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내가 4명의 아들(그들이 혼자였고,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을 때)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발췌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대학에서 공부하고, 그 다음 일했습니다. 당시 그들은 10대 후반과 20대였습니다.
아버지들은 자녀들을 "주의 훈계로" 양육하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래서 내가 쓴 글의 대부분은 주 예수님께 헌신하도록 이끄는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이었습니다. 나는 그들이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 안에 굳게 서기를 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마태복음 16:4) 한가운데 있는 젊은이로서 그들을 보호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또한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다른 사람들과 정확하게 나눌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나는 메일에서 몇 가지 사항을 중요하게 여기므로, 여러 번 강조하고 반복했습니다. 어떤 문제는 같은 이유로 신약에서도 여러 번 반복됩니다. 나는 거룩함, 십자가를 지는 것, 이기는 삶을 주로 강조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중요한 진리는 일반적으로 기독교 집단에서 강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나는 아들들에게 내 메시지의 카세트 테이프를 정기적으로 들으라고 권고했습니다. 오늘 당신은YouTube와 CFC 웹사이트(www.cfcindia.com)에서 내 메시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이 책의 한 장에는 배우자를 선택하고 결혼할 때 내가 그들에게 준 조언이 들어 있습니다. 네 사람 모두 내 조언을 따랐고 그 장에 설명된 대로 경건하고 젊은 여자와 결혼했습니다. 이에 대해 주님께 깊이 감사 드립니다.
나는 단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씨앗만 심었습니다. 하나님은 씨앗에 물을 주셨고 식물을 키우셨고 그들의 삶에서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그들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드립니다.
내가 이 편지들을 쓴지 벌써 25년이 넘었습니다. 내 견해는 동일하며 그때 쓴 모든 것을 지지합니다.
나는 이 책에서 아무 쓸모가 없는 제목, 날짜, 인사말, 이름 및 서명란을 제거하고 모든 이메일을 여기에 함께 결합했습니다.
이 책은 단지 읽기 쉽도록 챕터별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챕터는 주제별로 또는 우선 순위에 따라 구분되지 않았습니다.
내가 내 아들들에게 쓴 것의 90%는 어린 소녀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도 이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책은 다양한 주제에 대한 많은 메일의 내용을 담고 있으므로 천천히 읽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우유"가 아니라 "강한 고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추천하는 것은 하루에 한 장만 읽고 멈추고, 읽은 내용에 대해 생각하고 그 장에서 진리를 흡수한 다음 계속 진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인용된 모든 성경을 찾아 묵상하기를 촉구합니다. 그렇게 하면 아주 짧은 시간에 삶이 근본적으로 더 나은 방향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읽는 모든 젊은이들에게 축복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방갈로 / 2017년 1월 / 잭 푸닌
비록 너희가 예수님의 제자라 할지라도,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너희의 삶에도 계속해서 기복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제자가 되기로 한 결정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너희는 영적으로 주 예수님과 결혼하고 그분을 영원히 따르기로 선택했다. 너희는 그 결정을 절대 어기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개인적인 이득이나 이익을 위해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너희를 위해 하신 일에 대해 주님께 엄청난 감사의 빚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분이 먼저 너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너희는 지금 그분을 사랑한다.
지금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너희의 길(의인의 길)이 영광의 한 정도에서 다른 영광의 정도로 가는 것이다(잠 4:18). 따라서 매 해가 지난 해보다 더 영광스러운 해가 되어야 한다. 너희가 이전에 가졌던 것보다 더 큰 순결과 겸손과 사랑의 정도로 말이다. 그것이 너희의 목표여야 한다.
하나님은 또한 앞으로 그분의 교회에서 너희를 위한 사역을 가지고 있으시다. 그러므로 순결과 겸손과 사랑을 평생 목표로 삼으라. 주님은 더럽고 교만한 그릇은 사용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너희를 불타고, 성령으로 충만한 증인이 되게 하시기를 기도한다.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을 구하고, 항상 하나님을 경외함과 겸손에 뿌리와 터를 두어라(잠 22:4). 하나님은 자신을 경외하는 자를 보호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너희의 감정은 변동하기 때문에 항상 신뢰할 수 없다. 그러나 진정한 영성은 너희의 뜻을 하나님 편에 두기로 한 너희의 결정에 있다. 그러므로 낙심하는 것을 거부하는 의지를 훈련해라. 자백하는 즉시 너희의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피로 사탄의 참소를 이겨라(계 12:11).
예수께서 받아들이신 사람들
정직은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요구하시는 주요한 것이다. 시편 51편(Living Bible에서 읽음)에서, 우리는 다윗의 마음의 태도를 볼 수 있다. 그 마음의 태도가 하나님이 그를 받아들이게 한 것이다(비록 그가 한 여자와 간음하고 그 남편을 죽였을지라도). 대조적으로, 우리는 사울의 명예를 구하는 태도(삼상 15:30)를 본다. 그 태도는 명백히 작은 실수인데 하나님이 그를 거부하게 만들었다. 부정직과 위선은 반죽 속의 누룩과 같다. 그것은 오랫동안 숨길 수 없다. 그것의 효과는 조만간 나타날 것이다. 너희는 이런 악을 무엇보다 두려워해야 한다.
예수님이 지상에 계셨을 때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올 수 없었던 이유를 생각해 보아라:
- 바리새인: 그들은 스스로 의롭게 여기고, 남을 멸시하며, 스스로를 정당화하였기 때문이다;
- 서기관들과 율법학자: 그들의 지성과 성경 지식을 자랑스럽게 여겼기 때문이다;
- 부자 청년 관원: 그는 돈을 너무 사랑했고 예수님께서 포기하라고 말씀하신 한 가지를 기꺼이 포기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 제자를 지망하는 두 사람(눅 9:59-62): 친척에게 너무 집착했기 때문이다.
이제 자유롭게 주님께 나아갈 수 있었던 사람들을 보아라:
- 버림받은 나병환자(마 8:1-4);
-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요 8:1-11);
-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 부인한 후에도(요 21:15-17);
- 로마 군인(마 8:5-13);
- 가나안 여인(마 15:21-28).
이 목록의 마지막 두 사람은 이스라엘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복음서에서, 주님께서 그들의 큰 믿음에 대해 공개적으로 칭찬하신 유일한 두 사람이다. 그 구절들을 읽으면 그들의 깊은 겸손과 주님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보게 될 것이다. 큰 믿음은 항상 큰 겸손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심령이 가난한 자만이 주님께 나아갈 수 있다; 천국은 그런 사람들의 것이다. 평생 이것을 기억해라.
칭의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끊임없이 정죄감에 짓눌려 있기 때문이다. 너희가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의롭다고 선언하심)을 받았음을 확실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스도 안에서"('에베소서'에서 자주 사용되는 표현)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옷을 입히신다는 것이다. 이제 너희는 그리스도자신이 하시는 것처럼 값없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너희의 과거의 죄가 아무리 많고, 심각하고 크더라도 용서받았을 뿐만 아니라 깨끗해졌다. 하나님은 더 이상 너희를 상대로 그것들을 기억하지 않으신다(히 8:12). 너희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었다(고후5:21).
하나님은 너희의 죄를 그리스도에게 전가시키셨을 뿐만 아니라, 너희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혀주셨다. 그렇지 않으면 천사들도 얼굴을 가려야 하는 그분의 거룩한 임재 앞에 설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하나님과 사람에게 죄를 즉시 고백함으로써, 항상 양심을 깨끗하게 하여(행 24:16), 항상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가라(요일 3:21). 너희는 그 담대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큰 상을 가져오기 때문이다(히 10:35).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 나아 갈 때 결코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항상 담대하게 그분께 나아가라; 자책의 감정은 결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분은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그분의 자녀들에게 주시지 않고, 자녀들의 떡을 주신다. 그분은 먼 나라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탕자라도 즉시 그의 우편에 앉게 하시기를 원하신다.
용서와 칭의
너희가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입었다고(용서를 받았을 뿐 아니라 의롭다 하심을 선언 받음) 고백함으로써, 사탄의 참소를 이기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계 12:11). 용서와 칭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어떤 사람이 법정에서 기소되고 그에 대한 혐의가 입증되었지만, 판사가 그 사람이 회개했기 때문에 그를 놓아준다면, 그는 행복하게 법정을 나갈 수 있지만 머리가 숙여진 채로 나갈 것이다 - 그는 용서받은 범죄자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판사가 그에 대한 모든 혐의를 주의 깊게 검토한 후, 모든 혐의가 거짓임을 발견하고 그 사람이 100% 의롭다고 선언하면 고개를 들고 법정을 나갈 수 있다 - 그에게서 아무 죄도 발견되지 않았고 그는 의롭다고 선언되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방법이다(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심). 하나님은 "우리 머리를 들게 하시는 분"(시 3:3-KJV)이라고 불린다.
많은 신자들이 자기를 의롭게 하는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을 깨닫지 못하여 머리를 숙이고 있다. 그들은 단지 그들을 용서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해 들었을 뿐이다. 히브리서 8장 12절은 하나님이 다시는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그분이 마치 우리가 평생 죄를 지은 적이 없는 것처럼 우리를 바라보신다는 뜻이다. "그의 긍휼(mercies)이 아침마다 새롭다"(애 3:23)는 것은 하나님이 마치 전에 한 번도 우리를 용서한 적이 없는 것처럼 매일 아침 우리를 보신다는 의미이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가 결코 정죄감에 사로잡히지 않아야 한다 -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에 대한 불신이기 때문이다. "진실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우리 사는 날 동안 너희를 따르리니, 너희는 주님의 집에서 영원히 살 것이다"(시 23:6).
사탄이 우리를 낙심시키거나 우리로 정죄감을 느끼게 할 때마다 우리를 지배할 수 있다. 우리는 심판의 두려움으로 주님께 헌신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많이 반복적으로 우리를 용서해주시는 그의 엄청난 인자하심과 선하심에 응답함으로써 주님께 헌신하게 된다. "많이 용서받은 자는 많이 사랑하는 것이니라"(눅 7:47)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나는 많은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오늘 주님을 많이 사랑할 의무가 있다. 나는 평생을 그분을 위해 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영원히 나는 내 수고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가 나를 그렇게 많이 용서한 것만으로도 충분한 보상이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나는 내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일할 수 없습니다.
나의 주님께서 이미 하셨으니까요.
그러나 나는 다른 노예처럼 일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을 사랑하기 위해".
그것이 너희의 노래가 되기를 바란다 - 너희의 평생 동안, 그러면 너희는 이 세상의 재물이 많든지 적든지 행복한 사람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의롭다 하시는 이
칭의에 대한 구약의 그림을 생각해 보라. 레위기 13장은 문둥병(죄의 묘사)에 걸린 자들에 관한 지시를 다룬다. 9절에서 17절은 가장 교훈적이다. 작고 하얀 반점을 '만성 문둥병'이라고 불렀다(10, 11절). 그러나 문둥병이 퍼져서 온 몸에 덮였을 때, 그 사람은 '정하다'고 선언되었다(12, 13절)! 그러나 다시 몸 어딘가에 생살이 조금이라도 올라오면 다시 문둥병으로 분류된다(14, 15절). 그것이 다시 완전히 희어지면 그는 다시 깨끗해졌다(16, 17절).
이것을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할지 생각해보자. 너희 안에 선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한(어딘가의 작은 선함), 너는 하나님 보시기에 부정할 것이다. 그러나 네가 아주 작은 선의 조각도 없이 완전히 부패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내 육신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않습니다" - 롬 7:18), 하나님은 너를 깨끗하다고 선언하실 것이다!
너희의 어떤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혼란을 주거나 상처를 주었을 때, 너희의 의도가 좋았다고 그것을 정당화한다면, 너희는 여전히 문둥병이 있다. 그러나 너희의 육신이 완전히 악하고 그 속에 선한 것을 하나도 찾을 수 없다고 고백하면(롬 7:18), 하나님께서 너희를 의롭다고 하신다. 너희는 깨끗하다.
원리는 이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의롭다 하지 않는 자를 의롭다 하신다.
성전에 있던 바리새인은 자기 속에 선한 것을 보았지만 하나님의 정죄를 받아 떠나갔다, 그러나 세리는 스스로에게 선한 것을 보지 못하였지만 의롭다 하심을 받아 갔다(눅 18:14). 너희의 완전한 부패와 죄를 항상 속히 인정해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즉시 너희를 의롭다 하실 것이다.
고발자와 마주하기
그리스도인 생활의 초기에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을 것이다. 너희의 삶의 그래프에는 깊은 하락이 많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계속 진행하다 보면 그 하락은 더 얕아질 것이다. 그러므로 실패에 낙심하지 말아라. 일어나 계속 나아가라.
그들의 과거에 어떤 끔찍한 실패로 들볶이는 사람들은 사탄의 비난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멈추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피가 너희의 모든 죄에서 너희를 깨끗하게 하신 것을 믿으라(계 12:11). 그런 다음 히브리서 8장 12절에서 하나님께서 다시는 너희의 과거의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다는 증거의 말씀을 사탄에게 전해라. 악마와 악한 사람들은 너희의 과거를 기억하여 너희를 괴롭히고, 그 기억으로 너희를 심지어 고문하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으실 것이다. 너희가 하나님의 용서에 대해 의심이 든다면, 왜냐하면 너희는 과거의 어떤 죄에 대한 기억에 압도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 마지막으로 그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고, 하나님이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너희를 용서하신다는 것을 믿으면서, 너희를 용서해 달라고 주님께 간구해라. 그 후로 다시는 그 죄에 대해 생각하지 말아라. 그리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피의 능력과 하나님의 크신 자비를 영화롭게 한다.
우리는 사탄의 참소를 이기고 사탄을 번개같이 달아나게 해야 한다(눅 10:18).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젊은 시절의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시고... 원수가 우리를 이기게 허락하지 아니하시므로 우리로 부끄럽지 않게 하신다"(시 25:1, 7)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시편 25편의 그 구절은 다윗도 "젊은 시절의 죄"가 있었다고 말하지만 그 죄가 무엇인지 말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시편 51편에서도, 그는 일반적인 죄만을 언급할 뿐 특정 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이것이 지혜이며, 이것이 우리가 항상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죄를 인정해야 하는 방법이다 - 우리가 그들에게 죄를 짓지 않는 한, 결코 죄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하지 마라. 우리는 하나님께는 구체적이어야 하지만, 사람에게는 절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로마 가톨릭 고해성사의 어리석음이다. 이 원칙은 불행하게도 많은 독실한 단체와 이단 집단에서도 실행되고 있다.
에베소서 2장 7절은 영원의 시대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데려가서 우리를 그분의 은혜의 전리품으로 보여주실 것이라고 말한다 - 우리의 충실함으로 인한 전리품이 아니라 그분의 은혜의 전리품이다. 하나님이 가장 타락한 죄인을 내세우시고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을 무엇으로 만들었는지를 모든 사람에게 보여주는 그 날에, 사탄의 입을 어떻게 닫을지 생각해 보아라. 그분은 또한 실패한 신자들(베드로처럼)과 그들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천사들은 하나님께서 죄 많은 비참한 신자들과 실패한 신자들의 삶에서 행하신 일들을 보고 놀랄 것이다.
성령의 세례
사도행전 2장 38절은 오직 성령을 받는 것에 대해 분명히 밝힌다, 베드로가 죄를 지은 자들에게 요구한 것은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기 위하여 세례를 받으라 -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을 것이다." 성령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를 너희의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
로마서 8장 9절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그런 사람은 거듭나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에 오시기를 구하면, 그분의 영(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오신다. 예수님 자신은 하늘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우리는 거듭난다(또는 성령으로 태어남).
그러나 성령의 세례(침례)는 성령 충만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7장 37절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충만하기를 갈망하는 자들만이 충만하게 될 것이다. 너희의 마음의 모든 부분을 주님께 맡기고(yield), 믿음으로 채워달라고 구해야 한다. 성령의 불은 아무 사람에게서나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오는 것이다. 그 하늘의 불을 얻기 위해 어떤 모임에도 갈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진실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만나주신다. 너희는 너희 자신의 방에서 주님을 찾을 수 있으며 그분은 거기서 너희를 만나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위대한 사람들 중 일부는 방에 혼자 있을 때 성령의 세례(충만)를 받았다. 하나님은 자기를 열심히 찾는 모든 사람에게 상 주시는 분이시다.
오순절에 베드로가 인용한 하나님의 약속은 (요엘을 통해) "내가 내 종들에게(My bond-slaves) 내 영을 부어 주리니"(사도행전 2:18)였다. 노예는(a bond-slave) 권리가 없는 사람이다. 노예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너희의 삶을 완전히 지배하시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제부터,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너희를 대하도록 너희가 허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너희의 쪽에서 어떤 불평도 없이.
예수님은 성령 충만을, 물을 마시는 것과 매우 비슷하다고 말씀하셨다(요 7:37-39). 바울은 고린도전서 10:4과 12:13에서 같은 묘사를 사용한다. 그러나 물을 마실 때와 같이, 입을 벌려 삼켜야 하는 것과 같이, 성령 충만을 받을 때에도 마음의 모든 부분을 열어 단순한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면, 구한 것을 받은 줄로 믿어야 한다(막 11:24). 그러므로 삶의 모든 영역을 주님께 맡기고, 믿음으로 성령 충만을 구하라. 그런 다음 하나님께 너희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여라. 입은 우리가 감사를 표현하는, 마음에 가득한 것이 흘러 나오는 벨브와 같다(마 12:34). 그러므로 하나님께 계속 감사하고 그분이 너희를 채우셨다는 확신을 달라고 간구해라.
성령의 은사
성령의 충만함은 단순한 감정적 흥분의 문제가 아니다. 불행히도 많은 사람들이 단지 감정적 흥분으로 만족한다. 그러나 너희에게 필요한 것은 승리하는 삶을 살고 그리스도를 위한 담대한 증인이 될 수 있는 능력이다. 그것을 지속적으로 추구해라. 예수님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내 증인이 될 것이다"(행 1:8)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성령의 충만함의 증거(evidence)가 권능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예수님은 성령의 충만함의 목적은 우리가 그분의 증인이 되도록 하는 것 이라고 말씀하셨다 - 단지 그분을 증언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과 말로써 그분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언의 은사를 위하여 담대히 주님께 구하라(고전 14:1, 39의 계명을 순종함). 그러면 너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각 사람의 영적 필요에 따라 다른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전할 수 있을 것이다 - 교회 모임에서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예언한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위로하고, 그들을 세울 수 있는 말로 (개인적으로나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이다(고전 14:3). 이것은 너희가 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성령의 은사이다. 하나님은 너희가 담대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너희에게서 소심한 영을 쫓아내라 -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 아니다(딤후 1:7).
누가복음 11장 5-13절에서 우리는 친구에 대한 염려 때문에 그 사람이 친구를 위해 음식을 가지러 한밤중에 이웃 집에 간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의 은사를 구해야 한다고 하셨다(눅 11:13). 하나님은 그들이 알고 만나는 사람들의 영적 필요를 돌보고 염려하는 사람들에게 이 예언의 은사를 주실 것이다.
너희는 거듭거듭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한다. 이것은 단 한번의 경험이 아니기 때문이다. 갈급함과 믿음만이 그것을 위한 두 가지 조건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요한복음 7:37-39을 장자권으로 주장해라.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주장할 약속이 있는 것이 좋다. 그것은 너희를 담대하게 만들고, 또한 너희가 거지로서가 아니라 "자녀의 떡"을 받을 자격이 있는 아들로서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음을 증명할 것이다 -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다.
방언으로 말하기
그리고 이제 알 수 없는 방언(언어)으로 말하는 은사에 관한 한 말씀이다 - 이것은 종종 성령의 충만함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선물을 모든 사람에게 주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분은 모든 사람이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2장 30절은 "모든 사람이 방언을 말하지 아니한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마음을 열고 그분이 너희가 그것을 갖기를 원하실지 결정하도록 맡겨라.
평소의 말투에 분노, 거짓말과 같은 죄로부터 너희의 혀를 제어할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을 주시도록 먼저 하나님을 구하라. 그것이 알지 못하는 방언 말하는 은사를 받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야고보서 3장 2절에 말에 범죄하지 아니하는 자가 온전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신다. 아무리 알려지지 않은 방언으로 말하더라도 그 누구도 온전케 하지 못한다.
방언을 말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때, 우리는 영어가 제한적임을 알게 된다. 우리의 마음은 가득 차 있지만, 우리 마음(heart)에 있는 것은 입에서 나오기 전에 생각(mind) 속에 있는 영어의 좁은 파이프를 통과해야 한다. 그러나 생각을 건너 뛰면, 마음의 풍요로움이 마음에서 입으로 곧장 갈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채우고 있는 모든 것(풍부한 감사 또는 슬픔으로 인한 압박감)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이 매우 잘 이해하시는 음절로 하나님께 표현할 수 있다. 하나님은 마음을 들으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음에 가해지는 압박감은 표현을 통해 완화된다. 고린도전서 14장 14절은 우리가 방언을 말할 때, 우리의 생각이 우리가 말하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방언을 말할 때 우리의 말을 분석하려고 하지 않는다.
미적분학이 단순한 덧셈보다 훨씬 앞서 있는 것처럼, 믿음은 이성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훨씬 뛰어넘는다. 우리는 생각(mind)과 이성(reason)에 많은 강조를 두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두신 인간의 영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크다. 그래서 우리 생각은 영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다. 지성은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이기 때문에 우리는 지성을 파괴하지 않지만, 그것을 폐위시켜야 한다. 바울은 그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많이 한다고 말했다. 아마도 그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그의 사역에서 더 많은 압력을 받았고 따라서 방언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고전 14:18).
방언을 말하는 은사는 우리가 낙심할 때, 압력을 받을 때, 특별히 기도할 것이 생각나지 않을 때, 복잡한 상황에 대해 기도하는 방법을 모를 때 또는 우리가 집중하기에는 너무 피곤하고 휴식을 취하고 싶을 때 도움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침대에 누워 방언으로 기도할 수 있다. 방언의 은사로, 하늘 아버지께 너희의 마음을 쏟아낼 수 있다. 너희는 이해하지 못하는 음절로, 너희의 마음의 가장 깊은 갈망을 표현할 수 있다.
지난 12월 제자훈련 세미나에 참석하지 못한 젊은 형제로부터 격려의 편지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세미나의 테이프를 듣고 싶어했다. 그는 우리가 성령 충만에 대해 이야기했던 모임의 테이프를 들으며, 그는 스스로 이것에 관한 큰 갈증을 느꼈다. 그는 야곱이 여호와께 "나에게 복을 주시기 전에는 당신을 보내지 아니하겠나이다"(창 32:26)라고 말했던 야곱처럼 하나님을 찾기로 결심했다. 그는 자기 방으로 가서 기도했지만 그의 기도에는 부담도 없고 갈망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의 마음을 살피면서, 그는 자신의 삶에서 주님께 굴복하지 않은 한 가지가 있음을 발견했다. 그 한 가지는 죄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주님께서 그의 삶에서 취해야 할 자리를 차지했다. 그는 즉시 그것을 주님께 넘겨드렸다 - 그리고는 하나님이 그분의 영을 그에게 부어주셨고 그는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고 기쁨의 눈물로 울었다.
세미나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만나셨는지 들으니 참으로 힘이 났다. 나는 민수기 11장 25-29절이 생각났다.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내려오셔서 모세에게 내린 영을 취하여 칠십 장로 위에 내리셨다. 그리고 영이 그들에게 내려와 머물 때에 그들이 예언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이 진 안에 남아 있었다; 하나의 이름은 엘닷이요 다른 하나의 이름은 메닷이라. 그리고 영이 그들 위에 머물렀고 그들은 진 안에서 예언하였다. 한 소년이 달려가 모세에게 고하여 가로되, '엘닷과 메닷이 진 안에서 예언하고 있다' 하니, 여호수아가 이르되, '내 주 모세여 그들을 제지하소서.'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위하여 질투하느냐? 주님께서 주님의 백성 모두에게 그분의 영을 주셔서, 그들 모두가 예언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모세 시대에 그렇게 역사하신 하나님은 오늘날도 동일하시다. 하나님은 편애가 없으시다. 그분은 겸손하게 그분을 부지런히 찾는 모든 사람에게 상 주시는 분이시다. 영리하고 지적인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총명함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자만심 때문에 제외된다.
사도행전 2장 4절에서 오순절에 제자들이 방언을 말하는 것에 대해 언급한 것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구절을 주의 깊게 읽어라. 방언을 말할 때 입을 벌리고 혀를 사용한 것은 제자들 스스로였다. 성령은 그들의 혀를 움직이지 않으셨다. 그분은 다른 사람의 혀를 움직이지 않는다. 사람의 혀를 움직이게 하는 방식으로 사람을 조종하는 것은 악한 영뿐이다. 귀신을 쫓아낼 때, 나는 악한 영이 사람을 통하여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 때에 그 사람들은 혀를 제어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악한 영이 혀를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은 그렇게 역사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오직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은사를 행사하도록 우리가 스스로 혀를 움직이기를 기대하신다 - 그분이 우리에게 설교하는 은사(예언)를 주실 때, 우리가 말하는 것과 똑같다. 그러므로 "네 입을 크게 열라 - 하나님이 채우시리라"(시 81:10).
방언의 은사를 받았을 때, 개인 기도에만 사용해라 - 특히 하나님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를 때 사용해라. 이 은사는 본질적으로 하나님과의 사적인 교제를 위한 것이지 주로 공적인 사용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교회 모임에서 방언 통역하는 은사를 가진 사람이 있어야만 행사할 수 있다(고전 14:28). 통역의 은사가 누구에게 있는지 여부를 종종 알 수 없기 때문에, 바울처럼 은사를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전 14:18,19). 그러나 내가 앞서 말했듯이, 평소의 말에서 순결을 더 간절히 구해라.
성령의 은사들을 믿지 않는 그리스도인들과 이 주제에 대해 논의하지 마라 - 왜냐하면 불필요한 논쟁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성령의 은사를 멸시한다 - 그리고 그러한 신자들과 섞일 때 이 은사를 천천히 너희 스스로 평가절하하기 쉽다. 너희 주위에 있는 기독교 집단이 너희를 그들의 사고 방식으로 맞추도록 허용하지 마라.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붙들어라.
예수님은 방언을 말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분의 생각에는 제한이 없고 완전히 순결했고 아버지와의 교제는 항상 완전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천국에 갔을 때 그래서 방언이 사라질 것이다 - 그 때는 "온전한 것이 옵니다", "우리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립니다", "우리가 주님을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볼 것 입니다"(고전 13:8-12). 따라서 방언의 은사는 이 땅에서 우리의 불완전한 상태에서 일시적으로만 사용된다. 그러나 예언은 교회 모임에서 방언보다 2000배 더 우수하다(10,000/5; 참조 고전 14:19 참조). 왜냐하면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여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고 세워주기 때문이다(고전 14:3).
성령님은 교회에 있는 모든 사람이 동시에 방언을 말하면 당연히 "미친 교회"라 일컬어진다고 말씀하신다(고전 14:23)!! 그러므로 그러한 교회들을 피해라. 그러나 그분은 또한 교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 14:39). 그것이 올바른 균형이다.
성령세례의 목적
1975년 1월에 새롭게 성령 충만을 받은 후, 나는 마태복음 1장부터 신약성경을 다시 읽기로 결심했다. 첫날 말씀에서 받은 것은 성령 충만에 대한 확신이었다. 나는 마리아가 성령을 통해 어떻게 잉태했는지 읽었다. 성령께서 내게 임하신 것처럼 그녀에게도 임하셨다. 그리고 그날 마태복음 1장 18-23절에서 다음과 같은 진리를 배웠다:
- 마리아만이(그리고 다른 누구도 알지 못했지만) 성령이 그녀를 위해 하신 일을 알았던 것처럼 - 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 여러 달 동안, 마리아와 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임신했다는 외적 증거가 몸에 없었다. 나 역시 성령께서 오랫동안 내 안에서 행하신 일에 대해 외적인 자각이 없을 수도 있다. 나는 믿음으로 살아야만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리아와 다른 사람들은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점점 더 분명해질 것이다;
- 다른 사람들은 마리아를 오해하고 그녀를 비방했다. 나도 이것을 직면할 것이다;
- 성령이 마리아에게 임하여 마리아를 통하여 예수의 몸을 낳게 하셨다. 나와 함께 성령께서 무엇보다도 먼저 나에게 임하셔서, 나를 통해 그리스도의 생명을 낳게 하셨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그리스도의 몸이 나의 수고로 말미암아 세워지게 하려는 것이다.
성령의 세례(충만)는 우리를 영적 전투의 영역으로 인도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탄과 모든 악한 영을 다스리는 큰 권세를 받았음을 알게 하기 위해, 우리에게 영적인 싸움을 직면하게 하신다. 누가복음 10장 19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원수의 모든 세력을 누를 권세를 주었으니, 아무것도 너희를 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에서 폭풍을 마주하게 하셔서, 그것을 잠잠케 하시는 주님의 크신 능력을 경험하게 하셨다.
유혹과 죄
인생이 짧기 때문에, 이기는 자가 되기 위해서 너희가 직면하는 인생의 모든 시험을 잘 활용하여, 이 땅의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 드릴 지혜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시 90:12). 우리의 삶에서 아직 정복되지 않은 죄를 가지고 이 땅을 떠나서는 안 된다. 전심이란 하나님께 흠 없는 자신을 드리고자 하는 불타는 열망을 갖는 것이다(히 9:14).
유혹과 죄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악한 생각이 마음에 번쩍 떠오르면(flash) 그것은 유혹이다. 그것을 곰곰이 생각하거나 받아들이면 죄가 된다. 여자를 보고 그녀를 탐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 것은 유혹이다. 계속해서 그녀를 바라보거나, 그녀에 대해 생각한다면 죄를 짓는 것이다. 첫 번째 시선은 유혹이었고 피할 수 없다. 두 번째 시선은 죄이다 - 그리고 그것은 피할 수 있다. 어떤 유혹이 우리 생각에 떠오를 때 정죄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심지어 예수님도 마음으로 유혹을 받으셨다. 너희는 너희의 의지로 "안 돼"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너희는 이기는 자가 될 것이다. 예수님이 도움을 위해 울며 기도하신 것은,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함이다(히 5:7). 너희도 같은 방식으로 도움을 외쳐야 한다.
사탄은 패배했다
사탄은 거의 2000년 전에 십자가에서 예수님에게 패배했다 - 그리고 그것은 너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그 승리 위에 서 있다; 우리는 승리를 위해 싸우지 않는다. 사탄은 인간에게 너무 강력하고 너무 영리하다. 그는 수세기 동안 수십억 명의 사람들을 속이고 이겼다. 그러나 너희의 양심이 깨끗하고(어린양의 피가 너희의 마음을 깨끗하게 할 때) 그리고 너희가 사탄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고 그를 대적하면(계 12:11; 약 4:7) 너희에게서 도망칠 것이다. 이것을 항상 기억해라. 나는 이것을 믿고 실천하고 설교했다 - 그리고 이것이 사탄이 듣기 싫어하는 것이다.
너희는 사탄과 그의 모든 마귀들이 갈보리 십자가에서 단번에 완전히 패배했다는 지식에 뿌리를 내리고 기초를 두어야 한다(히 2:14, 골 2:15). 그러면 사탄은 언제라도 너희에게 두려움을 심어줄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마귀를 대적하여, 항상 너희 편에 계심을 기억해라. "그리스도께서 사신 대로 또한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살기 때문입니다"(요일 4:17).
주님께서 나에게 처음으로 사탄을 대적하는 믿음을 가지라고 격려하신 것은 꿈에서였다. 나는 악마가 나에게서 도망치는 것을 보는 꿈을 꾸었다. 밤에 잠에서 깨어나면, 나는 예수 이름으로 사탄을 대적했다.
사탄과 그의 악한 영들과의 그러한 전투는 또한 너희가 참으로 신성한 것과 위조품을 구별하는 분별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신성한 것은 항상 정직, 겸손, 순결과 사랑의 정신인 그리스도의 영으로 특징지어진다. 많은 사람들이 능력으로 나타나는 모든 현상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속는다. 그러나 그러한 많은 초자연적인 현상은 사탄에게서 온 것이다.
성령의 작은 속삭임에 순종하기 위해 항상 깨어 있어라 - 예를 들어, 성령이 너희에게 속삭이실 때, 때때로 빠른 기도를 하거나, 성경 구절을 읽거나,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거나, 누군가를 방문하거나, 누군가에게 말하거나, 누군가에게 사과하거나, 누군가를 용서하거나, 악한 것에서 눈을 돌리거나, 악한 대화를 듣지 않거나, 대화가 유익하지 않은 방향으로 진행될 때 친구들 앞에서 떠나거나, 대담하게 대화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등, 그러한 성령의 속삭임에 순종함으로써, 성령 안에서 사는 법을 배울 수 있다.
분별력의 중요성
우리가 종말에 가까워질수록 교회에서 성령의 역사가 점점 더 많아질 것이다. 속이는 영들도 세상에서 점점 더 많이 활동할 것이다. 따라서 속지 않으려면 다음 사항에 주의해야 한다:
(1) 감정적 위조, (2) 극단주의, (3) 바리새인, 그리고 (4) 이단적 태도.
원수는 항상 성령이 역사하시는 곳에 역사한다. 그러므로 보고 듣는 모든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말아라.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성령의 감동은 시끄러운 소리와 감정을 동반할 수 있으며 - 이는 일부 사람들이 인간적 어색함과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도록 도움이 된다. 감정은 하나님께서 주신 우리 인격의 일부이기에 우리는 감정을 평가절하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것들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감정이 아니라 마음을 보시기 때문이다. 기도할 때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하면 주변 사람들을 덜 의식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도할 때 눈을 감아 집중을 잘 하고 주위 사람들의 방해를 받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한 행동이 너희의 기도를 더 영적으로 만들지는 않겠지만, 너희가 주변 환경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데 도움이 된다. 성령의 능력은 외침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생활, 교회에서의 강력한 사역, 직장에서 주님을 위한 부끄러움 없는 증거에 의해 나타난다.
인간의 혼에는 엄청난 힘(지적 힘, 감정적 힘, 의지적 힘)이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요가에서처럼) 이용하고 그것이 성령의 능력이라고 상상한다. 그런 힘에 속아서는 안 된다. 성령은 항상 사람이나 체험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린다. 이것이 위조품을 감지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 중 하나이다.
절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딤후 1:7). 성령은 너희의 삶에서 모든 두려움과 소심함을 제거하고 이것을 능력과 사랑과 절제로 대체할 것이다.
절제 없이는 아무도 진정으로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없다. 성령의 열매는 절제이다(갈 5:23). 절제되지 않은 삶은 새는 그릇과 같다. 몇 번을 채워도 다시 비워진다. 반복해서 채워야 한다. 너희가 점점 더 훈련을 받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세 가지 영역은 다음과 같다:
(1) 너희의 몸, (2) 너희의 시간, 그리고(3) 너희의 돈을 사용할 때.
로마서 8장 13절은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것은 마음(heart)에서 우러나오는 행위가 아니다. 그러한 행위는 고의적인 죄가 되기 때문이다. 과식, 늦잠, 게으름, 수다 등의 영역에서 우리가 몸을 절제하지 않도록 허락했기 때문에, 이것은 몸(body)에서 나오는 행위이다. 특히 성령께서는 우리가 혀를 다스리도록 도우시기를 원하신다.
에베소서 5장 16절은 우리에게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라고 말씀한다. 너희가 절제한다면 낭비되는 많은 시간을 절약하고 성경을 연구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 나는 너희가 휴식을 취하거나 게임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니다. 너희는 금욕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금욕주의는 너희를 속박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자들이 "버리는 것이 없게"(요한복음 6:12) 떡 조각을 모았던 것처럼 시간의 "조각을 모을 수 있는 곳"을 생각해 보아라.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절제해라. 그러나 그것에 대해 광신도가 되지는 마라! 긴장을 풀어라.
누가복음 16장 11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돈에 충성하지 않는 자들에게 참된 영적 재물을 주시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돈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첫 번째 단계이다 - 속이지 않고, 모든 부채를 청산하는 등의 일이다. 다음 단계는 충실해지는 것이다 - 낭비, 사치스러운 생활, 쓸모 없는 사치 및 모든 불필요한 지출을 피해라.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하나님의 최고를 얻는 사람들은 성령께서 그들의 삶을 훈련하시도록 허락하는 사람들임을 기억해라.
예수님에 대한 헌신
성령님이 너희의 마음에 들어오셨다. 너희에게 체험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그분이 너희를 주님에 대한 더 큰 헌신으로 이끌고, 예수님의 영광을 너희에게 더욱 더 많이 보여주도록 허락해라. 성령님은 너희의 마음을 예수님의 사랑(자기를 미워하는 자를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을 주신 사랑)으로 가득 채워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하신다(롬 5:5).
항상 예수님께 헌신하는 단순함 속에 자신을 보존해라(고후 11:3).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여러 가지 교리와 그 설명을 생각하며 생각이 복잡해져서 주님에 대한 너희의 단순한 사랑을 잃어버리지 말아라.
너희가 예수님께 헌신할 때 너희의 지역 교회에서도 그분의 몸의 지체들에게 헌신할 것이다. 성령님은 일부 하나님의 자녀들처럼 편협하지 않으시며, 그들 중 일부가 하는 것처럼 지엽적인 교리에 대해 아주 자세히 논쟁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사람의 신학적 이해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보신다. 그리고 그들이 교리에 대한 이해가 불완전할지라도, 그분은 진실한 마음을 보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역사하신다.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 갔을 때 이것을 알아채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가리지 아니하시는 분이시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행 10:34, 35). 모든 단체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백성인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님처럼 항상 마음이 너그러워져야 한다.
배타적이 되는 것의 위험
배타주의를 조심해라. 너희의 교제에서 하나님의 자녀를 단 한 사람도 단절시키지 마라. 이것이 오늘날 많은 광신주의적인 신자들이 하고 있는 일이다. 느헤미야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벽을 쌓았다 - 그러나 진정한 이스라엘 자손이 그 도시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우리가 성벽 밖에 있게 해야 할 대상은 사탄과 세상이지, 우리와 의견이 다른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우리는 교리의 차이 등으로 일부 신자들과 함께 일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신자들과 교제할 수 있다.
스가랴 2장 4,5절에서 하나님은 예루살렘이 "성벽 없이" 건축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그 성을 둘러싸고 있는 "불 성벽"이 되실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를 지키는 담을 이루는 것은 성령의 불이다. 만일 우리가 이 불이 교회에서 타오르도록 허용한다면, 성령께서는 모든 세상적인 영향으로부터 교회를 깨끗하게 유지하실 것이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 주위에 불의 벽이 되실 것이라면, 우리 그룹을 순수하게 유지하기 위해 또 다른 "규칙과 규례의 벽"을 쌓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한 인공 벽은 항상 배타주의, 바리새주의 및 이단주의로 이어진다(그러나 이 벽에 부여된 이름은 분명히 '성경적'일 수 있다). 그러한 극단주의자들의 영향을 조심해라. 우리의 의무는 제자도의 좁은 문을 선포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만드신 것처럼 좁지만 더 좁지는 않다!
다른 신자들이 너희를 그들의 전적인 교제에서 차단하더라도 너희는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열린 마음과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
에드윈 미크햄의 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은 원을 그려 나를 차단했다.
'이단자', '반역자', 법을 무시했느니 하면서.
하지만 나는 사랑과 이길 수 있는 재치가 있었다 -
우리는 더 큰 원을 그려 그들을 포함했다!!"
그것이 승리하는 방법이고, 사랑의 방법이다.
너희가 많이 용서받았다는 것을 알면 주님을 많이 사랑하게 될 것이다(눅 7:47). 그리고 너희는 다른 신자들도 역시 사랑할 것이다, 너희와 다른 견해를 가졌을지라도 말이다.
우리 앞에 홀로 계신 주님
예수님은 아버지를 항상 앞에 모시므로, 마음이 항상 기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분은 "기쁨이 충만"하셨고, 아버지는 항상 예수님의 우편에 계셔서 그분을 지원하셨다(행 2:25,26, 시 16:10,11 인용). 그러므로 너희 앞에 항상 주님을 모시고 있어라. 그러면 충만한 기쁨이 항상 너희의 몫이 될 것이며 주님은 너희의 오른편에 계시고 항상 너희를 도우실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와 주님 사이에 사람이나 상황이 끼어들지 않도록 해라.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 임이요(마 5:8), 그들은 사람과 환경을 바라보지 않고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만 볼 것이다. 예수님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히면 유혹의 힘이 약해질 것이다. 그리고 주님을 통해 사람과 환경을 볼 때, 하나님께서 너희의 가장 좋은 것을 위해 그 모든 환경에서 그리고 그 모든 사람들을 통해 일하실 것이라는 확신으로 "안식"하게 될 것이다(롬 8:28). 앞으로 닥칠 더 큰 시련을 이겨낼 수 있도록 지금 닥쳐오는 모든 상황, 일상의 작은 시련 속에서도 안식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어떤 사람이나 어떤 사람의 글을 결코 우상화하지 마라. 진정으로 경건한 사람들과 진정으로 영적인 책들은 항상 예수님(살아 있는 말씀)과 성경(기록된 말씀)을 가리킬 것이다. 그런 사람만 따르고 그런 책만 읽어라.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능력이 가장 크게 나타난 것은 창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사탄을 이기신 때였다(엡 1:19, 20).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인류 역사상 가장 악한 일이었다. 그것은 또한 이 땅에서 일어난 가장 좋은 일이었다. 하나님이 역사상 최악의 사건을 가장 좋은 사건으로 바꾸실 만큼 충분히 강력하다면, 너희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도 너희를 위해 영광스러운 것으로 바꾸실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롬 8:28).
하나님은 화려하거나 과시하거나 나팔을 불지 않고,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일하기를 더 좋아하신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때때로 어떤 일이 우연의 일치로 또는 뜻밖에 발생했다고 상상할 수 있다. 실제로 그것들이 기도에 대한 구체적인 응답이었을 때 - 너희 자신의 기도와 너희를 위해 기도하던 다른 사람들의 기도가 응답되었을 때에 말이다. 그분은 일하시는 방식에서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시다"(사 45:15). "우리가 그의 방법을 깨닫는 것이 어찌 그리 불가능한지요"(롬 11:33 - living).
최선을 다해라 - 그리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겨라. 그분은 너희와 관련된 모든 문제를 주권적으로 다스리실 것이다. 심지어 너희의 실수와 실패도 주님은 영적인 유익으로 바꾸실 것이다. 우리가 경배하는 하나님은 이 땅의 모든 일을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가 한 실수에 대해 후회하며 살 필요가 없다. 사탄이 그러한 후회로 너희의 기쁨을 빼앗지 못하게 해라. 하나님은 너무나 주권적이어서 우리의 실수까지도 그분의 영광과 우리의 유익이 되도록 일하신다. 너희가 슬퍼해야 할 유일한 것은 교만과 고백하지 않은 죄이다. 그러나 사탄은 너희의 과거 실수를 계속해서 상기시켜 너희를 낙담케 할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실패로 인해 계속 낙심하면, 사탄이 다시 너희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파도가 요동할 때, 베드로처럼 너희 주변의 파도가 아니라 예수님 그 자체에 시각을 고정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마 14:30). 직장이나 주변에 소란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만 바라보면, 험난한 바다를 의기양양하게 건너게 될 것이다.
위험으로부터 보호
예수님은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신 후, 들짐승과 함께 계셨고(막 1:13), 난폭한 사람들을 대면하셨다(눅 4:13-16, 28-30). 그러나 그들 중 아무도 예수님을 죽일 수 없었다. 이는 하나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요한복음 7장 30절에서도 그것을 본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놀라운 구절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예수님을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요 17:23).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위험은 우리의 삶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나타낸다 -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잊어버리기 쉽다. "너희 주위에 울타리"(욥 1:10-12)가 있는데, 사탄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때까지 통과할 수 없다.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시다(요일 4:4). 너희가 죽음에서 구원받았던 과거에 있었던 사건들은, 너희의 삶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빚지고 있음을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경우를 기억하여 그분께 빚진 것을 감사하는 것이 좋다.
바울은 "거듭, 거듭, 거듭되는 죽음"(고후11:23-livng)을 만났고, 하나님의 전능하신 구원의 손길을 거듭, 거듭, 거듭 경험했다. 그렇게 그는 능력 있는 사도가 되었다. 그는 고린도후서 11장 24-28절에서 그가 어떻게 24시간 동안 하루를 바다에서 떠다녔고, 세 번 난파되었고, 강도 등의 위험에 자주 직면했는지 설명한다. 너희가 겪는 것은 바울이 겪은 일의 극히 일부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시련을 통해 너희를 앞으로의 사역을 위해 준비시켜 주실 것이다.
불신앙은 너희가 직면한 다양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너희를 위해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제한할 수 있다. 갈라디아서 3장 5절(living)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고 여러분 가운데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은 여러분이 율법을 행하기 때문입니까? 물론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이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할 때입니다."
이사야서 54장 17절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너를 치려고 만든 어떤 무기도 성공하지 못하리라는 것이다. 그것은 너희가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모든 상황에서 너희의 무죄를 입증하고, 의롭다 하실 것이다(롬 8:33).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을 때 비로소 진정으로 강해질 수 있다. 예수님은 약한 것을 택하셨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고후 12:9, 13:4 참조). 우리가 찬송가에서 노래할 때:
"주님, 저를 포로로 삼으십시오. 그러면 저는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내 검을 포기하게 하시면 내가 정복자가 될 것입니다."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
너희가 계속해서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만큼 충분히 선하지 않다고 느낀다면, 인생은 비참해질 것이다. 너희는 결코 그렇게 신음하지 말고,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있는 그대로 너희를 받아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너희를 이끄신 모든 것을 생각할 때마다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려라. 불평하고 원망하는 모든 생각은 성적인 생각과 동일시해야 하며 완전히 피해야 한다.
너희의 '제거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외부에서 오는 어떤 것도 너희를 오염시킬 수 없다(막 7:18-23). 많은 외적인 것들에 눈멀고 귀머거리가 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사 42:19, 20). 보고 듣는 모든 것을 먼저 머릿속에서 정리해야 한다. 예를 들어 남이 나에게 가한 악행, 앞날에 대한 근심 등 많은 것들을 즉시 마음에서 제거해야 한다. 그래야만 어떤 상황에서도 평안함을 유지하며 주님을 찬양할 수 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찬송과 기쁨의 영을 주시려고 오셨다(사61:1-3). 갈보리로 가기 전에 친히 찬송을 부르셨다(마 26:30). 그리고 그분은 이제 교회에서 노래하는 인도자가 되신다(히 2:12).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때,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을 위한 보좌를 만든다(시 22:3). 우리 믿음의 증거는 우리가 그분을 찬양하는 것이다(시 106:12). 따라서 너희는 하나님이 우주의 보좌에 앉아 계시고, 너희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그분의 명시적인 허락하에 있음을 믿는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분은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자세히 알고 계십니다" - 욥 23:10 living ). 성경에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가장 절대적인 진술은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후 한 것이다. 그는 말했다, "하나님은 땅의 사람들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십니다. 하늘의 천사들과 땅의 사람들은 다 그의 지배 아래 있습니다. 아무도 그의 뜻을 거스를 수 없으며 그가 하시는 일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단 4:35 - Good News Bible). 그때 느부갓네살이 "제정신이(sane) 되었다"(단 4:36). 그리고 모든 제정신인(sane) 신자들은 그렇게 믿을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믿음이다. 그런 신자들은 어떤 때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다.
서기관들과 관원들이 어린아이들이 성전에서 큰 소리로 찬양을 외치고 있다고 불평하자, 예수님은 찬양은 실제로 어린아이들에 의해서만 완전하게 드려졌다고 말씀하셨다(마 21:16, 시편 8:2 인용 - "당신은 어린 아이들에게 당신을 완전하게 찬양하도록 가르쳤습니다" - Living Bible). 그것은 우리의 찬양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 아니라, 겸손과 마음의 순결이라는 것을 가르쳐준다(이것은 모든 아기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기들은 또한 결코 투덜거리거나 불평하지 않는다 - 그것은 우리의 찬양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또 다른 요소이다. 우리 삶에서 아침, 점심, 밤, 일주일 내내, 일년 중 매주 불평이나 불만의 냄새조차 나지 않는다면, 우리의 찬양은 더 이상 일요일 아침에 행해지는 의식이 아니라 일상의 일부가 된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음정에 맞지 않게 노래하더라도 그러한 찬양을 기뻐하신다!!
새 언약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우리의 의가 바리새인의 의를 능가해야 한다(마 5:20) - 이것은 특히 10번째 계명을 지키는 것과 관련이 있다. 바리새인들의 의는 십계명 중 처음 9계명을 지키는 것과 관련이 있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 6절에서 이 9가지에 관한 한 자기는 흠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서 7장 7절에서, 10번째 계명에 이르러서 "탐내지 말라"는 지킬 수 없다고 했다. 그는 그의 마음에서 모든 종류의 탐욕(욕심)을 발견했다. 그는 구원을 갈망했다(롬 7:24). 그러나 그는 정욕의 죄에서 마음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새 언약 안에서 하나님께서 마음의 정결함을 원하신다는 것을 알았다. 그에게는 그 순결이 없었지만, 그것을 갈망했다. 하나님은 바울의 굶주림을 보시고, 그의 눈을 열어 새 언약 아래 만들어진 길을 보게 하시고, 그러한 정욕에서 벗어나 깨끗한 마음을 갖게 하셨다.
이것이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설명한 것이다. 거기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준비에 대해 말한다.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심으로(2절), 율법의 요구(이것은 "사랑하라"(롬13:9,10) - "탐내지 말라"의 긍정적인 면)가 지금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시려는 것이다(롬8:4). 만일 우리가 바울과 같은 정직과 굶주림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도 바울이 경험한 것과 같은 삶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 하나님께서는 편애가 없으시기 때문이다.
다음은 율법과 복음의 차이에 대한 예시이다: 어떤 사람이 돼지를 데리고 더러운 길을 산책할 때 돼지의 목에 강한 쇠사슬로 단단히 묶어서 진흙탕에 빠지지 않게 할 수 있다. 이것이 "율법 아래"가 의미하는 바이다. 여기서 우리는 계명의 구속, 즉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 보상에 대한 소망으로 깨끗함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율법이 할 수 없었던 일을, 우리를 위해 하신다. 그분은 돼지 안에 고양이의 본성을 집어넣는다. 그리고 이 새로운 본성은 항상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기를 원하며 더 이상 더러움을 원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슬(율법)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계명의 사슬로 우리를 외부에서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을 기뻐하는 그분의 성품에 내적으로 우리를 참여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의롭게 만드는 하나님의 방식이다..
죄에 대한 승리
의식적인 죄(너희가 죄로 알고 있는 것)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위해 전심으로 구하라 - 그것이 너희에게 아무리 오래 걸리더라도. 하나님께서 반드시 주실 것이다. 어떤 죄를 지을 때마다 애통해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너희가 죄를 이기는 삶을 진정으로 갈망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성령 충만을 받는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죄를 이기도록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승리를 위한 전쟁은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싸우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너희의 생각을 채우는 것이다. 성령은 이 두 가지 일에서 우리를 도우신다.
죄를 이기는 것, 모임에서 증거하는 것, 동료에게 증거하는 것 등은 모두 수영을 배우는 것과 비슷하다. 초기 단계가 가장 어렵다. 나중에 그 일을 즐기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 모든 문제에서, 주저하지 말고 "물 속으로 뛰어들어가라". 익사하지 않는다. 그것이 "수영"을 배우는 방법이다. 계속 망설이다 보면, 점점 "물(사람)"이 무서워지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구하라.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가장 큰 자유 중 하나이다.
유혹과 실수는 삶이 끝날 때까지, 너희의 삶의 끊임없는 부분이 될 것이다. 그러나 잠시 후 의식적인 죄에 대해 승리할 수 있다 - 그리고 그 후에는 넘어지는 일이 드물어 질 것이다.
(모든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너희가 정복해야 할 가장 큰 욕망은 성적 욕망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 앞에 골리앗과 같이 서서 말하기를 "내가 너를 이기면 네가 우리 블레셋 사람(모든 정욕)을 섬기겠거니와; 네가 나를 이기면 우리 모두가 너를 섬기리라"(삼상 17:9). 다윗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골리앗을 죽였을 때, 블레셋 사람들이 다 도망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죽임을 당했다(삼상 17:51,52). 또한 성적 욕망을 정복할 때, 다른 많은 욕망도 쉽게 정복할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어떤 여자와도 너무 가까운 우정을 피해라. 너희의 욕망을 도발하고 자극하는 문학을 멀리하라(2016년에는 "인터넷 사이트"도 추가될 것이다). 쓸데없는 TV 프로그램을 보면서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험담하는 것을 듣지 말아라. 악을 듣고, 악을 읽고, 악을 관찰하면 악에 대한 지식만 쌓게 할 뿐이다. 그런데 왜 그런 더러운 정보가 필요한가? 그것은 너희를 오염시키고 파괴할 뿐이다. 이제부터 그런 모든 정보에 귀와 눈을 닫아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행하는 악을 아는 것은 결코 너희를 현명하게 만들 수 없다.
성경은 우리에게 "악에 있어서는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고전 14:20)고 권고한다. 어린아이의 생각은 모든 악에서 깨끗하다. 그리고 복음의 좋은 소식은 우리가 오랜 세월 동안 악한 정보로 우리의 마음을 오염시켜 왔지만, 지금이라도 악한 정보로부터 자유로워지길 진정으로 원한다면, 성령께서 우리가 다시 한번 어린아이의 순수한 마음을 갖도록 도우실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악한 것에 대해서는 순진하고, 선한 것에 대해서는 지혜로운 자"(롬 16:19)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므로 성령님께 예수님이 어떻게 사셨는지 보여달라고 간구해라. 그러면 "선한 일에 지혜로운 자"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유혹을 받으셨지만 항상 이기셨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매일 직면하는 것과 똑같은 유혹을 당하셨다는 것을 기억해라(히 4:15). 그분은 우리가 가진 모든 한계를 가지고 계셨지만, 의를 사랑하시고 죄를 미워하시며 시험을 받을 때마다 아버지께 부르짖으셨기 때문에 극복하셨다(히 1:9, 5:7). 성령께서 사람이신 예수님을 도우셨고, 성령께서 같은 방식으로 너희들도 도우실 것이다.
예수께서 청년 시절에 어떻게 유혹에 맞섰는지 자주 생각해 보아라. 그분은 모든 소년이 직면하는 것과 똑같은 유혹을 느꼈다. 그에게 유혹을 이기는 것이 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사실, 그것은 더 어려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의 본성은 완전히 순수했고 그래서 유혹은 그분에게 더 거부감이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유혹은 우리보다 더 강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이겨내셨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은 유혹에 맞서 싸우는 줄다리기에서 너희의 편에 서 계신다. 그리고 그분은 너희를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 적 편에 있는 가장 기둥이 되는 사람은 교만이라고 불리는 빅 헤비급 선수이다. 그 옆에는 이기심이라고 불리는 또 다른 헤비급 선수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모든 죄와 함께 이 두 가지 죄를 모두 끌어당길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승리할 것이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여기 너희가 믿음으로 붙들 수 있는 약속이 있다: "예수님은 너희가 넘어지지(비틀거리지) 않게 지켜주실 수 있다"(유1:24). 믿음으로 걷는 것은 육체적인 걷기와 마찬가지로 배워야 한다. 아기처럼 처음에는 여러 번 넘어진다. 그러나 너희가 계속할수록 넘어짐은 점점 줄어들 것이다. 마침내 가장 위대한 성인이라도 결코 넘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때가 오지 않을 것이지만, 넘어지는 일은 드물게 될 것이다.
너희가 넘어질 때, '죄'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자신의 타락을 부르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 있다. 그것은 위험한 것이다. 자기 죄에 대한 개인적인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자신의 죄를 '실수', '실책' 등으로 부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명백한 죄를 변명하기 위해서, 로마서 7장 17절을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라고 잘못 인용한다. 이것은 위험한 길로 가는 것이다. 그것을 피해라.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착각 속에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여 우리를 용서하시고 깨끗하게 하실 것이다(요일 1:9).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죄를 "실수"라고 부른다면 정결케 할 것이라는 약속은 없다. 예수님의 피는 오직 죄만을 깨끗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죄로 넘어질 때마다 항상 정직해라. 그것을 "죄"라고 부르고, 그것으로부터 돌이키고, 미워하고, 버리고, 하나님께 고백해라. 그리고 나서 그것을 잊어버려라. 그것은 지워졌기 때문이다.
어떤 죄는 더 심각하다
태도의 죄는 행동의 죄보다 더 심각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덜 쉽게 인식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몇 가지 태도의 죄가 있다: 교만, 비판적 태도, 억울한 마음, 시기, 다른 사람에 대한 내적 판단(너희가 들은 것과 본 것으로 - 사 11:3), 자신의 것을 구함, 이기심, 바리새주의 등 태도의 죄가 있다.
죄의 승리를 설교하는 신자가 다른 사람을 경시한다면, 그는 자기에게 가장 큰 죄인 영적 교만을 이기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것은 끊임없이 간음하는 것과 동등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신자가 죄에 대한 승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영적으로 성장할수록 더 거룩해지고, 죄를 이기고 승리할수록 더 겸손해진다. 이것이 진정한 거룩함의 일차적 증거이다. 과일 나무에서, 가장 많은 열매를 맺은 가지가 가장 많이 숙이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자제력을 '신적 성품에 참여하는 것'과 혼동한다. 인간의 자제력은 외적인 개혁을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속사람을 거만하고 교만하고 바리새인의 태도로 남아있게 할 것이다. 우리는 죄를 이기기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도록 부르심을 받았고, 우리가 거저 받은 것을 결코 자랑할 수 없다. 우리는 스스로 만들어낸 것만 자랑스러워할 수 있으며 -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만들어낸 거룩함은 언제나 거짓된 거룩함일 뿐이다.
너희가 참여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신적 성품은 사랑이다. 하나님은 감사하지 아니하는 자와 악한 자에게 인자하시고 선하시며,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신다(마 5:46-48). 이것은 너희도 따라야 할 모범이다. 모든 사람을 사랑해라 - 그들이 너희에게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치명적인 질병을 피하는 것처럼, 논쟁의 여지가 있는 모든 토론과 논쟁을 피해라. 주변 사람들이 무언가에 대해 논쟁하기 원한다면, 모든 논쟁을 피하고 싶다고 사랑스럽게 이야기해라. 온 마음을 다하여 사랑 안에서 완전케 되기를 추구해라.
극복하는 방법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거룩한 삶의 기초이다. 경건의 비결은 예수께서 육체로 오셔서 모든 일에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으시고 이기신 것을 아는데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진리를 지적으로만 알고 있으며 - 계속 오만하고 교만하다. 그런 사람들은 경건의 교리는 이해했을지 모르지만, 경건의 비밀은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딤전 3:16). 그 비밀은 교리에 있지 않고 인격에 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은 오직 지식으로 교리를 이해하고, "환상에 불과한 거룩함"을 갖게 될 것이다(엡 4:22 - JB Phillips). "거룩함은 오직 하나님을 경외할 때에만 온전해 질 수 있다"(고후7:1).
따라서 어떤 일에 대해 너희의 양심이 조금이라도 불안하면, 즉시 그 문제를 해결해라. 비록 그것이 단지 너희의 생각의 실패일지라도, 즉시 하나님께 죄를 고백해라. 실패할 때마다 슬퍼하고 슬퍼하고 슬퍼해라. 필요한 사람에게 사과해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너희를 강하게 하시는지 보게 될 것이다. 유혹을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요셉이 한 것처럼 그것을 피하고 그것으로부터 달아나는 것이다(창 39:7-12). 너희를 강하게 유혹하고 너희를 약하게 만드는 모든 장소와 사람들을 피해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피해라, 피해라, 피해라. 도망쳐라, 도망쳐라, 도망쳐라. 너희가 그렇게 한 것에 영원히 감사할 것이다.
이 땅에서도, 지금부터 몇 년 후에, 너희의 능력으로 이길 수 없는 유혹에 빠질 수 있었던 장소와 사람을 피한 것에 감사하게 될 것이다. 그런 장소와 사람을 피하는 것은 너희가 정말로 주님만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다는 것을 주님께 증명하는 방법이다. (이와 관련하여 잠언 7장을 읽어라. 이것은 모든 소년이 때때로 읽기에 좋은 장이다.)
이 젊은 시절은 너희의 미래를 위하여 기초를 놓는 너희의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 따라서 주님은 이 시간에 너희와 완전히 동행하셔야 한다. 너희가 그것을 원한다고 주님께 말씀 드려라. 너희가 몇 번이나 넘어지는지 신경 쓰지 마라. 일어나라, 슬퍼해라, 승리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고, 다시 한 번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바쳐라.
끈기(persistence)
끈기, 끈기, 끈기.
그것이 승리의 비결이다. 계속해라 - 너희가 (컴퓨터하는 학생처럼) 컴퓨터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계속 작업하는 것과 같다. 낙심시키는 유혹은 전세계에 있다; 하지만 포기하지 마라. 하나님은 너희가 태어나기 전에 너희의 삶을 위한 완전한 계획을 세우셨다(시 139:16). 사탄이 그것을 망치게 두지 마라.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주님의 편에 서라.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30절에서 세상의 임금이 올 때에 그는 예수님 안에서 아무 것도 찾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이 걸으신 것처럼 걷도록 부름을 받았다. 사탄이 너희에게 올 때, 그는 너희에게서 아무 것도 찾지 못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거리낌이 없는 양심을 가지도록 힘쓰라"(행 24:16). 의식적으로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의 도우심을 전심으로 구해야 한다. 너희의 정욕에 굴복하는 것은 너희의 삶에서 사탄에게 발판을 제공할 것이다. 로마서 6장 1절은 "우리가 계속 죄 가운데 있겠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런 다음 로마서 6장 15절은 "우리가 한 번이라도 죄를 지겠느냐"고 묻는다. 두 질문에 대한 대답은 분명하다, 우렁찬 소리로 "아니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이다.
너희가 만약 죄에 빠졌다면, 즉시 슬퍼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죄를 가볍게 여기기 시작할 것이며 승리는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므로 어디에서든지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함을 자각하는 즉시 너희는 하나님께 간단히 설명하면서, 죄를 고백하고, 죄를 버리고, 회개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비현실성
비현실성은 승리의 삶을 추구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위험 중 하나이다. 많은 사람들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승리하는 삶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잃고 "그냥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너희가 믿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설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서 너희의 믿음을 얻는다면 하나님의 약속은 실제로 이루어진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 죄인의 증언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그것을 기억해라!
동시에 비현실적인 수준의 거룩함을 추구하지 마라.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균형을 고수하라. 어떤 혼적인 설교자들은 도달할 수 없는 거룩함의 기준을 선포할 수 있다. 그들에게 속지 않도록 주의해라. 혼적인 능력과 영적인 능력 사이의 분별력을 달라고 성령님께 구해야 한다. 진정한 영성은 항상 겸손, 정중함, 사랑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특성을 볼 수 있는 설교자들에게만 귀를 기울여라. 최고의 교회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과 바리새인들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너희는 분별력이 있어야 하며, 그래야 잘못된 무리와 섞이지 않는다. 그들을 판단하지 마라 - 그러나 분별하고, 그들을 피해라.
겸손과 안식
겸손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너희의 뛰어난 덕목이 되어야 한다. 내가 이 주제에 관해 읽은 것 중 최고는 Andrew Murray(앤드류 머레이)가 쓴 것이다. 겸손이라는 제목의 그의 책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위조된 거룩함을 식별할 수 있는 주요 특징은 겸손의 부족입니다. 우리를 겸손으로 이끄는 세 가지 큰 동기가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창조된 존재라는 사실, 둘째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과, 셋째, 우리는 성도라는 것입니다. 이 주제에 대한 대부분의 가르침에서 강조된 것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이므로, 많은 사람들이 겸손을 유지하려면 계속 죄를 지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기를 판단하는 것이 겸손의 비결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를 가장 겸손하게 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 은혜입니다. 하나님과 그의 영광에 사로잡힌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낮은 자리로 나아갈 것입니다, 자신의 죄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실패는 겸손의 부족에서 비롯됩니다. 예수님의 지상 생활에서, 그분은 끊임없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모든 것이 되게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자기 안에서 일하실 수 있도록 자신의 뜻과 능력을 온전히 아버지께 내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셨기 때문에, 사람 앞에서도 자신을 낮추고 모든 사람의 종이 되기 쉬우셨습니다. 자기 자신을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 안에 선한 것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과 인간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하나님만이 모든 것이 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앞의 문장을 다시 읽어라. 그 안에는 많은 의미가 있다. 항상 겸손에 뿌리를 내리고 기초를 두어라.
항상 바리새인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며 살아라. 그러면 결코 바리새인이 되지 않을 것이다. 항상 다른 사람을 자신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라 - 더 영적인 것이 아니라, 더 귀한 존재로 존중하라(빌2:3을 주의 깊게 읽어라). 이것은 우리가 낮은 자존감에 빠져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아니. 우리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께서 택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들, 즉 만왕의 왕의 아들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사람의 노예도 아니며 어떤 사람도 두려워하며 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사람을 존중한다.
하루 종일 몸과 마음이 활동하더라도, 주님은 너희의 마음이 항상 평안하기를 원하신다(마 11:28). 마음의 불안은 종종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향한 마음의 편협함 때문이다(고후 6:11-13). 하나님께 대한 마음이 넓다는 것은 너희의 모든 소유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이는 그분이 기뻐하시는 대로 사용하시기 위함이다(요한복음 17:10). 사람을 대하는 마음이 넓다는 것은 원한을 품지 않고 남을 속히 해방시켜주는 용서의 마음을 갖는 것이다. 절대, 절대 어느 때에나, 어떤 사람에게도 원한을 품어서는 안 된다. 이 문제에 충실해야만 하나님의 안식에 항상 거할 수 있다.
삶에 항상 감사하는 정신을 유지해라(하나님과 사람을 향하여). 겸손하면 쉬울 것이다. 감사의 정신을 빼앗아가는 것은 교만과 다른 사람사람에게 소리 없는 내적인 요구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라
너희는 결코 속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박고 터를 두는 것이 좋다. 매일 몇 분 안에, 너희는 무언가를 읽을 수 있다. 그 날의 나머지 시간 동안 그것에 대해 묵상함으로써 복을 받을 수 있다. 또한, 시간이 되면, 신약 1장(NASB)과 구약 3장(리빙 바이블)을 매일 읽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300일 안에 성경 전체를 읽을 수 있다.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후에, 맨 처음 기록된 그분의 말씀을 기억해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 야고보서 1장 22-25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살펴보라고 권고한다. 새 언약의 법은 거기에서 (a) 완전한 법과 (b) 자유를 주는 법이라고 한다. 모세의 율법과 달리, 새 언약은 우리를 완전함과 모든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로 이끄는 것을 의미한다 - 죄의 속박과 사람의 의견의 속박으로부터.
독신의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다시는 그런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시간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도록 훈련된 삶을 살도록 노력해라. 이것이 내가 독신 시절에 한 일이며, 내 삶 전체에 걸쳐 엄청난 영적 보상을 가져다 주었다.
긍정적인 태도로 교회에 가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부정적인 태도는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을 귀에서 듣지 못하게 할 것이다. 사탄은 너무 교활해서 하나님께서 너희가 듣기를 원하시는 것을 받지 못하도록 무언가 또는 다른 것을 가져와서 방해하려고 할 것이다. 누가복음 1장 53절에서 마리아가 언급한 원칙은 영원한 진리이다: "그분은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교회 모임에 굶주리고 궁핍한 사람으로 참석해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완전한 계획
너희가 지상에서 성취할 수 있는 것에서, 너희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완전한 계획을 성취하는 것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다. 언젠가 하나님이 너희의 삶과 수고를 통해 세계 곳곳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데 너희를 도구로 사용하시기를 기도한다. 너희의 교육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 따라서 지상의 필요를 위해 다른 사람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너희의 삶의 소명은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다. 그러니 직업을 우상으로 삼지 마라.
하나님은 이미 지상 생활의 모든 세부 사항을 계획하셨다. 여기에는 너희의 교육이 포함된다. 너희가 입학하게 된 학교와 대학, 심지어 대학에서 수강하게 될 과정도 포함된다. 그분은 이 모든 것을 주권적으로 다스리시며 마침내 너희가 올바른 직업을 갖도록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 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대하거나 원하는 과정이나 좋은 기회를 얻지 못하면, 그저 주님을 찬양해라. 몇 년 후, 너희는 하나님이 너희를 돌보시고 너희의 삶의 세부 사항을 주권적으로 지배하고 계시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비록 너희가 알지 못할지라도), 그 방식이 실제로 너희를 위한 하나님의 가장 좋은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로마서 8:28). 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가라.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주된 목적은 너희가 이 땅에서 예수님의 삶을 드러냄으로써 그분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의 야망이 결코 세속적이 되지 않도록 해라. 삶을 진지하게 받아들여라. 하나님의 완전한 뜻을 구해라. 최후의 심판 날에 주님 앞에 서게 될 때, 살아온 길을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아라. 그 마지막 날에 중요한 것은 너희의 '학점 평균'(대학에서)이 아니라 '하나님의 칭찬과 인정'(고전 4:5)이 될 것이다. 그때는 오직 그 점수가 중요할 것이다.
하나님은 이처럼 놀라운 방법으로 우리의 삶을 계획하신다. 이것은 내가 내 자신의 삶에서 거듭거듭 발견한 것이다. 이것은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의 고난의 상급을 얻기 위해" 앞으로 더욱 주님을 위해 봉사하고 싶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진젠도르프 백작이 지도자였던 18세기 모라비안 기독교(지금의 체코슬로바키아)의 모토였다.
너희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은 세상적인 자격이 부족하다고 해서 방해 받을 수 없다. 그 성취는 겸손한 마음가짐과 믿음에 달려 있다. 그러니 항상 그러한 미덕을 갖추기를 바란다.
어리석은 실수를 하지 않고 인생을 살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행한 많은 어리석은 일들을 간과하신다는 것을 내 삶을 통해 간증할 수 있다. 겸손하여 우리 죄를 인정하고 남을 탓하지 않고 믿음으로 "주님, 제가 한 일에도 불구하고 저는 주님께서 제 삶을 향한 계획을 성취하실 주님의 자비를 믿습니다"라고 말할 때에 너그러이 봐주신다. 많은 신자들은 그들의 실패로 인해 너무 낙심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결코 그런 말을 주님께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과 자비보다 그들의 실패를 높임으로써 하나님을 불명예스럽게 한다. 너희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크신 자비에 영광을 돌려야 한다. 그러면 한 해 한 해가 이전 해보다 더 잘 될 것이다.
오해 다루기
너희가 오해나 의심에 직면할 때마다, 주님께서 너희가 어린 나이에 그런 일을 마주하게 하여, 그것들을 통해 영적인 교육을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해야 한다. 너희를 의심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너그러운 마음을 갖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한 상황에서, 너희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강의 계획서에서 또 하나의 과목을 끝마칠 기회가 있다. 그러면 너희를 그런 식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성장할 수 있다.
또한 오해와 비난에 대하여 쉽게 동요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한 상황이 어떻게 주님에 대한 개인적인 지식으로 성장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의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 너희는 아마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발견한 것이다 - 이제 나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기쁨하고 뛰놀라"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눅 6:23).
이사야서 42장 19, 20절에서 주님의 종들에 대해 말하듯이, 주변에서 하는 많은 말에 귀먹은 자가 되어야 한다. 최종적으로 너희의 삶과 태도에 대하여 오직 주님께 답변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라. 이 사실을 깨달아야 진정한 그리스도의 종이 될 수 있다. 사람의 기쁨을 구하면 결코 그리스도의 종이 될 수 없다(갈 1:10). 많은 젊은이들이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얽매여있다. 이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결코 성장하지 못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명예와 인정을 원하기 때문에, 그들처럼 행동하고 말하고 기도하는, 다른 사람들을 모방하는(세상에서나 교회에서나) 복제품이 되지 마라. 과감히 자신이 되어라. 하나님은 너희가 항상 자연스러운 너희 자신이 되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너희가 인공적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모든 그리스도인 그룹에서, 너희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들의 본을 따르라는 압박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한 압박에 직면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래야만 그 압박을 이겨내고 영적 근육을 발달시켜 이기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기독교 지도자의 자녀들이 학교와 다른 곳에서 박해를 받고 괴롭힘을 당한다. 그에 비하면 너희가 다른 사람들에게 당하는 것은 개미에 물린 것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므로 담대하고 두려움 없이, 이 분야에서도 이기는 자가 되어라. 모든 것은 너희의 가장 좋은 것,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너희에게 영원한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이다.
"주님 안에서 받은 직분을 유의하여 완수하라." (골 4:17).
다른 사람에게 복이 되는 것
마태복음 14장 19절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복이 되는 세 단계를 본다: (1)예수님이 모든 빵과 물고기를 받으셨다; (2) 그분은 그것을 축복하셨다; 그리고 (3) 그분은 그것을 떼어 주셨다. 그런 다음 군중을 먹이셨다. 이것이 주님께서 너희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축복이 되기를 원하시는 방식이다. 그곳의 어린 소년처럼, 먼저 그분께 모든 것을 드려야 한다. 그러면 성령의 권능으로 축복해 주실 것이다. 그러면 그분은 많은 시련과 좌절, 실망한 희망, 실패, 질병, 배신 등을 통해 너희를 깨뜨리시고, 겸손하게 하시고, 사람의 눈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드실 것이다. 그때, 그분은 너희를 통해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깨뜨리심에 복종해라. 성경은 예수님이 먼저 상하게 되셨으며, 그 후에 아버지의 일이 그의 손에서 형통하였다고 말한다(사 53:10-12 참조).
예수님은 삶의 여러 상황에서 그분의 인간적 자기 의지가 깨어지는 것을 허용하셨다. 그래야만 흠 없는 자신을 아버지께 드릴 수 있었다. 이를 위하여 성령이 그분을 강건케 하셨다(히 9:14). 성령께서 너희 자신의 의지의 힘을 꺾으시도록 허용해야만 너희가 영적으로 될 수 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지 않고, 자신의 강한 자아가 하고 싶은 일을 하려는 유혹을 받을 때, 자기 의지가 부서져야 한다.
너희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이 너희 자신의 의지와 교차하는 곳에서 발견될 것이다. 거기에서 너희 자신의 뜻이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 그곳에서 성령은 너희에게 죽으라고 말할 것이다. 너희가 지속적으로 성령의 음성에 순종한다면, 너희는 끊임없이 깨어진 채로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심령이 계속 부서져 있는 자들에게 끊임없는 회복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주님은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는 자와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사는 것은, 겸손한 자의 영을 회복시키고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회복시키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신다(사57:15).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라는 자신의 결핍에 대한 감각을 항상 유지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을 간절히 찾는 모든 사람에게 강력하게 보상하신다는 것도 믿어야 한다. 심령이 가난한 것의 모든 가치는 하나님께서 너희를 축복하시고 그분의 능력으로 채워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아무 가치가 없을 것이다.
각 교회에서, 가난한 자와 약한 자와의 교제를 구하고 격려하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이들을 소홀히 하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이야기하고 격려하라. 항상 교회에서 낮고 눈에 띄지 않는 곳과 보이지 않는 사역을 찾으라. 어떤 교회에서든 탁월함을 추구하지 말고, 너희의 은사나 재능으로 어떤 식으로든 남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고 하지 마라. 특히 젊은 자매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려고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러나 모든 모임에서 항상 담대하게 증거하고, 교회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일, 즉 마루청소를 하든 피아노를 치든 모든 면에서 봉사하라. 어떤 사역을 위해 누구와도 경쟁하지 마라. 너희가 신실하다면, 하나님께서 친히 너희를 위해 계획하신 사역을 적절한 때에 열어 주실 것이다.
알코올 중독이나 약물 중독의 병력이 있는 청소년을 도울 때는 매우 현명해야 한다. 그러한 경우에 너희가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에 관해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라 - 그러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필요한 지혜를 즉시 주실 것이다(약 1:5). 사실, 그분은 그러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너희가 필요한 만큼의 지혜"를 주겠다고 약속하셨다(참조 누가복음 11:5-8).
너희의 소명
세상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사람은 극히 적다. 하나님의 은혜로, 너희는 아주 극소수에 속하게 되었다. 너희가 어렸을 때부터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허락하신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한가. 너희에게는 하늘의 장자권이 있다. 이 악한 세상의 어떤 것 때문에, 결코 포기하지 마라. 이 세상의 위대하고 웅장한 것에 감탄하면, 결국 그것에 굴복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이 세상의 영광을 얻기 위해 사탄에게 굴복하라는 시험을 받으셨다. 그러나 그분은 이기셨다. 그리고 너희도 이길 수 있다. 나는 너희가 이기는 자가 될 줄 믿는다.
너희가 시험을 이겼을 때, 사탄에게 주님이 어떤 정욕보다 너희에게 귀한 분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이 진리에 대한 증인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러한 증거를 위해 너희를 신뢰하고 계신다.
너희의 삶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다. 나는 주님께서 너희의 미래에 그분의 종이 될 수 있도록 지금도 너희를 준비시켜 주시기를 기도한다. 그러므로 순결한 생활을 하고 항상 성령 충만을 구하라. 시간과 삶을 절제하고 돈을 낭비하지 마라. 삶에 하나님의 부름이 없는 또래의 다른 많은 젊은이들처럼 너희의 날들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하라.
주님께서 너희를 축복하시고 지켜 주시어, 너희가 이 지상에서 영광스러운 삶과 사역을 누릴 수 있고, 언젠가는 그분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 마지막 날에 기쁨으로 그분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기 바란다. 그것이 너희를 위한 나의 끊임없는 기도이다.
논쟁과 경쟁
모든 사람을 사랑해라. 그러나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워져라. 그것이 영적 성장의 길이다. 논쟁의 여지가 있는 주제에 대한 모든 토론을 피해라. 인도의 도로에 있는 움푹 들어간 곳을 돌아가는 것 같이 그것들을 피해 가라. 그렇지 않으면 그 움푹 들어간 곳이 너희에게 심한 충격을 줄 수 있다. 하나님은 너희가 혀를 조심하기를 원하신다. 많은 능력의 누출이 혀를 통해 발생한다. 너희를 성령으로 계속해서 채워달라고 매일 하나님께 간구해라 - 그런 다음 새는 곳이 없는지 확인해라!
다른 지역에 있는 다른 교회와 관련된 문제를 논의하는 것을 단호하게 거절하라. 다른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려면 극도로 높은 생각을 가져야 한다. 여러 교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드러내고 "그 마음의 악한 생각을 나타내는" 방법이 된다(눅 2:34, 35). 따라서 하나님은 모든 자녀들을 시험하여 얼마나 많은 자녀들이 자신의 일에 신경 쓰는 법을 배웠는지 확인하신다. 테스트를 통과했는지 확인하라. 불필요한 생각들로부터 마음을 자유롭게 하라. 경건한 체하는 가십거리가 종종 많은 기독교계에서 기도 요청을 가장하여 전달된다. 그런 소문을 모두 피해라.
청년으로서 너희 모두는 자신의 경계를 인식하는 것이 좋다. 장로가 의논하는 것이 적절할 수 있는 것이, 너희에게는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너희는 그것에 대해 올바른 방식으로 이야기할 지혜가 없을 수 있기 때문이다. 너희는 확실히 너희의 신념을 굳게 붙잡고, 타협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이 너희를 세뇌하도록 허용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또한 가능한 한 모든 겸손으로 화평을 추구하고 교제를 구해야 한다. 이것은 때로는 젊음의 열정은 유지할 수 없는 섬세한 균형이다. 그러나 그 균형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너희가 다니는 모든 교회에서 형제자매들을 존경하라. 아무도 멸시하지 마라; 그리고 누구와도 논쟁을 벌이지 마라 - 그것은 너희를 파괴할 뿐이다. 너희가 교제하는 모든 신자와 모든 교회로부터 좋은 것을 받으라. 그러나 항상 분별 하라.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지 않고서는, 보고 듣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 마라. 베뢰아 사람처럼 되어라(행 17:11).
양심과 의
우리가 우리 아들로서 너희들에게 얼마나 감사하는지 결코 모를 것이다 - 내가 지금 생각할 수 있는 많은 것들에 대해 - 그리고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생각해낼 수 있는 더 많은 것들에 대해!
먼저 너희들에게 중요한 권면이 있다: "늘 여호와를 경외하며 살아라"(잠 23:17).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우리의 의가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뛰어나야 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결코 잊지 마라(마 5:20). 그 구절 직후에 예수님은 그 의미를 설명하셨다: 그분은 우리가 노하지 말며(5:22), 음욕을 품지 말며(5:28), 진실하지 아니하지 말며(5:37), 원수를 갚지 말며(5:38-44), 사람의 영광을 구하지 말라(마 6:1-18) 등등 말씀하셨다.
즉, 우리의 내적 삶이 외적 삶과 일치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율법으로는 아무도 이렇게 살 수 없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은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다. 이것이 바로 너희가 전심으로 힘써야 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도움을 구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분은 너희를 도우실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을 부지런히 찾는 모든 사람에게 상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민감한 양심을 잃는 것은 나병에 걸렸을 때 피부의 민감성을 잃는 것과 같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일이다. 그것은 퍼지고 마침내 너희를 완전히 파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너희를 주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사람과의 연결을 끊어야 한다. 세상 사람들과 육신적인 신자들과의 접촉에서, 너희는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너희가 그들과의 접촉을 통해 그들이 점차 너희를 세상으로 끌어당기고 있음을 발견하고, 너희가 그들을 주님께로 끌어당길 힘이 없다면 그러한 우정을 즉시 끊어라. 그들을 점차적으로 주님께로 끌어당길 때에만 붙잡아라. 그렇지 않으면 결국 손실이 매우 커질 것이다.
생명의 면류관
야고보서 1장 12절에 "시험을 견디어 내는(계속 이기는) 자는 복이 있도다 - 그가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라고 했다. 이 구절에 따르면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고, 시험 중에도 변함없이 충성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시험 중에도 항상 충성된 자만이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혹의 순간에 주님에 대한 당신의 사랑이 시험 받게 된다. 또한 인정을 받아야,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다는 말씀을 읽는다. 아직 생명의 면류관을 받은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가 인생의 과정을 신실하게 마치기 전에는, 그 누구에게도 하나님의 인정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확신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보호관찰 중이며, 우리의 삶이 끝날 때까지 그렇게 될 것이다. 잠시동안 열광하다가 뒤로 물러나거나 미지근해지기 쉽다.
날마다 충실 해라. 그리고 계속해서 도움을 요청해라. 비록 너희의 방에서 큰 소리로 주님께 부르짖을 수 없더라도, 너희의 마음에 항상 부르짖음이 있게 하라. 성령 충만을 계속해서 받으려면, 항상 깨끗한 양심을 유지하고 모든 상황에서 겸손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와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심판(하늘의 불)을 내려서는 안 된다. 야고보와 요한이 그런 제안을 했을 때, 예수께서 그들을 꾸짖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무슨 영을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 인자가 온 것은 사람의 생명을 멸망시키려 함이 아니라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9:51-56 - KJV, NASB의 여백). 우리와 의견이 맞지 않는 자들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영이 바로 사탄의 영이다.
그 구절을 읽어라 - 누가복음 9:49-56. 거기에서 첫 번째 그룹의 사람들이 제자들과 의견이 다른 것을 볼 수 있다(그들은 다른 사역을 가졌다). 두 번째 무리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영접하지 않았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그릇된 영에 대해 어떻게 책망하셨는지 묵상하라 - 그러면 오늘날 기독교계에 있는 많은 육신적인 신자들 사이에 있는 그릇된 영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이다. 항상 스스로에게 물어보아라, "내가 여기 있는 사람을 구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멸망시키려는 것인가?"
하나님은 아담에게 단 하나의 계명을 주셨다. 그는 그것을 불순종했다. 하나님은 자녀들에게 "네 부모를 공경하라(즉, 순종하고 존경하라)"라는 한 가지 계명만 주셨는데, 그들은 그것에 불순종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오직 한 가지 계명을 주셨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 그리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에 불순종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에만 우리가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요한은 우리가 거짓말쟁이라고 말한다(요일 4:20).
사탄에 관하여
사탄에 대한 몇 가지 사실을 아는 것이 좋다. 어떤 전투에서든, 적과 그의 전술을 잘 알고 있으면 전투에서 승리하기가 더 쉽다. 다음은 우리 영혼의 적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이다:
(1) 사탄의 기원: 천사들 중 가장 높은 천사는, 자기의 아름다움과 총명과 지위를 자랑스러워했고, 하나님이 자기를 두신 경계와 한계에 불만을 품고 하나님의 권위를 거역하여 사탄이 되었다(사14:12-15; 겔28:12-19).
(2) 사탄의 속임수: 그는 하와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의문을 갖게 하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하여, 하와를 속여 마침내 그녀를 파멸시키고, 그녀가 남편까지 파멸하게 만들었다(창 3:4-7). 미끄러질듯하고 매력적인 뱀의 부드러운 말을 조심하라.
(3) 사탄의 방법: 사탄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i) 하나님의 말씀보다 육신의 필요(빵)를 더 중요하게 여기고, (ii) 하나님의 이름으로 놀라운 일을 하여 영광을 얻게 하고, 마지막으로 (iii) 사탄에게 무릎을 꿇으면 세상의 모든 영광을 그에게 준다고 하였다. 사탄은 우리가 우리의 신념을 타협하기만 한다면 이 세상의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제공한다(마 4:1-10).
(4) 사탄의 패배: 사탄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무력하게 되었으니, 이제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를 대적하면 우리에게서 도망칠 것이다(히 2:14, 골 2:15, 약 4:7).
(5) 하나님이 사탄을 멸하지 않으신 이유: 하나님은 욥의 경우처럼 사탄을 사용하여 우리를 시험하고 우리의 영적인 근육을 강화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욥기 1장, 2장).
그래서 우리는 교회와 신자들에 대한 사탄의 시험이 모두 하나님의 완전한 계획의 일부임을 안다. 우리가 죄의 유혹을 받을 때나, 사탄이 우리를 속이려고 할 때,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살고 죄를 극도로 미워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혜롭게 하셔서 선악을 분별하게 하신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혜가 자라가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대로 거룩하고 지혜롭게 될 것이다.
사람들의 평판으로부터의 자유
내가 발견한 것 중 하나는 그리스도인의 성장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의 평판에서 벗어나는 데 달려 있다.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에(히4장) 대해 말하는 신약성경의 장에도 이 중요한 구절이 있다: "모든 것이 우리와 상관하시는 그분의 눈에 벌거벗은 채 드러나 있느니라"(v.13). 우리가 결국은 "우리와 상관 하시는 분"의 얼굴 앞에서만 사는 법을 배우지 않는 한, 우리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없다. 너희가 젊은 나이에 사람의 평판에서 벗어날 수 있으면서도, 누군가를 결코 멸시하거나 우월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정말 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이 무너질 것이다 - 기독교의 모든 교파에서. 그 날에는, 주님 안에서 굳건히 설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 지금 준비해라. 종교적인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내가 직면한 모든 반대는 모든 사람들의 의견으로부터 나를 훨씬 더 자유롭게 했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하나님 안에서 이렇게 많은 안식과 평화를 누렸던 적이 없었다! 나는 너희도 같은 안식과 평화를 누리기를 바란다.
일단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셔서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를 짓지 않으셨다는 위대한 "경건의 비밀"(히 4:15; 딤전 3:16)을 우리가 깨달았다면, 그 교리를 설명하는 데 너무 몰두하여 실제로 일상에서 예수님처럼 살아가고 그분의 삶에 참여하는 것을 놓치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한다. 옛말에 "우리는 나무를 보느라 숲을 놓칠 수 있다"라는 말이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사소한 세부 사항에 너무 몰두하여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여러 해 동안 거룩함을 전하되, 서로 비난하며 불평하는 많은 사람들을 본다. 이것은 그들이 지난 몇 년 동안 전혀 십자가의 길을 걷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은 그것의 이론만을 알고 있었을 뿐이다.
시간을 구원하기
부주의와 죄로 잃어버린 시간은 결코 회복될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낭비된 삶을 용서하실 수 있으며 여전히 우리를 그분의 왕국으로 데려가실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낭비된 세월을 되돌려 주실 수는 없다. 낭비한 시간은 영원히 잃어버린 시간이다. 절대 복구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주님을 따르기 시작하는 것이 매우 좋다. 지상에서의 우리의 삶은 매우 짧다. 그러므로 시간을 아끼고 유혹을 이겨내고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모든 기회를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겸손, 순결, 사랑에 뿌리를 두어라.
어느 날,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우리가 그분을 대면할 때, 하나님께서 빛을 주신 후 너희가 살아온 길을 후회하지 말아야 한다. 많은 신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그 날에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게 되면, 그들은 그들이 세상에 있는 동안 그토록 건성으로 지냈던 것에 근심과 후회로 짓눌리게 될 것이다, 심지어 그들이 천국에 들어갈지라도.
하나님께서 너희를 그러한 후회에서 구원하시기를 바란다. 지금은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현명해야 할 때이다. 결코 장자권(영적 축복)을 에서처럼 죽 한 그릇(육신의 즐거움)에 팔지 말아라.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고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머지않아, 그분의 얼굴을 보았을 때, 우리는 그분에게 더 많은 것을 드렸더라면 좋았을 텐데.....라고 소망할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예수님이 어릴 때부터 지혜가 자라나셨다는 것을 읽는다(눅 2:40, 52). 우리는 젊은이들이 어리기 때문에 어리석은 일을 할 것을 예상하지만, 예수님은 젊었을 때 결코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그분을 너희의 본으로 삼아라. 그러면 너희는 젊은 날에 많은 어리석은 일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 예수님은 영적 죽음에서 구원받을 수 있도록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하셨다 - 그리고 "그의 경외하심으로 인해 응답을 받으셨습니다"(히 5:7- KJV). 하나님은 예수님을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러므로 너희가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면, 너희의 기도도 들으실 것이다.
아브라함이 외아들을 희생할 준비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가 하나님 두려워하는 줄을 내가 이제 알았다"(창세기 22:12)라는 증명서를 주셨다. 아브라함은 그날 그 산꼭대기에서 홀로 하나님께 순종했다. 그는 하나님만이 그의 순종을 보기를 원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혼자 있는 어느 날 밤에 그에게 말씀하셨다(창 22:1). 아무도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신 것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은밀히 하나님께 순종했다. 너희가 은밀히 행하는 일에서(너희가 무엇을 하는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너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지 아닌지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사탄 앞에서 욥이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증거하셨다(욥 1:8). 하나님이 이와 같이 사탄에게도 너희를 자랑할 수 있다면 좋은 것이다 - 사탄은 오늘날에도 세계를 떠돌아다니며 모든 사람의 사생활을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욥은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지 않겠다고 눈과 언약을 했다(욥 31:1). 율법이 주어지기도 전에, 새 언약이 세워지기 수세기 전에 살았던 사람이 성경도, 성령도, 격려하거나 도전해 줄 다른 형제들도 없이 그러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욥은 심판 날에 일어나 이 세대의 음욕과 죄를 정죄할 것이다.
요셉은 너희가 따라야 할 또 다른 훌륭한 본보기이다. 그는 부모님과 멀리 떨어져 사는 청년이었다. 그러나 그는 죄 많은 여자에게 날마다 유혹을 받을 때마다,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끊임없이 그녀를 저항하고 그녀를 피했다(창 39:9).
욥과 요셉의 예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만으로도 이 끔찍한 성적 정욕과 간음의 죄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다.
만약 너희가 "자신을 살핀다면", "너희의 진보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명백해질 것이다"(딤전 4:15,16).
우리는 하나님께 찬양의 제사를 드려야 한다(히 13:15).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께 감사할 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제사가 된다. 복음의 '좋은 소식'은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것이다(사 52:7을 롬 10:15과 비교하라). 그리고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항상 통치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만일 말세가 노아의 때와 같으면(예수께서 마 24장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하나님은 노아와 같은 이 마지막 시대에도 죄와 불의를 대적하고 이 악한 시대에 하나님을 위해 진실하고 순결한 사람이 있어야 한다.
완전한 순결에 이를 때까지 성적인 영역에서 계속 싸워야 한다. 여자에게 말하는 방식에도 너희를 더럽힐 수 있는 불순함이 있을 수 있다. 이 부분에서 예수님처럼 순결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한 여자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기록되어 있다(요 4:27). 그것이 그분에 대한 증거였다. 너희가 여자들과의 대화에서 가볍고 경박하다면, 성적인 영역에서 승리를 기대할 수 없다. 그러므로 조심하여라.
예수께서 가신 길을 가기
"네 인생의 끝이 시작보다 나을 것"(전 7:8). 우리 모두는 순진한 아기로 인생을 시작했다. 끝이 그보다 더 낫다는 것은 어린아이와 같이 순진할 뿐만 아니라 지혜롭다는 것을 의미한다(고전 14:20). 그러나 거기에 도달하려면 시험에 충실해야 한다. 모든 일에 있어서 지혜는 너희가 전심으로 추구해야 할 목표이다.
십자가에서 많은 일이 일어났다:
(1)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형벌을 받으셨다(고전 15:3).
(2) 우리 옛사람(강한 '나')이 죽임을 당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죽은 자로 여기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롬6:6,11).
(3) 세상이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돈과 세상의 모든 영광을 우리에게 분리되게 하려 함이라(갈 6:14).
(4) 사탄은 패배하여 다시는 우리를 해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사탄과 그가 우리에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골 2:14,15; 히 2:14).
(5) 예수께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신 것은, 우리로 다시는 율법의 저주 아래 있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 복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갈 3:13,14).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붙잡지 않기 때문에 화를 내고, 떠나갈 것이다. 끝까지 견디려면 자기를 낮추신 예수님의 진리(하나님과 동등됨의 자리에서 내려와 만인의 종이 되신)를 붙잡아야 한다. 만일 너희가 주님 앞에서 항상 얼굴을 티끌에 조아리면(요한이 밧모섬에서 한 것처럼 - 계1:17), 인생을 승리로 마칠 것이다.
그리스도의 가치 증가(Increasing in the Virtues of Christ)
타락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의 가치들(virtues)을 끊임없이 강화하고 증가시키는 것이다(벧후1:5-10 참조).
나는 너희가 자주 그리스도 심판석의 "정식 리허설"을 하도록 격려하고 싶다. 다시 말해서, 주님 앞에 자주 자신을 드러내고, 지금 너희를 심판해 달라고 구해라. 약속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옳게 판단하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리라"(고전 11:31)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심판 날에 어떤 질문을 하실 것 같은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아라. 그분은 분명히 그날 너희의 교리적인 정확성을 확인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너희의 교만과 이기심, 돈에 대한 사랑, 더러운 생각에 맞서 싸웠는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려고 했는지 물을 것이다. 그러니 최종 시험 요강에 집중하고 다른 과목에 시간 낭비하지 마라!
예수님은 사자이자 어린양이셨다(계 5:5,6). 그분은 성전에서 돈 바꾸는 자들을 쫓아내실 때와, 종교의 이름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바리새인들을 꾸짖으시던 때에는,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집의 정결에 관한 일에 있어서는 사나운 사자와 같았다. 그러나 자신에 관한 문제에 관해서(사람들이 그분에게 침을 뱉고 그분을 마귀의 왕이라고 부르며 거짓으로 고발했을 때) 그분은 어린 양과 같이 침묵했다. 이것은 우리가 따라야 할 본보기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자들은 정반대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불명예를 당하고 교회에 타협이 있을 때는 어린 양과 같으나, 누가 그들을 짜증나게 하거나 모욕할 때는 사자와 같다. 이것이 우리가 회심해야 하는 이유이다 - 방향을 바꾸어라, 제대로!
양심과 믿음
의의 열매는 항상 화평 속에서 뿌려졌다(약 3:18). 마음에 평안과 안식이 없으면 의를 맺는 씨를 뿌릴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마음에 오는 어떤 불안은 고백하지 않은 죄, 누군가에 대한 잘못된 태도, 세상적인 문제에 대한 불안 등 항상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신호이다. 그러면 너희는 즉시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감정을 따라 살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뜻을 하나님 편에 두고, 죄를 고백하고, 용서해야 할 사람을 용서하고, 근심의 원인을 하나님께 맡기고, 안식해야 한다. 언제라도 마음에 불안이 남아 있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노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리라"(약1:20)는 사실을 기억해라.
선한 양심과 진실한 믿음은 너희의 인생의 배가 가야 할 안전한 수로의 양쪽을 표시하는 두 개의 부표이다. 이 부표 중 하나를 무시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삶을 파선한다(딤전 1:19, 20).
(딤전1:19-20) 믿음과 선한 양심을 가지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선한 양심을 버리고, 그 신앙 생활에 파선을 당하였습니다. 그렇게 된 사람 가운데 두 사람이 바로 후메내오와 알렉산더입니다. 나는 그들을 사탄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들을 응징해서, 다시는 하나님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양심의 민감성]을 유지하도록 주의하라. 너희의 양심이 불안할 때마다, 너희는 안전한 수로를 떠나 위험한 물 속에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양심의 경고를 무시하고 계속 그 길을 가면, 너희의 삶이 난파될 큰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해 매우, 매우 주의하여라.
[믿음]은 안전한 수로를 보여주는 또 다른 부표이다. 믿음은 그분의 변함없는 사랑, 그분의 전능하신 능력, 그분의 완전한 지혜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안에서, 우리의 인격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은 그분이 우리 삶에 허락하시는 모든 것을 결정한다. 거절된 기도 요청조차도 동일한 완전한 신성한 사랑에 의해 거절된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은 너무 큰 시험이 우리에게 닥치지 않도록 막아주실 것이다(고전 10:13);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시험을 극복하도록 도와주실 것이다(히 4:16).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길에 오는 모든 것이, 우리의 가장 좋은 것이 되게 하신다(롬 8:28).
하나님의 완전한 지혜는 그분이 우리 삶에 허용하시는 모든 일에 결코 실수를 하지 않으시며 - 그분만이 우리의 영원한 유익을 위한 것이 무엇인지 아신다.
너희는 하나님의 이 세 가지 속성에 대한 완전한 신뢰를 절대 잃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바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는 문구는 전임 사역자들이 그들의 필요를 위해 돈을 제공해 주시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말의 사용이다. 성경은 모든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라고 말한다. 우리는 성경이 항상 사용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성경의 말을 사용해야 한다.
믿음과 선한 양심을 소홀히 하면 점차 악한 마음(악한 양심)과 믿지 않는 마음(믿음을 잃은 마음)이 생길 수 있다. 이것들은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떨어지게 할 수 있다(히3:12).
그러한 타락에서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우리는 날마다 권면하고 격려해야 한다(다음절, 히 3:13 참조). 그러므로 매일 성경의 권고를 듣는 것이 좋다 - 성경을 읽고 묵상하거나, 좋은 기독교 서적을 읽거나, 교회 모임과 카세트 테이프에서 메시지를 듣는 것이 좋다.
우리의 생각을 다스리기
고린도전서 15장 24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반역을 진압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신 후에 나라를 아버지께 넘겨주실 것이라고 읽는다. 이것은 그분이 우리의 경우에도 그렇게 하실 것이다. 그분은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반역을 진압하시고 우리 몸을 지배하는 모든 정욕을 물리치신 후에 우리를 아버지께 바치기를 원하신다. 우리 마음 속에서 제멋대로 뻗어가는 생각과 의견은, 우리가 아버지께 드리기에 합당하게 되기 전에, 우리 앞에 놓인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강력한 무기(십자가의 능력)에 의해 모두 굴복해야 한다. (고후 10:4,5).
우리 생각 속에서 골리앗처럼 포효하는 거인들은, 그들의 목소리가 속삭이는 소리가 되고 마침내는 아무것도 아닌 소리가 될 때까지, 유혹의 시기에 망치로 두들겨지고, 맞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내면적으로 이기실 때까지, (우리가 그분께 협력한다면) 우리를 넘어뜨리고 우리의 자기 의지를 짓밟는 사람들과 상황으로 우리를 둘러싸실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모든 적들이 패배한다. 너희가 스스로 약할 때, 주님 안에서 진정 강해진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하나님과 몇 분을 보내는 것이 좋다. 이와 같은 짧은 시간이 너희의 하루를 변화시킬 수 있다. 그 시간에 다른 모든 생각을 차단해라. 그럴 때 마음에 밀려오는 근심과 걱정이 있다면 그 근심을 기도로 바꾸고, 하나님께 맡기고 계속 나아가라.
하나님을 아는 것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 때, 우리가 직면하는 모든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온 세상이 우리를 반대하더라도 담대하게 삶을 맞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굳건한 기반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그러니 너희가 젊었을 때 지금 시작하는 것이 좋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쓰레기로 여기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대단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너희에게 매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쓰레기로 여겨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그렇게 했다(빌3:8 참조). 우리가 이 세상에서 돈이나 쾌락이나 명예나 위대함을 추구하다 보면, 언젠가는 더 분명한 영원의 빛 속에서, 우리의 손이 쓰레기로 가득 차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를 부르셔서 그분의 재물을 소유하도록 하셨을 때, 우리가 쓰레기에 집착하여 지상의 삶을 보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현명해져라 - 우리가 이곳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하기 때문에 땅의 것들을 오직 사용하되, 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지 않도록 절대로 그것들 중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말아라.
하나님께서 너희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진지한 것을 보신다면, 너희의 삶에서 흔들릴 수 있는 모든 것을 흔드실 것이다. 너희가 그분과의 관계에 대해 속지 않도록 해라. 그분은 너희의 영을 질투하신다. 그분은 너희가 책(성경)이나 다른 사람을 통해서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그분을 알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진정한 상태를 보여주시고 필요한 것이 무엇이든지 바로잡을 수 있도록 지금 그 자체를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한다. 우리가 죄를 미워하고 자신을 순결하게 유지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아니. 우리는 주 예수님과 깊은 인격적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스스로를 깨끗하게 하는 모든 것이 단지 '도덕적 자기 계발 프로그램'에 그칠 수 있다.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려면, 무엇보다도 너희가 우선 죄를 알게 되는 즉시 슬퍼하고 고백함으로써 양심을 깨끗하게 유지하는데 매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면 낮에 자주 주님과 대화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따라서 언젠가는 주변의 모든 것이 무너지고 넘어질 때 혼자 설 수 있다.
내 아들들아, 너희 모두를 향한 나의 가장 큰 갈망은 이것이다 - 너희가 주를 아는 것이니, 이것만이 영생이다(요 17:3). 주님에 대한 이 지식만이 인도와 해외의 기독교 단체와 목회자들에 의해 반대와 비난을 받을 때, 방해 받지 않고 안식하며 무엇보다도 사랑 안에 설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나는 너희들 각자가 주님을 같은 방식으로 - 그리고 내가 그분을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은 방식으로 알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말씀에 떨다
나는 너희를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소녀들로부터 너희를 지키기 위해 잠언 7장(리빙 바이블)을 읽고 묵상할 것을 부탁 한다. 거기에는 "지옥으로 가는 길이 그녀의 집에 있다"(27절)라는 강력한 경고가 있다. 이따금 잠언의 앞부분 장(특히 1장에서 9장)을 읽는 것은 좋은 습관이다.
사탄의 첫 번째 계략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하와에게 말하는 것이었다(창 3:1-6). 사탄은 그녀에게 "너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사탄은 하와가 죄에 빠지게 할 수 있었다. 사탄은 오늘도 같은 방법을 시도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육신을 따라 사는 신자는 반드시 죽을 것"(롬 8:13)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탄은 "너희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고 말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신자들은 사탄을 믿고 계속해서 죄를 짓는다.'
여자를 욕망하는 것보다 눈을 잃고 소경이 되는 것이 낫고; 오른 손으로 성적인 죄를 짓는 것보다 그 손을 잃는 것이 낫다고 믿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 분노와 성적인 죄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마침내 지옥에 간다고 진정으로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마 5:22-30)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불신자와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께 주먹을 휘두르는 것과 같다고 믿는가?(고후 6:14) 마음이 청결한 자만이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마 5:8)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는 것과 거룩함을 구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를 보지 못하리라는 것을 믿는가?(히 12:14)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말하는 모든 부주의한 말을 심판 날에 설명해야만 할 것이라고 믿는가?(마 12:37) 세상에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신자는 거의 없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기독교 집단에 행한 속임수의 일이다. 그 결과, 대부분의 신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그분의 경고에 대한 두려움을 잃었다. 사탄이 그들을 철저히 멸망시킬 때까지, 그들은 죄를 지으며 바보짓을 한다.
하나님은 심령이 상하고 말씀에 떠는 자들을 돌보신다(사 66:1,2).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모든 경고에 떨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증거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는 자만이 마침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될 것이다. 이기는 자만이 둘째 사망(불못)에서 구원을 받고 생명나무에 참예하는 권리를 얻게 된다(계 2:7, 11). 이것은 성령께서 모든 교회에 하시는 말씀이다. 그러나 들을 귀 있는 사람은 극히 적다.
우리의 속사람이 날마다 새롭게 됨
우리의 겉사람은 날마다 부패한다. 그것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우리의 속사람도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고후4:16). 그러나 그것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날마다 새로워지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매일 하라고 말씀하신 한 가지, 즉 십자가를 지는 일(눅 9:23)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속사람이 새롭게 된다는 것은 내면적으로 예수님의 삶에 점점 더 참여하는 것이다. 이것은 날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몸으로 짊어질 때만 올 수 있다(고후4:10). 날마다 고난과 시련, 유혹의 할당량이 정해져 있다(예수님이 마태복음 6:34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 시련 속에서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우리 자신에 대해 죽어야 하며, 그리하여 각각의 유혹은 우리에게 어떤 영광을 가져다 주도록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오르락내리락하는 삶(때로는 산꼭대기에서, 때로는 쓰레기 더미에서)을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의 삶이 일관되게 위쪽으로만 나아가기를 원하신다 - 속사람이 끊임없이 새로워지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감당하기 위해 굳게 맞서야 한다. 모임과 집회에서 '흥분'한 것으로부터 신성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집회나 모임에서 감정적으로 동요했기 때문에, 영적이 되었다고 스스로를 속인다. 그러나 성장은 단순히 모임과 집회에 참석하는 것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성장은 일상생활의 평범한 고단함 속에서 십자가를 충실히 짊어질 때 온다. 우리는 매일 모임에 갈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날마다 유혹을 받기 때문에, 날마다 새롭게 될 기회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 우리의 것(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이 아니라 주님께 속해 있음을 인식하면서, 매일의 유혹 속에서, 불평과 투덜거림 없이, 주님께 단순한 신실함으로 살기 위해 날마다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사셨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날마다 새로움을 경험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몸의 쇠퇴가 날마다 눈에 띄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 눈에 보이는 것처럼, 속사람도 몇 년이 지나야 눈에 띄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충실하면, 새로워짐 자체가 매일 일어날 것이다(고후 4:16). 그러므로 작은 일에도 큰 일에도 충성하여라. 너희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고(갈 5:24), 하나님을 첫째 자리에 두며, 그분을 위해 온전히 사는 것이 모두 가치가 있었다는 것을 결국 깨닫게 될 것이다.
영원한 후회는 없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을 말하겠다: 내 아들들이여, 나는 너희 중 누구도 이 세상에서 위대하거나 번영하기를 결코 원하지 않았다 - 왜냐하면 모든 것이 쓰레기라는 것을 분명히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오직 너희 모두가 경건한 삶을 살고, 교회를 세우고, 너희의 삶을 위한 그분의 완벽한 계획을 성취하기를 원했다 - 인도에서든 다른 곳에서든. 하나님께서 내 마음의 갈망이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기도한다.
나는 이 땅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가장 좋은 것을 놓치는 사람들이 영원히 어떻게 될 것인지 아주 분명히 안다. 그들은 마음과 몸과 뜻을 주님께 온전히 바치지 않았기 때문에 수백만 년 동안 후회하게 될 것이다 -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그들을 위해 모든 고통을 겪으셨는지를 하늘에서 분명히 볼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의 옛 죄가 깨끗하여졌음"(벧후 1:9)을 결코 잊지 마라. 왜냐하면 너희가 많이 용서받은 것을 인식할 때만이, 너희가 많이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눅 7:47). 너희가 회심하기 전과 후에 하나님께서 너희를 얼마나 용서해 주셨는가를 잊어버린다면 바리새인이 되기 쉬울 것이다. 바울처럼 나도 하나님 보시기에 "죄인 중에 우두머리"(딤전 1:15)로 나 자신을 본다.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셔서 사역을 하시기로 결정하셨을 때 나는 가장 자격이 없고 최악의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아직 그분이 나를 위해 하신 일에 대해 보답할 만큼 충분히 하지 못했다.
다음은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어떻게 서게 될 것인지에 대한 아름다운 시이다:
"내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그리고 그분은 나를 위한 그분의 계획을 보여주십니다.
그랬을 수도 있는 내 인생의 계획
그분의 뜻대로 하셨더라면, 그리고 나는 봅니다 -
내가 여기에서 어떻게 그분을 막고,
저기에서 어떻게 그분을 저지했는지
그리고 나는 내 뜻을 굽히지 않을 것입니다.
내 구주의 눈에 슬픔이 깃들 것인가 -
그분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지만, 슬픔이?
그분은 나를 부자로 만드실 텐데, 나는 거기에서 가난하게 서있습니다.
그분의 은혜 외에는 모든 것을 빼앗겼네
기억은 사냥감처럼 흘러가지만
나는 되돌아갈 수 없는 길을 따라 내려갑니다.
그러면 내 황량한 마음은 거의 부서질 것입니다.
나는 눈물을 흘릴 수 없습니다;
빈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왕관을 쓰지 않은 머리를 숙일 것입니다.
나에게 남은 세월의 주님,
나는 그것들을 당신의 손에 맡깁니다.
날 데려가 부수고 빚어주십시오.
당신이 계획한 모양대로 빚으소서."
(Annie Johnson Flint)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 - 우리 전쟁의 무기
너희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기도로 바꿀 수 있다. 그것을 시도하고 하나님이 너희를 위해 무엇을 하실지 보라.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이 죄를 짓는 것을 막지 않으실 것이다 -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은 다른 사람들의 어떤 행동을 통해 우리가 극복할 수 없는 유혹을 받지 않도록 확실히 막아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통해 주신 소망은 우리가 죄의 법을 섬기게 하는 육신 안에 있는 아담의 비참한 본성에서 완전히 구원받는 것이다(롬 7:25). 우리가 죄에 빠질 때마다 슬퍼할 때, 그것은 우리가 병들고, 죄의 법을 섬기는 것에 지쳤다는 것을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이다. 그러면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언젠가 우리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고 우리를 온전히 건지실 것이다 - 이스라엘 백성이 탄식하며 부르짖을 때에, 애굽에서 구원하신 것과 같다(출 2:23-25 참조).
이 소망은 우리 영혼이 "휘장 안에서"(하나님 임재 바로 앞에서) 가지고 있는 닻이며, 그곳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선구자로서 우리보다 앞서 가셨다(히 6:19, 20). 그래서 우리는 낙심하기를 거부한다. 인생의 모든 폭풍우와 기복 속에서 우리의 닻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다. 사탄이 교묘하게 공격할 때, 너희의 삶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이 희망의 닻을 갖게 되기를 기도한다.
어떤 두려움이나 근심으로 시험을 받을 때마다,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을 인용하는 것이 좋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고 버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6) 또는 "내가 흑암 속을 걸을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빛이 되실 것이다"(미 7:8). 예수님께서 친히 그 성경을 인용하여 사탄을 이기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의 영역에서 유혹을 받을 수 있도록 허락하신 것처럼, 두려움의 영역에서 우리가 유혹을 받을 수 있도록 허락하신다 -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 유혹을 받을 때 기뻐하여라. 그러면 한 과정을 더 통과하여, 학점을 받을 수 있다! 따라서 너희는 앞으로 올 날에, 그 분야에서 다른 사람들을 위한 작은 - 선구자가 될 수 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서 허락하시는 모든 것은 미래에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사역을 위해 우리를 준비시키는 것이다.
다윗의 용사 엘르아살의 예를 생각해 보아라(삼하 23:9,10). 그는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두 달아났을 때 블레셋 사람들을 대항했다. 전투가 끝날 때 그는 너무 많은 시간 동안 칼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칼에서 손가락을 떼지 못했다 - "그의 손이 칼에 붙었다"(10절).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의 승리를 보고 돌아왔다(달아난 사람들이 다시 돌아옴). 그것은 너희가 따라야 할 좋은 본보기이다 -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릴 수 없을 정도로 마음에 새기고, 예수님과 함께 서서 갈보리에서 하나님을 위해 얻은 영토(너희 몸 안에)를 고수하는 것이다. 따라서 너희는 뒷걸음친 자들에게도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도전할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함
사탄은 믿는 자들의 생각까지 혼미케 하여 우리 인격의 모든 부분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인 놀라운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살후 2:14)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보지 못하게 하였다. "우리 영혼의 구원"(벧전1:9)이라는 구절은, 실제로 우리의 인격(우리의 영혼)이 아담의 태도와 특성에서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으로 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 단순히 그리스도와 같은 외적인 행동이 아니라, 인격의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성품, 즉 진정한 변화이다.
우리는 도전적인 메시지를 듣고 일시적으로 동요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눈이 열려서 그리스도처럼 되는 영광을 볼 때만, 우리는 이 일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시험에 충실하면, 참여할 수 있는 영광이 있다. 우리가 이 영광을 보았다는 증거는 우리가 하나님께 빨리 순종하고, 자신을 낮추고, 우리가 상처 입힌 사람들에게 빨리 사과하고, 유혹을 빨리 피하고, 경건한 자와의 교제를 간절히 구하는 것이다. 이 분야에서 느리고 지지부진한 신자들은 아직 이 영광을 보지 못했다.
모든 죄는 생각에서 시작된다. 훨씬 후에야 외부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이 불충실하면, 언젠가는 외적으로도 미끄러질 것이다. 우리는 영원히 마음 속에 죄를 숨겨둘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내면의 생각하는 삶에서 먼저 영광이 우리 것이 된다. 그것이 우리의 외적인 삶에 나타나기까지 몇 년이 걸릴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살고 인간에게 감동을 주려고 하지 않도록 도전한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을 위해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증거를 지키기 위해 항상 조심해야 한다.
가장 비싼 진주와 더 싼 진주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는 경우가 많다. 사탄은 너희가 그에게 조금만 무릎을 꿇는다면 세상의 어떤 영광을 너희에게 주겠다고 제안할지도 모른다. 예수님도 그런 시험을 받으셨다. 사탄이 너희에게 제공하는 것들에는 분명히 육신에 매력적인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주님은 너희가 그분의 이름을 위해 세상적인 것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너희를 시험하실 것이다. 만일 어떤 활동이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면 우상이 되기 쉽다. 주님께 드리는 것은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하며, 결코 값싼 것이어서는 안 된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은, 너희가 매우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릴 때이다.
종종, 우리는 건강이 없는 사람들을 보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인 건강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깨닫지 못한다. 우리 몸에는 잘못될 수 있는 것들이 수천 가지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안에서, 우리 몸은 잘못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건강한 몸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항상 감사하여라.
우리 자신을 추구하는 것 - 모든 악의 뿌리
참 기독교의 핵심은 자기자신의 뜻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너희 자신의 뜻이 하나님의 뜻과 교차하는 곳에서 너희가 죽어야 할 십자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그분에 대한 사랑이 시험을 받게 된다. 많은 신자들은 예배모임에 참석하고 품위 있는 외적인 삶을 사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좇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종교를 좇는 건지 알 수 있는 결정적인 지점은 날마다 십자가를 지는 지점이다. 주님께서 모든 상황에서 너희 스스로 죽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바란다. 그것이 기쁨과 행복과 축복과 성취와 영생의 길이다. 예수님 자신이 이 땅에서 그분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 주셨다.
바울은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말하며, 바울이 그리스도의 본을 좇은 것 같이, 우리도 바울의 본을 따르라고 했다(고전 10:33; 11:1을 함께 읽으십시오). 그건 그렇고, 이것은 두 장 사이의 구분이 오해의 소지가 있고 진리를 놓치게 만드는 신약성경의 많은 곳 중 하나이다. (이에 대한 몇 가지 다른 예는 요 7:53; 8:1; 롬 7:25; 8:1; 히 11:40; 12:1-4; 고전 9:27; 10:1-5입니다).
정욕, 분노, 억울함, 돈 사랑 등 특정한 영역에서 예수님을 좇으면서도, 육신에 있는 죄의 뿌리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 가능하다. 루시퍼와 아담은 죄를 지었다 - 간음이나 살인, 뒷담화나 가십, 눈으로 음욕을 품어서가 아니다. 그들은 둘 다 자신의 이익과 이득을 추구함으로써 죄를 지었다. 이것이 모든 죄의 뿌리이다 - 우리 자신의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 악한 뿌리에 도끼를 내리쳐야만 우리 삶의 근본 방향이 바뀐다. 그때까지, 우리는 많은 영역에서 승리를 거두면서도, 여전히 우리 자신의 이익과 이득과 명예를 추구할 수 있다. 그래서 죄를 이기라고 설교하는 많은 사람들도 결국 바리새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것을 끝내는 데 진지한 사람들은, 바울처럼 "많은 사람의 이로움을 추구하여, 그들이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고전10:33)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바울은 앞 절(고전 10:32)에서 "유대인과 이방인과 교회"의 세 부류의 사람, 즉 옛 언약 아래 있는 사람, 언약 없는 사람, 새 언약 아래 있는 사람에 대해 말한다. 그는 그들이 모두 구원받기를 갈망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죄에 대한 승리가 없는 신자(옛 언약), 불신자(언약 없음), 승리 가운데 사는 예수님의 제자(새 언약),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이 세 부류의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다음과 같아야 한다: "내가 구하는 것은 내 유익이 아니요, 그들의 유익이니 이는 저희로 저희 육체에 거하는 모든 죄에서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 예수님이 하늘에서 오셨을 때의 태도였다.
신자들이 "나는 내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는 태도를 가질 때에만, 그들이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울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모임에서 심오한 주제를 공유하는 것조차 그들 자신의 명예를 위한 것일 뿐이다.
예수님은 결코 자신의 것을 구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항상 아버지의 영광을 구하셨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영성이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사람이 사는 궁극적인 목적은 그가 경건한 사람인지 죄인인지를 결정하며, 여기저기서 정욕과 분노 등을 이겨내는 작은 승리뿐만 아니라, 이것들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쾌락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다른 문맥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은혜에 집중하라
신자가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살지 않는다면, 자신의 진정한 영적 상태에 대해 무지하기가 매우 쉽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에서 주님께서 일곱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주신 책망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분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장로)에게,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 속에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는 다양한 상황이 우리 삶에서 일어나도록 허락하신다. 여러 해 동안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겪었던 어려운 경험의 결과로 마음에 많은 불쾌한 기억을 저장했다. 그것들은 우리 마음의 바닥에 숨겨져 있다 - 그리고 우리는 우리 마음이 깨끗하다고 상상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 모든 썩은 것들을 휘저어, 우리 마음속에 모든 것이 떠오르도록, 어떤 작은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신다. 그 때 우리는 자신을 깨끗이 하고 관련된 사람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사랑하기로 결단해야 할 때이다.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마음을 깨끗이 하지 않으면, 소란이 끝난 뒤에 다시 바닥으로 가라앉아 마음에 남는다. 그리고 모든 것이 정상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또 다른 작은 이벤트가 그것들을 모두 다시 떠올리게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무언가가 드러날 때마다 자신을 정화해야 한다.
탕자의 형의 경우를 보면, 그가 동생에 대해 잘못된 태도를 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동생이 돌아와 동생을 위한 잔치를 베풀었을 때만 나타났다. 그러면서 자신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도 확인하지 않고, 그가 상상한 혐의로 동생을 비난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예를 들어, 그의 동생이 "창녀에게 돈을 낭비했다"고 말했다). 우리가 누군가와 좋은 관계를 갖고 있지 않을 때, 우리는 항상 그 사람에 대한 최악의 것들을 믿을 것이다.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너의 것이다"라고 말했다. 아버지가 그에게 준 것에 몰두하는 대신에, 형은 자신의 성취에 몰두했다: "나는 당신의 명령을 거역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이 모든 세월 동안 당신을 섬겼습니다." 그는 또한 동생의 결점에 사로잡혀 있었다. "당신의 이 아들이 당신의 돈을 허비하였습니다"(눅15:29-32). 그 아버지처럼, 하나님도 우리에게 "내게 있는 것은 다 너의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 안에 있는 모든 것, 즉 그분의 모든 순결, 그분의 모든 선하심, 그분의 모든 인내, 그분의 모든 겸손 등은 우리의 것이다.
우리가 이 이야기에서 배워야 할 교훈은 바로 이것이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에 사로잡혀 있어야 한다. 자신의 성취나 동료 신자들의 실패에 연연하지 마라.
겸손과 지혜가 자라나다
우리는 주님께서 너희의 눈을 열어서 예수님이 지상 생활 내내 걸어가신 방법, 즉 자아에 대한 죽음의 길을 보게 하신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너희 삶이 끝날 때까지 그 비전을 붙잡으면,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을 수 없다(계 3:11). 모든 신자들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열어주신 이 영광스러운 길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은 불평, 비판, 두려움, 긴장 및 기타 모든 악에서 그들을 구출할 것이다. 그러면 사탄은 더 이상 그들을 지배할 수 없다.
나는 예수님을 어렸을 때부터 항상 낮은 생각 속에 거하셨던 분으로 본다. 그분은 겸손하게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 - 그분은 항상 완전히 겸손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15세 때와 33세 때 갈보리에서 범죄자들과 함께 분류되기를 원했다(사 53:12). 그러나 그분은 성장함에 따라 직면한 다양한 상황에서 자신을 낮추실 기회가 점점 많아졌다. 이것이 바로 그분이 지혜가 자라났다는 말의 의미이다. 그분은 성장의 각 단계에서 이전 나이에는 직면할 수 없었던 새로운 시험에 직면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이기면서 어떤 단계에서도 죄를 짓거나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고 지혜가 자라났다. 반면에, 우리는 지혜뿐만 아니라 겸손도 성장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을 위해 살아온 매우 자만하는 사람들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교만과 높은 생각의 어리석음을 끝내고 진정한 지혜, 즉 겸손에서 나오는 지혜로 성장할 수 있다.
사탄을 이기는 능력
만일 주님 자신이 너희에게 가장 귀중하지 않다면, 그분과 너희 사이에 휘장이 생겨서, 하나님에 대한 너희의 시야를 가리게 될 것이다(고후3:14-16). 이 휘장은 기본적으로 "육체"이다(히10:20). 그러나 실제적인 말은, 그것은 땅의 어떤 것, 즉 어떤 인간, 어떤 물질적 소유, 또는 너희의 직업 등에 대한 육신의 애착이다. 주님에 대한 너희의 지식에 장애가 될 수 있는 것은 성경 자체일 수도 있다(고후3:14 참조).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이 자라도록 인도하지 않는 성경 지식은 속임수이다. 그것은 교만과 바리새인들을 조장할 것이다.
하나님은 너희의 영을 질투하시며(약4:5), 오직 그분 자신에 대한 독점적인 사랑으로 너희를 보존하고자 하신다("네 온 마음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다른 사람들을 순수한 방식으로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도 이기적일 것이다.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떡을 뗄 때, 우리는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상하게 하시기를 기뻐하셨다는 것을 기억한다(사 53:10). 예수님은 그 뭉개짐에 완전히 복종하셨기 때문에 사탄을 완전히 짓밟으셨다. 그것이 우리도 가야 할 길이다. 그러므로 만일 너희가 하나님께서 너희의 자기-의지를 완전히 부수도록 허용한다면(너희의 성격이 아닌, 하나님은 결코 그것을 부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사탄을 압도하여 사탄을 너희의 발 아래 짓밟을 것이다(롬 16:20).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인 삶에서 성장하지 못하고 사탄을 이기지 못하는 이유는 사람과 환경을 통해 시험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강한 의지를 깨뜨리도록 그들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탄은 그러한 때에 빛이 어둠보다 낫듯이 그들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그들의 선택보다 훨씬 낫다는 영광스러운 사실에 눈을 멀게 한다. 너희는 주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앉은 자로서, 땅에서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음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사탄과 만물이 너희 발 아래 있게 될 것이다.
너희가 '성찬예식'에서 잔을 마실 때마다, 예수님의 피로 씻어야 할 무의식적인 죄가 있음을 기억하여라 - 그러기 위해서는 너희는 먼저 다른 모든 사람들을 용서해야 한다. 너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빛 안에서 행해야 하며, 알고 있는 죄는 무엇이든지 고백해야 한다. 그러면 너희는 완전히 깨끗해질 것이다(요일1:7,9).
또한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를 흘리셔서 죽기까지 죄를 대적하셨다는 것을 기억해라(히12:4). 그러므로 너희가 그 잔을 마실 때, 너희도 죄에 대해 그분이 가졌던 같은 태도를 갖기를 원한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마음으로 믿는 것을 입으로 시인해야 한다(롬10:9,10). 너희가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말(교회 모임에서든 사적인 대화에서든)은 항상 믿음의 말이어야 하며, 결코 낙심이나 불신의 말이 되어서는 안 된다. 너희는 교회의 모임에서 너희의 믿음(너희의 죄가 아니라)을 고백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현명하지 못하며, 모임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 이것은 종종 그들이 겸손한 형제임을 보여주기 위해서만 행해진다. 그것은 명예를 추구하는 것이다. 대중 앞에서 패배를 고백하는 것은 사탄에게만 영광을 돌릴 뿐이다! 너희가 하는 말은 항상 믿음과 소망의 말이어야 한다 - 그 당시에는 상황이 좋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너희와 함께 더 나은 일이 되도록 하실 것이다.
너희의 증거의 말로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사탄을 이길 수 있다(계12:11 참조). 그러므로 너희의 입을 열어 사탄에게 담대하고 자신 있게 말하여라:
- 죄가 너희를 주관하지 못할 것이다(롬6:14 - 너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죄가 너희를 다스릴 수 없을 것이다);
- 하나님은 너희의 능력 이상으로 시험을 받거나 유혹을 받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다(고전10:13- 너희는 사람이 흔히 겪는 시련 밖에 다른 시련을 당한 적이 없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너희가 감당할 수 없는 능력 이상으로 시련을 겪는 것을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시련과 함께 그것을 벗어날 길도 마련해 주셔서, 너희가 그 시련을 견디어 낼 수 있게 해주신다);
-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장 좋은 것이 되게 하신다(롬8:28);
- 하나님은 언제라도 결코 너희를 떠나지 않으시며,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히13:5,6 - 돈을 사랑함이 없이 살아야 하고, 지금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를 떠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겠다"라고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담대하게 이렇게 말한다, "주님께서는 나를 도우시는 분이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누가 감히 내게 손댈 수 있으랴?");
- 너희가 넘어질지라도, 반드시 일어설 것이다(미7:8 - 내 원수야, 내가 당하는 고난을 보고서, 미리 흐뭇해 하지 말아라. 나는 넘어져도 다시 일어난다. 지금은 어둠 속에 있지만, 주님께서 곧 나의 빛이 되신다);
- 사탄은 거짓말쟁이요(요8:44 - 너희는 너희 아비인 악마에게서 났으며, 또 아비의 욕망대로 하려고 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였다. 또 그는 진리 편에 있지 않다. 그것은 그 속에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거짓말을 할 때에는 본성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는 거짓말쟁이이며,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에서 주 예수께 패한 자이다(히2:14 - 이 자녀들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이기에, 그도 역시 피와 살을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그가 죽음을 겪으시고서, 죽음의 세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멸하시고),
- 다른 하나님의 말씀들도 있다.
아들들 - 종이 아님.
하나님은 너희가 종이 아니라 아들이 되기를 원하신다. 종은 주인을 위해 해야 할 최소한의 일만 생각한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할 수 있는 최대치를 생각한다. 이것이 옛 언약의 정신과 새 언약의 정신 사이의 주요 차이점 중 하나이다(갈4:7 참조).
안타깝게도, 기독교 세계에서는 '하나님의 종'을 '하나님의 아들'보다 더 큰 사람으로 이해한다. 이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 하인이 아들보다 더 큰 지위를 차지하는 집은 없기 때문이다! 옛 언약 아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종이었으나, 이제 우리는 아들이다(요15:15, 갈 4:7). 이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주님의 참된 종이 될 수 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리라"(삼상2:30)였다. 예수님은 그것을 확장하여,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높여주실 것이다"(요12:26)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섬기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셨다. 예수님은 자기를 섬기는 자들은 자기를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 이것은 그분처럼 땅에 떨어져 죽는 것을 의미한다(요12:24), 그리고 그분처럼 이 세상에서 우리의 생명을 미워하는 것을 의미한다(25절). 그런 신자는 하나님을 섬기는 참 아들이 되고, 아버지께 존귀하게 여김을 받을 것이다(26절).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께 존귀하게 여김을 받고자 한다면, 기꺼이 이 길을 갈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거기에서 우리의 '생명'을 미워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한 삶(Self-life)과 자기 의지(Self-will)를 언급하신 것이다. 예수님도 자신의 뜻이 있으셨다 - 그러나 그분은 그것을 미워하셨고 결코 행하지 않으셨다(요 6:38 참조). 우리가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우리의 자기 의지를 미워하고 부인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위한 삶과 세속적 이익을 보존하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언젠가 그것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그것을 완전히 버리면, 대신 영생을 얻게 될 것이다(25절). 이 길을 선택하는 사람은 아버지께서 존귀하게 여기시는 사람이다.
겸손과 성숙
'악한 말'과 '동의하지 않음'의 차이를 설명하고자 한다. 바울은 베드로에게 동의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일부 미성숙한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음에 대해 썼다(갈2:11-21). 만일 바울의 의견 충돌이나 의견 충돌에 대한 그의 글이 죄라면, 바울에게 그러한 성경 구절을 쓰도록 영감을 준 성령 자신을 죄로 고발해야 할 것이다! 오히려 그 구절은 하나님께서 말씀의 진리와 관련하여, 우리 중 누구도 생각 없는 좀비나 비겁한 타협자가 되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내 기도는 너희 중 누구도, 내 아들들이, 좀비나 겁쟁이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동시에 너희는 어떤 인간에게도 사랑이 없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이 정하신 권위에 반항하는 일도 없어야 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을 심판하는 자들이나 그분의 대리자들에게 거역하는 자들을 결코 승인하지 않으신다.
나는 일생 동안 여러 기독교 단체를 떠났다 -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을 제한하고 하나님의 모든 목적을 설교하지 않는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 중 누구에게도 사랑 없는 태도를 갖지 않도록 조심했다. 그것이 너희가 조심해야 할 유일한 것이다. 내가 신념에 따라 행동하지 않았다면, 우리 가족의 운명이 어땠을지 생각해 보아라. 우리 모두는 오늘날 죽은 교단에 속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의견 불일치가 무례한 태도를 가져와서는 안 된다. 그것이 로마서 14장의 가르침이며, 우리의 삶에서 반드시 실현되어야 한다.
나는 너희가 참석하는 교회의 모임에 겸손한 마음으로 참석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곳의 바쁜 사람들이 그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던지는 질문을 무시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 어떤 질문에도 답하지 말아라. 우리는 주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모임에 간다; 그리고 겸손하고 수용적인 마음으로 참석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에게 말씀해 주실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의 호기심을 가진 미성숙한 신자들을 만나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런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우리는 성숙한 태도를 계발해야 하며, 그들의 말을 무시함으로써 그로 인해 야기될 수 있는 짜증을 극복해야 한다. 너희를 만날 때마다 영적인 검진을 해주고 싶어하는 미성숙한 신자들이 있다! 너희는 그들의 질문을 무시하고 지혜와 겸손으로 반응해야만 한다. 세상은 바쁜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을 피하려면, 이 세상을 떠나 천국에 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그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그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그들을 사랑할 수 있다. 그러면 너희는 이기는 자가 될 것이다. 너희는 항상 하나님 안에서만 너희의 안전을 찾아야 한다.
정직하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실패나 직면한 문제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 것은 아님을 기억해라. 그것은 누군가 "잘 지내세요?"와 같은 간단한 질문을 할 때, 너희의 자세한 병력을 알려주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다. 조용히 있으면 된다. 너희는 나에게 사람들의 의견은 쓰레기통에 들어가기에 딱 알맞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러니 절대로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살지 말아라.
선한 싸움을 위해 싸우기
너희의 전투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전쟁은 많은 전투로 구성된다. 그리고 비록 여기 저기서 몇 번의 전투에서 져도, 괜찮다. 전쟁은 여전히 승리할 수 있다. 사실 너희는 이길 것이다. 너희는 그 소망을 고백해야만 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영광을 받을 것이다. 너희 주위에 부도덕하고 죄 가운데 사는 사람들이 너희 때문에 동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가 하나님을 대하는 입장과 순결함이 그들의 죄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너희는 어두움을 드러내는 세상의 빛이 된다(마5:16).
엄마(아내, 의과대학 학생 때)와 나(해군에 있을 때)는 파티에 참석할 때 주님의 편에 서야 했다 - 그리고 우리는 그 당시 우리가 취한 입장에 대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는 것을 볼 뿐만 아니라, 젊은 시절에 많은 죄와 어리석음과 타락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았다.
우리의 육신(soulish)의 감정이 위아래로 흔들릴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고백하면서 우리의 육신의 감정과 정욕과 사탄에게 이렇게 증거하는 말을 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하나님은 여전히 보좌에 계신다. 내 모든 죄는 사함을 받고 정결함을 입었다. 하나님은 이제 내가 죄를 지은 것이 없는 것처럼 나를 보신다. 보이는 것은 다 잠깐이요.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선을 이루리라. 사탄은 십자가에서 영원히 패배했다. 내가 의기양양하게 나오리라, 내가 아무리 많은 우여곡절을 겪더라도 - 왜냐하면 하나님이 내 편이시기 때문이다."
바울이 말했듯이, "우리는 넘어질지언정, 쓰러지지는 않습니다"(고후 4:9 - J.B. Phillips 번역). 우리는 10을 세기 전에 일어나서, 계속하여 사탄과의 전쟁에서 승리한다. 우리는 한두 번의 전투에서 지더라도, 마침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 그러한 태도는 우리의 감정이 기복이 있더라도, 우리의 영이 꾸준하게 위를 향하게 한다. 너희도 항상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항상 너희의 의지(예수님을 따르겠다는 너희의 결정)에 따라 살고 결코 너희의 감정에 따르지 말아라. 너희의 의지가 정해진 방향에 따라 너희가 무엇이 될 것인지를 결정한다.
하나님께 대한 적절한 반응
하나님께서 너희를 위해 하신 모든 일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께 대한 적절한 반응은 무엇인가? 그분께 감사의 말을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로마서 12장(전체 장)이 그 질문에 대한 답이다. "하나님의 자비"에 비추어, 너희가 해야 할 일은 다음과 같다:
1. 먼저, 너희의 몸을 산 제물로 드려라(1절). '제물'이라는 단어는 너희의 몸을 주님께 바치려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임을 나타낸다. 눈, 손, 혀, 감각과 열정 등을 사용하여 자신을 기쁘게 하려는 너희의 강한 의지(self-will)가 희생되어야 한다.
2. 마음을 드리고, 새롭게 하라(2절) - 하나님이 보시는 것처럼 사람과 환경을 바라보라. 여기에서 여자를 바라보는 방식의 불순함, 너희에게 해를 끼친 사람들을 바라보는 너희의 억울함, 너희가 좋아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바라보는 편견, 상황이나 미래를 보는 방식에서 불신과 걱정과 두려움에서 자신을 깨끗게 해야 한다. "하나님은 이 사람이나 이 상황을 어떻게 보시는가?"라고 항상 자문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다른 모든 방식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여라.
3. 자신을 너무 높게 생각하지 말아라(3절). 영성의 진정한 척도는 지식이나 열심이 아니라 믿음의 척도이며, 이것이 바로 너희의 영성을 가늠할 수 있는 진정한 척도이다.
4. 하나님이 주신 은사와 달란트를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을 하여라(4-8절). 한 달란트를 가진 사람처럼 그것을 땅(세상)에 묻지 말아라. 열심히 주님을 섬기고(11절), 자주 기도하여라(=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과 대화하여라)(12절).
5. 악을 미워하고 선한 것을 굳게 잡으라(9절). 선한 것을 굳게 잡으면 악을 미워하는 것을 더 쉽게 할 수 있다.
6. 모든 형제를 사랑하고 존경하라 - 그들이 예수님의 동생이기 때문이다(9,10절). 그들에게 선을 베풀어라(13절).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라(15절). 모든 사람, 특히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가난한 자들과 덜 은사를 받은 자들에 대해 겸손한 태도를 취하여라(16절).
7. 모든 사람, 특히 너희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축복하여라(14,17-21절). 가능한 한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라. 너희에게 나쁜 짓을 한 사람에게 복수하거나 나쁜 것을 바라지 말아라. 그들에게 선을 행하여 선으로 악을 이겨라. 온 세상은 악을 더 많은 악으로 이기려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악은 결코 악을 이길 수 없다. 선은 악보다 강력하기 때문에, 선만이 악을 정복할 수 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갈보리에서 증명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보내시는 환난 가운데서 인내하고, 이 모든 것이 더욱 예수님을 닮아 가도록 계획된 것이라는 소망으로 기뻐하여라(12절).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모든 일과, 우리를 거듭거듭 용서해 주신 그분의 풍성한 자비에 대해 참으로 감사하고 있음을 하나님께 증명할 수 있다.
성령의 충만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그래프로 그리면 그 안에 기복이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의 경험이 그렇다. 그러나 일반적인 방향은 해가 지날수록 위쪽을 향해야 한다. 우리는 오르막과 내리막 그리고 그 사이에 안정기를 두고 천천히 위쪽으로 움직인다. 우리의 넘어지는 빈도는 줄어들고, 안정기는 점차 길어진다. 오르막이 반드시 급작스럽고 가파르지는 않지만, 가끔 그렇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오르막은 더 완만해진다. 그러나 믿지 않거나, 승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들의 경우, 그래프는 계속 아래로 내려갈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분의 약속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그래프로도 하나님 안에서의 우리의 성장을 완벽하게 묘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그래프는 어떤 면에서 결함이 있다.
죄를 심각하게 여기고 모든 실패 후에 슬퍼하여라. 그렇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너희가 나의 말을 자주 들어보았듯이, 죄에 빠진다는 사실은 죄에 빠진 후에 슬퍼하지 않는다는 사실만큼 심각한 것이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죄(또는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을 근심케 하는)에 빠진 직후 회개하고 슬퍼하라고 가르쳤다면, 나는 아버지로서의 의무를 다한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제대로 가르쳤기를 바란다.
궁핍하여 엘리사에게 찾아온 과부(왕하 4장)는 이웃에게서 그릇을 빌리고 그녀의 작은 기름 병을 그릇에 부어 채우라는 말을 들었다. 따라서 그녀는 빚을 청산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했다. 마침내 그녀의 아들들은 "더 이상 채울 그릇이 없다"고 말했다. 그런 다음 우리는 "그때 기름이 흐르기를 멈췄다"라는 말을 읽는다.
여기서 기름은 성령의 그림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성령의 세례(채움)를 체험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그들은 처음에 진정으로 채워진다. 그러나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의 삶에 더 이상 필요의 느낌이 없는 때가 온다(더 이상 채워야 할 그릇이 없음). 그러면 성령은 그들의 삶을 통해 흐르지 않는다. 빈 그릇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지 않은 삶의 영역을 나타낼 수 있다. 우리의 삶에는 부분적으로뿐만 아니라 끝까지 채워야 할 영역이 너무나도 많이 있다.
어떤 영역에서는, 죄에 대한 승리를 얻었을 수도 있다, 그릇이 부분적으로만 가득 차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닮는 것(또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은 죄를 이기는 것 이상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원망하지 않는 것과 그를 사랑하는 것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전자는 단지 부정적인 것이다(죄에 대한 승리). 후자는 긍정적이다(하나님의 성품). 마찬가지로, 화를 내지 않는 것과 축복하는 좋은 말은 많은 차이가 있다. 다른 많은 분야에서도 그렇다. 어떤 부분에서 죄를 이긴 것으로 만족한다면, 그때 우리는 "그릇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하며 만족한다. 그러면 기름이 흐르지 않게 되고, 우리는 후퇴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남을 판단하지 말고 스스로 끊임없이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의 의무는 항상 빈 그릇을 채울 준비가 되어 있는지 확인하는 것뿐이다. 그래야만 (그 과부처럼) 빚을 청산할 수 있다. 우리의 빚은 로마서 13장 8절에 설명되어 있다 - "너희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의 빚을 졌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될 수 있다. 모든 상황은 우리를 자아의 어떤 영역에서 구하고(save),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도록 설계되었다. 우리 자신의 빈 그릇이 먼저 채워지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축복받을 수 없다.
하나님 앞에서의 확신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아버지보다 더 좋은 아버지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께 구할 때, 그분이 성령과 다른 모든 좋은 것을 주실 것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다(눅11:13; 마7:11). 이것이 바로 불신이 끔찍한 죄인 이유이다.
기도에 대한 불신은 하나님이 이 땅의 아버지들보다 더 악하다고 비난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믿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구하는 것을 받지 못한다. 그들은 과거의 실패에 대한 정죄감에 너무 사로잡혀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아무 것도 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는 아침마다 새롭다(애3:22,23). 만일 우리가 그 죄를 자백하면, 매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전날 지은 죄까지도 전혀 기억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바라보신다. 이 사실을 믿을 때, 큰 담대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게 된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항상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숫자에 들어갈 필요가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에 대해 너무나 감사하여 남은 생애를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직면한 가장 큰 위험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는 것이다(딤후3:5). 우리가 인간의 명예를 추구할 때 이 위험에 더 직면한다. 경건의 능력은 시험과 격동의 때에 순결과 사랑으로 우리 마음을 지키는 능력이다. 올바른 언어를 말하고 올바른 노래를 부르는 등의 겉치장으로 내면의 실패를 은폐하는 것이 가능하므로, 아무도 우리 마음에 정말로 나쁜 것이 있다고 의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것을 철저히 미워해야 한다. 비록 우리가 우리의 죄와 실패를 다른 사람에게 고백할 필요는 없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의 영성에 대해 사실이 아닌 인상을 주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기도의 당혹스러움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할 수 없거나 기도 응답이 없을 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일을 해야 한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기도하신 후 하늘로부터 응답이 없자, 예수님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 우리의 주장(cause: 소송사건)을 그분께 맡겨라.
원수에 대한 재판관의 심판을 집요하게 요구하던 과부는 끈질김 때문에 원하던 것을 마침내 얻었다(눅18장). 이것이 믿음의 증거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있는 것(예: 우리 죄의 용서, 죄에 대한 승리, 성령의 충만, 성경에서 우리에게 약속된 다른 것들)을 구할 때, 그것을 받을 때까지 계속 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즉시 응답을 받지 못한다면, 우리는 믿음으로 아버지께 우리의 주장(cause)을 맡긴다.
다음은 내가 읽은 아름다운 시이다:
"게임은 하지 않으면 이길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 한 기도는 응답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바쁘고 붐비는 날에도,
시간을 내어 기도하는 습관을 들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도를 들으셨는지
또는 그분이 당신을 돌볼 수 있는지 궁금해하지 마십시오.
그냥 당신의 문제를 그분에게 말하고
그분의 응답이 때때로 연기되거나 지연되더라도 당황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결코 서두르지 않으시지만 결코 늦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에게 기다리라고 하실 때, 종종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그리고 너무 크거나 너무 작은 문제는 없습니다 -
하나님께는 모든 것을 처리 할 수 있는 지혜가 있습니다.
항상 우리가 가장 원하는 방식은 아니지만,
그러나 항상 우리에게 가장 좋은 방법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에게 즐거움과 기쁨과 건강, 면류관과 명예와 명성과 부를 구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에게 면류관 대신 십자가를 보내시며,
그리고 우리는 부유한 이익 대신 손실로 가난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심판과 뜻을 믿는다면,
우리의 기쁨이 크고 우리의 상이 풍성합니다."
(헬렌 스타이너 라이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안전
우리는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 안에서 우리의 안전을 찾아야 한다. 은혜나 지혜, 성령 충만 등 영적 성장이나 번영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우리가 그것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주기를 주저하실 수도 있다고 느낀다. 우리는 과거에 너무 많이 실패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의 실수를 저지르고 두 가지 악을 범하게 된다:
(1) 실수: 우리는 충분히 합당해야 하나님의 은사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백만 년 후에도 하나님의 가장 작은 선물이라도 받을 만큼 충분히 합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 사실에 뿌리를 두고 기초를 두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가치가 아니라 예수님의 가치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의 의미이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오직 그분 안에서 '예'가 되며 '아멘' 이 된다(고후1:20).
(2) 악 1번: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이전에 지은 죄를 기억하고, 우리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좋은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과거에 지은 모든 죄의 흔적을 지워버리는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을 멸시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우리 죄의 죄책감을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보다 더 크게 만든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몫을 충실히 해왔지만(우리의 죄를 자백하는), 주님은 그 죄를 깨끗하게 하는 일에 신실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무서운 악이다. 너무 끔찍해서 우리는 그것을 회개해야 하며, 다시는 하나님이 그의 말씀에 진실하지 않다고 결코 비난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3) 악 2번: 자녀의 많은 실패를 눈감아주고, 그들의 실패에도 좋은 것을 줄 줄 아는 세상의 아버지들보다 하나님이 관대하지 못하시고 사려 깊지 못하다고 비난하는 것이다(마7:7-11).
불신앙은 너무나 큰 악이라(히3:12), 분명히 보지 않으면 길을 잃게 된다. 우리가 불신앙을 악으로 보기 전까지는, 불신앙을 미워하는 법을 충분히 배우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받아 들여진 자로, 세상의 염려 없이 하늘 아버지의 무릎에 안전하게 앉아 있는 어린아이로 여겨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의 모든 염려를 돌보시기 때문이다.
자비에 완전하기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마5:48)고 명하셨다. 문맥상 예수님이 우리에게 상처를 주거나 해를 끼치거나 우리를 비방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선하게 대하는 것을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누가복음의 평행 구절은 예수님께서 "우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완전한 자비"(눅6:36)를 언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온전함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자비의 이 영역이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십자가에서 본 많은 것들은, 우리도 자기 십자가를 질 때, 내적으로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에 대한 그림이다.
우리가 떡을 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우리 자신의 뜻과 반대되는 것을 볼 때, (빵처럼) 기꺼이 속히 떼어지는 점에서 예수님과의 교제를 상징한다. 잔은 (보복을 부르짖는) 아벨의 피와 달리, 새 언약의 예수의 피(다른 사람을 용서하기 위해 부르짖음)와 교제하는 것을 말한다(히12:24).
이 땅에서 지은 가장 큰 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었다.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이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자신(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른다고 생각하시고, 그래서 그들이 알지 못하고 했기 때문에 용서해 주시기를 기도하셨다. 이것이 바로 남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예수님은 머리를 숙이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그러자 군인들이 와서 창으로 찔러 정말 죽었는지 시험하여 알아보았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시험을 허락하시는 방법이다 - 우리가 정말로 예수님과 함께 죽었는가 하는 것이다. 누가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들의 창으로 우리 옆구리를 찌르는지를 결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그 창 찌르는 것에 결코 반응하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그분이 정말로 죽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그분의 피(새 언약의 피)가 흘러 즉시 창을 덮었음을 본다. 이것은 우리를 위한 방법이기도 하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창 찌르는 것을 즉시 용서하고, 그들을 풀어주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화답한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다.
의와 선
우리의 의가 바리새인의 의를 능가한다면, 우리의 의는 하나님의 의와 같이 선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마 5:20; 44-48). 선은 의보다 더 중요하다 (참조 롬5:7: "사람은 의로운 사람을 위해 기꺼이 죽지 않을 것입니다; 선한 사람을 위해 일부는 기꺼이 죽을 수 있지만"). 의는 우리 몸의 뼈와 같고 선은 뼈를 덮는 살과 같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계명에 순종하는 모든 뼈를 가져야 한다. 그러나 선함이 없으면, 우리는 해골과 같을 것이다. 우리 몸의 뼈가 숨겨져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우리의 내적 순종은 숨겨져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봐야 하는 것은 우리의 선함뿐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1절에서 우리의 의로움을 사람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지만, 동시에 사람들이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마5:16). 우리의 목표는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선을 나타내어, 그들이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에게 이끌려 우리의 해골 같은 "의로움"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 즉 뼈를 덮는 살을 나타내셨다. 죄인들은 바리새인들의 해골 같은 의로움에 거부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들은 바리새인보다 더 많은 뼈(의)를 가진 예수님께 끌렸다. 여기서 우리 모두가 배울 점이 있다.
신적인 힘과 인간의 능력(Divine Power and Human Ability)
유혹은 마음속의 생각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는 즉시 저항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승리를 추구하기 시작할 때, 적어도 몇 초 동안 그것에 탐닉하는 동안까지는 일반적으로 그것에 저항하는 데 성공하지 못한다. 이것은 우리가 오랜 세월 동안 익숙해져 온 삶의 방식 때문이다. 저항의 초기 지연 시간이 0이 될 때까지 계속 싸워야 한다! 우리가 죄를 지었으면 즉시 고백하고 회개하고 애통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힘으로 죄를 대적하는지 하나님의 힘으로 대적하는지 분별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죄에 저항하는 한 옳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신성한 힘을 사용하고 있는지, 아니면 우리 자신의 인간적인 능력을 사용하고 있는지 판단하기가 어렵다. 시험에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과 같다. 시험에서 초자연적인 도움이 어떤 시점에서 우리를 도와주는가? 그것을 결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것을 결정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고요한 방식으로 우리의 인격과 혼합된다.
우리가 성령의 능력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타고난 능력으로 말하는지 아니면 신성한 능력으로 말하는지 판단하기 어렵다. 우리는 그것을 분석하는 데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불가능하고 이익이 없기 때문이다. 죄에 대한 승리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죄와 싸우고 그것에 저항하는 것이다.
죄를 이기는 것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 육신에서 죄를 몰아낼 수 없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저항할 수 있는 것은 마귀뿐이다. 그러면 그는 우리에게서 달아날 것이다. 그러나 사탄이 도망치는 것은 그 순간뿐이다(약4:7). 그는 예수님에게 했던 것처럼 나중에 다시 올 것이다(눅4:13 참조). 그럼 우리는 사탄을 다시 저항해야 한다.
그러나 죄는 다르다. 죄는 우리 육신에 거하며, 우리는 죽는 날까지 항상 죄에게 유혹을 받을 것이다.
죄를 피하는 것도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청년의 정욕(딤후2:22)과 음행(고전6:18)을 피하라고 말한다 - 그것들과 맞서라고 하지 않는다
우리가 어느 때라도 유혹의 압력이 너무 심하고 유혹에 굴복할까 두려워질 때, 베드로가 바다에 가라앉기 시작할 때 도움을 간구한 것처럼 즉시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마14:30). 이것이 은혜의 보좌로 달려가 도움을 구한다는 의미이다. 죄로부터 도망치는 것과 죄에 맞서 싸우는 것은 모두 너희의 삶에서 죄를 극복하기로 결심했다는 증거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너희를 강력하게 도우실 것이다.
사탄은 항상 우는 사자와 같이 다음 삼킬 자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다(벧전 5:8). 그는 이미 너무 많은 사람을 삼켜 버렸다. 그는 눈으로 음욕을 품을 만큼 부주의하고, 남을 원망하며, 불의한 자를 찾고 있다. 그는 그러한 신자들을 천천히 삼켜야 할 표적으로 표시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넘어지지 않도록 항상 건전한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 한다.
운동선수는 많은 영역에서 자신을 훈련한다. 그럼에도 사탄과 정욕을 이기고 마침내 이 하늘 경주에서 이기려면, 육신의 욕망을 절제해야 한다.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내 몸을 절제하여 그것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도록 함이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도리어 버림을 당하리라"(고전 9:27 - Living).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의가 바리새인보다 더 나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마 5:20), 그분은 우리가 특히 조심해야 할 우리 몸의 세 부분에 대해 말했다 - 우리의 눈, 우리의 혀, 우리의 손(마5:29,22,37,30; 마12:36,37 참조). 그러므로 특히 이 세 지체들로 죄를 짓지 않도록 매우 매우 조심하여라. 몸의 이 세 지체는 젊은이들이 가장 많이 죄를 짓는 지체이며 - 일반적으로 위에서 언급한 순서대로이다.
이것이 우리가 날마다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려야 할 세가지 몸의 지체이다(롬 12:1).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모든 것에 대한 보답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이다. "그것이 무리한 요구인가?"라고 성령께서 물으신다(롬 12:1 - Living).
하나님은 사탄과 우리의 정욕이 너무 강해지도록 허용하셔서, 우리 자신의 힘으로 그것들을 이길 수 있다고 상상조차 하지 못하게 하셨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의 능력을 구해야 한다. 이스라엘 정탐꾼들은 가나안 주민들의 크기를 보고 스스로를 메뚜기로 여겼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그 땅에 들어가 거인들을 무찔렀다. 우리의 모든 욕망을 정복하려면 그 정신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탄과 나의 모든 정욕을 정복할 수 있고 또 정복할 것입니다"라고 계속 말해라.
모든 유혹에는, 두 가지 길이 열려 있다. (i) 쾌락의 길, 그리고 (ii) 육체가 갈망하는 쾌락을 거부하는 고통의 길이다. 후자의 길은 "육신의 고난"(벧전 4:1)의 길이다. 계속 저항하고 괴로워하다 보면, 결국에는 죄를 짓기 보다, 죽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다. 그런 다음 너희는 "피 흘리기까지 죄를 대항"(히12:4)한다. 주님께서 너희가 끝까지 이 길을 가도록 격려하시기를 바란다.
학문과 영적 균형
나는 너희들이 다양한 기독교 그룹과 어울리고 교제할 때 냉정하고 균형을 유지해야만 하는 것이 염려된다. 왜냐하면 그들 중에는 바리새적인 경향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너희는 그리스도인들의 혼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분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그들 중 많은 사람들처럼 휩쓸려 바리새인이 될 것이다. 너희 자신이 속하지 않은 다른 그룹에 속한 사람들을 포함하여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을 소중히 여기는 법을 배워라. 그리하면 바리새주의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다.
대학에서, 너희는 영적인 것과 학문적인 것 사이에서 올바른 균형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 왜냐하면 하나님은 둘 다를 제정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가 모든 시간을 성경을 읽고 모임에 참석하는 데 보내지 않고, 사무실에서 일하든, 대학에서 공부하든, 부모로서 가정을 돌보는 등 대부분의 시간을 일반 대중들 속에 살며 이 땅의 직업에서 보내도록 정하셨다.
그러므로 단지 기독교 모임에 많이 나간다고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는 없다 - 그렇게 하면 학업을 게을리하고 낮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많은 모임을 우선시하는 것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모임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현실적이어야 한다.
학업 과정에서 최선을 다해라(나는 "잘 하라"가 아니라 "최선을 다하라"라고 말한다) - 그것이야말로 그곳에서 너희의 교육에 투자한 주님의 돈의 액수에 대해, 너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너희의 지능 수준을 넘어서는 결과를 기대할 수 없으며 - 하나님 자신도 그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분은 분명히 너희가 열심히 공부하기를 기대하신다. 그렇게 하기 위해 너희가 놓쳐야 할 많은 (예배)모임과 집회가 있을 수 있다. 모든 기독교 예배모임과 교회의 모든 집회에 참석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이 모든 것에 대한 접근 방식에서 균형을 유지하여라.
어떤 그리스도인이 대학에서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지 않을 때 주님은 불명예를 당하신다. 최선을 다했는데도 성적이 좋지 않다면, 그것은 괜찮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지성의 수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게으름은 다르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이마의 땀으로 생계를 꾸려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이 우리 모두를 위해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이다. 즉 열심히 일하는 것이다.
광신자들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숭배 활동에 참여하기 위해 학업을 게을리하도록 가르친다. 그러한 극단적인 종파적 경향에 빠지지 마라. 평생에 걸쳐 항상 먼저 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이다. 항상 하늘의 생각을 하고 땅의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집과 목공소에서 30년 동안 세속적인 일을 하셨고, 매일 회당 모임에 가지 않으셨다는 것을 기억하여라.
그러나 공부를 너무 많이 하고 영적인 것을 소홀히 한다면, 나는 반대 방향으로 권면할 것이다. 성령님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바른 길에서 우리가 벗어나는 방향에 따라 우회전이나 좌회전을 하라고 말씀하신다. 이사야서 30장 21절에서, "네가 네 눈으로 네 스승(예수님)을 보리라. 그리고 만일 네가 하나님의 길을 떠나 그릇된 길을 가면, 네 뒤에서 '아니다, 이것이 길이니, 여기로 걸어가라'하는 (성령의)음성을 들을 것이다"(Living Bible)라는 것을 읽는다. 우리 모두는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그 음성을 들어야 한다. 지혜는 모든 일에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너희들의 부모로서, 너희의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갈망을 보게 하셔서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 드리며, 그 불이 앞으로 더욱 더 커지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내가 위에서 말한 모든 것은, 너희의 열정이 지혜와 결합되어, 너희가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별똥별처럼 옆길로 새지 않도록 균형을 잡게 하려는 것뿐이다. 영원히 빛나는 별이 되었으면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균형 있게 성장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너희를 도우실 것이라고 믿는다.
대학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서는 필요 이상으로 하거나 시간외 공부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다. 여기서 토요일을 포함한 휴무일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배운 것만 공부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너희는 추가 읽기를 하고, 추가 문제를 풀고, 추가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해야 한다. 그리고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다른 사람(교수나 학생)에게 물어보아라. 또한 우리 모두는 어떤 주제에 대한 우리의이해를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음을 기억해라. 따라서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이 실제로는 이해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것을 정말로 이해했는지 여부는, 해당 주제에 대한 몇 가지 문제를 풀기 전까지는 결코 알 수 없다.
미디어 영향으로부터 보호
TV 프로그램 시청에 대한 경고를 주겠다. 긴장을 풀고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파악하기 위해 뉴스 프로그램과 일부 스포츠 경기를 보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다른 TV 프로그램은 정신을 오염시킬 뿐만 아니라, 성경을 읽고 하나님과 시간을 보내는 것에 방해가 될 수 있는 엄청난 시간 낭비이다. 따라서 오염되거나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TV를 볼 계획이 있을 때마다, 먼저 그날 성경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는지 자문해 보아라. 또한 누가 너희의 삶을 주도할 것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아라 - 하늘의 하나님인가 아니면 이 세상의 신인가?
나는 『십자가와 스위치블레이드』(The Cross and Switchblade)에서 데이비드 윌커슨(David Wilkerson)이 젊은 목회자였을 때 TV 시청에 사용하는 하루 2시간을 중단하고 그 시간을 기도로 보내기로 결정했다고 읽었다. 그런 기도시간 후에 한번은 그가 신문에서 뉴욕에 있는 일부 갱단원의 사진을 보았다. 주님은 그에게 그들을 도우라는 부담을 주셨고, 그리하여 그가 마약 중독자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세계적인 사역을 하도록 한 단계 한 단계 인도하셨다.
시험을 받고 인생의 작은 일에 충성된 사람만이 큰 일에 충성할 것이다. 나는 이것이 너희가 싸워야 할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언제나 적이 정복한 땅을 차지하기 위한 전투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충분히 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전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주님의 임재로 들어갈 때, 너희가 이 전투에서 마음을 다해 싸운 것을 기뻐할 것이다.
다가오는 새해에는 세속적이고 오염된 영향으로부터 너희를 지켜주시고, 어떤 결과가 초래되더라도, 그리고 그로 인해 누가 화를 내더러도, 너희가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은혜와 힘을 갖게 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너희가 사람의 영광을 구하는 것인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인지 분명해지도록 상황 속에서 시험을 받을 수 있도록 허락하실 것이다. 그러한 모든 시험에서 너희가 우수한 성적을 거두기를 바란다.
속임수에서 해방
너희는 누군가 너희에게 그리스도의 신부가 144,000명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썼다. 요한계시록은 표적과 상징으로 가득 차 있음을 기억해라(계1:1에서 "표적으로 보여주다(signified)"라는 단어로 표시됨 - KJV). 따라서 요한계시록 14장 1절의 144,000이라는 숫자는 상징적이며 실제가 아니다. 144,000은 "어린양이 어디로 가시든지 따라가는", "그 입에 간교한 속임수가 없는"(계14:1-5) 상대적으로 적은 수를 의미한다. 이는 "어린 양의 피로 자기 옷을 씻은 허다한 무리"와 비교된다(계7:9,14). 144,000명에 대해 그들이 "간교한 속임수가 없었다"는 것은 훌륭한 증거이다(계14:5 - KJV). 속임수는 어린 시절부터 계속 우리의 삶에 가득하다.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부모를 속이고, 교활한 일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의 영성에 대해 사실이 아닌 인상을 준다. 이 모든 것은 악이며 우리 삶에서 완전히 제거되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끊임없이 자신을 판단해야 하는 이유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속임수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곳에 도달하여 그 남은 자 안에 있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과부의 비유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하나님께 밤낮 부르짖어야 한다(눅18:7 - "하나님의 택하신 자가 주야로 부르짖음"). 우리는 원수(정욕)의 권세에서 벗어나서, 성령의 불을 결코 잃지 않는 순결하고 권세 있는 삶을 위해 그 과부처럼 부르짖어야 한다. 우리는 AIDS의 질병을 두려워하는 것보다 단 하나의 죄악된 생각(더러움이나 미움이나 세상적인 것이나 돈을 사랑하는 것 등)을 더 두려워해야 한다. 하나님은 한때 이스라엘에서 "스스로 분발하여 하나님을 붙잡는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다(사64:7). 디모데조차도 그 안에 있는 성령의 불을 "새롭게 불태워야" 한다고 했다(딤후1:6).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자동으로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신다. 그렇게 하면 우리의 자유 의지가 박탈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 삶에서 그분과 그분의 최고를 향한 우리 안에 있는 가장 작은 갈망을 보시면, 우리를 도와 주실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하나님은 너희를 위한 완벽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
우리는 항상 주님을 우리를 도와주실 분으로 신뢰해야 한다:
(1) 우리 육신의 모든 정욕을 이기게 하시고,
(2) 모든 시련에서 우리를 향한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게 하시고,
(3) 모든 상황에서 이기는 자가 되게 하고,
(4) 모든 악에 맞서 그리스도의 미덕을 나타내도록 도우신다.
그러니까 우리는 결코 낙심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기적을 행하시는 사랑 많으신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는 세대와 타협하는 기독교계에 산 증거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너희의 삶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 너희가 그분을 공경할 때, 너희는 날마다 그 계획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적시에 그분은 교제 단체, 취업, 주거 및 결혼(이러한 때가 오면)을 위해 모든 영역에서 너희에게 올바른 문을 열어주실 것이다. 그분을 공경하는 사람들은 대학에서 성적이 어떻든지, 영향력이나 재정적 자원이 부족하든지, 어느 나라에서나 경기 침체가 있든지 상관없이 모든 분야에서 최고의 결과를 얻는다.
모든 일에 지혜가 있기를 기도한다. 어리석음은 10대와 20대 사이에 매우 만연하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평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심각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지켜줄 수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살아가야 하며 항상 조심해야 한다.
너희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놓치지 말아라. 나는 19살 반에 내 삶을 온전히 주님께 바쳤다.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 "내 눈에 옳다고 생각되는" 일을 스스로 해낼 수 있었던 것 보다 하나님께서 내 삶을 통해 훨씬 더 좋은 일을 하실 수 있었다는 사실을 기쁨으로 되돌아볼 수 있다. 이 세월 동안 내가 죄를 지은 적도 없고, 어리석은 일을 한 적도 없고, 실수한 적도 없었다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 모든 일을 저질렀고 - 지금 내 인생을 돌이켜보면 내 어리석음과 실수가 완전히 부끄럽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고 그 모든 것을 지워버리시고 인도하셨다. 내 실수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내가 진심으로 그분의 뜻을 행하고자 노력하는 것을 보셨다고 생각한다. 그분은 많은 실수를 하더라도 부지런히 그분을 찾는 모든 사람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시다. 나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선하심(goodness)과 인자하심(mercy)이 너희에게도 평생 따를 것을 확신한다(시23:6).
너희가 하나님을 공경하려고 노력할 때 즐거운 놀라움이 너희를 기다리고 있다. 왜냐하면 "그분은 사랑 안에서 항상 조용히 너희를 위해 계획하고 계시기 때문이다"(습3:17-의역). 여기에는 세속적이든 영적이든 미래의 모든 세부 사항이 포함된다. 너희가 삶의 날마다 하나님을 공경하기로 결심한다면, 너희는 하나님의 가장 좋은 것을 가질 수 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우리의 미래를 계획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 편에서 일하시며 우리가 받을 자격이 없는 특별한 보너스를 우리에게 주시고, 취업과 같은 세상적인 문제에서도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미래에 대해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처럼, 우리는 공중의 새들처럼 불안과 긴장 없이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바울은 그의 달려갈 길을 기쁨으로 마칠 수만 있다면, 그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도 않았다(행20:24 - KJV). 부모는 어린 자녀를 학교에 보낼 때 학교를 졸업할 날을 고대한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그분은 우리의 인생 행로를 계획하셨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우리에게 주신 과정을 마쳐야 한다. 우리는 이 땅에서 삶을 사는 동안 실수를 하고 서투른 행동을 하고 어리석게도 시간을 낭비할 수 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것들은 우리 모두가 수학에서 범하는 실수와 비슷할 것이다. 학교에서 몇 가지 문제를 틀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취업, 결혼 등과 같은 중요한 문제에 대해 우리를 위한 완벽한 계획을 갖고 계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우리가 거룩함의 영역에서 그분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할 때만 성취될 수 있다. 우리가 전심으로 거룩함을 추구한다면, 하나님은 세상의 다른 모든 문제에서, 우리 삶을 위한 그분의 계획이 성취되도록 보장하실 것이다.
부흥이란 무엇인가
기독교계에서 부흥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나오는 가운데, 너희는 다음을 기억해야 한다:
부흥은 크고 시끄러운 소리와 감정이 아니다.
부흥은 종교 활동에 대한 열심이 아니다.
부흥은 열정적이거나 유창한 설교가 아니다.
부흥은 교리의 정확성이 아니다.
하지만
부흥은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죄와 세상적인 것을 버리는 것이다.
부흥은 우리 자신의 것을 추구하는 것으로부터 자유이다.
부흥은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겸손이다.
부흥은 바리새주의로부터 자유이다.
부흥은 죄를 이기는 능력이다.
부흥은 하나님의 모든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다(롬5:5).
부흥은 말의 은혜이다.
부흥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고자 하는 열정이다(행1:8).
사람으로 하여금 이 세상과 그 영광과 위대함을 쓰레기로 여기지 않게 하고, 그를 예수님에 대한 열렬한 헌신으로 불타오르지 않게 하는 소위 "부흥"은 가짜 부흥이다.
하나님의 최고의 것을 기다리라
너희는 이제 사탄의 표적이 되었다. 사탄은 너희가 앞으로 이 땅에 있는 그의 왕국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사탄의 올무로부터 너희를 구할 수 있는 세 가지 조언을 주고 싶다:
(1) 항상 겸손해라.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얼굴을 땅에 조아려라.
(2) 항상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에게 마음을 활짝 열어 두어라.
(3) 항상 순결을 유지해라. 여자들과의 관계에서 조심해라.
세 번째 영역은 특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사탄은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젊은이들을 유혹하고 함정에 빠뜨리는 데 성공하여, 신자라면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실수인 잘못된 사람과 결혼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분명히 용서하실 수 있지만 그분조차도 결코 되돌리거나 고칠 수 없는 실수이다. 하나님은 그러한 신자들에게 자비를 베푸실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최고의 것을 기다린 것만큼 좋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지혜가 부족함을 깨닫고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좋다. 이 문제에 대해 아무리 경고해도 지나치지 않다. 사탄이 너희를 쫓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라. 하나님은 너희를 위해 선택하신 소녀를 보호하시고, 적시에 너희의 길을 가로질러 그녀를 데려오실 수 있는 놀라운 방법을 가지고 계시다. 그러나 그분은 또한 그 때가 오기 전에 너희가 무엇을 선택하는지 보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유혹을 허용하실 것이다.
아담은 두 그루의 나무 중에서 선택할 수 있었고, 다른 나무도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나무를 선택했다. 하나님은 우리도 시험하신다. 아담이 그의 눈과 그의 이성이 말한 대로 행한 것과 같은 실수를 범하지 말아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 그것이 아담을 구원했을 것이고 그것이 너희를 구원할 것이다. 에서는 일시적으로 그의 육체적 식욕을 만족시켜주는 하찮은(또는 '매력적인'!!) 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았다. 몇 년 후 그가 상황을 더 명확하게 보았을 때, 그는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고 그것에 대해 고치려고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우리는 히브리서 12장 16,17절에서 에서와 같이 경건하지 않은 자가 되지 말라고 경고를 받는다.
우리가 만날 경건한 선교사들
헨리 마틴은 1806년 25세의 선교사로 인도에 와서 6년 후 사망했다. 그러나 그는 그 짧은 시간에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오늘날에도 기억되고 있다. 그는 어떤 소녀의 아름다움을 보고 음욕을 품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면, 그녀를 위해 그녀가 순결하고 거룩한 성령의 성전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렇게 그녀를 위해 기도한 후에는 그는 음욕을 품을 수 없게 되었다. 그의 모범을 따르라.
댄 크로포드는 18세(1888년)에 선교사로 아프리카의 콩고 내륙으로 가서, 22년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4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과부가 된 어머니와 여동생을 돕기 위해 일찍 학교를 그만두고 직장에 가야 했다. 그는 직장에서 그의 점심을 실직한 가난한 노동자들과 나누고 나서 그들과 복음을 나누곤 했다. 하나님은 그의 작은 일에서 충성됨을 보시고 나중에 아프리카에서 큰 사역을 하게 하셨다.
로버트 모팻은 1817년(22세)에 선교사로 아프리카에 가서 50년 동안 부족들과 함께 (육체적인) 노동을 하며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했다. 그는 한 번 친필 책에 이렇게 썼다:
"내 앨범은 이방인의 가슴이고,
그 곳은 폭풍우가 몰려오고 그림자가 머무는 곳,
한 줄기 빛도 없구나.
거기에 예수님의 이름을 쓰고
그리고 이방인이 기도하며 절하는 것을 보라 -
이것이 내 영혼의 기쁨이다."
제임스 칼버트는 피지의 식인종 선교사가 되기 위해 1838년(25세) 아내와 함께 영국을 떠났다. 그들이 피지에 도착했을 때, 그가 타고 있던 배의 선장은 그와 그의 아내가 육지로 나가는 것을 막으며, "당신이 저 야만인들 사이에 가면 죽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칼버트는 "우리는 여기 오기 전에 죽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언젠가 우리는 하늘에서 이들과, 그들과 같은 하나님의 다른 사람들을 만날 것이다. 그 날에, 우리는 이 땅에서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 후회하지 않아야 한다. 모든 사람이 선교사나 전임 사역자로 부름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아프리카에 갈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우리 삶에 대한 하나님의 완전한 뜻을 이루도록 부름을 받았다 - 그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든지 상관없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삼상15:22).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노래할 때마다, 그것은 결코 진부한 메시지가 아니라, 항상 새 노래를(하늘에 거하는 자들이 부르는 노래처럼 - 계5:9) 부를 수 있도록,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헌신을 끊임없이 유지해야 한다. 그 메시지에 익숙해지면 "우리를 찾으신 사랑과 우리를 다시 양의 우리(울타리)로 인도하신 은혜"의 경이로움을 잃어버리기 쉽다. 우리가 그 경이로움을 잃어 버리기 시작하면, 비록 우리의 타락의 외적 증거가 몇 년 후에야 드러날지라도, 타락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오직 성령만이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헌신을 신선하게 유지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너희 안에 두신 불꽃을 계속 "새롭게 불을 붙여라" (딤후1:6).
균형 잡힌 삶을 위한 지혜
하나님과 시간을 보내는 것과 지상의 일을 하는 것 사이에서 올바른 균형을 찾는 것은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어린 소년 시절 집에서 마리아를 도우면서 그리고 목공소에서 일하면서 얻어야 했던 지혜에 대한 교육이다. 이것은 분명히 다른 누구도 우리에게 가르칠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은 그것을 배우기 위해 30년을 보내실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선호하는 것들을 거부해야만 그것을 배울 수 있다. 예수님이 처음 30년 동안 겪으셨어야 했던 시험 중 하나는 집이나 목공소에서 일을 해야 할 때, 기도모임이나 영적 모임에 참석하고 싶은 유혹이었을 것이다. 그분은 그 유혹을 극복하고 지혜, 즉 올바른 균형을 배웠다. 이제 같은 지혜를 배워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너희도 같은 시험을 받게 하여, 올바른 균형을 배울 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래야만 세상의 마지막 날에 지혜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시90:12).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녀들을 질투하는 사랑으로 지켜보시므로 그들이 쉽게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너희가 하나님을 공경하기로 결정한다면, 너희는 지상 생활의 모든 날마다 하나님의 최고의 것을 얻게 될 것이다 - 그분은 자신을 공경하는 모든 사람을 공경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을 공경한다는 것은 많은 모임에 참석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사랑하고 겸손하며,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면 대학의 모든 학생들 중 최고의 미래를 갖게 될 것이다 - 이 지상과 영원 모두에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너희를 격려하기 위한 주님의 말씀이 있다: "너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너희 눈으로 보지도 못하고 귀로 듣지도 못하고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한 기이한 일을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예비하셨다"(고전2:9).
빛 속에서 살기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 5:18). 사탄이 하나님의 자녀를 만질 수 없는 곳은 단 한 곳, 바로 빛 가운데 있는 것이다. 사탄은 흑암의 왕이며 하나님께서 그에게 흑암의 모든 곳을 주셨다. 신자가 흑암에 들어가면 사탄이 즉시 그를 지배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신자들이 볼 수 있는 곳에서 간교하게 속이고 교활한 일(빛을 견디지 못하는)을 하거나, 우리가 빛 가운데서 부끄러워할 만한 글을 읽거나, 말하거나, 행동하는 것은 위험하다.
사탄이 흑암의 왕인 것과 같이, 그는 "거짓말쟁이의 아비"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는 거짓말을 낳기 위해 그와 연합 할 "어머니"를 찾고 있다! 거짓말을 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삶에서 사탄에게 자리를 내준다. 모든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거짓말을 하며 그릇 행한다"(시 58:3). 우리가 십대가 될 쯤에는 거짓말을 하고 부모와 교사를 모두 속이는 데 전문가가 된다. 우리가 회심할 때쯤이면, 우리의 삶은 교활함과 거짓말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악은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모든 거짓말과 모든 교활함을 미워하지 아니하면, 시온 산에서 여호와와 함께 결코 서지 못하리니 이는 그 숫자에 대하여 기록된 바 "그들의 입에 거짓과 간교한 속임수가 없었음이라"(계14:1,5). 이런 식으로 사탄에게 자신의 삶을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것은 너무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그러니 이 분야에서 철저 해야 한다.
그러나 진실하다고 해서 자신의 모든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공개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안 된다. 하나님도 모든 사람에게 드러내지 않는 비밀이 있다; 그리고 너희는 하나님보다 낫지 않다. 그래서 너희는 비밀을 지킬 수 있다. 그러나 너희가 말하는 것은 항상 진실이어야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너희의 실제보다 더 영적이라는 인상을 주려고 해서는 절대 안 된다. 다른 사람들이 스스로 그런 인상을 받는다면, 너희는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그런 인상을 주는 행동이나 말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항상 부모님에게 정직해야 함을 기억하여라. 우리는 너희를(자녀들) 돕고 올바르게 인도하기 위해 여기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희는 우리가 너희를 사랑하고 항상 너희에게 충실하고 너희의 비밀을 지킨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젊은이를 위한 잠언
다음은 모든 젊은이들이 항상 염두에 두면 좋은 잠언(리빙 바이블)의 몇 구절이다:
잠언 2:16-20: 오직 여호와의 지혜만이 부도덕한 여자의 아첨에서 남자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이 소녀들은 남편을 버리고 하나님의 법을 무시했습니다. 그들의 집은 지옥과 죽음으로 가는 길에 있습니다. 그들에게 들어가는 남자들은 끝장입니다. 이들 중 어느 것도 다시는 예전 같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경건한 사람의 발자취를 따르고 올바른 길을 가십시오.
잠언 3:3-6: 진실하고 친절함을 잊지 마십시오. 이 미덕을 단단히 잡으십시오. 마음속 깊이 새기십시오. 하나님과 사람의 칭송과, 선한 판단과 상식에 대한 평판을 원한다면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십시오. 절대 자신을 믿지 마세요. 당신이 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첫째 자리에 두십시오. 그러면 그분이 당신을 인도하시고 당신의 노력을 성공으로 장식하실 것입니다.
잠언 4:23-27: 무엇보다도 애정을 지키십시오. 그것들은 당신의 삶의 다른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부도덕한 소녀의 부주의한 키스를 피하십시오. 그녀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으십시오. 똑바로 앞만 보십시오. 고개를 돌려 쳐다보지도 마세요. 발로 디딜 곳을 잘 살피십시오. 곧은 길을 고수하고 안전하게 하세요. 곁길로 가지 마십시오. 위험에서 발을 뒤로 빼십시오.
잠언 5:3-14: 음행하는 여자의 입술은 꿀 같이 달콤합니다; 부드러운 아첨은 그녀의 장사의 밑천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는 양날의 검처럼 날카로운 양심의 가책만 남게 될 것입니다. 그녀는 당신을 죽음과 지옥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 그녀는 생명의 길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꼬불꼬불한 길을 비틀거리며 어디로 이어지는지조차 깨닫지 못합니다. 젊은이들이여, 내가 한 말을 절대 잊지 마십시오: 그녀에게서 도망치십시오. 그녀의 집에 가까이 가지 마십시오. 당신이 그녀의 유혹에 넘어가 당신의 명예를 잃고 잔인하고 무자비한 자들에게 당신의 남은 생애를 바칠까 두려워하십시오; 성병이 너희 몸을 삼킬 때에 너희가 괴로움과 수치로 신음하며, "아 내가 듣기만 하였더라면, 내 마음대로 하려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어찌 충고를 듣지 아니하였는가? 내가 어찌 이리도 어리석은가? 이제 나는 대중의 불명예를 직면해야만 한다" 말할까 염려하십시오.
잠언 6:20-29: 젊은이여, 네 부모에게 순종하라. 잊지 않도록 지시 사항을 손가락에 묶으십시오. 그들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밤낮으로 그들의 조언이 너를 인도하여 해를 입지 않게 하리라; 아침에 일어나면, 그들의 지시에 따라 새로운 날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조언은 위험에 대해 경고하고 좋은 삶을 살게 하기 위해 마음의 어두운 구석을 비추는 한 줄기 빛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조언은 모든 아첨과 함께 값싼 소녀들로부터 당신을 멀리하게 할 것입니다. 그 소녀들의 아름다움을 탐내지 마십시오. 그 소녀들의 수줍음이 당신을 유혹하게 하지 마십시오; 그러한 소녀들은 한 남자를 가난하게 만들고 그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불을 가슴에 품고 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가 뜨거운 석탄 위를 걷는데 발에 물집이 생기지 않을 수 있습니까? 간음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자신의 죄에 대하여 벌받게 될 것입니다
잠언 6:32-35: 간음하는 자는 완전히 미련한 자니, 이는 자기의 영혼을 멸함이니라. 상처와 끊임없는 불명예는 그러한 사람의 운명이 될 것입니다.
잠언 7:1-27: 내 아들아, 내 충고를 따르라; 항상 명심하고 지키십시오. 내 말을 당신의 가장 소중한 소유물로 지키십시오. 그것들을 기록하고 또한 당신의 마음 속에 깊이 간직하십시오. 연인처럼 지혜를 사랑하십시오. 그것(지혜)이 당신을 붙잡아 여자들과 관계를 갖는 것을 막도록 하십시오 - 여자들의 아첨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막도록 하세요. 어느 날 나는 순진하고 상식이 없는 청년이, 황혼 무렵에 길을 따라 이 버릇없는 소녀의 집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그에게 다가갔고, 건방지고 도도해 보였고, 매혹적인 옷을 입었습니다. 그녀는 팔로 그를 감싸고 그에게 키스했고 건방진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난 바로 당신을 찾으러 왔어요 그리고 당신이 여기 있어요! 나와 함께 집에 가면 멋진 저녁 식사를 만들어 드릴게요. 그 후에는 - 우리의 사랑을 가득 채워요." 그래서 그녀는 그가 그녀에게 굴복할 때까지, 그녀의 아름다운 말, 그녀의 구슬리기와 그녀의 감언으로 그를 유혹했습니다. 그는 그녀의 아첨을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도살장으로 가는 소처럼, 또는 덫에 걸려, 심장에 화살에 맞아 죽기를 기다리고 있는 수사슴처럼 그녀를 따랐습니다. 그는 올무 속으로 날아가는 새와 같았고, 거기에 닥칠 운명을 알지 못했습니다. 젊은이 여러분, 제 말을 들으십시오. 듣기만 하지 말고 순종하십시오. 당신의 욕망에 휘둘리지 마세요. 그녀에 대해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녀에게 가까이 가지 마세요. 그녀가 당신을 유혹하고 꾀지 않도록, 그녀가 걷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세요. 지옥으로 가는 길을 찾고 싶다면, 그녀의 집을 찾으세요.
육신과 옛사람
예수님은 인간으로서 자신의 뜻을 가지고 계셨다. 그러나 그분은 결코 자신의 뜻을 행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항상 자신의 의지를 십자가에 못 박았고, 따라서 하나님의 성품이 그분의 삶을 지배했다. 우리는 거듭날 때 하나님의 성품을 부여 받는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그 하나님의 성품이 표현되느냐 억압되느냐는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이것이 갈라디아서 5장 17절에 언급된 성령과 육신(flesh)의 갈등이다.
많은 사람들이 육신을 옛 사람과 혼동한다. 옛 사람과 새 사람은 본성이 다른데, 첫 번째는 인간적(아담적)이고 두 번째는 신적이다. 그러나 육신은 우리를 유혹하는 욕망의 창고이다. 이러한 욕망은 너희의 집(너희의 마음)에 들어가기 위해 도둑이 와서 너희의 문(당신의 의지)을 두드리는 것(유혹)과 같다. 늙고 불충실한 종(옛 사람, 아담의 본성)이 그들을 위해 문을 열어주곤 했다. 하나님은 이제 그 종을 죽이고(롬6:6), 그 안에 새 종을 두셨다(새 사람, 신적 성품). 그러나 강도(육신)는 그대로이다. 그러나 새 사람이 제대로 먹지 않으면, 그는 문을 닫아둘 만큼 충분히 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신자는 원하지 않는데도 죄에 빠지게 된다.
예수님은 사람으로서 "순종을 배우셨다"(히 5:8). 왜냐하면 그분은 왕이 순종을 배울 수 없는 것처럼, 하늘에서 하나님으로서 순종을 배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처럼 하나님의 성품을 얻을 필요가 없었다. 그분은 태어날 때부터 그런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육신을 충실하게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에, 사람으로서 여러 가지 상황에 대처하고 여러 가지 시험을 극복하는 지혜가 자라났다. 이것이 "예수님은 순종을 배우셨다"라고 말할 때 의미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약 12-13세가 될 때까지 성적인 영역에서 시험을 받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그 때까지는 그 영역에서 순종을 배우거나 자기 의지를 죽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분이 그때까지 그 영역에서 불결하셨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니. 그는 항상 완벽하게 순수했다. 학생은 11학년이 될 때까지 미적분학에 합격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그가 미적분학에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니. 그는 11학년이 될 때까지 미적분학을 공부하지 않았다.
예수님의 삶을 바라보고 우리 자신을 그분과 비교하고 그리고 그분과만 비교하는 것이 항상 겸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예수님이 인격으로 이 땅에서 항상 하나님이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래서 그분은 예배를 받으셨다, 우리는 그것을 받을 수 없다. 예를 들면: 너희가 개미를 돕기 위해 개미가 되었다면, 너희는 여전히 한 인격체로서 사람이다. 그러나 너희가 개미의 모든 한계, 유혹, 자원 및 능력을 갖게 될 것이다. 너희의 인격은 변하지 않을 것이지만, 너희의 능력은 바뀔 것이다.
예수님의 본성을 분석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그분도 우리와 같은 시험을 받으셨고 이기셨음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 - 그리고 우리도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가면 이길 수 있다. 소화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설명할 수 없어도 우리는 음식을 소화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를 분석하는 사람들은 잘못된 길로 들어간다. 시험을 피하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기만 하면 된다.
겸손과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겸손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항상 함께 간다(잠22:4 참조).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도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증거는 우리가 자신에 대해 낮은 생각을 가질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영으로 충만하셨고, 이로 인해 "하나님을 경외함 속에서 빨리 분간하시게 되어, 그분은 보고 들은 것을 통해 받는 느낌으로 결코 판단하지 아니하셨다"(사11:2,3). 우리가 겸손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우리는 듣거나 본 적이 있는 다른 사람들과 다양한 상황에 대해 빠르게 의견을 형성할 것이다(심지어 표현하기까지). 경건의 한 표는 우리가 "듣기는 빨리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약1:19),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먼저 듣기 전에는 의견을 내는 데 더디고 거의 전적으로 의견을 제시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어떤 일을 하고자 하는 열망이 크다면, 양심의 가책을 덜기 위해 간단히 기도한 다음, 하는 일에 대해 "마음이 평안하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쉽게 스스로를 속이고 그 일을 실행에 옮길 수 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놓칠 수 있다. 기억하여라: 결정을 내리는 것이 더 중요할수록, 행동하기 전에 하나님을 더 많이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최종 결정을 내리기 전에 부모님과 상의하여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훈련
육신은 기본적으로 게으르고 쾌락을 사랑하고 편안함을 사랑한다. 그것에 속지 말아라.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할 때, 너희의 감각을 통해 오는 느낌을 거부해야 한다. 너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땅과 하늘의 차이만큼이나 차이가 크다(사55:8,9). 일을 하는 하나님의 방법은 너희의 방법보다 훨씬 높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너희가 그분께 복종하여 그분의 최고를 얻기를 원하신다.
대학에 다니는 학생으로서 기도에 할애할 시간이 많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결정을 내릴 때 주님을 기다리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매일 몇 분 동안 하나님과 시간을 보내도록 자신을 훈련하여라 - 가급적이면 아침에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좋다. 그것이 아침에 가능하지 않다면 하루 중 어느 때라도 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받는 느낌이 너희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은 매일 너희와 소통하기를 원하신다. 이것은 성경의 첫 페이지에 나오는 메시지이다. 다음과 같이 기록 하기를: "첫째 날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둘째 날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셋째 날에....... 넷째,....... 다섯째 날, 여섯째 날에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매일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났고 최종 결과는 "매우 좋다"였다. 너희가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면, 너희의 삶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이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마 4:3)고 말씀하셨다.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을 첫째 자리에 두지 않으면 타락하기가 매우 쉽다.
"하나님을 듣는다"는 것은 성경을 읽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 종일 양심 안에서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고 그분을 불쾌하게 하는 일을 피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응답을 간절히 기다려야 한다. 때로 그분의 대답은 '아니'일 수도 있고, 때로는 '기다려'일 수도 있다. 빨간색, 노란색 및 녹색 신호등처럼, 하나님의 응답은 "아니", "기다려" 또는 "예"일 수 있다.
우리가 "남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거나(다른 사람에게 요구함), 남을 비난하거나, 남을 비방하는"(이사야 58:9 참조) 경우에도 우리의 영적인 귀는 귀머거리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악을 피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께 말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그리고 경청은 그분께 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생각해 보아라: 나이가 많고 더 경건한 사람과 전화로 이야기하고 있다면,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듣게 될 것이다. 참된 기도에서도 그러해야 한다 - 하나님께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들어야 한다.
우정, 상담 및 대화
친구와 함께 갈 때, 의심스러운 곳으로 가는 것을 발견하면 용기를 내어 친구에게서 떨어져 나와야 한다. 비록 그것이 너희가 방에 혼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더라도, 적절한 시기에 그러한 친구로부터 벗어나라. 그들에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하나님께 구해라.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혼자 있을 때 아무런 제약이 없다. 따라서 너희가 사귀는 친구를 조심해라
디도서 2장 6절(리빙 바이블)에서 우리는 젊은이들에게 주어진 두 가지 권고를 읽는다: "(1) 현명하게 행동하고 (2) 삶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십시오." 이 두 가지 권고를 항상 마음에 새겨라.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 젊은이들이 표면적인 종교성을 가지고 얄팍하고 유쾌한 삶을 사는 것은 그들에게 영원한 후회를 많이 하게 할 것이다. 주변 그리스도인들의 기준에 영향 받지 마라. 너희는 그들에게 더 큰 진지함, 더 큰 희생, 더 큰 경건으로 영향을 주어야 한다. 이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여라.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을 받아들이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라. 자신의 뜻대로 하고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이 땅에서 비참한 삶을 살다가 그 다음에는 지옥에 갈 운명이다.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에게 자기 의지적인 방식을 포기하도록 강요할 수 없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그들의 죄악된 방식에 대한 허가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교회의 낮은 기준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랐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을 완전히 악하고 사탄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 한, 사람들은 영원히 죄를 가지고 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진실한 사람들은 악한 자의 손아귀에서 하나님에 의해 구원받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사탄에 의해 멸망할 것이다.
사람들, 특히 기독교 바리새인들과 대화할 때 지혜롭게 행동하여라! 모든 쓸모 없는 대화를 피하라. 어떤 사람들은 너희와 너희의 가족에 대한 사적인 세부 사항을 몹시 알고 싶어할 수 있다. 그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키지 마라. 그냥 그들에게 "나는 차라리 그런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해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비둘기 같이 흠 없고 뱀 같이 지혜로워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절대로 여자에게 조언하지 마라. 자매보다 형제와의 교제를 추구하라.
어떤 식으로든 너희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사람들을 조심하라. 너희가 너희의 편지에 쓰는 것을 조심해라. 사람들은 너희의 편지를 보존하고 있다가, 너희와 사이가 안 좋아지면 언젠가 그것을 가지고 너희를 비난할 수도 있다. 쉽게 속지 마라. 모든 일에 조심하여라.
학위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영적으로 놓치는 일이 없을까 염려된다. 너희의 기독교 신앙은 너희의 삶의 단순한 부록으로 강등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항상 너희가 하는 모든 일의 중심이어야 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신자들은 양심의 가책을 덜기 위해 대부분의 시간에는 자신의 일을 하고 일요일에 그들의 생활에 약간의 종교를 붙인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께 그의 의무를 했다고 느낀다.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주신 분을 모욕하는 것이다.
너희는 그날 내린 결정, 그날 정한 너희의 삶을 위한 우선 순위, 그날 너희의 마음에 들어오게 허용한 정보(특히 너희의 눈을 통해, TV 등을 통해)에 대해, 언젠가는 기쁨이나 후회 중 하나를 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하루를 살아야 한다. 매일 성경을 읽고, 숙소에 있는 룸메이트에게 너희가 그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하여라.
"하루 종일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살라"(잠 23:17 - KJV). 어디선가 한 번의 부주의한 실수로 평생 후회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우리는 부모로서 항상 주님을 위해 전심인 너희를 보고 싶다.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자 갈망이며 우리는 그것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을 믿는다. 우리는 너희 중 누구도 부자나 유명인이나 이 세상의 눈에 위대한 일을 성취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우리는 너희가 항상 예수님을 위한 불타는 증인이 되기를 원한다.
또 다른 예수
바울은 이 세상 모든 것을 버리고 "쓰레기"로 여겼던 후에야 그리스도를 얻었다고 말했다(빌3:8). 예수님은 장사꾼이 값진 진주를 사려면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마13:46). 그러면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고 어떻게 그리스도를 얻을 수 있겠는가? 오늘날 많은 "신자들"은 세속적인 야망과 쾌락과 편안함과 안락함에 대한 사랑을 유지하면서도 여전히 그리스도를 얻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얻은 것은 바울이 얻은 예수님이 아니라 "다른 예수"(고후11:4)임에 틀림없다. 이 세상이 제공하는 모든 위대한 것들은 그리스도에 비하면 쓰레기이다. 너희를 위한 나의 기도는 너희가 이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다음 중 어느 것도 하나님 보시기에 위대하게 여기지 말아라: 너희의 지성, 건강, 훌륭한 외모, 은사와 능력, 좋은 대학에서 공부한 것, 학업 성취, 다른 사람들이 너희를 존경하는 것 등. 너희만큼 영리하거나 똑똑하지 않거나, 너희가 가진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을 생각해 보아라. 하나님 보시기에 너희가 그들 중 누구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라. 너희가 가진 유일한 가치는 신성한 성품에 참여한 정도이다. 나는 너희가 평생 이 진리를 붙잡고 살기를 기도한다.
견디는 믿음(Enduring Faith)
믿음이 없이는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히11:6). 동산에서 이브의 실패는 믿음의 실패였다. 그녀가 그 나무의 매력에 유혹을 받았을 때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과 지혜만을 오직 믿었다면, 사랑의 하나님께서 왜 그것을 먹지 못하게 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해도 그녀는 죄를 짓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탄이 그녀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하자, 그녀는 매우 빨리 타락했다. 하나님은 또한 우리에게 금하신 것도 많이 있고, 우리가 드리는 기도도 하나님께서 허락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보시는 것이 많이 있다. 그럴 때 우리는 그분의 완전한 사랑과 지혜를 신뢰해야 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버림을 당하셨을 때에도 아버지를 믿었다. 그분은 "오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나의 하나님이시여....."라고 말했는데, 그 뜻은 "주께서 나를 버리신 이유를 내가 이해할 수 없더라도, 당신은 여전히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뜻이다. 예수님의 질문에 하늘에서 응답이 없었다. 그러나 그분은 믿으시고 죽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믿음으로 끝까지 견디는 것이 의미하는 바이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탄이 그를 체질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사탄이 하나님께 욥의 체질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한 방식과 유사했다(구약에서). 사탄은 하나님의 허락 없이, 우리에게 아무 것도 할 수 없다(심지어 우리를 시험하는 것도). 그러나 베드로가 체질 받으려고 했을 때, 예수님은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다고 확신시켜 주셨다(눅22:31,32). 중요한 것은 그것뿐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시험 받지 않기를, 건강이나 재물이나 직업이 실패하지 않기를 기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의 믿음이 실패하지 않기를 기도하신다.
그러므로 믿음은 예수님 보시기에 우리의 가장 중요한 보물이다. 믿음이 있으면 베드로처럼 비참하게 실패하더라도 결코 낙심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고백할 때 우리를 완전히 깨끗하게 씻어 주시는 어린양의 피에 관한 우리의 간증의 말로 뛰어올라(일어날 뿐 아니라 뛰어올라) 사탄을 이길 것이다(계12:11).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깨끗함을 받았고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사탄에게 말해야 한다(히8:12). 사탄은 우리의 생각을 들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입으로 그것을 말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사탄을 이기고 사탄은 우리에게서 도망칠 것이다.
"오 나의 원수여, 나로 인하여 기뻐하지 마라. 내가 넘어질지라도 나는 일어나리라. 내가 흑암에 거할지라도 여호와는 나를 위한 빛이시라. 주께서 나를 빛으로 인도하실 것이요. 내 원수가 보고, 나더러 '주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한 것을 부끄러워하리라. 그 때에 그가 거리의 진흙 같이 짓밟힐 것이다(우리 발 아래)"(미7:8-10).
우리는 항상 담대히 말해야 한다.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어떤 사람이나 귀신이나 상황이나 무엇이든) 내가 결코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하나님이 나를 결코 떠나지 아니하고 버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13:6,5). 그것이 우리 믿음의 담대한 고백이다.
너희의 마음을 지켜라
어디를 가든지 유혹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 도발적인 텔레비전 이미지와 책과 잡지에 실린 사진과 기사는 큰 올무가 될 수 있다. 한 번 마음속에 품은 생각은 무엇이든 영원히 거기에 남아 있음을 기억해라.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 그러나 너희가 기억에 흡수한 것을 결코 지울 수는 없다. 너희는 기억이 너희의 꿈과 생각에서 너희를 괴롭히기 위해 다시 돌아오지 않도록, 기억이 기억 창고의 밑바닥으로 밀려 내려가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너희의 기억 창고의 맨 위층을 채울 때만 그렇게 밀어낼 수 있다.
나는 너희가 매주 좋은 기독교 책(너희는 내 책으로 시작할 수 있다)에서 적어도 한 챕터를 읽고, 매주마다 적어도 나의 메시지(on tape)를 한 장 이상 듣고, 적어도 한 명의 신자와 일주일에 한두 번 교제하도록 자신을 훈련할 것을 제안한다.
너희의 생각이 누구에게도 속박되게 하지 말아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면, 공부를 잘해야 한다. 공부를 게을리하면, 교회 모임에 가는 것이 미덕이 될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말하겠다. 그러나 교제는 중요하다, 하지만 반드시 모임에 참석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교제는 한 두 명의 신자와 비공식적으로 하는 것이 가장 좋다.
믿음
'승리'도 '구원'처럼 믿음으로 주장할 수 있는가?
요한일서 5장 4절은 "세상을 이긴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 그리고 말씀에서 "세상"은 "육신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인생에 대한 자랑"으로 정의된다(요일2:16).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을 이기는 것은 믿음에 의한 것임을 가르쳐 준다. 그런데 이 믿음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 지혜와 능력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 안에서 우리의 인격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다. 믿는 것은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 - 요한복음 1장 12절에서 명백히 밝히고 있는 바와 같다. 지적인 믿음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분의 뜻을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는(accept)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의지를 거부하기로 선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을 의미한다(갈5:24). 이것(자신의 의지를 거부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를 도와줄 은혜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믿음에서 나온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최선임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뜻을 죽이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TV를 볼 때 적용된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하셨을 일, 즉 쓸모 없거나 선정적인 프로그램이나 영화를 보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는가? 아니면 너희의 욕망을 기쁘게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너희에게 최선임을 믿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믿음이 없이는 승리할 수 없다.
너희가 따라야 할 예수님을 항상 생각하여라. 너희의 육신이 약하다는 것을 잊지 마라. 예수님은 아버지의 도움을 끊임없이 부르짖으셨다. 너희도 똑같이 해야 한다. 예수님의 이름은 공격을 받을 때 언제든지 피할 수 있는 망대임을 기억해라(잠18:10). 그리고 지상 어느 곳에서든 어려움에 처해 있다면 그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이든 구할 수 있다.
완전함으로 나아가기
로마서 7장 14-25절은 완전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구절이다. 바울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신의 경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나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롬 7:22)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울이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1장부터 시작하면서, "복음은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롬 1:16)을 설명하는 순서로 써있다. 바울은 3, 4, 5장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에 대해 말한 후, 로마서 6장에서 죄에 대한 승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런 다음 바울은 7장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그는 그 시점에서 자신의 인생에서 회심하지 않은 기간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아니. 그는 복음에 대한 설명을 계속하고 있다. 이제 그는 완벽을 추구하는 데 관심이 있는 사람이 내면의 삶에서 발견하는 투쟁에 대해 이야기한다. 의식적으로 그는 앞으로 하나님의 뜻만을 행하기로 선택했다. 그는 승리를 갈망하며 필요할 때 그를 도울 은혜를 찾았다. 그러나 그는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한다: (i) 방심하는 순간에 그는 여전히 그가 이미 빛을 가지고 있는 영역(의식적인 죄)에 넘어진다; 그리고 (ii) 때때로 그는 기독교 기준에 미치지 못하여 넘어진 후에야 그것을 깨닫는다(넘어지기 전에는 빛이 없었던 새로운 영역 - 무의식적인 죄).
전적인 완전함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그러한 투쟁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로마서 5장에서 멈췄기 때문이다. 죄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추구하는 사람은(롬6:14), 이 투쟁을 발견하고 이렇게 말한다, "오 가련한 사람이로다, 나를 거듭되는 영적인 사망에 이르게 하는 이 죄 많은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그러한 투쟁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의 내면의 삶에 대해 부정직하다. 비록 우리가 한 순간의 연약함 속에 넘어졌을 때에도, 그것은 우리가 회개하고 버려야 할 죄이며, 그리스도께 그분의 피로 정결하게 해달라고 간구해야 할 죄지만,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큰 희망을 주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우리의 차후의 후회는 그것을 매우 명확하게 보여준다. 우리가 계속 그런 죄를 미워하고 애통하기 때문에, 우리도 언젠가는 이기게 될 것이다.
로마서 7장을 주의 깊게 읽고 하나님께 빛을 주시도록 구해라. 로마서 7:1-13은 우리의 지침으로서 율법에서 해방되는 것에 대해 말한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와 결혼하여 율법보다 더 높은 표준에 따라 생활하지만,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율법주의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우리는 "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고 오래된 법조문으로 섬기지 아니한다"(롬 7:6).
자신의 투쟁에 대해 부정직한 자에게는 승리가 없다. 그것은 주로 로마서 7장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투쟁에 대해 절대적으로 정직한 질문이다. 나는 너희가 내면의 투쟁에 대해 정직하지 않은 사람들을 모두 피하도록 촉구하고 싶다 - 왜냐하면 그들은 위선자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여라.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요구하시는 가장 중요한 것은 정직함임을 기억하여라. 그것이 순결의 첫걸음이다.
하나님을 경외함
젊었을 때,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안다고 생각하기 매우 쉽다. 어떤 젊은이든지 어리석은 일을 하는 것에 두려움이 없어서, 어리석은 일을 많이 할 것이다. 그것으로부터 구원받는 유일한 방법은: (1)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항상 자신을 지키는 것, 그리고 (2) 겸손하여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이다.
낯선 땅에서 하나님께 충실했던 18세 소년의 본보기로서 요셉을 생각해 보라, 그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무장했고 그것은 사탄의 올무에서 그를 지켜주었다. 하나님께서 너희가 어디를 가든지 동일한 방법으로 너희를 보호하시기를 바란다. 요셉의 모범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경우에도 18세의 어린 소년이 주님께 진실하게 서있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a) 그는 기준이 없는 부도덕한 사회의 한가운데에 살고 있었다;
(b) 그는 날마다 여자에게 시험을 받았다;
(c) 그의 부모는 수백 마일 떨어져 있었고 그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d) 그는 그를 격려할 성경이나 경건한 문학이 없었다;
(e) 그는 성령의 능력을 받지 않았다;
(f) 그에게는 교제할 신자가 없었다;
(g) 그는 갈 수 있는 영적 모임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가지고 있었던 것은 그가 집에서 보낸 생애의 처음 17년 동안, 그의 아버지 야곱에 의해 그에게 심어진 하나님을 경외함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함은 오늘날에도 어떤 젊은이든지 죄에서 지켜주기에 충분하다.
안일함과 잘못된 우선순위
오늘날 대학의 분위기는 너무 악해서 죄에 대해 철저하지 않으면, 길을 잃을 것이다. 1년 정도 어떤 심각한 죄에 빠지지 않고 나면, 자신이 노련한 극복자가 되었다고 상상하기 시작할 수 있다. 그러다가 자신감이 생겼을 때 실패가 찾아온다. 공부에 두 가지 방해 요소가 있을 수 있다: (1) 여학생 및 (2) 특별 활동에 대한 불균형한 관심, 그것은 심지어 기독교 모임에 참석하는 것을 포함할 수 있다.
첫 번째 위험은 명백한 것이다. 그러나 수십만 명의 젊은이들이 그 시기에 소녀들에게 부주의하여 평생 동안 인생과 경력을 망쳐왔다. 부주의한 실수는 종종 너희의 전체 경력을 마감하기에 충분하다. 너희가 이것을 인식한다면, 너희는 이 영역에서 항상 극도로 조심할 것이다.
두 번째 위험은 그렇게 명백한 위험이 아니다. 왜냐하면 많은 모임에 참석할 때 마치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희가 하나님을 공경 하면 그분도 너희를 공경하실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은 항상 자신을 공경하는 자를 공경하신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너희가 너무 많은 모임(예배)에 참석하기 때문에 공부를 게을리한다면, 그리고 성경의 어떤 약속을 주장하면서, 너희의 시험에서 하나님께서 너희를 도와주실 것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시편 91:12(사탄이 예수님께 이 말씀을 주장하라고 제안함)을 주장하고 성전 지붕에서 뛰어내리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플 때 약을 먹지 않고 하나님께서 약 없이 치료해 주시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행하는 것과 같은 유형의 어리석음이다. 농부가 씨를 뿌릴 때 씨를 뿌리지 않는다면, 기도만으로는 수확을 기대할 수 없다!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하는 것은 언제나 옳다. 그러나 많은 기독교 모임을 첫째 자리에 두는 것은 하나님을 첫째 자리에 두는 것과 같지 않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나사렛 목공소에서 고객의 주문을 처리하기 위해 마무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면, 제 시간에 고객의 물건을 준비하기 위해 나는 그분이 회당-모임도 빠지셨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것이 바로 작은 일에 충실하다는 의미이며 - 그것이 진정한 영성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예수께서 항상 아버지를 첫째 자리에 두셨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본에서 영성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이성을 따른다면, 우리는 영적인 것이 아니라 결국 종교적인 사람이 될 것이다.
다른 젊은이들이 저지르는 실수는 너희가 스스로 같은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경고가 되어야 한다. 현명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실수에서 배우고 자신도 같은 실수를 하지 않는다. 주님께서 그분 자신만을 위해 너희를 보호하시고, 너희가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기를 바란다.
믿음과 이성
기도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에게 가장 쉬운 일이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무력함과 무기력함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리한 어른들은 그것을 인정하기 어렵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우리의 이성과 지성에 더 많이 의존할수록, 우리는 기도를 덜 하게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성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일을 하시는 이유에 대해 더 많이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순종은 "이성의 순종"이 아니라 "믿음의 순종"이다(롬 1:5). 하나님은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기를 원하지 않는 이유를 아담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아담은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셨고 따라서 하나님의 명령(심지어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경우에도)이 그에게 가장 좋은 것임을 아는 것으로 충분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잠 3:5). 그러므로 아담이 실패한 것은, 주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믿음의 실패였다. 여기서 우리도 실패한다.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열렬히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아는 것보다 더 잘 아신다는 것과, 그분이 지상의 모든 사건을 명령하실 만큼 충분히 전능하시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그분의 모든 명령에 기쁘게 복종하고, 앞으로 우리의 삶에서 그분의 뜻만을 행하기 위해 모든 것을 그분께 바치고, 즉각적인 응답이 없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기도하고,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 정하신 모든 것에 질문 없이 복종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과 능력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이것들 중 어느 것도 할 수 없다.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으면, 단순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쉽게 성령의 충만함을 마음에 받을 수 있다(눅11:13).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깨끗한 양심(알고 있는 모든 죄를 하나님과 사람에게 고백함), 성령의 충만에 대한 굶주림과 목마름, 우리 삶의 알고 있는 모든 영역을 그분께 완전히 바치는 것, 그리고 사랑의 아버지께서 우리가 구하는 것을 반드시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러면 우리는 요청할 수 있다 - 그리고 즉각적인 느낌이나 감각이 없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한 것(성령충만)을 들어주셨음을 믿어라. 외적인 현상은 나중에 나타날 것이다. 그러니 어린아이처럼 되어라.
믿음 -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확신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우리를 물에 담그시는 분이 우리를 익사시키지 않고 물에서 일으키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이것이 우리도 삶의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신뢰)을 가져야 하는 방법이다. 그분이 우리가 자아에 대해 죽어야 하는 상황이나 다른 사람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상황을 마련하실 때, 우리는 그분이 사용하시는 인간적인 도구들 너머로 하나님 그분을 보아야 한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오직 하나님만 볼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마 5:8) - 어떤 인간적인 도구들을 보지 않는다.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만 보면, 마음이 깨끗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 사람들에 대해 불만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깨끗할 때 하나님만 보게 되고, 그 때에 우리를 죽음으로 잠기게 하신 이가 우리를 또한 일으키시리라는 확신(물-세례와 마찬가지로)을 가질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심과 같이 하나님에 의하여 다시 살리심을 받으리라"(딤후2:11). 그런 다음 우리는 믿음으로 죽는다(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그러면 우리는 영광스러운 부활의 삶에 들어갈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항상 우리가 살아온 것과 똑같은 패배한 아담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자아에 대해 죽기를 거부할 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신뢰)이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
믿음의 사람은 우리가 야고보서 1장 6-8절에서 읽은 것처럼 한 마음을 품은 사람이다. 그러한 사람은 인생의 단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있다 -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그런 사람만이 믿음으로 산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보이지 않는 것들만이 영원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말하는 것을 믿는다. 많은 "신자들"은 지옥에 가고 싶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으로 살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 안에서 말씀하신 것이 사실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의 삶에서 행하고 말한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께 설명을 해야 한다고 믿지 않는다. 자기를 기쁘게 하고 이 세상의 쾌락을 즐기고 돈을 좇아 산다면 이 세상을 떠난 후 영원히 후회하리라고 믿지 않는다. 부자(예수님이 말씀하신)는 죽어서 지옥에 갔고, 죽자 마자 후회했고, 누군가가 가서 그의 형제들에게 그가 이 땅의 삶에서 매일 회개하는 가운데 살지 않은 것과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말해주기를 원했다(눅16:28,30). 우리는 모두 여기 지상에서 보호 관찰 중에 있으며, 하나님은 우리가 동물처럼 땅의 티끌을 위해 살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로서 선함, 사랑, 완전한 순결, 겸손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을 위해 살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우리를 시험하고 계신다. 주님께서 너희에게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들을 위해 살 수 있는 은혜를 주시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약자의 편이다
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설교하는 높은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결코 낙심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건강한 사람이 아니라 병든 사람을 도우러 오셨다. 성경 전체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약하고 힘없는 자들과 나그네와 과부와 고아를 돌보신다는 것을 본다. 예수님은 간음한 자들, 도적들(세리와 십자가에 달린 도적들), 문둥병자, 귀신 들린 자들, 이방인과 같은 유대 사회의 버림받은 자들(예: 로마 백부장과 수로보니게 여자)을 특별히 돌보셨다. 오늘도 그분은 거듭 실패하는 자들, 교회 모임에서 뒷자리에 앉은 자들을(그들 자신이 부끄러워서) 돌보신다.
사무엘상 16장에서 우리는 이새가 그의 막내아들 다윗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무엘이 그의 아들 중 하나를 왕으로 선택하려고 왔을 때 그를 부르지도 않았다는 것을 읽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을 주목하여 택하셨다. 그리고 다윗이 죄(간음과 살인)에 깊이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깊은 슬픔으로 회개하였기 때문에 주님은 여전히 그를 버리지 않으셨다. 사실, 하나님은 그의 실패까지도 사용하셨다. 왜냐하면 다윗의 실패가 없었다면 시편 51편(수백만 명을 축복한 시편 51편)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들이 회개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멸시 받고 영적이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 사람들과, 영적인 삶에 실패한 사람들과 자신을 연합하신다.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 부인했다, 그가 너무 심하게 실패했기 때문에 동정심 많은 사도가 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나중에 바리새인들처럼 완고한 태도를 취하지 아니하고 항상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다른 죄인들을 바라 보았다. 그런 사람만이 사도가 될 자격이 있다. 이 모든 것은 예수께서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케 하려 오셨다는 것, 지난 20세기 동안 세상에서 가장 큰 죄인들을 택하여 그분의 가장 위대한 사도들로 세우신 것을 분명히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래서 모두에게 희망이 있다.
하나님은 신실하다
나는 수년 전에 "주님, 저는 당신의 가족을 돌보고 당신은 나의 가족을 돌보십니다"라고 말하면서 주님과 거래를 한 이후로, 주님은 우리 모두를 돌보시는 데 전적으로 신실하셨다. 그래서 내 아들 네 사람을 주님께서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재정적으로, 취직과 결혼(그 때가 오면)과 그 밖의 모든 일에서 너희들의 삶 끝까지 돌봐주실 것을 믿는다. 하나님은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자를 영화롭게 하신다(삼상2:30); 경건한 자의 자녀는 복이 있느니라(잠20:7).
여러 해 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녀들은 다 주의 제자가 되어, 복이 크리라"(사54:13)는 동일한 약속을 엄마와 나에게(아빠) (따로따로) 주셨다. 그리고 나는 바울이 한 번 말한 것처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27:25)고 말한다. 그러므로 나는 주님께서 그분의 말씀을 지키실 것을 알기 때문에 너희들 중 누구도 염려하지 않는다. 부모로서, 우리는 할 일을 다했다. 주님은 반드시 그분의 일을 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우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4:19)고 약속하신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육체적, 물질적, 재정적, 정서적, 지적 또는 영적 필요가 그 약속에서 제외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모든 필요는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주시지 않고,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신다. 이 약속이 성취되는 유일한 조건은 마태복음 6:33 -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에 언급되어 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구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아신다(마6:8,32).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와 거룩함을 우리 삶의 최우선 순위에 두면, 우리가 구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필요한 모든 것이 제공된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
매일 기도로 하나님과 대화하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 몇 분으로 시작하는 훈련을 잃지 마라. 그렇게 시작하면 하루가 훨씬 더 나아지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 훈련을 유지하여라. 아침에 가장 먼저 하는 것을 놓쳤으면, 그것을 위해서 그 날 안에서 나중에 시간을 내어라. 주머니에 작은 신약성경을 가지고 다녀라. 그러면 때때로 그 일부를 읽을 수 있다. 그리고 가능하면 매주 적어도 한 개 이상 내 메시지 테이프를 들어라.
하나님의 말씀 어딘가에 우리의 모든 문제에 대한 답과 해결책이 있다. 예수님은 사람이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면, 우리는 살지 못하고 영적으로 죽을 것이다. 우리의 필요에 따라 말씀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께 10초 기도를 드리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때때로 그것은 우리에게 많은 헛수고와 절망을 덜어줄 수 있다. 아담의 후손은 오감에 의해서만 산다. 그러나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듣기는 속히 하고, (우리 입을 열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노하기는 더디해야…" 한다(약1:19). 예수님은 18년(12세부터 30세까지) 동안 매년 성전에서 돈 바꾸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러나 그분은 그들에게 결코 동요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아버지께서 뭔가를 하라고 말씀하실 때까지 기다리셨다. 그런 다음 그분은 행동하셨다. 그분은 그때까지 자신을 억제하셨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말씀을 보내사 그들을 고치셨으니"(시107:20)라는 말씀을 읽는다. 치유도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다. 하나님은 말씀을 보내어 요셉을 감옥에서 풀어주셨고(시105:20), 요나를 물고기 뱃속에서 나오도록 하셨다(욘2:10). 창조를 시작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은 혼돈에 질서를 가져오셨다(창1:1-3). 그것(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도 똑같이 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빠서는 안 된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마다 항상 새로운 것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읽는 것은 컴퓨터에 데이터를 저장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필요할 때, 하나님의 영이 그 저장된 데이터에 손을 집어넣어 우리의 상황에 맞는 적절한 단어를 기억나게 하실 것이다.
이 아름다운 찬송가가 너희의 매일의 기도가 되기를 바란다: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삶을 채우소서
모든 부분에서 찬양으로
내 온 존재가 선포할 수 있도록
당신의 존재와 당신의 길을 선포하게 하소서."
주님은 빌라델비아의 지도자에게(계 3:11) 그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면류관을 잃지 않도록 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영적으로 낙심하지 않고,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 것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공부나 우리의 일로) 바쁠 때, 우리의 머리는 주님이나 성경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 우리의 마음은 여전히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깨어 있을 수 있다. 신부는 "내가 잠들었지만, 내 마음이 깨어 있었고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였다"고 말한다(아 5:2,3). 주님께서 너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귀를 기울이기 위해 끊임없이 깨어 있어야 한다. 특히 그분이 도중에 발생할 위험에 대해 미리 경고하기를 원하실 때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의 지상 생활이 목적을 가지고 아침부터 밤까지 바쁘게 하도록 허락하신다 - 그러므로 우리는 많은 유혹을 받지 않는다. 사람들이 게으름을 피울 때, 죄에 대한 유혹을 더 많이 받는다.
새 언약의 완성
신약에서 "온전함"은 "그리스도께서 가지셨던 것과 같은 마음을 갖는다"(빌 2:5)라는 뜻이다. 이것이 우리가 날마다 추구해야 하는 목표이다: 예수님이 행하셨던 것처럼 죄, 그의 제자들, 그의 원수, 죄인들, 여자들, 물질적인 것들, 그의 소유, 이 세상에 대한 염려, 쾌락, 스포츠, 모든 것에 같은 태도를 갖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모든 일에서 우리 자신의 이익과 편안함과 즐거움을 추구한다. 이것이 우리가 은혜 안에서 자라지 못하는 비참한 존재로 가는 길이다. 은혜 안에서 자라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는 온전한 데 이르게 하는 한 가지 길은, 우리가 유전 받은 육신의 자연적 성향을 죽이는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가 우리 삶의 항상 중심이 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다음은 사탄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것을 추구하도록 하는 6가지 방법이다:
(1) 교만 - 우리의 능력이나 성취에 대한 자부심
(2) 성적인 불순함 - 생각에서 시작됨
(3) 미움 - 억울함, 복수심 등
(4) 타협 - 세속적임(돈을 사랑함)과 물질적 이득을 위한 부정직
(5) 두려움, 불안, 긴장 - 미래 등에 관한 것.
(6) 율법주의 - 바리새주의.
예수님은 이 영역들 중 어느 것에도 넘어지지 않았으며, 우리도 그럴 필요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탄이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육신을 공격하도록 허락하셨고 그 과정에서 사탄은 패배했다. 예수님의 발꿈치는 사탄에게 상했지만, 사탄의 머리는 으스러졌다(창3:15).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사탄이 바울의 몸을 육체적인 질병(육체의 가시)으로 괴롭히는 것을 허락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사용하여 바울의 마음에 있는 사탄의 머리(교만)를 상하게 하셨다(고후12:7). 하나님은 사탄에 대항하여 항상 우리 편에 계시며, 우리가 모든 일에서 겸손히 그분께 복종한다면, 주님은 항상 우리를 승리로 이끄실 것이다.
감사하는 태도
일전에(1993년 8월 13일) 내가 오토바이에서 기찻길로 떨어졌을 때, 하나님은 나의 생명을 보호해 주셨다. 기찻길 게이트를 조작하던 사람이 초보인데 내가 건너기 전에 두 번째 막대를 내려서 내 가슴을 쳤고, 나는 넘어졌다. 나는 잠시 동안 의식을 잃은 채 기찻길에 누워 있었다 - 얼마나 그랬는지는 모른다. 기차가 오기 전에 누군가가 나를 끌어냈다. 나는 이제 죽은 자 가운데서 돌아온 사람처럼 느껴진다(나는 넘어져서 죽을 수 있었다). 그것은 남은 날 동안 하나님께 내 삶을 빚지고 있음을 새롭게 상기시켜 주었다. 나는 내 시간이나 에너지, 돈을 내 마음대로 쓸 수 없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읽을 수 없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말할 수 없다. 무엇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된다. 그러한 삶은 (사단이 우리에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라고 믿게 하려는 것과 같이) 사는데 부담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살 수 있는 가장 영광스러운 삶이 될 것이다 - 왜냐하면 우리 주님이 그렇게 사셨기 때문이다.
너는 또한 치명적인 사고를 당할 수 있었던 도로에서 경험을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천사들이 너를 보호하셨다. 따라서 하나님께 대한 너의 빚도 비슷하다.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자로 살기를 바란다.
사고 후 삐었던 내 손과 어깨는 사고 후 3주 만에 95%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것은 기적이었다, 그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 드린다. 그 3주 동안 배운 것 중 하나는 평범한 삶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 심지어는 손을 들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조차 3주 동안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54년 만에 처음으로, 찬양할 때 두 손을 들 수 있는 특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때까지는 그 행동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것은 나의 눈, 귀, 혀 등과 같은 내 신체의 다른 많은 부분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감사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물고기 뱃속에 있는 요나의 기도는 가장 교훈적이다(욘2장). 그곳이 비좁은 곳이었고, 물고기의 위산이 그에게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요나는 자신을 그곳에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가 여호와께 감사하기 시작했을 때에만, 여호와께서 물고기에게 요나를 육지에 토하라고 명하셨다(욘 2:9,10을 주의 깊게 읽어라). 그러므로 집이나 음식이나 상황에 대해 불평하지 마라. 감사하라. 많은 자녀들이 넓은 세상으로 나가 삶이 얼마나 힘든지를 깨닫기 전까지는, 부모와 가정에 감사하지 않는다. 감사하는 마음은 요나가 구원받은 것처럼 많은 감옥에서 너희를 구원할 수 있다.
옛 언약 희생제물에 대한 새 언약 적용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져오라고 명하신 다섯 가지 제물이 있었다. 이것들은 레위기의 처음 다섯 장(각 장에 하나의 제물)에 설명되어 있다. 그것들은:
(1) 번제: 로마서 12장 1절에서 우리 몸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말씀과 같이, 예수님께서 자기 몸을 온전히 아버지께 드리는 것을 상징한다.
(2) 소제: 유일한 피흘림 없는 제사. 우리가 먹어야 할 생명의 떡으로 자기 자신을 주시는 예수님을 상징한다.
(3) 화목제: 자신을 주심으로써, 하나님과 사람 사이, 교회 안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평화를 가져오시는 예수님을 상징한다. 우리도 자신과 타인 사이의 평화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
(4) 속죄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상징한다. (죄는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여, 과녁을 벗어나는 것이다. 참조: 롬 3:23).
(5) 속건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예수님을 상징한다. 죄는 너무나 심각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위해 옛 언약 아래 두 가지 제물을 지정하셨다. 하나는 죄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죄책감에 대한 것이다(우리는 둘 다 같은 것을 언급한다고 생각할지라도).
레위기 4장 2절, 13절, 22절, 27절과 5장 4절, 15절, 17절을 읽으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규정들은 구약 율법 아래서 의도하지 않은 죄만을 위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의도하지 않은 죄는 무의식적으로 또는 순간의 도발(눈으로 탐욕에 빠지거나 화난 말을 하는 것과 같이) 하에 행해진 죄로, 미리 계획되거나 사전에 꾀하지 않았다. 계획된 죄는 훨씬 더 심각했다. 율법에는 고의적인 죄에 대한 규정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은혜 아래에는, 고의적인 죄에 대한 용서도 규정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모두는 유죄가 될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규정을 악용했기 때문에, 바로 기독교인의 90%가 구약의 유대인들이 가졌던 거룩함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다.
쓰라린 말조차도 계획적인 경우가 많다. 하나님은 행동보다 의도를 보신다. 히브리서 10장 26-29절에 보면 우리가 계속 의도적으로 죄를 지으면, 다시는 우리 죄를 속할 제사가 없나니, 그리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를 값싼 것으로 여기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죄를 진지하게 여기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완전한 거룩함을 이루어야 한다(고후7:1).
영광은 오직 주님께만
주님을 따르려면 예수님처럼 사람들의 눈에 "무명"이 되어야만 한다(빌 2:5 - KJV).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에게는 사람들을 그분께로 이끌 만한 매력이 하나도 없었다(사53:2). 이 세상이 크게 여기는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가증한(혐오스러운) 것이다(눅 16:15). 우리가 타고난 은사와 재능을 가진 인간으로서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길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그분의 능력을 나타내실 수 없다. 바울은 "나는 내 힘과 능력을 과시하기 보다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가 되어 기쁩니다"(고후12:9-living)라고 말했다. 그것이 우리의 소명이다. 자신의 재능과 은사와 능력을 과시하거나 자랑하지 말아라. 그 대신 다른 사람들이 너희를 연약한 인간(어린양)으로 보지만, 예수님의 제자(사자)처럼 담대하고 능력 있는 사람으로 보게 하여라.
참된 교회에도 모욕을 끊임없이 당하는 덮개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오해와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그 덮개 아래에는 영광이 있다 - 우리는 정욕을 이기고 사탄을 발아래 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고 있다. 우리는 결코 사람들의 칭찬을 바라거나 그것에 감동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쓰레기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70명의 제자들에게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 10:20)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a) 우리가 누구인지; (b)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 또는 (c)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기뻐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a) 주님이 누구신지; (b) 주님께서 행하신 일; 그리고 (c) 주님께서 행하실 일로 기뻐해야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기뻐할 때, 우리 자신이 영광을 얻게 되고 그것이 우리를 다른 신자들보다 우월하게 보이게 한다. 이것이 바로 바리새주의이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손으로 하는 일을 기뻐"(행 7:41)한다 - 그 일이 귀신을 쫓아내는 일, 병든 자를 고치는 일, 말씀을 전파하는 일, 글을 쓰는 일, 접대를 잘하기, 맛있는 음식을 요리하는 일, 차를 잘 운전하는 일, 또는 훌륭한 방법으로 어떤 세상적인 일을 하는 것 등이다. 우리 자신을 위한 영광을 얻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우상숭배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신 일만 기뻐할 때, 그것이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다른 모든 믿는 자들과 동등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질 수 있다.
겸손과 은혜
아무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고는 신약의 계명을 지킬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율법의 십계명 중 처음 아홉 계명을 은혜 없이 지킬 수 있다. 그러나 열 번째 계명인 "절대로 네 것이 아닌 것을 탐내지 말라"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아무도 지킬 수 없다. 그리고 아무도 은혜 없이는 새 언약의 삶(마태복음 5-7장에 설명된 대로)의 꼭대기에 올라갈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만 은혜를 베푸신다(벧전 5:5).
겸손은 가장 쉽게 위조되는 미덕 중 하나이다. 진정한 겸손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겸손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보시는 것이며, 우리 내면에 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삶에 예시되어 있다. 빌립보서 2장 5-8절은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서의 특권과 권리를 버리고 종이 되셨고, 사람들의 손에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도 기꺼이 받으셨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 겸손의 길에서 그분을 따라야 한다.
예수님은 자신을 3단계로 낮추셨다.
1. 그는 사람이 되셨다.
2. 그는 종이 되셨다.
3. 십자가에서, 그분은 기꺼이 죄인 취급을 받으셨다.
거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세 가지 비밀, 즉 겸손, 겸손, 겸손을 본다.
천사들은 예수께서 지상에서 33년 동안 사셨을 때 그리고 그분이 다른 사람들을 겸손하게 섬기고 고통과 모욕과 상처를 인내로 견디시는 것을 보았을 때, 경이로움을 보았을 것이다. 천사들은 여러 해 동안 하늘에서 그분을 예배하는 데 익숙했다. 그러나 그들이 지상에서 그분의 행하심을 보았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웠다 - 그분의 비천함과 겸손 - 그것은 그들이 예수께서 항상 하늘에 계셨을 때, 결코 보거나 이해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제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우리를 통하여 그 동일한 그리스도의 정신을 하늘에 있는 천사들에게 보여 주기를 원하신다(엡3:10). 천사들은 지금 우리와 우리의 행실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가? 우리의 행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가?
겸손은 모든 것의 가장 큰 미덕임을 기억하여라. 겸손은 우리가 존재하고 소유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겸손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인간, 특히 약한 사람, 교양 없는 사람, 지능 발달이 늦은 사람, 가난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존중하게 만든다. 그 겸손의 땅에서만 성령의 열매와 그리스도의 미덕이 자랄 수 있다. 그러므로 높은 생각이나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영광을 취하려는 독이 언제라도 마음속에 들어오지 않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판단하며 살아야 한다. 예수님의 겸손을 많이 묵상하여라. 그것이 너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권고이다.
말씀을 전파하기
우리는 주님께서 너희가 있는 곳에서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그들이 주님을 따르도록 격려할 기회를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린다.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얼굴을 흙 가운데 조아리고 겸손하게 살면, 그렇다면 너희의 삶은 오직 점점 더 잘될 것이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눌 기회가 있을 때마다, 너희가 말할 내용의 주요 요점과 참조 성구를 기록하고, 미리 메시지를 준비하여라. 담대하고 솔직하게 말씀을 전하여라. 무슨 말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 것처럼 변명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지 마라. 너희가 방갈로르에 있었던 몇 년 동안 너희가 배운 것과 하나님께서 너희의 삶에서 하신 일들이 많이 있다. 이제 기회가 있을 때 그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 너희의 의무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새 언약에 대한 이해가 거의 또는 전혀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주변의 다른 젊은이들을 격려할 기회를 주실 때, 너희는 다음 세 가지를 두려워하며 살아야 한다:
(1) 영적 교만(너희의 은사, 재능, 지위, 봉급, 성경 지식 때문에)
(2) 위선(실천하려고 하지도 않는 것을 설교하는 것)
(3)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자 하는 것 - 특히 모든 소녀들에게!
이러한 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역을 마친 후에도 끊임없는 자기 판단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대다수의 설교자들이 실패한 곳이다. 많은 사람들이 설교를 하기 전에 기도한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과 단 둘이서 설교를 마친 후에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
공개석상에서(말하거나 연주할 때) 남 앞에 설수록, 은밀히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한다. 사탄은 너희를 교만하게 부추기거나, 너희가 진실함 없이 행동을 하게 만들거나, 다른 방법으로 너희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한다. 그러니 조심하여라.
모든 것이 경건한 사람에게 잘 될 것이다
너희가 경건한 사람이 되기로 결정한다면, 너희의 미래 삶의 모든 단계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것이다. 인생에서 최고의 것을 얻는 것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이다 - 영리한 사람도, 부자도, 천재도 아니고, 인생에서 운이 좋은 사람도 아니다. 미래에 대한 모든 불안은 우리가 경건을 생활 방식으로 선택하지 않을 때 온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로 결심하여라. 그러면 영적으로 가장 좋은 것을 주실 것이며, 동시에 이 세상에서도 물질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실 것이다. 나는 이것이 내 인생의 지난 30년 동안(*그리고 지난 50년 동안 - 지금 2016년까지) 사실임을 발견했다. 너희가 지금 단 하나의 결정을 내리고 항상 그것을 고수한다면 즉, 범사에 하나님을 공경할 것이고 경건한 사람이 되기로 결정한다면, 하나님은 너희의 대학 과정과 너희가 선택해야 할 직업, 취업과 나중의 결혼, 그리고 모든 일에 관해 너희를 인도하실 것이다.
그것은 작은 일에 충성하라는 뜻이다. 결코 넘어지거나 실패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할 때마다 슬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너희의 소유가 아닌 것은 - 사람이나 집, 대학, 사무실, 어디에서나 - 값싼 펜이나 연필조차도 가져 가지 마라. 아주 작은 일에도 절대로 남을 속이지 마라. 그리고 우리가 너희를 학창시절에 가르쳤듯이, 시험에서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결코 부정행위를 하지 마라. 속이고 통과하는 것보다 실패하는 것이 낫다. 속이고 부자가 되는 것보다 가난한 것이 낫다. 너희의 마음을 더럽히는 문학을 읽지 말고 TV 프로그램을 보지 마라. 모든 문제에서 양심을 절대적으로 깨끗하게 유지하여라. 이렇게 사는 사람들은 모든 세대(높은 인플레이션과 경기 침체의 시대에서도)의 인생에서 하나님의 최고를 얻는다.
내 아들들 모두가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그때 너희가 매우 잘 될 것이며, 너희 자신이 축복받은 것처럼 하나님께서 너희의 자녀들에게도 축복하실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면 의인은 잘 되고 하나님은 자기를 영화롭게 하는 자를 영화롭게 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 세대에게 생생하게 실증할 수 있다. 너희의 영리함이나 성취로 이 세상에 감동을 주기보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한 살아 있는 증거가 되기를 온 마음으로 사모하여라. 또한 야외 활동이 너희의 삶에서 신이 되는 그런 자리를 차지하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또한 내 아들 네 명이 죄에 대한 승리와 자아죽음의 복음을 전하기를 기도한다(이 현실을 직접 경험함으로써). 또한, 너희가 그리스도의 몸에서 하나님이 정하신 직무(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를 이행하기를 기도한다. 세속 직업으로 자신의 생계를 꾸리면서 - 바울처럼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비용으로 주님을 섬겨라. 이것이 세상이 보아야 할 것이고 이것이 너희 모두를 위한 나의 가장 큰 갈망이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고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자만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후회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다.
오늘날 세상에는 젊은 대학생들을 공격하려는 강한 부도덕과 성적 왜곡의 정신들이 있다. 그래서 이 분야에서 끊임없이 사탄에게 저항하도록 조심하라고 경고하고 싶다. TV, 문학 또는 다른 어떤 것을 통해서도 언제라도 성적인 영역에서 사탄이 너희의 삶에 발판을 마련하도록 허용하지 마라. 사탄은 그의 일에 가장 큰 피해를 줄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 중에서 그의 표적을 선택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평생에 걸쳐 그러셨던 것처럼, 사탄의 공격을 받는 것은 영광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탄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 왜냐하면 사탄은 우리에 대한 그의 권세를 빼앗겼고, 우리 구주에게 완전히 패배하고 갈보리의 십자가에서의 공개적으로 구경거리가 되었다(골2:14,15).
에스겔 16:49은 성적인 영역에서 자제력이 부족한 네 가지 이유(소돔의 경우와 같이)를 제시한다. 교만, 탐식, 게으름, 이기심이다. 이 4가지 영역에서 성실하게 노력하면 성적인 영역에서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떨쳐 버려야 하는 고질적인 두려움이다. 어떤 분야(영적이든 학문적이든)에서 1000번째 실패하더라도, 일어나서 계속 달려야 한다. 과거의 실패가 너희를 괴롭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가 해야 할 일은 너희의 의지를 발휘하여 과거의 실패에 대한 모든 생각이 마음에 떠오를 때마다 거부하는 것이다. 만일 이 일을 충실히 수행하면, 그런 생각은 아주 드물게 일어나다가 마침내 완전히 중단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는 것이다(고후10:5).
물과 같은 성령
예수께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그분은 물을 성령의 상징으로 언급하신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물'을 세 번 사용하셔서 영적 발전의 세 단계를 보여주신 것을 주목하여라:
(1) 물에서 태어남 - 시작(한 컵의 물처럼)(요3:5; "구원의 잔" - 시116:13).
(2) 샘물 - 그리스도 자신으로 충만한 것(요4:14).
(3) 생수의 강물 - 하나님의 생명을 많은 사람에게 전함(요 7:38).
세례 요한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는 것"에 대해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불"은 글자 그대로의 불이 아니라 성령의 정결케(purification) 하는 내적인 사역을 상징하는 것이다. 마치 물이 깨끗케(cleansing) 하는 그의 외적인 사역("우리 몸을 깨끗한 물로 씻음" - 히10:22)을 상징하는 것과 같다. (민31:22,23은 먼저 물로 정결하게 한 다음 불로 더 깊게 정결하게 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승리의 삶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 우리가 가진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히11:6). 그리고 우리에게 믿음이 있을 때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막9:23).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 삶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어떤 것도 우리에게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계획만이 아주 작은 것에도 완전하고 자기 삶에 가장 좋은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그 계획 외에는 자신을 위해 아무 것도 원하지 않으며, 그래서 그는 그 계획 외에는 아무 것도 하나님께 구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그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믿음의 사람은 마귀를 상대로 하나님이 그의 편에 항상 계시다는 것과, 심지어 그가 죄에 빠졌을 때에도(죄를 고백하면), 예수님이 하늘 법정에서 항상 그의 중재자이심을 믿는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가 모든 죄를 이기고 모든 계명을 지키도록 도와주실 준비가 되어 있으며,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그를(믿음의 사람) 지키기 위해 그를 혼자 두지 않으셨다고 믿는다. 그런 사람은 인생의 모든 상황에서 끊임없이 이기는 사람이다.
인생에서 해야 할 일 중 어떤 것도 너희에게 불가능한 것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상상해 보라! 그러한 삶은 너희에게 얼마나 큰 승리감과 성취감을 가져다 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너희가 그렇게 살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믿음이 있으면 그렇게 살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마음을 다해 기꺼이 하나님의 계획과 명령을 너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서 선택해야 한다.
너희 안에서 믿음이 자라기 위해서는, 성령께서 매일 너희의 마음에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하루를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그날 동안 성령의 작은 속삭임에 신속히 순종해야 한다, 그분이 우리에게 "그것을 하지 마라. 그것을 보지 마라. 그것을 읽지 마라." 또는 "이제 성경을 조금 묵상하는 것이 좋다. 이제 주님을 위해 한 말씀을 전하라" 등을 말씀하실 때이다.
다른 사람들이 너희를 광신자라고 생각할지라도, 예수님의 이름을 소유하고 주 예수님의 완전히 헌신된 제자로 알려지는 것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마라. 반드시 멸망할 어떤 인간의 명예를 위해, 사탄이 너희로 하여금 그에게 무릎을 꿇지 못하게 하라(너희의 신념을 타협하지 마라).
우리가 호흡하는 호흡이 육신의 삶에 필수적인 것처럼,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작은 일에도 성령의 음성에 충성하라. 그러면 너희는 영적인 위엄을 가지고 항상 승리하며 사는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할 것이다.
성적 욕망에 대한 철저한 태도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는 그 여자와 간음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 사람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차라리 자기 눈을 뽑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셨다. 이로써 그분은 눈으로 계속해서 여성을 성적으로 탐하는 것만으로도 결국 남자를 지옥으로 보내는 데 충분하다고 가르쳤다.
오늘날 사람의 마음에 있는 욕망의 불은 아담의 시대 이후로 모든 사람의 마음에 타오른 것과 같은 지옥불이다. 오직 성령의 불만이 그것을 멸할 수 있다. 너희의 마음은 죄에 대한 정욕으로 타오르거나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타오를 것이다. 너희의 선택은 다음 두 가지 중 하나여야 한다: 지금 제련소의 불이거나 미래의 지옥불이다. 제3의 대안은 없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유대 민족은 이미 율법을 통해 매우 높은 도덕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혼외 성관계는 항상 사형에 처하는 엄격한 도덕 규범에 따라 살았다. 그 당시에는 사람들을 부도덕하게 유혹하는 음란한 책이나 잡지나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없었다. 그 사회의 모든 여성은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고, 남성과 여성은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제약이 있는 그러한 사회에서도, 주님은 남자가 여자를 탐하는 것을 아셨고, 제자들에게 그것에 대해 경고하셔야 했다. 그런 엄격한 사회가 그렇다면, 그분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음란한 사회에서 젊은이들에게 이것에 대해 얼마나 더 경고하시겠는가?
오늘날의 사회는 우리의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통해 우리의 마음에 연료를 붇는다. 이것이 우리 모두가 우리 시대에 더욱 조심해야 하는 이유이다. 이 정욕의 불을 끄는 것에 진지하다면, 그러면 연료 공급을 차단하는 것에 진지해야 한다. 그리고 그 연료의 원천을 자비 없이 맹렬하고 근본적으로 끊어야 한다. 이것은 눈을 뽑고 손을 자른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죄를 짓게 하는 것을 멸하라고 명령하셨다. 예수님은 죄의 위험성과 지옥불의 실상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죄에서 구원받기 위해 극단적인 영적 수술을 권하셨다.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되는 주님의 명령은 "만일 텔레비전이 너희의 마음에 죄를 짓게 하면 즉시 그것을 제거하라"이다. TV에서 보던 스타들과 함께 지옥에 가는 것보다 TV를 보지 않고 천국에 가는 것이 낫다. 아니면 어떤 잡지나 특정한 종류의 음악이 너희를 자극하고 죄를 짓게 하는 것이라면, 그 잡지와 카세트 테이프에 대해서도 같은 일을 하여라. 결국에는 천국을 놓치고 지옥에 간다고 할지라도 붙잡고 붙잡아야 할 만큼, 확실히 너희에게 소중한 것은 이 땅에 있을 수 없다.
너희가 이것을 읽는 동안에도 사탄은 너희에게 속삭일 것이다, "너는 결코 그렇게 작은 것 때문에 죽지 아니하리라"(지옥에 가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그는 잡지에 실린 사진이나 TV에서 본 사람을 탐하는 것은 진정한 간음이 아니라고 교묘하게 말할 것이다. 그의 말을 듣지 마라 - 예수님은 사탄이 처음부터 거짓말쟁이였다고 경고하셨다.
이 죄에 대해 "앞으로 더 잘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또는 "포기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라고 말하지 마라. 성경은 악한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경고한다. 이 죄를 즉각적이고 영구적으로 포기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너희를 도와주실 것을 믿어라. 오늘부터 전투를 시작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군대에서 너희를 거역하는 이 골리앗의 목을 베기까지 포기하지 마라.
주님은 그분의 성전을 다시 한 번 정결케 하신다. 그분의 성전은 이제 너희의 육신이다. 그분이 즉시 그 안에서 그 일을 철저히 하시도록 하여라.
고린도전서 7:1은 소녀들과의 신체적 접촉을 피하라고 우리에게 경고한다. 성령께서 어떤 것이 "좋지 않다"고 말씀하실 때(그분이 거기에서 말씀하셨듯이), 어떤 제자라도 그것을 완전히 피해야 한다. 율법주의자는 문자를 지키며 사는 반면, 제자는 계명의 정신을 따라 산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일곱째 계명의 정신을 이해하고자 하셨기 때문에,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이 간음임을 아셨다. 이와 같이, 너희가 마음을 다하면 하나님의 모든 계명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한 것을 보아라: "젊은이들이 자주 받는 유혹을 너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피하라"(딤후2:22 - living). 그러한 모든 유혹의 가능성에서 피해야 한다.
선택된 그릇(사람)
나는 이 아름다운 시를 읽었다.
주인은 사용할 그릇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분 앞에는 많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어떤 것을 선택했을까?
"나를 데려가 주세요"라고 금 그릇이 외쳤습니다. "나는 빛나고 밝아요."
"나는 매우 가치 있고 옳은 일을 합니다."
"나의 아름다움과 광채는 나머지를 능가할 것입니다."
"주인님 같은 분에게는 금이 가장 좋습니다."
주인은 아무 말 없이 지나갔고,
그리고 좁고 높은 은 항아리를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주인님, 당신을 섬기겠습니다. 당신의 포도주를 따르겠습니다.
"당신이 식사하실 때마다 나는 당신의 식탁 위에 있을 것입니다.
"내 선은 너무 우아하고 내 조각은 너무 진실합니다.
"그리고 은은 분명히 당신을 칭찬할 것입니다."
주인은 무시하고 입이 넓고 얕으며 유리처럼 광택이 나는
황동으로 된 그릇으로 넘어갔습니다.
"여기요, 여기"라고 그릇은 외쳤습니다, "나는 내가 할 것을 압니다";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나를 당신의 식탁 위에 두십시오."
"나를 보세요", 매우 맑은 수정의 잔이 불렀습니다,
"나는 연약하지만, 두려움으로 당신을 섬기겠습니다."
주인은 나무 그릇 옆에 왔습니다-
다듬고 조각한, 그것은 견고하게 서 있었습니다.
"저를 사용하셔도 됩니다, 주인님" 나무그릇이 말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나를 빵이 아니라, 과일을 위해 사용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나서 주인은 진흙 그릇을 내려다보았습니다,
비어 있고 부서져 무기력하게 놓여 있었습니다.
그 그릇은 주인이 깨끗이 씻어 온전케 하고, 채우고 사용하기로
선택할 것이라는 희망이 없었습니다.
"오, 이것은 내가 찾고자 했던 그릇이다."
"내가 이것을 수선하여 사용하고, 내 것으로 만들겠다."
"나는 자존심이 있는 그릇(금)이 필요 없다."
"좁은 잔(은)은 선반 위에 둘 수 없고,"
"입이 크고 얕고 시끄러운 그릇(동)이 아니라,"
"그 내용을 자랑스럽게 보여주는 그릇(수정)도 아니다."
그런 다음 부드럽게 진흙 그릇을 들어 올리셨습니다.
그날에 그것을 수선하고 깨끗하게 하고 가득 채웠습니다;
친절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해야 할 일이 있단다" -
"내가 너에게 붓는 것처럼, 그냥 다른 사람들에게도 부어라."
(작가 불명)
쓰러졌지만 지지 않았다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와 다르다. 그분은 먼저 많은 좌절과 실패를 통해 너희를 부서뜨리셔야 한다 - 그래서 그분은 너희를 위해 계획하신 영적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곳으로 너희를 보내신다.
우리 중 누구도 40년 동안 모세를 광야로 보내 양을 돌보고 장인과 함께 살면서 그 밑에서 일해야 하는 굴욕에 직면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를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준비시키기 위해서.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이다. 하나님은 야곱을 하나님의 왕자(이스라엘)로 바꾸시기 전에 그와 비슷한 일을 하셨다. 하나님의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을 부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일에 성공하실 때, 그런 사람을 통해 방출되는 힘은 원자가 부서질 때 방출되는 힘을 훨씬 능가한다!
내가 철도 건널목에서 오토바이에서 넘어졌을 때 하나님은 나를 보호해 주셨고 내가 꽤 빨리 회복할 수 있게 해 주셨다. 그것은 그분의 천사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또 다른 표시였다. 바울은 자신의 경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넘어졌지만, 우리는 일어나서 계속 간다"(고후4:9 - living). 그날의 내 경험도 그랬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가 넘어지는 것을 허락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가만히 있지 않는다. 우리는 일어나 계속 나아간다. 그리고 그것이 사탄을 더욱 화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또한 넘어짐을 통해 성화 교육을 하셔서, 그것이 우리에게 최선이 되도록 하신다. 그래서 나는 그날 이후로 가는 곳마다, 예수님의 승리와 사탄의 패배를 더욱 선포한다. 할렐루야!!
우리 자신에게 종말을 고하기
우리는 우리 자신이 완전히 끝났을 때 비로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11:28)고 말씀하시며 사람들을 초대하시는 주님께 나아갈 준비가 된 것이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그분께로 오라고 초대하지 않으셨다. 여기서 우리는 그분이 죄로 패배한 삶에 지치고 병든 자들만을 초대하시는 것을 본다. 탕자는 "모든 것을 다 쓰고", "아무도 그에게 어떤 것도 주지 않았을 때"에야 아버지에게로 돌아왔다. 그제서야 그는 "정신을 차렸다"(눅15:16-18). 사람의 명예에 연연하지 않고, 사람과 환경에 대한 불평과 불만을 멈추고, 패배한 자신의 삶에 지치고 병든 지점에 이르러야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 그것이 진정한 회개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항상 인큐베이터 안에 있어야 하는 미숙아와 같을 것이다(다른 사람들이 계속 따뜻하게 해주고 격려해줌). 우리의 안전은 교회에서도 찾지 말고, 오직 주님 안에서만 찾아야 한다. 에스겔 36장 25-30절은 새 언약 아래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풍성한 삶에 대해 예언하고 있다. 계속해서 31절에서 우리가 그 삶에 들어갈 때 "우리가 이전에 행한 모든 악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미워할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사람의 주요 특징 중 하나는 "오 나는 곤고한 사람입니다. 내가 어떻게 모든 죄에서 완전히 건져질 수 있겠습니까?"(롬7:24-의역)라고 말하는 내면의 외침이 항상 있다는 것이다. 그는 모든 더러움과 육신에서 죄악의 냄새도 나지 않기를 끊임없이 갈망한다.
하나님은 너희가 역경의 날에 강해지기를 원하신다(잠24:10). 그러나 역경의 날에 강해지고 싶다면, 이 평화로운 때에 주님에 대한 지식을 쌓아야 한다.
영적 능력
마지막 날의 한 가지 큰 위험은 "능력은 없이 경건의 모양"(딤후 3:5)만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은사와 재능 때문에 우리가 가진 힘에 만족하기가 매우 쉽다. 혼적인 힘은 지적인 힘, 감정의 힘, 의지의 힘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것들 중 어느 것도 그리스도와 성령이 우리에게 주시러 오신 신성한 능력이 아니다.
지적인 힘은 위대한 과학자, 학자, 영리한 설교자에게서 볼 수 있다. 감정적인 힘은 롹 음악가와 많은 설교자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의지의 힘은 요가 전문가와 다른 고행자들 사이에서 - 그리고 자신의 인격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려는 설교자들 사이에서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세 가지 중 어느 것도 영적인 능력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영적인 능력은 주로 우리로 하여금 모든 일에서 하나님께 순종하게 한다. 수천 년 동안 완벽한 타이밍에 궤도 내에서 움직이는 행성과 별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을 생각해 보라. 그 완벽함의 이유는 그것들이 하나님의 법을 암묵적으로 지켰기 때문이다. 이 천체들은 최선의 것이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없이 증거한다.
예수님은 육신의 힘으로 사탄을 이기신 것이 아니라 영적인 힘으로 이기셨다. 사탄에게 시험을 받았을 때, 예수님은 돌로 떡이 되게 하실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절하셨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몸이 40일 동안 금식한 후에 먹을 것을 갈망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배가 고프지 않았는데도, 에덴 동산에서 몸의 갈망을 즉시 만족시킨 하와가 한 행동과는 얼마나 대조적인가. 섹스에 대한 욕망은 음식에 대한 욕망과 마찬가지로, 우리 몸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욕망이다. 그것은 또한 끊임없이 만족을 갈구한다. 우리가 영적인 능력을 갖게 되면, 육신의 갈망을 만족시키는 것보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따라 살겠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처럼 될 것이다.
삼손은 육체적인 사자를 찢을 수 있는 엄청난 육체적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삼손 안에 있는 성욕의 사자가 그를 거듭해서 갈가리 찢었다. 이것은 성적 욕망이 어떤 사자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요셉은 삼손보다 더 강한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날마다 반복해서 정욕의 사자를 갈기갈기 찢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창 39:7-1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적인 능력을 주실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동기이다. 인생의 목표와 야망이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기꺼이 그분의 능력을 주실 것이다. "너희가 구하여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릇된 동기로 구하기 때문이다"(약 4:3).
일이나 전문직업은 생계를 꾸리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러나 삶에 대한 우리의 야망은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 우리 자신을 위해 살거나 이 세상에서 위대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다. 사탄은 이 세상의 영광으로 예수님까지 시험하려 했다. 그러므로 사탄은 분명히 이것을 우리에게도 제안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끊임없이 거절해야 한다(예수님처럼).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사탄에게 절해야만 세상 영광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돈에 대한 사랑이 우리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하지 않도록 특히 조심해야 한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후, 우리의 선택에 후회는 없어야 한다.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
구약 시대에 죽음으로부터 살아난 사람이 적어도 두 명, 예수님의 사역에서 세 명이 있었지만, 하지만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신 첫 번째 분이셨다. 왜냐하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다른 사람들이 다시 죽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2잘 14절에 따르면, 예수께서 죽음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권세를 가진 사탄을 무력하게 하셨고, 그 결과 죽음의 공포로 인해 평생 노예의 삶을 살던 사람들을 구원하셨다고 한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완전히 죽기로 선택할 때, 우리는 더 이상 육체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신자의 죽음은 신약에서 항상 "(잠을)자다"라고 불린다(예: 행7:60의 스데반).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절에서, 우리는 "예수 안에서 잠자는"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부활 할 것을 읽는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 십자가에서 주무셨다는 기록이 없다. 그분은 우리 죄에 대한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에 죽으셨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선택할 때, 우리는 죽음에 대해 욥이 말한 다음과 같은 말이 우리 삶에서 성취되었음(영적으로 말해서)을 알게 될 것이다. "죽음 안에서: (1) 사악한 사람들은 더 이상 우리를 귀찮게 할 수 없다; (2) 지친 자가 안식에 들어가고; (3) 갇힌 자들이 그들의 간수에게서 자유하고; (4) 종이 그 주인에게서 자유로워진다"(욥 3:17-19).
요한은 밧모에서 예수님을 보았을 때, "죽은 자 같이"(계1:17,18) 그의 발 앞에 엎드러졌다.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 하고 그분의 발 앞에 엎드려 평생 동안 죽은 자처럼 누워 있어야 한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손을 얹고 강하게 하실 것이다. 주님은 그때 요한에게 자신이 사망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사망의 열쇠를 쥐고 계신 것은 그런 사람들(예수와 함께 죽은 자들)을 위한 것이다(18절). 그들은 평생의 일이 끝날 때까지 죽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은, 여전히 사탄이 그들의 죽음의 열쇠를 쥐고 있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정해진 시간 전에 죽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시는 죽음을 맛보지 않도록 예수님과 함께 죽음을 단번에 받아들이는 것은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가?
로마서 6장 11절은 우리에게 항상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기라"고 말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 때문에 화가 나거나 또는 성적 욕망에 유혹을 받을 때마다 다음 두 가지 질문을 자문해 보아라: "이 상황에서 죽은 사람은 어떻게 반응할까?" 그리고 "예수님은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는가?" 너희는 즉시 대답을 얻을 것이다. 그런 다음 그에 따라 행동하여라.
은혜롭게 나이 들기
나는 너희가 등록금을 지불하려고 약간의 돈을 벌기 위해 매일 긴 시간을 일하는 것이, 너희에게 너무 과하지 않기를 바란다. 공부에 지장이 없는지 확인하여라. 물론 반대로 하루 종일 바쁘면 많은 유혹에서 너희를 지켜주고, 밤에 잠도 잘 자게 해 줄 것이다. "열심히 하는 학생은 적게 먹든 많이 먹든 잘 자지만, 부자 학생은 걱정하고 불면증에 시달릴 것이다"(전 5:12 - living)!
나는 예전에 전도서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읽었다: "살아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사람이 아주 오래 산다면, 삶의 모든 날을 기뻐하며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영원은 훨씬 더 길고, 비교하면 여기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젊은이, 젊다는 것은 멋진 일입니다! 매 순간을 즐기십시오! 원한다면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모든 것을 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당신이 한 모든 것을 해명해야 함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당신에게 슬픔과 고통을 주는 일을 제거하십시오. 그리고 어릴 때와 청년은 심각한 실수를 할 수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젊음의 흥분으로 인해 당신의 창조주를 잊지 마십시오. 악한 해(노년)가 오기 전에 젊었을 때 그분을 공경하세요. 그때에는 그분을 기억하기에는 너무 늦을 것입니다" (전 11:7-12:1 - living).
노년은 여기에서 "악한 해"로 언급된다 - 사람이 "백발 노인이 되어 성적 욕망도 없이 몸을 질질 끌고 가는"(전 12:5) 때이다. 그러나 젊었을 때 죄를 이기면, 노년이 영광스러운 해가 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세월은 비참하게 악할 수 있다. 나는 나이든 사람들이 심술궂고, 비뚤어지고, 신랄하고, 쓸모 없이 사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그들이 젊은 시절에 하나님의 율법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죄를 철저하게 다루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담 이후의 모든 사람(예수님을 제외하고)은 어린 시절에 많은 어리석은 방법으로 죄를 지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실패한 후에, 철저하게 회개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로 작정한 사람들은 영광스러운 삶을 살고 영광으로 삶을 마감한다. 다른 사람들은 일부 현대 설교자들이 인생의 막바지(50대, 60대, 할아버지가 될 나이)에 간음에 빠지는 것처럼 수치스럽게 생을 마감한다! 이것은 그들이 젊은 시절에 성적으로 더러운 생각을 극복하는 데 충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위의 구절(전 12:5)에서 내가 주목한 또 다른 흥미로운 점은 "성욕이 없는" 상태를 나쁜 상태로 묘사한다는 것이다! 요가는 사람들에게 성적 욕망을 죽여서 극복하도록 가르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다. 그것은 악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음식과 수면에 대한 욕망을 죽이는 것만큼이나 나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적 욕망이 우리에게서 영구적으로 제거되기를 갈망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몸에 있는 세 가지 강력한 욕망, 즉 음식, 수면, 섹스는 모두 전지하신(all-wise)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 이 세 가지 중 어느 것도 원하지 않는 사람은 병든 사람이다. 따라서 성욕이 강하다고 해서 영적인 검진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배고파서 먹고 싶은 것, 피곤해서 자고 싶은 것만큼 지극히 정상적이다. 우리는 그 두 가지 욕망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세 번째 욕망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사실, 청년인 너희의 나이에 강한 성욕이 없다면, 건강 검진이 필요하다는 것을 나타낼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세 가지 욕망을 모두 제어하여, 이것들이 우리 몸을 지배하여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대신, 우리와 우리 몸에 봉사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욕망을 모두 훈련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폭식하지 않도록 음식에 대한 식욕을 조절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여라; 그리고 게을러 지지 않도록 잠에 대한 욕구를 조절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라. 그러면 성적 욕망을 통제하는 것도 더 쉬워질 것이다.
혼적인가 또는 영적인가
고린도전서 2장 14,15절에서, 우리는 "자연인(혼적인)"과 "영적인 자"에 대해 읽습니다. 혼적인 기독교인과 영적인 기독교인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사람의 총명함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나니, 기록되기를; "자연인은 하나님의 영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그것들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적인 자는 모든 것을 살펴본다, 하지만 그 자신은 아무에게도 평가를 받지 않는다."
마음(mind;생각)과 영(spirit)은 눈과 귀처럼 다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청력이 좋으면서도 장님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또한 어떤 사람이 뛰어난 지성과 '죽은' 영을 가질 수도 있고 또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하는 일에는 좋은 마음(mind)이 필요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에 관해서는 중요한 것은 우리 영의 상태이다. 하나님의 일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성령의 계시가 필요하다. 이것은 겸손한 사람들(겸손한 영을 가진 "유아(infants)" - 마 11:25)에게만 주어지고, 영리한 사람들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그들이 또한 겸손하지 않는 한). 영리한 사람이 겸손하기는 어렵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독선적인 바리새인이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이 비록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어려운 것과 같다. 매춘부와 도둑이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이 더 쉽다. 신의 계시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배우지 않은 사람이 자신이 영리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더 쉬우므로 - 그는 신의 계시를 더 빨리 받을 수 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세 명의 못 배운 어부인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함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신 이유이다 - 왜냐하면 그분은 그들이 영적인 것에 가장 잘 반응하는 것을 발견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또한 바리새인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그토록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 왜냐하면 그들의 지성에 대한 교만은 그들이 영적으로 어리석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적이고 영리한 대학생들과 어울릴 때 끊임없이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총명함은 하나님 앞에 가치가 없다. 그것은 우리의 피부색만큼 하나님께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 모두 사람들이 타고난 것이며, 사람들이 무엇을 가지고 태어나든지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이점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의와 같이 명철함은 하나님 보시기에 더러운 옷과 같다(사 64:6).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가 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지혜가 되셨다(고전 1:30 참조).
그러나 독선적인 바리새인이자 총명한 지식인(두 가지 모두 불리한 조건)인 바울과 같은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격려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었기 때문이다. 고린도인들에게 말할 때, 그는 그의 지적 능력에 의존할까 두렵다고 말했다. 그것이 그가 "저희 가운데서 두려워 떨고 있었던" 이유였다(고전 2:3). 그는 하나님의 영의 능력이 아니라 자기 생각(혼)의 능력으로 그들에게 설교할까 두려워했다. 우리 모두는 말할 때마다 그 두려움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끊임없이 성령의 능력을 구해야 하는 이유이다. 성령의 능력이 계속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진리에 대한 영리한 지적 표현을 영적인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또한 우리는 매우 감정적인 메시지를 영적인 메시지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지성과 감정은 모두 우리 혼의 일부이다. 이들은 좋은 하인이지만 나쁜 주인이다. 오직 성령만이 우리 삶의 주님이어야 한다. 결국 영적인 사람이 되는 길은 앞서 언급했던 그리스도인의 삶의 세 가지 비결인 겸손, 겸손, 겸손에 있다! 너희가 그것을 가지고 있다면, 너희는 괜찮을 것이다.
십자가의 길
예수님께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말씀하신 경우는 마태복음 4장 10절과 16장 23절뿐이다. 두 경우 모두 사탄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는 것을 막으려 했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한 번은 직접, 두 번째는 베드로를 통해서이다. 첫 번째, 사탄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고도, 온 세상(예수님은 하나님께 온 세상을 되찾아드리기 위해 오심)을 주겠다고 예수님께 지름길, 타협의 지름길을 제안했다. 사탄은 거기에서 성공하지 못했을 때, 베드로를 통해 예수님이 자기 연민을 일으키도록 했다. 두 경우 모두 예수께서는 사탄의 음성을 알아차리셨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사탄의 음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곳이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십자가의 길을 피하라는 음성은 마귀의 음성임을 기억해야 한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정작 필요한데도, 사탄을 광적으로 꾸짖는 미친 습관을 가지고 있다. 육신의 욕망으로부터 나쁜 생각이 우리 마음에 떠오른다. 그것은 사탄과 그의 악마들이 우리 밖에 어떤 것을 우리 시야 안에 가져오므로 인해 자극을 받게 된다. 그러나 유혹을 일으키는 것은 우리의 자기 의지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그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여 우리 자신의 뜻을 물리치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다.
사탄은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거나 병자를 고치시거나 설교를 하실 때 패배하지 않았다. 히브리서 2장 14절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사탄이 패하였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릴 때 사탄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다. 그래서, 사탄이 너희가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막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끊임없이 십자가의 길을 선택한다면, 사탄은 너희를 결코 지배할 힘을 갖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다수의 복음주의 기독교 교회가 "예수 죽으심을 우리 몸에 항상 짊어짐"(고후 4:10)을 전파하는 것을 사탄이 막는 이유이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날마다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유일한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뿐이다(눅9:23). 그러므로 날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을 전파하지 않는 교회들을 조심하여라. 불신자들에게 예수님이 그들의 죄를 위해 죽으심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믿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날마다 죽어야 할 필요성에 대해 말하지 않는 모든 설교는 불완전한 복음이다. 이것은 복음의 양면이다.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다.
날마다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권능을 가질 수 없다. 오늘날 기독교 설교에서, 우리는 많은 좋은 것들이 설교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러나 매일의 십자가의 메시지는 완전히 빠져 있다. 날마다 예수님과 함께 죽으라는 말씀을 숨기는 것이 사탄의 놀라운 작업이다. 그러므로 말할 기회가 있는 곳마다, 균형을 회복하고 매일의 십자가를 설교할 것을 결심하여라. 그렇게 하면 사람들에게는 인기가 없지만 하늘에서는 위대해질 것이다.
나는 23살에, 성령의 능력을 위해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다. 그때 주님은 죽음의 길을 선택하셨을 때(상징적으로, 세례를 받으셨을 때),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셨음을 나에게 보여 주셨다(마 3:16). 그리고 주님은 내가 십자가의 길, 즉 자아에 대한 죽음의 길을 선택하는 한, 나 역시 그분의 능력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내가 그 길을 떠나기로 결정했다면, 나는 그분의 능력도 잃게 될 것이다. 나는 영구적으로 그 길을 선택했고, 그 길은 나를 지극히 행복하게 만들었다. 너희 모두에게 그 길을 진심으로 추천하고 싶다.
생명의 길
새 언약의 복음은 본질적으로 이것이다: 바로 우리가 신성한 성품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은 사랑이며, 사랑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자기의 것을 구하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신 것은 자기의 것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젖먹이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에 비유하신다(사49:15). 갓 태어난 아기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지상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사랑의 표현이다 - 좋은 어머니는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자기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비이기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도 이와 같으며, 이것이 우리가 참여해야 할 본성이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백성을 섬길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움직이는 연료이다. 연료탱크가 비었을 때는 차를 밀어야 한다.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말라버린 곳에서는, 주님을 위한 우리의 수고는 차를 밀어야 하는 것처럼 무겁고 부담스러워질 것이다. 그러면 주변 사람들의 연약함과 어리석음도 견디기 어려워질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주유소로 계속 돌아가서 연료를 채워야 한다. "끊임없이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
성냄과 눈으로 정욕을 품는 것을 이기는 것은 그 자체로 신성한 성품 자체에 참여하는 궁극적인 목표를 위한 준비일 뿐이다. 우리의 육체는 철저히 이기적이며, 이 이기적인 본성이 날마다 죽어져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익이나 명예나 위안이나 무엇이든 우리 자신의 것을 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영원한 죽음의 길이기 때문이다. 삶의 방식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리 삶을 위한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완전히 바치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날마다 여러 번 자기 내면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우리 자신을 판단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우리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영역을 발견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자기를 추구하는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깨끗하게 할 수 있다. 이것이 완벽에 이르는 길이다. 육체와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매우 충실하게 깨끗하게 하는 데 관심이 있는 사람은 극소수이다(고후7:1). 그래서 진정한 경건한 삶으로 성장하는 사람은 극소수이다.
예수님은 "폭력적인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11:12).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데 방해가 되는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해 폭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순종을 증명하는 것은 큰 계명에 대한 순종이 아니다. 아니.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계명에 순종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지극히 작은 것부터 지키도록 가르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5:19). 어린 아이의 순종은 학교에서 아무도 죽이지 않거나 간음하지 않는 것으로 시험 받지 않는다. 아니. 그 자신은 놀고 싶지만, 엄마가 도와달라고 부를 때, 그의 엄마에게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충실해야 하는 것은 일상의 작은 일들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불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 또는 맘몬
맘몬(땅의 재물)은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끊임없이 반대하는 큰 힘이다. 그것은 항상 우리의 충성과 봉사를 갈망하는 선택 가능한 주인이다. 누가복음 16장 13절은 우리가 돈의 권세를 이기고 그것을 우리 발 아래 두지 아니하면, 마땅히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없고 하나님을 붙들 수도 없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돈을 벌 수 있지만, 물질적 이득을 위해 영적인 것을 희생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서 항상 첫째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의 주님이 되셔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분은 전혀 주님이 되지 못한다.
삶에 어려움과 시련과 가난이 있을 때 열심으로 주님을 따르던 많은 신자들이 삶이 풍족해지고 편안해지고 사치스러워지면 주님에게서 멀어진다. 직업은 생계를 위한 수단일 뿐이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세상에서 살기에 점점 더 돈이 많이 들고, 불의가 개입되지 않는 기독교인을 위한 일자리는 점점 더 구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에, 어릴 때 받을 수 있는 모든 기술 교육을 받는 것이 좋다. 나중에 보수가 좋은 직업을 찾기가 더 쉬울 것이다. 그러나 너희의 목표는 항상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것이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른 모든 것은 부차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맘몬이 너희의 삶을 장악할 것이다.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 청년 관원은 좋은 자질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가 부족했다. 그는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했다. 그리고 그 하나의 결격으로 인해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놓치게 되었다. 그가 오늘 자신의 결정을 얼마나 후회하고 있을지 생각해 보아라.
돈 문제를 정확하게 처리하는 것은 돈이 우리에게 어떤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하늘에서 돈이 우리 발 아래 있을 것이라고 정말로 믿는다. 왜냐하면 그곳의 길이 순금으로 되어 있고, 우리가 그 길을 걸을 것이기 때문이다(계 21:21).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참 재물을 이 땅에서 돈 쓰는 일에 충성하는 자에게 맡기신다(눅 16:11).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돈을 사용할 때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진정한 부를 놓치고 싶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사 감독이 아니다. 과거에 우리가 돈을 사용하는 데 실수를 저질렀지만(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랬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며 용서해 주신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해, 미래에 충실하는 것이 좋다.
어린아이가 되어 불타오르는 것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마 18:3). 그러므로 거듭남에 대한 예수님의 정의는 어린아이와 같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한 살 때부터 배운 어른들의 방식을 잊는 것을 수반한다. 세상의 정신은 우리에게 "자신의 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왜냐하면 그것이 돈을 버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태도를 버려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어린아이처럼 될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악의와 원망과 원한과 불평과 더러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놀라운 복음의 메시지이다.
마태복음 13장 43절에서 예수님은 "의인은 해와 같이 빛나리라"고 말씀하셨다. 태양은 수백만 도에서 끊임없이 불타고 있다. 따라서 세균이나 박테리아가 생존할 수 없다. 주님은 우리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신다 - 항상 주님을 위해 불타오르고, 항상 순결을 위해 열성적이며 열렬하며, 다른 사람을 섬기고 축복하며, 스스로 겸손하고, 모임에서 증거하고, 교회를 세우기 위해 항상 불타기를 원하신다. 너희와 같은 젊은이들이 이 문제에 앞장서야 한다. 이어지는 세 구절(마13:44-46)에서, 예수님은 두 가지 비유(밭에 있는 보화에 관한 비유와 값진 진주에 관한 비유)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항상 불이 붙을 수 있는지 설명하신다. 둘 다에서, 우리는 이 한 구절이 반복되는 것을 발견한다. "그는 그가 가진 것을 모두 팔았습니다". 그것이 비밀이다. 우리는 우리의 자기-의지, 우리의 권리, 우리의 명예, 우리의 특권,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항상 불타오르는 태양처럼 될 수 있다.
바벨론의 영
하나님은 우리 교육의 일부로 우리 모두에게 바벨론 기독교를 견학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야 한다. 나는 거듭난 때부터 1975년까지 16년 동안 여행을 했다. 너희가 방문한 다른 타협적인 교회에서 거기서 너희는 지금은 그 여행을 하고 있다. 많은 하나님의 백성이 오늘날 바벨론에 있다. 요한계시록 18:4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하나님은 그 구절에서 그들에게 "내 백성아, 그녀에게서 나오라"고 말씀하신다. 문제는 양떼를 그릇 인도하는 지도자들과 목사들이다. 예수님 시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많은 하나님의 백성은 "참 목자 없는 양"(마 9:36)과 같다. 예수께서 12세부터 30세까지, 매년 세 번씩 예루살렘 성전에서 그리고 매주 나사렛 회당에 가셨을 때, 하나님을 욕되게 한 것을 틀림없이 보셨을 것을 생각해 보아라. 그러나 아직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모든 일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 시간과 그 경험은 훗날 그분의 사역을 위해 나사렛에서 교육을 받는 데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지금 너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바벨론 정신의 본질은 베드로가 마태복음 19장 27절에서 예수님에게 한 말에서 볼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을 얻겠습니까?" 우리도 주님을 위해 많은 것을 포기했다면, 여기 지상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하늘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어떤 상을 주실지 궁금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경건을 우리 자신을 위한 이득의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우리의 생각이 자기 중심적임을 증명한다. 어떤 사람들은 설교와 주님을 위한 봉사를 통해 이 지상에서 돈이나 명예를 구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은 상급이나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의 신부의 자리를 구할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무엇인가를 구하는 한, 우리 안에는 여전히 바벨론의 정신이 있다. 이것이 우리가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할 영의 더러운 것이다.
베드로가 주님을 섬기면 무엇을 얻을 것이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마태복음 20장 1-16절에서 비유로 대답하셨다. 거기에서 그분은 두 가지 유형의 일꾼에 대해 말씀하셨다:
(1) 상(급료)을 받기 위해 일한 사람들
- 일부는 1데나리온(2절)을 위해, 일부는 "무엇이든 합법적인 시급"(4절)을 위해
- 그러나 둘 다 임금을 위해 일함;
(2) 임금을 약속 받지 않고 출근한 자들(7절).
이 두 번째 범주의 노동자는 시간당 1데나리온으로 가장 높은 임금을 받았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더 적게 받았다 - 첫 번째 사람들은 1데나리온에 12시간 동안 일했기 때문에 시간당 0.08 데나리온만 받았다.
따라서 예수께서 거기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지금 나중 된 많은 사람들이 영원 속에서 첫째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일의 양이 아니라 "각 사람의 봉사의 질과 동기를 시험"하실 것이기 때문이다(고전3:13; 4:5).
예수님은 예루살렘 장터에서 돈 버는 사람들을 결코 쫓아내지 않으셨다. 아니. 시장은 돈을 벌기에 알맞은 곳이기 때문이다. 존 웨슬리는 기독교인은 열심히 일해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벌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것에 동의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집에서 자신을 위해 이익을 얻으려는 자들만을 쫓아내셨다. 오늘날에도 그렇다; 예수님은 교회 안에서 명예나 명성이나 돈이나 그 밖의 어떤 이득을 구하는 자들을 교회에서 깨끗이 하실 것이다. 교회는 희생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 스가랴의 마지막 구절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다시는 주님의 집에 욕심 많은 장사꾼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다(슥 14:21 - 리빙 바이블). 우리는 주님을 위해 하는 봉사에서 우리 자신을 위해 어떤 것도 구해서는 안 된다.
마태복음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신약성경에 약속하신 대로, 주님은 신실하게 섬기는 자에게 상을 주실지라도, 그러나 우리는 상을 받으려고 일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주님께서 갈보리에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일한다. 보상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아무 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철도 건널목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후 죽을 뻔했을 때의 기분은 이랬다:
(1) 이 땅을 떠나기 전에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고 싶은 부분이 더 많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조금 더 '예수님을 바라보며' 나의 부족함을 깨닫고 스스로를 판단하고 하나님께서 내게 빛을 주시는 부분에서 이기는 자가 되는 시간을 갖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2) 나는 또한 당시, 갈보리에서 주님이 하신 일에 대해 34년(19세부터 53세까지)으로는 나의 감사를 표현하기에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 목숨을 살려 주셨고 이제 이 궁핍한 세상에서 그분을 섬김으로써 그분께 감사를 표할 수 있는 몇 년을 더 주신 것에 대해 감사했다.
완전한 복음
주님께서 너희들에게 그곳에서 말씀을 나누고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그러한 활동 자체가 많은 유혹의 압력에서 너희들을 구할 것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달리 영적인 권위로 말씀하셨다(마 7:29). 이것은 예수님이 설교하시기 전에 30년 동안 일상생활에서 모든 시험을 이겨냈기 때문이다. 우리가 전파하는 것을 뒷받침하는 삶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것이 영적인 권세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온전한 복음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게 하신 예수님의 두 말씀에 있다: "나는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너의 과거의 죄로), 그리고 "이제부터는, 더 이상 죄를 범하지 말라"(요한복음 8:11). 주님의 이 두 말씀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한 면만 있는 동전(또는 복음)은 위조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선하고 겸손한 것에 대해 설교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모순되는 장로들의 전통을 책망하셨기 때문이다(막 7:6-13). 오늘날에도 사람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사람의 전통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인기를 얻으려고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인간의 전통에 대해 침묵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의 독특한 특징은 그들이 항상 죄를 대적한다는 것이다("성령은 육신과 싸운다" - 갈 5:17).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고전 15:3), 우리가 그와 함께 죽게 하신다(갈 2:20), 그러므로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을 위해서만 살게 하신다(고후 5:14,15).
주님은 마음에 열심이 없는 자를(미지근한 - 즉 세상적인(차가운) 것도 아니고 그를 위해 불타는(뜨거운) 것도 아닌 자를)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런 사람을 토해내신다(계 3:16) - 마치 우리가 뱃속에 들어간 후에는 몸의 일부가 되기를 거부하는 음식을 토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거룩한 삶을 살고,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고, 그분의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항상 성령의 불로 타올라야 한다.
자비와 은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은혜"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 영리한 그리스도인들이 발명한 "은혜"에 대한 많은 정의가 있다. 그러나 여기에 주님께서 친히 바울에게 주신 정의가 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 이는 내 능력이 너의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고후 12:9).
그래서 "은혜"는 "우리의 연약함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을 의미한다 - 그 약점이 무엇이든지.
우리의 기질 때문이든 과거의 실패 때문이든 그것이 무엇이든지, 우리가 가진 모든 약점을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줄 수 있다.
은혜는 히브리서 4:16에서 " 필요한 때에 돕는 것"이라고도 한다(여기서 필요한 때는 시험을 받을 때이다. 문맥에서 - 15절 참조). 우리는 모두 매우 약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은 거의 없다 -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너무 약해서, 잡지에 실린 예쁜 얼굴이나 유혹하는 사진 한 장으로 우리를 성적인 정욕으로 쓰러뜨리기에 충분하다. 우리의 능력이나 성과에 대한 한 번의 칭찬은 우리를 교만으로 무너뜨리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금전적 이득은 우리를 돈에 대한 사랑으로 무너뜨리기에 충분하다. 사탄은 이러한 영역에서 우리의 약점을 알고 있지만, 우리는 종종 알지 못한다. 우리의 연약함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때는 시험을 받을 때이다 - 죄에 빠지기 전에, 그 이후가 아니다. 우리는 산에 오르는 사람들과 같다, 유혹의 순간에 절벽에서 미끄러져 내려오다가, 손가락으로 매달려 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너무 교만해서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다. 우리는 보통 도움을 청하기 전에, 넘어지고 뼈가 부러질 때까지 기다린다. 그때 자비의 구급차가 와서 우리를 병원으로 데려간다.
그러나 히브리서 4장 16절은 우리가 어려울 때, 우리를 도와줄 은혜를 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 그리고 우리의 필요한 때는 우리가 넘어지기 전이지, 후가 아니다. 만약 그때 우리가 은혜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절벽에서 들어 올리시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반복적으로 넘어지고, 반복적으로 구급차로 병원에 실려가는 삶을 살고 있다. 하나님은 유혹의 순간에 우리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더 나은 삶을 제안하신다. 이 도움을 요청하여라.
새 언약의 좋은 소식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자비와 은혜 모두를 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은혜(능력) 받는 비결은 먼저 우리의 필요와 실패와 위선과 무력함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에게 주실 것을 믿고 하나님의 능력을 갈망하는 것이다. 믿음에 대한 나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가 받기를 열망하는 것보다 더 주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만 은혜를 주신다"(벧전 5:5). 겸손한 사람들만이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울 수 있다. 예수님은 교회의 터를 세우시기 전에 먼저 종이 되셨다.
은혜는 율법보다 우월하다
예수님이 모세보다 우월하신 것처럼 은혜는 율법보다 우월하다. 율법이 죄의 용서를 가져다 줄 수 있었다면(시103:3; 32:1), 은혜는 분명히 우리를 더 나아가 죄를 이기도록 인도할 수 있다(롬6:14; 8:3; 마1:21).
은혜는 예수님이 어린 시절부터(눅2:40 참조)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까지(히 2:9 참조) 이기는 자가 되도록 도왔던 것이다. 이제 그분은 아버지와 함께 보좌에 앉으셨다. 왜냐하면 그분은 이기셨기 때문이다(참조 계 3:21). 같은 구절에서, 그분은 또한 우리가 어떻게 그분과 함께 그분의 보좌에 앉을 수 있는지도 말씀하신다 - 그분이 친히 이기신 것처럼 정확히 시험을 이김으로. 이것은 야고보와 요한이 구한 영예로운 자리이며, 예수님은 아버지만이 줄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제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보좌, 좌우편에 있는 영광스러운 자리에 이를 수 있는지 말씀하신다 - 이김으로써.
제자도와 동역자 (Discipleship and Partnership)
누가복음 14장 26절, 27절, 33절에 언급된 제자도의 조건은 주님께서 그분의 교회를 세우는 데 쓰실 모든 사람에게 요구된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i) 우리의 마음과 삶에서 주님께 최고의 자리를 드리는 것; (ii) 우리 자신의 아담적 자아의 삶을 미워함; (iii) 세상적의 것들(돈, 직업 등)에 대한 소유욕에서 벗어나는 것.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소유하도록 허락하셨지만, 그 어느 것도 우리의 것인 양 소유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주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모든 것을 소유하고 사용하는 청지기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님과의 동역자이다. 예수님은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다(마 11:29). 여기에 있는 그림은 같은 멍에를 메고 있는 두 마리의 황소이다. 초보 황소는 경험 많은 황소에게서 일직선의 밭고랑을 쟁기질하는 법을 배운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가 스스로 무엇을 하기를 기대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디를 가든지 또는 무엇을 하든지(심지어 TV 프로그램을 보더라도) 예수님과 함께 그리고 그분의 멍에 아래서 하고 있는지 확인하여라. 예수께서 승인하지 않으실 것 같아서 어떤 일을 하는 것이 불안하다면, 즉시 포기하여라.
사탄에게 설 자리를 주지 마라
사탄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에게 완전히 패배했다(히2:14; 골2:14,15). 그러므로 너희는 결코 그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먼저 하나님께 순복하고 사단을 대적하면, 그는 반드시 너희에게서 도망갈 것이다(약 4:7).
"모든 원수에 대한 방패가 되시는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가라"라는 노래로 너희를 격려하고 싶다. 의인이 견고한 성루이신 이 이름을 향하여 달려가면 안전하다(잠18:10). 그 이름으로 사탄을 대적하여라. 주님을 부르라. 그러면 그분은 언제든지 너희를 괴롭히는 모든 것에서 너희를 건지실 것이다. 사탄에게 어떤 곳도 주지 마라. 요한계시록 12장 8절에는 하늘에 사탄이 설 곳이 없다고 했다. 너희의 마음에도 그를 위한 자리가 없어야 한다. 하나님께 대한 끊임없는 찬양의 정신은 사탄이 너희의 삶의 어느 곳에도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자만심에서 배우기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의 실패로부터 많은 교훈을 배울 수 있다. 그들의 가장 큰 실수 중 하나는 그들이 하나님의 관심을 받을 유일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지자 호세아와 이사야를 통해 다른 사람들도 부를 것이라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이는 로마서 9장에서 바울이 인용한 것이다: 24-32).
우리는 나사렛에서 예수님의 첫 번째 설교에 대한 두 가지 반응을 읽는다. 먼저 그 유대인들은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 가운데서 이루어지고 하나님이 그분을 보내어 그들을 자유케 하고 그들에게 은혜를 전파하게 하셨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분께 감사했다(눅 4:22). 사람들은 항상 그런 말을 듣는 것에 감사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먹이려고 하실 때, 이스라엘의 모든 과부들을 건너뛰어 사르밧에 있는 이스라엘인이 아닌 과부를 택하여 공급하셨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의 모든 문둥병자들을 무시하고 이스라엘인이 아닌 사람(나아만)을 고쳐 주셨다. 하나님께서 비이스라엘인들을 축복하신다는 말을 듣자마자 그들의 반응은 바뀌었다. 그들은 너무 화가 나서 예수님을 붙잡고 죽이려고 했다(눅 4:28, 29). 그 구절을 읽어라.
그것은 여러 세기 동안 전 세계 기독교도들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이 그분의 도구를 통해 움직이시고 새로운 운동을 시작할 때마다, 그 운동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만이 하나님의 특권을 받은 택함을 받은 자이며 하나님은 다른 누구에게도 설 자리나 축복을 가지고 계시지 않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이것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끊임없이 자신을 판단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확실히 사람을 분별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누군가를 판단하거나 정죄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계셨고,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의 육욕에 대해 분명한 견해를 갖고 있었다. 따라서 다른 사람에 대해 그러한 의견을 갖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사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속거나 조종당하는 것을 피하려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를 판단하거나 정죄해서는 안 된다.
사역과 비난
모든 예언적 사역은 "편안한 자를 괴롭게 하고, 불안한 자를 위로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설교 방법이었다 - 바리새인들을 불안하게 하고, 회개하는 죄인들을 위로하는 것.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설교에 분노했고 그분을 미워했다. 그러나 회개한 죄인들은 격려를 받고 그분을 사랑했다. 오늘날에도 모든 선지자는 거룩함을 추구하는 회개하는 죄인들에게 큰 사랑을 받을 것이며 위선자들과 독선적인 바리새인들에게는 몹시 미움을 받을 것이다.
시므온은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사역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의 생각이 드러나게 하여, 많은 사람의 마음이 낮아지고 소수는 높아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눅2:34,35). 이것은 오늘날에도 주님께서 당신의 종들을 통해 예언의 능력으로 주님의 사역을 베푸시는 곳마다 일어나는 일이다.
히브리서 13:11-13은 종교적 기독교 집단에 의해 거부당하는 것에 대해 세 가지를 알려 준다:
(1) 율법에 따르면, 죽임을 당한 동물의 시체는 부정한 것으로 취급되어 진영 밖에서 불태워야 했다.
(2) 이와 같이 예수의 몸도 유대인들에게 부정한 것으로 여겨 예루살렘 밖에서 죽임을 당했다.
(3) 이제 우리가 (주님을 위해 비타협적으로 선다면) 종교계에서 부정한 존재로 여겨질 차례이다.
우리는 기꺼이 세상의 기독교 집단을 벗어나 예수께 나아가야 한다. 비난은 모든 참된 제자와 모든 참된 지역 교회가 영원히 직면해야 할 덮개이다. 어떤 어리석음이나 바리새주의로 인한 비난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충실하고 그의 완전한 목적을 선포한 것에 대한 비난이다.
은혜 - 새 언약의 축복
옛 언약과 새 언약의 가장 큰 차이점은 옛 언약은 땅의 언약이고 새 언약은 하늘의 언약이라는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지켰다면 많은 돈, 번영하는 농장, 많은 자녀, 많은 가축, 신체적 건강만을 약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약속을 가지고 오시지 않았다. 그분은 우리를 노예로 삼는 정욕에 대한 승리를 약속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 즉 옛 언약의 축복과 새 언약의 축복을 선택할 수 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옛 언약의 축복에 상당히 만족한다. 예수님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묵은 것이 좋다"라고 말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눅 5:39).
이삭과 야곱
구약성경에서 우리는 이삭과 야곱이 그들의 삶을 마감한 방식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본다. 그리고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삭은 일생 동안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그는 부유한 아버지(아브라함)에게서 재물을 받아 집에서 모든 것을 마음껏 누렸다. 그의 결혼도 그의 아버지가 주선했다. 반면에 야곱은 모든 것을 위해 분투해야 했다. 형이 그를 죽이려 했기 때문에 그는 집에서 도망쳐야 했다. 그는 재산과 두 아내를 얻기 전에 장인 라반에게 속았다.
과연 이 두 남자의 최종 결과는 무엇인가? 이삭의 생애가 끝날 때, 우리는 좋은 음식을 사랑하고 그의 두 자녀 중 누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는지에 대한 영적 분별력이 없는 그를 본다. 에서가 좋아하는 사슴고기 카레를 만들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장자권을 에서에게 주기로 결정했다(창 27:2-4)!
그러나 야곱은 말년에 매우 달랐다. 브니엘에서 하나님에게 부서진 그는 이스라엘이 되었다. 그리고 요셉이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데리고 와서 축복을 받을 때, 야곱은 누가 더 복을 받을지 알았다. 그래서 그는 손을 교차하여 동생 에브라임에게 더 큰 축복을 주었다. 야곱은 또한 그의 모든 아들들의 장래에 대하여 예언하였다(창48:8-49:27). 하나님이 야곱을 부서뜨리셔서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예언자가 된 것이다.
이삭과 같은 많은 신자들은 다른 신자들로부터 영적으로 받은 것으로만 산다. 그들은 영적인 아버지에게서 받은 것만을 남에게 전할 수 있다. 이것은 좋지만 두 번째로 좋은 것이다. 그러나 인생에서 겪었던 시련을 통해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알게 된 다른 신자들이 있다(그리고 이들은 극소수). 그리고 야곱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영적인 부(계시)를 받았고, 하나님의 길과 마음을 깨닫고 영적인 분별력을 얻었다. 너희는 이렇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너희가 직면하도록 허락하신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하는 법을 배워라. 도예가가 진흙 그릇을 빚는 것처럼 그분도 너희를 빚어내게 하여라.
예수를 만물의 주로 삼으라
바울은 고린도후서 2장 14절에서, "우리를 항상 그의 승리 안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했다. 리빙 바이블은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을 통하여, 그가 우리를 이기셨느니라"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승리 가운데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를 이기셔야 한다.
어느 날 모든 무릎이 꿇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빌 2:10, 11). 그러나 지금은 너희의 육신 안에 있는 모든 욕망이 무릎을 꿇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인정해야 한다. 너희를 지배하는 정욕은 절을 하면서 예수님이 너희 몸의 주인이심을 인정해야 한다.
"여호와의 칼이 모든 육체의 머리(북쪽)에서 발(남쪽)까지 치실 것이고, 모든 육체가 여호와께서 자기 칼을 빼어 그것을 치신 줄 알리라"(겔 21:4,5).
하나님이 일하시는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에서 첫째가 되시는 것"(골 1:18)이다. 너희도 그것을 목표로 삼는다면, 너희의 삶과 그분을 증거하는 일 모두에서, 항상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것을 기대할 수 있다. 너희가 시간과 돈을 쓰는 방식, 읽는 책, 듣는 음악, 보는 TV 프로그램, 친구 관계, 너희의 말, 모든 일에서 그리스도가 1순위이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만물의 주재로 삼는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모든 영역에서 너희를 이기셨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을 장기적인 목표로 삼고 그것을 향해 계속 노력하여라. 그러면 너희는 날마다 그리고 해마다 그 목표에 점점 더 가까워질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짊어지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셨다. 우리는 이제 "도살될 양(롬 8:36)"이 되어,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범하는 죄를 짊어진다. 나무와 불이(우리의 삶의 환경) 모리아 산에서와 같이, 모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문제는(이삭이 그의 아버지에게 물었던 것처럼) "어린 양이 어디 있느냐"(창 22:7)이다. 정답은 "너희가 어린양이 되어야 한다"이다.
성령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
세례 요한은 하나님께서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네 가지 일을 하라고 그를 보내셨다고 말했다(눅 3:5). (1) 골짜기를 높아지게 하기 위해; (2) 산과 언덕을 낮아지게 하기 위해; (3) 굽은 길을 곧게 하기 위해; 그리고 (4) 거친 곳을 매끄럽게 하기 위해.
이것이 바로 성령께서 우리의 삶에서 하고자 하시는 일이다:
(1) 성령은 낮은 곳을(우리가 지상의 것들에 의해 지배되는 지역 - 성, 돈, 인간의 명예와 평판 등) 일으켜 세우려 한다.
(2) 성령은 교만, 오만, 자만(우리의 능력으로 인해)의 산들과 우월감의 작은 언덕들(예: 우리가 일을 잘할 때)까지 무너뜨리려 한다.
(3) 성령은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비뚤어진 것과 간사한 것을 없애려 한다.
(4) 성령은 우리의 엄격함과 가혹함과 거침을 부드럽게 하시려 한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서 이루신 구원을 보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 있다(눅3:6); 그러면 우리 육체의 모든 지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이다(비교 사40:3-5). 대초원의 불처럼, 하나님은 그분의 영광이 우리의 육체를 휩쓸고 지나가며, 조금씩 영역별로 모든 부분을 파괴하기를 원하신다.
우리 삶에서 찌꺼기 제거
예레미야 48장 10절에, "여호와의 일(예수님을 우리 육신의 모든 영역에서 주님이 되시게 하는 일)을 게을리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또 그 칼을 금하여 피를 흘리지 아니하는 자도 저주를 받을 것이로다(자기 육체의 정욕을 무자비하게 다루는 대신 부드럽게 다루는 사람)." 계속해서 다음 구절에서 모압이 이 그릇에서 저 그릇으로 비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향기가 변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릇에서 그릇으로 비우기'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존 폴렛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찌꺼기를 없애기 위해 우리를 다양한 그릇들에(오해, 조롱, 무고, 암흑의 시련 등의 그릇들) 부으시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모든 그릇에는 우리 삶에서 찌꺼기를 제거하는 놀라운 방법이 있다. 포도주만 가만히 있으면("휴식, 안식"), 찌꺼기가 빨리 가라앉을 수 있다. 일단 찌꺼기가 그릇의 바닥에 가라앉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른 그릇에 부어 주실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향기는 점점 더 달콤해진다. 그러나 우리는 안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 결코 우리 자신을 정당화하거나 자신을 변호하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끊임없는 혼란으로 포도주가 찌꺼기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는 낭비되는 헛된 고통이 많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을 정당화하고, 자신의 사정을 하나님께 맡기고 위임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가랴 2장 13절에서, 우리는 "모든 육체가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니(안식), 이는 그가 우리 가운데 거하시려고 하늘로부터 임하심이니라"(10절 참조). 이것이 항상 우리 안에 있어야 하는 방식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만 있는 영광
나는 너희가 갈보리를 많이 묵상하도록 격려하고 싶다 - 그리고 너희를 위해 거의 벌거벗은 채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 예수님을 옹호하는 것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마라. 너희가 타락하지 않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 한 가지는 동료 학생들에게 너희의 그리스도인 입장을 분명히 알리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이 하는 대로 사탄에게 무릎을 꿇지 마라. 굽히지 말고 똑바로 서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애굽 땅(죄의 권세)에서 인도하여 내었으니 이는 너희로 그들의 종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요, 또 내가 너희 멍에의 빗장을 부수어 너희로 바로 서서 걷게 하려 함이라"(레 26:13).
빌립보서 3:17-19에서, 바울은 두 부류의 신자에 대해 말한다:
첫째, 끊임없이 온전함을 추구하는 자신과 같은 사람들.
바울은 자신이 행한 한 가지, 즉 온전함을 추구하는 일에 자신을 따르라고 다른 사람들을 격려했다.
대부분의 교단에서, 설교자들은 (거짓 겸손으로) "나를 보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고 오직 그리스도만 따르라"고 말한다. 그것은 매우 겸손하게 들리지만, 그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우리는 우리가 전파하는 것의 살아 있는 본을 보여야 한다.
여기서 두 번째 부류의 신자를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라고 한다. 이들은 신자였다: (i) 그들의 식욕(여러 가지에 대한 그들의 정욕)이 그들의 신이었다; 그리고 (ii) 부끄러워해야 할 일을 자랑스러워하는 사람.
우리는 피부색, 아름다움, 지성, 능력, 학력, 부 또는 세상 사람들이 자랑스러워하는 그 밖의 어떤 것으로도 결코 자랑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바울이 한 것처럼,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자랑해야 한다, "우리에 대하여 세상의 관심이 죽었고, 세상 매력적인 것에 대하여 우리의 관심이 죽었습니다(갈6:14 -living)." 너희가 주님의 편에 설 때, 세상의 많은 사람들(심지어 세속적의 신자들도)은 너희를 이상한 사람으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너희를 방해하지 않도록 하라. 세상의 친구들 앞에서 주님을 위해 일어서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 되라.
만일 우리 삶에 기름부음이 없을 때나, 죄에 끊임없이 패배하거나,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을 때나, 우리의 모범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경건한 삶을 살도록 도전을 줄 수 없을 때마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워하고 슬퍼해야 한다. 그러한 애도는 우리에게 유익하다. 하나님은 그것을 주목하시고, 우리에게 속히 은혜와 승리를 주심으로 응답해 주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죄와 관련되지 않은 인간적인 연약함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 즉 질병, 어색한 버릇, 지성 부족, 볼품없음 또는 가난. 하나님은 그분의 일을 하기 위해 영화배우나 과학자를 택하지 않으시고, 사람들의 눈에 인간적으로 매력적이지 않은 사람들을 선택하신다.
영적으로 발전하려면 하나님이 가치 있게 여기시는 것에 가치를 두고, 하나님이 가치 있게 여기지 않는 일에 가치를 두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해주신 좋은 삶.
다음은 최근에 나를 축복한 시이다:
"우리는 폭풍우의 몫에 직면했습니다
그러나 태양으로 밝은 날은
폭풍우가 치는 날보다 많습니다
적어도 50대 1입니다.
우리는 몇 개의 험난한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내신 평탄한 길은
거친 길보다 수적으로 많습니다
최소 3000퍼센트(30배).
백 잔의 기쁨 -
반 잔의 갈등 -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는 방법입니다
인생의 계절들을 통해." (작가 불명)
기억해야 할 몇 가지 중요한 사항
최근 방갈로르에서 열린 단체연합에서, 우리는 다음 사항에 대해 생각했다:
-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열심을 내어야 한다"(계3:19 - living)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항상 불타기를 원하신다 - 죄에 대항하는 것과 의를 위하는 것, 하나님을 찬송할 때에 등등. 미지근한 사람들은 결국 토해내 진다.
- 하나님은 주로 신실함을 보신다. 우리는 신실해야 한다: (a) 작은 일에; (b) 돈의 사용; (c)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행동에서(누가복음 16:10-12).
- 시기는 무서운 악이다, 가인과 사울 왕, 맏아들(탕자 이야기에서) 그리고 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대적했던 바리새인들의 경우에서 볼 수 있다. '시기하다'와 '질투하다'는 말은 우리가 성구의 도움을 받아 공부해야 할 단어이다. 우리는 이 악에서 우리 자신을 완전히 정화해야 한다.
- 이사야서 53장은 우리도 걸어야 할 길이다 -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수실 때에만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를 통해 번성할 것이다"(사53:10 - living).
- 하나님의 능력 없이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구하고 끊임없이 성령 충만해야 한다.
- 선한 양심은 우리의 앞을 가로막는 산들에 대해 믿음을 행사할 수 있게 해준다. 우리는 편안히 앉아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들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것들을 대적하고 예수 이름으로 제거해야 한다.
우리는 이 시대에 단순한 인간의 흥분과 성령의 감동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이 분별력을 주실 수 있으며,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성숙해짐에 따라 점점 더 많은 분별력을 받는다.
기도의 몇 가지 양상
예수님은 우리가 계속 기도하고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 마치 재판장에게 계속해서 가서 원한을 풀어 달라는 과부처럼(눅18:1 이하).
만약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려면(즉, 우리가 전화 할 때 그분이 전화를 받으시려면 - 기도는 양방향 전화 대화 같기 때문에 - 시66:18), 우리의 마음은 순수해야 하고(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 선해야 한다(다른 사람과의 수평적 관계). 그러면 우리의 찬양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의 찬양과 어우러져 하나님께로 올라갈 것이다.
우리 자신의 결핍을 깨닫기: 눈이 멀어 부르짖는 바디매오는, 우리가 빛이 없는 곳에서 우리 자신의 결핍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시도록, 주님께 어떻게 부르짖어야 하는지에 대한 좋은 예이다(막10:46). 예수님은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하신 것처럼 기꺼이 우리의 눈을 뜨게 해주시려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 중 하나는 우리에게 결핍된 부분을 보여 주는 시각이다. 그것이 우리가 기도해야 할 중요한 것 중 하나이다. 다른 사람들의 결점에 집중하는 것은 우리 눈에 모래를 문지르는 것과 같다 - 그것은 우리를 장님으로 만들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궁핍함 살피기: 잠언 11장 24,25절에 보면 관대한 자는 형통하고 남에게 물을 주는 자는 하나님께서 친히 물을 주신다고 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짐과 궁핍함을 돌볼 때, 하나님은 우리를 강력하게 도우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필요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자기 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해야 한다. 욥은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 병이 나았다(욥42:10). 아브라함은 의심할 여지 없이 결혼 생활의 모든 기간 동안 자녀를 위해 기도해 왔다. 그러나 사라는 여전히 불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브라함은 임신하지 못하는 다른 여자들을 위해 기도했다(창20:17,18). 그 때 하나님은 그 여인들을 위한 아브라함의 기도에 응답하셨을 뿐만 아니라 바로 다음 구절에서 "여호와께서 사라의 태를 여셨다"고 말씀하신다(창 21:1).
기도의 논리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기도의 문제에서 우리 자신의 이해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셨고, 베드로는 사탄이 그를 세게 흔들어 체로 치는 어려운 시기를 잘 이겨냈다. 예수께서 기도하지 않으셨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상상해 보라.
예수님은 또한 겟세마네에서 압박감을 느끼실 때,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함께 기도해 달라고 요청할 만큼 겸손하셨다.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와 함께 그리고 우리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교만이다. 우리가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겪고 있는 압력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분은 여전히 기도 지원을 요청하셨고, 그 세 명의 제자에게서 기도를 받지 못해서 실망하셨다.
온유와 겸손 - 예수님의 멍에를 메다
영생은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 구원자, 앞서 달려가신 분으로 아는 것이다(요17:3). 안정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를 발전시켜야 한다. 그것이 타락(퇴보)에 대한 가장 큰 보호 장치이다. 감동적인 메시지를 듣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것이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말씀일지라도 말이다. 하늘에서 내린 만나도 24시간 만에 벌레가 생기고 악취를 풍기기 시작했다(출16:20). 그리스도인의 삶의 신선함을 잃고 24시간 안에 변질되기 쉽다!! 그러나 동일한 만나를 언약궤 안(성막의 지성소), 곧 하나님 앞에 두었을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서 방황한 40년 동안과 그로부터 수백 년 후 가나안에서 벌레도 나지 않았고 악취도 나지 않았다(출16:33; 히9:4). 그것이 우리 삶의 모든 것을 신선하게 유지하는 하나님의 임재의 능력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로부터(모임과 테이프에서) 주님에 대해 간접적으로 들은 모든 것은 주님 앞에 가져가야 하며 주님의 말씀을 통해 직접 주님으로부터 얻는 직접적인 지식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마태복음 11장 27-29절에서 예수님은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우리에게 계시하지 아니하시면 우리가 아버지를 알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 계시를 받기 위해서, 그분은 우리가 그분께 나아와 그분의 멍에(십자가)를 지고 그분에게서 온유함과 겸손을 배우라고 초대하신다(이 세 구절을 모두 함께 읽어라).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분에게서 배우도록 요청하신 단 두 가지이다. 그러므로 특별히 이 부분에서 예수님의 영광을 보기 위해서는 말씀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1) 온유함. 먼저, 예수님의 온유함은 바리새인들을 상대로 항상 죄인의 편을 들어주신 데서 나타난다. 간음하다 잡힌 여자의 경우에서 이것을 볼 수 있다(요 8:1-12). 또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 예수님의 발에 기름을 부은 죄 많은 여자의 경우도 있다(눅 7:36-50). 시몬이 그 죄 많은 여자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는 한,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시몬이 그녀를 멸시하는 것을 보시고, 그의 예의 없음과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그를 꾸짖으셨다(눅 7:40-47). 예수님은 회개하는 죄인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가혹하셨다. 그분은 성경에 열광적인 바리새인들에 맞서 항상 회개하는 죄인의 편에 서신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된다. 우리는 그분에게서 이 온유함을 배워야 한다.
예수님의 온유함의 두 번째 측면은 자신에게 해를 끼친 사람들에 대한 용서하는 태도에서 볼 수 있다. 사람들이 그분을 귀신의 왕이라 칭하자, 그분은 즉시 그들이 용서를 받았다고 말씀하셨다(마12:24,32). 그들이 그분을 모욕할 때, 그분은 결코 그들을 위협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단지 잠잠했다(벧전2:23). 이것이 우리가 배워야 할 예수님의 온유함의 두 번째 측면이다. 우리 손에 떨어진 도마뱀이나 바퀴벌레를 즉시 떨쳐 내듯이 원망, 복수, 원한, 용서하지 않는 마음 같은 사소한 생각도 떨쳐버려야 한다.
(2) 겸손. 마태복음의 처음 여섯 구절은 예수님이 태어나시기로 선택하신 가계에서 겸손하신 모습을 보여준다. 유대인의 족보는 일반적으로 여성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 언급된 네 명의 여자가 있다 - 다말, 라합, 룻, 밧세바이다.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와 간음하여 아이를 낳은 사람이었다(창38장). 라합은 여리고에서 유명한 창녀였다(수2장). 룻은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모압의 후손인 모압 사람이었다 - 롯의 딸은 아버지를 간음하게 했다(창19장). 그리고 밧세바는 다윗과 간음한 사람이었다. 신약성경의 맨 처음 단락에서 이 네 명의 여성(모두 어떤 식으로든 성적인 죄와 관련이 있음)의 이름이 언급된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죄인과 동일시하고 그들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심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다.
예수님의 겸손은 그분이 이 땅에서 맡은 비천한 일(목수의 일)과 지상 생애 내내 가졌던 종의 태도에서 볼 수 있다. 종의 태도는 끊임없이 경계하고,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살펴보고, 그러한 필요가 관찰되는 즉시 그러한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빠르게 움직이는 태도이다(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
겸손에 대한 앤드류 머레이의 책은 '겸손'을 "아무것도 되지 않으려 하는 것, 그리하여 하나님이 모든 것이 되시게 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이것이 예수님이 기뻐하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그분에게서 배워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예수님의 멍에를 목에 메고 그에게서 온유와 겸손을 배우라. 그리하여 그분은 너희에게 아버지를 점점 더 많이 드러내실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의 태도가 신성한 성품을 결정한다
우리는 성품의 변화가 생각의 변화(생각을 새롭게 함)에서 시작된다는 로마서 12장 2절의 말씀을 끊임없이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이나 상황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 너희는 어떤 사람이나 어떤 상황에서도 아담의 자손이 그것들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바라보지 말아라. 너희는 항상 "하나님은 이 사람이나 이 상황을 어떻게 보셨을까?" 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 그런 다음 너희의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과 일치시켜라.
또한 (유치원부터) 박사 학위를 받는 데 25년이 걸리는 것처럼,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데에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인간이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된 지 불과 4~5년 만에 그토록 그리스도와 같이 된 스데반(사도행전 6, 7장)과 같은 청년을 생각해 보라. 40년 동안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온 사람들이 영원한 세상에서 스데반보다 앞서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가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 우리 마음의 태도이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 1718-1747)는 미국 인디언(미국에서)을 위한 하나님의 동정심을 너무나 많이 받아들여서, 29세의 나이로 죽기 전에 그들 가운데서 위대한 일을 했다. 그는 10년 동안, 다른 사람들이 100년 동안 한 것보다 더 많이 하나님을 위해 일했다. 그러므로 나이가 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주님을 섬기기 시작해서는 안 된다. 마귀는 너희가 성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을 섬기기 시작하려면 50세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 거짓말쟁이의 말을 듣지 말아라.
하나님의 불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에 있을 때, 그는 850명의 거짓 선지자들에게 "불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시라"(왕상 18장)라고 말했다. 불은 순결을 말한다. 심지어 이교도들도 그것을 인정한다. 그 불은 감정적인 설렘이나 좋은 노래가 아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이드로의 양 떼를 치고 있을 때, 그는 다른 많은 떨기나무 사이에 불타는 떨기나무를 보았다. 하나님은 그 떨기나무에 거하셨다. 이것은 또한 오늘날의 참된 교회의 징표이다: 그것은 순결로 타오를 것이다.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다. 불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시다.
불은 항상 희생제물이 전체가 놓여진 제단 위에 떨어진다. 이것이 우리가 교회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을 계속 전하는 이유이다 - 그래야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에게 불을 보내실 수 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자신의 명예와 금전적 이득)을 구하는 모든 자들의 성전을 깨끗하게 하셨다. 이것은 그분이 오늘날에도 하는 일이다. 그날 성전에서 비둘기를 팔았던 것처럼, 오늘날 설교자들은 치유 집회에서 "성령의 위조된 은사"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주님의 이름으로 돈을 모으는 것이다. 언젠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사를 행사하여 자신을 위해 돈을 벌고 명예를 구하는 이 모든 설교자들을 쫓아내실 것이다.
하나님은 교회를 건축하기 위한 계획과 양식을 가지고 계신다. 우리가 건축하는 것이 그 계획대로 되지 않음을 기꺼이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떨며 겸손하고 심령이 상하면(이사야66:1,2), 주님은 우리를 돌보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의 교회를 올바로 건설하도록 도와주신다.
에스겔 40-48장에서 우리는 주님의 성전을 위한 계획을 주신 것을 본다. 이것은 교회를 건축하는 사진이다. 주님의 종들은 그곳에서("사독의 아들들" - 겔 44:15-27) 백성이 아닌 주님 자신을 섬기는 자들로 묘사된다. 그러한 교회에서 흘러나오는 생수의 강(예수님이 요한복음 7:37-39에서 말씀하셨음)은 에스겔 47장에 언급되어 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계획에서 벗어나 교회를 짓는 방식을 부끄러워하는 자들에게만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 주라고 말씀하신다(겔43:10,11). 여기에서 하나님의 집의 기본법은 거룩함이라고 언급되어 있다(겔 43:12).
혼적이고, 인간적이며, 바리새인적인 것이 영적이고 신성하고 그리스도를 닮은 것과 매우 유사하게 보일 수 있다. 에스겔 43장 8절에서, 하나님은 참 성전 바로 옆에 위조 성전이 지어졌다고 말씀하신다 - 그래서 분별 없는 사람들은 어느 문으로 들어가야 할지 혼란스럽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적이고 감정적인 열정에 불과한 것과 참으로 성령으로부터 오는 불을 구별해야 한다. 바리새인의 의와 그리스도와 같은 의를 구별해야 한다. 단지 인간의 선함과 신의 성품에 참여한 사람의 결과인 선함인지를 구별해야 한다.
신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의 한 가지 구별되는 표시는 누가복음 6:35에 "아무것도 바라지 아니함"으로 표현되어 있다. 인간의 사랑은 항상 그 대가로 존경과 사랑, 그리고 선물을 기대한다. 그러나 신성한 사랑은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내적인 요구를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선인과 악인에게 공평하게 해가 뜨게 하시며, 악인과 배은망덕한 자에게 친절과 자비를 베푸신다. 이 신성한 사랑 안에 살아야만, 우리는 모든 바리새주의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
바리새인과 이교도는 모든 면에서 그들과 하나가 아닌 사람들을 사랑할 수 없다. 이것은 그들의 사랑이 신성한 것이 아니라 인간적임을 증명한다. 이것이 그들의 완고함과 오만함의 근본 원인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만일 너희가 사랑하는 자에게만 사랑을 베풀고 선을 행한다면, 너희는 죄인보다 나은 것이 없느니라." 공산주의자들도 서로 사랑한다. 아담의 족속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 사랑하는 방법을 모른다.
너희의 "기대는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와야 한다"(시 62:5). 그러면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나쁜 기분, 낙담, 투덜거림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려, 존경, 선물 등을 기대한 결과이다. 주변 사람들이 변화하거나 더 나은 행동을 하거나 너희를 배려할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너희의 삶은 영광스러울 것이다.
큰 왕국으로 들어가는 좁은 문
예수님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만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고 하셨다. 그러나 낙타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아메바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다. 그것은 모두 크기의 문제이다. 우리 자신이 작을수록(우리 자신의 눈에는), "하나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벧후1:11). 하나님의 나라는 매우, 매우 크다. 그러나 그 문은 바늘구멍처럼 좁다. 우리의 은사, 재능, 능력, 성경 지식, 주님을 위한 봉사 또는 우리가 "영적"이라고 생각함, 등으로 인해 우리 자신이 자랑스럽고 자급자족하는 것은 우리를 크게 만드는 것이다. 너희 소년들은 모두 잘생겼고, 총명하고, 재능이 있고, 성취했으며, 성경에 대한 지식이 있고 영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나는 너희가 그 모든 일로 인해 결코 스스로 크게 여기지 않기를 기도한다. 항상 자신의 눈에 작게 남아 있고, 어떤 인간도 그의 교파, 종교, 또는 빛이 부족할지라도 결코 경멸하지 마라. 그리고 최악의 인간을 볼 때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라: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나도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항상 자신을 "사람의 아들", 즉 "보통 사람"이라고 하셨다. 이것은 너희도 모든 사람을 향해 항상 평범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절대로 자신을 우쭐대지 말고 자신의 능력이나 성취에 대해 묵상하지 마라. 너희를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어 주신 하나님의 자비에 항상 감사하여라.
구원을 하나님의 사역으로 인정하기
예수님은 사람이 자기를 구원할 수 없다고 하셨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죄의 형벌(과거), 죄의 권세(현재), 죄의 존재(미래)으로부터 구원을 주실 수 있다(막10:26,27 참조). 요나는 마침내 "구원(건져짐)은 오직 여호와께로서 말미암음이니라(욘2:9)"는 것을 인정했을 때, 물고기 뱃속에서 건져졌다. 그 다음 구절은 "그리고 나서 여호와께서 물고기에게 명하사 요나를 육지에 토하게 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구원은 자기계발 프로그램이 아니다. 그것은 겉모습만 너희를 변화시킬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너희의 내면을 변화시킨다. 로마서에서, 복음 메시지가 장별로 전개되는 것을 볼 수 있다:
1-3장 - 인간의 죄가 명백해졌다.
4장 -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음(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언하심).
5장 - 이제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유.
6장 -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우리의 옛 사람. 그러므로 죄의 종이 될 필요가 없다.
7장 - 율법과 율법주의적 태도로부터의 자유.
8장 - 이제 성령 안에서 살며, 육신의 정욕을 날마다 죽이라.
그런 삶의 결론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위험은 이 모든 것을 스스로 달성했다고 생각하기 시작하고 교만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9-11장으로 넘어간다.
9장 - 하나님의 주권. 그분은 아브라함의 많은 자손 중 한 명(이삭)만을 선택했다. 그분은 이삭의 두 아들 중 한 명(야곱)만을 선택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쌍둥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둘 중 하나가 선하거나 악을 행하기 전에"(롬 9:11) 야곱을 선택하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너희를 택하신 것은, "너의 달음질이나 결심이 아니요 오직 그분의 자비하심 때문이다"(롬 9:16). 이것은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10장 - 하나님의 의. 너희 자신의 의는 하나님 보시기에 더러운 옷과 같다(사64:6). 하나님은 너희의 내면과 마음 속에서 너희를 의롭게 만들기를 원하신다. 이스라엘은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힘썼기"(롬 10:3)때문에,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하였다.
11장 - 하나님의 신실하심. 이스라엘은 실패했지만, 하나님은 신실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약속과 경고가 있다. 그리고 그분은 이 두 가지를 모두 이루시는 데 신실하시다.
12장 1,2절 - 그러면 무슨 말을 할까? 하나님의 자비에 비추어, 너희의 몸과 마음을 온전히 그분께 드려 그분의 온전한 뜻을 이루어야 한다.
너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 이유는 그분이 지옥불로 너희를 위협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너희에게 자비를 베푸셨기 때문이다:
- 침례를 받은 후에 범한 죄를 포함하여 과거의 모든 죄를 용서해준다;
- 너희에 대한 너희의 과거를 기억하지 않으신다;
- 다른 사람들의 눈에서 너희의 벌거벗음과 실패를 가려준다;
- 받을 자격이 없을 때 거듭해서 축복하신다.
어떻게 그런 하나님을 이용할 수 있는가? 자신의 한 달란트를 파묻은 사람은 주인이 "완고하고 엄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하나님이 완고하고 엄격한 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비참하게 만들고 그들의 삶을 묻고 낭비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방면에서 가장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하시는 선하신 하나님이심을 너희가 알게 된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13장 - 하나님이 세우신 권세에 복종하는 것은 복음에 복종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이다.
14, 15장 -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받아주신 것처럼, 다른 신자들(심지어 다른 그룹의 신도들까지도)을 서로 의견이 다르더라도 받아주어야 한다. 바리새인과 오만한 기독교인들은 로마서 14장과 15장에 의해 폭로되는데, 그 말씀은 그들의 가르침 안에 설 자리가 없다. 너희는 많은 신자와 함께 일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받으신 것처럼, 너희도 그들을 모두 받아들여야 한다.
16장 - 마지막으로 20절에서 사단이 우리 발 아래에 짓밟힐 것이라고 하는 것으로 복음 메시지가 끝난다.
만약 너희가 성령님께서 로마서 16장 20절까지 인도하시도록 하면, 너희는 정말로 복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은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많은 비유와 복음서에 묘사된 그분의 생애 중 많은 사건은 우리에게 한 가지 진리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이다. 그분의 축복은 우리의 공로에 근거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것을 분명히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를 축복해 달라고 그분께 기도할 수 있는 믿음을 갖지 못할 것이다 - 왜냐하면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기에 합당하지 않다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 특히 성경을 읽지 않은 어느 날에 또는 어떤 죄에 빠졌을 때! 다음은 몇 가지 예이다:
- 탕자는 돌아올 때 그가 받을 자격 이상의 축복을 받았다(눅15장).
- 거리에서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에 초청을 받은 거지들은 각각 예복을 무료로 제공받고, 그들이 받을 자격 이상의 축복을 받았다(마22).
- 가장 늦게 출근한 일꾼이 임금을 제일 먼저 지급받았다(마20).
- 죽어가는 강도(지속적으로 큰 죄 가운데 살았던)와 예수님(죄를 결코 지은 적이 없음)은 같은 날 낙원에 들어갔다.
- 막달라 마리아(전에 귀신들렸던 아마도 전직 창녀)는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보는 특권을 받은 사람이었다(요20).
- "여호와는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자비롭고 인자하시도다"(시103:8 - living).
구원을 이루라
야고보서 1:19-25에서 우리는 모든 사람을 대할 때 "듣기는 빨리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19절)해야 한다고 읽는다 - 왜냐하면 우리는 분노를 통해서는 결코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20절). 콘크리트 포장의 갈라진 틈 사이에 풀이 자라는 것처럼 "악에서 뻗어 나온 것"을 조심하여라(21절). 잘못된 태도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 그러면 악의 싹이 자라지 않을 것이다.
말씀을 들은 후에 우리는 들은 것을 잊어버리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자신의 구원을 이루는)실행하는 일꾼이 될 수도 있다(25절). 하나님께서 (우리가 읽거나 들은 것을 통해) 말씀의 거울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을 빨리 잊어버리기 쉽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마음에 잘 간직하고 실천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우리는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읽고 또 묵상해야 할 몇 가지를 읽는다. 우리가 이 13장에서 설명하는 유형의 사랑이 없다면, 우리의 모든 지식, 열심, 희생 및 은사는 하나님의 눈에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는 이 거울을 보고 우리 자신을 보고, 우리의 사랑이 편파적이지 않고 선함으로 가득 차서 온전해질 때까지, 우리가 부족한 곳에서 노력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하며, 우리가 그에게 받아들여짐을 확신하고,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영화롭게 하여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라도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선포하고, 형제들을 참소하는 자들의 참소를 이겨낸다(계12:10,11).
예수님이 죽으시던 날, 33년 동안 단 한 번도 죄를 지은 적이 없는 사람(예수님)과 마지막 순간까지 이 땅에서 평생 죄를 지은 사람(회개한 강도), 두 사람이 낙원에 들어간 것은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의로운 사람으로서 손을 잡고 낙원을 걸었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것을 듣는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이용할 수 있다.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어라. 그들은 그것으로 스스로를 파괴할 것이다. 그러나 진실한 우리에게는 그러한 메시지가 우리로 하여금 다시는 단 한 번도 죄를 짓고 싶지 않게 만들고, 용서하시고 은혜로우신 주님께 더욱 헌신하고 싶게 만든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회개에 이르게 하시느니라"(롬 2:4).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서 기적을 행하실 것을 신뢰해야 하며, 우리의 불신앙이나 우리 자신의 무가치함의 어떤 느낌 때문에 그분을 제한해서는 안 된다.
자기 단체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을 성급하게 비판하는 신자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러한 신자들은 분명히 자신의 이전 죄로부터 깨끗게 되었음을 잊어버렸다. 주님은 요한복음 8장에서 그들이 여자에게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면 예수님께서 그녀 앞에 서서 "나를 먼저 죽이라"고 직접 돌을 맞으셨을 것임을 나에게 보여 주셨다. 그것이 그분이 갈보리에서 하신 일이다. 하나님의 다른 자녀를 돌로 치는 것은 예수님 자신을 돌로 치는 것이다. 항상 그것을 피하여라.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기
우리는 삶의 날마다 바울처럼 행해야 한다: "뒤에 있는 것은(바로 전날까지의 모든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노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위로부터의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빌 3:13,14). 즉, 그날까지의 모든 성취와 모든 실패를 잊어야 한다. 그렇다면 오직 한 가지만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을 닮으려면 얼마나 더 성장해야 하는가? 바울은 그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표시라고 말한다(빌 3:15).
새해가 너희 모두에게 복된 해가 되어서 마귀가 수치를 당하게 되기를 바란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거나 배척을 당하는 해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날마다 주님을 경외하며 살고, 너희를 해치는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그 대가로 그들을 축복하는, 주님과 더욱 친밀하게 교제하는 해가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지혜롭게 행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란다.
내가 비난과 배척에 대해 언급하는 이유는 마지막 때가 가까워짐에 따라 그것이 점점 더 우리의 몫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들이 집주인을 바알세불이라 불렀거든 하물며 그 집 식구들이랴"(마 10:25)라고 말씀하셨다. 자신의 단체에 속하지 않은 신자들을 온갖 종류의 악한 이름으로 부르는 습관은 기독교의 모든 단체에서 발견된다.
내 아들들아, 내가 너희들을 자랑스러워한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너희들은 나를 비판하는 기독교인들로부터 많은 압력과 반대에 직면해 왔다(주님을 향한 나의 입장 때문에) - 너희들은 내 아들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희에게 그 압력을 극복하고, 나를 미워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셨다. 나는 그 점에 대해 주님을 찬양한다.
나는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보시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너희들 모두를 본다.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며, 마치 너희들이 평생 죄를 범한 적이 없는 것처럼" - 그것이 내가 모든 진실하고 마음을 다한 신자들을 바라보려고 하는 방법이다. 우리가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 자신을 받아주신 것을 기뻐하는 것처럼, 우리는 아버지께서 받아주신 다른 신자들도 기뻐해야 한다.
오직 예수님만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 바로 전까지 평생 죄를 지은 살인자와 함께 손을 잡고 낙원에서 걸을 것이다!! 그것이 은혜이다. 사람의 죄가 더한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넘쳤다.
칭의
최근에 우리는 CFC의 모든 사람을 위해 다음과 같은 문구를 벽에 인쇄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슬프게 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지적해 주십시오" - (시편 139:24- living)
그 기도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가리키는 것이다. 우리의 과거는 우리 주님에 의해 용서되고 지워졌다. 사탄과 악한 사람들이 그것을 잊지 않더라도. 이제 우리는 현재만을 다룰 것이다. 주님의 이름은 "내가 있었다"가 아니라 "I AM"(나는 있다)(출애굽기 3:14)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현재와 관련해서만 우리를 다루신다 - 우리의 과거와 관련해서는 결코 다루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마치 우리가 결코 죄를 지은 적이 없는 거처럼)을 얻었다는 사실에 굳게 근거해야 한다(롬 5:9). 우리는 단지 무죄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고 선언되었다! 둘의 차이점을 생각해보아라. 무죄 판결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인이라고 선언하셨지만 우리가 용서받았다고 선언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자체로 좋은 소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전혀 범죄자가 아니라, 그분처럼 의롭고 순결하고 거룩하다고 선언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는다는 의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설교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불성실한 신자들이 죄를 짓게 하는 방편으로 이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결과 많은 신실한 신자들이 이 좋은 소식을 받지 못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진리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결코 그리스도인의 삶에 진보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항상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게"될 것이다.
베드로의 예를 생각해 보라. 베드로 자신이 주님을 그토록 심하게 그리고 그것도 세 번이나 부인한 지 불과 7주 후, 일어나서 다른 사람들에게 두 번 말하였다, "너희가 예수님을 부인했다……너희가 예수님을 부인했다"(행3:13,14). 자신이 지은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은 바로 그 죄에 대해 얼마나 담대하게 전파하는가! 그렇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에, 과거를 뒤로 하고 "그가 결코 죄를 짓지 않은 것처럼"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는 자신의 죄가 하나님의 은혜보다 더 크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롬 5:20)는 것을 믿었다. 이것이 우리가 새해를 시작하는 메시지이다.
새해로 전환 - 모든 회계장부 정산
야고보서 4:14,15에 우리는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심지어 우리가 살 수 있을지조차 예측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한 해 동안 주님께서 우리를 살게 하신 모든 날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 이제 새해를 맞이하여, 우리는 한 번에 하루를 살아야 한다. 올해 우리가 작년보다 더 발전하려면, "하루 종일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살라"(잠 23:17)라는 권고에 순종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야 한다. 그것이 발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우리는 1년 또는 그 이상 계획을 세우더라도, 내일에 대해 불안해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 해가 끝나기 전에 주님과 사람에 대한 모든 계산을 마감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에게도 빚진 것이 없고 필요한 모든 배상을 했는지 확인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우리에게 해를 끼친 모든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
빌레몬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에는 아름다운 메시지가 담겨 있다. 그곳에서 바울은 빌레몬 앞에서 오네시모를 위해 간청한다. 그는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서 훔친 것은 무엇이든지 바울이 갚겠다고 말했다. "내 회계장부에 청구하라. 내가 직접 갚겠다"(18절).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내 몸에 있는 형제 자매 중에 누가 당신에게 해를 입혀 당신에게 빚진 것이 있으면, 내 책임으로 돌리십시오. 내가 당신에게 갚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해를 끼친 모든 사람을 풀어주어야 한다. 어떤 것도 새해로 "이월"하지 마라.
우리는 다음 중 하나를 통해 주님을 섬기고 그분의 계명에 순종할 수 있다 (1) 심판의 위협의 능력; 또는 (2)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에 대한 감사의 능력. 옛 언약 아래서는 전자였다. 새 언약 아래서는 후자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벌을 주시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많이 그리고 너무도 값없이 용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용서해야 한다.
히스기야에 대해 "그가 받은 은혜대로 보답하지 아니하였느니라"(대하 32:25)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여러 해 동안 주님께 받은 혜택에 따라 주님께 드렸는지 자문해 보는 것이 좋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일주일에 한 번만 안식일이 있었지만, 우리에게는 매일 안식일이 있다. 그들이 50년에 한 번만 희년을 보낸 반면(7번의 안식년 이후 - 7x7년 - 레위기 25장), 우리는 매년 희년을 맞이한다! 희년에 하나님은 모든 빚을 탕감해주고 모든 종을 석방하도록 명하셨다. 리빙 바이블은 "올해는 얼마나 행복한 해가 될 것인가!"라고 말한다. (레 25:11) - 그것이 희년(행복)의 뜻이기 때문이다. 새해는 이렇게 시작해야 한다.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우리의 과거를 기억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과거의 모든 악은 용서하고 "더 이상 기억하지 말아야" 한다. 그 자리에 가기 위해서는, 사탄이 우리에게 생각나게 할 때마다, 우리의 과거와 타인의 과거를 기억하지 않기로 의도적으로 선택해야 한다. 우리는 또한 다른 사람의 과거를 알고 있고 그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그 어떤 정보도 남에게 절대 전달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은혜를 베푸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대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겸손과 믿음
너희가 항상 겸손하면 하나님은 너희를 강력하게 지원하실 것이다. 겸손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행한 악을 생각하지 않고, 항상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행한 선행을 기억할 것이다. 그는 또한 그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행한 선행을 마음에 두지 않을 것이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인간적 능력이나 세속적 자격이나 성취를 결코 자랑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결코 초라하게 느끼도록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너희가 믿음이 있어야만 지원하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 너희가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을 주실 것임을 믿어야 한다. 그것이 믿음이다. 우리 중 누구도 귀신이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볼 수 있는 특권을 주시리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런 생각을 하셨다. 너희가 충실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너희에게 합당한 만큼만 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은 하나님을 제한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선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분을 이용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더욱 섬기게 한다.
믿음은 너희의 앞을 가로막는 산들조차 비키라고 명령할 수 있도록 너희를 강하게 할 것이다. 새해의 좌우명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신자를 위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너희의 모든 일과 공부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어딘가에 있는 그분의 포도원에서 장차 봉사하도록 너희가 겪는 모든 일을 통해 너희를 훈련시키고 계시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너희 또래의 젊은이가 가져야 할 가장 큰 깨달음 중 하나이다. 나는 너희의 나이쯤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대한 계획을 갖고 계시다는 것과, 그 이전에 나의 실패와 타락에도 불구하고(심지어 내가 거듭난 후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내 인생에서 무엇인가를 만드실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후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비록 나의 실패와 실수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모든 훈련에 대해 감사하고 있다. 내 자신의 실패를 통해 배운 가장 큰 것 중 하나는 세상의 어떤 죄인도 업신여기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제는 죄인이나 타락한 자를 경멸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행하신 은혜의 역사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하나님께서 다가올 날에 너희를 위한 사역을 준비하고 계시기 때문에, 항상 겸손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정당화하지 않고, 끊임없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너희의 삶의 모든 인위적인 것을 미워함으로써 그 사역을 준비하여라. 시편 73편 25절을 너희의 변함없는 간증, 즉 예수님 자신에 대한 전적인 헌신이 되게 하여라.
너희는 또한 12세에 "나는 내 아버지의 일을 해야 한다"(눅 2:49)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에게서 배워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고 항상 그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셨다. 예수님이 12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다면, 우리 나이에는 성경을 읽거나 기도하거나 집회에 참석하는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와 세상적인 것에 대한 태도에서 얼마나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하겠는가.
바쁜 학업과 일과에 주님께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바란다. 컴퓨터 프로그래밍, 등의 어딘가에서 막혔을 때 하나님이 초자연적으로 도와주실 것을 기도하고 기대하여라. 그때야말로 너희가 하나님이 너희의 삶의 세세한 부분까지 관심을 기울이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증명할 수 있는 때이다.
성화 - 평생의 과정
바리새주의와 영적 교만은 의를 추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매우 가까이 있다. 따라서 이 쌍둥이 악은 어느 한 집단의 특권이 아니다. 이러한 악은 우리 중 누구에게도 멀지 않다. 나는 이러한 악을 다른 사람들에게서 보기는 쉽지만, 우리 자신에게서 보기는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위적인 것은 종교적 생각을 가진 젊은이들이 쉽게 접하는 것 중 하나이며, 그것은 영적인 것을 죽인다.
너희는 너희가 싸우고 있는 다른 영역들에서 죄에 대하여 "완전한" 죽음으로 들어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너희는 표면적인 승리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모든 욕망은 양파와 같다. 지금 보는 맨 위 껍질 아래에 층들이 있다. 눈에 보이는 층을 근본적으로 다루지 않으면, 그 아래 층에 도달할 수 없다. 성화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일생의 과정이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소녀들을 보시는 방식으로 보고, 그분이 돈과 물질을 보시는 방식으로 그것들을 보고, 그분이 그분의 원수를 보시는 방식으로 우리의 원수를 보는 것 등이다. 그것은 도달하는 데 평생이 걸리는 목표이다. 그러나 너희는 그것을 향해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완전을 향하여 나아가자"(히 6:1), 그리고 "예수와 같이 되기를 바라는 자는 그분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리라"(요일 3:3)와 같은 구절의 의미이다. 그리고 "나는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3,14). 너희가 포기하면 이 전투에서 적이 우위를 점하게 된다. 반면에 은밀히 "육신의 고난을 받는 것"(자아 생명을 죽음에 이르게 함)을 계속하면, 베드로전서 4:1,2에서 말하는 것처럼 죄 짓는 것을 멈추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시험을 받지 않는 방식으로 너희가 시험을 받고 있다고 상상하지 마라. 악마가 그 거짓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여라. 그런 생각은 너희를 낙담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0:13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경험하는 모든 시험은 보통 모든 사람들에게 오는 종류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십니다, 그분은 당신이 극복할 수 없는 능력이상의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이 시험 당할 즈음에, 그분은 극복할 힘(은혜)을 주시어 피할 수 있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감당치 못할 시험은 없습니다"(Good news bible & Living bible).
모든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뜻을 행하려는 같은 방식으로 유혹을 받는다. 죄는 다양한 분야가 있는 큰 원이다. 그러나 모든 시험은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즉,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거짓말을 하거나, 화를 내거나,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투덜거리거나, 음행을 저지르거나, 다른 죄를 짓는 것이다. 예수님도 자신의 뜻을 행하도록 시험을 받으셨다. 그러나 그분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함으로써 그 유혹을 물리치셨고(히 5:7) 결코 죄를 짓지 않으셨다(요 6:38). 이제 우리는 모두 그분의 모범을 따를 수 있다.
그러므로 다른 죄를 서로 독립적인 별개의 문제로 보지 마라. 어떤 사람들은 한 영역에서 더 유혹을 받고 다른 사람들은 다른 영역에서 더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죄를 짓는 것은 자신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라 - 그러면 성령께서 너희의 육신(자기 의지)을 죽이도록 도와주실 것이다(롬8:13 및 갈5:24 참조).
예수님에 대한 열렬한 헌신은 너희가 이기도록 도와주고, 항상 올바른 길을 따라가도록 지켜준다. 너희는 항상 "내가 당신 외에는 땅에서 아무 것도(아무도) 사모할 것이 없나이다"(시편 73:25)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너희의 마음에서 다른 사랑(그리고 정욕)을 몰아내는 힘이 있다. 너희는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요셉이 말한 것처럼 내가 죄를 두려워함이라); 그리고 그분이 항상 내 우편에 계신다(나에게 은혜를 주사 죄를 짓지 않게 하신다)"(시편 16:8). 그것이 끊임없는 승리 속에 사는 비결이다.
하나님을 위해 입장을 밝히는 것
하나님은 항상 한 곳에서 그분을 위해 입장을 취할 최소한 한 사람을 찾고 계신다(겔 22:30 참조). 그분은 한때 에녹, 그 다음에는 노아, 그 다음에는 아브라함, 나중에는 엘리야와 세례 요한 등을 찾았다.
그분은 바빌론에서 다니엘을 찾았다. 성경은 다니엘 1장 7절에서 다니엘의 세 친구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나중에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로 개명됨)에 대해 언급하지만, 그러나 다니엘 1장 8절에서는 다니엘만이 "뜻을 정하여 그는 자신을 더럽히지 아니하였다"라고 쓰여있다. 그제서야 나머지 3명도 용기를 내어 입장을 밝힐 수 있었다. 세계 여러 곳의 성도들 가운데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 같은 사람들은 많이 있다. 그들은 스스로 주를 위하여 일어설 용기가 없지만, 만일 다니엘이 그들 가운데 일어나서 주님을 위해 입장을 취한다면, 그들은 일어날 것이다. 그러므로 어디에 있든지 주님을 위하여 '다니엘'이 되기로 결심하여라.
우리는 반대편에서도 비슷하지만 사악한 것을 본다. 하늘에는 처음에 무언가에 대해 그들 안에 끓어오르는 불만을 품고 있었던 많은 천사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루시퍼가 그들 가운데 일어날 때까지 반역을 시작할 용기가 없었다. 루시퍼(천사의 머리)가 반역을 표명하자, 즉시 천사의 3분의 1이 그에게 합류했다(계 12:4). 그 수백만의 천사들은 모두 루시퍼와 함께 하나님에 의해 쫓겨났다 - 그리고 그들은 오늘날 사람들을 지배하는 마귀이다. 하나님은 "교만하고 거만한 자를 제거하고, 어디에서나 겸손하고 낮은 백성을 남겨 두신다"(습 3:11,12)는 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원칙이다. 예로부터 하늘을 이렇게 깨끗하게 하셨고 이것이 오늘날에도 교회를 깨끗하게 하시는 방법이다.
현재 세상에는 두 가지 운동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다니엘은 주님을 위해 입장을 취할 두 사람 그리고 세 사람을 모으고 있다; 그리고 루시퍼는 더러움, 권위에 대한 반역,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불순종으로 인도하기 위해 수백만의 사람들을 모으고 있다. 그러나 다니엘과 함께하는 두세 사람이 최종적으로 승리할 것이다 - 왜냐하면 하나님과 함께 있는 한 사람은 항상 다수와 같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한 지역에 다니엘을 얻지 못한다면, 그때 마귀는 사람들을 자기 길로 인도할 사람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위하여 너희의 자리에서 다니엘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 중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불순종함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을 것이고, 심지어 사자 굴에 던져진다 할지라도 주님을 옹호하기로 마음속으로 결심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주님께서 너희에게 은혜와 능력과 지혜를 주시기를 기도한다. 다음은 너희가 보았을 수도 있는 기도를 약간 수정했다: "주님, 제가 거절하기를 바라는 것들에 대하여 NO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주세요; 주님, 제가 하기를 바라는 것들을 할 수 있는 힘을 주세요, 그리고 그 차이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세요."
한 가지가 필요하다
"선택 - 선택 - 선택" - 유용한 삶의 비밀이다. 나는 너희가 학업에 대한 모든 압박감 속에서, 누군가가 "긴급사태의 횡포"라고 부르는 것에서 구원을 받고,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인생의 가장 위대한 교훈 중 하나, 즉 무가치한 것에서 소중한 것을 선택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기를 기도한다(렘15:19). 그것이 너희를 영적인 사람으로 만들 것이고, 참으로 열매 맺는 삶을 살 수 있게 할 것이다. 많은 것이 합법적이지만, 모든 것이 유익하거나 교육적인 것은 아니다(참조 고전 6:12; 10:23). 긴급한 것처럼 우리를 압박하는 많은 일들이, 보이는 것만큼 긴급하지 않다. 예수님은 "한 가지만 족하다"(눅10:42)고 말씀하셨다. 우리 중 누구도 젊었을 때 이 선택 문제를 완벽하게 수행한 적이 없다. 우리 자신의 욕망과 이성이 우리에게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나는 젊었을 때는 물론 지금도 내가 해야 하는 것만큼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지 못하는 것을 안다).
그러나 우리의 실패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교육의 일부이므로, 우리는 자신의 무력함과 어리석음을 깨닫고 그분의 자비(우리 과거의 실패에 대해)와 그분의 은혜(우리 미래를 위한 힘을 얻기 위해)에 우리자신을 맡긴다. 너희는 학문적으로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부모보다 앞서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왜냐하면 학문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우리가 어린 시절에는 결코 접할 수 없었던 가르침을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항상 겸손하고 부서지고 떨어야 한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호의적으로 바라보신다(이사야 66:1,2 참조).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불타는 욕망
우리는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기를 바라는 불타는 열망을 항상 가지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원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변화시키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닮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이 있고, 날마다 스스로 판단하고 정결하게 함으로써 이를 증명한다면(요일 3:2,3), 비록 우리의 발전이 더디더라도 하나님은 기뻐하실 것이다. 만일 우리가 자원하는 마음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받아들이신다(고후 8:12). 왜냐하면 하나님은 씨(열망)에서 다 자란 나무(그리스도를 닮음)의 가능성을 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와 같지 않다고 생각하는 모든 영역에서 변화하려는 강한 열망을 가져야 한다. 수천 명의 신자들이 예수님처럼 되기를 기도한다; 그러나 매우 소수만이 예수님을 닮지 못한 그들의 생각과 태도의 실패에 대해 은밀히 슬퍼한다. 이 후자의 소수만이 진정으로 변화하기를 갈망하는 자들이며, 그들만이 하나님께서 점진적으로 그리스도를 닮도록 변화시키는 유일한 자들이 될 것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는 모두 0이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우리에게 가치를 부여하시는 분은 우리 앞에 "1"이 되시는 그리스도이시다. 사람의 눈에도 기꺼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고자 하라. 너희의 모든 영적 발전을 오직 하나님 앞에서 은밀히 이루어지도록 하라. 어떤 사람의 승인 증명서도 필요하지 않다. 너희의 의는 (너의 뼈와 같이) 사람의 눈앞에서 숨겨져야 한다(마 6:1). 너희의 선함만이(너의 뼈를 덮고 있는 살처럼)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야, 그들은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마 5:16). 해골은 살로 덮이지 않으면 매력적이지 않다.
너희에게 악한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라. 롯에게 자신의 권리를 포기한 아브라함에게서 교훈을 배워라. 우리는 거기에서 롯이 자신을 위해 선택했지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위해 선택했다는 것을 읽는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축복하셨다(창 13:7-18). 이삭은 이것을 아버지에게서 배웠고 자기가 판 우물을 위해 싸우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권리를 포기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에게도 복을 주셨다(창 26:18-25).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복을 받는 사람은 바로 만인과의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모든 사람과 함께 평화의 사람이 되어라.
은혜 안에서 자라기
우리의 목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분을 아는 지식 안에서 자라가는 것이다(벧후3:18). 그러므로 우리는 모세가 시편 90:12에서 기도한 것처럼 기도해야 한다, "주님, 우리에게 우리의 날수 세는 것을 가르치사 우리가 지혜에 이르도록 우리의 마음을 쓰게 하소서" - 우리의 이 땅에서의 삶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서.
고린도후서 8장 9절의 은혜에 대한 또 다른 정의는 다음과 같다: "은혜는 우리를 위하여 부요하신 예수를 가난하게 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복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우리의 삶에서도 은혜가 하는 일이다. 우리가 궁핍한 세상에 축복이 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작고, 인정받지 못하고, 심지어 다른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의 눈에 가난하게 보여지는 것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셨다(행 10:38). 이것이 은혜가 너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다 - 너희를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게 하신다.
예수님은 어려운 상황에 처하셨을 때, '아버지 저를 이 시간에서 구원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요 12:27)라고 기도하셨다. 이것이 너희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안일한 삶을 추구하지 말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추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너희의 안팎에 두신 까다로운 사람이나 상황을 변화시켜 달라고 하나님께 구하지 마라. 그러한 상황에서 너희를 변화시켜 달라고 그분께 간구하라. 그렇게 계속 기도하는 사람은 과거의 모든 실패에도 불구하고 은혜 안에서 자라는 진정한 성도가 될 것이다.
태도의 죄(교만, 이기심, 질투심, 돈을 사랑함, 원망, 독선 등)는 행동의 죄(거짓말, 안목의 정욕, 도둑질 등) 보다 덜 인식되어 우리의 영혼을 더 쉽게 파멸시킬 수 있다. 두 부류의 죄를 모두 피해야 한다. 그러나 너희는 기도, 성경 읽기, 집회 참석 등 종교의 외형적인 것만 지키고 가장 중요한 것, 즉 (하나님 보시기에 내적으로)순결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것을 놓치는 거짓된 거룩함(광신적 종교집단처럼)으로 자신을 속이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한다. 우리는 활동하는 것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 안에서 성장해야 한다.
그곳에서 일하는 모든 일과 공부에 주님의 은혜가 임하기를 바란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 12:9)라는 약속을 생각하여라. 하나님의 은혜는 너희가 해야 할 모든 일(학업이든 아니든)에 충분하며, 언제든지 직면할 수 있는 모든 시련과 문제에도 충분하다. 일을 하는 도중이나 공부의 압박 속에서, 특히 유혹에 직면했을 때 도움을 구하는 5초 기도하는 습관을 기르라.
적그리스도의 영
아담과 하와가 유혹에 빠진 것은 단지 아름다운 열매를 먹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유혹이었다. 이것이 사탄이 그들에게 말한 것이다: "너희가 이 열매를 먹으면,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창 3:5). 이것은 여러 해 전에 사탄 자신이 넘어졌던 것과 동일한 유혹이었다. 이제 그는 같은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을 오염시키려고 했다. 사탄은 또한 같은 방법으로 예수님을 시험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네 권능을 하나님과 같이 하여 이 돌들을 떡이 되게 하라".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사람으로 이 땅에 왔다고 대답하면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3,4)고 하셨다. 그곳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낮추시고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사람(보통 사람)이라고 하신 것을 보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충분히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예를 들어 성적인 문제에서), 그것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과 같다고 느끼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만드신 법을 수정할 수 있고, 우리가 처한 상황에 맞게 법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 그것은 우리 자신의 정욕과 열정을 만족시키기 위한 핑계에 불과하다.
적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집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으로 나타낼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살후2:4).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영이다. 교회 안에서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에서 인정을 구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무례하게 행동할 때 기분이 상한다면,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처럼 되기를 원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가장 높은 천사를 마귀로 만든 것과 같은 욕망이다. John Milton은 그의 시 "Paradise Lost"(실낙원)에서 "천국에서 섬기는 것보다 지옥에서 다스리는 것이 낫다"고 이 말을 루시퍼의 입에 넣었다. 그것이 바로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려는 적그리스도의 영이다. 이것이 광신적 종교 지도자들이 광신적 종교 구성원들을 지배하는 방식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상 생애 내내 종이 아닌 다른 신분이 되기를 거부하셨기 때문에, 적그리스도의 영을 완전히 극복하셨다. 그분은 자신이 하나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 하지 않았다. 그분은 하나님과 동등할 권리를 포기했다. 하나님과 동등됨을 움켜쥐는 것이 바로 사탄의 영의 본질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은 항상 아래로 내려가는 데서 온다. 세상의 높은 곳에서는 끊임없는 혼란이 있다. 낮은 곳에 완전한 평화가 있다. 우리 마음에는 오직 한 분의 하나님만이 있을 수 있다 - 자아인가 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인가. 우리는 우리 마음에 누가 주님이 될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 온 마음을 주님께 바쳤는지 확인하는 것이 좋다. 나는 1959년에 내가 주님께 내 삶을 바쳤을 때, 나의 첫 번째 성경에 하트 그림을 그리고, 그 안에 주님의 이름과 내 이름과 그 아래에 "그분의 영원한, 오직 그분의 것"이라는 단어를 적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이 오랜 세월 동안 주님과 동행한 후에 주님과의 관계는 점점 더 달콤해졌다; 그리고 주변의 모든 것에 대한 나의 태도는 점점 더 초연해졌다. 너희가 걷는 주 예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의 길, 어느 때라도 너희와 그분 사이에 구름 한 점 없기를 기도한다. 하나님과 간단한 거래청산을 계속하라, 즉 실수하는 즉시 죄를 고백하여라. 한 순간도 지체하지 마라. 그리고 우리 아버지께서 이 세상의 모든 상황을 다스리시기 때문에 결코 낙심하지 마라.
예수님의 두 가지 초대 - 오라 그리고 따르라
그리스도인의 삶은 "나에게로 오라"와 "나를 따르라"라는 예수님의 두 가지 초대로 요약될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길을 걷기 시작할 때 한 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예수님께 나아와야 한다, 우리는 조금씩 미끄러지는(되돌아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내게로 오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이 초대를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려 하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꼬는 말씀을 하셨다, "내가 너희 "의인"을 위하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 병든 자에게라야 의원이 필요함이니라"(막 2:17). 우리가 계속해서 예수님께 나아가려면, 우리의 부족함과 죄와 실패를 끊임없이 기꺼이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죄를 지은 곳에서, 우리는 그들에게 항상 기꺼이 사과해야 한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사과하기를 꺼리는 것은, 우리 안에 씻어내야 할 교만이 여전히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께 나아갈 수 없다. 남의 허물만 보고 우리 자신의 허물을 보지 못하면, 성전에 있는 바리새인과 같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께 나아갈 수 없다(눅 18:10-14). 그러나 세리는 "나는 죄인입니다"(문자 그대로)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지상에서 가장 큰 죄인이라고 느꼈다. 바울도 그렇게 느꼈다("내가 죄인 중에 으뜸이라" - 딤전 1:15).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께 쉽게 올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계속 죄를 짓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이 우리보다 더 영적인 사람이라고 상상하면서 스스로를 속이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겸손이 아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결코 그렇게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육적인 고린도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영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가면 갈수록, 우리는 육신 안에 있는 죄의 부패를 더 많이 의식하게 될 것이다.
나를 따르라: 제자들도 오순절 날 성령이 오시기 전까지는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깨닫지 못했다. 한 가지 이유가 있다: 그들은 부당하고 끝없는 고난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자기가 "많은 고난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이 그 길을 가셔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예수님은 즉시 그것이 사탄의 음성인 것을 알아보시고,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셨다(마 16:23).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려면 오해, 학대, 거짓 고발, 조롱, 조소, 모욕, 불의, 심지어는 육체적 고통까지도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 평생 이 길을 가기 싫어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
그러므로 "나에게로 오라"와 "나를 따르라"라는 예수님의 두 가지 초대에 끊임없이 귀를 기울여라.
믿음의 분량에 따른 은혜
그리스도인의 삶은 규칙과 규정을 따르는 삶이 아니다. 모세는 율법을 가지고 왔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 엄격한 율법이 아니라 은혜를 가지고 오셨다(요 1:17).
은혜는 이 땅에 있는 돈과 같이 하나님나라에서 영적으로 동등하다. 이 땅에서 살기 위해서는 돈이 중요하듯이,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은혜가 중요하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많을수록, 더 풍요로워진다. 믿음은 매일 필요한 은혜를 인출하기 위해 은행에 수표를 제시하는 것과 같다. 수표는 하나님의 약속이며, 수표와 마찬가지로 너희가 믿음을 가지고 현금화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래서 너희는 하늘 은행에서 너희가 믿는 만큼 (즉, 너희가 수표에 쓰는 만큼)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 12:9)라고 말씀하셨다. 인생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할 수 있는 상황은 없다. 끈질긴 죄의 습관을 극복하든, 세상의 시련을 겪든, 다른 믿는 자들의 오해를 받든 -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충분하다. 그러나 너희가 그것을 의심하고 적은 양의 은혜에 대한 수표를 쓴다면, 그것이 너희가 얻을 수 있는 전부이다. 담대히 구하라 그러면 모든 상황에서 이기는 자의 은혜를 받으리라.
하나님의 한 사람이 한번은 시련을 겪을 때 그것을 없애 달라고 하나님께 계속 간구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꿈으로 그에게 응답하셨다. 그는 자신이 보트로 강을 건너려고 애쓰는데, 물속에 있는 바위에 끊임없이 부딪쳐 그의 통행을 막는 것을 보았다. 하나님은 바위(시련)를 옮기지 아니하시고, 물(은혜)의 수위를 높여 그가 건너가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그는 이기는 자가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많은 시련과 어려움을 겪을 수 있도록 허락하셔서, 하나님의 은혜를 더 체험하고 이기는 자가 되게 하신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안식하기
어떤 일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할 때, 무엇이든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주님께 진심으로 말하여라. 너희의 모든 것을 제단에 놓고 모든 일에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갈망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너희의 동기를 검토하여라. 그러면 그분이 너희에게 올바른 문을 열어주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앞으로 나아갈 때 마음속에 여전히 불확실성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희가 믿음으로 행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그것을 허락하신다. 그리고 확신은 때때로 눈으로 보며 걷는 것과 같을 수 있다.
일단 결정하고 나면, 일이 어딘가 잘못되어 가는 것 같아도 신경 쓰지 마라. 사도행전 16장을 읽고 바울이 빌립보로 오라는 '마게도니아 사람의 부름'에 순종하여 그곳에 갔을 때 어떻게 그가 곧 감옥에 갇혔는지 보라!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뜻이었다. 그곳에는 구원받아야 할 간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1966년 5월 해군을 떠난 이후로 나는 그것을 보아왔다.
하나님은 너희의 실패를 통해서라도 모든 것을 완벽하게 계획하신다. 모든 상황에서 그분은 너희가 그분을 알기를 원하신다. 그것이 그분의 목표이다. 내 아들들아, 나는 너희가, 내가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하나님을 더 잘 알기를 원한다.
어디를 가든지 여름 방학 동안, 기도의 정신을 유지하여라. 삶의 작은 일과 큰 일에 대해 주님께 이야기할 때, 기도가 너희에게 숨쉬는 것과 같은 것이 되게 하라. 이것이 "항상 기도하라"(누가복음 18:1)와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는 말씀의 의미이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너희가 직면하는 모든 어려운 상황을 너희의 믿음과 인격을 성숙시키는 도전으로 삼아라.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영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너희를 훈련시키도록 계획하신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후, 지금 당장 눈앞에 너무나 크게 보이는 작은 좌절감보다 너희가 맞닥뜨린 사람들의 반대와 상황에 어떻게 대처했느냐가 더 중요할 것이다. 예수님은 죄인들, 특히 종교적인 죄인들의 끊임없는 반대에 맞서 굳건히 인내함으로써 그분의 교육을 마치셨다(히 12:3).
너희가 이기는 사람이 되려면 작은 일에도 항상 로마서 8장 28절에 뿌리를 박아야 한다. 로마서 8:28에서 "모든 것"은 "모든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일상 생활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 통제하실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주권적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의 믿음이 결코 실패하지 않도록 하라 -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낙심해서는 안 된다. 믿음의 표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시편 106편 12절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사람들이 물에 빠진 것을 본 후에야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찬양하였음을 읽는다. 그러나 이제는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고 믿음으로 행하는 우리는 기도 응답을 보기도 전에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너희의 믿음을 강화하기 위해 많은 일을 마련하실 것이다. 너희는 때때로 너희의 삶이 순조롭고 문제가 없기를 바랄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 뚱뚱하고 연약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 그러나 불가능에 직면하여도 하나님을 믿을 수 있고, 극심한 증오와 악에 직면하여도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을 때, 너희의 성품을 발전시킬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해 너희에게 사역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희의 상황을 완벽하게 계획하고 준비하신다.
"그분은 너희에게 일어나는 모든 세세한 부분을 알고 계신다"(욥 23:10 - living)를 항상 기억하여라.
사랑의 빚
(마태복음 25장의 슬기로운 처녀의 비유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병의 기름은 우리의 숨겨진 삶뿐만 아니라 그 이상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두 과부의 경우를 생각해 보라. 한 과부는 엘리야를 위한 음식을 만들기 위해 그녀의 병에서 기름을 쏟았다 - 그리고 그녀의 병에는 항상 기름이 가득했다(왕상 17장). 다른 과부는 자기 병의 기름을 이웃의 그릇에 붓고 (엘리사의 명령에 따라) 그녀의 그릇도 가득 찼다(왕하 4장). 그러므로 기름 한 병을 가득 채우는 비결은 자신을 위해 이기적으로 살지 않고 남을 섬기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와 같이 주의 이름으로 계속 섬기는 자들은 (지혜로운 처녀들과 같이) 주의 오심을 준비할 것이다.
너희는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갚아야 할 사랑의 빚이 있다(롬 13:8). 너희가 그 모든 지식을 스스로 쌓아두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진리와 축복으로 다른 사람들을 계속 축복해 준다면, 하나님께서 친히 너희에게 물을 주시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잠 11:24,25). 그러면 너희의 삶은 항상 신선할 것이며 결코 진부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이유 없이 너희를 미워할 때"(요 15:25)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답은 명확하다: "이유 없이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너희의 사랑에 대한 아무런 이유 없이)!! 그리하여 너희는 선으로 악을 이긴다. 이와 같이, 너희가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 가운데서 끝까지 견디어, 그래서 너희가 선인과 악인에게 해를 비춰주시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와 같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사랑 가운데서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 24:13).
사랑 안에 거하라
너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너희가 사랑 안에 거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시험이다. 이 세상은 하나님 나라에서 언젠가 우리가 다스리기 위한 훈련장이다, 하나님나라는 모든 것이 사랑의 법에 의해 운영될 것이다. 우리가 이 수습 기간 동안 자격을 갖추면,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나쁘게 대하는 사람들에게 나쁘게 반응한다면 우리는 시험에 실패한 것이다. 항상 영원한 관점을 염두에 두어라. 그리고 사람이 보기에 크고 위대한 것은 모두 - 큰 일들과 세상의 명예를 포함하여 -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것임을 항상 기억하여라(눅 16:15). 영원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것은 사랑과 선과 자비 안에 거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자비는 단순히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뿐만 아니라 '친절한 행위'를 의미한다 -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에서 '자비'라는 단어가 그의 친절한 행동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눅10:37).
하나님이 원하셨다면, 그분은 그분의 모든 자녀들을 지구상에서 가장 지적인 아인슈타인이나 가장 부유한 빌 게이츠처럼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지성과 부는 그분의 왕국에서 아무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 이 땅에 짧은 기간 동안 그분이 우리에게 주기를 기뻐하신 모든 지능과 부에 대해,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지만 결코 그런 것들을 자랑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모든 변화는 우리의 생각에서 시작된다 - 우리가 로마서 12장 2절에서 볼 수 있듯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우리가 세속적이 되거나 거룩해지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생각에서 비롯되며; 우리가 이기적이 되거나 비이기적인 것도 우리의 생각에서 비롯된다.
히브리서 10:19-25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육체의 휘장을 통해 열어 놓으신 지성소에 들어가는 새롭고 산 길에 대해 읽는다. 그러나 사람들이 지성소에 들어갈 때 무엇을 하는가? 25절은 다음과 같이 알려 준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며, 그들을 축복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생각한다('어떻게 하면 너희가 다른 사람들이 사랑하도록 자극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라...').
예수님은 그분의 나라에서 누가 그분의 우편에 있을 것인지 말씀하셨다 - 그들은 주린 자를 먹이고, 헐벗은 자를 입히고, 병든 자와 옥에 갇힌 자를 돌보는 자들이다. 이 모든 행동은 그들의 생각에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생각하고 그것에 대해 뭔가를 하기로 결정했다. 다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대해 생각만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필요에 대해 생각하기
빌립보서 2장 5절에서는 예수님과 같은 마음을 가지라고 말씀한다. 우리는 종종 그 장을 겸손에 관한 위대한 장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대해 생각하는 것에 대한 훌륭한 장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우리를 생각하셨고 그것이 그분을 내려오게 한 것이다. 그분의 겸손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그분의 생각에서 나왔다. 우리도 같은 태도를 가지라는 명령을 받았다. 거기에 다음과 같은 엄청난 권고가 있다: 거기에서 우리는 "아무 것도 이기심으로 하지 말고…"(빌2:3). 우리가 이기심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 땅에서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복음(기쁜 소식)은 모든 이기심에서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역사상 위대한 선교사들은 모두 많은 생각을 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대해 생각했고, 예수님이 하늘에서 하셨던 것처럼, 그것에 대해 무언가를 실천했다.
주님께서 너희도 예수님과 같은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게 해주시기를 바란다. 히브리서 10장 16절의 약속은 하나님께서 친히 사랑과 이기심 없는 그분의 법을 우리 마음(생각)에 기록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분이 그렇게 하시도록 허용하자.
참된 거룩함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다
의로운 것과 불의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 인간의 이해(는 보통 바리새주의 경향이 있음)에 따르면, 의는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것을 의미하고 불의는 나쁜 일을 많이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한복음 7:18b에서 이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를 우리에게 주셨다. 나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 말할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고 그 속에 불의가 없다". 그 구절의 첫 부분에서, 예수님은 자기 영광만 구하는 사람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모든 불의에서 깨끗해지는 유일한 길은 우리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모든 것에서 깨끗해지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로마서 3:23에서 '죄'의 정의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함"이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것은 죄이다. 우리가 기도하고, 설교하고, 노래하고, 친절한 행동을 하는 것이 우리 자신의 명예를 위한 것이라면 모두 죄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의로운지 불의한지를 결정하는 것은 동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들의 마음 속에 있는 동기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을 판단하는 것이 전적으로 지혜로운 일이다. 우리는 우리 마음속의 동기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고린도전서 4:5 참조: "사람 마음의 숨겨진 동기를 밝혀 주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우리의 동기가 하나님의 영광일 때, 우리가 하는 일에서 실수를 해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100% 점수를 주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외적인 행위를 완벽하게 하지만 그 안에서 우리 자신의 영예를 구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0점을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이 의로운지 불의한지를 결코 결정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것을 아신다. 그러나 우리는 겸손과 순결로 우리 자신의 마음을 보존하기 위해 조심해야 하며,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봉사할 때 그분의 영광을 건드리지 않도록, 우리 마음의 어둠 속에 빛을 주시도록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 "정직한 자에게는 어둠 속에서도 빛이 비칠 것이다 "(시 112:4). 그 구절이 최근 내 귓가에 계속 맴돌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삶의 주요 목표로 삼아라. 참된 거룩함은 너희가 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어떤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데 실수를 하더라도,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다. 너희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할 때, 너희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자기 자신만 판단하게 된다. 다른 사람에 대한 판단은 하나님께 맡겨라. 그분은 우리의 도움 없이도 그것을 아주 잘 하실 수 있다!
숙고할 몇 가지 사항
여기 방갈로르에서 열린 최근 단체 연합에서 우리가 공유한 몇 가지 주제가 있다.
- 예수님의 삶의 비결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떨며 순종한 것이다. 이사야서 66장 1,2절은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호의적으로 보신다고 말한다.
- 4복음서는 예수님이 결코 죄인을 대적하지 않으셨다고 분명히 가르친다. 그분은 위선자들에 대해서만 반대했다. 예수님은 죄인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그들의 과거를 지워버린다.
- 하나님이 보시는 것처럼 사람을 본다면,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한 사람으로 귀하게 여길 것이다. 우리는 그들 중 누구도 경멸하지 않을 것이다.
- 하나님은 우리가 옳고 그름에 대한 많은 규칙과 규정에 따라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함께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항상 죽음을 가져온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해야 할 일(옳은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그른 것)에 대한 인도를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이다.
- "생수의 강"이 사방에서 흘러나오기 전에는 결코 만족해서는 안 된다. 이를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성령 충만을 구해야 한다.
- "육신으로 나타난 그리스도"는 "육신으로 나타난 사랑"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언젠가 그분과 함께 다스릴 수 있도록, 사랑 안에서 우리를 훈련시키기 위해 이 땅에 있게 하신다. 요한계시록 20장 4절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 하리라고 말한다. 우리는 (영적으로) 참수되어야 한다 - 우리의 아담을 닮은 이성은 끊어져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접붙여지고 그분의 몸의 일부가 될 수 있다. 그래야 우리가 그분의 지도력 아래 그분의 몸으로 기능할 수 있다.
- 하나님은 마음이 겸손하고 통회하는 자(깊이 뉘우치는)에게만 부흥(사 57:15)을 보내신다.
- 하나님의 집에 있는 금과 은의 귀한 그릇이 되려면 자신을 정결케 해야 한다(딤후2:20,21).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승인을 얻는 종으로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만 드릴 수 있다.
-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우리에게 아주 값없이 주셨다면, 반드시 그와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값없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비(죄 용서)와 은혜(죄를 이기고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살 수 있는 능력)를 주실 것이다.
자비와 심판
최근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새로운 계시가 있다:
"하나님은 경건한 자들의 고난과 심지어 경건한 자와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넘어지는 죄까지도 사용하셔서, 그들을 심판하고 참소하는 자들의 마음의 악함을 드러내신다."
마가복음 3장 5절(Living Bible)은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필요에 대한 그들의 무관심함에 몹시 괴로워하시며 화를 내며 그들(바리새인)을 둘러보셨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은 우리 안에서 주변 사람들의 영적, 육체적 필요에 무관심한 모습을 볼 때마다 심히 괴로워하신다.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가 이를 잘 보여준다. 부자는 나사로의 필요에 무관심했기 때문에 지옥에 갔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도 같은 진리를 보여 준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사탄이 동료 신자를 때리는 것에 대해 무관심했다.
욥기는 이 진리를 보여준다. 욥이 하나님에 대하여 많은 그릇된 말을 하였음에도,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지우셨다, 이는 욥이 한 마디의 회개로 그의 모든 말을 철회하였기 때문이다(욥 42:6). 마치 테이프의 나쁜 부분은 지우고, 좋은 부분은 그대로 유지하는 것과 같았다. 그러므로 욥이 하나님께 대하여 한 모든 원망(욥기에 기록되어 있음)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것들이 지워졌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욥이 한 좋은 말만 남아 있다! 하나님의 용서와 칭의는 얼마나 놀라운가! 그러나 욥에게 그의 병이 욥의 삶에서 어떤 죄의 결과라고 말한 세 명의 독선적인 설교자 엘리바스, 빌닷, 소발은 욥의 마음을 알지 못한 채 욥을 판단하여 하나님의 정죄를 받았다(욥42:7). 욥의 병을 통하여 그들의 마음의 사악함이 드러났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사용하여 그녀를 정죄한 바리새인들의 마음의 간악함을 드러내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아무도 판단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크게 긍휼히 여기실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주된 특징은 자비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조심해야 한다.
예루살렘과 바벨론
다른 그룹의 참된 신자들이 교리의 작은 포인트에서 우리와 다르다고 해서 그들을 멸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것이 바리새인이 되는 길이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 그것이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보시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이교도들이 겸손하게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만을 참된 교회라고 생각한다. 그런 바리새인들을 조심하여라.
신자들 사이에는 실제로 두 그룹만 있다(그들의 교리가 무엇이든 간에). 하나는 바벨론이고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이다. 하나는 음녀(사탄의 가짜 교회)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신부이다. 두 그룹은 다음과 같다:
ü 자기 영광을 구하는 자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요7:18; 빌2:19-21)
ü 자기를 낮추는 사람과 자기를 높이는 사람(벧전5:5)
ü 땅의 것을 구하는 자와 하늘의 것을 구하는 자(골3:2)
ü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자와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는 자(갈1:10)
ü 하나님의 축복만 구하는 자와 하나님의 인정도 구하는 자(고후5:9).
우리는 각자가 어떤 그룹에 속할지 결정한다. 영원한 세상에서 기쁨과 후회는 오늘날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내리는 결정에 달려 있다. 그러니 현명해져라 그리고 장기적인 안목을 가져라
사랑은 가장 위대하다
"너희가 이전 죄에서 깨끗하여졌음을 잊지 아니함은 너희가 소경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벧후 1:9). 주님께서 용서하셨고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에 대해 사탄이나 사람이 너희에게 죄책감을 갖도록 허용하지 말라. 그러나 동시에 주님께서 얼마나 많은 죄를 용서해 주셨는가를 결코 잊지 말라. 그래서 "주님을 많이 사랑"하고(눅 7:47), 모든 사람을 기꺼이 용서하여라(엡 4:32), 그러므로 그 최악의 죄 - 바리새주의로부터 구원을 받는다.
한 가지를 기억하여라: 주님께서 한 사람을 위해 계획하신 사역이 클수록, 주님께서는 그 사람이 적어도 30세가 될 때까지 젊은 시절에 더 많은 시련과 시험을 겪게 하실 것이다. 그것이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취하신 방법이었다. 나는 하나님이 너희 모두를 위한 사역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은 너희 각자를 같은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의 모든 시험에서, 너희가 사랑 안에 뿌리를 내리고 근거를 두고 있는지 확인하여라. 방언을 말하지 아니하며, 예언을 하지 아니하며, 산을 옮기지 아니하며, 병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네 모든 돈을 가난한 자에게 주지 아니하며, 순교자로 죽지 아니할지라도,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그러므로 스스로 깨끗하게 하게 하고), 고린도전서 13장에 묘사된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한다면, 너희는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 중 가장 위대한 사람이 될 자격을 갖추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이 가장 위대하기 때문이다. 정기적인 건강 검진이 우리 몸의 건강 여부를 확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적인 검진도 정기적으로 받는 것이 좋다. 고린도전서 13장은 그러한 점검에 사용하기 좋은 장이다: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이다.
사단은 흑암의 천사로 와서 사람에게 돈이 가장 위대하거나 성적인 쾌락이나 그 밖의 육체적인 흥분이 가장 위대하거나 명예와 지위가 가장 위대하다고 말한다. 그는 또한 빛의 천사로 와서 믿는 자들에게 방언을 말하는 것이 가장 위대하거나(고전 13:1), 설교와 기적을 행하는 능력과 같은 신령한 은사가 가장 위대하거나(2절), 관대하거나 순교자처럼 죽는 것이 가장 위대하다고(3절) 말한다. 그러나 사탄이 말하는 것은 모두 거짓말이다. 사랑이 가장 위대하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이 사실을 증명하는 살아있는 증거가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사탄의 거짓말을 폭로할 것이다.
고린도전서 13:4-7에 기술된 사랑의 특성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하는 행동이나 우리를 대하는 방식에 대한 우리의 반응 및 태도와 관련이 있다. 그런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적인 점검을 하신다.
이처럼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려면 좋은 기초가 있어야 한다. 사랑은 2층 건물과 같다. 그 기초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1층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고, 2층은 타인에 대한 사랑이다. 먼저 하나님께서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사랑합니다" - 요한일서 4:19),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너희를 얼마나 용서하셨는지("많이 용서받은 자는 많이 사랑합니다" - 누가복음 7:47)에 대해 묵상한다면 너희의 기초가 튼튼해 진다. 그러면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가 쉬워질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너희가 소경이 되지 않도록, 이전 죄에서 깨끗케 됨"(벧후 1:9)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지속적인 사랑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끝까지 사랑하셨다(요 13:1). 이것이 첫 번째 '떡을 떼는' 모임을 설명하는 장이 시작되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것은 '떡을 떼는' 때마다 우리에게도 해당되어야 한다. 그분의 사랑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써 나타났다 - 이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육체적으로는 발 씻을 필요가 있는 사람들을 위해 발을 씻어 주는 더러운 일을 하고, 영적으로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삶에서 보는 죄의 티끌을 씻어 주는 것이다(그들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대신).
예수님의 영과 대조적으로, 예수님이 가룟 유다의 발을 씻기신 후에, 그리고 심지어 예수님께서 "첫 음식 한 조각을 가룟 유다에게 줌으로써 그를 존귀하게 한" 후에도 그는 여전히 완고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을 본다(요한복음 13:26 - living bible).
이와 대조적으로, 오늘날에도 떡을 떼러 오는 자들 가운데 천국과 지옥의 영이 존재할 수 있음을 본다. 우리는 배신자들을 용서하는 마음으로 겸손하고 자기를 낮추고 사랑스럽게 섬기며 예수님을 따르거나 아니면 냉혹하고 원망함으로 유다를 따르게 될 것이다.
사단은 유다의 마음에 속히 들어가고(27절), "유다가 나가니, 밤이 되었더라"(30절). 사탄이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언제나 밤이다. 사람이 회개하라는 성령의 부르심을 계속 거스르는 것은, 고무줄을 계속 당기는 것과 같다. 잠시 후 끊어질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구원을 잃고 마음의 문이 열려 사탄과 그 악령들이 들어간다. 그런 상황을 생각하면 끔찍하다. 그러나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일어났다.
첫 번째 교회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지역 교회의 교제권을 떠나 다른 교회에 들어가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것 때문에 사탄이 사람의 마음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한 그룹을 떠나 다른 그룹에 합류할 때 원망함을 갖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때 사탄이 사람의 마음에 들어가는 때이다.
구원의 유일한 길은 예수님처럼 "주님과 모든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다.
돈에 충실함
요즘처럼 너희가 학생인 경우에는 돈 사용에 주의해야 한다. 그것은 너희가 훗날에 조심하도록 훈련시키고 영적인 부를 가져다 줄 것이다 - 하나님은 물질을 사용하는 데 충실한 자들에게 상을 주시기 때문이다.
영원한 가치가 없는 일에 낭비하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 따라서 그곳에서 돈을 쓰는 방식에 매우 주의해야 한다. 이 땅에서 살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하나님께 대한 헌신의 깊이를 시험하는 것이다. 불필요한 것에 낭비할 여유가 없다. 모든 지출에서 절약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학창시절에 모든 경비를 절약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좋다. 지출 내역을 잘 기록해 두는 것이 좋다. 지출을 어디에 쓰고 있는지, 어디에 많이 썼는지 알 수 있어 다음 학기에 지출을 줄일 수 있다. 또한 대학 등록금 납부 계획을 미리 세워 제시간에 납부하여, 연체료가 부과되지 않도록 주의하고, 수표를 쓰기 전에 은행에 잔고가 충분한지 항상 확인하여, 반송된 수표에 대한 벌금을 피해야 한다. 또한 학년초에 장학금을 받았을 때, 대학에서 예상한 한도 내에서 지출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도록, 학기 동안 지출한 비용을 합산하는 것이 좋다.
나중에 직장을 구하고 일을 시작하면, 존경과 예의와 절대적인 정직함으로 상사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도록 노력하여라. 그리고 상사에게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도록 기꺼이 야근도 감수하고 두 배로 열심히 일하여라.
음악과 텔레비전에 대한 분별력
이성으로는 악하지 않다고 설명할 수 있지만 동시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는 일들로 사탄에게 속지 않으려면 분별력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고 싶다. 예를 들어, 음악은 오늘날 매우 위험한 영역 중 하나이다. 사탄이 그것을 사용하여 수백만 명을 주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기 때문에, 극도의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영역이다. 너희가 가진 모든 재능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오직 그분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때에만, 하나님은 너희를 영화롭게 하고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이다. 따라서 듣는 음악 유형에 있어 철저해야 한다. 클래식과 세미 클래식 음악은 모두 휴식을 취하기에 좋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 음악'이라는 이름으로 통하는 것의 대부분은 악마적이고 위험하다. 그리고 우리가 집에서 지키던 규칙에 따라, 세속적인 사랑 노래의 가사를 듣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팝송의 가사는 매우 외설적이고 죄악된 사고 패턴으로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음악이 담긴 테이프나 CD는 절대 가지고 다니지 말아라. 만일 있다면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이 마술책을 불사른 것과 같이 그것들을 파괴해야 한다(행 19:19).
같은 방식으로, 미묘하게 선정적인 TV 프로그램도 신속하게 외면해라. 그러한 프로그램은 수십 년 동안 더러운 꿈으로 너희를 괴롭힐 수 있는 인상을 마음에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일에 주의를 기울이면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항상 주님을 위해 영적인 감각을 날카롭게 유지하여라. 영적 감각이 이 세상의 어떤 영으로도 결코 무뎌지지 않도록 해라. 너희의 마음과 소유물에 대하여 철저히 봄맞이 대청소를 하여라.
마음을 순수하게 지키라
너희가 오랫동안 보아온 부모님이 서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원칙을 기억하여라. 주님께서 너희의 세대에서도 그런 원칙을 옹호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기독교인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실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과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다(말라기 3:18). 즉, 잔의 안쪽을 깨끗하게 하는 데 집중하는 사람들(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과 겉만 깨끗하게 하는 사람들이다(마 23:25,26).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사람 앞에서 선한 증거를 받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정결케 하는 데 더 관심이 있을 것이다. 승리의 삶에 들어가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넘어질 때마다 각 죄에 대해 애통하는 것이다.
깨끗한 양심과 순결한 마음은 다르다. 깨끗한 양심은 아는 모든 죄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다. 그러나 순수한 마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하나님과 함께하는 마음이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만 본다(마 5:8). 그러면 악한 사람과 어려운 상황에 휘말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과 함께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에 대한 불평과 비판이 있다면, 그것은 너희의 마음이 하나님께만 있지 않고 순수하지 않다는 것을 나타낸다. 마음이 깨끗하고 하나님만 볼 때, 너희는 그분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최고가 되도록 일하신다는 것을 믿게 될 것이며, 끊임없이 그분을 찬양하게 될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과 우주의 수백만의 마귀가 너희를 대적하여 뭉쳐도, 그들은 여전히 너희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하시면 모든 상황에서 이길 수 있고, 너희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완전한 뜻을 이루게 될 것이다.
"물에서처럼, 얼굴은 얼굴을 비추고, 그렇게 사람의 마음은 사람을 비춘다."(잠 27:19) 이 구절의 한 가지 의미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에 대해 동기가 나쁘다고 남에게 전가할 때, 실제로는 우리 자신의 마음 상태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같은 일을 하고 있다면,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나쁜 동기를 가지고 일을 하고 있다고 상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계속 정결케 하는 가운데 살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판단하고 남을 판단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의 외적 행동만 판단하라고 하셨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7:16) - 우리가 볼 수 없는 그들의 뿌리(동기)가 아니라!)
주니퍼는 13세기에 살았던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의 제자였다. 그는 항상 가장 단순한 옷을 입었다. 어느 날 그는 화려한 옷을 입은 다른 형제를 보았다. 그런 다음 그는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아마도 그 화려한 옷을 입은 저 형제는 이 단순한 옷을 입은 나보다 마음이 겸손할 것이다." 그런 순수한 태도로 그는 형제를 판단하지 않고 자신을 지켰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따라야 할 좋은 본보기이다.
모든 투덜거림과 중얼거림을 없애라
우리 주변의 세상을 볼 때, 신자와 불신자 모두 같은 문제에 직면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솔로몬이 전도서 2:14에서 말한 것처럼 말이다. 왜 그런 것일까? 왜 하나님은 그러한 문제로부터 당신의 자녀들을 보호하지 않으시는가? 하나님은 마지막 날에 다른 사람들이 원망하고 불평하고 패배했던 바로 그 상황에서, 그분의 자녀들을 이기는 자 이상으로 만드신 그분의 '지극히 풍성한 은혜'를 보여주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 불평하는 모든 불신자들의 입을 다물게 할 것이다.
세상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 투덜거리고 중얼거리며 불평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이런 '구부러지고 뒤틀린 세대'에 하나님의 빛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투덜거림과 중얼거림을 완전히 없애는 것뿐이다(빌 2:14,15).
많은 위대한 성인들과 선교사들(심지어 최근 수십 년 동안 공산주의 국가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고문을 받은 사람들까지도)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때문에 투덜거리거나 불평하지 않고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최후심판 날 그들의 삶을 기록한 영상을 보면, 우리 삶의 하찮은 것들에 대해 불평하고 투덜거렸던 우리가 부끄러워질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후에 가치가 없는 것은 불평할 가치가 없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고 우리 삶에 대한 그분의 목적이 이뤄지기를 추구한다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우리의 선을 이루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면 불평할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은 우리를 해하는 자들을 즉시 벌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깡패'로 만드는 것이다, 그분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그들을 벌하시는 대신, 우리에게 이기는 자가 되는 은혜를 주시며, "모든 것(엡5:20)과 모든 사람(딤전2:1)에 대해 감사"하고, 마음에서 우러나와 그들을 사랑할 수 있게 해주실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적들을 무자비한 힘으로 침묵 속에 굴복시키시는 것보다 천사들을 훨씬 더 놀라게 만들 것이다.
고난의 신비
아무리 치열한 전투라도 주님을 위해 버텨내라. 찬송가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볼 때, 모든 것이 보람이 있을 것이다." 주님께서 너희에게 모든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주셔서, 모든 상황에서 더 경건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아무 어려움 없이 속히 구원하실 수 있는데 왜 그토록 많은 고난을 겪도록 내버려 두셨는지는 참으로 신비한 일이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세례 때에 일어난 모든 일에 증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너무 오래 감옥에 갇혔을 때 예수님이 정말 메시아인가 하고 의심했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마11:3). 오늘날에도 중국을 비롯한 다른 지역의 감옥에 있는 많은 성도들은(복음을 위하여) 하늘로부터 아무런 응답도 받지 못한 채 왜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고통을 당하도록 내버려두시는지 궁금해할 것이다. "주님, 언제까지...?" 그들의 외침이다.
과거 러시아와 루마니아 등지에서 길게는 14년 동안 아무런 구호도 받지 못한 채 수감되어 있던 신자들의 가족을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을 아는 가족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리고 하늘에서는 응답이 없었다. 그 신자들 중 일부는 여러 해 동안 독방에 갇혀 있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의 발자취를 따랐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대단히 존경한다.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를 위해 어떤 고난을 당할 때 고난 받는 신자들을 더 잘 동정할 수 있다.
하나님은 앞으로 너희 모두를 위한 특별한 사역을 준비하고 계신다. 나는 진심으로 그것을 믿는다. 하나님은 너희의 삶에 그분의 손길을 내밀고 계신다. 그러므로 너희의 영적 교육은 특별할 것이다.
1969년 11월(Bakht-Singh 회중들이 나를 거부했을 때)부터 1975년 8월(CFC가 시작되었을 때)까지 6년이라는 기간은 나에게 상당히 혼란스러운 시간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에게는 (당시) 돌봐야 할 아내와 세 자녀도 있었다. 하늘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주님께서 나를 위해 예비하신 사역을 준비시키려고 그 기간 동안 나를 짓밟고 철저하게 깨뜨리신 것이 주님을 기쁘게 했다는 것을 알았다. 너희가 그분을 사랑한다면, 그분은 너희를 짓밟아, 아담의 어떤 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부수실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대학에서 받는 교육이나 어떤 회사에서 일하면서 얻게 되는 경험이 아니다. 가장 위대한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너희에게 주시는 교육이다.
따라서 다음 두 가지 사실에 대한 믿음을 절대 잃지 마라:
(1)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2)하나님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결코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할 때마다 필요한 은혜를 주시리라(고전 10:13).
하나님의 말씀은 참되고 그 밖의 모든 것은 거짓이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신뢰하고,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주님께서 너희를 격려하시고, 그분의 얼굴을 너희에게 비추시며, 삶의 모든 상황에서 그분의 자비를 베푸시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엄청난 자비를 베푸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무엇이든지, 심지어 작은 자비에도 감사해야 한다. 우리가 얻는 모든 것은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지옥 불보다 훨씬 낫다!
역경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함
우리는 디모데전서 3:16("경건의 비밀이 크도다 -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시고 그의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었느니라")과 다음 구절인 디모데전서 4:1(그러나 성령은 말씀하시기를 어떤 사람들은 믿음에서 떨어질 것입니다")을 읽어야 한다. 말세에 신자들은 순결과 겸손과 사랑으로 이 땅에 사신 예수님(우리와 같은 사람이신)을 따르라는 부르심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은 일생 동안 고난의 길을 걸으셨고, 그런 길은 현대 기독교에 매력적이지 않다.
다음은 아버지께서 어떻게 예수님에게 세속적인 감각을 만족시켜줄 어떤 증거 없이, 고난을 겪고 믿음으로 걷도록 허락하셨는지 그 방법에 대한 세 가지 예이다:
(1)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33년 동안 아버지께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사신 후, 아버지께 마지막으로 간구하신 부탁("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소서")은 들어주지 않았다.
(2)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아버지께 하신 질문("왜 나를 버리셨나이까")은 대답하지 않았다.
(3) 이 세상이 예수님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속옷이 벗겨지고, 공개적으로 굴욕을 당하고, 죄인으로 오해 받는 것이었다 -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그들의 기도 요청에 "No"라고 말씀하시고 그들의 질문에 응답하지 않으시고 공개적으로 굴욕을 당하도록 내버려두실 때, 주님을 기꺼이 따르려고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것이 바로 믿음의 삶이다 - 우리의 모든 상황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전능하신 명령을 완전히 신뢰하고, 그 모든 상황에 의심의 여지 없이 순종하는 삶이다.
하나님이 정하신 경계를 존중하기
예수님은 베드로가 사탄에게 체로 침을 받을 때 믿음을 잃지 않기를 기도하셨다(눅22:31,32). 베드로처럼 세상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사탄은 우리를 체로 쳐서 그릇 인도하려고 한다.
너희가 전심으로 주님을 위해 살고자 하기 때문에, 사탄의 표적이 될 것이 확실하다, 특히 너희의 부모님이(잭 푸닌) 주님을 섬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탄의 살생부의 위 쪽에 있는 것은 영광스런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우리가 현명하고 조심해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더 이상 사탄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사탄은 십자가에서 완전히 패배했고, 지금은 마비된 코브라와 같다 - 죽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한, 우리를 지배할 힘이 없다. 그러나 사탄은 기만적이고 교활하여 특히 세상적인 생각을 가진 친구들을 통해 우리를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 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실패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 주위에 두신 경계를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경계가 없는 유일한 분이다. 창조된 존재로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우리 주위에 그어놓은 경계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항상 그 경계를 존중해야 한다. 금지되는 특정 사항이 있다.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금하신 것은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금지된 것들은 매우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다. 거기에 유혹이 있고 우리 육체를 끌어들이는 능력이 있다.
"담을 허는 자는 뱀이 물리라"(하나님이 그 사람 주위에 두신 경계)(전 10:8).
하나님을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이 금하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이 옳고 그에 대한 사탄과 우리의 친구들의 생각이 모두 틀렸음을 믿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은 참되시고 사람은 다 거짓말쟁이라"(롬 3:4)라고 말한다.
호기심도 위험한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그 금지된 열매의 맛이 어떤지 궁금했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음란물과 영화, 마약 등에 이끌려 죄에 빠져드는 방식이다. 아담 혼자서는 그 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았을 수도 있다 -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하와에 의해 그것에 이끌렸다. 그리고 많은 젊은이들이 그렇다. 그들 스스로는 금지된 많은 것들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친구들에 의해 그러한 것들로 이끌린다. 그러므로 너희는 친구들에게 'No'라고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오직 하나님의 인정을 원하기 때문에 친구들에게 기꺼이 인기가 없는 사람이 될 수 있어야 한다. 다니엘처럼 너희도 "자신을 더럽히지 아니하리라"(단 1:8)고 마음속으로 결심해야 한다.
은혜의 목적
나는 오늘 아침에 "자느냐? 일어나라! 시험을 받을 때 넘어지지 않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아름다운 말씀을 읽었다(눅22:46 - living).
죄를 지으면 벌을 받기 때문에 죄를 피하는 것은, 죄를 피하는 구약의 방법이다(심판에 대한 두려움 - 율법의 위협). 예수님은 새 언약 아래서 우리에게 더 나은 길을 보여 주셨다. 죄는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우리에게도 해를 끼치기 때문에 피하는 것이다.
죄를 지을 때마다 "나는 그곳에서 은혜를 받지 못했다"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순간에 너희가 은혜 아래 있었다면, 어떤 죄도 너희를 지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롬 6:14에서 명백히 밝히듯이). 그리고 나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서 "내가 어디선가 교만했기 때문에 은혜를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항상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이다"라고 스스로에게 말해야 한다. 그러므로 죄에 빠졌을 때마다 기도해야 할 것은 "주님, 당신이 나에게 은혜를 부어 주실 수 없었던, 내가 교만했던 곳을 보여 주옵소서." 교만만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데 방해가 된다. 아마도 너희의 교만은 "너희가 곤경에 빠졌을 때" 도움을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을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너희의 자신감에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너희가 넘어진 이유일 것이다. 그렇다면 미래를 위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영생은 영원한 생명, 즉 일시적인 것보다 영원한 것을 더 소중히 여기는 삶이며, 세상의 모든 것을 영원의 관점에서 보는 삶이다. 우리는 이 삶을 "붙잡아라"(딤전 6:12)라는 말을 듣는다. 마치 구덩이에 빠진 사람이 밧줄을 잡아서, 구덩이에서 건져질 수 있는 것과 같다. 마음을 다하여 영생을 잡아라.
우리 모두가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빌2:12,13) 바로 다음 구절(14절)에 언급되어 있다 - 투덜거림, 논쟁, 분쟁, 불평, 다툼, 중얼거림. 다시 말해, 결코 불만을 품지 말라. 만족하는 마음이 있는 경건은 큰 이익이 된다(딤전6:6).
노예는 권리가 없고, 어떤 대우를 받아도 결코 불평할 수 없는 사람이다. 1세기에 노예는 집에 있는 가구만큼 권리를 가졌다. 예수님은 종이 되셨다. 그것이 우리의 소명이기도 하다. 그러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는지에 대해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이 사셨던 것들을 위해 살아라.
선한 마음
예수님은 오직 한 분만이 "선하시다"고 말씀하셨고 그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었다. 우리가 지상에서 '선'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발견되는 선에 훨씬 못 미치는 상대적인 표현이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그분이 모든 사람을 위해 항상 좋은 것을 원하신다는 사실에서 발견된다. 반역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아노라. 그것은 선을 위한 계획이다, 너희에게 장래와 소망을 주기 위한 것이다"(렘 29:11). 이 선함이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히 8:10)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다는 것은 모든 인간에 대해 선한 마음을 갖는 것이다 -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든지 항상 그들에게 가장 좋은 것만을 바라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마음에 그러한 선한 본성을 기록하실 수 있다.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모든 선은 도덕적으로 우리의 외부를 개선시키는 표면적인 것일 뿐이다. 우리는 마음의 변화가 필요하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누군가에 대한 잘못된 태도를 볼 때마다 슬퍼하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의 선함이니라"(출33:18,19).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했을 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미치지 못하는" 영광이다(롬 3:23). 그리고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회복시키기 위해서 오신 영광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선함이 부족할 때마다 슬퍼하자. 여기에서 분투하고 모두에게 선을 베풀자.
그러나 성령께서는 말세에 "악한 자는 점점 더 악하여질 것"(딤후 3:13)이라고 경고하신다. 그리고 성경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악을 행하는 자는 그대로 악을 행하게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게 하여라"(계 22:11 - living)는 것을 읽는다. 왜 행악자들에게 계속 악을 행하고 죄 가운데 거하라고 성경에 이런 권고가 있는가?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성경 전체(거룩한 생활을 촉구하는)를 읽은 후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도 계속 악을 행하고자 한다면, 그에게는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를 포기하셨다. 그러므로 그가 계속해서 악을 행하고 자신을 멸망시키도록 내버려 두신다.
실패를 축복으로 바꾸다
내 자신의 경험에 따르면 내가 젊은 시절에 주님을 얼마나 근심케 했는지를 알면 알수록, 앞으로 주님을 위해 더 열심히 일하게 되었다. 더 많이 용서받은 사람은 항상 주님을 더 사랑한다. 그래서 나의 실패도 나를 위한 축복이 되었다. 나를 많이 용서해 주신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그분을 위해 훨씬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느끼는 이유이다. 왜냐하면 나는 아주 아주 많이 용서받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나는 CFC 교회의 어떤 형제가 아무리 깊이 타락했다고 해도 멸시한 적이 없다. 이것은 또한 내가 승리할 때 뽐내지 않게 나를 지켜주었다. 나를 넘어지지 않게 하시는 분은 예수님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까지도 그분의 이름을 위한 영광으로 바꾸실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A.D 70년에서 132년 사이에 기록된) 1세기의 저작인 "바나바의 서신"이 있다. 저자는 "주님이 복음을 선포할 사도들을 택하실 때, 모든 사람보다 죄인된 자들을 택하셨다, 이는 그분이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온 것을 나타내려 하심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다. "나 같은 비참한 자를 구원한 놀라운 은혜"인 것을 알기에, 이것이 지금까지 내가 자랑하지 못하도록 지켜주었다.
지금 작은 일에 충성하여라 - 그러면 주님께서 앞으로 더 많은 것을 너희에게 맡기실 것이다. 하나님은 너희의 삶을 위한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 그것이 실현될 것을 확신하여라. 지금까지의 삶과, 다른 기독교 단체와의 만남에서 경험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온전한 계획을 이루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다.
C.S.루이스의 'THE SCREWTAPE LETTERS'(스쿠르테이프의 편지)에서 얻은 몇 가지 통찰력
얼마 전에 'THE SCREWTAPE LETTERS'에서 섹스, 사랑, 결혼에 관한 내용을 읽었는데 너희에게 축복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 책을 쓴 C. S. 루이스는 놀라운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 그곳에서 그 책을 구할 수 있다면, 그것을 구해서 읽어 보아라. 사탄이 어떻게 그의 악마들을 훈련시켜 사람들을 죄로 유혹하는지에 관한 내용이다.
스쿠르테이프(선배 악마)는 웜우드(후배 악마)에게 악마는 대부분의 남성들에게 "'사랑에 빠진다'라고 부르는 호기심과 보통 오래가지 않는 경험이 결혼을 위한 유일한 존경할만한 근거"이며, "다른 동기로 결혼한다는 생각 자체가 우스운 일"라고 설득하는데 성공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이어서 악마들이 예술가들에게 여성의 모습을 잘못 그리도록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 - "실제 생활에서 여성의 자연스런 모습보다 더 단단하고, 더 날씬하고, 더 매끈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조이고 받쳐주는 것." 이것은 남성들이 존재하지 않는 유형의 여성을 원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것은 그들을 좌절로 이끈다!
다른 장에서, C. S. 루이스는 모든 인간이 느끼는 감정의 기복과 사탄이 이를 악의적인 목적을 위해 어떻게 이용하는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루이스는 주님께서 "우리의 정점보다 우리의 침체기를 더 많이 의지하신다"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우리가 "우울한" 감정을 느낄 때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려고 하신다는 것이다. 주님은 그러한 감정이 우리에게 오는 것을 허락하신다. 우리가 주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할 때에도, 주님에게 순종할 수 있도록, 우리의 의지를 강화하기 위해서이다. "침체기"에는 우리가 많은 관능적인 유혹, 특히 성적인 유혹에 빠질 수 있다.
다른 사람을 의롭다 하기 위해 의롭다 하심
항상 겸손을 유지하는 비결은 항상 예수님을 바라보고 우리의 삶을 그분의 삶과만 비교하는 것이다. 이것이 히브리서의 주제인 예수님의 지상 생애를 바라보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섬기고 구원하시기 위해 하늘에서 오셔서 이 땅에 사셨던 이타적인 방식을 묵상하는 한, 우리는 결코 교만해질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기심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끊임없이 회개하면서 우리 입을 다물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대하시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을 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분이 우리를 의롭다 하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의롭다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육신의 더러움을 덮을 정도로 선을 베푸신 것을 볼 때, 우리도 남을 비판하고 비난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더러움을 덮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스가랴 3장에서, 우리는 여호수아가 어떻게 더러운 옷을 입고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 섰는지 읽는다. 사탄은 그를 고발하기 위해 그곳에 있었고 예수님은 그의 옹호자로 거기에 계셨다. 스가랴는 법정에서 구경꾼이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정결한 옷(예수의 의)을 입히셨기 때문에, 사탄의 참소가 무산되었다. 이에 스가랴는 매우 신나서, "그들이 그의 머리에도 깨끗한 관을 씌우도록 하라"고 덧붙였다. 그리하여 그는 예수님과 동역자가 되어 그의 형제를 의롭게 한다. 이것은 우리도 해야 할 일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악을 볼 때 가능한 사역은 고발과 중보기도 오직 두 가지뿐이다. 우리는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사탄은 고발한다. 예수님은 중재하신다.
참 거룩함과 거짓 거룩함
깊은 겸손과 결부되지 않은 모든 거룩함이나 열심은 가짜이다. 그것은 인간의 노력에 의하고, 율법에 의해 생성된 거룩함이다. 요가를 연습함으로써, 분노와 성욕의 어느 정도 외적 표현을 극복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그러나 이러한 죄는 여전히 마음에 남아 있다). 그러한 '거룩함'은 위조된 것이다. 예수님은 항상 우리 마음속에 있는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신다. 참된 거룩함은 은혜를 통해 취하는 것이며,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만 은혜를 베푸신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겸손이 동반되는 참된 거룩함을 식별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열심에 관해서는, 많은 공산주의 청년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열심이 더 많지만 그것은 인간의 열심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겸손과 온유, 두 가지만 배우라고 하셨다(마 11:29). 이 두 가지 교훈을 배우지 않은 곳에서는, 다른 모든 것이 헛된 것이다.
사랑 - 예수님의 제자들의 표시
예수님은 우리가 서로 동의하거나 한 단체에서 함께 일할 때 사람들이 우리를 그분의 제자로 인정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사람들이 우리를 그분의 제자로 인정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13:35). 바울과 바나바가 마가 요한에 대해 크게 이견이 있었을 때(행 15:39), 그들은 서로 싸우지 않고, 평화롭게 헤어져 서로를 계속 사랑했다. 그 결과, 하나님은 두 사람의 수고를 축복해 주셨다.
그러나 바울이나 바나바가 다른 형제를 '창기'나 '적그리스도'라고 불렀다면, 형제에 대한 잘못된 태도를 가진 사람에게는 분명히 하나님의 축복이 보류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와 의견이 다르거나, 우리를 떠난 다른 사람들을 내버려 두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라고 주신 일에 집중하는 것이 가장 좋다. 교회에서 우리의 사역을 위한 강단은 항상 긍정적이고 결코 부정적이지 않아야 하며, 누구에게도 반대하지 않고, 친 예수 그리스도를 지향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계속해서 설교자들 사이에서 오류와 거짓 교리와 그리스도와 같지 않은 관행을 드러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반대하지 않는다. 우리는 오직 마귀를 반대할 뿐이다.
새 언약의 삶
새 언약은 하나님께서 사람과 세우신 "예수의 피로 서명한" 언약이다(히 13:20 - living). 이제 우리는 우리 생명의 피로 그 위에 서명을 해야 한다. 하나님과 그 계약을 맺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다. 많은 사람들이 만족스러운 그리스도인의 삶에 결코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자기 생명의 피로 점선에 서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평생에 걸쳐 아버지와 맺은 언약은 결코 자신의 뜻을 행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히 10:5 이하). 그분은 자신의 뜻을 죽이고, 따라서 자신의 뜻에 "피"(십자가에 못 박음)로 그 계약에 서명하셨다. 우리는 이제 그와 같은 방식으로 그분과 교제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이 길은 걷는 데 전혀 부담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 길은 우리가 살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삶(부담 없는 삶)으로 너희를 인도할 것이다.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와 함께 떡을 떼는 것은 바로 이 언약에 대해 증거하는 것이다.
누가복음 5장 38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새 포도주는 새 언약 아래서 우리가 참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리킨다. 묵은 포도주는 율법 아래 있는 삶, 곧 규칙과 규율의 삶을 말한다. 에덴동산에 있는 두 그루의 나무는 또한 이 두 언약 아래 있는 삶을 상징한다. (광신적 종교 집단에서 볼 수 있는) 많은 규칙과 규정에 의해 죄를 짓지 않는 삶(그리고 겉보기에 정직해 보이는)은 죽음으로 인도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해 경고하신 것과 같다. 참된 기독교는 내면에서 예수님의 생명에 참여하므로 샘솟는 삶이다, 그것은 어떤 것은 더럽고 어떤 것은 깨끗하다고 우리에게 경고한다. 우리는 선택의 자유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규칙("만지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라"- 골 2:21(금욕을 강조하는 율법적인 가르침))에 얽매이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그것들을 피하지 않는다.
새 가죽 부대는 그리스도의 몸(Body)을 말하는데, 이는 우리가 날마다 우리 몸을 그분에게 산 제사로 드릴 때 세워진다, 성령으로 우리를 충만케 하시기를 구하면, 성령이 지상에서 예수님의 몸 안에서 행하셨던 일을 우리 안에서도 행하실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같은 길을 걷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 하나가 된다. 이와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한 몸인 교회로 지어져서, 교회 안에서 그분은 우리에게 서로 세우는 데 필요한 은사들을 갖추게 하신다.
이와 같이 사단은 우리 발 아래 짓밟혔다(롬 16:20). 우리가 사탄에게 우리를 고발하거나 죄책감을 느끼게 할 여지를 줄 때, 그는 우리의 머리 위에 앉게 된다. 그러나 그의 자리는 우리 발 아래이다.
죄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것으로 정의된다(롬 3:23) -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님의 삶에서 나타났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과 교제하면서 할 수 없는 모든 것이 죄임을 기억하여라.
옛 언약 아래서, 죄는 덮을 수 있을 뿐(황소와 염소의 피로 덮음), 제거할 수 없었다(시32:1,2). 그것은 깨끗하게 하거나 지울 수 없었다. 해마다 죄를 끊임없이 기억해야 했다(히10:3,4). 그러나 새 언약 아래서는 우리의 모든 죄가 예수님의 피로 깨끗하게 씻겨질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히 8:12). 이 두 언약의 차이를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사는 것
성령은 사도행전 2장 25,26절에서 예수께서 육신에 계실 때에 어떠한 시련이나 시험에도 흔들리지 않으셨던 이유와 그분의 마음에 항상 기쁨이 충만했던 이유를 우리에게 알려 주신다: 그분은 아버지를 항상 그 앞에 모셨다. 그분은 아버지께서 항상 그분 앞에 계시다는 사실을 의식하며 사셨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또한 그분의 우편에 계셨고 그분을 지지하고 도우셨다(같은 구절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우리는 경건한 형제가 함께 있을 때 정말 죄를 짓지 않게 되는 것을 안다. 우리가 시험을 받을 때 평범한 형제라도 우리와 함께 있었다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죄를 피할 수 있었을까? 그 때에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임재를 알았다면 우리는 얼마나 죄에서 더 구원받을 수 있었을까? 우리가 항상 눈앞에 계신 주님의 임재를 알았다면, 과거에 분노와 더러운 책읽기와 더러운 TV시청에서 구원받았을 것이다. 만일 그럴 때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임재를 느꼈더라면, 불신자들 가운데서 주님을 위해 일어서기가 얼마나 쉬웠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너희는 이제 주님이 너희와 함께 하신다는 의식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것은 사실이 아닌 것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는 육신적으로 너무 많이 살기 때문에, 불행히도 몸이 느끼는 것만을 감지한다. 우리는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인식하기 위해 영적인 감각을 개발해야 한다.
믿음 - 머리로 믿는가, 마음으로 믿는가?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렘 32:27에서, "나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 있느냐?"라는 질문을 하셨다. 만일 우리가 그 질문을 받는다면, 우리 모두는 올바르게 대답할 것이다: "아닙니다. 하나님께는 너무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시련과 시험의 순간에, 마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려운 일이 많은 것처럼 행동하게 된다. 머리로 믿는 것과 마음으로 믿는 것은 다르다.
예레미야가 예언한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그때까지의 이스라엘 역사를 말하겠다. 그 나라 이스라엘은 기원전 1490년경에 이집트를 떠났다. 그리고 기원전 1450년경 가나안에 들어갔다. 그러나 약 500년 후인 B.C. 975년에 르호보암(솔로몬의 아들) 시대에 두 나라로 분열되었다. 북방 민족은 스스로를 이스라엘이라고 불렀고 10지파로 구성되었다. 남쪽 나라는 스스로를 유다라고 불렀고, 유다와 베냐민 지파로 구성되었다. 이스라엘(북방 국가)은 곧 심하게 우상 숭배를 하였고, B.C. 730년경에 하나님에 의해 포로로 보내졌다 - 국가로서 250년 동안 존재한 후. 그들은 당시 세계의 통치국가였던 아시리아의 노예가 되었다.
100년 후(B.C. 640년경), 하나님은 선지자 예레미야를 남유다에 보내시며, 유다에게 북왕국(이스라엘)에 일어난 일을 교훈을 받아들여, 그들에게도 같은 형벌을 내리지 않도록 말씀하셨다. 그러나 유다는 그들이 결코 하나님의 형벌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았다 -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러나 예레미야가 40년 이상 유다에게 예언한 후, 하나님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보내어 예루살렘을 공격하게 하셨다(B.C. 600년경). 바빌론은 그때까지 세계의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아시리아를 대체했다. 예레미야 32장의 사건이 일어난 것이 이때이다.
하나님은 이미 예레미야에게 바벨론 포로 70년 후에, 유다 민족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렘 29:10).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믿지 않았다. 그런 다음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중요한 행동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그의 믿음을 나타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그에게 그의 고향 아나돗에서 토지를 사서 매매 등기를 하고 매매 문서를 옹기그릇에 보관하라고 요청하셨다(렘 32:14). 인간적으로 말해서 모든 사람이 재산을 팔던 시기에 가장 어리석은 일이었다, 적이 땅을 약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백성이 돌아와 그 땅을 한 번 더 차지할 것이라는 자신의 설교를 믿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그렇게 했다. 그 당시 하나님께 대한 그의 응답은 다음과 같다: "주님, 당신께는 어려운 일이 없습니다"(렘 32:17). (예레미야 32장 전체를 읽는 것이 좋다.) 예레미야의 친척들은 70년 후에 스룹바벨과 함께 돌아와서(느 7:27) 아나돗에 살았다 - 의심할 여지 없이 예레미야가 70년 전에 구입했던 땅이었다(느 11:32).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말씀에서 분명히 말씀하신 모든 문제에 대해, 그렇게 믿음으로 행동하기를 기대하신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경우처럼,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에 근거해서만 믿음으로 행동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모방할 수 없다. 여기에 경고가 있다: 히브리서 11:29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특정한 말씀에 믿음으로 행하여 홍해를 건넜다고 말한다; 그러나 애굽사람들이 그것을 모방하려고 했을 때 그들은 익사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믿음을 흉내내지 말라고 모두에게 경고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홍해를 건너게 하실 때, 그분은 그들에게 그 길을 건너가라고 하기 전에, 물이 그들 앞에서 갈라졌고 그들 앞에 길을 내셨다. 그것은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으로 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때까지 하나님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한 발짝도 나가기도 전에 기적을 행하셨다. 모세에게 지팡이를 바다 위로 내밀라고만 하셨다(출 14:16, 21).
그러나 40년 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단강을 건너라고 하셨을 때, 상황은 달랐다. 이번에는, 제사장들에게 강물이 아직 흐르는 동안에 발을 물에 넣으라고 하셨다. 그들이 믿음의 발걸음을 내디뎠을 때 비로소 물이 갈라지고 길이 열렸다(수3:8,15). 그래서 이번에는 제사장들의 발이 젖어야 했다. 그때까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그분의 기적을 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더 많은 것을 기대하셨다. 하나님께로부터 더 많이 받은 자에게는 더 많은 것을 요구하신다.
우리는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배에서 나와 물 위를 걸으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 원리에 대한 또 다른 예를 본다. 베드로는 믿음으로 나아가야 했다. 그렇게 했을 때, 그는 물이 그의 발 밑에 있는 바위처럼 단단한 것을 발견했다.
하나님이 해결하시기에 너무 어려운 문제는 결코 직면할 수 없음을 항상 기억하여라. 그분은 모든 어려운 상황을 처리하는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항상 너희를 위해 행하시는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은 지혜가 부족하다고 해서,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고 결코 너희를 꾸짖지 않으신다(야고보서 1:5b 참조). 그분은 너희를 사랑하고, 이해심이 많으며, 자비로운 아버지이시다.
그러나 절대 섣불리 나서서는 안 된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입장을 뒷받침하는 성경이 없더라도, 아플 때 약을 먹지 않는다. 그것은 어리석은 것이요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바울(성령의 감동을 받은)은 디모데에게 그의 빈번한 위장병을 치료하기 위해 포도주(약으로써)를 먹으라고 말했다(딤전 5:23). 70인역(구약의 헬라어 번역)은 잠언 18장 9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기 일에 해이하고 게으른 자는 파괴하는 자의 형제이고, 자신을 치유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자는 자살하는 자의 형제입니다"(Amplified Bible-Classic Edition) [그건 그렇고, 성경에서 "자살"이라는 단어가 언급된 유일한 곳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특정한 말씀에 근거해서만 행동해야 한다. 제사장들이 요단강에 발을 담그는 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특별히 그에게 배에서 나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바다로 나갔다. 믿음은 추측(증거는 없지만 사실일 것이라고 추정함)과 크게 다르다.
더 높은 부름
하늘로부터 요한을 향한 주님의 부르심은 "이리로 올라오라"는 것이었다(계 4:1). 요한계시록 1장 9절에서, 우리는 요한이 이 땅에 - 밧모섬에 - 있었고 주님은 그에게 교회의 상태에 대해 많은 것을 보여 주셨다는 것을 읽는다(계 2,3장). 그런 다음 주님은 요한에게 더 높은 곳, 하늘에 올라오라고 초청하셨다. 그런 다음 그는 지상에 머물렀더라면 결코 보지 못했을 다른 많은 것들을 보았다. 주님은 그를 더 높이 데려가지 않으셨다(그의 허락 없이). 그는 주님의 초대에 응답하고 스스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로 선택해야 했다. 그가 그 초대에 응답하지 않았다면, 요한계시록은 세 장으로 끝났을 것이다! 많은 신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하늘의 사고방식으로 더 높이 올라오라고 초대하실 때, 그들은 응답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들은 평생 동안 지상에 머물렀다. 영적인 일과 사람의 반대와 전통에 대한 게으르고 나태한 태도에 기꺼이 영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만이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마 11:12).
"정직한 자를 위하여 흑암 중에 빛이 나느니라"(시112:4). 이 시편 전체(시112편)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절대적으로 정직하고 의롭게 되는 축복에 대해 이야기하는 놀라운 시편이다. 그런 다음, 우리를 미워하는 자(특히 마귀와 그와 교제하는 자)는 우리가 잘 되는 것을 볼 때 화를 낼 것이라고 말한다(마지막 몇 구절).
그러므로 우리의 과거의 실패가 너무 많고 그리고 너무 커서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여야 할지라도, 우리는 고개를 든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받아들여졌다"(엡 1:6 - KJV), 그리고 우리의 과거는 영원히 "지워졌기" 때문이다(히브리서 8:12 - "내가 다시는 그들의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특히 이사야서 44:22 - "내가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너희 허물을 완전히 지워버렸노라.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이 두 구절을 마음에 새겨두어라).
하나님이 증명하신 삶
베드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증명을 받은 사람이라고 했다(행2:22). 우리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요17:23), 예수님을 위해 하신 모든 것을 우리에게도 하실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예수님이 하신 것과 같은 조건을 충족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기적이 아니라 그분이 가장 좋은 방법으로 우리의 삶도 증명하실 것을 기대할 수 있다. 세례요한(예수님이 가장 위대한 선지자라 칭함 - 마11:11)은 한 번도 기적을 행하지 아니하였고(요10:41), 미래에 대하여 결코 예언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삶과 사역을 놀랍게 증명하셨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이 하늘에서 다스리시며 우리를 돌보신다는 사실과, 사탄을 대적하여 항상 우리 편에 서 계시다는 사실과, 그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광의 풍성함으로 우리의 모든 필요한 것을 채우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빌4:19)과, 그가 사탄을 우리 발 아래 짓밟아 버리실 것이라는 사실(롬16:20)에 대하여 우리 주변 세상에 살아있는 증거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많은 시련과 시험에 직면하도록 허락하실 수 있다. 그러나 그분은 그것들이 우리의 영적 발전의 각 단계에서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이 되도록 결코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다(고전 10:13). 그러나 그분은 모든 시험에서 우리를 의기양양하게 나오게 하실 것이다(고후2:14). 우리는 항상 맑은 하늘을 약속 받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승리를 약속 받았다.
내가 읽은 멋진 시 한편을 소개한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
"하나님은 우리의 평생 동안 하늘이 항상 푸르고 꽃이 만발한 길을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비 없는 태양, 슬픔 없는 기쁨, 고통 없는 평화를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수고와 시험, 환난과 화를 알지 못하리라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우리가 많은 짐과 많은 염려를 짊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인도자가 필요 없는 평탄한 길과 넓고 빠르고 쉬운 여행을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바위가 많고 가파른 산입니다,
탁하고 깊은 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날을 위해 힘을,
수고에는 안식을, 길에는 빛을,
시련에는 은혜를, 위로부터 도우심을,
변함없는 동정을, 불변하는 사랑을 약속하셨습니다.
(애니 존슨 플린트)
육체적 치유를 받는 믿음
고린도전서 6장은 우리 몸에 대해 네 가지를 알려준다.
(1) 우리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이다(15절).
(2) 우리 몸은 성령의 전이다(19절).
(3) 우리의 몸은 오직 주님만을 위한 것이다(13절).
(4) 그러면 주는 우리 몸의 주인이시다(13절).
그러므로 우리는 그 성경을 근거로, 우리 몸에 대한 예수님의 생명의 분량을 주장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몸의 건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몸을 위해 예수님의 부활 생명을 맛보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 히브리서 6장 5절에서는 "미래의 능력을 미리 맛본다"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 몸의 건강을 요청할 수 있다 - 하나님께서 더 높은 영적 목적을 위해 그 치유를 지연시키거나 거부하지 않는 한(바울의 육체의 가시의 경우와 같이 - 고후 12:7-9). 그러므로 우리가 아플 때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를 치유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 우리의 병을 치료해 주실 은혜 주시기를 - 그분이 생각하시는 것이 영적으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다.
기질에 관하여
어린 시절, 나는 주변 사람들처럼 사교적이고 외향적이길 원했고, 수줍음이 많고, 내향적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모든 기질이 약점뿐만 아니라 고유한 강점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점차적으로 발견했다. 그제서야 내가 외향적이었다면 전도자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데 어느 정도 장점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내향적인 사람들처럼) 체계적이지 못해서 성경을 가르치고 책을 쓸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님은 목적을 가지고, 우리 각자를 다르게 만드셨다. 그분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우리를 위해 계획하신 특정한 과업에 기질적으로 적합하도록 우리를 어머니의 태에서 만드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기질, 지성, 은사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 열심히 일하고 일을 완수하려는 의욕조차도 화를 잘 내는 외향적인 기질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사람과 같은 추진력이 없다고 낙심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금의 우리로 만드는데 실수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우리의 기본 기질과 신체적 특징과 관련하여 어떤 불평도 하지 않고, 우리가 다른 사람처럼 되기를 바라지 않고, 하나님이 만드신 대로 우리 자신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기질의 특정한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
다음은 네 가지 기본 기질의 강점과 약점에 대한 간략한 개요이다:
외향적인 사람:
1. 화를 잘 냄. 의지가 강하고, 결단력 있고, 독립적이며, 확고하고 자신감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쉽게 화를 내고 위압적이다. 사려 깊지 않고 자급 자족하며 감정이 없다.
2. 다혈질임. 외향적이고, 따뜻하고, 친절하고, 수다스럽고 근심걱정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의지가 약하고, 훈련되지 않고 신뢰할 수 없다.
내성적인 사람:
1. 우울함. 분석적이고, 민감하고, 완벽주의적이고, 미학적이며 이상주의적이다. 그러나 그들은 변덕스럽고 비판적이며 비현실적이며 사교적이지 않으며 쉽게 낙심한다.
2. 침착함. 침착하고, 원만하고, 느긋하고, 외교적이며, 유머러스하다. 그러나 그들은 인색하고, 겁이 많으며, 우유부단하고, 미루고, 느릿느릿하다.
그래서 너희는 무엇을 선택 하겠는가?? 성령께서 우리의 기질의 연약함을 극복하고 균형 잡히고 그리스도와 같이 되도록 우리를 도우러 오셨음을 하나님께 찬양한다. 그러므로 날마다 성령님께 복종하면, 성령님은 점차적으로 너희를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화시킬 것이고, 너희는 기질적인 모든 연약함을 점차 극복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몸을 "비천한 몸"(빌 3:21)이라고 부르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몸에 있는 동안, 어떤 식으로든 단 한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보다 자신을 높이거나, 우리의 말과 행실로 다른 사람을 작게 만드는 것은 옳지 않다. 예수님은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다"(빌 2:7). 즉, 사람이 취해야 할 유일한 합당한 지위는 종의 지위뿐임을 아셨다.
우리의 삶에 큰 영적 이득을 가져다 주는 것은 경건 그 자체가 아니라, 검소함과 만족함을 동반한 경건이다(딤전 6:6 - 의역). 검소함과 자족함이 없는 경건은 가짜이다. 우리가 재정적 상황에 만족하는 법을 배우고 더 많이 가진 다른 사람과 우리의 몫을 비교하지 않을 때, 그리고 우리가 가진 것으로 검소하게 사는 법을 배운다면, 그러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교훈을 배운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단순하게 살고 범사에 감사하도록 가르치기 위해 이 땅에 머물게 하신다. 이 두 가지 교훈을 빨리 배우도록 하자.
감사의 영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마지막 밤에 주님의 간절한 갈망과 열망은 제자들과 함께 떡을 떼는 것이었다(눅 22:15). 우리도 주님과 그분의 모든 자녀들과의 교제에 대한 그와 비슷한 갈망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만 떡을 떼는 일이 우리에게 의미 있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떡을 가지사 감사 기도를 드렸다(고전 11:24). 하나의 떡은 우리가 그것을 떼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한 몸임을 상징한다(고전 10:17). 감사를 드리는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몸의 모든 지체에 대해 감사하라고 가르치신다.
우리가 서로 원망할 때, 사탄은 우리의 머리 위에 앉는다. 그러나 그의 자리는 우리 발 아래이다. 하나님과 교회의 모든 형제자매에 대한 감사의 영은 항상 사탄이 우리 발 아래에 있도록 한다.
또한 우리는 형제자매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을 통해 우리는 서로 교제하며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신자들과의 교제에서 그에 상응하는 성장이 없이 거룩함이 겉으로만 성장하는 것은 기만적인 성장이다. 우리가 실제로 겸손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은 감사의 정신이다. 겸손은 참된 거룩함이 자라는 유일한 토대이다.
균형 잡힌 복음
복음의 균형 잡힌 메시지는 바울이 에베소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1장부터 3장까지는 단 하나의 권면도 없다. 그 장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만을 설명한다. 다음 세 장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권고로 가득 차 있다. 이것이 복음 동전의 양면이다. 어느 쪽이든 없으면 동전(복음)은 위조이다. 갈라디아서 1장에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저주가 선언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전한 복음, 그리고 올바른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도록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다(엡 1:3).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이 하신 일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사랑한다. 그분이 먼저 우리를 섬겼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섬긴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우리를 아셨다(엡 1:4).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가 있지만 하나님의 이름은 "I AM"(나는 존재한다)(출 3:14)이기 때문에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은 영원한 현재에 살고 있다. 그래서 그분은 무엇이든 창조하시기 오래 전에 우리 각자의 이름을 아셨다. 그분은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도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두셨다.
다음은 "그리스도 안에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예이다. 종이 한 장을 가져다가 책 속에 집어넣고 책을 태우면 종이도 태워진다. 책을 땅에 묻으면 종이도 함께 묻힐 것이다. 책을 로켓에 실어 달에 보내면 종이도 달에 간다.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놓여졌다(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마음에).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주후 29년에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우리도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가 묻혔을 때 우리도 묻혔다.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시고 승천하실 때,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함께 살리셨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6). 이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때에만 그 실재를 경험할 수 있다 - 믿지 않는다면 경험할 수 없다. "네 믿음대로 되리라"(마태복음 9:29)는 말씀이 하나님의 법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에 굳건히 서야 한다. 그 기초가 놓여져야, 에베소서 4장부터 6장까지의 새 길을 걸으라는 것과 사탄 등을 대적하고 이기라는 권면으로 집을 지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자주 낙심과 자책의 수렁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먼저 에베소서 1장에서 3장을 많이 묵상하여라.
많은 기독교인들이 한 곳에 기초를 놓고 다른 곳에 집을 짓는다! 그래서 집이 무너진다. 에베소서 마지막 세 장에 나오는 모든 권면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를 완전히 받아들이신 것을 기초로 한다(처음 세 장에서 언급됨). 이것은 기본적인 사항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잊는 경향이 있다. 어느 날은 45분 동안 성경을 읽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더 받아주실 거라고 생각하고, 또 다른 날은 우리가 1분도 성경을 읽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눈살을 찌푸리시며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뭔가 잘못되면 그날 성경을 읽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미신이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들이신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성경 읽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성경 읽기는 의심할 여지 없이 매우,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받아들인 기초가 아니다. 그것은 상부 구조의 일부이다. 너희가 이 진리 안에 굳게 서 있는 것은 매우, 매우,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복음이 사람 중심이 되어, 기초에 문과 창문을 설치하게 된다! 이러한 진리(에베소서 1-3장에 있음)를 무시하거나 평가절하하는 사람들은 결국 바리새인이 된다.
그러나 물론, 기초를 놓는 모든 목적은 집을 짓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기초에서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상부 구조를 계속 건설해야 한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손을 뻗어 우리에게 모든 하늘의 축복을 주시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손에서 축복을 받기 위해 뻗은 우리의 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의 이름을 믿음으로 주장하는 만큼만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하늘 은행 계좌에 수백만 개의 축복을 넣어 주셨고 예수 이름으로 서명된 수많은 백지 수표를 우리에게 주셨다. 이제 금액을 기입하고 은행에 가서 유산을 청구하기만 하면 된다.
신성한 교환
이제 다음과 관련된 내용을 나누겠다: 갈보리 십자가에서 세 가지 영역에서 일어난 신성한 교환, 즉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되신 것과 그 결과로 우리가 이제 그분 안에서 무엇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말하겠다.
(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심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5:21). 이것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영광스러운 진리이다 - 자신은 결코 하나님의 기준에 합당할 만큼 의롭게 될 수 없음을 깨달을 만큼 겸손한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만 담당하신 것이 아니다. 그는 또한 실제로 죄가 되었다. 우리는 불행하게도 돼지가 오물에 익숙해지는 것처럼 죄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그것이 예수님에게 얼마나 끔찍한 경험이었는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예수님이 죄에 대해 가지고 계셨던 혐오감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려면, 가득 찬 정화조에 뛰어들어 그 안의 오물과 똥에 영원히 동화되는 것을 생각해 보라. 그것은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의 깊이를 보여준다. 그 사랑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도록, 그분을 그가 싫어하는 것이 되게 했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하나님의 의는 땅에서 가장 거룩한 사람의 의보다 아주 높다. 죄 없는 천사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다(사6:2,3).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볼 수 있다. 우리가 죄의 끔찍함을 볼 때, 우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를 미워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무엇이 되었는지 볼 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완전히 받아들여진 것을 기뻐할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8:9). 그 구절의 문맥은 그것이 물질적 가난과 물질적 부요함을 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스도는 한때 부자였다고 이 구절은 말한다. "부요하게 된다"는 무슨 뜻인가? 부요하게 된다는 것은 많은 돈과 재산을 소유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필요에 충분하고 다른 사람들을 돕고 축복할 수 있는 여분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원하시는 것이다. 부자가 되는 것은 계시록 3:17에서 "아무 것도 부족한 것이 없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부요하신 방법이다. 하나님에게는 은이나 금이나 은행 계좌나 지갑이 없다. 그러나 그분은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다. 예수님도 이 땅에 계실 때 이와 같이 부요하셨다. 그분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5000명의 남자를 먹일 수 있었다. 오늘날 부자만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다. 그분은 세금을 낼 돈이 있었다. 유일한 차이점은 사람들은 세금을 내기 위해 은행에서 돈을 인출하는 반면, 그분은 물고기 입에서 꺼냈다는 것이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만큼 충분한 돈이 있었다(요 13:29). 그분은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는" 분이셨기 때문에, 이 땅에서 가난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분은 십자가에서 가난하게 되셨다. 우리가 본 가장 가난한 거지의 몸에는 적어도 누더기를 입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그것조차 없었다. 그분은 죽을 때 정말 가난했다. 왜 그분은 십자가에서 가난하게 되셨는가? 그것은 우리가 부요해지도록 하기 위해서 이다 - 우리 삶에서 언제라도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다. 현명한 부모라도 자녀에게 원하는 것을 다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공급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빌 4:19).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항상 갖게 될 것이다(벧후 1:4).
(3)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신 것은 아브라함의 복(성령에 대한 약속)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갈 3:13, 14).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한 저주는 신명기 28:15-68에 설명되어 있다 - 혼란, 불치병, 전염병, 끊임없는 실패, 눈이 멀음, 광기, 남에게 착취당함, 원수(사단)에게 빼앗긴 자녀, 극심한 가난 등이다. 이 중 어느 것도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대신 약속 받은 축복은 많은 돈과 많은 자녀로 이루어진 율법의 축복(신28:1-14 참조)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축복(창12:2,3에 설명됨)임을 유의하라. 이것은 기본적으로: 주님은 우리를 축복하시고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축복이 되게 하신다. 이것이 바로 성령 충만함으로 오는 축복이다 - 우리 속에서 솟아나는 샘물이 우리를 축복하고(요 4:14), 생수의 강이 우리를 통해 흐르고 다른 사람들을 축복한다(요 7:37-39). 심지어 최악의 죄인에게도 주님의 약속은 "그가 과거에 저주를 받은 것같이, 그는 미래에 축복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슥 8:13의 이 놀라운 약속을 기억하여라).
너희가 어디에 살든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축복이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이것이 이루어지려면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저주의 어떤 부분도 너희를 건드릴 수 없다고 믿어라. 사탄은 십자가에서 패배했다. 그래서 그는 너희의 삶의 어떤 부분에서도 권리가 없다. 이 진리를 입으로 고백하고 평생 동안 이기는 자가 되어라.
하나님의 모든 축복은 우리가 실제로 믿고 그것을 믿음으로 주장할 때에만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입으로 시인해야 한다. 사람은 마음으로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과 건짐을 받는다(롬 10:10). 그렇게 하면("우리가 증거하는 말로"), 우리에 대한 사탄의 고발도 이길 수 있다(계 12:11).
소망
"소망"은 "은혜", "온유", "심령이 가난한", 그리고 "이기다" 등과 같은 새 언약의 단어이다. 소망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신자는 거의 없다. 하지만 (성경)용어 색인에서 공부하기 좋은 단어이다.
롬 5:2-4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면서 기뻐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환난 중에도 기뻐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러한 환난을 인내한다면 검증된 성품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차례로 우리에게 소망을 준다. 즉, 우리는 과거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켜 주셨는가를 보았기 때문에, 앞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이 일을 완성하실 것이라는 소망을 가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미래에 대한 소망으로 우리를 채워주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주변 사람들처럼 당혹감과 우울함으로 미래를 대하지 않는다. 우리 속에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이 반드시 그것을 완성하고 우리 안에서 그것을 온전히 이루실 것을, 우리는 엄청난 희망을 가지고 기대한다(빌 1:6). 소망은 낙담과 우울에 대한 확실한 해독제이다.
우리가 고백하는 소망을 굳게 지켜야 한다(히 10:23). 다시 말해서 우리는 비록 지금 패배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고, 그분이 우리 안에서 약속하신 것을 행하실 것을 입으로 고백하는 담대함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소망 중에 기뻐해야 한다. 신자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하신 일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실 일을 기대하면서 기뻐해야 한다.
"그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로다"는 시편 1:3의 약속이다. 이것이 우리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며, 우리는 그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장자권(출생권)으로 주장해야 한다.
기쁨
넘치는 기쁨은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안에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이다. 왜냐하면 "그의 임재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시16:11).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참으로 우리 마음에 임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롬 14:17)이기 때문이다. 이 기쁨은 우리가 죄를 미워하고 의를 사랑할 때만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 기쁨의 기름 부음은 "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하는"(히 1:9) 자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항상 너희의 힘이 되기를 바란다(느 8:10). 기쁨은 유혹과의 싸움을 훨씬 쉽게 만들어 줄 것이다.
야고보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시련이 와도 기뻐해야 한다고 말한다(약 1:1-4):
(1)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발견한다(그것은 우리가 가진 금이 진품인지 아닌지를 알아내는 것과 같아서 우리가 실제로 가난한데 부자인 것처럼 스스로를 속이지 않도록 하는 것과 같다.)
(2) 우리의 인내심이 온전해질수록 우리는 완벽하고 완전하며,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 된다.
우리가 시련을 기뻐한다면 시련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 수 있는지 놀랍다. 성도들 사이에는 헛된 고통이 많이 있다. 그들은 고통을 통해 어떤 부도 얻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시련을 기뻐하는 대신에 불평하고 투덜거리기 때문이다.
믿음과 인내
히브리서 6장 12절에서 우리는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만 약속을 기업으로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믿음만으로는 부족하다. 히브리서 10장 36절에도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하나님의 약속을 기업으로 받으려면 인내가 필요하다고 같은 말씀하신다. NASB는 위의 구절에서 '인내'라는 단어를 '견딤'으로 번역한다 - 실제로는 그 뜻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에 대해 결코 불평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하는 모든 것을 우리의 유익을 위해 일하게 하시기 때문이다(롬 8:28). 로마서 8장 28절은 정수기와 같다. 사람들이 어떤 더러운 물을 부어도, 나오는 물은 배출구에서 완벽하게 깨끗하고 순수하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하든,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 그들이 우리를 칭찬하든 저주하든, 우리를 돕든 해치든 - 로마서 8장 28절을 믿는다면, 우리가 얻는 것은 항상 좋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믿어야 한다. 믿음은 전자 정수기의 스위치를 켜는 것과 같다. 믿음의 전류가 흐르지 않으면 작동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떤 시련이 우리에게 닥치든 - 다른 사람의 실수나, 악인의 고의적인 사악함이나, 우연한 일로 보이는 것이든지 - 우리는 그 모든 것에서 기뻐할 수 있다,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우리의 선을 이루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 즉, 우리를 더욱 그리스도와 같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로마서 8:29에서 말하는 것처럼).
믿음은 하나님이 그분의 지혜와 능력과 사랑 안에서 우리 삶에서 그러한 상황을 허용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것을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 되도록 그것들을 조정하고 설계하는 것이다.
성경 연구 도구
나는 그리스어를 공부한 적이 없다. 그러나 성경에 있는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원어를 이해하고 싶다면, 가장 좋은 방법은 Young's Concordance를 사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히브리어나 그리스어 단어를 영어로 모두 번역하여(KJV에 있는) 제공하기 때문이다. 성경공부에 아주 편리한 도구이며, 나는 1961년부터 성경공부를 위해 꾸준히 사용하고 있다.
Young's concordance에서 내가 본 것의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다:
히브리어 'revayah'('충만'을 의미)는 구약에서 단 두 번 나온다:
(1) 시편 23:5 - "넘치다(runneth over)"(KJV), "넘치다(overflows)"(NASB)
(2) 시편 66:12 - "부유한 곳(wealthy place)"(KJV), "풍요한(abundance)"(NASB)
두 구절을 합치면 다음과 같은 영적 진리를 얻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 머리에 기름을 부으신 후(시 23:5), 그분은 우리를 그물 속으로 끌어들이시며(꽉 조이는 상황), 우리에게 압박하는 짐을 지우시며(그러나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은 아님), 사람을 우리 머리 위에 타고 다니게 하시고, 우리에게 불과 물을 통과하게 하신다(시 66:11,12), 그리하여 우리의 잔이 넘치는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시 66:12와 시 23:5). 그래서 기름부음과 충만함 사이에는, 우리가 겪어야 할 시련이 많이 있다. 그래야만 우리는 넘치는 삶에 도달할 수 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
고린도전서 4장 7절은 우리가 가진 것은 몸에나 혼(생각과 감정)에나 영에나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아니한 것이 없다고 말한다. 우리의 외모, 지능, 기질, 상황, 교육, 인생에서 얻은 기회(다른 사람들은 "행운"이라고 함),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열망, 우리의 영적 발전, 우리가 받은 가정 교육의 유형 등은 모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어떻게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지 묻는다. 우리가 이 사실을 잊어버리면, 우월감에 대한 생각이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기 시작하고 다른 사람들 즉, 똑똑하지 않거나 교양이 없거나 예리하지 않거나 영적이지 사람들을 경멸하기 시작한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가장 강력한 말로 ("회칠한 무덤", "독사의 자식들" 등) 비판하셨다, 다른 죄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고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겼기"(눅 18:9) 때문이다. 이것은 살인과 간음을 훨씬 능가하는 하나님의 죄 목록에서 1위인 죄이다.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이 보시는 대로 죄를 보게 될 때, 우리는 죄의 순서를 하나님의 뜻에 맞게 재정렬할 것이다.
떡을 땔 때 우리는 떡을 받고 포도주를 받는다. 우리는 둘 다 만들지 않았다. 둘 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선물이다. 찬송가 "영원한 반석..."에서 말씀의 진리를 상징한다.
"내 손에 가져온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는 그저 당신의 십자가에 매달립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받았음을 깨달을 때, 우리의 삶은 그분의 친절한 손길로부터 받은 작은 자비 하나하나에 대해 하나님께 깊은 감사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형제자매들이 비록 완전하지 않더라도 교제하는 가운데 감사하게 될 것이다.
영적 또는 종교적
당신은 종교성과 영성을 구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종교성은 많은 기독교 활동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영적으로 되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의 태도(모든 것에 대한)를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것과 같은 태도로 바꾸도록 하는 것이다(빌 2:5,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것과 같은 마음을 가지라..."). 여성, 돈, 사람, 환경, 세속적 명예 등에 대한 태도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적으로 성장하고 있다고 결코 스스로를 속여서는 안 된다. 종교 활동 자체는 우리를 바리새인처럼 회칠한 무덤으로 만들 뿐이다.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릇된 태도로부터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해야 한다.
종교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옛 언약 아래서, 의를 추구하던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인 바리새인이 되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장 큰 적이었다. 오늘날에도, 율법의 정신 안에서 새 언약의 진리를 받아 그냥 종교적이 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면 우리는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가장 큰 원수가 될 것이다.
성령 충만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데 관심이 많은 사람은 영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닌 종교적인 바리새인이 될 위험이 있다. 구약에서 그들은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라는 명령을 받았다(시 1:2). 그러나 신약에서는 복음서에서 보는 주 예수의 영광을 묵상해야 한다(고후3:18).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롬 14:17). 종교성은 인간의 의를 가질 수 있지만, 평화와 기쁨은 없을 것이다. 불평과 중얼거림과 두려움과 근심이 있을 것이다. 참된 기독교는 충만한 화평을 가져다 주는 믿음이다 - 하나님과의 화평(모든 문제에 대한 깨끗한 양심), 사람과의 화평(화평이 우리에게 있는 한), 내면의 화평(불안과 긴장으로부터의 자유)으로. 그것은 또한 기쁨의 충만함, 즉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와 찬양이 넘치는 삶을 가져다 준다. 우린 노래한다:
"그는 자신의 슬픔을 위해 눈물을 흘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나의 슬픔을 위해, 피의 땀방울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사셨다. 그분은 한 번도 자신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피를 흘리며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에도 "나를 위하여 울지 말라"(눅 23:28)고 말씀하셨다. 그분에게는 자기 연민이 없었다. 그분은 아버지의 얼굴 앞에서 사셨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가혹한 대우를 받을 때에도 끊임없이 기뻐하셨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우리 자신의 슬픔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 않아야 한다.
종교성은 많은 활동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교만하고 남을 멸시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멸시하거나 우리의 의로움을 자랑스러워할 때, 우리는 영적인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것이다. (겸손은 새 언약의 가치이기 때문에 구약에서 많이 언급되지 않는다.) 우리는 성경 지식의 성장과 함께 우리가 단지 더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한다.
너희에게 해를 끼친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모든 것을 바로잡고, 성령 충만을 간절히 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매일 예수님의 죽으심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여라. 그러면 너희는 영적인 사람이 될 것이다.
믿음과 신뢰
아브라함은 "믿음이 더욱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여"(롬 4:20,21).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할 때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린다. 우리는 하나님이 다루실 수 없는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안다. 그분은 사탄이 만드는 모든 문제를 어디에서나 해결할 수 있다. 대통령의 마음도 그의 손에 있고, 그는 그것을 우리에게 유리하게 돌이킬 수 있다(잠 21:1).
그러므로 무슨 일이 있어도 항상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서 사탄을 너희의 발 아래 짓밟으시리라는 믿음을 고백해야 한다. 그러면 사탄이 무엇을 하든지 사탄을 이기게 될 것이다. 나는 내 자신의 삶에서 이런 일이 반복되는 것을 보았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너희에게 영적인 교육을 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학교에서 상급학년으로 올라갈수록, 수학 문제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문제가 점점 더 어려워질 것임을 예상해야 한다. 하지만 더 어려운 수학 문제의 도전을 피하기 위해, 더 낮은 학년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너희가 은혜 안에서 자라면서 더 힘든 상황에 직면하게 하셔도 놀라지 마라. 따라서 너희는 더 강하고 담대하고 확신에 찬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
너희의 양심이 어떤 일에도 너희를 정죄하지 않도록 항상 조심하여라. 그래야만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요일 3:21, 22) 문제 해결을 간구할 수 있다. 시련 속에서 하나님께 지혜를 구한다는 것은(야고보서 1:1-7 참조) 너희가 직면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갖고 계시기 때문에, 야고보는 다양한 시련을 만날 때 그것을 기쁨으로 여겨야 한다고 말한다 - 하나님이 너희를 위해 문제를 해결해 주실 때, 너희는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
이사야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을 때(이사야 6장), 그는 천사들이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라고 노래하는 것을 들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땅에서 그들 주변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놀라운 말씀이다. 그들은 부패와 악만 본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 있는 하나님의 천사들을 보기 위해서는 엘리사의 종처럼 눈을 떠야 한다(왕하 6:17).
우리가 그것을 볼 때 우리는 또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는 어떤 상황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다루실 수 없는 상황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땅에 있을 때에도 하늘에 앉아 있다(엡 2:6).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천국의 캡슐(우주복)을 입고 살도록 만드셨다(달에서 우주복을 입고 걷는 우주비행사처럼), 캡슐 안에는 천국의 분위기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이 땅을 걸을지라도, 더러움과 투덜거림과 두려움에서 보호받을 수 있다 - 이러한 것들은 하늘에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성령님은 이것을 우리에게 주기 위해 오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한다.
거절의 축복
내가 아직 해군에 있었다면 58년(1997년 11월 5일)을 마치고 오늘 은퇴했을 것이다. 그러나 31년 전 해군을 떠나,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해 유용하게 살 수 있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지난 달(1997년 10월), 주님은 내가 앞으로 더 많은 반대와 박해와 거절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셨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는 무엇과 관련되어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분은 앞으로 몇 년 동안 나에게 일어날 일에 대해 미리 경고하셨다고 생각한다.
나는 반대가 나의 메시지를 거부하는 기독교인들에게서 나올 것이라는 것을 안다 - 마치 예수님이 그분을 거부한 유대인들을 직면하신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나는 주님 안에서 기뻐하면서 개의치 않고, 계속 나아간다.
(*참고: 이 예언은 1998년부터 2007년까지 이루어졌는데, 그 기간 동안 나는 사람들의 큰 반대도 받았지만 주님의 큰 위로와 건지심도 받았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미리 경고하시고 준비시키신 것이 너무 유익했다.)
그러나 우리 교회 안에서는 점점 더 영광스러워지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마음을 다한 많은 형제 자매를 일으키셨다. 이것은 나에게 큰 기쁨이다. 그리고 지금 사역을 위한 많은 문이 열려 있다.
바울은 (고전16:8,9에서) "나에게는 섬기는 문이 활짝 열려 있고, 대적하는 자가 많도다"라고 썼다. 이 두 가지, 즉 열린 문과 반대는 사도 시대 이래로 함께 가는 것 같다.
하나님은 우리가족을 통해 '누구나 살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삶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이라는 것을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생생하게 증명하셨다. 하나님이 우리 가족을 축복하신 방식은 일부 사람들에게 질투를 불러일으켰다 - 그리고 그것이 일부 사람들이 우리를 적대시하는 주된 이유이다: 그들은 가난한 기독교 사역자의 아들들이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잘하는 것을 보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
주님께서 몇 년 전에 나에게 말씀하신 다른 것을 너희들과 나누겠다: 그분은 나에게 "내가 너를 내 백성 중에 시험자로 삼아 그들을 시험하게 하였느니라"(렘 6:27)고 말씀하셨다. 자랑처럼 들릴 것 같아서, 많은 사람들과 이것을 공유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CFC에 합류한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면서 수년 동안 이것이 성취되는 것을 보았다. 솔직하지 않은 신자들, 나와 또는 우리 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맺은 신자들은, 특히 죄가 있거나 그들 안에 바리새주의가 있는데 계속 살면서 회개하지 않는다면 언제나 노출된다. 나는 이런 일이 여러 번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회개하기를 바라면서 사람들의 은밀한 죄를 그들에게 계시하신다. 그러나 그분은 아무도 회개하도록 강요하지 않으신다.
비록 주님께서 재림을 늦추셔서, 우리가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상급을 받기 위해 집에 돌아가더라도, 너희 모두가 우리가 너희의 부모로서 너희에게 보여 준 모범에 따라 평생 동안 살아가기를 바란다. 주님의 포도원에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내가 살아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아신다 - 그리고 그분은 이미 우리의 날을 계수하셨다.
사탄에게 자리를 주지 말라
요한계시록 12장 8절에서, 우리는 사탄에 대해 두 가지를 배운다:
(1) 사탄과 그의 마귀는 하나님의 천사들, 또는 하나님의 아들인 우리를 대할 만큼 강하지 못하다;
(2) 하늘에도, 우리 마음에도 사탄이 설 자리가 없다.
성령께서는 사탄이 화를 내는 사람(엡4:26,27)이나 마음에 용서하지 않는 태도(고후2:10,11)를 품고 있는 사람을 지배할 수 있다고 경고하신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죄를 피하기 위해 특히 주의하여라.
사탄이 천국에 살 수는 없는 것은 그곳은 항상 하나님을 찬양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와 같은 찬양의 영을 가지고 있다면 사탄은 우리 마음에도 들어올 틈을 찾지 못할 것이다 - 우리는 항상 그 찬양의 영을 가질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적들이 홍해에 빠진 것을 본 후에야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다(시편 106:8-12 참조).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믿음으로 행하며 구원을 보기도 전에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상을 차려주시고 원수 앞에서 기쁨으로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셨다(시 23:5).
요나는 고래 뱃속에 있었을 때 처음 3일 동안은 나가려고 애썼다. 3일 후에야, 그는 기도하기 시작했다(욘 1:17 및 2:1의 "그때"라는 단어 참조). 우리도 곤경에 처하면 보통 먼저 기도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다른 모든 노력이 실패한 후에만 기도한다. 요나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할 때까지 구원받지 못했다.
요나가 "구원(구출)이 오직 여호와로부터만 나온다"(욘 2:9)라고 말했을 때, 그때 주님은 물고기에게 요나를 땅에 토하라고 말씀하셨다(욘 2:10). 우리가 주님을 찬양하기 시작할 때,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의 구원도 올 것이다. 이것은 연습하는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에 대한 믿음의 표현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고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에게 구원을 보여줄 길을 만든다"(시 50:23 - 의역). 요나는 그것을 경험했고, 너희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예수님은 무엇을 보고 놀라워하셨나?
"예수님께서 기이히 여기셨다(KJV)"는 것을 읽은 것은 단 두 번뿐이다 - 한 번은 믿음을 보았을 때이고, 다른 한 번은 믿지 않음을 보았을 때이다. 로마 백부장은 예수께서 한 말씀만 하시면 그의 하인(몇 리 떨어져 있던)이 낫게 될 것이라고 할 때에, 예수께서 그의 믿음을 기이히 여기셨다(마8:10). 그리고 예수께서 고향에 오사 그들이 예수를 믿지 아니하거늘, 그들의 믿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기셨다(막6:6). 백부장은 너무 겸손해서 예수님이 자기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할 자격이 없다고 주님께 말했다.
한때 그녀의 딸(몇 마일 떨어져 있는)을 고쳐달라고 주님께 간구했던 가나안 여인도 예수님께서 그녀의 믿음을 높이 칭찬하신 또 다른 사람이었다(마 15:28). 예수께서 개에게 자녀의 떡을 주지 않는 예를 사용하셨을 때, 그녀는 즉시 식탁 발치에 있는 개처럼 겸손한 자세로 자신의 자리를 받아들였다. 그녀는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이 두 사건에서, 우리는 한 가지 공통점을 본다: 겸손과 믿음 사이에는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겸손할수록 우리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줄어들고, 자신의 재능과 성취에 대해 덜 생각할수록 더 많은 믿음을 가질 수 있다. 우리가 자랑스러울수록 믿음은 줄어들 것이다.
우리는 주님 앞에 설 자격이 없음을 항상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신 것은 엄청난 은혜이다. 우리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마음을 다해 겸손을 추구하여라.
실패하지 않는 믿음
하나님은 우리의 원수에게 원수가 되겠다고 약속하셨다(출 23:22). 옛 언약에서 이스라엘의 원수는 모두 인간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사탄과 그의 악한 영들과 우리 육신의 정욕만 원수이다. 우리는 혈과 육에 대하여 씨름하지 않는다(엡 6:12). 인간과 결코 싸우지 않기로 결정했다면, 그러면 하나님만이 너희를 위해 싸울 것이다. 하나님은 사탄을 대적하여 항상 너희 편에 계심을 기억하여라.
하나님은 베드로를 그렇게 신뢰하셨고 그를 위한 큰 사역이 있었기 때문에, 사탄은 베드로를 체질하는 것을 허락 받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가 체질될 때에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셨다. 사탄에게 시험을 받을 때마다, 예수님께서 너희를 위해 기도하신다는 사실은 큰 위로가 된다.
집에 불이 났을 때, 사람들은 그 집 안에 가장 소중한 물건을 구하려 할 것이다. 안에 아기가 있으면, 부모는 오래된 신문이 아니라 아기를 구하기를 원할 것이다. 그래도 예수님은 베드로가 불을 통과할 때, 그의 믿음이 지켜지기를 기도하셨다. 그것이 가장 소중하고 유일한 것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쓸모 없는 오래된 신문 같았다.
너희의 믿음은 사탄에게 체로 쳐질 때 결코 떨어지지 않아야 한다. 믿음이 있다면, 가장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이렇게 고백하게 될 것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나를 지극히 사랑하시며 그분은 땅과 하늘을 다스리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사탄을 이기셨다. 사탄은 거짓말쟁이요 나의 삶을 주장할 수 없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 이것은 믿음이 떨어지지 않는 사람의 고백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그가 체질된 후에 회심하여 형제들을 굳세게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눅 22:31, 32). 우리가 시험을 받을 때 믿음이 무너지면, 다른 사람을 굳세게 할 수 없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불렀을 때에도 그가 기분이 상하지 않았기 때문에, 베드로와 많은 일을 하실 수 있었다(마 16:23). 그러나 예수님은 베다니에서 유다에게 작은 교정을 하셨을 때 그가 화를 냈기 때문에, 결코 유다를 위해 기도하지 않으셨다(요12:4-8과 마26:8-15를 함께 읽으라).
주님께서 너희를 교정하실 때 너희는 화를 내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너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 이루실 위대한 목적을 가지고 계시다. 목적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은 사탄에게 너희를 체에 걸러지도록 더 많이 허락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모든 시련에서 정복자 이상으로써 나올 것이다.
합법적이지만 교훈적이지 않는 것들
바울은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에 대하여 나누고 싶은 것이 많으나, 그들이 듣기에 둔하고 미성숙하여 할 수 없다고 말했다(히 5:7-14).
예수님은 성령이 오시면 그가 예수님에 관한 것을 받아서 우리에게 보이시겠다고 하셨다(요 16:14). 그는 그리스도의 삶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러면 우리는 신성한 삶, 즉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셨던 것과 같은 삶을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악을 피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친히 피하시려 한 것들을 피할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 12절과 10장 23절에서 모든 것이 합법적이나, 모든 것이 유익하거나 덕을 세우지 못한다고 두 번 말했다. 우리는 두 가지 차원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다. 하나는 모든 불법을 피하고 합법적인 일만 하는 단계이다. 두 번째 수준은 우리가 어떤 합법적인 것조차도 유익하지 않고, 교훈적이지 않으며 우리를 지배할 수 있기 때문에 피하는 더 높은 수준이다. 합법적인 활동을 포함하여 수행하는 모든 작업에 이 테스트를 적용해야 한다. 예수님과 교제하면서 너희는 그것들을 할 수 있는지 자문해 보라. 그래야만 너희는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단지 좋은 인간이 될 것이지만, 신성한 생명은 없을 것이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다. 다음은 너희가 살 수 있는 세 가지 수준이다:
영적(Spiritual): 유익하고 교훈적인 일만 하는 것.
혼적(Soulish): 합법적인 모든 일을 하는 것
육적(Carnal): 불법적인 일까지 하는 것
주님께서 너희가 매일 마주치는 유혹을 통해 감각을 훈련하고, 그 상황이나 유혹에 대한 신성한 반응이 무엇인지, 그리고 인간적이고 혼적인 것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기를 바란다(히 5:14).
주님을 위해 온전히 사는 것
요즘 인도에서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크게 격려하고 계신다. 이 땅에는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며,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나에게 생명을 주셔서 그분을 직접 만나기 전에 그분을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게 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한다.
하나님은 너희 각자의 삶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매일 그 계획을 위해 그분을 찾고, 그분을 위해 사는 특권과 영예를 너희에게서 빼앗는 어떤 것도 허용하지 말라. 예수님께서 갈보리에서 우리를 위해 하신 모든 일에 대해 감사를 표현하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 내 아들들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100% 주님을 위해 살아가면서 너희 모두가 가치 있는 삶을 살기를 기도한다.
너희가 성령 충만하여 제자의 길을 걷고, 주님만을 위해 살도록 주님께서 너희를 보호해 주시고, 학업도 도와주시기를 날마다 기도한다. 올해 너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해왔던 것보다 주님을 더 가까이에서 따를 수 있는 은혜를 주시기를 바란다. 인생은 짧고, 하찮은 일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니다. 다가오는 새해에는,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고 이 땅에서 그분의 증인된 것에 대한 진지함이 너희의 마음을 크게 사로잡기를 바란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만족스럽게 뒤돌아볼 수 있는 한 해가 되길 바란다. 시간은 너무 빨리 지나가서 곧 주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를 창조하신 그분 앞에 서서, 그분께 우리 삶에 대해 설명을 하게 될 것이다. 그날에 너희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큰 기쁨을 누리기를 바란다.
내 인생에서 하찮은 일을 할 시간은 없습니다
우리의 복되신 주인님이 걸으신 길은 이런 길이 아닙니다;
그러나 고된 노동 - 매 시간과 힘을 사용했습니다
항상 그리고 모든 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영원은 가까우며,
그리고 머지 않아 내 육체는 먼지 되어 잔디 아래 누워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내가 감히 내 인생을 낭비하거나 죽을 수 있겠습니까?
항상 그리고 모든 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A.B.심슨)
너희는 사람들이 매우 부끄러울 정도로 부도덕하고 부패한 나라에 살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주변 사회의 이러한 세속적 성향에서 등을 돌리는 데 급진적이거나 전심전력을 다하지 않는 신자들 사이에 살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는 주변의 그리스도인들과 같은 수준으로 가라앉아 그들이 하는 일을 하기 쉽다. 이것이 너희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위험이다. 그러므로 적의 간계를 조심하고 예수님만이 너희의 본이 되게 하라. 오직 예수님께만 시선을 고정시켜라. 예수님과 교제하면서 할 수 없는 일을 주변의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다 하고 있더라도 절대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너희의 삶의 규칙으로 만들어라.
항상 예수님 앞에서 살고, 그분을 바라보라. 이것은 끊임없는 자기 판단의 삶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모든 영적 진보의 길이다. 이것은 너희가 다니는 어떤 교회나 저쪽에서 들을 수 있는 메시지가 아니다. 그래서 너희는 스스로에게 설교자가 되어야 한다. 자기 내면을 바라보는 태도를 취하면 정죄와 낙담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바라보면 이사야와 욥과 요한(밧모섬에서)이 본 것처럼, 자신의 부패한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스스로를 판단할 수 있다.
나는 결코 내 안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나는 예수님만 바라본다 - 그분의 완전한 순수함(나와 같은 시험을 받은 사람으로서), 그분의 사랑과 그분의 겸손을 끊임없이 바라본다. 그것은 항상 나에게 나의 부족한 것을 깨닫게 해준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
하나님은 너희의 삶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우리는 그분이 그 100%를 이루시기를 원한다. 부모로서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고 노력했으며, 우리 자신을 위해 살고자 노력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뿌린 대로 우리 자손이 거둘 줄 믿는다, 이는 하나님이 자기를 영화롭게 하는 자를 영화롭게 하시고 그리고 의인의 자손은 복을 받는다는 하나님의 율법이기 때문이다(잠 20:7 참조).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취업과 결혼에 관해서 적당한 기회에 너희 모두에게 제공하실 것이다. 우리는 정기적으로 너희를 위해 기도한다. 그리고 그 기도는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의 어떤 공로 때문에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기 때문이다 - 오직 그분의 공로로 기도한다.
우리는 너희의 삶을 위한 주님의 완전한 계획이 성취되기를 바란다. 그것은 오직 한 가지에 달려 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너희의 삶에서 구하느냐 안 구하느냐에 달려 있다. 다른 요인에 달려있지 않다. 그것이 내가 지난 35년 동안 증명한 것이다(*참고: 그리고 지금은 57년 동안). 따라서 지속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A'를 받으라. 그러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온 세상은 모든 일에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빌 2:21) 원칙에 따라 살고 있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 모든 나라, 모든 세대가 그 원칙에 따라 살아왔다. 예수님은 그런 세상에 오셔서 한 번도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않고, 항상 아버지 하나님의 이익만 구하는 삶을 사셨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너희가 행하거나 말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나라의 이익에 의해 지배되는 철저한 방식으로 그분을 따르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3장 21절에서, 예수님은 자기가 이기신 것 같이 우리에게 이기라고 하신다. 이것은 그분이 싸워 이겨야 할 것이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 준다. 우리가 유혹과 시험을 받을 때, 성령이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어떻게 이기셨는지 따라서 예수님이 이기신 것처럼 우리가 이길 수 있도록 강해지는 법을 보여주시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실수를 무효로 한다
우리는 너희 모두가 정말 자랑스럽다. 특히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너희의 열망, 너희의 완전한 정직성과 도움과 근면성실이 자랑스럽다. 그것들은 매우 중요한 자질이다.
나는 하나님을 믿으며, 지금까지 너희 모두를 하나님의 뜻에 따르도록 지켜주신 기도의 능력을 믿는다. 너희가 결정하는데 실수가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무효로 하시고 여전히 미래에 너희를 위한 하나님의 온전한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 인생은 짧고 나는 너희의 인생에서 심각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너희가 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과 그분의 의(righteousness)를 첫째 자리에 두기 바란다. 그러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더 좋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는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며 세상의 직업을 추구하면서도 항상 영원한 관점을 유지하려면 하나님의 지혜가 정말로 필요하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라. 그분은 너희의 학업과 세속적인 일에 관심이 많다 -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고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해 직장을 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그분께 우리의 생명을 빚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분은 영원한 죽음에서 우리를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고와 조기 사망에서 우리 모두를 구원하셨기 때문이다.
대학 생활 내내 빚에서 자유로울 수 있도록 하신 그분의 선하심에 대해 주님을 찬양한다. 학부 과정을 마칠 때쯤이면 빚에 눌린 학생들이 너무 많다.
우리의 기대와 우리에게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것과 달리 많은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그러한 일이 일어나도록 허용하시는지 항상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에서 그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 이유를 분명히 알게 될 때, 우리는 주님께 동의하고 "주님, 당신은 모든 것을 잘했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실수를 하지 않으신다. 나는 그것을 확신한다. 경건한 자의 자녀는 기업이 있다. 따라서 너희 모두는 장기적으로 축복을 받을 것이다 - 분명히.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한 것이었다"(고전 2:9).
내가 글을 쓰는 모든 것은, 오직 너희가 주님을 위해 더욱 효과적이기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모든 인위적인 것을 제거하고 항상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러운 기독교 신앙을 가져라. 주님께서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너희를 보호하시고 지켜 주시기를 바란다.
부모에 대한 순종
하나님은 아담에게 단 한 가지 계명을 주셨지만 그는 그것을 불순종했다(창 2, 3장).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오직 한 가지 계명 곧 서로 사랑하라(요 13:34, 35)는 계명을 주셨지만, 대부분이 이에 불순종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자녀에게 한 가지 계명 곧 부모를 공경하라(엡 6:1-3)는 계명을 주셨지만, 대부분의 자녀가 불순종한다.
자녀에게 부모를 공경하도록 가르치는 것은 부모의 의무이다. 자녀는 평생 동안 항상 부모에게 공손하게 말해야 한다. 그리고 자녀들이 집에서 살 때는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해야 한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본보기이다. 그는 30세까지(집에 있는 동안) 마리아에게 순종했고, 그 후에는 가나에서 그녀에게 그분은 더 이상 그녀의 말을 들을 의무가 없으며, 그 후에는 아버지께 직접 말씀드려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마지막 순간에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여전히 그녀를 돌보셨다.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고 순종하는 모든 자녀들은 잘 될 것이다.
너희의 부모로서 우리는 너희에게 하나님을 대표해야 했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이 절실히 필요함을 보았다.
몇 가지 유용한 인용문
최근에 읽은 좋은 인용문은 다음과 같다:
"태초에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통에 관하여: "내가 힘든 여행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듣게 되면, 그 여정의 모든 힘든 순간은 내가 올바른 길을 가고 있음을 상기시켜 줄 뿐이다."
"좋은 소식은 좋은 매너로 전달될 때만 좋게 들립니다."
"롯은 땅(소돔)을 선택하고 모든 것을 잃었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선택하고 모든 것을 영원히 얻었습니다."
진정한 믿음의 표시
갈라디아서 5장 6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상관이 없고, 오직 사랑으로 일하는 믿음뿐이니라"고 했다. 이것은 교리에 대한 우리의 모든 이해가 (그 교리가 '할례'이든, '방언을 말하는 것'이든, '죄를 이기는 것'이든 무엇이든 간에) 가치가 없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만약 그것이 우리 행동에서 사랑으로 일하는 믿음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면 말이다. "믿음"의 한 가지 의미는 "하나님에 대한 무력한 의존"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의 끝에 이르렀을 때이다. 그런 다음 그 믿음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또 다른 표시는 우리 자신의 이성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과는 반대로 그분이 명하신 것이 항상 우리에게 최선임을 믿는 것이다.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고, 마음을 순결하게 하고, 항상 겸손하고,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선으로 악을 이기고,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 아래에서 자신을 낮추도록 부름을 받았다. 하나님의 능하신 손은 하나님이 주권 안에서 사람과 환경으로 우리를 짓누르도록 준비하셨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면 우리가 자신을 낮추고 자신을 주장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우리를 이용할까 궁금해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생각하시고 우리와 관련된 모든 것을 지켜보고 계신다"(벧전 5:6,7 - living). 그분은 우리가 능력 이상으로 시험 받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배은망덕하고 우리에게 사악한 사람들을 사랑한다면(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사람들이 우리를 이용할까 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또한 나에게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을 잊어버리는 것에 대해 신경 쓰지 말고, 거기에도 하나님의 주권을 위한 여지를 남겨 두라고 가르쳐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의 망각을 사용하여 적절한 때에 요셉을 왕좌에 오르게 하셨듯이(창 40:23; 41:1), 가장 높은 목적을 위해 훈련되지 않은 행동을 사용하는 방법을 가지고 계시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은 고의적인 죄일 뿐이다. 다른 모든 것은 그분이 눈감아주시고, 심지어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신다.
자아에 대한 죽음과 그리스도의 몸 만들기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으면 반드시 그분과 함께 살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이 "예수의 죽음"에 동의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상황에서 우리의 자기의지(우리 자신의 쾌락, 명예, 특권 등을 구함)에 죽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대가로 주실 신성한 생명이 우리가 죽음에 이르게 하는 썩은 아담의 생명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것을 전적으로 믿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 생명은 우리 모두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생명보다 확실히 훨씬 뛰어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님의 생명을 주시기 전에, 우리는 그 아담의 생명을 죽음에 이르기까지 기꺼이 포기해야 한다(딤후 2:11, 고후 4:10). 예를 들어, 우리가 구걸하는 깡통에 있는 몇 개의 동전을 하나님이 주신 백만 루피로 바꾸는 것과 같다. 어리석은 사람만이 그러한 교환을 거부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런 바보들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땅의 삶을 끝내기 전에, 영적으로 부자(신성한 본성으로)가 되기 위해 지상에서 직면한 유혹을 사용할 수 있었을 때, 얼마 안 되는 동전(썩은 아담의 삶)에 집착한 채 삶을 마감한다. 성경이 우리의 정욕을 속이는 것이라고 부르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엡 4:22). 왜냐하면 그것들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고 속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십자가의 길(자아에 대한 죽음)을 우리가 삶의 끝까지 걸어가야 할 길로 붙잡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울 수 없다. 이것은 추가 선택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데 핵심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표 - 그리스도를 닮는 것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를 예수님처럼 만드는 것이다. 다음은 이와 관련하여 세 가지 중요한 구절이다:
(a) 로마서 8:28,29: 우리 아버지께서는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이 외적으로 합력하게 하신다.
(b) 고린도후서 3:18: 성령은 우리 안에 충만하여 이 목적을 향하여 인도하신다.
(c) 요한일서 3:2,3: 그리스도의 재림을 바라는 모든 사람은 이 목표를 위해 일할 것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두 가지 표시는 비록 작은 것이라도 잘못을 범하면 꾸짖으시고 훈계하신다는 것이다(히 12:5-8, 계 3:19). 그것은 그분이 우리를 그분의 아들로 대하신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리고 우리가 같은 목표를 향해 진지하게 고민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님처럼 만드는 목표를 향해 꿋꿋이 일하신다.
하나님은 우리 삶에 대한 계획을 갖고 계신다. 그것은 우리가 전심으로 그분을 구할 때에만 성취될 수 있다. 우리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하시지 않는다(이와 관련하여 예레미야 29:11-13을 읽으라). 하나님은 자기를 간절히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이시다(히 11:6 - KJV). 그러므로 너희는 지금부터, 즉 젊었을 때부터 부지런히 그를 찾아야 한다.
죽음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가는 관문이다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우리는 떡을 뗄 때 주의 죽으심을 기억하라고 들었다. 예수님은 오셔서 "죽음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고후 4:10 참조)이라는 가르침을 통해 자신의 삶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모든 부분을 묵상하면서 그 죽음에 참여하고(떡을 떼어 먹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좋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한 측면은 그가 결코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십자가에서 비난을 받았다는 것이다("나는 한 번도 하지 않은 것에 대해 벌을 받고 내가 결코 훔치지 않은 것을 회복해야 합니다" - 시편 68:4 - Living). 이것은 아담이 한 일과 정반대이다 - 아담은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책임을 지려 하지 않았다. 그는 아내를 탓했다(창 3:12). 이것은 아담의 자녀들과 하나님의 자녀들이 걸어가는 완전히 다른 두 방식이다.
아담의 자녀들은 그들의 아버지처럼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너희는 스스로를 의롭다 하는 자들이니라"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셨다(눅 16:15). 아담은 자신의 부족함이나 자신의 죄를 볼 수 없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죄만 볼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탓하면서 자신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하는 것은, 그는 실제로 참소자인 사탄과 교제하고 있는 것이다.
죽어가는 도둑이 구원받은 것은, 단지 그가 "주님,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라고 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 말을 하기 전에 자신의 죄에 대해 책임을 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데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 그분은 그 모든 것을 혼자서 할 수 있다! 그분은 우리가 우리 자신만을 판단하기를 원하신다. 그런 신자들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 될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유다 민족에게 그들이 북이스라엘 왕국의 실패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했다고 말씀하셨다(렘 3:6-8). 그리고 이스라엘이 유다보다 낫다고 하셨다. 죽은 교단에서 나온 많은 기독교 단체는 하나님께서 죽은 교단에 행하셨던 것으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교단들보다 더 바리새인이고 죽은 것으로 끝났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직 한 가지만 하라고 부르신다. "네 자신의 죄악을 인정하라"(렘 3:13).
진정한 행복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잘못된 방법으로 그것을 추구하고 있다. 그들은 행복이 불법적인 성적인 쾌락이나 많은 돈, 명성과 명예, 지위와 권력 등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모든 것에는 어느 정도의 관능적 흥분이 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 행복은 오래 가지 않는다.
하나님은 또한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그분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도다"(마 5:8 - Living)라고 말씀하신다. 거룩함을 통해서만 우리는 참으로 행복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너희는 거룩하기 때문에 너희가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주변 세상에 보여주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금하신 죄악이 너희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우리는 결혼이나 직업과 같은 정당한 일을 추구해도 행복을 찾지 못한다. 우리는 이것들을 가질 수 있지만 그것들을 통해 행복해질 수는 없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만 행복할 수 있다. 그래야만 우리는 복음의 진리에 대한 효과적인 증인이 될 수 있다.
마음이 더러우면 참으로 행복할 수 없다. 은밀한 죄와 남에 대한 그릇된 태도는 하나님께서 "네 얼굴이 왜 좋지 않느냐?"고 물으신 가인처럼 우리를 슬픈 얼굴로 만드는 길이다(창4:6). 하나님은 가인에게 직면한 위험에 대해 경고하셨다. 죄는 그의 마음의 문에 웅크리고 있으면서 그를 삼키려고 기다리고 있었고 하나님은 그에게 그것을 지배하라고 말씀하셨다. 죄는 항상 우리의 매우 가까이에 있다. 이것을 항상 깨닫는 자는 복이 있나니 - 저희가 시험의 때에 빈틈없이 경계하리로다. 자기 육신(flesh)의 연약함을 깨닫고 끊임없이 하나님께 부르짖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축복은 교제를 이끈다
갈보리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뿐만 아니라,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는지 알려준다. 우리는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첫 번째 진리만이 아니라 이 두 가지 진리를 모두 보아야 한다.
아담은 적어도 하나님께서 그를 대면하셨을 때 하나님께 대답했다.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께 대답할 생각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앞을 떠나서 바로 나가서 동생을 죽였다! 하나님이 다시 그와 대면했을 때, 그는 동생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하나님께 거짓말을 하는 뻔뻔함이 있었다. 그러자 하나님은 가인을 저주하셨다.
아담이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가인이 저주를 받았다. 창세기 3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땅을 저주하셨지만 아담은 저주하지 않았다는 것을 읽는다. 가인은 하나님의 경고를 멸시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최초의 사람이었다. 저주는 가인이 땅에서 부랑자요 방랑자요 떠돌이가 되리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많은 사람들의 상태이다. 그들은 누구와도 또는 어떤 교회에서나 교제하지 않는다. 그들은 방랑자이며 떠돌이이며, 어떤 교제의 일원이 되지도 않고, 방문자로서 이 교회에서 다른 교회로 떠돌아다닌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실 때 우리는 교제를 얻는다. "하나님은 외로운 자들을 가족으로 삼으신다"(시 68:6).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방랑자가 된다.
세상 제도로부터의 구원
예수님은 죄뿐 아니라 이 세상 제도에서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사탄은 이 세상의 통치자이다. 그는 패션, 엔터테인먼트(오락), 교육 시스템 및 우리가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많은 다른 겉보기에 중립적인 것들 뒤에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좋은 기독교 음악을 들으면서 모든 여가 시간을 보낸다면, 그것은 사탄이 우리로 하여금 때때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데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하게 방해하는 방법일 수 있다. 그러면 좋은 것은(The good) 최상의 것의(The best) 적이 된다!
주님은 우리를 이 세상에서 데리고 나가지 않으신다. 요한복음 17장 15절에서 그분은 제자들을 세상에서 데리고 가시는 것이 아니라, 악으로부터 그들을 지켜 주시기를 아버지께 기도하셨다. 우리가 거룩하도록 훈련 받을 수 있는 곳은 오직 세상뿐이다. 선박의 방수 테스트는 마른 부두에서가 아니라 바다 한가운데에서 이루어진다!
예수님은 노아와 롯의 시대에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짓고 심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 등 모든 정당한 행위에 몰두했다고 말씀하셨다(눅 17:26-28). 우리는 이러한 "세상의 염려"에 너무 몰두하여 하나님을 위한 시간이 없다. 그것이 마지막 날의 위험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가 재정적으로 풍족하고 호화롭게 살기 시작하면, 쉽게 하나님에게서 멀어질 수 있다. 성경은 "검소한 경건은 진정한 영적 이익의 수단이다"라고 말한다(딤전 6:6 - 의역).
(딤전6:6) 자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경건은 큰 이득을 줍니다.
구원의 날은 지금이다. 우리는 하나님 자신이 아닌 다른 것에 몰두한 것을 회개해야 한다.
외눈 박이 교단
예수께서 두 맹인에게 예수님이 고치실 것을 믿느냐고 그들에게 물으셨을 때, 그들 중 한 사람이 한 눈만 보게 될 것을 믿는다고 대답했다면, 그것이 그가 고침 받을 전부였다. "너의 믿음대로"라는 원칙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마 9:29). 그러면 그는 "외눈 박이 교단"을 시작하고 두 눈을 뜨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이단자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한쪽 눈을 떴다는 뜻 1. 죄 사함을 받는 것 2.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게 됨 3.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심을 믿음 4. "생명"을 얻게 됨 5. 하나님의 축복을 구하는 것 6. 한 몸(지체) 안에서 그리스도인 개인의 삶을 사는 것 |
두 눈을 떴다는 뜻 1. 죄 사함을 받고 또한 죄에 대하여 이기는 것 2.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고 또한 죄에 빠지지 않게 하심 3.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심을 믿고 또한 나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믿음을 가지는 것 4. "생명"을 얻게 되고 또한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됨 5. 또한 하나님의 인정도 구하는 것 6. 한 몸 안에서 다른 사람과 교제하는 삶 |
위험 없이는 이익을 얻을 수 없음
달란트 받은 세 사람의 비유(마 25:14-30)를 보면, 영원한 세상을 위해 최대한의 수익을 산출할 수 있는 지혜로운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투자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은행 정기예금은 약 11년(이율 7%)이면 100% 수익을 낼 수 있다. 한 달란트 가진 사람은 심지어 연간 이자를 받지도 못했다. 그러나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가진 사람들은 아주 짧은 시간에 100% 이익을 냈다. 따라서 그들은 약간의 위험을 감수했을 것이다. "이익"의 한 가지 정의는 "위험을 감수한 것에 대한 보상"이다. 안전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거의 수익을 얻지 못한다.
베드로와 마태는 주님을 섬기기 위해 직장을 버렸을 때,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위험을 무릅썼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부르지 않으셨다면, 그렇게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을 것이다. 많은 어리석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했다. 바로 사람의 부름이나 희생의 부름에 감동되어 말이다. 부를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뿐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사람들을 부르셨을 때, 그들은 즉시 순종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엄청난 결실을 맺었다.
원칙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라고 부르시면 즉시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말이다. 하나님을 시험하거나 믿음을 과시하려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면 안 된다. 그러나 주님께서 물 위를 걸으라고 하시면 재빨리 배에서 뛰어내려야 한다.
사무실에서 진리를 옹호하고 양심을 깨끗하게 지키기 위해, 직업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주님의 약속대로(10,000%) 수익률은 백 배이다.
친구의 더러운 농담이나 하나님의 기준을 낮추는 것에 타협하거나 웃지 않기 때문에 친구에게 거절당하는 것은 너희를 인기가 없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위험은 큰 보상을 가져다 준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도 위험이 따른다. 그들은 감사할 줄 모르고 심지어 너희에게 등을 돌릴 수도 있다. 그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짊어지신 위험이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었을 수도 있다. 그런 다음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나타내지 않기로 결정할 수 있다. 그건 어리석은 일이다. 배은망덕하거나 사악한 사람들과 나쁜 경험을 했다고 해서 절대로 움츠러들지 마라.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선하게 대하는 것을 전문으로 하신다. 우리가 이 땅에 있는 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끝까지 우리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고 선으로 악을 이기도록 하자. 그러면 우리는 언젠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것을 인색하게 붙잡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가진 것조차 잃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푸는 사람들은 그 과정에서 더 부자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다른 사람에게 물을 주는 사람에게 물을 주기" 때문이다(잠11:24,25 참조). 선과 사랑을 베푸는 길이 복의 길이다(행20:35).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축복할 때, 그것을 간직하고 있으면, 우리는 더 가난해진다. 그러나 그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면, 더 부자가 되고, 그 말씀은 영원히 기억에 남는다.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기 위해 너희의 생명과 은사와 소유물을 사용하여라. 이것이 한 달란트를 가진 사람이 결코 배우지 못한 것이다.
나는 항상 인도에 있는 우리 CFC 교회에서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지 내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나는 단지 그분이 나를 여기 저기로 보내시고 그분이 시키는 대로 말할 수 있도록 내 자신을 내어줄 뿐이다. 문제를 해결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다루는 것은 그분의 일이다. 우리가 주인(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해야 함)이 아니라 종일 때(명령을 받은 것만 행함) 훨씬 쉽다! "하나님은 복되신 만물의 주관자이시다"(딤전 6:15 - J. B. Phillips 번역).
속임수 - 마지막 때의 한 표징
예수님께서 재림과 관련하여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경고하신 것은 조심하지 않으면 미혹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마 24:4). 오늘날 기독교 집단에는 많은 위조품이 있다. 우리는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나 성령이 역사하신다고 주장하는 것을 모두 삼켜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시험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속게 될 것이다. 또한 가정과 국가 사이에 증오와 전쟁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에 증오가 머물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음 속에 약간의 지옥이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의 육신(flesh)에 있는 죄에 점점 더 빛을 받아 깨닫게 되어, 우리는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여 죄를 이길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빛 가운데 걷고 있다는 하나의 분명하고 틀림없는 표시는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무의식적인 죄를 점점 더 많이 발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요한일서 1장 7절의 명백한 가르침이다. "만일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면, 예수의 피가 모든 죄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신다(우리가 점점 더 커지는 하나님의 빛 가운데 행할 때에, 우리 안에서 발견하는 죄로부터)".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 하는 것이다.
마지막 날은 노아의 때와 같을 것이다. 세상에는 사악한 성적 죄와 폭력이 넘쳐날 것이다. 오늘날 세계는 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마지막 날에는 노아와 같은 사람도 있고 노아의 가족과 같은 가족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노아처럼 대담하고, 타협하지 않고, 의롭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리의 신념을 위해 똑바로 서서 굽히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이상하고 심지어 미친 사람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언젠가 우리가 예수님을 볼 때 그것은 모두 가치가 있을 것이다.
바벨론 기독교의 본질은 백성들이 바벨탑을 쌓았을 때 "우리의 이름을 날리자"(창11:4)라는 말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능력과 본성과 은사를 우리와 나누시지만, 그분의 영광은 결코 나누지 않으신다(사 42:8 참조). 하나님께 속한 영광을 만지는 것은 - 타고난 것(아름다움, 지성, 재능, 부 등) 또는 은혜(우리의 영성, 하나님의 진리를 아는 것, 은사)를 우리의 공로로 삼는 것은 매우 큰 죄이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나 자주 하나님의 영광을 건드리기 때문에 이를 끊임없이 회개해야 한다.
교회
하나님이 그의 참된 교회("시온" - 렘 3:14)에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놀라운 축복 중 하나는 "자기 마음에 맞는 목자"(렘 3:15)의 축복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명하신 대로 하나님께서 이 땅에 더 많은 목자들을 일으키시도록 기도해야 한다(마 9:36-38). 너희보다 어린 사람들을 도우려고 한다면, 너희도 그러한 목자가 될 수 있다. 어디를 가든지 자기보다 어린 사람들과 친구가 되어야 하고 그 우정을 사용하여 자연스럽게 주님께로 인도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 마음에 합한 목자가 될 수 있다.
교회는 예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정부)가 어떤 모습일지, 지금 천국이 어떤 모습인지, 바로 지금 이 땅에 있는 축소판이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죽음의 교회에서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모든 것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는 이유이다. 그것이 우리 안에 성령의 생명을 위한 공간을 마련할 수 있도록, 옛 아담의 삶을 깨끗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서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식사하기 위해 입구에서 기다리시며 문을 두드리신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 먹고 마시기를 갈망하신다. 떡을 떼면서, 우리는 항상 그분과 그분의 몸(교회)이 필요함을 증언한다. 그것은 우리의 가치가 아니라 우리의 필요에 대한 고백이다.
바리새주의에 대한 세 가지 해독제가 있다:
1. 외적인 삶보다 내면의 삶에 더 집중하라.
2. 어떤 때에도 절대로 사람을 경멸하거나 얕보지 마라.
3. 예수님께 헌신하라.
만일 너희가 이것을 끊임없이 행한다면, 너희는 결코 바리새인이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 몸을 바치는 것 - 예배의 영적 행위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희에게 부탁한 보배를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키라"(딤후 1:14)고 말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상 여행을 하는 동안 그분을 위해 보존해야 하는 성스러운 보물로 우리의 몸을 주셨다. 우리 몸이 모든 죄에서 깨끗해지고 거룩하게 보존되어 언젠가는 인생의 여정을 마칠 때까지 우리 몸을 매일 그분께 드려야 한다. 예를 들면: 회사가 우리에게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안전하게 운반할 수 있도록 500만 루피를 준 것과 같다. 그러나 우리는 그 중 일부를 낭비했고 나머지는 도중에 잃어버렸다. 이제 우리는 회개하고 실패 가운데서 주님께로 돌아간다. 그분은 어떻게 하시는가? 그분은 우리를 거부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그분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또 다른 500만 루피를 주시면서 그것을 우리의 삶이 끝날 때까지 안전하게 운반하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얼마나 선하신 분인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증거는 세상의 표준보다 훨씬 더 높아야 한다. 심지어 악한 모양으로 보이는 일조차도 하지 말아야 한다. 확신이 서지 않을 때는 반대편에 서있기 것보다는 신중하고 조심하는 것이 낫다.
하나님을 갈망하기
은밀한 곳에서 하나님의 얼굴 앞에 살고 그분을 따르는 너희의 마음에 끊임없는 부르짖음이 있게 하여라. 하나님을 따르는 갈망이 사라지면 기독교는 메마르고 공허한 종교가 된다. 그러므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유지하여라. 그것이 신앙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듯 끊임없이 하나님을 사모해야 한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교육에는 세상이 "실망"이라고 부르는 많은 것들이 포함된다. 그러나 이것들은 우리에게 더 나은 것을 위한 "그분의 약속"이다. 그러한 실망에 직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다른 사람들에게 조언할 수 없을 것이다. 인생 교육에는 실패도 포함된다. 99.9%의 사람들이 실패자인 세상에서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서는 실패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실패의 두 가지 목적은 (1)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는 것(우리를 무너뜨리는 것)과 (2)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갖게 만든다.
영적 전투도 교육의 일부이다. 너희가 일시적인 땅의 학위를 위해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다면, 영원한 하늘 나라의 것을 위해 기꺼이 싸워야 하는 것은 얼마나 더 힘든 일이겠는가? 시간은 짧고 세월은 악하다. 우리는 지상에서 추구하는 모든 일에서 영원한 관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판단과 항상 주님과의 순수한 내적 동행으로 살아가라.
주님께서 너희의 진학과 결혼 등과 같은 훨씬 더 중요한 문제들에서도 너희를 항상 하나님의 뜻의 중심에 두시기를 바란다.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한 가지 기본 원칙은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절대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비와 율법주의
나는 어제 교회 모임에서 값비싼 향유 한 병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는 창녀에 대해 이야기했다(눅 7:37,38). 그녀는 분명히 매춘부로 번 돈으로 그 향수를 샀다. 예수님은 창녀의 소득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율법에 금지되어 있음을 아셨다(신 23:18). 그러나 그분은 율법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녀의 선물을 기쁘게 받으셨다. 그분은 그녀의 마음을 보셨다.
하나님께서 너희의 행동보다 더 많이 보시는 것은 너희의 마음이다. 그것은 바리새인들이(1세기와 20세기 모두) 진실한 신자를 비판하는 방식으로 드러나고 나타나는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 이다. 바리새인들은 매춘부에게서 그런 선물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주님의 마음은 분명히 그들의 마음보다 훨씬 더 넓었다!
우리가 Frederick Faber(프레드릭 파버)의 찬송가에서 노래하듯이:
하나님의 자비에는 바다의 광활함과 같은 광활함이 있습니다;
그분의 공의에는 자유 이상의 친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마음의 분량보다 넓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영원하신 분의 마음은 가장 놀랍도록 친절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우리 자신의 잘못된 한계로 너무 좁게 만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이 소유하지 않으실 열심으로 그분의 엄격함을 확대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돈과 성을 추구하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주님의 죽음을 선포"하는 것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두 가지 사실을 모두 받아들이고 그 현실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려고 할 때 비로소 우리가 '빵과 잔'에 의미 있게 참여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죄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산상수훈을 자세히 읽어보면 남에게 화를 내는 자와 여자에게 음욕을 품은 자는 모두 지옥불의 위험에 처해 있다고 예수님께서 가르치셨음을 알 수 있다. 여자에게 음욕을 품는 죄는 너무 심각해서 예수님은 소경이 되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셨다. 물론 우리가 이 죄를 회개하고 자백하면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을 받는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이러한 죄의 심각성을 깨닫는 것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이 죄들이 우리를 지옥으로 데려갈 만큼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기 전에는 결코 이 죄들에 대해 승리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런 죄들 때문에 우리 구주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돌아가셨다. 그런 죄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너희가 여자에게 음욕을 품은 죄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너희가 영원히 극복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기도한다. 이 골리앗을 죽이면, 다른 블레셋 사람들이 도망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삼상 17:51 참조).
나는 또한 돈을 너희의 신으로 만들지 않기를 기도한다. 그것은 결국 너희를 파멸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세상의 거의 모든 사람들은 돈과 성과 명예를 미친 듯이 추구하고 있다. 주님의 빛이 되려면, 너희 스스로 이러한 것을 추구하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미래에 대한 모든 생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도록 조심하여라. 너희의 첫 번째 소명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부자나 위대해지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의 부와 명예를 너희에게 얼마나 위임해주실지는 하나님께 맡겨라. 그분이 그것을 결정하신다 - 그리고 그것은 그분의 자녀들 각자마다 다르다. 하나님의 자녀 중 일부는 부유하고 존귀한 반면, 다른 일부는 가난하고 불명예를 안고 있다.
항상 영원의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라.
아버지는 항상 예수님의 기도를 들으셨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죄가 그의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항상 조심하셨기 때문이다.
죄에 대한 유혹의 진행은 다음과 같다:
1. 유혹은 마음속에 생각이 번뜩 떠오르면서 시작된다. (거기서 마음으로 내려가려고 한다).
2. 유혹이 마음으로 내려간다. (그러면 죄가 된다) (여기서부터 죄는 몸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려고 한다).
3. 죄는 혀, 눈, 손 등을 통해 자신을 표현한다. (다른 사람이 볼 수 있을 때이다).
예수님은 유혹을 받으셨다. 그러나 그분은 항상 2단계를 막으셨다. 그래서 그분은 결코 죄를 짓지 않으셨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와 간구의 영을 부어 주시어 우리가 상처를 입힌 예수님을 바라보며 애통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유혹이 2단계로 진행되어 죄가 되도록 내버려둠으로써 과거에 그분에게 상처를 입힌 것을 슬퍼한다(슥 12:10). 주께서 자신의 죄로 인해 애통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위로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바란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다음은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에 대한 몇 가지 참고 사항이다(참고용).
칼빈주의자(스위스 기독교인인 존 칼빈의 추종자 - 1509-1564년)는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강조한다. 그들의 다섯 가지 요점은 T-U-L-I-P라는 약어로 요약된다:
(1)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사람이 회개할 수 없으므로 누구에게도 회개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베드로와 바울은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2) 무조건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그들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그분의 자녀를 택하시되, 인간 편에서는 어떠한 조건도 성취해야 하는 것이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누구도 지옥에 간다고 비난 받을 수 없다!!
(3) 제한된 속죄(Limited atonement):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직 '택하신 자들'만을 위하여 죽으셨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요한일서 2장 2절은 예수님께서 "온 세상을 위하여" 죽으셨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4) 불가항력적인 은혜(Irresistible grace): 그들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은혜를 거스르지 못하고 반드시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 이것은 인간을 로봇으로 만들고 신약에서 선택의 자유에 대해 가르치는 모든 것과 모순된다.
(5) 성도의 인내(Perseverance of the saints): 그들은 한 번 구원을 받은 사람은, 결코 잃어버릴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히브리서 3장 14절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참예하는 자가 되려면 끝까지 굳게 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3장 5절에서, 예수님은 믿는 자들에게 이기지 못하면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질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위의 가르침을 극단적으로 믿는 사람들을 극단적-칼빈주의자라고 한다. 보시다시피, 나는 이러한 점들 중 어느 것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알미니안(네덜란드 기독교인 야곱 아르미니우스의 추종자 - 1560-1609)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고 - 위의 5가지 사항을 모두 반박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을 가르치지만,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이 가르치는 그 정도의 극단은 아니다. 그러한 터무니없는 극단으로 치닫게 되면 진실은 오류가 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는가 아니면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하는가? 정답은 '둘 다'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미리 아심을 따라 우리를 선택하셨다(벧전 1:1,2).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당신을 선택할 모든 사람을 알고 계셨고 그분은 그들을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찰스 시므온(18세기 영국의 경건한 기독교인)은 이 문제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진리는 어느 한쪽 극단에도, 다른 극단에도 있지 않습니다. 중앙에 있는 것은 더 아닙니다! 진실은 동시에 양 극단에서 서로를 지탱합니다." 이것은 진리를 표현하는 아름다운 방법이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주신 자유의지를 믿는다. 그래서 나는 설교할 때, 사람들에게 자신의 자유 의지를 하나님께 맡기라고 도전한다. 그러나 나는 기도할 때 절대 주권을 가진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며 - 그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없음을 믿는다. 하나님은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참으로 우리를 선택하셨다. 그것이 우리를 겸손하게 하는 사실이다. 우리는 또한 "끝까지 견디는 자만이 구원을 얻으리라"(마태복음 24:13)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다. 우리는 우리에 대한 그분의 주권적인 선택과 우리의 선택의 자유에 대한 신비를 풀 필요가 없다. 우리는 단지 그것을 믿는다.
존 웨슬리는 주로 알미니안주의자였으나, 반면에 그의 동시대의 조지 화이트필드는 주로 칼빈주의자였다. 그들은 함께 일한 적이 없지만 여전히 서로를 존중했다. 그들은 둘 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고 18세기 영국에 부흥을 가져왔고, 그들 각자는 야외 집회에서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설교했다. 조지 화이트필드가 사망했을 때, 존 웨슬리는 그의 장례식에서 연설했다(죽기 전 화이트필드의 구체적인 요청에 따라). 장례식이 끝난 후, 웨슬리의 추종자 중 한 사람이 웨슬리에게 천국에서 화이트필드를 만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웨슬리는 "아니오"라고 말했고, 그것은 "조지 화이크필드는 하나님의 영광의 궁창에서 매우 밝은 별이었고 보좌 가까이에 서게 될 것이므로, 나 같은 자, 가장 작은 자보다 못한 자는 그를 결코 엿볼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한 이유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겸손이다. 존 웨슬리는 하나님께서 심판석에서 우리의 교리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삶의 방식을 살피실 것임을 알고 있었다.
분별력이 자라남
나는 주님께서 너희에게 많은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소위 "부흥"에서 무엇이 참되고 피상적인지 분별력을 주시는 것을 보게 되어 기쁘다. 기독교 설교와 기독교 모임에서 심리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항상 분별해야 한다. 선해 보이는 것을 맹목적으로 따라가서는 안 된다. 우리는 "모든 것을 주의 깊게 살피고 선한 것, 즉 하나님 자신에게서 나온 것을 굳게 붙잡으라"(살전 5:21)는 명령을 받았다.
우리는 지난 월요일 형제 모임에서 분별력을 키워야 할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의 "사랑이 분별력 안에서 자라게 하옵소서"(빌 1:9)라고 기도했다. 오늘날 "환상 중에 천사를 보았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은 "사탄이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고후11:14)!!"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이 실제로 본 것은 천사인 척하는 마귀였을 수도 있다. 그것은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니다!! 깨어 있어야 미혹되지 않는다. 항상 깨어 있지 않으면 죄에 빠지기 쉽다.
많은 소녀들이 추파를 던진다. 그러한 소녀들을 빨리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함정에 빠지게 될 것이다. 영적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분별해야 한다. 영적이지 않은 그리스도인들과 교제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다 보면 너희의 영적인 삶이 점점 나빠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은 방갈로르 우리 교회에 있을 때 정기적으로 받던 강력한 권면을 그곳에서 받지 못하기 때문에 특별히 주의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성경에서 직접 성령의 권면을 받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나는 성령의 내적 증거에 따라 사는 법을 배우는 사람들이 이성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빠지는 많은 재난으로부터 자신을 구하는 것을 발견했다. 주님께서 너희를 끝까지 지켜주시고, 그분의 왕국에서 너희를 그분의 유용한 종으로 삼으시길 바란다.
너희의 장자권을 소중히 여겨라
할 일이 많지 않거나 지루할 때 매우 조심하여라. 그때 성적인 유혹을 강하게 느낀다. 그러면 너희는 나가서 다른 신자들과 교제를 하거나 산책을 해야 한다.
절대적으로 필수적이고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절대로 여자와 단둘이 차에 동승하지 마라. 아주 짧은 이동일지라도 말이다. 이와 같은 몇 가지 예방 조치만으로도 평생 후회하지 않을 수 있다.
예수님은 사탄에게 성전 꼭대기에 올라가서 뛰어내리면 천사들이 예수님을 보호해 줄 것을 믿는 시험을 받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어리석게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으셨다(마 4:7). 너희 또한 어리석게도 "여성 - 절벽"의 가장자리에 가까이 가서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 된다. 너희가 여자와 어리석게 돌아다닌다면, 하나님의 천사들이 너희를 떨어지지 않도록 지켜줄 것이라고 상상하지 마라! 이 "여성 - 절벽"의 가장자리에서 떨어지는 많은 사람들은 고의가 아니라 무심결에 떨어진다. 따라서 가장 좋은 방법은 그러한 여성 - 절벽의 가장자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생각해 보아라. 그러면 주님께서 내 말을 이해하게 하실 것이다.
모든 젊은이들은 에서의 예를 많이 묵상해야 한다. 그가 잃은 장자권, 즉 메시아의 조상이 되는 특권을 생각해 보아라. 그리고 그는 그 곳에서 무엇을 얻었는가? 죽 한 그릇! 그가 나중에 자신의 삶의 "대차대조표"의 최종 결과를(그가 얻은 것과 잃은 것) 명확하게 보았을 때, 우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이것들은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다. 모든 일에 영적 가치를 우선시하여라. 세상과 그 모든 명예와 쾌락과 부와 지식이 사라질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남으리라(요일 2:17).
요즘 사탄이 젊은이들에게 제공하는 죽 그릇이 많이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잃을 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모든 것을 거절할 것이다. 너희에게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성취해야 할 특정한 과업이 있다. 그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사탄의 간계에 쉽게 넘어갈 것이다.
히브리서 12장 17절에 보면, "그 후에"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원했지만 얻지 못했다고 한다. 우리의 모든 삶에는 "그 후에"가 있을 것이다. 그 "그 후에"에서, 올바른 결정을 내린 것에 대한 기쁨이 있고, 후회가 없도록 해라.
안식과 겸손
마태복음 11장 28-30절에서, 예수님은 안식과 짐에 대해 말씀하셨다. 거기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바꾸어 말하면, 그분은 우리에게 세상의 모든 짐을 내려놓고 쉬고 우리 마음에 그분의 짐(멍에)을 지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모든 짐을 그분께 맡기기 전까지는, 우리는 주님의 짐을 질 수 없다. ("너희의 짐을 주님께 맡기고 너희의 모든 염려를 다 주님께 맡기라 - 시55:22;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염려하지 마라. 만약 무언가에 대해 염려하고 싶다면,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에 대해 염려하라" - 마 6:31, 33 - 의역).
마음이 세상 일에 대한 염려와 근심으로 가득 차 있으면 주님께 무익하다. 의심의 여지 없이, 너희는 지상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야 하지만, 그것들 중 어떤 것에 대해서도 걱정하지 마라.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들만 마음에 염려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이 땅의 사람들과 다른 점이다. 지상에서 하는 시험(성적)의 결과도 영원한 가치가 없다. 물론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결과에 대해 걱정해서는 안 된다.
너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데 100% 점수를 추구하면, 영원토록 으뜸이 될 것이다. 그것이 내가 오래 전에 선택한 것이다.
스바냐 3장 17절을 의역해서 말하면, 일어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은 사랑 안에서 잠잠히 너를 위하여 계획하고 계신다". 그리고 주님은 또한 우리에게 "내가 하는 것을 너희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후에 알게 될 것이다"(요 13:7)라고 상기시켜 주신다.
나는 너희의 부모님이 여러 해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의 삶에 뿌렸기 때문에, 앞으로 너희의 삶에서 풍성한 수확을 보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하나님은 가장 좋은 것으로 보상해 주실 것이다 - 영적으로 먼저, 그리고 지상의 것들에 필요한 모든 것으로도 보상해 주실 것이다. 그래서 나는 너희 네 명들 중 누구에게도 염려가 없다.
마지막으로, (내가 어디에서나 모든 사람에게 권하는 것처럼) 겸손을 추구하고 자신에 대한 낮은 생각에 머물도록 다시 한 번 권면한다. 그것은 낮은 자존감이나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너희의 가치나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신 은사와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낮은 자존감이 설 자리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을 때에만, 하나님이 너희의 삶의 모든 것이 되실 수 있다. 너희를 아는 다른 사람들은 너희에게서 보는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만을 행하기 위해 자신의 선택을 포기하는 것을 포함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신 모든 것에 대해 항상 영광을 돌리고 그분이 너희에게 주신 모든 것을 그분의 영광만을 위해 사용하기로 결심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인간의 잘못이나 결점이 무엇이든 결코, 결코 무시하거나 놀리지 마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풍성한 은혜를 주신다. 그리고 그들의 영적 진보는 경이로울 것이다. 너희의 모든 날에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겸손하게 행하기를 바란다.
시험에 대한 하나님의 도움
우리는 주님께서 너희의 기말고사를 위해 너희가 타고난 것 이상의 지성을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다. 너희가 학교에서 시험 공부를 할 때, 내가 너희에게 주장했던 구절을 기억하여라. 다니엘 1:17,
"하나님은 네명의 젊은이에게 배울 수 있는 큰 능력을 주셨고, 그들은 곧 당시의 모든 문학과 과학을 통달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주장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약속을 경험할 수 없다. "누구든지 지혜(또는 지능)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는 하나님께 구하고 오직 믿음으로 구하라"(약 1:5,6)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은 자식에게 줄 줄 알거니와,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 그러므로 크고 작은 모든 것에 대한 아버지의 약속을 주장하여라.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
우리는 방갈로르에서 지금까지 개최한 연합 집회 중 최고로 훌륭한 연합 집회를 막 마쳤다. 다음과 같은 주제에 대한 메시지가 있었다:
(a)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은 삶으로 우리가 전파하는 교리를 장식해야 한다.
(b)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태초부터 가지셨던 신성한 생명과 교제를 항상 강조해야 하며 주변적인 진리에 사로잡히지 않아야 한다(요일 1:3).
(c) 우리가 날마다 자아를 죽는데 스스로 내어준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처럼, 우리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것을 믿어야 한다.
(d) 젊은이들이 이 악한 시대에 하나님을 위해 보존되기 위해서는 성적 욕망과 영적 교만의 '골리앗'을 이겨야 한다. 세상에는 애굽의 개구리처럼 더러운 영이 범람한다(계 16:13). 그러나 우리의 침실이나 마음에는 개구리가 없어야 한다.
(e) 돈은 사람들을 매우 교묘하게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엄청난 힘이 있다. 우리가 돈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을 미워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돈을 붙들면, 하나님을 멸시하게 된다(눅 16:13). 부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찔러 여러 가지 고난을 당할 것이다 - 부자나 부자가 된 사람들이 아니라 부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돈의 힘을 두려워해야 한다.
(f) 하나님을 만족시키기 위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하신 유일한 일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요 6:28, 29). 즉, 모든 상황과 모든 순간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유일한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며, 그분은 세상과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처리하실 수 있으며,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순간에 모든 것을 도와주실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적 논리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일하시기에 항상 충분히 선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10,000년 후에도 결코 충분히 선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분을 믿는 자들에게 약속을 주신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비록 그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와 같이 거룩하다 할지라도 저주를 받을 것이다(갈 1:8, 9).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히 믿기만 하면 성령을 받을 수 있고 다른 모든 영적인 축복도 받을 수 있다.
(g) 하나님은 창세 전부터 우리가 선악을 행하기 전에 우리를 택하사(롬9:11),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령의 모든 축복으로 복을 주시기로 작정하셨다. 그러므로 그분은 지금 우리에 대한 마음을 바꾸지 않으실 것이다.
방갈로르에서 열리는 우리의 멋진 연합 집회에 참석하지 못해서 너희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자주 생각한다. 나는 너희가 집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여러 번 생각했다. 그러나 주님은 너희가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신 분이다. 그래서 그곳에서도 너희의 몫을 받기를 기도한다. 비록 엘닷과 메닷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모이는 장막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그분의 영을 그들에게 보내신 것과 같이, 너희가 지리적으로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어도 주님을 찾으면 너희의 몫을 그곳에서 주실 수 있다(민 11:24-30).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너희를 축복하시고 생명과 영적인 신선함으로 항상 지켜주시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너의 삶의 모든 세부 사항을 계획하셨다
우리가 천국에 가면 이 땅의 길을 여행할 때, 우리를 보호해 준 천사들을 보게 될 것이다. 마지막 날에 우리의 삶 전체가 재생된 비디오테이프를 볼 때, 수천 명의 천사들이 우리를 보호해 주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고 감사하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는 도로에서 겪었던 몇 가지 "사고가 날 뻔한"것만 알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날에 우리는 우리가 구원받은 그러한 "모면한 것들"이 더 많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감사하라.
모든 것이 우리의 최고의 것을 위해 협력한다. 몇 년 전 사고를 당한 후, 나는 "주님, 주님께서 갈보리에서 나를 위해 하신 일에 대해 아직 완전히 감사를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을 조금만 더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런 다음 나는 이 구절이 생각났다: "우리의 삶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에 대해 끊임없이 감사하는 표현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일에 목적이 있다. 야곱에 대해 "믿음으로 그가 지팡이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경배하고(그것은 실제로 목발이었다, 하나님이 그의 허벅지를 탈골 시켰기 때문에, 더 이상 그것 없이는 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야곱이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였더라"(히 11:21). 그 지팡이(목발)는 매우 자급자족하는 야곱에게 그가 모든 것을 무력하게 하나님께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끊임없이 상기시켜주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스라엘, 곧 하나님과 사람과 더불어 권세를 가진 하나님의 왕자가 되었다. 그가 다른 사람들을 축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 약한 상태에 이르렀을 때였다(그 구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나는 너희들도 그것에 대해 알기를 기도한다 - 너희의 인간적인 힘이 부서지는 것에 대해, 그래서 너희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여, 너희가 다른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축복이 되기를 기도한다.
하나님은 너희의 삶을 모든 세부 사항까지 완벽하게 계획하셨다. 그분께서는 사탄이 예수님을 공격하도록 허용하신 것처럼 사탄이 너희도 공격하도록 허용하신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분의 영을 순결하게 지키셨고, 너희도 영을 순결하게 지킬 수 있다. "하나님은 너에게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을 알고 계신다"(욥 23:10 - Living), 심지어 네가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에도; 그리고 그분은 모든 세부 사항도 계획하신다(롬 8:28). 그러니 그 안에서 편안함을 찾아라. "사람의 도움이 헛되다"는 것을 알게 된 상황에서 하나님께만 의지하는 경험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것이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C. T. Studd는 "나는 궁핍한 곳의 호사(luxury; 자주 누릴 수 없는 기쁨 또는 혜택)를 사랑한다. 그래서 그곳에서 하나님이 나를 위해 어떤 기적을 행하실지 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성부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피로 우리를 사셨고, 성령께서 이제 우리를 하나님의 소유로 인치셨음을 깨달을 때 그것은 우리 안에 엄청난 해방을 가져온다(엡 1:1-13).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라고 대답하기를 기다리신 다음 모든 것을 하셨다(엡 2:1-8). 그분은 우리의 허락 없이 우리를 구할 수 없으셨다. 우리는 로봇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음성과 사탄의 음성 구별하기
베드로가 예수님께 십자가의 길을 가지 말라고 한 것은 선한 마음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즉시 그 제안이 사탄의 음성임을 알아차리고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 마음은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한다"(마 16:23)고 말씀하셨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이익에 맞춰져 있을 때에만 우리 마음에 있는 하나님의 음성과 사탄의 음성을 구별할 수 있음을 본다. 우리의 마음이 주로 우리 자신의 이익에 맞춰져 있다면, 사탄의 음성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착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하늘의 관점을 갖는 것은 좋은 것이다 - 심지어 너희가 공부하고, 일하고, 놀 때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해라. 대학에서 공부도 잘하고, 경기장에서도 잘 뛰고, 항상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올림픽 금메달을 잃고도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에릭 리델처럼!! 그리스도인으로서 특정한 기준이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마라. 주님께서 너희가 그렇게 하도록 도와주시기를 바란다.
우리는 너희가 대학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전쟁의 한가운데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너희의 간절한 열망 때문에 너희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우리는 너희를 위해 정기적으로 기도하고 있다. 우리는 주님께서 너희를 타협하게 만들려는 원수의 모든 공격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은혜와 힘을 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다. 주님은 사탄을 대적할 때 항상 너의 편에 계시며 사탄을 이기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유혹을 받을 때 이 땅의 모든 것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는 것을 우리가 증명할 수 있도록 이 땅에 있는 많은 것들을 매력적이게 하셨다. 그리하여 우리는 사탄을 부끄럽게 한다. 창조주는 그의 모든 피조물보다 훨씬 더 위대하고 훨씬 더 놀랍고 훨씬 더 만족감을 주는 분이시다. 이것은 사실이며 이것이 우리가 그것을 믿는 이유이다. 이런 우리의 믿음이 우리가 세상의 매력을 이기게 한다. 우리가 앞이 안 보이는 채 이 믿음으로 살 때, 우리의 감정은 적절한 때에 따라올 것이다. 우리는 감정을 먼저 찾지 말아야 한다.
사탄과의 싸움은 우리의 영에 좋다. 그래야만 우리는 강해질 수 있다. 그리스도의 좋은 군인이 되어라. 주님은 너에게 달려 있다. 우리도 너희가 주님의 깃발을 높이 휘날리며 승리를 거둘 것을 믿고 있다 - 주님의 이름은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가치 있는 삶을 살기
군인들이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조국을 위해 그토록 많은 희생을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기꺼이 모든 것을 (심지어 우리의 삶까지) 희생해야 하는가? 이는 범사에 우리의 삶을 통하여 여호와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사탄이 수치를 당하게 하려 함이다.
나는 너희가 너희의 일에서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기를 바란다. 너희는 하나님께 너희의 공부와 일에 대하여 아이디어를 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너희를 도와주실 것이다. 믿음으로 구하고, 그분이 너희를 위해 어떤 기적을 행하실 수 있는지 보라. 그러한 상황에서 그분을 증명할 때 우리의 믿음이 강해진다.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라. 그분을 공경하는 사람들은 항상 모든 분야에서 최고의 삶을 누리게 된다. 나는 거듭난 이래로, 나는 이 세상을 돌아다니며 모든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그렇게 증명했다:
- "모든 분야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세요.
- 항상 당신의 애정에서 하나님을 첫째 자리에 두십시오.
- 항상 양심을 깨끗하게 유지하십시오.
- 그래야만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러한 문제를 중요시하지 않고, 자신의 재능과 이 세상의 성취로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이것들(재능, 이 세상의 성취) 중 어느 것도 궁극적으로 아무도 만족시킬 수 없다.
요한복음 15장은 놀라운 장이다. 거한다(예수님 안에)는 것은 근심 걱정이나 긴장이 없는 완전한 안식(포도나무 가지처럼)의 모습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을 돌보신다는 믿음의 결과이다. 거기에 수고와 고생은 있을 것이지만, 근심 걱정이나 긴장은 없다. 나무에서 가지까지 수액의 끊임없는 흐름은 성령의 끊임없는 충만의 필요성을 보여준다.
바리새주의와 율법주의
우리는 매우 축복받은 신년 수양회를 가졌다. 주제는 "바리새주의와 율법주의로부터의 자유"였다. 나는 많은 형제자매들이 "만지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들지도 말고..." 등과 같이 힘들게 했던 사소한 규칙과 규정에서 해방되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새해에 두 가지 좋은 습관을 생각했다: (1) 매일 자신을 판단하고 그리고 (2) 매일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기. 이 두 가지가 모든 사람에게 최후의 심판 날을 쉽게 만들어 줄 것이다(약 2:13 참조).
너희가 겪었던 모든 것(그리고 너희가 앞으로 겪을 일)은 실수하고 실패한 세상의 다른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은 100%로 실수하고 실패함)에게 큰 희망이 되도록, 너희에게 사역을 주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설계된 것이다. 너희의 성격, IQ, 성적, 양육 및 교육조차도 모두 하나님의 완전한 계획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찬양하라!
새해를 시작하면서 너희들 모두에게 한 가지 제안하고 싶다.
두 가지를 위해 주님께 구하라: (1) 그것은 네가 오늘날까지 한 번도 죄를 지은 적이 없는 것처럼 실제로 너를 바라보시는 그분의 칭의가 얼마나 강력한지 말씀을 통해 너에게 보여주실 것. (2) 모든 사람의 의견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되는 것.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얼마나 노예가 되어 있는지 모른다. 이 두 가지 일을 하면, 주님의 손에 들린 매우 효과적인 그릇이 될 수 있다. 사탄은 종종 우리가 과거의 실패를 기억하며 굽실거릴 때 우리가 겸손하다고 생각하게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과거의 실패를 생각해야 하는 유일한 시간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가혹하게 굴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이다(벧후 1:9) - 그렇지 않은 경우는 아니다.
이 두 가지 점을 분명히 하면, 너희의 인생은 너희를 억제할 어떤 것도 없이 로켓처럼 날아갈 것이다. 이 문제를 이성적으로나 지적으로 추론하려고 하지 마라.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신뢰하라.
자책과 낙담은 항상 사탄에게서 오는 것이다. 절대 과거에 살면 안 된다. 과거의 실패 그리고 과거의 성공에 대해 생각하지 마라 - 그리고 넘어지면, 즉시 벌떡 일어나서 곧바로 경주를 계속해라. 절대 포기하지 마라.
세 번의 결혼
여기에 우리가 죄와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는 간단한 예가 있다.
첫 번째 결혼: 회심하지 않은 때에, 우리 모두는 남편으로서 옛 사람과 결혼했다. 그는 항상 우리에게 죄를 짓도록 요구하는 악한 남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거듭날 때 그 남편을 죽였다("너희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느니라" - 롬 6:6). 그래서 우리가 그에게서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했다..
두 번째 결혼: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와 결혼하는 대신에, 율법이 그리스도라고 생각하고 그와 결혼했다. 옛 사람과 달리, 율법은 모든 면에서 완벽을 요구하는 완벽한 남편이다(그래서 그의 요구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남편의 요구는 모두 의롭지만, 그는 결코 우리를 돕기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비참하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끊임없는 투쟁의 삶이지만, 너무 오랫동안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 이것이 율법 아래 있는 삶이다. 그리고 이 결혼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없는 것 같다. 율법은 완전하고 결코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이 결혼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셨다. 그분은 아내를 죽인다(우리는 죽는다), 따라서 결혼 생활이 파기된다(롬 7:1-4).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주의와 율법에서 자유롭게 된다.
세 번째 결혼: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내(우리)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와 연합하기를 기쁘게 선택한다(롬 7:4).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풍성한 생명이다. 그리스도도 율법과 같이 완전하시다. 그러나 그분은 기꺼이 돕는 남편이시다. 사실 그분은 일의 99%를 하신다. 그리고 그분은 결코 우리를 강요하지 않으신다. 얼마나 멋진 남편인가!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 그리스도와 네가 같은 멍에를 지고 있는 동역자 관계이다(마 11:29). 이것이 이기는 삶이다.
간음죄(육체적 간음)의 죄는 항상 모든 사람에게 매우 가까이에 웅크리고 있다 -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죄가 너를 정복하기 위해 너의 문 앞에 웅크리고 있느니라. 그러나 너는 그것을 다스릴찌니라"(창 4:7). 따라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1) 하나님을 크게 두려워하는 것(요셉이 그랬던 것처럼 - 창 39:9) 및 (2) 여자와 단둘이 있는 모든 도발적인 상황을 피하는 것(요셉이 그랬던 것처럼) (창 39:10; 고전 6:18; 딤후 2:22)이다. 또한 여자와의 대화가 경솔해지는 부분을 인식하기 위해 주의해야 한다. 그러면 너는 위험에 처한 것이다. 너는 성령께서 너에게 소녀와 대화를 중단하거나 즉시 그녀의 면전에서 떠나라고 말씀하실 때 그 음성을 듣는데 매우 민감해야 한다. 그래야만 많은 대학의 사악한 분위기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이 점을 항상 염두에 두어라. 그러면 평생 후회하지 않고 구원받을 수 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만이 중요한 분이신 삶에서 누릴 수 있는 내적 안식을 보여 주셨다. 하나님은 지금 이 세상의 가치 체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삶을 통해 보여줄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교육과 성, 인간의 사랑과 결혼도 전부가 아니며, 편안한 생활조차 전부가 아니라는 것. 모든 것들이 제자리에서는 선하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것임을 세상에 보여주도록 부름을 받았다.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실 때에만 다른 모든 좋은 것들이 우리 삶에서 적절한 위치를 찾을 수 있다.
완벽한 손님 되기
오늘 내 생일을 축하하면서, 나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생일 선물로 내 아들 너희 네 명을 생각한다. 너희 모두에게 아버지가 된 것은 정말 큰 기쁨이었다. 너희들은 내 일을 매우 쉽게 만들었다. 그리고 너희들이 성장하면서, 나는 너희들 모두가 아빠와 엄마와 별개로 스스로 주님을 위해 서 있는 것을 보게 되어 자랑스럽다.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 나는 너희 모두가 자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내 형제가 되기를 원했다. 그것이 우리가 영원히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 다른 사람의 집에 머무를 때의 행동에 관한 약간의 조언이 있다. 내가 전에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말했기 때문에 내가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아마도 불필요할 것이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반복할 것이다(예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1) 집에 있는 아이들과 친구가 되어라. 이것은 예수를 따르는 자들과 바리새인들을 따르는 자들을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이다. 모든 효과적인 사역의 첫 번째 원칙은: "예수님은 범사에 그 형제들과 같이 지으심을 받으셨다"(히 2:17). 그러므로 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 그들처럼 되라. 그들의 수준으로 내려와 그들과 이야기하고 그들과 놀아라. 그들이 너희 안에 계신 예수님을 보게 하라. 바울은 "내가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된 것은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을 구원하려 함이라"(고전 9:22)고 말했다. 아이들과 놀아라.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을 때, 이렇게 하셨을 것이다. 나는 장애 아동이 한번은 환상을 보았는데 하늘에서 예수님과 함께 방망이와 공을 가지고 노는 자신을 보았다는 것을 읽었다. 나는 그 환상을 사람들이 말하는 다른 많은 환상보다 더 믿을 수 있다. 예수님이 이 땅을 다스리실 때, 아이들은 거리에서 놀고 있을 것이다 -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놀고 있을 것이다(슥 8:5)!!
(2) 식탁에서는 타인을 배려해라. 탐식하지 마라. 식사를 절제하라.
(3) 매 식사 후에 설거지를 도와라.
(4) 매일 아침 잠자리를 정리하고, 물건과 방을 깨끗하고 깔끔하게 유지하라.
(5) 그것을 사용하려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배려의 행위로, 욕실과 화장실에서 최소한의 시간을 보내라. 욕실이나 화장실이 하나뿐인 집에서 지내다 보면, 나는 보통 다른 사람들이 이 곳을 몇 시에 사용하는지 알게 된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도록 그 시간 이전이나 이후에 사용한다.
(6) 떠날 때 집주인(특히 그 집의 부인에게)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을 잊지 마라. 그리고 작은 현금 선물을 남겨두고, 자녀를 위해 무엇인가를 사주라고 부탁해라.
너희들이 벌써 이 모든 일을 행하고 있는 줄을 내가 알고 있다. 너희들이 지금까지 방문한 모든 집에서 너희에 대한 좋은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너희들이 자랑스럽구나. 나는 단지 강조하기 위해 이 간단한 지침을 여기에서 반복한다.
작은 독수리는 하늘을 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여러 회사와 국가에서 변화하는 고용법칙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이 좋다.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면,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더하시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이 너희가 원하는 전부이고 그분의 계획이 항상 최고라면, 아무도 너희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을 좌절시킬 수 없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로 결정하셨을 때, 성령의 증거에 의지하여 사셨고 자신의 이성에 의지하지 않으셨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생각과 이성을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성령의 증거가 항상 최상이어야 한다.
우리가 더 자주 만날 수 있도록 너희들 모두가 방갈로르에 더 가까이 있기를 나는 종종 바랬다. 그러나 작은 독수리가 스스로 비행하는 법을 배우도록 둥지를 흔들어야 한다. 그것이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이므로 우리는 그것에 복종한다(신 32:11). 우리는 너희 모두가 하늘을 나는 법을 배우면서 때때로 땅에 떨어지더라도 하늘을 나는 법을 배우기를 기도할 뿐이다. 하나님은 항상 너희를 들어 올리실 것이다.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 하나님이 네 원수를 네 앞에서 쫓아내며 '그들을 멸하라' 하시도다"(신명기 33:27).
"만일 넘어져도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이는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너를 붙드심이라. 여호와는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결코 버리지 아니하시며, 경건한 자의 자녀들은 결코 주리지 아니하리라. 그대신, 경건한 자들은 선물을 후하게 베푸니, 그들의 자녀는 큰 복을 받는다"(시 37:24-26 - Living).
너희들 모두는 여기 방갈로르에 있는 많은 사람들, 특히 교회의 어린이들에게 축복이 되었다. 그래서 너희가 방갈로르를 떠난 지금 너희를 그리워하는 것은 우리뿐만 아니라 교회의 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교회의 아이들은 너희가 최근 방문한 것을 정말로 좋아했다.
종교인이 되는 것의 위험
어떤 일이 일어나도 낙심하지 말아라. 너희가 주님을 붙들면, 그분이 어떤 상황이든 극복하도록 도와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시련은 너희들이 그분을 더 잘 알 수 있도록 그분에 의해 계획된 것이다. 이것은 불신자들과 세상적인 신자들이 모두 실패하는 곳이다. 그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서지 않고, 그들은 자신의 실패와 고통에서 휴식과 평화를 얻기 위해 세상에 눈을 돌리고 금지된 물질을 실험한다. 그런 시도는 절대 하지 말아라. 처음에는 무해해 보이는 것들도 중독되기 매우 쉽다.
완전함은 한 번도 실패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실패를 솔직하게 털어놓고 넘어지면 즉시 벌떡 일어나서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사람이 달성하게 된다.
우리는 항상 '종교적'이 되면서, 그것이 '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위험에 직면해 있다. 종교적인 사람들은 외적인 것에 사로잡혀 있다 - 주님을 위한 외적 희생, 교회에서 좋은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해야 할 최소한의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과 관련된 외적 의식, 교회 활동, 옷차림, 말씀에 대한 지적인 연구(실제 적용 없이), 그리고 감정적인 모임에서(이러한 감정주의를 성령의 능력의 증거로 상상하는 것) 등. 이것들 중 어느 것도 잘못되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은 없다. 그러나 종교적인 사람에게는 이런 활동들이 주된 활동이며, 이런 활동이 영적인 것의 표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속게 된다.
그러나 진정으로 영적인 사람들은 하나님을 더 잘 알고자 하고, 예수님과 동료 신자들에 대한 열렬한 사랑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지 알아내려고 하고('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 '보다), 성령의 능력을 구하고, 행실에서 이기적인 동기를 깨끗이 하는데 몰두한다. 종교적인 사람들은 회중을 세운다. 영적인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운다.
하나님은 전 세계에서 그분을 옹호할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진리가 왜곡되고 균형을 잃고 모기는 걸러내고 낙타를 삼킨 바리새인과는 다른 사람을 찾고 계신다.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의 원칙을 옹호할 사람들, 엘리야, 세례 요한과 바울, 마틴 루터, 존 웨슬리, 에릭 리델과 같은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들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들이 믿는 것을 옹호했다. 하나님은 이러한 원칙의 사람들로 하늘을 채우실 것입니다. 너희들이 그 숫자에 포함되기를 기도한다. 너희들은 대학에서 주님을 위해 설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모든 경우에 너희가 그렇게 하기 바란다.
많은 경건한 사람들이 지난 세기 동안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고 복음의 순수한 메시지를 보존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집에서 성경을 읽는 데 5분도 쓰지 않고,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적다. 지난 세기에 많은 경건한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교리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없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오늘날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그리스도에 대한 열렬한 헌신을 가지고 있었다 - 그리고 그것은 교리의 정확성만이 아니라 최종 해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건망증은 죄처럼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면 많은 불편을 줄일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잊어 버린다. 지금 내가 건망증을 극복하기 위해 하는 일은 항상 가지고 다니는 작은 수첩에 내가 해야 할 중요한 일들을 적는 것이다. 나는 또한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들을 기록한다. 나는 그것을 기록하지 않으면, 종종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잊어버린다는 것을 알게 된다.
혼란과 지혜
우리가 무언가에 대해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 할 때 당황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라는 것을 너희들이 알기를 바란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도록 훈련하시는 방법이다 - 확실함은 눈으로 보고 걷는 것과 같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여러 번 당황했다. 그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몰라 당황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그만두지 않는다"고 말했다(고후 4:8 - 리빙 바이블).
하나님께서 우리가 당황하고 실수하는 것을 허락하시는 한 가지 이유는 "아무도 그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다"(고전 1:29). 그가 옳은 일을 행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이루었다고 영원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영원 속에서 대단히 기뻐하는 것은 우리가 그토록 많은 실수를 하고 많은 큰 실수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당신의 완전한 뜻을 성취하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확실히 나의 간증이다. 이와 같이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영광을 받으실 것이며, 우리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많은 신자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실패할 때마다, 또는 하나님의 길과 뜻에 대해 당황할 때마다 낙심한다. 하나님의 길과 우리의 길은 다르다. 그것들은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다르다(사 55:8, 9).
하나님의 지혜는 가질 수 있는 위대한 것이다. 지혜의 한 측면은 우리의 우선순위를 올바르게 정하는 능력이다 - 학문 연구, 하나님의 말씀, 일, 수면, 휴식 등을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할애할 것인지. 대부분의 신자가 실패하는 것은 우선순위를 정하는데 있다. 특히 결혼하고 가족이 생긴 후에 그렇다. 그러므로 지금 젊고 독신일 때, 그러한 지혜를 얻는 것이 좋다. 야고보는 너희에게 지혜가 부족하다면(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것이 부족하다), 하나님께 구하면 후히 주실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구하라!
나는 너희 모두에게 내 책 「하나님의 뜻을 찾기」의 6장을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거기에서 나는 우유부단함으로부터의 해방, 과거 결정에 대한 후회로부터의 자유, 실수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에 대해 이야기했다.
실수를 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 예수님 외에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대로 행하는 것을 실수 없이 배운 사람이 없다. "선한 사람의 발걸음은 주님이 인도하시는데… 만약 넘어져도 치명적이지는 않다, 주님이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니라"(시 37:23,24 - Living). 그러므로 실수를 두려워하지 마라. 하나님은 너희가 심각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보호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완전한 뜻을 이루는 것
나는 오늘 하나님께서 "피조물"(히 12:27)에 기초한 모든 것을 어떻게 흔드실 것인지에 대해 읽었다. 이것은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더 소중히 여기는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 이것은 아담과 하와의 죄이자 '경건하지 아니한 자'(그의 삶에서 하나님께 합당한 자리를 두지 아니하는 자)라 칭함을 받은 에서의 죄이기도 하다. 로마서 1장 25절은 "피조물을 창조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는" 자들에 대해 말한다. 나는 너희 모두가 너희의 삶에서 직업이나 여자, 쾌락, 편안함, 돈, 명예보다 하나님께 정당한 자리를 드리는 사람으로 평생을 살기를 바란다.
너희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완전한 뜻을 성취하기를, 너희의 부모인 우리가 너희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이것보다 더 큰 것은 없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는 결혼과 취직의 순서이다. 우리는 너희들이 이 두 가지 일에 있어서 그분의 완전한 뜻 안에 있기를 계속 기도한다. 다른 모든 문제는 이 두 가지에 비하면 사소하다. 어느 대학에 다니고 어떤 과목을 듣든 결혼과 취업에 비하면 하찮은 일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중요한 일에 하나님의 뜻을 간절히 구하라.
우리는 주님께서 너희를 위해 예비하신 올바른 직업을 찾기 위해 기도할 것이다. 너희는 민수기 10:33의 약속을 주장해야 한다. "여호와의 궤(임재)가 그들을 위하여 앞서 가며 안식할 처소를 찾으니, 곧 그들이 완전한 휴식을 취하게 하시고 불안하지 않은 곳이다(많은 사람들이 일하는 사무실에 있는 것처럼). "주께서 옛 언약 아래서 그들에게 그렇게 하셨다면, 새 언약 아래 있는 우리에게 얼마나 더 하시겠느냐. 내 아들들아, 너희가 범사에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고 모든 일에서 그를 영화롭게 하기를 구하는 한, 나는 너희 중 누구도 걱정하지 않는다. 그러면 아무것도 잘못될 수 없다. 나는 그것을 34년 넘게 증명해 왔다. (*참고: 그리고 현재 57년 동안).
"네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고전 4:7). 전혀 없다. 너희에게 지성과 건강과 공부하고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모든 좋은 것을 누리게 하신 분"(딤전 6:17)은 하나님이셨다. 우리는 너희의 삶의 모든 단계에서 너희를 위해 기도했고,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셨다. 이것에 대해 우리는 매우 감사하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너희 모두를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감정적으로, 육체적으로 얼마나 성숙하게 하셨는지를 보면 기쁘구나. 하나님은 너희들이 삶에 직면할 수 있도록 준비하셨다. 부도덕한 대학 생활의 힘든 환경 속에서 너희들은 고군분투하고 극복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복되신 만물의 주관자이시다"(딤전 6:15 - JB Philips 의역)를 기억하라. 다니엘 4장 35절은 또한 기억해야 할 좋은 구절이다: "땅의 모든 거민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심이라, 하나님은 하늘에서와 땅의 모든 거민 중에 자기 뜻대로 행하시느니라. 아무도 그분의 손을 피하거나 그분에게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라고 물을 사람이 없다."
아침에 하나님과 함께 하는 짧은 시간이 너희의 하루 - 일이 진행되는 방식을 완전히 바꿔놓을 수 있다. 잊지 말아라. 따라서 침대에서 10분 일찍 일어나는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다. 따라서 효율성을 고려하여 낮 동안 10분 이상을 확보해라. 비록 우리가 하나님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은 그분이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너의 구원을 이루라
빌립보서 2장 12,13절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느니라"고 했다.
다음은 이 구절에 관한 몇 가지 요점이다:
(i) 구원(과거 시제)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으로부터의 구원이다. 이 구원은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이며 우리는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할 수 없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그것을 "완료"하셨다. 그러나 구원은 또한 아담의 본성(the flesh)과 우리의 악하고 세상적인 행동(목소리 톤, 짜증, 부도덕, 물질주의 등)에서 구원받는(현재 시제) 것을 말한다. 이것이 위 구절에서 말하는 구원이다. 우리 구원에는 세 가지 시제가 있다:
우리는 죄의 형벌(penalty)에서 구원받았다.
우리는 죄의 권세(power)에서 구원받고 있다.
언젠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는 죄의 존재(presence)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다.
(ii)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말할 때마다,
그것은 항상 성령의 사역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분의 주된 임무는 우리를 깨끗하게 하고(죄와 세상으로부터 구별하여)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것을 우리는 "잘 진행되게"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변화해야 할 태도나 생각, 행동을 지적하시면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그 시정을 받아들이고 "그분이 지적하신 육신(flesh)이나 영(spirit)의 특정한 더러운 것에서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 참조) - 우리 삶의 특정한 습관 -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것"이다.
가장 위대한 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 모두를 영적인 교육의 일부로 어려운 경험을 하게 하신다. 예를 들어, 그분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믿음에 대해 우리를 조롱하도록 허용하실 수 있다. 우리를 놀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열등감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우리를 질투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조롱이 우리에게 작용하는 좋은 점은 우리가 사람들의 의견에서 더 자유로워진다는 것이다. 내 인생을 돌이켜보면 (젊었을 때) 해군 함대에서 동료 장교들로부터 믿음 때문에 겪었던 모든 조롱과 그 이후에 겪었던 모든 것들이 내가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지 않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이제 알게 된다. 그리하여 주님은 나의 사역을 위해 나를 준비시키셨다.
너희들이 때때로 교제 없이 있을 때, 바울이 3년 동안 아라비아에서 겪었던 것(갈1:17,18)처럼 주님을 더욱 친밀하고 인격적으로 알게 된 "광야의 경험"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우리 주 예수께 있음을 기억해라. 그분은 왕좌에서 물러나지 않으셨다. 그분이 너희의 삶에서 허용하는 모든 것은 목적을 위해 설계되었다 - 심지어 광야의 경험까지도. 다윗은 말하기를, "내가 어려서부터 늙어서도; 경건한 자가 버림을 받는 것과 그의 자손이 떡을 구걸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노라"(시 37:25). 우리는 언젠가 하늘에서 "내 예수께서 모든 것을 잘하셨도다"(막 7:37)라고 노래하게 될 것을 아주 잘 알기에,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간다.
좋은 직장을 얻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큰 것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를 인도로 부르셨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분은 나를 최고로 행복하게 하셨다. 그러나 나는 다른 누구에게도 인도에 머물도록 요청한 적이 없다 - 너희들, 나의 아들들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나는 각 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고유한 사역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너희의 부르심과 사역은 나와 다르다 -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몸의 각 부분은 다른 임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너희 모두에게 바라는 것은 너희가 항상 하나님의 영광만 구하고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 안에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 그게 어디든지 - 그것이 누구에게나 가장 좋은 삶의 방식임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온 땅에서 그 마음이 전심으로 하나님께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대하 16:9). 그래서 그분은 너희를 위해서도 일하실 것이다. 너희들 모두가 너희 세대에서 주님을 위한 강력한 증거가 되기를 바란다.
다른 사람 축복을 통한 영적 성장
2주에 한 번 또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 어딘가에 있는 소수의 신자들을 위해 성경 연구를 시작할 기회를 찾으려고 노력하라. 주님께 구하라. 그러면 그분이 너희를 인도하실 것이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고 다른 사람들을 축복할 수 있는 그러한 기회를 찾아야 한다. 참석하는 사람들이 흥미가 있어해야 한다. 따라서 모임을 짧게 유지하고 지루할 정도로 질질 끌지 마라. 연구를 실용적으로 만들고 결코 이론적으로 만들지 마라. 너희 모두는 성경을 꽤 잘 알고 있으며, CFC 방갈로르와 우리 집에서 수년 동안 매우 많이 들었다. 그러므로 성경에 무지한 많은 사람들을 위해 그러한 성경 연구를 인도하는 것은 쉬울 것이다.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라. 성경 연구를 인도하는 전체 활동은 너희도 영적으로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것이 내가 23살 때 젊었을 때 발견한 것이다.
끊임없이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고 예언의 은사("청중의 필요에 따라 말씀을 전하는 능력")를 구하라. 예언의 은사를 구하는 것이 교만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그것이 사탄이 사람들을 속이는 방법이다. 성령은 모든 신자에게 예언의 은사를 간절히 구하라고 권하신다(고전 14:1). 그러므로 이 은사를 구하라. 너희가 필요로 하는 것을 하나님께 구하지 않는다면 - 어떤 영역에서든 - 너희는 그것을 얻지 못할 것이다. 물질적 필수품, 지성, 직장 문제에 대한 해결책 또는 일반적인 문제에 대해 대담하게 요청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께 나아가 해결책을 찾을 수 있도록, 우리가 문제를 만나도록 허락하신다. 우리가 예수께서 잠잠케 하시는 어떤 폭풍도 만나지 않는다면, 얼마나 지루한 삶이겠는가! 그러므로 구하라 - 기쁨이 충만할 수 있도록 계속 구하라.
하나님께 지혜와 도움을 구하라
육체적이든 물질적이든 학문적이든 영적이든 무엇이든지 너희를 낙담시키게 하지 마라. 낙담은 항상 사탄이 주는 것이다, 결코 하나님이 주는 것이 아니다. 사탄의 목적은 먼저 너희를 낙심케 하여 죄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외로움과 향수병 또한 조심하지 않으면 낙담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그것들과 싸워 이겨야 한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실 것이다. 알다시피 우리는 매일 너희를 위해 기도한다.
주님께서 너희들 앞서 보시는 위험, 너희들이 볼 수 없는 위험, 그리고 너희들이 고려하지 않은 요소에 대해 미리 경고하시기를 바란다. 주님께서 너희에게 지혜를 주시고 보호해 주시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구하는 자에게 지혜를 약속하셨다(약 1:5). 너희가 구하지 않거나 또는 구하지만 하나님께서 필요한 지혜를 반드시 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지 않으면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더 많은 돈을 벌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더욱 닮게 하는 것임을 기억해라.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지상의 번영이 무엇이든지 주시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하시면, 그분은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다. 돈을 모으는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 맡기셨기 때문이다(전2:26b 참조).
재정 관리와 삶의 올바른 균형
학생으로서 배워야 할 분야 중 하나는 재정 관리이다.
너희들은 우리가 집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보았을 것이다: 우리는 도움이 필요할 때에도 재정적 도움이 필요하다는 인상을 아무에게도 주지 않았다. 우리는 가진 것이 거의 없을 때에도 하나님을 신뢰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몇 년 전에 투자한 작은 것을 축복하시고 많이 성장하게 하셨다. "그 가루의 그릇은 다한 적이 없고 기름의 병은 비워지지 아니하였느니라"(왕상 17:14-16). 그렇게 엄마와 나는 결혼한 이후로 지상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경험했다.
너희들은 가난한 설교자의 아들이라는 인상을 아무에게도 주어서는 안 된다. 아니. 너희들은 부유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들이다. 그러나 그것이 부자들처럼 돈을 낭비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사는 방식에서 검소함을 가르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가족으로 살아온 방식을 자랑하고 싶지 않다. 동시에, 우리는 그들의 교회에 기생하는 다른 설교자들을 판단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재정 문제에서 예수님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살기를 원한다.
너희들이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검소하고 조심하는 법(둘 다 좋은 특성임)을 배워야 하며, 인색하고 구두쇠(나쁜 특성)가 되지 않아야 한다. 불필요한 지출을 모두 피하도록 주의해라 - 그러면 하나님께서 영적인 재물로 너희에게 상을 주실 것이다. 인색하지 않고 검소할 수 있는 방법을 분별하려면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제 너희의 일과 공부에 대한 한마디이다. 중요한 것은 우선 순위를 올바르게 정하고, 가장 중요한 일에 먼저 시간을 할애한 다음, 우선 순위의 내림차순으로 다른 일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젊은 시절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다. 주님께서 그 우선순위를 수행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기를 바란다.
너희들의 학업과 직업(이를 통해 결국 너희의 생계를 꾸려야 함)은 당연히 너희의 최우선 순위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대부분의 시간을 세속 직업에서 보내도록 설계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분이시다 - 그리고 너희의 공부와 일은 모두 그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그러므로 공부와 일을 잘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이다 - 예수님께서 나사렛 목수로 12년에서 15년 동안 하신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분처럼 너희도 항상 영원의 관점에서 모든 일을 해야 한다.
주님께 진실하게 서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이 다수임을 기억하라. 너희가 순결하고 사랑스럽고 선하고 겸손하다면 하나님께서 너희를 통해 하실 수 있는 일이 많다. 그러므로 항상 이러한 미덕으로 자신을 관리해라. 찬송가가 말하는 것처럼 "너 외에는 아무도 할 수 없는 예수님을 위한 일이 있다".
항상 너희들이 하나님을 갈망하며, 보는 것이 아닌 믿음으로 살기를 바란다. 나는 너희들이 항상 모든 사람들에게 선하고 은혜로운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따라서 많은 친구를 사귈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주님을 위한 좋은 증거이다. 친구들이 너희와 함께 있기를 기뻐할 수 있도록, 너희가 나쁜 기분을 극복할 수 있는 은혜를 하나님께 구해라. 많은 사람들이 지상에서 너희의 길이 그들의 길과 만나게 된 것에 대해 영원히 감사하기를 바란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과 주님을 진심으로 섬기는 사람들에게 항상 큰 마음을 가지기 바란다. 여호와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베푼 선을 풍성하게 갚아 주실 것이다. 그러나 비뚤어진 설교자들(많은 사람들이 있다)과 항상 선물을 구하는 사람들을 조심해라. 그런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어라.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는 말씀을 듣는 것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결코 질려서는 안 되는 권면이다. 누군가가 말했다. "유혹은 불과 같다. 100세가 되어도, 그것은 너희를 태울 수 있다." 젊음의 정욕을 피하라는 성령의 부르심에 너희가 항상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너희의 영원에서 기쁨이나 후회의 정도가 크게 결정될 것이다. 너희 모두에게 기쁨만이 있기를 기도한다.
하나님은 자신을 공경하는 자를 공경하신다
너희들이 우리의 생일에 우리에게 인사해줄 때마다, 우리는 너희들이 우리를 너희의 부모로서 진정으로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는 표시로 여기고 -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기뻐한다. 우리는 항상 너희들의 감사의 표현에 깊은 감동을 받는다.
나는 우리가 가족으로서 직면한 모든 시련을 성공적으로 헤쳐 나갈 수 있도록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에 감사드린다. 사탄은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질투하도록 부추겼다. 그러나 우리는 사탄을 이기고 우리를 비방하고 우리를 해하려고 하는 모든 사람에 대해 좋은 태도를 유지하도록,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다. 사람들이 하는 모든 일은 로마서 8장 28절에 약속된 대로, 오직 우리의 유익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말하는 모든 악한 말이 우리를 악하게 만들 수 없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말하는 모든 선한 말이 우리를 선하게 만들 수 없음을 기억하라.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될지 결정한다 - 그것은 우리가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하든 그리스도와 같은 방식으로 반응하는 데 달려 있다.
우리의 과거 실패조차도 - 그것이 아무리 깊고 크더라도 - 우리가 미래에 더욱 전심으로 과거를 만회하겠다고 결심한다면, 우리 삶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는 것을 방해할 수 없다. 나는 거듭난 후에 여러 가지로 주님을 실망시켰다. 그러나 나는 1975년(거의 36세가 되었을 때, 우리 집에서 교회로 함께 모이기 시작했을 때)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주님을 배반하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온 마음을 다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 모든 세월이 지난 오늘, 나는 하나님께서 해마다 점점 더 큰 은혜를 내게 주심으로 나의 결정을 존중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흠이 없는 사람이나 한 번도 실수해서 실패한 적이 없는 사람을 택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개인적인 경험으로 안다. 사실 그분은 종종 가장 많이 실패한 사람들을 가장 많이 사용하신다. 이것이 우리 교회에 오는 최악의 죄인들에게 큰 희망을 주었다.
수넴 여자는 엘리사가 자기와 자기 아이가 잘 지내느냐고 물었을 때, 아이가 막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네, 잘 지내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왕하 4:8, 26)! 그녀가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믿음이었다. 하나님은 그녀의 아들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그녀의 믿음을 존중하셨다! 하나님은 자신을 믿는 자들에게 놀라운 일을 행하신다. 그런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때때로, 너희가 난처한 상황에 있음을 발견할 때 또는 하나님을 비참하게 실망시킬 때(이것도 일어날 수 있음), 항상 하나님에 대한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기 바란다. 주님은 모든 "죽은" 상황에서 부활을 가져올 수 있음을 기억해라. 너희들이 해야 할 일은 그분께 정직하기만 하면 된다(너희는 너희의 죄를 아무에게도 고백할 필요가 없지만, 너희는 주님께 완전히 정직해야 한다).
다른 사람을 축복하면 복을 받는다
우리는 주님의 축복을 받고, 지상에서 만나는 모든 가족(그리고 사람)을 축복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갈라디아서 3장 14절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신 것은, 성령의 은사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복이 우리의 것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다. 그 축복은 창세기 12장 2절, 3절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에게 복을 주리니 땅의 모든 가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부분에서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그의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하나님께 구한다.
이것은 너희들의 유산이다. 그러므로 다가오는 새해에도 항상 그것을 주장하고 그 안에서 살아라. 회개와 죄 자백으로 항상 양심을 깨끗하게 하여, 축복이 흐르도록 통로가 막히지 않게 하라.
제일 먼저, 하나님은 너희들이 하는 모든 일에서 너희들을 축복하기를 원하신다 - 영적, 물질적, 육체적, 학문적, 직업적,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네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시1:3) "네가 하는 모든 일이 성공할 것이다"(여호수아 1:8). 이 새 언약 시대에, 하나님은 물질적 축복만 받던 옛 언약 시대와 달리 먼저 영적인 삶에서, 다음으로 물질적인 것에서 너희들을 축복하고 형통하고 성공하게 하기를 원하신다.
둘째, 하나님은 너희의 삶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기를 원하신다. 그들은 너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맛보아야 한다. 그 결과 어떤 사람들에게는 너희가 "생명의 냄새"가 될 것이고 다른 사람들(하나님을 거부하는)에게는 너희가 "사망의 냄새"가 될 것이다(고후 2:16).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려면 끊임없이 간절히 성령 충만을 구해야 한다.
우리의 지상에서 직업은 재정적으로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생활비를 벌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상에서의 짧은 생애 동안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축복을 주기를 갈망해야 한다.
인도의 유명한 설교자들은 대개 대도시에서만 설교한다. 그들은 마을의 단순하고 가난한(그리고 문맹인) 사람들과 함께 앉을 시간이 거의 없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께서 인도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는 특권과 영광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기쁘다. 나는 그곳에서 이기는 삶의 복음을 전한다 - 그리고 주님은 그곳에 교회를 세우신다. 그리고 엄마는 그곳에서 가난한 여성들과 아이들을 위해 진료소를 운영한다. 우리 둘 다 이 사람들을 위한 봉사로 엄청난 축복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테이프와 출판물을 가져가신 곳을 보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것들은 모든 대륙, 곧 땅 끝까지 갔다(행 1:8). 많은 설교자들은 또한 그들의 교회에서 그들 자신의 메시지에 우리 책과 테이프의 자료를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말씀은 더 나아가 내가 갈 수 없는 교회에까지 간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 자료에 따라 생활하고 그것을 통해 돈을 벌려고 하지 않는 한,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영감을 주는 두 편의 시
여기 최근에 나를 축복해 준 두 개의 영감을 주는 시가 있다:
나는 받침 접시에서 마시고 있어요
나는 한 번도 재산을 모은 적이 없으며 - 앞으로도 절대 모으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어쨌든 나는 행복하기 때문에 그것은 상관 없습니다.
나는 여정을 따라가면서, 뿌린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거두고 있습니다.
나의 잔이 넘쳤기 때문에 받침 접시에서 마시고 있습니다.
나는 재산이 많지 않고 때때로 힘들지만
하지만 사랑하는 자식들이 있으니 나는 충분히 부자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단지 하나님의 자비가 베풀어준 축복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나의 잔이 넘쳤기 때문에 나는 받침 접시에서 마시고 있습니다.
길이 가파르고 험할 때에, 하나님이 내게 힘과 용기를 주신다면
다른 축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난 이미 충분히 축복받았습니다
너무 바빠서 다른 사람의 짐 지는 것을 돕지 못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내 잔이 넘쳤기 때문에 나는 받침 접시에서 마실 것입니다.
(작가 불명)
하나님의 최고의 것
하나님은 감히 시험을 견디는 소수를 위해 그분의 가장 좋은 것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최고를 얻지 못할 사람들을 위해 두 번째 선택이 있습니다.
약속된 안식을 위험에 빠뜨리는 죄가 항상 공개된 것은 아닙니다.
'더 좋은 것'(the better)이 종종 우리를 '최고'(the best)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적입니다.
거의 없지만 막연하게 어떤 식으로든 축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주님, 제가 구하는 것은 당신의 축복이 아닙니다. 나는 당신의 최고의 것을 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최고의 선택을 구하지만,
- 시련이 닥치면, 그들은 위축되고 굴복하며 십자가를 피하므로 하나님의 최고의 것을 놓칩니다.
나는 이 짧은 인생에서 최대한 압박 받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유용하기 위해. 나는 하나님의 최고를 원합니다.
"오 주님, 당신의 최고의 선택을 저에게 주소서, 나머지는 다른 사람들이 취하게 하십시오.
그들의 좋은 것(good)은 나에게 아무런 매력이 없습니다. 나는 당신의 최고(best)를 원합니다."
나는 승리자들의 군중 속에서 내 이름이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내 주인님이 "잘 하였다! 너는 나의 최고의 것을 얻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기를 원합니다.
(A.B.심슨)
너희들 모두가 우리 주님께 최고가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을 너희의 삶의 통치자로 삼으라
나는 너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righteousness)를 항상 먼저 구하시기를 항상 기도한다. 그리하면 네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할 것이며 하나님이 강한 용사처럼 너를 대신하여 일하실 것이다(렘 20:11). 이것은 내가 평생 동안 경험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주로 전도나 선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너희의 삶의 통치자로 삼고, 항상 하나님의 권위 아래 살고, 그분의 하늘의 가치관이 돈, 세속적 쾌락, 사람의 명예보다 우선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한다는 것은 너희의 내적 삶과 외적 행동의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나기를 갈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진리가 너희의 모든 날을 사로잡기를 바란다. 너희 모두가 이 진실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보면 나는 행복하게 이 땅을 떠날 수 있다.
그리고 자녀가 있을 때 자녀에게도 이 진리를 가르쳐서 자녀도 삶에서 동일한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따라서 주님은 재림하실 때까지 대대로 우리 가계를 통해 지상에서 증거하실 것이다.
교리가 아니라 삶에 관한 것이다
바울은 "환상이 아닌 거룩함"에 대해 말한다(엡 4:24 - J.B. Philips 번역). 이것은 교리를 이해함으로써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우리를 통해 그분의 삶을 사심으로써 온다. 디모데전서 3장 16절에 언급된 경건의 비밀은 예수님이 우리 육신으로 오신 교리가 아니라, 우리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 자신이다. 우리가 그분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은 어떤 교리가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봄으로써 된다(고후 3:18). 평생 이것을 기억하라.
(1) 만약 너희가 주님 그분 자신을 주시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2) 만약 너희가 주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어떤 그룹에 속해 있든지, 그들이 어떤 교리를 가지고 있든지, 모든 교리는 너희를 잘못된 길로 이끌 수 있다. 예수님 자신이 그분의 몸인 교회의 머리이다. 그러나 교리가 머리가 된다면 사람들은 바리새인이 될 것이다 - 그리고 교리가 순수할수록, 더 많은 바리새인이 나올 것이다! 찬송가의 가사를 기억하라: "한 때는 축복이었다면, 이제는 주님입니다." (전에는 축복을 구했지만, 이제는 주님 자신을 구합니다 - 역주)
우리가 교회로 보여주는 이미지는 예수님께서 아버지에 대해 보여주신 이미지와 일치해야 한다 - 특히 요한복음 8:1-12에서 예수님이 종교적인 바리새인들을 대적하여 회개한 간음한 여인 편에 서 계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지상에서 설교한 것 중 가장 높은 거룩함의 표준을 설교하셨지만, 가장 악한 죄인들과 어울리셨다(예: 부활하신 주님을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특권을 받은 막달라 마리아). 그분은 그런 죄인들을 한 번도 비판하거나 그들의 과거를 상기시켜주지 않으셨다. 이것은 교회로서의 우리의 소명이기도 하다. 예수님께서 설교하신 것과 동일한 거룩함의 표준을 전파하면서도, 가장 악한 죄인들과 타락한 사람들을 따뜻하게 대하여 그들을 그분께 인도하는 것이다.
우리 교회는 최악의 경우도 환영하는 병원과 같다. 그들은 모두 치료받을 수 있다. 아무도 자신이 도움을 받기에 너무 비참하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어떤 교회는 부자와 자기만족적인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동호회와 같다. 그러나 우리는 가장 악한 죄인들을 위한 병원이 되기를 원한다.
낙심이나 정죄의식은 금물
이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훈련의 중요성에 대한 몇 가지 생각을 나누겠다. 훈련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너희가 영적인 사람이 되려면 반드시 필수적이다. 만약 너희가 지금 훈련되지 않은 상태라고 해서 낙심하거나 정죄의식을 갖지 마라. 왜냐하면 낙심과 자기 정죄는 훈련되지 않는 것보다 더 나쁘기 때문이다. 과거에서 돌아서서 앞으로 훈련된 사람이 되도록 도와달라고 주님께 간구하라.
주님은 우리 모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셨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인정해 주셨다. 따라서 우리는 과거의 훈련되지 않은 삶의 방식이, 우리로 하여금 상실감에 시달리게 하는 것을 발견하더라도 상관없이 계속 나아가야 한다. (1) 죄를 피하고 (2)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 외에는 이 세상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없다. 이 두 가지 영역에서 우리가 옳다면, 우리는 99.9%가 옳다. 그것들이 우리가 완벽함을 추구해야 하는 부분이다. 돈을 잃는 것조차 부차적인 일이다. 우리가 실패할 때, 우리는 다음에 일을 더 잘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비록 다음 번이 우리가 같은 일을 더 잘하려고 노력하는 1000번째 일지라도! 하나님은 참 좋으시다 - 분명히 우리를 도우실 것이다.
지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지혜이다.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한 첫 번째 자격은 우리에게 그것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약 1:5). 그것은 우리가 어리거나 늙어서도 인정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그것을 끊임없이 인정하는 사람에게는 지혜가 풍성히 주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큰 지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지혜가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 부족함을 인정하고 모든 상황과 모든 관계에 대해 하나님의 지혜로 충만할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과 다르다. 그분의 길은 완전하다 - 그분은 우리의 길도 완전하게 만드실 것이다.
너희에게 오는 시련과 슬픔을 낭비하지 마라. 그것들 각각에서 어떤 영광을 얻어라. 그리고 우리가 교회에서 항상 말했던 것을 기억해라, 우리는 미래에 우리를 더 현명하고 더 신중하고 더 전심으로 만들지 않는 한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로 과거가 우리를 낙담하게 하거나 "만약 내가 그랬더라면......" 또는 "만약 내가 하지 않았더라면"이라고 소원하게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신비한 방법으로 일하시며 우리의 실패와 실수까지도 사용하여 그분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신다. 이것들은 모두 우리를 깨뜨리고 우리를 예수님처럼 만드시는 그분의 방법의 일부이다. 교훈을 얻었다면, 과거를 뒤로 하고 계속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직면하는 모든 시련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이 많이 있다. 그러므로 주님을 찬양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 방해가 되는 산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없어지라고 명령하면 그곳에 남아 있을 수 없다(막 11:22-25). 그것을 기억해라. 그러한 모든 산은 너희의 신앙에 대한 도전이지 후퇴하라는 신호가 아니다.
구원은 은혜로 받는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받아들이심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 특히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읽어보면, 바울이 복음을 순전한 형태로 보존하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는지 알 수 있다 - 영생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선물(롬 6:23)이라고 설명한다. 바울은 누구든지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갈 1:8).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받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진리를 오용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이에 반응하여 신자들이 다시 율법을 지키도록 설교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답이 아님을 알았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은혜를 남용하는 사람들과 영원한 불안 속에 사는 사람들, 두 그룹을 모두 마귀가 이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안한 감정은 은혜를 오용하는 것만큼 나쁘지 않을 수 있다. 그러한 감정으로 구원을 잃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우리를 지상에서 하나님을 위해 완전히 무능하게 만든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한 후에도 우리가 여전히 깨끗하지 않다고 상상하는 것은 불신앙(겸손이 아님)이다. 그것은 실제로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보다 우리의 죄를 높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은혜는 먼저 우리의 죄를 사하고 우리가 죄에 빠지지 않게 한다(롬 6:14). 이것이 "하나님의 참 은혜"(벧전 5:12)이다. 이 충만한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 사람들은 불신자들에게 다가가는 데 가장 효과적이다.
우리를 통해 일하시는 그리스도
다음은 잘 알려진 설명이다. 그러나 두 번째 줄에서 내가 약간 수정했다.
"단 한 번뿐인 인생 - 그것은 곧 지나갈 것이다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통해 하신 일만이 영원할 것이다."
두 번째 줄은 "그리스도를 위해 행한 일만이 영원할 것이다"는 말은 평상시에 내가 적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그리스도를 위해 행해지는 많은 것은 하나님의 뜻(will)에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인도 없이 자기 자신의 열심으로 일을 하는 것이다 - 예를 들어, 특별한 하나님의 부르심 없이, 필요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풀타임 기독교 사역에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희생적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희생보다 순종을 원하신다(삼상 15:22).
사람들이 우리 교회를 떠날 때, 그것은 결코 나에게 불안감을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천국도 한때 천사의 3분의 1이 비워진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참조 계 12:3,4에서 "별"은 천사이다 - 욥 38:7). 그러나 그 체질로 인해 천국이 더 깨끗해졌다! 예수님의 설교는 또한 진실한 열한 사람만 남게 될 때까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나게 했다(요 6:60,66,70). 그 11명은 완벽하진 않았지만 진심이었다!
금지된 곳으로 발을 들여놓지 마라
대부분의 신자들은 유혹과 죄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또한 우리가 유혹과 싸우는데 더 충실할수록, 유혹과의 싸움이 더 쉬워진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이 신자들 사이에 유혹과의 싸움의 정도가 다른 이유이다 - 왜냐하면 그들은 과거에 바로 그 유혹들에 다른 정도로 굴복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회심하지 않은 날에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거나 욕설을 많이 하는 신자들은, 회심 후에도 그런 영역에서 유혹을 받으면 그 습관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다. 그런데 왜 너희는 그런 문제에서 어려움을 겪지 않는가? 과거에 그런 습관에 빠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유혹에도 단 한 번도 굴복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혹과의 싸움이 그분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분석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결코 그분의 내적 삶을 분석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벳세메스의 사람들은 "여호와의 궤 안을 들여다보았다" -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의 불경함으로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삼상 6:19). 우리가 예수님의 내적 삶을 분석하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불경스러운 일이다. "은밀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우리에게 속하였느니라"(신 29:29).
요한의 두 번째 서신은 두 가지 오류의 낭떠러지를 보여준다. 첫 번째는 다음과 같다: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인정하지 아니하는 자니라"(요이 7). 그리고 반대편에는 낭떠러지가 있다: "누구든지 너무 지나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 거하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없느니라"(요이 9).
우리는 계시된 것만 안다 - 예수님은 모든 일에 우리와 같은 시험을 받으셨으나 죄를 짓지 않으셨다(히 4:15). 우리가 그것을 알고, 거기에서 멈추고, 그분의 모범을 따르는 것으로 충분하다.
우리가 분명히 알고 있는 한 가지는 예수님의 내면이 완전히 순수했다는 것이다. 성경은 그분이 흠이 없는 어린양이었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한 죄 없는 제물이 되실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죄 있는 육체로 오신 것이 아니라 "죄 있는 육체의 모양으로" 오셨다(롬 8:3). 그분에게는 죄가 없었다. 그분은 천사가 마리아에게 말한 대로 "거룩한 아이"로 태어나셨다(눅 1:35).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됨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자백할 때(그것이 아무리 많고 크더라도), 그분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즉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다(요일 1:9). 그리고 내가 자주 너희들에게 말한 것을 반복하겠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실 것이다(히8:12 참조). 그분은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지워 버리신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시면, 우리도 더 이상 기억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언제든지 우리의 죄를 누구에게도 결코 고백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모든 것을 완전히 씻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보다 우리 죄의 거대함을 결코 높이 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피는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셨다(롬 5:9).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금 그분 보시기에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신다는 뜻이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고백하고 그것에 따라 살아야 한다.
나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이 너희를 깨끗하게 하신 것을 더 이상 거룩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지 말라"(행 10:15, 16)라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설 것을 권한다. 베드로는 그 환상을 세 번 보아야 확신이 생겼다. 그는 나중에 이 문제에 대해 여전히 걸려 넘어졌다(갈 2:11-13). 그러나 우리는 한 번도 걸려 넘어질 필요가 없다. 형제들을 참소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깨끗케 하신 일에 대하여 말할 기회조차 주어서는 안 된다 - 이는 우리를 의롭다 하신 의로우신 하나님과 우리를 깨끗케 하신 그리스도의 피를 모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두가지를, 심지어 생각으로라도, 단 한 번이라도 모욕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너희가 취해야 할 태도이다. 다른 사람들이 고발자와 교제를 원한다면 교제하도록 해라. 그러나 우리는 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만 너희의 죄를 고백해라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사람들이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는 관습이 있다. 일부 개신교 교회는 또한 신자들이 서로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도록 격려하고 모든 신자는 죄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정기적으로 자신의 모든 죄를 고백하는 "책임 파트너"가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런 가르침은 신약성경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성령의 가르침이 아니라 인간 심리학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이 이 거짓 가르침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고 그리고 행하고 있다. 성경 어디에도 책임 파트너가 있다는 말은 없다. 죄를 피하는 방법은 실제로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통해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 "책임 파트너"에게 죄를 고백해야 하는 부끄러움 때문에 죄를 피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라고 명령한다(고후 7:1). 우리는 하나님께 책임을 져야 한다 - "그분은 우리와 함께 해야 할 유일한 분이시다"(히 4:13).
우리는 오직 주님께만 우리의 죄를 고백해야 한다. 야고보서 5장16절의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라"는 명령은 종종 문맥에서 벗어났다. 문맥상, 그것은 교회의 장로들에게 기도를 받고 있는 병든 신자를 가리키는 것임이 분명하다. 병은 때때로 죄로 인해 발생하기 때문에(요한복음 5:14에서 볼 수 있듯이), 병든 사람은 "고침을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의 죄(이것이 병의 원인일 수 있음)를 자백하라는 말을 듣는다. 그것은 신자들이 자신의 죄를 다른 신자들에게 고백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구절이 문맥에서 벗어나면 매우 위험하다. 문맥에서 벗어난 구절은 종종 거짓 가르침의 구실이 된다. 그러므로 모든 구절을 인접한 맥락에서 연구하고 성경의 같은 주제에 대한 다른 구절과 비교하도록 주의하여라.
우리가 인간에게 고백해야 하는 유일한 죄는 우리가 그 사람에게 지은 죄이다 - 예를 들어, 우리가 그를 속이거나 어떤 식으로든 그에게 상처를 입힌 경우이다(마 5:23,24). 이것을 항상 기억해라.
우리는 과거의 죄에 대해 누구에게도 자세히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탄(우리로 그 죄를 범하게 만든)을 영화롭게 하고 또한 우리의 고백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럽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해지고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선언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이것을 평생 기억해야 한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임을 항상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죄의 세부사항을 하나님 외에 다른 누구에게도 고백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새 언약의 방식이다.
우리의 간증은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한다
모든 신자는 간증할 때 항상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행하신 일(긍정적인 부분)에 대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고, 회심하지 않은 과거에 사탄이 그들에게 하게 한 모든 일을 자세하게 언급함으로써 결코 사탄을 영화롭게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죄인, 타락한 자 또는 반항적이었다고 말하면 충분하다.
나는 서신서에서 개인적으로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것에 관해서가 아니라, 변화산 체험에 대해 말한 것을 보고 감동받았다(벧후1:17,18). 마찬가지로 바울이 유대인들과(행 22장), 아그립바에게(행 26장) 간증할 때, 그는 주님과의 만남에 대해 아주 자세하게 말하고 기독교인들을 박해한 것에 대해 조금만 이야기한다. 내가 본 특정 죄를 고백하는 것은 로마 가톨릭과 이교도 사상이며, 불행히도 오늘날 일부 개신교 작가들도 이를 장려하고 있다. 이것은 "스스로 만든 종교와 자기 비하를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을 가지지만, 실상은 아무 가치가 없다" (골2:23) 자기 비하는 겸손이 아니며, 지혜도 아니다. 지혜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큰 열정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헌신을 신선하고 열렬하게 유지해야 한다. 나는 너희들 모두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지키기 위해 -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항상 뜨겁기를 권한다. 그것이 너희에게서 다른 금지된 것들에 대한 사랑을 제거해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다른 사랑을 몰아내는 힘, 즉 이 새로운 애정의 추방력이다.
성경은 "먹든지 마시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고 말씀하고 있다. 몸(성령의 전)을 해할 수 있는 술과 같은 것을 마시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 이 구절을 기억해라. "모든 것이 나에게 허용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에도 제재를 받지 않겠습니다"(고전 6:12,13).
나의 가장 큰 기쁨은 너희들 모두가 주님과 동행한다는 것이다. 나는 너희들이 얼마나 많은 학위를 받는지, 어떤 급여를 받는지, 어디에서 사는지 상관하지 않는다. 인생에서 너희의 가장 큰 열정이 너희를 위해 목숨을 바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내가 알 수만 있다면, 나는 항상 고개를 들고 걸을 수 있고, 주님께서 나를 집으로 부르실 때에도 평화롭게 죽을 수 있다. 살 가치가 있는 유일한 삶은 100%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다. 그러나 재정적으로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도록 자신의 생계를 꾸리는 것이다. 늘 그렇게 살아가기 바란다.
로마서 개요
다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라는 제목을 붙일 수 있는 "로마서"의 개요이다:
(1) 정죄와 죄책감으로부터의 자유(1-5장)
(2) 죄의 권세로부터의 자유(6장)
(3) 율법주의적 의로부터의 자유(7장)
(4) 성령 안에서의 자유(롬8:1-14)
(5)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롬8:15-39)
(6) 자랑으로부터의 자유 (롬9-11장)
(7) 세속성으로부터의 자유(롬 12:1, 2)
(8) 개인주의로부터의 자유(롬12:3-21)
(9) 배타주의로부터의 자유(롬14,15)
이렇게 로마서를 공부해라. 그것은 멋진 책이다.
예수께서 가장 미워하셨던 것들
예수님이 가장 미워하셨던 다섯 가지가 있다:
1. 위선(부정직, 거짓말 등 포함)
2. 교만
3. 이기심(남에 대한 배려 부족, 멸시 등 포함)
4. 증오(분노, 질투, 원통함 등 포함)
5. 불신
이 죄들은 십계명에 나오지 않는다 - 왜냐하면 율법은 죄의 열매만을 다루지만, 은혜는 죄의 뿌리를 다루기 때문이다. 율법은 가위를 사용하여 나쁜 열매를 잘라 냈다. 그러나 은혜는 도끼를 사용하며 그것을 나무 뿌리에 둔다.
질투는 교만의 반대편이다. 교만과 질투는 모두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는 데서 온다. 질투는 분노를 일으키고, 분노는 (가인의 경우처럼) 살인으로 이어질 수 있는 거친 말을 낳는다. 질투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이 땅을 떠나기 전에,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주님은 우리의 방어자이시다.
이제 가정과 교회에서 권위에 복종하는 것에 대해 말하겠다: 태양이 어떻게 행성을 (중력의) 보이지 않는 끈에 묶는 동시에 엄청난 속도로 날아갈 수 있는 자유를 주는지 생각해 보라, 어떤 식으로든 억제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 끈으로 인해 행성은 우주로 날아가거나 다른 행성과 서로 충돌하여 자신과 다른 행성을 파괴하지 않는다. 따라서 집에 있는 아이들도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지만 아버지가 보이지 않는 줄로 잡고 있다. 이것은 종종 너무 미숙하여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같은 원리가 교회 가정에도 적용된다.
너희 엄마와 나는 우리가 사람들을 의(righteousness)로 인도하고 그들을 신체적으로 건강해지도록 하는데 우리 삶을 바치는 특권을 누린 것에 대해 감사한다 - 특히 인도의 마을에서 그리스도께 나아온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말이다. 1975년에 나는 세계의 대도시에서 국제 회의 연사(international conference-speaker)를 그만두고(내가1971년부터 1975년까지 해왔던) 인도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기로 결정했다 - 특히 큰 설교자들이 거의 가지 않는 마을로. 우리가 이 가난한 사람들의 유익을 구했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아들 네 명을 여러 가지로 축복하여 우리에게 상을 주셨다. 그분은 과거에 너희에게 놀라울 정도로 선했고 미래에도 그러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에게 빚지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다른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우리의 일에 대해 여전히 약간의 반대가 있다 - 다시 한번 질투 때문이다. 주님께서 우리의 일을 축복하신다는 것이 이제 잘 알려지기 시작했다. 또한 모든 곳에서 나의 사역을 위한 많은 열린 문이 있다. 그래서 사탄은 우리에게 분노한다 - 이것은 좋은 징조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무시하고, 주님께서 나를 위해 하라고 부르신 일을 성취하기 위해 계속 달려간다.
어떤 문제에 대해 누군가가 너희를 비판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해 몇 가지 조언을 해주겠다. 자신을 변호하려면 아무 말도 하지 마라. 이사야서 54장 17절에 따라 여호와께서 친히 너희를 변호하시게 해라: "'너희를 치려고 만든 무기가 형통하지 못하리니, 너희를 송사하는 모든 혀가 정죄함을 받으리라. 그들의 옹호는 내게서 나온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대부분의 사람들과 문제를 명확히 하려고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그분의 진리는 우리와 같은 보잘것없는 사람들로부터 방어할 필요가 없는 불과 같다.
사랑과 지혜
내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남의 실수에서 배우게 되고, 평범한 사람은 자신의 실수에서 배우게 된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의 실수에서도 배우지 못한다."
아버지로서 나는 다른 아버지들에게서 본 실수로부터 배우고 싶다.
그래서 나는 너희들에게 어떤 모범을 보여 주었느냐고 자문한다 - 너희는 그 뒤를 따를 것이다: 나는 다음과 같기를 바란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고, 모든 사람을 향한 지혜로운(wise) 사랑으로 너희의 목숨이 다할 때까지 인내하는 것이다.
지혜는 귀찮은 사람들과 상당한 거리를 두는 것을 의미하며, 지혜가 너희의 사랑을 지배해야 한다. 너희의 휘발유(가스) 탱크(너희의 마음)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하지만, 지혜가 운전석에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사랑이 어리석은 일을 많이 할 수 있다. 너희의 사랑은 "분별력(지혜)이 풍부해야 한다"(빌1:9). 절대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무례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 인사하지 않는 사람에게 인사해라. 모든 사람에게 항상 정중하게 말해라(벧전2:17에서 말한 대로). 너희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바알세불"이라고 불렀을 때, 예수님은 그들을 용서하셨다(마12,24,32). 그들이 그분을 법정으로 끌고 가서 그곳에서 거짓으로 고발했을 때, 그분은 그들을 위협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일을 아버지께 맡기셨다(벧전2:23). 우리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바리새인이 너희를 고발한다면(혹은 너희를 법정으로 데려가기도 한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해라: "너희는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사람들이 너희를 법정으로 끌고 갈 것이다......그러나 너희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그때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실 것이다(그래서 거기에서 침묵할 필요가 없다!)....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모든 것이 드러날 것이다......그러나 모든 사람을 사랑하여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때가 이르리니 너희를 죽이는 자들이 자기가 하나님을 섬기는 줄 생각하리라"(마10:16- 30; 마24:9-13; 요16:2).
따라서 항상:
(1)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고
(2) 다른 사람에 대한 지혜로운 사랑에 항상 뿌리를 내리고 기반을 두어야 한다.
기독교 집단의 모든 그룹은 성경을 들고 "우리가 옳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라고 말한다. 그들 중 누가 옳은가? 나는 주님으로부터 분명한 대답을 받았다: "항상 진리를 말하는 사람들(그것이 그들에게 불리할지라도)과 항상 다른 사람에 대한 지혜로운 사랑을 하는 사람들(즉, 결코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해를 끼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들)과 하나님은 함께하신다."
너희들 모두가 항상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는 삶을 살기 바란다. 그것은 바로 지금 너희들이 공부(또는 일)를 잘하고 그리스도인들이 올바른 삶과 타인에 대한 이타적인 사랑으로 모든 분야에서 잘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너희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있단다.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너희에게 온갖 은혜가 넘치게 하실 수 있다. 그러하므로 너희들은 모든 일에 언제나, 쓸 것을 넉넉하게 가지게 되어서, 온갖 선한 일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후9:8)."
우리는 종종 우리가 해야 할 일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 구절은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로 시작한다. 이것이 우리의 주요 강조점이 되어야 한다, 즉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그리고 우리 안에서 하실 수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우리는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CFC에 합류한 많은 사람들은 도로에서 왼쪽으로(세속성) 멀리 벗어나 "차를 몰고" 있었다. 그들은 CFC에 합류했을 때 깨달았고, 길을 돌아가기 위해 핸들을 오른쪽(성결 방향)으로 돌렸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도로에 도착한 후, 도로를 직진하기 위해 '중앙' 위치에 바퀴를 고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계속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고 길을 건너 멀리 오른쪽으로 갔다(율법주의로). 따라서 이제 그들은 좌회전하여 본선 도로로 돌아와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주셨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은혜를 베풀어 그의 모든 뜻을 이루실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은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해라. 너희가 그것을 믿고 그 해결책과 극복할 은혜를 구한다면 너희의 미래는 영광스러울 것이다.
두려움
사탄의 주요 무기 중 하나는 "두려움"이다. 그는 그것을 끊임없이 사용한다. 신자가 다른 사람을 겁주거나 위협하려고 할 때, 그들은 사탄의 무기고에서 무기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무의식적이지만), 사탄과 교제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움의 영을 주시지 않는다"(딤후1:7). 두려움은 항상 사탄의 무기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사용하는 위협과 겁을 주는 전술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런 사람들은 스스로를 '신자'라고 부르더라도, 모두 사탄의 대리인이다. 이것은 우리가 평생 배워야 할 교훈이다.
우리는 사람들을 "겁먹게"하는 방식으로 설교하지도 말아야 한다. 사람들에게 지옥에 대해 경고하는 것과 그들을 겁주려고 하는 것은 다르다. 예수님은 아무도 겁을 주려고 한 적이 없다. 우리는 또한 여러 구절을 인용하여 우리를 죄책감과 정죄감에 빠지게 하는 설교자들에게 결코 겁을 먹어서는 안 된다. 설교자는 성도들이 교회를 떠나거나 십일조를 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고 그들을 위협한다. 이것들은 모두 사탄의 책략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냄새를 빨리 맡게 되는 것"이 중요하다(사11:3 직역). 경찰견이 범죄자의 냄새를 맡는 것처럼, 많은 도로가 교차하는 곳에서도, 성령은 우리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민감하게 되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많은 목소리를 듣는 모든 교차점에서, 어느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인지 알게 될 것이다. 이 영역에서 너희 모두가 빨리 냄새를 맡을 수 있기를 바란다. 너희는 죄와 부패가 도처에 있는 악한 땅에 살고 있다. 자신을 순수하게 지켜라.
기도 - 양방향 커뮤니케이션
주님은 남편이 아내를 깊이 사랑하고 그녀와 대화하기를 원하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과 교제하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내 비둘기......네 목소리를 듣게 하라, 네 목소리가 감미로우니......"(아2:14)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그분이 우리가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이유이다. 기도는 전화에서와 같이 듣기와 말하기의 양방향 문제이다. 상대방이 너희보다 훨씬 더 경건하다면, 너희는 확실히 듣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것이다. 그렇더라도, 너희가 그분께 너희의 필요를 말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너희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분은 어떤 경우에도 너희의 필요를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차를 운전할 때, 사무실에서 일할 때, 일이 잘못될 때,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날 때든, 언제나 마음의 귀는 열려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분은 그분의 자녀들이 무엇을 구하는 것을 듣기를 좋아하시는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물질적인 것을 하나님께 구할 수 있을까? 물론이다. 사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심지어 "우리 죄에 대한 용서......" 그리고 "악에서 구원......"을 구하기 전에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가르치셨다. 그것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영적으로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현실적이다. 그분은 너희가 일용할 양식을 얻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그분은 일용할 양식을 얻을 수 있도록 취직하기 위해, 대학 시절에 좋은 성적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일단 일을 시작하면 건강해야 하고, 일을 하러 가기 위해서 차도 좋은 상태여야 한다는 것을 아신다. 그래서 너희가 요청할 수 있는, 땅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질적인 것들, 즉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와 관련된 것들이 많이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기도에서 "우리"와 "우리의"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며, 우리 죄를 용서하여주시고, 우리를 악에서 구하소서.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궁핍한 이웃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
사탄은 패배한 원수다
여기 너희가 항상 명심해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다: 구약의 모든 인용문은 그것을 무효로 한 신약의 진리가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린 양을 죽이는 일은 이미 우리를 위해 죽임을 당한 하나님의 어린양에 의해 무효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다니엘이 아직 갈보리에서 사탄과 그의 군대가 패배하지 않았을 때 기도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3주 동안(단 10:12,13) 사탄과 (하늘에서) 충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사탄이 패한 십자가의 이후에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3주 동안 그와 씨름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승리 위에 서 있다. 이것은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이 가르치는 진리이다.
골2:14,15과 히2:14에서 우리는 사탄이 십자가에서 패배(멸망되지 않고 무장해제)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읽는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 온전히 복종(우리자신을 내어 드림)한 다음, 그리스도의 승리 위에 서서 예수 이름으로 사탄을 대적한다. 그러면 사탄이 곧 우리에게서 도망할 것이다(약4:7). 그는 초속 186,000마일(또는 300,000킬로미터)인 번개의 속도로 우리에게서 달아날 것이다 - 왜냐하면 예수님이 "사탄이 번개 같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눅10:18)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것은 야고보서 4:7에 대한 성경 퀴즈에서 물어볼 수 있는 좋은 질문이다. "사탄은 우리가 그를 대적할 때 어느 속도로 우리에게서 도망합니까?")
그러나 만일 너희의 삶이 정기적으로 죄를 자백함으로써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해지지 않는다면 (너희의 양심에 가책을 받을 때), 그때 너희는 사탄을 이길 힘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의 죄를 주님께 고백함으로 너희의 양심을 깨끗하게 유지해라.
하나님은 사랑의 아버지이시다. 너희는 항상 그분 안에서 너희의 안전을 찾아야 한다. 이 땅에 최고의 아버지는 하나님의 희미한 모형에 불과하다. 그래서 하나님이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상상할 수 있다. 너희는 항상 그분의 사랑 안에서 안전하며 그에 대한 보답으로 그분을 깊이 사랑해야 한다. 그분을 불쾌하시게 하는 일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너희가 넘어지면(때때로 그러는 것처럼), 즉시 회개하고 슬픔 중에 그분께 돌아가고, 예수님의 피로 항상 마음을 청결하게 유지해라.
많은 은사주의 설교자들은 물질적인 것들과 병 고침, 귀신 쫓아내기에 대한 믿음의 설교에 관심을 쏟고, 사람들이 그들에게 돈을 주도록 압력을 가한다. 어떤 다른 설교자들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게 하기보다는 기독교인들을 위로하는 심리학적 방법에 중점을 둔다. 그러므로 요즘 만연한 '내면의 치유', '긍정의 힘', '세대의 저주' 등에 대한 그릇된 가르침을 피하도록 주의하라. 영적인 문제에서는 신약성경의 언어를 고수하는 것이 가장 좋다.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면 속지 않을 것이다.
인간 이성의 한계
여기 인도에서 우리와 함께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한 최신 정보를 너희에게 제공한다: 1975년(CFC가 탄생한 때) 이후 우리에게 덮어씌운 "이단" 혐의는 지금도 계속 들리지만 그렇게 자주는 아니다. 지난 2000년 동안 하나님의 모든 선지자들은 "이단자"라고 불렸다 - 처음에는 예수님 자신이셨고; 그 다음에는 바울, 마틴 루터, 존 웨슬리 등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마5:11,12 참조). 그들은 일생 동안 모두 이단자로 불렸지만 죽은 후에는 선지자로 인정받았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처지에 있다!! 그러나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며 계속된다 - 그리고 결코 지루한 순간이 없다! 내가 자주 말했듯이 "경건한 사람의 삶은 흥미진진하다"!(잠14:14 - Living). 주님을 찬양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를 선한 사람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그가 사람들을 미혹하게 하는 자라 하더라"(요7:12).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사람들과 관련하여 동일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바울은 벨릭스에게 "나는 각하께 이 사실을 고백합니다,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것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고...... 성경에 따른 모든 것을 믿습니다(행24:14)" 라고 말했다. 우리는 같은 것을 말한다.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모든 것을 담대하게 전파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성경이 명확하게 가르치지 않는 것을 가르치지 않도록 주의한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 의지에 관한 논쟁은 20세기 동안 계속되어 왔지만, 특히 지난 4세기 동안 칼빈주의자와 알미니안주의자 사이에 있었다. 이것은 인간의 마음이 이 명백한 역설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신자가 영원히 떨어지지 않도록 (어미 고양이가 새끼 고양이를 입에 물고 있는 것처럼) 신자를 영원히 붙잡아 두시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가르친다. 다른 이들은 (어미에게 달라붙는 아기 원숭이처럼) 하나님을 붙잡아야 하는 사람은 신자라고 말한다. 사실 이 두 진리는 모순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이다. 그것들은 우리가 인간의 이성에 따라 생각하기 때문에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영원히 안전하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불쾌하시게 하는 일을 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해칠까 봐 두려워하지 않는다(우리는 영원히 그분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분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해칠까 두려워한다! 아무도 우리를 하나님의 손에서 빼낼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뛰어나갈 수 있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회심하자마자 로봇이 된다는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다!!
우리 이성의 이러한 한계는 예수님이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지 여부에 대한 논쟁에서도 볼 수 있다. 내가 말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수님이 죄를 지을 수 있는가? 하나님으로서는 확실히 아니다. 그러나 사람으로서, 확실히 그렇다.
이것을 "이 경건의 비밀은 위대하도다, 곧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딤전 3:16)이라고 한다.
하나님으로서, 그분은 시험을 받을 수도 없었다(하나님은 시험을 받을 수 없으시다 - 야고보서 1:13). 그러나 예수님은 시험을 받으셨다(마 4:1-10) - 그리고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다(히 4:15). 그렇다면, 그는 인간으로서 죄를 지을 수 있었는가? 예. 그렇지 않았다면, 그분은 우리처럼 시험을 받지 않았다 - 우리가 시험을 받을 때, 우리는 확실히 죄를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분의 승리는 우리가 그분이 죄를 지을 수 있음을 볼 때 실제로 훨씬 더 대단하시다. 비록 그분은 악한 사람들과 귀신들과 온갖 종류의 유혹들에게 둘러싸여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33년 반 동안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이나 태도나 동기나 다른 어떤 방식으로든 죄를 짓지 않으셨다. 우리는 단 하루라도 우리자신을 순수하게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안다. 예수님은 33년 반 동안 완전히 순결하게 사셨다!! 얼마나 강력하고 일관된 승리였는가 - 그분이 거룩함을 전혀 애쓰지 않고 하나님께 건네드리는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하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을 때 자신의 신성을 포기하셨는가? 아니. 물론 아니다! 많은 사람의 예배를 받으셨고,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 그분은 오직 하나님으로서만 이것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분은 지상에 계실 때,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위해 하나님으로 자신의 자원을 사용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우리가 가진 자원만 가지고 사람으로 살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인간으로서 우리에게 모범이요 앞서 달려가신분이시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에게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 날마다 나의 본을 좇으라)"(누가복음 9:23)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이유이다. 33년 반 동안 그분은 매일 자기를 부인하셨다.
개는 사람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이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낮추고 우리 인간 지성의 작은 컵으로 하나님의 지혜의 바다를 완전히 담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현명하다.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본으로 삼고 일상생활에서 그분을 따를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 - 따라서 우리가 시험을 받을 때마다 "예수님께서 이기신 것 같이 이겨라"(계 3:21). 주님을 찬양합니다! 어리석은 생각으로 이것을 추리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파헤치는 혼란의 구덩이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경건한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은 이 진리를 기뻐할 것이다 - 설명할 수 없어도 이기는 삶의 현실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견디기
우리는 사람들이 사랑이 식어지고 서로 배반(형제가 형제를 대적)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큰 속임수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 안에서 참고 견디어야 할 뿐만 아니라, 항상 다툼과 논쟁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피하는 것에도 지혜로워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누구에게도 악을 행하지 않을 것이며 인간과 결코 싸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잘못된 교리를 폭로할 것이다.
우리는 또한 "모든 불행한 자의 권리를 위해 입을 열어야 하며, 고통 당하고 궁핍한 자의 권리를 옹호해야 한다"(잠31:8,9). 다윗은 아히도벨의 모략을 통해 반역한 압살롬의 진영에 혼란을 일으키기를 기도했고(삼하15:31),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셨다(삼하17:23).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자신을 해치는 자들을 용서해 주시기를 기도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자들을 무자비하게 정죄하셨다(마태복음 23장에서 바리새인들을 정죄하신 것을 보라).
이제 슬기로운 처녀들의 비유에 대해 말씀이다:
일단 우리가 비유에 대한 한 가지 해석을 듣고 나면, 우리의 마음이 그 해석에 너무 고정되어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 비유에 대한 다른 해석을 결코 주실 수 없게 되기 쉽다. 얼마 전에 나는 주님께 이 고정관념을 깨고, 비유를 문맥 안에서 이해하기를 간구했다 - 이것은 모든 비유를 해석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마태복음 24장 12절에서, 예수님은 말세에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질 것이되, 끝까지 견디는 자(그들의 사랑이 식어지지 않고)는 구원을 얻으리라고(혹은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24:13). 그리고 나서 등불이 꺼진 다섯 처녀와, 끝까지 견디고 집에 들어간 다섯 처녀의 비유를 말씀하셨다(마25장). 그러므로 그가 말한 기름의 한 가지 의미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키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신랑이 올 때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려면 하나님의 사랑으로 끝까지 견디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등불을 끝까지 타오르게 할 "여분의 기름 한 병"이 있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은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했다"고 말씀하셨다(요15:25). 그러나 그분은 그 보답으로 이유 없이 그들을 사랑하셨다. 그분의 본을 따르고 끝까지 사랑하자. 그렇지 않으면 "자아에 대한 죽음"은 공허한 교리가 될 수 있다 - 그것에 대해 설교하는 많은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십자가의 길을 걷는다는 말을 하는 많은 '신자들'이 사랑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인간다운 품위와 예절도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소위 "순수한 교리"를 자랑하지만, 그들의 삶은 악취를 풍긴다. 우리의 교리가 참으로 순수하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의 향기가 우리 삶에서 발산될 것이다.
19세기 퀘이커 교도 선교사인, 스테판 그렐렛(Stephen Grellet)은 "나는 이 세상을 한 번만 지나갈 것을 예상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할 수 있는 선한 일이나, 어떤 동료에게 보여줄 수 있는 모든 친절은 지금 하겠습니다. 미루거나 소홀히 하지 않겠습니다 - 나는 다시는 이 길을 지나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들이 그 조언을 따르도록 권장한다.
우리의 반응은 우리의 영적 수준을 나타낸다
성경은 "악인은 요동하는 바다와 같아서 잠잠할 줄 모르고, 항상 진흙과 더러운 것을 토해 낼 뿐이다"고 말한다(바닥에는 진흙과 더러운 것이 끝없이 많기 때문이다 - 사57:20). 그리고 언제 그런 바다가 그 모든 더러운 것을 다시 토해내기 시작할지 장담할 수 없다. 그런 사람들은 완전히 예측할 수 없다. 바다는 달과 같은 자연의 계절적 힘의 영향을 받으며, 그리고 또한 그러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화를 내며 욕설을 퍼부은 다음 한동안 조용히 있다. 그런 다음 갑자기, 그들은 또 다른 쓰레기더미를 토해낸다!
잠언 26장 4절은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 너희도 그와 같을까 하노라"고 했다. 그러나 다음 구절에서 말하듯이 우리가 대답해야 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각 사람이 어떤 유형의 어리석은 사람인지 분별해야 한다. 원통해 하고 화내는 사람은 1부류에 속하며 절대 대답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내가 따르는 하나의 지침이다. 길가에서 짖는 개들을 무시하고 그 개들 근처에는 가지 말아라, 우리는 그런 인간들도 피해야 한다. 그들이 마음껏 짖도록 내버려 두어라. 그러나 우리가 대답해야 할 어리석은 자는(잠26:5), 진리를 알고자 갈망하는 무지하고 진실한 어리석은 자들이다.
우리의 행동은 우리의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중요한 지표이지만, 우리가 영적으로 서 있는 위치를 발견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한 우리의 반응에 의해 더 많이 나타난다. 나를 반대하는 많은 비판에 대한 나의 반응으로 나 자신을 평가한다. (나는 그들에게 결코 대답하지 않는다). 예수께서 살아 계실 때 직면하신 반대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우리가 따라가야 할 모범이 된다.
우리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매년 우리는 말과 편지를 쓰는 방식에서 더 현명해진다 - 그러나 지혜의 성장은 우리가 빛 가운데 걸으면 평생 동안 계속해서 일어날 것이다. 그래서 주어진 시간에, 우리는 그 순간에 우리가 가진 지혜에 따라서만 일을 할 수 있다.
성숙도와 안정성은 시간이 걸린다
나는 압박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한다 - 왜냐하면 우리는 그러한 상황에서 주님을 더 잘 알게 되고 따라서 삶을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코 넘어지거나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안정된 그리스도인의 삶에 이르려면 시간과 성숙이 필요하다.
나는 19살 반에 내 삶을 주님께 바쳤다. 그러나 나는 그 후에도 몇 번이고 넘어지고 일어났다. 16년 후, 내가 성령 충만한 삶을 살고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 형편은 비교적 수월해졌다.
Miles Stanford는 그의 저서인 영적 성장의 원리(Principles of Spiritual Growth)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하나님께서 성숙하게 하시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신 몇몇 친숙한 신자들의 이름을 생각해 보십시오 - D.L.Moody(디.엘.무디), Jonathan Goforth(조나단 고포스), George Mueller(죠지 뮬러), Hudson Taylor(허드슨 테일러), Charles Trumbull(찰스 트럼블), F.B.Meyer(에프.비.마이어), Andrew Murray(앤드류 머레이), Frances Havergal(프란시스 하버걸), Madam Guyon(마담 귀용), John Hyde(존 하이드), Robert McCheyne(로버트 맥체인), Amy Carmichael(에이미 카마이클), Evans Hopkins(에반스 홉킨스)와 같은 사람들.
그들이 그들의 생명으로써 주 예수님을 알고
그리고 그분을 위해 일하려고 애쓰는 것을 멈추기까지
그리고 그분이 그들의 모든 것이 되게 하고
그리고 그들을 통해 그분의 일을 하시기를 허용하기 시작하기까지
그들이 평생의 사역을 시작한지
이 사람들은 평균적으로15년이 걸렸다."
그러니 용기를 내라.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성장과 안정은 시간이 걸린다.
나는 모든 시련이 압력이 증가할 때 내가 사랑을 유지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시험임을 보았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가능하게 하므로, 끝까지 견딜 계획이다. 우리가 통과하는 모든 테스트는 더 높은 등급으로 승격될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이 그분을 죽일 때까지 사랑 안에서 시험을 받으셨다. 그분은 끝까지 그들을 사랑하다가 죽었다. 이것이 그분이 우리가 걸을 수 있도록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살아 있는 길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그렇게 살 수 있다. 악마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다"고 말한다. 악마의 거짓말을 절대 인정하지 말아라. 우리는 끝까지 이겨내고 사랑할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여러 번 주님을 실망시켰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고 이제 나에게 실패하는 남녀들을 위한 사역을 주셨다.
그러므로 너희가 아직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해서 사탄이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너희는 하루 안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절제는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자연스럽게 된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더 어렵다. 사실 너희는 너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절제심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날 세계의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너희 모두가 학교를 중퇴한 실업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더 훈련된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노력해라.
다음과 같은 고백을 자주 해라. 왜냐하면 너희가 믿든 안 믿든, 너희가 훈련을 받든 안 받든, 성공했든 실패했든 상관없이 그것들은 항상 진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의 보좌에서 세상을 다스리시며...
예수님은 나의 모든 죄를 위해 죽으시고 모든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사탄은 십자가에서 패배했습니다....
나를 위해 다시 오시는 예수님....
이 세상은 나의 영원한 집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탄을 내 발 아래 짓밟으시리라"(롬16:20).
엄마에 대한 감사
나는 너희 모두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만 어머니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는 일부 아이들과 달리 어머니가 살아있는 동안 감사하는 법을 배웠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정말 기쁘다. 엄마가 너희들 넷을 위해 자신의 경력을 포함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신을 부인하고 얼마나 고통을 겪었는지 너희들 중 아무도 모를 것이다. 나는 그녀의 희생을 조금 알고 있다. 그러나 그녀가 주님의 종인 나와 결혼했기 때문에 그녀가 은밀히 희생하고 고통을 겪은 모든 것이 어느 정도인지 나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했고, 그래서 그녀는 그녀가 희생하고 고통 받은 모든 것에 대해 언젠가 그녀의 상을 받게 될 것이다.
너희는 엄마 덕분에 지금의 너희가 있는 것이다:
- 영적으로, 엄마가 너희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했기 때문이다.
- 지적으로, 엄마는 너희 모두를 공부시키려고 끈질기게 노력했기 때문에, 심지어 너희가 모든 과목을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되는 방법과 수단을 고안해냈다.
- 육체적으로, 엄마가 너희에게 최고의 음식과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엄마를 주신 하나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나는 그녀에게 점점 더 감사하는 법을 배웠다.
경건한 삶을 위한 권고
몇 가지 실용적인 권고사항을 알려주겠다:
(1) 첫번째: 빛을 사랑하고 모든 위선과 연기를 미워해라. 너희는 너희의 영적 상태에 대해 모든 사람을 크게 속일 수 있지만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다. 사람들이 너희를 보는 시각이 아니라, 하나님이 너희를 보시는 시각으로 항상 너희 자신을 볼 수 있게 해주시기를 바란다.
(2) 둘째: 소녀들과의 모든 신체적 접촉을 피해라. 악수하고 거기에서 멈추라. 특히 늦은 저녁에 어떤 여자와도 단둘이 외출하지 마라. 그리고 너희가 그녀를 장래의 아내로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지 않다면, 어떤 소녀도 아무"생각"(너희의 말로 인해서)"을 갖지 못하게 해라. 그것은 그녀에게 공평하지 않다. 만일 너희 모두가 적어도 구약의 도덕적 순결에 대한 기준에 따라 생활한다면 - 소녀들로부터 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 그리고 바울이 45세의 헌신한 디모데에게 말한 대로 "청춘의 정욕을 피한다면" 그 자체로 좋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새언약의 기준에까지 밀고 나가서 "눈으로 보고 음욕을 품는" 죄의 전투 영역에서 충실히 싸우기를 촉구한다. 그러나 이것은 일생에 걸친 싸움이며 여성적이지 않은 모든 남자에게 매우 힘든 싸움이다(너희들 중 아무도 여성스럽지 않다!). 이 전쟁을 전심으로 싸울 수 있도록 주님께서 이 미혼의 시대에 너희에게 은혜를 주시기를 빈다. 이것을 힘든 싸움으로 인식하고,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고, 슬퍼하며, 하나님의 권능을 구하는 사람은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고통받는 소녀들을 동정하는 것을 조심해라. 나는 "방황하는 소녀들"을 도우려 했던 젊은이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았다. 일부는 곤경에 처한 "척"하는 소녀들에게 속았다. 그러한 경우에 지혜롭지 못한 인간의 동정은 항상 내리막의 첫걸음이 된다. 일부 소녀들은 소년들을 "사로잡기" 위해 먹거나 마실 것을 소년들에게 주기까지 했다. 빛 가운데 행하며 예수님의 피로 깨끗해진 하나님의 자녀는 그러한 '사랑의 독약'에 결코 영향을 받을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어둠 속을 걷는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므로 가장 안전한 길은 항상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이다. 다른 이들은 '사랑의 부적'으로 남성을 사로잡아 그것을 남자들에게 주고 그들의 몸에 지니도록 한다.
어떤 남자들은 한 소녀를 방문하고 나서 그녀와 함께 방이나 집에 단둘이 있는 것을 발견한다 - 그리고 그들은 요셉처럼 도망치지 않는다. 그 후 소녀는 임신을 하게 되고 그녀는 그 남자를 영원히 붙잡게 된다. 여자들은 이런 남자들을 잡으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러나 그런 남자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평생을 망친다. 나는 너희 모두에게 경고하고 싶다: 조심 해라. 다른 사람을 돕고 싶다면, 도움이 필요한 여성이 아닌(70세가 넘지 않는 한!), 도움이 필요한 남성만 도와라
(3) 셋째: 영적으로 가난한 자가 되라. 항상 자신의 영적 필요를 인식하고 -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판단에 따라 생활해라. 깨어짐은 진정한 영성의 비밀이다. 이기는 삶을 살 수 없다는 자신의 무능함을 끊임없이 자각하고, 성령 충만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4) 넷째: 매일 10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라. 하루 중 언제라도 그것이 너희의 평범한 일상의 일부가 되도록 해라. 경건한 해설을 받고 말씀을 공부해라. 또는 이 목적으로 나의 성경 연구 테이프를 사용해라. 매일 잠언의 몇 구절을 읽어라. 훈련 받은 말씀공부가 젊은 시절의 많은 재앙에서 나를 구원해 주었다.
(5) 다섯째: 어디서나 주님을 공경해라. 한 가지 예: 파티를 주최한다면, 기도하고 성경의 짧은 말씀을 나눔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그러한 경우에 기도하거나 말씀을 나눌 때 사과하지 말아라.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신자들은 그들이 주최하는 파티에서 주님을 인정하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참석한 불신자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그들의 파티에서 신자들을 기쁘게 하려고 하지 않는다! 사탄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자녀들보다 담대하다!
음악 및 전임 사역자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음악은 주로 우리 삶의 휴식과 과외 활동의 한 형태이다. 나는 누구도 음악을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음악만을 전담하는 사역을 한 사람은 찾아볼 수 없다.
전임 사역으로서의 기독교 음악은, 음악에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세속 음악가가 많은 돈을 버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서구에서 인기가 있다. 그리고 그곳의 기독교인들 사이에 부유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기독교 음악가들도 음악 사역을 통해 많은 돈을 벌 수 있게 한다. 이 관행은 불행히도 현재 인도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도 하나님과 돈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인은 설교나 음악적 능력으로 금전적 이익을 구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생계를 위해 다른 사람의 선물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 사역은 우리가 무엇보다도 먼저 주님께 드리고 그 다음에는 그분의 백성에게 드리는 자원 봉사여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사역을 모든 사람들에게(특히 지불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값없이 제공해야 하며, 다른 수단으로 우리 자신을 부양해야 한다. 이것이 CFC가 시작된 이래로 내가 해온 일이며, 이것이 내가 인도의 마을에서 정말 도움이 필요한 가난한 성도들을 방문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유급 설교자와 음악가는 부자만 섬길 수 있다. 예수님은 그렇게 사역하지 않으셨다.
(사두처럼; 힌두교 성자) 세속적인 안락함을 희생하는 것이 신을 섬기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이교도 개념이다. 전임 사역으로 하나님을 섬기려면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주어진 돈(금액이 적든 많든)으로 생활하기 때문이다. 아무도 스스로 그러한 소명을 선택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일꾼으로 특별히 부르심을 받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 주는 돈을 받을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돈을 훔치는 것과 같으며 -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그런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군대에서 먼저 복무하도록 선택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군대에서 급여를 받을 수 없다.
더욱이, 기독교 사역에는 너무나 많은 압력이 있어서, 하나님의 분명한 부르심이 없으면 타협하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다. 나의 경우에는,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줄을 내가 줄곧 알지 못하였더라면, 나는 오래 전에 "기도 편지를 통해 돈을 구걸하는 것"을 통해서나(특히 가족의 필요가 증가할 때, 재정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또는 내 메시지의 타협을 통해서(내가 내 메시지 때문에 인도의 모든 기독교 집단으로부터 거절을 당했을 때), 또는 낙담을 통해서(다른 형태의 반대에 직면했을 때) "무너졌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모든 상황을 통해 나를 보호하셨다 - 그것도 "내 머리를 물 위에 내미는 것(간신히 생존)"이 아닌, "나로 물 위를 걷게 하셨다(승리하여)". 나보다 나은 사람들이 수렁에 빠졌기 때문에, 나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바친다. 그래서 전임 기독교 사역이 이 세상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사역이라고 굳게 믿고 있지만, 하나님의 분명한 부르심이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 보시기에 그곳에 들어가 성공할 수 없다. 우리 주변의 기독교 집단에는 이것을 증명할 충분한 증거가 있다.
히브리서 5장 4,5절(Living)은 "아무나 (하나님 섬김을) 하고 싶다고 해서 취하지 못하며. 오직 아론과 같이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취할 수 있느니라.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그분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부르심 없이 우리가 어찌 하나님의 일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3중 울타리
우리는 많은 것에 대한 권리가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분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므로, 그분의 종들은 그들의 권리를 위해 싸우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경건한 사람들은 싸움을 하는 대신 자신의 권리를 포기한다. 아브라함은 롯과의 싸움을 거부하고 그의 권리를 포기했다(창13장). 롯은 자신을 위해 즉시 소돔을 차지하고 모든 것을 잃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선택하시도록 했고 - 그래서 그의 후손들은 가나안 땅 전체를 소유하게 되었다. 이삭은 또한 그랄의 목자들과 싸우기를 거부하고 그가 판 우물을 그들이 빼앗아 가도록 허락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게 더 좋은 곳을 주셨고 - 주변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심을 보기 시작했다(창26:17-30).
어느 날, 우리는 온순한 자(온유한 자)가 온 땅을 기업으로 받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마5:5).
어떤 사람들은 사탄에 대해 편집증적이어서 어디에서나 사탄을 보는 것 같다.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나는 사탄이 속박, 혼란, 불결 및 다툼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나는 또한 예수의 이름으로 저항할 때 사탄이 견딜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는 문자 그대로 도망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계략을 알지 못하거나 우리가 그를 대적하지 아니하면, 그는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사탄은 지금까지 우리 가족을 상대로 성공한 적이 없으며 - 앞으로도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1) 나 (2) 가족 그리고 (3) 나의 재산과 재정(욥 1:10 참조) 주위에 3중 울타리를 두셨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사탄이 우리를 공격한 모든 경우에, 하나님은 사탄에게 역전을 일으키고 그의 계획을 좌절시켰다. 우리는 살아있는 한 계속 사탄을 대적할 것이며 - 하나님은 사탄의 계획을 계속해서 좌절시키실 것이다. 어느 날 주님이 오실 때, 오늘 너희가 알지 못할 수 있는(고전 4:5), 우리가 너희 모두를 위해 싸운 전쟁을 보게 될 것이다(엡6:12).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얼마나 많이 너희를 보호하셨고 몇 번이나 너희를 구원하셨는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너희들 모두가 전심으로 주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사탄을 이기고, 너희들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완전한 계획 안에서 살기를 기도한다. 너희가 어디에 사는지는 나에게 중요하지 않다. 최고의 장소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중심에 두는 것이다.
나는 너희 모두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올바른 대학에 갔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너희가 그 대학에 입학하기 전에 너희 각자를 위해 특별히 기도했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 각자가 집을 떠난 후에 장성한 사람이 된 것을 본다. 그리고 주님은 여러 해 동안 너희를 보호하셨다. 너희는 기적적으로 사고로부터 보호되었다. 너희는 또한 너희가 잘 알지 못하는 끔찍한 악으로부터 구원받고 보호받았다. 또한 너희가 교회에서 활동하며 주님을 섬기며 많은 이들에게 축복이 되었다. 우리는 너희들을 자랑스러워 한다. CFC의 신도들은 너희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 드린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이 갈보리에서 너희를 위해 하신 일에 대해 예수님께 감사를 표해라 - 희생과 자기부인, 봉사의 삶을 삶으로써.
끊임없는 전투
나는 너희 모두가 더 이상 영적인 아기가 아니라, 성숙해 가는 것을 보게 되어 기쁘다. 나는 항상 너희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형제가 되기를 원했다 - 우리는 영원히 형제가 될 것이다. 우리가 함께 나눈 모든 토론은 성숙하고 건전했으며, (중요하지 않은 문제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더라도 여전히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를 지지한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이것은 정말로 너희가 성숙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성적인 영역에서, 특히 생각하고 눈으로(영화와 잡지) 보는 것과 싸우도록 너희들 모두를 격려하겠다. 결코 이 영역에서 전투를 포기하지 마라. 최소 60세가 될 때까지 이 전투를 벌이게 될 것이다, 더 길지는 않을 것이다. 다윗은 52살에 밧세바와 죄를 지었다. 그가 눈으로 보는 것에 부주의했을 때 그의 타락이 시작되었다. 지금의 너희들처럼, 이 전투는 젊은 시절의 나에게도 마찬가지로 강력했다. 하지만 외적으로, 내가 살았던 환경이 지금 너희가 살고 있는 환경만큼 폭발적으로 표출하지 않았기 때문에 너희의 전투는 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너희가 이것을 극복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은혜를 주실 것이다 - 마지막까지. 만약 넘어지면 - 일어나서 계속 싸워라. 너희가 매일의 이기는 자가 아니더라도,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살아 남아라. 그러면 언젠가는, 이기는 자가 되어 승리를 거두고 천국으로 항해할 것이다.
시편 112편은 Living Bible에서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의역되어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축복을 받습니다. 그 계명을 행하기를 기뻐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의 자녀들은 어디에서나 존경 받을 것입니다. 선한 사람들의 아들들은 특별한 유산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부자가 될 것이며 그의 선행은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어두움이 그를 덮칠 때 빛이 쏟아져 들어올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친절하고 자비롭습니다. 자신의 사업을 공정하게 수행하는 관대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잘 됩니다. 그런 사람은 악한 상황에 굴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에 대한 하나님의 끊임없는 보살핌은 그것을 보는 모든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것입니다. 그는 나쁜 소식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무슨 일이 일어날지 두려워하며 살지 않습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그를 돌보실 것을 마음으로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고 침착하게 적을 상대할 수 있습니다. 그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베풉니다. 그의 행적은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영향력과 명예를 가질 것입니다.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보고 화를 낼 것입니다. 그들은 분노하여 이를 갈고 물러나며 그들의 희망이 좌절될 것입니다.
개인 재정 관리
재정적 자유는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 어디든 더 쉽게 갈 수 있게 해주며, 또한 잠언 6장에서 미래를 위해 저축하기 위해 개미에게서 배우는 것에 관한 가르침과 그리고 예수님의 비유에서 자신의 달란트를 투자하여 10배나 더 많이 번 사람(1000% 증가)과 두 번째로 좋은 방법은 은행에 예금하고 이자를 받는 것(눅19:16, 23)이라는 주인의 제안에도 잘 맞는 것 같다.
주님의 일을 위해 약간의 돈을 주기로 결정할 때마다, 부유한 목회자와 교회와 조직에 주지 말고 인도 마을에 있는 가난한 CFC 교회에 주어라.
너희는 또한 지금 바로 저축 습관을 들여야 한다. 이를 돕기 위해, 처음에는 모든 주요 지출을 기록해야 한다. 그런 다음 매월 말에, 초과 지출한 부분과 줄일 수 있는 부분을 확인할 수 있다. 내 제안은 세금, 임대료 및 자동차 지불금을 공제한 후 매년 순 소득의 최소 25%(또는 그 이상)를 저축하는 것이다. 따라서 비상 상황에 대비할 수 있는 것과 - 나중에 결혼 생활을 시작할 때 사용할 수 있는 것이 된다.
지금 약간의 훈련이 나중에 많은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다. 장기적으로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너희에게 재정적 독립을 줄 것이고 따라서 더 큰 자유를 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5000명을 먹이신 후에 예수님은 "조각을 거두어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고 말씀하셨다(요6:12). 즉, "모든 낭비를 피해라". 결혼하기 전에 재정 관리를 배워야 한다. 그래서 이것을 우선순위로 두어라. 예수님은 돈 관리에 충실한 자들과 충실하지 못한 자들에 대해 많은 비유를 말씀하셨다. 이것은 영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모두 적용된다.
모든 대금을 기한 전에 잘 갚는 습관을 들이고, 연체 대금에 대해 막대한 이자를 내야 하는 신용 카드 부채를 비롯한 어떤 종류의 부채도 지지 않는 것이 좋다. 체크카드만 사용하는 것이 좋다. 신용카드는 비상시에만 사용해라. 이 습관을 조심하지 않으면, 결혼하면 더 많은 비용을 지출하게 되고, 언젠가는 심각한 문제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이것을 이제 그 자체로 생활 방식으로 발전시켜라. 신용카드를 사용할 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지출을 하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하다. 절대로 신용 카드 빚을 지지 마라. 매달 청구서를 지불해라. 자동차 보험료를 지불하는 것처럼 어김없이 그렇게 해라.
매월 저축한 금액의 일정액을 정기예금에 넣어 두어라. "계좌에 없는 돈은 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받은 것을 즉시 다 쓰지 않으셨다. 그렇지 않으면 회계 담당자와 돈 가방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유다가 보관한 돈은 "저축 계좌"였다.
주식 시장에서 투기는 매우 위험하므로 권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평판이 좋은 회사에 대한 장기 투자는 좋다. 그것이 내가 수년 전에 했던 일이다 - 그리고 나는 그것으로부터 몇 년 동안 우리 가족을 부양했다.
정부에 납부해야 하는 모든 세금을 제때 납부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세금을 피하기 위해 합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조항을 찾아내라 (탈세가 아니라 합법적으로 세금을 피해라). 그러면 세금 부담이 줄어들어 저축을 극대화할 수 있다. 그것이 지혜이다.
내가 말한 것과 균형을 이루기 위해 다음을 추가하겠다: 번영은 하나님의 축복의 증거가 아니며 심지어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중심에 둔다는 표시도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라. 예수님은 머리 둘 곳이 없었고 바울은 먹을 것이 부족할 때도 있었고 몸을 따뜻하게 할 따뜻한 옷도 없을 때가 있었다고 말했다(고후11:27). 그러나 그들보다 더 하나님의 완전한 뜻에 속한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을 주님께 더 가까이 가게 하는 것은 종종 물질적 손실이다. 암, 뱀에 물린 것과 다른 명백히 나쁜 일들이 사람들을 주님께로 이끈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재정적으로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로 영적 성장을 측정해서는 안 된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은 "번영은 구약의 축복이고, 역경은 신약의 축복이다"라고 말했다.
바쁨 - 사탄의 사악한 계략
최근에 사람들이 어떻게 바쁘고, 바쁘고, 바빠질 수 있는지에 대해 읽은 것이 있다.
"사탄은 세계적인 대회를 소집했다. 개회 연설에서 그는 그의 악마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기독교인들이 교회에 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우리는 그들이 그들의 성경을 읽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무언가 다른 일을 할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이 그리스도와 친밀한 관계를 갖지 못하게 할 수 있다. 만일 그들이 예수님과의 그 연결을 얻는다면, 그들을 지배하는 우리의 권력이 무너질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교회에 가고, 근본적인 교리를 갖게 하고, 보수적인 생활 방식을 갖게 하자, 그렇지만 시간을 빼앗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친밀한 경험을 발전시킬 수 없게 하자. 이것이 내가 너희 악마들에게 원하는 일이다. 그들이 구주를 붙잡지 못하도록 주의를 분산시켜라.
그의 악마들은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고 물었다.
사탄이 말했다, '인생의 비 본질적인 일에 바쁘게 해라.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수많은 계획을 발명해라. 소비하고 쓰고 빌리고 빌리도록 유혹해라. 아내들은 일하러 가고 남편은 주 6~7일, 하루 10~12시간 일하게 하여, 그들이 높은 생활 방식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라. 자녀들과 시간을 보내지 못하게 해라. 그들의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머지 않아 그들의 가정은 일의 중압감으로부터 탈출구를 제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마음을 지나치게 자극하여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없도록 해라. 운전할 때마다 음악과 함께 라디오나 카세트 플레이어를 재생하고, 집에서 TV나 비디오 테이프 또는 CD를 계속 재생하도록 유도해라. 그리고 반드시 세계의 모든 상점과 레스토랑에서 끊임없이 음악을 틀도록 해라.
잡지와 신문으로 커피 테이블을 채워라. 하루 24시간 뉴스로 그들의 마음을 두드려라. 광고판으로 운전하는 순간을 침입해라. 스팸메일로 우편함을 가득 채워라: 복권, 통신 판매 카탈로그 그리고 '무료' 제품, 서비스, 거짓 희망을 제공하는 모든 종류의 뉴스레터 및 판촉 행사이다.
그들의 여가 시간에도 그들이 지나치게 하도록 내버려 두어라. 가족 휴가에서 지치고 다음 주에 대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로 돌아오도록 해라. 자연 속에서 산책을 나가게 하지 마라. 대신 놀이 공원, 스포츠 행사, 콘서트 및 영화관에 보내라. 그리고 영적인 교제를 위해 모일 때에는 험담과 잡담을 하여 양심의 가책과 불안정한 감정을 안고 떠나게 해라.
그들이 그리스도를 증거하도록 허락해라. 하지만 그들의 삶은 선한 대의명분으로 가득 차서 그리스도에게서 능력을 구할 시간이 없을 것이다. 곧 그들은 대의를 위하여 그들의 힘으로 일하고 건강과 가족의 화합을 희생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악마들은 그들의 임무를 열심히 수행했다, 모든 곳의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바쁘고, 바쁘고, 바쁘게 해서 여기저기서 서두르게 했다.
악마는 그의 계획에 성공했는가? 너희가 판단해라."
바리새인
고린도후서 3장 6절에는 두 부류의 신자가 언급되어 있다:
(1) 성령의 인도를 받는 자.
(2) 율법(문자)의 노예가 된 사람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많은 시련과 시험을 거쳐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게 되고 그분의 생각과 길을 알게 된 사람이다. 따라서 그들은 영적인 문제에 대해 분별력이 있다.
그러나 율법(문자)의 노예가 된 사람들은 성경만 공부하고 교리를 이해한 자들이다. 그들은 올바른 삶을 살고 있을지 모르지만, 영이 아니라 말씀의 문자로 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 대한 태도가 바리새인의 경향이 있다. 모든 광신적 종교집단의 세력을 만들어 내는 것은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고, 그들이 속한 특정 집단의 교리만 안다. 그들은 단체의 리더가 다양한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했는지 연구하고 그들 자신이 그러한 상황에 있을 때 그들을 모방하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그들(단체의 리더)을 모방하고 (그들이 상상하는 대로) "영적"이 되기 위해 지도자의 행동에 대한 많은 데이터를 축적한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영적으로 되지 않는다. 그들은 더 큰 바리새인이 될 뿐이다.
기독교 집단에는 광신적 종교집단은 아니지만 광신적 종교집단의 성격을 띠는 단체가 있다. 나는 종종 그러한 단체에 대해 너희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경고했다. 그리고 나는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 그렇게 할 것이다 - 왜냐하면 마지막 날에 그러한 단체가 더 많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의 반대
우리 교회가 오랜 세월 동안 겪었던 것처럼, 하나님은 너희가 비난과 미움과 "죄인들의 반대(히12:3)"에 직면하도록 허락하실 것이다. 예수님과 바울, 그리고 기독교 역사상 모든 경건한 사람들이 이 문제에 직면했다. 그래서 너희도 마찬가지이다. 너희가 그 문제에 마주쳤을 때, 예수님처럼 온유해야 한다. 따라서 너희는 언젠가 "완전함"(그리스도를 완전히 닮음)이라는 목표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신자들이 자기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판단 속에 살지 않는 곳에서, 그 결과는 항상 최악의 바리새주의로 가파르게 쇠퇴할 것이다. 너희가 아는 어떤 신도들이 이렇게 쇠퇴하는 모습을 보면, 그런 독선과 '영적인 것에 대한 착각'에서 구원해 주신 주님의 자비에 감사해야 한다. 너희는 그것을 스스로에 대한 엄숙한 경고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 바리새인 중 많은 사람들이 "남의 일에 분주"(벧전4:15-KJV)하고 "자칭 검열관이며 남을 비난하는 자"(약3:1- 더 상세히 설명하면)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들의 발자취를 따르지 말라는 경고로 그들을 모든 사람에게 폭로하신다.
겸손으로 승리하기
모든 죄 중에서 가장 나쁜 것인 바리새주의에 대한 빛 비추임 없이 평생을 산다는 것은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가! 음란한 생각과 분노에 대해 승리하고 나서 독선과 교만에 빠지는 것은 20피트 깊이의 구덩이에서 건짐 받고 2000피트 깊이의 구덩이에 빠지는 것과 같다. 많은 사람들이 2000피트 깊이의 구덩이에 있으면서 20피트 깊이의 구덩이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죄의 승리에 대해 설교하고 있다!
승리의 삶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그것에 대해 겸손하고 우리가 죄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주시는 분이 오직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항상 깨닫는다면 항상 겸손할 것이다.
해군 시절 범선을 타고 항해를 갔을 때, 바람이 많이 불면 배의 용골을 낮추곤 했다. (용골은 강한 바람에 배가 넘어지지 않도록 무게 중심을 낮추기 위해 배 아래를 낮추는 중금속 판이다.) 우리 마음속 깊은 겸손(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음)은 우리 모두가 항상 가져야 하는 용골이어야 한다. 용골을 낮추지 않는 범선은 갑작스러운 돌풍(사람들의 약간의 감탄이나 인정)이 치면 쉽게 넘어진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 용골이 있으면, 우리는 거센 폭풍우가 몰아쳐도 안전하다.
우리가 끊임없이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며 그 결과 끊임없이 우리자신을 판단한다면, 우리는 가장 악한 죄인이나 타락한 자들까지도 멸시하지 않을 것이다 -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우리 자신이 "죄인들 중에 괴수"임을 확신하게 되기 때문이다(딤전1:15). 만일 하나님께서 독선적인 사울을 겸손한 바울로 변화(convert)시키실 수 있다면, (바울처럼) 그분께 복종하여 그분의 전능하신 손 아래 부서지고 겸손해지도록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하실 수 있으시다.
그러면 우리는 "환상이 아닌 거룩함"을 갖게 될 것이다(엡4:24 - JB Philips 의역).
혼적인 힘과 광신자들
광신적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혼적인 힘으로 그들에게 복종하도록 너희를 위협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을 조심해야 한다. 그들이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하는 한 가지 방법은 사람들이 죄를 그들에게 고백하게 하는 것이다! 그들은 탕자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의 단체에 합류하지 않고, 탕자가 노래하고 기뻐 뛰는 것을 참아 볼 수가 없다. 그들의 태도는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형'의 태도와 똑같다. 탕자가 형에게도 죄를 자백하여 형의 자존심을 만족시키라고 요구한다! 그렇지 않으면 탕자는 자백에 동의할 때까지 종의 숙소에서 보호 관찰을 받아야 한다! 이것은 세계의 모든 광신적 종교 집단의 기술이다. 그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회심하지 않은 삶의 실패를 그들에게 고백하게 하여, 광신적 종교 지도자들이, 협박에 대한 두려움을 통해, 그들을 영원히 붙잡을 수 있도록 한다. 공산주의 국가의 비밀 경찰이 사용한 방법을 광신자들이 사용하는 것을 보는 것은 슬픈 일이다! 이것은 100% 악마 같은 것이다. 그런 '형들'에게는 아버지의 마음이 없다(눅15장).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이 어떤 "형님의 집"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집임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이 광신자들은 또한 "그들을 반대하거나 집단을 떠나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나쁜 일이 일어난다"고 말함으로써 겁주어 그들에게 복종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것은 모든 광신적 집단의 오래된 협박이다.
광신자들은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죄책감과 정죄감을 느끼게 하고, 마음이 약한 신자들을 그들에게 무기력하게 의존하게 만든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서 얼마나 놀라운 일을 하고 계시는지 모든 사람에게 이야기하여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확신시켜 불안정한 신자들을 그들의 우리 안으로 끌어들일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그러한 광신자들이 불안정하다는 증거이다. 그러한 모든 광신적 집단을 피해라.
여호와께서 네 목자가 되시면, 네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너를 따르리니 네가 영원히 여호와의 집에 거할 것이다(어떤 바리새인의 종교 집단에도 거하지 아니할 것이다)(시23:6).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베푸신 크나큰 선하심과 자비에 대해 감사드린다.
광신자들은 괴롭히는 자들이다
광신자들은 언제나 괴롭히는 자들이다. 이사야 14장 3-6절(Living)에는 그들에게 적절한 구절이 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슬픔과 두려움, 종살이와 사슬(광신자들의)로부터 안식을 주시는 그 놀라운 날에, 너희가 바벨론 왕(사탄과 그의 광신자 - 대리인들)을 조롱하며 말하기를 `너 괴롭히는 자여, 너희는 끊임없는 분노로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고 그들을 너희의 성난 손아귀에 붙들었다. 너희는 폭정에 무절제 했다. 마침내 주님께서 너희의 사악한 세력을 꺾으셨다.'"
하나님께는 그의 대리자들이 있다(예수님의 겸손과 온유에 참여한 참된 영적 아버지들, 마11:29); 그리고 사탄은 그의 대리자들(어린 신자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려고 애쓰는 바리새인들)을 가지고 있다.
성령의 역사를 속이는 영들을 조심해야 한다. 광신자들의 외적인 모든 선함에 속지 마라. 그들의 핵심에는 바리새주의가 있다. 그리고 모든 광신적 종교 집단이 그렇듯, 일단 그들의 거미줄에 걸리면, 벗어나기 위해서 강한 정신력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광신적 종교집단에 대해 주목해야 할 한 가지는 그들 안에는 좋은 사람들과 좋은 가족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 중 일부는 심지어 복음주의 신자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것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다. 모든 광신적 종교집단에는 현혹된 진실한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현혹된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한 가지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말을 우선시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성경을 정확하게 인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진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 성경을 성경과 비교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들이 길을 잃는 이유이다. 분별력이 없는 신자들은 종종 이러한 광신적 종교집단에 선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속는다. 단체를 테스트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단체의 주요 지도자와 설교자가 독선적인지, 율법주의적인지, 교만한지 확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광신적 종교집단을 식별하는 것이 상당히 쉬워진다. 너희가 그들 가운데 좋은 사람만 본다면, 어리석게도 광신적 종교집단에 가담할 수 있다!
광신주의의 불균형한 가르침
대부분의 광신적 종교집단들은 그들에게 오는 사람들에게 누가복음 14장 26절을 인용한다,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고 말한다: "누구든지 내게로 오는 사람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식이나, 형제나 자매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전체 구절을 인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을 부모에게서 멀어지게 하기 위해 "아버지와 어머니를 미워하는"부분만 인용한다. 그들 중 누군가가 너희에게 그런 수법을 사용한다면, 예수님께서 같은 구절에서 그들은 또한 그들의 아내와 자녀들과 그들의 집단에 있는 형제 자매들을 미워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고 그들에게 말해라. 그들 중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는 그들의 위선을 드러낼 것이다. 진정한 제자도는 부모, 아내, 자녀 및 자기 집단 안에 있는 동료 신자들보다 그리스도를 첫째 자리에 두는 것이다.
이것은 광신적 종교집단이 성경 구절의 일부만 인용하고 사람들을 잘못 인도하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의 한 예일 뿐이다. 그런 사람들을 조심하고 그들에게 속지 말아라. 비록 너희가 어리지만, 오랜 세월 동안 방갈로르 교회에서 균형 잡힌 하나님 말씀의 가르침을 받아왔다. 항상 염두에 두고 있어라.
광신자들은 그리스도보다 사람을 더 따른다
광신자들은 그들의 지도자에게 큰 헌신을 하고 맹목적으로 그를 따른다. 지도자의 가르침은 성경보다 더 중요하다.
우리의 충성은 결코 한 집단이나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안 되며 - 오직 주님 그분과 그리스도의 몸 전체에 대해서만 충성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과의 교제는 교리나 사람에 대한 애착을 통해서가 아니라 항상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에스겔 21장 27절(Living Bible)은 "하나님은 통치하기에 합당한 분이 오실 때까지 계속해서 모든 것을 뒤엎으신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주권을 받아들이지 않고, 어떤 인간 지도자를 하나님의 아들과 동등한 받침대에 두거나 돈이나 직업 같은 피조물을 창조주보다 우선시하는 신자에게 하나님께서 하실 전복이다 - 이 모든 것은 피조물과 사물을 우상 숭배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광신적 종교집단과 밀접하게 접촉하는 것은 전기가 흐르는 전선을 만지는 것과 같다. 그것에 대항하고 벗어날 만큼 충분히 대담하지 않다면, 평생 동안 그것에서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다.
광신자들은 오만하고 배타적이다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는 줄을 내가 확실히 아노니 모든 나라(그리고 교파) 중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자는 다 환영을 받는다"(행10:34,35)라고 했다. 만약 그 진술에서 진실을 본다면, 우리는 모든 교만과 바리새주의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이다.
예수님의 시절에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이 자기들만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후로 지난 2000년 동안 기독교 집단에서도 그들 자신에 대해서 같은 자만심을 가진 배타적인 집단이 많이 있었다. 그러한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광신주의와 배타주의로 그들 자신과 추종자들을 파멸시켰다.
그런 광신자들을 조심하라.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어라.
'광신주의의 표식'에 대한 내 기사를 읽어라(내 책 『New Wine In New Wineskins』).
인생 배우자 선택의 기본 원칙
아내를 찾을 때, 먼저 다음 네 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해야 한다:
(1) 소녀는 거듭났는가? (요일3:10, 하나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녀가 여기에서 환희 드러납니다. 곧 의를 행하지 않는 사람과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이 아닙니다.)
(2) 그녀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가? (잠31:30,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지만, 주님을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는다.)
(3) 하나님이 가장 높이 평가하시는 온유(온순)하고 조용한 마음(quiet spirit)이 그녀에게 있는가? (벧전 3:4, 썩지 않는 온유하고 정숙한 마음으로 속 사람을 단장하도록 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값진 것입니다.)
(4) 그녀는 너와 같은 영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 (고후6:14, 믿지 않는 사람들과 멍에를 함께 메지 마십시오. 정의와 불의가 어떻게 짝하며, 빛과 어둠이 어떻게 사귈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요소를 무시하는 사람은 누구나 결혼 생활에서 심각한 문제에 직면할 수 있다. 그는 아내가 자기가 가고 싶은 길로 그를 끌고 가서, 그가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갈 수 없게 될 수도 있다. 그러면 그런 신자는 에서와 같이 죽 한 그릇에 영적 장자권을 팔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날 기독교 청년들이 예쁘고 똑똑하지만 거듭나지 않은 소녀들, 또는 거듭났다고 주장하지만 세속적인 소녀들을 만나도록 하심으로 시험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각 젊은이의 반응이 어떠할 것인지 관찰하신다. 그 때에, 신자가 어리석거나 성급한 결정을 내리면 신자의 미래 전체가 망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결혼 후에 아내를 회심시키거나 바꿀 수 있다고 상상할지 모른다. 하지만 일이 그렇게 풀리지 않는다. 어떤 종류의 '회심'이 아내에게서 일어나더라도,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깊이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훨씬 더 위험한 것은 소녀가 그것(회심)이 너희와 결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할 수 있는 외양만의 '회심'이다. 무엇보다 주의해라. 소녀가 자신의 삶에서 예수님을 첫째 자리에 두었다는 분명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 - 그리고 너희와 결혼하기 위해 "회심의 한 형태"를 거친 것이 아니어야 한다.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너희는 너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을 부인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표면적인 방법으로 회심했다고 공언하는 소녀들이 결혼한 후 아주 짧은 시간 안에 회심하지 않은 본성을 드러내는 경우를 보아 왔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이 점에 대해 완전히 타협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와 함께 묶이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겠는가?(고후6:14)"라고 말씀하고 있다.
일부 젊은 형제들은 어느 정도 올바른 가르침을 받으면, 어떤 여자라도 회심하거나 헌신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기로 선택하는 것이 자신의 삶과 세계관에서 가장 근본적인 변화를 수반하는 결정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관점이나 시각을 약간 바꾸는 문제가 아니다. 새로운 주인에 대한 완전한 충성이다. 이러한 삶의 방식을 기꺼이 선택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너희의 결혼은 아직 멀었는데, 내가 왜 지금 이 모든 이야기를 하겠는가? 그래야만 성숙한 태도를 기르고 올바른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오기 훨씬 전에 준비할 수 있다. 건전한 기독교 원칙을 미리 확립하는 것이 좋다.
인생의 동반자를 위해 주님을 신뢰하기
하나님은 너희의 삶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특히, 이 계획은 너희의 인생에서 중생 이후 가장 중요한 결정인 결혼이다. 그리고 그분만이 이 문제에 대해 두 가지 요인으로 인해 너희를 인도하실 수 있다:
(1) 그녀를 아무리 외적으로 안다고 해도, 여자의 마음 속 상태는 알 수 없다;
(2) 미래가 어떨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너희의 유일한 희망은 하나님께 크게 의지하는 것이다.
너희의 아내가 되려면 순종적인 여자가 필요하다 - 온유하고 조용한 영(spirit)을 가진 여자이다. 따라서 교만하고 지배하려 들고 다른 사람을 쥐고 흔드는 유형의 소녀를 조심해라. 아름다운 소녀는 그만한 가치가 없다, 아름다운 외모를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가 가정에서의 끝없는 싸움이라면 말이다. 결혼 생활의 행복은 외모보다 훨씬 중요하다. 동시에, 나는 너희가 그 소녀에게 육체적으로 매력을 느껴야 하고 그녀가 너희를 우러러보고 존경해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너희를 위해 최고를 원하며, 우리가 너희에게 어떤 부담도 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너희는 알고 있다.
다음은 너희가 고려하는 모든 소녀에게 꼭 필요한 세 가지 필수 요소이다:
(1) 그녀는 주님을 향한 열렬한 헌신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2) 그녀는 남편을 가정의 가장으로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그녀는 너희를 우러러볼 수 있어야 하고 그녀의 머리로서 너희의 평생 동안 기꺼이 너희에게 복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녀는 처음부터 너희를 가정의 지도자로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요즘에는 특히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런 소녀를 찾기가 어렵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희를 위해 어딘가에 그분이 선택하신 소녀가 있다.
(3) 그녀는 기꺼이 자기-부인의 길을 가야 한다. 날마다 이루어지는 자기-부인과 자기에 대한 죽음은 행복한 결혼 생활의 중요한 비밀이다. 소녀의 행동을 관찰하면, 그녀가 자기-부인 유형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소녀가 하거나 하지 않는 작은 일을 관찰함으로써, 그녀가 방종하거나 자기-부인을 하는지 알 수 있다.
우리는 너희의 결혼과 관련하여 너희 모두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너희가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도록 보호하실 것임을 안다. 우리는 주님께서 너희들 각자에게 때가 되면 언제든지 이 중요한 문제에서 너희 모두를 올바르게 인도하실 것이라고 믿는다.
적합한 사람을 찾지 못하는 자신의 무력감을 느끼면 너희를 주님께 맡길 것이다 - 이것은 신앙에 매우 중요하다. "여호와를 간절히 바라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로다"(사49:23) - "하나님이 자기를 기다리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기이한 일(아내)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생각으로도 생각지 못하는 것이니라"(사64:4) - 즉, 그들을 인도하실 그분을 신뢰하는 자들을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완전한 무력함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주변의 젊은 남자들이 서둘러 결혼하는 것을 보고 조급해하거나 낙심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때를 기다리면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것을 주실 것이다.
따라서 다음은 두 가지 중요한 조언이다:
(1) 네 지혜를 의지하지 말라: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잠3:5). 겸손하게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것이다.
(2) 서두르지 말아라. "사람이 자기 일에 조급한 것을 보았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소망이 더 있느니라"(잠29:20-KJV). 충동적으로 결정하지 말아라. 나는 너희가 이 문제에 대해 현명할 것이라는 것을 안다.
자신의 모든 취향을 제단에 맡기고 자신의 뜻을 하나님께 맡겨라. 그분이 너희에게 가장 적합하다고 결정하신 사람을 기꺼이 받아들인다고 말해라. 그러면 그분이 너희를 올바로 인도하실 것이다.
경건한 삶의 동반자
너희가 생각하는 소녀는 시끄럽고 떠들썩한 타입이 아니라 온유하고 조용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그녀는 너희의 직업, 교육 또는 돈을 벌 수 있는 가능성 때문에 너희에게 매력을 느끼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돈에 기초한 결혼은 재앙이 될 것이다. 그녀는 너희가 그녀처럼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너희를 선택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너희는 그녀가 너희처럼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녀를 선택해야 한다. 그녀의 영성 수준은 너희와 거의 같아야 한다 - 너희보다 훨씬 높거나 너무 낮지 않은 수준. 둘 다 영적으로 거의 같은 수준에 있을 때, 각자는 서로를 더 영적인 존재로 존중할 것이다.
그녀는 전해들은 말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얻은 주님에 대한 개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녀의 신념은 그녀의 부모나 교회에서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그녀 자신의 것이어야 한다. 경건한 가정의 유산을 갖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소녀가 주님을 안다는 것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영성은 거칠고 험난한 삶 속에서 경건한 선택을 하고, 비록 사람들의 인기를 잃게 될지라도 주님의 편에 서는 결과로 온다.
그녀는 회심한 후에 물-세례(침례)를 받은 사람이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자녀가 태어날 때 이 문제에(침례) 대해 충돌이 발생하지 않는다 - 그녀는 자녀들이 유아세례 받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성령으로 세례(충만)를 받지 아니할지라도 성령의 세례(충만)에 열려 있어야 하고 편견을 갖지 않아야 한다. 오순절주의와 은사주의의 극단에 반대하는 것은 괜찮다 - 하나님 자신이 그러한 극단에 반대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오순절에 사도들을 소심하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에서 그리스도를 위한 불타는 증인으로 변화시킨 성령의 진정한 충만을 반대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녀는 율법주의적이고, 트집 잡고, 종교적인 바리새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너희는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너희가 선택한 소녀는 지적으로 비슷해야 한다. 그러한 적합성은 결혼 생활의 주요 부분인 대화를 쉽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녀는 너희의 눈에 육체적으로 매력적이어야 하고 - 너희도 그녀의 눈에 육체적으로 매력적이어야 한다. 그녀에게 과거에 남자친구가 있었다면, 그녀는 그들과 완전히 헤어지고 더 이상 그 누구와도 연락하지 말아야 한다. 그녀는 재미를 좋아하는 유형이어야 하고 유머 감각이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을 웃게 할 능력이 없더라도 그녀는 웃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나는 그 소녀의 부모가 거듭나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많은 소녀들이 비기독교 가정에서 나오는 것을 보아 왔다. 그러나 소녀가 어느 가족 출신이든 그녀는 가족의 가치를 크게 존중해야 한다. 그녀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이혼에 대해 100% 반대해야 한다. 어머니의 소중함을 깨닫고, 자녀를 소중히 여기며 자녀 양육에 평생을 바칠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녀에게 직업이 있다면 그녀는 직업보다 가족을 우선시해야 한다.
우리의 본을 따르기
너희들은 너희 모두를 경건한 방법으로 양육하기 위해 자신의 경력, 안락함, 건강 및 개인적인 선택 등 모든 것을 포기한 어머니에게서 훌륭한 모범을 보았다. 그녀는 어떤 상황에서도 너희를 사랑하고 자신을 부인하고 너희 모두를 경건한 청년으로 양육하기 위해 헌신했다.
엄마를 아내로 선택하기 전에, 나는 주님께 그녀가 진정으로 그분께 헌신하고 있다는 표징을 보여달라고 주님께 간구했다. 그러다가 나는 그녀가 (인도 최고의 의과대학인 벨로르 기독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나병 환자들 사이에서 일하기로 선택한 것을 보았다. 그녀처럼 젊은 소녀가 왜 그런 직업을 선택하겠는가? 나를 납득시키기에 충분했다. 1968년 6월 19일 그녀와 결혼한 이후로 나는 내 선택을 한 순간도 후회한 적이 없다. 우리는 완벽한 부부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깊이 사랑하고 존중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나의 모든 여행에서 나에게 더 적합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리고 나는 절대 없을 것을 알고 있다. 너희도 결혼 생활을 하는 동안 아내에 대해 비슷한 간증을 갖게 되기를 기도한다. 이것이 내가 이 문제에 대해 많은 글을 쓰는 이유이다.
특정 소녀가 너희를 위한 그분의 선택인지 아닌지를 분명히 보여 주시도록 주님께 간구해라. 너희가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주님께 자신을 맡긴다는 바로 그 사실이 너희가 그분께 영광을 돌리고 그분만이 너희를 올바로 인도하실 수 있음을 인정하는 방법이다.
너희의 생명 자체가 그분께 빚지고 있음을 항상 기억해라. 너희는 더 이상 너희의 것이 아니다. 너희는 너희 자신을 위해 남은 인생을 살 수 없고 오직 주님과 그분의 완전한 뜻을 위해서만 살 수 있다.
내가 하는 모든 경고와 조언은 결혼하기 전에만 할 것이다. 일단 너희가 결혼하면 내가 너희의 아내를 완전히, 아낌없이, 전심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너희는 그것을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너희의 부모인 우리가 수년간의 경험과 지혜가 있어 소녀의 본성을 평가하는 데 있어 모든 인간적 방법이 불충분하다는 것을 미리 경고하는 것을 너희가 깨닫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너희는 어떤 여자가 너희의 인생 동반자가 되기에 적합한지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외모나 심지어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살 여유가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너희에게 딱 맞는 사람을 보여주실 수 있다. 그러므로 결정하기 전에 많이 기도해라.
하나님 말씀의 불변의 원칙
성경에는(아담 이후)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함께 인도하신 방법이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는 단 하나의 결혼이 있다 - 바로 이삭의 결혼이다. 그곳에서 하나님이 사용하신 방법은 당시 문화에서 받아들여진 방법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며 어떤 문화의 맥락에서도 잘 일하실 수 있다. 기원전 20세기 아브라함 시대에 하나님이 사용하신 방법은, 다른 문화권인 기원후 20세기 오늘날 하나님이 사용하는 방법과 다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것이지, 어떤 방법으로 너희를 여자에게 이끄시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방법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너희 각자가 너희를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이심을 확신하기를 기도한다.
태초에, 하나님만이 아담에게 합당한 돕는 자를 마련해 주실 수 있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만이 너희에게 이상적인 조력자를 제공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여자를 만드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자신의 '작품'을 가장 잘 알려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제작자의 의견은 확실히 최고이다! 그러므로 잠언 31장 10-31절을 읽고 하나님이 칭찬하시는 아내를 묵상하는 것이 좋다.
성경의 그 부분은 르무엘 왕의 어머니에 의해 기록되었다. 우리는 르무엘이 누구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에게는 분명히 경건한 어머니가 있었다(성경의 대부분의 책은 남자에 의해 기록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보기 드문 부분 중 하나인 여자를 통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온 것이다!!). 이 어머니는 아들이 어떤 유형의 여자와 결혼해야 하는지에 대해 많은 건전한 조언을 해 주었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모든 부모가 결혼해야 할 여자 유형에 대해 아들에게 조언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소녀는 부드러운 혀(26절)와 거친 손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 그 반대가 아니다(잠 31:13,15,17,19,22)! 부드러운 혀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없다. 그것은 획득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태어날 때부터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없다. 그것도 배워야 한다. 소녀는 재정 문제에 검소하고 현명해야 한다(16,22,24절). 그녀는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대하고 자비로워야 한다(20절). 그녀는 가정을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한다(27절). 무엇보다 여호와를 경외해야 한다(30절). 르무엘의 어머니는 "매력도 거짓이 되고 아름다움도 오래가지 못하거니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여자는 큰 칭찬을 받을 것이라"(잠 31:1,30 -Living)라고 조언을 끝맺었다.
나는 르무엘의 어머니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아들에게 말한 모든 것에 동의한다. 그런 아내는 평생에 네게 선을 행할 것이다(잠31:12). 나는 하나님께서 너희들 각자를 위해 이 세상 어딘가에 그런 소녀를 예비하셨다고 믿는다.
게으른 소녀나 유행에 집착하는 사람을 아내로 생각하지 말아라. 그러한 여성은 은행 계좌가 지속적으로 고갈되게 하고, 너희를 빈곤으로 몰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투고 잔소리하는 유형을 고려하지 말아라. 그녀는 너희의 정서적 자원을 지속적으로 고갈시키고 너희를 절망에 빠뜨릴 것이기 때문이다.
지혜는 너희가 선택을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를 인도하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자는 단순히 예쁘거나 매력적인 여자보다 훨씬 더 나은 아내가 될 것임을 기억해라(잠31:30). 제발 하나님이 여기서 하시는 말씀을 믿고, 직접 실험하고 알아내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 진실을 발견하지 말기 바란다. 그것은 재앙이 될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는 예쁜 여자는 "코에 금고리(그녀의 아름다움)가 있는 돼지(그녀의 성격)(잠11:22)"와 같다고 말씀하신다. 강한 표현이다 - 그러나 사실이다. 그러니 절대 금고리를 한 돼지를 쫓지 말아라!!
좋은 결혼 생활에는 영적 교제, 지적인 의사 소통, 가족 가치의 세 가지 요소가 있음을 기억해라. 그러면 여자를 찾으라:
(a) 주님에 대한 열정이 있고 영적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다(단지 너희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정기적으로 교회에 가는" 사람이 아니다. 너희는 소녀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을 통해 소녀의 마음에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마음에 가득한 것을 말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 12:34);
(b) 의사소통이 가족 생활의 주요 부분이기 때문에 지적으로 서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 그리고
(c) 가족과 모성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
하나님이 보시기에, 소녀는 "영과 혼과 몸"(살전 5:23)이지 몸과 혼과 영이 아니다. 따라서 소녀를 평가할 때 영적 가치를 첫째로, 혼적 가치(지적 등)를 두 번째로, 신체의 가치(육체적)를 세 번째로 두어라 - 그러면 실수하지 않을 것이다.
부디 내 책 『SEX, LOVE & MARRIAGE』의 5장을 다시 한 번 읽어라.
인간적 고려사항
아내를 선택할 때, 고려해야 할 많은 인간적 요소도 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많은 결혼 생활을 관찰한 후, 나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결혼하기 전에, 반드시 가족을 부양할 직업을 구해야 한다(잠 24:27에 나와 있음).
너무 오래 기다리면 좋지 않다. 시대가 악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음행을 피하려면 결혼해야 한다고 말한다(고전7:2). 욕망으로 '불타는' 것은 매우 쉽게 죄로 이어질 수 있다.
유쾌한 대화 상대가 지루한 결혼 생활로부터 너희를 구할 것이다.
사회-경제적 지위의 평등을 고려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너희의 가정 생활에서 서로에게 훨씬 쉽게 적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곤경에 대한 동정이나 연민으로 누구와도 결혼해서는 안 된다. 진실하고 이상주의적인 (그러나 어리석은) 젊은이들은, 그런 근거로 많이 비참한 결혼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서둘러 뿌린 것의 열매를 지금 느긋하게 거두고 있다.
영적 가치
행복한 결혼 생활은 두 사람이 그리스도를 그들의 삶의 주인으로 모시는 곳에서만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와 말씀의 기준이 으뜸이고, 그들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가 으뜸이 되는 곳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너희를 창조하시고, 그분을 위해 살도록 너희를 구원하셨다. 우리는 우리를 기쁘게 하는 일을 하도록 창조되지 않았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창조되었다. 우리가 엎드려 교만을 낮추고 그 진리를 인정한다면, 우리는 참된 삶의 이유를 발견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공허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를 기쁘게 하는 것을 추구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추구해라.
이미 하기로 결정한 일(예: 원하는 사람과 결혼하기 위해)에 대한 승인을 받기 위해 단순히 성경에 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에 맞는 "구절을 쉽게 찾을" 것이다 -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은 간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경을 사용하여 그분을 기쁘시게 하려는 사람들만 인도하신다.
공개적으로는 행복해 보이는 결혼 생활이 사적으로는 불행한 경우가 많다. 하나님은 많은 기독교인의 결혼을 축복해 주시지만(그분은 선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많은 결혼을 승인(인정)하지 않으신다. 결혼 생활에서 추구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승인(인정)이다.
무언가에 실망하거나 낙심할 때, 결코 결혼과 같은 중대한 결정을 내리지 말아라. 불필요한 유혹을 줄 수 있는 친구 관계는 항상 멀리해라. 자신이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먼저 넘어질 것이다. 항상 겸손하게 하나님을 의지해라. 우리가 그분의 지시를 어기면 영원한 행복은 있을 수 없다.
내가 반복해서 말했듯이, 너희가 영적 가치보다 아름다움과 대화 능력을 중시한다면, 너희는 하나님께서 너희를 위해 예비하신 최고의 것을 놓치게 될 것이다. 성경 지식에 무게를 두지도 말아라 - 설교자나 성경 학자인 여성이 가정과 자녀를 소홀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들이 소녀가 갖고 있는 가족 가치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질 것을 촉구한다. 나는 집을 유지하는 방법, 모성애에 대한 중요성, 자녀 양육과 같은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소녀가 이러한 가치를 얻기 위해 믿는 부모가 있을 필요는 없다. 이혼한 가정에서 자란 소녀도 경건한 가정 가치를 얻을 수 있다. 그래서 그녀 부모의 믿음이 척도가 아니라 그녀 자신의 믿음이 척도이다. 나는 파탄 가정에서 태어나 하나님의 은혜로 경건한 가치관을 갖고 훌륭한 아내와 어머니가 된 소녀들을 보았다.
실질적인 고려 사항
소녀들과 어울리지 않도록 최대한 주의할 것을 촉구한다. 신중함은 미덕의 어머니라는 것을 기억해라. 현명해져라. 너희에게 매달리거나 빨리 너희를 남편 삼으려고 붙잡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이는 소녀들과 항상 거리를 유지해라. 그리고 헌신한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어떤 소녀와도 너무 친해지지 마라. 자신을 순수하게 지켜라.
어린 소녀들이 하는 "흐느끼는" 이야기에 함정에 빠져 결혼한 좋은 형제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동정을 통해 소녀들에게 끌린 다음 먼저 "애무"에 유혹되고 그 다음 음행에 유혹되어 마침내 결혼에 갇힌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녀를 안타까워하게 만드는 슬픈 이야기를 하는 소녀를 극도로 조심해라.
어떤 여자와도 어떤 유형의 신체 접촉도 하지 마라. 성령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남자가 여자를 만지지 않는 것이 좋다(고전7:1)." 한 걸음이 또 다른 걸음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그리고 재앙으로 끝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희 모두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며 주님께서 그러한 재난으로부터 너희를 보호해 주실 것을 믿는다. 주님은 우리 각자에게 모든 것과 다른 모든 사람보다 그분을 더 사랑하는지 끊임없이 질문하신다. 그 질문에 항상 "예"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이 너희의 보호이자 구원이 될 것이다.
어떤 여자와 만날 때면 항상 어느 쪽이든 결혼에 대한 기대가 없어야 한다. 그러나 여성은 남성과 다르다는 것을 기억해라. 남성은 독립적인 경향이 있고 관계에서 안정을 찾지 않는 반면, 여성은 의존하는 경향이 있으며 특히 결혼 적령기에 이르면 안정을 추구한다. 그러므로 어떤 여자와 만날 때, 그 여자가 하나님께서 너희를 위해 선택하신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결혼을 고려하고 있다는 생각을 그녀에게 하지 않도록 주의해라.
너희의 부모로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너희를 염려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원하시는 것만을 원할 뿐이다. 하나님은 새에게 먹이를 주지만, 먹이를 둥지에 떨어뜨리지는 않는다. 새들이 날아다닐 때, 하나님은 새들이 필요한 음식을 찾도록 도와주신다. 따라서 너희들이 이동하는 동안, 주님은 너희들이 적당한 시기에 적절한 여자를 찾도록 도와주실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너희를 위해 택하신 소녀를 만날 때, 그분은 그녀를 위해 너희에게 영적인 매력을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미래의 배우자에 대해 진지하게 기도해라. 너희가 기도할 때, 그것은 너희가 너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무기력하게 의존하는 습관을 배우지 않으면 인생에서 많은 것을 놓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래 기도하느냐가 아니라 믿음의 태도, 즉 무력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다.
결혼 적령기에 관하여: 하나님의 말씀에는 이에 대한 규정이 없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 하지만 내가 줄 수 있는 간단한 지침은 다음과 같다: 직장에서 은퇴할 때쯤이면, 모든 자녀가 4년제 대학을 마치고 스스로 생계를 꾸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재정적 부담이 줄어든다. 그러니 너무 오래 기다리지 말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라. 이것은 인간적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것처럼 들릴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우리의 신뢰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미래에 대해 염려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미래를 생각할 때 개미처럼 지혜롭게 행동하라고 명령하셨다(잠6:6-8). 그리고 그분은 또한 부모들에게 자녀들의 현재 지상적 필요(식량, 의복, 주택, 건강 및 교육)를 제공하고(딤전 5:8), 또한 미래의 지상 필요를 위해 돈을 저축하라고 명하셨다(고후12: 14).
마지막으로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이 독신 기간 동안 이기심에서 벗어나도록 자신을 훈련해라 - 그러면 언젠가는, 너희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는 비이기적인 남편이 될 수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위해 하신 것처럼 매일 아내를 위해 목숨을 버리며, 너희가 자기 몸을 사랑하듯이 아내를 사랑할 수 있다. 결혼 준비로 에베소서 5:25-33을 읽고 묵상해라. 주님께서 이 문제에서 너희를 도우시기 바란다.
하나님께서는 기도에 응답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의 결혼에 대해 기도해라 - 그러면 하나님께서 너희를 적시에 적절한 사람에게 인도하실 것이다. 이 세상 어딘가에서, 그분은 이미 너희에게 완벽한 삶의 동반자가 될 사람을 만들고 계신다. 너희는 그분이 특별히 너희를 위해 선택하고 만드신 사람보다 더 나은 사람을 결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을 믿어라 - 그리고 그녀를 너희에게 데려오실 그분을 신뢰하라.
우리는 너희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너희는 우리가 선택한 여자를 너희에게 절대 밀어붙이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너희의 부모)는 이 땅에서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어느 정도 지혜를 얻었음을 기억해라. 그래서 결정할 때 우리와 상담하면, 너희는 실수를 피할 수 있다. 나는 소위 "기독교적" 결혼을 보았는데 그것은 기껏해야 "재앙"이라고만 설명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너희를 위해 기도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결코 너희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것이라고 확신한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모든 면에서 그에게 완전히 적합한 사람을 주신 것처럼 너희에게도 그렇게 하시도록 끊임없이 기도한다. 우리는 주님께서 이 중요한 문제에서 너희가 그릇된 선택을 하지 않도록 보호하시고 그분의 때에 그분이 선택하신 사람에게로 너희를 인도하실 것이라고 확신한다.
아멘. 그 의미는 "그렇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오직 주님만을 자랑하며
아버지로서 내가 가장 후회되는 두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나는 너희 각자와 개별적으로 충분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나는 종종 많은 일을 하느라 너무 바빴다. 나는 주님께 그것을 용서해 달라고 간구했다. 너희가 아버지가 되었을 때, 내가 가장 권하고 싶은 것은: 아내와 아이들과 개별적으로 시간을 보내라는 것이다.
2. 나는 때때로, 너희를 부당하게 또는 너무 가혹하게 벌했다. 그것도 주님께 용서를 구했다. 그리고 너희도 나를 용서해주었으면 한다. 그러나 나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너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에 감사드린다 - 너희의 행함이나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이다.
우리의 참된 부는 돈이나 재산에 있지 않고, 실패와 깊은 시련을 통해 오는 주님을 아는 지식에 있다. 예레미야 9:23,24(Living)에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용사는 그의 용맹을, 부자는 그의 재물을 즐기지 말지니. 그들이 이것만 자랑할지니라: 그들이 나를 진정으로 알고 나는 사랑이 한결같은 주님인 것과 내가 이런 식으로 있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가치가 있는 유일한 것이다. 그에 비하면 세상의 모든 성취는 쓰레기다. 그 진리를 빨리 발견할수록 우리는 더 현명해질 것이다.
다윗과 요셉은 모두 30세에 사역을 시작했다. 그러므로 서른 살이 되기 전에는 주님과의 관계에서 확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 나이가 되기 전에, 우리 모두는 기복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기복을 우리 미성숙의 결과로 너그럽게 봐주시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13세에서 30세 사이에는 부모의 조언을 무시할 수도 있다. 그것 또한 하나님은 이해하신다. 현명한 부모도 그것을 이해할 것이다.
나에게도 기복이 많았다. 그러나 우리가 가정에서 교회 모임을 시작한 1975년(당시 나는 35세 반) 이후로는 상황이 달라졌다. 좋은 형제들과의 교제는 내 삶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한 교제는 너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다. 나는 너희 모두가 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이것을 놓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비록 너희들이 그곳 교회에서 좋은 성경 가르침을 받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우리 교회를 좋은 교회로 만드는 것은 방갈로르 교회의 형제들 사이에 있는 교제이다. 너희 모두도 그곳에서 진지하게 주님을 따르는 좋은 신자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언젠가는 새 언약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우리 모두는 그것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하신다
사탄은 베드로를 밀처럼 체질할 수 있게 하나님께 허락을 구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탄이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셨다 - 왜냐하면 베드로는 이와 같이 체질되지 않은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더 중요한 직무를 가졌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했을 뿐이다.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 부인했다. 그러나 그 결과, 철저하게 상하고 겸손해져서 통곡하며 회개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었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교만의 겨가 체에 걸려졌다. 하나님은 그것을 이루기 위해 사탄을 사용하셨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직 사탄을 멸하지 않으신 한 가지 이유이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부활 후에, 하나님은 무덤에 있는 천사를 통해 특별한 메세지를 보내시어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예수께서 살아나셔서 너희 앞에서 가시는 것을 전하라"(막16:7)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베드로...."라는 구절은 우리 주님의 특유의 표현이다. 베드로도 제자가 아니었는가? 주님은 왜 그를 특별히 언급하셨는가? 베드로는 그의 끔찍한 실패로 인해 "그의 제자들"이라는 문구가 더 이상 그를 포함할 수 없다고 느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구절은 주님께서 여전히 그를 그분의 사도로 여기고 계시다는 것을 그에게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여전히 너무 낙담하여 옛 직업인 고기잡이로 영원히 돌아가기로 결정했다(요21:3). 그래서 주님은 가셔서 베드로를 개인적으로 다시 사도로 부르셨다. 주님의 사랑은 그런 것이다. 그분은 계속해서 우리를 쫓아올 것이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돌아왔고 그의 "믿음은 떨어지지 아니하였다." 그것은 베드로가 한 번도 실패하거나 실수한 적이 없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거듭나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받아주시고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두 가지 유형의 신자가 있다:
(1)하늘 아버지의 사랑이 무조건적이라고 믿는 자들.
(2)하늘 아버지의 사랑이 조건적이라고 믿는 자들.
(1)에 속한 사람들은 진리를 믿기 때문에 쉬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계속 사랑하실 수 있으려면 자신이 잘 수행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끊임없는 불안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거짓 종교는 하나님의 사랑이 조건적이라고 가르친다 - 그분의 사랑은 "실적에 따른 사랑" - 우리가 얼마나 잘 수행하는지에 기반한 사랑! 예수님은 오셔서 그 반대로 가르치셨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자들은 여전히 이교도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사탄의 거짓말을 폭로해야 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신다는 것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사랑을 거부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서 길을 잃을 수 있다. 그러나 자녀들에 대한 그분의 사랑은 여전히 무조건적이다. 탕자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 이야기가 이를 완벽하게 보여준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는 다양한 정도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사람을 어느 정도 사랑하신다(요3:16). 그러나 하나님은 거듭난 자녀들을 더 큰 정도로 사랑하신다. 그리고 그분의 자녀 중에서, 그분은 어떤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더 사랑하신다 - 그들은 특정 조건을 충족하기 때문이다 -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 21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제자들을 가장 사랑하신다 - 하나님은 예수님을 사랑하신 만큼 그들을 사랑하신다(요17:23 참조).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자체는 무조건적이다.
하나님만이 모든 것이다
우리의 신뢰와 확신은 항상 하나님께만 있어야 하며 결코 사람에게 있지 않아야 한다. 예레미야 17:5,6에 언급된 저주가 우리를 시들게 하지 않도록 해라: "나 주가 말한다. 나 주에게서 마음을 멀리하고, 오히려 사람을 의지하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그는 황야에서 자라는 가시덤불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소금기가 많아서 사람이 살 수도 없는 땅, 메마른 사막에서 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아리마대 요셉과 같은 영향력 있는 신자를 사용하여 빌라도(땅의 최고 통치자)에게 접촉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십자가에서 내리실 수 있었다. 그래서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사 53:9), "예수님의 무덤은 악인들과 함께 배정되었지만,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계셨다." 베드로와 같은 평범한 어부들은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을 실제적인 방법으로 돕는 영향력 있는 모든 신자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너희는 너희의 삶에 우상이 없을 때만 항상 쉴 수 있다. 좋은 직장, 집, 지상의 안락함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우상이 되었다. 그것은 나무나 돌로 된 우상을 숭배하는 것보다 나을 것이 없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깨닫지 못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은사(사역과 같이)도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우상이 되었던 것처럼 우상이 될 수 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모든 것이시고 우리가 진정으로 마음으로 주님께 "주님, 땅에서 주님 외에는 아무 것도 사모할 것도 없고 사모할 자도 없나이다"(시 73:25)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제서야 우리가 우상숭배에서 벗어나서 주님을 경배하기 시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너희 모두가 모든 우상을 버리고 오직 주님만 예배하기를 기도한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고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고자 한다면, 세상의 모든 권세가 우리 주님의 손에 있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너희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이 모든 면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예수님은 빌라도 앞에서 두 가지 중요한 말씀을 하셨다: (1)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요 그리고 나는 세상의 일을 위하여 싸우지 아니하노라"(요18:36). (2) "내 아버지께서 내게 행사하도록 허락하신 것 외에는 네가 나에게 어떤 권한도 가질 수 없다"(요19:11). 이 이중 고백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주님의 선한 증인이 되라고 말했을 때 상기시킨 것이다(딤전6:13,14).
이것은 내가 어려운 상황과 어려운 사람들을 만났을 때 하나님과 사탄과 사람들에게 했던 고백이기도 하다.
현재에 살기
우리가 과거에 어떻게 살았는지는 하나님께 아무런 상관이 없다. 우리가 지금 회개한다면 - 우리 하나님의 이름은 "I was"가 아니라 "I AM"(나는 존재한다)(출3:14)이기 때문이다. 우리 하나님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 사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자백하고 나면, 우리 과거를 기억하지 않으신다.
사탄과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거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 대한 우리의 과거를 기억한다(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과거를 기억하여 그들을 비난한다). 사람도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고 낙심한다. 그들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미래의 재난을 두려워하며 미래에서도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하나님 "I AM"과 함께 현재를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심 외에는 우리의 과거와 관련하여 자랑할 것이 없다.
우리 아버지는 추위 속에 밖에 남아 있는 독선적이고 종교적인 사람들의(탕자의 형) 항의에도 불구하고 회개한 탕자를 그분의 오른편에 앉히신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께서는 또한 회개한 가장 큰 죄인들을 그분의 가장 큰 사도로 사용하신다 - 이는 예수께서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신 것을 나타내려 하심이다.
불신앙은 하나님께 대한 모욕이다
좋은 직업을 얻든 못 얻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다. 우리는 평생을 이렇게 살아야 한다. 모든 나라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똑같이 좋다.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중요하다. 그러면 우리는 잔느 귀용 부인이 했던 것처럼 항상 말할 수 있다:
"내게는 장소도 시간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
내 나라는 모든 지역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어떤 해안에서도
평온하고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찾는 곳이나 피하는 곳
영혼은 어느 곳에서도 행복을 찾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의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니
'가든지 머무르든지 동등한 기쁨입니다.
주께서 계시지 않는 곳에 제가 던져질 수 있을까요?
정말 끔찍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찾는 지역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모든 곳에서 하나님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우리는 기쁨, 평화 그리고 안식 속에서 살 것이다. 이것들이 항상 너희의 몫이 되기를 바란다.
이 세상에서 주님께 충실한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물질적으로 성공할 것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번영하다, 성공, 성공하다"라는 말은 예수님이나 사도들의 가르침에서 결코 찾아볼 수 없다. 일치 항목을 검색하고 이를 확인할 수 있다.
- "성공(Success)"은 구약에 7번 나오는데, 신약에는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 "성공하다(Succeed)"는 구약에 14번 나오는데, 신약에는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 "번영(Prosper)"은 구약에 29번 나오지만, 신약에는 한 번뿐이다. 그것도 요한3서 2절에서 부담 없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마치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편지를 쓸 때 "잘 지내라"고 바라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이것들은 정말로 구약의 단어들이다. 신약성경은 타락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과의 교제와 풍성한 생명에 대해 훨씬 더 많이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은 이 땅의 모든 사람과 환경에 대해 절대적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모욕이다. 불신앙은 하나님이 너무 약하고 무력하여 지상에서 우리의 작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믿음은 단지 하나님께 그의 정당한 자리를 드리고 그분을 지상의 주권적인 창조주와 통치자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게 다이다. 우리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다.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들은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분은 그분의 모든 행동을 우리에게 설명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 삶의 모든 세부 사항에 관심을 갖고 계신다 - 열정적으로.
"주께서 선한 사람의 걸음을 인도하신다"(시37:23).
에벤에셀
엄마는 우연히도 물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하는 DAILY LIGHT(엄마가 오늘 읽고 있었던)에서 이 구절을 너희에게 보내주기를 원하였다 - 그리고 엄마는 어제 너의 차가 미끄러진 도로의 물에 대해 생각하였다: "많은 물보다 높은 곳에 계신 주님은 더 강하시다......너희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하리니......물이 너희를 침몰시키지 아니하리라......베드로가 예수께로 가려고 물 위를 걸었다. 그가 물에 빠지기 시작할 때에 외쳐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곧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셨다…… 주여 내가 두려울 때마다 주를 의지하리이다"(시93:4, 사43:2, 마14:29-31, 시56:3). 주님을 찬양합니다.
나는 항상 내 스쿠터에서 작게 흔들릴 때마다 하나님이 나에게 속도를 줄이고 더 조심하라고 경고하여 나중에 더 심각한 사고가 나지 않도록 했다고 느꼈다. 고속도로에서 너의 브레이크가 고장 났다면, 그 결과는 참담했을 수 있었다. 주님의 자비를 찬양하라. 우리 모두는 우리의 생명을 주님께 빚지고 있다.
나는 "에벤에셀"("도움의 돌"을 의미 - 삼상7:12)이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삼키겠다고 위협하자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하늘에서 우뢰를 발하여 그들을 구원하셨다. 사무엘은 그곳에 돌을 놓고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고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였다.
우리는 주님께서 사고나 죽음 등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신 과거의 "에벤에셀"의 순간을 자주 돌아보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 삶에 대한 확실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바로 지금까지 우리를 돌보셨던 그분이 우리를 끝까지 돌보아 주실 것이다.
"과거의 그분의 사랑은
그분이 우리를 마침내 곤경에 빠뜨릴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게 한다.
우리가 돌아보는 각각의 달콤한 '에벤에셀'은
우리를 인도하기를 그분이 기뻐하신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수년 동안 응답하신 모든 기도에 대해 주님을 찬양하라.
주님께서 모든 상황을 통해 너희를 인도하시고, 너희는 많은 "에벤에셀"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위해 하신 일
20년 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신 것처럼 나를 사랑하셨다는 것과 예수님을 육신으로 보내셔서 나의 앞서 달려가신 분이 되게 하신 그 진리에 사로잡혔을 때 쓴 노래이다:
무거운 짐과 걱정으로 풀이 죽어 있을 때,
당신의 영혼은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당신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주 가까이 계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아들을 사랑하신 것만큼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당신도 도우실 것입니다.
그분의 약속의 말씀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그분은 당신을 끝까지 살피실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이라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분이 예수님을 위해 행하신 일을 당신에게도 행하실 것입니다.
강력한 능력으로 당신을 강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은 끝이 없습니다.
죄와 악이 이 세상에 가득하지만
당신은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사실입니다
"죄가 너를 다스리지 못한다".
그리고 시험의 유혹이 강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당신을 지켜줄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예수님처럼 걸을 수 있습니다
매일 승리할 수 있습니다.
고통과 질병이 당신에게 다가오고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미칠 때,
하나님은 당신의 기분을 아시며
치유의 능력을 갖고 계십니다.
당신의 아버지께서 당신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분은 신실하시고 진실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예수님을 돌보셨듯이
그분은 당신을 돌보실 것입니다.
오, 당신이 예수님을 당신의 주님이자
맏형으로 알게 된다면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위로가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가진 모든 것은 이제 당신의 것이며
그분은 당신을 놓아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은 당신을 위하시니,
누가 당신의 적이 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다. 그분은 환난의 때에 검증된 도움이시다"(시46:1 - Living).
주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를 떠나지도 아니하고 너를 버리지 아니하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언제나 '여호와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나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라고 담대히 말할 수 있다. (히13:5,6)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