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기초

작성자 :   잭 푸넨 카테고리 :   기본 진실 시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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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복음은, 이제 사람이 하나님께서 원래 의도하신 대로 살 수 있다는 좋은 소식이다. 그리스도의 주장에 전적으로 굴복하는 자는 끊임없이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원자로 받아들인 많은 사람들은 복음이 제공하는 이 영광스러운 삶에 들어가지 못한다.

왜 들어가지 못하는가?

그 이유는 매우 자주 그들의 그리스도인 삶의 시작에 좋은 기초가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시 거듭난 후의 삶은 집을 짓는 것과 비교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집의 기초라는 것을 안다.

3층에 균열이 생기면, 원인은 대개 기초 결함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의 삶과 같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은 지 몇 년이 지난 후, 우리는 처음에 놓여진 잘못된 기초의 결과를 겪을 수 있다.

신약성서는 우리에게 죄에 대한 승리의 삶을 약속한다.

로마서 6장 14절 에 하나님의 약속을 보아라.

"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

그것은 또한 우리에게 지속적인 기쁨과, 걱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삶을 살도록 명령한다. 빌립보서 4장4 ,6절 참조

"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

하나님은 오직 우리가 할 수 있게 해주실 일만 명하신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래서 그의 계명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성취할 수 있게 한다는 약속이다!

그러므로 위의 명령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원한 기쁨의 삶과 걱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해주실 수 있다는 약속이다.

신약성경에는 이와 같은 영광스러운 약속들이 더 많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언급했던 것들은 복음이 정말로 좋은 소식이라는 것을 보여주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슬픈 사실은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주장하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위의 구절에 묘사된 삶의 유형을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책의 목적은 당신의 삶에 좋은 기초를 마련할 수 있도록 하여, 당신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완전한 목적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럼 읽고 성령께서 당신의 마음에 말씀하시도록 하라.

이것은 당신의 인생에서 완전히 새로운 장의 시작일 수도 있다…

장 1
회개

예수님은, 그의 양 우리(그의 왕국)로 들어가는 올바른 길은 문을 통해서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는 일부 사람들은 담을 넘어 들어오려고 한다고 말씀하셨다(요 10:1 )

하나님이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내려주신 길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개와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하나님은 다른 방법으로 오르려고 하는 사람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으신다.

주님의 길을 준비하러 온 세례 요한은 회개를 전파했다.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그들의 구원자로 맞이할 준비를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우리에게도 다른 방도가 없다.

회개와 믿음

오늘날 대부분의 신자들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가졌던 깊이나 헌신이나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다.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주된 이유는 그들이 제대로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잘 믿어왔다. 그러나 그들은 먼저 뉘우치지 않고 믿어 왔다. 그래서 그들의 회심은 얕았다.

잘 알려진 찬송가의 이 말들을 보라:

" 진실로 믿는 가장 끔찍한 범죄자 ,

그 순간 예수님으로부터 사면을 받는다 ."

가장 나쁜 범죄자가 단지 "진정한 믿음"만으로 사면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인가?

그가 먼저 회개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당신은 진정한 믿음은 회개도 수반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가장 흉악한 범죄자에게 설명되지 않는 한, 그는 단지 그가 믿었기 때문에 그가 거듭났다고 생각하면서 떠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속아서 갈 수 있다.

예수님 자신이 설교한 메시지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막1:15 )는 것이었다. 그는 사도들에게 같은 메세지를 전하라고 명령했다(눅 24:47 ).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들이 한 일이었다(행 20:21 ).

이 점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매우 분명하다. 당신이 잘되고 진정으로 회심하기를 원한다면 회개와 믿음은 분리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이 둘을 합치셨다.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합치신 것은 누구도 분리해서는 안 된다.

회개와 믿음은 사실 그리스도인 생활의 기초의 첫 번째 두 요소다(히6:1 ). 당신이 제대로 회개하지 않았다면, 그럼 기초가 잘못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물론 당신의 그리스도인 삶 전체가 흔들릴 것이다.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또는 ABC)이다"라고 말한다( 잠9:10 ). 그리고 우리가 정말로 여호와를 경외하면, 우리는 "죄에서 떠날 것"( 잠3: 7)이다.

그래서 회개하지 않고 죄에서 돌아서지 않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 삶의 ABC도 배우지 못했다.

거짓 회개와 참된 회개

당신이 회개했다면, 진정으로 회개한 것을 확실히 해야 한다. 사탄은 사람을 속이는 가짜 회개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탄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너는 잡히지 않을 것이다!"라는 단 하나의 계명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그들에게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죄를 짓는 방법과 수단을 가르친다.

도둑이라도 잡히면 미안한 마음이 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회개가 아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그들의 회개가 거짓이었던 사람들의 몇 가지 예를 본다.

사울 왕이 하나님께 불순종했을 때, 그는 사무엘에게 그의 죄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이 그것을 알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인간의 명예를 추구했다. 그는 정말로 회개하지 않았었다. 다만 들킨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삼상 15:24-30 ). 사울과 다윗의 차이점은 다윗은 넘어졌을 때 그의 죄를 공공연히 인정한 점이었다(51 ).

아합 왕은 사울과 같은 왕이었다. 엘리야가 하나님께서 그를 심판하실 것이라고 경고했을 때, 그는 자신이 정말 불쌍하다고 느꼈다. 그는 심지어 베옷을 몸에 걸치고 자신의 죄를 슬퍼했다( 왕상21:27-29 ). 그러나 그는 진정으로 뉘우치지 않았다. 그는 단지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했다.

가룟 유다의 경우는 거짓 회개의 명백한 예다. 그는 예수님이 사형선고 받은 것을 보고, 마음이 좋지 못하여 "내가 죄를 지었다"( 27: 3-5 )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제사장들에게 고백했다 - 오늘날에도 어떤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비록 그가 한 일에 대해 슬퍼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회개하지 않았다. 그가 진실로 회개했더라면, 깨어진 모습으로 주님께 가서 용서를 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러한 예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이 많다 - 회개가 아닌 것에 대해!

참된 회개는 "우상으로부터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살전1:9)이다.

우상은 이교도의 신전에서 발견되는 나무와 돌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숭배하는 똑같이 위험한 우상들이 있다. 그것들은 그렇게 못나 보이지 않는다. 이것들은 즐거움, 편안함, 돈, 명성, 자기 생각대로 하고 싶은 것 등등의 우상들이다.

우리 모두는 아주 여러 해 동안 이것을 숭배해왔다. 회개한다는 것은 이 우상을 숭배하는 것을 멈추고, 그것들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이다.

진정한 회개는 우리의 전체적인 인격, 즉 우리의 마음, 우리의 감정, 우리의 의지가 포함된다.

우선, 회개란 죄와 세상에 대한 우리 마음을 바꾼다는 뜻이다. 우리는 우리의 죄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켰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는 또한 이 세상의 모든 삶의 방식이 하나님을 반대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삶의 방식에서 돌이키려 한다.

둘째, 회개는 우리의 감정을 포함한다. 우리는 살아온 방식에 대해 슬픔을 느낀다( 고후7:10). 우리는 과거의 행동에 대해 우리 자신을 미워하고; 그 이상으로, 우리 안에 있는 다른 누구도 볼 수 없는 더 큰 악을 혐오한다( 겔36:31 ).

우리는 우리가 살아온 방식으로 하나님께 너무 많이 상처 드린 것에 대해 울며 슬퍼한다. 그것은 성경에 나오는 많은 위인들이 자신의 죄를 알게 되었을 때의 반응이었다. 다윗(51), 욥(욥 42:6 )과 베드로(마 26:75 )는 모두 죄를 회개할 때, 몹시 통곡했다.

예수님과 사도들 모두 우리에게 우리의 죄를 슬퍼하고 울도록 격려하였다( 5: 4; 약4:9 ). 그것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이다.

마지막으로, 회개에는 우리의 의지가 수반된다. 우리는 완고한 자기 의지, 즉 '자기 생각대로 하고 싶은 것'을 굴복하고, 예수님을 우리 삶의 주님으로 삼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앞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아무리 굴욕적인 일이라도 하겠다는 뜻이다.

탕자는 아버지가 시키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기꺼이 할 수 있는, 깨지고 굴복하는 젊은이로 아버지에게 돌아왔다. 그것이 진정한 회개이다( 눅15:11-24 ).

우리가 저지른 모든 죄를 하나님께 고백할 필요는 없다. 어떤 경우에도 그 모든 것을 기억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탕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가 한 말은, "아버지,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가 전부였다. 그리고 그게 우리가 해야 할 말의 전부다.

그러나 가룟 유다도 "내가 죄를 지었다"고 말한 것을 기억하라. 그러나 그의 고백과 탕자의 고백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말에만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는 그 말 뒤에 숨은 정신을 감지하고, 그에 따라 우리를 대한다.

회개의 열매

세례 요한은 바리새인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하였다(마 3:8 ). 만약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했다면, 그것은 우리 삶의 전체 방식을 바꿀 것이다.

우리가 회개하고 나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 중 하나는 우리가 살면서 저지른 잘못에 대한 보상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삭개오에 대해 읽었는데, 예수님이 그의 집에 들어오시자마자 그는 그의 죄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눅19:1-10 ). 삭개오는 돈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회개가 수반하는 것을 이해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평생 저지른 모든 잘못을 보상해야 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매우 많은 사람들을 속였으므로, 그에게 큰 금전적 손해를 끼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는 진심으로 회개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그는 주님께 그의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 다음에 남을 속인 것의 네 배를 돌려주겠다고 말했다.

삭개오가 배상을 하겠다고 말했을 때, 비로소 예수께서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하셨다. 배상하겠다는 의지는 진정한 구원의 증거 중 하나이다(눅 19:1-10 ).

예수님이 말한 비유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땅을 깊이 파고 모래 층 아래 바위 위에 그의 기초를 놓았다(눅6: 48 ). 어리석은 사람도 같은 지역에 집을 지었다. 그러나 그는 충분히 깊이 파고들지 않았다. 그는 얄팍하게 모래 위에 기초를 놓았다.

우리는 이 비유를 참된 회개와 거짓 회개에 적용할 수 있다. 우리 삶에서 철저한 보상을 하기 위해 고심 할 때, 비로소 깊이 파고든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올 때, 해결할 필요가 있는 우리의 회심하지 않았던 삶과 관련된 모든 문제들을 정리하기 위해, 처음부터 바로 시간을 갖는 것이 좋다.

만약 우리가 여기서 깊이가 없고, 몇 가지 문제를 얼버무리면, 우리의 기초가 약해져 언젠가는 집이 무너지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배상이 수반하는 것

배상이 수반하는 것은 무엇인가?

세금 등으로 정부를 속였다면, 이제 그 세금을 갚아야 한다는 뜻이다. 때로는 해당 부서에 금액을 상환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뜻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길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싶다면 말이다! 우리는 우체국 우표나 철도 티켓을 사서 해결할 수 있는데, 정부에 빚진 돈이 정말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사람을 속였다면 배상하면서 사과도 해야 한다. 그들에게 당신의 삶에 어떤 변화가 왔는지 말해주어라! 혼자서 이 모든 일을 할 용기가 없다면, 형제를 데리고 가서 배상 하라.

빚을 한꺼번에 다 청산할 수 없어도 괜찮다. 그것을 할부금으로 해라. 그러나 시작하라 - 비록 그것이 단지 5루피에 불과할지라도! 하나님은, 삭개오가 빚을 갚기로 결심한 날, 그가 모든 빚을 다 갚은 후가 아니라, 그날 그를 받아들였다.

만약 당신이 누군가를 속였고 그가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면, 그때 당신은 그 돈을 모든 돈의 원래 주인이신 하나님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신 규칙이었다( 민5:6-8 ).

어떤 경우에도 불법적으로 취득한 돈은 절대 가지고 있으면 안 된다. 하나님은 결코 그런 종류의 돈을 축복할 수 없다.

만약 돈과 관계없는 어떤 방식으로, 우리가 누군가를 다치게 하거나 상처 주었다면, 우리는 가서 그에게 사과하고 그의 용서를 구해야 한다.

나는 어떤 형제들이 속인 세금과 관세를 정부에 배상하기 위해, 몇 달 동안 돈을 저축하고 나서 통장을 인출한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큰돈이 든 은행계좌보다 더 좋은 것으로 축복해 주셨다!

나는 또한 버스나 기차에서 표를 사지 않고 여행했던 때의 요금을 세심하게 계산하고 그 금액을 갚은 다른 사람들도 알고 있다.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큰일을 할 사람이다.

나는 또한 학위 증명서를 가지고 대학 당국에 가서 그들이 기말고사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것을 인정한 몇몇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들은 깨끗한 양심을 가지기 위해 필요하다면, 학위를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나님은 보통 그런 신자들에게 당국자들이 호의를 베풀게 하셔서, 그들이 용서받도록 하신다.

그러나 항상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당신의 경우, 하나님은 대학이 당신의 졸업장을 빼앗는 것을 허락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 그것은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완벽한 뜻일 것이다.

나는, 수년 전에 작은 우표를 훔친 사람에게 사과 편지를 쓴 한 형제를 알고 있다. 도둑질은 도둑질이다. 아무리 그 도난 당한 물건의 가치가 작더라도 말이다. 우리의 충실함이 시험되는 것은 사소한 일에서다.

나는 당신이 과거에 저질렀던 작은 잘못들을 기억에서 끄집어내려고 애쓰면서, 지금 스스로를 고문하라고 제안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해결해야 할 것을 생각나게 할 것이다; 당신은 오직 하나님이 생각나게 하는 것만을 해결하면 된다.

잘못한 것이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완전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럴 때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께 슬픔을 표현하고 그의 자비를 구하는 것뿐이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특정한 문제를 바로 해결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사탄이 우리를 계속 죄책감을 느끼게 하고 영원히 비난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시고, 그는 우리를 고문하지 않는다. 만약 여러분이 기꺼이 마음을 먹는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것이다. 심지어 그것이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말이다(고후8 :12 -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하나님은 그를 존중히 여기는 자들을 존중히 여길 것이다(삼상2: 30 ). 우리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방법은 작은 일에 충실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배상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평생 동안 사슬을 끌고 다닐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돈, 명예, 학위, 심지어 우리의 직업보다 깨끗한 양심을 더 소중히 여기는지 시험해 보실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시험에 떨어졌다. 그러나 하나님을 찬양하여라. 모든 세대에, 이 땅의 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남은 자들이 있다.

타인을 용서하는 것

회개는 어떤 식으로든 우리에게 해를 끼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도 포함된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 너희가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 너희 아버지께서 너희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마6:15 ).

그는 이어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용서해야 하고, 단순히 겉으로만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마 18:35 ).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진심으로 그리고 완전히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을 수 없다.

우리는 어쩌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한 것을 잊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유혹을 받을 때마다,우리는 그들이 저지른 악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분명히 거부할 수 있다.

아마도 누군가가 당신을 심하게 해쳤기 때문에 당신은 그를 진심으로 용서하는 것이 정말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이 용서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는 그 이상의 열망과 힘을 기꺼이 주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토록 값없이 용서해 주셨던 수백만 개의 죄를 생각하면, 우리도 같은 방법으로 남을 용서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사탄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을 때이다.

바울은 "용서하라"고 말하면서, "사탄이 우리를 이용하지 못하도록"이라고 말한다( 고후2:10 , 11 ).

사탄을 향해 달라진 태도

문제가 해결되어야 할 부분이 하나 더 있다 - 사탄과 악한 영과의 접촉 지역이다. 만약 당신이 점성술, 우상숭배, 손금 보기, 흑마술 등을 장난 삼아 해보거나, 록음악과 유해한 약물에 관심이 있었다면, 여러분은 사탄과의 접촉을 끊어야 한다 - 이러한 접촉들 중 일부는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졌을지라도 말이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우상, 주술 서적, 부적 등을 파괴하는 것(파는 것이 아닌)이다(행19:19 참조). 그리고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주 예수님, 나는 알게 모르게 사탄과 가졌던 모든 접촉을 끊습니다."

그리고 사탄에게 직접 말해라,

"나의 주,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는 너희 사탄에게 대적한다. 이제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니, 너는 더 이상 나를 만질 수 없다."

야고보서 4장 7 절에서 말씀하기를,

" 하나님께 복종하라 .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

그러므로 사탄은 더 이상 너를 붙잡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주님과 계속 함께 걷는다면, 그분은 우리 삶의 다른 부분에 대해 점점 더 많은 빛을 우리에게 비쳐 줄 것이다. 그것은 세속적인 우리의 옷과 말이나, 거친 목소리 톤이나, 독서 습관으로 인해 우리가 더럽혀지고 있는 방식 등일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회개하고 깨끗하게 되어야 할 새로운 영역을 끊임없이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일생 동안 끊임없이 회개하는 이런 길을 걸어야 한다.

장 2
믿음

회개는 그리스도인 생활의 기초의 첫 번째다. 믿음은 두 번째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감정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더라도, 그분을 신뢰하고, 그가 말씀 안에서 말씀하신 것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간단하다.

하나님과 관련된 세 가지 사실이 있다:

1. 그는 우리를 무한히 사랑한다;

2. 그는 절대적으로 지혜로우시다; 그리고

3. 그는 전능하다.

이 사실들을 믿는 것이 어려운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브가 에덴 동산에서 사탄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그것은 믿음의 실패였다. 그녀는 하나님의 계명이 그녀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녀는 그녀를 위한 하나님의 완벽한 사랑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불순종했다.

하나님의 선물을 받는 믿음

하나님은 우리에게 줄 많은 놀라운 것들을 가지고 있다. 그의 선물은 모두 은혜의 선물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선물들을 받기 위해 믿음이 필요하다.

성경은 우리가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고 말한다(엡 2:8 ). 은혜는 하늘의 축복을 가득 안고 우리에게 내려오는 하나님의 손이다. 믿음은 우리의 손을 뻗어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그 축복들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 회개했다면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손을 내밀어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것을 값없이 받기만 하면 된다. 우리는 그것을 위해 일하거나 돈을 지불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이미 갈보리에서 지불되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감사합니다, 아버지"라고 말하고 그것을 받아가는 것뿐이다. 그게 바로 믿음이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우리는 실제로 그를 모욕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선물을 경멸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놀리는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이 선물을 들고 손을 뻗었다가 아이들이 그 선물을 가져가려고 손을 내밀었을 때 그들의 손을 뒤로 빼면서 아이들을 놀리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처럼 못되거나 악하지 않으시다. 그는 사랑의 아버지다. 그는 정말 우리에게 좋은 선물을 주고 싶어 하신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히 11: 6).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면, 그분은 우리의 죄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죄의 힘에서도 우리를 해방시켜 줄 것이다.

어떻게 믿음을 얻을 수 있을까?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

성경에는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 :17 )고 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이 그분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도록 허락하므로, 우리는 믿음을 얻게 된다. 우리의 믿음도 그렇게 증가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사셨음을 알게 되며; 우리가 회개하고 그분을 신뢰하면, 즉시 우리의 죄에 대하여 완전하고 값없는 용서를 받을 수 있다. 그러면 성령님은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우리 마음에 증언하신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이 두 가지 증인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셨고,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의 자녀임을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다.

믿음의 확신

하나님은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임을 마음속으로 완벽하게 확신하기를 원하신다. 그는 우리가 그 사실에 대해 의심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으신다.

사탄은 최선을 다해 우리를 의심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확신을 주시기 위해 그의 말씀에 많은 약속을 주셨기 때문이다.

이 약속들을 좀 보라: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 나에게 오는 사람은 절대 쫓아내지 않을 것이다 진실로 ,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다"( 요6:37 , 47 ).

" (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주셨습니다"( 1 :12 ).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 히8 :12 ).

하나님의 약속에 우리의 믿음을 두는 것은 강을 건너는 동안 튼튼한 다리(bridge)에 우리의 발을 올려놓는 것과 비유할 수 있다. 다리(bridge)가 튼튼하면, 우리의 발이 약해도 상관없다. 그렇다면 강한 믿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강한 하나님과 그의 약속을 믿는 것이다.

우리의 감정은 매우 자주 자신을 속인다. 우리는 그것을 절대 믿어서는 안 된다. 사실(fact), 믿음(faith), 감정(feeling)이라 불리는 세 사람에 대한 비유가 있다. 그들은 좁은 벽 위를 한 명씩 뒤따라 걷고 있었다. 사실은 앞에서 걸었고 믿음은 그의 뒤를 따라 걸었고 감정이 맨 뒤에 따라갔다. 믿음이 앞에 있는 사실을 주시하고 있는 한,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감정이 그의 뒤를 완벽하게 따랐다. 그러나 믿음이 감정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보려고 돌아서는 순간, 굴러 떨어져서 죽었고, 감정도 떨어져 죽었다. 하지만 사실은 방해 받지 않고 벽을 따라 계속 걸어갔다!

비유 속의 교훈은 명백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는 사실들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만을 변함없이 바라본다면, 우리가 영원히 떨어질 위험은 없다; 감정도 때가 되면 따라올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의 감정을 보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쉽게 굴러 떨어져서 낙담과 비난에 빠질 수 있다.

믿음의 고백

성경은 우리가 믿는 것을 고백해야 한다고 말한다.

"입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가운데서 살리셨다고 마음속으로 믿으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얻을있다"(롬 10:9 , 10 ).

우리 입의 고백은 중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단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아멘"(그렇게 될 것입니다)이라고 말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어렵지 않을 것이다.

성경에 '믿음'이라는 단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창세기 15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이 자식이 없을 때, 하늘의 별만큼 많은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읽었다. 그리고 "아브람이 주님을 믿었다"고 쓰여 있다(6). 거기서 "믿다"는 히브리어로 "아만"(aman)이고, 여기서 우리는 "아멘"(Amen)이라는 말을 얻게 되는데, "그렇게 될 것이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아브람이 한 일은 하나님의 약속에 "아멘"을 말하는 것뿐이었다.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께 "아멘"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나중에 아브람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새로운 이름인 아브라함("여러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으로 자신을 불렀다는 것을 읽었다. 사라, 그의 아내는 여전히 아이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아브라함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민족의 아버지라고 불렀는데, 이는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믿었기 때문이다(창 17:5 ).

그것이 바로 믿음의 고백이다 - 심지어 우리가 약속의 성취를 보지 못했을 때에도,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탁하는 것은 그것뿐이다 - 그분이 그의 말씀 안에서 말한 것과 같은 것을 말하라.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고백할 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표현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일하실 수 있다.

우리가 사탄을 이기는 것은 "우리 증언의 말"에 의한 것이다(계 12:11 ). 고발자인 사탄은 언제나 우리의 구원의 확신과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담대함을 강탈하려 한다. 사탄을 이기기 원한다면, 우리는 사탄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직접 인용해야 한다.

예수님 자신도 성경을 인용하여 사탄을 이기셨다. "기록되었으되… 기록되었으되… 기록되었으되"(마 4:1-11 ).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면,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든다. 그러나 우리가 사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고백할 때, 우리는 사탄과 그의 거짓말에 대항하여 하나님과 그의 말씀 편에 선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또한 사탄에게 우리의 상황과 감정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진실이라고 믿는다고 말한다.

이것이 믿음의 고백이다.

장 3
택하심과 의롭다 하심

하나님이 자녀들을 택하시는 것과 그가 자녀들을 의롭다 하시는 것은 신약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영광스러운 두 가지 진리들이다.

택하심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미리 아심에 따라 우리를 그의 자녀로 택하셨다고 적혀 있다(벧전1 :1 , 2 ). 이것은 그가 영원 전부터 그의 자녀들이 될 사람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에도 하나님이 "세상의 기초가 세워지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한다(엡1 :4 ). 심지어 아담이 창조되기 훨씬 전부터,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그의 자녀로 이름 지어 알고 계셨고, 우리의 이름은 "생명의 책"에 있었다( 계13:8 ).

이것들은 우리에게 엄청난 안정감을 주는 사실들이다.

성경은 우리가 서 있는 하나님의 기초는 이중의 (확증) 표시가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 쪽에는 "주님은 자기 백성을 아신다"라고 씌어 있다. 사람 쪽에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모든 불의에서 떠날지어다"라고 씌어 있다( 딤후 2: 19) .

하나님은 세상의 기초 전부터 그의 자녀들을 알고 계셨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실제로 회개하고 그에게 돌이킬 때 비로소 우리가 그의 자녀라는 것을 안다. 우리의 유한한 마음은 하나님이 어떻게 그의 자녀들을 택하시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하나님을 선택할 자유를 주는 지를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 이것들은 우리가 이해할 때 서로 만나지 않는 두 개의 평행선 같은 것이다. 그러나 평행선의 수학적 정의가 그렇듯이, 그들은 하나님의 무한한 마음속에서 무한히 만난다.

누군가가 이렇게 표현했다: 생명의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 날 열린 문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 위에 "누구든지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여기에 들어가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당신은 들어갔다. 뒤돌아 보니, 당신이 방금 들어간 바로 그 문 위에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 세상의 기초가 세워지기 전에"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의롭다 하심

우리의 죄가 용서받은 것은 과거의 죄책감을 없애준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를 완벽히 거룩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완벽하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더 많은 것을 해주셔야 했다.

그는 우리를 의롭게 해야만 했다!

의롭다 하심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완벽한 의를 우리의 공로에 두셨음을 의미한다. 그 결과는 우리가 이제 그리스도의 의와 같이 완벽해져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다! 정말 놀라운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마치 거지의 이름으로 수백만 루피가 은행 계좌에 넣어지는 것과 같다 - 그 돈을 벌거나 받을 자격이 없지만, 그것은 그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어졌다.

의롭게 됨은 우리가 평생 죄를 짓지 않은 것처럼, 그리고 현재 우리의 삶에서 완벽하게 의로운 것처럼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롬 5:2 )고 말한다. 이제 우리는 언제든지 어떤 두려움이나 망설임 없이 하나님 앞으로 대담하게 나아갈 수 있다. 하나님 자신이 그것을 위한 길을 열어 주셨다.

에덴 동산에서는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짓자마자,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느끼고 무화과 잎으로 몸을 가렸다. 하나님은 그들의 무화과 잎을 치우시고, 동물을 죽여서, 그 가죽으로 그들을 입혀주셨다.

저 무화과 잎들은 우리 자신의 선한 일을 나타낸다. 무화과 잎처럼 우리의 선한 일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벌거벗음을 가릴 수 없다; 왜냐하면 성경에 이르기를 우리의 최고의 행위도 하나님의 눈에는 더러운 누더기 같다고 하기 때문이다(사 64: 6).

그 죽은 동물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신 것을 나타낸다.

그 가죽은 우리를 덮으라고 주신 그리스도의 완벽한 의를 나타낸다( 창3:7 , 21 ).

의롭게 하심은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이다. 어떤 사람도 자신의 업적에 근거하여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오류의 한 극단은,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기 위해 의로워 지도록 노력하자"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되는 오류의 극단도 있다. 즉 "우리가 선택 받아 의롭게 된다면, 그러면 지금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선택하시고 의롭게 하셨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죄를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그들이 전혀 하나님의 선택한자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게 된다( 롬4: 5 vs 약 2:24 비교).

일단 우리가 선택 받고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면, 사탄의 고발은 우리에게 그 효력을 잃게 될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8 :31 )이기 때문이다. 우리 삶에서 다시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비난 받거나 거부당했다고 느낄 필요가 없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롬 8:33 ). 할렐루야!

복음의 희소식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사탄이 많은 신자들을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장 4
제자도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모든 민족으로 가서 제자를 만들라고 말씀하실 때, 사도들은 그분이 의미한 바에 대해마음에 의심이 없었다(마 28:19 ). 예수님은 이미 그의 제자가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14장 25-35절 은 가장 분명하게 제자도의 세 가지 조건을 드러낸다. 거기에서 예수께서는 한 사람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그는 망대를 위해 기초를 놓았으나, 그것을 완성하지 못했다, 건축비를 지불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28-30). 그것은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예수님께서는 건축을 시작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먼저 앉아서 그 비용을 세어 보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 사함을 받은 후, 제자도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기까지, 우리가 여러 해 동안 기다리기를 원치 않으신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그분께 오자마자 그 제자도의 비용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는 제자가 되고 싶지 않은 신자는 그 맛을 잃은 소금처럼 하나님에게 쓸모 없는 존재라고 말씀하셨다( 눅14:35 ).

우리의 친척을 '미워하기'

제자의 첫 번째 조건은 우리가 친척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자연스럽고 과도한 사랑을 끊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 눅14:26 ).

그건 강한 말들이다. '미워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미워하는 것은 죽이는 것과 같다(요일 3:15 ). 여기서 우리가 죽이라고 요청 받은 것은 우리 친족에 대한 당연한 애정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아니다. 그건 확실히 그런 뜻이 아니다. 우리가 그들에 대한 인간적인 애정을 포기할 때, 하나님은 그것을 신성한 사랑으로 대신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친척에 대한 사랑은 순수해질 것이다 - 하나님이 항상 우리의 애정에서 첫 번째가 될 것이며, 우리의 친척이 첫 번째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나 어머니, 아내 등을 불쾌하게 할까 봐 하나님에게 복종하지 않는다. 주님은 우리 인생에서 1등을 요구하신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에게 그 자리를 드리지 않는다면, 우린 결코 그분의 제자가 될 수 없다.

예수님 자신의 본보기를 보라. 비록 그는 혼자되신 어머니를 사랑했지만, 작은 일에서도 어머니가 그의 (하늘)아버지의 완전한 뜻에서 벗어나도록 영향을 미치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 우리는 가나의 결혼식에서 예수님이 어머니의 권유에 따라 행동하기를 거부했던 예를 본다(요 2:4 ).

예수님은 또한 우리에게 우리 형제들을 '미워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을 막으려 했을 때, 예수님은 돌아서서, 그가 한 말 중에서 가장 날카로운 말로 꾸짖었다. 그분은 "사탄아,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마 16:23 )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인간적인 사랑을 듬뿍 담아 말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베드로를 꾸짖으셨다, 그가 말한 것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예수님의 사랑에 있어서 항상 최고였다. 그분은 우리도 같은 태도를 취하기를 기대하신다. 부활 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 땅의 다른 모든 것들보다 그분을 더 사랑하는지 물었다(요 21:15-17 ). 오직 주님을 가장 사랑하는 자만이 주님의 교회에서 책임이 부여된다.

에베소 교회의 지도자는 주님을 향한 초기의 헌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떨어질 위기에 처했다(계2: 1-5) .

우리가 시편 기자처럼 말할 수 있다면,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제자의 첫째 조건을 갖추었다( 시73:25 ).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사랑은 하나님께 헌신하는 감동적인 노래를 부르면서 자신을 표현하는 감정적이고 감상적이며 인간적인 애정이 아니다. 아니, 우리가 그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에게 복종할 것이다(요 14:21 ).

우리 자신의 생명을 미워하기

제자도의 두 번째 조건은 우리가 자기 자신의 생명을 미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 누구든지 내게로 오는 자가 자신의 생명을 미워하지 않는다면 , 그는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눅14:26 ).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그것을 더 자세히 설명하셨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눅14:27 ).

이것은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 중 가장 덜 이해된 것 중 하나이다.

예수님은 제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매일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했다( 눅9:23 ). 우리가 성경을 읽거나 매일 기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자신을 부인하고, 매일 자신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자아를 부인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생명, 즉 우리가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생명을 미워하는 것과 같다.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은 자기 생명을 죽이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죽이기 전에, 먼저 그 생명을 미워해야 한다.

우리의 자기 생명은 그리스도의 생명의 주된 적이다. 성경은 이것을 '육신'이라고 부른다. 육신은 우리 자신의 이익, 우리 자신의 명예, 우리 자신의 즐거움,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는 방식 등을 추구하도록 유혹한다. 만약 우리가 정직하다면, 우리의 가장 좋은 행동들 중 많은 것들이 우리의 '자기 생명'에서 발생하는 악한 동기들에 의해 부패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 육신을 미워하지 않는 한, 우리는 주님을 따를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을 미워하는 것(혹은 잃는 것)에 대해 그렇게 많이 말씀하신 이유다.

사실, 이 구절은 복음서에서 6번 반복된다(마 10:39 ; 16 :25 ; 막8 :35; 9:24; 14:26 ; 요12 :25 ). 이것은 복음서에서 가장 자주 반복되는 우리 주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그것은 가장 덜 설교되고 가장 덜 이해된다!

자신의 생명을 미워한다는 것은 자신의 권리와 특권을 추구하는 것을 포기하고, 자신의 명성을 추구하는 것을 중단하며, 자신의 야망과 이익을 포기하고, 자신의 길을 찾는 것을 중단하는 것이다. 이 길로 갈 마음이 있어야만,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

우리의 모든 소유물 포기하기

제자도의 세 번째 조건은 우리 자신의 모든 소유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14:33 )고 하셨다.

우리의 소유물은 우리의 것으로, 우리가 소유하는 것이다. 그것들을 모두 포기하는 것은 우리가 더 이상 어떤 것도 우리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삶에서 이것의 예시를 본다. 이삭은 그 자신의 아들이었고, 그의 소유였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단 위에 눕히고, 그를 죽일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그 희생이 필요 없다고 하셨는데, 그 이유는 그가 복종할 의지를 증명했기 때문이다(22장). 그 뒤에 아브라함은 이삭을 그의 집에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자기 것으로서 그를 소유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삭은 이제 하나님의 소유였다.

우리의 모든 소유를 포기한다는 것은 이런 뜻이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제단 위에 놓고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것들의 일부를 사용하도록 허락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더 이상 우리 자신의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 비록 우리가 우리 집에 살고 있다고 해도, 우리는 그 집을 하나님의 집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집세를 내지 않고 지내도록 허락하셨다! 이것이 진정한 제자도이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가지고 그렇게 했는가? 우리의 소유물은 은행계좌, 재산, 직업, 자격, 은사와 재능,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소중하게 여기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우리가 진정한 제자가 되려면 그들 모두를 제단 위에 놓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해 그를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마태복음 5장 8절에서 언급된 '청결한 마음'의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깨끗한 양심을 갖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깨끗한 양심은 우리가 죄를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청결한 마음은 모든 것을 포기한 마음이다!

그래서 우리는 진정한 제자도는 다음과 같은 것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 변화를 수반한다고 본다:

1. 우리의 친척들과 사랑하는 사람들;

2. 우리의 자기 생명; 그리고

3. 우리의 소유물들

우리가 그리스도인 생활의 시작에서 이러한 문제들을 정면으로 직면하지 않는 한, 좋은 기초를 마련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장 5
물 세례

예수께서 하늘에 오르기 전에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명하신 것 중 하나는 다음과 같았다:

1. 가서 제자를 삼아라;

2. 그들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라; 그리고

3. 그들에게 그분이 명령한 모든 것을 따르도록 가르쳐라. 여기서 순서가 중요하다.

제자가 되려는 자만이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안 된다.

아기들을 예수께 데려왔을 때, 예수께서는 그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하셨다( 막10:13-16 참조). 그러나 회개한 어른들이 그에게 오자,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시켜서 세례를 베풀었다( 요4:1 ,2 참조 ).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많은 '교회'에서 무엇을 볼 수 있는가? 지극히 정반대다. 아기들은 세례를 받고; 어른들의 머리 위에 손을 얹는다('안수의식')! 이것은 예수님이 한 것과 정반대다.

오순절에,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죄로 유죄판결을 받았을 때, 베드로가 그들에게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말했다. 이 기록은 계속해서 "그의 말을 받은 자는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행2 :38 , 41 ).

하나님의 말씀을 지혜롭게 받아들이고 회개할 수 있는 자만이 세례를 받았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것이 '사도행전'에 기록된 모든 예에서 나타난 방식이었다.

세례의 의미

로마서 6장 1-7 절은 세례의 의미를 명확하게 설명한다. 거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세례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임을 당했다는 말을 듣는다. 옛사람은 우리가 회심하지 않았던 시절에 죄를 짓고 싶어했던 마음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우리가 그 현실에서 살기 전에, 먼저 이것을 이해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냥 믿으면 된다. 우리는 갈보리의 언덕에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말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믿는다. 이 두 가지 진리를 모두 믿음으로 받아들인다.

옛사람과 육신은 같지 않다. 육신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우리 안에 있는 '자기 생명'이다. 우리 모두 죽을 때까지 이걸 가지고 다녀야 한다. 우리는 그 육신을 우리 집에 들어오려는 강도 패거리에 비유할 수 있다. 옛사람은 마치 우리 집 안에 있는 불성실한 하인과 같아서 강도들이 들어오도록 끊임없이 문을 열어 주었다. 지금 살해된 것은 그 불성실한 하인이다. 그러나 그 강도들은 건장하다! 그런데 이제 우리에게는 이 강도들을 상대로 문을 닫아두려고 하는 새로운 하인, 새로운 사람이 생겼다.

세례를 받는 것은, 우리가 옛사람(죄의 갈망)의 죽음과 장사된 것과,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것을 증거하여, 이제부터는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다(롬 6:4 ).

노아시대의 홍수는 세례의 일종이기도 하다(벧전 3:20 , 21 ). 그 홍수로 온 세상이 하나님에 의해 파괴되었다. 노아는 방주에서 그것을 겪었고 완전히 새로운 세상으로 나왔다. 옛 세상과 그 안의 모든 것이 홍수로 파묻혔다. 이것이 우리가 세례에서도 증언하는 것이다 - 우리의 세상과의 옛 관계(세속적인 유행과 세속적인 친구 등을 포함한다)가 이제 모두 단절되었고 우리는 이제 물에서 완전히 새로운 세상으로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세례의 방식

우리는 이제 어떻게 세례를 받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

'baptism'(세례)이라는 단어는 영어 단어가 아니다. 신약성서는 원래 그리스어로 쓰여졌고; 'baptism'이라는 단어는 그리스어 'bapto'에서 유래되었는데, 이 단어는 '전부 유체로 덮는다' 또는 '담그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초기 사도들에게 세례가 의미하는 바 - 물속에 담그는 것이다. 누군가의 머리에 물을 뿌리는 것은 확실히 세례가 아니다.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세례를 주었을 때, "둘 다 물 속으로 내려갔다가… 물 밖으로 나왔다."라고 쓰여 있다(행8 :38 , 39 ).

예수님의 세례에서도 우리는 비슷한 말을 읽었는데, 그는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왔다는 것이다( 막1:10 ).

신약성서에서, 세례는 항상 물속에 담금에 의해 행해졌다. 세례는 장사(매장) 지내는 것이기 때문에, 담금만이 그것을 정확하게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왜냐하면, 결국 우리는 사람의 머리에 모래를 뿌려서 묻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땅속에 집어넣음으로써 사람을 묻어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옛사람이 죽은 사람들(더 이상 죄를 짓기 원하지 않는 사람)만이 세례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명확히 한다. 결국 죽은 사람만이 매장될 수 있다! 죽지 않은 사람을 매장하는 것은 범죄다!

삼중 세례

예수님은 우리에게 "아버지, 아들,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명령하셨다(마 28:19 ). 하나님은 한 분이기 때문에 그 이름은 단수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은 한 분이실지라도 그분은 서로 구별되는 세 인격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을 드러내셨다.

우리의 죄를 위해 돌아가신 분은 아버지도 성령님도 아니었다. 아들이셨다. 예수님이 하늘로 오르시니 성령의 오른편이 아닌,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으셨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그들의 돕는자로 보내신 분은 성령이지, 아버지가 아니셨다. 이 모든 것이 초보적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에 있어서 삼위일체의 세 인격과 그들의 독특한 사역을 혼동하지 않는 것이 필수적이다.

사도행전에서는,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는 것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읽었다( 행2:38 등). 이것이 마태복음 28장 19절 에서 예수님의 명령과 어떻게 들어맞을까?

성경에서 명백하게 모순되는 두 개의 진술이 발견되면, 우리는 더 면밀한 연구를 통해 두 진술이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이교도의 삼위일체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사도들은 성자를 예수 그리스도로 동일시했다. 그래서 그들은 "아버지,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라고 불렀다.

믿음의 순종

세례는 제자의 삶에서 순종의 첫걸음이 되어야 하며, 평생의 순종으로 이어져야 한다 - 이 순종은 믿음의 순종이어야 하며, 이성의 순종이 아니어야 한다.

예수님이 자신의 이성에 의지하셨다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이성은 세례를 받는 것에 반대하는 많은 논거를 그분에게 주었을 것이다 - 특히 그가 결코 죄를 지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요한 자신도 예수님이 왜 세례를 받으셔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성의 주장을 제쳐놓고, 단순히 성령의 목소리에 순종하셨다(마 3:15 ).

말씀은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신뢰하고,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고 말한다( 잠3:5 ). 이성은 믿음의 가장 큰 적이다 - 왜냐하면 인간의 이성은 영적인 진리를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물밑으로 들어가는 우리 몸의 마지막 부분은 머리 윗부분이다. 그건 상징적인 것이다! 우리 이성의 권위는 사형에 처하기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아담의 자녀들은 그들의 이성이 말해주는 대로 살아간다. 세례에서, 우리는 그런 삶의 방식(자신의 이성을 의지하는 것)에 죽었고, 이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을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증언한다(마 4:4 ; 롬1: 17).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대수롭지 않은 일로 경시한다. 나아만은 처음에 그의 문둥병을 낫게 하기 위해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이나 몸을 담그라는 엘리사의 명령을 경멸했다. 그러나 그가 치유된 것은 그 단순한 명령에 복종했을 때였다( 왕하5:10-14 ). 하나님이 우리의 순종을 시험하시는 것은 작은 일에서다.

하나님에 대한 순종은 결코 지체되어서는 안 된다. 당신의 옛사람이 정말 죽었다면, 그는 바로 매장되어야 한다. 죽은 사람을 매장하지 않는 것은 죄악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왜 지체합니까? 일어나서 세례를 받으십시오"(행 22:16 ).

장 6
성령의 세례

우리 모두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 번째는 과거와 관련이 있다 - 우리의 죄에 대한 용서이다. 두 번째는 미래와 관련이 있다 -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이다. 우리의 첫 번째 필요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해결된다. 두 번째를 충족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의 능력을 주신다.

삶과 섬김을 위한 능력

그 첫 번째 필요를 우리 스스로는 결코 충족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그것을 충족시켜야만 했다. 두 번째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거나 하나님의 뜻을 다 실현하는 삶을 우리 힘으로는 살아낼 수 없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시작에서 바로 이 점을 인정할 만큼 지혜롭다, 그래서 그들은 곧바로 하나님의 능력을 구한다. 다른 이들은 그것을 어려운 방법으로 발견한다, 수 년 동안 반복적으로 시도하고 실패를 거듭한 다음, 하나님의 능력을 위해 그분께 의지한다.

안타깝게도 추락과 실패를 거듭한 끝에, 이 삶에서 승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으면서, 결국 패배의 삶에 자신을 체념하는 다른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것에도 적용된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회심 직후 그들이 주님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들은 종종 말문이 막히고 무력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그들 성격의 불행한 특성으로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의 강력한 증인이 되려는 모든 희망을 포기한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성령의 능력을 약속하셨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들은 이 능력을 위해 하나님을 찾고 그것을 받는다. 그리고 그들은 담대함으로 가득 차 있고, 초자연적인 은사를 받아 불타오르고,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한 효과적인 증인이 된다.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은 한 가지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는 것(잠기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새 언약 출생권

옛 언약 아래서, 성령님은 오직 어떤 사람에게만 오셔서, 그들이 하나님을 위한 특정한 임무를 성취할 수 있게 하셨다. 그러나 새 언약 아래에서는, 모든 사람이 성령을 받을 수 있다. 성령은 예수님의 영광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우리를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려고 오셨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성취할 두 가지 사역을 가리켰다 - 하나는 죄를 없애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으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이었다(요1 :29 , 33 ). 우리는 이 두 가지 모두 경험할 필요가 있다.

신약성서의 첫 번째 약속은 다음과 같다:

"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 (마1 :21 ).

신약성서의 두 번째 약속은 다음과 같다:

"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 를 주실 이다"( 3: 11 ).

신약성경이 이 두 가지 약속으로 열린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다루는 새로운 시대 즉 새 언약의 시작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의 이중적 출생 권리이다 - 그것은 우리의 죄로부터 구원받고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확실히 우리에게 단지 절반만이 아니라 완전한 출생권을 주고 싶어하신다

신약성서의 처음 다섯 권은 각각 성령의 세례에 대한 약속으로 시작한다(마 3:11 , 막1:8 , 눅3:16 , 요1:33 , 행1: 5).

그러나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이것을 주장하는 것을 등한시해 왔다.

생명수의 강

성령은 신약성경에 하나님의 보좌에서 흘러나와 땅으로 떨어지는 강으로 묘사되어 있다( 계22:1 ; 행 2:33 ).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이 폭포 아래에 잠기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목마른 모든 사람이 그에게로 와서 성령을 받아 생명수의 강이 그들의 가장 깊은 곳에서 흘러나올 수 있게 하셨다 (요 7:37 ).

그러나 일반 신자들의 경험은 손-펌프와 더 흡사하다 - 메마른 가슴에서 몇 방울의 복을 힘겹게 퍼 올리는 삶이다. 하지만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메마름이 우리를 주님께로 인도할 수만 있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우리와 접촉하는 모든 사람에게 우리에게서 축복의 강이 흘러나오게 하는 것이 우리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다.

이것을 향한 첫 번째 단계는 우리의 필요를 인정하는 것이다. 많은 신자들이 말씀에 대한 어리석은 논쟁에 휘말린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능력이지 정확한 용어가 아니다. 만약 우리가 뼈처럼 건조하다면, 우리의 용어를 옳게 사용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축복의 강이 우리를 통해 흘러나오지 않는다고 고백하면서 정직하게 하나님에게 오는 것이 훨씬 낫다. 그 첫걸음을 내디딘 후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요구하는 것을 허락해 주시리라 믿을 수 있다.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기 위해 필요한 것은 목마름(하나님을 영광하고자 하는 큰 열망에서 태어난 강렬한 갈망)과 믿음(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라는 절대적인 신뢰) 뿐이다. 그러면 우리는 목마름과 믿음을 가지고 이 능력을 구하자.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의 요청을 부인하지 않으실 것이다.

성령 충만

초기 사도들은 예수님을 따르려고 모든 것을 포기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밖으로 나가 그들에게 하나님이 명하신 사역을 이행하기 전에 말이다.

예수님은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예수 님 자신이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부으심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행10 :38 ). 심지어 그분에게도 이 기름부으심이 필요했다면, 우리에게는 얼마나 더 필요한가.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예루살렘에서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눅24:49 ). 예수님이 하늘로 오르시기 직전에 그들에게 다시 말씀하시기를 성령이 그들에게 오시면, 그들은 '권능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다(행1 :8) . 오순절에, 성령이 그들에게 부어졌다. 그리고 그 겁 많던 자들은 즉시 주님을 위하여 담대하고 불타는 증인으로 바뀌었다(행 2:1-4 ). 그들이 받은 것은 예수님이 그들에게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바로 능력이었다.

그리스도인 생활을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단순한 교리가 아니라,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능력이다. 성령의 세례는 우리에게 경건함을 위한 능력뿐만 아니라, 섬김을 위한 능력을 준다.

성령의 일하심의 다양성

성령은 성경에 바람과 비유되며, 바람은 각기 다른 시기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분다. 예수님 은 "성령에게서 태어난 모든 사람도 그렇다"고 하셨다(요3 :8 ). 따라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는다는 외부적인 세부사항에는 각 신자들의 경험이 다를 것이다. 그러나 내면의 성령 충만은 정말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능력의 은사'를 주셔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를 세우는데 효과적으로 그분을 섬길 수 있게 하셨다. 그러나 그는 우리 각자가 어떤 은사를 가져야 할지를 결정하는 분이시다.

예언(도전하고, 격려하고, 위로하는 힘있는 설교 능력)은 이 은사들 중에서 가장 유용하다( 고전14:1-5 ). 섬김, 가르침, 치유, 권면, 돈을 주는 것, 지도력 등의 은사도 있다(롬 12:6-8 ; 고전12:8-10 ). 알 수 없는 언어로 말하는 능력('방언의 은사')은 우리의 마음과 모국어의 한계 없이 우리가 기도하고 그를 찬양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시는 또 다른 선물이다.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지 못했다면, 하나님께 구하고 당신의 출생권을 주장하라. 또한, 당신에게 이 일에 대한 확증을 달라고 요청하라.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녀에게 줄 줄 알거든,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 눅11:13 ; 약4:2 ).

그러면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 부르짖고, 야곱이 브니엘에서 하나님께 말한 것처럼,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 32:26 )라고 말하자.

하나님은 편애가 없으시다. 그분이 다른 사람을 위해 하신 일을, 그분은 당신을 위해 할 것이다. 오늘날에도 그는 부지런히 그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시다( 히11:6 ).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려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을 충만하게 주시기를 간절히 원하신다.

장 7
성화

복음의 두 가지 메시지는 죄로 잡힌 여인에게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요약된다.

(i) 나는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그리고 (ii) 더 이상 죄를 범하지 말라( 요8:11 ).

의롭다 하심은 그리스도인 경주의 출발선이고 성화는 경주가 진행되는 트랙이다. '성화'라는 단어는 분리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성화는 죄, 세상, 그리고 우리 자신을 위한 삶으로부터 점점 더 분리되는 과정이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모든 목적은 우리가 성화되게 하려 함이다 - 마치 선수가 경주의 출발선에 오는 모든 목적이 경주에 참가하는 것처럼 말이다. 선수가 경기 자체에 참가할 의사가 없다면, 출발선에서 다른 선수들과 함께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

우리들 대부분은 처음에 어떤 이기적인 동기를 가지고 그리스도께 왔다, 아마도 치유 또는 지옥불로부터 구원과 같은 우리자신을 위한 이익을 얻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이기적인 동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를 받아주셨다. 탕자의 아버지는 그 아들을 너무나 사랑해서, 아들이 단지 배를 채우기 위해 집에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반겨주었다. 그만큼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다!

하지만 우리가 단지 천국에 가고 싶기 때문에, 그리스도인 생활을 계속한다면 정말 슬플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더 많이 이해함에 따라, 우리는 그것을 완전히 성취하기를 간절히 바라야 한다.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기도한 것은, 그들의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분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기를 구했다(엡 1:18 ).

로마서 8장 29, 30절 은, 우리에게 그분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말해준다.

"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가 예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점점 더 예수님처럼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성화의 모든 것이다. 우리보다 앞서 같은 경주를 하신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하면서, 우리가 달려가야 하는 그리스도인 경주이다(히12:1,2).

죄 짓는 것을 그침

이 경주의 첫 번째 단계는 의식적으로 죄를 짓는 것을 멈추는 것이다. 율법 아래서는, 죄를 짓지 말라는 권고가 없었다. 그러나 새 언약 아래서, 모든 사도들은 복음의 두 가지 메시지 즉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동의한다: 정죄로부터의 자유와 죄를 그치는 것이다.

바울은 "죄를 그치라"고 말한다(고전15:34). 요한은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다(요일2:1). 베드로는 또한 우리에게 '죄를 그치라'고 권고한다(벧전4:1).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를 설명한 후,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고 묻는다(롬6:1). 그리고 다시 (이번에는 더 세게), "그럼 어쩌지? 한 번이라도 죄를 지을까?" (로마서 6:15 - 문자 그대로). 두 경우 모두 대답은 '아니오'이다. 우리는 심지어 단 한 번이라도,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무겁고 부담스러운 메시지처럼 들리는가? 계속 죄를 짓고자 하는 자에게만 짐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죄의 속박에 지치고 병든 자들에게 주는 해방의 기쁜 메시지이다. 어떤 죄수라도 그가 석방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들으면 기뻐할 것이다. 그것은 그에게 부담스럽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예수님은 "(죄의)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사탄에게) 눌린 자를 자유케 함(눅4:18)"을 선포하도록 기름 부음을 받으셨다.

영광스러운 새 언약의 약속은 다음과 같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옛 언약)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예수께서 세우신 새 언약) 아래 있음이라"(롬6:14).

승리의 첫 번째 단계는 그러한 삶이 당신에게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다.

유혹과 죄

유혹을 받는 것과 죄를 짓는 것은 다르다. 성경은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약1:14,15)라고 말씀한다. 죄는 육신의 욕망이 임신을 허락할 때까지 우리 마음에 태어나지 않는다. 사탄이나 육신이 우리 마음에 어떤 암시를 (섬광처럼) 번뜩 떠오르게 할 때, 우리는 유혹을 받는다. 우리의 마음이 그 유혹에 동의하게 되면, 그때 임신이 되고 죄가 태어난다.

시험을 받는 것이 우리를 악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예수님 자신도 시험을 받으셨다. 그러나 그분은 어떤 식으로든 단 한 번도 죄를 지으신 적이 없으셨고, 그래서 완전히 순결하셨다.

성경은 예수님이 "범사에 그 형제들과 같이 되셨고",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다"고 말한다(히2:17; 4:15). 그분은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지만, 결코 죄를 짓지 않으셨다.

우리 중 어떤 이들에게는 그것이 별로 놀랍지 않게 들릴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자연히 쉽게 죄를 이길 수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억하라, 그분은 이 땅에 오셨을 때, 하나님과 동등됨의 특권을 "스스로 비워버리셨다"(빌2:6,7). 비록 그분은 하나님이셨지만, 그분은 사람으로 이 땅에 사시는 동안,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것과 같은 성령의 권능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하고 경주하라는 말씀을 듣는다. 오늘날 우리가 "죄를 대항하는 싸움"에서, 우리는 그분의 본을 보고 격려를 받을 수 있다(히12:2-4). 그것은 그분도 역시 사람으로서, 우리가 직면하는 모든 시험을 이기셨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분은 앞서가는자요, 우리가 본받을 본보기가 되셨다(히6:20).

이것이 "경건함의 비밀이여.... -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셨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셨다"(딤전3:16)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셨을지라도, 평생 동안 그분의 영을 순결하게 지키셨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기신 것처럼 우리도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육신을 통해 새롭고 살아있는 길을 열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따라갈 수 있게 되었다(히10:20). 이것이 성화의 길이다.

옛사람과 새사람

우리는 이미 그 옛사람이 도둑을 집에 들어오게 하는 불충실한 종과 같았음을 보았다. 그러나 그 옛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넘겨져 장사 지냈다. 이제 우리 안에 새사람이 있다, 그는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내가 주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히10:7)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죄를 짓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제자가 죄를 짓는 것과 믿지 않는 사람이 죄를 짓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마치 고양이가 더러운 물에 빠지는 것과 돼지가 더러운 물에 뛰어드는 것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과 같다! 고양이는 더러운 물을 싫어하지만, 실수로 물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돼지는 그것을 좋아한다. 그것은 모두 본성의 문제이다. 예수님의 제자는 순결을 사랑하고 죄를 미워하는 새로운 본성을 가지고 있다.

옛사람은 죄를 짓고 싶어한다. 새사람은 결코 죄 짓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새사람이 충분히 강하지 않으면, 육신의 소욕에 저항하여 마음의 문을 닫지 못할 수도 있다. 그것은 그가 그러한 욕망을 원하기 때문이 아니다. 아니. 하지만 그가 그것들을 저항할 만큼 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히 먹지 않았기 때문이거나, 기도로 자신을 강화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러므로 죄를 짓는 것과 죄에 빠지는 것은 다르다. 이 차이점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우리 마음에 많은 불필요한 정죄의 감정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죄를 짓는 자(고의적으로 죄를 계속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였느니라"(요일3:8)고 말한다. 반면에 신자들에게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즉 만일 사람이 실수로 죄에 빠지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계시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요일2:1,2)라고 말한다.

의식적인 죄와 무의식적인 죄

죄에 빠지는 것과 죄를 가지고 있는 것 사이에도 차이가 있다. 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 인격에 무의식적인 죄가 있다는 것이다 - 우리 자신은 깨닫지 못하는 죄이다. 비록 우리보다 더 성숙한 사람들은 우리 안에 있는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무의식적인 죄는 결코 우리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율법이 없으면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롬5:13)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의 의식적인 마음에 죄에 대한 자각이 없을 때, 하나님이 죄를 우리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우리 안에 무의식적인 죄를 지을 것이다 - 그러나 만일 우리가 빛 안에서 걸어간다면, 죄를 점점 더 적게 지을 것이다. 성경은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 하면, 우리는 스스로 속이는 것"(요일1:8)이라고 말씀한다. 자신에게 죄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실제로 자신이 이미 그리스도처럼 완전해졌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분이 재림하실 때에만, 우리가 "그와 같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 전에는 아니다(요일3:2). 그러므로 이미 완전히 성화되고 완전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속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무의식적인 죄는 씻겨져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빛 안에서 걷는 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무의식의)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다(요일1:7). 그래서 우리는 이제 두려움 없이, 무한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담대히 설 수 있다.

이것이 우리를 의롭게 하는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이다. 할렐루야!

자비와 은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라"(히4:16)고 듣는다. 자비(긍휼)와 은혜는 같은 것이 아니다. 자비는 우리 죄의 용서를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의 과거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은혜가 필요하다 - 그것은 미래에, 우리가 어려운 때를 위한 것이다.

우리에게 어려운 때는 시험을 받을 때요 넘어지려고 할 때이다 -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에서 막 가라앉으려고 할 때처럼 말이다(마14:30). 그 때 우리는 은혜를 외쳐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붙드신 것처럼, 우리도 은혜를 받아, 일어서서 넘어지지 않게 되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넘어지지 않도록 지켜 주실 것이라고 우리에게 보증하는 놀라운 약속들이 있다. 다음 중 일부만 살펴보자:

우선, 하나님은 우리가 극복하기에는 너무 강한 시험을 결코 허락하지 않으신다고 약속하신다: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가 능히 너를 보호하사 실족하지 않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서게 하실 것이요"(유24).

하나님의 말씀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이 약속들과 많은 다른 놀라운 약속들로 인해, 우리는 더 이상 죄를 지을 필요가 없다. 우리의 삶은 이제부터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행하는 삶을 살 수 있다(벧전4:2에서 말하는 것처럼 -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점진적인 성화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그분이 명령하신 모든 것을 다른 사람들이 지키도록 가르치라고 말씀하셨다(마28:20).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먼저 온 마음을 다해 그 계명이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그것들을 순종하려고 노력할 것이다(요14:21).

율법 아래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계명을 주셨지만,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주시지 않았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율법을 주셨는가? 사람이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할 수 없음을 깨닫고, 구원자와 돕는자가 필요함을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선생이 되었느니라"(갈3:24).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사람과 새 언약을 맺으셨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에게 계명뿐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의 본보기를 주셨다. 예수님은 이 땅의 생활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계명에 순종할 수 있음을 보여 주셨다.

하나님은 또한 새 언약 아래서 그분의 율법을 우리 생각에 두시고 우리 마음에 기록하겠다고 약속하셨다(히8:10). 그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통해 이것을 하신다. 성령은 우리의 돕는자시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 뜻을 행하고자 하는 열망과 그 뜻에 순종하는 은혜도 주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다(살전5:23). 우리 스스로는 거룩해 질 수 없다. 우리는 그분께 의존해야 한다 -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 안에 그분의 뜻을 행할 수 있는 능력과 열망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빌2:12,13). 하나님께서 우리를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는지 알아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책감을 씻어주신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라는 명령을 받았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어떤 더러움에 대해 빛이 비춰질 때, 우리는 깨끗하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롬8:13) 성령의 열매는 -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자기절제 - 우리 안에서 점점 더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된다는 의미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길은 점점 빛나는 광명에 이를 것이다(잠4:18).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만드신 영광스러운 성화의 길이다.

장 9
교제와 교회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이 변화는 예수님의 다른 제자들과 분리되어 우리 안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과 함께할 때만 우리가 변화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의지할 뿐만 아니라, 서로 교제하며 살기를 원하신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은 모세나 엘리야, 세례 요한 등 개인을 통해 일하셨다.

그러나 새 언약 아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머리 되심 아래 하나가 된 제자들의 몸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이다 - 그리스도의 몸(엡1:22,23; 2:14-16).

교회 - 그리스도의 몸

교회는 건물도 아니고 교파도 아니다. 신약성경의 '교회'라는 영어 단어는 그리스어 '에클레시아'를 번역한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모임, 이 경우에는 하나님의 소유가 되도록 세상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모임을 의미한다.

전 세계에서, 죄와 세상으로부터 분리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형성한다. 모든 지역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이 지체들은 함께 그 몸의 지역적 표현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첫 번째 몸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의 육체적인 몸이었다. 그 몸으로 하나님은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셨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아버지께 너무나 완벽하게 내어주셨기 때문에, 당신의 생애의 마지막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요14:9)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

이제 우리의 소명은 함께 우리 주변의 세상에 예수님을 대표하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혼자서 예수님을 적절하게 대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가 필요하다. 우리 중 최고는 여전히 불균형하다. 우리는 강점도 있지만, 약점도 있다. 우리는 한 영역에서는 그리스도를 잘 반영할 수 있지만, 다른 영역에서는 매우 저조하게 반영할 수 있다. 그러나 함께일 때, 우리는 한 쪽의 강점이 다른 쪽의 약점을 보완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복종하며 살면, 그리스도는 우리를 통해 믿지 않는 세상에게 그분의 전체성을 나타낼 수 있다. 이것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다.

지역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

당신이 회심하자마자,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기를 열망하는 제자들의 교제를 찾아 참여해야 한다.

여기에서 새로운 회심자는 그가 기독교 집단에서 보는 수많은 무리들과 교단에 의해 어리둥절할 수 있다. 교리적인 스펙트럼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불행하게도,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유일한 참 대표자라고 주장하는 많고 많은 집단들이 있다!!

이 그룹들 중 많은 수가 그들의 성경을 두드리면서, 당신이 그들과 함께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당신에게 증명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그들의 '집단'에 속하지 않고, 고유한 형태의 교리를 고수하지 않는 많은 자녀를 갖고 계시다고 확신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것이 편견의 힘이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 집단을 괴롭히고 있는 이 바리새주의와 이단주의의 그물에 얽매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주님을 사랑하고 성실하게 그분을 따르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어 두라. 그들은 그들의 교리적 'i'를 쓸 때 점을 찍거나 그들의 교리적 't'를 쓸 때 당신과 같은 식으로 줄을 긋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빛 가운데 행하고 있다면, 그것은 심각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빛 안에서 그들도 행해야 한다고 요구할 수 없다.

하나님의 모든 자녀를 받아들이기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있는 만큼 많은 형제 자매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친히 받으신 모든 사람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롬14:1; 15:7). 예수님이 어떤 사람을 형제라 칭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히2:11).

이 교제의 문제에서, 신자들이 갈 수 있는 두 가지 극단이 있다. 하나는 교제를 유지하기 위해 진리 자체를 타협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교제를 하기 전에 모든 문제에 있어서 획일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당신이 현명하다면, 이 두 가지 극단을 모두 피할 것이다.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방식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일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와 교제하기 전에, 마지막 작은 세부 사항에 이르기까지, 누군가가 우리와 똑같이 믿도록 요구할 필요가 없다. 누군가와 함께 일하는 것과 그와 교제하는 것은 다르다.

그러나, 당신의 지역에서 당신에게 영적인 집이 될 수 있고, 당신이 헌신할 수 있는 교회를 찾아야 한다.

신약교회

당신의 지역에 있는 많은 '교회들' 가운데서, 당신이 지금까지 이해한 대로, 신약성경에 가장 근접한 교회를 찾아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신약성경을 더 많이 이해하게 되면, 그 '교회'를 떠나 하나님의 말씀과 더 일치하는 다른 교회에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것은 영적으로 성장하고 하나님의 가장 높고 가장 좋은 삶을 추구하기로 결심한 사람에게만 자연스러운 일이다.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최고가 아닌 것에 만족하지 마라 - 그러면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신약성경의 교회는 어떤 교단의 꼬리표도 갖지 않을 것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의 교제이다. 주님은 그러한 모임 가운데에만 계시겠다고 약속하셨다(마18:20).

여러분이 속해 있는 교회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리고 믿음과 삶의 유일한 기초로 받아들여야 한다. 많은 광신적 집단이 성경만을 자신들의 권위로 받아들인다고 주장하지만, 종종 동등한 권위를 가지고 그들의 지도자들의 글을 인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에게 가까이 가면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지도자의 가르침에 더 얽매인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 안에 좋은 것이 많을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이 그들과 합류한다면, 당신은 곧 그들의 광신적인 태도가 당신을 노예로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모든 신자는 동등하게 하나님의 제사장이다 - 하나님이 우리를 다 제사장으로 삼으셨기 때문이다(벧전2:9). 특별한 계급의 성직자나 '목사'만이 말씀을 전할 자격이 있다고 여겨지는 '교회'는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교회의 지도력을 장로들(항상 한 명 이상)의 손에 맡기도록 정하셨다. 그러나 이 장로들은 '전임 사역자'일 필요가 없다(행14:23; 딛1:5).

신약 교회의 모임에서, 주된 강조점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이다. 모든 신자들은 그러한 교회에서 그들의 성숙함과 영적 은사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나눌 자유를 갖게 될 것이다.

만일 말씀이 참으로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면, 그 말씀이 위로하고 도전하게 하고 세우며 '사람들의 마음의 비밀'을 드러내어, 듣는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것을 인정하게 하는 것을 알게 된다(고전14:3,24-31).

진정한 신약 교회의 주된 목적은 제자를 삼고, 그들에게 예수님의 계명에 대한 완전한 순종을 가르치는 것이다(마28:19,20). 그런 교회의 구별되는 특징은 성도간의 사랑이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3장 35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말씀이 강력하게 선포되고, 하나님의 사랑이 다스리며, 주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는 그런 교회는 여러분이 속한 지역에서 여러분이 속해야 할 교회이다.

교제의 중요성

다른 사람과 사랑의 교제 가운데 함께 살려 할 때, 교제를 유지하려면 얼마나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십자가를 져야 하는지 알게 된다.

사탄은 항상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에 끼어들기 바쁘다. 우리가 성숙한다면 우리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 사이에 끼어드는 쐐기를 방지하기 위해 항상 경계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교제가 깨질 때 큰 손실이 있다 - 하나님과 우리 둘 다 모두에게.

교회의 연합에는 엄청난 능력이 있다. 사탄은 연합된 교회만이 이길 수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두 신자일지라도 영이 온전히 하나가 되어, 완전히 연합하면,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면 구하는 바가 이루어지리라 - 나는 권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성령으로 두세 영혼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지 함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신자들의 교제는 하늘과 땅에 있는 사탄의 세력을 결박하여 사탄의 권세를 억제할 수 있다. 그들은 또한 그들의 기도를 통해 사탄의 속박에서 사람들을 해방할 수 있다"(마18:18-20 - 자유로운 의역).

그래서 사탄은 성도들 사이에 분열을 일으키고 교회 안에 파벌과 집단을 형성하는 것이다. 사탄은 연합된 교회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의 왕국을 보존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사탄의 계략을 경계해야 하고 그것들에 무지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팔다리가 함께 일할 수 없었다면 그리스도의 육체에 어떤 한계가 있었을지 생각해 보라. 그러면 그 때 그분이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이 세상에 나타낼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성도들이 분열될 때,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적 몸인 교회의 머리로서 직면하시는 한계이다.

우리도 또한 잃는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 중 한 사람에게서라도 단절된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다른 자녀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풍성함을 자신에게서 빼앗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모든 성도와 함께"(엡3:17-19)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다.

(기독교 교제의 중요성에 대한 더 깊은 연구를 원한다면, 당신은 나의 책, ONE BODY IN CHRIST(그리스도안에서 한 몸)을 읽으십시오.)

장 9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

신생아가 태어나서 필요한 두 가지는 음식과 공기이다. 영적인 탄생을 경험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갓난아이는 먹어야 하고 숨쉬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기의 음식이 되고, 기도는 아기 생명의 호흡이 된다.

하나님의 말씀 - 우리의 영적 양식

아이는 처음에는 우유가 필요하지만, 나중에는 단단한 음식이 필요하다. 성경에는 우유와 단단한 음식이 모두 들어 있다. 우유는 "그리스도에 관한 초보적인 가르침"(히6:1)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단단한 음식은 "의의 말씀"(히5:13)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얼마나 빨리 단단한 음식으로 넘어가느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빛에 얼마나 빨리 순종하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의 영적 성장은 믿음과 순종에 달려 있다.

하나님은 말씀에서 우리에게 약속을 주셔서 우리가 그분을 신뢰하게 하신다. 그분은 또한 우리에게 순종하라는 명령을 주셨다. 우리가 정기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분을 신뢰하고 순종한다면, 우리는 결코 시들지 않는 상록수와 같이 하나님 안에 깊이 뿌리 박혀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형통하도록 축복하실 것이다(시1:2,3).

지적인 공부만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다. 성령의 계시가 필요하다. 예수님은 영적인 진리를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신다고 말씀하셨다(마11:25).

아기들은 가지고 있고,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은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순수한 마음!

하나님은 머리가 아니라 마음을 보신다. 그분은 겸손하고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계시를 주신다(사66:2).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7:17).

하나님의 말씀 - 성령의 검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우리가 사탄과의 전쟁에서 사용하는 무기이다.

그것은 에베소서 6장 17절에서 "성령의 검"이라고 부른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마지막 세 번의 유혹을 받으실 때, 이 무기로 큰 효과를 내셨다. 매번 그분은 사탄의 유혹에 대해 "기록되었으되…"로 반박하셨다(마4:4,7,10).

그것이 그분이 이기신 방법이다; 그것이 우리도 이길 수 있는 방법이다.

사탄은 고발자이다. 우리는 그의 고발과 성령의 확신을 구별해야 한다. 사탄은 항상 우리를 괴롭히고, 그의 고발로 인해 우리로 하여금 정죄감을 느끼게 하려 한다. 반면에 성령의 확신은 언제나 온유하고 소망이 넘친다.

우리는 "어린 양의 피와 우리가 증언하는 말씀"(계12:11)으로만 고발하는 자를 이길 수 있다. 우리가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한 사탄의 고발은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하고 우리를 완전히 의롭게 하셨다는 우리의 증언을 사탄에게 말할 때만 이길 수 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것과 같은 무기를 사용해야 한다: "기록되었으되…".

사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고백하는 것은 사탄의 고소뿐만 아니라, 사탄이 우리 마음을 괴롭히는 낙심과 불안과 그 밖의 수많은 유혹을 이기는 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성령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때에 맞는 성경을 우리 마음에 떠올리게 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간구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좋다. 우리가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간직할 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도록 지켜줄 것이다(시 119:11).

우리 삶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대한 완벽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가 그것을 성취하도록 인도하시기를 원한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 수 있는 가장 축복받은 삶은 그 계획을 완전히 성취하는 것이다. 직업을 선택하거나 결혼 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이미 정하셨다는 것을 아는 것은 참으로 멋진 일이다! 우리가 그분의 길을 선택한다면, 사탄이 우리를 위해 마련해 둔 많은 함정을 피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계획으로 인도하시는 것은, 주로 그분의 말씀을 통해서이다.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은 완전한 주제이며,'하나님의 뜻 찾기'라는 제목의 나의 책에서 더 자세히 다루었다.

영적인 방법으로 결혼에 접근하는 것은 '성, 사랑, 결혼 - 기독교적 접근'이라는 제목의 또 다른 책에서 다루어졌다.

기도 - 하나님께 말하기

하나님과의 의사 소통은 양방향 문제이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다. 그런 다음 우리는 그분에게 말씀드린다.

그러나 기도는 단순히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신랑과 함께 있는 신부처럼,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신부가 신랑에게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에 대한 규칙은 없다.

그러나 훈련으로써, 우리의 기도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는 것이 좋다:

1. 하나님이신 우리 아버지께 찬양.

2. 죄와 실패에 대하여 고백;

3.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기도;

4. 우리 자신의 필요에 관한 기도;

5.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위한 중보기도;

6.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감사; 그리고

7. 하나님이 하실 일에 대한 감사.

예수님은 우리에게 "항상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눅18:1).

계발할 좋은 습관은 일상 생활의 작은 일에 대해 하나님께 말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 따라서 하루 종일 기도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 말씀 드리는 것은 의식이 아니라 우리에게 기쁨이 될 것이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께서 놀라운 방법으로 우리 마음에 말씀하시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기도 학교의 유치원 수업일 뿐이다. 우리가 충실하면, 더 발전할 수 있다.

어떤 경우에도, 기도가 건조하고 공허한 의식으로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 기도는 호흡과 같다. 호흡이 어려워지면,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무미건조하거나 지루한 기도는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발전함에 따라, 기도가 힘든 일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지우신 기도의 작은 짐에 충성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의 짐을 점점 더 많이 주시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는 그분의 일에서, 하나님과 동역자가 될 수 있다.

예수님은 '큰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다(히5:7). 한번은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에, 땀이 핏방울 같이 되었다(눅22:44). 그의 기도는 너무나 강렬했다.

한번은 밤새도록 기도하셨다(눅6:12). 그분은 기도하러 자주 광야로 떠나는 습관이 있었다(눅5:16). 어떤 사람은 "관광객이 새로운 곳에 올 때마다 볼거리를 찾는 것처럼, 예수님은 어디를 가든지 기도할 수 있는 한적한 곳을 항상 찾으셨다"고 말했다.

예수님의 예는 우리에게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 그분이 그렇게 많이 기도할 필요가 있었다면, 당신과 나는 얼마나 많이 기도해야 하는가.

그러면 게으름과의 전쟁에서 싸우고,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기도의 사람이 되기로 결심하라.

장 10
이 시대의 종말

구약 성경 시대에는 죽음 이후의 삶과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해 매우 분명하게 가르쳐주셨다. 우리도 이러한 문제에 대해 아는 것이 좋다.

죽음 이후 무엇?

그리스도의 제자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셨기 때문이다. 죽음은 패배한 적이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사탄을 무력하게 만드셔서, 우리가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게 하셨다(히2:14,15). 사망의 열쇠는 이제 예수님의 손에 있다(계1:18). 이제 그분만이 당신의 제자들에게 죽음의 문을 열어 주실 수 있다. 사탄은 그들을 만질 수 없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예수님은 부자와 나사로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이 질문에 분명하게 대답하셨다. 더 나아가기 전에, 지금 바로 누가복음 16장 19-31절을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다 - 예수님은 여기에서 하신 것처럼 어떤 비유에서도 사람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으셨다. 부자와 나사로는 모두 실존 인물이었다.

예수님은 여기서 죽은 자가 가는 곳이 두 곳뿐임을 분명히 하셨다. 하나는 천국('아브라함의 품' 또는 '낙원'이라고도 함) - 편안한 장소; 그리고 다른 하나는 지옥 - 고문과 고통의 장소이다. 사람이 죽자 마자 그의 몸이 땅에 묻히기도 전에, 그의 영혼은 즉시 이러한 장소 중 한 곳으로 간다. 그리고 비록 몸이 없더라도, 그는 주변 환경과 편안함이나 고통을 의식할 것이다.

사람은 영과 혼과 몸으로 이루어진 삼중의 존재이다(살전5:23). 죽을 때 혼과 영은 몸에서 분리되어, 낙원이나 지옥으로 가게 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있는 동안, 회개한 강도에게 바로 그날 낙원에서 그분과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과 그 강도는 영혼이 몸을 떠나자마자 낙원으로 갔다.

예수님은 자신이 죽으신 후 밤낮 3일 동안 '땅의 심장'에 계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12:40). 이것으로 우리는 그 당시 낙원이 땅의 심장부에 있었음에 틀림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을 때 "땅 아래로부터....높은 데로 승천하사, 많은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으셨느니라"(엡4:8,9). 그는 낙원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영혼을 셋째 하늘로 데려가셨다.

고린도후서 12장에서 2절과 4절을 함께 비교할 때, 낙원은 이제 셋째 하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이 예수님의 제자가 죽으면 가는 곳이다(빌1:23).

그리스도의 재림의 징조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재림하시기 직전에 일어날 많은 사건에 대해 알려 준다. 다음은 그 중 일부이다:

1. 전쟁과 기근과 지진(마24:7). 이것들은 항상 이 땅에 있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1939-1945) 이후로 그 빈도수가 크게 증가했다.

2. 지식의 갑작스러운 폭발과 전세계 여행의 엄청난 증가(단12:4). 이 두 가지 모두 지난 50년 동안 그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이 목격된다.

3. 사람들은 쾌락을 사랑할 것이다(딤후3:4). 부도덕은 우리 시대의 특별히 사악한 특성이다. 음란 영화와 비디오 테이프는 모두 부도덕을 조장하는 사탄의 목적에 기여했다.

4. 사람들은 교만하고,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할 것이다(딤후3:2-4). 오늘날 우리는 가정, 학교, 대학, 공장 등 우리 주변의 모든 곳에서 반항의 정신을 볼 수 있다.

5. 신자는 믿음으로부터 떠날 것이다(딤전4:1). 우리는 오늘날에도 많은 이단들이 널리 퍼져서, 많은 신자들이 먹잇감이 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6. 이스라엘 나라의 재탄생(무화과나무 - 이스라엘의 상징 - 잎이 돋아남 - 눅21:29-32). A.D. 70년 이래로, 유대인들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었다. 이 무화과나무는 그 후 거의 19세기 동안 시들어 있었다. 그러나 1948년 5월 이스라엘 나라가 다시 태어났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유대인이 아닌 나라들의 시대가 끝날 때까지 점령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눅21:24). 1967년 6월, 이스라엘은 20세기 만에 처음으로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오늘날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보는 것은 흥미진진하다. 그 징조들은 모두 곧 그리스도의 오심을 가리키고 있다.

첫째 부활과 그리스도의 심판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그에게 속한 모든 사람은 눈 깜짝할 사이에 변화될 것이다. 우리는 결코 늙지도 죽지도 않는 새 몸을 받게 될 것이다(고전15:51-53). 우리의 새 몸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과 같을 것이다(빌3:20,21).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도 새 몸으로 무덤에서 일어나, 그 때에 살아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공중으로 올라가 주를 영접하게 된다(살전4:13-17).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심판대를 마련하실 것이며, 그곳에서 우리는 이 땅의 삶에서 우리의 충실함에 대해 개별적으로 심판(평가)을 받고 보상을 받을 것이다.

성경은 그날에 충실한 사람들에게 면류관이 수여된다고 말한다. 그 때에 주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주실 상급의 자세한 내용을 알기 위해서 고후5:10; 고전3:11-15; 4:5; 딤후4:8; 벧전5:4를 읽을 수 있다.

그 날에, 우리는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된 자"(마19:30)를 보게 될 것이다. 이 땅에서 우리에게 매우 영적인 것처럼 보였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그렇게 신실하지 않은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우리가 높이 평가하지 않았던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신실한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그 날에는, 무명하지만 신실한 과부가 세계적으로 유명하지만 신실하지 못한 설교자보다 우선할 것이다.

그 날에는, 우리는 사람들이 이 땅에서 귀하게 여기는 돈과 명예와 같은 많은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가치가 없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귀하게 여기지 않는 미덕, 곧 순결, 겸손, 이타심, 자비, 선함이 하나님에 의해 높이 평가될 것이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의 혼인' -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곧 이 땅에서 그분의 제자들로서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르는 신실한 자들)의 영적 혼인 - 이 일어날 것이다(계19:8-10).

그 날에는 우리 주님과 그의 복음을 위하여 오해, 부끄러움, 핍박, 죽음까지도 당한 것이 모두 가치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천년 왕국

그러면 1000년 동안 평화의 통치가 시작될 것이다. 그 때 에덴동산의 상태가 땅에 널리 퍼질 때, 사자는 어린 양과 평화롭게 누워 있고 아이는 무해한 코브라를 가지고 놀 것이다…(사11:6-9).

그런 다음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온 땅을 다스리는 왕으로 통치하실 것이다(슥14:9-21). 사탄은 그 기간 동안 결박되어 지금처럼 땅에 접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 1000년이 끝나면, 사탄은 다시 한번 땅의 회심하지 않은 거주자들을 시험하기 위해 짧은 기간 동안 풀려날 것이다. 다시 큰 무리가 사탄을 따를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1000년의 평화를 본 후에도,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다스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천사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증명하시는 것이 될 것이다. 사람의 눈이 먼 것과 완고함과 사악함이 바로 이런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반역적인 무리를 심판하실 것이다; 그리고 사탄은 불못에 던져질 것이다(이는 지옥의 더 큰 형태이다 - 계20:7-10).

두 번째 부활과 최후의 심판

그러면 하나님은 모든 불신자들을 심판하실 심판대를 마련하실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부활이 될 것이다. 죽은 자들이 무덤에서 살아날 것이다. 모든 불신자들의 영혼은 지옥으로부터 그들의 육신(their earthly bodies)으로 돌아가 하나님 앞에 서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계20:12) 심판을 받을 것이다.

기억은 우리가 이 땅의 삶 전체에 걸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한 것과 우리의 태도와 동기 모든 것을 충실히 기록하는 비디오 테이프와 같다. 그 날에 하나님은 이 테이프를 재생하여 온 세상이 모든 사람의 숨겨진 삶을 보게 하실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들을 영원한 심판으로 보내시는 데 있어 완전히 의로우심을 보여주시는 방법이 될 것이다.

생명책에 이름이 없는 자는 불못에 던져져서, 그들이 땅에서 섬기던 사탄과 합류할 것이다(계20:15).

시간의 끝

그러면 시간이 멈추고 영원이 시작될 것이다. 구원받은 남자와 여자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것이며, 그리스도의 신부는 그 때 그녀의 모든 영광으로 빛날 것이다(계21장에 설명되어 있음).

사탄과 모든 불신자들은 그 완전한 하늘과 땅에서 제거될 것이다. 그 영광스러운 새 우주에서, 죄는 더 이상 추악한 머리를 들지 않을 것이며, 우리 육신에 어떤 정욕도 없을 것이다. 천국은 영원토록 하나님의 뜻을 기쁘게 선택한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이기라는 부르심

베드로는 "이 모든 것(기존의 하늘과 땅)이 멸망되리니, 너희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에 있어서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라고 말했다(벧후3:11,12).

이 마지막 날의 성령의 메시지는, 한 단어로 요약될 수 있다: "이기라" (계2:7,11,17,26; 3:5,12,21; 21:7 참조)

우리는 오늘날 불신자들에게 설교하는 많은 부분에서 빠진 요소인 회개를 강조하면서 이 책을 시작했다.

우리는 오늘날 신자들에게 설교하는 많은 부분에서 빠진 요소인 이기라를 강조함으로써 이 책을 마무리한다.

인간이 죄에 빠진 이후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이기는 자가 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말씀하셨다,

"죄가 너의 (마음의) 문에 웅크리고 있지만, 너는 그것을 다스릴지니라"(창4:7).

부름이 반복되는 성경의 마지막 책에서,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21:7).

지상의 그 어떤 것도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는 삶의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신 삶은 그 어떤 사람이 살았던 삶보다 가장 훌륭하고 가장 영광스럽고 행복한 삶이었다.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하거나 부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분은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발하셨다.

복음의 좋은 소식은 여러분도 그 영광을 발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신은 지상 생활의 모든 날 동안 이기는 자가 될 수 있다. 그러면 여러분이 충실하고 항상 영원의 가치를 염두에 두고 살기를 바란다. 아멘.