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방법대로 행한 하나님의 일

작성자 :   잭 푸넨 카테고리 :   교회 리더
    Download Formats:

장 0
소개

오늘날 기독교 사역 대(vs) 신약성경의 기준

오늘날 하나님의 사역은 예수님과 사도들이 하던 방식대로 행해지고 있지 않습니다. 돈은 오늘날 기독교 사역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돈은 주님과 그분의 사도들에게 결코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과 사도들이 하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까? 대답은 예입니다. 그리고 Zac Poonen과 그의 동료들은 지난 43년 동안 그것을 증명했습니다.

Zac은 이 책을 쓰기 위해 43년을 기다렸습니다 - 왜냐하면 그는 입증되지 않은 이론에 대해 쓰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새 언약 교회를 세우는 하나님의 방법에 대해 이 세월 동안 배운 것은, 그를 모든 신자들에게(그가 말하는) 빚진 자가 되게 하여, 하나님께서 그에게 가르쳐 주신 것을 그들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이 책은 그 빚을 청산하기 위한 그의 노력입니다.

이 책은 예수님처럼 길을 걷고 싶으며, 경건한 가정을 세우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새 언약의 교회를 세우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장 1
기독교 사역 – 그때와 지금

내가 노아 시대에 살았다면, 내 인생의 최우선 순위는 내 여가 시간을 모두 노아가 방주를 짓도록 돕는 데 사용했을 것입니다 - 방주는 그 당시 하나님의 심판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건축물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는 일이어야 한다는 것을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끝내 멸하실 때 교회만 남게 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현명하다면, 당신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사역 vs 신약성경의 기준

오늘날 지상에서 행해지고 있는 많은 기독교 사역을 신약성경에서 보는 것과 비교할 때 우리는 엄청난 차이를 봅니다. 신약성경의 원리에 따라 교회를 세우려고 애쓰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우리 시대에 그러한 원칙을 따르는 것이 불가능하고 실행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기업들이 일을 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 그리고 사도들이 일했던 방식과 매우 다른 방식으로 대부분의 기독교 일들이 행해지는 것을 봅니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 기업이 CEO를 채용하듯 교회도 목사를 채용합니다.

- 교회는 회사가 CEO에게 급여를 지급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목사에게 급여를 지급합니다.

-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기업 임원들이 가장 명성이 높고 봉급이 높은 회사를 선택하듯이, 가장 명성이 높고 봉급이 높은 교회를 선택합니다.

- 돈은 세상의 회사에서와 마찬가지로 교회 일에서도 중요합니다.

- 대학 교육이 기업 취업에 필수인 것처럼 성경 신학교 교육은 기독교 사역에 필수가 되었습니다. (이 기준에 따르면 예수의 11제자 중 누구도 오늘날 기독교 사역을 할 자격이 없었을 것입니다!)

-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성령의 기름부음과 인도하심을 구하지 않고, 세상적인 경영기법을 따라 교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 그리고 비슷한 예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집단에서 우리가 보는 이 모든 것과 훨씬 더 많은 것은, 우리가 신약성경에서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보는 것과 정반대입니다. 교회는 세상을 모방하고 있습니다 - 따라서 영적 죽음이 대부분의 교회를 지배합니다. 비록 그러한 교회 중 일부는 수천 명의 회원을 보유한 초대형 교회이고 교리는 철저히 복음주의적이지만 말입니다. 바벨론 기독교는 거대한 조직입니다. 그 교리는 복음적일 수 있지만 그 삶과 우선순위는 잘못되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하나님에 의해 완전히 멸망될 것입니다(계17,18장 참조).

많은 기독교인들은 마태복음 7장 1절("판단하지 말라")을 오해하고, 다른 기독교인과 교회에서 볼 수 있는 잘못된 것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영적인" 조언처럼 들리지만 -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서, 우리는 주 예수께서 요한에게 다섯 교회와 그 지도자들에게 편지를 보내서 그(요한)가 그들(교회와 지도자)에게서 본 많은 잘못들을 비판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그 편지들은 기밀로 유지되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주님은 요한에게 그 지역의 모든 교회에 그 편지를 배포하여, 모든 사람이 타락한 교회와 지도자의 상태를 알고 - 스스로 경고하도록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교회와 그 지도자에 대하여, 주님은 요한에게 "네가 이름은 살았으나, 실제로는 영적으로는 죽은 자로다"(계3:1)라고 쓰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교회와 그 지도자에 대해서, 요한을 통한 주님의 메시지는: "너희는 영적으로 비참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자로다"(계3:17)였습니다. 주님은 또한 바울에게 영감을 주어 고린도와 갈라디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보내 그들의 교회에서 잘못된 여러 가지를 지적했습니다(고린도전서와 갈라디아서 참조).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주 예수님은 오늘날에도 동일하시며 -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은, 그분의 종들을 통해 기독교 지도자들과 교회들에게 오류를 폭로하는 그러한 메시지를 계속해서 보내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1세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그분의 시정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마지막 말씀은, "귀 있는 자는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2:7,11,17,29; 3:6,13,22)입니다. 소수는 주님의 말씀을 듣겠지만, 대부분은 듣지 않습니다.

1966년 5월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전임 기독교 섬김에 참여하기 위해 해군 장교의 경력을 사임했을 때, 나는 기독교 일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이 하늘의 생각을 하고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몇 년 안에 나는 내가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지방 교회를 심고 세우며,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 사도 바울처럼 일하는 기독교인 일꾼을 거의 찾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에 내가 본 것은 돈과 명예와 명성을 구하는 설교자들이었습니다. 바울 시대의 데마처럼(딤후4:10), 그들 대부분은 자신의 이익을 구했습니다. 바울 시대에는 디모데와 같은 사심 없는 사람이 드물었습니다(빌2:19-21); 그런 사람은 오늘날에도 드뭅니다.

1975년 1월, 하나님께서 저를 만나셔서 성령으로 새롭게 채워주셨습니다. 이로 인해 바울이 경험하고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이야기하는 승리의 삶을 살기 위해 그분을 간절히 구하게 되었습니다: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고도 남는 자"(고후2:14; 롬8:37).

7개월 후(1975년 8월), 우리는 교제를 위해 함께 모여 이기는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께 구하는 데 관심이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우리 집에서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몇 년 동안 일부는 왔다가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몇몇은 남아 있었습니다. 다른 기독교인들은 우리를 분리주의자이자 이단자로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꼬리표는 우리를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와 바울도 일생 동안 분리주의자이자 이단자로 간주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가 선지자와 개혁자로 인정하는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종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일생 동안 분리주의자와 이단자로 여겨졌습니다.

우리는 매주 여러 번 우리 집에서 만났습니다. 주님은 천천히 우리를 "신자들의 교제"에서 변화시켜 새 언약의 교회로 만드셨습니다. 7년 동안 주님은 우리를 인도 방갈로르 한 구석에 가두어 두셔서, 새언약 기독교의 실체를 체험할 수 있는 시간을 주셨습니다.

그 후 1983년부터 주님은 인도 전역의 가장 가난한 마을과 가장 부유한 도시에 수많은 새 언약 교회를 세우기 시작하셨습니다. 몇 년 후, 그분은 우리를 다른 나라에도 데려가서 비슷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어둠의 세력은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세우신 교회를 결코 이기지 못했습니다.

나는 이 책을 쓰기 위해 43년을 기다렸습니다, 왜냐하면 증명되지 않은 이론에 대해서 쓰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역에 대한 주님의 축복, 그분의 말씀으로부터 내게 주신 놀라운 계시, 그분이 기적적으로 개척한 수많은 교회들은 모두, 새 언약 교회를 세우는 하나님의 방법에 대해 내가 배운 것을 그들과 나누도록 나를 모든 신자들에게 빚진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이 책은 그 빚을 청산하기 위한 노력입니다.

이 책은 일상 생활에서 예수님의 본을 따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새 언약 교회를 세우는 사도들의 본을 따르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을 위해 쓰여졌습니다.

장 2
새 언약 사역의 모범

"예수께서 먼저 행하시고 그 다음에 가르치시니"(행1:1).

옛 언약 아래서는, 선지자들이 전한 말씀이 사생활보다 훨씬 더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셨을 때 먼저 삶을 사시고 나서 자신이 행하신 일만을 전했습니다.

"와서 주님의 메시지를 들으라"는 선지자들의 옛 언약의 초청은 이제 "와서 주님께서 우리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셨는지 보라"는 새 언약 그리스도인들의 초청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새 언약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도를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기 전에 먼저 우리 삶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이것은 이기는 삶을 사는 것과 지역 교회를 세우는 일에 있어 주님을 섬기는 것 모두에 적용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세우신 교회가 흑암의 세력을 이기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6:18). 바울은 성도들을 이기는 삶으로 인도하고 이 교회를 세우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쏟았습니다. 디모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님께서 그분의 사도들에게 주신 위대한 사명에는 두 부분이 있습니다.

1.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15,16).

2. 제자를 삼아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모든 것을 가르쳐라(마28:18-20).

예수님은 첫 부분(복음전도) 뒤에 초자연적인 표적이 따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16:17,18). 두 번째 부분(제자 삼는 것)은 초자연적인 표적이 따르지 않고, 제자들을 가르쳐 그분의 모든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28:20). 복음전도(회심자 만들기)는 전 세계의 많은 신자들이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부분(제자 만들기)은 대체로 무시됩니다.

많은 전도자들과 선교사들이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다시 우리로 데려오기 위해 뒤쫓아 가고 있습니다 - 이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잃어버린 양을 다시 데려오는 교회신자들은 일반적으로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99명"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습니다(예수님이 누가복음 15:7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많은 기독교인 "양 우리"는 분노, 성적 욕망, 돈에 대한 사랑, 그리고 다른 많은 형태의 육욕에 의해 패배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들은 종종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보다 더 많은 회개를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절실히 필요한 것은 우리 안에 있는 99마리의 양들을 진정한 회개와 의로운 삶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잃어버린 양은 경건한 우리(새 언약)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한 마리의 양이 우리에 있는 99마리의 양이 가지고 있는 질병에 감염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도와 예수님의 모든 명령에 대한 순종을 강조하기 위해, 우리를 우리 교회(Christian Fellowship Church, CFC Bangalore, India)로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전도를 했습니다 - 그리고 우리의 수는 1975년 한 교회에 10명 미만에서, 오늘날 많은 교회에 있는 수천 명의 신자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전도 후에, 우리는 회심한 자들을 제자가 되도록 인도합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모든 명령에 순종하도록 가르칩니다.

마태복음 28:18-20에 주어진 대명령의 두 번째 부분에는 일곱 가지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마28:18-20)

예수께서 다가와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1."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우리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근거로 가서 제자를 삼아야 합니다. 어디에서나사람들 가운데 결핍을 보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나라에 가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요. 우리는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직 그분의 권위 아래 있기 때문에, 그분이 우리에게 가라고 하는 곳이면 어디든 갑니다. 그러면 그분의 권세는 우리가 어디로 가든지 우리를 보호하고 지켜주실 것입니다. 이것을 믿지 않으면 가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제자를 삼으라". 우리는 제자도의 세 가지 조건을(예수님이 누가복음 14:26,27,33에서 말씀하셨음) 선포할 때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친척보다, 자기 자신의 삶(생명, 뜻)보다, 자기 소유물 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3. "모든 나라에서". 우리는 이 제자도의 메시지를 가지고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가능한 한 세계의 많은 지역에 도달해야 합니다. 우리는 고향에서 몇 명의 제자를 삼았다고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우리는 부끄럼없이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선포해야 하며 - 단지 그들의 죄가 용서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아니라 -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만 침례를 베풀어야 합니다.

5. "예수께서 가르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전파하신 모든 계명에 순종하는 방법을 모든 제자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6.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과 협력하여 이 사역을 수행해야 하며 - 우리의 사역에서 그분의 임재와 능력으로 우리를 전적으로 지원하실 것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7. "이 세상 끝날까지". 우리는 그분이 우리의 삶이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우리를 지원하실 것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위의 모든 것을 우리의 삶이 끝날 때까지 계속해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똑같은 방식으로 일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 지도자들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의 삶에서 결실한 모든 선한 것을 생각하십시오……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주님을 신뢰하십시오 -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므로……

그리고 이상하고 새로운 생각(교리)에 끌려 다니지 마십시오……"(히13:7-9 - Living).

우리는 위의 구절을 정확히 따르려고 노력했습니다:

- 우리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 첫 사도들을 지도자로 받아들였습니다.

-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그들이 한 선한 일을 보았습니다.

- 우리는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주님을 신뢰했고, 그래서, 우리는 우리 가운데서도 비슷한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 당시와 오늘날도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 우리는 우리 주변의 기독교 집단에서 보았던 기독교 일을 하는 "이상하고 새로운 방식"에 스스로 끌려가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해서도 이와 같은 일을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이 강해지기를 바랍니다 - 하나님은 편애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모든 장소와 모든 세대에서 자기를 부지런히 찾는 모든 자에게 상 주시는 분입니다(히11:6).

사도들의 본을 따름

성령은 사도 바울에게 영감을 주어서 그의 편지에 어떻게 주님께서 그를 그 시대의 다른 대부분의 설교자들보다 더 높은 기준에 따라 살 수 있게 하셨는가에 대해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나의 이 자랑은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가 지금하고 있는 것, 그것을 앞으로도 할 것이다, 이것은 자기가 우리와 동일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자랑하는 자들의 발 아래에서 땅을 제하여 버리기 위함이다 .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전혀 보내지 않으셨고; 그들은 당신을 속여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생각하게 만든 "가짜"이다". (고후11:10-13 - TEV and Living).

바울이 자신을 당대의 다른 설교자들과 비교할 때, 그것은 헛된 자랑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는 강력한 증거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시대의 신자들에게 그의 본을 따르도록 도전을 주었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바울의 이 영적 자랑과 (하나님의 일을 하는 모든 사람은 반드시 가져야 함), 영적인 교만에서 영감을 받은 바리새인의 육신적 자랑(눅18:10-14, 우리 모두가 싫어해야 함)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성령은 바울에게 영감을 주어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인 것 같이, 여러분은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고전11:1; 빌3:17)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생애와 사역은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 할 모범으로 주어졌습니다. 바울은 새 언약의 사역을 어떻게 완수하였습니까?

<바울의 사역>

바울은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의 사역은 두 가지였습니다:

1. 먼저 그리스도를 들어본 적 없는 곳에서 복음을 전한 개척 전도자였습니다. 그는 "이미 다른 사람이 개척한 교회보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아직 들어본 적이 없는 곳에 전파하는 것이 내 뜻이니라"(롬15:20 - Living)라고 말했습니다.

2. 둘째, 바울은 옛 언약의 사람들의 모임만 있었던 곳에 새 언약의 교회를 세운 사도였습니다. 고린도 교회에게 그가 말하기를, "나는 여러분을 순결한 처녀로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여러분을 한 분 남편 되실 그리스도와 약혼시켰습니다"(고후11:2).

그의 사역의 첫 번째 부분에서 바울의 모범을 따름: 많은 경건한 선교사들은 수세기 동안 개척 전도자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으며, 바울의 모범을 따라 그리스도가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 그 분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개인 비용을 들여 이 작업을 수행했습니다.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은) 더 많은 선교사들이 오늘날에도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들 모두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들을 가장 존경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개척 전도자로 부르지 않으셨기 때문에 이것을 제가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잘 알려진 전도자들은 바울처럼 개척 전도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미 수천 명의 기독교인과 많은 교회가 있는 지역에서 모두 복음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그의 사역의 두 번째 부분에서 바울의 모범을 따름: 하나님은 바울의 사역의 두 번째 부분, 즉 옛 언약의 교회가 있던 곳에 새 언약의 교회를 세우기 위해 나와 우리 교회를 부르셨습니다. 그것이 내가 쓸 수 있는 전부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새 언약의 교회를 개척하는 사역에서 보고 피한 두 가지 위험>

돈의 위험 :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돈(부)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16:13). 그래서 무엇보다도 바울은 자신의 삶과 사역을 지배하는 돈의 권세를 없애려고 했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바울의 모범을 따르려고 노력했습니다.

인간 지배의 위험 : 두 번째 위험은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머리 직분을 사람이 대신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를 통해 세워진 교회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주신 사도적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권위의 경계 안에 머물고 교회의 장로들과 신자들이 그들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직접적인 관계를 갖도록 조심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도 바울의 모범을 따르려고 노력했습니다.

돈의 위험 극복하기

1. 바울은 경제적으로 자립했고 생계를 남에게 의존하지 않았습니다(행20:33,34). 주의 종은 그가 섬기는 자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고전9:6-14). 그러나 당시의 탐욕스럽고 돈을 사랑하는 설교자들과 다른 자신을 보여주기 위해 바울은 스스로를 부양하기로 결정했습니다(고전9:15-19, 고후11:12,13). 우리는 인도에 있는 대부분의 "목사들"도 탐욕스럽고 소유욕이 강하고 돈을 사랑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다르게 되기 위해,우리 교회의 모든 장로들은 재정적으로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를 부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모두가 지난 몇 년 동안 일한 방식입니다.

2. 바울은 예수님처럼 자신의 재정적 필요를 하나님 외에 다른 누구에게도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 그는 신자들을 격려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주도록 했습니다(고전16:1,2; 고후8,9). 우리 교회도 그 모범을 따랐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도 우리의 필요를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신자들을 돕기 위해 수백만 루피를 기부했습니다. 예수님은 예물을 은밀히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6:4). 그래서 우리는 지난 43년 동안 우리 교회에서 헌금을 모으기 위해 헌금 주머니를 한 번도 돌린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미팅홀 출구 근처에 헌금함을 두어, 신자들이 비밀리에 헌금을 드릴 수 있도록 합니다(막12:41-44 참조). 하나님은 즐겨 내는 사람만을 사랑하십니다(고후9:7). 그래서 우리는 그 누구에게도 헌금함에 돈을 넣으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헌금은 자발적이었습니다. 우리는 인도에서 수천 명의 신자들이 참석한 200번 이상의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들 모두에게, 우리는 아무에게도 돈을 요구하지 않고 군중을 값없이 먹이신 예수님의 모범을 따랐습니다.

3.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누구에게도 돈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일에 돈이 필요하다는 암시를 주는 자신의 일에 대한 보고서를 사람들에게 보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또한복음을 전하기 위해 누구에게도 돈을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지난 43년 동안 우리 사역에 대한 보고서를 아무에게도, 아무 곳에도 보낸 적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신자들에게 어떤 사람의 재촉도 없이 우리의 일을 지원하도록 자극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주님의 일을 위해 선물을 받는 방식에서 예수님의 본과 바울의 본을 따랐습니다(눅8:2,3; 고후11:7-9; 빌4:12-19 참조).

4. 바울은 그의 사역을 위해 아무에게도, 모든 사람에게서 선물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는 몇몇 신자들에게서만 선물을 받았습니다(빌4:15-19). 그에게는 선물을 받을 사람을 결정하는 몇 가지 원칙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교회로서 동일한 원칙을 따랐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우리 교회에 돈을 주기 전에 스스로에게 물어볼 다섯 가지 질문 목록을 만들었습니다:

(i) 당신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지상에서 하나님의 사업을 지원하는 것은 큰 영광이자 특권입니다; 그러나 그 특권은 그의 거듭난 자녀들에게만 주어집니다(요삼7).

(ii) 가족의 필요를 위해 충분한 돈이 있습니까? 당신의 기부가 가족에게 재정적 부담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까? 먼저 가족의 필요를 돌보아야 합니다(막7:9-13 및 딤전5:8 참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매우 부자이십니다, 그분은 (땅의 모든 부유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자녀들이 그분의 일을 위해 헌금을 함으로써, 어떤 식으로든 그분의 자녀들이 굶주리거나 고통 받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iii) 상환해야 할 큰 부채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먼저 부채를 청산하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모든 빚에서 벗어나 평안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롬13:8 참조). 하나님은 우리가 "가이사"의 돈이나 다른 사람의 돈을 그분에게 드리기를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이든 드리기 전에, 먼저 가이사의 것을 "가이사"에게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2장 21절에서 그것을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참고: 주택 대출은 "부채"가 아닙니다. 이 구절에서 의미하는 바는, 주택이 대출을 받은 금액과 동일한 가치로 소유하고 있는 자산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유로, 차량 대출은 부채도 아님 - 차량이 대출 금액에 대해 보험에 가입되어 있는 경우).

(iv) 당신은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어떤 식으로든 상처를 준 사람들과 화해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까?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도 그 사람에게 사과하지 않는 사람의 제물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마5:23,24).

(v) 당신은 누구의 압력이나 심지어 당신 자신의 양심의 압박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그리고 기쁘게 드리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즐겨 내는 사람을 사랑하시고, 마지못해 내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압력을 받아서 내는 사람, 어떤 의무를 다하기 위해 내는 사람, 단지 양심을 편하게 하기 위해 내는 사람, 또는 그 대가로 주님으로부터 어떤 보상을 받기 위해 내는 사람들로부터 선물을 원하지 않습니다(고후9:7).

이 목록은 우리의 웹사이트에 있습니다: http://www.cfcindia.com/our-financial-policy

5. 바울은 신자들에게 결코 빚지지 말라고 촉구했습니다(롬13:8). 우리의 모든 교회들도 어느 때든 누구에게도 빚을 지지 않고 자신들의 일을 관리해 왔습니다. 우리는 인도의 여러 지역에 많은 교회 건물을 지어야 했습니다. 그 곳에서 우리의 수가 증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우리는 그런 교회-건물을 짓기 위해 (은행에서조차 ) 돈을 빌린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지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돈을 모았을 때만 지었습니다. (위에 언급된 바와 같이, 우리의 재정 정책에 따라, 어쨌든 은행은 우리에게 대출을 제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6. 바울은 자신의 글을 통해 수백만 달러의 로열티를 벌어들이는 오늘날의 기독교 작가들과는 달리, 그의 글에 대해 어떠한 로열티도 받지 않았습니다. 우리 교회는 지금까지 여러 언어로 된 백만 부 이상의 책(30권)의 복사본을 출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책에 대한 로열티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바울처럼, 우리도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도록 무료로 우리의 글을 제공했습니다 - 우리의 경우, 우리 웹사이트에서( www.cfcindia.com). 우리는 또한 누구나 무료로 보고 다운로드 할 수 있도록 1000개 이상의 비디오 설교를 웹사이트(및 YouTube)에서 여러 언어로 제공했습니다.

7. 예수님과 바울은 신부의 아버지가 신랑의 아버지에게 막대한 돈을 지불해야 하는 인도의 만연한 결혼 지참금 제도에 반대했을 것입니다. 이 악한 관행은 인도의 모든 교파 기독교인들에 의해 행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지참금 제도에 전적으로 반대했습니다. 모든 결혼식에서, 우리는 신랑과 신부로부터 부모가 지참금을 주거나 받지 않았다는 서면 진술서를 받습니다.

인간적 지배의 위험

1. 바울은 그가 개척한 모든 교회에 목사가 아닌 장로(복수)를 임명했습니다(행14:23; 딛1:5). 이것은 한 사람이 교회를 지배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그리고 그 장로들은 모두 같은 교회에서 선출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장로들은 그들의 양 떼를 잘 알고 있었고 - 따라서 쉽게 그들의 영적 "아버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모든 교회에서 그렇게 했습니다. 우리 어느 교회에도 목사가 없습니다. 우리는 장로를 임명합니다. 그리고 모든 장로들은 같은 지역 교회에서 선출됩니다. 어느 누구도 어떤 교회를 인도하기 위해서 다른 곳에서 데려온 적이 없습니다.

2. 바울은 그가 개척한 교회를 위한 중앙 본부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 왜냐하면 교회는 교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각 지역 교회는 오직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 있는 장로들이 이끌었습니다. 우리는 같은 모범을 따랐습니다. 교회가 굳건히 세워지는 즉시, 우리는 그 리더십을 지역 장로들에게 넘깁니다. 그들은 그 교회에 관한 모든 문제를 결정하고 그들 자신의 재정을 관리합니다. 우리 교회에는 중앙 본부가 없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했던 것처럼 우리도 장로들에게 끊임없이 조언과 감독을 했습니다. 영적인 권위는 우리가 장로에게 부여한 적이 없고, 자발적으로 요구하고 기쁘게 받아들인 경우에만 주어집니다.

우리는 모든 일의 영역에서 우리 주 예수와 사도 바울이 보여주신 본을 따르기 위해 온 마음을 다해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시대에도 신약의 기준을 따르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우리의 사역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는 것을 나타냈습니다.

하나님의 일의 작은 부분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이 오늘날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몸에 있는 다르고 다양한 사역의 작은 부분일 뿐임을 압니다.

그러나 모든 사역은 여전히 ​​ 예수님과 그분의 사도들이 예시하고 가르친 하나님 말씀의 기준과 원칙에 따라 운영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신약의 기준을 따르지 않는 교회와 사역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최종적으로 하나님께만 대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CFC에 있는 우리는, 우리 주님과 그의 사도들이 그분의 말씀에서 가르친 기준이 오늘날 98%의 사람들이 비기독교인인 인도와 같은 가난한 나라에서도 따를 수 있다 는 사실에 대한 살아있는 증거가 되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을 교회에 모으는 일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생명의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마7:14). 따라서 우리의 목표는 그 소수만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지상의 모든 사람이 천국에 가고 싶어하기 때문에, 우리는 죽어서 천국에 가고 싶어하는 사람을 찾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죽기 전에 이 땅에서 온전한 제자로서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자들만 찾았습니다. 따라서 우리 교회는 거대 교회가 아니며 앞으로도 아닐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바울은 우리가 교회를 지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상징적으로 말해서) 금, 은, 보석 또는 나무, 풀, 짚으로 세웁니다(고전3:12-15). 제자도의 조건과 삶의 거룩함을 설교하지 않으면, 거대한 건축물(대형교회)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무, 건초, 짚으로 건물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믿는 자들을 심판하시는 그 날에, 위의 구절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불은 그러한 일을 완전히 태울 것입니다. 그러나 금, 은, 보석과 같은 제자도의 선포와 그리스도의 모든 명령에 대한 완전한 순종 위에 세워진 작은 일은, 불길을 뚫고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명한 그리스도인은 그의 일에서 숫자가 아니라 질을 추구할 것입니다.

우리는 쉽게 (거짓 겸손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행하신 모든 일에 대해 침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다음엔:

1. 우리는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2. 우리는 우리 시대에 다른 신자들에게서 신약의 원칙과 기준에 따라 생활하고 일하도록 하는 도전을 강탈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행하신 일을 강조해야 하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주님의 백성의 다음 세대는 이 원칙을 이해하고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 그래야 그들이 또한 평생 동안 맛을 잃지 않는 소금과 같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그리고 그의 사역을 통하여 행하신 일에 대해 잠잠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또한 바울이 말한 것처럼 말할 것입니다: "우리의 이 자랑이 그치지 아니하리라"(고후11:10) .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을 계속하여, 초대 사도들이 실천한 것과 같은 원리로 오늘날에도 주님의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음을 증명할 것입니다.

장 3
성육신의 원리

모든 효과적인 사역의 기본 원리는 성육신의 원리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사람으로 이 땅에 사셨을 때 친히 세우신 본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골로새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물을 볼 수 있도록 하나님께 구합니다"(골1:9 - J. B. Phillips)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을 새롭게 하여(생각의 변화) 우리가 점점 더 그분이 생각하시는 방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하고, 점차적으로 그분의 관점에서 모든 사람, 사물, 상황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를 닮음으로 변화되는 것과 예수님이 걸으신 것처럼 걷는다는 것은 이런 의미입니다(요일2:6).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우리의 변화는 우리의 생각(mind)에서 시작됩니다(롬12:2).

예수님은 우리처럼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성경에서 먼저 확신하지 않는 한 우리는 예수님이 걸으셨듯이 걸어가라는 도전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2장 17절에 "그분께서(예수) 모든 일에서 그 형제들과 같게 될 필요가 있었으니, 이것은 하나님께 속한 일들에서 긍휼 많고 신실하신 대제사장이 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2장 6,7절에 "그분은(예수)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의 모습이 되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인격으로 지상에 계셨을 때 여전히 하나님이셨으며, 이는 그분이 예배를 받아들였다는 사실로 증명되었습니다(복음서에 7번 기록됨 - 마 8:2; 9:18; 14:33; 15:25; 20:20, 막5:6; 요9:38). 그러나 그분은 이 땅에 계실 때 하나님의 권세를 버리고 인간의 한계를 받아들이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 38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원토록 예수님은 성부, 성령과 동등하시며, 항상 그들과 함께 역사하셨습니다. 그들의 연합된 뜻은 언제나 한결 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을 때, 모든 인간이 그러하듯이 자신의 뜻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신약에서 " 예수님이 육신으로(flesh) 오셨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의 뜻이 있다고 해서 죄가 되는 것은 없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그를 창조하셨을 때 자신의 뜻이 있었고, 그 당시에는 죄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자신의 뜻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항상 아버지의 뜻을 행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분은 결코 죄를 짓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겟세마네 그분의 기도에서 가장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 내 뜻 대로가 아니라 - 그러나 당신의 뜻대로 ...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마26:39,42). 하나님께서 성전의 휘장을 찢으셨을 때(마27:51), 예수님은 지상 생애 동안 충실하게 그의 육체의 휘장을 찢으셨고(자기 의지에 대한 죽으심), "우리가 걸어갈 새롭고 살아있는 길이 열렸음"을(히 10:20)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람의 자기 의지에 대한 이 죽음은 예수님께서 매일 지고 가셨고 이제 우리에게도 매일 짊어지라고 하신 십자가입니다(눅9:23).

기독교 집단에는 하나님이 세 위격이 아니라 세 칭호를 가진 한 위격이라고 잘못 가르치는 집단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자신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심을 가르칩니다 - 그래서 그들은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세례를 줍니다. 마태복음 28:19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예수님의 명령과 반대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줄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과 아버지가 같은 위격이었다면,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은 자신에게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말도 안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6장 38절에 있는 그분의 말씀은: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내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와 같이 들릴 것입니다! 그것도 말이 안됩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그것이 적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말합니다(요이1:7). 우리는 그러한 거짓 가르침을 경계해야 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만 세례를 받은 사람이 교회에 왔다면, 그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아버지와 성령을 저버렸음을 그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그는 마태복음 28:19에서 예수께서 명령하신 대로 올바르게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예수의 인성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다음에서 더 읽을 수 있습니다.

https://cfcindia.com/article/the-truth-that-we-believe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시험을 받으셨으나 죄를 짓지 않으셨다

성경은 디모데전서 3장 16절에서 경건의 비밀이 "육신으로 오셔서 자기의 영을 깨끗하게 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교회는 이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딤전 3:15)고 말합니다.

(딤전 3:15,16) 만일 내가 늦어지더라도, 하나님의 가족 가운데서 사람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그대가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가족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입니다. 이 경건의 비밀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분은 육신으로 나타나시고, 성령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으셨습니다.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 전파되셨습니다. 세상이 그분을 믿었고, 그분은 영광에 싸여 들려 올라가셨습니다."

그 구절의 리빙 바이블 의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경건한 삶을 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셔서 그의 심령에 흠 없고 깨끗함을 증명 받으신 그리스도 안에 답이 있습니다."

그 구절은 계속해서 사도들이 세상의 "열방 중에 이것을 전파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진리를 반대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죄를 지을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때 그분은 우리처럼 시험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4장 15절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일에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으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2장 17절은 그분은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시험을 받을 때 달려가서 우리를 도우실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탄은 우리가 유혹을 받을 때 이 힘과 위로를 빼앗고자 합니다.

경건한 A. W. Tozer는 이 주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어떤 사람이 죄의 가능성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는 도르래, 바퀴, 누루는 버튼으로 움직이는 일종의 로봇일 뿐입니다. 악을 행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마찬가지로 도덕적으로 선을 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도덕의 개념에는 인간의 자유 의지가 필요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의 의지가 악을 행할 자유가 없으면, 선을 행할 자유도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죄를 지으실 수 없다는 전제를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가 죄를 지을 수 없다면, 광야에서의 시험은 희극이었고, 하나님은 그것에 가담했습니다. 아닙니다. 그분은 인간으로서 죄를 지을 수 있었지만, 죄를 짓지 않으셨다는 사실이 그분을 거룩한 사람으로 표시했습니다.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죄를 지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지 않으려는 마음입니다. 거룩한 사람은 죄를 지을 수 없는 사람이 아니라 죄를 짓지 않는 사람입니다.

진실한 사람은 말을 못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말할 수 있고 거짓말을 할 수 있지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정직한 사람은 정직할 수 밖에 없는 감옥에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정직한 사람은 정직하지 않을 자유가 있지만, 부정직하지 않을 사람입니다.

(A.W.Tozer의 책: 교회의 비극 - 사라진 선물 - 7장에서)

성경에 정직하고, 자기만의 전통에 치우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은 모든 일에 우리가 시험을 받는 것과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으나; 죄를 짓지 아니하셨다"는 진리를 인정할 것입니다(히 4:15).

(히 4:15)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십니다.

우리는 유혹과 죄를 구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일에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한 번도 유혹에 굴복하지 않으셨고(심지어 마음으로도), 결코 죄를 짓지 않으셨습니다. 즉 , 한 번도 자신의 뜻을 행하거나 자기의 기쁨을 구하지 않으셨습니다(롬 15:3).

(롬 15:3) 그리스도께서도 자기에게 좋을 대로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님을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떨어졌다" 한 것과 같습니다.

모든 유혹은 다른 영역들에서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하고 우리 자신의 뜻을 행하라는 초대입니다. 사람은 그 초대에 굴복하고 자신의 뜻을 행할 때에만 죄를 짓습니다.

바울의 글에서 "정욕(lust)"이라는 단어는 악한 욕망이 아니라 " 강한 욕망"을 의미합니다. 기록된바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릅니다(the Holy Spirit lusts against the flesh) "(갈 5:17 - KJV) - 이는 성령께서 우리의 자기 의지를 거스르는 강한 갈망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 자기 의지가 산출되면, 그것이 잉태하여 죄를 낳습니다(약 1:15).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뜻을 부인하면, 죄를 짓지 않습니다. 옛 성인이 말했듯이 "새가 내 머리 위로 날아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내 머리카락에 둥지를 만드는 것은 막을 수 있습니다." 악한 생각이 스스로 우리에게 떠오를 때, 잠시라도 그것을 마음에 품고 있는다면, 우리는 그것이 거기에 "보금자리를 만들도록" 허용하는 것이고, 그 다음 우리는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본보기는 예수님입니다, 그분은 우리와 똑같은 시험을 받으셨으나 결코 죄를 짓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의 시험

신자가 경건에 대해 간절하지 않거나, 겁쟁이이며, (그가 성경에서 본) 진리를 옹호하기를 두려워하고, 다른 사람들의 비판을 두려워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신다면, 하나님은 이 진리를 그에게 숨기실 것입니다 - 이것을 "경건의 비밀"(딤전 3:16)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만 그의 비밀을 나타내십니다(시 25:14). 하나님의 일에 겁쟁이가 되는 것은 위험합니다. "겁쟁이"는 요한계시록 21:8에 첫 번째로 불 못에 보내질 사람들로 열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 "살인자들, 부도덕한 자들, 점술가들, 우상 숭배자들"보다 앞서!

마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진리의 모든 부분을 믿는다고 큰 소리로 공언하면서, 악마가 지금 공격하고 있는 특정한 진리에 대해 침묵한다면, 나는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지점에서 군인의 충성심이 시험됩니다. 군인이 현재의 갈등 상황에서 확고하게 서있지 않는다면, 전장의 다른 모든 지역에서 충실하다는 것은 무익하고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지난 43년 동안 인도에서 우리 교회를 상대로 가장 치열하게 전투가 벌어졌던 것은 "그리스도는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를 범하지 아니하셨다"는 진리를 중심으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3:15)가 되어 담대하고 부끄러움 없이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수많은 변화된 삶에서 그 결과를 보았습니다.

디모데전서 3:16에서 경건의 비밀은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다는 교리"가 아니라 "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인격"에 있음을 주목하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교리로 보고 그리스도의 인격자체를 보지 않음으로 바리새인이 되었습니다. "율법 조문은(정확한 교리라도) 사람을 죽입니다. 오직 성령만이 생명을 주십니다"(고후3:6). 우리는 사람들에게 어떤 교리가 아니라 그리스도 그 자신을 가리켜 주어야 합니다.

(고후 3:6)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언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이 새 언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라, 영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것을 우리의 영으로 시인한다는 것은

(그리고 단지 우리의 생각으로만이 아니라 - 요일 4:2),

1) 무엇보다도 먼저 그분이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것과,

2) 그분은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성령의 능력을 받을 수 없었다는 것과,

3) 우리가 마음을 다하면 그분이 걸어가신 것처럼 걸어 갈을 수 있다는 것을(요일 2:6)

온 마음을 다하여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영이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기를 갈망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결코 우리 자신의 것을 구하지 않고 우리 자신의 의지대로 행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지상에 계실 때 유혹을 통해 배운 교육을(아버지께 순종하여) 이해하기 위해 성령의 계시가 필요합니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셨느니라"(히 5:8)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분은 모든 유혹에 맞서 싸우시는 데 전적으로 신실하셨습니다. 그는 또한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도록" 충실했습니다(사53:12 - KJV). 이와 같이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이 그의 몸을 통하여 나타났습니다. 극소수의 사람들이 성화를 추구하면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영혼의 생명을 쏟아 붓는 지점에 이르게 됩니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그들의 삶에서 알려진 모든 죄와 싸우는, 하나님 보시기에 신실한 사람은 극소수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부분에서 이 점을 강조한 이유는, 많은 신자들이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놓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분의 육체를 통하여 우리를 위해 만드신 새롭고 살아 있는 길(히10:20)에 대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먼저 진리를 알아야 하고 그 다음에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고 말씀하셨습니다.

(히10:20) 예수께서는 휘장을 뚫고 우리에게 새로운 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휘장은 곧 그의 육체(flesh, self-will)입니다.

(요8:32) 그리고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예수는 우리의 큰형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큰형이시며(롬8:29), 하나님은 예수님을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요17:23). 하나님 앞에는 차별이 없으시므로(롬2:11), 우리는 다음과 같이 믿습니다:

(롬8:29)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사람들을 택하셔서, 자기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으니, 이것은 그 아들이 많은 형제 가운데서 맏아들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요17:23)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롬2:11)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함이 없이 대하시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은 예수님을 위해 하신 모든 것을 예수님의 어린 형제자매인 우리들에게도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를 죄의 힘에서 해방시키실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예수님을 돌보신 것처럼 우리를 돌보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를 모든 두려움과 불안에서 해방시켜 주실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의 가장 큰 두 가지 문제는 죄와 두려움입니다. 이 두 가지로부터의 자유는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이 이 두 가지 영역에서 시험을 받으셨으나, 죄를 짓지 아니하셨고 결코 두려워하거나 근심하지 아니하셨음을 볼 때 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이 걸으신 것처럼 참으로 걸을 수 있습니다(요일2:6).

다음은 내가 1977년에 이 진리에 사로잡혔을 때 하나님께서 내가 쓰도록 도우신 찬송입니다:

"무거움과 근심으로 몸을 굽힐 때

당신의 영혼은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주 가까이 계십니다.

그분은 그분의 아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도 도우실 것입니다.

그분의 약속의 말씀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그분은 당신을 끝까지 지키실 것입니다.

합창:

이것은 좋은 소식입니다 -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

그가 예수님을 위해 한 일, 그는 당신을 위해 할 것입니다.

강력한 능력으로 당신을 강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은 끝이 없습니다.

죄와 악이 이 세상을 가득 채우고,

그리고 당신은 쇠망할지라도,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참되다

"죄가 당신을 지배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유혹의 힘이 강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당신에게 머무를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매일 승리하는 예수님처럼 걸을 수 있습니다.

고통과 질병이 당신에게 올 때

그리고 그것이 당신이 사랑하는 이에게도 닥칠 때,

하나님은 당신이 어떻게 느끼는지 알고 계십니다,

그는 치유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당신의 아버지께서 당신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는 신실하시고 진실하시며,

그리고 그가 예수님을 돌보았듯이

그는 당신을 돌볼 것입니다.

오, 당신이 예수님을 당신의 주님이자

맏형으로 알게 된다면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위로가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가진 모든 것은 이제 당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당신을 놓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이 당신을 위하시는데

누가 당신의 적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야 할 7가지 영역

첫째, 예수님은 범사에 아버지의 영광을 구하셨습니다(요7:18).

자기 마음대로 말하는 사람은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만, 자기를 보내신 분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은 진실하며, 그 사람 속에는 불의가 없다.

그의 가장 큰 갈망은 인류의 선이 아니라 (그것이 아무리 좋은 동기일지라도) 그의 아버지 이름의 영광이었습니다(요17:4). 그분은 아버지의 얼굴 앞에서 사셨고, 모든 일에서 아버지만을 기쁘게 해 드리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분은 아버지 앞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하셨고, 그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 앞에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로 아버지를 섬겼습니다.

(요17:4)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성하여, 땅에서 아버지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것이 우리도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먼저 교회의 종이 아니라 주님의 종이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명하신 첫 번째 기도는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봉사하려고 하면, 결국에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 되어 우리 자신의 명성을 쌓게 될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교회를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리셨습니다.

교회의 기초를 놓는 일에 있어서 그분은 아무 것도 지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사 교회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사"(엡5:25).

(엡5:25) 남편 된 이 여러분, 아내를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내주심 같이 하십시오.

그의 죽음은 이사야의 예언에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복지를 생각하지 않고 죽었습니다(사53:8 - 메세지 의역).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은 자신의 복지를 위해 아무 생각 없이 살았고 죽으셨습니다! 그는 교회를 위해 자신을 완전히 바쳤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분께서 우리에게도 걸어가라고 부르시는 방식이며 - 기꺼이 이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만이 새 언약 교회를 지을 수 있습니다.

(사53:7-9) 그는 굴욕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였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마치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암양처럼, 끌려 가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체포되어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그 세대 사람들 가운데서 어느 누가, 그가 사람 사는 땅에서 격리된 것을 보고서, 그것이 바로 형벌을 받아야 할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느냐? 그는 폭력을 휘두르지도 않았고, 거짓말도 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에게 악한 사람과 함께 묻힐 무덤을 주었고, 죽어서 부자와 함께 들어가게 하였다.

그런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많은 불편을 감수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꺼이 일상 생활을 방해 받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고, 우리의 세상의 소유물을 다른 사람들에게 사용하고, 불평 없이 모든 유형의 압력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셋째, 예수님은 우리의 슬픔에 참여하셨습니다.

그분은 그 자신을 우리와 완전히 동일시하셨습니다. 우리를 도우시려면,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먼저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는 교육을 직접 받으셔야 했습니다(히 2:17; 5:8). 그리하여 그분은 우리의 선구자가 되셨습니다(히 6:20).

(히2:17) 그러므로 그는 모든 점에서 형제자매들과 같아지셔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비롭고 성실한 대제사장이 되심으로써, 백성의 죄를 대신 갚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히5:8) 그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히6:20) 예수께서는 앞서서 달려가신 분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거기에 들어가셔서,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시련 속에서 고난을 받고 순종을 배우려 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설교자가 아니라 우리 교회의 형제자매들을 위한 작은-선구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격려와 능력을 경험함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생명의 무언가를 가질 수 있도록, 많은 고통스럽고 어려운 상황과 시련을 겪습니다 - 말씀을 공부하거나, 책을 읽거나, 설교를 들으며 얻는 메시지가 아닙니다(고후 1:4 참조).

(고후1:4) 온갖 환난 가운데에서 우리를 위로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받는 그 위로로, 우리도 온갖 환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넷째, 예수님은 제자들을 항상 마음에 품고 계셨습니다.

그분이 항상 추구하셨던 것은 그들의 유익이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었습니다:

(a) 그분은 항상 제자들에게 종의 태도를 가지셨습니다. 그분은 그들에게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으셨지만, 항상 그분이 그들을 축복하고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셨습니다.

(b) 비록 강한 책망의 말로라도 제자들에게 유익한 것으로 권하셨습니다 - 이는 그 자신을 위한 온유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구하지 아니하시고 제자들의 영원한 선을 추구하셨습니다

우리는 바울처럼 우리가 말씀을 전한 모든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당신들 중 누구도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당신의 돈이나 선물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나는 당신의 어떤 것도 원한 적이 없습니다. 오직 당신뿐입니다. 나는 당신에게 유익한 하나님의 교훈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습니다"(이 구절들을 묵상하세요: 고후7:2, 행20:33, 고전9:15, 빌4:17, 고후12:14 행20:20).

(고후7:2) 여러분은 마음을 넓혀서, 우리를 받아 주십시오. 우리는 아무에게도 부당한 일을 한 적이 없고, 아무도 속여서 빼앗은 일이 없습니다.

(행20:33) 나는 누구의 은이나 금이나 옷을 탐낸 일이 없습니다.

(고전9:15) 그러나 나는 이런 권리를 조금도 행사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또 나에게 그렇게 하여 달라고 이 말을 쓰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하느니, 차라리 내가 죽는 편이 낫겠습니다. 아무도 나의 이 자랑거리를 헛되게 하지 못 할 것입니다.

(빌4:17) 나는 선물을 바라지 않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장부에 유익한 열매가 늘어나기를 바랍니다.

(고후12:14) 지금 나는 이렇게 세 번째로 여러분에게로 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폐를 끼치는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구하는 것은 여러분의 재물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위하여 재산을 모아 두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자식을 위하여 재산을 모아 두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행20:20) 나는 또한 유익한 것이면 빼놓지 않고 여러분에게 전하고,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 여러분을 가르쳤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에게 말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의 상태에 대해 많이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주님 앞에서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많이 생각하고 그들의 슬픔과 문제를 돌보는 사람들에게만 예언적 사역을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써서 다른 사람들의 입장이 되어 그들이 겪고 있는 일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보다 가난한 사람들의 집을 방문하고 그들과 교제하여서, 그들의 시련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사역은 그들의 필요와 문제와 관련이 없을 것입니다.

다섯째, 예수님은 먼저 삶을 사셨고, 그 다음에야 그것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산상수훈'(마태복음 5~7장)은 전날 밤에 예비하신 말씀의 결과가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 설교에서 말씀하신 그런 삶을 30년 동안 살아온 결과였습니다.

예를 들어, 이것은 우리가 실제로 안식에 들어오지 않은 경우,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가 안식의 삶에 들어갔다는 인상을 주는 방식으로 설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러한 삶에 들어가고자 하는 간절한 갈망이 없다면 우리 자신을 철저히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그런 삶에 들어가고자 하는 불타는 열정이 생길 때까지 애통해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권위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겸손해야 하며, 이미 우리의 삶이 되었거나, 적어도 우리가 노력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만 진심으로 말해야 합니다.

여섯째, 예수님은 모든 것을 스스로 하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행하신 기적에도 다른 사람들을 참여시키셨습니다 - 가나에서 포도주를 베풀 때와 오천 명을 먹이실 때와 심지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도 말입니다. 그는 어려운(불가능한) 부분을 자신이 하는 동안 각각의 경우에 다른 사람들에게 쉬운 부분을 요청했습니다! 마침내 그분은 제자들에게 그분이 행하신 것보다 더 큰 일을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4:12).

(요14:12)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지역 교회에 균형 잡힌 몸-사역이 있기 위해 따라야 하는 모범입니다. 그래야만 우리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몸의 각 지체에게 그분이 그들에게 겪게 하신 모든 일을 통해, 특정한 양육과 특정한 영적 교육을 해주셨습니다. 따라서 그들 각자는 교회를 풍요롭게 하는 데 독특한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한 교회의 형제자매들이 주님께 충성하기 위해 겪은 고난은 모두 교회의 부요함에 대한 기여입니다. 따라서 형제 자매들이 시련 속에서 주님으로부터 배운 것을 나누도록 격려 받지 않는다면, 교회는 가난해질 것입니다. 당신 자신과 당신의 사역에 대해 너무 높은 생각을 하여 당신만이 당신의 교회를 축복할 수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사역을 방해해서는 안 됩니다.

일곱째, 예수님은 자신의 삶과 사역을 위한 도움을 간구하는 기도에서 끊임없이 아버지의 얼굴을 구하셨습니다.

우리의 사역이 효과적이 되려면 열렬한 기도로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교회를 세우려면 우리 자신의 지혜와 능력에 의존하지 말고 성령의 은사를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거룩함과 사랑

우리가 거룩함과 이기는 삶을 추구할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의 삶을 통해 보여주신 것, 즉 참된 거룩함은 항상 다른 사람들에 대한 열렬한 사랑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3장 12,13절에서 바울은 "주님께서 여러분끼리 서로 나누는 사랑과 모든 사람에게 베푸는 여러분의 사랑을 풍성하게 하고, 넘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그래서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굳세게 하셔서,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 잡힐 데가 없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진리와 거룩함을 타협하지 않고 옹호할수록 모든 사람, 특히 우리에게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더욱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자기 기만 속에 살게 될 것이며 우리의 기독교는 위조될 것입니다.

"내가 사람의 말(유창한 화술)을 하고도 사랑하지 않는다면, 나는 녹슨 문짝이 삐걱거리는 소리에 불과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능력 있게 말하고, 그의 모든 비밀을 드러내며, 모든 것을 낮과 같이 드러낼지라도, 내가 사랑하지 아니하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무엇을 믿고, 무엇을 하든, 사랑이 없으면 파산합니다.

사랑은 없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만한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흥분하지(화를 내다) 않습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죄 목록을 간직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목숨이 그것에 달려있는 것처럼 사랑의 삶을 좇으십시오 - 정말 그렇거든요."

(고린도전서 13:1 ~ 14:1 - 메시지 의역).

장 4
모든 곳에 있는 순결한 증거

이 새 언약 시대에, 말라기 1장 11절에 예언된 대로, 우리 주님은 동에서 서에 이르는 모든 나라에 "모든 곳에서" 순결한 증거를 원하십니다. 주님이 1975년 방갈로르 교회를 시작하실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추구해야 할 목표로 주신 말씀입니다.

사탄의 주된 목적은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의 수가 늘어나는 것을 막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교회의 증거를 부패시키는 것입니다. 사실, 사탄은 그러한 교회에 더 많은 사람들이 가입하도록 허용하는 것이 사탄의 목적에 아주 잘 맞는 것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사탄이 육적인 신자들을 통해 더 쉽게 그 교회에 침투하여 그 증거를 부패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위해 어떤 교회든지 순결하기 위해서는 싸움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잘 시작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기준을 낮추고 점차적으로 죽은 교회로 타락하기 쉽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하고, 사탄의 계략을 알아야 합니다. 이 경계심과 자각은 우리가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자신의 삶에 주의를 기울일 때만 날카롭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육적인 사람들이 교회 모임에 참석하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가룟 유다를 12명의 그의 "교회"에 앉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고린도에 세운 교회에는 육적인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육적인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확실히 해야 할 것은 교회의 지도력이 항상 영적인 사람들의 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교회에서 선포되는 메시지가 항상 순수하고 새 언약의 메시지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먼저 자신을 주의하라고 말했습니다(딤전4:15,16).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일에 신실한 사람들(고후7:1)은, 원수의 계략에 대한 영적인 감수성을 얻게 될 것입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교리를 아는 것과 말을 잘하는 것과 신령한 은사도 여기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심지어 지적 세력에 대항하는 것도 아닙니다. 미혹될 수 있는 자들을 미혹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악한 영적 세력들에 대항하는 것입니다.

(딤전4:15,16) 이 일들을 명심하고 힘써 행하십시오. 그리하여 그대가 발전하는 모습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십시오. 그대 자신과 그대의 가르침을 살피십시오. 이런 일을 계속하십시오. 이렇게 함으로써, 그대 자신도 구원하고, 그대의 말을 듣는 사람들도 구원할 것입니다.

(고후7:1)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는 이러한 약속이 있으니,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에서 떠나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온전히 거룩하게 됩시다.

교회가 최우선인 겸손한 지도자들

예수님은 영적 사망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16:18). 주님만이 그런 교회를 지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기껏해야 그분의 뜻대로 그분이 사용하실 수 있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통치는 오직 그분의 어깨에 달려 있어야 합니다(사9:6).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지 않으시면, 우리의 모든 수고가 헛될 것입니다(시127:1). 아무데나 자기들이 주님의 교회를 건축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이는 내가 세운 바벨론이 아니냐"라고 말한 느부갓네살과 교제하고 있습니다(단4:30). 그러한 교만은 바벨론의 세속적인 "교회"를 낳을 뿐입니다(계17:5).

(마16:18) 나도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나는 이 반석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죽음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사9:6)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해 태어났다. 우리가 한 아들을 모셨다. 그는 우리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 그의 이름은 '놀라우신 조언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고 불릴 것이다.

(시127:1) 주님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집을 세우는 사람의 수고가 헛되며, 주님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된 일이다.

(단4:30) 혼자 중얼거렸다. "내가 세운 이 도성, 이 거대한 바빌론을 보아라! 나의 권세와 능력과 나의 영화와 위엄이 그대로 나타나 있지 않느냐!"

(계15:7) 그리고 이마에는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 큰 바빌론'이라는 비밀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지도자를 찾으십니다. 또한 그의 나라를 먼저 구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 노아의 방주처럼, 그들은 교회를 세우는 것이 삶의 최우선 순위인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사랑하셨고,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셨습니다(엡5:25). 우리가 교회를 사랑한다면, 우리 자신과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교회를 위해 온전히 바칠 것입니다. 지역 교회를 세우는 것보다 세속적인 직업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다른 바벨론 외에는 어떤 것도 세울 것을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속 직업을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요. 요즘에는 사도 바울처럼 자립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 일꾼이 돈을 위해 일한다고 비난하는 비기독교인들 앞에서 좋은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속 직업을 가지고 일하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생각에서 가장 우선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교회를 세우는 일에서 우리를 지원하시기 전에, 그분의 교회가 우리의 생각과 삶에서 최우선 순위인지 알아보기 위해 우리를 시험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신자나 교회의 수를 늘리는 데 결코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한 순결한 증거에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도 관심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첫 번째 기도는 항상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숫자 늘리기"가 아닙니다.

어떤 곳에서는 교회가 불결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나쁜 증거가 되는 것보다 전혀 교회가 없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목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두 가지는 하나님에 대한 더 큰 경외심과 더 큰 겸손입니다.

희생의 영을 가진 지도자(아벨-아브라함-다윗-예수님)

참된 교회는 예수님처럼 교회를 위해 모든 것을 기꺼이 내어놓는 사람만이 지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사, 교회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주사"(엡5:25). 오늘날 교회를 짓고자 하는 모든 사람은 같은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 날마다 자기 삶의 총체적 희생.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더 쉬운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는 인류 역사의 시작부터 이 원리를 봅니다.

가인은 하나님께 단지 "제물"을 가져왔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거절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벨은 "그의 양 떼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가져왔고, 하나님은 그것을 받으셨습니다(창4:3-5). 가인은 대가를 거의 또는 전혀 치르지 않은 제물을 하나님께 바치는 종교적인 기독교인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아벨은 모든 것을 희생한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인 신자를 상징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모리아 산의 제단에서 이삭을 드렸을 때, 그것은 그가 바칠 수 있는 가장 값비싼 희생이었습니다. 그는 아벨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었습니다(창22장).

천 년 후, 다윗은 모리아 산(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의 바로 그 자리에서 희생 제사를 드렸고, "값 없이는 결코 하나님께 드리지 아니하리라"는 전적인 헌신의 이 말을 했습니다(삼하 24:24).

(삼하24:24) 그러나 왕은 아라우나에게 말하였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오. 내가 꼭 값을 지불하고서 사겠소. 내가 거저 얻은 것으로 주 나의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지는 않겠소." 그래서 다윗은 은 쉰 세겔을 주고, 그 타작 마당과 소를 샀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이 바친 값진 희생을 보시고, 솔로몬에게 이 두 사람이 값비싼 희생을 바친 바로 그 장소, 즉 모리아 산에 있는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 당신의 성전을 지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참조 대하 3:1).

하나님은 이렇게 전적인 희생 정신을 가진 사람만이 하나님의 집을 지을 수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들만이 그리스도의 신부 - 예루살렘을 세울 것입니다(계21:2).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음녀 바벨론을 세울 것입니다(계17,18장).

(계21:2) 나는 또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와 같이 차리고,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종교적인 사람들과 영적인 사람들의 두 가지 흐름을 시작했습니다. 이 두 가지 흐름은 나중에 이스라엘 역사에서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으로; 그리고 마침내 바벨론과 예루살렘으로 끝날 것입니다(계17,18,21장).

예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지도자

많은 신자들은 천사의 환상과 예수님의 육체적인 사람의 환상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열망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셨던 방식에서 예수님의 삶의 영광을 보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따라야 할 본보기입니다.

바울은 "내 육신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노니.....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롬7:18,24)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그에게 자신을 철저히 정결케 하려는 불타는 열정을 준 것입니다. 우리 육신의 부패함을 드러내는 것이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럴 때에만 "육체의 모든 더러움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온전히 거룩하게" 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 이렇게 하여 교회를 순결하게 보존합니다(고후7:1).

(롬7:18,24) 나는 내 속에 곧 내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깃들여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나는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고후7:1)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는 이러한 약속이 있으니,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에서 떠나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온전히 거룩하게 됩시다.

우리가 믿고 전파하는 순수한 교리는 그것을 단순히 교리로 생각하면, 능력 없이 쉽게 경건의 모양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단순한 교리 이상이어야 합니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계시, 즉 우리 삶에서 계속 증가하는 계시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유혹에 더 충실하게 맞서고 싸울수록, 우리는 우리 내면의 삶에서 그리스도를 닮지 않은 많은 영역, 즉 우리 자신을 깨끗이 해야 하는 많은 영역에 대하여 성령의 계시를 더 많이 받을 것입니다.

그러한 지속적인 계시 없이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건축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입니다. 육신의 부패에 대한 이러한 계시 없이 우리가 얻는 '거룩함'은, (기껏해야) 오직 구약의 성도들의 그것, 즉 율법의 외적인 의로움일 뿐 입이다. 이것은 우리 동료 신자들에게 명성을 얻을 수 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하지" 않을 것입니다(계3:1,2).

(계3:1,2) "사데 교회의 심부름꾼에게 이렇게 써 보내어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분이 말씀하신다.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너는 살아 있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다. 깨어나라. 그리고 아직 남아 있지만 막 죽어 가는 자들을 굳건하게 하여라. 나는 네 행위가 나의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시험의 순간에 예수님을 우리의 본보기로 '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가 타락한 자들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순수한 증거를 세우는 가르침들

예수님은 모든 곳에서 단지 회심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제자를 삼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순수한 증거를 갖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우리 교회의 일원이 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제자가 되기 위한 조건을 분명히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제자도가 우리의 개인 생활, 가정 생활, 교회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쳐야 하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14장 26절부터 33절까지의 가르침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제자가 되기 위한 세 가지 필수 조건을 주셨습니다:

(눅14:26-33) "누구든지 내게로 오는 사람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식이나, 형제나 자매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너희 가운데서 누가 망대를 세우려고 하면, 그것을 완성할 만한 비용이 자기에게 있는지를, 먼저 앉아서 셈하여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게 하지 않아서, 기초만 놓은 채 완성하지 못하면, 보는 사람들이 그를 비웃을 것이며, '이 사람이 짓기를 시작만 하고, 끝내지는 못하였구나' 하고 말할 것이다.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나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서 자기에게로 쳐들어오는 그를 자기가 만 명으로 당해 낼 수 있을지를,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당해 낼 수 없겠으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서, 화친을 청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서 누구라도,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1. 우리는 모든 가족, 친척, 형제 자매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눅14:26).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주님께서 우리가 하기를 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을 방해하도록 허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2. 우리는 우리 자신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눅14:27). 우리는 유혹을 받을 때, 우리의 자아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 매일 여러 번(눅9:23).

3. 땅의 모든 소유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눅14:33). 하나님은 우리가 땅에 속한 많은 것을 소유하도록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 중 어느 것에 대해서도 소유욕을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소유물로써 열린 손바닥 안에 있어야 합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산상수훈(마 5,6,7장)에서 가르치고 경고하신 모든 것을 광범위하고 명확하게 설명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세 가지 예를 들어 그 설교를 결론 내리셨습니다:

(a) 이 설교에서 그의 가르침은 영생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을 묘사하고 있습니다(마7:14).

(마7:14)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너무나도 좁고, 그 길이 비좁아서, 그것을 찾는 사람이 적다.

(b) 제자들은 이 설교의 가르침에 순종해야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매 맺는 나무가 될 것입니다(마7:16-20).

(마7:16-20) 너희는 그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야 한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따며,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딸 수 있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찍어서 불 속에 던진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 열매를 보고 그 사람들을 알아야 한다.

(c) 예수님께서 이 설교에서 가르치신 모든 것에 순종해야만 제자들이 그들의 개인 생활과 가정 생활과 교회를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기초 위에 세울 수 있습니다(마7:24-27).

(마7:24-27) "그러므로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다 자기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고 할 것이다.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서,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그 집을 반석 위에 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서도 그대로 행하지 않은 사람은, 모래 위에 자기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고 할 것이다.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서, 그 집에 들이치니, 무너졌다. 그리고 그 무너짐이 엄청났다."

셋째, 우리는 교회의 모든 사람들이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구하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 위의 기준에 부합하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합니다(행1:8, 엡5:18).

(행1:8)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엡5:18)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방탕이 따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넷째, 불확실하고 악한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자기 아버지로 알고, 그래서 하나님 안에서 안정을 찾을 수 있도록 모든 성도를 인도해야 합니다.

다섯째, 우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범사에 우리와 같이 되셨고"(히2:17),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다"(히4:15)는 위대한 진리를 가르쳐, 그들도 "예수께서 걸으신 대로 걸을 수 있다"(요일2:6)는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히2:17) 그러므로 그는 모든 점에서 형제자매들과 같아지셔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비롭고 성실한 대제사장이 되심으로써, 백성의 죄를 대신 갚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히4:15)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십니다.

(요일2:6) 하나님 안에 있다고 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과 같이 마땅히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일을 시작할 때, 이 중요한 성경 진리를 연구하는 데 여러 달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에 따른 훌륭한 결과를 보았습니다.

그래야만 주님에 대한 순수한 증거, 즉 새 언약의 교회를 세울 수 있습니다.

혼적이지 않고 영적인 지도자

우리가 교회를 세우려면 우리 혼(우리의 생각과 감정)의 강하고 '경건한' 욕망도 죽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삶에서 혼과 영을 나누려고 합니다(히4:12). 이러한 혼적인 욕망은 사울이 결코 죽이지 않았던 아말렉의 좋은 양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 그 때문에 그는 왕좌를 잃었습니다(삼상15:15). 혼적인 욕망은 우리 육신의 욕망(사울이 죽인 아말렉의 나쁜 양)만큼 추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혼적인 욕망은 더 위험합니다 - 그것들은 더 기만적이기 때문입니다.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어서, 어떤 양날 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냅니다.

사탄의 목적은 교회를 부패시키는 것입니다 - 반드시 명백한 죄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교묘한 방법으로 - 인간의 영리함, 감정주의 및 기타 형태의 혼적인 것 의해. 우리는 우리의 영리한 생각에서 나온 프로젝트에 착수할 수 있으며, 이는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옆길로 빠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나지 아니한" 모든 계획은 언젠가는 하나님에 의해 뽑혀 망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5:13).

(마15:13)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자기가 심지 않으신 식물을 모두 뽑아 버리실 것이다."

우리의 사역은 우리가 이 영역에서 우리 자신을 판단하는 데 충실할 때만 더 풍부하고 더 예언적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영리함에서 나오는 모든 설교는 영적인 죽음만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사람의 감정을 흥분시키는 모든 것은 또한 영적인 죽음을 가져올 것입니다. 불행히도 많은 사람들은 인간의 감정의 흥분과 성령의 역사를 구별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역에 어떤 혼적인 것이 있는지 빛을 밝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모든 선한 의도를 가지고, 교회를 미묘하고 눈에 띄지 않게 오염시킬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기본적으로 영리하기 때문에(육신의 영리함을 가지고), 우리의 메시지에 '혼적인 힘'(인간의 영리함과 농담)을 담을 수 있는 위험이 항상 있습니다. 나는 당신이 고린도전서 2장 1-5절을 읽고 묵상하기를 권합니다. 영리한 바울이 말씀을 전할 때마다 두렵고 떨어야 했던 이유를 이해하십시오. 그는 자신의 영리한 마음에 의존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지혜로운 자가 되기 위하여 어리석은 자가 되라"(고전3:18)고 촉구합니다.

(고전2:1-5)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로 가서 하나님의 비밀을 전할 때에, 훌륭한 말이나 지혜로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습니다.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나는 약하였으며, 두려워하였으며, 무척 떨었습니다.

나의 말과 나의 설교는 지혜에서 나온 그럴 듯한 말로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 나타낸 증거로 한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바탕을 두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고전3:18)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거든, 정말로 지혜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짐'과 '기발한 생각'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주님의 짐'은 많은 기도와 우리 삶에서 주님의 훈련 후에 우리 생각가운데 확고해지는 것입니다. 반면에 '기발한 생각'은 명예를 얻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은 영리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설교할 때 명예 추구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리는 싸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싸움을 온 맘으로 싸워서 완전히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먼저 알려진 죄와 싸우는 데 충실하고, 항상 그분의 얼굴 앞에서 겸손하게 걷는다면,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의 혼적인 삶의 활동에 대해 빛을 밝혀주실 것입니다. 그것들을 발견하는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주님에 대한 개인적인 헌신이 계속 증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점차 타락한 자가 되고, 우리의 말에 기름 부음이 없게 되며, 어디에도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지 못할 것입니다.

혼과 영의 차이점에 대한 더 명확한 이해를 위해, 여기에서 그 주제에 대한 제 메시지를 들을 수 있습니다:

https://cfcindia.com/sermon/soulish-or-spiritual-0

자아 죽음의 길을 걷는 지도자들

예수님은 우리 삶에서 열매를 맺는 오직 한가지 확실한 방법이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 그것은 한 알의 밀이 죽어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이, 땅에 떨어져 자아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요12:24).

(요12:24)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매일의 삶에서 자아에 대해 죽을 만큼 충실한지를 보고 계십니다. 아무도 그것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주위에 어려운 사람들을 두셨다면, 당신에게 죽을 기회를 많이 주기 위해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그 사람들을 사랑하고 축복하십시오. 당신이 당신의 육신에 있는 부패로부터 구원받는 것에 대해 진정으로 진지하다면, 당신의 일상적인 직업에서, 당신은 자아에 대해 죽을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발견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인간의 의로 인도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소명은 신의 성품에 참여하고 다른 사람들도 동일한 성품에 참여하도록 이끄는 것입니다(벧후1:3). 이를 위한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항상 우리 몸에" 짊어지는 것뿐입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하나님은 "우리를 끊임없이 죽음으로 인도하십니다"(고후 4:10-12 참조).

(벧후1:3)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를 앎으로 말미암아 생명과 경건에 이르게 하는 모든 것을, 그의 권능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그의 영광과 덕을 누리게 해 주신 분이십니다.

(고후4:10-12)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으나, 예수로 말미암아 늘 몸을 죽음에 내어 맡깁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의 죽을 육신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하여 죽음은 우리에게서 작용하고, 생명은 여러분에게서 작용합니다.

다른 교회의 그리스도인보다 더 나은 '선한 삶'을 사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결코 율법의 의보다 더 높이 올라갈 수 없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도 더 높이 이끌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의를 칭찬하는 사람들의 증언을 귀하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의 선함과 의로움을 위해 명예를 구하는 것은, 바리새인의 본질이며 그리스도의 영과 정반대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적그리스도의 영에 속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기는 자가 되려면 이것을 무자비하게 죽여야 합니다. 이 문제에 충실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 소수에 속해야 합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길(자아에 대한 죽음)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화를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설교하는 것을 멈추게 해서는 안됩니다. 이 말씀을 듣는 것에 질린 사람들은 자신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이 아님을 증명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이 기분이 상하여 가버리는 것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스스로 명예를 추구하는 설교자들은 매번 설교할 '새로운' 것을 생각함으로써, 가려운 귀를 만족시키려는 욕망에 계속 굴복할 것입니다(딤후4:3,4; 행17:21 참조).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십자가의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 이것은 자연스런 생각에는 미련한 것이지만, "예수께서 걸으신 것 같이 걸어가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그분이 깨끗하신 것처럼 자신을 정결하게 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바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요일2:6, 3:3).

(딤후4:3,4) 때가 이르면, 사람들이 건전한 교훈을 받으려 하지 않고,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들으려고 자기네 욕심에 맞추어 스승을 모아 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진리를 듣지 않고, 꾸민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행17:21) 모든 아테네 사람과 거기에 살고 있는 외국 사람들은, 무엇이나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일로만 세월을 보내는 사람들이었다.

(요일2:6) 하나님 안에 있다고 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과 같이 마땅히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요일3:3) 그에게 이런 소망을 두는 사람은 누구나, 그가 깨끗하신 것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합니다.

바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이동

다니엘서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이동하기 시작하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내 백성아 바벨론에서 나오라"(계18:4)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타협하는 기독교 집단에서 하나님의 새 언약 교회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계18:4) 나는 하늘에서 또 다른 음성이 울려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내 백성아, 그 도시에서 떠나거라. 너희는 그 도시의 죄에 가담하지 말고, 그 도시가 당하는 재난을 당하지 않도록 하여라."

고대 바벨론에서의 그 운동은 타협하지 않는 한 사람인 다니엘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목적에 관심을 갖고 그 목적이 이루어지도록 금식하고 기도했습니다. 어느 곳에서든지 하나님을 위한 순결한 교회를 세우는 일은 대개 하나님 앞에서 기도의 짐을 지고 "주님, 저는 이곳에서 주님을 위한 순결한 교회를 원합니다. 그 교회를 위해 어떤 대가도 기꺼이 치르겠습니다"라고 하는 한 사람으로 시작됩니다. 그것이 성취되는 것을 보기 전에 오랫동안 그 짐을 짊어져야 할 수도 있습니다. 어머니가 뱃속에 아기를 안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이 짐을 마음에 짊어져야 합니다. 다니엘이 이 무거운 짐을 지고 갔던 것입니다.

다니엘의 삶의 한 가지 두드러진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기로 결심하였더라"(단1:8).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가장 작은 계명에도 순종하는 일에 있어서 전혀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이 계명 가운데 아주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 나라에서 아주 작은 사람으로 일컬어질 것이요, 또 누구든지 아주 작은 계명을 행하며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일컬어질 것이다"(마5:19). 하나님이 새 언약의 교회를 세우기 위해 쓰실 사람들은 주님의 주요 계명에 대한 순종, 즉 분노와 성욕을 버리라는 말씀(마5:22.28)은 물론, 여자는 교회 모임에서 기도하고 예언할 때 머리를 가려라(고전11:1-16)와 같은 주님의 부수적인 계명에 대한 순종을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단1:8) 다니엘은 왕이 내린 음식과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고, 환관장에게 자기를 더럽히지 않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처음에 다니엘은 홀로 서 있어야 했고, 반면에 다른 모든 유대인들은 타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바벨론 이름으로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로 더 잘 알려져 있음)는 다니엘이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정하는 것을 보고 용기를 내어 그에게 합류했습니다(단1:11).

(단1:11) 다니엘은 감독관에게로 갔다. 그 감독관은 환관장이 임명한 사람으로서,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를 감독하는 일을 맡은 사람이다. 다니엘이 그 감독관에게 요청하였다.

저는 오늘날 많은 곳에서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와 같은 사람들이 그들의 지역에서 주님에 대한 순수한 증거를 세우고자 하는 소망을 갖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입장을 취할 용기가 없습니다. 그들을 이끌어줄 다니엘이 필요합니다. 다니엘이 그들의 마을이나 도시에서 일어나면, 그들이 나와서 그와 함께 할 것입니다.

바빌론에서 네 명의 진심인 청년은, 왕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던 수천 명의 타협적인 유대인들보다 하나님을 더 강력하게 증거했습니다. 하나님의 편에 섰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그 시대의 가장 강력한 나라(바벨론)와 그 통치자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어중간한 기독교인은 수천 명이라 할지라도 어떤 도시나 국가에서도 주님의 빛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다한 신자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사람의 힘이나 숫자로 되지 아니하며, 오직 그의 영으로 되느니라"(슥4:6 참조).

(슥4:6) 그가 내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이것은 주님께서 스룹바벨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힘으로도 되지 않고, 권력으로도 되지 않으며, 오직 나의 영으로만 될 것이다'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오늘날 그들의 지역에 새 언약 교회를 세우려는 부담을 가지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결코 타협하지 않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장 5
종교적 단체인가 그리스도의 몸인가

교회는 매주 모이는 신자들의 모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단지 "종교적 기독교 단체"가 아니라 그 몸을 건설하고 있음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종교 단체를 조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기름부음이 필요합니다 - 이를 위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날마다 죽고,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옛 언약 아래 있는 이스라엘 백성은 한 몸이 아니라 회중이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대형 교회는 또한 회중이며 몸이 아닙니다. 일부 작은 가정 교회는 조금 더 낫습니다 - 그들은 클럽(사교모임)이지만 몸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분의 몸을 만들고 계십니다.

회중, 클럽, 교회의 차이점을 더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다음 메시지를 들을 수 있습니다.

"회중, 클럽, 교회"(*산토시 푸닌 지음)

https://www.cfcindia.com/sermon/the-congregation-the-club-and-the-church

치욕의 덮개

사람이 본 그리스도의 첫 번째 몸은 구유(소에게 먹이를 주는 그릇)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 굴욕적인 탄생에 대한 치욕은 목자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알아보게 한 표였습니다(눅2:12 참조). 그리스도의 몸이 마침내 갈보리에서 범죄자의 십자가에 달린 것은 또 한 번 치욕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첫 번째 몸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종교계뿐 아니라 세속적인 세상으로부터 치욕으로 특징지어졌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을 참으로 표현하는 것은 세상과 바벨론 기독교 집단으로부터 동일한 치욕을 받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 지역 교회에 그런 '그리스도의 치욕'이라는 덮개가 없다면, 그 이상으로, 우리는 타협자가 되었고 "바벨론 진 밖으로" 나가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히13:13).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한 치욕과 우리 자신의 죄나 어리석음이나 미지근함의 결과인 어떤 치욕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히13:13) 그러하므로 우리도 진영 밖으로 나가 그에게로 나아가서, 그가 겪으신 치욕을 짊어집시다.

예수님에 대해 "그에게는 전혀 아름다운 것이 없었고……그는 멸시를 당하고 귀히 여겨지지 아니하였느니라"(사53:2,3)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의 영광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가려져 있는 은혜와 진리로 충만한 그분의 내적 삶에 있었습니다(요1:14). 우리의 지역 교회들 역시 세상이나 바벨론 기독교계에 매력적이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내면에서 경건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만 매력적이어야 합니다. 성막의 천막 안쪽에는 아름다운 휘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깥 덮개는 먼지와 흙으로 덮인 짙은 갈색 숫양의 가죽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 아름다움은 천막 안의, 안쪽 휘장에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또한 "그 내면의 삶이 영광스럽습니다"(시45:13). 그리고 "그녀의 내면의 영광 위에 (치욕의) 덮개가 있을 것입니다"(사4:5).

(사53:2,3) 그는 주님 앞에서, 마치 연한 순과 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싹과 같이 자라서, 그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를 받으니,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요1:14)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시45:13) 왕후님은 금실로 수놓은 옷을 입고, 구중 궁궐에서 온갖 영화를 누리니

(사4:5) 여호와께서 거하시는 온 시온 산과 모든 집회 위에 낮이면 구름과 연기, 밤이면 화염의 빛을 만드시고 그 모든 영광 위에 덮개를 두시며

여기에 교회 지도자들의 막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들이 교회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방식에 따라 교회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지 못한 예수님을 닮아갈지, 세상으로부터 칭찬과 영광을 받을지 결정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이나 다른 육신적이거나 혼적인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칭찬을 구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바벨론을 건설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인기를 얻고 일반적으로 그리스도교 집단에 받아들여질 때, 우리는 우리가 예수의 발자취를 완전히 놓쳤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대항하여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온갖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그들이 너희 전에 있던 예언자들을 이와 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5:11,12).

헤롯과 그의 군인들은 20세기 전에 그리스도의 첫 번째 몸인 아기 예수를 죽이려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많은 곳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시작을 파괴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하고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빨리 순종함으로써 아기 예수 몸을 보호했습니다(마2:13-15).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책임을 맡은 우리도 요셉과 같아야 합니다. 우리는 '듣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 즉,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우리는 들은 바에 빨리 순종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듣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다면, 우리 지역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은 어떤 식으로든 손실을 입을 것입니다 - 그리고 우리는 마지막 날에 그것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서 우리의 책임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모든 영혼에 대해 하나님께 설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히13:17).

(마2:13-15) 박사들이 돌아간 뒤에, 주님의 천사가 꿈에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헤롯이 아기를 찾아서 죽이려고 하니, 일어나서,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라. 그리고 내가 너에게 말해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요셉이 일어나서, 밤 사이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헤롯이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이것은 주님께서 예언자를 시켜서 말씀하신 바, "내가 이집트에서 내 아들을 불러냈다"하신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었다.

(히13:17) 여러분의 지도자들의 말을 곧이듣고, 그들에게 복종하십시오. 그들은 여러분의 영혼을 지키는 사람들이요, 이 일을 장차 하나님께 보고드릴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들이 기쁜 마음으로 이 일을 하게 하고, 탄식하면서 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들이 탄식하면서 일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겸손 - 그리스도의 몸의 표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내 보좌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이보다 좋은 집을 지을 수 있으리요? 그러나 마음이 겸손하고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사람을 내가 좋게 바라볼 것이요 - 나는 그가 내 집을 지을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사66:1,2 - 의역).

그리스도의 첫 번째 몸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33년 반 동안 사셨던 육체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리스도의 영적 몸으로서, 우리는 그분이 이 땅에 사셨을 때 그분의 육체로 보여주신 본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삶과 사역의 모든 면에서, 그분이 사셨던 것과 같은 원칙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인 우리 각자는, 모든 일에서 예수님을 우리의 본보기로 삼으십시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과 교제하면서 할 수 없는 무엇이든 절대 하거나 말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오셨을 때 가장 먼저 하신 일은 자신을 낮추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기 위해서, 우리도 겸손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 겸손 1단계 -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리를 버리고 사람이 되심으로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 겸손 2단계 - 예수님은 만인의 종이 되심으로 더욱(사람으로서)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 겸손 3단계 - 예수님은 종보다 더 낮아지셔서, 죄인들이 죽임을 당하는 불명예스러운 방법(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죽기를 택하심으로 더욱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이 세 단계는 모두 빌립보서 2:5-8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세 가지 비밀입니다: 겸손, 겸손, 겸손입니다! 이 세 가지 비밀을 배우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삶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결코 성취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계속 바라보면, 결코 결코 교만해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찬송가에서,

"영광의 왕이 돌아가신 놀라운 십자가를 생각할 때,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교만한 맘을 버리네"라고 노래합니다.

(베드로가 바다에 가라앉기 시작한 것처럼 - 마14:30) 예수님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그들과 자신을 비교할 때만 우리는 교만에 빠지게 됩니다. 교만은 사람을 지옥으로 보냅니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을 우리의 원수로 만들고(벧전 5:5) 우리를 영적으로 파멸시킵니다. 그것은 그들이 겸손을 유지했다면, 오늘날 그들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예언자가 되었을 많은 훌륭한 젊은이들을 멸망시켰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만 은혜를 베푸십니다.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있느냐?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선물이니 그러므로 너희가 가진 것이나 있는 것으로 자랑하지 말라"(고전4:7 - Living).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자기를 보잘것 없는 자로 여기는 자들)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3 - Amplified).

이처럼 우리의 영이 가난하게 우리의 날이 끝날 때까지 산다면, 이 땅에서 영광스러운 삶을 살게 될 뿐만 아니라 마침내 하나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편파적이지 않으시고 - 우리가 성취한 모든 것에 감동을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다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만 은혜를 베푸십니다.

가룟 유다와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하나님이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한 무리의 사람들과 그들이 교제하려고 했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폭로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위선적이고 교만한 형제들이 강력한 교회에 가입할 때 조만간 드러납니다 - 하나님은 항상 그의 교회를 정결케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지도자의 위선과 교만을 폭로하시기까지 오랜 시간을 기다리시지만, 반드시 마침내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끊임없이 은밀히 자신을 판단하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책망을 받기를 원하고 기분이 상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주님에게서 결코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권위에 복종

누구든지 교회의 일부가 되기로 선택하면, 그는 교회 문제에 있어서 그 교회의 장로들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다른 문제에 있어서는, 장로와 상의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장로가 자신의 삶과 사역으로 신뢰를 얻었다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경건한 지도자는 아버지처럼 권위를 사용하여 위험으로부터 자녀를 보호하고 최고의 길로 인도합니다. 지도자로서, 우리는 양 떼를 돕기 위해 필요한 모든 희생을 기꺼이 감수해야 합니다.

장로들은 또한 다른 교회의 장로들이 도움을 청하지 않는 한, 자신의 지역 교회 밖에서는 책임이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교회에 갈 때마다, 그 지역 장로들의 권위를 인정해야 합니다. 다른 교회의 문제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를 때, 그들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해 조언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러한 조언은 혼란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다른 교회에 대한 책임도 맡기지 않는 한(이 경우 그 다른 교회의 장로들이 인정할 것입니다), 당신의 경계는 당신의 지역 교회 안에만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장로들은 그들의 교회를 개척하고 그들을 장로로 임명한 사도의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장로를 임명한 사도는 또한 필요하다면 장로 직분에서 그를 제거할 권한이 있습니다.

사도, 예언자, 전도자, 목자, 교사

우리의 개인 생활은 오직 그리스도에 기초합니다(고전3:11). 그러나 교회는 "사도들과 예언자들 위에 세워지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 모퉁잇돌이 되시느니라"(엡2:19,20).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신 후에도 교회에 사도들을 세우셨습니다(엡4:10,11).

(고전3:11) 아무도 이미 놓은 기초이신 예수 그리스도 밖에 또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습니다.

(엡2:19,20) 그러므로 이제부터 여러분은 외국 사람이나 나그네가 아니요, 성도들과 함께 시민이며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놓은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며, 그리스도 예수가 그 모퉁잇돌이 되십니다.

(엡4:10,11) 내려오셨던 그분은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려고, 하늘의 가장 높은 데로 올라가신 바로 그분이십니다. 그분이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예언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도자로, 또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에 은사를 주신 사람들, 즉 사도, 선지자(예언자), 복음 전하는 자와 목자와 교사를 주셨습니다(엡4:11). 그 중 사도와 선지자와 교사가 먼저 세 사람입니다(고전12:28).

그러나 이 모든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모든 평범한 신자들을 돕고 준비를 갖추도록 부름을 받았고, 함께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엡4:12 참조).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있는 모든 지체가 그리스도의 교회를 건축할 책임이 있음을 봅니다.

사도는 특정한 임무를 맡기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입니다.

다음은 사도가 하는 일들 중 일부입니다(신약에서 볼 수 있듯이).

1. 교회를 창설하고 설립합니다(행13-19장).

2. 각 교회에 장로를 임명합니다(행14:23, 딛1:5).

(행14:23)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임명한 뒤에, 금식을 하면서 기도하고, 그들이 믿게 된 주님께 그들을 맡겼다.

(딛1:5) 내가 그대를 크레타에 남겨둔 것은, 남은 일들을 정리하고, 내가 지시한 대로, 성읍마다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는 것입니다.

3. 그는 장로들의 아버지입니다(고전4:15).

(고전4:15)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는 일만 명의 스승이 있을지 몰라도, 아버지는 여럿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 내가 여러분을 낳았습니다.

4. 그는 교리적 문제와 실제적인 문제에 있어서 교회를 지도합니다(행15:6-29; 행6:3).

(행6:3) 그러니 형제자매 여러분, 신망이 있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여러분 가운데서 뽑으십시오. 그러면 그들에게 이 일을 맡기고,

5. 그는 문제가 발생할 때 교회에서 사람들을 징계합니다(고전1:11; 고전 5:4,5,13; 고후13:2).

(고전1:11)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글로에의 집 사람들이 여러분의 소식을 전해 주어서 나는 여러분 가운데에 분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전 5:4,5,13) [우리] 주 예수의 이름으로 여러분이 모여 있을 때에, 나의 영이 우리 주 예수의 권능과 더불어 여러분과 함께 있으니, 여러분은 그러한 자를 당장 사탄에게 넘겨주어서, 그 육체는 망하게 하고 그의 영은 주님의 날에 구원을 얻게 해야 할 것입니다……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악한 사람을 여러분 가운데서 내쫓으십시오.

(고후13:2) 내가 두 번째로 여러분을 방문하였을 때에, 전에 범죄한 사람들과 또 그 밖에 모든 사람에게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지금 떨어져 있으면서도 다시 말하여 둡니다. 내가 이번에 다시 가면, 그러한 사람들을 그냥 두지 않겠습니다.

6. 권위주의적인 장로들로부터 신자들을 보호합니다(딤전5:20, 요삼9).

(딤전5:20) 죄를 짓는 사람은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서, 나머지 사람들도 두려워하게 하십시오.

(요삼9) 내가 그 교회에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서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는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7. 그는 교회에 편지를 써서 경고하고 인도합니다(바울이 계속해서 그랬던 것처럼).

주님은 사도들에게, 주님이 그들을 통해 세우신 교회에 대한 권위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어떤 신자에게도 그의 권위를 결코 부과하지 않습니다(고후1:24). 교회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사도의 권위를 기쁘고 자발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고후1:24) 우리는 여러분의 믿음을 지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기쁨을 누리게 하려고 함께 일하는 일꾼일 따름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믿음에 튼튼히 서 있습니다.

하나님의 원래 계획은 모든 교회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놓은 터"(엡2:20) 위에 세워지는 것이었습니다.

(엡2:20)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놓은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며, 그리스도 예수가 그 모퉁잇돌이 되십니다.

예언자는 자신이 말하는 사람들의 현재 필요에 대해 하나님으로부터 분별력을 받고, 두려움 없이 긍휼히 여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회개로 인도하는 사람입니다(행15:32). 예언자의 사역은 도전과 격려를 가져오고 사람을 세우는 것입니다(고전14:3). 사람이 참 예언자의 말을 들을 때에 마음이 불타오를 것입니다(눅24:32). 그 결과, 그들은 자신의 숨겨진 죄를 보고 "하나님이 확실히 여기 계시다"(고전14:25)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행15:32) 유다와 실라도 예언자이므로, 여러 말로 신도들을 격려하고, 굳세게 하여 주었다.

(고전14:3) 그러나 예언하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덕을 끼치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을 합니다.

(눅24:32)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그 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이하여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우리 속에서] 뜨거워지지 않았습니까?

(고전14:25) 그 마음 속에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엎드려서 하나님께 경배하면서 "참으로 하나님께서 여러분 가운데 계십니다"하고 환희 말할 것입니다.

전도자들은 죄인들을 그리스도와 교회로 인도합니다.

목자들은 교회의 성도들을 돌보고 조언하고 양육합니다.

교사들은 많은 교회의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더 깊은 진리를 가르칩니다.

이 은사들에 대한 더 완전한 이해를 위해, 성경을 통하여(Through The Bible) 나의 성경해설, 에베소서 766-768페이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장로들이 각 교회를 인도하다

옛 언약 아래서, 이스라엘의 영적 권위는 대제사장 한 명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에서, 하나님은 교회를 최소 2명의 장로로 인도하도록 계획하셨습니다. 가정에서, 하나님은 가족에게 균형 잡힌 지도력을 주기 위해 아버지와 어머니(단지 아버지만이 아님)를 임명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도 지역 교회를 인도할 복수의 장로를 세우셨습니다 - 교회는 하늘 가정이고 그 지도력도 균형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새 언약의 모형이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로 보는 것은:

(a) 주교, 감독 또는 교황(다수 투표로 선출)에 의해 위에서 권위를 부여하는 대형 교단. 이들은 모두 대기업의 선출직 이사들과 똑같습니다.

(b) 또는: 아무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고 자신의 목사를 임명하는 독립 교회. 이 교회는 자신이 선택한 관리자를 선정하고 임명하는 독립 회사와 같습니다.

이 두 가지 모형은 모두 인간의 생각이며 신약에서 결코 발견되지 않습니다. 다른 지역에서 새 언약 안으로 들어가기를 열망하는 많은 사람들은 - 교회 모형이라는 이 분야에서 신약을 따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만 새 부대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새 포도주가 쏟아지고 잃어버리게 됩니다(눅 5:37,38). 그들은 하나님의 가장 좋은 것을 놓칩니다.

(눅5:37,38)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다가 넣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그 가죽 부대를 터뜨릴 것이며, 그래서 포도주는 쏟아지고 가죽 부대는 못 쓰게 될 것이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

신약은 지역 교회를 세우는 하나님의 이상적인 모형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장로를 세울 자리에 사도가 없으면, 그러면 그곳의 신자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한 사람의 방법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모든 나라에 사도가 드문 이유는 주님이 찾으시는, 그러한 사역에 기꺼이 대가를 지불할 신자가 극히 적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경계 안에 머무르기

모든 장로에게는 하나님께서 그의 사역을 위해 그에게 그어 놓으신 경계가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지정하신 영역 안에 머무르는 한, 하나님은 그를 강력하게 지원하실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0:13-15에서 이것을 아주 분명하게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정하신 일의 범위 내에서 머무를 것이며, 여기에는 우리가 여러분 가운데서 하는 일이 포함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그 한계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당신들에게 이르렀을 때 우리는 그 경계를 넘어서지 않았습니다......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설정 한 한계를 넘어 다른 사람들이 한 일에 대해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우리는 여러분의 믿음이 자람에 따라, 우리가 항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신 한계 내에서 여러분 가운데서 훨씬 더 큰 일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TEV)

(고후10:13-15) 우리는 마땅한 정도 이상으로 자랑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까지 다다른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하여 주신 한계 안에서 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러분에게로 가지 못할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까지 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것은, 한계를 벗어나서 행동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제 넘게 다른 사람들이 수고한 일을 가지고 자랑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바라는 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자람에 따라 우리의 활동 범위가 여러분 가운데서 더 넓게 확장되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장로가 그의 경계를 넘어 하나님께서 그에게 할당하지 않은 사역의 영역으로 나가면, 그는 하나님의 일에 혼란과 혼돈만을 가져올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정하신 영역 밖에서 그가 하는 일을 결코 증거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와 같이, "누구든지 담(하나님이 세우신 경계)을 허는 자는 뱀에게 물릴 것이니라"(전10:8).

(전10:8) 구덩이를 파는 자는 거기에 빠질 수가 있고, 담을 허무는 자는 뱀에게 물릴 수가 있다.

웃시야 왕의 이야기는 이와 관련하여 매우 유익합니다. 웃시야는 왕으로서 그의 사역 범위 내에서 많은 선행을 했습니다(대하26:3-15). 하나님은 그 영역에서 그를 크게 축복하셨습니다. 그러나 왕으로서 그의 성공은 그를 자랑스럽게 만들었고 그는 하나님이 정하신 영역을 벗어나 제사장의 직무도 수행할 수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하자마자, 하나님이 그를 나병으로 치시니 - 그가 나병으로 죽었습니다(대하26:16-21). 이것은 우리 모두를 위한 경고입니다.

사울 왕도 경계 밖으로 나가는 같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왕으로서). 하나님께서 왕으로서 그의 직무를 축복하셨기 때문에, 그는 제사장의 직무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하자마자, 사무엘은 그에게 하나님께서 그의 왕권을 빼앗으시겠다고 말했습니다(삼상13:8-14에서 이에 대해 읽으십시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경계 안에 머무르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이웃에게 주신 것은 무엇이든지 탐내지 말라"는 계명은 남의 사역을 탐내는 데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탐심은 우상숭배입니다"(골3:5).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거나 복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에 혼란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이 주신 경계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만 우리가 하나님을 발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행17:26,27에서 말하는 것처럼).

(행17:26,27) 그분은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셔서, 온 땅 위에 살게 하셨으며, 그들이 살 시기와 거주할 지역의 경계를 정해 놓으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각 지역교회의 독립

어떤 교회도 다른 교회의 본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도들이 개척한 교회들은 모두 주 예수님의 머리 직분 바로 아래 있는 독립적인 교회들이었다.

옛 언약에서, 이 땅의 도시 예루살렘은 종교 활동의 중심지였습니다 - 이스라엘을 위한 본부. 오늘날 교단의 교회들도 이 땅 어딘가에 본부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에서, 우리는 하늘에 속한 백성이므로 땅에 본부가 없습니다(갈4:26). 상징 형태로: 옛 언약의 일곱 갈래로 갈라진 유대인 촛대는 새 언약에서 일곱 개의 분리된 촛대로 대치되었습니다 - 그들 가운데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 계1:11-20.

그래서 바울은 그가 개척한 교회를 위한 본부로써, 이 땅(예루살렘이나 안디옥)에 어떤 교회를 세우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것은 초기 교회들이 죽은 교단이 되는 것을 막았습니다.

그 교회들은 모두 오직 그리스도의 머리 직분 바로 아래 있었습니다. 각 교회는 그들의 장로들에 의해 통치되었고 각 교회는 재정적으로 독립적이었습니다. 오늘날의 바벨론 기독교에서 볼 수 있듯이, 교구(교회 그룹)나 교회 그룹을 다스리는 주교나 대주교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새 언약의 모형을 따른다면, 한 교회에서 발견된 어떤 부패도 다른 교회로 퍼지지 않을 것입니다(교단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지도자들과 교회들 사이의 교제는 서로에 대한 상호 사랑과 존중에 기초해야 하며, 어떤 조직적 연합 때문이 아니라 완전히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목표를 공동으로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시를 정확히 따르는 것

노아가 방주를 짓고 모세가 성막을 짓는 것만큼, 중요한 교회 건축이라는 놀라운 일을 하려면 주님의 은혜와 지혜가 필요합니다.

"모세가 장막을 세우려고 할 때에, '너는 명심하여 내가 산에서 네게 보여준 그 모형을 따라 모든 것을 만들어라'하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것입니다 - 이것들은 다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과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히 8:5).

방주와 성막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지으라고 명하신 두 가지 구조물이며 - 둘 다에 대한 정확한 세부 사항은 하나님께서 노아와 모세에게 주셨습니다.

노아와 모세는 영리한 사람들이 제안한(또는 자신의 영리한 마음에서 나올 수 있는) 이러한 구조에 대한 수정을 받아들이는 것을 조심해야 했습니다. 이 수정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지시를 약간이라도 바꾸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하는 일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고, 성막에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렀던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정확히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지을 때도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장 6
다른 사람들이 따를 수 있는 지도자

높은 수준의 교회를 세우려면 높은 수준의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라오너라"(눅9:23)고 말씀하셨습니다.

(눅9:23) 그리고 예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려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그리고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인 것과 같이, 여러분은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고전11:1, 빌3:17)라고 말했습니다.

(고전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인 것과 같이, 여러분은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빌3:17) 형제자매 여러분, 다 함께 나를 본받으십시오. 여러분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은 것과 같이, 우리를 본받아서 사는 사람들을 눈여겨보십시오.

사도 바울의 이 말에서, 우리는 성령께서 각 장로가 교회의 모든 사람에게 무엇을 말할 수 있기를 기대하시는 것을 봅니다.

많은 장로들은, "나를 따르지 말고,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매우 겸손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그것은 패배한 삶을 덮기 위한 핑계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령의 가르침에 완전히 반대됩니다.

지도자로서, 당신의 삶과 말은 매우 모범이 되어야 하며, 교회의 모든 사람에게 "내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 같이, 나를 따르라"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이 회심하기 전에, 그는 완전한 실패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변화시키셨고 그가 온전하지 못함에도 다른 사람들이 본받을 수 있는 훌륭한 본으로 만드셨습니다(빌3:12-14 참조).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도 완전하지 않고 오직 완전함을 추구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에 인생에 많은 실패가 있더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다른 사람들이 따를 수 있도록 당신을 경건한 지도자로 만드실 수 있습니다.

(빌3:12-14)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다음은 하나님의 백성의 지도자로서 갖추어야 할 일곱 가지 특성입니다:

1. 항상 겸손하고 접근하기 쉬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겸손하고 가까이 가기 쉬운 분이셨습니다(마11:29).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나 그분께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니고데모는 밤에 예수님의 집에서 그를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과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겸손은 그분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열망하게 만들었습니다(눅4:18 참조). 바울은 자신의 잘못을 빨리 인정하고 즉시 사과하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행23:1-5). 장로로서, 당신도 교회에서 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구별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은 당신에 대해 "우월한 분위기"를 가져서는 안되며, 당신의 실수에 대해 신속하게 사과해야 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항상 평범한 형제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

(마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눅4:18)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2. 자신이나 목회를 위해 누구에게나 금전을 구하지 말아야 하고, 생활 방식이 단순해야 합니다.

당신이 값없이 제공되는 선물을 받는다면(바울이 때때로 그랬던 것처럼), 당신보다 더 부유한 사람들에게서만 받아야 하며, 결코 당신보다 가난한 사람에게서는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나 사역을 위해 누구에게도 돈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자기보다 부유한 사람들에게서만 선물을 받으셨습니다(눅 8:3). 예수님과 바울은 단순한 생활 방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돈과 물질에 대해 예수님과 바울과 같은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눅8:3) 헤롯의 청지기인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그 밖에 여러 다른 여자들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의 일행을 섬겼다.

3. 경건한 사람으로서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당신은 교회에서 거룩함에 대한 열정을 지닌 정직한 사람으로 알려져야 합니다 - 어떤 것에서도 자신의 것을 구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당신을 혀를 다스리는 자(약1:26; 엡4:26-31)로 알고, 실패한 자를 긍휼히 여기는 자(히5:2)로 알아야 합니다. 당신은 또한 나이가 많든지 적든지 불문하고 모든 여자에 대하여 완전한 순수함의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딤전5:2). 이것은 당신의 삶의 주위에 있어야 할 경건의 향기입니다.

(약1:26) 누가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혀를 다스리지 않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신앙은 헛된 것입니다.

(엡4:26-31) 화를 내더라도, 죄를 짓는 데까지 이르지 않도록 하십시오. 해가 지도록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마십시오. 악마에게 틈을 주지 마십시오. 도둑질하는 사람은 다시는 도둑질하지 말고, 수고를 하여 [제] 손으로 떳떳하게 벌이를 하십시오. 그리하여 오히려 궁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 있게 하십시오. 나쁜 말은 입 밖에 내지 말고, 덕을 세우는 데에 필요한 말이 있으면, 적절한 때에 해서, 듣는 사람에게 은혜가 되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성령 안에서 구속의 날을 위하여 인치심을 받았습니다. 모든 악독과 격정과 분노와 소란과 욕설은 모든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히5:2) 그는 자기도 연약함에 휘말려 있으므로, 그릇된 길을 가는 무지한 사람들을 너그러이 대할 수 있습니다.

(딤전5:2) 나이가 많은 여자는 어머니 대하듯이 권면하고, 젊은 여자는 자매를 대하듯이, 오로지 순결한 마음으로 권면하십시오.

4. 자녀가 주님을 사랑하도록 키웠어야 했습니다.

성령께서는 그런 사람들만이 장로로 임명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자녀들은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딤전3:4,5; 딛1:6). 우리 아이들은 집에서 항상 우리를 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우리를 더 잘 압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정에서 경건하게 사는 것을 자녀들이 보면, 그들도 주님을 따를 것입니다(잠22:6 참조).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당신은 주님께서 당신을 도우실 것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에게 주님을 사랑하고 모든 사람에게 공손하도록 가르치기 위해 그분의 도움을 구하십시오.

(딤전3:4,5) 자기 가정을 잘 다스리며, 언제나 위엄을 가지고 자녀들을 순종하게 하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자기 가정을 다스릴 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볼 수 있겠습니까?)

(딛1:6) 장로는 흠잡을 데가 없어야 하며, 한 아내의 남편이라야 하며, 그 자녀가 신자라야 하며, 방탕하다거나 순종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지 않아야 합니다.

(잠22:6) 마땅히 걸어야 할 그 길을 아이에게 가르쳐라. 그러면 늙어서도 그 길을 떠나지 않는다.

5. 두려움 없이 하나님의 모든 권고를 전해야 합니다.

신약에 기록된 모든 것 곧 모든 계명과 모든 약속을 전파해야 합니다 - 어떤 사람도 기쁘게 하려고 하지 말고(행20:27, 갈1:10). 당신의 메시지가 도전적이며 격려가 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구해야 합니다.

(행20:27) 그것은, 내가 주저하지 않고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경륜(counsel, purpose)을 전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갈1:10) 내가 지금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려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고 있습니까? 내가 아직도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고 있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닙니다.

6. 그리스도의 몸의 참된 표현으로 교회를 세우려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모든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그들을 그분의 몸으로 세워 그의 생명을 나타낼 것입니다(마16:18). 바울의 열정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기능할 그런 지역 교회를 모든 곳에 세우는 것이었습니다(엡4:15,16). 그것은 또한 당신의 열정이어야 합니다. 바울은 그런 교회를 세우기 위해 열심히 일했고, 여러분도 그렇게 하기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골1:28,29).

(마16:18) 나도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나는 이 반석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죽음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엡4:15,16)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살면서, 모든 면에서 자라나서,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다다라야 합니다. 온 몸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속해 있음, 몸에 갖추어져 있는 각 마디를 통하여 연결되고 결합됩니다. 각 지체가 그 맡은 분량대로 활동함을 따라 몸이 자라나며 사랑 안에서 몸이 건설됩니다.

(골1:28,29) 우리는 이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사람으로 세우기 위하여 모든 사람에게 권하며, 지혜를 다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칩니다. 이 일을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작용하는 그분의 활력을 따라 수고하며 애쓰고 있습니다.

7. 당신의 비전과 정신을 공유하는 당신의 교회에서 최소한 몇 사람을 세우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장로로서, 당신은 주님의 증거가 당신 교회에서 다음 세대에 순결하게 보존되는 것을 걱정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영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기준에 따라 생활하여 그분의 일을 수행하는 11제자를 일으키셨습니다. 바울은 겸손과 이타심의 정신으로 살았던 디모데와 디도를 세워 일을 하게 했습니다(빌2:19-21, 고후7:13-15). 당신은 또한 당신의 교회에서 당신의 비전과 열정을 공유할 소수를 세우기 위해 주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빌2:19-21) 나는 주 예수 안에서 디모데를 여러분에게 곧 보내고 싶습니다. 그것은 나도 여러분의 형편을 앎으로써 격려를 받으려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디모데와 같은 마음으로 진심으로 여러분의 형편을 염려하여 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 다 자기의 일에만 관심이 있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고후7:13-15) 그래서 우리는 위로를 받았습니다. 또한, 우리가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이 겹쳐서, 우리는 더욱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여러분 모두로부터 환대를 받고, 마음에 안정을 얻었던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을 두고 디도에게 자랑한 일이 있었는데, 여러분이 나를 부끄럽게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진실하게 말한 것과 같이, 우리가 여러분을 두고 디도에게 말한 자랑도 진실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디도는, 여러분 모두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를 영접하고 순종한 것을 회상하면서, 사랑하는 정을 더욱더 여러분에게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계속해서 성령으로 기름 부으시고 위에 열거한 모든 자질을 갖추게 하여, 교회의 모든 사람이 본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장 7
좋은 리더의 몇 가지 자질

다음은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신뢰하도록 하기 위해 추구해야 하는 몇 가지 특성입니다. 그들이 다음 사항을 봐야 합니다:

- 당신은 하나님의 인정을 구하고 사람의 인정을 구하지 않습니다(경건한 사람들의 인정도 아님);

-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가 당신의 최우선입니다;

- 당신은 주 예수님의 완전히 헌신된 제자입니다;

- 당신은 하나님에 대한 불타는 사랑을 가지고 있습니다;

- 당신은 진심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주 예수의 이름을 염려합니다;

- 당신은 겸손하고 마음(spirit)이 상한 사람입니다;

- 당신은 거룩함을 매력적으로 만듭니다;

- 당신은 교회를 순결하게 지키기 위해 열심입니다;

- 당신은 진리에 대해 담대합니다;

- 당신은 당신의 신념에 따라 살고, 당신이 설교하는 모든 것을 실천합니다;

- 당신은 화를 잘 다스리고, 결코 기분이 나쁜 상태에 있지 않습니다;

- 당신은 말과 행동으로 사랑합니다;

- 당신은 모든 사람을 대할 때 긍휼히 여깁니다;

- 당신은 당신의 행동이 자연스럽고, 어떤 "가식적인 행동"도 하지 않습니다;

- 당신은 다른 사람이 당신보다 열등하다고 느끼게 만들지 않습니다;

- 당신은 "Big brother"가(맏형, 예수님) 아닌 평범한 형제처럼 행동합니다;

- 사람들은 당신에게 항상 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 당신은 따뜻하고 친절하며, 사람들이 당신과 함께 있을 때 집과 같은 편안함을 느끼게 합니다;

- 당신은 당신의 집에서 환대합니다;

- 당신은 경건할 뿐만 아니라,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 당신은 항상 형제 자매의 영원한 복지를 구합니다;

- 당신은 교회의 모든 사람에 대한 태도에 있어 완전히 공정합니다;

- 당신은 가족 관계, 지역 사회 또는 다른 어떤 이유로 인해, 누구에 대해서도 편견을 갖지 않습니다;

- 당신은 모든 사람의 존엄성을 인정합니다 - 젊든 늙었든, 어린이든 고용인이든;

- 당신은 모든 사람, 특히 당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에게 정중하게 말합니다;

- 당신은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젊은이들과 어린이들에 대한 관심이 있습니다;

- 당신은 당신의 마음에 형제 자매를 품고 있습니다;

- 당신은 당신 자신의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권위를 두고 있습니다;

- 당신은 말을 조심스럽게 하고, 당신의 생각을 표현하는데 서두르지 않습니다;

- 당신은 눈에 띄게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있습니다;

- 당신은 결정을 내릴 때 자신의 이성이 아니라 성령에 의지합니다;

- 당신과 비밀로 나눈 모든 문제를 비밀로 유지하도록 신뢰할 수 있습니다(아내에게도 누설하지 않음);

- 당신은 전적으로 당신의 말을 지킬 것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

- 당신은 당신의 책임을 정확하게 수행합니다;

- 당신은 사람들에게 사랑 안에서 진실을 말하는 데 직설적입니다;

- 당신은 아무도 속이지 않습니다;

- 당신은 모든 사람에게 인내심이 있습니다;

- 당신은 인간의 연약함을 지닌 질그릇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습니다;

- 당신은 유연하고 기꺼이 양보합니다 - 경직되지 않고;

- 당신은 당신의 성격이나 재능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압력을 가하지 않도록 합니다;

- 당신은 당신의 조언을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으며,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줍니다;

- 당신은 당신이 수행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따라야 할 법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 군중이 아닌 개인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 당신은 동정심과 진정한 관심으로 다른 사람들의 문제에 개입합니다;

- 당신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과거의 실패를 계속 상기시키지 않습니다;

- 당신은 다른 사람의 약점과 실수를 참을 수 있습니다;

- 당신은 형제자매를 하나님이 보시는 것처럼 보려고 애쓰므로, 어느 누구에게도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 사람들이 실패하더라도, 미래에 대한 희망을 줍니다;

- 당신은 약자의 진정한 친구입니다;

- 당신은 당신의 적에 대해 말할 때에도, 악의가 전혀 없습니다;

- 당신은 공개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죄에 대해 강력하게 권고합니다;

- 당신은 당신의 사역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강조하는 것만 강조합니다;

- 다른 사람들이 당신보다 덜 성숙하더라도, 기꺼이 당신의 책임을 분담합니다;

- 아내가 교회 문제에 있어서 당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 당신은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농담하는 사람으로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 유머 감각이 있지만, 유머 감각으로 누구에게도 상처를 준 적이 없습니다;

- 당신은 사람들을 당신 자신이 아니라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연결합니다;

신뢰가 상실되는 방법

다른 사람들은 당신을 신뢰하지 않을 것입니다(또는 신뢰를 잃을 것입니다):

- 당신이 당신과 상관없는 일에 바쁘다면;

- 영적인 척 하여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한다면;

- 거짓 겸손으로 겸손하게 행동한다면;

- 자신의 명예와 이익을 도모하고자 하면;

- 형제자매를 이용하여 그들의 봉사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당신이나 당신의 가족을 위해 잡다한 일을 하게 하는 경우;

- 교회에서 형제자매보다 당신의 친구, 친척을 더 소중히 여긴다면;

- 만일 네가 진실하지 않고 교활하고(술수가 뛰어나고) 기만적이라면;

- 다른 사람의 조언을 듣지 않으려 한다면;

- 자신을 정당화한다면;

- 그들보다 위에 있는 사람처럼, 형제들과 거리를 둔다면;

-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 대해 들은 것을 모두 믿는다면;

- 판단하기는 빠르나 긍휼은 속히 베풀지 아니한다면;

- 당신이 진실하지 않다면;

-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 이익을 얻기 위해 사람들에게 아첨한다면;

- 형제를 지혜롭지 않게 칭찬하여, 그를 파멸에 이르게 한다면;

- 부자만 방문하고 가난한 신자는 소홀히 한다면;

- 영적인 문제에서 타협한다면;

-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면서 농담을 한다면;

- 당신이 용서하지 않고 원한을 품는다면;

- 자신이나 가족의 편의에 따라 교회 문제에 관한 결정을 내린다면;

- 다른 사람이 저지르는 작은 실수를 간과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로 큰 문제를 만든다면;

- 말을 할 때 사람들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는다면;

- 당신의 메시지가 지루하고 당신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면!

당신이 이 장에서 언급한 경건한 특성들을 가지고 있다면, 당신의 양 떼는 당신을 하나님께서 그들의 형으로 주신 분으로 인식할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부분에서 부족한 부분이 보이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그 연약함을 극복하고 소명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장 8
리더로서의 우리의 책임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의 장로들에게 보내신 메시지를 읽습니다. 이 장로들은 약 40년 전에 사도들에 의해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 장로들 중 다섯 명은 타락한 상태에 있었고 그들의 교회는 한심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교회를 개척한 사도들에 대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장로들에게, 그가 떠난 후에, 이리가 들어와 양 떼를 멸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행20:29,30). 그러나 그 장로들은 바울의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회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에베소 교회와 그 장로들은 주님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리고 타락했습니다(계2:4). 그리하여 소금은 그 맛을 잃고 빛도 사라졌습니다.

(행20:29,30) 내가 떠난 뒤에, 사나운 이리들이 여러분 가운데로 들어와서, 양 떼를 마구 해하리라는 것을 나는 압니다. 바로 여러분 가운데서도, 제자들을 이탈시켜서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것을 말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계2:4)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그것은 네가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이다.

교회는 그 교회의 장로들처럼 됩니다

그 다섯 교회의 타락한 장로들은 사도 바울이나 요한이 그들의 교회를 개척하고 그들을 장로로 임명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브라함이 그들의 조상이라는 사실을 자랑하는 유대인들처럼 어리석은 자랑이었습니다(마3:9, 요8:39). 오늘날에도 많은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를 설립한 하나님의 사람과의 관계를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현재 교회의 지도자가 영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러한 자랑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마3:9) 그리고 너희는 속으로 주제넘게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하고 말할 생각을 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

(요8:39) 그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우리 조상은 아브라함이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녀라면, 아브라함이 한 일을 하였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모든 교회는 지도자들과 함께 일어나거나 가라앉습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양처럼, 의심 없이 목자들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도자로서, 우리의 책임은 하나님 앞에서 매우 큽니다. 우리가 항상 그것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주님 앞에서 우리의 얼굴을 티끌 속에 감추고 그분의 은혜를 구하게 될 것입니다.

타락한 다섯 교회에서, 우리는 지도자가 주님에 대한 사랑을 잃었을 때, 교회도 사랑을 잃은 것을 봅니다. 지도자가 '발람의 교리'(명예와 금전을 위해 하나님을 섬기며 타협함)를 따랐을 때, 교회 성도들도 발람처럼 되었습니다. 지도자가 영적으로 죽거나 교만하면,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도 그와 같이 되었습니다(계2,3장).

그러나 몇 가지 예외가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4절에서, 우리는 사데교회에서 그들의 지도자처럼 타락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음을 봅니다. 그들은 장로의 (영적)죽은 상태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스스로 마음을 다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 반대의 경우에도 예외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영적으로 살아 있는 교회(서머나와 필라델피아의 교회들처럼)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는 교회가 그 지도자와 함께 일어나거나 가라앉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지도자로서의 책임을 중대하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장로들이 영적으로 귀머거리가 될 때

타락한 장로들은 자신의 타락한 상태를 전혀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도 요한을 통해 그들의 상태를 알려주셔야 했습니다. 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영적 상태에 대해 직접 말씀하시는 것을 듣지 못했습니까 - 요한을 통해서가 아니라? 결국에는 새 언약에서, 하나님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직접 말씀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교회 모임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을 전해야 할지 생각하는 데 더 몰두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한 설교자'가 되는 데 집중하다 보면 우리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해 무지하기 쉽습니다.

또한 그 (타락한)지도자들에게 주신 주님의 메시지가 그들에게 어떤 사적인 의사소통에서 개인적으로 전달된 것이 아님을 주목하십시오. 아닙니다. 메시지는 모든 교회에서 공개적으로 낭독되었습니다(계1:11). 그래서 모든 교회가 다른 모든 교회의 지도자들의 영적 상태를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자에게 축복이 선포되었습니다(계1:3).

(계1:11) 그 음성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네가 보는 것을 책에 기록하여, 일곱 교회, 곧 에베소와 서머나와 버가모와 두아디라와 사데와 빌라델비아와 라오디게아의 교회로 보내라."

(계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사람과 듣는 사람들과 그 안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그 때가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습니다, "죄에 거하는 장로들이 모든 사람 앞에서 반드시 책망을 받아, 다른 사람들도 죄를 두려워하게 하라"(딤전 5:20).

그래서 바울은 떨어져나간 동역자 데마의 이름을 언급하고 그 이유도 언급했습니다 - 왜냐하면 그는 "이 세상을 사랑했기"(돈과 안위와 사람의 존귀를 사랑함 - 딤후4:10) 때문입니다. 바울은 또한 그를 반대한 다른 사람들의 이름도 언급했습니다 - 부겔로, 헤르모게네스, 알렉산더, 후마네오(딤후1:15,4:14; 딤전1:20).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베드로와 바나바의 위선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습니다(갈2:11-16).

(딤후4: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해서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가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가고, 디도는 달마디아로 가고,

(딤후1:15) 그대도 알다시피, 아시아에 있는 사람이 모두 나를 버렸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들어있습니다.

(딤후4:14) 구리 세공 알렉산더가 나에게 해를 많이 입혔습니다. 주님께서 그의 행위대로 그에게 갚으실 것입니다.

(딤전1:20) 그렇게 된 사람 가운데 두 사람이 바로 후메내오와 알렉산더입니다. 나는 그들을 사탄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들을 응징해서, 다시는 하나님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신자가 지도자에 대해 이와 같은 말을 하도록 허락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도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육신에 속한 신자들은 하나님의 방법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바울이 지도자들의 이름과 실패를 폭로한 것을 탓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성령의 인도를 받습니다.

사도의 그러한 책망과 시정을 받아들일 수 있고 그 아래에서 겸손할 수 있다면 당신은 축복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도자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타락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책망하신 것은 항상 그들의 지도자들(군주들, 제사장들, 거짓 선지자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지도자들이 게으르고 부주의하여 그릇된 길을 갔습니다. 백성들은 그들의 지도자들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잃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잃었습니다.

새 언약 아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고후7:1). 만일 장로로서 우리의 거룩함이 작년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오늘 더 완전하지 않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기에 부적합합니다. 부지런히 다른 사람을 살피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살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누군가가 우리를 바로잡기 전에 우리의 타락이 너무 심각해져서, 때때로 그것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하기에는 너무 늦을 수 있습니다.

(고후7:1)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는 이러한 약속이 있으니,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에서 떠나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온전히 거룩하게 됩시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손을 잡고 우리가 완전히 떨어지지 않도록 강력하게 대처해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은 예수님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냄새에 빠르게' 하셨습니다(사11:3-KJV 여백). 그리고 그 성령은 우리도 하나님을 그렇게 두려워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 우리가 그분을 허용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해칠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해칠까 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사11:3) 그는 주님을 경외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는다. 그는 눈에 보이는 대로만 재판하지 않으며, 귀에 들리는 대로만 판결하지 않는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개인적인 삶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 회복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지 않고, 여러 주 동안, 교회모임에서 일상적으로 말하는 것에서 우리를 구원해 달라고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 전파하고 나서, 우리 자신이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 거절당하지 않도록 두려워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이 두려워한 것처럼 그의 삶에서 훈련되지 않았다면, 심지어 그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고전9:27).

(고전 9:27) 나는 내 몸을 쳐서 굴복시킵니다. 그것은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서 도리어 나 스스로는 버림을 받는, 가련한 신세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성령세례와 그의 은사

우리 시대의 성령세례(침례)가 평가절하되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 집단에는 두 가지 극단이 있습니다: 성령 세례를 완전히 부인하는 자들과, 값싸고 감정적인 위조품을 자랑하는 자들(그것은 그들에게 봉사를 위한 능력이나 삶의 거룩함을 가져다 주지 못함)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극단을 피하고,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하는 대로 살며 섬길 수 있도록, 진정한 권세의 부여를 위해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올라간 것보다 더 높은 교회를 이끌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위조 경험만 했다면, 다른 사람들도 위조 경험으로만 이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성령 안에 잠겨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효과적이 되려면, 계속해서 성령 충만한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성령의 충만함으로 채워져 있어야" 합니다(엡5:18 - 문자적).

(엡5:18)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방탕이 따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우리 교회에서 효과적인 사역을 하려면, 그러면 우리는 우리 교회의 형제자매들의 영적 성장에 진정한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동료 신자들을 효과적으로 섬길 수 있도록, 예언의 은사를 위해 하나님을 찾게 할 것입니다. 이 성령의 은사 없이는 말씀의 사역에서 효과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해 구해야 합니다. 한밤중에 친구를 위해 먹을 것을 구하러 이웃집에 간 사람에 대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는, 우리 교회에서 궁핍한 사람들을 보살피라고 가르칩니다. 그것은 차례로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을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 주실" 때까지 하나님의 문을 두드리고 그분을 찾게 할 것입니다(누가복음 11장 8절을 13절과 비교).

(눅11: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의 친구라는 이유로는, 그가 일어나서 청을 들어주지 않을지라도, 그가 졸라대는 것 때문에는, 일어나서 필요한 만큼 줄 것이다.

(눅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들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새 언약에서, 예언이란 성령의 기름부으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교회를 권면하고 격려하며 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고전14:4,24,25).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바울은 지역 교회의 모임에서 예언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그러한 기름부음 받은 예언 없이 교회가 세워질 수 있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선물을 교회에 불필요하게 주셨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언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라"는 권면은 불필요한 권면이 될 것입니다(고전14:1,39). 그러나 사실은 이 은사가 교회를 세우는 데 필수적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예언하는 형제가 한 명도 없는 교회는 곧 영적인 죽음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고전14:4,24,25)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은 자기에게만 덕을 끼치고, 예언하는 사람은 교회에 덕을 끼칩니다……그러나 모두가 예언을 말하고 있으면, 갓 믿기 시작한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 들어와서 듣고, 그 모두에게 질책을 받고 심판을 받아서, 그 마음 속에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엎드려서 하나님께 경배하면서 "참으로 하나님께서 여러분 가운데 계십니다"하고 환히 말할 것입니다.

(고전14:1,39) 사랑을 추구하십시오. 신령한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특히 예언하기를 열망하십시오……그러므로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예언하기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그리고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막지 마십시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무시하는 것은 오순절에 성령이 오신 것이 필요가 없고 우리가 주님의 능력 없이도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주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고, 우리가 그분 없이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하는 것만큼 심각한 오류입니다! 삼위일체의 세 번째 위격의 오심을 무시하는 것은 성령을 멸시하는 것과 같으며,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의 오심을 무시하는 것만큼이나 중대한 죄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기름부음이 어떤 신자들에 의해 남용되었다는 이유로 그것을 평가절하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의 능력이 없으면, 사람의 재능과 경험에 의지하여 주님의 일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지 못할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바리새주의와 율법주의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타협과 세속성에서 사람들을 해방시켜야 합니다. 누가 그러한 사역을 하기에 충분합니까? 오직 성령의 능력을 받은 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성령의 지혜와 능력을 구해야 합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기도할 때, 그는 그들이 성령의 지혜와 그의 능력을 모두 알게 되기를 기도했습니다(엡1:17; 3:16). 이것이 우리 역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엡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신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여러분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옙3:16) 아버지께서 그분의 영광의 풍성하심을 따라 그분의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여 주시고,

율법주의와 세속성의 위험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하여 모든 율법주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새 언약의 교회를 세울 수 있습니다.

율법주의는 항상 판단주의로 이끌고 하나님의 역사를 세속성만큼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율법주의와 세속성은 두 가지 극단이며, 둘 다 바벨론 교회를 세우는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둘 중 율법주의는 세속성과는 달리 '영적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더 위험합니다. 율법주의적인 교회는 세속적인 교회보다 더 영적으로 보이지만, 그 안에는 세속적인 교회보다 훨씬 더 위선과 비현실성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주의자들이고 헤롯당은 세속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헤롯당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율법주의의 위험성을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 6장은 죄로부터의 자유를 다룹니다. 그리고 로마서 7장은 율법주의로부터의 자유를 다룹니다. 우리는 둘 다로부터의 자유가 필요합니다.

장로들이 율법주의적일 수 있는 한 가지 예를 생각해 봅시다: 장신구를 착용하는 것은 세상적인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 가지를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첫째: 세속성은 주로 마음에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2절은 "너희는 세상을 본받지 말라 ....... 네 마음에"라고 말합니다. 세속성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 험담, 뒷담화, 돈 사랑, 사람들의 명예 구함(세상에서 또는 교회에서), 또한 값비싼 옷과 장신구로 자신을 과시. 그러나 험담은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 때문에, 장신구를 착용하는 것보다 백만 배 더 나쁩니다. 세속성은 마음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먼저 마음에서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그러면 잔 밖이 저절로 깨끗해집니다(예수님이 마23:26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롬12:2)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마23:26) 눈 먼 바리새파 사람들아! 먼저 잔 안을 깨끗이 하여라. 그리하면 그 겉도 깨끗하게 될 것이다.

둘째: 신자가 억지로 하는 것은 모두 죽은 일이며 하나님 앞에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는 "죽은 행실을 회개하라(히6:1)"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도덕적으로 죄가 되지 않는 일에 대해 우리 교회에서 누구에게도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사람들에게 험담을 중단하도록 강요할 수 있습니다(그것은 죄이기 때문에). 그러나 우리는 누군가에게 그들의 장신구를 제거하도록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이것은 죄가 아니라 단순함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단순함의 문제에서, 우리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아닌 자신의 신념에 따라 생활하고 옷을 입을 자유를 주어야 합니다.

(히6:1)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초보적 교리를 제쳐놓고서, 성숙한 경지로 나아갑시다. 죽은 행실에서 벗어나는 회개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여기에 제 아내와 저는 장신구를 착용한 적이 없다고 덧붙이겠습니다 - 왜냐하면 우리는 디모데전서 2:9("금이나 진주로 하지 말 것")와 베드로전서 3:3("금으로 장신구를 차지 말 것")을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에서 분명한 명령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장신구를 착용하는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이 구절을 우리가 이해하는 것처럼 이해하지 못한다고 가정합니다.

(딤전2:9) 이와 같이 여자들도 소박하고 정숙하게 단정한 옷차림으로 몸을 꾸미기 바랍니다. 머리를 어지럽게 꾸미거나 금붙이나 진주나 값비싼 옷으로 치장하지 말고,

(벧전3:3) 여러분은 머리를 꾸미며 금붙이를 달거나 옷을 차려 입거나 하여 겉치장을 하지 말고,

바울과 베드로는 디모데전서 2:9과 베드로전서 3:3에서 단순함과 겸손(사치, 과시와 반대되는)을 강조했습니다. 그들은 유행을 따르는 과시와 불필요한 사치품에 돈 낭비하는 것으로부터 자매들(및 모든 사람)을 막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금, 진주, 값비싼 옷, 값비싼 머리 모양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목록에 추가할 수 있는 다른 많은 사치품이 있습니다. 그것은 많은 신자들이 집에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로 판단하라(요7:24)"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요7:24) 겉모양으로 심판하지 말고, 공정한 심판을 내려라

그러므로 장신구를 끼는 자매를 비난하기 전에, 당신의 집에 불필요하고 사치스러운 물건이 있는지 자문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말할 것입니다: 당신의 위선, 율법주의, 독선, 판단의 영을 버리고 먼저 자신을 판단하십시오. 당신의 집에 있는 비싸고 불필요하고 호화로운 물건에 비해 얼마 안 되는 값싼 모조 장신구를 착용한 자매를 어떻게 비난할 수 있습니까?

성경은 "손가락으로 남을 가리킬 때 다시 생각하라. 남을 비판할 때마다, 당신은 자신도 정죄한다. 남을 비판하는 것은 자신의 결점이 발견되는 것을 피할 수 있는 잘 알려진 방법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일 수 없다. 그는 당신의 모든 위선을 꿰뚫어보고, 당신이 한 일에 대해 책임을 물을 것이다. 손가락으로 다른 사람을 가리킴으로써, 하나님께서 당신의 잘못을 보시고 당신을 엄하게 꾸짖지 않도록 주의를 분산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하나님이 그렇게 좋으신 분이기 때문에, 당신을 봐주실 거라고 생각하는가? 아니. 당신은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회개하라..."고 말합니다(롬2:1-5 - 메시지 의역).

(롬2:1-5) 그러므로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여, 그대가 누구이든지, 죄가 없다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그대는 남을 심판하는 일로 결국 자기를 정죄하는 셈입니다. 남을 심판하는 그대도 똑 같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공정하게 내린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을 심판하면서, 스스로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여, 그대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을 줄로 생각합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인자하심을 베푸셔서 그대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풍성하신 인자하심과 너그러우심과 오래 참으심을 업신여기는 것입니까? 그대는 완고하여 회개할 마음이 없으니,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이 나타날 진노의 날에 자기가 받을 진노를 스스로 쌓아 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위의 원칙은 장신구를 착용하는 것 외에도 많은 적용이 있습니다 - 율법주의는 다양한 형태와 색상으로 나타납니다 - 우리는 그것들을 모두 조심해야 합니다. 당신은 형제가 사용하는 자동차 모델이나 청바지나 화려한 셔츠를 입었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문제의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각 사람은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롬14:5) - 그가 살아야 할 집의 크기, 그가 소유해야 하는 자동차(또는 스쿠터)의 제조사, 그와 그의 가족들은 어떤 스타일의 옷을 입어야 하는지, 그가 어떤 음식을 먹어야 하는지, 그가 가족의 결혼식을 위해 얼마를 지출해야 하는지 등에 관해서 등. 이 모든 영역에 확실히 세속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에서 다른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만을 판단해야 합니다.

(롬14:5) 또 어떤 사람은 이 날이 저 날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또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이 다 같다고 생각합니다. 각각 자기 마음에 신념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바벨론은 장신구를 착용하는 사람이나 약간의 사치품을 소유한 사람에 의해 건설되지 않습니다. 바벨론은 그들이 설교하는 것을 실천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는 위선자들에 의해 건설됩니다.

판단하되 비난하지 않음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옳은지 아닌지에 대해 기독교인들 사이에 많은 오해가 있습니다 - 바로 '판단'이라는 단어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신자로서, 우리는 사람을 분별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다른 사람을 판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누군가의 설교를 들을 때 "그의 메시지를 판단해야" 한다고 말합니다(고전14:29). 그러므로 성령은 실제로 우리에게 모든 사람의 설교를 판단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것이 오늘날 기독교 집단에서 속이는 많은 설교자들에게 속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고전14:29) 예언하는 사람은 둘이나 셋이서 말하고, 다른 이들은 그것을 분별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판단)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요일4:1)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또한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너희 판단은 정직하고 , 표면적으로나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오직 공정하고 의롭게 판단하라"(요7:24 - Amplified)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또한 "판단하지 말라"(마7:1)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의미는 무엇이었습니까?

"판단하다(judge)"라는 단어는 또한 "정죄하다(condemn)"(원어 그리스어로)를 의미합니다. 이 구절의 Amplified Bible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남을 정죄하지 말라 너희 자신도 정죄를 받을까 하노라"(마7:1- Amplified).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 "나는 아무에게도 정죄하거나 선고하지 아니하노라"(요8:15 - Amplified)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선고하는 것은(말로든 생각으로든) 금지되어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그렇게 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험하고 분별해야 합니다.

예수님에 관해 그는 "눈에 보이는 것과 귀에 들리는 대로 사람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사람을 공의로 판단"(사11:3,4)하실 것이라고 예언되었습니다. 우리는 또한 그분의 모범을 따라야 하며, 우리가 보고 듣는 것만으로 어떤 것도, 누구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철저히 조사하여 편견 없이 의로 공정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우리 자신을 먼저 판단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벧전4:17).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의 내면을 보고 우리 자신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안돼요. 우리는 예수님의 본을 보고 그분의 삶에 비추어, 우리 자신의 결점을 보고 스스로 판단해야 합니다. 기록된 바 "주여,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라"(시36:9).

(벧전4:17)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심판이 우리에게서 먼저 시작되면, 하나님의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의 마지막이 어떠하겠습니까?

(시36:9) 생명의 샘이 주님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빛을 받아 환히 열린 미래를 봅니다.

하나님의 빛 안에서 우리 자신을 판단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교훈 중 하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결코 배우지 못하기 때문에 영적인 발전을 전혀 이루지 못합니다.

여기에 지금 자신을 충실하게 판단하는 사람들이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놀라운 약속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올바로 판단하면, 판단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고전11:31).

(고전11:31) 우리가 스스로 살피면, 심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남을 판단하지 않지만, 죄에 대하여 강력하게 설교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성냄, 눈으로 보고 품는 음욕, 돈을 사랑함, 근심, 두려움, 악한 생각, 거짓말, 사람의 명예 구함, 원수 미워하기 등 특정 죄에 대해 강력하게 말씀하셨습니다(마5,6,7장). 우리는 또한 인터넷 음란물을 보는 것과 같은 현대적 죄에 대해 말해야 합니다 - 그러나 사람들을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요3:17).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사람의 심판자요 선고자이십니다(약4:12).

(요3:17)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약4:12) 율법을 제정하신 분과 심판하시는 분은 한 분이십니다. 그는 구원하실 수도 있고, 멸망시키실 수도 있습니다. 도대체 그대가 누구이기에 이웃을 심판합니까?

하나님께서는 교만하고 오만한 자를 교회에서 제거하신다

교만하고 오만한 신자들은 교회 안에서 공개적으로 맞서야 합니다. 장로는 그런 사람들에게 온유하거나 절충을 잘 해서는 안 되며, 그의 말은 담대하고 예언적이어야 합니다 - 왜냐하면 모든 교만한 사람들은 주의 이름을 욕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러한 상황에서 장로들을 시험하여 교회에서 그들이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그분의 영광에 관심이 있는지 확인하실 것입니다.

누군가 우리의 시정에 기분이 상해서 교회를 떠난다고 해도 우리는 당황해서는 안 됩니다 -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모든 교만한 자들을 교회에서 제거하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가운데 교만하고 오만한 자를 다 제하여 버리리니, 내 거룩한 산(교회)에서는 교만과 오만이 없으리라. 남은 자는 가난한 자와 겸손한 자들이라, 그들이 주님의 이름을 신뢰하리로다. 그들은 거짓으로 가득 차 있지 않을 것이다. 고요하고 평안하며 안전하게 누우리니,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라.

너는 온 맘 다해 노래하고 외치며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여호와께서 친히 너와 함께 계신다! 너는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기운을 내라,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그는 전능하신 구주이시다. 그는 너에게 승리를 주실 것이다. 그는 큰 기쁨으로 너를 기뻐할 것이다. 그는 너를 사랑하고 너를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습3:11-18 - LivingBible).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니라"(요6:37)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말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우리가 섬기기를 원하시는 사람들은 우리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신자들만이 우리와 함께 있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가도록 내버려 두십시오 -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우리와 함께 있게 된다면, 우리에게 문제를 일으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교회나 목사가 당신의 교회에서 어떤 사람을 끌어내면 놓아주어야 합니다. 주권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이유가 있어 그것을 허락하십니다. 요한은 말했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참으로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리라; 그들이 나간 것은, 그들이 우리 모두에게 속하지 아니하였음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요일2:19).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런 체질을 허락하실 때 가장 약한 참 신자라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한 가지 사실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명령하여 너희를 체질하기를 마치 곡식을 체질함 같이 하려니와, 하나의 참 알갱이도 잃지 아니하리라"(암9:9). 그것이 그분의 약속입니다.

교회는 밀과 같이 체질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교회에서 만드시는 "빵"에 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숫자가 아닌 교회의 질에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 하나님께서도 그러하시듯이 말입니다.

교회의 징계

우리가 교회에서 하나님의 가장 높은 기준을 유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때때로 죄를 지은 형제를 파문해야 할 필요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를 교회에서 내보내십시오. 바울은 그의 사도적 권위를 사용하였습니다, 언젠가 "이러한 신자를 사단에게 넘겨주어 그의 육체는 멸하고 그의 영은 주의 날에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전5:5). 그래야만 교회가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장로라도 계속 죄 가운데 있으면 온 교회 앞에서 공개적으로 책망을 받아야 한다고 명하셨습니다. 장로들을 배나 존경하고, 장로들이 죄를 지었을 때 징계하라는 명령은 같은 성경 구절에서 함께 언급됩니다(딤전5:17,20). 주님은 공개적으로 모세와 베드로를 높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들을 또한 공개적으로 책망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나오는 타락한 다섯 장로에게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딤전5:17,20)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두 배로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특히 말씀을 전파하는 일과 가르치는 일에 수고하는 장로들은 더욱 그러하여야 합니다. 죄를 짓는 사람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서, 나머지 사람들도 두려워하게 하십시오.

누군가를 징계할 계획을 세울 때 우리는 우리가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지"(엡4:15) 확인하고 보아야 합니다. 요한일서 3장 16절에 "우리가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사람을 그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버릴 것인지 아니면 그의 죄를 지적하기만 원하는 것인지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엡4:15)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살면서, 모든 면에서 자라나서,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다다라야 합니다.

(요일3:16)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자매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시편 12편 6절은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한 말씀이요 - 은을 풀무에 단련하여 일곱 번 걸러 낸 것 같이".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말을 "여호와의 풀무"에 일곱 번 넣어야 하며, 주님께서 그 말씀을 정결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말하는 법을 가르쳐 주셔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필요에 따라 우리의 말을 더 부드럽게 또는 더 강하게 할 수 있는 지혜를 갖게 될 것입니다 - 왜냐하면 신성한 사랑은 각 상황에 따라 온화하거나 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징계를 받고 지역 교회에서 쫓겨난 신자나 반역의 영으로 교회를 떠난 신자와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명확하게 알려 줍니다. 성령은 "그들과 교제하지 말라"(고전5:11 및 살후3:14) 그리고 "그들에게서 떠나라"(롬16:17 참조).

(고전5:11) 그러나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 사귀지 말라고 쓰는 것은, 신도라 하는 어떤 사람이 음행하는 사람이거나, 탐욕을 부리는 사람이거나,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이거나, 사람을 중상(욕, 비방)하는 사람이거나, 술 취하는 사람이거나, 약탈하는 사람이면, 그런 사람과는 함께 먹지도 말라는 말입니다.

(살후3:14) 누가 이 편지에 담긴 우리의 말에 복종하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특별히 조심하여, 그와 사귀지 마십시오. 그리하여 그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십시오.

(롬16:17)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십시오.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어떤 신자들은 거기에 성령이 기록한 것이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하고, 어리석게도 가서 그런 반역자들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그 반역자들이 결코 "돼지와 함께 먹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회개하여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눅15:16,17). 따라서 그들은 영원히 길을 잃을 것입니다. 그러한 경우에 해야 할 현명한 일은 그 반역자들에게 회개하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주님과 그분의 백성과의 교제를 회복하도록 촉구하는 것입니다.

(눅15:16,17) 그는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라도 좀 먹고 배를 채우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제서야 그는 제정신이 들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꾼들에게는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

교회에서, 우리는 의를 거스르는 사람의 편을 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에게 대한 거짓된 충성심으로 말입니다. 어떤 형제를 지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도덕 기준을 결코 희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불의와 교제할 수 없습니다(고전13:6). 이것이 우리가 이단과 다른 점입니다. 이단 신도는 동료 이단 신도가 불의한 일을 저질렀더라도 그를 지원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단자들이 공개적인 죄로 인해 다른 교회에서 파문된 사람들을 어떻게 환영했는지에 대한 예를 보았습니다 - 그들이 회개하거나 배상하지 않은 경우에도 말입니다.

(고전13:6)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한 사람의 영원한 복지가 우리 교회의 수를 늘리는 것보다 더 중요해야 합니다.

당신의 교회가 나쁜 증거를 가지고 있다면, 모든 것을 덮고 모든 것이 괜찮은 척하기 보다는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낫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다섯 교회의 실패를 덮으려 하지 않으시고(요한계시록 2,3장), 모든 사람이 그것에 관하여 읽을 수 있도록 폭로하셨습니다! 그는 독선적인 자들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정직하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자들을 위해 오셨습니다. 자신의 실패를 덮는 자에게는 정결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새 언약 교회에서 장로가 되는 것은 큰 특권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우리를 주님 앞에서 두렵고 떨리게 만드는 막중한 책임을 수반합니다. 우리는 장로가 되는 영예와 특권에 대해 묵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장로로서 우리의 책임에 대해 더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겸손하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끝까지 충성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일치로 교회를 세우다

그들의 교회에서 완전한 연합. 그러나 그 연합은 그들 사이에서 먼저 시작되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7장 21절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 앞에 세우신 놀라운 연합의 기준을 봅니다: 그분은 지상에 계셨을 때, 그분과 아버지께서 가졌던 것과 동일한 연합을 제자들이 갖기를 원하십니다. 예수께서 지상에 계시는 동안, 아버지와 그러한 연합을 이룰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은, 항상 자신의 의지를 부인하는 것이었습니다(요6:38, 마26:39).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는 항상 우리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장로들이 자기의 것을 구하지 아니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서로 연합하여 행하는 교회에는 사탄이 결코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요17:21)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십시오.

(요6:38) 그것은, 내가 내 뜻을 행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려고 왔기 때문이다.

(마26:39) 예수께서는 조금 더 나아가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서 기도하셨다.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십시오."

여기에 학개가 백성들에게 자기의 것을 구하지 말고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라고 도전한 구약성경의 도전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 집이 황무한데, 지금이 너희만 잘 꾸민 집에 살고 있을 때란 말이냐? 그 결과를 보아라: 너희가 많이 심었으나 적게 거두느니라. 너희의 수입은 구멍으로 가득 찬 주머니에 넣는 것처럼 사라진다……너희는 많은 것을 바라지만 너무 적게 얻는다. 그리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오면 - 그것은 전혀 지속되지 않는다. 왜? 내 집은 폐허가 되었는데, 너희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너희의 유일한 관심사는 너희의 멋진 집이다. 이것이 내가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그치며 너희에게 이와 같이 적은 양의 곡식을 주는 이유이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든 백성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들이 와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니라(학1:3-14 - Living Bible과 NASB).

주님은 그분의 교회를 세우겠다는 전적인 헌신으로 우리의 마음도 그렇게 움직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사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엡5:25).

(엡5:25) 남편 된 이 여러분, 아내를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내주심 같이 하십시오.

성품과 봉사의 성장

우리의 삶에서 편향되기 쉽습니다. 성품은 성장하지만, 주님을 위한 봉사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은 우리의 성품과 봉사에 있어서 그분을 닮아가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몸의 반쪽(성품만 또는 봉사만)에는 강한 근육을 갖고 있지만 다른 쪽에는 피부와 뼈만 있는 사람처럼 보일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이기고도,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 일에 관심이 없다면, 우리는 예수님과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늘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모든 영원을 누리게 될 것이지만, 우리가 그분을 희생적으로 섬길 수 있는 삶은 단 한 번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성품을 계발하는 것과 관련하여, 우리가 치러야 하는 희생은 모두 내적이며 - 우리의 자기 의지가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를 세우려 한다면 - 잠, 휴식, 편안함, 건강, 돈 등 많은 외적 희생도 치러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렛에 사셨던 30년 동안, 외적으로 치러야 할 희생은 극히 적었습니다. 그러나 사역을 시작하고 나자, 잠잘 곳도 없고 먹을 시간도 없고 사탄과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히며 지루한 여행을 많이 해야 했습니다.

우리의 삶과 사역에서 희생적으로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도록 합시다.

장 9
종인 지도자의 영적 권위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을 영적 지도자로 임명하실 수 있습니다. 만일 교회에서 당신의 사역이나 직분에 임명된 것이 단지 사람에 의한 것이라면, 당신은 결코 그리스도의 권위를 행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의 본을 따름

그리스도를 따르는 첫 번째 단계는 다음과 같은 말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빌2:5-7).

이것은 우리 주님이 취하신 첫 번째 단계인 -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장로로서 취해야 할 첫 번째 단계이기도 합니다. 장로로서의 지위가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높인다고 생각하는 순간, 당신은 장로가 되기에 부적당합니다.

장로는 "성도들의 발을 씻기는 종", "교회를 청소하는 영적 화장실 청소부"가 되어야 합니다. 그들은 언제나 장로로서 물러나 언제든지 평범한 형제가 될 준비가 되어 있는 평범한 형제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 집에서 화장실 청소를 하는 하인은 어느 날 화장실 청소를 중단하고 그 후 가족의 일원으로 식탁에 앉으라는 요청을 받는다고 해서 화를 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장로도 어느 날 자신의 장로 직분을 포기하고 교회에서 평범한 형제로 앉으라는 요청을 받는다고 해서 기분이 상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은 장로 직분을 꽉 쥐어서는 안 되며, 항상 열린 손바닥 안에 두어야 합니다 -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당신에게서 취하여 가시도록 해야 합니다. 만일 당신의 장로 직분이 당신이 붙잡고 소유하는 것이 된다면, 당신의 장로 직분은 당신에게 우상이 됩니다 - 그리고 당신은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닙니다(눅14:33 참조).

(눅14:33) 그러므로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서 누구라도,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지도자는 형제입니다

영적 지도자는 자기 양떼를 십자가의 길로 인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부인의 길을 충실히 걸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러셨던 것처럼, 다른 사람의 종이 되기를 갈망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그리스도의 몸에서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땅의 임금들과 위대한 사람들이 백성위에 군림하지만;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나 메시아 조차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막10:42-45 - Living). 다른 누구보다 뛰어난 권위를 가진 위대한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들의 종이었습니다(고후4:5, 고전9:19).

(고후4:5)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합니다.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을 여러분의 종으로 내세웁니다.

(고전9:19)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영적 지도자는 하나님이 자기 아래 두신 자들을 다스리는 권세를 행사함과 동시에 그들에게 형제요 한 몸의 지체가 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 미묘하게 균형 잡힌 지도자-형제 관계는 종종 유지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불균형한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평범한 형제로 남아 있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주님의 많은 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 균형을 유지하려면 "얼굴과 얼굴을 마주대하는" 관계로 하나님과 가까이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모세가 40년 동안 가장 불리한 환경에서 200만의 하나님의 백성을 효과적으로 인도한 비결이었습니다(신34:10, 민12:8).

(신34:10) 그 뒤에 이스라엘에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는 나지 않았다. 주님께서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고 모세와 말씀하셨다.

(민12:8) 그와는 내가 얼굴을 마주 바라보고 말한다. 명백하게 말하고, 모호하게 말하지 않는다. 그는 나 주의 모습까지 볼 수 있다. 그런데 너희는 어찌하여 두려움도 없이, 나의 종 모세를 비방하느냐?

영적인 권세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기에, 우리가 남에게 주장하거나 억지로 복종하도록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의 말을 듣거나 순종하도록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대리자들을 대적하는 자들을 친히 다루실 것입니다. 주의 종은 누구와도 다투지 말아야 합니다(딤후2:24,25). 하나님이 당신을 후원하고 계시다면, 왜 당신의 입장을 변호하려고 합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을 변호하시고 권위를 세우실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권위를 스스로 주장하려 한다면, 그것은 당신의 권위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전혀 아님을 나타냅니다.

(딤후2:24,25) 주님의 종은 다투지 말아야 합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온유하고, 잘 가르치고, 참을성이 있어야 하고, 반대하는 사람을 온화하게 바로잡아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아마도 하나님께서 그 반대하는 사람들을 회개시키셔서, 진리를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리더'라는 칭호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마23:10). 우리는 '목사'라고도 불리면 안 됩니다. 에베소서 4장 11절에 보면 '목사'는 사도, 선지자, 교사, 전도자와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그의 교회에 주시는 선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들 중 어느 것도 교회에서 ​​직분이 아니며 취해야 할 칭호가 아닙니다.

(마23:10) 또 너희는 지도자라는 호칭을 듣지 말아라. 너희의 지도자는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비방에 대한 반응

영적 지도자는 공격을 받거나 비방을 받았을 때, 자신을 변호하거나 정당화하거나 정당성을 입증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너희의 본이 되시니, 그의 발자취를 따르라.....그가 모욕을 당하여도 대답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보복하겠다고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항상 공평하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사건을 맡기셨도다"(벧전2:21,23 - Living).

(벧전2:21,23) 바로 이것을 위하여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여러분이 자기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시려고 여러분에게 본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그는 모욕을 당하셨으나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고난을 당하셨으나 위협하지 않으시고, 정의롭게 심판하시는 이에게 다 맡기셨습니다.

가장 큰 권위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은, 사람들과 다투고 그들을 다스리는 그분의 통치를 주장하기를 거부하셨습니다. 그는 자신을 방어하고 변호하는 일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모든 아래 목자들이 밟아야 할 길입니다. 영적 지도자로서, 스스로 하나님의 권세 아래 산다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안전하게 맡길 수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에 대한 중상과 비판과 험담을 무시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그분 자신이 그러한 공격으로부터 당신의 종들을 보호할 것이다'이기 때문입니다(사54:17). 누군가 진흙을 우리에게 던졌을 때, 우리가 그것을 닦으려고 하면 우리는 옷을 더럽힐 것입니다. 그러나 그대로 두면, 시간이 지나면 말라서 저절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어떤 얼룩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비방에 대처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입니다.

(사54:17) 그러나 어떤 무기도 너를 상하게 하지 못하고, 너에게 맞서서 송사하려고 일어나 혀를 놀리는 자를 네가 모두 논박할 것이다. "나의 종들을 내가 이렇게 막아 주고, 그들이 승리를 차지하도록 하겠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오늘날 교회는 영적인 마음을 가진 지도자들이 매우 부족하기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직함을 가지고 공식적으로 권위를 행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영적 리더십은 드물고 거의 발견되지 않습니다. 한번은 예수께서 자기에게 오는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의 고난이 심히 커서 무엇을 할 줄도 모르고 어디로 가서 도움을 구해야 할지 알지 못함이라.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더라"(마 9:36 - Living Bible). 상황은 오늘날과 똑같습니다.

목자의 마음과 종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교회의 지도자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복종 - 기쁘게 받아들이고 강요되지 않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하나님의 위대한 사람'으로 우러러보거나 우상화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의 추종자가 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항상 우리의 형제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그들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개인적인 관계를 결코 갖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도 우리 자신에게 집착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 대신에,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홀로 살도록 촉구해야 합니다. 그들은 그들이 하는 일에서 우리의 인정을 구해서는 안 됩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집착하는 것을 발견하면, 즉시 그를 떨쳐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조언을 할 때, 우리는 그에게 우리와 동의하지 않을 자유, 우리 조언을 무시할 자유, 그리고 그가 스스로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할 자유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가 실수를 한다면, 우리는 그를 빨리 도와야 하고 절대 그에게 "내가 그렇게 말했잖아"라고 말하지 않아야 합니다.

형이 "하나님이 교회에 임명하신 권위에 복종하는 것"의 중요성을 교묘하게 가르치는 것이 가능합니다 - 그의 교회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에게 복종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마음에 두려움을 심어주어, 그와 동의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악입니다. 복종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신뢰의 정도에 기초할 수 있습니다 -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 우리 가정 생활의 경건함, 그리고 그들이 도움이 필요할 때 그들을 돕는 우리의 말에 기름 부음을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장로라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것은 우리가 불안하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그에게 복종하거나 반역할 자유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보다 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장로로서 누구에게든지 복종을 요구할 권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또한 우리의 혼적인 능력(성격의 능력)을 통해 누구도 우리에게 복종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마음이 강한 장로가 그의 성격의 능력으로 교회에서 다른 사람들을 최면에 걸리게 하는 것은 매우 쉽습니다! 그것은 혼적이고 악한 것입니다. 그러한 혼적인 능력은 모두 죽여야 합니다. 교회의 사람들은 우리와 함께 자유로워야 하고 아무도 우리를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율법주의 독재와 죽은 행실

우리는 형제자매들이 수많은 규칙과 규제의 짐을 지고 사는 독재정권처럼 교회를 운영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교회는 진정으로 경건한 형제자매들이 결코 편안함을 느낄 수 없는 율법주의적인 클럽으로 전락할 것입니다. 그 대신 육적인 'Yes - men'(무조건으로 우리에게 복종하는 사람)이 권력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법으로 다른 사람을 거룩하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전파해야 하지만, 사람들에게 특정한 패턴을 따르도록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이 개인적인 신념 없이, 단지 우리를 기쁘게 하기 위해 일을 하면, 그 행위가 사람의 눈에는 "의롭고" 좋게 보일지라도 그들의 행위는 죽은 행위에 불과합니다.

죽은 행실은 사람을 기쁘게 하거나 감동을 주기 위해 행하는 선행이나, 양심을 편안하게 하기 위하여 행하는 일입니다. 모든 죽은 행위는 하나님께 용납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일은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행한 일들입니다. 그런 일을 하도록 형제자매들을 인도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아담과 하와를 자유롭게 두신 것처럼 그들을 자유롭게 두어야 합니다. 참된 거룩함은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만 완성될 수 있으며(고후7:1), 기독교 지도자들을 두려워함을 통해서는 완성될 수 없습니다.

(고후7:1)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는 이러한 약속이 있으니,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에서 떠나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온전히 거룩하게 됩시다.

아버지의 마음을 품다

우리는 우리의 지위나 '장로'라는 호칭을 결코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결코 다른 형제 자매들보다 더 위대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우리는 교회의 다른 모든 사람을 우리 자신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빌2:3).

(빌2:3) 무슨 일을 하든지, 경쟁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자기보다 서로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

만일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을 사역하는 곳에 세우신다면, 그곳에는 형제들이 우리보다 그들을 더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이 하시는 일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은혜롭게 뒤로 물러서서 그러한 기름부음받은 형제들을 교회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 자신과 싸우게 될 것입니다.

참된 영적 아버지는 그의 영적 자녀들이 영적으로 자기보다 더 발전하기를 갈망할 것입니다. 그러한 다른 사람에 대한 갈망하는 마음이 없다면, 우리는 영적인 아버지가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는 장로로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지역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데 방해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흔들 수 있는 것을 흔드실 것입니다.

우리의 성경 지식, 우리의 설교의 웅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혼적인 힘은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신다는 표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셔서 심판을 행하시기 전에 오래 기다리십니다.

어떤 장로들은 교회 등에서 친구들에게 보이던 권위주의적 태도와 편파적 태도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모든 것을 세심하게 살펴보시고 모든 일을 정확하게 기록해 두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때가 오면, 그분은 신속하게 행동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위선자나 자기 양떼 위에 군림하는 장로나 남을 엄하게 다스리는 장로 등을 아끼지 아니하시는 것을 당신이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날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편애함이 없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히브리서 12장 26-28절은 "하나님이 흔들 수 있는 모든 것을 흔들고 옮기사, 흔들리지 않는 것을 있게 하시리라"고 말합니다.

(히12:26-28) 그 때에는 그의 음성이 땅을 뒤흔들었지만, 이번에는 그가 약속하시기를, "내가 한 번 더, 땅뿐만 아니라 하늘까지도 흔들겠다" 하셨습니다. 이 '한 번 더'라는 말은 흔들리는 것들 곧 피조물들을 없애버리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흔들리지 않는 것들이 남아 있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으니, 감사를 드립시다 그리하여,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그를 섬깁시다.

우리 주변에 있는 기독교 집단에서, 우리는 죄에 빠진 위대한 설교자들과, 신약의 양식을 따르는 것처럼 보였던 교회들이 쪼개지고 뿌리 채 흔들리는 것을 봅니다. 오늘 일어나고 있는 모든 흔들림 속에서, 우리가 기독교 집단 한편에서 보는 세속화와 타협의 한가운데서, 그리고 그 반대편에 있는 모든 율법주의와 바리새주의에서, 흔들리지 않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면, 우리는 히브리서의 위 구절에서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기 때문입니다.

추정의 죄

하나님은 신자의 의도가 선하다 할지라도, 그가 교회에 앉아(교회에 다니며) 교회를 비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만약 그가 어떤 교회에서 불행하다면(어떤 이유로든), 그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에 들어가야 합니다.

다음 예를 생각해 보십시오: 성막에서는, 고핫 사람들(레위의 후손)만이 하나님의 궤를 다룰 수 있었습니다. 웃사(고핫 사람이 아님)가 하나님의 궤가 넘어지려 할 때, 그것을 안정시키려 선한 의도로 한 번 만졌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치시니 죽었습니다(삼하6:6,7). 이 사건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삼하6:6,7) 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렀을 때에, 소들이 뛰어서 궤가 떨어지려고 하였으므로, 웃사가 손을 내밀어 하나님의 궤를 꼭 붙들었는데, 주 하나님이 웃사에게 진노하셔서 거기에서 그를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었다.

교회는 주님의 것이며, 그분만이 그분의 기름부음 받은 종들을 통해 교회를 비판하고 교정할 권리가 있습니다. 계시록 2장과 3장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사도들을 통해 장로들과 교회들에게 징계를 보내셨음을 봅니다.

그러므로 주님으로부터 그런 권세를 받지 못한 사람이 교회를 바로잡거나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 그가 생각하기에 교회가 무너질 것 같을지라도 말입니다 . 하나님은 그런 웃사의 도움 없이도 그분의 교회를 보호하실 수 있습니다!

신자는 자기에게 죄를 지은 사람을 개인적으로 꾸짖을 수 있습니다(눅17:3 및 마18:15 참조). 그러나 그는 지역 교회를 비판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 만일 그가 그 안에 하나님께서 주신 책임이 없다면 말입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사람은 이 문제에 대한 그들의 경계를 알아야 합니다. 신자들이 지역 교회를 비판하고 잘못을 발견할 때,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그들은 웃사입니다 - 그리고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든 그들을 벌하실 것입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일은 그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눅17: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믿음의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 주어라.

(마18:15)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있는 자리에서 그에게 충고하여라. 그가 너의 말을 들으면, 너는 그 형제를 얻을 것이다.

대다수는 일반적으로 틀리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을 반대하여 가르치는 자들과 교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없는 다수와 함께 하는 것보다 하나님과 함께 홀로 서 있는 것이 더 낫습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 집단에서는 대다수가 틀렸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다음은 우리가 그것을 볼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다섯 가지 예입니다:

1. 다수가 송아지에게 경배할 때, 모세는 누가 여호와의 편에 있느냐고 물었다. 오직 한 지파(레위)만이 그와 함께 섰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제사장 직분을 받았습니다(출32,33장). 대다수(11지파)가 틀렸습니다.

2. 12명의 정탐꾼이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파견되었을 때, 그 중 10명(대다수)은 믿지 않았습니다(민13,14장). 그러나 하나님은 소수인 여호수아와 갈렙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날 대다수의 사람들이 내린 결정이, 그들의 불순종으로 인해 광야에서 죽은 60만 명의 운명을 결정지었습니다.

3. 사울이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다윗을 공격하기로 한 결정은 재앙을 초래했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 자손의 대다수를 데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과 함께 하셨습니다(삼상16장). 후에 압살롬도 그의 아버지 다윗을 쫓아냈을 때 이스라엘의 대다수가 그와 함께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과 함께 하셨습니다(삼하15장).

4.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지상에 오셨을 때, 그분을 거부하기로 결정한 결과 거의 1900년 동안 흩어졌습니다. 대다수는 유대인과 바리새인들과 함께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과 함께 하셔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5. 바울의 친구들 대부분은 그의 삶이 끝날 때 그를 버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끝까지 바울과 함께 하셨습니다(딤후1:15, 4:16-18).

(딤후1:15) 그대도 알다시피, 아시아에 있는 사람이 모두 나를 버렸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들어 있습니다.

(딤후4:16-18) 내가 처음 나를 변론할 때에, 내 편에 서서 나를 도와 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 나를 버리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허물이 돌아가지 않기를 빕니다. 주님께서 내 곁에 서셔서 나에게 힘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나를 통하여 전도의 말씀이 완전히 전파되게 하시고, 모든 이방 사람이 그것을 들을 수 있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사자의 입에서 건져내셨습니다.

장 10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섬기기

종교적 기독교 집단과 하나님의 말씀에는 악과 의의 개념을 보는 방식에 큰 차이가 있습니다. 종교적 기독교 집단은 악한 사람들을 죄를 짓는 사람들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의로운 사람들은 선한 일을 하고 교회에 다니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악인은 자기자신만 믿고 실패하는 자요, 의인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사는 자니라"(합2:4 - Living Bible). 악인의 징표는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것이고, 의인의 징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주신 선택은 이것입니다, 두 나무가 상징하는 것은 곧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나무입니다: 혹 당신 안에 선악을 아는 지식이 있어, 당신 스스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결정합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믿는 삶입니다. 아니면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려 주실 수 있도록 하나님의 생명을 여러분 안에 가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4:4). 이것이 새 언약의 삶의 전체 기초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대안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 상징되는 이성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이 나무로 사람이 보기에 외적으로 곧은 삶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하지 않습니다"(계3:2), 생명나무로 상징되는 믿음의 삶, 즉 하나님께 영원히 의존하는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할례

많은 옛 언약의 의식이 새 언약에서 성취됩니다. 할례는 옛 언약 아래서 매우 중요한 의식이었습니다. 확실히 그러한 중요한 의식은 새 언약에서 중요한 영적인 의미를 가져야 하며,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그 의미는 빌립보서 3:3,4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예배하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랑하며, 육신을 의지하지 않는 우리들이야말로, 참으로 할례 받은 사람입니다" 이 세 가지 표현은 모두 서로 관련이 있습니다. 성령으로 예배하는 것은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는 것이며 육신을 신뢰하지 않는 삶으로 나타납니다.

육체적 할례에서 사람들은 그들의 육체의 일부를 잘라냅니다. 영적 할례에서, 우리는 육신에 대한 신뢰(우리의 자아의 생명)을 끊고 그것을 죽입니다. 구약에서 할례를 받지 않은 자는 이스라엘의 일부가 될 수 없었습니다(창17:14). 신약에서,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의 일부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자랑하고 스스로를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만이 참 교회의 일부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지은 것보다 우리 교회를 더 잘 지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참된 교회에 우리를 위한 자리를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창17:14) 할례를 받지 않은 남자 곧 포피를 베지 않은 남자는 나의 언약을 깨뜨린 자이니, 그는 나의 백성에게서 끊어진다.

사도행전 7장 41절은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자랑하는 사람들에 대해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가 이룬 것을 자랑한다면, 우리는 영적으로 할례 받지 못한 것입니다. 자신이 무언가를 성취했다고 느낀다면, 믿음이 실패한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아도 아무 것도 잡지 못하게"(요21:3) 허락하실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오직 그분께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임을 당신에게 가르치기 위해서요.

(행7:41) 그 때에 그들은 송아지를 만들어 놓고서 그 우상에게 희생제물을 바치고, 자기들의 손으로 만든 것을 두고 즐거워하였습니다.

(요21:3)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소"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나가서 배를 탔다. 그러나 그 날 밤에는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다.

어느 날 느부갓네살은 왕궁 옥상에 서서 그가 건설한 큰 바벨론 왕국을 흡족한 듯 바라보았습니다(단4:29,30). 그가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하나님은 그의 왕국을 그에게서 제거하고 그를 짐승과 같이 만드셨습니다. 그 후 그가 제정신으로 회복되는 데는 여러 해가 걸렸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많은 신자들도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이룬 일에 대해 속으로 흡족해 합니다. 그러나 느부갓네살은 마침내 자신의 어리석음을 회개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단4:34-36). 그는 마침내 마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이러한 영적 할례를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단4:29,30) 열두 달이 지난 뒤에, 어느 날, 왕이 바빌론 왕궁 옥상에서 거닐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내가 세운 이 도성, 이 거대한 바빌론을 보아라! 나의 권세와 능력과 나의 영화와 위엄이 그대로 나타나 있지 않느냐?"

(단4:34-36) "정해진 기간이 다 되어, 나 느부갓네살은 하늘을 우러러보고서 정신을 되찾았고, 그리고 가장 높으신 분을 찬송하고, 영원하신 분을 찬양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렸다. 그의 통치 영원하고 그의 나라 대대로 이어진다. 그는 땅의 모든 거민(inhabitants)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와 이 땅의 모든 거민에게 뜻대로 하시지만, 아무도 그가 하시는 일을 막지 못하고, 무슨 일을 이렇게 하셨느냐고 그에게 물을 사람이 없다. 내가 정신을 되찾았을 때에, 나의 명예와 위엄과 나라의 영화가 회복되었고, 나의 고문관들과 대신들이 나를 찾아왔으며, 나는 이전보다 더 큰 영예를 받으면서 왕위를 회복하였다.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에 할례를 받아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신30:6). 그것이 마음에 할례의 표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 할례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신30:6)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의 마음과 당신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셔서 순종하는 마음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신들이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필요 - 인간의 필요가 아님

만일 당신이 주님을 위한 일을 자랑스럽게 여기기 시작한다면, 비록 당신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어떤 은사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을지라도, 성령의 기름부으심은 당신을 떠날 것입니다. 사탄은 하나님께서 그를 완전한 천사로 창조하실 때 그에게 주신 재능을 여전히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잃었습니다. 그는 한때 "기름 부음 받은 그룹"이었으나, 지금은 아닙니다(겔28:14,18).

(겔28:14,18) 14 나는 그룹을 보내어, 너를 지키게 하였다. 너는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 살면서, 불타는 돌들 사이를 드나들었다. 18 너는 죄를 많이 짓고 부정직하게 무역을 함으로써, 네 성소들을 더럽혔다. 그러므로 내가 네 한가운데 불을 질러 너를 삼키도록 하였으며, 너를 구경하는 모든 사람의 눈 앞에서, 네가 땅바닥의 재가 되도록 하였다.

그러면 당신의 소위 "기독교 사역"은 하나님을 위한 사역이 아니라 사람들을 위한 사역이 될 것입니다. 이 두 사역을 구별해야 합니다. 많은 지도자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필요를 보고 그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 따라서 그들이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상상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필요가 아니라 인간의 필요에 맞춰져 있습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구원, 치유, 건져짐 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필요는 그의 이름이 영광을 받고, 그의 나라가 세워지고, 그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신 대로(마 6:9,10).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는 당신의 우선순위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 다음에 오면 기도하기에 좋은 기도입니다. 당신의 사역이 주로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킨다면, 그것은 천박하고 공허하며 사람 중심의 사역입니다.

(마6:9,10)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우리의 주된 기도는 사람들의 필요가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주 예수의 이름이 영광을 받는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우리의 빛이 비춰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5:16). 우리가 마음에 할례를 받았을 때, 우리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할례받지 않은 사람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가 나눈 말씀이 그들에게 축복이었다고 하면, 그는 그것을 자랑스러워하기 시작합니다.

(마5:16)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았지만, 모세는 하나님의 길들도 보았습니다(시103:7 참조). 지금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행하심에만 감동을 받습니다. 사람들이 구원받고 고침을 받는 것 등으로 기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기를 구하지 않습니다.

(시103:7) 모세에게 주님의 뜻을 알려 주셨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님의 행적들을 알려 주셨다.

우리 마음의 첫 번째 간구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첫 번째 기도는 우리의 질병, 재정적 어려움, 우리 가족의 필요 등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해 주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다른 것들은 우리에게 많은 문제를 일으킬 수 있지만 -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부차적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의 유일한 관심사여야 합니다(고전10:31).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다른 모든 문제를 처리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려면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고전10:31)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사람의 필요를 보셨기 때문에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께서 그를 보내셨을 때에만 오셨습니다. 아담이 범죄한 후 4000년 동안 하늘에서 기다리셨습니다. 우리는 아담이 죄에 빠지자마자 예수님이 이 땅에 급히 내려왔어야 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모두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 같은 무리를 보셨을 때, 제자들에게 가서 그 필요를 채우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닙니다. 그들에게 아버지께서 일꾼들을 보내 주시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9:36-38). 아버지만이 참된 목자를 보내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기독교 집단에서 들리는 "선교적 도전" 방식과 매우 다릅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필요에 대해 알게 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기다리지 않고, 즉시 가서 그 필요를 충족하도록 촉구 받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하나님의 사역에서 그토록 많은 혼란과 혼돈의 주된 이유 중 하나입니다.

(마9:36-38)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들은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에 지쳐서 기운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 그러므로 너희는 추수하는 주인에게 일꾼들을 그의 추수밭으로 보내시라고 청하여라."

성령의 인도하심

교회를 개척하고 그들의 한 생애에 많은 일을 이룩한 하나님의 사람들의 사역을 공부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들이 가기를 원하시는 정확한 장소로 그들이 하나님에 의해 인도되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 또는 씨를 뿌리거나 수확을 거두기 위해. 그리하여 그들은 그들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정확한 계획을 성취했습니다.

우리는 다양한 사역을 시도하다가, 나중에 그것이 우리 삶을 위한 하나님의 완전한 계획에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인생을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실패를 피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기 위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습관을 개발해야 합니다 - 그리고 나서 그분이 우리에게 하라고 하신 것을 정확히 행하고, 그분이 우리에게 가라고 하는 곳으로만 가십시오. 우리는 사람에 의해 움직여서는 안되며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움직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분 앞에서 기다리고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인내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성경의 맨 처음 장은 하나님이 매일 말씀하시며 - 그분이 말씀하실 때 기적이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들음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 종일 계속 그분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십니다. "아침마다 나를 깨우사 그의 뜻을 알게 하신다"(사50:4). 우리는 "하나님의 입으로 끊임없이 나오는 모든 말씀"(마4:4)을 들을 때만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50:4) 주 하나님께서 나를 학자처럼 말할 수 있게 하셔서, 지친 사람을 말로 격려할 수 있게 하신다. 아침마다 나를 깨우쳐 주신다. 내 귀를 깨우치시어 학자처럼 알아듣게 하신다.

(마4:4)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 하였다."

바울이 소아시아로 가다가 갈라디아를 지날 때에 성령께서 아시아로 가는 것을 막으셨습니다(행16:6). 그곳에서 우리는 바울이 어디로 가야 할지에 대해 하나님의 인도를 끊임없이 듣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그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곳 저곳을 옮겨 다니며, 한 번의 삶에서 많은 것을 성취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한동안 갈라디아 지역에 머물도록 인도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갈라디아에 몇몇 교회들이 세워졌습니다. "경건한 자의 걸음은(그리고 멈춤은) 여호와께서 인도하시나니"(시37:23).

(행16:6)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을 성령이 막으시므로, 그들은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지방을 거쳐가서,

(시37:23) 우리가 걷는 길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이면, 우리의 발걸음을 주님께서 지켜 주시고,

바울이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읽을 때, 성령께서 갈라디아에서 바울을 멈추게 하신 방법은 그가 병에 걸리도록 내버려 두신 것임을 발견합니다(갈4:13). 하나님의 방법은 놀랍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이 병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자로 영접했습니다(갈4:14). 교만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병든 하나님의 종을 판단하고 그의 삶에 고백하지 않은 어떤 죄가 있거나 그가 치유에 대한 믿음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갈라디아 교인들은 겸손하여 바울을 그렇게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바울도 자신의 병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완전한 계획을 성취하였습니다. 바울처럼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께 복종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향한 그의 완전한 계획을 이루기 위해 우리의 질병까지도 사용하실 것입니다.

(갈4:13,14) 13 그리고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여러분에게 처음으로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은, 내 육체가 병든 것이 그 계기가 되었습니다. 14 그리고 내 몸에는 여러분에게 시험이 될 만한 것이 있는데도, 여러분은 나를 멸시하지도 않고, 외면하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해 주었습니다.

사도행전 16장 10절에서 해설이 갑자기 '그들'에서 '우리'로 바뀝니다. 그곳에서 의사 누가(사도행전을 기록함)가 바울과 합류했습니다. 바울은 병자였으나, 너무 가난하여 의사를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게 의사 누가를 보내어 그와 함께 여행하도록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은 그분을 신뢰하고, 육신을 신뢰하지 않는 종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행16:10) 그 환상을 바울이 본 뒤에, 우리는 곧 마케도니아로 건너가려고 하였다. 우리는, 마케도니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사역은 우리의 내면 생활에서 흘러나와야 합니다

우리가 계시를 구한다면, 우리를 격려해 줄 성경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의 귀중한 보물은 표면에 있지 않습니다. 성령의 계시를 찾으려면 깊이 파고 부르짖어야 합니다(잠25:2 참조).

(잠25:2)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요, 일을 밝히 드러내는 것은 왕의 영광이다.

성령은 예수님의 것을 가지고 우리에게 나타내시려고 오셨습니다(요16:14). 그것은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거나 귀신을 쫓아내는 것과 같은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것을 보기 위해 영의 계시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내적 삶과 태도를 나타내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를 들어, 사도들은 3년 반 동안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예수님이 자기들과 똑같이 항상 시험을 받으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으나, 예수님은 결코 죄를 범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계시는 성령 충만한 후에야 그들에게 임했습니다.

(요16:14) 또 그는 나를 영광되게 하실 것이다. 그가 나의 것을 받아서,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전체 사역은 그의 내면의 삶에서 흘러나왔습니다. 우리의 사역도 하나님과의 내적 동행에서 흘러나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사역은 피상적일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은 합판에 붙인 티크 베니어판처럼 겉으로 보기에는 좋아 보입니다. 누군가 그들을 짜증나게 하면 안에 있던 것이 나옵니다. 마치 합판이 베니어판에 긁히면 드러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실 때 그것은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까지 가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할례를 베푸시는 것은 우리 마음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완전히 거룩해질 것입니다, 하나부터 열까지(속속들이).

하나님 앞에 있는 감춰진 삶

새 언약에서,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며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들이 믿음을 갖지 못하는 이유는 사람들에게 영광을 구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5:44).

(요5:44) 너희는 서로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은 구하지 않으니,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교회에 있는 두 형제가 겉보기에는 겸손해 보일 수 있고, 겉보기에는 '선한' 일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오직 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얼굴 앞에 살면서, 예수님만 바라보고 자신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알고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합니다. 겸손해 보이는 다른 형제는 자신감이 넘치고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고 속으로 상상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형제의 사역은 영원히 지속되는 믿음의 사역이 될 것입니다. 두 번째 형제의 일은 이 땅과 함께 멸망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사십시오. 그리고 당신 자신을 예수님과만 비교하십시오 - 그리고 결코 당신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자기를 남과 비교하는 자는 영적으로 어리석은 자니라"(고후10:12).

(고후10:12) 우리는 자기를 내세우는 사람들과 같은 부류가 되려고 하거나, 그들과 견주어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를 척도로 하여 자기를 재고, 자기를 기준으로 하여 자기를 견주어 보고 있으니,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엘리야가 여호와 앞에 서서 말했습니다(왕상17:1). 우리가 주님 앞에서만 서서 말을 한다면, 우리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왕상17:1) 길르앗의 디셉에 사는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였다. "내가 섬기는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내가 다시 입을 열기까지 앞으로 몇 해 동안은, 비는 커녕 이슬 한 방울도 내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타락했을 때, 하나님은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이 성소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한 레위인이 그 이후로는 백성만 섬기고,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겔44:6-14). 그것이 그들의 형벌이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주님을 섬길 수 없었습니다.

(겔44:6-14)

너는 저 반역하는 자들 곧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하여라.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는 역겨운 일을 해도 너무 많이 했다.

너희가 내 음식과 기름과 피를 제물로 바치며,

마음에 할례를 받지 않고,

육체에도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 사람들을,

내 성소 안에 데리고 들어옴으로써,

내 성전을 이렇게 더럽혀 놓았다.

너희가 저지른 온갖 역겨운 일들 때문에,

너희는 나와 세운 언약을 어겼다.

또 너희가 나의 거룩한 물건들을 맡은 직분을 수행하지 않고,

그 일을 이방사람들에게 맡겨서,

그들이 내 성소에서 너희 대신에 나를 섬기는 일을 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마음에 할례를 받지 않고 육체에도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 사람은

어느 누구도 내 성소에 들어올 수 없다.

"특별히 이스라엘 족속이 나를 버리고 떠나서,

우상들을 따라 잘못된 길로 갔을 때에,

레위 제사장들도 내게서 멀리 떠나갔기 때문에,

레위 제사장들은 자신들이 지은 죄의 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이제 제사장이 아니라 내 성소에서 성전 문지기가 되고,

성전에서 시중드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백성이 바치는 번제물이나 희생제물을 잡고,

백성 앞에서 시중을 들게 될 것이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그들이 전에 우상을 섬기는 백성들 앞에서 시중을 들면서,

이스라엘 족속이 죄를 범하게 하였으므로,

이제 내가 손을 들어 그들(레위인)을 쳐서,

그들이 지은 죄의 벌을 받게 하겠다.

그들은 이제 내 앞에 가까이 나오지 못하고,

제사장의 직무를 맡지 못한다.

그들은 가장 거룩한 것 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거룩한 물건에도 가까이 가지 못한다.

이처럼 그들은,

자기들이 저지른 수치스러운 일과,

자기들이 저지른 그 역겨운 일 때문에,

벌을 받아야 한다.

그래도 나는 그들에게,

성전 안에서 해야 할 모든 일들 곧 성전에서 시중드는 일들을 맡아 보게 할 것이다.

그러나 백성과 함께 그릇 행하지 아니한 사독의 아들들은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허락되었다(겔44:15). 사람들을 섬기는 것과 주님을 섬기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겔44:15)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이 나에게서 떠나 잘못된 길로 갔을 때에도, 레위 지파 가운데서 사독의 자손 제사장들은 내 성소에서 맡은 직분을 지켰으므로, 그들은 내게 가까이 나아와서 나를 섬길 수 있고, 내 앞에 서서 내게 기름과 피를 바칠 수 있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사독의 아들들이 성소에서 여호와를 섬긴 후에 백성에게로 나갈 때에, 여호와께서 그 세마포(거룩한) 옷을 거룩한 방에 두고 가라고 하셨습니다(겔44:19). 사람들이 그것을 보게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우리는 내면의 삶에서 주님과의 은밀한 교제를 사람들에게 보여서는 안 됩니다. 금식할 때 금식하는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아야 합니다(마6:17,18). 우리는 하나님과의 사적인 동행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거룩하게 할 수 없습니다. 마음에 할례를 받은 자만이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겔44:19) 그들이 바깥 뜰에 있는 백성에게로 나갈 때에는, 내 앞에서 직무를 수행할 때에 입은 옷을 벗어서 거룩한 방에 두고, 다른 옷을 갈아 입어야 한다. 백성이 제사장의 거룩한 예복에 닿아 해를 입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마6:17,18)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낯을 씻어라. 그리하여 금식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말고, 보이지 않게 숨어서 계시는 네 아버지께서 보시게 하여라. 그리하면 남모르게 숨어서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과 숨은 동행을 하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들에게 감사를 표하면, 그들은 즉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 겉으로 사람들의 귀에 들리게 하는 것이(그들에게 명예를 얻으려고) 아니라, 은밀히 속으로 말입니다.

영적인 교만에서 스스로를 지키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임을 보신다면,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갈망이 그분 앞에서 겸손하게 행하는 것임을 아시면, 우리가 스스로 크게 되기 시작하는 즉시 겸손해질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그는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를 줌으로 그를 도왔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 또한 도우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으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막9:23).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만, 그것을 통한 그분의 음성은 듣지 못합니다. 믿음은 읽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에서 납니다(롬 10:17). 모든 일이 죄를 이기고 승리한 자에게는 다 할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고, 오직 믿음이 있는 자에게는 다 할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거룩하지만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께 많은 것을 받을 수 없습니다.

(막9:23)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할 수 있으면'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

(롬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생기고, 들음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에서 비롯됩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통한 훈련

우리는 우리가 선택한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우리가 자신의 삶을 계획한다면, 영원한 가치를 지닌 어떤 것도 성취할 수 없습니다. 인간적으로 말해서, 우리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영리하고 유능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효과적으로 하게 하는 것은 기름부음이며, 그것은 우리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믿음과 겸손에 달려 있습니다.

입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말합니다(마12:34). 말에 신중을 기하더라도, 목소리 톤은 여전히 ​​마음속의 어느 정도의 교만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런 교만을 발견하고 스스로 겸손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마12:34)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악한데, 어떻게 선한 것을 말할 수 있겠느냐? 마음에 가득 찬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성령은 또한 다른 형제에게서 그리스도와 같은 겸손을 보여줌으로써 우리를 책망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듣는 말씀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경건한 형제들의 삶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들어올 때 우리는 지적으로나 직업적으로나 다른 형태와 크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분의 훈련을 통해 교회에서 우리 모두를 같은 수준으로 낮추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정결케 하는 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참된 교회가 가장 좋은 곳입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으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무너뜨리시고 낮추시려고 사용하시는 모든 상황을 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응답을 미루시는 이유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 중 일부에 대한 응답을 늦추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분의 길은 완전하고 그분은 우리의 길을 완전하게 만드십니다(시18:30,32).

(시18:30,32) 30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흠도 없다.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티도 없다. 주님께로 피하여 오는 사람에게 방패가 되어 주신다. 32 하나님께서 나에게 용기를 북돋우어 주시며, 하나님께서 나의 길을 안전하게 지켜 주신다.

예수님은 (행1:7에서) 사건의 시기를 아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것을 자신의 능력 안에 두셨기 때문입니다.

(행1:7)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때나 시기는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권한으로 정하신 것이니, 너희가 알바가 아니다."

어떤 문제는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에게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1. 예배를 받는 것 (마4:10);

(마4:10) 그 때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하였다."

2. 영광 받는 것 (사42:8);

(사42:8) 나는 주다. 이것이 나의 이름이다. 나는, 내가 받을 영광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 주지 않고, 내가 받을 찬양을 우상들에게 양보하지 않는다.

3. 복수하는 것 (롬12:19);

(롬12:19)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그 일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십시오. 성경에도 기록하기를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하였습니다.

4. 사건의 시기를 아는 것(행1:7).

(행1:7)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때나 시기는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권한으로 정하신 것이니, 너희가 알 바가 아니다."

이 네 가지는 모두 하나님의 특권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위의 (1)과 (2)를 기꺼이 받아들일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3)도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들은 다른 세 가지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쉽게 (4)도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 중 일부에 대한 응답을 오랫동안 미루실 때 우리는 겸손히 그분의 뜻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보좌에 계시며, 항상 자신의 것을 기억하시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의 편에 서있어서 이깁니다 - 그에게는 놓쳐버린 기회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가 희생하여 승리할 때 그에게 가장 달콤합니다."

그러므로 "기도와 말씀을 섬기는 일에 힘쓰며"(행6:4) 계속합시다. 그러면 우리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에 관하여 가르칠" 수 있을 것입니다(행28:31).

(행6:4) 우리는 기도하는 일과 말씀을 섬기는 일에 헌신하겠습니다.

(행28:31) 그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하게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일들을 가르쳤다.

우리에게서 흘러나오는 생수

전 세계에는 새 언약의 복음을 들어야 하는 궁핍한 신자들이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나라의 신자들이 돈을 쫓는 설교자들과 그들을 지배하는 이단 지도자들에게 착취를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노예가 된 신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기 위해서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해야 합니다(사30:21). 많은 신자들이 진리를 듣고 싶어하지 않을 때가 가까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말씀을 전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 우리에게 편할 때와 또한 편하지 않을 때도(딤후4:2,3).

(사30:21) 네가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치우치려 하면, 너의 뒤에서 '이것이 바른길이니, 이 길로 가거라' 하는 소리가 너의 귀에 들릴 것이다.

(딤후4:2,3) 그대는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하게 힘쓰십시오. 끝까지 참고 가르치면서, 책망하고 경계하고 권면하십시오. 때가 이르면, 사람들이 건전한 교훈을 받으려 하지 않고,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들으려고 자기네 욕심에 맞추어 스승을 모아 들일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을 주장하고 다음 말씀을 믿읍시다,

"우리 교회에서 일 년 내내 생수가 사방으로 흘러나와 동쪽으로 서쪽으로 흐를 것이다"(슥14:8).

그러나 어떻게 그 생수가 우리에게서 다른 사람들에게 흘러나옵니까?

시편 23:5에서, 우리는 "우리의 잔이 넘침"에 대해 읽습니다.

(시23:5) 주님께서는,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잔칫상을 차려 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 부으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

거기에서 "넘치다"에 대해 사용된 원래 히브리어 단어는 "revayyah"입니다. 이 단어는 성경의 다른 한 곳에서만 (히브리어로) 사용되었습니다 - 시편 66:12에서 "풍요의 장소"로 번역됩니다.

(시66:12) 사람들을 시켜서 우리의 머리를 짓밟게 하시니, 우리가 불 속으로, 우리가 물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마침내 건지셔서, 모든 것이 풍족한 곳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잔이 생수로 넘쳐 흐르는" 이 곳으로 오기 위해, 시편 66:12 이전 구절, 즉 10-12절에 언급된 경험을 거쳐야 한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시66:10-12)

하나님,

주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셔서,

은을 달구어 정련하듯 우리를 연단하셨습니다.

우리를 그물에 걸리게 하시고,

우리의 등에 무거운 짐을 지우시고,

사람들을 시켜서 우리의 머리를 짓밟게 하시니,

우리가 불 속으로, 우리가 물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마침내 건지셔서,

모든 것이 풍족한 곳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 하나님은 우리를 은처럼 연단하실 것입니다;

• 하나님은 우리를 그물 속으로 데려가실 것입니다(긴박한 상황);

•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부담스러운 짐을 지우도록 허락하실 것입니다;

• 하나님은 사람들이 우리의 머리 위에 올라타도록 허락하실 것입니다;

• 하나님은 우리를 타오르는 "불"(불같은 시험)에 두실 것입니다;

•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를 "차가운 물"(그분의 임재에 대한 '느낌' 없음)에 넣으실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훈련을 그들의 삶에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마침내 그들의 잔이 다른 사람들에게 넘치는 축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장 11
영적 교만과 하나님의 인정

주께서 미워하시는 것이 두 가지 있다면 그것은 외식과 영적 교만입니다.

우리가 이 두 가지를 모든 악 중에서 가장 큰 악으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큰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바리새인에게서 본 두 가지 악이 바로 이것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했던 가장 강력한 질책의 말씀으로 그들을 몰아붙이셨습니다(마23장). 그분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로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여 그분이 그것을 보는 모든 곳에서 바리새주의를 비난하실 것입니다 - 그리고 그것이 교회의 장로들 사이에서 발견된다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교만한 사람, 즉 신자나 불신자든, 나이가 많든 적든 다 대적하십니다. 그분은 겸손한 자에게만 은혜를 주시며, 편애가 없으십니다(벧전5:5).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하자면: 우리가 겸손하면, 하나님은 우리 뒤에 오셔서 우리의 그리스도인 삶에서 계속해서 우리를 앞으로 밀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교만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오셔서 끊임없이 우리를 뒤로 밀어내실 것입니다. 사탄과 세상과 육신은 이미 우리를 뒤로 밀어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밀어내시면 우리에게 소망이 없습니다. 교만은 많은 장로들이 삶에서 결코 영적인 발전을 이루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이며 그들의 메시지에 기름부음이 전혀 없는 이유입니다.

(벧전5:5) 젊은이 여러분, 이와 같이 여러분도 나이가 많은 이들에게 복종하십시오. 모두가 서로서로 겸손의 옷을 입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유능한 장로가 되려면, 마음을 다해 겸손을 추구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의 본보기

세례 요한은 겸손한 면에서 우리에게 훌륭한 본보기가 됩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초림을 위해 사람들을 준비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내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의 재림을 위해 사람들을 준비시키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다음은 예수께서 가장 위대한 선지자라고 부르신 세례 요한에게서 배울 수 있는 몇 가지 중요한 교훈입니다:

1. 요한은 자신이 소리일 뿐이라고 말했습니다(요1:19-23). 그는 선지자나 하나님의 사람으로 보이거나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지 하나님을 위한 소리로 만족했습니다.

(요1:19-23)

유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 지파 사람들을 [요한에게] 보내어서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어 보게 하였다.

그 때에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였다.

그는 거절하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오" 하고 그는 고백하였다.

그들이 다시 요한에게 물었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란 말이오? 엘리아요?"

요한은 "아니오" 하고 대답하였다.

"당신은 예언자요?" 하고 그들이 물으니,

요한은 "아니오" 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말하였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란 말이오?

우리를 보낸 사람들에게 대답할 말을 좀 해주시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시오?"

요한이 대답하였다. "예언자 이사야가 말한 대로,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하여라' 하고 말이오."

2. 그는 점점 더 쇠하기 원했고, 그래서 예수님이 사람들의 눈에 더 크게 보여지기를 원하였습니다(요3:30).

(요3:30)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

3. 자기는 예수님의 신을 들기에도 적합하지 않다고 했습니다(마3:11). 우리가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졌다고 해서, 그것이 결코 우리가 그분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경외심을 잃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마3:11)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능력이 있는 분이시다. 나는 그의 신을 들고 다닐 자격초자 없다. 그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4. 요한은 자신을 광고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그의 말을 들으러 왔습니다(마3:5). 당신이 하나님의 메세지를 가진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사람이라면, 당신의 교회가 요한이 설교한 광야와 같은 외딴 곳에 있더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당신의 말씀을 듣기 위해 수 마일을 여행하여 올 것입니다.

(마3:5) 그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부근 사람들이 다 요한에게로 나아가서,

여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마다 우리 자신을 숨기고 그리스도를 높여야 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아름다운 시가 있습니다:

그날, 그는 진리의 등불을 매우 낮게 들고 있어서

아무도 길을 놓칠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눈에 띄기에는 매우 높아,

세상의 위대한 빛을 공정하게 나타냅니다.

위를 바라보면서, 그 사이에 있는 등불,

그것을 잡은 손이 가까스로 보였습니다.

그는 항아리를 잡고, 몸을 낮춘 채

낮은 작은 사람들의 입술로.

그런 다음 지친 성도에게 그것을 올리고,

그리고 성도가 병들고 기절할 때 마시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항아리를 마셨고, 따라서,

그것을 잡은 손이 가까스로 보였습니다.

그는 나팔을 부드럽고 분명하게 불었고,

떨고 있는 죄인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나서 더 큰 소리로, 그리고 대담하게

사탄의 요새의 벽을 부수기 위해,

그 사이에 나팔 소리가 들려오고,

그것을 잡은 손이 가까스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말하길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오라."

항아리와 등불을 내려놓고,

나팔을 놓고 진영을 나와라,

지친 손이 그제야 보일 것입니다.

구멍 뚫린 예수님의 손에 꼭 쥐어진 것을

- 왕 되신 주님과 그 손 사이에는 어떤 것도 없이.

(선택한 부분)

우리가 진정으로 그렇게 되기를 열망한다면,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것이고,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를 파멸시키기 위해 온갖 일에 우리를 교만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장로의 직분을 집에서 하인이 하는 일, 사람들의 발을 씻겨주는 일(예수님이 하신 것처럼)보다 더 큰 일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교만이 들어와 타락하기 시작했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지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입니다. 우리가 장로라는 우리의 위치를 ​​사랑하기 시작했다면 우리는 이미 그릇된 길을 갔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문 앞에 웅크리고 있는 죄

영적 교만은 교회에서 사역하는 모든 사람의 문에 웅크리고 있는 죄입니다. 바울도 자신을 높일 위험이 있음을 인정했습니다(고후12:7). 그러나 그는 위험을 인식했기 때문에 그것에서 구원 받았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교만의 이러한 위험에 대해 끊임없이 경계하며 생활한다면, 그것은 결코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지 않을 것입니다.

(고후12:7) 내가 받은 엄청난 계시들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과대평가 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내가 교만하게 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사자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으로 나를 치셔서 나로 하여금 교만해지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항상 예수님의 지상 생애 동안 "사람들에게 멸시와 버림을 받기로(사53:3)" 선택하신 그분의 겸손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보여 주시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영성이나 사역을 위해 우리 자신의 이름을 얻는다는 생각 자체를 싫어해야 합니다.

(사53:3)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를 받으니,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우리는 교회에서 담대히 죄를 책망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일에 충실해야만 그렇게 할 수 있는 신성한 권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육신을 판단한 것은 교회에서도 판단할 수 있습니다 -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육신을 보고 판단한 것 이상의 모든 설교는 위선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실 때 영적 교만의 위험

영적 교만은 우리 모두가 항상, 특히 주님께서 우리의 수고를 축복하실 때 직면하는 큰 위험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항상 "아무것도" 아니면서 "무엇"이 된 것처럼 생각하기 매우 쉽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대적하고 우리와 싸울 것입니다 -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이 누구든지 대적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은사를 받았을 때, 개인 생활과 가정 생활이 잘 될 때, 우리 교회가 성장하고 있을 때, 물질적으로 부자가 될 때 우쭐해지기 쉽습니다.

우리는 다른 어떤 죄보다 우리의 영적 교만과 이기심에 빛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영역에서 자신을 속이는 것이 매우 쉽습니다. 우리는 실제로 매우 교만하고 자기 중심적일 때 우리는 매우 겸손하고 비이기적이라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사탄은 위대한 사기꾼입니다.

다음은 우리의 진정한 상태를 볼 수 있는 영적 교만의 몇 가지 증거입니다: 기분이 상하는 것, 화가 나는 것, 성적으로 불순한 사고 방식,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 사과하는 것을 더디 하는 것, 교회의 동료 신자들과의 교제 회복하는 것을 더디 하는 것 등.

아내와의 사랑의 회복을 빨리 하려는 장로 형제가, 예수님께서 아내를 사랑하듯 형제를 사랑하라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신자들과 장로들과의 교제 회복을 구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엡5:25와 요13:34은 완전히 동일한 명령입니다). 그는 가정의 평화가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교회에 있는 그의 형제들과의 평화에 대한 절실한 필요성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의 이기심과 영적 교만 때문에 그는 자신을 낮추고 형제들에게 사과하라는 성령의 재촉을 듣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엡5:25) 남편 된 이 여러분, 아내를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내주심 같이 하십시오.

(요13:34)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영적 교만이 바벨론을 건설하다

교만한 장로는 교회에서 독재자처럼 행동하고 CEO가 그의 회사를 운영하는 것처럼 교회를 운영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결코 교회를 몸으로 세울 수 없습니다.

영적 교만은 몸에서 나는 냄새와 입에서 나는 냄새와 같습니다. 우리는 냄새를 맡을 수 없지만 다른 사람들은 냄새를 맡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장로가 그의 사역에 대해 자랑할 때, 그는 자신에게서 나오는 악취 나는 영적 교만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은 즉시 그 안에 있는 영적 교만을 느낄 것입니다.

장로의 교만한 태도는 그의 교회를 바벨론 교회로 만들 것입니다. 우리가 느부갓네살의 태도(단4:30)에서 보았듯이, 하나님은 그를 낮추셨고 즉시 그를 버리셨습니다.

(단4:30) 혼자 중얼거렸다. "내가 세운 이 도성, 이 거대한 바빌론을 보아라! 나의 권세와 능력과 나의 영화와 위엄이 그대로 나타나 있지 않느냐!"

예수님은 "하나님이여 내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18:11)라고 기도하는 바리새인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도 즉시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

(눅18:11) 바리새파 사람은 서서, 혼자 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더구나 이 세리와는 같지 않습니다.'

정치인처럼 행동하는 장로들

장로가 정치인처럼 행동하는 것은 아주 쉽습니다 - 주님의 인정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사람들의 인정을 얻기 위해 행동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타락자가 될 뿐만 아니라 고용인(삯꾼)이 될 것입니다.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자는 결코 그리스도의 종이 될 수 없습니다(갈1:10).

(갈1:10) 내가 지금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려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고 있습니까? 내가 아직도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고 있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인정이지 우리 교회의 형제자매나 어떤 사도의 인정이나 존경도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올바른 심리학 및 관리 기법을 사용하면 사람의 인정을 받기 쉽습니다!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함으로써 당신은 교회에서 장로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이나 당신의 교회를 기뻐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의 모든 수고가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져야 하고 그러므로 하나님 보시기에 받아 들여져야 한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롬15:16). 하나님의 인정을 얻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의도, 태도와 동기를 살피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비밀스럽게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을 죽이지 않는다면, 우리의 수고의 결과는 결코 하나님 보시기에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미성숙할 때 많은 실수를 하고 어리석은 일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저지르는 모든 실수와 어리석은 행동에서 배우는 습관을 들이면 큰 발전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련한 일을 되풀이하는 것은 개가 토한 것을 먹으려고 돌아서는 것과 같습니다(잠26:11).

영적 교만을 이기기

영적 교만은 또한 나이 많은 형제들과 하나님께서 친히 증거하신 자들에 대한 존경심이 결여되게 할 것입니다. 그러한 장로는 그의 교회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복종하기를 기대하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위에 세우신 어떠한 영적 권위에도 복종하기를 꺼릴 것입니다. 이러한 존중의 부족은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점점 더 널리 퍼질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많은 어린이와 젊은이들에게서, 즉 나이가 많고 경건한 형제들에게 말하는 방식에서 그것을 봅니다.

디오드레베(요삼1:9)의 예와 요한이 편지를 쓴 교회의 타락한 다섯 장로들(계2,3장)의 예는 우리 모두에게 경고하는 것입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장로들이 스스로 판단했다면 하나님께서 직접 그들의 실패를 보여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은 사도 요한을 통해 그들의 실패를 지적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요삼1:9) 내가 그 교회에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서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는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판단하는 것을 멈출 때, 우리는 마치 전문가인 것처럼 설교를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 편에 서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스스로를 판단하고 항상 우리 자신과 우리의 사역에 대해 겸손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과 수고를 증거하고 계시는지 끊임없이 점검해야 합니다(갈6:4). 그렇지 않다면 뭔가 심각하게 잘못된 것입니다.

(갈6:4) 각 사람은 자기 일을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자기에게는 자랑거리가 있더라도, 남에게까지 자랑할 것은 없을 것입니다.

모든 장로들에게 드리고 싶은 세 가지 권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얼굴을 티끌에 묻은 채로 항상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가 되십시오.

2. 당신은 평범한 형제라는 것을 항상 기억하십시오.

3. 당신이 주님을 많이 사랑한다고 상상하기 보다는 항상 주님의 사랑을 묵상하십시오.

"심령이 가난한" 것은 "자신을 하찮은 존재로 여기고"(마5:3 - 자세한 성경) 개인적, 영적 필요를 끊임없이 느끼며 사는 것입니다.

(마5:3)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장로들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 지역 교회의 형제자매들을 인도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셨다고 해서 우리가 주님의 인정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 인정은 일정 기간에 거쳐 얻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시험을 받고 있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맡기기 전에 다양한 상황에서 우리를 시험하실 것입니다(요2:24 참조). 디모데는 이미 25년 동안 하나님을 섬겼음에도 불구하고, 바울로부터 하나님의 인정을 얻으라고 권면 받았습니다(딤후 2:15 참조). 디모데처럼 마음이 온전한 이도, 여전히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야 했습니다. 바울이 그를 높이 평가했다는 사실(빌2:19-22에서 볼 수 있듯이)은 이것과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요2:24) 그러나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을 알고 계시므로, 그들에게 몸을 맡기지 않으셨다.

(딤후2:15) 그대는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가르치는 부끄러울 것 없는 일꾼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기를 힘쓰십시오.

(빌2:19-22) 나는 주 예수 안에서 디모데를 여러분에게 곧 보내고 싶습니다. 그것은 나도 여러분의 형편을 앎으로써 격려를 받으려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디모데와 같은 마음으로 진심으로 여러분의 형편을 염려하여 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 다 자기의 일에만 관심이 있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디모데의 인품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자식이 아버지에게 하듯이 복음을 위하여 나와 함께 봉사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다섯 교회의 사자들에게 하신 말씀(계2,3장)은 그 초기 교회 시대에도 대다수의 장로들이 매우 빠르게 타락했음을 보여줍니다. 그 장로들은 주님의 인정을 전혀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장로로서의 지위를 유지했으며 여전히 교회의 "사자"로 간주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에 두려움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 그것은 항상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두려움입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잃은 후, 하나님이 마침내 그를 제거하기 전까지 적어도 10년 동안 왕좌에 앉았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서 일곱 장로들 각각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 행위를 안다……" - 그리고 주님에게는 편견이 없습니다.

장로는 평범한 형제여야 한다

많은 "목사들"은 교회의 신자들과 그리스도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합니다! 사람들에게 이러한 인상을 주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단호한 노력을 해야만 그런 '목사' 아래 있던 교회에서 온 순박한 사람들의 마음에서 이 견해를 제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의 사람들이 당신을 "목사-중재자"로 여긴다면, 잘못은 분명히 당신에게 있습니다. 그들은 당신을 그들의 하인이자 형제로, 그리고 그들과 같은 평범한 형제로 보아야 합니다.

또한 장로로서 그 호칭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권위주의적인 "목사님"처럼 행동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당신과 연결하거나 영적으로 누군가 당신을 의존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누구든지 당신의 충고를 따르지 않는다면, 그는 그로 인해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경우에만 죄를 짓습니다 - 당신에게 불순종하는 경우는 아닙니다 - 그리고 그들은 모두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교회의 모든 사람을 성숙하게 인도하기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사역은 실패할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우리에게 "네 형제님, 네 형제님"이라고만 말하는 형제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교회의 형제들은 자라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아야 하며, 우리에게 끊임없이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중 성격이 강한 사람은 혼적인 힘을 죽여야만 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위 사람들이 우리에게 의존하지 않고 성숙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성격으로 사람들을 위협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사역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면, 하나님은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 가정에서 자라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장성하게 자라는 가정과 같은 교회를 세우는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당신보다 더 성숙한 사람, 즉 당신에게 진실을 말할 만큼 담대한 사람에게, 당신의 삶과 당신의 설교에 대한 정직한 평가를 구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당신의 아내가 그렇게 할 만큼 영적이라면, 그것이 이상적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이 신뢰하는 경건한 형제에게 그가 당신과 당신의 봉사에 대해 실제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십시오. 그리고 그에게 당신에 대해서 무자비하게 솔직하고 정직하라고 말하십시오. 그런 다음 자신을 판단하고, 그에 따라 자신을 수정하십시오. 경건한 사람들은 당신이 스스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명확하게 당신의 영적 상태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형제 자매들 위에 군림하는 "독재자"가 되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지도자들은 교회 만찬의 상석에 앉아, 가장 눈에 잘 띄는 자리에 오르며 대중의 아첨의 광채에 만족하며 기뻐하고, 명예 학위를 받고 '박사'와 '목사'라는 호칭을 받기를 좋아합니다. 사람들이 당신에게 그런 짓을 하게 놔두지 말고, 당신을 그런 자리에 앉히게 하지 마십시오. 당신 모두는 한 명의 스승이 있고, 당신들은 모두 동급생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당신을 조종해서 그들을 맡게 하지 마십시오. 여기에 당신과 그들을 위한 단 한 분 삶의 지도자 -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눈에 띄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물러나십시오. 종이 되십시오. 당신이 자신을 부풀린다면, 당신을 쓰러뜨리는 바람을 맞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단순히 당신 자신이 되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당신의 삶은 충분히 소중할 것입니다." (마23:6-12 - 메시지 의역)

(마23:6-12)

그리고 잔치에서는 윗자리에, 회당에서는 높은 자라에 앉기를 좋아하며,

장터에서 인사받기와, 사람들에게 랍비하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는 호칭을 듣지 말아라.

너희의 선생은 한 분 뿐이요, 너희는 모두 형제자매들이다.

또 너희는 땅에서 아무도 너희의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아라.

너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분, 한 분뿐이시다.

또 너희는 지도자라는 호칭을 듣지 말아라.

너희의 지도자는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너희 가운데서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장로들은 그 양 떼들의 사생활에서 어떤 식으로든 그들을 통제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교회 문제"와 "사적인 문제"를 구별해야 합니다. 장로로서, 우리는 한 사람의 삶의 모든 면을 관리하도록 부름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신자들이 다루는 일의 90% 이상이 사적인 일입니다. 그러한 모든 문제에서, 그들은 스스로 결정을 내릴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장로는 그러한 문제에 절대 간섭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독재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독재적인 장로들이 있는 교회는 결국 그리스도의 몸이 아닌 이단으로 끝날 것입니다.

나중 된 자가 첫 번째가 된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세상에서 나중 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눈에 첫 번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일곱 비유를 통해 나오는 놀라운 진리입니다:

1. 마태복음 20장 1절에서: 일생의 90%(12시간 중 11시간)를 낭비하고, 11시에 온 일꾼이 먼저 상을 받았습니다.

(마20:1)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고용하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어떤 포도원 주인과 같다.

2. 누가복음 15:22에서: 아버지의 재산(자기 몫)의 50%를 잃고 아버지의 이름을 욕되게 한 ​​작은 아들은 여전히 ​​집에서 "가장 좋은 옷"과 "반지"를 얻었습니다 - 자칭 의로운 큰형은 둘 다 얻지 못했습니다.

(눅15: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말하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꺼내서, 그에게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라.

3. 누가복음 7:41에서: 더 많은 죄를 지은(그리고 더 많은 용서를 받은) 사람이 결국 더 많이 사랑하게 되었습니다(따라서 주님과 더 가까워짐).

(눅7:41) "어떤 돈놀이꾼에게 빚진 사람 둘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지고, 또 한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4. 마태복음 21장 28절에서: 처음에 반역하던 아들이 그의 형제와 달리 결국 아버지의 뜻을 행하게 됨.

(마21:28-32)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는데,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해라' 하고 말하였다. 그런데 맏아들은 대답하기를 '싫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 뒤에 그는 뉘우치고 일하러 갔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대답하기를, '예,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서는, 가지 않았다. 그런데 이 둘 가운데서 누가 아버지의 뜻을 행하였느냐?" 예수께서 이렇게 물으시니, 그들이 대답하였다. "맏아들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을 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오히려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옳은 길을 보여 주었으나,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세리와 창녀들은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치지 않았으며, 그를 믿지 않았다."

5. 누가복음 15:3에서: 잃어버린 양은 목자의 어깨에 메어져서 다른 양들보다 목자에게 더 가까워 졌습니다,

(눅15:3-7)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찾아 다니지 않겠느냐? 찾으면, 기뻐하며 자기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와서, 벗과 이웃 사람을 불러모으고,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더 기뻐할 것이다."

6. 누가복음 14장 10절에서: 혼인 잔치에서 가장 끝 자리를 차지한 이가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눅14:10) 네가 초대를 받거든, 가서 맨 끝자리에 앉아라. 그리하면 너를 청한 사람이 와서, 너더러 '친구여, 윗자리로 올라앉으시오' 하고 말할 것이다. 그 때에 너는 너와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을 받을 것이다.

7. 누가복음 18장 9절에 보면: 바리새인보다 외적으로 훨씬 더 나쁘고 부정직한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앞지르니 - 이는 하나님이 그를 의롭다 하셨기 때문입니다.

(눅18:9) 스스로 의롭다고 확신하고 남을 멸시하는 몇몇 사람에게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새파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세리였다. 바리새파 사람은 서서, 혼자 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더구나 이 세리와는 같지 않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런데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볼 엄두도 못 내고, 가슴을 치며 '아,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서 자기 집으로 내려간 사람은, 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이 세리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이 모든 비유는 한 가지 메시지를 제시합니다 - 시작이 좋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결국 상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경주를 어떻게 시작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완주하느냐입니다. 낙심하지 않고 출발이 나쁘다고 스스로 비난하지 않는 사람들은(바울처럼) 시작을 잘한 많은 사람들보다 앞서게 될 것입니다. 이것으로 그들의 삶을 엉망으로 만든 모든 사람들을 격려해야 하며, 결코 낙심하여 포기하지 않고 경주를 계속하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 생애 첫 30년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이후에 "한 가지"만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예수님처럼 되기 위해 밀고 나아가기 - 과거의 모든 실패를 잊어버리고 땅에 남겨진 짧은 시간 동안에 오직 예수님과 같이 되기 위해 앞만 바라보았습니다(빌3:13,14). 여기에는 또한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신 봉사의 직무를 수행하는 것도 포함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삶의 마지막에, 그는 "나는 경주를 마쳤고 이제 하늘에서 면류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딤후4:7)라고 말했습니다.

(빌3:13,14)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딤후4:7) 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일등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리라"(고전9:24)고 말했습니다. 심지어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도 회개하고 결단력과 절제로 달렸다면 그리스도인 경주에서 으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장로인 우리가, 실패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야 하는 희망입니다. 만일 그들이 회개하고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기로 결심한다면 말입니다.

(고전9:24)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사람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하나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

장 12
교회의 재정 문제

주님의 일을 위해 드린 돈은 세상에 있는 모든 돈 중에서 가장 성스러운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돈에 불성실하면, 그는 반드시 자신과 그의 가족에게 저주를 가져올 것입니다. 돈 문제에서 잘못한 사람들은 다른 모든 것에서도 잘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돈에 충성된 자에게만 참된 재물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16:11). 우리가 돈에 부주의하면,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참된 부요를 놓치게 될 것입니다.

(눅16:11) 너희가 불의한 재물에 충실하지 못하였으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돈과 바벨론

기독교 집단의 바벨론 선교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1. 그들은 제자훈련을 하지 않아서, 소수의 제자도 만들지 않습니다. 그들은 개종을 시킵니다 - 그리고 그 개종자 대부분도 제대로 개종하지 못합니다.

2. 그들은 새 언약의 교회 원리를 설교하지 않으므로 죽은 교단에서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지역적으로 표현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옛 언약의 회중과 기독교 클럽만을 세웁니다.

3. 그들은 예수님과 바울이 따랐던 재정 정책을 설교하거나 실행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일을 널리 광고하고, 죽은 교단에 있는 명목상의 "기독교인"에게도 부끄럽지 않게 돈을 구걸합니다. 그들은 목회자에게 매달 급여를 지불합니다(세상 기업이 직원에게 지불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가 섬길 수 있는 주인은 하나님과 돈 두 가지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재정을 올바르게 처리하는 것은 모든 장로와 모든 교회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게하시가 나아만에게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돈을 구하고 그 돈을 자기가 취했기 때문에 저주가 임했습니다(왕하5:21-27). 가룟 유다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돈을 자기 자신을 위해 취했기 때문에 저주가 내려졌습니다.

기독교 집단 어디에서나 게하시와 가룟 유다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교회에서도 유다가 있었다면, 당신의 교회에서도 몇 명의 유다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탄은 어디에나 그의 대리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장로들은 자기 돈보다 교회 돈에 더욱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돈을 사용하는 방식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나타냅니다. 장로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회의 사역을 위해 관대하고 희생적으로 바친 돈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에 대해 하나님께 책임을 져야 합니다.

바벨론과 돈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계시록 18장에서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바벨론의 원리는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많은 기독교 선교가 실행되는 방식에서 발견됩니다. 우리는 그러한 선교에 있는 신자들을 위한 단 하나의 메시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 백성아, 바벨론에서 나오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계18:4).

(계18:4) 나는 하늘에서 또 다른 음성이 울려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내 백성아, 그 도시에서 떠나거라. 너희는 그 도시의 죄에 가담하지 말고, 그 도시가 당하는 재난을 당하지 않도록 하여라."

부채로부터의 자유

돈 문제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첫 번째 단계는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우리가 먼저 모든 빚에서 벗어나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 빚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많은 장로들은 빚을 벗어나라는 신약의 계명을 충분히 강력하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령은 아무에게도 빚지지 말라고 분명히 명하십니다(롬13:8). 성령께서는 신자들이 절대로 누구에게서도 돈을 빌려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상치 못한 의료비나 자녀 교육을 위한 고액의 비용과 같이 가난한 신자들이 돈을 빌려야 하는 긴급 상황이 있을 수 있음을 아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경우 합리적인 기간 내에 반환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빌리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가능한 한 빨리 부채를 청산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비록 그것이 매달 소액을 상환하더라도 말입니다.

큰 빚을 갚는 데 어려움을 겪는 형제는 심지어 빚을 갚기 위해 집에 있는 귀중품을 파는 것도 고려해야만 합니다. 불행히도 많은 장로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명령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분의 권위로 그들을 지지하지 않으시는 이유입니다.

신자들은 장로들로부터 (1) 단순하게 사는 방법과 (2) 매달 약간의 돈을 저축하는 방법에 대한 실제적인 조언을 받아야 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나중에 긴급하게 필요할 때 빚을 지는 것을 피할 수 있습니다. 저는 많은 성도들(우리 교회에 들어온)에게 돈을 주어서가 아니라, 단순하게 사는 법과 금전적 절제를 실천하는 법을 가르쳐서 빚에서 벗어나도록 도왔습니다.

"꾸는 자는 빌려주는 자의 종이라"(잠22:7) - 하나님의 자녀가 남의 ​​종이 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따라서 한 번에 조금씩이라도 모든 사람이 가능한 한 빨리 부채를 청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것이 거의 없을지라도, 기꺼이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이 있는지 보십니다(고후8:12). 대출이 6개월 이상 있었다면, 차용인(borrower)이 해야 할 옳은 일은 대출을 반환할 때 대출에 연간 은행 이자를 더하는 것입니다(삭개오가 한 것처럼 - 눅19:8).

(잠22:7) 가난하면 부자의 지배를 받고, 빚지면 빚쟁이의 종이 된다.

(고후8:12) 기쁜 마음으로 각자의 형편에 맞게 바치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쁘게 받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없는 것까지 바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눅19:8) 삭개오가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하여 갚아 주겠습니다."

장로로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교인들에게 빚 없는 삶을 살도록 가르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신자들이 간음 생활을 하도록 허용하는 것보다 더 이상 이 부채 죄를 안고 살아가도록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주의 : 주택 담보 (대출) 또는 차량 대출은 대출을 위해 제시할 주택(또는 차량)이 있기 때문에 부채로 간주될 필요가 없습니다. 기업 대출도 특정 경우에 허용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 수익을 창출하는 기업을 위한 경우. 그러나 사업능력이 없는 많은 신자들은 자신의 사업능력 부족이나 시장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사업을 시작하려고 했기 때문에 수년간 빚을 지고 있습니다. 큰 사업 대출을 받을 계획인 신자들은 먼저 그들의 장로들과 상의해야 합니다.

신용 카드 부채는 매우 빠르게 증가할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심각한 부채입니다. 모든 신자들은 가능하면 신용카드보다 체크(직불)카드를 사용하도록 촉구 받아야 합니다. 장점 때문에 신용 카드를 사용하는 경우, 매월 신용 카드 청구서를 지불해야 합니다. 한 달이라도 이 빚을 갚지 못하면, 빚을 다 청산할 때까지 신용카드를 사용하지 않도록 훈육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부채를 근본적으로 다루는 자들을 존중하실 것입니다. 신자들은 또한 신용으로 값비싼 물건을 사지 않도록 가르침 받아야 합니다. 그들은 먼저 필요한 돈을 모은 다음 항목을 구입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하셨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부채는 탐욕과 절제되지 않은 생활 방식과 지출의 결과입니다.

천한 개미에게서 배우다

장로들은 또한 신자들에게 매달 약간의 돈을 저축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이를 위해 가족은 월 지출을 줄여야 하며,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높은 수준에서 생활하려고 시도하지 않아야 합니다 - 더 높은 수준에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주변의 다른 사람들을 따라 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은 불필요한 구매나 호화로운 파티에 돈을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많은 파티가 단지 다른 사람들로부터 명예를 얻기 위해 열리며, 이는 실제로 우상 숭배의 한 형태입니다. 환대는 가족의 재정 능력의 한계 내에서만 실행되어야 합니다. 환대에 대한 평판을 얻는 것보다 가족의 미래 필요를 위해 돈을 저축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성경은 아버지가 자녀를 위해 저축해야 한다고 말합니다(고후12:14b).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가족을 위해 저축하는 것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지구상에서 가장 작은 생물 중 하나인 개미에게 가서 지혜를 배우라고 우리에게 명령합니다. 개미는 겨울에 어려운 때가 올 것을 알고, 여름에 먹을 것을 비축합니다(잠 6:6-11). 우리는 예상치 못한 미래 비용에 대비하기 위해 개미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개미의 작은 두뇌가 많은 인간의 큰 두뇌보다 더 많은 지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잠6:6-11) 게으른 사람아, 개미에게 가서, 그들이 사는 것을 살펴보고 지혜를 얻어라. 개미는 우두머리도 없고 지휘관도 없고 통치자도 없지만, 여름 동안 양식을 마련하고, 추수 때에 먹이를 모아 둔다. 게으른 사람아, 언제까지 누워 있으려느냐? 언제 잠에서 깨어 일어나려느냐? "조금만 더 자야지, 조금만 더 눈을 붙여야지, 조금만 더 팔을 베고 누워 있어야지" 하면, 네게 가난이 강도처럼 들이닥치고, 빈곤이 방패로 무장한 용사처럼 달려들 것이다.

자녀를 교육하고 가족을 치료하는 데는 매우 비용이 많이 들 수 있으며 - 신자들은 이를 위해 저축하도록 가르침 받아야 합니다. 자기 가족의 필요를 부양하지 않는 신자는 불신자보다 더 나쁘다고 성령은 말씀하십니다(딤전5:8).

(딤전5:8) 누구든지 자기 친척 특히 가족을 돌보지 않으면, 그는 벌써 믿음을 저버린 사람이요,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나쁜 사람입니다.

많은 경우에, 집에 있는 아내는(그녀는 월급쟁이가 아니기 때문에) 가족의 재정에 대해 전혀 모르기 때문에 돈을 아낌없이 쓸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경우 남편은 아내에게 가족의 재정 상태를 설명하고 감당할 수 없는 지출에 대해서는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장로로서 우리는 모든 남편들이 담대하게 아내에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이 가족을 위해 약간의 저축을 할 수 있습니다.

가족이 재정 규율을 실천하고 매달 지출을 줄이는 데 진지하다면 모든 가정에서 그러한 저축을 할 수 있습니다. 모든 남편이 그렇게 하도록 격려하는 것은 장로로서 우리의 의무입니다.

종말이 다가옴에 따라, 신자들은 돈을 쓸 때 더욱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불확실한 재물"을 믿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뢰는 오직 하늘 아버지께 있습니다(딤전6:17). 그러나 신자들은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4:19)는 약속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개미에게서 배우고(위와 같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간절히 구해야만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 그렇지 않으면 약속은 성취되지 않습니다(마6:33).

(딤전6:17) 그대는 이 세상의 부자들에게 명령하여, 교만해지지도 말고, 덧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도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셔서 즐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하십시오.

(빌4:19) 나의 하나님께서 자기의 풍성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광으로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을 모두 채워 주실 것입니다.

(마6:33)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신앙생활 59년(결혼생활 50년 포함) 동안 아내와 나는 누구에게 1루피도 빌리지 않았고, 단 하루도 빚진 적이 없습니다 - 우리가 가족으로서 매우 가난했을 때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정에서 엄격한 재정 규율을 실천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어떤 것도 사지 않았습니다. 오래된 옷이나 "물려 입는 옷"이 여전히 사용될 수 있을 때, 우리 아이들을 위한 새 옷도 사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하나님께서 우리와 우리 자녀들을 영적으로 축복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재정 규율을 가르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나는 가정에서 로마서 13장 8절을 철저히 순종하고, 마태복음 6장 33절에 따라 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지상적 필요를 공급하셨을 뿐만 아니라 놀라운 영적 부요함도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모든 신자들에게 "나를 따르라 - 하나님의 말씀에 명령한 대로 소득 안에서 생활하고 빚이 없는 이 분야에서"라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롬13:8)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룬 것입니다.

(마6:33)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그것은 모두 우리가 무엇을 가치 있게 여기는가, 즉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인가 또는 우리 주변의 세상적인 그리스도인의 기준인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빚을 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직접적으로 불순종하여, 사탄에게 밤낮으로 그를 참소할 여지를 주는 것은 완전히 부끄러운 일입니다(계12:10).

(계12:10) 그 때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큰 음성이 이렇게 울려 나왔습니다.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권능과 나라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이 세우신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다. 우리의 동료들을 헐뜯는 자,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으로 그들을 헐뜯는 자가 내쫓겼다."

당신이 장로이고 많은 빚을 지고 있고 매달 빚을 청산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당신은 장로직에서 물러나 즉시 설교를 중단하고 빚을 청산해야 합니다 - 장기 부채는 모든 신자, 특히 장로에게 매우 나쁜 증거입니다.

베풀고 빌려주는 지혜

신자들은 먼저 장로들과 상의하지 않고는 누구에게도 큰 돈을 빌려주지 말라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에서 관계가 망가질 수 있습니다.

"무릇 구하는 자에게 주되 아무 것도 바라지 아니하고 꾸어 주라"(눅6:30)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어떻습니까?

(눅6:30) 너에게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사람에게서 도로 찾으려고 하지 말아라.

성경의 어떤 구절을 이해하려고 할 때 우리는 성경을 성경과 비교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구절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에게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유혹했을 때 "기록되었으되"라는 구절을 인용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 기록되었으되…" 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제안을 거절하셨습니다(마4:6,7). 그러므로 성경의 온전한 진리는 '기록된 바'에 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록된 바'와 '또한 기록된 바'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가복음 6장 30절에서 "무릇 구하는 자에게 주되 아무 대가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고 읽을 때, 고린도전서 10장 26절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즉 "땅에 있는 모든 것이 여호와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우리의 모든 돈과 재산과 저축이 주님의 것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돈을 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라는 구절에 순종하기 전에, 먼저 우리 돈의 주인이신 주님께 그렇게 하도록 허락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식으로 주님을 찾을 때, 그분은 때때로 우리에게 어떤 사람들에게 돈을 주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때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돈을 주지 말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 이는 우리에게 돈을 구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 보시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은 우리를 속이는 자들로부터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눅6:30) 너에게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사람에게서 도로 찾으려고 하지 말아라.

(고전10:26) '땅과 거기에 가득 찬 것들이 다 주님의 것' 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이 그러한 문제에 대해 신중하고 지혜롭지 않다면, 그들은 어리석게 돈에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모든 신자는 누구에게나 돈을 빌려주기 전에 장로와 상의해야 합니다 - 특히 금액이 많은 경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차용인에게서 돈을 돌려받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더 큰 위험은 제자도에 관심이 없고 관대한 신자들로부터 선물을 받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 의해 교회가 부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돈 문제는 보통 '제자도'가 아닌 '사랑과 친절'만을 전하는 교회에서 발생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제자도의 엄격한 기준이 정기적으로 선포되고, 당신이 (장로로서) 당신의 교회의 "숫자적 성장"을 위한 영예를 얻는 데 관심이 없다면, 그리고 당신이 진정으로 당신의 교회에 경건한 가정을 세우는 데 관심이 있다면, 그러한 속이는 자들로부터 보호받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가난한 사람이 적어도 2년 동안 제자가 되는 데 관심이 있음을 증명한 후에만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해 돈을 주는 관행을 따랐습니다.

의롭고 돈에 충실하다

돈 문제에서 의롭게 된 후(첫걸음), 돈 문제에서 충실하게 되는 것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돈 문제에 있어서 의로울 수 있습니다 - 속이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고, 빚을 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돈 사용에 충실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돈에 불성실하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해 돈을 아낌없이 쓰는 것이며, 교회 돈을 아낌없이 쓰는 것입니다. 많은 교회와 기독교 단체에서, 지도자들은 교회 돈을 상당히 아낌없이 사용하며, 하나님의 백성이 계속해서 점점 더 주기를 기대합니다.

우리 교회에는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가난한 형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집에서 많은 사치품을 살 여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교회에 주는 돈을 교회 비용을 위해서라도 아낌없이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동기는 좋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도 누가복음 10:38-42에서 주님과 그분의 백성을 위해 한 일에 좋은 동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녀의 일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그의 교정과 책망을 듣는 것이 좋습니다.

(눅10:38-42) 그들이 길을 가다가, 예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마르다라고 하는 여자가 예수를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이 여자에게 마리아라고 하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 곁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다는 여러 가지 접대하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마르다가 예수께 와서 말하였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대답하셨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범이시며 우리의 앞서 달려가신 분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로부터 선물로 많은 돈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것을 사용하는 데 있어 신중하고 검소하며 충실했습니다. 그분이 돈을 쓰신 방식은 요한복음 13장 29절에 나오는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정말 필요한 것만 사십시오. 그리고 항상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주십시오"(의역). 이것은 우리의 모든 지출에 따라야 할 좋은 지침입니다 - 가정과 교회 모두에서.

(요13:29)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자루를 맡고 있으므로, 예수께서 그에게 명절에 그 일행이 쓸 물건을 사라고 하셨거나, 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엇을 주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하였다.

당신이 돈에 부주의하고 돈을 낭비하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잃게 됩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돈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재물을 주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눅16:11). 하나님을 위해 교회를 불태울 수 있었던 많은 장로들이 여기서 실패했기 때문에 기름부음이 없었습니다.

(눅16:11) 너희가 불의한 재물에 충실하지 못하였으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돈에 충실한다는 것은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돈을 사용하는 방식에 있어 검소하고 현명하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 돕기

교회는 한 가족으로 세워져야 합니다 - 언어, 공동체, 인종의 구별 없이 -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를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 거기에는 다른 언어, 문화, 공동체의 사람들 사이에 차별이 없습니다.

장로로서 우리의 책임은 우리 교회 가족 중 누가 가난하고 궁핍한지 알아내고 그들을 돕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신자들이 가난한 신자들을 돕기 위해 돈을 주고 싶을 때 그 돈을 지도자인 사도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지도자들이 신자들의 필요를 그들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겸손하게 인정했습니다(행 4:34,35). 이것은 신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 돈을 장로들에게 주고 장로들이 그것을 궁핍한 사람들에게 공정하게 분배하는 것.

(행 4:34,35)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판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다.

그러나 신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스스로 돈을 준다면, 교묘하게 자신의 필요를 선전하는 가난한 사람들은 풍족해질 것이고 정말로 가난한 사람들은 아무 것도 얻지 못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드린 돈은 장로들이 필요에 따라 지혜롭게 사용해야 합니다. 가난한 교회에 돈을 보내려면, 여러 장로가 운영하고 회계가 제대로 관리되는 잘 세워진 교회에만 보내야 합니다. 장로들은 그러한 교회에 사업(project)을 위해 돈을 준 후에도, 그 돈이 현명하게 사용되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나는 우리가 불신자들을 돕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책임은 주로 우리 자신의 교회-가족에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당신이 당신의 마을에 있는 거지를 돕기 위해 당신의 돈을 준다면, 그것은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당신의 자녀가 굶주리면, 당신의 선행이 어리석은 일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의 돈으로 그런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돈으로 그런 어리석은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자기 가족을 부양하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믿지 아니하는 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동안,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 6:10).

(딤전 5:8) 누구든지 자기 친척 특히 가족을 돌보지 않으면, 그는 벌써 믿음을 저버린 사람이요,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나쁜 사람입니다.

(갈 6:10) 그러므로 기회가 있는 동안에,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합시다. 특히 믿음의 식구들에게는 더욱 그렇게 합시다.

아버지는 자녀에게 요청할 수 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헌금을 모아 예루살렘의 궁핍한 성도들에게 보낼 것을 촉구했습니다(고후 8,9, 고전 16:2). 그러나 그가 자신의 영적 자녀인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에게만 그렇게 하도록 요청했다는 점에 유의하십시오. 그는 로마나 골로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다른 곳의 가난한 신자들에게 돈을 보내달라고 요청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러한 교회를 개척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권한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아버지는 자신의 자녀들에게 가난한 신자들에게 돈을 주도록 요청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의 자녀들에게는 그렇게 하도록 요청할 수 없습니다.

(고전 16:2) 매주 첫날에, 여러분은 저마다 수입에 따라 얼마씩을 따로 저축해 두십시오. 그래서 내가 갈 때에, 그제야 헌금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이 이러한 원칙을 따른다면, 당신은 안전할 것입니다. 모든 바벨론 교회가 빠진 재정의 구덩이에서 벗어나려면 이러한 영적 가치를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자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땅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것"(마 6:33)을 굳게 믿습니다. 우리는 또한 우리가 새 언약의 원리에 따라 그분의 일을 하면, 하나님께서 항상 그분의 일을 위해 충분한 재정을 주실 것을 믿습니다.

돈에 대한 바울의 태도

다음 구절에서 돈과 관련된 사도 바울의 예를 고려해 보십시오:

고린도전서 9:11-19: 우리가 여러분에게 영적인 것으로 씨를 뿌렸으면, 여러분에게서 물질적인 것으로 거둔다고 해서, 그것이 지나친 일이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다면, 하물며 우리는 더욱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런 권리를 쓰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모든 것을 참습니다.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고, 제단을 맡아보는 사람은 제단 제물을 나누어 가진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이와 같이 주님께서도,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을 전하는 일로 살아가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런 권리를 조금도 행사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또 나에게 그렇게 하여 달라고 이 말을 쓰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하느니, 차라리 내가 죽는 편이 낫겠습니다. 아무도 나의 이 자랑거리를 헛되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것을 해야만 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 내가 자진해서 이 일을 하면 삯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마지못해서 하면, 직무를 따라 한 것입니다. 그리하면 내가 받을 삯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을 전하는 데에 따르는 나의 권리를 이용하지 않는다는 그 사실입니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강요아래 있기 때문이라....그런즉 나의 상이 무엇이냐? 이는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 값 없이 복음을 전함은 복음 안에서 나의 권리를 쓰지 아니하려 함이라.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더 많이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다."

여기에서 주목하십시오. 모든 사람을 얻기 위해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한 가지 방법은 그들에게 "값 없이"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1:7-12(NASB and Living): 내가 받은 엄청난 계시들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과대평가 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내가 교만하게 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으로 나를 치셔서 나로 하여금 교만해지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것을 내게서 떠나게 해 달라고, 주님께 세 번이나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가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나는 더욱 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합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여러분이 나를 억지로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나를 인정해 주었어야 마땅합니다. 내가 비록 보잘것없는 사람일지라도, 저 우두머리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일일이 참고 견디면서, 놀라운 일과 기적을 표징으로 삼아 사도가 된 표징을 행하였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값 없이 전하였기 때문에, 너희가 높임을 받도록 내가 스스로를 겸손하게 하는 죄를 범하였느냐? 내가 너희와 함께 하여 궁핍할지라도, 아무에게도 짐이 되지 아니하였노라.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짐이 되지 아니하였으며, 앞으로도 그러하리라. 그리스도의 진리가 내 안에 있는 것 같이, 나의 이 자랑이 아가야 지방에서 그치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왜 이렇게 한다고 생각하는가?.....우리와 같이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자랑하는 자들의 발 아래에서 땅(기회)을 도려내려 함이라."

여기서 바울이 우리 자신을 낮추고 우리 교회의 신자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그들에게 "값없이"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을 주목하십시오.

사도행전 20장 33-35절 : "나는 누구의 은이나 금이나 옷을 탐낸 일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대로, 나는 나와 내 일행에게 필요한 것을 내 손으로 일해서 마련하였습니다. 나는 모든 일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 이렇게 힘써 일해서 약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주 예수께서 친히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 하신 말씀을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7-9 : "우리를 어떻게 본받아야 하는지는 여러분이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에게서도 양식을 거저 얻어먹은 일이 없고, 도리어 여러분 가운데서 어느 누구에게도 짐이 되지 않으려고, 수고하고 고생하면서 밤낮으로 일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권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여러분에게 본을 보여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우리를 본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매우, 극소수의 설교자들만이 바울의 모범(성경의 이 부분에 기록된)을 따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소명은 그의 모범을 따르고 오늘날 기독교 집단의 바벨론 설교자들과 다른 것입니다.

바울이 늙어서 더 이상 일할 수 없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놀라운 방법으로 그의 필요를 채워 주셨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갇혔을 때, 몇몇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겠다고 서원했습니다(행 23:12-15).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으로, 바울의 누이의 아들이 이 소식을 듣고 옥에 와서 바울에게 일러주었다(행 23:16). 그리하여 바울의 생명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가이사랴로 끌려가 총독 벨릭스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벨릭스는 그를 놓아주기 위해 바울이 뇌물을 주기를 기대했지만, 바울은 결코 뇌물을 주지 않았습니다(행 24:26). 총독이라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뇌물은 분명 엄청난 액수일 것입니다. 벨릭스는 바울과 같은 가난한 설교자가 그와 같이 많은 돈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행 23:12-15) 날이 새니, 유대 사람들이 모의하여,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이 모의에 가담한 사람은 마흔 명이 넘었다. 그들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로 가서 말하였다. "우리는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아무 것도 입에 대지 않기로 굳게 맹세하였습니다. 그러니 이제 여러분은 의회와 짜고서, 바울에 관한 일을 좀더 정확하게 알아보려는 척하면서, 천부장에게 청원하여, 바울을 여러분 앞에 끌어내어 오게 하십시오. 우리는 그가 이 곳에 이르기 전에 그를 죽여버릴 준비를 다 해놓았습니다.

(행 23:16) 그런데 바울의 누이의 아들이 이 음모를 듣고, 서둘러 가서, 병영으로 들어가, 바울에게 그 사실을 일러주었다.

(행 24:26) 동시에 그는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하고 은근히 바랐다. 그래서 그는 바울을 자주 불러내어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추측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다소에서 매우 부유한 유대인 사업가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그들은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그의 유산을 그에게서 보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이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불쌍히 여겨 그의 누이의 아들을 통해 그의 많은 유산을 그에게 보냈을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남은 생애 동안 필요한 모든 것을 돌볼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돈을 얻었습니다. 벨릭스는 이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 후 바울은 로마(당시 세상에서 가장 비싼 성)로 가서 집을 빌려 2년 동안 머물렀습니다(행 28:30,31). 이것은 바울이 그때까지 많은 돈을 가지고 왔다는 또 다른 표시입니다.

(행 28:30,31) 바울은 자기가 얻은 셋집에서 꼭 두 해 동안 지내면서,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맞아들였다. 그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하게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일들을 가르쳤다.

바울은 수십 년 동안 재정 분야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충실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바울이 더 이상 일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부양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가족의 유산을 통해 그의 필요를 채워줌으로써 바울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공경하는 자를 항상 공경하십니다. 우리가 이것을 아는 것은 참으로 격려가 됩니다!

모든 장로들은 바울처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고 노력해야 하며, 바울이 말년에 가졌던 다음과 같은 간증을 가져야 합니다.

"나는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았고, 누구를 타락시킨 적도, 누구를 이용한 적도 없습니다"(고후 7:2).

장 13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

모든 신자가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신자는 간절히 예언하기를 사모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고전 14:1). 이것은 새 언약 시대에 성령을 부어주신 결과 중 하나입니다(행 2:17,18).

(고전 14:1) 사랑을 추구하십시오. 신령한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특히 예언하기를 열망하십시오.

(행 2:17,18)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마지막 날에 나는 내 영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들과 너희의 딸들은 예언을 하고,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꿀 것이다. 그 날에 나는 내 영을 내 남종들과 내 여종들에게도 부어 주겠으니, 그들도 예언을 할 것이다.

(새 언약의 의미에서) 예언한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말하여 그들을 격려하고, 도전하며 세워 주는 것입니다(고전 14:3). 성령 충만한 모든 신자는 교회 모임에서 간략하게 예언할 수 있습니다(고전 14:31). 다른 신자들은 그 말씀을 판단하여 얼마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얼마가 사람의 말인지 분별해야 하며 모든 것을 성경으로 분별해야 합니다(고전 14:29).

(고전 14:3) 그러나 예언하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덕을 끼치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을 합니다.

(고전 14:31) 여러분은 모두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예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모두가 배우고, 권면을 받게 됩니다.

(고전 14:29) 예언하는 사람은 둘이나 셋이서 말하고, 다른 이들은 그것을 분별하십시오.

하나님은 또한 교회에서 어떤 사람들을 선지자로 세우셨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교회에 선물로 주신 사람들입니다. 선지자들은 신자들에게 도전을 주고 강화하기 위해 긴 메시지를 말할 것입니다. 우리는 "유다와 실라가 선지자라 긴 말로 형제들을 권면하고 굳게 하여"(행 15:32)라고 읽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신자는 극소수이며(고전12:28; 엡4:11) - 모든 사람이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행 15:32) 유다와 실라도 예언자이므로, 여러 말로 신도들을 격려하고, 굳세게 하여 주었다.

(고전 12:28)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몇몇 일꾼을 세우셨습니다. 그들은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예언자요, 셋째는 교사요, 다음은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요, 다음은 병을 고치는 은사를 받은 사람이요, 남을 도와 주는 사람이요, 관리하는 사람이요, 여러 가지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입니다.

(엡 4:11) 그분이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예언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도자로, 또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습니다

교회 모임에서 예언하는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은 플랜틴 바나나를 먹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껍질(사람의 것)을 버리고 가죽 안에 있는 것(하나님으로부터 온 것)만 먹어야 합니다. 어린 신자의 껍질은 매우 두꺼울 것이고 그 안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작은 것조차도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더 성숙한 신자는 껍질이 더 얇아지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자매들도 예언할 수 있습니다(행 2:17,18). 그러나 오순절에 새 언약이 선포된 이후에는 여선지자가 보이지 않습니다. 여성 사도도 없습니다.

(행 2:17,18)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마지막 날에 나는 내 영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들과 너희의 딸들은 예언을 하고,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꿀 것이다. 그 날에 나는 내 영을 내 남종들과 내 여종들에게도 부어 주겠으니, 그들도 예언을 할 것이다.

사도행전 21장 9절에서 빌립의 네 딸에 관한 예언을 읽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선지자가 아니었습니다(킹제임스역과 성경의 확대역은 여기에서 원래의 그리스어 단어의 번역을 매우 명확하게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나중에 매우 분명하게 봅니다 - 하나님이 빌립의 집에서 바울에게 예언적 메시지를 주기를 원하셨을 때, 그는 그것을 전하기 위해 빌립의 네 딸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에 그는 바울에게 그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멀리서 선지자 아가보를 데려왔습니다(행 21:10,11 참조).

(행 21:9) 이 사람에게는 예언을 하는 처녀 딸이 넷 있었다.

(행 21:10-11) 우리가 여러 날 머물러 있는 동안에, 아가보라는 예언자가 유대에서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허리띠를 가져다가, 자기 손과 발을 묶고서 말하였다. "유대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허리띠 임자를 이와 같이 묶어서 이방 사람의 손에 넘겨 줄 것이라고, 성령이 말씀하십니다." 이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함께 우리는,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간곡히 만류하였다.

오늘날 여선지자가 되려고 하는 모든 여자는 틀림없이 이세벨(거짓 여선지자)이 될 것입니다 - 그들은 마침내 어느 지역 교회든 멸망시킬 것입니다(계 2:20-26; 왕상 19:1,2). 어떤 자매가 이 말에 기분이 상하게 된다면, 나는 그녀에게 자신을 낮추고 신약전서를 주의 깊게 연구하여 주님께서 새 언약에서 단 한 명의 여선지자도 임명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확인하도록 격려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누구의 기분이나 환상에 따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계 2:20-26) 그러나 네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이세벨이라는 여자를 용납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 예언자로 자처하면서, 내 종들을 가르치고, 그들을 미혹시켜서 간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 자다.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나, 그는 자기 음행을 회개하려 하지 않았다. 보아라, 나는 그를 병상에다 던지겠다.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그와의 행위를 회개하지 않으면, 큰 환난을 당하게 하겠다. 그리고 나는 그의 자녀들을 반드시 죽게 하겠다. 그러면 모든 교회는 내가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살피는 분임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너희 각 사람에게 그 행위대로 갚아 주겠다. 그러나 두아디라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 곧 사탄의 깊은 흉계에 물들지 않은 사람들인 너희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한다. 나는 너희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겠다. 다만 내가 올 때까지, 너희가 가지고 있는 그것을 굳게 붙잡고 있어라. 이기는 사람, 곧 내 일을 끝까지 지키는 사람에게는, 민족들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겠다.

(왕상 19:1,2) 아합은, 엘리야가 한 모든 일과, 그가 칼로 모든 예언자들을 죽인 일을, 낱낱이 이세벨에게 알려주었다. 그러자 이세벨은 엘리야에게 심부름꾼을 보내어 말하였다. "네가 예언자들을 죽였으니, 나도 너를 죽이겠다. 내가 내일 이맘때까지 너를 죽이지 못하면, 신들에게서 천벌을 달게 받겠다. 아니, 그보다 더한 재앙이라도 그대로 받겠다."

예언하는 자는 자기 믿음의 분수대로 하십시오(롬 12:6). 그래서 바울은 예언할 때 "주께서 말씀하시되"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오히려 "나도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고전 7:40)라고 말하고 싶어했습니다. 우리가 성경의 어떤 구절을 인용하지 않는 한, 우리는 예언할 때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라는 말을 절대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예레미야는 그런 말을 사용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렘 23:21). 또한 우리가 예언할 때마다, 다른 신자들에게 우리의 말씀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 분별하고 결정하게 해야 합니다.

(롬 12:6)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따라, 우리는 저마다 다른 신령한 선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령, 그것이 예언이면 믿음의 정도에 맞게 예언할 것이요,

(고전 7:40) 내 의견으로는, 그 여자는 그대로 혼자 지내는 것이 더 행복할 것입니다. 나도 하나님의 영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렘 23:21) "이런 예언자들은 내가 보내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달려나갔으며, 내가 그들에게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예언을 하였다."

지시적 예언을 조심하라

우리는 또한 새 언약의 선지자가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특정한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해 다른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린 적이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11장 28절을 보면, 아가보가 흉년이 임할 것을 예언하였지만, 그는 누군가가 그것에 대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도행전 21장 11절에서도, 그는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가면 포로로 잡힐 것이라고 말했지만, 바울이 갈 것인지 말 것인지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행11:28) 그 가운데 아가보라는 사람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일어나, 온 세계에 큰 기근이 들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바로 그 기근이 글라우디오 황제 때에 들었다.

(행21: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허리띠를 가져다가, 자기 손과 발을 묶고서 말하였다. "유대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허리띠 임자를 이와 같이 묶어서 이방 사람의 손에 넘겨 줄 것이라고, 성령이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이제 모든 신자에게 성령이 있고 그 영이 각 신자에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옛 언약 아래서는, 사람들을 인도할 내주하는 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영을 가진 선지자는 주님께서 그들이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지 그들에게 말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옛 언약의 선지자처럼 행하며, 신자들에게 해야 할 것을 말하는 미성숙한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두로에는 사도 바울에게까지 "자기의 스스로의 영으로" "예언"하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행 21:4)라고 말한 오만하고 미성숙한 신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지시를 완전히 무시하고 갔습니다(행 21:13). 후에 주님은 바울에게 그가 예루살렘에 가는 것이 참으로 당신의 뜻임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행 23:11). 따라서 두로에 있는 그 신자들은 그들의 소위 "예언"에서 완전히 틀렸습니다. 그것은 주님에게서 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교회의 신자들에게 그들이 속지 않도록,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알려주는 (소위)"지시적 예언"을 듣지 않도록 경고해야 합니다.

(행 21:4) 우리는 두로에서 제자들을 찾아서 만나고, 거기서 이레를 머물렀다. 그 제자들이 성령의 지시를 받아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간곡히 말하였다.

(행 21:13) 그 때에 바울이 대답하였다. "왜들 이렇게 울면서, 내 마음을 아프게 하십니까?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 예루살렘에서 결박을 당할 것뿐만 아니라, 죽을 것까지도 각오하고 있습니다.

(행 23:11) 그 날 밤에 주님께서 바울 곁에 서서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과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한다."

새 언약의 예언

새언약 예언의 주된 목적은 (1) 하나님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는 것과 (2)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교회의 모든 모임에서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두 가지 목적을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1) 그의 백성을 모든 죄에서 구원하기 위함(신약의 첫 번째 약속 - 마 1:21); 그리고 (2) 그의 ​​교회를 세우기 위함이다(마 16:18).

(마 1: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너는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마 16:18) 나도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나는 이 반석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죽음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반면에, 당신이 죄로부터의 자유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관계를 구축하는 것보다 성령의 은사를 행사하는 것에 대해 더 많이 설교한다면, 당신의 교회는 곧 고린도 교회와 같이 될 것입니다 - 성령의 모든 은사를 행사하되(고전 1:7), 그러나 육욕적이고 미성숙하며 내분(infighting)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교회는 심지어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이 끝날 수도 있습니다 - 곤고하고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도 못하는 것입니다(계 3:17). 그것은 재앙이 될 것입니다.

(고전 1:7) 그리하여 여러분은 어떠한 은사에도 부족한 것이 없으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계 3:17) 너는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 실상 너는, 네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

당신이 새 언약의 교회를 세우고자 한다면, 당신의 설교의 강조점은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 교회에서 듣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과 항상 같아야 합니다.

설교를 만드는 사람인가 아니면 주님의 사자인가?

정기적으로 주님의 말씀을 듣다 보면, 때때로 그분이 당신을 책망하시고 시정하시는 것을 듣게 될 것입니다. 하박국의 본은 따라야 할 좋은 본입니다. 그는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 있다. 나는 주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실지 지켜보고 있습니다. 내가 책망을 받았을 때,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합 2:1)라고 말했습니다.

(합 2:1) 내가 초소 위에 올라가서 서겠다. 망대 위에 올라가서 나의 자리를 지키겠다. 주님께서 나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실지 기다려 보겠다. 내가 호소한 것에 대하여 주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실지를 기다려 보겠다.

바울은 그가 그리스도를 전파하여, "우리는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완전한) 사람으로 세우기 위하여, 모든 사람에게 권하며, 모든 지혜를 다하여 각 사람을 가르칩니다. 이 일을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작용하는 그분의 활력을 따라 수고하며 애쓰고 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골 1:28,29).

바울은 주님께서 먼저 자기 안에서 강력하게 역사하셔서 그의 자신감과 혼적인 힘을 무너뜨리게 하셨을 때에만, 다른 사람들에게 완전함과 온전함을 제시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서도 행하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통해, 주님은 바울이 효과적으로 그분을 섬기도록 준비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도 하나님을 효과적으로 섬길 수 있도록 동일한 능력으로 우리를 무장시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인상적인 설교자가 아니라 교회에 주님의 기름부음 받은 사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 설교하는 장로들은 오직 바빌론을 건설할 것입니다 - 왜냐하면 사람의 명예를 위해 설교하는 사람들은 돈을 위해 설교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악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진리를 말하도록 위탁을 받은 사자로 말한다. 우리는 그분의 메시지를 듣는 자들의 입맛에 맞게 조금도 바꾸지 아니하고, 우리는 마음 속 깊이 살피시는 하나님만 섬긴다. 너희도 잘 알고 있듯이, 우리는 아첨으로 너희를 얻으려고 한 적이 없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너희에게 돈을 받기 위해서 너희의 친구가 되려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계신다"(데전 2:4,5 - Living).

우리 장로들 모두가 따라야 할 참으로 훌륭한 본이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의 몸에 있는 다양한 사역을 인정함

바울과 바나바가 바보에서 사역했을 때, 우리는 각각이 사역한 방식에서 뚜렷한 대조를 봅니다(행 13:7-10 참조). "성령이 충만한" 바울은 마술사 엘루마를 날카롭게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선한 사람"(행 11:24)이기도 했던 바나바는 그런 사람들을 결코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바나바에게 다른 사역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알면서도, 바울은 바나바에게 자기처럼 말하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바나바는 바울에게 주어진 은혜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이 말하는 방식으로 바울이 말하는 것을 막지 않았습니다.

(행 13:7-10) 그(바예수)는 총독 서기오 바울을 늘 곁에서 모시는 사람이었다. 이 총독은 총명한 사람이어서, 바나바와 사울을 청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였다. 그런데 이름을 엘루마라고 번역해서 부르기도 하는 그 마술사가 그들을 방해하여, 총독으로 하여금 믿지 못하게 하려고 애를 썼다. 그래서 바울이라고도 하는 사울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마술사를 노려보고 말하였다. "너, 속임수와 악행으로 가득 찬 악마의 자식아, 모든 정의의 원수야, 너는 주님의 바른 길을 굽게 하는 짓을 그치지 못하겠느냐?"

(행 11: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주님께로 나아왔다.

성령은 모든 설교자들에게 바울이나 스데반처럼(행 7:51,52) 사람들을 책망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바나바처럼 사역하도록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바울과 같은 사역을 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사역을 완수하도록 허용해야 하며 - 그들이 당신처럼 말하길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행 7:51,52)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 당신들은 언제나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당신네 조상들이 한 그대로 당신들도 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의 조상들이 박해하지 않은 예언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었습니까? 그들은 의인이 올 것을 예언한 사람들을 죽였고, 이제 당신들은 그 의인을 배반하고 죽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몸에서와 같이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사역을 갖고 있지 않으십니다. 목구멍은 받은 음식을 부드럽게 삼킵니다. 그러나 위는 같은 음식에 강력하게 산을 던집니다. 목구멍은 위가 음식에 산을 던지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할 수 있지만, 위가 제 역할을 하는 것을 막지는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위의 '사역'을 정하셔서, 음식이 잘 소화되고 토하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도, 모든 사역은 비록 다르지만, 똑같이 가치가 있습니다. 바울은 바나바가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없고, 바나바는 바울이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는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하라고 부르신 것은 무엇이든 상대방이 하도록 허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어떤 성경을 어기고 있다면, 우리는 먼저 그것에 대해 개인적으로 이야기하고, 성경에서 그의 오류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직분으로 남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각기 다른 직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향은 종종 우리 자신의 사역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더 귀히 여기고"(빌 2:3)라고 권고합니다.

(빌 2:3) 무슨 일을 하든지, 경쟁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자기보다 서로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

영혼을 시험하다

우리는 성경에서 경고받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요일 4:1). 모든 소위 "예언"은 판단되어야 하며 맹목적으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됩니다(참조 고전 14:29). "모든 예언을 주의 깊게 시험하고 - 오직 선한 것을 굳게 잡으십시오"(살전 5:21).

(요일 4:1) 사랑하는 여러분, 어느 영이든지 다 믿지 말고, 그 영들이 하나님에게서 났는가를 시험하여 보십시오. 거짓 예언자가 세상에 많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고전 14:29) 예언하는 사람은 둘이나 셋이서 말하고, 다른 이들은 그것을 분별하십시오.

(살전 5:21) 모든 것은 분간하고, 좋은 것을 굳게 잡으십시오.

옛 언약 아래서, 하나님께서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 그의 백성에게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너희들이 마음 속으로, 그것이 주님께서 하신 말씀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겠느냐고 말하겠지만, 예언자가 주님의 이름으로 말한 것이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말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니 당신들은 제멋대로 말하는 그런 예언자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신 18:21,22).

(신 18:21,22) 그런데 당신들이 마음 속으로, 그것이 주님께서 하신 말씀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겠느냐고 말하겠지만, 예언자가 주님의 이름으로 말한 것이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말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니 당신들은 제멋대로 말하는 그런 예언자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속임수를 피하는 방법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에 대한 진실을 사랑하고(살후 2:10,11) 우리 자신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 특히 돈을 사랑하고 성적 순결과 명예를 추구하는 면에서 그렇습니다. 이 죄와 싸우지 않는 모든 사람은 속임을 당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장로에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의 모든 성경 지식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살후 2:10,11) 또 온갖 불의한 속임수로 멸망을 받을 자들을 속일 것입니다. 그것은, 멸망을 받을 자들이 자기를 구원하여 줄 진리에 대한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미혹하게 하는 힘을 그들에게 보내셔서, 그들로 하여금 거짓을 믿게 하십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전 10:12).

'속임수'가 예수님과 바울이 말세를 특징짓는다고 말한 주요 내용임을 기억하십시오(마 24:4,5,11,23-25, 딤전 4:1,2, 살후 2:9-11). 속임수에서 벗어나 완전한 구원을 경험하려면 끊임없는 자기 판단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심지어 "의인도 큰 어려움을 겪을 때만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벧전 4:17,18).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고 다른 사람들을 그 나라로 인도하고 교회를 세우려면(마 11:12) 모든 죄의 생각 패턴에 대해 "강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마 24:4,5,11,23-25)

4,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도 속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이다' 하면서, 많은 사람을 속일 것이다.

11 또 거짓 예언자들이 많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을 홀릴 것이다.

23-25 "그 때에 누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보시오, 그리스도가 여기 계시오' 혹은 '아니, 여기 계시오' 하더라도 믿지 말아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일어나서, 큰 표징과 기적을 일으키면서, 할 수만 있으면, 선택받은 사람들까지도 홀릴 것이다. 보아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여 둔다.

(딤전 4:1,2) 성령께서 환히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때에, 어떤 사람들은 믿음에서 떠나, 속이는 영과 악마의 교훈을 따를 것입니다. 그러한 교훈은, 그 양심에 낙인이 찍힌 거짓말쟁이의 속임수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살후 2:9-11) 그 불법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작용에 따른 것인데, 그는 온갖 능력과 표징과 거짓 이적을 행하고, 또 온갖 불의한 속임수로 멸망을 받을 자들을 속일 것입니다. 그것은, 멸망을 받을 자들이 자기를 구원하여 줄 진리에 대한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미혹하게 하는 힘을 그들에게 보내셔서, 그들로 하여금 거짓을 믿게 하십니다.

(벧전 4:17,18)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심판이 우리에게서 먼저 시작되면, 하나님의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의 마지막이 어떠하겠습니까? "의인도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않은 자와 죄인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고난을 받는 사람은, 선한 일을 하면서 자기의 영혼을 신실하신 조물주께 맡기십시오.

(마 11:12) 세례자 요한 때로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힘을 떨치고 있다. 그리고 힘을 쓰는 사람들이 그것을 차지한다.

거짓 선지자를 조심하라

초기 사도들이 가르쳤던 거짓 선지자의 식별 표시 중 하나는 다음과 같습니다: "너에게 돈을 구하는 자는 거짓 선지자니 그의 말을 듣지 말라." ("The Didache - The Teaching of the Twelve Apostles" 열두 사도의 가르침이라는 책에서). 이 책은 A.D. 1세기에 쓰여졌으며 가장 초기에 쓰여진 기독교 서적 중 하나입니다). 이 기준으로 볼 때, 오늘날 기독교 집단에 거짓 예언자들이 많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마술쇼와 더 가까운) "소위 치유 모임"이 있는 기독교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의 이 설교자들의 사생활에 대해 아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가정 생활, 이혼 여부, 지역 교회에 속해 있는지에 대해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돈에 대한 그들의 태도와 공적 사역에서 그들이 적용하는 방식에서 그들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설교자는 그의 인기, 그의 쇼맨십 또는 그의 "명백한" 결과로 평가되어서는 안됩니다. 내가 "명백한 결과"라고 말하는 이유는 오늘날 인상적으로 보이는 많은 결과가 마지막 날에는 하나님께서 "나무와 풀과 짚"으로 평가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이름으로 진정한 기적의 능력을 행사한 많은 설교자들이 마지막 날에 "죄 가운데 살았던" 사람들로서 쫓겨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7:22,23). 그러면 가짜 "기적"으로 사람을 속이는 자들을 얼마나 더 엄하게 심판하실까요?

(마 7:22,23)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분명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

다음 테스트로 모든 설교자를 평가하는 것이 좋습니다:

1. 그의 방법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사역에서 채택하신 방법과 신약성서에 규정된 원칙, 특히 돈의 분야에서 일치합니까?

2. 설교자는 설교를 통해서만 우리를 감정적으로 감동시키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에서 우리의 마음을 확신시켜 그리스도의 계명에 순종하도록 우리를 감동시키는가? 우리는 성령의 기름부음과 인간의 웅변(심지어 정치인과 세속 TV 진행자도 가지고 있음)을 구별해야 합니다.

3. 설교가 우리를 즐겁게 하고 웃게 합니까, 아니면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하게 합니까?

4. 설교가 우리로 하여금 설교자를 존경하게 합니까 아니면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가게 합니까?

당신은 (이와 같은 작은 체크리스트를 가지고도) 많은 설교자들을 잘못된 기준으로 평가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 그리고 그 결과 당신의 영적인 삶과 재정적으로(그 비뚤어진 설교자들에게 돈을 주어서) 손실을 입었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더 이상 돈을 잃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많은 설교자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헌금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주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고 주 예수를 왜곡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지상에 계셨을 때 어느 때에도 아무에게도 돈을 구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어떻게 그분의 이름으로 돈을 구할 수 있습니까? 주님은 천국에 가신 후에도 돈에 대한 마음을 바꾸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설교자들이 신약성경을 주의 깊게 읽지 않은 단순한 생각을 가진 신자들을 속이는 또 하나의 방법일 뿐입니다.

오늘날 많은 소위 "치유 전도사"가 (공개 모임, 텔레비전, 잡지 기사에서) 하나님은 무엇이든 하실 수 있다고 설교하고 있습니다 - 눈을 뜨게 하고, 절름발이를 걷게 하고, 암을 치료하고, 죽은 자를 살리기까지 - 그런 다음 청취자에게 "이 기적을 주장하는 믿음을 행사하십시오"라고 요청합니다. 그런 말을 하고는 청중들에게 거액의 돈을 보내달라고 간청하며 재촉합니다! 그러므로 이 설교자들에 따르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하실 수 없는 유일한 일은 그분의 일을 하기 위해 그들에게 돈을 주는 것은 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그 우스꽝스러움이 보이십니까? 그들은 그러한 돈을 위한 구걸함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모독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돈을 구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방언을 말한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악령이 빛의 천사로 와서 그들에게 거짓 체험을 하게 한 것이 분명합니다(고후11:13-15). 그러나 수백만 명의 신자들이 이러한 속임수를 보지 못하고 어리석게도 그들에게 돈을 보냅니다.

(고후11:13-15) 이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들이요,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놀랄 것은 없습니다. 사탄도 빛의 천사로 가장합니다. 그렇다면, 사탄의 일꾼들이 의의 일꾼으로 가장한다고 해서, 조금도 놀랄 것이 없습니다. 그들의 마지막은 그들이 행한 대로 될 것입니다.

설교자들은 또한 여러 가지 이상한 일(예: 사람을 밀어 넘어뜨리고 걷잡을 수 없이 웃게 만드는 것)을 하고 이것이 모두 성령의 나타나심이라고 말함으로써 신자들을 속이고 있습니다. 그런 설교자들에게 속지 않으려면 이 네 가지 테스트로 모든 것을 시험해 보십시오:

1.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는가?

2. 예수님께서 그렇게 가르치셨습니까?

3. 사도들이 그렇게 했습니까?

4. 사도들이 그렇게 가르쳤습니까?

설교자의 행동이 이 네 가지 테스트에서 모두 실패하면 그와 그의 행동은 그가 아무리 유명하거나 인기가 있더라도 위조품으로 거부되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설교자들

내가 매우 강력하게 반대하는 한 가지는 예수님께서도 강력하게 반대하신 바로 그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돈을 받는 것을 보시고 채찍을 사용하셨습니다(요 2:14-17).

(요 2:14-17) 그는 성전 뜰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어 주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상을 둘러 엎으셨다.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을 걷어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주님의 집을 생각하는 열정이 나를 삼킬 것이다' 하고 기록한 성경 말씀을 기억하였다.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 돈을 주지 않으면 무지한 신자들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위협할 때, 그것은 주 예수님을 돈 훔치는 사람으로 묘사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주님을 모독하는 방식에 대해 내 속에서 거룩한 분노를 타오르게 합니다 - 그래서 제가 40년 이상 동안 이 악에 대해 그렇게 강력하게 설교해 왔습니다.

말라기 3:8,9은 성경에서 가장 잘못 인용되고 오해되는 구절 중 하나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시길, "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훔치면 되겠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나의 것을 훔치고서도 '우리가 주님의 무엇을 훔쳤습니까? 하고 되묻는구나. 십일조와 헌물이 바로 그것이 아니냐! 너희 온 백성이 나의 것을 훔치니, 너희 모두가 저주를 받는다!" 그러나 그 구절은 옛 언약 아래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공무원(레위인)을 부양하기 위해 10%의 소득세(십일조라고 함)를 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국가와 마찬가지로 소득세를 내지 않는 사람은 처벌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새 언약 아래 있는 우리에게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옛 언약은 오순절에 폐지되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가정입니다. 그리고 어떤 아버지도 자녀에게 소득세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를 위한 말씀은 고린도후서 9장 7절에 있습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많은 설교자들이 우리 주님을 사람들의 돈을 원하는 분으로 묘사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 특히 인도와 같은 비기독교 국가에서 그렇습니다.

그러한 일들은 나를 화나게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주님의 이름에 불명예를 가져다 주기 때문에 나를 울게 만듭니다.

바울은 "형제자매 여러분, 다 함께 나를 본받으십시오. 여러분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은 것과 같이, 우리를 본받아서 사는 사람들을 눈여겨보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여러 번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땅의 것(돈)만을 생각합니다" (빌 3:17-19).

바울은 죄와 이 돈을 움켜쥐는 태도에 대해 매우 강력하게 설교하여, 데마와 같은 많은 사람들이 그를 떠났습니다. 바울은 마지막 편지에서 "아시아에서 온 모든 그리스도인이 나를 버리고;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갔느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몇몇은 끝까지 그와 함께 했습니다. "오네시보로가 나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오네시보로와 그의 가족을 축복하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바울은 디모데에게 "내가 네게 가르친 진리의 본을 굳게 지키라"(딤후 1:13-16)고 권면합니다.

(딤후 1:13-16) 그대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 나에게서 들은 건전한 말씀을 본보기로 삼고, 우리 안에 살고 계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맡은 바 선한 것을 지키십시오. 그대도 알다시피, 아시아에 있는 사람이 모두 나를 버렸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들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빕니다. 그는 여러 번 나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내가 쇠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1세기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행상하는 자(저렴한 노점상)"(고후 2:17)가 있었습니다.

(고후 2:17) 우리는, 저 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서 먹고 살아가는 장사꾼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일꾼답게, 진실한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재물(맘몬)은 여전히 ​​인간을 지배하려고 하는 두 주인입니다(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이 당신을 완전히 다스리도록 하지 않는다면, 돈이 당신을 지배할 것입니다 - 그러면 당신은 사기꾼과 돈을 사랑하는 설교자들에게 속게 될 것입니다.

이 마지막 날에 속지 않으려면 "돈을 사랑함"에서 완전히 벗어나십시오.

신약성경을 따르고, 우리 주 예수께서 사시고 사역하셨던 원리를 지침으로 삼으십시오. 그러면 결코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마지막 날의 속임수

데살로니가후서 2장은 적그리스도가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과 같이 자기를 나타내어 표적과 거짓 기사를 행할" 마지막 날에 대해 경고합니다(4,9절). 그 "적그리스도의 영"은 오늘날 기독교 집단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요일 2:18-20 참조). 그것은 자신을 높이고 양 떼에 대해 하나님처럼 행동하는 설교자들에게서 발견됩니다. 즉, 양 떼를 통제하려고 노력함으로써, "가짜 예언"을 통해, "가짜 표적과 기사"를 보여줌으로써, 양 떼를 자신에게 집착하게 하고, 제물을 요구함으로써(예: 엘리의 아들들이 한 것처럼 - 삼상 2:12-17), 그리고 수많은 다른 방법으로 통제하려고 합니다.

(살후 2:4,9) 4; 그는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이나 예배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에 대항하고, 그들 위로 자기를 높이는 자인데,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서,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9; 그 불법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에 따른 것인데, 그는 온갖 능력과 표징과 거짓 이적을 행하고,

(요일 2:18-20) 어린이 여러분, 지금은 마지막 때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적대자가 올 것이라는 말을 들은 것과 같이, 지금 그리스도의 적대자가 많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이 마지막 때임을 압니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갔지만, 그들은 우리에게 속한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속한 자들이었더라면, 그들은 우리와 함께 그대로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들은 모두 우리에게 속한 자들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 부으심을 받아,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삼상 2:12-17)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빴다. 그들은 주님을 무시하였다. 제사장이 백성에게 지켜야 하는 규정이 있었는데, 그들은 그것도 무시하였다. 누군가가 제사를 드리고 그 고기를 삶고 있으면, 그 제사장의 종이 살이 세 개 달린 갈고리를 들고 와서, 냄비나 솥이나 큰 솥이나 가마솥에 갈고리를 찔러 넣어서, 그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제사장의 몫으로 가져갔다. 실로에 와서 주님께 제물을 바치는 이스라엘 사람이 모두 이런 일을 당하였다. 그뿐 아니라, 사람들이 아직 기름을 떼내어 태우지도 않았는데, 제사장의 종이 와서, 제물을 바치는 사람에게 "제사장님께 구워 드릴 살코기를 내놓으시오. 그분이 원하는 것은 삶은 고기가 아니라 날고기요!" 하고 말하곤 하였다. 제물을 바치는 사람이 그 종에게 "먼저 기름을 태우도록 되어 있으니, 그렇게 하고 난 다음에 원하는 것을 가져 가시오!" 하고 말하면, 그는 "아니오. 당장 내놓으시오. 그렇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가져 가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엘리의 아들들은, 주님께서 보시는 앞에서 이렇듯 심하게 큰 죄를 저질렀다. 그들은 주님께 바치는 제물을 이처럼 함부로 대하였다.

위 장의 10절과 11절(살후2장)은 하나님께서 친히 어떤 사람들을 미혹하실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이 구절은 우리가 "진리를 사랑하고 구원 받기를 원할 때", 즉 다음과 같은 경우 속임수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살후 2:10-11) 또 온갖 불의한 속임수로 멸망을 받을 자들을 속일 것입니다. 그것은, 멸망을 받을 자들이 자기를 구원하여 줄 진리에 대한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미혹하게 하는 힘을 그들에게 보내셔서, 그들로 하여금 거짓을 믿게 하십니다.

(1)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우리 자신의 죄, 이기심, 교만에 대한 진리를 사랑한다면;

(2)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진리를 사랑한다면; 그리고

(3) 우리가 "모든 죄에서 구원받기를" 열망한다면(예를 들어, 이기심, 교만, 성적인 더러움, 분노, 돈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죄에서)".

하나님은 오늘날 세상에 있는 많은 소위 '기독교' 사역을 통해 모든 믿는 자들을 시험하고 계십니다. 각 신자는 그의 가장 깊은 갈망을 충족시키는 사역에 이끌릴 것입니다. 경건한 삶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그것을 선포하는 사역으로 이끌릴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많은 거짓 사역도 번성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 "건강-부의 복음", "거짓 방언", "영혼을 죽이는 것", "가짜 표적과 기사", "가짜 예언 사역", "'예배'라고 거짓으로 부르는 반복적인 감정적 찬양", "죄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하는 심리학적 설교", "기독교(!) 록 음악", "제자 없는 복음전도" 등.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시험하기 위해 이 마지막 날에 그들이 번성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많은 신자들은 주로 경건을 구하지 않기 때문에 시험에 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이 모든 속임수에서 벗어나, 예수님을 본보기로 삼고 제자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신자들은 자신의 죄를 재빨리 인정할 것이며, 항상 성경의 권위(모든 인간의 전통과 또한 그들 자신의 영리한 추론 위에)에 굴복할 것이므로 결코 속지 않을 것입니다.

장 14
경건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함

"너희가 말씀을 전할 때에는,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 같이 하라"(벧전 4:11).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전하려면, 우리는 주님의 임재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이사야, 에스겔, 요한이 그분의 말씀을 전파하도록 준비시키신 방법입니다.

- 이사야서 6장 1절에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 - 하나님께서 그에게 백성을 위한 말씀을 주셨습니다(사 6:9).

(사 6: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나는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는데, 그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 차 있었다.

(사 6:9)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가서 이 백성에게 '너희가 듣기는 늘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못한다. 너희가 보기는 늘 보아라. 그러나 알지는 못한다' 하고 일러라."

- 에스겔 1장 26절에서 에스겔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 - 하나님께서 그에게 백성을 위한 말씀을 주셨습니다(겔 2:3).

(겔 1:26) 또 그들의 머리 위에 있는 창공 모양의 덮개 위에는, 청옥처럼 보이는 보석으로 만든 보좌 형상을 한 것이 있었고, 그 보좌 형상 위에는, 사람의 모습과 비슷한 형상이 있었다.

(겔 2:3) 그가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곧 나에게 반역만 해 온 한 반역 민족에게 보낸다. 그들은 그들의 조상처럼 이 날까지 나에게 죄만 지었다."

- 요한계시록 1장 17절에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영광을 볼 때에, 주님께서 그에게 일곱 교회에 대한 그분의 말씀을 쓰라고 하셨습니다(계 1:19).

(계 1:17) 그를 뵐 때에, 내가 그의 발 앞에 엎어져서 죽은 사람과 같이 되니, 그가 내게 오른손을 얹고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계 1:19) 그러므로 너는, 네가 본 것과 지금의 일들과 이 다음에 일어날 일들을 기록하여라.

우리가 항상 성령의 기름부으심 아래 산다면, 우리는 항상 주님의 임재 안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은 또한 우리로 하여금 균형 잡힌 예언적 방식으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도전하고 격려하여 그들을 세워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수 있게 해 줄 것입니다(고전 14:3).

(고전 14:3) 그러나 예언하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덕을 끼치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을 합니다.

한 메시지에서 우리의 강한 도전과 책망의 말은 항상 다른 메시지에서 위로와 격려의 말과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돈과 말에 충실함

설교는 기름부음을 받아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의 계시에 근거해야 합니다. 우리가 설교할 때 우리의 소명은 하나님의 말씀의 풍성함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그 부요를 하나님께로부터 얻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서기관은 하나님의 말씀의 보고에서 새로운 계시와 옛 계시를 가져오려면 먼저 제자(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사람)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13:13 - 메시지 의역).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효과적으로 전파하기 위해 충실해야 하는 두 가지 주요 영역은 돈과 혀를 사용하는 방식에 있습니다.

우리의 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불의한 재물에 충실하지 못하였으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눅 16:11). 참된 부요는 그리스도를 닮음과 성령의 기름 부으심과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계시입니다. 우리는 개인 생활에서 돈을 사용하는 데 충실할 때만 그러한 부를 얻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의 실패는 오늘날 기독교 집단에서 계시-설교가 부족한 주된 이유입니다.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돈에 불충실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에는 의롭지만, 돈을 사용하는 데에는 충실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이 분야를 광범위하게 다루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그것에 대해 더 많이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말

다음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말씀하실 수 있느냐 없느냐는 우리의 말의 신실함으로 결정됩니다.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만일 네가 무익한 것에서 귀한 것을 뽑아내면 (네 대화에서), 너는 내 입이 되리라"(렘 15:19)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가정에서나 다른 곳에서나 일상 대화에서 무가치한 말을 모두 제거하고 가치 있고 귀중한 것만을 말한다면,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말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의 입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정말 영광입니다!

(렘 15:19) "나 주가 말한다. 네가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맞아들여 나를 섬기게 하겠다. 또 네가 천박한 것을 말하지 않고, 귀한 말을 선포하면, 너는 다시 나의 대변자가 될 것이다. 너에게로 돌아와야 할 사람들은 그들이다. 네가 그들에게 돌아가서는 안 된다.

만일 당신이 나머지 시간에 마귀가 당신의 혀를 사용하도록 허용한다면, 당신이 설교할 때 하나님께서 당신의 혀를 사용하실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주의한 혀의 사용으로 그들의 사역을 망쳤습니다.

성경은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있다"고 말하고 "지혜로운 혀는 곧 생명나무라"(잠 18:21, 15:4)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혀에서 생명이 나오거나 혀로 사람을 (영적으로) 죽일 수 있습니다.

(잠 18:21)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으니, 혀를 잘 쓰는 사람은 그 열매를 먹는다.

(잠 15:4) 따뜻한 말은 생명나무와 같이만, 비뚤어진 말은 마음을 상하게 한다.

신약에 언급된 혀와 관련된 두 가지 불이 있습니다. 하나는 제자들이 성령세례를 받을 때 그들의 머리 위에 앉았던 "불의 혀"입니다(행 2:3). 다른 하나는 "지옥에서 불붙는 혀"(약 3:6)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불을 선택해야 합니다.

(행 2:3) 그리고 불길이 솟아오를 때 혓바닥처럼 갈라지는 것 같은 혀들이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약 3:6) 그런데 혀는 불이요, 혀는 불의의 세계입니다. 혀는 우리 몸의 한 지체이지만, 온 몸을 더럽히며, 인생의 수레바퀴에 불을 지르고, 결국에는 혀도 게헨나의 불에 타버립니다.

혀를 다스리려면 먼저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입은 마음에 가득 찬 것을 말한다.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느니라"(마 12:34,35).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다스려야 할 것은 마음입니다. 수도꼭지에서 더러운 물이 나오는 것은 물이 나오는 탱크가 더럽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탱크를 먼저 청소해야 합니다. 그러면 깨끗한 물만이 수도꼭지를 통해 나올 것입니다.

(마 12:34,35)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악한데, 어떻게 선한 것을 말할 수 있겠느냐? 마음에 가득 찬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선한 사람은 선한 것을 쌓아두었다가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악한 것을 쌓아두었다가 악한 것을 낸다.

우리는 항상 마음을 채우는 생각으로 말합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묵상하면, 그런 생각이 당신에게 저절로 나옵니다. 그러나 당신의 마음이 사람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차면, 그것이 나옵니다.

마음에 소란이 느껴진다면 절대로 말하거나 글을 써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여러분 마음에 심판자가 되게 하십시오. 참으로 여러분은 이(그리스도의 평강)를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골 3:15 - NASB 여백). 우리가 평화를 잃었을 때, 파울(반칙)이 어딘가에서 저질러졌음을 가리키며 심판이 휘슬을 붑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 진행하기 전에 파울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골 3:15)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게 하십시오. 이 평화를 누리도록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여러분은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시편 12편 6절에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하여, 풀무에 단련한, 일곱 번 걸러낸 은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혼란스럽게 하는(불안한) 생각이 머리를 스칠 때마다, 그 생각을 주님께 가져가십시오 - 몇 번이고, 일곱 번이라도. 그의 용광로는 모든 인간의 짜증과 분노를 제거할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이 하는 말은 비록 그것이 책망의 말일지라도 - 하나님께서 당신이 말하기를 원하시는 정화된 말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역을 지원하실 것입니다. 누군가를 바로잡기 위해 이메일이나 편지를 쓸 때도 똑같이 해야 합니다.

(시12:6) 주님의 말씀은 순결한 말씀, 도가니에서 단련한 은이요, 일곱 번 걸러 낸 순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는 것에 대하여

단순하고 명료함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야 합니다. 성경을 성경과 비교하고, 하나님께 말씀에 대한 계시를 요청하고, 그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때 하나님의 메세지와 표현의 자유를 구하면서 우리에게 명확한 생각을 달라고 요청해야 합니다.

단순함과 명료함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과 나누는 모든 것의 특징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 위해 고상한 주제로 전파하려는 유혹을 피해야 합니다. 우리가 머리에서 말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머리(생각)에만 닿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에서 우러나온 단순하고 평범한 말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닿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몇 가지를 적어 두는 것이 좋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그분이 그에게 말씀하신 것을 기록하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12번 읽습니다(계 1:11,19; 2:1,8,12,18; 3:1,7,14; 14:13; 19:9; 21:5). 그렇지 않으면 요한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것을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루 중 다른 시간에 우리에게 말씀하실 수 있으므로 항상 작은 공책과 펜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좋은 습관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주시는 말씀을 잊어버리기 전에 즉시 기록할 수 있습니다. 또는 휴대 전화가 있는 경우, 메모 앱에 기록할 수 있습니다.

(계 1:11,19) 11 그 음성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네가 보는 것을 책에 기록하여, 일곱 교회, 곧 에베소와 서머나와 버가모와 두아디라와 사데와 빌라델비아와 라오디게아의 교회로 보내라." 19 그러므로 너는, 네가 본 것과 지금의 일들과 이 다음에 일어날 일들을 기록하여라.

(계 2:1,8,12,18) "에베소 교회의 심부름꾼에게 이렇게 써 보내라. '오른손에 일곱별을 쥐시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분이 말씀하신다.'" 8 "서머나 교회의 심부름꾼에게 이렇게 써 보내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분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12 "버가모 교회의 심부름꾼에게 이렇게 써 보내어라. '날카로운 양날칼을 가지신 분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18 "두아디라 교회의 심부름꾼에게 이렇게 써 보내라. '그 눈이 불꽃과 같고, 그 발이 놋쇠와 같으신 분, 곧 하나님의 아들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계 3:1,7,14) 1 "사데 교회의 심부름꾼에게 이렇게 써 보내어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분이 말씀하신다.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너는 살아 있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다.'" 7 "빌라델비아 교회의 심부름꾼에게 이렇게 써 보내라. '거룩하신 분, 참되신 분, 다윗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 분, 여시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시면 열 사람이 없는 그분이 말씀하신다.'"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심부름꾼에게 이렇게 써 보내어라. '아멘이신 분이시요, 신실하시고 참되신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처음이신 분이 말씀하신다.'"

(계 14:13) 나는 또 하늘에서 들려 오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기록하여라. 이제부터 주님 안에서 죽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그러자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그들은 수고를 그치고 쉬게 될 것이다. 그들이 행한 일이 그들을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계 19:9) 또 그 천사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고 기록하여라." 그리고 또 말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참된 말씀이다."

(계 21:5) 그 때에 보좌에 앉으신 분이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또 말씀하셨습니다. "기록하여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다."

집중과 기름부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목적 없이 흘러가는 경향과 단조롭게 반복하는 경향을 조심하십시오. 이것을 죄라고 할 수는 없지만, 사람의 시간을 낭비하고 모임에 지루함을 주는 것은 분명합니다. 공유해야 할 요점을 미리 적어두면 메시지가 더 간결해질 뿐만 아니라 듣기도 쉬워져 더 효과적입니다. 어떤 형제들은 기억력이 좋기 때문에 요점을 기록하지 않고도 효과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이 문제에 있어서 자신의 명예를 추구하는 것으로부터 죽어야 하고, 메모를 사용하여 사람들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야 합니다.

바울의 설교는 "매우 명료하여, 웅변과 사람의 지혜가 많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말에 성령의 능력이 있더라"(고전 2:4 - Living). 하나님께서 "우리 말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며"(삼상 3:19), 항상 성령의 확신으로 사람의 마음의 본향으로 돌아가게 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갈망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보혜사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나를 증언할 것이요, 너희도 증언하리라"(요 15:26,27)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성령께서 우리가 전파하는 것을 뒷받침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성령의 풍성한 기름 부으심을 구해야 합니다.

(고전 2:4) 나의 말과 나의 설교는 지혜에서 나온 그럴 듯한 말로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 나타낸 증거로 한 것입니다.

(삼상 3:19) 사무엘이 자랄 때에,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사무엘이 한 말이 하나도 어긋나지 않고 다 이루어지게 하셨다.

(요 15:26,27)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 영이 나를 위하여 증언하실 것이다.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건전하고 위생적임

우리는 바울이 그의 마지막 편지에서 경고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때가 이르면, 사람들이 건전한 교훈을 받으려 하지 않고,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들으려고 자기네 욕심에 맞추어 스승을 모아 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진리를 듣지 않을 것입니다"(딤후 4:3,4).

그래서 그는 우리에게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큰 인내와 훈계로 책망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라고 권면하십니다.

3절의 '건전한 교리'는 "위생적이고 건강한 교리"를 의미합니다. 좋은 병원이 바닥을 소독제로 항상 깨끗하고 위생적으로 유지하여 작은 세균도 제거하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가 전파하는 것이 사람들을 심지어 가장 작은 죄에서도 벗어나도록 해야 합니다.

흥미롭고 이해하기 쉬움

우리의 메시지도 흥미로워야 합니다. 사람들이 우리의 말을 듣는 것이 지루하거나 우리가 설교할 때 대부분 꾸짖기 때문에 교회를 떠난다고 해서 사람들을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전도서 12장 9-11절(Living)에서 우리는 "전도자는 지혜로우며 백성에게 그가 아는 ​​모든 것을 가르치고 잠언을 모아 분류하였으니, 전도자는 지혜자일 뿐 아니라 좋은 선생이더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아는 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흥미롭게 가르쳤습니다. 현명한 사람의 말은 행동에 박차를 가하는 채찍과 같으며, 중요한 진리를 정립합니다."

(전 12:9-11) 전도자는 지혜로운 사람이기에, 백성에게 자기가 아는 지식을 가르쳤다. 그는 많은 잠언을 찾아내서, 연구하고 정리하였다. 전도자는 기쁨을 주는 말을 찾으려고 힘썼으며, 참되게 사는 길을 가르치는 말을 찾으면 그것을 바르게 적어 놓았다. 지혜로운 사람의 말은 찌르는 채찍 같고, 수집된 잠언은 잘 박힌 못과 같다. 이 모든 것은 모두 한 목자가 준 것이다.

위의 구절에서 배울 수 있는 많은 교훈이 있습니다. 구절을 천천히 읽고 각 구절을 묵상하십시오. 우리의 메시지는 흥미로운 방식으로 제시되어야 합니다. 그들은 또한 사람들이 우리의 말을 들을 때 행동하도록 자극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생각을 준비하고 정리해야 합니다. 좋은 주부가 맛있는 음식을 차려낸 후 식탁에 아름답게 차려 놓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분명히 받은 후에는 재미있고 이해하기 쉬운 방법으로 정리해야 합니다. 이것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며 - 우리는 우리의 메시지를 매력적으로 만들기 위해 기꺼이 그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설교하셨습니다.

스승 - 설교자 모방하기

다음은 예수님의 설교 방식에 대한 기사입니다:

http://www.cfcindia.com/article/jesus-our-example-as-a-preacher

예수님의 설교 방식은 우리가 도달하기 위해 힘써야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 비록 우리가 거기에 도달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말입니다.

오늘날 많은 인도 설교자들이 하고 있는 것처럼 서양 설교자들의 매너리즘과 술책을 모방하지 마십시오. 설교자로서 예수님만을 당신의 본으로 삼으십시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위해 하는 일

많은 신자들이 과거의 죄악된 삶으로 인해 끊임없는 정죄와 낙심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결코 이 속박에서 벗어나거나 사탄의 비난을 극복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주님의 종으로서 우리는 그들이 자유롭게 되도록 도와야 합니다.

여기에 내가 그리스도의 피와 그 피가 하는 일에 관해 전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 그러한 신자들을 위해:

http://www.cfcindia.com/sermon/the-blood-of-christ-what-it-does

당신은 그것을 듣고 다른 사람들과 그 진리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정죄 아래 살고 있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값없는 용서를 이용하여 그리스도의 피를 값싼 수돗물처럼 취급하며 계속 죄 가운데 사는 신자들이 항상 있었습니다(히 10:26-29).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불필요한 정죄 아래 살고 있는 신실한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이 메시지를 전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롬 5:9).

(히 10:26-29) 우리가 진리에 대한 지식을 얻은 뒤에도 짐짓 죄를 짓고 있으면, 속죄의 제사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습니다. 남아 있다고 예상할 수 있는 것은 무서운 심판과 반역자들을 삼킬 맹렬한 불뿐입니다. 모세의 율법을 어긴 사람도 두세 증인의 증언이 있으면 가차없이 사형을 받는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해 준 언약의 피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모욕한 사람은, 얼마나 더 무서운 벌을 받아야 하겠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롬 5:9)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되었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합니다.

순례자의 진보

PILGRIM'S PROGRESS는 John Bunyan이 (천로역정 - 존 번연) 350년 전에 쓴 책으로, 수세기 동안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축복이 되어 왔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더 나은 제자가 되는 방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다음은 그 책을 바탕으로 실용적인 가르침과 삽화를 통해 제가 전한 메시지입니다:

http://www.cfcindia.com/sermon/pilgrims-progress-what-we-learn-from-it

당신은 그것을 보고 격려 받을 것입니다.

전파할 때 올바른 태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3,6절에서 말합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분수에 맞게 생각하라…… 만일 예언이면 그 믿음의 분량대로".

설교하는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잘못은 "자신의 은혜와 믿음의 분량과 비율"보다 더 길게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생각해야 할 것보다 스스로를 더 높이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설교할 때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보다 우리 자신을 작게 생각함"에 대한 경고가 없습니다 - 왜냐하면 그러한 위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설교할 때 자신에 대해 작게 생각할 가능성이 더 큰가요? 아니면 더 크게 생각할 가능성이 더 큰가요?"라고 자문해 보십시오. 우리는 답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을 더 크게 생각할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에 대해 낮은 생각을 하는 것이 우리가 불안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안전해야 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항상 완전한 확신의 태도여야 합니다. 사탄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항상 예수 이름으로 전적인 저항의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항상 완전한 겸손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것이 우리가 기뻐하는 것이어야 합니다"(눅 10:20 - 메시지 의역). 우리는 우리가 누구이며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시며 그가 우리를 위해 하신 일과 하실 수 있는 일에 대해 더 묵상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냉정한 평가를 받게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설교하는 모든 사람이 가져야 할 바른 자세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2장 4-8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에 따라 은사가 각기 다르므로, 각 사람이 그 은사를 행사하되:

가르치는 자는 그의 가르침으로;

권면하는 자는 권면하는 일에......"

여기서 우리는 가르치는 것과 권면하는 것이 서로 다른 두 가지 은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영감을 주는 방식으로 성경을 가르치는 능력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에게 주시는 영적인 은사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은사 받은 교사는 거의 없습니다(약 3:1).

(약 3:1)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선생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많아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아는 대로, 가르치는 사람인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을 권면하는 은사는 모든 형제가 구해야 할 은사입니다. 그러나 다시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은혜와 믿음의 분량에 따라 행사해야 합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중요하고 주님께서 교회 모임에서 당신이 설교하기를 원하시는 것을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청취자의 시간을 낭비하게 됩니다. 사람들의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돈을 훔치는 것과 같은 관점에서 봐야 합니다. 같은 시각에서 본다면 설교 시간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게 될 것입니다. 특별한 재능이 없다면, 설교 시간을 20분으로 제한해야 합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지침일 뿐이며 엄격하고 고정된 규칙은 아닙니다.) 그 외에도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반복적이고 무겁고 지루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당신의 메시지가 끝날 때, 듣는 사람들은 그들이 주님을 만났다고 느껴야 합니다(고전 14:24,25 참조). 모든 교회 모임은 그렇게 끝나야 합니다. 그러려면 더 기도하고, 더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성령의 기름 부으심과 예언의 은사를 더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고전 14:24,25) 그러나 모두가 예언을 말하고 있으면, 갓 믿기 시작한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 들어와서 듣고, 그 모두에게 질책을 받고 심판을 받아서, 그 마음 속에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엎드려서 하나님께 경배하면서 "참으로 하나님께서 여러분 가운데 계십니다" 하고 환히 말할 것입니다.

비난의 사역이 아닌 격려의 사역

당신의 사역은 항상 비난의 사역이 아니라 격려의 사역이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3장 13절은 매우 분명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악하게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날마다 권하여라." 이것은 모든 형제 자매의 소명입니다 - 모든 모임에서 격려의 말을 나누는 것입니다.

(히 3:13) '오늘' 이라고 하는 그날그날, 서로 권면하여, 아무도 죄의 유혹에 빠져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당신이 설교할 때 당신은 참소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 왜냐하면 당신은 위대한 참소자 사탄과 손을 잡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말할 때마다 교회의 모든 멤버를 격려하기로 결정해야 합니다.

죄는 기만적입니다. 당신의 설교는 당신의 청중이 삶에서 죄의 속임수에서 구원받을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반면에, 당신이 설교에서 꾸지람을 일삼아서 청중을 "죄책감"에 빠지게 하면, 그것은 당신의 양떼를 자책하게 하고 그들의 형인 당신에 대하여 건강하지 않은 두려움으로 이끌 것입니다.

다음은 당신이 읽고 경고받을 수 있는 죄의식에 사로잡힌 상태(guilt trip) 설교에 관한 나의 기사입니다:

http://www.cfcindia.com/article/guilttrip-preaching

당신은 당신의 설교를 통해 동료 신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종이 되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말할 때, 성령께서 당신의 감정을 조절하시도록 하여 결코 화를 내지 마십시오. 당신 자신을 자칭 선지자로 만들지 마십시오!

3000년 전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은 사울(그의 머리는 남들 머리보다 더 높았다 - 삼상 10:23)을 제거하시고 다윗(그의 마음은 남들 마음보다 더 좋았다)으로 대체하셨습니다(행 13:22; 삼상 13:14). 육신적인 신자는 머리의 능력(영리함, 지식, 은사)을 높이 평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음의 능력(겸손, 선함, 사랑)을 높이 평가하십니다.

(삼상 10:23) 사람들이 달려가 거기에서 그를 데리고 나왔다. 그가 사람들 가운데 섰는데, 다른 사람들보다 어깨 위만큼은 더 커 보였다.

(행 13:22)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물리치시고서, 다윗을 그들의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찾아냈으니,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다. 그가 내 뜻을 다 행할 것이다' 하셨습니다.

(삼상 13:14) 그러나 이제는 임금님의 왕조가 더 이상 계속되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임금께서 명하신 것을 임금님이 지키지 않으셨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달리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아서, 그를, 당신의 백성을 다스릴 영도자로 세우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머리"가 약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정하실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영리하지 않고 설교 능력이 없거나 성경 지식이 많지 않아도 상관 없습니다. 교회는 머리에 지식이 있는 사람이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에 대해 느끼시는 방식을 느끼는 사람들이 세우는 것입니다.

먹이라고 부르셨으며 때리라고 부르신 것이 아님

누가복음 12장 42절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길, "누가 신실하고 슬기로운 청지기겠느냐? 주인이 그에게 자기 종들을 맡기고, 제 때에 양식을 내주라고 시키면, 그는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 종이 그렇게 하고 있으면, 그 종은 복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전파할 메시지를 준비할 때 충실하고 지혜로운 종이어야 합니다. 소중한 손님이 식사를 위해 우리 집에 온다면, 우리는 항상 시간을 내어 좋은 식사를 준비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값싸고 쓸모 없는 식사를 준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모욕이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말씀을 전하는 것에 부주의하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파할 때마다 가능한 한 최고의 영적 양식을 그들에게 제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여 형제 자매들을 공경합시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시간과 희생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누가 충성되고 지혜로운 청지기"가 되겠습니까? (눅 12:42).

주님은 계속해서 우리에게(눅 12:45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형제자매를 때리는 위험에 대해 경고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실패를 계속 비난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모든 교정은 사랑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전혀 교정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아이들은 때때로 막대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항상 영양가 있는 음식을 필요로 합니다. 자녀에게 음식을 주는 것보다 더 자주 때리는 아버지나 어머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 우리는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많은 설교자들이 그렇습니다.

(눅 12:45) 그러나 그 종이 마음 속으로, 주인이 더디 오리라고 생각하여, 남녀 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여 있으면,

장로인 당신은 육신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권세를 행사하고 당신의 설교에서 사람들에게 가혹하게 하기 쉽습니다. 기름부음 받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엄격함을 가지고 말하고 그의 메시지에서 다른 사람들을 책망하고 시정할 수 있는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선지자가 아니면서 선지자를 모방하려 한다면, 당신이 나타내는 엄격함은 육신의 엄격함과 완악함이 될 것입니다.

당신은 또한 당신과 견해가 다른 사람들에게 강경한 태도를 취하려는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당신에게 매우 가혹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절한 자에게 자비를 베푸시되; 굽은 자에게 적대함을 보이시나니. 그분은 겸손한 자는 구원하시고, 교만한 자를 낮추시며"(시 18:25,26).

(시 18:25-27) 주님, 주님께서는 신실한 사람에게는 주님의 신실하심으로 대하시고, 흠 없는 사람에게는 주님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사람에게는 주님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간교한 사람에게는 주님의 절묘하심을 보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연약한 백성은 구하여 주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십니다.

극소수의 장로들만이 하나님의 경건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엄격함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책망과 징계가 아닌 격려의 사역을 구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책망과 교정의 직분은 하나님의 엄하심을 경건하게 나타낼 수 있는 기름부음 받은 선지자에게 맡기십시오.

다른 사람에게 가혹하지 않고 교회에서 높은 기준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딱딱하고 꾸짖는 방식으로 전해진 동일한 메시지를 더 친절하고 부드럽게 말할 수 있으며 - 더 나은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교회의 그 누구도 우리를 두려워하거나 우리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 우리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느낌을 갖고 살지 않아야 합니다. 기록된바, 나를 두려워함이 너를 두렵게 하지 못하며, 나의 압박이 너를 무겁게 하지 못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욥 33:7).

(욥 33:7) 보라, 나의 두려움이 그대를 무섭게 하지 아니하겠고 나의 손도 그대를 무겁게 누르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우리와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냉담하지 않아야 합니다 - 그것이 사이비 지도자와 정치인의 기술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모든 사람에 대한 겸손과 섬김의 탁월한 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우리를 대적하도록 허락하실 때, 그것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셔서, 우리에게 그분의 은혜를 베푸시기 위함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자만이 그들을 인도할 수 있다"(사 49:10-중간)를 기억하십시오.

(사 49:10-중간) 이것은 긍휼히 여기시는 분께서 그들을 이끄시기 때문이며,

당신의 교회에서 신자들을 가볍게 '어리석고, 열심이 없는 사람들'로 언급한다면, 당신은 그들의 장로로 부적합하다는 뜻이다. 경건한 장로는 자신의 약점을 인식하고 - 다른 사람들을 부드럽게 대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록,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더 많이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해질수록, 우리는 사람들에게 더 온유해질 것입니다.

많은 장로들이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분을 하나님의 집에 있는 사람들을 채찍질하기 위해 항상 손에 채찍을 가지고 있는 분으로 봅니다! 그러나 실제 예수님은 공생애 3년 반 동안에 단 이틀 동안만 채찍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주일마다 채찍을 휘두른다면 당신은 '다른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지도자는 "그 자신도 같은 연약함에 괴로워하므로 그릇 인도되고 무지한 자를 온유하게 대해야" 합니다(히 5:2).

(히 5:2) 그는 자기도 연약함에 휘말려 있으므로, 그릇된 길을 가는 무지한 사람들을 너그러이 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서의 여러 곳에서 예수님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것을 읽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마음이 상하시니,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혼란하고 목적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마 9:36 - 메시지 의역) - 그분은 우리의 본이십니다. 그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배우라"(마 11:29)라고 말씀하시며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온유함과 겸손은 대부분의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두 가지 특성이지만, 가장 적게 가지고 있습니다.

(마 9:36)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들은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에 지쳐서 기운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모세에 관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성경에는 없지만 유대 전통에 있음). 모세가 이드로의 양 떼를 치고 있을 때 그는 물을 마시기 위해 시내로 조금 멀리 간 어린 양을 보았습니다. 모세가 달려가 양을 잡아 들고 이르되, "네가 목마른 줄 알았더면, 여기까지 데려왔을 텐데". 즉시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진실로 너는 이스라엘의 목자이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허구의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기 때문에, 나는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이 연약하고 무기력하고 그릇 인도된 자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을 보시고, "진실로 네가 장로가 되기에 합당하다" 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기도와 하나님 말씀의 사역

"우리는 (먼저) 기도하고 (그 다음에) 말씀 사역에 헌신할 것입니다"(행 6:4).

(행 6:4) 우리는 기도하는 일과 말씀을 섬기는 일에 헌신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영광을 아버지께 돌리기 위해, 설교하기 전뿐만 아니라 설교를 마친 후에도 기도하셨습니다(참조 눅 5:15,16). 우리도 설교를 마친 후에 기도해야 합니다 - 그래서 (1) 우리가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예수님처럼); 그리고 (2) 우리의 경우, 또한 우리 자신을 판단합니다. 나는 내 설교에서 완전함을 추구하기 위해 끊임없이 이것을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눅 5:15,16) 그러나 예수의 소문이 더욱더 퍼지니, 큰 무리가 그의 말씀도 듣고, 또 자기들의 병도 고치고자 하여 모여 들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외딴 데로 물러가서 기도하셨다.

장로로서, 우리의 주된 책임은 우리 교회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지고 효과적으로 예언해야 하며 - 이를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에 대한 바울의 부담은 이러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경고하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게 하나님께 드리기를 원합니다. 내가 이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 안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당신을 위해 기도하며 얼마나 많이 고생했는지 알아주셨으면 합니다"(골 1:28-2:1 - Living).

(골 1:28-2:1) 우리는 이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사람으로 세우기 위하여 모든 사람에게 권하며, 지혜를 다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칩니다. 이 일을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작용하는 그분의 활력을 따라 수고하며 애쓰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라오디게아에 있는 사람들과 그밖에 내 얼굴을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내가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여러분이 알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주님과 그분의 백성에 대한 열렬한 사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그래서 그는 항상 그들에게 적절한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모스를 통해 예언하신 영적 기근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주 하나님이 말씀하시되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기근을 그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나 물에 대한 기근이 아니라 , 도리어 여호와의 말씀을 듣는 것에 대한 기근이라. 백성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두루 다니되 얻지 못하리라'"(암 8:11,12).

(암 8:11,12) 그 날이 온다. 나 주 하나님이 하는 말이다. 내가 이 땅에 기근을 보내겠다. 사람들이 배고파 하겠지만, 그것은 밥이 없어서 겪는 배고픔이 아니다. 사람들이 목말라 하겠지만, 그것은 물이 없어서 겪는 목마름이 아니다. 주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서, 사람들이 굶주리고 목말라 할 것이다. 그 때에는 사람들이 주의 말씀을 찾으려고 이 바다에서 저 바다로 헤매고, 북쪽에서 동쪽으로 떠돌아다녀도, 그 말씀을 찾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 기근이 우리 교회에서 발견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교회에 오는 사람들은 매주 강력하게 전해지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전파할 때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과 예언의 은사를 위하여 하나님을 간절히 구하십시오(고전 14:1).

(고전 14:1) 사랑을 추구하십시오. 신령한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특히 예언하기를 열망하십시오.

또한 말씀에 대한 좋은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 이것은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공부해야만 얻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고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다루는 일꾼으로 인정된 사람으로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 (딤후 2:15).

(딤후 2:15) 그대는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가르치는 부끄러울 것 없는 일꾼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기를 힘쓰십시오.

바울은 또한 디모데에게 "세상의 헛된 말을 피하라, 이는 더 경건치 아니함을 낳느니라"(딤후 2:16)라고 말했습니다.

삶에서 기도를 우선순위에 두고 싶다면, 많은 신자들이 개인적인 대화와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 미디어에서 시간을 낭비하는 "세속적이고 공허한 잡담"을 제거해야 합니다. 이 시대의 시급함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은 그런 공허한 일에 시간을 허비하게 하십시오. 그러나 주님의 교회를 세우도록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본질적인 것, 즉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로 주님을 기다리는 것에 집중합시다.

(딤후 2:16) 속된 잡담을 피하십시오. 그것이 사람을 더욱더 경건하지 아니함에 빠지게 합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다"(고전 6:12). 따라서 "가장 좋은" 일에 집중할 시간을 갖기 위해 삶에서 "좋은" 일을 제거하십시오.

(고전 6:12) "모든 것이 나에게 허용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나에게 허용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에도 제재를 받지 않겠습니다."

과거를 잊고 계속 나아가라

날마다 우리는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빌 3:13) 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주님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처럼 매일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는 바로 그 첫날인 것처럼 매일을 살아야 합니다.

(빌 3:13)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우리는 날마다 "그리스도가 아니면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와 "그리스도와 함께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요 15:5, 빌 4:13)라고 의미 있게 고백해야 합니다. "무"(Nothing)는 "영원한 가치가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everything)은 "내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가 그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빌 4:13)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는 인정받은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2:15)

(딤후 2:15) 그대는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가르치는 부끄러울 것 없는 일꾼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기를 힘쓰십시오.

장 15
리더가 실패하는 이유

모든 지도자가 직면하는 가장 큰 위험은 "경건의 모양"만 갖고 - 오직 우리가 종교적일 때와 영적이지 않을 때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의 표시는 우리가 스스로 판단하는 것입니다(벧전 4:17).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를 판단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매우 빨리 깨닫게 됩니다. 장로로서, 우리는 다른 분야에서 매우 열심이고 강력하게 전파하더라도, 자신을 판단하는 것을 멈추고 스스로 빛을 발하지 않는 것이 매우 쉽습니다.

(벧전 4:17)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심판이 우리에게서 먼저 시작되면, 하나님의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의 마지막이 어떠하겠습니까?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었다"(계 3:1)는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괜찮다고 생각했던 장로 형제에게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계 3:1) "사데 교회의 심부름꾼에게 이렇게 써 보내어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분이 말씀하신다.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너는 살아 있다는 이름이 있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다.

목자가 불충실하면 양도 고통을 받습니다(참조 삼하 24:17). 신실하지 못한 목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마지막 날에 매우 가혹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가 두려워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삼하 24:17) 그 때에 다윗이 백성을 쳐죽이는 천사를 보고, 주님께 아뢰었다. "바로 내가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바로 내가 이런 악을 저지른 사람입니다. 백성은 양 떼일 뿐입니다. 그들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습니다. 나와 내 아버지의 집안을 쳐 주십시오."

그러므로 모든 사람에게 경고로, 나는 교회 지도자들 사이에서 실패하는 몇 가지 이유를 언급하고 싶습니다.

은밀히 모든 것을 버리지 않는다

어떤 장로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싶어도 그 값을 지불하기를 꺼립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소유를 포기"하지 않습니다(마 13:44,46). 그들은 교회를 세우고 싶지만, 가능한 한 적게 포기하고 싶어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직업, 좋은 음식, 많은 돈을 사랑하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처럼 편안한 지상 생활을 원합니다. 동시에 그들은 또한 교회를 건축하는 영예를 갖고 싶어합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두 세계의 최고를 얻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에서 이것을 보시고 그들의 일에 혼란과 실패를 가져옵니다.

(마 13:44,46) 44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 놓은 보물과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발견하면, 제자리에 숨겨 두고, 기뻐하며 집에 돌아가서는,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 밭을 산다. 46 그가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면,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것을 산다."

신은 편파적이지 않습니다. 그분은 어떤 사람이 강력한 교회와 교제로 연결되어 있거나, 주님의 뛰어난 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에 감명을 받지 않습니다. 지식과 교리에 대한 열심, 집회 등에서 '새 언약의 본'을 따르는 것도 하나님을 감동시키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찾으시고 상주시는 것은 사람의 숨겨진 삶에 대한 철저한 제자도와 신실함입니다. 그분의 보상은 항상 지도자가 충실한 정도에 정확히 비례합니다. 불성실도 정확히 보상을 받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뿌린 대로 거둡니다 - 하나님은 속지 않으십니다. 땅에 떨어져 죽는 지도자마다 반드시 많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친히 그것을 보증하셨습니다(요 12:24). 그리고 '열매'라는 말은 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그 수가 적더라도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변화된 삶을 의미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숫자가 아니라 질을 추구하십니다.

돈에 의롭지 않다

어떤 지도자들의 실패는 돈 문제의 불의로 인해 발생합니다. 우리는 이전 장에서 이 문제를 광범위하게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에게 재정적으로 의존하며 기생충처럼 살아가는 지도자들이 많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주의가 필요합니다. 동시에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자로 알려지는 영예를 원합니다. 이것은 속임수입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입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기준을 낮추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사도들은 때때로 선물을 받기는 했지만, 교회나 개인으로부터 선물을 받기를 계속 기대하지는 않았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돈을 사랑함과 부자가 되려는 욕망으로부터 도망쳐라, 오직 사람을 사랑함과 온유함을 좇으라"(딤전 6:9-11)라고 말했습니다.

(딤전 6:9-11) 그러나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유혹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도 해로운 욕심에 떨어집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립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좇다가, 믿음에서 떠나 헤매기도 하고, 많은 고통을 겪기도 한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그대는 이 악한 것들을 피하십시오.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십시오.

부와 재물은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우리는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더 안전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자가 되면, 매우 큰 위험에 직면하게 됩니다 -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부와 재물과 함께 교만과 오만이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계하고 주의해야 합니다.

돈을 대하는 태도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끝내는 방법은 시작하는 방법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경건한 사람들이 어떻게 그들의 삶을 마감했는지 생각하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십시오"(히 13:7 - 의역).

(히 13:7) 여러분의 지도자들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일러주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살고 죽었는지를 살펴보고, 그 믿음을 본받으십시오.

도덕적으로 순결하지 않다

일부 장로들은 성적인 면에서 불충실하여 실패합니다. 여자와 관련하여 자신을 순결하게 지키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으며, 그 안에서 장로가 되도록 혼자 내버려 두십시오. 성적인 영역에서 승리하지 못한 상태에서 다른 사람들의 목자가 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철저하게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이 영역의 불충실함은 항상 생각하는 삶의 부주의로 인해 발생하며, 이는 성욕에 대한 조심성 없는 태도의 결과이며, 이는 차례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의 부족으로 인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경외함"이라는 표현이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성적인 죄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은 흥미롭습니다(창 20:11). 성경은 "여호와께서 기뻐하지 아니하시는 자만이 간음하게 된다"라고 말합니다(잠 22:14 - NLT).

(창 20:11)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이 곳에서는 사람들이 아무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나의 아내를 빼앗으려고 할 때에는, 사람들이 나를 죽일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잠 22:14) 음행하는 여자의 입은 깊은 함정이니, 주님의 저주를 받는 사람이 거기에 빠진다.

젊음의 정욕(그가 생각하는 삶)에서 끊임없이 도망치지 않는다면, 누구든지 성적인 불결함의 먹이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분야에서 생각과 습관에 패배한 사람은 고결한 것처럼 말고, 두려워해야 합니다. 이 분야에서 승리하지 않을 때 승리한 것처럼 보이게 하여 다른 사람들을 속이지 마십시오 - 하나님은 언젠가 당신을 공개적으로 폭로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의 가장 가깝고 가장 헌신된 동역자였던 디모데에게 이 권면을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유혹 받는 악한 성적인 생각을 주는 것은 무엇이든 도망쳐라. 도리어 순결한 마음을 사모하는 형제들과 교제하여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딤후 2:22 - 메시지 성경 의역). 당신이 장로로서, 이 명령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이제 성숙하고 여러 해 동안 주님을 섬겼기 때문에 그런 권면이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십니까? 디모데는 25년 동안 주님을 섬겼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여전히 ​​성적인 영역에서 조심하라고 경고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우리 모두 역시 경고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 경고에 귀를 기울이면,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 교회도 순결하게 성장할 것이며 우리는 항상 우리 양떼를 위한 예언의 말씀을 갖게 될 것입니다. 모든 종류의 실패에는 깊은 회개와 자신에 대한 판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정직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삶이 끝날 때까지 이 영역에서 경계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겸손에 뿌리를 두지 않는다

장로로서의 위치에 대한 자부심은 일부 지도자를 몰락시키는 또 다른 요인입니다. 우리는 이전 장에서 이것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반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에서 평범한 형제로 남아있는 지도자는 끝까지 살아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항상 은혜를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장로로 임명되면 교만해집니다. 장로가 자신을 특별한 형제로 생각하기 시작하는 순간 그는 이제 죽었습니다. 평범한 형제들은 죽을 때까지 영적으로 번창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특별한' 형제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쉽게 무너질 것입니다.

특히 당신이 말씀의 은사를 받고 양 떼가 우러러본다면 조심해야 합니다. 남에게 우상화되기를 좋아하는 신자는 누구나 적그리스도의 영에 감염되어 사탄의 표적이 되기 쉽습니다. 우리의 소명은 종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의 안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능한 모든 성령의 축복으로 당신을 축복하시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당신을 이렇게 축복하신 후에는 당신을 겸손하게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협력 없이는 당신을 겸손하게 유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멍에의 다른 쪽 끝을 당신의 목에 메고 그에게서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마 11:29). 많은 장로들이 타락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정직하지 않다

정직은 겸손의 쌍둥이입니다. 그들은 항상 함께 갑니다. 많은 장로들은 실제로 어떤 죄에 빠지기 전까지는, 어떤 나이 많은 형제에게 도움을 구할 겸손과 정직함이 없습니다. 그들은 폭로될 때까지 위선자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거짓말을 합니다. 다른 이들을 경건한 삶으로 인도해야 하는 자들에게 그러한 정직과 진실함이 없다는 것은 충격적입니다.

많은 지도자들은 죄에 사로잡히면 스스로를 정당화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마침내 자신의 죄를 인정할 때, 그들은 사울 왕이 했던 방식으로 행합니다 - 여전히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위해 명예를 구합니다(참조 삼상 15:30).

하나님은 마침내 모든 위선자들을 폭로하십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고린도 교회와 같은 육신의 교회에 속했다면 그들은 발각되지 않고 더 오래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당시 예루살렘 교회와 같은) 순결한 교회에서 노출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한 교회의 그룹과 그 지도자들을 지원하신다는 가장 확실한 징조 중 하나는 조만간 그들 안에 있는 위선자들의 삶에서 죄를 폭로하신다는 것입니다 - 특히 그들 중 누군가가 지도자가 되기를 구하는 경우.

동료 장로에 대한 통치

강한 장로는 동료 장로들의 의견에 겸손하게 열려 있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동료 장로들에게 강요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동료 장로들에게 그들의 의견을 공유하고 당신에게 동의하지 않을 완전한 자유를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은 많은 어리석음과 많은 실수에서 당신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모든 장로는 연로한 장로가 이미 표현한 의견에 겁먹지 않고 솔직하고 담대하게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연로한 장로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경우, 마침내 그의 결정에 복종하더라도 그와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여전히 사랑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의견의 불일치는 분열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교회의 단독 장로이고 5,6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당신과 장로 직분의 책임을 분담할 다른 형제를 양육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장로형제가 아닌 작은 독재자였는지 자문해야 합니다. 아마도 당신의 강한 성격(죽기까지 쏟아버리지 않은)이 당신의 교회에서 다른 리더십이 자라지 않는 이유일 수 있습니다.

장로가 강한 성품을 가지고 은사를 받은 사람인 경우, 그는 "자기 영혼을 죽음에 쏟아 붓는" 법을 배워야 하고 형제 자매들을 주님과 직접적인 연결로 인도해야 하며, 어떤 식으로든 그에게 의존하지 않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는 형제자매들과 같은 수준으로 자신을 낮추어야 하며, 그들을 그에 대한 끝없는 두려움과 위압감 속에 살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또한 교회 안에서 자기와 다른 신실한 형제들과 사귐을 도모해야 하며, 자신에게 절하는 사람들에게만 총리 직위를 부여하는 정치 지도자와 같지 않아야 합니다.

장로로서, 당신은 많은 포도원(다른 곳에 있는 교회)을 돌보고 당신 자신의 포도원(당신의 지역 교회)을 소홀히 하는 죄를 짓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아가 1:6b).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많은 교회에서 설교하고, 당신의 거점 교회를 소홀히 하기 쉽습니다.

만일 당신의 지방 교회에서 형제애를 형성하지 않고, 책임감 있는 다른 형제들이 당신의 지역 교회에서 양육되지 않는다면, 당신이 무엇을 했든지 간에, 당신은 장로로서의 당신의 사역을 실패로 간주해야 합니다. 그러면 다른 교회에서는 무엇을 가르칠 수 있나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역을 위해 은혜를 베푸시는 것인지도 의심스러울 것입니다. 하나님이 장로의 사역을 위해 그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 한 가지 표시는 형제애가 점차 지역적으로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형제애.

어떤 지배적인 장로들은 "예스맨"을 두 번째 장로로 임명하는데, 단지 모든 교회에 복수의 장로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새로 임명된 장로가, 나이가 더 많고 더 지혜로운 장로에게 더 큰 영적 성숙을 인정하게 되는 것은 이해할 만합니다. 그러나 새 장로는 결코 연장자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예스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그는 동료 장로의 균형을 유지하는 역할을 수행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장로가 이 기능을 수행하도록 격려하는 것은 선임 장로의 책임입니다.

베드로는 동료 장로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합니다: "너희 양 떼 위에 군림하지 말라. 독재자가 되지 말라. 남에게 어떻게 하라고 거만하게 말하지 말라. 다만 그들에게 좋은 본이 되어 부드럽게 옳은 길을 보이라"(벧전 5:3 - 다양한 번역).

장로들은 권세에 취해 가르치기 어려운 자가 되어 자신이 자기 분야의 전문가라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교정 받는 것을 넘어가면, 그때 그들은 큰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소년이 훈계 받을 줄도 모르는 늙고 어리석은 관원보다 나으니라"(전 4:13)

장로가 되는 첫 번째 자격은 남을 다스리려는 마음이 아니라, 사람을 섬기고 겸손하게 그들의 발을 씻기려는 열정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교회에서 성숙한 젊은 형제들의 신임을 얻어 그들이 당신의 교회와 말씀 사역에서 점점 더 많은 책임을 맡게 해야 합니다. 모든 장로들은 교회 안에서 자신을 증명한 후배들에게 말씀을 나누기 시작하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장로는 절대 은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점점 더 많은 책임을 맡겨야 합니다. 따라서 그는 다른 교회를 더 자유롭게 도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 가운데 살고 항상 자신에 대해 낮은 생각을 하십시오.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너무 우러러보게 허락하여 당신이 그들에게 '작은 신'처럼 되도록 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행할 때, 하나님은 당신에게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그분은 편애하지 않으십니다.

교회-장로들을 위해 특별히 기록된 신약성경의 편지들인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및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을 자주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이것들은 당신에게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편애

장로가 특별한 친구와 친척에게 편애를 보이는 것은 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말합니다, "너희는 판단할 때에 불의를 행하지 말라; 가난한 사람의 편을 들지 말며 큰 자를 두둔하지 말고, 오직 네 이웃을 공평하게 판단하라"(레 19:15).

이것은 장로들에게 너무나 심각한 위험이었기 때문에 바울은 그의 가장 가깝고 가장 헌신된 동료 디모데에게 그가 편파적인 행동을 하지 않도록 경고해야 했습니다(딤전 5:21) - 그리고 그는 매우 엄숙한 말로 그 경고를 했습니다, "내가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그의 택하신 천사들 앞에서 너에게 엄히 명하노니, 편견 없이 이 원칙을 지키고, 아무 것도 편파적인 마음으로 하지 말라."

이것은 이미 25년 동안 바울과 함께 일한 디모데처럼 마음이 온전한 45세 된 형제라도 여전히 편파적인 태도를 보일 위험에 처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이 경고가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경고를 무시하고 "나는 결코 편파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장로가 이 죄를 지을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금송아지에게 경배할 때,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 여호와의 편에 있는 모든 사람을 불러 자기와 함께 하라고 했습니다. 레위 지파만이 그와 합류했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진에 들어가서 우상 숭배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하고, 그렇게 하는 동안 편애에서 완전히 벗어나라고 말했습니다 - 즉 죄를 지은 가장 가까운 친척까지 죽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바로 그렇게 했습니다 -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스라엘에서 제사장 직분을 주심으로써 상을 주셨습니다(출 32:27-29).

모세 자신은 후계자를 임명할 때 편애를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들 중 어느 누구에게도 이스라엘의 지휘권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호수아를 선택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얼굴 앞에서 살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이 택하신 자를 택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리더가 행동하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선지자 사무엘은 이 부분에서 실패했습니다. 그는 자기 아들들을 편애하여 자기 뒤를 이어 사사로 임명했습니다. 그 아들들은 "돈 버는 데만 관심이 있었고 뇌물을 받았으며 사건을 정직하게 판결하지 않았습니다"(삼상 8:3 - TEV). 따라서 훌륭한 사람이라도 스스로 판단하지 않으면 이 분야에서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를 위한 경고입니다.

나는 장로들이 교회에서 그들의 자녀와 친한 친구에게 편애를 보이는 유사한 사례를 보았습니다. 이것은 종종 불공정한 일을 초래했습니다. 그 다음에 모든 사람의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은 그런 장로들에게서 은혜를 거두십니다. 이 장로들은 구원이나 장로로서의 지위를 잃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름부음과 영적 분별력을 상실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점차 그들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됩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지혜는 누구에게나 편애를 전혀 나타내지 않습니다"(약 3:17 - KJV).

우리 모두는 우리의 삶과 과거에 취한 행동과 결정을 돌아보고 그 중 편파적인 것이 없었는지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 자신에 대한 빛을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이 영역에서 우리 육체의 부패를 결코 보지 못할 것이며 - 그러면 우리는 영원히 편견에 의해 더럽혀진 채로 남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과거에 어떤 행동과 결정에 편파적이었다고 가정하고 그러한 문제에 대해 하나님께 빛을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러면 그분이 당신에게 빛을 주실 것입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자문해 보십시오: 누군가가 당신의 친구였기 때문에, 그가 저지른 잘못을 은폐한 적이 있습니까? 당신이 그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꾸짖어야 할 것보다 더 강하게 꾸짖은 적이 있습니까? 스스로에게 그런 질문을 하면 당신에게 빛을 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떤 부분에 빛을 주시면, 깊이 회개하십시오.

모든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평등합니다 - 그리고 우리의 눈에도 그러해야 합니다. 편파적인 태도를 없애면 영적 감각이 더 날카로워지고 그 후에는 더 유능한 장로가 될 것입니다.

또한 가난한 사람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사람을 편애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출 23:3). 그것은 부자에게 편애를 보이는 것과 같은 악입니다!

(출 23:3) 너희는 또한 가난한 사람의 송사라고 해서 치우쳐서 두둔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에서 편애와 존경을 받는 사람은 부자와 교육받은 사람입니다(약 2:1-4). 이 문제에 대해 자신을 검토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장로로서 당신과 가장 가까운 형제들과 당신이 책임을 맡긴 형제들을 살펴보십시오 - 그리고 그들이 대부분 부유하고 교육받은 형제인지 확인하십시오.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아마도 무의식적으로) 교육과 부를 소중히 여기고, 무의식적으로 더 가난하고 교육을 덜 받은 형제를 외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신의 무의식적인 부분에서 당신이 여전히 영성보다 교육과 부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을 보여줄 것입니다. 그러한 태도는 장기적으로 당신의 교회를 파괴할 것입니다. 사탄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당신의 증언을 무력화시키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어부를 그분의 사도로 선택하셨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장 16
교정을 받고 깨어짐

우리가 마음을 열어 다른 성숙한 형제들이 우리를 바로잡아 주도록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장로로서 우리 자신의 잘못을 볼 수 없습니다.

성숙함과 상호 신뢰의 한 표시는 장로로서 서로 다른 문제에 대해 화를 내지 않고 강력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혼 초기에는,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게 어떤 말을 할지, 어떻게 말할지 조심해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상호 관계가 어떤 부담도 견딜 만큼 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서로에 대한 사랑이 더 강해지고 서로가 더 안전해질수록, 파트너가 화를 내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고 더 자유롭게 공유 할 수 있습니다.

장로들 사이에서도 그러해야 합니다. 장로들이 서로 경건한 사랑의 강한 관계로 성장하면 의견이 일치하지 않거나 잘못된 부분이 있어도 사랑 안에서 강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 이는 교회에 큰 유익이 될 것입니다. 큰 비극은 많은 장로들이 평생 이곳에 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 그리고 그들은 약간의 교정에도 화를 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꾸짖으시며, 한번은 그를 "사탄"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책망에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마 16:23). 베드로는 한 번 바울에게 공개적으로 책망을 받기도 했습니다(갈 2:11). 그는 여전히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분명히 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서 그에게 하신 작은 꾸짖음에 너무 화가 나서 즉시 가서 주님을 배반했습니다(참조 요 12:4-8; 마 26:10-16).

그러나 베드로와 바울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매우 견고했고 서로(베드로-바울)를 너무 사랑하여 서로 화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장로로서 도달하기 위해 서로 노력해야 할 높이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이르러, 나는 이것을 말하겠습니다: 다른 사람을 시정하기 전에, 화를 내지 않고 시정을 받는 법을 배우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디모데전서와 디모데후서의 교훈

바울은 디모데전서 4장 16절에서: "네 자신과 너의 가르침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라; 이 일을 계속하라 이렇게 함으로써 , 네 자신과 다른 이들을 구원하리라"고 디모데에게 말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가장 좋은 동역자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많은 면에서 그를 권면하고 교정해야 했습니다. 바울이 그에게 한 14가지 권면은 다음과 같습니다:

디모데전서에서:

1. 4:7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 자신을 단련하라.

2. 4:12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순결에 본이 되라.

3. 5:21 편파적인 태도로 아무 일도 하지 마라.

4. 5:23 신체 건강을 돌보라. 이건 매우 중요하다. 세상 사람들이 건강하게 장수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종인 우리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장수하고 건강하게 살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

5. 6:5-11 너의 물질적 환경에 만족하고 돈을 사랑하지 마라. 너의 설교 활동이 결코 돈을 버는 수단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 (디모데와 같은 경건한 사람에게도 이 권고가 필요했습니다.)

6. 6:20 모든 세속적이고 공허한 대화를 피하라. (이것은 바울의 두 번째 편지에서 다시 언급됩니다).

디모데후서에서:

7. 1:6,7 항상 하나님을 위해 불타오르고 소심하지 마라.

8. 2:3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으라.

9. 2:4 세속적인 문제에 너무 몰두하지 마라.

10. 2:7,15 다른 사람들에게 정확하게 가르칠 수 있도록,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부지런히 주님을 구하라.

11. 2:22 청년의 정욕으로부터 도망쳐라.

12. 2:24,25 온유하고 친절하며 결코 다투지 마라.

13. 4:2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준비를 하라(즉, 모든 모임에서 항상 나눌 수 있는 유익한 것을 가지고 있어라).

14. 4:2 남을 기쁘게 하거나 감동을 주려고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책망하고 꾸짖고 권면하라.

이 권면은 디모데가 45세 때 바울과 함께 이미 25년 동안 전심으로 하나님을 섬겼을 때 받은 것입니다.

이 14가지 권고 사항을 살펴보고 모든 권고 사항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는지 자문해 보십시오.

교정을 받는 겸손

당신이 오늘 장로에게 그런 권면을 받는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더 이상 그런 교정과 책망이 필요 없을 만큼 성숙하다고 느끼십니까? 하나님이 그런 태도를 보신다면, 당신을 바로잡아 줄 사람을 보내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패배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당신의 참된 상태를 알지 못하고,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채로 끝날 수 있습니다(계 3:17).

"지혜로운 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미련한 자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전 7:5). '바보들의 노래'는 분별력 없고 미성숙한 형제자매들의 공허한 아첨이다. 그러한 "노래"를 듣고 명상을 하면 너무 들뜨고 생각이 높아져서, 더 이상 수정할 필요가 없다고 점차 느끼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데마는 한때 바울의 동역자였으며(골 4:14) 디모데처럼 바울에게 교정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마음이 상하여 바울을 버리고 세상으로 갔습니다(딤후 4:10).

야고보서 1장 21절에 겸손으로 말씀을 받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교정의 말씀도 포함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타락했을 때,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책망하신 것은 그들의 지도자들이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은 지도자들이 태만해지고 부주의하여 잘못된 길을 갔습니다. 지도자들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잃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잃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교정을 받다

고린도후서 7장 1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의 거룩함이 작년보다 더 완전하지 않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충분히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할 것입니다. 우리는 장로로서 이 문제에서 서로 도와야 합니다 - 우리는 우리의 형제를 지키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각 교회에 한 명 이상의 장로를 임명하십니다. 히브리서 3장 13절은 우리가 죄의 유혹을 받아 완고해지지 않도록, 날마다 서로 권면하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속지 않도록 서로 도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사야서 11장 3절에서 하나님의 영이 예수님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민감하게" 하셨다는 것을 읽습니다.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데에도 민감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 우리가 그분을 허용한다면. 우리가 진정으로 성령 충만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충만해집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 편에 계시며 우리가 충만하기를 바라는 것보다 성령으로 우리를 충만하게 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약점에도 불구하고, 우리 중 누구를 통해 위대한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을 낮추고 끊임없이 그분의 얼굴을 구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과 마귀를 대적하여 항상 우리 편에 계십니다.

우리는 다른 예수(제자됨을 요구하지 아니하는)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전파되고, 다른 영(가짜 은사를 주되 사람을 거룩하게 하지 아니함)을 받고, 또 다른 복음(건강과 부)이 전파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고후 11:4). 그러므로 우리는 참 예수님과 성령과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높이기 위해서 우리들의 시대에 신실해야 합니다.

자신을 정당화하지 않고 사과하기

만약 우리가 부서지고 깊이 뉘우치고 심령이 가난하지 않다면, 우리가 잘못을 저질렀음을 깨닫는 즉시 겸손하게 사과하기를 꺼릴(또는 주저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인간이 말하기 가장 어려운 열 단어(영어)는 "미안합니다. 그건 제 실수였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세요"입니다.

깨지지 않은 영은 또한 우리가 사과할 때 우리 자신을 정당화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과에 자기 정당화가 포함되어 있다면, 사과는 사과가 아닙니다. 우리의 사과에 자기 정당화의 냄새라도 있다면, 우리는 우리가 부서지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정당화하는 것이 바리새인의 표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6:15).

우리가 한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즉시 그것을 인정하고 즉시 바로잡아야 합니다. 부서진 사람은 이것을 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깨어지지 않은 사람은 이 두 가지 모두를 미루게 됩니다. 그리고 사과를 할 때, 다른 사람도 탓할 것입니다. 아담은 죄를 지었을 때, 선악과를 먹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여자가 그것을 자기에게 주었다고 말하면서 자신을 정당화했습니다. 이로써 그는 아내를 원망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그런 아내를 준 것에 대해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것은 어떤 죄나 실수를 고백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그러나 다윗이 시편 51편에서 어떻게 자신의 죄를 고백했는지 주목하십시오. 우리는 거기에서 자기 정당화의 냄새조차 느끼지 못합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부서진 사람의 표시입니다. 나는 당신이 시편 51편을 길게 묵상하고, 깨어짐의 진정한 의미와 당신의 죄를 어떻게 고백해야 하는지를 주님에게 이해하도록 요청할 것을 권합니다.

또한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거짓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거짓말은 우리 자신을 좋게 나타내기 위해, 일부 사건을 과장하거나 숨기는 형태로 작은 것일 수 있습니다. 하나의 거짓말을 하는 것은 쉽지만, 단 하나의 거짓말만 ​​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 한 번 거짓말을 하면 첫 번째 거짓말을 뒷받침하기 위해 더 많은 거짓말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거짓을 미워하고 진실을 전심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삶에 대한 하나님의 기름부음과 선한 기쁨을 잃게 될 것입니다 - 그것은 우리가 당할 수 있는 가장 큰 손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드러나지고 파괴되어져야 할 교만을 보시고,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걸려 넘어지게 할 작은 사건이 우리 삶에 일어나도록 허락하실 것입니다(참조 에스겔 3:20: "...내가 그 앞에 장애물을 놓을 때...").

그리고 우리가 넘어질 때, 주님은 우리가 (1) 우리를 넘어지게 만든 우리의 교만을 인정하고, (2)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3) 그분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4) 사람들과 일을 바로잡는지 알아보기 위해 우리를 시험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판단하고 이런 일을 하면, 우리는 판단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의롭다 하면, 깨어지지 않고 남아있어 언젠가 세상과 함께 정죄를 받을 것입니다(고전 11:31,32).

우리의 실수를 인정하기

하나님은 우리가 실수를 정직하게 인정하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많은 장로들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하며 자존심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들의 사역에 은혜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판단하고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데 빠른 사람을 높이 평가하십니다. 나는 형제가 나에게 거짓말을 한 것을 발견할 때마다, 또는 그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하기를 꺼리는 것을 볼 때마다 그 형제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렸습니다.

우리 모두 실수를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실수를 하지 않으시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실수를 했을 때 우리는 즉시 그것을 인정하고 하나님과 우리의 실수로 영향을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그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장로로서 우리의 겸손이 시험 받는 것은 그 죄로 영향을 받은 동료 신자들에게 우리의 죄를 고백할 때입니다.

모든 장로들이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좋은 질문은: "내가 마지막으로 실수(또는 죄)를 고백하고 다른 형제에게 용서를 구한 것이 언제였습니까?"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에게 우리의 죄를 정직하게 자백할 때에만,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히 8:12).

또한 과거의 모든 실수로부터 교훈을 배워야 한다고 덧붙이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 실수를 다시 반복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수시도록 허용하는 것

예수님은 한 때 떡 다섯 개를 사용하여 무리를 먹이셨습니다. 그는 먼저 떡을 축복하셨습니다. 그러나 떡 5개가 그대로 남아 있어 무리가 먹지 못했습니다. 떡을 떼고서야 무리가 먹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축복(기름부음)을 받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주님에 의해 깨어져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얼굴을 흙 속에 조아릴 것이며 하나님의 능력이 방해 없이 우리를 통해 흐를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출4장에서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의 지도자로 임명되었습니다. 아론은 유창하게 말했지만 모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출 4:10,14). 그러나 하나님은 아론이 아니라 모세를 사용하셨습니다 - 모세는 상한 사람이었지만 아론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광야에서 40년의 깨어짐의 기간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낮추어 궁궐의 통치자에서 광야의 목자로 낮추셨습니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40년 동안 장인과 함께 있게 하셨고 - 그를 위해 일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를 철저히 부서뜨리기에 충분했습니다. 아론은 그런 부서뜨림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두 사람의 차이를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출애굽기 32장에서 이 두 사람의 효과성(Effectiveness)의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부서진 사람 모세가 그들 가운데 있는 한은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겨우 40일 동안 그들을 떠나고, 아론이 일시적으로 그들의 지도자가 되자, 그들은 우상 숭배에 빠져 금송아지 숭배를 시작했습니다. 아론은 유창한 연설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을 순결하게 보존할 수 없었습니다.

깨지지 않은 장로는 항상 자신의 명예를 구하고 그들 교회의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백성이 주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하나님의 방법으로 200만 명을 보존한 것은 한 사람의 부서진 모세였습니다. 수세기 동안 교회 역사에서도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교회를 그분의 방법으로 지키기 위해 상한 사람들을 사용하셨습니다.

복종은 부서짐으로 이어진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장로들에게 복종하라고 요구하심으로 우리를 깨뜨리십니다. 다음은 제 책 "A Spiritual Leader"(영적인 지도자)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경건한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은 우리가 어리석은 일을 많이 하지 않도록 보호해 줄 뿐만 아니라, 그에게서 많은 지혜를 배울 수 있게 해 줄 것입니다. 그는 우리가 알지 못할 수도 있는 자신이 직면했던 위험에 대해 우리에게 경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권위 아래 있는 것이, 자녀가 부모 아래 있는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안전합니다.

우리는 베드로전서 5장 5절에서 "젊은이들이 그들의 장로들에게 순복할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읽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영적인 권위를 받는 큰 비밀을 봅니다.

저는 하나님으로부터 영적인 권위를 받은 적이 없는 훌륭한 형제들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그들은 평생 누구에게도 복종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강한 의지는 결코 깨지지 않았습니다. 권위는 부서지지 않은 사람의 손에서는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먼저 부서지지 않고 사람에게 권위를 행사하려고 하면, 당신은 그들을 망치고 그 과정에서 자신도 멸망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중 누구에게나 영적인 권세를 맡기기 전에, 먼저 우리의 교만함을 깨뜨리셔야 합니다.

"제 경험을 간략하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 20~30대 인생의 10년 동안, 하나님은 나에게 나의 사역을 질투하는 장로들에 의해, 하나 이상의 교회에서 눌리고 공개적으로 굴욕을 당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 모든 경우에, 주님은 나에게 입을 닫고 질문하지 말고 그 장로들에게 복종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했습니다. 나는 그들의 교회에 있을 때 그리고 그들의 교회를 떠난 후에도 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그 세월 동안, 나는 하나님께서 앞으로 나를 위해 어떤 사역을 예비하실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랜 세월에 걸쳐 나를 꺾으심으로 영적인 권세를 행사하도록 준비시키고 계셨습니다. 그는 아직 나를 꺾는 일을 끝내지 않았습니다. 과거 몇 년 동안, 하나님은 내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시련을 겪도록 나를 데려가셨습니다 - 종교인들에게 법정에 끌려가서 그곳에서 거짓 고발을 당하는 것 같은 - 10년 동안. 그러나 내 삶에 대한 그분의 목적은 변함이 없습니다 - 나를 더욱 부서뜨리셔서, 그의 생명과 권위를 나에게 더 많이 맡길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도자를 통해 우리를 바로잡아 우리의 힘과 교만을 부수십니다. 거의 모든 신자들은 교정을 받는 것을 매우 어려워합니다. 두 살배기 아이도 교정을 받기가 쉽지 않습니다 - 특히 공개적으로 교정을 받는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공개 교정을 기쁘게 받아들인 것이 언제였습니까? 인생에 단 한 번이라도 그것을 받아 들인 적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영적 권위가 없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깨지지 않은 사람은 외로운 사람이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은 남에게 절대 복종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가고 싶은 데로 가고 하고 싶은 대로 합니다. 그런 깨지지 않은 신자는 자기에게 순종하고 말하는 것을 모두 받아들이는 사람과만 일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그런 "외톨이들"에게 영적 권위를 맡기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개인주의적인 신자들의 무리가 아니라 그분의 몸을 만드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장 17
사탄을 이김

예수님은 처음 교회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교회가 사탄의 세력과 영적 전쟁을 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 지옥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신 것을 주의 깊게 보십시오. 흑암 세력이 교회의 문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가 지옥의 문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모든 장로들은 이것을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 교회는 사탄의 공격에 대해 방어하기 위해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 자신(그리스도의 첫 몸)이 하셨던 것처럼 공격하기 위해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는 사탄의 요새를 파괴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사탄은 십자가에서 패배했습니다

우리는 먼저 사탄이 십자가에서 패배했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네 가지 일이 일어났습니다:

1.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고전15:3).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죄는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2.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셨습니다(갈 3:13). 그러므로 어떤 저주(조상의 저주나 다른 저주)도 우리에게 닥칠 수 없습니다.

3. 우리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롬 6:6). 그러므로 우리는 평생 죄를 섬길 필요가 없습니다.

4. 사탄은 십자가에서 패하여 갑옷을 벗었습니다(골 2:15, 히 2:14). 그러므로 우리는 그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그는 우리를 지배할 힘도 없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자들은 이 네 번째 진리인 사탄의 패배에 대해 무지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아니하고 어떻게 그 강한 자(사탄)의 집에 들어가 그 재물을 빼앗겠느냐? 그 후에 그가 그의 집을 노략하리라. (이 전쟁에서) 나를 돕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대적한다"(마 12:29,30 - NASB와 Living).

그러므로 우리는 사탄의 패배를 확신해야 합니다.

구약성경 시대에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사탄과 맞서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사탄이 패배하지 않았기 때문에 - 이스라엘이 사탄에게 제압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단 사탄이 십자가에서 패배하자, 교회는 사탄과 끊임없이 맞서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를 대적하면, 그는 우리를 피할(will flee) 것입니다(약 4:7).

우리는 지금 사탄과 싸울 필요가 없고, 그를 저항하기만 하면 됩니다. 만일 우리가 사탄이 십자가에서 패배했고 우리를 다스리는 권세가 없다고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고, 그런 다음 예수의 이름으로 그를 대적하면, 그는 달아날 것입니다. 우리가 이 고백을 굳게 붙드는 한, 사탄은 우리를 우울하게 하거나 패배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증거의 말로 사탄을 이깁니다(계 12:11).

사탄의 공격과 악마들의 교리

사탄은 2000년 동안 교회를 공격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몇 가지 교훈을 얻었습니다:

1. 사탄은 외부(박해함으로써)보다 교회에 침투하여 내부에서 공격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외부에서 공격이 올 때, 모든 교인이 연합하여 그를 대적할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2. 선한 삶을 사는 사람이 전파하는 거짓 교리로 교회를 공격하는 것이 지도자를 부도덕에 빠지게 하는 것보다 낫다는 것을 사탄은 압니다 - 왜냐하면 신자들이 부도덕에 빠진 지도자에 대한 신뢰를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자들은 분별력이 없기 때문에, 사탄은 선한 삶을 사는 속이는 자들을 통해 쉽게 그들을 미혹할 수 있음을 압니다.

3. 사탄은 자기가 빛의 천사로 와서 성경을 인용하며 '사랑'(진리를 타협하는 거짓 사랑)을 전하면, 그는 다른 거룩한 책을 인용하는 어둠의 마귀로 오거나, 또는 "미움"을 설교하러 오는 것보다 더 많은 신자들을 그릇 인도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성경에 정통하지 않기 때문에, 진리의 한 면만 인용하는 사람들에게 쉽게 미혹됩니다. 사탄이 예수님께 진리의 일면을 인용했을 때, 예수님은 진리의 다른 면을 인용하여 반박하셨습니다(마 4:6,7). 기독교 집단에 있는 대부분의 거짓 교리와 이단은 한 성경 구절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이 그 구절과 균형을 이루는 다른 진리를 무시하는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성경에 예언된 대로(딤전 4:1-3), 속이는 영의 홍수가 이미 "악마들의 교리"로 기독교 집단을 침범했습니다. 이러한 교리는 책과 인터넷을 통해 도처에 퍼지고 있으며 음란물보다 더 위험합니다 - 음란물은 모든 사람이 쉽게 악으로 인식할 수 있지만, 이러한 악마 교리 중 일부는 악으로 ​​인식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상에 전파된 처음 두 가지 "악마의 교리"는 이러했습니다:

1. 사탄은 하와가 하나님께 불순종해도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창 3:4). 사탄은 "사랑의 하나님"이 그분의 피조물이 그들의 죄로 인해 형벌을 받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으실 것임을 암시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사탄은 같은 거짓말을 퍼뜨리고 있습니다 - 사랑의 하나님은 누구도 영원히 지옥에 보내실 수 없기 때문에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2. 사탄은 하와에게 그녀가 하나님처럼 될 수 있고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에게 사탄 자신이 수년 전에 반역한 것처럼 권위에 반항하도록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또 다른 특징입니다: 그들은 그들에 대한 어떤 권위에도 복종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그들이 그릇된 교리에 빠지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아기들"을 보호하기 위해 가정에서와 같이 교회에 영적 아버지를 임명하셨습니다. 이 "아버지"의 보호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하와는 사탄에게 속았고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속고 있습니다. 하와는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쫓겨났고 오늘날 사탄의 교리를 믿는 사람들은 언젠가, 영원히 하나님의 임재에서 쫓겨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있는 천사들의 머리(후에 사탄이 됨)가 그들 안에 반역의 영의 흔적이라도 있는 천사들을 모두 모으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은 순식간에 그들을 모두 함께 하늘에서 쫓아내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이 깨끗해졌습니다. 오늘날도 이와 같이, 하나님은 교회 안에 반역하는 영이 있는 자들로 하여금 같은 반역심을 가진 다른 모든 사람들을 모으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그분은 그들이 교회에서 분열을 일으키는 것을 허용합니다. 그리하여 그 교회는 깨끗해집니다. 이것이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루시퍼 사역입니다 - 그리고 하나님은 교회를 깨끗하게 하기 위해 그것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십니다.

고발

사탄은 모든 믿는 자들의 주된 참소자입니다(계 12:10). 그러나 그는 이 일을 하는 데 도움이 될 동료들을 신자들 중에서 항상 찾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전 세계에서 그러한 동료들을 많이 찾습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거짓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가 우리를 하나님께 고발할 때, 사탄이 감히 하나님께 거짓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가 우리에 대해 하는 모든 고발은 사실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의 영은 진실을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참소하는 영입니다.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합니다 - 그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형제의 죄를 그에게 직접 말하지 않고 등 뒤에서 말하면, 비록 우리가 말하는 모든 말들이 진실일지라도, 이 참소 사역에서 사탄과 동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발자와 그런 교제를 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형제가 죄를 범하였으면, 온유한 심령으로 그를 바로잡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갈 6:1). 우리는 그에게 직접 말해야 합니다. 그가 우리 말을 듣지 않는다면, 우리는 장로들에게 그에 대해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가 심지어 장로들의 말도 듣지 않으면, 온 교회가 그가 영적인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교회에서 쫓겨나야 합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18장 15-20절에 주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신 절차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우리가 교회에서 사탄의 참소 활동을 결박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장로를 고발할 경우, 두 명 이상의 믿을 만한 사람이 고발했다면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딤전5:19). 그런 다음 다른 연로한 장로들이 그 문제를 주의 깊이 조사해야 합니다. 옛 언약 아래서,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당신들은 먼저 그 문제를철저히 조사하고 찾아보고 물어보아서, 그것이 참이고 입증되었는지를 확실하게 해야 합니다……"(신 13:14). 만일 장로가 계속해서 죄를 짓고 있는 것이 판명되면, 그는 교회 앞에서 연로한 장로에게 공개적으로 책망을 받아야 합니다(딤전 5:20).

연로한 장로가 그릇된 동정심으로 공개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의 이해가 성령의 이해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행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른 사람들에게 거짓 비난을 받는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한 두 가지 약속이 있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시니, 그들이 나를 모욕하여도 마음 상하지 않았다. 나는 그것들을 견딜 각오를 한다.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을 아는 까닭은, 나를 의롭다 하신 분이 가까이에 계시기 때문이다. 누가 감히 나아 다투겠는가? 함께 법정에 나서 보자. 나를 고소할 자가 누구냐? 나를 고발할 자가 있으면 하게 하여라. 주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실 것이니 - 그 누가 나에게 죄가 있다 하겠느냐? 나의 모든 고발자들은 사라질 것이다; 그들은 옷처럼 해어지고 좀에게 먹힐 것이다…… 너희 중에서 남을 멸망시키려는 자는 너희의 계략으로 말미암아 멸망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친히 이루시리라." (사 50:7-11 - 복음성경)

"너를 대적하는 무기가 성공하지 못하겠고, 너는 모든 법정의 거짓말에 대하여 정의를 얻을 것이다. 이는 여호와의 종들의 기업이요. 내가 네게 준 복이 이것이니, 여호와의 말이니라"(사 54:17 - Living).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의 진정한 마음의 상태를 모든 사람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 사탄이 그분의 백성을 시험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거짓과 미움이 가득한 세상에서 끝까지 진리와 사랑 안에 거할 것인지, 시험하기 위해 많은 시련을 겪도록 허락하실 것입니다.

보는 눈이 있는 사람은 이렇게 해서 누가 경건하고 그렇지 않은지, 선함의 동기와 시기와 미움의 동기를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끝까지 맹목적이고 분별력이 없는 상태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바리새인들처럼). 금은 불 속에서 더 순결해 지지만 짚은 재로 변할 것입니다.

사탄을 이기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을 때, 마귀의 나라는 끝났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이미 패배한 적에게 저항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인생의 시련을 겪을 때,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의 가정이나 당신의 경제 상황, 당신의 직장, 까다로운 자녀와 함께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 십자가에서 사탄의 권세가 끝났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는 패배했고 지금은 그가 당신을 위해 아무리 어려운 시험을 준비하더라도 당신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다 이루었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항상 기억하고, 사탄에게 그가 패배했고 당신을 지배할 권세가 없다고 말하십시오.

한번은 누군가가 회심하지 않은 여성을 우리 집으로 데려와서 기도를 드렸고, 아내와 나는 앉아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녀와 이야기하고 기도한 후, 나는 그녀에게 사탄에게 말을 걸고 "사탄, 나는 너에게 속해 있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너를 물리쳤다"라고 말하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녀는 갑자기 목소리를 바꾸며 "나는 십자가에서 패배하지 않았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제서야 그녀의 내면에 악마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조용히, 그러나 권위 있게 악마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거짓말쟁이야, 악마야. 너는 십자가에서 패배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지금 당장 그녀에게서 나가라." 악마는 즉시 떠났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여인은 사탄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그를 이기셨음을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양심이 깨끗하고 믿음이 있으면,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도 되며 떠나라고 한 번 이상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님은 한 마디로 악한 영을 쫓아내셨습니다"(마 8:16). 그리고 그것을 조용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으로,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날 저는 한 가지를 배웠습니다 - 사탄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패배했다는 말을 듣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시련이 어렵고 오래 걸리더라도 절대 포기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사탄의 모든 공격을 반드시 이겨낼 것입니다. 그저 버티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을 승리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결코 실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절대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사탄을 대적할 때 항상 당신 편에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결코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으실 것입니다.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

사탄은 두려움의 창시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죄에 대해 반대하셨듯이 두려움에 대해서도 반대하셨습니다. 그분은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두려워 말라"(무서워 말라)고 여러 번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 가운데 사는 사람들을 대적하셨듯이 두려움 가운데 사는 사람들을 대적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뜻하지 않게 실수하여 무언가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불안해지면, 즉시 그 자리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두려움을 고백하고 그분이 우리를 돌보실 것을 신뢰해야 합니다.

사탄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공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녀들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한번 예수님은 기도와 금식으로만 귀신을 쫓아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금식하고 기도하지 않으면 어떤 마귀는 그 자리잡은 곳에 남아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지상에서의 그의 일을 그리스도의 몸인 우리에게 의존하게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큰 특권이기도 하지만 큰 책임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흑암의 권세가 그분의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반기독교 세력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움의 영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분을 공경하는 자는 그분에게 공경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라도 두려움에 흔들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사울의 갑옷을 거부한 다윗처럼, 우리도 그럴 때 사람이나 우리를 도우려는 육신의 팔에 의지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이름이라는 영적 무기로 골리앗과 싸웠습니다. 우리의 무기도 영적입니다(고후10:4). 그리고 우리는 확실히 이길 것입니다 - 항상.

예수님은 우리를 "이리 사이의 양과 같이" 악한 세상에 보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또한 같은 구절에서 "뱀과 같이 슬기로워지라고"(마 10:16)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시며, 우리가 모든 족속으로 제자 삼으러 나간다면,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그 권세를 행사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마 28:19,20).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충분합니다. 그분이 우리 편에 계시면, 우리는 온 세상의 반대에도 맞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 자신이 동요하고 불안해하는 것을 멈춰라; 그리고 두려워하고 겁을 먹고 비겁하고 불안정하지 않도록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27 - Amplified Bible).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명령합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두려워하지 마라. 하늘의 주재 외에는 아무도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마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면, 다른 어떤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분 자신이 너의 안전이 되실 것이다" (사 8:12-14 - Living Bible).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를 떠나지도 아니하고 너를 버리지 아니하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여호와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사람이 나를 어찌하리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시니라" 고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습니다(히 13:5-8).

"두려움"과 관련하여 우리가 기억해야 할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우리는 두려움에 근거하여 결정하지 말고, 항상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결정합니다.

2. 두려움은 사탄의 무기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식으로든 다른 사람을 겁주거나 위협하려고 하는 모든 사람은 실제로 사탄과 교제 중입니다(비록 그들이 그것을 알지 못하더라도). 그러므로 우리는 그 무기를 아무에게도 절대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엡 6:10 및 딤후 1:7 참조).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행하는 악을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가 갖지 못했을 그분의 말씀에 대한 새로운 계시와 그분의 은혜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싸움은 인간을 적대자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과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엡 6:12 - TEV)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 구절에서 나에게 사탄의 세력과 효과적으로 싸우려면, 결코 사람과 싸워서는 안 된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옛 언약 아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사람과 싸웠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에서, 우리는 결코 사람과 싸우지 않고, 사탄과 그의 악마와만 싸울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모범으로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그들의 아내와 남편과 이웃과 다른 신도들 등과 싸우기 때문에, 사탄을 이기지 못합니다.

앞으로는 어떤 사람과도 싸우지 않겠다고 결심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사탄과의 싸움에서 효과적일 것입니다.

우리가 무조건적으로 하나님의 길을 따른다면, 사탄과 그의 계략을 항상 이기고 항상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장 18
박해가 올 때

기독교의 처음 300년 동안, 거의 모든 기독교인은 종종 그들을 박해하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을 죽인 반기독교 통치자 밑에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위대한 지혜로,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사람들이 그분의 자녀들을 핍박하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가장 훌륭한 자녀들이 그들을 박해하는 정부 아래서 살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교회는 환난에 직면할 것이다

교회는 항상 박해 속에서 가장 잘 번영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편리함, 안락함, 물질적 번영을 경험하는 곳마다, 대부분의 경우 세속적이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에 있는 한, 우리는 환난과 핍박과 시련을 겪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직장에서나 사생활에서나 이 시대의 끝이 다가옴에 따라 편안한 시간을 기대할 필요가 없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의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이라도 단순하게 사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사치스럽게 사는 사람들은 앞으로 매우 어려운 일을 겪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도록, 미래를 위해 돈을 저축하는 데 현명해져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뢰는 우리의 저축이 아니라, 오직 주님께만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며, 그분은 우리가 창조된 어떤 것도 신뢰하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금융 시스템을 흔들어, 피조물을 신뢰하는 사람들을 흔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형제가 형제를 배반하고 가족이 원수가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마 10:21). 사무실과 공장에서 신자에 대한 격렬한 박해가 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순결하게 하고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게 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13절은 우리가 항상 선을 행하기를 힘쓰면 아무도 우리를 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기로 결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고, 우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우리를 핍박하는 자의 용서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아무도 우리를 해칠 수 없습니다. 사탄과 그의 대리자들은 우리를 속이고, 괴롭히고, 희롱하고, 약탈하고, 다치게 하고, 가두고, 심지어 우리 몸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우리에게 영적으로 해를 끼칠 수 없습니다.

주님은 항상 우리를 지원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으십니다. 만일 우리가 박해의 때에 실수하여 그분을 배신하더라도, 우리가 겸손하면 그분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실 것입니다. 주님은 마음이 상한 사람에게 가까이 계십니다. "우리가 넘어져도 치명적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우리를 붙드시기 때문이다"(시 37:24 - Living).

하나님의 주권은 너무나 위대하고 총체적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행한 악을 우리의 선을 위해 일하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실패도 우리의 선을 위해 일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우리의 가장 좋은 것을 위해 작동하게 하십니다(롬 8:28). 주님은 우리를 모든 악에서 건져내시고 우리를 승리로 이끄실 것입니다. 우리의 확신은 끝까지 견디는 우리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끝까지 우리를 지키시는 그분의 능력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두려움이 아니라 큰 확신을 가지고 미래를 봅니다.

우리는 다른 모든 것에서 눈길을 돌려 예수님을 바라보며 경주합니다(히 12:2) - 우리의 과거의 실패, 현재의 연약함, 미래의 두려움을 결코 바라보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약하고 과거에 얼마나 많이 실패했더라도 주님은 우리를 이기는 자로 만드실 것입니다.

우리는 전 세계의 기독교인들이 앞으로 있을 그들의 믿음으로 인한 박해에 직면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야 합니다. 그런 날을 위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네 가지 명령이 있습니다.

1.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 10:16).

우리는 증거하는 데 어리석지 말고 지혜로워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생활하고 일하는 곳에서 그리스도를 대변해야 합니다. 주님을 증거할 때, 우리는 기독교가 다른 종교보다 우월하다는 것이 아니라 한 인격,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분이 들려서 올라가실 때,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이끄실 것입니다(요 12:32).

우리는 또한 기독교에 관심이 있는 척하는 비기독교 스파이를 식별하기 위해 경계해야 합니다. 그들의 진짜 동기는 우리가 "강력히 그들을 개종시키려고 했다"는 이유로 우리를 법정에 데려가기 위해서, 우리가 사용하는 몇 단어를 고발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할 뿐만 아니라 지혜로워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러하신 것처럼:

(a) "예수께서 어떤 사람에게 자기를 맡기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그 속에 있는 것을 아심이라"(요 2:23-25). 모든 사람을 분별하십시오.

(b) "예수께서 유대에 다니기를 꺼려하시니 이는 거기 유대인들이 자기를 죽이려 하였음이더라"(요 7:1). 불필요한 위험을 피하십시오.

(c)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선한 사람이 되십시오. 다른 사람들이 악하다고 해서 악해지지 마십시오.

2.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라"(마 4:4).

박해의 시대에, 가장 중요한 요건은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말씀하시는 말씀에 민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 종일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들은 말씀은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특히 신약)을 더 묵상해야 합니다 - 그래야만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3.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서로 판단하는 것, 험담하는 것, 다투는 것, 의심하는 것을 모두 멈춰야 합니다. 분별력은 신성한 특성이지만, 의심은 사탄의 특성입니다. 지금은 우리 삶에서 죄와 사탄과의 싸움에 집중해야 할 때입니다. 지금은 배우자를 사랑하고 동료를 사랑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때입니다.

4.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하나님은 보좌에 계시며 결코 자신의 것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사탄은 2000년 전에 패배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눈동자이므로, 그분은 우리를 둘러싸는 불 성벽이 되실 것입니다(슥 2:5,8). 우리를 치려고 만들어진 어떤 무기도 번성하지 못할 것입니다(사 54:17).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으로 만족합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기를,'내가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고, 너를 버리지도 아니하리라'. 그래서 우리가담대히 '주는 나를 돕는 자이시다. 나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할 것인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히 13:5,6).

또한 "주 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계 22:20)라고 기도합시다.

박해 중에 지혜롭게 되기

인도의 변화하는 상황을 고려할 때, 교회의 장로들은 무엇을 옹호하고 무엇을 옹호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아는 많은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또한 이러한 문제에 대해 동료 신자들에게 조언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박해는 반대와 다릅니다. 반대는 우리가 새 언약의 원칙을 옹호할 때 항상 다양한 정도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박해는 우리의 생명 등에 대한 물리적 위협을 의미합니다(대부분 비기독교인으로부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어 복음을 전하게(전도) 하실 때, 한 동네에서 박해를 받으면 다른 동네로 피하라고 하셨습니다(마 10:23). 다른 가난한 곳에서 더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다면, 핍박이 있는 곳에서 계속 복음을 전하는 것은 가치가 없습니다. "싸우고 도망치는 자는 살아서 다른 날 싸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두 가지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첫째, 예수님은 유대에서 생명의 위협에 직면하셨을 때, 그곳에 가지 않으셨습니다(요 7:1, 11:53,54). 그러나 그곳으로 가라는 아버지의 분명한 인도를 느끼셨을 때, 그분은 가셨습니다. 아무도 그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눅 9:51).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행 21:11-13). 그러므로 우리는 위험한 곳으로 가라는 주님의 명확하고 구체적인 인도가 있으면 위험한 곳으로 갈 수 있습니다 - 그러나 그때까지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둘째, 교회를 세우는 것은 전도와 다릅니다. 한 곳에서 주님의 양떼에 대한 책임이 있다면, 핍박의 때에 그들을 버리고 도망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리가 오면 품꾼만 도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0:12).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0장 23절에서 제자들에게 다른 동네로 도피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들이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전도에 힘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의 목자라 할지라도, 생명에 위협이 된다면 지혜롭게 행동해야 합니다. 지도자가 일시적으로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더 현명할 수도 있습니다(행 17:10에서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상식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믿음은 특정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합니다(롬 10:17). 하나님의 그러한 구체적인 말씀이 없을 때, 우리는 항상 상식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아플 때 약 먹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처럼 어리석고 그릇된 용기를 가지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앞으로 점점 더 "이리 가운데 있는 양과 같이" 될 것입니다(마 10:16). 그러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우리 머리털까지도 돌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의 모든 새보다 그분께 더 귀합니다(마 10:29,30).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이나 사탄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또한 반기독교 조직이나 정부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우리의 양심이 허락하는 한 정부의 모든 법에 순종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에 대해 결코 타협하지 않을 것입니다.

정부가 법을 통과시킨 곳이면 어디든지, 가능한 한 그들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하나님의 명령과 충돌하지 않는 곳이면 어디든지 말입니다. 우리가 세속 권위에 불순종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은 그들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에서 금지한 일을 하도록 요청할 때입니다(행 5:29 참조).

동시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 10:16)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다른 사람을 해쳐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항상 해야 할 두 가지 중요한 일을 기억하십시오:

1. 항상 겸손하고 선한 양심으로 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롬 8:31).

2. 항상 믿음으로 결단하십시오. 모든 행동에 신중하고 현명하되, 두려움 때문에 결정을 내리지 마십시오.

비판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우리는 다른 종교와 그들의 우상을 이름으로 비방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도 그들을 놀려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그런 문제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주로 참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위선에 대해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예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에베소에 있을 때 그리고 한결같이 진리를 전할 때에 그 성에 큰 소동이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 도시의 시장은 사람들을 불러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우리의 위대한 여신 다이아나를 모독하지 않았습니다"(행 19:37). 바울은 그리스도를 전파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에베소 사람들이 숭배하고 있는 거짓 신들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죄에서 그들을 구원하실 수 있다는 긍정적인 메시지였습니다. 그들의 거짓 신들과 우상들을 비판하는 부정적인 메시지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Divine Wisdom)였습니다. 일단 사람이 그리스도께 나오면, 주님께서 친히 그들을 우상에서 건져내는 일을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도 필요한 지혜입니다. 우리는 어떤 종교나 신념이나 관습을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메시지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만을 전합니다 -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고, 오늘 하늘에서 살아 계시고, 곧 세상을 심판하러 다시 오십니다. 그것이 우리의 메시지입니다 - 그리고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그들의 죄에서 돌이켜 그리스도를 그들의 주님과 구주로 받아들이도록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강요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설교해야 하는 것입니다 - 심지어 어린 아이들에게도 말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강요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도록 권유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우리도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진정으로 그들의 삶에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그들의 삶에 있는 다른 잘못된 것들은 모두 시간이 지나면 점차 사라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그들에게 죄를 깨닫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소명은 그리스도를 세상의 유일한 구원자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먼저 죄를 대적하여 말하고 스스로 판단하고 우리 가운데 있는 위선을 드러내야 합니다. 열심이지만 지혜롭지 못한 많은 형제 자매들은 때때로 그들의 말과 기도에서 불필요하게 다른 종교의 이름을 부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에게 그들이 하는 말을 조심하라고 경고해야 합니다. 특정 종교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보다 "비기독교인"에 대해 말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구원하려 하심이라(요 3:17). 우리의 소명은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는 것이므로 우리는 항상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지 않고 구원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변호사와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도움 활용하기

우리가 경찰서에 보내지거나 법원에 기소된 경우,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우리를 변호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원수를 대적할 때 칼을 가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22:36-38). 이 칼은 적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공격했을 때, 예수님은 즉시 칼을 칼집에 꽂으라고 말씀하시면서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6:52). 칼은 적들이 먼저 공격할 경우에만, 자기 방어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변호사를 이용하거나 경찰 당국에 불만을 제기하는 것을 포함하여, 모든 합법적인 수단을 사용하여 자신을 변호할 권리가 있습니다. 바울은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했고 심지어 로마 대법원(가이사)에 상소하기도 했습니다(행 25:11).

우리는 또한 우리가 아는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우리를 도울 수 있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빌라도에게 그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십자가에서 내려서 묻었습니다. 그러므로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발전시키도록 기꺼이 도와준다면, 우리는 그들의 도움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변호사를 사용하든 영향력 있는 사람을 사용하든, 우리의 신뢰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만 있어야 합니다. 마치, 우리가 의사에게 의학적 치료를 받을 때, 그와 그가 처방하는 약을 믿지 않고 오직 주님만이 우리를 치료해 주실 것을 신뢰하는 것과 같습니다(렘 17:5-8 참조).

우리는 또한 우리가 세속 권위 앞에 끌려갈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야 할지 지혜를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눅 12:11,12 및 21:12-15 참조).

우리가 어둡고 악한 세상에서 그분의 증인이 되려고 할 때 그분이 항상 우리를 도우시려면, 우리의 신뢰는 항상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만 있어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를 섬기고 돕기 위해 그분의 천사들도 보내셨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히 1:14).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겟세마네에서, 우리는 요한복음 18장 10,11절을 읽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그의 오른쪽 귀를 잘라버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잔을, 내가 어찌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베드로는 가룟 유다와 로마 군인들만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잔을 자기에게 마시게 하신 이가 아버지임을 아셨습니다. 유다는 단지 잔을 가져온 우편배달부였습니다.

마태복음 5장 8절에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만 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원수와 어려운 상황으로 가득 차 있다면 - 그것은 우리 마음이 불결하다는 것을 증명할 것입니다.

이사야서 6장 3절에서 하늘에 있는 천사들(스랍)이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다"고 선포하는 것을 읽습니다. 그들은 하늘뿐 아니라 땅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지상의 모든 사건을 주관하시는 분으로 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느부갓네살은 다니엘 4장 35절에서 말하기를, "땅의 모든 백성은 하나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요. 그는 하늘과 땅에서 가장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일을 합니다. 아무도 그를 막거나 '무슨 일을 이렇게 하느냐?' 라고 물을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보좌에 계시며 - 우리 중 가장 연약한 그분의 자녀들까지도 결코 잊지 않으실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 3절은 사탄이 우리를 "그리스도께 대한 단순한 헌신"에서 멀어지게 하는 위험에 대해 경고합니다. 거기에는 하와가 사탄에게 미혹되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이르게 된 과정이 나와 있습니다. 그 나무는 그녀를 하나님의 면전에서 멀어지게 하는 방해물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그러한 방해 요소가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모든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이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7장 35절에서 말하는: "흐트러짐이 없이 주님께 헌신"하는 것입니다.

장 19
경건한 사람들의 50가지 표시

모든 장로는 경건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여기 진정으로 경건한 사람들의 50가지 표시가 있습니다.

1. 경건한 사람은 매일 하나님 얼굴 앞에 서서 그의 음성을 듣습니다.

2. 경건한 사람은 그의 마음에 하나님 한 분 외에 다른 사람이나 그 어떤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3.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을 심히 두려워하여, 모든 형태의 죄를 미워하고 범사에 의와 진리를 사랑합니다.

4. 경건한 사람은 분노와 성적으로 죄악 된 생각들을 이기고, 생각이나 태도에 있어서라도 죄보다 차라리 죽기를 원합니다.

5. 경건한 사람들은 매일 십자가를 지는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으며, 완벽함을 추구하며,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 구원을 끊임없이 이룹니다(히 6:1, 빌 2:12,13).

6. 경건한 사람들은 성령이 충만하여 사랑에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졌기 때문에, 아무리 큰 도발을 하더라도, 그 무엇도 그들을 다른 인간에 대한 사랑 없는 태도로 이끌 수 없습니다.

7. 경건한 사람들은 겸손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칭찬이나 영적 성장, 하나님의 승인을 받은 사역이나 그 밖의 어떤 것도, 그들이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못하다는 자각을 잃게 만들 수 없습니다(엡 3:8).

8.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성품과 뜻을 알고, 그 말씀에 떨므로 아주 작은 계명이라도 거역하지 아니하며 남에게 가르치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사 66:2, 마5:19).

9. 경건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선포하고 종교적 음행과 비성경적인 사람의 전통을 폭로합니다.

10. 경건한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셔서 육신으로 말미암아 새롭고 산 길이 열린 것과 같은 경건의 비밀에 대한 성령의 계시를 받았습니다(딤전 3:16, 히 10:20).

11. 경건한 사람은 성실하고 근면하지만 유머감각이 있으며, 여유롭게 아이들과 놀고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좋은 선물을 즐길 줄 압니다.

12. 경건한 사람은 금욕적이지 않고 절제된 생활을 하며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고전 9:27, 딤후 2:3).

13. 경건한 사람은 값비싼 의복이나 관광에 관심이 없고 무익한 일에 그들의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며 불필요한 구매에 돈을 허비하지 않습니다.

14. 경건한 사람은 화려한 음식에 대한 욕망을 제어하고 음악이나 스포츠 또는 기타 합법적인 활동의 노예가 아닙니다(고전 6:12,13).

15. 경건한 사람들은 고난, 학대, 환난, 거짓 비난, 육체적 질병, 재정적 어려움, 친척과 종교 지도자들의 반대의 불 가운데서 하나님에 의해 성공적으로 훈련을 받았습니다.

16. 경건한 사람들은 긍휼이 충만하여 가장 악한 죄인과 가장 악한 신자를 동정하며 그들에게 소망을 갖습니다. 이는 스스로를 죄인 중에 우두머리로 여기기 때문입니다(딤전1:15).

17. 경건한 사람은 그들의 하늘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안전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어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고 사탄이나 악한 사람이나 어려운 상황이나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18. 경건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갔으니, 모든 일에 하나님의 주권이 그들의 최고인 것임을 믿으므로, 모든 사람과 모든 것과 모든 상황에 항상 감사합니다(롬 8:28; 엡 5:20; 살전5:18; 딤전2:1).

19. 경건한 사람들은 하나님에게서만 기쁨을 찾는다. 그러므로 모든 나쁜 기분을 이기고 주님의 기쁨이 충만하다

20. 경건한 사람은 살아 있는 믿음이 있고 자기 자신이나 타고난 능력을 신뢰하지 않고, 모든 상황에서 확실한 도움자이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합니다(빌 3:3).

21. 경건한 사람은 자기 이성의 속삭임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산다.

22. 경건한 사람들은 그리스도 자신에 의해 진정으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았습니다(그리고 어떤 감정적 위조에 의해 감동되거나 어떤 신학적 논쟁에 의해 설득되지 않음)(마 3:11).

23. 경건한 사람들은 성령께서 그들에게 주신 초자연적인 은사를 부여받아 끊임없이 성령의 기름부으심아래서 산다 (엡 5:18, 고전 14:1).

24. 경건한 사람들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회중이나 교단이 아님)으로 계시하고, 그들의 모든 에너지와 물질적 부와 영적 은사를 교회를 세우는 데 바칩니다.

25. 경건한 사람들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들의 혀를 재갈 물리는 법을 배웠고 그들의 혀는 이제 신성한 말씀으로 불타고 있습니다.

26. 경건한 사람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는 돈이나 물질에 끌리지 않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어떤 선물도 원하지 않습니다(눅 14:33).

27. 경건한 사람은 세상의 모든 필요에 대해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으며, 대화나 편지와 보고를 통해 물질적 필요에 대해 암시하거나 노동에 대해 자랑하지 않습니다(마 6:33).

28. 경건한 사람은 완고하지 아니하고, 온유하여, 비판에 열려있고, 나이 많고, 지혜로운 형제들의 교정 받기를 좋아합니다.

29. 경건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거나 조언하려는 욕구가 없으며(요청이 있을 때 조언을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지만), '장로'나 지도자로 간주되기를 갈망하지 않고 오직 평범한 형제와 모든 사람들의 종이 되기를 갈망합니다.

30. 경건한 사람은 쉽게 어울리고, 다른 사람들에 의해 기꺼이 불편해지는 것을 감수하고 이용 당합니다.

31. 경건한 사람들은 백만장자와 거지, 흰 피부와 검은 피부, 지식인과 바보, 교양 있는 사람과 야만인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 똑같이 대우합니다.

32. 경건한 사람들은 결코 그들의 아내, 자녀, 친척, 친구 또는 다른 신자들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이나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차가워지지 않습니다.

33. 경건한 사람들은 사탄이 제공할 수 있는 어떤 보상(명예나 돈, 무엇이든)으로도 타협하도록 뇌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34. 경건한 사람들은 두려움이 없는 그리스도의 증인이며, 종교 지도자나 세속 지도자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35. 경건한 사람들은 지상의 어떤 인간도 기쁘게 하지 않으려고 하며, 필요하다면 하나님만을 기쁘게 하기 위해 기꺼이 모든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합니다.

36. 경건한 사람들은 인간의 필요와 그들 자신의 안락함보다 항상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뜻, 하나님 나라를 우선시합니다.

37. 경건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나 자신의 이성에 의해 하나님을 위해 '죽은 일'을 하도록 압력을 받을 수 없고, 오직 그들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계시된 뜻대로 살기를 열망하고 만족합니다.

38. 경건한 사람들은 성령의 분별력이 있어 기독교 사역에서 혼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39. 경건한 사람은 세상의 관점이 아니라 하늘의 관점에서 사물을 봅니다.

40. 경건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한 그들의 수고에 대한 지상의 모든 명예와 칭호를 거절합니다.

41. 경건한 사람은 쉬지 않고 기도할 줄 알고, 필요할 때 금식하고 기도할 줄 압니다.

42. 경건한 사람들은 후하게, 기쁘게, 은밀하게, 지혜롭게 베푸는 법을 배웠습니다.

43. 경건한 사람들은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을 기꺼이 베푸나니 이는 조금이라도 구원하려 함입니다.

44. 경건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진리를 알게 되며 하나님의 모든 계명에 순종하는 것을 보기를 사모합니다(마 28:19,20; 딤전 2:4).

45. 경건한 사람들은 각처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세워진 순수한 증거를 보기를 갈망합니다.

46. ​​경건한 사람들은 교회에서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을 보고자 하는 불타는 열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47. 경건한 사람들은 어떤 일에 있어서도 자신의 것을 구하지 않습니다.

48. 경건한 사람은 영적인 권위와 영적인 위엄이 있습니다.

49. 경건한 사람들은 필요하다면 세상에서 홀로 하나님을 위해 설 것입니다.

50. 경건한 사람들은 사도들과 옛 선지자들처럼 완전히 타협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죄 많고 음란한 세대와, 타협하는 기독교 집단 한가운데서 그러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겠다고 마음을 다해 결정하십시오.

하나님은 편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여러분이 여러분의 교회에서 그러한 경건한 장로가 되기를 열망하고 기꺼이 가능하게 하십니다.

바리새인의 위험

경건해지고자 하는 모든 신자가 직면하는 가장 큰 위험은 바리새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장로들은 복음서에 언급된 바리새인의 표를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그는 바리새인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교회의 신자들에게 위험에 대해 경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주요 특징 중 일부는 제 소책자 "바리새인의 50가지 표시"에 나열되어 있으며 다음에서 자유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https://www.cfcindia.com/books/fifty-marks-of-phariseesbooklet

바리새인의 이러한 표식은 다음 위치에서 자유롭게 읽을 수 있는 같은 제목의 더 큰 책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https://www.cfcindia.com/books/fifty-marks-of-pharisees

장 20
영적 운동의 흥망성쇠

"주여! 도우소서! 경건한 사람들은 속히 사라지고 있습니다. 세상에 믿음직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사람마다 속이고 아첨하며 거짓말을 합니다. 진정성이 없습니다"(시 12:1 - Living).

위의 구절에 묘사된 상황은 오늘날 기독교 집단에 대한 적절한 묘사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한때 경건을 쫓던 신자들도 자기 목적을 위해 속임수와 아첨과 거짓말에 빠져들기 시작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성경은 알지만 하나님 그분 자체를 모르면, 쉽게 속아 넘어갈 수 있습니다 -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기독교 그룹은 성경을 교과서로 삼고 그들만의 고유한 교리를 홍보하기 위해 그들만의 증명 텍스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단이 지난 150년 동안 전 세계적으로 퍼져 나갔고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된 이유입니다. 이처럼 많은 신자들이 미혹되어 구원을 잃고 있습니다.

새 언약 아래서, 하나님은 선지자(거의 나타나지 않는)만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 수 있었던 옛 언약 시대와 달리, 그의 모든 자녀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기를 원하십니다(히 8:11). 사실, 새 언약의 하나님의 자녀는 옛 언약 아래 있는 가장 위대한 선지자보다 하나님을 더 잘 알고 더 친밀하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1장 11절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알고자 하는 열정을 가진 신자는 극소수입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성경 지식을 늘리고 감정적 경험을 하기 위해 열심입니다. 그래서 그들 대부분은 미혹되어 새 언약과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에 대한 계시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타락과 개혁

말세에,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어렵다"(딤후 3:1 - Living)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박해 때문이 아니라, 많은 "기독교인"이 "경건의 모양만 있고 그 속의 능력은 없기 때문"입니다(딤후 3:5). 다시 말해서 그들은 교리의 정확성에만 관심을 쏟을 것이며 -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인 헌신이나 실제적인 경건에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죽은 종파의 기독교를 떠난 많은 사람들은 영적인 실재를 찾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떠났습니다. 그러나 아주 자주, 사탄은 잠시 후 그들을 감정주의, 율법주의 또는 타협으로 곁길로 인도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우리는 1세기에 사도들이 세운 몇몇 교회들이 개척된 지 약 50년 만에 어떻게 세속화와 타협으로 흘러 들어갔는지 보았습니다.

그 이후 몇 세기 동안 기독교 교회는 더욱 후퇴했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하나님은 교회를 원래의 기준으로 회복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온 마음을 다한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를 통해 개혁 운동을 시작하실 것입니다.

교회 역사의 모든 개혁 운동은 변함없이 한 명의 급진적인 사람과 함께 시작되었으며, 하나님께서 그들 주위에 자기들이 속한 죽은 교회에서 떠나고자 하는 같은 마음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을 모으셨습니다. 그 운동은 일정 기간 동안 점진적으로 퍼질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그러한 분열이 일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분쟁이 있어야, 마땅히 너희 중에 인정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고전 11:19).

하나님 자신은 그분의 이름을 위한 순수한 증거를 지키기 위해 그러한 분열을 마련하십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빛을 창조하실 때, 즉시 빛과 어두움을 나누셨습니다(창 1:4). 그리고 교회 역사에서 계속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사람의 인정과 번영의 위험

하나님의 새 운동의 초기에, 그것은 대개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멸시와 배척을 받으며 운동에 있는 사람들도 대개 가난합니다.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려고 노력할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요소들은 실제로 운동을 안전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점점 더 그 운동에 임하고 -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존경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때가 위험에 처할 때입니다. 그 운동은 하나님의 인정만을 구하는 데 덜 열성적으로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첫 번째 그룹의 사람들처럼 마음을 다한 제자가 아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운동에 참여합니다. 그룹 내의 아이들도 자라서 어른이 되지만, 그들은 그들의 부모처럼 온 마음을 다하지 않습니다.

운동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돈도 더 풍부해지기 시작하고 이는 추가적인 위험이 됩니다. 돈은 좋은 종이지만 끔찍한 주인입니다. 돈이 사용되는 방식에 있어 지도자들이 끊임없이 경계하고 주의하지 않는다면 돈은 운동을 망칠 수 있습니다. 사탄은 많은 돈을 사용하여 기독교의 많은 선한 운동을 파괴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설립자가 이러한 쇠퇴에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동료들 모두가 위험을 그가 보는 것만큼 명확하게 보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일단 그가 죽으면, 운동은 타락하고 원래의 비전을 잃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마음을 다한 다른 사람을 찾을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운동의 영성은 다음에 달려 있습니다. 지도자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 그들의 겸손, 죄에 대한 민감성, 성령의 기름부으심 아래 머물고자 하는 그들의 열심, 돈에 대한 사랑으로부터의 자유, 동료 장로들을 소중히 여김, 그들의 양떼에 대한 그들의 사랑 그리고 매일 하나님과 동행함.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목자들

예레미야 3:14, 15에서 주님은 그의 백성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성읍에서 하나, 가문 중에서 둘을 시온으로 데려가겠다. 거기서 내가 내 마음에 맞는 목자들을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은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먹이리라."

여기서 "시온"은 하나님의 참된 교회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도시에서 한 사람과 가문에서 두 사람을 그분의 "시온"으로 데려옵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에 올 때 - 주님은 그들에게 "자기 마음에 맞는 목자"를 줍니다.

하나님의 참된 교회의 한 가지 주요 식별 표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목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사랑의 마음입니다 - 결코 자신의 것을 구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목자는 어떤 것에서도 자기의 것을 구하지 않는 목자들입니다. 그런 목자들은 누구의 돈이나 명예도 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거나 감동을 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그들은 신자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게"(골 1:28) 세우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갈망을 가진 사람을 찾을 수 있는 곳은 어디든지 - 세계의 어느 도시나 마을에서든지, 어떤 세대에서든지 - 그를 통해 그분의 교회를 세우실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는 본선 교단을 떠나 "신약성경의 본"을 따르려고 하다가, 결국 그들의 모든 교리를 옳게 여기면서도 돈을 사랑하고 자기의 것을 구하는 신자들의 경우를 많이 보아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고 있다고 상상하는 것입니다! 혼란과 혼돈은 그들의 수고로부터 비롯됩니다 - 그리고 그들이 마침내 건설한 것은 바빌론의 또 다른 버전이 됩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것을 구하지 않는 사람을 찾으셔야만, 그분의 참된 교회를 세우실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사를 공유할 수 있는 한 사람이 단순히 "신약의 패턴"을 따르는 어중간한 천 여명의 신자들보다 하나님께 훨씬 더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목자가 되기 위해서는 희생과 불편과 고통이 따릅니다. 오해와 반대와 조롱과 비방을 기꺼이 즐겁게 감수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만약 그러한 목자가 자신의 것을 구하지 않는 아내를 가질 만큼 충분히 축복을 받는다면, 그래서 그들의 집이 주님이 원하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다면, 그럼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부부를 통해 하실 수 있는 일은 제한이 없을 것입니다. .

나는 지금 많은 사람들을 모으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지금 모인 사람들의 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숫자는 결코 하나님의 축복의 표시가 아닙니다. 많은 이단과 거짓 종교에는 수백만 명의 회원이 있습니다. 숫자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그분이 주위를 둘러보시니 사람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았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곳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목자들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우리에게 그들이 저지른 실수를 보여주기 위해 그렇게 길게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피할 수 있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피하는 방법을 배울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다윗의 시대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한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나머지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를 버리기로 결정하더라도, 온 가족과 함께 여호와를 따르기로 결심했습니다(수 24:15). 필요하다면 기꺼이 홀로 설 수 있는 그런 사람만이, 오늘날 어느 교회에나 경건한 지도력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생애 동안, 이스라엘은 하나의 승리에서 다른 승리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죽었습니다. 그 이후에 일어난 일들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특정한 때에 특정한 목적을 위하여 특정한 나라에서 세우신 사람이 그의 지상 행로를 마치고 세상을 떠날 때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사기에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쇠퇴했는지 읽었습니다. 2세대는 잠시 동안 여호수아의 지도력으로부터 받은 추진력으로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상 숭배에 빠졌습니다. 여호수아 시대에, 이스라엘은 강력한 기관차에 의해 언덕을 올라가는 기차와 같았습니다. 여호수아가 사망했을 때 엔진이 분리되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다른 엔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차는 속도를 낮추고 마침내 멈춰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 그리고 추락했습니다!

다윗 시대에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습니다. 그는 큰 겸손으로 시작했지만, 너무 크게 타락하여 하나님께서 그에게서 기름 부음을 제거하셨습니다. 사울의 삶은 1세대 자체에서 쇠퇴하고 있는 그러한 운동의 그림입니다 - 그리고 기독교 집단에도 그런 운동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사울에게 이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삼상 13:14)에게 나라를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다윗을 극도로 질투하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너무 미워하여, 그를 심지어 죽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있는 곳을 인식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과 합류했습니다. 그리하여 작은 무리가 다윗 주위에 모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온 땅에서 사울에게 추격당하고 핍박을 받고 쫓기며 목숨을 걸고 달아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작은 그룹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여러 해 동안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왕좌에 앉아 있었습니다 - 흡사 타락한 기독교인 "지도자"가 수년 전에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들의 양 떼를 다스리는 것과 같습니다. 사울은 그에게 아첨하는 많은 추종자들이 있었습니다 - 오늘날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그들 자신의 그룹 안에 아첨하는 추종자들 있는 것처럼. 그러한 많은 추종자들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비기독교 종교 지도자들에게도 많은 추종자들이 있습니다.

교회 역사는 모든 세대에서 그분을 위해 전심으로 서 있는 소수의 그분의 백성을 통해 하나님께서 항상 그분의 가장 위대한 일을 하셨다는 것을 거듭 증명해 왔습니다. 그러한 그룹은 하나님께서 자기 시대에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기독교계의 기성 제도에 의해 미움과 오해와 박해를 받습니다(사울이 다윗을 박해한 것처럼).

하나님은 다윗과 그의 작은 무리를 보호하셨고 그는 40년 동안 이스라엘의 왕으로 다스렸습니다. 그의 통치에 대해 "그 자신의 시대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겼더라"(행 13:36)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다윗이 자신의 세대에서만 하나님의 목적을 섬길 수 있었음을 주목합니다.

그의 죽음 이후, 상황은 매우 빠르게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아들 솔로몬은 매우 심하게 타락했고 - 비참하게 끝났습니다. 처음에, 그는 경건한 아버지로부터 받은 추진력에 따라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부족하여 오랫동안 같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는 부와 여자들에게 미혹되었습니다(왕상 10:23; 11:1-9) - 우리 시대의 많은 기독교 설교자들처럼!

우리가 다윗과 솔로몬의 역사에서 본 것과 같은 쇠퇴의 이야기는 기독교 집단에서 거듭거듭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시작한 현재 2세대와 그 이상에 있는 모든 운동이나 기독교 교파를 주의 깊게 살펴보십시오 - 그러면 내가 말하는 것이 진실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합니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왜냐하면 그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보다 성경의 문자를 더 많이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교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인 헌신보다 더 중요해지면 영적인 쇠퇴, 독선, 바리새주의는 변함없는 결과입니다.

에베소 교회

이제 에베소 교회의 역사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3년 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하나님의 모든 뜻"(행 20:27-31)을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에베소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에게서 수백 건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주님께서 그들 가운데서 행하시는 놀라운 기적을 보았습니다(행 19:11).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이 2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소아시아 전역에 퍼졌습니다. 그들은 부흥을 경험했습니다(행 19:10,19). 그들은 사도 시대의 모든 교회 중에서 가장 큰 특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의심할 여지 없이 그 당시 소아시아에서 가장 영적인 교회였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에베소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알 수 있습니다. 거기서 그는, 그가 편지를 썼던 다른 교회들에서 그가 해야 했던 것과는 달리, 그들 가운데서 어떤 오류도 바로잡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에베소를 떠날 때에 장로들에게 경고하여 말하기를, "내가 떠난 뒤에, 사나운 이리들이 여러분 가운데로 들어와서, 양 떼를 마구 해하리라는 것을 나는 압니다; 바로 여러분 가운데서도, 제자들을 이탈시켜서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것을 말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입니다"(행 20:29,30).

바울이 거기 있는 동안에는, 이리가 에베소의 양 떼에 감히 들어가지 못하였으니, 이는 바울이 주께로부터 영적인 권세를 받은 매우 엄격한 문지기였기 때문입니다(참조 막 13:34). 그러나 그는 또한 그곳의 장로들이 자신만큼 주님께 헌신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분별력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가 떠나면 상황이 매우 빠르게 악화될 것임을 알았고, 그리고 그들은 교회의 리더십을 맡았습니다.

바울이 장로들에게 이리들이 들어오는 것에 대해 경고한 것은 에베소에서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경고였습니다. 장로들이 스스로 판단하고 회개하기만 했다면 - 그것은 그가 예측한 대로 일어날 필요가 없었습니다. 요나는 니느웨의 멸망을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였으므로, 그가 예언한 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에베소 교회도 회개했더라면 바울이 예측한 운명을 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장로들은 바울의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래서 그들은 주님에게서 떠나갔습니다.

50년 후, 에베소 교회의 상황은 정말 나빠졌습니다. 그들의 교리는 여전히 정확했으며, 그리스도인 활동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밤새도록 기도 모임과 특별 모임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영적 상태가 너무 나빠서, 주님은 그들을 교회로 인정하는 것을 거두려 하셨습니다. 그들의 죄악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여호와께 대한 헌신을 잃었습니다(계 2:4,5).

이 에베소 교회의 역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 어떤 교리나 종교 활동도 주님 그분 자체에 대한 열렬한 헌신만큼 중요하지 않습니다. 참된 영성의 표시는 단 하나뿐입니다: 예수님의 삶이 우리 삶에 점점 더 많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주님 자신에 대한 개인적인 헌신의 증가를 통해서만 올 수 있습니다.

바울은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 그의 삶이 끝날 때까지 주 예수께 헌신한 열렬하고 신실한 사도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탄이 "단순한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고후 11:3)에서 멀어지게 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이라고 모든 곳의 신자들에게 경고했습니다.

1세대와 2세대

우리는 바울조차도 자신의 세대에서만 하나님의 목적을 섬길 수 있음을 봅니다. 디모데처럼, 그와 함께 살았던 몇몇 사람들은 그의 정신을 흡수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이타적인 헌신으로 살았습니다(빌 2:19-21). 그러나 그 외에는, 바울은 자신이 세운 교회의 2세대 신자에게 자신의 영성을 전달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알아야 했습니다.

기독교 집단의 역사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독교 집단을 다시 그분께로 데려오도록 보내신 경건한 개혁가가 자신의 세대에서만 하나님의 목적에 봉사할 수 있음을 봅니다.

하나님은 한 나라에서 특정한 세대에 경건한 한 사람을 일으키사, 그 나라 교회에 사도들이 전한 진리를 회복시켜, 사람들을 경건한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그의 주위에서 서서히 움직임이 시작되고, 그 시대 기독교의 비현실성과 위선에 질린 소수의 온 마음을 다한 신도들이 그의 주위에 모인다. 머지 않아 주님에 대한 순수한 간증이 확립됩니다.

그런 그룹은 처음에는 항상 규모가 작았고 더 오래된 교회들에 의해 극도로 미움과 박해를 받았으며 대부분의 경우 가난했습니다. 창시자는 무엇보다 미움을 받습니다. 그리고 증오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이전 세대에서 일으키신 그룹으로부터 가장 강렬합니다 - 왜냐하면 그 그룹의 현재 지도자들은, 주님께서 그들을 버리신 것을 깨닫지 못하고 새로운 그룹을 질투하기 때문입니다! 사탄도 이 새로운 그룹에 대한 공격에 참여합니다 - 그리고 그는 대부분 더 오래된 그룹의 다른 "신자들"을 통해 고소 작업을 수행합니다.

그러나 사람과 악마들의 모든 핍박과 계략은, 하나님께서 그분이 일으키신 사람을 통해 새 세대에 그분의 이름을 위한 순수한 증거를 세우는 것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설립자가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거의 모든 경우에, 다음 세대에서 그의 추종자들은 지도자의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이 아닌, 그가 그들에게 가르쳤던 교리를 더 강조합니다. 경건의 모양이 가장 중요해지고 경건의 능력은 무시됩니다. 따라서 쇠퇴와 부패가 시작됩니다.

그러한 운동이 3대에 이르면, 그룹 내의 부패와 쇠퇴는 총체적입니다. 그 이후로 그 그룹은 그들의 설립자가 가지고 있었던 경건과 영성과 닮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가 행한 것과 동일한 교리를 선포하고 그의 이름으로 영광을 돌리지만 - 그들은 바벨론을 건설합니다.

한 그룹은 영적 운동으로 시작할 수 있지만, 여전히 혼적이고 육적인 것으로 끝날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사람에 의해 시작된 운동이 심지어 언젠가는 광신적 종교집단으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중요하고 좋은 교리도 예수님 그분 자신에 대한 헌신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이 모든 영적 운동의 창시자들은 주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 세대는 창시자와 그가 설교한 교리만을 알고 있었습니다.

모든 운동에서 일어나는 가장 흔한 일 중 하나는 그것이 2세대에 이르면, 구성원들이 많은 돈, 집, 토지 등을 소유하면서 부자가 되고 번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는 자부심, 자급자족 및 안주를 동반하는 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 부를 올바르게 처리하는 방법을 아는 신자는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운동의 첫 번째 세대는 일반적으로 가난에 시달리고 하나님과 가깝습니다. 두 번째 세대는 일반적으로 모든 부를 가지고, 세상에 더 가깝습니다 - 따라서 영적으로 잃어버립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은 그 그룹에서 물러나시고, 그 그룹은 바벨론의 일부가 됩니다.

이것은 교회-역사의 모든 개혁 운동에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매번, 첫 번째 개혁이 타락한 후, 하나님은 또 다른 개혁을 일으키기 위해 다른 곳에서 다른 사람을 일으키셔야 했습니다. 이 "죽음과 부활" 과정은 기독교 역사에서 계속해서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항상 하나님께서 지상에서 작지만 순수한 그분의 이름에 대한 간증을 보존해 온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현명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현재 어디에서 머물고 있는지(자신의 세대에서) 주위를 둘러보고 그러한 교회와 온전히 연합할 것입니다. 그들은 기름부음이 이전 세대에서 어디에 머물렀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한 두 세대 전에 움직이신 곳이 아니라 지금 하나님이 어디로 움직이고 계시는지 볼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단지 경건의 모양이 있는 자들을 피하고"(딤후 3:5)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딤후 2:2)과만 사귐을 구해야 한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딤후 2:22).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마음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신자들은 더 많은 돈이나 위로나 명예를 갈망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님 그분에게 헌신하고 어떤 교리에도 헌신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항상 그러한 신자들과의 교제를 구하도록 촉구 받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결코 실패하지 않고 진행됩니다 - 이는 여호와께서 각 세대에 그분께 헌신하는 사람들을 일으키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의 모든 간계는 하나님의 목적을 막을 수 없습니다.

장 21
마음의 은밀한 생각이 드러나다

시므온은 예수님에 관해 예언하기를, "그분은 많은 사람들이 공격할 기준을 세울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분은 그들의 마음의 은밀한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눅 2:34,35 - J. B. Phillips 의역).

우리가 이 책에서 말한 많은 내용과 우리가 여기에서 선언한 기준은 우리를 비판하도록 자극할 것입니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높은 삶의 모습을 비방하고 공격할 때,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자신의 부패한 마음 속을 드러내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오시지 않았다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일입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귀신 들린 사람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람 안에 있는 귀신은 바리새인들이 그 회당에서 여러 해 동안 전파한 모든 기간 동안 평화롭고 조용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 전파하는 순간, 그 사람의 속 상태가 드러났습니다(막 1:21-27).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오실 때마다, 사람들의 마음 속 상태와 태도가 항상 드러났습니다.

회당에 있는 모든 종교 관원들은 백성의 눈에 거룩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오실 때에, 그들의 기만적인 외모가 벗겨지고 그들은 외식하는 자들과 속이는 자들로 나타났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를 돌로 치려는 바리새인 무리 가운데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들의 속마음이 즉시 드러났습니다(요 8:3-11). 그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근거를 찾고자 했습니다(요 8:6). 그러나 예수님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던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시 그들의 마음의 내적 상태가 드러났습니다 - 그리고 그들은 모두 "나이든 사람들로부터 시작하여" 떠나야 했습니다! 나이 많은 바리새인들은 언제나 가장 큰 위선자들입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여자의 죄까지도 사용하여 그녀를 고발한 자들의 사악함을 폭로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오시자마자.

오늘 우리 마음에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 "남을 정죄하지 말라.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신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도 결국 그 바리새인 무리와 함께 하게 되고 예수님의 면전에서 영원히 쫓겨나게 됩니다. 모든 판단은 오직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항상 최선입니다.

빌라도는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고 누구의 의견도 신경 쓰지 않는 전능한 통치자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의 앞에 서서 그에게 말씀하시자, 빌라도는 즉시 그의 정체가 드러났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무죄한 줄 알면서도,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넘겨주었습니다. 그리하여 빌라도는 사람들의 의견을 두려워하는 겁쟁이로 드러났습니다.

이 모든 경우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의 내면 상태가 드러남으로써 시므온의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위).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인 우리는 그리스도의 첫 몸(예수님 자신)이 이루신 바로 그 사역을 수행해야 합니다.

오늘날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께서 전파하신 것과 같은 높은 수준의 삶을 선포한다고 우리를 비판할 때, 그 비평가들은 그들이 실제로 그들 자신 마음의 세속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 우리가 새 언약의 기준을 선포하는 가운데 오지 않았다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일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우리는 "예수님과 사도들은 재정 문제에서 우리의 본보기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늘의 존엄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필요와 사역을 위해 결코 아무에게도 금전을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신자에게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만을 요청했습니다"라고 선포합니다.

육신의 설교자들과 목회자들은 우리가 선포하는 이 하나님 말씀의 기준에 즉시 의문을 제기하고, 언약 아래 있는 레위인의 본을 인용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마음에 있는 다음과 같은 은밀한 생각이 드러납니다.

(1) 재정 문제에 있어서 이 신약의 기준을 무시함.

(2) 그들을 부양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그들의 불신.

(3) 옛 언약은 폐지되었으며 이제 예수와 그의 사도들이 우리의 본이 되고, 레위 사람이 본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그들의 무지(히 8:7-13; 12:1,2; 고전 11:1; 빌 3:17).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예일 뿐입니다. 더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과 설교자들이 반대하더라도, 우리는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예수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우리는 2000년 전 그리스도의 첫 몸(예수님)이 이 땅에서 이루셨던 것과 동일한 사역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도 같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메시지에 대한 사람들의 반대를 사용하여 그들의 마음의 육욕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때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고난까지도 사용하여 다른 사람들의 속마음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은 욥이 겪은 고난을 사용하여 욥에게 와서 설교한 세 전도자의 독선과 완악함을 폭로하셨습니다(욥 1-42장).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고난을 당하셨을 때 많은 사람들의 속마음이 드러났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그분을 조롱했고 - 그리하여 그들의 마음의 부패한 것을 드러냈습니다. 한편, 한 로마 병사의 내면의 성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하는 모습에서도 드러났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한 강도의 속마음이 부패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 그리고 그는 지옥에 갔습니다; 반면에 십자가에 못 박힌 다른 강도의 속마음은 진정으로 회개한 것으로 나타났고 - 그는 낙원에 들어갔습니다.

마가복음 3장 2절에서, 우리는 어느 날 예수님이 회당에 오셨을 때, 그분의 원수들이 그분에게 너무 화가 나서 비판할 것을 찾기 위해 "예수님을 면밀히 관찰"했다고 읽었습니다. 현대의 바리새인들도 정직한 신자들의 삶을 매우 면밀히 관찰하여 그들이 비판할 수 있는 어떤 결점을 찾습니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더 화를 내거나 그를 질투할수록, 당신은 그의 삶을 더 자세히 관찰할수록, 그에게서 어떤 결점을 찾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의 삶, 그의 집, 그의 가족에는 참으로 사소한 잘못이 있을 수 있습니다(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종들의 사소한 결점을 사용하여 그들을 심판하는 자들의 사악함을 폭로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 백성 중에는 악인이 있으니, 사냥꾼이 잠복하여 숨는 것처럼 희생물을 찾는다. 그들이 사람을 잡으려고 덫을 놓았다. 그들의 집에 악한 음모가 가득하다.... 내가 가만히 앉아서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행동할 수 있겠느냐?"(렘 5:26,29 - Living).

한번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체포할 수 있는 말을 하도록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눅 11:54 - Living). 또 다른 경우에는, "그들이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다른 종교 지도자들을 보내어 그와 이야기하게 하였습니다"(막 12:13 - Living).

"다른 사람들을 면밀히 살피고" 하나님의 종들에게 질문을 던진(그들을 가두기 위해) 바리새인들의 후손은 오늘날 기독교 집단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뱀처럼 지혜롭게", "이리 사이에 있는 어린양"처럼 그들 가운데서 행동해야 합니다(마 10:16).

누구든지 일류 바리새인이 되는 가장 빠른 방법 중 하나는 "다른 신자들을 면밀히 살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이 되는 것을 피하고 싶다면 그 습관을 단번에 끝내십시오 - 이는 결코 사람들을 도우려는 좋은 동기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의 잘못을 찾아내려는 목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자비는 바리새주의에 대한 훌륭한 해독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신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비를 베푸는 법을 배우도록 합시다.

예수님이 이 땅에 걸으실 때,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선하심이 그의 삶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성령(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하여, 그와 같은 사랑과 자비와 선하심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롬 5:5에 약속된 대로).

우리의 모든 삶이 그러하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