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승리

작성자 :   잭 푸넨 카테고리 :   하나님을 알기 시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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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사탄은 요한계시록이 자신의 마지막 패배와 궁극적인 운명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싫어합니다. 사탄이 싫어하는 책이라면, 그 책에 우리에게 가치 있는 무언가가 들어 있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특히 말세에 이기는 자가 되기 원하는 이들을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우리가 종말에 다가갈수록, 이 책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특별히 요한에게 이 책을 봉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모든 사람이 그것을 이해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계시록에 대한 이 연구는 지성이 아니라 마음을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미래를 위한 도표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기록되었습니다.

열린 마음으로 이 책을 읽고 당신의 선입견과 의견을 기꺼이 바꾸려고 한다면, 당신의 삶과 사역에 혁명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럴 준비가 되셨습니까? 그럼 계속 읽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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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7가지 서론

1-3절: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이 계시는 곧 일어나야 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천사를 보내셔서, 자기의 종 요한에게 이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거하였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사람과 듣는 사람들과 그 안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그 때가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이 처음 세 구절에서 우리는 계시록 전체를 소개하는 일곱 개의 표현을 발견합니다.

첫째로, 이 책을 계시라고 합니다. "계시"라는 단어는 "공개"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단어의 번역입니다. 하나님만이 그분의 진리를 우리에게 계시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첫 번째 사항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것을 이해하려면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이 필요합니다. 인간의 영리함은 결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이 계시가 "그분의(그리스도의) 종들에게 보이려고" 주신 것임을 읽었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의 자원하는 종들에게만 해당됩니다.

유급 하인과 종(노예)은 다릅니다. 하인은 급료를 위해 일합니다. 그러나 종은 주인에게 속한 노예로서 자기의 권리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종들은 누구입니까? 자신의 모든 계획과 야망, 모든 권리를 기쁘게 포기하고 이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행하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믿는 자만이 참된 종입니다.

주님의 하인은 많으나, 자원하는 종은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그분의 종들만이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과서를 공부하듯이 지적으로 공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감춰진 영적인 실체를 결코 파악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7장 17절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만 진리를 알 수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이 책이 요한에게 "계시"되었다고 들었습니다(1절 - KJV). 이것은 메시지가 상징을 통해 전달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처음 세 장에서만 촛대와 별, 청동(놋) 발과 좌우에 날선 검, 숨은 만나와 흰 돌 등에 관해 읽습니다. 이것들은 문자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영적 현실의 상징입니다. 우리는 이 상징들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기 위해 성경과 성경을 비교할 필요가 있습니다.

넷째, 요한은 이 계시를 "하나님의 말씀"(2절)이라고 부릅니다. 계시록 22:18,19에서 "이 책의 말씀"을 더하거나 빼려고 하는 자에게 엄중한 심판이 선언됩니다. 성경 전체에 그러한 엄숙한 경고를 담고 있는 책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각 부분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여" 우리로 하여금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 KJV).

계시록도 우리를 온전케 하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완전한 삶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말씀의 어떤 부분을 연구하더라도 최대의 유익을 얻을 것입니다.

다섯째, 이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2절)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 10절에 "예수의 증거는 예언의 영"이라고 했습니다. 참된 예언은 사건뿐만 아니라 항상 주님을 가리킬 것입니다. 예언에 대한 참된 이해는 우리를 주님 앞에서 겸손하게 만들고 다가올 사건에 대한 우리가 상상한 지식을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앞으로 있을 다양한 사건의 정확한 순서를 잘못 알고 있더라도, 주님을 아는 지식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잘한 것입니다.

비록 이 계시가 "곧 속히 될 일"(1절)을 밝히고 있지만 그것이 주된 목적은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미래의 사건에 대한 자세한 지식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 예수님이 미래의 사건을 통제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계시록 전체에서 주로 볼 수 있는 것은 주님의 승리입니다.

그렇다면 이 책을 통해 "우리의 시선을 예수님께 고정"시키도록 합시다.

여섯째, "그 안에 기록된 것을 지키는" 자에게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3절 - KJV). 성경의 이 마지막 책은 순종하도록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성경의 어떤 부분이든 순종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러나 계시록은 그 안에 기록된 대로 지키는 자에게 특별한 축복이 약속된 유일한 책입니다.

우리가 그 안에 있는 상징을 많이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읽는 내용에 순종하면 충분할 것입니다. 상징의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이나 앞으로 일어날 사건의 순서를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는 사람에게 약속된 축복은 없습니다. 순종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단순한 지적인 이해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불행히도, 대부분의 신자들은 순종보다 말씀에 대한 지식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우리가 그 것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살과 피와 뼈로 변환됩니다. 우리의 소화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충분합니다. 영적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지식은 소화되지 않은 음식과 같습니다. 그것은 생명 대신 죽음을 가져옵니다. 지식에 순종을 더하면 생명을 가져옵니다.

계시록의 시작과 끝에서 우리는 이 순종에 대한 부르심이 반복되는 것을 봅니다(1:3; 22:7). 계시록 전체는 순종에 대한 이 두 부름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일곱째,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3절) 사람들에게도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 공개적으로 소리 내어 읽고 다른 신자들에게 가르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요한 계시록의 개별 복사본은 1세기에 신자들이 사용할 수 없었음을 기억하십시오. 그 책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교회의 모임에서 읽을 때였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디모데에게 "성경의 낭독과 권면과 가르침에 힘쓰라"(딤전 4:13)라고 격려한 이유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이 일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

4-8절: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또 신실한 증인이시요 죽은 사람들의 첫 열매이시요 땅 위의 왕들의 지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며, 자기의 피로 우리의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여 주셨고, 우리로 하여금 나라가 되게 하시어 자기 아버지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분에게 영광과 통치가 영원무궁 하도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 "보아라, 그분이 구름을 타고 오신다. 눈이 있는 사람은 다 그분을 볼 것이요, 그분을 찌른 사람들도 볼 것이다. 땅 위의 모든 족속이 그분 때문에 가슴을 칠 것이다." 반드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주 하나님께서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요한은 하나님께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그들에게 임하기를 간구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은혜"는 "우리의 현재 필요에 따라 우리에게 제공되는 하나님의 도움"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게 용서가 필요하다면, 은혜가 우리를 용서해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죄를 이기는 능력이 필요하다면, 은혜가 우리에게 힘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시험의 때에 충실하기 위해 도움이 필요하다면, 은혜가 우리에게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항상 우리의 모든 필요에 충분합니다.

"평강"은 하나님의 또 다른 위대한 선물입니다 - 사라지지 않는 죄책감이나 정죄감이 없는 마음의 평화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의 다른 사람들과 평화를 이루어 교회에 교제를 가져옵니다.

인사말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보내집니다.

현재, 과거, 미래에 항상 존재하는 분은 아버지를 가리킵니다.

"일곱 영"은 성령을 가리킵니다. 일곱은 성경에서 완전함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일곱 영"은 완전의 영이신 성령을 가리킵니다. 이사야서 11:2,3에서 성령은 다음과 같이 언급됩니다:

1. 주님의 영

2. 지혜의 영

3. 이해의 영

4. 조언의 영

5. 힘의 영

6. 지식의 영

7.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 칭호로 언급되는데, 우리는 이를 하나씩 살펴볼 수 있습니다(5절).

그리스도의 칭호

"충성된 증인"은 주님께서 하신 약속과 관련하여 우리 주님의 절대적인 신뢰성을 의미합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 맏아들"은 예수님을 죽음을 극복하고 영원히 무덤에서 나온 최초의 사람으로 지칭합니다. 그분보다 먼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다른 사람들은 다시 죽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죽음을 영원히 이기셨으니, 우리는 더 이상 질병이나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땅의 왕들의 통치자"로 불립니다. 우리 주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습니다. 그분은 지상 통치자들의 마음도 다스리십니다. "왕의 마음은 여호와의 손에 있는 물길 같으니,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돌이키시도다"(잠 21:1).

우리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기 피로 우리의 죄에서 단번에 우리를 해방시키신 분"(5절 - AMP)으로 언급됩니다.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죄에서 단번에 완전히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 자신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신약성경의 첫 번째 약속은 예수께서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시리라"(마 1:21)는 것입니다. 죄의 권세에서 해방되는 것은 신약 전체의 큰 주제입니다. 우리가 은혜 아래 살면, 이제 죄가 우리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롬 6:14).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나라 곧 제사장들

더 나아가 우리는 주 예수께서 우리를 "그분의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 곧 제사장"(6절)으로 세우셨다고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절대권력을 행사하시는 영역입니다. 교회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여 "하나의 나라"가 된 사람들의 모임, 즉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나타냅니다. 주님은 무질서한 군중을 질서 있는 나라, 즉 지금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는 백성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우리도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모든 신자 - 남자든 여자든 - 주님의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교회에는 "제사장"이라는 특별한 부류의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은 구약의 개념입니다. 오늘날 어떤 교회에 그런 것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사람들을 B.C. 상태로 다시 인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으로서, 우리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짐승의 몸을 드렸다면, 오늘날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몸을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롬 12:1).

"그분의 하나님 곧 그분의 아버지"라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사용하신 표현인,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요 20:17)이라는 표현과 유사합니다. 그분의 아버지가 이제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 안에서 그분의 안전을 찾으셨던 것처럼, 우리는 이제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안전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요한이 "아멘"이라고 합니다(6절).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되리라"고 말합니다.

"오직 그분께 영광과 통치가 영원무궁 하도록 있기를 빕니다"(6절).

그런 다음 7절에서,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이 예언됩니다. 이 세상이 우리 주님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그분이 갈보리 십자가에서 수치를 당하신 때였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세상은 그분이 영광 중에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모든 눈이 그분을 볼 것입니다. 그분을 찌른 자(이스라엘 민족)도 그분을 볼 것입니다. 그분이 오실 때 땅의 족속들이 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뻐할 것입니다. 다시 요한은 "아멘"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8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알파와 오메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태초에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분은 시간의 끝에 바로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놀라게 할 일은 없습니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처음부터 끝만 아신 것이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므로 모든 것을 통제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래에 관하여 무엇이든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계시록의 끝에서 하나님은 다시 전능하신 분으로 그리고 알파와 오메가로 언급됩니다(19:6; 22:13). 우리는 계시록 전체가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전지전능한 능력을 언급하는 이 두 진술 사이에 끼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백성에게 닥칠 시련과 환난, 그리고 우리 주변의 세상에 닥칠 재난에 대해 읽을 때 우리에게 완전한 안전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신약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라고 10번만 불립니다. 그 10개의 언급 중 9개가 요한계시록에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이 책을 읽을 때, 우리가 하나님께서 전능하시고 만물을 주관하신다는 사실에 뿌리를 박고 기초를 두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유일한 다른 언급은 고린도후서 6장 17절과 18절에 있으며, 여기서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모든 부정한 것에서 분리하라고 부르십니다. 이것은 모든 부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는 모든 것에서 분리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전능하신 분" 으로 계시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것은 주로 그런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일곱 가지 영광스러운 진실

이 시대에 우리가 확립해야 할 가장 위대한 진리 중 일부는,

우리가 방금 고려했던 우리 주님과 그분과 우리의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1. 우리 주님의 약속의 절대적인 신뢰성;

2. 인간의 가장 큰 적(죽음)에 대한 그분의 승리;

3.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한 그분의 전적인 권위;

4. 우리에 대한 그분의 영원하고 변치 않는 사랑;

5. 그분은 우리를 죄의 힘에서 해방시켜 주십니다;

6. 그분의 아버지는 이제 우리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7. 그분의 재림은 이 땅에 그분의 왕국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다가오는 시대에 확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려면 이러한 진리에 뿌리를 내리고 기초를 다져야 합니다.

환난 중 위로

9,10절: 예수 안에서 여러분의 형제요 예수 안에서 환난과 그 나라와 인내에 여러분과 더불어 참여한 사람인 나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에 대한 증언 때문에 밧모라는 섬에 갇혀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날에 내가 성령에 사로잡혀 내 뒤에서 나팔 소리처럼 울리는 큰 음성을 들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요한이 자신을 "여러분의 형제"라고 부르는 것을 봅니다. 그 당시 요한은 예수께서 선택하신 열두 사도 중 유일하게 살아 있는 사도였습니다. 주님께서 밧모 섬에서 그에게 이 계시를 주셨을 때 그는 약 95세였습니다. 그때까지 그는 65년 넘게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형제였습니다.

그는 교황 요한이나 요한 목사(Reverend)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심지어 요한 목사(Pastor)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냥 평범한 형제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칭호를 피하고 항상 형제라고 부르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 23:8-11). 그리고 사도들은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과 달리 문자 그대로 그분께 순종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한 분의 머리와 한 분의 지도자, 곧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우리의 사역이나 경험이 무엇이든, 나머지 우리 모두는 형제입니다.

요한은 또한 자신을 "예수 안에서 환난에 함께 참여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마음을 다한 예수의 모든 제자는 이 세상에 있는 한, "예수 안에서 환난"에 참여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요한이 안락한 생활을 하는 한 이 계시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에 충실하였기 때문에, 밧모에서 환난을 겪으면서 그것을 받은 것입니다(9절). 그가 말세에 적그리스도로부터 큰 환난을 겪는 성도들에 대해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자신이 환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환난에 직면한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사역을 시키기 전에 우리를 먼저 시련과 환난을 겪도록 하십니다.

바울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환난 가운데서 우리를 격려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격려를 받는 것과 (같은)격려로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격려할 수 있게 하려 하심입니다"(고후 1:4 - AMP).

그러므로 큰 환난이 있기 전에 예수께서 은밀히 오셔서 그분의 교회를 세상에서 데려가시리라는 교리가, 기독교인들이 편안하게 살고 있던 나라(영국)에서 신앙에 대한 박해가 전혀 없었던 때(19세기 중반)에 처음으로 생겨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 이 교리는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가 전혀 없는 나라에서 편안하고 안락하게 사는 기독교인들이 계속해서 선포하고 믿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기독교인)들의 기도는 기본적으로 "주여 내 삶을 이 땅에서 더 편안하게 하소서"라는 순서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이 환난 전 교회의 휴거에 대한 이 가르침을 기꺼이 받아들인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사탄은 거짓 위로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달래는 데 성공하여, 큰 환난이 그들에게 닥쳤을 때 그들은 준비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합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기운을 내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그분은 작은 환난이든 큰 환난이든 우리가 환난을 피할 것이라고 결코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분이 이기신 것처럼 우리도 이길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환난에서 구원하는 것보다 우리를 이기는 자로 만드는데 훨씬 더 관심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의 안락함보다 우리의 성품에 훨씬 더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어떤 사람들이 가르치는 것처럼 큰 환난을 피하는 것이 충실함에 대한 상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사람은 주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보다 환난이 더 많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10:30).

그분은 제자들을 위해 아버지께 기도하실 때 "내가 구하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으로부터 그들을 지키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7:15). 그분은 제자들이 환난을 당할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당시 세상에서 그들이 휴거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3세기에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원형 극장에서 사자에게 던져지고 로마 제국의 여러 지역에서 화형에 처했을 때, 주님은 그러한 환난에서 그들을 구출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니엘 시대에 사자들의 입을 막으시고 불타는 풀무불의 힘을 제거하신 하나님께서, 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그런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새 언약의 그리스도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주인이신 예수님처럼, 그들은 12군단의 천사들이 와서 그들을 적들로부터 보호해 줄 것을 요구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늘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의 신부가 사자에게 찢기고 불에 타서 재가 되는 것을 지켜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들의 증언으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 왜냐하면 그들은 "어린양이 어디로 가시든지 따라갔고", 심지어 끔찍한 육체적인 죽음까지 이르렀기 때문입니다(계 14:4). 주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유일한 말씀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라는 말씀뿐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많은 나라에서 그분의 이름을 위해 고난과 핍박을 받고 있을 때에도 주님은 그들을 이 땅에서 데려가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큰 환난 전에 우리를 하늘로 휴거시키지도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은 훨씬 더 나은 일을 할 것입니다. 큰 환난 중에서 우리를 이기는 자로 만드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환난에서 구원하는 것보다 악에서 구원하는 데 훨씬 더 관심이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환난을 겪도록 허락하십니다. 그것이 우리가 영적으로 강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메시지는, 귀를 즐겁게 하는 설교자들에 의해 수년 동안 매주 일요일에 그들의 신도 좌석에서 귀하게 길러진, 위로 받기를 사랑하는 기독교 집단에게는 참으로 이상한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사도들이 초대 교회들에게 전한 메시지입니다. "그들(사도 바울과 바나바)이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믿음에 거하도록 권하고,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행 14:22).

지금 가정과 직장에서 직면하는 작은 시련은 장차 올 더 큰 시련을 위한 준비에 불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충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보병과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말과 경쟁하겠느냐?"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렘 12:5).

요한은 여기서 "예수 안에서 환난과 나라와 인내에 함께 참여하는 자"(9절)에 대해 말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나라에서 그분의 보좌를 그분과 함께 나누기 전에, 먼저 환난 중에 예수님과 교제를 시작해야 합니다.

인내는 신약 전체에서 강조되는 큰 덕목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그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나……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3)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 안에" 있는 것

요한은 "주의 날"에 이 계시를 받았습니다(10절). 한 주의 첫째 날을 "주의 날"이라고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그날이 예수님께서 죄와 사탄과 사망과 무덤을 이기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초대 제자들은 매주 첫날에 모여 서로를 세우며 떡을 떼었습니다(행 20:7; 고전 16:2). 그들에게는 일년 중 특별한 날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성 금요일"이나 "부활절" 또는 "크리스마스"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새 언약 아래에 들어왔기 때문에 날들과 절기 등을 지킬 필요가 없었습니다(골 2:16,17).

요한은 "성령 안에" 있었고, 그것이 그가 주님의 음성을 들은 이유입니다. 우리도 그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 우리가 성령 안에 있다면. 그것은 모두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설정되어 있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생각이 땅의 일에 있으면, 우리가 듣는 음성은 땅의 일에 관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우리 주변의 공중 전파에 많은 목소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들을 수 있는 목소리는 라디오 세트에 맞추는 주파수에 따라 달라집니다. 라디오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도 있고, 라디오를 통해 사탄의 록 음악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선택은 당신의 것입니다.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 있으면, 즉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고 우리의 마음이 위에 있는 것들에 맞춰져 있으면(골 3:2),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의를 끌기 위해 아우성치는 다른 목소리도 있습니다. 당신에게 더 많은 돈을 버는 방법, 가족 재산의 몫을 얻는 방법, 당신을 속인 사람에게 원한을 갚는 방법, 당신에 대한 거짓 이야기를 퍼뜨리는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방법 등을 알려주고 싶은 목소리가 있습니다. 사탄의 라디오 방송국들은 매일 24시간 거짓말, 원망함, 불안 등을 방송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주파수를 맞추기만 하면 원하는 것을 골라 들을 수 있습니다!!

신자들이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분은 항상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이 세상과 세상의 이익에 맞춰져 있습니다. 나는 성령께서 과거에 우리를 위한 말씀을 많이 하셨으나 우리가 성령 안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결코 "알아채지 못한" 것이 많다고 확신합니다.

당신은 교회의 모임에 앉아서 설교자가 말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 할지라도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을 전혀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 안에 있는" 당신 옆에 앉아 있는 누군가는 요한이 그랬던 것처럼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요한은 주님의 음성을 너무나 분명하게 들었기 때문에 그것이 나팔 소리처럼 컸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큰 소리로 말씀하시는지요! 그러나 귀먹은 사람은 나팔 소리도 듣지 못합니다.

여러분 각자가 날마다 성령 안에서 자신을 지키도록 권면하고 촉구합니다 - 특히 이 시대의 마지막 날에. 여러분은 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걸어가십시오. 그래야 귀가 열려서, 주님께서 당신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일곱 교회

11-20절: "네가 보는 것을 책에 기록하여, 일곱 교회들, 곧 에베소와 서머나와 버가모와 두아디라와 사데와 빌라델비아와 라오디게아의 교회로 보내라." 그래서 나는 내게 들려 오는 그 음성을 알아보려고 돌아섰습니다. 돌아서서 보니, 일곱 금 촛대가 있는데, 그 촛대 한가운데 '인자와 같이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발에 끌리는 긴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띠를 띠고 계셨습니다. 머리와 머리털은 흰 양털과 같이, 또 눈과 같이 희고, 눈은 불꽃과 같고, 발은 용광로에서 단련하여 광이 나는 놋쇠와 같고, 음성은 큰 물소리와 같았습니다. 또 오른손에는 일곱 별을 쥐고, 입에서는 날카로운 양날 칼이 나오고, 얼굴은 해가 강렬하게 비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분을 뵐 때에, 내가 그분의 발 앞에 엎어져서 죽은 사람과 같이 되니, 그분이 내게 오른손을 얹고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살아 있는 자다. 전에 죽었으나, 보아라, 영원무궁 하도록 살아 있어서, 사망과 지옥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너는, 네가 본 것과 지금의 일들과 이 다음에 일어날 일들을 기록하여라. 네가 본 내 오른손의 일곱 별과 일곱 금 촛대의 비밀은 이러하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들이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한 메시지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요한이 여기에서 명령 받은 대로 우리가 들은 것을 기록하는 것이 좋은 습관입니다(11절). 그렇지 않으면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것을 잊어버렸을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의 메시지는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아시아로 알려졌던 것은 오늘날 터키의 작은 부분입니다. 이 7개의 교회는 모두 서로 반경 75마일 이내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서로 매우 가까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런데도 ​​한데 묶어서 "아시아의 교회"라고 불리지 않았다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그들은 "아시아의 교회들"이라고 불렸습니다.

이것은 작은 포인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아시아에 있는 교회"는 이 교회들이 중앙 본부를 가진 교파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시아에 있는 교회들"은 각 교회가 주님의 머리 직분 바로 아래 있는 지역 교회임을 나타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러나 교단은 사람의 작품입니다. 사도들의 모든 가르침과 저술은 하나님의 뜻이 각 교회가 한 교단의 일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바로 아래 있는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요한은 이 편지를 교회들에게 배포하기 위해 보낼 수 있는 일곱 교회를 책임지는 주교나 감독은 없었습니다. 각 편지는 그 교회의 사자에게 개별적으로 보내져야 했습니다 - 각 교회는 독립적인 단위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교회에 사도들을 주셨습니다. 요한 자신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주교나 감독을 임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예를 들어 "인도의 교회"와 같은 것은 없습니다. 인도에는 교회들이 있으며, 이들은 주님에 의해 여러 지역에 세워졌고, 각 교회는 그분의 머리 바로 아래 있습니다.

사탄의 최종 목표는 그의 가짜의 세상"교회"인 바벨론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목표를 향한 그의 첫 번째 단계는 수세기 전에 교회를 교단으로 묶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바벨론을 건설하는 작업이 불가능했을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사탄의 계략을 모르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일곱 금 촛대는 일곱 교회를 상징합니다(20절 참조). 옛 언약 아래서, 성전에는 일곱 개의 가지가 있는 하나 의 촛대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예루살렘에 중앙 본부와 지도자가 있는 한 "교파"의 지파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새 언약에서는 다릅니다. 일곱 개의 서로 다른 촛대가 있으며, 각각은 서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위에서 보았듯이, 각 교회가 머리를 통하여 다른 교회들과 교제함에도 불구하고, 독립적으로 그리스도의 머리 직분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촛대라고 불리는 교회는, 하나님 보시기에, 교회의 주된 기능이 빛을 주는 것임을 나타냅니다. 금으로 된 촛대는 참된 교회의 신성한 기원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사람이 지은 것이 아니라 주님이 지으신 것입니다.

촛대는 단순한 장식품이 아닙니다. 교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모든 교회가 비추어야 할 빛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며, 이것은 이 어두운 세상에서 우리의 길을 비추는 빛입니다(시 119:105). 그 빛을 발하는 대신에, 소위 "교회"가 학교와 병원을 운영하고 사회 사업을 하는 것에 특별히 관심을 쏟기 시작할 때,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의 주된 목적에서 벗어났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누가 말하는지 보려고 몸을 돌렸을 때, 예수님을 보았습니다(12,13절). 그러나 그는 교회들 가운데서 그분을 보았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계시하시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려고 하는 것은 지역 교회를 통해서입니다.

성경에 언급된 하나님의 첫 번째 처소는 모세가 광야에서 본 불타는 떨기나무입니다(신 33:16). 밧모에 있는 요한처럼, 모세도 그 놀라운 광경을 보기 위해 그 때에 몸을 돌이켰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출 3:3).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의 거처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교회가 불타는 떨기나무처럼 그분의 영으로 타오르기를 원하십니다. 사람들이 지역 교회를 볼 때, 그 교회의 성도들을 통해 계시된 그리스도의 생명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사람들에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 요한은 계속해서 주 예수를 본 대로 묘사합니다. 주님은 부활하셨지만 여전히 "사람의 아들"라고 불리우며, 그분이 인류와 영원히 동일시 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분의 발까지 닿는 그분의 긴 옷(의심할 여지 없이 흰색)은 우리를 위한 중보의 대제사장의 사역을 가리킵니다 - 유대인의 대제사장이 매년 속죄일에 성막의 지성소에 들어갈 때에 입는 옷이 이러하였기 때문입니다(13절).

주님은 가슴에 금띠(벨트)를 두르셨습니다(13절). 금은 신성한 것을 상징합니다. 띠는 의와 성실을 상징합니다(사 11:5에 따름). 이것은 예수님의 지상 생활에서 보이신 하나님의 완전한 의와 그분이 우리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시는 완전한 신실하심을 강조합니다.

그분의 머리와 머리털은 양털같이 희었습니다(14절). 다니엘 7:9은 하나님의 영원성(그분의 끝없는 나이)을 언급하기 위해 이와 똑같은 상징을 사용합니다. 흰 머리는 또한 지혜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예수님이 비록 사람의 아들이시지만 지혜가 완전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분의 눈은 불꽃 같았습니다(14절). 그것은 그분께 "모든 것이 숨겨진 것이 없고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다"(히 4:13)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분의 눈은 모든 종교적 겉치레를 꿰뚫어보고 있으며, 종교적 위선자의 화려하고 경건한 언어와 "경건의 모양"을 꿰뚫어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영혼의 상하고 말을 더듬는 말 너머로 사람의 마음의 진실성을 봅니다. 그 결과, 그분의 평가는 사람의 평가와 완전히 다릅니다.

그분의 발은 광택이 나는 놋쇠와 같았습니다(15절). 놋쇠는 (성막 바깥뜰에 있는) 희생 제단을 만드는 재료입니다. 그곳에서 속죄 제물을 죽였습니다. 그러므로 놋쇠는 갈보리에서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합니다.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동안 예수님의 발은 십자가에서 뚫려야 했습니다(창 3:15).

그분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았습니다(15절). 생수의 강은 성령을 상징합니다(요 7:37-39). 예수님의 말씀은 항상 성령의 온유함과 지혜가 충만했습니다.

오른손에 일곱 별을 들고 계셨습니다(16절). 일곱 별은 교회의 일곱 사자입니다(20절). 하나님은 신약 교회가 다수의 장로에 의해 인도되도록 정하셨습니다(행 14:23; 딛 1:5; 행 20:17). 그러나 하나님은 보통 장로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분의 사자로서 교회에서 말씀을 선포하는 은사를 주십니다. 이 사람을 여기에서 "교회의 사자"라고 합니다. ("천사"로 번역된 단어는 실제로 "소식을 가져오는 자" 또는 "전령자"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단어입니다).

이 사자들은 그리스도의 손에 붙들려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파하는 일과 가르치는 일에 수고하는"(딤전 5:17) 장로들을 배나 존경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의 장로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손에 붙들려 있지 않다 는 것을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임명한 것이지 그분에 의해 임명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임명한 사자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것이며, 그는 당신의 확신을 불러일으키고 그의 삶과 사역을 통해 당신을 먹이고 인도하고 축복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 왜냐하면 그는 주님의 손에 붙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세상에 그런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은 몇 명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사탄의 특별한 표적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특별히 주님의 손에 붙들려 있습니다. 그들이 겸손하게 그곳에 있는 한, 사탄은 그들을 건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교만하거나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사탄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들을 쳐서 회개하게 하십니다. 주님의 사자로서 주님의 손에 붙잡힌다는 것은 엄청난 특권입니다. 하지만 막중한 책임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입에서는 좌우에 날선 검이 나왔습니다(16절). 이것은 그분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히 4:12). 우리는 15절에서 그분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와 같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두 구절을 합친 것은 예수님이 항상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하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분은 매우 온유하게 말하지만 필요한 경우에는 단호하게 꾸짖기도 합니다.

그분의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16절). 이것이 베드로, 야고보, 요한도 변화산 위에서 그분을 본 모습입니다(마 17:2). 이것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접근할 수 없는 빛"을 상징합니다(딤전 6:16). 여기서 하나님의 거룩함은 우리가 직접 볼 수 없는 정오의 태양에 비유됩니다. 태양은 세균이나 박테리아가 살 수 없는 불덩어리입니다. 어떤 죄도 하나님 앞에 거할 수 없습니다(사 33:14).

주님의 발아래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의 가슴에 기대던 바로 그 요한이 이제 죽은 사람처럼 그분의 발 앞에 엎드러집니다(17절). 요한은 65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는 의심할 여지 없이 그 당시 지상에서 가장 성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면전에서 똑바로 설 수 없었습니다. 주님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주님을 가장 경외합니다. 그분을 가장 적게 아는 사람들은 그분과 아주 친한 척 합니다.

하늘의 스랍들은 여호와 앞에서 얼굴을 가립니다(사 6:2,3). 욥과 이사야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을 때 그들의 죄를 보고 슬퍼했습니다(욥 42:5,6; 사 6:5). 그러나 "천사들이 밟기 두려워하는 곳에 어리석은 자는 달려듭니다"!! 이것이 육신에 속한 신자의 어리석음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더 많이 알면 알수록, 우리의 입은 티끌에 묻힌 채, 경탄하는 경이 가운데 그분의 발 앞에 더 많이 엎드러질 것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주님의 영광을 볼 때에만,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와 닮지 않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야만 남을 판단하는 것을 멈추고 자신을 판단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요한이 밧모에서 체험한 것과 같은 권능의 손길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오른손을 얹으셨습니다(17절). 이것은 힘과 권위의 부여를 상징했습니다. 요한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와 "나를 따르라"는 복음서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요한에게 자신이 처음이요 마지막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이전에 아버지께서 사용하신 바로 그 칭호입니다(8절). 그분은 처음부터 끝을 아시며 친히 시작 이전과 끝 이후에 계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이유입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요한에게 자신이 사망과 무덤을 어떻게 이기셨고, 이제 사망과 음부(죽은 영들이 있는 곳)의 열쇠를 가지셨음을 말씀하십니다(18절). 열쇠는 문을 열고 닫는 힘을 상징합니다. 한때 사망의 세력을 잡은 것은 사탄이었습니다(히 2:14,15). 그러나 예수님은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을 때 사탄에게서 그 열쇠들을 취하셨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은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계십니다. 즉, 삶에서 마음을 다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하나님의 뜻만 행하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오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그분의 임재로 들어가도록 죽음의 문을 열어야 할 때라고 결정하실 때까지, 어떤 사고나 질병도 당신의 생명을 앗아갈 수 없습니다. 이것은 진정으로 예수님의 제자인 모든 사람들에게 엄청난 격려가 됩니다.

요한은 밧모에서 사람들에게 박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를 위한 하나님의 때가 올 때까지 그를 죽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여전히 ​​요한이 수행해야 할 사역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요한은 이제 이 놀라운 계시록(19절)을 기록하는 새로운 과업을 위해 주님으로부터 권능을 받고 위임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사역을 승리로 완수하려면 주님으로부터 거듭거듭 힘을 얻어야 합니다.

"요한 계시록"의 세가지 구분

19절에서, 주님은 요한에게 이 책을 세 부분으로 나눕니다:

1. 요한이 이미 본 것(1장) -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승리하신 주 예수님의 환상. 주님의 영광을 본 제자의 마음에는 두려움이 전혀 설 자리가 없습니다.

2. 요한 시대의 상황(2,3장) -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의 상황을 언급함. 이 일곱 교회에 대한 주님의 메시지는, 모든 시대의 모든 교회와 그들의 "사자"에 대한 경고이자 도전입니다.

3. 요한 시대 이후의 사건들(4~22장) - 여기에서 사용된 "이 일 후에"라는 구절은 4장 1절에서 다시 사용되어 이 책의 세 번째 부분이 거기에서 시작됨을 나타냅니다.

그런 다음 주님은 촛대와 별들의 의미를 요한에게 설명하십니다(20절). 우리는 12절과 16절을 보았을 때 이것을 공부했습니다.

주님만이 그분의 말씀의 비밀에 대한 계시를 우리에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한 계시를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겸손이라는 두 가지 필수 덕목이 필요합니다. "여호와의 비밀은 그분을 경외하는 자에게 있도다...그분은 겸손한 자에게 그분의 길을 가르치시나니"(시 25:14,9).

그런 마음으로 이 책을 공부합시다.

장 2
2장

비록 이 일곱 편지가 주로 교회의 사자들에게 보내진 것이지만, 각 메시지의 끝에서 우리는 들을 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성령이 모든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라는 초청을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모든 세대의 모든 교회에 있는 모든 제자를 위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1장에서 우리 주님이 충실한 증인으로 묘사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이 편지들에서 그분이 이 사역을 완수하시는 것을 봅니다. 현대 표현을 사용하면, 예수님은 "있는 그대로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교회 한가운데서 사자와 교회 자체를 심판하시는 심판자이십니다. 그분은 사자들과 교회들에게 그분이 그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확히 말씀하십니다.

그분의 평가에서, 주님은 현대 사진 작가들처럼 초상화를 "수정"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그러기엔 자기 백성을 너무 사랑했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나중에 그분의 심판석에서 이러한 일들을 직면하는 것보다 지금 바로 죄, 세속성, 미지근함, 자기 중심성을 다루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곳에서 이런 일로 심판을 받는 것은 우리에게 유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의 영원한 유익을 염두에 두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 편지들에서 말씀하시는 모든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습니다.

감사의 여지가 있는 곳에서 주님은 진심 어린 감사를 표현하십니다. 그리고 꾸짖을 필요가 있는 곳에는 주저하지 않고 가차 없이 꾸짖습니다. 암은 비누와 물로 씻어낼 수 없습니다. 부드럽게 제거할 수도 없습니다. 근본적인 수술로 절제해야 합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 없는 교회

1-7절: "에베소 교회의 심부름꾼에게 이렇게 써 보내라: '오른손에 일곱 별을 쥐시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분이 말씀하신다. 나는 네가 한 일과 네 수고와 인내를 알고 있다. 또 나는, 네가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과, 사도가 아니면서 사도라고 자칭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그들이 거짓말쟁이임을 밝혀 낸 것도, 알고 있다; 너는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견디어 냈으며, 낙심한 적이 없다.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그것은 네가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해 내서 회개하고, 처음에 행했던 일들을 행하여라; 네가 그렇게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겠다. 그런데 네게는 잘 하는 일이 있다. 너는 니골라 당이 하는 일을 미워한다. 나도 그것을 미워한다.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이기는 사람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 나무의 열매를 주어서 먹게 하겠다.'"

에베소에 있는 사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주님은 오른손에 일곱 별을 쥐시고, 일곱 교회 ​​사이를 다니시는 분으로 자신을 설명합니다(1절).

주님은 항상 교회 한가운데를 거니시며,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 특히 주님이 손에 붙잡고 계신 사자들의 말과 행하는 모든 것을 살피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낮은 기준이나 십계명의 기준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의 다림줄로 모든 것을 측량하십니다.

그분은 실패를 지적하기 전에 먼저 인정(approval)과 감사(appreciation)를 표현합니다(2절). 신의 본성은 그런 것입니다. 주님은 항상 좋은 것을 먼저 찾으시고, 바로잡아야 할 것을 지적하시기 전에 먼저 감사를 표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의 본성은 사뭇 다릅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서 좋은 것을 먼저 찾지 않고 나쁜 것을 찾습니다. 인간은 본래 감사하는데 느리고 비판하는 데 매우 빠릅니다. 이것은 우리 시스템에 있는 "형제를 고발하는 자"의 독(해악)을 보여주는 하나의 표시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성한 본성에 더 많이 참여할수록 우리는 더 주님과 같이 될 것입니다 - 감사는 빠르고 비판은 더디게 됩니다.

평생 동안 이 원칙을 따르는 것이 좋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감사할 만한 것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에게 결코 잘못을 지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단순한 규칙을 따르면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높은 경건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해왔던 것보다 우리를 교회에서 훨씬 더 큰 축복으로 만들고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훨씬 덜하게 만들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감사할 때 우리는 비로소 다른 사람을 건설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들에게 벽돌을 던질 뿐입니다. 허공에 분필로 쓸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당신이 쓰고 있는 것을 보려면 칠판이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감사를 표현하는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으로 진실을 말하고" 쓸 수 있는 칠판을 만듭니다. 그러면 우리가 말하는 내용도 그들에게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더 높아집니다.

감사와 책망은 모두 사랑의 표시입니다. 그러나 먼저 감사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바울이 육신적인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쓸 때도 이 원칙을 어떻게 따르는지 주목하십시오(고전 1:4-10).

주님은 에베소의 사자에게 그의 수고와 인내와 악한 사람들로부터 교회를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한 그의 노력을 칭찬하십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는 세상적인 것이 교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그것들과 싸웠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교회를 교리적으로도 순결하게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는 사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시험했고 그들의 주장이 거짓임을 증명했습니다.

2절에서 주님께서 "사도들"에 대해 언급하신 것은 주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 임명하신 열한 명의 사도 외에 1세기에 교회에 다른 사도들이 있었음을 분명히 나타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위로 승천하신" 후에도 교회에 사도들을 주셨고(엡 4:11), 오늘날에도 사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가 아니면서 사도라고 자처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짓 사도들에게 속지 말아야 합니다(2절).

에베소 교회의 사자도 주의 이름을 위하여 포기하지 않고 "참았습니다"(3절). 대부분의 신자들의 기준에 따르면, 이 사자는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었습니까? 그리고 에베소 교회는 수고하고 인내하며 악인을 물리치고 거짓 교리를 막고 속이는 자들을 폭로하는 등 삶의 순결함과 교리의 순수성을 동시에 강조하는 참으로 훌륭한 교회로 보였습니다.

그러한 교회에는 주님께서 교회에서 찾고자 하시는 모든 것이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찾으신 중요한 것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 서로 사랑하는 것(4절)이라는 첫 사랑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내용은 본질적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네 모든 열심과 활동 중에 너는 나를 놓쳤다. 너는 한때 나를 위해 가졌던 그 열렬한 헌신을 잃어버렸다. 너는 악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교리적 오류를 피했다. 그러나 너희가 처음 회심했을 때 나를 얼마나 열렬히 사랑했는지, 그리고 그때에 너희가 어떻게 나를 사랑하여 모든 일을 했는지 기억하라. 이제 모든 것이 건조한 일상으로 변했다. 너는 여전히 ​​모임(예배)에 가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의식이 되었다.

이곳의 교회는 한때 남편에 대한 사랑 때문에 기쁘게 남편을 섬겼지만 지금은 같은 일을 고역으로 여기는 아내와 같이 되었습니다 - 왜냐하면 그녀의 결혼 생활에서 사랑의 불이 꺼졌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그녀는 매일 저녁 남편이 사무실에서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그녀는 여전히 그에게 충실하지만, 첫사랑을 잃었습니다.

진정한 남편이 먼저 아내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녀의 사랑입니까, 아니면 그녀의 노동입니까? 확실히, 그것은 그녀의 사랑입니다. 주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은 무엇보다도 우리 마음의 사랑을 원하십니다. 그것이 없어지면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죽은 일이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동기가 되지 않으면 선행은 죽은 행실이 됩니다.

이곳의 신자들도 서로에 대한 사랑이 식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서로의 연약함을 용납할 수 없었고 서로의 죄를 간과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서로에 대한 첫사랑도 잃었습니다.

그 사자는 첫사랑을 잃었고 - 점차 교회도 사자처럼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작은 실수가 아니었습니다. 엄청난 타락이었습니다 - 주님께서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기억하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통 신자가 간음이나 도둑질, 담배 피우는 등의 범죄를 했을 때만 넘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의 음성에 민감하게 될 때, 우리는 주님에 대한 헌신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고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이 조금이라도 식어가는 것 또한 타락의 증거라는 것을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어디에서 무너졌습니까?

에베소는 약 40년 전에 사도 바울이 와서 교회를 세운 곳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그러한 부흥이 있어서, 온 성읍이 그 일을 알고 있었습니다(행 19장). 여기에 바울이 3년 동안 수고하며 날마다 눈물로 설교하던 교회가 있었습니다(행 20:31). 마침내 그는 에베소를 떠났을 때, 교회의 장로들을 불러 그가 떠난 후에 교회가 직면하게 될 몇 가지 위험에 대해 경고했습니다(행 20:17-35).

4년 후, 바울은 그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 그것은 성경 전체에서 발견되는 새 언약의 가장 깊은 진리를 담고 있는 편지였습니다. 그는 에베소 교회를 그가 세운 모든 교회 중에서 가장 성숙하고 영적으로 생각하는 교회로 여겼기 때문에 그러한 문제에 관해 그들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또한 바울이 그들에게서 책망하거나 시정할 것을 찾지 못했다는 것을 편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한때 차지했던 높은 지위였습니다.

바울의 편지는 에베소 교인들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 계시록 2장에서, 우리는 에베소인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를 봅니다. 지금은 이야기가 완전히 다릅니다. 교회 안에 새로운 세대가 생겨났고, 그들은 조상들의 헌신이나 영성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이 2000년 동안 거의 모든 교회와 기독교 운동의 슬픈 역사입니다. 2세대는 교리는 같지만, 그들의 조상과 같은 삶은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은 에베소 교회에 "그러므로 네가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단 하나였습니다. "회개하고, 처음에 행한 것을 하라"(5절)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설교할 때 생각하는 단어인 "회개하라"는 주님께서 교회에 하시는 단어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의 죄에서 돌이키라고 말하기 전에, 너희가 처음 사랑을 떠난 죄에서 돌이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첫사랑을 떠난 것에 대해 슬퍼해야 합니다.

"처음에 하던 일을 하라"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5절). 그들의 행위가 사랑에서 나지 않았다면, 그들의 모든 행위는 그분 앞에서 아무 가치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행함은 이제 나무, 건초, 짚이 되었으며, 불에 태우기에만 적합했습니다.

각각의 행동 뒤에 있는 동기가 그 행동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인내와 수고와 순결 뒤에 있는 동기가 그것들을 주님께 받아들여지거나 받아들이지 않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날에 우리는 "왜?"라는 질문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무엇을?"이라는 질문보다 훨씬 더 중요할 것입니다. 우리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가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행동을 평가하시는 시험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지 않는 것은 죽은 일입니다.

우리는 죽은 행실을 회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히브리서 6장 1절은 이것이 우리 삶에서 온전함을 향해 나아가는 기초의 일부라고 말합니다.

만일 사자와 교회가 회개하지 않는다면 주님은 그들의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그분이 그 이후로 더 이상 그들을 지상에 있는 그분의 교회 중 하나로 여기지 않으실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여전히 ​​​​모임(예배)과 회의(연합 모임)를 할 수 있으며, 그 수는 계속 증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에 관한 한, 그분의 성령의 기름 부으심과 그분의 은혜가 없이는, 그들은 죽었고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만큼 첫사랑의 상실이 심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 주님은 그분이 미워하셨던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한 그 사자를 칭찬하십니다(6절).

성경 어디에도 니골라당이 누구였으며 그들이 무엇을 했는지 알려 주는 언급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행위가 무엇인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니골라당"이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백성을 정복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이 그런 뜻이었다면, 그것은 "양 떼 위에 군림"하려는 사람들(벧전 5:3) - 즉 종처럼 행동하지 않고 왕처럼 행동하는 장로들을 가리키는 말일 것입니다. 그러한 장로들은 자신들을 별개의 제사장 반열로 설정하고(구약에서 레위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다른 신자들을 다스렸습니다. 주님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교회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을 높이기 위해서 "목사(Reverend)"(성경에서 하나님만을 위해 사용된 호칭 - 시 111:9 - KJV)와 "목사(Pastor)"(직함이나 직책이 아닌 은사 - 엡 4:11) 등과 같은 호칭을 사용하는 기독교 설교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자들이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하는 것은 호칭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혼적인 힘(지배적인 성격), 재정적 힘, 영적 은사로 동료 신자들을 지배하는 "형제"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니골라당주의이며 하나님께 역겹습니다.

인도에서 우리는 서구 주인이 돈의 힘으로 통치하는 수많은 기독교 교회와 조직의 슬픈 광경을 봅니다. 서구 국가들에 초대를 받음으로써 생긴 재정적인 신세와 의무들 때문에 많은 인도 신자들은 결국 "백인"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한 신자가 다른 신자에게 노예처럼 굴복하는 것은 "니골라당"이며 하나님 보시기에 혐오스러운 것입니다.

니골라당의 또 다른 형태를 생각해 보십시오. 마리아가 그리스도와 인간 사이의 중보자라고 가르치는 사제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사제들은 그리스도인들과 마리아 사이에서 또 다른 중재자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성경적이고 중재적인 태도는 사제뿐 아니라 목사도 행할 수 있는 일입니다!

목회자가 취업이나 결혼 등에 관한 문제에서 양 떼 중 한 사람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찾으면", 그는 니골라당의 중재자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사제와 목사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방식으로 자기 양 떼를 다스리는 권세를 얻게 됩니다.

영적인 상담과 조언을 하는 것은 경건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의 다른 지체를 위해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은 그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의 연결을 그에게서 빼앗는 것입니다.

옛 언약 아래서,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찾았던 예언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개인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새 언약 아래서는, 상황이 다릅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히 8:8-12). 사실 주님은 교회의 모든 지체(그분의 몸)가 머리이신 주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골 2:18,19). 그러나 니골라당은 이것을 방해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니골라당을 성공적으로 저항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미워했고, 주님도 그것을 미워하셨기 때문에 그들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분은 1세기에 그것을 미워하셨고 지금도 그것을 미워하십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주님께서 이 악을 미워하시는 만큼 당신도 이 악을 미워합니까?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그리스도와 다르며, 그분의 참된 사자가 될 수 없습니다. 니골라당은 결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울 수 없습니다.

끝으로 성령은 들을 귀 있는 모든 자들에게 그분이 하시는 말씀을 들을 것을 권하시니, 이 말씀이 모든 교회를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7절). 모든 신자가 주님의 말씀에 기꺼이 순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 대부분의 신자는 자신만의 방식을 원하거나 동료들을 기쁘게 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아시고, 성령께서는 교회 안에 있는 개인들에게 승리하는 삶에 도전하도록 이끄십니다.

성령은 여기에서 교회 한가운데에서 "이기는 자"라고 부르는 마음을 다하고 신실한 신자들의 무리를 인정하십니다. 이들은 죄와 세속을 이기고, 그들 주변이 영적으로 쇠퇴하는, 한 가운데에서 주님을 위해 신실하게 서는 자들입니다.

모든 지역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기준에 충실하고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 기준을 위해 싸울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주로 이기는 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도 그분은 모든 곳에서 이기는 자를 찾으십니다. 그분은 모든 교회에서 그들을 찾지는 못하시지만, 모든 지역에서 그들을 찾으십니다.

주님은 이기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경우, 아담이 놓친 것은 생명나무 열매를 먹는 특권(7절)이었습니다. 생명나무는 신성한 생명, 신성한 본성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보상은 그분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여기 지상에서는, 대부분의 신자들도 이것을 너무 높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원의 더 선명한 빛 속에서, 우리는 이것이 참으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모든 보상 중에서 가장 큰 것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고통받는 교회

8-11절: "서머나 교회의 심부름꾼에게 이렇게 써 보내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분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네가 당한 환난과 궁핍을 알고 있다. 그런데 사실 너는 부요하다. 또 자칭 유대 사람이라는 자들에게서 네가 비방을 당하고 있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유대 사람이 아니라 사탄의 회당(무리)이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보아라, 악마가 너희를 시험하여 넘어뜨리려고,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감옥에다 집어넣으려고 한다. 너희는 열흘 동안 환난을 당할 것이다. 죽도록 충성하여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너에게 주겠다.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이기는 사람은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을 것이다.'"

주님은 여기에서 자신을 처음이요 나중이요 사망을 이기신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반대와 핍박을 받는 교회는 주님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사건을 주관하시는 분, 인간의 가장 큰 원수인 죽음을 이기신 분으로 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이 교회에 대해 전혀 비난하지 않으십니다.

환난과 가난과 비방에 시달리는 교회였습니다.

환난은 요한계시록에서 반복되는 주제입니다 - 환난은 타협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중 가장 충실한 자가 직면한다는 점에 유의하십시오. 요한계시록 1장에서 우리는 요한이 환난을 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같은 일을 겪고 있는 신실한 교회를 봅니다. 주님께서 단 하나의 비난도 하지 않으신 교회가 핍박을 당하고 있습니다. 세속적이고 타협적인 교회들은 편안한 시간을 보냅니다.

이 모든 것은 환난이 온 마음을 다한 그분의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완전한 뜻의 일부임을 상기시켜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도 어느 날 큰 환난에 직면했을 때, 어떤 이상한 일이 우리에게 닥쳤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충실한 자녀들이 수세기 동안 걸어온 것과 같은 길을 걸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자들이 환난에 직면하도록 허락하십니다. 1세기에도 그랬습니다. 2000년의 교회 역사를 통틀어 그랬습니다. 그리고 종말에도 그러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중 가장 훌륭하고, 그들 가운데 가장 충실한, 주님의 군대의 정예 특공대는 적그리스도의 시대에 그분을 위한 증인으로 서기 위해 이 땅에 있을 자들입니다. 모든 장군은 전투가 가장 치열한 곳으로 최고의 군대를 보냅니다. 주님도 그렇게 하십니다. 주님의 그 군대에 속하는 것은 큰 특권과 영광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상에서 이기는 자들의 간증이 가장 필요한 때에, 그들을 하늘로 데려가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은 과거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큰 환난 때에 적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주의 정예 부대를 요한계시록에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계 12:17)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적그리스도에게 절하거나 그들의 몸에 그의 표를 받기를 거부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위해 목숨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계 13:7,8,15-17). 그리하여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않은"(계 12:11), 역대 순교자들의 선택된 무리에 합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중 누구도 주님을 위해 죽음을 직면할 용기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피로 증거를 인봉하라고 우리를 부르셨다면, 그런 때가 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특별한 은혜를 주실 것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모든 기독교 순교자들이 과거에 두려움 없이 죽음을 맞이한 것은 그러한 특별한 은혜의 공급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하신 일을 우리에게도 하실 것입니다 - 우리 가운데 가장 약하고 가장 겁 많은 자들까지도 말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분께 충실하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것뿐입니다. 우리에게 의지가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담대함을 주실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의 성도들은 가난했습니다. 빈곤은 교회 역사를 통틀어 하나님의 신실한 자녀들이 직면한 또 다른 문제입니다.

많은 구약의 성도들이 부자였습니다. 하나님은 구약 시대에 순종의 보상으로 이 땅의 재물을 약속하셨는데, 이스라엘이 땅의 왕국을 소유하도록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새 언약을 시작하시고 천국을 이 땅에 가져오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약속된 부는 이 땅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자신과 사도들도 모두 가난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부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축복의 표시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교리는 하나님의 백성의 십일조로 부자가 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했던 서방의 설교자들에 의해 처음 발명되었습니다! 그런 다음 기독교 사업가들은 자신의 부를 축적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편리한 교리로 그것을 고수했습니다. 어디서나 탐욕스러운 설교자들은 그것이 그들에게도 편리한 교리임을 발견했습니다!!

예수와 사도들의 가난은 그러한 모든 설교자들이 그들 자신의 탐심에 완전히 속았다는 것을 보여주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서머나에 있는 신자들은 큰 시련 가운데서도 주님께 신실했고 그들은 가난했습니다. 반면에 라오디게아의 신자들은 완전히 죽었고 물질적으로는 부유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증명합니까? 답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여 믿음에 부요케 하셨습니다....하나님이 세상의 미련한 것을 택하셨습니다....하나님이 세상의 약한 것을 택하습니다....하나님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택하사....이리하여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약 2:5; 고전 1:27-29).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선택하는 데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모든 물질적 필요를 공급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마 6:33; 빌 4:19).

우리는 인도의 교회에서 이러한 증거를 거듭거듭 목격했습니다. 그곳에서 극심한 빈곤 속에 살고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신자들이 삶에서 그분을 공경할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부터 재정적인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는 정부가 지원하는 사회 보장 시스템이 없고 실업률이 높고 관료적 부패가 만연한 인도와 같은 나라에서 기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그러한 신자들이 부자가 되지 못한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들을 부자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또한 신자들이 재물을 쫓다가, 영적으로 스스로 멸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딤전 6:9,10).

신자가 상속받은 가족의 재산이나 다른 이유로 인해 이미 부유한 경우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1. 무엇보다도 그가 가진 모든 것이 주님께 속해 있음을 인정하십시오(다음 성구를 공부하십시오: 고전 10:26; 고전 4:7; 눅 14:33; 요 17:10).

2. 복음의 전파를 위해 그의 재산을 사용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십시오. 따라서 그의 돈으로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십시오("영원한 친구를 사귀는 데 돈을 사용하십시오" - 눅 16:9 - 의역).

3. 자신의 부를 다른 궁핍한 신자들과 나누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십시오(딤전 6:17-19).

이 세 단계를 따른다면 그는 오랫동안 부자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영적인 사람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물질에 대한 우리의 신실함에 따라 정확히 영적으로 보상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눅 16:11). 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가난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맡기시고 테스트를 하신 "불의의 재물(맘몬)"에 그들이 불충실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신약에서 물질적인 부를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서머나 교회에 "너희는 부요하다"(9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시련에 충실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 부요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새 언약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참되고 영원한 부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9절)에 직면했습니다.

비방은 하나님의 모든 충실한 자녀들이 직면해야 하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여기에서 이 교회가 직면한 비방과 반대는 스스로를 하나님의 백성이라 칭하는 자들,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지만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무리)이라"(9절) 하는 자들로부터 나온 것임을 주목하십시오.

그 유대인들은 성경(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을 연구한 종교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이 위선자였기 때문에 그들을 "사탄의 회당(무리)"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참 제자들을 핍박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유대인들이 시작한 많은 회당은 시간이 지나면서 사탄의 회당으로 변질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도들이 시작한 많은 교회들도 오늘날 하나님 보시기에 '사탄의 교회'로 타락했습니다.

오늘날 예수의 참된 제자에 대한 반대는 이방 종교(이방 종교의 반대는 이해할 수 있음)뿐 아니라 "자칭 기독교인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고 사탄의 교회"인 사람들에게서도 나옵니다.

오늘날 우리가 소위 기독교 '교회'를 '사탄의 교회'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그리스도답지 않다고 비난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마 16:23)고 베드로를 꾸짖으신 분이 예수님 자신이시며, 이 종교적인 사람들의 이 무리를 "사탄의 회당"이라고 부르신 분이 예수님이셨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그분은 오늘날 그들의 소명에서 벗어난 "교회들"을 책망하기 위해 똑같은 강력한 언어를 사용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그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쫓겨나게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를 죽이는 모든 사람이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생각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 그들이 이런 일을 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버지도, 나를 알지도 못함이라"(요 16:2,3).

그때 그분이 회당에 있는 사람들이 당신의 제자들에게 행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후세에 "교회들"에서도 행해진 것입니다. 중세 시대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예수의 제자들은 "기독교" 종교 재판관들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한 이 증오심은 적그리스도와 바벨론의 "세계 교회" 시대에 절정에 달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닥쳤을 때 그것을 직면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소위 기독교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로부터 받는 작은 비방과 반대를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절대로 비방당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이 비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탐식하는 자, 거짓 선생, 모독하는 자, 정신 나간 자, 귀신 들린 자, 잡종(혼혈), 사탄의 힘을 가진 자라고 불렸습니다(눅 7:34; 요 7:12; 마 26:65; 막 3:21,22; 마 12:24; 요 8:48).

그분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자가 선생보다 높지 않고, 종이 주인보다 높지 않다.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족하다. 그들이 집주인을 바알세불(마귀의 왕, 사탄에 대한 유대인의 호칭)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심하겠느냐"(마 10:24,25).

베드로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여러분은 이방 사람 가운데서 행실을 훌륭하게 유지하여, 그들이 여러분더러 악을 행하는 자라고 욕하다가도, 여러분의 선한 행위를 보고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하라"(벧전 2:12).

우리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너를 치려고 만들어진 어떤 무기도 번성하지 못할 것이다; 심판할 때 너희를 참소하는 모든 혀를 너희가 정죄하리라. 이것이 주의 종들의 유산이다. 그리고 그들의 변호는 나에게서 온다"(사 54:17).

그러므로 우리는 비방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 자신이 적절한 때에 우리를 변호하실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조용히 지내고 불경건한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말하는 것을 무시할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 주님은 서머나 교회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10절). "두려워하지 말라"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입에서 자주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이름을 위해 고난을 겪고 있는 교회를 향해 하시는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아마도 우리 모두가 이 시대에 가장 들어야 할 것은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한 마디 말일 것입니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두려움의 영이 있고, 그것은 점점 더 강력하게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날에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눅 21:26). 그러나 그분은 또한 제자들에게 이 두려움의 영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대부분의 신자들이 이 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두려움, 사람에 대한 두려움, 질병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및 기타 여러 유형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두려움은 사탄이 많은 신자들을 노예로 삼는 주된 무기 중 하나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교회의 모임에서 담대히 주님을 증거하고 직장에서 주님을 위한 담대한 증인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 두려움의 영입니다. 많은 신자들은 소심함과 겸손함을 혼동하므로, 사탄이 그들을 속입니다.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집에서 자기에게 질문한 여종에게 주님에 대해 담대히 증언하지 못한 것은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날 베드로가 성령세례를 받았을 때, 그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누구에게나 담대하게 주님에 대해 증거할 수 있었습니다.

후에, 그와 다른 사도들이 다시 두려움의 유혹을 받을 때에, 그들이 기도하매 다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두려움의 영이 다시 저희에게서 쫓겨났습니다(행 4:31).

이것이 답입니다: 우리는 거듭거듭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친구들과 친척들과 직장에서 입을 열지 못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을 방해하는 두려움의 영에 노예가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그분의 성령으로 채우시고 당신을 담대하게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당신이 겁쟁이임을 인정하고 당신이 그분의 담대한 증인이 될 수 있도록 당신을 성령으로 채워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뿐입니다.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 배부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훨씬 더 많은 두려움의 유혹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종류의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지금 우리가 가진 모든 기회를 사용합시다.

하나님은 당신의 충실한 자녀들을 고통으로부터 보호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영적 성장을 위해 고난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서머나 교회는 고난을 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10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사탄이 그들 중 일부를 감옥에 가둘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신자들을 부당하게 감옥에 가두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먼저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우리에게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옥에 갇힐지라도 그것은 우리를 시험하기 위함일 뿐입니다(10절). 하나님은 그분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감옥까지도 사용하십니다.

바울은 "(옥에 있는) 나의 형편이 복음의 더 큰 진보를 가져왔다"(빌 1:12-14)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투옥을 사용하여 여러 가지 목적을 이루셨습니다:

1. 바울을 거룩하게 하기 위하여;

2. 바울의 간수 몇 명을 회심시키기 위해;

3. 바울에게 그의 서신을 쓸 기회를 주기 위해; 그리고

4. 다른 많은 신자들이 두려움 없이 전하도록 격려하기 위해서입니다.

참으로 우리 하나님은 모든 것(투옥을 포함하여)이 오직 하나님의 목적의 성취를 위해서만 작동하는 방식으로 사탄에게 전세를 뒤집을 수 있습니다(롬 8:28; 시 76:10).

우리가 감옥에서 보내는 기간도 주님이 정하십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열흘 동안 환난을 당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10절). 그분의 자녀들이 환난을 겪어야 하는 기간을 결정하시는 분은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심지어 큰 환난의 날에도, 예수님은 "택하신 자를 위하여 그 날을 감하시리라"(마 24:22)고 말씀하셨습니다. 홍수가 땅에 있었을 때 "하나님이 노아를 기억하셨습니다"(창 8:1). 그리고 그분은 지상에서 큰 환난이 닥칠 때에도 당신의 택하신 자들을 잊지 않으실 것입니다. "내가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노라"는 그분의 말씀입니다(사 49:15,16).

이것을 아는 것은 우리에게 큰 위안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아야 할 앞으로의 날에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가 능력 이상으로 시험받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은 조절 손잡이에 손을 얹고 계시며 적절한 때가 오면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압력을 낮추실 것입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10절)는 주님의 권고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진실하게 서기 위해 필요하다면 기꺼이 죽을 수도 있어야 합니다. 약간의 명예나 승진, 돈 등의 작은 이익을 위해 그들의 증거를 타협하는 신자들의 본을 따르지 마십시오. 우리가 적그리스도의 표가 없이는 필요한 음식도 살 수 없는 날에, 그러한 신자들이 어떻게 주님께 진실하게 서겠습니까(계 13:16,17)? 그런 "신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짐승의 표"를 받아들일 것입니다.

생명의 면류관은 세상의 어떤 명예보다, ​​심지어 육체적인 생명보다 훨씬 더 큰 상임을 기억하십시오.

다시 주님은 모든 사람이 그러한 메세지를 들을 귀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들을 귀 있는 자들을 부르십니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11절).

둘째 사망은 영원한 사망입니다 - 하나님의 면전에서 영원히 버려져 불못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둘째 사망에 대한 약속이 이기는 자에게만 주어진다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를 이기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입니다 - 왜냐하면 죽음은 죄의 최종 결과이기 때문입니다(약 1:15에서 분명히 밝혔듯이).

신약 전체에 걸친 성령의 근본적인 메시지는 우리가 모든 형태의 죄를 이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교회

12-17절: "버가모 교회의 심부름꾼에게 이렇게 써 보내어라: '날카로운 양날 칼을 가지신 분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네가 어디에 거주하는지를 알고 있다. 그 곳은 사탄의 왕좌가 있는 곳이다; 그렇지만 너는 내 이름을 굳게 붙잡고, 또 내 신실한 증인인 안디바가 너희 곁 곧 사탄이 살고 있는 그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네게 몇 가지 나무랄 것이 있다. 너희 가운데는 발람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있다. 발람은 발락을 시켜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 올무를 놓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음란한 일을 하게 한 자다.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있다. 그러니 회개하여라;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속히 너에게로 가서, 내 입에서 나오는 칼을 가지고 그들과 싸우겠다.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이기는 사람에게는 내가, 감추어 둔 만나를 주겠고, 흰 돌도 주겠다. 그 돌에는 새 이름이 적혀 있는데, 그 돌을 받는 사람 밖에는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

주님은 여기에서 자신을 좌우에 날선 성령의 검, 즉 살아 있고 능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신 분으로 묘사하십니다(12절; 엡 6:17). 이것은 주님이 땅에 계실 때, 광야에서 사탄을 이기는 칼이었습니다. 이 칼은 오늘날에도 그분의 입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탄과의 싸움에서도 우리에게 필요한 무기입니다.

버가모는 주님께서 사탄의 지상 본부가 그곳에 있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악한 도시였습니다. 이것은 13절에서 두 번 언급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도시의 한가운데에 주님께서 그분의 교회를 두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나는 너희가 사는 곳을 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어디에 살고 있으며 어떤 환경에서 살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계십니다. 사탄이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그 자리에 그의 지상 왕좌가 있더라도, 그분은 우리를 순결하게 지켜주시고, 승리로 이끌어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도 성령의 검으로 이겨낼 수 있습니다.

어떤 촛대도 주변이 너무 어두워서 비치지 못한다고 불평하지 않습니다. 촛대의 밝기는 주변 환경과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빛은 촛대에 들어있는 기름의 양에 전적으로 의존합니다.

어느 지역 교회나 마찬가지입니다. 주변이 사악할지도 모릅니다. 사탄은 그 도시에서 그의 왕좌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성령의 기름으로 충만하면, 빛이 밝게 빛날 것입니다. 사실, 주변이 어두울수록 그러한 주변에서 빛이 더 밝게 보입니다! 별은 낮이 아니라 밤에 보입니다.

주님은 이 교회가 핍박의 시대에도 그의 이름을 굳게 붙잡고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것을 칭찬하십니다. 특히 믿음을 위해 목숨을 바친 신실한 증인 안디바를 언급합니다.

안디바는 설령 그것이 홀로 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더라도, 하나님의 진리를 옹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사람이 아니라 확신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자신이 믿는 것을 얼마나 많은 다른 사람들이 믿는지 보기 위해 주위를 둘러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필요하다면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을 상대로 기꺼이 주님을 위해 홀로 설 것입니다. 안디바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가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었다면, 죽음을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를 타협하지 않고 옹호했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편협하고, 고집이 세고, 어울리기 힘들고,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에게 아무런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는 모든 죄, 세상적인 것, 타협,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과 마귀에 대항하여 단지 주님께 충실했습니다. 여기 사탄의 왕국에 위협적인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탄이 버가모에 왕좌를 두기로 결정한 것은 안디바가 버가모에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탄도 그를 두려워한다면 안디바는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을 것입니까!

하나님은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안디바와 같은 사람들을 필요로 하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믿음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할 때가 곧 올 것입니다. 우리 주변의 모든 바벨론 기독교 집단은 타협하고 적그리스도에게 굴복할 것입니다. 그날에 우리는 안디바가 한 것처럼 굳게 설 것입니까? 아니면 우리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사탄에게 무릎을 꿇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 목숨을 잃는 것이 가치가 있다고 확신합니까?

오늘날, 하나님은 작은 시련을 통해 우리를 시험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 작은 시험에 충실해야만 미래에 닥칠 더 ​​큰 시련에 충실할 수 있습니다. 사탄은 당신을 그의 왕국에 대한 위협으로 여기고 그의 왕좌를 당신이 사는 도시로 옮길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안디바가 죽은 후 버가모 교회가 영적으로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안디바는 아마도 그가 살아 있을 때 교회의 사자였을 것입니다. 그가 죽었을 때, 다른 누군가가 그 자리를 물려받았고 교회는 내리막길을 걸었습니다. 이것은 많은 교회의 슬픈 역사입니다.

바울은 에베소를 떠날 때, 그곳의 장로들에게 그가 떠난 후에 그곳 교회가 타협하고 타락할 것을 안다고 말했습니다(행 20:28-31). 바울은 그곳에 있는 동안 세상과 죄와 싸웠고 적그리스도의 영을 막아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떠난 후 에베소에는 그렇게 할 만큼 강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장로들이 곁에 서서 지켜보고 있는 동안, 이리들이 양 떼 사이로 들어가 양을 거침없이 잡아먹었습니다!

사탄은 안디바가 죽은 후 버가모에서 전술을 바꿨습니다. 사탄의 왕좌가 한 장소에 있다고 해서 반드시 사탄이 항상 교회를 핍박으로 공격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는 성경에서 우는 사자(벧전 5:8)뿐만 아니라 자신을 빛의 천사로 가장하는 교활한 뱀(계 12:9; 고후 11:14)으로 묘사됩니다. 그는 수세기 동안 외부에서 박해하는 것보다 내부에서 세상적인 것으로 교회를 타락시킴으로써 자신의 목적을 훨씬 더 잘 성취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가 '발람주의'를 통하여 마침내 버가모에서 행한 일이며, 그리하여 그는 핍박으로 성공하지 못한 곳에서 성공했습니다!

주님은 여기 있는 교회에게 "거기에 발람의 가르침을 굳게 지키는 자가 있느니라"(14절)고 말씀하십니다. 발람은 발락 왕이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기 위해 고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성경에서 읽은 최초의 "고용된 설교자"였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집단에는 설교하는 것이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인, 이러한 고용인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양 떼를 치는 목자인 척하면서 양의 털깎기에만(이득을 챙김) 관심을 두는 그런 고용인을 대적하십니다.

발락이 처음에 발람을 불렀을 때 발람은 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가지 말라고 특별히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발락이 더 높은 보수와 더 큰 영예를 제안했을 때, 발람은 "다시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상황에서 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발람이 돈을 좇아가도록 허락하셨고, 그로 인해 스스로 멸망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많은 기독교 설교자들이 발람의 발자취를 따르고 마침내 발람의 종말에 이르도록 허락하십니다.

발람은 자신이 이스라엘을 저주할 수 없음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을 부도덕과 우상 숭배에 빠지게 하여 부패하게 만들 것을 발락에게 제안했습니다(민 24,25장). 그리하여 발람은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벌하시는 데 성공했습니다.

사탄이 버가모에서도 그렇게 해서 성공했습니다. 그는 교회가 어떤 면에서 세속적이 되기 전까지는 교회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교회를 내부로부터 타락시켰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주님을 위한 증거와 사탄과의 싸움에서 무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이길 수 없다면, 그들과 합류하라"는 교회에 대한 사탄의 모토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이 20세기 동안 많은 교회의 증거를 파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우상숭배와 음행은 구약성경 전체에 걸쳐 하나님께서 가장 크게 정죄하신 두 가지 죄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에도 그분이 정죄하는 두 가지입니다. 새 언약의 기준에 따르면, 탐욕을 부리는 것이나 돈이나 직업이나 사람이나 땅에 속한 모든 것을 숭배하는 것은 우상숭배입니다. 그리고 눈으로 여자를 탐하는 것은 음행입니다. 어느 분야에서든지 당신의 아내를 비판적으로 남의 아내와 비교하는 것은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는 것"입니다. 이것도 음행입니다.

이러한 새 언약의 기준이 교회에서 일관되게 전파되지 않는 곳에서는, 숨겨진 우상 숭배와 부도덕이 교인들 사이에 만연하고 교회는 머지 않아 버가모에 있는 교회와 같이 될 것입니다.

버가모 교회에 세속성이 덮쳤을 때 안타까운 것은, 교회의 사자가 그 일을 지켜보고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장로들이 그들의 교회에 홍수처럼 밀려오는 세속성에 대해 무력합니다.

버가모의 사자는 발람의 교리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버가모에는 "몇몇"의 사람들만이 사탄의 먹잇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자는 교회에 들어온 세속성을 책망하지 않은 죄가 있었습니다. 여기가 그가 실패한 곳입니다.

그가 실패한 이유는 자신의 생각으로 그러한 세속적인 것을 엄격하게 판단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들에 대해서만 교회에서 권위를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에서 죄와 세속성을 가볍게 다룰 때, 우리는 교회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삶에서도 그것을 관용하게 됩니다. 장로가 자신의 교회에 속한 세속적인 사람에 대해 "자비로운" 태도를 취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대개 장로 자신의 마음에 판단하지 않은 세속성이 있다는 사실에 의해 결정됩니다.

버가모의 사자는 세상의 가르침에 대해 너무 느슨하여, 심지어 그의 교회에서 니골라당의 가르침이 번성하도록 허용했습니다(15절). 버가모 교회의 어떤 사람들은 사제술(사제들의 영향력)을 하나의 교리로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자는 그것에 대해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그를 책망하신 또 다른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그와 교회에게 회개하라고 경고하십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그분의 입의 칼로 심판하시리라(16절)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시는 것은 그분의 말씀에 의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다 마지막 날에 그분이 하신 말씀으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2:48). 우리의 삶은 우리가 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비교될 것이며 우리는 그것에 의해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이기는 자에게는 감추어 둔 만나와 새 이름이 기록된 흰 돌의 상급이 약속되어 있습니다(17절).

구약성경에서, 모세는 하늘에서 내린 만나를 성막의 지성소에 있는 궤 안에 숨기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출 16:33,34). 이스라엘 백성이 장막에 보관한 만나는 24시간 만에 악취가 났지만(출 16:19,20), 궤에 있던 '숨겨진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방황한 40년 동안 신선하게 유지되었습니다. 우리가 항상 그분의 면전에서 그곳에 산다면, 우리를 신선하게 유지시켜 주시는 힘이 바로 지성소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의 ​​능력입니다.

지성소는 찢어진 육체의 휘장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히 10:20). 이 새롭고 살아있는 길을 걸으면,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감추어진 만나, 곧 말씀의 계시와 하나님과의 교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항상 주님의 신선함의 향기가 가득할 것입니다.

이긴 자의 이름을 기록한 숨겨진 보석(17절)은 신부가 신랑과 맺는 관계처럼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말합니다. 이것은 세상의 남자가 약혼자에게 주는 약혼반지(값비싼 보석과 이름이 새겨진 반지)와 같은 영적으로 동등한 것입니다.

신랑은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은밀한 이름으로 신부를 부릅니다(17절). 주님과 신부의 친밀함은 이기는 모든 사람에게 약속된 보상입니다.

평범한 신자는 그리스도와 건조하고 지루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죄와 세속적인 것에 대해 철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이기는 사람은 신부가 깊은 사랑에 빠진 신랑과 함께하는 것처럼 주님과 영적으로 황홀한 관계에 들어갑니다. 이것이 "솔로몬의 노래"에 묘사된 관계의 유형이며 - 이기는 사람만이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고 그 현실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간음한 교회

18-29절: "두아디라 교회의 심부름꾼(angel)에게 이렇게 써 보내라: 그 눈이 불꽃과 같고, 그 발이 놋쇠와 같이 빛나는, 하나님의 아들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네 행위와 네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오래 참음을 알고, 또 네 나중 행위가 처음 행위보다 더 훌륭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네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이세벨이라는 여자를 용납하고 있다. 그녀는 스스로 예언자로 자처하면서, 내 종들을 가르치고, 그들을 미혹시켜서 간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 자다. 내가 그녀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나 그녀는 자기 음행을 회개하려 하지 않았다. 보아라, 나는 그녀를 병상에다 던지겠다. 그녀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그녀의 행위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큰 환난을 당하게 하겠다. 그리고 나는 그의 자녀들을 역병으로 반드시 죽게 하겠다; 그러면 모든 교회는 내가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살피는 자임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너희 각 사람에게 그 행위대로 갚아 주겠다. 그러나 두아디라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 곧 사탄의 깊은 흉계에 물들지 않은 사람들인 너희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한다 - 나는 너희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겠다. 다만 내가 올 때까지, 너희가 가지고 있는 그것을 굳게 붙잡고 있어라. 이기는 사람과 곧 내 행위를 끝까지 지키는 사람에게는, 민족들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겠다; 그는 쇠지팡이로 그들을 다스릴 것이고, 민족들은 마치 질그릇이 부수어지듯 할 것이다. 이것은 마치, 내가 나의 아버지께로부터 권세를 받아서 다스리는 것과 같다; 나는 그 사람에게 새벽별을 주겠다.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여기서 주님은 불꽃 같은 눈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18절). 그분은 마음의 숨은 생각과 동기를 살피시므로 외모만 보고 판단하는 사람처럼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발은 빛난 청동과 같아서 그분이 죄에 대한 엄격한 심판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전해지는 분명한 메시지가 하나 있다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고, 죄가 발견되는 곳마다 엄중히 심판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두아디라에 있는 사자와 교회의 행위와 사랑과 믿음과 인내를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러한 행위의 양은 상당히 많이 늘었지만(19절), 그 질은 떨어졌음을 주목하셨습니다. 타협과 세상적인 것이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이 타협은 주로 교회의 사자가 한 여성(상징적으로 "이세벨"이라고 불림)이 악하고 세상적인 방식으로 교회에 영향을 미치도록 허용했기 때문에 비롯되었습니다(20절). 그녀는 여선지자 행세를 했고 교회의 교회의 사자는 속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에 선지자들을 주셨지만, 여선지자는 주지 않으셨습니다(엡 4:11,12 참조). 여자들은 교회의 모임에서 예언하도록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을 수 있습니다(행 2:17; 고전 11:5). 빌립의 딸들은 그렇게 한 사람들의 본보기입니다(행 21:9 - KJV).

남자와 여자는 예언할 수 있습니다. 즉, 교회를 격려하고 덕을 세우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나눌 수 있습니다(고전 14:3). 모든 신자들은 이 은사를 구하도록 권면을 받습니다(고전 14:1; 행 2:18). 그러나 예언하는 자와 선지자는 다릅니다. 주님은 새 언약 아래서 여자를 여선지자로 세우지 않으셨습니다 -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여자에게 남자를 다스리는 권세를 두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옛 언약 아래 여선지자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그들 중 다섯 명을 봅니다. 안나가 마지막입니다(눅 2:36). 그들은 모두 권위를 가지고 주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드보라는 그러한 여선지자의 한 예입니다(삿 4장). 그러나 새 언약 아래서 교회의 권위는 항상 주님께서 남자에게 부여하셨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교회에서 여자가 남자 위에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두 가지 이유를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1. 그녀는 남자를 따라 창조되었습니다 - 그의 돕는자가 되기 위해;

2. 그녀는 먼저 사탄에게 속았습니다(딤전 2:12-14).

여자는 남자보다 사탄에게 속기 쉽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여교사를 두지 않으신 한 가지 이유입니다.

그러나 이세벨은 자신을 여선지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는 너무 약하고 힘이 없어, 그녀를 잠잠하게 할 수 없었습니다.

가정에서, 가장이 되어야 할 남자가 약하고 여성적이라면, 그의 아내가 가정의 리더십을 이어받을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강력한 여성들은 교회의 장로들이 약하다는 것을 알면, 교회에서 자신을 주장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남자답게행하라"(고전 16:13)라고 권고합니다. 오늘날 많은 장로들이 강력한 여성을 침묵시키는 것과 관련하여 해파리만큼 기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권고가 매우 필요합니다! 그들은 아합 왕이 그의 아내 이세벨을 너무 두려워하여 그녀가 그의 왕국에서 좋아하는 모든 일을 하도록 허용했습니다 - 심지어 무고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죽일 정도로까지 허용했습니다(왕상 21장). 아합은 명목상 이스라엘의 머리였습니다. 이세벨은 실제로 왕국을 운영했습니다. 많은 교회 장로들도 아합과 똑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이세벨의 모든 거짓 예언자를 대적하여 마지막 한 사람까지 죽인 두려움이 없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왕상 18:40). 그래서 이세벨은 엘리야를 미워했습니다. 그리고 그녀 역시 그를 두려워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이세벨의 우상에게 절하지 않은 사람이 7000명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왕상 19:18). 그러나 이세벨은 그들 중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엘리야만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녀는 그 7000명이 그녀의 우상에게 절하지 않더라도 그녀를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이세벨은 신자들의 99.9%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신자들이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녀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세벨은 엘리야만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오늘날 기독교 집단에서 드뭅니다.

오늘날 이세벨은 엘리야 같은 장로를 미워하고 아합 같은 장로를 사랑합니다. 모든 교회의 모든 장로는 이 문제에서 엘리야나 아합을 따릅니다.

장로의 아내

여기에서 "여자"로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는 "아내"로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세벨이 교회의 사자의 아내였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확실히 사자에게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 사자가 주님의 참된 제자였고 그의 아내를 "미워하는" 법을 배웠다면(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 눅 14:26), 전혀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주님과 교회보다 아내를 더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녀를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교회에서 그녀가 마음대로 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두아디라 교회가 부패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부패한 방법입니다.

많은 교회가 종종 약하고 여성적인 장로 중 한 사람의 아내인 이세벨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그런 여자는 자주 방언을 말하거나 자신의 "방언"을 통역하거나 긴 기도를 하거나 다른 미숙하고 비성경적인 방법으로 교회 모임에서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또한 집에서 남편에게 영향을 주어 장로들의 결정을 바꾸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장로들의 모임에서 교회 문제를 의논하고, 집에 가서 아내와 의논하는 어리석은 장로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집에서 아내들에게 세뇌 당하고, 다음 장로회에서 이 여성스러운 남자들은 달라진 견해를 표명합니다!! 그리고 이전 회의에서 내린 결정이 변경되었습니다!! 이것이 교회에 영향을 미치는 숨겨진 이세벨의 능력입니다!

다른 경우에, 이세벨은 어떤 혼적인 방법으로 장로 중 한 사람에게 영향력을 얻은 여자일 수 있습니다. 어떤 장로의 아내들은 교회의 다른 남자들(장로들을 포함하여)이 어떤 식으로든 그녀를 불쾌하게 하는 것을 두려워할 정도로 강력한 성격과 혼적인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녀의 남편조차도 그녀를 두려워합니다.

거기 교회의 장로들이 어떤 식으로든 여자에게 권세를 행사하도록 허용한다면, 그리스도의 몸을 어느 곳에서든 건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장로의 아내는 "온유하고 조용한 영"을 가진 본보기가 되어야 하며, 항상 자신을 숨기기 위해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녀는 부목사, 찬양 인도자, 행정 보조(간사)가 (많은 여자들이 그러하듯이) 되어서는 안 되며, 남편의 숨은 조력자가 되어야 하며 뒤에서 교회를 운영하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어야 합니다. 여성으로서 자신의 경계를 인정하기 때문에, 장로 남편들에게 진정한 조력자가 되어 주는 아내들이 있음에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런 아내가 있는 장로님은 복이 있습니다.

모든 장로들은 어떤 식으로든 교회에서 두각을 나타내려는 여성을 특별히 주시해야 합니다. 그녀는 거의 확실히 이세벨의 영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녀에게 자유가 허락된다면, 그녀는 분명히,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교회를 파괴하는 사탄의 대리인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간음"(20절)은 분명히 영적인 것입니다 - 왜냐하면 의로우신 하나님은 육체적인 간음으로 태어난 무고한 아이들을 벌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적 간음은 인식이 덜하기 때문에 육체적 간음보다 더 위험합니다. 종교적 매춘은 신자들로 하여금 죄를 가볍게 여기게 하는 거짓 은혜의 가르침에서 비롯됩니다. 작은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과 작은 불성실은 무시됩니다. 그런 가르침이 음녀 교회인 바벨론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주님께서 여기서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회개할 시간

주님은 이세벨에게 회개할 시간을 주셨습니다(21절). 이세벨에게도 회개할 시간이 주어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그녀가 회개할 시간적 제한을 두셨습니다. 그녀가 그 시간 안에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녀는 심판 받을 것입니다. 이세벨뿐 아니라 그녀와 간음한 모든 자와 그의 자녀들(22,23절)도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죄인과 위선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인내는 무한하지 않습니다.

이세벨의 영적 간음 파트너는 그녀와 함께 이 거짓 가르침을 전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녀의 "자녀들"은 이 거짓 은혜의 가르침의 산물인 반쯤 회심한 잡종이었습니다. 그들은 먼저 죄를 회개하지 않고 회심한 줄로 생각하는 자들이거나, 이제 그들이 "회심"되었으므로 육신의 방종을 가볍게 여길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죄 가운데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그렇게 빨리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와서 죄를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은 더 엄격하고 더 빨리 처리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고린도에서 범죄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고전 11:29,30)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볍게 여기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엄중함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갚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23절). 이것은 "우리가 믿기만 하면 우리의 행위가 중요하지 않다"는 두아디라의 거짓 은혜의 가르침에 반박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동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각 사람은 선한 일이든지 악한 일이든지, 몸으로 행한 모든 일에 따라, 마땅한 보응을 받아야 합니다(고후 5:10)." "여러분이 육신을 따라 살면, 반드시죽을 것입니다(롬 8:13)."

주님은 두아디라에 있는 죄인들을 "큰 환난"(22절)에 던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약 성경에는 두 가지 유형의 환난이 언급되어 있으며, 우리는 계시록에서 이 두 가지 유형에 대해 봅니다:

1. 예수의 제자들에 대한 박해의 형태로 사람들에게서 오는 것 - (신약에서 대부분의 언급은 이러한 유형의 환난에 관한 것입니다);

2. "악을 행하는 모든 사람의 영혼에" 심판의 형태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 - (롬 2:9 & 계 2:22 은 이러한 유형의 환난에 대한 유일한 두 가지 언급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하지 않는 두아디라의 죄인들을 큰 환난에 던지겠다고 위협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적그리스도의 시대에 오게 될 큰 환난을 가리키는 것일 수 없습니다. 이는 두아디라의 죄인들이 이미 죽은 반면에, 이것은 아직 미래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하나님이 죄인과 위선자들에게 내리시는 심판을 의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아디라에는 이세벨의 말에 동의하지 않거나 그녀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주님은 다른 짐을 그들에게 지우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24절). 그들은 "사탄의 깊은 것"을 피했는데, 왜냐하면 그들 안에 있는 기름 부음이 이세벨이 전파한 이 거짓 은혜에 문제가 있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기름 부음에 귀를 기울였습니다(요일 2:27).

주님께서 거짓 은혜의 가르침을 "사탄의 깊은 것"이라고 부르신 것을 주목하십시오. 거짓 은혜는 사탄이 기독교 집단의 대부분을 속인 걸작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사탄의 깊은 실상' 중 하나라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

교리는 씨앗과 같습니다. 씨가 좋은지 나쁜지에 대한 증거는 그 열매에서 알 수 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신학 현미경으로 다양한 종류의 씨(교리)를 분석하여 어떤 것은 나쁘고 어떤 것은 좋은 것으로 선언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종자의 품질을 알아내는 방법이 아닙니다. 씨를 뿌리고 어떤 열매를 맺는지 보는 것이 좋습니다.

죄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주는 "은혜"에 대한 교리는 확실히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참된 회개가 가져오는 죄에 대한 깊은 슬픔과 격렬한 미움 없이, 가볍게 죄를 짓고 값싸게 용서를 구할 수 있게 해주는 교리라면, 그 교리는 "사탄의 더 깊은 실상" 중 하나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마지막 때의 진리", "왕국의 진리" 등과 같은 인상적인 문구를 입으로 말하는 신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소위 모든 "진리"를 평가할 수 있는 시험은 예수님께서 친히 주신 시험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죄로부터"(요 8:32-36). 일상 생활에서 당신을 죄로부터 해방시키지 않는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가 아니지만, 그것이 당신에게 성경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교리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진리를 올바르게 이해했다는 한 가지 표시는 당신이 삶의 모든 종류의 속박에서 점점 더 많은 자유를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며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고후 3:17).

그런 다음 주님은 두아디라에 남은 자에게 그들이 가진 것, 즉 "하나님의 참된 은혜"(벧전 5:12)를 굳게 잡으라고 권면하십니다. 사탄이 우리에게서 그것을 빼앗으려 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그것을 굳게 잡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25절).

여기에서 주님은 이기는 자를 끝까지 그분의 행위를 수행하는 자로 묘사하셨습니다(26절). 예수님의 행위는 그분이 육신으로 사셨던 날에 유혹을 이겨낸 승리입니다. 이기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유혹을 이기신 것처럼 시험을 이기고, 이 길에서 끝까지 견디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이기는 자에게 장차 나라들을 다스리는 권세의 상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26절).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세상의 권위를 이해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그들을 다스리시리라"(27절)라는 표현은 실제로 "그가 그들을 보살피리라(shepherd)"를 의미합니다(여기서 "다스리다"라는 단어는 "목자"를 의미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기는 자가 지금 가정과 교회에서 행사하는 권세이며, 언젠가는 천하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입니다. 오늘날 가정에서든 교회에서든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자들은 실제로 사탄의 권세를 행사하고 있는 것이며 나라들을 목양하기에 적합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장로 등 권위를 가지고 있는 우리 모두가 지금 주님의 시험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 다음 주님은 "나도 내 아버지께 권세를 받은 것 같이"(28절)라는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선택한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먼저 예수님에게 권세를 주셨습니다(요 17:2). 이것이 주님께서 교회 안에서도 그분의 사자들에게 권세를 주시는 목적입니다 - 다른 사람들이 영생을 얻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딤전 6:12). 다른 방법으로 권위를 행사하는 장로는 실제로 자신의 권위를 남용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생명에 대한 이 주님의 권위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언젠가 예수님께서 휘두르실 쇠지팡이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시 2:7-9; 계 12:5; 19:15). 주님은 이 쇠지팡이를 이기는 자와 나누실 것입니다. 이기는 자는 지상에 있을 때 권위의 막대기를 부드러움과 단호함으로 사용하는 법을 배웠을 것입니다(26,27절).

"자기의 영(spirit)을 다스리는 자는 도시를 점령하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6:32). 육신의 정욕과 이 세상의 매력과 사탄의 간계를 이겨낸 자만이 언젠가 하나님 나라에서 만국을 다스릴 자격이 있습니다.

이기는 자는 또한 "새벽 별"(샛별)(28절)을 약속 받습니다. 새벽 별(샛별)은 예수님 자신입니다(계 22:16 참조). 예수님은 행악자를 불사르고 만국을 치료할 의의 태양이라고도 불립니다(말 4:1,2). 세상은 그분을 의의 태양으로만 볼 수 있지만, 이기는 자는 그분을 새벽 별(샛별)로 볼 것입니다.

샛별은 해가 뜨기 직전에 보입니다. 이 시대의 마지막 순간, 큰 환난의 끝에, 세상이 흑암 중에 있을 때에, 마지막 나팔이 울리고, 외침과 함께 주님께서 친히 하늘에서 내려오실 것입니다. 모든 세대의 이기는 사람들은 그분이 지상에 다시 오신 것을 환영하기 위해 공중에서 그분을 만나기 위해 올려질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그분을 샛별처럼 볼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이 죄로 병든 세상을 심판하고 치유하기 위해 의의 태양으로서 이 땅에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눈이 그분을 볼 것입니다. 이기는 자들도 그 때에 그분과 함께 내려와, 그분과 땅에서 왕 노릇 할 것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29절).

장 3
3장

위선적인 교회

1-6절: "사데 교회의 심부름꾼에게 이렇게 써 보내어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분이 말씀하신다: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너는 살아 있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다. 깨어나라, 그리고 아직 남아 있지만 막 죽어 가는 자들을 굳건하게 하여라; 나는 네 행위가 나의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네가 그 가르침을 어떻게 받고 어떻게 들었는지를 되새겨서; 굳게 지키고, 회개하여라. 만일 네가 깨어 있지 않으면 내가 도둑같이 올 것인데, 어느 때에 내가 네게 올지를 너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사데에는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 몇이 있다; 그들은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닐 것인데; 그들은 그럴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이기는 사람은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인데; 나는 그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 버리지 않을 것이며, 내 아버지 앞과 아버지의 천사들 앞에서 그의 이름을 시인할 것이다.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주님은 여기에서 하나님의 일곱 영, 즉 일곱 가지로 이루어진 성령을 가지신 분으로 자신을 언급하십니다. 우리는 1장에서 이것의 의미를 보았습니다. 그분은 또한 일곱 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손에 있는 각 별(사자)이 교회에서 성령으로 충만한 그분의 대표자가 되기를 기대하십니다.

사데의 사자는 영적인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엄청난 명성을 쌓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주님의 견해는 사데에 있는 동료 신자들의 견해와 정반대였습니다. 이것은 사데에 있는 대부분의 신자들이 얼마나 육적이고 속기 쉬운가를 보여줍니다.

신자의 90% 이상이 육적인 설교자와 영적인 설교자를 구별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신자의 99% 이상이 사람의 혼적인 능력과 성령의 능력을 구별하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영적인 은사를 나타내고 행사하는 것에 감명을 받으며, 그것이 설교자나 장로를 평가하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이 속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음을 보십니다. 사데의 사자는 성령의 은사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영적으로 죽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주의해야 할 경고입니다: 동료 신자의 99%가 우리에 대해 갖고 있는 의견은 100% 틀릴 수 있습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의견은 그들의 의견과 정반대일 수 있습니다.

교회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다른 사람들은 교회를 "영적으로 살아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이 영적으로 죽은 줄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교회는 분별력이 없는 사람들에 의해 죽은 것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모임에 올 때 받는 환영의 따뜻함, 회중의 규모, 모임에서 발생하는 소리와 감동의 양, 노래의 음악적 질, 설교의 지적인 내용, 헌금의 양 등으로 교회를 평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것들에 감동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닮은 겸손, 순결, 사랑, 그리고 교인들의 마음 속에 있는 자기 중심성으로부터의 자유로움으로 교회를 평가하십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와 인간의 평가는 서로 완전히 다를 수 있습니다. 사실, 대개는 그렇습니다.

사데에는 이세벨이 없었고 발람이나 니골라당의 가르침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더 나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위선이었습니다.

사데의 사자는 자신이 쌓아온 명성에 은밀한 만족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가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위선자로 끝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서 어떤 만족도 얻지 않는다면, 영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으로 그들에게 알려지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위해 하는 일에서 우리 자신의 이름을 찾고 있다면, 우리는 결국 하나님의 얼굴이 아니라 사람들의 얼굴 앞에서 살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간의 의견이 무가치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 집단은 명성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일을 하고 보고서를 작성하는 설교자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사데의 사자처럼 끝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지막 날에 주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들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동기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한 것이라면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할 수 없습니다.

사데의 사자는 또한 영적으로 깊이 잠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기 위해 깨어 기도해야 한다고 경고하셨습니다 - 세상 염려와 재물에 대한 사랑은 가장 좋은 신자들을 잠에 빠지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참조 눅 21:34-36).

사람은 잠을 잘 때, 자신을 둘러싼 현실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그는 꿈의 비현실적인 세계를 더 의식합니다. 영적으로 잠든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실재 세계, 그들 주위에 있는 잃어버린 영혼들, 그리고 영원한 실재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물질적 부, 쾌락, 편안함, 세속적 명예와 명성의 비현실적이고 일시적인 세계에 대해 민감합니다.

사데 교회의 사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깨어날 것, 즉 비현실적인 꿈의 세계를(물질주의의 세계) 포기하고 그리고 영적인 죽음을 향해 가라앉고 있지만 아직 죽지 않은 그의 삶에서 몇 가지를 강화하라고 권고하십니다(2절). 불씨는 완전히 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 "불에 부채질"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완전히 죽을 것입니다(딤후 1:6 - AMP).

주님은 그에게 그의 행위가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하지 못했다고 말씀하십니다(2절 - KJV). 많은 신자들은 "완전함"이라는 단어를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서 이 사자의 일이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기를 기대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적 완전함은 방대한 주제입니다 -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것은 이 장로의 일을 하나님의 인정만을 받기 위해 온전한 마음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가 한 일은 선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영적으로 살아있다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 행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은 모두 죽은 일이었습니다. "그의 거룩한 행위에 죄악이 있었느니라"(출 28:38).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인정하시기 전에, 이 더러운 영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했습니다(고후 7:1).

"사람의 영예를 얻으려고 행한 선행은 죽은 행실입니다."

완전함의 첫걸음은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데도 갈 수 없습니다. 그것이 기도든 금식이든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든 무엇이든, 우리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중요한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지금 이 일을 하는 것을 보고 고마워할 사람을 생각하고 있는가, 아니면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이 일을 하고 있는가?" 잘못된 동기는 많은 선행을 부패시키고, 하나님 보시기에 불완전한 것으로 만듭니다.

주님은 그 사자에게 그가 여러 해 동안 받고 들은 것을 기억하고 그 권고에 순종하도록 상기시키십니다(3절). 주님은 더 많이 받은 자에게 더 많은 것을 기대하십니다. 이 사자는 완전함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권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진리를 알고도 순종하지 않는 것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언젠가는 무너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데의 사자와 교회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 사자는 이제 회개하라는 권고를 받았습니다(3절). 이것은 이 마지막 날에 모든 교회에 대한 주님의 메시지입니다: 회개하라 .

이 사자에게는 여전히 희망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여전히 주님의 손에 있는 별이었기 때문입니다(1절). 주님은 그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먼저 일어나 회개해야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회개를 전파하여 주님의 초림을 위해 이스라엘 민족을 준비시킨 그리스도의 선구자였습니다. 이제 교회의 선지자들은 회개를 전파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재림을 위해 하나님의 백성을 준비시켜야 합니다. 회개의 메시지는 오늘날 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만일 사자가 깨어 회개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도둑이 밤에 갑자기 오는 것 같이 심판 때에 그에게 임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주로 불신자들에게 밤에 도둑처럼 오실 뿐만 아니라 어둠 속에 행하는 신자들에게도 도둑처럼 오십니다. 빛 가운데 행하는 낮의 아들들은 주님의 강림하심을 놀라지 아니하고 밤의 아들들은 놀랄 것입니다(살전 5:4,5).

이기는 자들은 항상 빛 가운데 행하기 때문에 항상 주님의 오심을 준비할 것입니다. 그러나 삶에서 고백하지 않은 죄를 안고 어둠 가운데 행하는 자는 스스로를 '믿는 자'라고 부르더라도 준비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3절은 영적으로 잠들어 있고 회개하지 않는 신자들(심지어 교회의 사자라 할지라도)이 주님이 오실 때 놀랄 것이라고 분명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흑암의 아들들과 같은 부류에 속하게 될 것입니다. 이들은 주님이 오실 때, 닫힌 문 밖에 남겨질 미련한 처녀들입니다(마 25:10-13).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보아라, 내가 도둑처럼 올 것이다. 깨어 있어서, 자기 옷을 갖추어 입고, 벌거벗은 몸으로 돌아다니지 않으며, 자기의 부끄러운 데를 남에게 보이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도다"(계 16:15).

그러나 사데에는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이 몇 명 있었습니다(4절). 이것이 이 교회의 유일한 만회할 만한 장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순결하게 지킨 사람들의 명단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 순결함은 육신의 죄로부터의 자유뿐만 아니라 사람의 명예를 구하는 죄와 다른 영의 죄들로부터의 자유를 말합니다.

이들은 사데에서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살았던 이기는 자들의 남은 자들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지적하셨듯이 이 이긴 자들은 소수였습니다. 이 남은 자는 매 세대마다 항상 적었으니, 이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과 좁은 길을 찾는 자가 적기 때문입니다(마 7:14).

주님은 이 소수가 합당한 자들이니 그러므로 그들이 흰 옷을 입고 주님과 함께 걸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4절). 이들은 누가복음 21장 36절에 있는 주님의 권고를 순종한 사람들입니다: "그런즉 항상 깨어있고, 주의하여, 너희가 온전한 힘을 얻어 이 모든 것을 피해서, 인자의 앞에 설 자격이 있기를 기도하라"(AMP). 그들은 합당한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어린 양의 혼인날에 신부의 흰 옷을 입고 걸을 것입니다.

모든 이기는 자들에게는 흰 옷을 입는 상급이 약속되어 있습니다(5절). 이것은 이기는 자들만이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것임을 분명히 나타냅니다.

이기는 자들은 또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서 그들의 이름이 지워지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도 받았습니다(5절). 이것은 사람의 이름이 생명책에 있다가 지워질 수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여기서 이기는 자에게 주어진 약속은, 그러한 위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은 육신을 따라 사는 신자는 영적으로 죽을 것이라는 것입니다(롬 8:13). 그들은 전에 가졌던 구원을 잃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내가 그를 내 책에서 지워 버리리라"(출 32:33)고 말씀하셨습니다.

시편 69:25에서 우리는 사도행전 1:20에서 베드로가 인용한 가룟 유다에 관한 예언을 읽습니다. 시편 69편을 더 읽어보면 가룟 유다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진다는 예언적 언급이 있습니다(28절). 그의 이름은 그 책에 한 번 있었다가 지워졌습니다.

그곳에서 자신의 이름을 유지하려면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또한 아버지 앞과 그분의 천사들 앞에서 이기는 자의 이름을 시인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것은 사람들 앞에서 그분의 이름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시인하는 자에게 약속된 상급입니다(마 10:32; 눅 12:8). 주님은 친척, 친구, 이웃, 직장의 동료 앞에서 공개적으로 그분의 이름을 고백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많은 신자들이 여기에 불충실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들이 이기는 자가 아님을 증명합니다.

그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고백하신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이 땅에서 백년 동안 매일, 주님을 위해 부끄러움과 핍박을 감수해야 할지라도, 주님께서 언젠가 아버지와 그분의 거룩한 천사들 앞에서 우리를 자랑스럽게 인정하시는 것이 최종 보상이라면 그 모든 것이 여전히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그분의 귀한 입술에서 나오는 한 마디의 인정은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평생의 고통과 조롱의 기억을 지울 것입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6절).

신실한 교회

7-13절: "빌라델비아 교회의 심부름꾼에게 이렇게 써 보내라: '거룩하신 분, 참되신 분, 다윗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 분, 여시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시면 열 사람이 없는 그분이 말씀하신다: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보아라, 내가 네 앞에 문을 하나 열어 두었는데, 아무도 그것을 닫을 수 없다. 네가 힘은 적으나,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모른다고 하지 않았다. 보아라, 내가 사탄의 무리에 속한 자들을 네 손에 맡기겠다. 그들은 스스로 유대 사람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자들이다. 보아라, 내가 그들이 와서 네 앞에 꿇어 엎드리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하겠다. 인내하라는 내 말을 네가 지켰으니, 온 세상에 닥쳐올 시험을 받을 때에, 나도 너를 지켜 주겠다. 시험은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을 시험하려고 닥치는 것이다. 내가 곧 가겠다; 너는 네가 가진 것을 굳게 붙잡아서,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여라. 이기는 사람은, 내가 내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겠다. 그는 다시는 성전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하나님의 이름과 내 하나님의 도시,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또 나의 새 이름을 그 사람 위에 써 두겠다.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주님은 여기에서 자신을 거룩하고 참되신 분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분은 죄를 지으신 일이 없고 그분의 입에서는 아무런 거짓(위선)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벧전 2:22). 그분은 그분의 사자들에게서도 거룩함과 실재를 찾으십니다.

그분은 또한 다윗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은 다윗의 자손으로 나신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입니다(롬 1:1-3).

바울이 디모데에게 준 마지막 권고 중 하나는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을 기억하라"(딤후 2:8)는 것이었습니다.

열쇠는 문을 여는 능력을 말합니다. 죄와 사망과 사탄을 이기심으로, 예수님은 우리가 걸어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기기 원하는 모든 사람의 앞서 달려가신 분이며 모범이 되십니다.

주님은 또한 이제 어떤 문이든 열거나 닫을 수 있는 분으로 자신을 설명하십니다. 우리가 이기는 자라면, 우리가 통과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때 우리는 언제든 닫힌 문 앞에 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또한 우리 앞에 어떤 문을 닫으시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 정해주신 길이 아닌, 주께서 우리에게 유익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계신 길로 우리가 들어가지 않도록 하십니다. 이기는 사람의 삶은 참으로 신나는 일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어떤 문으로 들어가야 하고 어떤 문을 더 이상 두드리지 말아야 할지 결정하십니다.

요나서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어떻게 한 문(요나를 배에서 바다로 던지심으로써)을 닫고 다른 문(물고기 입으로 요나를 삼키게 하심으로)을 여는 것을 봅니다. 물고기가 이스라엘 해안에 이르렀을 때, 주님은 다시 물고기의 입을 열어 그분의 종을 육지에 올려 놓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요나를 "출발점"으로 되돌려 놓으셨습니다. 그런 다음 다시 한 번 니느웨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곳은 그분이 요나에게 설교하라고 하셨던 곳이었습니다. 그러자 요나가 갔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목적을 위해 어느 곳에 우리를 두기 원하신다면, 그분은 우리 앞에서 잘못된 문을 닫고(어쩌면 우리를 어딘가에서 내쫓게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앞에서 올바른 문을 여는 방법과 수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분은 심지어 우리가 그분의 최고를 놓치지 않도록 우리 삶에서 "출발점"으로 우리를 다시 운송하는 수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분이 요나를 위해 하신 일을 우리에게도 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심지어 더 많은 일을 할 것입니다.

모든 문에 대한 열쇠는 그분의 손에 있습니다. 당신이 삶에 대한 야망이 없고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마음이 있는 주님의 제자라면 한 가지 확신할 수 있습니다 - 그 무엇도 당신의 길을 막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가까이 오면 열리는 자동문처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방해가 되는 모든 닫힌 문이 당신이 근처에 오자마자 당신 앞에 열릴 것입니다. 그분은 너무 빠르지도 너무 늦지도 않은 적절한 시간에 각 문을 열어 주십니다. 그분은 또한 당신의 삶에 대한 그분의 완전한 뜻을 놓치게 만드는 문을 닫아 주실 것입니다.

여기 빌라델비아에서 우리는 주님의 책망을 전혀 받지 않는 두 사자와 교회들 중 두 번째를 봅니다. 우리가 처음 본 것은 서머나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 예는 우리에게 그러한 주님의 사자가 될 수 있고 주님께서 우리를 검토하실 때 주님으로부터 전혀 책망을 받지 않는 그러한 교회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도전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 있는 사자와 성도들은 연약한 백성이었습니다(8절). 그들은 인간의 영향력과 권력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주님의 이름을 고백했습니다.

이것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날에 대한 두 가지 주요 요구 사항입니다. 그것이 요한계시록에서 그것들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과 예수님의 증거를 붙잡는 것.

그들의 신실함 때문에, 주님은 그분을 위해 증거할 열린 문을 그들 앞에 두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그 문을 닫지 못할 것입니다(8절). 그들의 증거는 당연히 사탄의 반대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옥의 문은 이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 이것은 사탄 자신이 두려워하는 승리하는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교회는 서머나에 있던 회당과 유사한 사탄의 회당에 의해 반대를 받고 있었습니다(9절). 사탄의 회당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 ​​중 오직 두 교회, 즉 주님께서 아낌없이 칭찬하시는 두 교회만을 반대했음을 주목하십시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교회가 사탄이 가장 반대하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사탄의 반대는 주로 종교인들을 통해 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로마인이나 그리스인이 아니라, 매일 성서를 연구하는 종교적인 유대인들에게 반대를 당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를 주로 반대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지만 죄의 권세로부터의 자유를 설교하지 않는 자들에게서 나올 것입니다.

주님은 빌라델비아 교회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사탄의 회당이 분명히 알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탄의 대리자들은 교회 앞에 절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9절). 하나님은 사탄을 교회의 발 아래 짓밟도록 정하셨습니다(롬 16:20). 사탄을 대적할 때 하나님은 항상 우리 편에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라도 사탄이나 그의 대리자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아버지께 사랑받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요 17:23). 이 기도는 빌라델피아에서 응답되었습니다. 유대인의 회당은 주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들 곁에 서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9절). 하나님은 우리의 원수들을 혼란케 하시고 우리가 그분의 사랑과 보살핌의 대상임을 깨닫게 하는 놀라운 방법을 가지고 계십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예수님의 인내하라는 말씀을 지켰습니다(10절).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끝까지 순종하며 버텼습니다. 시험의 때를 충실히 견디어 냄으로써, 우리가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온전하게 됩니다(약 1:4).

이 교회에 대한 주님의 약속은 "온 세상에 닥칠 시험의 때로부터 내가 너를 지키리라"(10절)였습니다. 여기에서 주님은 그 당시(1세기 말이나 2세기 초에) 온 세상에 닥치게 될 시련의 때를 미리 경고하십니다. 빌라델피아 교회는 시험 기간 동안 하나님의 보호를 약속 받았습니다.

주님은 어떻게 "시험의 그 시간에서 그들을 지키셨습니까? " 그것은 확실히 그들을 세상에서 끌어내어 휴거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니요. 그들은 시련 중에도 안전하게 보호받았습니다. 그들은 환난 가운데서 주님의 보호의 손길을 경험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격려의 말씀입니다 - 주님은 적그리스도 시대의 큰 환난 가운데서도 마찬가지로 우리를 악에서 지켜주실 것입니다. 그분은 2세기에 빌라델비아 교회를 지키셨던 것과 똑같이 우리를 지키실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비록 우리가 그분의 이름을 위해 고난을 받아야 할지라도 악으로부터 안전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으리라....몸을 죽이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마 10:28,30; 눅 21:18).

환난 중에도, 주님의 허락 없이는 우리의 머리털 하나도 누가 만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쉴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 주님은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시험의 시간"에 시험을 받을 사람들은 "땅에 거하는 자들", 즉 이 땅을 자기 집으로 삼고 땅의 일을 생각하며 재물을 좇고 사람의 영광을 구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10절).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땅에 거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의 마음이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이 교회에게 그분이 이 땅에 다시 오실 때까지, 그들이 왕관을 잃지 않도록 그들이 가진 것을 굳게 붙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10절).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하나님이 당신을 위해 의도하신 면류관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위한 임무와 면류관을 계획하셨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 임무를 수행하는 데 불충실하다면, 당신은 그 왕관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일으키실 것이고, 그가 당신을 위한 면류관을 받을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 가능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다른 사도들에게 과업을 계획하신 것처럼 가룟 유다에게도 구체적인 과업을 계획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불충실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왕관을 잃었습니다. 다른 누군가(아마도 바울)는 유다가 완수해야 했던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그 사람은 이제 자신의 면류관 외에 유다의 면류관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는 한시도 여유를 가질 수 없습니다.

이기는 자는 교회의 영원한 기둥이 될 것입니다(12절).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가 교회에서 다른 사람들의 짐을 짊어지고 그들의 버팀목이 되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영적 "아버지"가 될 것입니다. 모든 교회에는 그러한 기둥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기는 자는 하나님의 이름, 새 예루살렘의 이름 그리고 주님의 새 이름이 그의 이마에 쓰여질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예수님의 온전한 제자임을 공개적으로 드러낼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지금 이 땅에서 멸시를 받지만, 주님이 다시 오실 때 그분에 의해서 영광을 받을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은 그리스도의 신부를 상징하는 이름입니다(계 21:9,10). 그 도시의 이름은 이기는 자의 이마에 기록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이기는 자만이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것임을 다시 한 번 봅니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이 권면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13절).

자만한 교회

14-22절: "라오디게아 교회의 심부름꾼에게 이렇게 써 보내어라: '아멘이신 분이시요, 신실하시고 참되신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를 시작하신 분이 말씀하신다: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겠다.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내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 너는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 실상 너는, 네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는 네게 권한다. 네가 부유하게 되려거든 불에 정련한 금을 내게서 사고, 네 벌거벗은 수치를 가려서 드러내지 않으려거든 흰 옷을 사서 입고, 네 눈이 밝아지려거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라.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너는 열심을 내어 노력하고, 회개하여라. 보아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이기는 사람은, 내가 이긴 뒤에 내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보좌에 앉은 것과 같이, 나와 함께 내 보좌에 앉게 하여 주겠다.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주님은 여기에서 자신을 아멘, 즉 말씀을 반드시 이루실 분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분은 또한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말하는 충실하고 참된 증인입니다. 그분은 또한 하나님의 창조의 시작(또는 창조자)이십니다. 그분은 첫 번째 창조를 창조하신 분이시며,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보다 먼저 계시니라"(골 1:17) -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 시작과 끝의 창조자이십니다.

여기에 이세벨이나 거짓 가르침이 없는 또 다른 교회가 있습니다. 그들은 부도덕하지도 악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서도 불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단지 "미지근한" 상태였습니다(16절). 그들은 그들의 교리에 있어 완전히(dead) 옳았습니다(right) - 하지만 그들은 죽었으며(dead), 옳았습니다(right)! 그들은 도덕적으로 존경받을 만한 사람들이었고 - 영적으로는 죽어 있었습니다!

주님은 우리 마음이 항상 타오르기를 원하십니다 - 주님과 다른 신자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타오르기를 원하십니다.

"제단 위의 불은 계속 타고 있어야 하며; 꺼뜨려서는 안 된다" 이것은 옛 언약의 율법이었습니다(레 6:13).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예수님의 참 제자의 정상적인 상태가 무엇인지를 상징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보다 낮은 것은 기준 이하입니다. 불타는 떨기나무가 여호와의 불로 타올랐을 때, 그 안에는 벌레나 세균이 살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이 성령의 불로 타오르고 있을 때, 그 안에서도 사랑 없는 태도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뜨겁거나 차갑거나 미지근한지 테스트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

"뜨겁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열렬히 사랑하는 것입니다. "차갑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억울해 하고 용서하지 않는 것입니다. '미지근하다'는 것은 남에 대한 억울함도 사랑도 없는 것입니다.

신자가 "내 마음에 아무에게도 원망할 것이 없다"고 말할 때 그는 미지근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마음에 서로 원망할 것이 없으면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서로에 대한 악한 태도가 없다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식별하는 표가 아닙니다(참조, 요 13:35).

우리 마음에 무언가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동료 신자들에 대한 열렬한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은 단순히 악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미덕입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원망하는 영을 쫓아내고 깨끗하게 하고 비워두는 것은 미지근해지는 가장 확실한 길이며 결국 처음보다 더 나쁜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눅 11:24-26).

세상은 "무언가가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낫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찬 것보다 미지근한 것이 낫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는 "나는 네가 차가웠으면 한다"(15절)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마음이 어중간한 것보다 차라리 완전히 세속적인 것을 원하십니다.

미지근하고 타협적인 기독교인은 믿지 않는 사람보다 지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목적에 훨씬 더 많은 피해를 줍니다. 불신자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취하지 아니하므로, 그의 세속성이 복음에 장애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타협하고 불성실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취하여 그들의 세속적인 태도로 이방인들 가운데서 그분의 이름을 욕되게 합니다.

또한 차갑고 세상적인 불신자는 미지근하고 독선적인 바리새인보다 자신의 영적 필요를 깨닫게 될 가능성이 훨씬 더 높습니다(마 21:31 참조).

이러한 이유로 주님은 우리가 미지근한 것보다 차갑게 되기를 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실제적으로 이것은 당신이 돈을 사랑하고 분노와 불순한 생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이 없다면(죄의 세 가지 영역만 예로 들자면), 당신이 예수님의 제자라고 주장하기보다 불신자로 남아 있는 것이 더 나을 것임을 의미합니다. 당신이 미지근할 때보다 차가울 때 더 희망이 있습니다. 이것은 놀랍지만 사실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소유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곳의 "신자들"은 스스로를 부유하고 아무 것도 필요 없다고 여겼습니다 - 아마도 그들이 진리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고 사람들 앞에서 좋은 평판을 얻었고 돈도 많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사회의 존경받는 지도자들도 그 교회의 교인이었을 것입니다.

성전에서 기도했던 바리새인처럼, 이 그리스도인들도 그들의 종교 활동이 풍부하기 때문에 자신이 영적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눅 18:9-14).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사자나 교회에 있는 사람들 중에 심령의 가난함은 전혀 없었습니다.

사자와 교회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타락한 상태를 전혀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에 대한 주님의 생각은 그들 자신에 대한 평가와 정반대였습니다. 그분은 그들을 "비참한 자와 가련한 자와 가난한 자와 눈먼 자와 벌거벗은 자"(17절)라고 부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상태가 참으로 불쌍하다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얼마나 강력한 형용사를 사용하셨습니까!

사데에서는, 사자와 교회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영적"이라는 평판을 받았습니다. 라오디게아에서는, 그런 평판조차 얻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눈에만 "영적"이었습니다.

대다수의 신자들은 주님께서 그들에 대해 생각하시는 것보다 자신의 영성에 대해 훨씬 더 높은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기독교 그룹의 신자들에게 해당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현실적인 평가를 하는 신자는 거의, 아주 거의 없습니다 - 왜냐하면 자기 자신에게 무자비하게 정직한 사람은 매우 극소수이기 때문입니다.

당신 자신이 당신의 영성에 대해 주님께서 당신에 대해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높은 견해를 갖고 있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자신을 낮추고 주님께 부르짖어 당신의 삶에 대한 주님의 평가를 받으십시오. 이 책을 잠시 내려놓고 지금 바로 기도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라오디게아 성도들은 한때 빌라델비아 성도들처럼 불타올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타락하여 영적 생활에 부주의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성령 충만한 삶의 교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삶의 실체를 잃어버렸습니다.

베드로는 그런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계명을 저버리는 것보다, 차라리 알지 못하는 것이 저희에게 나으니라(벧후 2:21).

주님은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하십니까? 그분의 입에서 그 사자와 교회를 토하시겠다고(16절)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입에서 무엇을 토합니까? 우리는 먹었지만 소화되지 않아 우리 몸의 일부가 되지 못한 음식을 토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주님께 드릴 때, 그 의도는 우리가 "그분에 의해 소화되어"("더 이상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 그분의 몸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전히 우리 자신의 것을 추구한다면 우리는 소화되지 않은 음식처럼 결국 주님으로부터 토해내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한동안 주님의 사자였으나, 더 이상 주님의 사자가 아니어서 토해내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일찍이 "그리스도 안에" 있을 수 있고, 나중에 토하여져 우리가 그분에게서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여전히 ​​이 사자와 이 교회에 대한 소망을 갖고 계셨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분은 비참하고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까지도 구원하려고 항상 애쓰십니다. 오래 전에 사람들이 버렸을 것을, 주님은 여전히 ​​구하려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 최악의 사람들도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회개한다면 우리 모두는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 사자와 교회에게 금과 흰 옷과 안약을 사라고 조언하십니다(18절).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무료인 것들이 있습니다. 죄 사함과 성령세례는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입니다.

그러나 밭에 감추인 보화와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자의 비유는 모든 것을 버리는 자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얻을 수 있음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마 13:44-46).

주님은 라오디게아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 영적인 부를 얻으려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사야 합니다.

불로 연단한 금은 합금이 전혀 함유되지 않은 순수한 신성한 성품을 상징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우리 안에서 가져야 할 것입니다.

흰 옷은 외적인 의로움 - 즉 우리의 외적 생활, 말, 행동 등의 순결을 말합니다.

안약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수 있게 하는 성령의 계시를 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목적을 이해할 수 있고, 또한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는 것처럼 우리 자신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의 부와 명예도 무가치함을 볼 수 있게 해줍니다.

이 모든 것을 얻으려면,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품절"(sold out)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주님께서 제공하시는 이러한 부, 즉 영원한 가치를 지닌 진정한 부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사랑하시는 자들만을 꾸짖으시고 징계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19절). 이것을 아는 것은 큰 위안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책망과 징계를 받을 때, 이것이 그분의 크신 사랑의 표시일 뿐이라는 것을 명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분이 여전히 우리에게 희망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반대로 죄를 지었는데도, 양심에 책망을 느끼지 않고 주님의 징계를 받지 않는다면, 당신은 참으로 위험한 상황에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주님은 당신을 변화시키려는 시도를 포기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그 이유는 당신이 과거에 그분의 부드러운 시정의 음성을 듣기를 끈질기게 거부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너무 늦기 전에 회개하고 그분께 다시 돌아오십시오.

모든 자녀(참 자녀)가 받는 징계를 여러분이 받지 않는다고 하면, 여러분은 사생아이지, 참 자녀가 아닙니다(히 12:8).

주님은 사자와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열심을 품고 회개하라"(19절)라고 권고하십니다. 심지어 우리의 회개도 더딜 수 있습니다. 우리는 회개에 대해서도 열심과 마음을 다해야 합니다.

주님은 지금 교회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들어가려고 하십니다(20절). 그러나 교회의 모임에서는, 찬양과 기도와 설교가 단조롭게 규칙적으로 진행되는 "평소와 다름없는"모습입니다. 그러나 회중은 주님 자신이 외부에 계시다는 사실을 마냥 행복해하면서 모르고 있습니다!

주님 자신이 문 밖에 계시는 교회에 절대로 속하지 마십시오. 그분이 밖에 계시다면, 당신 자신이 안에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도 밖에 있어야 합니다. 신랑이 밖에 서 있으면, 신부는 신랑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이제 교회의 개인들을 부르셔서 그분께 마음을 열도록 하십니다. 어떻게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열심을 품고 회개해야 그들은 문을 열 수 있다는 것을 문맥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문은 우리 지성의 문이나 감정의 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의지의 문입니다. 의지가 굴복할 때, 주님은 우리의 영 안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와 교제(식사)하십니다.

다시 한번 이기라는 부름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그분이 이 땅에 계실 때에 그분께서 이기셨던 것 같이, 우리도 이길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21절).

예수님은 첫 번째 이긴 자이셨습니다. 그분은 이미 세상과 마귀를 이기신 우리 앞서 달려가신 분입니다. 그리하여 그분은 아버지와 함께 그분의 보좌에 앉으시도록 높임을 받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이 하신 것처럼 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도 언젠가 그분의 신부로서 그분과 함께 그분의 보좌에 앉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참고 견디면, 우리도 또한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이요"(딤후 2:12).

마지막으로, 끝에 같은 말을 다시 듣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22절).

하락세를 저지하기

지금까지 살펴본 일곱 사자와 교회는 20세기 동안 존재해 온 일곱 종류의 사자와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 일곱 종류의 사자와 교회는 오늘날에도 세상에 존재합니다. 우리 각자는 자신을 평가하고 우리가 서 있는 위치를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책망을 받은 다섯 명의 사자와 교회를 보면 분명한 하락세를 볼 수 있습니다:

1. 에베소에서, 우리는 주님에 대한 첫사랑의 상실을 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을 잃을 때, 우리는 하락세의 첫 발을 내디뎠습니다. 잠시 후, 이것은 동료 신자들에 대한 사랑도 잃게 합니다.

2. 버가모에서, 우리는 발람의 가르침을 통해 세상적인 것이 교활하게 스며든 것을 봅니다. 니골라당(에베소 교회에서 배제되었던)이 이제 여기에서 권세를 얻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이 상실될 때, 세속적인 것이 스며들고 종교적인 위계가 교회를 장악합니다. 일단 종교적 위계질서가 교회의 지도력을 장악하면 바벨론은 쉽게 건설됩니다.

3. 두아디라에서, 교회는 철저히 세속적이게 되었고, 그 결과 종교적 음행이 만연했습니다. 이제 한 여자가 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고, 거짓 은혜를 선포하고 성령의 은사(특히 예언)도 위조하고 있습니다.

4. 사데에서, 우리는 위선을 봅니다. 죄는 가려지고 사람의 의견은 하나님의 의견보다 더 귀중합니다. 교회의 사자는 영적으로 잠들어 있습니다(영적인 현실을 알지 못함). 그러나 경건의 모양은 사람들의 눈에서 주님께서 그에게서 보시는 영적 죽음을 가리웁니다.

5. 라오디게아에서는 몸이 죽을 뿐만 아니라 썩어 악취가 나기 시작할 정도로 타락했습니다. 미지근함과 영적인 교만이 사망의 원인입니다. 위의 네 교회에는 여전히 주님께서 각 교회에서 볼 수 있는 좋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곳 라오디게아에서는 그분은 아무 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위의 교회들의 사자들 중 누구도 그들 자신의 삶이나 교회의 진정한 영적 상태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 모두는 그들이 자신에 대해 가졌던 높은 평가 때문에 안일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설교를 준비하느라 바빴기 때문에, 주님께서 개인적으로 그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필요를 보는 것보다 전파하는 데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일단 어떤 사람이 교회의 사자가 되면, 그 자신은 교정의 필요성을 넘어섰다고 생각하기가 매우 쉽습니다. 성경은 "더 이상 가르침을 받을 줄 모르는 늙고 어리석은 왕"(전 4:13)에 대해 말합니다.

이 다섯 교회의 사자들은 모두 그 어리석은 왕과 같았습니다. 그들의 말은 너무나 오랫동안 법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어떤 문제에서든 그들의 말이 틀릴 가능성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런 착각에 빠진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삶에서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결코 잃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교만한 태도가 그들을 영적으로 귀머거리로 만들었습니다.

사울 왕은 출발은 좋았으나 곧 중도에서 탈락한 또 다른 어리석은 왕이었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여호와께 기름 부음을 받았을 때 그는 "스스로를 작게 여겼습니다"(삼상 15:17). 그러나 그는 자신에 대해 낮은 생각을 유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잃었습니다. 기름부음은 어린 다윗에게로 옮겨졌습니다. 사울은 이 사실을 깨달았지만, 그것을 직면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는 고집스럽게 왕좌에 계속 앉아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사울의 목숨을 앗아가서 다윗을 왕위에 앉히셨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비슷한 상황을 봅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은 한때 주님의 사자였던 많은 사람들에게서 떠났고, 지금은 그들의 교회에 있는 몇몇 젊은 형제들에게 강력하게 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늙고 어리석은 왕들"은 이것을 보고 참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엇을 합니까? 그들의 질투와 그들의 왕국을 보존하려는 이기적인 욕망은 어떤 식으로든 그 젊은 형제들을 억압하도록 만듭니다.

아마도 비슷한 일이 소아시아의 타락한 다섯 교회에서도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사자들에게 마지막 경고를 하셨습니다.

하나님에게는 편애가 없고 특별히 좋아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심지어 사도 바울도 자신이 절제된 생활을 하지 않으면, 넘어져 자격을 상실할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고전 9:27).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했습니다,

"그대 자신과 그대의 가르침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이 일들을 계속하여라. 이렇게 하면 그대 자신과 그대의 말을 듣는 자들을 구원할 것이다"(딤전 4:16).

디모데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삶을 돌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면 그는 자신의 삶에서 그리스도를 닮지 않는 것에서 구원을 경험할 수 있고,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도 그러한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각 교회에 있는 그분의 모든 사자들에게 명하신 방법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그들 자신의 삶을 먼저 살피고 양 떼의 삶을 살피라고 했습니다(행 20:28).

무엇보다도 순결하고 끊임없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 아래 자신의 삶을 보존하는 것이 주님의 모든 사자의 책임입니다. "네 옷을 항상 희게 하고, 네 머리에 기름이 부족하지 않게 하라"(전 9:8).

주님은 이 사자들에게 직접 말씀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듣는 귀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분은 사도를 통해 그들에게 말씀하셔야 했습니다. 적어도 주님의 음성을 또렷이 들을 수 있는 요한이 있었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그들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다섯 명의 사자 모두에게 희망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 왜냐하면 주님은 여전히 그들을 모두 오른손에 붙들고 계셨기 때문입니다(계2:1). 그들이 회개한다면, 다시 영광스러운 형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교회는 주님의 영광을 다시 한 번 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 마지막 경고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주님은 그들을 버리실 것입니다.

이 모든 타락의 한가운데에, 주님께서 전혀 책망하지 않으신 두 명의 놀라운 사자와 교회(서머나와 빌라델비아)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서 우리는 다음의 미덕을 봅니다:

1. 가난과 반대 속에서의 신실함;

2.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인내; 그리고

3. 부끄러움 없이 그리스도의 증거를 선포함.

주님은 타락한 다섯 사자와 그들의 교회가 스스로를 판단하지 않았기 때문에 책망하시고 시정하셔야 했습니다.

두 신실한 사자와 그들의 교회는 책망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판단하여 육과 영의 모든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고후 7:1).

하나님의 말씀은,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올바르게 판단하면,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다"(고전 11:31)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먼저 우리에게서 시작되리라"(벧전 4:17). 우리가 자신을 먼저 그리고 끊임없이 판단하는 것이 참된 하나님의 집의 식별 표식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지금 우리 자신을 판단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셨기 때문에, 언젠가 그분의 심판대에 설 때, 우리 삶에서 심판 받을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를 판단하는 태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주님께서 책망하거나 바로잡을 것이 전혀 없는 사람들 가운데 포함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에는 개별 신자들에게 이기라는 부르심이 있습니다. 이기는 자들은 자신의 삶에서 하향세(위에서 보았듯이)를 저지해서 주님의 영광을 발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그들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타락하는 악한 성향을 가진 동일한 육체를 가지고 있음을 인식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경향을 거스르고, 성령의 능력으로 그들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오늘 이기는 자들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들이 속해 있는 죽은 교회에 머물러야 합니까, 아니면 밖으로 나와야 합니까?

"계시록"의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우리는 이기는 자들에게 그들의 지역 교회를 떠나라는 명령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각 지역에 오직 하나의 교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아직 그들에게서 촛대를 옮기지 않으셨습니다.

오늘날 상황은 매우 다릅니다. 오늘날 우리 마을과 도시에는 많은 "교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교회를 주님의 촛대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주님께서 그것들을 세우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사자들은 어느 때라도 결코 주님의 손에 있는 별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그들을 부르거나 장로직분으로 임명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다른 많은 경우에 주님께서는 그들이 회개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오래 전에 사자와 교회를 모두 포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교회의 일부가 되기로 결정하기 전에 주님의 "기름 부음"이 사자와 교회에 있는지 확인하는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이기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온전한 목적"(행 20:27)을 선포하지 않는 지역 "교회"의 일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에베소의 사자는 회개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촛대를 제자리에서 옮기실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습니다(계 2:5). 사자가 회개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주님은 그를 한쪽으로 치워 놓고, 다른 사람을 임명하셨을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도 회개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교회는 한쪽으로 치워져서 주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교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여전히 회중으로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 그러나 그 이후에는 주님이 보시기에 바벨론의 "교회"로만 남았을 것입니다.

그때 에베소에서 이기는 자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그들은 주님께서 교회를 떠나시자마자 그 옛 "교회"에서 빠져 나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따로 모이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옛 시스템에서 새 교회로 옮기시는 것을 보는 눈을 가진 자들은 이 이긴 자들과 함께 모였을 것입니다. 그때 그 새로운 모임은 에베소에서 교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그분의 촛대를 두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 새로운 교회가 이제 하나님의 길로 행하기를 거부하거나 스스로 판단하기를 거부한다면, 주님은 그들 가운데서 촛대를 옮기시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셔야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편애가 없습니다.

기독교 교회의 역사는 이 과정이 지난 2000년 동안 세계 각지에서 어떻게 반복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모든 곳에서 그토록 많은 바벨론"교회"를 발견하는 이유입니다. 어느 단계에 이르면 도시에 촛대가 전혀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심각해질 수 있습니다. 소위 교회라고 불리는 모든 교회가 바벨론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주님께서 친히 교회에서 나오신 후에는 그"교회"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충성은 항상 "우리가 자란 교회"가 아니라 주님과 그분의 교회에 대한 것이어야 합니다. 인간적인 애정은 우리가 주님과 함께 나아가는 데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일곱 교회에 대한 연구를 통해, 우리는 주님께서 교회에서 무엇을 찾으시는지를 분명히 보았습니다. 따라서 이기는 사람들은 자신의 지역에 있는 교회와 교제를 추구해야 합니다:

1.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과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타오르는 것입니다;

2.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살아있는 믿음을 전파합니다;

3.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계명에 대한 전적인 순종을 강조합니다;

4. 그것은 부끄러움 없이 예수님의 증거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5. 그것은 영적 교만, 위선 및 세속성에 반대하는 것입니다;

6. 그것은 거짓 사도들, 거짓 교사들, 거짓 은사들을 폭로합니다;

7. 그것은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음을 끊임없이 전파하는 것입니다;

8. 그것은 모든 신자들이 끊임없이 자신을 판단하도록 격려합니다;

9. 그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이기신 것처럼, 신자들이 이기는 자가 되도록 도전을 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모든 곳에서 그분의 이름에 대한 그러한 증거를 원하십니다.

그러한 교회를 세우기 위해, 주님은 우리가 2장과 3장에서 고찰한 진리에 사로잡혀 있는 사자를 필요로 합니다.

주님께서 이 마지막 날에 세계 각처에서 그러한 사람들과 교회들을 많이 찾으시기를……

장 4
4장

4장으로 넘어가기 전에, 앞서 우리가 읽은 내용을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들과 듣는 자들과 그 안에 기록된 것들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도다. 때가 가까웠기 때문이다 (계 1:3)."

신자들이 예언을 공부할 때, 그들의 관심은 대개 환난, 천년왕국, 나팔과 대접 등의 상징에 관한 모든 것을 아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언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기록된 것을 지키는 것입니다. 나머지 성경과 마찬가지로 예언도 순종을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에는 많은 상징과 계시가 사용됩니다. 누구도 그것을 독단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것들을 일부러 모호하게 남겨두셔서, 상징을 설명하는 데 몰두하는 신자들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자 하는 신자들을 구별하실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마태복음 5장에 있는 복 있는 자의 팔복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도 7명의 복 있는 자가 있습니다. 첫 장에는 "읽고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계 1:3)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 "이 책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도다"(계 22:7)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책의 시작과 끝 부분에, 이 책에 기록된 대로 순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약속된 이 축복이 있습니다. 이 두 복 있는 자 사이에 계시록 전체가 있습니다.

순종은 성경의 마지막 책에서도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계시록 어디에도, 모든 상징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사람이나 예언된 여러 사건의 시간표를 보여 주는 예언적 도표를 그릴 수 있는 사람에게 약속된 축복이 없습니다. 창세기 3장부터 요한계시록 22장까지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은 바로 순종입니다.

요한계시록 4장부터 22장까지는 2장과 3장에서 이미 성령의 부르심을 듣고 이기는 자들을 위해 기록된 것입니다. 절대 잊지 마세요. 이 장들은 단순히 이해력을 높이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쓰여진 것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1장 1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계시를 그분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려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셨음을 보았습니다. 이 책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숨기고자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요. 그분은 그 의미를 우리에게 알리고 싶어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예언을 공부할 때 가져야 할 믿음입니다. 네 믿음대로 되리라! 당신이 "주님,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저는 이기는 자가 되고 싶습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이 예언을 깨닫게 해주실 것을 믿습니다."라고 말하고 믿음으로 나아오면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1절: 그 뒤에 내가 보니, 하늘에 문이 하나 열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에 내가 들은 그 음성, 곧 나팔 소리와 같이 나에게 들린 그 음성이 "이리로 올라오너라. 이 뒤에 일어나야 할 일들을 너에게 보여 주겠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서 우리는 땅에 문이 열려야 할 필요성을 보았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의 문에 서서 두드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그 문을 열면(우리의 의지를 굴복하면),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하늘에서" 문을 여십니다. 우리가 그분께 우리의 뜻을 굴복하지 않고 그분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삼지 않는다면, 우리는 천국의 문이 열리는 것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면 예수님께서 "이리로 올라오라"고 하시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요한은 지상의 밧모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을 볼 수 있도록 더 높은 곳, 즉 하늘로 올라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더 높이 오라고 부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부름에 응답해야 합니다. 우리가 응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가 있는 곳에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요한이 응답하지 않았다면, 요한계시록은 단 세 장으로 끝이 났을 것입니다!!

2절: 나는 곧 성령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에 보좌가 하나 놓여 있고, 그 보좌에 한 분이 앉아 계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성령 안에서 우리를 높이사, 땅의 일을 하늘의 관점에서 볼 수 있도록 하시는 방법입니다! 종말이 가까울수록, 땅에서 일어날 일들을 땅의 관점이 아니라 하늘의 관점에서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21장 28절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 하늘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두려움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위를 올려다볼 때, 우리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통제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한이 경험한 것을 우리의 영으로도 경험해야 합니다.

그리고 요한이 처음 본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적그리스도나 환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것, 그것이 이 시대에 우리가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우선적으로 그것을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많은 문제와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3절: 거기에 앉아 계신 분은, 모습이 벽옥이나 홍옥과 같았습니다. 그 보좌의 둘레에는 비취옥과 같이 보이는 무지개가 있었습니다.

벽옥은 수정같이 맑은 돌입니다(계 21:11). 그리고 홍옥은 타는 듯이 붉은 색을 띠며,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두 상징을 통해 보좌에 앉으신 분에 대해 가장 먼저 강조된 것이 그의 거룩함과 순결함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보좌 주위에는 무지개가 있었습니다. 무지개는 홍수 직후, 노아가 방주에서 나왔을 때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다시는 홍수로 땅을 멸하지 않으시리라는 땅의 사람들과 맺은 언약의 표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무지개는 하나님의 은혜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좌에서 "진리와 은혜"를 봅니다. 이것이 예수님에게서 본 영광입니다(요 1:14).

요한계시록 전반에 걸쳐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의 두 가지 측면, 즉 은혜와 심판을 번갈아 봅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면서도 엄격하신 분입니다(롬 11:22).

4절: 또 그 보좌 둘레에는 보좌 스물네 개가 있었는데; 그 보좌에는 장로 스물 네 명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는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아 있었습니다.

골로새서 1:16에 보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천사들 중에는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 있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이 24장로는 하나님의 보좌를 둘러싸고 있는 권위를 가진 영적 존재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계시록 후반부에서 그들의 주요 임무 중 하나가 사람들을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인도하는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흰 옷은 그들의 순결을 말하고, 그들의 금 면류관은 그들의 권위를 나타냅니다.

5절: 그 보좌로부터 번개가 치고, 음성과 천둥이 울려 나오고, 그 보좌 앞에는 일곱 개의 횃불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 일곱 횃불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십니다.

번개와 천둥은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 그리고 장차 올 모든 것을 그분이 완전히 통제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들은 일곱 횃불은 하나님의 일곱 영입니다 - 또는 다른 말로 일곱 가지의 성령입니다(사 11:2, 3). 성령은 완전한 순결을 상징하는 일곱 개의 횃불로 표현되어 있음을 주목하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라"(히 12:29).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항상 사랑의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소멸하는 불이시기도 합니다.

나는 많은 집에서 "하나님은 사랑이다"라는 문구가 적힌 장식 판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다" 이라는 문구가 적힌 장식 판을 찾는 것은 드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소멸하는 불로 생각하기를 싫어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사실을 생각하기를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그분은 여전히 소멸하는 불이십니다.

사람들이 성령 충만함을 받았다고, 성령 체험을 했다고 말할 때, 진정한 성령 체험은 하나님의 순결의 불이 그들의 삶에 임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경험은 가짜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6-8절: 보좌 앞은 마치 유리 바다와 같았으며, 수정을 깔아 높은 듯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보좌 가운데와 그 둘레에는, 앞 뒤에 눈이 가득 달린 네 생물이 있었습니다. 첫째 생물은 사자와 같이 생기고, 둘째 생물은 송아지와 같이 생기고,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과 같이 생기고,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와 같이 생겼습니다. 이 네 생물은 각각 날개가 여섯 개씩 달려 있었는데, 날개 둘레와 그 안쪽에는 눈이 가득 달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밤낮 쉬지 않고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전능하신 분, 주 하나님! 전에도 계셨으며, 지금도 계시며, 또 장차 오실 분이시다!"하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사자는 짐승의 왕, 송아지는 가축의 왕, 독수리는 새의 왕, 사람은 창조물의 왕입니다. 네 생물은 하늘의 그룹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 구절을 에스겔 1:4-20 및 10:20과 비교할 때 분명합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그룹마다 땅에 바퀴가 있었고 그룹이 움직일 때마다 바퀴도 함께 움직였다는 것을 읽습니다. 우리는 또한 성령이 움직이는 것과 같은 방향으로 바퀴가 움직였다는 것을 읽었습니다. 그 바퀴는 세상의 사건과 상황을 상징하며, "우리의 상황이 바퀴처럼 여러 방향으로 돌고 도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완전히 통제하신다"는 이 진리를 묘사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상황이 움직이는 방향을 결정하십니다.

이 그룹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수호하는 자입니다. 에스겔서는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이스라엘을 떠나시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영광이 그룹들에게서 떠올라 성전 문지방에 오르매, 구름이 성전에 가득하더라"(겔 10:4)라고 읽었습니다. 그리고 18절을 보면 "여호와의 영광이 떠났다"고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을 때, 우리는 창세기 3장 24절에서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사방을 도는 화염검을 두셔서,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고 읽었습니다.

그룹들은 ​​불타는 칼을 들고 죄인들이 생명나무에 참여하는 것을 막는 것이었습니다. 그 칼이 마침내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떨어졌고, 이제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 육신을 심판하는 것에 동의한다면, 즉 하나님의 칼이 우리 육신에 떨어지도록 허용한다면, 우리 모두가 생명나무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먼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고는 신성한 생명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참된 종들은, 그 그룹들과 같이, 화염검을 들고, 교회에 서서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하심을 지킵니다.

이 그룹들은 밤낮으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부르짖습니다.

이사야도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하늘에 있는 스랍들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사 6:1-3)라고 외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사야는 스랍들이 날개 여섯 개 중 두 개만 사용하여 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머지 네개로는 얼굴을 가리고 하나님께 경배했습니다. 그 스랍들은 죄를 지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면전으로 나올 때 얼굴을 가려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과 나는 얼마나 더 그렇게 해야 할까요!

이것이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입니다. "거룩함"은 그룹이든 스랍이든 하늘의 주된 특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 칭하고 순결하게 살지 않는 것은 치욕입니다.

9-11절: 영원무궁 하도록 살아 계셔서 그 보좌에 앉아 계신 분께, 그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드리고 있을 때에, 스물네 장로는 그 보좌에 앉아 계신 분 앞에 엎드려서, 영원무궁 하도록 살아 계신 분께 경배 드리고, 자기들의 면류관을 벗어서, 보좌 앞에 내려놓으면서 "우리의 주님이신 하나님, 주님은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주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으며, 만물은 주님의 뜻을 따라 생겨났고, 또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하고 외쳤습니다.

24장로들은 하나님 앞에 면류관을 던지는 데 급급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은 "주님, 만일 우리가 우리 머리에 면류관을 쓰고 있다면, 그것은 당신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므로, 우리가 그것을 당신께 돌려드립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서 우리에게 어떤 지위나 권위를 주실 때, 그것은 우리가 자랑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머리에 면류관을 씌우셨다면, 우리는 그분만이 모든 존귀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임을 인정하고 즉시 그것을 그분의 발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의 권위나 은사를 과시하는 것은 바로 지옥의 영에 속한 것입니다.

하늘에서, 그들은 면류관을 내려놓고 "우리 주 우리 하나님이시여, 당신만이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장로들은 노래에서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또 다른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뜻에 따라 우리를 창조하셨고, 우리는 우리 자신의 뜻이 아니라 그분의 뜻을 행할 때만 창조의 목적을 성취한다는 사실입니다.

장 5
5장

1,2절: 나는 또, 그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이 오른손에 두루마리 하나를 들고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 두루마리는 안팎으로 글이 적혀 있고 일곱 인을 찍어 봉하여 놓은 것이었습니다. 내가 보니, 힘센 천사가 큰 소리로 "이 봉인을 떼고 두루마기를 펴기에 합당한 사람이 누구인가?"하고 외쳤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책(두루마리)을 들고 계신 하나님을 봅니다. 두루마리는 펴서 읽어야 하는 긴 양피지 두루마리입니다.

이 두루마리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이해하려면, 구약성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레위기 25장 24절, 25절을 보면

"당신의 재산의 모든 부분에 대해, 당신은 땅을 되찾기 위해 비용을 준비해야 합니다. 당신의 친척이 너무 가난해져서 재산의 일부를 팔아야 한다면, 그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 와서 그의 친척이 판 것을 다시 사야 합니다."

이스라엘에는 어떤 사람이 너무 가난해져서 재산을 팔아야 하는 경우, 가장 가까운 친척이 그를 위해 사야 한다는 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땅을 되찾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됩니까?

하나님은 아담에게 온 땅을 주셨습니다. 그것을 다스리고 정복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불순종하여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땅의 증서를 사탄에게 양도하였습니다. 그러자 사탄이 땅의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사탄은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할 때, 세상의 영광을 보여 주면서, "이 모든 것이 나에게 넘어온 것이니, 내가 너에게 주겠다"(눅 4:6)고 말했습니다. 누가 그에게 넘겨주었습니까? 아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선물을, 그들이 사탄에게 넘겨준 것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사람에게 돈과 건강을 주시고, 그들은 이것들을 이기적인 쾌락에 사용함으로써, 사탄에게 넘겨줍니다.

이제 아담이 사탄에게 준 이 땅을 되찾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레위기 25장에서 가까운 친족, 가까운 친척만이 그것을 되찾을 수 있음을 읽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으로 오셔야만 했습니다. 그래야만 그분은 우리의 친족이자 구속주이시며 땅을 하나님께로 되돌려 놓으실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32:6-9에서, 우리는 예레미야가 이 율법에 따라 그의 친척을 위해 땅을 사는 것을 읽었습니다. 그는 돈을 지불하고 구매 증서에 서명했습니다. 그 증서는 두루마리를 말아서 봉한 것이었습니다(렘 32:10).

그것은 우리가 요한계시록 5장에서 읽었던 유사한 두루마리인 땅의 매매 증서입니다. 그리고 천사는 그것을 되찾기에 합당한 사람이 누구인지 물었습니다.

룻기에서, 우리는 이러한 유형의 되찾음에 대한 또 다른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룻은 모압에서 유대인과 결혼한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죽자,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이스라엘에 왔습니다. 그들은 둘 다 매우 가난했고, 누군가는 룻의 죽은 남편의 땅을 되찾아야 했습니다. 그것을 되찾을 수 있는 사람은 보아스라는 가까운 친척이었습니다. 그래서 룻은 보아스에게 가서 "나를 위해 그것을 무르실 수 있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율법은 남자가 아내를 두고 죽으면, 그의 형제가 아내와 결혼해야 한다고 명시했습니다(신 25:8-10). 그래서 보아스는 이 땅을 사고 룻과 결혼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룻이 보아스에게 왔을 때, 그는 그녀에게 "나보다 더 가까운 친척이 있습니다. 먼저 그에게 물어봐야 할 것입니다. 그가 땅을 사서 당신과 결혼하기를 꺼린다면 내가 둘 다 하겠소."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보아스는 다른 친척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보아스는 룻을 구했습니다.

룻은 교회의 한 유형입니다 - 가난하고 구속이 필요합니다. 첫 번째 친척인, 율법은 우리를 구속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다음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보아스가 우리를 구속하고 우리와 결혼합니다. 로마서 7장 4절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율법에 대하여 죽은 것은 그리스도와 결혼할 수 있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5절: 그러나 두루마리를 펴거나 그것을 볼 수 있는 이는, 하늘에도 없고 땅 위에도 없고 땅 아래에도 없었습니다. 이 두루마리를 펴거나 볼 자격이 있는 이가 하나도 보이지 않으므로, 나는 슬피 울었습니다; 그런데 장로들 가운데서 하나가 나에게 "울지 마십시오;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 곧 다윗의 뿌리가 승리하였으니, 그가 이 일곱 봉인을 떼고, 이 두루마리를 펼 수 있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이 땅의 구속의 책을 봉인 해제할 자격이 있거나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그것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사람이 잃어버린 땅을 아무도 구속할 수 없음을 보고 울었습니다.

그 책을 펴기에 합당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그는 크게 울었습니다. 모든 땅을 잃은 이 불쌍한 "소녀"를 도우러 나온 친척도 없었고 "그녀"와 결혼할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자 장로 중 한 사람이 유다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합당하다는 기쁜 소식을 요한에게 전했습니다. 다윗의 뿌리이신 예수님은 또한 다윗의 자손이 되셨습니다(계 22:16). 예수님은 사람으로 오셔서, 우리의 가장 가까운 친족이 되셨고 우리와 땅을 되찾으셨습니다.

그래서 복음의 메시지는 "그만 울어라! 누군가가 사람으로 너의 가까운 친척으로 오셔서 너를 구속할 만큼 너를 사랑하였다."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사람으로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의 본질적인 부분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나셨다는 사실을 말합니다(롬 1:3, 딤후 2:8). 그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합당한 이유이며, 그것이 계시록 5장에서 그들이 하늘에서 그분을 찬양하는 새 노래를 부른다는 내용을 더 읽어볼 수 있습니다.

6,7절: 나는 또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가운데 어린 양이 하나 서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어린 양은 죽임을 당한 것과 같았습니다. 그에게는 뿔 일곱과 눈 일곱이 있었는데, 그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십니다. 그 어린 양이 나와서,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의 오른손에서 그 두루마리를 받았습니다.

요한이 사자를 보려고 돌아섰을 때 그가 본 것은 어린양이었습니다 - 죽임을 당한 어린양 -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함 -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한 중재자로서 서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탄과 죄와 세상의 영에 대해(어디에서나) 항상 사자와 같았습니다 - 그것들과 싸우고 저항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항상 어린 양과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분을 때리고 모욕하고 냉대할 수 있었지만, 그분은 결코 보복하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에서, 우리는 그 반대를 봅니다. 사람들은 마귀를 향해 어린 양과 같아서 그를 두려워하여 그에게 복종하고 죄에 굴복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를 향해 사자처럼 행동합니다 - 서로를 찢고 서로 싸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영, 즉 그리스도의 반대입니다.

"어린양"이라는 단어는 요한계시록에서 자주 사용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칭호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라고 말했습니다.

어린 양이 가지고 있는 일곱 뿔은 "모든 권세"를 상징합니다. 일곱은 완전한 요소이며 뿔은 힘과 권력을 말합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우리 주님께 주어졌습니다. 일곱 눈은 다시 하나님의 일곱 가지 성령입니다. 이것은 그분의 완전한 분별력을 말씀하시는 성령의 또 다른 상징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한 이 일곱 눈이 온 땅에 보내심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왜요? 그 답은 역대하 16장 9절에 있습니다, "여호와의 눈(일곱가지 성령)이 온 땅에 두루 다니사 마음이 온전히 그에게 있는 자들을 강력하게 지원하십니다". 우리가 미래를 내다볼 때, 우리의 마음이 온전히 그분의 것이라면, 성령께서 우리를 힘있게 지원하기 위해 온 땅에서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볼 때, 마귀가 우리를 대적해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그가 오사,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그것을 취하사"(7절)를 읽습니다. 여기에 있는 권위를 보십시오 - 아버지께로 걸어가서 그분의 손에서 책을 가져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십니다.

신격에는 세 위격이 아니라 오직 한 위격이 있다고 가르치는 일부 "기독교" 그룹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세례를 줍니다. 이것은 두 인격으로써의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구별을 제거하여, 우리를 중보자 없이 남겨두는 악마의 큰 속임수입니다(딤전 2:5 참조).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아버지께서 보좌에 앉으시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아버지의 손에서 두루마리를 가져 가셔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로서 두루마리를 받을 권리가 있음을 증명하시는 것을 봅니다.

에스겔 2:9,10에서 우리는 이 두루마리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봅니다: "보라, 두루마리.... 앞뒤에 기록되어 있고 그 위에 애가와 애곡과 화라고 기록되어 있다." 두루마리에는 여러 가지 심판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스가랴는 또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불순종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가 땅에 임하는 것을 보여주는 두루마리를 보았습니다(슥 5:1-3). 10계명 중 2개는 특히 다음과 같이 언급됩니다:

1. 훔치지 마라; 그리고

2. 주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도적질하는 자는 두루마리 겉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맹세하는 모든 사람은 두루마리 안쪽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두 돌판에 십계명을 기록하셨습니다. 하나에는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에 관한 네 가지 계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른 쪽에는 인간과 동료 인간의 관계와 관련된 여섯 가지 계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맹세는 첫 번째 판에서 한 계명을 어겼고 도둑질은 두 번째 판에서 한 계명을 어겼습니다. 그러므로 두루마리의 양면은 인류가 불순종하여 인간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야 하는, 하나님의 십계명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일곱 인을 떼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에 불순종한 인간에게 임할 심판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가 그 책을 펴고,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한가?"(2절)라는 질문을 "누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인류를 심판하기에 합당한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예수님께 데려왔을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누가 그녀에게 돌을 던지기에 합당한가?"(요 8:1-12)라고 비슷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질문은: "누가 세상을 심판하기에 합당합니까?"입니다.

간음한 여자의 경우에는, 죄 없는 예수님만이 그녀에게 돌을 던질 자격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은혜 시대를 시작하러 오셨습니다. 2000년이 흘렀고 이제 은혜의 시대는 거의 끝났습니다. 어느 날, 같은 예수님이 세상을 심판하러 다시 오실 것입니다.

두루마리를 떼는 것은 두루마리에 기록된 내용을 이해하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인봉된 책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책입니다. 그러나 봉인되지 않은 책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29장 11-12절은 말합니다,

"모든 환상 계시가 너희에게 봉인된 책의 말씀과 같을 것이요, 글을 읽을 수 있는 자에게 그것을 주어 '이것을 읽으십시오'하면 그는 '봉인된 책이라 할 수 없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문맹자에게 '이걸 읽어주세요'라고 책을 건네주면, 그는 '나는 읽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봉인된 책을 만나면 글을 아는 사람이 글을 모르는 사람만큼 어리석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13절에 답이 나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는 백성이 말로는 나를 가까이하고 입술로만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기 때문이니라."

우리가 이러한 태도로 요한계시록에 접근한다면 - 우리의 말로는 가까이 하되 마음으로는 가까이 가지 않는다면 - 그 책은 우리에게 봉인된 책이 될 것입니다. 이사야 시대에 "여호와께서 선지자들에게 깊은 잠을 부으시며 선견자들의 눈을 덮으셨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에게 봉인된 책과 같았습니다(사 29:10).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인봉된 책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0절에 "너희는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고 했습니다. 만일 우리의 눈이 그 의미를 보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의 눈을 뜨게 하시려고 계시록을 주셨습니다.

8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받아 들었을 때에, 네 생물과 스물네 장로가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히 담긴 금 대접을 가지고 어린 양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 향은 곧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이전에 우리는 24장로가 아버지 앞에 엎드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 (4:10). 이제 그들은 어린 양 앞에 엎드립니다. 우리는 또한 그들 각자가 향(성도들의 기도를 나타냄)으로 가득 찬 금 대접을 가지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 그릇에는 신자들이 2000년 동안 기도해 온 기도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기도는 그 그릇에 들어갑니다. 언젠가는, 그릇이 가득 차서 쏟아질 것입니다. 그것은 신자들이 기도한 모든 기도의 총합의 결과일 것입니다 - 특히 이 기도는 "나라가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도 임하소서" 입니다. 그 기도는 주님께, 땅을 구속하시고 그분의 의의 왕국이 이 땅에 임하게 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항상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즉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더라도, 우리의 기도는 그릇에 들어갑니다. 언젠가 그 그릇이 채워질 것입니다 - 그러면 당신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십시오. 그것은 육신의 병 고침이나 기타 다른 문제를 위한 기도보다 더 중요합니다.

몇 년 후에 그 대접이 가득 차서 그 천사의 권위자들이 그 대접을 주님 앞에 쏟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의 일을 끝내기 위한 하나님의 마지막 계획이 시작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기도에 응답하여 역사하신다는 것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 대접을 쏟을 때, 그들은 무엇을 노래합니까?

9,10절: 그들은 이런 말로 새로운 노래를 불렀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두루마리를 받으시고, 봉인을 떼실 자격이 있습니다; 주님은 죽임을 당하시고, 주님의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서 사람들을 사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가 되게 하시고,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땅을 다스릴 것입니다."

그들이 노래를 불렀다는 것은 그들이 "당신은 합당한 분이십니다"를 부를 때마다 신선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성령 충만하고 매일 십자가의 길을 걷는다면, 우리는 매번 아버지와 아들에게 예배와 찬양을 새롭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우리가 땅을 다스릴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왕과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영으로 통치합니다. 언젠가 우리도 우리 몸으로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11절: 나는 또 그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선 많은 천사를 보고, 그들의 음성도 들었습니다; 그들의 수는 수천 수만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늘에 수억 명의 천사가 있고 더 많은 수백만 명의 천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각 자녀에게 한 명씩 아주 쉽게 할당할 수 있는 충분한 천사들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장 14절에서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을 유업으로 받는 자들을 섬기도록 보내심을 받았음을 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위해 천사들을 할당하셨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믿을 때, 우리는 격려를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어린이에게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도와주는 천사가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마 18:10). 그리고 그 천사들은 우리가 커서도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12절: 그들은 큰 소리로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권세와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하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해야 합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께서 경배를 받는 만큼 경배를 받아야 할 하나님이심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13,14절: 나는 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와 바다에 있는 모든 피조물과, 또 그들 가운데 있는 만물이, 이런 말로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분과 어린 양께서는 찬양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영원무궁 하도록 받으십시오." 그러자 네 생물은 "아멘!"하고, 장로들은 엎드려서 경배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아멘을 한 번만 한 것이 아니라 거듭거듭 말했음을 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서 사람들이 "아멘", "할렐루야"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 기분이 상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천국에서 어떻게 살까요??

하나님이 예수님을 높이신 것은 예수님이 자기를 낮추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빌 2:8-11).

우리가 불신자들에게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입니다. 언젠가는, 온 우주가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의 눈이 열려 예수님의 주되심을 볼 수 있고, 사람을 향하여 어린 양으로, 사탄을 향하여 사자로 오신 분의 합당하심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예수님은 세상을 이기셨고(요 16:33), 이 땅이 하나님께 다시 되돌려질 수 있도록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장 6
6장

6장부터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더 예언적인 부분, 즉 예수께서 요한에게 미래에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신 부분을 봅니다.

우리가 아직 성취되지 않은 예언을 연구할 때마다 고린도전서 13장 12절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영상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마는 -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밖에 알지 못하지마는, 그 때에는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크신 지혜로 미래에 관한 많은 예언이 우리에게 거울처럼 희미하게 보이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육체에는 미래에 대한 모든 것을 정확히 알고자 하는 큰 호기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신명기 29장 29절은 "은밀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분명히 드러난 것과 숨겨진 것이 있습니다.

여기에 분명히 계시된 몇 가지가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1:4에서는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라고 말합니다.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것과 관련된 모든 것이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희미하지도 불명확하지도 않습니다. 로마서 6:14은 또한 "너희가 은혜 아래 있을 때에는 죄가 너희를 주관할 수 없느니라"고 말할 때 매우 분명합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대부분의 신자들이 분명히 가르치는 그러한 진리를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 그들은 종종 불분명한 예언의 세부 사항에 대해 논쟁합니다. 이것은 위험한 태도입니다. 우리는 우선순위를 올바르게 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언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우리는 예언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추구하라는 말씀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 즉 신성한 성품을 추구하라고 들었습니다(고전 13:8, 9,13; 14:1).

성경에는 예언이 실제로 일어나야 분명히 알 수 있는 부분이 많고, 주님이 오셔야만 알 수 있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계시록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비록 희미하지만 미래에 대해 무엇인가를 이해하기를 기대하시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6장에서는 미래의 마지막 순간까지 조감도를 보여줍니다. 그런 다음 7장부터 성령이 다시 와서 나머지 장의 특정 세부 사항을 채웁니다. 이 책이 우리의 호기심을 충족시키지 않도록 그렇게 쓰여진 것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마지막 때에 사건의 순서를 설명한다고 주장하는 예언적 도표를 연구하려는 큰 욕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호기심을 만족시키지 않으십니다. 요한계시록을 비롯한 하나님의 말씀은 주로 그것(우리의 호기심)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기 직전에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도들은 "주께서 이스라엘에게 나라를 되찾아 주실 때가 이때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이후로, 이제 로마인들을 쫓아내고 천년왕국을 세우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러한 질문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대신에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권한으로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행 1:6,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그들에게 바로 그때 알아야 할 다른 것이 있고, 알 필요가 없는 다른 많은 것들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영적인 권능을 받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식이 아니라 능력! (행 1:8) - 세상 끝날까지 주님의 증인이 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지상에서의 그분의 마지막 말씀임을 기억하십시오. 이 사실은 우리가 계시록에 접근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중요한 사실입니다.

1절: 나는 그 어린 양이 그 일곱 봉인 가운데 하나를 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네 생물 가운데 하나가 우레 같은 소리로 "오라!"하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 초대 "오라"는 4번 계속됩니다. 3절에서, 두 번째 생물은 "오라"고 말합니다. 5절에서 세 번째 생물은 "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7절에서 네 번째 생물은 "오라"고 말합니다.

이것들은 우리가 4:7에서 본 네 생물입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그들이 에스겔이 본 그룹과 같았으며 그들이 창조된 범주에서 지도자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사자 - 짐승의 왕; 송아지 - 가축의 왕; 사람 - 창조물의 왕; 독수리 - 새의 왕. 그래서 6장 1절, 3절, 5절, 7절에 "오라"고 말하는 이 네 피조물은 예수님께 "오라"고 말하는 창조의 음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말미에 요한 자신이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말합니다(계 22:20). 그러나 우리가 로마서 8장 19절에서 22절에서 읽은 것처럼 모든 피조물 자체가 주님의 오심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다른 피조물처럼 간절한 열망을 갖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예수님이 영광 중에 오실 때,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날에 모든 피조물이 썩어짐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아들들의 영광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피조물은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 이 고통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만 끝날 것입니다.

그리고 이 피조물들이 "오라"고 말할 때, 주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 아니라, 세상 죄를 심판하는 사자로 오실 것입니다.

2절: 그리고 내가 보니, 흰 말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위에 탄 사람은 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면류관이 주어졌는데, 그는 나가서 정복하고, 또 정복하려 했습니다.

이것을 요한계시록 19장 11-16절과 비교해 보십시오, "나는 또 하늘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거기에 흰 말이 있었는데, '신실하신 분', '참되신 분'이라는 이름을 가지신 분이 그 위에 타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의로 심판하시고 싸우시는 분입니다. 그분의 눈은 불꽃과 같고, 머리에는 많은 관을 썼는데……그분의 옷과 넓적다리에는 '왕들의 왕', '군주들의 군주' 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분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 계시록 6:2에서 보는 것은 약간 다릅니다. 그는 머리에 많은 면류관을 쓰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왕관이 그에게 주어졌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왕관은 그 자신의 권리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왕관을 쓰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백마를 타고 있었고 활을 가지고 있었고, 정복하고 또 정복하려고 나갔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사람, 즉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는 사람의 상징입니다.

마태복음 24장을 읽으면 요한계시록 6장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두 구절 모두 시대의 끝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언제 이런 일이 있으리이까 우리에게 이르소서,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마 24: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삼가 너희를 미혹하는 자가 없게 하라"(4절). 여기 첫 번째 백마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그것이 예수님이 주신 첫 번째 표적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계시록 6:2에서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백마를 타고 와서 많은 사람들을 이끌어 그를 뒤쫓게 합니다 -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 주님을 따른다고 생각하고 따라가는 사람들은 속아서 길을 잘못 가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와서 우리를 속일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런 사람은 여기에서 백마를 탄 자로 상징됩니다. 그는 가짜 그리스도입니다!!

이 장에서 "그것이 주어졌다"라는 구절이 몇 번이나 나오는지 주목하십시오 - "그에게 면류관이 주어졌다....그것은 땅에서 평화를 없애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그에게 큰 칼이 주어졌다....그에게 권세가 주어졌다"(2,4,8절). 모든 경우에, 악한 것이 나옵니다. 그러나 각각의 경우에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허락하신 후에였습니다. 첫 번째 말을 탄 자에게는 면류관이 허용되었습니다. 둘째는 땅에서 화평을 빼앗고 큰 칼을 가지도록 허락 받았습니다. 넷째 말을 탄 자는 땅의 사분의 일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도록 허락되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나에게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권한이 있다'고 말하자, 예수님은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라"(요 19:11)고 말씀하셨습니다. 빌라도에게 예수님에 대한 권위를 허락하신 분은 아버지이셨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 이 땅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속이는 영들이 진리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들을 미혹하기 위해 세상에 들어오도록 허락하시는 분은 우리 아버지십니다(살후 2:10,11). 이 모든 속임수는 적그리스도(가짜 그리스도)가 세계 무대에 등장하면서 절정에 달할 것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참으로 그들의 "메시아"이자 그들의 "구원자"이며, 그를 따름으로써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도록 속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그리스도가 도래하기 전에, 많은 작은 적그리스도가 이미 여러 세기 동안 생겨났고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린 자녀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니라; 적그리스도가 온다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있으니 이로써 우리는 지금이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요일 2:18)."

요한이 이 글을 썼을 때가 서기 96년의 마지막 시간(오후 11시)이었다면, 지금은 밤 11시 59분이 지났을 것입니다. 이제 몇 초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역사상 많은 정치 지도자들은 악마 같은 힘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인 작은 적그리스도였습니다. 인도에는 같은 일을 하는 이교도 "신들린 사람들"(godmen)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영은 기독교 집단에도 있습니다. 재능 있는 "기독교" 지도자들은 종종 사람들을 그리스도와 연결시키는 대신 그들을 따르게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 그룹에는, 가짜 "그리스도들"인 그러한 지도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처럼 백마를 타고 옵니다. 사탄은 빛의 천사로 와서 많은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아 그들의 죄에서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말을 탄자가 "나가서 정복하고 또 정복하려 했다"(2절)는 것을 봅니다. 사탄은 철저하게 사람을 정복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3,4절: 그 어린 양이 둘째 봉인을 뗄 때에, 나는 둘째 생물이 "오라!"하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때에 붉은 말 한 마리가 나왔는데 말 위에 탄 사람에게 땅에서 평화를 걷어내고 사람들끼리 서로 죽이게 하는 권세가 주어졌고 또 그에게 큰 칼도 주어졌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죽이고 땅에서 평화를 제거하는 권한이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이것은 전쟁의 그림입니다. 말의 붉은 색은 유혈 사태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두 번째 표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전쟁과 전쟁의 소문을 듣겠으나,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이 아니니라 -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리라(마 24:6)."

붉은 말을 탄 두 번째 기수는 땅에서 평화를 빼앗고 사람들이 서로를 죽입니다.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이래로 지난 19세기 동안 항상 전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1900년 동안, 20세기까지 "세계 대전"이라고 불리는 전쟁은 없었습니다. 국가 간의 전쟁도 20세기에 엄청나게 증가했습니다. 20세기까지 테러리즘(요즘 우리가 보는 것처럼)은 없었습니다.

5,6절: 그 어린 양이 셋째 봉인을 뗄 때에, 나는 셋째 생물이 "오라!" 하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보니, 검은 말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위에 탄 사람은 손에 저울을 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네 생물 가운데서 나오는 듯한 음성이 들려 왔는데, "밀 한 되도 하루 품 삯이요, 보리 석 되도 하루 품 삯이다.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에는 해를 끼치지 말아라"하고 말하였습니다.

세 번째 말은 검은 말이며 - 기근과 식량 부족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세 번째 징조인 기근에 해당합니다(마 24:7).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상황이 매우 어려워질 것입니다. 그들은 하루 봉급으로 밀 1킬로그램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그들이 싼 음식을 원한다면, 하루 품삯으로 보리 3킬로그램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종말에 다가갈수록, 생활 필수품의 부족이 증가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름과 포도주와 같은 사치품은 건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부자는 풍족하게 살고 가난한 자는 살아남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야고보가 말합니다,

자, 부자여, 당신에게 닥칠 불행에 대해 울고 통곡하십시오....당신의 금과 은이 녹슬었습니다. 그것들의 녹이 당신에 대한 증거가 될 것이며, 불처럼 당신 살을 태울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당신은 보물을 쌓아 두었습니다! 당신은 이 땅에서 사치스럽게 살았고 방탕한 쾌락의 삶을 살았습니다. 살육의 날에 당신의 마음을 살찌게 하였습니다(약 5:1,3,5).

7,8절: 그 어린 양이 넷째 봉인을 뗄 때에, 나는 이 넷째 생물이 "오라!"하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보니, 청황색 말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위에 탄 사람의 이름은 '사망'이고, 지옥이 그를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칼과 기근과 역병과 땅의 들짐승들로 사분의 일에 이르는 땅의 주민들을 멸하는 권세가 주어졌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병들고 창백한 말을 봅니다. 그리고 그 말을 탄자는 "죽음"이었습니다. 그 다음은 사람이 죽을 때 가는 곳의 이름인 "하데스(지옥)"가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지구의 4분의 1에 대한 권위가 주어졌습니다. 세계 인구는 60억이 넘고, 이는 15억 명에 대한 권위를 나타냅니다. 여기에는 사람을 죽이는 데 사용되는 네 가지 도구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1. 전쟁 무기,

2. 기근,

3. 질병,

4. 야생 동물.

하나님께서 왜 이 네 가지 심판을 허락하시는지 아는 것은 우리가 그 심판에 참여하지 않도록 하는데 중요합니다.

에스겔 14:13,14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읽습니다,

"한 나라가 불성실하여 내게 범죄하면, 내가 내 손을 그 위에 펴서 그 공급하는 양식을 멸하고, 기근을 보내어 사람과 짐승을 그 중에서 사라지게 한다고 하자. 비록 이 세 사람 곧 노아와 다니엘과 욥이 그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그들이 그들의 의로 말미암아 자신만 구원할 수 있도다."

노아, 다니엘, 욥은 당대에 가장 의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노아는 아내와 세 아들과 그들의 아내를 구했습니다. 다니엘은 세 친구를 구했습니다. 욥은 그의 가족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이 시대에 살았더라면, 그들 자신만 구원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그들의 자녀들이 의롭지 않다면, 그들은 그들의 자녀를 구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들짐승을 그 땅에 두루 다니며 살게 하여 인구가 줄게 하고, 그 짐승으로 말미암아 아무도 지나가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그 땅이 황무지가 된다고 하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세 사람이 그 가운데에 있을지라도, 그들은 그들의 아들과 딸을 구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 자신만 구원받을 것이다. 나 주 하나님의 말씀이니라(에스겔 14:15,16)."

그리고 나서 주님은 "내가 예루살렘에 네 가지 엄한 심판 곧 칼과 기근과 들짐승과 질병의 재앙을 내릴 때에, 그 해가 얼마나 크겠느냐!"라고 덧붙이십니다(21절). 이것이 계시록 6:7,8에 언급된 네 가지 심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계 인구의 4분의 1만이 멸절되어, 나머지 사람들이 의로 돌아오게 하신다는 점에서 은혜로우십니다. 이러한 가혹한 심판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의로움에 의해서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아내와 아들과 형제 자매들도, 그들이 의롭지 않으면 구원할 수 없습니다.

모든 의로운 사람들에게 시편 91편의 약속은 특히 의미가 있습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이 네 가지 심판에 대해 읽습니다:

1. 전쟁 무기 - "낮에 날아가는 화살"(5절);

2. 질병 - "역병"(6절);

3. 기근 - "정오에 황폐케 하는 멸망"(정오는 우리가 먹는 시간이며 이것은 음식이 부족함을 나타냄)(6절);

4. 들짐승 -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밟으리라"(13절).

이 심판은 의인에게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천 명이 네 옆에서, 만 명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질지라도, 그것(재앙)이 네게 가까이 오지 못하리라"(7절).

세계 인구의 4분의 1이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에게 접근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너는 너의 눈으로 자세히 볼 것이니, 악인들이 보응을 받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네가 주님을 네 피난처로 삼았으니……네게는 어떤 불행도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네 장막에는, 어떤 재앙도 가까이 하지 못할 것이다(8-13절).

왜요? 주님은 "그가 나를 사랑하였으므로, 내가 그를 건지리니 내가 그를 안전하게 높이리라"(14절)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높이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성취될 약속을 받을 자격을 갖추도록 합시다.

9-11절: 그 어린 양이 다섯째 봉인을 뗄 때에, 나는 제단 아래에서,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또 그들이 말한 증거 때문에,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영혼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큰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거룩하시고 참되신 주여, 우리가 얼마나 더 오래 기다려야 땅 위에 사는 자들을 심판하시어 우리가 흘린 피의 원한을 풀어 주시겠습니까?" 그리고 그들은 흰 두루마기를 한 벌씩 받아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들과 같은 동료 종들과 그들의 형제자매들 가운데서 그들과 같이 죽임을 당하기로 되어 있는 사람의 수가 차기까지, 아직도 더 쉬어야 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다섯째 인은 환난을 상징합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 때문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건전한 말씀의 본(모범)을 굳게 붙들라"(딤후 1:13)라고 권면했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굳게 붙들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귀를 간지럽히기 위해 설교하는 타협자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사람을 기쁘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될 수 없느니라"(갈 1:10).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의 증거로 굳게 붙잡은 그리스도의 참된 종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잡았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마태복음 23장 34,35절에서 예수님은

"보라, 내가 예언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또는 성경 교사)을 너희에게 보낸다. 너희는 그 가운데서 더러는 죽이고, 더러는 십자가에 못박고, 더러는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 저 동네로 뒤쫓으며 박해할 것이다. 그리하여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너희가 성소와 제단 사이에서 살해한 바가랴의 아들 사가랴의 피에 이르기까지, 땅에 흘린 모든 의로운 피의 죄책이 너희에게 돌아갈 것이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주님은 가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형제의 피가 땅에서 내게 부르짖고 있다 - 네가 그를 죽였기 때문이다."

여기 계시록 6장에서, 죽임을 당한 자들이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주님, 언제까지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우리 피를 갚지 않으실 겁니까?"

이것이 구약의 선지자들과 성도들의 부르짖음입니다. 시편 79:10에서 우리는 읽습니다,

주의 종들의 흘린 피에 대한 복수가 우리 목전에서 열방 중에 알려지게 하소서.

시편 94:1-7과 119:84에서도 비슷한 기도를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같은 것을 표현합니다:

"주여 우리의 피를 흘린 이 백성에게 원수를 갚아 주소서"

- 아벨의 피가 복수를 외치듯이.

그러나 히브리서 12장을 보면 다른 것이 보입니다. 여기서 옛 언약은 새 언약과 대조됩니다. 오늘 우리는 시내산과 모세에게 온 것이 아니라, 시온산과 예수님께 왔습니다.

"새 언약의 중보자요,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들을 말하는 피 곧 (예수님이) 뿌리시는 피니라(21-24절)."

아벨의 피는 복수를 외쳤지만, 예수님의 피는 자비와 용서를 외쳤습니다!! 여기에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의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습니다.

복수하려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피가 무엇을 위해 흘렸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몸에서 - 머리와 손과 등과 발에서 - 피가 흘렀을 때, 그분은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그들을 용서하십시오."

스데반의 몸에서 피가 흐르자,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이 죄를 그들의 탓으로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

그것이 바로 새언약 성도의 부르짖음입니다. 예수님의 참된 제자의 한 가지 표시는 그가 원수에게 복수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계시록 6장에 나오는 이 죽임을 당한 성도들은 분명히 구약의 성도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원수들에게 복수할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이 환상을 받았을 때 교회가 세워진 지 65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당시에 신앙 때문에 죽임을 당한 기독교인은 극소수였습니다. 죽임을 당한 성도들의 대부분은 아벨 시대부터 스가랴 시대까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도들입니다. 이들은 혼이 제단 아래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흰 옷을 받고 죽임을 당할 동료 종들과 형제들의 수(교회 시대의 이 20세기 동안)가 다 차기 까지 조금 더 기다리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이 "형제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위하여 죽임을 당한 새 언약 성도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의 증거 때문에 죽임을 당해야 하는 특정한 수의 성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숫자를 알고 계십니다.

지난 2000년 동안,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과 스데반처럼 자기들을 죽인 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며 죽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 때문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수가 차면, 하나님은 자기 종들을 죽인 이 세상에 심판하러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인내해야 합니다.

따라서 다섯째 인은 환난과 박해가 지상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몫임을 알려 줍니다. 마태복음 24장 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다섯 번째 표적은 환난 곧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고 그 이름을 위하여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지상의 모든 나라가예수님의 참 제자들을 미워할 날이 오고 있습니다.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과, 타협하는 "신자들"은 미움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받아 들여지고 존경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의 모든 뜻을 전하는 자는 미움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에 많은 사람들이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그들은 바벨론 기독교(거짓, 타협하는 기독교 교회)에 합류할 것입니다. 그곳에서 그들의 생명이 안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참 제자들을 배반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나라에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그곳에서 우리가 환난을 겪을 것이라고 아주 분명하게 가르치셨습니다. 신자가 환난을 피할 수 있다는 교리는 성령의 가르침이 아니라 사람의 가르침입니다.

환난을 피하고자 하는 것은 편안함을 사랑하고 타협하는 외교적인 기독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독교는 예수님께서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리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환난을 피할 것이다"라고 가르치는 신학을 자연스럽게 만들어 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요. 그분은 "내가 세상을 이기었다"("세상을 탈출한 것이 아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도 이기는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그들을 다만 악(죄)에서 지켜 주시옵소서 "(요 17:15). 그렇다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환난에 직면하지 않도록 세상에서 옮겨질 것이라고 어떻게 가르칩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환난에서가 아니라 죄를 짓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과 사탄의 권세로부터 보호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박해로부터 보호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 왜냐하면 예수님은 박해와 환난이 우리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초대 사도들이 두루 다니며 교회를 세우고 제자들을 가르칠 때 "하나님이 너희를 이처럼 사랑하사 너희를 도우사 모든 환난에서 벗어나게 하시리라"고 가르쳤습니까? 아니요. 사도들은 제자들에게 "우리가 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하리라"(행 14:22)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과 사도들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메시지는 오늘날 전파되지 않고 있습니다.

계시록 6:12-17에서, 우리는 땅에 임할 하나님의 진노(wrath)에 대해 읽습니다. 환난(tribulation)은 참된 신자들에게 부어지는 인간과 사탄의 진노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진노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적이 없습니다. 수백만 명의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지난 20세기 동안 상상할 수 없는 환난과 박해에 직면했고 살해당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그 모든 것을 용감하게 직면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wrath)가 임할 때(계 6:12-17), 우리는 반드시 피할 것입니다.

12-17절: 그 어린 양이 여섯째 봉인을 뗄 때에, 나는 큰 지진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해는 검은 머리털로 짠 천과 같이 검게 되고, 달은 온통 피와 같이 되고; 하늘의 별들은, 무화과나무가 거센 바람에 흔들려서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듯이, 떨어졌습니다.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듯이 사라지고; 모든 산과 섬은 제자리에서 옮겨졌습니다. 그러자 땅의 왕들과 귀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세도가들과 모든 노예들과 모든 자유인들이 동굴과 산의 바위들 틈에 숨어서; 산과 바위를 향하여 말하였습니다, "우리 위에 무너져 내려서, 보좌에 앉으신 분의 얼굴과 어린 양의 진노로부터 우리를 숨겨다오; 그들이 진노 를 받을 큰 날이 이르렀다; 누가 이것을 버티어 낼 수 있겠느냐?"

계시록에서 하나님과 어린양의 진노를 가리키는 '진노'라는 단어가 처음 나오는 곳은 바로 여기입니다. 대조적으로, 환난(9-11절의 다섯 번째 봉인 아래에서 우리가 본 것)은 사탄이 사주한 사람의 진노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심판이 내리기 전에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기 위해 올려질 것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24장에서 주님께서 설명하신 이 순서를 봅니다:

"그 날의 환난 직후에,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리리니(비교 계 6:12-14),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이 통곡하고 (비교 계 6:15,16), 인자가 권능과 큰 영광에 싸여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가 큰 나팔을 불고 그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사방에서 그의 택하신 자들을 모으리라. (이것은 살전 4:16에서도 설명된 순서입니다). (마 24:29-31)."

그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을 기다리는 교회의 휴거입니다 - 큰 환난 바로 와 이 땅에 하나님의 진노가 내리기 바로 에 일어날 일입니다.

그 때에 예수님은 "빛나는 새벽별(샛별)"(계 22:16)로 나타나셔서 우리를 데리고 가서 그분과 함께 있게 하실 것입니다. 샛별은 태양이 나타나기 직전(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그분의 왕국을 세우기 직전)과 한밤중과 흑암 기간(큰 환난) 직후에 나타납니다. 가장 어두운 시간은 새벽 직전입니다.

우리 주님은 마태복음 25장 6절에서 "보라, 신랑이 온다"라고 외칠 때가 "한밤중"이라고 가르치심으로써 이것을 확증하셨습니다. 환난의 칠흑 같은 어둠(자정) 가운데, "신랑이 온다"는 외침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해가 땅에 뜨기 전에, 준비된 사람들이 올려질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샛별'로 볼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6장의 끝에서 우리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주의 날"이라고 불렀던 것을 읽습니다. 이것은 여기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큰 날"(계 6:17)이라고 불리며, 땅에 대한 매우 짧은 심판의 시간입니다.

사도행전 2장 17-20절에서, 베드로는 오순절 날 선지자 요엘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말세에 내가 내 영을 온 인류에게 부어 주리니'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너희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 젊은이들은 이상을 볼 것이며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놀라운 일을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여호와의 크고 영광스러운 날 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흑암이 되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요엘에 의하면, 성령의 부으심과 세상의 끝은 거기에서 함께 나타납니다. 그리고 18절과 19절 사이에는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고 신성한 성품에 참여할 수 있는 이 2000년 기간이 있습니다. 우리가 17절과 18절에서 읽는 것은 이 '교회 시대'의 시작입니다. 그런 다음 19절과 20절은 교회 시대의 종말에 대해 말합니다. 선지자 요엘은 성령의 부어주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사이에 있는 교회시대를 알지 못하였으므로, 그 날을 '주의 큰 날'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최후의 심판("주의 날")이 왜 이 땅에 임합니까?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구약의 몇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이사야서 13장 6-11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으니 울라! 그것은 전능자에게서 멸망으로 올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손이 축 늘어지고 모든 사람의 마음이 녹을 것이다. 그들이 두려워하고 고통과 고뇌에 사로잡혀 해산하는 여인처럼 몸부림칠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그 기간을 산통의 시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마 24:8)....또는 하늘의 별과 그 별자리가 빛을 발하지 않을 것이다. 해가 떠도 어둡고, 달은 빛을 발산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내가 세상의 악으로 인해 세상을 벌하고, 악인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벌하리라. 내가 또한 교만한 자의 오만함도 그치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이 최후의 심판이 오는 것은 주로 사람의 교만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교만은 다른 모든 죄가 자라는 뿌리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무자비한 자의 거만함을 낮추리라"(11절)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이사야서 2:10-21도 살펴봅시다:

"여호와의 두려움과 그분의 위엄의 영화를 피하여 바위에 들어가고 티끌 속에 숨으라. 사람의 교만한 외모가 무너질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교만함이 낮아지리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모든 교만한 자와 거만한 자, 오만한 자들을 낮추기 위해 심판의 날을 주실 것임이라..... 사람의 위대함이 낮아지고 사람의 교만함이 낮아지리라. 그리고 그 날에는 여호와만이 높임을 받을 것이다."

주님의 심판은 "교만"에 대한 것임을 다시 한 번 주목하십시오. 사람의 교만과 높임은 낮아지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많은 죄를 짓지만, '주의 날'에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은 무엇보다도 사람의 교만입니다.

이사야서 3장 10절, 11절에서 여호와의 날의 한 부분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잘 될 것이라고 의인에게 말하십시오....악인에게 화가…… ! 그에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또한 스바냐 1:14도 생각해 보세요:

"주의 큰 날이 가깝고 속히 오리라. 들어라, 주의 날에! 그 속에서 전사가 비통하게 외친다."

그리고 선지자는 스바냐 2:3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의 계명을 지킨 땅의 겸손한 자들아, 주님을 찾으십시오. 의를 구하십시오. 겸손을 구하십시오. 아마도 당신은 주님의 진노의 날에 숨겨질 것입니다."

겸손한 자는 반드시 숨겨질 것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구절에서 구약의 선지자들이 주님의 오심에 대해 예언할 때마다, 교만한 자들에게 심판이 올 것이라고 항상 말했습니다. 벗어나는 사람은 겸손한 자들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나에게 누가 휴거될 것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지상 생활에서 자신을 낮추는 법을 배운 사람들"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들었습니다,

겸손을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여호와의 진노의 날에 숨겨지리라

스바냐 3:11-13, 17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그 날에, 내가 너희 중에서 교만하고 자랑을 일삼는 자들을 제거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너희 중에 겸손하고 천한 백성을 남겨 두고 ,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보호를 받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거짓말을 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입에 속이는 혀가 있지 아니하리라.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는 당신의 한가운데에 승리한 용사입니다. 그분은 당신을 기뻐하며 반기시며, 사랑으로 잠잠하시며, 기쁨의 함성으로 당신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겸손한 자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모든 사람이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기뻐하신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겸손을 구하라는 이전의 권고에 응답하고 자신을 낮추는 사람들만이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방금 살펴본 것을 확인하기 위해, 요한계시록 6:15을 보고 예수님께서 영광 중에 오실 때 동굴과 바위와 산에 숨을 일곱 부류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왕, 고관, 장군, 부자, 강한 사람, 자유인(위대한 사람들의 여섯 가지 범주) 그리고 모든 노예"입니다.

그날에 교만하고 의기양양한 자들은 낮아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대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배우라고 권하신 것을 배우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그분의 그러한 제자들을 위해서만 오십니다.

이제 주의 날에 관한 신약성경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 때와 시기를 두고서는 여러분에게 더 쓸 필요가 없겠습니다. 주님의 날이 밤에 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여러분은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하고 말할 그 때에, 아기를 밴 여인에게 해산의 진통이 오는 것과 같이, 갑자기 멸망이 그들에게 닥칠 것이니, 그것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아니하므로, 그 날이 여러분에게 도둑과 같이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빛과 낮의 아들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겸손, 즉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흑암에 속한다는 것은, 흑암의 군주가 넘어질 때부터 해왔던 것처럼 자신을 높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적그리스도는 마침내 자신을 높이는 모든 자들의 머리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는 모든 사람의 머리가 되실 것입니다.

겸손하게 사는 자는 결코 흑암에 있지 않으며 주의 강림하심이 도적같이 그들에게 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분의 오심에 놀라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항상 그분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고 자신을 낮추는 방법, 즉 예수님께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살아있는 길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장 7
17장

1절: 대접 일곱 개를 가진 그 일곱 천사 가운데 하나가 와서, 나에게 "이리로 오너라. 큰 바다 물 위에 앉은 큰 창녀가 받을 심판을 보여 주겠다."

약혼한 신부가 다른 남자와 함께 다니면 그녀는 창녀라고 불릴 수 있습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두 남편을 가질 수 없습니다 - 그리고 예수님은 두 가능한 남편이 하나님과 맘몬(물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6:13)!

그리고 이 둘은 기름과 물처럼 섞일 수 없습니다. 당신은 그것들을 완전히 분리된 상태로 유지해야 합니다. 자동차를 운행하려면 오일이 필요합니다. 물은 마시기에 좋습니다. 하지만 이 둘을 섞으면 마실 수도 없고, 차에 넣을 수도 없습니다. 쓸모 없게 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과 맘몬을 섞으려 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들은 결국 바벨론으로 가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거나 돈을 위해 살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기독교로 이익을 얻으려고 할 때, 그들은 바벨론을 건설합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바벨론은 거대한 구조입니다! 기독교 사역을 위해 바친 돈이 자신을 위해 불의하게 쓰이거나 부주의하게 낭비될 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돈을 받기 위해 기독교 사역에 대한 보고를 보낼 때, 거기에 바벨론의 본질이 있습니다.

바벨론은 그리스도와 약혼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돈과 세상과 결혼했기 때문에, 창녀라고 불립니다. 그녀는 하늘뿐만 아니라 세상에서도 위대해지기를 원합니다. 이교도 사람들은 심지어 그리스도와 약혼했다고 주장조차 하지 않기 때문에, 바벨론에 속해 창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맘몬과 결혼하고, 남편에게 충성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만이 바벨론을 구성할 수 있습니다.

2절: "세상의 왕들이 그 여자(바벨론)와 더불어 부도덕한 행위를 저질렀고, 땅에 사는 사람들은 그 여자의 부도덕의 포도주에 취하였느니라."

이것이 종교와 정치의 결합입니다. 정치적인 통치자와 종교적인 통치자는 함께 일하는데, 그 이유는 둘 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 다 사람을 지배하려고 합니다 - 함께 일하면 이 목표를 훨씬 더 잘 달성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는 이러한 일이 2000년 동안 얼마나 많이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서기 300년경에 "기독교인"이 되었을 때, "기독교인" 주교들과 손을 잡고 교회의 머리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벨론 기독교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로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요한은 적어도 콘스탄틴 시대보다 200년 앞서 계시록을 기록했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9절에서 "지혜 있는 마음이 여기 있으니.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라고 했습니다.

음녀(창녀)는 일곱 언덕 위에 세워진 도시인 로마에 본부를 두려고 했습니다. 18절에, "네가 본 그 여자는 땅의 왕들을 다스리는 큰 성(큰 도시)이라"는 말씀이 로마를 가리키는 것임을 확증해 줍니다.

수세기 동안, 기독교 지도자들은 정치 지도자들과 긴밀히 협력해 왔습니다 - 대부분 로마로부터 왔으며 그 결과 영적인 음란과 기독교의 부패가 발생했습니다. 그것이 바벨론입니다.

이 부패한 기독교의 영향력은 이제 온 땅에 퍼졌습니다. 그러므로 그 구절은 "땅에 거하는 자들이 그녀의 부도덕의 포도주에 취하였느니라"고 말합니다.

3,4절: 그리고 그 천사는 성령으로 나를 휩싸서, 빈 들로 데리고 갔습니다. 나는 한 여자가 빨간 짐승을 타고 앉아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짐승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로 가득하였고, 머리 일곱과 뿔 열 개가 달려 있었습니다. 이 여자는 자주색과 빨간색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는 금잔을 들고 있었는데, 그 속에는 가증한 것들과 자기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였습니다.

바벨론은 적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우리는 나중에 19장에서 그리스도의 신부를 보게 될 것입니다. 두 사람의 옷차림에는 현저한 대조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가는 린넨) 옷을 입습니다(19:8) - 단순하고 깨끗하고 순결합니다. 그러나 바벨론은 금과 보석과 진주로 장식된 화려한 자주색과 주홍색 옷을 입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보시고 사람은 외모를 보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입는 옷에 관심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옷은 우리 마음의 욕망을 드러내는 경우가 매우 많으며, 그것이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입니다. 바벨론은 이 세상의 영광으로 자신을 꾸미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신부는 "하나님 보시기에 값진 온유하고 조용한 심령"(벧전 3:4)으로 옷을 입습니다.

바벨론이 들고 있는 가증한 것이 가득한 금잔은 누가복음 16장 15절에 있는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사람이 높이 평가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혐오스럽고 가증한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무엇이든지 세상에서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의 영리함, 학력, 부, 음악적 능력, 교양, 세련됨, 가족 관계, 세상의 명예와 지위 - 이 모든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높이 평가하는 것도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심지어 노벨상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세상의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그런 세상적인 상이나 영예를 얻는다면, 감격할 것입니까? 이러한 것들에 가치를 두는 교회는 분명히 바벨론이 될 것입니다.

바벨론의 부도덕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대사라고 주장하면서도, 세상의 원칙에 따라 살고 세상에서 위대해지려고 하는 데서 드러납니다. 그리하여 그녀의 잔은 가증한 것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여기 테스트가 있습니다. 자신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해보세요:

당신은 어떤 인간, 즉 세상 사람들이나 당신 교회 지도자들에게 인정과 존경을 받는 것에 조금도 관심이 없다고 정직하게 말할 수 있습니까?

5절: 그리고 이마에는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 큰 바벨론' 이라는 비밀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바벨론은 예수님을 따른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비밀입니다. 따라서 그녀는 전 세계 수백만 명의 열렬한 신자들을 속이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바벨론은 11번이나 GREAT(큰)라고 불립니다. " 거룩한 도성"이라고 불리는 그리스도의 신부인, 예루살렘과의 대조를 주목하십시오(계 21:10). 거기에서 우리는 음녀(창녀)와 신부의 차이를 봅니다. 음녀는 큰 반면, 신부는 거룩합니다. 세상에서(심지어 기독교 세계에서도) 크고자 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바벨론의 일부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룩함을 추구한다면(히 12:14), 우리는 예루살렘의 일부가 될 것입니다. 바벨론은 전도와 사회사업에 관심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녀는 거룩함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녀의 행위은 세상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이루어집니다. 그런 기독교적인 사역들이 많이 있습니다. 통계는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의 불은 규모와 크기를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질을 시험할 것입니다(고전 3:13). 예수님처럼 종이 되기를 바라는 대신에 어떤 기독교 단체나 교회에서 지도자의 자리를 탐내는 사람은 바벨론으로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그가 이미 그(바벨론) 일원이 되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바벨론은 음녀의 어미라 일컬어지는데, 이는 음녀가 단지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종교적인 바벨론은 4세기 초에 기독교가 로마 제국과 손을 잡았을 때 대규모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로부터 수세기에 걸쳐 많은 교파 교회와 독립적인 교회들이 생겨났으며, 이 교회들도 결국 음녀가 되어 어머니와 똑같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은 땅의 음녀와 가증한 자들의 어미라 일컬어집니다. 지도자들이 위대함과 세속적 영예를 추구하는 것은 기독교의 대형 주류 교파에만 있습니까? 아닙니다. 소규모의 독립된 교회에도 그것을 찾는 지도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종교적 음행은 기독교 집단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들 중 누구와도 같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나귀를 타고 오셨습니다. 그분은 몸에 금과 은 장식을 하고 오시지 않았습니다. 이런 주님께서, 금과 은과 보석을 두르고 자주색과 주홍색 옷을 입은 신부와 어떻게 연합될 수 있습니까? 그런 생각 자체가 웃깁니다!

6절: 그리고 나는 그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하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그 여자를 보고 크게 놀랐습니다.

수세기 동안, 모든 집단의 많은 소위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참 성도들을 박해했습니다. 수백만 명의 진정한 하나님의 성도들이 모든 교파의 종교적 "기독교인"들에 의해 박해를 받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모든 권고를 전파했다는 이유로 그들의 "동료-그리스도인들"에 의해 - 그들의 혀와 그들의 글로 - 죽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바벨론과 그 딸들은 정말로 예수의 참 증인들의 피에 취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기록해 두셨고, 마지막 날에 모든 사람에게 합당하게 갚아 주실 것입니다. 아무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수를 약속하셨고 항상 그분의 말씀을 지키시기 때문입니다(롬 12:19).

7,8절: 그 때에 천사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왜 놀라느냐? 나는 이 여자의 비밀과, 이 여자를 태우고 다니는 머리 일곱과 뿔 열이 달린 그 짐승의 비밀을, 너에게 말하여 주겠다. 네가 본 그 짐승은, 전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으며, 장차 아비소스(무저갱, 깊은 구렁)에서 올라와서, 나중에는 멸망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땅 위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창세 때로부터 생명책에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사람들은, 그 짐승을 보고 놀랄 것이다. 그것은, 그 짐승이 전에는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다시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짐승은 아비소스에서 왔습니다. 인간은 죽을 때 바닥이 없는 무저갱에 보내지지 않습니다. 그들이 회심하지 않으면,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6:23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지옥에 가게 됩니다. 무저갱은 감옥에 갇힌 악마들이 사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무저갱에서 나오는 자는 악마임에 틀림 없습니다. 오늘날 세상의 통치자들을 다스리는 악령이 있는 것처럼, 이 악령은 적그리스도를 다스리는 악령이 될 것입니다. "그는 전에는 있었고, 지금은 없다"라는 문구는, 동일한 악마가 과거에 세계의 대제국 중 하나를 담당했음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 악마는 요한 시대에는 무저갱에 있었지만, 말세에 나와서 적그리스도를 다스리도록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것입니다.

9-11절: 여기에 지혜를 가진 마음이 필요하다, 머리 일곱은 그 여자가 타고 앉은 일곱 산이요, 또한 일곱 왕이다; 그 가운데서 다섯은 이미 망하고, 하나는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이 나타날지라도, 잠깐 밖에 머물지 못할 것이다. 또 전에 있다가 지금은 없는 그 짐승은 여덟 번째인데, 그것은 그 일곱 가운데 속한 것으로서, 마침내 멸망하여 버릴 자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주후 96년에, 이집트, 앗수르, 바벨론, 메디아-페르시아, 그리스 등 다섯 세계 왕국이 멸망했습니다. 로마는 여전히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다른 하나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난 1900년 동안 존재했던 어떤 세계 초강대국을 가리키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제국은 잠시 동안 남아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적그리스도가 일어날 것입니다. 마침내 그도 멸망할 것이다.

12-14절: 네가 본 열 뿔은 열 왕이다. 그들은 아직 나라를 차지하지 못하였지만, 그 짐승과 함께 한동안 왕권을 차지할 것이다. 그들은 한 마음이 되어서, 그들의 능력과 권세를 그 짐승에게 내줄 것이다. 그들이 어린 양에게 싸움을 걸 터인데, 어린 양은 만주의 주요, 만왕의 왕이시며 그리고 그분과 함께 있는 사람들은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신실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이길 것이다."

열 뿔은 열 나라입니다. 여기서 언급된 "한 시간"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심판의 시간입니다. 열 나라가 그들의 모든 힘과 권위를 적그리스도에게 넘길 것입니다.

다니엘 7:24,25에 기록하기를, "열 뿔은..….일어날 열 왕이다; 그 뒤에 또 다른 왕이 일어날 것인데, 그는 이전 자들과 다르며 전에 있던 세 왕을 굴복시킬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열 나라 중 세 나라를 완전히 정복하고 나머지 일곱 나라를 다스릴 것입니다.

그러면 적그리스도는 어린양과 전쟁을 벌일 것입니다. 긴 전쟁은 아닐 것입니다. 잠시 후에, 주님은 그분의 입의 말씀으로 군대를 멸하실 것입니다. 그분의 신부인 144,000명은 - 부르심을 받고, 택함을 받고, 충실한 - 이 전쟁에서 그분과 함께 할 것입니다. 부름을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함을 받은 자는 적고, 충실한 자는 더 적습니다. 우리는 충실합니까? 우리의 충실함은 큰 일에서보다는 작은 일에서 시험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가장 작은 계명에 충실하고자 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15-18절: 천사가 또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네가 본 물 곧 그 음녀가 앉아 있는 물은, 백성들과 무리들과 민족들과 언어들이다. 그리고 네가 본 그 열 뿔과 그 짐승은, 그 음녀를 미워해서 비참하게 만들고, 벌거벗은 꼴로 만들 것이다. 그들은 그 음녀의 살을 삼키고, 그 여자를 불에 태울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을 이루실 때까지, 그분의 목적을 실행하려는 마음을 그들에게 두셔서, 그들이 한 마음이 되어 그들의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셨기 때문이다. 네가 본 그 여자는, 세상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통치권을 가진 큰 도시(큰 성)를 가리킨다."

음녀는 그녀의 영향력을 전 세계에 퍼뜨렸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열 나라 왕국은 음녀를 미워할 것입니다. 정치적 세력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기독교" 종교 체계를 사용할 것입니다. 통치자들이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면, 그들은 더 이상 바벨론과 관계를 맺지 않게 될 것입니다.

몇 년 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두 후보는 미국 인구의 상당수가 거듭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두 후보 모두 거듭난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 그래야 그들이 거듭난 사람들의 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도에서는, 이제 "기독교" 설교자들이 비기독교 정치 지도자들과 함께 연단에 앉아 군중에게 연설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복음의 메시지는 완전히 손상됩니다.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 헤롯이나 빌라도를 연단에 함께 앉으라고 초대하시는 것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기독교" 설교자들은 또 다른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러나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 속임수를 간파할 수 없습니다!

정치적 세력이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바벨론 기독교를 이용하게 되면, 그들은 그녀를 미워하고 그녀를 불로 태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거짓되고 배교한 기독교가 한때 손을 잡았던 바로 그 정치적 세력에 의해 바벨론 기독교에 심판이 내리도록 허락하실 것입니다.

이 장에서, 우리는 거짓 기독교의 본질을 보았습니다 - 종교, 돈벌이, 정치권력이 모두 뒤섞인 것입니다.

인류의 시작부터 우리는 두 종류의 종교를 발견합니다 - 하나는 가인의 종교이고 다른 하나는 아벨의 종교입니다. 가인은 무신론자가 아니라, 깊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우상 숭배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참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경건의 형태를 가졌습니다. 아벨도 같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벨은 어린 양의 피를 가지고 왔지만, 가인은 땅에서 채소를 가져왔습니다. 주님은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습니다 - 아마도 초자연적인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것을 태워버렸을 것입니다. 가인이 그것을 보고, 그는 질투했습니다. 이는 그의 제물에는 그러한 불이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벨을 죽였습니다. 세계 최초의 살인은 종교적인 살인이었습니다 - 질투심에 저질러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읽은 요한계시록 17장 6절의, "성도들의 피에 취한 여자"의 시작이었습니다. 가인은 성도의 피를 가장 먼저 흘린 사람입니다. 가인에게서, 우리는 바벨론 종교의 시작을 보듯이, 아벨에게서 참 믿음의 시작을 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노아 시대에 홍수로 가인의 후손을 모두 멸하시고 다시 시작하셨습니다. 노아는 가인의 자손이 아니라 셋의 자손이었습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가인의 후손이 없습니다. 그러나 곧 노아의 아들들 사이에 구분이 생겼습니다. 그에게는 셈이라는 경건한 아들과, 함이라는 경건하지 않은 아들이 있었습니다. 함은 저주를 받았고, 셈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셈을 통해 아브라함과 유대 민족과 그리스도가 나왔습니다.

함이 아버지를 공경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주를 받았습니다(창 9:22-27). 함의 후손들에게 저주가 임한 것은 권위를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권위에 대한 경시는 바벨론의 본질적인 속성입니다. 자녀들이 그들의 부모를 공경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그들은 바벨론을 위해 길러지는 것입니다. 함에게는 구스라는 아들이 있었고, 그에게는 니므롯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는 바벨론의 첫 왕국(바벨)을 세웠습니다(창 10:6-10). 그런 다음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반역 행위로 바벨탑을 쌓은 과정을 읽습니다(창 11장).

세속 역사에 따르면 니므롯은 많은 야생 짐승을 죽인 위대한 사냥꾼으로 유명해졌고, 적그리스도의 일종인 세계적인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노아의 아들 셈은, 그 당시에 하나님의 종으로서 예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적그리스도의 가증한 것을 대적하는 참된 교회의 모형입니다. 마침내 니므롯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 아마도 셈에 의해 초자연적인 죽임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니므롯은 사람들에게 거의 숭배를 받았습니다. 역사는 니므롯의 아내, 세미라미스가, 이제 그녀가 사람들에 대한 권력을 잃을 위험이 있음을 감지하고 매우 영리한 일을 했다고 알려줍니다. 그녀는 부도덕한 여자였기 때문에, 누군가를 통해 아이를 낳았습니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 그녀는 사람들에게 니므롯이 환생했다(다시 살아났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어머니와 아들"에 대한 숭배가 시작되었고, 후세에는 "마리아와 아기 예수" 숭배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시기 수백 년 전부터 전 세계에는 "어머니와 아들"의 조각상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세미라미스와 그녀의 아들의 조각상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이 바벨론 종교에 의해 타락했습니다. 예레미야 시대에, 그들이 "하늘의 여왕"에게 제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습니다(렘 44:15-18). 그들은 마리아가 태어나기 600년 전에 하늘의 여왕을 숭배하고 있었습니다. 에스겔 8장 14절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세미라미스의 아들로 환생한 것으로 알려진 니므롯의 또 다른 이름인 담무스를 위해 애곡하는 것을 읽습니다. (그것은 사탄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위조한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어머니와 아이"는 "세미라미스와 담무스"였습니다.

세속 역사는 또한 바벨론 종교에 태양 숭배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려줍니다. 그래서 우상 숭배자들은 태양을 상징하는 둥근 과자를 먹곤 했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의 신들의 머리 주위에 태양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 오늘날 우리는 이것을 "후광"이라고 부릅니다. 세미라미스의 머리와 담무스의 머리 뒤에는 후광이 있습니다. 후광이 있는 예수와 마리아의 그림에 결국 영향을 미친 것은 이 바벨론의 사상이었습니다.

우상 숭배는 또한 부도덕으로 이어집니다. 역사책에는 중세 시대의 "기독교" 교파의 지도자들이 이끌었던 부도덕한 삶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부도덕은 중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근자에 많은 "기독교" 설교자들과 목사들도 부도덕한 삶을 살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딸들도 역시 어머니의 음행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 주제에 대한 상세하고 완전하게 문서화된 연구를 보려면 Alexander Hislop의 "THE TWO BABYLONS"(두 바벨론)이라는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행해지는 많은 의식과 관습이 고대 바빌로니아 종교에서 실제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장 7
7장

1-8절: 그 뒤에 나는, 천사 넷이 땅의 네 모퉁이에 서서 땅의 네 바람을 붙잡아서, 땅이나 바다나 모든 나무에 바람이 불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다른 천사 하나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장을 가지고 해 돋는 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땅과 바다를 해하는 권세를 받은 네 천사에게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도장을 찍을 때까지는,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아라." 내가 들은 바로는 도장이 찍힌 사람의 수가 십사만 사천 명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이마에 도장을 받은 사람들은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에서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도장이 찍힌 사람은, 유다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이요, 르우벤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이요, 갓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이요, 아셀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이요, 납달리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이요, 므낫세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이요, 시므온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이요, 레위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이요, 잇사갈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이요, 스불론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이요, 요셉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이요, 베냐민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후에" 또는 "이 일 후에" 라는 구절을 다시 봅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요한계시록 4:1의 새로운 부분의 시작으로 보았습니다.

7장에서 우리는 이 구절로 시작하는 1절과 9절을 봅니다.

첫 번째 부분(1-8절)은 이스라엘을 다룹니다: "내가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수가 …… 144,000이니"(4절)

두 번째 부분(9-17절)은 교회를 다룹니다: "각 나라와 모든 족속과 백성과 방언 중에서 나와,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섰습니다."

이스라엘의 경건한 남은 자는 진노의 때에 보호를 받지만, 교회 자체는 휴거되어 주님 앞에 서게 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땅에 쏟아지기 직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일어나, 산 자들과 함께 하늘로 주님을 만나러 올라가서, 주님을 영접할 것입니다 - 신랑을 맞이하러 나가는 신부처럼. 그들은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9절) 서 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그 때에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은 경건한 남은 자가 있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진노로부터 그들을 보호하실 것입니다. 2절에서 우리는 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인칠 천사가 오는 것을 읽었습니다.

다니엘서 12장 1절에서 우리는 이 천사에 대해 읽습니다:

"이제 그 때에 주의 백성을 지키는 대군 미카엘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 때까지 민족이 있었던 이래로 한 번도 없었던 환난의 때가 있을 것이다. 그 때에, 주의 백성 곧 책에 기록된 자는 다 구원을 얻으리라."

대천사 미카엘과 이스라엘 자녀들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진노가 이 땅에 쏟아질 때, 즉 끔찍한 고통의 시간에 일어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인치고 보호할 것입니다.

다니엘서 12장 2-4절에 보면 구약 시대에 믿음으로 죽었던 사람들도 교회와 함께 일어나 휴거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죽은 자) 중 많은 자가 깨어나, 영생을 얻는 자도 있고 어떤 이들은 수치와 영원한 멸시를 받는 자도 있을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하늘의 밝은 빛처럼 빛나고, 많은 사람을 의로 인도하는 자는 별과 같이 영원무궁토록 빛나리라."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에 관한 한, 이스라엘에 대한 그분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로마서 11장에서 분명히 알 수 있듯이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1-8장에서 구원의 복음을 설명하신 후, 9-11장에서 성령께서 이스라엘에 대해 설명하십니다. 이것은 구약의 가르침이 아니라 신약의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신 것은 아닙니까? 그렇지 않나요? 그럴 수 없습니다!"(롬 11:1). (그런데, 그것은 성령께서 로마서 6장 1,2절에서 사용하신 것과 같은 표현입니다. "우리가 다시 죄를 범하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7000명의 남은 자가 있었던 것처럼, 또한 말세에 "하나님의 은혜로운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으리라(롬 11:2-5).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이스라엘 나라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남은 자가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었더라면 유대인과 비유대인의 구별이 없는 교회의 일부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이스라엘을 버리심으로 세상과의 화해를 이루는 것이라면, 그들을 받아들이심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입니까?(롬 11:15)"

이스라엘이 버림받았을 때, 온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런 다음 이스라엘이 다시 받아들여질 때, 이 땅은 부활과 같은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야생 동물은 다시 길들여질 것입니다. 가시와 엉겅퀴가 사라질 것입니다.

"너희(이방인)가 돌감람나무에서 잘려서,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여져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되었다면), 하물며 원가지인 이 사람들(유대인)은 자신의 감람나무에 얼마나 더 접붙이심을 받겠습니까?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여러분이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다 차기 까지 이스라엘이 부분적으로 완악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25절)."

"이방인의 충만한 수"는 땅의 민족들 가운데서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어린 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마지막 사람이 모일 때가, 휴거의 때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에게서 강퍅함이 사라지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은 번복될 수 없습니다"(29절). 하나님은 결코 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한 번 부르셨습니다. 그분은 그들에 대한 마음을 결코 바꾸지 않으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6장 13절을 보십시오. 거기에서 우리는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큰 바람에 흔들려서 덜 익은 무화과를 떨어뜨리듯, 땅에 떨어졌다"는 것을 읽습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은 무화과나무가 덜 익은 무화과를 떨어뜨리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그 직후, 우리는 계시록 7:1-8에서 이스라엘에 대해 읽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의 그림입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땅의 네 모퉁이에 서 있는 네 천사"(계 7:1)에 대해 읽습니다. 네 모퉁이는 '북쪽, 남쪽, 동쪽 및 서쪽'을 나타냅니다. 여호와께서 유대인들을 모든 땅 구석구석에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구약에서, 다윗은 사탄(골리앗)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솔로몬이 우상 숭배자가 되기 전, 통치의 초기 부분은 천년 동안 지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미래 통치에 대한 그림입니다. '솔로몬'은 '평화로운'을 의미하며, 솔로몬 시대에는 "유다와 이스라엘이 각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습니다"(왕상 4:25). 여기에 언급된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는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나타내는 두 가지 상징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 1절에서 "나는 참 포도나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내가 참 무화과나무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우리는 이제 포도나무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로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을 다스리러 오실 때, 여호와의 집의 산이 산들의 우두머리로 굳게 설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올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많은 민족들 사이에서 심판하실 것이다. 민족은 민족을 치러 칼을 들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전쟁 훈련을 하지 않을 것이며(그리스도의 천년 통치 기간 동안), 그들 각각은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을 것이다(미가 4:1-4).

신명기 32:8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열방에게 그들의 기업을 주신 것에 대해 읽습니다.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주의 것이니라"(고전 10:26). 그리고 땅은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분은 땅의 여러 부분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분은 아담의 자손을 갈라놓으셨을 때, 모든 민족의 경계를 정하셨습니다. 그러나 먼저, 그분은 이스라엘 자손의 경계를 정하셨습니다(신 32:8)."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유프라테스 강까지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 15:18)."

그 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땅이었고,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었을 때 다스렸던 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통치하실 때 다시 한번 이스라엘의 소유가 될 땅입니다.

창세기 35:9-12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말씀하신 것을 읽습니다. "네 이름은 야곱이다. 다시는 너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을 것이요,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 내가 그것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리라". 이것은 우리에게 명확한 답을 줍니다. 온 땅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내가 이 땅을 야곱의 후손에게 주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엘 1장 12절에 보면, "포도나무가 마르고 무화과나무가 시들더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직후에 성취된 이스라엘의 쇠퇴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요엘 2장 22절에서 "여호와께서 그 일을 마치신 후에 무화과나무포도나무가 온전히 열매를 맺었다"는 말씀을 읽습니다. 시들었던 무화과나무가 다시 꽃을 피우기 시작합니다.

구약에는 우리가 영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많은 약속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또한 예수께서 이 땅에 그분의 왕국을 세우시기 전에, 이스라엘 나라에서 문자 그대로 성취될 것입니다. 요엘 2:28은 말합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늙은이는 꿈을 볼 것이다. 그 날에 내가 내 영을 부어 주리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며,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이것의 첫 번째 부분은 첫 제자들이 성령세례를 받은 오순절에 영적으로 성취된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이 오면 이스라엘에 문자 그대로 성취될 것입니다.

마가복음 11장 12-14절, 20절을 보면, 예수께서 한 번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열매를 찾으러 가까이 오시니, 잎사귀만 보였는데, 이는 무화과의 제철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아무도 네게서 열매를 먹지 못하게 하라"고 저주하셨습니다. 이튿날 제자들은 무화과나무가 마른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주님의 그 행동은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는 예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매를 찾으러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본 것은 종교 의식의 잎사귀뿐이었고 열매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저주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민족은 즉시 시들지 않았습니다. 사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40년 후)에 ,그것은완전히 말라버렸습니다."

예수께서 사역을 마치시고, 성전에서 나가시며 이르시되,

"너희 집은 너희에게 황폐하게 될 것이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부르고 싶었으나, 너는 내가 방문할 때를 알지 못하였느니라. 이제부터는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다'라고 하기까지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마 23:37-39)."

무화과나무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서기 29년 또는 서기 30년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그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마 27:25)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말을 들으셨고, 40년 후인 서기 70년에 로마군은 티투스 장군 휘하에서 예루살렘에 침입하여 성전을 파괴했습니다. 그 후 유대인들은 땅 끝까지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화과나무의 끝은 아니었습니다.

한번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막 13:4). 예수님은 "무화과나무에게 이 비유를 배우라"(막 13:28)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배우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예수님께서 그분으로부터 온유와 겸손을 배우라고 말씀하신 것처럼(마 11:29), 무화과나무에게서도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님이 저주하시고 아침에 말라버린 무화과나무, 즉 이스라엘에 대해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화과나무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너희는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느니라. 그런즉, 너희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그가 가까이 곧 문 앞에 계신 줄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일이 다 이루기까지 이 세대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막 13:28-30).

예수님은 어느 세대를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분명히 무화과나무(이스라엘)가 다시 싹트는 것을 보는 세대입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아직 이스라엘에는 열매가 맺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회심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매가 없습니다. 그러나 무화과나무는 잎사귀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누가복음 13장 6-9절에서, 예수님은 무화과나무가 있어 열매를 구하려고 왔으나 얻지 못한 사람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도 이스라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포도원지기에게 말했습니다, "찍어버려라. 왜 땅을 낭비하는 거지? 왜 땅을 차지하고 있는 거지?" 포도원지기는 "그대로 두십시오. 조금만 더 해보겠습니다. 그리고 내년에도 열매가 없으면 잘라 버리세요."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40년 동안 살려두었다가 베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다시 싹을 틔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주님께서 한번은 예레미야에게 두 광주리의 무화과를 보여 주셨습니다. 한 광주리에는 좋은 무화과가 있었고, 다른 광주리에는 썩은 무화과가 있었습니다(렘 24:1-3). 오늘날 이스라엘에서는 대부분의 무화과가 썩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위에서 읽은 144,000명의 남은 자들의 일부를 구성할 몇 개의 좋은 무화과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47절에서 그 한 가지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다니엘에 대해, "여기에 간사함(썩음)이 없는 이스라엘 사람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다니엘이 주님께 물었습니다, "당신이 나를 어떻게 아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내가 너를 보았노라!". 나다니엘은 비록 그 당시 회심하지 않았지만, 좋은 무화과였습니다. 그는 말세에 이스라엘에 있게 될 남은 자들의 모형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주시하고 계시며 그들을 한데 모으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기도 전에, 모세는 언젠가 여호와께서 그들을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흩으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신 28:64).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을 때(B.C. 2000년경), 그를 가나안으로 데려가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애굽에서 400년 넘게 종살이를 하도록 허락하셨고, B.C. 1400년경 여호수아를 통해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솔로몬이 죽은 후(B.C. 900년), 이스라엘 나라는 둘로 갈라졌습니다. 남쪽 왕국은 스스로를 유다라 하고, 북쪽 왕국은 스스로를 이스라엘이라고 불렀습니다. B.C. 722년에 앗수르가 와서 이스라엘(북쪽 국가)을 정복하고 포로로 잡았습니다. 그 후 이스라엘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후 B.C. 586년에, 느부갓네살 왕의 바벨론이 와서 유다(남쪽 왕국)를 정복하고, 그들도 포로로 잡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예레미야를 통해 "너희가 바벨론에서 70년을 보낸 후에, 너희 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렘 29:10)고 이미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정확히 70년 후에 유대인들이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에스라, 학개, 스가랴 시대에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땅의 모든 민족에게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앗수르와 바벨론으로 끌려갔으나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들이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흩어질 때를 예언했습니다. 이것은 서기 70년에만 일어났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후, 하나님은 그들에게 회개할 수 있는 40년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분은 그들을 땅 구석구석에 흩으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도 예언하여 이르되,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사로잡은 곳에서 돌이키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흩어 버리신 모든 민족 중에서 너를 다시 모으시리라. 네 쫓겨난 자가 땅 끝에 있으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모으시고, 거기서 너를 다시 데려오시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그 열조가 차지한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리니, 너는 그것을 차지할지니라; 그가 너를 형통하게 하시고 너를 네 열조보다 번성케 하시리라(신 30:3-5)."

그것이 우리 시대에 일어난 일입니다. 무화과나무에 꽃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땅의 사방에서 모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앗수르와 애굽과 바드로스와 구스와 엘람과 시날과 하맛과 바다 섬들에 남아 있게 될 그의 백성의 남은 자를 두 번째로 회복시키실 것이라. 그가 열방을 위한 깃발을 세우시고, 이스라엘의 쫓겨난 자들(북 왕국)을 모으시며, 땅 사방에서 유다의 흩어진 자들(남 왕국)을 모으시리니(사 11:11,12)."

주님께서 처음으로 이스라엘을 다시 데려오신 것은 바벨론 포로 생활 70년 후였습니다. 두 번째는 금세기에 있었습니다.

이사야서의 이 구절은 천년왕국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 때에는

"늑대가 어린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젖먹이가 코브라의 굴 옆에서 놀게 될 것이다(사 11:6-8)".

예수께서 이 땅을 다스리실 때 동물은 더 이상 사나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스라엘이 자기 땅으로 돌아온 후에야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스라엘이 그 땅으로 돌아와서 예루살렘 성을 점령하기 전에는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실 수 없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은 스스로를 국가로 선언했습니다. 1967년 6월에 그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 부지를 점령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서기 100년이나 서기 1900년에 오실 수 없었습니다. 가장 빨리 오실 수 있었던 것은 1967년 6월 이후였습니다.

또 다른 예언은 에스겔에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열방 중에서 취하며, 모든 땅에서 모아다가, 너희 본토로 인도하리라"(겔 36:24).

예레미야서에는 또 다른 예언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백성이 '여호와께서 택하신 두 족속(유다와 이스라엘)을 버리셨다'라고 말한 것을 보지 못하였느냐?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교회를 택하시고 유대인들을 버리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보기에 더 이상 국가가 아니기에, 그들이 내 백성을 멸시한다.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만일 낮과 밤에 대한 내 언약이 흔들릴 수 없고, 하늘과 땅의 법칙들이 무너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가 야곱과 내 종 다윗의 자손을 버리지 않을 것이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을 다스리는 통치자를 그의 후손 중에서 선택할 것이다. 이제는 내가 그들의 부를 회복하고 그들을 긍휼히 여기리라'(렘 33:23-26).

즉, 낮과 밤이 순환하는 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매우 분명합니다.

이스라엘 땅은 로마인(B.C.63~A.D.313), 비잔틴 제국(A.D.313~636), 아랍인(A.D.636~1099), 십자군(A.D.1099~1291), 맘루크 통치자(A.D.1291~1516), 오스만 제국(A.D.1517~1917),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국인(A.D.1917~1948)에 의해 통치되었습니다.

수세기 동안 다양한 사람들이 유대인들을 그들의 땅으로 돌아오게 하려고 노력했지만, 어떻게 실패했는지 보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서기 4세기에, 로마 황제 율리안은 유대인들에게 그(율리안)가 그들(유대인들)의 성전을 지을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성전을 건축하려고 할 때마다, 어떤 재난이 일어나 그가 성전을 건축할 수 없었습니다. 왜일까요? 하나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서기 16세기와 17세기에, 세 명의 유대인 지도자가 유대인들을 그들의 땅으로 데려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들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왜죠? 하나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9세기 말에, 벤자민 디즈레일리(유대인)가 대영제국의 수상이 되었습니다. 그는 또한 유대인들을 팔레스타인으로 다시 데려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하기 직전에, 총리로 선출되었습니다. 1917년, 영국의 밸푸어 경은 유대인들에게 팔레스타인을 약속하는 "밸푸어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영국은 아랍인들의 환심을 사고 싶었기 때문에, 30년 동안 유대인들에게 했던 말을 되풀이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유대인의 가장 큰 원수인 아돌프 히틀러를 사용하셔서,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도록 하셨습니다. 히틀러는 사탄에게 영감을 받아 600만 명이 넘는 유대인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전 세계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피난을 떠났고, 그곳에서 히틀러가 죽은 지 약 4년 후에 조국을 세웠습니다.

예레미야 16장 14-16절에, 이스라엘로의 출애굽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께서 살아계신다'라고 말하지 않고, '이스라엘 자손을 북방 땅(히틀러의 땅, 독일은 이스라엘 북쪽)과 그분이 그들을 추방한 모든 나라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께서 살아계신다'라고 말할 날이 다가오고 있다. 내가 그들을 그들의 본토로 되돌려 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은 어떻게 그들을 돌아오게 할 것인가?) 내가 많은 어부를 보내어 그들을 낚을 것이다; 그 후에 내가 많은 사냥꾼들을 보내리니, 모든 산과 모든 언덕과 모든 바위 틈에서 사냥꾼들은 그들을 사냥할 것이다 ."

우선, 하나님은 어부들(이스라엘의 친구들)이 매력적인 미끼로 그들을 이스라엘로 끌어들이게 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충분하지 않을 때, 그분은 사냥꾼들(이스라엘의 적)을 보내어 구석구석에서 그들을 쫓아내고 이스라엘로 도망하게 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이스라엘의 친구와 원수를 모두 사용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주권을 주목하십시오.

또 다른 흥미로운 구절을 고려하십시오. 이사야서 43:5,6은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내가 네 자손을 동쪽(여기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돌아간 인도가 포함됨)에서 데려오고, 서쪽(영국과 미국 포함)에서 너희를 모으리라. 나는 북쪽에 '그들을 내놓으라'고 말하고, 남쪽에 '그들을 붙잡아 두지 말라'고 말할 것이다.'"

여기서 사용된 다른 표현에 주목하세요. 유대인들이 동쪽에서나 서쪽에서 이주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은 "내가 그들을 데려오고 그들을 모으리라"는 말씀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북쪽(러시아)에 관해서는 "나는 그들에게(북쪽) 그들을(내 백성) 내놓는 것이 좋다고 말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러시아가 유대인의 이주를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러시아의 공산주의를 무너뜨리셨고, 그리하여 1990년 이후 러시아가 60만 명의 유대인을 이스라엘로 보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남쪽 나라들에 관해서, 주님은 그들에게 그들을 붙잡아 두지 말라 고 경고하셨습니다. 그 나라들도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이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곳에서도 그들을 데려오셨습니다. 1948년과 그 다음 해에 오만 나라에서 온 모든 유대인(그 중 43,000명)이 어떻게 이스라엘 나라로 돌아왔는지는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1984년과 1991년에 이스라엘이 수행한 두 가지 놀라운 작전을 통해 30,000명의 유대인이 에티오피아에서 돌아왔습니다. 이 모든 것이 성경 예언의 정확한 성취였습니다.

주님은 또한 아모스 9장 15절에서 이스라엘 땅에 두 번째로 유대인을 심으신 후에는, 그들이 다시는 그 땅에서 뽑히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그들의 땅에 영원히 머물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초능력의 도움으로가 아니라, 주님의 능력으로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 관련된 또 다른 구절은 스가랴 10:9,10입니다:

"내가 그들을 만민 가운데 흩을 때에, 그들이 먼 나라에서 나를 기억하고, 그들의 자녀와 함께 살다가 돌아올 것이다. 내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고, 앗수르에서 모으고, 길르앗 땅과 레바논 땅으로 데려올 것이니, 그 땅이 살기에 비좁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민자의 수가 너무 많아 그들을 위한 공간이 없을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이민자들을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정착지를 건설하는 이유입니다. 그들을 위한 공간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최신 정보입니다! 하나님은 3000년 전에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신 모든 땅을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후손들에게 돌려주고 계십니다. 누구도 하나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놀라운 점은 19세기 동안 유대인들이 분산되어 여러 나라 사람들과 동화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구상의 다른 어떤 사람들과도 달리, 항상 뚜렷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19세기가 지난 후에도 그들은 여전히 ​​유대인입니다. 그들은 선지자 요나와 같았습니다. 만국에 흩어진 유대인들은 고래 뱃속의 요나와 같았습니다. 고래는 요나를 3일 동안 소화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하고 마침내 그를 이스라엘 해안에 토해냈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민족이 2000년 동안 유대인을 소화시키려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유대인을 이스라엘 땅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요한계시록 7:1-8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세에 어떻게 그분의 백성을 보호하시는지를 봅니다. 이 144,000명의 남은 자는 처음에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믿지 않았던 나다니엘과 같습니다. 그러나 나다니엘은 그분을 보고 믿었습니다. 말세 이스라엘에 나다니엘과 같은 사람들,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인데, 이들은 영광 중에 그분을 볼 때까지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믿지 않습니다. 144,000이라는 숫자는 문자 그대로가 아닌 소수의 상징일 뿐입니다. 이 사람들은 그 때에 세상에 임할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보호받을 것입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적그리스도의 한 예표)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 하나님이 애굽에 내리신 재앙(심판)으로부터 보호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애굽에 임했지만, 이스라엘에게는 미치지 않았습니다. 바벨론에서, 느부갓네살(적그리스도의 또 다른 유형)이 모든 사람에게 그의 형상에 절하도록 강요했을 때, 거절하고 불타는 풀무에 던져진 세 명의 유대인(남은 자의 유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은 그들을 해칠 수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마지막 날에 그의 경건한 남은 자를 보존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인침을 받고 보호될 것입니다.

"의인에게 이르기를, 그들이 잘되리라 하라"(사 3:10). 겸손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잘 될 것입니다.

9,10절: 그 뒤에 내가 보니, 아무도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 사람들인데, 흰 두루마기를 입고,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큰 소리로 외쳐 말했습니다, '구원은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께 속한 것입니다.'

이것은 거듭난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하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이때는 교회가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기 위해 휴거되는 때입니다.

솔로몬의 아가서 2장 10절에서, 신랑은 신부에게 "나의 사랑, 내 아름다운 자야, 일어나서 가자"고 말합니다. 왜요?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익었기" 때문입니다(13절). 그 부르심이 언젠가 신랑(그리스도)으로부터 신부(교회)에게 올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화과나무에게서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나의 사랑 일어나서 가자"라는 그분의 부르심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어린 양의 결혼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심판의 때에, 교회는 이 땅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9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진노하심에 이르도록 정하여 놓으신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날이 노아의 때와 같고 롯의 때와 같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심판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기 전에 롯이 건짐을 받았고, 심판이 땅에 내리기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갔던 것과 같이, 세상에 심판이 내리기 전에 교회가 들림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성도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서 있는 것을 봅니다.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초막절을 지키라고 들었습니다(레 23:40). 이스라엘의 모든 절기에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습니다. 유월절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묘사했고, 초막절은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를 묘사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자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있는 모습의 의미입니다.

그들이 "구원은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라고 외칠 때, 그들이 말하는 것은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우리 하나님께 있고, 우리 속에 있는 어떤 것으로도 말미암지 아니하노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구원이 하나님과 어린 양의 은혜로 된 것임을 기쁘게 인정합니다. "그들은 어린 양의 피로 그들의 옷을 씻어 희게 하였습니다"(계 7:14).

"나는 그분의 공로 위에 서 있습니다,

'임마누엘의 땅에, 영광이 거하는 곳이 아닌'

나는 다른 서 있을 곳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참된 자녀는 주님 앞에 섰을 때,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어린양의 피만이 그를 그곳으로 인도했다는 사실을 고백할 것입니다.

11,12절: 모든 천사들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을 둘러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면서,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영원무궁 하도록 있습니다. 아멘!"하고 말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일곱 교회,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일곱 우레와 같은 수많은 일곱 가운데에서도 하늘에서 예배하는 모습을 일곱 번 잠깐(일별) 봅니다. 그리고 여기 그 일별 중 하나가 있습니다. 앞서 4장과 5장에서 그 중 두 가지를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별(한 번 흘낏 봄)에서 하늘에 있는 사람들, 즉 천사와 스물네 장로와 네 생물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할렐루야, 주님을 찬양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작은 기회를 항상 기다리고 있음을 봅니다. 이 분위기를 항상 마음에 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는 "천국이 내려오고, 영광이 내 영혼에 가득 찼다"라는 노래를 부릅니다. 사람의 영혼에 천국이 내려오는 한 가지 징표는 그가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할 사소한 구실을 영원히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찬양과 경배의 영은 천국의 영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이 "우리의 구원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라고 말하면 수백만 명의 천사들과 네 생물, 스물 네 장로들은 즉시 "예. 아멘. 맞습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라고 말합니다.

13,14절: 장로 중 하나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흰 두루마기를 입은 자들이 누구며, 어디서 왔습니까? 그리고 나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주여, 당신은 알고 있습니다.' 그가 내게 말했습니다, '이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로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습니다.'

14절은 교회가 큰 환난을 겪은 다음 "그곳에서 나올 것"이라고 매우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누군가가 방에서 나왔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가 방에 있었다가 그 방에서 나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 18장 4절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바벨론에서 나오라고 하실 때 바벨론에 있는 사람들을 나오라고 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여기에서, 신자들이 "큰 환난에서 나왔다 "고 말할 때, 분명한 의미는 그들이 큰 환난 중에 있었다가, 그곳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150년 전 서구 세계에서 교회가 큰 환난을 겪지 않을 것이라는 교리가 생겨난 것은 인간의 육신이 환난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육신과 마찬가지로 내 육신도 믿고 싶어하는 교리입니다. 모든 사람의 육신은 우리가 편안한 시간을 보낼 것이라는 교리를 듣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큰 환난을 피할 것이라고 가르치는 구절은 성경에 단 한 구절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으로부터 오는 환난에서 우리를 보호하겠다고 약속하신 적이 없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통틀어, 교회는 항상 환난을 겪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세계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기독교인을 박해하는 반기독교 통치자 아래에 있습니다. 그리고 신자들은 이런 땅에서 환난을 겪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20세기 동안 일어났고 지금 일어나고 있습니다. 앞으로 더 넓은 범위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화형에 처하거나 사자를 마주할 용기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육신은 두렵고 비겁합니다. 그러나 그 때가 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특별한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그분의 약속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큰 환난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책을 쓴 요한이 계시록 1장 9절에서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환난에 함께 참여하는 자니라"라고 말하는 것을 이미 보았습니다.

만일 당신이 요한에게 환난은 교회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면, 그는 자신도 고난을 겪고 있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환난 전 교회의 휴거" 교리는 편안한 서구 기독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박해를 받고 있는 나라에 사는 신자라면 그런 교리를 발명하거나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성도들은 환난에서 승리를 하고 나왔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을 특권으로 여기고 자기 목숨을 버리고 죽임을 당하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어린 양의 피로 그 옷을 씻어 희게 했습니다. 그들은 깨끗해지고 충실했습니다.

15절: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밤낮 그분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보좌에 앉으신 분이 그들을 덮는 장막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만이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마 5:8). 그들은 피로 깨끗해 졌기 때문에 깨끗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 있고; 그리고 그들은 밤낮으로 그분을 섬깁니다. 이것은 영원에서도 우리가 아버지를 위해 할 어떤 형태의 봉사가 있을 것임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보호막이 되실 것입니다. 그들은 어디를 가든지 위안을 주는 하나님의 임재를 갖게 될 것입니다.

16절: 그들은 다시는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도 않고; 해나 그 밖에 어떤 열기도 그들 위에 괴롭게 내려 쬐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상에서 품었던 모든 충족되지 못한 갈망이 그곳에서 충족될 것입니다. 그곳에는 땅에서와 같이 어떤 시련이나 환난의 열기도 없을 것입니다.

17절: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리니;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그곳에서 이 땅보다 훨씬 더 깊고 더 큰 방법으로 우리의 목자가 되실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성령의 체험, 즉 생명수 샘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더 이상 슬픔도 죽음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영원의 모습을 살짝 엿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8장에서 심판이 시작되기 전에, 이 은혜의 환상을 주십니다.

계시록에서 거듭거듭, 우리는 모든 심판을 엿볼 때마다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살짝 엿보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장 8
8장

1절: 그가 일곱째 봉인을 땔 때에, 하늘은 약 반 시간 동안 고요하였습니다.

일곱째 인을 떼면서, 이 땅에 하나님의 심판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6장에서, 우리는 다양한 말을 탄 자들이 땅에 재앙을 가져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또한 큰 환난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로부터 땅에 내리는 어떤 심판도 보지 못했습니다.

교회는 여섯 인 중 다섯 인(전쟁, 기근, 지진, 전염병, 박해)을 떼실 때 이 땅에 있습니다. 그러나 8장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기 직전에, 우리는 교회가 7장에서 들림을 받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유대인들은 인침을 받고 보호를 받습니다.

일곱째 인을 떼자마자, 하늘에 고요함이 있습니다.

30분 동안이라도 침묵하는 것이 천국에서는 너무나 이례적이어서 기록으로 남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천국의 정상적인 분위기는 천둥과 거센 강의 소리처럼 끊임없이 하나님께 찬양이 올라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모든 것이 조용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러나 침묵의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사야서 28장 21절, 22절에서 "온 땅에 작정하신 멸망"을 수행하기로 한 주님의 결정은 "특이한 일"과 "기이한 사역"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심판은 하나님의 "평상시의 일"이 아니며 그분의 "일상적인 사역"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는 이상한 일입니다. 그것은 그분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분에게 이상하고 낯선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기다리시며 "나는 백성이 회개하여, 내가 그들을 심판하지 않기를 원하노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침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분의 오래 참으심은 모든 사람이 회개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에는 멈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최후의 심판이 있기 전에 회개하기를 기다리십니다.

요한계시록 6장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두루마리를 펴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루마리가 완전히 펴져 있는 것을 봅니다 - 마지막 봉인을 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부분적으로만 펼쳐졌습니다.

누가복음 4:16,17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서의 두루마리를 펴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은 이사야서 61:1,2이 기록된 곳을 찾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2절이 끝나기 전에 멈췄습니다. 누가복음 4:18,19을 이사야서 61:1,2와 비교하면,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읽으신 것은,

"주님의 성령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다시 보게 함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은 거기서 멈추시고 "우리 하나님의 (심판)보복의 날"에 관한 다음 문장을 읽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에서 주님의 은혜로운 (365일 은혜의 해)와 단 24시간의 보복(심판)의 에 대해 언급하고 있음을 주목하십시오! 하나님은 친절하면서도 엄격하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친절하심은 그분의 엄격함보다 365배나 더 큽니다! 그분은 우리도 그렇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또한 여기서 우리에게 오래 참으시고 인내하시며 은혜의 시대가 길고 긴 기간이라는 것을 우리 마음에 새기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제 거의 2000년 동안 연장된 은혜의 해인 "호의적인(favourable) 해"에서 멈추셨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읽지 않은 채로 두시고 두루마리를 말아 넣으셨습니다(눅 4:20).

그러나 요한계시록 8장 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미 2000년을 충분히 기다리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여전히 ​​여기서 조금 더 기다리십니다. 주님에게는 하루가 1000년 같습니다. 따라서 30분의 침묵은 약 20년이 됩니다. 하나님은 기다리십니다. 사람들이 회개하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러나 마침내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 예수께서는 두루마리의 나머지 부분을 펴시고 그 마지막 문장도 읽으십니다: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이 이르렀다."

2절: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일곱 천사를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일곱 나팔을 받았다.

우리는 일곱 나팔을 일곱 개의 다른 나팔로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곱 영을 상징하는 일곱 등불(계 4:5)을 보았을 때, 우리는 그것이 서로 다른 일곱 성령이 아니라 일곱으로 이루어진 성령임을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는 일곱 배의 지속기간을 지닌 하나의 나팔, 즉 마지막 나팔입니다.

이 나팔의 의미는 고린도전서 15:51,52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라; 우리 모두는 잠들지 않을 것이다(우리 모두는 죽지 않을 것이다; 일부는 죽을 것이지만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한 순간에 변할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마지막 나팔에(교회가 휴거될 때)"

계시록 8장 2절에서 읽은 것은, 마지막 일곱 나팔의 시작입니다. 일곱 배의 나팔. 요한계시록 7장에서 보았듯이, 그 나팔이 울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전 15:52). 마지막 나팔은 큰 환난 직후에 울리고, 교회는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마지막 나팔이 불 때, 순간적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그리고 깜박이는 데 얼마나 걸리는지) 우리는 변화될 것이며 우리는 땅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사라지자마자, 심판이 땅에 내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민수기 10장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진영에서 나팔을 사용했던 일곱 가지 이유를 봅니다. 우리는 이것을 여기에서 일곱 배의 나팔과 관련시킬 수 있습니다:

1. 회중을 소집하기 위해(2절).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도록 교회를 부르기 위해.

2. 진영이 이동하게 하려 함(2절). 교회가 행할 마지막 이동은 '이 땅으로부터 공중에 계신 주님의 임재앞으로'가 될 것입니다.

3. 경보를 울리기 위해(5절). 심각한 일이 일어날 것임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4.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나타내기 위해(9절). 하나님과 불경건한 사람들(적그리스도가 이끄는) 사이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5. 기쁨의 날을 나타내기 위해(10절). 교회는 주님을 대면할 것이기 때문에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6. 잔치를 선포하기 위해서(10절).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시작되었습니다.

7. 그 달의 첫째 날을 선포하기 위해(10절). 교회는 새로운 출발을 하고 있습니다.

3,4절: 또 다른 천사가 와서, 금향로를 들고 제단에 섰습니다; 그는 모든 성도의 기도에 향을 더해서 보좌 앞 금제단에 드리려고 많은 향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향의 연기가 성도들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갔습니다.

우리는 앞서 계시록 5:8에서, 성도들의 기도가 무엇인가를 이루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계시록 8:3에서 그것을 다시 봅니다 - 특히 이 기도는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입니다. 사람들은 수백 년 동안 그 기도를 해왔습니다. 그것은 이제 응답 될 것입니다.

성도들의 기도에 향을 더했습니다. 향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그 이름은 "쏟아 부은 향유 같으며"(아 1:3), 달콤한 냄새가 나는 향과 같은 이름입니다. 그 이름이 우리의 기도에 더해질 때 우리의 기도가 아버지 앞에 올라가 응답을 가져옵니다. 나는 예수의 이름을 무의미하게 반복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누구시며 갈보리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 때문에, 그 이름에 있는 가치와 진가에, 영적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이름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받아들여 질 수 있게 됩니다.

그 자체로는,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올라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올 때, 우리의 기도는 아버지께 받아들여집니다 - 마치 예수님 자신의 기도가 그분에게 받아들여진 것과 같습니다.

수천 년 동안 수백만 성도들의 모인 이런 기도가 하늘로 올라가자마자 요한계시록 8장 5절에서 그 결과가 나타납니다. 즉각적인 답변이 있습니다.

5절: 그 뒤에 그 천사가 향로를 가져다가, 거기에 제단 불을 가득 채워서 땅에 던지니, 천둥과 요란한 소리와 번개와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그 많은 기도에 응답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기다리셨지만, 응답하기 시작하시면, 빠르고 강력하게 응답하실 것임을 가르치는 상징적 언어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강력하고 철저하게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그분이 기다리고 기다리시는 것은,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을 매우 오래 참으시기 때문입니다.

6,7절: 그 때에 나팔을 하나씩 가진 일곱 천사가 나팔을 불 준비를 하였습니다.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우박과 불이 피에 섞여서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땅의 삼분의 일이 타버리고, 나무의 삼분의 일이 타버리고, 푸른 풀이 다 타버렸습니다.

첫 번째 심판은 지구상의 녹지와 삼림을 파괴하여, 인간에게 생태 및 환경 문제를 일으킵니다.

8,9절: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불타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그래서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바다에 사는, 생명이 있는 피조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부서졌습니다.

두 번째 심판은 바다를 오염시키고, 수백만 마리의 물고기를 죽입니다.

10,11절: 셋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큰 별 하나가 횃불처럼 타면서 하늘에서 떨어져서, 강들의 삼분의 일과 샘물들 위에 덮쳤습니다; 그 별의 이름은 '쑥'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물의 삼분의 일이 쑥이 되고; 많은 사람이 그 물을 마시고 죽었습니다. 그 물이 쓴 물로 변하였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심판은 땅의 샘과 강을 오염시킵니다.

예레미야 9:13-15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내가 그들 앞에 둔 내 법을 버리고, 내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며 준행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마음의 완악함과 그들의 우상을 좇았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쑥으로 백성을 먹이고,이 든 물을 마시게 하겠다".

이 심판의 이유는 사람의 완고함과 우상숭배와 불순종입니다.

예레미야 23:9-15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언자들에 관해서는……이 땅이 간음하는 자들로 가득하고……그 예언자와 제사장은 모두 더러워졌도다…...예언자 중에 내가 끔찍한 것을 보았노라……간음하고 거짓된 길로 행하며 그들이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을 도와서……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예언자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들에게 쑥을 먹이리라'고 하셨느니라."

설교자들은 죄 가운데 살고 있었고 백성들을 그들의 죄에서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많은 기독교 집단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도 쑥을 먹이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별은 또한 사람들을 고문하고 괴롭히는 것이 허용된 '쑥'이라는 이름의 악마인 타락한 천사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12절: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의 삼분의 일과 달의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타격을 입어서, 그것들의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고, 낮의 삼분의 일이 빛을 잃고, 밤도 역시 그렇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천체가 땅에 빛을 비추지 못하게 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봅니다.

땅에 내리는 이 네 가지 심판은 하나님께서 애굽에 내리신 재앙과 여러 면에서 유사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각 범주의 1/3만이 심판의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에 주목하십시오. 하나님은 은혜로우십니다. 그분은 여전히 ​​어떤 사람들이 그들의 죄에서 돌이키기를 바라면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분은 한 방에 모든 것을 완전히 끝내고 싶지 않습니다.

13절: 그리고 내가 보고 들으니, 날아가는 독수리 한 마리가 하늘 한가운데로 날면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화가 있다. 화가 있다. 땅 위에 사는 사람들에게 화가 있다. 아직도 세 천사가 불어야 할 나팔 소리가 남아 있다."

화는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선언됨을 주목하십시오 - 그들은, 아래에 있는 것에 마음을 두고, 이 땅에 관심을 두는 자들입니다.

당신이 자신을 신자라고 부르지만, 당신의 관심사가 이 땅에 있다면, 이 화가 당신에게 적용됩니다.

예수의 참 제자는 위에 있는 일에 정신을 쏟을 것입니다. 이 세상은 그의 집이 아니며 그는 이곳에서 순례자이자 나그네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 땅에 영원한 안식처를 마련한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장 9
9장

1-11절: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었습니다. 내가 보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이 하나 있는데;

그 별은 아비소스(바닥 없는 구덩이)를 여는 열쇠를 받았습니다. 그 별이 아비소스를 여니; 거기에서 큰 용광로의 연기와 같은 연기가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해와 하늘이 그 구덩이에서 나온 연기 때문에 어두워졌습니다. 그리고 그 연기 속에서 메뚜기들이 땅 위로 나왔습니다; 그것들은, 땅에 있는 전갈이 가진 것과 같은 권세를 받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땅에 있는 풀이나 푸성귀나 나무는 하나도 해하지 말고, 이마에 하나님의 도장이 찍히지 않은 사람만을 해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사람들을 죽이지는 말고, 다섯 달 동안 괴롭게만 하라는 허락이 내렸습니다; 그것들이 주는 고통은 마치 전갈이 사람을 쏠 때와 같은 고통이었습니다. 그 기간에는 그 사람들이 죽으려고 애써도 죽지 못하고; 죽기를 원해도 죽음이 그들을 피하여 달아날 것입니다. 그 메뚜기들의 모양은 전투 채비를 한 말들과 같고; 머리에는 금 면류관과 같은 것을 쓰고,그들의 얼굴은 사람의 얼굴과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여자의 머리털 같은 머리털이 있고, 이빨은 사자의 이빨과 같았습니다. 철로 된 가슴막이와 같은 가슴막이를 두르고; 그 날개 소리는 마치 전쟁터로 내닫는 많은 말이 끄는 병거 소리와 같았습니다. 그것들은 전갈과 같은 꼬리와 침이 달려 있었는데, 그 꼬리에는 다섯 달 동안 사람을 해할 수 있는 권세가 있었습니다. 그것들은아비소스의 사자를 자기들의 왕으로 떠받들었는데, 그 이름은 히브리 말로는 아바돈이요, 그리스 말로는 아볼루온 입니다.

이 별은 분명히 타락한 천사이며, 아마도 사탄일 것입니다. 이 타락한 천사는 하나님께서 어떤 마귀들을 가두는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습니다(벧전 3:19 참조). 모든 악마는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악마는 지구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만나신 마귀 군단이 든 사람을 기억하십니까? 그 사람 안에 있는 귀신들이 예수님께 그들을 무저갱에 보내지 말라고 간청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셨고 돼지 2000마리에게 보내자 그 돼지들은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바닥 없는 구덩이가 열릴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갇힌 마귀들이 지면으로 풀려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 허락하실 심판의 일부입니다. 마치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너희는 마귀의 충고를 따르길 원했다. 너희는 내 말보다 마귀의 말에 순종하기를 원했다. 좋다. 여기 지금 무저갱에 있는 네 친구들이 모두 너를 찾아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여기서 보는 것입니다.

구덩이에서 나오는 연기는 더러운 영의 오물과 배설물입니다. 메뚜기는, 땅의 전갈이 사람의 육신을 독살하는 힘을 가지고 있듯이, 사람의 마음을 독살하고 괴롭히는 권세를 받은 악령입니다. 이 악마들이 주는 고통은 너무 커서 많은 사람들이 죽고 싶어하지만, 자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악마들에 대한 묘사는 끔찍합니다 - 무서운 얼굴, 미친 여자처럼 휘날리는 머리카락, 사자의 이빨 - 모든 그림은 이 악마들에게 고통을 받을 사람들이 얼마나 끔찍할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들은 5개월 동안만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습니다. 왜 5개월 동안만일까요?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8장 23-35절에서 왕에게 4천만 루피(6억 9,800만원)를 용서받은 어떤 사람이 동료 종에게 고작 40루피(698원)를 용서하지 않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이 무자비한 사람은 동료 종의 멱살을 잡고 "갚아라"라고 말했습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화를 내며 무자비한 종을 고문하는 자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 고문자들은 오늘날 무자비한 신자들을 괴롭히도록 허용된 악마들을 상징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35절)".

이것은 심각한 일이며, 나는 누구의 피도 내 손에 묻히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자신을 신자나 성령세례를 받은 자나 무엇이라고 부르던지) 세상 어느 곳에서든지 단 한 사람이라도 용서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오랫동안 자신을 "신자"라고 생각했더라도) 절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 당신은 결코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당신은 전갈의 침을 가진 이 악마들에게 넘겨질 것입니다. 나는 주 예수님의 말씀을 믿기 때문에, 그것은 흑백처럼 분명합니다. 고문자들에게 넘겨진 그 남자는 한 번 용서받은 남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주인은 그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기 때문에, 그 용서를 철회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마귀에게 넘겨주기를 주저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여러분에게 간곡히 간청하는 것은 "당신의 원통함(당신의 쑥)을 버리십시오. 모든 사람을 아낌없이 용서하십시오. 여러분이 이 땅 위에서 단 한 사람이라도 용서하지 아니하면 당신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당신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무저갱의 천사의 이름인 아바돈 또는 아볼루온은 "파괴자"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사탄의 목적을 한 단어로 설명합니다 - 정욕이나 용서하지 않는 태도로 인간을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0장 19절에서 흑암의 권세를 상징하는 전갈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짓밟는 권세를 주었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귀는 이마에 하나님의 인이 찍혀 있지 않은 사람만 해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이마에 인을 찍을 수 없습니다.

12-17절: 첫째 재앙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두 가지 재앙이 더 닥쳐올 것입니다.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었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있는 금제단의 네 뿔에서 울려 나오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나팔을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큰 강 유프라테스에 매여 있는 네 천사를 풀어놓아 주어라" 하는 음성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네 천사가 풀려났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삼분의 일을 죽이기 위하여, 그 해, 그 달, 그 날, 그 때에 맞추어 예비된 이들입니다. 내가 들은 바로는 그 천사들이 거느린 기마대의 수는 이억이나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러한 환상 가운데서 말들과 그 위에 탄 사람들은 보았는데; 사람들은 붉은빛과 청색과 유황빛으로 된 가슴막이를 둘렀고, 말들은 머리가 사자의 머리와 같으며, 입에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을 내뿜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언급된 유프라테스 강은 이라크를 가로질러 흐르는 매우 넓은 강입니다. 네 명의 악마가 그 강에 결박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사람들이 서로 전쟁을 하도록 부추기는 것이 주된 목적인 악마들입니다. 중동은 말세에 끊임없는 전쟁의 중심이 될 것입니다. 이라크와 이란 사이에 거의 9년 동안, 그리고 그 후 이라크와 서방 열강 사이에 긴 전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미래에 유프라테스 강 주변에서 일어날 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네 명의 악마가 풀려나자마자, 큰 전쟁이 시작될 것이며 16장에 더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정확한 시간과 날과 달과 해는 이미 하나님이 정하셨다는 것을 읽습니다.

그때 2억의 사나운 마귀가 지면에 풀려나 2억 명의 군인을 사로잡아 전쟁을 일으키도록 선동합니다. 예수님은 지옥을 불과 유황이 있는 곳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악마들이 지상의 사람들에게 그러한 분위기를 가져오는 것을 봅니다.

18절: 그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 이 세 가지 재앙으로 사람의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6장 8절에서, 우리는 이미 '죽음'이 탄 '잿빛 말'에게 인류의 4분의 1이 죽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남은 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더 죽습니다. 그것은 세계 인구를 원래의 절반으로 줄입니다.

19절: 그 말들의 힘은 입과 꼬리에 있는데; 꼬리는 뱀과 같고, 또 꼬리에 머리가 달려 있어서; 그 머리로 사람을 해쳤습니다.

하나님은 이 마귀의 끔찍한 본성을 가르치기 위해 여기에서 다양한 상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마귀에게 자신을 노출시키고 하나님의 말씀의 경고를 무시하는 것은 끔찍합니다.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사탄의 말을 듣자, 마귀가 인류로 유입되는 문을 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 문을 닫을 수 있도록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은 우리입니다. 에베소서 4장 27절에서 우리는 어떠한 자리도 마귀에게 주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우리 삶에서 마귀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으면, 이 땅에서 많은 시련과 슬픔 속에서도 하나님 안에서 온전한 안식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20,21절: 이런 재앙에서 죽지 않고 살아 남은 사람들은 자기 손으로 한 일들을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귀신들에게나, 또는 보거나 듣거나 걸어 다니지 못하는, 금이나 은이나 구리나 돌이나 나무로 만든 우상들에게, 절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또한 살인과 점치는 일과 음행과 도둑질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세계 인구의 절반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도, 사람들은 여전히 ​​회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한 번, 지옥에 간 부자의 실화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부자의 대문 앞에 앉아있던 거지 나사로는 천국에 갔습니다. 부자는 지옥에 갔을 때, 아브라함에게 그(부자)의 다섯 형제들에게 회개하라고 말하기 위해 나사로를 땅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눅 16:30). 그 부자는 지옥에 갔을 때 사람들이 지옥에 가는 이유는 죄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죄를 회개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람들이 계속해서 탐닉했던 죄는 무엇이었습니까?

우선, 우상숭배 - 금과 은으로 만든 우상과, 돈과 지위와 세속적 명예를 우상으로 섬기는 행위입니다.

그런 다음 살인 - 그것은 증오를 포함합니다. 그들은 증오와 억울함과 살인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다음 주술 - 사탄 숭배는 20세기에 세계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훨씬 더 증가했습니다. 마법에는 또한 점성술, 손금 읽기, 운세, 별이 한 주 동안 예언하는 것을 읽기, 점괘판, 타로 카드 등이 포함됩니다. 마법을 뜻하는 그리스어 'Pharmakeia'는 영어 'Pharmacy'에서 유래했습니다. 따라서 이 단어를 '마약 판매자'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코카인, 마리화나, 헤로인과 같은 해로운 약물을 판매한 것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다음 부도덕 - 그것은 그들의 간음과 음행입니다. 텔레비전, 비디오 테이프, 인터넷에 음란물의 출현 이후 지난 50년 동안 이 모든 것이 세상에서 엄청나게 증가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둑질 -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가져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세계 인구의 절반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는 것은 그들의 마음이 완악해졌기 때문입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장 10
10장

1-3절: 또 나는 힘센 다른 천사 하나가 구름에 싸여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의 머리 위에는 무지개가 둘려 있고, 그 얼굴은 해와 같고, 발은 불기둥과 같았습니다; 그의 손에 작은 두루마리 하나를 펴서, 들고 있었습니다. 그는 오른 발로는 바다를 디디고, 왼발로는 땅을 디디고 서서; 마치 사자가 울부짖듯이 큰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그가 부르짖으니, 일곱 천둥이 각각 제 소리를 내면서 말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천사는 이 강력한 외모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분명히 천사장입니다. 그의 머리 위의 무지개는 하나님의 은혜의 상징입니다. 그는 작은 책을 펴고 있었습니다. 이 책은 5장에서 봉인되었습니다. 이제 일곱 인이 모두 떼지고 그 책이 펴졌습니다.

4절: 그 일곱 천둥이 말을 다 하였을 때에, 나는 그것을 기록하려고 하였습니다; 그 때에 나는 하늘로부터 나오는 음성을 들었는데, "그 일곱 천둥이 말한 것을 인봉하여라. 그것을 기록하지 말아라" 하였습니다.

요한은 일곱 개의 천둥소리가 말한 것을 분명히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기록하려 했습니다. 만일 그가 그랬다면, 그것도 이 특정한 시점에서 요한계시록의 일부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하나님은 그에게 그것을 기록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그 천둥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고 추측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16장 후반에 나오는 일곱 인과 일곱 나팔과 일곱 진노의 대접을 생각하면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끔찍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말씀하시는 어떤 것들은 우리만을 위한 것이므로, 다른 사람들과 나누면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5,6절: 그리고 내가 본 그 천사, 곧 바다와 땅을 디디고 서 있는 그 천사가 오른 손을 하늘로 쳐들고, 하늘과 그 안에 있는 것들과 땅과 그 안에 있는 것들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것들을 창조하시고, 영원무궁 하도록 살아 계시는 분을 두고, 이렇게 맹세하였습니다, "더 이상 지체되지 않을 것이다"

계시록에서, 바다는 항상 땅과 별개로 언급됩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말합니다. 바다는 태초에 창조된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생성되었습니다. 바다는 악령과 악마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나중에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에서 천사는 하늘과 땅과 바다를 창조하신 분을 두고 더 이상 지체가 없을 것이라고 맹세합니다 - 심판의 일은 속히 완료될 것입니다.

7절: 일곱째 천사가 불려고 하는 나팔 소리가 나는 날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종 예언자들에게 전하여 주신대로, 하나님의 비밀(mystery, 신비)이 이루어질 것이다."

일곱 겹 나팔의 일곱째 나팔이 울리면 '하나님의 비밀'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비밀은 무엇입니까? 신약성경에는 '비밀(mystery, 신비)'이라는 단어가 여러 번 등장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비밀을 의미합니다. 전혀 이해 할 수 없는 비밀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밝힐 수 있는 비밀입니다. 신약성경에 언급된 비밀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1. 경건의 비밀(딤전 3:16); 그리고

2. 죄악의 비밀(살후 2:7).

경건의 비밀은 진리입니다. 죄악의 비밀은 거짓입니다.

"경건의 비밀"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이 경건의 비밀의 첫 부분이 디모데전서 3:16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앞 절에서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버팀목"(15절)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진리인가요? 다음 구절에 언급된 것입니다: "경건의 비밀이 크도다, 그리스도는 육체로 나타나셨고 영으로는 깨끗하시니,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 전파된 바 되었느니라". 여기서 핵심적인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오셨지만 그분의 영은 순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죄를 지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이 걸으신 것처럼 우리도 걸을 수 있습니다(요일 2:6). 그것이 '진리'입니다. 교회는 이 진리를 옹호하는 기둥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랜 세월 동안 교회는 이 진리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2. 경건의 비밀의 두 번째 부분은 에베소서 5:31,32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3:16에서는 큰 비밀을 언급합니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위대한 비밀, 즉 그리스도와 교회가 한 몸이 되는 비밀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신부(교회)를 얻으셨고, 그 신부도 예수님이 걸으셨던 길을 걸으며 그녀의 영을 순결하게 유지합니다.

3. 비밀의 세 번째 부분은 고린도전서 15:51,52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오시고 마지막 나팔이 울릴 때 우리가 어떻게 눈 깜짝할 사이에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될 것인지를 알려 줍니다.

이제 우리는 "죄악의 비밀"(살후 2:7)에 이르렀습니다. 사탄도 육신을 입고 마침내 적그리스도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9-11절에서, 우리는 사탄이 적그리스도의 영으로 역사하여 거짓 표적과 기사와 불의의 속임수로 사람을 속임을 읽습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께서, 구원받기 위한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는 사람들에게 미혹하는 영향력을 보내신다는 것을 읽습니다 - "그들이 모두 거짓을 믿게 하십니다"(11절 - 직역).

여기서 말하는 거짓이란 무엇입니까? 사탄이 에덴동산에서 하와에게 한 거짓말입니다: "너는 죄를 짓고, 그냥 넘어갈 수 있다. 하나님은 너를 벌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사탄이 세상을 속인 가장 큰 거짓말입니다. 심지어 많은 신자들도 사탄의 거짓말을 믿습니다!! 죄악의 비밀은, 이 거짓말이 효과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을 속임수에 빠지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짓 기독교집단이 사탄에게 바벨론이라는 신부를 주는 것으로 절정에 이릅니다! 교회가 비밀이라고 불리는 것처럼, 그녀도 계시록 17:5에서 비밀이라고 합니다.

"거짓 교회는 "당신이 죄를 지을 수 있고 하나님은 그것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으실 것이다"라는 사탄의 거짓말을 선포하는 이 표시로 식별할 수 있습니다."

불경건한 무신론자들이 그렇게 설교했다면,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설교자들은 어떻게 회중에게 그런 설교를 할까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거룩함보다는 거짓 표적과 기적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까? 어떻게 그들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거룩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정말로 비밀입니다 - 죄악의 비밀입니다. 일곱째 나팔의 날에는, 모든 비밀이 끝나고 사탄의 속임수가 온 세상에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하나님의 종 선지자들이 그것을 선포합니다(계 10:7).

8-11절: 하늘로부터 들려 온 그 음성이 다시 내게 말하였습니다, "너는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그 천사의 손에 펴 있는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라." 그래서 내가 그 천사에게로 가서, 그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고 하니, 그는 나에게 말하기를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것은 너의 배에는 쓰겠지만, 너의 입에는 꿀같이 달 것이다" 하였습니다. 나는 그 천사의 손에서 그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서 삼켰습니다. 그것이 내 입에는 꿀같이 달았으나, 먹고 나니, 뱃속은 쓰라렸습니다. 그 때에 "너는 여러 백성과 민족과 언어와 왕들에 관해서 다시 예언을 하여야 한다"하는 음성이 내게 들려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한이 그 책을 먹었을 때, 그것이 그의 입에 꿀 같이 달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말씀이 그의 안에 들어왔을 때, 그것은 쓰라렸습니다. 이것은 말씀에도 진리, 즉 우리의 죄를 심판하는 진리가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은혜뿐만 아니라 진리이기도 합니다. 계시록에서, 우리는 은혜와 심판에 대한 그림이 번갈아 등장합니다. 책 전체에 걸쳐 단맛과 쓴맛이 번갈아 나타납니다.

우리는 또한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설교)하는 올바른 방법을 봅니다. 우리는 먼저 주님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먹고 우리 자신이 먼저 소화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을 위한 예언적인 말씀을 주실 것입니다. 이것은 대부분의 설교자들이 인상적인 설교를 하기 위해 단순히 책을 공부하고, 테이프를 듣고, 머리를 써서 그들의 메시지를 준비하는 방식과 매우 다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그 말씀의 달콤한 부분인 "은혜"만 취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권고가 우리의 인격에 스며들게 하지 않고도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입에 영원히 담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권고가 우리 인격에 침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서 발견한 죄를 심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심판은 우리에게서 먼저 시작해야 합니다"(벧전 4:17).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껌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씹습니다. 달콤하기 때문에, 계속 씹고 씹습니다. 그리고 나서 뱉어냅니다!! 그것은 소화되기 위해 결코 그들의 마음에 내려 가지 않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판단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듣는 말씀을 소화되게 하신 것은 많은 쓰라린 경험을 통해서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쓰라린 경험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도 경험할 것입니다(고후 1:4). 이렇게 해서만이 우리는 우리 세대에 대한 예언적 사역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요한이 말씀을 소화한 후에, "이제 너는 예언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앞서 주님께서 그가 들을 것을 기록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과 대조해 보십시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공유해야 할 것과 공유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한때 셋째 하늘로 들려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14년 동안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언급할 때도 그가 말한 전부는, "나는 사람이 말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고후 12:4) 이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개인적으로 말씀하신 것과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을 분명히 구분했습니다. 11장부터, 우리는 요한이 그 책에서 소화한 것을 예언하는 것을 봅니다.

장 11
11장

요한계시록은 시간순서로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6장에서 미래의 조감도를 받았고, 그 이후에 세부 사항을 점차적으로 채워갑니다. 우리가 11장의 첫 부분에서 보는 것은 실제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전 마지막 3년 반 동안 일어난 일입니다.

1절: 나는 지팡이와 같은 측량자 하나를 받았는데; 그 때에 이런 말씀이 내게 들려 왔습니다, "일어서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을 측량하고, 성전에서 예배하는 사람들을 세어라."

솔로몬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린 반석 위에 여호와의 전을 건축했습니다(대하 3:1). 그 성전은 바벨론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유대인들에 의해 재건되었고 나중에 헤롯에 의해 개선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서기 70년에 로마 군대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6세기 후인 서기 691년에, 아랍인들이 팔레스타인을 통치했을 때, 칼리프 중 한 명이 그 사원 자리에 모스크를 지었고, 그것을 '바위의 돔'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모스크가 그곳에 없었다면, 유대인들은 오래 전에 그곳에 성전을 지었을 것입니다.

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의 다른 지역에 성전을 짓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야곱의 장막의 재산을 회복하고 그의 처소를 긍휼히 여기리라; 그 성읍이 그 폐허가 된 곳에 재건되고, 궁궐 (성전)이 제자리에 설 것이요"(렘 30:18).

그리고 정당한 장소는 현재 모스크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의 일부가 여전히 "이방인들에게(비유대인) 짓밟히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이와 같이 이방인의 때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이는 예수께서 누가복음 21장 24절에서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짓밟히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예루살렘은 유대인들이 장악했다는 의미에서, 더 이상 이방인들에게 짓밟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의 가장 신성한 부분(유대인에게)은 여전히 ​​이방인에게 밟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곳에 갈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크신 지혜로 허락하신 놀라운 상황입니다.

요한은 가장 거룩한 곳인 하나님의 성전("내부 성소" - 난외 번역)과 제단과 그곳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구약의 성전은 바깥뜰, 성소, 지성소의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지성소는 휘장으로 막혀 있었습니다, 휘장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찢어졌습니다. 이곳이 내부 성소였습니다.

2절: 그러나 그 성소의 바깥 틀은 측량하지 말고, 내버려 두어라. 그것은 이방 사람들에게 내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 거룩한 도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을 것이다.

거룩한 성은 이방인들의 발 아래 계속 짓밟힐 것입니다. 마태복음 23장 37,38절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밖으로 나가서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내가 몇 번이나 너희 자녀를 모으려 하였으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으니 이제 너희 집이 황폐하게 남을 것이다"

그분이 성전을 그들의 집이라고 하신 것에 주목하십시오. 불과 며칠 전에 그분은 성전에 들어가 "내 집"이라고 부르셨습니다(마 21:13). 주님은 그 성전이 그분의 집이 되기를 원하셨지만, 유대인들은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오셨다"고 말합니다(마 24:1). 그분은 다시는 그곳에 가지 않으셨습니다. 이 시점에서 예수님이 성전에서 물러난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에 관한 한, 그분은 그 성전과 더 이상 관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미래에 적그리스도가 유대인들과 언약을 맺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으로 나타내는"(살후 2:4) 날이 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을 때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성전을 떠나시며 "이제부터 이것은 너희 집이다. 나는 떠나겠다. 너희 집이 황폐해질 것이다(마 23:3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적그리스도가 그 성전에 들어가면, 그들은 그를 영접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는 그를 영접하리라(요 5:43)"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의 많은 예언들이 아직 이스라엘 나라에서 문자 그대로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우리는 그것들을 우리의 삶에 영적으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바깥뜰이 아니라 내부 성소만 측량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믿는 자"라고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이 아니라, 찢어진 휘장을 통해 지성소에 들어가는 사람들만을 세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우리를 위한 이 구절의 영적인 적용입니다.

요한계시록 11장 2절에 사용된 단어는 매우 강력합니다. "바깥 뜰은 내버려 두어라"고 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미지근하므로 버려질 위기에 있었습니다(계 3:17).

요한은 내부 성소에서 예배하는 자들만 측량하라고 들었습니다. 지성소에 있는 사람들은 휘장을 통과하고 스스로를 심판하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기는 자입니다.

2절과 3절에 언급된 42개월(1260일)의 기간은 계시록에 여러 번 나옵니다. 예루살렘은 지금 이스라엘의 손에 있습니다. 그러나 장차 예루살렘이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인 42개월 동안, 적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을 때가 옵니다.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재림하시기 전 마지막 3년 반 동안, 이 "거룩한 성을 발로 밟는 것"이 ​​다시 있을 것입니다.

다니엘서 9장에서, 우리는 다니엘이 바벨론 포로 후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던 때를 읽었습니다. 여기서 예언은 예루살렘의 회복을 넘어서 미래까지도 내다봅니다. "당신의 백성을 위해 칠십 이레(또는 "일곱 단위" - 여백)가 결정되었습니다"(단 9:24-27). 여기에서 이 단어는 '일흔 이레' 또는 490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을 위하여 정하신 490년을 가리켜, "반역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속죄하며, 영원한 의가 이루어지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죄악에 대한 속죄가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영원한 의를 가져오는 것"은 아직 미래에 있습니다. 2000년의 교회 시대가 그 둘 사이에 들어왔습니다. 다니엘은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중건하라는 조서를 내림(단 9:25)"으로부터 해를 계산하는 것이 시작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 성전이 아닌, 예루살렘 도시입니다.

우리는 느헤미야 2장에서 "아닥사스다 왕 이십년 니산월"(느 2:1)에 예루살렘을 재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읽었습니다 - 이는 기원전 446년경입니다. 다니엘은 예루살렘을 재건하라는 명령이 내려진 날부터 "왕 메시아"가 오실 때까지가 정확히 '7 이레와 62 이레'(25절), 즉 각 360일씩 예언적 483년, 즉 173,880일이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를 양력으로 환산하면 476년이 되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해로 이어집니다. 이 구약의 예언은 매우 정확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누군가가 예수께서 지상에 계실 때 다니엘 9:24,25을 연구했다면 나사렛 예수가 참으로 메시아임을 분명히 알았을 것입니다.

69 이레의 기간은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 7 이레의 한 부분과 62 이레의 또 다른 부분입니다. 처음 49(7x7)년 동안 예루살렘은 재건될 것입니다 - "그 성은 환난의 때에 광장과 해자(성 주위에 땅을 파고 물을 채워 놓은 것)로 다시 건축될 것입니다"(25절). 또 다른 62이레(434년) 후에 "메시아가 끊어질 것입니다"(26절) - 즉, 그분은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입니다. 같은 구절에서 메시아에게 "아무도 없을 것(문자 그대로)"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그분이 십자가 위에서 사람과 심지어 아버지에게도 완전히 버림을 당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예언은 매우 정확했습니다.

26절에서, 우리는 십자가 못 박히신 사건 후에 "장차 한 왕의 백성들이 와서 예루살렘 성과 그 성전을 파괴할 것이다"라고 읽었습니다. 장차 올 한 왕은 분명히 세계의 통치자요 적그리스도입니다. 그 왕의 "백성"은 로마 제국이었던 1세기의 세계 통치자들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주후 70년에 성취되었습니다.

이것은 원래 언급된 490년 중 7년이라는 기간이 남아 있습니다. 다니엘 9장 27절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적그리스도)가 7(년) 동안 많은(유대인)과 견고한 언약을 세우리라." 그것이 마지막 7년의 기간입니다. 적그리스도는 유대인들에게 자신을 메시아로 나타내고, 유대인들은 그를 받아들일 것입니다.

다니엘 9:27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그 주의 중간에, 그는 희생제사와 소제물을 중단하고; 그리고 황폐하게 하는 자가 가증한 것의 날개를 타고 오리니, 마침내는 완전한 멸망이 임하리라, 작정된 것이 황폐하게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이 7년 기간의 중간(42개월 후)에, 적그리스도는 유대인과의 언약을 깨뜨릴 것입니다. 나머지 42개월(1260일) 동안 적그리스도가 통치할 것입니다(계시록 11:2,3 참조). 적그리스도의 통치가 3년 반 동안 있었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기간과 정확히 같은 기간이 될 것이라는 점은 중요합니다. 적그리스도는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모방할 것입니다.

여기서 언급된 멸망의 가증한 것은 마태복음 24장 15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며, 성전에 앉아 있는 적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 기간이 끝나면 적그리스도가 "완전히 멸망"될 것이라고 여기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3,4절: 나는 내 두 증인에게 예언하는 능력을 줄 것이다. 그들은 천이백육십 일 동안 상복을 입고 예언할 것이다. 그들은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님 앞에 서 있는 올리브 나무 두 그루요, 촛대 두 개입니다.

1260일이라는 전체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예언할 두 증인을 두실 것입니다. 그들은 굵은 베옷을 입게 될 것입니다 - 이것은 겸손과 단순한 생활 방식과 유대인의 불경건함에 대한 슬픔을 의미합니다.

이 선지자들을 올리브 나무라고 합니다. 스가랴 4장 11-14절에서, 이 두 올리브 나무에 대해 "기름 부음을 받은 두 자, 곧 온 땅의 여호와 곁에 서있는 자"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5,6절: 그들을 해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그 원수들을 삼켜 버릴 것입니다; 그들을 해하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예언 활동을 하는 동안에, 하늘을 닫아 비가 내리지 못하게 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물을 피로 변하게 하는 권세와, 그들이 원하는 대로 몇 번이든지, 어떤 재앙으로든지, 땅을 칠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구약에서, 우리는 원수를 불로 멸망시킨 두 명의 선지자에 대해 읽었습니다 - 모세와 엘리야(민 16:35; 왕하 1:10). 엘리야는 하늘을 닫아 42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게 한 사람이기도 합니다(약 5:17). 그리고 모세는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재앙으로 애굽을 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모세와 엘리야가 무엇을 나타냈는지 주목하십시오.

모세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온 이스라엘 백성이 그릇 행하여 우상을 섬기고 간음하였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그들에게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오라"(출 32:26)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모세의 영(spirit,정신)이었습니다.

엘리야도 온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던 시대에 살았습니다. 어느 날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갈멜 산 꼭대기에 모아 모세가 말한 것을 거의 그대로 전했습니다, "너희가 언제까지 울타리 위에 앉아 있으려느냐? 여호와가 하나님이면, 그분을 따르라. 만일 너희의 우상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좇으라"(왕상 18:21).

엘리야는 이스라엘이 역사상 가장 사악한 왕과 왕비의 통치를 받고 있을 때 살았습니다. 아합 왕은 악을 행하기 위해 사탄에게 자신을 팔았습니다(왕상 21:25), 그는 적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그리고 그의 아내 이세벨은 바벨론의 음녀, 거짓 교회의 모형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2장 20절에서, 이세벨이라는 이름으로 거짓 예언자를 부르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세도 바로(적그리스도의 또 다른 유형)에게 예언하고 그와 그의 마술사들을 반대하고 저항했습니다.

구약에 언급된 마지막 두 선지자는 모세와 엘리야입니다(말 4:4,5).

마지막 날의 두 선지자는, 42개월 동안, 모세와 엘리야의 불타고 타협하지 않는 영으로 예언할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적에게 불을 내려달라고 구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에 오셨으나 사마리아인들이 영접하지 아니하매, 야고보와 요한이 (성경을 잘 연구하고, 엘리야가 그의 원수들에게 불을 내렸던 곳이 사마리아 인 줄 알고 있었음)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하늘에서 내려 엘리야처럼 그들을 멸하도록 할까요?"(눅 9:54 - 여백). 주님은 "너희는 너희가 무슨 영을 가졌는지 알지 못하느니라, 인자가 온 것은 사람의 생명을 멸하러 온 것이 아니요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새 언약과 옛 언약의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불을 내려 원수를 멸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과, "주님,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말한 스데반의 발자취를 따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 달라고 구하지 아니하며, 하늘을 닫지 아니하며 땅에 재앙을 내려 달라고 구하지 아니할지라도, 우리는 모세와 엘리야의 영으로 서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사람들에게 "누가 여호와의 편에 있습니까? 그 사람은 나에게로 나오도록 하십시오"라고 도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죽은 교단의 한가운데로 들어가서 교단을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바뀔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들 밖에 서서 (모세와 엘리야처럼)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여화와의 편에 서 있다면, 바벨론에서 나와, 나와 함께 서십시오. 오늘 당신이 따를 것을 선택하십시오 -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아니면 사람의 전통입니까?"

적그리스도가 일어나기 전, 말세에도 그러할 것입니다. 말세에 교회에는 모세와 엘리야의 사역이 있을 것입니다.

7절: 이 두 선지자가 증언을 마칠 때, 아비소스(무저갱)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싸워 이기고, 그들을 죽일 것입니다.

이 짐승은 적그리스도입니다, 즉 사탄에 사로잡혀 지배하는 사람입니다 - 그에 대해서는 13장에서 더 읽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가 "이 선지자들이 증언을 마칠" 때에만 죽일 수 있음을 주목하십시오. 하나님은 이 선지자들이 1260일 동안 예언하도록 정하셨습니다 - 그래서 그들은 그 하루 전에도 죽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선지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은 시편 139:13-16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내 장기를 창조하시고, 내 어머니 뱃속에서 나를 지으셨습니다……내 뼈 하나하나도, 주님 앞에서는 숨길 수 없습니다. 나의 형질이 갖추어지기도 전부터, 주님께서는 나를 보고 계셨으며, 나에게 정하여진 날들이 아직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주님의 책에 다 기록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지상에서의 첫날을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은 이미 그를 위해 계획된 날수를 결정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온전한 기간을 살게 될 것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을 위해 살고, 죄 가운데 살기 때문에 때가 되기 전에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사는 사람은 그들의 온전한 기간을 살게 될 것입니다.

적그리스도는 이 두 선지자의 때가 끝나기 전에 그들을 죽이려고 할 수 있지만, 그는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약속된 1260일의 예언을 이행할 것입니다!! 그들이 간증을 마친 후에야, 짐승이 "그들과 싸워 이기고 그들을 죽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충성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면 당신 평생의 일이 끝날 때까지 불사신이 될 것입니다. 이보다 더 안전한 지구상의 생명체는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종이 되기 위해 전임 사역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바울은 전 시간 사역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생계를 꾸리기 위해 세속적인 직업(텐트 만드는 일)을 가졌습니다. 모든 신자는 지상에서의 직업이 무엇이든 간에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1260일 동안 공생애를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7장 30절에 보면, 예수님의 원수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분을 붙잡을 수 없었습니다. 왜요?

예수님이 그들보다 더 똑똑했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그저 운이 좋게 그들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왔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거기에 주어진 이유는 단순히 "그분의 때가 오지 않았다"입니다. 그분에 관한 책에 기록된 날수가 아직 다 차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8장 2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강력한 말씀을 하셨으나, 다시 그분을 붙잡고 싶어도 아무도 그분을 붙잡을 수 없었습니다, "아직 그분의 때가 오지 않았다"는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면, 아무도 우리를 만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두려움 없이 이 땅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그러나 이 약속은 오직 마음을 다한 제자를 위한 것이지, 타협하고, 미온적이고, 돈을 사랑하는 "신자들"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약속은, 하나님 앞에 살고 명예와 사람들의 인정에 관심이 없는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당신이 그와 같다면, 당신에 대하여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적들이 그를 죽일 수 없었습니다. 마귀가 그를 죽이려고 했지만, 죽이지 못했습니다.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라고 기록될 것입니다.

마침내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때가 되자,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군인들에게 "내가 여기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의 두 선지자를 위한 하나님의 때가 오면, 그들도 떠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과 나를 위한 하나님의 시간이 왔을 때, 의사와 외과의사들이 이 땅에서 우리의 생명을 연장하는 것을 원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주님, 감사합니다. 나의 증거를 마쳤습니다"라고 말하며 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

다윗에 대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기 세대를 섬기는 일을 마치고, 잠이 들더라"(행 13:36)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을 떠나기 전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 세대를 섬기는 일을 마쳤다는 이런 말을 우리 모두에 대해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8절: 그들의 시체는 그 큰 도시(city, 성)의 거리에 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 도시는 신비롭게도 소돔 또는 이집트라고도 불리는데, 곧 그들의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곳입니다.

이 두 선지자는 죽은 후에 장사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대중에게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그들의 시체는 도시의 거리에 있을 것입니다. 그 도시는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입니다 - 그것은 예루살렘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이곳은 영적인 음행과 영적인 간음으로 가득 찬 소돔과 같이 되었으므로 여기에서는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합니다. 그것은 바벨론과 같이 "큰 성(city, 도시)"이 되었기 때문에 "큰 성"이라고 불립니다(계 18:2).

그리스도인의 간증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곳인 예루살렘으로 시작하여 바벨론으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집단에서 하나님의 기름부음과 능력으로 시작하는 것의 많은 일들이 몇 년 후에 영적 음행으로 끝나고, 사람들의 눈에는 크게 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거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9,10절: 백성들과 종족과 방언과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사흘 반 동안 그 두 예언자의 시체를 볼 것이며, 그 시체가 무덤에 안장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이 그 시체를 두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서로 선물을 보낼 것입니다. 그것은 이 두 예언자가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을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세계의 모든 나라 사람들은 위성 TV를 통해 예루살렘 거리에 누워 있는 두 시체를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황금 시간대 뉴스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이 두 예언자가 공개적으로 수치를 당하는 것을 보고 기뻐할 것입니다. 온 세상이 두 선지자를 미워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돈에 대한 사랑, 세상적인 것에 대한 사랑, 우상 숭배에 반대하는 끊임없는 설교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예언자는 세상 사람들과 세상적인 신자들과 종교적인 바리새인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이 두 선지자의 소박함, 겸손함, 충실함, 용기, 그리고 그들이 그들의 사역을 완수했다는 사실 등 그들의 정신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까? 우리도 이 세상의 삶이 끝날 때,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게 하라고 주신 일을 제가 마쳤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웠고, 믿음을 지켰고, 달려갈 길을 마쳤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요 17:4; 딤후 4:7).

11,12절: 그러나 사흘 반이 지난 뒤에, 하나님에게서 생명의 기운이 나와서 그들 속으로 들어가니 그들이 제 발로 일어섰습니다.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두 예언자가, 하늘로부터 자기들에게 "이리로 올라오너라"하는 큰 소리가 울려오는 것을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이 그것을 지켜 보았습니다.

두 선지자가 바로 예루살렘 거리에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입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은 주님의 면전으로 올려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적들이 그것을 지켜볼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일반적으로 마지막 부활 때만 그분의 종들의 정당성을 입증하실 것이며, 그 전에는 그렇지 않을 것임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충실했는데도 땅에서 여러 가지 모욕을 당하였거나, 사람들이 우리를 욕하고 우리의 메시지가 어렵고 괴롭다고 말하며 또한 그들이 우리를 미워하고 우리를 비방하였으나 우리가 그들을 용서하고 참았어도, 하나님은 우리의 지상 생활 동안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정당성을 입증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할 때, 온 세상은 우리가 하나님의 참되고 신실한 종이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릴 의향이 있습니까? 아니면 지금 세상과 교회로부터 정당화되고 인정받기를 원하십니까? 우리 주님도 아직까지 정당성을 입증 받지 못하셨습니다. 왜 그분보다 앞서 정당성을 입증 받아야 합니까?

13절: 바로 그 때에 큰 지진이 일어나서, 그 도시의 십분의 일이 무너졌는데, 그 지진으로 사람이 칠천 명이나 죽었습니다. 그리고 살아 남은 사람은 두려움에 싸여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 사람들은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지만, 여전히 그들의 삶을 바꾸고자 하는 열망은 없었습니다.

14,15절: 둘째 재난은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이제 셋째 재난이 곧 닥칠 것입니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 때에 하늘에서 큰 소리가 났습니다, "세상 나라는 우리 주님의 것이 되고,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다; 주님께서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다."

이때가 바로 우리 주님께서 지상에 천년 통치를 시작하실 때입니다. 사탄은 한때 예수님에게 "천하 만국"을 보여주고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라고 말했습니다(마 4:8,9). 예수님은 사탄을 꾸짖으시고 사탄의 제안을 거절하셨습니다. 대신에 그분은 고통스러운 방법, 즉 아버지의 방법으로 세상을 되찾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마침내, 2000년이 지난 후에, 아버지께로부터 세상 나라를 받으셨습니다. 사탄이 예수님에게 보여준 것은 세상의 왕국들(복수형)임을 주목하십시오. 세상은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수천 개의 왕국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에 예수님이 아버지께로부터 받는 세상의 왕국은 단 하나의 왕국(단수)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언젠가 빌라도에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요,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울 것이다"(요 18:3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같은 말을 합니다: "우리의 왕국은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악마에게서 아무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악마가 우리에게 우리의 신념을 약간만 타협하라고 촉구하면서 우리에게 제공하는 세상의 영광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길을 택하면, 언젠가 우리도 아버지께 나라를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적은 무리여,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눅 12:32)."

그렇다면 왜 우리는 악마에게서 그것을 원합니까? 왜 우리는 마귀가 제공하는 이 세상의 영예를 원합니까?

16-18절: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 보좌에 앉아 있는 스물네 장로도 엎드려서, 하나님께 경배하고, 말하였습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던 전능하신 분, 주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님께서는 그 크신 권능을 잡으셔서 다스리기 시작하셨습니다. 열방이 이것에 분개하였으나 오히려 그들이 주님의 진노를 샀습니다. 이제는 죽은 사람들이 심판을 받을 때가 왔습니다. 주님의 종 예언자들과 성도들과 작은 사람이든 큰 사람이든 주님 이름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실 때가 왔습니다.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킬 때가 왔습니다."

여기에 하늘의 예배와 찬양에 대한 그림이 하나 더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보좌에 앉은 24장로들이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합니다. 우리는 이 장로들이 만물을 성취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가운데 하늘의 만군을 거듭거듭 이끌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요한계시록에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에 대한 언급이 자주 등장합니다. 온 하늘은 하나님이 주권자이시며 모든 곳에서 만물을 다스리시며, 그분은 항상 만물을 완전히 통제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찬양합니다 - 그래서 천국은 완전한 평화의 장소입니다. 우리도 그분을 전능하신 분으로 인정한다면 우리 삶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찬양은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위해 계속됩니다. 세계의 모든 나라가 하나님께 반역했으며, 하나님은 수천 년 동안 그들에 대해 오래 참으셨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그분의 진노가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인내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분이 사람들에게 회개에 이르도록 하신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마침내 "주의 진노가 임하였나이다"라는 말씀이 성취될 때가 올 것입니다. 아직은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지금 은혜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주님의 은혜로운 해가 끝날 것입니다.

이제 예수께서 요한복음 5장 28,29절에서 말씀하신 때가 이르렀습니다, 모든 죽은 자는 그분의 음성을 들을 때, "선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두 번의 부활이 있을 것입니다 - 하나는 생명의 부활, 하나는 심판의 부활입니다. 그러나 두 번의 부활은 천 년 간격으로 나뉘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두 부활은 장로들의 찬양에서 여기 함께 나타납니다: "죽은 자들을 심판하실 때가 이르렀사오니" 그리고 "주의 종들에게 상을 줄 때가 되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상급은 지상 생활에 충실한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종들에 대한 것임을 주목하십시오. 말라기 3:16-18절을 보면,

"그 때에 주님께서는, 주님을 경외한 사람들이 서로 주고받는 말을 똑똑히 들으셨다. 그 가운데서도 주님을 경외하며, 주님의 이름을 존중하는 사람들을 당신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내가 지정한 날에, 그들은 나의 특별한 소유가 되며, 사람이 효도하는 자식을 아끼듯이, 내가 그들을 아끼겠다. 그 때에야 너희가 다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않는 자를 비로소 분별할 것이다.'"

오늘날에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과 그분을 섬기지 않는 사람을 구별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는 외부만 볼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을 구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람이 어떤 동기로 하나님을 섬기는지 모릅니다. 오늘날, 우리는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인지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것인지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사람의 모든 열망이 또한 그 자신의 명예에 대한 욕망인지, 아니면 돈에 대한 욕망인지, 아니면 다른 것에 대한 욕망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마음에 하늘의 탐조등을 비추실 날이 오고, 그 날에는 모든 마음의 숨은 동기와 태도가 드러날 것입니다. 그래야만 누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겼고 누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봉사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날에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지금 먼저 된 자가 그 때에 나중 될 자가 많으리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훌륭한 종으로 여겼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의 내면과 동기를 드러내실 때 그들의 내면이 상당히 부패했음이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가 높이 여겼던 많은 신자들이 위선자로 비춰질 것이며 맨 나중이 될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의로운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상을 받는 자 중에 으뜸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말(speech) 문제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우리가 말하는 모든 부주의한 말을 심판의 날에 설명해야 할 것이다"(마 12:3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라기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기억의 책"에, 그분은 서로에게 말하는 방식에서 그분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하신다는 것을 상기시켜줍니다. 나는 일생 동안 사적인 대화와 사적인 서신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자들을 거의 만나지 못했는데, 아마도 내가 만난 모든 거듭난 신자의 1% 미만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억의 책"은 아주 얇은 책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기록된 사람들은 주님께서 그분의 특별한 보석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문제를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은 누가복음 14:12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점심이나 만찬을 베풀 때에, 네 친구나 네 형제나 네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 사람들을 부르지 말아라. 그렇게 하면 그들도 너를 도로 초대하여 네게 되갚아, 네 은공이 없어질 것이다. 너희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절름발이와 앉은뱅이 눈먼 자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은 너희에게 갚을 수단이 없기 때문에 너희가 복을 받을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하나님께서 네게 갚아 주실 것이다."

여기에 신자의 1% 미만이 순종하려고 애쓰는 예수님의 또 다른 명령이 있습니다. 요점은 다리 저는 사람과 눈먼 사람을 찾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갚을 수 없는 사람들을 돕고 축복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이 갚음을 받지 못할 때, 의인의 부활 때에 갚음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때는 이 땅에서 돈이나 명예 등 자기 이익을 구하지 않고 선을 행한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때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에 있어서도, 오늘 먼저 된 자들이 그 날에는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들이 먼저 되는 자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이제 이 땅을 타락시키는 자들을 멸망시킬 때가 왔다는 것을 읽습니다. 계시록 19장 2절에서, 우리는 큰 음녀 바벨론, 즉 그리스도와 약혼했다고 주장하지만 자기의 정욕을 따라 사는 음녀 기독교가 부도덕함으로 땅을 타락시켰다는 것을 읽습니다. 영적 부도덕이 땅을 타락시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7절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멸하실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식으로든 교회를 타락시키면, 어느 날 주님께서 그를 멸하실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하나님의 집에 부패를 가져왔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즉시 멸하셨습니다(행 5장). 이러한 즉각적인 심판이 지난 2000년 동안 아주 많이는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부패한 사람들이 그것(심판)을 모면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아니요.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망시키실 날이 머지않아 올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2절에 보면, "옛 사람은 속임수의 정욕에 따라 부패했다"고 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부패는 정욕(lust) 때문입니다(벧후 1:4). 이제 하나님은 정욕을 따라 살며 땅을 타락시킨 자들을 멸하십니다.

19절: 그러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고; 성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였습니다. 그 때에 번개가 치고, 요란한 소리와 천둥소리가 나고, 지진이 일어나고, 큰 우박이 쏟아졌습니다.

계시록 21장 22절을 보면,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과 어린 양이 그 도성의 성전이기 때문에, 그 도성에는 성전이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언급된 것은 분명히 상징적인 언어입니다. 여기서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언약궤는 그분의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천둥과 지진 등은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합니다.

장 12
12장

1-2절: 그리고 하늘에 큰 표징이 나타났는데: 한 여자가 해를 둘러 걸치고, 달을 그 발 밑에 밟고, 열두 별이 박힌 면류관을 머리에 쓰고 있었습니다. 이 여자는 아이를 배고 있었는데, 해산의 진통과 괴로움으로 울고 있었습니다.

이 여자는 누구를 상징합니까?

성경을 해석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성경과 성경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해와 달과 12개의 별"이 사람들의 공동체를 묘사하는 데 사용된 곳은 단 한 곳뿐입니다 - 그곳은 창세기 37:9에서, 요셉이 그의 형들에게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면서,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했습니다"라고 말한 부분입니다. 아버지는 그 뜻을 이해하고 "나와 네 어머니와 열한 형제가 와서 네 앞에 땅에 엎드려 절을 할 것이란 말이냐?"라고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국 이집트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해와 달과 12개의 별을 야곱의 가족 묘사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오는 여자는 사실 그 가문에서 나온 이스라엘 민족의 상징입니다.

그 여자는 진통 중이었습니다. 미가서 5장 2-4절에서, "베들레헴아....너에게서 한 사람이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의 통치자로 나올 것이다... 해산하는 자가 아이를 낳을 때까지 그들(이스라엘 백성)을 버려두실 것이다. 그 후에는 그의 형제들(회심할 이방인)의 남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일어나서 주님의 능력으로 그의 양 떼를 먹일 것입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여자 이스라엘이 진통을 겪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낳는 것을 봅니다(롬 9:4,5 참조).

3절: 또 다른 표징이 하늘에서 나타났습니다; 머리 일곱 개와 뿔 열 개가 달린 커다란 붉은 용 한 마리가 있는데, 그 머리에는 왕관을 일곱 개 쓰고 있었습니다.

이 용은 사탄입니다(9절). 우리는 13장을 공부할 때 일곱 머리와 열 뿔에 대해 자세히 공부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것들은 세계 정부를 상징하고 이것은 세상 정부에 대한 사탄의 통제를 의미한다고 말하겠습니다. 우리는 다니엘 10장에서 페르시아 나라를 다스리는 악령에 대해 읽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6장 12절에서, 우리는 하늘에 앉아 있는 세상의 통치자들과 씨름한다고 읽었습니다. 실제 세계의 통치자는 세계의 수도에 있지 않습니다. 그 지도자들은 하늘에 있는 영의 세력이 조종하는 실에 의해 당겨지는 꼭두각시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권세 있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 그 악한 영들의 활동을 결박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모든 국가의 정부 지도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용은 붉은색입니다 - 피와 살인의 색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 44절에서 마귀는 살인한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사탄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붉은 용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창조하셨을 때, 그는 이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습니다. 우리는 에스겔 28장 13절에서 그가 한때 하나님의 동산을 다스리던 기름부음 받은 그룹이었다고 읽습니다. 그러나 교만과 반항적인 태도가 마음에 들어오자, 그는 끔찍한 용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천사처럼 순결한 자도 마음에 교만을 품으면 용과 같이 될 수 있습니다. 또는 권위에 대한 반역의 영이 여러분의 마음에 조금 들어오게 한다면 - 그 권위가 여러분의 부모이든, 사무실의 상사이든, 교회의 장로이든 - 그러면 여러분은 곧 용과 같이 될 것입니다. 사탄은, 성령이 사람들을 예수님처럼 만들려고 하는 것처럼, 사람들을 자기와 같이 만들려고 영원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교만이나 반역의 영으로 사람들을 감염시킬 수 있을 때마다 사람들을 자기와 같이 만드는 데 성공합니다.

4절: 그 용은 그 꼬리로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휩쓸어서, 땅으로 내던졌습니다. 그 용은 막 해산하려고 하는 그 여자 앞에 서서, 그 여자가 아기를 낳기만 하면 삼켜 버리려고 노리고 있었습니다.

천사들은 욥기 38:7과 요한계시록 9:1,2에서 별이라고 불리기 때문에, 이것은 아마도 천사 무리의 3분의 1이 사탄의 반역에 가담했음을 나타냅니다. 이사야서 9:15에서는 속이는 선지자를 "꼬리"라고 합니다. 따라서 용의 꼬리는 루시퍼가, 악마가 된 수백만 명의 하나님의 천사들을 미혹하도록 이끌었던 루시퍼의 속임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용은 곧 해산할 여자 앞에 섰습니다. 이는 그 여자가 해산할 때 그 아기를 삼키려 함이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역사 전체에 걸쳐 부분적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출애굽기 1:16을 보면, 바로가 이스라엘 산파들에게 명령하여 갓난 남자는 다 태어나는 즉시 죽이라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탄은 항상 유대 민족을 대적해 왔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아가 그들을 통해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스더서에서 우리는 사탄에게서 영향을 받은 또 다른 사람 하만이 유대 민족 전체를 멸망시키려 했다는 것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하만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남자-아이를 삼키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용의 이 그림이 부분적으로 많이 성취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바로를 통해서든, 하만을 통해서든, 히틀러를 통해서든, 또는 다른 세계 지도자를 통해서든 유대 민족을 멸망시키는데 성공한 적이 없습니다.

사탄은 하나님께서 에덴에서 "여자의 자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메시야가 태어날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남자-아이를 파괴하기를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사탄은 헤롯을 사주하여 그의 군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 두 살 미만의 유대인 남자 아이들을 모두 죽이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아기 예수는 탈출했습니다.

5절: 그 여자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기는 장차 쇠지팡이로 만국을 다스리실 분이었습니다; 별안간 그 아기는 하나님께로, 곧 그분의 보좌로 이끌려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은 "쇠지팡이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아이이십니다(계 19:15). 여기서 그는 '아들', '아기'라고 불리며, 우리에게 이사야서 9장 6절에 "한 아기가 우리에게 태어날 것이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리라"는 말씀을 상기시켜 줍니다.

"통치하다"라는 단어는 난외(여백)에서 "돌보다"로 번역됩니다. 예수님은 오늘날 세상의 통치자들이 통치하는 것처럼 세상을 통치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은 열방을 돌볼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참된 통치는 앞에서 본보기로 양들을 이끄는 목자의 정신(spirit)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임명한 모든 지도자는 이 표시로 식별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보스가 아니라 목자가 될 것입니다.

그 아이는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이끌려 올라갔습니다. 이것은 또한 그 아이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요한계시록 3:21에서, 이기는 자는,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가 아니라 예수님의 보좌에 예수님과 함께 앉는다고 읽습니다. 오직 예수님 자신만이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문자 그대로 이스라엘에 해당하는 것이 상징적으로 교회에 해당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서 몇 가지 영적 진리를 배우기 위해 교회의 묘사로 여자를 볼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26절에,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그녀는 우리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 19절에서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내가 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 안에 그리스도의 성품을 나타내도록 해산의 고통을 겪는 영(spirit)을 가진 자를 찾으십니다.

6절: 그 여자는 광야로 도망을 쳤습니다. 그곳은 하나님께서 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 여자를 먹여 살리시려고 마련해 두신 곳이었습니다.

이것은 적그리스도가 유대인들과 맺은 언약을 깨뜨린 후의 통치 기간 동안 일어날 것입니다. 그것은 엄청난 박해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에 진정한 '이스라엘'은 1260일 동안 광야에서 하나님의 보호와 양육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레미야 30장 3-7절의 말씀대로,

"나는 공포의 소리를 들었습니다....왜 나는 모든 남자가 분만 중인 여자처럼 허리에 손을 얹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까?...아아! 그날은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그날과 같은 날은 없습니다. 야곱의 고난의 때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서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7절: 그 때에 하늘에서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미카엘과 미카엘의 천사들은 용과 맞서서 싸웠습니다. 그리고 용과 용의 부하들이 이에 맞서서 싸웠습니다.

다니엘 12장 1절에서 다음과 같이 읽습니다:

"이제 그 때에 주의 백성(이스라엘)의 자손을 지키는 대군 미카엘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민족이 있은 이래로 그 때까지 한 번도 없었던 환난(큰 고난)이 있을 것입니다; 그 때에 주의 백성,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더 읽습니다,

"내가 들으니, 세마포 옷을 입은 사람이 강물 위에 있어, 오른손과 왼손을 하늘을 향하여 들고, 영원히 사시는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되,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3½년)가 지나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거룩한 백성들의 권세를 깨뜨리는 것이 끝나면, 모든 일이 끝나리라 하더라(단12:7)."

8,9절: 용이 당해 내지 못하였으므로, 하늘에서는 더 이상 그들이 발 붙일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큰 용, 곧 그 옛 뱀은 땅으로 내쫓겼습니다. 그 큰 용은 악마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데, 온 세계를 미혹하던 자입니다; 그 용의 부하들도 그와 함께 땅으로 내쫓겼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그분의 나라를 세우시기 직전의 마지막 3년 반 동안 일어날 것입니다. 사탄은 그때 땅으로 내던져질 것입니다. 현재, 사탄은 하늘의 장소에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탄이 지옥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없습니다. 그는 언젠가 불못에 던져질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하늘에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늘에 있는 흑암의 악한 세력"과 씨름해야 합니다(엡 6:12).

성경은 세 개의 하늘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늘은 우주와 공간의 보이는 하늘입니다(시 8:3). 사도 바울이 이끌려 갔던 셋째 하늘은 낙원(Paradise)이라고도 불립니다 - 그곳은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입니다(고후 12:2,4). 첫째 하늘과 셋째 하늘 사이에 "둘째 하늘"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이 두 번째 하늘을 뚫고 세 번째 하늘에 들어가야 합니다. 침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참을 수 없는 한 가지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기 어렵다면, 기도를 멈추고,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하십시오. 셋째 하늘에 연결된 다음 기도를 시작하십시오.

용과 그의 천사들은 하늘에서 쫓겨났습니다. 예수님은 언젠가 "사탄이 번개 같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다"(눅 10: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이 처음에 타락하여 사탄이 되었을 때, 사탄의 몰락을 보셨습니다. 그러나 사탄이 땅에 던져지고, 무저갱에 갇히게 되고, 마침내 불못에 던져지는 것도 미리 아셨습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과 사탄의 모든 세력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노니, 아무것도 너희를 해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보신 것을 볼 때, 우리는 더 이상 사탄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우리 주님에 의해 십자가에서 패배했기 때문에, 패배한 적입니다. 세상의 왕이 심판을 받았습니다. 지금 신자가 사탄을 두려워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탄의 몰락을 볼 수 있는 눈을 열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십시오. 사탄은 요한계시록이 그의 마지막 운명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요한계시록 책을 싫어합니다.

미카엘과 그의 천사들은 사탄을 쫓아낸 자들입니다. 오래 전에 사탄이 루시퍼로서 미카엘 위에 있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높아졌다가 넘어졌습니다. 결국 미카엘은 사탄과 그의 군대가 있는 둘째 하늘을 청소하는 일을 맡게 됩니다.

여기서 사탄은 옛 뱀과 악마라고 불립니다. 그리스어로 'devil'(악마)라는 단어는 'diabolos'(디아볼로스)인데, 여기서 영어 단어 'diabolical'(디아블로컬)이 유래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어로 '디아볼로스'라는 단어는 실제로 '비방하는 자' 또는 '험담하는 자'를 의미하며, 디모데전서 3: 11에 "여자는 디아볼로스가 되지 말라"라는 구절에서 사용되었습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여성이 남의 뒤에서 남을 비방하고 악담을 하는 작은 악마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남자도 비방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디모데후서 3장 2,3절에서, "말세에, 어려운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작은 악마(diabolos)가 되리라"고 했습니다. 디도서 2장 3절에서 또 말합니다. "나이든 여자는 디아볼로스가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남성과 여성 모두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악마"가 되지 않도록 경고를 받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얻듯이, 비방하는 자는 사탄의 이름을 얻습니다.

그 악마의 또 다른 이름은 '대적'을 의미하는 사탄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 진리를 대적하는 자,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는 또한 속이는 자, 온 세상을 속이는 자라고도 불립니다.

사탄은 1260일 동안 지상에 있을 것입니다. 그는 아직 여기에 없습니다. 상황이 이미 그렇게 나쁘다면, 여러분은 사탄이 그의 천사들과 함께 땅으로 내던져질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그 때에 그는 크게 분을 내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0절: 그 때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큰 음성이 이렇게 울려 나왔습니다,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권능과 우리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이 세우신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다. 우리의 동료들을 참소하는 자(비방하는 자),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으로 그들을 헐뜯는 자가 내쫓겼다.

여기에서 사탄은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는 자'라고 불립니다. 누구든지 자기 형제나 자매를 비방하면, 그가 형제들을 고발하는 우두머리인 사탄과 교제하고 있음을 깨달으십시오. 사탄은 밤낮 하나님 앞에서 "당신의 자녀가 그곳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십시오! 당신의 자녀가 그곳에서 어떻게 말하는지 보십시오!"라고 말하며 우리를 참소합니다. 마귀는 우리의 사생활을 주의 깊게 살피므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고발할 자료를 많이 얻습니다.

사탄은 욥이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겼다고 하나님 앞에서 욥을 고발했습니다. 사탄은 오늘날에도 신자들을 그렇게 고발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당신이 정말로 잘못된 동기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을 보신다면, 사탄이 틀렸다고 말씀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의로운 중재자"이십니다(요일 2:1). 우리가 잘못한 경우 그분은 우리를 덮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우리 자신을 판단하고 깨끗하게 하는데 있어, 항상 하나님께 정직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며 사탄이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고발할 근거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1절: 우리의 동료들은 어린 양이 흘린 피와 자기들이 증언한 말씀을 힘입어서 그 악마를 이겨 냈다. 그들은 죽기까지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이들은 사탄을 이긴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세 가지 무기를 사용했습니다.

1. 그들이 하나님의 빛 가운데 걸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그들을 깨끗하게 했습니다.

2. 그들이 증언한 말씀. 그들은 그들의 입으로 사탄에게, 자신들이 용서받았고 깨끗해졌으며 더 이상 사탄이 그들에 대해 주장할 권리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3.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지고 매일 자아에 대해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사탄을 물리친 것은 갈보리의 십자가에서였고,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로 자리를 잡고 매일 우리 자신에게 죽을 때, 우리도 사탄을 이길 수 있습니다.

왜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를 지는 것에 대해 말하는가? 날마다 사탄을 이기고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꺼이 스스로 죽지 않는 날, 사탄이 우리를 이길 것입니다.

12절: 그러므로 하늘아, 그리고 그 안에 사는 자들아, 즐거워하여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가 있다; 악마가, 자기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몹시 성이 나서 너희에게 내려갔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에는, 하늘이 기뻐하는 일에 대해 세 곳이 나옵니다.

1. 누가복음 15장 7절: 회개하는 죄인을 인하여 하늘에서는 기쁨이 있느니라.

2. 요한계시록 12장 12절: 믿는 자가 이기면 하늘에 기쁨이 있습니다.

3. 요한계시록 19장 7절: 어린양의 혼인날에는 하늘에서 기쁨이 있으니, 이는 신부가 자기를 준비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세 가지 경우는 실제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세 단계입니다.

• 1단계: 우리가 우리의 죄를 회개할 때.

• 2단계: 우리가 개인의 삶에서 사탄을 이길 때.

• 3단계: 우리가 어린양의 혼인을 위한 신부로서 자신을 준비했을 때.

우리가 이 세 단계를 기꺼이 통과한다면, 우리 모두는 천군들에게 기쁨의 근원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사탄을 이기셨습니다. 이제 그분은 로마서 16장 20절에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네 발 아래 짓밟으시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분이 이미 이기신 승리를 실행할 특권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사탄은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을 때 그분을 삼키려고 시도했지만(계 12:4),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늘에서 미카엘과 그의 천사들과 싸웠으나, 쫓겨났습니다(7-9절). 이제 그는 우리와 싸웁니다. 우리는 패배할 것인가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오늘 우리가 실행하여 평강의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일상생활에서 사탄을 완전히 부수실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악마는 예언을 연구하는 학생이며 그가 지상에 내려오면 3년 반 밖에 남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진노가 클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상에 끔찍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13절: 그 용은 자기가 땅으로 내쫓겼음을 알고, 남자 아이를 낳은 그 여자를 핍박했습니다.

사탄은 이 땅에 오자마자, 예수 그리스도를 낳은 이스라엘 민족을 박해하기 시작합니다.

14-16절: 그러나 그 여자는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가지고 광야에 있는 자기 은신처로 날아가서, 거기에서 뱀을 피해서,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동안 부양을 받았습니다. 그 뱀은 그 여자의 뒤에서 입으로 물을 강물과 같이 토해 내서, 강물로 그 여자를 휩쓸어 버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땅이 그 여자를 도와주니, 땅이 입을 벌려서, 용이 입에서 토해 낸 강물을 삼켰습니다.

독수리 날개는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할 장소를 마련해 두신 광야로 안전하게 공수되는 것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강은 이스라엘을 쓸어버리려고 할 박해의 홍수를 가리킵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들이 땅에서 휩쓸리지 않도록 도울 것입니다.

17절: 그래서 그 용은 그 여자에게 노해서, 그 여자의 남아 있는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과 싸우려고 떠나갔습니다.

용은 이스라엘을 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화를 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녀의 나머지 자손들"과 전쟁을 하러 나갑니다. 이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예수의 증인이 된 자, 전심을 다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여자의 후손'이라고 불립니다. 교회는, 모두 이스라엘 백성인 열두 사도의 증거로 탄생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 시대에, 하나님께 순종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붙들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있을 것임을 증명합니다. 그들은 사탄을 이기고 지상에서 주님을 위한 강력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그 날을 위해 그분의 백성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충실하여 사탄을 완전히 이기고 우리 발에 짓밟히게 합시다.

예레미야 12장 5절은, 주님은 지금 우리에게 사람과 함께 달리는 것을 가르치셔서, 언젠가 우리가 말과 함께 달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요단의 홍수"가 닥칠 때 우리가 설 수 있도록 평화의 때에 우리를 훈련시키십니다. 우리는 하루아침에 준비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지금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기회를 활용하여 자신을 낮추고 지금 자아에 대해 죽는다면, 홍수(큰 환난)가 닥칠 때 우리는 주님께 진실하게 설 수 있고 이 땅에서 주님을 위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

장 13
13장

1절: 나는 바다에서 짐승 하나가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짐승은 뿔 열과 머리 일곱이 달려 있었는데, 그 뿔들에는 왕관을 쓰고 있고, 그 머리들에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이 붙어 있었습니다. 우리가 계시록 17장 15절에서 "네가 본 물들은….백성과 무리와 나라와 방언들이니라"라고 읽은 것처럼 세상의 나라들을 나타냅니다. 열 뿔과 일곱 머리를 가진 짐승이 세상 나라들 가운데서 나옵니다. 그리고 그의 뿔들에는 면류관이 있고 그의 머리들에는 신성 모독적인 이름이 있었습니다. 이 짐승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그 분의 나라를 세우시기 직전 3년 반 동안 세상을 통치할 적그리스도, 즉 세상의 통치자입니다. 일곱 머리는 계시록 17:9-11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머리 일곱은 그 여자가 타고 앉은 일곱 산이요, 또한 그것들은 일곱 왕이다; 그 가운데서 다섯은 이미 망하고, 하나는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이 나타날지라도, 잠깐밖에 머물지 못할 것이다. 또 전에 있다가 지금은 없는 그 짐승은 여덟 번째인데, 그것은 그 일곱 가운데 속한 것으로서, 마침내 멸망하여 버릴 자다.” 로마 시는 일곱 개의 언덕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머리는 또한 일곱 왕국을 나타냅니다. 요한이 이 책을 쓰고 있을 때(A.D. 96년경), 5개의 세계 제국(성경에 언급됨)은 이미 왔다가 사라졌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출애굽기에서 읽은 이집트 왕국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열왕기하에서 읽은 앗시리아 왕국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다니엘서에서 읽은 바벨론 왕국이었습니다. 네 번째는 다니엘에서도 언급된 메디아-바사 왕국이었습니다. 다섯째는 다니엘이 예언한 그리스 왕국이었습니다. 여섯 번째는 당시 존재하던 로마제국입니다. 일곱째 왕국은 그 당시에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적그리스도는 여덟 번째 왕국을 건설할 것인데, 이는 이전의 일곱 왕국 중 하나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열 뿔은 계시록 17:12에도 설명되어 있습니다, “네가 본 열 뿔은 열 왕이다. 그들은 아직 나라를 받지 못하였지만, 그 짐승과 함께 한 시간 동안 왕들처럼 권세를 받을 것이다.” 이 열 왕국은 적그리스도 시대에 세워집니다. 말세에 10개국이 연합하여 재정력을 바탕으로 세계 최강대국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적그리스도는 이 초강대국의 통치자가 될 것입니다. 요한은 밧모 섬에 있었고, 짐승이 나온 바다는 지중해였습니다. 짐승의 여섯 머리는 모두 이집트, 앗시리아, 바벨론, 메디아-바사, 그리스, 로마와 같은 지중해 근처나 그 주변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열 왕국도 거기에서 나올 가능성이 가장 큽니다. 2절: 내가 본 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한데, 그 발은 곰의 발과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과 같았습니다. 그 용이 자기 힘과 왕위와 큰 권세를 이 짐승에게 주었습니다. 다니엘 2장에서, 우리는 느부갓네살의 꿈에 대해 읽었습니다. 그 큰 신상의 머리는 금이요, 가슴과 팔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종아리는 철이요, 발은 일부는 철이요 일부는 진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여러분은 머리에서 발로 내려갈수록 금속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류가 계속해서 타락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다니엘 2:38-42에서, 우리는 다니엘이 꿈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을 봅니다: "너는 금 머리니"(바벨론), "네 뒤에 너보다 열등한 다른 나라가 일어날 것이다"(메대-바사). 세 번째 청동 왕국은 그리스요. 그리고 "네 번째 왕국은 철처럼 강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로마제국이 될 것입니다. 그 후, 꿈은 교회 시대의 2000년을 건너뛰고 마지막 왕국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는 시간의 끝에 옵니다: 그 발과 발가락이 일부는 토기장이의 진흙이요 일부는 철인 것을 네가 보았은즉, 그 나라가 분열되리니; 그러나 그것은 철의 강인함을 가질 것이지만, 일반적인 진흙(민주주의)과 혼합되어, 왕국의 일부는 강하고 일부는 부서지기 쉬울 것이다. 말세에는 독재와 민주주의는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 동상은 발가락이 몇 개였습니까? 열 개! 이것이 계시록 13장에서 본 열 나라(열 뿔)이며, 적그리스도가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러자 다니엘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그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이 결코 멸망하지 않을 한 나라를 세우실 것입니다(44절).” 그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그것이 꿈에는 이렇게 그려졌습니다: “손대지 아니한 돌이 나와서 쇠와 진흙으로 된 신상의 발을 쳐서 부수니라(단 2:34).” 그 돌은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이 돌은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철을 치지 않습니다. 그 왕국들은 이미 지나갔고 사라졌습니다. 열 왕국이 땅을 다스리고 있을 때 돌이 발을 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신상을 친 돌이 큰 산이 되어 온 땅을 가득 채웠습니다(단 2:35).” 그것이 온 땅에 충만할 그리스도의 나라입니다. 이 꿈은 이 왕국들을 사람의 관점에서 본 것입니다. 나중에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이 같은 왕국들을 귀한 금속이 아니라 사악한 짐승으로 보시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다니엘 7:2-14에서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꿈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내가 밤에 환상을 보니, 하늘의 사방의 바람이 큰 바다(지중해)를 휘젓고 있더라. 네 마리의 큰 짐승이 바다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첫째는 사자와 같고 독수리의 날개를 가졌더라." 이것은 바벨론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메디아-바사를 대표하는 곰과 그리스를 대표하는 표범을 보았습니다. 이에 이어 “넷째 짐승은 사납고 무섭고 매우 강하다; 그것은 큰 철 이빨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삼키고 부숴 버리고, 남은 것을 그 발로 짓밟았더라 (로마제국)....그것은 열 뿔이 있더라(열 왕국이 마지막 날에 함께 모일 것임). 내가 열 뿔을 보고 있을 때에, 또 다른 뿔(적그리스도) 곧 작은 뿔이 그 가운데서 나와서 처음 뿔 중에서 세 뿔을 뽑았는데, 보라, 이 뿔에는 사람의 눈과 같은 눈이 있고 큰 자랑을 하는 입이 있더라." 마침내, 다니엘은 적그리스도가 죽임을 당하고,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이 땅에 그분의 왕국을 세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보좌들이 놓일 때까지 내가 바라보았더니,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그의 자리에 앉으셨고...수만 명이 그를 모시더라....그 짐승은 죽임을 당하였고....또 보라, 하늘의 구름과 함께 하나님의 아들과 같은 이가 오매, 그가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가니,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셨으니, 이는 모든 백성과 나라와 모든 언어로 말하는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하셨으니, 그의 권세는 영원한 권세이니라(9-14절)." 다니엘은 사자, 곰, 표범의 순서대로 보았는데, 이 왕국들은 아직 미래에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이 동물들의 특성을 가진 짐승을 보았지만, 그 순서가 반대였습니다. 그는 이미 왔다가 사라진 이 왕국들을 되돌아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표범, 곰과 사자(계 13:2). 이것은 적그리스도가 과거의 바벨론, 메디아-바사, 로마 제국의 특징을 가진 사자, 곰, 표범의 특성을 가질 것임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 지상의 모든 왕국은 짐승과 같습니다. 사람이 성령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으면, 타락하여 들짐승과 같이 됩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정당(the political parties)을 짐승으로 여기십니다. 한 정당이 다른 정당보다 약간 나을 수 있지만 모두 짐승입니다. 당신이 투표할 때, 당신은 하나의 야수와 다른 야수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결코 투표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야수에게 투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대신 하나님께서 나라를 다스리도록 택하신 사람을 (귄위자로) 결정하시고 임명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용(사탄)은 적그리스도에게, 그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줍니다. 2000년 전, 사탄은 이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탄에게서 어떤 것도 받기를 거부하셨습니다. 그러나 적그리스도는 사탄을 경배하여 그에게서 세상 나라를 받을 것입니다. 사탄은 자신의 능력을 원하는 모든 사람이 기꺼이 그들의 양심을 희생하고 그에게 절한다면, 기꺼이 그의 능력을 줄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이와 같이 사탄에게서 초자연적인 능력을 얻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많은 이교도 종교 지도자들은 악마에게 자신을 팔았기 때문에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3절: 나는 그의 머리 중 하나가 죽임을 당한 것 같았고, 그의 치명적인 상처가 나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온 땅이 놀라 그 짐승을 따라갔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모방한 것으로 보입니다. 적그리스도는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본받을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적인 부활이 아닐 것입니다 - 하나님 외에는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들을 속이는 아주 좋은 모방이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죽임을 당한 것처럼"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온 땅에 놀라운 일이 될 것이며 모든 사람이 적그리스도를 따를 것입니다. 4절: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그들이 용에게 경배하니라; 그들이 짐승에게 경배하여 이르되, ‘누가 그 짐승과 같으며, 누가 능히 그에 맞서서 싸울 수 있으리이까?’하더라. 이제 온 땅이 사탄을 경배합니다. 이것은 사탄이 처음부터 항상 원했던 것입니다. 이사야서 14장 14절에서 우리는 루시퍼가 하나님과 같이 되기를 원했다는 것을 읽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루시퍼에게 지혜, 아름다움, 능력, 초자연적 은사 등 많은 놀라운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는 무엇을 더 원했습니까? 그는 하나님처럼 경배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는 악마가 되었습니다. 당신이 사람들의 존경을 받기를 원할 때마다, 당신도 사탄과 같은 욕망을 가지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사람들의 명예를 구하는 것은 사탄적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사탄이 온 세상이 그를 경배하도록 만든다는 것을 여기에서 봅니다. 물론, 오늘날에도 이러한 현상이 조금씩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훨씬 더 널리 퍼질 것입니다. 그들은 적그리스도도 경배했습니다. 적그리스도를 경배하는 것, 즉 사람을 경배하는 것 역시 오늘날 널리 퍼져 있습니다. 그들은 "누가 그 짐승과 같으리요?"하며 적그리스도를 경배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이여, 누가 주와 같으시나이까”라고 하나님께 경배하듯이, 사람들은 사탄과 적그리스도를 같은 말로 경배합니다. 사람들은 적그리스도를 "적그리스도"라고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요. 그들은 그를 존경할만한 이름으로 부를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18절에서, 우리는 읽습니다, “자녀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이다. 너희가 적그리스도가 온다는 말을 들은 것과 같이, 지금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다; 이것으로 우리는 지금이 마지막 때라는 것을 안다. 그들은 우리에게서(교회 한가운데에서) 나갔다.” 이것은 1세기 교회 한가운데에 적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오늘날 기독교계에도 그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적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사람들은 정치 세계, 비즈니스 세계, 이교도 종교 세계, 그리고 소위 "기독교 교회들"에서도 발견됩니다. 이 적그리스도의 영의 표시는 무엇입니까? 많은 표시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요 특징 중 하나는 이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존경하고 높여주기를 원합니다 - 이는 사람에게서 경배를 받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서로 명예를 추구하는 것에 맞서 싸우지 않는 교회는 머지않아 적그리스도의 영이 그 교회를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명예에 대한 욕망은 우리 육신에서 발견됩니다. 누군가의 인정이나 칭찬을 받고 싶어하는 작은 욕망은 마치 아기처럼, 작은 씨앗처럼 자라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결국 경배를 갈망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있는 이 작은 뱀의 알을 볼 때마다 우리는 그것을 부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는 뱀을 낳을 것입니다. 이 영이 가장 높은 천사들에게서 나타날 수 있다면, 왜 우리 중 누구에게도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십시오. 우리는 온 땅이 적그리스도를 따를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세상은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를 없이 하라.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적그리스도를 따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옛 거짓 예언자들처럼 부드러운 말로 그들에게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은 우리에게 사람들의 비난과 조롱과 반대를 가져올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인기를 얻으려고 할 때, 그들은 위험한 땅, 즉 적그리스도의 땅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할 때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사람의 의견은 쓰레기통에 딱 맞는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돌이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따르기 전에, 너희 부모와 형제자매와 아내와 자녀와 소유물과 자기의 목숨까지 미워해야만 한다”(눅 14:26-33). 그 말들은 그것을 들은 많은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는 어려운 말들이었습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는 바로 그 동일한 말씀을 설교하며, 그 말씀은 마치 그리스도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어렵게 들리며 사람들을 화나게 합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그리스도에 대한 비난이 우리에게 임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적그리스도의 영으로부터 보호됩니다. 그러나 바벨론 기독교는 이 메시지를 전파하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영광을 받을 것이고, 그리하여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수 있는 길을 닦을 것입니다. 5절: 오만한 말과 훼방하는 입을 허락하시매; 마흔두 달 동안 행할 권세가 그에게 주어졌더라. "그에게 주어졌더라"는 이 구절은 이 장에서 여섯 번 반복됩니다(5,7,14,15절). 요한계시록 6장에서 백마 탄 자 곧 적그리스도와 관련하여 본 구절과 유사합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이 여전히 모든 것을 통제하고 계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분은 적그리스도가 잠시 동안 이 권세, 심지어 기독교인을 박해할 수 있는 권세를 갖도록 허락하시는 분입니다. 또한 이 장에서 “사자 같은 입”이라는 '입'이라는 단어가 여러 번 나오는 것 또한 주목하십시오 (2절). 사람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그의 입으로 표현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반역도 그의 입을 통해 표현됩니다. 잠언 18장 21절에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바벨탑에서 반역했을 때, 하나님은 혀를 통해 사람들 사이에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순절에, 하나님이 사람의 반역으로 인한 혼란을 바로잡으시던 날, 성령 충만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모르는 언어로 말하게 된 이유 중 하나입니다. 그것은 바벨의 반대였습니다. 하나님은 사탄이 인류를 지배하는 반역의 영으로부터 사람들을 이끌어 내셨습니다. 그러나 말세에, 사탄은 적그리스도의 입을 통해 그 반역을 극도로 나타내게 될 것입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우리 입에서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마치 발사된 로켓과 같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말한 것을 후회하고 "아, 그 말을 철회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말하거나 글로 쓰고 나면 너무 늦습니다. 그 말들은 우주로 나갔습니다. 당신은 다음 로켓을 보낼 때만 주의할 수 있습니다. 이미 해버린 말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모든 무의미한 말(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부주의한 말)은 심판 날에 설명해야 할 것이다”(마 12:36). 그 이유는 반역이 주로 혀를 중심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를 저주하고 우리에 대해 악한 말을 할 때, 하나님께 대한 찬양과 복종과 감사의 영과, 우리의 혀에서 나오는 은혜와 선하심의 영으로 그 영을 정복합니다. 6절: 그 짐승은 입을 열어서 하나님을 모독하였으니, 하나님의 이름과 그분의 장막, 곧 하늘에 사는 이들을 모독하였습니다. 적그리스도의 입은 세 번 언급됩니다(2,5,6절). 다니엘 7장에서도 적그리스도의 말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입으로 큰 자랑을 하며.…뿔이 말하던 그 자랑하는 소리가.…그가 지극히 높으신 이를 대적하여 말할 것이다”(단 7:8,11,25). 사람 속에 있는 반역의 영은 그 입을 통해 그 가득함이 나타나나니, 입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말하느니라(마 12:34). 마음에 성령이 충만하면, 알지 못하는 언어든 아는 언어든 성령이 주신 말씀이 입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고 다른 영이 여러분을 다스리면, 그 다른 영이 방언이나 아는 언어로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의 혀가 깨끗하려면, 그 반역의 영을 부셔버려야 하는 곳은 바로 우리 마음 속입니다. 그래서 “온유하고 조용한 심령”이 하나님 보시기에 매우 귀하다고 말씀하십니다(벧전 3:4). 요한계시록 13장 6절에서, 우리는 "하늘에 사는 자들"에 대한 언급을 읽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앞서 본 땅에 사는 자들과 대조됩니다. 하늘에 사는 자들에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포함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적그리스도가 하늘에 거하는 모든 자들을 모독한다는 것을 읽습니다. 7절: 그리고 그 짐승에게 성도들과 싸워서 이기는 권세가 주어졌습니다; 또 모든 종족과 백성과 언어와 민족을 다스리는 권세를 그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은 적그리스도의 시대에 이 땅에 성도들이 있을 것이라고 너무나 분명하게 가르치는 또 다른 구절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그들과 전쟁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라는 단어는 신약 전체에서 거듭난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적그리스도는 육체적으로 그들을 이길 것입니다 - 그들을 죽일 것입니다. 그는 그들의 영을 이길 수 없습니다. 마귀는 우리 몸만 만질 수 있습니다 - 그것도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후에야 가능합니다! 질병으로 마귀는 우리 몸을 괴롭힙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영을 만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영 안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사탄의 사자는 육체의 가시로 바울의 몸을 괴롭힐 수 있었습니다(고후 12:7). 그러나 그는 바울 자신을 해칠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거기에서도, 하나님께서 가시를 바울에게 축복으로 바꾸신 것을 봅니다. 우리는 다니엘 7:19-25에서, 다니엘이 적그리스도를 봤을 때 당황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성도들과 싸워 그들을 이기고....그는 말하여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며(무시하며), 핍박으로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을 짓누르리라. 그리고 그는 율법을 변경할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에도 그 시작을 봅니다 - 하나님의 율법이 사람의 정욕에 맞게 변경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때에 "하나님의 백성이 삼년 반 동안 그의 손에서 무력하리라"고 들었습니다(25절 - TLB). 다니엘이 이것에 대해 천사에게 물었을 때, 그는 이것이 "옛적부터 늘 계신 이(아버지)께서 오시어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에게 유리한 판결이 내려질 때까지" 지속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정당화될 때가 있습니다 - 예수님이 아버지의 영광으로 재림하실 때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분은 성도들에게 다스리는 권세를 주실 것입니다. 재판관이 판결을 내릴 것이며, 그(적그리스도)의 통치권은 빼앗기고, 소멸되고, 영원히 파괴될 것입니다. 그 때에 온 천하 만국의 주권과 지배권과 위대함이 지극히 높으신 이의 거룩한 백성에게 주어질 것입니다(26,27절). 8절: 그러므로 땅 위에 사는 사람 가운데서,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때부터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모두 짐승에게 경배할 것입니다. “창세로부터”라는 말은 두 가지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1. 세상의 기초가 놓일 때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 갈보리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은 하나님의 나중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아담의 죄는 하나님을 놀라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담이 죄를 지을 것을 줄곧 알고 계셨고,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이미 그것에 대한 준비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2. 우리의 이름은 창세부터 생명책에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는 에베소서 1장 4절에서 "하나님이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를 읽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담이나 천사들을 창조하시기 전에도 우리의 이름을 알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영원한 과거인 오래 전에, 그분은 우리를 영원히 그분의 소유로 부르셨습니다. 그것을 아는 것은 매우 위안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름이 그 생명책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날 적그리스도의 영에 절하기를 거부하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기를 거부할 것입니다.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경배할 것입니다. 적그리스도의 영은 이미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그 영으로부터 자신을 순수하게 유지한다면, 그것이 장차 올 날을 위한 최고의 준비가 될 것입니다. 9절: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이 구절은 우리가 2장과 3장에서 공부한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이기는 자들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기는 자는, 내가 주리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우리는 그곳에서 무엇을 듣게 되었습니까? 이기라는 부르심! 적그리스도의 영을 이기라는 부르심이 여기에서 반복됩니다: 사람을 숭배하는 것을 이겨내십시오. 물질적 이득이나 인기 등을 위해 사람에게 굽실거리지 마십시오. 세속적인 이익을 위해 당신의 원칙을 희생하지 마십시오. 사람의 명예를 얻으려고 타협하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 불의한 일을 하려고 누구에게도 뇌물을 주지 마십시오. 그런 식으로 손을 더럽히지 마십시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물론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소수는 그럴 것입니다. 10절: 사로잡혀 가기로 되어 있는 사람이면,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맞아서 죽임을 당하기로 되어 있는 사람이면, 칼에 맞아서 죽임을 당할 것이다. 여기에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있습니다. 적그리스도는 언젠가 포로로 잡혀갈 것입니다. 남을 죽인 자는 결국 자기도 죽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성도의 인내와 믿음"이 있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그들을 괴롭히는 이 사람을 하나님께서 적절한 때에 처리해 주실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어떤 어려운 사람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고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다루실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면, 핍박이 더 심해지는 마지막 날에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겠습니까? 우리는 정말 하나님의 주권을 믿나요? 우리를 잡는 자는 언젠가는 하나님께 사로잡히고, 오늘 우리를 죽이는 자는 언젠가는 하나님께 죽임을 당할 것을 믿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도 ‘사람들이 우리를 대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람들을 대하실 것임을 정말로 믿습니까? 우리가 믿는다면, 우리는 누구에게도 복수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에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반격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그 대신, 우리는 모든 상황에서 의롭게 심판하시는 그분께 우리의 대의를 맡깁니다. 여기 우리 믿음의 시련이 있습니다. 지금은 작은 일에서 시작됩니다. 적그리스도의 날에는 큰 일에서 시험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하느니라”(마 26:52)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칼은 사람의 혀가 될 수 있습니다. 남을 향해 그들의 칼(혀)을 휘두르는 자들은, 언젠가 그 결과로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칼(혀)을 칼집에 넣고, 우리의 정당화를 하나님께 맡길 수 있다면, 그분은 언젠가 우리의 원수들을 정의롭게 다루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면, 우리는 항상 안식할 것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이 직접 적그리스도를 처리하실 때까지 기다릴 수 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 힘든 상황을 처리해 주실 때까지 기다릴 수 있습니까? 아니면 "내가 직접 해결하겠다"하고 스스로 해결하려고 할까요? 우리는 히브리서 6장 12절에서, "우리가 믿음과 인내(또는 오래 참음)로 말미암아 약속을 유업으로 받는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시험을 받을 때 정말로 인내가 필요합니다. 누가복음 21장 16-19절에서,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고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에게 배반을 당할 것이라고 읽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배신당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할 것입니까? 예수님은 “네 인내로 네 영혼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내를 통해서 우리는 영혼을 얻고 우리 영혼 안에서 신의 성품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가 지금 시험을 받는 것을 허락하시는 한 가지 이유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닥치는 유혹이 장차 올 더 큰 일을 위한 하나님의 훈련 학교라는 것을 알 수만 있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일 수 있는 모든 기회를 활용하여 양처럼 털을 깎이고, 양처럼 죽임을 당하고, 우리의 입을 다물기를 간절히 열망할 것입니다. 우리의 인내로 우리의 영혼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히브리서 10:36-38을 읽습니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천국인가요? 그것이 주된 것은 아닙니다. 그분의 약속은 우리가 그분의 성품에 참여하고 예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천국에 있는 것보다 백만 배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질병이나 문제로부터의 자유를 주된 것으로 약속받지 않습니다. 부나 건강이 아니라 신의 성품입니다!(벧후 1:4). 우리는 오늘의 시련을 견뎌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자아에 대해 죽고, 우리의 입을 다물고, 우리 자신을 낮추는 등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받을 때까지 인내가 필요합니다. 조금 있으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나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러나 그가 물러나면(예를 들어, 칼을 들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우) 내 영혼이 그를 기뻐하지 않을 것이다(히 10:37,38). 11절: 나는 또 땅(the earth)에서 다른 짐승 하나가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어린 양처럼 뿔이 둘 있고, 용처럼 말을 하였습니다. 이 장의 처음 10절은 적그리스도를 다룹니다. 여기 이 구절에서, 우리는 다른 짐승에 대해 봅니다. 이것은 "땅(the earth)"에서 나옵니다. 세상의 국가를 대표하는 바다에서 첫 번째 짐승이 올라왔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땅(the land)”은 항상 이스라엘을 가리키고, “바다”는 다른 나라들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여기서 "땅(the earth)"이 그 "땅(the land)"과 같은 의미라면, 이 짐승은 유대인일 수 있습니다. 그는 어린양 겸 용이기 때문에 종교적인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는 어린 양처럼 보이지만 용처럼 말합니다 어린양처럼 보이지만 용처럼 말하는, 그런 종교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모임에서는 어린 양처럼 보이지만 집과 사무실에서는 용처럼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가 어느 나라에 속해 있는지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외모가 아니라 그의 말에 의해서 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경고하셨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라. 그들은 어린 양처럼 보이지만, 속은 탐욕스러운 이리(용)이다”(마 7:15). 그래서 여기에서 우리는 어린 양처럼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갖고 싶어하는 사람을 봅니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 사탄의 대변자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대표하는 척하지만, 그의 입은 용의 입입니다. 12절: 이 짐승은 첫째 짐승이 가진 모든 권세를 그 첫째 짐승을 대신하여 행사하였습니다. 이 짐승은, 땅(the earth)과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치명상에서 나음을 받은 그 첫째 짐승에게 절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거짓 예언자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날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일어나 큰 표징과 기적을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려 하리라”(마 24:24). 거짓 그리스도는 적그리스도입니다. 거짓 예언자는 우리가 여기서 보는 이 종교적인 사람입니다. 이것은 정치에 종교를 더한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우리는 발락 왕과 거짓 예언자 발람이 함께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것을 읽습니다. 오늘날에도, 주교와 정치 지도자들은 서로 손을 맞잡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종교와 정치가 함께 갈, 적그리스도의 최종 통치를 위한 준비에 불과합니다. 거짓 예언자는 첫 번째 짐승인 적그리스도와 손을 잡고 있습니다. 여기에 사탄의 삼위일체, 용, 짐승, 거짓 예언자가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공적 사역을 하셨던 것과 같은 기간인 3년 반 동안 통치합니다. 거짓 예언자는 사람들로 하여금 적그리스도를 경배하게 합니다. 13절: 또 그 짐승은 큰 기적들을 행하였는데,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에서 불이 땅에 내려오게도 하였습니다. 사탄은 불을 보내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욥기에서 사탄이 하늘에서 불을 보내 욥의 재산을 파괴했다고 읽었습니다(욥 1:16). 14절: 그리고 그 첫째 짐승을 대신해서 행하도록 허락받은 그 기적들을 미끼로 해서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을 미혹하였습니다. 땅 위에 사는 사람들에게, 칼에 맞아서 상처를 입고서도 살아난 그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고 말하였습니다. 거짓 예언자는 거짓 표적과 기적으로 사람들을 속일 것입니다. 우리는 디모데후서 3:8에서 모세를 반대한 바로의 마술사 얀네와 얌브레에 대해 읽습니다. 바로는 적그리스도의 모형이고 그의 마술사들은 거짓 예언자의 모형입니다. 그 마술사들은 초자연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땅에 던지니 지팡이가 뱀이 되자, 그 마술사들도 지팡이를 던지니 뱀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물을 피로 변하게 했고, 마술사들은 물을 피로 변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들의 마법은 무력해졌습니다. 바로의 마술사들에 대해 말한 후에, 바울은 계속해서 마지막 날에 많은 마술사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디모데후서 3:13에서 "사기꾼(imposter)"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go-ace"로 "마술사"를 의미합니다. 거기에는 "악인과 마술사들이(imposter) 많아지니....남을 속이고 자기도 속임을 당하리라"라고 쓰여있습니다. 모든 마술 쇼가 순수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들 중 일부는 단지 속임수와 날랜 손재주일 뿐입니다. 그러나 악마적인 마법도 있습니다. 모든 마술 쇼를 경계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거짓 예언자의 목적은 사람을 미혹하는 것입니다(계 13:14). 그는 일종의 마술사로서 땅에 사는 자들을 속이고, 마침내 "멸망의 가증한 것"인 짐승의 형상을 세우게 됩니다. 다음은 말세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정치인과 종교 지도자가 서로 협력하여 일하면서, 점점 더 사탄의 힘과 혼의 힘으로 사람들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사기꾼과 마술사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것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초자연적으로 행해지는 모든 것이 반드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영을 시험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그들의 영으로 고백합니까? (요일 4:1-3).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심을 그들의 영으로 고백합니까? (고전 12:3). 그들은 예수께서 가지셨던 겸손하고 순수하며 돈을 사랑하지 않는 영을 나타냅니까? 우리가 만나는 설교자들과 지도자들의 영을 분별해야만, 적그리스도의 영과 거짓 예언자의 영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8장 9절에 보면, 사마리아에서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마술을 행하여, 그가 행하는 기적과 표적으로 백성을 놀라게 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를 "하나님의 큰 능력"이라고 부르며, 그에게 사로잡혔습니다. 마지막 날에도 이러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적그리스도와 거짓 예언자가 행하는 표적과 기사로 인해 놀랄 것입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사탄과 악한 영들이 초자연적인 능력을 행사하도록 허락하시는지 자문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탄과 악한 영들의 손에서 모든 초자연적인 능력을 거두시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신명기에서 하나님께서 거짓 예언자와 사탄의 대리자들이 초자연적인 능력을 행사하도록 허락하신 목적이 있음을 읽습니다. 신명기 13장 1-5절에서는, 만일 예언자가 일어나 어떤 초자연적인 이적을 행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일을 가르친다면,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말라고 했습니다;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를 시험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사와 초자연적인 표적에 사로잡힐지, 아니면 그분의 말씀에 사로잡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초자연적인 표적이나 기적이 행해지는 것을 볼 때마다, 심지어 그것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해질지라도,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할 것은, 설교자가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인도하고 있는지 아닌지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그를 거짓 예언자로 기록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지금 그 분별력을 계발하지 않는다면, 거짓 예언자가 그의 기적들로 사람들을 속일 때 우리는 완전히 속게 될 것입니다. 이 거짓 예언자는 사람들에게 짐승의 형상을 만들라고 말합니다. 성령이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과 같이, 거짓 예언자는 적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입니다. '짐승에 대한 형상'은 우리에게 느부갓네살이 생각나게 합니다. 그는 순금으로 자신의 신상을 만들고, 사람들에게 불복종하면 벌을 내리겠다고 위협하며 그에게 절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 날에 남은 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엎드려 절하지 않았습니다. 아주 작은 숫자였습니다! 마지막 날에도 이와 같은 자들이 소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곧게 서서 엎드려 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15절: 그리고 둘째 짐승이 능력을 받아서 첫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넣어주고, 그 짐승의 우상으로 하여금 말을 하게도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죽임을 당하게도 하였습니다. 이것은 창조를 모방하려는 초자연적인 속임수가 될 것입니다. 오늘날 인간은 실험실에서 생명을 창조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동물을 복제했고 지금은 인간을 복제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이 생명을 창조하실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은 결코 생명을 창조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이 속는 것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거짓 예언자는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고", 그것이 말하게 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식으로든 허락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인간을 컴퓨터로 모방한 것일 수도 있고 사탄의 마술과 속임수일 수도 있습니다. 이 형상은 아마도 예루살렘에 놓일 것이며, 예수께서 "황폐케 하는 가증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일 수 있습니다(마 24:15). 다니엘 11장은 알렉산더 대왕의 그리스 제국이 끝난 후, 로마인이 세계 강국이 되기 전에 일어난 일을 설명합니다. 알렉산더의 왕국은 그의 4명의 장군들에게 나누어졌습니다. 가장 강력한 두 장군이 시리아와 이집트를 다스렸습니다. 다니엘 11장 31절에서, 우리는 "그(시리아의 북방 통치자)의 군대가 일어나서, 성소의 요새를 더럽히고, 항상 드리는 제사를 폐하리니, 그들이 황폐하게 하는 가증한 것을 세우리라"고 했습니다. 기원전 175년경, 시리아의 통치자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에 와서, 성전에서 제사를 멈추고 제단에 돼지를 제물로 바치고, 지성소에 제우스상을 세웠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성소를 더럽혔습니다. 그것이 다니엘 11장에 나오는 멸망의 가증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세에도 이런 일이 반복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장차 올 적그리스도의 모형이었습니다. 따라서 다니엘 11장 32절의 말씀은 적그리스도가 할 일에 대한 그림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는 부드러운 말로, 언약을 배반하고 악행하는 자들을 타락시킬 것이나, 그러나 그들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해질 것입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와 같이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그 날에 꼿꼿이 설 것입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적그리스도의 부드럽고 아첨하는 말에 속을 것입니다. 그 때에, "백성 중에 통찰력 있는 자가 많은 사람을 깨우칠 것이다"(33절). 그 때에 말씀 계시를 받은 자는 이것이 예언의 성취임을 사람들에게 설명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칼에 쓰러질 것이요, 통찰력을 가진 사람들 중에 몇 사람이 몰락하리니, 이는 마지막 때까지 그들을 정결하게 하고, 깨끗하게 하며, 순결하게 하기 위함이라”(35절). 다니엘 11:36-45은 적그리스도를 분명히 언급합니다, “왕은 자기 좋을 대로 행하여, 스스로를 높이고, 모든 신보다 자기를 크다고 하며, 신들의 신을 대적하여 괴상한 말을 할 것이며; 그는 하나님의 분노가 그칠 때까지는 번영 할 것이다.... 그는 요새의 신(군력에 의한 통치)을 존경 할 것이다.... 그는 이방 신(사탄)의 도움으로 가장 강한 요새를 공격할 것이며, 자기를 인정하는 자들을 크게 존귀하게 하고, 그들로 많은 사람을 다스리게 하며 땅을 보상으로 나누어 줄 것이요.... 그도 아름다운 땅(이스라엘)에 들어가고 많은 나라가 무너지리라.... 그의 최후가 이르리니 아무도 그를 돕지 아니하리라.”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서 우리는 적그리스도의 출현에 대해 읽습니다. 1,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일과 우리가 그분 앞에 모이는 일을 두고 여러분에게 간청합니다. 주님의 날이 왔다고 생각하여, 여러분의 평정심이 급히 흔들리지 않게 하십시오. 여러분은 아무에게도 속아넘어가지 마십시오. 그 날이 오기 전에 먼저 믿음을 배신하는 일(신앙을 버림)이 생기고, 불법자(적그리스도) 곧 멸망의 자식이 나타날 것입니다.” 배신하는 것은 경건한 삶(예수님과 사도들이 세상에 전한 말씀)으로 인도하는 믿음에서 떠나는 것이며, 그것은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멸망의 자식'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사탄이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적그리스도도 멸망의 자식이라고 합니다. 사탄이 그의 안에도 들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소위 말하는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이나 예배의 대상 위에 자신을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신을 하나님으로 나타낼 것입니다(4,5절). 적그리스도는 말세 교회에서 이기는 자들을 통하여 나타내신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때 이전에 자기를 나타내지 못하게 하셨느니라(6절). 그런 다음 7절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읽습니다, “불법의 비밀은 이미 작동하고 있습니다; 다만, 억제하시는 분(사탄의 권세를 제지하는 성령)이 물러나실 때까지는 그것을 억제하실 것입니다."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때가 되면 성령은 (이기는 자들을 통해) 그분의 억제하는 영향력을 거두실 것입니다. 9,10절에 보면 적그리스도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속이는) 기사와 모든 불의한 속임수를 행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초자연적인 표적과 기사가 많이 있을 것입니다 - 모두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기 위한 것입니다. 10,1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여 줄 진리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속는 것을 허용하십니다. 그러므로 말세의 초자연적인 표적과 기사는, 하나님께 그들의 삶에서 죄로부터 구원받는 데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속는 것을 허락하시는 수단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진리를 사랑하고 모든 죄에서 구원받기를 전심으로 구할 때만, 속임수에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마지막 날의 속임수에 대한 유일한 보호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계시록 13장 15절에서 사람들이 경배하는 말하는 우상에 대해 보았습니다. 텔레비전과 비디오 영화에, 우리는 말하는 우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 세계의 사람들은 TV 앞에서 몇 시간을 보내면서, TV를 숭배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나 성경 공부나 기도를 위한 시간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습니다. 텔레비전 숭배는 적그리스도를 위한 준비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이 없는 기독교 집단의 많은 소위 신자들은 이 "말하는 우상"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모든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악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깨끗한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것에 지배당하면, 그 노예가 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섬기면, 우상숭배자가 됩니다. 사탄은 적그리스도의 나타남을 위하여 세상을 준비시키기 위해 많은 수단을 사용합니다. 16,17절: 그리고 그는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이나 할 것 없이, 다 그들의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사람, 곧 그 짐승의 이름이나, 짐승의 숫자를 가진 사람 외에는, 아무도 팔거나 사거나 할 수 없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짐승의 표"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적그리스도로부터 오른손이나 이마에 이 표를 받을 수 있는 선택권을 받을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적그리스도의 공개 추종자(오늘날 일부 비기독교 종교인들이 이마에 표시를 하는 것처럼 이마에 표시가 있음)가 되거나 또는 비밀 추종자(손바닥에 표시가 있음)가 될 수 있는 선택권이 주어질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적그리스도의 영은 이미 기독교 집단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적그리스도의 영을 따르는 것, 즉 공공연하게 죄를 짓고 생활하는 것이 가능합니다(창녀, 도박꾼, 술주정뱅이 및 많은 영화배우들이 하는 것처럼). 그 영을 은밀히 따르는 것도 가능합니다 - 직장에서 불의한 일(돈을 좀 더 벌기 위해 손으로 거짓 진술에 서명하거나, 무언가 불의한 일을 행하기 위해 뇌물을 주는 것 등)을 하다가 교회-모임에 와서 “영적”인 척 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들의 이마에 적그리스도의 영의 표시를 받지 않을 "신자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증거가 그렇게 함으로써 망가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증거를 유지하면서 여전히 세속적인 방법으로 불의한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짐승의 표를 그들의 손에 은밀히 받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헌신이 시험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마에 있든 오른손에 있든 모든 형태의 짐승의 표시를 멀리해야 합니다. 대신에,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내 몸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 있습니다”(갈 6:17)라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다른 표시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지막 날에 매우 가혹한 시험이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짐승의 표가 없어 음식을 살 수 없다면, 그것이 어떤 시험이 될지 생각해 보십시오. 에덴동산에서 하와에게 온 시험은 음식의 시험이었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예수님께 드린 첫 시험도 음식에 대한 시험이었습니다. 사탄은 "이 돌들로 떡이 되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굶어 죽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살(live)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만이 필요하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생존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태도를 가진 신자만이 마지막 날에 이기는 자가 될 것입니다. 타협하고 사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죽는 것이 낫다는 태도가 우리에게 없다면, 이미 기독교 집단에서 벌어지고 있는 타락의 흐름에 끌려갈 것입니다. 18절: 여기에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각이 있는 사람은 그 짐승을 상징하는 숫자를 세어 보십시오.그 수는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데; 그 수는 육백육십육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계산하도록 성령의 격려를 받았으므로, 계산을 해봅시다! 성경에 나오는 '6'은 사람의 수입니다. 사람은 여섯째 날에 창조되었습니다. 따라서 '666'('6'이 세 번 반복됨)은 하나님(삼위일체)과 동등해지려는 인간의 시도를 나타냅니다. 마찬가지로, '8'이라는 숫자는 새로운 주간의 첫째 날인 8일째 되는 날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새 창조의 숫자입니다. 음악에서도, 8번째 음마다 새로운 옥타브가 시작됩니다. 그리스어(신약이 기록된 언어)에서, 각 알파벳에는 숫자 값이 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그리스어로 "IESOUS"라고 쓰여 있으며 그 숫자 값은 888(I=10, E=8, S=200, O=70, U=400, S=200)입니다 - 세 번 반복되는 새로운 창조의 수! 그러므로 적그리스도의 숫자가 666이라는 것은 그의 이름의 숫자 값이 666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의 이름을 알게 되면 확인될 것입니다.

장 14
14장

1절: 또 내가 보니,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서 있었습니다. 그 어린 양과 함께 십사만 사천 명이 서 있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분의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13장에서 방금 읽은 것과 현저한 대조를 이룹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적그리스도가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이마에) 또는 은밀히(오른 손바닥에) 그를 인정하는 선택권을 제안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제자들에게 그러한 선택을 제공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의 모든 제자는 공개적으로 그분을 인정해야 합니다. 표시는 이마에만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밀한 추종자로 부름을 받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하리라.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 그를 부끄러워하리라"(마 10:32,33, 막 8:38).

당신이 사무실에서 일하는 경우 이마에 주님의 표시가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당신의 사무실에 있는 모든 사람은 당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직장에서 아무도 모르는 당신의 손에 숨겨진 표가 있는 것과 같은 것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따르는 사람은 그들의 이마에 표를 받을 것입니다. 그의 동료들은 그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알고 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 알려지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나는 비기독교인들이 공개적으로 이마에 종교적 표시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 부끄럽지 않게 그들의 종교를 선포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누구를 따르는지 알리는 것을 너무 자주 부끄러워합니다 - 아마도 그들은 사무실에서의 승진 기회가 그로 인해 영향을 받을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은 타협하고 세속적인 명예를 사랑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이 아닙니다. 그들은 시온 산에 어린 양과 함께 서 있는 자들 가운데 결코 포함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144,000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담대히 고백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제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친척들 사이에서나 사무실에서나 이웃에서 타협하지 않습니다. 비기독교인이 그의 이마에 종교적 표시를 하고 있는 것을 볼 때마다, 그것이 당신에게 도전이 되게 하십시오. 그가 자기 신을 숭배한다고 선포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어찌하여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숭배한다고 선포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겠습니까?

여기에 있는 144,000명은 앞서 7장에서 본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7장에 나오는 144.000명) 오직 이스라엘 지파에서만 나왔습니다 - 그리고 이스라엘 지파는 확실히 어린 양을 따르거나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임을 믿지 않습니다. 이들은 완전히 다른 그룹입니다. 이들은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서 "이기는 자"라고 불리는 자들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이름은 성격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이 144,000명의 이마에 "어린양과 아버지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는 것은 그들의 삶이 어린양과 아버지의 성품을 반영했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에게 물어볼 좋은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서, 털을 깎일 때에 입을 다물고 있고, 죽임을 당할 때 침묵했으며,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자신의 권리와 명예를 박탈당했을 때 자신의 대의(소송 사건)를 아버지께 맡겼던, 어린 양의 본성을 반영합니까? 우리는 죄인들을 오래 참으시고, 회개하는 타락한 자를 환영하시는 아버지의 성품을 반영하고 있습니까(눅 15:11-24).

어떤 사람들은 "이기는 사람이 그렇게 적다는 말입니까?"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삶에서 결코 화를 내지 않고 성나게 하는 상황에서 침묵하는 법을 배운 신자를 얼마나 많이 보았습니까? 확실히 적은 숫자입니다.

이 144,000명이 지상에서 내면적으로 획득한 본성, 즉 "아버지의 본성"이 이제 그들의 얼굴에서 그들의 인격을 통해 빛나기 시작합니다. 우리 각자에 대한 하나님의 갈망은 우리가 성숙하여, 다른 사람들에 향해 그분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분은 그런 목적을 염두에 두고 우리를 훈련시키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할 때 우리는 모두 아기입니다. 우리가 자라면 점차 젊은이처럼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계속 성장한다면, 우리는 아버지(요일 2:12-14), 즉 남을 섬기기 위해 자신을 부인하는 아버지, 다른 사람을 성숙하게 인도하기를 갈망하는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열정이 되어야 합니다 - 어린 양과 아버지의 본성이 우리의 인격을 통해 반영되도록 완전히 우리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2,3절: 그리고 나는 많은 물이 흐르는 소리와도 같고 큰 천둥소리와도 같은 음성이 하늘에서 울려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내가 들은 음성은 거문고를 타고 있는 사람들의 노랫가락과 같았습니다. 그들은 보좌와 네 생물과 그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땅에서 구원을 받은 십사만 사천명 밖에는, 아무도 그 노래를 배울 수 없었습니다.

시온산은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의 다른 이름입니다. 계시록 3장 12절은 하늘 예루살렘의 이름이 기록된 사람이 누구인지 알려 줍니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라"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또 내가 그의 위에 내 하나님의 이름('아버지'의 이름)과, 내 하나님의 도성 곧 내 하나님으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내 새 이름('어린 양'의 이름)을 기록하리라."

아버지의 이름과 어린 양의 이름, 새 예루살렘의 이름에 주목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계시록 14장에서 읽는 것입니다. 144,000명은 그분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 그들의 이마에 있으며, 시온 산(하늘의 예루살렘)에 서 있습니다. 성경과 성경을 비교할 때 모든 것이 명확해집니다.

이들은 이기는 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그들은 땅에 사는 동안에도 하늘에 속해 있습니다.

이 이긴 자들은 보좌 앞에서 새 노래를 불렀는데, 이는 땅에서 구속함(속량)을 받은 자들 외에는 아무도 배울 수 없었습니다. 왜 아무도 그 노래를 배울 수 없었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음악적인 마음이 없었기 때문일까요? 아니요. 이것은 음악적 사고와 관련이 없습니다. 그것은 하늘의 마음을 갖는 것과 모든 관련이 있습니다!! 악마의 진영에는 음악적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늘의 음악은 찬양과 경배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으며, 아버지 앞에서 황홀한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온 산에 서 있는 이 144,000명은 그들이 땅에 있는 동안에도 그 찬양의 노래를 배웠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투덜거리고, 원망하고, 비난하고, 험담하고, 남을 판단하고, 비방하는 일을 다 끝냈습니다. 오히려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감사하고, 항상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새 노래는 "찬양과 존귀와 영광과 통치와 권능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도다"입니다(계 5:12). 불평, 원망, 투덜거림의 냄새가 없는 노래입니다. 우리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노래를 배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천국의 노래, 찬양과 감사의 노래를 배우기 위해 이 땅에서 한 번의 일생을 주셨습니다. 원망과 불평에서 100% 자유로워지는 법을 배운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대부분의 신자들은, 음식이 좋지 않을 때, 또는 누군가가 그들을 위해 무언가를 하겠다고 약속하고 그것을 하지 않을 때, 또는 누군가가 자신의 권리를 빼앗았을 때, 또는 누군가가 자신이나 자녀에게 악을 행할 때, 또는 누군가가 자신이나 가족에 대해 나쁜 말을 할 때 불평합니다. 그러한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고 십자가를 지고 새 노래를 배울 수 있는 얼마나 많은 기회를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가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우리의 권리와 명예와 명성에 대해 죽지 않는 한 그 노래를 배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144,000명은 "무슨 일에든지,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말고"(빌 2:13,14), "모든 일에 감사하라"(살전 5:18)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유일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 14장 3절의 '배우다'라는 단어는 교육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새 노래를 부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선, 우리 중 아무도 이 노래를 모릅니다. 어째서 이 144,000명 외에는 노래를 배운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들었지만, 시험의 순간에는 실제로 짊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0년 동안 신자였음에도, 투덜거림과 화냄과 원망과 불평과 비방과 험담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대부분의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했기 때문에 모든 것이 괜찮다고 착각하여 미혹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또한 여기에서는 그들이 "땅에서 구속함을 받았다(속량을 받았다)"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땅에 사는 거주자들"과는 반대되는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땅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들은 땅의 일에 사로잡혀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위에 있는 것, 즉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우편에 앉아계시는 곳에 맞춰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땅에서 최대한 많은 돈을 벌고 죽어서도 천국에 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최대한 안락한 삶을 살다가 죽어서 천국에 갈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땅 거주자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이 땅에서 한 번뿐인 나의 삶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모든 뜻을 행할 수 있을까? 갈보리에서 나를 위해 죽으신 주님께 어떻게 감사를 표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요즘 스스로를 "신자들"이라고 하는 타협하고, 불성실하고, 미온적이고, 세속적인 유형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전혀 다른 범주에 속했습니다. 그들은 땅에서 구원(해방)되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세상의 안락이나 부나 명예에 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노래는 "우리가 얼마나 합당한 사람입니까!"가 아니라 "주님, 당신은 합당하십니다"입니다. 항상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합당하다고 생각하나?"라고 항상 궁금해 하는 사람들은 이 범주에 속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은 "우리는 합당하지 않다. 오직 그분만이 합당하시다"라고 새 노래를 부릅니다. 그것을 배운 신자가 얼마나 됩니까? 아주 아주 소수입니다. 신자들이 사람에게 존경과 인정을 받기 위해 행하는 수많은 일들은, 그들이 이 범주에 전혀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4절: 그들은 여자들과 더불어 몸을 더럽힌 일이 없는, 정절을 지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린 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다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드리는 첫 열매로서 구속함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육체적인 순결이나 육체적인 음행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언급된 여자들은 뒤에 계시록 17장 5절에 언급된 창녀들의 어머니 바벨론과, 그녀의 창녀-딸들입니다. 이 구절은 이 144,000명이 영적인 음행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육신과 세상과의 영적 간음으로 더럽혀지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순결한 처녀로 자기를 지켰습니다. 영적 간음은 야고보서 4:4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간음하는 자들아. 세상과 벗이 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이들은 시험의 순간에 충성하여, 세속성으로부터 자신을 지킨 자들입니다. 그들은 어린 양이 어디로 가든지 따라갔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어린 양이 이 땅을 걸으셨던 것처럼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걸었습니다.

여기에서 "그들은 사람들 가운데서 구속함을 받았다"라는 또 다른 구절에 주목하십시오. 우리는 그들이 땅에서 해방된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들이 사람들로부터, 즉 사람들의 의견으로부터도 해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첫 열매가 됩니다.

첫 열매는 나무에서 가장 먼저 익는 열매입니다. 이들은 지상 생애 동안 즉각적으로 성령님께 반응하여 무르익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인생을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십자가를 지도록 주신 기회를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린 양을 따를 기회를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스스로 죽어 예수님을 따르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빠르게 무르익었습니다. 그들은 첫 열매입니다.

야고보서 1장 18절은 하나님이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사, 우리로 그분의 피조물 가운데 첫 열매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올바른 방식으로 반응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올바르게 응답하고 첫 열매가 되는 소수가 있을 것입니다. 144,000이라는 숫자는 문자 그대로의 숫자가 아닙니다. 소수의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생명으로 가는 길이 좁아, 찾는 사람이 극소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 양의 피로 자기 옷을 씻은 큰 무리가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무리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계시록 7장에서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들 중 다수는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기 전에 죽은, 모든 종교의 사람들의 아기들이 될 것입니다. 그들 중 수백만은 20세기에 있었던 유산된 태아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그들에게 적용되어 그들이 하늘에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기는 자가 될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을 의식적으로 선택한 사람들은 셀 수 있는 무리입니다. 그들은 아주 아주 극소수입니다. 이들은 마태복음 5장, 6장, 7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하나님과 어린양의 첫 열매가 되는 사람들입니다.

5절: 그들의 입에서는 거짓말을 찾을 수 없고; 그들에게는 흠잡을 데가 없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거짓말쟁이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이 평범한 인간적 습관에서 너무나 깨끗해져서 그들의 삶이 끝날 때까지 그들의 입에서 거짓말을 찾을 수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한 가지 자격만으로 신자를 평가할 때 그 숫자가 매우 적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거짓말은 어릴 때부터 시작됩니다. 그것은 각종 속임수로 발전하여, 사람들에게 잘못된 인상을 주고, 과장하고, 진실에 가감하여 편견을 주거나, 위선, 검증되지 않은 통계를 인용, 가식 등으로 발전합니다. 이 모든 것에서 모든 신자가 다 깨끗해 졌다고 생각합니까?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이 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서, 자신의 삶에서 모든 거짓말을 제거하고, 항상 진실만을 말하며, '예'는 항상 '예'이고 '아니오'는 항상 '아니오'라고 합니까?

솔직히 많은 신자들의 상태를 지켜본 결과, 거짓말로부터 자신을 완전히 깨끗하게 한 사람이 온 인류 중에 144,000명이나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어린 양이 어디로 가시든지, 심지어 여기에서도(거짓말) 그분을 따라가는 것이 우리의 부르심입니다. 어린양이 거짓말을 하신 발자취를 보셨습니까? 없어요! 우리는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나왔을 때, 우리는 거짓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성령님은 우리를 결코 거짓을 말하지 않으시고 "나는 진리다"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형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가 성령과 협력하면, 그 숫자 속에서 우리의 자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입에 대한 강조를 다시 주목하십시오. 우리는 앞서 적그리스도의 말(speech)과 관련하여 그것을 보았습니다. 여기에 우리는 이기는 자들의 입이 있습니다. 신약 성경은 우리의 말에 얼마나 큰 중요성을 부여합니까!

예수님은, 마지막 날에 우리의 말을 평가함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거나 정죄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2:37)!! 우리의 말로써, 우리는 우리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그리스도의 영인지 아니면 적그리스도의 영인지 나타냅니다. 그들이 그들의 삶에서 모든 거짓을 제거했기 때문에, 이러한 승리자들은 "흠 없는" 사람이라고 불립니다. 우리도 우리의 부름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그 숫자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6절: 나는 또 다른 천사가 하늘 한가운데서 날아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에게는,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과 모든 민족과 종족과 언어와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천사는 땅 거주자들에게 영원한 복음을 전합니다. 그들은 여기에서 "땅에 앉은 자들"이라고 불립니다(여백). 그들은 앉아서 이 땅의 안락함, 명예, 쾌락과 부를 즐기기로 결정한 사람들입니다.

7절: 그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려라.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가 이르렀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의 근원을 만드신 분께 경배하여라."

이것은 심판이 내리기 전,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며 창조주를 경배하라"는 땅 거주자들을 향한 마지막 초대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고 창조주로 경배하지 않기 때문에, 악에 빠지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 20-32절에 보면 인간은 창조세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으나, 감사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죄에 점점 더 깊이 빠져들었고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셨습니다.

여기에 언급된 "심판의 시간(1시간)"과 고린도후서 6장 2절에 언급된 "구원의 (24시간)"의 대조를 주목하십시오. 그것은 하나님께서 심판보다는 은혜로 행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아담적 본성은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기 보다는 판단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우리는 차라리 심판의 날과 은혜의 시간을 원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에덴동산에서 아담의 행동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께 질문을 받자마자, 아내에게 비난의 손가락을 겨누었습니다. 죄를 짓자마자 남을 판단하는 습관이 그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주님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허물을 찾는 우리의 악한 본성을, 그분 자신의 은혜롭고 용서하는 본성으로 바꾸려고 하십니다. 한계에 다다랐을 때에만, 하나님은 심판을 행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도 모든 사람에게 이와 같은 자비의 마음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8절: 또 두 번째 다른 천사가 뒤따라와서 말하였습니다, "무너졌다. 무너졌다. 큰 도시 바벨론이 무너졌다. 그녀는 자기 음행으로 빚은 욕정의 포도주를 모든 민족에게 마시게 했다."

바벨론은 예수를 따르는 척하지만, 자신과 세상과 세상의 모든 정욕과 열망을 위해 사는, 창녀-기독교, 가짜 교회입니다. 그녀는 모든 민족이 그녀의 영적 부도덕의 욕정의 포도주를 마시게 했습니다. 그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17장과 18장에서 살펴보겠습니다.

9-11절: 또 세 번째 다른 천사가 그들을 뒤 따라와서 큰 소리로 말하였습니다, "누구든지 그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절하고, 이마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잔에 순전히 독하게 섞인 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될 것이다; 또 그런 자는 거룩한 천사들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통을 받을 것이다. 그들의 고통의 연기는 영원히 올라올 것이며; 그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절하는 자들과, 또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에도 낮에도 휴식을 얻지 못할 것이다."

바벨론의 포도주를 마시는 자들은 또한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셔야 할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를 마시고 다른 하나를 피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진노는 "순전히 독하게 섞여 있다"고 언급되는데, 이는 자비가 없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남에게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긍휼 없이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약 2:13). 즉, 그들에게 해를 입히고, 속이고, 도적질하고, 악을 행한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무자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용서하지 않는 사람들은 여기에서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는 사람들과 같은 범주에 속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모두 거룩한 천사들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영원히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 그들의 고통은 영원합니다.

계시록 4장 8절에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경배하므로 주야로 쉬지 않는 생물들을 보았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악인들도 하나님께 경배하는 대신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했기 때문에 항상 괴로움을 당하므로 주야로 쉬지 못한다는 것을 봅니다.

12절: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를 믿는 믿음을 지키는 성도들에게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들로 묘사됩니다. 언급된 두 가지, 즉 순종과 믿음에 주목하십시오. Amplified Bible(확대 성경)은 이 구절을 "습관적으로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자들"로 번역합니다. 나는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습관적으로 지키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강한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마지막까지 견디기 위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구 사항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첫 번째 이긴 자이시며, 그분이 이기신 것처럼 우리 모두가 이길 수 있도록 초대하십니다(계 3:21). 그분은 시온산에 있는 이 모든 이긴 자들, 즉 이 세상의 삶에서 마음을 다해 주님을 따르고 자기 세대에서 적그리스도의 영을 이긴 소수의 사람들의 머리로 서 계십니다.

13절: 나는 또 하늘에서 들려 오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기록하여라. 이제부터 주님 안에서 죽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그러자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그들은 수고를 그치고 쉬게 될 것이다. 이는 그들의 행위가 그들을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항상 복이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제부터 주 안에서 죽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아마도 그들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무덤에 있을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 종말이 가까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구절도 주목하십시오: "그들의 행위가 그들을 따를 것이다."

디모데전서 5장 24절에 보면 "어떤 사람들의 죄는 명백해서, 재판을 받기 전에 먼저 드러나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나중에야 드러납니다"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의 죄악된 삶은 누구에게나 명백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죄악된 삶은 그들의 죄가 숨겨져 있기 때문에 그렇게 명백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죄는 마지막 날에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놀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들의 선행은 아주 분명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알지 못하는 선한 일을 많이 한 사람들이 있습니다(딤전 5:25). 그들의 선행은 마지막 날에만 드러날 것입니다.

계시록 14장 13절에서 우리는 삶의 숨겨진 영역에서 선하게 살았던 그러한 사람들에 대해 읽습니다. 그리고 심판 날에 그 책이 펼쳐졌을 때, 그 행위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렇게 죽는 사람은 다 복이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경건한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한 모든 선행이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고 우리의 사생활에 숨겨진 선행이 없다면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14-16절: 내가 또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그 구름 위에는 '인자 같은 분'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는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날이 선 낫을 들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천사가 성전에서 나와서,

구름 위에 앉아 있는 분에게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낫을 들고 거두어들이십시오. 땅에 있는 곡식이 무르익어서(시들어서), 거두어들일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구름 위에 앉은 분이 낫을 땅에 휘둘러서, 땅에 있는 곡식을 거두어들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수확물을 거두시는 예수님을 봅니다. 천사는 땅의 수확물이 "시들었다"고 보고합니다(15절 - 난외 번역).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 단어 "xeraino(제라이노)"는 "시들다"를 의미합니다 -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4장 6절에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사용하신 것과 같은 단어입니다. 거기에서 어떤 씨는 땅이 깊지 않은 땅에 떨어져서, 태양이 떠오를 때 식물이 시들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복음에 표면적으로만 반응하고, 내면의 생명이 시들어 버린 자들의 추수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추수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에도 이미 준비되어 있었습니다(요 4:35 참조).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에 대한 추수는 지금 2000년 동안 일어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4장 14절에 언급된 추수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고,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지났는데도, 우리가 구원을 얻지 못하였노라(렘 8:20)"하며 외치는 자들의 추수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않는 사람들은, 들에 남아 시들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추수하는 시간은 앞서 7절에서 언급한 심판의 시간과 같습니다. 구원의 은 끝나고 심판의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주님은 심판의 낫을 땅 위에 휘두르셔서 거두십니다.

요엘 3:12-14서도 이 때에 대해 나와 있습니다:

민족들아, 일어나서 여호사밧 골짜기로 오너라. 내가 거기에 앉아서 사방의 민족들을 모두 심판하겠다. 거두어들일 곡식이 다 익었으니, 너희는 낫을 들어라. 와서 포도주 틀을 밟으라. 포도주 틀이 가득히 찼느니라. 포도주 통들이 넘치니 그들의 악이 큼이로다. 판결의 골짜기에 수많은 무리가 모였다. 판결의 골짜기에서 주님께서 심판하실 날이 가까이 왔다.

17-20절: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왔는데, 그도 역시 날이 선 낫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는 불을 지배하는 권세를 가진 천사였습니다; 날이 선 낫을 들고 있는 천사에게 큰 소리로 말하였습니다, '날이 선 그 낫을 대어, 땅에 있는 포도나무에서 포도송이를 거두십시오. 포도가 다 익었습니다.' 그래서 그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서,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졌습니다. 포도주 틀은 성 밖에 있었는데, 그것을 밟아 누르니 틀에서 피가 흘러 나왔습니다. 그 피가 말 굴레의 높이까지 닿고, 거의 200마일이나 퍼져 나갔습니다.

그 송이들은 의 포도 나무에서 수확되고 있습니다. 하늘의 참 포도나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요 15:1). 그러나 이것은 또 다른 포도나무, 즉 땅에 사는 사람들의 포도나무입니다! 그리고 그 포도나무의 포도는 심판을 위해 익었습니다.

하나님은 문제가 무르익었을 때만 사람을 심판하십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15장 1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을 애굽에서 400년 후에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이유는 그때가 되어야만 가나안 족속이 심판을 위해 무르익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18장에 보면 가나안 족속이 범한 죄의 대부분이 성적 타락(변태)의 죄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 시대에 세상을 멸하신 것과 같은 이유로, 여호수아를 통해 가나안 족속을 멸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 악인이 제거되지 않았다면, 온 세상이 타락했을 정도로 성적 타락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온 몸이 죽지 않도록 괴사한 다리를 절단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브라함 시대에, 가나안 사람들의 죄는 아직 "원숙해지지" 않았습니다(창 15:16). 아직 심판하기에 무르익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인내하시고, 오래 참으시고, 오래 기다리십니다. 오늘날 세상의 성적 타락(변태)과 폭력과 악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가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이 익기를 기다리십니다. 한편, 그분은 모든 사람이 회개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종들을 보내어 말씀을 전파하고, 사람들에게 말하여 그들의 죄에서 돌이키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돌아서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할 때마다, 그들은 조금씩 심판을 받을 준비가 되어 갑니다. 마침내 천사가 "추수가 무르익었습니다"라고 보고할 날이 올 것입니다.

포도주 틀은 포도즙이 흘러나오도록 포도를 넣고 밟는 곳입니다. 이것은 아마겟돈 최후의 전쟁에서 예루살렘 주변 200마일에 걸쳐 흐를 피의 그림입니다.

장 15
15장

1절: 그리고 나는 하늘에서 크고도 놀라운 또 다른 표적을 하나 보았습니다. 일곱 천사가 일곱 재난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마지막 재난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그것으로 끝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6장에서 우리는 여섯 개의 봉인을 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들의 대부분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킨 것이 아니라, 말세에 이 땅에서 일어날 어떤 사건들에 대한 설명일 뿐입니다. 그러나 여섯 번째 봉인을 떼실 때, 우리는 "진노"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의 진노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시작될 때, 교회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지 않기 때문에, 교회가 들려집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의 표현인 일곱 개의 마지막 나팔을 보았습니다. 이제 마침내, 우리는 일곱 개의 마지막 재앙을 담은 일곱 개의 진노의 대접을 봅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끝났다"고 말합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리실 때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충만한 진노와 심판을 경험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오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진노나 심판이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위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피난처를 얻지 못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날 희망이 없습니다. 이사야서 13장 6-11절을 읽습니다: “슬피 울어라! 주님께서 오실 날이 가깝다. 전능하신 분께서 오시는 날, 파멸의 날이 곧 이른다. 주님의 날이 온다. 무자비한 날, 진노와 맹렬한 분노의 날, 땅을 황폐하게 하고 그 땅에서 죄인들을 멸절시키는, 주님의 날이 온다. 하늘의 별들과 그 성좌들이 빛을 내지 못하며, 해가 떠도 어둡고, 달 또한 그 빛을 비치지 못할 것이다. 내가 세상의 악과 흉악한 자들의 악행을 벌하겠다. (특히) 교만한 자들의 오만을 꺾어 놓고, 무자비한 자들의 거만을 낮추어 놓겠다.” 하나님의 진노는 특히 세상의 교만한 자와 오만한 자와 거만한 자에게 부어질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교만을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2절: 나는 또 불이 섞인 유리 바다와 같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 유리 바다 위에는 짐승과 그 짐승 우상과 그 이름을 상징하는 숫자를 이긴 사람이, 하나님의 거문고를 들고 서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공중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휴거된, 이긴 자들을 다시 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가 땅에 떨어질 때 여기에 있지 않을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4장 6절에서도 이 유리 바다를 보았습니다. 이 이긴 자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 있습니다. 계시록을 보면 은혜와 심판이 자주 교차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이 먹은 책은 은혜와 심판이 번갈아 나오는 달고 쓴 책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 장에서 심판을 다시 보기 전에, 여기 15장에서 은혜의 그림을 봅니다. 다시 말하지만, 요한계시록은 시간 순서대로 기록되지 않았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6장에서 여섯째 인 아래서 묘사된 하나님의 진노는 16장에 더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이긴 자는 짐승을 이긴 자, 즉 20세기 동안 활동해 온 적그리스도의 영을 이긴 자로 묘사됩니다. 적그리스도의 영은 1세기부터 스스로를 산처럼 세웠고, 우리는 지금 그 정점에 매우 가깝습니다! 어느 날, 적그리스도가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세대에나 적그리스도의 영을 이긴 자들이 있었습니다. 세상은 짐승처럼 행동하고 공격을 받으면 짐승처럼 반응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짐승을 이기는 사람들은, 주변의 짐승들에게 그리스도와 같이 반응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이기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어린 양을 따릅니다. 심지어 종교적인 사람들도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을 때, 예수님에게 짐승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 보답으로 그들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셨습니다. 이것이 이기는 자들이 걷는 길입니다. 3,4절: 그들은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와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주 하나님, 전능하신 분,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크고도 놀랍습니다. 만민의 왕이신 주님, 주님의 길은 의롭고도 참되십니다. 주님, 누가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누가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지 않겠습니까? 주님만이 홀로 거룩하십니다. 모든 민족이 주님 앞으로 와서 경배할 것입니다. 주님의 정의로운 행동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구약에 언급된 모세의 노래는 두 가지입니다 - 하나는 출애굽기 15:1-4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고, 바로와 그의 군대가 그곳에서 물에 빠져 죽었을 때입니다. 모세는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분은 지극히 높으시도다. 그분이 말과 기병을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라고 노래했습니다. 우리는 계시록 6장에서 적그리스도 역시 백마 탄 자로 묘사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기는 자들이, 그 말과 기병을 넘어뜨리신 것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봅니다. 아마겟돈의 마지막 전투에서, 적그리스도와 그의 군대가 이스라엘 땅에 들어와 공격할 것입니다. 그 때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들과 함께 강림하실 것입니다. 그분의 발이 감람산 위에 서실 것이며, 적그리스도의 세력을 멸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전혀 싸우지 않고 지켜보고 그 승리에 참여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오늘날에도 모든 승리를 이기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무기로 전투에서 승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가만히 서서 주님을 신뢰하면, 주님은 우리의 원수들을 멸하십니다. 그래서, 그것을 믿는 사람은 오늘도 모세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삶의 전쟁에서 모세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만히 서서" 주님께서 우리의 적들에게 하시는 일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의 두 번째 노래는 신명기 31:30-32:52에 있습니다. 그곳에서도 그는 노래합니다, “모든 나라들아, 주님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여라. 주님께서 그 종들의 피를 흘린 자에게 원수를 갚으시고 당신의 대적들에게 복수하신다. 당신의 땅과 백성이 지은 죄를 속하여 주신다”(신 32:43). 두 노래 모두에서. 우리는 하나의 진리를 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의 원수에게 복수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물러서고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싸우시고 복수하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언젠가 하나님의 하프로 영광 중에 부를 수 있도록 지금 배워야 할 노래입니다. 일상의 상황이, 우리가 이 노래를 배우기 위한 합창단 연습과 같습니다. 이기는 자는 하나님의 길은 완전하다고 노래합니다. 천국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잘하셨습니다"라고 노래할 것입니다. 그 날,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신 방식을 되돌아보면,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우리의 가장 좋은 것을 위해 하나님이 정하신 것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왜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날, 우리는 완벽하게 이해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그날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심지어 지금도 그것을 믿고 알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이 땅에서 그에게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한 이유를 설명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그는 "주님! 당신의 길은 완전합니다!"라고 노래합니다. 5,6절: 그 뒤에 또 내가 보니, 하늘에 있는 증거의 장소인 장막 성전이 열리고, 그 성전으로부터 일곱 천사가 일곱 재난을 들고 나왔습니다. 그들은 깨끗하고 빛나는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띠를 띠고 있었습니다. 천사들은 "깨끗하고 밝은" 세마포 옷을 입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9장 8절에서 우리는 깨끗하고 밝은 세마포가 성도들의 의를 상징한다고 들었습니다. 이 천사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내리며, 그들의 의복은 심판이 의롭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들의 가슴에 두른 황금 띠도 같은 것을 말합니다. 이사야서 11장 2절, 3절에 예수님에 관해서 보면, "그분은 눈으로 본 대로, 귀로 들은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시며"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분의 이 땅의 감각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본을 따르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것을 보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것들을 모두 아버지께 가져가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는 이제 인간적인 한계를 가진 사람으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당신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만일 그분의 아버지께서 그분에게 무엇인가를 말씀하셨다면, 그분은 그것에 근거하여 그분의 판단을 내리실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심판이 항상 의로운 이유였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보고 듣는 것만으로 판단할 수 있고, 그러한 정보는 항상 의로운 판단을 내리기에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결코 아무도 판단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7절: 또 네 생물 가운데 하나가, 영원무궁하도록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 채운 금 대접 일곱 개를 그 일곱 천사에게 주었습니다. 네 생물은 지금까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에만 참여했습니다. 이제 그들도 하나님의 심판에 참여합니다.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심판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는 다른 하나의 직접적인 결과입니다. 그리고 이 네 생물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때가 되면 심판에 참여하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습니다. 하나님이 선을 나타내시고 필요에 따라 심판하시는 것은 지극히 합당합니다 - 둘 다 그분의 완전한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8절: 성전이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에서 나오는 연기로 가득 차게 되니, 그 일곱 천사의 일곱 재난이 끝나기까지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솔로몬이 그 시대에 성전 건축을 마치매,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심판이 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충만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에도 영광이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회심하지 않은 사랑하는 사람이 지옥에서 영원히 불타는 모습을 우리가 어떻게 견딜 수 있을지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예수님이 그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보다 더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 사람이 영원히 저주를 받는 것을 보고 견디실 수 있다면, 우리도 견딜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때 우리가 그분과 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온유와 사랑으로 이 땅에 걸으실 때 나타난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이 그분의 심판에 나타나 있음을 분명히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육신 안에 있고 우리의 마음이 죄로 더럽혀지고 비뚤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지금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요 1:14) 예수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조차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영광을 구함으로 그들의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겸손, 용서, 자비, 복수하지 않음, 원수 사랑 등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마지막 날에 우리의 눈이 조금 더 떠지면, 사람을 지옥으로 보내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임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미워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심판에도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 있는데, 우리는 지금 그것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장 16
16장

1-9절: 나는 또 성전에서 큰 음성이 울려오는 것을 들었는데, 그 음성이 일곱 천사들에게 이르기를 "가서, 하나님의 진노가 담긴 일곱 대접을 땅에 쏟아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첫째 천사가 나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니, 짐승의 표를 받은 받은 자들과 그 짐승 우상에게 절하는 자들에게 혐오스럽고 악한 종기가 생겼습니다. 둘째 천째가 그 대접을 바다에 쏟으니, 바닷물이 죽은 사람의 피처럼 되고, 바다에 있는 모든 생물이 죽었습니다. 셋째 천사가 그 대접을 강과 샘물에 쏟으니, 물이 피가 되었습니다. 내가 들으니, 물을 주관하는 천사가 말하기를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던 거룩하신 주님, 이렇게 심판하셨으니, 주님은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들은 성도들과 예언자들의 피를 흘리게 하였으므로, 주님께서 그들에게 피를 주어, 마시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되어야 마땅합니다" 하였습니다. 또 내가 들으니, 제단에서 "그렇습니다. 주 하나님, 전능하신 분, 주님의 심판은 참되고 의롭습니다"하는 소리가 울려 나왔습니다. 넷째 천사가 그 대접을 해에다 쏟았습니다. 해는 불로 사람을 태우라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몹시 뜨거운 열에 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재앙을 지배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였고, 회개하지 않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진노의 처음 네 대접의 심판은 처음 네 나팔의 심판과 유사합니다(8장). 나팔이 부는 것과 동시에 이 대접이 쏟아질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처음 네 나팔과 똑같이, 첫째 대접은 땅에, 둘째 대접은 바다 위에, 셋째 대접은 물의 샘들 위에, 넷째 대접은 천체 위에 쏟아졌습니다. 그것을 14장 7절과 비교해 보십시오!! 거기서 사람들은 (1) 하늘과 (2) 땅과 (3) 바다와 (4)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분을 경배하도록 요청 받습니다.

2절은 짐승의 표에 대해 말합니다. 인간이 성장함에 따라 짐승처럼 행동하기 시작하기 때문에 영적으로 말하자면, 모두 짐승의 표가 생기기 시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전도서 3장 1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사람의 아들들에 관하여 속으로 말하되, 하나님이 확실히 그들을 시험하여(다양한 시련과 시험을 겪도록 허용하심), 사람이 참으로 짐승에 불과함을 알게 하셨느니라."

우리 삶에 시련이 닥치고, 짐승처럼 행동하는 우리 자신을 볼 때, 하나님은 우리가 동물보다 나을 것이 없다고 말씀하시려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오 하나님, 제가 얼마나 눈이 멀었습니까! 당신은 나를 당신의 아들로 창조하셨습니다. 대신 나는 짐승의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사 변화시켜 주소서.

짐승의 표의 반대는 어린 양의 표입니다. 어린 양은 인생의 시련과 시험을 겪을 때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시련에서 짐승의 표를 조금 더 받거나 어린 양의 표를 조금 더 받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세 번째 재앙에서 사람들에게 피를 주어 마시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뿌린 대로 거두게 하시는 것을 봅니다. 그들은 성도들의 피를 흘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물을 피로 변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과 똑같이 우리를 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시며, 마음이 비뚤어진 자에게 기민함을 보이십니다"(시 18:25).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사람은 그분께 용서받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관대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관대하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남에게 인색한 사람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인색하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무자비하고 완고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완고하고 무자비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혀나 다른 방법으로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언젠가 그들에게 피를 마시게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심판의 날에 하나님의 심판이 정확함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정확히 우리가 한 일에 따라 우리의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계시록 22장 12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의 보상도 우리가 행한 대로 정확하게 될 것입니다.

물의 천사는 심판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정확함에 대해, "그들은 피를 마시는 것이 합당하다" 또는 "그들은 그것을 받아 마땅하다 "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예수께서 사데에서 이기는 자들에 대해 "그들은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걷기에 합당하다"(계 3:4)라고 말씀하신 것과 대조해 보십시오. 얼마나 대조적인가요!

계시록에서 "의로운"과 "심판"이라는 단어는 종종 함께 나옵니다. 우리는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모든 심판에 의로움이 있음을 분명히 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회개하지 아니하였느니라"는 요한계시록 9:20,21에서 본 구절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여기에서 다시 봅니다(9절). 이것은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완고해졌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러한 가혹한 형벌도 회개를 가져오지 못합니다.

10,11절: 다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짐승의 왕좌에 쏟으니; 짐승의 나라가 어두워지고; 사람들은 괴로움을 못 이겨서 자기들의 혀를 깨물었습니다. 그들은 아픔과 부스럼 때문에, 하늘의 하나님을 모독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행동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애굽(이집트)의 재앙과 다소 비슷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회개하는 대신에, 더욱 하나님을 모독하기 시작합니다. 회개는 모든 고통과 종기와 질병에 가장 좋은 약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약을 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께 이의를 제기하고 그분을 저주합니다. 그것이 그들을 치료합니까? 아니요. 그것은 그들을 더 빨리 지옥으로 보냅니다.

사람이 얼마나 눈이 멀고 어리석습니까?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는 음녀 교회인, 바벨론을 세우는 영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바벨론에서 끝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인 예루살렘의 일원이 되는 사람들은 그 반대에 해당됩니다: "그들은 회개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서, 교회에 대한 주님의 메시지에서 회개에 대한 반복적인 강조를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이기는 자가 되는 길입니다!!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회개의 삶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나 사역에서 아직 그리스도와 같지 않기 때문에 회개합니다.

참 교회인, 예루살렘은, 자기 안에 끊임없는 회개의 영을 품고, 날마다 자기 안에서 판단할 것을 찾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세워집니다. 당신이 형제에게 가서 사과하고 "내가 한(말한) 일에 대해 미안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어려워지면, 당신은 정말 유감스러운 상태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바벨론으로 가는 길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당신은 이미 거기에 있습니다!

9절에 보면, 우리가 회개할 때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까? 바로 지속적인 회개입니다.

12절: 여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큰 강 유프라테스에 쏟으니; 강물이 말라 버려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마련되었습니다.

9장에서, 우리는 어떤 악마들이 유프라테스 강에 묶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유프라테스 강은 느부갓네살이 건설한 고대 바벨론을 지나 흐릅니다. "동방에서 온 왕"은 아마도 중국 군대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9장은 그 군대에 있는 2억 명의 사람들을 언급합니다. 그런 군대를 키울 수 있는 나라는 세계에서 중국밖에 없습니다.

13,14절: 나는 또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예언자의 입에서, 개구리와 같이 생긴 더러운 영 셋이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귀신의 영으로서, 기이한 일을 행하면서 온 세계의 왕들을 찾아 돌아다니는데,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큰 날에 일어날 전쟁에 대비하여 왕들을 모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우리는 입의 강조를 세 번이나 하는 것을 봅니다.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더러운 영이 그들의 입을 지배합니다. 여기 사탄의 삼위일체인 용, 짐승,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더러운 영이 나옵니다. 더러운 영은 여기에서 개구리에 비유됩니다. 우리가 악한 말이나 불친절한 말을 할 때마다, 그것이 우리 입에서 나오는 개구리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애굽의 개구리 재앙처럼, 신자들이 돌아다니며 여기저기 개구리를 뱉어 내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모든 신자들은 그들의 말의 영역에서 회개할, 절실한 필요가 있습니다.

이 악한 영들은 기적을 행합니다. 말세에 넘치게 될 것인, 속이는 이적과 표적이 다시 언급됨을 주목하십시오.

전능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날의 전쟁인 아마겟돈의 마지막 전투를 위해 세계의 나라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일 것입니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악한 말(개구리)은 종종 세상과 세속적인 기독교 집단 모두에서 결국 전쟁으로 이어집니다. 여기에서 그것들은 아마겟돈의 마지막 전투로 이어집니다.

15절: ("보아라, 내가 도둑처럼 올 것이다. 깨어 있어서, 자기 옷을 갖추어 입고, 벌거벗은 몸으로 돌아다니지 않으며, 자기의 부끄러운 데를 남에게 보이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전쟁이 한창이던 바로 그때, 우리가 이 시간에 이 땅에서 발견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님의 경고가 한 번 더 옵니다. 우리가 충실하다면, 여기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옷을 깨끗하게 유지하고 마음과 말을 조심합시다. 예수님은 도적같이 오실 것이며, 우리가 준비되어 있으면 우리를 데려가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들림을 받는다면, 여기에 설명된 모든 일이 일어나고 있을 때, 우리는 이 땅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이 구절을 괄호 안에 넣었습니다.

16절: 그 세 영은 히브리 말로 아마겟돈이라고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50마일 떨어진 곳에는 마게드(아마겟돈)라고 하는 큰 들판이 있습니다. 이 들판은 예수님께서 성도들과 함께 내려오셔서 적그리스도를 멸하시고 그분의 왕국을 이 땅에 세우실 때, 이 마지막 전투가 일어날 곳입니다.

아마겟돈 전쟁 중에, 악마의 영은 세상의 많은 통치자들 즉 총리들과 대통령들을 사로잡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마겟돈에 모여서 하나님께 맞서 싸울 것입니다.

17,18절: 일곱째 천사가 그 대접을 공중에 쏟으니;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다 되었다"하는 큰 음성이 울려 나왔습니다. 또 번개가 치고, 음성들이 나고, 천둥이 울리고, 큰 지진이 일어났는데; 이런 큰 지진은 사람이 땅 위에 생겨난 뒤로 일찍이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감람산에 발을 딛으실 때, 세상에서 가장 큰 지진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 때 산이 둘로 갈라질 것입니다.

19,20절: 그리고 그 큰 도시가 세 조각이 나고, 민족들의 도시들도 무너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큰 도시 바벨론을 기억하셔서,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는 독한 포도주의 잔을 그 도시에 내리시니, 모든 섬들이 사라지고, 산들이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여섯 번째 봉인이 떼어질 때 본 것입니다: "모든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졌습니다"(계 6:14).

21절: 그리고 무게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들 위에 떨어지니; 사람들은 우박의 재앙이 너무도 심해서, 하나님을 모독하였습니다.

스가랴 14장은 아마겟돈 전쟁에 대한 설명을 제공합니다. 거기에는 "보라, 내가 모든 민족을 모아 예루살렘을 치게 하는 날이 여호와께 이르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1,2절).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지 40년 후, 로마인들이 예루살렘을 쳐서 멸망시켰습니다. 지난 1900년 동안, 12세기와 13세기에는 십자군, 그리고 이후에는 터키와 영국 등 많은 나라들이 예루살렘을 치러 왔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민족이 예루살렘을 대적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것은 여전히 ​​​​미래에 있습니다.

적그리스도의 지도 아래, 그 날에 모든 민족들이 모여서 예루살렘을 치러 올 것입니다.

"이 도성이 함락되고, 가옥이 약탈당하고, 여자들이 겁탈당하고, 이 도성의 주민이 절반이나 사로 잡혀 갈 것이다.…..주님께서 나아가셔서, 이방 나라들과 싸우실 것이다. 전쟁 때에 싸우시던 것처럼 하실 것이다"(2,3절).

주님께서 나아가셔서 적그리스도의 세력을 멸하시고 그분의 왕국을 이 땅에 세우실 것입니다.

"그 날이 오면, 주님께서 올리브 산(그분이 승천하시던 그 산) 위에 발을 디디고 서실 것이다. 그러면 올리브 산은 한가운데가 갈라져서 동서로 뻗은 매우 긴 골짜기가 생길 것이다. 산의 반쪽은 북쪽으로 다른 반쪽은 남쪽으로 옮겨질 것이다.…..주 나의 하나님이 오실 것이다. 모든 거룩한 자들을 거느리시고 오실 것이다"(4-6절).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생수가 흘러나오리라.…..주님께서 온 세상의 왕이 되실 것이다.…..온 땅이 평야로 변할 것이다.…..예루살렘은 우뚝 솟아서, 제자리에 그대로 남을 것이다"(9-10절).

그 마지막 전쟁에서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해 계속 설명합니다. 그 중 일부는 핵전쟁의 영향처럼 보입니다:

"예루살렘을 치러 오는 모든 민족을, 주님께서 다음과 같은 재앙으로 치실 것이다. 그들이 제 발로 서 있는 동안에 살이 썩고, 눈동자가 눈구멍 속에서 썩으며, 혀가 입 안에서 썩을 것이다"(12절).

여호와께서 그분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실 때 그 날에는 "여호와의 집에 장사꾼(사업가)이 다시는 없을 것"(슥 14:21)입니다.

사업가는 종교를 사업으로 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성전에서 돈 바꾸는 자들과 같이 경건을 물질적 이득의 수단으로 삼은 자들을 예수님께서 쫓아내셨습니다! 마지막 날에 그런 장사꾼들은 모두 하나님의 집에서 쫓겨날 것입니다.

다음 장에서는 기독교가 수익과 이득의 원천이 된 사람들이 세운 바벨론을 다룹니다. 주님은 돈 바꾸는 자들을 쫓아내기 위해 두 번째 오실 것입니다. 이번에는 성전에서가 아니라 기독교 교회에서 말입니다.

장 18
18장

1,2절: 그 뒤에 나는 다른 천사가 큰 권세를 가지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땅은 그의 영광으로 환해졌습니다. 그는 힘찬 소리로 외쳤습니다, '무너졌다. 무너졌다. 큰 도시 바벨론이 무너졌다! 바벨론은 귀신들의 거처가 되고, 온갖 더러운 영의 소굴이 되고, 더럽고 가증한 온갖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17장은 바벨론을 종교 체계로 보여주는 반면, 18장은 바벨론을 상업 체계로 보여줍니다. 둘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벨론은 어떻게 귀신들의 처소가 되었습니까? 이 악령들은 어떻게 거기에 발을 들였습니까? 순결과 거룩함을 강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위대함과 명예와 번영을 강조한다면, 더러운 영들은 머지않아 그 가운데에 보금자리를 지을 것입니다. 반면에 거룩함과 순결함을 강조한다면, 더러운 영은 순식간에 쫓겨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거룩함을 강조하는 교회는 드뭅니다. 교회가 거룩함을 강조하기 시작하면, 그들은 곧 완벽주의를 설교한다는 비난을 받습니다 - 그리고 교회의 지도자들은 곧 두려움에 물러서서, 거룩함을 설교하는 것을 중단합니다. 반면에, 참된 거룩함을 강조하며 시작한 몇몇 교회들은 오늘날 율법주의적인 바리새인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부정한 새들은 그들 가운데서도 안식처를 찾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속주의와 율법주의의 양극단을 모두 경계해야 합니다.

3절: 이는, 모든 민족이 그 음녀의 부도덕한 정욕의 포도주를 마셨고, 세상의 왕들이 그녀와 더불어 부도덕한 행위를 하였으며; 세상의 상인들이 그녀의 관능의 풍요로움으로 치부하였기 때문이다.

한 가지 예는 바벨론을 통해 세속적인 사업가들이 어떻게 부자가 되었는지를 보여주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매년 전 세계에서 크리스마스 시즌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카드와 선물에 쓰는 수백만 루피와 달러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탄생일'을 축하하는 것은 전 세계 모든 대기업을 위한 기회가 되었습니다. 소위 신자들까지 크리스마스때 산타클로스에게 호감을 표시합니다!! 이 모든 것이 철저하게 바벨론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집단이 실제로 12월 25일에 기념하는 것은 태양신의 생일입니다. 유럽 ​​사람들은 태양신을 숭배하고 그 날짜에 태양신의 생일을 축하했습니다 (그들이 기독교로 회심하기 전에 수세기 동안). 그들의 계산에 따르면 그날이 동지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12월 22일이 태양이 남회귀선에서 북쪽으로 이동하는 실제 날짜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날 이후로 북반구의 낮이 다시 길어지기 시작합니다 - 그래서 그 날짜는 태양신의 생일로 축하되었습니다. 그 이교도들이 그들의 종교를 "기독교"로 바꾸었을 때, 그들은 단지 그들의 축제의 이름을 바꾸어 "그들의 새로운 신, 그리스도의 생일"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은 이제 전 세계의 사업가들에게 수백만 달러를 긁어 모을 기회를 주었습니다!

4,5절: 나는 하늘에서 또 다른 음성이 울려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내 백성아, 그녀에게서 떠나거라. 너희는 그녀의 죄에 가담하지 말고, 그녀가 당하는 재난을 당하지 않도록 하여라. 그녀의 죄는 하늘에까지 닿았고, 하나님은 그녀의 불의한 행위를 기억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들 중 일부가 이 부패한 바벨론 체제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도 하나님께는 얼마나 큰 슬픔이겠습니까? 그래서 하늘에서 "내 백성아, 그 여자에게서 나오라"하는 음성이 들립니다. 다음과 같이 말씀하실 때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슬픔을 볼 수 있습니까:

"너희는 내 백성이다. 너희가 이 부패한 체제에 어떻게 머물 수 있니? 그녀의 죄에 가담하지 않도록 즉시 그녀에게서 나와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도 그녀의 형벌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

모든 신자에 대한 부르심은 순결함이 없는 종교의 모든 제도와 인간의 전통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체한 곳에서 나오라는 것입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6,7절: '그녀가 준 만큼 그녀에게 돌려주고, 그녀의 행실대로 갑절로 갚아 주어라; 그녀가 섞은 잔에 갑절로 섞어 주어라. 그녀가 그렇게 자기를 영화롭게 하고, 관능적으로 살았으니, 그만큼 그녀에게 고통과 슬픔을 안겨 주어라; 그녀는 마음 속으로 "나는 여왕의 자리에 앉아 있고, 과부가 아니니, 절대로 슬픔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때 하늘에서 음성이 심판을 선포합니다.

이 구절들에서 우리는 바벨론의 본질, 즉 "그녀는 자신을 영화롭게 했다"는 것을 한 마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사람들의 명예를 추구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장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은 곧 바벨론 체제의 일부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합니다. 그녀는 새 노래를 부릅니다: "오 주님, 당신만이 합당하십니다! 우리는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종교의 이름으로 이 세상에서 지위, 위대함, 돈, 명예 또는 그 무엇도 구하거나 바라지 않습니다. 그녀는 하인이 되고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바벨론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신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 주어진 돈으로 사치스럽게 살면서 감각적이고 호화롭게 삽니다. 바벨론 지도자들은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왕의 아들들은 최고의 것을 받을 자격이 있다!!"라고 말하며 자신들의 생활 방식을 정당화합니다. 이와 같이 이 악한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조금도 느끼지 않고 가난한 과부와 가난한 사람들의 헌물을 먹고 삽니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 집단 모든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증한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사람들에게 그분이 다른 사람들에게 내리시는 형벌의 두 배를 주실 것임을 읽습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그것을 순종하지 않는 자는 매를 더 맞을 것입니다(눅 12:47).

바벨론은 여왕으로 앉아 있고, 그녀의 죄로 인해 슬퍼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녀는 성대한 파티와 소풍을 즐기는 법, 멋지게 사는 법,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주님의 돈을 쓰는 법만 압니다.

8-10절: '그러므로 그녀에게 재난 곧 전염병과 슬픔과 굶주림이 하루 사이에 닥칠 것이요, 그녀는 불에 타 버릴 것이다. 그녀를 심판하신 주 하나님은 강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녀와 더불어 부도덕한 행위를 저지르고 음란하게 살았던 세상의 왕들은, 그 불붙는 연기를 보고 그녀로 말미암아 울며, 가슴을 칠 것이다. 그들은 그녀가 당하는 고문이 두려워서, 멀리 서서, "화를 입었다. 화를 입었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너에게 심판이 한 순간에 닥쳤구나"하고 말할 것이다.'

바벨론의 심판은 아마겟돈 전쟁에 앞서 있을 것입니다. 그때 땅의 통치자들은 그녀가 심판받는 것을 볼 것입니다.

11-13절: '그리고 세상의 상인들도 그녀를 두고 울며, 슬퍼할 것이다. 이제는 그들의 상품을 살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 상품이란, 금과 은과 보석과 진주요, 고운 모시와 자주 옷감과 비단과 붉은 옷감이요, 각종 향나무와 각종 상아 기구와, 값진 나무나 구리나 쇠나 대리석으로 만든 온갖 물건이요, 계피와 향료와 향과 몰약과 유향이요, 포도주와 올리브 기름과 밀가루와 밀이요, 소와 양과 말과 병거와 노예와 사람의 생명이다.'

바벨론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 종교의 이름으로 돈을 번 기업인들은 통곡하며 슬퍼할 것입니다 - 매출이 0으로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허영심과 명예를 위해 사치품을 쌓는 데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지 않도록 하십시오. 노예와 사람의 생명은 목록의 끝에 "사람의 몸과 영혼"이라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불필요한 사치를 추구하다 보면, 결국 그들의 몸과 영혼도 바벨론의 노예가 됩니다.

14-20절: '네가 마음 속으로 탐하던 실과가 네게서 사라지고, 온갖 화려하고 찬란한 것들이 네게서 없어졌으니, 다시는 아무도 그런 것들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그녀 때문에 부자가 된, 이런 상품을 파는 상인들은, 그녀가 당하는 고문이 두려워서, 멀리 서서 울며 슬퍼하면서, 말하기를, "화를 입었다, 화를 입었다, 큰 성이여, 고운 모시 옷과 자주색 옷과 빨간색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민 그녀가 그렇게도 많던 재물이 한 순간에 잿더미가 되고 말았구나!"라고 할 것이다. 또 모든 선장과 승객과 선원과 바다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다 멀리 서서, 그녀를 태우는 불의 연기를 보고 "저렇게 큰 성이 또 어디 있겠는가!"하고 외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머리에 먼지를 뿌리고, 슬피 울면서, "화를 입었다. 화를 입었다. 큰 성이여! 바다에 배를 가진 사람은 모두 그녀의 값진 상품으로 부자가 되었건만. 그것이 한 순간에 잿더미가 되고 말았구나!"하고 부르짖었다.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예언자들이여, 즐거워하라. 하나님께서는 그대들을 위하여 그녀를 심판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그 위대함과 명예와 재물만을 위해 살던 기독교를 마침내 심판하십니다.

이 두 장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17장은 우리에게 순결함보다 위대함을 추구하는 종교를 조심하라고 경고합니다. 그리고 18장은 호화로운 생활을 추구하는 것을 조심하라고 경고합니다 - 특히 그것이 기독교의 이름으로 하는 경우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돈과 섞인 기독교는 아마도 다른 어떤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했을 것입니다. 이 경고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이러한 문제를 피하기 위해 주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마침내 바벨론이라고 하는 이 상업적이고 종교적인 "기독교" 체제의 일부가 될 것이며,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내 백성아, 그녀에게서 나오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21절: 또 힘센 천사가 큰 맷돌과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지고서 말하였습니다, "그 큰 성 바벨론이 이렇게 큰 힘으로 던져질 터이니, 다시는 그 흔적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2장 20,21절에서, 우리는 거짓 여예언자 "이세벨"에 대해 읽었습니다. 거기에서 그녀에 대해 말한 것 중 일부는 바벨론에 대해 말한 것과 매우 유사합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종들을 그릇 인도하여 그들이 부도덕하고 우상 숭배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녀에게 회개할 시간을 주셨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이세벨은 기독교 교회에 바벨론의 영을 가져왔고 교회의 장로는 그녀를 제지하지 않았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이세벨 왕비는 결국 아래로 내던져져 죽임을 당했습니다(왕하 9:33). 같은 운명이 바벨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벨론과 예루살렘의 차이는 회개 하나입니다. 바벨론의 일부가 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 삶에 끊임없이 회개의 영이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22절: '거문고를 타는 사람들과 노래를 부는 사람들과 피리를 부는 사람들과 나팔을 부는 사람들의 노랫소리가 다시는 네 안에서 들리지 않을 것이요; 어떠한 세공장이도 네 안에서 하나도 보이지 않을 것이요; 맷돌 소리도 다시는 네 안에서 들리지 않을 것이다.'

여기 바벨론에서 음악에 대한 언급을 주목하십시오. 음악은 성령의 지배 아래 있으면 좋은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기독교 집단에서 음악은 사탄의 지배 아래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기독교 록 음악"도 있습니다 - "기독교인"들이 사탄을 흉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신자들은 앉아서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창세기 4장 21절에 보면, 처음으로 악기를 발명한 사람은 가인의 아들들이고 - 그것들은 가인이 여호와께 쫓겨난 후에 발명되었습니다. 의미심장하지 않나요? 음악은 악이 아닙니다. 음악은 사탄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하신 다른 많은 것들과 마찬가지로, 사탄도 사람들을 지옥으로 이끌기 위해 음악을 사용했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록 콘서트에 갔다가 자살했습니다. 록 음악가들은 전 세계적으로 마약과 사탄 숭배를 대중화했습니다. 그리고 음악은 바벨론에서도 발견됩니다. 모든 음악에는 영이 있으며, 우리는 음악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지, 음악 자체를 예배하는지 분별해야 합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둘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23절: '등불 빛도 다시는 네 안에서 비치지 않을 것이요; 신랑과 신부의 음성도 다시는 네 안에서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네 상인들이 땅의 세도가로 행세하고 모든 민족이 네 마술에 속아넘어갔기 때문이다.'

바벨론의 사업가들은 땅의 큰(great)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벨론에서 "큼"(greatness)이 거듭 강조됨을 주목하십시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라면, 우리의 부르심은 신랑과 같아야 합니다 -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았으며, 분명히 사람들의 눈에는 크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모든 민족이 그녀의 마술에 미혹되었다고 말합니다. Amplified Bible(확대 성경)은 열방이 "그녀의 마법 주문"에 속았다고 말합니다. 바벨론의 영이 모든 나라의 기독교인들에게 단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세상 즉, 돈, 쾌락, 명예를 위해 살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죽어서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며 속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과 사도들이 가르치고 우리가 신약 전체에서 읽는 모든 것과 정반대의 것을 믿도록 그들에게 마법이 걸린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보지 못하게 바벨론이 그들에게 내린 마법 주문의 결과입니다! 그것은 마법입니다!! 그것은 속임수입니다!!

한 가지 예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너희가 하나님과 돈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너희가 하나를 사랑하면, 다른 하나를 미워할 것이다"(눅 16: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둘 다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신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마지막 날에 바벨론이 그들에게 마법을 걸었다는 것을, 즉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상상만 하고, 실제로는 마음을 다해 돈만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미워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24절: 예언자들의 피와 성도들의 피와 땅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사람의 피가 그녀 안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참된 많은 종들이 이 바벨론 체제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예언자가 이 바벨론 체제를 비난할 때, 그는 그 체제의 일부인 기독교인들에게 인기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는 어떤 식으로든 죽임을 당하거나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바벨론은, 수세기 동안 그녀의 부패와 부도덕과 세속적인 것에 대항해 온 많은 예언자들의 피로 죄를 지었습니다. 주님은 이 체제와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그러니 너무 늦기 전에 "그녀에게서 즉시 나오십시오"!

장 19
19장

1,2절: 이 일이 있은 뒤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있는 큰 무리가 내는 우렁찬 음성과 같은 소리가 이렇게 울려왔습니다,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권력은 우리 하나님의 것이다; 그분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우시다; 부도덕으로 땅을 타락시킨 그 큰 음녀를 심판하셨고, 자기 종들이 흘린 피의 원한을 그 여자에게 갚으셨다."

"할렐루야"는 "여호와를 찬양하라"라는 뜻의 멋진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에서 단 4번만 나오는데 모두 4번이 여기 계시록 19:1-6에서 나옵니다!!

"할렐루야"라는 단어가 신약성경에 처음 등장한 것은 음녀 바벨론이 심판을 받았을 때라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우리도 할렐루야를 외쳐야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바벨론에 앉아 있는 *카리스마주의자들은 그것에 대해 "할렐루야"라고 말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 왜냐하면 바벨론의 마법의 주술이 그들을 속였기 때문입니다!!

(*카리스마주의자 -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능력을 부여받았다고 믿음)

이 구절의 한 번역은 바벨론이 "그녀의 부도덕으로 땅을 독살한 자"라고 말합니다. 우유 한 잔을 치명적으로 만드는 데 독 몇 방울만 있으면 됩니다. 그것이 바로 바벨론이 인간의 전통이라는 독을 진리와 섞어 기독교 신앙을 타락시킨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그녀에게 당신의 종들의 피를 갚아 주십니다.

3절: '그들이 다시금 "할렐루야! 그 여자에게서 나는 연기가 영원히 올라가는구나"하고 외칩니다.'

그들은 같은 이유로 두 번째로 할렐루야를 외칩니다. 음녀가 심판을 받을 때 천국에는 이렇게 굉장한 기쁨이 있습니다!

"죄인이 회개하면 하늘에서 기쁨이 있다"(눅 15:10).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믿는 자가 사탄을 이기면 하늘에서 기쁨이 있다"(계 12:11,12). 우리는 그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다음과 같이 말할 때는 어떻습니까?

"하늘과 성도들아 기뻐하라, 하나님이 음녀 바벨론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셨느니라"(계 18:20).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방법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바벨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숨겼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벨론이 드러날 때, 그녀의 마법과 속임수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드러날 때, 그리고 그녀가 마침내 단번에 심판받을 때 하늘에 기쁨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도 그 기쁨을 기대하며 말해야 합니다,

할렐루야! 언젠가 이 부패한 체제가 심판을 받게 될 것임에 대해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 체제는 사람들을 속이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욕되게 하며, 예수님의 발자취를 좇거나 십자가를 지는 데 관심이 없고 오직 이 세상에서 좋은 시간을 보내거나, 위대해지거나, 기독교의 이름으로 돈을 버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이 모든 말도 안 되는 것, 즉 화려한 옷차림과 금빛 십자가와 왕관과 (종교적) 축제와 기념일들이 곧 파멸될 것임을 인해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그녀의 연기가 영원히 올라갑니다.

이것이 천국의 영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영을 우리 안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과 천국의 거주자들과 영이 하나라면, 당신은 바벨론의 멸망을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

4절: 스물네 장로와 네 생물이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하고, "아멘, 할렐루야!"하고 말하였습니다.

세 번째 "할렐루야"도 같은 이유입니다! 음녀가 심판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세 번의 "할렐루야"를 외칩니다! 마치 "바벨론이 무너졌다는 세 번의 만세"를 외치는 것과 같습니다!!

5-7절: 그 때에 그 보좌로부터 음성이 울려왔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종들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아, 작은 자들과 큰 자들아,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여라." 또 나는 큰 무리의 음성과 같기도 하고, 큰 물소리와 같기도 하고, 우렁찬 천둥소리와 같기도 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할렐루야, 전능하신 주 우리 하나님이 통치하시도다. 어린 양의 혼인날이 이르렀고 그분의 신부가 준비되었으니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네 번째로 "할렐루야"하고 하늘에서 기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신부가 그녀의 혼인을 위해 단장을 끝냈을 때입니다!! 전능하신 주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므로, 그분이 땅에서 신부가 당하는 모든 핍박과 반대를 허락하신 것은, 그녀의 유익을 위하여 작용하고 그녀의 혼인날을 예비하게 하려 하심입니다!!

주님께서 신부를 준비시켰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하십시오. 아닙니다. "신부가 자기를 준비하였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많은 신자들은 하나님이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임을 압니다(요일 1:7). 그러나 그것은 진실의 한 면일 뿐입니다. 진실의 다른 면은 우리도 자신을 깨끗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 세 구절을 생각해 보세요:

1. 요일 3:3: "또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분의 깨끗하심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이전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을 가진 사람들의 한가지 표식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깨끗하게 합니다. 그리고 언제 멈추나요? 그들이 그리스도만큼 순결할 때만!! 그래서 우리는 아주 성경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이 없는 사람은 누구든지 일상 생활에서 그리스도의 순결함의 기준까지 자신을 깨끗하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로 식별할 수 있습니다!!"

2. 고후 7:1: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는 이러한 약속이 있으니, 우리 자신을 육신과 영의 모든 더러운 것에서 깨끗하게 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온전히 거룩하게 됩시다." 여기에 언급된 약속은 앞의 구절(고후 6:14-18)에서 나오는 것으로, 요한계시록 18:4의 권고와 매우 유사합니다: "내 백성아 그녀에게서 나오라"(계18:4).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읽습니다: 주님은 '그들 가운데서 나와서 따로 있으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 자녀가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약속이 성취되기 위한 조건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까? 육신과 영의 모든 더러운 것으로부터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신부는 자신을 준비합니다. 따라서 대다수의 신자가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데 조금도 관심이 없기 때문에, 모든 신자가 그리스도의 신부의 일부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3. 딤후 2:20,21: "큰 집(교회)에는 금그릇과 은그릇(이기는 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무그릇과 질그릇도 있어서, 어떤 것은 귀하게 쓰이고, 어떤 것은 천하게 쓰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들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이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게 되고 주님께 쓰임 받고, 모든 선한 일에 준비된 그릇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불명예스러운 그릇으로 시작합니다 - 회심했지만 그리스도와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하고 귀하고 거룩한(죄에서 구별된) 금 그릇이 되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염두에 두신 모든 선한 일에 유용하게 쓰일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모두 우리가 자신을 깨끗하게 하라는 부르심을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이 신부가 자신을 준비하는 방법입니다.

8절: 신부에게 빛나고 깨끗한 모시 옷을 입게 하셨다; 이 모시 옷은 성도들의 의로운 행위다.

"그녀에게 주어졌다"라는 문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분명히 합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하려는 열망과 능력조차도 하나님의 선물임을 가르쳐줍니다. "우리 안에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빌 2:13). 우리는 그것에 대해 어떤 공로도 내세울 수 없으며, 어떤 식으로든 다른 신자들에 대해 자랑할 수 없습니다.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발견되는 모든 선에 대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육신에 선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이 옷이 선물이라면, 왜 모두가 그것을 받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그분의 선물을 받도록 강요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그분의 선물도 그분의 말씀에 응답하는 자만이 받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세마포는 그리스도의 의가 아니라 "성도들의 옳은 행실"입니다. 우리가 거듭남과 동시에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은 사실입니다(롬 4:22-24, 고전 1:30). 그러나 우리는 또한 "율법의 의가 우리 속에서(안에서) 성취되어야 한다"(롬 8:4)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여기 신부의 복장입니다: "성도들의 옳은 행실"입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19장 8절에서 너무나 분명해서, 그것을 보지 않으려면 박쥐처럼 시력이 나빠야 합니다.

그녀 자신의 의로운 행동이 그녀의 옷입니다. 그녀는 자신을 깨끗하게 하고 정결하게 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진지하게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을 얻었습니다. 그녀는 "두렵고 떨림으로"(빌 2:12) 자신의 구원을 이루었습니다. 두려움과 떨림으로 성령의 능력 안에서 자신의 구원을 이룰 때마다, 신부 예복에 한 땀 한 땀 더 바느질을 했습니다. 수년에 걸쳐, 그녀는 옷 전체를 짜서 만들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무심코 받아들이면서 "예수의 피가 나를 깨끗하게 하였으니, 나는 모든 것이 괜찮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은 어떻습니까? 그런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은,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라. 깨어 있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은 몸으로 다니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계 16:15)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은 결혼식에 벗은 몸으로 오는 신부를 본 적이 있습니까? 주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벌거벗은 채로 발견되지 않도록 경고하십니다 - 그들은 결혼식 날 예복이 없기 때문에 벌거벗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의로운 행실을 하지 않았습니다.

바벨론의 속임수, 죄악의 비밀, 바벨론이 그토록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마법을 건 주문은 바로 이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은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었습니다. 당신이 어떻게 사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분명히 경고합니다. 그러나 바벨론은 신자들이 그러한 경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더러운 옷과 같은 우리 자신의 의(사 64:6)와 우리가 매일의 삶에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걸을 때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의로움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신부의 예복은 후자입니다. 우리가 처음 주님께 나아갈 때, 우리가 가진 옷이라고는, 우리 자신의 의라는 더러운 누더기들과 우리 죄의 더 더러운 누더기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듭나면,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의롭다 하십니다 -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십니다(롬 3:24; 4:5). 그런 다음 그분은 그분의 법을 우리 마음과 생각에 기록하여(히 8:10), 우리 마음 안에 율법의 의를 성취하십니다(롬 8:4). 이것은 그 의가 점차 우리의 외적인 옷차림이 되고, 우리의 외적인 성품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결과를 낳습니다.

신부의 옷은 고운 모시 옷으로 만들어졌으며, 밝고 깨끗합니다. 그녀의 소박함과 음녀의 화려한 진홍색 드레스와 금 장신구 사이는 얼마나 대조가 됩니까? "신부의 시편"(시편 45편)에서, 우리는 신랑이신 주님을, "의를 사랑하고 죄악을 미워하신 분"(7절)으로 소개합니다. 그리고 그 신부는 다음과 같이 묘사됩니다: "왕의 딸은 그 속이(마음속이) 온통 영화로우니"(13절). 그녀는 온유하고 조용한 영을 가지고 있습니다(벧전 3:4). 그리고 이 내면의 옷을 입고 "왕에게로 인도될 것이다"(14절).

그것은 계시록 19:8에서 성취될 것입니다.

9절: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셨다.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다'라고 하셨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신부가 아닌 사람들이 하늘에 있을 것이라는 것을 매우 분명하게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단지 만찬에 초대받았기 때문입니다. 신부가 자신의 결혼 만찬에 초대받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누구일까요? 아마도 그들은 음녀 바벨론을 떠났지만,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만큼 마음을 다하지 못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씨가 떨어진 좋은 땅에도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 세 부류의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4:20). 이 세 부류의 신자 중 누구도 나쁜 땅이 아니었습니다. 모두 좋은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30배 신자와 100배 신자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100배 신자들은 "어린 양이 어디로 가시든지 따라갔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신부를 구성합니다. 그러나 30배와 60배의 신자들은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됩니다.

당신이 이것을 읽는 동안에도 이 모든 것이 단지 일부 종교 광신자의 미친 의견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이것은 하나님의 참된 말씀이다"라는 문장을 하나 더 추가하라는 지시를 받습니다!!

10절: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라' 하더라.

요한은 너무 기뻐서 이 모든 것을 자기에게 보인 이에게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그 천사가 요한에게 즉각적으로 대답한 내용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참된 종의 태도를 봅니다: "나를 경배하지 마십시오. 나에게 집착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참된 종은 항상 당신을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연결시켜 줄 것이며, 당신이 그 자신에게 붙어 있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을 우리 자신에게 끌어들이는 것은 그들이 우리를 숭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렇게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사기꾼입니다. 그는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끌어드리는 적그리스도의 영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집단에는, 불행하게도 많은 신자들이 속는 그러한 사기꾼이 많이 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일부 설교자들을 거의 숭배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설교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에 따라 삽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직접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며, 이런 설교자들은 그들을 부추깁니다!! 이것은 우상숭배입니다!! 오늘날 일부 기독교계에는 신자들을 "예언자"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소위 "예언"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예언자들은 모두 거짓 예언자들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천사가 말하는 것을 봅니다, "나는 당신과 같이 주님의 종일 뿐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경배하십시오."

"예수의 증언"을 붙잡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지상 생활에서 붙잡으셨던 것과 동일한 횃불을 오늘날 우리가 붙잡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분이 하신 것처럼, 우리도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 임이요"라고 선포합니다.

여기에 진정한 예언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있습니다: "예수의 증언". 이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첫째, 참된 예언은 항상 그리스도를 주목하게 하고, 그분을 높입니다. 예수님이 들리실 때, 그분은 모든 사람을 그분 자신에게로 이끄십니다. 참 예언의 은사를 주시는 성령은 항상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십니다(요 16:14). 당신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주의를 끌거나, 당신이나 다른 사람을 높이는 모든 예언은 거짓 예언으로 기록될 수 있습니다.

둘째, 참된 예언은 예수께서 그분의 설교에서 선포하신 모든 것을 선포합니다. 참된 예언에는 타협이 없습니다. 그것은 은혜와 진리로 충만할 것이지만, 사랑 안에서 모든 진리를 말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을 시험하려면, 우리는 먼저 예수님께서 그분의 가르치심에서 무엇을 강조했는지 알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복음서를 읽고 예수님이 강조하신 것을 본다면, 오늘날 우리가 "예언"으로 듣는 모든 것을 시험할 시금석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복음을 주의 깊게 공부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속아 넘어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예언"으로 가장하고 있는 것의 99%가 예수님이 선포하신 것을 선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산상수훈(마 5-7장)을 읽고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 듣는 것과 비교해 보면 그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11-13절: 나는 또 하늘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거기에 흰 말이 있었는데, '신실하신 분', '참 되신 분' 이라는 이름을 가지신 분이 그 위에 타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의로 심판하시고 싸우시는 분입니다. 그분의 눈은 불꽃과 같고, 머리에는 많은 관을 썼는데, 그분 밖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이름이 그분 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분은 피로 물든 옷을 입으셨고, 그분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불립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6장 2절에서 우리는 백마를 탄 다른 사람, 즉 적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여기에 그리스도 자신이 계십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의와 심판이 강조되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하나님의 심판은 언제나 의롭습니다.

그분의 눈은 불꽃처럼, 우리 마음의 가장 깊은 동기와 태도를 꿰뚫고 있습니다. 그분의 머리에는 그분을 만왕의 왕으로 선포하는 많은 왕관이 있습니다. 그분에게는 또한 새 이름이 있습니다(계 3:12 참조).

그분은 피 묻은 옷을 입었습니다 -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그분이 흘리신 피가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는 사실을 상징합니다.

하늘에 있는 모든 사람은 이 땅에서 신체적으로 흠이 있는 것이 무엇이든 고침을 받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손과 다리가 없는 사람들은 부활 때에 온전한 몸을 갖게 될 것입니다. 모든 상처도 치유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만이,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과 우리의 구원을 위해 치르신 대가를 영원히 상기시키기 위해, 십자가에서 받은 상처를 영원히 간직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때, 우리는 그 상처로 그분을 알아볼 것입니다:

"나는 그분을 알 것입니다,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알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불립니다,

"하나님의 말씀, 신실하고, 참되시며,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시요"(16절).

14절: 그리고 하늘의 군대가 희고 깨끗한 모시 옷을 입고, 흰 말을 타고, 그분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하늘의 군대는 144,000명, 즉 이기는 자 - 부르심을 받고, 택함을 받고, 충성된 자를 가리킵니다.

15,16절: 그분의 입에서 날카로운 칼이 나오는데, 그분은 그것으로 모든 민족을 치실 것입니다; 그분은 친히 쇠지팡이를 가지고 모든 민족을 다스리실 것이요; 전능하신 하나님의 맹렬하신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으실 것입니다. 그분의 옷과 넓적다리에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분의 입에서는 예리한 검이 나오는데, 이는 모든 민족을 심판할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5장 22절에서, 아버지께서 모든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주 예수님은 그분의 말씀을 통해 심판을 집행하실 것입니다: "내가 한 말이, 마지막 날에 사람들을 심판하리라"(요 12:48).

17,18절: 나는 또 태양 안에 한 천사가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공중에 나는 모든 새들에게 큰 소리로 외치기를,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라. 왕들의 살과, 장군들의 살과, 힘센 자들의 살과, 말들과 그 위에 탄 자들의 살과, 모든 자유인이나 종이나 작은 자나 큰 자나 모든 자의 살을 먹어라" 하였습니다.

이 구절 이후로 우리는 아마겟돈 전쟁에 대한 또 다른 설명을 보게 됩니다. (앞서 보았듯이, 요한계시록은 시간 순서대로 순차적으로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아마겟돈 전쟁은 하루 만에 끝날 것입니다.

여기에서 천사는 공중의 모든 새들을 하나님의 큰 만찬을 위해 모이도록 초대합니다. 이것은 어린양의 혼인만찬과는 다른 만찬입니다!! 이것은 죽은 자의 살로 된 만찬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재림과 관련하여 교회가 휴거된 후에(눅 17:30,34,35절),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일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언급하신 것입니다(눅 17:37). 아마겟돈에서, 독수리는 하나님의 큰 만찬을 위해 시체 주위에 모일 것입니다!!

에스겔 39:17-21에서도 이 "만찬"에 대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모여 오너라. 이 큰 희생제물을 (먹기)위해..... 용사의 고기를 먹으라...... 너희는 말과 병거로 내 상에서 배부르리라.'

19절: 또 나는 짐승과 세상의 왕들과 그 군대들이, 흰 말을 타신 분과 그분의 군대에 대항해서 싸우려고 모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에스겔 38장 2절에 보면, 주님께서 "너는 마곡 땅의 곡 곧, 로스와 메섹과 두발의 왕에게로 얼굴을 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언급된 노아의 후손 메섹과 두발이 거주하던 지역은 유럽을 가리킵니다(창 10:2-4). 여기에서 언급된 왕은 이 나라들을 아마겟돈 전쟁으로 인도할 자, 즉 적그리스도입니다. 전투는 마침내 주님께서 이 모든 군대를 멸하심으로 끝납니다.

20,21절: 그러나 그 짐승은 붙잡혔고, 또 그 앞에서 기이한 일들을 행하던 그 거짓 예언자도 그와 함께 붙잡혔습니다. 그는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과 그 짐승 우상에게 절하는 자들을 이런 기이한 일로 미혹시킨 자입니다; 그 둘은 산 채로, 유황이 타오르는 불바다로 던져졌습니다. 그리고 남은 자들은 말 타신 분의 입에서 나오는 칼에 맞아 죽었고, 모든 새가 그들의 살점을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산 채로 하늘로 올려진 두 사람 에녹과 엘리야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산 채로 불못에 던져지는 두 사람, 즉 적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를 볼 수 있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칼(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지옥과 불못은 같은 곳이 아닙니다. 지옥은 오늘날 모든 불신자들이 가는 작은 불못입니다. 언젠가 지옥 자체가 불못에 던져질 것입니다(계 20:14).

구약성경에서 고라, 다단, 아비람과 다른 250명이 산 채로 지옥에 던져지는 것을 읽었습니다(민 16:31-33).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영적 권위인 모세를 거역했기 때문에 이 무서운 형벌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루시퍼의 영을 가지고 있었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지 않은 지도자의 위치를 ​​탐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등 뒤에서 모세를 비방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루시퍼가 있던 같은 장소로 보내셨습니다.

아마겟돈 전쟁에서, 우리는 6000년 이상 쌓아온 이 반역의 영이 마침내 정점에 이르렀음을 발견합니다. 반역의 정신으로 가득 찬, 거대한 농양처럼, 마침내 터져 버립니다. 오늘날 자녀들은, 부모에게 반역합니다. 학생들은 교사들에게 반항합니다. 그리고 신자들은 하나님이 임명하신 지도자들에게 반역합니다 - (바벨론의 제사장과 목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시고 임명하신 경건한 목자들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경건한 권위에 대한 반역의 영을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적그리스도가 결국 그 세력을 이끌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마침내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권위에 대한 반역을 미워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우리는 지금 이 반역을 주도하는 적그리스도가 산 채로 불못에 던져지는 날이 오기 직전에 살고 있습니다.

장 20
20장

1,2절: 내가 보매 한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사슬을 손에 들고, 하늘에서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붙잡아 천 년 동안 결박했습니다.

예수님이 귀신 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실 때에, 귀신이 무저갱에 보내지 마시기를 간청하였습니다(눅 8:31). 그들은 예수님께 때가 되기 전에 그들을 괴롭히러 오셨느냐고 물었습니다(마 8:29). 그들은 언젠가 무저갱에 가게 될 운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그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그 때가 마침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탄과 그의 모든 악마들은 이제 이 바닥 없는 구덩이에 천 년 동안 묶여 있습니다.

3절: 무저갱에 던지고 닫은 다음에, 그 위에 봉인을 하여 천 년 동안 가두어 두고, 천 년이 끝날 때까지는 민족들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사탄은 그 뒤에 잠시 동안 풀려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한때, 루시퍼는 천사들의 머리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후배 천사 중 한 명이 와서 그를 가둡니다!!

사탄의 몰락에는 네 단계가 있습니다.

1. 셋째 하늘에서 둘째 하늘로(사 14:12-15).

2. 둘째 하늘에서 땅으로(계 12:9).

3. 땅에서 무저갱으로(계 20:1-3).

4. 영원한 불못으로(계 20:10).

이와 대조적으로, 우리는 자신을 낮추시고 하늘에서 내려와 땅 아래로 내려가신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셔서 하나님의 보좌에 오르신 것을 봅니다.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입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영이 존재합니다 - 하나는 끊임없이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려고 하는 영이고, 다른 하나는 끊임없이 올라가고 자기를 높이는 영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두 영 중 하나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마귀는 어떤 사람도 미혹하지 못하도록 여기에 갇혔습니다. 여기서 강조점은 마귀는 사람들을 고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속인다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많은 사람들은 마귀가 자신을 육체적으로 해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마귀가 우리를 속이는 것에 대해 훨씬 더 많이 경고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몸만 죽일 수 있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사탄의 교묘한 술책과 속임수에 주의하라는 경고를 받습니다. 바벨론의 마법 주문은 박해보다 더 위험합니다.

예수님의 1000년 통치는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정하신 안식일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엿새 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에는 안식하도록 명하셨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 8절은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6일은 6000년이 됩니다. 이것은 아담의 시대부터 지금까지 인간이 이 땅에서 살아온 기간과 거의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7일째 되는 날, 즉 7번째 천년(1000년)의 안식에 매우 가까워졌음에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의 지상 1000년 통치는 이사야서 11장 6-9절에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 때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 암소와 곰이 풀을 뜯고,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눕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한다."

아담은 채식주의자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식물과 잎사귀와 과일만 먹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홍수 후에, 하나님은 노아에게 고기도 먹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천년왕국에는 모든 동물이 다시 채식주의자가 될 것입니다. 자연은 에덴동산의 상태로 되돌아갈 것입니다. 뱀은 독이 없을 것입니다. 더 이상 엉겅퀴와 가시덤불이 땅에 없을 것입니다. 어떤 동물도 더 이상 사나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왜요? 예수님께서 마침내 지상에서 합당한 자리를 차지하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반역한 일 때문에, 동물들도 고통을 받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요!!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롬 8:19). (6000년 동안 마귀의 아들들이 다스렸던) 이 세상을 하나님의 아들들이 차지하기를 동물의 왕국은 기다리고 있습니다.

4절: 내가 또 보좌들을 보니, 그 위에 사람들이 앉아 있었는데, 그들은 심판할 권세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나는, 예수의 증언(testimony)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이 베인 사람들의 영혼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 짐승이나 그 짐승 우상에게 절하지 않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살아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 동안 왕 노릇 했습니다.

부활의 생명을 얻은 사람들은, "예수의 증언(testimony)때문에 목 베임을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죽임을 당한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사회사업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증언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증언"이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내 종들이 싸우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증언, 즉 순결함과 선함과 세속적이지 않으심에 대한 증거입니다. 그분은 하늘과 영원을 위해 사셨습니다. 이 제자들은 적그리스도를 경배하지도 않았고, 손바닥과 이마에 그의 표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1000년 동안 통치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할 것이라고 상상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만일 우리가 지금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으면, 그 때에 함께 왕 노릇 하리라"(딤후 2:12; 롬 8:17)라고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보이지 않는 삶에 충실한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상을 받을 것이며 그때에는 그분과 함께 통치할 것입니다.

그러한 구절에 비추어 볼 때, 우리가 소위 "신도"라고 불리는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할 것이라고 상상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이기는 자만이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할 것'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예수님은 요한계시록 3:21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기는 자는 나와 함께 내 보좌에 앉으리라."

5,6절: 그 나머지 죽은 사람들은 천 년이 끝날 때까지 살아나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첫째 부활입니다.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은 복이 있고 거룩합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둘째 사망이 아무런 세력도 부리지 못합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서, 천 년 동안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 29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죽은 자들이 인자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 선한 일을 한 사람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한 일을 한 사람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는다."

둘째 사망은 첫째 부활에서 다시 살아난 자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11절에도 비슷한 구절이 있습니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첫째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날 자는 이기는 자, 즉 이 땅의 삶에서 성령의 음성을 듣고 세상과 죄를 이기는 자들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그 시대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기에 합당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눅 20:35).

예수님의 이 말씀은 또한 첫째 부활이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님을 가르쳐 줍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얻을 만큼 충분히 가치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지만, 다른 이들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언젠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그러나 합당한 자들만이 첫째 부활에 살아날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35절에서, 우리는 구약의 성도들이 고난을 받을 때에도 믿음을 부인하지 않았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은 이마와 손에 짐승의 표를 받기를 거절했습니다. 그들은 타협의 대가로 석방되기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왜요? 그들이 첫째 부활, 곧 "더 나은 부활"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에게 더 나은 부활이 있고, 그렇지 않은 또 다른 부활이 있음을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이 구약의 성도들이 더 나은 부활을 얻기 원했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을 부인하기를 거부했습니다.

다니엘서 12장 2절에 보면,

"땅 속 티끌 가운데서 잠자는 사람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이 깨어날 것이다. 그들 가운데서, 어떤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며, 또 어떤 사람은 수치와 함께 영원히 모욕을 받을 것이다."

누가복음 14장 14절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보답할 수 없는 궁핍한 자들을 돕고 축복하며 베풀면,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갚음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기는 자들에게 그분과 그분의 왕국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희생한 모든 것에 대해 갚아 주실 것입니다.

빌립보서 3:7-11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가장 고상함에 비하면, 땅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쓰레기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왜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겼습니까?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내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함이라."

바울이 말한 것은,

나는 이기는 사람이 되기 원합니다. 나는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알고 싶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그분과 함께 통치하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지금 내 삶에서 그분의 부활의 권능을 알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언젠가는 장차 일어날 죽은 자 가운데서 선택적인 부활에 이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오실 때, 죽은 자들이 살아나면, 그들이 부활한 몸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 할 것입니다. 우리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 우리는 예수님이 가지신 몸과 똑같은 몸을 갖게 될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21절은, 그분께서 우리의 비천하고 천한 몸을 자기 영광스러운 몸의 모양으로 바꾸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분의 몸이 가지고 있던 능력을 압니다. 그분의 몸은 벽을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짧은 시간에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자신을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그런 몸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것과 같은 살과 뼈로 된 (피가 없는) 보이는 몸이 될 것입니다(눅 24:39).

우리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하나님의 성도들을 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를 소개받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모세와 엘리야를 알아 볼 수 있었습니까? 그들은 어디에서도 모세와 엘리야의 그림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인식의 일부였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0절은,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각 사람은 선한 일이든지 악한 일이든지, 몸으로 행한 모든 일에 따라, 마땅한 보응을 받아야 합니다'라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구원은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상은 우리의 행위에 따라 주어질 것입니다.

주 예수님은 심판석에서 제자들에게 상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한 보상은 우리가 이 곳에서 그분께 충실하고 자신을 낮추는 정도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최고의 보상은 영원토록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더욱 친밀해지고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누구에게나 줄 수 있는 최고의 영예이자 특권임을 우리는 그때 알게 될 것입니다.

사탄이 결박되어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서 땅을 다스리시므로 땅이 천 년 동안 평안할 것입니다.

천 년 동안, 수백만 명의 아기가 오늘날처럼 이 땅에서도 태어날 것입니다. 이사야서 65장 20절은 말합니다,

"거기에는 더 이상 몇 날 살지 못하고 죽는 아이가 없을 것이며, 수명을 다 채우지 못하는 노인도 없을 것이다; 백 살에 죽는 사람을 젊은이라고 할 것이며, 백 살을 채우지 못하는 사람을 저주받은 자로 여길 것이다."

오늘날에는 수백만 명의 유아가 유아기에 사망합니다. 그러나 그 천년기에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질병이 제거되고 저주가 부분적으로 제거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수백 년을 살 것입니다. 저주가 완전히 제거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 왜냐하면 죽음이 여전히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의 청년 모임은 90세, 100세를 위한 것입니다!! 마치 아담부터 노아 때까지 사람이 900세 이상 장수하던 시대와 같을 것입니다(슥 8:4,5). 그러나 그때에 이 땅에는 여전히 회심하지 않은 죄인들이 있을 것입니다(사 65:20 - KJV).

7,8절: 천 년이 끝나면, 사탄은 옥에서 풀려나서, 땅의 사방에 있는 민족들,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려 나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을 하려고 그들을 모을 것인데, 그들의 수는 바다의 모래와 같을 것입니다.

그 천 년이 끝나면, 사탄은 감옥에서 풀려나고 다시 땅을 방문하도록 허용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그것을 허락하실까요? 인간의 부패한 본성을 모두에게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의 1000년 통치는 왕 예수님뿐만 아니라 그분과 함께 땅을 다스리는 성도들(오늘날의 부패한 통치자들과 다른)의 선함과 겸손을 모든 사람이 보게 되는 평화의 시대가 될 것입니다. 동물들도 그 시간을 매우 즐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전히 ​​쇠막대기로 다스리셔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압해야 할 죄인들이 여전히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 많은 사람들은, 마음의 반역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순종하는 것을 두려워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보고 사탄의 6000년 통치와 비교하면, 온 세상이 기쁘게 예수님을 왕으로 선택할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사탄이 잠시 풀려나 온 땅을 돌아다니면서 여전히 수백만 명을 모아 주께 반역하여 그를 따르게 할 수 있다는 이것이 믿을 수 없는 현실입니다.

사람들이 여전히 사탄을 따르기를 원할 것이라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에 부패한 것을 모든 사람에게 보여주실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탄이 나가서 사람들을 겁주는 것이 아니라 속일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다시 한 번 사람들에게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부담스러운 것이다. 천년 동안, 너는 너의 욕망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했기 때문에 즐거움을 누릴 수 없었다. 이제 나에게 와서 즐겨라.

이것은 그가 6000년 동안 사람에게 한 말이며 많은 사람이 믿었던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천 년이 지난 후에도, 그를 다시 믿고 그릇된 길로 가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아담의 족속이 타락한 것을 이 우주에 보여 주실 것인데, 그들은 천 년 동안 그리스도의 통치를 본 후에도, 그들의 정욕을 따라 살기 위해 여전히 사탄을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곡과 마곡이 다시 언급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마겟돈 전쟁이 아닙니다. 그것은 천 년 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곡과 마곡의 후손들이 모여서 두 번째로 주님을 대적하려고 합니다!! 참으로 사람의 어리석음은 믿을 수 없습니다. 그는 가장 기본적인 교훈을 결코 배우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성경이 말하듯이, 사람의 마음은 거짓되고 좋은 것이 육신에 거하지 않습니다(렘 17:5, 롬 7:18). 그리고 종말에 그 증거가 가장 명확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9절: 그들은 땅의 넓은 평원에 이르러, 성도들의 진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도시를 둘러쌌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그들을 삼켜 버렸습니다.

그 어리석은 자들은 성도들의 부활의 몸이 결코 해를 입거나 죽임을 당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성도들을 공격하려 합니다. 이것이 사탄이 사람을 미련하게 만드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도들의 진영(예루살렘 - 예수님의 보좌가 있는 곳)을 둘러쌉니다. 그러나 불이 내려와 그들은 즉시 소멸됩니다. 이 전쟁은 아마겟돈 전쟁보다 훨씬 짧을 것입니다. 아마겟돈 전쟁은 하루가 걸렸을지도 있습니다. 이것은 잠깐이면 될 것입니다.

10절: 그들을 미혹하던 악마도 불과 유황의 바다로 던져졌는데, 그 곳은 그 짐승과 거짓 예언자들이 있는 곳입니다; 거기에서 그들은 영원히, 밤낮으로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마귀를 속이는 자라고 부르는 횟수를 주목하십시오. 그것은 우리에게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는 마침내 그의 영원한 고향인 불못으로 보내집니다.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불못의 첫 번째 거주자는, 적그리스도와 거짓 예언자였습니다. 세 번째 거주자는 사탄입니다. 그래서 사탄의 삼위일체 전체가 무엇보다도 먼저 불못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 짐승과 거짓 예언자는 천 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거기에 있습니다. 불은 꺼지지 않고, 구더기는 영원히 죽지 않기에, 그들은 소멸되지 않습니다(막 9:44,46). 바벨론과 같이, 그들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갑니다(계 19:3).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사람들이 주님의 선하심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을 따르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천년왕국이 지나면, 모든 사람은 그것이 이유가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진짜 이유는 사람이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11절: 나는 크고 흰 보좌와 거기에 앉으신 분을 보았습니다.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사라지고, 그 자리마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인 첫 번째 보좌는 성도들이 상을 받을 때인 천년왕국이 시작될 때 세워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천년왕국의 끝에 세워진 두 번째 보좌, 즉 크고 흰 보좌를 봅니다. 여기에서는 땅과 하늘의 자리를 찾을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을 때, 그분이 태어나실 곳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분이 보좌에 앉으실 때, 그분을 거부한 땅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12절: 나는 또 죽은 사람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할 것 없이, 다 그 보좌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책들이 펴져 있고; 또 다른 책 하나가 펴져있는데, 그것은 생명의 책이었습니다; 죽은 사람들은, 그 책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자기들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 불신자들이 무덤에서 살아난 후에도, 그들은 여전히 ​​"죽은 자들"로 불리는 것을 주목하세요. 그들은 영적으로 죽었기 때문에, 여전히 실제로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무덤에서 살아났기 때문에 육적으로는 살아 있지만, 영적으로는 죽은 자들입니다.

"죽은 자들"이 보좌 앞에 서 있고 책들이 펼쳐 있습니다. 난외 번역은 "두루마리가 펼쳐졌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서기 96년에는, 오늘날과 같이, 제본된 책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두루마리, 즉 물레(막대기)에 말려진 긴 양피지밖에 없었습니다. 다음 페이지로 이동하려면 한쪽 끝을 말아 올려야 했습니다. 오늘날 두루마리에 가장 가까운 것은 테이프 녹음기 및 비디오 녹음기에 사용되는 마그네틱(자기) 테이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 말할 수 있습니다: "비디오 테이프를 꺼내서 재생했습니다." 무슨 테이프인가요? 첫째 부활에서 부활하지 못한, 아담 이후 이 땅에 살았던 모든 사람의 전체의 삶을 기록한 것입니다. 이 기록은 실제로 각 사람의 기억에 정확하게 저장되어 있으며, 평생 동안 그가 한 모든 행동, 그가 한 모든 말, 그가 가졌던 모든 생각, 태도 및 동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테이프에 기록된 내용에 따라 판단됩니다. 구원은 은혜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상과 벌은 행위에 따른 것입니다. 불못에 있는 사람들마다 형벌의 정도가 다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똑같이 벌하신다면 불의하실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주님은 앞으로 나오는 각 사람의 삶의 테이프를 되감아,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화면에서 재생해 주실 것입니다. 한 사람의 자신의 기억을 담은 비디오 테이프는 거짓말을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충실히 재생할 것입니다. 기록을 재생하는 것은 자신의 기억이기 때문에, 그는 기록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온 세상은 기록을 보고 각 사람이 영원히 받게 될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하나님께 동의할 것입니다. 이 심판은 사람들을 벌하시는 하나님의 의로움을 모든 사람에게 증명할 것입니다. "정의는 행해지는 것뿐만 아니라 행해지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날에는 하나님께서 정의를 온전히 이루셨음을 모든 사람이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날에,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성취될 것입니다,

"사람이 부주의하게 내뱉는 모든 말은, 심판 날에 그 말을 해명해야 한다"(마 12:36).

당신은 당신이 한 쓸데없는 말들이 모두 잊혀졌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그것들은 당신의 기억의 비디오 테이프에 충실하게 기록되었습니다. 화내고 원망하며 했던 말, 험담, 비방 등의 말은 모두 테이프에 충실히 녹음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2장 16절은 하나님이 사람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4장 5절은 하나님께서 감추어진 일과 동기를 드러내신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신의 금융제국을 건설한 바벨론의 "기독교인들"이 그날 폭로될 것입니다. 아무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죽은 자들은 그들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13절: 바다가 그 속에 있는 죽은 사람들을 내놓고, 사망과 지옥도 그 속에 있는 죽은 사람들을 내놓았습니다. 그들은 각각 자기들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바다가 죽은 자를 내어준다는 것은 어쩌면 감옥에 갇힌 어떤 악령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사망과 지옥도 자기 속에 있는 죽은 자를 내어줬습니다 - 이것은 모든 불신자를 가리킵니다. 바다에는 다른 것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베드로후서 2장 4절은 하나님은 범죄한 어떤 천사들을 흑암의 구덩이에 가두어 심판을 위해 예비하셨다고 말합니다. 이 구절의 배경은 노아 시대(5절)로, 어떤 천사들이 여자를 탐하고, 그 여자들과 성적인 죄를 짓기 위해서 남자를 빙의하여 죄를 지었던 때입니다. 그 천사들은 오늘날 다른 악령들처럼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심판을 위해 예비되었습니다. 그들의 심판도 이때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바다가 죽은 자를 내어준다는 것"의 ​​의미일 것입니다.

바다는 하나님의 원래 창조의 일부가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하나님이 본래 천지만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바다(물)는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 루시퍼의 죄로 인해 생겨났습니다.

14절: 그리고 사망과 지옥이 불바다에 던져졌습니다. 이 불바다가 둘째 사망입니다.

예수님은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에서 죽음 이후에 일어날 일에 대해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눅 16:19-31). 이 이야기는 비유가 아니라 실화입니다. 지옥 불에서, 부자는 낙원에 있는 아브라함과 나사로를 보고, 혀를 식힐 물을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혀가 없었습니다. 그의 몸은 땅에 묻혔고, 지옥에 있는 것은 그의 영혼뿐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평생 혀를 가지고 있었던 그는, 지금도 여전히 혀가 있다고 상상합니다!! 죽은 사람은 즉시 주변을 의식합니다. 낙원과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를 보고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두 곳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깊은 구렁이 있었습니다.

하데스(그리스어로 죽은 영들의 장소에 사용된 단어) 또는 스올(히브리어로 사용된 단어)에는 두 부분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부자가 갔던 지옥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나사로가 갔던 낙원 또는 아브라함의 품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회개한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23:43). 사도행전 2장 27절에서 예수님이 음부(Hades)에 내려가셨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성경구절들을 종합하면, 예수님과 도둑이 음부에 있는 낙원 구역으로 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2장 40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을 바다 괴물의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의 심장부(in the heart of the earth)에 있으리라."

예수님의 시신은 지상에 있는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말씀하신 대로, 그분 자신은 땅의 심장부에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죽은 영들이 있는 곳인 하데스가, 예수님께서 죽으실 당시 땅의 심장부에 있었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예수님과 나사로와 회개한 도둑은 모두 아브라함이 있는 낙원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에베소서 4장 8절에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실 때 사로잡힌 포로들을 데리고 그들과 함께 승천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음부의 낙원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데리고 셋째 하늘 즉, 하나님의 존전으로 올라가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낙원은 더 이상 땅의 중심부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있는 셋째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고린도후서 12장 4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내가 이끌려 낙원, 곧 셋째 하늘에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옥(Hell)은 여전히 ​​지구의 심장부에 있습니다. 지옥은 마침내 불못에 던져질 것입니다.

15절: 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다, 이 불바다에 던져졌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 29절에서 말씀하신 불못입니다,

"네 눈이 너로 음욕을 품게 하거든, 두 눈을 가지고 불못에 가는 것보다 차라리 눈을 빼는 것이 나으니라. 그리고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범죄하게 하거든 네 오른손을 베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불못으로 가는 것보다 나으니,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같은 맥락에서, "너를 죄짓게 하여 불못에 보내게 하는 너의 혀나 다른 신체 부위를 잘라내는 것이 낫다"고 말하는 것도 사실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어떤 설교자보다 지옥과 불못에 관해 더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이 곳의 참혹한 현실과, 죄에서 돌이키지 않은 자들의 지옥에 가는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아담부터 아브라함까지 2000년, 아브라함부터 그리스도까지 2000년,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 2000년, 천년왕국 1000년 등 7000년의 인류 역사 후에 마침내 최후 심판이 끝났습니다.

사람이 6000년(6일) 동안 일하고 1000년(1일) 동안 쉬고 나면 어떻게 될까요? 뭔가 새로운 것이겠죠!

요한계시록의 다음 두 장에서 그 내용에 대해 적혀 있습니다.

장 21
21장

1절: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이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말로 시작합니다(창 1:1). 그러나 그 하늘과 땅은 천사와 인류의 죄로 더럽혀졌습니다. 그래서 베드로후서 3장 10절에 기록된 것처럼,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멸하실 것입니다:

"하늘이 큰 소리를 내며 사라지고 원소들은 뜨거운 열에 녹으며,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불타버릴 것이다."

그것은 강력한 원자 폭발이 될 것입니다. 하나의 원자가 쪼개질 때 생성되는 에너지는 도시 전체를 파괴하기에 충분합니다. 하나님이 지구상의 모든 원자를 쪼개시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 보세요!!

그런 다음, 하나님께서 새롭게 시작하실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처음과 같이, 바다가 없고 하늘과 땅만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녹아버릴 터인데,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너희는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 이 오기를 바라보고 서두르라, 그 날에 하늘은 불타서 없어지고, 원소들은 뜨거운 열로 녹아버릴 것이다"(벧후 3:11,12).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God)의 날은 주님(Lord)의 날과 다릅니다. 주님의 날은 예수께서 오셔서 천년 통치를 하시는 날입니다. 주님의 날이 끝나면 하늘과 땅이 멸망하고 하나님의 날이 시작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약속대로, 우리는 의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고 있습니다"(벧후 3:13).

예수님의 1000년 통치 기간 동안에도, 여전히 마음에 불의를 품은 죄인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과 함께 영원이 시작될 때 그곳에서는 오직 의만이 있을 것입니다. 이 구절은 ".... 의가 집처럼 느껴지는 곳"으로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집에서 사는 것'과 '집처럼 느껴지는 것' 사이에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의 집에서, 우리는 집처럼 편안함을 느낍니다. 다른 사람들의 집에서는, 그들이 친절하게 대해 줄지라도, 우리는 집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현재 이 땅에서 의는 집처럼 편안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의가 마침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편안하게 느껴질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 왕국을 위해 우리를 준비시키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 마음 속에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바로 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는 사역은 우리를 자녀 삼으실 때 하는 사역과 같습니다. 그분은 우리 마음 안에 그분의 왕국, 즉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기쁨의 왕국을 세우시고, 그곳은 의가 집처럼 편안하게 느껴지는 곳입니다. 당신의 삶에서 의가 편안하게 느껴진다면 당신은 이 새로운 창조의 삶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언젠가 옛 하늘과 옛 땅을 불로 태워 버리시듯, 우리 안에 있는 아담의 본성의 잔재를 태우시고,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가 완전히 예수님을 닮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위해 준비될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자들의 마음속에서 하나님께서 이미 시작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2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라."

그분은 죄와 불의에 대해 진절머리가 나고, 의를 갈망하는 자들을 위해 처소를 예비하러 가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은 의를 사랑하시고 불법을 미워하셨습니다. 그분이 준비하고 계신 집은 그분과 같은 태도를 가진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2절: 나는 또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와 같이 차리고,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루살렘은 큰(great) 도성이라 불리는 바벨론과 달리 거룩한(holy) 도성이라고 불립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그녀는 신성한 남편을 위해 단장되었습니다. 우리는 베드로전서 3장 4절에서 "단장"이라는 단어를 읽습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인 여자들은 금과 땋은 머리와 화려한 옷으로 자기를 단장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매우 귀히 여기시는 온유하고 조용한 심령으로 자기를 단장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온유와 겸손을 배운 사람들이 단장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외적인 영광이나 위대함이 아니라 내면의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성에 온유함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천성적으로 거칠고, 무례하고, 상스럽고, 거만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성령께서 겸손과 온유함으로 우리를 단장하시는 일을 시작하십니다. 이제 유일한 문제는 우리가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서 그 일을 하시도록 허락하고 있는지 여부입니다.

3절: 그 때에 나는 보좌에서 큰 음성이 울려 나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보아라, 하나님의 집이 사람들 가운데 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요,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다."

하나님은 항상 사람들 가운데 거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분의 갈망이 이루어졌습니다. 고린도후서 6장 16-18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들 가운데서 살며, 그들 가운데로 다닐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가운데서 나오너라. 그들과 떨어져라.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아라. 나 주가 말한다.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영접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너희의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 아들들과 딸들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 거하시는 조건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부정한 것을 멀리해야 합니다.

4절: 그분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니;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저주가 마침내 완전히 제거되었습니다. 천년왕국 동안에도, 사람들은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침내 영원에서 더 이상 죽음은 없을 것입니다. 더 이상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을 것입니다.

5절: 그 때에 보좌에 앉으신 분이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또 말씀하셨습니다, "기록하여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다."

요한계시록은 새 이름, 새 노래, 새 하늘, 새 땅과 같은 새 것으로 가득 차 있어, 이제 만물이 새롭게 되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백성이 미래의 집이 어떤 모습인지 알 수 있도록, 모든 것을 기록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6절: 그분은 또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 곧 처음이며 마지막이다. 목마른 사람에게는 내가 생명수 샘물을 거저 마시게 하겠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모든 것이 마침내 완전히 성취되었습니다. 그분은 시작과 끝이십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곳에서 시작된 일이 성취되는 것을 봅니다: "다 이루었다".

하나님의 약속은 목마른 자에게만 주어집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6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생명수의 샘은 성령의 나타나심과 체험을 의미합니다. 이 샘물은 목마른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것입니다 - 그리고 그들은 돈이나 선행, 기다림, 금식 등 어떤 대가를 지불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비용도 들지 않습니다.

7절: 이기는 사람은 이것들을 상속받을 것이다.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될 것이다.

자식(child)과 아들(son)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기서 "그는 내 아들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 "내 자식"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모든 유산을 아들들에게 넘겨주기를 기뻐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들들아, 내가 너희를 검증하고 시험하였다. 이제 내가 만든 모든 것이 너희의 것이다."

그날에 이기는 자들에게 얼마나 큰 복이 있겠습니까?

8절: 그러나 비겁한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과 가증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부도덕한 자들과 마술쟁이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쟁이들이 차지할 몫은, 불과 유황이 타오르는 바다뿐이다. 이것이 둘째 사망이다.

여기에 열거된 사람들은 앞 절에서 언급한 이기는 자들과 대조됩니다. 이들은 이기지 못한 자들입니다. 여기에 언급된 불못에 던져질 여덟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목록의 첫 머리에 있는 사람들의 범주를 주목하십시오. 우리는 아마도 살인자를 목록의 맨 위에 놓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살인자는 4번이고 부도덕한 사람은 5번에 있습니다.

여기 목록의 맨 위에 비겁한 자들, 즉 사람의 의견을 두려워하여 타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어떤 조치를 취하기 전에 스스로에게 "내가 그렇게 하면 아무개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라고 자문하는 사람들입니다.

살인과 간음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비겁함에서도 자신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비겁함을 미워하시는 것은, 피조물을 경배하고 사람의 영광을 구하며 하나님의 의견보다 사람의 의견을 중시하는 우상숭배이기 때문입니다.

이기는 자는 여기에 열거된 여덟 가지 죄를 이긴 자들입니다.

가장 먼저 그들은 비겁함을 이깁니다.

두 번째는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자들과, 그들의 삶에서 불충실한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말씀하실 때 우리가 그것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며 죄입니다.

목록의 세 번째는 가증한 자들입니다. 이것은 성적인 변태에 빠진 사람들, 즉 동물도 하지 않을 가증하고 더러운 일을 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네 번째는 살인자입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누구나 살인자입니다. 그들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결국 불못으로 가게 됩니다.

다섯째는 부도덕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이 영역에서 공개적으로 죄를 짓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눈을 뽑거나" "그들의 손을 자르지" 않았고, 그들의 삶에서 죄의 정욕을 근본적으로 제거하지 않았습니다.

여섯째는 마법사입니다 - 마술, 점성술, 별이 예언하는 것, 손금 읽기, (심령술에서 쓰는) 점괘판, 악마 게임을 가지고 노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어로 '마법사'라는 단어는 '파마케우스(pharmakeus)'인데, 여기서 영어 단어 '조제술(pharmacy - 약을 다루는 사람)'이 유래되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또한 사람들을 파괴하는 해로운 약물을 판매하는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이것이 9:21에서도 언급된 것을 보았습니다)

일곱째는 우상숭배자로서 하나님 이외의 것을 마음에 1순위로 두는 자들입니다. 여기에는 돈이나 쾌락이나 이 세상의 무엇이든 숭배하는 사람들이 포함됩니다.

마지막으로, 목록의 8번째는 모든 거짓말쟁이입니다. 다른 모든 범주에서는 "모든(all)"이라는 단어가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짓말쟁이에 관해서는, "모든 거짓말쟁이"라고 말합니다. 왜일까요? 거짓말에는 검은 거짓말과 하얀 거짓말 등 종류가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얀 거짓말쟁이가 그것이 검은 거짓말쟁이에게만 해당된다고 생각할 경우를 대비하여, 성령은 모든 거짓말쟁이가 포함되어 있음을 확실히 말하십니다. 회색, 갈색 또는 노란색 등 모든 종류의 거짓말쟁이는 불못에서 타버릴 것입니다. 거짓말은 우리 육신 깊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제 마음을 다하여 거짓말로부터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9절: 마지막 일곱 재앙이 가득 담긴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에게로 와서 말하기를, "이리로 오너라. 어린 양의 아내인 신부를 너에게 보여 주겠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언급된 천사는 요한에게 이 모든 죄를 이긴 신부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녀는 불못에 간 사람들과 같은 육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이기는 자가 된 것은, 예수의 발자취를 따르고, 주님을 신뢰하며, 성령의 능력으로 몸의 행실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10,11절: 나를 성령으로 휩싸서 크고 높은 산 위로 데리고 가서,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 도성은 하나님의 영광에 싸였고, 그 빛은 지극히 귀한 보석과 같고, 수정처럼 맑은 벽옥과 같았습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언급된 것은 거룩한 도성인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도 요한이 우리 주님에 대해 언급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신부는 그리스도의 은혜와 진리에 참여하여 점점 더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해졌습니다. 그녀는 수정같이 맑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그녀가 위선 없이 투명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녀는 간교한 속임수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했습니다. 그녀는 투명했습니다. 그녀의 겉모습은 내면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2절: 그 도성에는 크고 높은 성벽이 있고, 거기에는 열두 문이 있었습니다. 열두 문에는 열두 천사가 지키고 있고; 그 문들 위에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즉, 교회에 대한 설명이 성벽으로 시작된다는 점은 흥미롭습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시작했을까요? 아마도 높은 탑들로 시작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령은 성벽으로 시작하십니다. 그 성벽은 "크고 높은" 것이었고, 이것은 세상과 모든 부정한 것들로부터의 분리를 말합니다.

"성(벽) 밖에는 개들과 마법사들과 부도덕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을 좋아하고 지어내는 자들이 다 있느니라(계 22:15)."

오늘날에도 교회 주위에 크고 높은 성벽을 쌓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성벽을 넘어 교회에 들어가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늘구멍만 한 좁은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과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자기의 죄를 버리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을 쉽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면서도 영생을 얻고자 했던 부자청년에게 하신 것처럼 그런 사람들을 좁은 문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생명으로 가는 길은 좁고 찾는 자가 적습니다. 사람들이 그들의 교회에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넓히고 벽을 낮추는 수많은 설교자들, 즉 고용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가 아니라 그들의 교회입니다. 예루살렘에는 크고 높은 성벽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12개의 문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성령은 구원의 좁은 문이 아니라 전혀 다른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60장 18절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너희 성벽은 구원(죄로부터의 구원, 세상과의 분리)이라 하고, 너희 문은 찬송이라 하리라."

동서남북 각각 3개씩 12개의 문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느 편에 있든지, 항상 찬양과 감사의 영으로, 항상 하나님의 임재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교회에는 원망하거나 투덜거리거나 불평할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이것이 새 예루살렘에 대해 언급된 처음 두 가지, 곧 분리의 성벽과 찬양의 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교회에서 끊임없이 이야기해야 할 두 가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열두 문에 적힌 이름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이라는 것을 보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이것은 구약의 성도들도 그리스도의 신부의 일부가 될 것임을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 세대주의적 성경학자들이 그것에 대해 뭐라고 말하든지 간에!!!

13,14절: 그 성문은 동쪽에 셋, 북쪽에 셋, 남쪽에 셋, 서쪽에 셋이 있었습니다. 그 도성의 성벽에는 주춧돌이 열두 개가 있고, 그 위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어린 양의 열두 사도는 도성의 기초가 아니라 성벽의 기초입니다. 그 도성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고전 3:11). 사도들은 성벽의 주춧돌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분리의 높은 벽의 기초를 먼저 놓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기초 위에 오늘날 우리가 분리의 높은 벽을 쌓고 있습니다.

15,16절: 나에게 말하던 그 천사는, 그 도성과 그 문들과 성벽을 측량하려고, 금으로 된 자막대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도성은 네 모가 반듯하여, 길이와 너비가 같았습니다. 그가 자막대기로 그 도성을 재어 보니,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서로 똑같이 만 이천 스타디온이었습니다.

그 도성은 정육면체입니다. 구약의 성막에서, 지성소는 높이와 길이와 너비가 정확히 15피트인 정육면체였습니다. 성전에서도 지성소는 정육면체였습니다. 예루살렘 도성은 바깥뜰이나 성소가 없을 것입니다. 그곳은 전적으로 지성소만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신부가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 (하나님은 성막의 지성소에 거하셨기 때문입니다). 바깥뜰과 성소에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데 집중하는 반면, 지성소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과 교제합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마리아처럼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을 경배하고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예루살렘이 정육면체라는 것은 또한 예루살렘에 속한 사람들의 삶의 길이와 너비만큼 깊이를 가지고 있음을 상징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그들의 외적인 삶을 보는 것만큼 그들의 내면의 삶에서도 깊이를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독교인의 삶은 정육면체가 아닌 정사각형과 같습니다. 사람들이 보는 그들의 앞면은 큽니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깊이가 없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그들의 명성이 높아짐에 따라 그들의 사각형은 점점 더 커집니다. 그러나 심판 날에, 하나님께서 이 모든 사각형을 옆으로 돌리실 때 많은 사각형이 종이처럼 얇은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들은 전혀 정육면체가 아니라, 단지 정사각형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속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평판만 가지고 사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큰 정사각형보다 아주 작은 정육면체가 되는 것이 낫습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17,18절: 또 그가 성벽을 재어 보니, 사람의 치수로 백사십사 규빗(70m)이었는데, 그것은 천사가 측량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 성벽은 벽옥으로 쌓았고; 도성은 맑은 수정과 같은 순금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다시 한 번 우리는 투명한 유리처럼 깨끗한, 순결에 중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에 거주할 완벽한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간사함이 없는 진실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19,20절: 그 성벽의 주춧돌들은 각색 보석으로 꾸며져 있었습니다. 첫째 주춧돌은 벽옥이요; 둘째는 사파이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비취옥이요;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옥수요; 일곱째는 황보석이요, 여덟째는 녹주석이요; 아홉째는 황옥이요; 열째는 녹옥수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수정이었습니다.

보석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엄청난 압력으로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되며, 지구 표면 아래 깊은 곳에 숨겨져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성도들이 새 예루살렘에 합당하도록 형성되는 방법입니다 - 일상 생활과 상황의 많은 압력을 통해. 그들은 이러한 압력 속에서 스스로를 낮추었고, 그 결과 오랜 세월에 걸쳐 보석이 되었습니다.

에스겔 28장 13절에서, 우리는 루시퍼가 바로 이 돌들로 장식되었음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존전에서 쫓겨났습니다. 이 돌들은 대제사장 아론의 옷에 나타납니다(출 28:17-20). 이것은 루시퍼가 잃어버린 것이, 아론이 상징하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람에게 올 것임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그 돌들은 마침내 그리스도의 신부에게서 발견됩니다. 그 하나님의 영광이 새 예루살렘 교회에 임한 것입니다.

21절: 또 열두 문은 열두 진주로 되어 있는데; 그 문들이 각각 진주 한 개로 되어 있었습니다. 도시의 넓은 거리는 맑은 수정과 같은 순금이었습니다.

모든 문은 진주입니다. 진주 역시 굴의 몸에 들어오는 이물질에 대한 반응으로 형성됩니다.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걸어가는 두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모든 것은 고난을 통해 얻은 영광의 그림입니다:

"그리스도가 마땅히 이런 고난을 겪고서,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느냐?(눅 24:26)"

도시의 거리는 순금이었습니다. 천국에서 우리는 금을 입는 것이 아니라, 금 위를 걸을 것입니다. 여기 지구에서, 사람들은 금에 높은 가치를 부여합니다. 그러나 금은 하늘에서 우리 발 아래 있을 것이며, 오늘날에도 금은 하늘을 생각하는 자들의 발 아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금에 대한 욕망을 이기고 천국을 향해 준비가 된 자들입니다!

도시의 거리 또한 투명한 유리 같았습니다. 우리는 유리와 물의 차이를 알고 있습니다. 물은 무엇인가를 넣으면 쉽게 더러워질 수 있습니다. 사실, 세상의 거의 모든 물은 깨끗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리 위에 무엇인가를 놓는다고 해서 더럽게 될 수 없습니다. 먼지는 문제없이 유리에서 그냥 씻어내면 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영원한 상태를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우리는 다시는 죄를 짓는 것이 불가능한 곳에 있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넘어질 수 있지만, 천국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22-27절: 나는 그 안에서 성전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주 하나님과 어린 양이 그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도성에는, 해나 달이 빛을 비출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그 도성을 밝혀 주며, 어린 양이 그 도성의 등불이시기 때문입니다. 민족들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닐 것이요, 땅의 왕들이 그들의 영광을 그 도성으로 들여올 것입니다. 그 도성에는 밤이 없으므로, 온종일 문을 닫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민족들의 영광과 명예를 그 도성으로 들여올 것입니다; 속된 것은 무엇이나 그 도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가증한 일과 거짓말하는 자도 절대로 거기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다만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늘의 빛은 하나님 자신이 될 것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빛을 주거나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 다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되시며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실 것입니다. 우리는 해나 달이나 다른 빛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예루살렘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이 땅에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영광, 즉 이 땅의 어떤 왕이나 국가의 영광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림 언어입니다. 그러나 그 도시 안에서는 거짓말쟁이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신부에 속하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특권인지 깨달았습니까?

요한복음 3장 12절에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지상 생활에 대해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땅의 일에도 주님을 신뢰하는 것을 어려워합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새를 먹이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먹이실 것이라고 분명히 가르치셨지만, 땅의 일에 대한 염려는 많은 신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주님께서 지상의 일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믿는 것이 그렇게 어렵다면, 하늘의 많은 것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낮추고, 계시록에 언급된 천국과 영원한 상태에 관한 많은 것들이 우리가 독단적으로 완전하고 명확한 이해를 가지고 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인식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유리를 통해 어둡게 봅니다. 언젠가는 모든 것이 분명해질 것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영광스러울 것입니다.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영광을 듣고, 이스라엘에 와서 그것을 보고, 놀라 가로되, "내가 여기서 본 것의 절반도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 이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하도다"(왕상 10:7). 우리가 영광에 올라가서 영원한 상태를 보면, 그와 같은 말을 할 것 입니다.

영원한 상태에 대한 모든 세부 사항을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생각의 한계 때문에, 천국과 영원에 대한 모든 것을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새 예루살렘의 일부가 될 것임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합창으로 "하늘이 내려오고 영광이 내 영혼에 가득 찼다"라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여기에서, 성령님을 통해 우리 마음에서 천국을 조금 미리 맛보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다음은 내가 의미하는 바에 대한 몇 가지 예입니다:

"그 도성은 해나 달의 비취는 것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양이 그 등불이 되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기 위해 어떤 외부 환경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기쁨은 항상 충만합니다. 그분 홀로 우리의 빛이십니다. 우리는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 사람들의 인정이나 건강, 재물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주 하나님이 친히 우리의 기쁨이요 빛이 되셨기 때문에, 우리는 지상의 해나 달이 우리를 비출 필요가 없습니다.

"민족들이 그 빛 가운데 다닐 것이다": 이것이 문자 그대로 미래에 무엇을 의미하든, '오늘날 교회'는 세상의 모든 민족을 위한 빛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거기에는 밤이 없으리라": 주님은 우리가 항상 빛 가운데 행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삶에 어둠의 순간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 성문은 결코 닫히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항상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의 문은 항상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든 부정한 것과, 가증한 일과 거짓말하는 자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고,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교회는 더러움이 침투하는 것을 강력히 막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보기에 크고 위대한 것은 다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6:15). 그러므로 세상이 크고 위대하다고 여기는 것에 관심이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 가증한 것, 예를 들어 세상적인 음악과 세상적인 방법을 교회에 들여오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서는 어떤 거짓말도 용납되어서는 안 됩니다. 거짓말쟁이들이 몰래 들어올 수는 있지만, 교회 모임에서 말씀을 들을 때 그들은 떨고 두려워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우리는 어린 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모든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모든 면에서 우리와 의견이 일치하지 않더라도 누구도 배제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우리의 교제는 지적인 동의가 아니라 삶을 기반으로 합니다.

장 22
22장

1절: 천사는 또, 수정과 같이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 강은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흘러 나와서.

이것은 분명히 성령의 묘사입니다. 에스겔 47:1-12에서, "강이 흐르는 곳마다 모여드는 모든 생물은, 살 것이다"(9절)라는 강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강은 가는 곳마다 생명을 불어넣습니다. 예수님은 이 구절을 언급하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이 말한 바와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 7:37,38)."

에스겔은 이 강 속으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가 발이 땅에 닿지 않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그 후 그는 강으로 옮겨졌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더 이상 땅에 얽매이지 않는 성령 충만한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발은 땅을 떠나고 성령은 우리를 계속해서 위로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이 강과 관련하여 "수정처럼 맑은"에 대한 강조를 다시 한 번 봅니다. 21장과 22장에서, "맑다", "투명하다", "유리처럼 순수하다" 등과 같은 단어로 순수성과 투명성을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그 강이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에서 흘러나온다는 것은, 성령은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보좌에서 합당한 자리를 차지한 곳에서만 능력으로 역사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절: 도시의 넓은 거리 한가운데를 흘렀습니다. 강 양쪽에는 열두 종류의 열매를 맺는 생명 나무가 있어서, 달마다 열매를 내고, 그 나뭇잎은 민족들을 치료하는 데 쓰입니다.

아담이 생명나무에 참여할 기회를 잃었던 것이 이제 사람에게 회복되었습니다. 창세기 2장과 요한계시록 22장 사이에는 많은 유사점이 있습니다.

생명나무는 하나님 자신의 생명, 즉 영원한 생명(영생) 또는 우리가 지금 참여할 수 있는 신성한 성품을 상징합니다. 영생은 "영원히 존재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불못에 가는 사람도 영원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영생이 없습니다. 영생은 시작도 끝도 없는 생명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자신의 생명입니다. 그것이 생명나무가 상징하는 것입니다. 아담은 어리석게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생명나무 대신 지식의 나무로 갔습니다. 그들은 생명보다 성경 지식을 구합니다. 요한계시록 22장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사라졌습니다.

우리가 이 계시록을 통해 연구하면서, 우리가 지식의 나무가 아니라 생명나무에게로 나아가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눈치채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생명나무 앞에 불칼을 두셨습니다(창 3:24). 이것은 우리가 생명나무에 참여하려면, 우리의 자기 생명에 칼이 떨어져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이것이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그 앞에 칼이 없는 지식의 나무로 가는 것을 택하는 이유입니다. 성경 지식을 얻기 위해, 우리는 자아에 대해 죽거나 매일 십자가를 져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기 위해서, 우리는 항상 "예수의 죽으심을 우리 몸에 짊어져야"합니다(고후 4:10). 우리는 칼이 우리에게 떨어지는 것을 허용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길은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입니다. 칼이 예수님에게 떨어졌고, 그분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우리도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므로, 칼이 우리에게도 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달마다 새로운 열매를 맺고, 그 잎사귀는 병을 낫게 하는, 생명나무에 참예할 수 있습니다.

3절: 다시 저주를 받을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그 도성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가 도성 안에 있고, 그분의 종들이 그분을 예배하며,

갈라디아서 3장 13절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축복을 우리의 삶에서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받은 자"라고 하였기 때문에, 그분은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그 저주를 완전히 받으셨기 때문에, 저주는 우리에게서 완전히 제거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번 생에서 그 구원의 완전한 효과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죽음은 저주의 일부이며, 신자들은 여전히 ​​죽습니다. 이는 우리가 저주의 모든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도 완전한 구원을 미리 맛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셨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고통을 경험하고, 여전히 가시가 발을 찌르며, 아프고, 괴롭고, 질병이 있지만, 우리가 저주 아래 있지 않고 하나님의 축복 아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합니다. 언젠가는, 저주의 모든 효과가 완전히 제거될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몸을 치유하실 때마다, 우리는 언젠가 완전히 경험하게 될, 저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종들(또는 노예들)에 대한 강조에 주목하십시오. 우리는 1장 1절에서 언급된 "종들"을 보았고, 이 마지막 장(22장 3절)에서도 "종들"이 언급된 것을 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칠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들이 그분을 섬기리라"라고 읽습니다. 이것은 영원 속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어떤 방법이 있을 것임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영원토록 두 손을 들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우리가 영원토록 할 일, 즉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의 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원토록 하나님을 위해 하게 될 어떤 형태의 섬김도 있을 것인데, 여기에서 그것을 설명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땅, 이 곳에서 주님을 섬기는 것을 기뻐했던 사람들은 영원에서도 주님을 섬기는 것을 기쁨과 영광으로 여길 것입니다.

4절: 그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뵐 것입니다. 그들의 이마에는 그분의 이름이 적혀 있고,

하나님을 직접 뵙는다는 것은 놀라운 특권이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 같이 얼굴을 맞대고 말씀하신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신 34:10). 이것은 인간이 지상에서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특권이며, 사람이 친구에게 말하듯이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원토록 우리와 주님 사이가 그렇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얼굴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분의 이름이 우리 이마에 있을 것이라는 의미는 그분의 성품이 우리의 인격을 통해 나타날 것임을 뜻합니다.

5절: 다시는 밤이 없고, 등불이나 햇빛이 필요 없습니다. 그것은 주 하나님께서 그들을 비추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원무궁 하도록 다스릴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우리는 하나님 자신이 그분의 백성을 위한 빛의 근원이심을 읽습니다. 여기에 언급된 "다스린다"는 것은 또한 우리가 이 땅에서 미리 맛보는 것, 즉 사람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욕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의 아들들은 분노와 탐욕 등 자신의 정욕을 다스리고 싶어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먼저 다스려야 할 영역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다스리도록 준비가 될 것입니다.

이 구절로 영원한 상태에 대한 설명이 끝납니다.

6절: 천사가 또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믿음직하고 참되다." 예언자들에게 영을 내려 주시는 주 하나님께서 자기의 종들에게 곧 일어날 일들을 보여 주시려고, 자기의 천사들을 보내셨다.

여기서부터 장이 끝날 때까지, 많은 권면과 약속이 있습니다.

계시록의 시작 부분에서, 우리는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라는 구절이 얼마나 자주 나오는지 알아차렸습니다. 이것은 이 책의 내용을 가볍게 여기지 말 것을 거듭 상기시키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종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또한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사람도 우리와 주님 사이에 끼어들어서는 안 됩니다.

요한계시록을 공부하면서 당신이 직접 책을 파고들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자 하는 욕구를 주었으리라 믿습니다.

7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라.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은 복이 있느니라."

주님은 여기서 그분이 곧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아니요. 그분은 아무런 경고도 없이 밤에 도적같이 속히, 갑자기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계시록은 1장 3절에서 이 책의 끝 부분에서 나오는 동일한 문구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책에 기록된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도다."

8,9절: 이 모든 것을 듣고 본 사람은 나 요한입니다. 내가 이 모든 것을 듣고 볼 때에, 이것들을 내게 보여 준 그 천사의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고 하였더니, 그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지 말아라; 나도, 너와 너의 동료 예언자들과 이 책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과 같은 종이다. 경배는 하나님께 드려라."

다시 한 번 요한은 하나님께서 이 모든 진리를 그에게 가르치기 위해 사용하셨던 자에게 이끌려가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자기에게 보여준 천사의 발 앞에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그러나 천사는 재빨리 "그러지 마라. 나는 당신의 동료 종일 뿐이다.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하여라"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참 종의 한 표징입니다. 그는 누구든지 자기에게 붙는 것을 볼 때마다 즉시 그 사람에게서 자신을 분리하여, 그 사람이 사람이 아닌 주님을 붙잡을 수 있도록 합니다!

천국에서 그들은 오직 하나의 노래 "당신만이 합당하시도다"라는 새 노래를 부릅니다. 이 천사는 그 노래를 배웠기 때문에, 재빨리 요한을 떨쳐버리고, 요한에게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라고 요청했습니다.

10절: 또 그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이 책에 적힌 예언의 말씀을 봉인하지 말아라."

요한계시록은 봉인되지 않은 책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최근까지 봉인된 책이 한 권 있습니다. 다니엘서 12장 4절에서, "다니엘아 너는 이 말을 숨기고 이 책을 세상 끝날까지 봉인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다니엘서 12장 9절에서 반복됩니다. 다니엘서의 예언은 봉해졌으나, 지금은 하나님의 백성이 이해할 수 있도록 열려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마지막 때" 있음을 증명합니다.

주님은 서기 96년에 요한에게 그때도 때가 가까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얼마나 더 가까이에 있겠습니까!

11절: "이제는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러운 채로 있어라; 의로운 사람은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사람은 그대로 거룩한 채로 있어라."

이것은 우리가 성경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찾을 수 있는 놀라운 권고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더러운 채로 있어라" 하고, 계속해서 "잘못을 행하라"고 말합니다.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만약 당신이 성경을 다 읽고 마지막 장까지 왔는데도 회개하고 싶지 않고 죄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면, 계속 더러워지고 계속해서 악을 행하십시오. 당신에게 희망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읽고 난 후, 당신이 여전히 정욕에 빠져 죄악의 쾌락을 구하려 하고, 음란한 책을 읽고자 하며, 음란물을 보고자 하며, 누군가에 대한 원한을 품고 용서하지 않으려 하고, 모욕하고, 험담하고, 시기하고, 자기를 위하여 이 부패한 세상을 위하여 살고자 하거든, 계속해서 그것을 하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을 막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11절 후반부에 의인을 위하여 기록된 바를 보십시오:

"의로운 사람은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사람은 그대로 거룩한 채로 있어라."

거룩함을 추구하는 데는 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의와 거룩함을 더욱 추구하십시오.

우리가 어떤 상태로 삶을 마감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영원을 어떻게 보낼지를 결정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와 더러움 가운데 살았다면, 우리는 영원히 불못에서 죄와 더러운 것과 불법을 계속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번 삶에서 의와 거룩함을 추구했다면, 그것을 영원에서도 추구할 것입니다. 우리의 상태는 우리가 죽을 때 영원히 고정될 것입니다.

"나무가 남으로 치우치든지 북으로 치우치든지, 그 나무가 넘어지는 곳에 그대로 있느니라(전 11:3)."

12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라.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가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구원은 은혜로 말미암는 것이나, 상급은 우리의 행한 대로 받는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상을 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조차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주님께 하듯이 해야 하며, 오직 그분에게서만 "고맙다"와 "잘하였다"를 기대해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상을 위해 섬기지 않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의 모든 행위는 죽은 행위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충실함에 대해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것은 여전히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인생의 말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장래에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리니,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께서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나에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 주실 것입니다(딤후 4:7,8).

13,14절: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곧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끝이다. 자기 겉옷을 빠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이르는 권리를 차지하고 성문으로 성에 들어가려 함이로다

NASB 번역에서는, 생명나무에 접근하는 자들을 "그 옷을 빠는 자"로 설명합니다. KJV 번역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저희로 생명나무에 나아가는 권리를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두 표현 사이에는 충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옷을 빠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계명도 지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순종은 그들의 믿음이 참되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복 있는 자" 중 마지막입니다. 그 일곱 가지를 함께 살펴봅시다.

1.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안에 기록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계 1:3).

2. 이제부터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이들은 수고를 그치고 쉼을 얻으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계 14:13).

3. 깨어 자기 옷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가 벌거벗은 채로 다니지 않으며 사람들에게 그의 부끄러움을 보지 않게 하려 함이라(계 16:15).

4.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계 19:9).

5.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 하리라 (계 20:6)

6.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자는 복이 있도다(계 22:7).

7. 자기 옷을 빠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는 권리를 얻으며, 문을 통하여 성에 들어가려 함이라(계 22:14).

15절: 개들과 점술가들(마술사들)과 부도덕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을 좋아하고 행하는 자는 다 바깥에 남아 있게 될 것이다.

개들은 타락한 자들로, 처음에는 자기가 싫어하는 것을 토하고(죄를 버리고 그리스도께 나아오며), 그 후에 가서 자기가 토한 것을 먹습니다(그리스도를 멸시하고 다시 같은 죄 가운데 살아감)(벧후 2:22).

다시 한 번 점술가들(주술에 손을 대는 자들), 부도덕한 자들,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은 하나님의 나라 밖에 있는 자로 언급됩니다. 거짓말을 좋아하고 거짓말을 행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의 끝 부분에서, "거짓말쟁이들"이 하나님의 나라 밖에 있다는 것을 세 번이나 상기시켜 줍니다(계 21:8,27; 22:15).

성경에 언급된 첫 번째 죄는 거짓말입니다. 사탄은 하와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창 3:4).

초대교회에서 심판받은 첫 죄는 거짓말이었습니다(행 5:3).

성경에 언급된 마지막 죄도 거짓말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다른 어떤 습관보다도 이 습관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깨끗이 해야 할 큰 필요성을 가르쳐줍니다. 어린양과 함께 시온산에 선 자들은 거짓과 가식과 위선을 자기 삶에서 완전히 버린 자들입니다(계 14:5).

16절: 나 예수는 나의 천사를 너희에게 보내어, 교회들에 주는 이 모든 증언을 전하게 하였다. 나는 다윗의 뿌리요, 그의 자손이요, 빛나는 새벽별(샛별)이다."

"다윗의 뿌리"는 "다윗을 낳으신 여호와, 다윗의 창조주"라는 뜻입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다윗의 씨로 말미암아 육신으로 난 자"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성경에 언급된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칭호 중 하나입니다 - 그분의 신성과 인성을 강조합니다.

"나는 빛나는 새벽별이다." 구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 4장 2절에서 그리스도는 "의의 태양"이라고 불립니다. 옛 언약 아래 있는 유대인들에게, 그분은 천년이 시작되는 날에 태양처럼 떠오릅니다. 교회에게 그분은 해가 뜨기 조금 전에 나타나는 "빛나는 새벽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이 땅에 내리기 직전, 예수님께서 의의 태양으로써 그분의 성도들과 함께 이 땅에 내려오시기 조금 전에, 교회가 휴거 될 때입니다.

17절: 성령과 신부가 "오라!"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듣는 사람도 "오라!" 말할 것이요. 목이 마른 사람도 올 것이요;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의 물을 받으라 하시더라.

이것이 성경의 마지막 초청입니다. 하나님은 더러워지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더러워진 채로 있으라고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마음은 여전히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우리는 성령과 신부가 죄인들을 초대하여 생명의 샘이신 예수님께 와서 마시도록 초대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듣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도 초대하도록 격려받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이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도전으로 끝나는 것을 봅니다, 이는 교리가 아니라 예수님 그분 자신에게로 나아오라는 초대입니다.

18,19절: 나는 이 책에 기록한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거합니다. 누구든지 여기에 무엇을 덧붙이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 책에 기록한 재앙들을 덧붙이실 것이요, 또 누구든지 이 예언의 책에 기록한 말씀에서 무엇을 빼 버리면, 하나님께서 이 책에 기록한 생명 나무와 그 거룩한 도성에서 그가 누릴 몫을 빼 버리실 것입니다.

이 책(계시록)에 기록된 재앙들은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하나님은 그 누구도 그분의 거룩한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이 책에서 더하거나 빼는 자들에게는 엄중한 경고가 주어집니다. 이 경고는 성경의 마지막 페이지에 있기 때문에 이 원칙은 성경 전체에 적용됩니다.

창세기 3장에서 하와가 저지른 첫 번째 실수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더하고 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2장 17절에서 아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아담은 의심할 여지 없이 이것을 하와에게 정확하게 전달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3장 1절에서 뱀이 하와에게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느냐"라고 물었을 때, 하와는 하나님의 명령에 더하고 빼서 대답했습니다. 우선 그녀는 무언가를 추가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그것을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창 3:3)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나무를 만지는 것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와는 뺍니다. 그녀는 "네가 죽을까 하노라"(창 3:3)고 말하면서 "너는 반드시 죽으리라 "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를 약화시켰습니다. "네가 죽을까 하노라"라는 말은 죽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의 서두에서 죄가 하나님의 말씀을 더하고 빼면서 시작되었음을 봅니다. 그래서 성경 말미에, 하나님의 말씀을 더하거나 빼지 말라는 강력한 경고가 나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전통을 하나님의 말씀에 추가하여 거의 동등하게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어떤 작은 계명에 대한 순종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에서 빼왔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는 모든 것을 우리의 삶과 가정에서 제거하기 위해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놓친 모든 것을 우리의 삶과 가정에 추가하기 위해 똑같이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통해, 우리가 영원히 그분과 함께 살 준비가 되어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시험하십니다.

시편 138편 2절은 하나님이 그분의 말씀을 그분의 이름보다 크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욕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많은 교파가 하나님의 말씀에 더하거나 빼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적인 음녀로 끝났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실패에서 경고를 받아야 합니다.

20절: 이 모든 계시를 증언하시는 분이 이르시기를, "그렇다. 내가 속히 오리라."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여기에 성경의 마지막 기도, 우리 모두가 기도할 수 있는 좋은 기도인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만날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이 기도를 드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더하거나 뺀다면, 이 기도를 드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람의 영광을 구한다면, 이 기도를 드릴 수 없습니다.

그분이 깨끗하신 것처럼 우리 자신을 정결케 하지 않는다면, 이 기도를 드릴 수 없습니다.

오시옵소서, 주 예수님. 우리는 죄에 진절머리가 납니다. 우리는 이 썩은 세상이 지겹고 지쳤습니다. 우리는 의가 거하는 세상을 갈망합니다. 오시옵소서, 주 예수님.

21절: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있을 지어다. 아멘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끝나는지 보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가 새 예루살렘의 일부가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과 도움이 있어야만,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우리를 노예로 삼았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은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합니다! 그리고 은혜는 우리가 죄와 세상과 사탄을 이길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이 단어를 구약의 마지막 단어인 "저주"와 대조해 보십시오.

말라기 4장 6절에서, 하나님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탄생으로 시작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라는 축복의 기도로 끝납니다.

구약이 끝나는 저주에서 벗어나 신약의 은혜 아래서,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고, 영원히, 하나님의 거처에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할렐루야! 모든 영광과 찬양과 존귀를 하나님과 우리 죄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께 돌립니다.

아멘 그리고 아멘!

장 23
계시록 요약

1장: 그리스도 자신

1절과 3절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책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이것은 주로 미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언적 프로그램의 계시가 아니라 주님이신,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으로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셔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언제든지 완전히 통제하시는 분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입니다. 이 책은 순종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선포하기 위해 그분의 종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진리를 다른 이들과 나누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7절: 전체 책의 주제는 "보라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니 모든 사람의 눈이 그를 보리라" 입니다. 이것이 인류 역사의 절정입니다.

10-17절: 여기서 우리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새로운 계시로 시작됨을 발견합니다. 첫 번째는 다가오는 재앙과 심판에 대한 예언적인 계획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요한에게 "먼저, 예수님을 봐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먼저 예수님의 영광을 보아야 합니다. 모든 새로운 진리의 계시는 우리가 그분의 발 앞에 엎드려 "오 주여, 당신만이 합당하십니다!"라고 말하게 만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 대한 새로운 계시로 시작되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의 다른 것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고 그분의 영광을 보는 법을 배웠다면, 가장 중요한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19절: 이 책은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1. 네가 본 것들 -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 대한 계시(요한계시록 1장).

2. 지금 있는 것들 -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요한계시록 2,3).

3. 이 일 후에 일어날 일들 -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요한계시록 4-22장).

2장과 3장: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

여기에서 우리는 일곱 교회와 그들의 사자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에 이릅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는 그분의 백성을 정화하는 분으로 보여지며, 각 지도자와 각 교회의 문제를 드러내십니다. 마치 의사가 환자의 문제를 진단하듯이, 그리스도께서는 각각의 경우를 진단하시고, 그들의 삶에 어떤 부분이 건강한지 어떤 부분이 아픈지 말씀해 주십니다. 7개 교회 중 단 2개의 교회만이 질병 없이 건강합니다. 한 교회는 서머나 교회로 핍박을 신실하게 견뎌냈습니다. 다른 하나는 열렬한 형제 사랑을 유지한 빌라델피아 교회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찾으시는 두 가지가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1. 고통에 대하여 신실하게 견딤; 그리고

2. 열렬한 형제 사랑

이 두 가지에 충실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라오디게아 교회에 속한 자들과 같이 미지근하고 타협하는 자는, 마지막 날에 여호와의 입에서 토하여 내어져 음녀 바벨론의 일부인 것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일곱 교회에 보내는 이 메세지에서, 우리는 성령의 부르심을 일곱 번 듣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그리고 성령은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주로 두 가지입니다:

1. 그분은 일곱 번 "이겨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2. 그분은 일곱 번 "회개하라!" 고 말씀하십니다.

(참고: 2개 교회에 회개하라는 권고는 없지만, 나머지 5개 교회에 보낸 편지에는 회개하라는 말이 7번 나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의 영과 이기는 자 사이에 연관성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기는 사람은 자신 안에서 끊임없이 발견하는 죄에 대해 끊임없이 회개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4~22장: 그리스도와 그의 왕국

4장부터 이 책의 끝까지, 우리는 미래와 관련된 것들을 봅니다. 여기서 다시 요한은 하늘에 대한 환상을 처음으로 받습니다(4장과 5장). 요한은 모든 것이 끊임없이 추적 관찰되고 있는 천국의 중앙 통제실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무엇보다 먼저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늘에서 감시하고 통제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전적인 주권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먼저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하나님이 홍수의 심판을 땅에 내리실 때에 노아를 기억하신 것 같이, 그분의 자녀들 한 사람 한 사람을 항상 돌보고 계십니다.

6장에서는, 일곱 인 중 여섯 인이 떼어졌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전 마지막 7년 동안 이 땅에서 일어날 일에 대한 미리 보기입니다. 여섯 인은 마태복음 24장에서 마지막 날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1. 적그리스도가 나옴.

2. 전쟁;

3. 기근;

4. 전염병;

5. 큰 환난;

6. 그리스도의 재림.

여섯째 인이 떼어질 때, 계시록에서 처음으로 '진노'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구름 가운데 나타나시고 교회가 휴거 될 때, 즉 적그리스도가 나타나고 큰 환난이 일어난 후입니다(7:9,10).

7:1-8에서, 우리는 지상에 있는 충실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인침을 받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마지막 나팔에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폭발이 시작됩니다. 이 나팔은 7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져 7개의 나팔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우리가 변화될 때 울리는 나팔입니다(살전 4:16; 고전 15:52). 마지막 나팔의 처음 네 부분은 8장에 묘사되어 있으며,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과 천체에 심판을 내립니다. 9장에 두 가지가 더 설명되어 있습니다 - 무저갱에서 나오는 악마들과, 유프라테스 강(고대 바벨론이 있던 곳)에서 풀려난 악마들, 그리고 아마겟돈의 마지막 전투를 위해 2억 명의 군인을 모으는 것입니다.

9장 20,21절에서, "그들이 회개하지 아니하였더라"라는 구절이 두 번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회개하다"라는 단어는 성경의 어떤 책보다 계시록에 더 자주 나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회개하여 그들을 심판하실 필요가 없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나타냅니다.

10장에서, 그 책이 완전히 펼쳐져 있고, 요한이 그것을 먹으라는 요청을 받는 것을 봅니다. 그것은 입에는 꿀 같이 달고 배에는 쓰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와 심판이 있음을 상징합니다.

11장에서 13장까지는, 마지막 7년 중 후반의 3년 반 동안 일어날 사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합니다. 11장에서, 모세와 엘리야의 영으로 예언할 두 증인을 봅니다. 12장에서, 사탄이 땅으로 쫓겨나는 것을 봅니다. 땅에서 이기는 자는 사탄을 이기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13장에서, 적그리스도와 거짓 예언자의 권세를 봅니다.

14장에서, 이기는 자들이 주님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봅니다. 그들은 극소수입니다 - 좁은 문(바늘구멍)으로 통과하고, 어디든지 어린양을 따랐고, (모든 것과 모든 사람에게 감사하는) 새 노래를 배웠으며, 그들의 삶에서 거짓말을 완전히 씻어 낸 소수의 사람들입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아마겟돈의 마지막 전투에 대한 간략한 미리 보기를 봅니다. 15장에서, 이기는 자들이 다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봅니다.

16장에서, 일곱 천사가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아 붓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7중 마지막 나팔과 매우 유사하며, 아마도 7중 마지막 나팔과 동시에 일어날 것입니다. 또, 우리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17장과 18장에서는, 그리스도께 속했다고 주장하지만, 세상과 영적 간음을 행한 음녀 바벨론에 대해 설명합니다. 종교적인 바벨론은 17장에, 상업적인 바벨론은 18장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바벨론 기독교는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섬기려는 기독교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세상과도 친해지려고 노력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전통과 섞었습니다. 종교적인 바벨론의 전통을 제거한다고 해서 구원이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돈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상업적인 바벨론의 거미줄에 여전히 걸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교적인 음녀보다 상업적인 음녀를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19장에서, 순결하게 서 있는 그리스도의 신부를 봅니다 - 종교적인 음녀로부터 순결하고 상업적인 음녀로부터 순결하며, 단순하고 순결한 옷을 입고, 어린양과 결혼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어린양이 신부와 함께 적그리스도와 그의 군대가 패배하는 아마겟돈의 마지막 전쟁을 위해 오는 것을 봅니다. 적그리스도와 거짓 예언자는 불못에 던져집니다.

20장에서, 사탄이 묶여있을 때,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를 봅니다. 1000년의 평화 끝에, 사탄이 풀려나 나가서 다시 사람을 미혹하고 다시 한번 하나님을 반역하도록 부추기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한 순간에 멸망합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크고 흰 보좌의 마지막 심판을 봅니다.

마지막으로 21,22장에서, 새 하늘과 새 땅과 그리스도의 신부가 그 모든 영광가운데 빛나는 것을 봅니다. 마지막 장은 몇 가지 마지막 경고와 죄인들에게 그리스도께 나아오라는 마지막 권유로 마무리되고, 이 말씀으로 끝납니다: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

성령의 부르심은 오늘날 우리에게 울려 퍼집니다:

회심하지않은 죄인들에게: "오라. 생명수를 거저 마시라."

신자에게: "회개하라. 이기는 자가 되어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