 :20 ). 사탄은 우리의 혀가 성질을 내거나 남을 욕하도록 하지 못한다. 그는 우리의 눈에 여자에 대한 욕망을 갖게 하지 못한다. 아니. 그의 자리는 우리 발 아래에 있다 - 항상!!

여호사밧은 여호와의 그 말씀을 듣자마자 여호와를 경배하였다. 다음날 아침 그는 "노래하는 자들과 거룩한 예복을 입은 주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을 군대의 선두에 배치하여 유다의 군사들을 전투로 이끌었다. 그리고 그들이 주님을 찬양하고 노래하기 시작하자마자, 여호와께서 그들의 원수들을 물리치셨다(21,22절).

거룩한 예복을 입고 주님을 찬양하는 것

전투에서 적을 도망치게 하는 것은 주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표현하는 찬양하는 영이다. 우리는 그들이 거룩한 예복을 입고 주를 찬양했다는 것을 구약성경 구절에서 더 많이 본다. 이것이 우리가 교회에서 필요로 하는 균형, 즉 찬양과 거룩함의 영이다. 기독교에서는 불행히도, 이 문제에 있어서 신자들이 양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한편으로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고 있지 않은 사람들, 큰 목소리와 많은 감정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을 발견한다. 그들은 모임에서 다른 방언으로 주님을 찬양한 다음 집으로 돌아가 모국어로 아내에게 소리친다!! 이것은 속임수의 극치다. 분별력이 없는 혼적인 사람에게, 그런 소음과 감정은 천국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분별력이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아무리 감정적으로 '방언'으로 노래하거나, 주님을 크게 찬양하더라도, "육에 속한 모든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롬 8:8 )는 것을 알 것이다.

다른 한 극단에서는, 자신을 성실하게 판단하고 경건하게 살려고 하지만, 평생 찬양의 영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된다. 그들은 항상 서로 권면하는 것만 믿는 것 같다 - 그러는 동안 그들은 너무 진지하고 우울해 보인다!

히브리서 2장 12절 에 예수님에 대해 쓰여있는데, 예수님은 교회 가운데서 두 가지 일을 하신다:

1. 아버지의 이름을 선포하기

2. 아버지께 찬송 드리기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아버지의 전령일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 찬양-인도자 그리고 노래-인도자 이다.

교회 모임에서, 이 두 분야는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우리의 앞서 가신 자와 맏형으로 따라야만 하는 두 영역이다.

우리가 교회에서 말씀을 나누기 위해 일어설 때, 우리가 선포해야 할 것은 아버지의 이름이지, 우리 자신의 이름이 아니다. 우리는 남들에게 우리가 얼마나 잘 설교할 수 있는지, 또는 지난 한 주 동안 얼마나 충실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일어서서는 안 된다. 사람들의 필요를 위해 성경에서 찾아낸 어떤 말로 사람들의 머리를 때리는 것도 안 된다!! 그런 설교는 모두 세상적, 혼적, 악마적인 것이고, 주님의 이름에 먹칠하는 것이다. 오직 예수님의 증언만이 모든 기름부음 받은 예언의 영이다(계19: 10) .

우리는 또한 예수님을 따라 교회에서 아버지를 찬양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기도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해야만 한다. 열 명의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고쳐주시기를 기도했다. 오직 한 사람만이 그를 찬양했다. 불행히도 그 비율은 오늘날 교회에서 거의 같다.

완전한 승리

여호사밧이 전투에 접근한 결과는 "(적의) 한 사람도 피한 자가 없는지라"(24절)는 것이었다. 그것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은 만약 우리가 사탄과의 전투를 믿음과 찬양으로, 같은 방식으로 접근한다면 우리의 문제들 중 하나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역대하 20장은 "다수의 적(문제들)"으로 시작하지만, "적(문제)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로 끝난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모든 문제를 강력하게 해결해 주신다.

유다 백성은 전리품으로 부자가 되었다(25절). 그리고 이것이 우리에게도 영적인 부를 획득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더 나아가서, "이방 모든 나라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적군을 치셨다 함을 듣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므로, 여호사밧의 나라가 태평하였으니, 이는 그의 하나님이 사방에서 그들에게 평강을 주셨음이더라"( 대하20:29 ,30)고 읽었다. 오늘날에도 적의 모든 권력을 제압하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비슷한 안식이 남아 있다.

찬양 안에서 끝까지 견디기

슬픈 것은, 여호사밧이 그날 배운 것을 잊어버리고, 말년에 이르러 타락하고 타협했다는 점이다.

우리는 역대하 20장 35절 에서 여호사밧이 "악을 행하고" 우상숭배하는 이스라엘과 또다시 동맹을 맺었다 - 이번에는 아합의 사악한 아들 아하시야였다.

성령께서 여호사밧이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악을 행하였다고 말씀하신 것을 주의하라. 여호사밧이 처음에 타협했을 때, 그는 어리석었다. 두 번째에 그는 악했다.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잠26:11 ).

한때 "거룩한 예복을 입고 여호와를 찬양하는 법"을 배운 많은 이들은, 한결같이 끝까지 견디지 못하는 것 같다. 어딘가에서 그들은 다시 한번 타협한다. 하지만 우리가 그럴 필요는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끝까지 견딜 수 있도록 힘있게 도와주신다.

믿음으로 주님을 찬양하기

우리는 항상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해 주님을 찬양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더 나빴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심리학자들이 환자에게 이렇게 말하라고 하는 것처럼), "그것이 더할 나위 없이 좋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것이 우리의 가장 좋은 것(best)를 위해 작동하도록 해주기 때문이다(롬 8:28 ). 그것이 바로 믿음의 찬양이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지난 삶을 돌아보고, 우리에게 나쁘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바꿔주셨는지 볼 수 있다. 주님은 미래에도 그렇게 하실 것이다. 그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언제나 주님을 찬양할 것이다.

시편 106편 12절 에서, 우리는 "그때 그들이 그의 말씀을 믿고; 그를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도다"라고 읽었다. 우리는 거기에서 이집트를 떠난 이스라엘 자손이 홍해 아래에 파묻힌 모든 원수를 본 에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는 것을 읽었다(11절). 그것은 눈으로 보는 것으로 사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신 후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으로 살 수 없기 때문에, 옛 언약 아래서 그것이 가능한 전부였다.

그러나 이제 새 언약 아래서, 우리의 머리에 성령의 기름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원수의 목전에서……왜냐하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시 23:5 ,1, 2 ). 우리는 이제 홍해가 우리를 위해 갈라지지 않았을 때, 이집트인들이 우리의 뒤를 바짝 쫓을 때, 그리고 산이 우리를 사방으로 울타리로 둘러쌀 때에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살아 있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우리는 악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이는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도 우리의 하늘 아버지로부터 허락 받지 않고는 우리의 적이 만질 수 없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예수님처럼, 우리는 적들에게, "하늘 아버지께서 위에서 너희에게 주지 않으면, 너희는 우리에게 아무런 권한도 가질 수 없다"(요 19 :11 )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결코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거나, 우리의 상황이나 누군가에 대해 불평하거나 투덜거릴 이유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저지른 실수 조차도 우리의 최고의 것으로 만드실 수 있다.

하나님은 실패한 사람들을 사용하신다.

베드로는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는 죄에 빠져서 실수하고 나서야 인정 많은 사도가 될 수 있었다. 베드로가 그렇게 죄를 짓는 것은 분명 하나님의 완벽한 뜻이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베드로가 일을 하기 위해 그것을 허락하셨다는 것을 안다. 그것은 베드로를 인생에서 실패한 사람들에게 부드럽고 동정하게 만들었다.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죄를 지은 적이 없는데도, 죄인에게 무한한 동정심과 자비를 베푸셨다. 그러나 아담의 나머지 인종은 그렇지 않았다. 심한 죄악에 빠져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대개 죄인에 대해 엄격하고 무자비하며 오만하게 된다.

베드로가 이 큰 죄악에 빠진 상황을 보면, 하나님께서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려는 유혹에 직면하는 것조차 쉽게 막을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혹의 순간으로부터 그를 보호하지 않기로 선택했다.

요한복음 18장 15-18절 에서, 우리는 요한과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 대제사장의 뜰로 갔음을 알 수 있다. 요한이 대제사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문지기는 그를 들여보냈다. 그러나 베드로는 들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요한이 와서 문지기에게 말을 해서 베드로가 들어가도록 허락을 받았다. 그것은 그 순간 좋은 일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날 밤에, 요한이 베드로를 저 뜰로 데려가지 않았더라면, 베드로가 죄를 짓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주목하라. 베드로는 오직 그 안에서 질문을 받았고, 주님을 세 번 부인하였기 때문이다( 요18:17 , 25 , 27 참조).

그래서 우리는 질문을 할 수 있다, "왜 하나님은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셨을까? 왜 그는 베드로가 뜰로 들어가는 것을 막지 않았을까?" 그건 하나님의 실수였나? 아니다, 하나님은 그의 주권 안에서 베드로가 실패를 통해 교육을 받도록, 요한이 베드로를 안으로 데려가는 것을 허락하셨다. 베드로가 교육과정에서 이 과정을 이수하지 않았다면, 사도들의 리더, 초대 교회의 선도적인 전도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사탄은 그의 요원들이 베드로를 유혹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가 완전히 실패한 그 순간에 그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었다(눅22: 31 ,32). 그리고 예수님의 기도가 응답 받았다. 베드로는 그 경험에서 깨어졌고, 동정심이 많은 사람이 되었다. 그는 평생 다시는 죄인을 가혹하게 비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하고 싶은 유혹에 빠질 때마다, 그는 자신의 실패를 기억하고 자신의 비난을 누그러뜨리곤 했다.

당신이 믿음이 있다면, 하나님은 당신의 인생에서 일어났던 가장 최악의 일들을 당신의 가장 최고의 것으로 만드실 수 있다. 오순절 전 7주 동안, 베드로는 요한이 그 운명의 밤에 안뜰로 들어가는 허락 받지 않았더라면, 주님을 부인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여러 번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는 깨지지도 않았을 것이고, 오순절에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에 부적합했을 것이다.

우리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발자취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셨다"를 따르는 것과, 그리고 "죄를 그쳤다"에 대해 편지에 썼기 때문에, 여전히 죄에 대항하여 설교했다는 것을 안다(벧전2:2, 22 ;4:1,2). 그러나 이제 그는 동정심을 가지고 설교했다. 이것은 베드로가 오순절에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의 문을 열어주고, 고넬료 집에 있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문을 열어 줄 수 있는 특권을 받은 이유다. 하나님은 그 두 가지 사례 중 하나에 야고보나 요한을 사용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분은 그러지 않았다. 그분은 비참하게 실패한 베드로를 사용했다. 왜냐하면 다른 제자들보다 베드로가 더 다루기 힘든 죄인들에게 더 동정심을 가지고 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윗은 베드로와 같은 또 다른 사람이었다. 한번은 게으름으로 전쟁터에 나가는 것을 피했을 때, 그는 심하게 미끄러져 죄악에 빠졌는데, 그것은 그의 남은 생애와 그 후 수 세기 동안 그에게 검은 표식 같은 죄가 되었다(삼하 11 :1-5). 성령께서는 "다윗이 헷 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고,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하였음이라"( 왕상15:5 )고 기록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의 실패를 사용하여 그를 깨뜨리고 시편 51편을 쓰도록 하셨는데, 이것은 다윗이 쓴 다른 어떤 글보다도, 수 세기 동안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축복을 준 영감을 받은 성경의 한 부분이 되었다. 다윗이 작은 죄악에 빠졌더라면 그 시편을 결코 쓸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실패는 크고 깊으며 공개적으로 알려져야만 했기에, 철저히 겸손해지고 깨졌을 지도 모른다. 그는 남은 그의 인생 동안 깨어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다!!

실패로 인한 깨어짐

그러므로 우리가 사도와 예언자가 되려면, 나는 가서 죄를 지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니, 당연히 아니다. 그러나 이미 비참하게 실패했다면, 당신에게 희망이 없다고 느낄 필요는 없다. 그런데도 당신은 심지어 하나님의 충실한 종이 될 수도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항상 승리하며 살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는 겸손한 자에게만 은혜를 줄 수 있다. 그리고 종종 그는 우리가 큰 죄에 빠지는 것을 허락해야만 우리를 겸손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신다. 그것은 최선의 방법이 아니다. 예수님은 죄에 빠지지 않고 겸손하셨다. 그러나 베드로와 다윗과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예수님과 같이 그 일을 해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하나님은 비참하게 실패한 베드로와 다윗까지도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실패를 회개하며 통곡할 때에만 그렇다, 다른 방법은 없다.

"바나바의 편지" 1세기 저자는 "주께서 그의 복음을 선포할 사도들을 택하셨을 때, 가장 큰 죄인인 자들을 택하셔서, 그분이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이 회개하도록 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을 보여주셨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베드로와 다윗을 위해 하신 일을, 당신을 위해서도 하실 것이다.

그렇다면 이브가 당신에게 먹을 열매를 주었기 때문에, 아니면 요한이 문지기에게 당신이 마당에 들어가도록 요청했기 때문에 죄를 지었다고 불평하지 마라.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 죄를 짓고 실패하는 것은 확실히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당신은 실패하였다, 하나님은 그마저도 하나님의 영광과 당신의 유익이 되게 하실 수 있고, 당신은 깨어진 사람이 되어, 그래서 당신은 평생 동안 남에게 결코 가혹하게 굴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주님을 찬양하라. 그리고 어린양의 피와 당신의 증거의 말로 사탄을 이겨라. 믿음의 말을 하고, 베드로와 다윗처럼, 남은 나날 동안 깨어진 사람이 되라..

하나님은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의 삶을 계획하셨다. 다윗이 말하기를 "주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나를 보았고, 내가 숨쉬기 시작하기 전에 내 인생의 하루하루를 계획하셨습니다. 매일매일이 주의 책에 기록되었나이다. 주여, 당신이 끊임없이 나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요! 주의 생각이 하루에 몇 번이나 나에게로 향하는지 셀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아침에 깨어났을 때, 당신은 아직도 나를 생각하고 있군요"(시 139:16-18 - TLB)!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당신의 이름을 표지에 새긴 일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일기는 당신의 삶에 대한 그의 계획이 무엇인지 매일 기록한다. 당신이 태어나기 몇 세기 전, 그는 이미 당신의 부모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이지, 당신이 어느 나라에서 태어나게 될 것인지, 그리고 당신을 그리스도로 데려올 수 있도록 마련한 상황을 적어두셨다. 또한 그 일기에는 영적인 교육을 시키기 위해 어떤 시련을 겪게 할 것인가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당신의 실수를 그의 영광을 위해 어떻게 작동하게 하실지도. 이제 당신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 매일 그 일기에 무엇이 기록되어 있는지 보여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하여 이미 세우신 것보다 더 나은 계획을 세울 수 없으니,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당신은 땅에서도 그의 뜻을 행하고 싶다고 말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이렇게 위대하시고, 사탄이 우리 발 아래 짓밟히고, 우리를 향한 그의 고발은 완전히 무효가 되게 하시는 놀라운 복음을 주신 주님을 찬양하라.

장 9
당신은 신을 섬기는가 아니면 돈을 섬기는가?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눅16:13 ).

우리가 하나님과 사탄 둘 다 섬길 수 없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맘몬(돈) 둘 다 섬길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네 가지를 주의 깊게 살펴보라:

1. 하나님을 정말 사랑한다면, 돈을 싫어하게 될 것이다.

2. 정말 하나님을 붙들고 있으면, 돈을 경멸할 것이다.

3. 돈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미워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4. 돈을 붙잡고 있으면, 하나님을 경멸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소위 "신자"라고 불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지만, 그들은 돈과 물질적인 것들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실제로 하나님을 미워하고 그를 경멸한다. 한 신자는 다른 신자보다 자신이 교리적으로 더 순수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둘 다 돈을 사랑한다면, 둘 다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교리적 순수성을 가지고 있었고(마 23:3a ), 종교적이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지는 않았다.

사탄에 대해 중립적인 태도를 가질 수 없듯이, 돈에 대해서도 중립적인 태도를 가질 수 없다. 사탄을 사랑하거나 미워해야 한다. 같은 식으로, 돈을 좋아하거나 싫어해야 한다. 당신은 돈을 움켜쥐거나 경멸해야 한다.

하나님과 맘몬은 자석의 두 극과 같이, 반대되는 두 개의 극이다. 당신이 한 극에 끌리면, 다른 극에는 밀려난다.

그럼 어떻게 하면 돈을 싫어할까?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은 금욕과 고된 훈련에 의한 것인가? 돈을 미워하는 법을 배우려면 수도원 이나 "믿음의 집"에서 살아야 하는가?

예수님은 우리를 은둔자나 수도승이나 목회자로 만들려고 오신 것이 아니다!! 그 자신은 이 세상에서 평범한 삶을 살았고, 수년 동안 목수로 일하며 생계를 책임지고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을 부양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돈을 벌고 사용했다. 하지만 그는 돈을 싫어했고 아버지를 사랑했다.

이 예화는 아마도 우리가 어떻게 돈을 싫어하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젊은 남자와 깊은 사랑에 빠져서, 젊은 남자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느끼는 어린 소녀를 생각해 보라.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첫 남자보다 훨씬 더 잘생기고 그녀에게 훨씬 더 매력적인 또 다른 젊은 남자를 만난다. 일단 이 새로운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나면, 그녀는 다시는 첫 남자를 만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녀는 어떻게 그 첫 남자에 대한 사랑을 버렸을까? 새로운 애정의 분출하는 힘에 의해서다. 그것이 우리 역시 돈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이다. 주 예수에 대한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채울 때, 우리의 가슴속에는 돈에 대한 이전의 사랑이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빛이 방을 가득 채우면, 어둠은 단숨에 달아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돈을 미워해야 한다고 설교하지 않는다. 아니. 그것은 부정적인 메시지며, 오직 바리새인들만 양산할 것이다, 그들은 돈을 싫어하고 다른 모든 신자들이 돈을 사랑한다고 상상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높여서, 사람들이 온 마음을 다하여 그리스도를 사랑하도록 이끈다. 그들이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사랑할 때, 그들은 자동적으로 돈을 미워하게 될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여전히 돈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그가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단순히 돈을 좇지 않는다거나, 돈을 갈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것은 약하고 부정적인 진술이다. 우리가 실제로 돈을 싫어하고 경멸한다는 우리의 고백은 긍정적인 것이다. 그것이 우리 삶에서 사실이 아니라면, 우리의 부족함을 고백하고, 구원을 위해 주님을 찾는 것이 훨씬 낫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자기 기만에서 해방되려면, 우리는 자신에게 무자비하게 솔직해져야 한다.

돈의 증가가 우리를 흥분시키는가? 우리는 점점 더 많은 돈을 벌기를 갈망하고 있는가? 만약 우리의 대답이 이 질문들 중 하나에 "예"라면, 우리가 돈을 좋아하고 맘몬을 섬기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많은 신자들은 돈의 증가는 그들의 삶에 신의 축복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상상할 만큼 어리석다. 심지어 어떤 신자들은 언젠가 복권에 당첨되기 위해 하나님이 그들을 도와주기를 바라기도 한다!! 복권은 사람들을 맘몬 숭배로 끌어들이기 위한 사탄의 수단 중 하나이다. 한 사람이 1루피 복권을 사서 100만 루피를 받는다. 그리고 그가 받는 돈은 실망한 백만 명의 다른 사람들의 돈이다. 그것은 완전한 악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딤전6:9 ).

롯은 부자가 되기를 원했고 그 과정에서 그의 가족을 파괴했다. 발람은 부자가 되기를 원했고 예언자로서의 소명을 잃고 지옥으로 갔다. 게하시는 부자가 되고 싶어했고 예언자가 될 기회를 놓쳤을 뿐만 아니라, 자신과 그의 자녀들에게 나병을 가져다 주었다.

우리는 잘 나아갔지만 갑자기 타락하는 신자들의 비극적인 예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보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부자가 되고 싶었고 필요 이상으로 부를 추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탄은 그러한 신자들을 처음에는 재물이 줄 수 있는 즐거움을 조금씩 맛보게 함으로써(마약밀매자가 젊은이들에게 마약을 조금 맛보게 하는 것처럼) 유혹했다. 그래서 사탄은 맘몬에 대한 그들의 욕구를 자극했다. 그는 조금씩 그들을 이끌었고, 마침내 그들이 "맘몬에 중독되어" 자신과 가족을 파멸과 파괴로 몰아넣었다. 교회를 세우려고 했던 삶들이, 이제는 돈을 좇는 데 허비되고 있다. 그런 신자들은 팥죽 한 그릇을 위해 그들의 출생권(장자권)을 팔아먹었다! 영원히 그들의 후회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

그러므로 모든 분별 있는 신자들은, 건물의 10층에서 뛰어내리지 않는 것처럼, 결코 재물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행동들 중 하나가 그들을 파괴할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들은 성경의 경고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여전히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해 주시기를 기대한다.

실제로 돈을 쫓아야만 우리가 떨어져 나가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돈을 마음속으로 사랑하면 떨어져 나갈 수도 있다, 이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기"(딤전6:10) 때문이다. 젊은 남자가 실제로 여자를 쫓아가지 않고도 마음속으로 여자를 사랑할 수 있듯이, 심지어 그렇게, 실제로 돈을 쫓지 않고도 마음속으로 몰래 돈을 사랑할 수 있다. 그것은 신자가 떨어져 나가기에 충분하다.

예수님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기로 결심하지 않는 사람은 교회를 세울 수 없다. 우리가 돈을 미워하고 경멸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을 기꺼이 주님에 대한 사랑의 시험으로 삼으려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우리가 여전히 돈을 사랑한다면, 우리가 자랑하는 모든 "영성"은 전혀 가치가 없다 .

예수께서 돈과 관련하여 우리 책임의 두 가지 측면을 말씀하셨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마22: 21).

1. 가이사에게 그의 것을 주는 것은 돈 문제에서 의로움을 가리킨다.

2. 하나님에게 그분의 것을 드리는 것은 돈을 쓸 때 충실한 것을 말한다.

돈 문제에서 의로워지기

우리가 돈 문제에 있어서 먼저 의로워지는 유치원 수업을 거치치 않는다면, 우리는 돈을 미워하고 경멸할 수 없다. 이것은 우리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주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우리는 다른 누군가의 것을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정부에 내야 하는 세금을 속여서, 정부(가이사)에게 빚진 것이 없어야 한다.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빌렸다가 돌려주지 않았거나, 부정행위로 누군가(혹은 어떤 사무실)로부터 빼앗은 것이나, 정당하게 벌지 못한 돈을 우리 소유로 가져서는 안 된다. 부당하게 얻은 모든 것에는 저주가 있다. 누군가에게 빚을 지고 있다면, 당신의 머리와 자식들의 머리 위에 저주가 드리워지는 것보다 굶고 빚을 갚는 것이 낫다.

우리는 또한 과거에 우리가 잘못 가져간 모든 돈과 물건들을 돌려주어야 한다, 비록 그러한 보상을 완료하는 데 수년이 걸리더라도 말이다. 삭개오의 집은 그가 배상하기로 결정한 순간 복을 받았다(눅19 :9 ). 그런 결정을 내리는 날, 당신 집도 복을 받을 것이다. 빚이 매우 크더라도, 낙담하지 마라, 비록 한 달에 10달러밖에 안 되더라도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갚기 시작하라.

성경은 할 마음이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당신을 받으실 것이요, 하나님께서 당신이 모든 것을 실제로 갚았는지 여부에 따라 받지 않고, 당신의 갚을 능력에 따라 받으실 것이라고 말한다( 고후8:12 ).

정당하지 않게 얻은 물건과 돈이 집에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집을 축복하신다"라고 쓰인 명패를 집에 걸어두어도 소용없다. 하나님은 결코 그런 가정을 축복할 수 없다.

그런 재정상의 부정을 당신의 삶에서 모두 해결하지 않으면, 어디를 가든지 당신 뒤에 쇠사슬을 끌고 갈 것이다. 주님이 갑자기 돌아오신다면, 당신은 휴거 받기에는 가치가 없는 것으로 발견될 것이다. 소위 "신자"라고 불리는 많은 사람들이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 휴거 뒤에 남겨지게 될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롬 13:8 )고 명령한다. 그것은 우리가 모든 대출과 신용으로 모든 물건을 사는 것을 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이 시키는 대로 "지금 사서 나중에 결제하라"는 것보다, "지금 저축하고 나중에 사라"는 게 낫다.

만약 위급할 때, 누군가에게 돈을 빌렸다면, 최대한 빨리 갚아야 한다. 필요하다면 집에서 금을 팔아서 갚아라. 빌린 돈을 일정 기간까지 돌려주겠다고 약속하고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채권자에게 가서, 겸손하게 용서를 구하고 반환 기간을 연장해 달라고 부탁하라. 그 일에 대해 잠자코 있다가, 마음이 내킬 때마다 돈을 돌려주는 것은 옳지 않다.

지금 채권자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경우에는, 그 돈을 교회에 줄 수 있다 - 모든 돈은 결국 주님의 것이기 때문이다(민5:8 참조). 그러나 우리 스스로 결코 그런 돈을 가져서는 안 된다. 합법적으로 우리의 것이 아닌 것을 가지고 있는 모든 돈에는 저주가 있기 때문이다.

맘몬에 대한 신자들의 노예상태는 결혼식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거기서 우리는 탐욕과 욕심이 부끄러움 없이 발휘되는 것을 본다. 모든 교파에서 소위 "신자"가 행하는 지참금을 주는 것을 생각해보자. 지참금을 요구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확실히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다. 신부의 부모로부터 지참금을 받기를 기대하는 사람들도 더 나을 것이 없다.

또한 많은 결혼 피로연에 엄청난 돈이 낭비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라. 형편이 좋으면 결혼 피로연을 잘 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예수님은 결혼식 피로연에서 사람들을 위해 여분의 와인을 만들었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이 이런 성대한 피로연을 열기 위해 돈을 빌린다. 그것은 악하다. 돈을 빌려서 거창하게 하는 것보다, 간단한 접대를 하는 것이 훨씬 낫다. 그러나 아아, 그런 때에 많은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생각은,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실까?"가 아니라, "남들이 뭐라고 말할까?"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견을 두려워하는 것보다 사람의 의견을 더 두려워한다.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교회에서 이 메시지에 불순물을 섞어서는 안 된다. 타협자가 많은 큰 교회를 세우는 것보다, 우리 지역에 소수의 진심인 사람이 있는 작은 교회를 세우는 것이 훨씬 낫다.

돈에 충실하기

일단 돈 문제에 있어서 의로운 것을 배웠다면, 돈에 충실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

예수님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것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신 것은 무슨 뜻이었을까? 우리가 그분에게 십일조(우리 수입의 10%)를 받치라는 뜻이었나? 옛 언약 아래서는,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께 바쳐야 할 것은 그것뿐이었다. 그것이 하나님께 마땅히 주어져야 하는 것이다. 일단 그렇게 하고 나면, 나머지는 그들 자신의 것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언약 아래에서는 다르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100% 바쳐야 한다는 것을 그 자신의 삶으로 증명하셨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 내 것모두 아버지의 것이요"(요 17:10 )라고 하셨다. 그는 율법의 속박(십일조의 속박)에서 우리를 구원하여, 영광스러운 은혜의 자유로 우리를 인도하기 위해 오셨다(하나님께 100% 기꺼이 드리는 데서 오는 자유).

우리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그렇게 하라는 어떤 계명이 있어서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어떤 경우에도 모든 것이 합법적으로 그의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집이나 땅, 금이나 은이나 그 밖의 모든 것)이 주의 것임이라"( 고전10:26 ). 우리가 많이 벌었다면, "여호와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신8:18 )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우리의 돈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사용할 수 있는 우리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든 경우에 주님께 구체적인 지시를 묻지 않고서는 쓰거나, 빌려주거나, 아무에게도 돈을 줄 수 없다 - 이제 모든 우리의 재산은 주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우리는 주님께 모든 것을 드린다,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돈은 지금 우리의 천국의 신랑과 공동 계좌에 보관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따로 계좌를 만들어 두지 않고, 매달 10%씩 그에게 돈을 드리지 않는다!! 아니, 우린 "주님, 내 것이 모두 당신의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오직 그런 사람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맘몬을 미워한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돈에 충실하다는 것은 우리가 주님을 너무 사랑하여 음식, 옷, 집 등을 꾸미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돈을 자기에게 쓴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라"( 눅14:33 )는 뜻이다. 비록 우리가 이 땅의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우리는 더 이상 그것들 중 어느 것도 우리의 소유물로서 소유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든 물질적인 것들로부터 분리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에서 맘몬을 숭배하는 것에서 해방되었다.

순수한 마음이란 지상의 모든 소유물을 버린 마음이다. 순수한 마음은 깨끗한 양심과 다르다. 순수한 마음은 오직 하나님만을 위한 자리이며, 맘몬이나 다른 어떤 것을 위한 자리는 없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영적 책임을 맡길 수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하는 것은 돈과 이 땅의 것들을 통해서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눅16 :11 ).

하나님께서는 맘몬으로 먼저 시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그분을 섬기는 일에 사용하실 수 없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예언의 말이 부족한 이유는, 그들의 지도자들이 맘몬-시험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설교자와 신자들이 해마다 하나님으로부터 전혀 새로운 계시를 받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돈을 쓰는 방식에 충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돈을 쓰는 방식이 헤프다 - 그들의 음식, 옷, 집, 심지어 여행, 관광 등등

맘몬(돈)에 대한 충실함은 모든 낭비를 피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5000명을 먹인 뒤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요6: 12 ). 예수님은 모든 종류의 낭비를 싫어하신다. 그것은 빵과 물고기뿐만 아니라, 시간과 돈에도 적용된다.

경건함은 지출을 절약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낭비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을 포함한다.

우리가 돈을 사용하는 데 충실하지 못하면, 우리가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해 얻게 될 유일한 지식은 충실한 다른 사람들의 설교로부터 간접적으로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간접적인 계시는 결코 계시가 아니라, 단지 메마른 지식일 뿐이다. 정확한 지식일지는 몰라도,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부족할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모든 집단에서 대다수의 신자들의 상태이다.

전임 기독교 사역자와 돈

이제 "전임 기독교 사역자"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우선 (복음 기록에서) 주님은 실직자를 한 번도 사도로 부르신 적이 없다는 것을 주목하라.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마태(복음서에 그들의 '부름'만 기술되어 있다)는 주님이 부르셨을 때, 모두 이 땅의 직업에 일하고 있었다. 주께서 그들을 부르시고 그를 따라오라고 하셨을 때에, 그들은 돈벌이가 되는 이 땅의 직업을 떠났다.

여호와께서 세속적인 직업에 종사하고 있는 자들만 부르신 이유는 세 가지다:

1.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적 사역을 주시기 전에, 우리는 세속적인 세상에서 돈을 다루는 충실함을 증명해야 한다. 그리고 그 돈을 우리가 직접 벌어야만 돈으로 우리의 충실함을 증명할 수 있다. 우리가 선물로 받은 돈은, 우리 스스로 쪼들리는 것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나 주님의 일에 쉽게 줄 수 있다. 그런 베풂은 우리의 관대함을 전혀 증명하지 못한다, 우리가 베푼 것은 다른 누군가가 힘들게 번 돈이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 힘들게 번 돈을 주는 것을 배울 때 우리는 우리의 관대함을 증명할 수 있다.

2. 하나님은 희생의 원리로 세상을 다스린다 - 우리가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보듯이.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섬기러 나가는 데는 항상 희생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주의 종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러 나가는 것에 의해서 돈을 벌거나, 우리가 섬기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돈을 벌거나, 그들이 우리에게 주는 제물을 통해 우리가 섬기는 사람들보다 더 높은 수준의 생활을 한다면, 소위 "경건함"은 우리에게 손실과 희생이 아닌 이익의 수단이 되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이 쫓아낸 성전 안의 돈 바꾸는 사람들과 같다. 예수님은 우리 또한 쫓아낼 것이다.

3. 우리가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섬기는 사람들은 모두 세속적인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 우리 자신이 세속적인 직업에서 겪는 투쟁과 어려움에 대한 경험이 없다면, 우리 양떼에게 이론만 설파할 수 있을 뿐, 세속적인 세계에서 통용되는 실질적인 진리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지식에서가 아니라 경험에서 설교해야 한다.

이 세 가지 이유로, 예수님은 이미 세속적인 일을 충실히 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사도들을 선택했다. 그는 20세기에도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그는 오늘날에도 오직 그런 사람들만을 선택하셔서 주님을 섬기게 하신다.

그러나 인도의 대부분의 '전임 기독교 사역자'들은 평생 어떤 세속적인 직업에서도 정직한 하루의 일을 해본 적이 없다. 그들 대부분은 다른 대학에 입학하지 못했거나, 실직상태였기 때문에 성경학교에 진학했다. 그리고 이제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서양과의 접촉을 통해, 그러한 부를 축적해서, 집과 땅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세속적인 직업에서 일했다면 결코 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기독교' 형태는 그들에게 엄청난 재정적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을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하나님의 진리를 잃어 버린 자들"(딤전6:5)이라고 부른다 .

오늘날 인도에서 그리스도의 증언에 가장 큰 걸림돌은 우리 동포들에게 기독교는 서양의 돈과 서양의 설교자들이 선전하는 서양의 종교라는 인상을 주는 그런 사람들이다.

서양의 설교자들은 인도에 있는 그들의 대리인에게 많은 돈을 주거나, 또는 서양으로의 무료 여행을 하게 하여 하나님의 일을 방해한다. 인도의 신자들은 영적인 도움을 받기 위해 서양 지도자들에게 너무 의존하게 되고, 그래서 인도에서는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결코 일어나지 않으며, 이곳 교회들은 영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자립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

생계를 위해 천막을 만든 사도 바울처럼 "전임 사역자"들이 주를 섬기기 시작할 때가 인도에 왔다( 행18:3 ; 20:33-35). 우리 역시 이 시대에 우리 자신을 부양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우리의 생계를 위해 다른 신자들과 교회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복음 전하는 이들에게는, 복음을 전하는 일로 살아가라"( 고전9:14) 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많은 "전임 사역자"들이 그 구절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무분별하게 돈을 받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잘못 사용했고, 결국 하나님이 아닌 맘몬을 섬기게 되었다.

바울은 다음 네 구절( 고전9:15- 18)에서,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섬기면서 어떻게 스스로를 부양하는 것이 특권이자 명예라고 생각했는지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성령께서 바울에게 그렇게 주님을 섬기도록 인도하셔서, 그 시대에 거짓된 설교자들을 드러내게 하셨다 - "바울과 같은 방식으로 일을 하고 있다고 자랑할 구실을 찾는 자들에게서, 그러한 기회를 잘라 없애려는 것입니다" ( 고후11:12 ).

성령께서 인도에 있는 우리 교회의 모든 장로들을 같은 방식으로 인도하셨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부양하면서, 복음을 전하며, 양 떼를 돌본다 - 우리가 설교하는 사람들로부터 어떤 헌금도 받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날 인도에서 맘몬을 섬기는 설교자들을 드러낸다. 마치 돈을 사랑하는 많은 설교자들이 그 시대에 예수님과 바울에게 분노했던 것처럼, 우리에게 분노하게 되었다.

누구든지 우리와 함께하여, 자기의 섬김을 위하여 양떼로부터 경제적 이익을 꾀한 사람은, 주님께서 유다와 데마를 드러내신 것처럼, 주님에 의해 무자비하게 드러나고 우리 가운데서 제거되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지난 20년 동안 단 한 차례만 이런 일이 일어났다)

오늘날 인도에는 "사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바울처럼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내가 알기에는 없다!

많은 설교자들이 우리의 책을 읽고 우리의 테이프를 듣고, 우리의 메시지를 그들 자신의 것으로서 설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를 모방하지 않을 것이다(우리 스스로를 부양하고, 무료로 복음을 전파하는 방식으로), 그들은 맘몬을 숭배하고 섬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경의 진리에 대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인 계시를 받지 못한다. 그들은 우리의 책과 테이프에서 그들의 메시지를 간접적으로 받아낸다. 이러한 하나님의 계시의 결여는 그들이 돈과 물질적인 것을 다루는 데 있어서 불성실하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에 있는 절름발이 남자에게 그에게 줄 은도 금도 없다고 말했다( 행3:6). 당시 신자들이 이 사도들에게 그 많은 돈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행4 :35 ), 사도들은 그 돈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주어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많은 돈이 그들의 손을 통해 흘러갔지만, 그들의 손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 사도들은 그들의 봉사에 대한 어떤 대가도 받지 않으려 했다! 그리하여 돈에 충실함으로써, 오늘날 많은 이들이 시작은 잘하였으나 나중에는 가룟 유다처럼 된 것과는 달리, 그들은 삶 끝까지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을 간직하였다.

신약성경은 발람의 잘못, 발람의 , 발람의 교훈을 경고한다( 유1:11 ; 벧후2:15; 계2 :14 ).

돈을 사랑하고 부자들로부터 돈을 모은 발람의 설교 사례가, 신약성경에서 거듭 강조되어, 우리 스스로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하고 있다.

경건함은 돈, 명예, 수익성 있는 사업 계약 또는 다른 유형의 물질적 이득의 측면에서, 우리 중 누구에게도 결코 이익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경건함은 실제로 우리에게 명예와 돈을 잃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믿는 것에 대한 대가를 지불한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을 때 부와 명예를 모두 잃었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따라간다면, 우리도 부와 명예도 잃을 것이다.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들만이 그들의 영적인 접촉을 통해 이익을 얻을 것이다. 만약 당신의 "경건함"이 당신에게 명예, 재산 또는 금전적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면, 당신은 예수가 아니라 유다를 따르고 있는 게 틀림없다.

경건함이 가져오는 진정한 이득은 언제나 영적인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땅에서 철저한 남여 세대를 찾고 계신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기쁘게 하고 싶어 하며, 그리고이 세상에 그 모든 가치 체계 전체가 완전히 잘못되어 있고, 지구상의 모든 것이 사랑의 법을 섬기는 데 사용되지 않는 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증명할 사람들이다 .

그런 사람들은 사는 방식, 즉 그것은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교육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편안한 생활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세속적인 명예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 등을 통해 드러낼 것이다. 대신 그들은 거꾸로 된 세상에서 진리를 위해 똑바로 서서, 세상에 다음과 같이 나타낼 것이다: 하나님만이 모든 것이다. 당신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겠는가?

여호와께서 오늘 우리 땅에서 그런 많은 남녀를 일으켜 세우시기 바란다.

장 10
주님 앞에서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겔22: 30 ).

하나님은 이 장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바벨론의 포로가 된 이유를 에스겔에게 말한다(15절). 예루살렘은 "남을 모함하여 죄 없는 피를 흘리게 하는 자들이"있는 살인의 도시가 되었다(3,9절).

오늘날 우리는 많은 교회들이 비슷한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을 발견한다. 에스겔 22장에 열거된 죄와 오늘날 우리가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발견한 죄들을 비교해 보아라. 신자들은 동료 신자들을 혀로 살해한다(6절). 많은 기독교 단체들은 자신들만이 진정한 교회를 구성한다고 주장하며, 자신들과 동의하지 않는 다른 신도들을 비난한다. 많은 신자들이 부모와 영적 아버지들을 경시한다(10절). 그런 신자들이 있는 교회는 실로 살인의 도시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포로로 잡혀가서, 그들의 지역에서 그리스도의 효과적인 증인이 되지 못했다.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은 그분 앞에 서서 그 땅을 위하여 기도할 한 사람을 찾으셨다고 한다(30절). 하지만 그는 아무도 찾지 못했다. 약 8세기 전에, 이스라엘이 죄를 지었을 때, 모세는 그 틈새에 서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을 멸망시키지 않으셨다. 그러나 지금은 기도할 사람이 없었다. 모두 그들만의 것을 추구했다. 조금이라도 기도를 하면,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기도했다. 그래서 그들은 포로가 되었다.

하나님이 마침내 찾은 사람

하지만, 70년 후, 하나님은 마침내 그 틈새에 서 있을 사람을 찾았다 - 다니엘.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이스라엘 자손이 바벨론으로 끌려간 지 칠십 년이 지난 뒤에야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렘25:12 , 13 ). 다니엘이 87세가 넘었을 때(포로가 된 기간 내내 살아오면서), 그는 예레미야의 그 예언을 읽었다.

다니엘은 그의 시대까지 살아온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현명했다. 솔로몬보다 더 현명했다. [하나님께서 사탄의 총명함을 지적하시고자 할 때, 그는 사탄의 지혜를 솔로몬이 아닌 다니엘의 지혜와 비교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는데, 하나님이 그 말씀을 하실 때 다니엘은 바빌론에 사는 젊은이였다( 겔28:3 , 14 ).]

그러나 다니엘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읽었을 때, 그는 영리한 마음을 쓰지 않았고, 그가 아무것도 할 필요 없이, 하나님의 말씀이 자동적으로 이행될 것이라고 단정하지 않았다. 아니. (그런 태도는 기독교가 아니라 숙명론이다). 그는 애통하고금식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기도했다(단9: 2, 3 )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실현된 방식이었다. 거기서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할 때, 어떻게 자신의 지혜나 논리적인 감각에 기대지 않았는지를 보게 된다.

하나님은 그 틈새에 서서 기도하는 사람과 따로 일하지 않는다.

다니엘은 또한 의로운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살아왔던 가장 의로운 세 사람을 지적하고 싶으셨을 때, 노아, 다니엘, 욥의 이름을 언급하셨는데, 그때 다니엘은 젊은 청년이었다!!( 겔14:14 , 20 ). 요셉이 애굽에서 자신을 순결하게 지켰던 것처럼, 다니엘도 바빌론에서 자신을 순결하게 지켰다(단1: 8). 그러나 이 의로운 다니엘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 그는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했다!!( 단9:4-11 ).

하나님의 진실한 사람의 한 가지 표시는, 자신의 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처럼, 하나님의 모든 진실한 사람은 자기를 이 세상 모든 죄인의 우두머리로 여긴다. 그들의 양심을 어지럽히는 죄는 보통 죄인들이 빠지는 더러운 죄는 아니다. 아니. 그들의 양심은 너무나 민감해서 기도하기를 쉬는 것조차 죄로 여긴다(삼상12:23). 그들은 또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있게 하신 백성의 죄를 그들 자신의 죄로 재빨리 동일시한다. 하나님께 효과가 있는 것은 오직 그런 의인들의 기도일 뿐이다(약5: 16 ).

당시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하고 예루살렘 도시 자체를 재건하기 위해 사람들(그리고 왕들까지도!)을 감동시킨 것은 다니엘의 기도였다. 우리가 학개, 스가랴, 에스라, 느헤미야의 책에서 읽었던 것처럼 말이다.

다니엘 자신은 그때쯤에는 예루살렘에 가서 일하기에는 너무 늙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스룹바벨과 스가랴와 여호수아 같은 젊은이들을 시켜서 그렇게 하셨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그들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다니엘의 기도가 필요했다. 일찍이 여호수아와 그의 부하들이 아말렉족을 이기기 위해 모세의 기도가 필요했던 것처럼 말이다( 출17:8-13 ).

이기주의로부터 자유

하나님은 오늘날까지도 우리 땅에서 남녀를 찾고 계신데, 교회의 틈새에 서 있을 이타적인 사람들, 즉 자기 욕구에만 사로잡히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염려하는 이타적인 사람들이다.

많은 신자들은 성화가 단지 그들의 개인적인 처신과 행동을 정제시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정한 성화는 사람을 하나님처럼, 혹은 다시 말해서 예수님처럼 이타적으로 만든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그분을 설명하시기 까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요1 :18 ). 그리고 예수를 바라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본성에 대해 무엇을 배울까? 신적 성품이란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하고, 그 결과 죄인들이 그들의 죄에서 구원받아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다면, 그 어떤 불편함도 감수 하는 것임을 우리는 알게 된다.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얻고자 했기 때문에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아니. 그는 순전히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왔다. 그는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았다. 그는 금식하고 기도하고 자기 자신을 바쳤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할 수 있도록 말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지도자들 사이에서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것이 바로 이 정신이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 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 사심 없는 사랑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에게 어떤 이익을 가져다 준다면, 기꺼이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려고 한다 - 아마도 그리스도의 신부 안에 있는 것과 같은 영적 이익, 하지만 여전히 그들 자신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순수하게 타인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부인해 온 것인지 스스로에게 묻는다면, 그 대답은 '거의 없다'라는 것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전임 기독교 사역자들이 충분한 빛을 받지 못한다고 느끼면서, 경멸하는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 많다. 하지만 그들을 비판하기 전에, 당신은 이교도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기꺼이 직장을 사직할 것인지 자문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만큼 빛을 받지 못한 사람을 경멸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가 받은 모든 빛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편안함을 사랑하고 주님을 위해 값비싼 어떤 것도 포기하려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예수님은 33년 반 동안 현대 문명의 편안함 없이, 이 땅에 와서 살기 위해 하늘에 계신 자신의 자리를 포기하셨는데, 오직 다른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또한 목수로서의 직업을 사임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전임 사역자"가 되기 위해 그의 모든 시간을 헌신하셨다.

수년 동안 선교사들이 고난과 상실을 겪도록 촉구하시고, 예수님의 이름을 듣지 못했던 이교도 땅에 복음을 전하여,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데려오게 한 것이 바로 이 그리스도의 영이다. 반면 요즘 5성급호텔에서 편안하게 여행하고 머무르며,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모두 관광객이다.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성스러운 선교사들의 전기를 읽어, 우리 또한 그들의 희생과 주님을 향한 헌신으로 도전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에게 좋다. 희생적인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 거룩함은 속임이다. 진정한 거룩함은 단지 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애로부터도 자유로워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불이 오늘날 많은 사람에게 내리지 않는 것은, 그들이 제단 위에 모든 것을 올려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의 직업과 편안함을 제외하고,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 기꺼이 포기하려 한다. 만약 이 지상의 어떤 것이 아직도 당신에게 가치 있고 귀중하다면, 당신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다.

내적&외적 희생

기독교에서 많은 사람들은 신약성경이 우리를 부르셔서 십자가를 지게 하는 내면적 희생보다 외적인 희생을 더 중시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오류에 대한 과잉반응으로, 우리는 모든 희생이 오직 내면적인, 때로는 상상 속의 삶을 사는 다른 극단으로 가는 것이 가능하다!!

예수님이 내면의 희생만 하셨다면, 결코 천국을 떠나 이 땅에 오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의 사도들이 내적 희생만 했더라면, 복음은 예루살렘보다 더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균형을 이루었고, 하나님께서 복음을 위해 외적인 희생뿐만 아니라 내면적인 희생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남을 축복하기 위해 예수님과 사도들처럼, 기꺼이 고난과 불편을 겪는 사람들만이 기도할 때 타인의 짐을 짊어지고 오늘날 교회에서 몸으로 막아 서서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오직 우리 자신의 필요에만 사로잡혀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시간이 거의 없다면, 우리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다고, 혹은 거룩하고 영적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대단한 속임이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이 복을 받고 하나님께 가까이 올 수 있게 하는 그런 방식으로 살았다. 이것이 그가 우리를 위해 시작하신 새롭고 살아 있는 길이다.

우리가 삶에서 우선시하는 것은 예외 없이 우리가 진정으로 무엇을 예배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예를 들어, 만약 우리가 일 년 중 하루도 빠짐없이, 먹거나 자거나 직장에 가는 것을 결코 잊지 않지만, 여러 날 기도하는 것을 잊어버린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면, 그렇다면 음식과 잠과 돈이 분명히 우리의 신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와 돈을 주님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것인가? 우리는 새 언약아래서, 주님을 위해서 일주일 중 하루와 수입의 10%를 따로 떼어 놓으라는 명령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잘못된 위안을 찾을 수도 있다. 교단에 있을 때 수입의 10%를 하나님께 드리던 많은 이들이, 이제는 거의 아무것도 드리지 않을 정도로 타락했다. 이것은 확실히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이 아니다. 편안함과 번영이 그들의 신이 되었기 때문에 그런 사태가 일어났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화를 내지 않거나 여자에 대한 욕망이 없을지도 모른다. 잘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따르려면, 이런 것들이 우리 삶에서 또한 발견되어야 할 외적인 희생을 대신할 수는 없다.

우리 중 많은 이들이 이제 사도들보다 '죄에 대한 승리'라는 교리를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곳에 왔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삶의 방식을 특징짓는 완전한 이기주의를 좀 더 밝혀낼 필요가 있다. 영적 불안정은 흔히 사람의 '지식' 다리는 3피트가 넘는데, 그의 '삶' 다리는 1~2인치 정도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자신의 '지식' 다리를 늘리기 위해 시간을 사용한다. 그가 가지고 있을 수 있는 하나님의 진리가 가장 순수하게 드러났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이기심은 여전히 십자가에 달리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부담과 근심이 있는 사람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이스라엘의 귀환 운동은 하나님의 일을 더 진전시키려 사심 없이 염려하는 사람들에 의해 탄생되고 추진되었다. 이를 위해 그들은 금식하고 기도했다.

우리 시대에도 교회는 이렇게 되어야 한다. 하나님 이름의 영광과 그의 나라가 임하고 그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듯이 땅에서 이루어지길 원하는 사람들은, 금식하고 기도하며 악한 영의 일들을 결박하여, 하나님의 목적을 이룰 것이다.

다니엘은 자주 금식하고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에스라 역시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 때, 금식과 기도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스8:21 ).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성벽이 불에 탔다는 소식을 듣고 울며 금식하고 기도했다( 느1:4 ). 그는 예루살렘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게으르거나 이기적이라고 비난하지 않았다. 아니. 그는 금식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그는 상사(왕)조차 그의 슬픔을 알아차릴 정도로 부담이 컸다. 마침내,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가서 성벽을 다시 쌓고자 궁전에서 자신의 지위와 편안함을 포기하였다.

여호와의 일이 진척되지 않아, 느헤미야처럼 슬퍼한 적이 있는가? 교회에서 일이 잘 진행되지 않는 것을 보고, 우리는 그처럼 금식하고 기도해 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 적이 있는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전하는 사람들(그리고 그 가족들)이 사탄의 분노의 대상이라는 것을 우리가 깨달았는지 궁금하다. 그들은 사탄의 살생부에 위쪽에 있다. 사탄은 당신의 도움 없이도, 그 일을 꽤 잘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을 비난하는 것을 그만두라고 권하고 싶다! 그 대신 앞으로 그들을 위해 조금 더 기도하라. 그들이 적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도록 말이다.

2000년 전 이스라엘처럼, 오늘날 인도에서는, 주님의 양떼 중 많은 양들이 돌보아 줄 목자가 없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우리 땅의 많은 고용인들은 보수를 받고 일한다. 양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목자들은 거의 없다. 누구든지 양에게 부담이 없고, 정기적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양 떼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권리가 없다.

추수하는 주님께서 그의 마음에 합한 목자들을 추수할 때에 보내시기를 기도하라(마9: 36-38 ; 3: 15 ).

금식과 기도

금식은 이 세대 신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가 (신랑이) 땅을 떠나면, 제자들이 금식할 것이라고 하셨다. 그는 그의 제자들이 금식할지도 모른다고 말하지 않았다. 아니. 그가 말한 것은 "그 날에는 내 제자들은 금식할 것이다"( 눅5:35 )라는 것이었다. 금식하고 기도하는 모든 사람이 반드시 예수님의 제자는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참된 제자인 모든 사람은 반드시 금식할 것이다.

사도들이 금식하며 여호와를 경배할 때, 성령이 그들에게 바울과 바나바를 보내 이방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셨다. 이리하여 초대 교회가 이방인의 땅으로 나아가는 최초의 위대한 선교운동이 시작되었다(행 13 : 2 ,3). 바울과 바나바는 나가서 교회를 세운 다음, 다시 금식하고 기도한 다음, 그 교회를 지역 장로들에게 넘겨 주었다(행 14:23 ).

심지어 남편과 아내까지도 기도를 목적으로 때로는 성관계를 금식하라고 성령으로부터 권유 받는다( 고전7:5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소돔은 그들의 누이동생이라고 하셨는데, 소돔처럼, 그들은 교만하고 게으르고 이기적이며 좋은 음식을 좋아했기 때문이다(겔16: 49). 이를 통해 우리는 (소돔이 유명해진) 성적인 죄는 그들의 식탐과 질 높고 맛있는 음식에 대한 사랑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게 된다. 성적인 부분의 자제력 부족과 게으름과 과식으로 특징지어지는 삶 사이에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하나님이 소돔을 네 여동생이라고 부르지 못하게 해라.

사탄 세력의 일들을 구속하기

한 번은 다니엘이 21일간의 기도와 부분 금식의 기간을 마치자,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통해 페르시아를 다스리는 악한 영을 이겼음을 그에게 나타내셨다( 단10:2 , 3 , 13 ).

비슷한 방식으로, 우리 시대에도, 악한 영들이 거의 75년 동안 공산주의 땅에 가지고 있던 지배가 깨진 것은, 세계 여러 곳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금식하고 기도하고 씨름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이 땅들은 이제 복음을 위해 개방되었다.

예수님은 특정한 범주의 악마는 금식과 기도를 통해서만 내쫓을 수 있다고 하셨다(마 17:21 - KJV).

인도에 살고 있는 우리는 지금 우리 땅에 있는 많은 신자와 불신자들을 그렇게 강하게 지배하고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금식하고 기도하고 씨름해야 할 큰 책임이 있다. 인도에는 기독교에 대한 많은 타협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세계에서 인도만큼 많은 이교도 사원을 가지고 있거나, 사람들이 우상 숭배에 더 얽매여 있는 나라는 없다. 우리 모두는 특히 지난 몇 달 동안, 이 악한 종교적 영들이 어떻게 수백만의 우리 동포들을 그렇게 믿을 수 없는 폭력과 종교적 광란으로 몰아넣었는지를 보아왔다.

지금은 인도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서서 이 사탄 세력의 일을 묶어야 할 때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 땅에서 편견과 원한, 게으름과 이기심으로부터 자유롭고, 인간과는 절대 싸우지 않기로 결심하고, 오직 악한 정사와 권세들과 싸우려고 결심한 남은자를 찾을 수 있다면, 인도의 수백만 명에게 영향을 미치는 악령들이 떨기 시작할 것이다.

교회로서의 우리의 소명은 그리스도가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이긴 승리를, 인도 위에 맴도는 사탄의 모든 세력에 대해 행사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날 교회의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기도하는 남자와 여자를 찾고 계신다 - 금식하고 기도할 사람 - 그리고 그들은 우리 땅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오랜 세월 동안 눈을 멀게 하고 길을 잃게 한 이 악한 종교적 영들의 일들을 묶을 것이다. 그리하여 인도에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영광스럽고 높임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든 백성에게 같은 짐을 주시지 않으시니, 이렇게 기도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지 않으면, 죄의식을 느낄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인도에서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한 '순수한 증거'가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다면, 이 시대에 우리가 금식과 기도로 함께 서서,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도록 하자.

만약 당신의 마음이 이 부름에 응답한다면, 인도에서 이 악한 영들의 일이 구속되고 제지 될 수 있도록 매일 기도하는 것으로 시작하라. 그리고 나서 금식과 기도를 계속하라. 그리고 나서 비슷한 짐을 지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라. 그리고 기도가 응답되길 바란다면, 항상 자신을 순수하게 지키기 위해 조심하고, 주위 사람들을 판단하고 남의 일에 참견하는 죄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나님의 날카로운 도구로서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자신을 지키고, 어떤 종류의 죄로도 당신의 효력이 무력화되지 않도록 하라.

장 11
타락한 자의 2가지 유형과 리더의 2가지 유형

두 가지 종류의 타락한 자가 있다 - 그리고 예수님은 누가복음 15장에서 그들 둘 다에 대해 말씀하셨다. 첫 번째는 잃어버린 양이라고 말씀하셨다. 두 번째는 잃어버린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다.

잃어버린 양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 다니지 아니하겠느냐......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눅15:4 , 7 ).

목자가 찾으러 간 것은 염소가 아니었다. 그것은 한 때 우리 안에 있던 양이었다. 이 비유는 거듭난 신자가 타락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는 반역의 정신으로 교회를 떠난 것이 아니다. 그는 양처럼 부주의로 잘못된 길로 갔다. 아마도 그는 속았을 것이다. 아마도 그의 약함 때문에, 그에게 너무 벅차 보이는 매력에 압도당했을 것이다. 선한 목자는 그런 양을 찾을 때까지 찾아 다닌다. 하급목자(양치기)인 우리도 똑같이 해야 한다. 우리는 부주의, 사탄의 속임수, 그들의 욕망을 통해 교회에서 떠난 자들을 찾아야 한다.

여호와께서 그리스도가 태어나기 600년 전, 이스라엘의 목자를 상대로 고발하신 것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너희들이 약한 양을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양을 치유하지 아니하며, 상한 양을 싸매주지 아니하며, 흩어진 양을 다시 데려오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양을 다시 찾아 헤매지도 않았다......그리고 그들은 목자가 없어서 흩어졌고, 그들은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어 뿔뿔이 흩어졌다. 나의 양 떼는 산과 높은 언덕을 두루 돌아다녔고, 나의 양 떼는 온 땅 위에 흩어져 있었다; 그들을 찾고 찾아낼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보아라, 나는 이 목자들을 대적하여…… 보아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내가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지라"( 겔34:1-12 ).

많은 양들이 흐리고 캄캄한 날 - 그들에게 너무 벅찬 어떤 시험이나 슬픔의 압박에 의해 낙담하고 우울한 날 - 에 길을 잃는다. 여호와께서 그런 양을 찾아내서 다시 데려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는 "내 마음에 합한 목자"를 통해 그들을 찾는다(렘3:15). 그것은 교회에 있는 우리 모두의 갈망일 것이다 - 형제자매 모두의 - 하나님 마음에 합한 목자가 되어, 오늘날 우리 주변의 많은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내는 것 말이다.

그런 양들은 벼랑 끝에 그렇게 가까이 헤매지 말았어야 했다거나, 양떼 가운데 머물러서 다른 목초지를 찾아 혼자 헤매지 말았어야 했다거나, 거짓 목자들의 목소리 등에 귀를 기울이지 말았어야 했다며 비판하고 비난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이 양들이 타락하는 이유에 대해 정확하게 분석할 수 있는 전문가들이 없는 것이 아니다. 슬프게도 부족한 것은 이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서 다시 무리 안으로 데려올 하나님 마음에 합한 목자들이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다.

주님의 진실한 양떼

주님께서 이 비유에서 그의 양떼를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로운 자들"(눅15 :7 )이라고 말씀하신다.

놀라운 말이다! 모든 의식적인 죄를 이겨내며 살아가는 인간들이, 주님 자신이 그들은 회개할 필요가 없음을 증명하시는 인간들이 이 땅에 있는 것이 가능한가?

그렇다, 오늘날에도 이런 경건한 자들이 이 땅에 있다. 그들은 주님의 진실한 양떼이다. 이 세상의 어떤 교회도 전부 그런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기독교의 모든 집단이 교회의 증인을 부패시키기 위해 사탄이 보낸 잠입자들과 외부인들에 의해 타락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예수님조차도 그의 "교회"에 가룟 유다가 있었다. 사도들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데마도 있었다. 하지만 이 사람들 중 누구도 그 당시에 교회에서 권력을 얻지 못했다. 그것이 예수님과 사도들이 그들의 교제의 순수성을 보존한 방법이다.

여호와께서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신 이 의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교회다. 그들은 항상 자기 자신을 판단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회개도 필요하지 않다. 그들은 하나님과 지속적으로 짧은 이야기를 나누며, 항상 하나님과 사람에게 악의 없는 양심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하나님께 조금이라도 죄된 생각이나 태도를 빨리 고백하고, 똑같이 사람에게도 아주 작은 죄의 말이나 행위를 빨리 고백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끊임없이 회개하면서 살고 있기 때문에 회개가 필요 없는 자로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이들과 이런 것들만이 주님의 참된 양떼를 구성한다.

오늘 주님이 세우고 있는 모든 교회에는 이런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로운 사람들"의 핵심이 있어야만, 이 마지막 날 주님을 위한 순수하고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다. 모든 타락한자(잃어버린 양)는 그런 경건한 사람들의 양떼들과 함께하고 교제를 도모해야 하며, 스스로를 '교회'라고 부르는 어떤 집단과도 함께해서는 안 된다.

병에 걸려 서로 물고 뜯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 즉 의롭지 못하고 스스로 회개할 것이 많은 양으로 구성된 우리 속에 길 잃은 양을 전도하고 데려와 봤자 소용없다! 그런 교제에 참여한다면 잃어버린 양은 훨씬 더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런 양들은 그런 타락한 교회 안에 있는 것보다 황야에 있는 것이 훨씬 안전할 것이다. 요즘 길 잃은 양을 어떤 교회로 데려오는 것은, 마치 아픈 사람들이 병원에 왔을 때 앓지 않았던 병에 걸리게 하는 더러운 병원에 입원시키는 것과 같다!!! 무엇보다 먼저 전도에 나가기 전에 필요한 것은, 교회 그 자체 안의 철저한 청소다.

잃어버린 아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작은아들이 모든 것을 한데 모아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났고, 거기서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탕진했다…… 그가 정신을 차리고,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당신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눅15:11-24).

이 타락한자는 다르다. 그는 자신의 것을 추구하는 아들이었고, 아버지와 가정, 가족 구성원들을 비판하며 아버지에게 반항하고 가버렸다. 그는 교회의 지도자들과 형제자매들을 비판하고, 그들의 희생으로 자신을 높이려고 한다.

이 비유에서, 앞의 비유와 달리, 우리는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아들을 쫓아가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는 잃어버린 아들이 뿌린 대로 거두게 하고, 반항의 결과로 고통을 겪도록 허용하신다. 그리고 아들이 스스로 끝내고, 자기 발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다. 그는 누구에게도 업혀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는 자신에게 진절머리가 난 채 회개하고 스스로 돌아온다. 그런 타락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그들을 뒤쫓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망할 때까지 뿌린 것을 거두게 한 다음, 깨어지고 진실한 회개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데서 나타난다.

모든 교회의 신자들은 대부분 육신적이기 때문에, 지혜가 부족하다. 그래서 이 두 종류의 타락한자를 어떻게 구별할 줄 모른다. 한편으로는, 그들은 반항적인 아들을 어깨에 메고 교회 안으로 데려오려 하고, 지도자들이 이렇게 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반면에, 그들은 잃어버린 양들을 무시하고, 찾아서 데려오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꾸짖어야 할 자를 위로하고, 위로 받아야 할 자를 꾸짖는다.

반항적인 아들과 딸들(하늘 아버지와 집을 떠난 사람들)을 먹이는 것은 그들이 결코 하나님께 돌아가지 못하도록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런 행동은 동정심이 아니라 어리석은 행동이다. 반항적인 신자들을 꾸짖는 대신 친절한 말을 하는 것은, 많은 이들이 자신의 명예와 평판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말과 행동은 이 잃어버린 아들들이 먼 나라에 더 오래,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영원히 머무르게 할 뿐이다. 먼 나라에서 망하고 지옥에 가는 이 방탕한 아들들의 피가 마침내 그들을 돕고 위로한 사람들의 손에 있을 것이다.

(주: 이 시점에서 모든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경고의 말이 필요하다: 누군가가 당신의 그룹을 떠나 다른 교제권에 함께 했다고 해서, 그가 아버지의 집을 떠났다는 뜻은 아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집은 당신의 하찮은 작은 그룹보다 훨씬 넓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비유나 위의 단락을 당신의 그룹을 떠난 사람에 대한 당신의 바리새인적 태도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하지 마라. 어쩌면 당신은 비유 속의 형과 같고, 전혀 아버지와 같지 않은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이 반항적인 아들들이 진정한 부서짐과 회개하며 교회로 돌아올 때, 우리는 그들을 환영하기 위해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하며, 그들이 비참함과 슬픔에 뒹굴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과 같은 자와 바리새인 같은 자의 차이가 뚜렷하게 나타나는 곳이 바로 여기에 있다. 비록 신뢰가 회복되고, 이 방탕한 아들들이 교회의 어떤 사역에도 회복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지만, 수용과 교제에 관한 한, 이것은 즉각적이고, 따뜻하며, 전폭적인 마음이어야 한다. 이것은 주님이 비유에서 말씀하신 그대로, 잔치를 베풀고 즐거워해야 한다!

둘 사이를 분별하다

우리 시대의 가장 큰 필요는 우리의 사랑이 지혜에 의해 인도되는 것이다.

바울의 기도는,

"너희 사랑이 진짜 분별력 있게 성장하여, 지극히 선한 것(단순히 좋은 것들에 비해)을 인정하게 되기를 기도한다"( 빌1:9 , 10 ).

이 두 종류의 타락한자들을 우리 주위에서 구별하려면, 성령의 목소리를 항상 우리 영으로 듣는 습관을 길러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바리새인의 규칙이나, 세상적인 동정심으로 살지 않는다. 우리 자신의 이성에 의존한다면, 우리는 실수를 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겸손해야 하고, 우리 자신의 인간적인 엄격함과 인간적인 사랑을 미워해야 한다.

목자와 아버지

교회에도 두 가지 유형의 리더가 있다. 좋은 지도자들은 목자와 아버지 같다. 사리 사욕적인 사람들은 고용인이나 가정교사와 같다. 타락한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따라 우리가 어느 범주에 속하는지 구별할 수 있다.

교회에서 진정한 목자가 드물듯이, 진정한 아버지 또한 드물다. 고용인들이 어디에나 있듯이, 자신의 것을 추구하는 교사들 역시 많다. 왜 그럴까? 목자가 되기보다는 고용인이 되는 것이 쉽고, 아버지보다 교회에서 교사가 되는 것이 쉽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버지와 목자가 되려면, 가슴앓이와 무거운 짐과 함께 늑대들과 으르렁거리는 적들과 맞서 기도로 싸워야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님을 섬기거나 교회를 세우기 위해 그런 대가를 치르기를 원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회를 값싸게 세우려 한다.

바울은 실패한 육신적인 고린도 기독교인들의 진정한 아버지로서 그들에게 말했다, "나는 너희를 부끄럽게 하고 싶지 않다. 그리스도 안에 셀 수 없이 많은 스승이 있다고 해도, 아버지는 많지 않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너희를 낳았다"( 고전4:14 , 15 ).

(예수님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회개한 아들을 6개월 동안 보호관찰에 처하지 않았다. 또한 하인의 숙소에서 살게 한 것도 아니었다. 아니, 그는 그를 믿었고, 그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느니라"( 고전13: 7).

진정한 아버지는 결코, 아이들이 타락할 때조차도, 결코 절대 자식들을 수치스럽게 하거나 남에게 그들의 결점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학교와 대학의 교사들은 학생들의 어리석은 행동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을 기뻐한다. 타인의 결점과 실패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보면, 우리는 우리가 아버지인지 교사인지 알 수 있다.

주님은 교회에서 진정한 아버지와 목자를 찾고 계신다.

장 12
사탄 위에 승리한 교회

예수님이 교회에 대해 말한 것은 마태복음 16장 18절과 18장 17-20절에 두 번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두 경우 모두 사탄이 교회를 상대로 싸우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첫 번째 언급에서, 예수님은 사탄이 영적 죽음의 힘, 즉 악한 영을 통해 교회를 직접 공격하는 것에 대해 언급했다. 두 번째 예에서, 사탄이 속이고 사로잡아, 무의식적으로 그의 대리인이 되는 형제를 통해 교회를 간접적으로 타락시키려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탄이 어떤 방법을 채택하든지, 주께서는 우리에게 사탄의 일을 결박하고, 사탄에게 사로잡힌 자들을 풀어줄 권한을 주셨다(마 16:19 ; 18:18; 딤후2:26 ). 우리는 교회에서 이 권위를 과감히 행사해야 한다.

신의 계시의 중요성

예수님은 여기서 베드로에게 그의 교회가 베드로가 고백한 반석(베드로의 이름의 뜻)위에 세워질 것이라고 하셨다 -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마 16:16 ). 베드로는 아버지로부터 예수님에 대한 그 계시를 받았다(17절). 우리도 예수님에 대한 계시가 필요하다.

단지 성경 공부나 전해 들은 말로 아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은 충분하지 않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다"(마 11:27 ) - 오직 아버지만이 우리에게 그 계시를 줄 수 있다. 그래야 사도들이 당대에 교회를 세운 것과 같은 토대 위에 교회를 세울 수 있다.

오직 아버지만이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 예수님은 사탄을 완전히 이기고, 이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모든 것이 그의 발아래 놓여있다.

오직 아버지만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셔서, 우리처럼 모든 점에서 유혹을 받으셨지만, 죄를 짓지 않으셨고, 세상을 완전히 이기셨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으며, 또한 예수께서 걸어가신 것처럼 우리가 땅 위를 걸어갈 수 있다는 희망을 주셨다( 요일2:6 )

인간의 어떠한 많은 주장과 추론도 결코 신의 계시를 대신할 수는 없다.

사탄의 대리인으로부터 교회를 지키신다

예수님은 그가 세운 교회가 하나의 식별 표시를 가지고 있다고 하셨다: 그것은 지옥의 문(영적 죽음의 힘)을 압도한다. 한편, 교회 자체가 영적 죽음의 힘, 즉 질투나 다툼, 경쟁의 영, 명예추구, 부도덕함, 또는 돈에 대한 사랑, 세속성, 또는 응어리, 자존심, 오만, 바리새주의 등에 의해 압도된다면, 우리는 그것이 예수님이 세운 교회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모든 교회에는 이러한 죄의 노예가 되는 육신적인 성도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교회에서 어떤 사역이나 책임이나 권력을 부여 받지 못하도록, 영원히 변방(바깥 뜰)에 있어야만 한다. 우리 중 누구도 이러한 악과 끊임없이 싸우려 하지 않는 교회의 일원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탄은 끊임없이 교회를 파괴하려고 한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대리인을 통해 교회 안으로 침투하여 이를 시도한다. 유다는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4절)고 말한다. 여호수아를 속인 기브온 사람들처럼(수9,) 오늘날 지도자들을 속이고 제자인 척하며 눈에 띄지 않게 교회 한가운데로 기어 들어간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지도자들을 속일 수 있었을까? 아마도 장로들이 재산이나 세속적인 지위에 의해 위압당하거나 뇌물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바벨론 교파에서는, 비록 지도자가 아니더라도, 세속적인 지위나 부를 가진 사람들은 그들의 집단에서 내린 결정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러나 결코 우리 가운데에는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가 조심하지 않으면, 기브온 사람들도 교회 안으로 들어올 것이다.

하나님은 때때로 "가만히 들어온" 이 사람들이 일정 기간 교회에 있게 하여, 회개하고 회심할 수 있는 시간을 주도록 허락할 수도 있다. 때때로, 하나님은 이 잠입자들이 옛날에 루시퍼가 세번째 하늘에서 수행했던 임무를 완수하도록 허락할 수도 있다. 루시퍼는 그와 함께 천사의 3분의 1을 끌고 갔는데, 그때 그는 반란을 일으켜 떨어져 버렸다( 계12: 4). 따라서 세 번째 하늘은 모든 반항적인 요소들을 깨끗이 씻어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주님은 이기적인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오도록 허락하시어, 그들이 떠날 때, 다른 불성실한 사람들도 함께 데려가서, 모든 반항적인 요소들을 교회에서 깨끗이 씻어내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의 일부분이다.

우리는 인도 교회에서 주님께서 여러 번 행하신 일에서 이것의 예를 볼 수 있다. 주님은 훌륭하고 교묘하게 상황을 정리하셨고, 교회에서 지위를 구하고, 분열을 일으키고 논쟁의 여지가 있는 영을 가진 사람들을 우리 가운데서 노출시키고 제거하셨다( 롬16:17 참조). 주님은 우리 가운데 들어온 똑똑한 사람들과 큰 사람들을 "자기들의 꾀"(고전1 :19 )에 빠지게 해서, 교회를 "장악"하려는 그들의 비밀 계획을 좌절시켰다!!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보살펴 주시고, 우리 땅에 그분의 이름에 대한 순결하고, 흠 없는 증언이 있기를 간절히 원하신다는 표시다.

그런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시려고 끊임없이 우리를 보살펴 주시는 주님을 찬양한다. "주께서 성을 지키시지 않는다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된 일이다"(시 127:1 ). 형제들이 연합하여 함께 사는 곳만이 주님께서 그의 복을 명하실 수 있다(시 133:1 ) - 오직 하나된 교회만이 지옥의 문을 이길 수 있다. 그래서 성령님은 우리 가운데 힘있게 일하시며, 그 연합 속에서 우리를 지켜 주신다.

이제 우리는 경각심을 갖고 주님께서도 이 일을 앞으로도 계속하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그가 우리에게 한 영속적인 약속은: "내가 너희 가운데에서 교만하고 의기양양한 자들을 제거하고, 너희 가운데에서 겸손하고 낮은 백성을 남겨 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보호를 받을지라"( 습3:11 , 12 )는 것이다. 교회는 겸손하고 낮은 사람들만이 연합하여 세워질 수 있다.

사람의 열심으로 교회에서 누군가를 쫓아내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니다 - 왜냐하면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약1:20 )이기 때문이다. 아니. 우리의 임무는 우리에게 오는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고, 그들에게 삶의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순결하게 자기 교회를 보존하려고 질투하시니, 그가 적시에 돈 바꾸는 자들을 성전 밖으로 쫓아내신 것처럼,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의 시간에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드러내시고 제거하실 것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8장 17- 20절에서 죄를 짓고 교회에 더러운 것을 가져오는 형제에 대해 말씀하셨다. 우리는 그런 형제가 보통 자신이 사탄의 손에 있는 도구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가 그를 얻기 위해서, 먼저 가서 그와 개인적으로 이야기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것이 항상 우리의 목표다: 형제를 얻는 것 - 주님과 그분의 교회를 위해서, 그를 사탄으로부터 끌어내는 것. 만약 그가 듣지 않는다면, 이번에는 한 두 형제와 함께 다시 그를 끌어내도록 노력해야 한다. 만약 그가 여전히 듣지 않는다면, 우리는 교회에 그에 대해 말해야 한다. 그리고 만일 그가 교회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그는 교제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그래야 그는 자신의 결핍을 깨닫고 회개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이 그의 영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는다.

우리는 사탄의 일을 묶기 위해서 기도하고 주 안에서 강해야만 한다. 그래서 인도교회에서 하나님의 일이 방해 받지 않고 진행되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또한 모든 형제들을 빠르고 완전하게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래야 사탄이 우리의 삶에 대하여 어떤 이익도 얻지 못한다( 고후2:11).

사탄의 전술을 아는 것

효과적인 영적 전쟁을 하려면 사탄의 음모와 계략, 전술을 모르면 안 된다.

사탄이 광야에서 음식으로 예수님을 유혹한 방식에서, 사탄이 우리 몸의 정당한 욕구를 통해서도 우리를 유혹하려 할 것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음식과 의복에 너무 염려하지 말라고 말했다. 음식이나 화려한 옷이 우리를 사로잡는다면, 사탄은 틀림없이 우리를 지배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교회에 있는 어린 소녀들이 예쁜 드레스에 매료되도록 훈련시키지 않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그들이 자라서 사탄에게 사로잡히지 않도록 말이다.

루시퍼는 자신(천사의 우두머리로서)이 천사들 사이에서 중요한 존재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 사탄이 되었다( 겔28:11-18 ; 사14:12-15 ). 이와같이 사탄은 많은 신자들의 마음에도 들어온다. 형제가 교회에서 자신을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는 사탄의 영에 감염된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주변의 분별없는 신자들이 그를 중요하게 느끼게 함으로써 그의 자아를 충족시킨다 해도, 그는 영적 전쟁에 비효율적일 것이다!!

한 형제가 모임에서 그의 영적 내용의 도를 넘어 한참 동안 말을 하고, 교회 안에 오랫동안 고통 받아온 가난한 사람들, 형제자매에게 성경지식을 토해낸다면, 그것은 그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고,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이 사탄의 정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그런 형제가 화를 내는 것 같은 기본적인 문제에서 조차 승리하지 못하는 것을 발견하곤 했다. 모임이 끝난 후 간략하게 하라고 권하면, 그는 기분이 상한다. 그런 형제들은 끊임없는 자기 판단 속에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만일 그랬다면, 그들은 성령이 그들의 교만함과 오만함을 유죄로 선고하시는 것을 느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악마가 그의 대리인을 만드는 것은 바로 그런 형제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를 순결하게 보존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길고 지루한 형제들에게 간단히 하라고 계속 권해야 한다 - 비록 그들이 우리의 권고에 계속 화를 내더라도 말이다. 그들의 영혼이 원통하고 심술궂은 사람은 교회 모임에서 1분 이상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 1분 안에 그들이 빨리 온전한 마음이 되고, 죄의 태도를 없애기를 바라는 소망을 고백하게 해야 한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직함을 사용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을 때, 그는 교회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을 높이려고 하는 바로 그 사탄의 정신을 경고하고 있었다. "Reverend"(목사)는 평범한 형제보다 더 위대하다. "Pastor"(목사)도 평범한 형제보다 더 위대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평범한 형제라고 하셨다. 바벨론 사람들은 그들의 직함을 유지하도록 하라. 우리는 마음속에서도 그것들을 피하자. 항상 교회에서 가장 어린 형제가 되고자 마음속으로 노력하라. 그러면 당신은 안전할 뿐만 아니라, 사탄과의 싸움에서도 효과적일 것이다.

루시퍼는 또한 하나님이 그를 처하게 한 상황에 불만족스러워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악마가 되었다. 이 불만의 정신은 사탄이 지금 전 세계 사람들의 마음 속에 퍼트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많고, 많은 신자들이 계속해서 감염되고 있다.

당신의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환경을 개선하는 데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그러나 다른 형제가 당신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때, 그를 부러워하지 말고, 그가 가진 것을 갈망하지 말고, 그에게서 어떤 선물도 기대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너에게 준 것에 만족하라. "뇌물을 싫어하는 자는 살 것이다"(잠 15:27b ). 사탄의 계략에 무지하지 마라. 월급이나 집, 피부색이나 그런 것에 불만이 있는 순간, 당신은 사탄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주게 된다.

우리는 혈과 육에 맞서 싸우지 않는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 권력자들, 이 어둠의 세상 세력들,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에 대항하는 것이다"( 6: 12 ).

3500년 전, 모세는 시내 산에서 내려와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 땅에 있는 나라에 대한 약속을 가져왔다. 그런데 2000년 전,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우리에게 천국의 약속을 가져다 주셨다. 이것이 새 언약과 옛 언약의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사탄을 대항하여 효과적인 전쟁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왕국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문제에 관해서도 절대 , 절대 인간과 싸우거나 다투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효과적인 영적 전쟁을 위한 제1의 요건이다. 사탄이 신자들의 부르심에서 곁길로 새게 하는 주된 방법 중 하나는, 신자들이 그들의 친척이나 이웃, 형제 자매, 다른 사람들과 싸우거나 다투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 싸움은 어떤 지상의 문제에 관한 것일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신자들을 천국의 위치에서 이 땅과 그 일들로 끌어내리는 데 성공하여, 사탄을 상대로 한 싸움에서 그들을 무능하게 한다.

만약 당신이 효과적으로 사탄과 싸우고 교회를 세우고 싶다면, 당신은 어떤 인간과의 논쟁이나, 또는 어떤 세속적인 것에 대해서도 결코 관여하지 않겠다고 결심해라. 우리는 마음속으로 다른 사람들과 상상 속의 싸움조차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누구에게도 단 하나의 불평을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 누구에게 내적으로 요구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를 존중하거나 배려하거나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주거나, 그들이 우리에게 사기를 치거나 속여서는 안 된다고 요구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결혼 상대에게도 그런 기대를 하면 안 된다. 그런 모든 논쟁과 불평과 요구는 그 사람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고, 그리고 그가 마음속에 사탄에게 자리를 내줬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비참한 삶을 살게 될 운명이다.

우리가 함께해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다(히4 :13 ). 우리의 모든 환경(남들이 우리를 대하는 방식 포함)은 가장 좋은 것을 위해서 사랑의 아버지가 설계하신 것이다 - 우리를 아들의 모습과 일치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에게도 불평할 여지가 없고, 언제나 하나님을 찬양할 여지가 충분하다.

찬양의 영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천국의 7가지를 잠깐 본 모습에서, 우리는 하늘의 주민들이 큰 목소리로 하나님을 끊임없이 찬양하는 것을 본다 - 때로는 천둥과 포효하는 강물소리처럼 큰소리로 찬양한다. 이것은 하늘의 분위기인데, 불평이나 요구가 전혀 없이 끊임없이 찬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성령이 우리 마음과 가정, 교회에도 가져다 주고자 하는 분위기다. 그러므로 사탄은 이 모든 곳에서 쫓겨날 것이다.

'할렐루야'라는 큰 소리로 하나님을 자주 찬양하던 뜨거운 형제(지난 세기에 살았던)의 이야기를 읽었다. 어느 날, 이런 찬양의 영에 짜증이 난 주위의 고리타분하고 죽은 기독교인들 중 한 사람이, 만약 하나님께서 그 형제를 지옥으로 보내시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다. 이에 그 형제가 대답하였다. "내가 지옥에 가면, 거기에서 '할렐루야'를 외치며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 악마가 나에게 지옥에서 나가라고 할 때까지, 내가 지옥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칭찬의 영으로 감염시키지 못하도록!!"

지옥에는 찬양의 영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곳이 없다! 지옥에 가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불평과 요구로 가득 찬 사람들이다. 그들은 땅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 땅을 떠날 때도 그 악한 본성을 가지고 간다.

사탄은 많은 기독교인들을 마비시켜서, 사탄과의 영적 싸움에서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사탄은 그들이 형제자매, 친척, 이웃, 그들의 환경, 심지어 하나님께도 중얼거리고 불평하는 정신으로 감염시키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권면에 순종할 때, 사탄을 이길 수 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3 :15 ).

"내가 권하노니 모든 사람에게 감사를 하되"( 딤전2:1 ).

"모든 일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5: 20 ).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부르신 모든 사람에게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 선택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부르신 많은 사람들, 특히 우리 집단이 아닌 다른 집단에 속한 사람들을 부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늘이 땅보다 더 높은 것처럼,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보다 높아서, 하나님은 분명하게 우리와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계신다. 우리가 지혜롭다면,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과 일치시킬 것이다.

일단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인 형제자매에게 감사하는 법을 배우고 나면,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법을 배울 수 있고, 그 다음에 모든 상황에 감사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 모든 사람과 모든 상황을 주권적으로 통치하시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가 진정으로 이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속한 나라가 천국이지 이 세상나라가 아님을 증명하게 된다. 그러면 사탄은 우리를 지배하는 힘을 잃게 될 것이다. 오직 그때 우리는 사탄에 대한 효과적인 전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요한계시록 12장 8절 에는 하늘에서 사탄과 그의 악마들이 있을 곳이 없다는 놀라운 말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의 삶에도, 우리의 마음에도, 우리의 가정에도, 그리고 교회에도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한다. 사탄과 그의 무리들은 이 장소들 중 어느 곳에서도 있을 곳을 얻지 못해야 한다 .

장 13
하나님 앞에서 누구도 자랑 할 수 없다.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전 1:29, 31 ).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시기 때문에 누구도 자신이 했거나 성취한 것에 대해 영원히 자랑할 수 없다.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며 다른 누구에게도 그의 영광을 주지 않으실 것이다( 사42:8 ).

부유한 젊은 통치자는 재산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을 떠나 갔을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처럼 어렵다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주님께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주님의 대답은 인간이 스스로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하나님만이 인간을 구할 수 있다(막 10:24-27 참조).

부자는 단지 돈 많은 사람만이 아니다. 사람은 재능, 성경 지식, 자신의 영성에 대한 의견,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 면에서 부자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매우 매우 크다. 그러나 그 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바늘구멍처럼 좁다. 낙타가 그것을 통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낙타에게 불가능한 것은 아메바(가장 작은 생물)에게 세상에서 가장 쉬운 것이다. 그것은 모두 크기에 관한 문제다.

사람을 부자로 만들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자만심이다. 그리고 자만심은 너무나 교묘하고 악하기 때문에, 인간이 그것으로부터 자신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많은 죄를 뉘우치고, 심지어 분노와 안목의 정욕과 돈에 대한 사랑과 많은 다른 죄들을 이겨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밑바닥에는, 여전히 우리의 구원과 승리를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가능하다.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다음과 같은 태도를 가질 수 있다,

"내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고 심지어 다른 교파의 기독교인들과 같지 않는 것에 대해 하나님에게 감사합니다"(눅18 :11 참조).

우리가 교만의 악으로부터 자신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할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깨닫고 겸손하게 하나님께 복종하여 우리를 구해주시기를 요청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삶의 끝에서, 우리는 "승리"와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모든 경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단지 일류 바리새인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제자들과 함께 묻는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시듯이 우리에게 대답하신다, "사람은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막10:26 , 27 ).

신약성서에 기술된 구원은 과거, 현재, 미래 등 세 가지 시제가 있다. 만약 우리가 거듭난다면, 우리는 이미 죄의 형 로부터 구원받았다. 우리는 지금 죄의 으로부터 구원받는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 주님이 영광으로 돌아오실 때, 우리는 바로 죄의 존재로부터 구원받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구원의 각 측면은 하나님의 일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알려준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엡2:8 , 9 ).

요나는 "구원은 주님에게서만 올 수 있다"( 욘2:9 )는 것을 인정했을 때, 비로소 물고기의 배에서 구원받았다. 다음 구절에는, "그 때 여호와께서 물고기에게 요나를 마른 땅으로 토해내라고 명하셨다"고 적혀 있다. 하나님은 요나가 자신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어떤 죄나 어려운 상황으로부터 스스로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때까지 높은 곳에서 기다린다. 그 때에 요나에게 하신 대로 우리에게 구원을 명하신다.

요나처럼 '긴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때, 불평하고 중얼거리는 대신, 우리가 주님께 감사하는 법을 배우고, 구원은 오직 주님에게만 나온다고 고백한다면, 우리는 더 빨리 구원을 얻을 것이다.

구원은 자기계발 프로그램이 아니다. 자기계발은 우리를 겉으로만 변화시킬 수 있다. 하나님의 일은 우리의 내면을 변화시킨다.

하나님은 인간이 어떤 일에도 결코 자랑할 수 없는 그런 방식으로 일한다. 우리가 죄로부터 완전한 구원을 경험하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죄에 대한 승리를 포함하여, 우리를 위해 하신 모든 일에 대한 자랑하는 것에서 구원받아야 한다.

우리가 더 작아질수록(우리 눈에), 바늘귀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벧후1 :11 ). 그리고 우리가 정말로 작은 존재라는 한 가지 증거는 결코 다른 사람을 경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그의 종교, 교파, 또는 빛이 부족하든(우리가 이해한 진리에 대한) 무엇이든지. 우리가 인간의 최악의 모습을 볼 때도, 우리는 스스로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더라면 나도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고 말할 것이다.

예수님은 항상 자신을 "사람의 아들" 즉, 다시 말해서 "보통 사람"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우리가 항상 스스로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죄의 형벌에서 구원을 받았다면, 그 구원을 주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이다. 지금 우리가 죄의 힘으로부터 구원받고 있다면, 그 역시 하나님이 우리에게 값없이 베푸신 자비와 은혜의 결과인 것이다. 그럼 우리가 자랑할 것은 무엇인가? 아무 것도 없다.

예를 들어보자: 만약 다른 사람들이 당신이 그린 아름다운 그림을 칭찬한다면, 당신은 당신의 성취에 대해 자랑스러워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다른 사람이 그린 것을 감탄할 때, 어떻게 당신이 자랑스러워하고 싶은 유혹에 빠질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 예를 하나님이 우리 삶에서 이루시는 구원의 일에 사용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스스로를 개선시키거나 성화시켰다면, 우리는 그것을 자랑스러워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안에서 이 일을 해낸 분이 하나님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자랑스러워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성화"의 질은 어떤가? 그것은 단지 도덕적 향상을 위한 행함인가?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살면서 신성하거나 초자연적인 것을 경험하지 못했고, 다만 작은 결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삶에서 일어난 진정한 하나님의 일이라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하나님의 본성)을 받은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값없는 선물(롬6: 23 )이다. (하나님의 본성은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없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값없는 선물의 결과라면, 모든 자랑은 배제된다.

그러니 당신이 죄를 이겨낸 것이 자랑스럽다면, 그럼 당신이 직접 만들어 낸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당신의 승리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고 확실히 진짜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을 빨리 버릴수록 좋다. 대신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기를 구하라.

바울은 자신이 만든 의를 갖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의(하나님에 의해 생산된)를 가지고 있는 것이 발견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빌3 :9).

로마서에는, 복음 메시지가 장마다 발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처음 몇 장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 제1-3장 - 인간의 죄가 명백해졌다.
  • 제4장 - 믿음에 의한 칭의(하나님에 의해 의롭다고 선포함)
  • 제5장 -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유가 있다.
  • 제6장 - 우리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게 되었다.
  • 제7장 -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고, 기독교인의 삶에 대한 율법적인 태도로부터 자유롭다.
  • 제8장 - 우리는 이제 성령 안에서 살 수 있고, 매일 우리의 정욕을 죽인다.

그런 구원의 결과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정복자 그 이상이다"(롬 8:37 )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끝에 있는 위험은, 우리가 이 구원의 일이 우리 자신의 성취라고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 이어 세 개의 멋진 장들이 나오는데,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일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장들은(롬9-11장) 주로 옛 언약 아래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다루심을 언급하고 있지만, 성령님은 이러한 진리를 오늘날 우리의 삶에 적용하고자 한다.

로마서 9장 - 하나님의 주권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스마엘과 이삭은 같은 아버지와 같은 집에서 자랐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 중 오직 한 명만을 선택했다 - 이삭(롬 9:7 ). 그것은 하나님이 편파적이어서가 아니라 주권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우주의 창조자로서 정확히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어떤 일을 위해 좋아하는 사람을 선택할 수 있는 절대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다. 아무도 그의 권리에 의문을 제기할 수 없는 것은, 그가 그의 즐거움을 위해 만물을 창조했기 때문이며, 바울이 말한 대로(이 대단히 아름다운 세 장 끝에)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11:36)라는 것이다.

이삭에게는 에서와 야곱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같은 부모와 한 집에서 자랐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생 야곱만을 택하셨다. "쌍둥이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선한 일도, 나쁜 일도 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 때문이 아니라,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롬 9:11 , 12 )고 했다. 하나님의 이 행동에는 부당한 것이 없었다, 그는 우주의 통치자였기 때문이다.

모세와 바로는 둘 다 이집트에 동시대에 같은 궁전에서 살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그의 예언자로 키웠다. 바로는 그의 마음의 완고함과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내리실 심판으로 인해, "너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고 하나님의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기 위해"(롬 9:17 )세워졌다.

이 세 가지 예에서, 우리는 사람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본다. 우리는 구원에 있어서도 같은 주권이 작용하는 것을 볼 필요가 있다. 왜 하나님은 당신의 친척(당신의 형제, 자매, 삼촌 등)이 아닌 당신을 택하셨는가? 당신이 그들보다 낫기 때문이었나? 확실히 아니다. 아마도 당신은 그들보다 더 큰 사기꾼이고 위선자였을 것이다. (야곱처럼). 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을 선택했다. 그것은 순전히 자비와 은혜다.

이 모든 것을 비추어 볼 때 우리는 뭐라고 말할까? 우리는 오직 이 전능하신 주권자 하나님 앞에 절을 하고 온 마음을 다해 그분을 경배하며, 그분만이 가치 있고,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100%) 그의 은혜 때문인 것을 인정하게 된다.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우리가 받아들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일은 전적으로 그가 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자녀들을 주권적으로 선택했다는 사실만큼 인간을 겸손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그래서 영리한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이기 어렵고, 그것에 맞서 싸우면서, 성경이 의도하지 않은 것을 의미하도록 성경을 왜곡하려 한다.

사람이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로(혹은 거룩하게 되기로) 결심하거나, 성실하게 달려가기로 결심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를 베푸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 얻는 회개를 주시고"(행 11:18 ),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 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 빌2:13 ).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자랑할 수 있을까?

로마서 9장 16절 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것은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에게 달려있다".

고린도전서 4장 7절 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들이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받았으면 왜 받지 아니한 것 같이(스스로 한 것처럼) 자랑하느냐?"

이 두 구절을 기억하고 항상 마음에 간직하라. 그 말씀은 당신을 겸손하게 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거듭남은 육신의 뜻(인간의 결단)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신의 결단)에 의해 이루어진다(요 1:13 ).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한 것이다"(요 15:16 ). 우리는 그 사실을 알고 있는가?

우리는 종종 주님을 우리의 구원자로 받아들인 것은 바로 우리였고, 그것이 우리와 불신자들 사이에 차이를 만들었다고 상상한다. 그러므로 우리를 선택한 것은 하나님이셨음을 기억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하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했다 - 사실, 심지어 그가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엡 1:4 ).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의 구원은 100%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그래서 언젠가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주님과 그의 나라를 위해 놀라운 일을 했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것에 대해 잊기 위해 최선을 다해라. 하나님이 당신에게 건강, 힘, 지성, 은사, 재능, 기회, 그의 말씀과 그분 자신에 대한 지식 등을 주지 않았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임을 인식하라. 주신 목록은 끝이 없다. 그럼 어떻게 자랑할 수 있는가?

우리가 얼마나 영적이 되었는지, 주님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에 사로잡혀 있을 때, 우리는 이미 바리새인이다. 진정한 제자는 항상 예수님의 모습으로 사로잡힌 사람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설명하지 않으시는 많은 일들이 있다. 그의 대답이 "아니"인 기도가 많은데, 우리는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 컵에 인도양을 채우는 것만큼이나,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시는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지혜는 바다와 같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작은 컵에 불과하다.

성경에 이르기를, "너희들이 누구인데 하나님을 비판하느냐?"( 9: 19 , 20 - TLB). 우리가 겸손해질 때, 하나님의 방식에 대해 불평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다루심을 이해하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의 주권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복종할 뿐이다.

로마서 10장 - 하나님의 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큰 열심을 가지고 있었다(롬 10:3 ) - 그러나 하나님의 의가 그들의 노력으로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열심이었다. 이것이 본질적으로 그들이 실패한 곳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의를 추구하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실패하는 부분이다. 그들은 거룩해지기를 원하지만, 인간적인 열심으로 그것을 뒤쫓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거만하고 오만하게 된다.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고, 자기들의 의를 세우려 하니, 이스라엘은 스스로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았다"(롬 10: 3).

우리 자신의 의(우리의 가장 훌륭한 행함들)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더러운 누더기와 같다( 사64:6 ). 그것들은 하나님이 보기에 혐오스러운 것이다 - 그래서 그것들은 버려야만 한다.

형(탕자 이야기에서)을 바리새인으로 만든 것은 자기 의였다. 비유의 앞부분에서, 아버지의 집 밖에 있는 사람은 바로 동생이다. 그러나 이야기의 마지막에는, 바깥에 있는 사람은 형이고, 반면에 동생은 안에서 옷을 입고 기뻐하고 있다. 예수님은 끊임없이 자기 의를 모든 죄 중 가장 나쁜 죄라고 드러내셨다 - 간통이나 살인보다 더 나쁜 죄. 그러나 극소수의 기독교인들만이 이 죄의 심각성을 이해하고 있다.

자기 의는 기독교인이 다른 기독교인을 깔보게 하고, 설교자가 자신을 먼저 판단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설교하게 만든다. 그런 태도는 마치 하나님이 보기에 더러운 누더기 같다.

당신의 의는 하나님이 당신을 그의 본성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당신 안에서 행하신 것인가, 아니면 당신이 이를 악물고, 매일 아침 4시 30분에 일어나 금식하고 기도하며, 요가적 자기절제를 통해 달성한 것인가? 겸손이 시금석이다.

하나님은 그 어떤 육체도 영원히 그분 앞에서 자랑할 수 없다는 것에 단호하시다. 그러므로 당신의 노력으로 만들어 낸 의는 마지막 날에 아무런 가치도 없을 것이다. 당신은 지금 그것을 깨닫는 게 좋을 것이다.

우리의 기독교 생활이 시작될 때, 하나님은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 때문에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신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수조차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은 우리를 점점 더 그의 본성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성화시킨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도록, 유혹의 순간에도 충실하고 굽히지 않도록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 바로 그분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그의 포도밭에서 쓰임 받도록 성령의 능력과 재능을 주시는 분이 바로 그분이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구원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안다 - 100%.

"하나님은 그분을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바 되고, 그분에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내신다"(롬 10:20 ).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알지도 못하는 말들이 신약성경에서 발견된다. 바울은 거기에서 이사야가 그런 말을 한 것이 매우 대담했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사야가 매우 대담했다고 확신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발언은 모든 시대에 자기를 의롭게 여기는 바리새인의 기질과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들은 그들의 구원이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고 끝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의 창시자이며(그들의 삶 속에서 그것을 시작하신 분), 그들의 믿음의 완성자이다(완성하실 분)( 히12:2 ). 그래서 그들은 전혀 자랑할 것이 없다.

로마서 11장 - 하나님의 성실하심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은 마침내 이스라엘을 배척하셨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했던 약속은 무효화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성령은 사도 바울을 통해,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다"(롬 11:2 )라고 매우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어떤 자들이 믿지 않았다고, 그들의 불신이 하나님의 신실함을 없어지게 하지 못한다"(롬 3:3 ).

하나님은 그의 약속에 충실하시며, 그래서 아브라함의 씨앗을 25세기 이상 여러 나라를 떠돌아다닌 후 금세기에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오셨다.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롬11 :5 ). 이것은 하나님이 약속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비록 지금은 이스라엘이 완고함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롬11 : 25 ,26).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에게도 자비롭다.

새 언약 아래 있는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그의 성실함에서 우리의 위안을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의 자손에 관하여 하신 약속은 하나도 실패하지 않았고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의 자녀인 우리에게 한 약속은 절대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성실함은 우리 삶의 끝까지, 그리고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를 지켜줄 것이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빌1 :6).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

로마서 12장 - 유일한 적절한 반응

우리가 고려했던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에 비추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가 주의 선함을 이용하고, 나아가서 더욱 죄를 지을까. 그렇게 하나님의 선과 자비를 이용하는 것은 우리와는 거리가 멀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를 볼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적절한 대응은 다음과 같다고 말한다:

1.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살아 있는 제물로 바치는 것.

2. 매일매일 마음을 새롭게 하여, 세상처럼 생각하지 않고 그분처럼 생각하는 것.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삶을 위한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증명하고 성취하는 것이다(롬 12:1 , 2 ).

하나님께서 너무나 자비로우시고 용서해 주시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과 은혜를 이용할 생각만 하고, 따라서 죄를 가볍게 여기는 비열하고 이기적인 기독교인들이 있다(언제나 그랬듯이). 그러나 조금이라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신자라면, 다시는 죄를 짓지 않고, 평생 주님을 위해 살기를 간절히 바랄 것이다, 다음을 생각하면서:

1. 주님께서 회심하지 않았던 시절에 범한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셨다;

2. 주님은 자신이 회심한 뒤에 저지른 많은 죄(알고서 저지른 죄 포함)를 더욱 자비롭게 용서해 주셨다;

3. 주님은 더 이상 과거의 죄와 잘못을 기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다;

4. 주님은 다른 사람의 눈으로부터 그의 죄를 덮어 주시고, 따라서 그의 위엄을 지켜 주셨다;

5. 주님은 사탄이나 사탄의 대리인(그의 과거 실패를 아는 사람)이 그에 대해 제기하는 고발을 듣지 않으신다;

6. 주님은 그가 받을 자격이 없는 면에서 그를 거듭 축복해 주셨다;

7. 주님은 언제나 사탄에 대항하여 그의 편이 되신다.

그런 사랑은 아무리 굳은 마음일지라도 깨뜨리시고, 앞으로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만 온전히 살 수 있게 한다. 우리자신을 주님께 바치는 것은 주님이 우리를 불과 심판으로 위협하시기 때문이 아니다. 아니.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하나님의 엄청난 친절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자신의 주인이 "딱딱하고 엄한 사람"( 눅19:21 )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의 달란트를 묻어버렸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지만, 그는 그것을 믿었기 때문에 그의 인생을 낭비했다. 그와 같이 많은 신자들도 하나님을 딱딱하고 엄격하고 까다롭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 땅의 삶을 낭비한다. 심판의 날에, 그들은 낭비된 삶과 달란트를 꺼내서 하나님께 보여 줄 것이다.

하나님은 흥을 깨뜨리는 분이 아니다. "그는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습3:17 ). 그는 우리에게 친절하고 자비를 베푸시며, 우리의 삶에 최고의 것을 주시려 한다. 그는 오직 선하고 완벽한 선물만 주시고, 그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아버지보다 더 친절하고 사랑스럽다. 그는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주고, 무엇보다도 성령의 선물을 주신다. 그는 모든 가능한 면에서 우리의 삶을 영광스럽게 만들고 싶어하신다.

사탄이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해 잘못된 모습을 그리게 해서는 안 된다. 또한 사탄이 우리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잘못된 모습을 나타내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딱딱하고 근엄한 분이라고 상상하는 사람들은 대개 그들의 결혼 상대자와 자녀,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딱딱하고 근엄하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아주 확신해야만 한다, 그래서 사탄은 우리를 더 이상 비난하지 못하고, 우리는 비난 받는 감정을 느끼지 않게 된다.

이기는 자의 비밀은, (계시록에 계속 언급되고 있는), 요한계시록 12장 11절 에 기술되어 있다:

"그들은 그를(사탄 - 그리고 그의 고발들 - 10절 참조) 이겼다.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다".

여기 순서를 주목해라: 그들은 먼저 그리스도의 피가 자신들을 깨끗하게 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들은 사탄에게 그리스도의 피가 그들에게 한 일을 말했다. 그것은 "그들의 증언의 말"이었다. 그 후에야 그들은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랐다 ("그들은 심지어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않았다"). 그 순서는 절대 뒤집으면 안 된다. 우리가 먼저 비난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않았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항상 우리 내면을 들여다보고 우리가 얼마나 부패했는지 보는 것으로 더 거룩해지지 않는다. 아니,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경주를 해야 하고, 우리 자신의 내면을 보지 말아야 한다( 히12: 1, 2 ).

하나님의 말씀은 거울과 같다( 약1:23 ).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울을 주셨으니, 성령은 먼저 그 거울을 통해 예수님의 영광을 보여주실 것이다 - 우리 자신의 부패가 아니라(고후3 :18 참조). 예수님의 영광을 점점 더 볼수록, 우리가 얼마나 그와 다른지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다, 여러 영역에서.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낙담시키지 않을 것이다, 성령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려고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한 달란트(하나뿐인 삶)를 이용하여 그분께 열 달란트를 바치자.

장 14
마지막 때에 교회에 대한 경고

"(적그리스도의) 세력은 성소를 더럽히고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할 것이다....그는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하는 자들에게 아첨하여, 그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것이다.

"그러나 자기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해져서 큰일을 할 것이다. 그리고 영적으로 지혜로운 자들이 그 시대에 폭넓게 가르치는 사역을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며, 그들 중 많은 수가 불과 칼에 의해 죽거나, 감옥에 갇히고 약탈을 당하게 될 것이다.

"결국 이런 압박은 가라앉을 것이고, 어떤 경건하지 못한 사람들이 와서,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시늉을 하며, 다만 그들을 이용하려 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에 가장 은사가 있는 자들은 그 때에 걸려 넘어질 것이다( 단11:31-35 - TLB).

이것은 마지막 날을 가리키는 구절이며, 따라서 교회에 대한 많은 경고들이 있다 - 왜냐하면 적그리스도의 영은 교회 안에서도 발견될 것이기 때문이다(요일2: 18 ,19).

불순물로 교회를 더럽히다

적그리스도의 영은 "성소를 더럽히려고 한다"(31절). 사탄으로부터 거룩함과 의의 메시지에 대한 엄청난 반대가 있다. 적그리스도의 영은 또한 "언약 무시"(32절)를 부추긴다. 새 언약은 죄에 대한 승리의 삶을 약속한다. 그러나 적그리스도는 신자들에게 그런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인도 전역에서 지난 20년간 교회로서 우리의 사역이 반대 받은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거룩함과 의를 선포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죄가 우리를 더 이상 주장하지 못한다"( 6: 14 ), "돈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눅16: 13 ),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고 경멸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마 5:22 ),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또한 지옥에 던져질 위험에 처해 있다"( 5:28,29) 등을 선포했다. 예수님의 이런 말씀은 대다수의 신자들에게는 달갑지 않은 말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를 반대해 왔다.

우리는 기독교 사역자들을 위한 비성경적 급여 체계(1세기에는 들어보지 못한 것)와 인도에서 기독교의 일을 특징짓는 돈을 구걸하는 비성경적 행위를 반대해 왔다. 이것은 설교를 통해 생계를 유지하고, 그로 인해 개인적인 제국을 건설하는 자들의 분노를 샀다.

우리는 또한 교회에서의 개인 숭배 문화, 교황주의, 교파주의, 인도 교회에 대한 서구의 지배, 그리고 이곳 교회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서구 지도력에 대한 불건전한 의존에 반대해 왔다. 이것은 그 광신주의 단체들을 격분시켰다.

사탄의 목적은 어떻게든 하나님의 성소를 타락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내부로부터 파괴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군대"( 단11:31 )를 교회 안에 둔다. 기독교의 역사는 20세기 동안, 어떻게 이 세력들이 집단 마다 부패하고, 운동마다 타락시키는 데 성공했는지 보여준다.

교회가 실패한 주요 원인은 하나님이 교회에서 임명한 파수꾼들이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탄은 어떻게 이 파수꾼들을 재우는데 성공했을까? 어떤 경우에는, 그들이 어떤 사람들(특히 부자와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지 않도록 진실을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만든다. 어떤 경우에는, 아내를 즐겁게 해주는 사람이 되게 만들고, 그리고 돈과 좋은 음식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들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는,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기준을 지키려다 보니, 파수꾼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메시지에 대한 끊임없는 반대에 직면하는 것에 싫증을 느낀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그들의 메시지를 부드럽게 했다.

히브리서 12장 3절 에서는,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를 거역한 일을 참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라"고 한다. 예수님을 반대하는 이 죄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이스라엘에서 매춘부나 살인자, 도둑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로마인도 그리스인도 아니었다. 아니. 예수님을 끊임없이 반대했던 죄인들은, 이스라엘에서 성경을 열광적으로 전하는 설교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질투하여 마침내 그를 죽였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간다면, 오늘날에도 같은 집단의 반대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가장 큰 반대는 하나님의 기준을 낮추고 교회를 타락시킨 설교자들로부터 나올 것이다. 이들은 우리를 반대하는 사탄의 주요 요원들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런 끊임없는 반대에 직면하는 데 지치고, 낙담하기 매우 쉽다.

사탄은 "박해를 통해 하나님의 성도들을 지치게 하려 한다"( 단7:25 ). 오직 이기는 방법은 예수님이 적들에게 죽임을 당할 때까지, 끊임없이 반대에 부딪히신 예수님의 예를 보는 것이다. 우리 역시 기꺼이 "죽기까지 충실"해야 한다. 삶이 끝날 때까지 반대에 직면하기를 꺼리는 설교자는, "사람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아첨하는", 귀를 간지럽게 하는 설교자로 끝나게 될 것이며(단11 :32 ), 타협하는 발람으로 일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다.

교회로서의 우리의 소명은 우리 가운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하나님의 기준을 지키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적그리스도의 세력을 경계해야 한다.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교회를 하나님의 은혜로 그가 있는 삼 년 동안 순결하게 보존하였다. 그러나 그는 떠날 때에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그가 떠난 뒤에 부패가 올 것이 확실하다고 했다(행 20:29 - 31 ). 그리고 우리가 에베소 사람들에게 보낸 두번째 편지에서 읽었던 처럼, 아니나 다를까, 그렇게 되었다(계2:1-5) .

매일 드리는 희생제사

우리는 다니엘 11장 31절 에서, 적그리스도가 폐하려는 것 중 하나가 "매일 드리는 제사"라는 것을 읽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끊임없이 매일 드리는 제사에 대해 말씀하셨다 - 그 자신이 살아오면서 겪었던 매일의 희생: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눅9:23 ).

이 메시지는 사탄에 의해 기독교에서 제거되었다. 그래서 성소는 타락했다. 어느 교회에서나 십자가의 설교가 사라지면, 곧 죄와 세속성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은 찢어진 휘장(십자가에 못 박힌 육신)을 통해 놓여 있다. 가장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는 다른 길은 없다. 그것이 예수님을 위한 길이었다 - 그리고 우리 또한 다른 길이 없다.

당신은 어제 십자가를 짊어졌는가? 아마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어제 당신에게 주어진 악에 대해서만 충분한 것이었다(마6:34).

오늘은 또 다른 날이다. 그리고 오늘도 당신의 몸과 의지를 희생제물로 바쳐야 한다. 오늘 당신은 정욕, 분노, 교만함, 돈에 대한 사랑, 인간의 명예에 대한 사랑, 억울함 등에 죽어야 한다. 이 욕망들은 여전히 당신의 육신에 존재하며, 당신이 살아 있는 한 당신과 함께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이 땅의 삶이 끝날 때까지, "매일 드리는 희생제사"가 필요한 이유이다.

당신의 삶에는 매일 드리는 희생제사가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적그리스도의 영은 분명히 당신을 속였다.

예수께서는 물에서 세례를 받는 것과 동시에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셨다. 요단 강물에 잠긴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장례를 받아들이는 것을 상징했다. 이것은 우리에게 성령의 기름부음 아래에서 사는 길은 바로 자기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임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었다.

세례에서, 우리는 하나님 이름으로 물속으로 눌리고, 그것을 받아들인다. 우리를 물속으로 밀어 넣는 사람이 우리를 그 물에서 꺼내줄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아래로 눌리고 억압받는 삶의 상황에 직면할 때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위해 우리를 죽음에 넘기시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후4 :10 , 11 ). 그리고 우리가 죽음을 우리의 삶에 받아들일 때, 우리를 죽음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또한 살리실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던 이들이 그들의 삶과 교회에서 매일 드리는 희생을 유지했다면, 그들은 우리 땅에서 하나님을 위해 엄청난 힘과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탄은 십자가의 길 대신, 방언, 치유, 감정의 작용,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종교 활동을 강조하도록 함으로써, 그들 대부분을 곁길로 새게 하는데 성공했다.

사탄을 이기고, 우리의 삶과 가정과 교회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존하는 유일한 방법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어떤 타협도 없이 매일의 희생을 유지하는 것이다.

몇 년 동안 『HIDDEN TREASURES』 논문을 읽은 사람들은 "매일 십자가를 지라"는 이 메시지를 반복해서 읽었다. 그러나 그들 중 그것에 사로잡힌 사람은 거의 없다.

헤롯은 "세례 요한의 말을 즐겨 듣곤 했다"( 막6:20 ). 세례 요한은 지루한 바리새인들과는 달리, 듣기에 흥미 있고, 열정적인 설교자였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같은 이유로 『HIDDEN TREASURES』를 즐겨 읽는다. 그러나 그들은 헤롯왕보다 더 영적이게 되지는 않는다!!

설교를 위해, 다른 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신선한 요점을 얻기 위해 『HIDDEN TREASURES』를 읽는 이들도 있다. 하나님은 타인의 메시지를 훔치는 자들을 치신다고 말씀하셨다(렘 23:30 ), 그들 스스로를 판단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필요에 대해 말씀하시도록 하는 대신, 언제나 설교를 위해 요점을 찾고 있는 설교자들에게는 희망이 거의 없다.

예를 들면, 누군가가 당신이 마땅히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존경을 하지 않았거나, 혹은 교회에서 어느 정도 책임 있는 위치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당신이 기분이 상했다면, 그것은 당신의 삶에서 매일 드리는 희생이 없어졌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만약 자아가 죽었다면, 당신은 언제든지 어떤 일에나 누구에게도 결코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

다니엘 11장 32절에서, 적그리스도의 영에 영향을 받은 자들이 부드러운 말(아첨)을 하여 사람들을 자기 자신에게 끌어들일 것이라고 읽는다. 역사상 모든 거짓 예언자의 분명한 특징은 아첨이었다. 그리고 모든 진정한 예언자의 분명한 특징 하나는 질책이었다. 거짓 예언자들은 사람들에게 아첨하여 그들을 자기 집단에 끌어들이기 위해서, 또는 그들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서, 또는 명예를 얻기 위해서, 또는 돈을 얻기 위해서 등, 이 거짓 예언자들 중 많은 사람들은 그들에 대한 개인적인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사람들과 성실히 연락을 주고받는다. 그러나 그들의 편지에는 질책과 교정의 말들(우리가 요한계시록 2,3장과 서신들에서 읽은 바와 같이, 주님과 사도들의 편지들이 담고 있는 것과 같은)이 들어 있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감사와 칭찬과 아첨의 말만을 포함할 것이다.

부드러운 말은 교만과 자기 만족으로 당신의 마음을 더럽힐 뿐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한편으로 질책하는 말은 당신의 마음을 맑게 하고 순수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예수님은 "내가 사랑하는 자를 내가 꾸짖고 훈육한다"( 계3:19 )고 하셨다. 질책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 중 하나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예언자를 보내셔서 우리를 꾸짖으실 때,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저버리시면, 교회를 꾸짖을 "예언자가 더 이상 그 가운데 있지 않을 것이다"(시 74:1 , 9 ). 대신, 부드러운 말을 전하는 설교자들이 있을 것이다(딤후4: 3 ,4).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처하게 되는 슬픈 상황이다.

요한계시록 2,3장에서, 일곱 교회 가운데 다섯 교회가 나쁜 상태였음에도, 주님이 아직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증명하는 것은 주님이 예언자(사도 요한)를 보내서 그의 서신을 통해 그들을 꾸짖고 바로잡게 한 사실에서 볼 수 있다.

요한은 장로들(감독자들)에게조차 강한 말을 했다 - "너는 처음 사랑을 버렸다....영적으로 죽었다....너는 비참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었다"와 같은 말이다. 만약 그 장로들과 교회들이 그 질책의 말에 반응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버림받을 것이다.

주님이 일단 "그 촛대를 옮기시면"(계2: 5), 더 이상 교회를 꾸짖기 위해 그의 예언자들을 보내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거짓 예언자들이 그 자리를 이어받을 것이고, 일요일마다, 모임에서 부드러운 말들을 정기적으로 듣게 될 것이다!! 이것은 교회마다, 대대로, 지난 20세기 동안 계속되어 왔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다.

"하나님을 아는 자, 강한 자,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할 자"(32절)가 크게 필요한 그런 때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매일 드리는 희생을 통해서이다. 하나님이 계시는 지성소로 들어가려면 휘장을 찢어야 한다. 그러니 매일 드리는 희생이 당신의 삶에서 사라지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말라.

만약 당신의 남편이나 아내가 당신을 나쁘게 대한다면 - 죽어라. 당신이 부당한 고통을 받을 때 - 죽어라. 만약 당신의 형제들이 당신을 배반하고 미워한다면 - 죽어라. 당신이 자기중심적 삶에 죽을수록, 하나님과 예수님을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적에 대한 올바른 태도

비록 사람들이 너를 해치려고 계획한다 하더라도, 너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너희를 보살펴 주실 것이며 너희의 원수들도 상대할 것이다.

"너를 지키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잠도 자지 않는다"( 시121:3 , 4 ).

그리고 하나님은 항상 깨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잠을 잘 여유가 있다.

에스더서에서, 우리는 하만과 그의 아내가 밤새도록, 모르드개를 모함하고 음모를 꾸몄으며, 모르드개를 매달기 위해 75피트의 교수대를 준비하는 것을 읽었다. (사실 10피트의 교수대는 사람을 교수형에 처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75피트 높이로 만들었다. 그래서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 교수형을 볼 수 있게 해서, 모르드개가 더 큰 굴욕을 당하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깊이 잠들어 있었고, 하나님이 그를 돌보셨다. 하만이 모르드개를 위해 준비한 교수대는 마침내 하만이 스스로 매달린 교수대가 되었다(에 5:14 ;7:10). 하나님은 사탄의 형세를 역전시키는 데 전문가이시다.

당신의 적들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당신에 대한 악담을 하고, 당신에게 해를 입힐 계략을 꾸미고, 심지어는 당신을 "매달"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들 자신이 당신을 위해 준비한 교수대에 매달릴 것이다.

우리는 교회에서 우리를 상대로 은밀하게 계략을 꾸민 자들이 언제나 자기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을 몇 번이고 보아 왔다. 우리는 그런 형제들이 우리를 위해 준비한 교수대에 매달리는 것을 보고도 전혀 즐겁지 않다. 우리는 항상 그들을 용서하고 축복해 주었으며, 그들이 회개하여 교회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은 바뀔 수 없다: "남을 위해 덫을 놓는 사람은 스스로 그 덫에 걸릴 것이다. 만약 당신이 누군가에게 돌을 굴리면, 그것은 다시 굴러와서 당신을 짓눌러버릴 것이다.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시다"(잠 26:27 - TLB; 고전3:19 ).

ü 사람은 그가 뿌린 것을 거두게 된다.

ü 그러면 사람들이 우리를 교수형에 처할 계획을 세울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ü 자라!!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127:2).

사도행전 12장에서, 우리는 헤롯이 베드로를 투옥하고, 다음날 아침 그를 죽이려고 계획하는 것을 읽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날 밤 베드로에게 숙면을 취하게 했다(6절). 여호와의 천사가 나타나서, 베드로를 깨워 쇠사슬을 풀어 주고, 집으로 돌려보냈다(7절). 그러나 그것이 이야기의 끝이 아니다. 여호와의 천사가 두 번째로 땅을 방문하여, 이번에는 헤롯을 쳐서 죽였다(23절)!! 하나님은 사탄의 형세를 거듭 역전시킨다.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했다. 그런데 유다는 어떻게 됐을까? 그는 예수가 죽기도 전에 죽었다(마 27:5 ).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당신을 해칠 음모를 꾸미는 하만이나 헤롯, 심지어 가룟 유다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아무도 하나님과 맞서 싸울 수 없고, 또는 하나님의 교회와 맞서 싸울 수 없으며, 성공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지만, 그들은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모두 실패했다. 우리는 승리 편에 있다.

박해는 피할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결코 박해나 죽음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니엘 11장 33절에서, 마지막 때에, 경건한 사람들이 공격 당하고, 감금되고, 살해될 것이라고 읽었다. 하나님의 참된 종들은 항상 박해를 받는다.

야고보는 헤롯 에게 살해당했다(행12:2) . 그를 풀어주러 온 천사는 없었다. 아벨은 살해되었다. 구약성경의 모든 참된 예언자는 박해를 받았다(행7 :52 ). 세례 요한은 참수당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혔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다. 바울은 참수당했다. 역사는 우리에게 베드로 자신이 마침내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말해준다 - 그리고 그 때 어떤 천사도 베드로를 구하러 오지 않았다. 우리가 아는 바로는, 요한만 빼고, 모든 사도들이 죽임을 당했다. 많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선교사들이 이교도의 땅에서 살해되었다.

성경은 예수님이 오기 전에 교회가 큰 고난을 겪게 될 것이며, 그 기간 동안 하나님의 가장 훌륭한 성도들 중 많은 수가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계13:7 ). 하나님의 가장 훌륭한 성도들 중 몇몇은 심지어 우리 생전에 공산주의 땅에서 죽임을 당했다.

하나님의 목적은 사람마다 다르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오직 지상의 삶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걷고자 한다면, 당신의 사명이 끝날 때까지, 죽지 않을 것이다.

"영적 명철함을 가진 자들은 마지막 때에 폭넓은 가르치는 사역을 하게 될 텐데.....하나님 백성의 현명한 지도자들은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지혜를 나눌 것이다"( 단11:33 - TLB & GNT).

한편, 마지막 날에도 "주님이 미워하시는 자, 형제들 사이에 불화를 뿌리며 다니는 자"(잠6: 16-19 )가 많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과 싸우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엡 6:12 ). 우리는 오직 사탄과 싸우며, 모든 인간 적수를 상대하는 것은 주의 천사에게 맡긴다.

수년 전에 나는 어떤 문제에 관해서도 어떤 사람과도 결코 싸우지 않겠다고 결심했고, 나는 그 결정을 결코 후회한 적이 없다. 누가 와서 시비를 걸면, 나는 잠자코 있든지, 아니면 일어나서 가버린다. 사람들이 편지로 나를 고발할 때, 나는 답장을 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에게 답하는 것은 순전히 시간 낭비다. 난 그들을 용서하고, 축복하고, 사랑하고, 그들을 내버려둔다 . 나는 사탄과 싸우는 데 나의 에너지를 집중하고 싶다. 나는 하나님이 나보다 더 이 고발자의 요원들을 잘 다룰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원수 갚는 것은 그의 것이다(롬 12:19 ).

다니엘 11장 34절 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악한 자들과 함께 그들의 위선에 동참할 것"이라고 더 읽었다. 많은 사람들이 박해의 시대에 위선자가 될 것이다. 그들은 교회 한가운데 있을 때는 전심인 형제처럼 행동할 것이며, 스스로를 판단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세속적인 친구들과 회심하지 않은 친척들 틈에 있을 때는, 그들은 인간의 명예를 추구하고 그들과 함께 행동하며 그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방식으로 말을 할 것이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교회 안에서 그들 안에 쓴 뿌리로 많은 다른 사람들을 더럽게 했다(히 12:15 ).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 모두에게 오랫동안 고통 받으셨고, 아직도 그들은 모두 교회에 있다. 그러나 때가 되면, 그들 역시 모두 드러날 것이고(회개하지 않으면), 그러면 그들 역시 그들 앞의 다른 사람들처럼 떨어져 나갈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면, 우리는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남아있을 것이다( 3 :17 ) - 그리고 교회에도 뿌리를 내릴 것이다. 남들이 우리를 미워하고 배반하여 그들의 집에서 쫓아낸다면, 우리는 그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며 그들을 섬길 또 다른 기회를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그 기회가 생기면, 우리는 그것을 빨리 잡을 수 있을 것이고, 그들을 우리의 능력껏 축복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도 우리를 악하게 만들 수 없을 것이다. 만약 다른 사람의 악한 행동이 우리를 악하게 만든다면, 그때 우리도 그와 같은 사탄의 종이 되는 것이다.

마지막 날에는 "지혜로운 자들도 넘어질 것이다"( 단11:35 )라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그들이 스스로 겸손하고 스스로 판단한다면, 그들에게도 희망이 있을 것이다. 그런 다음 "연단을 받아, 정결하게 되며 희게 되어"(35절)질 수 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판단하지 않는 자는, 한 때 하나님의 길에 대한 통찰과 이해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사탄의 손에 넘어 갈 것이다. 오늘은 은혜의 날이며, 회개하고 스스로 판단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영적으로 위대한 높이까지 오를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은 정직해야 하고 빛 가운데 걸어가야 한다.

이 연단하고 정결하게 하는 일은 "마지막 때"( 단11: 35)까지 계속될 것이며, 이는 하나님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모습을 본받게 하려는 그의 목적을 이루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땅에서 편안한 시간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계속해서 고난을 겪게 될 것이다.

다니엘 사역과 루시퍼 사역

다니엘(이 예언을 쓴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의 세대에 쓰실 수 있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열일곱 살 청년 시절, "자신을 더럽히지 않기로 마음속으로 결심 했다"(단1: 8).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는 젊은 다니엘이 주님께 대한 입장을 표명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들도 또한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정하는데 담대하게 되었다(단 1:11 ). 그들은 스스로 태도를 정하는데 용기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니엘의 태도를 보았을 때 대담해졌다. 오늘날에도 그러한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 혼자서는 주님에 대한 태도를 정하는데 대담함을 갖지 못하고, 다니엘이 입장을 취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때 그들은 다니엘과 함께 할 것이다.

당신이 그런 다니엘이 되겠는가? 당신은 "나는 내 자신을 더럽히지 않을 것이다. 나는 왕이나 지휘관이나 어떤 타락한 지도자나 그 누구도 기쁘게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100% 따를 것이다" 라고 말하겠는가?

오늘날 우리 땅에는 다니엘 사역이 매우 필요하다 -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인도할" 남자와 여자가 필요하다( 단12:4 ). 그 구절은 의에 대해 설교하는 설교자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말과 삶이 본보기가 되어서 다른 사람들을 의로 인도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우리는 성서에서 또 다른 사역을 읽었는데, 이것은 이 "다니엘 사역"과 정반대인 "루시퍼 사역"이다.

요한계시록 12장 4절 에서, 루시퍼가 하나님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면서 수백만 명의 천사들이 그를 따르도록 하는데 성공했다고 읽었다. 왜 하나님은 루시퍼가 그렇게 많은 천사를 잘못된 길로 이끌도록 허락하셨을까? 그것은 불만스럽고 반항적인 모든 천사들을 천국에서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루시퍼가 그들 가운데 일어나 하나님께 반역하도록 이끌지 않았다면, 그들의 악한 마음은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형제자매들이 교회에서 루시퍼 사역을 하도록 허락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뒤에서 험담하고, 비난하고, 거짓말을 하고, 악한 말하는 것을 허락하실 것이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모든 불만스럽고 반항적이고 세속적인 신자들을 구별하고, 드러내고, 함께 모아서, 교회 밖으로 내보내신다,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깨끗게 된다.

하나님은 그런 루시퍼 사역에 종사하는 자들이 교회에 돌아다니는 것을 막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수백만 년 전에 천국에서 최초의 루시퍼를 막지 않으셨던 것처럼 말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다.

우리도 그런 형제 자매와 절대 싸우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 자신은 교회를 보존할 것이며, 적절한 시기에, 교회를 더럽히는 자들을 멸하실 것이다( 고전3:17 ). 그러나 하나님은 오랫동안 고통을 받으시고, 심판하시기 전에 여러 해를 기다리신다. 왜냐하면 그분은 아무도 멸망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이 회개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노아의 시대에, 그는 120년을 기다렸다. 그러나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 그의 심판은 엄격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분열된 적이 없다고 자랑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태초부터, 천사들 중에서, 천국 그 자체에서 분열이 있었다. 이러한 분열은, "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하나님에게) 나타나게 되리라"( 고전11:19 )는 점에서 필요하다.

빛과 어둠을 분리해야 한다. 그것은 분열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화다. 그것이 없으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증거는 타락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다니엘 사역(교회에서 연합과 교제를 세우는)이나 루시퍼 사역(불화를 일으키는)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중립이 될 수 없다. 예수님은 '그와 함께 모으지 않는 자는 그분으로부터 사람들을 흩어지게 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다. 교회 안에서 사역은 두 가지 뿐이다 - 모으거나 흩어지게 하기(마12:30).

하나님의 뜻대로 이 마지막 날들을 살 수 있는 은혜와 지혜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바라며, 하나님 이름의 영광을 위해 교회가 모든 곳에서 순수한 증거로 세워질 수 있도록 하소서.

장 15
얼마나 행복한 해가 될 것인가

"안식일( 그리고 하나님의 법도 마찬가지)'은 사람에게 이익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에 이익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막2: 27 ).

하나님의 모든 법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가 이미 만든 법칙을 지킬 피조물이 필요해서 사람을 창조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인간을 창조한 후에 법을 만들었다 - 이는 인간을 지극히 그리고 영원히 행복하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엿새째 되는 날 후반에 아담을 만드셨다. 이리하여 일곱째 날(안식일)은 인간 존재의 바로 첫 날이었다. 아담은 안식일을 갖기 전에 6일 동안 일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그에게 6일 동안 일하라고 하기 전에 먼저 하루의 안식을 주셨다. 그 첫날은 쉬는 날이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날이었다. 창조주와의 교제로부터, 앞으로 6일 동안 하나님을 위한 아담의 섬김이 흘러나오게 되었다. 이것이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이다 - 왜냐하면 하나님은 처음부터 사람을 위해 이런 일을 의도하셨기 때문이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삶에서 하는 모든 일에 해당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활동의 시작에 있어야 한다. 우리는 아담이 했던 것처럼 모든 것을 시작해야 한다 - 우리가 그분을 섬기려고 하기 전에, 하나님과 교제의 안식에 들어가야 한다.

마르다는 주님을 섬겼다. 그러나 그녀는 혼란스런 마음으로 주님을 섬겼기 때문에, 주님은 그녀를 꾸짖으셨다( 눅10:38-42 ). 그러나 마리아는 안식을 취하고 있었고, 이것은 주님이 말씀하신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다"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섬기지만, 그들은 내면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안식일 쉼을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율법 정신으로 주님을 섬기며 "자신의 일을 결코 멈추지 않는다"( 4: 10 ).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안식일의 쉼"( 4:9)을 말한다. 이 새 언약의 안식일은 무엇을 나타내는가?

옛 언약에 따르면,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여러 종류의 안식일을 주셨다. 매주 안식일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덜 알려진 안식일도 있었다. 하나는 매 6년의 끝마다 오는 안식년이었다(레25 :2-4 ). 또 다른 하나는 매 7번 안식년 끝마다 오는 50번 째 안식년이었다(매 49년 뒤에). 이 50년 째 안식년은 "희년"( 레25:8-12 )이라고 불렸다.

희년이 되는 해에, 이스라엘 자손은 "모든 노예가 된 채무자에게 온 땅에 자유를 선포"해야 하며, 그것은 "모든 빚을 탕감하는 시기"가 되었다( 레25:10 - TLB).

주님은 또한 매 7년 말에 모든 빚을 탕감하라고 명령하셨는데, 그 때 "모든 채권자는 그가 가지고 있는 약속 어음에 '완납'이라고 써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이 모든 사람을 그의 의무에서 해방시켰기 때문이다" (레25: 1-10 을 주의 깊게 읽어라).

하나님은 사람들이 빚쟁이를 풀어주는 것에 큰 관심을 가지셨다. 그래서 주님은 두 안식년(매 7년마다, 매 50년마다)을 제정하셔서, 그 해에 모든 채무자들이 풀려나게 하셨다.

안식년은 큰 축복과 기쁨의 시기였다. "희년(jubilee)"이라는 단어는 "기쁨의 함성"을 의미한다. 희년이 되는 해는 기쁨의 함성으로 가득한 해였다. 모든 빚이 용서되고, 모든 빚진 자들이 풀려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그 해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얼마나 행복한 해가 될 것인가"( 레25:11 - TLB).

지금, 새 언약 아래에서 우리는 일주일 중 매일마다 안식일을 기념한다, 모든 하루가 주님께 거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매년 안식년을 기념한다. 매년이 희년이기 때문이다. 그 해는 우리를 해치고 속인 모든 사람을 풀어주고 용서하는 기쁨의 해이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매 해는 행복할 수 있다. 매 해는 우리에게 희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희년이 되는 해에, 주님은 "너희는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가라"( 레25:10b )고 명하셨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형제자매와 소원해진 모든 사람은 (어떤 이유로든) 이제 하나님의 가족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이것은 새 언약에 따른 하나님의 명령이다. 모든 빚(죄)은 용서되어야 하고, 모든 노예(우리가 어떤 청구를 가지고 있는 자들)는 석방되어야 한다. 이것 역시 주님의 명령이다. 그래야만 매년 우리에게 행복한 한 해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 많이 용서해주셔서, 우리의 마음에서 남을 용서하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 자신을 주신 그분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이다.

히스기야 왕이 주님에 의해 중병에서 기적적으로 회복된 후, "그가 받은 은혜를 보답하지 아니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대하32:24,25).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축복을 베푸신 만큼 하나님께 보답하지 않았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가 주님께 축복을 받은 것과 같은 만큼 주님께 보답하였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주신 것처럼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값없이 용서하였는가? 모두를? 아직 용서받지 못한 사람이 한 명이라도 남아 있는가?

히스기야 왕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하지 아니했기 때문에, 그의 인생의 다음 15년은 평생 최악의 시기였다. 그는 그 시기에 아들(므낫세)을 낳았는데, 유다 역대 최악의 왕이 되었다(왕하 21:11 ). 부흥의 정신으로 통치를 시작한 히스기야는, 슬픔으로 끝을 맺었다.

우리가 남을 용서하지 않고 풀어주지 않는다면, 이 땅에서 우리 삶의 남은 세월은 정말 나쁠 것이다.

우리를 부르심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듯이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셨듯이"라는 그 구절은 우리가 모든 사람들을 대할 때 항상 명심해야 할 좌우명이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값없이 받았다. 그러면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 값없이 주도록 하자(마 10:8 ) - 구두쇠나 인색한 방식이 아니라, 관대하고 넓은 마음으로. 우리가 타인을 대할 때에 인색하고 까다롭게 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대하실 때에 인색하시고 까다롭게 하실 것이다( 시18:25 , 26 참조).

주님께서 그토록 값없이 허락하신 용서의 경이로움을 결코 잃어서는 안 된다.우리의 모든 삶은 이제 주님께 감사의 표시로 살아가야 합니다.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모든 일에 대해서 말이다.

율법 아래 사람들이 주님을 섬긴 것은 심판의 위협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은혜 아래에서는, 감사의 힘을 통해서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 18장 23 -35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종에게 만 달란트(약 3조 원; 하루 품삯 5만원일때)의 큰 빚을 용서한 친절한 왕의 비유를 들려주었다. 그 하인의 빚은 너무 커서 평생 갚을 수도, 대대로 갚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받은 용서에 대해 엄청나게 감사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받은 것과 같은 방식으로 남에게 베풀지 않았다. 그는 주인 앞에서 나가 즉시 그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다른 사람의 집으로 갔다. 백 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 확실히 우리가 쉽게 간과할 수 있는 적은 액수의 돈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용서받은 3조원에 비하면 그저 바다의 한 물방울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남자는 무엇을 하였는가? 그 종은 "다른 사람의 목을 잡고 즉각적인 상환을 요구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돈을 갚지 못하자, 그를 잡아서 감옥에 가두었다. 이것은 왕에게 보고되었는데, 왕은 즉시 그 무자비한 종을 불러 "사악한 놈"이라고 부르고, 전액을 갚을 때까지, 그를 고문자들에게 넘겨주었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35절)고 하셨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한 때 우리에게 주신 용서를 철회할 것이며, 하나님께서 한 때 그의 시야에서 지워 버리셨고, 그가 한 때 다시는 기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던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실 것을 우리에게 확실히 가르쳐 준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는 것은 항상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계속 용서하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주님이 마태복음 6장 9-13절에서 제자들에게 가르친 기도는 분명히 매일 해야 할 기도이다, 그는 거기서 우리의 매일의 음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 기도 역시 매일 기도해야 할 부분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우리에게 죄 지은자)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빚(죄)을 용서해주세요". 우리는 삶에서 매일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 왜냐하면 매일 누군가 또는 다른 사람이 어떤 식(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으로든지 우리를 다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갈보리에서 죽었을 때, 우리가 하나님께 진 빚 증서를 없애시고, 율법이 우리에게 준 고발장을 파기하셨다( 골2:14 ). 우리도 빚진 자들에게 똑같이 했는가? 아니면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한 고발장과,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과거에 우리에게 저지른 잘못에 대한 기억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용서하는 법을 배울 때까지, 우리를 괴롭게 하기 위해 우리와 우리 가족을 고문자들(악한 영들)에게 넘겨주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

이 비유 속의 왕은 그의 종이 은혜의 보답으로 자비를 베풀기를 바랐었다. 그 신하가 받은 자비에 대하여 감사로 행동하지 않았을 때, 왕은 두 번째 방법 즉 고문의 방법을 택하였다. 하나님도 그러하시다. 그는 주로 우리에게 행하신 일에 대한 감사에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기를 바란다. 우리가 그 은혜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우리가 적어도 법의 위협에 응답하기를 바라시면서, 우리를 법 아래 두신다. 그리고 우리를 고문자들에게 넘겨줌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 법을 가르치려고 하신다. 많은 신자들이 결코 하나님의 안식의 쉼에 들어가지 못하고, 불안정하고, 그들의 행동이 예측불가능하며, 종종 우울하고, 슬픈 얼굴이고, 우울하고, 짜증스러운 것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문관들이 그들의 정신을 괴롭게 하고 있는 것이다.

남을 고발하기 위해 치밀하게 보존해 온 "고발장"에 모닥불을 피워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도발에도, 결코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물을 오래된 채무증명서를 꺼내지 않겠다는 불굴의 각오로 결심해야 한다.

옛 언약 아래서 그들은 50년에 한 번만 행복한 해(희년)를 보낼 수 있었다. 새 언약 아래서 우리는 얼마나 더 좋은가 - 우리는 인생의 매년 행복한 한 해를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용서하지 않은 영혼은 용서하지 않은 자들에게 점점 악을 빌기 시작한다.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악을 빈다면, 그것은 그를 저주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갈라디아서 3장 13절 에서 예수님이 온 세상의 저주를 받으셨다는 것을 읽었다. 그래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저주할 때, 우리는 실제로 모든 사람의 저주를 받은 예수님을 저주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에 사탄이 당신에게 다른 사람이나 그의 아이들을 위해 악을 빌도록 유혹할 때 그것을 생각해 보라.

간음 중에 잡혀온 여자를 예수님께 데려온 바리새인들이, 그 가엾은 여자에게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면, 예수님은 그 여자 앞에 서서 직접 돌을 맞으시고, "나를 먼저 죽여라"고 하셨을 것이다. 그것이 갈보리에서 그가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이다. 그는 우리 앞에 서서 우리가 맞아야 할 '돌'을 맞았다. 그리스도의 영은 새 언약의 영이며, 바리새인의 영과는 정반대다. 오직 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자만이 평생 영원한 행복에 들어갈 수 있다.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제목의 실화의 책이 출판되었는데, 수년 전 한 공산주의 청년의 총에 맞아 죽은 젊은 아들을 둔 한국의 한 경건한 기독교인에 관한 것이다. 그 경건한 아버지는 가서 아들을 죽인 사람을 찾아내어 그를 용서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들로 입양하여 키웠다. 그런 사람은 확실히 교리와 성경 참고문헌만을 아는 많은 사람보다 "새롭고 살아 있는 길"을 훨씬 더 잘 이해했다! 예수님은 교리로서 길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는 평생 그 길을 걸어갔다. 그는 그를 그토록 미워하는 사람들을 너무나 사랑하여, 그들을 구하기 위해 그의 생명을 주셨다. 이것이 새롭고 살아 있는 길이다.

우리는 이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라는 부름을 받고 있는데, 그것은 다른 사람을 위해 악을 빌어 저주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하는 것이다. 세상은 남을 위해 악을 빌고 돌아다니며 남을 저주하고 불평하고 험담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 대신 우리가 가는 모든 곳에서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축복하고 풀어주자, 이 희년의 해에!

갈라디아서 3장 13 , 14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으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아브라함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들었다. 이것은 성령으로 계속 채워짐으로써 우리에게 가능한 일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물의 상징을 사용하여 성령을 통해 가능한 세 단계의 영적 발달을 설명하였다.

ü 레벨 1: 요한복음 3장 5 절에서, 그는 "물과 성령으로 태어남"에 대해 말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기독교인의 삶을 시작하는 "구원의 잔"(시 116:13 )이다. 이 물잔으로, 우리는 정결하게 되어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

ü 레벨 2: 요한복음 4장 14 절에서, 예수님은 더 나아가 그 컵이 "우물(샘물)"이 되는 것에 대해 말했다. 이것은 성령의 더 깊은 경험으로, 우리의 모든 내면의 갈망이 그분에 의해 충족 되며, 우리는 아무 부족함 없이 영원한 승리와 기쁨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자신의 집안에 우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도시공사의 수도에 의존하지 않는다. 어떤 외부인도 그의 물 공급을 막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집안에 물의 원천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풍요의 비밀을 발견한 기독교인은 이와 같다. 그 누구도 그의 기쁨이나 평화, 승리의 공급을 끊을 수 없다(요 16:22 ).

ü 레벨 3: 요한복음 7장 38 절에서, 예수님은 더 나아가 우물이 이제 강이 되고, 많은 강들이, 신자로부터 흘러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넘치는 풍요의 그림이다. 그런 신앙인은 주위의 많은 가난한 사람들의 갈증을 해소할 수 있다. 우물은 오직 우리 자신의 갈망만을 충족시키는 반면, 생수의 강들은 우리가 가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에게 축복이 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축복하신 복은, "내가 너에게 복을 주겠다....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창12:2 , 3 ). 이것이 지금 성령을 통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는 축복이다( 갈3:14 -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강물이 흘러나오는 정도로 축복해 주실 때, 전국 각지의 많은 가정은 물론 전 세계에서도 우리를 통해 복을 받을 수 있다.

오직 저주받은 사람만이 가는 곳마다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고 상처 입게 한다. 아담의 자녀들 대부분은 이렇게 살고 있다. 남을 위해 악을 빌고, 무례한 말로 상처를 주고, 뒷담화로 그들을 더럽히는 방법밖에 모르는 것이다. 불행히도 많은 "신자"들조차 이렇게 살고 있으며, 그 결과 그들의 회심이 거짓이었거나 구원을 잃을 지점까지 타락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복음의 좋은 소식은 우리가 그런 비참한 존재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생수의 강들이 있어 끊임없이 우리를 통해 흘러나오게 할 수 있고, 우리가 만나는 모든 가족들에게 축복의 존재가 될 수 있다.

ü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셨듯이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다.

ü 하나님이 우리를 풀어준 것처럼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풀어줄 수 있다.

ü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신 것처럼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복을 줄 수 있다.

ü 하나님이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값없이 줄 수 있다.

ü 하나님이 우리에게 마음이 넓으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 넓은 마음을 가질 수 있다.

A.W. 토저는 그의 아티클 『영적인 힘을 위한 5가지 결정』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당신이 새로운 기쁨, 새로운 힘, 새로운 삶을 얻는 것 같은 영적 발달에 대해 진지하다면, 당신은 당신의 삶에 대해 마음속으로 어떤 결정을 내리고,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나아가야만 한다".

"한 가지 결정은: 다른 사람을 해치는 어떤 것을 남에게 절대 누설하지 말라".

"'사랑은 수많은 죄를 덮어 준다"(벧전 4:8 ). 이야기꾼은 하나님이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 중 한 사람의 명예를 저해하거나 손상시킬 만한 것을 알고 있다면, 영원히 묻어 두어라. 하나님이 처리하게 내버려 두어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7: 2 ).

"하나님이 당신에게 잘해주기를 바란다면, 당신은 그의 자녀들에게 잘해주어야 한다. 우리 아버지 식탁의 규칙은 당신과 같은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 그들이 어떤 교파, 국적, 배경에 상관없이"(『THE BEAUTY OF HOLINESS』 책으로부터).

만약 우리 모두가 오늘 그 결정을 내린다면 - 다른 사람 혹은 그의 명성을 해칠 어떤 것도 절대 누설하지 않기 - 그리고 그 결정을, 올해 남은 기간 동안뿐만 아니라 평생 동안 계속 지키면 유익한 일이 될 것이다. 지난 몇 년 동안, 그 결정에 따라 살아온 사람들은 매일의 대화에서 쓸모 없는 것을 버리고, 교훈적이고 유익한 것만을 말할 때, 하나님께서 결과적으로 그분의 약속을 이행하시고, 그분의 대변자(그의 입)로 삼으셨음을 알게 되었다 ( 렘15:19 - 네가 만일 헛된 것을 버리고 귀한 것을 말한다면 너는 나의 입이 될 것이라).

비록 가룟유다는 속이는 자요, 배신자였지만,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있던 3년 동안 다른 11명의 제자들에게 그에 대해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그래서 마지막 만찬에서 배신자가 누구인지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예수님은 결코 험담에 빠지지 않았다. 그는 유다에게 개인적으로 말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이 유다를 드러내기 전까지는, 그는 결코 그의 뒤에서 그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우리 역시 하나님이 악한 사람들을 폭로하실 때까지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뒷담화로 그를 도와주지 않아도 그는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다!!

우리가 죄인과 타락한 자들을 대할 때, 그들을 향해 탕자의 아버지처럼, 또는 탕자의 형처럼 행동할 수 있다( 눅15:11-32 ).

그 비유에서, 집은 교회에 대한 그림이다. 아버지는 하나님의 그림일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참된 아버지의 그림이다. 그리고 형은 이 땅의 모든 교회들에서 발견되는 바리새인들의 그림이다. 하나님은 죄인과 타락한 자들(탕자처럼)를 사용하셔서 바리새인들을 교회 안에서 노출시킨다.

바리새인들은 의가 있을 수 있으나, 선량함과 겸손함이 없다. 그들은 타락한자를 동등한 존재로 받아들이는 것을 어려워한다. 그들은 그가 돌아오면 보호 관찰로 몇 달 동안 하인의 숙소에 처넣어야 한다고 느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그는 바리새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회개한 죄인을 돌아오자마자 (그리스도의 의로) 겉옷을 입힌다. 하나님은 돌아오는 즉시 그에게 반지(성령의 기름부음)를 껴준다. 그리고 그분은 죄인을 즉시 그의 오른편에 앉히신다.

평생 동안 이 땅에서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은 예수님은 갈보리에서 돌아가신 후, 평생을 죄로 땅에서 보낸 회개한 도둑과 함께 낙원으로 들어가셨다. 오직 은혜만이 그런 경이로움을 성취할 수 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런 은혜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래서 그들은 완고하고 용서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를 파괴한다. 이 비유의 끝에서, 큰아들이 아버지의 집 밖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 그의 남동생에 대한 무자비한 태도 때문에 그의 구원을 잃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는 모든 사람들의 최후의 종말이다.

작은 아들은 온갖 어리석음과 죄악으로 마침내 자신의 필요를(역주: helpless - 무력함) 알게 되어서, 심령이 가난해졌고, 아버지의 나라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큰아들은 자신의 필요를 전혀 보지 못했기 때문에, 결코 그런 영적 가난에 이르지 못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죄만 보았다. 그래서 아버지의 모든 계명을 충실히 지켰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는 길을 잃었다( 눅15:29 ). 율법적인 순종은 신자들을 그들의 마지막 상태가 첫 번째 상태보다 더 나빠지는 바리새주의로 이끌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사람들, 혹은 어떤 식으로든 우리에게 상처를 주거나 다치게 한 모든 사람들을 풀어준다면, 올해 그리고 매년, 우리 모두에게 행복한 한 해가 될 수 있다. 그 원한을 영원히 묻어 버리고,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어, 오늘 주님과 함께 새로운 출발을 하라.

장 16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주님을 피할 것인가?

"그의 안에 머물러 있으라, 이는 주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가지려고 하는 것이며, 그가 오실 때에, 그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 요일2:28 ).

주님이 오시는 것은 모든 신자들이 크게 기쁨으로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일부 신자들은 주님이 돌아 오실 때, 부끄러워하며 주님 앞에서 피하게 될 것인가?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하나 지적하고 싶다.

요한복음 8장 1- 12절에서, 우리는 바리새인들이 간음으로 잡힌 여자를 예수께 데려와 고발하고 나서, 부끄러워하며 예수님 앞에서 물러나는 것을 읽었다.

왜 그들은 주님 앞에서 물러났는가?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들에게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을 던지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갑자기 그들은 예수님 존재의 눈부신 빛 속에서, 그들이 그 여인을 고발한 것이, 모두 스스로 죄를 지은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로마서 2장 1절 에서, 우리는 다름과 같이 읽는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 우리는 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손가락질했던 모든 것들이, 어떤 면에서, 어떤 때에, 우리 삶에서, 우리는 스스로 죄를 지은 것이다.

그 날 하나님의 빛은 너무나 밝아서, 우리 자신이 남들이 한 일에 대해 비난했던 바로 똑같은 일을 저질렀음을 분명히 보게 될 것이다. 남을 고발한 모든 신자들이 부끄러워하며 주님으로부터 피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한 신자들이 그들 자신도 바리새인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질 것이다.

많은 신자들은 눈이 매우 예리해서 다른 사람의 사소한 말과 행동조차 판단한다. 그들은 심지어 다른 사람들이 기도하고, 증언하고, 설교하는 방식까지도 비판한다. 사람이 하는 가장 좋은 일에는 언제나 불완전한 것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는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발의 정신을 가진 사람은 자기 안에 어떤 결점도 인식하지 못하고, 오직 다른 사람의 잘못만을 인식한다.

우리는 주님이 돌아오실 때, 오직 하나님의 완전한 빛 안에서, 우리 자신의 이기심과 교만함의 전모를 온전히 알게 될 것이다(고전13: 12) . 만약 우리가 지금 자신을 더 완전하게 볼 수 있다면, 다시는 다른 사람의 어떤 것도 판단하거나 비판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스스로도 같은 결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육신의 부패를 보면 볼수록, 주위의 다른 사람들의 흠을 덜 찾게 될 것이다.

다음을 생각해보라: 당신이 바로 그 날 아침에 간통을 저질렀다면, 다른 사람의 간통을 비판하기 위해서 당신은 일급 위선자가 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만일 아버지 자신이 2분 전에 커피잔을 엎질렀다면, 아이가 바닥에 우유를 엎질렀다고 비난하려면, 냉철하고 무신경한 아버지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비판하는가? 왜냐하면 우리는 스스로 그런 일을 할 수 없다고 상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걸린 여인을 데리고 예수께 올 만큼 대담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의 앞에 이르렀을 때에, 그의 빛은 그들의 마음에 있는 바로 같은 죄를 드러내 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부끄러워서 그를 피했다"

주께서 돌아오실 때에, 이것이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비판한 모든 사람의 운명이 될 것이다: 그들은 자기 육신의 부패의 깊이를 보고,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서 같은 것을 판단하고 비판했는지를 볼 때, 부끄러움에 주님으로부터 피할 것이다.

우리 중 누구라도 다른 사람이 이기적으로 행동하거나 완고하게 굴거나 교만하게 행동하는 것을 보는 것은 매우 쉽다.

아마 당신은 종종 "아무개는 매우 이기적인 사람이야" 또는 "아무개는 매우 완고하고, 자기의지가 강한 사람이야" 또는 "아무개는 매우 거만한 사람이야"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한 말은 전적으로 사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다른 사람에 대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면, 그리스도가 돌아오실 때, 하나님은 당신에게 이기심, 고집, 자기 의지, 그리고 당신의 삶에 대한 교만함의 더 큰 영역을 보여주실 것이라고 확신해도 된다.

그리고 그 날에 당신도 (그 바리새인들처럼) 부끄러워하며 주님 앞에서 물러갈 것이다. 이는 당신이 너무 자기를 의롭게 여겨서 훨씬 작은 정도의 죄에 대해 남을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우리 각자에게는 우리가 볼 수 없는 어떤 형태의 이러한 악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만약 우리가 이것을 깨닫는다면, 이런 것들에 대해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 매우 느릴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판단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그들 자신의 이기심, 고집, 교만함을 볼 수 없다고 가정할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육신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는 충분히 용납하면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그렇게 자비로운 용납을 베풀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약2:13 )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판단하지 말라"(마 7:1 )고 하셨다.

우리는 심지어 "나에게 해를 입힌 모든 사람들을 용서했다"고 말할 때 조차도 조심해야 한다 -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해를 입혔다는 바로 그 감정에도 교만함과 자만심이 있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물었다,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벧전3:13 ). 그 대답은 분명히, "아무도 없다"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말했듯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8:28)이기 때문이다. 만약 모든 것이 우리의 유익을 위해 합력한다면, 어떻게 누가 우리를 해칠 수 있을까?

그러나 오늘날 많은 신자들은 몇몇 사람들이 그들과 그들의 가족에게 해를 입혔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의 빛에 비추어, 그런 신자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바로 이것이다: "너를 포함한 모든 사람은 다 거짓되되,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찌어다"(롬 3:3 ).

나는 교회 안에서 자기를 의롭게 여기는 신자들이 다른 사람들이 자신과 자녀들에게 해를 끼쳤지만, 그들을 용서했다고 증언하는 것을 들었다. 그들은 분명히 자신들의 그리스도와 닮은 점에 대해 스스로 축하했다!! 그러나 그러한 증언에는 엄청난 교만함이 있는데, 그러한 신자들이 실제로 말하는 것은(그들의 말을 바꾸어 말하면) "나는 심지어 교회에서 조차 나에게 악마처럼 행동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그러나 나는(나는 영적인 남자/여자) 그들을 향해 예수님처럼 행동하고 용서해 주었다. 내가 얼마나 너그럽고 착한지 봐라!!"

그들의 증언은 어린 잭 호너가 자신의 파이 속에 엄지손가락을 넣고 자두를 꺼내며, "나는 얼마나 착한 아이인가"라고 말하는 동요를 떠올리게 했다. 하나님께서 그런 바리새인들로부터 교회를 구하시기를!

성령이 주신 예언은 언제나 예수님을 찬양할 것이다( 계19:10 ).

사탄의 영은 자신의 선함을 언급하고 다른 사람의 악으로 생각되는 것을 강조한다!

그런 신자들은 자신에게 해를 입힌 사람들을 용서했다고 할 때 거짓말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분명 다른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그런 것들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감안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들은 그들 자신이 다른 많은 방법으로 얼마나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입혔는지에 대해 어떠한 깨달음도 가지고 있지 않다.

주님께서 돌아오시면, 그들은 고발하는 영을 가지고 악마처럼 행동한 것이 자기 자신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또한 누군가가 그들에게 해를 입혔던 것보다 그들이 다른 이들에게 훨씬 더 많은 해를 입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신자들은 지금 당장 자기를 의롭게 여기는 악취를 맡을 수는 없다!! 바리새인은 타인에 대한 자비로운 태도의 겉옷으로 변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육신은 얼마나 기만적인가!

여러분들 중 누구라도 그런 적이 있다면, 적어도 지금이라도, 자기를 의롭게 여김과 교만함을 조금이나마 깨달아, 타인에 대한 판단과 비판적인 태도에서, 당신의 행동이 얼마나 악마와 같았는지 알 수 있기를 바란다.

당신이 지금까지 이 일의 악을 보지 못했다면, 왜 아직 보지 못했는가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답은 다음과 같다: 왜냐하면 당신은 완벽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은 의에 주리고 목마르지 않는다. 당신은 예수님이 순수한 만큼 스스로를 깨끗하게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당신은 주님의 오심을 진정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요일3: 2 , 3 -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주님께서 갑자기 오실 때, 당신은 부끄러워하며 그의 앞에서 피해야 할 것이다.

너무 늦기 전에, 지금 주님께 당신에게 좀 더 많은 빛을 비춰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좋다.

영적 진보의 한 증거는 우리가 과거에 했던 것들 중 일부, 심지어 작년에 했던 것까지도 후회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지혜가 자라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우리는 악한 어떤 일을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우리가 좀 더 완벽하게, 그리고 더 그리스도다운 방식으로 일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라고 깨닫는다. 우리는 아마도 의식적으로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죄를 지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닮지 않은 것은 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런 후회 없이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전혀 성장하지 않은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그들은 오늘, 그들이 처음 회심했을 때와 같은 영적 상태에 있음에 틀림없다. 그 당시 그들은 돈을 좋아했다. 그들은 지금 돈을 좋아한다. 그때 그들은 화를 냈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화를 낸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행동과 삶의 방식에 대해 어떠한 슬픔이나 후회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런 사람들은 얼마나 눈이 멀었는가! 하지만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판단을 너무 빨리 내렸다!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그들은 어떤 후회를 하게 될 것인가.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사람이, 만약 그가 영적으로 진보하고 있다면, 매년 더 그리스도다운 방식으로 설교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설교할 때마다, 자신의 동기, 말, 태도 등을 스스로 판단하고 있을 때만 일어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 중 설교 후에 스스로를 판단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래서 그들은 매년 그들의 삶에 성령의 기름부음이나 은혜나 능력 없이, 똑같은 단조롭고 지루한 방법으로 계속한다.

배고픈 영혼들은 어딘가에서 하나님의 사람을 찾을 수 있다면 수백 마일을 여행할 것이다, 그의 사역에는 천국의 감동을 가지고 있고 들을 가치가 있다 - 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의 말을 듣기 위해 유대 광야로 떠났고, 예수님의 말을 듣기 위해 이스라엘 전역에서 그들이 여행했고, 그리고 많은 도시의 군중들이 사도 바울의 말을 듣기 위해 먼 길을 여행한 것처럼 말이다.

장로들이여(감독들), 너희가 모임에서 영적 준비도 없이, 성령의 기름부음도 없이 설교해 왔을 때에, 너희가 다른 사람을 얼마나 지루하게 하였는지를 깨달았는가? 아마도 당신은 아무 생각이나 기도도 없이, 부주의하고 나태하게 말을 하면서, 모임에서 40분이나 설교를 계속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교회에서 오랫동안 시달렸던 형제 자매들은 불평 한마디 없이 이 고문을 견뎌냈다! 오, 당신이 얼마나 그들에게 죄를 지었는가! 그런데도 그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당신의 죄를 알겠는가?

많은 집회에서, 장로들은 그들의 양떼에게 먹이를 주지 않고, 오히려 길고 피곤한 설교로 그들을 죽도록 지루하게 한다. 모든 장로들은 자신을 판단하고 다른 형제들에게 자신에 대한 솔직한 의견을 묻는 것이 좋다. 기름부음을 잃은 자는 설교를 멈추고, (사울 왕처럼) 왕좌에 앉아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지 말고, 불타고 기름부음 있는 어린 형제(다윗 같은)에게 강단을 내어주어야 한다.

우리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상처 입히고, 다치게 하고, 그들에게 요구하고, 배려 없이 행동하고, 다른 사람들의 환대와 선의를 이용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편지를 쓰고, 기타 등등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는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우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우리와 함께 고통 받고 참아왔다.

우리 중 얼마나 많은 이들이 교회 안에 있지 않았다면, 오래 전에 많은 죄에 빠졌을 텐데 우리를 지켜준, 교회의 말씀 사역과 문서 사역에 감사해 왔는가?

우리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밤낮으로, 우리 집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섬기면서 열심히 일해 온 아내들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했는가? 우리는 우리 집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남편으로서 아내에 대한 고마움이 없다면, 어떻게 자녀들이 우리, 즉 그들의 부모에게 감사할 것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우리 아이들은 우리에게 그런 습관을 배울 것이다! 그리스도가 돌아올 때, 많은 남편들은 아내에게 얼마나 악하고 감사하지 않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날 많은 아내들은 남편이 자신을 위해 해준 모든 것에 대해 남편에게 얼마나 악하고 감사하지 않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결혼 배우자와 형제 자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를 표한 적이 있는가? 그러나 우리가 그들에게서 단 한 가지 실수라도 보았을 때, 얼마나 빨리 잘못을 찾아냈는가? 그리고 그들이 우리에게 한 모든 선한 일들을 우리는 얼마나 빨리 잊었는가?

나는 한 때 어떤 선생님이 그의 반 학생들 앞에서, 한쪽 구석에 작고 검은 점이 있는 커다란 흰 종이 한 장을 펼쳐놓은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무엇을 보았는지 물었다. 그들 모두는 한쪽 구석에서 작고 검은 점을 보았다고 말했다. 아무도 그들이 커다란 흰 종이를 봤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 다른 사람들에게 있는 선을 보지 못한다. 우리는 그들의 검은 점만 본다.

이것은 단지 교만함 때문이다. 겸손한 사람들은 동료-신자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데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형제자매에게 감사하지 않게 만드는 것은 오직 사탄의 교만함이다.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우리에게 얼마나 선하고 멋진 형제자매를 주셨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었다. 적어도 지금이라도 형제 자매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법을 배우자.

이런 글을 읽음으로써 우리 자신에 대해 약간의 빛을 얻을 수 있다면, 예수님의 재림으로, 천국의 밝은 빛이 우리에게 비칠 때, 우리의 이기심과 교만함에 얼마나 더 빛을 얻을지 상상이 가는가?

에서는 그때 많은 눈물을 흘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후에"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히12:17 ).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 우리의 모든 삶에는 "그 후에"가 있을 것이다. 그 날, 우리는 감사하는 법을 배우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때 울기에는 너무 늦을 것이다. 그때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지금이야말로 우리 자신을 판단하고 애통하며 눈물을 흘려야 할 때다.

그러면 하나님께 예수님의 영광에 대한 새로운 계시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부탁하자. 그 빛 안에서, 우리는 이기심, 고집, 자기 의지, 교만함의 깊이를 우리 자신의 육신 안에서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회개하고 슬퍼하며 주님 앞에 엎드릴 것이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것을 완전히 끝내는 것이 쉬울 것이다.

"예수님의 깨끗함의 기준"에 도달할 때까지, 스스로를 깨끗하게 하는 것에 만족하지 말자(요일 3:3 ). 그것이 우리의 목표라면, 주님이 돌아오실 때 우리는 부끄러워서 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장 17
한 사람의 영향력

"나는 그들 중에서 성을 쌓으며 내 앞에 서있는 한 사람을 찾아 다녔다......그러나 나는 단 한 사람도 찾지 못했다"( 겔22:30 ).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야 할 과업이 많으시며, 그 모든 것이 똑같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중요하지 않은 일을 위해서는, 아무나 사용하실 수 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일을 위해서는, 아무나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중요한 임무를 위해서는, 하나님은 많은 시련과 시험을 통해 검증 받고 증명된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만약 그런 사람이 당장 나타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런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가장 유능한 사람과 일을 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성냥개비를 사용하여 불을 붙인다. 그리고 성냥개비는 더 이상 아무런 쓸모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성냥개비를 버린다. 하나님이 그렇게 쓰시는 사람도 있다. 그분은 그들을 사용하신 뒤에, 그들을 버리시는데, 그들은 주님에게 귀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하나님에 의해 단지 사용되기를 갈망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그에게 가치 있는 사람이 되기를 구해야 한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2 :20 , 21 ).

사람은 그의 일에 다른 재료의 그릇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금 그릇과 은 그릇을 소중히 여기는 만큼, 토기와 나무상자를 소중히 여기지 않을 것이다. 같은 식으로, 비록 거듭난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하나님의 자녀일지라도, 하나님의 모든 자녀는 그분의 일에 있어서 동등하게 유용하지 않다. 비록 하나님은 편애가 없지만, 모든 그릇이 거룩하고 유용한 그릇은 아니다. 하나님은 오직 극소수에게 상을 주신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전적으로 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귀중한 그릇이 되려면, 끊임없이 "육신과 영의 모든 더러운 것"(즉,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와 다른 모든 것들로부터)을 씻어내야 하는 것이다(고후2: 1) .

한 사람이 귀한 그릇이 되면, 하나님은 그분의 일을 위해 그를 크게 의지할 것이다. 만일 그런 사람이 하나님을 저버리면,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는 다른 사람을 찾으실 때까지, 하나님의 일은 잠시 중단될 것이다.

세계와 이스라엘과 교회의 역사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이 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특정한 상황에서 단 사람에게만 얼마나 자주 의존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많은 예들을 본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 있는 한 사람은 항상 다수와 같다.

노아

온 세상이 하나님에 대한 사악함과 반항으로 가득 차 있을 때, 노아 시대에는, 이 땅에 비록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여덟 사람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것은 전적으로 오직 한 사람 노아의 충실함에 달려 있었다.

노아는 그 당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유일한 사람이었다(창6: 8). 그 한 사람이 하나님에게 불성실했더라면, 인류 전체가 전멸했을 것이고, 우리 중 누구도 오늘 살아 있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노아가 충실하게 남아있던 것에 대해 하나님께 확실히 감사해야 한다.

예수님은 마지막 날이 노아의 날과 같을 것이라고 하셨다. 노아 시대의 성적 왜곡과 폭력은 마지막 날 역시도 특징이 될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다. 그래서 노아처럼 타협하지 않는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다.

모세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에 있을 때에, 하나님은 그분을 대표할 만한 적합한 사람을 찾아낼 때까지 그들을 노예에서 해방시켜 주지 못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사람이 준비될 때까지 기다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나님 은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에 400년 동안 머물 것을 계획하셨었다(창15:13) . 그러나 그들은 마침내 430년 동안 머물렀다( 12: 40). 왜 그들은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보다 30년을 더 머물러야 했을까?

그것은 확실히 하나님이 실수를 해서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절대 실수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지도자가 될 사람이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하나님은 아마 모세가 광야에 들어간 지 10년 안에 준비가 되도록 계획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모세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영적 교육을 마치는데 40년이 걸렸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30년 더 노예 생활을 해야 했다.

한 번은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과 불과 40일 동안 떨어져 있을 때, 그 200만 명 모두가 잘못된 길로 갔다(출32장).

하나님의 사람이 그 자리를 떠나면, 온 민족이 진리의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는 그릇된 길을 가는 데는 며칠밖에 걸리지 않는다.

그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로 눈앞에서 놀라운 기적을 보았었다. 그러나 그 기적의 기억은 이스라엘 자손이 우상을 숭배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오직 하나님의 한 사람의 엄격한 지도력만이 그렇게 할 수 있었다!

모세가 산으로 떠나 있는 동안, 아론은 그들의 임시 지도자였다. 그러나 아론이 선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지만, 백성을 하나님께 헌신하게 할 수는 없었다. 분명히 그는 대중의 비위를 맞추려는 사람이었고, 백성들은 그를 이용했다.

오늘날 아론과 같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많이 있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주님을 섬기고 있다고 상상한다. 그들은 선하고, 정직한 사람들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을 산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회를 순결하게 유지하기 위해 그들을 사용할 수 없다, 그들은 백성의 뜻에 쉽게 굴복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사탄과의 싸움에서 교회를 이끌 모세와 같은 사람을 찾으신다.

여호수아

여호수아는 여호와께서 높여주시고 함께 있어 주신 또 다른 사람이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이 가나안 경계선에 이르렀을 때에, "오늘 내가 너를 높여서 온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너를 높일 것이니, 내가 모세와 함께 한 것과 같이 내가 너와 함께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알게 될 것이다"( 3: 7 ).

여호와께서 이미 여호수아를 광야에서 40년 동안 훈련시키셨다. 이제 그분은 그를 지도자로 세우시고, 모세와 함께 한 것과 같이, 그와 함께 계셨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를 지원하기 위해, 몇 시간 동안 지구가 자전하는 것까지 멈추게 하셨다. 성경에는 "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수10:14 )라고 말한다.

일단 하나님께서 그분을 대표할 사람을 선택하셨을 때, 그 분은 어떤 기적을 행하셔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와 함께 있다는 것을 나타내실지 놀라울 따름이다.

우리는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이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삿 2:7 )고 읽었다.

여호수아의 영향력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매우 강력하여, 이스라엘 자손은 그의 생전과 또 그의 동료-장로들의 생전에 우상을 숭배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죽자, 이스라엘은 심하게 타락했다.

하나님의 한 사람의 삶이 미치는 영향력은 이와 같다.

엘리야

이스라엘 역사에서 아합이 모든 사람에게 바알을 숭배하게 한 또 다른 때를 생각해 보자. 당시 이스라엘에는 바알 숭배를 거부한 사람이 7000명 있었다( 왕상19:18 ).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대담하고 믿을만한 태도였다. 그러나 그러한 증거는 여전히 부정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우상을 숭배하지 않았다. 이것은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증거와 같다 - 그들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그들은 도박을 하지 않는다 등.

그러나 하나님은 그 당시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이 7000명 가운데 한 명도 사용할 수 없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은 엘리야가 필요했다. 아합은 이 7000명의 "신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엘리야를 두려워했다. 이 7000명의 사람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기도는 하늘로부터 불을 내리지 못하였다. 그렇게 한 것은 엘리야의 기도였다.

모든 신자들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그 효과에 있어서 동등하지 않다. 성경은 엘리야와 관련하여, "의인의 효과적인 기도는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다"( 약5 : 17 ,16)고 말한다.

한 사람이 혼자서, 온 민족을 하나님께 되돌리고, 악한 무리를 참패시키고, 바알의 예언자들을 모두 죽였다.

하나님의 목적이 오늘날에도 성취되는 것은, 수많은 사람을 통해서가 아니라, 한 충실한 사람을 통해서입니다.

엘리사

엘리야 시대에는 모두 언젠가는 이스라엘에서 예언자가 되기를 바라고 있던 50명의 "예언자들의 아들들(성경학교 학생들)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은 그들 모두를 우회하여 엘리사에게로 왔는데, 엘리사는 "예언자의 아들"이 아니었다( 왕하2:7 , 15 ). 엘리사는 이스라엘에서 오직 종으로만 알려져 있었다 -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자"였다( 왕하3:11 ).

아람 왕의 군대가 이스라엘을 공격했을 때, 이 50명의 성경학자들 중 누구도 이스라엘을 보호할 수 없었다. 그들은 비록 성서학교에서 모세의 율법을 연구했을지라도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직 엘리사만이 이스라엘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유일한 사람으로서, 적이 정확히 어디를 공격할 지 이스라엘에 미리 경고할 수 있었다.

오늘날에도 예언자의 주요 기능은 유사하다: 사탄이 그들을 공격할 곳을 미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경고하기 위해서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엘리사와 같은 예언자 한 사람이 50명 이상의 설교자("예언자의 아들들")보다 영적 재앙으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을 구할 수 있다. 사람이 성령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면 성경에 대한 지식은 아무 소용이 없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사람만이 사탄의 계략과 공격으로부터 교회를 구할 수 있다.

옛 예언자들은 "선견자"("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가지고 미래를 수 있는 사람들" - 삼상 9: 9)로도 불렸다. 그들은 적이 어디를 공격할지 알고 있었고, 특정한 행동을 취하는 것의 위험성을 예견할 수 있었다. 오늘날 교회는 그러한 선견자들이 매우 필요하다.

다니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가나안 땅으로 데리고 나오시기를 원하셨을 때였다. 그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는 모세를 찾았다. 그분은 바빌론에서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으로 데려오고자 했을 때, 그는 또 다른 사람이 필요했다. 그는 다니엘을 찾았다.

바빌론에서의 포로의 기간(70년)은 이집트의 포로의 길이가 예측되었던 것과 똑같이 예측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모세의 시대와 달리) 하나님의 계획이 실현되는 데 단 하루도 지체되지 않았다 - 하나님의 사람이 제시간에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니엘은 젊었을 때부터 충실했고 모든 시험을 아주 멋지게 통과했다. 바벨론에서 어린 십대였을 때, 그는 주님을 위해 확고한 입장을 취했다. "그는 마음속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단1:8 ) - 모든 젊은이들이 기억해야 할 좋은 구절.

다른 모든 젊은 유대인들은 왕을 두려워하여 왕의 식탁에 차려진 음식(하나님이 레위기에서 금지한 음식)을 선뜻 먹었지만, 다니엘만은 그것을 먹기를 거부했다. 그날 그 테이블에는 또 세 명의 젊은이가 있었는데, 다니엘이 입장을 고수하는 것을 보고, 그와 합류했다. 다니엘과 그 세 사람은 바벨론에서 하나님을 위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70년 후, 다니엘이 거의 90세가 되었을 때, 그의 기도는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다시 이동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날에도 영적인 바벨론(거짓 교회)에서 영적인 예루살렘(그리스도의 몸)으로 향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움직임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운동을 위해서 역시 하나님은 사람이 필요하다.

오늘날 다니엘의 세 친구인 하나냐, 미샤엘, 아사랴와 같은 이들이 많다( 단1:11 ). 그들은 주님에 대한 입장을 취하고 싶지만, 스스로 그렇게 할 용기가 없다. 그들은 다니엘이 그들을 이끌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 다니엘을 찾고 있다.

바울

새 언약 아래, 하나님은 여기 저기에서 한 사람만이 아니라, 그의 모든 자녀들을 사용하길 원하신다. 그러나 이는 모든 신자들이 새 언약 안에 살아야만 가능하다. 그러나 사도들의 시절부터 바로, 우리는 새 언약에 들어가는 신자들이 거의 없음을 본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죄에 패배한 삶을 살고, "건강과 부귀의 복음"에 사로잡혀 살고, 그들과 그리스도 사이의 중재자로서 목사가 필요하다, 등등. 그들은 여전히 구약성서의 이스라엘인들과 여러모로 똑같이 살고 있다.

그러므로 구약성서 시대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많은 상황에서 다시 한 사람에게 의지하여, 사탄이 교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신다.

에베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해 보라: 바울은 다른 어떤 교회보다 그곳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3년 동안, 날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모든 권고를 설교하였다(행 20:31). 그것은 모든 교회들 중에서 가장 특권이었다. 바울이 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높은 수준의 그 가르침은 영적인 마음을 가진 교회였음을 또한 보여준다. 그래서 신자들이 새 언약의 삶으로 많이 들어가야 할 교회가 하나 있었다면, 에베소의 이 교회였어야 했다. 그러나 아아, 그렇지 않았다. 그곳의 장로들도 그런 삶에 들어가지 못했다.

바울이 떠날 때에, 장로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행 20 : 29 ,30 ) .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몸소 있는 동안에는, 어떤 이리도 그 교회에 들어갈 수 없었다. 왜냐하면 바울은 양 떼를 주의 깊게 살피는 목자였고 주의 집의 엄격한 문지기였기 때문이다. 자기 것을 추구하는 장로들도 바울이 있는 한, 그들을 따르도록 그 어떤 제자도 끌어낼 수 없었다 - 그들은 바울이 있는 데서 무력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장로들의 영적 상태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에베소를 떠나자마자, 교회가 이리들과 이기적인 장로들로 들끓고, 증언이 타락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 가 에베소 사람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를 읽을 때(계2:1-7), 우리는 바울이 예언한 대로, 그곳 교회가 타락한 것을 보게 된다.

누가 그 3년 동안 에베소에 있는 교회를 순결하게 보존했는가? 단 한 사람 - 바울이다. 사탄은 바울을 두려워했지만, 에베소의 다른 모든 장로들을 아주 쉽게 다룰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께서 지난 20세기 동안 세계 어느 곳에서나 일으키신 모든 집단의 역사였다.

우리가 지난 20세기 동안 교회의 역사를 되돌아볼 때,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장소에서, 하나님은 오랫동안 묻힌 그분의 말씀의 진리를 교회에 회복시키기 위해 한 사람을 일으키신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비밀리에 훈련시킨 다음, 그를 공적인 사역에 끌어낸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이 사람을 미워하고 그를 이단자라고 부르며 거짓 예언자라고 배척한다. 그러나 진리를 들을 귀가 있는 소수는, 하나님이 그에게 기름 부으시는 것을 인식하고, 그가 말하는 것이 하나님의 진리임을 깨닫고 그와 합류한다. 그러므로 이 몇 사람을 통하여, 그 세대에서 주님을 위한 증거가 세워진다. 그 사람이 살아 있는 한 일은 잘 된다. 그러나 그가 죽고 나면 상황은 쇠퇴하기 시작하고, 곧 이 새로운 집단도 표류하여 곧 다른 모든 교파들처럼 바벨론의 일부가 된다.

기독교 역사상 자기 자신이 가졌던 것과 같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진 2세 리더를 배출할 수 있었던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들 각자는 자기 세대에만 봉사하고 죽었다. 다음 세대에는, 하나님이 항상 새로운 시작을 해야 그의 이름을 위한 순수한 증거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이것은 우리가 더 큰 교파의 역사를 고려하든 더 작은 집단의 역사를 고려하든 간에, 교회 역사를 통해 계속해서 일어난 일이다.

오늘날, 이 모든 집단이 여전히 그들의 창시자들이 선포한 것과 같은 교리를 선포할지라도, 그들 모두는 그들의 창시자들이 가졌던 하나님의 지식과 삶에서 멀어져 갔다. 그들은 모두 세속성과 타협이라는 하나의 절벽이나, 바리새주의와 율법주의라는 반대편 절벽에서 떨어졌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세대에 그의 이름을 위한 순수한 증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 세대에서도 증인 없이 스스로 떠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이 세대에 하나님이 전적으로 이용하실 수 있도록 대가를 치를 것인가?

장 18
예수님께 온유함을 배우다.

"나에게 배워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 마11:29 ).

예수님은 우리에게 겸손과 온유라는 두 가지를 그로부터 배우라고 하셨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겸손에 대해 말하고 썼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온유함에 대해 쓰거나 말하는 것은 많지 않다. 이로 인해 많은 신자들의 개인적 삶은 물론 교회 내에서도 불균형이 빚어지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바리새인(마23)과 베드로(마 16:23 )를 꾸짖는 방식에서, 그 방식으로 환전상들의 상을 뒤엎으시고 성전 밖으로 쫓아내신 것에서 그분의 엄격함을 본다(요 2:14-16 ). 그것은 예수님이 드러낸 하나님의 본성의 한 측면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예수님이 악명 높은 죄인을 대하는 방식에서 하나님의 온유함을 본다.

예를 들면,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하는 방식에서 예수님의 온유함이 보인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그녀의 남편에 대해 물었었다. 여자는 즉시 화제를 바꿔 예수님께 전혀 관계없는 예배에 대한 질문을 했다( 4: 17-24 ). 거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그녀의 부도덕한 과거에 대한 문제를 압박하지 않고, 그녀가 주제를 바꾸도록 내버려 두었고, 예배에 대한 그녀의 질문에 대답한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의 지난 삶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자세히 조사하거나, 그들의 삶에서 아픈 점을 건드리는 것들을 반복함으로써 그들을 난처하게 만든다면, 우리가 성령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온유함에 대해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고 확신할 수 있다.

호기심은 많은 신자들조차 악덕으로서 인식하지 못한 죄이다. 우리의 육신은 남들이 저지른 악행에 대해 알고자 하는 큰 갈망을 가지고 있으며, 그래서 기도요청이라는 구실로 나눌 때에도 항상 남의 죄를 듣고 싶어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정보는 결코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의 마음을 더럽히고, 다른 사람에게 편견을 갖게 하며, 우리를 악하게 만들고, 주님을 위한 증거와 사역을 방해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사탄이 많은 신자들을 곁길로 가게 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자발적으로라도 지난 삶을 우리에게 말하게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오직 하나님께만 그의 죄를 고백해야 하고, 다른 사람에게 죄를 고백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죄를 고백하는 경우는 회중 안에서 죄를 범한 때이다.

사생활의 죄와 우리 자신 외에는 아무도 해치지 않는 생각들의 죄는 오직 하나님께만 고백해야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힌 죄는, 그 다른 사람에게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고백해야 한다. 신자들의 지역 단체에 저지른 죄는 집회 모임에서 공개적으로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고백해야 한다.

온유한 사람은 타인의 사생활이나 그의 과거를 호기심으로 파헤칠 어떤 말도 하지 않도록 항상 조심할 것이다. 우리가 실수로 아픈 데를 건드려서 그 사람이 당황하는 것을 보게 된다면, 우리는 빨리 화제를 바꿔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그것이 온유함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온유함을 간음으로 잡힌 여자를 다루는 방식에서도 본다(요8 :1-12 ). 예수님은 확실히 그녀의 죄를 묵인하거나 그녀의 죄를 다른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간음을 '죄'라고 부르며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아주 분명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는 죄가 있다고 해서 그녀에게 돌을 던지지 않았다.

하나님은 죄인에게 돌을 던지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죄에 대한 승리를 설교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돌을 던지지 않고 설교한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바리새인들이 사람들을 비난함으로써 설교한 방법이다.

죄에 대한 승리를 설교하는 많은 사람들의 말 속에는 그리스도의 온유함이 빠져 있다. 남에게 죄를 짓지 말라고 말하지만, 그들은 또한 비난하고 고발하며 그들을 나쁘게 언급하기도 한다. 바리새인들이 그랬다. 그들은 의에 대해 설교했지만, 자기 집단에 속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저주받은" 사람으로 여겼다(요 7:49 ). 오늘날 우리는 많은 신자들에게서 같은 태도를 발견한다.

반면에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했던 것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의 의를 설교하셨다. 그러나 그는 어떤 죄인도 나쁜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주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셔서, 그의 온유함으로 그들을 경건한 삶으로 인도하셨다.

간음죄에 걸린 여인은 바리새인들이 자기의 죄를 지적하고 고발하고 폭로하기 위해 왔을 뿐인 반면에, 예수님은 그 여인을 구원하고 싶어하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녀는 분명히 구원을 받아서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예수님과의 만남 이후에 말이다.

예수님이 그 죄 많은 여자에게 설교하셨을 때, 그는 그 여자에게 교리를 설교한 것이 아니라 격려를 하셨다. 그는 단지 거룩함에 대한 교리가 아니라, 죄의 힘으로부터의 구원의 메시지를 가지고 왔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거룩함-설교"는 옛사람과 육신, 육신을 통한 새롭고 살아 있는 길 등을 정의하는 교리에 관심을 쏟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심오한 진리를 설교하는 자들에게서 예수의 온유함을 좀처럼 보지 못한다. 그래서 죄인들은 그런 바리새인들에게 끌리지 않았다, 예수님께 끌렸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거룩함을 설교하는 우리 모두가 자신의 삶을 살피고, 우리의 메시지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되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좋다. 그리스도의 온유함이 우리의 사역에 존재하는가?

다른 사람이 그리스도께 끌리게 하려면, 그리스도가 우리의 육신에 나타나야만 한다. 우리가 우리의 사역을 완수하려면, 성령이 예수님의 온유함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우리를 그 모습으로 변화시키도록 허락해야만 한다.

당신은 다른 사람에게 돌을 던지는가? 당신은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하나님보다 악마와 더 닮았다. 사탄은 고발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절대 고발하지 않는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너를 사랑하시고 너를 고발하지 않으실 것이다"(습3: 17 - TLB)라고 아주 분명하게 말해준다.

성경은 심판이 하나님의 "비상하며 기이한 일"(사28 :21 )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보통 또는 일상적으로 하시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다르다. 남을 판단하는 것은 그의 보통의 일이다. 여기서 인간이 사탄의 독에 감염되었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지 않았는데,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있다고 자신을 속이는 것은 쉽다. 다른 사람을 고발하고 판단하는 습관을 버리지 않았다면, 우리는 분명히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성장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선생이 되려고 하지 말라고 한다( 약3:1 )

선생들은 보통 무엇을 하는가? 그들은 매일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학생들의 모든 책을 가지고 교정하고 교정하고 교정한다...... 그것이 매일, 매년, 그들이 하는 일이다.

우리는 매일 다른 사람들을 교정하고 점수를 매기는 그런 선생님들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같은 구절에서 더욱 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받는다.

만약 우리가 온유하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실패를 용인할 것이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실패의 원인이 되는 숨겨진 요인들이 있을 수 있다고 믿는다.

어느 날 저녁 퇴근해서 집에 와서, 아들이 숙제에서 계산을 잘못한 것을 보고, 심하게 꾸짖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만약 아내가 당신이 들어오기 전에 아들이 한 시간 동안 바로 그 계산을 하려고 노력했던 10장의 종이를 보여준다면, 당신은 어떤 기분이 들겠는가? 아들에게 그렇게 심하게 대했던 것을 후회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의 방식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실제로 죄악에 빠지기 전에 얼마나 저항했는지는 알 수 없다. 우리는 오직 그 사람의 넘어짐만을 보고 우리가 보는 것으로 판단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이 넘어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치고 싸웠던 시간을 보시며, 우리보다 더 자비롭게 심판하신다.

에베소서 4장 2절 (TLB)에는, "온유해라. 서로 사랑하므로, 서로의 결점을 용납하면서 인내심을 가져라"라고 써있다.

욥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온유함을 보여주는 예를 본다. 거기서 우리는 욥이 병중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중얼거린 것을 읽었다. 그의 말들은 불신과 원통함으로 가득 차 있었고, 하나님의 엄격한 심판을 받았어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을 사랑하셨고, 그를 용납하셨다. 하나님은 욥이 하루아침에 모든 재산과 열 명의 자식들을 잃었고, 불치병에 걸렸으며, 게다가 아내로부터도 비난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압박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욥은 오늘날과 달리 "극복하는 은혜"를 누릴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욥에게 부드럽게 말씀하시며, 욥의 말을 책망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배경 상황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는 온유하셨다. 우리는 보통 어떤 배경 상황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엄격하다. 이것이 성경이 판단하지 말라고 하는 이유이다.

이사야 61장 2절 에서, 우리는 주 예수님이 "주님의 은혜의 해(365일)와 하나님의 보복의 날(1일)"을 선포하기 위해 기름부음을 받은 것을 읽었다.

우리는 로마서 11장 22절으로부터 하나님이 친절하고 엄격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 그러나 이사야 61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그의 엄격함에 대한 비율이 50:50이 아니라 365:1이라고 읽는다!!

우리를 부르신 것은 그 온유한 성품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른 사람에게 자비로운(긍휼히 여김) 자만이 하나님으로부터 자비를 받을 것이라고 하셨다(마 5: 7).

신약성서의 자비는 우리에게 해를 끼친 다른 사람들을 단지 용서하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누가복음 10장 25 -37절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끝날 때, 사마리아인의 행동은 궁핍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었다'라고 한다(37절). 그래서 우리는 자비가 우리의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성경은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은 자에게는 자비가 없을 것"이라고 경고하지만, "자비를 베풀었다면, 하나님의 자비가 당신에게 내리는 그분의 심판을 이길 것"(약2 :13 )이라고 말해 우리를 격려한다.

그 구절에 비추어 볼 때, 두 신자가 심판하는 날에 어떻게 될지 생각해 보자 -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었던 신자와 그렇지 않은 신자.

A형제가 먼저 와서 주님 앞에 선다. 그는 이 땅에서 성실한 신자였지만, 많은 분야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 못한 신자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에게 해를 끼친 모든 사람들을 완전히 용서하고, 주위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어 준 사람이었다. 여호와께서 그를 보시고 이르시되, "음, A야, 네 인생에는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할 여러 가지 일이 있다. 그러나 나는 네가 너의 길에서 우연히 마주한 모든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자비롭고 온유하게 대해주었음을 안다. 그러니, 네가 다른 사람들을 대했던 것처럼 내가 너를 대할 것이다. 너는 자유롭게 갈 수 있다. 너에 대한 심판은 없다."

그리고 나서 그의 삶의 모든 의식적인 영역에서 죄에 대한 승리를 거둔 B형제가 온다. 자신보다 훨씬 못하던 A형제가 그렇게 가볍게 넘어갔다면, 그 자신도 분명히 주님의 높은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그는 속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B는 죄에 대한 승리가 없는 다른 신자들에게 엄격하고 무자비한 형제로, 끊임없이 그들을 그리스도의 신부의 지체가 아닌 "창녀"의 지체라고 불렀다(하나님이 B형제에게 아들을 위해 신부를 선정하는 임무를 부여한 것처럼!!). B형제는 또한 다른 집단의 신도들을 얕잡아 보며 자기 집단에 속한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택한 자라고 느꼈다. 이제 주께서 그에게 이르시기를, "네가 죄와 싸우기 위해 그토록 정성을 다하여 노력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것은 좋았다. 하지만 너는 다른 신자들에게 너무 가혹했고 그들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 너무 무자비했다. 그러니, 네가 다른 사람들을 대했던 것처럼 내가 너를 대할 것이다. 너는 엄격하게 심판을 받아야 한다."

B가 주님으로부터 그 말씀을 들었을 때, 그가 얼마나 놀랐을까? 이곳에서 1등인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꼴찌가 될 것이다.

A와 B에 대한 주님의 대우에는 편견이 없었다. 주께서는 두 사람에게 똑같은 말씀을 하셨다: "네가 다른 사람들을 대하듯이 나도 너를 대하겠다." 그리고 그들 둘 다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았다.

이것은 내가 그려낸 상상의 장면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 우리가 가장 확실하게 보게 될 것이다 -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 거짓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직도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면 야고보서 2장 13절 을 다시 읽어라 (약2:13 -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많은 신자들이 다른 사람에게 엄격하게 대하고 그들을 무자비하게 판단하는 이 사탄적 습관을 없애지 못한 채 해마다 살아가고 있다. 올해는 다를 것이라고 결심하자.

하나님께 그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을 구하자. 올해에는 다른 사람에 대한 모든 판단을 끝내도록, 다른 사람의 사생활과 일에 대한 모든 호기심을 끝내도록, 다른 사람의 문제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끝내도록, 다른 형제와 그들의 아내와 자식들에 대한 모든 비판을 끝내도록.

대신 그리스도의 온유함에 참예하는 길을 점점 더 추구하자. 그렇다면 우리는 올해를 헛되이 살지 않을 것이다.

장 19
당신의 결정이 당신이 무엇이 되는지를 결정한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6: 38) .

예수님은 여기서 이 땅에 무엇을 하시려고 오셨는지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 한 문장에서 예수님이 이 땅에서의 모든 삶의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았는지 보게 된다.

나사렛에서 예수님이 살아온 30년을 가리켜 숨겨진 세월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은 그 30년 동안 매일 무엇을 하였는지를 밝힌다: 그는 자신의 뜻을 부인하고 아버지의 뜻을 따랐다.

예수님이 영원 전부터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함께 계실 때, 자신의 뜻이 아버지의 뜻과 같았기 때문에, 그는 결코 자신의 뜻을 부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우리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왔을 때, 그 육신은 모든 점에서 아버지의 뜻과 정반대되는 자기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을 행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항상 자기 뜻을 부인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예수님이 지상의 삶 내내 짊어지셨던 십자가, 즉 자신의 의지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었고, 우리가 주님을 따라가려면, 그분은 이제 매일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요구하신다.

예수님을 영적인 사람으로 만든 것은 일관된 자신의 의지에 대한 부인이었다. 그리고 우리를 영적으로 만드는 것 또한 우리의 자기 의지에 대한 부인이다.

우리는 매일 여러 가지 문제에 관한 결정을 내린다. 우리는 돈을 어떻게 쓸 것인지, 여가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지, 또는 어떻게 말할 것인지, 또는 누군가에 대해 어떻게 말을 할 것인지, 또는 어떻게 특정한 편지를 쓸 것인지, 또는 다른 사람의 행동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또는 말씀을 공부하거나 기도하거나 교회를 섬기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쓸 것인지 등과 관련하여 결정을 내린다. 우리는 아침부터 밤까지 주위 사람들의 행동과 말과 처신에 반응한다. 우리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매일 적어도 100개의 결정을 내린다 - 그리고 그 각각의 결정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할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기쁘게 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우리의 많은 행동들은 의식적인 결정의 결과가 아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우리는 이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로 결정을 한다. 즉,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하거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우리의 무의식적인 행동은 우리가 의식적인 결정을 내리는 방식에 의해 결정된다. 마침내, 우리가 영적이 되는지 아니면 육신적이 되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이러한 결정들의 총합이다.

우리가 처음 회심한 이후 지금까지 내린 수백만 가지의 결정을 생각해 보라. 매일 여러 차례 자기 의지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의식적이고 끊임없이 선택해온 이들은 영적이 되었다. 반면에, 단지 그들의 죄를 용서받은 것만으로 기뻐하고, 따라서 대부분의 시간을 그들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을 택한 사람들은 육신적으로 남아있다. 각 개인의 결정으로 마침내 무엇이 되었는지를 결정해 왔다.

당신은 오늘, 지난 몇 년 동안 삶의 다양한 상황에서 내린 수천 가지 결정을 통해, 스스로 선택한 것만큼 겸손하고 거룩하며 사랑스럽다.

영성은 하나님과 한 번의 만남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니다. 자기부인의 길을 선택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매일마다, 매주마다, 매해마다 일관되게 선택한 결과이다.

그들이 개종한 지 10년이 지난 두 형제(둘 다 같은 날에 그리스도에게로 회심함)의 영적 상태를 생각해 보라. 한 사람은 이제 영적 분별력을 가진 성숙한 형제로, 하나님께서 교회에서 많은 책임을 맡기실 수 있다. 다른 한 명은 여전히 어린 아이로 분별력이 없고,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먹여지고 격려를 받아야 한다.

무엇이 그 둘 사이에 그러한 차이를 만들었을까?

답은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인 생활 10년 동안 매일 그들이 내렸던 작은 결정들 때문이다.

그들이 같은 방식으로 10년을 계속한다면, 그들 사이의 차이는 더욱 확연해질 것이다. 그리고 영원한 세상에서, 그들의 영광의 다른 정도는 2000와트 전구와 5와트 전구가 내뿜는 빛만큼 다를 것이다!!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고전 15:41 ).

당신이 한 가정을 방문할 때, 지금 이곳에 없는 (당신이 싫어하는) 어떤 형제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상황을 생각해 보라.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그 유혹에 굴복하여 험담을 할 것인가, 아니면 자기를 부인하고 입을 다물고 있을 것인가? 단지 그들이 누군가를 욕한다고 해서 나병이나 암으로 하나님이 쓰러뜨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니.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죄가 그들의 삶을 파괴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아, 많은 형제 자매들이 그들 스스로를 기쁘게 할 때마다, 어떻게 조금씩 자신을 파괴했는지를 깨닫는 것은 오직 영원한 세상에서 이다. 그때 그들은 이 땅에서 그들의 삶을 낭비한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도 나사렛에서 30년 동안 비슷한 상황에서 유혹을 받았다. 그 숨겨진 세월에 대해 어느 때에도 "그는 결코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않았다"(롬 15:3 )고 씌어 있다. 그는 항상 자신을 부인했다. 그래서 그는 항상 아버지를 기쁘게 했다.

자신을 즐겁게 하는 것은 삶의 많은 부분, 예를 들어 먹는 부분에서 할 수 있다. 배가 고프지 않을 때도, 맛있는 간식을 사기 위해 돈을 쓰기로 결정한 상황을 생각해 보라. 거기에는 확실히 죄가 있거나 잘못된 것이 없다. 하지만 그것은 특정한 삶의 방식을 말해준다. 돈이 있기 때문에, 필요하든 필요치 않든 마음에 드는 것을 사게 된다. 당신은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을 한다. 만약 당신이 무언가를 사고 싶다면, 당신은 그것을 산다. 당신이 어딘가로 가고 싶으면, 당신은 간다. 만약에 당신이 늦게 자고 싶으면, 당신은 그냥 늦게 잔다. 당신이 정기적으로 모임에(예배) 가고 매일 성경을 읽어도, 그렇게 사는 최종 결과는 무엇일까? 구원을 잃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그분을 위하여 살라고 주신 삶을 반드시 낭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형제는 다르게 행동한다. 그는 자신의 몸을 단련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배가 고프지 않을 때, 불필요하게 아무것도 먹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는 자신을 위해 불필요한 물건을 사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는 하나님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매일 15분 일찍 일어나기로 결심한다. 누군가 화가 나서 그에게 말을 걸면, 그는 부드럽게 대답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항상 사랑과 선함에 남기로 결심한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자극할 신문의 특정 뉴스 기사를 읽지 않기로 결심한다. 모든 상황에서, 그는 자신을 낮추고 자신을 의롭게 여기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는 그에게 세상 영향을 주는 특정 우정을 포기하기로 결심한다. 끊임없이 자신의 의지(그를 기쁘게 하는 것)를 부인하기로 결심함으로써, 하나님만을 기쁘게 하려는 의지가 강해진다.

그는 그 불필요한 물건을 사지 않거나, 15분 일찍 침대에서 일어나거나, 그의 인간다운 품위를 포기하고 용서를 구함으로써 무엇을 잃었는가? 아무 것도 없다. 하지만 그가 얻은 것을 생각해보아라!

작은 일에도 한결같이 충실한 그런 사람은 몇 년 안에 믿음직한 하나님의 사람이 될 것이다 - 그것은 그가 소유하고 있는 성경적 지식 때문이 아니라, 인생에서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취하는 작은 결정의 충실함 때문이다.

그렇다면 의지가 약해지지 마라. 항상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당신의 의지를 연습하라.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실천하기 때문에(수년을 거쳐 올바른 방향으로 그들의 의지를 연습함에 있어서), 선악을 분별하는 감각을 훈련 받은 자들"( 히5:14 )이다.

예를 들어 보자: 뚱뚱한 남자 두 명이 그들의 군살을 빼기 위해 의사에게 간다. 의사는 그들에게 앞으로 12개월 동안 일련의 운동을 시킨다. 한 남자는 매일 꾸준히 그러한 운동들의 훈련을 거치고, 날씬해지고 강해진다. 다른 남자는 처음 며칠 동안 운동을 하다가 느슨해져서 결국 완전히 포기한다. 그의 불룩 나온 배는 그의 무절제함으로 점점 더 뚱뚱해지고, 마침내 그는 요절한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우리의 의지를 강하게 만들거나, 악마가 착취할 수 있도록 무기력하고 나약하게 내버려 둘 수 있는 방법을 보여주는 예다.

나는 한 주님의 젊은 종이 텔레비전을 너무 많이 보고 있다고 느끼고(깨끗한 프로그램만 보고 있었음에도), 어느 날 TV를 팔 뿐만 아니라, TV를 보면서 보냈던 시간을 매일 기도하는데 쓰기로 결심했다는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난다. 그가 선택하고 유지한 그 작은 결정의 직접적인 결과로서, 하나님은 그에게 수천 명에게 축복을 주는 사역을 맡기셨다.

깨끗한 프로그램을 TV로 시청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보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많은 것을 맡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그분은 부지런히 그를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며, 그분은 편애하지 않으신다.

그렇다, 당신은 자신을 부인하거나, 또는 음식, 돈, 수면, 독서 등의 분야에서 자신을 즐겁게 하는 것과 관련하여 당신이 취한 많고, 많은 작은 결정들 때문에 오늘 당신이 있는 것이다.

시간이 빨리 지나가고 있다. 나이 마흔이 넘고, 그리고 그들의 인생을 자신을 기쁘게 하며 보낸 사람들은, 이제 하나님을 위해 많은 것을 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다. 그들은 인생의 가장 좋은 세월을 허비했기 때문이다. 당신의 지난 세월은 영원히 사라졌다. 전능하신 하나님도 그것들을 당신에게 회복시킬 수 없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회개한다면, 아직 인생의 후반기를 맞이하여 하나님을 위해 유익한 일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아직 10대와 20대인 사람들에게 주로 말하고 싶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축복이 되도록, 당신을 축복하기 원하신다는 것을 알려주겠다. 당신의 나이 30세나 35세가 될 때쯤에, 그분은 그의 교회에서 중요한 사역을 당신에게 맡기고 싶어한다. 그렇지만 그분이 앞으로 10년 후에 당신을 충실하다고 생각하여, 그분이 당신의 인생에서 그분의 뜻을 이루시도록 하겠는가?

만약 지금부터 충실하기로 결심했다면, 지난 삶에서 지금까지 아무리 실패했더라도,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인생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라.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육신의 나날들을 어떻게 살았는지를 생각하고, 그의 본을 따르라. 스스로에게 말하라, "나는 이 땅에서 태어났으며, 내 뜻을 부인하고, 하늘 아버지의 뜻을 행할 것이다."

악마가 지금 내가 하는 말을 당신이 진지하게 받아들이도록 해줄 것 같은가? 아니, 그는 시간이 충분하다고 말해줄 것이다. 그는 당신에게 그런 자기-부인적인 생활이 부담이 될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자신을 즐겁게 하는 것을 개의치 않으시며, 여기저기서 조금씩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을 개의치 않으신다고 말할 것이다. 그는 당신에게 느긋하라고 말할 것이다, 등등. 왜? 왜냐하면 그는 당신이 앞으로 20년 동안 목적 없이 떠돌기를 원하고, 너무 늦었을 때 깨어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젊은이여, 사탄에게 속지 마라. 하나님은 당신에게 단 한번의 삶을 주셨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 그것을 낭비하지 마라.

당신 주위에는 그렇게 훈련되고 온전한 삶을 사는 데 관심이 없는 (심지어 새롭고 살아 있는 방식을 이해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많은 신자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을 판단하지 마라. 바리새인이 되어 그들을 업신여기지 마라. 네 일이나 신경 쓰고 그들의 일에 쓸데없이 참견하지 마라. 그들에게 있어 가장 좋은 부분을 믿어주고 내버려 두어라. 그러나 동시에 그들의 예를 따르지 마라. 달라져라. 예수님만 너의 본보기가 되게 하라. 당신은 당신 삶에 대한 소명이 있다. 이 세상에서 어떤 걸 잃더라도, 그것을 잃을 수는 없다.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당신의 삶에 대해 설명해야 할 날을 자주 생각하라.

그러니 인생에서 저질렀던 실수는 잊어버려라. 너의 죄를 근본적으로 뉘우치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온 마음을 다져라. 하나님은 당신을 용서하고 당신의 과거를 완전히 지워 버리신다. 지금 너의 실패를 곱씹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도 장차 방랑자가 될 것이다. 당신의 실패에 대한 기억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당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그것은 또한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항상 얼굴을 흙 가운데 두도록 해줄 것이다.

당신이 하나님의 진정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결심하라.

장 20
어둠의 지배자이자 거짓말의 아버지인 사탄

사탄은 "어둠의 지배자"와 "거짓말의 아버지"로 불린다(엡 6:12 ; 요8:44 ). 이 두 호칭 모두 그의 성격과 사역을 보여주고 있다.

이 우주에서 영적 어둠을 구성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사탄에게 할당한 영역이다. 이 영토를 방황하는 모든 사람들(신자들이든 불신자들이든)은 어둠의 지배자가 그들의 삶에 발판을 마련할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빛을 견딜 수 없는 일을 할 때마다, 사탄에게 마음을 열어준다. 우리의 안전은 빛 안에 있다. 오직 거기에서만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고, 거기에서만이 아버지와 교제를 할 수 있다(요일1 :9 ) 사탄은 이것을 알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는 끊임없이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빛을 견디지 못하는 일을 하라고 종용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성령 충만한 신자들조차 그들의 기름부음을 잃게 되는 것이다.

모든 거짓말은 역시 사탄에서 비롯된다. 신자들이든 불신자들이든 간에, 그들의 삶에서 어떤 종류의 거짓말이나 속임수나 위선에 여지를 주는 모든 사람들은, 사탄이 그들의 삶에 침투하도록 허용한다. 사탄은 이것을 알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사탄은 어디에서나 신자들에게 사람의 얼굴 앞에서 살도록 권하는 것이다. 그것이 위선자가 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위선은 거짓이며 사탄에 의해 양육된다.

우리가 먼저 사탄에게 우리 삶의 발판을 마련해 주는 그 무엇으로부터도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탄을 극복할 수 없다. 성경은 우리에게 먼저 "하나님께 복종하라"고 명령하고, 그 다음 "악마를 저항하라"( 약4:7 )고 명령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삶을 세심하게 평가하고, 어둠 속에서나 간교한 속임수 가운데 걸어 다니면서 사탄에게 자리를 내준 곳이 있는지 살펴야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세상의 통치자가 오는데, 그는 내 안에서 아무것도 취하지 못하느니라"(요 14:30 )라고 하셨다. 사탄은 예수님 안에서 거짓, 교활함, 어둠을 찾을 수 없었다.

우리 역시 악한 자가 우리 삶에 어느 때라도 발판을 마련하지 못하는, 그런 방식으로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다.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자신을 지키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요일5:18 ).

장 21
하나님을 돕는 것!!

인간의 추리력을 사용하고, 자기자신의 명철을 따라 하나님을 도우려 할 때, 하나님의 일과 우리 자신의 삶에서 많은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하늘을 쳐다보고 별을 세어 보아라. 네 자손도 그와 같을 것이다'.....이제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다…..그래서 사래는 자기 하녀 이집트 사람 하갈을 자기 남편 아브람에게 그의 아내로 주었다.....그리고 하갈은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아 주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아뢰었다, `오,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것이니, 내가 그와 나의 언약을 세우겠다'"( 창15:5 ; 16:1,3,16; 17:18,19).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별처럼 셀 수 없이 많은 씨앗을 약속했었다. 그러나 사라는 불임이었다. 아브라함과 사라 모두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이름이 불명예스럽게 될 것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래서 사라의 제안에 따라, 아브라함은 궁지에서 하나님을 돕기 위해, 다른 아내를 얻어 그녀를 통해 아들을 얻었다!!

아브라함이 깨닫지 못한 것은 하나님에게는 그런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가 (이스마엘을 낳음으로) 하나님께 바친 도움은 마침내 그의 아내뿐만 아니라, 아들 이삭과 그의 후손들에게도 문제를 일으켰다.

우리가 얼마나 자주 우리의 도움 없이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행되지 않을 것이라고 느끼는가.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움직이거나 행동하라고 말하지 않았을 때 움직이고 행동한다. 우리는 인간이 만든 계획과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노력을 신뢰하며, 주님이 우리를 인도하시기를 기다리며 충분히 믿지 않는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과 지도하심을 구하지 않고서는 평생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요 5:19 , 30 ). 그러나 대부분의 신자들은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신뢰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나님의 뜻과 지도하심을 구하지 않는다!!

우리가 결정을 내리는데 있어서, 우리 기도의 부족과 우리 자신의 명철(또는 위의 아브라함의 경우처럼, 우리 아내의 명철함!!!)을 의지하는 것은 우리의 가정과 하나님의 일에 혼란을 가져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위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 하라'.....그러자 모세가 손을 들어 바위를 그의 지팡이로 두 번 내리쳤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가 이 회중을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민20:7-13 ).

하나님은 이번에는 오직 모세에게 바위에게 말하라고만 하셨다. 그러나 모세는 바위를 두 번 쳐서 하나님을 돕기로 결심했다. 육신이 부드럽게(한 번) 말하는 것보다 오히려 세게(그리고 두 번) 치는 것이 얼마나 진실한가!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이 인간의 약간의 강인함으로 좀 더 빨리 성취될 것이라고 느낀다, 그가 우리에게 온유하라고 명령할 때에도 말이다(마 11:29 ).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인자하심을 통해서 사람을 회개하게 하신다( 롬2 :4).

모세 또한 하나님이 전에 바위를 한 번 치라고 하셨기 때문에(출 17: 6), 매번 그렇게 해야 한다고 느꼈을 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은 성령이 항상 이전에 또는 다른 곳에서 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심리적인 수법으로 그를 도와 "부흥"을 불러오고,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고, 사람들이 "방언" 하게 한다. 그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은 성령이 각기 다른 시기에 다르게 일하시며, 그의 은사를 드러내기 위한 어떤 영혼의 도움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웃사가 하나님의 궤를 향해 손을 내밀어 잡았는데, 소가 그 궤를 뒤엎을 뻔하였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분노가 웃사를 향해 타올라, 하나님께서 그의 불경함을 인하여 거기서 치시매; 그가 거기에서 죽었다"(삼하6: 6, 7 ).

웃사의 의도는 좋았다. 그는 하나님의 증거의 궤가 넘어지지 않도록 지켜주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러나 그는 레위인이 아니어서, 궤를 만질 권리가 없었다. 그는 자기 영역을 벗어났다. 이건 너무 심각한 문제여서, 하나님이 그를 죽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함부로 다룰 수 없다.

교회에서도, 하나님은 각기 다른 책임을 주셨다. 그리고 각 사람의 주위에 경계를 그으셨다. 우리가 어떤 부분에서 부족함을 보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여 하나님을 도우려 할 때, 먼저 성령께서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그 문제에 대해 무엇인가를 하라고 재촉하는 것이 우리 자신의 인간적 추리인지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모두의 경계를 존중한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 주위에 그려진 경계를 벗어나, 우리로부터 어떤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오직 그 경계 안에서만, 우리는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행17 :26 , 27 ). 경계 밖에서는, 우리는 악마만 발견할 것이다( 전10:8b ).

위 사례에서 설명한 원칙의 우리 삶에 대한 적용은 다양하다. 그러면 우리 자신의 삶과 사역과 관련하여 이 문제에 대해 하나님에게 빛을 요청하자.

장 22
멜기세덱의 사역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히7 :17 ).

멜기세덱은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친밀하게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돌아올 때, 아브라함을 만나, 음식과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으로 그를 축복하였다( 창14:14-20 ).

아브라함은 피곤했고, 그렇게 승리한 후 크게 교만해질 수 있는 위험에 처해 있었다. 그는 또한 전쟁에서 획득한 소돔 왕의 재산을 탐낼 위험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멜기세덱을 보내서 아브라함의 지친 몸의 생기를 되찾게 하는 음식과, 교만과 탐욕으로 더럽혀지는 것으로부터 그의 영혼을 구원하는 말씀을 주셨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하늘과 땅의 주재이시요, 너희의 적에 대한 승리를 안겨주신 하나님 영광을 받으소서." 그는 아브라함에게 7가지 요점의 긴 설교를 하지 않았다. 아니. 그는 단지 한 문장을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아브라함의 필요를 정확히 충족시킨 예언적인 말씀이었다.

그는 그 한 문장을 통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승리를 안겨주셨으므로 그 공을 스스로 차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그는 또한 아브라함에게 그의 하나님이 천지를 소유하고 계시기 때문에, 승리자들이 보통 하는 것처럼, 그가 전쟁의 어떤 전리품도 취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몇 분 후, 아브라함이 소돔 왕을 만났을 때, 멜기세덱의 이런 말이 그가 옳은 일을 하도록 도왔다. 그는 소돔 왕에게 그의 하나님이 하늘과 땅의 주재이기 때문에, 그는 전리품의 실 한 가닥도 취하지 않겠다고 말했다(창 14:22-24 ).

예수님은 이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하나님으로부터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같은 반차에 따라 제사장이 되어 이 멜기세덱 사역을 완수해야 한다.

멜기세덱은 어떻게 어떤 허세, 과시, 홍보, 광고도 없이, 조용히 나타나 단지 아브라함에게 필요한 것, 즉 그의 육체적 필요를 위한 음식, 그리고 아브라함을 교만과 탐욕으로부터 구하는 올바른 말을 했는지 생각해 보라. 아브라함의 필요를 충족시킨 후, 그는 온 것처럼 조용히 사라졌다. 이것이 우리 모두가 갈망해야 할 사역이다 -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조용히 축복하고 나서 우리 자신에 대한 명예, 칭찬, 감사 또는 홍보를 구하지 않고 사라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면서 일하는 세상에서 전투로 피곤하고 지쳐서, 교회의 모임에 온다. 멜기세덱처럼 교회에서 예언으로 신도들에게 생기를 주는 영적인 음식과 영양분을 제공해 주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또한 그들이 필요로 할 때, 실용적이고 이 땅의 방법으로 그들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가.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삶을 더 쉽게 만들 수 있다.

형제들이 자신에 대해 높은 생각을 갖고, 교회 모임에서 그들의 말에 내용이 거의 없이 오랫동안 말을 할 때 슬프다. 그렇게 길고 지루한 설교는 그 모임에 죽음을 불러온다. 반면에, 모든 모임에서 형제 자매들에게 올바른 말 - 예언의 말 - 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예언을 하려면, 우리는 은밀히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며, 언제나 하나님과 교통하며, 양심이 깨끗한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편애가 없으시다. 그는 교회의 모든 형제 자매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 되어, 예언하기 바라신다(행 2:17 , 18 , 고전 14:31 참조).

만약 제사장으로서 희생제단에 기꺼이 모든 것을 바칠 의지가 있다면, 예언하기를 간절히 원한다면, 형제자매의 복지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염려가 있다면, 그리고 자신의 명성이나 명예에 대한 욕망이 없다면, 하나님은 매 모임에서, 형제자매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반드시 당신의 입에 한 말씀을 넣어주실 것이다 - 단지 한 문장일지라도 말이다.

멜기세덱의 제사장직에서는, 아무도 특별한 형제는 없다. 당신이 가진 은사 때문에 알려지려고 하지 마라. 보잘것없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라. 정말 멜기세덱 사역을 원한다면, 익명으로 행동하라.

당신이 그리스도께 어떤 영혼들을 데려온 사람이라는 생각이나, 귀신을 내쫓거나, 병든 자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나, 모임을 이끄는 사람이라는 생각이나, 이런 저런 생각이 당신 안에 없도록 하라. 어떤 이름, 직함, 명예, 명성 없이 평범한 형제가 되는 것에 만족하라.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고 사라져라. 알려지지 않기를 노력해라.

비록 우리의 사역과 은사는 다를지라도, 우리는 모두 동등하다는 것을 기뻐하자. 예수님은 일찍이 제자들에게 귀신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라고 말한 적이 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사역, 즉 그들이 할 수 있었거나 했던 것을 기뻐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하신 일 - 생명책에 그들의 이름이 기록된 것으로 기뻐해야 했다( 눅10:20 ).

그러한 태도는 모든 새 언약 사역의 핵심에 있다.

하나님의 본성의 한 가지 특징은 모든 전시와 선전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을 두고 쓴 글이다,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사45:15). 하나님은 우리를 자기와 같이 만들기를 원하신다 - 눈에 띄지 않고, 행하는 일에 대해 어떤 공도 바라지 않고 일을 하기를 좋아하는 그의 본성에 참예하는 것을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그렇게 큰 일을 하기를 원하시니, 우리도 멜기세덱이 그랬던 것처럼, 남을 축복하고 사라지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그는 우리가 한 일에 대해 사람들로부터 명예와 인정을 구하는 이 사탄적 악으로부터 우리를 완전히 해방시키고 싶어한다.

우리 가운데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 되는 사람이 많기를 바란다.

장 23
분별력의 비밀

"종교적 지도자들은 예수를 비웃고 있었다.... 군인들도 또한 그를 희롱했다. 그곳에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 중 한 명이 예수를 비방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강도는 그를 꾸짖으면서 '이 사람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눅23:35-41 ).

이스라엘의 성경-학자 어르신들, 빈틈없고 교육받은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분별하지 못하는 동안, 성경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강도이자 살인자가 이 땅에서 마지막 순간에 그렇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왜 그럴까?

분별력은 지능이나 성경 지식이나 경험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마음이 진실한 사람에게 주신다.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는 우리가 분별력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그날 이스라엘에 있는 주교들, 제사장들, 성경학자들 전체가 십자가의 발치에서 예수님을 이것저것 고발하였다(마 27:41 ). 그 옆을 지나가던 나라의 많은 주요 시민들도 예수님을 무자비하게 욕하고, 예수님이 성전을 파괴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그를 비난하였다(예수께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으니 억울한 누명을 씌운 것이다)(마 27:39 ).

두 강도는 모두 이러한 고발에 매우 확신하여, 그들 역시 예수님에 대한 비난에 가담하였다(마 27:44 ).

그런데 갑자기 그 중 한 사람이 멈추고, 예수님께 대하여, "이 사람은 한 가지의 죄도 범하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눅23:41 ).

그가 어떻게 알았을까? 예수님이 자신이 주장했던 메시아라는 것을 그는 어떻게 알아냈을까? 아무도 예수님을 지지하지 않았던 이때에, 그는 어떻게 백성의 모든 고발을 거짓이라고 거부했을까?

결국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는 가능한가? 그 속담의 세상적인 지혜로 미루어 볼 때, 강도는 예수 안에 아무리 작아도 이 수백 명의 사람들이 그를 고발할 만한 어떤 근거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강도는 예수님이 잘못한 것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

강도는 어떻게 "귀가 들은 것"( 사11:3 )을 거절할 정도로 영적인 마음이 되었는가? 그는 예수께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23:34 )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한편에서, 강도는 저 성경학자들의 불안과 동요, 응어리와 증오를 보았다. 다른 한편에서, 강도는 용서하는 정신, 자기 변호를 하지 않음, 그리고 예수 안에 있는 평안을 보았다. 그래서 그는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를 알아냈다.

교회에서도, 이렇게 우리는 분별력을 발휘해야 한다. 두 형제자매가 논쟁을 벌일 때, 이 강도의 잣대를 이용하면, 곧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악인은 평온함을 얻지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구쳐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사57:20 , 21 ).

하나님 보시기에 그릇된 자는 경건한 형제자매에 대하여 그들의 입에서 쓰레기와 진흙(험담, 비난, 불평, 욕설)을 계속 토해내는 끊임없는 동요와 불안의 삶을 살게 된다. 당신은 그런 형제나 자매를 만나면, 주저 하지 않고, 악인으로 그/그녀를 분류할 수 있는데, 그것은 이사야 57 20 , 21절에서 하나님께서 그/그녀를 그렇게 부르시기 때문이다. 더 이상의 증거도, 심지어 사건의 진상을 조사할 필요도 없다. 그 사람의 불안과 동요는 그 모든 것의 가장 확실한 증거다.

세상적인 법정 사건에서, 판사들은 종종 판결에 도달하기 전에, 모든 증거를 살펴보는 데 여러 해가 걸린다. 그리고 심지어 그때도 그들은 틀릴 수 있다. 교회 내 분쟁을 위해 이 방법을 채택한다면, 우리는 결론에 도달하기 전에 한 쪽과 다른 쪽 말만 듣다가 평생을 보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틀릴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나은 방법을 주셨다: 누가 평안한지 누가 불안한지 확인해 보라. 누가 자신을 변호하기를 거절하고 누가 불평으로 가득 차 있는지 확인해 보라. 그리고 누가 의로운지, 누가 의롭지 않은지에 대한 답을 당신은 바로 갖게 될 것이다.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가 우리에게 분별력의 비밀을 보여 주었다.

장 24
교회 장로들에게 복종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히13 :17 ).

지역 교회-장로들에 대한 신뢰가 있는 곳에서는, 모든 문제에 있어서 그들에게 복종하는 것이 쉽다. 하지만 장로에 대한 신뢰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당신은 교회 일과 개인적인 일을 구별하여, 당신은 장로들에게 복종해야 할 곳과 하지 말아야 할 곳을 명확히 알 수 있어야 한다.

교회 문제들

교회 문제는 교회의 모임의 수행, 교회가 나아가고 있는 영적 방향, 그 교회의 사역에서의 강조, 교회가 주선한 활동 등등이 있다.

이런 문제에서는, 항상 장로가 주는 지시에 전적으로 복종해야 한다. 이것은 여러분이 그들을 성숙한 형제로서 존경하거나, 그들을 신뢰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께서 당신들을 두신 교회의 목자들이기 때문이다 - 다만 당신이 하나님께서 당신을 그 곳에 두셨음을 확신한다면 말이다.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에게 복종하셨다.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보다 불완전하고 덜 성숙하였지만, 그의 아버지가 예수님을 그들의 집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의 처음 30년 동안 나사렛에서, 그의 육신을 통해 새롭고 살아있는 길을 열기 시작한 방법이었다.

새롭고 살아있는 길의 첫걸음이, 예수님이 집 안의 불완전한 권위에 복종함으로써 열렸다는 이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다른 모든 단계들은 나중에 왔다.

당신은 어떤 교회에서도 분쟁의 원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 하나님은 형제들 사이에 불화를 뿌리는 사람들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 아무리 그들이 스스로 영적이거나 열성적이라고 생각하더라도 말이다( 잠6:16-19 ).

하나님께서 임명한 지도력에 대한 반항은 언제나 악마 같은 것이다. 고라의 길이며( 유11 절; 민16장), 항상 교만과 오만의 결과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당신을 특정한 교회에 두셨는지 확신이 없다면, 당신은 그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에 들어가야 하는지를 하나님 앞에서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절대로 교회에 머물러서 거기서 혼란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그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의 방문객처럼 책임감 없이 식당에서처럼 그곳에서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식당이 아니라 집이다. 그러니 당신은 지역 교회에 전적으로 전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교회는 불완전하므로 이상적인 교회를 결코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가장 가까운 교회를 찾으라 - 현재 여러분이 이해하고 있는 바와 같이.

만약 당신이 교회에 (부족한) 새로운 강조점을 가져와야 한다고 느끼면, 적절한 방법은 우선 장로 형제들과 이 문제를 의논한 다음, 그들이 지시하는 대로 정확히 하는 것이다. 부절절한 방법은 장로들이 정한 방향과 모순되게 말씀을 전함으로써, 모임에서 여러분이 강조하는 바를 이끌어 내는 것이다.

어떤 일에서든지 당신이 장로들에게 강하게 대립하고, 그들의 장로의 직책에 복종할 수 없다고 느끼거나, 장로들이 교회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고 느낀다면, 언제나 그러한 교회를 떠나 당신이 필요하고 중요하다고 느끼는 것을 강조하면서 자유롭게 자신의 교회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계시면, 당신의 새로운 발걸음을 축복할 것이다 - 하나님의 지시로 그들의 기존 교회를 떠나 새로운 교회를 시작한 마틴 루터, 존 웨슬리, 윌리엄 부스, 워치맨 니와 많은 다른 나라들의 사람들을 수세기를 거쳐 축복하신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당신이 자기 고집대로 행동하고 있고,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계시지 않는다면, 드다와 갈릴리의 유다( 행5:36 , 37 ), 그리고 이 20세기 기독교의 다른 수천 명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새로운 운동을 시작했지만 결국 혼란과 좌절에 빠졌다.

개인적인 문제들

개인적인 문제로는 어떤 옷을 입는지, 돈을 어떻게 쓰는지, 어떤 종류의 집에서 살 것인지, 어디에서 어떻게 여행하는지(항공기나 기차로), 당신과 가족들이 어떤 옷을 입는지, 어떤 음식을 먹는지, 자녀를 위해 어떤 장난감을 살지, 자녀가 컴퓨터 게임을 하는지 안 하는지, 자녀가 이웃의 텔레비전에서 스포츠 경기 보는 것을 허락할지 안 할지, 당신이 어떤 직업을 갖는지, 당신이 어디에서 일하는지 등의 문제가 있다.

그런 문제에서 당신이 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완벽한 자유가 있다. 만약 당신이 장로들에게 신뢰가 없다면, 그런 문제에서 당신은 장로에게 복종하거나 상의할 필요도 없다. 만약 그런 문제에 관해 의심이 간다면, 당신은 심지어 다른 곳에 있는 나이 많은 형제와 상의할 수도 있다, 만약 당신의 지역 장로들보다 그 형제를 더 신뢰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에서 최종 결정은 항상 당신의 몫이다.

장로들이 당신의 행동이나 복장이나 자녀들이 교회의 다른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된다고 느끼지 않는 한, 그런 문제에서 다르게 행동하는 것은 반항이 아니다 - 걸림돌이 되는 경우, 당신은 그들이 당신에게 말하는 것에 기꺼이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렇다면 지혜의 방법은 교회의 장로들에게 반드시 복종해야 할 곳과 그렇지 않아도 되는 곳을 구분하는 것이다.

당신의 지역 장로들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다고 해서 당신이 반항적인 것은 아니다 - 모든 장로들이 영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며, 모든 장로들이 반드시 신뢰감을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이 어느 곳에서도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는 사람이 되기 쉽다, 그러므로 사탄이 쉽게 때려부수고 파괴할 수 있는 표적이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가 항상 지혜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장 25
영적 점검

1. 내가 오늘 누군가를 나쁘게 말했거나 생각한 적이 있는가?

2. 내가 오늘 쓸데없는 말을 했는가?

3. 내가 과식이나 게으름이나 다른 더러운 정욕에 빠져 있었는가?

4. 내가 오늘 누군가에게 이기적인 방식으로 행동했는가?

5. 나는 다른 사람의 실패에 대해 행복했는가 아니면 심지어 무관심했는가?

6. 오늘 내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였는가?

7.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증거하고 선한 일을 할 기회를 찾았던가?

8. 내가 오늘 하나님의 사랑이나 능력이나 주권을 의심했는가?

9. 나는 어떤 성취를 자랑스러워 했는가?

10. 내가 무슨 일로 낙담하거나 우울했는가?

11. 내가 유익하거나 교훈적이지 못한 무슨 말을 했는가?

12.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해주길 원하는 대로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했는가?

13. 나는 누군가의 일에 세속적으로 호심이 많거나 참견하기 좋아하는 사람인가?

14. 내가 오늘 쓸데없는 것에 돈을 낭비했나?

15. 나는 비밀로 나에게 전해진 것을 또 다른 사람에게 말했는가?

16. 오늘 내가 누구한테 조급해 했나?

17. 내가 하인과 사회적 지위가 낮은 이들을 어떻게 대했는가?

18. 내가 누군가에게 격려나 감사의 말을 했는가?

19. 내가 가족들에게 사랑을 보였는가?

20. 내가 누구보다도 나 자신을 낫게 생각했는가?

21. 내가 오늘 누구에 대한 판단을 내렸나 - 심지어 내 생각으로도?

22. 내 마음에서 완전히 용서하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23. 내가 그 정보를 확인하지 않은 채 어떤 악담을 믿었는가?

24. 오늘 내 생각이 도덕적으로 순수했는가?

25. 나를 미워하고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내가 기도했는가?

26. 내가 오늘 누군가를 질투했는가?

27. 내가 동료들을 소중히 여기고 기뻐했는가?

28. 나는 내 형제들의 영적&육체적 필요에 대해 걱정했는가?

29. 내가 누군가에게 무심코 상처를 입혔을 가능성이 있는가?

30. 내가 나의 말과 약속을 지켰는가?

31. 내가 오늘 우연히 만난 모든 사람들에게 하인이었는가?

32. 내가 모든 근심과 짐을 주님께 맡겼는가?

33. 내가 어떤 사람의 의견에 대해 염려했는가?

34. 내가 오늘 시간을 낭비했는가, 아니면 하루를 유익하게 사용했는가?

35. 오늘 주님이 내게 했던 말씀을 듣고 내가 조심하였는가?

36. 내가 가능한 사치를 피해 단순하게 살려고 했는가?

37. 내가 오늘 아이들과 영적으로 가치 있는 무언가를 나누었는가?

38. 내가 오늘 아내(남편)의 일을 도와주려고 했는가?

39. 나와 같은 빛을 가지지 않는 사람을 내가 경멸했는가?

40. 내 마음속에 누군가를 향해 좋지 않은 어떤 생각이 있는가?

장 26
하나님의 완벽한 뜻 증명하기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확신이 서지 않는 문제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자신에게 12가지 질문을 하는 것이 좋다. 우리가 이러한 질문에 정직하게 대답함에 따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점점 더 분명해질 것이다.

1. 내가 아는 한 그것은 예수와 사도들의 가르침 중 어느 것과도 반대되는 것인가 , 아니면 신약성서의 정신에 반하는 것인가 ?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3:16 , 17 )

2.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인가 ?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요일3 :21 )

3.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인가 ?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10:31)

4. 예수님과 교제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인가 ?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골3:17 )

5. 내가 하는 대로 하나님께 축복해 달라고 해도 되겠는가 ?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9:8)

6. 내가 그것을 하는 것이 어떤 식으로든 나의 영적인 날을 무디게 할 수 있을까 ?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딤후2:15 )

7. 내가 아는 한에서 , 그것이 영적으로 유익하고 교훈적일 수 있을까 ?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고전6 :12 );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고전10:23)

8. 예수님이 땅으로 돌아오시는 그 순간에 내가 그것을 하는 것이 발견된다면 나는 행복할까 ?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일 2:28 )

9. 더 현명하고 성숙한 형제들은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

지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잠11 :14 ); 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무너지고 지략이 많으면 경영이 성립하느니라(잠15:22); 너는 전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지략이 많음에 있느니라(잠24:6)

10. 내가 한 행동이 다른 사람이 알면 ,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힐까 , 아니면 나의 증언을 망칠까 ?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롬 2:24 ); 이는 우리가 주 앞에서뿐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함이라(고후8:21 )

11. 내가 그 일을 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이 그 일을 알면 넘어지게 할 것인가 ?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롬 14:13 );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고전8 :9 )

12. 내가 마음속으로 자유롭게 그것을 할 수 있다고 느끼는가 ?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 2:27 )

(성경 참고 문헌을 찾아 묵상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